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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03.18 서울 도심의 오랜 우백호, 인왕산~인왕산둘레길 나들이 (탕춘대성, 기차바위, 한양도성, 석굴암)
  2. 2019.05.05 높은 산에 포근히 감싸인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평창동~홍제천~부암동 나들이 (보현산신각, 박종화가옥, 홍지문, 옥천암, 산모퉁이)
  3. 2018.04.24 상큼한 경승지를 많이도 간직한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 둘러보기 ~~~ (세검정, 석파랑, 석파정별당, 홍지문, 옥천암,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4. 2017.12.15 도심 속에 숨겨진 상큼한 숲길을 거닐다. 북한산둘레길 옛성길~탕춘대능선~구름정원길 (탕춘대성 암문)

서울 도심의 오랜 우백호, 인왕산~인왕산둘레길 나들이 (탕춘대성, 기차바위, 한양도성, 석굴암)

서울 도심의 우백호, 인왕산 (탕춘대성, 기차바위, 석굴암)



' 서울 도심의 오랜 우백호, 인왕산 '
(탕춘대성, 기차바위, 한양도성, 석굴암)

인왕산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인왕산 한양도성길

인왕산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  인왕산 한양도성길

▲  인왕산에서 바라본 북한산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산은 나의 즐겨찾기 뫼의 하나이다. 하여 그의 품을
지겹도록 오갔지만(100번은 넘게 갔음) 아직까지 발길이 닿지 않은 미답처(未踏處)들이
여럿 남아있어 나를 참지 못하게 한다. 하여 그들을 미답 목록에서 흔쾌히 지우고자 겨
울 제국이 서서히 이빨을 보이던 11월 끝 무렵에 그곳을 찾았다.

이번 인왕산 나들이는 세검정교차로에서 첫 발을 떼었다, 거기서 세검정로를 따라 남쪽
으로 조금 가면 홍지문(弘智門)이 나오는데, 그 남쪽에 탕춘대성과 인왕산 산길(인왕산
둘레길)이 있다. 그 길이 인왕산 북쪽 기점의 하나(홍지문 기점)이자 인왕산의 가장 북
쪽 끝으로 아직 미답의 상태로 남아있었다.

홍지문 기점으로 접근하려면 세검정교차로에서 세검정길 남쪽 보도로 가거나, 홍지문
·
옥천암 정류장(홍은동에서 세검정 방향)세검정 방향)에서 보도로 접근해야 된다.



 

♠  인왕산(仁王山) 북쪽 능선과 탕춘대성(蕩春臺城)

▲  탕춘대성과 인왕산둘레길 (홍지문 기점 남쪽)

홍지문 기점 코스는 탕춘대성과 인왕산 북쪽 능선을 거쳐 기차바위로 이어진다. 시작부터 사
람들의 기를 꽉 잡으려는 듯, 경사가 각박하여 숨을 적지 않게 헐떡이게 하는데, 처음 10~15
분 정도가 좀 고통스러울 뿐, 산길은 서서히 진정을 되찾는다. 게다가 산이 크게 흥분을 보이
는 구간은 나무데크 길과 계단을 닦아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다. (중간에 가
파른 구간이 여럿 있음)
홍지문에서 기차바위를 거쳐 한양도성이 흐르는 인왕산 주능선까지 35~45분 정도 걸리며, 정
상은 거기서 10~15분 정도 추가하면 된다.

산길을 따라 이어진 빛바랜 성곽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이어주던 탕춘대성이다. 연
산군(燕山君)이 세검정(洗劍亭) 부근에 지었다는 탕춘대(蕩春臺)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으로
한양(서울) 서쪽(정확히는 북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성(西城)이라 불리기도 했고, 겹성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었다.
이 성은 숙종(肅宗) 임금이 만약에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서울의 방어력을 높이고
비상시 북한산성 행궁(行宮)으로 신속히 도망칠 수 있는 시간 확보를 위해 조성되었다. 1702
년에 신완(申琬)이 성곽 축성을 제의했는데, 북한산성(北漢山城) 증축과 행궁 조성, 한양도성
보수가 마무리되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짓고자 1715년 홍제천(弘濟川)에
홍지문을 먼저 닦았다. 그런 다음 1718년 8월 26일 성곽 공사에 들어갔으나, 겨울이 다가오면
서 10월 6일에 일단 공사를 멈추고 1719년 2월 다시 공사에 들어갔다. 허나 처음보다 사업이
크게 축소되면서 3월에 공사를 종료시켰다.

그렇게 태어난 탕춘대성은 인왕산 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 능선, 홍지문, 탕춘대능선을 거쳐
비봉능선 서쪽 수리봉(향로봉 부근)까지 이어진 4km 규모로 원래는 북한산성까지 이으려고 했
으나 비봉능선이 험준하여 포기했으며, 북한산성 대남문에서 보현봉, 형제봉능선, 북악산(백
악산) 북쪽 능선을 거쳐 한양도성을 잇는 탕춘대성 동쪽 성곽도 계획했으나 취소되었다.


▲  산길과 잠시 분리되는 탕춘대성
성곽에 뿌리를 내린 나무와 수풀을 위해 동쪽으로 짧게 우회길을 냈다.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 경계인 홍제천에는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을 두었으며, 탕춘대능선에
는 암문(暗門) 1개를 내었다. 그리고 성 안에는 훈련장인 연융대(鍊戎臺)와 선혜청(宣惠廳),
평창(平倉) 등의 창고를 설치했으며, 총융청(摠戎廳) 본부도 이곳에 두었다.
탕춘대성이 들어앉은 위치 대부분은 각박한 경사지로 거의 천험(天險)을 자랑한다. 하여 홍지
문을 제외하고는 성을 높이 구축하지 않았으며, 현재는 인왕산 북쪽 능선과 홍지문, 탕춘대능
선에 성곽이 그런데로 남아있다.

탕춘대성 인왕산 구간은 홍지문에서 북쪽 능선 사이에 남아있는데, 홍지문 기점에서 5분 정도
올라간 정도까지만 여장이 복원되어 있고 그 이남은 성곽만 남아있다. <홍지문과 탕춘대성은
'홍지문 및 탕춘대성'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호로 지정되어 있음>

* 탕춘대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산4 외


▲  키 작은 돌담처럼 남아있는 탕춘대성
인왕산 쪽 탕춘대성은 거의 키가 작다. 워낙 각박한 지형에 나무도 무성하여
높이 다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최대 높이는 2~3m 정도)

▲  소나무숲에 묻힌 탕춘대성 (오른쪽 돌무더기가 성곽)
이곳 이후로는 성곽 대부분이 사라진 상태라 흔적을 더듬기도 힘들다.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① <내부순환로와 홍은동 지역>

왼쪽에 부드럽게 곡선을 보인 도로가 서울 도심 주변을 챗바퀴처럼 도는 내부순환로이다. 차
량들의 통행이 빈번하여 그들이 내는 굉음이 나의 두 귀를 마구 때려댄다.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② <북한산 탕춘대성 남쪽 능선>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③ <북한산 산줄기와 부암동,
홍지동, 신영동, 평창동 지역>
부암동(付岩洞)과 홍지동(弘智洞), 평창동(平倉洞), 신영동(新營洞) 지역은
인왕산과 북한산, 북악산(백악산)에 포근히 감싸인 분지 지형으로
마치 산악 도시나 마을 같은 아늑한 분위기이다.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④ <부암동과 북악산>
사진 가운데 산속에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백사실계곡(백석동천, 백사골)이
묻혀있다. 그 너머로 성북동과 더불어 이 땅의 0.1%가 산다는 졸부 마을
평창동이 곱지 않게 바라보인다.

▲  벼랑을 오르는 계단길 (인왕산 북쪽 능선)

▲  인왕산 북쪽 능선 중간쯤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북쪽 능선은 탕춘대성에서 기차바위능선 북쪽까지로 그 중간쯤에 동쪽(기차바위 방향
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철조망이 쳐진 구간이 있다. 그 철조망 안쪽이 흥선대원군의 별장으로
유명한 석파정(石坡亭)을 품고 있는 서울미술관 땅이다. (철조망만 있을 뿐, 문이나 개구멍은
보이지 않았음)


▲  인왕산 북쪽 능선 중간쯤에서 바라본 북악산 북쪽 자락과
북한산(삼각산), 형제봉능선

▲  솔내음이 깃든 인왕산 북쪽 능선길
인왕산은 바위도 많지만 소나무도 제법 우거져 있다.

▲  인왕산 북쪽 능선 남쪽에서 바라본 홍은동과 은평구 지역
서울과 은평구의 서쪽 벽이자 서울둘레길이 흐르는 앵봉산(235m)과
봉산(烽山, 209m)도 덩달아 시야에 들어온다.

▲  기차바위 북쪽 갈림길
여기서 부암동(성덕사)과 홍제동 개미마을, 환희사(歡喜寺)에서 올라온 길이
하나가 되어 기차바위로 이어진다.

▲  기차바위 북쪽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의 위엄
내가 천하를 스케치하는 조물주라면 그 밑에 지저분하게 붙어있는 졸부들의
흔적을 지우개로 지워 북한산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다.

▲  기차바위 북쪽에서 바라본 인왕산 정상(338m)



 

♠  인왕산 기차바위와 인왕산 주능선(한양도성)

▲  인왕산의 북쪽 하늘길, 기차바위 (기차바위능선)

인왕산 바위의 갑(甲)으로 찬양받는 기차바위는 기차처럼 길쭉한 바위 능선이다. 절대 기차처
럼 생기지는 않았으며, 그저 길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 것 같다. 어린이들이 부르는
노래에도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바나나는 길어, 길면 기차' 이런 구절이 있다. 그만큼 기
차는 이 땅에서 길쭉한 존재의 대명사이다.
기차바위 능선은 약 300m 정도로 순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거닐면 실감이 덜하겠지만
세검정초교에서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로 올라가는 길이나 부암동 산복길(백석동길)에서 바
라보면 정말 단단하고 두툼한 바위임을 알 수 있다. 사방이 확 트여있어 조망은 1등급이나 양
쪽이 자비심이 없는 낭떠러지이니 난간을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한다.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①
바로 앞에 부암동과 북악산(백악산), 서울 도심부는 물론 멀리 동대문구와
중랑구, 광진구, 아차산~용마산 산줄기, 강동구, 송파 지역까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와 두 눈이 호사를 누린다.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② 북악산(백악산)
서울의 영원한 북현무(北玄武) 북악산과 부암동, 청운동 지역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③ 인왕산 그늘에 묻힌 부암동
부암동 일대가 인왕산 그늘에 푹 잠겨 있다. 그 너머로 북악산(백악산)과
평창동, 북한산(삼각산), 형제봉능선이 시야에 들어온다.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④ (서대문구, 은평구 지역)
인왕산 북쪽 자락과 홍은동, 홍제동, 백련산, 은평구, 앵봉산~봉산 산줄기가
시야에 들어온다.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⑤
서울 도심과 서촌(웃대), 그리고 멀리 강동, 송파, 강남 지역까지;;

▲  인왕산 한양도성에서 바라본 기차바위 능선

기차바위를 지나면 한양도성 전까지 내리막이 펼쳐진다. 성곽 앞에 이르면 잠시 오르막이 펼
쳐지면서 계단이 나타나는데, 그 계단을 오르면 한양도성이 흐르는 인왕산 주능선에 발을 들
이게 된다. (기차바위 갈림길)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인왕산 정상이며, 동쪽은 창의문(彰義門, 자하문)과 북악산(백악산)으
로 이어진다. 그날은 정상에 대한 미련이 없었고 눈 감고도 갈 정도로 익숙해진 곳이라 바로
동쪽으로 내려갔다. 정상이란 자리가 탐이 나는 자리긴 해도 그렇다고 늘 좋은 것은 아니다.


▲  기차바위 갈림길 계단 밑에서 바라본 한양도성 (여름 사진)
성벽과 여장의 피부색이 너무 차이가 난다. 성벽은 조선 때 것으로 고색의 때가
자욱한 반면, 여장은 근래에 새로 붙인 것이라 피부가 매우 하얗다.


▲  인왕산 한양도성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이미 인왕산의 어깨와 목 부분까지 올라탄 상태라 조망이 가히 천하일품이다.
마치 하늘을 배회하는 큰 새의 등에 강제로 업힌 기분이다.

▲  인왕산 한양도성 북쪽 성곽길 - 창의문 방향 ①
성곽길은 계단이 좀 팍팍하여 통행이 조금 고통스러우며, 그 옆에 급한 경사를
조금 순화시킨 계단길이 있어 그 길을 많이 이용한다.


인왕산하면 빼놓을 수 없는 서울의 든든한 갑옷 한양도성(漢陽都城,
사적 10호), 그럼 여기서
한양도성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다.

1388년 압록강을 건너 단동(丹東) 북쪽 위화도(威化島, 현재 압록강에 있는 그 위화도가 아님
)에서 그 유명한 위화도회군을 일으켜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 그는 1394년 남경(
南京)이라 불리던 한양(서울)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 천도 프로젝트에는 천하 제일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정도전(鄭道傳)이 그 중심에 서서
도읍 천도와 도성 축조계획을 세웠는데, 1395년까지 경복궁과 종묘, 사직단, 대략적인 한양(
서울) 시가지 등을 지어놓고 1396년 1월 도성 축조에 들어갔다. 한양도성 코스는 정도전이 짰으며, 도읍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내사산(內四山)인 북악산(
北岳山, 백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駱山, 낙타산)을 모두 끼게 했다. 성곽 길이는 59,500
자(18.2km)로 고려의 도읍인 개경<開京, 나성(羅城) 길이만 23km>보다는 작으며, 평지는 토성
(土城), 산지에는 석성(石城)을 지었다. 이때 천하에 징발령을 내려 11만 8천명을 동원, 49일 동안 성곽의 대부분을 완성했고, 농사철
이 다가오자 축성을 잠시 멈추고 집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 했다. 농사를 지어야 뜯어먹을
세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농사철이 끝나는 8월 다시 79,400명을 콩 볶듯이 동원, 49
일 동안 빡세게 굴려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고 4대문과 4소문까지 지어 축조를 마무리 지었다.

토성으로 지은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 세종은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업그레이드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여 1422년 1월, 무려 32만 2천명의 인부와 기술자 2,200명을 동원해 공사에 들어갔
다. 그 시절 한양 인구가 10만 정도였다고 하니 그 3배의 인원이 동원된 것이며, 이는 조선
최대의 공사로 꼽힌다.
또한 공사를 너무 닥달하여 죽어나간 일꾼이 872명에 달했으며, 그 공사 결과 성곽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城) 6곳, 곡성(曲城) 1곳, 성랑(城廊) 15곳을 갖춘 아주 늠름
한 도성으로 새로 태어났다. 그 도성을 관리하고자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
었으며, 워낙 성곽을 단단하게 다진 덕에 20세기까지 스스로 붕괴된 적도 없었다. 그리고 성
곽 보수도 1704년 숙종이 벌인 1차례가 전부이다.


