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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2.31 깊은 산골에 푹 묻혀있는 고즈넉한 산사, 영동 백화산 반야사 (석천계곡, 반야사 호랑이, 문수전, 망경대)
  2. 2019.10.29 서울 북쪽 끝에 숨겨진 상큼한 숲길,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 (도봉산 능원사, 도봉사, 진주류씨묘역, 무수골)
  3. 2019.09.24 서울의 동북쪽 지붕을 거닐다. 수락산 구석구석 나들이 ~~~ (노원골, 수락산보루, 서울둘레길, 동막골, 도선사)
  4. 2019.05.05 높은 산에 포근히 감싸인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평창동~홍제천~부암동 나들이 (보현산신각, 박종화가옥, 홍지문, 옥천암, 산모퉁이)
  5. 2019.04.01 늦겨울에 즐긴 고즈넉한 산사 나들이, 세종시 운주산 비암사 ~~~ (비암사 도깨비도로)
  6. 2015.06.02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 정릉 봉국사 (맛있는 점심공양)
  7. 2013.06.03 석가탄신일 기념 절 나들이 ~ 늘씬한 숲길과 많은 보물을 간직한 고색의 절집, 정릉 경국사

깊은 산골에 푹 묻혀있는 고즈넉한 산사, 영동 백화산 반야사 (석천계곡, 반야사 호랑이, 문수전, 망경대)

 


' 봄맞이 산사 나들이, 영동 백화산 반야사 '

반야사3층석탑
▲  반야사3층석탑과 배롱나무

▲  영천과 망경대

▲  반야사계곡(석천계곡)

 


 

♠  백화산(白華山)의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고즈넉한 산사,
영동 반야사(般若寺) - 영동군 향토유적 9호

▲  반야사 경내
경내 뒷쪽으로 꼬랑지를 든 호랑이를 닮았다는 돌너덜(반야산 호랑이)이 보인다.


영동 고을의 동부를 맡고 있는 황간(黃澗), 그 황간 북쪽 우매리에서 석천계곡(반야사계곡)을
따라 들어가다보면 그 길의 끝에 반야사가 그림 같은 모습으로 반겨준다.

백두대간의 일원이기도 한 백화산이 베푼 석천계곡이 태극문양으로 산허리를 감아 돌면서 연
꽃 모양의 지형을 이루는 그곳 한복판에 둥지를 닦은 반야사는 백화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고
있다. 절을 둘러싼 주변 경관이 매우 곱고 절의 옆구리를 간지럽히는 계곡은 수량이 풍부하고
청정하기 이를 데 없어 영동(永同) 지역 경승지이자 피서의 성지로 오랜 세월 찬양을 받고 있
다.

경관 하나는 아주 일품인 반야사는 신라 말에 무염(無染, 800~888)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가 황간 지역 어딘가에 있었다는 심묘사(深妙寺)에 주석하고 있었을 때, 현재 절 자리에 있던
연못에 나쁜 악룡(惡龍)이 머물며 갖은 민폐를 부리자 사미승(沙彌僧) 순인(純仁)을 보내 그
들을 쫓아내고 연못을 메워 절을 닦으니 그것이 반야사의 시작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 용(龍)이 진짜로 있을 리는 없을 터이니 아마도 백화산에서 설치던 산적을 교화하
거나 때려잡고 그들의 본거지에 절을 세운 것으로 여겨지며, 비록 무염이 창건했는지는 의문
이나 대웅전에 신라 후기에 조성되었다는 불상이 있어 9~10세기에 창건된 것은 확실한 것 같
다.
무염의 창건설 외에도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원효(元曉)가 세웠다는 설과 의상(義湘)의 10
대 제자 중 하나인 상원(相源)이 세웠다는 설도 덩달아 전하고 있으나 원효와 의상의 창건설
은 이 땅에 많은 절에서 사골이 되도록 우려먹는 흔한 소재이다. 반야사도 예전에는 그들이
창건했다고 우겼으나 요즘은 한 발자국 물러나 그 부분을 생략하고 신라 후기에 크게 활약했
던 무염을 창건주로 내세우고 있다.
절 주변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머무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절의 이름을 반야사라 했으며 산
이름을 지장산에서 백화산으로 바꾸어 문수도량임을 내세웠다.

창건 이후 오랫동안 사적(事績)이 전해오지 않다가 1352년에 중건되었다고 하며, 1464년 신미
(信眉)가 세조(世祖)의 허락을 받아 절을 크게 중창했다. 세조는 법주사(法住寺)를 방문했다
가 신미의 청을 받아 반야사에 들려 새로 지은 대웅전에 참배하고 '반야'란 현판을 내렸다고
하며 그때부터 절 이름이 '반야사'가 되었다고 한다. ('반야'는 문수보살의 지혜를 뜻함)
그 이후 500년 가까이 잠수를 탔다가 6.25전쟁 때 거의 파괴된 것을 1970년대 이후부터 꾸준
히 불사를 벌여나갔고 1993년에 새 대웅전과 요사를 지어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극락전, 산신각, 지장전, 심검당 등 10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경
내에서 다소 떨어진 망경대 벼랑 위에는 이곳의 상징인 문수전이 아슬아슬하게 자리를 닦았다.
절이 들어앉은 특성상 대웅전과 극락전 등 주요 건물들은 서쪽을 바라보고 있고, 문수전은 북
쪽을 향하고 있다, (경내에서 계곡 건너 서쪽에 전답과 관세음보살상이 있음)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이곳의 유일한 국가 지정문화재인 3층석탑을 비롯해 영동군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대웅전 불상, 조선 후기 부도 2기가 있으며, 그 외에 500년 묵은 배롱나무 2그루와 신
중탱이 전하고 있다.
또한 절 뒷쪽 계곡 너머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파쇄석이 모인 돌너덜이 있는데,
마치 꼬랑지를 세운 호랑이 모습이라 절에서는 그를 '반야사 호랑이'로 삼으며 호랑이로 화현
(化現)한 산신(山神)으로 내세우고 있다. 경내에서도 그 돌너덜이 보이며, 그 너덜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고자 이곳에 절을 닦은 모양이다.

반야사는 풍경도 좋고, 볼거리도 넉넉하나 교통편이 영 좋지 못한 것이 큰 흠이라 대중교통으
로 오려면 여간 힘들지가 않다. 허나 그만큼 첩첩한 산속으로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
거나 마음을 싹둑 다듬고 싶을 때 안기면 아주 좋은 곳이다. 게다가 이곳은 템플스테이도 운
영하고 있으니 세상사 잠시 내려놓고 고적한 산사에 묻혀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 소재지 :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우매리 151-1 (백화산로 652 ☎ 043-742-4199, 7722)
* 반야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주차장 남쪽에서 바라본 반야사 경내

문수도량과 산신기도 도량까지 내세우는 이곳에는 재미난 전설이 여럿 전하고 있는데, 그중 2
가지를 우선 꺼내보겠다. (다른 1가지는 영천 부분에서)

① 고려 충숙왕(忠肅王, 재위 1313~1330, 1332~1339) 시절 글재주가 좋은 황도령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황간 관아에서 열린 백일장에 참여했는데, 웃기는 것은 아주 쉬운 한자인 '수(
水)'와 '산(山)' 2자를 몰라서 백일장에서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이에 크게 발끈한 황도령은 바로 반야사로 달려가 그곳에 있던 일우에게 학문을 배웠다. 일우
는 학식이 뛰어난 승려로 그에게 많은 학문을 전해주었는데 언제부터인가 황도령의 얼굴색이
나날이 나빠지고 있어 얼굴을 살펴보니 글쎄 처녀귀신에게 씌인 것이 아닌가? 그냥 방치하다
가는 황도령이 골로 갈 수 있기에 그의 옷을 벗겨 온몸에 금강경(金剛經) 5,149자를 빼곡히
적어넣고 옷을 입혔다.
그날 밤, 황도령을 찾아온 처녀귀신은 도령 몸에 쓰인 금강경을 보고는 크게 발작했다. 금강
경의 위엄에 너무 괴로워한 나머지 황도령의 귀를 물어뜯고 줄행랑을 쳤는데 이는 일우가 금
강경을 쓸 때 귀 부분을 실수로 빼놓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황도령은 귀는 잃었지만 스승 덕
분에 살아날 수 있었고 그 인연으로 출가를 하니 세상 사람들은 그를 무이법사(無耳法師)라
했다. 귀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이다.

② 불교 탄압이 극성이던 조선 성종~연산군(燕山君) 시절, 벽계선사(碧溪禪師)는 그 소나기를
피하고자 머리를 기르고 속인(俗人)으로 가장하여 살았다. 그는 과부를 맞아들여 같이 살았는
데 어디까지나 위장 혼인일 뿐, 3년을 살아도 여전히 남남처럼 살았다. 부부의 재미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에 완전히 뿔이 난 과부는 어느 날 '야~ 나 갈꺼야~~!!'
선사 왈 '왜?'
과부 '이름만 부부지 과부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이래서 살겠냐?'
선사 '그러면 말리지 않겠다. 그래도 3년 동안 밥해주느라 고생했는데 수고비로 이거나 가져
가셔~!'
하면서 은으로 만든 표주박을 주었다.

과부는 표주박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와 동구 밖 샘물가에서 그것으로 물을 떠마시며 팔자 한
탄을 간드러지게 하였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있던 표주박이 갑자기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자 그만 포기하고 3년 동안 천하를 돌아다니며 적당한 재혼처를 물
색했으나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벽계선사를 다시 찾아갔다.
선사는 '내 다시 올 줄 알았다'
그 말에 과부는 '어찌 알았누?'
선사 '그 이유가 궁금함? 그런데 3년 전에 내가 준 표주박은 어따 팔아먹었노?'
과부 '아 그거... 마을 동구 밖 샘터에서 잃어버렸어. 쩝'
선사 '그 자리에 다시 가봐라. 아직 그대로 있을 것이다'
과부가 놀라서 '어째서?'
선사 '내가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 중이 되기를 500번이나 했는데, 처음 중이 되면서 지
금까지 남이 주지 않는 것은 가져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 인덕으로 무엇이든 내것이라 이
름만 지어놓으면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지~~!'

과부는 웃기고 있네~~! 표정을 지으며 그 샘터로 가보니 과연 그 표주박이 3년 전 모습 그대
로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본 과부는 다시는 다른 마음을 품지 않으며 선사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잘살았다고 한다.

▲  반야사 심검당(尋劍堂)
2층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종무소, 공양간의
역할도 하고 있다.

▲  반야사 용머리 연꽃 석조
백화산이 베푼 옥계수로 늘 가득하여
그의 넉넉한 마음을 비춘다.

▲  반야사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大雄殿)
1993년에 지어진 것으로 그 이전에는
극락전이 대웅전 행세를 하였다.

▲  맞배지붕을 지닌 지장전(地藏殿)
지장보살과 시왕 등 명부(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 불단과 붉은 닫집, 그리고 석가3존상
(대웅전 불상 - 영동군 향토유적 12호)


대웅전 불단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普賢菩薩)로 이루어진 조그만 석
가3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들은 경주 옥석(玉石)으로 조성되어 산뜻하게 도금을 입힌 것으
로 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가운데 석가여래상은 검은 머리칼을 드러내고 있고
좌우 보살상은 화려한 보관을 눌러쓰며 석가여래 좌우를 받쳐준다. 그들 뒤로는 검은 바탕으
로 이루어진 석가후불탱이 든든하게 후광이 되어준다.

▲  대웅전 신중탱
대웅전을 지키는 온갖 호법신의 무리가
그려진 것으로 석가후불탱과 비슷한
스타일로 조성되었다.

▲  산신각(山神閣)
2단으로 다져진 석축 위에 높이 들어앉은
산신각은 산신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의 보금자리이다.


▲  반야사3층석탑 - 보물 1371호

극락전 앞에는 하얀 피부의 3층석탑이 소박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지금이야 반야사의 일원
으로 완전히 묻혀있어 이곳의 오랜 유물로 봐도 이상할 것은 없지만 그는 원래 북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석천계곡 탑벌에 쓰러져 있었다. 그러던 것을 1950년에 주지 성학(性學)이 수습
하여 일으킨 것이다. 그 덕분에 반야사에 오래된 존재가 하나 늘었다.

이 탑은 네모난 바닥돌 위에 1층의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3층의 탑신을 얹힌 다음 머리장식
으로 마무리를 한 형태로 밑에서 머리까지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으며, 높이는 335cm이다. 바
닥돌은 모두 6매의 판석(板石)으로 이루어졌으며, 바닥돌 윗면 네 모서리에는 합각선이 돌출
되어 있고, 중심부에는 깊이 3cm 정도의 홈을 파 기단면석이 꼽히도록 하였다.
기단부는 4매의 석재로 이루어졌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隅柱)와 탱주가 모각되었다. 갑석 윗
면은 1매의 판석으로 조성했으며, 중앙에는 깊이 3cm 정도의 홈을 파서 1층 탑신을 꼽도록 조
성했다. 그리고 갑석의 네 모퉁이에도 합각선이 돌출되어 있다.
1층 탑신은 4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를 새겼으며, 남/북쪽 면석은 새
로 끼워 넣었다. 2,3층 탑신은 모두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2층 탑신에 모각된 우주에서는 엔
타시스 수법을 볼 수 있다. 3층 탑신은 현상으로 보아 새로 끼운 것으로 여겨진다.

옥개석(屋蓋石)은 1층에서 3층까지 모두 1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각층 옥개석의 낙수면은 길이
가 짧고 경사가 급해 보이며, 옥개석 받침은 1층 5단, 2/3층은 4단으로 되어 있다. 추녀는 비
교적 두껍게 조성되었는데, 직선화되는 보편적인 수법과는 달리 둥글게 표현되어 전각의 반전
은 예리한 편이다. 탑의 머리부분에는 찰주(刹柱)가 관통된 노반(露盤)과 복발 등의 머리장식
이 남아있다.
이 탑은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 초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
으로 보기도 함) 1층 탑신의 결구 수법은 신라 석탑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기단 면석과
1층 탑신을 꼽도록 하면에 홈을 판 점은 백제계 석탑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제자리를
떠나긴 했지만 탑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고 건강 상태도 좋으며, 반야사의 보물로 묵묵히 살
아가고 있다.

▲  서쪽에서 바라본 3층석탑과 배롱나무
, 극락전

▲  범종을 비롯한 4물의 보금자리
범종각(梵鍾閣)


▲  배롱나무 - 영동군 보호수 13호

극락전과 3층석탑 사이에는 오래된 배롱나무 형제가 꿈틀거리고 있다. 이들은 추정 나이가 약
530년(1994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500년) 정도로 높이는 각각 8m, 7m, 나무 둘
레는 각각 0.8m, 0.6m이다.
경내에서 대웅전 불상 다음으로 늙은 존재(3층석탑은 제외)로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자신이
가지고 댕기던 주장자(柱杖子)를 꽂아 둔 것이 둘로 갈라져 쌍배롱나무로 자랐다는 믿거나 말
거나 전설이 전해온다.
한여름(7~8월)에 왔더라면 배롱나무(백일홍)의 아름다운 붉은 향연을 제대로 누릴수 있을텐데
겨울과 봄의 팽팽한 경계선에 오다 보니 그 아름답다는 나무도 다른 나무와 비슷하게 그저 알
몸만 있다. 사람이나 나무나 걸치는 옷을 빼버리면 다 똑같거늘 왜 그리도 욕심을 부리고 계
급을 나누는지 모르겠다.


▲  배롱나무의 여름 모습 (반야사 홈페이지 참조)
배롱이의 향연은 기껏해야 2달 정도이다. 6~7개월 정도는 푸른 옷을 걸치고 있으나
나머지 5~6개월은 겨울 제국에게 모든 것을 공출당한 채, 알몸으로 살아간다.


▲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 반야사 극락전(極樂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원래는
이곳의 대웅전이었으나 1993년 바로 옆에 새 대웅전이 지어지면서 법당에서
물러나 아미타불의 거처인 극락전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  석천계곡(반야사계곡)과 반야사의 상징, 문수전

▲  석천계곡 (반야사계곡)

이렇게 경내를 둘러보고 '이제 다봤구나~!' 싶어서 발길을 돌리려고 하니 문수전을 알리는 이
정표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발길을 붙잡는다. 문수전이라?? 반야사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나
싶어서 살펴보니 그곳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경내 뒷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기왕 온 것이니 다
음에 안와도 될 정도로 말끔히 둘러봐야 나중에 명부(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
다.

문수전으로 인도하는 산길은 석천계곡을 따라 이어지는데, 계곡 풍경이 반야사 이전보다 더욱
장관이었다. 물은 깊고 청명하며, 바위와 벼랑이 적당히 나타나 여흥거리가 되어준다. 그리고
누런 갈대가 바람에 펄럭이며 나그네의 마음을 간지럽히고, 소나무 등 나무도 삼삼해 이런 곳
이야말도 진정한 신선(神仙)의 세계가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이다.
신선의 세계는 인간계보다 시간이 빛의 속도만큼 빠르다고 한다. 신선의 장기를 구경하는 동
안 몇 대(代)가 흘러갔다는 난가(爛柯)의 전설도 있을 정도이니 괜히 이 계곡에 발을 들였다
가 기백 년 뒤에나 나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 정도였다.


▲  대자연이 빚은 작품, 돌너덜 (반야사 호랑이)

반야사의 명물 중에는 '반야사 호랑이'라 불리는 돌너덜이 있다. 그 모습이 마치 호랑이가 꼬
랑지를 치켜든 모습과 비슷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이들은 순 자연산으로 수 만년
동안 흘러내린 파쇄석이 산자락에 자연스럽게 쌓이고 쌓여 높이 80여m, 길이 300여m에 이르는
돌너덜을 이루게 되었다. 근데 하필이면 호랑이 모습을 이루고 있어 대자연의 기가 막힌 작품
솜씨에 그저 놀라울 따름인데, 반야사는 그를 산신의 화현으로 삼고 있으며, 산신각 산신탱에
그려진 호랑이 모습과도 비슷하다.


▲  문수전으로 이어지는 계곡 숲길

▲  망경대(문수바위) 위에 아슬아슬하게 둥지를 튼 문수전(文殊殿)

문수전으로 이어지는 계곡 숲길은 아주 느긋하다. 허나 그것도 잠시, 착했던 길은 영천을 앞
에 두고 갑자기 180도 흥분하여 아주 각박한 오르막길로 돌변한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 위에
맞배지붕 건물 하나가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들어앉은 건물처럼 장엄하게 보이는데, 그것이
반야사의 상징인 문수전이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벼랑 옆에 닦여진 가파른 길을 올라가
야 되는데, 경내에서도 다소 떨어져 있고, 길도 각박하여 문수전을 건너뛰는 사람도 있다.
허나 이는 갈비탕에서 고기를 빼먹는 거와 같을 정도로 어리석은 일이다. 비록 문수보살에게
관심이 없다고 해도 그 주변 풍경이 가히 일품이니 조금은 힘들더라도 발품을 팔만하다.


▲  망경대 밑에 자리한 석천계곡 영천(靈川)

문수전을 강제로 머리에 이고 있는 망경대(문수바위) 밑 계곡을 영천이라 부른다. 이곳은 세
조와 문수보살에 얽힌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서려 있으니 내용은 이렇다.

세조가 신미의 청을 받아 반야사를 방문하니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홀연히 나타났다. 세조
가 예를 차리자 그는 왕을 영천으로 인도하여 몸을 씻을 것을 권했다. 그리고는
'왕이 불심(佛心)이 갸륵하니 부처의 자비가 따를 것이오'

한 마디 남기고는 사자를 타고 망경대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다가 사라졌다.

왕이 목욕을 마치고 계곡 밖으로 나오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하며, 병을 낫게 해준 문수
보살을 기리고자 절 이름을 반야사로 갈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설화는 가만보면 오대산 상원
사(上院寺)에 서린 세조와 문수동자 전설과 여러모로 비슷하다. 아무래도 거기 설화를 가져와
서 반야사 스타일로 다듬은 듯 싶다.
세조가 과연 여기서 목욕을 했는지는 의문이나 그만큼 왕실의 인연과 지원이 각별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절 부근 경치 좋은 곳에 이런 전설을 갖다 붙인 듯 싶으며, 그 전설로 인해 영천
옆 벼랑을 문수바위 또는 망경대(望京臺)라 불리게 되었다. 여기서 망경대는 서울을 바라본다
는 뜻이니 절을 중창시켜준 세조와 왕실의 은혜를 두고두고 기리겠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  망경대 꼭대기에 자리한 문수전의 위엄

문수전은 세조와 문수보살의 설화가 깃든 망경대 벼랑 위 250m 고지에 북쪽을 바라보며 자리
해 있다. 건물을 짓기에는 다소 척박한 곳이지만 그 현장에 문수보살을 위한 건물을 지어야
문수도량의 뽀대가 나므로 그 어려움을 무릅쓰고 건물을 지어올렸다.
문수전에 오르면 백화산 남쪽 자락과 석천계곡, 호랑이 돌너덜 등이 시원스레 시야에 들어오
나 주변이 칼처럼 솟은 높은 산줄기에 둘러싸여 있어 보이는 범위는 그것이 전부이다.


▲  문수전에 봉안된 문수보살상과 문수동자상

문수전은 북쪽을 향해 문이 나 있다. 그 문을 들어서면 늠름한 모습의 문수보살상이 파란 피
부의 목각사자상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려놓고 푸근한 표정으로 중생들을 맞는다. 그 좌우에
는 붉은 옷을 걸친 문수동자와 녹색 옷을 입은 문수동자가 두 손을 모아 합장인(合掌印)을 선
보이고 있어 그야말로 '문수'의 세상이다.
문수보살과 동자상은 근래 지어진 것들이라 고색의 때는 여물지도 못했지만 목각사자상은 조
선 후기 것이라고 하며. 그 좌우에 중생들의 시주를 받아 봉안한 조그만 금동 원불(願佛)들이
빼곡히 자리를 채워 어두운 건물 내부를 환하게 밝혀준다.


▲  문수전에서 바라본 반야사 호랑이(돌너덜)

▲  문수전에서 바라본 석천계곡 북쪽과 백화산 산줄기
다음에 오면 저 계곡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나의 존재를 잠시 지우고 싶다.

▲  백화산의 첩첩한 산줄기 (백화산 정상 방면)

▲  망경대 바로 밑에 펼쳐진 영천
영천 주변에 흙과 자갈이 넓게 깔려 있어 여름 피서 장소로 아주 제격이다.
혹시 아는가 여기서 물놀이를 하면 세조 임금처럼 병이 싹 나을지도~~?

▲  문수전에서 경내로 내려가는 산길

반야사 경내에서 문수전으로 인도하는 길은 2개가 있다. 우리가 이용한 계곡 길을 거쳐서 가
는 것과 경내 동쪽 산길로 오르는 길이 그것인데, 보통 계곡 길로 올라가서 문수전을 찍고 경
내 동쪽 산길로 내려오며 절에서도 그렇게 가기를 적극 권하고 있다. 이유는 계곡 길에서 망
경대 벼랑으로 오르는 길이 좁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도 상관은 없음)
계곡 길은 완만하게 가다가 망경대에서 아주 화끈하게 흥분을 하지만, 동쪽 산길은 서서히 오
르는 형태로 덜 가파르다. 그 길을 내려오면 잠시 떨어졌던 경내가 이내 모습을 드러내며, 주
차장 쪽으로 떨어진다.


▲  동쪽 산길로 내려가면서 바라본 반야사 경내

▲  반야사 부도(浮屠) - 영동군 향토유적 10호, 11호

주차장 남쪽 산자락에 고색이 짙은 부도 2기가 나란히 자리해 있다. 이들은 주차장 부근에 있
어 찾기는 쉽지만 구석진 곳에 있어 자칫 놓치기가 쉬우니 꼭 등잔 밑을 살펴보기 바란다.

반야사 부도는 이 땅에 흔한 석종형(石鐘形) 부도로 왼쪽 1호 부도(향토유적 10호)는 검은 주
근깨(이끼)가 가득 핀 네모난 바닥돌 위에 대추알처럼 생긴 탑신을 얹히고 네모난 지붕돌로
마무리를 했다. 그리고 오른쪽 2호 부도(향토유적 11호)는 네모난 바닥돌 위에 8각의 대석(臺
石)과 석종 모양의 탑신을 올리고 그 위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지붕돌과 정체가 아리송한 기둥
모양의 머리장식을 올렸다. 이들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누구의 승탑(僧塔)인지는 귀신
도 모른다.

▲  왼쪽 1호 부도

▲  머리장식이 특이한 오른쪽 2호 부도

▲  주차장에서 부도로 인도하는 돌계단

▲  주차장에서 바라본 석천계곡


▲  봄을 기다리는 석천계곡
백화산 등산을 하려면 저 다리를 건너면 된다. (관세음보살상도 저 다리를 건너면 됨)


부도를 끝으로 그림 같은 절, 반야사 관람은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기분 같아서는 계곡 다
리를 건너서 관세음보살상까지도 가보고 싶고, 계곡길을 따라 일주문(주차장에서 우매리로 나
가면 중간에 있음)까지 걸어가며 계곡을 느끼고 싶지만 다음 답사지(경북 어느 지역)로 빨리
넘어가자는 일행의 독촉에 그 좋은 후식거리를 모두 포기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아쉽긴 했지
만 반야사에 깃든 보물과 문수전, 영천과 망경대 등 볼만한 것은 거의 다 보았으니 별로 후회
는 없다.

시간은 어느덧 16시. 해가 많이 길어지긴 했지만 조금씩 어둠의 기운이 피어나 세상을 훔치려
들고 우리는 고적한 산사에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사라졌다.
우리는 반야사란 절을 기억하겠지만 반야사는 잠깐 스치고 지나간 나를 기억이나 할련지 모르
겠다. 다음에 다시 인연이 된다면 (여름에 인연을 잡고 싶음) 계곡도 말끔히 둘러보고 세조가
몸을 씻었다는 영천에도 풍덩해보고 싶다.
이렇게 하여 반야사 나들이는 막을 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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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북쪽 끝에 숨겨진 상큼한 숲길,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 (도봉산 능원사, 도봉사, 진주류씨묘역, 무수골)

 


' 도봉산 봄나들이 '

▲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윗무수골)

▲  능원사 용화전

▲  도봉사

 


 

도봉산(道峯山, 739.5m)이 뻔히 바라보이는 그의 포근한 그늘, 도봉구 도봉동(道峰洞)에서
15년이 넘게 서식하고 있지만 그에게 안긴 횟수는 의외로 매우 적다. 그가 집에서 멀면 모
르지만 버젓히 그의 밑에 살고 있음에도 이렇다. 그렇다고 내가 산을 싫어하거나 돌아다니
는 것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며, 도봉산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상하
게도 손과 발이 잘 가질 않았다. (도봉산 밑도리까지 포함하여 1년에 2~3번, 많으면 4~5번
정도 찾는 편임)
그래도 우리 동네의 듬직한 뒷동산이자 꿀단지 같은 존재인데, 가끔은 가줘야 도봉산도 서
운해 하지 않겠지? 하여 거의 1년 여 만에 그의 품을 찾았다.

