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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종로구 북부 지역(부암동, 홍지동) 역사탐방 '
' 세검정 ~ 대원군별장 ~ 홍지문 ~ 보도각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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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높이 솟아난 북한산과 북악산(北岳山) 사이로 약간 움푹 들어간 분지(盆地)가 있다.
그 곳에는 홍지천(弘智川)의 상류 동네인 부암동과 구기동, 평창동이 들어앉아 있는데 서울 도심과
불과 고개(자하문고개) 하나 차이의 가까운 거리임에도 '이 곳이 정말 서울 맞어?' 의구심이 들 정
도로 도심과는 전혀 다른 전원(田園)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이 곳에는 삼국시대(6세기)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 후기까지를 망라한 수많은 흔적들이 산재해 있어
다양한 볼꺼리를 선사해준다. 우선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점령한 기념으로 직접 시찰하여 세운
순수비(巡狩碑,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음)와 그 비석이 1500년 동안 살아왔던 비봉(碑峰), 그 봉
우리 아래로 고려와 조선시대 고찰인 승가사와 금선사(金仙寺), 승가사 위쪽 바위에 둥지를 튼 고려
중기 대불(大佛)인 구기동 마애석가여래좌상(보물 215호), 평창동 보현봉 아래로 산악신앙의 현장인
산신각(山神閣), 북악산의 뒤쪽 백사골(백사실)에는 비밀의 옛 정원인 백석동천 별서 유적이 300년
의 세월을 간직하며 오묘하게 숨어 있다.
비봉과 북악산에서 발원한 계류는 세검정(洗劍亭)에서 만나 한 몸이 되면서 비로소 홍지천을 이루니
그 부근으로 '조지서(造紙署)'와 '탕춘대'의 옛터를 알리는 표석, 세검정초등학교 안에는 서울 유일
의 당간지주인 장의사터(藏義寺) 당간지주가 심어져 있다.
큰 세상을 향해 부지런히 갈 길을 재촉하는 홍지천을 따라 내려가면 석파정에서 분리된 대원군 별장
의 사랑채를 만나게 되고, 홍지문을 통과하면 흥미로운 모습의 하얀 불상, '보도각 백불'을 만나게
되니, 이 불상이 바로 '평창동, 구기동, 부암동 문화유적 벨트'의 종점이다.
아직까지는 그들의 인지도가 낮아 찾는 이도 그리 없지만, 서울에서 4대문 안쪽을 제외하고 이렇게
문화유적이 집중 분포하고 있는 곳도 거의 없으며 넉넉잡아 4시간 정도면 약간의 등산이 필요한 승
가사(僧伽寺)와 금선사를 제외한 나머지를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그럼 지금부터 세검정을 시작으로 홍지천을 따라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장의사터 당간지주와 평창동 산신각, 석파정은 본 글에서 제외했으며 북악산 백석동천 별서 유적지
는 별도 글에서 따로 소개하도록 하겠다)
♠ 반역(인조반정)을 꿈꾸며 칼을 씻던 곳, |
(弘智川)을 바라보며 단아하게 서 있는 세검정을 만날 수 있다. 세검정은 'T' 형태의 구조로 지붕은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정자의 건립시기에 대 해서는다소 말들이 많으나 연산군(燕山君)이 부근에 탕춘대(蕩春臺)를 조성하면서 부속 정자 로 세웠다는말도 있고, 또는 숙종(肅宗) 연간에 북한산성을 축조하던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웠 다고도 한다. 하지만 둘 다 나름대로의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로 연산군 연간에 세워진 탕춘대 소속 정자가 세검정의전신(前身)이 아닐까 생각된다. 세검정의 세검(洗劍)은 말그대로 칼을 씻는다는 뜻으로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통치에 가득 불만을 품던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괄(李适) 등이 여기서 광해군의 폐위를 모의하며 칼을 물에 씻었다고 한다. (혹은 칼을 갈고 날을 세웠다고도 함) 김유를 중심으로 한 반란파는 얼마 뒤 군사를 이끌고 도성(都城)을 침범, 창덕궁을 점령하여 광해군을폐위하고 얼떨떨한 능양군(綾陽君)을 군주로 옹립한 이른바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저 지르게 된다. 정권을 잡은 반란파는 이 곳을 반정을 모의한 상징적인 장소로 삼으며 이를 기념하는 뜻에서 지금의 정자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영조 24년(1748년)에 약간 수리를 하였으며, 1941년에 불타버려 그 흔적만 남아 있던 하지만 1970년대 이후, 이 곳에도 개발의 바람이불어오면서 옥계수(玉溪水)의 홍지천은 거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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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같아서는 정말 벌러렁 누워서 한잠 청하고 싶은 잘생긴 바위, 홍지천을 정화하여 옛날의 | |
◀ 사초를 깨끗하게 세초 사초 등의 서적을 세초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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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나무는 한지(韓紙) 외에도 오늘날의 휴지 역할도 하였다. | |
◀ 탕춘대(蕩春臺) |
