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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도(巨濟島) ~ 한산도(閑山島) 역사 기행 (2005년 10월 30일)'
'상편 ― 거제도 학동 해변 ~ 옥포대첩비 ~ 한산대첩의 현장(한산도 앞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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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거제도, 통영 지역은 여전히 먼 곳이다. 거리상으로는 부산(釜山)보다 더 가깝지만 체감 거리는
부산보다 더 먼 곳, 비록 12월 중순에 통영까지 고속도로가 뚫리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경성(京城)에서
천리 밖에 떨어진 머나먼 남쪽 지역이다.
올 여름에 거제도와 통영의 한산도를 갈 계획을 세웠으나 갑자기 제주도로 길머리를 바꾸는 통에 실천에
옮기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10월 29일, 개인적으로 잘 아는 어느 여행사에서 거제도 방면으로 무박 여행을 간다고 하여 이 기회에
저번에 가지 못했던 그 곳을 찾아갈 생각으로 '거제도에 이런이런 일이 있어서 가게 되었는데 거기까지 좀
태워주시지 않겠습니까?' 부탁을 하니, 다행히 자리가 좀 남는다며 허락을 해준다.
21시 30분, 세종문화회관 뒤쪽 출발 장소로 찾아가 관계자 분들을 만나뵈니 잘갔다 오라면서 거제도 방면
1호차 제일 앞좌석으로 자리를 잡아준다.
드디어 22시, 거제도로 가는 관광버스 2대는 광화문을 출발, 남쪽을 향해 부지런히 달리기 시작한다.
손님으로 온 사람들은 여행에 대한 설레임 때문인지 외도(外道)에 대한 지나친 환상 때문인지 다들 싱글벙글..
나는 한산도에서 불멸의 충무공을 만날 생각에 역시 싱글벙글..
새벽 4시, 거제대교를 건너 견내량 부근에서 차는 멈춰선다. 그 여행 일정에 의하면 여기서 6시까지 차내 수면
혹은 부근 해수탕을 이용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나를 포함 대부분은 차에서 잠을 청한다.
아침 6시가 되자, 버스는 잠에서 깨어나 사람들을 태우고 다시 거제대교를 건너 한산도 휴게소로 갔다.
거기서 아침으로 해물탕을 먹었는데 그런데로 먹을만 하다. 특히 '누룽지 숭늉'은 가히 예술적..
이 휴게소는 작년 7월에도 한 번 와본 적이 있는데 그 때는 여기서 점심을 먹었다. 물론 비슷한 메뉴로.
거제도 방면으로 가는 guided tour 관광버스는 거의 여기서 아침이나 점심을 해결한다.
아침을 먹고 잠시 푸르른 바다를 바라보며 소화 좀 시키다가 7시 10분에 출발, 8시 경에 몽돌의 고향인
학동해변에 도착했다.
학동은 작년에 한 주 간격으로 2번이나 찾은 적이 있어 별로 낯설지가 않은 곳이다. 오히려 친근한 곳이지.
사람들은 남해바다와 친구가 되고 싶어 모두들 몽돌 해변으로 내려간다.
* 학동 해변 찾아가기.. (* 2005년 12월 기준)
① 대중교통 - 고현터미널(신현)에서 학동까지 시내버스가 약 1시간 간격으로 운행
- 통영에서 거제,동부 경유 학동 행 직행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다닌다.
② 승용차 - 남해고속도로(부산,김해,창원,울산) → 마산 → 진동 → 고성 → 통영 → 신거제대교 →
사등,사곡 → 거제 → 동부 → 부촌리 → 학동리
- 중부고속도로(서울,인천,대전,진주) → 사천 → 고성 → 통영 → 신거제대교 → 사등,사곡 →
거제 → 동부 → 부촌리 → 학동리
♠ 꿈꾸는 몽돌의 세상 ~ 학동 몽돌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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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아침의 바다 ~ 학동 해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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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건너 멀리 보이는 저 곳은 해금강(海金剛)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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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돌과 바다와의 만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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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보이는 외딴 섬은 그 유명한 외도(外道)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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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동해변을 거니는 사람들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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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동해변을 거니는 사람들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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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롱몽롱하게 생긴 몽돌들의 조그만 세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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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떠나고 없는 쓸쓸한 학동 해변 |
학동에서 이렇게 남해바다와 몽돌과 더불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으려니 어느덧 시간은 8시 30분,
이제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엄격한 원칙에 따라 여기까지 같이 왔던 사람들에게도 작별을 고할 시간이 되었다.
