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 백두대간의 힘찬 줄기가 남쪽 끝에 빚어놓은 대작품
~ 천성산 홍룡폭포 '
천성산 홍룡폭포
▲ 홍룡사 관음전과 홍룡폭포


가을이 슬슬 그 절정을 준비하던 10월의 첫 주말 절친한 선배를 보고자 동북아시아 제1의
항구도시인 부산을 찾았다. 부산의 번화가인 서면(西面)에서 그를 만나 부근 연지동의 더
덕삼겹살로 유명한 고깃집을 찾았다. 삼겹살과 더덕,고추장이 3위1체가 되어 노릇노릇 여
물어가는 더덕삼겹살에 소주를 겯드리며 오랜만에 회포를 푼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서면으로 나와 2차로 왜식(倭式) 주점에서 거하게 술을 들이키며 해롱해롱한 상태로 그의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날을 마무리했다.

드디어 다음 날 아침, 아침햇살의 눈부신 재촉으로 슬금슬금 눈이 뜨인다. 이날은 홍룡폭
포와 홍룡사를 간직한 천성산으로 길을 떠나는 날이다.전날의 취기는 말끔히 사라진 개운
한 마음으로 길을 나서 명륜동전철역에서 금정산과 천성산, 신불산 등산객과 가을 나들이
객으로 뒤범벅을 이룬 양산시내버스 12번을 타고 홍룡폭포 입구인 대석리에 발을 내린다.

우선 늦었지만 아침을 먹기로 하고 주변을 기웃거리는데 오전 10시도 안된 시간이라 문을
연 식당은 보이질 않는다. 다행히 막 빗장을 연 만두집이 있어 그곳의 첫 번째 손님이 되
었다. 3가지의 만두로 시장한 배를 달래고 있으려니 만두집 주인이 캠코더를 가져온다.그
는 만두의 후식으로 천성산 화엄벌에서 찍은 동영상을 보여주었다.화엄벌은 천성산 남쪽
에 있는 고지대로 원효대사가 당나라에서 온 제자 1,000명에게 화엄경(華嚴經)을 설법(說
法)하던 곳이라 전한다. 그의 캠코더에는 은빛 억새의 즐거운 가을향연이 가득 담겨져 있
었다. 천성산에 이런 곳이??다들 처음 들어본 화엄벌 억새밭에 감동하며 군침을 꼴깍 삼
킨다. 원래는 홍룡폭포를 보러 온 것인데, 화엄벌의 유혹에 그만 화엄벌까지 욕심을 부리
기로 했다.

대석리에서 홍룡사까진 거의 50분 정도를 걸어가야 된다. 화엄벌 동영상으로 칭찬을 들은
식당 주인은 3,000원을 주면 홍룡사까지 모시겠다고 제안을 건넨다.우리야 반대할 이유는
없어 흔쾌히 승락하고 그의 수레로 편안하게 홍룡사 앞까지 들어갔다.

그는 오랫동안 대석리에 살면서 천성산에 자주 올랐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천성산에 대한
애정이 무척 남달라 보였다. 마치 천성산 가이드인양 열심히 산에 대해 이야기를 해준 그
는 우리와 작별을 고하면서 화엄벌과 원효암은 꼭 가보라며 신신당부를 했다.홍룡사 계곡
에 무지개처럼 걸린 반야교(般若橋)를 건너니 바로 관음도량 홍룡사가 우리를 반긴다.


♠ 홍룡폭포를 껴안은 조그만 산사,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관음도량 ~ 천성산 홍룡사(虹龍寺)

홍룡사는 천성산 남쪽 계곡에 둥지를 튼 산사로 재단법인 선학원(禪學院) 소속이다. 홍룡폭포를
품에 안으며, 숲이 무성하고 폭포에서 내려온 계곡이 절을 감싸고 흘러 경관이 수려하다. 또한
한여름에도 뜨거운 햇빛이 들어오지 못해 피서지로 명성이 높으며, 청정한 기운이 절을 감돌아
신선 세계에 들어온 듯하다.

