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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양예술공원 주변 문화명소들 (안양사 / 석수동 마애종 / 석수동 석실고분) '

삼성산은 관악산 서쪽에 솟아난 높이 480m의 산으로 서울 관악구와 금천구, 경기도 안양시에
넓게 걸쳐 있다.삼성산이란 이름은 원효대사와 의상(義湘), 윤필(尹弼, 의상대사의 동생이
라고 함) 3명의 고승이 막(幕)을 치고 머물렀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다른 설로는
고려 말 불교계를 이끌었던 나옹대사(懶翁大師)와 지공, 무학(無學) 3명의 고승이 삼막사에
머무른 데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삼성산에는 삼막사(三幕寺)와 안양사, 염불암,
성주암 등 수많은 절과 풍부한 불교문화유산이 아낌없이 서려 산 전체가 거대한 불국토(佛國
土)를 연상시킨다.

삼성산 서남쪽에 길게 누운 안양예술공원(安養藝術公園)은 안양시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명
소로예전의 안양유원지이다. 서울근교 유원지 중 가장 오래된 곳으로 무려 60여 년의 긴 역
사를 지녔다. 1950년대에 이미 수영장이 문을 열었을 정도로 수도권 최대의 행락지로 번영을
누렸으나 1990년대 이후 서서히 망해가던 것을 2005년 유원지에서 예술공원으로 이름을 바꾸
면서 문화공간으로 새롭게 변신하고 있다.

관악산과 삼성산에서 발원한 삼성천을 따라 펼쳐진 안양예술공원은 서울농대실습림까지 길게
펼쳐져 있으며 유원지가 갖추고 있을 시설과 다양한 먹거리의 주막들로 예전 유원지의 역할
과 성격은 녹슬지 않았다. 또한 예로부터 안양포도의 산지로 유명하여 여름에는 포도의 향기
가 공원 일대에 가득 진동한다. 삼성산과 관악산 배후에 자리하여 휴일에는 등산객들로 홍수
를 이루며계곡이 좋고 볼거리가 푸짐하여 나들이객과 답사/사진쟁이들이 줄지어 몰려온다.

안양예술공원 입구에서 늦가을에 잠긴 공원길을 400m가량 들어서면 삼성천 위에 자리한 공원
주차장이 나오고 안양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중생을 맞는다. 인파가 붐비는 공원길과 달리 안
양사 길은 공원의 뒤쪽 부분으로 가끔씩 스치는 바람의 소리 외에는 한적하기만 하다.


▲ 안양사 가는 길

이정표의 안내로 나무가 무성한 길을10분 정도 걸으
면 안양사를 알리는 표석이마중한다. 예전에는 저런
게 없었는데 그새 땅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무럭무럭
자라난 모양이다.

미술품을 보듯 기품이 넘치는 안양사 표석을 지나면
버려진 집 1채와 다소 볼품이 떨어지는 연못이 옥의
티처럼 놓여져 있다. 그런 연못을 지나 계단을 오르
면 비로소 안양사 경내(남쪽 구역)에 다다른다.

안양사는 명부전이 있는 남쪽과 대웅전이 있는 북쪽
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가람(伽藍)이 허벌
나게 큰 것도 아니다
그럼 여기서 잠시 안양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삼성산 남쪽에 안긴 오랜 산사, 안양시(安養市)의 지명 유래가 된
삼성산 안양사(安養寺)

절의 이름인 안양(安養)은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정토(極樂淨土)를 말한다. 그곳은 이 세상에서
서쪽으로 10만 억 불토(佛土)를 지나야 나온다는 이상의 세계로 안양세계(安養世界), 안양정토(
安養淨土)라고도 한다. 안양사에서 지명이 유래된 인구 60만의 안양시는 그야말로 '극락정토의
도시'란 좋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안양사는 태고종(太古宗) 소속의 비구니 사찰로 절의 규모와 인지도는 삼막사보다 많이 떨어진
다. 허나 작고 아담한 산사의 모습을 여실히 지니고 있어 정감이 많이 가며, 삼막사 못지 않은
오랜 내력을 자랑한다.


