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경새재, 주흘산 늦가을 나들이 ~~


' 문경새재, 주흘산(主屹山) 가을 산행 (2006년 10월 29일)'
'주흘관 ~ 여궁폭포 ~ 혜국사 ~ 주흘산 ~ 조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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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재로 가는길(鳥嶺途中) ~~

雉鳴角角水潺潺 꿩은 꾹꾹, 시냇물은 졸졸
細雨春風匹馬還 봄비를 맞으며 필마로 돌아오네
路上逢人猶喜色 낯선 사람 만나서도 반가운 것은
語音知是自鄕關 그 말씨 정녕코 내 고향 사람일세

- 퇴계 이황 선생이 새재를 넘어 고향인 안동으로 가면서 쓴 시


가을의 상징, 단풍이 그 절정에 다다르던 10월의 마지막 주, 가을의 향연으로 가득한 가을 산이 보고
싶은 마음에 근 3년 만에 영남의 오랜 관문, 문경새재를 찾았다.

찬란한 여명의 배웅을 받으며 후배들과 함께 동서울터미널에서 문경으로 떠나는 직행버스를 타고 새
재의 입구인 문경읍에 이르러 다시 새재로 들어가는 차를 타고 10시가 좀 넘어서 문경새재 관광단지
에 다다렀다.
관광단지는 막바지 가을 단풍과 등산을 즐기러 온 이들로 그야말로 시장통을 이루었다. 그들이 끌고
온 거추장스러운 4발 수레로 주차장은 완전 포화상태라 관광단지 뒤쪽으로 임시 주차장을 마련해 놓
았지만 역시나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매표소에서 소정의 통과의례(?)를 마치고 안으로 들어서니 문경새재 박물관 정문 옆으로 '신길원' 현
감의 충렬비각이 '잠깐 나좀 보고 가소 ~' 하며 나의 발길을 묶는다.


♠ 문경을 지키다 전사한 신길원 현감의 넋이 서린 ~
신길원 현감 충렬비(申吉元縣監忠烈碑)

◀신길원 현감 충렬비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145호
<문화재청 사진 참조>

문경현감(聞慶縣監, 현 문경시장) 신길원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조선 정부가 1706년에 세운것이다.

신길원은 선조 연간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진
사(進士)가 되었으며 태학(太學)의 추천으로 참봉(參
奉)을 거쳐 1590년 문경현감으로 승진되어 군민(郡民
)들에게 아낌없이 선정을베풀었다.

1592년 4월, 15만의 왜군이 부산 앞바다에 상륙, 불과 이틀 만에 부산을 먹어치우고, 경주와 대구를
거쳐 상주를 지키던이일(李鎰) 장군까지 몰아내 버린다.
4월 27일, 왜군이 문경에 다다르자 부하들은 현감에게 서둘러 피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그는 문경을
사수하기로 마음을 잡고 2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왜군과 맞섰으나 끝내 생포되고 말았다.
왜장은 제발 항복 좀 해달라고 권유를 했으나 이를 따르지 않고 다시 싸우다가 결국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조선 정부는 그에게 좌승지(左承旨)를 추증(追增)하고 비석을 세우게 했으며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
해문경향교 부근에 충렬사(忠烈祠, 지금은 1관문 뒤쪽에 있음)를 세웠다.

이처럼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옛 사람의 의기(義氣)가 담긴 비석이건만 그 비석에 잠깐이
라도 눈길을보내는 이가 거의 없어 은근히씁쓸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물론 산행도 좋고 단풍놀이
도좋지만 잠시 딱 30초만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는 것이 나라를 지킨 호국영령들에 대한 마땅
한 도리가아닐까..?

▲ 하얀 피부를 가진 가지각색의 장승들..

가는 날이 장날이라 했던가 문경 지역에서는 마침 사과축제가 열렸다.
거액의 입장료에 허탈해 하는 등산, 나들이 손님들에게 사과축제 행사 요원들이 사과를 하나씩 봉
다리에 싸서 나눠주고 있었는데 요염(?)하게생긴 빨간 사과의 매혹에 그만 1관문을 들어서기도 전
에 모두 먹어치우고 말았다.

