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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천절(開天節)의 남도 나들이 (2006년 10월 3일)'
'상편 ― 영광 내산서원 (강항 선생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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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상, 하 2편으로 나누어 작성했습니다.



한반도의 5천년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유서깊은 개천절을 맞이하며 오랜만에 광주를 비롯한 남도(南
道) 지역을 살짝 다녀왔다.

추석 귀성객으로 완전히 북새통을 이루던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원래는 광주로 먼저 가려고 했으
나 사람들이 너무 밀린 탓에 1시간이나 기다려야 된다고 그런다.
그런데 마침 영광으로 가는 차 시간과도 맞아 떨어져 확인을 해보니 아직 자리 여유가 있어 영광으로
가는 7시 40분 고속버스를 타고 한반도에 널린 수많은 미답지(未踏地)의 하나이자 원불교(圓佛敎)와
영광굴비의 고향인 영광 고을을 찾았다.
영광까지는 귀성 차량의 증가로 인한 교통정체로 거의 4시간 20분이나 걸렸는데,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처음 문을 두드린 영광 고을의 첫 인상은 다른 고을과 거의 비슷비슷하구나 싶을 정도로
별로 낯설지가 않아 보인다.

추석의 기쁨과 활기로 가득한 영광터미널에서 12시 30분 불갑사(佛甲寺)로 들어가는 영광군내버스를
타고 추수를 기다리는 가을들녘 길을 한없이 지나 불갑사의 초입인 내산서원을 찾았다.


♠ 왜열도 성리학(性理學)의 시조이자 간양록(看羊錄)의 주인공,
강항(姜沆) 선생을 배향한 내산서원(內山書院) - 전남 지방기념물 28호


영광에서 목포 방면 23번 국도를 따라 8리(1리는 550m) 정도 가면 불갑초등학교가 나온다. 여
기서 국도를 과감히 버리고 꽃무릇의 향기가 서린 불갑사 쪽으로 2리 정도 가면 영광이 낳은
대유학자이자 왜열도 성리학의 아버지라일컬어지는 수은 강항(睡隱 姜沆) 선생을 배향한 내산
서원이 나온다.


▲ 의절묘(義節廟)의 정문인 여재문(如在門)

이 곳은 1635년(인조 12년) 강항의 제자들이그
의 고향인 불갑면 유봉리에 세운 것으로조선
정부에서 '용계사(龍溪祠)'란 이름을내려 주었
다.
1875년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흥선대원
군이 물러난 이후, 다시 세워졌으며 1974년 지
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1992년에는 임진왜란 400주년 재조명사업의하
나로서원을 정비하여 서원 앞으로 조그만공원
과연못, 정자를 세우고 강항선생의 유물을모
아 조촐하게 유물전시관을 세웠다.

* 내산서원 찾아가기 (2007년 4월 기준)
① 대중교통
- 영광터미널에서 불갑사 방면 군내버스(1시간 ~ 2시간 간격)로 서원 앞 하차
- 영광터미널에서 불갑, 신광 방면 군내버스(1일 10회 정도)로 불갑초교 하차, 도보 10분

② 승용차 (서원 앞에 주차장 있음)
- 서해안 고속도로 → 영광나들목 → 목포 방면
23번 국도 → 영광읍 → 불갑초교 →내산서원

- 서해안 고속도로 → 함평나들목 → 영광방면
23번 국도 → 신광 → 불갑초교 → 내산서원

* 입장료 - 없음
* 관람시간은 따로 제한은 없음


▲ 입을 굳게 봉한 유물전시관


~ 내산서원의 주인공 수은 강항(睡隱 姜沆, 1567 ~ 1618) ~


강항 선생은 세조 연간에 활약했던 강희맹(姜希孟)의 5세손으로 본관은 진주이다.
1567년 영광 불갑산 밑 유봉리(流峰里)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태초(太初), 호는 수은이다.
1588년 소과(小科)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1593년 별시(別試)에 병과(4등)로 급제
하여교서관박사(校書館博士)가 되었다.
1596년에 공조(工曹), 형조(刑曹)의 좌랑(佐郞)을 지내다가 1597년 봄, 잠시 휴가를 얻어 고향
에 내려와 있던 중, 정유재란이 터지면서 분호조판서(分戶曹判書) 이광정()의 종사관이
된다.

