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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9.04 황량함과 재건의 공존, 경주 서라벌 절터 나들이 ~~~ (감산사, 연지암, 활성리석불입상, 숭복사)
  2. 2018.11.03 옛 무덤일까? 탑일까? 깊은 산골에 숨겨진 신비의 돌무더기, 산청 구형왕릉~왕산 늦가을 나들이 (왕산사지, 유의태약수터)
  3. 2017.03.05 눈덮힌 폐허의 절터에서 인생무상을 느끼다. 신라 말 구산선문의 하나였던 곳 ~~ 보령 성주사지
  4. 2015.04.12 동백꽃에 둘러싸인 전설의 절터, 광양 백계산 옥룡사터 (동백나무숲, 도선대사천년숲길)

황량함과 재건의 공존, 경주 서라벌 절터 나들이 ~~~ (감산사, 연지암, 활성리석불입상, 숭복사)

 

 

' 여름맞이 서라벌 경주 나들이 '
(감산사, 숭복사)

▲  감산사지 3층석탑


 

여름 제국이 막 기지개를 켜던 6월의 한복판에 신라의 향기가 지독하게 서린 서라벌 경주
(慶州)를 찾았다.
신라 왕릉의 백미(白眉)로 손꼽히는 괘릉(掛陵)을 둘러보고 그 후식거리로 감산사와 숭복
사를 둘러보고자 괘릉안내소 문화유산해설사(이하 해설사)에게 길을 물었다. 그랬더니 감
산사는 약 20분, 숭복사는 더 들어가야 된다고 그런다. 하여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미
답처(未踏處)에 대한 설레는 마음과 두려운 마음을 품은 채, 다시 길을 떠났다.

괘릉을 지나면 바로 3거리가 나오는데, 왼쪽은 감산사, 오른쪽은 숭복사로 이어진다. 3거
리에 감산사 이정표가 있지만 숭복사는 거리가 멀어서 그런 것은 없다. 나는 감산사를 먼
저 둘러보고 숭복사를 거쳐 속세(俗世)로 나갈 생각이라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괘릉초등학교를 지나 멀리 남월산<南月山, 토함산 남쪽 산>의 관찰을 받으며 한적한 시골
길을 거닌다. 오르막도 거의 없는 평탄한 길이고, 드넓은 논두렁과 밭두렁이 펼쳐진 그야
말로 목가적(牧歌的)인 풍경의 연속이라 가는 길이 그리 지루하지가 않았다. 그렇게 20분
을 가니 산 밑에 절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 입구에는 절의 정체를 알리는 표석이 자리
해 있는데, 그의 피부에는 감산사 3자가 쓰여 있다.


▲  감산사 표석과 2층 요사

표석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ㄱ'자 모양의 기와집이 나온다. 이 집은 승려
와 신도들의 생활공간인 요사(寮舍)로 거의 한옥 민박이나 펜션 같은 모습이다. 

요사를 지나면 경내로 인도하는 길이 2갈래가 펼쳐진다. 어느 길로 가던 목적지는 같지만
연못을 끼고 가는 길이 더 아기자기하다. 돌과 흙으로 축대(築臺)를 쌓고 그 위에 마련된
연못은 네모난 모습으로 연꽃들이 막바지 와신상담(臥薪嘗膽) 중이라 소소한 연잎들만 가
득하다. 이제 보름 정도 지나면 연꽃의 향기가 눈과 코를 제대로 마비시킬 것이다.

연못에서 들꽃들이 손짓하는 계단을 오르면 대적광전이 있는 감산사 중심에 이른다.


▲  감산사 연못

▲  감산사의 중심지로 인도하는 돌계단
옛 감산사의 주춧돌로 만든 계단 너머로 법당인 대적광전이 슬쩍 머리를 내민다.


 

♠  감산사(甘山寺) 둘러보기

▲  감산사의 법당(法堂)인 대적광전(大寂光殿)

감산사는 토함산의 남쪽 줄기인 남월산 서쪽 자락에 안긴 절이다. 겉으로 보면 근래에 창건된
절처럼 보이지만 겉보기와 달리 매우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이 절은 신라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 시절에 김지성(金志誠, 652~?)이 부모와 가족들,
아내의 명복을 빌고 제왕(帝王)의 만수무강을 빌고자 가산을 털어서 지은 절이다. 이때 감산
(甘山)에 있던 자신의 장전(莊田)을 내놓아 그 자리에 절을 세웠는데, 그 연유로 감산사라 불
리게 되었다.
절을 세운 김지성은 문신(文臣)으로 아버지는 일길찬(一吉粲) 김인장(金仁章), 어머니는 관초
리(觀肖里)부인이다. 그의 어린 시절과 중년 시절에 관한 기록은 없으며, 67세란 적지 않은
나이에 집사부(執事部) 시랑(侍郞)에서 물러났는데, 나름대로 정치 개혁을 꿈꾸다가 지략(智
略)이 얕아 실패하고 자칫 형벌을 받을 뻔했다고 한다. 아마도 형벌 대신 은퇴를 권유받아 시
랑에서 물러난 듯 싶다.
어쨌든 벼슬에서 물러나 719년 2월 자신의 사유지에 감산사를 짓고 현재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에 가 있는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81호)과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 82호)을 봉안했다. 미륵
보살 광배(光背) 뒤에 창건 관련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감산사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다. 이것 마저 없었다면 감산사의 존재 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참고로 그 명문은 신라
의 대학자 설총(薛聰)이 썼다고 전한다.

또한 은퇴 이후, 미륵보살의 유가론(瑜伽論)을 연구하고 당(唐)나라에서 건너온 노장사상(老
莊思想)에 크게 빠져들었다. 특히 5천 언에 이르는 노자 도덕경(道德經)을 늘 펼쳐 읽었다고
하니 그의 사례를 통해 신라 귀족들 사이에서 노장사상이 어느 정도 퍼져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렇게 김지성이 애지중지 가꾸던 감산사는 김지성 일가의 원찰(願刹) 노릇을 하며 후손들이
정성껏 관리했으나 마땅한 사적(事蹟)은 전해오지 않으며, 고려 이후 쇠퇴의 길을 걷다가 조
선 중기 때 완전히 망했다고 한다.
이후 절터만 황량하게 남게 되었으며, 김지성이 봉안한 석불들은 절이 망하는 과정에서 죄다
땅속에 묻혀 어둠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3층석탑과 석등 대석 등은 비록 생매장은 면했으나
이리저리 뒹구는 신세가 되었으며, 절터는 논밭으로 변해 감산사의 존재는 말끔히 잊혀져 갔
다.

그러다가 1915년경 왜인(倭人)들이 우연히 절터 논밭에서 미륵불과 아미타불을 캐내면서 역사
속에 사라진 감산사의 존재가 다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다. 허나 이들 불상은 서울로 강
제로 옮겨지고 절터는 다시 방치된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비구니들이 들어와 옛터 위에 조그
만 건물을 지어 감산사를 칭했으며, 지금은 법당인 대적광전을 비롯해 극락전 등 여러 건물이
경내를 이루면서 제법 절집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3층석탑과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있으며, 왜정(倭
政) 때 발견되어 서울로 소환된 석불 2개는 국보의 지위를 지니고 있다.

절이 산 밑에 있을 뿐, 괘릉리의 너른 전답을 바라보고 있는 평지 절로 경내 건물에서 고색(
古色)의 내음은 맡아볼 수 없으나,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3층석탑 등 옛 석조물에서는 고색의
향기가 진동한다. 게다가 비구니 절이라 경내가 꽤 정갈하고 깔끔하며 아기자기하다.


▲  현란한 색채의 극치, 대적광전 내부

▲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舍那佛坐像)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318호

협시불(夾侍佛)도 없이 혼자 불단(佛壇)을 지키고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은 화강암으로 만든 신
라 후기 불상이다. 전체 높이는 약 1m로 얼굴은 딱히 표정은 없어 보인다. 눈과 코, 입, 머리
,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제대로 남아있으며, 머리는 깨져있던 것을 복원했고, 광배(光
背)와 대좌(臺座)는 새로 만들어 붙였는데, 고색의 때가 가득 입혀진 석불과는 달리 너무 대
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어깨는 듬직해 보이고, 두 손은 비로자나불이 좋아하는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는데, 이
는 근래에 보수한 것이다.
이 땅에 남아있는 비로자나불 중 거의 초창기 불상이며, 등에 조각된 띠매듭은 석불의 옷주름
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석불 앞에는 그의 외로움을 달래주려 함일까? 그의 1/15도 안되는 조그만 석불을 갖다두어 마
치 어미와 새끼를 보는 듯 하다. 그의 뒤에는 고운 빛깔로 채색된 아미타후불탱(阿彌陀後佛幀
)이 든든하게 뒤를 받쳐준다.

▲  꽃창살이 아름다운 극락전(極樂殿)

▲  대적광전 뒷뜨락

대적광전 뒤쪽에는 잔디가 입혀진 넓은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은 감산사터의 일부분으로 3층석
탑과 석등 대석, 옛 주춧돌이 자리를 지키며 까마득한 왕년의 시절을 그리고 있다. 그만큼 감
산사의 전성기와 신라란 나라는 우리와 엄청 멀리 떨어진 시대이다.

3층석탑 북쪽 가장자리에는 특이하게도 네모난 원두막을 두어 정겨운 풍경을 연출한다. 그냥
빈터만 덩그러니 있는 것보다는 햇빛을 피할 수 있도록 저런 것이라도 만들어 약간의 자리를
채워넣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


▲  감산사지 3층석탑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95호

절터 동쪽에 자리한 3층석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힌 전형적인 신
라 후기 석탑이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65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는데, 1층 탑신은 약간의 상처가 있는 것 외에는 그런데로 온전하나 2층과 3층 탑신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완전히 사라져 세월 앞에 장사가 없음을 실감케 한다. 기백(幾百)이
넘는 세월 동안 폐허로 있던 절터에서 저 정도라도 건진 것도 그나마 다행이다.

탑 옥개석(屋蓋石)은 4단 받침이며, 추녀 부분이 위로 살짝 올려져 작은 새가 날개짓을 하는
듯 하다. 탑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이 남아 있다.


▲  주인을 잃어버린 석등대석(石燈臺石)

3층석탑 인근에 화석(化石)처럼 박힌 석등대석, 꽃잎이 아래로 쳐진 연꽃 무늬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사실적인 모습을 자랑한다. 저기에 그럴싸하게 색깔만 입히면 정말로 연꽃이 따로
없을 것이다. 비록 옛 사람들이 조각한 연꽃 무늬지만 그에 대한 시샘 때문일까? 주변에는 꽃
들이 거의 없었다.
저 수려한 대석에 뿌리를 내린 석등(石燈)은 과연 어떠했을까? 석등의 모습이 거의 거기서 거
기지만 저 석등만큼은 왠지 특별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오늘도 오래 전에 가출한 석등을 애타
게 기다리며 화려한 연꽃잎을 펼쳐 보인다.


▲  바닥에 바짝 엎드린 석등대석과 주춧돌

▲  수습된 주춧돌들 (1)

▲  수습된 주춧돌들 (2)
저들이 받쳐들던 감산사의 옛 건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옛 터에 맞게 고스란히
남아있었더라면 짧은 상상력이라도 발휘해볼 수 있었을텐데, 한쪽에 수습해
놓아 그마저도 여의치 않게 만들었다.

▲  감산사 감로수(甘露水)
감로수란 말에 단단히 각인된 것일까? 물맛이 제법 달콤한 것 같다. 물을
바가지에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목마름에 잠긴 목구멍이 즐겁다며
쾌재를 부르짖는다.

▲  붉은 장미 옷을 걸친 초가 형태의 불연정(佛緣亭)

감산사는 원두막과 불연정 등의 초가를 갖추고 있다. 불연정은 차를 마시는 공간으로 벽 바깥
에는 장미꽃이 가득하여 마치 장미 옷을 걸친 듯, 운치를 가득 돋군다. 땅바닥에는 힘없이 떨
어진 장미꽃잎이 수북하게 쌓여있어 인생무상을 느끼게 하는데, 장미가 제아무리 아름답다 해
도 그 역시 잠깐일 뿐.. 세월과 자연은 그 존재조차 희미하게 만들어버린다. 이래서 세월이란
존재가 무섭다.

* 감산사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6-2 (앞등길 117-20 ☎ 054-746-7096)


▲  바위 위에 자리를 편 조그만 석불
몸에 가득 피어난 세월의 때를 보니 제법 오래된 석불 같다. 이 석불은 근래
수습되어 없어진 머리를 새로 만들고 부분부분 손질하였다.


감산사에서 1시간 정도 머물다가 숭복사로 가고자 왔던 길로 괘릉으로 나왔다. 날씨도 허벌나
게 덥고 지치기도 해서 다시 괘릉안내소에 얼굴을 들이미니 해설사(50대 후반 아줌마)가 반가
운 표정으로 벌써 2곳을 다 둘러봤냐고 그런다. 하여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이제 감산사 하
나 보고 왔다고 그러니 힘들겠다면서 잠깐 들어와 쉬었다 가라고 그런다.
그래서 안내소에 들어가 앉으니 참외와 사과, 시원한 매실차를 권한다. 마침 시장도 하고 해
서 고마움을 표하며 흔쾌히 섭취에 임했다. 그렇게 다과시간을 가지며 해설사와 괘릉과 감산
사, 숭복사 관련 이야기를 나누었고, 화제(話題)는 점차 경주와 신라(新羅), 개인적인 이야기
까지 확대되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보니 2시간이 훌쩍 흘러가 버렸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갈 준비를 했지만 귀차니즘 발동으로 발길이 쉽사리 떠지질 않는다. 해설
사와의 이야기도 재미있던 터라 그런 마음은 더했다. 허나 그날 내 자신에게 내린 임무도 있
고 시간도 제법 흘러간 터라 이제 떠나야 된다. 해설사가 날씨가 덥다며 시원한 물을 제공하
니 그 물을 모두 마시고 아쉽지만 작별을 고했다. 그는 잘 보고 가라며 숭복사 가는 길을 알
려주었다.

