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에 해당되는 글 14건

  1. 2020.04.09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에서 무지개를 보다 ~~ (숙정문에서 청운대, 백악마루, 부암동 창의문까지)
  2. 2019.03.15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성북동에서 즐긴 고즈넉한 한옥 산책 ~~~ (최순우옛집, 수연산방, 한옥에서 즐기는 전통차 1잔)
  3. 2018.12.19 김신조 공비패거리가 넘어갔다는 도심 속의 푸른 허파, 북악산 김신조루트 ~~~ (북악하늘길1산책로, 2산책로, 북악산길)
  4. 2018.02.12 법정스님과 길상화(김영한)의 아름다운 넋과 무소유 정신이 깃든 도심 속의 포근한 절집 ~~ 성북동 길상사
  5. 2017.09.15 짙푸른 숲과 조촐한 계곡을 간직한 도심 속의 싱그러운 쉼터, 북악산 삼청공원 ~~~ (말바위, 영무정, 한양도성. 삼청동길)
  6. 2016.10.06 눈요깃감이 많은 서울 도심 속의 포근한 전원마을, 성북동 나들이 (심우장, 수연산방, 최순우옛집 등)
  7. 2015.11.26 서울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 늦가을 나들이 (숙정문~백악마루~창의문)
  8. 2014.11.10 늦가을이 아름다운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 성북동 산책 (최순우옛집, 삼청각, 북악산) 2
  9. 2013.10.25 늦가을도 걸음을 멈춘 아름다운 박물관, 성북동 간송미술관
  10. 2013.07.06 길상사 진영각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에서 무지개를 보다 ~~ (숙정문에서 청운대, 백악마루, 부암동 창의문까지)

 


' 서울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백악산) 나들이 '

▲  북악산에 뜬 무지개

▲  숙정문

▲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가을이 막바지 절정을 누리던 11월 중순 주말에 일행들과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北
玄武)인 북악산(백악산)을 찾았다.

둥근 햇님이 하늘 높이 떠 있던 오후 2시, 한성대입구역(4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서울시내
버스 1111번(번동↔성북동)을 타고 성북동(城北洞) 서울다원학교 종점에서 두 발을 내렸다.
성북동 종점에서 천하 여러 나라의 만국기(萬國旗)가 펄럭이는 '성북 우정의 공원'을 지나
삼청각으로 인도하는 조그만 길(성북로31가길)로 들어서니 숲과 계곡, 주택이 뒤섞인 전원
(田園) 풍경이 펼쳐진다. 길 왼쪽(남쪽)에는 진하게 우거진 숲과 함께 북악산이 베푼 계곡
이 졸졸졸~~♬ 흘러가며, 그 계곡은 성북천이란 간판을 달고 북악산의 청정한 기운을 가득
머금으며 속세로 흘러간다.
그 길의 막다른 부분에 이르면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와 함께 약간의 오르막 길이 펼쳐지
는데, 그 길을 오르면 바로 삼청터널 북쪽이다. 삼청터널은 성북동과 삼청동, 도심을 이어
주는 터널로 시대가 변했음에도 여전히 2차선 덩치를 고수하고 있어 주말과 휴일에는 버벅
거리는 차량의 행렬을 심심치 않게 본다.
(삼청터널은 차량 전용 터널이라 뚜벅이는 통행 금지임)

삼청터널로 향하는 길(대사관로)을 건너면 홍련사로 가는 길과 북악산으로 가는 길이 나란
히 나타난다. 허나 길이 서로 붙어있어 초행자는 자칫 햇갈리기 쉬운데, 오른쪽 평탄한 길
이 홍련사(紅蓮寺) 길이며, 왼쪽 계단길이 북악산과 김신조루트로 가는 길이다. 그러니 햇
갈리지 않도록 한다.
홍련사로 가는 길은 오로지 홍련사만 이어줄 뿐이며, 절 입구에 정열적으로 타오른 단풍나
무가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에 마구 돌을 던진다. 저 길로 들어서면 나도 저들처럼 붉게
물드는 것은 아닐까..?


▲  늦가을이 화사하게 질러놓은 붉은 단풍이 펼쳐진 홍련사 입구(오른쪽)와
북악산, 숙정문 입구(왼쪽)


 

♠  북악산(北岳山, 백악산) 입문

▲  북악산으로 오르는 산길 (숙정문안내소 직전)

북악산으로 인도하는 계단길을 오르면 2007년에 북악산 개방 기념으로 조림(造林)한 것을 기
리고자 세운 표석이 있고, 그 표석을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와 제2산책로(김신조루트)로 이어지며, 직진을 하면 바로 숙정문안내소
가 나온다.


▲  숙정문안내소

숙정문안내소는 말바위안내소, 창의문안내소와 함께 북악산 주능선(한양도성길)으로 인도하는
관문이다. 예전에는 신분증을 무조건 지참하여 출입신청서를 작성해야 했으나 2019년 4월 5일
부터 그런 것이 폐지되어 다소 자유의 공간이 되었다.
허나 북악산에 국가의 예민한 곳이 많다보니 개방 시간에는 여전히 제한을 두어 여름(5~8월)
에는 7~19시(출입은 17시까지), 봄과 가을은 7~18시(출입은 16시까지), 겨울은 9~17시(출입은
15시까지)이다. 또한 쉬는 날도 사라져 요일 가리지 않고 접근이 가능하다.

숙정문안내소를 지나면 속세살이처럼 각박한 길이 숙정문까지 이어진다. 시작부터 힘든 길이
니 북악산이 그리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님을 느끼게 하는데, 그 각박함을 조금이라도 덜고자
나무데크 계단길을 닦아놓았다.


▲  숙정문으로 오르는 산길 (숙정문안내소 이후, 초겨울)


※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백악산(白岳山)> - 명승 67호
서울 도심 북쪽에 가파르게 솟아난 북악산(342m)은 서쪽의 인왕산. 동쪽의 낙산(駱山, 낙타산
), 남쪽의 목멱산(木覓山, 남산)과 함께 서울 도심을 지키는 4대 산의 하나이다. 이들을 내사
산(內四山)이라 부르는데, 그들 중 북악산이 맏형이며, 낙산은 막내 동생이다.

서울 도심의 지형은 내사산에 감싸인 분지(盆地)로 조선 태조 때 개경(開京)에서 서울로 국도
(國都)를 옮기면서 이들 산의 능선을 따라 18.2km의 도성(都城)을 구축했다. 그리고 풍수지리
에 따라 북악산을 북현무로 하여 서울의 주산(主山)으로 삼았으며,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
낙산을 좌청룡(左靑龍), 남산을 남주작(南朱雀)으로 삼았다.
이렇게 도성을 만들고 한강 남쪽에 있는 관악산(冠岳山, 629m)을 신하의 산이란 뜻의 조산(朝
山)으로 삼았는데, 그가 주산인 북악산보다 훨씬 높고 산세가 우람해 거의 신하가 왕을 누르
고 있는 형세였다. 게다가 관악산과 그 서쪽에 있는 호암산(虎巖山)이 각각 활활 타오르는 불
의 모습과 호랑이의 모습으로 나란히 서울을 응시하고 있어 조선 위정자들은 비보풍수(裨補風
水)의 일환으로 서울 북쪽에 있는 북한산(삼각산)을 가져와 서울을 지키는 듬직한 진산(鎭山)
으로 삼아 관악산의 기운을 누르고자 했다. 북한산이 관악산보다 키도 높고 산세 또한 장대하
기 때문이다.

북악산의 옛 이름은 백악산으로 종로구에서는 어디서든 그가 보이는데, 오랫동안 서울을 상징
하는 산으로 남쪽 자락에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景福宮)을 닦고, 그 북쪽(지금의 청와
대)에는 넓게 후원을 두었다. 지금은 청와대(靑瓦臺)와 국무총리공간이 둥지를 틀어 이 땅의
정치, 행정 1번지의 역할은 변함이 없다.

북악산 주능선에는 한양도성(漢陽都城)이 파노라마처럼 길게 펼쳐져 있다. 정상 동쪽에는 북
문인 숙정문이 있고, 인왕산과 경계를 이루는 자하문고개에는 창의문(자하문)이 고색의 모습
으로 고개 중턱을 지킨다.
이렇듯 예나 지금이나 서울을 지키는 예민한 곳으로 성곽을 낀 주능선과 정상 주변은 사람들
의 발길을 통제했는데, 그래도 해방 이후에는 주능선과 북쪽 능선은 어느 정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으나 1968년 1.21 사건 이후 북악산 대부분이 닫힌 땅이 되고 말았다.

주능선과 조금 떨어진 삼청동(三淸洞)과 청운동(淸雲洞)은 한양도성의 북쪽 변두리로 숲이 무
성했다. 삼청동계곡과 대은암(大隱巖)계곡, 백운동(白雲洞)계곡, 청송당(聽松堂)계곡 등의 계
곡이 흘렀으며, 풍경이 아름다워 왕족과 귀족들의 별장 및 풍류 장소로 각광을 받았다. 그리
고 삼청공원과 숙정문 주변은 사대부(士大夫) 여인들의 봄꽃놀이 장소로 유명했다고 한다. 대
은암계곡 바위글씨를 비롯해 당시의 여러 문화유적이 아련히 남아있으며, 북악산 북쪽 백사골
(백사실)에는 백석동천이란 별서(別墅)유적이 전하고 있다.

북악산은 북쪽으로 북한산과 이어져 있고 숲이 무성하다보니 예로부터 호랑이가 자주 나타났
다. 그들은 궁궐 후원과 북촌까지 침투했는데, 태종(太宗)이 경복궁 후원을 거닐다가 호랑이
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북악산 호랑이는 다른 호랑이와 달리 곶감 따위는 무서워하지 않았다고 하며, 대신 수진궁(壽
進宮) 귀신을 무서워한다고 했다. 하여 인왕산, 북악산 호랑이는 수진궁 귀신이어야 쫓을 수
있다는 속담이 생겨났다. (수진궁은 혼인을 못하고 죽은 왕족의 사당임)

1968년 이후 속세에 개방을 꺼렸던 북악산은 2006년 4월 1일 홍련사에서 숙정문을 거쳐 촛대
바위까지 부분 개방되었으며, 그것도 인터넷 예약을 통해 1일 4회만 출입이 가능했다. 이후
전면 개방을 위해 쉼터와 의자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어 2007년 4월 5일에 말바위에서 정상을
거쳐 창의문까지 전 구간이 개방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2009년 북쪽 능선인 북악하늘길(김신
조루트)이 활짝 열려 시민의 품으로 들어왔는데, 이 길은 약간의 통제구역이 있긴 하지만 제
약이 심한 주능선과 달리 언제든 자유롭게 안길 수 있다.

북악산은 예로부터 소나무가 유명하여 조선 조정에서 특별히 옆구리에 끼고 관리했으며, 왜정
(倭政) 이후 관리 소홀과 마구잡이 벌채로 지금은 주능선 일대에 조금 남아있다. 그 외에는
간간히 소나무가 목격된다. 또한 오랫동안 금지된 곳으로 있다보니 나무와 식물들이 마음 놓
고 뿌리를 내려 숲이 원시림마냥 울창하다. 게다가 숙정문 주변에는 팔배나무가 군락을 이루
고 있으며, 수목이 무성하여 새들이 많이 산다.
그러다보니 서울 도심의 하늘을 정화시켜주는 허파 역할까지 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인왕산
과 북한산, 관악산과 더불어 대자연이 서울에 내린 소중한 선물이자 꿀단지로 앞으로도 지금
의 모습 그대로 삼삼한 자연의 공간으로 서울 속에 있었으면 좋겠다. 하긴 산 주변에 국가의
예민한 곳이 많다보니 개발의 칼질 또한 그 눈치로 마음껏 칼질을 할 수는 없다.


▲  북악산 김신조루트 남마루에서 바라본 북악산 주능선(가운데 산줄기)과
서울 도심

※ 북악산(백악산) 주능선과 한양도성길
2006년 4월부터 순차적으로 개방된 주능선은 창의문에서 정상을 거쳐 말바위로 이어지는 4.3
km 구간으로 숙정문 안내소와 말바위 안내소, 창의문 안내소를 통해 입장할 수 있다. (그 외
에는 출입금지) 또한 탐방구간(말바위안내소~창의문안내소)을 절대로 벗어나면 안되며 도처에
군인이 지키고 서 있으니 엉뚱한 마음을 품으면 곤란하다. (말바위안내소~말바위~삼청공원/와
룡공원 구간은 완전 개방된 구간이라 시간 제한 없음)

주능선에서 만날 수 있는 명소로는 숙정문과 1.21사태소나무,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촛대바
위, 청운대 등이며, 군사시설이 옥의 티처럼 널려 있어 북악산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실감케
한다. 만약 서울이 수도가 아니었다면 북악산은 꽤나 자유로운 몸이 되었을 것이다.
북악산 정상과 청운대에서는 서울 도심이 두 눈 아래로 펼쳐져 조망(眺望)이 일품이며, 숙정
문과 말바위에서는 성북동과 성북구 지역이 보이고, 한양도성을 따라 평창동(平倉洞)과 부암
동, 인왕산, 북한산이 차례대로 보여 그야말로 움직이는 조망대이다.

* 북악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삼청동 / 성북구 성북동
* 말바위안내소 (☎ 02-765-0297~8, 팩스 02-765-0296)
* 숙정문안내소 (☎ 02-747-2152, 팩스 02-747-2153)
* 창의문안내소 (☎ 02-730-9924~5, 팩스 02-730-9926)


 

♠  숙정문에서 청운대까지

▲  약간 측면에서 올려다본 숙정문(肅靖門) - 사적 10호
숙정문 앞은 바로 각박한 산비탈이라 평평한 공간이 적어 성문을
지키기에는 아주 그만인 곳이다.


숙정문안내소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숙정문이 모습을 비춘다. 이 문은 한양도성의 북문(北門)
으로 남대문<숭례문(崇禮門)>, 동대문<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돈의문(敦義門)>과 함께
한양 4대문의 하나였다. 북대문(北大門), 북문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가파른 산능선에 자리해
있어 도성의 대문이라기 보다는 산성(山城)의 조촐한 성문 분위기가 진하다.

문의 이름인 숙정(肅靖)은 엄숙히 다스린다는 뜻으로 원래 이름은 가운데 1자만 다른 숙청문(
肅淸門)이었다. 1396년 지금보다 약간 서쪽에 조성되었는데, 1413년에 풍수학자인 최양선(崔
揚善)이 태종에게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아 길을 내어 지맥(地脈)을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건의하여 이들 문을 닫아걸고 소나무를 잔뜩 심어 통행을 금지시켰다. 그래
서 무늬만 문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거 외에도 숙정문을 품은 북악산 주능선은 도성 내부와 바깥이 훤히 바라보이는 예
민한 위치로 서울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러다보니 백성들의 출입을 거의 통제했고,
설령 이 성문을 나와도 이어지는 곳은 숲이 무성한 북악산 북쪽 산줄기와 북한산, 성북동가
고작이었다. <성북동은 동소문(東小門)을 통해 갈 수 있음>
그리고 평소와 비가 많이 올 때는 숙정문을 닫아 걸다가 가뭄이 심할 때 남대문을 닫고 이 문
을 열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는 1416년에 제작된 기우절목(祈雨節目)에 따라서 북쪽은
음(陰). 남쪽은 양(陽)을 상징하는 음양의 원리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니 통행문으로서의 존
재감보다는 도성 수비와 음양의 원리를 따지는 풍수지리적인 존재감이 훨씬 컸던 것이다.

1504년 성곽을 보수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으며, 숙청문이 언제 숙정문으로 이름이 갈렸
는지는 북악산 산신(山神)도 모르는 실정이나 1523년부터 숙정문 이름이 등장했다. 숙정문 외
에도 북정문(北靖門)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이들 명칭이 같이 쓰이다가 언제부턴가 숙정문으
로 통합되었다.
1968년 1.21사태 이후 북악산 대부분과 숙정문 일대가 금지된 땅이 되었으며, 1976년 북악산
일대 성곽을 손질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문루는 비록 새 건물이지만 성벽을 이
루는 성돌에는 고색의 때가 만연해 중후한 멋을 보인다.
2006년부터 다시 속세에 공개되어 제한적이긴 하지만 성문 관람이 가능해졌다. 허나 문 좌우
성곽길과 숙정문안내소 방면만 통행이 가능하며, 남쪽에는 삼청동으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으
나 금줄이 쳐져 있어 절대로 갈 수 없다.

숙정문 문루에 올라서면 북악산 북쪽 능선과 성북동 일대가 바라보이며, 대자연이 그린 가을
단풍이 산자락을 곱게 수를 놓아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자아낸다. 높은 곳에 자리한 것
은 분명하지만 문 남쪽은 울창한 수목이 시야를 방해하고 있고, 북쪽도 겨우 성북동과 삼청각
, 북악산 북쪽 능선이 전부라 조망은 생각보다 별로다.
매년 봄에는 사대부 여인들이 숙정문 남쪽에서 봄꽃놀이를 즐겼다고 하며, 그거 외에는 딱히
숙정문 주변에 대한 옛 사람들의 시(詩)나 문구(文句)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  숙정문의 수수한 뒷모습

▲  숙정문 서쪽 협문(夾門)


▲  숙정문에서 바라본 천하
눈이 시리게 맑은 가을 하늘 아래로 북악산과 북한산 사이에 포근히 둥지를 튼
성북동이 바라보인다. (왼쪽에 보이는 큰 기와집이 삼청각)

▲  숙정문 서쪽 성곽에서 바라본 천하 (가운데 기와집이 삼청각)

▲  북악산에서 만난 일곱 색깔 무지개의 위엄
비가 잠깐 오더니 이내 일곱 색깔 무지개가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무지개를
본 것이 정말 몇 년 만인지 옛 친구를 만난 듯 무척 반갑고 신기했다.

▲  힘차게 뻗은 숙정문 서쪽 성벽
서울 수비를 향한 굳건한 마음이 뭉쳐 단단한 성벽이 되었다. 성곽을 따라
북악산으로 오르면 시야에 범위도 점차 넓어진다.

▲  촛대바위

숙정문 서쪽에는 촛대바위가 있다. 아마도 촛대처럼 생겨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 듯 싶은데
현실은 바위의 북쪽과 동쪽 면 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곳에서 보면 촛대처럼 보이지도 않아
그저 그런 바위로만 보이는데, 그를 제대로 보려면 바로 정면인 남쪽에서 봐야 되지만 남쪽은
금지된 구역이라 발을 못들이게 한다. 또한 바위 정상도 금지된 곳이니 괜히 바위 위에 올라
가는 일이 없도록 한다.

우리가 촛대바위를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왜정(倭政)이 이 땅의 혈을 끊고자 무식하게 쇠말뚝
을 박았던 추악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왜정은 1920년대에 경복궁과 일직선이 되는 이곳에 말뚝을 꽂았는데, 사람으로 친다면 머리의
정수리가 되는 부분이다. 즉 조선 땅의 머리 부분을 아작을 내어 이 땅을 영원히 통치하고 싶
은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다행히 그 말뚝은 제거되었으나 말뚝의 휴유증 때문일까? 이 땅은
아직도 혼돈 속에 잠겨있다. 친일매국노와 그런 것을 추종하는 잡것들이 권력과 부를 챙기고
이 땅을 이간질시켜 나라의 기본부터가 망가졌기 때문이다. 언제쯤 촛대바위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까? 그때가 되면 주름진 나라 사정도 좀 펴지겠지.
(왜정의 쇠말뚝에 대해서는 측량용이란 말도 있음)


▲  촛대바위와 그에게로 인도하는 나무데크길
나무 난간 너머와 바위는 감히 발도 들일 수 없는 금지된 구역이다.

▲  촛대바위에서 청운대로 오르는 성곽
성곽을 따라 이어진 북악산의 명물 소나무의 푸른 물결..

▲  북악산 주능선을 따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한양도성
(곡장 조망대에서 바라본 모습)
도성 너머로 구름에 감싸인 북한산(삼각산)이 바라보인다.


촛대바위를 지나면 성곽길 경사가 점점 각박해지면서 암문(暗門)이 하나 나온다. 여기서 암문
밖으로 나가서 잠시 성곽 바깥 길을 이용해야 되는데, 이는 성곽에 군사시설이 있기 때문에
부득이 그렇게 길을 낸 것이다.
길 옆에는 철조망이 둘러져 있고, 그 너머로 북한산, 평창동 등이 바라보여 마치 휴전선 너머
의 금지된 땅을 보는 듯 하며, 그 길의 끝에 이르면 성 안으로 인도하는 계단길이 나온다. 거
기서 다시 성곽길이 이어진다.


▲  청운대(靑雲臺) 표석 (해발 293m)

촛대바위에서 성 바깥, 안쪽을 들락거리며 20분 정도 오르면 북악산(백악산)에서 2번째로 높
은 곳인 청운대가 마중을 한다.
청운대는 푸른 구름의 지대란 뜻으로 근래에 붙여진 이름인 듯 싶다. 이곳은 공간이 넓고 의
자가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으며 북쪽으로 성북동과 북한산, 남쪽으로 남산과 서울 도심이
바라보여 조망 또한 괜찮다. (도심 쪽이 괜찮음)


▲  소나무가 짧게 그늘을 드리운 청운대

▲  청운대에서 바라본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 도심과
서울의 영원한 남현무, 남산(목멱산)

▲  청운대에서 바라본 북악산 정상

▲  청운대 주변에서 바라본 평창동과 신영동, 부암동, 북한산

▲  여장 성돌에 새겨진 빛바랜 글씨들

청운대를 지나면 안내문이 하나 나오는데, 그 안내문에 따라 여장을 살펴보면 글씨들이 희미
하게 아른거릴 것이다. 이 글씨들은 도성을 축조하면서 새긴 공사 구역 표시와 공사 담당 고
을, 공사 일자와 공사 책임자의 직책과 이름으로 이런 것이 새겨진 성돌이 한양도성에 여럿
있다.

1396년 한양도성을 만들 때 성곽 전 구간을 600자(약 180m) 단위로 끊어 97구간으로 구획하고
천자문(千字文) 순으로 공사 구역을 표시했다. 북악산 정상에서 천(天)으로 시작하여 지(地),
현(玄)... 순으로 해서 북악산 정상 동쪽에서 조(弔)로 끝나며, 구역 다음에 공사 일자와 공
사 책임자의 직책, 이름을 새겼다. 이런 공사 실명제는 조선 후기까지 계속 되었으며, 이곳
성돌에는 의령시면(宜寧始面)이라 쓰여 있어 의령(경남) 시작 지점을 뜻한다.


▲  남북분단의 쓰라진 비극 - 1,21사태 소나무

성돌글씨 부근에는 1.21사태 소나무라 불리는 소나무가 있다. 북악산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
건이 바로 1968년 김신조 공비 패거리의 서울 침공 사건인 이른바 1.21사태로 그들과 총격전
을 나눈 현장의 하나이다. 북악산에는 그와 관련된 쓰라린 장소가 많은데, 이 소나무와 호경
암이란 바위에는 총탄의 흔적이 있으며, 호경암이 있는 북쪽 능선에는 김신조 일당이 도망친
길인 김신조루트(북악하늘길 제2산책로)가 있다.
1.21사태 소나무에서 우리 군과 공비 패거리간의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그때 이 나무에 총탄
15발이 무심하게 박혔다. 이후 그 자리에 흉물스럽게 동그란 표시를 하여 남북분단의 잔인한
현실과 함께 이곳을 지키는 군인들로 하여금 경계로 삼고 있다.

때는 1968년, 북한은 김신조 일당 31명을 보내 청와대를 공격케 했다. 임진강(臨津江)을 건너
파주와 양주의 여러 산과 북한산 서쪽 자락, 창의문을 거쳐 1월 21일 서울 도심까지 용케 들
어온 김신조 패거리는 청와대를 코앞에 둔 청운동(淸雲洞)에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崔圭植,
1932~1968)이 이끄는 경찰에게 저지를 당했다.
경찰이 검문을 한다며 그들의 길을 막자 공비들은 크게 발작하여 외투 속에 감춘 기관단총을
꺼내 먼저 공격을 가했다. 불행히도 최서장은 가슴과 배에 관통상(貫通傷)을 입어 쓰러졌고
'끝까지 청와대를 사수하라!!'
마지막 명령을 내리며 비장한 최후를 마쳤다.
서장의 죽음에 애끓는 복수심에 불탄 경찰은 더욱 반격의 속도를 올려 공비들 상당수를 벌집
으로 만들었다. 이때 김신조를 비롯한 살아남은 공비들은 목을 붙잡고 북악산과 인왕산으로
줄행랑을 쳤는데, 그들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바로 이 소나무 부근에서 격전이 있었던 것이다.

이후 북악산 북쪽 능선인 호경암에서 격전이 있었고, 1월 21일 이후 14일의 토벌 끝에 김신조
와 도주 1명을 제외한 29명을 사살했다. 도주 1명은 북한까지 도망을 친 것으로 전해지며, 처
단된 공비의 시신은 파주시 적성면 적군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김신조는 투항해 이 땅 어
딘가에 살고 있다.

김신조 일당의 난입 사건을 1.21사태라 부르며, 이 사건을 계기로 단단히 뚜껑이 폭발한 박정
희 대통령은 바로 그해 4월 1일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고, 군작전도로인 북악스카이웨이를 콩볶
듯 급히 만들게 했다. 이 예비군 창설로 인해 이 땅의 남자들은 군제대를 하고도 8년이나 예
비군 훈련을 받아야 되는 불이익을 받게 된 것이다.


▲  1,21사태 소나무의 총탄 흔적
그때 총탄이 박힌 자리에 빨간색과 흰색으로 좀 흉하게 표시를 해두었다.


북악산에 널린 수많은 소나무의 하나로 이제는 북악산의 명물로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허나
좋은 뜻에서 그리 되면 모르겠지만 호경암과 함께 1.21사건 같은 영 좋지 않은 사건으로 명물
이 된 것이니 소나무 자신도 마음이 그리 편치 않을 것이다. 차라리 이름이 없는 소나무처럼
조용히 묻히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어쩌다가 안좋은 쪽으로 명물이 되었는지 나무나 사람이
나 운과 시간을 잘 만나야 된다.
게다가 호경암처럼 당시에 총탄 흔적까지 안고 있으니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70년 넘게 대치
하고 있는 남북분단의 우울한 비극을 전율이 일도록 느끼게 만든다.


 

♠  북악산 정상(백악마루)에서 창의문까지

▲  북악산 정상힌 바위 (저 바위가 실질적인 정상임)

청운대에서 10분 정도를 마저 오르면 북악산(백악산)의 정상인 백악마루에 이르게 된다. 백악
마루는 해발 342m로 마루란 순수 우리말로 정상을 뜻한다.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정상 중앙에 백악산 정상 비석과 북악산 옛모습 복
원기념비가 있다. 그리고 정상 북쪽에는 사람 키보다 2배 정도 높은 굵직한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꼭대기가 실질적인 북악산의 머리이다.
정상 남쪽에는 청운대와 마찬가지로 소나무가 가득해 그윽한 솔내음을 전해주며, 테두리 안에
서만 움직이고 사진을 찍어야 된다. 테두리를 넘으면 나라가 매우 싫어하기 때문에 굳이 넘을
생각은 하지 않도록 한다.
여기서는 동서남북 어디든 촬영이 가능하며, 북쪽으로는 평창동과 북한산(삼각산), 동쪽은 성
북동과 서울 동북부지역, 서쪽은 부암동과 인왕산(仁王山), 그리고 남쪽으로 서울 도심과 남
산(南山)이 속시원히 바라보여 조망이 일품이다.

이곳에 올라 발아래 펼쳐진 천하를 보고 있자면 그 천하가 마치 내 것이 된 듯, 잠시나마 제
왕(帝王)마냥 즐거운 기분이 밀려온다. (허나 현실은 시궁창 중의 시궁창..) 세계 최대의 대
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을 발 아래 두고 굽어볼 수 있는 곳으로 이곳만큼 조망이 좋은 곳도
없다. 또한 서울 도심을 둘러싼 뫼 가운데 가장 높은 산이며, 오랜 세월 서울 땅을 지켜온 북
현무로서의 면모와 위엄도 느껴진다.


▲  하얀 돌로 다듬은 백악산 정상 표석

▲  소나무 너머로 바라보이는 서울 도심과 남산
중공 짱깨산 미세먼지로 조망이 영 시원치가 못하다.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성북동과 서울 동북부 지역
산속에 묻힌 너른 동네가 성북동이고, 그 산 너머로 성북구와 강북구,
노원구 등 서울 동북부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북악산 꼭대기 바위에서 바라본 정상부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평창동과 북한산
북악산을 받쳐주는 서울의 듬직한 진산, 북한산이 북악산을 굽어본다.
그 남쪽 산자락에는 부자 동네 평창동이 크게 둥지를 틀었다.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인왕산
인왕산을 비롯하여 서대문구, 은평구 지역과 서울/고양시의 경계를
이루는 산(봉산, 앵봉산 등)들이 바라보인다.

▲  백악쉼터에서 바라본 북악산 북쪽 산줄기와 평창동,
그리고 북한산의 위용
북악산(삼각산) 북쪽 산줄기는 늦가을이 질러놓은 단풍에 산불마냥 활활
타오르고 있다. 너무 곱게 타올라 깜깜한 밤에도 모두 보일 것만 같다.

▲  백악쉼터에서 창의문으로 내려가는 성곽길
녹음이 짙은 소나무가 아찔한 내리막길을 가려주려는 듯 가운데서 시야를 막는다.

▲  백악쉼터 부근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신영동, 홍지동 지역

북악산 정상에서 창의문으로 가는 성곽길은 북악산에서 가장 고달픈 구간으로 각박한 속세살
이만큼이나 길이 가파르다. 내려갈 때는 올라가는 것보다야 부담이 적겠지만 급하게 펼쳐진
성곽길에 아찔함마저 들 정도이다. 그리고 창의문에서 올라갈 때는 각박한 경사를 자랑하는
성곽길에 '이게 인간이 오를 수 있는 길인가?' 기를 제대로 질리게 만든다. 거의 30~40도 경
사의 야속한 성곽길을 올라야 되니 말이다.
그래서 등산이 딸리거나 노인과 어린이들은 가급적 숙정문이나 말바위에서 오르기를 권한다.
어차피 거기도 힘들긴 마찬가지이나 서서히 경사가 급해지는 구간이라 덜 힘들다. 창의문이
정상과 가까운 지름길이라고 해서 만만히 보면 후회한다.

정상에서 10분 정도 내려가면 백악쉼터라 불리는 조촐한 쉼터가 나온다. 여기는 북악산 개방
을 위해 닦은 공간으로 역사적인 의미는 없다. 이곳에서도 사진 촬영은 가능하나 쉼터 자체는
찍을 거리가 없으며 성곽과 성 밖에 펼쳐진 천하를 찍으면 된다.


▲  각박한 경사를 자랑하는 한양도성길 (백악쉼터에서 정상 방향)

▲  돌고래쉼터에서 만난 돌고래바위

백악쉼터에서 10분 정도 내려가면 돌고래쉼터가 나온다. 쉼터 바로 옆에 돌고래처럼 생긴 바
위가 누워있어 돌고래쉼터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 이름도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닌 북
악산을 개방하면서 지은 이름이다.
바위가 돌고래를 닮았다며 거의 주입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제 눈이 안경이라고 내 눈에는 물개
처럼 보인다. 바위 동쪽에는 약간의 틈이 있는데, 거의 입처럼 생겼고 그 위에 눈처럼 보이는
자국도 있다. 가만 보면 물개가 꼬랑지를 흔들면서 움직이는 모습 같아 차라리 물개바위라고
했으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나에게는 이름을 갈아치울 힘이 없다.

돌고래쉼터 주변은 촬영이 가능하나 찍을 만한 것은 돌고래바위와 성곽 너머로 보이는 풍경들
뿐이다. 돌고래바위는 통제구역이라 그냥 난간 너머로 보기 바라며, 바위 주변에도 소나무가
그윽하게 운치를 자아낸다. 그런 소나무 사이로 서울 도심이 살짝 속살을 비친다.


▲  창의문 - 보물 1881호
자하문고개를 밀어 만든 신작로(新作路)에 밀려 성문으로의 기능은 다소
떨어졌으나 왕년에 도성 성문으로서의 위엄은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서울 도심과 부암동(付岩洞)을 잇는 자하문고개에 옛 한양도성의 성문인 창의문이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킨다. 창의문은 성밖 부암동의 계곡 이름을 따서 자하문(紫霞門)이라 부르
기도 하는데, 창의문보다는 자하문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나도 자하문이라 주로 부름)

이 문은 한양도성의 8개 성문의 하나이자 4소문(小門)의 하나인 북소문이다. 4소문은 동소문
<東小門, 혜화문(惠化門)>, 서소문<西小門 ,소의문(昭義門)>, 남소문<南小門, 광희문(光熙門
)>, 그리고 이곳 창의문으로 혜화문과 소의문, 광희문은 각각 동소문. 서소문, 남소문이라 불
리나 유독 창의문은 북소문이라 불린 적이 거의 없다.


▲  창의문 안쪽 (도심 쪽)

창의문은 1396년 한양도성을 지을 때 조성된 것으로 문의 이름인 창의(彰義)는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다. 1413년 풍수학자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
아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건의하여 1416년 문을 닫아걸었다. 다만 1422년 군인들의 통로로 사용되었고, 1617년 창덕궁
을 보수할 때 이 문을 통해 석재를 운반하는 등, 철저히 나라 일에만 문을 열었다. 허나 성
밖 부암동 지역에 왕족과 귀족들의 별장과 그들의 즐겨찾기 명소가 즐비해 그들의 은밀한 통
행로로 쓰였다. 즉 국가와 높은 사람들의 전용문이었던 것이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정치에 불만을 품은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괄(李适) 등은 세검정(洗劍亭)에서 칼을 씻으며 역적질을 모의, 역촌동(驛村洞) 별서에 있
던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 인조)을 앞세워 도성에 쳐들어가 광해군을 폐위시킨 이른바 인조
반정(仁祖反正)을 저질렀다. 그때 그 반역도당들이 부시고 들어간 문이 바로 창의문이다. 그
래서 문루에는 인조반정을 저지른 작자들의 이름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문이 백성들에게 전격 개방된 것은 1741년이다. 그때 훈련대장 구성임(具星任)이 인조반정
때 의군(義軍)이 진입한 곳이라며 성문을 중수하고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문루를 다시 세
울 것을 건의해 지금의 문루가 지어졌다.


▲  창의문안내소에서 바라본 창의문 문루와 협문
하얀 추녀에 잡상(雜像)과 용머리가 걸터앉아 성문을 지킨다. 창의문이 무탈했던
것은 저들의 굳은 직업정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  문루에 걸린 인조반정 반역자들의 명단 현판
저들의 우매한 권력투쟁과 명나라에 대한 지극한 사대주의, 국제정세에 우둔함으로
얼마 뒤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삼전도(三田渡) 굴욕의 대치욕을 당하게 되고
그것도 모자라 동아시아의 호구 국가로 이리 털리고 저리 털리다가 결국
나라와 이 땅의 장대한 역사마저 잃게 된다.


창의문은 한양도성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서소문은 왜국 통감부(統監
府)가 만든 성벽처리위원회에서 1908년에 무단 철거하여 정확한 위치조차 아리송하고 동소문
은 왜정 때 없어진 것을 근래에 다시 지었다. 남소문인 광희문은 성문만 오래되었을 뿐, 문루
와 성곽은 1970년 이후에 복원되었다.
그에 비해 창의문은 6.25 때도 총탄이 알아서 비켜가 별다른 피해가 없었으며, 1958년 중수된
것 외에는 옛 모습 그대로 정정함을 과시한다. 바로 그런 점이 인정되어 2015년 12월 2일, 국
가 지정 보물로 특진되었다. 비록 일찌감치 국보와 보물 1호 지위를 누린 남대문(숭례문), 동
대문(흥인지문)에 비해 다소 늦은 감도 있고 너무 늦게 빛을 본 서글픔도 있지만 역시나 인생
은 끝까지 살아남고 봐야 된다.


▲  창의문 문루에서 바라본 창의문 안쪽

겨울 제국의 등쌀에 떠밀려 서서히 손을 놓으려는 늦가을이 잠시 이곳에 걸음을 멈추고 그의
마지막 잎새를 잔뜩 그려놓았다. 단풍이 환대하는 저 오솔길을 거닐면 나도 저들처럼 곱게 물
들지는 않을까? 황색 피부가 졸지에 다색(多色) 피부로 변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  신작로로 강제로 끊어진 창의문 반대쪽 언덕과 성곽
저 언덕에는 2009년에 터를 닦은 윤동주시인의 언덕이 있다. 끊어진 폭은 짧지만
고개를 깊게 깎아놔서 마치 끊어진 강가 절벽을 보는 듯 하다.


오랫동안 도성 성문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으나 1960년 이후 자하문고개를 밀어내고 신작로를
닦으면서 성문의 통행 기능을 잃게 되었다. 요즘이야 산꾼과 답사꾼, 나들이꾼들로 심심치는
않겠지만 그래도 예전 같지는 못하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물건이든 현역에서 물러나 뒷전에
물러나 앉은 모습은 정말 초라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문 서쪽에 신작로를 내면서 한양도성은 50m 남짓 끊어져 있다. 끊어진 반대쪽<현재 윤동주(尹
東柱)시인의 언덕과 청운공원이 들어서 있음>
을 애타게 바라보는 인왕산 쪽 성벽이 견우와 직
녀를 보듯 애처롭기까지 하다. 끊어진 구간은 도로 위에 흙을 덮어 성벽을 세우지 않는 이상
은 복원은 어려우며, 창의문 바로 남에는 북악산길이 지나가 시야를 제대로 방해한다. 하여
문루에 올라가 북쪽 전방을 뚫어지라 바라봤자 북악산길에 가려 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별로
없다.


