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바다'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8.06.25 북한 개성 땅이 아련히 바라보이는 강화도의 북녘을 거닐다 ~~~ (연미정, 월곶돈대, 강화나들길, 강화평화전망대, 예성강)
  2. 2016.03.27 서해바다와 새만금을 품은 고즈넉한 바닷가 절집, 김제 망해사 (새만금바람길, 심포항)
  3. 2014.07.21 서해바다에 떠있는 아름다운 섬의 무리들 ~ 군산 고군산군도, 선유도 나들이 (장자도, 비응항)

북한 개성 땅이 아련히 바라보이는 강화도의 북녘을 거닐다 ~~~ (연미정, 월곶돈대, 강화나들길, 강화평화전망대, 예성강)

 


' 강화도 늦겨울 나들이 '
(북한 땅이 바라보이는 연미정, 강화 평화전망대)

▲  강화 연미정

▲  월곶돈대

▲  강화평화전망대 망배단


 


강추위를 앞세우며 천하를 꽁꽁 얼리던 무심한 겨울 제국, 그 제국의 유일한 꿀연휴인 설날이 다가왔다.

이번 연휴는 다행히도 제국(帝國)의 기운이 다소 누그러들어 길을 떠나기에는 좋았다.
여 처음에는 경기도 동부로 가려고 했으나 갑자기 강화도 연미정이 격하게 땡겨 서쪽으로
쿨하게 방향을 돌렸다.

연미정은 강화도(江華島) 동북쪽 끝에 매달린 오랜 명소로 금지된 바다 너머로 역시나 금
지된 땅 북한이 바라보인다. 참으로 순진했던 어린 시절에는 내가 장성할 때쯤 되면 반드
시 통일이 될거라 기대를 했었지. 허나 시간이 흐를수록 통일은 커녕 점점 절망적으로 변
해간다. 분단이 된지 벌써 70년이 넘었건만 이 상태로는 서울과 가까운 개성(開城)DMZ
에 갇혀 고통받고 있는 철원의 후고구려(後高句麗) 도성도 어림 없을 것이다.
그러니 비록 간의 기별도 가지 않겠지만 북녘이 바라보이는 전방을 찾아 멀리서나마 그곳
을 바라보는 수 밖에는 도리가 없다. 그것이 이 땅의 개같은 현실이다.

아침 일찍 합정역에서 친한 후배를 만나 김포좌석버스 3000(강화터미널신촌로터리)
잡아탔다. 이 노선은 강화도의 오랜 발로 강화도가 연륙되기 이전부터 시외직행버스로 운
행해 왔으나 2010년 봄에 좌석(광역)버스로 전환되어 보다 저렴하게 강화도를 찾을 수 있
게 되었다.
허나 설날 연휴를 맞이하여 강화도를 찾는 나들이 수요가 폭증하여 마송(통진)부터 강화
읍내까지 허벌나게 막힌다. 인간의 이기(利己)4발 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기어
가기를 반복, 강화도와 한반도를 이어주는 강화해협(江華海峽)을 겨우 건너 강화도의 관
문인 강화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에 이르러 연미정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찾았으나 그는 간발의 차이로 이미 떠나고
없는 상태, 교통체증으로 일정이 벌써부터 틀어져 버렸다. 하여 잠시 멘붕(혼란)에 빠졌
으나 곧 극복하고 마침 점심 때라 밥을 먼저 먹기로 했다.
그래서 읍내로 들어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강화군청에서 내려 예전에 갔던 밥집을 찾았다.
허나 그 밥집은 설날 연휴를 이유로 빗장을 닫아 걸은 상태였다. 그래서 다시 멘붕된 마
음을 부여잡으며 부근에 적당한 집을 찾다가 군청 서쪽에 '흥부네집'이란 고기집이 장사
를 하고 있어 꿩 대신 닭을 고를 여유도 없이 그곳에 들어가 불고기버섯전골을 먹었다.


▲  잘 차려져 나온 불고기버섯전골과 반찬들

▲  밥도둑, 불고기버섯전골의 위엄

전골을 주문하니 김치와 멸치볶음, 게장 등으로 이루어진 밑반찬 7가지가 차려진다.
다음 불고기버섯전골이 나타나 푹푹 끓여대니 보글보글 익으면서 멋지게 숙성이 되었다.
전골에는 소고기, 당면, 여러 채소들이 육수에 버무려져 있는데 한참 시장한 상태라 목
구멍에 제멋대로 들어갈 정도로 퍼먹었고 밥도 무려 2공기나 먹었다. 그야말로 밥 도둑
이 따로 없다.

그렇게 기분 좋게 점심을 먹고 후식 커피를 뽑아 먹으며 밖으로 나왔다. 오늘 계획대로
연미정을 가야되나? 아니면 다른 데로 갈까? 궁리하다가 후배가 북한 땅이 보고 싶다며
택시를 타고 연미정에 가자고 그런다. 아무리 세상에 관심이 없고 지리, 역사와 철저히
담을 쌓은 후배지만 역시나 이 땅의 어쩔 수 없는 백성인가 보다.
하여 거리에서 놀고 있는 택시를 붙잡아 강화읍내 북쪽을 가로지르며 연미정으로 이동했
. 소요시간은 약 10분 정도. 그곳에 이르니 인적이 별로 없을 것 같은 예상을 뒤엎고
나들이객들이 제법 있었다.


 

♠  연미정을 품으며 강화해협을 지키는 조선 후기 해안 요새
월곶돈대(月串墩臺) - 사적 452호(강화외성)

▲  월곶돈대 조해루(朝海樓)

강화도의 동북쪽 끝으머리인 월곶리(月串里) 해변에 연미정을 품은 월곶돈대가 의연한 모습으
로 자리해 있다.
이곳은 강화해협과 한강(아리수)이 만나는 요충지로 동쪽 강화해협 너머로는 김포 문수산(
殊山), 북쪽 바다 너머로는 금지된 땅으로 묶인 개성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월곶돈대는 강화외성(江華外城)의 일원으로 17세기 이후에 축성되었다. 그렇다면 강화외성의
정체는 무엇일까?
때는 13세기의 한복판, 사기급의 전투력으로 주변 나라를 닥치는데로 때려잡던 깡패 나라,
()가 고려를 잡고자 1232년부터 7차례가 넘게 공격을 해왔다. 당시 고려 조정을 주름잡던
최씨정권의 2대 실력자 최우<崔瑀, 최이(崔怡)>1233년 개경(開京)을 버리고 강화도로 도읍
을 옮겨 강도(江都)로 삼았는데, 그해부터 강화도 방어를 위해 백성을 동원해 내성(內城,
재 강화읍성)과 중성(中城)을 쌓고 강화해협에 23km의 긴 외성을 방패로 둘렀다. 외성은 적북
돈대에서 월곶리, 갑곶, 광성보를 거쳐 초지진까지 이어지며 흙으로 쌓았다. 허나 몽고에 두
손을 들던 1270년 이후 모두 버려져 앉은뱅이가 되고 만다.

조선 15대 군주 광해군(光海君)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강화도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했다.
1618년 버려진 외성을 흙으로 다시 일으켜 세웠다. 허나 병자호란(1636~1637)으로 강화도
가 청나라에게 털리자 외성 상당수가 손상을 입었고 숙종(肅宗) 시절에 돌을 이용해 다시 쌓
았다. 이때 곳곳에 돈대(墩臺)를 설치하니, 월곶돈대도 바로 그때 탄생했다.
영조(英祖) 때 강화유수 김시혁(金始爀)은 비가 오면 성의 흙이 흘러내린다고 건의하여 1743
년부터 1년 동안 벽돌을 이용해 다시 손질했다.

강화외성은 문루(門樓) 6, 암문(暗門) 6, 수문(水門) 17개를 두었으며, 외성 뿐만 아니라
강화도 해변에 5개의 진, 7개의 보, 53개의 돈대를 빼곡히 설치해 섬 전체를 그야말로 요새화
하였다. 이중 돈대는 진, 보를 돕는 조그만 요새로 20명 정도의 병력이 머물렀다.

월곶돈대는 연미정 주변에 동그렇게 성을 두룬 형태로 이곳에 올라서면 한강과 강화해협,
성 남쪽 해변, 김포 문수산, 유도 등이 바라보여 여기가 보통 자리가 아님을 귀띔해준다.
리고 남쪽 해변으로 성을 내려뜨리며 조해루란 성문을 두었는데, 그가 강화외성의 주요 문루
이다.
허나 구한말 이후 강화도의 요새들은 방어의 성격이 상실되어 버려지게 되었고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조해루는 사라졌다. 겨우 연미정을 품은 돈대 중심부만 남아있었으나 그마저
도 북한 땅이 바라보이는 예민한 위치로 인해 오랫동안 통제구역으로 묶여있었다.
이미 호랑이가 담배를 피다 암 걸리던 시절이 되버린 2006, 그런 사실도 모르고 이곳을 찾
은 적이 있었는데 연미정을 만나려면 최소 1주 전에 관할 군부대를 찾아가 출입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만큼 까다로운 곳이었다. 그러다가 2008년 금지된 땅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었고, 쓰러진 조해루를 복원해 지금에 이른다.
현재 강화외성은 국가 사적 452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월곶돈대는 그 일원으로 묶여 사적의 지
위를 누리고 있다. 또한 강화도의 야심작 강화나들길 1코스인 '심도(沁都) 역사문화길(강화터
미널~연미정~갑곶돈대, 18km)'이 이곳을 지나간다. 여기서 심도란 강화도의 고려 때 이름이다.


▲  밑에서 바라본 월곶돈대와 조해루를 잇는 성곽
(중간에 보이는 비석이 황형장군 택지비)


조해루는 월곶돈대의 성문이다. 닫혀진 문을 나서면 바로 파도가 일렁이는 강화해협인데 바다
를 통해 들어오는 적을 막고자 바닷가에 성문을 둔 것이다.
장대한 세월이 감쪽같이 훔쳐갔던 조해루는 2011년 말에 복원되었으며 성문과 문루, 남쪽 성
벽 일부가 다시 지어졌다. 문루를 포함한 전체 높이는 13m, 면적 45.56로 문루를 감싸고 있
는 여장은 이곳에서 나온 오래된 성돌을 주로 사용했으나 성문과 남쪽 성벽은 새 성돌로 꾸며
져 서로 어색한 세월의 조화를 이룬다. 원래는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성벽이 이어져야 되지만
아직 그럴 여건까지는 되지 못한다.


▲  윗쪽에서 바라본 조해루와 월곶리

▲  장무공 황형장군 택지비(莊武公 黃衡將軍 宅地碑)

월곶돈대를 오르다보면 때깔이 좋은 비석 하나가 발길을 잡는다. 바로 이곳에서 말년을 보냈
던 장무공 황형장군의 택지비이다.

황형(1459~1520)은 창원황씨로 자는 언평(彦平)이다. 1480년 무과(武科)와 진현시(進賢試)
급제, 상서원(尙瑞院) 판관이 되어 내승(內乘)을 겸임했으며, 1486년 무과중시에 장원해 함경
도 혜산진(惠山鎭) 첨절제사(僉節制使)가 되었다.
15104, 부산포(釜山浦)와 제포(薺浦, 진해), 염포(鹽浦, 울산 염포)에 거주하던 왜인들
이 조선 조정에 불만을 품고 조선의 속방인 대마도(對馬島) 세력과 연합해 폭동을 일으킨 삼
포왜란(三浦倭亂)이 터지자 전라좌도 방어사(防禦使)가 되어 제포의 왜인을 때려잡았다. (
마도까지 쫓아가서 정벌했다는 이야기도 있음) 그 공으로 경상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되었으며, 왕이 연미정 일대를 하사했다.

1512년 두만강 건너의 여진족이 조선에 거역하며 소란을 피우자 순변사(巡邊使)가 되어 그들
을 정벌했고, 이어 평안도와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북녘 변방을 지키다가 공조판서(工曹判書)
를 끝으로 관직에서 사퇴, 연미정이 있던 이곳에 자리를 잡고 말년을 보냈다.
1520년 그가 숨을 거두자 중종(中宗)은 크게 애통해하며 '장무공'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연미
정 주변 3만 평의 땅을 그의 자손들에게 하사했다. 그의 묘는 서남쪽으로 1.5km 떨어진 학무
산 자락에 있으며, 장무사(莊武祠)에 배향되어 매년 음력 101일 자정, 제향을 올리고 있다.

