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산(창원) ~ 김해 ~ 부산 역사 기행 (2006년 4월 23일 ~ 24일)'
'하편 ― 옛 가야(伽倻)의 영원한 성역, 김해 김수로왕릉(金首露王陵)'

▲ 곡선의 아름다움을 지닌 ~ 김해 김수로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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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편 - 마산 무학산(서원골, 관해정) ^^보러 가기^^
4월 24일 아침 9시,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꿈나라를 허우적 거리는 나를 똑똑 깨우고, 졸린 고양이 처럼 한없이 잠기려 드는 눈을 비비며 잠의 유혹에서 헤어나기 위해 불이나게 세수를 한다. 친구 모친(母親)이 차려준 아침을 먹고, 10시 30분에 친구 부모님에게 하직인사를 고하고 친구와 함께 밖으로 나온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제 어느덧 떠날 시간이 찾아 온 것이다. 그냥 헤어지기는 아쉬운 나머지, 부근 편의점에서 간식 등을 사먹으며, 약 30분 동안을 그렇게 있 다가 11시 10분 경, 다음을 기약하며 남산동 방면으로 가는 시내버스에 올라탔다. 14년이나 숙성된 우정이라 아쉬움도 그만큼 크다. 그렇지만 뭐 별 수 있으랴? 만나면 언젠가는 꼭 헤어져야 되는 것이 바로 세상의 이치가 아니던가..? 하지만 추후에 또 만나게 될 것이라 믿어 의 심치 않는다.
남산동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김해까지 단돈 900원(카드 800원, 2006년 요금)에 모시는 김해시내버 스 59번(김해 지내동 ↔ 창원대학교)을 타고 장유터널을 지나 인구 5만이 산다는 장유신도시를 머 리가 어지럽도록 징그럽게도 돌고돌아 1시간여 만에 금관가야의 옛 도읍, 김해에 이르렀다.
2004년 1월 이후, 근 2년 만에 찾은 김해 땅, 그 때와 별로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처음에는 여기서 바로 부산으로 넘어갈 생각을 하였으나 오랜만에 왔는데 뭐 하나 보고 가라며 김 해 땅이 자꾸 나의 발목을 붙잡고 놓을 줄을 모른다. 상황이 그러니 그냥 매정하게 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어디를 볼까? 궁리를 하는데, 마침 차에서 내린 곳이 '김수로 왕릉 입구'이다. 그 곳은 1996년에 가본 적이 있어 그냥 넘어갈까 했지만, 10년 전에 가본 터라,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그 동안 성역화 사업이다 뭐다 해서 능역(陵域)도 나처럼 많이 변했겠지 싶은 생각이 들면서 정말 오 랜만에 '김수로왕릉'의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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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관가야(金官伽倻)의 시조(始祖)가 잠들어 있는 옛 가야의 영원한
성역(聖域), 수로왕릉(首露王陵) ~ 사적 73호
 | 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의 능으로 전해지 는 옛 무덤으로, 납릉(納陵)이라고도 부른다.
수로왕의 성은 김, 휘(諱, 이름)는 '수로(首露)'로 별다른 시호 (諡號)나 묘호(廟號)가 없기 때문에 보통 '수로왕' , '김수로왕' 으로 불린다.
그는 변한(弁韓) 12국의 하나인 구야국(狗倻國)에서 세력을 일으켜 가락국(駕洛國, 가야)을 세웠다고 하는데, 그 시기는 대략 1세기 전후로 생각된다. |
▲ 숭안전(崇安殿) |
| 가야는 점차 나머지 변한 제국(諸國)들을 통합하여 지금의 경남과 경북 일부를 장악하게 되는데, 점령지역에는 항복한 기존 군장(君 長)을 그대로 두거나 혹은 가야의 왕족, 망족(望族)들을 파견, 그 지역의왕으로 봉하면서 연맹국가 체제를 구축하였다.
