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가탄신일 기념, 서울 동남부 지역 사찰 순례기 ~
상편 - 서울 봉은사(奉恩寺) <2006년 5월 5일 / 6월 8일>'

▲ 봉은사 3층석탑 비둘기
2003년부터 시작된 사월초파일 기념 사찰 순례는 병술년(2006년)에도 변함없이 진행되었다.
2004년과 2005년 초파일에는 한결같이 한수(漢水) 이북의 고찰들을 찾았는데 이번 사찰 기행에서는
한수 이남으로 과감히 눈길을 돌려 강남 한복판에 들어앉은 봉은사와 경기도 성남시에 있는 망경암
(望京庵), 봉국사(奉國寺) 등 고찰 3곳을 순례하였다.
이번 초파일은 이상하게도 어린이날과 겹쳐버리는 통에 한쪽에서는 어린이들을 위한 행사가, 다른
한쪽에서는 초파일을 위한 불교 행사가 산발적으로 열려 천하가 온통 축제 분위기로 떠들썩 하였다.
아무래도 우리나라의 큰 기념일 2개가 하루에 만나버렸으니 그 정도가 오죽하겠는가? 덕분에 쉬는
날이 하루 줄어 많은 아쉬움을 주었던 5월 5일,
그럼 지금부터 사찰 순례 이야기를 거침없이 펼쳐보이도록 하겠다.
* 익스플로어 새 창으로 보고자 할 경우 여기를 클릭바랍니다.
* 본 글은 3편으로 나누어 작성했습니다.
~~~ 강남 한복판에 들어앉은 큰 절 - 봉은사의 내력(來歷) ~~~
 | 우리나라 제일의 부자동네인 강남(江南) 한복판에서울 에서제일 큰 절, 봉은사가 넓직하게 들어앉아 있다.
이 절은 어린 시절부터 종종 찾았던 곳으로, 1991년 이 후 15년만에 발걸음을 해본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 듯, 그 동안나처럼참 많이도 변해있었다. 예전에 없 던 건물과 석물들이새로 솟아나 있고 절의 사세(事勢) 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나날이커져만 가니, 아 무래도 강남 노른자위 땅에 있는 덕을 톡톡히 보고 있 는 듯 하다. |
▲ 진여문에 걸린 봉은사 현판 |
봉은사는 794년(신라 원성왕 10년) 연회국사(緣會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견성사(見性寺)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고 한다.
하지만 창건 이후, 근 700년 동안 이렇다 할 사적(事績)과 유물이 전혀 없어 창건시기에 대해 상 당한의구심을 품게 만든다.그러다가 15세기 후반, 드디어 긴 침묵을깨고 다시 세상에 나타난 다.
우선 연산군 4년(1498년), 성종의 비(妃)인 정현왕후(貞顯王后)는 견성사를 성종의 능인 선릉(宣 陵)의원찰로 삼는다. 능을 수호하는 원찰로 선정되면 그 절은 조선 정부로부터 많은 지원과 비호 를 받게 되는데, 그 덕에 이 절은 크게 중창되었으며 이 때 절 이름이 봉은사로 변경되었다. |
중종 연간(年間)에 이르러 절을 모조리 없애려는 국책 에 따라봉은사도 자칫 문을 닫을 뻔했으나 성종의 원 찰이라쉽사리건드리지 못했으며, 중종의 3번째 부인 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시대에 이르면서 조선 불교 중 흥의 중심지로 우뚝 서게 된다. 불교를 신봉하던 문정왕후는 희대의 간녀(奸女)로 악명 높은 정난정(鄭蘭貞)의 소개로 친분이 두터워진 보우선 사(普雨禪師)를 앞세워 불교 중흥을꾀하는데, 그가 머 물던 봉은사를 선종의중심 사찰인 선종수사(禪宗首寺) 로 삼는다. |  |
▲ 봉은사 사적비 |
또한 연산군 연간에 폐지된 승과(僧科)를 부활시켜 시 험에 통과한 승려들에게 도첩(度牒)을 내렸는데, 그 시 험 장소가바로 이 곳 봉은사이다. 1552년 1월, 승과 부활 기념으로 첫 시험이 치러져 400 여명이 선종에 합격하였고, 4월에 치러진 시험에선임 진왜란때 승병을 일으킨 서산대사(西山大師)가, 1562 년 시험에선 사명대사(四溟大師)가 합격하여 그 존재 를당당히 드러내었다. |  |