해가 하늘 높이 걸려있던 오후 3시에 집을 나서 서울시내버스 142번(도봉산↔방배동)을 타
고 도봉산 종점으로 이동했다. 거리는 불과 정류장 4개. 때가 때인지라 내려오는 산꾼들의
행렬이 마치 성난 파도와 같이 밀려온다. 거센 파도에서 아슬아슬하게 요트를 타듯 그들을
뚫고 북한산둘레길 안내도가 있는 통일교에 이른다.
여기서 직진을 하면 도봉서원(道峰書院), 천축사(天竺寺), 도봉산 정상, 포대능선, 만월암
(滿月庵) 방면으로 이어지고, 왼쪽 통일교를 건너면 능원사와 도봉사로 이어지는데 북한산
둘레길은 여기서 '도봉옛길'이란 부속 간판을 달고 남북으로 힘차게 흘러간다.
마음 같아서는 정상까지 가고 싶으나 늘 시간을 구실로 정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능원사
, 도봉사 방면 도봉옛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 길을 5분 정도 오르면 황금색으로 치장한 능
원사가 마중을 한다.


▲  능원사, 도봉사로 인도하는 숲길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구간)


 

♠  황금사원을 꿈꾸는 현대 사찰, 도봉산 능원사(能園寺)

도봉사 동쪽에 둥지를 튼 능원사는 20세기 중반 이후에 창건된(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음) 따끈
따끈한 산사(山寺)로 고색의 내음은 아직 여물지도 못했다. 나는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현대 사찰에는 무뚝뚝한 편이라 성북동 길상사(吉祥寺, ☞ 관련글 보러가기)와 문화유산을 간
직한 절을 제외하면 딱히 눈길도 주지 않지만 동양 최대의 황금 사원으로 유명한 서울 구산동
수국사(守國寺, ☞ 관련글 보러가기)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 정도로 황금 사원으로 꾸몄다는
점이 꽤나 끌렸다. 솔직히 인간 가운데 황금을 싫어하는 사람이 고려의 마지막 보루(堡壘)인
최영(崔榮)장군 등을 빼고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도봉산 능원사는 여주 능원사의 말사(末寺)로 그들 모두 미륵불(彌勒佛)을 내세운 미륵도량이
다. 근래 지어진 절이라 딱히 볼거리도, 내세울 것도 없지만 불교와 사람들이 매우 좋아하는
황금을 테마로 황금색 단청(丹靑)을 모든 건물에 입혀 찬란한 황금사원임을 속세에 진하게 어
필하고 있다. 절 앞을 지나던 산꾼들도 황금색 건물에 매료되어 자연스레 경내를 기웃거리니
능원사의 마켓팅은 크게 성공한 셈이다.

황금 단청은 중원대륙에서 문을 열거나 대륙을 장악했던 나라의 궁궐에서 즐겨 애용했던 것으
로 그들은 하나 같이 황제(皇帝)를 칭했는데, 황색이 바로 황제를 상징한다. 하여 황금색 단
청과 지붕을 선호했다. (그게 중원대륙의 법칙이기도 했음) 반면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한 배
달 민족은 황금색 단청과 기와를 즐겨하지 않고 다양한 색채를 입힌 이른바 컬러풀(colorful)
한 단청을 선호했다.
근래 들어 수국사와 여수 향일암(向日庵) 원통보전(圓通寶殿), 그리고 이곳 능원사에서 황금
색 단청을 선보이며 단청의 새로운 역사를 열었다. 이렇게 부처를 향한 절대적인 존경심이 금
빛찬란한 단청미를 탄생시켰고, 현대 사찰에 무정한 나를 황금을 미끼 삼아 이곳으로 낚은 것
이다.

능원사는 경내로 인도하는 일주문부터 황금색 단청을 입혀놓아 벌써부터 황금 사원의 냄새를
진동시키는데, 그 문을 들어서면 곧게 깔린 짧은 길이 펼쳐지고 바로 법음각과 용화전, 철웅
당 등이 모습을 비춘다. 경내는 법당(法堂)인 용화전을 비롯해 법음각. 철웅당(鐵雄堂) 등 5~
6동의 건물이 전부인 조촐한 규모이나 건물에 죄다 황금색 떡칠을 하여 마치 조그만 황궁(皇
宮)
같다.

▲  능원사 일주문(一柱門)

▲  일주문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길

▲  범종을 머금은 법음각(法音閣)
그 흔한 범종각 대신 부처의 소리를 뜻하는
법음각을 칭했다. 건물의 모습도 4각형이
아닌 6각형을 취했다.

▲  용화전 뒷쪽에 숨겨진 샘터
능원사에는 2곳의 샘터가 있어 중생들의
목마름을 아낌없이 해소해준다.


▲  능원사 용화전(龍華殿)
지붕 용마루 양쪽 끝에는 무려 용을 잡아먹는다는 금시조(金翅鳥)를 배치하여
화마 등 악귀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다.


능원사의 중심 건물인 용화전은 용화세계의 주인공이자 막연히 56.7억년 후에 나타난다는 미
륵불의 거처이다. 이곳이 미륵도량이다보니 자연히 용화전이 법당의 역할을 도맡게 되었는데,
정면 5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단청과 커다란 지붕을 받치는 공포(空包)는
거의 황금색 일색이라 사치와 장엄함의 깊이를 더욱 짙게 해준다.
건물 내부에는 미륵불을 중심으로 석가세존불, 약사여래불, 관세음보살이 봉안되어 있으며,
다들 자애로운 표정으로 중생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들 뒷쪽에는 헤아림이 무색할 정도로 조
그만 금동불(金銅佛)이 빼곡히 자리를 채우니 건물 전체가 그야말로 금색 투성이다.


▲  용화전 불단에 봉안된 미륵불(가장 큰 불상)과 석가여래(제일 오른쪽),
약사불(미륵불 왼쪽), 관세음보살<가장 왼쪽에 보관(寶冠)을 쓴 보살상>

▲  황금색으로 치장된 용화전 현판과 단청, 공포, 수막새의 위엄

공포와 단청이 죄다 황금색으로 도배된줄 알았더만 가까이서 보니 붉은색, 녹색, 파란색 계열
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어 단청의 고유 맛은 그런데로 살렸다. 용화전 가운데 칸 좌우 기둥
윗쪽에는 봉황을 배치하여 지붕 용마루에 배치된 금시조와 함께 만약에 모를 화마(火魔)의 공
습에 대비한다. 이곳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도 황금색에 눈이 먼 나머지 불지르기 아깝다
고 판단하여 그냥 돌아서지는 않을까?


▲  용화전의 경쾌한 뒷모습

▲  용화전 뜨락에 세워진 하얀 피부의 5층석탑
근래에 지어진 탑으로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의 매끈함을 자랑한다.

▲  용화전 주차장 - 숲 너머로 수락산(水落山, 638m)이 바라보인다.

▲  능원사의 또다른 샘터

용화전 밑에는 석조를 갖춘 샘터가 놓여져 있다. 앙련(仰蓮)이 새겨진 반원 모양의 석조에는
도봉산이 베푼 물이 호수를 이루고, 그 옆에는 용과 구름무늬 등이 새겨진 네모난 석조가 있
는데, 동그란 여의주(如意珠)를 단단히 물고 있는 용머리 조각이 인상적이다.
용이 되려면 여의주가 있어야 되고 그래야 승천이 가능하다고 들었는데, 석조에 새겨진 무늬
를 보면 용의 손에 여의주로 보이는 동그란 존재가 눈에 띄어 마치 여의주 획득 기념으로 하
늘로 요란하게 비상하는 용의 모습을 담은 듯 하다.

* 능원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502 (도봉산길 87 ☎ 02-954-6060)


▲  여의주를 문 용머리

천하에 무려 300곳이 넘는 절을 돌아다니며 많은 샘터를 보았고 샘터에 달린 용머리, 거북이
조각도 무수히 보았지만 이곳처럼 여의주까지 문 용머리는 처음 본다. 아마도 능원사의 원대
한 꿈을 저 여의주를 문 용머리로 간략하게 표현한 듯 싶은데, 너무 겉모습과 돈에만 연연하
지 말고 부처와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어디선가 숨어서 직무유기를 일삼으나 마음만큼은 속
세 걱정에 잠 못이루는 미륵불의 마음처럼 철저하게 속세를 위하는 공간이 되기를 주문해본다.


▲  능원사에서 도봉사로 올라가는 숲길 (도봉옛길)


 

♠  고려 초기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도봉산의 오래된 고찰 ~
도봉사(道峰寺)

능원사를 둘러보고 도봉옛길을 따라 서쪽으로 2~3분 가면 도봉산의 이름을 그대로 딴 도봉사
가 슬그머니 모습을 비춘다.
도봉산 동남쪽 자락에 자리한 도봉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고려 초인 968년에 혜거국사
(惠居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971년 혜거가 광종(光宗)의 초청으로 궁궐 원화전(元和殿)
에서 대장경(大藏經)을 강의하자 감동을 먹은 광종은 칙령(勅令)을 내려
'국내 사원 중에 오직 3곳만은 머물러 두어 움직이지 말 것이며, 문하의 제자들이 주지를 상
속하여 대대로 단절되지 않도록 이를 규정하라'
하였다.
이때 고달원(高達院, 여주 고달사)과 희양원(曦陽院, 문경 봉암사), 도봉원(道峰院)을 특별선
원으로 삼았는데, 그 도봉원이 바로 도봉사로 여겨진다.

1010년 요(遼)나라(거란) 성종이 강조(康兆)의 난과 목종(穆宗)의 폐위를 이유로 40만의 대군
을 휘몰아 고려를 침공했다. 당시 고려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강조는 직접 30만 군사를 이끌
고 검차(劍車)와 잘 훈련된 군사를 바탕으로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만 방심하는 통에
크게 패하고 만다. 강조는 포로로 잡혀 처단되고 거란군은 그 기세로 폭풍 질주하자 현종(顯
宗, 재위 1009~1031)은 눈물을 머금고 피난길에 올랐다.

현종은 채충순(蔡忠順, ?~1036)의 호위를 받으며 임진강을 건너 창화현(昌化縣, 의정부)에 이
르렀는데, 야밤에 적의 습격을 받자 왕을 시종하던 이들은 뿔뿔히 도망치고 채충순과 지채문(
智蔡文, ?~1026) 등이 적을 격퇴하여 왕을 지켰다.
지채문이 왕의 말고삐를 잡고 지름길로 도봉사에 들어가 여기서 잠시 국정을 살폈으며, 거란
군이 계속 추격하자 한강을 건너 멀리 나주(羅州)까지 내려가게 된다. 이렇게 도봉사에서 잠
시 머문 인연으로 현종은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6천 권 상당수를 그곳에서 제작하게 했다.
또한 고려 중기 때 정각국사 지겸(靜覺國師 志謙, 1145~1229)은 1170년 승과(僧科)의 선선(禪
選)에 급제했는데, 그의 이름은 전학돈(田學敦)이다. 바로 그해 삼각산(북한산)을 찾아 도봉
사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는데, 꿈에서 산신(山神)이 나타나
'화상(和尙)의 이름은 지겸(志謙)인데 왜 지금의 이름을 쓰는가?'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쿨
하게 지겸으로 이름을 갈았다.

2012년 서울문화유산연구원은 도봉사 바로 북쪽 산너머에 있는 도봉서원(道峰書院)을 복원하
고자 기존 건물을 부시고 터를 정비하면서 5개월 정도 발굴조사를 벌였는데, 뜻밖에도 옛 영
국사(寧國寺) 시절의 고려 때 유물 77점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2014년 8월 21일 국립고궁
박물관 강당에서 공개되었는데 그중 '도봉사'라 쓰인 청동제기가 있어 도봉사에서 빌려오거나
(또는 가져오거나) 또는 영국사의 옛 이름이 도봉사인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로 영국사는 도
봉서원에 있던 도봉산의 대표 사찰로 1573년 유림들이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서원을 깔았다.

여기까지 보면 도봉사는 고려 때 꽤나 잘나갔던 절임을 알 수 있다. 허나 13세기 이후 근대까
지 적당한 발자국을 남기지 못했다. 그냥 단순히 전쟁과 화재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다고 나올
뿐이다. 13
세기 이후 이렇다할 내력이 없는 것을 보면 13세기 중반 몽골(원)의 지긋지긋한 침
공에 때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현재 도봉사는 장대한 내력의 걸맞지 않게 고색의 내음이 전
혀 없고, 오래된 유물도 기껏해야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치성광여래3존도가 고작이다. 하여
고려 때 도봉사가 이곳이 아니라는 의견도 적지 않으며, 도봉서원에 있던 영국사가 도봉사란
의견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특히 도봉서원터에서 발견된 도봉사라 쓰인 청동제기는 그런 의
견에 크게 부채질을 한다.

한참 동안 역사 속으로 사라진 도봉사는 19세기 후반에 벽암(碧巖)이 현 자리에 절을 세우고
도봉사를 칭하면서 그 이름이 다시 살아났다.
한때 산사음악회 등 다양한 행사를 열어 절의 명성을 아낌없이 드날렸으나 종파 간의 갈등과
주지승의 재정 낭비로 2006년에 절 전체가 경매에 나오는 불상사까지 발생했다. 절이 북한산
국립공원 내부에 있어 경매 수요가 없다가 다행히 적당한 임자를 만나 조금씩 불사를 벌여 지
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2층짜리 대웅전을 비롯해 극락정사, 산신각, 선방 등 약 7~8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
장문화유산과 오래된 유물은 19세기 후반에 그려진 치성광여래삼존도(熾盛光如來三尊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9호
, 관람이 거의 어려움)가 고작이다. 그리고 예전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
재 151호
지정된 철불좌상(고려 초기 불상)도 가지고 있었으나 2006년 절 경매 이후 한국불
교미술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애당초 도봉사와 관련이 없는 존재로 왜정 말기에 왜
인(倭人)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해방 이후 종로구 청운동(淸雲洞)에 있던 자명사가 가지고 있
다가 자명사가 철거되자 도봉사로 흘러들어온 것이다.
그밖에 부처의 사리를 담은 뿌리탑과 빈자일등상(貧者一燈像), 심우도 등의 소소한 볼거리가
있고, 절 앞에는 비록 짧지만 메타세콰이어 숲길이 닦여져 있다.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이 절
앞을 지나가고, 경내가 숲에 포근히 감싸인 푸른 지대로 도심이 지척임에도 공기도 청정하다.

도봉산 그늘에 산지 15년이 넘었고, 서울에 흩어진 오래된 절 상당수에 발도장을 찍었지만 도
봉사는 이번이 첫 인연이다. 2005년 석가탄신일에 인연을 지으려고 했지만 무리한 사찰 순례
일정으로 찾지 못하고 이제서야 격하게 인연을 짓는다.


▲  활짝 열린 도봉사 정문

도봉사는 그 흔한 기와집 일주문(一柱門)이 없다. 대신 절과 산길의 경계에 여닫이식 철제 정
문을 두어 일주문의 역할을 담당한다.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는 문이 일주문을 흉내내며 활
짝 열려있지만 달님의 세상이 되면 미련 없이 문을 꽁꽁 걸어잠궈 열린 마음의 일주문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정문 앞 우측에는 금동을 씌운 지장보살상이 육환장(六環杖)을 쥐어들며 중생을 맞이하고 정
문 좌측 담장 벽에는 심우도(尋牛圖)가 그려져 있다.


▲  정문 옆 담장에 그려진 심우도
심우도는 방황하는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고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야생 소를 길들이는 것에 비유하여 10단계로 표현한 그림이다. 10개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어 십우도(十牛圖)라 불리기도 하며 보통
법당 바깥 벽에 많이 그려둔다.

▲  정문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연등길

정문을 들어서면 뿌리탑까지 곧게 오르막 길이 펼쳐져 있다. 길 좌우로 요사(寮舍), 선방(禪
房) 등으로 쓰이는 건물들이 뿌리를 내렸는데, 그 길의 끝에 이르면 뿌리탑과 대웅전이 모습
을 드러낸다.

▲  계단 옆 경사면에 꽃으로 다듬은
커다란 절 마크

▲  경내 구석에 옹기종기 모인 3층석탑과
여러 공덕비들


▲  도봉사의 명물, 뿌리탑

대웅전 앞에는 불교의 뿌리라 할 수 있는 부처의 진신사리 3과를 머금은 뿌리탑이 장대한 모
습으로 자리해 있다.
예전에는 진신사리를 봉안한 절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1990년대 이후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하
여 이제는 너무 흔해졌다. 서울만 하더라도 도봉사와 삼천사(三千寺), 승가사(僧伽寺), 조계
사(曹溪寺) 등이 사리를 봉안하고 있다. 부처의 사리가 수만 과가 넘는다고 하더니만 아직도
나눠줄 수량이 많은 모양이다. (상당수 인도와 동남아에서 가져온 것임)

1982년 3월 한국외대 부총장 최창성 교수가 태국(타이) 국립사원 홧벤짜마버핏의 종정(宗正)
프라풋타부이윙을 초빙해 원각회(圓覺會)에서 법회를 연 적이 있었다. 이 인연으로 태국에서
진신사리 3과를 얻게 되었고, 부총장은 도봉사에 이를 기증했던 것이다.

탑의 기단은 특이하게 계란처럼 동그란 모습인데, 이는 공(空)을 뜻한다고 한다. 그 위에 5층
의 몸돌을 세웠으며, 1층 몸돌은 유난히 두텁다. 그 안에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고, 동쪽에 관
세음보살, 남쪽에 석가불, 서쪽에 아미타불, 북쪽에 지장보살상을 새기고 그 주변에 16나한상
을 둘렀다. 탑 주위로 12지신을 새긴 난간을 둘렀고, 탑 위에는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를
두었다.

탑의 전체적인 모습은 이 땅에 흔한 탑이 아닌 특이한 모습의 이형탑(異形塔)으로 탑 밑에는
석굴암(石窟庵) 본존불(本尊佛)을 본따서 만든 석가불이 당당한 체격으로 앉아있으며, 그 앞
에는 석등 2기가 서 있다. 그들 좌우로 뿌리탑과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늘어뜨렸는데,
이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뿌리탑의 장엄함을 마음껏 드러낸다.


▲  도봉사 대웅전(大雄殿)

뿌리탑 뒷쪽에 자리한 대웅전은 도봉사의 법당으로 이 땅에 흔치 않은 2층짜리 목조 불전(佛
殿)이다. 근래에 지어진 건물로 겉모습은 2층이지만 속은 1층이며, 불단에는 관세음보살과 지
장보살, 석가불로 이루어진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불 자리에는 원래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철불좌상이 앉아있었으나 그가 절을 떠나자 새로 금동석가불을 만들어 본존불의 자리
를 채웠다.

▲  우측에서 바라본 대웅전

▲  좌측에서 바라본 대웅전과 6층석탑


▲  대웅전 석가3존불

석가불 좌우에는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각자의 상징물인 육환장과 꽃을 쥐어들며 자애로운
표정으로 서 있고, 그들 사이에 석가불이 연꽃대좌(臺座)에 앉아 중생을 굽어본다. 그들 뒤에
는 그 흔한 후불탱 대신 바퀴 모양의 금동 전륜(轉輪)이 두광(頭光)처럼 떠있다.

▲  대웅전 지장탱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대웅전 내부 좌우 벽에는 지장탱과 신중도, 석가불도 등의 탱화 4점이 걸려있다. 이중 지장탱
과 신중도는 빛바랜 때가 좀 낀 것으로 보아 20세기 초~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나머
지 탱화들은 20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고색의 기운은 아직 여물지 않았다.


▲  대웅전 양쪽에 배치된 가릉빈가 운판(雲版)과 6층석탑

운판은 범종, 법고, 목어와 더불어 불교 의식에 쓰이는 4물(四物)의 일원으로 보통 범종과 같
은 방을 쓰기 마련이다. 허나 도봉사는 절의 필수품인 범종(梵鐘)이 없어서 운판을 범종 대신
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대웅전 좌우에 일주문 축소판 모양의 건물을 세우고 커다란 운판을 북
처럼 걸어두어 아침 3시 새벽예불과 오후 6시에 도봉산에 은은하게 운판 소리를 울린다. 운판
피부에는 불교의 새인 가릉빈가<迦陵頻伽, 극락조(極樂鳥)>를 새겨 조촐하게 조형미를 고려했
다.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극락정사
(極樂精舍, 극락전)

▲  극락정사의 주인인 금동아미타3존불과
아미타후불탱

         ◀  빈자일등상(貧者一燈像)
대웅전 우측에는 빈자일등상이라 불리는 생소
한 이름의 석물이 자리해 있다. 처음에는 보이
는 모습 그대로 코끼리 등에 용과 연꽃무늬 등
이 새겨진 대좌를 얹히고 그 위에 선 관세음보
살 누님 상이라 생각했는데, 집에 와서 확인해
보니 '가난한 자의 등불 하나'를 뜻하는 빈자
일등상이었다.
빈자일등상은 현우경(賢愚經)의 빈녀난타품(貧
女難陀品)에서 비롯된 것으로 다음의 사연이
깃들여져 있다.
인도 사위국(舍衛國)에 난타(難陀)라는 가난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주로 구걸로 삶을 연명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나라에 석가모니가
찾아왔다. 인도의 대중스타가 된 그의 방문 소
식에 나라 사람들은 앞다투어 몰려가 공양과
등불을 올리며 그를 환영했는데, 난타도 그를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궁색한 형편이
라 그에게 줄 선물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몇푼이라도 벌기 위해 거리로 나가 구걸을 했으나 겨우 1푼 정도의 돈을 마련하
는데 그쳤다. 그 돈을 들고 기름 장수를 찾아가 기름을 청했으나 당시 1푼으로는 어림도 없었
다. 기름 장사도 코웃음을 치며 거절했던 것이다.
그러자 난타가 눈물로 단장의 심정으로 호소하니 기름 장수도 이내 태도를 바꿔 돈하고 상관
없이 많은 양의 기름을 그녀에게 내주었다. 이에 단단히 감동을 먹은 난타는 절을 100번 이상
올리며 감사의 뜻을 표하고 등불을 들고 석가모니를 찾아가 다른 사람들이 갖다 놓은 등불들
사이에 정성스럽게 놓았다. 마치 그가 보아주기를 바라듯이..
그런데 다음 날 이상한 일이 생겼다. 등불의 밥줄인 기름이 말라 감에 따라 하룻밤 사이에 등
불이 죄다 꺼졌으나 이상하게도 난타의 등불만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등불
은 더욱 밝고 힘차게 타오르는 것이다. 그 등불을 본 석가모니는 난타의 사연을 전해 듣게 되
었고 결국 그를 여자 승려인 비구니(比丘尼)로 받아들여 제자로 삼았다.

이것이 바로 빈자일등의 사연이다. 즉 물질과 풍요로움보다는 빈약하나 정성과 정신이 더 소
중하다는 의미가 되겠다. 돈님을 숭배하고 사는 오늘날 인간들에게 제대로 귀감이 되는 내용
이지만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것이 인간인지라 빈자일등은 여전
히 외면을 받고 있고, 부자1등만 찬양을 받는 것이 현재의 세태이다. (종교도 예외는 아님)
코끼리는 부처의 법을 상징하며, 인도에서 많이 살고 있는 동물이다. 또한 그 위에 있는 여인
은 관세음보살 누님이 아닌 바로 빈자일등의 주인공, 난타이다. 도봉사에서 빈자일등상을 세
운 것도 그 교훈을 닮겠다는 것인데, 지나치게 겉모습과 돈에만 치중하지 말고 비록 소박하더
라도 중생을 위하는 아름다운 공간이 되기를 염원해본다.


▲  가건물로 이루어진 산신각(山神閣)

대웅전 우측 높은 곳에는 가건물로 이루어진 허름한 산신각이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
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산신각은 그 이름 그대로 산신을 봉안하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산신
과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같은 자리에 봉안했다. 산신각은 절에 따라 독성 외에 칠성(七聖,
치성광여래)까지 봉안해 삼성각(三聖閣)의 역할을 하기도 하며, 도봉사의 유일한 지정문화재
인 치성광여래3존도가 여기에 있나 싶어 기웃거려 보았으나 값비싼 존재라 이곳에는 없었다.
하긴 도봉사에서 가장 비싼 몸인데, 이런 가건물에 봉안할 리는 없겠지.


▲  산신각 산신과 독성

호랑이 등을 의자 삼아 앉아있는 산신, 그 곁에는 하얀 머리의 독성이 나란히 앉아 마치 경로
당 분위기를 자아낸다. 비록 그들이 앉은 방석은 다르지만 이렇게 산신과 독성이 같은 자리에
봉안된 것을 여기서 처음 본다. 그들 뒤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 소나무, 산이 그려진 산신
탱이 걸려있다
.

* 도봉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494-2 (도봉산길 89, ☎ 02-954-7743)


 

♠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  도봉사 앞에 펼쳐진 메타세콰이어 숲길

능원사와 도봉사를 차례대로 둘러보고 그들 앞
을 지나는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을 타고 무수
골로 넘어갔다.
도봉옛길은 다락원에서 광륜사, 도봉동문(道峰
洞門) 바위글씨, 능원사, 도봉사, 진주류씨묘
역, 윗무수골을 거쳐 무수골 세일교로 이어지
는 3.1km의 산길로 거의 느긋한 수준이며, 통
행이 좀 어려운 곳에는 나무데크길 닦아 통행
의 편의성을 높였다.
게다가 도봉사와 광륜사 등의 오래된 절과 도
봉동문 바위글씨, 진주류씨묘역, 광륜사 느티
나무 등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볼거리도 산재
해 있어 역사의 향기도 진하다.
옛날 서울에서 도봉산과 도봉서원으로 가던 산
길이라 도봉옛길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다락원에서 '다락원길'로 간판을 바꾸어 북쪽
으로 흘러가고, 무수골에서는 '방학동길'로 간
판을 갈고 남쪽으로 흘러간다.

도봉사 앞에는 비록 짧지만 늘씬하게 솟은 메타세콰이어가 조촐하게 숲길을 이루며 하늘과 이
른 무더위를 긴장시킨다. 메타세콰이어는 은행나무와 더불어 천하에서 매우 오래된 화석나무
로 2차 세계대전 시절에 중원대륙에서 발견되었다.
이 나무에 단단히 매료된 아메리카와 유럽 양이(洋夷)들은 그 나무를 가져가 그들 나라에 심
었고, 이렇게 서양식 이름표를 달며 천하에 보급되었는데, 우리나라에는 1950년대에 미국산
나무가 들어와 뿌리를 내렸다.

메타세콰이어 하면 다들 전남 담양(潭陽)에 있는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을 떠올릴 것이다. 그
곳은 이제 담양을 넘어 천하의 메타세콰이어 성지(聖地)로 크게 추앙받고 있는데, 시작은 단
순히 도로 가로수였으나 점차 관광지로 몸값이 높아지면서 이제는 담양 꿀단지로 단단히 자리
를 잡았다.
도봉사 메타세콰이어 숲길은 조성된지 얼마 안된 것으로 나이는 비록 적지만 훤칠한 키를 자
랑하며, 늘씬하게 솟은 모습이 시원스럽기 그지 없다. 참고로 서울에서 메타세콰이어 숲길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이곳 외에 서남물재생센터공원과 용산가족공원, 안산자락길, 하늘공원 등
이 있다.


