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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예천 ~ 함창 역사기행 ~~'

용화사 약사전(증촌리 석불좌상/석불입상)
▲ 용화사 약사전에 둥지를 튼 오랜 석불들(증촌리 석불좌상과 입상)


♣ 세련된 모습의 고려 초기 석탑 ~ 개심사터 5층석탑(開心寺址 五層石塔)
보물 53호

▲▼ 옛 개심사터를 홀로 지키고 선 5층석탑
개심사지 5층석탑


예천읍 남본3거리 부근 논 가운데에 단아한 맵시의 5층석탑이 서 있다. 이 탑은 고려 초기에
세워진 개심사의 유일한 흔적으로 윗층 기단에는 감사하게도 탑과 관련된 내용<석탑기(石塔
記)>이 새겨져 있어 탑의신상명세를 소상히 알려준다. 물론 글씨들이 다소 훼손되어 맨눈으
로는 무슨글씨인지 분간하기는 어렵다.

석탑기에 따르면 이 탑은 1010년(고려 현종 1년)에 세워졌으며 이곳에 개심사가 있었음을말
해준다. 또한 고려 정종(定宗, 재위 945 ~ 949)이 거란과의 맞짱을 대비하기 위해 조직한 광
군(光軍)의 대한 내용이 짧막하게 새겨져 있다고 한다.


▲ 팔부중상과 12지신상이 새겨진 5층석탑의 기단부

고려 초기에 세워진 탑답게 2중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땅바닥에
접한 아래층 기단에는 몸통은 사람, 머리는 동물인 지신상(支神像)을 1면에 3개씩 모두 12개,
즉 12지신상을 새겼다.
윗층 기단에는 불법을 지키는 8명의 신, 팔부중상(八部衆像)이 자리해 있다. 1쪽 면에 2명씩
8명을 맞추었으며 이들은 불법 대신 이 탑을 지켜준다. 개심사는 오래 전에 녹아 없어졌지만
이 탑은 그들의 가호로 이렇게 온전하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없다. 예전에 얼핏 들으
니 그들은 탑이 심어진 1,000년 전 이 땅을 지키던 고려 군사의 모습이라고 한다. (고려 군인
을 모델로 팔부중상을 새긴 것으로 보임)


▲ 1층 탑신에는 문고리를 사이에 두고 2명의 인왕상(仁王像)이 자리해 있다.
그 아래로 연꽃 무늬가 새겨진 괴임돌이 보인다.


윗층 기단과 1층 탑신 사이로 탑신을 떠받들기 위해 연꽃무늬의 괴임돌을 두었는데, 이는 고
려 탑의 특징이다.1층 탑신의 남쪽에는 문고리와 인왕상을 새겼는데, 저 문고리는 무엇을 의
미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혹 열쇠가 있어 저 문고리를 열 수만 있다면 탑 안에 안치된 보물
과 개심사의 정체를 밝혀줄 무엇인가가 나오지는 않을까? 우리집 열쇠라도 들이밀며 저 문고
리를 풀어보고 싶다.

탑의 높이는 4.33m, 기단 폭이 2.15m로 체감률이 안정되어 좋은 비례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탑으로 예천에 왔다면 꼭 보고 가야하는 예천 고을의 소중한 보물이다.

※ 개심사터 5층석탑 찾아가기
(2009년 5월 기준)
* 탑이 남본3거리 길가 북쪽(읍내 방향)에 있
어 탑이 어떻게 생겼는지만 안다면 찾기는 식
은 밥 먹기보다 더 쉽다.
* 동서울터미널에서 예천행 직행버스가 1~2시
간 간격으로 1일 11회 떠난다.
* 예천터미널에서 4차선 길(영주 방면)을 따
라 한천(漢川)을 건너 15분 정도 걸으면남본
3거리에 이른다.
* 대구북부정류장에서 예천행 직행버스(보통
1시간 간격)를 타고 예천터미널 전인 남본3거
리(보통 3거리라고 부름)에서 내리면 바로 탑
앞이다.
* 영주, 안동에서 예천행 직행버스를 타고 3
거리(남본3거리) 하차.
* 상주, 김천에서 예천 경유 영주, 안동행 직
행버스를 타고 예천터미널 다음인 3거리에서
하차.