♠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의 옛 사랑방 - 대원군별장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3호
(石坡廊)이라불리는 전통 고급 한식당으로 서예가로 크게 활약했던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 선생이1958년에 세워 자신의 거처로 삼았다. 소전 선생은 6.25 시절, 북으로 끌려갈 뻔한 간송미술관의 동산문화재를 뛰어난 재치로 지켜 낸위인이다. 특히 왜국(倭國)으로팔려간 김정희(金正喜)의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를 천신 만고끝에가지고 온 인물로유명한데, 그는 집을 지으면서 평소 석파정에눈독을 들였는지 석파정의 사랑채만을 이곳으로 가지고 왔다. 이 건물은 맞배지붕의 'ㄱ'자 형태로, 방이 모두 3개인데 가운데 큰 방은 흥선대원군의 방이 고건너 방은 손님을 접대하던 공간, 대청 방은 그의 주특기인 사군자(四君子)의 난초를 그릴 때만특별히 사용했다고 한다. 사랑채의 마루 안쪽에는 난간을 설치하여 고급스러운 주택분위 기를풍기고 있으며, 창문 쪽 외벽에는 동그란 창문을 내고 그 주변 외벽에는 모조리 벽돌로 도배하여마치 감옥처럼 폐쇄적인 듯한 인상을 주고 있는데 이는 전형적인 중국 건축 양식으 로그 디자인을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현재 이 곳은 석파랑 주인이 소유하고 있으며, 식당 손님을 접대하는 용도로 쓰인다고 한다. 대원군 별장이 졸지에 식당 손님들 밥 먹는 곳으로 전락해 버리다니.. 방 안에 환풍기 같은 시설이 얼마나 눈에 거슬리던지, 하지만 그런데로 깨끗히 보존되고는 있으니, 이 정도면뭐, 봐줄 만은하겠다. 사랑채로 접근하는 방법은 석파랑 정문을 이용하여 가는 것과, 석파랑 남쪽 주차장 쪽으로 가 는길이 있는데 보통 주차장 쪽으로 가는 것이 더 접근이 쉽고, 석파랑 관계자의 눈치를 덜 받는다. 현재 사랑채는 석파정과 따로 분류하여 '대원군 별장'이란 이름으로 서울지방유형문화재 23호 로 지정되었다. ※ 대원군별장, 석파랑 찾아가기 (2007년 9월 기준) |
▲ 보랏빛 향기로 가득한 비비추 |
♠ 서울도성과 북한산성을 이어주던 탕춘대성의 성문, 홍지문(弘智門)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호
과 '탕춘대성(蕩春臺城)'이라 불리는 성곽을 만나게 된다. 조선 숙종은 혹 일어날지도 모르는 청나라와의 맞짱을 대비하기 위해 한양 도성 북쪽에 있는 북한산성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며 산성을 크게 중축하였다. 그리고 도성과 북한산성의 방어시설을 보완하고 부암동, 평창동 일대 주요 국가시설(평창<平 倉>, 선혜청) 등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1715년, 도성의 인왕산(仁王山)과'북한산성'을 잇는 약 7km의 성을 쌓았는데, 그 과정에서 홍지문이 탄생하였다. 이 성은 세검정 부근에 연산군이 세웠다는 '탕춘대'의 이름을 따서 '탕춘대성'이라 부르며간 단하게 2글자로 서성(西城)이라고도 부른다. 홍지문은 한북정맥(漢北整脈)이 지나는 길목에 세워져 있어 '한북문(漢北門)'이라 불리기도 하며 성안쪽 동네인 부암동, 구기동, 평창동은 선혜청(宣惠廳), 평창(平倉), 조지서(造紙署) 등의 주요 국가시설이있던 중요한 곳이다. 200년 가까이 잘 살아오던 홍지문은 1921년 1월, 지붕에 쌓여진 세월의 무게를 감당치 못하고 문루가 폭삭 붕괴되었으며, 같은 해 8월에는홍수로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마저 무책임하게 떠내려가 터만 남아있던것을1977년 7월, 홍지문과 함께 복원하였다. 우리나라 성문 중 거의 유일하게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케이스로 어린 시절 문루까지 올라가 놀던 기억이난다. 하지만 지금은 보호를 위해 문루와 오간대수문 접근을 통제하고 있다. 문 밖에는 벤치 등이 마련되어 있어 동네 사람들의 휴식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성문 주변으로 나무들이 무성히 심어져, 한여름에도 시원하다. 또한 문을 경계로 하여 안쪽은 종로구 부암동(홍지동), 바깥쪽은 서대문구 홍은동이다. ※ 홍지문 찾아가기 (2007년 9월 기준)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서울시내버스 7018번, 홍지문 하차 * 3호선 녹번역(4번 출구)에서 서울시내버스 7730번, 홍지문 하차. * 2호선 신촌역(1,3번 출구)에서 서울시내버스 110, 153번 홍지문 하차 |
▲ 홍지문의 뒷모습 | |
![]() | ◀ 홍지문 천정에 그려진 와운문(渦 |
▲ 홍지천의 물을 하염없이 흘려 보내는 오간대수문 |
♠ 고려시대에 조성된 거대한 하얀 불상 - 보도각 마애보살좌상(普渡閣 磨崖菩薩坐像)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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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을 보호하기 위해 바위 주변으로 사방이모 | |
▲ 시원하게 흐르는 홍지천 변에 들어앉은 | |
이 불상은 고려대 뒤쪽에 있는 보타암(寶唾庵)의마애불과 여러모로 비슷하여, 혹 쌍둥이로착 ※ 보도각 백불 찾아가기 (2007년 9월 기준) |
▲ 홍지천 건너에서 바라본 옥천암(玉泉庵) | |
| 불상의 덩치가 워낙에 커서 그의 모습을 한 장 |
◀ 불상의 아랫 도리 |
* 답사, 촬영 일시 - 2006년 6월 25일 / 8월 2일
* 작성 시작일 - 2006년 8월 2일
* 작성 완료일 - 2006년 8월 4일
* 숙성기간 - 2006년 8월 5일 ~ 2007년 8월 30일
* 공개일 - 2007년 8월 3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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