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자연의 향기가 한데 어우러진 간송미술관

' 문화와 자연이 한데 어우러진 아름다운 박물관,
성북동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

간송미술관 보화각
▲ 간송미술관 보화각


가을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며 천하를 곱게 물들이던 10월이 다가왔다. 10월이 되면 우리의 옛
문화에 목말라하는 많은 문화인들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서울 도심 동북쪽의 성북
동으로 시선을 모은다. 바로 간송미술관 때문이다.1년에 딱 2번, 5월과 10월에 각각 2주 동
안만 문을 여는 그곳은 다양한 테마로 특별전을 여는데 그 특별전에 대한 세인(世人)들의 관
심과 주목은 다른 박물관과 미술관보다 훨씬 지독하며 은근히 중독성도 강하다.한번 발을 들
이면 자신도 모르게 달력을 보며 특별전만을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5월 특별전 이후,다시 5개월 동안 빗장을 걸어잠구며 기나긴 잠수에 들어간 간송미술관은 번
데기를 탈피한 어여쁜 나비처럼 다시금 화려한 10월 특별전을 선보이며, 다시금 세상에 나타
났다. 전국 곳곳의 문화인들은 천릿길도 마다않고 미술관의 문이 활짝 열리기가 무섭게 몰려
들어가 옛 것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한다.

본인 역시 그 미술관의 특별전을 애타게 고대하던 사람이라 특별전 오픈 소식을 접하고 10월
의 마지막 주말에 멀리 남쪽 바닷가에서 올라온 손님들과 그곳을 찾았다.미술관 입구에 이른
우리는 실로 엄청난 광경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벌써부터 관람객들로 기나긴 줄이 형성된
것이다. 미술관은 예나 지금이나 조그만 보화각 건물 하나가 전부인데 반해 관람객은 인해전
술마냥 늘어나 수용능력을수천 배나 초과하여 생긴 현상이다.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줄
은 거의 400m에 이르렀으며, 그 꼬리의 끝은 선잠단(先蠶壇)터 부근에 머물러 있었다. 저 줄
을 어느 세월에 기다리나? 참 눈앞이 캄캄할 따름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그날이 특별전 마
지막 전날이라 다음날은 분명 더 할 것인데, 우리에겐 꿩 대신 닭을 잡을 여유는 없었다. 죽
이 되든 밥이 되든 어여 줄이 줄어들기를 바랄 뿐이다.근 2시간 정도 지났을까? 간신히 붉은
벽돌로 된 미술관 정문에 이르렀다.

이렇게 힘겹게 미술관 경내로 들어서니 그제서야 '조금만 기다리면 되겠구나!~' 싶은 안도의
한숨이 밀려온다. 하지만 길은 아직도 멀었다.정문을 들어서 보화각까지 겨우 100m를 가는데
거의 1시간이나 걸린 것이다. 줄에 동참하여 보화각에 발을 들이기까지 무려 3시간의 시간을
내던져야 했다. 그 정도의 시간이면 고속전철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갈 시간인데 고작 400m가
이렇게나 멀 줄은 꿈에도 몰랐다.


▲ 간송미술관 정문
붉은 벽돌의 정문 기둥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해 보인다. 오른쪽 기둥 명패에는 한자로
'澗松美術館'이라 쓰여 있고, 왼쪽에는 특별전 제목이 쓰인 하얀 종이가 명패마냥 달려 있다.
저 문을 들어서면 수수한 모습의 미술관 내부가 가을 속 동화처럼 펼쳐진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드디어 보화각 정문 앞에 이르렀다.정문에는 미술관 관계자가 일정한
인원이 나가면 그만큼을 들여 보내는 식으로 힘겹게 인원을 통제하고 있었다. 거기서도 10분
정도를 초조하게 대기하다가 마침내 옛 그림의 향기로 그윽한 보화각 내부로 발을 들인다.

