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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5.08 길상화와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깃든 도심 속의 고즈넉한 산사, 성북동 길상사
  2. 2020.10.03 도심 속에 숨겨진 고즈넉한 산사와 거닐기 좋은 상큼한 뒷동산, 안암동 보타사~개운산 (개운산둘레길) 2
  3. 2019.03.15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성북동에서 즐긴 고즈넉한 한옥 산책 ~~~ (최순우옛집, 수연산방, 한옥에서 즐기는 전통차 1잔)
  4. 2016.10.06 눈요깃감이 많은 서울 도심 속의 포근한 전원마을, 성북동 나들이 (심우장, 수연산방, 최순우옛집 등)

길상화와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깃든 도심 속의 고즈넉한 산사, 성북동 길상사

성북동 길상사



' 도심 속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성북동 길상사 '

▲  길상사를 키운 법정의 사진과 유품들


봄이 막바지 절정에 치닫던 5월 중순의 어느 평화로운 날, 후배 여인네와 성북동(城北洞)
길상사를 찾았다.
내가 늙은 절을 좋아하다보니 법등(法燈)의 끈이 짧은 절은 문화유산이 없는 이상은 별로
찾지 않는 편인데, 길상사는 예외로 내 즐겨찾기의 일원이 되어 이미 50번이 넘게 인연을
지었다. 이는 이곳이 지닌 상큼한 풍경과 포근하고 편한 분위기가 서로 어우러져 나를 이
곳의 충성 단골로 만든 것이 아닐까 싶다.

길상사는 성북동 북쪽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데 성북초교 직전 선잠단(先蠶壇)터에서 선잠
로를 따라 12분 정도 들어가면 절이 모습을 비춘다. 그 짧은 구간은 부자들의 으리으리한
금입택(金入宅)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현장으로 우리 같은 서민들은 보기만 해도 주눅
이 잔뜩 들고 편한 마음마저 사라지는 기분이다. 
이 땅에서 나날이 커져만 가는 빈부격차를 보여주듯 담장은 요새 같으며, 대문은 충차(衝
車, 공성무기의 하나)로도 어림 없을 정도로 견고하다. 또한 그것으로도 마음이 놓이지를
않는지 방범장치를 겹겹이 설치하여 지나가는 나그네를 항시 응시한다.
저택과 고급빌라 뜨락에는 담장 밖으로 손과 얼굴을 내민 나무들로 가득하며 도심과 가까
움에도 분위기도 차분하여 산책 코스로도 아주 좋다. 하여 나는 서울에서 가을이 가장 아
름다운 곳으로 성북동을 1순위로 꼽는다. 비록 서민들에게는 기분이 영 그런 곳이긴 하지
만 그렇다고 졸부들의 하찮은 위엄 앞에 지나치게 꼬리를 내릴 필요는 없다. 괜히 기죽지
말고 당당히 가슴을 피며 나들이객의 입장으로 산책을 즐기면 그만이다.
또한 성북동은 예로부터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의 명당 자리로 명성이 자자했다. 성북동
에 우리나라의 0.1%가 산다고 할 정도로 졸부들이 몰려든 것도 바로 명당(明堂)의 기운을
누리고자 함이다. 그러니 명당의 기운을 졸부나 상류층 따위가 다 누리도록 두지 말고 성
북동을 거닐면서 그 기운을 조금이나마 챙겨가기 바란다.


♠  길상화와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깃든 도심 속의 산사,
북한산 길상사(吉詳寺)

▲  길상사 극락전(極樂殿) 주변

서울 도심 속의 별천지이자 아늑한 산사(山寺)인 길상사는 저택과 고급 빌라가 쓸데없이 홍수
를 이루는 성북동 북쪽에 둥지를 틀고 있다. 비록 주택가에 터를 닦았지만 이곳이 북한산(삼
각산) 남쪽 자락에 해당되어 '삼각산 길상사'를 칭하고 있으며, 나무가 무성하고 계곡이 경내
를 가로질러 첩첩한 산골에 묻힌 산사의 분위기를 진하게 풍긴다.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절
풍경도 제법 아름답고 도심에 있음에도 공기도 청정하다. 경내는 포근하고 아늑해 중생의 마
음을 다독거려주고,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이채로운 볼거리가 두 눈을 호강시킨다.

길상사는 늙은 절도 아니고 그렇다고 문화유산을 품은 절도 아니다. 역사는 겨우 20여 년, 나
보다 한참이나 어리다. 이곳이 법등이 켜진 시간에 비해 유명세를 크게 탄 것은 군사정권 시
절 권력실세들이 들락거리던 고급요정에서 누구나 의지할 수 있는 절로 거듭난 전대미문의 현
장이며, 무소유(無所有)의 저자이자 불교계의 큰 승려로 추앙받는 법정(法頂)이 가꾼 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급요정을 기증한 김영한(길상화)의 이야기도 속인(俗人)들의 마음에 적지
않은 감동을 선사한다.

이곳을 키운 법정은 2010년 3월 11일 13시 52분께 78세의 나이로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다음
날 순천 송광사(松廣寺)로 운구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의 입적을 애도했다.


▲  창건주 김영한(길상화)의 영정 (극락전 내부 우측에 있음)

* 길상사의 창건주 김영한(金英韓, 1916~1999)의 생애와 길상사의 과거
길상사는 원래 성북동 서쪽에 자리한 삼청각(三淸閣)과 함께 고급요정으로 악명을 떨쳤던 대
원각(大元閣)이다. 군사정권의 실력자들과 대기업 고위간부들, 부유층들이 찾아와 기생을 끼
고 놀던 요정(料亭)으로 이곳을 세운 사람은 김영한<법명 길상화(吉詳花)>이다.

김영한은 양반가에서 태어났으나 집안이 일찍이 풍비박산이 났다. 그래서 16세에 궁중아악과
가무(歌舞)를 가르치던 하규일(河圭一, 1867~1937)의 문하로 들어가 진향(眞香)이란 이름으로
기생이 되었다. 그는 바다 건너 왜열도를 여행하다가 문학가로 유명한 백석(白石, 1912~1995)
을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그 당시 그는 조선일보 기자로 그녀를 자야(子夜)라 불렀다. 그들
은 혼인을 약속했으나 백석의 부모가 쌍수를 들고 반대하여 결국 이별하고 만다.

오기가 생긴 그는 악착같이 돈을 벌고 공부에 전념하여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
으며, 몇 편의 수필과 '내 사랑 백석','하규일 선생 약전' 등을 썼다. 또한 예전 기생을 했던
경력을 바탕으로 고급 식당을 차리고자 서울 주변을 물색하다가 계곡이 흐르는 지금의 길상사
자리에 좋은 예감을 얻어 이 일대를 사들여 청암장(靑岩莊)이란 한식당을 냈다. <성북동에 서
린 완사명월형의 명당 기운을 받으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잠시 다른 사람에게 운영을 맡기기도 했다가 이후 대원각으로 이름을 갈아 자신이 직접 챙겼
으며, 군사정권 시절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정권 실력자와 졸부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삼청
각, 청운각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고급 요정으로 우뚝 선다.

대원각 단골들이 정/재계에서 죄다 잘나가는 작자들이라 삽도 모자라 포크레인으로 돈을 쓸어
담을 정도로 대박 수입을 자랑했던 김영한, 허나 그는 혼인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돈과
명예를 위해 악착같이 살았던 그였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그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서서히 깨
달았고 그 와중에 법정의 '무소유'를 읽고 적지 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만나 여러 법문을 들었고, 결국 모든 것을 내놓기로 결심, 1987년 법정에게 절집
으로 써달라며 대원각을 통채로 기증했다. 허나 갑자기 뜬금없는 거액의 기증에 법정은 크게
펄펄 뛰며 거절을 했다. 당시 대원각의 면적은 7천여 평, 시가는 무려 1,000억원을 헤아렸다.

김영한은 8년 동안 끈질기게 기증의 뜻을 보였고, 결국 1995년 법정은 그곳을 받아 순천 송광
사(松廣寺)에 넘겼다. 송광사는 대원각을 대법사(大法寺)로 이름을 고치고 송광사의 말사(末
寺)로 삼았으며, 1997년 송광사의 옛 이름인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고 바로 그해 12월 14일 개
원법회를 열었다.
법회에는 천주교의 고(故)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시민, 불자 4,000여명이 구름
처럼 참석했는데, 법정의 이끌림에 대중 앞에 선 그는 자신의 부질없는 삶을 이렇게 드러내며
대중의 심금을 진하게 울렸다.
'저는 죄가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저쪽에 보이는 팔각정을 보면서)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요정시절 기생들)이 옷을 갈아입던 곳이었습니다. 제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길상사의 창건주가 된 김영한은 법정으로부터 길상화(吉祥花)란 법명(法名)과 함께 염
주(念珠)를 받았으며, 옛 사랑인 백석을 기리고자 2억 원을 내놓아 백석문학상을 만들기도 했
다.

이후 불교에 귀의하여 말년을 보내다가 1999년 11월 14일, 83세의 나이로 외로운 삶을 마감했
다. 그가 죽기 하루 전날, 절에 들어와 목욕재계하고 예불을 올리며, 길상헌에서 인생의 마지
막 밤을 보냈으며, 당시 길상사 주지 청학(靑鶴)에게
'내가 죽으면 눈이 내릴 때 절 마당에 뿌려주세요'
유언을 했다.

중생의 애도 속에 그의 육신은 산산히 화장되고 유골은 49재 이후 유언에 따라 첫눈이 절을
하얗게 채색하던 날, 길상헌 뒤쪽 언덕에 뿌려졌다. 그 자리에는 공덕비를 세워 그를 기리며,
매년 음력 10월 7일에 기제(忌祭)를 올린다. 또한 절은 그의 뜻을 받들어 대중에 널리 문을
열었고 '맑고 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을 만들어 해마다 30여 명의 중고생에게 장학금을 지원
하고 있다.

김영한은 막대한 재산을 가진 부자였지만, 돈을 신으로 받들며 사람 무시를 예사로 여기는 이
땅의 상당수 졸부들과 상류층과 달리 그 모든 것을 속세에 내버리고 빈털털이가 되어 인생을
마무리했다.
그는 자손도 없고 한줌의 재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 지 20년이 넘었지만, 그의 눈물 어린 사
연과 함께 아름다운 넋과 마음은 여전히 그의 유작(遺作)이라 할 수 있는 길상사에 고이 깃들
여져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중생의 메마른 마음에 감동의 싹과 눈물을 틔우게 한다.

▲  김영한(길상화)이 숨을 거둔 길상헌

▲  길상화 공덕비

* 길상사의 현재
길상사의 불전(佛殿)은 지장전 등 일부를 제외하고 기존 요정 건물을 개조한 것이다. 경내에
는 법당인 극락전을 비롯해 지장전, 설법전, 종무소, 범종각, 길상선원, 유마선방, 침묵의집,
진영각 등 2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오래된 절이 아니다 보니 딱히 문화유산은 없
고, 다만 200년 정도를 헤아리는 오래된 느티나무 2그루가 뜨락에 그늘을 드리운다.

또한 시민운동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도량으로 매년 5월에 법회와 길상음악회를 연다. 법회
때는 고(故) 법정이 자주 법회를 주관했으며, 그를 보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길
상음악회는 다양한 테마의 음악을 선보이는 자선음악회로 여기서 나오는 수입은 어려운 이들
을 위해 쓴다고 한다.

휴일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넓은 경내에 빈 공간이 없을 지경이며, 평일에도 적지 않게들
찾아와 길상사의 높은 인기를 보여주는데, 그 방문객 수는 서울 굴지의 고찰인 조계사, 봉은
사(奉恩寺), 도선사(道詵寺), 진관사(津寬寺) 다음급 정도는 될 것이다. (조계사가 방문객 수
는 단연 1등일 듯, 그 다음은 봉은사 정도)

* 길상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323 (선잠로5길68 ☎ 02-3672-5945)
* 길상사 홈페이지는 아래 법정 진영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길상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법정의 진영(眞影)


♠  길상사 일주문, 설법전 주변

▲  길상사 일주문(一柱門)

길상사로 들어서려면 '三角山 吉詳寺' 현판을 내민 일주문을 들어서야 된다. 이 문은 2000년
에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을 했는데, 정문을 들어서면 도심 속의 별천지 같은 길상사 경내가 1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고 장엄하게 펼쳐진다.


▲  늦가을이 잔잔히 깃든 경내
늦가을이 길상사와 이곳을 빛낸 인물들을 깊이 흠모했는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봉숭아물처럼 곱게 채색을 들였다.

▲  관세음보살과 성모 마리아를 섞은 길상사 관세음보살상

정문에서 설법전으로 가면 늘씬한 자태의 특이
한 석상이 눈길을 단단히 잡아맨다. 바로 관세
음보살상이다.
그런데 그 흔한 관세음보살처럼 생기지 않아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하는데,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어루만지는 어진 성모(聖母)와 같은 존
재라 아름답게 꾸며지는 경향이 강하지만 대부
분은 거기서 거기이다. 허나 이곳은 네모나게
다듬은 돌을 대좌(臺座)로 삼고 그 위에 소박
하고 날씬한 모습으로 곧게 서 있는데, 천주교
의 성모 마리아와 비슷한 이미지로 지어졌다.

이 보살상은 천주교 신자이자 우리나라 조각
계의 거장인 최종태씨가 만든 것으로 관세음보
살을 보살이 아닌 불모(佛母)로 삼아 만들면서
세상에 화제가 되었다. 2000년 4월 28일에 봉
안되었으며, 높이는 1.8m이다. 비록 보살상의
면모는 떨어지나 불교와 천주교가 서로 돕고
교류하여 이루어진 상징물로 그 가치는 크다.

머리에는 관세음보살이 필수로 쓰는 보관(寶冠)을 썼지만 그 모습은 서양식 왕관과 비슷하다.
머리결은 목 뒤쪽까지 내려갔으며, 얼굴은 자애로운 성모의 얼굴이다. 오른손을 들어 시무외
인(施無畏印)을 취했으며, 왼손에는 감로수가 든 정병(政柄)을 들고 있다. 그리고 손 아래쪽
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다.

대좌에는 다음의 메세지가 적혀있다. '이 관세음보살상은 길상사의 뜻과 만든 이의 예술혼이
시절인연을 만나 이 도량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모습을 보는 이마다 대자대비한 관세음보
살의 원력으로 이 세상 온갖 고통과 재난에서 벗어나지이다. 나무관세음보살'


▲  범종각 밑에 자리한 샘터

절을 찾은 중생의 목마름을 해소해주는 고마운 샘터로 가뭄과 겨울을 제외하고 늘 물로 가득
하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담아 한모금 들이키니 몸과 마음에 낀 때와 번뇌가 싹
씻겨 내려간 듯, 속이 시원하다.


▲  길상사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6호

길상사에는 2그루의 늙은 느티나무가 있는데, 윗 사진의 느티나무는 관세음보살 부근에 자리
한 것으로 오랜 세월을 양분으로 먹고 자라 제법 모습을 갖추었다. 경내에 선선한 그늘을 드
리우며 여름 제국도 나무의 기세 앞에 고개를 숙인다.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165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거의 200년 정도 되었으며 높이
는 12m, 둘레 2.5m이다.


▲  관세음보살 옆에 자리한 일그러진 표정의 마애불
커다란 돌에 새겨진 추상화 같은 선각마애상(線刻磨崖像)이 꽤 이채롭다.

▲  샘터 위쪽에 자리한 범종각(梵鍾閣)
이름 그대로 범종(梵鍾)의 보금자리로 길상화가 시주하여 만든 범종이
있었으나 2009년 9월에 새 종을 만들어 달았다.