▲  창의문 성문 천정에 그려진 봉황(혹은 닭)과 구름무늬

창의문은 이 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문의 모습이라 그냥 지나치기가 쉽지만 그만의 매력이
자 특징이 2가지가 있다. 그러니 지나치지 말고 반드시 눈여겨 보기 바란다.
우선 빗물이 잘 흘러가도록 문루 바깥 쪽에 설치된 1쌍의 누혈(漏穴) 장식이 있다. 이것은 연
꽃잎 모양으로 조각되어 성문의 매력을 수식해주고 있으며, 성문 천정에는 화려하게 날개짓을
펼치는 봉황(鳳凰) 1쌍이 그려져 있는데 속설에는 봉황이 아닌 닭이라고 한다. 성문 밖 부암
동 지형이 지네를 닮았다고 하여 비보풍수에 일환으로 그 천적인 닭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림
을 가만히 보면 머리와 목, 날개는 닭을 많이 닮았으나 몸통과 꼬리는 닭과는 거리가 먼 봉황
의 모습이다.
봉황이 1마리가 아닌 둘이 있는 것을 보면 암수 1쌍일 것이다. 그들 주변으로 와운문(渦雲紋)
이 가득 그려져 있는데, 신선의 오색구름처럼 영롱하게 그려진 구름의 모습이 마치 물결의 거
센 소용돌이를 보는 듯하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북악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창의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산1-1 (창의문로 118)


▲  하늘을 향해 경쾌하게 날개짓을 펼치는 추녀마루의 고운 맵시
선의 유연함과 아름다움이 진하게 배여난 창의문,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선이 또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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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3월 1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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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성북동에서 즐긴 고즈넉한 한옥 산책 ~~~ (최순우옛집, 수연산방, 한옥에서 즐기는 전통차 1잔)

 


' 서울 도심 속의 전원 마을 ~ 성북동 나들이 '
(최순우 옛집, 수연산방)

▲  수연산방 사철나무

▲  최순우 옛집 뒷뜰에 있는
둥그런 탁자와 의자

▲  최순우 옛집에서 만난 조그만
맷돌과 석구(石臼, 돌통)

 


 

♠  시민들이 지켜낸 시민문화유산 1호, 우리나라 고고미술에
평생을 바친 최순우(崔淳雨) 옛집 -
등록문화재 268호

가을이 한참 익어가던 10월의 끝 무렵, 후배 여인네와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성북동(城北洞
)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오후 2시, 한성대입구역(4호선)에서 그를 만나 5번 출구를 나와서
성북동 방면으로 뚜벅뚜벅 걸었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가니 왼쪽 골목에 키다리 빌라와 주택
사이로 별천지처럼 들어앉은 기와집이 손짓을 보낸다. 그 집이 이 땅의 고미술 연구에 평생을
바친 혜곡(兮谷) 최순우 선생(1916~1984)이 말년을 보냈던 집이다.

이 집에 살았던 최순우는 1916년 4월 27일 경기도 개성(開城)에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희
()으로 개성 송도()고보를 나와 1943년 개성박물관에 입사했다. 그는 당시 개성박
물관장인 고유섭()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면서 고미술에 뜻을 굳혔다고 한다.

1945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학예관과 미술과장, 학예연구실장을 지냈으며, 1950
년 6.25가 터지자 이승만 정권의 무책임한 한강인도교 폭파 만행으로 강을 건너지 못하고 북
한군에게 꼼짝없이 잡히고 만다.
서울을 접수한 북한은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당시는 북단장(北壇莊)과 보화각(葆華閣)이라
불림>에 있던 문화유산에 군침을 흘리고 박물관에서 일했던 최순우와 소전 손재형(孫在馨)을
소환해 그것을 모두 포장하여 지정된 곳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최순우와 손재형은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이 힘들여 수집한 문화유산의 북송만은 어떻게든
막아보고자 기가 막힌 눈속임작전을 감행했는데, 하늘이 도왔는지 감독관으로 온 공산당원 기
(奇)는 아주 어벙벙한 작자였다.

그들은 기씨에게 왜국(倭國) 판화로 된 춘화(春畵, 미성년자 관람불가급의 예민한 그림)를 보
여주고, 보화각 지하실에 있던 화이트호스 위스키를 권해 허구헌날 술에 쩔게 만들었다. 또한
문화유산 선별기준에서 좋은 것은 나쁘다. 나쁜 것은 좋다고 속이고, 물건을 하나 가져다가
풀면 이건 아니라고 다시 싸게 하고, 목록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다시 하게 했다.
포장이 진행되면 감독관에게 상자를 사와라, 목수가 없다 등으로 태클을 걸었고 손재형은 일
부러 생다리에 붕대를 매면서 다리가 아프다고 연극까지 벌여 9월 28일 서울수복까지 포장되
어 상자에 담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3달이 넘도록 아무런 진척이 없자 뚜껑이 뒤집힌 북한은 사람을 보내 그들을 추궁하려고 했다.
허나 그때 우리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하면서 추궁은 모면하게 되었고, 간송미술관의 유물
은 모두 북송을 면하게 되었다. 그 인연으로 간송 전형필과도 가까운 사이가 된다.

6.25 이후 서울대와 고려대, 홍익대에서 미술사 강의를 했으며, 1967년 이후 문화재위원회 위
원과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대표, 한국미술사학회 대표를 역임하고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되어 박물관을 크게 발전시켰다. 1981년에는 홍익대 대학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
며, 1984년 12월 16일 성북동 자택(지금의 최순우 옛집)에서 숙환으로 별세하니 그의 나이 68
세였다.

그는 고미술 외에 현대미술에도 조예가 깊었고, 우리나라 박물관사에 큰 업적을 끼쳤다. 주요
논문으로 '단원 김홍도 재세연대고()','겸재 정선론()', 한국
의 불화()','혜원 신윤복론(),'이조(李朝)의 화가들' 등이 있고 저서는 삼척
동자도 다 안다는 '무량수전(無量壽殿)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와 '한국미술사' 등이 있다.


▲  최순우 선생의 왕년의 모습

최순우 옛집은 1930년대에 지어진 한옥으로 경기도 지방 한옥 양식을 띄고 있다. 'ㄱ'자의 본
채와 'ㄴ'자의 사랑채, 행랑채가 있으며, 전체적으로 'ㅁ'자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본채 뜨
락에는 닫혀진 우물이 있고, 그 옆에는 작은 우물이 있다. 최순우는 1976년에 이 집을 구입해
1984년 생애 마지막 날까지 살았으며,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그가 사라진 이후, 이 땅의 천박한 개발의 칼질이 슬슬 압박을 가해오면서 그야말로 풍전등화
의 위태로운 신세가 되고 만다. 이 집을 밀어버리고 빌라를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청천
벽력과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뜻있는 사람들이 시민운동단체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를 창단해
개인마다 1평씩 구입하여 절대 사수에 나선 것이다. 그렇게 개발의 칼질은 그들의 의기(義氣)
에 보기 좋게 참교육을 당해 고개를 숙였고, 집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허나 주인이 사라진 옛집은 많이 초췌해져 있었다. 그래서 내셔널트러스트는 2003년부터 2004
년까지 돈을 모아 복원하고 뜨락을 꾸미면서 그 집에 '시민문화유산1호'란 별칭을 주었다. 우
리나라 최초로 민간에서 문화유산을 구입해 지킨 유서 깊은 곳이기 때문이다. (재단법인
내셔
널트러스트(National Trust)문화유산기금에서 관리하고 있음)

현재 안채는 전시 공간과 최순우기념관으로 쓰이고 있고, 동쪽 행랑채는 사무실, 서쪽 행랑채
는 회의실과 휴식공간으로 꾸몄다. 그리 넓지 않은 뜨락은 전통식으로 아기자기하게 손질하여
나무와 풀, 꽃이 뜰을 장식하고 있으며, 안채 앞뜰 중앙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
운다.
뒷뜨락과 모서리 공간에는 기증을 받거나 수습해온 동자상과 문인석, 맷돌, 석구(石臼) 등 다
양한 석물을 배치해 간송미술관의 뜨락을 꿈꾼다. 구석마다 그들이 자리를 채우니 넓고 알찬
느낌을 선사한다. 게다가 뒤뜰에 야외도서관을 두어 최순우가 쓴 글과 여러 서적, 그와 관련
된 서적들을 읽으며 독서의 여유도 누릴 수 있으며, 뒷뜰 뒤쪽에는 높은 담벼락으로 그늘이
가득하다.

안채 내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어 사무실에 허가를 구하면 들어가게 해주며, 쪽마루에 앉아
한옥의 미와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리며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도심 속의 새로운 오아시
스이다. 또한 주말과 휴일에는 다양한 공연과 전시회 등의 이벤트가 열려 성북동의 대중적인
명소이자 살아있는 한옥 공간으로 위엄을 날리고 있다.

길상사의 창건주인 길상화(김영한)가 자신이 일군 고급 요정을 절로 바꾸어 속세에게 선물했
듯이 이 집 또한 최순우와 그의 집을 지킨 뜻 깊은 이들이 속세에 남긴 소중한 선물이다. 또
한 2006년에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성북동의 꿀
단지로 단단히 자리매김하여 대문 문턱이 무너질 정도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나
도 이곳을 2008년부터 거의 10회 이상 찾아 내부 구조를 거의 외울 정도이다.
성북동 초입에 자리해 있어 성북동 답사나 나들이를 계획한다면 한성대입구역을 기점으로 삼
아 이곳을 먼저 둘러보기 바란다. 단 겨울(12~3월)과 일요일에는 문을 열지 않으며 관람시간
은 10시부터 16시까지로 짧은 편이다. (15시 30분까지 입장 가능)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126-20 (☎ 02-3675-3401~2)

* 내셔널트러스트 최순우 옛집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빌라와 주택들 사이에 고풍스럽게 들어앉은 최순우 옛집의 위엄
개발의 칼질을 참교육시킨 유서 깊은 현장이다. 이곳은 그나마 운이 좋았지
속세의 관심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개발로 날라간 옛 집과
문화유산이 적지 않다.

▲  속세를 향해 가슴을 연
최순우 옛집 대문

▲  안채 앞뜰에 높이 솟아 옛집에
그늘을 드리우는 소나무


▲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나타나는 안채 앞뜨락

▲  최순우 옛집 관리사무실로 쓰이는 동쪽 행랑
최순우 관련 서적과 전통차를 판매하고 있다.

▲  소나무 옆에 뚜껑이 닫힌 죽은 우물
최순우와 이전 주인 일가의 식수를 제공했던 네모난 우물, 허나
지금은 뚜껑이 닫힌 채 겉모습만 남아있다.

▲  여러 석물과 서적들이 놓인 뒷뜨락 남쪽
돌의자에 놓인 책은 마음껏 볼 수 있으며 돌의자나 안채 뒷쪽 쪽마루에
걸터앉아 독서에 임하면 된다.

▲  동쪽 행랑에서 바라본 뒷뜨락

▲  수풀 밑에 누워있는 석구(石臼)

▲  표정이 앳된 조그만 동자상


▲  박석이 입혀진 뒷뜨락 돌길과 장승 2기 (오른쪽 장승은 수풀에 가려짐)

돌길이 우리네 인생처럼 너무나 짧다.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끝나기 때문이다. 그 앞에는 재
밌게 생긴 장승 2기가 돌길을 지키고 있는데 이곳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영 좋지않은 기운들
은 장승의 재미난 얼굴을 보고 자신의 본분도 잊은 채 발길을 돌릴 것이다.


▲  뒷뜨락에 닦여진 둥그런 탁자 (누구든지 앉아서 독서나 대화 가능)

▲  뒷뜨락 장독대
장독대에는 무언가가 숙성의 과정을 거치고 있으리라 생각하겠지만
저들은 속이 빈 장식용이다.

▲  옛집의 서쪽 모서리를 지키는 2기의 조그만 문인석(文人石)
저들의 표정에 부질없는 세월의 고된 모습이 묻어난 듯 하다.

▲  나그네들의 조촐한 휴식공간
안채 뒷쪽 쪽마루

▲  안채 내부 - 복원 과정에서 꾸며진
부분이 상당수 된다.


▲  최순우 옛집의 뒷통수 (안채 서쪽 담장길)

흙으로 만든 토담과 시냇물의 징검다리처럼 박석(薄石)이 입혀진 정겨운 담장길, 담장 너머가
자연의 공간이거나 한옥이었다면 그 운치는 곱배기가 되었을텐데, 빌라와 슬레이트 지붕이 그
자리를 대신하니 그나마 우러난 정겨움과 운치도 절반 이상으로 뚝 떨어진다. 내게 큰 지우개
가 있다면 담장 밖 풍경을 싹싹 지우고 싶을 뿐이다.


▲  서쪽 행랑채에 진열된 혜곡이 쓰던 도장과 조그만 자기들

▲  마루에 놓인 검은 피부의 커다란 함지박


 

♠  상허 이태준이 살던 기와집, 현재는 전통찻집으로 바쁘게 살고 있는
상허 이태준 가옥(尙虛 李泰俊 家屋)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11호

▲  상허 이태준 가옥<수연산방(壽硯山房)> 외경

성북동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지친 머리와 두 다리도 잠시 달랠 겸, 차 1잔의 여유를 즐기
기로 했다. 하여 찾아간 곳은 예전부터 꼭 차를 마시고 싶었던 수연산방이다.
수연산방은 성북구립미술관 서쪽에 자리해 있는데, 전통담장과 나무로 몸을 가린 기와집이다.
성북동의 어엿한 명소이자 굵직한 전통찻집으로 사람들로 늘 미어터져 주말에는 자리를 잡기
가 힘들다.

이곳은 월북작가로 이 땅에서 오랫동안 좋지 않은 대접을 받았던 상허 이태준의 집이다. 그는
성북동에 서린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 명당에 욕심이 났는지 29살이던 1933년에 성북동의 배
꼽 부분에 해당되는 바로 이 자리에 땅을 구입해 개량한옥을 지었다. 이런 한옥을 짓고 살 정
도면 어느 정도 재산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여기서 1946년까지 가족과 살았으며,
'달밤','돌다리','황진이' 등 그의 수많은 작품이
여기서 태어났다. 이른바 그의 문학의 산실(産室)인 셈이다.
(어떤 자료에는 1900년대에 지어
진 집으로 나옴)


집의 규모는 대지 약 120평, 건물 면적 23.2평으로 서남향(西南向)을 하고 있다. 건물은 사랑
채와 안채를 합친 본채 하나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조그만 대문을 들어서면 아기자기하게 펼
쳐진 뜨락이 눈길을 단단히 잡아매며, 하늘을 가리고 선 나무와 온갖 화초들로 가득해 산속의
외딴 별장에 들어선 기분이다. 산방 동쪽에는 찻집으로 쓰이는 본채가 있으며, 서쪽에도 기와
집이 있으나 이는 찻집을 확장하면서 새로 지은 것이다. 또한 예전에는 상심루란 건물이 본채
앞에 있었으나 6.25전쟁 때 파괴되었다.

죽간서옥(竹澗書屋)이라 불리는 본채는 앞부분은 팔작지붕이고, 뒷부분은 맞배지붕으로 'ㄱ'
자형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중앙 2칸을 대청으로 하고 대청 남쪽에는 1칸 크기의 안방을, 안
방 앞에는 작은 1칸 크기의 누마루가 있다. 그 뒤에 반칸 크기의 부엌을 두었으며, 대청 북쪽
에는 1칸의 건넌방이 있고, 대청과 건넌방 앞에 툇마루가 있으며, 건넌방 뒤에 1칸의 뒷방이
있다.

이태준이 월북하자 그의 남겨진 가족들은 나라의 눈치를 보며 힘들게 살았으며, 1977년에 개
량한옥의 모습을 잘보여주고 있는 점과 사랑채와 안채를 합친 특이한 구조로 인해 서울시 지
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99년에는 그의 외종손녀인 조상명이 이 집을 전통찻집으로 손질하
여 속세에 활짝 문을 열었다. 당시 성북동은 지금처럼 제대로 된 찻집이나 까페가 없던 시절
이니 거의 성북동의 전문 전통찻집 1호나 다름이 없다.
찻집의 이름은 이태준의 당호(堂號)인 수연산방으로 삼았는데, 수연산방이란 '오래된 벼루가
있는 산속의 작은 집'이란 뜻이다. 왜정(倭政)까지만 해도 이곳은 산속 같은 변두리라 그 이
름이 딱 어울렸으나 이제는 졸부들의 집이 주변에 널려 주택가 속의 외로운 기와집이 되었다.

수연산방은 고풍스런 분위기와 한옥에서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매력으로 속
인들의 입과 입을 통해 찾는 수요가 상당하며, 간송미술관과 길상사, 삼청각, 심우장 등 성북
동의 간판 명소들이 크게 인기를 누리면서 그 후광(後光)을 단단히 봤다. 성북동에서 꼭 가봐
야 직성이 풀리는 전통찻집 겸 한옥으로 명성이 높아졌고, 돈을 삽으로 쓸어담을 정도로 호황
을 누리고 있다.
특히 휴일에는 거의 자리를 잡기가 힘들 정도로 올 때마다 만원이라 여러 번 발길을 돌린 쓰
라린 기억이 있다. 허나 이번에는 운이 좋았는지 사랑채 쪽에 자리가 하나 있어서 거기서 차
를 1잔 마셨다.
이토록 늘어나는 손님을 해결하고자 서쪽에 새로 건물을 지었으나 역시나 역부족이다. 하지만
더 이상의 신축이나 증축도 어렵다. 주어진 공간을 다 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본채를 건드리는 것은 말도 안되며, 자칫 잘못 손댔다가는 고풍스런 분위기마저 해칠
수 있다. 괜한 욕심으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지 말고 지금 그대로 두는 것이 수연
산방 주인이나 손님 모두에게 좋다.

▲  뜨락에 세워진 이태준 문학의 산실 표석

▲  뜨락에 심어진 돌기둥과 석등


* 상허 이태준(1904 ~ ?)의 간략한 삶
이태준은 강원도 철원 출생으로 호는 상허(尙虛)이다. 그의 아버지는 개화파(開化派)의 지식
인으로 활약했던 이문교(李文敎)로 함경남도 덕원감리서(德源監理署)에서 관리로 있었는데,
수구파에 밀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여기저기를 전전하다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다보니 이태준의 가정형편은 그리 좋은 편이 되지 못했으며, 9살에 어머니까지 별세하면
서 친척집에 얹혀 살게 된다.

그는 책장사를 해가며 1920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당시 그 학교 교사였던 이병기(李秉
岐)의 영향을 받아 고전문학의 소양을 듬뿍 쌓았다. 그 소양은 나중에 소설가로 성장하는 밑
거름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허나 학교의 무슨 비리나 문제가 있었는지 불합
리한 운영에 불만을 품고 동맹휴학을 주도하다가 퇴학을 당했다.

1925년 '조선문단'에 단편소설 오몽녀(五夢女)가 입선되어 시대일보(時代日報)에 발표를 했고,
1926년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 조오치대학(上智大學) 문과에 진학해 신문과 우유 배달로 힘겹
게 돈을 충당하며 공부를 했으나 재정난을 이기지 못해 결국 중퇴하고 귀국했다.

1929년 개벽사(開闢社)에 들어가 기자로 일했고,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을 역임했으며, 1930
년에 이화여전 음악가 출신인 이순옥과 혼인하여 가정을 꾸린다. 1933년에는 그동안 모은 돈
으로 성북동에 땅을 구입해 꿈에 그리던 한옥을 지으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에 돌입한다. 그
리고 그해 이효석(李孝石)과 김기림(金起林), 정지용(鄭芝溶), 유치진(柳致眞) 등과 친목단체
인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했다.
그 시절 평론가이던 최재서(崔載瑞)는 시는 정지용(鄭芝溶), 산문은 이태준이라 할 정도로 문
장의 달인으로 평가를 받았으며, 순수 문학의 기수, 한국 단편의 완성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순수문예지 '문장(文章)'을 주재하여 수많은 문제작품(問題作品)을 발
표했고, 역량있는 신인들을 발굴해 문단에 크게 공헌했다. 그리고 1931년 '아무일도 없소(東
光, 1931.7.)'를 시작으로 '불우선생(不遇先生 / 三千里, 1932.4)'과 '꽃나무는 심어놓고(新
東亞, 1933,3)','달밤(中央, 1933.11)','손거부(孫巨富 / 新東亞, 1935.11)','가마귀(朝光,
1936 1936.1),'복덕방(朝光, 1937.3)' 패강냉(浿江冷 / 三千里文學, 1938.1)','농군(文章, 1939.7)', '밤길(文章, 1940·5·6·7합병호)','무연(無緣 / 春秋, 1942.6)','돌다리(國民文
學, 1943.1) 등을 냈다.
1945년 이후 민족의 과거와 현실적 고통을 비교하는 문제의식을 드러낸 '해방전후(解放前後/
文學, 1946.8)'는 그의 간결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묘사적 문장으로 속인들의 호응을 크게 받
았다.

1945년 문화건설중앙협의회 조직에 참여하였고,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하
면서 '해방전후'로 조선문학가동맹이 제정한 제1회 해방기념 조선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
다가 1946년 여름 홍명희와 함께 월북(越北)했다.
1946년 10월에는 북한의 조선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소련을 다녀왔고,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의 부위원장까지 지냈다. 그리고 6.25시절에는 종군작가로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허나 1952년부터 북한당국으로부터 사상검토를 당하고 과거를 추궁받았으며, 1956년 친일혐의
와 우경적인 작품을 썼다는 이유로 함흥(咸興)으로 추방당해 콘크리트 블럭 노동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 그의 행적은 전해지는 것이 없어 아마도 소리소문도 없이 처단된 듯 싶다.

그의 1945년 이전 작품은 대체로 시대적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경향을 띄기보다는 구인
회의 성격에 맞는 현실에 초연한 예술지상적 색채를 진하게 나타내고 있다. 인간 세정(世情)
의 섬세한 묘사나 동정적 시선으로 대상과 사건을 바라보는 자세 때문에 단편소설의 서정성(
抒情性)을 높여 예술적 완성도와 깊이를 세워 나갔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대표적 단편소설
작가로 평가받는다. 1945년 이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핵심으로 활동하면서 작품에도 사회주
의적 색채를 담으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북한 종군기자로 전선에 참여하면서 쓴 '고향길(1950)'이나 '첫전투(1949) 등은 생경한
이데올로기를 여과없이 드러냄으로써 왜정 때 쓴 작품에 비해 예술적 완성도가 훨씬 떨어진다.
그런데 그가 월북한 것도 자의적인 것이 아닌 강제로 갔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1956년 이후에
숙청으로 사라진 것은 그가 철저한 사회주의적 작가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어쨌든 엄연한 월북작가라서 우리나라 정부에서 그의 작품을 몽땅 통제하여 그의 이름과 작품
은 생매장을 당했다. 그렇게 어둠 속에 가려진 그의 존재는 1988년 통제에서 풀려나면서 정지
용과 더불어 다시 세상에 드러나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으며,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지겹도록 등장할 정도가 되었다.
또한 그의 외종손녀의 노력으로 그의 집은 수연산방이란 이름으로 속세에 널리 알려졌으며 자
연히 그의 이름 3자와 작품도 덩달아 알려지게 되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48 (성북로26길 8 ☎ 02-764-1736)


▲  문이 활짝 열린 수연산방 정문

▲  뚜껑이 닫힌 우물
본채 앞에 사람 키 정도로 땅을 파 석축을 입히고 그 복판에 우물을 팠다.
이태준 일가에게 시원한 물을 선사했던 우물은 오래전에 생명을 다해
지금은 겉모습만 남았다.

▲  문학의 향기와 차의 향기가 뒤섞인 수연산방 본채(죽간서옥)

죽간서옥이라 불리는 본채의 방과 툇마루에는 차 1잔의 여유를 누리는 사람들로 발을 디딜 공
간이 없다. 이곳은 이태준이 있던 시절, 구인회 회원들의 모임 장소로 우리들 귀에 매우 익숙
한 이효석, 정지용도 자주 찾았다. 그들은 여기서 다과나 곡차(穀茶)를 즐기며 서로의 작품을
이야기하고 토론을 했으며, 세상 걱정에 자주 밤을 샜다고 전한다.
죽간서옥은 대나무 숲 사이의 서옥(書屋)을 뜻하며, 건물 안에는 이태준의 손때가 묻은 유물
과 그가 직접 쓴 작품과 서적들이 있다.


▲  빛바랜 수연산방 현판의 위엄 - 이태준의 글씨로 전해진다.
빛바랜 부분이 많아서 수십 년이 아닌 300년은 거뜬히 묵은 현판 같다.

▲  빛이 바랜 죽간서옥 현판 - 이태준 글씨
죽(竹) 글씨 위가 하얗게 바래지면서 마치 대나무에 쌓인 눈을 보는 듯 하다.

▲  본채(죽간서옥) 앞에 놓인 소나무 분재의 위엄

▲  뜨락 중앙에 자리한 사철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34호
수연산방에서 단연 돋보이는 자연물로 아담한 키로 뜨락을 햇볕으로부터 지킨다.
나이가 50년 정도 되었다고 하는데, 50년이면 이태준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그의 남은 가족이 망중한을 달래고자 심은 듯 싶다.

▲  뜨락을 수식하는데 조금이나마 일조하고 있는 벌개미취와 여러 꽃들

▲  본채 내부에 걸린 이태준 가족 사진
슬하의 자녀가 무려 5명이나 된다. (그 시절에는 5~6명은 기본이었으니)
본채에서 차를 마실 때, 방 곳곳에 걸린 사진과 현판, 그의 유품과
서적을 구경할 수 있다.

▲  본채 내부에 걸린 이태준의 친필 현판 (해석은 각자 알아서 ~~)

▲  액자에 소중히 담긴 이태준의 문서

▲  수연산방에서 누린 전통차 (차 이름은 잊어먹었음)

수연산방에서는 본채(사랑채, 안채) 내부나 새로 지은 서쪽 건물과 야외 자리, 그리고 사철나
무 밑에 자리를 잡고 차를 마실 수 있다. 그 자리들이 모두 찼을 때는 본채 툇마루에서 마셔
야 되는데 그 자리라도 앉으면 다행이다. (사랑채 안쪽 자리가 명당으로 미리 예약을 하는 것
이 좋음)
이곳 전통차 가격은 인사동과 비슷하거나 좀 야박한 수준으로 차를 주문하면 유과 등의 먹거
리와 따뜻한 물이 같이 덩달아서 나온다. 양반가의 방처럼 꾸며진 고풍스런 기와집에서 마시
는 전통차라 그런가 맛이 좀 남다른 것 같다. 특히 비오는 날 뚝뚝 대지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빗소리를 노래 삼아 누리는 차 1잔의 여유는 이곳의 백미(白眉)라 할만하다.

차의 향기도 좋고, 찻집 분위기도 아주 그윽하고 좋으니 서로의 긴장된 마음이 열리면서 이야
기꽃이 마구 쏟아진다. 그렇게 여기서 머문 시간은 무려 2시간, 전통찻집이나 까페는 자주 가
는 편이지만 길어봐야 2시간 이하로 머무는데, 여기서는 그 시간을 훨씬 넘긴 것이다. 정말 1
시간 정도 머문 것 같은데, 이곳이 시간 도둑인지 시간을 잡아먹는 블랙홀인지 하루에 1/12이
지나가버린 것이다. 게다가 방에 앉아서 마시는 거라 일어나기 귀찮음이 발생하면 머무는 시
간은 자연히 늘어날 수 있다.
이렇게 잠시나마 차담(茶啖)으로 각박한 속세를 잠시 잊는 것도 괜찮지. 식사를 하는 것이 아
닌 분위기에 취해, 차 향기에 취해, 이야기에 취하며 오래 머무는 공간이 바로 찻집(또는 까
페)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성북동 가을 나들이는 막을 내린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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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2월 1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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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조 공비패거리가 넘어갔다는 도심 속의 푸른 허파, 북악산 김신조루트 ~~~ (북악하늘길1산책로, 2산책로, 북악산길)