▲  인왕산 한양도성 북쪽 성곽길 <창의문 방향 ②>

이렇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조선의 심장, 한양(서울)의 든든한 갑주로 위엄을 드러내던 한양
도성은 근대화의 물결이 요동치던 구한말 이후 팔자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1899년 조선 황실은 미국 양이(洋夷)인 콜브란(Corlbran)과 합작해 한성전기주식회사를 만들
었다. 콜브란은 고종(高宗) 황제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인 홍릉(洪陵)까지 편하게 거둥
하라며 전차(電車)의 필요성을 건의, 그해 12월 서대문에서 종로를 거쳐 홍릉 남쪽인 청량리(
淸凉里)까지 이어지는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이때 전차 통행을 위해 부득이 동대문과 서대
문의 양쪽 성벽을 싹둑 자르면서 성곽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도성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0년에는 종로와 용산(龍山)을 잇는 전차 노선이 생기면서 남대문 양쪽 성벽도 잘려
나갔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제왕의 명으로 시내 교통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니 이해는 된다.
하지만 문제는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이다.
을사늑약 이후 왜는 서울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 그 소속으로 1908년 '성벽처리위원회'라
는 해괴한 기관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도성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1910년 이후 서소문<소의문
(昭義門)>과 서대문<돈의문(敦義門)>은 물론 동소문<혜화문(惠化門)>까지 밀어버리면서 망국
(亡國)의 서울을 욕보인 것이다.

그렇게 빼앗긴 들에서 차디찬 시련을 견디며 35년 만에 봄을 찾았건만 바로 무섭게 6.25가 발
발하면서 왜정이 남긴 상처만큼이나 무거운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6.25이후까지 살아남은 성
문은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 창의문(자하문), 숙정문(肅靖門), 광희문(光熙門)
뿐이며, 성벽은 북악산과 성북동, 낙산, 장충동, 남산, 인왕산 등 10.5km 정도만 남았다.

이렇게 영욕의 상처를 품고 쓰러진 성곽을 1975년부터 중수하기 시작해 광희문과 숙정문을 손
질하고 남아있던 성곽을 수리했다. 이후 동소문을 제자리 북쪽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사라진
성곽에 대한 복원에 착수하여 옛날의 면모를 서서히 되찾고 있다.
또한 2010년 이후에는 시민과 답사객을 위해 성곽을 따라 탐방로를 닦았는데, 북악산 주변을
제외하고는 언제든 출입이 가능하다. (인왕산 성곽길은 매주 월요일은 못감) 다만 성곽이 사
라진 부분은 인근 골목길을 이용해야 된다.


▲  한양도성 여장 너머로 보이는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
부암동, 평창동 지역


예전에는 서울성곽이라 불렸으나 2011년 7월에 '서울성곽'에서 '한양도성'으로 문화재청 지정
명칭이 갈렸다. 게다가 서울이란 이름도 이 성곽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
기가 전해온다. (인왕산 선바위 전설과 조금 비슷함)
태조 이성계가 한양도성을 어떤 코스로 쌓을지 고심을 했다. 그러던 어느 밤, 난데없이 큰 눈
이 내렸는데,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 한양 주위로 마치 성곽 모양으로 눈이 쌓여져 있었다
. 그래서 하늘이 친히 성곽 자리를 정해준 것이라 여겨 눈 쌓인 자리에 성곽을 쌓게 했다. 눈
이 쌓인 자리 즉 눈울타리<그것을 한자로 하면 설울(雪圍)>를 따라 성을 쌓았다고 하여 설울
이라 했는데, 그것이 나중에 서울로 변했다고 한다.
허나 신라의 중심지인 서라벌에서 서울이란 말이 유래된 것으로 크게 보고 있다.


▲  소나무 사이로 모습을 비춘 서울 도심 (인왕산 한양도성 성곽길)



 

♠  인왕산 동쪽 자락에 숨겨진 작은 석굴 암자, 흔한 이름에 비해
존재감이 매우 낮은 석굴암(石窟庵)

▲  만수천약수터

기차바위 갈림길에서 성곽길을 5분 정도 내려가면 신교동(新橋洞)으로 내려가는 산길이 슬쩍
손을 내민다. 석굴암을 가려면 여기서 성곽과 헤어져야 되기에 그를 버리고 신교동 방향으로
가다가 중간에 석굴암 입구로 이어지는 길로 빠져 2~3분 내려가니 만수천약수터가 마중을 나
온다.

만수천은 인왕산 동부의 대표적인 약수터이나 가뭄으로 물이 마르면서 부적합 주홍글씨를 받
은 상태였다. 이곳이 아무리 도심 지척이라고 해도 비가 적당히 내려주고 약수터 주변을 잘
관리하면 충분히 적합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비가 가뭄에 콩 나듯이 거의 내리지를
않으니 물순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여 영 좋지 않은 존재들이 샘물에 활개를 치는 것이
다.
약수터 주변에는 쉼터와 간단히 몸을 풀 수 있는 운동기구들이 있으며, 커다란 바위도 여럿
포진해 있어 인왕산이 바위의 산임을 실감케 한다. 그중 북쪽에 있는 바위에는 작은 자연산
굴이 있는데, 지금은 들어가지 못하게 철창을 씌웠지만 예전에는 기도나 굿을 벌이는 장소로
널리 쓰였다. 인왕산에 잘생긴 바위가 많고 기가 센 산이라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
전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이자 굿터로 유명했다.

▲  만수천약수터 쉼터

▲  겨울잠에 잠긴 석굴암1약수터

만수천약수터에서 조금 내려가다가 오른쪽 길로 질러가면 석굴암약수터가 나온다. (왼쪽은 석
굴암입구 초소로 이어짐) 이 샘터는 물낭비를 줄이고자 수도꼭지를 달아 놓았는데, 이곳 역시
바가지들이 무색할 정도로 부적합의 고통을 받고 있었다. 석굴암 부근에도 약수터가 있어 이
를 구분하고자 편의상 석굴암1약수터라 부르기도 한다.


▲  석굴암으로 인도하는 나무데크 계단길

석굴암1약수터에서 석굴암까지는 나무데크 계단길이 닦여져 있다. 마치 하늘로 이어진 것일까
? 계단이 얼마나 길던지 거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는데 경사 또한 각박하여 오르는 길이
조금은 무겁게 느껴진다. 그래도 계단을 닦아놓아 길이 좀 순해진 것으로 예전에는 경사지고
울퉁불퉁한 산길에 의지해 힘겹게 올라가야 했다.
저 계단의 끝에는 하늘 대신 석굴암이 자리해 있으며, 길 중간에 조망이 괜찮은 장소(바위)가
하나 있다.


▲  서울에 석양이 진다. 석굴암 밑 바위에서 바라본 도심
이곳은 인왕산에 숨겨진 조망 포인트이다.

▲  석굴암 석굴법당

석굴암은 인왕산 정상 치마바위 동쪽 밑에 둥지를 튼 작은 석굴 암자이다. 장대하게 생긴 바
위가 석굴암의 거의 모든 것으로 그의 밑도리에는 조그만 자연산 석굴이 깃들여져 있다. 호랑
이가 담배에 호기심을 품던 머나먼 시절부터 산악신앙과 무속이 벌여지던 현장이었으며, 20세
기 중반 이후, 수성동계곡 인근에 자리한 불국사(佛國寺)에서 이곳을 접수해 굴 내부를 손질
하고 부속암자인 석굴암으로 삼았다. 암자 이름은 바로 이 석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어째 경
주의 불국사와 석굴암 관계를 따라한 느낌마저 든다.

석굴을 법당(法堂)으로 삼아 돌로 만든 석가3존상과 여러 보살상을 두었으며, 문을 남쪽과 동
쪽에 내었다. 석굴 서남쪽에는 산신각 공간이 있으며 숙식을 할 수 있는 건물이 따로 없어 불
국사에서 승려와 보살 아줌마들이 왕래하면서 이곳을 관리한다. 보통 일몰 때 불국사로 돌아
가며, 가끔 기도를 위해 절을 지키기도 한다. 허나 내가 갔을 때(17시 이후)는 경내에 아무도
없는 빈 암자 상태였다. (그래도 소중한 불전함을 지키고자 cctv를 달아놓음;;)

비록 조그만 암자이지만 여기서 동쪽과 동남쪽으로 도심이 훤히 바라보여 조망 하나는 좋으며
, 그 도심을 이곳의 너른 뜨락으로 삼고 있다. 절 주위로 치마바위와 매바위, 닭바위 등 대자
연 형님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잘생긴 바위들이 많아 풍경 또한 일품이며, 석굴암 주변은
2007년 12월에 지정된 '인왕산 생태경관보전지역'의 하나로 자연경관이 아주 수려하고 소나무
와 상수리나무, 아까시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또한 박새, 어치, 유리딱새, 소쩍새, 암먹부전나비, 작은주홍부전나비, 노랑나비, 호랑나비
등 다양한 새와 곤충이 서식하고 있는 도심 속의 소중한 자연의 보고이다.


▲  석굴암 석굴법당 내부 (석가3존상)

자연산 굴을 손질한 석굴 내부는 굴의 타고난 본능상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추위를 좀
면할 정도이다. 사람은 없지만 방석과 난방기구, 선풍기 등을 갖추고 있으며, 석굴 허공에는
중생의 소망을 머금은 분홍 연등이 가득 매달려 또 다른 낮은 하늘을 이루고 있다.


▲  북쪽에서 바라본 석굴암과 인왕산 치마바위

▲  산신각(山神閣)의 예전 모습
인왕산 산신의 보금자리로 어엿한 기와집이 아닌 바위 앞에
터를 다지고 가건물을 씌웠다.

▲  산신각 마애산신도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산신각에는 산신(山神) 가족을 담은 마애산신도가 깃들여져 있다. 신선
처럼 생긴 산신 할배가 앉아있고 그 옆에 고양이 같은 호랑이가 꼬랑지를 살랑거리고 있으며,
산신의 비서인 동자와 그의 활동무대인 산이 선각(線刻)으로 처리되어 있다.
산신의 위엄과 진지함보다는 동네에 친근한 노인네를 다룬 것 같은 느낌으로 바위에 산신도
를 새긴 예는 서울은 물론 천하에서도 매우 흔치가 않다. 아쉽게도 20세기 후반에 제작되어
문화재적 가치는 아직 여물지 못했지만 최소 60~70년 이상 숙성되면 거뜬히 지방문화재의 자
리 하나는 따지 않을까 싶다.


▲  석굴암 마애사리탑<磨崖舍利塔, 바위 윗쪽 네모난 구멍>

경내의 서남쪽 바위를 숨은 그림을 찾듯 눈으로 잘 더듬어보자. 그러면 바위 윗쪽에 있는 네
모난 구멍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 구멍이 18~20세기에 서울 지역 사찰에서 많이 등장했던
마애사리탑으로 바위 피부에 홈을 파고 그 안에 승려나 신도의 사리함을 봉안한 간편한 사리
탑이다. 이 탑은 돈을 크게 들여 탑을 지을 필요도 없으며, 그저 바위만 있으면 된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사리탑은 불암산 학도암(鶴到庵, ☞ 관련글 보기)에 있는 것으로
19세기 초에 조성된 2기가 있으며, 도봉산 천축사(天竺寺, ☞ 관련글 보기)에도 19세기 사리
탑 2기가 전한다. 그리고 상도동 사자암(獅子庵, ☞ 관련글 보기)과 석굴암에도 20세기 것이
있는데, 석굴암 것은 20세기 초/중반에 지어진 것으로 현재는 달랑 구멍(감실)만 남아있다.

석굴암에서 치마바위와 인왕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었다. 허나 그 길은 금지된 길이
되었으며, 절 북쪽과 서쪽은 바위와 벼랑으로 막혀있고, 오로지 내가 올라온 동쪽 길과 근래
속세에 개방된 남쪽 길이 전부이다.
지금은 비록 뒷전으로 밀려났지만 인왕산은 한때 서울에서 잘나갔던 암장(암벽장)이었다. 서
울 유일의 암장이란 타이틀도 가지고 있었는데, 석굴암에서 시작하여 치마바위 정상까지 올라
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코스로 1968년 1,21사태 이후 인왕산 등산이 통제되었지만 암장은 군부
대에 허가를 받으면 누구든 가능했다. 허나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 불암산이 인기 암장으
로 부상했고 실내 암장까지 많이 들어서면서 이제는 거의 잊혀졌다.


▲  천향암(天香庵) 돌문

숨겨진 볼거리가 더 없을까 싶어 경내를 더 기웃거리니 북쪽으로 가늘게 이어진 산길이 보인
다. 마치 보물을 찾으러가듯 호기심과 기대감을 가득 품으며 그 길로 접어드니 바로 벼랑 길
(밑이 벼랑임)이 나오고 커다란 바위들이 기묘하게 서로 기대선 틈에 자연산 돌문이 나 있다.
서쪽은 그야말로 장대한 바위이고 오른쪽은 그 바위에 몸을 기댄 돌덩어리이다.
그 안으로 들어서면 바위에 둘러싸인 샘터와 기도처가 나온다. 이곳을 '천향암'이라 부르는데,
이름으로 봐서는 암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가건물 같은 것으로 대충 때우다가 사라진 듯 싶으
나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며 석굴암과 비슷하게 오랫동안 무속/산악신앙의 현장으로 쓰였을 것
이다. 지금은 석굴암의 부속 공간으로 딱히 주제는 없으나 샘터가 있는 것으로 봐서 용왕(龍
王)을 위한 공간으로 쓰이는 듯 싶다.
조그만 샘터에는 물이 고여 있으나 원효대사가 마셨다는 해골에 고인 물처럼 상태가 그리 좋
아 보이진 않는다.


▲  암벽에 감싸인 천향암 샘터

벼랑 길은 천향암에서 뚝 끊겼다. 얼핏 보니 북쪽으로 넘어가는 암릉길이 있는 듯 싶은데, 딱
히 안내문도 없고 햇님도 슬슬 커텐을 칠 준비를 하니 감히 살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북쪽
과 서쪽, 남쪽은 암벽으로 막혀있고, 오로지 동쪽만 트여있는 궁벽한 곳으로 여기서 바라보는
조망도 석굴암 못지 않다.


▲  하늘이 지은 기묘한 돌문

서울 한복판에 이런 자연산 돌문이 있다니 정말 신기할 따름이다. 인왕산을 수없이 들락거린
내가 이제서야 이곳을 오다니 그동안 인왕산을 정말 헛 다닌 모양이다. 이런 것을 두고 등잔
밑이 어두웠다고 하는 모양이다.