▲  설법전(說法殿)

길상사 좌측 높은 곳에는 설법전이 자리해 있다. 설법전은 교육과 템플스테이 공간으로 쓰이
고 있는데, 기존 요정 건물을 개조한 탓에 불전(佛殿)의 이미지보다는 거대한 한옥 민박집이
나 강당 같은 이미지가 강해 보인다.
깔끔하게 정비된 설법전 내부는 연병장처럼 매우 넓고 깨끗하며, 2000년 8월에 조성된 금동석
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  옆에서 바라본 설법전

▲  설법전 내부


▲  저보다 밝은 표정이 있을까? 미소를 한가득 품은 금동석가여래좌상

볼살이 푸짐한 그의 표정은 너무 환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두근거리며 그 모든 것이 금동으로
장엄되어 그 금빛에 두 눈이 멀 지경이다. 석가여래 주변에는 중생의 시주로 하나씩 올린 수
백 개의 작은 옥불(玉佛)이 석가여래를 석굴처럼 에워싸 대장관을 이루는데, 이들은 인도에서
가져온 옥으로 만들었다.


▲  길상사 유일의 석탑인 길상보탑(吉祥寶塔)

설법전 남쪽에는 2012년 11월에 장만한 길상보탑이 길상사의 새로운 명물을 꿈꾸고 있다. 4마
리의 석사자가 7층 탑신(塔身)을 받치고 선 이른바 4사자 7층석탑으로 그가 세워지기 이전에
는 길상사에 그 흔한 석탑도 없었다.
탑이 없는 허전함을 계속 간직하고 있다가 2012년 영안모자 회장이 길상화와 법정의 높은 뜻
을 기리고 길상사와 성북성당, 덕수교회가 함께 한 종교간의 교류의 의미를 널리 전하고자 탑
을 기증하였고 탑 안에 복장봉안품을 넣었다. 이후 2013년 8월 동남아 미얀마에서 1,600년 묵
은 늙은 탑을 해체하면서 나온 석가여래의 오색정골사리와 옹혈사리, 나한사리를 입수하여 탑
에 넣어두었다.
 
탑이 있는 이 자리는 '바람 속 향기' 쉼터가 있던 곳으로 자판기 길다방과 음료수, 조촐한 평
상이 있었는데, 탑에게 밀려나 2012년 10월 정랑 서쪽으로 거처를 옮겼다. 탑은 보통 법당 앞
에 세우기 마련인데, 이곳은 극락전(법당) 대신 경내 동쪽 구석을 내주어 탑을 세웠다. 그렇
다고 극락전 뜨락이 좁은 것도 결코 아닌데, 아마도 다른 탑을 염두에 두고 그러는 것은 아닌
지 모르겠다.


♠  길상사 극락전, 지장전

▲  극락전(極樂殿)

길상사의 법당인 극락전은 옛 대원각의 중심 건물로 'ㄷ'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건물 내부에
는 방이 꽤 많은데, 가운데 칸에는 극락전의 주인장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있고, 우측 칸에
는 길상화와 법정, 절에 의탁한 망자들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좌측 칸은 중생들
이 예불을 올리거나 쉬어가는 쉼터로 방이 꽤 넓다.
좌측 칸에서 챗바퀴처럼 돌아가는 속세를 잠시 잊으며 쉬어가는 재미가 꽤 쏠쏠한데, 미닫이
씩 방문을 조금 열고 밖을 바라보면 정말 집 주인이나 마님이 된 기분이다.


▲  극락전 금동아미타3존상

극락전 불단에 봉안된 아미타3존상은 길상사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1997년 11월에 조성되
어 12월에 봉안되었다. 길상사의 창건을 지켜본 존재로 인자함이 가득 깃들여진 표정으로 중
생을 맞이하고 있는데, 그의 오른쪽에는 육환장(六環杖)이란 지팡이를 든 지장보살(地藏菩薩)
이 있으며, 왼쪽에는 보관을 쓴 관세음보살이 나란히 자리해 아미타3존상을 이룬다.
두 협시불(夾侍佛) 역시 자애로운 표정은 아미타불 못지 않으며, 그들 뒤로 비슷한 시기에 제
작된 금니(金泥)후불탱화가 있다.


▲  극락전 우측의 돌문
궁궐이나 고급 한옥에서 볼 수 있는 품격 높은 돌문으로 옛 요정시절의
화려하면서도 어두웠던 시절을 아련히 전해준다.

▲  극락전 느티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3호
60~70년 정도 묵은 느티나무로 대원각 초창기나 그 이전에 싹을 틔운 것으로 보인다.
계림황엽(鷄林黃葉)처럼 누렇게 뜬 낙엽을 하나, 둘 떨어뜨리며, 허전한
극락전 뜨락을 덮어준다.

▲  코스모스의 마지막 물놀이 현장
그들 생애의 마지막 물놀이지만 그들의 표정은 명랑하기만 하다. 마지막 앞에서도
의연한 모습으로 웃음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이 마치 길상화 공덕주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듯 하다.

▲  길상사의 또 다른 늙은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5호

극락전과 지장전 사이에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인 느티나무가 둥지를 틀었다. 보호수로 지
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27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300~310년 정도 되었으며 높이는 12m, 둘레
3.2m 규모이다.


▲  지장전(地藏殿)

경내 서쪽에는 '나누는 기쁨'이란 찻집과 지장전이 있다. 설법전과 극락전이 기존 요정 건물
을 손질한 건물인데 반해 지장전은 새로 장만한 것으로 2004년 10월 17일, 상량식(上樑式)을
가져 2005년 5월 8일에 완성을 보았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우람한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층은 밥을 먹
는 공양간인 선열당(禪悅堂), 2층은 도서관, 3층은 지장전이다. 건물 앞에는 보름달을 닮은
동그란 연못이 놓여져 있고 주위로 푸른 잔디가 곱게 입혀져 있으며, 건물 뒤에는 주차장이
있다.


▲  지장전 지장보살상

지장전 불단에는 고창 선운사(禪雲寺) 도솔암의 지장보살상을 모델로 삼아 만든 지장보살상이
밝은 미소로 중생을 맞이한다. 그 좌우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가 협시하
고 있으며, 붉은 색의 지장후불탱화가 그들의 든든한 후광(後光)이 되어준다.

◀  아미타불 염불이 잔잔히 울려퍼지는 지장
전의 숨겨진 복도 (영가들의 공간)

지장보살 불단과 그 앞에 펼쳐진 공간이 지장
전의 전부는 아니다. 불단 좌우로 보이는 문을
들어서면 불단 뒤쪽에 숨겨진 복도가 마치 보
물이 묻힌 비밀의 석실(石室)처럼 모습을 드러
낸다.
이곳은 죽은 이들, 즉 영가(靈駕)들의 공간으
로 그들의 이름이 적힌 위패가 빼곡히 자리를
채운다. 물론 이들도 돈을 받고 해준 것이다.
동쪽 벽에는 고운 색채로 치장된 석가3존상 벽
화가 그려져 있는데, 복도의 폭이 조금 좁다보
니 꽤 장엄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살아있는 이
의 심금을 자극시키며 잔잔히 흘러 나오는 아
미타불 염불(念佛)은 엄숙한 분위기를 유도해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  지장전 영가들의 공간에 그려진 벽화

황홀한 색채를 자아내는 벽화에 석가여래와 아리따운 모습의 관세음보살이 그려져 있다. 월출
산 무위사(無爲寺) 극락전의 후불벽화나 내소사(來蘇寺) 대웅보전의 후불관음탱화, 세계 최고
의 불화로 손꼽히는 고려불화처럼 현란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  '나누는 기쁨' 찻집

지장전 좌측에 자리한 '나누는 기쁨' 찻집은 녹차와 매실차, 국화차 등 두 귀에 익은 전통차
를 팔고 있다. 길상사 찻집으로도 불리며 보통 16~17시까지 운영하는데, 차의 가격은 인사동
이나 삼청동의 절반 정도 수준이다. 예전에는 리필이 가능했으나 요즘에는 거의 안해주는 편
이며, 가격도 괜찮은 수준이니 잠시 발길을 멈추고 차 1잔의 여유를 누려보는 것도 괜찮다.


▲  계곡 건너 숲속에 묻힌 길상헌(吉詳軒)
어른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요정 시절에는 길상화와 요정 식구들이 생활했다.
김영한이 마지막 밤을 지내며 인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며, 건물 주위를
돌담으로 둘러싸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임을 귀뜀해준다.


경내 우측(일주문을 들어서는 기준으로 왼쪽)은 좌측과 달리 자연의 비중이 꽤 높다. 나무들
이 무성하게 숲을 이루고 있으며, 북한산(삼각산) 남쪽 줄기(정릉 뒤쪽 산줄기)에서 발원한
계곡은 길상사 서쪽을 가로질러 성북천(城北川)으로 흘러간다. 나무로 우거진 언덕에는 조그
만 집들이 가득한데, 이들은 요정 시절 손님 접대 공간으로 지금은 승려 참선 및 처소로 쓰인
다.

제법 풍치가 깃들여진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3개 있는데, 먼저 다리를 건너면 어른 승려가 머
무는 길상헌이, 그 다음 다리를 건너면 길상화의 공덕비가 있다. 그 다음 다리는 나무그늘과
조그만 집들로 이어진다. 경내 북부에는 법정을 기리는 진영각과 승려의 생활공간이 있으며,
극락전 뒤쪽에는 침묵의집, 길상선원, 유마선방 등이 빼곡히 자리를 채운다.


♠  길상사 마무리

▲  창건주 길상화(김영한) 공덕비 (예전 모습)

길상화 공덕비는 창건주 길상화를 기리고자 그의 2주기인 2001년에 세웠다. 비석을 칭하고 있
지만 앞서 관세음보살상처럼 이형(異形)적인 모습이며, 비석 머리에는 사발 2개를 포개놓은
듯한 장식물이 눈길을 끈다.
길상화가 1999년 11월 숨을 거두자 그의 유언대로 눈이 하얗게 쌓인 한겨울에 이곳에서 그의
유골을 뿌렸다. 

나도 나중에 졸부들 못지 않은 대부자가 된다면 길상화가 그랬던 것처럼 인생 말년에 모든 것
을 세상을 위해 내놓을 수 있을까..? 그 물음에 '그렇다'는 대답은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보
다는 우선 돈좀 왕창 벌어 정승처럼 써보고 싶다. 부자가 되야 길상화를 따라하지 지금 같은
서민 신세에 그렇게 따라하면 큰일난다. 뱁새가 괜히 황새를 따라하다가는 가랭이가 절단나는
법이다.


▲  길상사 경내를 가로지르는 계곡

이 계곡은 정릉(貞陵) 뒷산에서 발원하여 성북천으로 흘러가는 것으로 약간의 인공이 더해졌
을뿐,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야말로 길상동천(吉詳洞天)을 칭해도 손색이 없는 수려한
풍경이다. 김영한은 바로 이 계곡에 매료되어 이곳을 매입해 대원각을 지었다고 전한다.

계곡 바위는 신선(神仙) 세계에서 몰래 슬쩍한 듯 멋드러진 모습을 자랑한다. 조그만 폭포도
2개 정도 있는데, 물줄기가 실타래처럼 가늘어 속세의 삶처럼 너무 답답하기만 하다.


▲  경내 북서쪽 언덕에 터를 닦은 집들 - 승려의 참선 및 처소로 쓰인다.

▲  경내 북쪽 산책로

경내 북서쪽에는 자연의 내음이 진하게 풍기는 산책로가 그림처럼 펼쳐져 번뇌의 염통을 잠시
나마 쫄깃하게 만든다. 보통은 절로 들어가는 길이 멋드러진 경우<월정사(月精寺) 전나무 숲
길, 내소사(來蘇寺) 전나무숲길>는 많으나 이곳처럼 경내에 어여쁜 길을 둔 경우는 그리 흔치
는 않다. 자연이 어우러진 이 산책로야말로 길상사의 자랑거리이자 얼굴이다,


▲  길상사 진영각(眞影閣)

경내 북쪽 구석이자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 진영각은 법정의 진영을 봉안한 건물로
그의 유품이 전시되어있다.
이 집은 원래 어른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행지실(行持室)이라 불렸는데, 2012년 7월부터 법정
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손질하여 11월에 마무리를 보았다. 그가 살았던 강원도의 오두막(수류
산방)에서 쓰던 유품을 비롯해 신도들이 기증한 저서와 서적을 모았고, 개방을 하지 않고 보
류하다가 그의 3주기인 2013년 3월 7일(음력 1월 26일)에 진영 봉안식을 봉행하면서 비로소
속세에 문을 열었다.

비록 늦긴 했지만 법정을 기리는 공간은 필요로 했다. 그의 손에서 자란 길상사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도리겠지. 그러고 보면 이 절을 탄생시킨 길상화를 위한 건물도 하
나 있어야 되지 않을까 싶다. 그의 영정과 유품을 전시해 법정과 더불어 길이길이 기렸으면
좋으련만, 아무리 법정이 이 절을 키워도 길상화가 아니었다면 길상사 자체는 없었다. 너무
법정만 띄우지 말고 길상화도 그에 못지 않게 1:1 비율로 띄워주기 바란다. 그게 길상사의 마
땅한 도리이다.


▲  진영각에 봉안된 법정의 진영

법정 진영은 김호선 화백이 2011년 3월부터 1년 2개월 동안 정성을 다해 그린 것이다. 전 문
화재청장이던 유홍준이 이 그림을 보고 스님이 그림을 뚫고 뚜벅뚜벅 걸어나올 것 같다고 평
가를 했는데, 서예가로 유명한 여초 김응현의 제자인 승려 기현(奇玄)이 진영의 글씨와 진영
각 현판을 썼다.


▲  법정의 사진과 유품, 온갖 서적들

▲  법정의 승려증과 건강보험증 (주민번호도 나와 있음)

▲  법정 관련 서적과 그가 쓰던 다기(茶器)들

▲  법정의 유품들 (불상과 그림, 모자 등)

▲  법정의 유품들 (승복, 염주, 법계증)

▲  법정의 법계증(法階證)


▲  법정의 유골이 뿌려진 곳

무소유의 소유자답게 그의 마지막 안식처는 참 조촐하기만 하다. 제자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그 흔한 승탑(僧塔, 부도탑)도 두지 않고 길상화가 그랬던 것처럼 자연의 일부로 돌아갔기 때
문이다. 조그만 안내문과 돌탑, 그리고 그의 넋을 먹고 자란 꽃과 풀이 그의 영혼터임을 알려
준다.


▲  길상선원(吉祥禪院) 앞길
길상선원은 시민들을 위한 참선 공간으로 선원장(禪院長) 승려의 지도로
참선이 이루어지는 좌선방(坐禪房)이다.

▲  길상선원 부근에서 만난 법정의 어록

▲  여염집 분위기 같은 적묵당(寂默堂)
신행단체 법회장소 및 석가탄신일 연등 작업 등 여러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예전에는 유마선방(維摩禪房)이라 불렸으나 2012년에 적묵당으로
간판을 갈았다.

▲  적묵당 앞 동그란 연못 (가을)
물이 태산처럼 고인 연못에는 한 세상 진하게 살다간 연들이
쓸쓸히 잎을 접고 있다.

▲  길상선원에서 설법전으로 가는 길 - 동네 골목길 같다.

▲  침묵(沈默)의 집

침묵의집은 중생들이 자유롭게 참선을 하거나 명상을 즐길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오전 10시
부터 17시(일요일은 16시부터 17시까지)까지 이용할 수 있으며, 최대 인원은 8명, 인원이 찼
을 경우는 방이 빠질 때까지 목이 빠져라 기다려야 된다.