* 승용차편
① 중앙고속도로 → 영주나들목 → 28번국도를 따라 예천 방향 → 남본3거리
② 중부내륙고속도로 → 점촌함창나들목 → 점촌 → 28번국도를 따라 영주 방향 → 예천터미
널 → 남본3거리
♠ 소재지 - 경상북도예천군예천읍 남본리 200


예천읍내에서 상주 방면(서쪽)으로 차로 30분 정도 달리면 고령가야국의 옛 도읍, 함창읍
(咸昌邑)이 나온다.함창은 상주시(尙州市)에 속한 작은 읍으로 이곳에는 2곳의 소중한 명
소가 깃들여 있으니
바로 전 고령가야왕릉(傳 古寧伽倻王陵)과 읍내 서쪽에 있는 용화사(
龍華寺)이다.

함창터미널에서 남쪽으로 5분 정도 가면 용화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그 안내에 따
라 골목으로 들어서면 멀지 않아 읍내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넓게 펼쳐진 함창평야가 절을
찾은 나그네를 맞이한다.

경북선(慶北線) 철길을 건너면 용화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또 나오는데 그 표시에 따라 북
쪽으로 가면 연꽃들의 보금자리인 연지(蓮池)가 나온다. 여름이나 가을(9~10월)에 왔더라
면 연꽃의 화려한 향연을 즐길 수 있으련만,겨울의 제국 치하라 연꽃은 이미 사라진지 오
래고, 축 늘어진 연잎들만이 아래로 떨어지려는 고개를 간신히 붙들고 있을 뿐이다. 내년
봄을 꿈꾸며 인고의 세월을 감내중인 연꽃들의 공간을 지나치면 대가집 대문처럼 생긴 용
화사 정문이 나온다. 다른 절과 달리 일주문(一柱門)이 없으며 함창평야가 펼쳐진 평지에
자리하여 깊은 산중에 파묻힌 상당수의 절과는 새삼 다른 분위기다.절에 왔다기보다는 개
인 한옥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다.


♣ 함창평야를 바라보고 있는 절집, 보물급 석불 2기를 품은 ~
상주 용화사(龍華寺)

▲ 용화사 3층석탑과 약사전(藥師殿)


함창읍내 서쪽에 자리한 용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김천 직지사(直指寺)의 말
사(末寺)로 비구니 사찰이다. 이곳에는 676년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하는 상안사(
詳安寺)가 있었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으며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다
만 경내에 신라 후기 석불 2점과 고려 초기 석탑 등이 남아있는 것으로 봐서 최소 고려 중기까
지 법등을 유지하다가 망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오랫동안 절터만 남아 전하던 것을 1954년
지금의 용화사를 세워 옛 상안사의 유지를 잇고 있다.

당우(堂宇)로는 법당인 약사전을 비롯하여 요사(寮舍) 등 3~4채 정도에 불과한 상당히 작은 절
로 산이 아닌 마을 한복판 평지에서 함창평야를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약사전에 모셔진 보물로 지정된 신라 후기 석불 2점이 있는데, 옛 상안사
의 유물로 여겨지며 2001년에 복원된 고려시대 3층석탑과 불상의 광배(光背), 석탑의 옛 부재
(部材) 등이 아련히 전하고 있다. 특히 약사전의 석불은 동네 사람들에게 미륵불(彌勒佛)로 통
하며 오랫동안 지성으로 받들고 있다.


▲ 용화사로 들어서는 정문

절의 일주문 및 천왕문 역할을 하는 대문을 들어서면 사방이 담장으로 둘러싸인 조그만용화사
경내가 펼쳐진다. 절로 들어서는 문은 저거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동쪽으로 수레가 들어가는
문(여닫는 형태가 아닌 뻥 뚫려있는 문)이 있으며, 왼쪽에도 뻥 뚫려있는 조그만 문이 베풀어
져 있어 닫힌공간이 아닌 열린 공간의 절이다.

석탑을 보고 있으려니 지나가던 비구니가 약간의 경계심을 품으며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그래
서 답을 주니 그제서야 웃음을 띄고는 잘 둘러보라고 그런다.


