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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락산 학림사(鶴林寺) ~~~~~

학림사 대웅전
▲ 학림사 대웅전
학림사 동자상
▲ 선불당 뜨락에 앉아있는 귀여운 동자상


수락산 그늘에서 8년 가까이를 살면서 수락산 다람쥐마냥 산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녔지만
이상하게도 당고개역 가까이에 있는 학림사까지는 나의 발길과 관심이 미치질 못했다. 오
랫동안 학림사에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은 것은 절의 내력만 오래되었을 뿐, 오래된 볼거
리가 없는, 즉 나를 유혹할만한 매력이 없는 그런 절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다 2007년 겨
울, 수락산 흥국사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학림사의 숨겨진 매력을 발견하고는
크게 놀라고 말았다. 그런 곳은 늘 구미가 당기는 법이라 바로 몇일 뒤에 그곳을 접수(?)
하여 호기심을 충족시켰다. 허나 그래도 뭔가가 허전하여 한참의 세월이 흐른 2009년 4월
17년 숙성을 자랑하는 오랜 친구와 다시 학림사의 산문을 찾았다.

학림사는 우리집에서 불과 5km 거리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발을 들일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덕릉고개 너머의 흥국사만 생각을 했지 학림사는 조금의 관심조차 주지 않다가 이
렇게 늦게나마 그곳을 찾으니 그저 염치가 없을 따름이다.

지하철4호선의 북쪽 끝인 당고개역에서 절을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주택가를 가로질러 수
락산(水落山, 638m)의 품으로 들어선다. 골목마다 절을 알리는 이정표가 길을 안내해주어
지나친 길치가 아닌 이상은 길을 헤맬 우려는 적다.

상계3,4동 당고개 일대는 서울의 몇 남지 않은 달동네로 지금은 다세대 주택과 빌라가 달
동네의 상징인 분홍색 기와집과 판자집을 대신하여 언덕을 메우고 있다. 하지만 곳곳으로
달동네 집들이 군데군데 남아 극심한 빈부격차의 안타까운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주택가를 벗어나니 겨울의 제국에서 벗어나 봄의 향연이 펼쳐지는 산길이 펼쳐진다. 산길
이라고 해서 흙길이 아닌 수레를 위한 시멘트 길로 학림사까지 이어져 있다. 절이 산중턱
200m고지에 위치해 있어 약간의 등산을 감내해야 되지만, 하얀 시멘트 길을 따라 가는 것
이라 등산 분위기는 그리 나지 않는다. 길의 경사도 대체로 완만하여 산책 삼아 걷기에는
딱 그만이다.

속세의 때가 말끔히 날라갈 것 같은 시원한 산바람을 맞으며 '학림사 1km' 이정표를 지나
잠시 가던 발길을 멈추고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본다. 서울의 동북쪽 끝으머리인 상계3,4동
일대가 훤히 눈 아래로 펼쳐지고,그 너머로 바위가 일품인 불암산(佛岩山)이 비슷한 위치
에서 우리를 지켜본다. 산에서 바라본 상계3,4동은 서울의 일부가 아닌 산에 둘러싸인 조
그만 시골 읍내(邑內) 같다. 당고개와 동막골 산자락에 듬성듬성 일구어진 약간의 밭, 닭
과 꿩을 기르는 사육장,꿀벌을 치는 양봉장까지 정말로 전원(田園)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이곳이 정녕 인구 1000만을 지닌 서울이 맞더냐~~~? 의심이 벌컥 들 정도로 말이다.



▲▼ 연등과 봄의 내음이 초롱초롱 길을 비추는 학림사 가는 길


▲ 수락산의 영원한 단짝 불암산(507m)의 위용,
두 산 사이에 포근히 안긴 상계3,4동

▲ 학림사를 200m 앞두고
고운 색채의 연등이 가로등처럼 늘어서 절을 찾은 중생을 환하게 맞이한다.

▲ 학림사 부도(浮屠)

숲길을 어느 정도 오르니 잠깐 발을 쉴 수 있는 나무 벤치가 나온다. 가까이에 학림사의 내력이
적힌 안내문이 진하게 보이니 절도 이제 다 온 모양이다.

벤치 부근에는 대추모양의 오랜 부도 2기가 자리해 있다. 학림사로 들어서기 전에 제일 먼저 마
주치게 되는 것으로 그들의 모습은 마치 다정함이 물씬 풍기는 부부처럼 다가온다. 왼쪽에 평퍼
짐한 모습의 부도는 남편, 오른쪽에 홀쭉한 몸매의 탑은 아내로 다정히 서서 나에게 기념촬영을
요청하는 것 같다.

