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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설악산님 제공
설연휴 마지막 날인 2월9일 저녁 8시에 남대문에 불이 났습니다. 새벽 1시까지 이어진 화재로 남대문 문루가
폭삭 붕괴되고 성곽의 여장 등이 많이 파손되었습니다.서울의 오랜 관문 겸 서울의 상징물로우리나라 국보
제1호의 상징성을 지닌 남대문에 그런 일이 발생하니 참으로 통탄을 금할 길이 없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남대문 사진 몇장 찍어두는 건데, 어린 시절부터 늘 보아오던 남대문이라 그럴 생각을 하지
못했죠. 만약 내가 지방에 살았다면 남대문은 사진에 몇장 담아두었을텐데 말입니다.
남대문은 서울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건물로 서울(한양) 도성의 남문입니다. 1395년에만들기시작하여1398년
에 완공을 본 이래 610년 가까이 이렇다할 피해를 겪지않고 살아온 문이라 그 가치는 정말 남달랐지요.
1908년왜국이 서울 개발을 이유로 성벽처리위원회를 만들어 남대문 양쪽의 성곽을 싹 헐면서 지금처럼 양손이
잘린 상태가 되어 섬 아닌 섬이 되었지요.
남대문은 1934년 왜국에서조선보물 1호로 지정했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국보 몇호니, 보물 몇호니 하는 건 그
때 시작되었습니다. 보물 1호로 지정된 이유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이 입성한 성문이
라 그걸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하는군요.비슷한 시간 소서행장(고니시 유끼나와)은 동대문(흥인지문)으로 입성
을 했구요.
4월 28일 충주 탄금대가 뚫리자 선조임금과 벼슬아치들은 죄다 개성으로 줄행랑을쳐 버리고 왜군은 1592년 5월
2일 한양도성을 무혈점령했습니다.조선정부가 내버린 한양을 왜군이 그냥 줏어 먹은 셈이지요.
한양을 싱겁게 점령한 왜장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은 한숨을 쉬었다지요. 수도만 점령하면 전쟁이 끝일줄 알았는데
조선의 왕이 도망쳤으니 전쟁은 더 길어지겠구나 젠장~~
조선의 제왕은 도성 밖을 출입할때 주로 남대문을 사용했습니다.(강원도 지역으로 갈때는 동대문 이용) 그리고
명나라, 청나라의 사진은 독립문에 있던 모화관에서 의관을 정제하고 남대문을 거쳐 도성으로 들어왔지요.
태종의 장자인 양녕대군이 썼다고 전하는 남대문의 현판이 가로도 아닌 세로인 이유는 화재를 막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풍수지리적으로 서울 남쪽 관악산이 불을 상징하는데 딱 서울 도성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서울 도성을
둘러싸는조산은 북악산인데, 높이와 덩치면에서 관악산의 적수가 되질 못합니다. 관악산은 629m, 북악산(백악
산)은 342m, 그래서 북한산(837m)을 서울의 진산으로 삼아 관악산에 대항케 했지요.
관악산은 불을 상징합니다. 멀리서 보면 활활타오르는 불덩어리처럼 생겨서오랜옛날부터두려워했던 산이지요.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남대문 현판을 세로로 했고, 경복궁 앞에 해태 2개를 설치하여 관악산 화기의 공습을
막고자 했습니다. 지금은 남대문에서 광화문까지 바로 태평로가 뚫려있지만, 조선시대에는 막혀있었습니다.
남대문에서 지금의 롯데, 광교4거리로 우회해서 종로, 광화문4거리로 우회하는 형식인데 이 역시 화마로부터
궁궐(경복궁)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남대문이 방화로 추정되는 불로 폭삭 붕괴되고 불을 막는다는 현판도 힘없이 바닥으로 내동댕이 쳤으니 이제 서울에
대화재가 나는건 시간문제일듯 싶네요~~ 관악산의 화기를 막아주는 남대문이 당해버렸으니 말입니다.옛 사람들의
풍수지리, 지금 보면 그저 헛소리같고 말도 안된다고 생각될 순 있으나 그렇다고 무시하는건 곤란합니다. 풍수지리는
자연에 맞춰서 동화되어 살고자 했던 옛 사람들의 정신이 담긴 학문이자 철학이니까요 ~~
남대문 복원은 최소 2년 이상 걸린다고 하던데, 원형 그대로 복원은 어렵다고 합니다. 아무리 최첨단 과학의 최첨단
토목건설을 자랑해도, 정작 옛 사람들의 건축물을 재현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한 예로 경주 황룡사 9층목탑 같은 경우
현재기술과 건축공법으로는 절대 복원이 불가능하다고 하는군요. 옛 사람들이 만든 옛 건축물이라고 무시하면 안되겠
습니다.