1관문을 향해 5분 정도 가니 우리나라 7000만 인구만큼이나 다양한 표정을 가진 장승들이 지나가는
나그네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그런 장승 무리를 지나치면 정면으로 주흘관이 보이고, 오른쪽 들판으로 '대조영'.'연개소문'등의
사극에서 전쟁신을 찍을 때 사용되는 나무로 만든 전쟁용 병기들이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고있다.
이들은 화살을 쏘는 노궁(弩弓)과 망루(望樓), 성문을 부실 때 사용하는 충차(衝車)와성을 넘을
때 사용하는 운제(雲梯) 등으로 마치 1000년 전, 병영(兵營)으로 들어온 기분이다.

망루를 보니 문득 2001년 이곳에 왔던 추억이 새삼 떠오른다. 망루에 올라 사진도 찍고 신기한 눈
으로 망루와 충차를 어루만지던 그 시절, 그러나 이제는 머나먼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 공성(攻城)용 전쟁 소품들
오늘날 최첨단의 무기들에 비해서는 정말 보잘 것 없는 병기(兵機)들이지만 1000년 전에는 저들이
최신의병기들 그 자체였다.
사극 촬영 소품으로 다시 태어난 고전 병기들은 예전의 전쟁용 대신 수익을 탐하는 방송사 사극용
으로 그 역할을 충실히 행하고 있으며 성문을 부시는 충차와 성벽을 오르는 운제가 촬영이 없는 날
을 이용해 나란히 쉬고들 있다.


♠ 새도 넘기 힘들다는 고갯길, 출세를 꿈꾸던 영남 선비들의 애환이 서린
문경새재 관문(關門) -
사적 147호


▲ 문경새재 1관문 (주흘관)

문경새재는 부근에 있는 이화령(梨花嶺)과 함께 소백산맥(小白山脈)을 넘는 주요 고갯길의 하나로써
영남에서 서울에 이르는 가장 가까운 지름길이다.
이 곳이 뚫린 시기는 조선 태종 연간으로 계립령(鷄立嶺)을 대신하여 새롭게 개척되었다.

문경새재에서 '새재'는 새들도 넘기 힘들 정도로 험한 고개라는 뜻에서 그렇게 불려졌다는 말도 있
고, 억새풀이 우거져 '새재'라고도 하며, 새로 닦은 길이라는 뜻에서 '새재'라 했다는 등, 다양한
유래가 있지만 대부분은 새들도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에서 조령(鳥嶺)이라 부르고 있다.

특히 이 곳은 천연의 요새지로써 1589년에 중봉 조헌(重峯 趙憲)은 왜적 방비책으로 영남의 방비를
튼튼히 하고 문경새재의 경계를 강화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조정은 그의 의견을 묵살해 버린다.

드디어 1592년 4월,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경주와 상주를 거쳐 거침없이 북진을 해오자 조정은여진
족(女眞族) 정벌의 영웅, 신립(申砬)을파견한다.
처음에 그는 문경새재에서 왜군을 막으려 했으나생각이 부족한 위인이라 문경을 버리고 엉뚱하게도
충주 탄금대(彈琴臺)에 배수진(背水陣)을 쳐버렸다.그가 왜멀쩡한 새재를 버리고 탄금대를 선택했
는지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는 여진족 정벌에 큰 전공을 세웠고그가 자랑하는 강인한기마병
을 믿으며 은근히 왜군을과소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왜군에 대한 두려움을가진군사들의 군
기를 잡으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한편 문경을 점령한 왜군은 문경새재에 이르러잠시길을 멈추었다. 그 이유는 조선군의 매복 공격
을 우려해서였는데,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왜군은까마귀들이 까악까악 울어대는 모습을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바로 새재를 넘어 충주로 들이닥쳐 신립의 배수진을 보기좋게 깨뜨려 버린다.