연미정 주변에는 대나무가 있었는데, 황형이 왜구를 토벌하고 돌아올 때 가져 손수 가져와 심
은 것이라고 전한다. (안내문에는 대마도를 정벌하고 돌아올 때 가져왔다고 나옴) 또한 그는
소나무도 잔뜩 심었는데 임진왜란 때 그 나무로 수군 함선을 만들기도 했으며, 1597년 정유재
란이 터지자 선조(宣祖)가 잠시 이곳에 온 적이 있었는데, 소나무를 이용해 성책과 집을 만들
어 사람들은 황형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고 전한다. 미래를 대비하여 나무를 심은 것인지 아
니면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월곶돈대 남쪽 성벽에서 바라본 강화해협과 김포 문수산

강화도는 북한과 겨우 짧은 해협을 사이에 둔 가까운 곳이라 해변에는 철조망이 휴전선마냥
길게 둘러져 있다. 남북분단이 선사한 강화외성의 현대판 버전이라고나 할까? 어서 이 땅이
통일이 되어 옥의 티 같은 저 산물을 싹 걷어냈으면 좋겠다.


▲  연미정을 품은 월곶돈대

▲  월곶돈대 암문(暗門)
돈대로 인도하는 유일한 문이다.

▲  월곶돈대 암문 안쪽
암문 바깥쪽은 동그란 홍예로, 안쪽은
네모나게 문을 지었다.


 

♠ 강화10경의 하나로 오랫동안 찬양을 받았던 경승지이자 월곶돈대의 얼굴
연미정(燕尾亭)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24호

월곶돈대 정상에는 이곳의 얼굴이자 나를 여기로 소환한 연미정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은
한강과 강화해협이 쿨하게 만나는 현장으로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한 줄기는 바로 서해로,
른 줄기는 강화해협을 이루며 남쪽으로 흐르니 그 모습이 마치 제비 꼬리와 같다하여 연미정
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연미정은 언제 지어졌는지는 귀신도 모르나 고려 23대 군주인 고종(高宗)이 구재(九齋)의 학
생들을 여기에 모아놓고 공부를 시켰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고려 중기에 뿌리를 내린 것으
로 짐작된다.
이후 폐허가 된 것을 조선 중종이 다시 지어 황형에게 하사했다고 전하며, 황형은 이 일대에
집을 짓고 말년을 보냈다. 그 인연으로 현재 연미정은 그의 후손들이 소유하고 있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후금()이 조선의 외교 정책에 격하게 불만을 품으며 압록강
을 건너 황해도까지 침공하자 이에 염통이 쫄깃해진 조선은 급하게 강화를 요구했다. 그래서
바로 이곳 연미정에서 후금과 강화조약을 맺었다. 이후 병자호란(1636~1637) 때 후금(後金)
서 청()으로 나라 간판을 바꾼 청나라군이 강화도를 점령하면서 정자 상당수가 파손되었다.

1744년 강화유수 김시혁이 월곶돈대를 손질하면서 연미정을 다시 일으켜 세웠고, 1891년 조동
(趙東冕)이 다시 중수했으며, 1931년 유군성(劉君星)이 보수했다. 허나 6.25전쟁으로 서남
쪽 모서리 기둥이 세 동강이 나는 등, 무거운 상처를 입은 것을 중수했으며 이때 세 동강 난
기둥은 붙여서 다시 세웠다.
1976년 강화도 국방유적을 복원하면서 현재와 같이 재생되었는데, 처음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좋아하던 베이지색으로 기둥을 떡칠했으나 이후 색을 제거해 자연스런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서남쪽을 바라보고 선 연미정은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겹처마로 10개의 기둥을 돌기
둥 위에 얹힌 민도리집이다. 월곶돈대 꼭대기에 서 있어 자연히 장대(將臺)의 역할을 했으며,
정자 뒷쪽에는 500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병풍을 이루고 있다.

지금이야 앞바다가 금지된 바다로 묶여 오가는 배도 없는 실정이지만, 구한말까지만 해도 서
해바다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배는 연미정 밑에서 만조를 기다렸다가 한강으로 들어갔다. 그러
니 해상무역이 활발했던 고려와 상업이 한참 성장하던 조선 후기, 연미정 주변은 대단했을 것
이다. 특히 썰물 때 물이 빠져나가는 흐름이 보일 정도로 물살이 세기로 유명하며 여기서 즐
기는 달맞이는 강화10경의 하나로 추앙을 받기도 했다.
그토록 아름다운 곳이건만 남북분단이라는 가혹한 시련이 그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고, 그마
저도 철저히 금지된 곳으로 묶여 오랫동안 외롭게 남아있다가 2008년에 비로소 해방되어 자유
롭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달맞이도 가능해졌다. 하지만 주변 해변은 여전히 금
지된 곳으로 묶여 있어 출입이 어렵다. 이 땅이 통일되는 그때 나머지도 그 빗장이 열릴 것이
.


▲  연미정과 오래된 느티나무 2그루

연미정 뒷쪽에는 겨울 제국에서 영혼까지 털린 오래된 느티나무 2그루가 있다. 이들은 약 510
년 묵은 것들로 2000년에 강화군 보호수 4-9-58호, 4-9-59호로 지정되었다.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500)
그들은 높이 약 22m, 둘레 4.5m4.2m로 그 장대한 나이를 거슬러 가면 황형이 이곳에 머물
던 시절과 거의 비슷하다. 그러니 그가 심었던 나무가 아닐까 싶다. 연미정과 월곶돈대를 쭉
지켜온 살아있는 증인으로 연미정의 풍치를 더욱 살찌워주는 역할도 했다. 비록 겨울이라 감
흥은 덜해도 늦봄이나 여름, 늦가을에 왔다면 한층 아름다웠을 것이다.

▲  연미정의 뒷모습

▲  연미정 현판의 위엄


▲  연미정 부근의 조그만 비석
비석 피부에는 '고 공신 장무공 황형 택(故 功臣 莊武公 黃衡宅)' 이라 쓰여 있다.
즉 황형이 이곳에 살던 것을 기리고자 후손들이 세운 비석이다.

▲  연미정 부근에 놓인 주춧돌 3개
옛 연미정의 주춧돌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받쳐들 존재를 상실한 채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고적한 월곶돈대 내부 (연미정 남쪽)

▲  북한을 향하고 있는 월곶돈대 (연미정 동북쪽)

▲  월곶돈대 서북쪽과 월곶리 해변

▲  텅 비어있는 월곶돈대 포대
옛날에는 대포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그의 빈 자리만 허전하게 남아있다.

▲  월곶돈대에서 바라본 김포 문수산
강화해협 너머로 보이는 곳은 다행히도 출입이 가능한 김포 지역이다.

▲  월곶돈대에서 바라본 한강과 유도(留島, 가운데 섬)

안개로 흐릿한 한강에 조촐하게 떠있는 섬이 유도이다. 오랫동안 민통선에 묶인 금지된 섬으
로 옛날에 섬이 떠내려오다가 여기에 머물렀다고 해서 머무루섬이라 불렸다.
남북분단으로 인간의 발길이 끊긴 그곳에는 저어새를 비롯한 철새와 야생 동식물이 살아가고
있으며, 2008년 야생동식물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  월곶돈대에서 바라본 바다와 북한 개성 땅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바다 안개가 아주 극성이었다. 그래서 시야는 절망 수준, 그렇게 보고
싶었던 북한 땅은 한 치도 보이질 않는다. 날씨가 좋아야 바다 너머 지역이 바라보이는데 이
땅에 내려진 저주, 남북분단의 아픔을 애써 지우고 싶었는지 하늘이 안개로 바다 너머 땅을
잠시 지운 모양이다.
차라리 저 너머는 그냥 망망대해였으면 좋으련만 그러면 아쉽지나 않지. 문제는 그 너머가 금
지된 땅이라는 것. 요즘은 달나라는 물론 우주도 가는 세상이라는데, 저 너머 땅은 그 우주보
다도 가기가 힘들다.


▲  월곶돈대에서 바라본 월곶리 검문소와 월곶리 지역
월곶리 검문소는 신분증이 없으면 통과하기 힘든 전방의 까다로운 검문소 중
하나이다. 그러니 저곳을 지날 때는 꼭 신분증을 지참해야 뒷탈이 없다.


※ 연미정, 월곶돈대 찾아가기 (2018년 6월 기준)
강화읍(강화터미널)까지
* 신촌로터리(2호선 신촌역 1번 출구), 홍대입구역(2호선/경의중앙선/공항전철) 중앙차로 정
  류장, 합정역(2/6호선)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3000번 좌석버스를 타고 강화터미널 하차
* 5호선 송정역(1,4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88, 3000번을 타고 강화터미널 하차
* 부평역(서울1호선/인천1호선) 정류장, 부평구청역(서울7호선/인천1호선, 1번 출구 밖),
  1호선 경인교대입구역(1번 출구)에서 김포 90번 이용
* 인천2호선 마전역(1번 출구)에서 70, 700-1, 90번 이용
* 3호선 백석역(4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96번 이용

현지교통
* 강화터미널에서 강화군내버스 10번을 타고 연미정 하차 (113회 운행)
승용차 (연미정 밑에 주차장 있음)
* 서울 -> 김포한강로/강화 방면 48번 국도 -> 통진 -> 강화대교 -> 강화읍 수협4거리에서 우
  회전 -> 연미정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 242


 

♠  남북분단이 빚은 서글픈 산물, 강화평화전망대(제적봉 평화전망대)

▲  강화도 최북단에 자리한 강화평화전망대

연미정을 둘러보니 어느덧 14시가 넘었다. 어디로 갈까 궁리하다가 그렇게 소원하던 북한 땅
을 하늘의 방해로 살피지 못한 아쉬움이 컸던지 강화평화전망대가 머리 속에 떠오른다. 그래
서 그곳을 가기로 했지. 허나 군내버스로 가려면 강화읍내에서 강제 환승을 해야 되고 더군다
나 연미정은 버스가 별로 없어 가기가 좀 우울하다. 그래서 후배의 쿨한 지원에 힘입어 택시
를 소환하여 가기로 했다.

연미정 주차장에 있는 콜택시 번호로 택시를 부르니 10분 뒤 택시가 나타나 입을 벌린다.
것을 잡아타고 강화도의 북쪽 들판을 신나게 가로질러 당산리검문소에 이른다. 당산리(堂山里
)와 평화전망대가 있는 철산리는 엄연한 민통선 구역이라 검문이 좀 까다로우며 반드시 신분
증이 있어야 출입이 가능하다. (신분증만 있으면 통과됨)
설연휴로 통일전망대를 찾은 차량의 행렬이 길게 꼬리를 물고 있었는데 우리 차례가 되자 택
시 운전사는 동네 사람을 태우고 간다며 군인에게 말을 건넸다. 그랬더니 군인은 검문도 하지
않고 쿨하게 통과시켜주었다. 일반 차량은 신분증 검사를 철저히 하지만 택시는 지역 사람들
을 주로 태우고 다니는지라 그렇게 해주는 모양이다. 어쨌든 신선한 충격을 간직하며 당산리
와 철산리를 지나 강화평화전망대 주차장에 도착했다. 택시 요금은 16천원 정도 나왔다.


▲  강화평화전망대 입구 (왼쪽이 평화전망대, 오른쪽은 인화리,
교동도 방면)

▲  강화평화전망대의 옆모습

강화도 최북단인 제적봉(制赤峰) 정상에 강화제적봉 평화전망대(강화평화전망대)가 웅크리고
있다. 제적봉이란 '붉은 것을 제압한다'는 뜻으로 여기서 붉은 것은 북한을 일컫는다.

