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녕읍내 둘러보기
▲ 창녕석빙고(昌寧石氷庫) - 보물 310호 |
창녕터미널에서 창녕박물관, 화왕산 방면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고분을 닮은 창녕석빙고가 나온 다. 석빙고는 그 옛날 얼음과 진상품 등을 보관하던 냉동창고이다. 오늘날이야 냉장고 등의 냉 동시설이 휼륭해서 언제든지 얼음을 취할 수 있으나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얼음은 정말 구하 기 힘든 존재로 나라에서 관리하였다. 그래서 개천 주변에 고분 모양의 거대한 석빙고를 만들어 겨울철에 강이나 하천에서 얼음을 떼서 저장했다가 여름이나 기타 필요할 때 꺼내 썼으며 서울 로 보내는 진상품과 냉동 보관이 필요한 여러 물품을 보관했다. 그 많고 많던 석빙고는 현대화 를 거치면서 죄다 녹아 없어지고 현재는 이곳을 비롯하여 경주, 청도, 안동, 영산 정도만 남아 있다. 서울에는 국립 냉동창고인 서빙고(西氷庫)와 동빙고(東氷庫)가 있었다.
창녕석빙고는 서쪽으로 흐르는 개울과 직각을 이루도록 남북으로 길게 조성되었다. 남쪽에는 빙 고(빙실)안으로 들어가는 돌문이 있으며, 문 앞에 이르면 실내에 차디찬 기운이 엄습해와 냉동 창고의 기능은 아직 녹슬지 않았다.
빙실(氷室)의 높이는 5.4m, 길이 13m로 경주의 석빙고보다는 좀 작으나 구조는 비슷하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명확하진 않으나 석빙고 앞 비석에는 조선 영조 18년(1742년) 창녕현감 신후서 (申侯曙)가 만든 것으로 나와있다. 하지만 삼국시대부터 석빙고 제도가 있었고 이곳이 비화가야 의 옛 도읍임을 비추어 볼 때 적어도 비화가야 시절부터 숨을 쉬고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석빙고 주변은 조촐하게 공원으로 조성되어 휴식공간을 제공하며, 조그만 개울이 석빙고 주변을 감싸 흐른다.
※ 창녕석빙고 찾아가기 (2010년 5월 기준)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창녕행 직행버스가 1일 5회 떠난다. * 부산서부터미널에서 창녕행 직행버스가 40~50분 간격으로 있다. * 대구서부정류장에서 창녕행 직행버스가 1시간에 2~3회꼴로 다닌다. * 마산에서 창녕행 직행버스가 20~4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창녕터미널을 나오면 바로 오리정4거리이다. 여기서 오른쪽(화왕산, 창녕박물관 방면)으로 10 분 가량 걸으면 길 오른쪽에 창녕석빙고가 있다. * 승용차 (석빙고 주변 길거리에 잠시 주차) ① 구마고속도로 → 창녕나들목을 나와서 창녕읍내 방면으로 좌회전 → 오리정4거리에서 직진 → 창녕석빙고 * 소재지 -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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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읍내를 굽어보는 창화사(昌和寺) |
창녕석빙고에서 동쪽으로 가면 화왕산 서쪽 자락에 솟아난 절, 창화사가 나온다. 화왕산 등산로 의 하나인 자하곡(紫霞谷) 입구에 자리한 이 절은 천태종(天台宗) 소속으로 2002년 10월에 문을 열었다. 아직은 사세가 미약하여 대불보전(大佛寶殿)이란 2층 건물이 고작이다. 법당과 생활공 간을 하나에 담은 대불보전은 단청(丹靑)과 외부장식이 현란하여 절의 초라함을 약간이나마 달 래준다. |
▲ 대불보전 풍경물고기의 위엄 푸른 하늘을 그의 바다로 삼으며 오늘도 그윽한 풍경소리를 속세에 베푼다. |
창화사 바로 뒤쪽 언덕에는 옛 비화가야의 지배층이 잠들어 있는 송현동고분군과 신라후기에 만 들어진 송현동석불좌상이 있다. 모두 경내를 통해서 접근이 가능하며 송현동석불좌상은 절에서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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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현동석불좌상의 조촐한 거처 창화사 뒤쪽 숲속에 자하곡의 은자(隱者) 석불좌상이 기거하는 조그만 기와집이 있다.
▲ 바위에 비스듬히 기댄 송현동석불좌상(松峴洞石佛坐像) - 보물 75호 |
조그만 기와집에 은신하고 있는 송현동석불좌상은 바위에 돋음새김으로 새겨진 높이 1.4m 남짓 의 조그만 마애불(磨崖佛)이다. '송현동마애여래좌상'이 적당한 이름인 듯 싶은데 어째 석불좌 상으로 이름이 정해졌는지 모르겠다. 좌상이라고 해서 독립적인 형태로 앉아있는 불상을 떠올렸 는데 정작 빗장을 열어보니 마애불이 나를 반긴다.