가야 연맹은 북쪽으로는 신라, 서쪽으로는 백제와 땅을 맞대고 있 으며 동쪽과 남쪽은 바다로 막혀 있는데 백제와 신라는 가야보다 세력이 큰 나라로 북과 서로의 진출이 그리 쉽지가않았다. 오히 려 그들에게 밀리고 있던 상황, 그래서 일찍이 바다를 이용하여 교역과 세력 확장을 꾀했다. |
▲ 가야시대 토기들 |
가야는 가까운 대마도를 발판삼아 왜열도로 진출, 규슈를 비롯한 많은 지역을 개척하여 정착하게 되며 멀리로는 낙랑군(樂浪郡)과 한나라, 오끼나와 등과도 교류를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인도의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왔다고 전하는 허씨 세력과 혼인 동맹을 맺는다. 수로왕은 허씨<허황옥(許黃玉)>를 왕후로 삼고, 그 사이에서 10명 의 왕자를 두었는데 그 중 2명은 모후(母后)의 성인 허씨를 따르 게 하여 지금의 김해 허씨를 형성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서로 혼인을 하지 않는다고 하며 지금도 그 법칙은 여전히 지켜지고 있는 것 같다. |  |
▲ 숭선전과 안향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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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수로왕은 199년, 157세의 나이로 붕 어(崩御)했다고 한다. 그런데 솔직히 사람이 150년을 사는 것이 가능이나 할까?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우연인지는 몰라도 수로왕의 부인허씨 역시 수로왕처럼 약 157년을 살았다고 한다. 이는 김씨, 허씨로 상징되는 연합세력이 150년간 금관가야를 지배 하다가 199년 이후, 다른 세력에 의해 일종의 정권교체가 이루어 진 것으로 생각된다. 즉 157년이란 김수로와 허황후가살았던 시간 이 아니라 그들 세력이 가야를 지배하던 기간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 역시 나의 부질없는 역사 해석일 뿐, 완벽한 정답이 될 수는 없다. |
▲ 숭모재(崇慕齋) |
가야는 유감스럽게도 역사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실정으로, 아직도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어 좀처럼 해답을 주려고 하질 않는다. 수로왕릉은 별다른 장식이 없는 높이 5m의 동그란 모습의 흙무덤으로 무덤 조성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려진 것은 없다.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의하면 고려 문종 때까지 매년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조선 세종 연간에 왕릉의 사방 100보 이내를 보호구역으로 삼으며 표석을 세웠고, 1580년 경상도 관찰사 허엽(許曄)이능을 크게 정비하 면서 상석(床石), 석단(石壇),능표(陵表) 등을설치하였다. |
18세기 이수광(李晬光)이 쓴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의하면 임진 왜란 때 왜군에게 도굴을 당했다고 하며 능의 구조는 석실묘(石 室墓)라고 한다. 1647년(인조 24년) 인조(仁祖)의 칙령(勅令)으로 묘비를 세웠으 며 1865년에는 숭선전(崇善殿)을 중수하였다.
18,000평에 달하는 능역(陵域)에는 수로왕 내외를 모신 숭선전을 비롯하여 안향각, 전사청, 숭재, 동재, 서재 등의 건물과 신도비 , 공적비, 고인돌 2기 등의 석조물이 있으며 근래에 세운 유물전 시관에는 김해 지역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수로왕릉 관련 |  |
▲ 수로왕릉 사적비 |
고문서(古文書), 제례(祭禮) 관련 유물, 제기(祭器) 등이전시되 어 있다. 또한 능역 경내에는 꽃과 나무를 잔뜩 심어 푸른 공원으로 꾸몄 으며 유물전시관 남쪽으로 아담한 연못을 조성하였다. 매년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에는 대제(大祭)를 지내고있으며 이 제례행사는 작게는 김해 김씨와 허씨가(家)의 크나큰 문중 행사, 크게는 김해시의 축제로 시민들도 참여하는 지역 축제로 자리매김 하였다.
수로왕릉 제례행사는 그 역사와 전통, 독특함을 인정받아 경남 지방무형문화재 11호로 지정되었다. |  |
▲ 가야시대 청동 유물 |
~ 김수로왕릉 입장료 (2006년 11월 기준) ~ * 대인 (19 ~ 64세) - 700원 (단체 30명 이상 - 600원) * 중고생 - 400원 (단체 10명 이상 - 300원) * 어린이 - 300원 (단체 200원) ~ 김수로왕릉 찾아가기 (2006년 11월 기준) ~
1. 지하철 3호선 구포역(3번 출구)에서 김해 8번 이용, 수로왕릉 하차 2. 지하철 3호선 구포역(3번 출구)에서 부산 123,130,좌석128,130-1,309번 이용, 김해백화점 하차 3, 김해(외동)터미널에서 도보 15분 ~ 관람시간 (2006년 11월 기준) - 3 ~ 10월 : 9시 ~ 18시 / 11 ~ 2월 : 9시 ~ 17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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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로왕릉의 정문 - 숭화문(崇化門) 용두를 갖춘 우진각 지붕의 3문(三門)으로 매표소 는 문을 들어서면 바로 왼쪽으로 나온다.