그들은 외도까지 아니 서울까지 같이 가자고 하였으나, 나는 이미 나의 갈 길을 정해둔 상태라 아쉽지만
여기서 이별(離別)을 고했지. 그들의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어차피 사람의 인생이란
혼자가 아니던가..?
그럼 내가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어디긴 어디야? 거제도의 서울인 장승포(長承浦)지, 학동3거리에 있는
가게에 들어가 장승포 가는 시내버스 시간을 물어보니 대략 1시간 30분에 1대 꼴로 다닌다고 하는데
버스시간표는 바람이 났는지, 몇일 전 바람에 날려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언제 올지 모르는 장승포행 시내버스를 우두커니 기다리다 지쳐서 지나가는 차량을 잡아보았으나
좀처럼 잡히지를 않는다. 게다가 지나가는 차량도 몇 대 없고, 거의 다 해금강과 거제 방면 차량들만..
그러다가 동네 아줌마 2명이 정류장으로 어슬렁 나와 차를 기다린다. 흠 이제 차가 올 시간이구나.
9시 20분이 되자 해금강에서 장승포로 가는 거제시내버스가 나타난다.
푸르른 남해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14번 국도를 따라 거제도의 유명 해변인 구조라, 와현, 지세포를 차례로
지나 10시 경에 장승포 시내에 도착, 능포 입구에서 내려서. 다시 옥포(玉浦) 방면으로 가는 시내버스로
대우조선소에서 하차, 부근 숲 속에 있는 옥포대첩비를 찾았다.
♠ 충무공 이순신의 최초의 해전(海戰) 전승지 ~ 옥포(玉浦),
그 승리를 기념하여 세워진 옥포대첩비(玉浦大捷碑)와 옥포정(玉浦亭)
▲옥포정
장승포와 옥포 사이에는 옥포만(玉浦灣)이라 불리는 움푹 들어간 해만(海灣)이 있다.
지금은 세계 최대의 조선소(造船所)인 대우 옥포조선소가 있는, 세계 조선산업의 중심지로 매일 거대한
배들이 만들어지고, 바다에 띄워지며 또한 세계 곳곳으로 수출되는 산업의 현장이다.
또한 이 옥포만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수군이 첫 전승(戰勝)을 거두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1. 임진왜란의 발발 (경상도 수군의 참패, 남해바다를 장악하려는 왜군과 그들을 기다린 이순신)
왜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자신의 대외 정복 야욕을 채우고, 지방 다이묘(大名)들의
불만도 해소할 겸 해서,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외치며 1592년 4월, 15 ~ 20만의 대군으로 무모하게 조선을
공격한다.
오랜 내전에서 다져진 전투실력과 조총을 앞세운 왜군의 파상적인 공격에 미처 대비도 하지 못한 조선정부는
그저 속수무책일 뿐, 조선의 육군은 왜군의 공격에 그저 등을 보이며 줄행랑 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바다를 담당하던 수군 역시 전혀 대비가 되어있지 못해,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 부산 수영동)을 담당하던
박홍(朴泓)은 왜군과 제대로 맞서지도 못하고 줄행랑을 쳤으며, 경상우수영(慶尙右水營, 경남 통영)을
담당하던 원균(元均) 역시 왜군과 싸워 패배, 배를 버리고 수군을 해산시켰다,
한편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왜의 동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좌수사로 부임하자마자 2년 동안 꾸준히
수군들을 훈련시켰다. 특히 화포술과 해상전투훈련을 중심으로 강하게 훈련을 시켰으며 나대용(羅大用)의
건의로 거북선이라 불리는 귀선(龜船)을 건조하였고, 꾸준히 판옥선(板屋船) 등의 전함을 만들어서 계속
수군의 전력을 증강시켜 나갔다.