▲ 용화사 약사전(藥師殿)

약사전은 용화사의 법당(法堂)으로 신라 후기에 조성된 석불좌상과 석불입상의 보금자리이다.
그중 석불좌상은 왼손에 약합(藥盒)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藥師如來)라 법당의 이름을 약사전이
라 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남향을 하고 있는데, 안에 모셔진 석불과 관
음보살은건물의 방향과 달리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 약사전 북쪽 벽을 장식한 칠성탱화(왼쪽)와 신중탱화(오른쪽)

◀ 용화사 증촌리석불입상 - 보물 118호

광배(光背)를 갖춘 신라 후기 불상으로 하나
의 돌에 불상과 광배를 표현했다. 키는 1.98
m의 왜소한 모습으로 무릎 아래 부분은 오래
전에 없어진 상태라 원래 높이는 대략 3m 정
도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왼손은 가슴 앞에 대고 오른손은 배꼽 부분에
놓고 있는데 무슨 수인(手印)인지는 모르겠다
. 옷의 주름선은 선명하나 얼굴 부분은 조금
마멸되었으며 머리 위로 육계가 솟아있다.

1,0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불상의 외모도
많이 늙고 쇠퇴했지만 신라시대 작품임을 느
끼기에 별로 부족함은 없다.

◀ 용화사 증촌리석불좌상 - 보물 120호
8각의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앉은 신라 후
기 불상으로 몸통과 목이 절단되어 있던것을
시멘트로 붙여 놓았다.
석불이 바라보는 기준으로 왼쪽에 자리한왜
소한 석불입상에 비해 당당한 체격으로딱 벌
어진 어깨와 가슴은 보기만 해도 듬직하고 믿
음직스럽다.

왼쪽 석불과 달리 육계는 없으며 머리스타일
은 소발(素髮)이다.얼굴 부분은 둥근 널쩍하
며 조용히 명상에 임하는 모습이다.

왼손에는 약합(藥盒)을 들고 있어 그가 약사
여래임을 알 수 있으며 몸통 뒤에 광배를 꽂
았던 구멍이 있으나 광배는 오래 전에떨어져
나간 상태이다.
(3층석탑 곁에 누워있는 조각
난 광배가 이 불상의 광배일지도 모르겠다)

앙련(仰蓮)으로 가득한 8각 연화대좌는 8세기
에 많이 나타나는 대좌이다.

◀ 유리 안에 모셔진 금동관음보살좌상
인자함이 배어난 표정의 금동불로 화려한 보
관(寶冠)과 목걸이 등을 갖춘 것으로 보아 그
가 관음보살(觀音菩薩)임을 알 수 있다.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왼쪽에 한참이나 선배
인 불상들보다 크기가 작아 도난을 우려하여
특별히 유리막을 씌웠다.


▲ 용화사 3층석탑

약사전 앞에 세워진 3층석탑으로 용화사는 1금당 1탑 형식의 가람배치를 취하고 있다. 이 탑은
고려 초기(혹은 신라 후기) 것으로 오래 전에 파괴되어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것을 2001년에
수습하여 복원하였다. 없는 부분은 새로 만들어 보충했으며 상층 기단부에는 팔부중상(八部衆
像)을 새겨 탑의 외형을 꾸몄다.


▲ 처참하게 동강난 광배(光背)
3층석탑 옆에는 깨진 광배와 석탑의 부재 등이 어지럽게 놓여져 옛날을 그리워한다.

곱게 꽃무늬가 입혀진 저 광배는 증촌리석불좌상이 등에 지던 광배였을지도 모르겠다.

◀ 용화사 요사채
일반 민가와 같은 모습으로 용화사 비구니들
의 생활공간이다.


▲ 용화사를 지키는 견공(犬公)
용화사 신도와 동네 사람들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으며 오늘도 절을 지키느라 여념이 없다.
매서운 모습이 아닌 귀여운 자태라 절을 침범한 악의 기운도 그 귀여움에 반해 스스로
길을 돌릴 것이다.