그가 자랑하던 기마병은 왜군의 신식무기인 조총(鳥銃) 앞에 와르르 무너지고, 신립 그 자신은 전쟁
에 패한수치심으로 홧김에 남한강으로 뛰어들어 자살했으며, 그가 이끌던 3천의 조선군은 지휘관을
잘못 만난 죄로 거의 대부분 전사 혹은 포로 신세가 되버렸다.

신립의 이 어이없는 탄금대 패전으로 다급해진 조선 정부는 서둘러 짐을 꾸려 평양, 의주로 줄행랑
을 쳐버렸으니, 만약 신립이 새재를 굳건히 지켰더라면 임진왜란의 판도는 크게 바꿨을 것이다. 하
지만 이 역시 쓸데없는 역사의 가정일 뿐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을 어찌 되감기를 하리요..

왜란 이후 문경새재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깨달은
조선 정부는 새재에 관문(關門)을 설치할 것을검
토하게 된다. 그래서 1594년에 중성(中城, 제2관문
)을 세우게 되며 숙종 연간인1708년에 이르러서
중성을 크게 중창하고 초곡성(草谷城, 제1관문)과
영성(嶺城, 제3관문)을 축조하면서 지금의 문경새
재 관문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이후 영남 사람들의 한양으로 가는 통행로 겸
과거길로널리 이용되었으며 1925년 이화령 고갯길
이 뚫리면서 문경새재의 그 무거운 짐은 이화령에
게 넘어갔다.

▲ 문경새재 2관문, 조곡관(鳥谷關)

1966년 제1관문, 제2관문, 제3관문이 사적 147호로 지정되었으며, 1970년대 중반에는 퇴락한 관문들
을 복원하고 새재길 주변을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또한 1981년에 경상북도
도립공원(道立公園)으로 지정되었다.

문경새재는 영남 지역 선비들이 조정출사의 꿈을 안고 과거를 보러 가던 과거길로 1관문과 3관문 사
이로 옛 과거길(평범한 산길)이 재현되어있다,
그런데 과거를 보러가던 영남지역 선비들은 다른고갯길을 제쳐두고 거의 이 길을 이용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우스개 소리를 하나 하자면 만약추풍령(秋風嶺)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과거에서떨
어진다고 하며 죽령(竹嶺)으로 넘으면 쭉쭉 떨어진다고 하여 통행을 회피하였다고한다.
그렇다면 왜 문경새재는 그들의 과거길로 애용되었을까?

우선 새재를 한자로 하면 조령(鳥嶺)으로 이 고개를 넘어감으로써 과거에급제하여 새처럼 높이높이
상승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영남의대부분 지역에서 서울로 갈 때는
새재를 통해서 가는 것이 다른 고개로 넘어가는 것보다 약간 빨랐다.그래서 선비들과 백성, 관원들
까지 이 고개를 넘나들면서 서울과 영남지역을 왕래했던 것이다.

현재 문경새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관광지로써
제1관문에서 제2관문으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태조
왕건과 무인시대, 대조영의 촬영장인 고려촌이 있
어, 많은 사극들이 여기서 촬영되고 있다.
그리고 3개의 관문과 주변 계곡은 그들의 촬영지
로 쉬지 않고 이용되고 있어 처음 오는 사람이라
도 결코 낯설지가 않을 것이다.

새재길 주변으로 주흘산(主屹山, 1108m)과 조령산
(鳥嶺山, 1025m), 월악산(月岳山, 1097m)등의 멋
드러진 산들이 연이어 포진해 있어 등산객들의 인
기가상당하다.

▲ 조령산 (해발 1025m)

문경새재 일대는 3개의 관문을 비롯, 촬영세트인 고려촌, 고려 공민왕이 잠시 머물렀다는 혜국사,
시원한 모습의 여궁폭포와 팔왕폭포, 경상도 관찰사의 휴식처인 교구정, 물맛이 일품인 영천약수,
나그네들에게 숙식을 제공한 조령원터와 동화원터, 한글의 고어(古語)로 쓰여 흥미로운 산불됴심비
등의볼꺼리와 함께 1관문부터 3관문까지 약 8km의 그림 같은 산책로가 거침없이 펼쳐져 있어 굳이
산행을 할 것도 없이 가볍게 걸어가도 무리는 없다.