▲  천향암에서 바라본 일몰녘에 서울 도심

▲  석굴암과 인왕산을 뒤로 하며 (석굴암 계단길)

천향암에서는 왔던 길로 다시 나가야 된다. 바람소리와 낙엽 소리가 전부인 적막한 석굴암과
의 짧은 인연을 정리하고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날 것 같은 계단길을 내려왔다. 석굴암입구에
이르니 햇님은 퇴근 본능에 따라 철수를 했고, 달님이 자리를 이어받아 검은 도화지에 가녀린
한줄기 빛을 선사한다.

이렇게 하여 연말 인왕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그날 목적했던 인왕산의 미답처를
모두 지우긴 했으나 그 기억 또한 흐릿한 과거의 하나로 싹 사라지니 모든 것이 참 부질없는
것 같다.

* 인왕산 석굴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산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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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산에 포근히 감싸인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평창동~홍제천~부암동 나들이 (보현산신각, 박종화가옥, 홍지문, 옥천암, 산모퉁이)



'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평창동~부암동 나들이 '


▲  인왕산에서 바라본 평창동과 부암동


 

가을이 한참 숙성되던 9월의 끝 무렵, 친한 후배와 서울 도심 속의 전원(田園) 마을인 평
창동과 부암동을 찾았다.
평창동(平倉洞)하면 으리으리한 저택과 빌라가 먼저 떠올릴 정도로 서울의 대표적인 졸부
동네로 꼽힌다. 인근 성북동과 더불어 이 땅의 0.1%가 산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을 정도인
데, 이곳이 졸부의 성지(聖地)가 된 것은 북한산(삼각산)을 든든한 배경으로 삼은 빼어난
절경과 더불어 명당 자리로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하여 1950년대 이후 돈 꽤나 주무
르던 졸부들이 마구 몰려와 북한산의 살을 마구잡이로 뜯어내고 할퀴며 자리를 가리지 않
고 그들의 모래성을 세운 것이다.

평창동은 북한산으로 가는 길목이라 산꾼과 나들이객 수요가 많다. 하여 졸부들만의 폐쇄
적인 공간이 되는 참상은 면했다. 허나 10초가 멀다하고 나타나는 고래등 집에 온갖 잡동
사니 생각이 다 일어나 정처 없는 마음을 편치 않게 한다. 허나
그렇다고 너무 주눅은 들
지는 말자~!
제아무리 철옹성 저택이라 한들 대자연 형님 앞에서는 모래알 같은 하찮은 존재이기 때문
이다. 그러니 기죽지 말고 당당히 어깨를 피며 졸부들로 고통 받고 있는 평창동을 끌어안
아 보자, 또한 이곳에 서린 명당(明堂)의 기운도 조금씩 챙겨가도록 하자.

우리가
평창동을 찾은 것을 이곳에 서린 명소를 보고자 함이다. 우리 주제에 이런 모래성
을 구입하기는 완전 불가능하니 명소만 쏙 챙겨보고 이옷 동네인 부암동으로 넘어갔다.


 

♠  평창동에서 만난 명소들 (박종화 가옥, 보현산신각)

▲  평창동 박종화 가옥(朴鍾和 家屋) - 등록문화재 89호

평창동의 제일 번화가라 할 수 있는 세검정 새마을금고 주변(서울예술고등학교, 평창동주민센
터 정류장 맞은편)에서 평창11길을 따라 12분 정도 올라가면 평창동에 거의 흔치 않은 기와집
인 박종화 가옥이 마중을 나온다.

돈 냄새가 시끄럽게 진동하는 저택과 빌라 숲속에 별천지처럼 들어앉은 이곳은 현대 문학가인
월탄(月灘) 박종화가 살던 집이다. 원래는 악질 친일파인 이기원(李起元, 1880~1937)이 왜정
(倭政) 초기에 동대문 부근인 충신동(忠信洞) 55-5번지에 세운 것으로 그는 친일반민족행위자
704두<인(人)으로 쓰기도 아깝다>의 1두로 등재되어 있다. 또한 그의 아비인 이봉의도 왜왕에
게 남작(男爵) 작위를 받는 등 부자(父子)가 아주 쌍으로 매국노로 악명을 날렸다.

1937년 6월 이기원이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 떨어지자 박종화(이하 월탄)가 이 집을 매입해
분가를 했다. 그러다가 1975년 혜화동과 동대문을 잇는 도로(율곡로)가 뚫리면서 집이 그 대
지에 포함되자 평창동으로 옮겨 원형 그대로 복원을 했다. 그는 세상을 뜨던 1981년까지 이곳
에서 늘 펜을 놓지 않았으며, 그가 간 이후에는 자손들이 살고 있다.

※ 월탄 박종화(1901~1981)의 생애
월탄은 1901년 남대문 밖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집안 대대로 높은 벼슬을 누린 부유한 양
반가로 그의 할아버지인 박태윤은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벼슬을 그만두고 백지(白紙)와 장
지 등의 종이를 팔아 크게 돈을 불렸다. 그렇게 번 돈으로 인쇄소와 책방까지 차렸고, 집 사
랑채에 서당을 열어 집안과 지역 젊은이에게 한학과 신학문, 왜어(倭語)를 가르쳤다. 왜어와
신학문 같은 경우는 유능한 왜인을 초빙하여 강사로 삼았다.

월탄은 할아버지한테 10년 동안 한학(漢學)을 배웠고, 15살에 신학문을 배우고 싶다고 청하여
1년 동안 신학문과 왜어를 배워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 휘문중고교)에 3등으로 입학을 했
다. 여기서 홍사용(洪思容), 정백(鄭白) 등의 벗과 교류를 했으며, 무려 17살에 혼인을 했다.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친구와 함께 탑골공원으로 달려가 만세를 불렀으며, 1920년 학교를
졸업하자 문학동인지 '문우(文友)'를 발간했다. 그리고 1921년에는 '장미촌(薔薇村)' 창간호
의 그의 첫 작품인 '오뇌의 청춘'과 '우윳빛 거리'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창작의 길에
나선다.
1922년 백조(白潮)의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밀실로 돌아가다','만가' 등의 시와 '영원의 승방
몽'을 내놓았고, 1923년에는 조선 세조 때 활약했던 신숙주(申叔舟)의 부인을 주인공으로 한
'목매이는 여자'를 발표해 충신의 길이 얼마나 가시밭 길인지를 표현했다.

1924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첫 시집인 '흑방비곡'을 냈고, 이어 단편소설인 '순대국'과 '여
명','부세' 등을 차례대로 쓰면서 소설가로 변화를 꾀했다. 1936년 '금삼(錦衫)의 피','대춘
부'를 통해 역사 소설을 탁월하게 엮었으며, 1940년 '다정불심(多情佛心)'을 발표해 역사 소
설가로서 재량을 인정받기에 이른다. 1942년에는 수필집 청태집(靑苔集)을 냈으며, 왜정(倭政
)에 협력하는 나약한 지식인들이 늘어나는 세태를 비판하고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왜정과 거
리를 두었다.

1946년에는 동국대 교수와 서울신문사 사장을 역임했으며, 1947년 성균관대 교수와 서울시예
술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우익 진영의 대표자로 1949년 발족된 한국문학가협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 1955년 예술원 회장이 되어 제1회 예술원상을 받았으며, 1966년 제1회 5.16민족상을
수상하면서 받은 상금으로 월탄문학상을 창설, 같은 해 10월에 제1회 월탄문학상을 받았다.

1945년 이후 그의 손에서 태어난 작품은 무진장 많다. 해방과 더불어 냈던 '민족'은 왜정 시
절에 냈던 '여명','전야'와 함께 3부작에 해당하는 작품이었고 1946년에 '홍경래(洪景來)'를,
1947년에는 '청춘승리','논개(論介)'를 냈고, 1954년에 서울신문사 사장을 그만두고 임진왜란
시리즈를 다시 쓰기 시작하여 총 946회를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이후 '황진이(黃眞伊)의 역천(逆天)','벼슬길','여인천하'를 내어 인기를 모았고, 1961년 회
갑 기념으로 '월탄시선(月灘詩選)'을 출간했다. 1962년에는 '자고 가는 저 구름아','제왕3대
'를 연재했고, 1964년 '월탄삼국지(月灘三國誌)'를 한국일보에 4년 동안 연재했다.

1965년에 '아름다운 이 조국'을 중앙일보에, 1966년 '양녕대군(讓寧大君)'을 부산일보에 연재
했고, 1970년에 수필집인 '한자락 세월을 열고'와 기념 사화집(詞華集)인 '영원히 깃을 치는
산'을 내놓았다. 또한 1969년부터 1977년까지 8년 동안 조선일보에 연재한 '세종대왕'은 우리
나라 신문 소설 가운데 가장 많은 2,456회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말년에는 '화음격음(和
音激音)'과 회고록 '역사는 흐르는데 청산은 말이 없네' 등을 냈다.

1920년대 낭만주의 시인으로 출발했던 그는 1930년대 식민지 현실에서의 이상 추구를 역사소
설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민족의 역사적 주체성과 민족혼을 부각시키는데 크게 주력하
여 역사소설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다.

월탄은 인격적으로도 꽤 대인(大人)의 풍모를 보여주었다. 집안일을 하던 하인이 죽자 2일 동
안 글을 멈추고 애통해하며 직접 장례식을 치뤄주었고, 그 가족에게 많은 조위금을 건네 그들
을 위로했다. 또한 많은 문학인들과 교분을 쌓으며 술도 많이 마셨는데, 자제력이 강해 술이
취하면 즉각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한 그는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을 세운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의 외종 사촌형으로 간송의 문화 사업에도 크게 도움을 주기도 했다.

부유한 환경에서 살던 그였지만 돈 많은 티를 내지 않았고, 솜버선에 한복을 입고 하얀 고무
신을 신고 다녔다. 원고 기일을 한번도 어기지 않은 성실함으로 단골 신문사와 출판사가 많았
으며, 주위 사람들에게도 '돈을 뜻하는 '전(錢)에 창을 뜻하는 과(戈)가 2개나 들어있으니 조
심해야 된다'며 물질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늘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광주(光州)에 내려가면 제일 먼저 광주학생운동기념탑을 찾아 묵념을 했고, 인천(仁川) 자유
공원에 갔을 때 동행한 문인들이 맥아더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자 왜 다른 나라 사람 동상에
서 사진을 찍냐며 일행을 나무란 일화는 유명하다.

현대 문학의 산실이었던 박종화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 별채, 너른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 누마루를 조수루(釣水樓,
棗樹樓)라 부르며 여기서 '금삼의 피','대춘부','자고가는
저 구름아','세종대왕','아랑의 정조' 등 굵직굵직한 작품을 써내렸다. 그래서 월탄 외에 조
수루주인(釣水樓主人)이란 호도 가지고 있었다.

현재 집은 후손들이 살고 있어 내부 관람은 거의 어렵다. 굳게 닫힌 대문 앞에서 자존심을 곱
게 접고 발길을 접어야 했지. 벨을 눌러 간곡하게 관람을 청해도 되겠지만 그럴 의지와 배짱
까지는 없었고, 박종화에 대해서도 딱히 관심이 없다. 붉은 담장 너머로 다는 아니지만 지붕
과 부연이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으니 그 정도로도 족하다.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에
안으로 들어갈 인연이 생긴다면 그때 자세히 살펴봐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128-1 (평창11길 80)


▲  굳게 잠긴 박종화 가옥 대문

▲  기품이 돋보이는 박종화 가옥 내부 (문화재청 사진)

▲  보현산신각 입구 (입구에 큰 바위가 있음)

박종화 가옥에서 오르막길(평창11길)을 4~5분 정도 오르면 평창동의 지붕인 평창길이 나온다.
북한산둘레길의 일원인 평창마을길도 신세를 지고 있는 그 평창길을 따라 서쪽으로 3분 정도
가면 보현산신각을 알리는 안내문과 함께 고래등 같은 큰 바위가 마중을 한다.

덩굴옷을 걸친 그 바위 밑도리에는 기도처로 쓰이던 조그만 굴이 있다. 보현산신각을 보조하
던 공간으로 산신(山神) 할배가 소원을 잘 들어주는 곳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무당과 중생들이
찾아와 기도를 올렸다. 지금은 햇살도 들어오기 힘든 지하 아닌 지하가 되었지만 예전에는 앞
이 확 트인 공간으로 북악산(백악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나 평창동에 졸부들이 들어와 주
거지가 마구 형성되면서 바위를 전혀 배려하지 않고 그 앞에 골목을 내어 시야를 가로 막았다.


▲  고래등 같은 보현산신각 바위의 뒷모습

▲  평창동 보현산신각(普賢山神閣)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3호

큰 바위 옆구리를 지나면 의자가 여럿 설치된 조촐한 그늘 쉼터가 나온다. 그 너머로 조그만
석성(石城) 같은 돌담을 두룬 아주 조그만 기와집이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그 집이 평창동의
오랜 명소이자 신앙터인 보현산신각이다.

해발 180m 고지 숲속에 자리한 보현산신각은 이 땅에 흔하고 흔한 산신 제당이다. 보현봉 남
쪽 자락에 안겨 있어 '보현산신각'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북한산 산신각'이라 불리기
도 한다. 평창동 주민들이 동제(洞祭)를 지내던 곳으로 인왕산(仁王山)과 더불어 서울의 이름
난 무속(巫俗) 장소였는데, 지금은 무척 한가해졌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장안에 잘나가던
무속인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굿을 벌였다. 굿은 산신각 안에서 하지 않고 산신각 옆이나 입구
에 있는 바위에서 했으며 '산신각(보현산신각)에 올라갔다 왔다'란 말은 그 시절 잘나가던 무
당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이 산신각은 원래 남산신각(男山神閣)으로 언제 지어졌는지는 북한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대략 조선 후기로 여겨진다. 지금은 건물 1동이 전부이지만 예전에는 근처에 여산신각(女山神
閣)과 부군당(府君堂), 부군당에 딸린 신목(神木)이 있어 이 일대가 평창동 사람들의 신앙터
로 무척 애지중지되었다. 매년 음력 3월 1일에 동네 노인들이 돈을 모아 이곳에서 유교식으로
당제를 지냈으며, 제물을 집집마다 분배하여 뒷풀이를 했다.
허나 부군당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녹아 없어지고 여산신각도 1974년에 불에 타 없어지면
서 이 산신각에 통합되었다.

산신각은 나무로 만든 맞배지붕 건물로 달랑 1칸 밖에 안되는 매우 조촐한 당집이다. 굳게 잠
긴 내부에는 가로 97cm, 세로 108cm 크기의 여산신도(원래 여산신각에 있었음)가 봉안되어 있
는데, 산신은 청색 도포(道袍)를 입고 관을 썼으며, 왼손에 우선(羽扇)을 들었다. 뒤쪽에는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엎드려 있고, 왼편에는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무릎을 꿇고 천도복
숭아 3개를 든 쟁반을 들고 있다.
그런데 보통 산신하면 할배 산신을 받들기 마련이나 이곳은 특이하게도 할매 산신을 주인공으
로 했다. 그래서 그를 위한 산신각과 산신도(山神圖)를 두었으며, 여산신각이 없어지자 이곳
에 통합하여 주인으로 삼았다. 특히 여산신도는 천하의 유일한 유물로 가치가 높은데, 1923년
8월 24일에 김예안당(金禮安堂)이 그렸다는 기록이 있어 그때 기존의 그림을 버리고 새로 그
린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제단 위에는 종이 있는데, 막연히 정유년(丁酉年)이라 새겨져 있어 1897년 또는 1837
년으로 여겨지나 확실한 답은 아니다.