경상도의 수군을 격파한 왜군은 이제 조선의 수군은 더 이상 없겠지 싶은 안일한 생각에 웅천(熊川, 진해),
합포(合浦, 마산), 거제도(巨濟島) 주변을 차례대로 점령해 나간다.
2. 이순신 수군의 첫 출전 ~ 그리고 대승리 ~ 옥포해전의 전개 과정
5월 초까지 왜군과의 싸움에서 이렇다할 승리를 거두지 못한 조선, 그래서 왜군을 더욱 두려워 했고,
이순신의 전라좌수군 역시 그 예외는 아니었다. 다들 피나는 고된 훈련을 통과한 용장(勇將)들이었지만,
아직 실전(實戰)의 경험이 없는 그들로써는 왜군은 역시 공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한편 원균은 이순신에게 옥포 지역의 중요성을 설명하며 옥포를 공격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래서 이순신은 전라좌수군과 전라좌수영 소속 판옥선(板屋船) 25척, 협선(挾船) 15척, 포작선(匏作船) 46척을
이끌고 거제도로 출진했으며, 원균은 경상우수영 전선 3척으로 당포 앞바다에서전라좌수군에 합류, 옥포를
향해 힘차게 노를 저었다.
5월 7일 정오(正午), 드디어 옥포에 도착한 조선 수군은 옥포에 짱박고 있던 왜선 50여 척을 발견하였다.
한편 옥포에 머물러 있던 왜장(倭將)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는 '조선 수군이 아직도 남아 있었나? 이 기회에
철저히 분멸(焚滅)시켜 주지' 하며 도도한 웃음을 띄우며 부하들을 독려하여 배에 승선시키고 조선 수군을 향해
돌격을 시도한다. 그들의 해상 전투법은 배를 적선(敵船)에 대어 적선으로 넘어가 칼과 창으로 맞짱을 뜨는
이른바 백병전(白兵戰)이다. 왜군은 수십 년에 걸친 내란으로 백병전이 거의 몸에 배어 있던 상황이라 그렇지
못한 조선 수군에게는 좀 불리할 수가 있었다.
특히 백병전식 수전(水戰)은 그 당시 세계 해전의 공통적인 싸움 방식이었다. 물론 우리의 고려, 백제, 발해,
신라도 그 예외는 아니며, 1274년과 1281년에 고려가 왜 열도를 정벌할 때 그 전황을 그린 그림을 보면
배 위에서 창과 칼로 싸웠음을 알 수 있다.
![]() | ◀ 1274년과 1281년, 왜 열도를 정벌한 고려, |
이순신 장군은 그런 어찌보면 무식한 백병전을 지양하고 세계 최초로 새로운 선진적인 전법을 구사하였으니,
바로 그 시대까지 그 예가 없었던, 이른바 원거리 포격 전술이다.
왜군의 배에는 대포가 없었다. 배가 워낙에 빈약하여 대포를 설치하여 발포할 경우, 배에 심각한 충격을
줄 수 있어서, 그냥 조총과 화살만 사용하였다. 그에 비해 조선군은 이순신과 그 참모의 끊임없는 함선(艦船)
개량 프로젝트로 배에서 대포를 쏴도 아무런 충격이 없을 정도로 단단한 배를 만들어 내었다.
조선 수군이 설마 대포까지 장착했겠는가? 싶은 잘못된 생각에 빠진 도도 다카도라는 조선수군이 일제히 대포를
들이미는 모습에 충격에 빠져 그만 뒤로 넘어졌다. '이런 큰일 났다. 빨리 배를 돌려라..'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은 상황, 이순신 장군의 호령으로 지자총통(地字銃筒), 현자총통(玄字銃筒) 등의
대포는 일제히 왜군을 향해 힘찬 포성을 울리고, 거기서 날아온 환(丸)은 자칭 천하무적을 자랑했던 그들의
배를 조금의 봐줌도 없이 하나 둘, 그렇게 산산조각 내버린다. 예상치도 못한 화포공격에 왜군은 순식간에
아비규환(阿鼻叫喚)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른다. 1분이 멀다하고 날아오는 대포알, 그리고 조선군이 쏘아대는
놀라운 적중률의 화살은 모조리 왜군을 가격(加擊)하고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그저 죽어주는 수 밖에는 없었다.
