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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속초, 고성 역사기행 ~ (2005년 6월 5일)'
'하편 ― 동족상잔의 비극이 서려있는 ~ 금강산 건봉사 '
 

건봉사에는 '능파교(凌波橋)'라 불리는 아름다운 홍예다리가 있다. 그런데 마침 그 말라버린
계곡 위로 홍예다리 하나가 걸쳐져 있으니 나는
'이 다리가 능파교로구나. 그런데 안내문이
하나도 없네..'
라고 생각을 하였지. 그런데 절에 들어가서 안 사실이지만 그 다리는 능파교가
아니었다. 그냥 이름 없는 돌다리였을 뿐. 조성시기는 대략 18세기 이후의 것.

▲ 이름 없는 홍교
건봉사로 들어서는 길목에 있는 무지개 모양의 홍교.
이 다리의 이름은 모르겠으며, 그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알지 못한다.

▲ 말라버린 계곡 위에 우두커니 서 있는 홍교의 모습

홍교를 건너 야트막한 언덕을 넘으니 드넓은 건봉사 주차장이 나를 맞이한다.

산을 넘고, 계곡을 건너기를 여러 차례, 강렬히 내리쬐는 햇빛과 싸워가며
전혀 나타나지 않을 것 같은 그 절을 찾아 약 5km를 걸어서 드디어
첩첩산중에 숨어 있는 옛 사찰, 건봉사에 다다르게 되었다.

건봉사의 테스트를 이렇게 통과하자, 건봉사는 약속대로 자신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며, 나의 승리를 치하해 준다.


♠ 폐허 속에서 다시 태어난 고찰(古刹) ~ 금강산 건봉사(金剛山 乾鳳寺)
비무장지대로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어 있는 건봉산(乾鳳山)의 동쪽 자락에는 '건봉사'라 불리는
유서깊은 고찰(古刹)이 숨어 있다.

건봉산 자락에 자리해 있어 '건봉산 건봉사'라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은데 건봉사 측에서는
건봉산 대신 '금강산 건봉사'를 칭하고 있다.

건봉사 측에서 '금강산 건봉사'를 칭하는 이유로는
1. 건봉사 사적기(史蹟記)에 금강산 남쪽에 이 절을 창건했다는 내용이 나오고
2. 건봉산과 향로봉이 금강산의 남쪽 줄기에 속하므로
3. 통일을 염원하는 뜻에서..
4. 정말로 금강산에 들어온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기 위해..

그러나
1. 건봉사에서 금강산까지는 20km가 넘는 먼 거리이며
2. 민족 분단의 아픔이 서려 있는 휴전선과 남강(南江)이라는 강이 중간에 딱 가로막고 있어서
금강산과 이 곳을 연계시킨다는 것은 좀 무리가 아닐까.....

어쩄든 오랜 역사를 간직한 절, 건봉사는 한 때 우리나라 4대 사찰의 한 곳으로 설악산 백담사(百潭寺),
양양 낙산사(洛山寺) 등 이름만 들어도 다 알 만한 강원도의 주요 사찰 9개를 말사(末寺)로 거느리던
큰 사찰이었다.


한국전쟁으로 파괴되기 직전에 건봉사의 모습

건봉사의 창건시기에 대해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乾鳳寺及乾鳳寺末寺史蹟)'에 의하면 신라 법흥왕
(法興王) 6년(520년), 아도화상(阿道和尙)이 금강산 남쪽에 원각사(圓覺寺)를 세웠는데 그 절이
건봉사의 전신(前身)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해준 고구려의 '아도화상'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전자(前者)의 아도화상이라 주장하며 절의 창건 시기를 5세기로 훌쩍
올리기도 하는데 과연 '아도'가 창건했는지. 520년에 창건되었는지, 현재로써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534년(법흥왕 20년)에는 반야암(般若庵) 등의 암자를 세웠으며. 신라 경덕왕(景德王) 16년(758년)에는
발징화상(發徵和尙)이 절을 중수하고 그 기념으로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열었는데 그 것이 우리나라
염불만일회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신라 후기에 이르러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절을 중수하고 절의 서쪽 봉우리에 봉황 형태의 돌이 있다고
하여 서봉사(西鳳寺)로 개칭하였으며 고려 공민왕(恭愍王) 연간(年間)에는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서봉사를
중수하고 건봉사로 이름을 바꿨다.