 


~~~ 서울의 듬직한 허파이자 상큼한 숲길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

남마루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  남마루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호경암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  호경암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가을이 여름 제국을 몰아내고 천하를 막 접수하던 9월의 끝 무렵에 일행들과 북악산(백악
산) 북악하늘길을 찾았다. 이곳은 김신조루트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2010년에 처음 발을
들인 이후 매년 1~2회 정도 발걸음을 하고 있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14시, 한성대입구역에서 일행들을 만나 서울시내버스 1111번(
번동↔성북동)을 타고 성북동(城北洞) 서울다원학교 종점에 두 발을 내린다.
성북동 종점에서 만국기(萬國旗)가 펄럭이는 '성북 우정의 공원'을 지나 삼청각으로 인도
하는 조그만 길로 들어선다. 서울의 심장부가 바로 지척이건만 그런 도심(都心)을 비웃듯
숲과 계곡이 어우러진 전원(田園) 풍경이 도시에서 오염된 안구를 어루만진다. 길 옆에는
계곡이 졸졸졸♪~~노래를 부르며 흘러가는데 이 물줄기는 성북천이란 간판을 달고 속세로
흘러간다.

길의 막다른 부분에 이르면
계곡을 건너는 다리와 약간의 산길이 그림처럼 펼쳐지는데 그
산길을 오르면 바로 삼청터널 북쪽이다.


▲  우정의 공원에서 북악산(백악산)으로 인도하는 골목길(성북로31가길)


 

  북악산 북악하늘길 입문

▲  도심과 성북동을 바짝 이어주는 삼청터널

삼청터널은 성북동과 도심 북쪽인 삼청동(三淸洞)을 이어주는 2차선 땅굴이다. 이곳은 성북동
의 가장 막다른 구석으로 북악산(백악산)의 산세가 칼처럼 솟은 곳이라 오르기가 좀 각박하다.
그런 구석진 곳에서 다른 곳으로 순간이동을 하듯 넘어갈 수 있는 한줄기 희망을 선사한 것이
바로 삼청터널이 되겠다.

이 터널은 군사정권이 절정에 이르던 1969년에 삽을 떠서 1970년 12월 30일에 완성되었다. 공
사비는 총 2억 4,900만원(민자 1억 9,900만원, 시비 5,000만원)으로 당시 성북동에는 차지철
을 비롯한 군사정권의 실세들이 여럿 살았는데 그들의 청와대 접근 편의와 땅값 상승을 위해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솔직히 그 시절 성북동과 삼청동은 한적한 동네로 두 동네를 이을
터널의 필요성은 그다지 없었다.
터널이 뚫리자 안그래도 졸부들로 가득한 성북동의 땅값이 백두산처럼 치솟아 금싸라기 땅이
되었고,
성북동과 청와대, 서울 도심간의 접근이 한결 편해지면서 대원각, 삼청각 등의 고급
요정과 식당들이 아주 재미를 보았다.

산간지방의 조촐한 터널 같은 삼청터널은 길이 302m, 폭 8.5m(2차선)로 오로지 차량만 들락거
릴 수 있다. 예전에는 권력층과 돈 많은 작자들이 주로 이용하던 터널이었지만 시대가 바뀌고
성북동이 도심 속 명소로 크게 각광을 받으면서 나들이와 드라이브를 즐기려는 차량들이 크게
늘었다. 허나 터널도 그렇고 도로도 그렇고 확장은 커녕 여전히 2차선을 고수하고 있어 휴일
에는 꼬리에 꼬리를 잡고 굼벵이 속도로 가는 차량의 행렬을 쉽게 구경할 수 있다.

터널을 지나면 바로 삼청동과 북촌으로 이어지지만 걷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억지로 터널
에 발을 들이지 않도록 한다. (벌금 내야됨) 차라리 쿨하게 택시를 타고 넘어가던가 숙정문안
내소에서 한양도성 북쪽 산길을 타고 말바위쉼터나 와룡고개(와룡공원)를 넘어 북촌으로 넘어
가길 바란다.


▲  삼청각(三淸閣) 정문

성북동의 가장 구석이자 삼청터널 북쪽에는 으리으리한 한옥으로 치장된 삼청각이 있다. 이곳
은 북악산(백악산) 주능선과 북쪽 능선이 갈라지는 150m 고지로 도심이 바로 지척임에도 이곳
을 감싸고 흐르는 공기부터가 무척 산뜻하고 청정하다.

삼청각은 겉에서 우러나오는 모습처럼 원래는 고급요정이었다. 1972년에 지어진 이곳은 군사
정권 시절 악명을 떨친 3대 요정-청운각(淸雲閣), 대원각(
大元閣), 삼청각의 하나로 삼청
각이란 이름은 북악산 남쪽에 있는 삼청동(三淸洞)에서 유래되었다.
이곳은 주로 국빈 접대와 정치적 회담을 위한 요정으로 운영되었는데, 1972년 7월 4일에 벌어
진 7.4남북공동성명 직후 남북적십자대표단이 만찬을 가졌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권력
실세들의 공간으로 30년 가까이 폐쇄적으로 이어오다가 2001년 서울시가 인수하여 리모델링을
거쳐 도심 속의 전통문화 공간으로 속세에 활짝 문을 열었으며, 현재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관
리하고 있다.

한때 백성들은 감히 발도 들이지 못했던 고급 요정이 누구나 자유롭게 오가고 전통문화를 즐
기며 식사와 차 1잔의 여유, 혼인, 돌잔치 등을 가질 수 있는 대중적인 공간으로 거듭난 현장
으로 이는 길상사(☞ 관련글 보러가기)란 절집으로 변신한 인근 대원각과 비슷하다.

이곳은 오래된 문화유산도 아니고 비록 속세에 개방되었다고 해도 비싼 이미지는 여전히 깃들
여져 있다. 한식당과 다원의 후덜덜한 음식/차 가격과 행사 비용은 서민들에게는 그리 호락호
락한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허나 서울의 허파인 북악산의 품에 포근히 안긴 곳으로 20세기
로 전승된 현대 한옥의 아름다움과 기품, 전통 정원의 미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  2007년 북악산 전면개방 기념조림 표석 (숙정문 안내소 부근)

▲  숙정문 안내소로 인도하는 숲길 (홍련사~숙정문 안내소 구간)

▲  숙정문안내소

홍련사와 삼청터널 사이로 난 산길을 오르면 북악산 전면개방 조림을 기념하는 커다란 표석이
마중을 한다. 지금은 사라진 어느 전(前) 대통령이 남긴 것이라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기
서 기념촬영을 많이 하는 모양이다. 그 표석을 지나면 북악산 주능선의 주요 관문인 숙정문안
내소가 고개를 내민다.
여기서 길은 크게 3갈래로 갈리는데, 안내소를 지나 직진하면 숙정문(肅靖門)과 주능선, 북악
산 정상(342m)으로 이어지며, 안내소 직전 왼쪽(남쪽) 길은 한양도성의 북쪽 산길로 말바위나
와룡공원으로 통한다. 그리고 오른쪽(북쪽) 길이 김신조루트로 통하는 북악하늘길이다.


▲  숙정문안내소에서 북쪽 능선으로 인도하는 북악하늘길 계단길
왼쪽은 통제 시절에 닦여진 군부대 계단, 오른쪽은 2011년 이후에 새로 닦여진
계단으로 어느 계단을 이용하든 상관없다. 취향에 따라 고르면 된다.


북악산 북쪽 능선 주변은 통제가 여전한 북악산(백악산) 주능선과 달리 백성들의 출입이 자유
로운 편이었다. 그러다가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공비 패거리가 서울에 침투한
이른바 1.21사태로
금지된 땅이 되었으며, 북악산과 인왕산 허리에 군사 작전 및 관광을 겸한
북악스카이웨이(북악산길)를 급하게 만들었다.

금지된 구역이 된 북악산 북부는 41년이 지난 2009년부터 홍련사에서 말바위를 비롯해 성북동
, 정릉동, 평창동에서
북악산길을 잇는 산길이 속속 문이 열리기 시작했고, 2010년 2월 27일
에 홍련사에서 북악산 북쪽 능선으로 오르는 산길을 손질하여 '북악하늘길'이란 이름으로 속
세에 내놓았다. 그중 제2산책로는 김신조 일당이 도망친 루트라 하여 김신조루트란 이름으로
인기를 더하고 있으며, 북악하늘길의 백미이자, 안보관광지로 가장 볼거리가 많은 산길이다.
(실제로 김신조는 이 길로 가지 않았다고 함)
이곳이 주능선과 다른 점이 있다면 24시간 언제든 출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행히
내가 팔
팔한 시절에 공개되어 이렇게 발을 들이니 기쁘기 그지 없다. 북한이나 휴전선처럼 기약할 수
없는 곳에서 벗어났으니 말이다.

무려 40여 년 동안 금지되어 속인들의 발길을 거부한 탓에 북악산 북부의 자연은 군부대로 인
한 일부의 훼손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 잘 보존되어 있다. 그리하여 생태적인 가치가 높고, 자
연경관이 우수하며, 서울 도심을 비웃듯 자연이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어 '서울 속의 비무장
지대','도심 속의 허파','도심 속의 신세계'란 별명까지 지니게 되었다.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와 제2산책로(김신조루트) 대부분은 통제 시절 군인들이 오가던 산길로
군사 시설과 그 당시 지어진 계단길이 줄지어 있으며, 제2산책로는 경사가 좀 각박하여 탐방
객의 편의를 위해 나무로 만든 등산로를 곳곳에 만들었다.

북악산 북쪽 능선을 개방하면서 닦여진 북악하늘길 코스는 다음과 같다.
*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 : 말바위쉼터 - 한양도성 북쪽 산길 - 숙정문안내소 - 성북천발원지
  - 북악팔각정 (1.4km)
* 북악하늘길 제2산책로(김신조루트) : 성북천발원지 - 서마루 - 솔바람교 - 호경암 - 하늘전
  망대 - 북까페 - 하늘교 - 하늘마루 (2km)
*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 : 북까페 - 동마루 - 숲속다리 (640m)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둘러보기 (1)
삼청각쉼터 ~ 성북천발원지 ~ 서마루 ~ 솔바람교

▲  삼청각쉼터

숙정문안내소에서 북악하늘길로 접어들면 가장 먼저 높다란 계단길이 나그네의 기를 주눅 들
게 만든다. 시작부터 각박한 계단이 펼쳐지는 것이다. 김신조루트는 이렇게 첫 이미지에서 보
이듯 계단길이 유별나게 많아 숨을 적지 않게 차게 하는데, 이건 맛보기 버전이다. 여기서부
터 지친다면 김신조루트 산책은 어렵다. 자존심을 곱게 버리고 악으로 깡으로 올라간다면 김
신조루트는 그의 속살을 하나씩 벗겨주며 그대를 반겨줄 것이다. (솔직히 그렇게 힘든 코스는
아님, 오르막과 내리막이 좀 반복되는 것이 있을 뿐임)

계단을 오르면 가장 먼저 삼청각쉼터가 마중을 한다. 이곳은 삼청각의 서쪽이자 뒷통수로 소
나무의 산인 북악산답게 소나무 1그루가 쉼터 중간에서 운치를 가득 불어주며 솔내음과 선선
한 그늘을 드리운다. 여기서 잠시 삼청각을 비롯한 좁은 천하를 굽어보고 더 올라가면 제1산
책로와 제2산책로가 갈라지는 성북천발원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  삼청각쉼터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삼청각과 성북동, 성북구 지역)
이제 시작 단계라 조망 범위는 매우 좁다. 허나 산길을 오르며 하늘과
보다 가까워질 수록 조망의 품질도 더욱 높아진다.

▲  성북천(城北川) 발원지

성북천은 북악산 동북쪽 자락에서 발원(發源)하여 성북동과 삼선교, 보문동, 제기동(祭基洞)
을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가는 7.7km의 지방 2급 하천이다. 조그만 하천의 발원지라 한강의 발
원지인 검룡소(儉龍沼)나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黃池)처럼 뭔가 특별하거나 요란한 것은 없
으며, 속세를 향해 흐르는 계곡 주변에는 바위들이 벌러덩 누워 있고 수심은 매우 얕다.

성북구에서 이곳을 생물 서식처로 가꾸고자 사람들의 계곡 접근을 통제하고 여러 식물을 심으
며, 수질에 각별히 신경을 쓴 결과 가재를 비롯한 여러 수중 동물들이 좀 늘어났다. 하여 이
를 기념하고자 성북천발원지 바로 남쪽에 있는 다리 이름을 가재가 물에서 물장구를 치는 다
리란 뜻에
수고해(水鼓蟹)다리라 하였다.

이곳에서 산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직진하면 기존의 제1산책로로 바로 북악팔각정과 빠르게
이어지며, 오른쪽은 김신조루트라 불리는 제2산책로로 호경암을 거쳐 하늘교까지 이어지는 2
km의 산길이다. 이 산길은 중간중간 조망이 괜찮은 곳에 '~~마루'와 '하늘전망대'라 불리는
조망대를 두어 천하를 마음껏 굽어볼 수 있게 했다.


▲  성북천발원지에서 서마루로 오르는 김신조루트 계단길

▲  김신조루트 서마루

성북천발원지에서 서마루까지는 속절없는 세상살이처럼 고통스런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나무
로 지어진 서마루에 오르면 삼청각쉼터보다 1단계 높아진 조망을 누릴 수 있으며, 의자가 넉
넉하게 베풀어져 있어 잠시 숨을 고르며 천하를 굽어보기에 좋다. 이곳에선 북악팔각정이 가
까이에 보이며, 여기서 길은 동쪽을 향해 급하게 내리막길로 돌변한다. 그래서 처음 온 이들
은 '벌써 다 올라온거야? 이거 정말 싱거운데!' 생각을 하며 방심을 하지만 이는 북악산이 내
린 일종의 속임수이니 속지말자.
북악산이 북한산(삼각산)이나 관악산(冠岳山), 수락산(水落山) 등 서울 주변의 쟁쟁한 산들에
비해 키는 낮지만 그래도 악(岳)이 들어가는 서울의 북현무(北玄武)이다. 남산처럼 만만한 산
이 아니란 말이다.


▲  서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1)
소나무 너머로 성북동과 와룡공원, 성북구와 동대문구, 중랑구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서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2)
북악산의 두터운 주능선 너머로 서울 도심과 남산이 바라보인다.

▲  서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3)
북악산 주능선과 남산, 서울 도심은 물론 멀리 관악산까지 시야에 잡힌다.

▲  이름도 시원한 솔바람교

서마루에서 솔바람교까지 220m 구간은 각박한 경사의 내리막이다. 다 올라왔구나 싶겠지만 솔
바람교를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흥분기를 보이며 무지막지한 오르막길로 나그네의 기를 죽인
다.
내리막길은 고난 앞에서 잠시 즐기는 여유라고나 할까..? 한라산(漢拏山)도 관음사(觀音
寺) 방면으로 한참 내려갈 때 중간에 오르막길이 나와 속인들을 잠시 좌절하게 만드는데 바로
그 이치이다.
남마루까지는 가파른 길이 계속 이어지니 방심의 늪에 빠지지 말자~~

솔바람교는 계곡 위에 걸린 나무다리로 그 이름이 순 우리말이라 정감이 참 깊다. 주변은 소
나무를 비롯해 온갖 수목이
삼삼하여 그 이름 그대로 솔바람이 나를 날려보낼 것 같다. 계곡
이라고 하지만 워낙 생긴 것이 부실하고 돌만 가득하여 이곳에 올 때마다 늘 황량한 모습을
보여주어 안타깝기 그지 없다.
 

다리를 내려오면 쉼터가 있으며 다리 북쪽 구석으로 가면 약수터가 있는데, 이곳이 김신조루
트의 유일한 샘터이다. 산에서의 약수터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라 갈증이 없어도 꼭 물
을 마시기 마련이나 무심한 가을 가뭄 때문인지 물은 이미 사라졌다. 북악하늘길에서 가장 첩
첩한 곳으로 북쪽과 서쪽, 동쪽은 산으로 막혀있고, 남쪽만 가늘게 뚫려있다.


▲  솔바람교 밑에 자리한 약수터 - 이름도 없고, 성도 없는
이름 없는 약수터이다.

▲  솔바람교 쉼터
이곳은 김신조루트의 중간 정도 지점이다.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둘러보기 (2)
솔바람교 ~ 남마루 ~ 호경암

▲  솔바람교 쉼터에서 남마루로 올라가는 계단길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느껴진다.


솔바람교에서 남마루까지는 다시 지독한 오르막길이 펼쳐진다. 그 거리는 약 600m 정도로 여
기가 김신조루트에게 가장 산행의 회의를 느끼게 만드는 곳이다. 하긴 공비 패거리들이 살아
돌아가려는 일념으로 넘었던 곳인데 오죽 험하겠는가..? 게다가 이곳은 산길도 없던 구간이라
각박한 산세를 순화시키고자 나무로 길게 계단길을 닦고 짧은 간격을 두며 쉼터를 만들어 턱
까지 밀려오는 숨을 잠시나마 제자리를 찾도록 했다.

그렇게 잔뜩 흥분한 산길을 오르면 남마루라 불리는 전망대가 나온다. 이곳은 앞서 서마루보
다 더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더 휼륭한 조망을 선물로 준다. 이곳 이후 흥분했던 산길은 진정
을 되찾으며 호젓한 산길의 기품을 서서히 회복한다.


▲  지옥 끝에 나온 극락, 남마루

▲  남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1)
성북동과 성북구, 동대문구, 성동구를 비롯한 서울 동부지역

▲  남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2)
북악산 주능선 너머로 서울 도심과 남산, 관악산, 우면산 등이 보인다.

▲  서서히 진정되고 있는 산길 (남마루와 호경암 사이)

▲  호경암으로 오르는 계단길
이 구간은 거의 벼랑이라 그 옆구리에 계단 잔도를 깔았다.

▲  김신조루트의 상징물, 호경암(虎京岩)

남마루에서 360m 오르면 길 왼쪽에 가득 상처를 입은 큼직한 바위가 나그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도심을 바라보며 자리한 이 바위가 바로 김신조루트의 상징인 호경암이다. 바위는 그리
잘생긴 편은 아니고 그저 평범한 수준인데, 그냥 흔한 바위로 묻힐 뻔한 그가 일약 유명해진
것은 김신조 공비 패거리와 격전을 벌였던 남북분단의 서글픈 현장이기 때문이다.

청운동에서 경찰에게 털린 김신조 패거리는 북악산을 넘어 성북동 뒷산(북악산 북쪽 능선)으
로 줄행랑을 치며 몸을 숨겼다. 39대대 2중대는 호경암 주변을 수색하던 중, 등을 보이고 도
망치는 공비 3명을 발견, 호경암에서 교전을 벌이다가 인근 구진봉 주변에서 모조리 사살했다.

처단된 김신조 패거리 29명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파주시 적성면에 있는 적군묘지(敵軍墓地)에
묻어주었다. 적군묘지는 6.25때 남한 땅에서 죽은 북한군과 중공군의 시신을 묻은 곳으로 김
신조 사건과 동해 잠수함 침투 때 죽은 공비들, 그리고 1987년 KAL기를 폭파시킨 폭파범도 같
이 묻혀 있다.


▲  남북분단의 비극이 안겨준 선물 아닌 선물 - 총탄 자국으로
계속 고통받고 있는 호경암


북악산이 서울 근교 경승지로 조선시대부터 귀족들의 별장과 기와집, 바위글씨가 즐비했던 탓
에 호경암도 그런 곳이 아닐까 생각을 했었다. 허나 막상 확인해보니 1968년에 서울을 지켰던
맹호부대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옛 사람들의 손길은 북악산 주능선과 서쪽(부암
동, 청운동), 남쪽(삼청동)에 치우쳐져 있을 뿐, 김신조루트와 북쪽 능선은 전혀 없는 것이다.
아마도 금표(禁標) 구역으로 오랫동안 금지된 곳으로 묶인 탓이 아닐까 싶다.

바위 밑에는 이곳이 격전지임을 알리는 안내문이 있는데, 1998년 1월 호경암 주변에서 복무하
는 군장병들의 애국심과 경각심을 크게 돋구고자 안내문을 설치했다고 하며, 울퉁불퉁한 바위
피부에는 당시 총격전으로 생긴 50여 발의 탄흔이 진하게 남아 당시에 긴장되고 숨막히던 상
황을 아련히 전해준다. 그런 악연으로 북악산의 이름 없는 바위는 김신조 사건의 격전지로 이
들을 격퇴한 부대 이름을 따서 호경암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고, 이곳이 개방되면서 북악산
의 새로운 명물이자 이 땅의 비극적 현실을 담고 있는 산증인으로 몸값과 이름을 크게 올리고
있다. 좋은 쪽으로 이름을 높여야 되는데 안좋은 쪽으로 높이고 있으니 바위 자신도 참 우울
할 것이다. 바위를 보면 표정이 조금은 굳어져 있는데, 이 땅이 통일이 되면 그의 표정도 씨
익~ 펴지지는 않을까?


▲  이 땅의 비극은 저렇게 깊었다 - 바위에 박힌 탄흔

▲  호경암 정상에 비스듬히 박힌 호경암 표석
이곳에서 바라보는 천하는 앞에서 봐왔던 조망을 훨씬 뛰어넘는 1등급의 조망이다.
(이곳은 통제구역이긴 하나 그 통제의 정도가 느슨함, 낮은 난간만 넘으면 됨)


▲  호경암 표석에서 바라본 천하 (1)
북악산 일대와 성북동, 서울 도심, 남산 등이 바라보인다.

▲  호경암 표석에서 바라본 천하 (2)
성북동과 정릉동, 성북구, 중랑구, 강북구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호경암 표석에서 바라본 천하 (3)
평창동과 구기동, 북한산(삼각산) 산줄기, 형제봉 등이 바라보인다.

▲  호경암에서 하늘전망대로 인도하는 길
호경암을 지나면 더 이상 오르막길은 나오질 않는다. 가을에 잠긴 잔잔한
숲길만이 조용히 사색을 도울 뿐이다.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마무리

▲  김신조루트 북쪽에 자리한 하늘전망대

호경암에서 4~5분 정도 가면 하늘전망대라 불리는 전망대가 나온다. 지금까지 나온 '~~마루'
보다 덩치도 크고 조망도 괜찮은 편으로 그 이름은 북악하늘길에서 따왔지만 그만큼 하늘과도
가까운 곳이라 이름이 썩 어울린다.

서마루부터 호경암까는 성북동과 북악산 주능선, 서울 도심, 남산 등의 남쪽과 성북구와 중랑
구, 동대문구 등 동쪽이 주로 보였다. 허나 호경암을 경계로 능선 남부에서 북부로 넘어왔기
때문에 하늘전망대부터는 그와는 반대인 북쪽으로 파노라마가 바뀌면서 평창동과 구기동, 정
릉동, 북한산(삼각산) 산줄기를 비롯하여 강북구, 도봉구, 노원구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1)
서울의 대표 졸부 동네인 평창동(平倉洞)과 구기동(舊基洞)을 비롯하여
탕춘대성 능선과 북한산 서부가 거침없이 시야에 박힌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2)
평창동과 북한산 산줄기, 형제봉 등이 바라보인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3)
정릉동과 길음동, 삼양동, 강북구, 도봉구, 노원구, 수락산 등이 흔쾌히
두 눈에 들어온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4)
정릉동과 돈암동, 성북구, 노원구, 중랑구, 불암산 지역

▲  솔내음이 그윽한 북까페

하늘전망대에서 북쪽으로 110m 가면 북까페라 불리는 소나무숲이 나온다. 이곳에는 책장과 의
자 등이 닦여져 있는데 북한산과 북악산의 산바람이 교차하는 곳이며 솔내음도 그윽하여 독서
도 무지 잘될 것 같다.
그런데 북까페보다는 '독서마당'이나 '소나무 책방','솔내음 책방','사색의 공간'으로 이름을
지었으면 훨씬 부드럽지 않을까? 다른 곳은 '~~마루(마루는 정상을 뜻하는 순 우리말)'나 '하
늘전망대' 등의 우리말을 쓰면서 왜 이곳만큼은 영어로 지었는지 철밥통들의 뇌 속이 궁금할
따름이다.

북까페 책장은 달랑 1개로 책은 많이 담겨져 있으나 상당수는 어린이와 청소년용 책이거나 소
설이다. 집에 버려둔 책이 있다면 썩혀두지 말고 이곳에 기증하는 것도 공익 차원에서 괜찮을
것이다. 다만 이곳의 책은 인간적으로 가져가지 말자. 그리고 책을 봤다면 의자에 두지 말고
반드시 책장에 넣기 바란다.

이곳에서 산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북까페를 등지고 북쪽으로 직진하면 하늘교가 나오고, 북
까페를 가로지르면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이다.

▲  조촐하게 생긴 북까페 책장

▲  북악산길 위에 걸린 하늘교


▲  하늘교 밑에 펼쳐진 북악산길
서울 도심 속의 산악 도로로 드라이브 코스로 명성이 자자하다. 특히 야간에는
회색빛 대도시 서울의 야경을 제대로 조망할 수 있다.

▲  김신조루트의 북쪽 종점, 하늘마루

북까페에서 1분 정도 가면 하늘교란 콘크리트 다리가 나온다. 다리 밑에는 2차선 북악산길이
펼쳐져 있는데 차들이 1분이 멀다하고 지나간다. 그 다리를 건너면 하늘마루가 나오니, 이곳
이 김신조루트의 북쪽 종점이다.

하늘마루에는 6각형 정자와 쉼터, 운동기구 등이 있으며,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서
쪽으로 가면 북악팔각정과 부암동, 창의문, 사직공원으로 이어지며, 동쪽으로 가면 북악정과
성북구민회관, 아리랑고개 방면으로 통한다. 중간에 국민대나 배밭골, 성북동 길상사로 내려
가는 길이 있으며, 하늘마루를 조금 지나면 북한산 형제봉으로 가는 산길이 있어 북한산으로
넘어갈 수 있다. 이 산길은 북악터널 위쪽과 여래사(如來寺)를 지나며, 형제봉고개에서 북한
산둘레길과도 만난다. 이렇게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은 북악터널에서 서로 이어져 있고, 북
악산 북쪽 능선은 넓게 북한산의 남쪽 줄기로도 볼 수가 있어 성북동 북쪽에 자리한 길상사와
정법사(正法寺)가 삼각산(三角山)에 있음을 칭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마루에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북한산과 형제봉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나온다. 그 길로 들
어서면 얼마 안가서 정릉동 배밭골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는데 그 길을 조금 내려가면 조망이
괜찮은 전망대가 모습을 비춘다. (전망대 이름은 딱히 없으나 여기서는 국민대 남쪽 전망대라
고 하겠음)


▲  국민대 남쪽 전망대

▲  국민대 남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 동쪽 산줄기
거대한 수해(樹海)를 이룬 북한산 산줄기의 녹음이 참 짙기만 하다.

▲  국민대 남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가까이에 국민대를 비롯하여 정릉동과 길음동, 강북구, 수락산~불암산
산줄기가 두 눈에 들어온다.


▲  국민대 남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북악산 동쪽 산줄기와 정릉동, 길음동, 성북구 지역


국민대 남쪽 전망대에서 다시 한번 천하를 굽어본 다음, 여래사를 거쳐 형제봉 방면으로 이동
했다. 원래는 형제봉고개를 거쳐 평창동으로 내려가려고 했으나 시간도 늦어서 북악터널 북쪽
을 거쳐 국민대로 내려갔다. 이렇게 하여 도심 속의 허파이자 별천지, 북악산 김신조루트 나
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닫는다.

※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찾아가기 (2018년 11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동 서울다원학
  교 종점 하차. 여기서 10분 정도 가면 삼청터널이 나오는데 삼청각과 삼청터널 사잇길로 들
  어가면 숙정문안내소로 안내소 직전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와 김신조루
  트이다.
*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116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구민회관(구민회관
  입구) 종점에서 하차, 여기서 북악산길을 따라 이동한다. (하늘마루까지 1시간 소요)

★ 북악산 북악하늘길 관람정보
* 북악산 주능선과 달리 언제든 출입이 가능하다. 단 출입금지 지역과 등산로 외에 구간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 김신조루트는 약수터 1곳과 화장실 1곳(호경암 부근) 밖에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정릉동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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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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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8년 11월 2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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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과 길상화(김영한)의 아름다운 넋과 무소유 정신이 깃든 도심 속의 포근한 절집 ~~ 성북동 길상사


' 성북동 길상사 겨울 산책 '

▲  길상사 관음보살상


 

묵은 해가 천하만물의 아쉬움 속에 그렇게 저물고 따끈따끈한 새해의 햇살이 천하를 막 보
듬던 1월의 첫 주말, 후배 여인네와 성북동 길상사를 찾았다.
길상사는 1년에 4~5회 이상 찾을 정도로 지겹게 발걸음을 한 곳이다. 허나 도심 속의 별천
지 같은 그곳에 마음이 퐁당퐁당 빠져 질리기는 커녕 자꾸만 손과 발이 간다. 아마도 서울
장안에 있는 사찰 중, 종로에 있는 조계사(曹溪寺)를 제외하고 가장 많이 찾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몸이 길상사의 열성 신도나 법정스님의 팬이냐. 그것도 전혀 아니다.

길상사를 그렇게도 많이 찾았건만 모두 봄과 여름, 늦가을에 갔을 뿐, 한겨울에는 간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곳의 설경(雪景)을 보고자 벼르고 있었으나 그저 다짐으로만 끝난 채 벌
써 여러 해의 겨울을 흘려 보내고 말았다. 그러다가 묵은해와 새해가 갈리는 시점에 큰 눈
이 내렸는데 이때다 싶어 새해 첫 주말 나들이 메뉴로 그곳을 택했다.

길상사는 성북동 북쪽 구석에 자리해 있는데 성북초교에서 2차선 골목인 선잠로를 따라 12
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걷는 것이 싫다면 성북구 마을버스 02번을 타면 됨~) 그 짧은 구
간은 권력층과 졸부들의 번쩍번쩍한 금입택(金入宅)이 덥수룩하게 펼쳐진 현장으로 보기만
해도 주눅이 잔뜩 들고 편한 마음마저 앗아가 버린다.
이 땅에서 나날이 심해져 가는 빈부격차를 보여주듯 담장은 거의 요새 같으며 대문은 충차
(衝車, 공성무기의 하나)로도 어림 없을 정도로 단단해 보인다. 그것으로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방범장치를 겹겹이 설치해 지나가는 선량한 나그네를 불편하게 응시하고 있으며 고
급빌라와 저택 뜨락에는 담장 밖으로 손을 내민 나무들로 가득하다.

비록 나같은 서민들에게는 기분이 영 좋지 않은 곳이긴 하나 그렇다고 졸부들의 하찮은 위
엄 앞에 지나치게 꼬리를 내릴 필요는 없다. 제아무리 구중궁궐의 저택이라 하여도 위대한
대자연 형님 앞에서는 모래성만도 못한 하찮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괜히 기죽지 말
고 당당히 가슴을 펴며 나들이객의 입장으로 산책을 즐기면 그만이다. 또한 성북동은 예로
부터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의 명당자리로 명성이 자자했다. 성북동에 우리나라의 0.1%
서식한다고 할 정도로 졸부들이 몰려든 것도 바로 명당의 기운을 누리고자 함이다. 그러니
명당의 기운을 졸부 따위들이 다 누리도록 두지 말고 성북동을 거닐면서 그 기운을 조금이
나마 챙겨가기 바란다.


 

♠  길상화(김영한)와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녹아든 도심 속의
포근한 산사, 성북동 길상사(吉詳寺)

▲  연등으로 주변을 치장한 극락전

서울 도심 속의 별천지이자 아늑한 산사인 길상사는 졸부들의 저택과 고급 빌라로 가득한 성
북동 북쪽에 둥지를 틀고 있다. 비록 주택가에 터를 닦았지만 이곳이 북한산(北漢山, 삼각산)
의 남쪽 자락에 해당되어 '삼각산 길상사'를 칭하고 있으며, 나무가 무성하고 계곡이 경내를
흐르고 있어 첩첩한 산골에 묻힌 산사의 분위기를 진하게 풍긴다.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절
풍경도 제법 아름답거니와 도심에 있음에도 공기도 청정하다. 또한 다른 절에서는 접하기 힘
든 이채로운 볼거리도 여럿 있어 두 눈에 적지않게 흥분감을 던진다.

길상사는 고색의 내음이 서린 절도 아니요, 그렇다고 문화유산이 풍부하게 깃든 절도 아니다.
역사는 겨우 20여 년으로 나보다 한참이나 어리다. 이곳이 법등(法燈)이 켜진 시간에 비해 유
명세를 크게 탄 것은 군사정권시절 권력실세와 졸부들이 들락거리던 고급요정에서 누구나 의
지하고 찾을 수 있는 절로 변신한 전대미문의 현장이자 무소유(無所有)의 저자로 불교계의 큰
승려로 추앙받는 법정(法頂)이 가꾼 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고급요정을 흔쾌히 기증했던
김영한(길상화)의 인생 이야기도 속인(俗人)들의 마음에 적지 않은 감동을 선사한다.

법정은 20103111352분께 78세의 나이로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다음날 순천 송광
(松廣寺)로 운구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의 입적을 애도했다.


▲  창건주 김영한(길상화)의 영정 (극락전 내부 우측에 있음, 위치는
변경 가능)

* 길상사의 창건주, 김영한(金英韓, 1916~1999)의 생애와 고급요정에서 절로 탈바꿈된 길상사
  의 영화와 같은 탄생과정
길상사는 원래 성북동 서쪽 구석에 자리한 삼청각(三淸閣)과 더불어 고급요정으로 악명을 날
렸던 대원각(大元閣)이다. 군사정권의 실세들과 졸부들이 기생을 끼고 놀던 요정으로 이곳을
세운 이가 바로 김영한<법명 길상화(吉詳花)>이다.

김영한은 1916년 부유한 양반가의 딸로 태어났다. 허나 부모가 일찍 세상을 뜨면서 집안은 풍
비박산이 났고 거의 팔려가다시피 하여 시집을 가게 되었다. 허나 그의 신랑은 몸이 매우 허
약했고, 15살에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던 중, 곁에 있던 남편이 실수로 우물에 빠져 죽으면서
그 어린 나이에 벌써 과부가 되고 만다. (아마도 우물 부근에서 놀다가 빠진 듯함)
아들을 잃은 시어머니의 이성 잃은 구박이 나날이 드쎄지자 이를 감당하기 힘들어 결국 집을
나왔으나 정작 정처(定處)는 없었다. 하여 하규일(河圭一, 1867~1937)의 문하에 들어가 진향(
眞香)이란 이름으로 기생이 되었다. (그때 나이 16)

그는 가무와 궁중무, 시문 등 기생의 기본 소양을 익혔는데 타고난 미모에 지식과 문학, 예술
적 소질까지 넘쳐나 금세 서울 권번가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게다가 삼천리 문학에 수필까지
발표하는 등, 그야말로 팔방미인이었다. (거기에 사업 수완도 대단했음)
흥사단(興士團)에서 만난 스승 신윤국(申允局)의 도움으로 1933년 왜열도 동경으로 유학을 갔
으나 스승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에 그가 있다는 함경도 함흥(咸興) 감옥을 찾았다. 허나 만나
지 못하고 허탈한 마음에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들 회식 장소에 나갔는데 거기서 영어 교사로
있던 백석(白石, 1912~1996)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고 둘은 급 가까워진다.

김영한에게 퐁당퐁당 빠진 백석은 그녀를 자야(子夜)라 부르며 그녀의 하숙에서 함께 지냈다.
거기서 거의 출퇴근을 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다가 그녀가 서울로 돌아가자 교사직까지 내
던지고 그를 따라 상경, 조선일보에 취직했다. 그리고 청진동(종로1)에 살림을 차리고 서울
과 함흥을 오가며 3년 동안 동거에 들어갔다.
허나 백석의 부모는 아들이 기생과 어울리는 꼴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그들의 혼인을 쌍수들고
반대했고 극기야 다른 여자에게 강제로 혼인을 시키기에 이른다. 허나 백석은 혼인 첫날 밤에
도망쳐 김영한을 찾았고, 이후에도 그런 행위는 계속 되었다.

백석은 김영한과 부모 사이에서 머리에 쥐가 나도록 갈등하다가 아예 만주로 도망치자고 김영
한에게 제안을 했다. 허나 그녀는 백석의 장래를 걱정하여 이곳에 있자고 하였고 서로가 조금
씩 갈등의 골을 보이다가 결국 백석 혼자 만주로 훌쩍 떠나고 말았다. 이에 그녀는 그를 비운
에 빠트렸다며 늘 후회했다. (이후 백석은 북한에서 활동했음)
혼자가 된 김영한은 그 외로움을 돈벌이로 풀었다. 돈에 대한 강인한 집녑을 보이며 적지 않
은 재산을 긁어모았고 6.25전쟁이 한참이던 1951, 그녀의 나이 불과 35세에 거금 650만 원
을 들여 현 길상사 자리를 매입해 대원각의 전신이 되는 청암장(靑岩莊)이란 한식당을 내었다.
그는 계곡이 흐르고 경치가 빼어났던 그곳에 좋은 예감을 얻었다고 한다. 물론 성북동에 서린
완사명월형 명당 기운에도 적지 않게 욕심을 냈을 것이다.
또한 사업과 함께 공부도 병행하여 1953년 중앙대 영문학과를 졸업했으며, 몇 편의 수필과 '
내 사랑 백석','하규일 선생 약전' 등을 쓰기도 했다.

잠시 식당 운영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도 했으나 이후 대원각으로 이름을 갈아 자신이 직접
챙겼고 군사정권 시절,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대원각의 명성에 정권 실력자와 졸부들이 구
름처럼 몰려들면서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서울의 3대 고급 요정으로 우뚝 선다. (청운각
대신 '오진암'을 넣기도 함)
대원각 단골들이 하나같이 잘나가는 작자들이라 삽도 모잘라 포크레인으로 돈을 쓸어담을 정
도 였고 '걸어 들어오는 사람은 있어도 소형차를 타고 오는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로 명성
을 드날렸다.

허나 그녀는 재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돈과 명예 등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거의 다하
고 악착같이 살았지만 나이를 강제로 먹으면서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서서히 깨닫던 중, 법정
'무소유'를 읽고 적지 않은 감명을 받았다. 그러다가 미대륙 로스앤젤레스에 잠시 머물렀
1987년 그곳으로 설법을 하러 온 법정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법문에 다시 감동의 파도를 느낀 그는 그의 모든 것이 담긴 대원각을 법정에게 기증하기
로 했다. 당시 대원각은 면적 7,000여 평, 건물만 40여 동에 이르렀으며 시가는 무려 1,000
을 헤아렸다. 하지만 갑자기 뜬금없는 거액의 기증에 법정은 크게 놀라며 거절했다. (바로 받
으면 그것 또한 모양새가 좋지 않음) 허나 김영한은 8년 동안 끈질기게 기증의 뜻을 보였고,
결국 법정은 1995년 그곳을 받아 일단 순천 송광사(松廣寺)에 넘겼다.
갑자기 큰 보물단지를 얻게 되어 싱글벙글이 된 송광사는 대원각을 대법사(大法寺)로 이름을
갈아 송광사의 말사(末寺)로 삼았으며 1997년 송광사의 옛 이름이자 법정이 김영한에게 지어
준 법명인 길상화(吉祥花, 吉祥華)를 따서 길상사로 이름을 다시 바꾸고 그해 1214일 개원
법회를 열어 길상사의 탄생을 만천하에 알렸다.

개원법회에는 천주교의 고()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시민, 불자 4,000여명이
몰렸는데 법정의 이끌림에 대중 앞에 선 그는 자신의 부질없는 삶을 이렇게 드러내며 대중의
심금을 진하게 울렸다.
'저는 죄가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저쪽에 보이는 팔각정을 보면서)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요정 시절 기생들)이 옷을 갈아입던 곳이었습니다. 제 소원
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길상사의 창건주가 된 김영한은 법정으로부터 염주(念珠)를 받았으며, 옛 사랑인 백석
을 기리고자 2억 원을 내놓아 백석문학상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불교에 귀의하며 인생의 끝 무렵을 보내던 그는 1999111483세의 나이로 외로
운 삶을 놓게되었다.
그가 죽기 하루 전날, 절에 들어와 목욕재계하고 예불을 올리며 길상헌에서 인생의 마지막 밤
을 보냈으며, 당시 길상사 주지 청학(靑鶴)에게
'내가 죽으면 눈이 내릴 때 절 마당에 뿌려주세요' 유언을 했다고 전한다.

중생의 통곡 속에 그의 육신은 산산히 화장되었고 유골은 49재 이후 유언에 따라 첫눈이 절을
하얀 수채화로 채색하던 날, 길상헌 뒤쪽 언덕에 뿌려졌다. 그 자리에는 공덕비를 세워 그를
기리고 있으며, 매년 음력 107일에 기제(忌祭)를 올린다. 또한 절은 그의 뜻을 받들어 대
중에 널리 문을 열었고 '맑고 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을 만들어 해마다 30여 명의 중고생에