원래 제적봉은 김포(金浦) 애기봉에게 씌우려던 반공 스타일의 봉우리 이름이었다. 1966년 공
정식 제6대 해병대사령관이 그렇게 하려고 했으나 때마침 박정희 전대통령이 애기봉을 방문해
그곳에 서린 애기 전설을 전해듣고는 애기봉으로 할 것을 지시하여 그 이름을 지키게 되었다.
그래서 강화와 김포 지역 전방의 여러 봉우리를 상대로 제적봉 후보감을 물색하다가 해병대가
있는 철산리 언덕을 제적봉으로 삼았다. 이를 기리고자 그의 측근인 김종필이 '제적봉' 비석
글씨를 남기며 명명식(命名式)을 거행했다.

이후 40여 년 뒤, 제적봉에 강화평화전망대를 지어 200895일 문을 열었다. 그 역시 북
한 이 바라보이는 적당한 곳에 세우는 통일전망대의 일종으로 가장 최근에 지어진 통일전망대
이다. 허나 아무리 그런 전망대에서 통일을 염원하며 북녘을 뚫어지라 바라본들, 그림의 떡이
. 분단의 한은 더해가기만 한다. 이건 어찌된 것이 통일은 커녕 분단만 더욱 고착화되고 있
으니 말이다. 그러니 남북분단이 빚은 서글픈 산물이라고나 할까? 그리 유쾌한 현장은 아니다.

여기는 다른 전망대와 달리 바다를 앞에 두고 있고<고성(高城) 통일전망대는 바다를 옆에 끼
고 있음>, 그 바다 너머로 북녘을 바라볼 수 있는데 북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바로 가까이
에서 구경할 수 있는 전망대임을 강조한다. 여기서 북한 땅까지 불과 2.3km에 불과하기 때문
이다. 그래서 실제로 바다 너머 그들의 모습이 간간히 보인다. 국경을 지키는 군인, 농사를
짓는 마을 사람들, 학교에 가는 학생 등, 허나 그것도 날씨가 좋고 운이 좋아야 보이는 것이
지 보통은 보기 힘들다.

바다 너머 지역은 황해북도 개성 지역으로 날씨가 좋으면 예성강(禮成江) 포구도 시야에 잡힌
. 허나 우리가 갔을 당시는 안개가 지독해 북한 땅은 아주 흐릿하게 시야에 잡혔다. 그래서
전망대에 전시된 북녘 촬영 사진으로 그 아쉬움을 대신할 수 밖에 없었다.

전망대의 규모는 지하 1, 지상 4층으로 지하층은 군부대 전용시설이 있어 출입이 어렵고, 1
층에는 통일염원소와 휴게실, 식당, 기념품 매장이, 2층은 전시관과 전망대, 3층은 북한땅 조
망대와 옥외전망대가 있다.
바깥에는 망배단이 설치되어 실향민들의 한을 어루만지고 있으며, 군부대에서 기증받은 오래
된 전차와 제적봉 비석, 임진왜란 초기인 15928월에 이정암(李廷馣, 1541~1600)이 황해도
연백에서 왜군을 크게 때려잡은 것을 기리고자 세운 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 등이 자리를 채
우고 있다.
연성대첩비는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모정리에 있으나 거기서 넘어온 실향민들이 강화도에 정
착하면서 양사면 연화리에 편강렬(片康烈) 의사 충렬비와 함께 세워 기리던 것을 20098
19일 이곳으로 옮겼다.

▲  1966년에 지어진 제적봉 비석
제적봉 3자는 김종필의 친필이다.

▲  편강렬 의사 충렬비(왼쪽)와
연성대첩비


▲  전망대 1층 통일염원소

통일염원소에는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남북통
일을 염원하며 한 글자씩 남긴 종이가 한 공간
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토록 이 땅의 민중들은 통일을 바라고 있지
만 이 땅과 북한의 더러운 권력층 작자들은 이
를 크게 바라지 않는다. 말로만 통일, 통일을
외칠 뿐, 뒤에서는 서로를 이용하며 그들의 권
력유지와 욕심 채우기에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리 통일염원소에 글을 남긴들 딱히
소용이 없다. 결국은 모두 쓰레기통으로 가게
되니 말이다.

 

◀  통일염원소를 가득 메운 민중들의
메아리


▲  2014년 여름과 가을에 이곳에서 담은 북녘 땅 사진

▲  3층 북한땅 조망실(건물 내부)에서 바라본 북한 개성 땅 ①
여기서 북한 땅까지는 겨우 2.3km이다. 날이 좋으면 저 너머가 훤히
두 눈에 들어올텐데 안개의 방해로 겨우 해안만 시야에 들어온다.

▲  3층 북한땅 조망실(건물 내부)에서 바라본 북한 개성 땅 ②

▲  3층 북한땅 조망실에 있는 개성 지역 조감도
밑부분 빨간 표시가 있는 곳이 강화평화전망대이다.

▲  북한에서 제작된 개성, 김포, 강화도 지역 지도

▲  2층에 전시된 6.25전쟁의 상징물, 녹슨 철모

▲  3층 옥외전망대에서 바라본 바다와 흐릿하게 다가오는 개성 땅 ①

▲  3층 옥외전망대에서 바라본 바다와 흐릿하게 다가오는 개성 땅 ②

▲  3층 옥외전망대에서 바라본 바다와 흐릿하게 다가오는 개성 땅 ③

▲  3층 옥외전망대에서 바라본 바다 (서북쪽 방향)
바다 안개 너머로 개성 땅과 예성강이 있다. 벽란도(碧瀾渡)를 품은 그 예성강이라..?
말로만 듣던 그 현장이 가까이에 있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설렌다.

▲  3층 옥외전망대에 설치된 500원짜리 망원경
안개를 뚫고 북녘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500원을 넣어 잠든 망원경의 혼을 불러 모은다.
망원경의 시력이 더 좋은 탓에 맨눈으로 보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날씨가
받쳐주지 못해 바다 너머 땅도 썩 신통치 않게 보인다.

▲  북녘 실향민(失鄕民)을 위한 망배단(望拜壇)
망배단은 통일전망대의 필수 요소로 이곳에서 제사를 올리거나 북쪽에 둔
가족을 향해 인사를 하는 실향민들이 적지 않다.

▲  망배단에서 바라본 북녘 개성 땅
실향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강과 임진강이 합동으로 쏟아놓은
바닷물은 유유히 서해로 흘러갈 뿐이다.

▲  강화평화전망대의 귀염둥이(?) 전차
1971년 미국에서 생산된 전차로 길이 7.94m, 높이 3.12m, 폭 3.2m, 무게 23톤이다.
해병대에서 사용한 상륙돌격장갑차로 1975년부터 절찬리에 쓰였다가 2004년 국산
장갑차에게 자리를 넘기고 은퇴, 이곳에서 마음에도 없는 한가한 노후를 보낸다.


이렇게 강화평화전망대를 둘러보고 매점에서 간단하게 간식을 사먹었다. 이곳은 북한 땅이 바
라보인다는 이유로 입장료도 비싸고, 간식이나 음식도 바깥보다 조금 더해진 가격을 받아먹는
. 민간도 아니고 강화군청에서 운영하는 공영인데 적당히좀 먹었으면 좋겠다. 솔직히 통일
전망대 같은 것이 뭐 그리 자랑이란 말인가? 이 땅의 우울한 산물이거늘. 나중에 정말 통일이
된다면 우후죽순 들어선 통일전망대부터 싹 정리하고 상징적인 몇 개만 남겨 분단의 기념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

평화전망대 입구로 나와서 강화읍내로 가는 강화군내버스 2번을 잡아타고 읍내로 나왔다.
님은 벌써 칼퇴근을 하여 천하는 어둑어둑해진 상태, 이럴 때는 그저 얌전하게 집으로 돌아가
는 것이 진리이다. 이렇게 하여 설연휴 강화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강화평화전망대 찾아가기 (2018년 6월 기준)
* 강화읍까지 교통편은 앞의 연미정 참조
* 강화터미널에서 강화군내버스 1(19), 26(16)을 타고 평화전망대 하차, 도보
  5
* 승용차 (반드시 신분증 지참 요망) : 서울 김포한강로/강화 방면 48번 국도 통진
  강화대교 강화읍 송해3거리 당산리검문소 (검문을 거쳐 출입통제증을 받아야 됨)
  강화평화전망대

★ 강화평화전망대 관람정보 (2018년 6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2,500(20인 이상 단체 2,200) / 청소년과 군인 1,700(20인 이상 단
  1,500) / 어린이 1,000(20인 이상 단체 800) / 유아와 노인은 무료
* 관람시간 : 9~18(12~2월은 17시까지) 연중무휴, 주차비 없음
* 전망대 해설시간 : 1011, 1220, 13, 14, 15, 16
* 민통선 구역이라 자전거와 오토바이, 도보 접근은 불가하다. (무조건 군내버스나 관광버스,
  승용차, 택시로 가야 됨), 그리고 신분증은 반드시 지참하기 바란다.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철산리 11-12 (전망대로 797 ☎ 032-930-7062)
* 강화평화전망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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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바다와 새만금을 품은 고즈넉한 바닷가 절집, 김제 망해사 (새만금바람길, 심포항)



' 서해바다와 새만금을 품은 고즈넉한 절집, 김제 망해사 '

(새만금바람길, 심포항)

▲  새만금바람길



제국(帝國)의 부흥을 노리는 겨울의 잔여 세력과 겨울로부터 천하를 해방시키려는 봄이 팽
팽히 맞서던 3월의 어느 날, 호남의 곡창지대인 전북 김제(金堤)를 찾았다.

해가 아직 솟지도 않은 새벽 5시, 아침에 차디찬 공기를 가르며 집을 나섰다. 좌석은 불편
하지만 매우 저렴한 1호선 전철에 몸을 싣고 천안역까지 쭉 내려간 다음, 바로 목포(木浦)
행 호남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10시 30분 정도에 김제역에 도착했다.

김제에 이르니 불청객 하나가 나의 미간을 잠시 찌푸려지게 했다. 바로 비이다. 비록 가랑
비 수준이라 애교로 넘길 만 했지만 나들이에 비가 오는 것만큼 짜증나는 것은 없다. 그날
기상청 정보에는 새벽에 비가 그치고 차차 맑아진다고 했으나 아직도 비가 오고 있으니 역
시나 기상청의 날씨 적중률은 아무도 못말린다.
비가 속히 그치길 고대하며 거전리로 가는 김제시내버스 19번을 타고 50여 분을 달려 망해
사에 발을 내리니 하늘도 그새 지쳤는지 더 이상 비를 내리지 않았다. 대신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지으며 나를 노려본다.


 

♠  망해사 입문 (곽경렬 묘소, 망해사 부도)

▲  망해사로 인도하는 소나무 숲길

망해사 입구에서 절을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오르막길을 오르니 푸른 소나무들이 숲길을 이루며
운치를 진하게 드러낸다. 망해사는 절의 필수 요소라 할 수 있는 일주문(一柱門)을 갖추지 못하
여 숲길이 자연히 일주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소나무가 베푼 솔내음이 바다내음과 어우러져 속세에서 염치없이 따라온 번뇌를 싹 털어가니 잠
시나마 마음이 가벼워진 것 같다. 허나 번뇌가 해보다 무거워 멀리 가지는 못하고 절 입구에 우
두커니 매달려 기다리고 있고, 사람들도 절을 나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속세(俗世)의 야성
을 되찾으니 해탈(解脫)은 정녕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소나무 숲길을 5분 정도 들어가니 길 바로 왼쪽에 애국지사 곽경렬(郭京烈)의 묘역이 나의 발길
을 멈추게 한다. 여기서 처음 들어보는 이름, 곽경렬, 그는 과연 누구일까?


▲  곽경렬 선생 묘역

곽경렬(郭京烈, 1901~1968)은 현풍곽씨로 김제 진봉면에서 태어났다. 봉수(奉守)란 이름도 가지
고 있으며, 1915년 박상진()과 채기중() 등이 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
)을 통합해 대구(大邱)에서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자 불과 14세에 어린
나이로 가담해 독립 활동에 뛰어들었다.