조선 제7대 군주인 세조(世祖)는 금강산을 유람하고 환궁(還宮)하던 길에 건봉사에 잠시 들렸는데 이 절을
자신의 부왕(父王)인 세종대왕의 원당(願堂)으로 삼고 어실각(御室閣)을 세웠으며 건봉사의 재정을 위해
논과 밭을 하사하였다.
또한 어제어필(御製御筆)의 동참문(同參文)을 내려 대대로 조선황실의 지원을 받으며 절의 규모는 더욱
커져만 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명대사(四溟大師)는 이 곳에 머물며 친히 수 천명의 승병(僧兵)을 양성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 왜국에 사신으로 가서 왜군이 통도사(通度寺)에서 훔쳐간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돌려받아 건봉사에 그 사리를 봉안하였다.

현종(顯宗) 13년(1672년)에는 1200근의 커다란 종을 만들어 걸었으며 숙종 34년(1704년)에 능파교를
세웠고, 1804년(순조 4년)에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가 금 1000냥과 오동향로, 양산(陽傘)등을
하사하였다.

1878년에는 부근 산에서 산불이 일어나 건물 3183칸이 불에 탔으며, 그 이후 여러차례 중건을 거쳐
1911년, 사찰령(寺刹令)에 따라 9개의 말사(末寺)를 거느린 한국 31본산(本山)의 하나가 되었다.

왜의 무단통치(武斷統治)연간(年間)에는 '님의침묵'으로 유명한 만해 한용운(韓龍雲) 선생이 이 곳에
머물며 '건봉사지(乾鳳寺誌)'를 저술하였고, 친히 봉명학교(鳳鳴學校)를 세워 인재를 육성하였다.


터만 황량하게 남은 건봉사

8.15 광복 이후, 건봉사는 북한의 영역이 되었으며, 한국전쟁 때, 고성 지역이 치열한 격전지가 되면서
건봉사는 불이문(不二門)과 능파교, 부도, 부도비 등을 제외한 모든 건축물이 흔적도 없이 모조리
파괴되는 비운을 맞이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4대 사찰에서 제명(除名)되었으며 또한 31본산에서 영구
제명되었다.

휴전 이후, 이 곳은 비무장지대에 속하게 됨으로써 승려, 신도들의 접근이 통제되었으며, 다만
사월초파일에 한해, 일부 접근이 허용되었다.
1989년에 이르러 한국정부와 군부대와의 협조로 사찰 출입이 완전 자유로워졌으며 1990년에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로 절터를 다시 정비하고 불전(佛殿)을 세우며 건봉사를 다시 일으켜, 대웅전, 팔상전,
명부전, 산신각, 적멸보궁, 독성각 등의 전각이 세워졌고, 지금도 계속해서 복원불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난 건봉사 ~ 건봉사 대웅전

2003년에는 비포장도로이던 건봉사 진입도로가 2차선으로 확장, 포장되어 접근이 더욱 쉬워졌으며
고성군 지역의 대표적인 명소로 크게 부각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찾아온다.

현재 이 절은 설악산 신흥사(新興寺)의 말사(末寺)로 되어있으며, 남북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이
뼈저리게 서려있는 아픔의 현장으로 절 바로 뒤로 민통선 철책이 펼쳐져 있다.

한 때는 나라를 지키고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던 큰 사찰에서 지금은 통일을 염원하는 사찰로
비록 옛 영화는 되찾지 못했지만 민통선의 한계를 극복하며 옛 영화를 되찾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동분서주(東奔西走)하는 건봉사의 부지런한 모습을 보면서 언젠가는 반드시 옛날의 번영을 되찾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만 구인사(救仁寺)처럼 지나치게 산 속으로 파고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럼 지금부터 폐허 속에서 피어난 한송이의 꽃처럼 다시 일어난 건봉사 경내를 살펴보도록 하자.
건봉사터 일원은 강원도 지방기념물 51호

※ 건봉사 찾아가기
① 대중교통 (2005년 9월 현재)
* 간성터미널에서 해상리 가는 군내버스 이용 (1일 5회 운행 ~ 7:20, 11:00, 13:40, 16:45, 19:30)
해상리(건봉사 입구 3거리)에서 하차하여 도보 5km,
(# 버스 시간표는 추후 변경 가능)
* 간성터미널에서 건봉사까지 택시 이용, 대략 20분 소요, 요금은 한 2만원 정도 요구할 듯..
② 승용차
* 서울 ~ 영동고속도로 ~ 동해고속도로 ~ 양양 ~ 속초 ~ 간성 ~ 해상리 ~ 건봉사
* 서울 ~ 6,44번 국도 ~ 홍천 ~ 인제 ~ 백담사입구 ~ 진부령 ~ 해상리 ~ 건봉사

* 건봉사 앞에 주차장이 있음
* 입장료는 없으며, 매점이나 주막 같은 서비스 시설은 하나도 없다. 다만 음료수 자판대만 몇 개 있을 뿐..
* 건봉사로 가는 길과 건봉사 이외에 산림(山林), 계곡 지역은 함부로 출입하지 말 것.
민통선 지역이므로...