길상화의 숭고한 뜻과 법정의 무소유 정신, 중생구제를 향해 고행도 서슴치 않았던 석가여래
와 관세음보살 누님, 지장보살 형님의 고귀한 뜻에 따라 세상이 문을 닫는 그 순간까지 오로
지 중생을 위해 헌신하며, 세속과 겉멋에 물들지 않는 순수의 불교 도량이자 도심 속의 극락,
길상사로 남기를 고대하며 본글을 마무리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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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숨겨진 고즈넉한 산사와 거닐기 좋은 상큼한 뒷동산, 안암동 보타사~개운산 (개운산둘레길)

 


' 도심 속에 숨겨진 고즈넉한 산사, 그리고 상큼한 뒷동산
안암동 보타사~개운산 나들이 '


▲  이 땅에서 매우 희귀한 유희좌 불상, 보타사 금동보살좌상

▲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  개운산둘레길


 

봄이 파릇파릇 익어가던 4월 한복판의 어느 따사로운 날, 고려대 뒷쪽에 자리한 안암동
(安岩洞) 보타사를 찾았다.
보타사는 10회 이상 인연을 지은 절로 즐겨찾기 급까지는 아니나 집에서도 가깝고 진귀
한 문화유산을 둘이나 간직하고 있어 매년 1~2회 정도 복습하러 간다. 올해도 변함없이
보타사 보물들의 안부가 격하게 궁금하여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오후 한복판에 부랴부
랴 카메라와 지갑을 챙기고 길을 나섰다.

보타사 서쪽에 자리한 개운사(開運寺)를 먼저 둘러보았으나 마음은 벌써 보타사에서 나
를 재촉하고 있어
개운사를 콩 볶듯이 살펴보고 동쪽 골목길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 길
의 끝에는 조그만 산사 보타사가 산문을 열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활짝 열린 보타사, 대원암 정문


 

♠  보타사(普陀寺) 입문 (대원암)

▲  안암동 대원암(大圓庵)

보타사 정문을 들어서면 양반가 기와집처럼 생긴 한옥이 제일 먼저 마중을 한다. 이곳이 초행
이라면 이것이 보타사인가 싶어 마음이 설레겠지만 그것은 함정이며, 그는 개운사의 부속암자
인 대원암이다.
보타사를 제대로 가리고 앉은 대원암은 기와집 1동이 전부인 조그만 암자로 1845년 지봉선사(
智峰禪師)가 창건했다. 그는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으로 법명(法名)은 우기(祐祈)인데, 북한
산(삼각산) 도선사(道詵寺)에서 인파당 축홍(仁波堂 竺洪)에게 사사하여 그의 법을 이어갔으
며, 효성이 깊고 인품이 넉넉했다. 또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도 친분이 있어 그에게 판
서(判書)직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연유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지봉판서라 불렀다.

왜정(倭政) 때는 현대불교의 큰 승려로 추앙받는 석전 박한영<石顚 朴漢永(1870~1948), 법명
은 정호, 영호>
이 이곳에 머물며 불교 교육에 나섰으며 1960년대에는 탄허(呑虛, 1913~1983)
가 역경사업을 벌였던 유서 깊은 현장이기도 하다.


▲  숲속에 자리한 보타사 주차장

대원암을 지나면 녹음이 깃든 숲이 조촐하게 펼쳐진다. 숲은 작으나 나무들의 강인한 협동심
으로 햇살도 우걱우걱 씹어먹을 정도로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마치 깊은 산중의 암자에
들어선 기분이다. 개운사에서 아주 잠깐 이동했을 뿐인데 풍경화는 이렇게나 180도 달라진 것
이다.

햇살도 거의 들어오기 힘든 그곳에 차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이 있고 그 너머로 석축을
쌓고 터를 다진 보타사가 마치 별장 같은 모습으로 들어앉아 있다. 연등이 아니었다면 이곳이
정녕 절집인지 고개 조차 갸우뚱했을 것이다.
주차장 옆에는 키도 제각각인 중창(重創) 송덕비와 사적비(事蹟碑) 등 비석 4기가 있고 그 옆
에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반원(半圓) 모양의 조그만 연못이 장차 다가올 연꽃의 향연을 숨죽여
준비한다.

▲  보타사 송덕비와 사적비

▲  반원 모양의 작은 연못

주차장에서 보타사로 인도하는 계단을 오르면 보타사 현판을 머금은 일주문(一柱門)이 중생들
을 맞는다. 일주문이라고 하나 그냥 일반 주택 대문에 기와 지붕을 얹힌 모습이다.


▲  보타사 일주문

▲  보타사 대웅전(大雄殿)

개운사 동쪽 그늘진 곳에 비구니 절인 보타사가 살포시 자리해 있다. 대원암과 더불어 개운사
의 부속 사찰로 경내가 숲에 완전히 감싸여 있어 바깥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으며 나무들이 무
성해 속세의 온갖 기운과 소음을 거의 털어버린다. 그래서 도심 속에 박혀있음에도 늘 번잡한
안암동 대학가가 지척임에도 고적하고 아늑한 산사(山寺)의 분위기가 진하다. 그야말로 '절간
답다'는 말이 딱 어울린다.

보타사는 개운산<開運山, 안암산(安岩山)>의 남쪽 끝자락을 잡고 있다. 서쪽을 제외하면 모두
가 막힌 궁색한 곳으로 경내 동쪽과 남쪽은 고려대로 막혀있고, 북쪽은 벼랑으로 완전히 막혀
있으며, 그 벼랑 윗쪽에 개운산의 남쪽 허리를 가르는 북악산길이 흘러가 차량의 굉음이 조금
씩 전해진다. 그리고 서쪽은 고려대 안암학사와 개운사로 나가는 길이 있다.

이곳은 원래 20세기 중반 불교전문강원과 중앙승가대학의 기숙사로 출발했다. 허나 1911년 2
월 경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마애보살좌상 옆에 맞배지붕 건물이 보인다. 그런 것을 보면 개
운사나 대원암에서 마애불 관리를 위해 닦은 조그만 건물이 이전부터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기숙사 건물을 손질해 칠성암(七星庵)이란 간판을 내걸었으며, 1980년대에 보타사로 이
름을 갈아 마애불과 금동보살좌상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아 절을 꾸리고 있다.

처음에는 개운사의 부속 암자로 조용히 묻혀 지냈고, 마애불 또한 주변 사람만 찾아올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다. 하지만 낭중지추(囊中之錐)란 의미심장한 말이 있듯이 결국 세상에 그 모습
을 드러내게 된다. 1992년 서울문화사학회가 서울에 숨겨진 문화유산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이
마애불이 발견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단순히 늙은 존재로만 주변에 전해졌는데, 조사를
해보니 무려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하여 바로 이듬해에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고, 2014년에 국가 보물로 승진하기
에 이른다. 또한 금동보살좌상은 이 땅에 흔치 않은 유희좌 스타일로 그 역시 지방문화재로
있다가 2014년 3월에 보물로 승진되어 같은 해에 무려 보물급 문화재를 2개나 지니는 위엄을
보였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관음전, 선방 등 4~5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2018년 이후 관음전
을 새로 짓는 등, 크게 중창불사를 벌였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마애보살좌상과 금동보살좌상
등의 값비싼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으며, 숲에 묻힌 벼랑 밑부분이라 깊은 산중에 들어선 기
분을 물씬 들게 만들어 이곳이 서울 한복판임을 순간 잊게 한다.


▲  대웅전 내부 (석가여래상과 영산회상도, 신중도)

일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마애불과 벼랑이 있고, 오른쪽에는 선방(禪房), 왼쪽에는 대웅전과
관음전이 자리해 있다.

보타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
붕 집이다. 불단(佛壇)에는 금색 찬란한 석가여래상이 들어앉아 있는데, 근래에 조성되어 피
부가 아주 탱탱하며, 변색된 부분이 없는 100% 금동 피부로 그의 광배(光背)는 마치 이글이글
타오르는 모습 같다.
볼살이 많아 보이는 그의 온후한 표정에는 미소가 깃들여져 중생의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데,
그 뒤에는 그 흔한 후불탱을 두지 않고 환하게 창문을 내어 마애보살좌상이 보이게끔 하였다.
그러니까 마애불이 일종의 후불탱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불상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과일과 꽃, 쌀로 상에 금이 갈 지경이며, 건물 좌측 벽에는 석가
여래의 설법 장면을 담은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와 법당 수호용인 신중도(神衆圖)가 걸려있
다. 이들은 20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고색의 기운은 아직 피지 않았다.


 

♠  보타사의 보물들 (마애보살좌상, 금동보살좌상)

▲  보타사 마애보살좌상(磨崖菩薩坐像) - 보물 1828호

대웅전 뒷쪽 벼랑에는 보타사의 2대 꿀단지의 하나인 마애보살좌상이 깃들여져 있다. 마애불
이 고된 몸을 기댄 화강암 벼랑은 거의 80~85도 각도로 불상 윗쪽에는 암벽이 눈썹바위 마냥
앞으로 길게 튀어나와 자연산 모자나 보개(寶蓋)의 역할을 하고 있다. 바로 그 윗쪽에는 개운
산의 남쪽 허리를 가르는 2차선 북악산로가 있어 차량 소리가 가늘게 들린다.

이 마애불은 오랫동안 안암산의 은자(隱者)로 이곳에 살짝 은신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92년
서울문화사학회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어떤 자료에는 발굴했다고도 나온다. 허나 그는 바깥에
노출된 상태였으므로 발견이 맞다. 서울의 대표적인 고찰(古刹)의 하나인 개운사가 바로 지척
이고 개운사 그늘에 자리한 곳에 조그만 것도 아닌 커다란 마애불이 수백 년이나 숨어왔으니
그의 숨바꼭질 실력이 참으로 대단하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 가치를 인정받아 발견된 이듬해(1993년)에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89호
로 지정되었고, 2014년 3월 경내에 있는 금동보살좌상이 국가 보물로 지정되자 그 여세를 몰
아 그해 7월 보물로 승진되었다.

마애불의 높이는 대략 5m, 폭은 4.3m로 조사 결과 고려 후기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런데 그
생김새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는 홍은동 옥천암(玉泉庵) 마애보살좌상(보도각 백불)을 너
무나 닮았다. 보관(寶冠)은 좀 틀리지만 얼굴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하얀 피부까지 옥천암의
그것과 너무 비슷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옥천암 마애불 역시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같은 사람이 조성하거나 모방하여 만
든 것으로 여겨지며, 고려 후기 서울 변두리에서 아주 잠깐 나타났던 마애불 형식으로 진정한
서울 스타일의 고려 마애불이다. 놀라운 것은 이런 마애불은 천하에서 서울에 딱 2곳뿐이라는
것이다.


▲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전경

마애불의 모습을 살펴보면 머리에는 보관을 눌러쓰고 있는데, 좌우로 관대(冠帶)가 나와있고
그 밑에 보관 장식이 늘어져 있다. 그리고 오른쪽 관대 밑에는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긴 장식
이 눈에 띈다. 하얀 얼굴은 약간 볼살이 있어 보이는데,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고, 그 눈썹
사이에 백호가 찍혀 있으며, 검은 두 눈은 지그시 뜨고 있다. 코와 입은 좀 작은 편이며, 입
술은 붉은색이나 빛이 좀 바래있고, 귀는 보관 장식에 가려져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고,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왼쪽 가슴을 가로지르
는 스카프 형태의 천의(天衣)가 밖으로 흘러나오도록 표현되어 있다. 왼쪽 팔은 몸에 비해 지
나치게 크고 길게 표현되어 괴물 팔처럼 보이는데, 팔찌를 낀 왼손은 무릎 밑까지 내려와 있
으며, 엄지와 3째 손가락을 맞대고 있다. 그리고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올려 엄지와 2번째 손
가락을 맞대고 있다.
옷의 주름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고, 두 다리는 포개어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다. 그리
고 두 발은 옷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  마애보살좌상 옆에 새겨진 네모난 원패(圓牌)

마애불 어깨쪽 좌우에는 네모나게 구멍이 파여 있다. 이는 자연산 구멍이 아니라 마애불을 지
켜주던 목조 건물이나 보호각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허나 아쉽게도 마애불에 대한 기
록이 전혀 없어 언제 지어지고 어떤 모습을 취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마애불은 보호각을
갑옷으로 삼아 온전하게 살아남았고, 그를 살린 보호각은 장대한 역사의 거친 흐름 속에 형편
없이 녹아 없어져 이렇게 상처 만이 남게 되었다.

마애불 왼손 쪽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네모난 공간이 있는데, 이를 원패라고 부른다. 이 원
패는 제작 당시에 새겨진 것으로 보이는데 '南無金剛會上佛菩薩(나무금강회상불보살)'이라 쓰
여 있다. 원패란 부처나 보살의 이름을 적어 불단 앞에 놓는 것으로 마애불 옆에 새겨진 점이
꽤 이채롭다.


▲  마애보살좌상의 얼굴과 자연이 그에게 씌워준 자연산 돌모자
어깨 양쪽에 파인 홈은 옛날에 사라진 보호각의 아련한 흔적들이다.

▲  바로 밑에서 바라본 마애보살좌상의 위엄
오른쪽 발은 발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했으며, 왼쪽 발은 오른쪽 발에 가려져 있다.
 

현재 마애불은 하얀 피부의 백불이지만 원래부터 백불은 아니었다. 하얗게 호분(胡粉, 여자들
이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하던 것으로 조개껍데기를 태워서 만듬)을 칠한 것은 20세기에 들어
와서이며, 그로 인해 몇몇 부분은 확인이 어렵게 되었다. 참고로 그와 친척뻘인 옥천암 마애
보살좌상은 19세기에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민씨(府大夫人閔氏)가 호분을 칠했다고 전
한다.


▲  관음전(觀音殿)

대웅전 옆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관음전이 있다. 지금 집은 2018년 이후에 새롭게 지은 것으로
원래는 여염집 모습의 기와집이 있었는데, 중앙승가대학 숙소로 쓰였던 것을 요사(寮舍)와 종
무소(宗務所), 금동보살좌상의 거처까지 담당하던 복합 공간으로 쓰이다가 새 건물을 장만하
면서 모두 분리가 되었다.
관음전이란 이름 그대로 보타사의 2대 꿀단지의 하나인 금동보살좌상의 거처이다. 중창불사로
잠시 대원암으로 거처를 옮겼고,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새 관음전에 안착을 했다.

▲  보타사 금동보살좌상(金銅菩薩坐像) - 보물 1818호

관음전에 봉안된 금동보살좌상은 이 땅에 흔한 불상이나 보살 스타일이 아니다. 오른쪽 다리
는 연화좌에 올려 무릎을 세웠고 왼쪽 다리는 밑으로 내린 모습이기 때문이다. 딱 보면 아줌
마 스타일의 착석 방법과도 비슷한데, 이런 포즈를 유희좌(遊戱座)라고 한다.

유희좌는 9세기 이후 북송(北宋) 시절부터 생겨났는데, 이 땅에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중
기에 가뭄에 콩 나듯 조금씩 생겨났다. 그러다보니 매우 귀한 실정이라 그 가치는 대단할 수
밖에 없다. 바로 그것이 현대사찰 보타사에 버젓히 서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보살상이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제자리가 어디었는지는 귀신
도 모르는 실정이며, 보살상 또한 굳게 입을 다물며 진술을 거절한다. 아마도 이리저리 떠돌
다가 중앙승가대학으로 흘러들어와 기숙사 불단에 봉안되었고, 기숙사 건물이 보타사로 변신
하면서 이렇게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앞서 마애보살좌상이 좀 남성적이라면 이 보살상은 여성적이다. 고품격과 미색(美色)이 느껴
지는 그의 정체는 딱 봐도 관세음보살 누님인데, 덩치는 조그만하고 머리에는 황제의 금관을
털어버릴 정도로 장엄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보관 밑으로 검은 머리칼이 조금 나와있다. 얼
굴은 아리따운 여인네처럼 곱기 그지 없어 은근히 마음을 설레게 하는데, 카메라도 그를 보고
잔뜩 흥분을 했는지 셔터가 마구마구 눌러진다.
불상과 보살상은 보통 당시 왕족이나 귀족, 특정 인물의 얼굴을 모델로 하여 만든 경우가 적
지 않아서 아마도 이쁘장하게 생긴 젊은 귀족이나 중년층 여인을 모델로 삼은 듯 싶다.