대한광복회는 군자금을 조달해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여러 혁명 기지를 확보하여
폭동을 일으켜 왜정(倭政)을 몰아낼 생각을 했다. 허나 친일 부호(富豪)들이 협조를 해주지 않
고 자신의 뱃대기만 불리자 친일 부호 처단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이에 곽경렬은 유장렬(
), 한훈() 등과 친일 반역자를 처리하는 행형부(行刑部)의 요원이 되어 전남 지역 친
일 부호를 여럿 처단했으며, 오성()의 헌병 분견소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했다.
1916년 왜경의 추격으로 잠시 만주로 넘어갔다가 다시 들어와 활동했으며, 1918년 친일파로 방
향을 바꾼 밥버러지 이종국()의 밀고로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드러나면서 다시 은신했다.
1919년에는 전북 옥구군 대야면에서 김영순의 지원을 받아 27원을 상해임시정부로 보냈으며, 계
속해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이다가 1924년 왜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1926년 전주지방
법원에서 3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1929년 4월 1일 전주감옥에서 출소했으나 왜정의 잔인한 고문에 몸이 상하여 더 이상 독립활동
을 하지 못하고 고향에서 은거하고 말았다. 마음에서는 늘 독립의 의지를 불태웠으나 몸이 만신
창이가 되었으니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후로는 조용히 지내다가 1968년 67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1982년 이 땅의 정부는 그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어 뒤
늦게나마 그의 애국 정신을 기렸다. 또한 지원금을 보내 무덤에 상석(床石)과 비석(碑石), 망주
석(望柱石)을 갖추게 했으며, 봉분(封墳)에 호석(護石)을 둘렀다.

그의 묘역은 망해사로 가는 길목에 있으므로 그냥 지나치지 말고 잠시 발길을 멈추고 무덤 앞에
옷깃을 여미는 예를 보이기 바란다. 바로 길가에 있으니 시간도 크게 잡아먹지 않는다. 다만 무
덤 주변에 마땅한 안내문도 없고, 그냥 '애국지사 곽경렬 선생 묘소'임을 알리는 표석이 전부라
자세한 사연을 알지 못하여 지나치기가 쉽다.

▲  곽경렬 선생 묘소를 알리는 표석

▲  뒤에서 본 곽경렬 묘소

곽경렬 묘소 아랫쪽 산비탈에는 누런 옷을 입은 무덤들이 즐비하다. 이곳은 망해사의 사하촌(寺
下村)인 명동마을의 공동묘지로 절로 가는 길목에 이렇게 백성들의 무덤이 1~2기도 아니고 무더
기를 이루는 광경은 거의 본 적이 없는데, 소나무 그늘 밑에 옹기종기 둥지를 튼 묘역이 은근
포근해 보이기도 한다.

곽경렬 묘소를 둘러보고 다시 2분 정도 길을 재촉하면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바로 망해사에 이르게 되는데, 망해사를 외면하고 그냥 직진하면 새만금바람길이 펼쳐진다. 이
바람길은 여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진봉면사무소에서 망해사를 거쳐 거전리로 이어지며, 생
각치도 못하게 보랏빛처럼 등장한 바람길에 군침이 가득 돌았지만 망해사를 목표로 하고 왔으니
일단 그곳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  고색의 때를 간직한 망해사 부도(浮屠) 4기

바람길과 갈리는 3거리에서 망해사로 내려가면 길 왼쪽에 제일 먼저 고색의 기운이 넘치는 부도
4기를 만나게 된다.
이 부도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가운데가 볼록한 석종형(石鐘形)부도이다. 마치 대추처럼
생긴 것이 크기도 조촐하여 참 귀여운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이들은 청심당(淸心堂), 만화당(
萬化堂), 심월당(心月堂), 덕유당(德有堂) 등 망해사에서 활동했던 승려의 승탑(僧塔)이다. 이
중 1기는 너무 작아 포도알처럼 보이며, 나머지는 거의 비슷한 모습이다. 부도의 형태는 땅바닥
에 자연석을 활용한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대추 모양의 탑신을 얹힌 다음, 모자처럼 생긴 지붕
돌을 올렸다.

▲  가까이서 본 부도 - 모자를 쓴 사람의 얼굴이나 허수아비 얼굴처럼 보인다.


▲  해우소 부근에서 바라본 서해바다 (새만금)
날씨가 흐리고 바다 안개가 자욱해 시야가 속세처럼 좋지 못하다.

▲  바닷가 사찰, 망해사 경내에 이르다.

부도군을 지나면 볼일을 보며 근심을 터는 해우소(解憂所)가 나온다. 그곳을 지나면 철난간 너
머로 물줄기가 보이는데, 그가 바로 서해바다이다.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바다 안개가 오
리무중(五里霧中)을 이루고 있어 시야가 완전 꽝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망해사의 내력을 살펴
보도록 하자.

※ 속세를 등지고 서해 바닷가에 자리한 고찰, 김제 망해사(望海寺)
우리나라에는 오래된 절이 별처럼 많이 흩어져 있다. 허나 바닷가에 자리한 절은 정말 손에 꼽
을 정도인데, 서해바다 같은 경우에는 이곳 망해사가 유일하다. 물론 안면도(安眠島)에 있는 안
면암(安眠庵, ☞ 관련글 보러가기)도 바닷가에 있지만 내력이 무지 짧아 고찰에 끼지 못한다.
그외에 남해바다에는 여수 향일암(向日庵)이 있고, 동대해(東大海)에는 양양 낙산사(洛山寺)와
홍련암(紅蓮庵), 휴휴암(休休庵), 동해 감추사(甘湫寺), 부산 해동용궁사(海東龍宮寺) 등이 있
다.

망해사란 절 이름 그대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이곳은 642년(의자왕 원년) 부설(浮雪)이 창건
했다고 전한다. (다른 자료에는 671년이라고 나옴) 허나 안타깝게도 신뢰도는 떨어지며, 754년
(경덕왕 23년)에 당나라 승려인 통장(通藏)법사<또는 중도법사(中道法師), 도장(道藏)법사>가
세웠다는 설도 있으나, 이름만 서로 다를 뿐 같은 인물로 여겨는 설도 있다. 허나 이 역시 확실
한 것은 아니다.

고려 때에는 1073년(문종 27년)에 심월(心月)대사가, 1371년에는 지각(知覺)선사가 중창했다고
하며, 조선으로 들어와서는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절이 무너져 바다에 가라앉았다고 한
다. 그러다가 1624년 경(또는 1589년 경)에 김제 출신 고승인 진묵대사(震默大師)가 절을 일으
켜 세웠다. 이때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악서전(낙서전)이 지어졌다.

진묵대사는 해인사(海印寺)의 8만대장경을 모두 암송했다는 이야기부터 물고기를 끓인 죽을 먹
고 대변을 보면서 그들을 환생시킨 이야기까지 정말 많은 이적(異蹟)과 재치를 남긴 고승으로
유명한데, 이곳에도 그의 설화가 하나 전해온다.
진묵이 망해사에고 머물 때, 바닷가에서 굴을 따서 먹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놀라서 '왜
승려가 육식을 하시오?'
그러자 진묵이 '이것은 굴이 아니고 석화(石花)요' 답했다고 한다. 참
고로 굴을 석화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어원이 진묵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는 만화(萬化, 1850~1919)와 심월(心月)이 절을 중창하고 불도를 닦았으며, 1915년
에 계산(桂山)이 중창했다. 1933년에는 주지 김정희가 악서전을 중수하고 보광명전(普光明殿)과
칠성각을 신축했으며, 1977년에 요사와 망해대를 짓고, 악서전, 보광명전을 중수했다.
1984년에는 기존의 보광명전과 칠성각을 부시고, 그 자리에 대웅전(大雄殿)을 지었는데, 나중에
극락전으로 이름을 갈았다. 1986년에는 악서전을 해체 복원하였고, 1989년에 범종각을 지었으며,
1991년에 극락전을 중수했다.

그리 넓지 않은 조촐한 크기의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악서전과 삼성각, 종
각, 요사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요사를 빼고는 모두 바다가 있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
이 이곳의 특징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팽나무와 악서전이 있으며, 이들 모두 조선 중기 것이다.
(이전 시대 유물은 없음) 또한 절 이름의 유래에 대해선 딱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바닷가에 있
어 섬들을 바라볼 수 있고, 서해 일몰을 구경할 수 있는 경승지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보인
다. (창건 시절부터 망해사로 불린 듯 함)

바닷가 언덕에 자리해 있어 파도 소리가 번뇌에 잠긴 정신을 깨워주며, 파도 소리와 풍경 소리,
발자국 소리가 전부인 고요한 절이다. 게다가 높이는 바다에 닿을 정도로 낮지만 산사(山寺)의
분위기도 조금은 서려있다. 또한 이곳에서 보는 저녁 일몰은 번뇌가 녹아버릴 정도로 대장관이
며, 바다에 점처럼 그려진 섬들까지 이곳의 풍경을 한몫 거들고 있으니 조물주(造物主)도 시샘
을 할 지경이다.
허나 1990년대부터 시작된 새만금 사업으로 망해사 앞바다는 크게 수정될 위기에 처했다. 새만
금 개발 계획을 보면 절 앞바다를 메워 거의 강처럼 만든다고 한다. 그리되면 바닷가 절이 아
닌 강가의 절이 되며 수평선 너머로 펼쳐진 너른 바다를 더 이상 못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절 풍경도 크게 손상될 것이고, 바다를 바라본다는 뜻의 절의 이름마저 무색하게 된다. 인간들
의 무분별한 개발에 망해사의 경관은 물론이고 군산(群山)에서 김제 앞바다를 거쳐 부안(扶安)
에 이르는 바다와 갯뻘 대부분이 강제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망해사를 중심으로 서해바다를 향해 솟은 야트막한 산자락에 새만금바람길이 조성되었다. 절을
둘러보고 후식으로 바람길을 따라 서쪽인 심포항이나 동쪽인 진봉면사무소 방면으로 걷는 것도
괜찮다. 망해사가 거의 중간이고 길도 험하지 않아 1시간 반 정도면 충분히 서쪽 끝과 동쪽 끝
에 닿는다. 바다가 늘 옆에 있어 바다내음과 산내음에 마음마저 즐거워지는 길이다.

※ 김제 망해사 찾아가기 (2016년 3월 기준)
① 김제까지
* 용산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 광주역, 광주송정역, 목포역에서 호남선 열차
  를 타고 김제역 하차 (고속전철은 정차 안함)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김제행 고속버스가 1일 4회 떠나며, 동서울터미널에서
  김제행 직행버스가 1일 6회 떠난다.
* 인천, 성남, 전주, 익산, 군산에서 김제행 직행버스 이용 (군산에서 올 경우에는 만경에서 내
  리면 편함)
② 현지 교통
* 김제역(김제역3거리 북쪽, 김제역1승강장)과 김제시외고속터미널 앞에서 김제시내버스 18, 19
  번을 타고 망해사 하차. 두 노선 합쳐서 1일 20회 운행(주말, 휴일에는 14회)하며 만경정류장
  을 경유한다.
* 망해사 정류장에서 망해사까지 도보 7~8분
③ 승용차 (경내에 주차장 있음, 주차비는 공짜)
* 서해안고속도로 → 서김제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만경3거리 직진 → 만경4거리 좌회전 →
  진봉 → 망해사입구에서 우회전 → 망해사 (경내까지 진입 가능)

* 소재지 -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1004 (심포10길 94 ☎ 063-545-4356)

▲  망해사 악서전

▲  망해사 삼성각


 

♠  조촐한 망해사 둘러보기

▲  망해사 팽나무 - 전북 지방기념물 114호

경내에는 오래된 팽나무가 2그루 있다. 그중 하나가 요사 앞에서 바다를 굽어보고 있는데, 조선
인조(또는 선조 때인 1589년) 때 진묵대사가 악서전을 짓고 그 기념으로 심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나이는 대략 400년 정도가 된다. 나무의 높이는 17m, 가지 길이 동서 16.7m, 남북 17m이
며, 다른 팽나무는 악서전 옆에 있는 것으로 높이 21m, 가지 길이 동서 24.8m, 남북 22m이다.

이들 나무는 중창 기념으로 심은 것도 되지만 수시로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봄마다 문을 두드리
는 황사 바람을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절이 바닷가에 있어 일몰도 배부르게 볼 수 있고 경
관도 아름답지만 대신 바람과 태풍에는 무지 취약하기 때문이다.