괘릉을 나와 3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숭복사로 통한다. 중간에 햇갈리는 부분이 있긴 하지
만 그 길(신계입실길)을 따라 한없이 가다보면 숭복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거리를 대
충 헤아려보니 거의 2.3km 정도 된다. 이동 도중에 활성리마을에서 생각치도 못했던 연지암과
활성리석불입상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애타게 손짓을 하여 숭복사는 잠시 넣어두고 그 손짓
에 이끌려 연지암으로 들어갔다.


 

♠  신라 후기 석불을 간직한 조그만 암자, 연지암(蓮池庵)

▲  활성리석불입상의 거처, 연지암 대웅전(大雄殿)

감산사와 숭복사 중간에 자리한 연지암은 팔작지붕 대웅전과 2채의 요사(寮舍)가 전부인 그야
말로 손바닥만한 작은 절이다. 불국사(佛國寺)의 말사(末寺)로 이곳에는 신라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절터가 있었다. 물론 절의 자세한 정보는 전하는 것이 없다.

왜정 시절의 어느 날 김연지화(金蓮池花) 보살이 밭 가운데서 목탁소리가 들려오는 꿈을 꾸었
는데, 이를 이상하게 여기며 그 밭을 찾아 직접 파보니 석불이 하나 발견되었다. 그것이 바로
연지암의 보물인 활성리석불입상이다. 연지화는 그 불상을 수습하여 지금의 자리에 절을 세우
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연지암이라 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은 왜경(倭警)이 무슨 심보인지 불상의 출처를 대라며 연지화를 괴롭혔는데, 갑
자기 왜경이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꺼꾸러졌다고 한다.

어쨌든 활성리석불의 난데없는 등장으로 태어난 연지암은 그를 든든한 밥줄로 삼아 꾸준히 법
등(法燈)을 유지하고 있으며, 여전히 조촐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절 남쪽에는 나무가 약간
우거져 있고, 주변에는 경작지가 펼쳐진 평지 절이다.

* 연지암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활성리 378 (활성길 120-5, ☎ 054-744-7314)


▲  연지암 대웅전 내부

▲  대웅전 내 서쪽에 있는 활성리석불입상(活城里石佛立像)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96호

연지암의 법당인 대웅전은 1987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그 안에 이곳의 보물인 활성리 석불입
상이 깃들여져 있는데, 마땅히 중심 불단에 있을 줄 알았더만 불단에는 엉뚱하게도 금동(金銅
)으로 다져진 석가3존불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정작 당사자는 서쪽 구석에 자리해 있는 것
이다. 지금의 연지암을 있게 해준 존재이건만 한참 후배들에게 밀려나 구석에 있는 것이다.
다소 이해가 가지 않지만 나름 사정이 있을 것이다.

이 석불은 신라 후기 불상으로 주형광배()를 갖추고 있다. 불상 높이는 153cm, 광배
높이는 190cm에 이르며, 광배에는 머리 주변의 두광()과 몸 뒤쪽의 신광()을 새기고
그 바깥쪽에 화염(火焰) 무늬를 새겼다. 얼굴은 다소 훼손되어 지워져 있으며, 귀가 유난히
길어 어깨에 닿는다. 왼손에는 무언가를 쥐고 있는데, 약합(藥盒)인듯 싶으며, 그게 맞다면
그는 약사여래(藥師如來)가 된다. 오른손에도 뭔가가 쥐어져 있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머리 꼭대기의 무견정상은 꽤나 두꺼워 보이며, 통견()의 법의()를 걸치고 있다. 얼
굴이 좀 지워진 것 외에는 대체로 건강상태는 양호하다.

이렇게 연지암을 덤으로 둘러보고 숭복사로 길을 재촉했다. 숭복사입구에서 이정표의 안내를
따라 왼쪽(동쪽)에 조그만 농로로 한없이 들어서니 넓은 절터와 함께 그 위에 자리한 숭복사
가 모습을 비춘다. 감산사는 그나마 길이 쉽지만 숭복사는 괘릉 해설사와 이정표의 안내가 없
었으면 결코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이다.


 

♠  숭복사(崇福寺)터 둘러보기

▲  숭복사터
절터 가운데에 나무가 솟아나 얇게나마 주변에 그늘을 드리운다. 저 나무는
이곳이 절터(금당터)인지도 모르고 대책도 없이 뿌리를 내렸으니 자연도
망각할 정도로 숭복사란 존재가 오랫동안 잊혀졌다는 뜻이다.


괘릉에서 도보로 거의 30분 이상 떨어진 말방리 구석에 자리한 숭복사는 괘릉과도 무척 인연
이 깊다.
괘릉의 주인을 속시원하게 밝혀준 이곳은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 이전에 파진찬(波珍
飡) 김원량(金元良)이 창건했다. 당시 이름은 곡사<鵠寺, 또는 동곡사(洞鵠寺)>였다.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 시절에 왕이 능자리를 물색하자 신하들이 곡사 자리가 좋다며
추천했다. 이에 왕은 어찌 절에다 능을 쓰냐며 거절했다. 그러자 신하들이
'폐하(陛下), 절이란 자리하는 곳마다 반드시 교화되며 어디를 가든지 어울리지 않음이 없어
재앙의 터를 능히 복된 마당으로 만들어 한없는 세월 동안 위태로운 세속을 구제하는 것입니
다. 무덤이란 아래로는 지맥(地脈)을 가리고 위로는 천심(天心)을 헤아려 반드시 무덤에 사상
(四象)을 포괄함으로서 천대만대 후손에 미칠 경사를 보전하는 것이니 이는 자연의 이치입니
다. 불법(佛法)은 머무르는 모양이 없고 예(禮)에는 이루는 때가 있으니 땅을 바꾸어 자리함
이 하늘의 이치에 따르는 것이 됩니다.
다만 청오자(靑烏子)와 같이 땅을 잘 고를 수만 있다면 어찌 절이 헐리는 것을 슬퍼하겠습니
까? 또한 이 절을 조사해보니 본래 폐하의 인척에게 속해 있던 것인바 진실로 낮음을 버리고
높은 데로 나아가며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왕릉으로 하여금
나라의 웅려(雄麗)한 곳에 자리잡도록 하고 절로 하여금 경치의 아름다움을 차지하게 하면 우
리 왕실의 복이 산처럼 높이 솟을 것이요. 저 후문(侯門)의 덕이 바다같이 순탄하게 흐를 것
입니다.
이는 알고는 하지 않음이 없고 각각 그 자리를 얻는다고 할 수 있으니, 어찌 정(鄭)나라 자산
(子産)의 작은 은혜와 한(漢)나라 노공왕(魯恭王)이 도중에 그만둔 것과 더불어 견주어 옳고
그름을 따지겠습니까?. 마땅히 점괘에 들어맞는 말을 듣게 된다면 용신(龍神)이 기뻐함을 보
게 되실 것입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거린 원성왕은 곡사를 매입하여 능을 조성했으며, 절은 지금의 자리로 옮
겼다. 원성왕의 능자리 매입은
한국경제사에서도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이다. 영토 전체가 제
왕의 땅이라는 이른바 왕토사상(王土思想)이 지배적이던 시절에 돈을 주고 그 자리를 매입했
기 때문이다.
얼마큼의 돈이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잠들 자리이고, 그곳에 신라가 숭배하던 불교사원
이 있었으므로 적지 않은 재정이 지출되었을 것이다.

이후 경문왕(景文王)이 꿈에서 원성왕을 친견하여 곡사를 크게 중건하며 괘릉 수호와 원성왕
의 명복을 빌었으며, 헌강왕(憲康王) 시절에 대숭복사(大崇福寺)로 이름을 갈았다. 이상은 최
치원(崔致遠)이 숭복사비에 남겼다는 비문(碑文)의 내용이다.

신라가 망한 이후, 마땅한 사적은 전해지지 않으나 조선시대까지 그런데로 법등을 유지한 듯
싶으며, 조선의 배불(排佛) 정책으로 경영난이 닥치자 문을 닫고 소리없이 사라진 것으로 보
인다.

이후 이곳은 속세의 뇌리 속에 완전히 잊혀지면서 숭복사란 고유의 이름을 잃은 채, 그저 지
명 이름을 따서 '말방리(末方里)절터'란 이름으로 흘러내려왔다. 그러다가 1931년 입실소학교
에서 이곳으로 소풍을 왔는데, 그때 깨진 비편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에
있던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과 대조한 결과 이곳이 숭복사터임이 밝혀졌다. 그제서야
자신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되찾은 것이다. 또한 비석은 최치원이 쓴 숭복사비로 밝혀졌고, 비
석의 내용을 통해 경주김씨들이 문무왕릉(文武王陵)이라고 그렇게나 우기던 괘릉이 원성왕릉
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숭복사비는 2마리의 거북이 조성된 쌍귀부(雙龜趺)로 절터에서 수습되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으며, 비석 조각은 13개가 발견되어 100자 정도가 판독되었다. 그 외에 기와조각과 주
춧돌 등이 다량으로 햇빛을 보게 되었다.

현재 절터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3층석탑 2기를 비롯해 금당터과 여러 석재(石材), 주춧돌
등이 남아있으며, '國寺大雄(국사대웅)'과 '蓋瓦大雄(개와대웅)'이 새겨진 평와(平瓦)와 금동
제 금구(金口) 등이 발견되었다. 또한 근래에 승려들이 절터 옆에 건물을 짓고 숭복사를 칭하
며 아주 옛날에 끊긴 숭복사의 뒤를 잇고 있다. 지금은 건물 4~5동 정도로 이루어져 있는데,
불전(佛殿)의 품격과는 많이 떨어지는 건물이다. 그나마 저것도 힘들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냥 절터만 덩그러니 있어 도난의 위험에 노출되어있는 것보다는 절터도 지키고 석탑도 지킬
겸, 조그만 절집이라도 곁에 있는 것이 숭복사터에게도 좋을 듯 싶다. 다만 욕심과 불사(佛事
)에 너무 눈이 멀어 절터를 훼손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  숭복사터 3층석탑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94호

금당(金堂)터 남쪽에는 옛 숭복사의 영화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3층석탑 2기가 나란히 서있다.
서로가 닮은 쌍탑(雙塔)으로 2중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얹힌 형태인데, 감산사3층석탑과
마찬가지로 신라 후기 탑이다. 게다가 1금당 2탑 형식의 신라 후기 가람배치하고도 맞아떨어
진다.

동쪽 탑은 2층과 3층 탑신, 3층 옥개석이 없어졌고, 서쪽 탑은 2층 탑신이 온데간데 없다. 기
단은 이리저리 깨지고 닳아 그 틈을 이용하여 자연이 심어놓은 잡초가 둥지를 틀었다. 아무리
인간이 만든 것이 위대하다 한들, 자연 앞에서는 언제 사라질지 모를 모래성에 불과하다. 다
행히 탑이 자연의 일부가 되버리기 전에 절터를 수습하여 이렇게나마 숨을 쉬게 된 것이다.

윗층 기단에는 부처의 법을 수호하는 존재인 팔부신장(八部神將)이 새겨져 있는데, 세월의 때
가 가득 끼었지만 알아보는데 별로 어려움은 없다. 1층 탑신에 문(門) 모양의 조각을 두었으
며, 옥개석은 4단의 받침으로 이루어져 있다.


▲  숭복사터 동3층석탑
세월이란 꺼지지 않는 불에 형편없이 녹아내린 듯한 모습이다.

▲  숭복사터 서3층석탑
동탑보다는 낫지만 여기저기 상처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  3층석탑 기단에 깃든 팔부신장들 ▼


▲  숭복사 금당터

탑 북쪽에는 두툼하게 솟은 금당터가 있다. 세월의 장대한 흐름에 죄다 휩쓸려 가고 터만 황
량하게 남은 금당의 옛 모습은 어떠했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잡초에 쌓여 간신히 주춧돌을
내밀고 있으니 세상살이는 그야말로 무상한 모양이다.
이렇게 하여 감산사와 숭복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숭복사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 68-2 (개곡말방길 17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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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무덤일까? 탑일까? 깊은 산골에 숨겨진 신비의 돌무더기, 산청 구형왕릉~왕산 늦가을 나들이 (왕산사지, 유의태약수터)