▲  도봉옛길 도봉사 서쪽 관문

▲  무덤을 잃은 채, 약간 기울어진 문인석(文人石)

도봉옛길을 굳이 2개로 나눈다면 다락원~도봉사 구간과 도봉사~무수골의 남쪽 구간으로 구분
할 수 있다. 도봉사~무수골 구간은 다락원~도봉사 구간보다 완만한 산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간에 조선 전기에 조성된 진주류씨묘역이 자리해 있다. 도봉산 자락이 명당(明堂) 자리로
이름이 높았고, 서울과도 가까워 왕족과 사대부(士大夫)의 무덤 자리로 인기가 높았다. 하여
도봉산 자락인 방학동(放鶴洞)과 도봉동에 조선시대 상류층의 무덤이 즐비하다.
그중 도봉옛길 남쪽에 자리한 무수골에 전주이씨 영해군파(寧海君派)묘역(☞ 관련글 보기)과
과 호안공 이등(胡安公 李登)과 의령옹주(義寧翁主)묘역, 함열남궁씨묘역, 도봉옛길에 자리한
진주류씨묘역 등은 후손들의 지극정성으로 잘남아있지만 관리 소홀로 인해 자연의 일부로 녹
아든 묘도 적지 않다.
도봉사에서 도봉옛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보면 문인석 1기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무덤을 잃
고 홀로 남아있다. 그는 고된 세월에 매우 지쳤는지 옆으로 좀 기운 상태로 이를 안스럽게 본
어떤 사람이 나뭇가지를 세워 문인석의 등을 받쳐들게 했다.
허나 문인석이 아무리 우울한 처지라고 해도 몸을 지탱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렇지만 무
덤을 잃고 버려진 자신에게 그런 배려를 한 점에서 문인석도 적지 않게 고마움을 느꼈을 것이
다. 문인석이 지켰을 무덤은 그 주변을 파보면 아마 나올 것이다.


▲  무덤이 졸지에 조그만 언덕이 되버린 현장

문인석 부근에는 버려진 무덤이 하나 있다. 무덤 밑에 석축까지 있는 것을 보면 지체 높은 양
반가의 무덤이 분명해 보이는데, 무덤이 버려지면서 봉분(封墳)에는 공자(孔子) 무덤처럼 무
려 나무까지 자라났다. 앞서 문인석이 이 무덤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나 문인석이 입을 열지
않으니 낸들 알 도리가 없다.


▲  도봉옛길 고갯길 (진주류씨묘역 북쪽)

▲  도봉옛길 (진주류씨묘역 부근)

▲  진주류씨묘역 류양 신도비(柳壤 神道碑)

도봉옛길 남쪽 구간 중간에는 진주류씨묘역이 자리해 있다. 산길 좌우에 자리해 있어 만나기
도 매우 쉬운데 산길 가에 이 묘역의 제일 어른인 류양 신도비가 있다.
이곳은 진주류씨 류양 일가의 묘역으로 15세기에 활약했던 류양이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
) 이후 무덤 자리로 매입했다. 그 토지에 청천부원군(菁川府院君) 류양이 제일 먼저 묻혔고,
그의 아들인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 류첨정
(柳添汀), 류첨정의 아들인 좌의정(左議政) 류보(
柳溥)와 진양군(晉陽君) 류영(柳濚), 류영의 아들인 진명군(晉溟君) 류사기(柳師琦), 류보의
아들인 사헌부 감찰 류사상(柳師尙) 묘 등이 자리한다. 이들은 15~16세기에 활약했던 인물로
근래에 무덤에 다소 손질을 가하긴 했으나 조선 전기 무덤 양식을 그런데로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무수골에는 진주류씨의 제각(祭閣)이 있다.

북한산둘레길 이전에는 한가한 산골로 산꾼의 왕래도 드물었으나 둘레길이 개척되면서 산꾼들
의 왕래가 빈번해졌다. 둘레길이 묘역 중앙을 지나가기 때문이다. 북한산둘레길로 그 존재가
드러난 명소의 하나로 묘역은 다행히 개방되어 이들을 둘러볼 수 있으나 몇몇 몰지각한 산꾼
들이 묘역에 자리를 피고 밥이나 간식을 먹거나 나물을 캐는 행위 등을 벌이고 있어 묘역을
개방한 진주류씨 집안의 뜻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이들 묘역은 그들 조상의 무덤이자 소중
한 문화유산으로 무덤을 둘러보거나 답사를 하는 것 외에 행위는 무조건 삼가해야 된다.
묘역 사진은 본인의 귀차니즘으로 담지는 않았고 최근에 만든 류양 신도비만 담는 선에서 끝
냈다. 도봉산 자락에 널린게 조선시대 상류층의 무덤이다보니 그리 끌리지는 않았다.


▲  도봉옛길 윗무수골 관문

진주류씨묘역을 지나 남쪽으로 조금 가면 윗무수골 관문이 나온다. 그 관문을 지나면 윗무수
골로 무수골 윗쪽에 자리해 있어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이곳은 도봉산 자락에 묻힌 산
골마을로 밭과 계곡이 펼쳐져 있고, 숲이 무성해 이곳이 정녕 서울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
든다. 갑자기 지방의 어느 시골로 순간이동을 한 기분이다.


▲  도봉옛길 윗무수골 구간 ①

▲  도봉옛길 윗무수골 구간 ②
도봉옛길 윗무수골 구간은 무수골 세일교까지 1차선 크기의 시골길이
펼쳐져 있다. 서울에서 거니는 시골길의 맛은 참 담백하다.

▲  윗무수골과 무수골이 만나는 세일교 주변

윗무수골 관문에서 7분 정도 시골길을 거닐면 무수골과 만나는 세일교이다. 여기서 도봉옛길
은 묵은 이름을 버리고 방학동길로 간판을 바꾸어 연산군묘 방면으로 흘러간다. 세일교를 건
너 무수골 안쪽으로 들어가면 무수골의 주인인 영해군파묘역이 나오며, 산골을 무색케하는 너
른 논이 펼쳐져 있어 이곳이 꿈인가 생시인가 의심될 정도로 고개를 또 갸우뚱하게 만든다.


본글은 여기서 끝, 무수골 부분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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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10월 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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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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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동북쪽 지붕을 거닐다. 수락산 구석구석 나들이 ~~~ (노원골, 수락산보루, 서울둘레길, 동막골, 도선사)



~~~~~  서울의 동북쪽 지붕, 수락산 여름 나들이
~~~~~
(수락산보루, 도선사, 동막골)

   
서울둘레길 수락산 동막골 구간

▲ 수락산보루
◀ 서울둘레길 동막골 구간
▶ 동막골 숲길
▼ 도선사 석삼존불상

   

 


 

서울의 동북쪽 지붕을 이루고 있는 수락산(水落山, 638m)은 상계1동에 살던 10대~20대 시
절 나의 뒷동산이다. 지금은 바로 옆 동네인 도봉동(道峰洞)에서 도봉산(道峯山, 720m)의
그늘을 받으며 살고 있지만 수락산이 뻔히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라 종종 그의 품을 찾
곤 한다. 그곳에는 계곡과 명소, 오래된 절 등 구수한 볼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수락산 서울 구역에 남아있는 미답처(未踏處)를 일부라도 지우고자 아직 발자국
을 남기지 못한 수락산 보루터와 서울둘레길 수락산 구간 일부, 그리고 오래된 석불을 간
직한 도선사를 찾았다.


 

♠  수락산 노원골과 수락산보루터

▲  노원골 (노원골약수터 주변)

이번 수락산 나들이는 수락산의 주요 기점의 하나인 노원골에서 시작했다. 상계1동에 살 적에
노원골과 인근 수락골(벽운동계곡)을 많이 이용했는데, 물을 뜨러 갈 때는 보통 노원골을 선
호했다. 수락골은 제대로된 샘터를 만나려면 상당히 올라가야 했지만 수락골은 조금만 올라가
도 샘터가 무수히 나왔기 때문이다.

노원골은 수락산을 장식하는 주요 계곡으로 노원골 북쪽 능선과 남쪽 능선 사이에서 발원(發
源)하여 중랑천(中浪川)으로 흘러간다. 허나 계곡 밑까지 주거지가 형성되면서 수락산과 속세
의 경계선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한 채, 중랑천으로 넘겨지고 있다. 이는 인근 수락골도 마찬
가지로 서울에 있는 많은 계곡의 잔인한 현실이기도 하다. 겨울 제국(帝國)이 씌운 얼음은 소
쩍새가 울 때면 알아서 녹기 마련이지만 인간이 씌운 복개천의 굴레는 좀처럼 벗기기가 힘들
다.

노원골이 수락골보다 골짜기는 작아도 바위와 반석이 많고, 계곡을 완전히 가릴 정도로 숲이
짙으며, 수심도 얕아 아이들 물놀이 장소로도 아주 좋다. 게다가 경관 또한 아름다워 예로부
터 지역 피서지로 격하게 추앙을 받아왔다. 작지만 매우 야무진 계곡이었던 것이다. 특히 노
원골약수터 주변은 풍경이 아주 일품으로 반석이 넓게 깔려있다.
허나 여름 제국이 무더위로 천하를 너무 쥐어짜면서 계곡을 불리던 냇물은 거의 말라버렸다.
제아무리 잘생긴 바위도, 아름다운 계곡 풍경도 다 물이 있어야 빛을 발하기 마련이거늘, 물
이 별로 없으니 바위와 반석도 일개 돌덩어리 밖에는 되지 않는다. 심술쟁이 여름 제국이 이
멋드러진 계곡을 무더위란 폭격으로 그야말로 쑥대밭을 만든 것이다.

노원골 기점에서 8~9분 정도 오르면 노원골약수터가 모습을 비춘다. 한때 수락산에서 잘나가
던 약수터였으나 약수터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부적합 판정을 받은 이후, 완전 죽은 샘터
가 되었다. 물이 마지막으로 용솟음친지 꽤 되었는지 물기 조차 더듬기가 어렵다. 상계1동 시
절에 이곳 물도 참 많이 마셨는데, 이렇게 맥없이 끊기고 말았다.


▲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
이곳을 오가던 사람들이 소망을 넣으며 하나, 둘 쌓은 돌무더기가 어느덧
큰 돌탑으로 성장했다. 소박한 중생들의 소망을 먹고 자란 돌탑이라
그 모습 또한 소박하기 그지 없다.
 

노원골약수터에서 남쪽 산길을 오르면 노원골 남쪽 능선과 수락산보루로 이어진다. 경사는 그
리 각박하지는 않은데, 그 길을 1분 오르면 왼쪽(동쪽)으로 빠지는 샛길이 있다. 그 길로 접
어들면 바로 조그만 샘터가 하나 있었다. 한때 나의 즐겨찾기 약수터였으나 노원골약수터처럼
숨통이 끊어져 참 애석하기 그지 없다.
인간의 탐욕과 개발의 칼질이 춤추는 속세의 악한 기운이 어느덧 이곳까지 구렁이 담 넘듯 들
어와 수락산을 위협하고 있던 것이다.

여기서 조금 올라가면 운동 시설을 갖춘 약수터가 나오고, 길은 좀 각박해진다. 하지만 그만
큼 능선으로 가는 길도 빨라, 상계1동 시절에 이 산길을 자주 오르곤 했다. 잠깐의 고통을 감
내하면 완만한 능선길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드디어 노원골 남
쪽 능선에 이르고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귀임봉은 동쪽으로 가면 되고, 수락산보루
는 서쪽으로 서서히 내려가면 된다.


▲  노원골약수터 남쪽 산길에서 바라본 수락산 산줄기
가운데 왼쪽 봉우리가 수락산 정상이다. 같은 수락산이지만 노원골은
수락산 정상과 거리가 제법 멀다.

▲  수락산보루(堡壘)터 - 사적 455호

노원골 남쪽 능선이 귀임봉을 거쳐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상계동 아파트단지를 바로 앞에 두고
마지막 용솟음을 치는 봉우리에 고구려(高句麗)가 남긴 작은 점, 수락산보루가 살짝 깃들여져
있다.
이곳은 수락산에서 가장 서남쪽이자 시내와 가장 가까운 봉우리로 수락산 영역에서 가장 전방
에 자리해 있다. 높이는 192.5m로 수락산의 제일 막내 봉우리이지만 수락산 산줄기와 이어진
동북쪽과 북쪽을 제외하면 모두 평지라 조망이 썩 일품이다. 그래서 봉우리에 올라서면 남쪽
과 동남쪽으로 불암산(佛巖山)과 노원구 일대, 멀리 중랑구와 봉화산(烽火山)이 시야에 들어
오고, 서쪽으로 옛 마들평야를 회색빛으로 물들인 상계동(上溪洞) 아파트단지와 도봉구, 강북
구, 북한산(삼각산), 도봉산이 시야에 잡힌다.
이처럼 위치가 휼륭하니 옛 사람들이 그냥 둘리는 없을 것이다. 지금이야 거의 전쟁을 잊고
살지만 옛날, 특히 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에는 전쟁이 빈번했다. 그때는 이런 봉우리가 천금
보다 비싼 법이라 일찍이 고구려는 이곳에 보루를 심어 서울 지역을 지켰다.

만주에서 일어난 고구려가 서울 강북을 점유한 것은 고구려의 위대한 정복군주인 광개토태왕(
廣開土太王, 재위 392~413) 시절이다. 그는 재위 초반에 백제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서울 강
북과 경기도 이북을 점령했는데, 백제(百濟) 또한 산동반도(山東半島)를 비롯한 중원대륙의
넓은 해안 지역과 왜열도(倭列島)를 점유한 무시못할 나라라 더 이상 남하를 못하고 한강을
두고 대치했다. 대신 말발굽을 서쪽과 북쪽, 동쪽으로 돌려 신나게 영토 확장을 벌였다.

광개토태왕의 뒤를 이은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은 보호국인 북연(北燕)을 완전히
접수하고 라이벌인 북위(北魏)를 위협하며 황하 유역과 내몽골 지역인 지두우(地豆于)까지 영
역을 넓혔다. 그리고 숙적인 백제를 공격하고자 아차산성(阿且山城) 주변에 보루를 주렁주렁
닦고 바로 한강 너머로 보이는 백제의 국도(國都), 한산<漢山, 위례성(慰禮城) 서울 송파/강
동 지역>을 수시로 염탐하며 때를 찾다가, 드디어 475년 한강을 건너 한산을 점령, 백제 개로
왕(蓋鹵王)을 처단하고 한산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리고 경기 남부와 충북, 경북 포항(浦項
)까지 거침없이 내달렸다.


▲  봉긋 솟은 봉우리에 자리한 수락산보루

서울과 한강 유역을 장악한 고구려는 이 지역을 다스리고 백제와 신라(新羅)의 공격에 대비하
고자 전략적 요충지인 서울과 경기 북부에 많은 성과 보루를 구축하거나 백제가 쓰던 것을 수
리하여 사용했다. 여기서 보루란 성보다 작은 요새로 돌과 목책으로 구축했는데, 작은 것은
수십 명, 큰 것은 수백 명이 주둔하며 산성(山城) 못지 않은 시설을 갖추기도 했다.

보루는 주로 서울 동쪽 산줄기에 주렁주렁 달렸는데, 한강과 가까운 구의동 홍련봉(紅蓮峰)을
시작으로 아차산과 용마산(龍馬山), 망우산(忘憂山), 봉화산 산줄기에 크고 작은 보루를 닦아
아차산성(阿且山城)을 보조했다. 그리고 수락산에도 보루를 설치해 북쪽(사패산)과 남쪽 아차
산을 연결했다. 수락산보루에서 남쪽을 보면 봉화산이, 서북쪽으로 사패산을 품은 도봉산이
바라보여 이곳에 보루를 둔 고구려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만하다.
그리고 북쪽으로 사패산(賜牌山), 의정부 천보산(天寶山), 양주 불곡산(佛谷山), 도락산(道樂
山), 독바위(양주시 옥정동)에 보루를 설치했는데, 아차산부터 천보산까지는 중랑천과 3번 국
도를 쭉 따라가고 있어 이들이 당시 주요 교통로였음을 귀뜀해준다. 양주 이북은 보루는 거의
없고, 연천 호로고루(瓠蘆古壘)와 은대리성, 당포성, 포천 반월성(半月城) 등의 온갖 성곽을
지어 경계망을 촘촘히 했다.

허나 그렇게 강성했던 고구려는 6세기 이후, 백제와 신라, 중원대륙의 여러 나라, 돌궐(突厥)
등의 도전을 받게 되면서 많은 땅을 잃고 만다. 551년 경에는 백제와 신라에 의해 한강 유역
을 상실하게 되었고, 아차산성까지 신라에 떨어지면서 결국 경기 북부로 물러나게 된다. 백제
의 뒷통수까지 치며 서울 지역을 장악한 신라는 고구려 보루 상당수를 내버렸고, 불곡산보루
등 일부만 수리해서 쓴 것으로 보이나 끝내는 모두 버려지게 된다.
아무리 인간이 만든 대단한 건축물이라 해도 사람의 손때가 식은 것은 그리 오래 못간다. 결
국 세월의 장대한 흐름과 대자연의 태클 앞에 모래성처럼 녹아내리고 말았다.


▲  대머리처럼 허전한 수락산보루터 (그 너머로 귀임봉이 보인다)

수락산보루는 장수태왕 시절인 5세기 중/후반에서 6세기 초에 구축된 것으로 여겨진다. 보루
가 둥지를 튼 봉우리 정상부는 평탄하며, 북쪽과 동서쪽은 조금 급경사를 이루고 있고, 남쪽
은 완만한 경사이다.
이 보루는 상계동에 있다고 해서 상계동보루라 불리기도 했는데, 요즘은 수락산보루로 널리
불린다. 이곳은 6세기 중반 이후 버려져 터만 남아오다가 왜정(倭政) 때 발견되었으며, 왜정
이 1942년에 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상계동 성터가 2개소로 나와있어 이곳이 그중 하
나로 여겨진다.

보루는 봉우리 정상부에서 3~4m 아래로 빙돌아가며 돌을 쌓았는데, 전체 둘레는 약 150m 정도
이며, 북쪽 부분이 약간 찌그러진 타원형이다. 그리고 집수시설로 보이는 함몰 부분이 2곳이
있다.
보루의 밑도리만 간신히 남아 흙에 묻히고 잡초와 섞여졌으며, 보루의 존재가 잊혀진 채, 오
랜 세월 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히면서 석축은 흩어지거나 가루가 되었다. 심지어 정상부에 체
육시설까지 들어서면서 간신히 남은 보루의 흔적마저 숨기가 바빴다.
그러다가 1990년대 말 이후, 아차산과 용마산, 망우산에서 많은 보루가 발견되었고, 봉화산과
수락산, 사패산, 불곡산 등 땅속에 잠자던 보루들이 대거 밖으로 나오면서 수락산보루도 다시
금 빛을 보게 되었다. 게다가 고구려앓이가 전국적인 유행을 타면서 아차산성과 아차산~용마
산 보루는 고구려의 장대한 유적이자 남한의 대표 고구려 흔적으로 단단히 덕을 보게 되었다.

수락산보루를 발굴조사하면서 많은 고구려 토기와 성돌, 보루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조사가
끝나자 이들을 모두 흙으로 덮고 그 위에 나무와 풀을 심어 가려놓았다.


▲  서쪽에서 바라본 수락산보루터

그렇다면 보루의 왕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워낙 단단히 녹아내려 그 모습을 상상하기는 좀
무리가 있지만 근래 복원된 아차산4보루를 참고로 하여 그 모습을 크게 축소하면 대충 그림은
그려질 것이다. 봉우리가 작고 보루의 둘레도 고작 150m 내외라고 하니 그냥 이 땅에 흔한 봉
수대 규모 정도로 보면 될 듯 싶다. 거기에 군사들이 머물 공간과 무기 창고, 보루를 보호할
목책 정도 갖추고 있었을 것이며, 규모가 작기 때문에 50명 내외가 머물며 수비한 것으로 여
겨진다.

보루가 우뚝 서있던 봉우리 정상은 풀만 좀 돋아 있다. 거기에 누런 흙바닥마저 황량히 드러
나고 있어 대머리처럼 허전하기까지 하다. 그 주변은 여름 제국의 기운을 먹고 자란 수풀과
들꽃이 짙게 우거져 고구려의 흔적을 가리고 있어 안내문이 아니면 이곳이 정녕 보루가 있던
곳인지 조차 햇갈린다. 그만큼 자연에 쏙 동화되어 버린 것이다.


▲  수풀로 가득한 수락산보루터 남쪽
숲 너머로 상계동과 노원구 지역, 봉화산이 바라보인다


수락산보루는 2004년 10월에 아차산과 용마산, 망우산 보루와 더불어 '아차산 일대 보루군'이
란 이름으로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그 묶음에 들어간 보루는 총 17기인데, 수락산은 아차산과
거리가 제법 있음에도 그 묶음에 넣어버렸다. 차라리 이곳은 별도로 사적으로 지정하거나 서
울 지방기념물로 삼아 관리하는 것이 좋을 듯 싶은데, 굳이 먼 거리를 무릅쓰고 한 덩어리로
모은 것이 궁금하다. 만주와 요동(遼東), 북한을 제외한 이 땅에 흔치 않은 고구려 유적이니
너무 짜게 굴지 말고 후하게 등급을 매겨 관리했으면 좋겠다.


▲  수락산보루터에서 바라본 귀임봉과 수락산 산줄기

▲  수락산보루터에서 바라본 불암산(507m)의 위엄

수락산보루를 지닌 봉우리의 이름은 아직 없다. 보루터가 있으니 편하게 보루봉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봉우리지만 그 옛날 고구려가 남긴 한 줄기 점 때문에 비록
아차산만큼은 아니더라도 조촐하게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아직 이름을 지니지 못한 봉우리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우리의 자랑스런 고구려
가 백제를 뚫고 이곳을 차지해 보루를 씌우고 남방을 경영했던 곳이 바로 여기가 아니더냐~!
내가 서식하는 근처에 비록 완전하지는 못해도 이런 고구려 유적이 있다는 것이 참 반갑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 산 105-1


 

♠  수락산 서울둘레길과 동막골

▲  수락산보루에서 온곡초교로 내려가는 숲길

수락산보루와 이렇게 첫 인연을 짓고 온곡초교 방면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은 계단이 닦
여져 있으나 경사가 속세를 닮은 듯, 조금 가파르다. 허나 소나무가 하늘과 속세(俗世)를 가
릴 정도로 삼삼하게 우거져 솔내음의 향도 진하며, 그늘의 깊이도 크다. 숲 너머로 보람아파
트를 비롯한 상계동의 회색빛 아파트들이 가까이 바라보여 도심 속 산길을 거니는 기분을 진
하게 선사하는데, 산길 중간에 그 유명한 서울둘레길과 만난다.

서울둘레길은 서울시가 야심차게 닦은 둘레길로 서울 주위를 1바퀴 도는 길이다. 총 8개의 코
스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거리는 157km에 이르는데, 그 1코스가 도봉산역에서 시작해 수락산
과 불암산 허리를 지나 화랑대역에서 끝을 맺는 길로 거리는 14.3km이다. 2개의 산을 들락거
려야되서 서울시에서는 난이도를 상급으로 책정해 사람들을 괜히 긴장을 타게 만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무섭거나 걱정할 수준은 절대 아니다. 다만 산 구간이 길어서 상급으로 책정된
것이다. 길도 잘 닦여져 있고,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나 거닐 수 있는 대중적인 둘레길이니
너무 겁은 먹지 말자~!
또한 도봉산역 동쪽인 창포원 관리사무소 앞과 불암산 우회코스 갈림길, 그리고 화랑대역(6호
선) 4번 출구 앞 공원에 서울둘레길 스탬프가 있으니 완주를 하거나 그곳을 지나가면 기념 도
장을 찍고 가기 바란다.


▲  잘 닦여진 수락산 서울둘레길 (수락산보루 부근)

수락산보루에서 동막골 도선사까지는 서울둘레길을 타기로 했다. 귀임봉과 학림사(鶴林寺)를
경유해서 가는 것이 조금은 빠르겠지만, 수락산 허리에 깔아놓은 서울둘레길 1코스도 엄연한
미답처이므로 미답처를 하나라도 더 지울 겸, 느긋한 둘레길을 이용했다.
수락산보루 주변과 상계3동 일부 구간은 끊긴 길을 잇고자 새로 길을 뚫거나 나무로 길을 내
었고, 시내가 잘 보이는 곳에는 조망대를 설치하여 두 눈까지 호강을 시켜준다. 게다가 숲도
짙어 시원한 산바람이 적당히 땀까지 털어준다.


▲  수락산 서울둘레길 (학림사 부근)

▲  석천(石泉)약수터
학림사 동남쪽 계곡에 묻힌 석천약수는 바위 밑에서 물이 나오는 샘터이다.
하여 이름도 석천이다. 아직은 적합 판정을 유지하고 있어 마음껏
마셔도 되며, 졸고 있는 컵을 깨워 실타래처럼 답답하게 나오는
샘물을 가득 담아 들이키니 목구멍이 뻥뚫린 듯 시원해진다.

▲  석천약수터 부근에서 바라본 상계동과 노원구 지역

▲  수락산 서울둘레길 동막골 서쪽 구간
서울 시내가 바로 지척임에도 마치 지방의 깊은 산골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  수락산 동막골

수락산 남쪽에 자리한 동막골은 수락산의 주요 골짜기이다. 이곳 동막골은 골짜기가 깊고 숲
이 무성해 일찌감치 유원지로 개발이 되었다. 그래서 동막골유원지라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수락산 보호를 위해 행락 시설은 거의 철거되고 나무를 짙게 깔았으며, 골짜기에 도선사와 송
암사, 도안사 등 많은 절이 둥지를 틀어 계곡 중류까지 포장길이 닦여져 있다.

동막골은 경관이 아름답고 자연 환경이 잘 남아있는 현장으로 2010년에 노원구청이 저수량 4
만8천톤 규모의 저수지를 계곡에 만들려고 생난리를 치다가 지역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된 바
가 있다. 서울시도 그 사업에 타당성이 없다고 노원구에 공문을 보낸 터라 다행히 전시행정의
부질없는 삽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2014년에 서울시 보건환경연구원에서 동막골과 북악산(백악산) 삼청동천(삼청공원), 북
악산 백사실계곡(백사골), 인왕산 백운동천(白雲洞天)의 생태계 조사를 벌였는데, 모두 1급수
를 유지하고 있음이 나타났다.
특히 동막골에서는 북방산개구리와 좀주름다슬기 등 도시에서는 만나기 힘든 수중 동물이 크
게 무리 지어 살고 있었다. 비록 이곳이 수락산의 주요 길목이라 산꾼과 나들이 수요가 높아
때는 많이 벗겨지긴 했으나 아직 청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  동막골 도선사입구

▲  도선사를 알리는 표석

동막골에서 울창한 숲길을 따라 윗쪽으로 가면 도선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을 한다. 여기
서 그의 안내를 받아 동쪽 길로 가면 얼마 안가 '수락산 유아숲 체험장'이 모습을 비춘다.