팽나무는 겨울 제국에게 모든 걸 털리고 앙상한 가지만 드러낸 채, 제국의 혹독한 시련을 말없
이 견디고 있다. 이제 봄도 상륙했으니 조만간 겨울의 망령에서 완전히 해방이 될 것이다.

▲  망해사 요사(寮舍)

▲  팽나무 쪽에서 본 요사

팽나무 부근에 자리한 요사는 1997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ㄱ'자 건물이다. 요사는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공양간과 종무소(宗務所)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  바다를 향한 범종각(梵鐘閣)

범종각은 1989년에 세워진 것으로 너른 바다에 은은한 종소리를 울려 보낸다. 요즘은 새만금 사
업으로 인해 잔뜩 격앙된 서해바다와 갯벌 식구, 사업을 찬성 또는 반대하는 사람들을 달래주느
라 종을 33번 쳐도 모자를 듯 싶다. 종은 계속 바다에 종소리를 실어보내고 싶건만 그 바다가
없어지면 얼마나 허전할 것인가..?


▲  망해사 극락전(極樂殿)

바다가 있는 북쪽을 굽어보는 극락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원래는 대웅전이었다. 1984년에 보광명
전과 칠성각을 부시고 그 자리에 만든 것으로 1991년에 중수했으며, 이후 극락전으로 이름을 갈
았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로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3존불
이 봉안되어 극락전의 이름값을 하고 있으며, 지장보살과 지장시왕탱, 아미타후불탱, 진묵대사
의 초상 등이 건물 내부를 수식한다.


▲  망해사 악서전(樂西殿) - 전북 지방문화재자료 128호

극락전 옆에는 담장을 두른 공간이 있는데, 그 안에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악서전(낙서전)이 있
다. 악서전 옆에는 오래된 팽나무가 하늘 높이 자라나 악서전을 바다 바람으로부터 지켜준다.

이 건물은 1624년(또는 1589년)에 진묵대사가 지은 것으로 전하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ㄱ'자
형 팔작지붕 건물로 기둥 위에 공포를 얹힌 주심포(柱心包) 식이다. 4개의 주련이 걸려있으며,
단청(丹靑)이 칠해져 있으나 색이 많이 바랜 상태이다. 1933년과 1977년에 수리를 했으며, 1986
년에 해체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내부에는 절을 거쳐간 승려들의 진영(眞影)과 석가3존불이
봉안된 불단이 있으며, 그 뒤에는 아미타후불탱화가 든든하게 걸려있다.

악서전(발음에 따라 낙서전)이란 이름은 서해바다를 즐긴다는 뜻으로 자연 속에 있기를 좋아했
던 팔자 좋은 사대부(士大夫)의 집 이름 같다. 처음에는 승려의 거처 및 법당의 역할을 겸했으
나, 지금은 승려의 생활공간 및 수행처로 쓰여 일반인의 접근을 통제하고 있다. 그래서 키는 작
지만 토담을 주위로 둘렀고 사립문은 늘 닫혀있다.
기둥의 모양은 불규칙하고 자연의 나무를 기둥으로 사용했으며, 건물 크기는 작지만 평온한 분
위기를 간직하여 살짝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허나 그 충동을 억제하고 담
장 너머에서 열나게 사진에 담는 선에서 악서전에 대한 욕구를 잠재웠다.


▲  낙서전과 팽나무, 범종각

▲  범종각 옆 샘터
망해사의 샘물이 치솟던 곳으로 범종각 옆에 땅을 파고 돌로 단단하게 석축을 엮어
샘터로 내려가는 계단을 마련했다. 현재는 겉모습만 남은 죽은 샘터로
우물 안에는 물이 가득 고여있으나 마실 수는 없다.
(절에서는 삼성각 부근에 별도의 물탱크를 두어 식수를 해결함)

▲  삼성각(三聖閣)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삼성각이 둥지를 트며 천하를 굽어보고 있다. 이 건물은 제일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극락전 위쪽에 터를 다지고 계단을 내었다.
삼성각에는 산신탱과 독성탱, 칠성탱이 봉안되어 있으며, 이들은 원래 칠성각에 있었으나 철거
되면서 오랫동안 극락전에 얹혀 살았다.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  불화(佛畵)같은 이미지의 칠성탱

◀  여인처럼 다소곳이 앉아있는 독성(獨聖,
나반존자)이 그려진 독성탱


▲  망해사 뜨락에서 바라본 서해바다

절에 들어왔을 때보다는 시야가 조금은 좋아졌지만 바다 건너는 여전히 안개에 감싸여 있다. 뜨
락과 해안 사이에는 텃밭을 닦아 여러 채소를 기르고 있으며, 바다 쪽에는 철책이 금줄처럼 둘
러져 있어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일반인 출입 통제 구역임)


 

♠  새만금바람길 산책 (심포항, 거전리)

▲  새만금바람길 (망해사 부근)

해사를 25분 정도 둘러보고 새만금바람길로 이동했다. 새만금바람길은 진봉면사무소에서 진봉
방조제, 전선포, 망해사, 두곡서원 뒤쪽, 심포항, 봉화산봉수대를 거쳐 거전리로 이어지는 10km
의 산책로이다. 요즘 산이나 특정 지역을 도는 둘레길이 크게 인기를 누리고 있는데, 이 바람길
역시 상큼하게 등장한 도보길 유행에 따라 김제시청에서 야심차게 닦은 것이다.

진봉방조제와 심포항 부분을 제외하고는 바닷가에 솟은 야트막한 산줄기의 산길이며, 길을 손질
하고 이정표를 설치했다. 그리고 새만금의 이름을 따서 새만금바람길이라 했으니 그 흔한 둘레
길 대신 바람길을 칭한 것이 이채롭다. 아직까지는 인지도가 낯선 까닭에 사람들의 발길은 별로
없으나 차차 김제 지역의 꿀단지가 될 것이라 믿는다. 그럴 싹수가 충분히 보이기 때문이다.
 
바람길 거리가 10km라 좀 길어보이지만 산길의 소나무가 무성하고 서해바다도 바로 옆에 바라보
여 산내음과 바다내음에 마음이 상쾌해진다. 그런 길에 열중하여 걷다 보면 정말 거리가 모자를
정도이다. 소요시간은 2~3시간 정도로 약간 가파른 구간이 몇 있을 뿐, 그외에는 그냥 이 땅에
흔한 둘레길 수준이다.


▲  망해사 전망대

망해사는 바람길의 중간 정도로 나는 심포항 쪽으로 이동했다. 보도블록이 깔린 바람길로 접어
들면 곽경렬 선생의 추모비가 나오고, 그 비석을 지나면 흙길로 변신한다. 흙의 촉촉한 기운을
느끼며 걷다보면 곧 망해사전망대가 마중을 나온다.
이 전망대는 3층 규모로 꼭대기에 올라서면 새만금 개발로 혼돈한 서해바다가 두 눈에 바라보인
다. 그리 부담없이 지어진 전망대라 딱히 다른 시설은 없으며, 전망대에 올라 잠시 천하를 조망
(眺望)하고 다시 길을 재촉하면 솔내음이 진동하는 소나무 숲길이 펼쳐진다.


▲  소나무 너머로 보이는 서해바다

▲  모습을 드러낸 심포항(深浦港)

망해사에서 바람길을 따라 1.5km 정도 가면 심포항이 모습을 드러낸다. 심포항은 진봉면 심포리
(深浦里) 바닷가에 둥지를 튼 어촌으로 만경강(萬頃江) 최하류에 자리해 있다.
심포항은 한때 100여 척이 넘는 어선이 드나들던 큰 어항(漁港)으로 갯벌이 넓게 펼쳐져 조개의
집산지 및 체험 장소로 명성이 높았다. 허나 새만금 공사와 연안 어업의 쇠퇴로 인해 왕년의 모
습은 크게 꺾인 상태이며, 수천만 평을 자랑하던 갯벌은 새만금 개발 앞에 사라질 위기에 처했
고, 포구 앞바다는 거의 담수호(淡水湖) 수준이 되었다.
그래도 아직은 어촌의 분위기가 남아있어 조개류나 생선 등을 구입할 수 있으며, 조개구이와 해
물칼국수, 해산류를 파는 식당과 민박 등의 숙박업소도 여럿 자리해 있다. 또한 심포항은 일몰(
日沒) 풍경이 아주 일품으로 전국적인 일몰 명승지로 유명하다.


▲  한가로운 심포항 동쪽 부분

▲  바닷가에 몸을 기대며 단잠에 빠진 어선들
새만금 개발이 완료되면 저 어선들의 미래는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  심포항 중간 부분

▲  심포항 서쪽 부분

심포항은 주말 오후임에도 한가롭기 그지없다. 어항이 동서로 긴 편인데, 핵심은 바로 서쪽 부
분이다. 이곳에는 식당과 조그만 어시장이 형성되어 있는데, 인적이 드문 동쪽 부분과 달리 사
람들이 제법 몰려있었다. 식당에도 사람들이 절반 정도 차 있는 상태였고, 상인들과 가격을 흥
정하는 사람도 눈에 띈다.

심포항에서 바람길은 봉화산 산자락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서 길을 잘못 들었다. 괜히 바람길을
고집하다가 바람맞을까 염려되어 여기서 쿨하게 바람길을 접고 버스가 다니는 지평선로로 나왔
다. 심포항에서 지평선로 안하3거리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이다.
아직은 버스 시간이 있어서 거전리 방향으로 더 걷다가 거전리 입구인 길곤마을에서 길을 멈추
고 버스정류장에 들어가서 쉬었다.


▲  푸른 싹이 돋아난 김제평야의 위엄(거전리 방향)
올해 처음으로 본 푸른 싹들이다.

▲  풍년을 미리 예감하는 김제평야 (내륙 방향)

버스정류장에서 호남평야(湖南平野)의 일부인 김제평야를 보니 정말 넓기는 넓다. 지평선 너머
까지 끝없이 펼쳐져 마치 대륙의 농경지를 보는 듯 하다. 아직은 겨울 제국에서 해방되지 못한
평야 바깥 세상과 달리 평야에는 푸른 싹이 돋아나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그것이 올해 처음으
로 본 푸른 새싹이었다.
이제 봄이 턱밑까지 오긴 했구나 실감을 하고 있으려니 남쪽에서 날아온 한 무리의 철새들이 오
랜 비행에 지쳤는지 우루루 평야에 착륙한다. 그리고 잠시 쉬더니 북쪽으로 힘찬 날개짓을 하며
길을 떠났다. 나도 북쪽으로 가야되는데 흔쾌히 태우고 가면 안될까?
손짓을 했지만 내가 저들보다 무거우니 현실은 불가능하다. 괜히 화물 초과 수송으로 저들에게
항공법 위반 벌금을 물리면 나로써도 면목이 없을 뿐이다.

그렇게 버스를 기다리니 거전리에서 맨몸으로 나오는 김제시내버스 19번이 다가온다. 버스에 올
라 만경까지 간다고 하니 같은 행정 구역에 가까운 거리임에도 구간 요금을 징수한다. 허나 나
에게 꿩 대신 닭을 고를 권한은 없었다. 그 버스가 아니면 걸어가거나 지나가는 차량을 잡아타
야 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만경(萬頃)에서 익산(益山)으로 넘어갈 요량이었으나 버스가 너무 기어가서 만경까지
무려 23분씩이나 걸렸다. 그래서 간만에 차이로 익산시내버스 15번(원광대↔만경)을 놓치고 말
았지. 운행 시간을 너무 널널하게 짠 느림보 김제버스 때문에 결국 만경에서 1시간 강제 체류를
하게 되었다.
1시간에 긴 시간을 억지로 흘려보내며 익산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탔지만 시간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늦어진 터라 이후 일정을 다음으로 넘기고 익산역에서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내 제
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봄맞이 김제 망해사 나들이는 약간의 여운을 남기며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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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바다에 떠있는 아름다운 섬의 무리들 ~ 군산 고군산군도, 선유도 나들이 (장자도, 비응항)

 

' 군산 선유도,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 나들이 '

▲  고군산군도

 


봄이 나날이 흥해감과 동시에 여름이 천하를 훔칠 기회를 엿보던 4월 끝 무렵에 군산 선유
도를 찾았다. 이곳은 마음 속 바구니에 담아두며 인연이 닿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드
디어 그 인연이 닿았다.