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김영한은 막대한 재산을 가진 부자였지만, 돈을 신으로 받들며 사람 무시를 예사로 여기는 이
땅 태반의 졸부들과 달리 그 모든 것을 속세에 내버리고 빈털털이가 되어 인생을 마무리했다. 그가 대원각을 기증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아깝지 않냐고 물었는데 그는 '그래봐야 그 사람(
백석)의 시 한줄만도 못하다'
며 답을 했다고 한다.

그는 자손도 없고 한줌의 재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 지 20년 가까이 흘렀지만 그의 눈물어린
사연과 함께 아름다운 넋과 마음은 여전히 그의 유작(遺作)이라 할 수 있는 길상사에 고이 깃
들여져 속세에 오염되고 상처받은 중생의 메마른 마음에 한줄기 감동의 싹과 눈물을 선사한다.
또한 그가 속세에 준 커다란 선물(길상사) 덕분에 졸부들이 점거하여 진흙탕이 되버린 성북동
부촌(성북로 북쪽) 한복판에 진흙탕에 피어난 한송이 연꽃처럼 중생들이 편안히 찾아와 안길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 생겨났다.

▲  김영한이 인생의 마지막 날을 보냈던
길상헌

▲  조촐한 모습의 길상화 공덕비

* 길상사의 현재
길상사의 불전(佛殿)은 지장전을 제외하고 대부분 요정 시절 건물을 개조한 것이다.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지장전, 설법전, 종무소, 범종각, 길상선원, 유마선방, 침묵의집,
진영각 등 30동 가까운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오래된 절이 아니라서 딱히 문화유산은 없
으나 200년 정도 묵은 오래된 느티나무 2그루가 절 뜨락에 그늘을 드리운다.
또한 시민운동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도량(根本道場)으로 매년 5월 법회와 길상음악회를 연
. 법회 때는 법정이 자주 법회를 주관했으며, 그를 보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길상음악회는 다양한 테마의 음악을 선보이는 자선음악회로 여기서 나오는 수입은 어려운 이
들을 위해 쓴다고 한다.

휴일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넓은 경내에 빈 공간이 없을 지경이며, 평일에도 적지 않
게들 찾아와 길상사의 높은 인기를 보여준다. 그 방문객 수는 서울 굴지의 고찰인 조계사,
은사(奉恩寺), 도선사(道詵寺), 진관사(津寬寺) 못지 않다.


▲  길상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법정의 진영(眞影)

* 시민들을 위한 다양한 참선 프로그램들
길상선원(吉詳禪院) - 상설 시민선방으로 길상사에서 벌이는 12일 선수련회에 3회 이상
참여하거나 34일 여름 특별 선수련회 참여자, 또는 다른 절의 선수련회에 참여한 뒤 길상사
12일 선수련회에 1회 참여한 사람에 한해 방부<房付, 선방에 안거(安居)를 청하거나 승려가
다른 절에 가서 잠시 있기를 청하는 것>가 가능하다.
기존 이용자는 매월 25~31일까지, 신규 이용자는 매월 1~3일에 방부를 들일 수 있다. 방부가
승인된 사람은 일정액의 방부비를 내고 이용하면 되며, 한달에 5일 이상은 출석해야 된다.
원 출입시간은 매 정시에서 10분 사이이다.

침묵의집 - '침묵의집에서 침묵을! 침묵 속에서 고요함을! 고요함 속에서 평화를'이란 테
마로 누구나 자유롭게 명상과 좌선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용시간은 10~17시이며, 일요
일은 16시부터 17시까지만 짧게 이용이 가능하다. (특별행사가 있는 날은 거의 이용 불가)

템플스테이(Temple Stay) - 체험 위주의 프로그램으로 1달에 2(매월 3/4째주 토~일요일
12일 일정) 정도 열린다. 사찰예절과 경내 탐방, 예불습의, 발우공양, 참선, 108, 차담, 자유포행 등을 하며, 108배가 가능한 사람만 참여할 수 있다. 참가비는 무려 5만원으로 이곳
템플스테이에 1회 이상 참여했던 사람은 3만원으로 깎아준다. (여름선수련회와 3~4시간 일정
으로 이루어지는 템플라이프도 있음) <자세한 정보는 길상사 홈페이지 참조>

※ 길상사 찾아가기 (2018년 1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성북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길상사 하차, 또는
  1111, 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홍익대부속중고등학교 입구에서 하차하여 도보 15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323 (선잠로5길 68 ☎ 02-3672-5945)
* 길상사 홈페이지는 앞에 템플스테이의 링크된 부분이나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길상사 일주문, 설법전 주변

▲  길상사 일주문(一柱門)

속세에서 길상사로 진입하려려면 '三角山 吉詳寺'라 쓰인 일주문(정문)을 들어서야 된다.
문은 2000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된 것으로 정문을 들어서면 도심 속의 별천지 같은 길상
사 경내가 1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고 장엄하게 펼쳐진다.


▲  일주문 천정 그림 (봉황일까? 극락조일까?)

일주문을 들어설 때면 다들 정면에 보이는 풍경에만 눈과 마음이 팔려있어 천정을 보는 이는
거의 없다. 아마 문을 들어서는 중생의 99.9%는 그냥 앞만 보고 갈 것이다. 그게 사람의 본능
이니까. 허나 여기서 잠시 목운동을 해보자. 고개를 90도 올려다보면 천정에 장엄하게 그려진
그림이 두 눈을 화들짝 놀라게 만들 것이다.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 사이로 하얀색의 긴 꼬랑
지를 가진 새 2마리가 하늘을 향해 힘차게 비상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새의 모습을 보니 거의 봉황(鳳凰)과 비슷하다. 그래서 봉황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이곳이 절
이다보니 딱히 봉황을 키울 이유는 없어보여 불교에서 많이 키우는 극락조<極樂鳥, 가릉빈가>
가 아닐까도 싶다. 그림이 꽤 수작(秀作)으로 어떻게 저런 곳에 교묘하게 숨어서 지나가는 중
생의 머리통을 보고 있었는지 정말 등잔 밑이 어두웠다. 길상사를 30번 이상 들락거렸음에도
그의 존재를 처음 눈치챈 것은 2012년 봄이었으니 진정한 숨바꼭질의 종결자가 아닐 수 없다.

   ◀  이국적으로 생긴 길상사 관음보살상
일주문에서 오른쪽 길을 오르면 설법전 앞에
늘씬한 모습의 관음보살상이 자리해 있다.
상사를 상징하는 명물로 꽤나 명성이 높은 존
재인데 그 흔한 관음보살처럼 생기지 않아 '
이건 무슨 스타일의 관음보살인가?' 고개를 좀
갸우뚱하게 만든다.

그는 네모나게 다듬은 돌을 대좌(臺座)로 삼아
소탈하고 늘씬한 모습으로 곧게 서 있는데 머
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긴 했지만 유럽 왕관과
비슷한 모습이며, 머리결은 목 뒤쪽까지 내려
왔다. 얼굴은 자애로운 성모의 얼굴, 그 자체
라 거의 천주교 성모 마리아와 비슷하게 보인
. 오른손은 번쩍 들어 시무외인(施無畏印)
취했고, 왼손에는 관음보살의 필수 아이템인
정병(政柄)을 들고 있으며, 손 아래쪽은 아무
런 조각이 없다.

이 이국적인 관음보살상은 천주교 신자이자 우리나라 조각계의 거장인 최종태씨가 만든 것으
로 보살이 아닌 불모(佛母)로 삼아 만들면서 세상에 화제가 되었다. 2000428일에 봉안
되었으며, 높이는 1.8m이다. 비록 불상의 면모는 떨어지긴 하나 불교와 천주교가 서로 돕고
교류하여 이루어진 상징물로 그 가치는 크며 대좌에는 다음의 메세지가 적혀있다.
'이 관세음보살상은 길상사의 뜻과 만든 이의 예술혼이 시절 인연을 만나 이 도량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이 모습을 보는 이마다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의 원력으로 이 세상 온갖 고통과
재난에서 벗어나지이다. 나무관세음보살'


▲  겨울 제국의 핍박에 물까지 끊긴 샘터

산사(山寺)에는 어김없이 샘터가 있기 마련이다. 완전한 산사는 아니지만 길상사도 나름 산사
의 분위기가 자욱한지라 인근 계곡물을 끌어와 범종각 밑에 조촐하게 샘터를 냈다. 길상사를
찾은 중생의 목마름을 해소해주는 고마운 샘터로 봄과 여름, 가을에는 늘 물로 가득했다.
나 지금은 겨울 제국 시절이라 물이 끊겨 연꽃무늬의 석조(石槽) 안에는 물 대신 눈이 가득하
. 그러다보니 바가지들도 딱히 소임거리가 없어 찬바람을 맞으며 꾸벅꾸벅 졸고들 있다.


▲  설법전 앞뜨락 (범종각과 샘터, 관음보살상)

▲  샘터 위쪽에 자리한 범종각(梵鍾閣)
이곳에는 길상화가 시주하여 만든 범종이
있었으나 2009년 9월 새로 만든 종으로
대체했다.

▲  관음보살 옆에 조그만 석불(마애불)
커다란 돌에 새겨진 추상화 같은 선각마애상
(線刻磨崖像)의 모습이 꽤 이채롭다. 그는
예전에는 극락전 좌측에 있었다.


▲  길상사 느티나무(왼쪽의 큰 나무) - 서울시 보호수 8-6호

길상사에는 2그루의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다. 윗 사진의 느티나무는 관음보살상 건너편에 자
리한 것으로 마르지 않는 샘인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제법 모습을 갖추었다. 허나 겨울 제국
에게 모든 걸 빼앗겨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가련한 신세로 몰래 봄을 잉태하여 쏟아낼 시간을
기다린다.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165년 정도라고 하니 지금은 190년 정도 되었으며 높이 12
m, 둘레는 2.5m이다.


▲  느티나무 그늘 쉼터에서 만난 법정스님 어록

▲  길쭉한 모습의 설법전(說法殿)

길상사 좌측 높은 곳에는 서쪽을 바라보고 선 설법전이 있다. 설법전은 일종의 강당(講堂)
로 교육과 템플스테이 공간으로 쓰이고 있는데, 기존 요정 건물을 개조한 탓에 절 건물의 이
미지보다는 거대한 한옥 민박집이나 강당 같은 이미지가 강해 보인다.
깔끔하게 정비된 설법전 내부는 연병장처럼 매우 넓고 깨끗하며, 20008월에 조성된 금동석
가불좌상이 제일 앞쪽에 봉안되어 있다. 볼살이 푸짐한 그의 표정은 너무 환하여 나도 모르게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며 그 모든 것이 금동으로 장엄되어 그 금빛에 침침한 두 눈이 멀 지경
이다. 석가불 주변에는 중생의 시주로 하나씩 올린 수백 개의 조그만 옥불(玉佛)이 석가불을
석굴처럼 에워싸 대장관을 이루는데 이들은 인도에서 가져온 옥으로 만들었다.

▲  무지 넓은 설법전 내부

▲  해맑은 표정의 금동석가불좌상


▲  길상사 유일의 석탑인 길상보탑(吉祥寶塔)

설법전 남쪽에는 201211월에 새로 심어진 길상보탑이 있다. 4마리의 석사자가 7층 탑신(
)을 받치고 선 이른바 4사자 7층석탑으로 그가 세워지기 이전에는 길상사에는 그 흔한 석탑
도 하나 없었다. 탑이 없는 허전함을 계속 간직하고 있던 중, 2012년 영안모자 회장인 백성학
이 길상화와 법정의 높은 뜻을 기리고 길상사와 성북성당, 덕수교회가 함께 한 종교간의 교류
의 의미를 널리 전하고자 흔쾌히 이 탑을 기증했다.

겉보기에는 20세기 탑처럼 보이나 조선 중기(17세기)에 조성된 탑이라고 하며 탑 안에 복장봉
안품을 넣어 봉안했다. 그러다가 2013825, 동남아 미얀마에서 1,600년 정도 묵었다는
오래된 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나온 부처의 오색정골사리, 옹혈사리, 아라한 사리를 입수하
여 그것까지 복장유물로 넣으면서 내부도 아주 빵빵해졌다.

탑이 자리한 자리는 원래 '바람 속 향기'라 불리던 쉼터가 있던 곳으로 자판기 길다방과 음료
수 자판기, 조촐한 평상이 있었다. 허나 탑에게 밀려나 201210월 정랑 서쪽으로 자리를 옮
겼다.
탑은 보통 법당 앞에 세우기 마련이나 여기서는 극락전(법당) 대신 경내 동쪽 구석을 내주어
탑을 세웠다. 그렇다고 극락전 뜨락이 좁은 것도 아닌데 무슨 이유가 있는 모양이다.

▲  사천왕(四天王)이 아로새겨진 기단부와
기단과 탑신의 경계를 이루는 석사자들

▲ 설법전 남쪽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성북동 동부와 동선동(東仙洞), 낙산(駱山)
등이 바라보인다.


 

♠  길상사 극락전과 지장전 주변

▲  길상사 극락전(極樂殿)

길상사의 법당인 극락전은 옛 대원각의 중심 건물로 ''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건물 내부에
는 방이 꽤 많은데, 가운데 칸에는 극락전의 주인장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봉안했고, 그 우
측 칸에 길상화와 법정, 절에 의탁된 망자들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좌측 칸은 중생
들이 예불을 올리거나 쉬어가는 쉼터로 방이 꽤 넓다. 여기서 챗바퀴처럼 돌아가는 속세를 잠
시 잊으며 쉬는 재미가 꽤 쏠쏠한데 미닫이씩 방문을 조금 열고 밖을 바라보면 정말 집 주인
이나 안방 마님이 된 기분이다.


▲  극락전 좌측에 자리한 법정의 영정 (영정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극락전 금동아미타3존불

극락전 불단을 장식하고 있는 아미타3존불은 길상사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199711월에
조성되어 12월에 봉안되었다. 길상사의 창건을 지켜본 불상으로 인자함이 가득 깃들여진 표정
으로 중생을 맞는다. 그의 오른쪽에는 육환장(六環杖)이란 지팡이를 든 지장보살(地藏菩薩)
, 왼쪽에는 보관을 갖춘 관음보살이 나란히 자리해 아미타3존불을 이루며, 두 협시보살(夾侍
菩薩) 역시 자애로운 표정은 아미타불 못지 않다. 그들 뒤로는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금니(
)후불탱화가 걸려있다.


▲  극락전 뜨락 느티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3호
60년 정도 묵은 나무로 대원각 초창기에 심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  극락전 우측의 돌문
궁궐이나 고급 한옥에서 만날 수 있는 품격 높은 돌문으로 옛 요정시절의
화려하면서도 어두웠던 시절을 아련히 전해준다.

▲  황토색과 하얀색(눈), 누런색으로 이루어진 극락전 뜨락

▲  길상사에서 가장 오래된 자연물,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5호

극락전과 지장전 사이에는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인 느티나무가 자리해 있다. 이 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270년 정도라고 하니 지금은 300년 정도 되었으며, 높이
12m, 둘레 3.2m로 오랜 세월을 양분으로 먹고 자라 제법 덩치를 갖추었다.


▲  길상사 지장전(地藏殿)

경내 서쪽에는 '나누는 기쁨'이란 찻집(불교용품점도 겸하고 있음)과 지장전이 있다. 설법전
과 극락전 등이 기존 요정 건물을 손질한 건물인데 반해 지장전은 새로 지은 것으로 2004
1017일에 상량식(上樑式)을 가져 200558일 완성을 보았다.
정면 5, 측면 3칸의 우람한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층은 밥을 먹
는 공양간인 선열당(禪悅堂), 2층은 도서관, 3층은 지장전이다. 건물 앞에는 보름달을 닮은
동그란 연못이 닦여져 있고 주위로 푸른 잔디가 곱게 입혀져 있으며, 건물 뒤에는 주차장이
있다.


▲  지장전 내부 (지장보살상)

지장전 불단에는 선운사(禪雲寺) 도솔암의 지장보살상을 모델로 삼아 만들었다는 지장보살이
밝은 미소로 중생을 맞이한다. 그 좌우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염라대왕이 있으며, 붉은 색
의 지장후불탱화가 그들의 든든한 후광(後光)이 되어준다.

 ◀ 아미타불 염불이 종일 잔잔히 울러펴지는
 지장전의 숨겨진 복도 (영가들의 공간)

지장보살 불단과 그 앞에 펼쳐진 공간이 지장
전의 전부는 아니다. 불단 좌우로 보이는 문
을 들어서면 불단 뒤쪽에 숨겨진 복도가 마치
보물이 묻힌 비밀의 무덤 석실(石室)처럼 모
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죽은 이들, 즉 영가(靈駕)들의 공간으
로 그들의 이름이 적힌 위패가 빼곡히 자리를
채운다. 물론 이들도 돈을 받고 해주는 것이
.
동쪽 벽에는 고운 색채로 치장된 석가삼존불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복도의 폭이 조금 좁다
보니 꽤 장엄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살아있는
이의 심금을 자극시키며 잔잔히 흘러나오는
아미타불 염불(念佛)은 엄숙한 분위기를 유도
해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  지장전 영가들의 공간에 그려진 벽화
황홀한 색채를 자아내는 벽화에 석가불과 아리따운 모습의 관음보살이 그려져 있다.
월출산 무위사(無爲寺) 극락전의 후불벽화나 부안 내소사(來蘇寺) 대웅보전의
후불관음탱화, 세계 최고의 불화로 손꼽히는 고려불화처럼 현란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  눈에 갇혀 고통받고 있는 지장전 뜨락과 연못

▲  지장전에서 바라본 경내 - 깊은 숲속의 절을 보는 듯 하다.

▲ 계곡 건너에 자리한 길상헌(吉詳軒)
어른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요정 시절에는 길상화와 요정 식구들이 생활했으며
김영한이 인생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그 인생을 마감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경내 우측(일주문을 들어서는 기준으로 왼쪽)은 좌측과 달리 자연의 비중이 높다. 북한산 남
쪽 줄기(정릉 뒤쪽 산줄기)에서 발원한 계곡은 경내 서쪽을 가로질러 성북천(城北川)으로 흘
러가며, 나무로 우거진 언덕에는 조그만 집들이 가득한데 이들은 요정 시절 손님 접대 공간으
로 지금은 승려의 참선 및 처소로 쓰인다.

제법 풍치가 깃들여진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여러 개 있는데, 먼저 다리를 건너면 어른 승려
의 거처인 길상헌이, 그 다음 다리를 건너면 길상화의 공덕비가 있다. 경내에서 가장 북쪽 구
석에는 법정을 기리는 진영각이 있으며, 극락전 뒤쪽에는 침묵의집, 길상선원 등이 빼곡히 자
리를 채운다.


▲  길상화 공덕비로 인도하는 나무다리와 길상헌 뒤쪽 담장

▲  창건주 길상화(김영한) 공덕비 (예전 모습)

길상화 공덕비는 창건주 길상화를 기리고자 그의 2주기인 2001년에 세운 것이다. 비석을 칭하
고 있지만 앞서의 관음보살상처럼 기존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며, 비석 머리에는 사발 2개를
포개놓은 듯한 장식물이 눈길을 끈다.
길상화가 199911월 숨을 거두자 그의 유언대로 눈이 하얗게 쌓인 한겨울에 이곳에서 그의
유골을 뿌렸다. 내가 찾아온 날도 눈이 푹신할 정도로 깔려 그때의 모습이 대략 그려진다.

나도 나중에 그에 못지 않은 대부자가 된다면 길상화가 그랬던 것처럼 인생 말년에 모든 것을
세상을 위해 내놓을 수 있을까? 그 물음에 '그렇다'는 대답은 솔직히 자신이 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우선 돈부터 왕창 긁어모아 정승처럼 써보고 싶다. 부자가 되야 길상화를 따라하지
지금 같은 서민 신세에서 그렇게 따라하면 큰일난다. 뱁새가 괜히 황새를 따라하다가는 가랭
이가 절단난다.

◀  길상사 경내를 가로지르는 계곡

이 계곡은 정릉 뒷산에서 발원하여 성북천으
로 흘러가는 것으로 약간의 인공이 더해졌을
,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야말로 길상
동천(吉詳洞天)을 칭해도 손색이 없는 수려한
풍경이다. 김영한은 바로 이 계곡에 매료되어
이곳을 매입했다고 한다.
계곡 바위는 신선의 세계에서 몰래 슬쩍한 듯
멋드러진 모습을 자랑하며 조그만 폭포도 2
정도 있는데, 눈과 얼음에 갇혀 나래를 펼치
지 못하고 있다. 소쩍새가 울 때면 거추장스
러운 얼음을 박차고 졸졸졸 깨어나겠지.


 

♠  길상사 마무리 (진영각, 침묵의집)

▲  경내 서북쪽 언덕에 터를 닦은 집들 - 승려의 참선 및 처소로 쓰인다.

경내 서북쪽에는 자연의 내음이 진하게 풍기는 산책로가 그림처럼 펼쳐져 번뇌의 염통을 잠시
나마 쫄깃하게 만든다. 보통은 절로 들어가는 길이 멋드러진 경우<월정사(月精寺) 전나무 숲
, 내소사(來蘇寺) 전나무숲길>는 많으나 이곳처럼 경내에 어여쁜 길을 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자연이 어우러진 이 산책로야말로 길상사의 자랑거리이자 얼굴이다.


▲ 나무그늘 쉼터
경내 서북쪽 언덕에 2012년에 새롭게 터를 다진 낭만적인 이름의 나무그늘이 있다.
이곳은 좌선을 위한 공간으로 누구나 이용할 수 있으며 나무 그늘로 가득해
여름 제국도 감히 손을 대지 못한다. (단 겨울 제국이 손을 대는 경우,
이곳 사용은 건강을 위해 포기해야됨)


▲  나무그늘에서 바라본 계곡과 길상헌 뒤쪽

▲  진영각(眞影閣)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북쪽 구석에 자리한 진영각은 법정의 진영을 봉안한 건물로 그
의 유품을 머금고 있다.
이 건물은 원래 어른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행지실(行持室)이라 불렸는데, 20127월부터 법
정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손질하여 11월에 마무리를 보았다. 그가 살았던 강원도의 오두막(
류산방)에서 쓰던 유품을 비롯해 신도들이 기증한 저서와 서적을 모아두었으나 공개는 하지
않고 있다가 그의 3주기이던 201337(음력 126) 진영 봉안식을 봉행하면서 비로
소 속세에 문을 열었다.

비록 늦긴 했지만 법정을 기리는 공간은 필요했다. 그의 손에서 자란 길상사 입장에서는 당연
히 그리하는 것이 도리겠지. 그러고 보면 이 절을 탄생시킨 길상화를 위한 건물도 하나 있어
야 되지 않을까 싶다. 그의 영정과 유품을 전시해 법정과 더불어 길이길이 기렸으면 좋으련만,
아무리 법정이 이 절을 키우고 불교계의 명망 돋는 승려라고 해도 길상화가 아니었다면 지금
의 길상사는 없었다. 너무 법정만 띄우지 말고 길상화도 그에 못지 않게 1:1 비율로 띄워주기
바란다. 그게 길상사의 마땅한 도리이다.


▲  진영각에 봉안된 법정의 진영

진영각 중앙에 자리한 진영은 김호선 화백이 20113월부터 12개월 동안 정성을 다해 그
린 것이다. 전 문화재청이던 유홍준이 이 그림을 보고는 스님이 그림을 뚫고 뚜벅뚜벅 걸어나
올 것 같다며 격찬을 했는데 진영의 글씨와 진영각 현판은 서예의 대가인 여초 김응현의 제자
, 승려 기현(奇玄)이 썼다.


▲  법정의 사진과 유품, 온갖 문서들

▲  법정의 승려증과 건강보험증 (주민번호도 나와 있음)

▲  법정 관련 서적과 그가 쓰던 다기(茶器)들

▲  법정의 유품들 (불상과 그림, 모자 등)

▲  법정의 유품들 (승복, 염주, 법계증)

▲  법정의 법계증(法階證)


▲  법정의 유골이 뿌려진 곳

무소유의 소유자답게 그의 마지막 안식처는 참 조촐하기만 하다. 제자들의 권유를 흔쾌히 뿌
리치고 그 흔한 승탑(僧塔)도 두지 않아 길상화가 그랬던 것처럼 자연의 일부로 돌아갔기 때
문이다. 조그만 안내문과 돌탑, 그리고 그의 넋을 먹고 자란 꽃과 풀이 그의 영혼터임을 살짝
귀뜀해준다.


▲  길상선원(吉祥禪院) 앞길
길상선원은 시민들을 위한 참선 공간으로 선원장(禪院長) 승려의 지도로
참선이 이루어지는 좌선방(坐禪房)이다.

▲  길상선원에서 설법전으로 가는 길 - 마치 동네 골목길 같다.

▲  여염집 같은 적묵당(寂默堂)
신행단체 법회장소 및 석가탄신일 연등작업과
여러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예전에는
유마선방(維摩禪房)이라 불렸으나 2012년에
적묵당으로 이름을 갈았다.

▲  극락전 뒤쪽 자비실
승려의 생활 및 참선 장소로 지붕이 유난히
크다. 절집보다는 거의 별장 같은 분위기로
길상사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집이다.


▲  침묵(沈默)의 집

침묵의집은 중생들이 자유롭게 참선을 하거나 명상을 즐길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오전 10
부터 17(일요일은 16시부터 17시까지)까지 이용할 수 있으며, 최대 인원은 8명 정도. 인원
이 찼을 경우는 방이 빠질 때까지 목이 빠지라 기다려야 된다.

◀  침묵의집에 걸린 불화
불화 앞 탁자에는 순천 송광사(松廣寺) 목조
3존불감의 모조품이 조용히 자리를 지킨다.


▲  길상사에서 누린 일다경(一茶頃)의 여유

길상사 관람을 마무리하고 '나누는 기쁨' 찻집에서 기분 좋게 차 1잔의 여유를 누렸다. 곱상
하게 생긴 작은 찻잔에 잣 2~3덩어리를 조각배처럼 둥둥 띄워 제공하는데 (나는 매실차를 마
셨음) 차의 가격은 3,000~5,000원선으로 인사동이나 삼청동에 비해 좀 저렴하며 대신 리필이
안된다. (상황에 따라 되는 경우도 있음)
전통차 외에 커피도 판매하고 있고 가격도 그런데로 착한 수준이니 잠시 발길을 멈추고 산사
에서의 차 1잔의 여유를 누려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길상화(김영한)의 숭고한 뜻과 법정의 무소유 정신, 중생구제를 향해 고행도 서슴치 않던 부
처와 관음보살 누님의 고귀한 뜻에 따라 세상이 문을 닫는 그 순간까지 오로지 중생을 위해
헌신하며 세속과 겉멋에 물들지 않는 순수의 불교 수행 도량이자 도심 속의 극락, 길상사로
남기를 고대하면서 한겨울에 찾아간 길상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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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푸른 숲과 조촐한 계곡을 간직한 도심 속의 싱그러운 쉼터, 북악산 삼청공원 ~~~ (말바위, 영무정, 한양도성. 삼청동길)



'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 나들이
(삼청공원, 말바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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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바위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  숲이 무성한 서울 도심의 든든한 허파, 삼청공원(三淸公園)

▲  감사원 서쪽에 있는 삼청공원 후문

여름이 한참 무르익어가던 6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북촌(北村)을 찾
았다. 북촌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계속 북쪽으로 가니 어느덧 북촌과 북악산(백악산)의 경계인
삼청공원까지 발길이 가게 되었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오랜만에 공원이나 1바퀴 둘러보고자
공원 정문을 통해 그의 품으로 들어섰다.

북악산 동남쪽 자락에 넓게 누운 삼청공원은 서울 도심의 북쪽 끝으로 조선시대에도 한양도성(
都城)의 북쪽 끝을 담당했다. 예나 지금이나 싱그러운 나무가 바다를 이루던 명승지로 서울 사
람들의 오랜 나들이 명소였으며, 봄꽃이 만연할 때는 사대부 여인들이 봄꽃놀이를 즐기던 현장
이기도 하다. 조선 초기 학자인 성현(成俔, 1439~1504)은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도성
안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으로 삼청동 골짜기를 꼽았으니 그곳이 바로 삼청공원으로 '산이
높고 나무가 빽빽한데 바위 골짜기가 깊숙하다'
라며 이곳을 표현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 표현은 유효한데, 공원 일대에는 북악산의 명물인 소나무를 비롯해 노간주
나무, 붉나무, 팥배나무, 쪽동백나무, 신갈나무, 때죽나무, 진달래 등 갖은 나무들이 숲을 이
루고 있으며, 골짜기가 깊고 멋드러진 바위가 여럿 포진해 있다.

이렇게 서울 사람들의 오랜 산책 명소이자 피서지였지만 공원에 서린 옛 흔적은 북악산 주능선
에 붙어있는 숙정문(肅靖門)과 한양도성 밖에는 없다. 이들은 도성 수비용이니 풍류와는 관련
이 없고 기껏해봐야 관리들이 말을 타고 올라와 시를 지었다는 자연산 바위, 말바위 정도가 있
다. <공원 바깥까지 확대한다면 '삼청동문(三淸洞門)' 바위글씨를 비롯한 여러 바위글씨와 유
길준(兪吉濬)이 유폐되어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작성했던 취운정(翠雲亭)터 정도가 있음>

왜정(倭政) 시절인 1934년 3월, 삼청골 일대를 삼림공원으로 삼아 관리하기 시작했으며, 1940
년 3월, 총독부고시 208호에 따라 도시계획공원의 하나가 되었다. 당시 왜정은 도시계획공원
140개를 발표했는데 삼청공원이 그 1호로 당시 공원 면적은 약 432,000㎡였으며, 소나무를 비
롯한 온갖 나무들로 울림(鬱林)을 이룬 이곳에 산책로와 정자, 의자, 풀장 등을 설치했다.

1945년 이후에는 정몽주 시조비 등의 시비(詩碑), 영무정, 어린이놀이터, 운동시설 등을 계속
해서 설치했고 산책로와 계곡을 정비했으며 삼청동길과 계곡(삼청골) 사이에 나무데크길을 닦
았다. 그리고 근래에 후문 부근에 숲속도서관을 짓는 등, 자연에 크게 반(反)하지 않는 범위에
서 얌전하게 손질을 했다.
공원 손질이 얌전했던 이유는 공원 주변에 국가의 예민한 곳이 잔뜩 포진해 있어 천박한 개발
의 칼날을 뚝 부러뜨렸기 때문이다. 하여 자연에 쏙 묻힌 싱그러운 공간으로 도심 속에 남게
된 것이다. 다만 시내 확장과 군부대로 공원 면적은 5만㎡가 줄어 현재는 약 388,109㎡이다.

삼청공원은 도심의 핵심인 광화문(光化門)과 종로에서도 무척이나 가깝다. 게다가 공원과 살을
맞댄 북촌과 삼청동길의 인기가 계속 하늘을 찌르면서 찾는 이도 많이 늘어났다. 숲이 매우 짙
어서 그늘도 꽤 깊으며 조촐하게 자연산 계곡까지 갖추어 북악산 서북쪽 자락에 묻힌 백사실계
곡(백석동천, ☞ 관련글 보러가기)과 더불어 도심 속 피서지로 인기를 더하고 있다.
 비록 천하에 이름 꽤나 있는 계곡 앞에 명함조차 내밀기 쑥쓰러운 수준이지만 도심 속에서 발
을 담구며 간단하게 피서를 누릴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는 대단하다. 공원을 가로질
러 도심으로 향하는 삼청골은 삼청천(三淸川)이라 불리며 청계천 상류의 하나를 이룬다.

시내에서 공원으로 접근하는 방법은 삼청동(三淸洞) 마을버스 종점에서 들어가는 것과 감사원
서쪽의 후문으로 가는 길이 가장 일반적이다. 북촌에서 들어간다면 후문을 이용하면 되며, 삼
청동길로 접근하거나 마을버스를 이용한다면 삼청동 마을버스 종점에서 들어가면 편하다. 또한
2009년에 공원에서 말바위로 오르는 산길이 뚫리면서 북악산 주능선과 숙정문은 물론 그 너머
성북동(城北洞) 지역까지 바로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특히나 이 길이 지나가는 북악산 동남
쪽 자락은 오랫동안 속인(俗人)들의 접근을 허용치 않았던 금지된 곳으로 산길이 닦이면서 이
곳을 잠궜던 자물쇠가 조금이나마 풀렸다.

공원 서쪽에는 경복궁 동십자각에서 시작된 삼청동길이 마을버스 종점을 지나면서 구불구불 또
아리를 튼 2차선 산악도로의 모습을 보이며 삼청터널을 거쳐 성북동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박
정희 정권 시절 성북동에 서식하던 권력 실세들이 그들의 교통 편의와 땅값 상승, 청와대와 정
부기관에서 삼청각/대원각 등 고급요정으로의 접근 편의를 위해 낸 것으로 당시에는 차량이 많
지 않아 조촐하게 2차선으로 만들었다.
 허나 시간이 흘러 차량들이 쓸데없이 늘어나면서 도로와 터널을 넓혀야될 지경에 이르렀지만
개발제한구역이라 그것도 쉽지가 않다. 그래서 2차선으로 마냥 두고 있는 것이다.

삼청터널과 터널로 이어지는 길(삼청공원~삼청터널 북쪽, 삼청각 구간)은 뚜벅이들의 배려 따
위는 안중에도 없는
오로지 차량을 위한 길이니 괜히 도보로 가는 일이 없기 바라며 삼청동에
서 숙정문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으나 이 길은 오랫동안 통제구역으로 묻혀 속세의 뇌리 속에
잊혀진 상태이다.

※ 삼청공원 찾아가기 (2017년 8월 기준)
* 지하철1/2호선 시청역(4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11번을 타
  고 삼청동 종점 하차. 이 버스는 삼청동에서 정독도서관입구, 동십자각, 광화문, 시청, 남대
  문을 거쳐 서울역(서울역전우체국 북쪽)까지 운행한다.
* 지하철 3호선 안국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감사원 하차(또는 도보 15
  분), 감사원에서 서쪽(삼청동)으로 내려가면 막다른 3거리가 있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들어
  가면 공원이다. (왼쪽으로 내려가면 삼청동길)
* 경복궁 동십자각에서 삼청동길을 따라 25분 정도 걷거나 동십자각 북쪽 법련사 정류장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11번 이용
* 삼청공원 숲속도서관 이용시간 : 10시~18시 (여름은 20시까지, 매주 월요일 휴관, 문의 ☎
  02-734-3900)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2-1 일대 (북촌로 134-1)


▲  삼청공원 후문 안쪽

공원 후문을 들어서면 수목원 같은 삼청공원의 고운 속살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수목원 같지만
속살을 깊이 들어가면 수목원 분위기는 울림으로 변화하고 산내음과 솔내음이 청정한 기운을
볶아내면서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와 마음을 제대로 어루만져준다.


▲  숲터널을 이룬 삼청공원 산책로 ▼


▲  시인 김경린(金璟麟, 1918~2003)의 '차창'이 담긴 시비(詩碑)

차창(車窓)
나는 수족관에 온 한마리의 어족
미끄러지는 바깥 세계가 뿜는 향수로
안경은 차웁다

우리나라 현대 시인의 하나인 김경린이 2003년 세상을 뜨자 그의 후학들이
그가 살았던 삼청동에 그의 대표작, 차창을 담은 시비를 세웠다.

▲  동심이 깃든 삼청공원 어린이놀이터
어린이들의 안전과 그들의 흙놀이 공간을 위해 흙으로 놀이터를 닦았다. 나도
어렸을 때 흙장난 참 많이 했었지. 그때는 흙으로 많은 세상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내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도 아리송하다.

▲  삼청공원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옛 약수터
오른쪽에 보이는 네모난 구멍에서 약수가 콸콸 쏟아져 나왔으나
이제는 목구멍이 막힌 죽은 샘터가 되었다.

▲  삼청공원 약수터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담는 약수터로 근래 부적합 판정을 받아 찾는 이가 많이 줄었다.
약수터 맞은편 의자에는 1996년 10월 문화체육부에서 세운 근대 소설가 염상섭
(廉想涉, 1897~1963)의 앉아있는 동상이 있었으나 2014년에 치워버렸다.
(염상섭의 생가터가 이곳 부근이라 동상을 세웠음)


▲  비둘기도 이곳 경관에 반해 뒤뚱뒤뚱 산책을 즐긴다.

▲  정몽주(鄭夢周, 1337~1392)와 그의 어머니의 시조비

정몽주와 그의 어머니의 시조가 담긴 정몽주 시조비는 이곳에서 그나마 오래된 볼거리로 1973
년에 세워진 것이다. 포은(圃隱) 정몽주는 고려의 마지막을 덜 초라하게 해준 3은(三隱)의 하
나로 그의 시조비가 떡하니 있어 이곳과 무슨 관련이 있겠구나 싶지만 실상은 서로 아무런 관
련이 없다.

시조비 오른쪽을 장식하고 있는 시조는 백로가(白鷺歌)로 정몽주의 어머니가 간신과 역신(逆臣
) 등 질이 안좋은 무리와 어울리지 말 것을 훈계하고자 지은 시라고 한다. 허나 조선 영조 때
간행된 청구영언(靑丘永言)에는 작자 미상이라 나와있고 조선 말 학자인 이희령(李希齡)이 지
은 약파만록(藥坡漫錄)에는 연산군 시절에 김정구(金鼎九)가 지은 시라고 나와있어 작자에 대
해서는 아직도 말들이 많다.

시조비 왼쪽에는 정몽주가 지은 그 유명한 단심가(丹心歌)가 쓰여 있다. 이 시는 이성계(李成
桂) 패거리가 고려를 뒤엎고 새 나라를 세우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그의 아들인 이방원(李芳
遠, 후에 조선 태종)이 정몽주를 살짝 찾아와 그 유명한 하여가(何如歌)를 들이밀며 그의 의중
을 물었다.
 허나 정몽주는 그 이름도 높은 단심가로 답을 하며 고려에 대한 일편단심을 강하게 내비췄다.
결국 안되겠다 여긴 이방원은 부하 조영규(趙英珪)를 보내 선죽교(善竹橋)에서 정몽주를 잔인
하게 처단하고 만다. 고려의 마지막 보루인 최영(崔瑩)과 정몽주를 잃은 고려는 더 이상 지탱
하지 못하고 결국 이성계 패거리에 의해 강제로 휘장을 내리게 된다.



백로가(白鷺歌)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낸 까마귀 흰빗을 새오나니
창파(滄波)에 좋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하여가(何如歌)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여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영무정의 4계절' 시비
영무정 보존회에서 2008년 10월에 세운 시비이다.


영무정 시비에서 북쪽을 보면 초록색 철책이 빙 둘러진 후미진 공간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
속살에는 조그만 폭포가 동천(洞天)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고 그 밑에 물이 담겨진 욕조처
럼 생긴 통이 있으며, 그 옆에 조그만 정자가 있으니 그곳이 바로 삼청공원의 숨겨진 명물, 영
무정이다.

이곳은 서울에 거의 남지 않은 노천 목욕탕으로 1960년경에 동네 사람들이 목욕터로 만든 곳이
다. 폭포 밑에 3명 정도 들어갈 크기의 욕조를 만들었는데 물이 매우 맑고 차다고 한다. 허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사람 여럿이 욕조에 몸을 담구거나 (물론 옷은 입었음) 주변에 앉아 대
화를 하고 있어서 안에는 굳이 들어가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특히 아저씨와 노공(老公)>의 오랜 목욕터이나 문제는 시민들이 거니는 공원에서
벌거벗고 목욕과 냉수마찰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계속 논란이 불거지자 종로구청에서
이곳을 없애려고 삽을 들었으나 영무정보존회에서 쌍수 들고 반대하여 철거는 하지 못했다. 또
한 방송에도 여러 번 등장해 그 이름의 무게가 더해지면서 철거하기에 좀 애매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하여 종로구청은 기존에 있던 펜스를 치우고 초록색 철책을 둘렀으며, 벌거벗고 씻지
말라는 경고문을 붙이는 선에서 영무정 문제를 마무리 지었다.
 허나 장소가 장소인지라 늦은 밤에 몰래 벗고 씻는 이들도 아직 있을 듯 싶으며 구석진 곳이
라 둘만의 조용한 대화(?)를 원하는 이들이 찾기에 좋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서울의 영원한 남주작(南朱雀)이자 내 어린 시절 뒷동산이었던 남산(
南山)의 여러 약수터에는 이런 노천 목욕탕이 거의 딸려있었다. 약수터와 운동시설 옆에 담장
등을 둘러 벗고 씻는 공간을 둔 것이다. 나도 어린 시절 남산 그늘에 살았을 적에 부친을 따라
남산의 모 약수터에서 냉수마찰을 한 적이 있다. 냉수마찰을 해야 감기가 안걸린다는 말에 깜
빡 속아서 말이다.

영무정이 법에는 다소 저촉은 되지만 동네 사람들의 쉼터이자 피서지로 차가운 물이 모였다는
욕조에 들어가 피서를 즐기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단 물놀이에 적당한 가벼운 옷차림(속옷바
람은 안됨)으로 통에 들어가길 바라며, 삼청골 오염을 방지하고자 비누 사용과 음식물 취사행
위를 금하고 있으니 그냥 몸만 시원하게 담구고 오자.


▲  삼청공원 윗쪽 산책로 (영무정 북쪽)
집으로 살짝 가져와 혼자서만 누리고 싶은 아름다운 길이다.