 


~~~~~ 산청 가을 나들이 ~~~~~
(전 구형왕릉, 왕산사지, 유의태약수터)

▲  전 구형왕릉


 

늦가을이 절정을 이루던 10월의 끝 무렵에 지리산 동쪽에 넓게 누운 경남 산청(山淸)을 찾
았다.
아침 일찍 부산서부터미널에서 진주(晋州)행 직행버스를 타고 냉정분기점까지 줄기차게 이
어진 교통체증을 뚫으며 1시간 50분 만에 진주시외터미널에 도착했다. 여기서 바로 산청으
로 가는 직행버스를 잡아타고 40분 정도를 달려 9시 40분에 산청터미널에 이르렀다.
산청터미널에서 구형왕릉이 있는 화계리로 가는 군내버스가 10시에 있는데 마침 시간이 딱
맞아 떨어진다.
쌀쌀한 아침 기운에 여남은 졸음을 털어내고 있으니 화계리행 군내버스가 타는 곳에 쑥 머
리를 들이민다. 차에 오르니 거의 노인들 뿐이고, 젋은층은 정말 손에 꼽을 지경이다.

10시가 되자 군내버스는 강인한 심장 소리를 내며 산청터미널을 출발했다. 마침 읍내 주변
은 오리무중(五里霧中)처럼 안개가 자욱했는데, 금서면(今西面) 중심지(매촌리)를 지나 고
개를 오르니 특리(特里)에 이르러 안개에서 완전히 벗어나 광명을 되찾았다. 즉 안개 위로
올라온 것이다.
거의 흔치 않게 경험한 안개 위에 세상은 구름이 거의 없는 푸르른 가을 하늘이 눈 시리게
펼쳐져 있고, 내가 왔던 안개 밑 세상은 여전히 두터운 안개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다. 졸
지에 환경이 달라지니 속세에서 천상(天上) 세계로 승천(昇天)이나 해탈(解脫)을 한 듯한
묘한 기분이 교차한다.

산청군에서 야심차게 닦은 산청한방테마공원을 지나 다시 뱀꼬리 같은 험준한 고개를 넘으
니 구형왕릉을 알리는 이정표와 함께 덕양전이 나온다. 여기서 노인 3명과 같이 내려 늦가
을이 내려앉은 덕양전을 찾았다.


 

  가락국 구형왕(仇衡王)을 봉안한 사당 ~ 덕양전(德讓殿)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50호

▲  홍살문과 굳게 입을 닫은 외삼문(外三門)

구형왕릉 입구에 자리한 덕양전은 가락국(駕洛國, 금관가야)의 마지막 군주인 구형왕 내외를
봉안한 사당이다.

구형왕은 신라에 항복하고 구형왕릉 남쪽 왕산사 자리에 있었다는 수로왕(首露王)의 별궁, 수
정궁(水晶宮)에서 5년 정도를 머물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전한다. 이후 후손들이 사당을 만들
어 제사를 지냈으나 여러 번 중단되었다고 하며, 1798년에 왕릉 밑에 사당을 새로 짓고 다시
제향(祭享)을 올렸다. 1898년 덕양전으로 이름을 갈았는데 이는 구형왕의 다른 이름이라는 양
왕(讓王)에서 따온 이름으로 그의 덕을 기린다는 뜻이다.
그 이후 1930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으며, 1991년 문화재 정비사업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
게 되었다.

덕양전은 1,200평 규모로 영정각(影幀閣)과 안향각(安香閣), 연신문(延神門), 추모재(追募齋)
, 정숙당(靜肅堂), 해산루(海山樓), 동재(東齋), 서재(西齋) 등을 갖추고 있으며, 덕양전 본
전(本殿)에 봉안된 구형왕 내외의 영정은 1798년 왕산사터에서 발견된 목함(木函) 속에 있었
다고 한다. 그 안에는 영정 외에도 왕산사기(王山寺記)도 들어있었다고 하는데 영정은 그때
발견된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 정체가 아리송한 돌무더기를 구형왕릉으로 둔갑시키는 과정에
서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옛 가야의 쓸쓸한 성지(聖地)인 덕양전은 추모재(왕산재)가 있는 경내 우측 부분만 출입이 가
능하다. (공개 범위는 변경될 수 있음) 본전과 안향각, 서재 등 덕양전의 핵심인 해산루 안쪽
은 제향 때를 제외하고는 문을 굳게 닫아건다. 허나 담장이 낮아 밖에서도 거의다 보이며 옛
가락국의 성역인만큼 출입통제 안내문을 거스르면서까지 억지로 들어갈 필요는 없다.

덕양전의 매력은 바로 담장이 아닐까 싶다. 다른 사당은 기와를 얹힌 담장을 둘렀으나 이곳은
아산 외암리마을의 돌담처럼 그냥 돌만 쌓은 형태이다. 돌담의 높이는 1.5m 내외로 돌을 차곡
차곡 쌓아 마치 조그만 성곽(城郭)처럼 보이며, 기와를 얹힌 부분이 없고, 높이도 성인 키보
다 좀 작은 높이를 유지하여 동네 돌담처럼 수수한 모습이 그저 정겹기만 하다. 또한 구형왕
릉의 곡장(담장)도 이곳의 돌담과 비슷한 모습인데 덕양전은 그 왕릉의 사당인만큼 그곳의 담
장을 본떠서 만든 듯 싶다.

제향은 매년 봄 음력 3월 16일과 가을 음력 9월 16일에 춘추향례(春秋享禮)를, 음력 초하룻날
과 보름날에 삭망향례(朔望享禮)를 지내며, 제례 때는 산청 지역 주요 인사들과 후손들, 유림
(儒林), 기관단체장 등 수백 명의 사람들이 참석한다.
* 덕양전 소재지 :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370 (동의보감로 995)


▲  덕양전 추모재(왕산재)로 들어가는 삼문(三門)

늦가을 아침 햇살이 살포시 어루만지고 있는 덕양전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존재는 홍살문이다.
보기만 해도 정덜미가 뚝 떨어질 것 같은 차디찬 인상의 소유자, 홍살문은 관청과 향교 등 국
가 기관과 사당, 향교(鄕校), 서원(書院) 등 양반과 관련이 깊은 장소에 세우는 것으로 이곳
을 찾은 이에게 예의와 엄숙을 요구한다.

홍살문을 지나면 외삼문이 나오는데, 향례 때를 제외하고 늘 문이 닫혀있다. 문에 새겨진 큼
직한 태극마크는 사당의 엄숙함을 더욱 진하게 해준다.


▲  왕산재<(王山齋), 추모재(追募齋)>
덕양전을 관리하는 후손들이 머물거나 모임을 하는 공간이다.

▲  덕양전 사적비를 품은 비각(碑閣)

▲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에 자리한 해산루

▲  해산루 담장 너머에 자리한 서재(西齋)

▲  해산루 돌담 너머에서 본 내삼문과 그
주변 (내삼문 뒤쪽에 덕양전 본전)


▲  외삼문 돌담 너머로 본 해산루 주변
해산루는 외삼문, 내삼문과 달리 문이 활짝 열려있다. 하긴 내부로 들어가는 문을
죄다 통제해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게 했으니 해산루까지 문을 닫아 걸 필요는
없을 것이다.

▲  고색의 때로 자욱한 하마비(下馬碑)

하마비는 하마 서식지가 아닌 말에서 내리란 뜻(下馬)의 비석으로 보통은 홍살문 곁에 두지만
이곳은 다소 거리를 두며 자리해 있다. 덕양전 주차장에서 화계리로 나가는 길가에 빛바랜 모
습으로 있어 자칫 지나치기가 쉽다.

오랜 세월의 때가 가득 낀 하마비는 관청과 향교, 궁궐, 서원, 사당, 왕릉이나 사대부의 묘역
입구에 세우며, 이 앞은 무조건 말에서 내려 예의를 갖출 것을 요구한다.


▲  알록달록 옷을 걸쳐입은 덕양전 동쪽 돌담
지체 높은 사당의 돌담보다는 일반 민가의 돌담 같은 정겨운 모습이다. 이렇게 보면
누가 사당의 돌담으로 보겠는가? 담장 높이도 성인 키보다 약간 낮은 수준이라
평소에는 공개하지 않는 콧대 높은 덕양전 내부가 속시원히 바라보인다.

▲  망경루(望京樓)

덕양전 동쪽에 구형왕릉으로 인도하는 2차선 길(구형왕릉로)이 닦여져 있다. 그 길을 5분 정
도 가면 길 서쪽 계곡에 2층 누각 하나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곳은 망경루란 누락으로 조
선 태조가 고려의 충신인 민안부(閔安富)의 충절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라고 한다. 누각의 이
름인 망경(望京)은 서울을 바라본다. 그리워한다는 뜻으로 민안부의 서울은 당연 고려의 국도
(國都)인 개경(開京, 개성)이 된다.

민안부는 본관이 여흥(驪興, 여주). 자는 영숙(榮叔), 호는 농은(農隱)이다. 학문이 매우 뛰
어나 일찌기 관직에 진출해 공양왕(恭讓王, 재위 1389~1392) 때 예의판서(禮儀判書)까지 올랐
으나 1392년 이성계가 고려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자 이에 반발하여 고려의 유신 70여
명과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고려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 세상은 그를 포함한 72명을 두문
동 72현(賢)이라 부른다.

조선 태조(이성계)는 그에게 벼슬을 내려 나올 것을 권했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두문동을 나
와 산청 대포리(大浦里)에 은둔하면서 매월 첫날과 보름에 개경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며 고려
를 그리워했다. 또한 자손들에게도 조선 조정의 벼슬을 하지 말 것을 경계했으며, 현감(縣監)
에 등용된 아들을 사직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누각은 근래에 손질된 것으로 매년 음력 4월 초파일에 유림에서 조직한 '한계회'에서
제를 지낸다고 한다.

망국(亡國)의 제왕이 묻혔다는 왕릉으로 가는 길목에 이렇게 망국의 충신을 위한 누각이 있으
니 참으로 우연이 아닐 수 없다. 일부러 망국 제왕의 능 밑에 지은 것이 아닐까 싶지만 당시
구형왕릉은 정체가 아리송하던 시절이므로 그건 아닌 듯 싶다. 비록 서로의 신분은 달라도 망
국을 강제로 겪었고, 그 한을 달래는 부분에서는 서로가 공통되니 이 골짜기는 망국을 그리는
이들의 조촐한 공간인 셈이다.

▲  김유신이 화살을 쐈다는 장소에 세워진
사대비(射臺碑)

▲  비각 안에 담긴 가락국 유적비(遺蹟碑)

망경루를 지나면 길 오른쪽에 돌로 다진 단(壇) 위에 심어진 비석이 마중을 한다. 비석 피부
에는 '신라 태대각간 순충장렬 흥무왕 김유신 사대비(新羅 太大角干 純忠壯烈 興武王 金庾信
射臺碑)'라 쓰여 있는데, 김유신이 여기서 활쏘기 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후손들이 이를
기리고자 단을 닦고 비석을 세웠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임)


▲  늦가을이 곱게 봉숭아물을 들인 구형왕릉 가는 길
길을 가다가 갑자기 신선 형님이나 선녀(仙女) 누님이 튀어나오는 것은 아닐까..?


 

  가락국의 마지막 군주, 구형왕의 능으로 전해오는 신비의 돌무덤
전 구형왕릉(傳 仇衡王陵) - 사적 214호

덕양전에서 남쪽으로 1km 떨어진 왕산 북쪽 골짜기에 '전 구형왕릉(이하 구형왕릉, 석총)'이
라 전하는 거대한 돌무덤이 신비로움과 수수께끼를 고요히 품은 채 웅크리고 있다. 산청의 대
표적인 명소로 주변의 빼어난 풍광 때문인지 나 같은 범인(凡人)들이 감히 발을 들이는 것이
뭐할 정도로 더욱 신비롭게 다가온다.

이 무덤은 일반적인 흙무덤이 아닌 돌로 쌓은 이른바 석총(石塚)이다. 이 땅에서 석총의 대표
적인 존재로 고구려의 장군총(將軍塚)이 있는데, 그건 덩치로 보아 고구려의 태왕(太王) 무덤
이 확실하다.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의 왕릉으로 보고 있음> 하지만 이곳 석총은
여전히 정체가 아리송하다. 그래서 구형왕릉이란 이름 앞에 전(傳)을 붙인 것이다. 즉 구형왕
릉으로 아련히 전해오는 존재란 뜻이다.

석총의 형태는 경사진 언덕에 돌로 쌓은 기단식 석단(石壇) 형태로 동쪽으로 뻗어있는 경사면
에 잡석으로 앞면을 7단 쌓고, 정상은 봉분(封墳)처럼 타원의 반구형을 이루고 있다. 전체 높
이는 7.15m 정도로 어떤 이는 산청의 피라미드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자연 경사를 활용하여 만
든 것이라 평지에 만든 계단식 돌무덤<장군총이나 서울 석촌동고분군>과는 차이가 있다.
석총 중간 부분에는 네모난 구멍이 하나 있는데, 이는 폭 40cm, 깊이 68cm의 감실(龕室)로 그
안에는 아무 것도 없으며, 존재의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려진 것이 없다. 처음에는 내부로 들
어가는 문으로 생각했지만, 깊이가 1m도 안되니 그것도 아니다. 만약 불교와 관련된 돌탑이라
면 불상을 봉안한 공간이겠지만 그런 증거도 마땅치가 않다. 예전부터 구형왕릉에 가게 되면
반드시 저 구멍을 살펴보겠노라 다짐했으나, 석총으로 올라가는 양 사이드에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장이 있어 그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사람도 없으니 그 경고를 무
시하고 올라가도 되겠지만 이는 문화유산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석총 주위에는 돌로 쌓은 키 작은 돌담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데, 돌담의 모습은 아까 덕양전
의 돌담과 비슷하여 덕양전이 1930년 그 자리에 터를 닦을 때, 이곳의 돌담을 따라 만들었음
을 알 수 있다.
석총 앞은 경사가 좀 기울어져 있는데 경사면 앞 평지에 비석과 장명등, 문인석(文人石)과 무
인석(武人石) 1쌍을 두어 석총을 지키게 했다. 이들은 모두 근래에 심은 것으로 석총과는 시
대 차이가 상당하다. 무엇을 모델로 삼아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기존의 문인석, 무인석과는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훤칠한 키의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며, 문인석은 너무 나이가 지긋해 보
인다. 그리고 세월에 지쳤는지 조금은 경직된 표정이다.
석총 북쪽 계곡에는 돌로 터를 다지고 능을 관리하고 제기(祭器)를 관리하는 재실(齋室) 2동
을 만들었고, 근래에 주차장과 무덤으로 건너가는 홍예다리를 가설하고 주변을 정비했다.

▲  구형왕릉 우측 석인(石人)
