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산(창원) ~ 김해 ~ 부산 역사 기행 (2006년 4월 23일 ~ 24일)'
'하편 ― 부산 시내 나들이 (국제시장 ~ 연산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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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상, 중, 하 3편으로 나누어 작성했습니다.
* 상편 - 마산 무학산(서원골, 관해정) ^^보러 가기^^
* 중편 - 김해 김수로왕릉 ^^보러 가기^^
약 2시간에 걸친 '잃어버린 나라, 옛 금관가야와의 만남'은 유물전시관을 끝으로 그 마무리가 된 가 운데 시간은 어느덧 2시를 똑딱 가리키고 있다. 이제 슬슬 밥먹으러 가야지.. 점심은 무엇을 먹을까? 물론 어디서 무엇을 먹을지는 정해둔 상태.. 문제는 그 곳이 여기서 50리 정 도 떨어진 부산 도심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전날, 집을 나올 때부터 거기서 점심을 먹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온터라, 1시간 정도기 꺼이 더 참기로 하였지.
버스에서 잠시 눈이라도 붙일 생각으로 부산까지는 부산좌석버스 309번(김해 구산동 ~ 충무동)을 탔 다. 그러나 눈은 좀처럼 붙여지지 않았으며 김해에서 낙동강을 거쳐 대청로(국제시장)까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창 밖 풍경을 모조리 보고야 말았다.
김해 출발 1시간 20분만에 대청로(국제시장)에서 내려서 국제시장 내에 있는 '돌고래순두부'집을 찾 았다.시장 골목을 좀 헤메긴 했지만, 쉽게 그 집을 찾아서 들어갔지, 그 주막은 4월 초순, 아는 이를 통해 알게 된 곳으로, 인터넷에서 낚시를 해보니 그 집과 관련된 정 보가 수두룩하게 걸려들었다. 그래서 한번 가보기로 하였지.
이 집이 순두부로 유명해진 것은 특별히 맛이 있거나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마도 저렴한 가격 때문으로 생각되는데, 순두부 1그릇은 달랑 2500원이다. 보통 일반 분식집에서 3000원 정도 하는걸 보면 많이 저렴한 편, 게다가 옵션으로 준비해놓은 오징어볶음은 30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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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고래 순두부집에서 먹은 순두부 백반 |
점심시간과 저녁시간에는 자리가 없어 한참 기다릴 정도라고 하는데, 마침 피크 시간을 지나서인지 사람들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밥을 주문한지 5분 만에 순두부 백반이 한 상 걸쭉하게 차려져 나왔는데, 반찬은 3가지, (반찬은 매 일 바뀌지 않고 늘 고정적이라고 한다) 냉채국 하나, 큰 그릇에 나온 하얀 쌀밥, 그리고 황홀한(?) 색깔의 순두부..
시장기가 상당하여 금방 밥을 비웠는데, 먹어보니 동네 분식집에서 파는 순두부와 맛은 비슷한 것 같다. 별로 특별한 맛은 느끼지 못했음.. 저렴한 가격에 저렇게 두둑히 먹을 수 있다는 최대 장점이 그 주 막을 오늘에 이르게 만든 것 같다.
이렇게 점심을 먹고 중앙동 쪽으로 나가고 있으니, '근대역사관'이라는 약간 우중층해 보이는 2층 건물 하나가 '잠깐 나좀 보고 가소' 하며 나의 길을 가로 막고 선다. |
♠ 조선반도를 철저히 말아먹으려고 했던 왜정(倭政)의 경제 수탈의 쓰라린 흔적 ~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舊 東洋拓植株式會社 釜山支店) - 부산 지방기념물 49호
 ▲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문화재청 사진 참조) - 현재는 부산근대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다. |
1908년, 왜국의 '동양협회(東洋協會)'는 왜인 농민들의 조선 이주를 장려하기 위해 왜국 정부에 그 것을 전담하는 회사를 하나 만들어줄 것을 요구했다.
왜 정부는 대기업과 합자하여 자본금 1000만원의 '공사(公私)합동기업'을 세우니 이 회사가 바로 그 악명 높은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양회사'로 표시)'이다.