그의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고, 두 눈은 지그시 떠 있으며 코는 작고, 입술은 작지만 어여
쁜 모습이다. 볼에는 살이 조금 있어 보이며, 가슴에는 온갖 장식물을 달고 있다. 어깨에는
천의(天衣)를 걸치고 있고 그 한 자락을 수직으로 늘어뜨렸는데, 이는 조선 초기 보살상에서
조금 등장하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그가 앉아있는 연화좌(蓮花座)는 보타사에서 마련한 것으
로 오래된 것은 절대로 아니다.

보살상의 예사롭지 않은 모습과 조그만 불상/보살상이 많이 등장하는 조선 초기 금동상 중에
서 그나마 규모가 큰 점으로 보아 조선 초에 왕실이나 귀족에서 발원하여 특별히 제작된 것으
로 보인다.
비록 고향은 잃었지만 건강 상태는 양호하며, 조선 초기 귀족적인 보살상의 형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케이스이자 조선시대 보살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인정되어 2006년에 서울 지방유
형문화재 216호
로 지정되었다가 2014년 3월 국가 보물로 특진되었다.
이처럼 귀한 몸이니 보타사에서 유리막을 설치해 그에게 손도 대지 못하게끔 했는데, 어찌보
면 유리 감옥에 갇혀있는 듯 답답하게 보이기도 한다. 허나 어찌하랴? 문화유산 도난이 다반
사처럼 일어나는 이 땅의 현실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이런걸 두고 바로 필요악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보타사 승려들은 별 거부감 없이 그를 쿨하게 공개하고 있고, 사진 촬영에도 호의적이
라 그것으로도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 보타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5가 7 (개운사길 60-46 ☎ 02-928-2074)


▲  고적한 보타사를 뒤로하며~~~

숲속의 절집 보타사를 둘러보고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아직 해가 한참이나 남아있어 보너스
시간을 받은 기분인데, 어디로 가야 널리 칭찬을 받을까 궁리를 하다가 문득 깨달은 것이 있
다. 개운사와 보타사는 여러 번 인연을 지었지만 정작 그들을 품은 개운산은 제대로 둘러본
적이 없다. 즉 자식만 살펴봤지 그 어미는 살펴보지 않은 꼴이다. 게다가 개운산은 서울 장안
에 몇 남지 않은 미답처(未踏處)이기도 하다.
하여 미답지를 하나라도 더 지우고자 그곳으로 길을 잡았다. 비록 보타사가 개운산 자락에 있
다고 해도 개발의 칼질로 서로를 바로 이어주는 길은 진작에 끊겼다. 그나마 빠르게 개운산으
로 가려면 고려대 안암학사를 가로질러 정문으로 올라가 북악산길로 나가야 된다.

북악산길은 창의문<彰義門, 자하문>에서 북악산(백악산) 북쪽 능선과 미아리고개, 개운산 남
부를 거쳐 종암동 개운산입구 교차로까지 이어지는 서울에 대표적인 산악도로이다. 아리랑고
개까지만 북악산길로 알고 있었는데 개운산 산복도로까지 그 일원으로 있었다.
개운산을 넘어 종암동(鍾岩洞)까지 발을 뻗치고 있는 북악산길의 위엄에 새삼 놀라며 안암학
사 정문에서 3분 정도 그 길을 거닐면 성북구의회 입구가 나온다. 여기서부터 개운산 산책을
벌였다.


▲  잠깐 거쳐간 북악산길 (안암학사에서 성북구의회 입구 방면)

▲  성북구의회 입구에서 바라본 북악산길 (종암동 방향)


 

♠  성북구 한복판에 누워있는 도심 속의 포근한 뒷동산
개운산<開運山, 안암산(安岩山)>

▲  편안한 둘레길의 정석, 개운산둘레길 (명상의 길)

도심 속에 자리한 개운산(134m)은 성북구 안암동과 종암동, 돈암동(敦岩洞)에 걸쳐있는 조촐
한 뫼이다. 개운산이란 이름은 산 남쪽에 자리한 개운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안암동에 있다고
해서 '안암산', 종암1동에 진씨(陳氏)의 채석장이 있어서 '진석산' 등의 별칭을 가지고 있다.

산 서쪽에는 그 유명한 미아리고개가 있으며, 그 고개를 통해 아리랑고개와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산줄기와 이어진다. 산 남쪽과 동쪽은 평지이며, 북쪽은 야트막한 산지로 북
한산과 이어진다.
허나 개발의 무분별한 칼춤으로 인해 산 주위로 아파트와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차 산의 목을
조르고 있으며, 그로 인해 도시에 완전히 고립된 외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행히 1982
년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더 이상의 험한 꼴은 면했으나 겨우 높은 지대(거의 70~75m 이상)
만 자연의 공간으로 살아남았을 뿐이다.

개운산은 1936년 경성부(京城府, 서울의 왜정 시절 이름)에 편입되면서 그 주변이 신흥 주택
가로 주목을 받아 집들이 많이 들어서고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1940년 공원 지역으로 고시되
었으나 해방 이후 북쪽에서 많은 월남민들이 서울로 몰려들었고, 특히 도심과 가까운 안암산
자락에 마구 집을 닦아 머물면서 수목들이 상당히 희생되었다. 게다가 6.25전쟁으로 미아리고
개~개운산~종암동을 잇는 서울의 최후 방어 저지선을 지키고자 치열한 전쟁이 벌어져 산은 완
전 민둥산 신세가 되어버렸다.
196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나무를 심고 가꾸면서 다시 숱이 늘어났으나 산 주위로 주택가 확
대와 대학교들의 몸집 불리기로 계속 위협을 당하던 중, 1982년 근린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산
을 향한 개발의 칼질은 크게 줄었다.
2000년 이후 둘레길이 크게 유행을 타자 성북구가 3.4km의 개운산둘레길을 닦았고, 산책로와
산길 정비, 운동시설 확충, 울창한 숲속에 야외도서관과 유아숲체험장 등을 닦아놓아 조그만
산에 정말 없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알차게도 다듬었다. 게다가 숲이 짙어 조촐하게 산림
욕장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개운산은 덩치가 작으니 산행이 아닌 산책이란 말이 어울릴 것이다. 성북구의회에서 나들이를
시작하여 둘레길을 따라 산을 1바퀴 돌아도 되고, 성북구의회에서 북쪽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
마로니에마당으로 이동해도 된다. 마로니에마당은 개운산 정상(134m)으로 산의 몸집에 비해
정상이 너무 북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산으로 인도하는 길은 성북구의회, 북악산길 개운산 구간(중간중간에 산길이 있음), 종암아이
파크2차아파트 남쪽 길(종암로9가길), 종암동 죽림정사, 동부센트레빌아파트, 돈암동 새소리
어린이공원, 돈암풍림아파트 등이 있으니 각자 취향에 따라 골라가기 바란다.
아직은 동네 사람들이 주로 찾는 동네 명소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지만 가볍게 오를만한 도
심 속의 아늑한 뒷동산이고, 둘레길도 일품급이니 점차 서울의 주요 명소로 크게 거듭나리라
믿는다. 그럼 지금부터 개운산을 1바퀴 둘러보도록 하자.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종암동, 돈암동


▲  지그재그로 닦여진 개운산둘레길 계단길 (명상의 길)

성북구의회 입구에서 2분 정도 들어가면 좌우로 갈라지는 막다른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
쪽(북쪽)으로 가면 의회, 개운산 정상 방면이고, 오른쪽(남쪽)은 군부대 쪽인데, 오른쪽으로
길을 잡으면 이내 개운산둘레길이 동아줄 같은 길을 살짝 내려놓는다.
여기서 둘레길로 들어서니 시멘트길 대신 정겨운 흙길이 펼쳐져 개운산도 엄연한 산임을 짙게
내비춘다. 아무래도 산이 작아서 사람들이 뒷동산, 언덕이라고 낮춰서 대하니 산도 발끈하여
이런 길을 꺼내든 모양이다. (둘레길은 상당수 흙길이며, 북쪽은 지형상 나무로 닦은 데크길
이 많음)

개운산둘레길은 3.4km로 명상의 길, 연인의 길, 산마루길, 사색의 길, 건강의 길 등 5개 코스
로 이루어져 있다. 허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름일 뿐이며, 산이라 약간의 오르락내
리락이 있을 뿐, 길도 느긋하고 잘 닦여져 있다.
개운산 남쪽 봉우리에는 군부대가 닦여져 있어서 둘레길은 이들의 눈치를 보며 다소 남쪽으로
피해가며, 크게 1굽이를 돌면 종암동 구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  푸른 숲터널, 개운산둘레길 (명상의 길)

▲  개운산둘레길(명상의 길)에서 바라본 천하
숲 사이로 종암동과 청량리, 천장산(天藏山, 홍릉수목원 뒷산), 중랑구 지역,
아차산 산줄기가 바라보인다. 비록 하늘로 조금 솟은 뫼이나 조망은 낮은
높이치고는 썩 괜찮은 편이다.

▲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개운산둘레길 (명상의 길)

▲  개운산둘레길 종암동 구간에서 만난 바위들 (명상의 길)
세상이 바위에게 달아준 이름은 아직 없다. 바위들이 병풍처럼 들어선 모습이
그리 예사롭지는 않아 보여 옛날에 산악신앙이나 치성 장소로 쓰이지
않았을까 싶다.

▲  개운산둘레길 종암동 구간에서 만난 운치 깊은 소나무 (명상의 길)
소나무를 해치지 않고 그 양 옆으로 길을 내어 그를 조금이나마 배려해주었다.

▲  녹음 속에 펼쳐진 개운산둘레길 (연인의 길)

▲  개운산둘레길(연인의 길)에서 윗쪽으로 오르는 계단길
저 계단의 끝에는 개운산 산책을 시작했던 성북구의회 남쪽과 이어진다.
결국 원점으로 다시 돌아간 셈이다.

▲  개운산스포츠센터 뒷쪽(동쪽) 숲길

▲  솔내음이 두텁게 막을 이루고 있는 담소정 서쪽 소나무숲
이곳 평상에 누워 낮잠 한숨 청하면 정말 꿀잠이 따로 없을 것 같다. 사진에는
짤렸지만 책장이 있는 야외도서관도 있으니 솔내음의 가피 아래 독서의
즐거움도 누려보자~~! (책은 반드시 제자리에 꽂아둘 것)

▲  푸른 기와를 지닌 6각형 모습의 담소정(談笑亭)
정자 이름이 참 인간적이다. 즐겁게 이야기 꽃을 피우라는 뜻에서 그렇게
이름을 붙인 모양인데, 좋은 사람들과 즐기는 이야기꽃만큼
아름다운 꽃도 없지~~!

▲  담소정에서 개운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책로 (개운산둘레길 산마루길)

앞서 잠시 떨어졌던 개운산둘레길은 담소정에서 다시 만나 정상(마로니에마당)까지 함께 한다
. 담소정~정상 구간을 산마루길이라 하는데, 이 구간이 개운산의 지붕 길이자 중심 길로 쿠션
이 느껴질 정도로 길이 잘 닦여져 있어 발도 아주 호강을 누린다.


▲  담소정에서 성북구의회 방면 산책로

▲  개운산둘레길 산마루길 ① (개운산 정상 방면)

▲  개운산둘레길 산마루길 ② (성북구의회 방면)

▲  일품 그늘을 지닌 네모난 초가 정자 (산마루길 옆)

▲  아직은 썰렁한 개운산 자연학습장 (산마루길 서쪽)

▲  드디어 개운산 정상 직전 (저 길의 끝에 마로니에마당이 있음)

▲  개운산 정상, 마로니에마당

개운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마로니에마당은 평평한 너른 공간이다. 이곳의 절반 정도는
푸른 잔디가 잔잔하게 입혀져 있으며 'H'마크가 새겨진 헬기장과 화목정이란 정자를 비롯해
쉼터와 운동시설이 넉넉히 깔려 있어 동네 사람들의 발길이 빈번하다.
정상이라고 하지만 주변에 나무가 빼곡하여 조망은 별로이며, 북쪽으로 둘레길을 따라 내려가
면 길음역과 동부센트레빌아파트 방면, 동쪽은 종암동 죽림정사로 이어진다.

▲  남쪽에서 바라본 마로니에마당

▲  북쪽에서 바라본 마로니에마당과 헬기장

▲  푸른 기와를 지닌 화목정(和睦亭)

▲  개운산 정상 북쪽 밑에서 바라본
종암동과 개운산 남쪽 부분


▲  개운산 정상에서 길음역 방면으로 내려가는 나무계단길
(개운산둘레길 사색의길 구간)


개운산 북쪽은 산세가 조금 패기가 있다. 그렇다고 아주 험한 것까지는 아닌데, 정상 바로 밑
이다 보니 경사가 다소 흥분을 한 것이다. 그래서 나무로 계단을 닦고 길을 내었는데, 둘레길
은 그 계단과 나무테크길을 따라 미아리고개 동쪽인 돈암삼성아파트 뒷쪽으로 이어진다.


▲  개운산 북쪽 자락을 흐르는 나무데크길 (개운산둘레길 사색의길)
산길을 편하게 닦아놓아 거닐기도 좋고, 숲도 삼삼하여 시원한 산바람을 맞으며
사색에 잠기기에 좋다. 하여 생각 좀 하고 살라는 뜻에서 길 이름을
사색의 길이라 지은 모양이다.

▲  개운산 북쪽 자락 나무데크길(개운산둘레길 사색의길)에서 바라본
길음동 지역과 북한산(삼각산) 산줄기

▲  동부센트레빌아파트 뒷쪽 산자락을 지나는 개운산둘레길 사색의길

▲  개운산 나들이의 종점, 돈암1동 새소리어린이공원

개운산둘레길을 완전히 1바퀴 돌고 싶었으나 시간도 그렇고, 더 이상 땡기지도 않아서 (여기
서 더 가면 다시 성북구의회임) 둘레길을 버리고 새소리어린이공원으로 내려왔다. 이 공원은
개운산의 북쪽 관문 중 하나로 길음역(4호선) 2,3번 출구에서 도보 5분 거리라 접근성도 아주
좋다.

시간은 어느덧 17시 30분. 그리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개운사와 보타사에 깃든 보물들, 그리고
개운산까지 많은 곳을 둘러보니 정말 배가 부르다. 특히 오랜 미답처였던 개운산은 거의 상당
부분을 둘러보았으니 그와의 첫 인연치고는 성과는 좋다.
욕심은 과하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 여기서 쿨하게 길을 접으며 개운산 봄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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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9월 1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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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성북동에서 즐긴 고즈넉한 한옥 산책 ~~~ (최순우옛집, 수연산방, 한옥에서 즐기는 전통차 1잔)

 


' 서울 도심 속의 전원 마을 ~ 성북동 나들이 '
(최순우 옛집, 수연산방)

▲  수연산방 사철나무

▲  최순우 옛집 뒷뜰에 있는
둥그런 탁자와 의자

▲  최순우 옛집에서 만난 조그만
맷돌과 석구(石臼, 돌통)

 


 

♠  시민들이 지켜낸 시민문화유산 1호, 우리나라 고고미술에
평생을 바친 최순우(崔淳雨) 옛집 -
등록문화재 268호

가을이 한참 익어가던 10월의 끝 무렵, 후배 여인네와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성북동(城北洞
)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오후 2시, 한성대입구역(4호선)에서 그를 만나 5번 출구를 나와서
성북동 방면으로 뚜벅뚜벅 걸었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가니 왼쪽 골목에 키다리 빌라와 주택
사이로 별천지처럼 들어앉은 기와집이 손짓을 보낸다. 그 집이 이 땅의 고미술 연구에 평생을
바친 혜곡(兮谷) 최순우 선생(1916~1984)이 말년을 보냈던 집이다.

이 집에 살았던 최순우는 1916년 4월 27일 경기도 개성(開城)에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희
()으로 개성 송도()고보를 나와 1943년 개성박물관에 입사했다. 그는 당시 개성박
물관장인 고유섭()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면서 고미술에 뜻을 굳혔다고 한다.

