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구] 성주 성산동 고분군 ~ 옛 영남의 중심, 대구 경상감영공원



' 경북 성주, 대구 역사기행 (2006년 3월 25일)'
'하편 ― 성산가야(星山伽倻)의 옛 도읍, 경북 성주(下) ~ 대구 경상감영공원(선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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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 성산동 고분군 둘러보기 ~ 사적 86호

▲ 성산동 67호분
성산동 고분군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무덤으로 이 곳을 다스렸던 지배자의무덤으로
생각된다.

기왕 여기까지 올라왔으니, 좀 쉬었다 가야지. 두 다리의 불만도 잠재우고.. 주변 풍경도
바라보고.. 그래서 무례하게도(?) 67호분 봉분(封墳) 위에 올라가 누런 풀을 방석 삼으며
양반자세로 덥석 앉아 버린다.

무덤 위에 앉아 천하를 바라보는 기분.. 비록 보이는 범위는 성주읍내와 그 주변으로크게
한정되어 있지만, 잠시나마 성산가야를 지배하던 지배자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천하에 모든 것이 나의 발 아래에 있으며, 나무와 무덤, 모든 것이 나에게 예를 표하며
머리를 조아리는 것 같다.

이렇게 봉분 위에서 나름대로의 상상과 여러가지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마침 아는 이에게
전화가 따르릉온다. 나에게 지금 어디냐고 묻길래.. 나
'무덤 위에 있어' 그러자 상대방
'허걱~~'

여자의 가슴처럼 부드러운 곡선의 무덤 위에 앉아 있으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다.
게다가 날씨도 따뜻하니, 졸음이라는 놈이 슬슬 나를 희롱하기 시작한다. 마음 같아서는
한숨자고 갈까 했지만, 무덤 주인에 대한 예가 아니고, 또한 갈 길이 바쁜지라 자리를
잡은지약 40분 만에 자리를 털며 슬슬 일어났다.

▲ 무덤 위에 피어난 노란 들꽃
67호분 위에 앉아 천하를 바라보는 나를 넌지시 바라보는 노란 들꽃..
혹 무덤 주인의 혼이 깃들여진 꽃은 아닐까..?
작지만 어여쁜 들꽃의 자태에 나의 시선은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모른다.

◀ 67호분에서 바라본 성산동 69, 70,
71호분

◀ 약간 외딴 곳에 떨어진 65, 66호분
- 65 ~ 66, 67 ~ 71호분은 고분군에서
제법 높은 곳에 자리해 있다.

곡선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유연한 모
습의 무덤들... 저들을 보면볼 수록
자꾸 야릇한 생각이 나는 이유는.. 무
엇일까..?

◀ 야트막하게 누워있는
성산동 49호분

◀ 57호분에 버금가는 큰 무덤 -
성산동 48호분

▶ 성산동 42호분 ▶

▶ 성산동 46호분 ▶

▲ 노란 들꽃
무덤 주변 드넓은 풀밭 사이로 간간히 이름 모를 들꽃들이 수줍은 모습으로
나를 바라본다.
아직은 날씨가 쌀쌀하여 건초에 몸을 의지하며 완연한 봄의 세상을 기다리는 꽃들..


이렇게 하여 약 2시간에 걸친 성산동 고분군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처음에는 산 아래 약 20기 정도만 살펴보려고 했는데, 어떻게 하다보니 산 자락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이렇게 재미도 없는 옛 무덤들을 지겹게 본 것은 작년 11월 19일, '경주 노서동 ~ 노동동 고분군' 이후 4개월만
으로 무덤의 모습은 솔직히 거의 비슷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무덤의 곡선과 크기가 다르다는 것..
(경주 노서동 ~ 노동동 고분군 둘러보기)