왼쪽이 문인석, 오른쪽이 무인석이다.

▲  구형왕릉 좌측 석인의 뒷모습

◀  구형왕릉 비석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이라 쓰여 있다.
여기서 양왕릉은 구형왕릉의 다른 이름이다.

이 석총의 정체에 대해서는 왕릉이란 설과 석탑이란 설이 있다. 탑으로 보는 설은 안동(安東)
과 의성 지역에 비슷한 모습의 탑이 있어서 그런 것이고, 근처에 왕산사란 절이 있어서 석탑
일 가능성을 높여준다. 탑의 모습은 이 땅의 흔한 스타일이 아닌 이형(異形) 스타일일 것이다.
그리고 구형왕릉이나 왕릉(신라 왕릉으로 구전됨)으로 보는 것은 오래 전부터 구전이나 기록
을 통해 왕릉으로 전해오고 있어서 그렇다. 지금은 왕릉 쪽에 무게가 크게 쏠리고 있으나 불
교 석탑의 견해도 만만치 않다.

조선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산음현(山陰縣) 부분에 '현 서쪽 10리, 왕
산 산중에 돌로 쌓은 언덕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상에서는 왕릉으로 전한다'
는 기록이 있어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던 옛날부터 왕릉으로 구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이곳이 구형왕릉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홍의영(洪儀永, 1750~1815)의 '왕산심
릉기(王山尋陵記)'에서 비롯되었다. 거기서는 무덤 서쪽에 왕산사란 절이 있고 그 절에서 전
하는 '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쓰여있다고 했으며, 산사기권(山寺記券)에도 그렇게 나와있
다. 또한 산청현읍지(山淸縣邑誌)에는 무오년(戊午年, 1798년)에 구형왕릉을 수리하고 사당을
세워 수호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허나 이들도 딱히 신뢰도는 떨어진다. 경주에 있는 많은 신
라 무덤들이 신라 왕족 후손들(박씨, 석씨, 김씨)에 의해 대충 '신라 어느 왕'의 능으로 둔갑
되었듯이 구형왕릉 역시 후손(김해김씨)에 의해 둔갑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석총의 조성시기는 구형왕릉이 맞다면 6세기 중반이 될 것이고, 만약 탑이라면 그 이후가 될
것이다. 이곳에 얽힌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따르면 구형왕이 세상을 뜨자
'나라도 구하지 못한 몸이 어찌 흙에 묻히겠는가? 차라리 돌로 덮어달라' 유언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따르던 신하와 군사들은 시신을 매장하고 그 위에 산에서 뒹굴던 잡석을 하나씩
얹혀서 지금의 석총이 되었다고 한다.

아직 이곳은 구체적인 발굴작업이나 학술조사가 진행되지 않았는데, 하루 빨리 발굴조사가 이
루어져 그 속을 속시원히 들추었으면 좋겠다. 왕릉이라면 조촐하게 석실(石室) 같은 것이 있
을 것이고 거기서 괜찮은 단서나 당시 유물이 앞다투어 나올 지도 모른다. 옛날 제왕이나 귀
족의 무덤은 보물단지라 불릴 만큼 유물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  신비한 기운에 감싸인 듯한 구형왕릉

그럼 이곳에 묻혔다는 구형왕(?~537년)은 누구일까? 구형왕을 살피기 전에 일단 가락국을 포
함한 가야(伽倻)에 대해 아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자웅을 겨루던 삼국시대에 당당한 일원임에도 삼국(三國)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한 가야, 당연히 사국(四國)시대라고 불려야 되지만 가야는 늘 외면을 받고 있다.
가야는 변한(弁韓)을 이루던 12개 나라의 일원인 구야국(狗倻國, 경남 김해)에서 시작되었다.
바로 이곳에서 김수로(金首露)가 지역 촌장과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가락국(駕洛國)을 건국했
다. 그 가락국(금관가야)의 건국 시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나 개황록(開皇曆)에 따르면 서기
42년이라고 한다. 물론 정확한 것은 아니다.

가락국은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변한을 통합했으며, 점령한 곳에는 왕족이나 귀족을 보내 그
곳의 왕이나 관리로 삼거나, 항복한 세력의 군장에게
통치권을 부여했다. 이렇게 해서 소위
말하는 13가야를 이루게 되었다. (예전에는 6가야라고 했음)
13개(혹은 그 이상)의 연맹국가(聯盟國家)로 구성된 가야는 경남 대부분을 차지하고, 경북 성
주(星州)와 상주, 문경<고령가야(古寧伽倻)>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또한 북쪽에 있는 신라(新
羅)와 자주 충돌했는데, 초기에는 가야가 우위를 차지했으며, 서로는 마한(馬韓)과 백제와 다
투었다. 또한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열도(倭列島)로 진출, 곳곳을 개척하여 속령(屬領)으로
삼았으며, 이때 건너간 가야인 중 유력한 사람이 왜왕(倭王)이 되어 가야의 명을 받았다.
특히 철이 많이 생산되어 철생산국으로 막대한 부를 모았는데, 그 철을 바탕으로 강력한 기마
군단을 만들어 주변 나라를 벌벌 떨게 했다.

이렇게 부강하던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 달리 제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지 못
한 한계점이 있었다. 이들 삼국은 중앙집권체제를 통해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고 부국강병을
추구하며 영토 확장에 매진했으나, 가야는 각 연맹국가가 따로국밥처럼 놀아 단결이 쉽게 되
지 못했던 것이다. 가락국과 대가야가 가야연맹의 맹주(盟主) 노릇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맹주일 뿐, 다른 연맹국가를 제어할 정도는 아니었으며, 같은 가야라도 이익 관계에 따라 서
로 치고 박고 싸우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3세기 초반에 안라국(安羅國)이 일으킨 포
상팔국(浦上八國) 전쟁이다.
가락국이 주변 나라와의 해상교역권을 송두리째 차지하며 혼자서만 배를 불리자 안라국 등 경
남 남부 해안 지역에 있던 8개의 나라가 연합군을 결성하여 가락국을 공격했다. 가락국은 서
둘러 신라에 구원을 청했으나, 8국 연합군의 수군이 신라 땅인 울산까지 치고 들어가 그 기세
를 떨치니 가락국은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  계곡 위에 닦여진 홍예다리
홍예다리는 근래에 만든 것으로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를 자아낸다.


4세기 후반, 가락국은 왜열도의 군사를 징발해 약 2만의 군사로 신라 왕경(王京, 경주)을 공
격했다. 신라 내물왕(奈勿王)은 급히 고구려에 살려달라 요청을 했고, 고구려의 태왕인 광개
토태왕(廣開土太王)은 친히 기병 5만을 이끌고 서라벌로 달려가 가야군을 격파했다.
이때 고구려의 기마군과 가야의 기마군이 처음으로 격전을 벌였는데, 둘 다 같은 철갑기병(鐵
甲騎兵)에 철갑옷을 갖췄지만 승자는 고구려였다. 가야의 철갑은 판갑(板甲)으로 방어력은 끝
내주지만 너무 무거워 기동력이 떨어진데 반해 고구려 철갑은 환갑(環甲)으로 방어력은 좀 떨
어지지만 가벼워서 기동력이 좋다. 게다가 고구려군이 전쟁경험도 풍부하니 어찌 가야가 당해
내겠는가.

고구려군은 줄행랑치는 가야군을 쫓아 가야를 풍비박산을 내었고 바다를 건너 왜열도까지 공
격해 쓸어버렸다고 전한다. 그 과정에서 가야연맹국은 큰 혼란에 빠졌고, 이후 소리 없이 쇠
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런 마당에 백제와 신라가 강성해지면서 좌우에서 가야를 압박하
니 하나로 뭉치지 못해 따로 노는 가야연맹은 더욱 힘들어 질 수 밖에 없다. 

가야에게 너무나 가혹했던 6세기가 도래하고, 521년 구형왕이 가락국 10대 제왕이 되었다. 가
락국이 42년에 세워졌다고 쳐도 480년 동안 왕은 겨우 9명이었다는 소리가 된다. 그렇다면 이
들의 평균 재위 기간은 50~55년이라는 소리인데, 이게 말이 될까? 이는 기록의 실수로 중간에
누락된 제왕이 제법 많을 것이다. 세상에 전하는 왕은 구형왕 포함 10명 뿐이니 후세에서 이
를 잘못 계산한 것이다.

구형왕은 구충왕(仇衝王), 구해왕(仇亥王), 양왕(讓王)이라고도 하는데, 왕비는 분질수이질(
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이다. 그는 3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노종(奴宗), 2남은 무
덕(武德), 3남은 무력(武力)이다.

신라 법흥왕(法興王)은 가락국 왕자(또는 왕족)에게 화친의 의미로 신라 왕족 여인을 시집보
냈다. 허나 구형왕은 시집 온 신라 왕녀에게 가야 옷을 입혔고, 이를 들은 법흥왕은 괜한 것
도 아닌데도 뚜껑이 폭발하여 532년 사다함(斯多含)을 시켜 가락국을 공격케 했다.
가야연맹의 오랜 맹주로 위엄을 떨쳤던 가락국은 신라군에게 형편없이 깨지고, 결국 국고(國
庫)의 보물을 들고 신하를 대동하여 신라에 항복하고 만다. 이렇게 하여 500년 역사의 가락국
은 532년 그 문을 닫게 되고, 가야의 맹주는 대가야(大伽倻)로 넘어가게 된다. 또한 가락국을
방패 삼아 간신히 나라를 꾸리던 다른 가야연맹국도 차례대로 무너져 561년 안라국(경남 함안
), 562년 대가야의 멸망을 끝으로 가야연맹은 역사에서 영원히 퇴장한다.


▲  늦가을이 깃든 재실 주변
이곳을 지나던 늦가을도 구형왕릉의 신비로움에 반한 것일까?
잠시 길을 멈추고 곱게 작품을 남겼다.


구형왕이 항복하자 신라 조정은 상등(上等)의 벼슬을 내리고 가락국 땅을 식읍(食邑)으로 주
어 심심치 않게 사례를 했다. 또한 구형왕 일가를 신라 진골(眞骨) 귀족으로 대우했다. 허나
왕은 가락국에 있지 않고, 바로 길을 떠나 수로왕의 별궁이라고 전하는 수정궁(水晶宮)에 들
어와 은둔했다고 한다. 수정궁은 구형왕릉 남쪽 왕산사터라고 전한다. 반면 그의 아들은 김해
에 남거나 신라 조정에 출사했다.
그가 김해를 떠나 산청 산골로 들어간 것은 나라를 말아먹은 죄책감에 고개를 들기 힘들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수정궁이 대가야 서쪽이고, 백제 땅과도 가까워 이들의 도움을 받아 후
일을 도모하고자 함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여기서 5년을 머물다가 한많은 삶을 마감했다.

구형왕의 3째 아들인 김무력(金武力)은 신라 조정에 출사해 많은 무공(武功)을 세웠으며, 나
중에 벼슬이 상위 등급인 각간(角干)까지 올랐다. 그의 아들인 김서현(金舒玄)은 신라 왕족인
만명(萬明)과 혼인했으며, 그 역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그 유명한 김유
신으로 그도 숱한 전공을 세우고, 왕족인 김춘추(金春秋)를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하면서 군권
을 장악했다. 그가 죽자 왕족이 아님에도 왕으로 추존되었으니 신라에서 그의 위치가 어떠했
는지를 가늠케 해준다. 그의 시호는 흥무왕(興武王)이다.
그를 통해 가야계 김씨들의 세력이 왕성해졌으나 그가 세상을 뜬 이후, 그 세력도 많이 약해
졌으며, 김유신의 자손들도 별로 두드러지는 인물이 없었다.


▲  홍살문 앞에서 바라본 건너편 남쪽 재실(호릉각)

구형왕릉은 새도 들어오기 힘든 심산유곡(深山幽谷)으로 숲이 울창하고 계곡이 졸졸 흘러 한
여름에도 시원하다. 산청에서 띄워주는 명소로 휴일에는 사람이 좀 오지만 평일에는 사람 구
경 하기가 힘들어 새소리와 산바람의 소리만이 이곳에 내려앉은 정적을 살짝 깨뜨린다.
자연을 벗삼아 사색을 즐기기에 아주 좋은 곳으로 왕산 등산로의 시작점이 되기도 한다. 여기
서 유의태약수터나 망경대를 통해 왕산으로 오를 수 있다.

홍살문에서 구형왕릉으로 갈 때는 정면 돌다리를 건너 호릉각을 거치거나 홍살문을 지나 삼문
을 거쳐도 된다. 어차피 거리는 둘 다 비슷하다. 다리 건너에 돌로 터를 다져 석축을 3단으로
쌓고 재실인 호릉각을 지었는데, 그곳에 서린 늦가을 풍경이 가히 숨이 막히고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저곳에 들어가면 나도 단풍마냥 알록달록 물드는 것은 아닐까?

▲  왕릉으로써의 애써 위엄을 보이려는
붉은 피부의 홍살문

▲  왕릉 앞에 세워진 삼문(三門)

▲  제사 물품을 보관하고 제례를 준비하는
호릉각(護陵閣, 남쪽 재실)

▲  호릉각과 북쪽 재실을 이어주는 문


▲  왕릉의 우측 돌담
돌담과 왕릉 뒤쪽은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이젠 나이가 상당하여
돌담과 왕릉에 발을 올리기만 해도 스르륵 무너질 것 같다.

▲  약간 우측에서 올려다본 구형왕릉
가을 볕이 살포시 내려앉은 구형왕릉, 워낙 비밀이 많은 곳이다 보니
왕릉을 이루고 있는 돌들도 모두 범상치 않게 다가온다.

▲  북쪽 재실에서 바라본 돌다리와 홍살문

※ 전 구형왕릉 찾아가기 (2018년 10월 기준)
① 산청까지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산청행 직행버스가 1일 8회 떠난다.
*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산청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진주에서 산청행 직행버스가 10~20분 간격으로 운행
② 현지교통
* 산청터미널에서 화계리행 군내버스가 1일 9회 정도 있으며, 화산마을(덕양전)에서 하차하여