▲  수락산 유아숲 체험장

수락산 유아숲은 서울시가 동막골에 조성한 이름 그대로 어린이를 위한 숲체험장이다. 유아를
둔 가족과 유치원, 어린이집의 소풍 장소로 수풀과 꽃을 심은 초화원을 비롯해 올챙이숲속교
실, 모험놀이마당, 교구놀이마당, 모래놀이터, 계곡물놀이마당, 숲속휴게소 등을 갖추고 있으
며, 먹거리를 가져와 섭취하는 것은 괜찮으나 밥 짓는 등의 취사행위는 절대로 안된다.
유아숲 체험장도 좋지만 동막골이 골도 깊고 숲도 짙으므로 넓게 범위를 잡아 산림욕장을 닦
는 것은 어떨까 싶다. 마침 서울에는 호암산(虎巖山) 외에는 마땅한 산림욕장도 없고 자연휴
양림도 없다.
자연휴양림은 서울 땅에서는 좀 무리가 있고 숲이 넓은 이런 곳에 제대로 된 산림욕장을 닦고
자연보호를 더 엄격히 하여 도심 속의 신선한 청량제로 가꾸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  귀여운 개구리가 인상적인 수락산 유아숲 체험장 안내도

▲  유아의 꿈을 먹고 자란 들꽃들의
조그만 세상, 초화원

▲  유아숲 놀이터와 쉼터


▲  동막골계곡에 자리한 계곡물놀이마당 ▼


▲  도선사로 인도하는 숲길


 

♠  동막골에 둥지를 튼 조촐한 산사, 오래된 석불을 후광으로
삼아 절을 꾸리는 수락산 도선사(導善寺)

수락산 동막골에는 수락산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절들이 많다. 이들은 대부분
역사가 짧은 절집으로 그중 도선사가 동막골 상류 구석에 살짝 둥지를 틀었다.

도선사하면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도선사(道詵寺)를 떠올릴 것이다. 도선대사의
이름을 딴 북한산 도선사는 서울 뿐 아니라 천하에도 널리 알려진 오래된 절이기 때문이다.
허나 수락산 도선사는 이름은 같지만 한자는 완전 다르다. 이름을 풀이하면 선함으로 인도하
는 뜻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역사가 짧고 인지도도 매우 적다.
내가 현대 사찰인 도선사를 찾은 것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오래된 석불을 보기 위함이다. 솔
직히 그거 때문에 온 거지 그것도 없었다면 아마 영원히 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도선사에 오래된 석불이 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문화유산을 간직한 20세기 절들 상당수가 속
세에 배타적인 기질(외지인 경계, 사진 촬영 금지 등)이 짙어 사전에 어떤 곳인지 인터넷에서
살펴보았다. 아주 적게나마 도선사 관련 데이터들이 나왔는데, 절을 찾은 이들이 담은 석불
사진도 제법 나왔다. 그래서 속세에 그리 경계적인 곳은 아니라 판단되어 출동한 것이다.

같은 동막골에 있음에도 산꾼과 피서객으로 분주한 유아숲 체험장과 동막골 산길과 달리 이곳
은 꽤 한적하다. 수락산이 부는 산바람 소리가 그야말로 전부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소리를
깨고 혜성처럼 나타난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도선사에서 기르는 멍멍이들이다. 덩치도 쥐방
울만한 것들이 나를 보자 세상이 꺼지도록 짖어대는데, 그 소리가 귀신마저 도망치게 할 정도
로 매서웠다.
내가 도둑질하러 온 것도 아니고, 영 좋지 않은 사람도 아니건만, 단지 저들에게 익숙치 않다
는 이유로 단순한 저것들의 견제를 받으니 참 당황스럽기 그지 없다.

그래서 주차장 옆에 보이는 종무소(宗務所)로 달려가 도움을 청했으니 아무도 없어 간신히 개
들의 견제를 뚫으며 계곡(동막골) 다리를 건너 경내로 진입했다. 다행히 주지승이 나와 그들
을 제지하니 그것들도 이내 멍멍~ 개소리를 멈추고 꼬랑지를 살랑거리며 경계를 푼다. 승려는
절에 잘 왔다면서 쭉 둘러보라고 하길래, 석불을 보러 왔다고 솔직히 털어놓으니 마음껏 사진
에 담아가라고 그런다. 그런데로 인심도 있는 셈이다. 이렇게라도 해야 도선사의 인지도가 조
금은 올라가는 것을 그는 안 것이다.


▲  도선사 요사(寮舍)와 2층으로 이루어진 뒷쪽 법당

도선사는 이 땅에 흔치 않은 조동종(曹洞宗) 소속으로 1920년경 청운대선사(靑雲大禪師)가 여
기서 수행을 하다가 세운 절이다. 이곳에는 원래 조그만 석굴이 있었다고 하며, 많은 승려와
사람들이 찾아와 불도를 닦거나 산신에게 기도를 올린 곳이라고 전한다. 그래서 도선사는 산
신기도도량을 칭하고 있다.
1970년대까지는 볼품 없는 모습이었으나 현주지인 대은(大隱)이 30년간 꾸준히 불사(佛事)를
벌여 지금의 모습으로 불렸으며, 2005년에는 천하에서 가장 큰 천수천안관세음보살상을 봉안
하여 크게 위엄을 보이기도 했다.

경내에는 2층 법당을 비롯해 산신각과 범종각, 천고루, 요사, 종무소 등 5~6동의 건물이 있으
며, 2층 대웅전에는 절의 꿀단지이자 유일한 문화유산인 석3존불상이 봉안되어 있어 절의 듬
직한 후광 역할을 한다. 이제 100년 남짓 된 현대 사찰이라 딱히 내세울 것도 없고, 인근 학
림사와 흥국사(興國寺), 동막골에 묻힌 여러 절 등 쟁쟁한 절이 많다보니 이런 오래된 불상이
라도 하나 옆구리에 끼고 있어야 그나마 경쟁이 된다. 비록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 이곳의 새
로운 명물이라고 하나 석3존불상에 비하면 아직 한참이나 경력이 짧다.

보이는 것이 그야말로 하늘과 숲이 전부일 정도로 첩첩한 산주름 속에 깊숙히 묻혀있으며, 찾
는 이도 별로 없어 고적한 산사의 멋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게다가 도선사 윗쪽 계곡과 주
변 숲은 자연생태가 매우 양호하여 서울시에서 2008년 12월에 '수락산 야생동물,식물 보호구
역'으로 지정했다. (서울시 고시 제2009-496호) 하여 절 윗쪽 숲과 계곡은 출입이 통제되었고
그 덕에 도선사는 청정한 환경 속에서 법등(法燈)을 유지하고 있다.

▲  다양한 손짓의 관세음보살상 3자매

▲  큰 북과 운판을 지닌 천고각(天鼓閣)

▲  커다란 석축 위에 세워진 6각형 범종각
석축 밑도리에는 옷자락을 휘날리며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상(天人像)이 새겨져 있다.

▲  인조 암벽으로 이루어진 산신각(山神閣)
어엿하게 기와집으로 만들지 않고 특이하게
인조 암벽으로 산신각을 꾸몄다.


▲  2005년에 조성된 청동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天眼觀世音菩薩)상

경내 남쪽에는 도선사의 새로운 명물로 등극한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 자리해 있다. 이름도 허
벌나게 긴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란 무려 1,000개의 손과 눈을 지닌 관세음보살로 이 땅의 천
수천안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그만큼 도선사에서 모든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존재
인 것이다.
인자함이 깃든 관세음보살의 큰 얼굴 위에는 그의 조그만 얼굴이 가득 달려있고, 그 위에 부
처의 작은 머리가 있다. 이들 얼굴은 1,000개의 눈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리고 보살상 뒷쪽에
는 손과 팔이 수두룩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그중 두 손이 지팡이와 극으로 보이는 무기를 들
고 있다. 그를 반짝반짝 빛내주는 광배(光背)는 금색과 검은색이 서로 대비를 이루고 있는데,
광배 아랫쪽은 마치 칼로 싹둑 자른 듯, 생략되어 있고, 윗쪽은 봉긋 솟아있어 보주형을 이룬
다. 그가 앉은 연꽃 대좌(臺座)는 검은색을 띄고 있으며, 그 밑에 돌로 만든 큰 기단을 두고
팔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겼다.


▲  꽃을 든 남자의 새로운 버전? 꽃을 든 산신상 (산신각 내부)

붉은 옷을 입은 수염 지긋한 산신이 포근한 표정을 지으며, 왼손에 꽃을 들고 호랑이 등에 앉
아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산신상과 산신도(산신탱)을 봐왔지만 저런 색다른 산신은 처음이다.
절을 찾은 여심(女心)을 위한 도선사의 배려이자 마켓팅은 아닐까? 뭔가 크게 개성적이고 독
특해야 눈에 띄는 법이니 말이다.

 ◀  지붕만 한옥, 나머지는 양옥인 2층 법당
요사 뒷쪽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법당은 경내
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1층은 극락전(極樂殿,
큰법당) 및 영가(靈駕)들을 위한 납골당(納骨
堂)으로 쓰이고 있는데, 요즘 많은 절에서 납
골당을 운영하여 수익을 내고 있다.

2층은 대웅전(大雄殿)으로 석삼존불상과 금동석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원래는 석3존불
이 대웅전의 중심이었으나 새로 금동석가불을 만들면서 조금은 뒷전으로 밀려난 기분이다. 그
래도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석3존불이 보이니 금동석가불보다 가장 먼저
중생들의 인사를 받고 있다.


  도선사 석삼존불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1호

대웅전 서쪽 불단에 자리한 석3존불상은 도선사의 듬직한 후광이자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도
선사에서는 그들을 '천년의 미소'라 하여 격하게 띄워주고 있는데, 고된 세월에 지쳐 얼마나
울었을까? 얼굴이 거의 지워져 미소 여부는 알 수 없다.

이들은 돌로 다진 석불(石佛)로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다. 속사정이야 알 수는 없지
만 어찌어찌하여 이곳까지 흘러들어와 도선사의 보물로 묻어가고 있다. 그들이 앉은 복련(伏
蓮)대좌는 도선사에서 마련한 것이고, 그들 뒤로 돌로 다져진 후불탱이 병풍처럼 자리하고 있
으며, 그 주변을 인조 암벽으로 둘러 석굴 분위기를 자아낸다.

  석3존불상의 본존불(가운데 석불)

  석3존불상의 향우측 협시상

석3존불 중앙에 자리한 석불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고 있는데,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
頂相)이 두툼히 솟아있고, 동그란 얼굴은 마멸이 심해 눈썹과 코 정도만 확인이 가능하다. 목
은 매우 두꺼우며, 옷은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偏袒右肩)식이고, 어깨와 무릎에는 넓은 띠
주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아랫도리는 부처상의 흔한 앉은 자세인 결가부좌(結跏趺坐)로 보
이나 너무 축약되었다.

가운데 석불 왼쪽(향우측 협시상)에 자리한 보살상은 머리에 원통형 보관(寶冠)을 쓰고 두 손
은 다리 위에 대고 화염보주(火炎寶柱) 같은 물건을 들고 있으며, 양 어깨 위에는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눈과 코, 눈썹 정도 확인이 가능하나 너무 지워진 상태이며, 허리가
너무 짧고 아랫도리가 낮아, 마치 윗도리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석3존불상의 향좌측 협시상

  2층 대웅전 내부

오른쪽 보살상(향좌측 협시상)은 머리가 날라가 없어진 것을 석고로 대충 만들어 붙였다. 그
래서 옆 석불과 달리 눈과 코, 입이 그런데로 달려있다.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고, 몸통 정
면은 통견식으로 법의(法衣)를 입은 듯 하며, 양쪽 어깨에는 옷주름이 있으나 뒷면에는 편단
우견식으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었다. 그리고 두 손은 무릎 위에 대소 선정인(禪定印) 비슷
한 제스쳐를 취하고 있다.

이들 석불은 너무 간결하게 표현되어 덩치도 매우 작으며, 얼굴도 거의 지워지고 훼손도 심하
다. 게다가 신체 비례도 너무 떨어져 근래 대충 만든 석불이나 장난감처럼 보이기도 한다. 허
나 그들은 전체적으로 양감이 있고 안정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어 고려 석불의 전통을 계승
한 고려 말~조선 초기 석불로 보고 있다. 특히 이 시대에 조성된 석불이 별로 없어 2009년 3
월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대웅전 금동석가3존불
남쪽을 바라보고 앉은 이들은 근래 조성된 것
으로 석가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이 어엿하게 3존불을 이루고 있다.
석3존불보다 더 화려하고 덩치도 있지만 고색
을 밝히는 나의 두 눈에는 오로지 석불만 보일
뿐, 저들에게 간 시선의 양은 별로 되지 않는
다.


  도선사를 뒤로하며 (사진을 클릭하면 도선사 홈페이지가 번쩍 뜸)

도선사를 둘러보니 어느덧 18시가 다 되어간다. 이날 수락산에서 목적한 곳과 모두 인연을 지
었으니 더 이상 욕심 부릴 것도, 미련 둘 것도 없다. 이것으로 충분히 보람찬 하루를 보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한여름에 벌인 수락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그렇다고 수락산과의 인연이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 산153-1 (덕릉로145길 103 ☎ 02-936-0419)
* 도선사 홈페이지는 윗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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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8월 2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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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산에 포근히 감싸인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평창동~홍제천~부암동 나들이 (보현산신각, 박종화가옥, 홍지문, 옥천암, 산모퉁이)



'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평창동~부암동 나들이 '


▲  인왕산에서 바라본 평창동과 부암동


 

가을이 한참 숙성되던 9월의 끝 무렵, 친한 후배와 서울 도심 속의 전원(田園) 마을인 평
창동과 부암동을 찾았다.
평창동(平倉洞)하면 으리으리한 저택과 빌라가 먼저 떠올릴 정도로 서울의 대표적인 졸부
동네로 꼽힌다. 인근 성북동과 더불어 이 땅의 0.1%가 산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을 정도인
데, 이곳이 졸부의 성지(聖地)가 된 것은 북한산(삼각산)을 든든한 배경으로 삼은 빼어난
절경과 더불어 명당 자리로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하여 1950년대 이후 돈 꽤나 주무
르던 졸부들이 마구 몰려와 북한산의 살을 마구잡이로 뜯어내고 할퀴며 자리를 가리지 않
고 그들의 모래성을 세운 것이다.

평창동은 북한산으로 가는 길목이라 산꾼과 나들이객 수요가 많다. 하여 졸부들만의 폐쇄
적인 공간이 되는 참상은 면했다. 허나 10초가 멀다하고 나타나는 고래등 집에 온갖 잡동
사니 생각이 다 일어나 정처 없는 마음을 편치 않게 한다. 허나
그렇다고 너무 주눅은 들
지는 말자~!
제아무리 철옹성 저택이라 한들 대자연 형님 앞에서는 모래알 같은 하찮은 존재이기 때문
이다. 그러니 기죽지 말고 당당히 어깨를 피며 졸부들로 고통 받고 있는 평창동을 끌어안
아 보자, 또한 이곳에 서린 명당(明堂)의 기운도 조금씩 챙겨가도록 하자.

우리가
평창동을 찾은 것을 이곳에 서린 명소를 보고자 함이다. 우리 주제에 이런 모래성
을 구입하기는 완전 불가능하니 명소만 쏙 챙겨보고 이옷 동네인 부암동으로 넘어갔다.


 

♠  평창동에서 만난 명소들 (박종화 가옥, 보현산신각)

▲  평창동 박종화 가옥(朴鍾和 家屋) - 등록문화재 89호

평창동의 제일 번화가라 할 수 있는 세검정 새마을금고 주변(서울예술고등학교, 평창동주민센
터 정류장 맞은편)에서 평창11길을 따라 12분 정도 올라가면 평창동에 거의 흔치 않은 기와집
인 박종화 가옥이 마중을 나온다.

돈 냄새가 시끄럽게 진동하는 저택과 빌라 숲속에 별천지처럼 들어앉은 이곳은 현대 문학가인
월탄(月灘) 박종화가 살던 집이다. 원래는 악질 친일파인 이기원(李起元, 1880~1937)이 왜정
(倭政) 초기에 동대문 부근인 충신동(忠信洞) 55-5번지에 세운 것으로 그는 친일반민족행위자
704두<인(人)으로 쓰기도 아깝다>의 1두로 등재되어 있다. 또한 그의 아비인 이봉의도 왜왕에
게 남작(男爵) 작위를 받는 등 부자(父子)가 아주 쌍으로 매국노로 악명을 날렸다.

1937년 6월 이기원이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 떨어지자 박종화(이하 월탄)가 이 집을 매입해
분가를 했다. 그러다가 1975년 혜화동과 동대문을 잇는 도로(율곡로)가 뚫리면서 집이 그 대
지에 포함되자 평창동으로 옮겨 원형 그대로 복원을 했다. 그는 세상을 뜨던 1981년까지 이곳
에서 늘 펜을 놓지 않았으며, 그가 간 이후에는 자손들이 살고 있다.

※ 월탄 박종화(1901~1981)의 생애
월탄은 1901년 남대문 밖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집안 대대로 높은 벼슬을 누린 부유한 양
반가로 그의 할아버지인 박태윤은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벼슬을 그만두고 백지(白紙)와 장
지 등의 종이를 팔아 크게 돈을 불렸다. 그렇게 번 돈으로 인쇄소와 책방까지 차렸고, 집 사
랑채에 서당을 열어 집안과 지역 젊은이에게 한학과 신학문, 왜어(倭語)를 가르쳤다. 왜어와
신학문 같은 경우는 유능한 왜인을 초빙하여 강사로 삼았다.

월탄은 할아버지한테 10년 동안 한학(漢學)을 배웠고, 15살에 신학문을 배우고 싶다고 청하여
1년 동안 신학문과 왜어를 배워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 휘문중고교)에 3등으로 입학을 했
다. 여기서 홍사용(洪思容), 정백(鄭白) 등의 벗과 교류를 했으며, 무려 17살에 혼인을 했다.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친구와 함께 탑골공원으로 달려가 만세를 불렀으며, 1920년 학교를
졸업하자 문학동인지 '문우(文友)'를 발간했다. 그리고 1921년에는 '장미촌(薔薇村)' 창간호
의 그의 첫 작품인 '오뇌의 청춘'과 '우윳빛 거리'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창작의 길에
나선다.
1922년 백조(白潮)의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밀실로 돌아가다','만가' 등의 시와 '영원의 승방
몽'을 내놓았고, 1923년에는 조선 세조 때 활약했던 신숙주(申叔舟)의 부인을 주인공으로 한
'목매이는 여자'를 발표해 충신의 길이 얼마나 가시밭 길인지를 표현했다.

1924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첫 시집인 '흑방비곡'을 냈고, 이어 단편소설인 '순대국'과 '여
명','부세' 등을 차례대로 쓰면서 소설가로 변화를 꾀했다. 1936년 '금삼(錦衫)의 피','대춘
부'를 통해 역사 소설을 탁월하게 엮었으며, 1940년 '다정불심(多情佛心)'을 발표해 역사 소
설가로서 재량을 인정받기에 이른다. 1942년에는 수필집 청태집(靑苔集)을 냈으며, 왜정(倭政
)에 협력하는 나약한 지식인들이 늘어나는 세태를 비판하고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왜정과 거
리를 두었다.

1946년에는 동국대 교수와 서울신문사 사장을 역임했으며, 1947년 성균관대 교수와 서울시예
술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우익 진영의 대표자로 1949년 발족된 한국문학가협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 1955년 예술원 회장이 되어 제1회 예술원상을 받았으며, 1966년 제1회 5.16민족상을
수상하면서 받은 상금으로 월탄문학상을 창설, 같은 해 10월에 제1회 월탄문학상을 받았다.

1945년 이후 그의 손에서 태어난 작품은 무진장 많다. 해방과 더불어 냈던 '민족'은 왜정 시
절에 냈던 '여명','전야'와 함께 3부작에 해당하는 작품이었고 1946년에 '홍경래(洪景來)'를,
1947년에는 '청춘승리','논개(論介)'를 냈고, 1954년에 서울신문사 사장을 그만두고 임진왜란
시리즈를 다시 쓰기 시작하여 총 946회를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이후 '황진이(黃眞伊)의 역천(逆天)','벼슬길','여인천하'를 내어 인기를 모았고, 1961년 회
갑 기념으로 '월탄시선(月灘詩選)'을 출간했다. 1962년에는 '자고 가는 저 구름아','제왕3대
'를 연재했고, 1964년 '월탄삼국지(月灘三國誌)'를 한국일보에 4년 동안 연재했다.

1965년에 '아름다운 이 조국'을 중앙일보에, 1966년 '양녕대군(讓寧大君)'을 부산일보에 연재
했고, 1970년에 수필집인 '한자락 세월을 열고'와 기념 사화집(詞華集)인 '영원히 깃을 치는
산'을 내놓았다. 또한 1969년부터 1977년까지 8년 동안 조선일보에 연재한 '세종대왕'은 우리
나라 신문 소설 가운데 가장 많은 2,456회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말년에는 '화음격음(和
音激音)'과 회고록 '역사는 흐르는데 청산은 말이 없네' 등을 냈다.

1920년대 낭만주의 시인으로 출발했던 그는 1930년대 식민지 현실에서의 이상 추구를 역사소
설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민족의 역사적 주체성과 민족혼을 부각시키는데 크게 주력하
여 역사소설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다.

월탄은 인격적으로도 꽤 대인(大人)의 풍모를 보여주었다. 집안일을 하던 하인이 죽자 2일 동
안 글을 멈추고 애통해하며 직접 장례식을 치뤄주었고, 그 가족에게 많은 조위금을 건네 그들
을 위로했다. 또한 많은 문학인들과 교분을 쌓으며 술도 많이 마셨는데, 자제력이 강해 술이
취하면 즉각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한 그는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을 세운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의 외종 사촌형으로 간송의 문화 사업에도 크게 도움을 주기도 했다.

부유한 환경에서 살던 그였지만 돈 많은 티를 내지 않았고, 솜버선에 한복을 입고 하얀 고무
신을 신고 다녔다. 원고 기일을 한번도 어기지 않은 성실함으로 단골 신문사와 출판사가 많았
으며, 주위 사람들에게도 '돈을 뜻하는 '전(錢)에 창을 뜻하는 과(戈)가 2개나 들어있으니 조
심해야 된다'며 물질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늘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광주(光州)에 내려가면 제일 먼저 광주학생운동기념탑을 찾아 묵념을 했고, 인천(仁川) 자유
공원에 갔을 때 동행한 문인들이 맥아더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자 왜 다른 나라 사람 동상에
서 사진을 찍냐며 일행을 나무란 일화는 유명하다.

현대 문학의 산실이었던 박종화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 별채, 너른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 누마루를 조수루(釣水樓,
棗樹樓)라 부르며 여기서 '금삼의 피','대춘부','자고가는
저 구름아','세종대왕','아랑의 정조' 등 굵직굵직한 작품을 써내렸다. 그래서 월탄 외에 조
수루주인(釣水樓主人)이란 호도 가지고 있었다.

현재 집은 후손들이 살고 있어 내부 관람은 거의 어렵다. 굳게 닫힌 대문 앞에서 자존심을 곱
게 접고 발길을 접어야 했지. 벨을 눌러 간곡하게 관람을 청해도 되겠지만 그럴 의지와 배짱
까지는 없었고, 박종화에 대해서도 딱히 관심이 없다. 붉은 담장 너머로 다는 아니지만 지붕
과 부연이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으니 그 정도로도 족하다.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에
안으로 들어갈 인연이 생긴다면 그때 자세히 살펴봐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128-1 (평창11길 80)


▲  굳게 잠긴 박종화 가옥 대문

▲  기품이 돋보이는 박종화 가옥 내부 (문화재청 사진)

▲  보현산신각 입구 (입구에 큰 바위가 있음)

박종화 가옥에서 오르막길(평창11길)을 4~5분 정도 오르면 평창동의 지붕인 평창길이 나온다.
북한산둘레길의 일원인 평창마을길도 신세를 지고 있는 그 평창길을 따라 서쪽으로 3분 정도
가면 보현산신각을 알리는 안내문과 함께 고래등 같은 큰 바위가 마중을 한다.

덩굴옷을 걸친 그 바위 밑도리에는 기도처로 쓰이던 조그만 굴이 있다. 보현산신각을 보조하
던 공간으로 산신(山神) 할배가 소원을 잘 들어주는 곳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무당과 중생들이
찾아와 기도를 올렸다. 지금은 햇살도 들어오기 힘든 지하 아닌 지하가 되었지만 예전에는 앞
이 확 트인 공간으로 북악산(백악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나 평창동에 졸부들이 들어와 주
거지가 마구 형성되면서 바위를 전혀 배려하지 않고 그 앞에 골목을 내어 시야를 가로 막았다.


▲  고래등 같은 보현산신각 바위의 뒷모습

▲  평창동 보현산신각(普賢山神閣)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3호

큰 바위 옆구리를 지나면 의자가 여럿 설치된 조촐한 그늘 쉼터가 나온다. 그 너머로 조그만
석성(石城) 같은 돌담을 두룬 아주 조그만 기와집이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그 집이 평창동의
오랜 명소이자 신앙터인 보현산신각이다.

해발 180m 고지 숲속에 자리한 보현산신각은 이 땅에 흔하고 흔한 산신 제당이다. 보현봉 남
쪽 자락에 안겨 있어 '보현산신각'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북한산 산신각'이라 불리기
도 한다. 평창동 주민들이 동제(洞祭)를 지내던 곳으로 인왕산(仁王山)과 더불어 서울의 이름
난 무속(巫俗) 장소였는데, 지금은 무척 한가해졌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장안에 잘나가던
무속인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굿을 벌였다. 굿은 산신각 안에서 하지 않고 산신각 옆이나 입구
에 있는 바위에서 했으며 '산신각(보현산신각)에 올라갔다 왔다'란 말은 그 시절 잘나가던 무
당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이 산신각은 원래 남산신각(男山神閣)으로 언제 지어졌는지는 북한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대략 조선 후기로 여겨진다. 지금은 건물 1동이 전부이지만 예전에는 근처에 여산신각(女山神
閣)과 부군당(府君堂), 부군당에 딸린 신목(神木)이 있어 이 일대가 평창동 사람들의 신앙터
로 무척 애지중지되었다. 매년 음력 3월 1일에 동네 노인들이 돈을 모아 이곳에서 유교식으로
당제를 지냈으며, 제물을 집집마다 분배하여 뒷풀이를 했다.
허나 부군당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녹아 없어지고 여산신각도 1974년에 불에 타 없어지면
서 이 산신각에 통합되었다.

