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을 구하고 숨진 의로운 개의 무덤, 구미 의구총 (낙산리3층석탑)


~~~구미 낙산리에서 만난 의로운 견공(犬公)의 무덤과 옛 고분, 그리고 석탑 ~~~

구미 낙산리3층석탑
낙산리 3층석탑


강원도 태백(太白)에서 발원한 낙동강(洛東江)이 바다를 향해 구비구비 흘러가는 길목에는 낙산리
(洛山里)란 동네가 있다. 행정구역상 구미시 해평면에 속한 낙산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낙동강변에
자리한 여느 농촌과 비슷한 곳이지만 그곳에는 무려 3가지의 고귀한 보물이 있어 세인들의 눈길을
끌게 한다.

우선 낙산리 언덕을 가득 메운 낙산리고분군은 우리나라 고분군(古墳群)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며
마을 동쪽에는 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맵시가 고운 낙산리3층석탑이 서 있고, 일선리로 가는 길목
에는 주인을 구하고 죽은 의로운 개의 무덤, 의구총이 있으니 이들이 바로 낙산리가 자랑하는 3가
지의 보물이다. 본글에서는 낙산리의 그런 보물을 굵직하게 다루고자 한다.


♠ 화마(火魔)로부터 주인을 구하고 숨진 의로운 개의 무덤
의구총(義狗塚) -
경북 지방민속자료 105호

일선리 문화재마을에서 우회도로 신설로 많이 한가해진 옛 25번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5~6분 정도
걸으면 길 좌측으로 의로운 개의 무덤인 의구총이 나그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해준다.
주인을 구하고 숨진 의견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여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개만도
못한 인간과 개들이 너무나 판치는 요즘 세상에 의견 스토리는 세상 사람들을 감동 속으로 몰아
넣고 삶의 대한 깨달음을 일깨워주는 옛날 이야기로 전혀 손색이 없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주인을 구하거나, 주인을 위해 죽은 개에게 의견(義犬), 의구(義狗)란 칭호
를 주면서 비석을 세우거나 무덤을 만들어 그들을 두고두고 기렸다.

우리나라 의견이야기의 대표격은 뭐니뭐니해도 전북 임실(任實)의 오수이다. 오죽하면 지명까지
도 큰개의 나무인 오수(獒樹)라고 했을까? 오수 사람들의 의견에 대한 자부심은 실로 대단하여
의견비와 의견상까지 세웠을 정도다. (☞ 오수 의견비
답사기 보러가기)
영남 지방에도 이에 뒤질세라 오수 의견에 버금가는 의견 이야기가 구미(선산)와 밀양(密陽)에서
전해온다. 그중 구미의 의견은 17~18세기에 목판으로 간행된 의열도(義烈圖)에도 수록되었고, 그
의 무덤은 조선후기 지도인 해동도(海東圖)에도 나왔을 만큼 명성이 자자했다.

그런데 오수나 구미, 밀양의 이야기는 공교롭게도 내용이 거의 비슷하다. 단지 다른 것은 등장인
물의 이름과 시대, 지역일 뿐이다. 이야기는 보통 개 주인이 술에 취해 집으로 가는 것에서 시작
된다. 그렇게 가다가 그만 벌판에 쓰러져 잠이 들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부근에서 들불이 일어나
주인을 덮치려고 한다. 마침 주인을 기다리던 (또는 같이 다니던) 개가 근처 강에서 몸에 잔뜩
물을 묻혀 불을 끄지만, 너무 체력소모를 한 나머지 그만 쓰러져 숨지고 만다. 잠에서 깬 주인은
그런 속사정을 알고 죽은 개를 껴안고 통곡하며, 그를 위해 무덤을 만들어주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오수는 무덤 옆에 나무를 심었다고 함)

▲ 정면과 옆면에서 바라본 의구총, 무덤 뒤에 있는 건 화강암에 조각한 의구도


구미 의구총은 무덤과 의구의 행적이 아련히 전해오던 것을 17세기 중반. 선산부사 안응창(安應
昌)이 의열도(義烈圖)에 의구전(義狗傳)을 수록하고 묘 앞에 비를 세웠으며, 1685년에는 의구의
이야기를 4폭의 의구도(義狗圖)로 압축하여 의구전에 실었다.