▲ 봉은사 영산전 |
1562년 문정왕후는 중종의 곁에 묻히고 싶은 욕심에 지금의 봉은사 자리에 있던 중종의 능<정릉 (靖陵)>을 지금의 선정릉 자리로 옮기고, 선정릉 자리에있던봉은사를 지금의 자리로옮기면서 절을 크게 증축하였다. 그러나 불교의 수호자, 문정왕후가 1565년 세상을 뜨면서 오랜 만에 부흥기를 맞이한 불교계는 다시끝없는 침체로 빠져들고, 왕후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불교 재건에 힘쓰던보우는 왕후가 세상을 떠난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제주도로 귀양 보내져 처참히살해된다. 임진왜란으로 불전 대부분이 파괴되어 1612년 이후 벽암선사(碧巖禪師)가 힘들게 손질을 했으나 1637년 1월, 남한산성으로 꽁무니를 뺀 인조를 잡으러 얼어붙은한강을 건넌 청나라 군에 의해 다시 한번쑥대밭이 되는 비운을 겪는다.
전쟁이 끝나고 곧바로 승려 선화(禪華)와 경림(敬林)등이 중심이 되어 다시 절을 일으켜 세웠으나 1665년화재로 전각 상당수가 잿더미가되었으며, 1692년 선정릉으로 참배를 갔던 숙종은 봉은사 의 중창(重創)현장을 직접 시찰하고 특별히 재물을 내려 공사를 도왔다. |
1720년에는 450근의 범종을 주조하여 범종각(梵鍾閣)에 걸었으며, 1790년 정조 임금은 봉은사를 비롯한 서울 주변의 5개 사찰을 규정소(糾正所)로 지정하여 전국의 사찰을 관리케 했는데봉은사는 강원도 지역의 사찰을 담당하였다. 1856년에는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과 훈련대장 김병익, 경상감사신석우(申錫雨) 등 고위관리의 아낌없는 시주 에 힘입어화엄경 80권, 총 3479판을 간행하고 그 경판 을 보관할 판전(板殿)을 세웠으며, 당시 봉은사에 머물 던 추사 김정희(金正喜)가친히판전 현판을 썼다. |  |
▲ 봉은사 판전 |
1902년 조선 정부는 대한사찰령을 제정하여 봉은사를 비롯한전국 14개 사찰을 수사찰(首寺刹)로 삼았으며 1911년 조선총독부는 사찰령(寺刹令)을 반포하여 봉은 사를 전국 31본산(本山)의 하나로 삼아 서울, 경기도 지역 80여개 사찰을 관할케하였다. 1925년(을축년) 7월 한강 대홍수로 뚝섬, 압구정, 잠실, 천호동지역 주민1천여 명이 수해를 입자, 주지 청호 화상(晴湖和尙)은절의 승려를 이끌고헌신적인 구조작 업으로708명을 구조하였으며, 재물을 풀어이재민을 구호하였다. |  |
▲ 봉은사 미륵대불 |
 | 1939년 대화재로 판전을 제외한 모든 불전이 잿더미가 되어1941년 다시 중수했으며, 해방 이후, 조계종 총무 원 직속사찰이 되었으나 6.25전쟁으로 선불당, 판전을 제외한 모든당우들이 파괴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1954년 이후, 넉넉치 못한 재정으로 조금씩 절을 일으 켜세웠으며 1960년대 이후, 활발히 진행된 강남 개발 로 허허벌판이 거대한 신도시로 탈바꿈하면서 뜻하지 않게도시 속의별천지로 전락되어 버린 경향은 있으나. 대신 강남 부자들을대거 신도로 영입하여 그들의 아낌 없는 시주로 절의 규모를계속해서 불려나가 지금은 서울 굴지의 사찰로 그 명성을누리고있다. |
▲ 봉은사에서 바라본 무역센터 |
1972년에는 동국역경원을 세워, 대장경(大藏經)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선불당, 영산전, 판전, 선원,요사,북극보전, 지장전, 진여문 등 약 20여 동의으리으리한당우(堂宇)들이 있으며1996년에 세워진 거대한미륵대불이 있다. 소장 문화재로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4호로 지정 된 선불당을비롯하여, 판전 현판, 대방광 불화엄경 수소연의 초판, 장흥사동종, 사천왕상 등 지방문 화재 5점과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불상, 경판, 불화 , 문서 등 비지정문화재90여 점을 간직하고있다. |  |