이곳은 흔한 산신각의 하나이지만 여산신을 봉안한 귀중한 신앙 유물로 산신을 받드는 산악신
앙(山岳信仰)과 마을 동제(洞祭)가 어우러진 현장이자 무속 신앙의 현장이다. 그래서 그 가치
를 인정받아 일찌감치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541-1


▲  석축 위에 자리한 보현산신각
산신각과 그곳을 둘러싼 돌담 대문은 동제 외에는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여기서는 열려라 참깨를 외쳐도 소용이 없음~~!

▲  보현산신각의 옆면

▲  위에서 바라본 보현산신각

▲  보현산신각 옆 돌담 계단길 - 돌담은 산신각 보호를 위해 근래에 씌운 것으로
돌담 대신 기와를 얹힌 흙담으로 했으면 더 정겹지 않았을까 싶다.


 

♠  홍제천(弘濟川)에서 만난 명소들 (홍지문, 옥천암)

▲  홍지문(弘智門)과 탕춘대성(蕩春臺城)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호

평창동에 대한 볼일을 마치고 부암동(付岩洞)으로 넘어오면 세검정교차로(상명대입구)가 나온
다. 여기서 홍은동(弘恩洞) 방면으로 2분 정도 가면 홍지문과 탕춘대성이라 불리는 성곽이 마
중을 나온다. (세검정교차로에서도 훤히 바라보임)

홍지문을 거느린 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잇는 산성(山城)으로 연산군이
검정 부근에 지은 탕춘대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한양(서울) 서쪽(정확히는 북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성(西
城)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겹성이란 별칭도 있었다.
이 성은 숙종(肅宗) 임금이 만약에 있을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서울의 방어력을 높이고
비상시에 북한산성 행궁(行宮)으로 신속히 줄행랑을 칠 수 있는 시간 확보를 위해 조성되었다.
1702년에
신완(申琬)이 성곽 축조를 제의했는데, 북한산성(北漢山城) 증축과 행궁 조성, 한양
도성 보수가 마무리되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짓고자 1715년 홍제천에 홍
지문을 먼저 닦았다. 그런 다음 1718년 8월 26일 성곽 공사에 들어갔으나, 겨울이 다가오면서
10월 6일에 일단 공사를 멈추었다가 1719년 2월 다시 공사에 들어갔다. 허나 처음보다 사업이
크게 축소되면서 3월에 공사를 종료시켰다.
그렇게 태어난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인왕산 북쪽 능선, 홍지문, 탕춘대능
선을 거쳐 비봉능선 서쪽 수리봉(향로봉 부근)까지 이어진 4km 규모이다. 원래는 북한산성까
지 싹 이으려고 했으나 비봉능선이 험준해 포기했으며, 북한산성 대남문에서 보현봉, 형제봉
능선, 북악산(백악산) 북쪽 능선을 거쳐 한양도성을 잇는 탕춘대성 동쪽 성곽도 계획했으나
모두 취소되었다.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 경계인 홍제천에는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을 두었으며, 탕춘대능선에
는 암문(暗門) 1개를 내었다. 그리고 성 안에는 훈련장인 연융대(鍊戎臺)와 선혜청(宣惠廳),
평창(平倉) 등의 창고를 설치했으며, 총융청(摠戎廳) 본부도 이곳에 두었다.
탕춘대성이 들어앉은 위치 대부분은 각박한 경사지로 거의 천험(天險)을 자랑한다. 하여 홍지
문을 제외하고는 성을 높이 구축하지는 않았으며, 현재는 인왕산 북쪽 능선과 홍지문, 탕춘대
능선에 성곽이 그런데로 남아있다. (여장은 홍지문과 남쪽 성곽 일부에만 남아있음)


▲  서쪽(홍은동)에서 바라본 오간대수문과 홍지문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은 인왕산과 북한산의 경계가 되는 홍제천 협곡에 지어진 것으로 탕춘대
성의 유일한 성문이다. (암문 제외) 한북정맥(漢北整脈)이 지나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한북문
(漢北門)이라 불리기도 한다.

200년 이상 별탈없이 살아온 홍지문은 1921년 1월에 지붕에 쌓인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
하고 내려앉고 말았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해 8월 홍제천의 물을 흘려보내는 오간
대수문(五間大水門)까지 모두 떠내려가면서 터만 아련하게 남아오다가 1977년 7월에 복원되었
다. 홍지문은 홍예 주변에 고색의 때가 탄 성돌만 옛날 것이며 때깔이 하얀 성돌은 1977년 복
원할 때 새로 끼어넣은 것이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문루까지 올라가 놀았던 기억이 난다. 허나 지금은 문화유산 보호를 위
해 문루와 오간대수문을 금지 구역으로 삼았으며, 오간대수문에서 탕춘대능선 방면 성곽 300m
정도 구간도 통제되어 탕춘대능선을 가려면 홍지동 주택가나 옥천암 뒷쪽에서 접근해야 된다.
문 남쪽은 세검정로가 지나고 있어 성곽이 아주 잠깐 단절되어 있다. 허나 그 길을 넘으면 성
곽은 다시 소소하게 율동을 부리며 인왕산으로 뻗어간다.
성문 앞뒤로 나무가 심어진 짧은 산책로가 놓여져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오간대수문 바로 밑
에는 최근에 산책로가 닦여져 오간대수문의 속살을 구경할 수 있다. 이 산책로는 세검정과 옥
천암은 물론 멀리 홍제천인공폭포와 사천교, 한강까지 연결된다. 또한 문을 경계로 성 안쪽은
종로구 부암동(홍지동), 바깥쪽은 서대문구 홍은동이다.


▲  북한산을 향해 힘차게 뻗어가는 탕춘대성 (탕춘대능선 남쪽 끝)

오간대수문 윗도리는 금지된 다리라 발을 들일 수 없지만 아랫도리는 홍제천 산책로가 닦이면
서 접근이 가능해졌다. 처음으로 살펴보는 오간대수문의 속살, 비록 하천에서 약간 비린내가
풍기긴 했으나 그 정도 냄새는 이미 익숙해진 상태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서울 사람임)

홍예문 위쪽에는 용머리가 새겨져 있다. 아무래도 물이 흐르는 수문이라 물을 관장하는 용을
수호용으로 넣은 듯 싶다. 5개의 수문 중, 북쪽 기준으로 1,2,5번째 문은 바닥에 돌이 입혀져
있고, 3,4번째 문은 홍제천이 흐르고 있다. 하늘에서 물폭탄이 내려 홍제천이 흥분하는 경우
에는 5개 문이 모두 수문이 되버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산4

  ◀  홍지문 천정에 그려진 와운문(渦雲紋)
신선의 오색구름처럼 영롱하게 그려진 구름의 
모습이 마치 물결의 거센 소용돌이를 보는 듯 
하다.


▲  홍제천 건너에서 바라본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홍지문에서 홍제천을 따라 서쪽으로 7분 정도 가면 하얀 암반을 앞에 내밀며 큰 바위에 살포
시 깃든 하얀 피부의 커다란 불상이 크게 아른거릴 것이다. 그가 바로 상서로운 관세음보살로
통하는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이다.
문화재청은 그를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으로 다루고 있으나 지역 사람들은 '보도각 백불'이라
많이 부르고 있다. (나도 그 명칭이 버릇이 되었음) 여기서 보도각(普渡閣)은 하얀 마애불과
바위를 보듬은 보호각의 명칭으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이다. 또
한 홍제천변에 있어서 옛날부터 '해수관음상'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으며 강제로 하얀 피부
가 된 19세기 이후에는 '백의관음(白衣觀音)'과 '백불' 등의 별칭이 추가되었다. 여기서 '백
불'은 구한말에 양이(洋夷)들이 그를 보고 'White Buddha'라고 불렀는데 거기서 유래된 것으
로 보는 견해도 있다.

마애불 옆에는 그를 관리하는 조그만 절, 옥천암이 둥지를 틀었으며, 그들에게 다가서려면 홍
제천에 걸린 보도교(普渡橋)란 유연한 곡선의 다리를 건너야 된다. 시멘트가 아닌 홍예 돌다
리였으면 운치가 참 진국이었을텐데 그 점이 참 아쉽다. 다리 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조촐한
문이 있는데, 바로 옥천암의 일주문(一柱門)이다. 일주문이 다리 끝에 달린 흥미로운 현장으
로 그 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보도각 백불(마애불)이, 오른쪽 언덕에 옥천암이 있다.

▲  보도각에 깃든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 보물 1820호

북한산(삼각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으며 홍제천 바람을 쐬고 있는 이 마애불은 서울에 전하는
8개의 오랜 마애불(磨崖佛)의 하나이자 달랑 4개 밖에 없는 고려시대 마애불로 고려 말에 조
성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여기서 조금 거리가 있는 안암동에 보타사(寶唾寺)란 작은 절이 있는데, 그곳에 옥천암 백불
과 비슷하게 생긴 하얀 피부의 마애불이 있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조성 시기도 비슷하여 같은
사람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여기서 가까운 승가사(僧伽寺)의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과 비슷한 계열의 작품으로 보기도 하며, 개성(開城)의 관음굴 석조보살반가상과 비교되는 고
려 말 불상 조각의 특징을 보여주는 존재로 평가받기도 한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서울로 천도하자 그를 찾아와 예불을 올렸다고 전하며 그
인연으로 조선 왕실의 주요 기복처(祈福處)가 되었다고 한다. 15세기에는 성현(成俔, 1439~
1504)이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옥천암 백불을 부처바위를 뜻하는 불암(佛巖)으로 기재
했다. 그것이 이곳에 대한 첫 기록이다.
임진왜란 때는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 권율(權慄) 장군이 여기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는
데 어리석운 왜군은 백불을 그만 조선군으로 잘못 알고 조총을 정신없이 쏘아댔다. 그렇게 탄
환을 다 소비한 왜군이 혼란에 빠지자 그때를 틈타 그들을 모두 때려잡았다는 이야기가 홍제
천의 물결을 따라 전해오고 있다. 이는 백불을 서울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띄우고자 근처에서
일어났던 권율 장군의 왜군 토벌전을 끌어들여 지어낸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高宗)의 어머니인 부대부인민씨(府大夫人閔氏)까
지 찾아와 아들의 천복(天福)을 빌었다고 한다. 그 기념으로 조개껍데기를 태워서 만든 호분
(胡粉, 여자들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으로 불상 전체를 하얗게 도배하면서 이때부터 팔자에도
없는 백불이 되버린 것이다. 그렇게 하얀 피부의 소유자가 되면서 마애불은 다소 젊어 보이게
되었으나 대신 문화유산의 큰 매력인 고색의 기운이 다소 꺾여 그리 나이가 지긋해 보이지 않
는다.


▲  보도각과 붙임바위의 뒷모습

백불의 높이는 5m로 그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예로부터 영험이 있는 마애불로 명성이 높았다.
그 앞에 닦여진 공간에는 그의 영험을 빌리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며 특히 입시철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다.

백불에게 기댈 수 있는 자리를 내준 커다란 바위는 '붙임바위'라고 불리는데, 생긴 모습부터
가 영 예사롭지가 않다. 부암동의 유래가 된 부침바위와 비슷하게 돌(또는 동전)을 바위에 붙
이거나 위로 던져서 바위 위에 철썩 붙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바위에 매달린 작은 돌
과 동전이 적지 않게 보인다. (동전은 옥천암에서 부수입거리로 계속 수거하고 있어서 요즘은
별로 안보임) 그래서 불상이 이곳에 깃들기 이전부터 민간신앙의 소박한 현장으로 쓰였을 것
이다.

보도각 앞에는 홍제천과 경계를 이루는 돌담이 둘러져 있었으나 2016년 이후 그 돌담을 밀면
서 정면이 확 트였다. 키 작은 난간이 돌담 대신 둘러져 있으며 난간 바로 앞에는 나무로 다
져진 홍제천 산책로가 닦여져 있고 그 앞 홍제천에는 하얀 피부의 잘생긴 반석들이 가득하다.
한때 시내 경승지로 바쁘게 살았으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비린내 풍기는 하천으로 떨어지면
서 그 반석이 다소 아깝게 되었다. 아비규환의 속세(俗世)를 상징하는 그런 하천을 걱정스럽
게 굽어보며 중생을 걱정하는 불상의 모습은 자식을 걱정하는 어미의 따뜻한 모습 같다.

그의 몸은 온통 새하얗지만 그의 장식물은 특이하게도 주황색으로 되어 있다. (예전에는 모두
하얀색이었으나 이후 금색으로 갈았고 2016년 이후에 주황색으로 갈았음) 오른손에 걸린 팔찌,
삼도(三道) 아래로 커다란 목걸이, 주렁주렁 매달린 장식으로 무거워 보이는 보관(寶冠), 그
리고 귀걸이까지 정말 관세음보살이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 그의 얼굴은 거의 포근한 인상으
로 중생들의 소원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다 들어줄 것만 같다. (현실은 하나도 안들어주
었음)


▲  마애보살좌상의 잘생긴 얼굴과 윗도리

홍제천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은 '一'자 모습으로 지그시 떠 있으며, 긴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닿는다. 살짝 다문 입술은 립스틱을 넘치도록 바른 듯 상당히 찐하다. 보살상의 몸을 덮고 있
는 옷 주름은 세세히 묘사되어 마치 진짜 옷을 걸친 듯 하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선보이고 있고 왼손은 무릎에 대고 있는데 왼
팔이 너무 길어보이며 앉아있는 모습치고는 아랫도리가 좀 넓게 표현되어 신체 균형이 좀 맞
지 않아 보인다.

백불 앞에는 중생들이 기도를 올리며 소망을 슬쩍 내밀고 있었다. 그들의 갖은 소망을 접수만
하느라 힘도 제법 들텐데 표정 하나 일그러지지 않고 한결 같은 표정으로 그들을 맞이하며 소
망 하나라도 누락될까봐 귀를 쫑긋 세운다. 소망이 이루어질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는 모
르지만 그 정성이 백불과 하늘을 감동시켜 나를 포함한 중생들의 소망이 모두 이루어지길 간
절히 기원해 본다.


▲  백불 옆에 자리한 옥천암(玉泉庵)

백불 동쪽에는 그를 든든한 밥줄로 삼은 옥천암이 자리해 있다. 백불이 관세음보살이라 자연
히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칭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3대 관음도량으로 양양 홍련암(紅蓮庵
), 남해 보리암(菩提庵), 강화 석모도 보문사(普門寺)를 꼽는다. 허나 옥천암도 관음도량으로
서의 자부심이 대단한지 비공식적으로 자신들을 포함해 4대 관음도량의 하나로 우기기도 한다.