1945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학예관과 미술과장, 학예연구실장을 지냈으며, 1950
년 6.25가 터지자 이승만 정권의 무책임한 한강인도교 폭파 만행으로 강을 건너지 못하고 북
한군에게 꼼짝없이 잡히고 만다.
서울을 접수한 북한은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당시는 북단장(北壇莊)과 보화각(葆華閣)이라
불림>에 있던 문화유산에 군침을 흘리고 박물관에서 일했던 최순우와 소전 손재형(孫在馨)을
소환해 그것을 모두 포장하여 지정된 곳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최순우와 손재형은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이 힘들여 수집한 문화유산의 북송만은 어떻게든
막아보고자 기가 막힌 눈속임작전을 감행했는데, 하늘이 도왔는지 감독관으로 온 공산당원 기
(奇)는 아주 어벙벙한 작자였다.

그들은 기씨에게 왜국(倭國) 판화로 된 춘화(春畵, 미성년자 관람불가급의 예민한 그림)를 보
여주고, 보화각 지하실에 있던 화이트호스 위스키를 권해 허구헌날 술에 쩔게 만들었다. 또한
문화유산 선별기준에서 좋은 것은 나쁘다. 나쁜 것은 좋다고 속이고, 물건을 하나 가져다가
풀면 이건 아니라고 다시 싸게 하고, 목록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다시 하게 했다.
포장이 진행되면 감독관에게 상자를 사와라, 목수가 없다 등으로 태클을 걸었고 손재형은 일
부러 생다리에 붕대를 매면서 다리가 아프다고 연극까지 벌여 9월 28일 서울수복까지 포장되
어 상자에 담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3달이 넘도록 아무런 진척이 없자 뚜껑이 뒤집힌 북한은 사람을 보내 그들을 추궁하려고 했다.
허나 그때 우리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하면서 추궁은 모면하게 되었고, 간송미술관의 유물
은 모두 북송을 면하게 되었다. 그 인연으로 간송 전형필과도 가까운 사이가 된다.

6.25 이후 서울대와 고려대, 홍익대에서 미술사 강의를 했으며, 1967년 이후 문화재위원회 위
원과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대표, 한국미술사학회 대표를 역임하고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되어 박물관을 크게 발전시켰다. 1981년에는 홍익대 대학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
며, 1984년 12월 16일 성북동 자택(지금의 최순우 옛집)에서 숙환으로 별세하니 그의 나이 68
세였다.

그는 고미술 외에 현대미술에도 조예가 깊었고, 우리나라 박물관사에 큰 업적을 끼쳤다. 주요
논문으로 '단원 김홍도 재세연대고()','겸재 정선론()', 한국
의 불화()','혜원 신윤복론(),'이조(李朝)의 화가들' 등이 있고 저서는 삼척
동자도 다 안다는 '무량수전(無量壽殿)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와 '한국미술사' 등이 있다.


▲  최순우 선생의 왕년의 모습

최순우 옛집은 1930년대에 지어진 한옥으로 경기도 지방 한옥 양식을 띄고 있다. 'ㄱ'자의 본
채와 'ㄴ'자의 사랑채, 행랑채가 있으며, 전체적으로 'ㅁ'자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본채 뜨
락에는 닫혀진 우물이 있고, 그 옆에는 작은 우물이 있다. 최순우는 1976년에 이 집을 구입해
1984년 생애 마지막 날까지 살았으며,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그가 사라진 이후, 이 땅의 천박한 개발의 칼질이 슬슬 압박을 가해오면서 그야말로 풍전등화
의 위태로운 신세가 되고 만다. 이 집을 밀어버리고 빌라를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청천
벽력과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뜻있는 사람들이 시민운동단체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를 창단해
개인마다 1평씩 구입하여 절대 사수에 나선 것이다. 그렇게 개발의 칼질은 그들의 의기(義氣)
에 보기 좋게 참교육을 당해 고개를 숙였고, 집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허나 주인이 사라진 옛집은 많이 초췌해져 있었다. 그래서 내셔널트러스트는 2003년부터 2004
년까지 돈을 모아 복원하고 뜨락을 꾸미면서 그 집에 '시민문화유산1호'란 별칭을 주었다. 우
리나라 최초로 민간에서 문화유산을 구입해 지킨 유서 깊은 곳이기 때문이다. (재단법인
내셔
널트러스트(National Trust)문화유산기금에서 관리하고 있음)

현재 안채는 전시 공간과 최순우기념관으로 쓰이고 있고, 동쪽 행랑채는 사무실, 서쪽 행랑채
는 회의실과 휴식공간으로 꾸몄다. 그리 넓지 않은 뜨락은 전통식으로 아기자기하게 손질하여
나무와 풀, 꽃이 뜰을 장식하고 있으며, 안채 앞뜰 중앙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
운다.
뒷뜨락과 모서리 공간에는 기증을 받거나 수습해온 동자상과 문인석, 맷돌, 석구(石臼) 등 다
양한 석물을 배치해 간송미술관의 뜨락을 꿈꾼다. 구석마다 그들이 자리를 채우니 넓고 알찬
느낌을 선사한다. 게다가 뒤뜰에 야외도서관을 두어 최순우가 쓴 글과 여러 서적, 그와 관련
된 서적들을 읽으며 독서의 여유도 누릴 수 있으며, 뒷뜰 뒤쪽에는 높은 담벼락으로 그늘이
가득하다.

안채 내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어 사무실에 허가를 구하면 들어가게 해주며, 쪽마루에 앉아
한옥의 미와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리며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도심 속의 새로운 오아시
스이다. 또한 주말과 휴일에는 다양한 공연과 전시회 등의 이벤트가 열려 성북동의 대중적인
명소이자 살아있는 한옥 공간으로 위엄을 날리고 있다.

길상사의 창건주인 길상화(김영한)가 자신이 일군 고급 요정을 절로 바꾸어 속세에게 선물했
듯이 이 집 또한 최순우와 그의 집을 지킨 뜻 깊은 이들이 속세에 남긴 소중한 선물이다. 또
한 2006년에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성북동의 꿀
단지로 단단히 자리매김하여 대문 문턱이 무너질 정도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나
도 이곳을 2008년부터 거의 10회 이상 찾아 내부 구조를 거의 외울 정도이다.
성북동 초입에 자리해 있어 성북동 답사나 나들이를 계획한다면 한성대입구역을 기점으로 삼
아 이곳을 먼저 둘러보기 바란다. 단 겨울(12~3월)과 일요일에는 문을 열지 않으며 관람시간
은 10시부터 16시까지로 짧은 편이다. (15시 30분까지 입장 가능)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126-20 (☎ 02-3675-3401~2)

* 내셔널트러스트 최순우 옛집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빌라와 주택들 사이에 고풍스럽게 들어앉은 최순우 옛집의 위엄
개발의 칼질을 참교육시킨 유서 깊은 현장이다. 이곳은 그나마 운이 좋았지
속세의 관심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개발로 날라간 옛 집과
문화유산이 적지 않다.

▲  속세를 향해 가슴을 연
최순우 옛집 대문

▲  안채 앞뜰에 높이 솟아 옛집에
그늘을 드리우는 소나무


▲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나타나는 안채 앞뜨락

▲  최순우 옛집 관리사무실로 쓰이는 동쪽 행랑
최순우 관련 서적과 전통차를 판매하고 있다.

▲  소나무 옆에 뚜껑이 닫힌 죽은 우물
최순우와 이전 주인 일가의 식수를 제공했던 네모난 우물, 허나
지금은 뚜껑이 닫힌 채 겉모습만 남아있다.

▲  여러 석물과 서적들이 놓인 뒷뜨락 남쪽
돌의자에 놓인 책은 마음껏 볼 수 있으며 돌의자나 안채 뒷쪽 쪽마루에
걸터앉아 독서에 임하면 된다.

▲  동쪽 행랑에서 바라본 뒷뜨락

▲  수풀 밑에 누워있는 석구(石臼)

▲  표정이 앳된 조그만 동자상


▲  박석이 입혀진 뒷뜨락 돌길과 장승 2기 (오른쪽 장승은 수풀에 가려짐)

돌길이 우리네 인생처럼 너무나 짧다.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끝나기 때문이다. 그 앞에는 재
밌게 생긴 장승 2기가 돌길을 지키고 있는데 이곳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영 좋지않은 기운들
은 장승의 재미난 얼굴을 보고 자신의 본분도 잊은 채 발길을 돌릴 것이다.


▲  뒷뜨락에 닦여진 둥그런 탁자 (누구든지 앉아서 독서나 대화 가능)

▲  뒷뜨락 장독대
장독대에는 무언가가 숙성의 과정을 거치고 있으리라 생각하겠지만
저들은 속이 빈 장식용이다.

▲  옛집의 서쪽 모서리를 지키는 2기의 조그만 문인석(文人石)
저들의 표정에 부질없는 세월의 고된 모습이 묻어난 듯 하다.

▲  나그네들의 조촐한 휴식공간
안채 뒷쪽 쪽마루

▲  안채 내부 - 복원 과정에서 꾸며진
부분이 상당수 된다.


▲  최순우 옛집의 뒷통수 (안채 서쪽 담장길)

흙으로 만든 토담과 시냇물의 징검다리처럼 박석(薄石)이 입혀진 정겨운 담장길, 담장 너머가
자연의 공간이거나 한옥이었다면 그 운치는 곱배기가 되었을텐데, 빌라와 슬레이트 지붕이 그
자리를 대신하니 그나마 우러난 정겨움과 운치도 절반 이상으로 뚝 떨어진다. 내게 큰 지우개
가 있다면 담장 밖 풍경을 싹싹 지우고 싶을 뿐이다.


▲  서쪽 행랑채에 진열된 혜곡이 쓰던 도장과 조그만 자기들

▲  마루에 놓인 검은 피부의 커다란 함지박


 

♠  상허 이태준이 살던 기와집, 현재는 전통찻집으로 바쁘게 살고 있는
상허 이태준 가옥(尙虛 李泰俊 家屋)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11호

▲  상허 이태준 가옥<수연산방(壽硯山房)> 외경

성북동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지친 머리와 두 다리도 잠시 달랠 겸, 차 1잔의 여유를 즐기
기로 했다. 하여 찾아간 곳은 예전부터 꼭 차를 마시고 싶었던 수연산방이다.
수연산방은 성북구립미술관 서쪽에 자리해 있는데, 전통담장과 나무로 몸을 가린 기와집이다.
성북동의 어엿한 명소이자 굵직한 전통찻집으로 사람들로 늘 미어터져 주말에는 자리를 잡기
가 힘들다.

이곳은 월북작가로 이 땅에서 오랫동안 좋지 않은 대접을 받았던 상허 이태준의 집이다. 그는
성북동에 서린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 명당에 욕심이 났는지 29살이던 1933년에 성북동의 배
꼽 부분에 해당되는 바로 이 자리에 땅을 구입해 개량한옥을 지었다. 이런 한옥을 짓고 살 정
도면 어느 정도 재산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여기서 1946년까지 가족과 살았으며,
'달밤','돌다리','황진이' 등 그의 수많은 작품이
여기서 태어났다. 이른바 그의 문학의 산실(産室)인 셈이다.
(어떤 자료에는 1900년대에 지어
진 집으로 나옴)


집의 규모는 대지 약 120평, 건물 면적 23.2평으로 서남향(西南向)을 하고 있다. 건물은 사랑
채와 안채를 합친 본채 하나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조그만 대문을 들어서면 아기자기하게 펼
쳐진 뜨락이 눈길을 단단히 잡아매며, 하늘을 가리고 선 나무와 온갖 화초들로 가득해 산속의
외딴 별장에 들어선 기분이다. 산방 동쪽에는 찻집으로 쓰이는 본채가 있으며, 서쪽에도 기와
집이 있으나 이는 찻집을 확장하면서 새로 지은 것이다. 또한 예전에는 상심루란 건물이 본채
앞에 있었으나 6.25전쟁 때 파괴되었다.

죽간서옥(竹澗書屋)이라 불리는 본채는 앞부분은 팔작지붕이고, 뒷부분은 맞배지붕으로 'ㄱ'
자형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중앙 2칸을 대청으로 하고 대청 남쪽에는 1칸 크기의 안방을, 안
방 앞에는 작은 1칸 크기의 누마루가 있다. 그 뒤에 반칸 크기의 부엌을 두었으며, 대청 북쪽
에는 1칸의 건넌방이 있고, 대청과 건넌방 앞에 툇마루가 있으며, 건넌방 뒤에 1칸의 뒷방이
있다.

이태준이 월북하자 그의 남겨진 가족들은 나라의 눈치를 보며 힘들게 살았으며, 1977년에 개
량한옥의 모습을 잘보여주고 있는 점과 사랑채와 안채를 합친 특이한 구조로 인해 서울시 지
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99년에는 그의 외종손녀인 조상명이 이 집을 전통찻집으로 손질하
여 속세에 활짝 문을 열었다. 당시 성북동은 지금처럼 제대로 된 찻집이나 까페가 없던 시절
이니 거의 성북동의 전문 전통찻집 1호나 다름이 없다.
찻집의 이름은 이태준의 당호(堂號)인 수연산방으로 삼았는데, 수연산방이란 '오래된 벼루가
있는 산속의 작은 집'이란 뜻이다. 왜정(倭政)까지만 해도 이곳은 산속 같은 변두리라 그 이
름이 딱 어울렸으나 이제는 졸부들의 집이 주변에 널려 주택가 속의 외로운 기와집이 되었다.

수연산방은 고풍스런 분위기와 한옥에서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매력으로 속
인들의 입과 입을 통해 찾는 수요가 상당하며, 간송미술관과 길상사, 삼청각, 심우장 등 성북
동의 간판 명소들이 크게 인기를 누리면서 그 후광(後光)을 단단히 봤다. 성북동에서 꼭 가봐
야 직성이 풀리는 전통찻집 겸 한옥으로 명성이 높아졌고, 돈을 삽으로 쓸어담을 정도로 호황
을 누리고 있다.
특히 휴일에는 거의 자리를 잡기가 힘들 정도로 올 때마다 만원이라 여러 번 발길을 돌린 쓰
라린 기억이 있다. 허나 이번에는 운이 좋았는지 사랑채 쪽에 자리가 하나 있어서 거기서 차
를 1잔 마셨다.
이토록 늘어나는 손님을 해결하고자 서쪽에 새로 건물을 지었으나 역시나 역부족이다. 하지만
더 이상의 신축이나 증축도 어렵다. 주어진 공간을 다 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본채를 건드리는 것은 말도 안되며, 자칫 잘못 손댔다가는 고풍스런 분위기마저 해칠
수 있다. 괜한 욕심으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지 말고 지금 그대로 두는 것이 수연
산방 주인이나 손님 모두에게 좋다.

▲  뜨락에 세워진 이태준 문학의 산실 표석

▲  뜨락에 심어진 돌기둥과 석등


* 상허 이태준(1904 ~ ?)의 간략한 삶
이태준은 강원도 철원 출생으로 호는 상허(尙虛)이다. 그의 아버지는 개화파(開化派)의 지식
인으로 활약했던 이문교(李文敎)로 함경남도 덕원감리서(德源監理署)에서 관리로 있었는데,
수구파에 밀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여기저기를 전전하다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다보니 이태준의 가정형편은 그리 좋은 편이 되지 못했으며, 9살에 어머니까지 별세하면
서 친척집에 얹혀 살게 된다.

그는 책장사를 해가며 1920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당시 그 학교 교사였던 이병기(李秉
岐)의 영향을 받아 고전문학의 소양을 듬뿍 쌓았다. 그 소양은 나중에 소설가로 성장하는 밑
거름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허나 학교의 무슨 비리나 문제가 있었는지 불합
리한 운영에 불만을 품고 동맹휴학을 주도하다가 퇴학을 당했다.

1925년 '조선문단'에 단편소설 오몽녀(五夢女)가 입선되어 시대일보(時代日報)에 발표를 했고,
1926년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 조오치대학(上智大學) 문과에 진학해 신문과 우유 배달로 힘겹
게 돈을 충당하며 공부를 했으나 재정난을 이기지 못해 결국 중퇴하고 귀국했다.