▲ 선방 겸 요사로 쓰이는 심검당(尋劍堂)


▲ 미륵불 좌측에 자리한 산신각(山神閣)


절의창건 시기는 후삼국시대라고 전한다. 신라 효공왕(孝恭王) 3년(900년) 태조 왕건이 남쪽을
공격하러 지금의 안양을 지나다가 삼성산 꼭대기에 오색구름이 채색을 이루며떠있는 것을 이상
히 여겨 산을 살펴보니 구름 밑에서 능정(能淨)이란 승려를 만났다. 그와 이야기를 나눈 왕건은
서로 뜻이 통하여 그를 만난 곳에 절을 세웠는데 그것이 안양사의 시초라고 한다.하지만 900년
이면 송악(松嶽, 개성)에 둥지를 튼 왕건(王建)의 왕씨 세력은 송악 일대에 한정될 정도로 그
세력이 왜소했고, 황해도의 여러 지방세력과 더불어 강원도를 장악하여 서쪽으로 향하는 궁예(
弓裔)와 맞짱을 뜰 것인가? 항복할 것인가를 두고 몹시 고심하던 시기였다. 상황이 이러니 왕건
이 군사를 일으켜 남쪽을 칠만한 여유는 없다고 봐야 된다.

이처럼 절의 창건 설화에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이름을 내세운 건 역시나 절의 내력을 윤색시키
기 위함이다.하지만 다른 절과 달리 원효나 도선(道詵) 등의 유명 승려의 이름을 팔아먹지 않
고 고려를 세운 제왕을 내세운것을 보면 아마도 창건 시절부터 고려 정부와 깊은 인연이 있던
것으로 보이며, 고려 정부의 지원으로 능정이 절을 개창한 것으로 여겨진다.


▲ 안양사 대웅전(大雄殿)


▲ 안양사 천불전(千佛殿)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는 고려 우왕 7년(1381년) 왕실에서 향을 하사했으며, 고
려의 마지막 보루인 최영(崔瑩) 장군이 고려 초에 만들어진 기와가 얹혀진 7층전탑(塼塔)을 중
수하고 승려 1,000명이 불사(佛事)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어 안양사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가늠케
한다. 조선으로 들어와서도 조선 정부와 여러 문인들과의 인연이 상당하여 태종 11년(1411년),
태종(太宗)이 충청도 온양(溫陽)으로 온천욕을 가던 중, 이곳에 잠시 들리기도 했으며, 안양사
와 관련된 여러 수의 시가 전해오고 있다. 지금의 불전은 근래에 지어진 것이며 대웅전, 명부전
, 산신각, 천불전 등 약 6~7동의 당우(堂宇)가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인 귀부(龜趺)와 비지정문화재인고려시대 부도가 있으며, 대웅
전 뒤로는 안양사의 명물이자 안양에서 가장 큰 불상인 미륵불이 서 있다.


♠ 안양사 둘러보기 (남쪽 구역)


▲ 안양사 경내 (남쪽 구역)

남쪽 구역에는 종무소로 쓰이는 하늘색 기와 건물과 기묘한 자세로 또아리를 튼 소나무, 그리고
소나무를 빛가리개로 삼은 명부전이 있으며, 주차장으로 쓰이는 넓은 앞뜰이 펼쳐져 있다. 삼성
산 남쪽 자락에 포근히 안긴 산사답게 인적은 별로 없고 조용하다. 새들의 합창소리와 낙엽이
사뿐히 내려앉는 소리, 산이 불어주는 산바람 소리만이 나그네의 귀를 기분 좋게 간지럽힐 따름
이다.

앞뜰에는 중생들의 목마름을 해소해주는 둥그런 석조가 있다. 여기까지 쉬지 않고 걸어온 우리
는 물을 두 바가지 정도 마시고 나서야 비로소 발길이떨어진다. 그 부근에는 겨울잠을 준비하
는 연꽃의 보금자리가 있는데,돌로 만든 여러 모양의 통에 물을 담아서 거기에 연꽃을 베풀어
놓았다. 허무하고 짧기만 한그들의 전성기도 그 막을 내리고 축 처진 연꽃잎만이 그 자리를 지
키고 있을 따름이다.


▲ 명부전(冥府殿)과 소나무

남쪽 구역의 유일한 불전(요사, 종무소 제외)인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을 취
하고 있다. 그 앞에는 기묘한 자태의 소나무가 명부전의 현판과 지붕 부분을 싹 가려주고 있는
데 부처에 대한 일편단심의 마음일까?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건물 쪽으로 몸을 숙여 그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는 듯 하다. 소나무 그늘에는 안양사의 내력이 적힌 안내문이 서있으며, 비가 와
도 눈이 와도 소나무가 우산처럼 다 가려주니 자리도 딱 그만이다.