군량 보급을 위해 급히 남원으로 파견되었으나 그 곳이 왜군에게 떨어지면서 서둘러 고향으로
돌아와 김상준
(金尙寯)과 더불어 주변 고을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하지만 왜군이 영광
에 이르렀다는 소식에 의병들은 모조리 겁을 집어먹고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배 2척을 급히 마련하여 논잠포에서 가솔들을 이끌고 이순신(李舜臣) 장군
이있는 통제영(統制營)으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뱃사공의 부주의로 부친(父親)이 탄 배가 침몰
하였고 나머지 1척도 영광 앞바다만을 대책 없이 맴돌다가 운이 없게도 왜선과 맞부딪친다.

마땅한 대응책이 없던 강항은 일가족 10여명과 함께 바다로 뛰어들었으나 투신지점의 수심이
매우얕았고 왜군들이 서둘러던진 갈고리에 모조리 걸려들면서 꼼짝없이 포로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금지옥엽같은 자녀 2명을 잃었으니, 강항은 간양록에서 그 때의 끔찍했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어린 놈 용이와 첩의 딸 애생의 죽음이 너무도 애달프다. 모래사장에 밀려 물결 따라 까막까
막 하다가 그대로 바다 깊숙이 떠내려가 버렸다. 엄마야! 엄마야! 부르던 소리 아직도 귓결에
들려온다.그 소리마저 시들어질 때 산 아비가 살았다 할 수 있겠는가!"

포로가 되어 여러 번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남은 가솔들과 함께 왜열도로 이송되어
오사까에서 1년 정도 머물다가 1598년 교토(京都)의 후시미성(伏見城)으로 옮겨졌다.
그는 학식이 높은 유학자로 비록 포로신분이지만 현지 쇼군(장군, 將軍)에게 특별대우를 받았
다.
쇼군은 그에게 2명의 노비(奴婢)를 주었으며 제한적이긴 하지만 주변을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
는 특권도 주어져 오사까와 교토 지역의 지리, 풍토, 군사시설 등을 살펴 인편을통해 몰래 조
선정부에 보고하였다.

그는 현지에서 학식이 풍부한 여러 승려들과 교분을 다졌는데 우연한 기회에 탈출을 시도하다
실패하여 자칫 형장에 이슬로 사라질 뻔 했으나 그와 친교가 있던 승려 '카이케이'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살아나며 특히 강항의 1급 제자라 할 수 있는 '후지와라 세이가(:1561~
1619)'의도움을 많이 받았다.
'후지와라 세이가(이하 후지와라)'는 전형적인 승려로 학문에 대한 열정이 매우 상당하여 강
항 선생의 고명을 듣고 찾아와 삼가 가르침을 청했다.

강항은 그를 이용해 조선으로 탈출할 배를 구하려는 의도로 그에게 조선의 유학을 가르쳐 주었
는데,그 유학에 크게 매료된 나머지 바로 그날로 승복을 내던지고 유복(儒服)을 갖추어 강항
의 열성제자가 되었다.
강항은 그런 기특한 제자를 위해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비롯한 많은 것을 아끼지 않고 전수해
주었고 '후지와라'는 그에게 배운 유학을 에도시대 통치이념으로 발전시키며 왜국 성리학(性理
學)의 시조가 되었다. 그래서 왜의 학계는 왜 유학의 계통을 '퇴계 이황 - 강항 - 후지와라 세
이카'
로 보고 있으니 따지고 보면 강항은왜열도 성리학의 실질적인 시조라 할 수가 있다.


▲ 내산서원 뒷쪽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강항 선생 묘역

1600년 4월 후지와라의 도움으로 가솔과 함께
교토를 떠나 5월 오매불망 그리던 고국으로돌
아왔다.
부산을 통해 귀국하여 한양으로 상경, 선조(宣
祖)를 알현하고 왜국 생활의 실상과 행적을 보
고하고는 바로 고향으로 내려가스스로 부끄러
운 죄인이라 칭하며 문을 닫아걸었다.
1602년 조선 정부는 그에게 대구교수(敎授)를
제수했으나 받지 않았으며 그 이후에도 계속
관직을거절했다. 다만 후학 양성에는 열심이
라 그의 명성을 듣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어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의 문하에서 많은
문장가들이 배출되었다.

1618년 부친상의 상복을 벗은 그 이듬해, 갑작스레 병을 얻어 와석종신(臥席終身)하니 그의 나
이 51세였다.