  도보 20분
③ 승용차 (주차비 없으며, 덕양전에도 주차장 있음)
* 대전~통영고속도로 → 산청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매촌3거리에서 우회전 → 덕양전에서
  좌회전 → 구형왕릉
* 구형왕릉 소재지 -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


 

  늦가을에 젖은 왕산(王山) <왕산사지, 유의태약수터>

▲  살짝 구부러진 왕산 포장길 (구형왕릉로)

왕산(923m)은 산청군 금서면에 자리한 높은 산이다. 왕산이란 이름은 구형왕릉에서 유래되었
다고 하며, 태왕산(太王山)이라고도 한다. 왕이 오른 고개란 뜻의 왕등재를 비롯하여 관련된
이름이 여럿 전해오며, 특히 고령토(高嶺土) 산지로 예로부터 명성이 높아 특리와 향양리, 방
곡리에 가마터 유적지가 있다.
왕산에는 전 구형왕릉과 왕산사터, 유의태약수터 등의 명소가 있으며, 능선과 정상 주변은 봄
에는 철쭉이, 가을에는 억새가 장관을 이룬다.

구형왕릉에서 유의태약수터까지 가는 길은 2갈래이다. 하나는 산길이고 다른 하나는 포장길을
인데, 서로 떨어진 듯 보이지만 결국 하나로 만난다. 포장길은 차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
게끔 산 중턱을 지나 자혜리로 이어진다.
산길은 돌이 많고 계곡을 옆에 낀 헝클어진 길이지만 거의 직선이다. 포장길은 잘 닦여진 길
이라 발의 무리는 별로 없지만 험준한 왕산의 눈치 때문에 2배 이상으로 빙빙 둘러가야 된다.
그리고 기왕 산에 왔으니 가을 낙엽이 귀를 접고 누운 산길이 더 호젓할 것이다.

가을이 떠나려는 산길에는 장차 밀려올 겨울을 원망하며 땅으로 곤두박질 친 낙엽들이 가득하
다. 점차 차가워지는 가을산을 따스히 덮어주며 흙으로 들어갈 그 순간을 기다리는 낙엽의 마
지막 여정.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마지막에는 결국 한줌의 흙이 되고 만다. 시작과 중
간은 크게 다를지언정 그 종점은 모두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허무한 모양이다.


햇볕 한점 들어오기 힘든 무성한 산길을 10여 분 오르면 구형왕릉에서 갈라진 포장길과 다시
만난다. 왕산과 유의태약수터를 띄우고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콘크리트로 밀어버렸지만 그
냥 흙길이거나 오솔길 같은 길이었으면 더 운치가 있었을텐데 그 점이 아쉽다.
포장길에는 낙엽이 우수수 떨어져 거대한 자연산 카페트를 이루고 있고, 마치 산불이 일어나
듯 알록달록 타오른 나무들은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광속과 같은 시간을 원망한다. 아
름답게 다가오는 늦가을 풍경에 가히 숨이 막히고 눈이 멀 지경이다. 인간의 한낱 언어나 단
어로 늦가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건방질 정도로 말이다.


▲  낙엽이 가득 깔린 왕산 포장길

평일이라 그런지 이 서정적인 길에 사람은 나 하나 뿐이다. 구형왕릉은 그래도 나들이객들이
여럿 보였지만 그 이상은 차도 사람도 보이질 않는다. 자연의 소리만이 살며시 귀를 간지럽히
는 이 좋은 길을 비록 잠시긴 하지만 내가 완전 무료 전세를 낸 것이다. 소원 같아서는 이 길
을 내 소유로 만들거나 집으로 살짝 가져와 두고두고 거닐고 싶지만, 그저 헛된 망상일 뿐이
다. 그저 오늘만이라도 이곳의 주인공이 된 양 누구의 눈치 없이 마음 편히 둘러보고 사라지
는 것이 최선일 뿐이다.

아무도 없는 길이지만 자연과 벗삼으며 자연 속에 녹아들며 걸으니 결코 지루하지가 않다. 아
니 그런 것을 느낄 겨를도 없다. 포장길과 산길이 만난 곳에서 유의태약수터 입구까지 20분
거리이지만 무엇에 홀린 듯, 그렇게 걷고 보니 금세 약수터 입구이다. 이런 길은 정말 몇 시
간을 걸어도 질리지 않을 것이다.


▲  유의태약수터 입구를 코앞에 두고

▲  유의태약수터로 가는 산길 (왕산사터 주변)

유의태약수터 입구에서 왼쪽으로 난 산길로 접어들면 초반에는 조촐하게 깔린 계단길이 펼쳐
진다. 경사는 자연의 넉넉한 마음처럼 여유로우니 힘든 것은 별로 없다. 계단길을 오르면 돌
이 박힌 정겨운 풍경의 산길이 펼쳐지는데, 그 길의 끝에 유의태약수터가 있다.
그곳으로 가는 중간에는 구형왕과 관련되어 있다는 왕산사터가 있으니 유의태약수터의 후식으
로 삼아 둘러보기 바란다.


▲  왕산사터(王山寺址) - 경남 지방기념물 164호

구형왕릉에서 남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왕산 북서쪽 자락에 왕산사터가 숨어있다. 이곳은 유
의태약수터 바로 밑으로 그곳으로 가는 길목에 있으니 찾기는 쉽다.
예전에는 이곳이 절터긴 하지만 정체가 확실치 않아 이름 앞에 아련히 전한다는 뜻에 전(傳)
을 붙였으나 이제는 완전히 확증이 가는지 과감하게 전을 빼버리고 그냥 안내문과 관련자료에
모두 왕산사지라 표현했다.

이곳에 있던 왕산사는 언제 지어지고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망했는지는 기록이 없어 전하
는 것이 거의 없다. 다만 승려 탄영(坦暎)이 쓴 왕산사기가 절터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그
기록에 따르면
'산양현(山陽縣, 산청) 서쪽 모퉁이 방문산(方文山)의 동쪽 산록에 산이 있는데, 왕산이라고
부른다. 산 위에 왕대(王臺)가 있고, 아래에 왕릉이 있어 왕산이라고 한다. 능묘를 수호하였
기 때문에 왕사(王寺)라고 하였는데, 절은 원래 왕산의 정궁(正宮)이었다. 능은 가락국 10대
왕인 구형왕이 자리잡았던 현궁(玄宮)이었다'

즉 구형왕릉을 관리하고 지키던 원찰(願刹)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곳에는 구형왕이 말년을
보냈다는 수정궁이 있었다고 하는데 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이 세웠다고 전하는 궁으로 거의
별궁 수준으로 여겨진다. 그 수정궁이 구형왕이 죽은 이후에 왕산사로 전환되었다고 하며 궁
자리가 넓어서 수정궁 건물을 그대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16세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이곳이 왕대암(王臺庵)으로 나오
며, 1755년에 제작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왕대암이 폐사되고 왕산사가 있다'는 기록이
있어 왕산사는 적어도 16~17세기까지 법등(法燈)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왕대암은 왕
산사의 다른 이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1793년에는 왕산사에서 오랜 세월 전해오던 나무상자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서 구형왕 내외의
초상화와 옷, 활, 왕산사기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유물은 덕양전에 있는데, 아마도 발
견되었다기보다는 구형왕릉 둔갑 프로젝트 차원에서 지어낸 것으로 여겨진다. 구형왕릉은 불
교 탑으로도 강하게 의심을 받고 있어 그것이 맞다면 왕산사와 관련된 탑으로 보인다.

근래에는 가야문화연구소에서 지표조사를 벌려 건물터 6개와 문터로 추정되는 흔적, 계단 흔
적, 비석 받침과 부도 등을 건졌으며, 산청군에서 2007년과 2009년에 발굴작업을 벌여 수많은
기와조각과 그릇 조각을 꺼냈다. 다만 구형왕과 관련된 가야 유물은 나오지 않아 이곳에 씌워
진 구형왕 관련 이야기에 다소 회의감을 들게 한다.

현재 절터는 대자연이 잡초와 나무로 따스하게 보듬어주어 그 허전함을 덮어주고 있으며, 주
춧돌과 석물은 잡초에 묻혀있다. 왕산사가 아무리 크고 대단하다 한들, 자연 앞에서는 그저
장난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곳을 가득 채웠을 왕산사 왕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 모습을 담은 그림이나 기록이 없으
니 누구도 알 수 없다. 단순히 건물터나 주춧돌 등으로 그 모습을 정확하게 판단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니 옛터 위에 상상의 나래를 발휘해 이곳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도 괜찮
을 것이다. 절의 건축물이야 뭐 기와집일 것이니 그것을 참조하여 상상을 펼쳐보이면 된다.
어차피 정답은 없으니 말이다.

인적이 없는 고요한 절터를 둘러보며 부도(승탑)를 찾다가 갑자기 맷돼지가 생각이 난다. 요
즘 그들의 개체수가 쓸데없이 늘어나 산에 자주 출몰한다고 하는데, 이곳은 지리산과 가깝고
숲이 무성한 데다가 워낙 외진 곳이라 자칫 멧돼지가 나타날 수도 있다. 자연의 소리만 들리
는 이런 곳에서 그를 만난다면 참 대책이 없을 것이다. 갑자기 다가오는 그 오싹한 기분에 절
터 답사를 팽개치고 부랴부랴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  숲의 일부가 되버린 왕산사터 산중턱 부분

▲  왕산사터 주춧돌
절터를 가득 메운 잡초와 나무들이 계속 자라서 나중에 왕산사 시절
건물을 그런데로 재현해주지는 않을까?

▲  왕산사터 서쪽 부분

▲  산중턱에 남은 왕산사터 석축


▲  유의태(柳義泰)약수터

왕산사터에서 3분 정도 더 들어가면 그 길의 끝에 유의태약수터라 불리는 약수터가 마중을 한
다. 왕산에 왔다면 구형왕릉, 왕산사터와 더불어 꼭 둘러봐야 되는 명소로 허준(許浚)을 주인
공으로 한 동의보감에 등장하는 그의 스승 유의태의 이름을 딴 것이 이채롭다.
약수터로 인도하는 길은 근래에 박석을 깔아 정비했으며, 약수터 역시 그냥 길가에 물이 솟은
평범한 샘터이던 것을 마치 오래된 유적처럼 손질했다.

이곳이 유의태약수터란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은 동의보감에 등장하는 유의태가 약수와 치료에
사용했다는 이야기 때문이다. 샘터에는 자연이 베푼 옥계수가 가득 솟고 있는데, 물을 한 바
가지 떠서 들이키니 몸 속의 체증이 싹 가신 듯 목구멍이 즐겁다고 쾌재를 부르짖는다. 그렇
다고 물이 오색(五色)약수나 방동약수처럼 쓴 맛도 아니다. 그냥 일반 샘터에서 마실 수 있는
그런 물이다. 다만 유의태약수 어쩌구 하니까 심리 때문인지 맛이 조금은 달콤하고 특별하게
느껴진다. 이 물을 마시면 정말 병이 싹 나을 것 같은 기분도 교차한다.

허준의 스승인 유의태는 동의보감 소설에 나오는 가공의 인물이다. 그의 모델은 18세기에 산
청 지역에서 활약했던 유이태(柳爾泰, 또는 柳以泰 1652~1715)라고 한다. 그러니까 허준 시절
보다 약 100년 뒤에 인물이 된다.
그는 거창유씨로 호는 신연당(), 원학산인(). 인서(西), 자는 백원()이
며, 거창(居昌) 위천 서마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소에는 '泰' 한자를 썼고 의서에는 '
泰'를 사용하여 이름 한자 2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 외가가 있는 산청 생초면으로 넘어와 그곳에서 의술활동을 펼쳤다. 이때 그가 진
료에 사용한 물이 바로 이 약수라는 것이다.
1706년 전국적으로 천연두(天然痘)와 마진(痲疹, 홍역)이 유행하여 많은 생명을 앗아가자 마
진경험방()을 토대로 하여 의학서적인 마진편(痲疹篇)을 썼다. 이 책은 1931년 활
자본으로 출간되었다.
숙종(肅宗) 때 어의(御醫)가 되었으며, 안산군수로 발령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고향으로 내려
와 백성들을 치료했다. 의술이 뛰어나 허준과 중원대륙의 명의 판작()에 비유되기도 했으
며, 실험단방(), 인서문견록(西) 등의 저서를 남겼다.

이후 소설 동의보감에서는 허준이 산청에 잠시 머물던 시절, 이 지역 명의였던 유이태를 이름
만 약간 바꿔 유의태로 삼아 그의 스승으로 둔갑시켰다. 그러니 유의태란 인물은 실존 인물이
아닌 것이다. 다만 산청군청과 몇몇 사람들이 유의태가 실존 인물로 정말 허준의 스승이었다
고 주장을 해 눈길을 끈다. 유의태는 1516년 산청군 신안면 상정마을 출신으로 서자(庶子)였
다고 하며, 산청 지역 제일의 명의로 활동하면서 허준을 제자로 삼아 많은 것을 전수했다는
것이다. 임종에 임할 때 허준에게 자신의 몸뚱이를 해부할 것을 유언으로 남겨 해부의학(解剖
醫學)의 효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또한 유의태는 왕산의 자생 약초에 이 약수터의 물로 탕액을 만들었다고 하며. 자신이 고치지
못한 병에 이 물을 이용해 낫게 했다는 설화가 있다고 한다. 그는 이 약수를 위암을 다스리는
물이라고 했으며, 위장병과 피부병 등 불치병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전해져 인근에서 인기가
높다. 과연 효험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유의태가 과연 동의보감에서만 나오는 인물인지 아니면 정말 숨을 쉬던 인물인지는 알 수 없
다. 현재로써는 유이태를 모델로 한 가상인물이란 설이 지배적이다.

* 약수터입구까지 차량 접근 가능, 구형왕릉에서 도보 약 30분

* 왕산사터, 유의태약수터 소재지 -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1외


▲  성큼 다가선 유의태약수터

▲  샘터 위에 약수터의 이름이 점잖게
쓰여 있다.

▲  콸콸 솟아지는 약수


▲  왕산을 뒤로 하며

약수터에서 물이 닳도록 마시니 배가 부르다. 여기서 동쪽 산길을 오르면 망경대와 왕산 정상
으로 이어지는데, 거기까지는 답사 계획에 없으므로 쿨하게 하산하기로 했다. 이때 해는 중천