▲ 봉은사 범종각(梵鐘閣) |
조선 왕실의 원찰로 막대한 지원과 비호로 조선 최고의 사찰로영화를 누렸으며, 왜정(倭政) 때 는 31본산의하나로, 1960년대 강남 개발로 끝없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봉은사는 강남과늘 운 명을 함께하는강남의 수호 사찰이자, 높은 빌딩으로 가득한 강남 번화가 속에 하나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
~ 봉은사 찾아가기 (2007년 6월 기준) ~
1. 지하철 2호선 삼성역 6번 출구에서 도보 10분 2. 지하철 7호선 청담역 2번 출구에서 도보 10분 3. 봉은사(봉은사로) 경유 서울시내버스 - 361, 640, 3412,공항좌석 600번 4. 봉은사(영동대로, 아셈타워) 경유 서울시내버스 - 143, 146, 301, 362, 401, 2225, 3217, 3218, 3414, 4418, 4419, 공항좌석 606번
* 봉은사 입장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따로 제한 없음 |
♠ 봉은사 진여문(眞如門) ~
| ◀ 봉은사 코끼리상 부처님의 법을 상징한다는 코끼리 2마리가 봉은사를 찾은 중생들을 제일 먼저 맞이 한다. |

|
▲ 부처님 오신날을 축하해 주기 위해 풍물패들이 진여문 앞에서 신나게 판을 벌이고 있 다. 봉은사를 찾은 중생들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의 공연에 눈과 귀를 아낌없이기울이 고, 한참 절정에 오른 그들의 풍악 소리에 흥이 더욱 커져만 가면서 어깨춤이 절로 나 올 정도로 마음이 덩실덩실 즐거워진다. |
▲ 봉은사의 거대한 정문 - 진여문(眞如門) <2006, 6, 8일>
|
다른 절에서는 필수 요소로 일주문(一柱門)을 갖추고 있으나 봉은사는 그런 것이 거추장 스러운지 따로 일주문을 세우지 않았다. 대신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정도로 웅장한 규 모의 진여문이 그 일주문의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진여문의 진여(眞如)는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사물의 본체로써 영원불멸한 것을 뜻한다고 한다. 이 문은 봉은사 창건 시절부터 있었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으며 1939년 대화재로 소실된 것을 1982년에 다시 세웠다. |
♠ 봉은사 사천왕상(四天王像)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60호
 | ◀ 다문천왕(多聞天王)과 지국천왕 (持國天王) -
진여문을 들어서면 문 양쪽으로 1칸 규모의 나무 건물이 있는데 그 안에 서울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다. 이들은 원래 그들의 보금자리인 천왕 문(天王門)에 있어야 되지만 여기서는 특이하게도 진여문의 수문장 노릇을 하고 있다. 이들은 1746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서 울지역에 현존하는 사천왕상 중에서 제일 오래된 것이다. |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된 귀하신 몸이라 도난과 훼손을 우려하여 유리막으로 막아버려그 아쉬움 가득하지만 문화재 도난이 다반사(茶飯事)로 일어나는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뭐 어찌할 도리가없 지 않겠는가..?