이 절은 673년(신라 문무왕 12년)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낙수사(落水寺)라 했다고 한다. 허나 그
것을 순진하게 그대로 믿는 것은 곤란하다. 믿거나 말거나 창건설화에 따르면 원효가 어느날 현
재 기장군 장안읍에 있는
불광산 척판암(擲板庵)에서 천리안(千里眼)으로 당나라를 살피고 있었
다. 그런데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長安) 남쪽 태화사(太和寺)의 뒷산이 무너질 태세라 급히 '海
東元曉 拓板救衆(해동원효 척판구중)'이라 글씨를 써 신통력으로 태화사로 횡 날려 보냈다. 금빛
을 휘날리며 상공을 맴도는 현판의 출현에 태화사 승려들은 신기해하며 하나, 둘 밖으로 나오고,
그곳에 머물던 1천 명의 승려가 모두 나오자 그때 산사태가 일어나 절을 덮쳤다고 한다.

그들은 그 현판을 소중히 안고 생명의 은인인 원효를 만나고자 서해바다를 건너 신라를 찾았다.
원효의 환대를 받은 그들은 우루루 무릎을 끓으며 열성제자가 되기를 원했고, 원효는 그들을 수
습하여 천성산에 89개의 암자를 지어 머물게 했다고 한다.

그 이후 그들 1,000명은 천성산 상봉(지금의 화엄벌)에서 원효의 화엄경 강의을 듣고 모두 도를
터득하여 성인(聖人)이 되었다고 하며, 그 연유로 산의 이름이 천성산(千聖山)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89암자에 머물던 그들을 집합시키기 위해 큰 북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 북을 매달아 두던
곳이 집북재라고 한다.

▲ 중생구제를 향한 부처의 은은한 메세지가
담겨진 범종각(梵鍾閣)

▲ 홍룡사의 법당인 대웅전(大雄殿)
1910년에 지은 것으로 1979년에 중수했다.


창건 이후 16세기까지 천불전과 관음전, 나한전, 십왕전 등 10여 동의 불전(佛殿)을 갖춘 천성산
제일의 사찰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말끔히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세상에 드러내지 못한 채,
300년을 묻혀 살다가 1910년 법화선사, 혜오선사가 합심하여 절을 크게 일으켜 세웠으며, 1970년
대 후반 우광(愚光)이 대대적인 불사를 벌여 인근 내원사(內院寺)에 버금가는 사찰로 성장했다.

홍룡사는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칭하고 있다. 홍롱폭포 옆에 백의관음(白衣觀音)을 모신 관음전이 있고, 무설전에 천수천안관음보살(千手天眼觀音菩薩)이 있다. 또한 폭포에서 가끔 관음보살이
나타난다고 한다. 과연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진짜라면 폭포는 그의 거대한 감로수(甘露
水)인 셈이다.

▲ 무설전(無說殿)
1984년에 세워진 건물로 경전을 배우고
참선을 하는 곳이다.

▲ 산신각(山神閣)
산신탱화와 독성(獨聖)탱화가 모셔져 있다.


이토록 오랜 내력을 지니고 있으나 이곳의 모든 것이 세월에 묻히고 산산히 흩어져 소장 문화유
산은 아쉽게도 없다. 허나 홍룡폭포 같은 훌륭한 자연유산을 지니고 있어 그 허전함을 다소나마
달래준다.

깊은 산중에 들어앉은 탓에 잠시 세속의 짐을 내던지며 머물고 싶은 곳이다. 관음보살의 인자함
에 마음의 위안을 얻고, 절을 뒤덮은 대나무의 잎사귀 소리에 속세에 오염된 귀를 씻으며, 비단
과 같은 홍룡폭포의 장쾌한 음악소리에 번뇌에 젖은 정신이 맑아진다. 폭포수에 내려앉은 낙엽에
세상 번뇌를 살며시 띄워 보내며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 홍룡사(홍룡폭포) 찾아가기 (2009년 6월 기준)
* 1호선 명륜동전철역(1번 출구), 범어사역(4,6번 출구)에서 양산시내버스 12번을 타고 대석에서
내린다. 버스는 거의 10분 간격으로 자주 있다.
* 2호선 호포역(1번 출구)에서 63, 88번 시내버스를 타고 대석 하차, 63번은 1일 6회, 88번은 1
일 19회 운행한다.
* 2호선 양산역(4번 출구)과 양산시외터미널에서 63,67,88번 버스 이용
* 대석에서 홍룡사까지는 차편이 없으며 50분 정도 걸어가거나 택시를 타야 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소형차는 홍룡사 앞까지 접근이 가능하나 주차는 홍룡사 주차장에서 해야
된다. 주차장에서 홍룡사까진 900m)
① 경부고속도로 → 양산나들목을 나와 언양방면으로 우회전 → 대석에서 우회전 → 홍룡사 주차
장 → 홍룡사
② 부산 → 양산 → 언양방면 35번국도 → 대석에서 우회전 → 홍룡사 주차장 → 홍룡사