죽기 싫은 왜군은 바다에 뛰어들어 어떻게든 발버둥을 쳐보나, 역시 남해바다가 그들을 고이 놓아두질 않는다.
3. 세계 해전사의 한 획을 그은 옥포해전 ~ 그 전쟁의 결과
약 2~3시간에 걸친 옥포 해전은 조선 수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버렸다.
이 전투로 왜선 26척을 격침했으며, 그 외 20척에 가까운 배를 반파(半破) 혹은 나포(拿捕)하였고, 왜군 약
8000 ~ 9000명을 살육(殺戮)했으며, 수백 명의 왜군을 포로를 잡고 왜적의 머리 수천 급(級)을 취하는 큰 전공
(戰功)을 세웠다.
그에 반해 조선군의 피해는 없다. 있다면 부상병 몇 명이 전부.. 세계 해전사상 그 유례가 없는 정말 일방적인
승리였다.
조선 수군에게 거의 궤멸을 당한 왜군, 특히 그의 수장(首將) 도도 다카토라는 자신의 목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부하들을 사지(死地)에 버려두고 열심히 줄행랑을 쳤다.
한편 옥포에서 대승을 거둔 조선 수군은 마산 앞바다로 넘어가 왜선 5척을 격침하고 약 1000명을 살육하는
전과를 올리며 유유히 서쪽으로 사라졌다.
이 옥포해전은 임진왜란에서 조선군이 거둔 첫 승리였다. 이 승리의 소식은 조선 곳곳으로 전해져 우울증에
빠진 조선정부와, 군사들, 의병들, 민중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 주었으며, 승승장구하며 북진을 계속 하던
왜군에게도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특히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세계 최강의 수군에 의해 옥포 해전 이후로도
계속 왜의 수군이 거의 전멸을 당하다 싶이 깨지면서 남해에서의 재해권을 상실하였으며 서북쪽으로 군량,
군사 수송에 큰 차질이 생기면서 임진왜란의 전황이 점차 왜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게 된다.
또한 세계 해전사상 처음으로 원거리 화포 공격술을 사용하여 백병전에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세계 해전사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으며 그의 빛나는 23전 23승의 서막(序幕)을 열게 되었다.
그 이후, 옥포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1959년에 옥포만이 바라보이는 당등산성(堂嶝山城, 현재 대우조선소의
가장자리 언덕)에 대첩비를 세우고 공원과 옥포정을 조성하였으며 1963년에 당등산성을 포함한 옥포만 일대가
대우조선소 자리로 선정됨에 따라 부득불 대첩비와 옥포정을 대우조선소 뒤쪽 언덕,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대첩비가 옥포만을 바라보며 서 있으면 정말 그 당시 옥포해전의 감동이 쉽게 떠오를 텐데, 한국 근대화의
상징인 대우조선소에 의해 뒷쪽 구석으로 밀려나 버렸고 또한 바다가 보이지를 않으니 참으로 애석할 뿐이다.
비록 장소를 옮기더라도 옥포 앞바다가 잘 바라다보이는 곳으로 옮겼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 옥포대첩비 찾아가기.. (* 2005년 12월 기준)
※ 대중교통 - 고현터미널(신현)에서 장승포, 능포행 시내버스 이용
- 장승포, 능포에서 고현 방면 시내버스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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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포대첩 기념탑 안내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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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 3칸, 측면 2칸의 옥포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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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포정 도리 부분에 그려진 그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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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포정 보 부분에 그려진 옥포해전 | |
![]() | ◀ 옥포대첩 기념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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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첩비 앞부분에 새겨진 거북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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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포정에 잠깐 앉으며 바라본 옥녀봉(玉女峯)의 모습.. |
옥포정에 잠깐 앉아 물을 마시면서 약 10분 정도 머물렀다.