이들 부도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한 발짝 내딛으면 바로 아래로 곤두박질 칠 것 같은 위
치에 있어 애당초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네모난 기단(基壇) 위에 뿌리를 내린 이
들 부도의 주인은 아쉽게도 누군지 알 수는 없으나 그중 1기에 '상궁(尙宮)~~' 명문이 있어 학
림사와 인연이 있던 궁궐 상궁의 묘탑(墓塔)임을 알게 해준다.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잠시 학림
사의 내력을 간추려보도록 하자.


♠ 학이 알을 품고 있는 지세에 둥지를 튼 작은 절집, 나한도량(羅漢道場)으로
열심히 앞날을 꾸려가는 ~ 수락산 학림사
(鶴林寺)

덕릉고개 너머에 있는 흥국사가 약사도량으로 유명하다면 이곳 학림사는 나한도량으로 그 명성
이 자자하다. 학림사란 이름은 절이 들어앉은 위치가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학지포란(鶴之抱卵)
의 지세라 하여 유래된 것이라 한다. 이런 지세에는 무거운 돌의 탑이나 석물은 가급적 피해야
된다는데 근래에 3층석탑과 5층석탑, 석불 등을 세워 자칫 알이 깨져 탈이 나지 않을까 우려된
다.

대한불교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인 학림사는 671년(신라 문무왕
10년)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 역시 신빙성이 잔뜩 떨어지니 신뢰
하지 않는 것이 좋다. 1881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순항(金淳恒)이 쓴 '학림암중수기
(鶴林庵重修記)'에는
'절의 내력을 적은 문서가 모두 사라져 절을 창건한 이와 절의 사적(事蹟)
을 알지 못한다'
하였으니 원효대사의 창건설이 근거가 없음을 진하게 보여준다. 또한 고려 후
기에는 나옹화상 혜근(懶翁和尙 慧勤, 1320∼1376)이 머물렀다고 하지만 학림암중수기에는 언급
조차 없다.

중수기에 본격적으로 기록이 나타나는 건 16세기 이후로 임진왜란 시절인 1597년 절이 소실되었
다고 한다. (아마도 산불이나 불을 잘못 취급하여 일어난 화재로 여겨짐) 1624년(인조 1년) 무
공화상(無空和尙)이 터만 남은 이곳에 법당을 지어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웠으며 1780년에 최백(
崔伯)과 궤징(軌澄) 두 승려가 중수하고 1830년에 손질을 가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거의 문 닫기 직전에 이르자 1880년(고종 17년) 영상(景惺), 경선(慶船) 두 승
려가 팔을 걷어붙이며 절을 손보려고 했다. 허나 자금이 한 푼도 없었다. 마침 판관 하도일(判
官 河道一)이 절을 찾아오자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도성으로 돌아간 하도일은 명성황후(明成
皇后)에게 학림사 중수를 건의했고 이에 황후는 천금의 하사금을 지원했다. 중수가 끝나자 단청
은 찬란하여 빛을 발했다고 하며, 부처의 성전은 의연하게 자리잡았다고 중수기에는 적고 있다.

1918년 4월 주지 금운(錦雲)이 중수를 했는데 승려 연응(淵凝)이 '학림암대방여각전각중수기(鶴
林庵大房與各殿閣重修記)'에
'전각이 낡고 기울어 거꾸로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 보다
못한 금운화상이 발심하여 작은 물건까지도 모두 보시(報施)하여 다시 세우니, 가히 후세의 귀
감이 될만하다'
고 기록했으니 중수 이전 절의 상태가 가히 짐작이 간다.

학림사는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역과 지척이라 매년 봄과 가을 재(齋)가 있을 때마다 많은
제물을 부담했다. 심지어는 절을 묘역에 포함시키는 등 그 폐해가 컸다고 한다. 1927년에는 도
정궁(都正宮) 소유로 되면서 절을 찾는 중생이 줄어들어 절의 수입이 감소하였다.

흥국사처럼 왕실의 원찰(願刹)은 아니나 궁궐 상궁들이 자주 드나들며 자신들의 안녕을 빌었고
퇴직하여 오갈 데 없는 상궁들이 많이 기거하였다. 6.25전쟁 때는 상당수의 건물이 파괴되면서
다시금 쇠퇴의 늪에 빠졌으나 1985년 전각들을 개축하고 대웅전, 오백나한전 등을 새로 지었으
며, 1994년 노원역 부근에 7층 규모의 불교회관을 지어 올리면서 사세가 놀랍게 확장되었다.