* 문경새재 입장료 (2006년 12월 기준) :
(문경새재 박물관 입장료도 포함됨)
- 일반 2100원(단체 1700원)
- 중,고등학생 1100원(단체 900원)
- 어린이 750원(단체 600원)

* 문경새재 주요 등산 코스 : (제1관문 기준)
① 1코스(주흘산 종주길 21km) : 제1관문 → 혜국
사 →대궐터 → 주흘산 정상 → 부봉 → 동문 →
북문
→ 마패봉 → 제3관문 → 괴산군 원풍리
* 소요시간 약 9시간

② 2코스(가장 일반적인 등산코스 15km) : 제1관
문 → 혜국사 → 대궐터 → 주흘산 정상 → 조곡
골 →제2관문 → 제1관문
* 소요시간 약 5시간

③ 3코스 (가장 쉬운 코스 10km) : 제1관문 → 고
려촌→ 조령원터 → 교구정터 → 제2관문 →제3
관문 → 괴산군 원풍리
* 소요시간 약 4시간

▲ 선녀들이 목욕을 했다는 여궁폭포

* 문경새재 찾아가기 (2006년 12월 기준)
① 승용차로 갈 경우 : (수도권 기준)
* 영동고속도로 -> 중부내륙고속도로 -> 문경나들목 -> 문경새재 관광단지
② 대중교통으로 갈 경우 :
* 동서울, 인천, 충주, 대전동부, 대구북부, 부산에서 문경이나 점촌까지 직행버스 이용
* 점촌과 문경터미널에서 문경새재까지 문경시내버스가 30 ~ 6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 문경제1관문, 주흘관(主屹關)

주흘관은 문경새재를 넘는 첫 관문으로 사극에 단골로 어지간히 나온 탓에 그 모습이 결코 낯설지가
않을 것이다.
이 문은 영남제1관(嶺南第一關)이라고도 하며 1708년(숙종 34년) 주변 석성(石城)과 함께 축성된것
으로 새재에 있는 3개의 관문 중 제일 오래되었다.
문루(門樓)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좌우에 협문(夾門)이 있으며, 머리에 팔작지붕을 이고 있다.

관문 성벽을 가만히 보면 일부가 약간 검게 그슬려 있는데, 이는 사극에서 맞짱신을 찍을 때 불화살
을 쏘고 불을 지르고 하면서 생긴 자욱들이다. 그런데 이것도 문화재 파손에 속하지 않으려나..?

새재를 찾은 이들을 마치 검문하듯 서 있는 주흘관, 우리는 활짝 열려진 주흘관을 통해 관문 내로
들어선다.

▲ 신길원 현감의 넋을 모신 충렬사(忠烈祠)
주흘관을 지나면 정면으로 경북 100주년 타임캡슐광장이 있는데 거기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혜
국사, 여궁폭포, 주흘산 정상으로 통한다.

혜국사 방면으로 3분 정도 오르면 개울 건너로 맞배지붕을 얹힌 충렬사가 나오는데 태극마크가 새겨
진 3문은 굳게 입을 봉하며 좀처럼 열릴 줄을 모른다.
충렬사는 1826년 문경현감 홍노영(洪魯榮)과 유림(儒林)들이 신길원 현감을 기리기 위해 문경향교
부근에 세운 것으로 1857년과 1981년에 각각 대대적인 중수를 거쳐 1999년에 현 위치로 이전하여 매
년 제향(祭享)을 올린다.

▲ 충렬사 앞 은행나무
가을도 신길원 현감을 존경하는지 그의 혼이 서린 이 곳에 머물러 좀처럼 떠날 줄을 모른다.
그냥 머물기 심심했는지 저렇게 아름다운 작품(은행나무)을 만들어 놓아 존경의 뜻을 표한다.
한참 절정에 다다른 은행나무, 가을 햇빛에 더욱 빛나 보이니. 마치 황금이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달
려 있는 듯 하다.