1929년 개벽사(開闢社)에 들어가 기자로 일했고,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을 역임했으며, 1930
년에 이화여전 음악가 출신인 이순옥과 혼인하여 가정을 꾸린다. 1933년에는 그동안 모은 돈
으로 성북동에 땅을 구입해 꿈에 그리던 한옥을 지으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에 돌입한다. 그
리고 그해 이효석(李孝石)과 김기림(金起林), 정지용(鄭芝溶), 유치진(柳致眞) 등과 친목단체
인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했다.
그 시절 평론가이던 최재서(崔載瑞)는 시는 정지용(鄭芝溶), 산문은 이태준이라 할 정도로 문
장의 달인으로 평가를 받았으며, 순수 문학의 기수, 한국 단편의 완성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순수문예지 '문장(文章)'을 주재하여 수많은 문제작품(問題作品)을 발
표했고, 역량있는 신인들을 발굴해 문단에 크게 공헌했다. 그리고 1931년 '아무일도 없소(東
光, 1931.7.)'를 시작으로 '불우선생(不遇先生 / 三千里, 1932.4)'과 '꽃나무는 심어놓고(新
東亞, 1933,3)','달밤(中央, 1933.11)','손거부(孫巨富 / 新東亞, 1935.11)','가마귀(朝光,
1936 1936.1),'복덕방(朝光, 1937.3)' 패강냉(浿江冷 / 三千里文學, 1938.1)','농군(文章, 1939.7)', '밤길(文章, 1940·5·6·7합병호)','무연(無緣 / 春秋, 1942.6)','돌다리(國民文
學, 1943.1) 등을 냈다.
1945년 이후 민족의 과거와 현실적 고통을 비교하는 문제의식을 드러낸 '해방전후(解放前後/
文學, 1946.8)'는 그의 간결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묘사적 문장으로 속인들의 호응을 크게 받
았다.

1945년 문화건설중앙협의회 조직에 참여하였고,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하
면서 '해방전후'로 조선문학가동맹이 제정한 제1회 해방기념 조선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
다가 1946년 여름 홍명희와 함께 월북(越北)했다.
1946년 10월에는 북한의 조선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소련을 다녀왔고,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의 부위원장까지 지냈다. 그리고 6.25시절에는 종군작가로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허나 1952년부터 북한당국으로부터 사상검토를 당하고 과거를 추궁받았으며, 1956년 친일혐의
와 우경적인 작품을 썼다는 이유로 함흥(咸興)으로 추방당해 콘크리트 블럭 노동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 그의 행적은 전해지는 것이 없어 아마도 소리소문도 없이 처단된 듯 싶다.

그의 1945년 이전 작품은 대체로 시대적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경향을 띄기보다는 구인
회의 성격에 맞는 현실에 초연한 예술지상적 색채를 진하게 나타내고 있다. 인간 세정(世情)
의 섬세한 묘사나 동정적 시선으로 대상과 사건을 바라보는 자세 때문에 단편소설의 서정성(
抒情性)을 높여 예술적 완성도와 깊이를 세워 나갔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대표적 단편소설
작가로 평가받는다. 1945년 이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핵심으로 활동하면서 작품에도 사회주
의적 색채를 담으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북한 종군기자로 전선에 참여하면서 쓴 '고향길(1950)'이나 '첫전투(1949) 등은 생경한
이데올로기를 여과없이 드러냄으로써 왜정 때 쓴 작품에 비해 예술적 완성도가 훨씬 떨어진다.
그런데 그가 월북한 것도 자의적인 것이 아닌 강제로 갔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1956년 이후에
숙청으로 사라진 것은 그가 철저한 사회주의적 작가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어쨌든 엄연한 월북작가라서 우리나라 정부에서 그의 작품을 몽땅 통제하여 그의 이름과 작품
은 생매장을 당했다. 그렇게 어둠 속에 가려진 그의 존재는 1988년 통제에서 풀려나면서 정지
용과 더불어 다시 세상에 드러나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으며,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지겹도록 등장할 정도가 되었다.
또한 그의 외종손녀의 노력으로 그의 집은 수연산방이란 이름으로 속세에 널리 알려졌으며 자
연히 그의 이름 3자와 작품도 덩달아 알려지게 되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48 (성북로26길 8 ☎ 02-764-1736)


▲  문이 활짝 열린 수연산방 정문

▲  뚜껑이 닫힌 우물
본채 앞에 사람 키 정도로 땅을 파 석축을 입히고 그 복판에 우물을 팠다.
이태준 일가에게 시원한 물을 선사했던 우물은 오래전에 생명을 다해
지금은 겉모습만 남았다.

▲  문학의 향기와 차의 향기가 뒤섞인 수연산방 본채(죽간서옥)

죽간서옥이라 불리는 본채의 방과 툇마루에는 차 1잔의 여유를 누리는 사람들로 발을 디딜 공
간이 없다. 이곳은 이태준이 있던 시절, 구인회 회원들의 모임 장소로 우리들 귀에 매우 익숙
한 이효석, 정지용도 자주 찾았다. 그들은 여기서 다과나 곡차(穀茶)를 즐기며 서로의 작품을
이야기하고 토론을 했으며, 세상 걱정에 자주 밤을 샜다고 전한다.
죽간서옥은 대나무 숲 사이의 서옥(書屋)을 뜻하며, 건물 안에는 이태준의 손때가 묻은 유물
과 그가 직접 쓴 작품과 서적들이 있다.


▲  빛바랜 수연산방 현판의 위엄 - 이태준의 글씨로 전해진다.
빛바랜 부분이 많아서 수십 년이 아닌 300년은 거뜬히 묵은 현판 같다.

▲  빛이 바랜 죽간서옥 현판 - 이태준 글씨
죽(竹) 글씨 위가 하얗게 바래지면서 마치 대나무에 쌓인 눈을 보는 듯 하다.

▲  본채(죽간서옥) 앞에 놓인 소나무 분재의 위엄

▲  뜨락 중앙에 자리한 사철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34호
수연산방에서 단연 돋보이는 자연물로 아담한 키로 뜨락을 햇볕으로부터 지킨다.
나이가 50년 정도 되었다고 하는데, 50년이면 이태준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그의 남은 가족이 망중한을 달래고자 심은 듯 싶다.

▲  뜨락을 수식하는데 조금이나마 일조하고 있는 벌개미취와 여러 꽃들

▲  본채 내부에 걸린 이태준 가족 사진
슬하의 자녀가 무려 5명이나 된다. (그 시절에는 5~6명은 기본이었으니)
본채에서 차를 마실 때, 방 곳곳에 걸린 사진과 현판, 그의 유품과
서적을 구경할 수 있다.

▲  본채 내부에 걸린 이태준의 친필 현판 (해석은 각자 알아서 ~~)

▲  액자에 소중히 담긴 이태준의 문서

▲  수연산방에서 누린 전통차 (차 이름은 잊어먹었음)

수연산방에서는 본채(사랑채, 안채) 내부나 새로 지은 서쪽 건물과 야외 자리, 그리고 사철나
무 밑에 자리를 잡고 차를 마실 수 있다. 그 자리들이 모두 찼을 때는 본채 툇마루에서 마셔
야 되는데 그 자리라도 앉으면 다행이다. (사랑채 안쪽 자리가 명당으로 미리 예약을 하는 것
이 좋음)
이곳 전통차 가격은 인사동과 비슷하거나 좀 야박한 수준으로 차를 주문하면 유과 등의 먹거
리와 따뜻한 물이 같이 덩달아서 나온다. 양반가의 방처럼 꾸며진 고풍스런 기와집에서 마시
는 전통차라 그런가 맛이 좀 남다른 것 같다. 특히 비오는 날 뚝뚝 대지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빗소리를 노래 삼아 누리는 차 1잔의 여유는 이곳의 백미(白眉)라 할만하다.

차의 향기도 좋고, 찻집 분위기도 아주 그윽하고 좋으니 서로의 긴장된 마음이 열리면서 이야
기꽃이 마구 쏟아진다. 그렇게 여기서 머문 시간은 무려 2시간, 전통찻집이나 까페는 자주 가
는 편이지만 길어봐야 2시간 이하로 머무는데, 여기서는 그 시간을 훨씬 넘긴 것이다. 정말 1
시간 정도 머문 것 같은데, 이곳이 시간 도둑인지 시간을 잡아먹는 블랙홀인지 하루에 1/12이
지나가버린 것이다. 게다가 방에 앉아서 마시는 거라 일어나기 귀찮음이 발생하면 머무는 시
간은 자연히 늘어날 수 있다.
이렇게 잠시나마 차담(茶啖)으로 각박한 속세를 잠시 잊는 것도 괜찮지. 식사를 하는 것이 아
닌 분위기에 취해, 차 향기에 취해, 이야기에 취하며 오래 머무는 공간이 바로 찻집(또는 까
페)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성북동 가을 나들이는 막을 내린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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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2월 1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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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요깃감이 많은 서울 도심 속의 포근한 전원마을, 성북동 나들이 (심우장, 수연산방, 최순우옛집 등)



' 서울 도심 속의 포근한 전원 마을, 성북동 나들이 '


▲ 수연산방 (상허 이태준 가옥)


 

싱그러운 5월을 맞이하여 후배 여인네와 함께 나의 즐겨찾기 답사지인 성북동(城北洞)을
찾았다.
도심 속의 전원(田園) 마을로 북악산 동쪽 자락에 감싸인 성북동은 20대 중반부터 1년에
여러 차례 답사나 나들이로 찾는 편이다. 그렇게 질리도록 갔음에도 돌아서면 또 안기고
싶은 곳이 또한 성북동이라 나의 마음을 두고두고 앗아가는 얄미운 곳이기도 하다. 이곳
외에도 부암동(付岩洞)과 백사실(백사골), 북촌(北村), 서촌도 나의 정처없는 마음을 들
었다 놓기를 반복한다.

성북동을 거론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곳의 풍수지리적 지형이다. 이곳은 호
랑이가 담배 맛을 알던 시절부터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의 명당(明堂) 자리로 명성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즉 '밝은 달빛 아래 비단을 펼쳐놓은 형세'이니 그 자리가 오죽하겠
는가? 바로 그 기운을 받고자 돈과 권력을 꽤나 주무르던 갖은 졸부(간송 전형필 선생은
빼자~!)들이 몰려와 집을 짓고 서식하면서 자연스레 이 땅 최고의 부자 동네를 형성하게
되었다. 하여 어떤 이는 이 땅의 1%가 아닌 0.1%가 사는 동네라고 강하게 꼬집기도 한다.

우리 같은 서민들이 오기에는 다소 꺼림칙한 곳이 분명하지만, 아름답고 의미가 깃든 명
소들이 많아 그 거부감을 감수하고 발걸음을 한다. 아무리 졸부들의 집이 거대하고 대문
이 성문처럼 두터워도 위대한 대자연 형님 앞에선 일개 모래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명소를 보러 것이지 졸부들의 하찮은 저택과 빌라를 보러온 것이 아니며 그
것들은 어디까지나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들러리일 뿐이다. 그러니 괜히 기죽지 말고 가
슴을 당당히 피고 관광객이나 답사객의 입장으로 성북동을 살펴보자. 졸부들에게 집중될
명당의 기운도 조금씩 챙길 겸 말이다.

본글에서는 성북동을 빛낸 20세기 초/중반 인물, 만해 한용운(심우장)과 상허 이태준(수
연산방), 혜곡 최순우(최순우옛집)의 흔적을 다루도록 하겠다. 이들은 모두 성북길 주변
에 있어 찾기는 매우 쉽다.


 

♠ 만해 한용운 선생이 독립을 염원하며 말년을 보낸 곳
심우
장(尋牛莊) - 서울 지방기념물 7호

성북동 종점(1111, 2112번 종점) 동쪽에 심우장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그 이정표를 따라 달
동네 언덕을 150m 정도 오르면 오른쪽에 문화유산 안내문을 내민 심우장이 답사객을 맞이한다.
심우장 주변은
달동네 집들로 가득하여 대궐 같은 집들로 도배가 된 성북로 북쪽과는 완전 대
조를 보인다. 같은 성북동인데도 이렇게 차이가 크다니 세상의 불공평함에 정말 치가 떨린다.


1933년에 지어진 심우장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조촐한 크기의 팔작지붕 건물로 겨우 80년 밖
에 숙성되지 않았다. 게다가 산뜻하게 손질된 탓에 고색의 내음도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
넓지 않은 뜨락에는 만해가 심은 향나무가 어엿하게 성장하여 주인을 대신해 집을 지키고 있으
며, 심우장은 만해의 기념관으로 쓰이고 있다. (심우장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만해 한용운
심우장'임)

~~ 1.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1944)의 생애 ~~
만해는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洪城)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청주(淸州), 본명은 유천
(裕天, 어렸을 때 쓴 이름), 정옥(貞玉, 장성해서 쓴 이름)이며, 호(號)는 만해이다.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배웠으며 14세에 혼인을 하였다. 1896년 홀연히 집을 떠나 설악산 오세
암(五歲庵)에 들어갔으며, 처음에는 절의 허드렛일을 돌보다가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 이후 만
주와 연해주를 홀로 여행하다가 1905년 다시 설악산에 들어와 백담사(百潭寺)에서 연곡(連谷)
을 스승으로 삼아 득도에 나섰다. <'만해'란 이름은 스승 만화(萬化)가 지어줌>

1908년에는 전국 사찰 대표 52인의 1명으로 원흥사(
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
립하고 왜국을 시찰하고 왔으며, 1910년 이후 만주로 건너갔다가 1913년에 귀국, 불교학원 선
생이 되었다. 바로 그해에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하여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해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6년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했고,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하나로 독립선언
서(獨立宣言書)에 앞장 서서 서명을 했다. 그리고 3.1운동 이후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했다.
1926년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해 왜에 저항하는 저항문학에 앞
장섰으며, 1927년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해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이 되
었다.
1931년에는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해 청년운동을 강화했
으며,같은 해에 여러 뜻있는 이들의 도움으로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했다. 이후 많은 논
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했고, 1937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
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이후 왜정에 배타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불교 개혁과 문학활동을
계속하다가 광복을 겨우 1년 앞둔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쓸쓸히 눈을 감으니, 그의 나이
65세였다.


▲ 만해 한용운 선생 영정

~~ 2. 만해 한용운과 심우장 ~~
만해는 3.1운동으로 3년간 옥고(獄苦)를 치르고 도심과 가까운 성북동에 셋방을 얻어 빈곤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를 존경하던 승려 김벽산(金碧山)이 찾아와
'성북동 송림(松林) 속에 구입한 52평의 땅이 있습니다. 그 땅을 선생님께 드릴테니 그곳에 집
을 짓고 사십시요'
하면서 지금의 심우장 자리를 주었다. 허나 땅만 있지 돈이 없어 집을 짓지
못했다.
그래서 만해의 부인 유씨(兪氏)가 친일파로 악명이 대단한 조선일보의 방응모 사장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 금융조합에서 대출을 받아 1933년 지금의 건물을 지었다. 건물의
면적은 약 18평으로 조촐한 크기이다.

이 건물의 특징은 그 흔한 남향(南向)이 아닌 북향(北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남
쪽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있으므로(정확히는 서남쪽이다) 이를 불쾌하게 여겨 북쪽을 바
라보게 만든 것이다. 이를 통해 그의 굳센 독립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심우장이란 이름은
선종(禪宗)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이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
한10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리고 건물 왼쪽 부분에 '심우장' 현판이 걸려있는데, 독립운동가 겸 서예가이자 간송 전형필
(澗松 全鎣弼)의 정신적인 스승인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이 쓴 것이다.