에 떠서 점심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내려갈 때는 중간에 새는 거 없이 포장길로 구형왕릉까지 내려갔다. 내려가는 동안에도 사람
이나 차량을 하나도 구경을 못했다. 이렇게 운치 그윽한 길을 홀로 걸으니 기분 또한 색다르
며 늦가을의 향연에 잠긴 나무들은 낙엽을 휘날리며 떠나는 나를 전별한다. 다음에 인연이 된
다면 꼭 다시 찾아와 왕산 정상까지 오르고 싶다.


▲  잠시 낙엽에서 해방되다.

▲  포장길(구형왕릉로)이 크게 구부러진 곳에서 바라본 천하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와 함양군 유림면 지역

▲  구형왕릉에서 덕양전으로 내려가는 길
나무들이 서로 불을 지르고 있다.

포장길을 거의 2/3 내려온 지점에서 길이 크게 구부러지는데, 여기서 화계리와 유림면 지역이
두 눈에 조망된다. 그 구간을 지나면 구형왕릉이 나온다.

잠시나마 정들었던 왕산과 다음을 막연히 기약하며, 덕양전을 지나 화계리 마을로 나왔다. 화
계리는 금서면에서 2번째로 큰 마을로 경호중학교와 보건지소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북쪽에
있는 임천교를 건너면 바로 함양군 유림면의 중심지로 임천을 사이에 두고 산청과 함양(咸陽)
행정 경계가 맞대고 있는 것이다.

눈이 시리도록 깨끗한 은빛 물결에 임천을 건너 유림면사무소앞 유림3거리에서 함양읍으로 가
는 군내버스를 타고 함양읍내로 나갔다. 화계리에서 산청읍으로 가는 것보다는 유림에서 함양
읍으로 가는 군내버스가 더 많이 다니는데, 서울이나 인천에서 온다면 함양을 거쳐 이곳 유림
3거리에서 왕산 나들이를 시작하는 것도 괜찮다. 덕양전까지는 도보 15분 정도면 도착하고 여
기서 50분 정도를 더하면 거뜬히 유의태약수터까지 간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구형왕릉, 왕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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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8년 10월 1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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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덮힌 폐허의 절터에서 인생무상을 느끼다. 신라 말 구산선문의 하나였던 곳 ~~ 보령 성주사지

 


' 폐허의 옛 절터를 거닐다, 보령 성주사지 '

▲  눈에 뒤덮힌 폐허의 성주사지

 


겨울 제국의 한복판을 헤매던 1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충남 예산과 보령 지역을 찾았다.
우선 예산에 먼저 들려 예산읍내 근처에 있는 향천사(香泉寺. ☞ 관련글 살펴보)를 둘
러보고 예산역으로 나온 다음, 장항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보령시(保寧市)의 관문, 대
천역에서 두 발을 내렸다.

장항선 대천역과 보령시외터미널이 보령시내 도심인 옛 대천역에서 현 자리로 이전을 했
지만 보령시내버스 대부분은 여전히 옛 보령역을 기/종점으로 고집하고 있다. 그래서 그
곳까지 20분 정도 가볍게 걸어가 오천(鰲川)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자 했다. <충청수
영성(忠淸水營城)과 오천항을 보려고 했음>
허나 버스 시간도 맞지 않고 일몰까지 코앞에 다가와 그야말로 마음이 급해졌다. 겨울의
한복판이라 해가 일찍 지기 때문이다. (그때 시간 16시경) 그래서 시내와 가까운 성주사
터나 갈까 해서 성주/웅천행 정류장에서 시간표를 확인하니 성주사터 앞까지 가는 800번
대 버스(백운사행)가 곧 올 시간이다. 하여 꿩 대신 닭으로 성주사지를 가게 되었다.

그 버스를 타고 보령시청을 지나 성주고개의 눈치를 덜어준 성주터널을 통과하니 서해안
과는 전혀 다른 첩첩한 산골의 성주면이 펼쳐진다. 충남 서해안 지역은 거의 평지이지만
이렇게 약간의 거리를 두고 거의 강원도(江原道) 산골 분위기가 나타나니 마치 강원도까
지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성주면사무소에서 왼쪽(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성주천(聖住川)을 따라 들어가는데, 하늘
을 가리며 늘어선 오래된 가로수들의 유혹에 그만 성주사지를 하나 앞둔 성주초교(성주2
구)에서 내리고 말았다. 허나 여기서 성주사지까지는 도보 5분 거리에 지나지 않아 별로
부담도 없다.
이곳 가로수는 100~200년 정도 숙성된 느티나무로 10여 그루의 조촐한 모습이다. 이들은
성주천의 범람을 막고자 조성된 일종의 제림(堤林)으로 동네의 정자나무 역할도 겸한다.


▲  성주천과 나란히 이어진 성주초교 앞 가로수길(심원계곡로)

▲  가로수길의 제일 어른인 200년 묵은 느티나무 -
보령시 보호수 8-1-11-5-479호
성주천을 향해 몸을 구부리며 하천을 거울로 삼아 자신의 초췌한 모습을
우수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나무 높이 15m, 둘레 2.8m

▲  돌담 사이로 난 저 계단을 오르면 폐허의 현장 성주사지가 모습을 비춘다.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로 이름을 날렸던 곳, 허나 지금은
폐허의 현장이 되버린 거대한 옛 절터, 성주사지(聖住寺址)
- 사적 307호

성주산(聖住山) 남쪽 평지에 포근히 자리를 깐 성주사터는 백제 법왕(法王, 재위 599~600) 때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법왕은 신라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이들의 영혼을 기리고자 세웠다고 전
하며 처음 이름은 오합사(烏合寺)였다. 백제의 마지막 국도(國都)인 부여(扶餘)에서 서해바다
로 가는 길목에 있어 어느 정도 번영을 누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 때는 낭혜화상(朗慧和尙) 무염(無染)이 당나라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와 이곳 주지로 머물면서 선종(禪宗)을 보급하는 한편,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성주산파(聖住山派)를 개창해 이곳을 중심지로 삼았다.
선종은 경전 중심의 학문적이고 귀족들이 선호하던 교종(敎宗)과 달리 문자를 통하지 않고 오
로지 참선을 중시하던 사상이라 백성들의 인기가 높았다. 그러다보니 성주사를 찾는 신도의 수
가 급증하면서 그 인기에 힘입어 절을 크게 중창했는데, 불전 80칸, 수각 7칸, 고사(庫舍) 50
여 칸 등 1,000여 칸을 자랑했으며, 이곳에 머물던 승려만 2,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에 문성왕은 무염을 성인(聖人)이라 칭하며 그 성인이 머무는 절이란 뜻의 '성주사'란 이름을
내렸다.
이렇게 신라 막판에 선종 사찰의 하나로 번영을 누리던 성주사는 고려 이후 마땅한 사적(事蹟)
을 남기지 못했으며, 조선 초기 석등이 전하는 것으로 봐서는 조선 때까지 법등(法燈)을 그런
데로 유지했던 모양이다. 허나 이후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아 아마도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다
시는 일어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거의 전설처럼 사라져 허망함을 던진 성주사터는 속인들의 경작지로 변했고, 그 밭두렁 사이로
성주사의 옛 영광을 숨죽여 간직한 석탑과 석등이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불상이라도 남아있
었으면 사람들이 와서 예불도 올리고 보호각도 짓고 했을 터인데, 그러지도 못했다. 절터 한쪽
에 있는 석불입상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인근에서 가져온 석불로 성주사와는 관련이 없다.

근래에 절터를 정비하면서 절터의 목을 단단히 죄고 있던 경작지를 모두 밀어버렸으며,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정도로 드넓은 면적의 절터에는 국보 8호인 낭혜화상탑비를 비롯하여 중앙3층
석탑과 서3층석탑, 동3층석탑, 5층석탑, 석등, 석계단, 석불입상 등의 문화유산이 풍부하게 널
려있다. 이 중 국보가 1점, 보물이 3점이나 된다. 또한 중문터(동문터)와 강당터, 금당터, 화
랑터, 삼천불터 등의 건물터도 윤곽을 드러내고 있으며. 신라 후기 불상의 머리와 백제와 신라
, 고려의 기와조각 등이 출토되어 성주사의 옛 영화로움을 속삭여주고 있다.
가람배치는 중문(동문터)과 석탑, 금당, 강당으로 이어지는 배치이나 3층석탑 2기 대신에 5층
석탑을 둔 것이 특이하며, 금당 뒤로 3층석탑이 3기나 몰려있어 기존 신라 사찰의 가람배치와
는 조금 틀리다.

현재 절터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넓지만 절터 일대를 완전히 조사한 것은 아니다. 절
터 주위로 돌담이 길게 둘러져 있는데, 이는 절터에서 출토된 돌을 마땅히 둘 곳이 없어서 담
장으로 만든 것이며 그렇다고 그 돌담이 성주사의 경계를 나타내는 것은 더욱 아니다. 돌담 안
에 감싸인 절터도 아직까지도 절반 이상이 미발굴지로 남아있고, 절의 명성을 봤을 때 절터 서
쪽 산자락과 절터 북쪽에 자리한 마을도 모두 성주사의 영역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부분 발굴만 할 것이 아니라 언제 한번 절터와 주변 산자락, 마을까지 속시원하게 뒤엎
어 발굴조사를 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성주사의 숨겨진 행적과 보물이 제대로 드러날 것이다.

성주사의 왕년의 모습은 남겨진 그림이 없다. 그러니 각자 알아서 그 당시에 맞게 상상의 나래
를 살찌우면 된다. 어차피 정답은 없다. 그렇다고 인도식이나 아랍식, 유럽식으로 엉뚱하게 상
상하는 것은 곤란하다. 우리 전통 사찰의 맞게 상상을 하면 될 것이다.
4기의 석탑에 둘러싸인 금당은 이 땅의 흔한 법당(法堂) 이름인 대웅전(大雄殿)으로 불렸을 것
이고, 아마도 맞배지붕을 지녔을 것 같다. 그 옆에는 동서로 길쭉한 건물터가 있는데, 이는 삼
천불전(三千佛殿)터라고 한다. 건물의 이름처럼 3,000기의 조그만 불상이 불단을 가득 메우며
장관을 이루었을 것이다. 3층석탑 뒤에는 남북으로 긴 강당(講堂)터가 있으며, 금당터 남쪽에
는 회랑터가 있다. 그리고 성주사의 제일 보물은 낭혜화상탑비는 강당터 서쪽에 두어 절을 크
게 키운 그를 두고두고 기린다. 절의 건물 배치는 현재 이 정도만 살을 드러내고 있어 나머지
는 아직 수수께끼에 머물러 있다.

※ 성주사지 찾아가기 (2017년 2월 기준)
① 보령까지
* 용산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군산역, 익산역에서 거의 1시간 간격으로 다니는 장항
  선 열차를 타고 대천역 하차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보령행 직행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떠나며, 동서울터
  미널에서 1일 10회, 남부터미널에서 1일 3회 떠난다.
* 인천, 부천, 고양, 성남, 안산에서 보령행 직행버스 이용
* 대전(서부, 복합, 유성), 천안, 아산, 공주, 서산, 군산에서 보령행 직행버스 이용
* 대전서부터미널과 논산, 부여에서 성주 경유 보령행 직행버스(1일 6회)를 타고 성주 하차.
  성주사지까지 도보 15분
② 현지교통
* 대천역과 보령터미널에서 시내(옛 대천역)로 나가는 100번 시내버스를 타고 보령요양벙원에
  서 하차, 건너편 정류장에서 백운사, 먹방, 심원동으로 가는 800번대 시내버스(1일 12회 운
  행)로 환승하여 성주사지에서 하차.
  차 시간이 맞지 않을 경우 성주, 외산으로 가는 800번 시내버스 아무거나 잡아타고 성주에서
  하차하여 도보 15분, 이들 버스는 모두 옛 대천역에서 출발한다.
* 보령터미널에서 성주 경유 부여, 서대전행 직행버스(1일 6회)를 타고 성주 하차.

★ 성주사지 관람정보
* 성주사지 문화유산해설사가 9시부터 18시(겨울에는 17시까지)까지 근무한다.
* 소재지 -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


▲  설피(雪皮)를 뒤집어 쓴 성주사터
대머리처럼 허전한 절터를 하얀 눈이 두텁게 감싸준다.


▲  문화재발굴체험 학습장
절터 동쪽에 담장을 갖춘 기와집을 만들어 문화재발굴 체험장으로 삼았다.
평일 오후라 대문은 굳게 잠겨져 있어 내부는 적막만이 감돈다.
체험문의는 보령관광안내소(☎ 041-932-2023, 대천역 소재)

▲  동문터로 인도하는 돌계단

▲  돌계단을 오르면 중문터인 동문(東門)터가 나타난다.
큼직한 주춧돌이 동문의 옛 모습에 약간의 단서를 제공해준다.

▲  남쪽 회랑(回廊)터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회랑의 모습은 신라 사찰의 대명사인 불국사(佛國寺)의 대웅전 주변 회랑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듯 싶다. 금당 주변을 회랑으로 두룬 것은
신라와 고려 절의 특징이다.

▲  남쪽 회랑터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  동문터와 회랑터가 접히는 부분에서 바라본 금당터 주변

▲  성주사지 석등(石燈)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33호

훤칠한 키의 5층석탑 그늘에 자리하여 조금은 초췌해 보이는 이 석등은 조선 초기 것으로 여겨