♠ 문경새재 계곡을 촉촉히 적셔주며 뭇 사내의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
여궁폭포(女宮瀑布)

▲ 가을이 머무는 여궁폭포 계곡 (1)
여름의 제국을 몰아낸 가을이 이 곳에 풍경이 흠뻑 반했는지 다녀간 흔적을 곱게도 남겨놓았다.
고운 색채를 유감없이 자아낸 한 폭의 가을 수채화..

▲ 가을이 머무는 여궁폭포 계곡 (2)
계곡 주변 나무들이 겨울의 제국에 대비하여 슬슬 거추장스러운 그들의 옷을 계곡에 떨구고 계류
암반들은 그들의 버림을 받은 잎들을 눈처럼 소복히 뒤집어 쓰며 겨울을 기다린다.

◀ 문경새재의 꽃, 여궁폭포
1관문(주흘관)에서 충렬사를지나 15분 정도 땀
을 빼고 오르면 가녀린 물줄기의 여궁폭포를 나
타난다.

20m 높이에서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이 폭포
는 가까이 다가서 엿보듯, 고개를 돌려야만 보
이는 폭포로, 호랑이가 담뱃대를 물던 시절, 7
명의 선녀(仙女)가 구름을 타고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전설을 간직한 아름다운 폭포이다.

폭포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모습이 꼭
여인네의 하체(어떤 이는 감히 성기라고 주장함
ㅋㅋ)와 고스란히 닮았는데 그런 연유로 여궁
혹은 여심(女心)폭포라는 어여쁜 애칭을 가지게
되었다.
여궁폭포의 이런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폭포구나'
하고 지나치지만 사연을 아는 이들특
히 남자들은 폭포를 매우 유심히도 쳐다본다.
그 것이 바로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

▲ 여궁폭포가 위에서 흘려 보낸 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자연이 만들어놓은 기가 막힌 작품에 잠시 넋을 잃으며 열심히 감상에 젖어본다.

폭포를 뒤로 하며 혜국사로 오르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폭포 위쪽으로 아슬아슬하게 펼쳐진 등
산로는 거의 천길 낭떠러지로, 전망은기가 막히나 잘못하면 굴러 떨어지기 좋은 곳이라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하늘과 점점 가까워질수록, 계곡의 물은 점점 줄어만 가고, 약간 추운 날씨에도 땀은 여름 마냥
열심히 쏟아져 내린다. 그 땀으로 가뭄의 현실을 여실히 드러내 보인 저 계류를 가득 채워주고싶
건만..~~

조그마한 폭포와 절 입구에 있는 무지개다리를 건너니 혜국사를 알리는 이정표와 함께 나무 사이
로 혜국사가 조심스레 그 얼굴을 드러내 보인다.


♠ 주흘산 자락에 살며시 안겨있는 산사(山寺), 나라의 은혜를 생각하는 절
~ 주흘산 혜국사(惠國寺)


▲ 한참 몸단장에 여념이 없는 혜국사

주흘관에서 주흘산 정상을 향해 40분 정도를 힘겹게 오르면 문경새재 유일의 고찰(古刹)인혜국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절은 846년 승려 체징()이 창건했다고 하는데, 처음 이름은 법흥사(法興寺)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고려 후기에 이르러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 ~ 1374년)이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개
경(開京, 개성)을 버리고 안동으로 줄행랑을 치면서 잠시 이 곳에 머물렀다.

임진왜란 때는 청허()와 송운(), 기허() 등이 이 곳에 머물며 승병(僧兵)을 양성, 왜군
을 토벌하는데 일조를 하면서 조선 정부에서는 그 공으로 '혜국사'라는 이름을 내렸다고한다. (또
는 고려 공민왕이 이 곳에 머문 인연으로 많은 지원을 베풀었다고 하여 나라의 은혜를입었다는 뜻
에서 혜국사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6.25 전쟁으로 절이 파괴되어 1960년대 이후에 다시 세웠으며 사우(寺宇)로는 금당(金堂)인 대웅전
과관음전(觀音殿), 산신각(山神閣), 요사 등이 있다.
경내에는 지정문화재는 없으며, 오래된 유물로는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부도(浮屠) 4기가 절 부근
산자락에 숨어 있다.