산신각은 나무로 만든 맞배지붕 건물로 달랑 1칸 밖에 안되는 매우 조촐한 당집이다. 굳게 잠
긴 내부에는 가로 97cm, 세로 108cm 크기의 여산신도(원래 여산신각에 있었음)가 봉안되어 있
는데, 산신은 청색 도포(道袍)를 입고 관을 썼으며, 왼손에 우선(羽扇)을 들었다. 뒤쪽에는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엎드려 있고, 왼편에는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무릎을 꿇고 천도복
숭아 3개를 든 쟁반을 들고 있다.
그런데 보통 산신하면 할배 산신을 받들기 마련이나 이곳은 특이하게도 할매 산신을 주인공으
로 했다. 그래서 그를 위한 산신각과 산신도(山神圖)를 두었으며, 여산신각이 없어지자 이곳
에 통합하여 주인으로 삼았다. 특히 여산신도는 천하의 유일한 유물로 가치가 높은데, 1923년
8월 24일에 김예안당(金禮安堂)이 그렸다는 기록이 있어 그때 기존의 그림을 버리고 새로 그
린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제단 위에는 종이 있는데, 막연히 정유년(丁酉年)이라 새겨져 있어 1897년 또는 1837
년으로 여겨지나 확실한 답은 아니다.

이곳은 흔한 산신각의 하나이지만 여산신을 봉안한 귀중한 신앙 유물로 산신을 받드는 산악신
앙(山岳信仰)과 마을 동제(洞祭)가 어우러진 현장이자 무속 신앙의 현장이다. 그래서 그 가치
를 인정받아 일찌감치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541-1


▲  석축 위에 자리한 보현산신각
산신각과 그곳을 둘러싼 돌담 대문은 동제 외에는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여기서는 열려라 참깨를 외쳐도 소용이 없음~~!

▲  보현산신각의 옆면

▲  위에서 바라본 보현산신각

▲  보현산신각 옆 돌담 계단길 - 돌담은 산신각 보호를 위해 근래에 씌운 것으로
돌담 대신 기와를 얹힌 흙담으로 했으면 더 정겹지 않았을까 싶다.


 

♠  홍제천(弘濟川)에서 만난 명소들 (홍지문, 옥천암)

▲  홍지문(弘智門)과 탕춘대성(蕩春臺城)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호

평창동에 대한 볼일을 마치고 부암동(付岩洞)으로 넘어오면 세검정교차로(상명대입구)가 나온
다. 여기서 홍은동(弘恩洞) 방면으로 2분 정도 가면 홍지문과 탕춘대성이라 불리는 성곽이 마
중을 나온다. (세검정교차로에서도 훤히 바라보임)

홍지문을 거느린 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잇는 산성(山城)으로 연산군이
검정 부근에 지은 탕춘대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한양(서울) 서쪽(정확히는 북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성(西
城)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겹성이란 별칭도 있었다.
이 성은 숙종(肅宗) 임금이 만약에 있을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서울의 방어력을 높이고
비상시에 북한산성 행궁(行宮)으로 신속히 줄행랑을 칠 수 있는 시간 확보를 위해 조성되었다.
1702년에
신완(申琬)이 성곽 축조를 제의했는데, 북한산성(北漢山城) 증축과 행궁 조성, 한양
도성 보수가 마무리되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짓고자 1715년 홍제천에 홍
지문을 먼저 닦았다. 그런 다음 1718년 8월 26일 성곽 공사에 들어갔으나, 겨울이 다가오면서
10월 6일에 일단 공사를 멈추었다가 1719년 2월 다시 공사에 들어갔다. 허나 처음보다 사업이
크게 축소되면서 3월에 공사를 종료시켰다.
그렇게 태어난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인왕산 북쪽 능선, 홍지문, 탕춘대능
선을 거쳐 비봉능선 서쪽 수리봉(향로봉 부근)까지 이어진 4km 규모이다. 원래는 북한산성까
지 싹 이으려고 했으나 비봉능선이 험준해 포기했으며, 북한산성 대남문에서 보현봉, 형제봉
능선, 북악산(백악산) 북쪽 능선을 거쳐 한양도성을 잇는 탕춘대성 동쪽 성곽도 계획했으나
모두 취소되었다.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 경계인 홍제천에는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을 두었으며, 탕춘대능선에
는 암문(暗門) 1개를 내었다. 그리고 성 안에는 훈련장인 연융대(鍊戎臺)와 선혜청(宣惠廳),
평창(平倉) 등의 창고를 설치했으며, 총융청(摠戎廳) 본부도 이곳에 두었다.
탕춘대성이 들어앉은 위치 대부분은 각박한 경사지로 거의 천험(天險)을 자랑한다. 하여 홍지
문을 제외하고는 성을 높이 구축하지는 않았으며, 현재는 인왕산 북쪽 능선과 홍지문, 탕춘대
능선에 성곽이 그런데로 남아있다. (여장은 홍지문과 남쪽 성곽 일부에만 남아있음)


▲  서쪽(홍은동)에서 바라본 오간대수문과 홍지문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은 인왕산과 북한산의 경계가 되는 홍제천 협곡에 지어진 것으로 탕춘대
성의 유일한 성문이다. (암문 제외) 한북정맥(漢北整脈)이 지나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한북문
(漢北門)이라 불리기도 한다.

200년 이상 별탈없이 살아온 홍지문은 1921년 1월에 지붕에 쌓인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
하고 내려앉고 말았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해 8월 홍제천의 물을 흘려보내는 오간
대수문(五間大水門)까지 모두 떠내려가면서 터만 아련하게 남아오다가 1977년 7월에 복원되었
다. 홍지문은 홍예 주변에 고색의 때가 탄 성돌만 옛날 것이며 때깔이 하얀 성돌은 1977년 복
원할 때 새로 끼어넣은 것이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문루까지 올라가 놀았던 기억이 난다. 허나 지금은 문화유산 보호를 위
해 문루와 오간대수문을 금지 구역으로 삼았으며, 오간대수문에서 탕춘대능선 방면 성곽 300m
정도 구간도 통제되어 탕춘대능선을 가려면 홍지동 주택가나 옥천암 뒷쪽에서 접근해야 된다.
문 남쪽은 세검정로가 지나고 있어 성곽이 아주 잠깐 단절되어 있다. 허나 그 길을 넘으면 성
곽은 다시 소소하게 율동을 부리며 인왕산으로 뻗어간다.
성문 앞뒤로 나무가 심어진 짧은 산책로가 놓여져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오간대수문 바로 밑
에는 최근에 산책로가 닦여져 오간대수문의 속살을 구경할 수 있다. 이 산책로는 세검정과 옥
천암은 물론 멀리 홍제천인공폭포와 사천교, 한강까지 연결된다. 또한 문을 경계로 성 안쪽은
종로구 부암동(홍지동), 바깥쪽은 서대문구 홍은동이다.


▲  북한산을 향해 힘차게 뻗어가는 탕춘대성 (탕춘대능선 남쪽 끝)

오간대수문 윗도리는 금지된 다리라 발을 들일 수 없지만 아랫도리는 홍제천 산책로가 닦이면
서 접근이 가능해졌다. 처음으로 살펴보는 오간대수문의 속살, 비록 하천에서 약간 비린내가
풍기긴 했으나 그 정도 냄새는 이미 익숙해진 상태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서울 사람임)

홍예문 위쪽에는 용머리가 새겨져 있다. 아무래도 물이 흐르는 수문이라 물을 관장하는 용을
수호용으로 넣은 듯 싶다. 5개의 수문 중, 북쪽 기준으로 1,2,5번째 문은 바닥에 돌이 입혀져
있고, 3,4번째 문은 홍제천이 흐르고 있다. 하늘에서 물폭탄이 내려 홍제천이 흥분하는 경우
에는 5개 문이 모두 수문이 되버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산4

  ◀  홍지문 천정에 그려진 와운문(渦雲紋)
신선의 오색구름처럼 영롱하게 그려진 구름의 
모습이 마치 물결의 거센 소용돌이를 보는 듯 
하다.


▲  홍제천 건너에서 바라본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홍지문에서 홍제천을 따라 서쪽으로 7분 정도 가면 하얀 암반을 앞에 내밀며 큰 바위에 살포
시 깃든 하얀 피부의 커다란 불상이 크게 아른거릴 것이다. 그가 바로 상서로운 관세음보살로
통하는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이다.
문화재청은 그를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으로 다루고 있으나 지역 사람들은 '보도각 백불'이라
많이 부르고 있다. (나도 그 명칭이 버릇이 되었음) 여기서 보도각(普渡閣)은 하얀 마애불과
바위를 보듬은 보호각의 명칭으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이다. 또
한 홍제천변에 있어서 옛날부터 '해수관음상'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으며 강제로 하얀 피부
가 된 19세기 이후에는 '백의관음(白衣觀音)'과 '백불' 등의 별칭이 추가되었다. 여기서 '백
불'은 구한말에 양이(洋夷)들이 그를 보고 'White Buddha'라고 불렀는데 거기서 유래된 것으
로 보는 견해도 있다.

마애불 옆에는 그를 관리하는 조그만 절, 옥천암이 둥지를 틀었으며, 그들에게 다가서려면 홍
제천에 걸린 보도교(普渡橋)란 유연한 곡선의 다리를 건너야 된다. 시멘트가 아닌 홍예 돌다
리였으면 운치가 참 진국이었을텐데 그 점이 참 아쉽다. 다리 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조촐한
문이 있는데, 바로 옥천암의 일주문(一柱門)이다. 일주문이 다리 끝에 달린 흥미로운 현장으
로 그 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보도각 백불(마애불)이, 오른쪽 언덕에 옥천암이 있다.

▲  보도각에 깃든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 보물 1820호

북한산(삼각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으며 홍제천 바람을 쐬고 있는 이 마애불은 서울에 전하는
8개의 오랜 마애불(磨崖佛)의 하나이자 달랑 4개 밖에 없는 고려시대 마애불로 고려 말에 조
성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여기서 조금 거리가 있는 안암동에 보타사(寶唾寺)란 작은 절이 있는데, 그곳에 옥천암 백불
과 비슷하게 생긴 하얀 피부의 마애불이 있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조성 시기도 비슷하여 같은
사람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여기서 가까운 승가사(僧伽寺)의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과 비슷한 계열의 작품으로 보기도 하며, 개성(開城)의 관음굴 석조보살반가상과 비교되는 고
려 말 불상 조각의 특징을 보여주는 존재로 평가받기도 한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서울로 천도하자 그를 찾아와 예불을 올렸다고 전하며 그
인연으로 조선 왕실의 주요 기복처(祈福處)가 되었다고 한다. 15세기에는 성현(成俔, 1439~
1504)이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옥천암 백불을 부처바위를 뜻하는 불암(佛巖)으로 기재
했다. 그것이 이곳에 대한 첫 기록이다.
임진왜란 때는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 권율(權慄) 장군이 여기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는
데 어리석운 왜군은 백불을 그만 조선군으로 잘못 알고 조총을 정신없이 쏘아댔다. 그렇게 탄
환을 다 소비한 왜군이 혼란에 빠지자 그때를 틈타 그들을 모두 때려잡았다는 이야기가 홍제
천의 물결을 따라 전해오고 있다. 이는 백불을 서울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띄우고자 근처에서
일어났던 권율 장군의 왜군 토벌전을 끌어들여 지어낸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高宗)의 어머니인 부대부인민씨(府大夫人閔氏)까
지 찾아와 아들의 천복(天福)을 빌었다고 한다. 그 기념으로 조개껍데기를 태워서 만든 호분
(胡粉, 여자들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으로 불상 전체를 하얗게 도배하면서 이때부터 팔자에도
없는 백불이 되버린 것이다. 그렇게 하얀 피부의 소유자가 되면서 마애불은 다소 젊어 보이게
되었으나 대신 문화유산의 큰 매력인 고색의 기운이 다소 꺾여 그리 나이가 지긋해 보이지 않
는다.


▲  보도각과 붙임바위의 뒷모습

백불의 높이는 5m로 그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예로부터 영험이 있는 마애불로 명성이 높았다.
그 앞에 닦여진 공간에는 그의 영험을 빌리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며 특히 입시철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다.

백불에게 기댈 수 있는 자리를 내준 커다란 바위는 '붙임바위'라고 불리는데, 생긴 모습부터
가 영 예사롭지가 않다. 부암동의 유래가 된 부침바위와 비슷하게 돌(또는 동전)을 바위에 붙
이거나 위로 던져서 바위 위에 철썩 붙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바위에 매달린 작은 돌
과 동전이 적지 않게 보인다. (동전은 옥천암에서 부수입거리로 계속 수거하고 있어서 요즘은
별로 안보임) 그래서 불상이 이곳에 깃들기 이전부터 민간신앙의 소박한 현장으로 쓰였을 것
이다.

보도각 앞에는 홍제천과 경계를 이루는 돌담이 둘러져 있었으나 2016년 이후 그 돌담을 밀면
서 정면이 확 트였다. 키 작은 난간이 돌담 대신 둘러져 있으며 난간 바로 앞에는 나무로 다
져진 홍제천 산책로가 닦여져 있고 그 앞 홍제천에는 하얀 피부의 잘생긴 반석들이 가득하다.
한때 시내 경승지로 바쁘게 살았으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비린내 풍기는 하천으로 떨어지면
서 그 반석이 다소 아깝게 되었다. 아비규환의 속세(俗世)를 상징하는 그런 하천을 걱정스럽
게 굽어보며 중생을 걱정하는 불상의 모습은 자식을 걱정하는 어미의 따뜻한 모습 같다.

그의 몸은 온통 새하얗지만 그의 장식물은 특이하게도 주황색으로 되어 있다. (예전에는 모두
하얀색이었으나 이후 금색으로 갈았고 2016년 이후에 주황색으로 갈았음) 오른손에 걸린 팔찌,
삼도(三道) 아래로 커다란 목걸이, 주렁주렁 매달린 장식으로 무거워 보이는 보관(寶冠), 그
리고 귀걸이까지 정말 관세음보살이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 그의 얼굴은 거의 포근한 인상으
로 중생들의 소원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다 들어줄 것만 같다. (현실은 하나도 안들어주
었음)


▲  마애보살좌상의 잘생긴 얼굴과 윗도리

홍제천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은 '一'자 모습으로 지그시 떠 있으며, 긴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닿는다. 살짝 다문 입술은 립스틱을 넘치도록 바른 듯 상당히 찐하다. 보살상의 몸을 덮고 있
는 옷 주름은 세세히 묘사되어 마치 진짜 옷을 걸친 듯 하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선보이고 있고 왼손은 무릎에 대고 있는데 왼
팔이 너무 길어보이며 앉아있는 모습치고는 아랫도리가 좀 넓게 표현되어 신체 균형이 좀 맞
지 않아 보인다.

백불 앞에는 중생들이 기도를 올리며 소망을 슬쩍 내밀고 있었다. 그들의 갖은 소망을 접수만
하느라 힘도 제법 들텐데 표정 하나 일그러지지 않고 한결 같은 표정으로 그들을 맞이하며 소
망 하나라도 누락될까봐 귀를 쫑긋 세운다. 소망이 이루어질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는 모
르지만 그 정성이 백불과 하늘을 감동시켜 나를 포함한 중생들의 소망이 모두 이루어지길 간
절히 기원해 본다.


▲  백불 옆에 자리한 옥천암(玉泉庵)

백불 동쪽에는 그를 든든한 밥줄로 삼은 옥천암이 자리해 있다. 백불이 관세음보살이라 자연
히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칭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3대 관음도량으로 양양 홍련암(紅蓮庵
), 남해 보리암(菩提庵), 강화 석모도 보문사(普門寺)를 꼽는다. 허나 옥천암도 관음도량으로
서의 자부심이 대단한지 비공식적으로 자신들을 포함해 4대 관음도량의 하나로 우기기도 한다.

이곳에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훨씬 이전부터 약효가 있다는 샘물(혹 탄산약수가 아닐까?
)이 있어 환자들이 몰려들었다고 전하며, 그 연유로 옥처럼 맑은 샘물, 옥천암을 칭하게 되었
다고 전한다. 허나 그 약수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진작에 사라졌고, 절 앞을 흐르는 홍제
천 또한 세월에 고되게 대이면서 그런 모습은 이제 전설의 한 토막이 되고 말았다.

이 절은 언제 지어졌는지는 모른다. 다만 인근에 조선 초기까지 잘나갔던 장의사(藏義寺, 세
검정초교에 있었음)와 사현사(沙峴寺) 등의 쟁쟁한 절들이 있어 백불을 관리하는 부속 암자로
지어진 듯 싶으며, 세검정 맞은편에는 혜철선사(惠哲禪師)가 1396년에 태조의 도움으로 세웠
다는 소림사(小林寺)가 있는데, 그 절의 부속암자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모두 부질없는 답이
다.

이곳의 본격적인 사적(事績)이 등장하는 것은 1868년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명으로 정관(
淨觀)이 관음전(觀音殿)을 세워 천일기도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1927년에는 주지 이성우(
李成祐)가 칠성각(七星閣)과 관음전을 지었으며, 1932년에 큰방 6칸과 요사(寮舍) 3칸을 고쳤
다.
1942년에는 주지 동봉(東峰)이 관음전을 수리했으며, 이후 삼성각, 요사 등을 추가로 갖추었
으나 1987년 삼성각이 소실되고 1988년에 법당인 수덕전(修德殿)을 지으면서 삼성각의 기능은
수덕전에 통합되었다. 1989년에 종각을 만들고 1990년 설법전(說法殿)을 지어 요사의 기능도
겸하게 했으며, 1996년에 홍제천에 보도교란 다리를 놓고 1998년에 일주문을 달았다.

북한산(삼각산)의 서남쪽 끝으머리를 잡으며 홍제천변에 둥지를 튼 조그만 절로 절 확장이 좀
어렵다. 바로 동쪽에는 속세의 주택가가 있고 뒤에는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된 북한산(삼각산
) 자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내가 무지 답답하다. 또한 백불 외에는 오래된 문화유산이 없
고 주택가와 접해 있어 산사의 내음은 좀 떨어진다.

* 옥천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1동 8 (홍지문길 1-38 ☎ 02-395-4031)


 

♠  부암동 산모퉁이까페

▲  언덕에 자리한 산모퉁이

창의문(자하문)에서 백석동천(백사실계곡), 능금마을로 인도하는 부암동 산복도로(백석동길)
를 10분 정도 오르면 아담하게 수식된 별장 같은 산모퉁이 까페가 모습을 비춘다. 서울 도심
과 인왕산이 바라보이는 언덕배기에 뿌리를 내린 이 까페는 갤러리를 갖춘 갤러리까페로 2007
년 MBC에서 방영된 드라마 '커피프린스1호점' 촬영지로 유명세를 탄 곳이다.

이곳은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원래는 인사동(仁寺洞)에 있는 목인박물관 유물의 수장고
이자 작업실이었다. 그러다가 커피프린스1호점 촬영지로 절찬리에 쓰이면서 세상에 주목을 받
았고<그 드라마에서 '최한성'이란 인물의 집으로 나왔음> 시청자들로부터 누구나 찾을 수 있
는 공간으로 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하면서 목인박물관장은 갤러리를 갖춘 까페로 꾸며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니까 그 드라마의 후광(後光)으로 어두컴컴했던 창고가 새로운 명소이자 돈을
쓸어 담는 꿀단지로 찬란한 변신을 한 것이다.

많은 까페가 서양식 이름을 쓰는데 반해 이곳은 순수한 우리말인 '산모퉁이'를 까페의 이름으
로 삼았다. 그래서 적지 않게 정감이 간다. 산모퉁이란 이름은 북악산(백악산) 산모퉁이에 자
리해 있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  산모퉁이 2층 라운지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까페 정원에는 문인석을 비롯하여 아시아의 석인상과 동물 모양의 석상(
石像), 조그만 자동차 모형과 옛날 디자인의 노란색 자동차가 뜨락을 채우고 있다. 지하 1층
은 갤러리로 아시아 곳곳에서 가져온 예술품이 진열되어 있어 조그만 미술관을 이룬다. 물론
여기서도 차를 마실 수 있다.

1층에는 카운터가 있으며, 여기서 차를 주문하면 된다. 1층과 2층은 차를 마시는 라운지로 2
층 옥상에는 조망이 일품인 야외데크가 있어 산 아래 펼쳐진 부암동의 전원 풍경과 창의문 너
머로 펼쳐지는 서울 도심을 바라보며 차 1잔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 특히 햇님이 휘장을 치
고 몸을 숨기는 밤에는 서울의 숨막히는 야경(夜景)을 즐길 수 있으며, 분위기를 강조한 까페
라 청춘남녀의 발길도 빈번하다.

이곳에서 파는 것은 커피류와 홍차, 쿠키, 케익 등으로 유명세 때문인지 시중보다 가격은 조
금 비싸다. 얄미운 수준의 가격이지만 이곳의 명성과 분위기 때문에 사람들의 발길은 물처럼
끊기지가 않는다. (영업시간 11시~22시)


▲  까페 뜨락에 놓인 산모퉁이의 모델, 노란 자동차

까페 앞뜨락에는 이곳에 모델이자 상징인 노란 자동차가 바퀴를 접고 쉬고 있다. 드라마에 나
온 차량으로 까페를 찾은 사람들의 모델이 되어주고 있는데, 저 차량을 보는 순간 우리나라가
아닌 20세기 초반 유럽이나 미대륙의 어느 별장이나 집에 들어선 기분이다. 차 하나의 이렇게
기분이 달라지다니 까페 주인의 미적 감각이 대단하다 여겨진다.


▲  까페 현관에 자리한 2마리의 동물상
호랑이로 보이는 저들의 표정은 너무 익살스럽고 밝은 모습이다. 까페의
수입도 상당할 것이니 그래서 기분이 좋은가 보다.

▲  말 모양의 석상 2기

▲  문인석(文人石) 2기와 조그만 장난감 차

▲  커피프린스1호점 촬영 소품과
촬영 장면을 담은 그림 4장

▲  지하1층 현관에 있는 자태가
고운 호랑이상


▲  산모퉁이에서 일행들과 마신 커피들의 집합

커피에는 거품으로 꽃을 비롯한 다양한 문양을 넣어 하나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 문양이 아름
다워 후루룩 마시기에 아까운 마음도 들지만 우리네 인생살이가 바로 저 거품의 문양처럼 부
질이 없다. 문양이 아름답다 한들 얼마나 가겠는가? 흐트러지면 형편없이 사라지는 것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97-5 (☎ 02-391-4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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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겨울에 즐긴 고즈넉한 산사 나들이, 세종시 운주산 비암사 ~~~ (비암사 도깨비도로)


 

' 늦겨울 산사 나들이, 세종시 비암사 '


 

겨울 제국의 기운이 슬슬 꺾이던 2월의 마지막 주말, 세종시 제일의 고찰(古刹)인 비암사
를 찾았다.

비암사가 있는 세종시(世宗市)는 옛 충남 연기군(燕岐郡)으로 2005년 국가 주도의 행정중
심복합도시를 조성하면서 이 땅의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고 존경한다는 조선 세종의 묘호(
廟號)를 따 세종시로 간판을 갈았다. 이때 공주시 장기면과 청원군 부강면이 세종시의 일
원이 되었다. (세종시의 정식 이름은 '세종특별자치시')

주말 오전에 일찌감치 집을 나서 간만에 근성도 테스트할 겸, 1호선 전철을 타고 천안(天
安)까지 쭈욱 내려갔다. 소요시간은 2시간 50분. 방학역(1호선)을 기준으로 무려 115km에
달하는 그 장대한 거리를 딱딱한 전철 의자에 의지하여 가야 되는 고행(苦行)의 길이지만
버스와 전철에 최적화된 뼛속 깊은 서민인지라 별 어려움 없이 근성 시험을 마쳤다.

천안역에서 천안시내버스 700번(안서동↔전의)을 타고 소정면과 함께 세종시의 북부를 이
루고 있는 전의면(全義面)으로 이동하여 전의의 중심인 전의역에서 두 발을 내렸다. 여기
서 다방리로 들어가는 세종시내버스 82번으로 환승, 전의면의 남쪽 산하를 비집고 들어가
비암사입구에 하차했다.


 

♠  비암사 입문 (도깨비도로)

▲  인간의 눈은 정상이 아니었다, 비암사 도깨비도로 (서쪽에서 본 모습)

비암사입구에서 비암사를 향해 10분 정도 들어가면 도깨비도로가 나타난다. 도깨비도로는 인
간의 두 눈이 결코 정상이 아님을 일깨워주는 현장으로 내리막길을 마치 오르막길처럼 보이게
하는 신기한 현상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
이 땅에는 제주도의 '1100도로'를 비롯하여 속칭 도깨비도로가 여럿 있는데, 말로만 듣던 그
런 길을 직접 겪으니 눈이 요상하게 홀린 듯, 신기하다. 내리막길이 분명한데 올라가는 것처
럼 반대로 보이니 말이다.

이 도깨비도로(Mysterious Road)는 좁고 구불구불했던 비암사 길을 2005년부터 2007년 11월까
지 크게 손질하면서 나온 것으로 출발점(시작점 표시가 있음)에서 보면 꽤 오르막길로 보이지
만 실제로는 120cm 낮은 내리막길이다. 그러니 이때만큼은 눈을 믿지 말자.


▲  동쪽에서 본 도깨비도로
이렇게 보면 정말 내리막길처럼 다가오지만 현실은 오르막길이다.

▲  해와 달, 나무의 조그만 거울, 다비숲공원 연못
도깨비도로를 지나 3거리에서 왼쪽(북쪽)으로 들어서면 조그만 연못이 모습을 비춘다.
이곳부터 경내 주차장 직전까지 다비숲공원 영역으로 연못과 3층석탑,
쉼터 등을 갖추고 있다.

▲  다비숲공원 표석

▲  비암사 부도<浮屠, 승탑(僧塔)>

다비숲공원을 지나 주차장에 이르면 왼쪽(북쪽)에 고색이 짙은 석종형(石鐘形) 승탑 2기가 눈
에 들어올 것이다.
이들 승탑 형제는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노란 때가 입혀진 오른쪽 탑은 피부에 '청한당
성정탑(淸閑堂性淨塔)'이라 쓰여 있어 탑의 이름은 성정, 탑의 주인은 승려 청한당임을 알려
준다. 하지만 그의 대한 정보와 탑 조성 시기는 드러난 것이 전혀 없어 한 곡절 아쉬움을 건
넨다.
그리고 왼쪽 승탑은 오른쪽 것과 달리 누구의 것인지는 알려진 것이 없으나 기단부에 '강희갑
오입탑(康熙甲午入塔)'이라 쓰여 있어 1714년)에 탑이 세워졌음을 살짝 귀뜀해주며, '施主俊
祂(시주준야)'란 글씨도 추가로 새겨져 있어 시주자가 '준야'임을 알려준다.