▲ 학림사 범종각(梵鍾閣)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3층석탑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2006년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삼신불괘불도(서울지방유형문화재 211호)
석조약사여래좌상(석불좌상)이 있으며 비지정문화재인 부도 2기와 신라 후기에 조성되었다고 전
하는 대웅전 청동석가여래좌상이 있다. 사우(寺宇)는 비록 고찰의 내음은 씻겨 내려갔지만 대웅
전과 선불당, 청학루 등 7~8동의 건물을 지녔다.

학이 알을 품은 지세라 그런지 포근함이 느껴지며, 비록 시내와 가깝긴 하지만 깊은 산골에 들
어온 듯 산사(山寺)의 고요함과 고즈넉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절이다. 마음을 정리하거나 복
잡한 머리를가다듬고는 싶은데 서울에서 멀리 나가기가 어려울 경우 한번쯤 찾아와 안기고 싶
은 절집이다.

※학림사 찾아가기 (2009년 8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당고개역(1번 출구)에서 걸어서 25분 거리 (이정표가 있으므로 그거만 따라가면
된다)
*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 약사재일(藥師齋日), 관음재일(觀音齋日) 등의 행사 때는 당고개역
(1번 출구)에서 오전 8시부터 수시로 차량이 운행되며, 평일에는 오전 10시에 1회 운행한다.
* 승용차로 학림사까지 접근이 가능하나 주차 공간이 좁고 주택가 골목길을 지나야 되기 때문에
운전에 각별한 주의가 요망된다. 가급적 대중교통 이용을 권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4동 산1
(☎ 02-936-1700)


♠ 학림사 약사전(藥師殿)


학림사의 내력이 적혀진 안내문을 지나서면 오른쪽으로 계단이 나온다. 별로 길지 않은 계단의
끝에는 절에서 자랑하는 오랜 보물이자 영험하기로 이름난 약사불의 거처인 약사전이 있다.

내가 지금까지 접해온 약사전은 모두 절 경내에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특이하게도 경내로 들어
서는 길목에 세워두어 절을 찾은 중생들이 가장 먼저 찾게끔 하였으니 그만큼 약사불이 학림사
의 간판 역할을 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약사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정말 조촐한 모습이다. 건물 이름이 쓰인 현판
을 보니 글씨에 생명을 불어넣은 듯, 힘이 넘쳐보여 '藥(약)'자가 '茶(다)'로 보인다. 불전 주
변으로는 담장이 빙 둘러져 있으며 건물 앞에는 석등 1기가 멀뚱히 서 있다.


▲ 석조약사여래좌상(석불좌상)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2호

약사전의 주인장, 약사여래좌상은 키가 불과 77cm에 불과한 상당히 왜소한 불상이다. 신체 비례
도 상당히 떨어져 얼굴이 신체의 약 2/5에 이르며 앉아 있는 모습이긴 하나 얼핏 보면 아랫도리
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석불이 앉아 있는 연화대좌(蓮花臺座)는 석불
보다 덩치가 더 크며 꽃잎이 위로 향한 앙련(
仰蓮)과 아래로 향한 복련(伏蓮)이 대좌를 아
름답게 꾸며준다. 자신보다 훨씬 큰 대좌 위에
앉아있는 모습이 마치 조그만 어린이가 커다란
의자에 걸터앉은 것 같다.

조선 초기에 조성되었다고 전하는 이 불상은
고개 너머 흥국사의 약사불처럼 영험하기로 소
문이 자자하다고 한다. 거의 네모진 형태의 얼
굴은 무척 두꺼워 비만해 보인다. 두 눈은 지
그시 감겨져 있으며, 코는 선으로 모양만 표현
했다. 입술에는 약간의 미소가 드리워져 중생
의 마음을 편안케 해주며, 그들의 소망을 모두
접수하려는 듯, 커다란 두 귀를 지녔다. 목은
짧고 두꺼워서 어깨와 단단히 붙어 있으며, 가
슴 앞에 모은 그의 손에는 조그만 약합이 들려
져 있다. 아랫도리는 지나치게 작게 처리되어
윗도리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 학림사 해탈문(解脫門)과 원숭이상

▲ 학림사 담장 옆을 끼고 흐르는 계곡

계곡과 나란히 한 산길을 1km 오르면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조그만 암자, 용굴암(龍窟庵)이 나
온다. 거기서 다시 1시간 정도를 더 오르면 바위가 일품인 수락산 마루(638m)이다.