주차장 맞은편에 자리한 사명대사 기념관
사명대사의 유품―상당수가 모조품임―과 건봉사 관련 여러 자료, 사진,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건물은 'ㄷ'자 형태로 되어 있으며 대략 둘러보는데 3 ~ 10분 정도 걸린다.

1920년대 건봉사의 모습 - 아~ 옛날이여 ..~~
건봉사 왕년의 모습을 저렇게 그림이나 모형, 사진으로만 봐야 되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진영(眞影)
임진왜란 이후, 승병(僧兵)을 일으켰던
서산대사 계열이 조선 불교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영정
왜적들이 제일 두려워하면서도 가장 공경했던
큰 스님, 사명대사의 모습.
그는 조선을 구한 조선 민중들의 부처님이었다.

사명집(四溟集) -
사명대사가 남긴 시문 등을 그의 제자들이
정리하여 편찬한 책으로 진본은 현재
서울국립중앙도서관에 있다고 한다.
 

사명대사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의 장삼(長衫), 금란가사(金袈裟)

 

◀ 사명대사의 구원을 받아 이 땅으로 돌아온
금동보살상(金銅菩薩像)
사명대사는 1604년 선조(宣祖) 임금의 칙서(勅書)
를 받들고 왜국에 사신으로 건너가 왜의 실권자
도꾸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강화조약을
맺었다.

이 불상은 원래 조선에 있던 것으로 왜군들이
훔쳐간 것을 사명대사의 반환요구로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비운의 불상이다
.

사명대사가 사용하였던 패도(佩刀)
저 칼에 죽어간 왜군들의 수는 가히
헤아릴 수가 없을 것이다.

사명대사의 언월도(偃月刀)
 


건봉사 불이문(不二門) - 강원도 지방문화재자료 35호
1902년에 건립된 것으로 다른 말로는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한다.
이 문은 수미산문(須彌山門)으로 들어서는 마지막 문으로 한국전쟁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목조 건축물이다.

전쟁의 참화와 비극을 뼈저리게 느꼈을 이 문의 특징은 기둥이 4개 라는 것,
앞쪽 기둥에 금강저(金剛杵)라 불리는 이상한 기호가 새겨져 있다는 것 등이며
현판(懸板)은 해강 김규진(海剛 金圭鎭) 선생이 썼다.

건봉사 범종각(梵鐘閣)
사물(四物)의 보금자리로 사물이란 범종(梵鐘), 운판(雲版), 목어(木魚), 법고(法鼓)등을 말한다.

◀ 범종각 범종(梵鐘)
통일을 염원하는 부처의 메세지가 건봉산 전역에
울려펴진다.

구름무늬로 가득한 범종각 운판(雲版)

 

 

소나무 사이로 바라보이는 사명대사 기념관

주춧돌만 무성하게 남아 있는 건봉사터

건봉사 능파교(凌波橋) ~ 보물 1336호
드넓은 건봉사 경내는 건봉산 계곡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나눠져 있다.
북쪽에는 근래에 세워진 대웅전, 팔상전, 요사(寮舍) 등이 있으며, 남쪽에는 적멸보궁,
독성각 등의 전각과 드넓은 절터가 펼쳐져 있는데, 그 남북을 서로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존재가 바로 '능파교'이다.

이 홍예교는 1708년에 건립되었으며 다리의 폭은 약 3m, 길이는 14m, 높이는 5.4m이다.
다리의 이름인 능파(凌波)에는 '고해(苦海)의 파도를 모두 헤치고 부처님의 세계로 건너간다'
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데 계곡 위에 마치 무지개가 걸려 있는 듯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던
다리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아름다운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대수술중인 능파교의 초라한 모습만이
계곡 위에 힙겹게 걸려있을 뿐이다. 마치 작년 선암사(仙巖寺)에서 봤던 수술 중인 승선교처럼..