주흘산의 깊숙한 산골에 숨어 있는 산사로 근래(2006년)에 들어 좀더 크게 짓고 싶은 욕심 때문인지
대대적인 보수를 벌이고 있다.
문명의 이기인 4발 수레가 하얀 모래처럼 펼쳐진 시멘트길을 따라여기까지 들어오며 보수를 위해
건물 주변을 가득 에워싼 철기둥이 산사의 조용한 이미지를 해하고 있어 은근히 아쉬움이 든다.

▲ 혜국사 대웅전(大雄殿)
혜국사의 법당(法堂)답게 제일 높은 곳에 들어앉아 절을 찾은 중생들을 위엄 있게 바라본다.
불전 주변으로 가득 심어진 보수용 철기둥이 심히 눈에 거슬려 저 곳까지는 올라가지 않았다.

◀ 혜국사 요사(寮舍)
새로운 모습을 꿈꾸며 한참 몸단장 중인
요사, 번쩍거리는 건물의 피부를 보니세
운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무슨 보수
공사일까..?

▲ 메마른 혜국사 석조(石槽)
맨바닥만 고스란히 드러낸 새하얀 석조, 그리고 뿜어낼 물이 없어 입이 근질근질한 멀뚱한 표정의
용머리.

▲ 가을이 익어가는 주흘산
왜 죽음 앞에서는 모든 생물들은 처절한 아름다움을 보이는 것일까? 살고 싶은 한가닥 미련 때
문일까?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단풍잎들은 하나,둘 대지에 떨어져 스산한 낙엽들이 되면서 바람
에 이리저리 구르고 비와 눈에젖어가며 땅 속으로 슬슬 사라져 가겠지. 내년에 자라날 다음
세대를 위해서..

혜국사를 지나서면 얼마 동안은 만만한 길이 계속 되는 듯 싶다가 갑자기 180도 돌변하며 경사
가 급해지는 등, 만만치 않은 수준으로 안면을 바꾸며 산을 정복하려는 인간들에게 자신이 결
코 호락호락한 산이 아님을 경고한다.

▲ 잡초만 무성한 대궐터
혜국사에서 20분 정도 오르면 대궐터라 불리는 곳에 이른다.
이 곳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줄행랑을 치던 고려 공민왕의행재소(行在所)가 있던 곳
이라 하는데 왕이 머물렀다는 뜻에서 대궐터라 부른다.
하지만 그 넓이는 그리 넓지가 못하며 예전에 건물이 있었음을 알리는 주춧돌만이 하얗게 머리
를 드러내며 어지러이 늘어서 있을 뿐이다.

▲ 대궐터 약수터
제1관문(주흘관)에서 주흘산 정상까지는 1시간 30분의 긴 거리이나 약수터는 딸랑 이 곳 하나
밖에 없다.
자신에게 감히 도전장을 내밀며 개미처럼 기어 오르는 오만한 인간들이 혹 목마름으로 힘들어
하지는 않을까 하여 주흘산이 친히 베푼 소중한 약수터이다.

등산을 하다보면 배도 고프긴 하지만 제일 그리워지는 것은 바로 물이다. 한참 땀을 흘리며산
을 오르다 약수터를 만나면 그 반가움은 정말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똑같은 물맛이지만산에
서 마시는 물은 얼마나 꿀맛이던지 보통 두 바가지는 꾸역꾸역 마셔야 직성이 풀린다. 거기에다
얼마나 시원한지, 얼음에 푹 담군 물 같다. 하지만 물줄기가 가늘어 바가지의 반을 채우는데
상당한 인내가 필요하다.


♠ 주흘산 정상에서 천하를 바라보다..

대궐터 약수터에서 오직 정상만을 향해 다시 인고의 등산을 시작한다.
사람 인생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등산. 해발 1000m가 넘는 산들은 역시 만만치가 않은 것 같다.
비록 한라산(漢拏山)만은 못하겠지만, 해발의 숫자가 크면 클수록 산을 오르기는 점점 힘들어진다.