보화각(葆華閣)은 1938년에 지어진 하얀색 2층 건물이다. 화려함과 웅장함과는 거리가 먼 작
고 수수한 모습이지만 작은 고추가 맵다는 의미심장한 말이 있듯이 그 안에는 가치를 헤아리
기 조차 어려운 엄청난 보물들이 잠들어 있다. 정문 동쪽에는 1마리의 석사자가 무서운 표정
을 지으며 이곳의 보물을 지킨다.본글에서는 특별전과 거기서 선보인 고서화(古書畵)에 대한
언급은 생략한다. 대신 간송 선생의 일생과 간송미술관의 내력, 뜰에 잠들어 있는 여러 석조
문화유산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선생의 일대기 ~~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던진 대인(大人) 간송 선생, 그는
1906년 부호(富戶)인 정선 전씨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어의동공립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와
휘문고보(현 휘문중고)를 거쳐 왜국 와세다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음에도 그는 30대 이전에 친가족 대부분
-조부모, 친부모, 양부모
<養父母,
송의 종숙부(從叔父)인 전명기(全命基)가 후사가 없어 그의 양자로 들어감>, 친형제-
을 잃었
다. 심지어는 보통학교와 대학 졸업 때 그의 양부(종숙부) 상(喪)과 부친상을 당해상복을 입고
졸업사진을 찍었을 정도였다. 이렇게 양부모와 친부모를 모두 여의면서 그 자손은 오직 간송 하
나뿐이니 자연히 양가의 막대한 재산을상속 받아 일시에 십만 석을 일컫는 조선 최대의 부자가
되었다.


대학교 재학 중, 왜인들에게 무시를 당하며 망국(亡國)의 한을 뼈저리게 느낀 그는 '민족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될까?'
고민에 휩싸이며 여러 선배와 스승을 찾아가자문을 구했다. 그러다가
고보 시절 그의 미술 선생이던 고희동(高羲東)의 권유로 우리나라 문화유산에 관심을갖고 지키
기로 결심한다. 고희동은 그런 제자를 위해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을 소개시켜 주었다. 간송
은 그를 통해 서화와 도자기, 불교 문화유산 등 골동품 관련 식견을 높여갔으며, 위창은 그에게
골동품거간(居間)인 이순황(李淳璜)씨를 추천해주었다.

1930년, 간송은 이순황과 의기투합하여 본격적으로 문화유산 수호 사업에 뛰어든다.그는 한남서
림(翰南書林)을 인수하여 이순황에게 맡기고, 그곳을 교두보로 많은 문화재를 수집했다. 훈민정
음 등의 고서적, 고려청자 등의 자기류, 혜원풍속도(蕙園風俗圖) 등의 옛 그림, 금동여래입상과
금동삼존불감 등의 불상과 석불, 부도 등의석조물 등, 정말 다양한 문화유산을 사들였으며
왜인
들을 상대로 골동품을 팔아먹던 인사동(仁寺洞)을 수시로찾아가상당한 양을 구입했다.특히 왜
인들이 꽤나 군침을 흘리던 문화유산은 미리 선수를 치거나 그 몇 배를 얹혀서구입했으며, 왜국
동경(東京)에 머물던 영국인 변호사 존 갓스비(John Gadsby)가 막대한 고려청자를 소유하고 있다
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를 찾아가 고려청자를 모두 사들였다.
또한 총독부 고위층이 소유한 문화
재를 사들이고자 온고당(溫古堂)의 주인이자 왜인 골동상인 신보기조(新保喜三)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왜의 민족말살정책에 대항하고 우리의 전통문화를 지키고 가꿀 인재를
기르고자1940년 적자에 허덕이던 보성중학교를 인수, 동성학원을 설립하면서 교육 분야에도 아
낌없이 돈을 내놓기 시작한다.

해방 이후에는 고적보존위원회, 문화재보존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했으며 1960년에는 고고미술동인
회를 세워 문화재 연구와 서적 편찬에 동분서주하였다.이렇게 평생에 걸쳐 자신의 재산을 기꺼
히 내던지며 문화재와 교육발전에 헌신하였으나 하늘은그의 업적에 크게 샘이 났는지 야속하리
만큼의 커다란 시련을 내린다.

1950년 2월 정부는 농지개혁법을 시행하면서 소작농에게 농지를 분배하고 지가증권(地價證券)을
발행하여 땅주인에게 땅값을 치러주기로 하였다. 허나 6.25전쟁으로 지가증권은 모조리 휴지조각
이 되면서 앉아서 농지를잃어버린 꼴이 되었으며, 전쟁통에 문화유산을 제외한 기타 유동자산은
거의 모두 분실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전쟁에서 잃어버린 문화재를 다시 거금으로 사들이면서 재
정 압박은 갈수록 커져만 갔으며, 1959년 보성중고교 교장 서원출이 경영 실수로 엄청난 부채가
쌓이자 이를해결하기 위해 동치서주(東馳西走)하였으나, 그만 병을 얻어 쓰러지고 만다. 결국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신우염(腎盂炎)으로 1962년1월26일, 56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뜨
고 말았다.