이곳에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훨씬 이전부터 약효가 있다는 샘물(혹 탄산약수가 아닐까?
)이 있어 환자들이 몰려들었다고 전하며, 그 연유로 옥처럼 맑은 샘물, 옥천암을 칭하게 되었
다고 전한다. 허나 그 약수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진작에 사라졌고, 절 앞을 흐르는 홍제
천 또한 세월에 고되게 대이면서 그런 모습은 이제 전설의 한 토막이 되고 말았다.

이 절은 언제 지어졌는지는 모른다. 다만 인근에 조선 초기까지 잘나갔던 장의사(藏義寺, 세
검정초교에 있었음)와 사현사(沙峴寺) 등의 쟁쟁한 절들이 있어 백불을 관리하는 부속 암자로
지어진 듯 싶으며, 세검정 맞은편에는 혜철선사(惠哲禪師)가 1396년에 태조의 도움으로 세웠
다는 소림사(小林寺)가 있는데, 그 절의 부속암자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모두 부질없는 답이
다.

이곳의 본격적인 사적(事績)이 등장하는 것은 1868년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명으로 정관(
淨觀)이 관음전(觀音殿)을 세워 천일기도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1927년에는 주지 이성우(
李成祐)가 칠성각(七星閣)과 관음전을 지었으며, 1932년에 큰방 6칸과 요사(寮舍) 3칸을 고쳤
다.
1942년에는 주지 동봉(東峰)이 관음전을 수리했으며, 이후 삼성각, 요사 등을 추가로 갖추었
으나 1987년 삼성각이 소실되고 1988년에 법당인 수덕전(修德殿)을 지으면서 삼성각의 기능은
수덕전에 통합되었다. 1989년에 종각을 만들고 1990년 설법전(說法殿)을 지어 요사의 기능도
겸하게 했으며, 1996년에 홍제천에 보도교란 다리를 놓고 1998년에 일주문을 달았다.

북한산(삼각산)의 서남쪽 끝으머리를 잡으며 홍제천변에 둥지를 튼 조그만 절로 절 확장이 좀
어렵다. 바로 동쪽에는 속세의 주택가가 있고 뒤에는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된 북한산(삼각산
) 자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내가 무지 답답하다. 또한 백불 외에는 오래된 문화유산이 없
고 주택가와 접해 있어 산사의 내음은 좀 떨어진다.

* 옥천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1동 8 (홍지문길 1-38 ☎ 02-395-4031)


 

♠  부암동 산모퉁이까페

▲  언덕에 자리한 산모퉁이

창의문(자하문)에서 백석동천(백사실계곡), 능금마을로 인도하는 부암동 산복도로(백석동길)
를 10분 정도 오르면 아담하게 수식된 별장 같은 산모퉁이 까페가 모습을 비춘다. 서울 도심
과 인왕산이 바라보이는 언덕배기에 뿌리를 내린 이 까페는 갤러리를 갖춘 갤러리까페로 2007
년 MBC에서 방영된 드라마 '커피프린스1호점' 촬영지로 유명세를 탄 곳이다.

이곳은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원래는 인사동(仁寺洞)에 있는 목인박물관 유물의 수장고
이자 작업실이었다. 그러다가 커피프린스1호점 촬영지로 절찬리에 쓰이면서 세상에 주목을 받
았고<그 드라마에서 '최한성'이란 인물의 집으로 나왔음> 시청자들로부터 누구나 찾을 수 있
는 공간으로 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하면서 목인박물관장은 갤러리를 갖춘 까페로 꾸며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니까 그 드라마의 후광(後光)으로 어두컴컴했던 창고가 새로운 명소이자 돈을
쓸어 담는 꿀단지로 찬란한 변신을 한 것이다.

많은 까페가 서양식 이름을 쓰는데 반해 이곳은 순수한 우리말인 '산모퉁이'를 까페의 이름으
로 삼았다. 그래서 적지 않게 정감이 간다. 산모퉁이란 이름은 북악산(백악산) 산모퉁이에 자
리해 있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  산모퉁이 2층 라운지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까페 정원에는 문인석을 비롯하여 아시아의 석인상과 동물 모양의 석상(
石像), 조그만 자동차 모형과 옛날 디자인의 노란색 자동차가 뜨락을 채우고 있다. 지하 1층
은 갤러리로 아시아 곳곳에서 가져온 예술품이 진열되어 있어 조그만 미술관을 이룬다. 물론
여기서도 차를 마실 수 있다.

1층에는 카운터가 있으며, 여기서 차를 주문하면 된다. 1층과 2층은 차를 마시는 라운지로 2
층 옥상에는 조망이 일품인 야외데크가 있어 산 아래 펼쳐진 부암동의 전원 풍경과 창의문 너
머로 펼쳐지는 서울 도심을 바라보며 차 1잔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 특히 햇님이 휘장을 치
고 몸을 숨기는 밤에는 서울의 숨막히는 야경(夜景)을 즐길 수 있으며, 분위기를 강조한 까페
라 청춘남녀의 발길도 빈번하다.

이곳에서 파는 것은 커피류와 홍차, 쿠키, 케익 등으로 유명세 때문인지 시중보다 가격은 조
금 비싸다. 얄미운 수준의 가격이지만 이곳의 명성과 분위기 때문에 사람들의 발길은 물처럼
끊기지가 않는다. (영업시간 11시~22시)


▲  까페 뜨락에 놓인 산모퉁이의 모델, 노란 자동차

까페 앞뜨락에는 이곳에 모델이자 상징인 노란 자동차가 바퀴를 접고 쉬고 있다. 드라마에 나
온 차량으로 까페를 찾은 사람들의 모델이 되어주고 있는데, 저 차량을 보는 순간 우리나라가
아닌 20세기 초반 유럽이나 미대륙의 어느 별장이나 집에 들어선 기분이다. 차 하나의 이렇게
기분이 달라지다니 까페 주인의 미적 감각이 대단하다 여겨진다.


▲  까페 현관에 자리한 2마리의 동물상
호랑이로 보이는 저들의 표정은 너무 익살스럽고 밝은 모습이다. 까페의
수입도 상당할 것이니 그래서 기분이 좋은가 보다.

▲  말 모양의 석상 2기

▲  문인석(文人石) 2기와 조그만 장난감 차

▲  커피프린스1호점 촬영 소품과
촬영 장면을 담은 그림 4장

▲  지하1층 현관에 있는 자태가
고운 호랑이상


▲  산모퉁이에서 일행들과 마신 커피들의 집합

커피에는 거품으로 꽃을 비롯한 다양한 문양을 넣어 하나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 문양이 아름
다워 후루룩 마시기에 아까운 마음도 들지만 우리네 인생살이가 바로 저 거품의 문양처럼 부
질이 없다. 문양이 아름답다 한들 얼마나 가겠는가? 흐트러지면 형편없이 사라지는 것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97-5 (☎ 02-391-4737)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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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9년 4월 3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9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상큼한 경승지를 많이도 간직한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 둘러보기 ~~~ (세검정, 석파랑, 석파정별당, 홍지문, 옥천암,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볼거리가 풍성한 서울 도심 속의 전원 마을 ~
부암동 산책 '

▲  인왕산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부암동


 

하늘 높이 솟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 그리고 인왕산(仁王山) 사이로 움푹하
게 들어간 분지(盆地)가 있다. 그곳에는 수려한 경치를 지닌 부암동(付岩洞)이 포근히 안
겨져 있는데서울 도심과는 고작 고개(자하문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가까운 거리라 '
곳이 정녕 서울이 맞더냐?' 의구심을 던질 정도로 도심과는 생판 다른 전원(田園) 분위기
를 지니고 있다.

부암동은 3개의 뫼 사이로 간신히 비집고 들어온 세검정로와 자하문로를 중심으로 가늘게
시가지가 조성되어 있을 뿐, 6층을 넘는 건물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대부분 정원이 딸린
주택이거나 빌라들이며, 밭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특히 산자락에 터전을 일군 집들은 지
방의 시골 마을이나 산골 읍내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진하게 선사한다.
도심이 바로 코 앞임에도 이런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은 지정학적 위치로 오랜 세월 개발제
한에 묶인 탓이다.
이렇듯 도심과 가까운 지리적 위치와 그곳에 깃든 아름다운 풍경으로 조선 초부터 양반사
대부와 왕족들의 별장 및 피서지로 크게 각광을 받았다. 자연에 동화되어 살고 싶었던 그
들의 팔자 좋은 바램은 부암동 곳곳에 그림 같은 경승지와 흔적을 빚어놓았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부암동에는 오래된 볼거리가 풍부해 옛 것과 자연에 목말라하는 나그네를 유
혹한다. 북악산 북쪽 백사골(백사실)에는 옛 별서(別墅) 유적인 백석동천(白石洞天)이 숨
겨져 있고, 백사골 상류에는 도심 속 두메산골로 통하는 뒷골마을(능금마을)이 강원도 산
간의 분위기를 선사하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현장이자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부질
없는 야망이 서린 무계정사터,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구한말에 지어진 반
계 윤웅렬 별장, 인왕산 자락의 경승지인 청계동천(淸溪洞天), 석파정의 별당과 순정효황
후의 집이 하나로 묶여진 석파랑 등이 있다.
그 외에 응선사 산신도(山神圖), 성불사 금동보현보살좌상 등의 불교문화유산이 있고,
울미술관, 환기미술관, 자하미술관 등의 미술관, 산모퉁이 등 분위기를 내세운 까페와 찻
, 온갖 식당들로 즐비하다.

부암동 북쪽으로 흘러가는 홍제천(弘濟川)1970년대까지 서울 시민들의 소풍, 피서지로
각광을 받던 곳으로 세검정, 장의사(藏義寺)터 당간지주(幢竿支柱), 춘원 이광수(春園 李
光洙)의 별장터, 탕춘대성과 홍지문이 있다. 또한 서쪽으로 조금 확장하면 옥천암과 그곳
에 깃든 하얀 피부의 마애보살좌상이 있다.
서울 장안에서 4대문 안을 제외하고 문화유적과 볼거리가 많이 산재한 동네로 넉넉잡아 5
~6시간 정도면 상당수의 명소를 둘러볼 수 있다. 물론 그 이상의 시간을 던져 더 많은 곳
을 더 여유롭게 둘러보는 것도 좋다.

부암동은 나의 즐겨찾기의 1곳으로 그곳에 퐁당퐁당 빠진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봄의 한
복판을 맞이하여 다시 부암동으로 들어가 홍제천을 따라 여러 명소를 흔쾌히 사진에 담았
고 그 명소를 요리하여 이렇게 글로 다시 내놓는다.


 

♠  도성 밖 경승지이자 시민들의 소풍/피서지로 오랫동안 인기를 누렸던,
허나 개발의 칼질로 이제는 이름만 남은, 세검정
(洗劍亭)
-
서울 지방기념물 4

신영동3거리에서 홍은동 방면으로 5분 정도 걸으면 멋드러진 바위에 걸터앉아 홍제천을 바라
보고 선 단아한 모습의 세검정이 마중을 한다.

세검정은 팔작지붕을 지닌 'T'자형 정자로 연산군이 1506년 탕춘대(蕩春臺)를 조성하면서 좌
우로 흐르는 물을 가로질러 돌기둥을 세워 옆으로 긴 누각을 세우니 그것이 세검정의 시작이
라고 한다. 물론 그때는 세검정이라 불리지 않았다.
세검정의 세검(洗劍)은 칼을 씻는다는 뜻이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통치에 쓸데없이 불
만을 품은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괄(李适) 같은 것들이 여기서 광
해군의 폐위를 모의하고 그 결의를 다지고자 칼을 물에 씻었다고 한다
그들은 역촌동(驛村洞) 별서에 있던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을 앞세워 자하문(창의문)을 뚫
고 도성(都城)을 침범, 창덕궁(昌德宮)을 점령하여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군주로 옹
립한 이른바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저지른다. 이렇게 정권을 빼앗은 서인 일당은 반역을 모의
하고 칼을 씻었던 현장을 길이길이 추억하고자 정자 이름을 세검정이라 한 것으로 여겨진다.

숙종(肅宗) 시절,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축성하던 군사들의 휴식처로 다시 세웠다고 하며 영
조 시절인 1748년 총융청(摠戎廳)이 탕춘대 자리로 이전되면서 현재의 세검정이 지어졌다. (
이때 새로 정자를 지었다고 함)
이후 이곳은 자하문 밖(자문 밖) 경승지로 명성을 누렸는데 1749년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이 벗 25명과 여기서 봄놀이를 가졌으며, 1790년 정조 임금이 연융대(鍊戎臺)에서 활쏘기 시
험을 참관하고 세검정에 들렸다가 정자에 걸린 영조의 어제시(御製詩) 현판을 보고 시를 남기
니 내용은 이렇다.

군사 정돈하는 뜻으로 이 정자에 임어(臨御)하니
북한산 높은 하늘에 뿔피리 소리도 맑구나
사랑스럽다 근원이 있는 샘물은 매우 힘차서
시원한 물 한줄기에 온 산이 쩡쩡 울리네

1791년 여름,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이곳을 다녀가 세검정의 명물인 물구경을 했다. 1941
화재를 만나 겨우 주춧돌 하나만 남아있던 것을 1977년 겸재 정선(謙齋 鄭敾)'세검정도'
참조하여 복원했다. <세검정은 '세검정터'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기념물 4로 지정되어 있음>

▲  옆에서 바라본 세검정

▲  세검정의 뒷모습

세검정은 규모는 작지만 홍제천과 차일암, 북한산(삼각산)의 시원스런 숲이 서로 어우러진 그
림 같은 현장이다. 또한 질 좋은 바위들이 많아 덕수궁(경운궁) 석조전(石造殿) 기초공사 때
이곳 화강암을 채취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19세기 말 이후에는 양반과 귀족 외에 일반 백성들도 나들이로 많이 찾아왔으며, 서울 시내의
여러 신식 학교들도 이곳으로 소풍을 왔다. 특히 18995월에는 이화학당(梨花學堂) 여학생
들이 여기로 소풍을 왔는데 그것이 이 땅 최초의 여학생 소풍으로 당시 '조선 그리스도인 화
'에는 그때의 사연을 이렇게 적고 있다.
'정동 이화학당 여학도들이 1년 동안을 애쓰고 공부하다가 봄빛을 따라 창의문(자하문) 밖으
로 화류(花柳) 구경 갔더라 하니 우리가 매우 치하하는 것은 여학도의 화류는 500년에 처음이
..'