그는 자결을 하지 못하고 왜의 포로가 된 것을 그 자신에게 있어 씻을 수 없는 큰 수치이자 나
라에 대한 큰 불충(不忠)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 이유로 귀국 이후에 스스로죄인이라
칭하며 벼슬도 거절하고 두문불출하였으며 지인과의 편지에서 "나는 비록 이 세상에 있다 해도
맥이 풀려 저승의 사람과 같으니, 윤회(輪廻)가 있다면 속히 죽어 다른 삶을 얻기를 바랄 뿐,
현세에는 바랄 것이 없다"
라고 했을 정도이니 이는 임진왜란 6년 전쟁이 그에게 남긴 커다란
아픔이자 정신적 휴유증이라 하겠다.

그가 세상을 뜬 후, 조선 정부에선 그에게 이조판서를 추증(追增)했으며 내산서원에 사액(賜
額)을 내려 그를 배향하였다.


▲ 강항 선생의 영정

* 간양록(看羊錄)
간양록은 그가 왜열도에 있을 때, 왜국의
지리, 풍토, 인문, 군사시설 등과 정유란
의 실상을상세히 기록한 책으로 포로가 된
1597년부터 귀국한1600년까지의 일기를섭
란사적()이란이름으로 권말(卷末)
에 첨부하였다.

책의 원래 이름은 건거록(巾車錄)으로 이는
강항이 죄인을 자처하는 뜻에서 붙인 것이
다.

그러다가 그의 제자인 윤순거(尹舜擧)가 권필(權韠)이란 사람이 강항에 대해 '절위간양락(節爲
看羊落, 절개를 지키기 위해 양치기로 떨어졌다, 중국 전한시대 충신인 소무(蘇武)의 고사에서
유래됨)'
이라 예찬한 것에 착안, '간양록'으로 고쳤으며 그 이름으로 1656년에 간행되었다.

그는 비록 포로가 되어 나중에 죄인을 칭하며 살았지만, 그가 왜열도에 끼친 영향은 매우 상당
하여왜국 성리학의 시조가 되었으며, 그가 남긴 간양록은 그 시절의 실상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인 귀중한 자료로 사료(史料)적, 국문학적 가치가 매우 높다.

특히 왜정은 간양록을 금서(禁書)의 하나로 취급하여 절대로 읽지 못하게 했다. 그 이유는 책
에 쓰인 내용(왜국의 실정과 임진,정유란 시절 왜군의 온갖 행태들)이 그들에게는 쥐구멍으로
들어가 숨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고 참혹했던 과거이기 때문일 것이다.


▲ 내산서원의 정문인 홍살문 ~
별로 반갑지 않은 인상의 홍살문을 들어서면 문향(文香)으로 가득한 내산서원이
유감없이 펼쳐진다.

▲ 강항의 문집 '강감회요(綱鑑會要)'가 잠들어 있는 경장각(敬藏閣)
강항 선생이 자치통감(資治通鑑)과 '통감강목(通鑑綱目)'을 나름대로 정리, 보완한 '강감회
요'의 목판을 비롯하여 '수은집' , '간양록', '문선(文選)'의 필사본을 간직한 서고(書庫)이
다.
강감회요는 1702년에 판각된 총 642매의 목판(木板)으로 인쇄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딱
1권 전해오고 있으며 이들 목판은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213호로 지정되었다.

강항의 문집을 수호하려는 의지가 참으로 대단한 듯, 문을 꼭꼭 닫아걸고 좀처럼열어주려
하질 않아, 매서운 눈초리로 관람객들을 주시하는 모습에 가히 기가 꺾일 정도이다.

참고로 이 곳에 있던 강항의 영정은 2006년 4월 도난당해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다고 한다.
상황이 그러니 경장각이 더욱 긴장의 끈을 놓치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 내산서원 본당
강항 선생의 영정을 모신 내산서원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건물 앞에는 그의 충절을 길이 기리려는 듯, 소나무 4그루가 늘 푸른 모습으로 서원 내부를
푸르게 수 놓는다.

◀ 내산서원 본당 내부
적막감으로 가득한 건물내부에는 강
항 선생의 영정 한 폭이의연하게 걸
려 있어 그 허전함을 약간이나마 달
래준다.

◀ 내산서원 본당으로 통하는 충의
문(忠義門)

▲ 새색시 마냥 단아한 용모의 수은정(睡隱亭)
1992년 이후, 서원을 정비하면서 서원 아래로 네모난 연못과 '수은정'이란 정자를 베풀어 놓아
답사객들의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 연꽃과 개구리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수
은정 앞 연못 ~
연못 가운데로 동그란 섬을 띄워놓았다.마치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
圓地方)을 상징이나 하려는듯이..