★ 홍룡사 관람정보
* 입장료는 없으며 주차장은 유료이다.
* 홍룡사 위쪽으로 홍룡폭포와 관음전이 있다. 이들은 홍룡사의 상징으로 계란으로 치면 노른자
위와 같다. 다른건 지나치더라도 이들 노른자위는 꼭 둘러보도록 하자.
* 홍룡사에서 원효암까지 등산으로 50분 정도 걸리며, 거기서 화엄벌과 원효산, 천성산으로 오를
수 있다.
* 소재지 -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 (☎
055-374-4177)


♠ 관음도량 홍룡사 둘러보기


▲ 대웅전 아래에 길게 누운 석조(石槽)
석조 위로 조그만 동자상이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이며 지그시 수면을 바라본다.
수면에 떠 있는 연잎은 화사했던 연꽃을 접으며 다시금 내년 여름을 기다린다.


▲ 연꽃을 닮은 또 다른 석조
반야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감로수로 가득한 석조가 있다. 천성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것일까? 늘 옥계수로 가득하여 이곳에 오른 중생들의 목마름을 해소시킨다.
바가지로 물 한모금 떠 마시며 마음에 낀 속세의 때를 말끔히 씻어본다.


▲ 대웅전 석가여래3존불

단청이 칠해져 있지 않은 나무색 그대로의 대웅전 내부에는 1979년에 조성된 3존불이 모셔져 있
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파란머리의 조그만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좌측에는 보관(寶冠)
을 쓴 관음보살이 나란히 자리한다. 그들 뒤로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가 걸려 있는데, 이 그림
은 화승(畵僧)으로 유명한 승려 석정이 그린 것으로 간결하고도 섬세한 붓놀림이 그대로 살아난
듯 채색의 기운이 온화해 보인다.


▲ 무설전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普薩)

무설전 불단에는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미묘한 천수천안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여기서 천
은 무량.원만의 뜻이고 천수는 자비의 넓음을, 천안은 지혜의 원만함을 나타낸다. 이 불상은 27
개의 얼굴, 1천 개의 손과 눈을 가진 관음보살로 대비관세음보살(大悲觀世音普薩)이라고도 한다.
허나 불상에 1천 개의 손과 눈을 만들어 달기는 어렵다. 그래서 간단히 줄여서 얼굴 양쪽에 20
개씩 40대의 손을 만들고, 그 손바닥에 눈을 그렸다. 40개의 손과 눈은 25종류의 중생을 제도한
다고 하므로 40에 25를 곱하면 1,000이 된다. 허나 꼭 1,000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중생구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11개의 얼굴을 가진 관음보살로 본 얼굴 위에 10개의
조그만 얼굴이 달려있다. 본 얼굴은 진실과 불변의 지혜를 뜻한다고 한다.


▲ 홍룡폭포로 인도하는 수정문(守正門)

홍룡사에서 폭포로 가려면 수정문이란 돌문
을 지나야 된다. 문이라고는 하지만 여닫는
문짝은 없으며 어느 누구 가리지않고 반가
이 맞는다. 수정문처럼 넓은 포용력을 지니
며 살리라 다짐을 하건만 돌아서면 언제 그
랬냐는 듯 금세 잊어 버린다. 그래서 사람
은 절대 신이 될 수 없는 모양이다. 폭포까
진 계단길이 펼쳐져 있어 오르기는 쉬우며,
중간에 산신과 독성을 모신 산신각(山神閣)
이 있다.

폭포 아래로 그냥 지나치기는 아까운 아름
다운 계곡이 숨죽이며 누워있는데 이곳은
상수원 보호구역이라 사람들의 출입이 통
제되어 있다.

◀ 홍룡폭포에서 내려온 계류(溪流)가
계곡 암반에 조그만 폭포를 빚어놓으며
미끄러지듯 속세로 흘러간다.