문을 들어서면 옛 가야의 성역이자, 김해 김씨,허 씨의 영원한 고향, 수로왕릉 능역(陵域)이 거침없 이 펼쳐진다. |
 | ◀ 성역의 상징 홍살문 숭화문을 들어서면 별로 반갑지 않은 모습의 붉은 홍살문이 찾아온 이들에게 엄숙하고 단정히 관람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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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왼쪽 거북이 귀부(龜趺) 오른쪽 귀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앉아 있다. 이들은 혹 서로를 연모하는 것은 아닐까..? | ▲ 오른쪽 거북이 귀부(龜趺) 홍살문이 바라보는 방향 오른쪽에 있는 거북이, 비신(碑身)은 없으며, 거북이의 새하얀 피부색깔 로 볼 때 근래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데, 수로 왕탄생설화에 나오는 구지가(龜旨歌)의 상징물 로 세워진 것 같다. 지금이라도 당장 엉금엉금 기어갈 것 같은 거북 이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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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살문을 지나면 바로 나오는 2층의 가락루(駕洛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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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수로왕, 허태후의 영정이 모셔진 숭정각(崇禎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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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직 상상으로 그려진 김수로왕, 허태후 영정 영정 위쪽으로는 봉황으로 보이는 새 모양이 양각되어 있다. |
 | ◀ 기분이 오싹해 지는 ~ 시생대(豕牲臺) 춘추대제를 지내기 하루 전날(음력 3월 14일, 9월 14일) 제물로 쓰일 돼지를 잡는 신성한의식인 생 성례(牲省禮)를 치르는 곳이다.
후손들의 그들 시조에 대한 숭배와 정성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곳으로 시조능 바로 앞에서 돼지를 잡는다는 것도 독특하거니와 그 것을 익히 지 않고 날 것 그대로를 제물로 바친다고 한다. |
 | ◀ 숭신각(崇神閣) - 숭신각 안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신도비는 무덤 동남쪽에 세우는 것이 상례 이나 여기서는 약간 서남쪽에 세워져 있다. |
 | ◀ 납릉정문(納陵正門) 수로왕릉의 정문으로 1792년에 세워졌다. 문에는 가야의 문장(文章)인 '쌍어문(雙魚文)'문양 과 김해 지역에서만 발견되고 있는 파사석탑의 문 양, 그리고코끼리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이들은 가야가 멀리인도와 교역을 함은 물론 허태후가 인 도에서 왔음을 증명하는 증거물로 자주 등장한다. 그 외에도 인도의 불교가 바다를 거쳐 바로 가야로 전래되었다는 학설도 나오고 있으나, 아직 이렇다 할 정답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하루 빨리 가야의 실체가 속시원하게 밝혀지기를 고대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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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가야의 수수께끼를 간직하며 오늘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수로왕릉 ~ 왕릉 주변 석물은 1580년 이후에 세워진 것이며, 능비(陵碑)는 1647년 인조의 칙명으로 세워 진 것이다. |
 |  |
▲ 능역 서쪽의 석물들 | ▲ 능역 동쪽의 석물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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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따사로운 오후의 여유가 느껴지는 ~ 수로왕 릉 분수대 |
 | ◀ 김수로왕, 허태후의 신위(神位)를 모신 숭선전(崇善殿) 맞배지붕을 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전각으로 숭선전 안내문에 의하면 금관가야 2대 군주인 도왕 원년(元年, 199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거의 신빙성이 없으며 지금의 전각 은 1698년에 세워서 1865년에 중수한것이다.
전각 주변으로 정(鼎, 솥) 2개가 세워져 있어 이 곳이 신성한 구역임을 애써 표현한다. |
 | ◀ 숭선전 왼편에 있는 조촐한 모습의 안향각 (安香閣) 춘추대제를 지낼 때, 조선 정부에서 보내온 향과 축(祝)을 보관하던 곳으로 1792년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정면 3칸의 2층 건물이었으나 1824년 에 지금의 모습으로 변경되었으며, 1987년에숭 선전과 더불어 이 곳으로 이전되었다. |
 |  |
▲ 전사청(典祀廳) 춘추대제에 쓰일 제사음식을 만들거나 보관 하던 곳으로 1700년에 세워졌다. | ▲ 제기고(祭器庫) = 서원청(書員廳) 1700년에 세워진 건물로 춘추대제에 쓰일 제 기(祭器)들을 보관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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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달래와 나무로 가득한 수로왕릉 뒷뜰 꽃과 나무로 가득한 넓은 뒷뜰에는 변한시대에 조성된 고인돌 2기가 숨어 있다. 수로왕릉을 찾은 이들은 이곳 뒷뜰까지는 많이 안들어온다고 한다. 그냥 왕릉과 유물전시 관, 사당만 둘러보고 그냥 가버리는 이들이 부지기수.. 나도 부끄럽지만 시간이 없다는 구실로 몇 발자욱 들여놓기가 무섭게 바로 나와 버렸음... |
♠ 김수로왕릉 유물전시관 둘러보기 ~
| ◀ 유물전시관 김해 지역에서 발견된 가야시대 유물을 비롯하여 수로 왕릉 관련 유물과 고문서들, 수로왕 대제(大祭)에 사용 되는 제기와 의복들, 제사상(祭祀床)의 모형 등이 아낌 없이 전시되어 있다.