▲ 안양사 북쪽 구역으로 넘어가는 오솔길

명부전을 지나 솔내음이 진동하는 오솔길을 오르면 미륵불과 대웅전이 있는 안양사의 북쪽구역
이 나온다. 경내가 숲을 경계로 둘로 나눠진 점이 이곳의 큰 특징이다.


♠ 안양사 둘러보기 (북쪽 구역)


▲ 심검당 앞에 호랑이상

안양사의 알맹이라 할 수 있는 북쪽 구역에 이르면 선
방으로 쓰이는 심검당 앞에 날카로운 두 이빨을 내세운
호랑이상을 만나게 된다. 이 호랑이는 심검당 모서리에
있는 조그만 두꺼비상과 함께 부정한 기운을 막고절의
안녕을 위한 것으로 절을 찾은 중생들을 검문한다.
허나 호랑이의 모습이 고양이처럼 귀여워 자신도 모르
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게 될지도 모른다.호랭이의 용
맹함은 날카로운 이와 계속 응시하는 듯한 눈빛을 제외
하고는 그리 보이지가 않는다.
불장난을 좋아하는 화마(火魔)와 그외 다양한 악귀들도
그의귀여움에 넋이 나가 자신의 본분을 잊고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호랑이의 검문을 거치고 심검당을 지나치면 절의 법당
인 대웅전이 나온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취한 대웅전 앞뜰에는 안양사의 오랜 보물 2점이 있는
데, 좌측에는 귀부가, 우측에는 부도(浮屠)가 근800년
의 세월을 뒤로 한 채, 조용히 누워 있으며, 서로 마주
보고 있어 오랜 단짝처럼 보인다.


▲ 잘 다듬어진 수작(秀作), 하지만 정작 중요한 탑신 부분이
사라지고 없는 안양사 부도(浮屠)

안양사 부도는 머리 부분이 팔각으로 되어있는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부도로 고려 때 만들어
졌다. 그의 인생이 그리 순탄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듯, 부도의 알맹이인 탑신(塔身)은 오래 전
에 휩쓸려 사라졌으며, 머리부분과 탑신 아랫부분만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다. 높이는 1.4m로
누구의 부도탑인지는 귀신도 모른다.


▲ 안양사 귀부(龜趺)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93호

부도를 바라보며 넓직하게 앉아있는 귀부는 비석의 일부로 용머리가 받쳐들던 비신(碑身)과 2마
리의 교룡이 여의주를 두고 대치중인 비석의 머릿부분인 이수(螭首)는 무구한 세월의 얄미운 장
난으로 이미 사라져 버린 상태다. 고려 중기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처음부터 안양사에 있
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어떻게 하다보니 이곳으로 흘러들어와 안양사의 오랜 내력을 상징하
는 소중한 보물이 되었다. 아마도 승려의 탑비(塔碑)나 사적비(事蹟碑, 혹 중초사 사적비는 아
닐까?)로 여겨지지만 글씨가 적힌 비신도 없고비석의 정체를 밝혀줄 단서도 없어 그저 답답하
고 가련하기만 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저술한 김부식(金富軾)이 비문을 썼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인할 길은 없다>

귀부의 등에는 등껍데기가 세세히 묘사되어 있으며 비문이 심어져 있던 비좌(碑座)는 치아가 빠
진 모양마냥 무척이나 허전해 보인다. 당장 앞으로 엄금 기어갈 것 같은 용머리(귀부)의 높이는
1m, 길이는 3m, 너비는 2.18m에이르며 머리와 수염, 4개의 발, 등껍데기, 살랑살랑 흔드는 꼬
랑지 등이 섬세히 표현되어 조각 솜씨가 예사롭지가 않다. 귀부 주위로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
석주(石柱) 18개를 심었다.
참고로 조선총독부가 1942년에 제작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수록된 경기도 시흥군(始興郡)
고적유물에 석비귀부(현 안양사 귀부)와 고분(현 석수동 석실고분)의 관한 기록이 있다.

24. <석비귀부(石碑龜趺),석등(石燈)> 동면 안양리(東面 安養里, 현 안양시) 불곡(佛谷, 국유림
) -석비귀부는 길이 10척, 폭 7척, 높이 3척5촌으로 석비는 분쇄되어 파편의 일부만 남아 곁에
넘어져 있으며, 석등 하나와 폐정(廢井) 하나가 있는데 마을사람들은 불곡(佛谷)이라하는 사찰
이 있었다고 하지만 절의 이름 등은 알지 못한다.