소공원으로 꾸며져 있긴 하지만, 찾는 이도 거의 없는 쓸쓸한 곳, 공원 내 잔디 곳곳에서 어느 개념없는
작자들이 마시다 버린 술병과 쓰레기가 눈에 띈다. 거의 공원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고,
화장실 역시 그냥 옛날식.. 임진왜란의 첫 전승지로 매우 의미가 깊은 곳임에도 그에 걸맞는 대접을 못받고
있는 것 같다. 정말 옥포대첩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옥포정을 나와 육지로 나가기 위해 고현까지 시내버스를 타고, 고현에서 육지로 나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견내량을 건너 통영시의 관문인 통영시외터미널에서 내린다. (11시 20분)
우리나라에서 아름다운 항구도시의 하나로 유명한 통영시(統營市), 정말 얼마 만에 와보는 것인지, 거의
3년 만에 찾아오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시내도 좀 달라진 것 같고..
통영터미널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통영시내버스를 타고 여객터미널을 찾았다.
이 곳을 찾은 이유는 한산도(閑山島)로 들어가기 위함인데, 한산도(제승당)까지는 편도는 무려 4100원,
왕복은 7800원이다. 거리도 겨우 10km 정도인데, 왜 그렇게 비싸야만 하는가? 저번 8월 말에 탔던 인천~제주
'오하마나호'보다 더 비싸다.
그래도 뭐 별수가 있겠는가? 나에게는 꿩 대신 닭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그걸 안타면 한산도에
들어갈 수가 없거든..
12시 배표를 사들고 항구로 나가니 연락처와 주민번호를 쓰라고 한다. 배를 타면 꼭 쓰게 되는 것들..
그런 것을 쓰는 이유는 불의의 사고를 당할 경우, 그 신상을 파악하여 가족에게 알려주기 위함이다.
물론 그런 사고는 절대로 일어나면 안되지..
배에 오르니 약간 튀는 듯한 단체 관광객이 눈에 띈다. 바로 왜열도에서 온 왜인(倭人) 관광객들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그의 딸과 며느리로 보이는 여자 4명, 그리고 손녀로 보이는 애들 2명, 총 7명..
복장도 참 특이하고.. 그렇다고 기모노를 입은 것은 아님.. 그들은 통영 지역에 놀러온 김에 '한산도'까지
보고 가려는 것 같던데, 어찌보면 그들에게는 좀 유쾌하지 않을 수 있는 한산도에는 왜 들어가려는 것일까?
저들은 무슨 생각으로 한산도를 찾아가는 것일까? 정말 궁금하다. 그렇지만 물어보진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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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과 한산도를 이어주는 여객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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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의 얼굴 통영항 ~ 멀리 통영대교가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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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섬 ~ 통영 앞바다에 공주처럼 단아하게 자리한 조그만 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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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와 미륵도 사이에 그림처럼 떠 있는 하죽도(下竹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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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와 미륵도 사이에 또 있는 상죽도(上竹島) |
♠ 세계 4대 해전의 하나 ~ 한산대첩(閑山大捷)의 현장을 가다 ~
▲한산대첩의 현장 한산만(閑山灣)
양이(洋夷)의 사학자들은 세계 4대 해전으로 다음의 전투를 꼽았다.
1. 기원전 480년 그리스 데미스토클레스의 살라미스 해전
2. 1588년 영국 하워드의 칼레 해전
3. 1592년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해전
4. 1805년 영국 넬슨의 트라팔가 해전
서양 세력이 동양보다 거의 우세한 현실에서 그들이 중심이 되어 그들 잣대로 정해버린 세계 4대 해전.
특히 별로 영양가도 없는 영국 관련 해전이 2개나 들어가 있다. 그렇지만 동양에서는 유일하게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이 들어가 있어 '서양 우월주의에 빠진 그것들도 정말 보는 눈은 있구나~' 절로 감탄이 나온다.
특히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과 학익진(鶴翼陣)은 세계 대부분의 해군사관학교에서 필수 전공으로 배운다고
하니 해군(海軍)들에게 있어 한산도 대첩과 그 대첩을 이끈 이순신 장군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 존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1. 한산도 해전 직전의 조선 수군과 왜 수군의 대치 상황 ~
1592년 5월, 옥포(玉浦) 해전을 시작으로 이순신 장군의 수군은 계속해서 사천(泗川), 당포(唐浦), 당항포
(唐項浦), 율포(栗浦) 등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육군은 계속해서 왜군에게 깨지며. 국도(國都)와 평양
(平壤), 함흥(咸興)까지 그들에게 내어주고, 선조(宣祖)의 조선 정부는 여차하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명나라로 도망칠 궁리를 하기에 이른다.