왜정(倭政) 이후, 시민들의 소풍 및 피서지로 발디딜 틈이 없었고, 세검정 주변 신영동과 홍
지동은 자두와 능금 명산지로 유명하여 여름만 되면 그들의 달달한 향기가 온 동네에 진동했
. 지금으로서는 거의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을 세검정이 지녔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착했던 세검정은 1970년 이후 모진 변화를 강요 받게 된다. 천박한 개발의 칼질
이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부암동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하여 한적했던 동네에 집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서면서 그들이 내뱉은 생활폐수로 세검정을 윤
기 나게 했던 홍제천은 악취가 진동하는 저주받은 하천으로 전락했고, 능금과 자두가 자라던
곳도 주택 개발에 밀려나 자취를 감추었으며, 세검정 옆을 지나는 도로(세검정로)가 확장되면
서 운치가 적지 않게 깎여나갔다.

현재 세검정은 그 뒷통수를 지나는 차량들의 소음과 매연, 그리고 아직도 덜 걸러진 홍제천의
쾌쾌한 냄새로 매일 고통을 받고 있다. 홍제천이 예전보다 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비린
내는 여전하며 하천 너머로 주택들이 가득해 옛날의 운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긴 서울 땅
에서 천박한 개발의 칼질에 희생되거나 고립된 경승지가 어디 한둘이랴. 너무 사람과 개발만
생각하여 일을 저지르다보니 옛 경승지와 자연을 전혀 배려해주지 못했던 것이다.


▲  세검정의 오랜 단짝, 차일암(遮日巖)

세검정 밑에는 하얀 피부의 넓적한 반석(磐石)이 누워있는데 이 바위가 조선시대에 사초를 깨
끗히 세초(洗草)했던 차일암이다.
세초란 조선왕조실록의 모태가 되는 사초(史草)를 실록(實錄)으로 편찬한 다음, 사초에 적힌
글씨를 물로 씻겨 지우고 그 종이를 다시 쓰는 것이다. 그것을 마치면 뒷풀이로 세초연(洗草
)을 가졌는데 이때 바위에 햇빛을 가리는 천막인 차일(遮日)을 치며 잔치를 했다. 하여 차
일암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차일암에는 차일 기둥을 세우고자 파놓은 구멍들이 있으며 오랫동안 세검정을 수식하며 서울
장안의 이름난 경승지이자 피서지로 바쁘게 살았었다. 무더운 날씨에 벌러덩 누워 한잠 청하
고 싶을 정도로 잘생긴 바위이나 주변 환경이 고약하게 변한 탓에 이제는 그러기가 곤란해졌
. 비록 인간들이 주변에 씌워놓은온갖 굴레들은 어쩌지 못해도 홍제천의 수질만큼은 더 깨
끗하게 거를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것도 여전히 어려운 모양이다.

세검정에서 홍제천을 따라 동쪽으로 200m 남짓의 산책로가 닦여져 있으며, 그 길의 끝에는 간
단하게 몸을 풀 수 있는 운동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근래 세검정 밑에서 세검1교 밑도
리로 징검다리가 놓였는데, 그 다리를 통해 홍제천 옆 산책로를 따라 홍지문 방면으로 이동할
수 있다. 다만 물이 아직 깨끗하지 않으니 손이나 발은 담구지 말자.


▲  늦가을과 겨울의 경계에서 서성이는 세검정 산책로

▲  세검정 동쪽 홍제천 산책로
빌라 너머로 보이는 산자락에 부암동의 꿀단지, 백사실계곡(백사골)이 숨겨져 있다.


세검정 찾아가기 (20184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번 출구)에서 110, 153번 버스를 타고 세검정(상명대) 하차
* 지하철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로 세검정(상명대) 하차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번을 타고 세검정(상명대)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 168-6 (세검정로 244)

         ◀  탕춘대(蕩春臺)터 표석
탕춘대는 1506년 연산군이 세운 누대(樓臺)
홍제천 바위에 자리했다. (표석은 그 위치가
아님) 이후 영조 시절에 여기서 군사를 훈련시
키면서 연융대(鍊戎臺)로 이름이 갈렸다.
(세검정 동쪽 길가)

         ◀  탕춘대 한지마을터 표석
조선 때 닥나무로 종이를 만들던 조지서(造紙
) 소속 사람들이 살던 마을이다. (세검정초
교 정류장 부근)


 

♠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에서 홀로 떨어져 나온 기와집,
석파정 별당(石坡亭 別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3

세검정을 둘러보고 서쪽으로 조금 가면 상명대입구인 세검정교차로이다. 여기서 서남쪽 길 건
너편으로 고풍스런 멋이 깃들여진 고래등 기와집이 눈에 들어올 것인데, 그 집이 석파정 별당
을 품고 있는 석파랑(石坡廊)이란 고급 한정식당이다.

지금은 비록 식당이지만 원래는 서예가이자 문화유산에 조예가 깊었던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
, 1903~1981)의 별서였다.
그는 1945년 왜열도로 건너가 왜인 학자 후지쓰카 지카시가 가지고 있던 추사 김정희(金正喜)
의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를 천신만고 끝에 받아온 인물로 유명하며, 6.25시절 서울을 점령
한 북한이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담긴 문화유산을 죄다 빼돌리려고 하자 혜곡 최순우(
谷 崔淳雨)와 함께 뛰어난 재치로 문화유산의 강제 북송을 막아내기도 했다.

소전은 금수저 출신(전남 진도 대지주의 아들임)으로 1963년 이곳에 별서를 지었다. 집을 새
로 짓지 않고 도심에 있던 김옥균(金玉均) 가옥, 박영효(朴泳孝) 가옥, 이완용(李完用) 별장,
기생 나합(羅閤) 양씨의 집 등의 한옥을 구입하여 그 자재로 집을 지었다. 또한 태평로 확장
으로 덕수궁(경운궁)의 동쪽 돌담이 철거되었을 때 이를 모두 매입해 석파랑 돌담과 정원 축
대를 쌓을 때 사용했는데 자그마치 트럭 30대 분이었다고 한다. (운현궁 돌담도 사들였음)

그의 별서는 1969년 완성을 보았으며, 1958년에 매입한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의 옥인
(玉仁洞) 집을 별서 북쪽에 두고, 같은 해에 흥선대원군의 별장, 석파정(石坡亭)에서 가져
온 별당은 뒤쪽에 두었다. 또한 당시로는 그리 흔치 않던 서양개 세퍼드를 여러 마리나 키우
고 있었다고 하니 그의 재력이 엄청났음을 보여준다,

자기의 별서를 조그만 한옥 전시장으로 꾸민 소전은 1981년 세상을 떴고 그의 후손이 가지고
있다가 1993년 주인이 바뀌면서 비싼 한정식당으로 바뀌었다. 석파정 별당의 이름을 따서 석
파랑이란 간판을 내걸었으며 오랫동안 손님 외에는 내부 접근이 어려웠으나 2000년대 이후 빗
장이 열려 마음 편히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덕에 이곳은 부암동의 주요 명소로 크게 존
재감을 드러내어 사진쟁이와 답사객의 발길이 늘고 있다. 허나 이곳은 엄연히 개인 식당이기
때문에 별당을 비롯한 건물 내부는 마구 들어가서는 안되며, 18시나 일몰 이후에는 식당 영업
을 위해 관람을 가급적 피해주기 바란다.


▲  석파랑에서 바라본 석파정 별당

석파랑 뒤쪽 높은 곳에 자리한 석파정 별당은 맞배지붕의 ''자 형태로 3개의 방으로 이루어
져 있다. 가운데 큰 방이 흥선대원군의 방이고 건너 방은 손님을 접대하던 공간이며 대청방은
그의 특기인 사군자(四君子)의 난초를 그릴 때만 특별히 사용했다고 전한다. 사랑채의 마루
안쪽에는 난간을 설치해 고급스러운 한옥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외벽은 벽돌로 도배해
속살을 가리고 가운데에 동그란 창을 냈다. 이는 청나라의 건축 양식을 부분 반영한 것이다.

소전에게 별당을 빼앗긴(?) 석파정은 오랫동안 비공개로 일관하다가 2012년 겨울에 비로소 공
개되었다. (서울미술관 개장으로 개방됨) 문화유산은 제자리에 있어야 된다는 법칙에 따라 별
당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마땅하나 서로 떨어진지 60년이 넘은 상태고 서로 소유자가
다르다보니 이 또한 쉽지가 않다. <석파정은 서울미술관 소유, 석파정에서 떨어져 나온 별당
은 석파랑 소유임>


▲  석파정 별당 쪽마루와 섬돌
대청방 문을 살며시 열면 그 안에 열심히 난초를 그리고 있는 대원군 할배가 있는 것은
아닐까? 섬돌에 신발들이 있는 것을 보니 가운데 방에서 사람들이 한정식을
먹고 있는 모양이다.


석파정 별당은 현재 식당의 일부로 쓰이고 있다. 결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던 대원군의 별
장이 졸지에 식당 손님들 밥먹는 장소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별탈 없이 깨끗하게 보
존되고 있으니 이 정도는 뭐 봐줄 만은 하겠다. (아직 방 내부는 구경하지 못했음)
별당으로 다가서는 방법은 석파랑 정문에서 접근하거나 석파랑 전용 주차장에서 스톤힐로 이
어지는 돌계단을 타고 들어가면 된다.


▲  석파랑 본채 동쪽에서 바라본 석파정 별당과 스톤힐 정문

별당 옆에 조성된 돌계단과 돌문, 성곽처럼 다져진 석축은 석파랑에서 스톤힐이란 건물을 지
으면서 닦은 것들이다. 스톤힐(Stone hill)은 이탈리안 음식과 와인을 취급하는 식당으로 전
통과 고풍스런 멋이 깃든 석파랑과 완전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데, 그 옆에 빨간 피부
를 지닌 홍지동 산신각이 있다.
돌의 언덕을 뜻하는 '스톤힐'에 걸맞게 하얀 돌로 그 길목을 꾸민 것이 참 이색적이다. 하지
만 소나무가 무성한 주변 풍경과는 그리 어울려 보이지 않으며, 스톤힐을 만들면서 석파정 별
당의 석축까지 진하게 다져놓아 마치 성곽 위에 집처럼 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  150년 이상 묵은 석파랑 감나무 (가운데 나무)

▲  활짝 열린 석파랑 대문(정문)
지금은 모두에게 개방된 착한 문이지만 예전에는 비싼 밥을 먹으러 오는
손님들에게만 입을 벌리는 차가운 문이었다.

▲  경복궁에서 가져온 만세문(萬歲門)

석파랑 본채는 순정효황후의 집을 옮겨온 것으로 청나라 천진(天津)에서 가져온 청나라식 
벽이 그대로 남아있다. 뜨락에 세워진 만세문은 고종(高宗)이 황제 위에 오른 것을 기념하고
1898년 경복궁에 세운 것인데 심술 고약한 왜정이 이를 매각하자 소전이 매입하여 옮겨놓
은 것이다.
비록 제자리는 잃었지만 소전 덕분에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궁궐 건축물의 고품격이 고
스란히 배여있다. 그리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뜨락에는 곳곳에 박석(薄石)을 깔아 돌길을 냈
으며 조그만 절구통과 다양한 석물, , 나무 등을 심어놓아 눈을 심심치 않게 해준다.


▲  석파랑의 중심인 본채
최대 50명까지 밥 손님 수용이 가능하며, 석파랑의 값비싼 한정식을 지어내는
부엌이 이곳에 들어있다.


※ 석파정 별당(석파랑) 찾아가기 (2018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 시
  내버스를 타고 상명대입구(세검정교회) 하차 (1,2호선 시청역 4번 출구에서 1711, 7016
  이용)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번 출구)에서 110, 153번 시내버스로 세검정(상명대) 하차, 도보 2~
  3
* 석파랑 홈페이지는 위의 석파랑 본채 사진을 클릭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125 (자하문로 309, 석파랑 ☎ 02-395-2500)


▲  하림각 건너편 길가에 자리한 부침바위터(付岩址)

부침(붙임)바위는 부암동의 지명 유래가 된 유명한 바위이다. 바위 피부에 난 구멍에 돌을 대
고 비비면서 소원을 빌거나 바위에 붙인 돌에서 손을 떼었을 때 그 돌이 척 붙으면 아들을 낳
거나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와 아들을 원하는 여인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옛날부터 뿌리 깊게 박힌 아들 선호 사상이 빚어낸 기자신앙(祈子信仰)의 애뜻한 현장으로 바
위 높이는 2m 정도 되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 잘 남아있었으나 개발의 칼질에 무참히 난도
질을 당해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바위터에 표석을 세워 그가 있던 자리임을 아련하
게 전해줄 따름이며, 세검정교차로 공원에 그를 추억하는 표석을 세웠다. 허나 아무리 그런다
고 강제로 사라진 그가 돌아오지는 않는다.
서울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잘생긴 바위가 참 많았는데, 개발만 앞세운 도시화
의 거친 물결과 인간의 욕심으로 많은 바위가 세월의 저 편으로 강제로 사라지고 말았다.
런 바위 가운데 여기서 가까운 응암동(鷹岩洞) 백련산(白蓮山) 자락에는 매 모양의 잘생긴 매
바위가 있었는데 땅값을 노린 집주인이 무식하게 파괴해버렸다.