▲  왼쪽 승탑 기단부에 선명하게 새겨진 '강희 갑오 입탑' 6글자

▲  석축 위에 터를 다진 비암사


※ 세종시 제일의 고찰이자, 백제의 마지막 종묘(宗廟)사찰, 운주산 비암사(雲住山 碑岩寺)
운주산의 한참 남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비암사는 백제의 마지막 종묘 사찰로 일컬어진
다. 매년 4월마다 백제 제왕과 대신들에게 백제대제(百濟大祭)를 지내기 때문이다. 그 대제로
비암사는 천하에 조금씩 이름 3자를 알리고 있다.

비암사는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한나라 선제(宣帝) 오봉
(五鳳) 원년인 기원전
57년에 창건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그때면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오기 훨씬 이전이니
100% 맞지가 않는다. 다만 3층석탑에서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국보 106호)'이라 불리는
석불비상(石佛碑像)이 발견되었는데, 그 비상에는 계유년(癸酉年)인 673년 4월 혜명대사
(惠明
大師)가 전씨(全氏)를 비롯한 백제 유민들의 뜻을 모아 백제왕과 대신들, 법계중생들의 안녕
을 위해 만들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어 이를 근거로 673년 창건설이 크게 설득을 얻고 있다.

왜열도와 중원대륙의
많은 지역을 호령하며 천하의 바다를 름잡았던 백제, 허나 달이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660년 7월 나당연합군과 웅진성주(熊津城主)를 비롯한 매국노에 의해 허망
하게
멸망의 비운을 당하자 백제 유민들은 충청도와 전라도, 왜열도에서 치열하게 백제 부흥
운동을 전개했다. 게다가
왜왕(倭王)상국(上國) 백제의 멸망에 크게 곡소리를 내며 서둘러
배를 만들고 군사를 조련해 백제 부흥군을 도왔다.
비암사를 품은
세종시 지역은 백제의 국도(國都)웅진(熊津, 공주) 바로 동쪽 동네로 백
제 부흥군은 세종시 도처에 웅거해 나당연합군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었다. 허나 백제 부흥
군은
지도층의 내분으로 663년 거진 진압되고 만다.

백제 부흥이 물거품이 되자 비암사 주변에 살
았던 전씨를 중심으로 한 유민들은 망국(亡國)
한을 달래고자 673년에 비암사 자리에 백제 왕실의
종묘(宗廟)를 세우고 석불비상을 빚었다.
그리고 그해 4월 15일 비상이 완성되자 제사를 올리니 그것이 비암사의 상징이자 백제를 그리
워하는
이들의 가슴을 치는 백제대제(百濟大祭)이며, 그 연유로 백제의 마지막 종묘 사찰이란
수식어를 달게 되었다. 이후 4월 15일마다 제를 지냈다고 하며, 그 역사가 무려 1,300년이 넘
는다. 지금은 편의상 양력에 지낸다.

673년 창건설 외에도 후삼국시대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나 물증은 없다. 다만 경
내에 고려 때 조성된 3층석탑과 800년 이상 묵은 느티나무가 있어 고려 때도 법등
(法燈)을 유
지했음을 보여주며, 그 이후 뚜렷한
사적(事績)은 전하지 않으나 조선 후기에 편찬된 '전역지
(全域
誌)'에 비암사가 나오고, 경내에 조선 후기에 지어진 극락보전과 괘불 등이 있어 그런데
로 절을 꾸렸음을 보여준다.

1960년에 3층석탑에서 앞서 언급한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과 '기축명아미타불비상(己丑銘
阿彌陀佛碑像, 보물 367호)','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彌勒菩薩半跏思惟碑像, 보물 368호)' 등
이 발견되어 천하에 크게 주목을 받은 바가 있다. 이들은 신변 보호를 위해 모두 제자리를 떠
나 국립청주박물관에 가 있다.
1991년 대웅전을 새로 지어 법당(法堂)으로 삼았고, 1995년 극락보전을 중수하고 산신각과 요
사 2동을 지었다. 그리고 1996년 범종각을 세우고, 2007년에는 절 진입로를 정비했다. (이때
도깨비도로가 태어남)

경내에는 대웅전과 극락보전, 산신각, 설선당, 명부전 등 7~8동의 건물이 있으며, 극락보전과
3층석탑, 소조아미타여래좌상, 영산회괘불탱화 등의 지방문화재와 800년 묵은 느티나무, 조선
후기 승탑 2기 등을 간직하고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한다.
매년 4월 15일에는 백제대제가 성황리에 열리는데, 이때 영산회괘불탱화(세종시 지방유형문화
재 12호
)가 외출을 나와 대제의 분위기를 한층 드높인다. (괘불은 석가탄신일과 일부 행사일
에만 잠깐 모습을 드러내는 비싼 존재임)

* 소재지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다방리 4 (비암사길 137 ☎ 044-863-0230)


▲  비암사 3층석탑과 극락보전


 

♠  비암사 둘러보기 (느티나무, 극락보전 주변)

▲  비암사 느티나무 - 세종시 보호수 8-17호

주차장에서 비암사 경내로 들어서려면 느티나무 옆에 늘어진 돌계단을 올라야 된다. 계단 윗
쪽에는 장대하게 자라난 느티나무가 천하를 굽어보며 중생을 검문하고 있는데, 비암사는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이나 천왕문(天王門)이 없어 돌계단과 느티나무가 그 역할을 조금이나마
해주고 있다.
허나 느티나무가 아무리 기골이 장대한들 겨울 제국 앞에서는 영혼까지 몽땅 털린 가련한 존
재에 불과하다.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며 간절히 봄의 해방군을 열망하는 모습이 석불비상을
만들며 잃어버린 조국을 그리워했던 백제 유민들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이 느티나무는 세종시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로 1972년에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그 당시 추
정 나이가 약 810년이라고 하니 그새 40여 년이 얹혀져 대략 850살 정도 되었다. 지방기념물
이나 국가 천연기념물로 삼아도 손색이 없으나 아직까지 보호수 등급에 머물러 있으니 아무래
도 관련 철밥통들의 보는 눈이 없나 보다. 도깨비도로에 홀린 탓일까?
나무의 높이는 15m, 둘레 7.5m로 방대한 나이에 비해 덩치는 작은 편이며, 잎이 밑에서 피어
나 윗쪽으로 올라가면 흉년, 위에서 아래로 피면 풍년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올해는 과연 잎
이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아무리 전설이라고 해도 사람의 심리상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것이
니 매년마다 바람직한 곳에서 잎이 시작되어 주변 농민들의 마음에 늘 희망의 씨앗을 뿌려주
면 좋겠다. 그것이 비암사와 느티나무의 중생들을 위한 소임일 것이다.


▲  중생들에게 금연을 권하는 비암사 느티나무
호랑이가 담배를 빨다가 폐암으로 죽었다고 한다. 하여 산에 호랑이가 없는 거라고??
이유야 어쨌든 담배는 백해무익한 존재이니 비암사를 찾거나 본글을 접한
흡연 중생들은 다들 금연에 동참해 천수를 누리기를 바란다.

▲  경내로 인도하는 잘 다듬어진 돌계단

▲  계단의 끝에 등장하는 3층석탑과 극락보전

▲  비암사 3층석탑 - 세종시 지방유형문화재 3호

계단을 올라서면 바로 정면에 3층석탑과 극락보전, 오른쪽에는 설선당, 왼쪽에는 범종각과 요
사 등이 경내를 메운다.
극락보전 뜨락에 단정하게 자리한 3층석탑은 땅바닥에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1층 기단(基壇)
과 3층 탑신(塔身), 머리장식 등을 지니고 있다. 1982년에 탑을 손질하면서 기단부를 보완하
고 뒤집어져 있던 석재를 바로 잡았으며, 탑신 지붕돌은 귀퉁이가 살짝 들려져 있고, 밑면에
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신 1층은 2층보다 2배 이상 커서 균형이 그리 맞아보이질 않으며,
밑면의 받침이 4단인 점으로 보아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1960년 탑 꼭대기에서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기축명아미타불비상','미륵보살반가사
유비상'이 발견되어 창건 시기를 몰라 애태우던 비암사의 한줄기 단비를 뿌렸으며, 비상과 느
티나무를 제외하고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로 세종시 출범으로 세종시 지방유형문화재 3호
란 지위를 얻게 되었다. (연기군 시절에는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119호였음)

▲  비암사 설선당(設禪堂)

▲  범종각과 우측 선방(禪房)


▲  비암사 극락보전(極樂寶殿) - 세종시 지방유형문화재 1호

3층석탑이 있는 서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선 극락보전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
타불(阿彌陀佛)의 거처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집이다. 공포(空包)가 평
방(平枋) 위에 촘촘히 박혀있는 다포(多包)양식으로 언제 지어졌는지는 도깨비도 모르는 실정
이나 현재의 건물은 조선 후기에 중건된 것으로 당시 건축 양식을 잘 보여준다.
비록 법당의 역할을 대웅전에게 넘겨주고 2인자로 밀려났지만 법당 건물의 품격을 잘 간직하
고 있으며, 내부에는 소조아미타불좌상과 화려한 닫집,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민화 스타일의
산신탱, 독성탱, 법당의 필수 그림인 신중탱 등이 걸려있다.
이 건물은 연기군 시절에는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79호였으나 세종시가 출범하면서 세종시 지
방유형문화재 제1호란 큼직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  옆에서 바라본 극락보전
지붕에는 겨울 햇살이 잔잔히 내려앉아 경내를 따스하게 어루만지고 있고
살짝 올려진 추녀는 마치 새의 경쾌한 날개짓을 보는 듯 하다.

▲  비암사 소조아미타여래좌상 - 세종시 지방유형문화재 13호

극락보전 불단에는 우람한 모습의 아미타여래좌상이 홀로 자리하여 중생을 맞이한다. 이 불상
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 도금을 입힌 소조상(塑造像)으로 높이 196cm, 어깨 폭
89cm, 무릎 폭 132cm에 이르는 큰 불상이다.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아주 두툼하게 솟아있고, 중간에 반원 모양의 중간계주
(繫柱)가 있다. 머리칼은 꼽슬인 나발로 꼽슬이 꽤 촘촘하게 표현되어 있고, 얼굴은 큰 덩치
에 맞게 푸짐하고 듬직한 인상인데, 볼에 살이 두툼해 거의 사각형에 가깝다. 눈썹은 직선으
로 그어져 있고, 그 사이에 동그란 백호가 박혀있으며, 두 눈은 가늘게 뜨며 정면을 바라본다.
코는 오똑하고 붉은 입술에는 미소가 흐드러지게 피어올라 중생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두 귀
는 중생의 조그만 소리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듯, 어깨까지 늘어졌으며, 두꺼운 목에는 삼도(
三道)가 획 그어져 있다.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양 어깨부터 다리까지 이어져 있고, 어깨는 딱 벌어져 듬직하다. 손
은 아미타9품인(阿彌陀九品印)의 하나를 취하고 있으며 오른쪽 발바닥은 하늘을 향하고 있는
데, 불상의 생김새를 통해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민화(속화)처럼 그려진 독성탱과
산신탱

▲  극락보전의 지킴이, 신중탱



♠  비암사 마무리

▲  대웅전(大雄殿)과 괘불석주, 명부전(冥府殿)

극락보전 옆구리에는 1991년에 지어진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은 극락보전을 대신하여 법당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데, 그 안에는 1년에 딱 1번 백제대제 때만 모습을 드러낸다는 영산회괘
불탱화가 담긴 함이 있다.
이 괘불은 1657년에 화승 신겸(信謙)이 그린 것으로 도상(圖像)의 내용이 그가 1652년에 제작
한 청주 안심사(安心寺) 괘불과 비슷하여 그것을 참고로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 괘불은 대웅
전 앞에 놓인 붉은 피부의 괘불석주(掛佛石柱)에 몸을 기대며 중생의 하례를 받는데, 괘불이
그때만 외출을 하여(석가탄신일에도 외출 가능성 있음) 만나기가 꽤 까다롭듯이 석주 역시 그
때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 외에는 멀뚱히 서 있을 뿐이다.


▲  대웅전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좌우에 자리해 3존불을 이룬다.

▲  석가3존불 옆에 있는 검은 피부의 '기축명 아미타불 비상' 모조품
비암사에서 발견된 3개의 비상 가운데 하나로 진품은 국립청주박물관에 가 있고
모조품이 덩그러니 앉아 진품을 닮아간다.

▲  비암사 명부전(冥府殿)

▲  명부전 지장보살입상

대웅전 우측 옆구리에는 근래에 지어진 명부전이 자리해 있다. 남쪽을 바라보고 선 명부전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의 거처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가 꽤 컬러풀한 스타
일로 그의 좌우에 서 있고, 색채가 고운 지장탱이 그들의 뒤를 받쳐준다.


▲  비암사 산신각(山神閣)
극락보전과 대웅전 사이로 난 계단을 오르면 그 계단의 끝에 1칸짜리 산신각이 있다.
경내에 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1칸짜리 건물로 1995년에 지어졌다.

▲  산신각 산신탱과 산신상

산신각에는 흰 수염을 휘날리며 호랑이를 옆에 품은 산신상과 산신탱 2점이 걸려있다. 산신탱
은 보통 1점만 걸려있기 마련이나 이곳은 무려 2점이나 걸어두어 산신에 대한 각별한 마음과
기대감을 표시했다. 산신상과 산신탱에 묘사된 호랑이는 호랑이탈을 쓴 고양이마냥 귀엽게 다
가온다.


▲  산신각에서 바라본 비암사 경내 (바로 앞 건물이
극락보전의 뒷통수)


비암사를 이리저리 둘러보니 1시간 30분이 훌쩍 지났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절
로 생각했으나 직접 와보니 이게 전부야? 싶을 정도로 조촐한 모습이었다. 극락보전과 대웅전
주변이 전부기 때문이다. 허나 지나치게 겉모습만 추구하며 으리으리함을 강조하는 절보다는
이런 아담한 산사가 적지 않게 정감이 가며, 거기에 고색의 내음도 무척 진하니 정말 금상첨
화가 따로 없다.

이렇게 하여 비암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백제대제를 알았다면 그때를 맞춰서 찾
아와 괘불탱화까지 몽땅 챙겨보는 것인데 그것을 몰라서 다시 와야 될 구실을 만들고 말았다.
아마도 다시 인연을 짓자는 비암사의 지극한 뜻인가 보다. 비암사에 간다면 백제대제가 열리
는 4월 15일이나 산사음악회가 열리는 9~10월에 가는 것을 권한다. 그래야 괘불탱화를 비롯한
비암사의 숨겨진 끼까지 샅샅이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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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 정릉 봉국사 (맛있는 점심공양)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정릉 북한산 봉국사(奉國寺) '

▲  조선 후기에 조성된 봉국사 석조여래좌상


봄과 여름의 팽팽한 경계선인 5월이 되면 3가지의 볼거리가 나를 바쁘게 만든다, 서울연등축
제(연등회)와 석가탄신일, 그리고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특별전이 그것인데, 이중 가장 흥
겨운 것이 석가탄신일(이하 초파일)과 그 1주 전에 열리는 서울연등회이다.  (간송미술관 특
별전 2014년부터 미술관 대신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리고 있음, 특별전 기간도 연장됨)

간송미술관 특별전은 별 인연이 없으면 거르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초파일은 비가 와도 절대
거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불교 신도도 아니고 평소에도 많은 절을 다녀 지금까지 300곳
에 이르는 사찰을 들락거렸지만 초파일에 굳이 순례를 가장한 절 투어를 벌이는 이유는 초파
일의 흥겨운 분위기가 너무 좋기 때문이다. 거기에 공양밥과 떡 등 온갖 먹거리까지 그 흥겨
움을 보탠다. (공양밥 때문에 그럴지도??)

초파일이 다가오자 설레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내가 살고 있는 서울 장안을 대상으로 미답(未
踏)으로 남은 고찰(古刹)을 물색해본다. 초파일 만큼은 멀리 갈 것도 없이 마음 편하게 가까
운 시내 고찰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의 왠만한 고찰과 문화유산을 간직한 근현대
사찰은 거의 가본 터라 아무리 쥐어짜도 적당한 곳이 나오질 않는다.  <문화유산을 소장하고
있지만 개방을 꺼리거나 외지인에게 꽤나 인색하게 구는 곳은 뺐음>
그래서 아주 옛날에 가보거나 1~2번 정도 간 곳을 포함하여 서울 강북 일대를 대상으로 코스
를 짰는데, 이번에는 후배 2명도 같이 가기로 하여 이동이 편하게끔 동선을 고려했고, 그 첫
답사지로 20년 전에 딱 1번 가봤던 정릉 봉국사를 선정했다.

드디어 고대하던 초파일의 서광이 밝았다. 그 서광을 받으며 오전 11시에 길음역(4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국민대로 가는 1213번 시내버스를 타고 봉국사에서 발을 내린다. 봉국사가 비록
도선사(道詵寺), 길상사(吉祥寺) 만큼이나 유명한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중생의 발길이 적지
않은 절이라 일주문부터 사람과 수레가 꼬리를 꼬리를 문다.


♠  봉국사 입문

▲  봉국사 일주문(一柱門)의 뒷모습 - 지붕에 세월이 달아준
푸른 머리칼이 자라고 있다.

서울의 북서쪽과 동쪽을 이어주는 정릉로는 시
내의 주요 간선도로로 수레의 왕래가 빈번하다.
거기에 고가도로로 된 내부순환도로까지 있어
수레의 굉음이 멈추질 않는다. 그런 정신없는
현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선 일주문은 봉국사
의 정문이다.
북한산(삼각산)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지만
내부순환로가 떡하니 앞을 가로막고 있어 그 시
야도 시원치 못하며, 문의 크기가 상당하여 시
작부터 중생의 기를 죽인다. 여기는 그런식으로
속세의 기운을 다스리는 모양이다.
문 앞쪽과 뒷쪽에는 절의 이름(삼각산 봉국사)
이 쓰인 현판이 있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경내까지 200m 정도의 가파
른 오르막이 펼쳐져 다시 한번 중생의 기를 죽
인다. 절이 산중턱에 있고 경내로 인도하는 길
이 일주문을 경유하는 북쪽 언덕길 뿐이라 꿩
대신 닭을 택할 권리는 없다. 그저 자존심을 곱
게 접고 길을 임하는 수 밖에..


▲  천왕문(天王門)과 범종루(梵鍾樓)를 품고 있는 일음루(一音樓)

일주문을 들어서면 2층 규모의 건물이 중생을 맞는다. 1층에는 천왕문 현판이, 2층에는 범종루
현판이 있어, 한지붕 밑에 2개의 서로 다른 공간이 담겨져 있는데, 이 건물을 통틀어 일음루라
부른다. 일음루는 범종루의 다른 이름으로 그 일음(하나의 소리)이란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메세지이다.
이 건물은 1979년 10월에 주지 현근(玄根)이 세웠는데, 일음루 편액과 주련은 청사 안광석(晴斯
安光碩)이 썼고, 천왕문 현판은 여초 김응현(如初 金膺顯)의 글씨이다.


▲  일음루의 뒷모습 - 일음루 현판이 뒷쪽에 달려 있다.

▲  천왕문 사천왕상(四天王像)
천왕문 양쪽에 늘어서 중생을 검문하는 사천왕, 허나 일음루 옆에 수레를
위한 길이 따로 닦여 있어 사천왕의 눈치를 굳이 볼 필요는 없다.

▲  여염집 같은 종무소(宗務所)

일음루를 지나면 주차장이 나온다. 수레를 끌고 온 이들은 여기서 수레를 접어야 되는데, 주차
공간이 넉넉치 못해 바퀴를 동동 굴리는 수레들도 적지 않았다. 어떤 수레 주인은 주차장 관리
요원과 자리를 두고 말싸움을 벌여 석가탄신일의 경건한 분위기를 해치기도 한다. 봉국사가 교
통이 불편한 시골에 있다면 이해라도 하지만 교통편도 괜찮은 서울 한복판에 자리해 있는데, 잠
깐 편하자고 굳이 수레를 끌고와 불편과 혼잡에 기름을 껴얹어야 되는지 모르겠다. 이런 날은
그저 대중교통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주차장을 지나면 길은 180도로 크게 구부러지며, 그 길의 끝에 산중턱에 둥지를 튼 봉국사가 자
리해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봉국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정릉의 원찰(願刹)이자 약사도량(藥師道場), 봉국사(奉國寺)
북한산(삼각산)의 가장 남쪽 산줄기에 자리한 봉국사는 1395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창건했
다고 전한다. 예전에는 1354년(고려 공민왕 3년)에 나옹선사(奈翁禪師)가 창건했다고 우겼으나
근래에는 무학대사 창건설로 완전 굳어진 모양이다.
무학은 이곳에 절을 짓고 약사여래불을 봉안해 약사사(藥師寺)라 했다고 전하며, 1468년에는 세
조(世祖)의 지원으로 절을 중창했다고 전한다.
허나 그 이후 정릉(貞陵)이 복원된 17세기 중반까지 200년 동안 적당한 내력이 없어 창건 시기
에 대한 의구심을 던지게 한다. 게다가 조선 초기 유물은 하나도 없으니 무학이 정녕 창건한 것
인지 아니면 15세기의 세조의 지원으로 지어진 것인지, 정릉이 복원된 이후에 지어진 것인지는
좀더 조사가 필요하다.

봉국사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1669년 이후이다. 태종(太宗)에 의해 260년 가까이 속세
의 뇌리 속에 잊혀져 쑥대밭이 된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정릉을 현종(
顯宗)의 명에 따라 1669년에 복원되었다. 이때 정자각(丁字閣)과 전례청(典禮廳) 등 정릉의 부
속 건물이 새로 지어지고, 인근 경국사(慶國寺, ☞ 관련글 보러가기)와 이곳을 정릉의 원찰로
삼았는데, 이때 나라를 받든다는 착한 뜻에서 봉국사로 이름을 갈았다. 왕실에 더욱 잘보여 절
을 크게 꾸려보겠다는 야심에서 비롯된 소산일 것이다. 참고로 봉국사는 정릉과 같은 산자락에
안겨져 있으며, 정릉에서 바로 북쪽 300m 거리에 자리해 있어 원찰의 자격으로는 충분하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터지자 성질이 난 군인들에 의해 절이 피해를 입었고, 1883년 한
계(漢溪), 덕운(德雲)이 중건했다. 1885년 3월에는 명부전에 지장탱을 조성했으며, 1898년에 운
담(雲潭), 영암(永庵), 취봉(翠峰) 등이 명부전을 중건하고 시왕도를 봉안했다.
1913년에 주지 종능(宗能)과 화주 월하봉연(月荷奉蓮)이 칠성각을 중건했고, 1938년 화주 금파(
錦坡)가 조인섭(趙寅燮)의 시주로 염불당을 새로 지었다. 1979년에는 주지 현근이 2층 크기의
일음루를 세워 범종루와 천왕문으로 삼았고, 1986년에 산신각을 중수하고 만월보전에 신중탱을
봉안했으며, 1991년에 천불전에 신중탱을 봉안했다.
1994년 3월에는 안심당을 새로 마련해 승려와 신도의 수행처로 활용하고 있고, 주지 선관과 신
도들이 합심해 경내에 나무 1,000여 그루와 온갖 꽃을 심어 도량의 분위기를 화사하게 살렸다.
그래서 경내에 제법 나무가 무성하여 산사의 티가 진하게 된 것이다.

일주문이 정릉로 도로변에 있어서 그렇지 일주문과 일음루를 지나면 산사의 내음이 오각을 간지
럽힌다. 정릉로와 내부순환도로가 절 앞에 있고 주택가와 가깝지만 숲에 짙게 둘러싸인 경내는
아늑하고 적막해 깊은 산골에 들어선 기분이다. 지금이야 속세의 기운이 절 밑까지 올라와 실감
이 덜하겠지만 옛날에는 완전 첩첩한 산주름 속이었다. 한양(서울) 도성에서 오려면 동소문<(東
小門), 혜화문(惠化門)>을 나와 아리랑고개를 넘어가야 했는데 워낙 외진 곳이라 호랑이의 등장
이 잦았다.

일주문은 북한산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경내 서쪽과 남쪽, 동쪽은 야산이라 정릉천이
있는 북쪽이 그나마 진입이 쉬웠다. 그래서 그곳에 문을 내고 속세와 왕래했으며, 그 길이 절과
속세를 잇는 유일한 통로이다. 경내는 일주문에서 각박한 오르막길을 200m 올라야 나오는데, 법
당(만월보전)은 지형상의 이유로 동쪽을 향하고 있고, 명부전은 남쪽을 향하고 있다. 법당 뒤쪽
에는 높은 벼랑이 병풍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 벼랑에 독성각과 산신각을 아슬아슬하게 걸쳐놓
았다. 이는 경내 확장이 용이하지 못해 그리 한 것이다.
이렇게 조촐한 경내에는 만월보전을 위시하여 명부전, 천불전, 산신각, 독성각, 납골당인 연화
원 등 약 10동의 건물이 터를 메우고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목조석가여래좌상, 석조여래
좌상, 석조지장3존상과 시왕상 및 권속일괄,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아미타괘불도(서울 지방유형
문화재 351호
), 지장시왕도, 시왕도와 사자상 등 지방문화재 6점을 간직하고 있다. 이들은 2014
년 1월에 한꺼번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받았다.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깝고, 교통편도 양호해 접근성은 진짜 좋다. 몇 시간이나 발품을 팔아
야 되거나 수레도 겁을 집어먹는 깊은 산중의 산사에 가기가 여의치 않을 때 아주 잠깐의 발품
으로 언제든 안길 수 있는 산사(山寺)로 산사의 기운을 나름 진하게 간직하고 있어 속세의 기운
을 잠시 털어버리기에 좋다.

※ 정릉 봉국사 찾아가기 (2015년 5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길음역(3번 출구)에서 171, 1213, 7211번 시내버스를 타고 봉국사 하차
* 지하철 4호선 미아3거리역(1,6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길음역(7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에서 153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6호선 고려대역 4번 출구에서 1213번, 6번 출구에서 7211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4번 출구)에서 7211번 시내버스 이용
* 경내에 주차장 있음 (주차장까지 진입 가능)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2동 637 (정릉로 202 ☎ 02-919-0211~2)
* 봉국사 홈페이지(연화원 포함)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초파일 분위기에 잠긴 봉국사 경내


♠  봉국사 만월보전, 명부전 주변

▲  봉국사의 법당인 만월보전(滿月寶殿)

경내로 들어서니 사람들로 진짜 봐글봐글하다. 때가 점심시간이라 공양밥을 먹고자 사람들이 만
월보전 뜨락에 길게 꼬리를 물고 있는데, 지금 그 꼬리에 동참을 하더라도 공양밥이 내 손에 오
기까지는 30분 이상은 걸릴 것 같았다. 그래서 밥은 나중에 먹고 일단 경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사람들로 가득한 뜨락을 말없이 굽어보고 있는 만월보전은 이곳의 법당이다. 정면 5칸, 측면 3
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큰 불전(佛殿)인데, 만월보전이란 약사전(藥師殿)의 다른
이름으로 약사여래(藥師如來)의 거처이다. 봉국사가 약사도량을 칭하다보니 자연히 약사여래와
그의 거처가 절의 중심이 되었다.