♠ 비뚤어진 비석이 인상적인, 강항 선생의 묘역(墓域)

▲ 강항 선생묘 가는 길
녹음으로 가득한 나무와 곱게 깔린 푸른 잔디의 인도를 받으며 그의 안식처로 다가선다.


▲ 무덤을 만나기 100m 전..

묘역 주변으로 아름드리 소나무들로 가득하다. 한결같이 무덤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있으니
마치 강항 선생의 제자들이 소나무로 화(化)한 듯 하다.
소나무가 내던진 솔내음의 솔솔한 향기의 취해 눈앞이 몽롱해진다.


▲ 강항 선생 내외 묘역

강항 선생과 그의 부인(2명)의 유택(幽宅)으로 소나무 숲, 양지 바른 곳에 조용히 들어앉아
있다.
볼록한 선의 미가 느껴지는 무덤 주변으로는 문인석 1쌍, 망주석 2쌍, 배례석(拜禮石), 양석
(羊石) 1쌍, 묘비 2기가 유택을 지키고 있으며 묘역 주변으로는 후손들의 묘역이 듬성듬성 둥
지를 트고 있어 죽어서도 늘 선조(강항 내외)와 함께 한다.


▲ 망주석(望柱石)의 어제와 오늘의 모습

400년 세월의 때로 가득한 왼쪽 망주석, 그리고 근래에 세운 하얀 피부의 윤기가 흐르는 오른
쪽 망주석, 마치 지팡이에 의지한 팔십 노공(老公)과 훤칠한 장부의 손자가 마주 서 있는 것
같다.
새 망주석에는 꼬랑지가 긴 세호(혹은 다람쥐)가 새겨져 무덤을 찾은 이들에게 후회없이 살아
갈 것을 주문하고 있다.

◀ 매서운 눈초리의 문인석(文人石)
무서운 눈꼬리의 삼각 수염을 가진 문인석이
바라보는 방향은 동쪽, 즉 왜열도이다.
자신의 귀한 자식들을 죽게 하고 포로생활의
커다란 시련을 주었던 왜국에 대한 강항선생
의 강력한 원망의 표현은 아닐까..?


▲ 가까이서 바라본 강항의 묘역

400년 세월의 검은 때가 잔뜩 입혀진 옛 묘비(墓碑)는 무덤의 방향(남쪽)과 반하게 특이하게
도 동쪽을 향하며 서 있다.
새로 세워진 묘비는 남향인데 어째서 옛 묘비는 비뚤게도 동쪽을 바라보고 있을까..?

임진,정유년의 수치를 결코 잊지 말고 후대에 경계로 삼아 나중에 꼭 복수를 해줄 것을 바라
는 강항의 강력한 메세지가 담긴 것은 아닐까..?

◀ 동쪽을 바라보는 그 문제의 비석
비석이 왜 동쪽을 바라보며 서 있는지에 대해
인터넷 세계를 열심히 허우적거렸지만결국
그 해답을 찾진 못했다.

▲ 코스모스 길 (내산서원 -> 불갑초교)
가을의 전령, 코스모스의 열화(?)와 같은 배웅을 받으며 그렇게 내산서원을 떠난다.

◀ 민주열사 박관현 동상(銅像)
불갑초교로 나오던 중, 어느 동상 하나가나
의 발길을 덩굴처럼 꽉 붙잡는 터라 누군가
살펴보니 5.18열사 박관현의 동상이다.
그는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광주 5.18 민주
화 운동에 참여했으며 군부에 수배되어 오다
가 1982년 체포되어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
다.
그는 전두환의 처단과 광주사건 규명을요구
하며50일간 단식투쟁을 벌이다 결국 옥사(
獄死)하였는데, 무덤은 광주 망월동 묘역에
있으며 고향은 바로이곳이라고 한다.
여기서 이렇게 뜻하지도 않은 5.18관련 기념
물을 대하고 보니 왠지 모를 우울감이 나를
엄습한다.
별로 기억하기도 싫은 우리나라의 우울한 현
대사(現代史)와 안개 속에서 여전히 허우적
거리는 나라의 암담한 현실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으리라...

~~ 아쉽지만 상편은 여기서 끝. ~~

* 답사, 촬영 일시 - 2006년 10월 3일
* 작성 시작일 - 2006년 10월 9일
* 작성 완료일 - 2006년 10월 18일
* 숙성기간 ~ 2006년 10월 18일 ~ 2007년 4월 3일
* 공개일 - 2007년 4월 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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