♠ 붉은 용이 승천했다고 전하는 천성산 제일의 절경
관음전과 어울려 한폭의 수채화를 자아내는 - 홍룡폭포(虹龍瀑布)


홍룡사를 품은 천성산의 두툼한 허리에 비단폭같은 하얀 띠가 하나 둘러져 있다. 바로 홍룡폭포
다. 홍룡사의 든든한 후광이자 밥줄인 이 폭포는 상폭(上瀑)과 중폭(中瀑), 하폭(下瀑) 3단으로
꺾어지면서 칼로 거칠게 다듬은 듯한 절벽에서 거침없이 떨어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선녀가 하
얀 비단 옷을 걸치고 어여쁘게 춤을 추는 것 같다. 폭포에선 가끔 관음보살이 나타난다고 하는
데 우리가 갔을 때는 아쉽게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상폭은 높이가 80척, 중폭은 46척, 하층은 33척 정도로 머나먼 옛날 붉은 용이 폭포 아래에 살
다가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거짓말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그래서 이름도 홍룡폭포
라는 것이다. 용은 선녀, 신선과 더불어 아름다운 명승지에 단골로 등장하는 전설 소재이다. 그
만큼 이곳의 빼어난 절경이 옛 사람들을 단단히 매료시킨 것이다. 수량이 많고 맑은 날에는 폭
포 상층에 무지개가 피어올라 천상(天上) 세계를 자아낸다.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가을이 졸음을 퍼붓고 있는 폭포,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취한 단풍잎과 폭
포의 물줄기가 만나는 그곳에 가을햇빛이 부서지고 있다. 칼 같이 솟은 절벽 아래에는 어젯밤에
내린 어둠이 한낮에도 채 가시지를 않는다. 그만큼 햇빛이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깊숙한 심산유
곡(深山幽谷)이다.

폭포 우측에는 홍룡사 관음전(觀音殿)이 폭포와 그 주변풍경과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며 한 세트
를 이룬다. 양산 관련 관광자료를 보면 관음전을 옆구리에 낀 홍룡폭포의 모습이 단골로 나오며
, 홍룡사입구 대석리에도 그런 사진이 대문짝만큼 걸려 중생들을 손짓한다. 비가 좀 와서 수량
이 많으면 폭포의 장대한 모습을 만날 수 있을텐데, 가을 가뭄이 천하를 목마르게 하니 수량도
길게 내려진 실타래마냥 가늘어진 것이다. 밤이 되면 하늘나라 선녀들이 실타래 같은 폭포수를
타고 내려와 목욕을 하진 않을까? 그때를 노려 금강산 나뭇꾼처럼 한 건 건지고 싶다.

폭포와 잘 어우러지는 모습이 인상적인 관음전은 1970년에 지어진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의 맞배지붕 건물로 안에는 홍룡사가 자랑하는 백의관음보살(白衣觀音菩薩)과 폭포에 가끔 나타
난다는 낭견관음이 모셔져 있다. 또한 관음도량의 품격을 드러내기 위해 관음탱화와 천수천안관
음탱화로 후불탱화를 구성하였다.


▲ 관음전에 모셔진 백의관음보살
어진 누님이자 성모와 같은 모습으로 삶에 지친 중생을 맞는다.


▲ 폭포에 고인 물을 바라보는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
1988년에 조성된 불상으로 왼손에는 중생을 치료하는 약이 담긴 약합(藥盒)이 들려 있다.
머리에는 특이하게
파주 용미리 석불과 비슷한 네모난 돌갓이 얹혀져 있으며 수인은
약사불로는 드문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했다.


▲ 폭포를 타고 내려온 천성산의 감로수는 이곳에 잠시 머물며
기나긴 여정을 준비한다. 한번 떠나면 다시는 오지 못할 그들의 고향에 대한 미련 때문인 듯,
쉽사리 발길을 떼지 못한다. 잔잔한 수면 위에 살포시 놓여진 낙엽은 그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가을 물놀이에 열심이다.


♠ 천성산 800m 고지에 터를 닦은 조그만 산중암자 ~ 원효암(元曉庵)


홍룡사를 둘러보고 화엄벌의 억새를 만나기 위해 천성산을 오른다. 절을 나오면 바로 왼쪽
으로 등산로가 있는데,처음에는 경사가 완만하나 각박한 세상살이를 상징하듯 경사가 서서
히 급해진다. 오랜만에 산을 올라서 그런지 여간 힘들지가 않다.예전에는 정말 다람쥐처럼
날라갔었는데, 나도 어느덧 30고개를 넘고 말았다. 금방 나오겠지 싶은 화엄벌과 원효암은
좀처럼 나오지를 않는다.한 발짝, 두 발짝 내딛으면서 하늘도 그만큼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홍룡폭포에 반하여 천성산에 깃들여진 가을은 산자락에 고운 단풍을 그려 천하에 선보인다.
아직 단풍이 절정에 이르진 못했지만 1달 정도 지나면 산 전체가 붉은 단풍잎으로 활활 타
오를 것이다.