▲  구부러진 삼청공원 윗쪽 산책로

▲  삼청공원 산책로는 경사가 별로 없어 누구든 마음 편히
거닐 수 있는 착한 오솔길이다.

▲  오랜 가뭄으로 목이 타버린 삼청골
물은 온데간데 없고 흙과 돌만 어지럽게 흩어져 초여름 가뭄의
심각함을 드러낸다.


 

♠  삼청공원의 새로운 산길, 북악산 말바위 산길

▲  말바위 산길 입구

삼청공원 윗쪽에는 북악산 말바위로 인도하는 산길이 있다. 2008년에 닦기 시작하여 2009년에
완성되어 세상에 선보인 산길로 말바위조망대까지 600m 정도 이어져 있으며, 그곳까지는 가볍
게 10~15분 정도 걸린다. (중간에 갈림길이 있음, 거기서 왼쪽으로 가면 소나무 숲길, 직진하
면 말바위임)

말바위조망대에서 성곽을 따라 서쪽(숙정문 방향)으로 조금 가면 성곽 밖으로 나가는 나무데크
길이 있는데 그 길로 내려가면 바로 성북동으로 북악하늘길 제3코스와 만난다. 여기서 왼쪽(서
쪽)으로 가면 삼청각과 김신조루트라 불리는 북악하늘길2/3코스로 이어지고, 오른쪽(동쪽)으로
가면 와룡공원<여기서 성북동 종점이나 성균관대, 감사원 방면으로 내려가면 됨>으로 이어진다.
 또한 성곽길을 더 가면 말바위안내소가 나오는데 여기서 숙정문을 거쳐 북악산 정상과 창의문
(彰義門, 자하문)으로 넘어갈 수 있어 코스 또한 다양하다. 그러니 취향에 따라 코스를 잡으면
된다.
허나 숙정문과 북악산(백악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주능선 성곽길은 9시부터 16시(동절기는 10
~15시)까지만 출입이 가능하다. (신분증을 지참하여 출입증을 작성해야 됨)

삼청공원에서 말바위로 오르는 산길이 생기기 전에는 거기서 성북동/북악산 방면으로 가는 정
식적인 길이 없었다. 삼청터널이 있지만 거긴 오직 차량 전용이며, 걸어서 간다면 와룡고개로
우회해서 가야했다. 지도에서 보는 거리는 매우 가깝지만 걸어서 가는 체감거리는 이론과 다르
게 꽤 각박했던 것이다.
 허나 말바위 산길이 생김으로써 비록 산을 넘어야되는 부담은 있지만 서로의 거리가 꽤 줄어
들었고 반대로 성북동(삼청각)에서도 삼청공원과 도심 도보 접근이 수월해졌다.

출입절차를 밟아야 되는 말바위안내소에서 창의문으로 이어지는 북악산 주능선과 달리 말바위
등산로와 성곽 밖 북악하늘길은 언제든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하다. (단 군사시설이 여럿 있으
므로 그곳은 들어가거나 촬영하지 말 것)
 이렇게 삼청동에서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산길이 뚫렸다니 참 세상이 많이 변하긴 변한 모양이
다. 국가의 예민한 곳으로 백성들은 감히 발도 들이지 못하고 먼산 쳐다보듯 해야 했던, 잘못
들어갔다가는 정말 총 맞을 것 같던 그곳이 말이다. 이제 도성 남쪽인 북악산 남쪽만 개방되면
북악산은 거의 완전히 해방이 된다. 하지만 그곳에는 청와대와 여러 예민한 시설이 있으니 당
장 실현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  말바위 입구에 세워진 건강 돌탑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돌탑이든 우선 건강하고 봐야 된다.
건강이 없다면 바닷가의 힘없는 모래성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  소나무가 운치를 우려내는 말바위 산길

북악산은 호랑이가 곶감의 눈치를 보던 시절부터 소나무가 유명했는데, 조선 조정에서는 특별
히 옆구리에 끼고 관리하여 산이 온통 솔내음의 향기가 진동했다. 허나 왜정 이후 관리 소홀과
마구잡이 벌채, 다른 나무의 유입 등으로 소나무가 많이 줄어 지금은 주능선 주변과 고지대에
주로 남아있다. 삼청공원이나 와룡고개 등 속세와 가까운 곳은 소나무가 거의 없고 속세와 어
느 정도 거리를 둔 고지대에서 소나무들이 이슬을 먹으며 자라고 있다.

북악산 일대는 오랫동안 금지된 산으로 묶여있다 보니 나무와 식물이 마음 놓고 뿌리를 내리면
서 숲이 매우 울창하다. 그러다보니 다양한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는데 삼청공원 일대에서는 직
박구리와 박새, 멧비둘기, 오색딱따구리, 꿩, 노랑지빠귀, 다람쥐, 청솔모 등이 살고 있다.


▲  삼청공원과 말바위 사이에 조성된 쉼터
말바위 등산로는 흙길과 나무로 만든 계단길이 적당히 섞여 있다.

▲  한양도성 (말바위 방향) - 사적 10호

삼청공원에서 말바위 등산로를 15분 정도 오르면 한양도성(한양성곽)의 여장이 나타난다. 여장
이란 성곽을 수비하고자 두툼하게 돌벽을 쌓고, 중간에 여러 개의 구멍을 낸 수비시설인데, 이
곳이 성내(城內)이다 보니 여장 안쪽에 있게 된 것이다. 여장 너머는 성밖으로 바로 성북동이
다.


▲  한양도성 (삼청공원 방향)
서울을 지키던 성곽도 부끄러움을 타는 것일까? 몸에 걸친 담쟁이덩굴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성곽은 1974년 이후에 복원한 거라 일부 검은 주근깨가 낀 것을 빼고는
대부분 하얀 피부를 자랑한다.

▲  말바위로 오르는 각박한 계단길 (왼쪽에 보이는 길로 가면 말바위 조망대)

한양도성과 만나는 곳에서 성곽을 따라 서쪽으로 3분 정도 가면 각박한 각도의 계단길이 나타
난다. (동쪽은 군사시설로 길이 막혀 있음) 그 계단을 오르면 바로 말바위인데 계단길 중간에
왼쪽으로 통하는 나무길이 있으며 그 길로 들어서면 말바위 조망대가 모습을 비춘다.


 

♠  북악산 말바위조망대와 말바위

▲  도심을 향해 들어앉은 말바위 조망대

말바위 밑에 자리한 말바위 조망대(전망데크)는 커다란 바위 위에 나무로 만든 조망대로 도심
이 있는 남쪽을 향하고 있다. 천하 굴지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을 발 밑에 두고 굽어볼
수 있는 곳으로 북악산 정상(342m)이나 그 동쪽 봉우리인 청운대(293m), 인왕산(338m)보다 키
가 낮아 시야에 들어오는 범위도 사대문(四大門) 안쪽으로 좁다. 하여 이곳이 그리 높다는 생
각도 들지 않는다.
 허나 삼청공원을 비롯해 북악산 남쪽 자락과 인왕산(仁王山), 남산(南山), 그리고 그 안쪽에
둥지를 튼 도심이 속시원히 바라보며 그런데로 후한 점수를 줄만하다. 낮은 높이치고는 제법
선전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  말바위조망대에서 바라본 북악산 정상과 남쪽 자락
북악산 너머로 인왕산과 서촌<웃대, 경복궁 서쪽 동네> 일대가 바라보인다.

▲  말바위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①
바로 정면에 서울의 남주작인 남산이 바라보인다.

▲  말바위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②
삼청공원과 삼청동, 경복궁 주변 일대가 바라보인다.

▲  북악산의 오랜 명소, 말바위

말바위는 촛대바위와 더불어 북악산에 이름난 바위이다. 이곳까지 삼청공원의 영역에 들어가는
데, 북악산의 오랜 명소로 조선시대에 문인(文人)과 관료들이 말을 타고 이곳으로 올라와 시문
을 짓거나 바람을 쐬며 많이들 쉬었다고 한다. 그래서 말을 타고 올라왔다는 뜻에서 말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며, 다른 이야기로는 북악산의 산줄기가 동쪽으로 좌청룡(左靑龍)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그 끝에 자리한 바위라 하여 말(末)바위라 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니까 말
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 것이다. (바위가 말처럼 생기지도 않았음)

말바위 옆에는 소나무 1그루가 바위 쪽으로 가지를 뻗어 바위에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며 서
로의 끈끈한 정을 자랑한다.


▲  말바위의 옆모습

1968년 1.21사건 이후 말바위는 금지된 바위가 되어 속세에서 잠시 그 모습이 지워졌다가 2007
년 4월 다시 공개가 되었다. 그때 말바위에서 북악산 정상을 거쳐 창의문까지 제한적으로 개방
되었으며, 말바위는 24시간 언제든 발을 들일 수 있는 자유의 공간으로 거듭났다.


▲  말바위에서 바라본 북악산 주능선 (북악산 정상에서 숙정문 구간)

▲  도성 밖으로 인도하는 말바위 나무다리와 한양도성 성곽길
탐방객 유의사항 현수막이 걸린 나무다리를 내려가면 도성 밖 성북동이다.
 

말바위와 말바위안내소 중간에는 성밖으로 나가는 나무다리가 있다. 무지 귀한 몸인 성곽 여장
을 부시고 내려가는 길을 낼 수가 없기에 부득이 성곽 위에 나무 다리를 다져 성밖으로 통하는
길을 냈다.
다리 북쪽에는 조망대를 설치하여 도심 속의 전원 마을인 성북동을 굽어보게 했는데, 삼청각과
길상사(吉祥寺), 북악산 북쪽 능선과 김신조투르 일대가 훤히 바라보여 조망도 괜찮다. 여기서
다리를 내려가면 성곽 북쪽 자락길로 삼청각(三淸閣)과 숙정문안내소, 북정마을, 와룡공원, 김
신조루트(북악하늘길) 방면으로 이어지며, 성곽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면 북악산 주능선의 동
쪽 관문인 말바위안내소가 마중한다.


▲  말바위 나무다리에서 바라본 북악산(백악산) 주능선

▲  말바위 나무다리에서 바라본 삼청각과 북악산 북쪽 능선
삼청각 뒷쪽에는 2009년에 개방된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이 숨겨져 있다.

▲  성북동 서부 - 북악산의 두 능선에 막힌 궁벽한 곳이지만 그곳에
자리한 집들은 궁벽과는 거리가 먼 크고 호화로운 집들 투성이다.
빈부격차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마음을 아프게 하는 현장이라
눈도 그리 즐겁지가 않다.

▲  성북동 일대
성북동은 북악산 주능선과 북쪽 능선(북악산길이 지나가는 능선) 사이에 포근히 터를
닦은 도심 속의 전원마을이자 완사명월형(浣絲明月形)의 명당 자리로 유명하다.
그러다보니 시커먼 졸부들이 가득 기어들어와 속칭 이 땅의 0.1%가 사는
비싼 동네가 되어버렸다.

▲  성북동 너머로 성북구 삼선동, 돈암동 지역이 바라보인다.

▲  다시 삼청공원으로 (말바위 산길 입구)

말바위 나무다리에서 성밖으로 넘어가 와룡공원을 거쳐 시내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시간도
늦었고 귀찮기도 하여 왔던 길을 다시 재방송하여 삼청공원으로 되돌아왔다.

정몽주시조비를 거쳐 삼청동길로 나오니 길 동쪽으로 북악산이 베푼 삼청골이 착한 풍경을 도
처에 빚으며 도로와 나란히 흘러간다. 허나 오랜 가뭄으로 비리비리한 모습을 보이니 보는 내
가 답답할 따름이다.


▲  가뭄에 타들어가는 가련한 삼청골 (삼청동길 동쪽 계곡)

▲  삼청동길과 삼청골 사이에 만든 뚜벅이용 나무데크길

▲  삼청동길 나무데크길의 남쪽 종점

서울 도심의 거의 흔치 않은 계곡인 삼청골(삼청천)은 공원 남쪽에 있는 삼청테니스장에서 어
두컴컴한 지하로 흘러간다. 개발의 칼질에 강제로 생매장을 당한 것이다. 이 물줄기는 삼청동
길을 따라 경복궁(景福宮) 동쪽을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가는데 옛날 경복궁 주변 사진을 보면
경복궁 동쪽과 북촌 주거지 사이로 하천이 하나 보이니 그가 바로 삼청천이다.

삼청공원을 벗어나 2분 정도 가면 삼청동 종점(종로구 마을버스 11번 종점)이 나온다. 삼청동
과 도심을 이어주는 마을버스의 쉼터로 이곳도 엄연한 도심이라 경복궁과 광화문은 물론 시청
까지 걸어가도 될 정도로 가까운 거리이다.

우리는 지친 몸을 마을버스에 담아 시내로 나왔다. 어차피 종점이라 100% 앉아가는 것은 가능
하다. 이렇게 하여 초여름에 찾아간 북악산 삼청공원, 말바위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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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요깃감이 많은 서울 도심 속의 포근한 전원마을, 성북동 나들이 (심우장, 수연산방, 최순우옛집 등)



' 서울 도심 속의 포근한 전원 마을, 성북동 나들이 '


▲ 수연산방 (상허 이태준 가옥)


 

싱그러운 5월을 맞이하여 후배 여인네와 함께 나의 즐겨찾기 답사지인 성북동(城北洞)을
찾았다.
도심 속의 전원(田園) 마을로 북악산 동쪽 자락에 감싸인 성북동은 20대 중반부터 1년에
여러 차례 답사나 나들이로 찾는 편이다. 그렇게 질리도록 갔음에도 돌아서면 또 안기고
싶은 곳이 또한 성북동이라 나의 마음을 두고두고 앗아가는 얄미운 곳이기도 하다. 이곳
외에도 부암동(付岩洞)과 백사실(백사골), 북촌(北村), 서촌도 나의 정처없는 마음을 들
었다 놓기를 반복한다.

성북동을 거론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곳의 풍수지리적 지형이다. 이곳은 호
랑이가 담배 맛을 알던 시절부터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의 명당(明堂) 자리로 명성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즉 '밝은 달빛 아래 비단을 펼쳐놓은 형세'이니 그 자리가 오죽하겠
는가? 바로 그 기운을 받고자 돈과 권력을 꽤나 주무르던 갖은 졸부(간송 전형필 선생은
빼자~!)들이 몰려와 집을 짓고 서식하면서 자연스레 이 땅 최고의 부자 동네를 형성하게
되었다. 하여 어떤 이는 이 땅의 1%가 아닌 0.1%가 사는 동네라고 강하게 꼬집기도 한다.

우리 같은 서민들이 오기에는 다소 꺼림칙한 곳이 분명하지만, 아름답고 의미가 깃든 명
소들이 많아 그 거부감을 감수하고 발걸음을 한다. 아무리 졸부들의 집이 거대하고 대문
이 성문처럼 두터워도 위대한 대자연 형님 앞에선 일개 모래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명소를 보러 것이지 졸부들의 하찮은 저택과 빌라를 보러온 것이 아니며 그
것들은 어디까지나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들러리일 뿐이다. 그러니 괜히 기죽지 말고 가
슴을 당당히 피고 관광객이나 답사객의 입장으로 성북동을 살펴보자. 졸부들에게 집중될
명당의 기운도 조금씩 챙길 겸 말이다.

본글에서는 성북동을 빛낸 20세기 초/중반 인물, 만해 한용운(심우장)과 상허 이태준(수
연산방), 혜곡 최순우(최순우옛집)의 흔적을 다루도록 하겠다. 이들은 모두 성북길 주변
에 있어 찾기는 매우 쉽다.


 

♠ 만해 한용운 선생이 독립을 염원하며 말년을 보낸 곳
심우
장(尋牛莊) - 서울 지방기념물 7호

성북동 종점(1111, 2112번 종점) 동쪽에 심우장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그 이정표를 따라 달
동네 언덕을 150m 정도 오르면 오른쪽에 문화유산 안내문을 내민 심우장이 답사객을 맞이한다.
심우장 주변은
달동네 집들로 가득하여 대궐 같은 집들로 도배가 된 성북로 북쪽과는 완전 대
조를 보인다. 같은 성북동인데도 이렇게 차이가 크다니 세상의 불공평함에 정말 치가 떨린다.


1933년에 지어진 심우장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조촐한 크기의 팔작지붕 건물로 겨우 80년 밖
에 숙성되지 않았다. 게다가 산뜻하게 손질된 탓에 고색의 내음도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
넓지 않은 뜨락에는 만해가 심은 향나무가 어엿하게 성장하여 주인을 대신해 집을 지키고 있으
며, 심우장은 만해의 기념관으로 쓰이고 있다. (심우장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만해 한용운
심우장'임)

~~ 1.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1944)의 생애 ~~
만해는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洪城)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청주(淸州), 본명은 유천
(裕天, 어렸을 때 쓴 이름), 정옥(貞玉, 장성해서 쓴 이름)이며, 호(號)는 만해이다.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배웠으며 14세에 혼인을 하였다. 1896년 홀연히 집을 떠나 설악산 오세
암(五歲庵)에 들어갔으며, 처음에는 절의 허드렛일을 돌보다가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 이후 만
주와 연해주를 홀로 여행하다가 1905년 다시 설악산에 들어와 백담사(百潭寺)에서 연곡(連谷)
을 스승으로 삼아 득도에 나섰다. <'만해'란 이름은 스승 만화(萬化)가 지어줌>

1908년에는 전국 사찰 대표 52인의 1명으로 원흥사(
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
립하고 왜국을 시찰하고 왔으며, 1910년 이후 만주로 건너갔다가 1913년에 귀국, 불교학원 선
생이 되었다. 바로 그해에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하여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해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6년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했고,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하나로 독립선언
서(獨立宣言書)에 앞장 서서 서명을 했다. 그리고 3.1운동 이후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했다.
1926년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해 왜에 저항하는 저항문학에 앞
장섰으며, 1927년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해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이 되
었다.
1931년에는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해 청년운동을 강화했
으며,같은 해에 여러 뜻있는 이들의 도움으로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했다. 이후 많은 논
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했고, 1937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
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이후 왜정에 배타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불교 개혁과 문학활동을
계속하다가 광복을 겨우 1년 앞둔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쓸쓸히 눈을 감으니, 그의 나이
65세였다.


▲ 만해 한용운 선생 영정

~~ 2. 만해 한용운과 심우장 ~~
만해는 3.1운동으로 3년간 옥고(獄苦)를 치르고 도심과 가까운 성북동에 셋방을 얻어 빈곤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를 존경하던 승려 김벽산(金碧山)이 찾아와
'성북동 송림(松林) 속에 구입한 52평의 땅이 있습니다. 그 땅을 선생님께 드릴테니 그곳에 집
을 짓고 사십시요'
하면서 지금의 심우장 자리를 주었다. 허나 땅만 있지 돈이 없어 집을 짓지
못했다.
그래서 만해의 부인 유씨(兪氏)가 친일파로 악명이 대단한 조선일보의 방응모 사장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 금융조합에서 대출을 받아 1933년 지금의 건물을 지었다. 건물의
면적은 약 18평으로 조촐한 크기이다.

이 건물의 특징은 그 흔한 남향(南向)이 아닌 북향(北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남
쪽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있으므로(정확히는 서남쪽이다) 이를 불쾌하게 여겨 북쪽을 바
라보게 만든 것이다. 이를 통해 그의 굳센 독립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심우장이란 이름은
선종(禪宗)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이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
한10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리고 건물 왼쪽 부분에 '심우장' 현판이 걸려있는데, 독립운동가 겸 서예가이자 간송 전형필
(澗松 全鎣弼)의 정신적인 스승인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이 쓴 것이다.

만해가 세상을 뜨자 그의 외동딸인 한영숙씨가 살았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심우장 건너편에 일
본대사관저가 건방지게 들어서면서 이웃 동네인 명륜동(明倫洞)으로 이사를 가 버렸다. 역시나
부녀간의 질긴 피는 속이지 못하는 모양이다. (심우장은 여전히 한영숙씨 소유로 되어 있음)
그런데 어찌하여 심우장 부근에 일본대사관저가 들어섰는지는 심히 의문이 든다. 왜국이 싫어
서 기껏 북향으로 집을 지었는데, 친일행위로 말썽이 많은 박정희 정권이 그런 것까지 배려를
하지 않고 방관한 모양이다.

이후 만해사상연구소가 이곳을 지켰으며, 만해의 기념관으로 탈바꿈하여 그의 글씨와 저서, 여
러 문서를 전시하고 있다. 또한 성북구청에서 집을 손질하여 심우장 내부를 천하에 공개했다.
(내부 관람 가능,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됨)


▲ 일창 선생이 쓴 심우장 현판 - 글씨의 기품이 느껴진다.

▲ 만해가 머물던 조그만 방

주인이 가고 없는 방에는 그의 숨결이 배인 여러 유품과 글씨들, 그리고 그의 초상화가 빈 방
을 지킨다. 햇볕이 별로 들지 않는 곳이라 한여름에도 시원하여 방바닥에 앉아 잠시 쉬어가기
에 좋은 곳이다. 허나 그렇다고 너무 오래 머물거나 벌렁 누워 잠을 청하거나, 너무 시끄럽게
떠들지는 말자. 시민 모두가 공유해야 되는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 심우장 뒷뜨락
현역에서 물러난 굴뚝이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옛 시절을 회상하며 우수에 젖어있다.


▲ 심우장 부엌
이제는 보기 힘든 정겨운 부뚜막 가마솥 안에 잘 숙성된 누룽지가 들어있는 것은
아닐까? 허나 막상 열어보면 누룽지 대신 무상한 세월이
입힌 먼지만이 털털 날린다.

▲ 만해의 글씨 - 마저절위(磨杵絶韋)
절구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들었다는 사자성어로 쉬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라는 뜻이다.


▲ 만해(卍海)의 호가 적힌 전대법륜(轉大法輪)

▲ 오도송(悟道頌)
1917년 12월 3일 설악산 산중암자인 오세암(五歲庵)에서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한 시문(詩文)이다. 목판에 쓰여진 하얀 글씨는 그의 친필이다.


▲ 만해의 온갖 저서와 관련 서적, 심우장과 그의 안내문이 담긴
가운데 방

◀ 심우장 뜨락에 심어진 향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46호
나무의 나이 약 80년


▲ 심우장에 그늘을 드리우는 소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31호
나무의 나이 약 90년

심우장 뜨락에는 오래된 나무 2그루가 아낌없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늘씬한 키를 자랑하는
향나무는 만해가 직접 심었다고 하며 아름다운 수관을 자랑하는 소나무는 심우장이 있기 이전
부터 있던 존재로 서로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심우장을 수식하는 정원수가 되었다.

조국의 광복을 꿈꾸며 절치부심(切齒腐心)하던 만해를 매일마다 지켜보던 자연의 산물로 그의
벗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문학 소재가 되기도 했으며, 여름의 제국(帝國)에는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겨울 제국에는 추운 바람을 온몸으로 막아주던 그야말로 만해를 위해 모든 것을 베
풀던 존재였다. 만해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이들 나무는 여전히 살아 남아 그의 빈 집을 지키
며 이곳을 찾은 나그네에게 당시의 상황을 아련히 속삭인다.


※ 심우장 찾아가기 (2016년 9월 현재)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동(서울다원학
교) 종점에서 하차, 버스가 왔던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면 심우장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 심우장은 아침 9시부터 18시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입장료는 없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22-1 (성북로29길 24)


▲ 심우장 앞에 자리한 붉은 벽돌집
심우장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집으로 만해사상연구소로 쓰이기도 한다.
이곳은 관람객 통제구역임~~

▲ 심우장 앞 골목길 - 어린 시절 뛰어놀던 그 비슷한 분위기의 골목길이다.
저 골목길의 끝에서 혹여 나의 꼬마 시절과 마주치는 것은 아닐까?


심우장 골목길은 서울 시내에 흔히 있는 조그만 골목길이지만 심우장과 그를 꾸미는 소나무의
위엄 때문인지 매우 특별하게 다가온다. 저 골목길을 오르면 달동네인 북정마을이 나오며, 그
마을 역시 성북동의 일부이다. 분명 같은 성북동인데, 졸부 동네와 서민 동네가 한 하늘 아래
공존하는 불편한 진실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북정마을에서 한양도성 산책로로 진입이 가능하며, 암문(暗門)으로 도성 내부로 들어갈 수 있
다.


 

♠ 월북 문학가 상허 이태준이 살던 집, 지금은 수연산방이란 이름으로
성북동 제일의 전통찻집으로 거듭난, 상허 이태준 가옥
(尙虛 李泰俊 家屋)-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11호


▲ 수연산방(壽硯山房)의 바깥 풍경

송미술관과 심우장 중간인 성북구립미술관 서쪽에 전통 기와담장과 나무로 몸을 가린 기와집
이 머물고 있다. 그 집이 바로 성북동의 주요 명소이자 이곳의 굵직한 전통 찻집으로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수연산방이다.

수연산방은 월북작가로 국내에서도 오랫동안 좋지 않은 대접을 받았던 상허 이태준(尙虛 李泰俊
)의 집이다. 이곳은 성북동의 배꼽 부분에 해당되는 곳으로 그도 완사명월형의 기운을 듬뿍 받
고 싶었는지 1900년대 초반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이 집을 1933년에 매입하여 머물렀다.
그는 여기서 1946년까지 가족과 살았으며,
'달밤','돌다리','황진이' 등 수많은 작품이 여기서
태어났다. 이른바 그의 문학의 산실(産室)인 셈이다.

집의 규모는 대지 약 120평, 건물 면적 23.2평으로 서남향(西南向)을 하고 있다. 건물은 사랑채
와 안채를 합친 본채 하나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조그만 대문을 들어서면 아기자기하게 펼쳐진
뜨락이 눈길을 단단히 잡아매며 하늘을 가리고 선 나무와 온갖 화초(花草)가 가득해 산속의 별
장에 들어선 기분이다.
산방 동쪽에는 찻집으로 쓰이는 본채가 있으며, 서쪽에도 기와집이 있으나 이는 찻집을 확장하
면서 새로 지은 것이다. 또한 예전에는 '상심루'란 건물이 본채 앞에 있었으나 6.25전쟁 때 파
괴되었다.

죽간서옥(竹澗書屋)이라 불리는 본채는 앞부분은 팔작지붕이고, 뒷부분은 맞배지붕으로 'ㄱ'자
형 구조를 하고 있으며, 중앙 2칸을 대청으로 하고 대청 남쪽에는 1칸 크기의 안방을, 안방 앞
에는 작은 1칸 크기의 누마루가 있다. 그 뒤에 반칸 크기의 부엌을 두었으며, 대청 북쪽에는 1
칸의 건넌방이 있고, 대청과 건넌방 앞에 툇마루가 있으며, 건넌방 뒤에 1칸의 뒷방이 있다.

이태준이 월북하자 그의 남겨진 가족들은 나라의 눈치를 보며 힘들게 살았으며, 1977년에 20세
기 초반 개량 한옥의 모습을 잘보여주고 있는 점과 사랑채와 안채를 합친 특이한 구조로 인해
서울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99년에는 그의 외종손녀인 '조상명'이 이 집을 전통찻집으
로 손질하여 속세에 활짝 문을 열었다. 당시 성북동은 지금처럼 제대로 된 찻집이나 까페가 없
던 시절이니 거의 성북동의 전문 전통찻집 1호나 다름이 없다.
찻집의 이름은 이태준의 당호(堂號)인 수연산방으로 삼았는데, 수연산방이란 '오래된 벼루가 있
는 산속의 작은 집'이란 뜻이다. 왜정(倭政)까지만 해도 이곳은 산속 같은 변두리라 그 이름이
딱 어울렸으나 이제는 졸부들의 집이 주변에 가득해 주택가 속의 외로운 기와집이 되었다.

수연산방은 고풍스런 분위기와 한옥에서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는 매력으로 속
인들의 입과 입을 거쳐 찾는 이가 늘었으며, 간송미술관과 길상사, 삼청각, 심우장 등 성북동의
기라성 같은 명소들이 크게 인기를 누리면서 그 후광(後光)을 단단히 봤다. 하여 성북동에서 꼭
가봐야 직성이 풀리는 전통찻집으로 명성이 높아졌고, 돈을 삽으로 쓸어담을 정도로 호황을 누
리고 있다.
휴일에는 거의 자리를 잡기가 힘들 정도로 올 때마다 만원이라 여러 번 발길을 돌린 쓰라린 기
억이 있다. 이토록 늘어나는 손님을 해결하고자 서쪽에 새로 건물을 지었으나 역시나 역부족이
다. 하지만 더 이상의 신축이나 증축도 어렵다. 주어진 공간을 다 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
방문화재로 지정된 본채를 건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자칫 잘못 손댔다가는 고풍스런 분위기
마저 해칠 수 있다. 괜히 욕심부리지 말고 지금 그대로 두는 것이 수연산방 주인이나 손님 모
두에게 좋다.

▲ 이태준 문학의 산실 표석

▲ 뜨락에 심어진 돌기둥과 석등

* 상허 이태준(1904~?)의 간략한 삶
이태준은 강원도 철원 출생으로 호는 상허(尙虛)이다. 그의 아버지는 개화파(開化派)의 지식인
으로 활약했던 이문교(李文敎)로 함경남도 덕원감리서(德源監理署)에서 관리로 있었는데, 수구
파에 밀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여기저기를 전전하다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다
보니 이태준의 가정형편은 썩 좋은 편이 되지 못했으며, 9살에 어머니까지 별세하면서 친척집에
얹혀 살게 된다.

그는 책장사를 해가며 1920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 당시 그 학교 교사였던 이병기(李秉岐
)의 영향을 받아 고전문학의 소양을 듬뿍 쌓았다. 그 소양은 나중에 소설가로 성장하는 밑거름
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허나 학교의 무슨 비리나 문제가 있었는지 불합리한
운영에 불만을 품고 동맹휴학을 주도하다가 퇴학을 당했다.

1925년 '조선문단'에 단편소설 오몽녀(五夢女)가 입선되어 시대일보(時代日報)에 발표를 했고,
1926년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 조오치대학(上智大學) 문과에 진학해 신문과 우유 배달로 힘겹게
돈을 충당하면서 공부를 했으나 재정난을 이기지 못해 결국 중퇴하고 귀국했다.

1929년 개벽사(開闢社)에 들어가 기자로 일했고,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을 역임했으며, 1930년
에 이화여전 음악가 출신인 이순옥과 혼인하여 가정을 꾸렸다. 그리고 1933년에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성북동에 집을 구입해 본격적인 작품활동에 돌입했으며, 바로 그해 이효석(李孝石)과 김
기림(金起林), 정지용(鄭芝溶), 유치진(柳致眞) 등과 친목단체인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했다.
그 시절 평론가이던 최재서(崔載瑞)는 시는 정지용(鄭芝溶), 산문은 이태준이라 할 정도로 문장
의 달인으로 평가를 받았으며, 순수 문학의 기수, 한국 단편의 완성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순수문예지 '문장(文章)'을 주재하여 수많은 문제작품(問題作品)을 발표
했고, 역량있는 신인들을 발굴해 문단에 크게 공헌했다. 그리고 1931년 '아무일도 없소(동광,
1931.7.)'를 시작으로 '불우선생(不遇先生/삼천리, 1932.4)','꽃나무는 심어놓고(신동아, 1933
,3)','달밤(중앙, 1933.11)', 손거부(孫巨富/신동아, 1935.11)','가마귀(조광, 1936.1),'복덕방
(조광, 1937.3)' 패강냉(浿江冷/ 삼천리문학, 1938.1)','농군(문장, 1939.7)', '밤길(문장,
1940·5·6·7합병호)','무연(無緣/ 춘추, 1942.6)','돌다리(국민문학, 1943.1) 등을 냈다.
1945년 이후 민족의 과거와 현실적 고통을 비교하는 문제의식을 드러낸 '해방전후(解放前後/문
학, 1946.8)'는 그의 간결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묘사적 문장으로 속인들의 호응을 크게 받았다.

1945년 문화건설중앙협의회 조직에 참여하였고,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면
서 '해방전후'로 조선문학가동맹이 제정한 제1회 해방기념 조선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6년 여름 홍명희(洪命憙)와 함께 돌연 월북(越北)했다.
1946년 10월에는 북한의 조선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소련을 다녀왔고,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부위원장까지 지냈다. 그리고 6.25시절에는 종군작가로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허나
1952년부터 북한당국으로부터 사상검토를 당하고 과거를 추궁받았으며, 1956년 친일혐의와 우경
적인 작품을 썼다는 이유로 함흥(咸興)으로 추방당해 콘크리트 블럭 노동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 그의 행적은 전해지는 것이 없다. 아마도 소리소문 없이 처단된 듯 싶다.

그의 1945년 이전 작품은 대체로 시대적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경향을 띄기보다는 구인회
의 성격에 맞는 현실에 초연한 예술지상적 색채를 진하게 나타내고 있다. 인간 세정(世情)의 섬
세한 묘사나 동정적 시선으로 대상과 사건을 바라보는 자세 때문에 단편소설의 서정성(抒情性)
을 높여 예술적 완성도와 깊이를 세워 나갔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대표적 단편소설 작가로 평
가받는다.
1945년 이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핵심으로 활동하면서 작품에도 사회주의적 색채를 담으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북한 종군기자로 전선에 참여하면서 쓴 '고향길(1950)'이나 '첫전투(1949) 등
은 생경한 이데올로기를 여과없이 드러냄으로써 왜정 때 쓴 작품에 비해 예술적 완성도가 훨씬
떨어진다. 그런데 그가 월북한 것도 자의적인 것이 아닌 강제로 갔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1956
년 이후 숙청으로 사라진 것은 그가 철저한 사회주의적 작가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월북작가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정부에서 그의 작품을 몽땅 통제하면서 그의 이름과 작품
은 생매장을 당했다. 그렇게 어둠 속에 가려진 그의 존재는 1988년 통제에서 풀려나면서 정지용
과 더불어 다시 세상에 드러나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으며,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활
발하게 진행되어 이제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쥐가 날 정도로 등장할 정도이다.
또한 그의 외종손녀의 노력으로 그의 집은 수연산방이란 이름으로 속세에 널리 알려졌고, 자연
히 그의 이름 3자와 작품도 덩달아 알려지게 되었다.

※ 수연산방 찾아가기 (2016년 9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쌍다리(성북구립미
술관) 하차, 여기서 서쪽(내린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2분 정도 걸으면 성북구립미술관
이 나오는데, 바로 옆에 돌담을 두른 기와집이 있다. 거기가 수연산방이다.
* 운영시간은 10시부터 20시까지로 다양한 전통차를 판매한다. (가격은 인사동보다 조금 비쌈)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48 (성북로26길8 ☎ 02-764-1736)


▲ 문이 활짝 열린 수연산방 정문

▲ 뚜껑이 닫힌 우물
본채 앞에 사람 키 정도로 땅을 파 석축을 입히고 그 중앙에 우물을 팠다.
이태준 일가에게 시원한 물을 선사했던 우물은 오래전에 생명을 다해
지금은 겉모습만 남았다.

▲ 문학의 향기와 차의 향기가 한데 어우러진 수연산방 본채(죽간서옥)

죽간서옥이라 불리는 본채의 방과 툇마루에는 차 1잔의 여유를 누리는 사람들로 발을 디딜 공간
이 없다. 이곳은 구인회 회원들의 모임 장소로 우리들 귀에 매우 익숙한 이효석, 정지용도 자주
찾았다. 그들은 여기서 다과나 곡차(穀茶)를 즐기며 서로의 작품을 이야기하고 토론 했으며, 세
상 걱정에 자주 밤을 샜다고 전한다.
죽간서옥은 대나무 숲 사이의 서옥(書屋)을 뜻하며, 건물 안에는 이태준의 손때가 깃든 유물과
그가 직접 쓴 작품과 서적들이 담겨져 있다.


▲ 빛바랜 수연산방 현판의 위엄 - 이태준의 글씨로 전해진다.
빛바랜 부분이 많아서 수십 년이 아닌 200년은 거뜬히 묵은 현판 같다.

▲ 빛이 바랜 죽간서옥 현판 - 이태준 글씨
죽(竹) 글씨 위가 하얗게 바래지면서 마치 대나무에 쌓인 눈을 보는 듯 하다.

▲ 본채(죽간서옥) 앞에 소나무 분재와 여러 화분들

▲ 뜨락 중앙에 자리한 사철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34호
수연산방에서 단연 돋보이는 자연물로 아담한 키로 주변 뜨락을 햇볕으로부터 지킨다.
나이가 50년 정도 되었다고 하는데, 50년이면 이태준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아마도 그의 가족이 망중한을 달래고자 심은 듯 싶다.

▲ 뜨락을 수식하는데 조금이나마 일조하고 있는 벌개미취와 여러 꽃들


 

♠ 시민들이 지켜낸 시민문화유산 1호, 우리나라 고고미술에 평생을 바친
최순우(崔淳雨) 옛집 -
등록문화재 268호

한성대입구역(4호선) 5번 출구를 나와서 성북동 방면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왼쪽 골목에 빌라와
주택 사이로 별천지처럼 들어앉은 기와집 하나가 두 눈에 달려올 것이다. 그 집이 바로 우리나
라 고미술 연구에 크게 헌신했던 혜곡(兮谷) 최순우 선생이 말년을 보냈던 현장이다.

이곳은 삼청각(三淸閣)과 더불어 성북동의 차세대 명소로 존재감을 드러낸 지는 몇 년 되지 않
았다. 이제는 간송미술관, 길상에 버금가는 성북동의 주요 명소로 단단히 자리를 닦았는데, 자
칫 개발의 칼질 앞에 이슬로 사라질 뻔했던 것을 뜻있는 시민들이 발벗고
서 개인마다 1평씩
구입하여 지킨 문화유산으로 매우 의미가 남다르다. 시민들이 지키고 가꾼 시민문화유산 1호로
재단법인 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문화유산기금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곳에 둥지를 틀었던 최순우(1916~1984)는 1916년 4월 27일, 경기도 개성(開城)에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희순
()으로 개성 송도()고보를 나와 1943년 개성박물관에 입사했는데, 당
시 개성박물관장인 고유섭()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면서 고미술에 뜻을 굳혔다고 전한다.