진여문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우측에 '다문천왕'과 '지국천왕'이, 좌측에는 '증장천왕'과 '광목천왕'이 각각 자리해 있다. 절을 찾은 중생들에게 멋진 음악을 선사하려는 듯 비파(琵琶)를 들고 있는 제1상은 다문천왕으로 눈썹이너무 하얀 탓에 나이가 상당히 들어 보이나사천왕상의 백미(白眉)라 할만하며 생뚱 맞은 표정의 제2상(지국천왕으로 추정)은 마치 절을 찾은 이들에게 두 손을 배 앞에 대고 '어서오이 소' 하는 듯 하다. 다른절의 사천왕상은 너무 무섭게 생겨서오금이 저릴 판인데 이 곳의 그들 은 너무 친근한 모습들..그들 앞에는 그들의 높은 인기를 보여주듯 중생들이 바친 꽃과 과일들 로 가득하다. |
▶ 증장천왕(增長天王), 광목천왕 (廣目天王) -
삼국지의 장비(張飛)와 인상이 많이 비슷해 보이는 제3상(증장천왕), 그는 오른손으로 용의 머리를 꽉 쥐어들고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듯 계속해서 남쪽을 두리번 바라본다.
삼지창(三枝槍)의 소유자 광목천왕(제 4상)도 초파일 축제 분위기에 흥이 잔 뜩 오른 듯 약간 상기된표정이다. |  |
♠ 봉은사 법왕루(法王樓)
|
▲ 봉은사 법왕루 진여문을 지나면 정면으로 법왕루라 불리는 커다란 문루를 만나게 된다. 법왕루는 법의 왕, 즉 부처가 계시는 곳을 뜻하는데 흔히 설법전(說法殿)이라고도 부른다. 이 건물은 기존의 법왕루를 미륵대불로 옮겨 미륵전으로 삼으면서 1997년에 새로 만든 것이 며 봉은사의 탄탄한 재력을 상징이나 하듯, 전각 내부는 정말로 호화, 찬란 그 자체이다. |
| ◀ 법왕루 내부 ~ 거대한 호화 연회장 을 보는 것 같다. |
|
▲ 법왕루 동쪽 벽을 가득 메운 금동불(金銅佛) 조그만 불상에서부터 큰 불상까지 헤아리기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수많은 금동불이 동쪽 벽에 빼곡히 들어앉았다. 그들의 광채로 눈이 부시다 못해 눈이 심히 부담스러울 지경. |
♠ 봉은사 선불당(選佛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4호
|
▲ 붉은 연등으로 가득한 선불당 앞뜰 선불당은 말그대로 부처를 가려 뽑는다는 건물로 조선시대 때 승과 시험을 보던 곳이다. 정면 8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전각으로 조선 중기에 세워졌으나 1939년 대화재로 무너져 내린 것을 1941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현재는 신도들이 참선, 공부를 하는 선방(禪房)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다른 절에서는 거의 찾아 보기 힘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초파일을 맞아 절을 찾은 중생들이 하나둘 아픈 다리를 쉬어가기 위해 툇마루에 걸터앉은 모습들이 너무 정겹고 평화롭다. |

|
▲ 선불당 뒷쪽 선불당 뒤쪽 툇마루에는 국수 공양을 하는 사람들로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선불당 동쪽 요사(寮舍)에는 국수를 먹기 위해 사람들이 거의 1리에 가깝게 꼬리에 꼬리를 물며 서 있고, 선불당과 요사 주변은 국수를 먹는 사람들로가득하다.