이렇게 불상이 있으니 그를 관리하던 절은 분명 있었을 것이다. 허나 그 절에 대한 기록과 흔적 은 전혀 없으며, 오랫동안 작은 기와집에 기거하던 것을 창화사에서 번듯하게 손질하여 지금에 이른다.
하얀 피부를 지닌 바위에 기댄 그는 민머리 스타일로 머리 꼭대기에 육계가 큼지막하게 솟아있 다. 얼굴은 둥글고 볼은 풍만해 보여 자애로운 인상을 풍긴다. 두 눈썹 사이로 동그랗게 파인 백호가 있으며, 눈과 코는 조금 손상되긴 했으나 알아보는데는 별 지장은 없다. 길쭉한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내려와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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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현동석불좌상의 얼굴과 어깨 |
목은 두꺼워 보이나 삼도(三道)는 보이지 않으며 어깨는 넓고 당당하지만 조그만 몸집 때문인지 어딘가 허전해 보인다. 두 손은 결가부좌(結跏趺坐)를 취한 다리 위에 올려 항마촉지인(降魔觸 地印)의 제스쳐를 선보인다. 우측 어깨를 살짝 덮은 법의(法衣)는 하체까지 내려왔으며 옷주름 은 계단식으로 표현되었다.
경주 석굴암(石窟庵) 본존불의 양식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이는 신라 후기 석불로 그 흔한 광배( 光背)가 없는 것이 이상했는데, 알고 보니 바위가 그의 광배였다. 바위의 모습이 광배의 하나인 보주형(寶珠形)을 쏙 닮아 그걸 약간 다듬어서 자연산 광배로 삼은 것이다. 광배 무늬를 따로 새기지 않고 바위 그대로의 모습을 광배로 한 것이 무척 인상 깊다.
불상 앞에는 예불을 드리는 공간이 있으며 건물 천정에는 중생들의 소원을 한가득 담은 연등이 대롱대롱 매달려 불상을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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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 비화가야의 비밀이 담겨진 송현동고분군(松峴洞古墳群) - 사적 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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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읍내 동쪽과 동북쪽 외곽 구릉에는 1,500년 전에 사라진 비화가야의 옛 무덤들이 언덕을 가 득 메우고 있다. 평지에 조성된 신라 고분과는 달리 가야 고분은 대체로산자락혹은 구릉자리 를선호하고 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속시원한 해답은없는 것 같다.
창녕의 고분군은 교동고분군(사적 80호)과 송현동고분군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이번에 찾은 송현동고분군은 2개의 군(群)으로 나눌 수 있다. 1군은 목마산(牧馬山) 기슭에서 송현동 일대에 널리 퍼져 있으며 그 일부는 도야리로 통하는 도 로를 넘어 교동까지 이른다. 원래는 80여기 정도가 있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16기에 불과하다. 2 군은 윗사진에 나온 고분들로 송현동석불좌상 옆 언덕에 솟아난 고분이 그것이다. 20여기 정도 가 있으며 대부분 밭으로 개간되면서 제대로 남은 것은 8~9기 정도이다.
비화가야는 13가야(혹은 6가야)의 하나로 삼한시대에 변한연맹(弁韓聯盟)의 하나인 불사국(不斯 國)에서 시작된 나라이다. 김수로(金首露)의 세력이 구야국(狗倻國, 경남 김해)에서 가야(伽倻) 를 세워 변한 일대를 장악하면서 가야연맹의 일원이 된다.
4세기 후반 고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 가야를 풍비박산 낼 때 위기를 극복했으나, 6세기 에 이르러 신라의 압박이 거세지자 존망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백제(百濟)와 왜국과 손 을 잡고 신라를 경계하게 된다. 554년 백제 성왕(聖王)이 약속을 저버리고 한강 유역을 가로챈 신라를 응징하고자 3만의 대군을 몰아 신라 관산성(管山城, 충북 옥천)을 공격하자 가야제국(諸國)은 앞다투어 원군과 물자를 보 내 백제를 도왔다. 비화가야 역시 백제를 도왔을 것이다. 허나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가야 연합 군은 형편없이 깨지고 백제 성왕은 신라군에 잡혀 목을 잃고 만다.
가야가 백제를 도운 사실에 뚜껑이 폭발한 신라 진흥왕(眞興王)은 대대적인 가야토벌을 벌인다. 바로 이듬해인 555년(진흥왕 15년) 비화가야가 그 첫 희생양이 되었으며, 나머지 제국도 도미노 현상처럼 신라에 무너졌다. 이윽고 562년 대가야(大伽倻)를 끝으로 가야의 존재는 한반도에서 영구히 사라지게 된다.