만월보전은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건물은 근래에 새롭게 손질한 것이다. 만월
보전 현판은 조선 후기 것으로 지금은 종무소에 있으며, 그 글씨를 확대한 새 현판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  만월보전 불단에 봉안된 불상과 용이 그려진 기둥
불단 가운데가 석조여래좌상, 왼쪽에 보관을 쓴 이가 관음보살,
오른쪽은 목조석가여래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4호)


만월보전 불단에는 이곳에 주인으로 약사불로 통하는 석조여래좌상을 가운데에 두고 그 좌우에
관음보살과 목조석가여래좌상을 배치했다.
이중 목조석가여래좌상은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어깨가 넓고 둥글며, 머리를 앞으로
살짝 수그려 굽어보는 듯한 자세를 하고 있고, 간략해진 옷 주름으로 신체 윤곽이 뚜렷하고 부
피감이 있어 보이는 점으로 보아 18세기 중/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해맑은 표정의 만월보전 석조여래좌상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7호

봉국사의 든든한 밥줄인 석조여래좌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석불로 정확한 시기는 전해오지 않
는다. 불상의 얼굴은 거의 동그랗고 볼에는 살이 좀 있어 보이며,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
러져 선의 미학을 선사한다. 눈썹 사이에는 백호가 살짝 찍혀 있고, 두 눈은 가늘고 살며시 뜨
며 중생과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진 제물을 바라본다. 코는 끝이 두툼하고 붉은 입술은 얼굴 크
기에 비해 지나치게 작은 감이 있으나 입술에 드리워진 미소는 얼굴 전체를 환하게 만든다.
두 귀는 중생들의 소망을 모두 경청하려는 듯, 어깨까지 늘어졌으며, 머리칼은 꼽슬인 나발이고,
그 가운데에 하얀 무견정상(無見頂相)이 솟아 있다.
목에는 불상에 흔한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지 않고, 몸에 걸친 옷은 어깨를 감싼 통견
(通肩)이
다. 가슴 밑에는 군의(裙衣)가 보이는데, 그 옷깃과 띠가 직사각형으로 정형화되어 표현된 것은
조선 후기 불상에서 많이 나타나는 양식이다.
두 손은 다리 위에 모아 금색이 칠해진 무엇인가를 소중히 들고 있는데, 이는 약사여래의 필수
품인
약합(藥盒)로 근래에 금색을 입혔다.

불상을 만들 때 해맑은 동자승을 모델로 하지 않았을까? 그의 동그란 얼굴은
해맑고 귀여워 보
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웃음의 꽃을 머금게 한다. 아무리 세상이 즐거움과 웃음을 앗아가도 그
는 그 웃음을 되찾아주고 치료해주는 의원인 셈이다. 약합보다는 그의 얼굴이 그야말로 약이다.
자신을 보며 늘 웃어주고 밝은 표정을 지어주는 불상 앞에 어느 누가 즐겁지 않으리..? 찰거머
리같은 번뇌도 속세의 부정한 기운도 그 앞에서는 모두 털리게 되어있다.

이 약사불은 도금을 입히지 않고 원초적인 돌의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신체 비례도 거
의 맞고 세부 묘사도 충실해 조선 후기 불상 가운데 괜찮은 작품으로 점수를 받고 있다. 특히나
해맑은 얼굴과 미소는 보물급으로도 손색이 없다. 다행히 조선 후기 서울/경기 지역에서 유행했
던 도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뒤늦게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  석조여래좌상과 석가후불탱화

▲  호법신(護法神)을 있는데로 끌어 담은 신중탱
법당에 필수적으로 걸어놓는 신중탱은 법당 수호를 목적으로 한다.
허나 그림에 그려진 이들이 너무 많아 누가 누군지 정신이 없다.

▲  봉국사 5층석탑
만월보전 뜨락에 날씬한 몸매의 5층석탑 2기가 서있다. 이들은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저들 이전에는 경내에 그 흔한 탑도 없었다.

       ◀  천불전(千佛殿)과 느티나무
남쪽을 바라보고 선 천불전은 석가3존불과 조그
만 금동불 1,000상을 봉안하고 있다. 이들이 합
심하여 금빛을 발산하니 그 찬란함에 눈이 마비
될 지경이다.
천불전 앞에는 60여 년 묵은 느티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
무 9호
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높이는 약 16m
정도로 경내에 있는 나무 가운데 가장 으뜸이다.


▲  천불전을 장식하고 있는 석가3존불과 조그만 금동불 1,000상의 위엄
조그만 불상은 중생들의 돈으로 조성된 원불(願佛)이다. 즐거운 초파일을 맞이하여
후하게 차려진 제물을 바라보며 봉국사 승려를 대신하여 흐뭇한 미소로 답을 한다.

▲  천불전 옆에 자리한 안심당(安心堂)
승려와 신도들의 수행을 위해 1994년 3월에 지어졌다.

▲  봉국사의 보물 창고, 명부전(冥府殿)

만월보전의 옆구리를 뚫어지라 바라보는 명부전은 조선 후기에 지어졌다. 지금의 건물은 1989년
에 중건된 것인데, 내부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조지장3존상과 시왕상, 지장시왕도, 시왕도,
사자도 등이 푸짐하게 봉안되어 있어 경내의 보물 창고나 다름이 없다.
특히 건물 현판은 가로가 아닌 세로로 걸린 것이 이채로우며, 현판의 색깔도 검은색이 아닌 붉
은색 바탕에 금색으로 된 것이 꽤 돋보인다. 이런 현판은 여기서도 가까운
흥천사(興天寺) 명부
전(☞ 흥천사글 보러가기)에도 있어 무슨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보니 거기 명부전과
여기 명부전이 너무나 닮았다.


▲  명부전 석조지장3존상과 시왕상, 권속일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5호
그 뒤에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2호

명부전 불단에 봉안된 조그만 지장3존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다. 금동 옷을 입은 지장보살상
은 녹색 승려머리로 조금 매서운 맵시로 앉아있는데, 북한산(삼각산) 동쪽에 있는
본원정사(本
精舍) 지장보살상과 비슷한 모습이다. (☞ 본원정사글 보러가기)
지장보살 옆에는
도명존자(道明尊者)무독귀왕(無毒鬼王)협시(夾侍)해 있는데, 얼굴이 좀
순하고 단정해 보인다. 그들 뒤에는 1885년에 제작된 지장시왕도가 든든하게 걸려있고, 그 좌우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인 시왕상을 비롯하여 판관(判官), 녹사, 시자상, 동자상, 인
왕상 등이 거의 빠짐없이 자리를 메운다. 시왕도와 사자도는 1898년에 그려진 것으로 19세기 후
반 불화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명부전 시왕상과 시왕도
밑줄에 자리한 상은 판관, 녹사, 시자상

◀  호랑이탈을 쓴 고양이처럼 귀여운
인왕상(仁王像)과 사자도
(시왕도와 사자도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3호)


♠  봉국사 마무리

▲  산신각이 달려있는 경내 뒤쪽 벼랑

만월보전 뒤쪽(서쪽)에는 거의 80도 가까이 솟은 벼랑이 병풍처럼 자리해 있다. 그 옹색한 곳에
계단을 내고 좁은 자리를 간신히 닦아서 독성각과 산신각을 내는 기적을 내었는데, 산신각은 각
한 계단을 1분 정도 올라야 된다.
봉국사가 이런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산신각을 걸친 것은 경내가 썩 넓지가 않고,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에 산신각이나 삼성각을 두는 원칙 때문이다. 그래서 욕심을 내어 벼랑 윗부분
에 자리를 닦은 것이다.

산신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예전에는 광응전(光膺殿)이란 생소한 이름으로
불렸다. 산신각이니 당연히 산신(山神) 할배가 중심이 되야겠지만 중심은 엉뚱하게도 약사여래
상이 차지하고 있으며, 산신과 관음보살상이 그 좌우에 자리해 있다. 아무래도 이곳이 약사도량
을 내세우다보니 경내에서 가장 높고 험준한 이곳까지 약사여래를 둔 모양이다.

이곳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각박하지만 다행히 거리는 짧아서 그런데로 올라갈 만하다. 경내에
서 가장 하늘과 가까워 조망은 좋을 것 같지만 숲의 패기가 드높아 조망은 썩 좋지 못하다. 숲
에 가려 경내와 정릉동 일부가 보이는 것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건물 주변이 낭떠러지라
추락사고의 위험도 늘 도사리고 있으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뒷탈이 없다. 사고가 나면 제아무리
영험하다는 산신, 약사여래라도 구제해주지 못한다.

▲  계단 끝에 자리한 산신각

▲  산신각 중수 공덕비(功德碑)


▲  산신각 식구들 (왼쪽부터 산신, 약사여래상, 관음보살)
이들과 후불탱화는 모두 근래에 조성되었다. (산신각도 마찬가지)

▲  산신각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울창한 숲에 가려 보이는 것은 별로 없다.

▲  독성각(獨聖閣, 위쪽)과 용왕단(龍王壇, 아랫쪽)

▲  용왕단 (독성각 바로 밑에 있음)

월보전과 산신각으로 인도하는 계단 입구 사이에 용왕단이 자리해 있다. 말그대로 용왕(龍王)
의 거처로 용왕과는 전혀 관련도 없어보이는 이런 산속에 그의 공간이 있다는 것이 참 이채롭다.
바다 용왕이 바다에서 먼 이런 산골까지 무슨 볼일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
이곳에 용왕단을 세운 것은 지금은 제대로 안나오지만 약수터를 지키고자 세운 것이다. 용왕이
라고 해서 꼭 바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물이 미치는 모든 곳이 그의 관리 영역이다. 허나 독
성, 산신과 달리 번듯한 건물이 아닌 노천에 있어 절에 봉안된 다른 존재와 크게 차별을 두었다.
용왕의 거처는 둥근 초석을 깔고 그 위에 나무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에 용이 새겨져 있으나 색
이 퇴색해서 제대로 안보면 지나치기 쉽다. 마주보는 용머리 위에 기둥을 세우고 기와를 올렸는
데, 이는 최근에 세운 것이며, 그 안쪽을 파서 얕은 감실(龕室)을 두고 거기에 용을 탄 용왕을
봉안했다.


▲  벼랑 위에 둥지를 튼 독성각

용왕단 위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독성각이 벼랑 바위에 아찔하게 걸터 앉아있다. 이곳은 독성(獨
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근래에 조성된 독성상과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독성각을 가려면 만월보전 좌측에서 올라가야 되는데, 산신각보다는 접근이 쉽다. 다만 건물 정
면 바깥은 벼랑이기 때문에 내부에서 괜히 뒷걸음질하다가 자칫 골로 가는 수가 있다. 건물 크
기도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손바닥만한 규모라 3명만 들어가도 숨쉬기 힘들다. 추락을
염려하여 2줄로 안전 난간을 둘렀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해 보인다.


▲  독성상과 독성탱 - 초파일 특수로 그에게 올려진 제물이 꽤 풍족하다.
며칠 동안 독성 식구들 제대로 회식했을 듯~~

▲  독성각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 오른쪽 녹색 천막에서는 전을 팔고 있었다.

▲  봉국사에서 먹은 점심 공양의 위엄

국사를 정신없이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3시가 되었다. 경내도 다 구경했으니 이제 점심을
먹으며 지친 몸을 달래줘야 되겠지. 공양줄도 제법 줄어든 상태라 줄에 동참하여 공양을 받았다.
이곳 공양은 다른 절집과 비슷한 비빔밥이다. 밥과 갖은 나물, 고추장이 그릇에 담겨
이들을
비벼먹으면 되며, 작은 그릇에는 물김치가 담겨져 있다. 그리고 떡도 1봉지씩 나눠주면서 후식
도 배려했다.

공양을 받는 건 좋으나 경내가 사람들로 가득하다보니 밥먹을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산
신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간신히 자리를 잡고 즐거운 공양시간을 갖는다. 이들 공양밥 외에도
전과 간식도 있는데, 이들은 돈 주고 사먹어야 된다. 전 1장은 1~2천원선, 후배 1명이 전을 2장
사와서 같이 먹었다. 한참 배가 고플 시간이고 바깥에서 소풍 나온 듯 밥을 먹으니 밥과 물김치,
전이 모두 꿀맛 같다. 밥에 담긴 고추장은 양이 적당하여 모두를 붉게 물들이는데 충분했고, 물
김치는 맛이 시원하여 이내 바닥을 드러냈다.

그렇게 즐겁게 점심 공양을 마치고 봉국사를 뒤로하며 다음 절로 이동했다. 이날 우리의 갈 길
은 아직 멀었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만 둘러보고 끝낼 수도 있지만 달랑 1곳으로 초파일 절투어
를 땡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1년에 딱 하루 있는 날이니 이날만큼은 좀 무리하여 초파일 분위
기를 내내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봉국사 글은 여기서 끝 ~~~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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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5월 2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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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탄신일 기념 절 나들이 ~ 늘씬한 숲길과 많은 보물을 간직한 고색의 절집, 정릉 경국사

 


' 석가탄신일 기념 절 나들이 ~ 정릉 경국사(慶國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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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국사 숲길


올해도 변치않고 찾아온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이하 초파일)을 맞이하여 설레는 마음을 다독
이며 순례(巡禮)를 가장한 초파일 절 나들이에 나섰다.
우선 서울에 얼마 남지 않은 미답(未踏)의 절을 하나라도 지우고자 수유리에 있는 본원정사(本
願精舍, ☞ 관련글 보러가기)를 둘러보고 맛있는 점심 공양으로 배를 두둑히 충전한 다음 정릉
동(貞陵洞)에 있는 경국사로 발길을 향했다.

본원정사에서 경국사까지는 10리도 안되는 가까운 거리임에도 차편이 시원치가 못하다. 그래서
절 인근에서 바퀴를 돌리는 강북구 마을버스 02번(본원정사↔수유역)을 타고 일단 화계사(華溪
寺)로 나왔다. 화계사는 봉은사(奉恩寺)와 조계사(曹溪寺), 도선사(道詵寺), 진관사(津寬寺)와
더불어 서울 굴지의 사찰이라 폭풍처럼 몰려드는 사람과 수레로 그야말로 대혼돈이었다.
수레들로 완전 마비가 된 화계사입구(한신대)4거리를 간신히 뚫고 화계사종점으로 이동해 서울
시내버스 152번(화계사↔경인교대,삼막사4거리)을 타고 길음역에서 143번 시내버스(정릉↔개포
동)로 환승하여 경국사(정릉4동 주민센터)에 두발을 내린다
(152번을 타고 삼각산동SK아파트 반대편 정류장에서 1166번으로 환승하면 바로 정릉4동으로 넘
어갈 수 있으나 배차간격이 20~30분임;;)

버스에서 내려 북쪽(북한산 방면)을 바라보면 경국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그 지시에 따
라 왼쪽 길로 들어서면 정릉천에 걸린 극락교가 나오는데, 그 다리를 건너면 조그만 주차장과
함께 일주문이 모습을 비춘다. 앞서 둘러본 본원정사는 초파일 대목이라 사람들이 무지 많았는
데, 경국사는 오늘이 초파일인지 물음표를 던질 정도로 한산했다.


▲  속세와 경국사를 이어주는 유일한 다리 극락교(極樂橋)

▲  경국사와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정릉천(貞陵川)

북한산 정릉계곡에서 발원해 큰 세상으로 흘러가는 정릉천은 가뭄의 갈증에 신음하고 있다. 하
천의 물은 누가 죄다 마셨는지 온데간데 없고 돌과 모래만이 가득해 속세처럼 황량하기만 하다.
무게가 아리송한 번뇌를 정릉천에 쿨하게 내던지고 싶은데 액체는 커녕 고체만 보이고 있으니
아무리 던져봐야 소용도 없을 것 같다, (물론 던져도 마찬가지)


♠  경국사 숲길에서 번뇌를 훌훌 털다

▲  경국사 일주문(一柱門)

극락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향하면 바로 눈앞에 경국사의 정문인 일주문이 마중한다. 문이 바로
코앞에서 나를 뚫어지라 굽어보니 안그래도 큰 문이 더욱 장대하게 보여 단단히 주눅을 들게 만
든다. 돌로 만든 굵직한 기둥에는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이 섬세하게 새겨
져 있어 문의 위엄을 더욱
돋구고 있으며, 지붕 밑에는 '삼각산 경국사'라 쓰인 현판이 걸려있
어 이곳의 정체를 밝힌다.

  극락교 가설기념비(架設記念碑)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왼쪽에 있다.


▲  경국사의 싱그러운 보물, 경국사 숲길

일주문을 들어서면 산내음이 진동하는 푸른 숲길이 수채화처럼 아름답게 펼쳐진다. 경국사의 첫
이미지를 긍정으로 인도하고 속세에서 오염된 안구에 한줄기 감동을 선사하는 이 숲길은 이곳의
자랑이자 싱그러운 보물로 비록 거리는 짧으나 서울에 있는 숲길 중의 갑(甲)으로 쳐주고 싶다.
이 숲길은 300년 묵은 소나무까지 100m 정도 곧게 펼쳐져 있고 거기서 서쪽으로 100도 정도 꺾
여 경내로 이어진다. 숲길의 길바닥은 다행히 콘크리트로 밀지 않고 박석(薄石)을 깔아 숲길의
운치를 전혀 해치지 않았다. (흙길이었으면 더 좋으련만..)

숲길에 들어서니 속세(俗世)에서 오염되고 피로감에 찌든 두 눈이 싹 정화되면서 단단히 호강을
누린다. 하늘로 늘씬하게 솟아 하늘과 해를 가린 나무들이 저마다의 빼어난 자태를 뽐내며 앞다
투어 갖은 청정한 기운을 베푸니 머리와 마음마저 어느 정도 정리되는 것 같다. 경국사가 경내
를 앞에 두고 이런 멋드러진 숲길을 내민 것은 극락교와 일주문에서도 살아남은 번뇌와 속세의
기운을 자연의 힘에 의지해 모두 털고 경내에 임하라는 뜻이다.

▲  정처가 없는 내 마음을 제대로 앗아간 경국사 숲길
집으로 몰래 가져와 나 혼자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숲길이다. 허나 조물주가 아닌 이상
그건 불가능하니 사진으로 대신 품으련다. 이 숲길은 봄도 아름답지만 나무들이
처절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늦가을이 단연 백미(白眉)이다.


▲  300년 묵은 소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11호

숲길이 서쪽으로 100도 구부러지는 곳에 숲길의 최고 고참인 소나무가 있다. 나이가 무려 300년
이 넘었다는 오래된 나무로 몸매도 매우 준수하여 키가 무려 20m를 넘는다. 제아무리 잘난 인간
이나 4발 수레도 그의 앞에서는 거의 개미에 불과하다.

하늘을 떠받들며 숲길을 다스리는 이 나무는 매우 지극한 나이임에도 그 흔한 보호수 등급이 아
닌 겨우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등급에 머물러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편
의상 지정하는 등급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 싶겠지만 서울에서는 100~150년이 넘는 나무 가운데
지방기념물 이상의 지위를 가지지 못한 나무들은 거의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300년
이면 100% 보호수로 지정되고도 남을 연세인데 그에 상응하는 적당한 등급을 매겨야 되지 않을
까 싶다. 소나무 앞에는 수레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이 있다.


♠  경국사를 빛낸 큰 승려의 승탑을 만나다

▲  승탑(僧塔)과 탑비들의 보금자리

소나무 북쪽에는 승탑 2기와 비석(碑石) 3기로 이루어진 너른 공간이 있다. 다들 고색의 때가
얇은 존재로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그냥 지나치기 쉽다. 허나 이들 승탑은 우리나라 현
대 불교 발전에 크게 빛을 선사한 승려 2명의 사리탑으로 경국사에서도 매우 비중이 큰 인물들
이다. 그러니 한번 더듬고 가길 권한다.
비석 가운데 가장 왼쪽에 있는 큰 존재가 경국사의 오랜 내력이 담긴 사적비(事蹟碑)로 1995년
에 지관이 만든 것이다.


▲  자운대율사 계주원명사리탑(戒珠圓明舍利塔)

모난 넓은 기단 위에 마치 범종(梵鍾)이 그대로 돌로 굳어버린 듯한 모습의 석종형 승탑은 자
운대율사(慈雲大律師, 1911~1992)의 사리탑으로 탑 이름은 계주원명사리탑이다.

자운대율사는 왜정(倭政) 이후 계율을 무시하고 아내를 맞이해 가정을 꾸리며, 심지어 고기까지
먹는 등, 불교가 타락의 끝으로 추락하는 모습에 크게 발끈하여 불교 중흥과 율풍(律風) 진작에
팔을 걷어부쳤다.
그는 1940년부터 서울 도심에 있는 대각사(大覺寺)에 머물며 율장과 관련 자료를 찾기 위해 매
일 도시락을 싸들며 국립중앙도서관을 들락거렸다. 그래서 만속장경(卍續藏經)에 수록된 오부율
장(五部律藏)과 그 주소(註疏)를 모두 필사해 연구했으며, 1948년 문경 봉암사(鳳巖寺)에서 처
음으로 보살계(菩薩戒) 수계법회를 열었다.

1949년에는 천화율원 감로계단(千華律院 甘露戒壇)을 설치해 대각사에서 범망경(梵網經), 사미
율의(沙彌律儀), 사미니율의(沙彌尼律儀), 비구계본(比丘戒本) 등의 간행을 준비했으나 6.25전
쟁으로 모두 분실하고 만다. 허나 이에 굴하지 않고 부산에서 다시 율문(律文)을 준비하여 한문
본(漢文本) 25,000권을 포함해 총 48,000권을 간행해 불교의 법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리고 1981년부터 단일계단 전계대화상에 추대되어 1991년까지 많은 승려에게 계를
주었으며, 1992년 2월 7일 해인사(海印寺)의 부속암자인 홍제암(弘濟庵)에서 바쁘게 살아온 삶
을 마무리 지었다.
자운이 세상을 뜨자 그와 인연이 있던 경국사에서 그의 승탑을 만들었는데, 2년 동안 공을 들여
2005년에 완성을 보았다. 승탑은 그의 명성과 업적에 걸맞도록 특별하게 계단형(戒壇形)으로 만
들어 두고두고 그의 업적을 기린다.

자운대율사 사리탑 뒤쪽에 자리한 고운 맵시의 승탑은 보경보현대종사(寶鏡普賢大宗師)의 사리
탑으로 정토사지(淨土寺址)에 있던 고려시대 승탑인 홍법국사실상탑(弘法國師實相塔)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 그리고 승탑 바로 옆에 자리한 보경의 행적비는 1991년 지관이 찬(撰)을 하고
세운 것으로 그의 일대기가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있다.

보경은 1916년 이곳 주지가 되어 60여 년 동안 경국사를 꾸린 인물로 교학(敎學)과 선지(禪智)
를 두루 익혔고, 계율에도 무지 철저해 승가의 귀감이 되었다. 특히 불화(佛畵)를 잘 그려 화승
(畵僧)으로도 널리 활동을 했는데, 경국사의 불화 상당수는 그의 손길에서 탄생한 것이다.


▲  펼쳐진 책 모양의 불교대사림(佛敎大辭林) 편찬발원문

불교대사림(불교대사전)은 지관이 오랫동안 추진한 편찬 사업으로 10여 권을 편찬했다. 이 발원
문은 지관이 정성을 들여 작성한 것인데, 그 내용에서 그의 지성이 제대로 우러나온다.


▲  경국사 샘터
자연이 내린 샘물의 보금자리로 깊이가 좀 있어서 바가지를 들고 한참 팔을
뻗어야 물에 닿는다. 샘터 위에는 광배(光背)를 갖춘 조그만 석불입상 3개가
있고, 그 뒤에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 쓰인 표석 3개가 나란히 자리한다.

▲  경내로 인도하는 오르막 숲길 (샘터 주변)

◀  보리수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12호
 (나무 너머로 보이는 건물은 관음성전)

주차장에서 서쪽으로 휘어진 오르막길을 오르면
숲속에 숨겨진 경국사가 모습을 비춘다.
경내 앞에는 넓은 공터가 펼쳐져 있는데, 초파
일 행사가 막 끝났는지 천막과 의자로 어수선하
다. 공양밥도 바로 여기서 제공했는데, 본원정
사에서 공양을 먹은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지
만 다시 시장기가 밀려와 공양 여부를 물어보니
벌써 마감되었다고 그런다.

이곳에는 3갈래로 솟은 커다란 나무가 있는데,
그는 불교에서 매우 중요시 여기는 보리수나무
이다. 나이는 200년에 이른다고 하며, 앞에 소
나무처럼 보호수 등급도 아닌 성북구의 아름다
운 나무 등급에 머물러 있다. 서울에 거의 흔치
않은 오래된 보리수인데도 말이다.


♠  경국사 관음성전(觀音聖殿)

▲  관음성전의 정면
담장 너머 윗쪽이 관음성전, 천막이 있는 밑쪽이 공양간이다.


▲  관음성전의 뒷모습

보리수나무 뜨락에서 관음성전 좌우로 나있는 계단을 오르면 비로소 경내에 이르는데, 가장 먼
저 중생을 반기는 건물은 보리수나무를 바라보고 선 관음성전이다. 이 건물은 흔히 말하는 관음
전(觀音殿)으로 이 절은 유난히 '聖'과 '寶' 돌림을 좋아하는지, 그 글자가 첨가된 건물이 많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관음성전은 옛 무량수각(無量壽閣) 자리에 2000년대에 새로 지은 'ㄷ'모양
의 건물로 관음보살의 거처이다. 건물이 워낙 넓어 큰방이라 불리기도 하며, 법회와 강의 장소
로 쓰이기도 한다. 그리고 바로 밑에는 넓게 자리를 파고 공양간으로 삼으면서 졸지에 2층이 되
버렸다.

관음성전 정면에는 불당에서 흔치 않은 툇마루가 있어 두 다리를 잠시 쉬어갈 수 있으며, 연병
장처럼 넓은 건물 안에는 목관음보살좌상과 아미타후불탱, 감로도 등의 여러 탱화를 비롯해 중
생들의 시주로 만들어진 무수한 원불(願佛)이 일제히 금빛 물결을 이루며 내부를 장엄한다. 또
한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이 쓴 '화엄회(華嚴會)', '법화회(法華會)' 현판과 이
승만이 쓴 '경국사' 현판이 걸려있다.


▲  관음성전의 중심부

▲  경국사 목관음보살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8호

관음성전 불단에는 이 건물의 주인인 관음보살좌상이 자리해 있다. 어린 동자승이 관음보살 누
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의 보관(寶冠)과 복장, 장식물을 슬쩍 착용한 것일까? 아니면
잠시 관음보살 체험을 하는 것일까? 표정이 어린아이처럼 해맑고 천진난만하다. 게다가 덩치도
쥐방울만하니 귀여움도 가득 묻어나 나도 모르게 쓱쓱 쓰다듬고 싶다.