만해가 세상을 뜨자 그의 외동딸인 한영숙씨가 살았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심우장 건너편에 일
본대사관저가 건방지게 들어서면서 이웃 동네인 명륜동(明倫洞)으로 이사를 가 버렸다. 역시나
부녀간의 질긴 피는 속이지 못하는 모양이다. (심우장은 여전히 한영숙씨 소유로 되어 있음)
그런데 어찌하여 심우장 부근에 일본대사관저가 들어섰는지는 심히 의문이 든다. 왜국이 싫어
서 기껏 북향으로 집을 지었는데, 친일행위로 말썽이 많은 박정희 정권이 그런 것까지 배려를
하지 않고 방관한 모양이다.

이후 만해사상연구소가 이곳을 지켰으며, 만해의 기념관으로 탈바꿈하여 그의 글씨와 저서, 여
러 문서를 전시하고 있다. 또한 성북구청에서 집을 손질하여 심우장 내부를 천하에 공개했다.
(내부 관람 가능,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됨)


▲ 일창 선생이 쓴 심우장 현판 - 글씨의 기품이 느껴진다.

▲ 만해가 머물던 조그만 방

주인이 가고 없는 방에는 그의 숨결이 배인 여러 유품과 글씨들, 그리고 그의 초상화가 빈 방
을 지킨다. 햇볕이 별로 들지 않는 곳이라 한여름에도 시원하여 방바닥에 앉아 잠시 쉬어가기
에 좋은 곳이다. 허나 그렇다고 너무 오래 머물거나 벌렁 누워 잠을 청하거나, 너무 시끄럽게
떠들지는 말자. 시민 모두가 공유해야 되는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 심우장 뒷뜨락
현역에서 물러난 굴뚝이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옛 시절을 회상하며 우수에 젖어있다.


▲ 심우장 부엌
이제는 보기 힘든 정겨운 부뚜막 가마솥 안에 잘 숙성된 누룽지가 들어있는 것은
아닐까? 허나 막상 열어보면 누룽지 대신 무상한 세월이
입힌 먼지만이 털털 날린다.

▲ 만해의 글씨 - 마저절위(磨杵絶韋)
절구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들었다는 사자성어로 쉬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라는 뜻이다.


▲ 만해(卍海)의 호가 적힌 전대법륜(轉大法輪)

▲ 오도송(悟道頌)
1917년 12월 3일 설악산 산중암자인 오세암(五歲庵)에서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한 시문(詩文)이다. 목판에 쓰여진 하얀 글씨는 그의 친필이다.


▲ 만해의 온갖 저서와 관련 서적, 심우장과 그의 안내문이 담긴
가운데 방

◀ 심우장 뜨락에 심어진 향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46호
나무의 나이 약 80년


▲ 심우장에 그늘을 드리우는 소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31호
나무의 나이 약 90년

심우장 뜨락에는 오래된 나무 2그루가 아낌없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늘씬한 키를 자랑하는
향나무는 만해가 직접 심었다고 하며 아름다운 수관을 자랑하는 소나무는 심우장이 있기 이전
부터 있던 존재로 서로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심우장을 수식하는 정원수가 되었다.

조국의 광복을 꿈꾸며 절치부심(切齒腐心)하던 만해를 매일마다 지켜보던 자연의 산물로 그의
벗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문학 소재가 되기도 했으며, 여름의 제국(帝國)에는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겨울 제국에는 추운 바람을 온몸으로 막아주던 그야말로 만해를 위해 모든 것을 베
풀던 존재였다. 만해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이들 나무는 여전히 살아 남아 그의 빈 집을 지키
며 이곳을 찾은 나그네에게 당시의 상황을 아련히 속삭인다.


※ 심우장 찾아가기 (2016년 9월 현재)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동(서울다원학
교) 종점에서 하차, 버스가 왔던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면 심우장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 심우장은 아침 9시부터 18시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입장료는 없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22-1 (성북로29길 24)


▲ 심우장 앞에 자리한 붉은 벽돌집
심우장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집으로 만해사상연구소로 쓰이기도 한다.
이곳은 관람객 통제구역임~~

▲ 심우장 앞 골목길 - 어린 시절 뛰어놀던 그 비슷한 분위기의 골목길이다.
저 골목길의 끝에서 혹여 나의 꼬마 시절과 마주치는 것은 아닐까?


심우장 골목길은 서울 시내에 흔히 있는 조그만 골목길이지만 심우장과 그를 꾸미는 소나무의
위엄 때문인지 매우 특별하게 다가온다. 저 골목길을 오르면 달동네인 북정마을이 나오며, 그
마을 역시 성북동의 일부이다. 분명 같은 성북동인데, 졸부 동네와 서민 동네가 한 하늘 아래
공존하는 불편한 진실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북정마을에서 한양도성 산책로로 진입이 가능하며, 암문(暗門)으로 도성 내부로 들어갈 수 있
다.


 

♠ 월북 문학가 상허 이태준이 살던 집, 지금은 수연산방이란 이름으로
성북동 제일의 전통찻집으로 거듭난, 상허 이태준 가옥
(尙虛 李泰俊 家屋)-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11호


▲ 수연산방(壽硯山房)의 바깥 풍경

송미술관과 심우장 중간인 성북구립미술관 서쪽에 전통 기와담장과 나무로 몸을 가린 기와집
이 머물고 있다. 그 집이 바로 성북동의 주요 명소이자 이곳의 굵직한 전통 찻집으로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수연산방이다.

수연산방은 월북작가로 국내에서도 오랫동안 좋지 않은 대접을 받았던 상허 이태준(尙虛 李泰俊
)의 집이다. 이곳은 성북동의 배꼽 부분에 해당되는 곳으로 그도 완사명월형의 기운을 듬뿍 받
고 싶었는지 1900년대 초반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이 집을 1933년에 매입하여 머물렀다.
그는 여기서 1946년까지 가족과 살았으며,
'달밤','돌다리','황진이' 등 수많은 작품이 여기서
태어났다. 이른바 그의 문학의 산실(産室)인 셈이다.

집의 규모는 대지 약 120평, 건물 면적 23.2평으로 서남향(西南向)을 하고 있다. 건물은 사랑채
와 안채를 합친 본채 하나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조그만 대문을 들어서면 아기자기하게 펼쳐진
뜨락이 눈길을 단단히 잡아매며 하늘을 가리고 선 나무와 온갖 화초(花草)가 가득해 산속의 별
장에 들어선 기분이다.
산방 동쪽에는 찻집으로 쓰이는 본채가 있으며, 서쪽에도 기와집이 있으나 이는 찻집을 확장하
면서 새로 지은 것이다. 또한 예전에는 '상심루'란 건물이 본채 앞에 있었으나 6.25전쟁 때 파
괴되었다.

죽간서옥(竹澗書屋)이라 불리는 본채는 앞부분은 팔작지붕이고, 뒷부분은 맞배지붕으로 'ㄱ'자
형 구조를 하고 있으며, 중앙 2칸을 대청으로 하고 대청 남쪽에는 1칸 크기의 안방을, 안방 앞
에는 작은 1칸 크기의 누마루가 있다. 그 뒤에 반칸 크기의 부엌을 두었으며, 대청 북쪽에는 1
칸의 건넌방이 있고, 대청과 건넌방 앞에 툇마루가 있으며, 건넌방 뒤에 1칸의 뒷방이 있다.

이태준이 월북하자 그의 남겨진 가족들은 나라의 눈치를 보며 힘들게 살았으며, 1977년에 20세
기 초반 개량 한옥의 모습을 잘보여주고 있는 점과 사랑채와 안채를 합친 특이한 구조로 인해
서울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99년에는 그의 외종손녀인 '조상명'이 이 집을 전통찻집으
로 손질하여 속세에 활짝 문을 열었다. 당시 성북동은 지금처럼 제대로 된 찻집이나 까페가 없
던 시절이니 거의 성북동의 전문 전통찻집 1호나 다름이 없다.
찻집의 이름은 이태준의 당호(堂號)인 수연산방으로 삼았는데, 수연산방이란 '오래된 벼루가 있
는 산속의 작은 집'이란 뜻이다. 왜정(倭政)까지만 해도 이곳은 산속 같은 변두리라 그 이름이
딱 어울렸으나 이제는 졸부들의 집이 주변에 가득해 주택가 속의 외로운 기와집이 되었다.

수연산방은 고풍스런 분위기와 한옥에서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는 매력으로 속
인들의 입과 입을 거쳐 찾는 이가 늘었으며, 간송미술관과 길상사, 삼청각, 심우장 등 성북동의
기라성 같은 명소들이 크게 인기를 누리면서 그 후광(後光)을 단단히 봤다. 하여 성북동에서 꼭
가봐야 직성이 풀리는 전통찻집으로 명성이 높아졌고, 돈을 삽으로 쓸어담을 정도로 호황을 누
리고 있다.
휴일에는 거의 자리를 잡기가 힘들 정도로 올 때마다 만원이라 여러 번 발길을 돌린 쓰라린 기
억이 있다. 이토록 늘어나는 손님을 해결하고자 서쪽에 새로 건물을 지었으나 역시나 역부족이
다. 하지만 더 이상의 신축이나 증축도 어렵다. 주어진 공간을 다 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
방문화재로 지정된 본채를 건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자칫 잘못 손댔다가는 고풍스런 분위기
마저 해칠 수 있다. 괜히 욕심부리지 말고 지금 그대로 두는 것이 수연산방 주인이나 손님 모
두에게 좋다.

▲ 이태준 문학의 산실 표석

▲ 뜨락에 심어진 돌기둥과 석등

* 상허 이태준(1904~?)의 간략한 삶
이태준은 강원도 철원 출생으로 호는 상허(尙虛)이다. 그의 아버지는 개화파(開化派)의 지식인
으로 활약했던 이문교(李文敎)로 함경남도 덕원감리서(德源監理署)에서 관리로 있었는데, 수구
파에 밀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여기저기를 전전하다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다
보니 이태준의 가정형편은 썩 좋은 편이 되지 못했으며, 9살에 어머니까지 별세하면서 친척집에
얹혀 살게 된다.

그는 책장사를 해가며 1920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 당시 그 학교 교사였던 이병기(李秉岐
)의 영향을 받아 고전문학의 소양을 듬뿍 쌓았다. 그 소양은 나중에 소설가로 성장하는 밑거름
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허나 학교의 무슨 비리나 문제가 있었는지 불합리한
운영에 불만을 품고 동맹휴학을 주도하다가 퇴학을 당했다.

1925년 '조선문단'에 단편소설 오몽녀(五夢女)가 입선되어 시대일보(時代日報)에 발표를 했고,
1926년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 조오치대학(上智大學) 문과에 진학해 신문과 우유 배달로 힘겹게
돈을 충당하면서 공부를 했으나 재정난을 이기지 못해 결국 중퇴하고 귀국했다.

1929년 개벽사(開闢社)에 들어가 기자로 일했고,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을 역임했으며, 1930년
에 이화여전 음악가 출신인 이순옥과 혼인하여 가정을 꾸렸다. 그리고 1933년에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성북동에 집을 구입해 본격적인 작품활동에 돌입했으며, 바로 그해 이효석(李孝石)과 김
기림(金起林), 정지용(鄭芝溶), 유치진(柳致眞) 등과 친목단체인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했다.
그 시절 평론가이던 최재서(崔載瑞)는 시는 정지용(鄭芝溶), 산문은 이태준이라 할 정도로 문장
의 달인으로 평가를 받았으며, 순수 문학의 기수, 한국 단편의 완성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순수문예지 '문장(文章)'을 주재하여 수많은 문제작품(問題作品)을 발표
했고, 역량있는 신인들을 발굴해 문단에 크게 공헌했다. 그리고 1931년 '아무일도 없소(동광,
1931.7.)'를 시작으로 '불우선생(不遇先生/삼천리, 1932.4)','꽃나무는 심어놓고(신동아, 1933
,3)','달밤(중앙, 1933.11)', 손거부(孫巨富/신동아, 1935.11)','가마귀(조광, 1936.1),'복덕방
(조광, 1937.3)' 패강냉(浿江冷/ 삼천리문학, 1938.1)','농군(문장, 1939.7)', '밤길(문장,
1940·5·6·7합병호)','무연(無緣/ 춘추, 1942.6)','돌다리(국민문학, 1943.1) 등을 냈다.
1945년 이후 민족의 과거와 현실적 고통을 비교하는 문제의식을 드러낸 '해방전후(解放前後/문
학, 1946.8)'는 그의 간결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묘사적 문장으로 속인들의 호응을 크게 받았다.

1945년 문화건설중앙협의회 조직에 참여하였고,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면
서 '해방전후'로 조선문학가동맹이 제정한 제1회 해방기념 조선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6년 여름 홍명희(洪命憙)와 함께 돌연 월북(越北)했다.
1946년 10월에는 북한의 조선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소련을 다녀왔고,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부위원장까지 지냈다. 그리고 6.25시절에는 종군작가로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허나
1952년부터 북한당국으로부터 사상검토를 당하고 과거를 추궁받았으며, 1956년 친일혐의와 우경
적인 작품을 썼다는 이유로 함흥(咸興)으로 추방당해 콘크리트 블럭 노동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 그의 행적은 전해지는 것이 없다. 아마도 소리소문 없이 처단된 듯 싶다.

그의 1945년 이전 작품은 대체로 시대적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경향을 띄기보다는 구인회
의 성격에 맞는 현실에 초연한 예술지상적 색채를 진하게 나타내고 있다. 인간 세정(世情)의 섬
세한 묘사나 동정적 시선으로 대상과 사건을 바라보는 자세 때문에 단편소설의 서정성(抒情性)
을 높여 예술적 완성도와 깊이를 세워 나갔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대표적 단편소설 작가로 평
가받는다.
1945년 이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핵심으로 활동하면서 작품에도 사회주의적 색채를 담으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북한 종군기자로 전선에 참여하면서 쓴 '고향길(1950)'이나 '첫전투(1949) 등
은 생경한 이데올로기를 여과없이 드러냄으로써 왜정 때 쓴 작품에 비해 예술적 완성도가 훨씬
떨어진다. 그런데 그가 월북한 것도 자의적인 것이 아닌 강제로 갔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1956
년 이후 숙청으로 사라진 것은 그가 철저한 사회주의적 작가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월북작가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정부에서 그의 작품을 몽땅 통제하면서 그의 이름과 작품
은 생매장을 당했다. 그렇게 어둠 속에 가려진 그의 존재는 1988년 통제에서 풀려나면서 정지용
과 더불어 다시 세상에 드러나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으며,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활
발하게 진행되어 이제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쥐가 날 정도로 등장할 정도이다.
또한 그의 외종손녀의 노력으로 그의 집은 수연산방이란 이름으로 속세에 널리 알려졌고, 자연
히 그의 이름 3자와 작품도 덩달아 알려지게 되었다.

※ 수연산방 찾아가기 (2016년 9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쌍다리(성북구립미
술관) 하차, 여기서 서쪽(내린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2분 정도 걸으면 성북구립미술관
이 나오는데, 바로 옆에 돌담을 두른 기와집이 있다. 거기가 수연산방이다.
* 운영시간은 10시부터 20시까지로 다양한 전통차를 판매한다. (가격은 인사동보다 조금 비쌈)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48 (성북로26길8 ☎ 02-764-1736)


▲ 문이 활짝 열린 수연산방 정문

▲ 뚜껑이 닫힌 우물
본채 앞에 사람 키 정도로 땅을 파 석축을 입히고 그 중앙에 우물을 팠다.
이태준 일가에게 시원한 물을 선사했던 우물은 오래전에 생명을 다해
지금은 겉모습만 남았다.

▲ 문학의 향기와 차의 향기가 한데 어우러진 수연산방 본채(죽간서옥)

죽간서옥이라 불리는 본채의 방과 툇마루에는 차 1잔의 여유를 누리는 사람들로 발을 디딜 공간
이 없다. 이곳은 구인회 회원들의 모임 장소로 우리들 귀에 매우 익숙한 이효석, 정지용도 자주
찾았다. 그들은 여기서 다과나 곡차(穀茶)를 즐기며 서로의 작품을 이야기하고 토론 했으며, 세
상 걱정에 자주 밤을 샜다고 전한다.
죽간서옥은 대나무 숲 사이의 서옥(書屋)을 뜻하며, 건물 안에는 이태준의 손때가 깃든 유물과
그가 직접 쓴 작품과 서적들이 담겨져 있다.