30분 정도를 오르니 오르막길은 끝나고 평탄한 길이 나타난다.여기서 화엄벌과 원효암으로
갈라지는데, 나의 제안으로 우선 원효암부터 가기로 했다.5분 정도를 더 낑낑대며 산을 타
니 그제서야 조그만 산중암자, 원효암의 속살이 우리를 반긴다.

천성산 800m고지에 둥지를 튼 원효암(元曉庵)은 부처의 세계를 상징한다는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에 들어앉은 듯하여 아래서 보면 정말 하늘 높이 떠있는 신선의 별장같다. 하늘과도
무척이나 가까워 아래 세상과 공기부터가 확연히 틀리다. 확 트인 공간에 자리하여 조망도
가히 명품급으로 이곳에 올라서면 양산 땅이 바라보인다. 다만 아쉬운 건 운무(雲霧)가 천
성산 허리를 얇게 두르고 있어 보이는 시야가 그리 넓지는 못했다.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인 원효암은 홍룡사와 더불어 7세기 중반에원효대사(元曉大師, 617~
686)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원효암에선 646년에 창건되었다고 우기나 그때는 그의 나이 불
과 29살이다. 그 이듬해 황룡사(皇龍寺)의 주지가 되긴 하지만 독자적으로 절을 세울 정도
는 아니었던 것 같다. 또한 그 당시는 신라의 서울인 경주를 중심으로 절이 지어지던 시절
이라 굳이 이곳까지 내려와 절을 지을 이유는 없다.

원효암의 창건설화도 홍룡사와 대체로 비슷하다.당나라에서 그의 현판을 들고 찾아온 태화
사 승려 1천 명을 거둔 원효는 천성산에 89개 암자를 지어 그들을 머물게 했는데,원효암이
그 암자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설화에 불과하며, 구
체적인 창건 시기는 그 이후이다.

이렇다 할 내력을 남기지 못한 채, 천성산의 운무 속에 살아온 원효암이 다시 세상에 모습
을 드러낸 것은 1905년으로 효은(曉隱)화상이 중창을 했다.1906년에는 인법당 오른쪽 바위
에 아미타삼존불을 조성했으며, 1976년 경봉(鏡峰)은 종각과 범종을 조성했고, 1980년에는
승려 박지완이 인법당을 신축했다.특히 1991년에 일어난 신기한 이적(異蹟)은 원효암을 일
약 유명하게 만들었다.

1991년 여름 어느 날의 일이다.비가 오지 않는데도 천둥과 번개가 2시간 동안 요란하게 춤
을 추다가 원효암 동쪽 사자봉을 향해 벼락이 내리쳤다.다음날 사람들이 가보니 글쎄 벼락
을 맞은 암벽에 부처의 형상이 조각이 된 듯 드러나 있는 것이다.그 소식을 들은 통도사의
월하(月下)대종사가 바로 달려와 이를 친견하면서 하늘빛이 빚어서 만들었다 하여 천광(天
光)이라 하고, 바위가 향한 동쪽(동방)에는 약사불이 있으므로 천광약사여래(天光藥師如來)
라 하였다. 과연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천둥번개가 바위를 쪼아 불상 비슷한 모양으로 빚
었다는 것에 절로 머리가 숙여질 정도로 신비롭기 그지없다.아무리 인간이 대단하다 똥폼
을 잡아도 위대한 자연 앞에서는 역시 어린아이에 불과하다.하지만 아쉬운 건 그날 우리는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다.애당초 이곳까지 오를 생각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
다.
자연의 이적이 나타난 그 해, 후불탱화와 신중탱화 등을 조성했고 2004년에 인법당의 단청
을 새롭게 칠해 지금에 이른다. 건물로는 법당인 인법당(人法堂)을 비롯하여 삼성각, 요사
, 의상대 등 5~6동이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인법당에 봉안된 석조아미타여래좌상과
그 좌측에 있는 마애아미타삼존불이 있다. 석조아미타여래좌상은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보
물로 1648년에 조성되었다고 하며, 불상의 배에서 불상 조성시기가 적힌 복장기(腹藏記)와
유물이 나왔는데, 불상과 복장유물(腹藏遺物)은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430호이다.