1952년 도로공사로 무덤과 비석이 약간 손상된 것을 일선리 마을 뒷산으로 옮겼으나, 1987년 일
선리 문화재마을 조성으로 지금의 위치로 옮겨 정비했으며, 무덤 뒤로 의구도 4폭을 화강암에 새
겨 의구의 이야기를 생생히 전해준다.

의구총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아주 먼 옛날 해평(海平) 산양에 김성원(金聲遠, 이하 주인)이란 사람이 누렁이 1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어느 날, 주인은 이웃마을에서 술을 마시고 말을 타고 집에 오는데, 술에 취해 말 위에
서 꾸벅꾸벅 졸았다. 의구도에는 개와 동행한 것으로 나와있으니 어디를 갈 때는 늘 개를 데리고
다닌 모양이다.

그렇게 집에 오던 중, 월파정(月波亭) 북쪽에서 그만 말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인사불성이 된 주
인은 벌판에 그대로 뻗어버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마침 부근에서 들불이 일어났다.
개는 주인을 깨우려고 발버둥을 쳤으나, 주인은 꿈나라 깊숙히 들어가 좀처럼 깨어날 줄 모른다.
그래서 개는 가까운 낙동강으로 달려가 몸에 물을 적시고 불에 뿌리는 형식으로 진화작업에 들어
갔다. 그야말로 온몸을 던져 화마로부터 주인을 구하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닌 것이다.

개는 간신히 불을 진압하여 주인을 구하는데 성공했으나, 너무 체력을 소비한 나머지 이내 쓰러
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가까스로 잠에서 깨어난 주인은 개가 자신을 살렸음을 알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관에 개를 넣어
땅에 묻었으며, 무덤을 만들어 자신을 구하고 숨진 의로운 개의 죽음을 세상에 알렸다고 한다.

참고로 구미에는 의구총 말고도 호랑이로부터 주인을 구한 소의 무덤인 의우총(義牛塚)이 있다.
이 역시 의열도 의우전(義牛傳)에 실려 있으며, 이곳과 가까운 산동면 인덕리에 자리한다.

의구총 주변은 조촐하게 공원으로 꾸며져 이곳을 찾은 나그네를 배려하였으며, 의로운 개의 넋을
기리며(물론 인간의 입장에서 본 것이긴 하지만..) 잠시 쉬어가는 여유를 누릴만한 곳이다.

※ 의구총 찾아가기 (2009년 2월 기준)
* 서울(강남, 동서울), 대구(북부,서부), 부산, 대전(동부), 상주, 울산에서 구미행 직행, 고속
버스 이용, 구미터미널을 나와 왼쪽으로 2분 정도 걸으면 터미널4거리가 나오는데, 거기서 정
면으로 길을 건너 왼쪽 오성예식장으로 가면 정류장이 있다. 거기서 해평행 80, 83, 180, 181
번 버스 이용
* 서울, 대전, 동대구, 부산, 울산, 영주에서 열차를 이용하여 구미역 하차, 구미역전에서 선산
행(20, 120번) 시내버스나 해평행(80, 83, 180, 181번) 버스 이용
* 대구북부정류장에서 선산행 직행버스로 선산 하차, 또는 해평 경유 상주행 직행버스(1일 9회)
를 타고 해평 하차
* 선산터미널과 해평에서 일선교 방면 시내버스(23, 30, 32, 123번../ 1일 15회 남짓)를 타고 일
선리문화재마을(일선교휴게소) 하차, 도보 7분
* 승용차 이용시
① 중부내륙고속도로 → 선산나들목 → 선산읍 → 생곡리 → 일선교를 건너 구 25번국도 낙산리
방면 → 의구총
② 구미 → 황상동 → 옥계동 → 괴곡3거리 → 해평 → 낙산리 방면 구 25번 국도 → 의구총
* 의구총 앞에 조그만 주차 공간이 있다.