진다. 석탑 주변에 이리저리 조각나서 흩어져 있던 것을 1971년에 수습한 것으로 네모난 창이
4개나 뚫린 화사석(火舍石) 밑에는 3단을 이루는 받침을 두고, 위에는 8각의 지붕돌과 머리장
식을 얹혔다. 화사석 받침 밑과 석등의 제일 밑부분인 바닥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석등
의 기둥은 신라나 고려의 석등보다는 굵기가 가는 편이다. 별 꾸밈이 없는 수수한 모습으로 절
이 있던 시절에는 부처의 광명(光明)을 상징하듯 경내를 환하게 밝혀주었을 것이다.

▲  성주사지 5층석탑 - 보물 19호

금당터 앞에 자리한 5층석탑은 성주사터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존재이다. 금당터 뒤쪽에 있는 3층석탑 3형제와 층수만 다를 뿐, 만든 솜씨는 거의 비슷하며, 2중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
신을 얹힌 형태로 성주사가 한참 잘나가던 9세기 후반 탑으로 여겨진다.
기단 바로 위쪽에는 네모난 괴임돌을 끼워 두었는데, 탑에 괴임돌을 두는 것은 고려시대 탑에서 흔히 나타나는 양식이다. 이 탑은 괴임돌이 하나기 때문에 그 이전 단계라고 보면 될 듯 싶다.
탑신의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고, 추녀 밑은 수평을 이루다가 위로 살짝 고개를 들었
으며, 탑신은 위로 올라갈 수록 일정하게 줄어드는 비율로 균형이 잡히고 우아한 모습을 자랑한
다. 탑 위쪽에는 머리장식인 노반(露盤)이 있을 뿐 다른 것은 없다.


▲  동남향(東南向)을 취한 금당터

금당터는 특이하게도 동쪽도 남쪽도 아닌 동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왜 방향을 그리 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절터 동쪽에 흐르는 성주천에 맞추고자 함일 수도 있고, 신라의 왕도(王都)인 경주
를 바라보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허나 딱히 증거가 없으니 상상 속에서 더 이상 끌어오지를
못한다.

신라 후기에 지어졌을 금당은 이렇게 건물을 받치던 주춧돌만 남아있을 뿐, 그 위에는 텅 비었
다. 금당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 상상 속 도화지에 그 모습을 그려본다.


▲  성주사지 석계단(금당 동쪽 계단)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40호

금당으로 오르는 돌계단은 2개가 있는데, 위로 올라갈 수록 계단의 폭이 줄어드는 형태를 취하
고 있다. 동쪽을 향한 계단 양쪽 소맷돌에는 수려한 조각의 사자상(獅子像)이 새겨져 있었는데,
바로 그 때문에 돌계단이 1984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것이다. 허나 공무원의 관리소홀로 인해
1986년 도둑을 맞아 그때 생긴 상처를 간직한 계단만 남아있으며, 그때 사라진 사자상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어여 돌아왔으면 좋으련만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들 돌계단과 사라진 사자상은 금당이 세워진 신라 후기에 같이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금당터 중앙에 자리한 연화대석(蓮花臺石)

금당터 중앙에 자리한 연화대석은 금당에 봉안했던 불상의 보금자리로 불상과 좌대(座臺)는 전
란 중에 사라지고 좌대를 받치던 밑부분만 남아있다. 옛날에 쓰라린 상처를 간직한 대석(臺石)
위에는 눈이 소복히 내려앉아 그를 보듬는다. 그래도 대석에 새겨진 연꽃잎은 선명하고 두툼하
게 살아있어 채색만 적당하게 입히면 진짜 연꽃이 따로 없을 것 같다.


▲  금당 서쪽 석계단 - 동쪽 계단과 달리 위,아래가 일정한 폭을 유지한다.


 

  성주사지 금당터 주변

▲  금당터 북쪽에 자리한 삼천불전(三千佛殿)터
향천사 천불전(千佛殿) 1,500불의 2배가 넘는 불상이 있었다는 삼천불전터
허나 지금은 터만 아련하게 남아있다. 삼천불전 생전의 모습이
어땠을지는 각자의 상상 속에 답이 있을 것이다.

▲  금당터 뒤쪽에 나란히 자리한 3층석탑 3형제
(왼쪽부터 서3층석탑, 중앙3층석탑, 동3층석탑)

▲  성주사지 중앙3층석탑 - 보물 20호

금당터 뒤쪽에는 서로 비슷하게 생긴 3층석탑 3형제가 서로를 보듬으며 정을 누리고 있다. 이
들 3형제는 위치에 따라서 편의상 중앙/동/서3층석탑이라 불리는데, 정확히는 서남/중앙/동북
이 맞다. 그렇다고 서남3층석탑, 동북3층석탑이라 부르기는 뭐하니 흔히 쓰는 동/서3층석탑으
로 이름을 잡은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따르면 이들은 정광(定光), 약사(藥師), 가섭(
迦葉) 등 3여래(三如來)의 사리탑(舍利塔)이라고 전한다.

3층석탑 형제의 맏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3층석탑은 2중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얹힌 형태
로 성주사가 구산선문의 하나로 한참 상한가를 치던 9세기 중/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기단 바로 위쪽에는 5층석탑과 마찬가지로 괴임돌을 하나 끼워두었으며, 1층 탑신이 2층과 3층
보다 훨씬 커 보인다.
1층 탑신 남쪽 면에는 문짝 모양을 새겼는데, 자물쇠 모양을 가운데에 두고 그 자물쇠 밑에 동
물 얼굴 모양의 문고리 1쌍을 배치했다. 그리고 나머지 공간에 못머리 모양의 둥근 조각을 채
웠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귀퉁이 끝이 아주 살짝 올려져 마치 병아리가 날
개짓을 하는 듯 하다. 탑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인 노반이 있으며, 그 둘레에 작은 구멍이 있고,
그 위를 복발(覆鉢)로 마무리하였다.
1층 탑신 모서리와 기단 모서리 부분이 좀 손상된 것을 빼고는 그런데로 상태는 양호하며, 문
짝과 자물쇠 문양이 새겨진 것 외에는 이 땅에 흔한 신라탑의 모습이다. 안내문에는 경쾌하고
화려하다고 하는데, 딱히 그런 점은 다가오지 않는다.


▲  중앙3층석탑 1층 탑신에 새겨진 문짝과 자물쇠, 문고리 문양
문짝과 자물쇠, 문고리 문양이 있지만 정작 문짝을 여는 열쇠 문양은 없다.
혹 열쇠가 있어 저 문고리를 열 수 있다면 탑 안에 안치된 보물이나
성주사의 숨겨진 역사를 밝혀줄 무엇인가가 나오지는 않을까?
우리집 열쇠라도 들이밀며 저 문고리를 따고 싶다.

▲  성주사지 동3층석탑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26호

3층석탑 3형제 중 동북쪽에 자리한 동3층석탑은 중앙3층석탑과 비슷한 모습이다. 중앙과 서3층
석탑은 국가지정 보물의 큰 지위를 누리고 있는데, 유독 이 탑만은 유일하게 지방문화재의 지
위에 머물러 있다. 어차피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정한 등급이긴 하지만 서로 비슷한 시기에 비
슷한 모습으로 조성되었는데, 왜 하나는 등급이 달라야되는지 그 기준이 참 아리송할 따름이다.

동3층석탑은 2중의 기단 위에 3층에 탑신을 얹힌 형태로 기단 바로 위쪽에 괴임돌이 끼워져있
으며, 1층 탑신의 남/북면에는 자물쇠모양과 1쌍의 고리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각 4단이며, 귀퉁이 끝이 살짝 올려져 있다. 조성시기는 역시나 9세기 중/후반으로 보
인다.


▲  성주사지 서3층석탑 - 보물 47호

3층석탑 3형제의 둘째라고 할 수 있는 서3층석탑은 중앙/동3층석탑과 비슷한 모습이다. 역시나
기단 위쪽에 괴임돌을 두었고, 1층 탑신에는 동물 얼굴 모양의 문고리 1쌍을 새겼는데, 장대한
세월의 흐름 속에 많이 씻겨 내려가 거의 희미해진 모습이다. (자물쇠 문양은 없음) 지붕돌은
밑면이 4단으로 되어있고, 네 귀퉁이가 살짝 올려져 있으며, 머리장식은 노반만 남아있다.
1971년 탑을 해체수리했을 때 1층 탑신에서 네모난 사리공이 발견되었으나 향나무 썩은 가루와
먼지만 가득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미 도굴을 당한 듯 싶다. 조성시기는 9세기 중/후반으로 탑
의 높이는 4m이다. 이는 3형제 모두 같다.


▲  서3층석탑 1층 탑신에 화석처럼 남겨진 문고리 장식

▲  장대한 세월에 흔적마저 사라진 3층석탑 뒤쪽 강당(講堂)터
강당은 승려와 신도들의 교육 및 행사 공간이다.

▲  성주사지 석불입상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373호

이 석불은 마치 온몸에 붕대를 둘둘 감은 듯한 우울한 모습으로 얼굴은 거의 타원형이다. 타원
형 얼굴을 지닌 불상은 그리 흔치가 않은 편으로 머리는 머리칼이나 육계를 표현하지 않은 그
냥 맨피부이며, 얼굴 부분은 마치 단단히 화상을 입은 듯, 돌의 겉면이 떨어져 나가 누런 색을
이룬다. 얼굴은 좀 고통스러워 보이며, 목부분도 돌의 겉면이 나갔다.
몸통은 군데군데 표면이 벗겨진 상처가 있고 왼손은 가슴 앞에 대고 있는데, 무슨 제스쳐인지
는 모르겠다. 오른손은 왼손 밑에 조그맣게 표현되어 있으며 아랫도리는 없다. 아마도 얼굴과
상반신만 만들어 땅에 심은 듯 싶다.

그는 원래 성주사에 있던 것이 아닌 근처 어딘가에서 옮겨온 것으로 석불을 받치고 있는 바닥
돌의 움직인 흔적이 이를 입증한다. 조성시기는 조선시대에 많이 보이는 불상 형태로 조선 중
기나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성주사가 사라진 이후, 인근에 방치된 석불을 사람들이
수습해 가져온 듯 싶다.
고향을 떠난 것은 마음이 아프겠지만 그의 미래를 위해서는 참 잘된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에 원래 자리에 있었다면 관리나 제대로 받았을까? 성주사터라는 보령 제일의 꿀단지에 숟가락
을 얹히고 들어앉았으니 이렇게 관리도 받고 사람들의 주목도 받는 것이다.


▲  성주사지 석불입상의 뒷모습
뒤에는 별다른 조각은 없다. 다만 뒷통수 가운데 주위로 돌껍질이 죄다 벗겨나가
심한 탈모증 환자를 보는 듯 하다.

▲  성주사지 서쪽 경계에 쌓은 돌담
절터에서 나온 무수한 돌로 절터 주변에 길게 돌담을 쌓았다.
담의 모습이 조그만 성곽 같다.


 

  최치원의 문장이 담긴 성주사터 제일의 보물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朗慧和尙塔碑) - 국보 8호

▲  비각 안에 담긴 낭혜화상탑비

강당터 서남쪽에는 성주사터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보물이 있다. 바로 낭혜화상탑비이다. 비각
(碑閣) 안에 소중히 안긴 이 비석은 성주사를 크게 일으키며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파를 개
창한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탑비로 높이가 5m에 이른다. 글씨들이 깨알같이 적힌 비신(碑身)
은 절 뒤쪽 성주산에서 많이 나오는 유명한 돌, 남포오석(藍浦烏石)으로 빚었다. 1,100년이 넘
는 적지 않은 나이를 먹었음에도 글씨들이 온전하여 남포오석의 위엄을 더욱 높여준다.

비석을 받쳐든 귀부는 거북의 머리로 깨지고 다친 부분이 많아 안타까운 마음을 솟게 한다. 이
는 임진왜란 때 생긴 상처로 보인다. 머리 위쪽에는 둥근 뿔이 나 있고, 회오리 모양의 눈썹이
표현되어 있으며, 등에는 2중의 육각무늬를 새기고 가운데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표현되
어 있다. 구름무늬 위에는 비신을 꽂은 비좌(碑座)가 있다. 귀부는 파손이 심해 흙에 묻혀 있
던 것을 1974년에 복원해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비신에는 앞쪽에만 글씨가 쓰여있는데, 낭혜화상의 생애와 업적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으며, 비
신 위쪽의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았다. 비신 위에 얹혀진 이수(螭首)는 밑부분에 연꽃을 두르
고 그 위에 구름과 함께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반룡(蟠龍)의 모습을 조각했는데, 너무 섬세하
여 흑백영화 속에 나오는 용을 보는 듯 하다.


▲  낭혜화상탑비

비석의 주인공인 낭혜화상 무염(801~888)은 무열왕(武烈王)의 8세손으로 신라 왕족이다. (성은
김씨임) 801년(애장왕 1년) 금수저로 태어나 13살에 출가를 했으며, 821년 당나라로 건너가 불
교를 공부하고 845년에 귀국했다.
귀국 후 오합사(성주사)의 주지가 되면서 선종을 널리 보급하여 신라 후기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파를 개창하게 되었고, 신도가 급증하자 절을 크게 일으키니 문성왕이 성주사란 이름을
내려 그를 기렸다.
888년 87세의 나이로 성주사에서 입적을 하니 진성여왕(眞聖女王)은 낭혜(朗慧)란 시호를 내리
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白月葆光)이라 하였다.

비문을 쓴 이는 신라 후기에 대표적인 인물인 최치원(崔致遠)이며, 그의 사촌이자 당대의 명필
로 꼽히는 최인곤(崔仁滾)이 글씨를 썼다. 그런 연유로 최치원이 썼다는 사산비문(四山碑文)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여기서 사산비문이란 이곳 낭혜화상탑비를 비롯하여 하동 쌍계사 진감선
사대공탑비(雙磎寺 眞鑑禪師大空塔碑),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 智證大師寂照塔