1945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학예관과 미술과장, 학예연구실장을 지냈으며, 1950년
6.25가 터지자 이승만 정권의 무책임한 한강인도교 폭파로 인해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그만 북
한군에게 잡히고 만다.
서울을 접수한 북한은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당시는 북단장(北壇莊)과 보화각(葆華閣)이라 불
림>에 있던 문화유산에 군침을 흘리고 박물관에서 일했던 최순우와 소전 손재형(孫在馨)을 불러
그것을 모두 포장해 지정된 곳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최순우와 손재형은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이 힘들여 수집한 문화유산의 북송만은 어떻게든
막아보고자 기가 막힌 눈속임작전을 감행했는데 마침 운이 좋게도 감독관으로 온 공산당원 기(
奇)씨란 사람은 어벙벙하고 무식한 작자였다.

그들은 기씨에게 왜국(倭國) 판화로 된 춘화(春畵, 미성년자 관람불가급 그림)를 보여주고, 보
화각 지하실에 있던 화이트호스 위스키를 권해 허구헌날 술에 쩔게 만들었다. 또한 문화유산 선
별 기준에서 좋은 것은 나쁘다. 나쁜 것은 좋다고 속이고, 물건을 하나 가져다가 풀면 이건 아
니라고 다시 싸게 하고, 목록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다시 하게 했다.
포장이 진행되면 감독관에게 상자를 사와라, 목수가 없다 등으로 자꾸 태클을 걸고 손재형은 일
부러 생다리에 붕대를 매면서 다리가 아프다고 연극까지 하면서 9월 28일 서울 수복까지 포장되
어 상자에 담긴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3달이 다되가도록 아무런 진척이 없자 뚜껑이 열린 북한 당국은 사람을 보내 그들을 추
궁하려고 했다. 허나 그때 우리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하면서 다행히 추궁은 면하게 된다.
어쨌든 그들의 재치와 하늘의 보살핌으로 간송미술관의 유물은 모두 북송을 면할 수 있었고 그
인연으로 간송 전형필과도 가까운 사이가 된다.

6.25 이후 서울대와 고려대, 홍익대에서 미술사 강의를 했으며, 1967년 이후 문화재위원회 위원
과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대표, 한국미술사학회 대표를 역임하고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되어
박물관을 크게 발전시켰다. 1981년 홍익대 대학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84년
12월 16일 성북동 자택(지금의 최순우 옛집)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때 그의 나이 68세였다.

그는 고미술 외에 현대미술에도 조예가 깊었고, 이 땅의 박물관사에 큰 업적을 끼쳤다. 주요 논
문으로는 '단원 김홍도 재세연대고()','겸재 정선론()', 한국의
불화()','혜원 신윤복론(),'이조(李朝)의 화가들' 등이 있고 저서는 삼척동자
도 다 안다는 '무량수전(無量壽殿)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와 '한국미술사' 등이 있다.


▲ 최순우 선생의 왕년의 모습

최순우 옛집은 1930년대에 지어진 한옥으로 경기도 지방 한옥 양식을 띄고 있다. 'ㄱ'자의 본채
와 'ㄴ'자의 사랑채, 행랑채가 있으며, 전체적으로 'ㅁ'자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본채 뜨락에
는 닫혀진 우물이 있고, 그 옆에는 작은 우물이 있다. 최순우는 1976년 이 집을 구입해 1984년
숨을 거둘 때까지 거주했으며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했다.

그가 사라진 이후, 개발의 칼질이 슬슬 압박을 가해오면서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태로운 신세
가 되고 만다. 이 집을 밀어버리고 빌라를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전해 들은 뜻있는 사람들이 시민운동단체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를 창단해 그 집을 흔쾌히 매입
하면서 개발의 무자비한 칼질은 그들에 의기 앞에 보기 좋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허나 주인이 사라진 옛집은 많이 지쳐 있었다. 그래서 내셔널트러스트는 2003년부터 2004년까지
혜곡이 살았던 시절의 사진과 그의 지인들의 자문을 참고하여 사랑방과 집을 복원하고 뜨락을
꾸미면서 그 집에 '시민문화유산1호'란 별칭을 주었다. (전시공간 확보를 위해 바깥채 2칸을 증
축하는 등의 변형이 좀 있음) 우리나라 최초로 민간에서 문화유산을 구입해 지킨 유서 깊은 곳
이기 때문이다.

현재 안채는 전시 공간과 최순우기념관으로 쓰이고 있고, 동쪽 행랑채는 사무실, 서쪽 행랑채는
회의실과 휴식공간으로 꾸몄다. 그리 넓지 않은 뜨락은 전통식으로 아기자기하게 손질하여 나무
와 풀, 꽃 등이 뜰을 장식하고 있으며, 안채 앞뜰 중앙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운다
. 뒷뜨락과 모서리 공간에는 기증을 받거나 수습해온 동자상과 문인석, 맷돌, 석구(石臼) 등 다
양한 석물을 배치해 간송미술관의 뜨락을 꿈꾼다.
구석마다 그들이 자리를 채우니 넓고 알찬 느낌을 선사한다. 게다가 뒤뜰에 야외도서관을 두어
최순우가 쓴 글과 여러 서적, 그와 관련된 서적을 읽으며 독서의 여유도 누릴 수 있으며, 뒷뜰
뒤쪽에는 높은 담벼락으로 그늘이 가득해 시원하다.

안채 내부는 접근과 촬영이 통제되어 있으나 사무실에 허가를 구하면 내부 진입/촬영이 가능하
며, 쪽마루에 앉아 한옥의 미와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리며 쉬어갈 수 있는 도심 속의 새
로운 오아시스이다. 또한 주말과 휴일에는 다양한 공연과 전시회 등의 이벤트가 열려 어린이와
학생, 가족단위 나들이객들이 많이 찾는 대중적인 명소이자 살아있는 한옥 공간으로 위엄을 날
리고 있다.

길상사의 창건주인 길상화(김영한)가 자신이 일군 고급요정(대원각)을 절로 바꾸어 속세에 선물
했듯이 이 집 또한 최순우와 그의 집을 지키던 뜻 깊은 이들이 속세에 남긴 소중한 선물이자 작
품이다. 또한 2006년에는 국가 지정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당당히 누
리고 있다.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잠시 길을 멈춰 최순우 선생의 체취를 느끼며 쪽마루
에 걸터앉아 한옥의 아름다움에 심취하며 쉬어가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 최순우 옛집 찾아가기 (2016년 9월 현재)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나 성북구마을버스 02, 03번
을 타고 홍익대부속중고등학교 입구에서 하차, 또는 5번 출구를 나와서 도보 10분, 길가에 최
순우 옛집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 관람기간 : 4월 1일 ~ 11월 30일까지 (12~3월은 개방안함)
* 관람요일 : 매주 화요일 ~ 토요일 (축제기간에는 일요일도 개방, 추석 당일은 휴관)
* 관람시간 : 10시 ~ 16시 (15시 30분까지 입장 가능 / 축제기간에는 17시까지 개방)
* 관람료 : 공짜 / 20인 이상 단체는 사전 예약 요망
* 옛집 내부에서 음식 섭취 행위는 통제하고 있다.
* 건물 면적 - 대지 395.042㎡, 건평 101.92㎡, 한옥 2동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126-20 (성북로15길 9 ☎ 02-3675-3401~2)
* 내셔널트러스트 최순우 옛집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빌라와 주택들 사이에 고풍스럽게 들어앉은 최순우 옛집의 위엄
애미도 몰라본다는 천박한 개발의 칼날도 고개를 푹 숙인 현장이다.

▲ 속세를 향해 문을 연 최순우 옛집 대문

▲ 안채 앞뜰에 높이 솟아 옛집에
그늘을 드리우는 소나무


▲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나타나는 안채 앞뜰

▲ 최순우 옛집 관리사무실로 쓰이는 동쪽 행랑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나는 내것이 아름답다' 등의 최순우 저서와
전통차를 판매한다.

▲ 소나무 옆에 뚜껑이 닫힌 죽은 우물
최순우와 그 이전 주인 일가의 식수를 제공했던 네모난 우물
허나 지금은 뚜껑이 닫힌 채 겉모습만 남아있다.

▲ 여러 석물과 방석, 서적들이 놓인 뒷뜨락 남쪽(야외도서관)
돌의자에 놓인 책은 마음껏 볼 수 있으며, 돌의자나 안채 뒷쪽 쪽마루에
걸터앉아 독서에 임하면 된다.

▲ 동쪽 행랑에서 바라본 뒷뜨락

▲ 조그만 맷돌과 빗물이 고인
석구(石臼, 돌통)

▲ 표정이 앳된 보이는 조그만 동자상
몸집이 너무 작아 딴 마음(?)을 품기에 매우
좋겠지만 그도 엄연한 돌이다.


▲ 돌이 박힌 뒷뜨락 돌길과 장승 2기 (오른쪽 장승은 수풀에 가려짐)

돌길이 우리네 인생처럼 너무나 짧다.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끝나기 때문이다. 그 앞에는 재미
나게 생긴 장승 2기가 돌길을 지키고 있어 이곳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나쁜 기운도 그들의 얼굴
앞에 자신의 본분도 잊은 채 발길을 돌릴 것이다.


▲ 뒷뜨락에 자리한 둥그런 탁자

둥그런 탁자 주변에는 머리에 방석을 쓴 키 작은 돌의자 7개가 둘러져 있다. 저들은 독서와 이
야기꽃을 피우는 공간으로 탁자에는 최순우 옛집과 내셔널트러스트 관련 자료가 놓여져 있다.


▲ 뒷뜨락 장독대
장독대에는 무언가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으리라 생각하겠지만
저들은 속이 빈 장식용이다.

▲ 옛집의 서쪽 모서리를 지키는 2기의 조그만 문인석(文人石)
저들의 표정에 부질없는 세월의 고된 모습이 묻어난 듯 하다.

▲ 시민들의 조촐한 휴식공간
안채 뒤쪽 쪽마루

▲ 최순우 선생의 기품과 학식이 고스란히
묻어난 안채 내부 - 복원하는 과정에서
꾸며진 부분도 적지 않다.


▲ 최순우 옛집의 뒷통수 (안채 서쪽 담장길)

흙으로 만든 토담과 시냇물의 징검다리처럼 박석(薄石)이 박힌 정겨운 담장길, 담장 너머가 자
연의 공간이거나 한옥이었다면 그 운치는 곱배기가 되었을텐데, 빌라와 슬레이트 지붕이 그 자
리를 대신하니 그나마 우러난 정겨움과 운치도 절반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 지우개가 있다면 담
장 밖 풍경을 싹싹 지우고 싶을 뿐이다.


▲ 서쪽 행랑채에 진열된 여러 도장과 최순우의 어록 1구절
혜곡의 손때가 묻어난 도장들이다.

▲ 서쪽 행랑채에 진열된 도장과 조그만 자기들 - 혜곡의 유품

▲ 안채 거실에 걸린 최순우의 사진과 그의 일대기가 적힌 장문의 안내문


▲ 마루에 놓인 커다란 함지박

▲ 개성만두집인 인사동 궁에서 먹은 떡만두국

이렇게 성북동을 둘러보고 시내로 나와 인사동(仁寺洞)을 찾았다. 어느덧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
오르는 저녁밥 생각이 간절해지는 시간이라 무엇을 먹을까 궁리를 하다가 오랜만에 경인미술관
맞은편에 있는 개성만두집 궁으로 들어갔다.
이 집은 인사동에 딱 어울리게 한옥으로 되어있다. 다행히 자리가 널널하여 방으로 들어가 자리
를 폈는데, 나는 떡만두국을 먹고 여인네들은 조랭이떡만두국을 먹었다. 만두국만 먹으면 허전
할 듯 싶어서 전을 하나 시켰는데, 가격이 그새 세월의 무게가 단단히 더해져 죄다 1만원을 호
가한다. 녹두전을 먹을까 하다가 가격이 그나마 낮은 김치전을 주문했다.

제일 먼저 배추김치와 무김치, 나박김치로 무장된 밑반찬이 펼쳐졌는데, 나박김치가 이곳의 자
랑으로 김칫물이 매우 달콤하고 시원하다. 그래서 거의 3덩이나 비웠다. 그리고 본 메뉴인 떡만
두국이 나타나 우리의 심판을 기다린다. 만두는 경기도 개성식으로 왕만두처럼 매우 두텁다. 육
수도 꽤나 숙성시킨 듯, 맛이 얼큰한 것이 좋았고, 떡과 소고기도 입맛에 맞는다. 일행들도 조
랭이떡만두국을 먹느라 정신이 없어 이내 그릇을 비운다.


▲ 떡만두국의 위엄

▲ 김치전의 위엄

만두국을 입에 대기가 무섭게 김치전이 앞에 차려진다. 김치전은 동그란 큰 그릇에 담겨져 있는
데, 조금 맛이 짠 것 같다. 그래도 배가 고파서인지 만두국과 함께 전도 말끔히 비워 어느 것도
남기지 않았다. 만두국의 가격은 인사동이란 프리미엄 때문인지 시중보다는 조금 비싸며 물가가
오른다는 핑게로 계속 가격을 올리고 있으니 이러다가 10,000원을 주고 만두국을 먹고, 파전 하
나에 2만원을 호가하는 시대가 오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아무리 맛이 좋아도 만두국 주제에
1만원이나 주고 먹기에는 좀 아깝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5월 성북동 나들이는 기분 좋게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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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6년 9월 2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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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 늦가을 나들이 (숙정문~백악마루~창의문)


' 서울의 영원한 북현무(北玄武), 북악산(백악산) 나들이 '

북악산 한양도성길 (백악쉼터 부근)

▲  북악산 한양도성길

숙정문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  숙정문

▲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가을이 한참 절정을 누리던 11월 한복판, 일행들과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을
찾았다.
오후 2시, 한성대입구역(4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1111번(번동↔성북동)을 타고 성북동 명
수학교 종점으로 이동했다. 서울 도심 속의 전원(田園)마을로 일컬어지는 성북동(城北洞)은
나의 즐겨찾기 명소로 정말 지겹도록 찾은 곳이건만 매년 10번 이상 발을 들일 정도로 나의
마음을 제대로 앗아간 곳이다.

성북동 종점에서 만국기(萬國旗)가 펄럭이는 '우정의 공원'을 지나 삼청각으로 인도하는 조
그만 길로 들어선다. 서울 도심이 바로 지척이건만 도심을 비웃듯 산골 풍경을 여실히 비춘
다. 길 왼쪽에는 진하게 숲이 우거져 있고, 북악산이 베푼 조그만 계곡이 졸졸졸~~♪노래를
하며 흘러가는데, 그는 성북천이란 간판을 달고 속세로 흘러간다.
울긋불긋 타오른 나무들은 늦가을의 절정을 누리고 있고, 그들이 뿌려놓은 은행잎과 단풍잎
은 귀를 접고 누워 있다. 은행잎은 누가 쓸었는지 가장자리로 수습되어 자연산 황금빛 카페
트를 자아낸다.

길의 막다른 부분에 이르면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와 함께 약간의 오르막 길이 펼쳐지는데,
그 길을 오르면 바로 삼청터널 북쪽이다. 삼청터널은 성북동에서 도심을 이어주는 터널인데,
겨우 2차선 크기로 폭이 좁으며, 4발 수레의 왕래가 빈번해 삼청각(三淸閣) 앞에 닦여진 횡
단보도에서 보행자용 신호 버튼을 눌러 파란불을 소환해 건너는 것이 좋다. 물론 수레의 눈
치를 적당히 보며 건너가도 된다.

길을 건너면 홍련사(紅蓮寺)로 가는 길과 북악산으로 가는 길이 나란히 나타난다. 초행자는
자칫 햇갈리기가 쉬운데, 오른쪽 평탄한 길이 홍련사로 가는 길이며, 왼쪽 계단길이 북악산
과 김신조루트로 가는 길이다. 홍련사로 가는 길은 단지 홍련사만 이어줄 뿐, 다른 곳과 이
어지지 않으며, 절 입구에 정열적으로 타오른 단풍나무가 정처없는 나그네의 마음을 앗아간
다. 저 길로 들어서면 나도 저들처럼 붉게 물드는 것은 아닐까?


▲  늦가을에 잠긴 삼청각, 숙정문안내소 가는 길

▲  늦가을이 화사하게 불을 질러놓은 붉은 단풍이 마중하는
홍련사(오른쪽) 입구와 북악산, 숙정문 입구(왼쪽)


 

♠  북악산(백악산) 입문

▲  북악산으로 오르는 산길 (숙정문안내소 직전)

북악산으로 인도하는 계단길을 오르면 2007년에 북악산 개방 기념으로 조림(造林)한 것을 기리
고자 세운 표석이 있고, 그 표석을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북악
하늘길 제1산책로와 제2산책로(김신조루트)로 이어지며, 직진을 하면 북악산 주능선의 주요 관
문인 숙정문안내소이다.


▲  북악산의 관문이자 검문소, 숙정문안내소

숙정문안내소에서 출입신청서를 작성하여 신분증과 함께 제출하면 출입 허가를 알리는 목걸이용
패찰을 준다. 물론 신분증도 돌려준다. 단 신분증이 없으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들어가지 못하
며, 입장시간(9~16시, 겨울은 15시까지)이 지나면 이 역시 출입이 불가능하다.

숙정문안내소를 지나면 속세살이처럼 가파른 길이 숙정문까지 이어진다. 시작부터 힘든 길이니
북악산이 그리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님을 느끼게 한다. 허나 다행히 북악산을 정비하면서 목조
계단길을 만들어 통행이 조금은 편해졌으며, 가파르기로 이름난 북악산 주능선과 비교하면 이
정도는 간단한 시험 수준이다.


▲  숙정문으로 오르는 산길 (숙정문안내소 이후)

▲  숙정문으로 오르는 계단길

※ 서울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北岳山, 백악산(白岳山)> - 명승 67호
서울 도심 북쪽에 가파르게 솟아난 북악산(342m)은 서쪽의 인왕산(仁王山, ☞ 관련글 보러가기)
, 동쪽의 낙산(駱山, 낙타산, ☞ 관련글 보러가기), 남쪽의 목멱산(木覓山, 남산)과 더불어 서
울 도심을 지키는 4대 산의 하나이자 이들의 맏형이다. 이들 4개의 산은 서울의 안쪽을 둘러싸
고 있어 내사산(內四山)이라 불린다.

서울 도심의 지형은 내사산에 감싸인 분지(盆地)로 조선 태조 때 개경(開京)에서 서울로 국도(
國都)를 옮기면서 이들 산의 능선을 따라 18.2km의 도성(都城)을 쌓았다. 그리고 풍수지리에 따
라 북쪽의 북악산을 북현무(北玄武)로 하여 서울의 주산(主山)으로 삼았으며, 인왕산을 우백호(
右白虎), 낙산을 좌청룡(左靑龍), 남산을 남주작(南朱雀)으로 삼았다.
이렇게 도성을 만들고 한강 남쪽에 솟은 관악산(冠岳山, 629m)을 신하의 산이란 뜻의 조산(朝山
)으로 삼았는데, 문제는 주산인 북악산보다 훨씬 높고 산세가 우람해 거의 신하가 왕을 누르고
있는 형세였다. 게다가 관악산과 그 서쪽에 자리한 호암산(虎巖山)이 각각 활활 타오르는 불의
모습과 호랑이의 모습으로 서울을 응시하고 있는지라 조선 위정자들은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
환으로 서울 북쪽에 있는 북한산(삼각산)을 서울을 지키는 진산(鎭山)으로 삼아 북악산을 보조
하게 하고 관악산의 기운을 누르고자 했다. 북한산이 관악산보다 키도 높고 산세도 훨씬 장대하
기 때문이다.

북악산은 하얀 바위가 많아 원래 백악산(白岳山)이라 불렸으며, 종로구에서는 어디서든 그가 보
인다. 마치 제주도 어디서나 한라산(漢拏山)이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조선시대부터 서울을 상징하는 산으로 남쪽 자락에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景福宮)을 세웠
으며, 그 북쪽(지금의 청와대)에는 넓게 후원을 두었다. 지금은 청와대(靑瓦臺)와 국무총리공간
이 둥지를 틀고 있어 이 땅의 정치, 행정 1번지의 역할은 변함이 없다.

북악산 주능선에는 한양도성(漢陽都城)이 파노라마처럼 길게 펼쳐져 있다. 정상 동쪽에는 도성
의 북문인 숙정문이 있고, 인왕산과 경계를 이루는 자하문고개에는 창의문(彰義門)이 고색의 모
습으로 고개 중턱을 지킨다. 예나 지금이나 서울을 지키는 중요한 요충지로 해방 이후까지 주능
선과 북쪽 능선은 어느 정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으나 1968년 1.21 사건 이후 북악산 대부분
이 금지된 땅이 되고 말았다.

주능선과 조금 떨어진 삼청동(三淸洞)과 청운동(淸雲洞)은 한양도성의 북쪽 변두리로 숲이 무성
했다. 삼청동계곡과 대은암(大隱巖)계곡, 백운동(白雲洞)계곡, 청송당(聽松堂)계곡 등이 흘렀으
며, 풍경이 매우 고와 왕족과 귀족들의 별장 및 풍류(風流) 장소로 각광을 받았다. 또한 삼청공
원과 숙정문 남쪽은 서울 여인들의 봄꽃놀이 장소로 유명했다고 전한다. 대은암계곡 바위글씨를
비롯해 당시의 여러 문화유적이 아련히 남아있으며, 북악산 북쪽 백사골(백사실)에는 백석동천
이란 별서(別墅)유적이 남아 있다.

북악산은 북쪽으로 북한산과 이어져 있고 숲이 무성하다보니 예로부터 호랑이가 자주 나타났다.
그들은 궁궐 후원과 북촌(北村)까지 침투했는데, 태종(太宗)이 경복궁 후원을 거닐다가 호랑이
의 습격으로 위기를 겪은 적도 있었다. 또한 다른 호랑이와 달리 곶감 따위는 무서워하지 않았
다고 하며, 대신 수진궁(壽進宮) 귀신을 무서워한다고 했다. 그래서 인왕산과 북악산 호랑이는
수진궁 귀신이어야 쫓을 수 있다는 속담이 생겨났다. (수진궁은 혼인을 못하고 죽은 왕족의 사
당임)

1968년 이후 빗장을 철저히 닫아걸던 북악산은 2006년 4월 1일 홍련사에서 숙정문을 거쳐 촛대
바위까지 부분 개방되었으며, 그것도 인터넷 예약을 통해 1일 4회만 출입이 가능했다. 이후 전
면 개방을 위해 쉼터와 의자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어 2007년 4월 5일, 말바위부터 북악산 정상
을 거쳐 창의문까지 전 구간이 부분 개방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2009년 북쪽 능선인 북악하늘길
(김신조루트)이 활짝 열려 시민의 품으로 돌아어왔다. 특히 이 길은 약간의 통제구역이 있긴 하
지만 제약이 심한 주능선과 달리 시간 제약이 없다.

북악산은 예로부터 소나무가 유명하여 조선 조정에서 특별히 옆구리에 끼고 관리했으며, 왜정(
倭政) 이후 관리 소홀과 마구잡이 벌채로 지금은 주능선 일대에 좀 남아있다. 그 외에는 간간히
소나무가 목격된다. 또한 오랫동안 금지된 곳으로 있다보니 식물들이 마음 놓고 뿌리를 내려 숲
이 원시림마냥 매우 울창하다. 숙정문 주변에는 팔배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수목이 무성
하여 새들이 많이 산다.
그러다보니 서울 도심의 하늘을 정화시켜주는 허파 역할까지 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인왕산과
북한산, 관악산과 더불어 대자연 형님이 서울에 내린 소중한 선물이자 꿀단지로 앞으로도 지금
의 모습 그대로 삼삼한 자연의 공간으로 서울 속에 있었으면 좋겠다. 하긴 산 주변에 국가의 예
민한 시설이 많으니 도읍을 옮기지 않는 이상은 개발의 칼질도 자유롭게 산을 범할 수 없을 것
이다.


▲  북악산 북쪽 산줄기 남마루에서 바라본 북악산 주능선(가운데 산줄기)

※ 북악산 주능선과 한양도성길
2006년 4월부터 순차적으로 개방된 주능선은 창의문에서 정상을 거쳐 말바위, 와룡공원으로 이
어지는 4.3km 구간으로 숙정문 안내소와 말바위 안내소, 창의문 안내소를 통해 입장할 수 있다.
그외에는 절대 출입금지이다. 또한 탐방구간(말바위안내소~창의문안내소)을 절대로 벗어나면 안
되며 도처에 군인이 지키고 서 있으니 엉뚱한 마음을 품으면 곤란하다. (말바위안내소~말바위~
삼청공원/와룡공원 구간은 완전 개방된 구간으로 시간 제한 없음)

주능선에서 만날 수 있는 명소로는 숙정문과 1.21사태소나무,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촛대바위
, 청운대 등이며, 군사시설이 옥의 티처럼 널려 있어 북악산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실감케 한
다. 만약 서울이 수도가 아니었다면 북악산은 꽤나 자유로웠을 것이다.

북악산 정상과 청운대에서는 서울 도심이 두 눈 아래로 펼쳐져 조망(眺望)이 천하 일품이며, 숙
정문과 말바위에서는 성북동과 성북구 서북부 지역이 보이고, 한양도성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평창동(平倉洞)과 부암동, 인왕산, 북한산이 차례대로 보여 그야말로 움직이는 조망대이다.

※ 북악산 한양도성 찾아가기 (2015년 11월 기준)
① 창의문 안내소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자하문고개(윤동주문학관) 하차, 창의문 옆에 바로 안내소가 있다.
② 숙정문 안내소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동 종점에서 하차, 도보 15분
③ 말바위 안내소 - 지하철 3호선 안국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성대후문
   (와룡공원)에서 하차, 성북동 방면으로 3분 걸으면 한양도성이 있는 와룡공원이다. 여기서
   성곽 북쪽 자락길을 10분 정도 가면 말바위로 오르는 나무 계단이 나오며, 계단을 올라 서쪽
   으로 가면 말바위안내소이다. 또는 4호선 혜화역(1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8번을 타
   고 명륜동 종점에서 20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 이들 안내소는 주차시설이 없으며, 부근에 딱히 수레를 세울 곳이 없으므로 대중교통을 이용
  하기 바란다.

★ 북악산 관람정보 (2015년 11월 기준)
* 북악산(한양도성) 입장시간은 9시부터 16시까지이며, 동절기(11~3월)는 10시부터 15시까지다.
  퇴장은 무조건 18시(동절기는 17시)까지 마쳐야 된다.
* 쉬는 날 -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화요일에 쉼) / 입장료 없음
* 탐방구간
① 창의문 ~ 북악산 정상 ~ 청운대 ~ 숙정문 ~ 말바위안내소 ~ 삼청공원/와룡공원/성북동
② 숙정문안내소 ~ 숙정문 ~ 청운대 ~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 창의문
* 북악산 탐방 유의사항
① 지정된 코스를 절대로 벗어나면 안된다. 잘못하면 총 맞을 수 있다.
② 탐방로 전 구간은 금연, 금주, 애완동물 출입 제한
③ 안내소(창의문, 숙정문, 말바위)에서 출입신고서를 작성해야 되며,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해
   야 된다. 신분증이 없으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못들어간다.
④ 안내소 외에는 딱히 편의시설이 없다. 해우소는 안내소에만 있으며, 간단한 먹거리는 안내소
   주변이나 산길 곳곳에 마련된 쉼터에서 먹으면 된다.
⑤ 사진 촬영은 숙정문과 촛대바위, 청운대, 북악산 정상, 백악쉼터, 1,21사태소나무, 돌고래쉼
   터, 창의문에서만 가능하다. (그 밖에 장소는 곤란함)
* 문화유산 해설 : 3~11월까지 문화유산 해설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매일 2회<10시(11월은 10시
  30분), 14시> 운영하며, 각각 말바위와 창의문을 출발하여 곳곳을 설명해준다. 별도의 신청은
  받지 않으며, 출발시간까지 집결지에 모인 탐방객에 한해 가이드를 해준다.
* 안내소 연락처 (북악산 한양도성 홈페이지는 이곳을 클릭한다)
① 말바위 (☎ 02-765-0297~8, 팩스 02-765-0296)
② 숙정문 (☎ 02-747-2152, 팩스 02-747-2153)
③ 창의문 (☎ 02-730-9924~5, 팩스 02-730-9926)


 

♠  한양도성의 북문이자 오랫동안 통제구역으로 묶인 금지된 성문,
숙정문(肅靖門) - 사적 10호

숙정문안내소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숙정문이 모습을 비춘다. 북악산 주능선에 자리한 숙정문은
한양도성의 북문(北門)으로 남대문<숭례문(崇禮門)>, 동대문<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돈의
문(敦義門)>과 함께 한양 4대문의 하나였다. 북대문(北大門), 북문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가파른
산능선에 자리해 있어 도성의 대문이라기도 보다는 산성(山城)의 조촐한 성문 분위기가 강하다.

문의 이름인 숙정(肅靖)은 엄숙히 다스린다는 뜻으로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이었다. 1396
년 지금보다 약간 서쪽에 조성되었는데, 1413년(태종 13년) 풍수학자인 최양선(崔揚善)이 태종
에게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아 길을 내어 지맥(地脈)을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
다'
건의하여 이들 문을 닫아걸고 소나무를 잔뜩 심어 통행을 금지시켰다. 그래서 무늬만 문이
된 것이다.
허나 숙정문을 품은 북악산 주능선은 도성 내부와 바깥이 훤히 바라보여 서울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러다보니 백성들의 출입을 거의 통제했고, 주변이 첩첩한 산주름 속이라 교통의
기능은 별로였다. 겨우 성북동과 북악산 북쪽 능선이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옛날 성북동은 산
지에 선잠단(先蠶壇) 같은 국가 제단만 있었음>
그리고 평소 때와 비가 많이 올 때는 숙정문을 닫아 걸다가 가뭄이 심할 때 남대문을 닫고 이
문을 열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는 1416년(태종 16년) 제작된 기우절목(祈雨節目)에 따라
북쪽은 음(陰). 남쪽은 양(陽)을 상징하는 음양의 원리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니 통행문으로서
의 존재감보다는 도성 수비와 음양의 원리를 따지는 풍수지리적인 존재감이 더 컸던 것이다.

1504년(연산군 10년) 성곽을 보수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으며, 숙청문이 언제 숙정문으로
간판을 갈았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1523년부터 숙정문 이름이 등장했다. 숙정문 외에도 북정문(
北靖門)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이들 명칭이 같이 쓰이다가 숙정문으로 통합되었다.

1968년 1.21사태 이후 북악산 대부분과 숙정문 일대가 금지된 땅이 되었으며, 1976년 북악산 일
대 성곽을 손질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문루는 비록 새 건물이지만 성벽을 이루는
성돌에는 고색의 때가 만연해 중후한 멋을 보인다.
매년 봄이 되면 서울 여인들이 숙정문 남쪽에서 봄꽃놀이를 즐겼다고 전하며, 그거 외에는 딱히
숙정문 주변에 대한 옛 사람들의 시(詩)나 문구(文句)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2006년부터 다시 속세에 개방되어 제한적이긴 하지만 성문 관람이 가능하다. 허나 문 좌우 성벽
과 숙정문안내소 방면만 통행이 가능하며, 남쪽에는 삼청동으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지만 금줄이
쳐져 있어 절대로 갈 수 없다.

숙정문 문루에 올라서면 북악산 북쪽 능선과 부자 동네로 콧대가 드센 성북동 일대가 훤히 바라
보이며, 대자연이 스케치한 가을 단풍이 산자락을 곱게 수 놓아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자
아낸다. 다만 문 남쪽은 울창한 수목이 시야를 방해하여 조망은 크게 떨어진다.
(숙정문은 사적 10호로 지정된 '한양도성'의 일원임)


▲  숙정문의 수수한 뒷모습

▲  세상을 향해 활짝 문을 연 숙정문
다른 성문과 달리 천정에 그림이 없다. 그냥 맨들맨들한 성돌만 보일 뿐이다.

▲  숙정문 동쪽 협문

▲  서쪽에서 바라본 숙정문 문루


▲  숙정문에서 바라본 천하 (1) 성북동 지역
눈이 시리게 맑은 가을 하늘 아래로 북악산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성북동이 두 눈에 바라보인다. (왼쪽에 보이는 기와집이 삼청각)

▲  숙정문에서 바라본 천하 (2) 울긋불긋 타오른 북악산 북쪽 능선
북악산길이 흐르는 북악산 북쪽 능선이 가까이에 바라보인다. 사진 왼쪽에
희미하게 보이는 기와집이 북악산길의 상징인 북악팔각정이다.

▲  힘차게 뻗은 숙정문 서쪽 성벽
서울 수비를 향한 굳건한 마음이 뭉쳐 단단한 성벽이 되었다.
성곽을 따라 북악산으로 오르면 시야에 범위도 점차 넓어진다.


 

♠  북악산 촛대바위와 청운대

▲  촛대바위

숙정문에서 서쪽으로 10분 정도 오르면 왼쪽에 촛대바위가 있다. 아마도 촛대처럼 생겨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 듯 싶은데, 현실은 바위의 북쪽과 동쪽 면 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곳에서 보
면 촛대처럼 보이지도 않아 그저 그런 바위로만 보인다. 그를 제대로 보려면 바로 정면인 남쪽
에서 봐야 되는데, 남쪽은 통제구역이라 발도 못들이게 하니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바위 정상
역시 금지된 곳이니 괜히 바위 위에 올라타는 일이 없도록 한다.

촛대바위는 우리의 아픈 역사가 서려있다. 바로 왜정이 이 땅의 혈을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박았
던 추악한 곳이기 때문이다.
왜정은 1920년대 경복궁과 일직선이 되는 이곳에 말뚝을 꽂았다. 사람으로 치면 머리의 정수리
가 되는 부분이다. 즉 조선 땅의 머리 부분을 아작 내어 이 땅을 영원히 통치하려는 의도를 심
은 것이다. 다행히 그 말뚝은 제거되었다.


▲  촛대바위와 그에게로 인도하는 나무길
나무 난간 너머와 바위는 감히 발도 들일 수 없는 금지된 구역이다.

▲  촛대바위에서 청운대로 오르는 성곽
성곽을 따라 이어진 북악산의 명물인 소나무의 푸른 물결

▲  촛대바위와 청운대 중간의 성곽 바깥 길

촛대바위를 지나면 길의 경사가 점점 각박해지면서 암문(暗門)이 하나 나온다. 여기서 암문 밖
으로 나가서 곡장이라 불리는 높은 곳까지 성곽 바깥 길을 이용해야 되는데, 이는 성곽에 군대
시설이 있기 때문에 부득이 그렇게 길을 낸 것이다.
길 옆에는 철조망이 둘러져 있고, 그 너머로 북한산, 평창동 등이 바라보여 마치 휴전선 너머의
미지의 땅을 보는 듯 하며, 저 길의 끝에 이르면 성 안으로 인도하는 계단길이 나온다. 거기서
다시 성곽길이 이어진다.


▲  청운대(靑雲臺) 표석 (해발 293m)

촛대바위에서 성 바깥, 안쪽을 들락거리며 20분 정도 오르면 북악산에서 2번째로 높은 곳인 청
운대에 이른다.
청운대는 푸른 구름의 지대란 뜻으로 근래에 붙여진 이름인 듯 싶다. 이곳은 공간이 넓고 의자
가 마련되어 있어 잠시 두 발을 멈추고 쉬어가기에 좋으며, 북쪽으로 성북동과 북한산, 남쪽으
로 남산과 서울 도심이 바라보여 조망 또한 괜찮다. (도심 쪽이 괜찮음)


▲  소나무가 짧게 그늘을 드리운 청운대

▲  청운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  청운대에서 바라본 북악산 정상

▲  여장 성돌에 새겨진 빛바랜 글씨들

청운대를 지나면 안내문이 하나 나오는데, 그 안내문에 따라 여장을 잘 살펴보면 글씨들이 희미
하게 아른거릴 것이다. 이 글씨들은 도성을 축조하면서 새긴 공사 구역 표시와 공사 담당 고을,
공사 일자와 공사 책임자의 직책과 이름으로 이런 것이 새겨진 성돌이 한양도성에 여럿 있다.

1396년 한양도성을 만들 때 성곽 전구간을 600자(약 180m) 단위로 끊어 97구간으로 구획하고 천
자문(千字文) 순으로 공사 구역을 표시했다. 북악산 정상에서 천(天)으로 시작해 지(地), 현(玄
)... 순으로 해서 북악산 정상 동쪽에서 조(弔)로 끝나며, 구역 다음에 공사 일자와 공사 책임
자의 직책, 이름을 새겼다. 이런 공사 실명제는 조선 후기까지 계속 되었다. 이곳 성돌에는 의
령시면(宜寧始面)이라 쓰여 있어 의령(경남) 시작 지점을 뜻한다.


▲  남북분단의 쓰라진 비극 - 1,21사태 소나무

청운대를 지나면 성돌 글씨와 함께 1.21사태 소나무라 불리는 소나무를 만나게 된다. 북악산하
면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1968년 김신조 공비 패거리의 서울 침공 사건인 이른바 1.21사태로
그들과 총격전을 주고 받은 현장이다. 북악산에는 그와 관련된 쓰라린 장소가 많은데, 이 소나
무와 호경암이란 바위에는 총탄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호경암이 있는 북쪽 능선에는 김신조 일
당이 도망쳤다고 전하는 김신조루트(북악하늘길 제2산책로)가 있다.

때는 1968년 북한은 김신조 일당 31명을 보내 청와대를 공격케 했다. 임진강을 건너 파주와 양
주의 여러 산과 북한산 서쪽 자락, 창의문을 거쳐 1월 21일 도심까지 용케 들어온 김신조 패거
리는 청와대를 코앞에 둔 청운동(淸雲洞)에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崔圭植, 1932~1968)이 이끄
는 경찰에게 저지를 당했다.
경찰이 검문을 한다며 그들의 길을 막자 공비들은 순간 발작하여 외투 속에 감춘 기관단총을 꺼
내 먼저 공격을 가했다. 불행히도 최서장은 가슴과 배에 관통상(貫通傷)을 입어 쓰러지고 '끝까
지 청와대를 사수하라!!'
명령을 내리며 비장한 최후를 마쳤다.
서장의 죽음에 애끓는 복수심에 불탄 경찰은 더욱 반격의 속도를 올려 공비들 상당수를 벌집으
로 만들었으며, 이때 김신조를 비롯한 살아남은 공비들은 목을 붙잡고 북악산과 인왕산으로 줄
행랑을 쳤는데, 그들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바로 이 소나무 부근에서 격전이 일어나 15발이 나무
에 박혔다.

이후 북악산 북쪽 능선인 호경암에서 격전이 있었고, 1월 21일 이후 14일의 토벌 끝에 김신조와
도주 1명을 제외한 29명을 사살했다. 도주 1명은 북한까지 도망을 쳤으며, 토벌된 공비의 시신
은 파주시 적성면 적군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김신조는 투항해 이 땅 어딘가에 살고 있다.

우리는 김신조 일당의 난입 사건을 1.21사태라 부르며, 이 사건을 계기로 단단히 뚜껑이 폭발한
박정희 대통령은 바로 그해 4월 1일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고, 군작전도로인 북악스카이웨이를 콩
볶듯 급히 닦게 했다. 예비군 창설로 인해 이 땅의 남자들은 군제대를 하고도 8년이나 예비군훈
련을 받아야 되는 불이익을 받게 되었다.

북악산에 널린 수많은 소나무의 하나이지만 이제는 북악산의 명물로 단단히 자리매김을 하였다.
허나 좋은 뜻에서 그리 되면 모르지만 호경암과 함께 1.21사건 같은 우울한 사건으로 명물이 된
것이니 소나무 자신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차라리 이름 없는 소나무로 조용히 묻히는 것
이 좋았을 것이다. 어쩌다가 안좋은 쪽으로 명물이 되었는지 참. 나무나 사람이나 운과 시간을
잘 만나야 된다.
게다가 호경암처럼 당시에 총탄 흔적까지 진하게 안고 있으니 서로 총을 겨누며 대치하는 남북
분단의 비정한 현실을 전율이 일도록 안겨주는 유쾌하지 못한 곳이다.


▲  1,21사태 소나무의 총탄 흔적
그때 총탄이 박힌 자리에 빨간색과 흰색으로 흉하게 표시를 해두었다.


 

♠  북악산 정상(백악마루)에서 창의문까지

▲  북악산 정상에 박힌 바위

청운대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북악산(백악산)의 정상인 백악마루에 이르게 된다. 백악마루는 해
발 342m로 마루는 순수 우리말로 정상을 뜻한다.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북악산 정상은 청운대보다 공간이 조금 넓으며, 정상 중앙에
는 백악산의 정상 비석과 북악산 옛모습 복원 기념비가 있다. 그리고 정상 북쪽에는 사람 키보
다 2배 정도 높은 굵직한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꼭대기가 실질적인 북악산 정상이다.

정상 남쪽에는 청운대와 마찬가지로 소나무가 가득해 그윽한 솔내음을 전해주며, 지정된 테두리
안에서만 움직이고 사진을 찍어야 된다. 테두리를 넘으면 절대로 안된다. 여기서는 동서남북 어
디든 촬영이 가능하며, 북쪽으로는 평창동과 북한산, 동쪽으로는 성북동과 서울 동북부지역, 서
쪽은 부암동과 인왕산, 그리고 남쪽으로 서울 도심과 남산이 속시원히 바라보여 조망이 가히 천