능파교가 지금의 처참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것은 작년(2004년)에 벌였던 다리 보수공사 때문
이라고 한다.
나를 간성읍까지 태워주던 건봉사 승려의 의하면 2004년에 다리를 보수하다가 잘못되어
다리가 폭싹 주저앉았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열심히 보수공사를 벌이고는 있으나 언제 끝날지는 도저히 기약을 할 수가
없다고 한다.

공사를 빨리 끝내려고 대형 크레인까지 동원하여 용을 쓰고 있던데, 그렇다고 홍예교가
빨리 복원될 수 있을까.. 지금 입장에서 보면 구닥다리 건축기법으로 만들어진 이 홍예교는
옛날보다 더 우수하고 첨단이라고 자랑하는 오늘날의 기술을 크게 비웃고 있을 것이다.

옛 사람들의 홍예교 건축 기술은 오늘날 기술로도 따라하기가 힘들다고 하던데 100층이 넘는
거대한 건축물은 잘도 만들면서 그것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저런 홍예교는 왜 제대로 만들어
내지 못하는지.. 최첨단 기술의 정의는 과연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봐야 되지 않을까..?

무너지기 직전의 건봉사 능파교의 모습 (문화재청 사진 참조)

철골 구조물에 힘겹게 몸을 의지하고 있는 능파교의 홍예석

내년에 온다면 과연 아름다운 능파교의 모습을 볼 수나 있을까?

능파교가 온전히 남아 있었다면 그 다리를 건너 '金剛山乾鳳寺'라 쓰여 있는
저 누(樓)를 거쳐 대웅전(大雄殿)으로 바로 갈 수 있을텐데..
지금은 불이문으로 뺑 돌아가야 된다.

화려한 전각들로 가득했을 드넓은 절터에는 이름 모를 풀과 꽃들만이 가득할 뿐이다.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한 인간의 건축물도 결국 자연 앞에서는 한줌의 나무, 흙에
불과한 것을..

풀잎과 조그마한 꽃들로 가득한 절터..
그 사이로 간신히 얼굴을 내민 주춧돌
 

산신각 못미쳐의 오른쪽 연못
산신각으로 가는 길목 양쪽에 조그마한 연못 2개가 자리해 있다.
연못에는 세상에 막 태어난 올챙이 무리들로 손을 집어넣을 틈이 없다.

연꽃 잎(혹은 개구리밥)으로 가득한
왼쪽 연못 ~
조금의 공간도 허용치 않으며 빼곡히
들어찬저들을 보니 왠지 기분이
오싹해진다.
 

산신각(山神閣)
금강산(건봉산이 더 맞을지도)의 산신을 모신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전각.
산신각 뒤에는 약수터가 하나 있는데 물이 엄청 시원하고 맛이 있다.

산신각의 산신(山神)
가슴까지 내려오는 하얀 수염에 별로 무섭지 않은 포근한 인상의 금강산 산신.
왼손에 붉은 지팡이를 들고 있으며, 오른손으로 자신의 애완동물인 호랑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산신의 귀여움을 먹고 자라며 꼬랑지를 살랑살랑 흔드는 호랑이의 모습은
집고양이의 모습과 거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호랑이 오른편으로 산신의 시자(侍子)인 동자 2명이 배 앞에 두 손을 모은 채,
정중히 시립(侍立)해 있다.

황량하게 남아있는 석축과 계단

옛 배수구의 흔적
산신각 뒤쪽 약수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저 배수구를 거쳐 건봉산 계곡으로
흘러나갔다.
 

 

 

절터 제일 서쪽에 있는 전각으로 저 안에 적멸보궁(寂滅寶宮), 독성각 등이
자리해 있다.

적멸보궁(寂滅寶宮)
적멸보궁은 부처의 사리를 모신 전각으로 불단(佛壇)에는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는다.

부처의 진신치아사리(眞身齒牙舍利)를 모신 석종형 사리탑(石鐘形 舍利塔)
7세기에 활약했던 신라의 승려 자장율사(慈藏律師)는 당나라에서 부처의 치아사리를 다량으로
구해와 양산 통도사(通度寺)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왜군이 통도사를 약탈하면서 부처의 진신사리까지 훔쳐간 것을 사명대사가
1604년, 왜국에 사신으로 가면서 도쿠가와 막부(幕府)에 사리 반환을 강력히 요구했는데
도쿠가와(德川家康)는 그 사리를 찾아와 사명대사에게 바쳤으며 귀국 후, 이 곳에 봉안하였다.
지금의 사리탑은 1990년 이후에 새로 만든 것이다.