아침 해가 떠오르기가 무섭게 집을 나서 서울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군산으로 가
는 일반고속버스를 탔다. 버스는 2시간 40분 동안 열심히 바퀴를 굴려 군산 도심에 자리한
군산고속터미널에 나를 내려준다.

선유도 유람선이 출발하는 비응항까지는 10시 반까지 가야 된다. 남쪽에서 온 일행은 이미
도착한 상태, 군산시내에서 비응항은 시내버스 5개 노선이 운행하고 있는데, 노선 수를 봐
서는 제법 많이 다닐 것으로 보인다. 허나 그것은 치명적인 함정. 그들은 각각 1~2시간 간
격으로 운행하고 있어 인구 28만을 지닌 도시의 시내버스치고는 다소  절망적인 수준이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시외/고속터미널을 경유하는 4개 노선의 버스 시간을 전날 확인해 두
었는데, 그새 시간표가 바뀌었는지 정보 오류인지 차가 좀처럼 오질 않는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지 뱃시간은 다가오지, 초조함으로 제대로 쫄깃해진 염통을 부여잡으며
일단 군산시내버스 상당수가 종점으로 삼는 군산대 방면 시내버스를 타고 군산대 후문에서
내렸다. 그런 다음 서둘러 택시를 낚아 비응도로 이동했다. 시내에서 바로 택시로 가도 되
지만 그럴 경우 막대한 요금 앞에 뒷목을 잡을 수 있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택시는 나의 조급한 마음을 헤아린 듯, 비응도까지 새만금북로로 시원하게 질주했는데, 15
km 거리를 13분에 주파하는 위엄을 보인다. 허나 요금은 14,000원 약간 넘게 나와 늘 돈에
쪼들려 사는 나의 마음을 무척 쓰라리게 만들었지. 고군산군도와 선유도 때문에 이곳에 왔
는데, 그곳을 못본다면 애써 여기까지 온 보람이 없어지고 만다. 그래서 부득이 무리를 하
고 말았다.

비응도(飛鷹島)에 이르니 시간은 오히려 20분의 여유가 있다. 그래서 월명유람선 선착장까
지 안가고 비응항에서 내려 걸어갔는데, 상춘객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선착장에서 일행들을
만나 10시 30분에 출발하는 유람선에 몸을 실었다.


♠  고군산군도 해상 유람 (비응도→선유도)

▲  만선의 꿈을 꾸는 어선들의 보금자리 ~ 비응항(飛鷹港)

고군산군도 유람선인 월명유람선은 비응항(비응도항)을 출발하여 횡경도와 방축도, 명도, 대장
도, 장자도 등을 차례대로 지나 선유도에 배를 대고 잠시 머물다가(1시간 정도 머무는 B코스와
4~5시간을 머무는 C코스가 있음) 다시 비응도로 돌아오는 코스로 비응도에서 선유도까지 약 1시
간, 나오는데 40~50분 정도 걸린다.
비응도에서 방축도와 명도를 경유하여 선유도까지 보통 30~31km 정도 되며, 고군산군도가 한반
도와 좀 떨어져 있긴 하지만 비응도와 오식도(筽篒島)가 섬에서 한반도의 일원이 되면서 서로의
거리가 많이 좁혀졌다. 그 이전에는 군산시내에 위치한 군산항에서 배를 타야 했는데, 꼬박 2시
간 이상 걸렸다. (지금은 1시간) 배를 대는 곳은 오로지 선유도 한곳으로 나머지 섬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지나가며, 다른 섬에 발을 들이고 싶은 경우 군산여객선터미널이나 선유도에서 일
반 여객선을 이용해야 된다.
 
유람선은 2층으로 이루어진 배로 1층과 2층 모두 관광객들로 만원을 이룬다. 2층에는 간식과 음
료수, 술을 파는 매점을 비롯해 넓은 노래방 홀까지 갖추고 있는데, 배가 움직이는 내내 중/장
년층 단체객들이 노래방을 점거하며 노래를 부르고 신나게 춤판과 술판까지 벌인다. 일반 여객
선도 아닌 유람선이라 그러려니 해도 너무 지나치면 안하는 것만 못하다고 조금은 눈살을 찌푸
리게 한다. 게다가 그렇게 넋을 놓고 놀다가 만약 사고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하는지 정말 대책
이 안보인다. 물론 배가 움직이는 동안 심한 요동으로 인해 속이 울렁거리거나 현기증이 일어나
거나 심하면 멀미까지 하는 경우도 많다. 게다가 오가는 시간도 지루하니 그렇게라도 신나게 몸
을 움직이면 그런 것을 잠시나마 떨쳐버릴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어느 정도 선은 지켰으면 좋
겠다. (지켜서 손해볼 것은 없지 않은가?)

우리가 탄 배는 10시 반에 출발하는 것으로 승선이 지연되어 거의 10시 40분에 뱃고동을 울리며
미끄러지듯 비응항을 출발했다. 그렇게 한반도를 뒤로하며 고군산군도로 느릿느릿 다가선다.
우리는 2층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파도로 인해 배가 좀 요동을 치면서 자연히 속에서 불편한
신호가 왔다. 오랜만에 배를 탄 것도 있겠지만 속이 계속 울렁거려 미칠 것 같다. 그래도 계속
참으며 자리를 지키다가 결국 자리를 뜨고 1층으로 내려온다. 배를 타면서 속이 말썽을 부릴 때
는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선창으로 나가 바닷바람을 쐬는 것이 매우 좋지. 1층으로 내려오니 2
층보다는 요동이 적어 불편한 속이 조금 진정이 되었고, 바깥으로 나가 바닷바람을 맞으며 바다
내음에 심취하니 그나마 남아있던 불편함도 거의 가신다. 게다가 사진기를 꺼내 바다와 가까이
다가오는 고군산군도를 열심히 담으니 정말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  비응도를 출발한지 얼마 안되어 한반도에서 멀게만 느껴졌던
고군산군도가 그 모습을 서서히 비춘다.

▲  서해바다란 넓은 도화지에 대자연 형님이 점을 여럿 찍으니 그 점이
바로 서해바다의 꽃인 고군산군도이다.

▲  길게 드러누운 횡경도(橫境島)

고군산군도에 이르면 가장 먼저 횡경도가 마중한다. 새만금방조제가 생기기 이전에는 야미도(夜
味島)가 가장 먼저였지만 그곳이 방조제로 인해 육지와 끈끈하게 연결되면서 이제는 횡경도가
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횡경도는 동서로 길쭉한 64.4만㎡의 조그만 섬으로 소횡경도를 거느리고 있다. 사람이 살지 않
는 무인도로 낚시터로 유명해 낚시꾼들의 출입이 잦으며, 이 섬에 들어가려면 선유도나 야미도
에서 어선을 빌려타야 된다. 섬 중앙에는 할배바위(장자할배바위)란 바위가 있는데, 상투에 갓
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형상처럼 생겼고, 소횡경도에는 거북이가 목을 뺀 듯한 모습의 거북바
위와 등대가 있다.


▲  보다 가까워진 횡경도(왼쪽)와 소횡경도(오른쪽)

▲  등대가 있는 소횡경도 서쪽 부분 <왼쪽 벼랑이 거북바위>

▲  서남쪽에서 본 소횡경도와 횡경도
속세에서 잠시 나란 존재를 지우고 싶을 때 살짝 찾아와 아무도 모르게
며칠 정도 머물고 싶다. 아니면 내가 중심이 되는 나만의 나라를
이곳에 세워보는 것은 어떨까? (물론 안될꺼야..)
 

▲  횡경도 해역에서 바라본 야미도와 신시도(新侍島)

▲  횡경도 해역에서 바라본 선유도와 관리도

▲  고군산군도의 방파제인 방축도(防築島)

횡경도를 지나면 방축도란 섬이 나타난다. 이 섬은 선유도 북쪽에 자리하여 고군산군도의 자연
산 방파제의 역할을 하는데, 그런 연유로 방축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유인도로 신라 후기에 바다의 제왕 장보고(張保皐)가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고 동아시
아의 드넓은 바다를 엄하게 호령하던 시절, 당나라 상인들이 신라에 가다가 표류하여 이곳에 들
어와 정착했다고 전한다. 허나 마을 뒷산에 7기의 고인돌이 발견되어 이미 청동기시대(靑銅器時
代)부터 이 좁은 섬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살짝 귀뜀해준다.

섬 주변은 암석이 많고, 수심이 얕아서 조류가 거세고 파도가 강하다. 허나 낚시 장소로는 제격
이라 많은 낚시꾼들이 찾아오며 농어가 많이 잡힌다고 한다. 그리고 해변에는 독립문바위와 시
루떡바위, 책바위 등 대자연이 빚은 여러 바위들이 포진해 섬의 아름다움을 더욱 수식해준다.


▲  방축도와 외부를 이어주는 방축도 포구
저 섬에도 잠시 두 발을 들였으면 좋으련만 이렇게 멀리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된다.

▲  방축도 해역에서 바라본 횡경도

▲  방축도 서부


▲  방축도의 명물 독립문바위가 중앙에 보인다.

방축도 서쪽 해안에 자리한 독립문바위는 조그만 돌다리나 고가도로처럼 생긴 참으로 기묘한 바
위이다. 서울의 독립문(獨立門)처럼 생겼다하여 독립문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북문바
위라 불리기도 한다. 바위 서쪽에도 산을 갖춘 섬 같은 땅이 보이는데, 겉으로 보면 별도의 섬
처럼 보이지만 엄연한 방축도의 일부로 그 사이가 가늘게 이어져있다.


▲  말도(末島)와 명도(明島), 방축도의 서부
푸른 산과 바다 밖에는 안보이는 말그대로 망망대해(茫茫大海)의 고적한 섬이다.


우리를 태운 유람선은 방축도에서 남쪽으로 꺾는다. 그래서 명도와 말도는 이렇게 아주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된다.

밝은 섬이란 뜻의 명도는 달과 해가 합쳐진 것처럼 물이 맑다고 하여 유래된 이름이다. 사람들
이 살고 있는 아주 조촐한 섬으로 낚시터로 명성이 높으며, 섬의 야트막한 산에는 수십 가지의
각종 약초가 자라나 약산(藥山)이라 불리기도 한다.

말도는 고군산군도의 종점이자 끝으로 가장 서쪽에 자리한다. 끝섬이라 불리기도 하며, 한반도
에서 고군산군도를 왕래하는 여객선의 종점으로 1909년에 지은 말도등대가 서해바다와 군산을
찾는 배들의 밤길을 밝혀준다.
이 섬은 조선 중기부터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며, 심씨 성을 가진 판서(判書)가 귀양을 와서 밭
을 일구고 살면서 인구가 늘었다고 한다. 그가 귀양에서 풀려나 서울로 소환된 이후, 섬 사람들
은 그의 공덕을 기리고자 영신당(靈神堂)을 지어 매년 11월에 제를 지냈으나 기독교가 이 섬을
휩쓸면서 당제(堂祭)는 끊기고 말았다.


▲  끝없는 서해바다 - 저 수평선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속인(俗人)들이
그렇게나 동경하던 극락이나 유토피아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해가 뜨고 지는 사이에 잠시 머무는 그만의 비밀 공간이 있는지도 모른다.

▲  관리도<串里島, 곶리도>

대장도 서쪽에 자리한 관리도는 곶리도라고도 한다. (어차피 한자는 같음) 원래 이름은 꽂지섬
이었다고 하는데, 섬의 모습이 전쟁에 출진한 장군들이 적의 몸에 화살을 쏘아 꽂아대는 모습이
라 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섬의 지형이 마치 꼬챙이처럼 생겼다
고 하여 꼭지도라고 부르다가 꼬챙이를 뜻하는 관(串)을 붙여 관리도(곶리도)가 되었다고 한다.

이 섬에는 완전무장한 장군의 모습 같은 투구봉, 말을 탄 무인의 모습을 한 질망봉, 승려로 이
루어진 승군(僧軍)의 모습을 한 중바위(중바우), 시루떡 모양의 시루봉 등이 있으며, 갖가지 바
위들이 섬을 수식하여 눈을 심심치 않게 한다. 섬 사람들은 대부분 전복을 양식하거나 고기잡이
로 생계를 꾸린다.