하일품이다. 이곳에 올라 저 발아래 펼쳐진 천하를 보고 있자면 그 천하가 마치 내 것이 된 듯,
잠시나마 제왕(帝王)마냥 즐거운 기분이 밀려온다. (허나 현실은 시궁창..)

세계 최대의 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을 발 아래 두고 굽어볼 수 있는 몇 안되는 곳으로 이곳만
큼 조망이 좋은 곳도 없다. 서울 도심을 둘러싼 산 가운데 가장 높은 산이고 오랜 세월 서울 땅
을 지켜온 북현무로서의 면모와 위엄이 느껴진다.


▲  하얀 돌로 다듬은 백악산 정상 표석

▲  북악산 정상에서 소나무 너머로 보이는 서울 도심과 남산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성북동과 서울 동북부 지역
산속에 묻힌 동네가 성북동이고, 그 산 너머로 성북구와 강북구, 노원구 등
서울 동북부 지역이 앞다투어 바라보인다.

▲  북악산 꼭대기 바위에서 바라본 정상부
정상부는 대머리처럼 아무 것도 없고, 그 주변에 소나무와 여러 식물을 심었다.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평창동과 북한산(삼각산)
북악산을 받쳐주는 서울의 듬직한 진산, 북한산이 북악산을 굽어본다.
그 남쪽 산자락에 부자 동네 평창동이 둥지를 틀었다.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인왕산
인왕산 너머로 은평구, 서대문구 등의 서울 서북부 지역과
서울/고양시 경계를 이루는 산들이 보인다.

▲  백악쉼터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인왕산
늦가을 오색 단풍의 물결이 부암동 일대를 화사하게 물들였다.


북악산 정상에서 창의문으로 가는 길은 북악산에서 가장 고달픈 구간으로 각박한 속세살이만큼
이나 가파르다. 내려갈 때는 올라가는 것보다야 부담이 적겠지만 급하게 펼쳐진 성곽길에 아찔
함마저 일 정도이다. 반면 창의문에서 올라갈 때는 각박한 경사를 자랑하는 성곽길에 저걸 어떻
게 올라가나 정말 까마득하다. 거의 30~40도 경사의 야속한 성곽길을 올라야 되니 말이다.
그래서 등산이 딸리거나 노인과 어린이들은 가급적 숙정문이나 말바위에서 오르길 권한다. 어차
피 거기도 힘들긴 마찬가지지만 서서히 경사가 급해지는 구간이라 덜 힘들다.

정상에서 10분 정도 내려가면 백악쉼터라 불리는 조촐한 쉼터가 나온다. 여기는 북악산 개방을
위해 만든 공간으로 역사적인 의미는 없다. 이곳에서도 사진 촬영은 가능하나 쉼터 자체는 찍을
거리가 없으며, 성곽과 성밖에 펼쳐진 천하를 찍으면 된다.


▲  백악쉼터에서 바라본 북악산 북쪽 줄기와 평창동, 그리고 북한산의 위용
북악산 북쪽 줄기는 늦가을이 질러놓은 단풍에 산불마냥 활활 타오르고 있다.
너무 곱게 타올라 깜깜한 밤에도 모두 보일 것만 같다.

▲  힘차게 내려가는 한양도성 (백악쉼터에서 창의문 방향)

▲  각박한 경사를 자랑하는 한양도성길 (백악쉼터에서 정상 방향)

▲  백악쉼터 성곽 너머로 바라본 천하
북악산 북쪽 줄기와 북한산, 평창동과 부암동

▲  돌고래쉼터와 돌고래바위

백악쉼터에서 10분 정도 내려가면 돌고래쉼터가 나온다. 왜 북악산과 전혀 관련도 없는 돌고래
를 쉼터 이름으로 삼았는지 아리송했으나 그곳에 가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바로 돌고래처럼
생긴 바위가 누워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고래쉼터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 그 이름도 원래부
터 있던 것이 아닌 북악산을 개방하면서 지은 이름이다.
돌고래라고는 하지만 내 눈에는 물개처럼 보인다. 바위 동쪽에는 약간의 틈이 있는데, 거의 입
처럼 생겼고 그 위에 눈처럼 보이는 자국도 있다. 가만 보면 물개가 꼬랑지를 흔들면서 움직이
는 모습과 같은데, 차라리 물개바위라고 했으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다.

돌고래쉼터 주변은 촬영이 가능하나 찍을 만한 것은 돌고래바위와 성곽 너머로 보이는 풍경 뿐
이다. 돌고래바위는 통제구역이라 그냥 난간 너머로 봐야 되며, 바위 주변에도 소나무가 그윽하
게 운치를 자아낸다. 그런 소나무 사이로 서울 도심이 살짝 속살을 비친다.


 

♠  북악산의 서쪽 종점이자 옛 한양도성의 성문
창의문<彰義門 = 자하문(紫霞門)> - 사적 10호

▲  창의문 바깥쪽 (부암동 쪽)
자하문고개를 밀어 만든 신작로(新作路)에 밀려 성문으로의 기능은 다소 떨어졌지만
왕년에 도성 성문으로서의 위엄은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서울 도심과 부암동을 잇는 자하문고개에 옛 한양도성의 성문인 창의문이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킨다. 창의문은 성밖 부암동에 있던 계곡의 이름을 따서 자하문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창의문보다는 자하문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 문은 한양도성의 8개 성문의 하나이자 4소문(小門)의 하나인 북소문이다. 4소문은 동소문<東
小門, 혜화문(惠化門)>, 서소문<西小門 ,소의문(昭義門)>, 남소문<南小門, 광희문(光熙門)>, 그
리고 이곳 창의문으로 혜화문과 소의문, 광희문은 각각 동소문. 서소문, 남소문이라 불리나 유
독 창의문은 북소문이라 불린 적이 거의 없다.


▲  창의문 안쪽 (도심 쪽)

창의문은 1396년 한양도성을 만들 때 조성된 것으로 문의 이름인 창의(彰義)는 '올바른 것을 드
러나게 하다'는 뜻이다. 1413년(태종 13년)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
복궁의 양팔과 같아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건의하여 1416년 문을 닫아걸었다. 다만 1422년 군인들의 통로로 사용되었고, 1617년(광해군 9
년) 창덕궁을 보수할 때 이 문을 통해 석재를 운반하는 등, 철저히 나라 일에만 문을 열었으며,
성 밖 부암동에 귀족들의 별장과 놀이터가 즐비했고, 부암동을 드나들던 귀족들이 많은 점으로
볼 때 그들의 은밀한 통행로로 쓰였다. 즉 국가와 귀족들의 문이었던 것이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정치에 불만을 품은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
괄(李适) 등은 세검정(洗劍亭)에서 칼을 씻으며 역적질을 모의, 역촌동(驛村洞) 별서에 있던 얼
떨떨한 능양군(陵陽君, 인조)을 앞세워 도성에 쳐들어가 광해군을 폐위시킨 이른바 인조반정을
저질렀다. 그때 그 반역도당들이 부시고 들어간 문이 바로 창의문이다. 그래서 문루에는 인조반
정(仁祖反正)을 저지른 작자들의 이름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창의문이 백성들에게 전격 개방된 것은 1741년(영조 17년)이다. 그때 훈련대장 구성임(具星任)
이 인조반정 때 의군(義軍)이 진입한 곳이라며 성문을 중수하고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문루
를 다시 세울 것을 건의하여 지금의 문루가 지어졌다.


▲  창의문안내소에서 바라본 창의문 문루와 협문(夾門)
하얀 추녀에 잡상(雜像)과 용머리가 걸터앉아 성문을 지킨다. 창의문이 무탈했던 것도
아마 저들의 굳은 직업정신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  문루에 자랑스럽게 걸린 인조반정 반역자들의 명단 현판
기분같아서는 저 현판을 떼서 장작으로 쓰고 싶다. 저들의 우매한 권력투쟁과 명나라에
대한 지극한 사대주의, 국제정세에 우둔함으로 얼마 뒤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삼전도
(三田渡) 굴욕의 대치욕을 당하게 되고 그것도 성에 안차 동아시아의 호구 국가로
이리 저리 털리다가 결국 나라마저 몽땅 말아먹게 된다.


창의문은 한양도성의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서소문은 왜국 통감부(統監
府)가 만든 성벽처리위원회에서 1908년에 무단 철거하여 정확한 위치조차 아리송하고 동소문은
왜정 때 없어진 것을 근래에 다시 지었다. 남소문인 광희문은 성문만 오래되었을 뿐, 문루와 성
곽은 1970년 이후에 복원되었다.
그에 반해 창의문은 6.25 때도 총탄이 알아서 비켜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1958년 중
수된 것 외에는 옛 모습 그대로 정정함을 과시한다. 바로 그 점이 인정되어 2015년 10월 문화재
청에서 국가 지정 보물로 지정 예고되었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절차를 거쳐 별다른 일이 없는
한 11~12월 중에 보물로 지정될 예정이다.


▲  창의문안내소에서 바라본 창의문 안쪽과 서울 도심
이곳은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공비들이 침투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도성 성문의 하나로 성문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으나, 1960년 이후 자하문고개를 밀어내고 신작
로를 닦으면서 성문의 통행 기능을 잃게 되었다. 요즘이야 산꾼과 답사꾼들로 심심치는 않지만
그래도 예전 같지는 못하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물건이든 현역에서 물러나 뒷전에 물러나 앉
은 모습은 정말 초라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문 서쪽에 신작로를 내면서 한양도성은 50m 남짓 끊어져 있다. 끊어진 반대쪽<현재 윤동주(尹東
柱)시인의 언덕과 청운공원이 들어서 있음>
을 애타게 바라보는 인왕산 쪽 성벽이 견우와 직녀를
보듯 애처롭기까지 하다. 끊어진 구간은 도로 위에 흙을 덮어 성벽을 세우지 않는 이상은 복원
은 어렵다. 또한 창의문 바로 앞에는 북악산길이 지나가 시야를 제대로 방해한다. 문루에 올라
가 북쪽 전방을 뚫어지라 바라봤자 북악산길에 가려 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별로 없다.


▲  창의문 성문 천정에 그려진 봉황(혹은 닭)과 구름무늬

창의문은 흔히 볼 수 있는 성문의 모습이라 그냥 지나치기가 쉽지만 그만의 매력이자 특징이 2
가지가 있다. 그대로 지나치지 말고 반드시 눈여겨 보기 바란다.
우선 빗물이 잘 흘러가도록 문루 바깥 쪽에 설치된 1쌍의 누혈(漏穴) 장식이 있다. 이것은 연꽃
잎 모양으로 조각되어 성문의 매력을 수식해주고 있으며, 성문 천정에는 화려하게 날개짓을 펼
치는 봉황(鳳凰) 1쌍이 그려져 있는데 속설에는 봉황이 아닌 닭이라고 한다. 성문 밖 부암동 지
형이 지네를 닮았다고 하여 비보풍수에 일환으로 그 천적인 닭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림을 가만
히 보면 머리와 목, 날개는 닭을 많이 닮았다. 허나 몸통과 꼬리는 닭과는 거리가 먼 봉황의 모
습이다.

봉황이 1마리가 아닌 둘이 있는 것을 보면 암수 1쌍일 것이다. 그들 주변으로 와운문(渦雲紋)이
가득 그려져 있는데, 신선의 오색구름처럼 영롱하게 그려진 구름 모습이 마치 물결의 거센 소용
돌이를 보는 듯하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북악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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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11월 1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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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이 아름다운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 성북동 산책 (최순우옛집, 삼청각, 북악산)

 


'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 성북동(城北洞) 산책 '

▲  삼청각 편운정

 


서울 도심의 갑옷인 한양도성, 그 도성의 북문인 숙정문(肅靖門)과 동북문에 해당되는 혜화문
(惠化門, 동소문)을 나서면 바로 성북동이 도심과 다른 모습으로 고개를 내민다. 서울의 주산
(主山)이자 영원한 북현무(北玄武)인 북악산(北岳山, 백악산)과 서울의 늠름한 진산(鎭山) 북
한산(삼각산) 사이에 포근히 감싸인 성북동은 천하 최대의 대도시로 콧대가 드쎈 서울 도심의
한복판이란 것이 무색할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과 전원 분위기를 자랑하며 다소 예민한 지정학
적 위치상 개발의 물결도 잠잠하다. 하여 성북동에 오면 서울특별시 성북구가 아닌 교외(郊外
)로 나온 듯한 기분이 물씬 든다.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성북동은 조선 초부터 나라에서 운영하는 제단인 선잠단과 영성단(靈
星壇)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이 지역의 대부분은 왕실 소유였다. 그러다가 19세기 이후, 성락
원(城樂苑) 등의 사대부 별장(별서)이 나타났고, 구한말과 왜정 때는 부자와 문인들이 앞다투
어 들어와 집과 별장을 지으니 이종석 별장과 이태준 가옥(수연산방), 간송 선생의 보화각 등
이 그 대표적인 흔적이다.
왜정(倭政) 시절에는 만해 한용운(韓龍雲)이 심우장(尋牛莊)을 지어 머물면서 이 땅의 독립을
염원했고,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은 드넓은 땅을 프랑스 양이(洋夷)에게 사들여 북단장(北
壇壯)과 보화각(葆華閣)을 지어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키고 연구하였다. 보화각은 나중에 우리
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 관련글 보러가기)으로 거듭났다.

해방 이후에는 성북동비둘기로 유명한 김광섭(金珖燮)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들어와 성북동
의 아름다운 정취를 벗삼으며 문학의 꿈을 키웠고, 이 땅의 미술사학에 크게 이바지한 최순우
선생은 간송 선생을 도우며 성북동 한쪽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또한 청와대와 서울 도심과 가까운 이점으로 나는 새도 알아서 떨어지게 한다는 고위관료들도
많이 들어와 살았다. 그들의 교통 편의와 땅값 상승을 위해 북악산 아랫도리에 삼청터널이 뚫
렸고, 대원각과 삼청각 등의 고급요정이 뿌리를 내려 돈을 삽으로 쓸어담을 정도로 호황을 누
렸다. 그리고 1968년 1.21사태 때 김신조의 북한 공비 패거리들이 성북동 북쪽 산자락을 통해
줄행랑을 치다가 우리 군에게 토벌되는 등, 남북분단의 얼룩진 역사가 서려있기도 하다. 바로
이 사건으로 인해 성북동을 둘러싼 북/서/남쪽 북악산 산줄기의 통행이 전면 통제되면서 성북
동은 도심 속의 막다른 섬이 되어버렸다.

이처럼 부유층과 권력층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통제 구역도 많았던 성북동은 1990년대 이후 변
화의 바람이 불면서 고급 요정을 모두 시민의 공간으로 해방을 시켰다. 삼청각은 서울시가 인
수해 시민의 문화공간으로 새로 단장했고, 대원각은 주인인 김영한(길상화)이 법정(法頂)에게
기증해 절(길상사, ☞ 관련글 보러가기)로 거듭났다. 또한 2006년 이후 북악산이 조금씩 개방
되면서 숙정문을 비롯한 북악산 주능선은 제한적이긴 해도 발을 들일 수 있게 되었고, 2009년
에는 북악스카이웨이(북악산길) 방면 산길이 거의 빗장을 열었다.

성북동을 거론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성북동의 지형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
완사명
월형
(浣紗明月形)'의 명당(明堂)으로 명성이 자자했는데, 완사명월형이란 '밝은 달빛 아래 비
단을 펼쳐놓은 형세'로 그 명당의 기운을 받고자 갖은 졸부(간송 전형필은 제외)들이 밀고 들
어와 본의 아니게 졸부 동네를 형성하게 되었다. 수레가 없으면 다니기도 힘들 정도로 교통도
안좋고 걸어다니기에는 숨이 차는 산동네인 성북동이 말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괜히 땅값만 치솟아 서민들은 들어갈 공간도 여의치 않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 땅의 1%가 아닌 0.1%가 사는 동네라 꼬집기도 한다. (졸부들 집은 성북로 북쪽과 명수학교
주변에 몰려 있고, 성북로 남쪽은 서민들이 주로 살고 있음)
나 같은 서민들이 오기에는 은근히 꺼림칙한 곳이 분명하지만 아름답고 의미있는 명소들이 많
아 그 거부감을 감수하고 발걸음을 한다. 아무리 졸부들의 집이 대궐만하고 대문이 성문(城門)
처럼 두터워도 위대하신 대자연 형님 앞에선 일개 모래성에 불과하다. 그리고 나는 명소를 보
러온 것이지 졸부들의 하찮은 집들을 보러온 것이 아니며, 그것들은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들
러리일 뿐이다. 그러니 괜히 기죽지 말고 가슴을 당당히 피고 관광/답사객의 신분으로 성북동
을 살펴보자. 더러운 졸부들에게 집중되고 있는 명당의 기운도 좀 누리면서 말이다.

성북동은 도심과 무척이나 가까워 접근성도 나름 괜찮고 아름다운 명소도 즐비하다. 적어도 4
~5시간 정도의 발품으로 충분히 들러볼 수 있으며(간송미술관과 북악산은 별도) 발품을 팔 가
치도 충분하다. 게다가 분위기를 내세운 찻집과 까페, 맛집, 조촐한 미술관(갤러리)들이 산재
해 있어 먹고 마시고 수다 떠는 이른바 5감의 재미를 덩달아 즐길 수 있다.

본글에서는 성북동 가운데서도 나의 즐겨찾기 명소인 선잠단터와 심우장
, 삼청각을 소개한다.


  양잠(養蠶)의 번성을 기원하던 조선시대 제단의 흔적
선잠단지(先蠶壇址) - 사적 83호

▲  선잠단터 표석과 누런 잔디

성북초등학교 3거리 동북쪽에 조선시대 주요 제단이던 선잠단이 있다. 지금은 잔디로 덮여있는
옛터와 근래에 세워진 선잠단터 표석, 홍살문만이 옛날 이곳이 신성한 장소였음을 아련히 귀뜀
해주고 있을 뿐, 제단의 흔적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럼 선잠단은 무엇을 하던 곳일까? 이곳은 누에를 관장하는 잠신(蠶神)인 서릉씨(西陵氏)에게
양잠의 번성을 기원하며 제를 지내던 공간으로 그 제례를 선잠례(先蠶禮)라고 한다. 선잠례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어 조선 개국 이후, 8년 정도 중단되었다가 1400년(정종 2년) 3월 초사일(
初四日)부터 다시 행해졌다.
세종은 각 도에 괜찮은 땅을 골라 뽕나무를 심고, 잠실(蠶室)을 지어 누에를 키우게 했으며 중
종(中宗)은 각 도의 분산된 잠실을 지금의 서울 송파구(잠실)와 서초구(잠원동) 일대로 집합시
켰다.
<서울 잠원동 신반포16차아파트 부근 도로변에 그 당시 재배했던 400년 묵은 뽕나무 1그
루가 죽은 채 남아 서울 지방기념물 1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음>

1471년 성종은 선잠례를 지내기 위한 장소로 동소문(東小門, 혜화문) 밖 지금의 자리에 선잠단
을 세웠는데. 단을 쌓은 방법은 사직단(社稷壇)과 비슷하나 남쪽으로 한 단(段) 낮은 댓돌이 있
고, 그 앞쪽 끝에 상징적인 뽕나무를 심어 궁궐 잠실에서 키운 누에에게 먹였다. 1477년에는 창
덕궁 후원에 채상단(採桑壇)을 만들어 누에치기를 장려하는 차원에서 왕비가 직접 누에를 길러
실을 뽑는 이른바 친잠례(親蠶禮)를 지냈다.

선잠례는 매년 3월 초사일에 지내는데 신하를 보내 제례를 주관했으며, 풍악을 울리고 제를 지
냈다는 기록이 있어 일종의 제례악(祭禮樂)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 의식은 순종 시절까지 이
어져 오다가 1908년 7월(순종 융희 원년) 순종 황제가 '칙령(勅令) 제50호<향사리정(享祀
釐整)
에 관한 건>'를 발표하여 국가에서 관리하는 사당과 제단을 대거 정리하면서 선잠단과 선농단(
先農壇, 서울 제기동)의 신위를 모두 사직단으로 옮겼고, 선잠단은 몸뚱이만 남게 되었다.
 
왜정 때는 왜인(倭人)들이 원 모습을 알지 못하게끔 깔끔하게도 파괴시켰고, 그 터마저 민간에
팔아 먹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문화유산을 조사하면서 1939년 선잠단터
를 문화유산 지정 등급인 보물 17호로 지정해 앞/뒤가 전혀 안맞는 행동을 보였다는 것이다. 부
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문화재로 지정하다니 망국의 제단을 아주 제대로 엿먹인 셈이다.

해방 이후, 터만 황량하게 남아 오던 것을 1990년 이후, 성북구청에서 선잠단 주변 528평을 매
입하여 홍살문을 세우고 뽕나무를 심었으며, 제단터에는 표석과 잔디를 입혔다. 그리고 1993년
부터 다시 선잠제를 여니 1908년 이후 85년 만에 부활이다.

성북구는 매년 5월 초/중순에 열리는 성북구의 대표 축제인 아리랑축제에 맞춰 선잠제(先蠶祭)
를 거행한다. 제례가 열리는 날과 일부 행사/축제일을 제외하고는 문이 굳게 닫혀있으며, 굳이
내부로 들어가고 싶다면 미리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02-920-3413)에 문의를 한다. 허나 바깥
에서도 보일 것은 다 보이기 때문에 굳이 월담을 하면서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다.

참고로 선잠단터 북서쪽인 성북초교 뒤쪽에는 농업을 관리하는 별인 영성(靈星)에게 제를 지내
던 조선시대 제단인 영성단(靈星壇)이 있었다. 이 역시 1908년에 순종의 칙령에 따라 선잠단과
더불어 폐쇄되었다.


▲  선잠단 홍살문
나라에서 신성시 하던 제단은 사라지고 홍살문의 위엄은 녹슨지 오래건만
다시 솟아난 홍살문은 예전의 위엄을 내보이고자 애써 안간힘을 쓴다.

▲  뽕나무로 무성한 선잠단터 내부
60~70년 묵은 아름드리 뽕나무들이 조촐하게 숲을 이룬다. 이들 뽕나무는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로 지정되었다.

▲  선잠단터 표석에서 바라본 모습

간송미술관과 가까워 그곳을 찾을 때마다 후식으로 꼭 둘러보는 선잠단터. 역사의 뒤안길에 묻
힌 이곳에는 그저 망국의 쓸쓸함만이 가득하다. 무성하게 우거진 뽕나무는 이곳의 허전함을 조
금이나마 덮어준다.
 
※ 선잠단터 찾아가기 (2014년 11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나 성북구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성북초교 하차, 내린 방향을 기준으로 오른쪽(동쪽)으로 1분 걸으면 성북초교3거리가 나
  오는데, 길 건너 홍살문 뒷쪽 언덕이 선잠단터이다, 도로변에 있어서 홍살문이 어떻게 생겼는
  지만 안다면 찾기는 매우 쉽다.
* 선잠제례는 매년 5월 초/중순에 아리랑축제 기간에 열리며 자세한 일정은 성북구청 문화관광
  홈페이지(여기를 클릭)를 참조한다.
* 선잠단터 내부를 보고 싶다면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02-920-3413)에 문의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64-1


♠  시민들이 지켜낸 시민문화유산 1호, 우리나라 고고미술에 평생을 바친
인물, 최순우(崔淳雨) 옛집 -
등록문화재 268호

한성대입구역(4호선) 5번 출구를 나와서 성북동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왼쪽 골목에 빌라와 주택
사이로 별천지처럼 들어앉은 기와집 하나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 집이 바로 우리나라 고고미
술에 평생을 바친 혜곡(兮谷) 최순우 선생(1916~1984)의 옛집이다.
이곳은 삼청각(三淸閣)과 더불어 근래에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성북동의 새로운 꿀단지이다. 속
세에 이름을 떨친 지는 4~5년 정도로 나날이 답사객들이 늘고 있어 주말에 가면 늘 번잡하다.

최순우 옛집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자칫 개발의 칼질 앞에 이슬로 사라질 뻔했으나 뜻있는 시
민들이 발벗고 나서 개인마다 1평씩 구입하여 지킨 문화유산으로 매우 의미가 남다르다. 시민들
이 지키고 가꾼 시민문화유산 1호로 재단법인 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문화유산기금에서
관리하고 있다.

집의 주인이던 최순우는 1916년 4월 27일 경기도 개성(開城)에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희순(
熙淳)으로 개성 송도(松都)고보를 나와 1943년 개성박물관에 입사했다. 그는 당시 개성박물관장
인 고유섭(高裕燮)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면서 고미술에 뜻을 굳혔다고 전한다.

1945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학예관과 미술과장, 학예연구실장을 지냈으며, 1950년
6.25가 터지자 한강다리 폭파로 미쳐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북한군에게 잡히고 만다.
서울을 접수한 북한은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당시는 북단장과 보화각이라 불림>에 있던 무수
한 문화유산에 군침을 흘리고 박물관에서 일하던 최순우와 소전 손재형(孫在馨)에게 그것을 포
장해서 지정된 곳으로 옮길 것을 지시했다. (간송은 훈민정음과 일부 문화유산만 급히 챙기고
한강을 건너 피난감)
그들은 감독관으로 온 공산당원 기(奇)씨에게 왜국 판화로 된 춘화(春畵)를 보여주고, 보화각
지하실에 있던 화이트호스 위스키를 권해 허구헌날 술에 쩔게 했다. 또한 문화유산 선별기준에
서 좋은 것은 나쁘다. 나쁜 것은 좋다고 속이고 물건을 하나 가져다가 풀면서 이건 아니라고 다
시 싸게 하고, 목록이 잘못되었다고 다시 했다.
포장이 진행되면서 감독관에게 상자를 사와라, 목수가 없다 등으로 자꾸 똥개훈련을 시켰고, 손
재형은 일부러 생다리에 붕대를 감고 아픈 시늉까지 벌이면서 9월 28일 서울수복까지 완전히 포
장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렇게 기가 막힌 지연작전으로 간송미술관의 유물은 모두 북송을
면했던 것이며, 그 인연으로 간송과도 가까운 사이가 된다.


▲  최순우 선생 왕년의 모습

6.25 이후 서울대와 고려대, 홍익대에서 미술사
강의를 했으며, 1967년 이후 문화재위원회 위원
과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대표, 한국미술사학회
대표를 역임하고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되
었다.
1981년 홍익대 대학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84년 12월 16일, 바로 이곳 성북동
집에서 숙환으로 별세하니 그의 나이 68세였다.

그는 고미술 외에 현대미술에도 조예가 깊었고,
우리나라 박물관사에 큰 업적을 끼쳤다. 주요논
문으로 '단원 김홍도 재세연대고(檀園金弘道 在
世年代攷)','겸재정선론(謙齋鄭敾論)','한국의
불화(佛畵)','혜원신윤복론(蕙園申潤福論)','이
조(李朝)의 화가들' 등이 있고 저서는 삼척동자
도 다 안다는 '무량수전(無量壽殿) 배흘림 기둥
에 기대서서','한국미술사' 등이 있다.

최순우 옛집은 1930년대에 지어진 한옥으로 경기도 지방 한옥 양식을 띄고 있다. 'ㄱ'자의 본채
와 'ㄴ'자의 사랑채, 행랑채가 있으며, 전체적으로 'ㅁ'자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본채 뜨락에
는 닫혀진 우물이 있고, 그 옆에는 작은 우물이 있다. 최순우가 1976년에 구입하여 1984년 숨을
거둘 때까지 의지하던 집으로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그가 사라진 이후, 개발의 칼질이 슬슬 압박을 가해오면서 그의 집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외로
운 신세가 되었다. 이 집을 밀어버리고 빌라를 지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소식을 접한
뜻있는 이들이 시민운동단체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를 창단하여 그 집을 매입하면서 개발의 칼날
은 보기 좋게 부러지고 말았다. 허나 주인이 사라진 옛집은 많이 지치고 초췌해져 있었다. 하여
내셔널트러스트는 돈을 모아 2003~2004년에 복원 공사를 벌었고, 그 집에 '시민문화유산1호'란
별칭을 주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민간에서 문화유산을 구입하여 지킨 곳이기 때문이다.

현재 안채는 전시 공간과 최순우기념관으로 쓰이고 있고, 동쪽 행랑채는 사무실, 서쪽 행랑채는
회의실과 휴식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 넓지 않은 뜨락은 전통식으로 아기자기하게 손질하
여 나무와 풀, 꽃 등이 뜰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으며, 안채 앞뜰 중앙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운다. 뒷뜨락과 모서리 공간에는 간송미술관의 뜨락을 꿈꾸듯 동자상과 맷돌 등 다
양한 석물을 가져와 작지만 넓고 알찬 느낌을 준다. 게다가 뒤뜰에 야외도서관을 두어 최순우가
쓴 글과 여러 서적, 그와 관련된 서적들을 읽으며 독서의 여유도 누릴 수 있으며, 뒷뜰 뒤쪽에
는 높은 담벼락이 있어 그늘이 가득해 시원하다.
안채 내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으나 툇마루에 앉아 도심 속의 한옥의 미와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릴 수 있고, 주말과 공휴일에는 다양한 공연과 전시회 등의 볼거리가 열려 늘 사람들
로 분주한 살아있는 한옥 공간으로 시민 곁에 다가서고 있다. 길상화가 길상사(吉詳寺)란 절을
속세에 선물로 안겼듯이 이곳 최순우옛집은 최순우와 그의 집을 지키던 뜻 깊은 이들이 시민들
에게 남긴 소중한 선물이자 작품인 것이다. 또한 2006년에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국가지정문
화재의 지위를 당당히 누리고 있다.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동네 초입에 자리해 있어 성북동 나들이를 벌일 경우 가장 먼저 들러보는
것도 좋으며, 최순우 선생의 체취를 느끼면서 툇마루에 걸터앉아 잔잔히 불어오는 바람을 디저
트 삼으며 잠시 쉬어가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 최순우 옛집 찾아가기 (2014년 11월 현재)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나 성북구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홍익중고 하차, 또는 5번 출구로 나와서 도보 10분, 길가에 최순우 옛집을 알리는 이정
  표가 있어 찾기는 쉽다
* 관람기간 : 4월 1일 ~ 11월 30일까지 (12~3월은 개방안함)
* 관람요일 : 매주 화요일 ~ 토요일 (축제기간에는 일요일도 개방)
* 관람시간 : 10시 ~ 16시 (15시 30분까지 입장 가능 / 축제기간에는 17시까지 개방)
* 관람료 : 공짜 / 20인 이상 단체는 사전 예약 요망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126-20 (☎ 02-3675-3401~2)
* 최순우옛집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


▲  밋밋하게 솟은 빌라와 주택들 사이에 고풍스럽게 들어앉은
최순우 옛집의 위엄 - 개발의 칼날도 고개를 숙인 현장이기도 하다.

▲  굳게 닫힌 최순우 옛집 대문

▲  안채 앞뜰에 높이 솟은 소나무


▲  사무실로 쓰이는 동쪽 행랑

▲  소나무 옆에 뚜껑이 닫힌 죽은 우물
최순우를 비롯해 이 집을 거쳐간 이들의 목을 축여주던 네모난 우물,
허나 지금은 뚜껑이 닫힌 채 겉모습만 남아있다.

▲  수풀 사이에 고개를 내민 조그만 동자상
최순우 옛집을 복원하면서 천하 어딘가에서 가져온 것이다.

▲  조그만 맷돌과 빗물과 꽃잎을 머금은 돌쟁반

▲  옛집의 서쪽 모서리를 지키는 2기의 조그만 문인석(文人石)
저들의 표정에 부질없는 세월의 고된 모습이 묻어난 듯 하다.

▲  안채 뒤쪽 툇마루 (4월 중순)

▲  최순우 선생의 기품과 학식이 고스란히
묻어난 안채 내부 (내부 접근은 통제되어
있으므로 문 밖에서 관람 요망)

▲  안채 뒤쪽 툇마루
서울에서 툇마루에 걸터앉아 여유를
누릴 수 있는 몇 안되는 곳이다.


▲  마루에 놓인 함지박

▲  뒷뜨락에 옹기종기 모인 장독대들
무엇인가가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은 아닐까?
허나 저들은 알맹이가 텅빈 장식용 장독이다.

▲  장독대 앞에 둥그런 돌탁자
탁자 주변에는 키 작은 7개의 돌의자가 머리에 방석을 쓰며 달처럼 둘러져 있다.

▲  돌이 박힌 뒷뜨락 산책로와 장승을 닮은 조그만 석상 2기

▲  다양한 석조물이 있는 뒷뜨락

▲  서쪽 행랑채에 진열된 여러 도장과 최순우의 어록 1구절
혜곡의 손때가 묻어난 도장들이다.

▲  서쪽 행랑채에 진열된 도장과 조그만 자기들 - 혜곡의 유품

▲  최순우 옛집의 뒷통수 (안채 서쪽 담장길)

흙으로 만든 토담과 시냇물의 징검다리처럼 박석(薄石)이 박힌 정겨운 담장길, 담장 너머가 자
연의 공간이거나 한옥이었다면 그 운치는 곱배기가 되었을텐데, 빌라와 슬레이트 지붕이 그 자
리를 대신하니 그나마 우러난 정겨움과 운치도 절반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 지우개가 있다면 담
장 밖 풍경을 싹싹 지우고 싶을 뿐이다.


  권력실세들이 드나들던 고급요정(料亭)에서 시민들의 전통문화공간으로
거듭난 현장 - 성북동 삼청각(三淸閣)

▲  북악산 한양도성 북쪽 산길에서 바라본 삼청각

성북동의 가장 서쪽 구석이자 삼청터널 북쪽에는 으리으리한 한옥으로 치장된 삼청각이 자리해
있다. 이곳은 한양도성이 지나는 북악산 본줄기와 북악하늘길이 지나는 북쪽 산줄기 사이 150m
고지로 성북동에서 제일 막다른 곳이다.

삼청각은 겉에서 우러나오는 모습처럼 원래는 고급요정이었다. 1972년에 지어진 이곳은 군사정
권 시절 악명을 떨친 3대 요정<청운각(淸雲閣), 대원각(
大元閣), 삼청각>의 하나로 삼청각이란
이름은 북악산(백악산) 남쪽에 있는 삼청동(三淸洞)에서 유래되었다.

이곳은 주로 국빈 접대와 정치적 회담을 위한 요정으로 운영되었으며, 1972년 7월 4일 7.4남북
공동성명 직후 남북적십자대표단의 만찬이 열렸던 장소이기도 하다. 권력실세와 졸부들의 공간
으로 30년 가까이 폐쇄적으로 이어오다가 2001년 서울시가 인수하여 리모델링을 거쳐 전통문화
의 공간으로 속세에 활짝 개방되었으며, 현재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백성들은 감히 발도 들이지 못했던 고급 요정이 누구나 자유롭게 오가며 산책과 전통문화를 즐
길 수 있는 대중적인 공간으로 탈바꿈된 현장으로 이는 인근 대원각과 비슷하다. 대원각은 그곳
의 주인인 김영한(金英韓, 1916~1999)이 법정에게 통째로 기증하여 절로 변신한 곳으로 비록 과
정은 다르지만 결과는 비슷하다.

성북동의 새로운 꿀단지로 크게 두각을 드러낸 이곳은 북악산 등산의 기점으로 숙정문과 북악산
북쪽 능선으로 오를 수 있으며, 2009년 개방된 북악하늘길, 속칭 김신조루트를 통해 북악산길로
넘어갈 수 있다. 또한 삼청터널을 통해 바로 서울 도심으로 이어지며, 한양도성 앞을 흐르는 산
길을 거쳐 말바위를 경유하여 삼청공원과 북촌으로 넘어갈 수 있다.

비록 속세에 개방된 공간이라 해도 여전히 고급요정의 이미지가 깃들여져 있다. 한식당과 다원
의 높은 음식/차 가격, 시중보다 비싼 전통문화체험, 온갖 피로연, 가족행사 공간에 경악을 금
치 못하지만 서울의 허파인 북악산(백악산)의 품에 포근히 안긴 곳으로 20세기로 전승된 현대
한옥의 아름다움과 기품, 전통 정원의 미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 삼청각 찾아가기 (2014년 11월 기준)
* 삼청각 무료셔틀버스가 1일 12회(10~21시) 운행한다. (17~20시는 매시 20분, 그외는 정각에
  출발) 경유지는 종로1가 영풍문고(1호선 종각역 5번 출구), 을지로입구역(2호선/1번 출구),
  프레스센터(1,2호선 시청역 4번 출구), 광화문 교보문고(5호선 광화문역 3번 출구) 등이며,
  을지로입구역에선 삼청각 출발시간에 20분 정도를 더하면 된다.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동 종점에서 하
  차, 성북로를 쭉 따라가거나, 주암아파트 옆길로 11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 승용차로 갈 경우 (주차장 있으며, 삼청각 이용객에 한해 공짜)
① 광화문4거리 → 삼청동길 → 삼청공원 → 삼청터널 → 삼청각
② 한성대입구역 → 성북로 → 성북동종점 → 삼청각

★ 삼청각 관람정보
* 입장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에 제한은 없음
* 일화당 1층에는 고급한식당, 그 윗층에는 찻집 다원이 있다. (가격은 좀 비쌈)
* 매월마다 다채로운 문화공연이 열리고 있으며, 다래와 규방공예, 한복체험, 한국요리 등의 전
  통문화체험강좌가 열린다. (물론 유료임)
* 전통혼례와 가족연회, 세미나 공간도 갖추어져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330-115 (☎ 02-765-3700)
* 삼청각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솟을대문 모습의 삼청각 정문 (그 옆에 삼청각 표석이 있음)
사람들은 기와집 정문으로, 수레들은 북쪽 문으로 들어간다.


▲  지방의 시골길 같은 삼청각, 홍련사 앞길

▲  궁궐의 돌담처럼 기품이 돋보이는 삼청각 돌담길
끝없이 펼쳐진 돌담길을 오르면 그 길의 끝에는 유하정과 천추전이 있다.

▲  천추당(千秋堂)
고풍과 기품을 갖춘 전통 한옥으로 가족모임이나 돌잔치 장소로 쓰인다.
수용인원은 34명 정도로 소나무가 둥지를 튼 주변 뜨락이 아름답다.


▲  유하정(幽霞亭)
삼청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유하정은 팔각형 정자로 그 곁에 북악산 계곡물이
흐른다. 이곳은 전통문화 배움터나 기업 세미나 공간으로 쓰이고 있으며
30명까지 수용이 가능하다.

   ◀  벚꽃나무 밑에 자리한 편운정(片雲亭)
유하정 뒤쪽에는 편운정이라 불리는 네모난 원
두막 쉼터가 있다. 여기서 편운(片雲)은 구름조
각이란 뜻으로 세종문화회관이 삼청각을 인수한
기념으로 지었다. 정자를 칭하고 있지만 원두막
에 가까운 모습이며, 그렇다고 화려함이 배여난
삼청각에 걸맞는 모습도 아니다. 그저 수수하고
조촐한 쉼터로 누구든 편안히 신발을 벗고 들어
가 쉴 수 있는 공간이다.

편운정 곁에는 벚꽃나무 1그루가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다. 봄의 절정 때는 한송이 눈이 되어 대
지로 내려앉는 벚꽃의 처절한 아름다움이 깃들
여진 현장이다.


▲  유하정과 편운정 곁을 흐르는 북악산 계곡

이끼가 낀 하얀 피부의 반석이 곳곳에서 고개를 들며 그 사이로 서울의 허파, 북악산이 베푼 청
정한 계곡물이 큰 세상을 향해 졸졸졸~~♬ 흘러간다. 계곡의 내음과 숲의 맑은 내음, 솔솔 하늘
을 가르며 불어오는 산바람은 편운정에서 발길을 멈춘 나그네의 오염된 마음과 정신을 씻기기에
충분하다. 깊숙한 산골에서나 누릴 법한 자연의 향기와 풍경을 번잡함이 연상되는 서울 도심 한
복판에 버젓히 박혀있는 것이 참 신선할 따름이다. 물론 이곳이 청정한 모습을 간직하게 된 것
은 국가의 예민한 곳을 두루 품은 북악산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다.


▲  청천당(廳泉堂)
고즈넉함이 묻어난 양반가 별채의 모습으로 연회나 약혼식 장소로 쓰인다.
수용인원은 60명 정도로 독립적인 앞뜨락을 갖추고 있다.

◀  일화당 뜨락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5호로 70년을 묵은
소나무이다. 게다가 삼청각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본 산증인이기도 하다.


▲  삼청각의 중심 건물인 일화당(一和堂)

한옥의 당당함이 깃들여진 일화당은 삼청각에서 가장 큰 건물로 이곳의 중심 건물이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때 대표단 만찬이 열렸던 유서 깊은 장소로 사진을 보면 1층으로 보이지만 실