* 소재지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산 148


♠ 낙산리 언덕을 가득 메운 옛 무덤의 거대한 물결
낙산리고분군(洛山里古墳群) -
사적 336호


의구총에서 남쪽으로 10분 정도 발품을 팔면 야트막한 고갯길이 나온다. 고갯길 양쪽 언덕으로
헤아리기조차 무의미한 방대한 옛 무덤이 언덕을 가득 메우고 있으니 바로 낙산리고분군이다.



낙동강 동쪽, 낙산리 언덕에 형성된 낙산리고분군에는
무려 250여 기에 달하는 크고 작은 옛 무덤이 산재해있
다.무덤 개수로 따지면 거의 우리나라 최대급이다.
이들 무덤은 분포지역에 따라 오목야(吳木野), 중리(中
里), 불로산(不老山), 월파정산(月波亭山), 정묘산(鄭墓
山), 칠창동(七倉洞) 고분군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규
모가 큰 것은지름이 15~18m, 높이는 4~5m에 이르며, 작
은 것은 높이가채 1m도 되지 않는다.

무덤의 형식도 다양하여 나무관을 안치한 목곽묘(木槨墓
),옹관을 묻은 옹관묘(甕棺墓), 구덩이를 수직으로 파
고 돌로 관을 만든 수혈식(竪穴式) 돌방무덤 등이 있다.

이들 고분은 1917년 왜인(倭人)들이 발굴을 했으나 자세
한 것은 전해오지 않으며, 1987년 대구 카톨릭대에서 발
굴조사를 벌여 가야와 신라 토기, 쇠도끼,금장신구, 화
살촉, 금동제(金銅制) 장식, 토기 등잔 등400여 점의
부장품을 건졌다. 허나 거대한 고분군의 출토 유물치고
는상당히 빈약한 편인데, 그 이유는 이미 도굴의 마수
가 이곳을 휩쓸었기 때문이다.

무덤의 형성시기는 정확히 단정짓기는 어려우나 대략 3
세기 후반부터 7세기 사이로 여겨지며, 근 400년 가까이
공동묘지로 쓰인 것 같다. 물론 아무나 이곳에 묘를쓸
수 있던 것은 아니다. 오로지 귀족 등의 지배층만이 여
기에 뼈를 묻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유감스럽게도 그에
대한 속시원한 해답은 없다. 그저 선산 지역에 둥지를
튼 지배세력이나 신라, 가야의 귀족 무덤 정도로 보고
있을 뿐이다.

구미와 한 몸이 된 선산(善山)은 지금도 그렇지만 상주와
김천, 대구, 안동으로 통하는 사통팔달의 요지이다. 거기
에 낙동강도 끼고 있어 오래 전부터 교역의 중심지 역할
을 하였고 강 주변으로 농지가 많아 농업 생산력도 대단
했다.
이런 것들을 배경으로 선산 지역에는 이름이 전해오지 않
는 조그만 나라나세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점차
가야연맹이나 신라의 일원으로 흡수되었던 것이다.

신라는기존 세력의 자치권을 인정해주거나 왕족이나 망
족(望族) 등을 파견하여 이 일대를 다스렸을 것이다.
그들은 거의 선산에서 생을 마감하면서 선산 지배층의 공
동묘지인 이곳에 묻히게 되고, 그것이 7세기까지 이어져
이렇게 거대한 고분군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선산은 신라(新羅)가 한강이나 충청도 방면으로 진출하려
면 거의 거쳐야 했으며, 신라 13대 첨해왕(沾解王)이 사
벌국(沙伐國, 경북 상주)을 정벌할 때도 선산을 거쳤을
것이다. 신라 눌지왕(訥祗王) 연간에는 고구려 승려인 아
도화상(阿道和尙)이 선산 도개에 들어와 신라에 고구려불
교를 전했으며,후삼국시대에는 한민족 최대의 전투로 손
꼽히는 고려와 후백제(後百濟)의 마지막 맞짱, 일리천(一
利川) 전투의 현장이기도 하다.

