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암사입구에서 비암사를 향해 10분 정도 들어가면 도깨비도로가 나타난다. 도깨비도로는 인 간의 두 눈이 결코 정상이 아님을 일깨워주는 현장으로 내리막길을 마치 오르막길처럼 보이게 하는 신기한 현상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 이 땅에는 제주도의 '1100도로'를 비롯하여 속칭 도깨비도로가 여럿 있는데, 말로만 듣던 그 런 길을 직접 겪으니 눈이 요상하게 홀린 듯, 신기하다. 내리막길이 분명한데 올라가는 것처 럼 반대로 보이니 말이다.
이 도깨비도로(Mysterious Road)는 좁고 구불구불했던 비암사 길을 2005년부터 2007년 11월까 지 크게 손질하면서 나온 것으로 출발점(시작점 표시가 있음)에서 보면 꽤 오르막길로 보이지 만 실제로는 120cm 낮은 내리막길이다. 그러니 이때만큼은 눈을 믿지 말자. |
 ▲ 동쪽에서 본 도깨비도로 이렇게 보면 정말 내리막길처럼 다가오지만 현실은 오르막길이다.
 ▲ 해와 달, 나무의 조그만 거울, 다비숲공원 연못 도깨비도로를 지나 3거리에서 왼쪽(북쪽)으로 들어서면 조그만 연못이 모습을 비춘다. 이곳부터 경내 주차장 직전까지 다비숲공원 영역으로 연못과 3층석탑, 쉼터 등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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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숲공원을 지나 주차장에 이르면 왼쪽(북쪽)에 고색이 짙은 석종형(石鐘形) 승탑 2기가 눈 에 들어올 것이다. 이들 승탑 형제는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노란 때가 입혀진 오른쪽 탑은 피부에 '청한당 성정탑(淸閑堂性淨塔)'이라 쓰여 있어 탑의 이름은 성정, 탑의 주인은 승려 청한당임을 알려 준다. 하지만 그의 대한 정보와 탑 조성 시기는 드러난 것이 전혀 없어 한 곡절 아쉬움을 건 넨다. 그리고 왼쪽 승탑은 오른쪽 것과 달리 누구의 것인지는 알려진 것이 없으나 기단부에 '강희갑 오입탑(康熙甲午入塔)'이라 쓰여 있어 1714년)에 탑이 세워졌음을 살짝 귀뜀해주며, '施主俊 祂(시주준야)'란 글씨도 추가로 새겨져 있어 시주자가 '준야'임을 알려준다. |
※ 세종시 제일의 고찰이자, 백제의 마지막 종묘(宗廟)사찰, 운주산 비암사(雲住山 碑岩寺) 운주산의 한참 남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비암사는 백제의 마지막 종묘 사찰로 일컬어진 다. 매년 4월마다 백제 제왕과 대신들에게 백제대제(百濟大祭)를 지내기 때문이다. 그 대제로 비암사는 천하에 조금씩 이름 3자를 알리고 있다.
비암사는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한나라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인 기원전 57년에 창건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그때면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오기 훨씬 이전이니 100% 맞지가 않는다. 다만 3층석탑에서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국보 106호)'이라 불리는 석불비상(石佛碑像)이 발견되었는데, 그 비상에는 계유년(癸酉年)인 673년 4월 혜명대사(惠明 大師)가 전씨(全氏)를 비롯한 백제 유민들의 뜻을 모아 백제왕과 대신들, 법계중생들의 안녕 을 위해 만들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어 이를 근거로 673년 창건설이 크게 설득을 얻고 있다.
왜열도와 중원대륙의 많은 지역을 호령하며 천하의 바다를 주름잡았던 백제, 허나 달이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660년 7월 나당연합군과 웅진성주(熊津城主)를 비롯한 매국노에 의해 허망 하게 멸망의 비운을 당하자 백제 유민들은 충청도와 전라도, 왜열도에서 치열하게 백제 부흥 운동을 전개했다. 게다가 왜왕(倭王)도 상국(上國) 백제의 멸망에 크게 곡소리를 내며 서둘러 배를 만들고 군사를 조련해 백제 부흥군을 도왔다. 비암사를 품은 세종시 지역은 백제의 국도(國都)였던 웅진(熊津, 공주) 바로 동쪽 동네로 백 제 부흥군은 세종시 도처에 웅거해 나당연합군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었다. 허나 백제 부흥 군은 지도층의 내분으로 663년 거진 진압되고 만다.
백제 부흥이 물거품이 되자 비암사 주변에 살았던 전씨를 중심으로 한 유민들은 망국(亡國)의 한을 달래고자 673년에 비암사 자리에 백제 왕실의 종묘(宗廟)를 세우고 석불비상을 빚었다. 그리고 그해 4월 15일 비상이 완성되자 제사를 올리니 그것이 비암사의 상징이자 백제를 그리 워하는 이들의 가슴을 치는 백제대제(百濟大祭)이며, 그 연유로 백제의 마지막 종묘 사찰이란 수식어를 달게 되었다. 이후 4월 15일마다 제를 지냈다고 하며, 그 역사가 무려 1,300년이 넘 는다. 지금은 편의상 양력에 지낸다.
673년 창건설 외에도 후삼국시대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나 물증은 없다. 다만 경 내에 고려 때 조성된 3층석탑과 800년 이상 묵은 느티나무가 있어 고려 때도 법등(法燈)을 유 지했음을 보여주며, 그 이후 뚜렷한 사적(事績)은 전하지 않으나 조선 후기에 편찬된 '전역지 (全域誌)'에 비암사가 나오고, 경내에 조선 후기에 지어진 극락보전과 괘불 등이 있어 그런데 로 절을 꾸렸음을 보여준다.
1960년에 3층석탑에서 앞서 언급한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과 '기축명아미타불비상(己丑銘 阿彌陀佛碑像, 보물 367호)','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彌勒菩薩半跏思惟碑像, 보물 368호)' 등 이 발견되어 천하에 크게 주목을 받은 바가 있다. 이들은 신변 보호를 위해 모두 제자리를 떠 나 국립청주박물관에 가 있다. 1991년 대웅전을 새로 지어 법당(法堂)으로 삼았고, 1995년 극락보전을 중수하고 산신각과 요 사 2동을 지었다. 그리고 1996년 범종각을 세우고, 2007년에는 절 진입로를 정비했다. (이때 도깨비도로가 태어남)
경내에는 대웅전과 극락보전, 산신각, 설선당, 명부전 등 7~8동의 건물이 있으며, 극락보전과 3층석탑, 소조아미타여래좌상, 영산회괘불탱화 등의 지방문화재와 800년 묵은 느티나무, 조선 후기 승탑 2기 등을 간직하고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한다. 매년 4월 15일에는 백제대제가 성황리에 열리는데, 이때 영산회괘불탱화(세종시 지방유형문화 재 12호)가 외출을 나와 대제의 분위기를 한층 드높인다. (괘불은 석가탄신일과 일부 행사일 에만 잠깐 모습을 드러내는 비싼 존재임)
* 소재지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다방리 4 (비암사길 137 ☎ 044-863-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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