 

♠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이어주며 도성의 수비력을 높였던
탕춘대성과 홍지문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


▲  고된 세월의 때와 하얀 피부가 공존하는 홍지문

석파랑을 둘러보고 홍은동 방면으로 2분 정도 가면 홍지문이란 성문과 탕춘대성이라 불리는 성
곽이 마중을 나온다. (석파랑 옆 세검정교차로에서 훤히 바라보임)

홍지문을 거느린 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잇는 산성(山城)으로 연산군이 세검
정 부근에 지은 탕춘대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한양(서울) 서쪽(정확히는 북서쪽)에 있다고 해
서 서성(西)으로도 불리며, 겹성이란 별칭도 있었다.
이 성은 숙종(肅宗)이 만약에 있을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서울의 방어력을 높이고 비상시
북한산성 행궁(行宮)으로 신속히 도망칠 수 있는 시간 확보를 위해 조성되었다. 1702년에
(申琬)이 성곽 축조를 제의했는데, 북한산성(北漢山城) 증축과 행궁 조성, 한양도성 보수가
마무리되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세우려고 1715년 홍제천에 홍지문을 먼저
닦았다. 그런 다음 1718826일 성곽 공사에 들어갔으나, 겨울이 다가오면서 106일에
일단 공사를 멈추었다가 17192월 다시 공사에 들어갔다. 허나 처음보다 사업이 크게 축소
되면서 3월에 공사를 종료시켰다.
그렇게 태어난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 능선, 홍지문, 탕춘대능선을 거
쳐 비봉능선 서쪽 수리봉(향로봉 부근)까지 이어진 4km 규모로 원래는 북한산성까지 이으려고
했으나 비봉능선이 험준해 포기했으며, 북한산성 대남문에서 보현봉, 형제봉능선, 북악산(
악산) 북쪽 능선을 거쳐 한양도성을 잇는 탕춘대성 동쪽 성곽도 계획했으나 싹 취소되었다.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 경계인 홍제천에는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을 두었으며, 탕춘대능선에
는 암문(暗門) 1개를 내었다. 그리고 성 안에는 훈련장인 연융대(鍊戎臺)와 선혜청(宣惠廳),
평창(平倉) 등의 창고를 설치했으며, 총융청(摠戎廳) 본부도 이곳에 두었다.
탕춘대성이 들어앉은 위치 대부분은 각박한 경사지로 거의 천험(天險)을 자랑한다. 하여 홍지
문을 제외하고는 성을 높이 구축하지 않았으며, 현재는 인왕산 북쪽 능선과 홍지문, 탕춘대능
선에 성곽이 그런데로 남아있다. (여장은 홍지문과 남쪽 성곽 일부에만 남아있음)


▲  홍제천의 물을 하염없이 흘려보내는 오간대수문 (동쪽 모습)
북한산과 북악산에서 발원한 홍제천은 저 문을 통해 한강으로 흘러간다. 마치 냇물 위에
5개의 무지개를 보듯, 유연하게 구부러진 홍예의 곡선이 그저 아름답기만 하다.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은 탕춘대성의 유일한 성문이다. (암문은 제외) 한북정맥(漢北整脈)이 지
나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한북문(漢北門)이라 불리기도 한다.
200년 이상 별탈없이 지내온 홍지문은 19211, 지붕에 쌓인 세월의 장대한 무게를 감당하
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해 8월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
지 홍수로 싹 떠내려가면서 터만 아련하게 남아오다가 19777월 복원되었다. 홍지문은 홍예
주변에 고색의 때가 탄 성돌만 옛날 것이며 때깔이 하얀 성돌은 1977년 복원할 때 새로 맞춘
것이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문루까지 올라가 놀았던 기억이 난다. 허나 지금은 문화유산 보호를 위
해 문루와 오간대수문은 금지 구역이 되었으며, 오간대수문에서 탕춘대능선 쪽 성곽 200m 정도
구간도 통제되어 탕춘대능선을 가려면 홍지동 주택가나 옥천암 주변으로 돌아가야 된다. 또한
문 남쪽은 세검정로가 지나고 있어 성곽이 아주 잠깐 단절되어 있다. 허나 그 길을 넘으면 성
곽은 다시 소소하게 율동을 부리며 인왕산으로 뻗어간다.
성문 앞뒤로 나무가 심어진 짧은 산책로가 닦여져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오간대수문 바로 밑
홍제천 북쪽에 최근에 산책로가 닦여져 오간대수문의 속살을 구경할 수 있다. 이 산책로는 세
검정과 옥천암까지 이어진다. 또한 문을 경계로 성 안쪽은 종로구 부암동(홍지동), 바깥쪽은
서대문구 홍은동(弘恩洞)이다.


 홍지문의 야경 (홍지문의 앞 모습)
홍지문은 더 이상 서울 수비의 의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문화유산과 관광지의 의무와 성격만 지니고 있으며,
문은 24시간 열어두고 있다.

 홍지문 천정을 장식하고 있는 고운
빛깔의 와운문(渦雲紋)

▲  홍체천 산책로에서 바라본 오간대수문의
북쪽 홍예문들

   

오간대수문 윗도리는 금지된 다리라 발을 들일 수 없지만 아랫도리는 홍제천 산책로가 닦이면
서 접근이 가능해졌다. 처음으로 살펴보는 오간대수문의 속살, 비록 하천에서 약간 비린내가
풍기긴 했으나 그 정도 냄새는 이미 익숙해진 상태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서울 사람임)

홍예문 위쪽에는 용머리가 새겨져 있다. 아무래도 물이 흐르는 수문이라 물을 관장하는 용을
수호용으로 넣은 듯 싶다. 5개의 수문 중, 북쪽 기준으로 1,2,5번째 문은 바닥에 돌이 입혀져
있고, 3,4번째 문은 홍제천이 흐르고 있다. 하늘에서 물폭탄이 내려 홍제천이 흥분한 경우에
5개 문이 모두 수문이 되버린다.

※ 홍지문 찾아가기 (2018년 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7018번 버스를 타고 홍지문 하차
* 지하철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를 타고 홍지문 하차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번 출구)에서 110, 153번 버스를 타고 홍지문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산4


 

♠  북한산 끝자락 홍제천변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고려 후기에
조성된 거대한 하얀 마애불을 간직한 홍은동 옥천암(玉泉庵)


 홍제천 남쪽에서 바라본 옥천암 (왼쪽은 마애보살좌상,
오른쪽이 옥천암)

홍지문에서 한강을 향해 열심히 길을 재촉하는 홍제천을 따라 서쪽으로 7분 정도 가다보면 하
얀 암반이 일품인 하천 건너로 하얀 피부의 커다란 마애불상이 눈에 보일 것이다. 그가 바로
이곳의 명물이자 상서로운 관음보살로 통하는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이다.
문화재청은 그를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으로 다루고 있으나 지역 사람들은 '보도각백불'로 많
이 부르고 있다. (나도 그 명칭이 버릇이 되었음) 여기서 보도각(普渡閣)은 하얀 마애불과 바
위를 보듬은 보호각의 명칭으로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홍
제천변에 있어 옛날부터 '해수관음상'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으며 강제로 하얀 피부가 된 19
세기 이후에는 '백의관음(白衣觀音)', '백불' 등의 별칭이 추가되었다. 여기서 '백불'은 구한
말에 양이(洋夷)들이 그를 보고 'White Buddha'라고 불렀는데 거기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 견
해도 있다.

마애불 옆에는 그를 관리하는 조그만 암자 옥천암이 둥지를 틀었으며 그들에게 다가서려면 홍
제천에 걸린 보도교(普渡橋)란 유연한 곡선의 다리를 건너야 된다. 시멘트가 아닌 홍예 돌다
리였으면 운치가 정말 진국이었을텐데 그 점이 참 아쉽다. 다리 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조촐
한 문이 있는데, 그가 옥천암의 일주문(一柱門)이다. 일주문이 다리 끝에 달린 흥미로운 현장
으로 그 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보도각 백불(마애불), 오른쪽 언덕에 옥천암이 있다.

▲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 보물 1820

북한산(삼각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으며 홍제천 바람을 쐬고 있는 이 마애불은 서울에 전하는
8개의 오랜 마애불(磨崖佛)의 하나이자 달랑 4개 밖에 없는 고려시대 마애불의 일원으로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조금 거리가 있는 안암동에 보타사(寶唾寺)란 절이 있는데 그곳에 옥천암 백불과 비슷
하게 생긴 하얀 피부의 마애불이 있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조성 시기도 비슷하여 고려 후기에
같은 사람이나 지역 세력가가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여기서 가까운 승가사(僧伽寺)
마애여래좌상과 비슷한 계열의 작품으로 보기도 하며, 개성(開城)에 있는 관음굴 석조보살반
가상과 비교되는 고려 말 불상 조각의 특징을 보여주는 존재로 평가받기도 한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서울로 천도하자 그를 찾아와 예불을 올렸다고 전하며 그
인연으로 조선 왕실의 주요 기복처(祈福處)가 되었다고 한다. 15세기에는 성현(成俔, 1439~
1504)이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옥천암 백불을 부처바위를 뜻하는 불암(佛巖)으로 기재
했다. 그것이 이곳에 대한 첫 기록이다.
임진왜란 때는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 권율(權慄) 장군이 여기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는
데 어리석은 왜군들은 백불을 그만 조선군으로 잘못 알고 조총을 정신없이 쏘아댔다. 그렇게
탄환을 다 소비한 왜군이 혼란에 빠지자 그때를 틈타 그들을 보기좋게 때려잡았다는 이야기가
홍제천의 물결을 따라 전해오고 있다. 이는 백불을 서울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띄우고자 근처
에서 일어났던 권율의 왜군 토벌전을 끌어들여 지어낸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高宗)의 어머니인 부대부인민씨(府大夫人閔氏)
찾아와 아들의 천복(天福)을 빌었다고 한다. 그 기념으로 조개껍데기를 태워서 만든 호분(
, 여자들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
으로 불상을 하얗게 도배를 하면서 이때부터 팔자에도 없는
백불이 되버린 것이다. 그렇게 하얀 피부가 되면서 마애불은 다소 젊어 보이게 되었으나 대신
문화유산의 큰 매력인 고색의 기운이 다소 꺾여 그리 나이가 지긋해 보이지 않는다.


▲  보도각과 붙임바위의 옆모습

백불의 높이는 5m로 그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인해 예로부터 영험이 깊은 석불로 명성이 높았
. 그 앞에 닦여진 공간에는 그의 영험을 빌리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며 특히 입시철에는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다.

백불에게 기댈 수 있는 자리를 내준 커다란 바위는 '붙임바위'라고 불리는데, 생긴 모습부터
가 예사롭지가 않다. 부암동의 유래가 된 부침바위와 비슷하게 돌(또는 동전)을 바위에 붙이
거나 위로 던져서 바위 위에 붙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바위에 매달린 작은 돌과 동전
이 적지 않다. (절에서 동전을 계속 수거하고 있어 요즘은 별로 안보임) 그래서 불상이 이곳
에 깃들기 이전부터 민간신앙의 소박한 현장으로 쓰였던 듯 싶다.

보도각 앞에는 홍제천과 경계를 이루는 돌담이 둘러져 있었으나 2016년 이후 그 돌담을 밀면
서 정면이 확 트였다. 키 작은 난간이 돌담 대신 둘러져 있으며 난간 바로 앞에는 나무로 다
진 홍제천 산책로가 닦여져 있고, 그 앞 홍제천에는 하얀 피부의 잘생긴 반석들이 가득하다.
한때 도심 경승지로 바쁘게 살았으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비린내 풍기는 하천으로 떨어지면
서 그 반석이 다소 아깝게 되었다. 아비규환의 속세(俗世)를 상징하는 그런 하천을 걱정스럽
게 굽어보며 중생을 걱정하는 불상의 모습은 자식을 걱정하는 어미의 따뜻한 모습 같다.

그의 몸은 모두 새하얗지만, 그의 장식물은 특이하게도 주황색으로 되어 있다. (예전에는 금
색으로 되어있다가 2016년 이후 주황색으로 갈았음) 오른손에 걸린 팔찌, 삼도(三道) 아래로
커다란 목걸이, 주렁주렁 매달린 장식으로 무거워 보이는 보관(寶冠), 그리고 귀에 건 귀걸이
까지 정말 관음보살 누님이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그의 얼굴은 거의 포근한 인상으로 중생
들의 소원과 고충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다 들어줄 것만 같다. (현실은 하나도 안들어주었음)


▲  마애보살좌상의 잘생긴 얼굴과 윗도리

홍제천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은 '' 모습으로 지그시 떠 있으며, 긴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닿는다살짝 다문 입술은 립스틱을 넘치도록 바른 듯 상당히 찐하다. 불상의 몸을 덮고 있는
옷 주름이 세세히 묘사되어 있어 마치 진짜 옷을 걸친 듯 하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선보이고 있고 왼손은 무릎에 대고 있는데 왼
팔이 너무 길어보이며 앉아있는 모습치고는 아랫도리가 좀 넓게 표현되어 신체 균형이 좀 맞
지 않는다.

백불 앞에는 중생들이 정성스레 기도를 올리며 고민거리를 슬쩍 내밀고 있었다. 그들의 갖은
소망을 들어주느라 보통 귀찮은 것이 아닐텐데 표정 하나 일그러지지 않고 한결 같은 표정으
로 그들을 맞이해 고충 하나라도 누락될까봐 귀를 쫑긋 세운다. 소망이 이루어질 확률이 얼마
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그 정성이 부디 백불과 하늘을 감동시켜 나를 포함한 중생들의 소망이
모두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원해 본다.


▲  조그만 기와문을 지나면 조촐한 옥천암 경내가 펼쳐진다.

백불 동쪽에는 그를 든든한 밥줄로 삼은 옥천암이 자리해 있다. 백불이 관음보살이다보니 자
연히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칭하게 되었는데, 이 땅의 3대 관음도량으로 양양 홍련암(紅蓮庵)
, 남해 보리암(菩提庵), 강화 보문사(普門寺)를 꼽는다. 허나 옥천암도 관음도량으로서의 자
부심이 대단하여 비공식적으로 자신들을 포함시켜 4대 관음도량의 하나로 우기기도 한다.

이곳에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약효가 있다는 샘물(혹시 탄산약수가 아닐까?)
있어 환자들이 몰려들었다고 전하며, 그 연유로 옥처럼 맑은 샘물, 옥천암을 칭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허나 그 약수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오래전에 사라졌고, 절 앞을 흐르는 홍제천
또한 세월에 고되게 대이면서 그런 모습은 이제 전설의 한 토막이 되고 말았다.

이 절은 언제 지어졌는지 전해오는 것이 없다. 다만 인근에 조선 초기까지 잘나갔던 장의사(
藏義寺, 세검정초교에 있었음)와 사현사(沙峴寺) 등의 쟁쟁한 절들이 있어 백불을 관리하는
부속 암자로 지어진 듯 싶으며, 세검정 맞은편에는 혜철선사(惠哲禪師)1396년에 태조의 도
움으로 세웠다는 소림사(小林寺)가 있는데, 그 절의 부속암자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모두 부
질없는 메아리이다.

이곳의 본격적인 사적(事績)이 등장하는 것은 1868년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명으로 정관(
淨觀)이 관음전(觀音殿)을 세워 천일기도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1927년에는 주지 이성우(
李成祐)가 칠성각(七星閣)과 관음전을 지었으며, 1932년에 큰방 6칸과 요사(寮舍) 3칸을 고쳤
.
1942년에는 주지 동봉(東峰)이 관음전을 수리했으며, 이후 삼성각, 요사 등을 추가로 갖추었
으나 1987년 삼성각이 소실되고 1988년에 법당인 수덕전(修德殿)이 지어지면서 삼성각의 기능
은 수덕전에 통합되었다. 1989년에 종각을 만들었고 1990년 설법전(說法殿)을 지어 요사의 기
능도 겸하게 했으며, 1996에 홍제천에 보도교란 다리를 놓고 1998년에 일주문을 지었다.

북한산의 서남쪽 끝으머리를 잡으며 홍제천변에 둥지를 튼 조그만 절로 사세확장이 좀 어렵다.
바로 동쪽에는 주택가가 있고 뒤에는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된 북한산(삼각산) 자락이기 때문
이다. 그래서 경내가 무지 답답하다. 또한 백불 외에는 오래된 유산이 없고 주택가와 접해 있
어 고색과 산사의 내음이 크게 말라버렸다.

▲  요사의 기능도 겸하고 있는 설법전
옥천암 뜨락에도 변함없이 늦가을이 찾아와
이렇게 고운 작품을 남겼다.

▲  옥천암의 법당인 수덕전(修德殿)
수덕전과 설법전은 그 사이에 조그만 벽돌집
을 만들어 거의 하나로 이어져 있다.