절밥을 좋아라하는 나 역시, 국수 공양에 참여하려고 했으나, 줄이 너무 길고 그것을 기다 리다 자칫 성남으로 넘어가는 시간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아서, 우선 절부터 둘러보고 천천 히 먹으려고 하였지. 그러나 절을 다 둘러보고 다시 찾으니, 국수 공양은 이미 끝... 아줌마 신도들은 그릇 설 겆이 하느라 여념들이 없고.. 공양이 끝났냐고 살짝 물어보니 그렇다고.. 이럴 수가... '금강산도식후경'이라는 말을 무시하다가 결국 이런 화(?)를 자초하고 말았구나.... 작년 초파일에는 고양시 흥국사(興國寺)에 늦게 왔음에도 공양부터 하고 절을둘러봤거늘, 역시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
| ◀ 요사 남쪽에 임시 천막을 세워놓고 절을 찾은 중생들에게 코코아, 커피, 차 등의 마실것을 아낌없이 제공하고 있다. 역시 부자 사찰다운 면모라 할까..?
국수를 못먹은 한을 달래보고자, 차 2잔 과 코코아 1잔, 커피 1잔 등, 정말 다양 하게도 마셨다. |
♠ 새하얀 연등의 세상 - 봉은사 지장전(地藏殿)

|
▲ 하얀 연등을 베풀어 놓은 지장전(地藏殿)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신 곳으로 1939년 대화재로 전소된 것을 1941년에 다시 세웠으나 2002년 6월 또 다시 찾아온 화마의 장난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2003년 겨울에 기존 12평이던 전각을 40평으로 크게 확장하여 새로 지었으며 불전 앞에는 망자(亡者)의 극락왕생을 소망하는수천 개의 하얀 연등이 하늘 가득 뒤덮고 있다. |
| ◀ 지장보살상(地藏菩薩 像)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제 스쳐를 취한 승려머리의 지장보살이 잔잔한 미소를 띄우며 삶에 지친 중생들 을반가이 맞는다. |
♠ 봉은사의 법당, 대웅전(大雄殿) 주변 풍경 (1) ~
|
▲ 대웅전의 측면 봉은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 초파일을 맞이하여 대웅전에 모셔진 부처님에게 하례를 드리기 위해 중생들이 기다림의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고 길게 길게~ 줄을 서 있다.
이 건물은 1982년에 새롭게 중창된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우람한 규모를 자랑한다. 불전 내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장흥사 동종을 비롯하여 18세기에 만들어진 삼존불과19세기 후반에 그려진 삼회불도, 신중도(神衆圖), 괘불 등의 불화가 있다. |

|
▲ 연등으로 가득한 대웅전 앞뜰 하늘을 뒤덮은 연등의 끝없는 물결로 석탑과 대웅전의 윗부분이 거의 가려져 버렸다. 마치 자욱한 하얀 안개로 산 윗부분이 완전히 가려진 것처럼.. 연등의 아래 세상은 중생들로 가득하니,마치 연등 위는 천상 세계 혹은 극락, 그 아래는 축생(畜生)들의 세계를 상징하는 것 같다. |
 | ◀ 봉은사 3층석탑 1970년대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부처의 사리 1과가 모셔져 있다.
탑 주변으로 중생들의 소망과 온갖 사연들이 담긴 색깔이 고운 연분홍 촛불들이 자신의 몸 을 앞다퉈 불사르며 탑 주변을 따스하게 덮어 준다. 저녁이 되면 화끈 달아오른 연등과 한데 어울 려 황홀한 분위기를 연출해 낼 것이다. |

|
▲ 1년 만에 바깥 나들이를 나온 아기부처의 희열(喜悅), 그리고 초파일 행사의 백미(白眉), 관정(灌頂) 의식 |
~~ 아쉽지만 상편은 여기서 끝.
~~
* 답사, 촬영 일시 - 2006년 5월 5일 / 6월 8일
* 상편 작성 시작일 - 2006년 6월 3일
* 상편 작성 완료일 - 2006년 6월 13일
* 상편 숙성기간 ~ 2006년 6월 15일 ~ 2007년 5월 28일
* 공개일 - 2007년 5월 28일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