송현동고분군은 5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데, 고분 태반이 왜정 때 싸그리 도굴당하고 오랜 세월 관리소홀로 인한 자연현상으로 봉분이 무너지거나 경작이나 도시개발 등으로 사라진 무덤이 많아 아쉬움을 준다. 허나 그것이 망국 무덤의 처절한 운명이다. |
 ▲ 송현동고분군에서 바라보이는 교동고분군 - 사적 80호 송현동고분군과 더불어 옛 비화가야의 비밀을 간직한 곳으로 언제나 그 정체가 밝 혀질련지 고분은 오늘도 침묵으로 일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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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교동고분군 5,6,7,8,10,11,12호분과 송현동의 89.91호분이 발굴되어 많은 유물들이 쏟아 져 나왔는데 발굴보고서도 없고 유물 상당수가 사라졌다고 한다. 고작 1918년에 발표된 교동 21 ,31호분 발굴보고서가 창녕고분의 유일한 조사기록이다. 무덤의 형태는 교동12호분은 신라무덤과 같은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며, 대부분은 가야식 장 방형의 횡구식석곽분(橫口式石槨墳)으로 비화가야 시절의 무덤이 확실한 것 같다.
출토품의 메모가 남아있는 교동7호분의 목록은 이들 고분의 부장품이 매우 풍부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들은 우리나라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1918년 발굴 이후, 권력과 결탁한 도굴 행위가 자행되어 대낮에도 버젓히 도굴이 이뤄질 정도였다고 하며 이렇게 도굴된 유물들은 왜국 상인들을 거쳐 왜열도로 무차별 유출되었다. 현재 왜국의 '오쿠라(小倉) 컬렉션'은 당시 대구에 살던 오쿠라가 빼돌린 가야문화유산(특히 창녕 유물들)이 주류를 이룰 정도라고 하니 정 말 뚜껑이 열릴 일이다.
왜인의 악랄한 도굴은 비화가야 및 고대 창녕지역의 정체와 성격을 밝힐 수 있는 단서마저 산산 히 없애버렸으며, 가야 문화유산의 보고(寶庫)를 무참히 파멸상태로 만들었다. 나라 잃은 서글 픔은 이 땅의 백성뿐만 아니라 이 땅의 자연과 문화유산까지 수모를 당하게 만든 것이다.
이곳에서 나온 유물 중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건 해방 후에 출토된 굽다리접시<고배(高杯)>, 항 아리 등이 고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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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손으로 더듬고 싶은 모습의 송현동고분군 | ▲ 서로 색깔이 다른 2기의 무덤이 하나로 붙어있다. |
사람이란 죽으면 다 썩어 문드러져 흙의 일부가 되거늘 죽어서도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자했 던 지배층의 부질없는 꿈이 이들 고분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저 거대한 무덤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피와 땀을 필요로 했던가. 하지만 그들의 부질없는 짓거리는 오늘날 우리 들로 하여금 오래 전 그들의 존재를 약간이나마 알게 해주며, 창녕 고을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 는 산증인들로 우리에게는소중한 존재들이다.
이곳에 오르면 창녕읍내가 두 눈에 바라보인다. 1호분에 올라 천하를 바라보는 기분.. 비록 보 이는 범위는 창녕읍내로국한되어 있지만, 잠시나마 비화가야를 지배하던 지배자가 된 기분이다. 천하에 모든 것이 나의 발 아래에 있으며, 나무와 무덤, 모든 것이 나에게 예를 표하며머리를 조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나를 잠시나마 즐겁게 한다.
※ 송현동고분군/송현동석불좌상 찾아가기 (2010년 5월 기준) * 창녕까지 교통편은 앞에 창녕석빙고 참조 * 창녕터미널을 나오면 바로 오리정4거리이다. 여기서 오른쪽(화왕산, 창녕박물관 방면)으로 20 분 가량 걸으면 길 모퉁이가 나오고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 3분 정도 걸으면 길 왼쪽으로 창 화사가 나온다. 경내로 들어서면 왼쪽 언덕으로 송현동고분군이 보이고 오른쪽 오솔길 끝에 송현동석불좌상의 거치인 기와집이 있다.. * 승용차 (주차는 창화사입구 도로변에 하면 된다) ① 구마고속도로 → 창녕나들목을 나와서 창녕읍내 방면으로 좌회전 → 오리정4거리에서 직진 → 창녕석빙고 → 창화사(송현동석불좌상/송현동고분군)
* 소재지 : 송현동석불좌상 -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105-4 송현동고분군 -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