35. <고분(古墳)>, 동면 안양리국유림(國有林) - 석수동(石水洞) 동방의 산록 제24호 귀부(龜
趺)의 후방에 석곽(石槨)이 노출된 것 2, 3개가 있다.
(여기에 귀부는 안양사 귀부로 여겨지나 확실치는 않음, 만약 맞다면 귀부의 원위치를 파악하는
데 좋은 단서가 될 것이다)

▲ 안양사 귀부의 옆부분

▲ 꼬랑지가 옆으로 늘어진
안양사 귀부의 뒷부분

경내에서 제일 높은 곳에는 안양사의 명물이자
든든한 후광인거대한 미륵불이 있다. 1976년에
만들어진 안양에서 가장 큰 불상으로 높이가 거
의 20m에 이른다.

온몸이 하얀 피부로 이루어진 백불(白佛)로머
리에는 면류관(冕旒冠)과 비슷한 보관(寶冠)을
쓰고 오른손으로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제스처
를 취했으며,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높다랗
게 서서 남쪽(안양시내)을 굽어 본다.

석불 양쪽으로 계단을 만들어서 불상 주변을돌
면서 예불을 할 수 있게 배려했으며, 그앞으로
넓게 기도처를 마련했다.

◀▼ 안양사 미륵불

석불을 바로 아래서 올려다보니 고개가 아파서
뚝 떨어질 것만 같다. 석불의 위용 앞에 위압감
과 초라함에 몰려오면서 나도 모르게 존경과 복
종을 표하고 싶어진다. 우리는 석불 앞에 놓인
기도처에서 정성스레 3배를 올리며 소망을 빌어
본다. 기도를 드리니 소망이 들어진 양,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짐을 느낀다.

나는 저 미륵불에게 해준 것이 전혀 없는데, 나
의 소망만을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 같아서 좀
송구스런 마음이 든다. 허나 그는 우리보다 훨
씬 높고 성스러운 존재이니, 가련한 중생들의
마음을 기꺼이 헤아려주고 보듬어 줄 것이다.

※ 안양사 찾아가기 (2009년 3월 기준)
* 1호선 석수역(2번 출구), 관악역(2번 출구)에서 1, 51, 5530, 5624, 5625, 5626, 5713번 시
내버스를 타고 안양예술공원 입구 하차, 또는 관악역에서 걸어서 28분
* 2호선 구로디지털단지역(1번 출구) 바로 앞에서 51, 5624번 버스를 타거나, 중앙차로 정류장
에서 5625, 5713번 이용
* 안양예술공원 주차장에서 하천(삼성천) 건너로 보면 안양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으며, 공원
입구에서 걸어서 20분
* 승용차로 안양사 명부전까지 접근 가능

*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41 (☎ 031-471-4848)


♠ 우리나라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바위에 새겨진 오래된 종 ~
석수동 마애종(石水洞 磨崖鐘)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92호


안양예술공원 주차장에서 북쪽(삼성천 건너)을 바라보면 기와를 얹힌 문화유적 보호각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바로 그 안에 석수동 마애종이 다이어리에 적힌 옛 추억처럼 소중히 간직되어
있다. 마애종이 새겨진 바위는 사람들이 치성을 드린 흔적들(촛불이나 불에 그을려져 검게 되
버린 바위 부분)이 많은데, 신앙의 대상으로 삼을 만큼 범상치않은 기묘한 자태를 지녔다.

마애종이란 마애불(磨崖佛)처럼 바위에 새겨진 종을 말한다. 허공에 매달린 종을 승려가 치는
장면을 바위에 묘사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달랑 하나 밖에 없는 희귀한 문화유산이다.


▲ 석수동 마애종의 거처

9개의 유두가 달린 2개의 유곽을 드러내 보인 종(아마도 범종일 듯)은 쇠사슬로 단단히 연결되
있으며 범종의 기본 메뉴인 음통, 상대, 유곽, 당좌, 하대(구연대) 등을 갖추고 있다.종 우측
에는 종을 치는 승려의 모습이 자리해 있다.