약수터에서 약 20분 정도를 힘겹게 올라 해발 1000m 능선에 이르렀다.
비록 정상은 아니지만 정상을 코 앞에 둔 지점으로 여기에 자리를 깔고 늦은 점심을 먹는다.
점심이라고 해봐야 1줄에 1000원하는 김밥과 과자, 그리고 곡차 1병 등이 전부이지만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먹어서 그런지 모두가 달콤하다.
요즘은 먹을 것이 가히 넘쳐나서 음식에 대한 소중함을 잊고 사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산에 오르
면 음식도 그렇고 물에 소중함도 절실히 느끼게 되니 이는 산이 인간들에게 건네는 소중함 가르침이
라 할 것이다. 물론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 가르침은 모두 잊고 말지만..

점심을 먹고나니 식곤증의 일환으로 다리가 나사 풀리듯 풀리고 졸음이 배 깔고 한숨 주무시라며 슬
슬 나를 희롱해댄다.
정상까지 500m라는 말과
말이 500m지 실제는1km함께 별로 힘들지 않다는 등산객들의 말을 위안
삼으며 또다시 산행을시작했다.

▲ 깎아지른 듯한 모습의 정상 (전좌바위)
저 곳이 바로 주흘산의 정상으로 이렇게 보니 꼭 거대한 코끼리의 얼굴 부분을 보는 것 같다.

◀ 주흘상 정상(1075m) 표석
주흘관에서 거의 2시간, 능선부에서
서 15분을 오른 끝에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주흘산 정상에 다다렀다.

대머리처럼 허전한 정상부에는 거추
장스런 낙엽만 잔뜩 짊어진나무들
과 주흘산 정상을 알리는표석만이
있을 뿐이다.

정상에 올랐다는 뿌듯함에 단단히
빠진 사람들, 모두들 왔다간 흔적을
남기느라 여념들이 없다.

▲ 주흘산 정상에서 바라본 문경 평천리
산 꼭대기라주변 전망도 일품이다. 천하의 모든 것이 모두 내 밭 밑에 펼쳐져 있으니 마치 천하의
주인이 된 듯한 거만한 착각에 빠진다.

정상부에서는 한 15분 정도 머무른 것 같다. 나는 다음에 오를 이들을 위해 정상의 자리를 기꺼이
내어놓고, 아까 전에 왔던 길을 버리고 2관문 쪽으로 서둘러발걸음을 재촉했다.

▲ 가을 단풍의 향연
2관문 쪽으로 내려가는 조곡골은 혜국사에서 올라온 산길 보다는 좀 완만하지만 산을 오르면서 다리
의 힘이 상당히 떨어진 상태라 나사가 풀리듯 다리가 막 풀리려고 한다.

올해의 마지막 향연을 펼치느라 여념들이 없는 나무들, 정말로 몰래 훔쳐가고 싶은 풍경이다.
우리집으로 고스란히 가져가 고이 간직하고 싶으나 그럴 재간이 없어 대신 사진으로 대리만족을하
련다.

▲ 가을 단풍의 화려한 향연을 뒤로하며..
땅바닥으로 내려앉은 낙엽들이 카펫트처럼 자칫 딱딱한 산길의 촉감을 약간이나마 부드럽게 해준다.
겨울의 제국에 적응하기 위해 봄 ~ 가을 동안 걸치던 아름다운 옷을 모두 낙엽으로 내버려야만했던
나무들의 모습이 하늘을 향해 원망을 표하듯, 애처롭다.
낙엽 가득한 늦가을은 나무 자신들 뿐만 아니라 사람들까지도 모두 우울쟁이로 만들어버린다.

▲ 돌탑의 거대한 제국, 꽃밭너덜
주흘산 정상과 조곡관 중간 지점에 돌탑으로 가득한 '꽃밭너덜'이란 곳이 있다.
이 곳은 산을 오르던 사람들이 그들의 소망을 위해 차곡차곡 쌓아둔 돌탑이 모이고 모여서 형성된
돌탑의 거대한 나라로이 곳에서 아들을 기원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어 많은 아줌
마들이 찾아온다.