왜는 조선에 공동출자를 요구하여 조선 정부는 자본금의 약 30%에 이르는 국유지를 출자하였으나, 회사 설립과 운영은 왜국이 혼자 다 해먹었으며 1910년 이후, 동양회사는 왜의 국책회사로 식민지 척식(拓植)사업을 담당하게 된다.
처음에는 서울에 본점을 두고, 조선반도에서만 영업을 하였으나 1917년 이후, 본점을 왜국 동경(東 京)으로 이전하였다. 또한 회사 대표는 왜인으로 국한했으며, 왜가 중국까지 진출함에 따라 만주지 역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1938년 이후 대만과 사할린, 태평양 지역까지 영업 범위를 확장시켰다.
동양회사의 주요 사업은 1. 왜 농민들의 조선 이주 장려 및 그들의 편의 제공(농지 / 주택 / 정착 지원금 지급, 자금 융자) 2. 조선 농민들에 대한 지원(농기구 지원, 우수 농법 보급..) 및 자금 융자 3. 척식사업으로 조선의 농토 개발과 산미증식(産米增殖) 추진 4. 토지조사사업을 근거로 조선 농민들의 토지를 헐값에 사들이거나 압수하는 이른바 토지수탈 추진 5. 척식사업으로 긁어 모은 돈으로 대출 등의 금융업 6. 광공업 개발 1945년 이후, 38도 이남을 점령한 미군정(美軍政)에 의해 신한공사(新韓公社, New korea company)로 그 이름이 바뀌었으나. 효용가치가 없어 얼마 뒤 문을 닫고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이 건물은 1929년에 세워진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1945년 이후, 부산에 진주한 미군들의 숙소로 사용 되다가 1949년 '미국 해외공보처 부산문화원'으로 변경, 50년 가까이 미국이 소유했으며 부산시민들 의줄기찬 요구로 1999년 드디어 부산광역시에 반환되었다.
건물이 생긴 이래 70년 이상 다른 나라가 소유했던 외세 지배의 우울한 의미를 고스란히 간직한 건 축물로 2001년 건물을 재보수하여 '부산근대역사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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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근대역사관으로 탈바꿈한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마침 역사관은 문을 철통같이 닫아 걸고 나를 문전박대(?)하였다. 이 역사관은 지상 3층의 2100㎡의 규모로 왜정 이후 부산관련 자료 260여 점이 전시되어 있으며매 주 월요일마다 문을 굳게 닫아 걸고 쉰다. 입장료는 없음.
* 부산 근대역사관 찾아가기 (2006년 12월 기준) - 1호선 중앙동역 5번출구에서 대청로 방면으로 도보 10분 - 부산시내버스 15,40,81,126,140번 / 좌석 58-1,309번 대청동(동광초교) 하차 |
시간은 어느덧 15시를 넘은 가운데, 처음에는 양산으로 넘어갈 생각을 했으나 거기까지 들어갈 시간 이 여의치 않아 따로 문을 두드릴 장소를 정하지 못한 채, 무작정 지하철을 타고 약간의 방황(?)을 하였다.
3호선과의 환승역인 연산동역에 이르자 문득 무엇인가가 머리 속에 떠오른다. 하지만 그 곳을 꼭 가 야되나 싶어 약간의 망설임도 있었지만, 시간도 그렇고 해서 밖으로 나와 토곡 방면으로 터벅터벅 걸어 갔다.