저 무덤들을 만들기 위해 강제 동원되어, 땀과 피를 바친 이 지역의 수많은 백성들, 그리고 죽어서도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며 누리기 위해 큰 무덤을 선호했던 망족(望族)들의 부질없는 행동, 인생이란 죽으면 그만인 것을
뭐가 아쉬워서 그렇게 큰 무덤을 만들었던 것일까..? 다 썩어 문드러진 그들의 육신을 위한 공간치고는 너무
넓은 것 같다.
그렇지만 그들의 부질없는 행동은 자칫 영원히 잃어버릴 뻔 했던 성산가야의 존재를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이 곳은 그들이 우리에게 남긴 몇 안되는 흔적들로, 고분에서 나온 수천 점의 유물들(현재 대구 계명대 박물관에
있음)
은 우리로 하여금 1500년 전 그들의 존재를 약간이나마 느끼게 해준다.

어느덧 시간은 오후 3시, 성산동 고분군을 뒤로 한 채, 다시 읍내로 걸어 나왔다.
날씨는 잠바가 필요 없을 정도로 따뜻했는데, 봄에 반항하는 겨울의 잔여 세력들이 반란을 꿈꾸는지, 매서운
바람이 몇번 씩이나 나를 후려치고는 그렇게 사라져 간다.

성주터미널에서 이르러 아쉽지만 성주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 짓고, 그 다음 행선지인 대구로 가기 위해
성주좌석버스 250번을 탔다. 좌석버스라고는 하지만 거의 농어촌 완행버스.. 대구까지는 3000원을 요구하길래
다사에서 지하철을 탈 생각으로 다사까지만 표를 끊는다.

3시 45분, 버스는 성주터미널을 출발, 읍내를 한바퀴 돌고, 선남을 지나 4시 10분 '성주대교'라 불리는 정말로
길쭉한 다리를 건넌다. 이 다리 역시 낙동강(洛東江) 위에 걸린 수많은 다리 중에 하나. 그날따라 그 강을 벌써
3번이나 건넌다.

강을 건너니, 이제부터 본격적인 대구광역시(大邱廣域市)... 하산리와 대구지하철 2호선 종점인 문양역을 지나
4시 30분 경, 아파트로 가득한 다사읍(多斯邑)에 도착. 읍내의 어느 정류장에서 내렸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다사역'을 찾는데 이건 도대체 어디에 숨어있는지 안내문도 없고, 나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찾지 못할 지경이다. 그래서 과일을 파는 행상들에게 '지하철역이 어디에 있습니까?' 물으니 길을 건너 아래로
내려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로 가는 도중 할인마트 하나를 발견했는데, 마침 집에서 가지고 온 물도 바닥을 드러내어, 캔커피
음료라도 사 마실 생각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세상에 커피 음료 하나에 250원.. 우리동네는 제일 싸봐야 400원
인데.. 매우 저렴한 가격에 그만 감동을 먹어.. 충동구매로 2개나 사고 말았다.

세천리 방면으로 통하는 내리막길에 이르니 그제서야 다사역이 눈에 보인다.
읍내에서 약간 외진 곳에 자리한 전철역, 그렇지만 이용객은 상당하다. 어차피 읍내에서도 걸어서 10분 이내
거리이니..
역으로 내려가 자동판매기에서 표를 사는데, 나는 수도권에서 전철을 탈 때 100% 카드를 이용하기 때문에
특별히 자동판매기를 찝적거릴 이유가 없었다. 솔직히 전철표 구경해 본지도 오래 되었지. 볼 이유가 없으니까.

중앙로역(900원)으로 가기 위해 판매기에 1000원짜리를 쑤셔 넣는데 판매기는 자꾸 반항을 하고.. 나의 이런
모습을 바라본 역무원이 다가오면서
'이렇게 하면 됩니다' 친절히 설명을 하면서 직접 표를 뽑아준다.
그런데 네모 모양의 표가 아닌 조그마한 동그라미 표 하나가 덩그러니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걸 보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오잉~ 이게 표에요?'라고 물으니 그렇다고 그런다. 처음으로 접해본 특이한 디자인의
'지하철 표', 얼마나 신기하던지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처럼 표 윗면과 아랫 면을 구석구석 살펴보았지.