이 불상은 원래 경국사 것이 아니었다. 1703년 전남 영암 도갑사(道岬寺)에서 조성된 것으로 도
갑사의 부속암자인 견성암(見性庵)에 있었다. 청신(淸信)이 화주가 되어 만든 것으로 어찌어찌
하여 서울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었는데, 자세한 사연은 모르겠다. 덕분에 경국사의 오랜 문화유
산이 하나 더 늘었으니 경국사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지, 그가 경국사에 들어온 이후에는 한동안
극락보전 우측에 있던 것을 관음성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불상의 높이는 60cm에 조그만 크기로 그의 뱃속에서 발견된 발원문(發願文)에 따르면 색난(色難
)을 수조각승(首彫刻僧), 순경(順瓊)을 부조각승으로 하여 행원(幸垣), 대원(碓遠), 일기(一機),
대유(大裕) 등이 같이 조성했다고 한다. 색난은 조선 후기에 호남지역에서 활약한 불상 전문 승
려이다.

앳된 표정이 묻어난 얼굴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는데,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으며, 눈은 살
짝 뜨고 있는 것 같다. 코는 끝이 오똑하고, 입은 굳게 다물고 있으며, 머리에는 화려하면서 신
라 금관(金冠)처럼 무거워 보이는 보관을 썼는데, 귀 옆까지 관대자락이 내려와 보관의 수려함
을 더욱 드높인다. 그런 보관 밑으로 검은 머리카락이 삐죽 나와있는데, 이마 중간에는 백호가
찍혀 있으며, 볼살은 두툼하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다.
신체는 그런데로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작은 어깨에는 법의(法衣)가 걸쳐져 있는데, 목 뒷부분
이 약간 접혀있고, 법의의 왼쪽은 어깨를 완전히 가리고 어깨부터 무릎까지 내려오면서 무릎 위
에 놓인 왼손을 손목부분까지 완전히 덮고 있다. 그리고 법의 오른쪽은 어깨를 덮은 뒤 오른쪽
팔꿈치 아래로 하여 배 부근으로 내려가 왼쪽에서 내려온 법의 안쪽으로 여며진 모습이다. 이런
착의법은 넓게 트인 가슴과 수평 혹은 연꽃형의 군의 표현과 함께 조선 후기 불상의 가장 전형
적인 모습이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고 첫째 손가락과 3째 손가락을 마주잡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에 대고 그
의 필수품인 정병(政柄)을 살짝 쥐고 있다. 앉은 폼은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오른쪽 발이 훤히
드러나 있으며, 무릎 앞쪽으로는 옷자락이 물결치듯이 좌우로 유려하게 흘러내렸다.

조선 후기 목조보살상의 양식을 잘 드러낸 불상으로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혔으며, 그의 뒤에
는 아미타불이 중심이 된 아미타후불탱이 든든한 후광이 되어준다. 이 후불탱은 1924년에 보경
이 그린 것이다.


▲  경국사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1호

관음성전 우측 벽에는 고색의 기운이 제법 넘치는 매우 복잡한 그림이 하나 있다. 이 그림은 죽
은 이의 극락왕생을 염원하고자 만든 감로도로 19세기 중/후반에 서울,경기 지역에서 크게 유행
한 감로왕도(甘露王圖)의 하나이다.
그림을 보면 밑부분은 극락왕생을 못해 방황하는 영가(靈駕, 죽은 사람)들이 그려져 있고, 중간
에는 그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후손들이 있다. 그리고 가장 윗쪽에는 극락으로 들어간 영가의 환
희가 담겨져 있다.

무수히 많은 인물의 표현과 생동감있는 자세 연출로 조금의 공백도 허용치 않고 알차게 채우고
있으며, 서울,경기와 강원도에서 활동했던 화승(畵僧)인 축연과 철유가 상궁(尙宮)들의 시주로
1887년경에 그린 것으로 왕실의 불화 발원 사례를 잘 보여준다. 조선이 비록 대내외적으로는 불
교를 배척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적지 않게 불교를 옆구리에 낀 것이다. 특히 19세기부터 1910년
이전까지 상궁은 물론 왕비와 후궁의 시주로 그려진 불화가 서울과 경기도 사찰에 상당히 존재
한다. 그럼 여기서 잠시 경국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자칫하면 그냥 넘어갈 뻔 했다.

★ 정릉의 원찰이자 현대 불교의 큰 승려들이 주석했던 북한산 경국사(慶國寺)
북한산(삼각산)의 제일 남쪽, 정릉천을 낀 숲속에 둥지를 튼 경국사는 1325년(고려 충숙왕 12년
)에 자정율사(慈淨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절 위치가 북한산 청봉(靑峰) 밑이라 절 이
름을 청암사(靑岩寺)라 했으며, 1330년 무기(無奇)가 이곳에 머물러 천태종(天台宗)의 교풍을
크게 떨치고, 1331년에는 채홍철(蔡洪哲, 1262~1340)이 절을 증축해 승려들의 수행을 도왔다고
한다.
허나 이를 입증할 공식적인 기록이나 유물이 없어 신빙성은 떨어지며, 명부전에 있는 요나라에
서 넘어왔다는 철조관음보살좌상이 경내의 유일한 고려 때 유물이다. 하지만 고려 때는 절이 우
후죽순 들어서던 시기라 그 시류를 타고 고려 후기에 문을 열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조선이 들어서면서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서서히 기울다가 결국 중종(中宗) 시절에 풍비
박산이 나고 터만 남았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1545년(인종 원년) 왕실의 도움으로 쓰러진 절을
일으켜 세웠고, 1546년에는 조선의 여제(女帝)로 악명을 날린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지원에 힘
입어 크게 중창을 벌였다. 이때 문정왕후에 잘보이고자 부처의 가호로 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을
기원하는 뜻에서 경국사(慶國寺)로 이름을 갈았다고 한다.

1669년(현종 10년) 오랫동안 잊혀지고 철저히 파괴된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
씨의 능인 정릉(貞陵)이 복원되자 근처에 있던 봉국사(奉國寺, 국민대 근처)와 흥천사(興天寺,
관련글 보러가기)와 함께 정릉을 지키는 원찰이 되었다. 이때 경국사로 이름을 갈았을 가능
성도 있다. 어쨌든 정릉의 원찰(願刹)이 되어 망할 일은 없게 된 경국사는 이후 탄탄대로를 누
비게 된다.

1698년 연화승성(蓮華昇城)이 절을 중수하고 천태성전(天台聖殿)을 세웠다. 천태성전은 독성각
의 다른 이름으로 당시의 상량문이 남아있다. 1737년에는 낙암의눌(洛巖義訥)이 주지로 부임하
여 절을 손질했고, 1793년에는 천봉태흘(天峰泰屹)이 크게 중수했다.
1855년에는 예봉평신(禮峰平信)이 법당을 다시 세웠고, 1864년에는 고종(高宗)의 즉위를 축하하
는 재를 열어 왕실에 더욱 굽신거렸다. 그리고 1868년에 칠성각과 산신각을 새로 짓고 호국대법
회를 열었는데 이때 왕실에서 범종(梵鍾)을 하사했다. 1870년에는 큰방을 수리했다.

1878년에는 함홍치능(涵弘致能)이 고종의 지원으로 요사를 중수하고, 철종의 왕비인 철인왕후(
哲仁王后) 김씨의 49재를 지냈으며, 1887년에는 석찬(碩讚) 등이 팔상도(八相圖)와 지장시왕도,
신중도, 현왕도, 감로도 등을 조성하여 봉안했다.

어둠의 시절에는 기송석찰(其松錫察)이 1914년에 극락보전을 다시 세웠고, 1917년 정릉천에 반
야교를 놓았다. 1921년부터는 그 유명한 보경(寶鏡)이 주지로 머물면서 절을 크게 일으켜 세웠
는데, 그는 직접 건물에 단청을 입히고 큰방에 아미타후불탱과 구품탱 등을 그렸으며, 1930년에
는 영산전과 산신각, 큰방을 중수하고, 1936년에는 영산전에 석가모니후불탱과 신중탱, 18나한
탱 4폭, 범종을 조성했다. 그리고 1939년에는 삼성보전에 약사탱, 칠성탱을 봉안했다.

6.25전쟁 이후에는 이승만 전대통령이 이곳에 들렸는데, 보경의 인격에 크게 감동을 먹어 참다
운 승가(僧伽)의 모범이 이곳에 있다면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 인연으로 경국사의 단골이
되어 여러 차례 보경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1953년 11월 닉슨 미국 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
하자 이승만이 한국문화의 참모습이 경국사에 있으니 한번 가자며 그를 끌고 오기도 했다. 이때
닉슨은 경국사에서 참배했던 경험이 한국 방문 일정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밝히며 경국사
를 단단히 추켜세우기도 했다.

보경이 사라진 이후, 현대의 큰 승려로 일컬어지는 지관(智冠)이 주지로 머물면서 관음전과 삼
성보전, 영산전, 산신각, 환희당 등 대부분의 건물을 중수해 경국사를 더욱 반석 위에 올렸다.
또한 1989년에는 극락보전을 크게 넓혔으며, 1991년에 보경의 행적비를 세웠다. 이후 사적비를
세우고, 삼성보전과 관음성전을 새로 만들었으며, 자운의 부도인 계주원명사리탑을 세웠다.
최근에는 2012년 1월 지관이 입적하면서 그의 사리를 공개했는데, 이때 많은 중생이 몰려와 그
를 애도하며 사리를 친견했다.

북한산(삼각산)에 안겨있다고는 하지만 거의 주택가에 둘러싸인 형태로 다행히 절 주변이 수목
들로 삼삼해 심산유곡의 산사에 파묻힌 기분이다. 또한 정릉천이 바로 앞에 흘러 속세와 적당히
경계를 이루며, 도심 속의 조그만 오아시스처럼 포근하고 그윽하기만 하다.
 
내가 이곳을 처음 찾은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다. 그때는 학생이라 그런지 수상한 짓도 안했음에
도 승려가 나가라고 성을 냈다. 당시의 기억 때문에 경국사를 매우 불쾌하게 여겼는데, 그래도
뭔가 끌렸는지 이듬해 초파일에 다시 찾은 적이 있다. 허나 또 쓸데없는 잔소리를 들을까 겁이
나 관음성전 앞에서 발길을 돌렸고, 이후 2004년 초파일에 다시 찾아 경내를 둘러보았다. 그때
까지만해도 일주문 앞에 외지인은 들어오지 말라는 차가운 푯말이 있었다.
수행도량의 명성을 누리는 것은 좋으나 대신 외지인에게는 배타적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곳이
유명한 곳도 아니고 관광지도 아니기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허나 그런 경국사도 지정문화유산
이 늘어나고 점차 이름이 드러나 답사객의 발길이 조금씩 늘면서 외지인에 대한 배타적인 마음
도 조금은 허물어진 듯 싶다.

청정한 승가의 본가임을 자처하는 이곳에는 극락보전과 관음성전, 삼성보전, 무우정사, 명부전,
영산전, 산신각 등 10여 동의 건물이 경내를 가득 채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을 비롯해 팔상도(八相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2호), 괘불도(
掛佛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4호) 등 지방문화재 6점을 간직하고 있다. (괘불도와 팔상도는
관람이 어려움) 그외에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철조관음보살좌상과 보경이 그린 여러 불
화 등이 전한다.
건물들은 죄다 근래에 새로 손질하여 고색의 멋은 없지만 그 속에는 많은 문화유산들이 고색의
기운을 피우고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해준다.

※ 경국사 찾아가기 (2013년 5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길음역(3번 출구)에서 110, 143번 시내버스나 성북06번 마을버스를 타고 경국사
  (정릉4동주민센터) 하차, 성북06번은 크게 돌아간다.
*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62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과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에서 1020번 이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3동 753 (☎ 02-914-5447)


♠  경국사 극락보전(極樂寶殿) 주변

▲  경국사 극락보전

경국사의 법당(法堂)인 극락보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관음성전의 뒷통수를
바라보고 있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이 건물은 뜨락보다 한 3m 높은 기단(基壇) 위에 자리해 있
어 자못 웅대해 보이는데, 1989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증축한 것이며, 한때는 건물 앞쪽에 1칸
정도 보태어 공간을 넓혔으나 나중에 철거했다.

법당 앞에는 으례 있어야 될 석탑이나 석등은 없고, 그냥 빈 뜨락만 있으며, 그 좌우로 명부전
과 종무소, 삼성보전 등이 뜨락을 둘러싸고 있다.


▲  화려하게 속살을 비춘 극락보전 불단과 닫집
극락보전 속에 또다른 건물인 닫집(불단 위에 떠 있는 붉은 피부의 장식물)에는 하늘을
나는 극락조와 공작, 백학과 여의주를 문 2마리의 용, 그리고 연꽃봉오리가 조각되어
극락세계를 장엄하게 재현한다. 저런 극락이라면 한번은 가볼만하지 않겠는가?

▲  경국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 - 보물 748호

극락보전 불단에는 눈을 매우 부담스럽게 만드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이하 목각탱)과 조그만
아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아미타3존불은 근래에 만든 거지만 그 뒤에 든든하게 자리한 목
각탱은 경국사에서 특별히 옆구리에 끼며 자랑하는 이곳의 제일 가는 보물이자 이곳 최초의 지
정문화재로 서울에 거의 유일한 조선 후기 후불목각탱이다.

이 목각탱은 나무를 조각하여 금색을 입힌 것으로 겉으로 보면 꽤 복잡해 보이지만 잘 살펴보면
구조는 단순하다. 탱화 중앙에는 극락전의 주인인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가 두손을 무릎에 댄
이른바 설법인(說法印)을 취하고 있는데, 앙련(仰蓮)이 새겨진 여러 층으로 된 대좌(臺座)에 앉
아있다. 그런데 탱화의 주인공임에도 그를 둘러싼 인물들보다 덩치가 작아 귀여운 인상을 풍긴
다. 그래도 그들과 달리 주형광배(舟形光背)를 달아주어 그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고, 광배의
위,아래가 비슷한 폭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양식이다. 또한 광배 안에는 연꽃을 새기
고 일정한 너비의 주연(周緣), 밖으로는 화염(火焰) 무늬를 생겼는데, 그 무늬는 위로 솟구치고
있고, 그 안쪽에 조그만 불상이 4구 정도 있다. (눈에 잘 띄지는 않음)
 
아미타여래의 옷무늬는 통식(通式)으로 조선시대 양식이며, 그의 좌우에는 아미타8대보살을 각
각 4명씩 배치했다. 그들 가운데 지장보살을 제외히고 모두 가지각색의 보관(寶冠)을 쓰고 연꽃
을 들고 있으며, 앙련 위에 앉아있다. 그 밑의 좌우 끝에는 사천왕(四天王)의 하나인 증장천왕
(增長天王)과 지국천왕(持國天王)을 배치해 아미타불의 호위를 부탁했고, 보살들 바깥 좌우에는
나한상(羅漢像) 1구씩 두었다.

탱화의 양식으로 보아 18세기 중반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몇 안되는 조선 후기 목각
탱화이자 서울에 거의 유일한 고색의 목각탱화로 그 가치는 대단하다.


▲  경국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3호

극락보전 좌측 벽에는 호법신장(護法神將)들이 빼곡히 그려진 신중도가 자리해 있다. 이 그림은
1887년 상궁들의 시주로 혜산 축연(惠山 竺演) 등이 조성한 것으로 중앙에는 동진보살(童眞菩薩
)과 제석천(帝釋天), 범천(梵天)이 있고, 그 좌우에 명왕(明王)와 신장(神將) 등이 배치되어 있
다. 이들은 인도의 토속신으로 범천은 무려 힌두교의 창조신인데, 불교에서 이들을 모두 영입해
부처의 세계를 지키는 신장으로 꾸몄다. 특이한 것은 산신(山神)과 조왕신(竈王神) 등 우리나라
의 토속신이 위태천(韋太天)의 협시로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극락보전을 서성이고 있으니 마침 아줌마 보살이 부처에게 봉양한 길쭉한 떡을 가져와 중생들에
게 나눠준다. 나도 하나 먹었는데, 부처를 거쳐서 온 떡이라 그런지 맛이 좀 다른 거 같다.


▲  삼성보전(三聖寶殿)과 범종각이 하나가 된 현장

극락보전 좌측에는 삼성보전과 범종을 비롯한 사물(四物)을 담은 범종각이 하나가 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 있다.
삼성보전은 산신과 독성, 칠성을 봉안한 삼성각(三聖閣)의 다른 명칭으로 생각했다. 허나 이곳
은 전혀 엉뚱하게도 약사여래(藥師如來)을 중심으로 미륵불(彌勒佛), 치성광여래(칠성)를 협시
로 배치한 약사3존불을 봉안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명부전 뒤에 산신각과 천태성전을 두면서
산신과 독성을 그곳으로 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빈 자리에 약사여래와 미륵불을 배치했고 따
로 거처가 없는 칠성(七星)만 이곳에 두어 약사여래의 협시로 삼았다.

하얀 피부의 약사3존불 뒤와 좌우에는 1939년에 보경이 그린 약사회탱과 칠성탱, 미륵탱이 뒤를
받쳐준다.

▲  삼성보전 내부 (가운데가 약사회탱,
왼쪽이 미륵탱, 오른쪽이 칠성탱)

▲  관음성전 북쪽에 자리한 종무소 겸
요사(寮舍)


▲  극락보전 뜨락에 마련된 관불(灌佛) 의식의 현장

관불 현장에는 곱게 차려입은 아줌마 신도가 자리를 지키며 의식을 도와주기 마련인데, 여기는
셀프서비스인 모양이다. 각자 알아서 길쭉한 바가지에 물을 담아 아기부처에게 부어주면 된다.
1년 만에 외출을 나와 한참 초파일 환희(歡喜)에 잠긴 그도 저물어가는 해가 무척 아쉬울 것이
다. 오늘이 가면 다시 어두컴컴한 창고로 들어가 1년을 갇혀야 되니 말이다.


♠  경국사 명부전, 영산전 주변

▲  북쪽을 바라보는 명부전(冥府殿)

극락보전 우측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조촐한 건물 내부
에는 죽은 이의 극락왕생을 위해 헌신하는 지장보살상을 비롯하여 시왕(十王)과 판관 등 명부(
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지장시왕도와 사자탱, 시왕탱 등이 걸려있고.

좌측에는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의 철조관음보살좌상이 있다.


▲  명부전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과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0호

푸른 머리의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서 있다.
이들은 보경이 흙으로 직접 빚어서 만든 것으로 그들 뒤에 든든하게 자리한 그림이 지방문화재
로 지정된 지장시왕도이다.
이 그림은 1870년에 안암동 개운사(開運寺)에 있는 지장시왕도를 참고 삼아
혜산 축연(惠山 竺
演)이 그린 것이다. 혜산은 구한말에 강원도와 서울,경기에서 활동하던 화승으로 서울에는 흥천
사와 경국사를 비롯해 그의 불화 20여 점이 전한다. 그는 이 그림을 그릴 때 수화사(首畵師)로
활동하면서 불사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림을 보면 선악동자를 함께 그린 전형적인 지장시왕도 형식으로 유난히 가늘고 긴 눈과 아주
작은 입 등 얼굴 한 가운데로 몰려있는 이목구비, 좁은 미간, 눈 주위와 코/뺨 부분에 음영을
표현해 얼굴의 골격을 강조한 점은 다른 지역의 불화와 구별되는 서울,경기 지역 조선 후기 불
화의 특징이다.


▲  명부전 우측의 시왕상과 시왕탱

▲  명부전 좌측의 시왕상과 시왕탱, 철조관음보살좌상

지장보살상 불단 좌우에는 죽은 이를 심판하는 저승의 10왕이 각각 5왕씩 앉아있다. 복장은 다
비슷하지만 손짓이나 얼굴,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은 서로 다르다. 그들 뒤에는 시왕탱이 있는데,
역시 1왕당 1폭씩 배치하여 총 10폭을 이룬다.

명부전 좌측 벽에는 앉아있는 모습의 커다란 철불(鐵佛)이 있는데, 여기서는 철조관음보살좌상
이라 불린다.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11세기에 거란족의 나라인 요(遼)나라에서 조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요나라의 것인지는 아직 분명치는 않으나 고려와 조선의 불상과는 확연히 차
이를 보이고 있어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것은 확실하며, 언제 무슨 일로 여기까지 들어왔는지는
자세한 사연이 없어 모르겠다.
 
의자에 사람처럼 앉아있는 이 불상은 성인 남자 키 정도 되는데, 얼굴은 그냥 무표정에 가까워
보인다. 그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대고 있는데, 손가락에는 특이하게 반지가 끼여져 있다. 적의
(翟衣) 형태의 옷에는 용과 새, 사자 등이 새겨져 있고 보관에는 모란꽃무늬를 매우 정교하게
나타냈다. 그리고 정병(政柄)까지 새겨져 있어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로 여겨지나 정병은 근래
에 손질한 것이라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허나 경국사에서는 호랑이가 곶감의 눈치를 보던 시
절부터 관음보살로 받들고 있어 한때 관음전에 있기도 했으며,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임에
도 아직까지 지정문화재 등급을 얻지 못하고 있다.


▲  가운데 문을 열어둔 경국사 영산전(靈山殿)

명부전에서 서쪽으로 난 계단길을 오르면 부처와 그의 열성제자 나한들의 공간인 영산전이 모습
을 비춘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말에 지어진 것을 1930년에 보경이 중
수했다. 어칸 위에 달린 영산전 현판은 해강 김규진이 쓴 것으로 필체가 무척 돋보인다.


▲  영산전 석가3존불과 석가모니후불탱

현란한 보관의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거느린 석가불의 표정이 후덕해 보
인다. 이들 3존불은 보경이 흙으로 직접 빚어서 도금을 입힌 것으로 뒤에 있는 석가모니후불탱
은 1935년에 그가 그린 것이다. 주지승이 직접 불상을 만들고 불화를 그리는 경우는 흔치 않은
데 그림과 조형에 능한 보경이 주지로 있으면서 불상을 조성하고 그림까지 그리니 제작 비용은
크게 절약되었을 것이다.

▲  영산전 18나한상과 18나한탱. 신중도

▲  영산전 18나한상과 18나한탱

영산전 석가3존불 좌우에는 부처의 열성제자인 나한상(羅漢像)과 나한탱이 배열되어 있다. 하얀
피부의 나한상은 좌우에 각각 9개씩 18나한을 이루고 있는데, 16나한은 지겹도록 봤지만 18나한
은 생소하다. 경국사를 찾은 중생처럼 가지각색의 모습을 지닌 그들 뒤에는 나한탱이 2폭씩, 4
폭이 자리해 있는데, 나한과 동자가 어울려 있는 모습이다.
이들은 모두 보경이 만든 것으로 왼쪽에 1폭은 1966년에 다시 그렸고, 우측 벽 구석에 있는 신
중탱은 1966년에 제작된 것이다.


♠  경국사 마무리

▲  경국사 산신각(山神閣)
극락보전 뒷쪽 언덕에서 경내를 굽어보고 있는 산신각은 산신(山神)을 봉안한
공간으로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조촐한 건물이다.

▲  산신각 산신탱

소나무와 산을 배경으로 한 산신탱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童子) 등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진
하게 우러나온다.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북쪽을 향하고 있는데, 그곳에 꿀단지나 아리따운 처자
라도 있는 것일까? 보는 시선이 예사롭지가 않다. 이 그림은 1980년에 덕문(德文)이 조성한 것
으로 그 앞에 산신의 탈을 쓴 애기 같은 산신상은 근래에 봉안된 것이다.


▲  담장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민 천태성전(天台聖殿)

산신각, 영산전보다 1단계 더 높은 곳에 천태성전이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건물로 보통은 산신각이나 삼성각이 제일 높은 곳을 차지하고 있는데 반해 이곳은 천태성전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건물 이름이 조금 낯설긴 하지만 천태(天台)란 이름에서 이미 답은 나왔다.
바로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거처이다.

독성의 거처는 독성각(獨聖閣)이란 흔한 이름을 쓰지만 북한산 진관사(津寬寺)의 독성전(獨聖殿
)이나 삼천사(三千寺)의 천태각처럼 다른 이름을 쓰기도 하며, 경국사는 그의 거처를 크게 높여
천태성전이라 부른다.

경내의 다른 건물과 달리 담장을 두르고 있어 특별한 이미지를 선사하지만 담장 안에 담긴 천태
성전은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조그만 건물이다.


▲  담장을 두룬 천태성전

▲  독성 할배가 그려진 독성탱과 독성상
독성탱은 1980년에 덕문이 조성한 것으로 그 앞에 있는 독성상은 근래에 봉안했다.

▲  무우정사로 인도하는 문수원(文殊院) 기와문

▲  무우정사(無憂精舍)와 3층석탑

종무소에서 해우소(解憂所)로 가다보면 종무소 바로 뒷쪽에 무우정사가 있다. 문수원이란 현판
을 인 기와문을 들어서면 극락보전 앞에도 없는 3층석탑이 나오는데, 그 탑을 중심으로 북쪽에
는 무우정사가 있고, 탑 좌우로 승려들이 생활하는 요사가 좁은 뜨락을 둘러싸고 있다.

다소 고급 분위기가 풍기는 무우정사는 주지승이 거주하는 건물로 가운데 칸이 반칸 정도 앞뒤
로 삐죽나와 '十'모양의 구조를 이룬다. 지관이 설계하고 지은 것으로 현관에는 금강반야대(金
剛般若臺)란 현판이 걸려있다. 그리고 뜨락에 자리한 3층석탑은 석가탑(釋迦塔)을 그대로 모방
하여 맵시가 고운데, 경국사의 유일한 석탑으로 근래에 만든 것이다. 왜 극락보전을 놔두고 이
곳에 탑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법당보다 주지승의 거처가 더 중요했던 모양이다. 무
우정사 주변을 문수원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중생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참고로 무우정사의 무우(無憂)는 무우수(無憂樹)에서 유래된 말로 아수가수(阿輸迦樹)를 한자로
번역한 이름이다. 부처는 룸비니 동산의 무우수 밑에서 태어났고 과거 1불인 비바시불도 이 나
무 아래에서 성도(成道)했다고 하며, 보리수와 더불어 불교에서 소중히 여기는 나무이다.


▲  경국사를 뒤로하며

오랜만에 발을 들인 경국사를 1시간 반 정도 누비며 문화유산도 괘불도와 팔상도를 빼고는 모두
눈에 넣었다.
경국사를 둘러보고 속세로 나갈 때까지 절을 찾은 중생의 수는 앞서 본원정사보다 훨씬 적었다.
사람은 거의 2~3분 간격으로 꾸준히 들어오긴 했지만 그 수가 적었던 것이다. 흥이 나고 사람들
로 만원을 이루는 초파일 분위기도 좋지만 너무 번잡한 것도 그리 좋지는 않다. 이곳 초파일 분
위기는 기대치에 절반도 안되는 수준이었지만 대신 그리 번잡하지가 않아 울창한 숲에 묻힌 산
사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제대로 누려서 좋았고 사진을 찍으며 살피기에도 크게 곤란하진 않았다.

이렇게 하여 석가탄신일 경국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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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5월 2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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