▲  관리도 해역에서 바라본 횡경도

▲  관리도 해역에서 본 선유도와 장자도


▲  장자도 서쪽에 홀로 떠있는 등대 - 등대 너머로 방축도의 동부와
동서로 길쭉한 횡경도가 보인다.

▲  대장도(大長島, 왼쪽 섬)와 장자도(오른쪽 섬)

선유도 바로 서쪽에 자리한 대장도는 남쪽으로 장자도와 이어져 있다. 이 섬은 옛날에 어떤 사
람이 섬을 1바퀴 둘러보고는 미래에 크고 긴 다리가 생길 것이라 말을 하고 섬을 떠났는데, 한
반도와의 연륙을 애타게 꿈꾸던 섬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으며 섬 이름을 크고 긴 다리를 뜻하
는 대장도로 갈았다고 한다.
과연 그의 예언대로일까 대장도를 잇는 현수교(懸垂橋)가 생겨나 장자도는 물론 선유도까지 걸
어서 이동이 가능해졌고, 새만금방조제의 등장으로 고군산군도의 동쪽을 이루던 신시도와 야미
도 등이 연륙되었으며, 한반도에서 선유도를 붙들어 맬 다리 공사를 진행중이라 그것이 완성되
면 선유도는 물론 대장도까지 4발 수레로 오갈 수 있게 된다. 그리되면 그야말로 크고 긴 다리
가 생기는 셈이다.

섬 동쪽에는 고군산군도에서 꽤나 이름난 장자할매바위가 있는데, 그 모습이 아이를 등에 업은
형상으로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슬픈 전설이 전해온다. (바위는 못봤음)
조선시대(또는 고려시대)에 대장도에 살던 선비 부부가 있다. 남편은 열심히 공부를 하고 서울
로 과거를 보러 나갔는데, 부인은 몇달 동안 한결같이 장자봉에 올라 남편의 과거 급제를 기원
했다. 허나 남편은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때를 한참이나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애가 탄 부인은
매일 아이를 업고 장자봉에 올라 남편을 실은 배가 오기를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남편이 돌아왔다. 허나 과거 급제로 금의환향(錦衣還鄕)을 한 것이 아
니라 육지에서 첩실과 그를 통해 얻은 아들을 데리고 온 것이다. 육지에 오랫동안 머물며 소실
까지 맞을 정도면 선비의 집안은 제법 형편이 되었던 모양이다.

남편의 일탈에 크게 뚜껑이 열린 부인은 눈물을 떨구며 뒤로 돌아서는 순간 등에 업힌 아이도
덩달아 발끈했는지 힘을 주었는데, 그 바람에 그들은 즉석에서 돌로 변했다고 한다. 한편 아내
와 아이가 그렇게 사라지자 남편은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며 횡경도에 들어가 그 벌로 돌이
되니 그 돌이 장자할배바위라고 한다.
이 전설은 대장도나 주변 섬에 살던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지만 순간의 실수로 어긋나버린 이
곳에 살던 어느 부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지은 것이 아닐까 싶다. 굳이 과거를 보러 간 것이
아니라도 육지에 일이 있어 나간 남편이 첩을 데리고 오면서 그들의 가정은 파탄이 났고 이에
발끈한 부인은 아이와 함께 장자할매바위에서 투신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아내와 자식이
죽자 발작한 남편도 횡경도에서 자살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이후 사랑하는 이와 이 바위에서 사랑을 약속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믿거나 말거나 속설
이 전해오며, 월명유람선은 대장도 뒷쪽으로 가기도 하고 선유도 사이인 앞쪽으로 가기도 하여
뒷쪽으로 가는 경우에는 이 바위를 만날 수 없다. 그날 운에 맡기는 수 밖에는...

그리고 대장도 남쪽에 자리한 장자도는 선유8경의 하나인 장자어화(壯子漁火)의 현장이다. 한때
멸치포구로 유명했고, 고군산군도 제일의 어항(漁港)으로 많은 배들이 심야에 장자도 앞바다에
서 고기를 잡느라 불야성(不夜城)을 이루었는데, 그 배에서 비치는 불빛이 아름다운 풍경을 자
아내 '장자어화'가 된 것이다.

장자도는 옛날에 힘이 센 장사가 나왔다고 하여 유래되었다는 설과 가재미와 장재미를 합쳐 장
자도라 했다는 설이 공존한다. 이곳 포구는 자연이 빚은 대피항으로 유명해 예전에는 고군산군
도와 서해바다에서 가장 잘나가는 섬이었다. 섬의 모습은 말 앞에 놓은 커다란 구유처럼 장자봉
이 우뚝 솟은 형국으로 서 있고, 그 앞에 선유도가 맥을 감싸안고 있어 큰 인재가 많이 나오는
지형이라고 하며, 북쪽의 대장도와 다리로 연결되어 거의 한몸이 되었는데, 서해를 바라보는 사
자바위(사자봉)를 장자도를 지키는 바위로 여기고 있다.
섬 동쪽에는 장자대교를 통해 선유도와 이어져 있다. (차량 통행은 어려움)


▲  대장도 사자바위(사자봉)
사자나 고양이, 개가 땅바닥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 같다. 오른쪽 봉우리에
머리에 해당되는 조형물만 갖다 붙인다면 영락없이 그 모습인데 말이다.

▲  다른 각도에서 본 대장도 사자바위(사자봉)

▲  선유도 인어등대


▲  장자도 해역에서 본 관리도와 말도, 방축도

▲  장자도와 선유도를 잇는 장자대교


♠  고군산군도의 중심지, 선유도(仙遊島)

▲  선유도선착장에서 바라본 선유대교(무녀도와 선유도를 이어줌)

고군산군도를 1시간 정도 배회한 유람선은 이 군도(群島)의 중심지이자 유일하게 상륙하는 선유
도로 들어와 선유도항(선유도여객터미널)에 고된 몸을 기댄다. 이윽고 여기서 1시간 정도 머무
니 반드시 출발시간을 지켜달라는 안내방송이 강하게 나온다. 오랜 뱃길에 심신이 지치거나 고
군산군도의 매력에 눈과 마음이 지나치게 호식(好食)을 누린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나오면서 썰
렁했던 선유도항은 잠시나마 활기를 누린다.


▲  선유도항에 몸을 기댄 월명유람선

선유도는 고군산군도의 중심 섬으로 예전에는 군산도(群山島)라 불렸다. 섬 북쪽에 있는 봉우리
의 형태가 마치 2명의 신선(神仙)이 마주 앉아 바둑을 두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하여 후대에 신
선이 머무는 섬이란 뜻의 선유도란 고운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섬의 면적은 2.13㎢로 5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원래는 3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것을
바다가 실어다준 흙과 모래로 하나의 섬이 되었다. 고려 때는 송(宋)나라와 동남아의 여러 제국
(諸國)을 오가는 중간 기항지로 관청을 두어 그들의 편의와 상거래를 관리했고, 조선 초기에 수
군기지인 군산진(群山鎭)을 두어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를 파견했다. 군산진은 조선 세종(世宗
) 때 지금의 군산시내로 이전되면서, 군산이란 이름도 같이 따라갔는데, 선유도와 주변 섬들은
옛 군산이 있던 곳이라 하여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1597년에는 천하의 영원한 해신(海神),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진도 울돌목에서 불과 13척의 형
편없는 전력으로 서해바다로 진출하려는 왜선 330여 척을 맞아 분전 끝에 31척을 격파하고 92척
을 사용 불능으로 만들었으며, 18,000여 명의 왜군을 물고기 밥으로 만든 이른바 명량대첩(鳴梁
大捷)의 위업을 이루었는데, (아군의 피해는 왜군의 1%도 안될 정도로 매우 가벼운 수준, 이순
신이 탄 대장선에서 2명 전사, 3명 부상 / 다른 배도 비슷한 수준) 그 대첩을 치르고 잠시 몸을
추스리고자 선유도까지 올라왔다. (1597년 9월 21일)
그는 선유도에 이르자 몸살로 고생을 했으며, 거기에 태풍까지 몰려와 12일 정도 머물렀다. 그
리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완도 고금도(古今島)에 주둔하며 원균(元均)이 말아먹은 조선 수군
을 빛나게 재건했다.

선유도에는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선유8경이 있다.
1. 선유도 해변에서 바라보는 일몰의 아름다움, 선유낙조(仙遊落照)
2. 가늘고 긴 선유도해수욕장의 명사십리(明沙十里)
3, 선유도로 유배를 온 충신들이 매일같이 올라 임금을 그리워했다는 망주봉(望主峰), 특히 여
   름에 큰 비가 오면 망주봉에서 일시적으로 7~8개의 물줄기가 폭포처럼 쏟아지니 이것을 망주
   폭포(望主瀑布)라고 한다.
4, 선유도 모래사장을 위에서 바라보면 마치 내려 앉는 기러기처럼 생겼다 하여 평사낙안(平沙
   落雁)
5. 무녀도(巫女島)에 속한 3개의 무인도가 풍기는 아름다운 모습, 삼도귀범(三道歸帆)
6. 장자어화 (자세한 것은 앞의 장자도 부분 참조)
7. 신시도에 있는 월영봉(月影峰, 199m)의 가을 단풍이 매우 곱다고 하여 월영단풍(月影丹楓)
8. 방축도와 말도 등 12개 섬이 마치 투구를 쓴 군사들이 도열한 모습과 같다고 하여 무산12봉(
   巫山十二峰)


선유도는 명사십리로 유명한 선유도해수욕장을 비롯하여 망주봉, 옥돌해수욕장, 몽돌해수욕장,
수군절제사 선정비(善政碑) 등의 명소가 있으며, 선사시대의 아련한 흔적인 패총(貝塚, 조개더
미)도 있다. 또한 섬마을답게 오룡묘제, 장생제, 수신제 등의 마을 제사와 풍습이 있었으나 지
금은 모두 사라져 아쉬움을 건네며, 주변 섬과는 다리로 이어져 있는데, 동쪽으로 무녀도, 서쪽
으로는 장자도, 대장도와 이어져 있어 배가 아닌 두 다리나 자전거로 둘러볼 수 있다.

한반도와 선유도를 이어주는 나루터는 2곳으로 선유대교 북쪽에 자리한 선유도항이 가장 크다.
여기서는 월명유람선을 비롯하여 군산을 오가는 여객선이 운행하며, 망주봉 동쪽 선유3구 선착
장에서는 야미도에서 출발한 새만금유람선이 오간다. 허나 선유도를 한반도에 단단히 붙들고자
현재 연륙교를 짓고 있어 그것이 완성되면 선유도까지 편히 수레로 오갈 수 있게 되며, 그때가
되면 군산에서 시내버스와 시외버스가 들어와 교통이 보다 좋아질 것이다.
허나 그로 인해 오랫동안 한반도와 고군산군도를 이어주던 해상교통의 희생은 어쩔 도리가 없어
군산을 오가는 여객선과 유람선의 노선 조정이 불가피해 보인다.


▲  선유도항 주변

선유도와 한반도를 이어주는 교통의 중심지, 선유도항은 여객선표를 구입하는 매표소를 비롯하
여 식당 몇 곳이 전부이다. 선유1구 마을과 선유2구 마을의 중간 지점이기 때문이다.
길가에는 골프장에서 많이 보이는 카트(Cart) 수십 대가 대기를 타면서 하얀 물결을 이루는데,
이들은 선유도와 무녀도에서 숙박업소나 식당을 하는 이들이 가지고 온 것으로 배를 타고 들어
온 관광객들에게 이거 타고 섬 1바퀴 돌라며 강하게 유혹의 메세지를 건넨다. 이곳에서 주어진
시간은 달랑 1시간, 아무리 선유도가 작다고 해도 그 시간 동안 두 다리에 의지해 돌아다닐 수
있는 범위는 좁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많이들 카트에 올라타는데, 대부분 4인승에서 8인승이
다. 카트는 대부분 카트 주인이 직접 운전하지만, 키를 맡겨 돌고 싶은 곳을 돌라고 하는 경우
도 있다. 물론 돈을 더 줘야 된다. 카트 승차비는 카트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보통 5천원 정도
한다.