표를 넣고 들어가는 개찰구도.. 그 동그란 표를 어디에 쑤셔 넣는지 몰라서 허둥지둥.. 그래서 역무원이 직접
넣어주었다. 이렇게 하는 거라면서..~ 서울에 살면서 지하철을 23년 이상 타온 나는 그 순간만큼은 순진한
촌놈이 되어버렸다.

▲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었던 대구지하철 표
크기가 상당히 작다. 거의 500원짜리 동전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까..?
이렇게 보니 꼭 냉장고에 붙이는 병따개처럼 보인다.


♠ 400년 영남(嶺南)의 중심지 ~ 경상감영공원(慶尙監營公園)

옛 경상감영이 있던 자리에 조성된 시민공원으로 대구에 감영이 설치
된것은 1601년이다.
조선 정부는 3천리 강토를 8도로 나누고 각 도에 지금의 도지사와 같
은관찰사(觀察使)를 파견하였다.
관찰사의 임기는 보통 360일로, 그들이 정무(政務)를 보던 곳을 감영
(監營)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감영은 지금의 도청(島廳)과 같다고
보면 되겠다.
경상감영은 임진왜란 이전에는 안동(安東)에 있었으나, 왜란 이후인
1601년경상도의 교통, 경제의 중심지인 대구로 이전되었으며 이 때

부터 영남의중심도시로 경상도의 행정, 정치, 군사, 치안의 중심지가 됨과 동시에 조선 3대 도시(서울,
평양,대구)의 하나로 급성장하게 된다.

지금의 공원 자리는 경상감영 외에도 객사, 진영(鎭營), 군창(軍倉)
등이있던 대구의 행정, 사법, 군사의 중심지로 1910년까지 계속 이
어져 내려왔으나, 1910년 이후, 감영에 딸린 일부 건물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파괴되었으며, 선화당은 1910년부터 1965년까지 경북도청으로
사용되었다.

1966년, 경북도청이 옮겨간 후, 그 터를 보존하기 위해 1970년 공원
으로조성하였으며, 공원의 이름은 '중앙공원(中央公園)'이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이후, 공원을 다시 손질하여 '경상감영공원'으로
다시태어났다.

공원 내에는 경상감영의 건물이었던 '선화당'과 '징청각'이 있으며,
대구관내에서 옮겨온 29기의 비석들이 공원 북쪽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 외에도 종각(鐘閣), 연못, 분수대, 도로원표 등이 있으며, 나무와
꽃들이 넉넉히 심어져 있고, 조촐하게 산책로와 벤치도 갖추고 있어
대구 도심 속의 아늑한 휴식공원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 경상감영공원 찾아가기
- 대구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에서 도보 5분, 대구역에서 도보 10분
* 입장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제한 없음

▲ 하마비(下馬碑)

경상감영의 정문인 관풍루(觀風樓, 현재 달성공원에 있음) 앞에 세워져 있던 것으로 비문
(碑文)에는 '節度使以下皆下馬'라 쓰여 있다.
즉 비석 앞에서 '절도사' 이하의 모든 사람은 말에서 내려 들어오라는 뜻이다.

▲ 선화당 앞에 피어난 벚꽃
서울에서는 아직 피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던 벚꽃이 이 곳에서는 벌써부터 화사하게
꽃망울을 터트리며 그 아름다운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2006년 처음으로 만난 벚꽃.. 마치 그녀를 만나듯, 나의 가슴을 두근두근 만들던 그 순백의
아름다움에 잠시 나의 눈은 멀어지고 말았다.

▲ 가로등과 벚꽃나무

◀ '시민의 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석조
조형물


▲ 선화당(宣化堂) ~ 대구 지방유형문화재 1호
경상감영의 정청(政廳)으로 경상도 관찰사(觀察使)가 집무를 보던 곳이다.
이 건물은 1601년, 당시 관찰사인 김신원(金信元)이 세웠으며, 여러 차례의 화재와 보수를
거쳤으며 지금의 건물은 1807년(순조 7년) 관찰사 윤광안(尹光顔)의 의해 최종 중건된
것이다.