▲ 학림사 해탈문(解脫門)

▲ 사자에 올라탄 문수동자

▲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

약사전을 지나 100m 정도 가면 경내로 오르는 108계단 앞에 이른다. 계단 중간에는 문수, 보현
동자와 사천왕상의 보금자리인 해탈문이 걸려있다. 문 바깥 쪽에는 우람한 모습의 금강역사(金
剛力士)상이 그려져 있고, 안에는 사자를 탄 천진난만한 표정의 문수동자(文殊童子)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普賢童子)가 중생을 맞는다. 그들 뒤로 부처의 경호원인 사천왕(四天王)이 그려져
있어 천왕문(天王門)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 108계단에서 만난 원숭이들 ~ 그들의 자세에는 모두 심오한 뜻이 담겨져 있다.


108계단에는 4쌍(8마리)의 귀여운 원숭이 조각이 있다.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원숭이부터 시작해
서 눈을 가린 원숭이들, 귀를 막은 원숭이, 끝으로 두 손을 번쩍 들며 만세를 외치는 원숭이까
지 적당한 거리를 지키며 자리를 지킨다. 그럼 이들의 자세는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학
림사에서 그저 눈요기나 하라고 갖다놓은 것은 아닐텐데 말이다.
우선 손으로 입을 가린 원숭이는 나쁜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악한 말을 할 바에는 차라리
손으로 입을 막는 것이 좋다. 그 다음에 눈을 가린 원숭이는 나쁜 것을 보지 말란 뜻이며, 귀를
막은 원숭이는 나쁜 말을 듣지 말라는 의미다. 끝으로 만세를 외치는 원숭이는 정확하지는 않으
나 해탈문을 지나 계단 끝에 있는 것으로 봐서 아마도 속세에 대한 해탈의 환희(歡喜)를 표현한
것 같다.

만세를 외치는 원숭이를 제외한 3가지의 원숭이는 속인(俗人)들에게 중요한 충고 3가지를 자세
로써 보여주고 있다. 나쁜 것을 말하지 않고, 보지 않고, 듣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정말 극락처
럼 아름다울텐데 사람은 동물과 신(神) 중간에 어정쩡한 존재라 좀처럼 지키려고 들질 않는다.
원숭이의 메세지를 가슴 깊이 새기며 계단 끝에 이르면 청학루 뜨락이다.


▲ 학림사 청학루(靑鶴樓)

108계단의 끝에는 포대화상과 2층 누각의 청학루가 자리해 있다. 청학루는 종무소(宗務所)와 강
당 등으로 쓰이는 불전으로 대웅전으로 통하는 1층 좌우로 사무실과 찻집이 있고, 2층은 주로
강당으로 쓰이고 있는데, 2층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면 불암산의 모습이 두 눈에 가득 들어올 정
도로 조망이 좋다. 청학루 앞에는 4명의 동자승을 품에 앉은 뚱뚱하고 푸짐한 인상의 포대화상(

布袋
和尙)이 연꽃대좌 위에 앉아 있다. 복덕원만(福德圓滿)한 인상을 지닌 그는 많은 절에서 볼
수 있는데, 그는 몸집이 비대하고 배가 축 나왔으며, 항상 커다란 자루를 등에 짊어지고 지팡이
를 짚으며 시주를 하거나 인간사의 길흉을 점쳤다고 하는 중국 승려로 미륵불의 화신으로 존경
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무척이나 아이들을 좋아한 모양이다. 왼쪽
어깨에 거뜬히 동자승 1명을 얹히고, 오른손으
로 다른 동자를 안고 있으며, 또 1명은 그의 배
를 만지작거리고, 다른 하나는 그의 발 사이에
앉아 웃음을 가득 띄운다. 만지면 복이 온다는
그의 똥배와 동자승의 머리는 중생들이 하도 문
질러대서 시커멓고 반질반질하다.

웃음과 정으로 가득한 그들의모습은 너무 감동적이라 비록 돌로 만든 조각이긴 하지만 여간 부
럽지가 않다. 단순히 겉모습이나 가식적인 아름다움보다 훨씬 아름다운 그들의 모습에 우리같은
중생들도 마음이 즐거워진다.