▲ 원효암 마애아미타3존불(磨崖阿彌陀三尊佛)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431호


인법당 좌측 바위에 자리한 마애아미타3존불은 1906년에 조성된 것으로 조선후기에 만들어
진 몇 안되는 마애불이다. 불상 왼쪽에 '世尊應化二千九百三十三年四月日(세존응화 2933년
4월일)'이라 새겨진 명문은 조성 시기를 알려주며, 불상 위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이 구름처럼 떠있다.두광(頭光)을 갖춘 3존불은 선각(線刻)으로 얇고 은은하게 표현되었으
며, 가운데로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이, 좌우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
勢至菩薩)이 아미타불을 향해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인다. 지방문화재긴 하나 이를 알리는
안내문도 없어 자칫 그냥 지나칠 뻔했다.바위에 뭔가 새겨져 있음을 직감하고 다가서니 선
으로 처리된 마애불이 나를 맞는다. 건강상태가 양호하여 근래에 만든 불상으로 여겼으나,
나중에 알아보니 몇개 없는 조선후기 마애불이라는 것이다.

원효암에 들어서니 어느덧 12시다. 마침 절에서는 점심공양이 한참이다. 우리도 배고픈 배
를 위로코자 공양에 동참했다.공양은 흰 쌀밥에 김치와 콩나물 등의 나물, 그리고 국이 전
부다. 나물과 밥에 고추장을 첨가하여 비빔밥으로 비벼먹는다. 마침 신도 아줌마가 불상에
공양한 것이라며 콩나물국을 나에게 준다. 국은 이미 식은 것이라 안받을려고 했으나,부처
에게 공양한 것이라 맛있다며 적극 들이미는 통에 밥그릇에 담아가지고 왔다. 이미 부처가
식사를 하며 입댄(?) 음식을 먹어보기는 처음인데, 그에게 바친 음식이라는 이미지 때문인
지 맛이 기존 콩나물국과는 확연히 틀린 것 같다.위대한 사람과 식사를 같이한 것 같은 영
광된 기분이 밀려온다.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먹는 음식은 그게 무엇이든 다 맛있는 것 같
다.천하가 훤히 펼쳐진 산사에서의 점심공양은 색다른 맛을 선사하며, 밥맛을 더욱 꿀맛으
로 인도한다.

이렇게 점심을 먹고 화엄벌로 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의논을 하였다. 다들 오랜만의
산행이라 지쳐있는 상태, 나도 그렇고,그래서 화엄벌은 다음으로 미루고 수레길을 따라 속
세로 내려갔다.미륵전 부근 약수에서 디저트로 물 한바가지를 떠 마시니 얼마나 시원하던
지 마음이 확 트이는 것 같다. 절을 찾은 중생들의 갈증을 해소해주는 고마운 약수이나 가
뭄이라 나오는 양이 너무 적어 보기에도 무척 답답하다.

원효암에서 담아온 사진은 아쉽게도 마애불 밖에는 없다. 부산 선배도 거기서 많은 사진을
찍었으나 모두 분실했다고 한다.서울에서 가기가 정말 쉽지 않은 곳인데 정말 통탄할 따름
이다.

※ 원효암 관람정보 (2009년 6월 기준)
* 교통편은 홍룡사 부분 참조
* 원효암 매점에서 셔틀버스가 1일 3~4회 가량 운행된다. 첫차는 대략 오전 9시, 막차는
오후 1시 경이다.절과 군부대 관련 차량을 제외한 일반 차량은 출입이 통제되므로 매
점 부근에 주차하여 버스를 타야 된다. 버스로 절까진 15분 정도 걸리며 길이 매우 험
난하다. 거의 죽령이나 한계령 수준,
* 등산으로 가는 경우 홍룡사에서 40분 정도 걸리며,원효암 매점에서 찻길을 따라 올라
가는 경우 거의 2시간 정도 걸린다. 허나 이 길은 군작전도로로 오후 이후로는 통행에
제한이 따른다.
* 인법당 안에 조선 중기 불상인 석조아미타여래좌상이 있으며 그 좌측 바위에 마애아미
타삼존불이 있으니 놓치지 말고 꼭 둘러보자.
* 원효암 동쪽 산정에 천광약사여래불이 있다. 지나치기 쉬우니 꼭 살펴보자.
* 소재지 -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 산 1-1 (☎ 055-385-4111)


▲ 원효암 코스모스길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공기가 청정하다보니 코스모스의 색깔이 유난히 깨끗하다.
속세에 찌든 속세의 코스모스와는 차원이 달라 보인다.