전체적으로 종이 안정감이 들어 보이며 조각 수법이나 종뉴, 종신의 표현 등으로 볼 때 구체적
인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략 고려 초기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안양사와 지금은 없어진 중초사
(中初寺)가 부근에 있어 그들과 관련된 유물일 수도 있는데, 조선총독부가 1924년에 제작한 '고
적급유물등록대장'에는 '중초사지 마애종'으로 나와있다.

1,000년 가까운 연세에도 마애종의 건강 상태는 양호하며, 승려와 종의 모습을 쉽게살펴볼 수
있다. 무슨 이유로 바위에 이런 것을 새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 유일한 것으로 서울
가까이에서 이렇게 쉽게 접할 수 있다는 것이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아직도 국가지정 보물
이 아닌 지방문화재로 머물러 있다는 것이 다소 아쉽긴 하지만, 그까짓 인위적인 등급이 무슨
대수랴? 비록 보호각 때문에 마애종 앞까지는 다가갈 순 없지만. 종을 향해 귀를 기울이면 종소
리가은은하게 들려올 것만 같다.

※ 석수동 마애종 찾아가기 (2009년 3월 기준)

* 안양예술공원 대중교통은 안양사 참조
* 안양예술공원 입구에서 공원 안쪽으로 9분 정도 걸으면 공원 주차장이 나오는데, 하천 너머로
기와로 된 보호각이 보인다. 바로 거기

* 소재지 - 경기도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산32

마애종과 오랜만에 눈인사를 나누고 오늘의 종점인 석수동 석실고분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 고
분을 알리는 이정표가 지나치리만큼 길 곳곳에서 우리의 길을 밝혀주어 길은헤메진 않았다.
마애종에서 우측길로 들어서면 마을이 나오는데 거기서부터 고분을 알리는 이정표가 시작된다.
처음에는 800m라 되있길래 가볍게 생각하고 농로와 다름없는 조그만 길을 따라 10분 정도 가니
옛 안양장석광업소가 나오고 거기서부터 조촐하게 산길이 펼쳐진다. 슬슬 어둠이 내려앉으려는
산길로 접어들어서도 10분 이상 수목을 헤치고 말라 비틀어진 계곡을 건너니드디어 마애종 출
발 20여 분 만에능선 정상에 터를 잡은 석수동 석실고분에 이른다.
거리는 말이 800m지 실제로는 1km가 넘는 긴 거리였다. 이정표의 농간에 속은 것인가..?하지만
고생 끝에 낙이라고 소정의 목적을 이루었으니 얼마나 신이 나던지~~


♠ 삼성산 서남쪽 능선에 터를 판 옛 무덤 ~ 석수동 석실고분(石室古墳)
-
경기도 지방기념물 126호


삼성산의 서남쪽 능선 300m 고지에 들어앉은 삼국시대 돌무덤이다. 보통 고구려 무덤들은 흙무
덤과 돌무덤(4세기 이후) 중심으로 주로 평지에 널려 있고, 백제의 무덤은 흙무덤 계열로 바깥
은 흙으로, 안은 돌로 돌방(석실)을 만든 구조인데 대체로평지에 조성했다. (능산리와 송산리
고분은 산자락) 신라의 무덤도 흙으로 쌓고 안에 돌방을 갖춘 형태로 평지를 선호하였고, 가야
는 특이하게 산자락이나 산 정상 부분을 선호하였다.

우리가 찾은 석수동 석실고분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오래된 무덤으로 가야의 무덤처럼 능선 정
상부에 자리해 있는데 그렇다고 가야의 무덤은 아니다. 가야의 영역은 경기도까지 이르지도 못
했으니, 아마도 백제나 6세기 이후 신라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허나 어째서 산 능선부에 무덤을
썼는지는 알 길이 없다. 석실까지 갖춘 무덤의 규모를 봐서는 일반 백성의 묘는 아니다. 백성의
묘는 산에는 쓸 수있지만 저렇게까지는 감히 만들지도 못했으며, 안양 지역을 다스리던 토호(
土豪) 등의 지방세력가나 그 일가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무덤은 산의 정상부를 향해 남북으로 축조되어 있는데 오래 전에 말끔히 도굴을 당한상태라 부
장품(副葬品)은 없다. 들리는 소문에는 여기서 금관(金冠)이 나왔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대단한 인물의 무덤임이 틀림없다.

◀ 무덤 내부에 누워있는 길다란 돌 ~
부장품이 놓여 있던 돌 같다.