은 2층 규모(실제로는 3층)이다.

사진에 나온 2층은 각종 연회나 혼례식 장소로 쓰이며, 다양한 전통공연이 열리는 200석 규모의
공연장과 전통차와 커피, 와인을 마실 수 있는 다원(茶園)이란 찻집이 있다. 다원은 야외 테라
스가 있어 눈 앞에 펼쳐진 성북동과 북악산(백악산)의 모습을 바라보며 일다경(一茶頃)의 여유
를 누릴 수 있다. 1층에는 한식당이 있는데 정갈한 전통한식을 먹을 수 있으며(가격이 비싼 것
은 함정). 일화당 앞뜨락과 전통놀이마당에서는 종종 전통놀이와 각종 행사가 열린다.


▲  일화당 다원 테라스에서 바라본 천하 (동쪽 방향)
성북동과 북악산이 부분적으로 보이고 그 너머로 동대문구, 성북구 지역이
아련하게 눈에 들어온다.

▲  일화당 1층 벽에 그려진 자연의 벽화
대자연이 그린 멋드러진 벽화가 일화당의 품격을 드높인다. 그려진 폼을 보니 아마도
추상화인 모양이다. 아무리 천재화가가 그린다 한들 자연이 그린 벽화만 할까?

▲  모양도 가지각색인 일화당 장독대들
무엇인가가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을 것이다.


▲  익한당으로 넘어가는 남천문(南天門)
궁궐 후원의 문을 보는 듯 기품이 돋보인다.

▲  일화당 동쪽 송림에 안긴 취한당(翠寒堂)
아담하고 편안한 모습의 별채로 가족단위의 소규모 행사 장소로 쓰인다.
취한당 서쪽에는 비슷한 모습을 지닌 동백헌(東白軒)이 있으며,
가족모임이나 다례, 전통요리 체험 공간으로 쓰인다.



▲  쌍다리돼지불백에서 먹은 돼지불고기백반

▲  서울왕돈까스에서 먹은 왕돈까스

성북동은 볼거리도 풍성하지만 한정식과 한식 종류를 다루는 식당부터 누룽지백숙 등의 영양식,
칼국수와 만두, 돈까스 등의 분식을 다루는 집, 찻집과 까페 등 다양한 먹거리의 맛집들이 즐비
하다. 그중에서 돼지불고기백반과 돈까스집이 눈에 많이 띄는데, 돼지불고기백반집은 쌍다리정
류장 부근에 있고, 돈까스는 성북초교에서 혜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와 쌍다리 부근에 있다.
제일 위의 사진은 돼지불고기백반으로 이름난 쌍다리돼지불백(쌍다리기사식당)에서 먹은 돼지불
백인데 잘 구워진 돼지고기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의 반찬과 상추, 상추쌈, 조개국이 백반을 이
룬다. 돼지고기를 먹고 싶은데, 고깃집이 1인 손님은 받지를 않으니 집이 아니면 해먹기가 그렇
다. 여기는 그런 점을 해소해준다. 그래서 1인 손님이 제법 많다. 가격은 7,000원으로 그런데로
그런데로 저렴하다. 이곳은 원래 택시기사들이 주로 찾던 기사식당이었으나 지금은 일반인들도
많이 찾는다. 

아랫 사진은 서울왕돈까스에서 먹은 왕돈까스로 크기가 정말 왕만큼 크다. 성북동에 이런 왕돈
까스집이 유독 많은데, 그 이유가 자못 궁금하다. 성북동 돈까스집은 특이하게 고추와 고추장이
나온다는 것, 특별한 맛은 없으나 양이 많아서 배불리기는 좋다. 돈까스 리필도 때에 따라 가능
하다. 가격은 8,000~9,000원으로 이 집 옆에는 같은 돈까스를 다루는 오박사네돈까스가 있어 서
로 경쟁이 치열하다.

♣ 성북동 추천 명소와 음식점
* 추천 명소 - 최순우 옛집, 선잠단터, 간송미술관, 이종석별장, 수연산방<壽硯山房, 이태준가
  (家)>, 심우장, 북정마을, 삼청각, 성락원, 길상사, 한국가구박물관, 북악산 김신조루트(북악
  하늘길), 북악산(백악산) 산행, 숙정문, 와룡공원, 한양도성 등
* 음식점 - 성북동집(만두와 만두국, 02-747-6234), 쌍다리돼지불백(돼지불고기 백반, 02-743-
  0325), 성북동돼지갈비집(돼지불고기 백반, 02-764-2420), 금왕돈까스(02-763-9366), 서울돈
  까스(02-766-9370), 성북동메밀수제비/누룽지백숙(02-764-0707), 수연산방(찻집, 02-764-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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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10월 3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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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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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도 걸음을 멈춘 아름다운 박물관, 성북동 간송미술관

 


' 늦가을도 걸음을 멈춘 우리나라 박물관의 성지,
성북동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간송미술관 보화각


늦가을이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10월 중순이 되면 나의 이목을 강하게 붙잡는 곳이 하나 있다.
그곳이 어디냐? 바로 성북동(城北洞)에 자리한 간송미술관이다. 우리나라 박물관의 오랜 성지
이자 늦가을이 유난히도 아름다운 명소로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닌 1년에 딱 2번,
5월과 10월 중/하순에만 문을 연다. 그외에는 들어가지 못하며, 아무리 열려라 참깨를 외치고
참깨를 집어던져도 안으로 절대 들여보내지 않는다.
 
문이 활짝 열리면 간송미술관은 다양한 테마로 무료 특별전을 여는데, 그 특별전에 대한 문화
인들의 관심은 지독하기 그지 없어 중독성이 매우 강하다. 그 중독에 빠지면 간송미술관 사립
문이 열리는 날만 애타게 기다리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른다. 보통 10월 초면 신
문을 통해 특별전 소식이 곳곳에 알려지며, 10월 중순이 되면 빗장이 스르륵 열리면서 방방곳
곳에서 문화인들이 몰려와 박물관의 성지를 순례하며 옛것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한다.

본인 역시 간송미술관 특별전을 기다리는 1인으로 올 봄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들어가지 못
했다. 어쨌든 가을 특별전 소식을 접하고 토요일에 후배 여인네와 그곳을 찾았는데, 이번에도
퇴짜맞는거 아닌가 걱정이 들었으나 다행히 운이 따라주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여 정
말 느긋하게 미술관을 관람했다.

간송미술관은 나무가 무성하여 산골에 묻힌 별장에 들어선 기분이다. 속세와 공기부터가 확연
히 틀려 서울 도심에 있음을 무색하게 하며, 청정한 공기는 속세(俗世)에 오염된 마음과 돌처
럼 굳어버린 머리를 정화시켜 아무리 어려운 그림 이름도 쏙쏙 머리에 들어올 것만 같다.

본글에서는 특별전 그림에 대한 언급은 뺀다. 대신 간송미술관의 내력과 간송 전형필의 생애,
뜨락에 있는 여러 석조 문화유산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  간송미술관 정문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정문의 동쪽 기둥에는 '澗松美術館'이라 쓰인 명패가 있고
서쪽 기둥에는 간송미술관 스타일로 특별전 제목이 쓰인 하얀 종이가 붙여져 있다.



★☆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선생의 생애 ☆★

어둠의 시절,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키고 후학을 양성하고자 자신을 헌신한 진정한 대인(大人)의
정석, 간송 전형필, 그는 1906년 부자집안인 정선 전씨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의동공립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와 휘문고보(현 휘문중고)를 거쳐 왜국 와세다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했다.

남들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대신 가족들은 대부분 명줄이 짧아 20대에 친가족 대
부분
-조부모, 친부모, 양부모<養父母, 송의 종숙부(從叔父)인 전명기(全命基)가 후사가 없어
그의 양자로 들어감>, 친형제-
을 잃었다. 심지어는 보통학교와 대학 졸업 때 그의 양부(종숙부
) 상과 부친상을 나란히 당해 상복을 입고 졸업사진을 찍었을 정도다. 이렇게 가족을 죄다 여의
면서 그 집안의 자손은 간송 하나만 남게 되었고, 자연히 일가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 받아 10만
석을 일컫는 조선 최대의 부자가 되었다.


와세다대학교 재학 중, 왜인들에게 무시를 당하며 속국(屬國) 백성의 한을 한을 뼈저리게 느끼
자 '나는 무엇을 해야 되나?' 번민에 빠졌다. 허나 그 답을 구하지 못해 주변 선배와 스승에게
자문을 구했고, 휘문고보 시절 그의 미술 선생이던 고희동(高羲東)이 이 땅의 문화유산을 지킬
것을 권하면서 그의 권유에 감동해 대책 없이 방치된 이 땅의 문화유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고희동은 그런 제자를 기특히 여겨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을 소개시켜 주었다. 간송은 그를
스승으로 받들며 서화와 도기/자기, 불교 문화유산 등 골동품 식견을 쌓아갔으며, 위창은 골동
품 거간(居間)인 이순황(李淳璜)을 소개하여 그를 돕게 했다. 그리고 1930년, 24살에 이른 간송
은 이순황과 함께 본격적으로 문화유산 수호 사업에 뛰어든다.

간송은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하여 이순황에게 맡기고, 그곳을 교두보로 수많은 문화유산을
수집했다. 동국정운(東國正韻) 등의 고서적, 고려청자 등의 자기류, 혜원풍속도(蕙園風俗圖) 등
의 서화(書畵), 금동여래입상, 금동삼존불감 등의 불상을 있는데로 사들이고, 1934년 북단장과
함께 1만평 규모의 넓은 뜨락을 조성하면서 석탑과 석불 등을 아낌없이 수집했다.
또한 왜인을 상대로 고미술품을 팔아먹던 인사동(仁寺洞)을 수시로 찾아가 많은 것을 구입했으
며, 왜인들이 군침을 흘리던 문화유산은 미리 선수를 치거나 웃돈을 두둑히 얹혀 사들이니 자연
히 골동품상이 그에게 몰려들어 거래를 했다.
그리고 왜국 동경(東京)에 있던 영국인 변호사 존 갓스비(John Gadsby)가 자기 나라로 귀국하면
서 소유하던 고려청자를 처분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를 직접 만나 고려청자를 죄다 사들이기도
했으며, 총독부 고위층이 소유한 문화유산을 사들이고자 온고당(溫古堂) 주인인 왜인 골동상 신
보기조(新保喜三)의 도움을 받았다.

그 당시 간송과 그를 돕던 이들의 문화유산 수집 에피소드는 정말로 많았는데, 그중에서 겸재(
謙齋) 정선(鄭敾)의 화첩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왜정 때 이순황과 거래하던 골동상 가운데 장형수(張亨修)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지방을 돌며
서화를 구입해 수집가들에게 팔았는데, 1933년경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추계리를 지나다가 친일
파로 악명이 높은 송병준(宋秉畯)의 고래등 기와집을 구경했다. 마침 양지면장이자 중앙자동차
주식회사를 운영하던 송병준의 손자 송재구(宋在龜, 이하 집주인)가 말을 타고 귀가하다가 누구
를 찾냐고 물었다.
그래서 '유명한 댁이라고 해서 지나다가 구경 좀 하고 있소!' 답을 하니, 악질 친일파의 손자라
발작을 하며 쫓아낼줄 알았더만 뜻밖에도 친절을 보이며 안으로 들어가자고 그런다. 사랑방에
자리를 잡자 직업을 묻길래 골동품을 수집한다고 하니, 집주인이 흥미를 보이며 오원 장승업(吾
園 張承業)의 산수화 병풍을 비롯해 고려청자 향합(香盒), 불상 등을 보여줬고, 서로 말이 잘
통해 늦게까지 대화를 하다가 푹 자고 가라고 잠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잠을 자다가 늦은 밤, 소변이 급해 사랑방 한쪽에 붙은 변소를 가는데 마침 그 집 머슴이 군불
을 때고 있었다. 그런데 문서 뭉치를 마구 아궁이에 쑤셔넣고 있길래 문득 직업 본능이 발동하
여 확인해보니 땔감 가운데 초록색 비단으로 꾸민 책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그 책을 보니 글쎄
42폭으로 이루어진 겸재 정선의 42화첩(畵帖)이 아닌가? 그 안에 그 유명한 금강산도(金剛山圖)
가 들어있었다. 좀만 늦었으면 그 그림은 영영 되살릴 수 없는 전설이 되었겠지. 그렇게 정선의
화첩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니 장형수의 때를 잘타는 생리 현상에 우리들은 정말 감사해야 될
것이다.

그 화첩을 서둘러 들고 집주인에게 보이며, 방금 전의 일을 말하자 '그런 일이 있었소!~ 그런건
우리집에 흔하오'
그러는 것이다. 그래서 '불에 타 없어질 뻔했던 것이니 나에게 파시오' 제안
을 하니 집주인이 흔쾌히 응하자 얼마면 되겠냐고 물으니 '생각해서 낼 만큼만 내시오' 그런다.
그래서 20원을 주고 서울로 가져와 이순황에게 팔아달라고 부탁했다.
이순황은 그 그림을 간송에게 보냈고, 장형수는 간송의 인품에 반해 그의 협력자가 되었다.

간송은 문화유산 수집에만 멈추지 않고 왜정의 민족말살정책에 대항하고 우리의 전통문화를 지
키고 가꿀 인재를 기르고자 1940년 적자에 허덕이던 보성중학교를 인수했고, 동성학원을 설립하
여 교육 분야에도 아낌없이 돈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 당시 보성중교를 운영하던 고계학원은 학
교 매입금 16만 5천원 외에 학교의 부채와 학교가 소유한 물건까지 값을 매겨 무리한 가격을 요
구했는데, 간송은 쓴소리 하나 없이 장우식, 윤용섭을 통해 대금을 모두 지불했다. 또한 동성학
원 재단설립에 무려 60만원을 들였는데, 이를 위해 황해도 연백군(延白郡)에 있던 3,000석 지기
땅을 처분했다.

1945년 8월 이후 11개월 동안 보성중학교 교장을 지냈는데, 이것이 간송의 유일한 공직생활이었
다. 또한 1950년 이후 고적보존위원회, 문화재보존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했으며 1960년에는 고고
미술동인회를 세워 문화유산 연구와 서적 편찬에 동분서주하였다. 이렇게 평생에 걸쳐 자신의
재산을 내던지며 문화유산과 교육 발전에 헌신했으나 위인(偉人)은 고난 속에 일찍 죽고 간신배
는 배때기에 기름칠하며 아주 지독하게 오래 사는 이 땅의 더러운 법칙에 따라 야속하리만큼 커
다란 시련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1950년 2월 정부는 농지개혁법을 시행하면서 소작농에게 농지를 분배하고 지가증권(地價證券)을
발행하여 땅주인에게 땅값을 치러주기로 하였다. 허나 6.25전쟁으로 지가증권이 모조리 휴지조
각이 되면서 앉아서 농지를 잃어버린 꼴이 되었으며, 전쟁통에 많은 문화유산과 유동자산을 잃
었다.
거기에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북단장 뜨락마저 무심한 총탄과 폭탄으로 파괴되고 만다. 그런 상
황에 전쟁에서 잃어버린 문화유산을 다시 사들이면서 재정 압박은 갈수록 커져만 갔으며, 1959
년 보성중고교 교장 서원출의 방만 경영으로 엄청난 부채가 쌓이자 이를 해결하고자 동분서주하
던 중 그만 병을 얻어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결국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신우염(腎盂炎)으
로 1962년 1월 26일, 56세의 한참인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그가 그렇게 세상을 뜬 이후, 박정희 정권에서는 문화포장(文化褒章)과 문화훈장(文化勳章)을
추서(追敍)했으며, 고고미술 동인회 회원과 간송의 아들, 제자, 벗들이 그의 수집품을 정리하여
그의 호를 딴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박물관인 간송미술관을 열었다.

이곳을 둘러보면서 늘상 생각하는 거지만 그가 없었다면 미술관 수장고와 전시실에 있는 문화유
산 대부분은 일찌감치 해외로 빼돌려지거나 행방불명이 되었을 것이다. 1446년에 반포된 한글의
해설서인 훈민정음(訓民正音)도 예외는 아니었겠지. 다행히 하늘의 뜻이 있었는지 그의 품으로
들어갔으며, 그 덕분에 우리는 편안하게 훈민정음을 구경하고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가 큰 부자였으니 무량(無量)의 문화유산 수집은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다. 하지만 그는
수집한 것을 비싸게 팔거나 중개상 노릇을 한 것도 아니며 어떠한 이익 행위도 취하지 않았다.
이 땅의 문화유산을 수집하여 지키고, 그것을 연구하고 가꿀 후학을 양성하고자 거액의 재산을
내던진 것이다. 허나 무리한 지출이 매년 이어지다보니 적지않은 재산을 처분했고 결국 미술관
주변(그래도 꽤나 넒음, 마음 놓고 구경할 수 있는 미술관 보화각 주변은 그 일부에 불과함)
서울 방학동(放鶴洞) 가옥, 그리고 일부 토지만 남게 되었다.
이렇게 이윤을 포기한 그의 문화사업은 불모지나 다름없던 우리나라 미술사 연구의 큰 밑거름이
되었으며 그의 업적과 문화, 사회적 공헌의 가치는 정말로 값지다 할 것이다.

현재 미술관의 문화유산은 국가 소유가 아닌 간송 일가의 소유이다. 돈과 땅처럼 마음대로 행사
할 수 있는 재산이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 유동자산 대부분을 문화유산으로
바꾼 것이다. 그의 수집품은 국보나 보물, 지방문화재로 수두룩하게 지정되었고, 특별전 때 소
장 문화유산을 공개하면서 그들의 가치는 연일 하늘을 치고 있다. 왜정 때 1만원을 주고 산 그
림이 지금은 수천~수억을 호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바꿔 말하면 간송의 재산은 줄어든 것
이 아니라 숫자가 모자를 정도로 크게 증가된 셈이다. (간송미술관의 소유 문화유산이 어느 정
도 되는지 아직 구체적인 보고서도 없음)
허나 간송이 그것을 노리고 문화유산 수집에 나선 것은 아니다. 그는 어둠의 시절을 겪으면서
무방비로 방치된 문화유산을 지키려는 생각만 했었지 수익을 보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에게는
오로지 문화유산 수호와 민족 교육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자손들도 부유층 수준으
로 넉넉히 살고 있으니 궁색해지지 않는 이상은 문화유산을 팔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의 배때기를 채우고자 서민들을 쥐어짜고 나라를 팔아먹고 갖은 간계를 부리는 이 땅의
졸부와 권력층과 달리 간송은 그 돈을 정말 어디에 써야 되는지, 어떻게 써야 가치가 높은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몸소 실현한 선각자이다. 적어도 사회 지도층(부유층)이라면 간송의 그런
예를 본받고 행동에 옮겨야 진정 지도층이 아닐까? 지금 이 땅에 간송 같은 위인이 없는 것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  간송미술관 보화각 2층

★ 간송미술관의 역사
간송 선생은 자신이 사들인 문화유산의 효율적인 보관과 연구를 위한 터전을 짓고자 서울 장안
에서 적당한 터를 물색했다.
1930년대까지 간송미술관 자리에는 구한말에 조선에 들어와 비료장사로 부자가 된 프랑스 사람
브레상이 별장을 짓고 팔자좋게 살고 있었다. 그는 자기 나라로 귀국하고자 별장을 비롯한 인근
숲 1만평을 내놓았는데, 그 소식을 들은 간송이 그 땅을 둘러보니 명당(明堂)의 기운이 넘치는
좋은 터였다.
그래서 그 일대를 모두 사들이고 1934년 간송미술관의 전신인 북단장(北壇莊)을 세웠다. 북단장
이란 이름은 옛 선잠단(先蠶壇) 부근에 있다는 뜻으로 오세창 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왜정의 민족말살정책이 갈수록 요란해지자 간송은 근대식 박물관을 짓기로 작정하고 1938년 북
단장 옆에 2층 규모의 보화각을 세웠다. 당시 왜정은 전시체제를 이유로 물자통제를 하고 있었
는데, 그것을 비웃듯 이탈리아에서 대리석을 수입해 계단을 깔고, 진열실 바닥은 쪽나무 판자로
마루를 깔았으며, 오사까에서 화류진열장을 들여왔다. 또한 오세창과 박종화(朴鍾和, 간송의 외
종 사촌형) 등 서화계의 원로와 지식인들을 수시로 초빙해 자문을 구했다.
드디어 1938년 7월 5일 보화각 상량식(上樑式)을 가졌는데, 당시 75세였던 오세창은 너무 감격
스러워 다음의 정초명(定礎銘)을 새겼다.
'때는 무인년 윤 7월 5일 간송 전군의 보화각 상량식이 끝났다. 내가 북받치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이에 명(銘)을 지어 축하한다. 우뚝 솟아 화려하니, 북곽(北郭, 한양도성)을 굽어본다. 만
품(萬品)이 뒤섞여 새집을 채웠구나, 서화 심히 아름답고, 고동(古董)은 자랑할만, 일가에 모인
것이 천추의 정화로다. 근역(槿域, 우리나라)의 남은 주교(舟橋)로 고구(攷究) 검토할 수 있네,
세상 함께 보배하고, 자손 길이 보존하세'

많은 이의 기대 속에 보화각이 탄생했지만 정작 왜정의 태클로 속세에 공개되지도 못했다. 그러
다가 어느 날,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 부임기간 1936~1942년)가 보화각을 구경하고 싶다
고 연락을 했다. 총독비서인 스즈끼의 청을 받은 김승현 박사가 간송에게 이를 전하니 간송은
마지못해 허락을 했다.
허나 막상 미나미가 보화각에 도착했을 때는 마중 나온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미나미의 표정은
잔뜩 울상이 되었고, 당황한 김승현은 급히 간송에게 달려가 총독이 왔음을 알리니 그제서야 자
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세수를 하고 의관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30분을 기다리게 하고서야 총독을 맞이한 간송은 보화각을 구경시켜주고 응접실에서 홍
차 1잔을 대접해 보냈다고 한다. 민족말살정책으로 조선반도와 만주를 쥐어짠 조선총독이 간송
에게는 그야말로 하찮은 대접을 받고서도 그저 기다릴 대로 기다리고 보여주는 대로 보고 조용
히 돌아간 것이다.

해방 이후로도 어수선한 시대가 계속되어 개방을 하지 못하다가 1950년 6.25가 터졌다. 불과 3
일만에 북한군이 서울을 접수하면서 북단장과 보화각 정원은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고 보화각이
품은 막대한 문화유산은 북한에 의해 북송(北送)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북한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하던 최순우(崔淳雨)와 소전 손재형(孫在馨)에게 보화각 문화유산
을 죄다 포장해서 지정된 곳으로 옮길 것을 지시했다. 그들은 문화유산을 어떻게든 지키고자 감
독관으로 온 공산당원 기(奇)씨에게 왜국 판화로 된 춘화(春畵)를 보여주어 흥분시키게 하고 보
화각 지하실에 있던 화이트호스 위스키를 권해 허구헌날 술에 곯아 떨어지게 만들었다. 또한 그
들이 무식한 것을 이용하여 문화유산 선별기준에서 좋은 것은 나쁘다. 나쁜 것은 좋다고 속이고
물건을 하나 가져다가 풀면서 이건 아니라고 다시 싸게 하고, 목록이 잘못되었다며 다시 하게
했다.
포장이 진행되면서 감독관에게 '상자를 사오시오. 목수가 없소' 등으로 자꾸 태클을 걸었고 손
재형은 일부러 다리에 붕대를 매 뒤뚱뒤뚱 아픈 시늉까지 하면서 9월 28일 서울수복까지 포장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렇게 기가 막힌 지연작전으로 간송미술관의 유물은 모두 북송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북한이 책임자를 보내 추궁하려는 찰라 우리군과 유엔
군이 때마침 서울을 수복함으로써 화를 면하게 되었다.
허나 1951년 1.4후퇴로 간송이 급히 부산으로 내려가면서 유물 대부분을 챙기지 못해 상당수는
분실되고 말았다. (분실된 것 중 상당수는 전쟁 이후 다시 사들임)
6.25이후로도 그의 생전에는 공개되지 못했으며, 그가 별세한 후, 그의 아들 전성우가 부친의
유업을 이어받아 유물을 정리하여 1966년 한국민족미술연구소와 간송미술관을 세우면서 비로소
천하에 공개되었다.

1971년 '겸재(謙齋)전'을 시작으로 매년 봄, 가을에 특별전을 열고 있으며, 그 특별전에 한해
달랑 30일만 공개하여 상당한 아쉬움을 건넨다. 또한 관람객은 폭증하고 있는데, 전시 공간은
여전히 보화각 1동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관람객을 위한 편의시설도 많이 부족하고 미술관 홈페
이지도 아직 갖추지 않아 편함을 가중시킨다. 게다가 관람객이 폭풍처럼 밀려오는 경우에는 2~3
시간 심지어는 4~5시간 이상 줄을 서야 되는 등, 관람객을 위한 배려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부디 입장료를 받아도 상관없으니 미술관의 오랜 명성과 간송의 뜻에 걸맞게 이제라도 전시공간
을 확충하고 관람객 편의 제공과 개선에 많은 신경을 써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더 큰 아쉬움은 보화각 주변을 빼고는 관람객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 (통제의 정
도는 나날이 심해지고 있음) 통제 사유는 이 일대가 전씨 일가의 소유로 그 일가의 집이 보화각
을 중심으로 북쪽과 동쪽에 넓게 자리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곳곳에 배치된 상당수의 석조
문화유산과 숨겨진 아름다운 공간을 눈에 넣지 못해 무척이나 섭섭하다. 집 뜨락까진 아니더라
도 일단은 보화각과 가깝고 사생활 침해가 미미한 호랑이상과 괴산 외사리 승탑(僧塔, 보물 579
)까지는 적어도 쿨하게 공개를 해주면 좋겠다. 아니면 2012년 11월에 개방된 부암동 석파정(
石坡亭)처럼 입장료(좀 비싸도 상관은 없음)를 받아도 좋으니 공개 범위를 더욱 넓혀주었으면
좋겠다.

간송미술관은 훈민정음과 동국정운, 청자기린형뚜껑향로,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금동3존불감, 혜
원풍속도 화첩 등 국보 13점과 백자박산형뚜껑향로, 금보(琴譜), 금동여래입상, 문경5층석탑 등
보물 10점, 3층석탑과 석조팔각승탑 등 서울지방문화재 4점을 간직하고 있다.

※ 간송미술관 찾아가기 (2013년 10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나 성북03번 마을버스를 타
  고 성북초교 하차, 버스에서 내려서 왼쪽으로 100m가면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5분 정도 가볍게 걸어가는 것도 괜찮다.
* 미술관 내에 주차시설은 없으며 전시기간 중에는 바로 앞에 있는 성북초교 운동장을 임시로
  개방한다. 하지만 가급적 대중교통 이용을 권한다.

★ 간송미술관 관람정보
* 입장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10시~18시이다. (인원이 많은 경우 관람시간 약간 연장 가능)
* 특별전 기간에는 전시하는 그림과 문화유산를 다룬 도록을 판매한다. 가격은 2만원선, 내용이
  좀 어려운 경향은 있으나, 그런데로 볼만하며 소장용으로도 손색이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97-1
(☎ 02-762-0442)


♠  간송미술관의 문턱을 들어서다

▲  금지된 곳에 아련히 보이는 호랑이상 (사진 중앙에 있음)

미술관 정문을 들어서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야 미술관의 본관인 보화각에
이르는데, 왼쪽 대신 매서운 기세로 출입금지라 쓰여진 정면의 길을 보면 수풀 너머로 귀여움이
묻어난 석상 2기가 눈에 달려올 것이다. 그들이 바로 이 땅에 흔치 않은 호랑이상이다. 예전에
는 눈치를 살살보며 저들까지 올라가곤 했는데, 열정이 많이 식었는지 이제는 그것도 귀찮다.


▲  호랑이상의 위엄

요즘은 카메라나 스마트폰이 워낙 잘되어있어서 최대한 줌을 땡기면 그들을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그래도 직접 앞에까지 가서 보는 게 더 좋음)
그들은 무섭고 소름이 돋는 호랑이보다는 밝은 표정에 앙증맞고 귀여운 고양이 같다. 그들은 간
송 선생의 구원으로 이곳에 들어왔는데, 고향과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다.

호랑이상에서 길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가면 숲속에 가려진 주택이 하나 있다. 간송 일가가 머무
는 집의 하나로 여겨지는데, 좀처럼 접근을 못하게 하니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괜히 몰래 접근
하다가 잠복근무중인 멍멍이에게 호되게 쫓기는 경우가 있으니 주의하기 바라며, 적어도 호랑이
상까지는 접근을 허가해도 괜찮을 듯 싶은데, 휴전선 너머의 금지된 땅을 바라보듯 해야 되니
속이 참 쓰릴 정도이다.

▲  무인석(武人石)들
왕족이나 귀족의 무덤을 지켰을 그들은 간송 선생에 이끌려 지금은 미술관을 지킨다.
칼을 짚고 서 있는 눈맵시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  날렵한 몸매의 3층석탑
바닥돌 위에 1층의 기단(基壇)을 세우고 그 위에 3층의 탑신(塔身)과 노반, 상륜(相輪)을
갖춘 탑으로 그 역시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시대 탑으로 여겨진다.

▲  애꾸눈 석불좌상

간송 선생의 흉상 좌측 수풀 속에 애꾸눈 석불좌상이 숨어있다. 이 불상은 왼쪽 어깨는 옷으로
가리고 오른쪽 어깨는 훤히 드러낸 우견편단(右肩偏袒)을 취하고 있는데, 얼굴은 상당히 망가져
있으며, 오른쪽 눈은 파열되어 거의 애꾸눈처럼 되었다. 머리 부분도 3도 화상을 입었는지 매우
울퉁불퉁하여 무견정상(無見頂相 = 육계)과 머리 스타일은 확인하기가 어렵다.

석불의 조성시기는 신라 후기에서 고려시대로 여겨지나 자세한 신상정보는 모른다. 그 역시 간
송 선생의 구원으로 이곳의 일원이 되었으며, 그가 앉아있는 네모난 대좌(臺座)에는 불법(佛法)
을 지키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다.


▲  애꾸눈 석불좌상 대좌에 새겨진 다문천왕(多聞天王)
사천왕의 하나로 북쪽을 수호하는 다문천왕이 3층보탑(寶塔)과 창을 들고 있다.
이 석불을 미술관에 올 때마다 꼭 사진에 담았지만 다문천왕은 이번에 처음 본다.
왜 이제서야 그를 보게 된 것일까...? 그의 얼굴이 몸의 2/3를 차지할 정도로
신체비례가 맞지 않는 것처럼 나의 눈도 그리 잘 맞지 않는 모양이다.


♠  보화각 주변 둘러보기

▲  간송미술관 보화각(葆華閣)

간송미술관이 뜨락은 참 넓지만 건물은 보화각 하나가 전부이다. (그 외에 집들은 간송 일가의
생활공간)
2층 규모의 보화각은 1938년 북단장 옆에 세운 것으로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대리석으로 계단을
깔고, 진열실 바닥은 쪽나무 판자로 마루를 깔았으며, 오사까에서 화류진열장을 들여 내부를 꾸
몄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건축가인 박길용(朴吉龍, 1898~1943)이 설계한 건물로 의미가 큰데,
이렇게 많은 돈과 정성을 들여 1938년 7월 5일 상량식을 가졌으며, 이때 오세창은 너무 감격하
여 '조선의 보배를 두는 집'이란 뜻에서 보화각이라 이름을 지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간송미술관 전시실로 쓰이고 있는데, 건물이 워낙 단단하여 크게 손을 보거나
수정을 가한 부분이 없이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
관이자 간송의 정신과 체취가 서린 현장으로 요즘 흔한 등록문화재나 사적으로 지정하여 그 예
우를 해줘야 될 듯 싶은데, 아직 그런 소식까지는 들리지 않는다. 2012년에 방학동에 있는 간송
의 가옥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마당에 말이다.

저 작은 건물에 지금까지 수십만 명이 발걸음을 했고 70년이 넘는 연세에도 끄떡이 없으니 20~
30년만 넘으면 비리비리해지는 오늘날 건물과 견주어 참 대단한 건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간
송의 정성과 혼이 아낌없이 담긴 탓일 것이다.

   ◀  미술관(보화각)으로 인도하는 오솔길
보화각으로 가려면 꽃과 나무, 화분으로 가득한
녹음의 오솔길을 지나야 된다. 이 조그만 오솔
길에는 벽돌이 박혀 있으며, 길 양쪽에는 화분
과 수풀이 가득해 분재(盆栽)시장이나 숲속 산
책로를 거니는 기분이다.
여기가 과연 미술관이 맞을까? 의문이 들 정도
로 말이다. 자연물 사이로 망향(望鄕)의 한을
달래는 온갖 석물이 서로를 보듬고 있고, 다른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볼
거리인 공작의 보금자리(사육장)까지 지니고 있
어 관람객의 눈길을 단단히 잡아맨다. 이는 다
른 미술관에서는 감히 상상 조차 거부하는 특이
하고도 살아있는 특별 전시물(?)로 문화와 자연
이 공존하는 간송미술관 만의 묘한 매력이라 하
겠다.


▲  간송미술관 만의 매력, 공작의 보금자리

▲  사람 구경에 한참 넋이 나간 하얀 공작의 위엄

▲  공작의 보금자리 옆에 놓인 녹아버린 2개의 석물
잘 다듬어진 석대(石臺, 무덤의 혼유석이나 석물로 여겨짐) 위에 타다 만
흔적처럼 일부만이 남은 돌덩어리가 초췌하게 놓여져 있다.

▲  항아리나 함처럼 생긴 조그만 석물

 ▲  3층석탑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호

오솔길을 장식하고 있는 3층석탑은 바닥돌 위에 2중의 기단(基壇)을 얹히고 그 위에 3층의 탑신
을 세운 형태로 1층의 탑신이 2, 3층보다 크다. 지붕돌 받침이 3단으로 이루어져 있어 고려 초
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탑 높이는 약 3m이다. 기단부의 상대갑석(上臺甲石)과 하대갑석(下
臺甲石)에 새겨진 연꽃무늬가 마치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처럼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 탑의 고향은 알지 못하며 탑에 관련된 어떠한 정보도 전해 오지를 않는다. 다만 왜인들이 빼
돌리려 한 것을 간송 선생의 구원을 받았으나 결국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기억상실증에 걸
린 양 자신의 존재를 망각한 채 미술관 뜰의 장식물이 되었다.

◀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舍那佛坐像)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1호

3층석탑 옆에는 듬직하게 생긴 석불 1구가 높은
대좌 위에 앉아 있다. 두 손을 위아래로 잡고
있는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어 비로자나불
임을 알 수 있는데, 석불의 전체 높이는 약 3m
정도이다. 그의 머리는 꼽슬인 나발(螺髮)로 머
리 꼭대기에는 상투 비슷하게 육계(肉髻 = 無見
頂相)가 솟아 있으며 얼굴은 살이 많아 인심이
후박한 뚱보 아지매 같다.
불상이 앉은 대좌(臺座)에는 연꽃(앙련)이 새겨
져 있고, 대좌 아래 기단(基壇)에는 결가부좌를
한 조그만 석불이 4면에 새겨져 있다, 이들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끝없는 명상에 나래를 누리
고 있는데 그 뒤로 두툼하게 생긴 동그란 두광(
頭光)과 신광(身光)이 눈에 띈다.

불상의 조성시기는 고려 중기로 여겨지며 자세한 정보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 역시 간송 선생
의 구원에 이끌려 이곳에 안착했으며, 평퍼짐한 엉덩이가 인상적인 그의 뒷모습도 풍만스럽다.


▲  대좌 기단에 새겨진 석불 - 선정인의 포즈로 웅크리고 앉아
명상의 나래를 펼친다.

  ▲  주인 잃은 광배(光背)의 비애

광배에 새겨진 꽃무늬들이 마치 살아 숨쉬는 것 같다. 저 광배에 등을 기댔을 석불은 어디로 간
것일까? 광배는 혹여 찾아올지도 모를 자신의 님을 기다리며 오늘도 화사한 무늬를 펼쳐 보인다.
내가 저 앞에 앉으면 나도 광배를 갖춘 부처나 보살이 되는 걸까? 다음에 오면 그 앞에 결가부
좌로 살짝 앉고 싶다. (그러다가 관람객들에게 싸대기 맞는건 아닌지..?)

◀  석조비로사나불 옆에 자리한 석등(石燈)
그 역시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다.


▲  오랜만에 문을 연 보화각 현관

▲  보화각 현관 좌측 석사자

▲  보화각 현관 우측 석사자

보화각 현관 주변에는 제법 무서운 티가 풍기는 3개의 석사자가 미술관을 지킨다. 현관 바로 옆
에 자리한 석사자는 크게 으르렁거리듯 입을 대문만큼 벌리며 관람객들에게 조용히 관람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현관 앞에는 석사자 2개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모습은 비슷하다.

현관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우측 사자는 오른쪽 발로 구슬을 축구공처럼 만지고 있고, 좌
측 사자는 특이하게 그의 새끼와 발을 맞대고 있다. 가만히 살펴보면 발 밑에 새끼 사자가 누워
어미의 발과 맞장구 치는 모습이 보일 것이다.


▲  늦가을도 걸음을 멈춘 보화각 남쪽 산책로

▲  금지된 땅 - 간송미술관 북쪽(서북쪽) 언덕

보화각 북쪽에는 녹음이 짙은 언덕길이 있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사색하며 거닐고 싶은 그 언
덕길의 끝에는 간송 일가의 저택이 있으며, 길이 3갈래로 갈린 중턱에는 석조팔각승탑과 석인(
石人)이 있다. 예전에는 중턱까진 접근이 가능했으나 이번에 갔을 때는 바리케이트도 모자라 사
람까지 배치해 감시를 한다. 그래서 간송미술관에 갈 때마다 무조건 사진에 담는 석조팔각승탑(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9호
)와 괴산 외사리 승탑(보물 579호)을 사진에 담지 못했다. 저렇게 길
을 막는데 내가 권력층이 아닌 이상 무슨 수로 들어가겠는가..?
금지된 구역에 들어가는 경우 관계자의 허가를 받아야 되나 그것도 쉽지가 않다. 눈치껏 살짝
들어가 사진에 담아도 되지만 통제가 심해지니 이러다가는 저 언덕길도 오르지 못하는 것은 아
닌지 모르겠다.

통제구역과 간송 저택 뜰에는 망향의 한을 간직한 석탑, 불상, 승탑, 문인석 등 다양한 석조문
화유산들이 베일에 가린 채 은둔해 있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입장료를 받아도 좋으니 제발
속세에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괜찮은 것들만 추스려 보화각 주변에 끄집어내는 것도 괜
찮을 것이다.

이번에 못본 석조팔각승탑과 괴산 외사리 승탑. 문경5층석탑 등이 궁금하다면 이전에 쓴 간송미
술관 답사기를 쿨하게 참조하기 바란다. (☞ 관련글 보러가기)


▲  내년 봄을 그리며 간송미술관과 작별을 고하다.

이렇게 하여 간송미술관 가을 특별전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미술관을 나가는 순간까지도 답
사객의 발길은 여전했다. 봄과 가을이 한참이나 머물렀다 가는 도심 속의 별천지 같은 곳, 미술
관을 알록달록 수놓은 늦가을 풍경은 내년 특별전에서도 변치않는 모습으로 문화에 목마른 사람
들을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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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10월 2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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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 진영각

* 법정스님의 영정과 유품을 보관한 길상사 진영각
이곳은  원래 고참 승려의 거처인 행지실로 2013년 3월 7일에 진영각으로 속세에 개방되었다.

* 진영각 대문

 

* 기존 행지실을 손질한 진영각

* 법정의 유품

 

 

* 법정의 유골이 봉안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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