그가 그렇게이승을 떠난 후, 박정희 정권에서는 그에게 문화포장(文化褒章)과 문화훈장(文化勳
章)을 추서(追敍)했으며, 고고미술 동인회 회원과 그의 후손, 제자, 벗들이 그의 수집품을 정리,
그의 호를 따서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박물관인 간송미술관을 세웠다.

이곳을 둘러보면서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만약 그가 없었다면 미술관 수장고 혹은 전시실에 있는
귀중한 것들 대부분은 일찌감치 타국살이를 하거나 행방불명이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1446년에
반포된 한글의 해설서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우리나라가 아닌 외국을 떠돌고 있다고 생각하면
상상만으로도 치가 떨린다. 우리나라의 문자인 한글 해설서가 말이다.다행히 간송 선생 덕분에
우리들은 우리 땅에서 편안하게 훈민정음 등을 구경하고 연구할수 있게 되었다. 그의 헌신으로
많은 문화유산의 해외 유출을 막을 수 있었으니 이 역시 애국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그가 부자였으니 무량(無量)의 문화재 수집은 마음만 먹으면 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수집한
것을 다른 이에게 비싸게 팔거나 중개인 노릇을 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미술관을 세워 입장료
수입을 챙긴 것도 아니다. 그는 이 땅의 문화유산을 수집하여 지키고, 그런 것을 연구하고 가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사심없이 거액의 재산을 쏟아 부었다. 허나 지출이 수입을 훨씬 초과하여
결국 미술관과 주변 땅을 빼고 모조리 거덜이 났지만 금전적 이윤을 포기한 그의 문화사업은 우
리나라 미술사 연구의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으며 그의 업적과 문화, 사회적 공헌의 가치는 우리
나라 100년 예산보다 더 값지다 할 것이다.

자신들의 배때기만 불리느라 여념이 없는 우리나라의 치졸한 부자들(일부 제외)과 달리 간송은
그 재산을 정말 어디에써야 되는지, 어떻게 써야 가치가 높은지를 알고 있으며, 그것을 몸소실
천한선각자이다. 적어도 사회 지도층(부유층)이라면 간송의 그런 예를 본받고 행동에 옮기는 것
이 진정한 지도층이 아닐까..? 지금 이 땅에 간송과 같은 위인(偉人)이 없는 것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 보화각 남쪽에 서 있는 장명등(長明燈)
누군가의 무덤을 밝혀주었을 장명등, 그러나
이제는 보화각 주변을 밝혀준다.

▲ 무인석(武人石)
어느 사대부(士大夫)의 무덤을 지켰던 그는
간송 선생에 구원으로 지금은 미술관을 지킨다.
두 손으로 칼을 짚고 서 있는 모습이
결코 예사롭지가 않아 보인다.


~~ 간송미술관의 60년 역사 ~~
1934년 간송 선생은 성북동에 1만 평의 땅을 구입하고 문화유산 보관 및 연구를 위한 건물을 하
나 지었다. 이것이 간송미술관의 전신인 북단장
(北壇莊, 옛 선잠단 부근에 있다는 뜻으로 오세창
선생이 지어준 이름)
이다.
왜정(倭政)의 민족말살정책이 갈수록 그 도를 더해가자, 간송은 근대식 박물관을 짓기로 작정하
고 1938년 북단장 옆에 지금의 보화각을 세웠다. 1938년 7월 5일 상량식(上樑式)을 가졌으며 오
세창 선생이 친히 현판을 써주었다. 하지만 왜정의 태클로 대중에게 공개도 되지 못했으며, 해방
이후로도 어수선한 시대가 계속되면서 그의 생전에는 결국 공개되지 못했다. 그가 별세한 후, 그
의 아들인 전성우씨가 부친의 유업을 이어받아 수집한 유물을 정리하여 1966년 한국민족미술연구
소와 간송미술관을 세우면서 비로소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6.25 전쟁 시절, 서울을 점령한 북한은 미술관의 유물을 모조리 북으로 빼돌리려고 했다. 허나
유물정리를담당하던 최순우(崔淳雨) 선생과 손재형(孫在馨) 선생의 기가 막힌 눈속임 작전으로
다행히 북송만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잘 꾸며진 미술관 뜰과 그 뜰에 안식하던 많은 문화재
들은 전쟁통에 쑥대밭이 되었으며 1951년1.4후퇴 때 급히 부산으로 피신가면서 유물 대부분을
챙기지 못해 상당수 분실되고말았다.(분실물 중 대부분은 전쟁 이후 다시 사들이거나 수집함)