돌탑 사이로 군계일학(群鷄一鶴) 마냥 벌거벗은 고목 하나가 외로이 서 있으며 돌탑들의 우산, 양산
역할을 해준다.

▲ 문경새재 2관문, 조곡관(鳥谷關, 嶺南第二關)

꽃밭너덜에서 20분을 내려가니 드디어 문경새재의 주로(主路)인 새재길이 나오고, 새재의 제2관문인
조곡관이 시원스런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조곡관은 1594년에 충주사람 신충원이 성을 쌓고 관을 설치한 뒤 1708년에 중창했는데 그 이후 문루
는 전소되고 홍예만 남아 있던 것을 1975년에 복원한 것이다. 팔작지붕을 머리에 인 문루는 정면 3
칸,측면 2칸으로 좌우로 협문(夾門)을 갖추고 있으며, 성문 양쪽으로는 성곽이 펼쳐져 있는데, 성
곽의 길이는 다 합쳐봤자 200m도 채 되지 않는다.

조곡관은 제1관문인 주흘관과 마찬가지로 '태조왕건','대조영'의 촬영지로 수없이나왔던 곳이다.
이 곳에서는 주로 맞짱장면(공성과 수성전)을 찍었으며 관문 안에는 몸에 좋기로 이름난 영천(靈泉)
약수가 있으나 시간이 여의치 않아 이번에는 그냥 통과하였다.

2관문을 100m 앞두고 1관문 쪽으로 내려간다. 시간은 어느덧 6시를 향해 치닫고 있었지. 이번 나들
이는문경새재를 가볍게 거니는 것보다는 거의 주흘산 산행에 중점을 둔 터라 등산 때문에 많은 것
을 그냥 지나쳐야 되는 아쉬움이 있었다.

산행을 하고 나면 산행에 대한 피로와 여독을 풀고자 거의 꼭 동동주 등의 곡차와 파전, 도토리묵을
즐기는데 이번에도 역시 그 원칙은 지켜졌다.
우리는 2관문 아래쪽, 수정처럼 맑은 새재 계곡 위에 거린 무지개 모양의 철교(鐵橋)를 건너 어느
주막을 찾았다.

주막에서 좁쌀동동주라 불리는 누런색의 동동주 3동이와 파전, 두부김치를 시켜 거의 저녁삼아 무척
이나 시장한 배를 꾸역꾸역 채우고 산바람에 얼어붙은 몸을 녹이며 오랜 산행으로 입이 저만큼이나
삐죽 나온 두 다리를 쉬게 하였다.

땅꺼미로 가득한 새재길을 따라 1관문으로 가면서 길 주변으로 한글로 쓰인 오래된 자연비석인 산불
됴심비, 경상도 관찰사(觀察使)가 도장을인수인계했던 교구정(交龜亭), 태조왕건에서 궁예(弓裔)의
최후 장면을 찍은 용연(龍淵), 관리들의숙식을 제공하던 조령원(鳥嶺院)터, 특이한 모습의 쭈구미
바위 등이 베풀어져 있으나 어둠 속에서거의 보는 둥 마는 둥 한지라 본 글에서는 그 핑계를 과감
히 내세우며 모두 생략하고자 한다.

어둠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고려촌(사극 촬영지)을 바라보며 주흘관을 지나니 시간은 어언 7시,
얼어붙은 몸을 녹일 겸 자판기 커피로 열심히 몸을 녹이며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점촌으로 나와서
서울 강남으로 가는 우등고속버스에 의지하여 서울로 돌아오니...
~~ 이렇게 하여 문경새재, 주흘산 산행은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 답사, 촬영 일시 - 2006년 10월 29일
* 작성 시작일 - 2006년 11월 5일
* 작성 완료일 - 2006년 11월 14일
* 숙성기간 - 2006년 11월 15일 ~ 12월 5일
* 공개일 - 2006년 12월 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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