※ 용화사 찾아가기 (2009년 5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함창행 직행버스가 1일 10회 떠난다.
* 상주터미널과 점촌터미널에서 함창까지 시내버스와 직행버스가 수시 운행
* 함창터미널에서 상주 방면으로 걸어서 12분 거리 (절 입구에 이정표 있음)
* 승용차편 (주차는 앞뜰에 잠시 세워두면 된다)
① 중부내륙고속도로 → 점촌함창나들목 → 함창읍 → 용화사
② 중부내륙도속도로 → 북상주나들목 → 함창읍 → 용화사
♠ 소재지 -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증촌리 258-3 (☎
054-541-3551)


♠ 옛 고령가야국 시조의 능으로 막막하게 전해오는 거대한 옛 무덤
전 고령가야왕릉(傳 古寧伽倻王陵) - 경남 지방기념물 26호


▲ 전 고령가야왕릉(고령가야 태조왕릉)

▲ 전 고령가야왕비릉(고령가야 태조왕비릉)


함창읍내 남쪽 증촌리에는 고령가야국의 시조능(始祖陵)이라 막연하게 전해오는 커다란 고분 2
기가 있다. 하나는 고령가야국 시조의 능(태조왕릉), 동쪽으로 200m 떨어진 다른 하나는 그의
부인묘로 전해오는 태조왕비능이다. 함창김씨 문중은 이름도 모르는 고령가야국 시조를 자신의
시조로 삼으며 이 무덤을 시조의 능으로 받들어 거의 성역화까지 시킨 상태이다. 하지만 과연
그들의 무덤인지 이를 입증할 어떠한 기록이나 유물이 전혀 없어 확인할 길이 없다. 그래서 무
덤의 이름 앞에 전(傳)을 붙인 것이다.
<다만 함창읍지(咸昌邑誌)와 함창김씨족보(族譜)에 고령가야 시조에 대해 간략히 언급되어 있
으나 정확성이 많이 떨어짐~~>


▲ 숭선전(崇善殿)과 안향각(安香閣)
숭선전은 고령가야국 시조의 신위를 모신
곳이며 안향각은 제사에 쓰일 향과 축문
(祝文)을 보관하는 건물이다.

▲ 전사청(典祀廳)
춘추대제에 쓰일 제사음식을 만들거나
보관하던 곳이다.

그 기록에 따르면 능의 주인은 42년 3월 15일, 김
해 구지봉(龜旨峯)에서 김수로(金首露)와 함께 알
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즉 김수로와 한 형제가 된
다.

김수로가 김해지역 9간(九干)의 추대로 왕위에오
르자, 왕릉의 주인은 홀연히 함창 지역으로 올라와
고령가야(古寧伽倻)를 세웠다고 한다.

<고령가야의 위치에 대해서는 함창 외에도 경남진
주(晋州)도 거론되었으나 요즘은 함창으로 완전히
굳어진 듯 하다>
그는 무려 115년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며 태조왕
(太祖王)이라 불린다. 그 다음 2대 마종왕(摩宗王)
은 156년에 즉위하여 65년간 나라를 통치했으며, 3
대 이현왕(利賢王)은 220년에 즉위하여 35년간 재
위에 있었다고 한다.

신라 12대 군주 첨해왕(沾解王, 재위 247~261)은
경북 북부지역으로영토를 확장하면서 상주(尙州)
에 있던 사벌국(沙伐國)과 고령가야를 정벌했다.
나라를 잃은 고령가야 사람들은 상당수 금관가야(
金官伽倻)를 비롯한 다른 가야 연맹으로 넘어갔다
고 하며 일부는 백제로 망명했다고 한다.(일부는
끝까지 남아 신라와 싸웠다고 함)

다른 설에는 신라 벌휴왕(伐休王) 2년(185년)에망
했다고도 하는데, 상주 지역에 있던 사벌국이 249
년에 망했으므로 그 이후인 254년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신라가 고령가야로 가려면 반드시 사
벌국을 거쳐야 되기 때문이다.

고령가야의 영역은 함창읍을 중심으로 남쪽으로공
검면, 북쪽으로 문경시의 가은, 농암까지며남북으
로 약 20km,
동서로 약 10㎞, 전체 면적은약 720
㎢ 남짓의 아주 조그만 나라였다.