1971년 '겸재(謙齋)전'을 시작으로 매년 봄과 가을에 특별전을 열고 있으며, 1990년대 후반까지
는 거의 매일 미술관 관람이 가능했으나, 그 이후 봄, 가을 특별전에 한해 총 4주 정도만공개하
고 있어 상당한 아쉬움을 건넨다.

▲ 날렵한 몸매의 3층석탑
바닥돌 위에 1층의 기단(基壇)을 세우고 그
위에 3층의 탑신(塔身)과 노반, 상륜(相輪)을
갖춘 탑으로 그 역시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다. 고려시대 탑으로 여겨진다.

▲ 보화각 좌측에 자리한 석등(石燈)
비로사나불 옆에 얌전히 서 있는 육중한 덩치의
석등, 무덤 앞에 세우는 장명등(長明燈)과 비슷
하다. 이 석등 역시 어디서 왔는지는 모른다.


※ 간송미술관 찾아가기 (2009년 6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초교에서 하차,
버스에서 내려서 바로 왼쪽으로 100m 정도 가면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5분 정도 가볍게 걸어가는 것도 괜찮다.
* 미술관 내에 주차시설은 없으며 전시기간 중에는 바로 옆에 있는 성북초교 운동장을 임시로 개
방한다. 하지만 가급적 대중교통 이용을 권한다.

★ 간송미술관 관람정보
* 입장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9시 ~ 18시이다. (인원이 많은 경우 관람시간 연장 가능)
* 매년 5월 중/하순과 10월 중/하순에 각각 2주 정도만 한시적으로 공개하며, 공개 1주 전부터
주요 신문과 인터넷 언론에서 앞다투어 정보가 나온다. (미술관 홈페이지는 없음)

*
특별전 기간에는 전시하는 그림, 유물에 대한 도록(圖錄)을 판매한다. 가격은 무려 20,000원
내용이 좀 어려운 경향은 있으나, 그런데로 볼만하며 소장용으로 손색이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97-1 (☎ 02-762-0442)


♠ 보화각 주변 둘러보기


▲ 미술관(보화각)으로 들어서는 조촐한 오솔길 (봄)

보화각으로 가는 길은 가을낙엽으로 가득한 조그만 오솔길이다. 길 양쪽으로 화분과 꽃, 식물들
로 가득하여 마치 분재(盆栽) 시장이나 식물원, 숲 속 산책로에 들어선 기분이다. 여기가 과연
미술관이 맞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그들 사이로 망향(望鄕)의 한을 간직한 석탑과 불
상, 석등, 광배 등이 서로를 의지하며 적절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고, 다른 박물관(미술관)에서는
그 예가 없는 토끼와 닭, 공작 등의 보금자리(사육장)도 자리해 있어 관람객의 눈길을 단단히 잡
아맨다. 이는 다른 박물관에서는 상상조차 품을 수 없는 특이한 전시물(?)로 간송미술관 만이 지
닌 독특한 매력이다.


▲ 간송미술관 만의 매력, 닭과 공작의 보금자리

◀ 3층석탑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호

바닥돌 위에 2중의 기단(基壇)을 얹히고 그 위
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형태로 1층의 탑신
이 2,3층 보다 크다. 지붕돌 받침이 3단으로
이루어져 있어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
다. 탑의 높이는 약 3m로 아주 작은 편이며 기
단부의 상대갑석(上臺甲石)과 하대갑석(下臺甲
石)에 새겨진 연꽃무늬가 마치 활활타오르는 촛
불의 불꽃처럼 아름답기 그지없다.

탑의 고향은 알지 못하며 탑에 관련된 어떠한
정보도 전해 오지를 않는다. 다만 왜인들이 빼
돌리려 한 것을 간송 선생의 구원으로 타국살이
는면하게 되었으나결국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
가지못하고, 기억상실증에 걸린 양 자신의 존
재를망각한 채 미술관 뜰의 장식물이 되었다.