한편 이순신의 수군을 처리하고 해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왜군은 또다시 대규모의 병력, 함선, 노련한 장수를
투입시키는데 특히 왜 수군의 1인자이자 용인(龍仁) 전투에서 달랑 1500명의 군사로 조선군 5만 명을 격퇴시킨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와 바다에서 뼈가 굵은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이
100여 척의 배로 조선 수군과 맞짱을 뜨기 위해 거제도와 통영 방면으로 진출을 시도한다.
한편 왜군의 상황을 보고 받은 이순신 장군은 전라우수사 이억기(全羅右水使 李億祺)와 연합하여 90척을
거느리고 거제도 방면으로 출진한다. 중간에 노량(露梁)에서 경상우수사 원균(慶尙右水使 元均)의 함대
7척이 합세하였다.
7월 7일 저녁, 조선 수군은 당포에 이르러 하루를 머물렀는데, 마침 와키자카의 왜선 70척이 견내량(見乃梁)
으로 들어섰다는 첩보를 입수, 다음 날, 한산도 앞바다로 왜군을 유인할 작전을 세운다.
그 이유는 견내량 부근이 암초가 많아 판옥선(板屋船)이 자유로이 움직이기가 힘들고, 육지와 가까워 왜군이
육지로 도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한산도는 거제도와 통영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도망칠 길이 없고,
적이 상륙한다 해도, 식량이 없어 오래 버티지를 못한다.
드디어 결전의 그날인 7월 8일, 이순신 장군은 미끼용으로 판옥선 6척을 견내량으로 보내 왜군을 공격한다.
~ 2. 한산도 해전의 전개 ~
이순신의 조선 수군을 반드시 격파하여 서해바다로 나가리라. 굳게 다짐을 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
나름대로 수전(水戰)의 명장을 자처하던 그는 조선 수군의 선제 공격을 받고 심히 눈이 뒤집혀, 총공격의
명령을 내리고 조선 수군을 열라게 추격하기 시작한다.
미끼를 쫓아 앞만 보며 한산도 앞바다까지 들어온 왜군, 이순신 장군은 '이 때다' 명을 내리고 명을 받은
비장(裨將)들은 북을 치고 호각을 부니 한산도 부근에 숨어 있던 조선 수군과 미끼용 6척은 일제히 학익진
(鶴翼陣)을 형성하며 왜군을 공격한다.
갑작스런 조선 수군의 공격에 왜군은 크게 혼란에 빠지고, 조선 수군은 조금의 봐줌도 없이 그들을 향해
지자총통(地字銃筒), 현자총통(玄字銃筒) 등의 대포와 조란환(鳥卵丸), 화살을 발사했다.
왜군들은 조총을 요란하게 쏘아대며 나름대로 저항을 시도하나, 막강한 조선수군의 위력 앞에서는 어림도 없다.
아비규환에 빠진 왜군, 그저 이리저리 우왕좌왕 하다가 1초가 멀다하고 날아오는 대포와, 조란환, 화살에 맞아
그저 죽는 도리밖에는 없었다. 나무 판대기에 불과한 왜선 역시 하나, 둘 산산조각이 나며 바다에 가라앉기에
바쁘다. 거기에 거북선 2척이 왜선들의 진열로 뛰어들어 닥치는 데로 종횡무진(縱橫無盡)하며 불을 내뿜으니
왜군들은 더 이상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결국 왜군은 거의 전멸, 한산도 앞바다는 그들의 고깃덩어리, 무기, 배의 파편으로 가득하니. 그 광경을 바라본
조선 수군은 또다시 승리의 쾌재를 불렀다.
이 전투가 바로 세계 4대 해전의 하나이자,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손꼽히는 바로 한산도 대첩이다.
~ 3. 한산도 해전의 결과 ~
옥포해전과 달리 거의 비슷한 전력(戰力)으로 벌어진 한산도 해전, 그러나 그 결과는 전교 1등과 꼴등의
차이처럼 그 차이가 너무 심했다.