▲  수덕전 아미타여래좌상

옥천암은 관음도량이라 보도각 백불이 중심 불상이나 법당에는 따로 아미타불(아미타여래좌상
)을 봉안했다. 불단에는 아미타불 홀로 있으며, 그 흔한 협시불(夾侍佛)은 없다. 불상 주위로
석가후불탱화와 지장탱화, 신중탱화, 칠성탱화, 산신탱화, 독성탱화 등의 불화가 수덕전 내부
를 진하게 수식하고 있는데, 그중 독성탱화가 1954년에 제작된 것으로 백불을 제외하고 제일
오래되었다.


▲  왜식(倭式)으로 지어진 옥천암 5층석탑
5층석탑은 예전에 수덕전 정면 우측에 있었으나 담장 쪽으로 옮겨졌다. 날씬하게
솟은 석탑의 탑신(塔身)에는 조그만 구멍이 무수히 뚫려있어 내부가 보인다.


▲  수덕전 우측에 세워진 키 작은 석등과 3층석탑
사람 키보다 작은 석탑은 2,3층 탑신이 없어지고 지붕돌만 남아있는데 조금 오래되어
보인다. 예전(2010년 이전)에는 그가 없었으나 근래에 주변에서 가져온 모양이다.
(탑의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음)

◀  석가탄신일을 맞아 간만에 외출을 나온 옥
천암 괘불(掛佛)의 위엄
청아한 색채로 그려진 이 괘불은 근래에 조성
된 것이다. 이전 시대의 괘불보다 키와 덩치는
작지만 담길 것은 모두 담겨져 있다.
초파일을 맞이하여 간만에 화려한 외출을 나와
중생들의 인사를 받으며 상다리가 아작날 정도
로 차려진 제물에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옥천암을 끝으로 부암동 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워낙에 많이 찾았던 곳이라 마치
우리 동네처럼 친근한 곳이다. (부암동은 나를
기억이나 해줄까?)

▲  홍제천에 걸린 보도교와 징검다리

▲  사물(四物)의 보금자리, 범종각(梵鍾閣)


※ 옥천암(보도각 백불) 찾아가기 (2018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7018번 버스를 타고 유원하나아파트 하차 도보 2
* 지하철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 이용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번 출구)에서 110, 153번 버스 이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18 (홍지문길 1-38 ☎ 02-395-40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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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숨겨진 상큼한 숲길을 거닐다. 북한산둘레길 옛성길~탕춘대능선~구름정원길 (탕춘대성 암문)



' 북한산둘레길 옛성길, 구름정원길 가을 나들이 (탕춘대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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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탕춘대성 암문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은평구

▲  구름정원길



 

가을이 한참 익어가던 9월의 끝 무렵, 친한 후배와 천하 둘레길의 성지로 격하게 추앙받는
북한산둘레길을 찾았다.
햇님이 슬슬 고개가 꺾이던 오후 3시, 구기터널에서 길을 시작하여 북한산둘레길의 일원인
옛성길로 들어선다. 이 코스는 구기터널3거리에서 탕춘대성 암문, 옛성길전망대를 거쳐 북
한산 생태공원(북한산래미안아파트)까지 이어지는 2.7km의 짧고 굵직한 산길로 구기터널과
독박골에서 오르는 부분이 조금 각박할 뿐, 거기만 오르면 길은 다소 순해진다.

옛성의 주인공이자 이곳의 알맹이인 탕춘대성과 그에 딸린 암문, 옛성길 전망대 등의 명소
가 있으며 거의 능선길이라 조망도 제법 괜찮다. (1시간 정도면 충분히 완주 가능)


 

♠  북한산둘레길 옛성길 (탕춘대성 암문)

▲  평창동에서 바라본 탕춘대(蕩春臺) 능선

▲  구기동 주택가를 지나는 옛성길 동쪽

구기터널에서 둘레길을 안내하는 이정표를 따라 돈냄새가 요란하게 풍기는 고급 주택가를 지
나면 숲속에 묻힌 그늘진 오르막길이 나온다. 여기가 정녕 서울 도심 종로구(鍾路區)가 맞는
지 물음표를 여러 번 내던지게 하는 외딴 산골 풍경으로 아무리 손등을 꼬집어보아도, 두 눈
을 비벼보아도 이곳은 분명 서울 종로구 구기동(舊基洞)이 맞다. 이 첩첩한 산골까지 주택이
마구 밀려와 150m 고지까지 좁게나마 골목길이 깔려 있다.


▲  옛성길 동쪽 시작점

▲  탕춘대성 암문으로 오르는 옛성길 (1)

옛성길 동쪽 시작점에서 탕춘대성 암문까지는 숨가뿐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다행히 둘레길을
잘 닦아놓아 그리 힘든 구석은 없다.
동쪽 시작점에서 암문까지는 약 10분 정도 걸리는데 중간에 쉼터가 있으며, 소나무가 무성하
여 은은한 솔내음에 속세에서 오염된 청각과 마음을 적지 않게 치유해준다.


▲  탕춘대성 암문으로 오르는 옛성길 (2)

▲  탕춘대성 암문(暗門) - 탕춘대성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호)

북한산둘레길의 일원인 옛성길의 옛성은 바로 탕춘대성을 뜻한다. 조선 19대 군주인 숙종(肅
宗, 재위 1675~1720)은 혹시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고자 버려져 있던 북한산성(北漢
山城)을 크게 증축하고 그 안에 행궁(行宮)과 관청, 창고, 군사시설, 승병(僧兵)을 위한 사찰
을 가득 지어 조그만 산속 도시를 구축했다.
그리고 부암동(付岩洞)과 평창동 지역에 있는 관청과 창고(선혜청, 조지서 등)를 지키고 한양
도성의 방어력을 드높이고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蕩春臺城)을 축성했다. 그
성의 이름은 연산군(燕山君)이 세검정(洗劍亭) 부근에 세운 탕춘대(蕩春臺)에서 비롯되었다.

이 성은 한양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성(西城)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1715년 홍제천에 홍지문(
弘智門)과 오간대수문을 세웠고, 1718~1719년에 인왕산(仁王山) 동북쪽에서 비봉능선 부근까
지 5.1km의 석성을 쌓았다. 이후 북한산성까지 늘리려고 했으나 실현하지 못했고, 보현봉에서
형제봉을 거쳐 북악산(北岳山, 백악산)을 잇는 성곽도 추진했으나 계획에서 끝났다.

한양(서울)의 북쪽을 지키며 별탈없이 지내오던 탕춘대성은 장대한 세월에 짓눌려 여장과 성
벽 곳곳이 망가졌고 1921년 1월에는 홍지문 문루(門樓)가 세월의 무게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
너졌다. 그리고 그해 8월에는 대홍수로 오간대수문까지 떠내려가는 등, 계속 고통을 당해 오
다가 1977년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이 복원되었다.

바깥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탕춘대성 암문은 높이가 2m 정도로 구기터널 고개 윗쪽에 자리
한다. 암문(暗門)은 일종의 비밀 문으로 잡초와 뒤섞여 예전의 면모는 많이 떨어졌지만 문과
성벽은 그런데로 잘 남아있으며, 성돌이 헝클어져 통행이 힘들어진 성곽 길의 짐을 덜어주고
자 그 옆에 산길을 내었다. 성곽에 오르면 홍은동과 홍제동, 불광동 등 은평구와 서대문구의
상당수 지역과 신촌, 안산(鞍山) 등이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온다.
암문을 나가면 바로 홍은동(弘恩洞)과 불광동(佛光洞)으로 이어지며 탕춘대성 능선을 따라 남
쪽으로 내려가면 상명대와 세검정, 북쪽으로 올라가면 비봉능선과 북한산성으로 이어진다.
< 탕춘대성은 홍지문과 한 덩어리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호로 지정됨, 지정 명칭은 '홍지문
및 탕춘대성
'>

▲  네모나게 다져진 탕춘대성 암문 안쪽

▲  탕춘대성 암문 바깥쪽


▲  고된 세월에 녹초가 되버린 탕춘대성
인간이 만든 것이 아무리 위엄 돋는다 한들 대자연 앞에서는 한낱 모래성에 불과하다.
그나마 복원을 해서 저 정도라도 유지를 하고 있지. 그렇지 않았다면 산의 일부로
영영 묻혔을 것이다.

▲  탕춘대성 암문에서 바라본 천하 (1)
구름이 점점이 떠있는 하늘 아래로 홍은동과 홍제동, 안산, 신촌 지역이
바라보인다.

▲  탕춘대성 암문에서 바라본 천하 (2) - 불광동과 연신내, 은평구 지역

▲  송전탑 너머로 족두리봉과 향로봉, 비봉 등이 시야에 잡힌다.

▲  소나무가 우거진 옛성길 (암문~옛성길전망대 구간)

▲  옛성길에서 바라본 홍은동과 안산, 서대문구 지역

▲  옛성길 전망대

탕춘대성 암문을 지나면 둘레길은 비로소 진정을 되찾는다. 약간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수 차
례 반복될 뿐, 길은 느긋하다. 능선길이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조망이 두 눈과 마음을 시
원스럽게 다독거려주며, 가까이에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인사를 건넨다. 그런 길을 가볍
게 15분 정도 가면 옛성길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옛성길 전망대에 이른다.

이 전망대는 해발 220m 지점에 닦여진 조망터로 북한산의 동남쪽 산줄기와 은평구, 서대문구
지역이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  옛성길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1) 북한산 문수봉과 보현봉, 형제봉,
평창동 지역

▲  옛성길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2)
향로봉과 비봉, 승가봉, 나한봉, 문수봉

▲  옛성길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3) 불광동 독박골과 족두리봉

인생의 오르막이 있다면 내리막도 반드시 있는 법, 옛성길전망대를 지나면 길은 완전히 내리
막으로 돌변한다. 암문부터 참 온순했던 옛성길은 크게 흥분기를 보여 경사가 좀 각박해지는
데 다행히 내려가는 것이니 망정이지 이 길로 올라왔다면 두 다리가 꽤나 성을 냈을 것이다.
그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면 구기터널 서쪽인 불광동(佛光洞) 독박골이며, 여기서 큰 길(진
흥로)을 건너 북한산래미안아파트 동쪽으로 가면 북한산 생태공원이 나오는데 여기서 옛성길
은 그 끝을 맺는다.

※ 북한산둘레길 옛성길, 탕춘대성 찾아가기 (2017년 12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구기터널(한국고전번
  역원)이나 독박골(북한산래미안아파트)에서 하차, 7212번을 탔을 경우 구기터널 대신 구기
  동 현대빌라에서 내리면 된다.
* 지하철 3,6호선 불광역(2번 출구)에서 구기터널 방향으로 14분 정도 걸어가면 옛성길과 구
  름정원길이 나온다.
* 지하철 3호선 홍제역(2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서대문구 마을버스 11번을 타고 홍은
  동 국민주택 종점 하차, 여기서 5분 정도 오르면 옛성길과 만나며 거기서 오른쪽으로 2분
  정도 가면 탕춘대성 암문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 서대문구 홍은1동 / 은평구 녹번동


 

♠  북한산둘레길 구름정원길

▲  구름정원길 남쪽(불광사) 시작점

북한산둘레길 옛성길은 북한산생태공원에서 구름정원길로 간판을 바꾼다. 구름정원길은 북한
산생태공원에서 하늘전망대, 선림사, 옛 기자촌 뒷쪽을 거쳐 진관생태다리까지 이어지는 5.2
km의 기나긴 산길로 진관동 화의군(和義君)묘역~폭포동 힐스테이트아파트 구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주택가와 아파트 뒷쪽을 지난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계속 반복되며 속세를 옆구리에 끼
고 있어 언제든 속세로 뛰쳐나갈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옛성길에 비해선 깊은 산길의 운치는
좀 떨어진다.

산길 이름인 구름정원길은 별다른 뜻은 없다. 그냥 구름의 정원을 거닐 듯 편안한 길이란 뜻
에서 동심 어린 이름을 갖다 붙인 듯 싶으며, 하늘전망대와 기자촌전망대 등의 조망터가 마련
되어 있다.


▲  구름정원길 (북한산힐스테이트 1차 뒷쪽)

▲  구름정원길에서 바라본 천하 (1)
북한산래미안아파트와 독박골 주변, 옛성길이 흐르는 탕춘대 능선

▲  구름정원길에서 바라본 천하 (2) 불광동과 녹번동, 백련산(白蓮山)

▲  은평구를 앞 뜨락으로 삼은 하늘전망대

구름정원길의 백미(白眉)는 은평구를 품은 하늘전망대와 길쭉하게 나무로 다져진 다리(데크길
)이 아닐까 싶다. 구름정원길 남쪽 시작점에서 10여 분 정도 오르면 서쪽으로 돌출된 하늘전
망대에 이르게 되는데 벼랑 위에 설치된 이곳에 올라서면 서울의 서북부를 이루고 있는 은평
구 일대가 속시원하게 바라보인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1) 불광동과 녹번동, 응암동 지역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2) 불광2동과 은평뉴타운, 앵봉산을
비롯한 은평구 북부 지역

▲  나무 다리에서 바라본 하늘전망대 (사진 가운데 부분)

▲ 산길 한복판에 자리한 소나무 (나무 다리 직전)
하늘전망대 북쪽에서 나무다리까지는 소나무가 삼삼하게 군락을 이루고 있다.
나무데크길을 내다보니 소나무가 길 한복판에 있게 되었는데, 그를 강제로
손대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둔 센스와 배려가 무척 돋보인다.

▲  길쭉한 나무 다리 (나무데크길)
이곳은 하늘전망대와 더불어 구름정원길의 상징적인 구간으로 소나무숲 보호와
탐방 편의를 위해 나무로 길게 다리를 깔았다.

▲  북쪽에서 바라본 나무 다리 (하늘전망대 방향)

하늘전망대에서 나무 다리를 지나면 족두리봉 입구가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동쪽) 산길을 오
르면 북한산(삼각산)의 서남쪽 끝 자락을 잡고 있는 족두리봉으로 이어지며, 왼쪽(서쪽)으로
내려가면 불광동 대호아파트, 북쪽으로 직진하면 구름정원길의 나머지 부분이 마저 펼쳐진다.

여기서 둘레길을 따라 5분 정도 전진하면 이름도 긴 북한산힐스테이트3차아파트 뒷쪽이다. 시
간도 어느덧 18시에 임박했고 햇님은 달님과 업무 교대를 하며 칼퇴근을 준비한다. 마음 같아
서는 불광중교까지는 달려가고 싶었으나 시간도 그렇고, 배도 고프고, 슬슬 지치기도 하여 나
머지 구간은 불투명한 다음으로 넘기고 둘레길 나들이를 접었다. 어차피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니 언제든 접근이 가능하다. 그러니 너무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다.

이렇게 하여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 무지개와 같은 북한산둘레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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