어쨌든 남대문의 조의를 표하며 다른 목조문화유산에 더 이상 이런 일이 없기를 기원합니다.
문화재청과 소방방재청, 국가 기관에서 좀더 신경을 써주길 바랄 뿐입니다. 국민들도 그냥 지나치지 말고, 파수꾼의
심정으로 우리 문화유산을 지켜나갑시다. ~~
2008년 2월 11일 (월) 12:00 헤럴드경제
“어떤 건물인데…” 대목장의 절규
눈물조차 마른 신응수씨
“어떻게 이어온 건물인데…. 누가, 왜 이런 소중한 유산에 불을 질렀단 말입니까.”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다. 말조차 잃어버렸다. ‘국보 1호’ 숭례문(남대문)이 밤새 방화로 추정되는 불에 타올랐다는 소식에…. 47년 전 숭례문을 직접 손으로 뜯었던 그에게 숭례문은 부모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성재(誠齋) 신응수(66) 대목장. 1961년 당시 21세의 나이로 숭례문 해체작업에 뛰어들어 직접 손으로 뜯고 재료를 만지던 목공이다. 그는 어느덧 91년, ‘중요무형문화재’ 호칭까지 받은 대목장이 돼 있었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준 소중한 문화유산이 밤새 불타오르는 장면을 옆에서 보고 있던 신 목장은 자신의 가슴이 타오르는 것 같은 슬픔에 눈을 돌리고 싶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그럼에도 그가 밤새 불타는 숭례문을 보고 있었던 것은 오직 이 건물을 다시 원래 모양 그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신 목장은 61년, 숭례문 보수공사 때를 잊지 못했다. 아직 풋내기 목공이었던 그는 국보급 문화재를 직접 손으로 만지고 다듬는 대공사에 참가한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다고 한다. “당시 도편수였던 조원재 선생의 지도를 받아가면서 직접 숭례문의 서까래 하나, 적심목 하나를 내 손으로 뜯고 다듬어 다시 올렸지. 그때는 참가한 것만으로도 영광이었어. 지금 와 돌아보면 목공 일이 뭔지, 이제 겨우 눈을 뜰까 말까 한 때였거든….” 2년여에 걸친 공사 끝에 63년, 보수공사가 완료되고 난 이후로 불국사 무설전(70~72년), 수원성곽(75~78년), 창경궁(86~87) 등 수많은 주요 문화재 복원공사에 때로는 부편수로, 때로는 도편수로 참여한 그였지만 숭례문은 그에게 남다른 의미를 지녔다.
“하다못해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도 일부러 숭례문 근처로 차를 지나가달라 부탁했지. 그리고 오가며 숭례문이 보이는 동안에는 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어. ‘저게 내가 참여한 공사인데. 내 손으로 국보 1호를 중수했는데’ 하는 생각을 하다 보면 어떤 공사에 참가해도 소홀히 할 수가 없더라고. 그렇게 숭례문을 보면서 자랑스러워하기도 하고 마음을 다지기도 했는데….”
밤새도록 타오르는 숭례문을 뜬눈으로 지켜본 그는 이번 불이 방화로 추정된다는 말에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600여년간 이어온 건물이야. 우리가 자랑스러워해야 하고 지켜야 할 소중한 유산인데, 거기에 직접 불을 지르나. 수원성곽에도 계속 누가 불을 지른다고 해서 가슴 아팠는데 이젠 숭례문까지 이렇게 되다니. 차마 볼 수가 없어. 자식 같고 부모 같은 건물인데….”
하지만 타오르는 숭례문에서 눈을 떼지 못한 것은 원래 모습 그대로 살려내야만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고 한다. “47년 전, 막내 도공처럼 들어가 만든 숭례문이야. 이젠 도편수가 돼서 모두를 지휘해야 하겠지. 당시 공사하면서 만들어 둔 실측도가 있으니 그대로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아. 하지만 얼마나 원래의 숭례문을 그대로 살리느냐, 원래의 재료를 얼마나 살리고 죽이느냐 같은 건 이제 들어가서 찬찬히 조사해보고 결정해야지. 될 수 있으면 원래의 나무, 원래의 기왓장 하나까지 그대로 쓰고 싶은 게 욕심인데 그건 어렵겠지.”
말을 마친 신 목장은 숭례문을 촉촉한 눈길로 다시 한번 살펴봤다. 그는 “복원을 위한 긴급회의를 해야 한다”며 재촉하는 문화재청 관계자의 독촉에도 그의 발걸음은 한동안 숭례문을 떠나지 못했다.
김재현 기자(madpen@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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