낙산리고분군은 그 터가 좋은 것 같다. 가까이에 낙동강
이흐르고 무덤 뒤에는 태조산(太祖山)이란 높다란 산이
있으니, 거의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세를 갖추었다.





구 25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양 언덕에 포진한 고분군은
발굴 이후 상당수 복원되었다. 미처 복원되지 못한무덤
은 '~~호분(號墳)'이란 꼬리표를 세워 무덤이 있던자리
임을 표시한다. 도로변에는 주차장과 조그만 쉼터가 마
련되어 나그네의발길을 배려하였다.

인적도 거의 없어 고요함만이 감도는 고분군은동네 사
람들이 개척한 것으로 보이는 산책로가 군데군데놓여져
있다. 국도 서쪽 고분군은 소나무가 울창하여 솔내음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는데, 특히 소나무숲 사이로 펼쳐
진산책로는 정말 집으로 고이 훔쳐오고 싶을 정도로 탐
이 난다.

고분의 모습은 정말 비슷비슷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무
덤의 크기와 곡선의 정도, 고분군의 영역은 너무 광대하
여 다 둘러보는데 꼬박 1시간 이상이 걸렸다. 엄청난 무
덤의 영역과달리 인지도는 그 반비례라 찾는 이는 거의
없다. 내가 갔을 때는 사람이라곤 나뿐이었으니 내가마
치 고분군의 관리자가 되어 이들을 구석구석 살펴본 기
분이다.

낙산리 고분군 1호분 (왼쪽)


인적이 없으니 사색하기도 좋고 날씨가 좀 따스하다면 봉분(封墳) 위나 적당한 자리에 자리를 피
고 잠 한숨 청하고 싶다. 실례를 무릅쓰고 무덤 위에 올라 조촐하게 두 눈에 다가오는 천하를 바
라보는 재미도 쏠쏠하며, 낙동강도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 바라보인다.

사람이란 죽으면 자연의 일부로 돌아간다. 허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돈 있고 권력있는 자들은 죽
어서까지 그들의권위를 누리고자 한다. 그래서 저런 거대한 무덤이 탄생하게 되었고,무덤 안에
진귀한 많은 유물을 넣었던 것이다. 허나 그들의부질없는 행동은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자칫 잊
어버릴 뻔했던 그들의 존재를느끼게 해주며, 역사 기록이 부족하여 애태우게 만드는 고대사의
일부를 약간이나마 밝혀주는 고마운 열쇠가 되어주기도 한다.


▲ 낙산리고분군에서 바라본 낙동강 (멀리 보이는 다리는 일선교)

나무의 보금자리가 되어버린 채, 그 모습을 상실한 무덤들
자연의 위대한 힘 앞에서는 아무리 인간의 큰 무덤도 별수가 없는 모양이다.
오랫동안 관리되지 못하고 방치된 사이, 어느새 나무들이 무덤을 조그만
언덕으로 인식하고 그곳에 뿌리를 내려 버린 것이다.


낙산리 고분군이 안겨준 커다란 선물, 울창한 소나무 숲길


※ 낙산리고분군 찾아가기 (2009년 2월 기준)
* 서울(강남, 동서울), 대구(북부,서부), 부산, 대전(동부), 상주, 울산에서 구미행 직행, 고속
버스 이용, 구미터미널을 나와 왼쪽으로 2분 정도 걸으면 터미널4거리가 나오는데, 거기서 정
면으로 길을 건너 왼쪽 오성예식장으로 가면 정류장이 있다. 거기서 해평행 80, 83, 180, 181
번 버스 이용
* 서울, 대전, 동대구, 부산, 울산, 영주에서 열차를 이용하여 구미역 하차, 구미역전에서 선산
행(20, 120번) 시내버스나 해평행(80, 83, 180, 181번) 버스 이용
* 대구북부정류장에서 선산행 직행버스로 선산 하차, 또는 해평 경유 상주행 직행버스(1일 9회)
를 타고 해평 하차
* 선산터미널과 해평에서 일선교 방면 시내버스(23, 30, 32, 123번../ 1일 15회 남짓)를 타고 낙
산리 하차, 도보 3분

* 승용차 이용시
① 중부내륙고속도로 → 선산나들목 → 선산읍 → 생곡리 → 일선교를 건너 구 25번국도 낙산리
방면 → 의구총
② 구미 → 황상동 → 옥계동 → 괴곡3거리 → 해평 → 낙산리 방면 구 25번 국도 → 의구총
* 고분군 안내문이 있는 곳에 차를 세워둘 수 있는 공간이 있다.