우리 일행도 카트의 신세를 많이 졌는데, 나도 일행에 끼어 8인승 카트에 올라탔다. 카트 주인
은 식당/펜션을 하는 아줌마로 선유도해수욕장을 비롯한 선유도 북부를 1바퀴 구경시켜주었다.
코스는 선유도항 → 선유도해수욕장 → 망주봉 주변 1바퀴 → 선유3구 선착장 → 선유도해수욕
장 → 선유도항으로 딱 1시간에 맞는 코스였다. 길의 폭은 선유도항 주변을 빼고는 카트 2대가
교행하기에 적당할 정도로 좁았다.
선유도를 돌면서 선유도해수욕장이나 중간에 내려서 발자국을 남길 시간은 없었고, 오로지 카트
만 타고 움직였다. 마음 같아서는 몽돌해수욕장과 옥돌해수욕장, 장자도와 무녀도도 가고 싶었
지만 시간이 없으니 그건 어렵다. 배가 떠나면 한반도로 나가기가 힘들어진다.


▲  선유도항 주변 갯벌

▲  부드러운 곡선의 선유도해수욕장

선유도항에서 도보 15분 거리에 고군산군도의 아름다운 입술인 선유도해수욕장이 누워있다. 명
사십리(明沙十里)란 걸쭉한 별명까지 지닌 이곳은 약 1.5km의 백사장으로 10리는 커녕 5리도 안
되는 길이다. 서해에 있는 다른 해변과 마찬가지로 수심이 매우 얕아 바다로 100m를 나가도 겨
우 허리에 닿을까 말까 하며, 해가 그만의 공간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면 붉게 타오르는 낙조가
대장관을 이루어 선유8경의 하나인 선유낙조의 현장으로 명성이 높다.

물이 빠졌을 때는 팽나무가 자라고 있는 모래톱 끝까지 갈 수 있으며, 둑방 건너편에 긴 자갈밭
이 펼쳐져 선유도해수욕장의 아름다움을 진하게 수식시킨다. 바다낚시와 갯벌체험, 모터보트,
바나나보트 등을 탈 수 있고, 샤워장과 뒷간, 방갈로, 파출소와 보건소, 숙박시설 등이 주변에
있어 여름 피서지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  여유로운 풍경의 선유도해수욕장 - 바다 건너로 진하게 보이는 산은
장자도의 지붕인 장자봉이다.


▲  선유도해수욕장 북쪽

▲  선유도해수욕장에서 선유3구로 가는 길

▲  바위산인 망주봉
(望主峰, 152m)

선유도해수욕장 동북쪽에 자리한 망주봉은 선유도해수욕장과 더불어 선유도의 소중한 꿀단지이
다. 2개로 이루어진 바위 봉우리로 조선시대에 이곳으로 귀양 온 충신들이 매일 같이 올라 서울
에 있는 군주를 그리워했다고 하여 주군을 바라본다는 뜻의 망주봉이 되었다.
평소에는 그저 조용한 바위 봉우리지만 비가 많이 쏟아지면 산으로 떨어진 빗물이 암벽을 타고
약 7~8개의 물줄기를 이루며 아래로 떨어진다. 그 모습이 폭포와 같아서 망주폭포(望主瀑布)라
고 부른다. 그러니까 비가 많이 올 때만 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폭포인 셈이다.


▲  선유도항에서 바라본 망주봉의 위엄


♠  고군산군도 마무리

▲  선유도를 떠나다

선유도를 항아리 겉돌 듯 둘러보고 유람선으로 돌아왔다. 떠날 시간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짧은
자유시간을 이용해 선유도 곳곳으로 흩어진 상춘객들도 일제히 돌아와 선착장 주변은 다시 북새
통을 이룬다. 이번에도 늦게 온 몇몇 사람들 때문에 지정 시간보다 15분 정도 늦게 선유도를 출
발했다.

우리는 선유도로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2층에 자리를 잡았는데, 한반도로 돌아가는 길은 대략
50분 정도 걸린다. 선유도로 올 때와 마찬가지로 약간의 너울로 배가 조금 들썩였으나 이미 몸
에 익숙해진 터라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피곤이 물결처럼 밀려와 나를 희롱하니 슬슬 졸리
기 시작한다. 허나 이제 언제 올지 모를 고군산군도와의 작별이 너무 아쉬워 갑판으로 나가 점
점 멀어져가는 선유도를 비롯한 고군산군도의 뒷모습을 열심히 사진에 담았다. 시원하게 느껴졌
던 바닷바람도 이제는 차갑게 다가온다.


▲  선유도 선유3구 선착장 - 야미도에서 오는 새만금유람선이 주로 이용한다.

▲  조금씩 작아지며 흐릿한 점이 되어가는 고군산군도의 식구들

▲  새만금방조제로 한반도의 일원이 된 신시도(新侍島)

선유도를 가리고 선 신시도는 새만금방조제가 섬 동부를 지나가면서 한반도의 어엿한 일원이 되
었다. 고군산군도에서 가장 큰 섬으로 면적이 4.25㎢에 이르며, 삼국시대 초반에 가락국(駕洛國
)에서 건너온 김해김씨 일가가 청어를 잡기 위해 제일 먼저 들어와 살았다고 전하나 확실한 것
은 없다.
신라 후기에는 천하의 대학자인 최치원(崔致遠)이 옥구 자천대(紫泉臺)에 머물러 있다가 신시도
에 우뚝 솟은 월영산(月影山, 당시에는 이름이 없었음)을 보고 천하 명산(名山)이라고 크게 칭
송했다. 그리고 그곳이 급히 땡겼는지 풍선(風船)을 타고 신시도로 건너가 그 봉우리에 단을 쌓
고 거처를 세워 산 이름을 월영봉(199m)이라 했다.
그는 여기서 매일 책을 읽었다고 하는데, 글을 읽는 소리가 어찌나 낭랑하던지 바다 건너 당나
라 상해(上海)까지 들렸다고 전한다. 물론 글 읽는 소리가 바다 건너 대륙에서까지 들렸다는 것
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일 뿐이나 그가 이곳에 잠시 머물렀던 것은 사실인 듯 싶다.

신시도의 기둥인 월영봉은 선유8경의 하나인 월영단풍의 현장으로 단풍에 물든 월영봉의 자태가
마치 1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답다. 신시도란 이름은 왜정 때 지어진 것으로 새만금방조제가 지나
는 동쪽 대각산(187m)에 전망대가 세워져 있고, 그 전망대를 통해 대각산으로 올라가 고군산군
도와 새만금 일원을 두 눈에 조망할 수 있다.


▲  유람선이 남긴 하얀 물보라 자국 ▼

유람선은 푸른 도화지에 물보라를 튀기면서 요란하게 지나간 자국을 남긴다. 허나 그 자국은 이
내 일체의 흔적도 없이 지워지고 다시 원래의 푸른 도화지로 되돌아간다. 나를 비롯해 배에 탄
사람들 모두 선유도를 비롯한 고군산군도에 열심히 다녀간 흔적을 남겼지만 결국은 사진 외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는 것이다.


▲  야미도(夜味島)와 신시도 사이 해역 - 그 사이로 바다의 만리장성이라
자화자찬하는 새만금방조제가 희미하게 보인다.

▲  야미도와 횡경도 사이에 외롭게 뜬 조그만 바위섬, 계도(鷄島, 닭섬)
이렇게 봐서는 닭처럼 생겼는지 꿩처럼 생겼는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  새만금방조제에 붙어있는 야미도

야미도는 고군산군도에서 가장 한반도와 가까운 섬으로 군산에서 출발한 여객선이 제일 처음 들
렸던 곳이다. 지금은 새만금방조제로 한반도의 일원이 되면서 신시도와 함께 편히 수레로 오갈
수 있게 되었다.
이 섬은 밤나무가 많아 밤섬이라 불렸는데, 왜정(倭政)이 이 섬 이름을 지을 때 밤나무를 뜻하
는 율(栗)을 안쓰고 무식하게도 밤을 깜깜한 밤으로 해석해서 야(夜)을 썼다. 그리고 밤은 맛있
다고 하여 맛있다는 뜻의 미(味)를 붙여 본래 섬과는 맞지도 않은 엉터리 이름인 야미도란 이름
을 지니게 된 것이다. (지금이라도 섬 이름을 뜯어고쳐야 되지 않을까?)
섬 서쪽은 고군산군도가 점점이 떠 있는 서해바다, 오른쪽은 새만금방조제에 갇혀버린 새만금호
로 근래에 일출/일몰 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선유도를 출발하여 근 50분 만에 비응항으로 귀항했다. 배가 항구에 몸을 대기가 무섭게 상춘객
들이 우루루 육지로 몰려나오고 선착장에서 애타게 다음 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그들의 빈 공
간을 채워주면서 배는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바로 선유도로 뜰 준비를 한다.
우리는 관광버스에 올라타 새만금북로 주변에 있는 해물탕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지루할 정도
로 긴 새만금방조제를 넘어 부안 내소사(來蘇寺)로 넘어갔다.

아쉽지만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고군산군도 선유도 찾아가기 (2014년 7월 기준)
ⓘ 군산까지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군산행 고속버스가 15~2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동서울터미널에서 군산행 직행버스가 60~9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고양, 부천, 성남, 수원, 오산, 천안, 청주, 대전(복합), 익산, 광주, 목포, 대구(서부
  ), 부산(노포동), 창원(마산)에서 군산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 용산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평택역, 천안역, 대천역, 익산역에서 장항선 열차를 타고 군산역
  하차 (거의 1시간 간격으로 운행)
② 군산시내에서 배타는 곳까지
* 연안여객터미널 : 군산역과 군산시외고속터미널에서 7, 85번 시내버스 이용 (2노선 모두 1시
  간 간격으로 운행하며, 군산역에서 7번은 매시 25분, 85번은 매시 40분에 출발)
* 비응항(월명유람선) : 군산역에서 7, 85번 시내버스를 타거나 군산시외터미널에서 7, 8, 85번
  시내버스를 타고 비응항 종점 하차 (91번은 시외터미널 남쪽 팔마광장에서 승차)
③ 선박편
* 비응항 월명유람선(☎ 063-445-2240)에서 선유도행 유람선이 운항한다. 코스는 3시간짜리 B코
  스(2만원)와 6~7시간짜리 C코스(3만원)가 있으며, 유람선 출항시간과 요금, 전화예약은
  ☞ 월명유람선 홈페이지 참조
* 군산연안여객터미널(☎ 063-462-4000)에서 선유도행 여객선이 1일 3~4회 다닌다. 주말과 피서
  철에는 대폭 증회하며, 자세한 출발시간표와 요금 문의는 위의 월명유람선 홈페이지 참조
* 야미도 새만금유람선 선착장(063-464-1919)에서 선유도행 유람선이 1일 3~4회 다닌다. 코스는
  선유도에서 1시간 정도 머무는 B코스와 3~4시간 머무는 C코스가 있다.
  운항시간과 요금, 예약은 ☞ 새만금유람선 홈페이지 참조
④ 배타는 곳까지 승용차 (주차장 있음)
* 서해안고속도로(동군산나들목) / 호남고속도로(전주나들목) → 전주~군산 21번 국도 → 새만
  금북로 → 비응항(월명유람선)
* 서해안고속도로(동군산나들목) / 호남고속도로(전주나들목) → 전주~군산 21번 국도 → 새만
  금북로 → 옥녀교차로 우회전 → 구 해양경찰서 4거리 우회전 → 대왕제지3거리 좌회전 → 연
  안여객선터미널
* 서해안고속도로(동군산나들목) / 호남고속도로(전주나들목) → 전주~군산 21번 국도 → 새만
  금북로 → 신시도입구3거리 좌회전 → 새만금방조제 → 야미도 새만금유람선

* 선유도해수욕장은 7월 초/중순에 개장하여 8월 하순까지 해수욕 손님을 맞는다.
* 선유도와 고군산군도 관련 자세한 정보는 ☞ 군산시청 문화관광 홈페이지 참조 (월명유람선과
  새만금유람선 홈페이지를 참조해도 된다)
* 선유도 소재지 - 전라북도 군산군 옥도면 선유도리 (문의 ☎ 063-454-3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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