무덤을 덮은 흙은 장대한 세월과 일확천금을 노린 도굴꾼의 마수 앞에 무참히 벗겨나가 석실은
밖으로 적나라하게 노출된 상태이다. 석실 내부는 길이 3.3m, 폭이 1.4m, 높이가 1.5m로 화강암
을 적당히 다듬고 깎아서 동, 서, 북벽을 면을 맞추어 쌓았고, 남쪽 벽은 대판석 1매로 축조했
다. 3개의 넓다란 화강암 판석(板石)으로 석실을 덮었는데, 가운데 덮개석이 파괴되어 무덤을
세상 밖에 유감없이 드러내 보인다. 무덤의 형태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
으로 남쪽 벽을 이용해 추가로 시신을 안치했던 것으로 보이는 초기 형태이며, 연도(羨道)가 생
기기 이전 형태로 보여진다.
참고로 조선총독부가 1942년에 제작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시흥군(始興郡)
35. <고분>, 동면 안양리국유림(國有林) - 석수동 동방의 산록 제24호 귀부(龜趺)의 후방에 석
곽(石槨)이 노출된 것 2, 3개가 있다.(여기에 귀부는 안양사 귀부로 여겨지나 확실치는 않음)


무덤 내부는 원칙적으로 문화유적 보호 차원에서 들어가면 안되지만, 이미 뚜껑이 열린 상태라
살짝 들어가 볼 수 있다. 하지만 깊이가 1.5m 정도로 깊고 안으로 들어가는 계단이 없어 다리에
무리가 없도록 조심스레 내려가야 된다.
텅 비어있는 석실 내부는 바깥과 달리 따뜻하다. 무덤이라기보단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만든 임
시 거처나 아지트 같은 아늑한 곳이다. 간단한 먹을거리나 주변을 밝힐 손전등이 있다면 조촐하
게 하룻밤 머물러도 손색은 없어 보인다. 물론 다소 외진 곳이고 옛 무덤이라 밤에는 다소 꺼림
칙하기는 하겠지만,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어디론가 숨고 싶을 때, 누군가와 단둘이 조용
히 지내거나 곡차 1잔 걸치고 싶을 때, 염치불구하고 신세를 지고 싶은 그런 곳이다.


▲ 석수동 석실분에서 바라본 천하, 안양시내 ~
멀리 바라보이는 산은 수리산(修理山)이다.


무덤 밖에서 눈 아래로 펼쳐진 안양시내를 바라보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20분 정도 땀을마다
하고 올라왔고 무덤도 살펴봤으니 다리의 불만도 잠재울 겸 잠시 숨 좀 돌려야지. 시내에서 사
온 김밥과 바나나를 말린 과자, 커피 음료를 먹으며 조촐하게 산행 뒷풀이를 즐겨본다.하늘과
보다 가까운 곳에서 먹어서 그런지 맛이 정말 꿀맛이다. 수리산과 삼성산 사이에 둥지를 튼 안
양시내를 바라보니 그곳이 나의 영지(領地)인양 거만한 착각에 마음이 잠시즐거워진다.


▲ 석수동 석실분에서 먹은 김밥과 바나나 과자


햇님은 그만의 공간으로 가고자 슬슬 휘장을 치려 하고 안양시내도 그만큼 흐릿하게 다가온다.
산에서는 평지와 달리 일찍 어둠이 내려오는 터라 서둘러 내려와야 된다. 우리가 무덤을 출발
할 때는 땅꺼미가 상당히 짙은 상태였는데 조심을 거듭하며 다시아비규환의 속세로 내려왔다.

※ 석수동 석실고분 찾아가기 (2009년 3월 기준)
* 안양예술공원 교통편은 앞에 안양사 참조
* 마애종에서 우측길(안양사 반대쪽)로 들어가면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무조건 좌측(오른손
방향)으로가면 석실고분을 알리는 이정표를 만난다. 이정표는 길목마다 포진해 있으므로 찾
는데 별로어려움은 없다. 심지어 무덤 바로 아래까지 이정표가 있을 정도니까 ~~

* 소재지 - 경기도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산2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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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촬영 일시 - 2007년 10월 20일 / 2008년 11월 16일
*작성 시작일 - 2008년 12월 12일
*작성 완료일 - 2008년 12월 13일
* 숙성기간 - 2008년 12월 13일 ~ 2009년 3월 27일
*공개일 - 2009년 3월 27일부터 / 최종수정 2009년 4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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