◀ 포근한 인상의 석조비로사나불(石造毘盧舍
那佛)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1호

3층석탑 옆에는 듬직하게 생긴 석불 1구가 높은
대좌(臺座) 위에 앉아 있다. 이 불상은 두 손을
위아래로 잡고 있는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어 비로사나불임을 알 수있는데, 석불의 전
체 높이는 약 3m 정도이다.

그의 머리는 꼽슬인 나발(螺髮)로 머리 꼭대기
에는 상투 비슷하게 육계(肉髻 = 無見頂相)가
두툼하게 솟아 있으며 얼굴은 살이 많아 인심이
후박한 뚱보 아지매 같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에는 연꽃(앙련)이
새겨져 있고, 대좌 아래에는 결가부좌를 한조
그만 석불이 4면에 새겨져 있다, 이들은 결가부
좌(結跏趺坐)를 한 채, 눈을 감으며끝없는 명
상에 잠겨 있는데 그들 뒤로 동그란 두광(頭光)
과 신광(身光)이 눈에 띈다.

불상의 자세한 정보는 알려진 것이 그리없으며 왜인들이 빼돌리려한 것을 간송선생의 구원으
로 이곳에 안착했다.불상의 조성시기는 고려 중기 경으로 평퍼짐한 엉덩이가 인상적인 그의 뒷
모습도 꽤나 풍만스럽다.


▲ 애꾸눈 석불좌상

수풀 사이로 애꾸눈의 석불좌상이 숨어있다. 이 불상은 우견편단(右肩偏袒), 즉 왼쪽 어깨는 옷
으로 가리고 오른쪽어깨는 훤히 드러냈으며 얼굴 부분은 상당히 망가져 있는데. 오른쪽 눈은 파
열되어 거의 애꾸눈처럼되었다.머리부분도 거의 3도 화상을 입은 듯 매우 울퉁불퉁하여 무견정
상(無見頂相 = 육계)과 헤어스타일은 확인하기가 어렵다.
석불의 조성시기는 신라 후기에서 고려시대로 보이며자세한 신상정보는 모른다. 다만 옛 절터에
오랫동안버려져 있다가 간송 선생의 손길로 이곳의 일원이 되었다.


♠ 봄과 가을이 한참이나 머물다 가는 곳 ~
간송미술관 위쪽 뜰

▲ 늦가을이 깃들여진 저 언덕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미술관으로 들어서면 보화각으로 가는 길과 언덕길로 갈라진다. 저 언덕길의 끝에는 간송 일가가
거주하는 주택이 있으며, 길 중간에는 석조팔각부도와 문인석 등이 있다. 관람객들은 팔각부도가
있는 중간 정도만 접근이 가능하며, 보통 때는 관리인이 단단히 지키고 서 있다. 그 이상 들어가
려는 경우 관리인이나 미술관 관계자의 허가를 받아야 되나, 그것도 좀처럼 쉽지가 않다. 관리인
이 없다면 괴산 외사리부도나 간송 일가의 주택 뜰까지 살짝 들어갈 수 있다. (왠만하면 허가를
받고 둘러보기 바람)


▲ 석조팔각부도(石造八角浮屠)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9호

언덕길 가운데 부분 좌측에는 육중한 모습의 8각부도가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바닥돌 위에 기단
(基壇)을 올리고 그 위에탑신을 얹힌 후 머리장식으로 마무리한 형태로 기단 아랫부분에는 연꽃
무늬가 있다. 지붕돌 귀퉁이에 꽃조각이 있으나 몇몇 귀퉁이는 약간깨져 있으니 이는 세월이 무
심히 할퀴고 간 상처이다. 머리 장식은 마치 그릇을 뒤집어 놓은 모습으로, 이 탑의 주인이 누구
이고 어디서 왔는지는 역시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하긴 이곳에 뿌리를 내린 문화재치고 슬픈
사연 없는 존재가 어디 있겠는가..? 탑의 모습으로 보아 후기신라시대 것으로 짐작된다.