활짝 피어난 연꽃 위에 살짝 종(鍾)이 올려져 있는 것 같은 사리탑의 모습.

적멸보궁 불단 앞에서 열심히 기도를 드리고 있는 어느 승려
불단(佛壇) 위에는 불상 대신 황금색의 방석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으며
그 뒤에 네모난 유리창으로 사리탑이 바라보인다.

적멸보궁 북쪽에 자리한 독성각(獨聖閣)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나반존자(那畔尊者)를 모시고 있다.

잡초만 무성한 옛 어느 전각의 주춧돌과 계단

건봉사 대웅전(大雄殿)
절터의 남쪽 부분(계곡 남쪽)을 둘러보고 불이문(不二門)을 나와 계곡을 건너
건봉사의 북쪽 부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춧돌만 가득한 남쪽과는 달리 북쪽은 어느 정도 전각들이 복원되어 있었다.
물론 대웅전 등의 전각 뒤로는 옛 전각들의 주춧돌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지만..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전각으로 건봉사에 있는 건물 중에서
제일 규모가 크다.

대웅전 불단(佛壇)에 모셔진 3존불(三尊佛)
불단 가운데에 약간 상기된 표정의 부처님이 앉아 있고, 그 양쪽으로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앉아 있다.

우리나라의 통일을 염원하듯 오늘도 열심히 참선을 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

대웅전 옆에 자리한 명부전(冥府殿)

높이가 무려 1m가 넘는 거대한 돌절구 ~
이렇게 큰 돌절구는 처음 보는 것 같다.
그 옛날 건봉사의 거대한 규모를 짐작케
해주는 유물로 전쟁 이후 절터를 이리저리
뒹굴고 다닌것을 1990년대 이후 대웅전
부근으로 옮겼다.만든 시기는 조선 후기로
생각됨.
 

명부전 아래 그늘에서 ~ 정으로 가득한 멍멍이 모자(母子)


약 90분에 걸쳐 건봉사 경내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언제나 긴장감과 초조, 불안감으로 가득한 비무장지대, 그리고 그 안에 자리한 건봉사.
절 경내는 겉으로는 여기가 정말 휴전선 부근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평화로운 분위기이지만
언제나 긴장감으로 가득한 곳이 또한 이 곳 건봉사이다,

만약 북한과의 전쟁이 또 터진다면 건봉사는 거의 우선 순위로 잿더미로 화(化)할 것은 뻔하기 때문이다.
절 뒤로 비무장지대 철책이 쳐져 있고, 절 이외에는 어느 집도 없는 적막만이 감도는 산 속에 자리한
건봉사, 승려의 염불소리가 마치 통일을 염원하는 소리로 들린다.

대웅전 주변을 둘러보고 한참 공사중인 능파교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주변에 이름모를 수많은 꽃들이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폐허 속에서 피어난 꽃들.. 전쟁 당시
이곳에서 쓰러져간 수많은 군인들. 절을 지키다 죽어간 승려들.. 그들의 혼이 이 곳에 꽃으로 다시
피어난 것은 아닐까.. 그 꽃은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나고 있는 건봉사를 상징하며 작지만 아름다운
꽃잎을 오늘도 하늘을 향해 펼쳐 보인다.

다시 불이문 쪽으로 내려가면서 간성까지 어떻게 나가야 되나 곰곰히 생각을 해본다.
물론 그에 대한 답변은 이미 정해둔 상태였지... 차를 얻어 타기로..
마침 대웅전 쪽에서 승려 하나가 부지런히 나오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는 화장실 부근에 세워진
차량(스타렉스)으로 갔는데. 나는 이 때다 싶어서, 먼저 합장(合掌)을 하고 "저기 스님, 실례지만
간성읍까지 태워주실 수 없겠습니까?"

승려는 "예, 잠깐만 기다리세요. 우선은 뒷좌석에 타고 계십시요"
그러면서 서둘러 화장실로 뛰어 간다. 아마도 그 곳에 급한 볼일(?)이 있는 모양이다.
볼일을 마친 승려는 운전석에 타서 누구에게 전화를 하더니만 바로 시동을 걸고 차를 움직인다.

간성으로 가는 약 15분 동안 승려와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까지 승려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이렇게 기회가 생기는구나.
아마도 건봉사가 나에게 준 커다란 선물일 것이다.

