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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학산인서실

1930년대 예산 추사고택의 별가로 여겨지는 집에 걸려있던 편액이다. (이곳 편액은 모조품)

 

2. 모거리

이곳 모거리는 추사 김정희가 기거하던 곳이다. 그는 위리안치(집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유배

형)의 형을 받았기 때문에 오랜 세월 집에 꽁 박혀있어야 했는데, 그 시간 동안 여기서 학문과 예술에

몰두했다. 특히 그의 자랑인 추사체가 여기서 태어났는데, 추사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벼루 10개를 구

멍 내고 붓 1,000자루 이상을 닳아 없어지게 했다고 전한다.

 

3.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의 다담 모습

추사 김정희(1786~1856)와 초의 의순(1786~1866)은 동갑내기 벗이다. 그들은 1815년 처음 만났는

데, 이후 추사는 그에게 걸명시를 보냈고, 종종 글씨를 써서 보내기도 했으니 그 대표적인 글씨가 '명

선'이다.

추사는 1840년 제주도로 유배되어 8년을 머물렀는데, 초의는 1843년 그를 찾아가 6개월 동안 같이

시간을 보냈다. 추사는 그에게 '일로향실'이란 글씨를 써주었으며, 그 글씨는 해남 일지암에 전하고 있

다.

 

4. 모거리 내부

 

5. 밖거리

밖거리(바깥채)는 추사가 지역 청년과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던 곳이다. 그의 인기는 대단

해 제주도에 어지간한 선비들이 이곳을 거쳐갔을 정도인데, 이때 '그의 문하에 3,000명의 선비'가 있

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며, 그의 제자 중에는 대정 지역의 부호로 그에게 공간을 내어준 강도순도 있

었다. 그 강도순의 집이 추사 김정희 유배지의 중심지이다.

 

6. 밖거리에서 문하들을 가르치고 있는 추사 김정희

 

7. 정지(부엌) 옆 장독대의 공간 (정지 왼쪽 공간)

 

8. 정지(부엌)

제주도에서 부엌을 정지라고 부른다.

 

9. 물허벅을 올려놓던 현무암 피부의 물팡

식수로 사용할 물을 길어올 때 쓰던 용기를 물허벅이라 하고, 그것을 올려놓는 공간을 물팡이라 부른

다.

 

10. 눌

탈곡하기 전 농작물을 단으로 묶어 쌓아두거나 탈곡하고 난 짚을 쌓아놓은 것을 '눌'이라고 한다. 그

눌을 만드는 일을 '눌을 눈다'고 한다.

 

11. 추사 유배지(강도순 집) 후문

 

12. 이수를 갖춘 추사김정희 유허비

 

13. 추사 유배지(강도순 집)의 외경

추사 유배지(김정희 유배지)의 중심부는 강도순 집이다. 그가 여기서 위리안치의 유배살이를 했기 때

문이다. 강도순은 대정 지역 유지이자 부호로 추사의 문하에서 공부를 했는데, 그에게 집 한쪽을 제공

하여 의식주 편의를 흔쾌히 봐주었다.

이후 강도순 집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경작지가 되었던 것을 그의 후손들의 증언을 토

대로 지금의 모습으로 집을 복원, 재현하여 추사 유배지의 중심지로 삼았다. 강도순 집 남쪽에는 추사

의 유물과 그의 제주도 유배 생활, 그의 내력을 머금은 제주추사관이 있는데, 내가 갔을 때는 내부공사

중이라 내부는 살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