♠ 학림사 대웅전(大雄殿) 주변

높다란 계단 위에 위엄을 갖춘 학림사의 법당(法堂) 대웅전은 1985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수락산의 서기(瑞氣)가 기왓장마다 가득 깃들여진 대웅전
에는 신라 말에 조성되었다고 하는 청동석가여래좌상이 있는데, 불상의 모양을 보면 신라나 고
려가 아닌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여 신라 불상이라는 것은 너무 억지가 아닐까 싶다. 석
가불 뒤로 1985년에 제작된 아미타후불탱화가 있고, 좌우 벽면에는 지장탱화와 신중탱화, 천불
탱화를 봉안했다.

대웅전 뜨락에는 하얀 맵시를 드러낸 5층석탑이 서 있고, 그 좌측에 선불당(選佛堂), 우측에 오
백나한전이 자리해 있다.


▲ 대웅전 불단에 모셔진 석가3존불
가운데 석가불이 신라 후기(혹은 고려 초기)에 만들어졌다는 청동석가여래좌상이다.
하지만 불상의 모양이 신라와 고려의 양식과는 많이 떨어져 좀더 구체적인
학술조사가 절실하다.

▲ 학림사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나한도량을 자처하는 절답게 대웅전 아래 우측에 오백나한을 모신 오백나한전을 두었다. 대웅전
과 더불어 1985년에 지은 것으로 건물 안에는 석가불과 미륵불, 정광불(錠光佛) 등의 3존불이
모셔져 있고, 좌우로 16나한상이, 그 뒤로 작은 크기의 5백나한을 빼곡히 배치해 놓았다. 세계
60억 인구처럼 다양한 모습과 표정을 지닌 오백나한의 모습이 절을 찾은 중생들에게 웃음을 자
아내게 한다.


▲ 오백나한전 불단에 모셔진 하얀 피부의 3존불, 그 좌우로
정신없이 들어앉은 오백나한(五百羅漢)


▲ 오백나한전과 마주한 선불당(選佛堂)
승려들의 수행공간으로 선불장(場)으로도 불린다.

▲ 웃음을 묻어나게 하는 동자상
해맑은 표정의 동자가 엉덩이를 요염하게 쳐들며 연꽃의 향기에 심취해 있다.


♠ 학림사 삼성각(三聖閣) 주변

▲ 멋드러진 노송(老松) 1그루
대웅전 뜨락에 늘 그늘을 드리워 주는 소나무로 그의 수령(樹齡)은 정확하게
가늠할 순 없으나 대략 100년 남짓으로 여겨진다.

▲ 삼성각(三聖閣)

1985년에 지어진 조그만 건물로 우리나라 토속신인 산신(山神),
칠성신(七星神),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이다.

◀ 삼성각 앞에 세워진 3층석탑
1층 탑신(塔身)에 4마리의 돌사자가 위층 탑신
을 받쳐든다. 탑 주위로 중생들이 정성껏 갖다
놓은 가지각색의 동자상과 불상들이 자리를 빼
곡히 채운다.

학림사 석조미륵불입상
▲ 석조미륵불입상(石造彌勒佛立像)

경내 서쪽에 서 있는 석조미륵불입상은 근래에 세운 것이나 몸통에 검은 때가 약간 입혀져 연세
가 조금 들어 보인다. 처음에는 100년 이상 먹은 미륵불인가 싶었는데 대략 20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온후한 표정을 지닌 석불로 연화대좌 위에 우뚝 서 있으며 머리 위로 무거워 보이는 보관
(寶冠)을 쓰고 있는데 생김새가 옥개석(屋蓋石)과 상륜부(相輪部)를 갖춘 석탑 같다.


▲ 뒤풀이로 먹은 시원한 메밀국수 1그릇

지금은 비록 작지만 열심히 앞날을 꾸려가는 학림사를 둘러보고 다시 속세로 나와 상계동(上溪
洞)의 옛 중심지인 상계역에서 저녁으로 메밀국수을 먹었다. 가격은 6천원으로 철모르고 찾아온
이른 더위에 지친 목구멍과 온몸을 시원하게 녹여주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하여 학림사 나들이
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0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단 블로그는 한달까지이며, 원본
은 2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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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글을 읽으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고 댓글 하나씩 꼭 달아주세요.
*답사, 촬영 일시 - 2009년 4월 12일
*작성 시작일 - 2009년 5월 4일
*작성 완료일 - 2009년 5월 21일
*숙성기간 ~ 2009년 5월 21일 ~ 2009년 8월 26일
*공개일 - 2009년 8월 26일부터
* 최종수정 - 2009년 8월 29일

Copyright (C) 2009 by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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