▲ 왕릉 입구에 서 있는 홍살문

가야 연맹은 주로 경남지역과 경북 남부(성주 지역
)에 걸쳐있는데 반해 고령가야는 너무 북쪽으로 멀
리 떨어져 있다.
(성주에 있던 성산가야에서도 북
쪽으로 80km나 더 올라가야 된다)

가야 연맹의 중심인 금관가야(김해)와 대가야(고령
)와도 이토록 멀리 떨어져 있으니 가야 연맹의주
요 세력까지는 되지 못했던 것 같다.또한 고령가
야란 이름은 정작 가야 때는 없었고
후기 신라시대
에 생겨난 이름이라고 한다.


▲ 고령가야왕릉으로 들어서는 문

고령가야의 흔적들로는 전 고령가야왕릉 외에도남산고성(함창읍 신흥리의 오봉산 자락에 자리
한 옛성으로 고령가야국의 왕궁이 있었다고함)
과 공검지
<恭儉池, - 삼한시대에 조성된 오래된
저수지로 고령가야국의 옥토인 함창평야를 늘 적혀주었다>
등이 있으며 그 외에 함창읍 일대에
고령가야의 옛 흔적들이 널려 있으나 아직까지이렇다 할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오랜 세월 지역 사람들을 중심으로 막연히 고령가야왕릉으로 전해오던 이곳은 1592년 경상도관
찰사(慶尙道觀察使) 김수(金睡, 1537∼1615)와 함창현감(咸昌縣監) 이국필(李國弼)이 무덤앞에
묻혀 있던 묘비를 발견하여 가야왕릉임을 확인했다고 전하며 1712년 숙종(肅宗)의 어명에 따라
묘비와 석양(石羊) 등의 석물(石物)을 세웠다.


▲ 고령가야국 사적비(史蹟碑)

왕릉 아래로 시조에게 제향를 올리고, 준비하는
숭선전(崇善殿)과 안향각(安香閣) 등의건물이
있으며
제향(祭享)은 매년 10월 1일과3월 15일
에 지낸다.

태조왕릉 동쪽으로 200m가량 떨어진 소나무로우
거진 언덕에는 고령가야왕의 부인 능이라 전해오
는태조왕비능(太祖王妃陵)이 있다.


▲ 고령가야왕릉(태조왕릉)

석축 위에 솟아난 커다란 봉분 앞에 상석(床石)과 묘비가 마련되어 있고, 그 주변으로 장명등(
長明燈)1기와 문인석(文人石) 1쌍, 석양(石羊) 2쌍이 넓은 묘역을 지키고 있다.가까이서 접한
왕릉의 봉분(封墳)은 높이가 거의 3m, 둘레는 40m에 이를 정도로 거대하다.


▲ 고령가야왕릉(태조왕릉) 옆에서 바라본 능역(陵域)

▲ 고령가야 태조왕비능

태조능에서 왕비능까지는 대략 200m 거리로 시골의 정취가 서린 마을 길을 따라 쭉 걸으면 왕
비능 앞 홍살문에 다다른다.
왕비능은 태조능보다 규모는 다소 작으나 구조는 비슷하다. 비석과 상석, 장명등과 문인석 1쌍,
양석 2쌍 등이 무덤 주변을 지킨다.

※ 전 고령가야왕릉 찾아가기 (2009년 5월 기준)

* 대중교통은 앞의 용화사 참조
* 승용차편
① 중부내륙고속도로 → 점촌함창나들목 → 함창읍 → 전고령가야왕릉
② 중부내륙도속도로 → 북상주나들목 → 함창읍 → 전고령가야왕릉
* 주차는 능 주변 골목길에 잠시 세워두면 된다.
* 왕릉 관람시간은 보통 9시부터 17시까지이며, 그 이전과 이후에는 담장 너머로 봐야된다.
(담장 너머로 봐도 보일 것은 다 보인다. 관람에 별 지장은 없음)
♠ 소재지 - 경상북도상주시 함창읍 증촌리(회천리) 7외 3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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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09년 4월 2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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