▲ 괴산 외사리(槐山 外沙里)에서 온 석조부도(石造浮屠) - 보물 579호

석조팔각부도에서 출입이 통제된 오른쪽으로 난 조그만 길로 30m 정도 가면 잡초 사이로 추녀 귀
퉁이가 아름다운 부도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석조팔각부도에서도 보임) 이 부도는 원래 충북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 절터에 있던 것으로 왜인들이 왜열도로 빼돌리기 위해 인천항에 가져다 둔
것을 간송이 이순황을 급히 보내 거액을주고 수습해 온 것이다. 6.25전쟁으로 무너진 것을 1964
년에 복원하였다. 멋있게 올려진 추녀 귀퉁이에는 아름다운 꽃장식이 깃들여져 있으며, 웅장함과
수려함이 돋보이는 부도로 고려 중기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 탑신은 사라지고 옥개석(屋蓋石)만 남은 2기의 석탑 형제

석조팔각부도와 괴산 외사리 부도 사이에는 조그만 석종형부도와 석탑의 부재(部材), 탑신은 없
고 옥개석만 남은 석탑 등이 수풀 속에 자리해 있다. 사진 오른쪽의 5층석탑은 기단과 1층 탑신
은 그런데로 살아있으나 2~5층 탑신은 장대한 세월의 흐름 속에 휩쓸려 가고 옥개석만 간신히 남
았다. 3층탑으로 보이는 왼쪽의 석탑은 상태가 더욱 좋지가 못해 탑신 자체가 아예 없다. 고려시
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저들 형제도 어떤 기구한 사연으로 인해 이곳에 들어와 뜰의 일부가
되었다.


▲ 홀을 들고 서 있는 문인석(文人石) 1쌍
조선시대 어느 지체 높은 양반의 무덤을 지켰을 문인석. 그들의 머리에는 특이하게도
2개의 혹(뿔)이 솟아나 있는데, 아마도 머리에 씌운 금관이나 익선관(翼善冠) 등이
사라지면서 남은 상처 자욱으로 여겨진다. 그들의 한결같은 표정에는 동자(童子)와
같은 천진난만함이 깃들여져 있는 듯 하다.


♠ 간송미술관 마무리 ~

▲ 언덕길 끝부분에 들어앉은 간송 일가의 주택 (봄)

간송 일가의 집은 정말로 저 푸른 녹지 위에 세워진 그림 같은 별장이다. 집 주변으로 소나무가
운치를 자랑하며 늘어서있으며, 수목들이 울창하여 산내음과 솔내음이 진동을 한다. 집 뜰에는
문경에서 왔다는 5층석탑과 석조불입상, 광배 등 여러 석조문화재가 널려 있으나, 엄연한 개인주
택이라 출입은 통제되어 있다.


▲ 간송 일가 북쪽에 펼쳐진 송림(松林)

간송미술관은 개인 소유의 미술관이고 미술관 주인의 주거지도 있기 때문에 통제구역이 유난히도
많다. 수려한 절경과 석조문화재들이 뿌리를 내린 미술관 구석구석 어느 하나라도 그냥 지나치기
가 아까울 따름이다. 마치 왕릉의 송림처럼 하늘 높이 솟아난 소나무와 그 사이로 곱게 깔린 멋
있는 산책로. 저 길에 나의 두 다리를 꼭 들이고 싶다.


▲ 수풀 속에서 간신히 고개를 내민 광배(光背)
광배에 새겨진 꽃무늬는 마치 살아 숨쉬는 것 같다. 저 광배에 등을 대고
앉았을 석불(石佛)은 어디로 간 것일까? 광배는 혹여 찾아올지도 모르는
주인(석불)을 기다리며 오늘도 화사한 꽃잎을 펼쳐 보인다.

◀ 전(傳) 문경5층석탑(聞慶五層石塔) -
보물 580호

처음으로 들어가 본 간송 일가의 뜰, 그 안에는
균형잡힌 아름다운 몸매의 문경5층석탑이 나를
맞이한다.
이 탑은 원래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하늘
재 고갯길 동쪽)
에 있던 것으로 왜인들이 빼돌
린 것을 간송 선생이 수습한 것이다.
2중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려 놓은 모습
으로 거의 완전한 모습을 지니고 있어 건강상태
는 매우 양호하다. 탑신(塔身)은 1층부터 4층까
지 비슷한 모습이나 유독 5층의 옥개석만이 층
급받침이 많다. 1층의 남쪽 면에는 자물쇠 모양
의 조각을 새겼는데, 문의 표현을 단순화시킨
듯 하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네모난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이 하나의 돌에 새겨져
있는데, 네 귀퉁이마다 꽃조각이 깃들여 있다.