10분 정도 걸으니 터널이 나오고, 터널을 뒤덮고 있는 야트막한 언덕이 나온다. 그 언덕으로 오르는 길을 찾았으나, 출입금지 지역인지 제대로 된길은 나오질 않는다. 그래서 주택 가 쪽으로 들어가 찾아보니 언덕으로 통하는 거의 조그만 계단길이 나온다. 계단을 오르니 그 곳에는 부산에서 제일 오래되었다는 작은 무덤들이 옹기종기 모여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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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에서 제일 오래된 무덤들 ~ 연산동 고분군 (連山洞 古墳群) - 부산 지방기념물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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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동과 망미동에 넓직하게 걸쳐있는 배산(盃山)의 북쪽 능선에는 부산에서 제일 오래된 무덤으로 알려 진 '연산동고분군'이 들어앉아 있다. 야트막한 능선을 따라 봉분(封墳)의 형태만 간신히 남은 옛무덤 10여 기가 솟아있고 그 주변으로 작은 무덤들이 여러기 있으나 고난이도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맨 눈으로확인하기에는 매우 어렵다. 무덤이 들어앉은 바로 아래로 터널이 뚫려버렸는데 터널을쌩쌩 지나가는 차량들의 소음으로 무덤의 묻 힌옛 사람들이제대로 잠이나 잘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들 고분은 삼국시대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혹자는 가야시대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이 무 덤들은 이미 왜정 때발굴이 이루어졌으며, 1988년에 4호분과 8호분을 조사하였다.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은 고배(高杯), 그릇받침, '목이 긴 항아리', '둥근 바닥의 목이 짧은 항아리'등 의 신라 토기와화살통, 쇠손칼, 쇠촉, 철갑옷, 쇠토끼 등으로 이들 유물을 통해무덤에 묻힌 이들은 신 라와 어느 정도교류를 했거나 혹은신라의 통제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무덤에 잠들어 있는 이들은 이 지역을 다스리던 지배층으로 고분 남쪽으로 삼국시대 초반에축성된 '배 산성'이 있어, 무덤주인들의 성읍(城邑)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 세력은 부산 지역을 통치하며 따로 신라와 왜열도 등과교역을 벌이다가나중에 금관가야에조용히 통합된 것으로 보인다. 연산동 고분군은 '복천동 고분군'과 달리 공원으로 조성되지는 않았으며 거의 방치되어 있는 수준이다. 고분 관련 안내문도 달랑 2개, 고분이 밀집되어 있는 주변으로문화재 보호를 위해 철조망이 길게 쳐져 있기는 하나, 연산동 주민들이 산책을 즐기는 뒷동산으로 출입에 제한은 없으며, 고분 관리초소 하나가 있기는 하지만 지키는사람은 없어 보였다. |
 | 무덤 주변으로는 무덤 주인의 혼령이 되살아난듯 나 무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무덤을 덮어주고있으며, 무 덤 입구에 세워져 있는 고분군 관련안내문과 문화재 보호 관련 안내문이 없다면 이곳이 정말 옛 무덤들이 있는 곳인지 분간하기가어려울 정도이다.
무덤 주변으로는 산책 나온 동네 사람들 몇 명만이 늦은 오후 산책을 즐기고 있을 뿐, 분위기는대체로 조용하다. |
* 연산동 고분군 찾아가기 - 지하철 1,3호선 연산동역 8, 10번 출구에서 도보 15분, 터널 못미처에서 주택가로 들어가서산으로 들 어가는 길을 찾으면 된다. |
별로 무덤 같지도 않은 연산동 고분군을 둘러보고 동쪽으로 내려갔다. 시간은 어느덧 6시. 이제 내가 원점
으로 돌아가야 될 시간이 온 것이다.
산자락 동북쪽 연산8동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부산의 북쪽 관문인 부산종합터미널을 찾았다.
여기서 19시에 서울로 가는 일반고속을 타고, 나의 고향인 서울로...
얼마 전 '부산~대구 고속도로'가 뚫려, 부산~대구 거리와 소요시간이 약간 단축이 되었는데, 내가 탄 버스
역시 기존의 경부구간을 버려고, 양산에서 김해 쪽으로 빠져 대동분기점에서 그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부산
출발 겨우 70분만에 대구에 이르렀고, 부산 출발 260분만인 23시 20분, 서울강남고속터미널에 도착했다.
2일 동안의 어찌보면 긴 시간의 기행이지만 집에 들어와 앉으니 그 시간이 왜 이렇게 찰라와 같은지..
정말 일장춘몽(一場春夢) 그 자체로다..~~~
~~~ 이렇게 하여 마산, 김해, 부산 지역 역사기행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 답사, 촬영 일시 - 2006년 4월 23, 24일
* 하편 작성 시작일 - 2006년 5월 26일
* 하편 작성 완료일 - 2005년 5월 31일
* 하편 숙성기간 - 2006년 6월 2일 ~ 11월 23일
* 공개일 - 2006년 11월 23일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