* 소재지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98-4 (넓이 229,245
)


♠ 신라후기에 조성된 아름다운 맵시의 석탑
낙산리 3층석탑 -
보물 469호


낙산리고분군에서 남쪽으로 2분 정도 가면 낙산리 마을이 나온다. 마을에 들어서면 '낙산리3층석
탑'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오는데 그 지시를 따라 동쪽으로 농로(農路)를 따라 1.2km가량 들어가면
논 가운데로 모전석탑 모양의 낙산리3층석탑을 만나게 된다. 탑은 길에서도 훤히 보여 적어도 탑
이 어떻게 생겼는지만 안다면 쉽게 찾는다.

가을수확의 기쁨을 뒤로 하며 오로지 다시금 봄을 잉태한 낙산리 마을은 가끔 들락날락거리는 수
레들 소리 외에는 조용하기 그지없으며, 낙산리고분군에 묻힌 지배층의 경제기반이었을 낙산리 평
야는 한참 겨울 휴식을 즐긴다. 땅도 좀 쉬어가면서 지기(地氣)를 보충해야 봄에 씨앗을 뿌리며
경작을 할 수 있다.
논 한가운데로 부처를 상징하는 탑이 있으니, 분명 이곳에는 절이 있었을 것이나 절과 관련된 유
적이나 기록은 전혀 없는 실정이다. 다만 부근 경작지에서 기와조각과 토기가 발견되어 절이 있긴
있었음을 알려줄 따름이다.

이 탑은 신라후기에 세워진 모전석탑(模塼石塔) 계열의 탑이다. 높이는 7.2m에 이르며, 앞에서 보
면 정말 거대하다. 2중의 기단 위에 탑신(塔身)을 세웠으며. 1층 탑신에는 돌문을 갖춘 조그만 감
실(龕室)이 있는데, 안을 들여다보니 텅 비었다. 탑의 꼭대기인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만
있을 뿐, 그 위에 것은 없어졌다.

선산은 신라에서 가장 먼저 불교가 전래된 곳이
라 특이한 모습의 탑을 몇 개 볼 수 있는데, 선
산읍 부근 죽장리5층석탑의 축소판을 보듯 그와
많이도 닮았다.
장중한 아름다움이 깃들여진 석탑으로 그 맵시
가 고와 탑을 등지고 떠날 때도 자꾸 뒤를 돌아
보며 작별을 고했을 정도다.

▲ 탑의 정면

▲ 1층 탑신의 텅빈 감실

▲ 탑의 동쪽면

▲ 봄을 기다리며 한참 힘을 비축중인
낙산리 평야


이렇게 하여 구미 낙산리에 서린 3가지의 보물을 모두 둘러보았다.가까이에 일선리문화재마을이
자리해 있어 낙산리의 보물과 함께 겯드려 본다면 정말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라 확신하며 여
기서 본글을 마무리짓는다.

※ 낙산리3층석탑 찾아가기 (2009년 2월 기준)
* 대중교통은 앞에 낙산리고분군 참조, 낙산리 정류장에서 도보 15분
* 승용차 이용시
① 구미 → 황상동 → 옥계동 → 괴곡3거리 → 해평 → 낙산리 → 낙산리3층석탑
② 중부내륙고속도로 → 선산나들목 → 선산읍 → 생곡리 → 일선교를 건너 낙산리 방면 옛 25번
국도 → 낙산리 → 낙산리3층석탑
* 탑 앞에 차를 세울 수 있는 적당간 공간이 있다.
* 소재지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8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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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일 - 2009년 2월 1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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