아래층 기단의 뚜렷한 안상조각, 지붕돌 받침이 4단, 3단 등으로 일정치 않아 고려시대 탑임을
짐작케 하며 전체적으로 탑의 비례가 아름답고 안정감이 느껴진다. 탑 앞에는 배례석(拜禮石)이
놓여져 그 격식을 갖추었다.


▲ 미술관을 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관람객들의 줄은 여전히 장사진을 이루었다.

가을이 머무는 별천지 같은 곳, 문 주변으로 알록달록 물들어진 단풍은 1년 뒤
특별전에서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이할 것이다.


♠ 20세기 초반에 지어진 부자 상인의 별장,
성북동 이종석 별장(城北洞 李鍾奭 別莊) - 서울 지방민속자료 10호


간송미술관을 둘러보고 나오니 오후 5시,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은지라 문득 생각나는 곳이 있어
삼청각(三淸閣)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200m 정도 가면 쌍다리 정류장이 나오고 거기서 100m를
더 가면 길 왼쪽으로 덕수교회가 나온다. 교회 안쪽으로 고색(古色)이 짙은 기와집 하나가 고개
를 빼꼼 내밀고 있는데, 그 집이 바로 문득 생각난 곳인 이종석 별장이다.
<2009년 2월부로 이재
준가(家)에서 이종석 별장으로 명칭 변경>

남쪽을 바라보는 이 집은 190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마포(麻浦)에서 새우젓 장사로 떼부자가 된
이종석의 별장이라 전한다. 성북동이 귀인(貴人)과 부자를 많이 낸다는 완사명월형(
浣紗明月形)
의 명당이라 돈을 어느정도 손에 쥔 이종석이 명당의 기를 받고자 이곳에 별장을 지은 모양이다.

잘 다듬어진 석축 위에 둥지를 튼 집으로 별장이라 그런지 건물 1채가 전부이다. 그 안에 사랑채
와 안채, 행랑채가 갖추어져 있는데, 동북쪽에 안채가, 북쪽에 행랑채가 있으며 마루에는 일관정
이란 현판이 붙어있다. 정원은 우리나라 조경의 멋이 물씬 풍기며, 별장 안쪽에는 장독대가 정겨
운 풍경을 연출한다. 궁궐의 그것과 많이 닮은 굴뚝은 담장과 색이 비슷하여 서로 조화를 이루며
, 단순히 연기를 뿜어내는 굴뚝이 아닌 하나의 예술작품 같다. 대문 밖에는 우물이 있으나 지금
은 막아두고 사용하지 않는다.

지금은 비어있는 집으로 덕수교회에서 인수하여 수양관으로 쓰고 있다. 가옥 내부를 관람하려면
교회 관계자나 가옥을 지키는 신도 아줌마의 허락을 받기 바라며 내부 촬영은 통제하고 있으니
요령껏 하기 바란다. 굳이 통제할 이유는 없다고 보는데,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다.

▲ 대문 밖에 마련된 우물 ~
현재는 죽은 우물이다.

▲ 별장 안쪽에 자리한 장독대와 멋스러운
굴뚝은 우리 조경의 아름다움을
여실히 드러내 보인다.


※ 성북동 이종석 별장 찾아가기 (2009년 6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쌍다리 하차, 여기서
삼청각, 성북동 종점 방면으로 100m 걸으면 덕수교회가 나오는데 그 안에 있다.
* 평소에는 문이 닫혀져 있으므로 교회 관계자에게 허가를 받아 관람하기 바란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43-4

♣ 성북동 추천 명소와 맛집
* 추천 명소 - 심우장(尋牛莊, 만해 한용운이 말년을 보낸 곳), 간송미술관, 선잠단터, 성락원(
城樂園, 조선 후기 별서), 길상사(吉祥寺, 예전 고급요정으로 승려 법정과 인연이 깊은 절),
삼청각, 수연산방(壽硯山房, 예전 이태준의 집으로 현재 찻집으로 쓰임), 최순우 가옥
* 맛집 - 성북동집(만두와 만두국, 02-747-6234), 금왕돈까스(돈까스, 02-763-9366), 성북동돼지
갈비집(돼지불고기 백반, 02-764-2420), 수연산방(찻집, 02-764-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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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사, 촬영 일시 - 2008년 10월 25일
* 작성 시작일 - 2009년 1월 25일
* 작성 완료일 - 2009년 1월 27일
* 숙성기간 - 2009년 1월 27일 ~ 2009년 6월 3일
* 공개일 - 2009년 6월 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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