승려와의 이야기는 지금은 별로 기억에 남는 것이 없어서 기억이 나는 것만 대충 정리해 본다면.
처음에는 승려가 나에게 어디서 왔는가. 건봉사는 어떻게 알고 왔는가? 직업은 무엇인가?
등등을 물었다.
그런 다음 그와 건봉사에 대한 것, 그의 인생, 기타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의 법명(法名)은 물어보질 못했다. 집에 와서야 그게 생각이 났거든.. 왜 그것을 묻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감이 잔뜩 들었지.

그는 3년 전에 출가했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순천 송광사(松廣寺)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나 송광사의
지형이 자신과 맞지 않아 1년 전에 건봉사로 이사를 왔다고 하는데 나는 "땅과 사람이 서로 안맞을 수도
있는가? 그런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그러자 승려가 "당연히 있다. 땅과 자신이 맞지 않으면 거기서
살면 이로울 것이 없다. ~중간 생략~ 물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곳이 괜찮은 터이다. 동에서 서로
흐르는 곳은 별로 좋지가 않다"

그 다음 능파교와 육송정 홍교에 대해서도 물어보니
"능파교는 작년에 뭣모르고 보수하다가 무너져 버려 새로 만들고 있는데 과연 잘 될지 모르겠다.
육송정 홍교는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작년 홍수로 무너진 것 같은데 아직까지 복원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 외에 풍수관련 이야기도 했으나 여기서는 생략..

건봉사 출발 약 15분 만에 간성읍내 터미널에 도착, 승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차에서 내린다.
터미널로 들어와 서울로 가는 차시간을 확인하니 차는 무려 17시 50분에 있다고 한다.
(그 때 시간 16시 10분)
그 때까지 무엇을 하고 어떻게 기다리나, 그래서 우선 인제까지 넘어가기로 하였지. 인제는 여기보다
서울로 나가는 차가 더 많으니까.

그래서 16시 20분에 춘천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험하기로 이름난 진부령(陳富嶺)을 넘고
설악산 북쪽을 휘돌아 17시 30분, 인제군의 중심지 인제읍내 터미널에 도착했다.

차를 타고 오던 중, 원통에서 운전사가 승객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지금 홍천까지 차가 엄청
막힌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제에서 양구를 거쳐 춘천으로 가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홍천 승객
분들은 춘천에서 무료 환승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홍천으로 가는 승객들이 반발하여 그 차는 지정된 노선대로 홍천으로 갔지.. 결국 반대했던
사람들은 뼈저리게 후회를 하였다는..

하늘과 가까운 고장 인제읍에 이르니 어느덧 날이 약간씩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나는 서울까지 바로 갈까 하다가, 6번국도의 교통체증이 생각이 나서 양평의 동쪽인 용문까지 표를
끊었지. 용문까지도 7900원.. 용문에서 열차를 타고 갈 생각으로..


44번 국도와 나란히 흐르는 소양강 상류 부분

18시가 되자 동서울로 가는 직행버스가 터미널로 들어온다.
약 30명 정도 태우고 출발.. 인제읍내를 벗어나니 바로 기약을 할 수 없는 교통체증이 시작되었다.
그 짜증나는 교통체증은 홍천까지 약 60km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보통 1시간 30분이면 갈 거리를 무려
3시간.. 홍천까지 무려 3시간씩이나 걸린 것이다.
지루함을 달래보고자 나름대로 잠과 벗을 청하나. 잠을 자도 거기서 거기. 한참 자다 깨도 겨우 1km
전진... 정말 기가막힐 노릇이다.
이처럼 홍천 ~ 인제 44번 국도가 먹통이 된 이유는 바로 도로공사 때문에. 원래 4차선으로 뚫려 있는 것을
공사한답시고 2차선을 막아버려 이렇게 차가 막히는 것이다.

간신히 홍천에 도착하여 한숨 돌리고 바로 출발, 용문에는 22시에 도착하였다.
용문역에서 청량리로 가는 열차의 막차가 언듯 22시 20분 경에 있는 것으로 기억이 나서 서둘러 역으로
가서 확인을 해보니 다행히도 22시 26분에 열차가 있다.

22시 26분, 안동에서 청량리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나의 고향 서울로 돌아오니
이로써 강원도 고성 역사기행은 추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 하편 작성 시작일 - 2005년 7월 18일
* 중편 작성 완료일 - 2005년 7월 27일(1953년 휴전일)
* 중편 수정,보완,편집 ~ 2005년 7월 28일 ~ 9월 2일
* 공개일 - 2005년 9월 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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