정면 6칸, 측면 4칸의 넓직한 모습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주심포(柱心包)와 익공식(翼工式)
의절충형 공포를 이룬 2고주(二高柱) 7량가(七樑架)의 건물이다.

연회용으로 쓰이던 누각(樓閣)처럼 사방이 뻥 뚫려 있어, 늦봄이나 여름, 초가을에는 집무를
보기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부는 추운 날에는 어떻게 저 곳
에서 일을 봤을까..? 물론 다른 건물에서 집무를 봤을 것이다.

궁궐 전각에 못지않은 큰 규모를 자랑하는 선화당, 이는 이 건물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과
권위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며 조선 3대 대도시의 하나인 대구 고을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라할 수 있겠다.

예전에는 선화당 툇마루에 걸터 앉을 수 있었으나, 지금은 금하고 있음.

◀ 메마른 연못
연못에는 액체의 물 대신, 고체의 돌덩
어리들만이 가득히 고여 있을 뿐이다.
분수대도 할 일이 없어, 저렇게 졸고만
있고..

▲ 징청각(澄淸閣) ~ 대구 지방유형문화재 2호

경상도 관찰사의 처소(處所)로 1601년에 세워졌다.
이 건물은 선화당과 내력이 비슷하며 지금의 건물은 1807년에 새로 중건된 것이다.
정면 8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선화당과 마찬가지로 2고주(二高柱) 7량가(七樑
架)의익공계 건물이다.

관찰사가 머물던 관사(官舍)답게, 건물의 크기도 매우 크며 시원스럽다.

◀ 징청각 현판

▲ 비림(碑林)

경상감영공원을 조성하면서 대구 각지에 흩어져 있던 경상도 관찰사, 혹은 대구부사(府使)의
선정비(善政碑), 불망비(不忘碑), 공덕비(功德碑) 29기를 이 곳에 모두 집합시켰다.

저 중에는 정말로 비석을 세워줄만한 공덕과 선정을 베푼 지방관(地方官)도 있겠지만 제대로
한 것도 없으면서 어디까지나 형식적으로 비석을 세운 지방관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 징청각의 뒷모습
공원 내부를 이렇게 둘러보고 잠시 벤치에 앉아 불만에 가득한 다리를 잠시 쉬게 하였다.
시간은 어느덧 6시 10분, 슬슬 저녁을 먹을 시간이다.
도심 속에 오아시스와 같은 곳, 경상감영공원의 분위기는 어찌보면 서울 탑골공원과 많이
비슷한것 같다. 두 곳 모두 도심 한복판에 위치해 있고, 공원 관람객의 2/3 이상이 노공
(老公)들이니 말이다.
벤치에는 노공들과 중년층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토요일 저녁 시간을 즐기고 있었고비둘기
들은 혹 먹을 것이 없나 사람들 주변을 열심히 어슬렁거린다.

6시 30분, 슬슬 자리를 털고 일어나 대구역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가는 도중, 대구역 지하상
가에서김밥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지하철을 타고 동대구역으로 갔다.


동대구에서 나를 맞이하는 것은 서울로 올라가는 열차와 버스 뿐이다. 어차피 나의 최종 목적지는 집이니까.
성주와 대구는 어디까지나 경유지..

동대구역 아랫쪽에 있는 고속버스정류장에서 19시 40분 서울로 가는 일반고속을 타고 중부내륙고속도로를
거쳐 23시 40분, 서울에 도착했다.

~ 이렇게 하여 '성주 ~ 대구' 역사기행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며 다시는 재생이 불가능한 추억 속의 한 페이지로
그렇게 남게 되었다. ~

* 답사, 촬영 일시 - 2006년 3월 25일
* 하편 작성 시작일 - 2006년 4월 17일
* 하편 작성 완료일 - 2005년 4월 21일
* 하편 숙성/방치 기간 - 2006년 4월 22일 ~ 7월 10일
* 공개일 - 2006년 7월 1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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