그럼 지금부터 옛 금관가야의 향기와 시조(始祖)에 대 한 후손들의 일편단심이 물씬 배어있는 전시관의 내부 유물들을 일부라도 살짝~살펴보도록 하자. |
| ◀ 종규(宗規) ~ 김해김씨 / 허씨 가(家)의 친목 도모를 위한 종약(宗約) 문서 |
| ◀ 숭선전지(崇善殿誌) ~ 숭선전의 내력 및 제사 관련 기록들이 소상히 적 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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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서문(上書文) 1 ~ 1832년(순조 32년) 김시필(金始弼) 등 38명이 수 로왕릉을 지키는 정남(丁男) 38명의 호세를 감면 해줄 것을 경상도 관찰사에게 청원한 문서 | ▲ 상서문 2 ~ 1843년(헌종 9년) 선산의 허운(許雲), 진주의 허 제(許齊)등 18명이 왕릉의 전각을 보수하고 담장 을수리해 줄 것을 경상도 관찰사에서 청원한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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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서문 3 ~ 1787년(정조 11년) 김광락(金光洛) 등 13명이 춘 추향사를 신라 왕릉의 예에 따라 봉행할 것을경 상도관찰사에게 청원한 문서 | ▲ 1823년(순조 23년) 왕릉의 관리와 부역을 담 당한장유암 승려 성윤(性允)이 절의 전답을 팔 아먹고사라졌다는 거짓말이 유포되고 있으니 이 를 조사해달라며 왕릉 관리인이 숭선전 참봉(參 奉)에게올린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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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종 황제가 친히 내린 치제문(致祭文) 망국의 황제 순종이 1909년(융희 2년) 2월 7일, 김해군수 이시철(李是哲)에게 보낸 수로왕 릉 치제문. 조선 정부는 철저한 유교 통치의 이념에 따라 옛 나라(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탐라, 고 려, 기자조선, 단군조선..)의 시조에 대한 제례에 아낌없이 지원을 해주었으며 가끔씩 군주 가 친히 치제문을 하사하여 각별한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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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제(大祭) 때 입는 의상들 왼쪽 파란색 의상은 대축복(大祝服), 집례복(執禮服)이며, 오른쪽 붉은 의상은 헌관복(獻官 服)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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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 지역에서 출토된 가야 토기들 옛 금관가야 사람들의 뛰어난 미적 감각과 그릇을 다듬는 솜씨가 물씬 배어있는 토기들. 이들 그릇은 밥을 먹거나, 음식물을 담거나, 곡차 한잔 즐길 때, 제사용 그릇, 장식용 등으로 사용되었다. |
 | ◀ 가야 철제 갑옷 가야연맹이 들어앉은 경남 지역에는예로부 터 우수한 철들이 많이 나왔는데 그철을 바탕으로 가야는 수준 높은 철기문화를이 루었다.
가야가 만든 갑옷 등의 철제품은 그당시 세계 최고급의 수준으로 주변 나라로절찬 리에 팔려나갔으며우수한 무기와갑옷, 마 갑(馬甲)으로중무장한 가야군은주변에 작 은 나라들을정복하고 백제, 신라 등과 맞 서며 근 500년 이상 나라를지켜왔다. 또한 우수한 철문화를 기반으로 왜열도로 세력을 확장, 규슈를 비롯한많은 지역을 통치하며 왜왕(倭王)까지 배출하게된다. 그러나 4세기 중반 이후, 왜열도를 장악한 백제에 의해 그 세력은 크게 위축된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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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투구, 말방울 등의 철제 마갑류 저렇게 우수한 철기문화를 보유했음에도 가야는 어째서 백제, 신라처럼 큰나라로 성장하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바로 연맹국가 형태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철제 무기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조그마한 각 연맹국가가 하나로 통합되지 못하고 거의 따로국밥으로 놀고 있으니, 어찌 큰 나라로 성장할 수 있겠는가? 비록 대가야와 금관가야가 가야 연맹의 맹주(盟主)를 자처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맹주일 뿐, 각 연맹국가를 제대로 통제하지도 못했다.
통일되지 못한 가야 연맹은 결국 제왕(帝王) 중심의 중앙집권을 이룬 백제, 신라의 좋은 먹 이감이 되어 하나씩 하나씩 그들에게 흡수되어 갔으며 금관가야는 532년신라에서 시집보낸 공주에게 가야옷을 입혔다는 구실로 신라에게 처참히 짓밟히고, 562년 대가야를 끝으로 역 사 속으로 쓸쓸히 사라져 버렸다. |
* 답사, 촬영 일시 - 2006년 4월 23, 24일
* 중편 작성 시작일 - 2006년 5월 23일
* 중편 작성 완료일 - 2005년 5월 26일
* 중편 숙성기간 - 2006년 5월 27일 ~ 11월 20일
* 공개일 - 2006년 11월 2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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