▲ 빛바랜 수연산방 현판의 위엄 - 이태준의 글씨로 전해진다.
빛바랜 부분이 많아서 수십 년이 아닌 200년은 거뜬히 묵은 현판 같다.

▲ 빛이 바랜 죽간서옥 현판 - 이태준 글씨
죽(竹) 글씨 위가 하얗게 바래지면서 마치 대나무에 쌓인 눈을 보는 듯 하다.

▲ 본채(죽간서옥) 앞에 소나무 분재와 여러 화분들

▲ 뜨락 중앙에 자리한 사철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34호
수연산방에서 단연 돋보이는 자연물로 아담한 키로 주변 뜨락을 햇볕으로부터 지킨다.
나이가 50년 정도 되었다고 하는데, 50년이면 이태준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아마도 그의 가족이 망중한을 달래고자 심은 듯 싶다.

▲ 뜨락을 수식하는데 조금이나마 일조하고 있는 벌개미취와 여러 꽃들


 

♠ 시민들이 지켜낸 시민문화유산 1호, 우리나라 고고미술에 평생을 바친
최순우(崔淳雨) 옛집 -
등록문화재 268호

한성대입구역(4호선) 5번 출구를 나와서 성북동 방면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왼쪽 골목에 빌라와
주택 사이로 별천지처럼 들어앉은 기와집 하나가 두 눈에 달려올 것이다. 그 집이 바로 우리나
라 고미술 연구에 크게 헌신했던 혜곡(兮谷) 최순우 선생이 말년을 보냈던 현장이다.

이곳은 삼청각(三淸閣)과 더불어 성북동의 차세대 명소로 존재감을 드러낸 지는 몇 년 되지 않
았다. 이제는 간송미술관, 길상에 버금가는 성북동의 주요 명소로 단단히 자리를 닦았는데, 자
칫 개발의 칼질 앞에 이슬로 사라질 뻔했던 것을 뜻있는 시민들이 발벗고
서 개인마다 1평씩
구입하여 지킨 문화유산으로 매우 의미가 남다르다. 시민들이 지키고 가꾼 시민문화유산 1호로
재단법인 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문화유산기금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곳에 둥지를 틀었던 최순우(1916~1984)는 1916년 4월 27일, 경기도 개성(開城)에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희순
()으로 개성 송도()고보를 나와 1943년 개성박물관에 입사했는데, 당
시 개성박물관장인 고유섭()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면서 고미술에 뜻을 굳혔다고 전한다.

1945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학예관과 미술과장, 학예연구실장을 지냈으며, 1950년
6.25가 터지자 이승만 정권의 무책임한 한강인도교 폭파로 인해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그만 북
한군에게 잡히고 만다.
서울을 접수한 북한은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당시는 북단장(北壇莊)과 보화각(葆華閣)이라 불
림>에 있던 문화유산에 군침을 흘리고 박물관에서 일했던 최순우와 소전 손재형(孫在馨)을 불러
그것을 모두 포장해 지정된 곳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최순우와 손재형은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이 힘들여 수집한 문화유산의 북송만은 어떻게든
막아보고자 기가 막힌 눈속임작전을 감행했는데 마침 운이 좋게도 감독관으로 온 공산당원 기(
奇)씨란 사람은 어벙벙하고 무식한 작자였다.

그들은 기씨에게 왜국(倭國) 판화로 된 춘화(春畵, 미성년자 관람불가급 그림)를 보여주고, 보
화각 지하실에 있던 화이트호스 위스키를 권해 허구헌날 술에 쩔게 만들었다. 또한 문화유산 선
별 기준에서 좋은 것은 나쁘다. 나쁜 것은 좋다고 속이고, 물건을 하나 가져다가 풀면 이건 아
니라고 다시 싸게 하고, 목록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다시 하게 했다.
포장이 진행되면 감독관에게 상자를 사와라, 목수가 없다 등으로 자꾸 태클을 걸고 손재형은 일
부러 생다리에 붕대를 매면서 다리가 아프다고 연극까지 하면서 9월 28일 서울 수복까지 포장되
어 상자에 담긴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3달이 다되가도록 아무런 진척이 없자 뚜껑이 열린 북한 당국은 사람을 보내 그들을 추
궁하려고 했다. 허나 그때 우리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하면서 다행히 추궁은 면하게 된다.
어쨌든 그들의 재치와 하늘의 보살핌으로 간송미술관의 유물은 모두 북송을 면할 수 있었고 그
인연으로 간송 전형필과도 가까운 사이가 된다.

6.25 이후 서울대와 고려대, 홍익대에서 미술사 강의를 했으며, 1967년 이후 문화재위원회 위원
과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대표, 한국미술사학회 대표를 역임하고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되어
박물관을 크게 발전시켰다. 1981년 홍익대 대학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84년
12월 16일 성북동 자택(지금의 최순우 옛집)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때 그의 나이 68세였다.

그는 고미술 외에 현대미술에도 조예가 깊었고, 이 땅의 박물관사에 큰 업적을 끼쳤다. 주요 논
문으로는 '단원 김홍도 재세연대고()','겸재 정선론()', 한국의
불화()','혜원 신윤복론(),'이조(李朝)의 화가들' 등이 있고 저서는 삼척동자
도 다 안다는 '무량수전(無量壽殿)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와 '한국미술사' 등이 있다.


▲ 최순우 선생의 왕년의 모습

최순우 옛집은 1930년대에 지어진 한옥으로 경기도 지방 한옥 양식을 띄고 있다. 'ㄱ'자의 본채
와 'ㄴ'자의 사랑채, 행랑채가 있으며, 전체적으로 'ㅁ'자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본채 뜨락에
는 닫혀진 우물이 있고, 그 옆에는 작은 우물이 있다. 최순우는 1976년 이 집을 구입해 1984년
숨을 거둘 때까지 거주했으며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했다.

그가 사라진 이후, 개발의 칼질이 슬슬 압박을 가해오면서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태로운 신세
가 되고 만다. 이 집을 밀어버리고 빌라를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전해 들은 뜻있는 사람들이 시민운동단체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를 창단해 그 집을 흔쾌히 매입
하면서 개발의 무자비한 칼질은 그들에 의기 앞에 보기 좋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허나 주인이 사라진 옛집은 많이 지쳐 있었다. 그래서 내셔널트러스트는 2003년부터 2004년까지
혜곡이 살았던 시절의 사진과 그의 지인들의 자문을 참고하여 사랑방과 집을 복원하고 뜨락을
꾸미면서 그 집에 '시민문화유산1호'란 별칭을 주었다. (전시공간 확보를 위해 바깥채 2칸을 증
축하는 등의 변형이 좀 있음) 우리나라 최초로 민간에서 문화유산을 구입해 지킨 유서 깊은 곳
이기 때문이다.

현재 안채는 전시 공간과 최순우기념관으로 쓰이고 있고, 동쪽 행랑채는 사무실, 서쪽 행랑채는
회의실과 휴식공간으로 꾸몄다. 그리 넓지 않은 뜨락은 전통식으로 아기자기하게 손질하여 나무
와 풀, 꽃 등이 뜰을 장식하고 있으며, 안채 앞뜰 중앙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운다
. 뒷뜨락과 모서리 공간에는 기증을 받거나 수습해온 동자상과 문인석, 맷돌, 석구(石臼) 등 다
양한 석물을 배치해 간송미술관의 뜨락을 꿈꾼다.
구석마다 그들이 자리를 채우니 넓고 알찬 느낌을 선사한다. 게다가 뒤뜰에 야외도서관을 두어
최순우가 쓴 글과 여러 서적, 그와 관련된 서적을 읽으며 독서의 여유도 누릴 수 있으며, 뒷뜰
뒤쪽에는 높은 담벼락으로 그늘이 가득해 시원하다.

안채 내부는 접근과 촬영이 통제되어 있으나 사무실에 허가를 구하면 내부 진입/촬영이 가능하
며, 쪽마루에 앉아 한옥의 미와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리며 쉬어갈 수 있는 도심 속의 새
로운 오아시스이다. 또한 주말과 휴일에는 다양한 공연과 전시회 등의 이벤트가 열려 어린이와
학생, 가족단위 나들이객들이 많이 찾는 대중적인 명소이자 살아있는 한옥 공간으로 위엄을 날
리고 있다.

길상사의 창건주인 길상화(김영한)가 자신이 일군 고급요정(대원각)을 절로 바꾸어 속세에 선물
했듯이 이 집 또한 최순우와 그의 집을 지키던 뜻 깊은 이들이 속세에 남긴 소중한 선물이자 작
품이다. 또한 2006년에는 국가 지정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당당히 누
리고 있다.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잠시 길을 멈춰 최순우 선생의 체취를 느끼며 쪽마루
에 걸터앉아 한옥의 아름다움에 심취하며 쉬어가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 최순우 옛집 찾아가기 (2016년 9월 현재)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나 성북구마을버스 02, 03번
을 타고 홍익대부속중고등학교 입구에서 하차, 또는 5번 출구를 나와서 도보 10분, 길가에 최
순우 옛집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 관람기간 : 4월 1일 ~ 11월 30일까지 (12~3월은 개방안함)
* 관람요일 : 매주 화요일 ~ 토요일 (축제기간에는 일요일도 개방, 추석 당일은 휴관)
* 관람시간 : 10시 ~ 16시 (15시 30분까지 입장 가능 / 축제기간에는 17시까지 개방)
* 관람료 : 공짜 / 20인 이상 단체는 사전 예약 요망
* 옛집 내부에서 음식 섭취 행위는 통제하고 있다.
* 건물 면적 - 대지 395.042㎡, 건평 101.92㎡, 한옥 2동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126-20 (성북로15길 9 ☎ 02-3675-3401~2)
* 내셔널트러스트 최순우 옛집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빌라와 주택들 사이에 고풍스럽게 들어앉은 최순우 옛집의 위엄
애미도 몰라본다는 천박한 개발의 칼날도 고개를 푹 숙인 현장이다.

▲ 속세를 향해 문을 연 최순우 옛집 대문

▲ 안채 앞뜰에 높이 솟아 옛집에
그늘을 드리우는 소나무


▲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나타나는 안채 앞뜰

▲ 최순우 옛집 관리사무실로 쓰이는 동쪽 행랑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나는 내것이 아름답다' 등의 최순우 저서와
전통차를 판매한다.

▲ 소나무 옆에 뚜껑이 닫힌 죽은 우물
최순우와 그 이전 주인 일가의 식수를 제공했던 네모난 우물
허나 지금은 뚜껑이 닫힌 채 겉모습만 남아있다.

▲ 여러 석물과 방석, 서적들이 놓인 뒷뜨락 남쪽(야외도서관)
돌의자에 놓인 책은 마음껏 볼 수 있으며, 돌의자나 안채 뒷쪽 쪽마루에
걸터앉아 독서에 임하면 된다.

▲ 동쪽 행랑에서 바라본 뒷뜨락

▲ 조그만 맷돌과 빗물이 고인
석구(石臼, 돌통)

▲ 표정이 앳된 보이는 조그만 동자상
몸집이 너무 작아 딴 마음(?)을 품기에 매우
좋겠지만 그도 엄연한 돌이다.


▲ 돌이 박힌 뒷뜨락 돌길과 장승 2기 (오른쪽 장승은 수풀에 가려짐)

돌길이 우리네 인생처럼 너무나 짧다.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끝나기 때문이다. 그 앞에는 재미
나게 생긴 장승 2기가 돌길을 지키고 있어 이곳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나쁜 기운도 그들의 얼굴
앞에 자신의 본분도 잊은 채 발길을 돌릴 것이다.


▲ 뒷뜨락에 자리한 둥그런 탁자

둥그런 탁자 주변에는 머리에 방석을 쓴 키 작은 돌의자 7개가 둘러져 있다. 저들은 독서와 이
야기꽃을 피우는 공간으로 탁자에는 최순우 옛집과 내셔널트러스트 관련 자료가 놓여져 있다.


▲ 뒷뜨락 장독대
장독대에는 무언가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으리라 생각하겠지만
저들은 속이 빈 장식용이다.

▲ 옛집의 서쪽 모서리를 지키는 2기의 조그만 문인석(文人石)
저들의 표정에 부질없는 세월의 고된 모습이 묻어난 듯 하다.

▲ 시민들의 조촐한 휴식공간
안채 뒤쪽 쪽마루

▲ 최순우 선생의 기품과 학식이 고스란히
묻어난 안채 내부 - 복원하는 과정에서
꾸며진 부분도 적지 않다.


▲ 최순우 옛집의 뒷통수 (안채 서쪽 담장길)

흙으로 만든 토담과 시냇물의 징검다리처럼 박석(薄石)이 박힌 정겨운 담장길, 담장 너머가 자
연의 공간이거나 한옥이었다면 그 운치는 곱배기가 되었을텐데, 빌라와 슬레이트 지붕이 그 자
리를 대신하니 그나마 우러난 정겨움과 운치도 절반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 지우개가 있다면 담
장 밖 풍경을 싹싹 지우고 싶을 뿐이다.


▲ 서쪽 행랑채에 진열된 여러 도장과 최순우의 어록 1구절
혜곡의 손때가 묻어난 도장들이다.

▲ 서쪽 행랑채에 진열된 도장과 조그만 자기들 - 혜곡의 유품

▲ 안채 거실에 걸린 최순우의 사진과 그의 일대기가 적힌 장문의 안내문


▲ 마루에 놓인 커다란 함지박

▲ 개성만두집인 인사동 궁에서 먹은 떡만두국

이렇게 성북동을 둘러보고 시내로 나와 인사동(仁寺洞)을 찾았다. 어느덧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
오르는 저녁밥 생각이 간절해지는 시간이라 무엇을 먹을까 궁리를 하다가 오랜만에 경인미술관
맞은편에 있는 개성만두집 궁으로 들어갔다.
이 집은 인사동에 딱 어울리게 한옥으로 되어있다. 다행히 자리가 널널하여 방으로 들어가 자리
를 폈는데, 나는 떡만두국을 먹고 여인네들은 조랭이떡만두국을 먹었다. 만두국만 먹으면 허전
할 듯 싶어서 전을 하나 시켰는데, 가격이 그새 세월의 무게가 단단히 더해져 죄다 1만원을 호
가한다. 녹두전을 먹을까 하다가 가격이 그나마 낮은 김치전을 주문했다.

제일 먼저 배추김치와 무김치, 나박김치로 무장된 밑반찬이 펼쳐졌는데, 나박김치가 이곳의 자
랑으로 김칫물이 매우 달콤하고 시원하다. 그래서 거의 3덩이나 비웠다. 그리고 본 메뉴인 떡만
두국이 나타나 우리의 심판을 기다린다. 만두는 경기도 개성식으로 왕만두처럼 매우 두텁다. 육
수도 꽤나 숙성시킨 듯, 맛이 얼큰한 것이 좋았고, 떡과 소고기도 입맛에 맞는다. 일행들도 조
랭이떡만두국을 먹느라 정신이 없어 이내 그릇을 비운다.


▲ 떡만두국의 위엄

▲ 김치전의 위엄

만두국을 입에 대기가 무섭게 김치전이 앞에 차려진다. 김치전은 동그란 큰 그릇에 담겨져 있는
데, 조금 맛이 짠 것 같다. 그래도 배가 고파서인지 만두국과 함께 전도 말끔히 비워 어느 것도
남기지 않았다. 만두국의 가격은 인사동이란 프리미엄 때문인지 시중보다는 조금 비싸며 물가가
오른다는 핑게로 계속 가격을 올리고 있으니 이러다가 10,000원을 주고 만두국을 먹고, 파전 하
나에 2만원을 호가하는 시대가 오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아무리 맛이 좋아도 만두국 주제에
1만원이나 주고 먹기에는 좀 아깝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5월 성북동 나들이는 기분 좋게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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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6년 9월 2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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