▲ 코스모스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양산 땅
저 까마득한 밑에서 여기까지 오로지 두 다리에 의지해 올라온 것이 전혀
믿겨지지가 않는다.


▲▼ 원효암으로 가는 수레길(군작전도로)

속세로 내려갈 때는 원효암 셔틀버스를 이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절 어디에서도 버스시간
표는 붙여져 있지 않았으며 버스로 보이는 차량도 눈에 띄질 않았다. 절 종무소에 시간을
물어보면 되겠지만 이미 절을 벗어난 상태라 다시 되돌아가기도 귀찮다. 아무래도 버스는
틀린 듯 싶어 다시 두 다리의 의존해 속세로 내려간다.

원효암으로 가는 수레길은 천성산에 자리한 군부대가 뚫어놓은 군작전도로이다. 원효암도
어부지리로 저 길을 통해 수레 접근이 가능하다.포장길과 비포장길이 섞여있으며 길 좌우
로 억새들이 마음껏 향연을 펼쳐 보인다. 비록 화엄벌 억새는 만나지 못했지만 이곳의 억
새도 화엄벌의 그것처럼 적당하게 밭을 형성하고 있다. 억새밭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화
엄벌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을 대신한다. 그 사진으로 화엄벌까지 갔다고 우겨볼 심정으로
말이다. (그 사진은 모두 분실됨..)

내려가는 도중에 덕계리(서창)로 내려가는 등산로가 있으며, 홍룡사에서 오르는 등산로와
달리 인적이 뜸해 우리가 거의 전세를 내버리다 싶이 했다.뱀꼬리처럼 구불구불하게 이어
진 그 기나긴 길은 거의 6km로 수레의 통행도 거의 없는 강원도 두메산골 길을 걷는 기분
이다. 다리가 조금 아프긴 했지만, 언제고 거닐고 싶은 길이다.다만 군도로로 중간중간에
군사시설이 옥의 티처럼 버티고 있으며,지뢰가 묻힌 곳도 여럿 있으니 주의 표시가 된 곳
은 감히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그 길을 1시간 30분 정도를 걸으니, 그제서야 아랫 세상에 이
른다. 거의 종점에 다다른 시점에 이르자 굳게 닫힌 철문이 우리의 발목을 붙잡으려고 든
다.허나 다행히 문 곁에 사람이 통행할 수 있는 커다란 개구멍이 뚫려져 그 구멍을 통해
거뜬히 밖으로 나온다. 문이 철석같이 닫힌 걸 보니 그날 수레의 통행시간도 끝난 모양이
다. 아까 한참 내려가는 도중에 먼지를 자욱히 일으키며 힘겹게 산을 오르던 원효암 셔틀
버스를 보았는데, 홍룡사 밑에 있는 원효암 매점에서 버스 시간을 보니 그게 절로 오르는
마지막 차였던 것이다. 그 차는 낼 아침 9시에 다시 속세로 내려온다. 하염없이 기다리다
가는 정말 낼 아침까지 거기에 있을 뻔 했다.

내려올 때 파전에 동동주 한잔 하려고 했는데 파는 집은 보이지 않는다. 원효암입구 철문
에서 20분을 걸어 35번 국도가 달리는 대석에 이른다. 여기서 음료수 하나 사먹고 양산시
내버스 12번을 타고 부산으로 들어갔다. 이리하여 홍룡폭포 나들이는 약간의 여운을 남기
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0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는 한달까지이며, 원본
(☞보기)
은 2달까지임>
* 본 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동호회)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작게 처리된 사진은 마우스로 꾹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글을 읽으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고 댓글 하나씩 꼭 달아주세요.
*답사, 촬영 일시 - 2008년 10월 5일
*작성 시작일 - 2009년 1월 12일
*작성 완료일 - 2009년 1월 16일
*숙성기간 ~ 2009년 1월 16일 ~ 2009년 6월 25일
*공개일 - 2009년 6월 25일부터


Copyright (C) 2009 by Par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