이 전투로 왜선 47척(혹은 66척)을 격침시켰고, 12척을 나포(拿捕). 왜군 9000명을 물고기 밥으로 만들었다.
왜장 와키자카는 그의 수하 장수를 거의 잃고, 1만 명에 부하들을 버려둔 체, 겨우 400명의 군사로 한산도로
줄행랑을 쳤다. 그러나 한산도는 무인도라 먹을 것이 없어, 해초(海草) 등으로 13일을 겨우 연명하다가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부산 쪽으로 도망쳤다.
또한 선단(船團) 후미에 있던 왜선 14척은 조선 수군에 의해 묵사발이 된 본대의 아비규환을 보고는 죽어라
노를 저어 사지(死地)에서 겨우 벗어났다.
그에 반해 조선군의 피해는 거의 미미할 정도의 수준으로, 승리를 거둔 다음 날(7월 9일), 이순신 장군은
수군을 거느리고 왜의 수군이 머물고 있는 안골포(安骨浦, 진해시 청안동)를 공격, 왜선 40척을 격침시키고
왜군 3000 ~ 4000명 정도를 살육하며, 유유히 서쪽으로 철군하였다.
이 한산도 전투와 안골포 전투, 양 전투에서 조선 수군의 피해는 왜군의 1/1000 수준인 전사 19명, 부상자
114명, 약간 손상된 배 4척 정도였다..
한산도 전투 이후, 왜의 수군은 더욱 기가 죽어, 남해바다에서 더 이상 활개를 치지 못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와키자카에게 패전의 책임을 묻고, 그의 수하 장수 하나를 처단했으며, '앞으로 이순신의
수군과 절대로 맞짱뜨지 말라'고 명령을 내리며 사실상 수군을 해체시켰다.
왜 수군의 거듭되는 참패와 남해바다 미확보(未確保)로 서해바다로의 군수물자 수송이 차단되면서 평안도로
진격한 소서행장(小西行長)의 왜군은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며, 의주(義州)에 머물러 있던 조선정부로 하여금
재정비의 시간을 주었다.
또한 한산도 대첩이 일어났던 7월 8일, 충청도 금산(錦山)과 전라도 완주(完州) 경계에 이치(梨峙)고개에서는
권율(權慄) 장군과 황진(黃進)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이 금산 연곤평에서 조헌(趙憲)의 칠백 의병을 깨뜨린
고바야가와 다까가께(小早川隆景)의 1만 왜군과 맞서 큰 승리를 거두면서, 수륙 양쪽으로 왜군의 기세는 크게
저하되었다.
한산도 해전으로 이순신은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서(陞敍)되었으며
한산도 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7월 8일이 양력에 해당되는 8월 14일 통영시와 한산도에서는 대대적인 축제를
벌인다.
또한 한산도에서 큰 고배를 마신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후손들은 와키자카가 한산도에서 해초를 먹으며
13일을 버틴 것을 기리고자, 매년 하루씩을 해초 먹는 날로 정하여 해초만 먹는다고 하며, 와키자카가 남긴
문서에는 '내가 제일로 미워하고, 두려워하고, 죽이고 싶었던. 그러나 좋아하고 존경했던 사람이 바로
이순신이다'라고 나와있어 그의 이순신에 대한 심정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 수군의 힘찬 함성이 들리는 듯한 ~ 한산만(閑山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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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 해역의 상징 ~ 한산도 거북등대 (2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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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제승당 나루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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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승당 -> 통영' 배 운항 시간표 (2005년 11월 기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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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승당 나루터에 세워진 한산도 유적지 안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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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승당 나루터에서 바라 본 한산만, 그리고 한산대첩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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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지 표석 |
~~ 아쉽지만 상편은 여기서 끝. ~~
* 답사, 촬영 일시 - 2005년 10월 30일
* 상편 작성 시작일 - 2005년 11월 15일
* 상편 작성 완료일 - 2005년 11월 23일
* 상편 숙성기간 ~ 2005년 11월 23일 ~ 12월 19일
* 공개일 - 2005년 12월 19일부터
* 하편 공개 일시 - 2005년12월22일 이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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