碑), 경주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로 모두 신라 후기에 이름난 비석들이다. 나는 성주사 낭혜
화상탑비를 끝으로 사산비문과 모두 인연을 지었다.

비석의 조성시기는 확실치는 않으나 890년에 낭혜화상의 사리탑(소재 불명)을 만들었다는 기록
이 있으므로 그때쯤 해서 만든 듯 싶다. 비석에는 그의 생애 외에도 가문에 대해서도 나와있는
데, 그의 아버지 대에 이르러 왕족임에도 6두품(六頭品)으로 신분이 낮아진 적이 있었다. 그래
서 무염이 관직 진출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승려의 길을 걷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비석의 원래 이름은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로 이름이 좀 길다. 그래서 근래 문화재청에서 '백
월보광' 4글자를 빼고 '낭혜화상탑비'로 이름을 줄였다.
신라 후기에 지어진 비석 가운데 가장 큰 풍채를 자랑하며, 깨진 부분이 많지만 화려하고 아름
다운 조각 솜씨를 엿보는데 그리 지장은 없으며, 거기에 최치원의 명문장까지 깃들여져 있어
신라 후기 최고의 비석이자 성주사터의 제일 가는 보물로 손꼽힌다.


▲  상처가 심한 낭혜화상탑비의 귀부
눈 위쪽에 회오리 모양의 문양이 눈썹이라고 하는데, 마치 1대 얻어맞아서
눈이 핑 돌아가는 모습 같아 약간의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  비석이 꽂힌 비좌 부분
마치 소용돌이 치는 물결이 그대로 화석(化石)으로 굳은 듯한 구름무늬 위에
비좌를 두어 육중한 비신을 꽂았다.

▲  귀부의 뒷쪽 부분
귀부의 등에는 등갑무늬가 근래에 새겨진 듯 선명하게 남아있고 덩치에 비해
조그만 꼬랑지가 하늘을 향해 귀엽게 말려져 있다.

▲  비석의 꼭대기인 이수
회오리 모양의 연꽃무늬 위에 구름과 반룡이 새겨져 있으니 잘 찾아보기 바란다.

▲  글씨가 선명하게 남은 비신
1,100년이 넘은 나이에도 글씨들은 정정하다.

▲  비각 안에 담긴 낭혜화상탑비


▲  낭혜화상탑비 옆에 수습된 기와조각과 주춧돌

▲  낭혜화상탑비 옆에 누운 석물 (정체는 모르겠음)

▲  성주사지 서북쪽 구석에서 바라본 성주사터
절터를 비추던 햇님이 조금씩 발을 빼면서 깊은 골짜기인 이곳에도
어둠의 땅꺼미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성주사터를 1시간 반 정도 둘러보니 어느덧 17시가 넘었다. 세상을 열렬히 비추던 햇님도 슬슬
막을 치며 그만의 공간으로 사라질 채비를 한다.
한 토막 신화가 되어 사라진 성주사터, 대머리처럼 허전하고 황량한 절터에 탑비와 석탑을 안
테나처럼 드러내면서 자신의 존재를 지켜왔다. 다행히 보령 굴지의 명소이자 답사의 필수 코스
로 인기를 얻으면서 휴일에는 많은 이들이 절터를 보듬으러 온다. 게다가 성주산과 성주산자연
휴양림, 성주계곡, 보령 석탄박물관, 심연동계곡, 백운사(白雲寺) 등의 명소가 가까이에 있어
이들을 1~2개 겯드리면 더욱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겨울에 이루어진 성주사지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역시 황량한 절터
는 겨울에 찾아가야 제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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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에 둘러싸인 전설의 절터, 광양 백계산 옥룡사터 (동백나무숲, 도선대사천년숲길)

 


' 광양 동백꽃 나들이 (백계산 옥룡사터, 동백나무숲) '

▲  동백숲에 둘러싸인 광양 옥룡사터


 

봄이 겨울 제국(帝國)을 몰아내고 하늘 아래를 파릇파릇 수놓던 4월 첫 무렵에 전남 광양(光陽)
땅을 찾았다.

아침 일찍 부산서부(사상)터미널에서 광양행 직행버스를 탔는데, 광양과 동광양(東光陽)으로 출
근이나 출장, 통학하는 사람들로 만석을 이룬다. 그렇게 자리를 몽땅 채우고 남해고속도로를 질
주해 섬진강휴게소에서 잠시 바퀴를 접고, 동광양을 거쳐 부산 출발 약 2시간 20분 만에 광양터
미널에 이른다.

광양 땅은 나와 지지리도 인연이 없는 곳으로 2001년 이후 10여 년 만에 와본다. 오랫동안 눈길
조차 주지 않아 미안한 마음이 가득 들지만, 서울과도 거리가 멀고 인연 또한 잘닿지 않으니 나
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래도 이번에 옥룡사터와 동백림을 목표로 왔으니 광양 땅도 서운
함을 어느 정도 잊어 줄 것이라 믿는다.

터미널 바깥 시내버스 정류장(옛 광양역 앞)에서 옥룡 방면 시내버스를 타면 되는데, 마침 옥룡
면 논실로 가는 버스가 1분 뒤에 온다고 정류장 전광판에 뜬다. 읍내에서 추동 방면은 거의 50~
60분 간격으로 다녀 시간표를 따로 확인하지 않고 왔는데, 이처럼 시간이 딱 맞아떨어지니 이보
다 기쁜 것이 없다.
이윽고 논실로 가는 광양시내버스 21-3번이 들어와 활짝 입을 연다. 광양5일장의 영향으로 버스
는 오전부터 노공(老公)들을 가득 태워 만차의 기쁨을 누리며 읍내를 벗어나 옥룡면으로 달린다.

백운산 남쪽에 펼쳐진 옥룡면(玉龍面)의 산하를 가로질러 어느덧 추동에 이른다. 여기서 북쪽으
로 가면 옥룡사터 입구와 백운산자연휴양림이며, 동쪽으로 다리를 건너면 동곡계곡과 백운산(白
雲山)으로 이어진다. 나야 목적지가 옥룡사터이니 북쪽으로 길을 잡는다.


♠  옥룡사 동백나무숲 - 천연기념물 489호

▲  운암사 입구에서 바라본 백계산
(중앙에 보이는 금빛 물체가 운암사 약사여래불)

추동마을에서 북쪽으로 6분 정도 걸으면 운암사 입구이다. 여기서 동북쪽을 보면 금빛을 비추는
커다란 불상이 두 눈을 놀라게 하는데, 바로 그곳에 운암사가 있다. 그곳을 거쳐 동백림과 옥룡
사로 가도 되지만 나의 머리 속에는 운암사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운암사 입구에서 5분 정도 올라가니 옥룡사터 입구이다. 여기서 이정표의 지시로 오른쪽으로 들
어서면 주차장과 해우소(解憂所)가 나오고, 그 뒤로 옥룡사터로 올라가는 오솔길이 나온다. 이
길은 수레가 마음 놓고 절터까지 들어갈 수 있게끔 잘 닦여져 있지만 중간에 볼라드를 설치하여
4발 수레의 통행을 막고 있었다. 어차피 절터까지 거리도 얼마되지 않고, 문화유산 보호 및 동
백림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100번 지당하다.

근래에 둘레길 유행에 따라 주차장에서 옥룡사터를 거쳐 백계산 정상 입구인 금목재까지 이어지
는 산길에 '도선국사 천년숲길(둘레길)'이란 이름을 붙었다. 옥룡사에 딱 어울리도록 말이다.


▲  봄에 완전 물들어진 옥룡면의 산하 (옥룡사터 입구 주변)
고요하고 목가적(牧歌的)인 시골 풍경에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두 안구는
싹 정화되고 마음도 조금씩 평안을 누린다. 봄이 한참 붓질을 하고
지나간 천하는 싱그러운 녹색의 세상이다.

▲  옥룡사터 입구 주차장에서 만난 벚꽃

▲  순백의 아름다움으로 봄에게 보답하는 배꽃의 위엄
광양 땅이 오랜만에 찾은 나에게 보답 차원에서 봄꽃 구경을 시켜주는 모양이다.

▲  옥룡사 동백나무숲 바로 직전 (수레의 통행을 막는 볼라드의 위엄)

주차장에서 별로 급하지 않은 오르막길을 7분 정도 가면 속인(俗人)들의 농가가 끝나면서 푸르
게 우거진 동백나무 숲이 진하게 모습을 드러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혹여 건방진 수레의 발길
을 막고자 길 가운데를 버티고 선 철기둥(볼라드)을 지나면 본격적인 동백나무 숲에 들어서게
된다.


▲  옥룡사 동백나무숲길 (1)
동백나무와 속인들의 경작지가 숲길을 사이에 두고 팽팽히 경계를 이룬다.

▲  옥룡사 동백나무숲길 (2)

▲  옥룡사 동백나무숲길 (3)
이제 완전하게 동백나무 숲에 들어섰다. 친겨울 성향이 강한 동백은 겨울부터
4~5월까지 순홍(純紅)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  옥룡사 동백나무숲길 (4)

▲  옥룡사 동백나무숲길 (5) - 옥룡사터를 코 앞에 둔 지점

옥룡사터를 넓은 바다의 외딴 섬처럼 꽁꽁 둘러싼 옥룡사 동백나무숲은 백계산(白鷄山) 남쪽 자
락에 자리한다. 옥룡사터 주변과 운암사 북쪽까지 펼쳐진 이 숲은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동백나
무 군락지로 옥룡사를 세운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땅의 기운이 약한 것을 보완하고자 비보풍수(
裨補風水)의 일환으로 동백을 심어 숲을 조성했다고 전한다.
허나 도선대사 시절만큼 오래된 동백나무가 하나도 남아있지를 않아 그가 과연 조성했는지는 의
문이다. 하지만 이곳을 메운 동백은 100년에서 수백 년 이상 묵은 것들로 초창기 동백들이 계속
후손을 뿌린 것으로 보이며, 계속해서 씨를 주변에 내려 보내 7,000여 그루의 나무가 15만㎡의
장대한 숲을 이루었다. 나무의 높이는 5~6m, 줄기는 20~40cm에 이른다.
남부지방 사찰 동백나무숲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어 '광양 옥룡사 동백나무숲'이란 이름으로
천연기념물 489호
의 지위를 얻었으며, 산림청에서 정한 제7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함께
나누고픈 1,000년의 숲'으로 선정되어 아름다운 공존상(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우리나라 동백숲의 성지(聖地)로 동백이 전성을 누리는 3~4월에는 아름다움이 절정을 이루어 속
인들의 눈과 마음을 완전히 앗아가 돌려줄 생각을 않는다. 제아무리 어여쁜 미녀라 한들 순홍의
동백 앞에서는 두 다리 달린 동물에 불과할 것이다.


▲  옥룡사터 샘터

동백나무 숲을 지나면 옥룡사터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절터 밑에는 약수터가 있어 이곳을 찾은
속인들의 갈증을 해소시켜준다. 백계산이 베푼 약수로 네모난 석조(石槽)에는 언제나 물이 넘쳐
흐르는데, 가뭄 때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이 샘터는 옛 옥룡사의 샘터로 근래에 정비되었으며, 옛날 광양고을의 사또가 즐겨 마셨다고 전
한다. 그만큼 물맛이 좋다는 뜻인데, 동백의 향기나 기름이 첨가되서 그런 것일까? 허나 마셔보
니 딱히 다른 맛은 없어 보이며, 옛날에는 약수에서 숯가루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  연꽃들의 와신상담(臥薪嘗膽)의 현장 - 옥룡사터 연못
동백의 향연이 끝나면 연꽃이 그 자리를 대신해 9월까지 화려한 연(蓮)의 향연을 펼친다.
그 이후에는 늦가을의 향연이 펼쳐지고, 그것이 끝나면 바로 동백의 시대가 열린다.
옥룡사터는 1년 내내 대자연이 베푸는 향연(饗宴)의 장인 것이다.


♠  도선국사가 창건하여 머물던 유서 깊은 고찰, 지금은 동백나무 속에
터만 남아 옛날의 영화를 아련히 들려주는 백계산 옥룡사(玉龍寺)
- 사적 407호

광양의 듬직한 진산(鎭山)인 백운산(1228m), 그의 남쪽을 이루고 있는 백계산(505m) 서남쪽 자
락에 동백숲에 감싸인 옥룡사터가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옥룡사는 864년에 도선국사(827~898)
가 창건한 것으로 그가 세운 것이 100% 확실한 천하에 몇 안되는 절로 의미가 대단한 곳이다.

그는 동리산 태안사(泰安寺, ☞ 관련글 보러가기)를 찾아가 혜철대사(惠徹大師)에게 선종(禪宗)
을 배웠고, 운봉산(雲峯山)과 태백산(太白山)에 들어가 불도를 닦다가 백계산에 들어오게 되었
다. 이곳에 오니 풍경이 그야말로 그윽한지라 '지네가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형국이요,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극찬하며 여기서 평생 머물기로 작정하고 864년에 옥룡사를 짓고 정
착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옥룡자(玉龍子)라 칭하며 절 이름도 옥룡사라 했는데, 여기서 34년을
머물다가 898년 71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그가 열반에 들자 신라 효공왕(孝恭王)은 요공선사(了空禪師)란 시호를 내렸고, 고려 태조(太祖
) 왕건의 스승이었던 인연 탓에 숙종(肅宗, 재위 1095~1105)은 대선사(大禪師)에 왕사(王師)의
호를 추가했다. 그리고 인종(仁宗, 재위 1122~1146)은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추봉(追封)했으며,
의종(毅宗, 재위 1146~1170)은 그의 비석까지 세웠다.

도선이 이곳에 들어왔을 때 절터에는 연못이 있었는데, 그 안에 9마리(또는 2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 절을 세우고자 하니 다른 곳으로 가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용 8마리는 <2
마리 전설에서는 황룡(黃龍)이 응해줌> 별말없이 응하려고 했으나 백룡(白龍)이 크게 반발하며
대들자 열받은 도선이 활을 쏘아 그의 왼쪽 눈을 맞추니 (또는 지팡이로 두들겨 팼다고 함) 백
룡은 인근 구룡소(九龍沼)로 도망쳤다. (다른 전설로는 용 9마리가 이곳에 머물며 인근 백성들
을 괴롭히자 도선이 그들을 몰아냈다고 함)
이들 전설을 통해 옥룡사 자리에는 토착신앙이나 다른 종교가 들어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걸
도선이 들어와 그들과 일종의 싸움을 벌여 그 자리를 차지하거나 그들을 설득하여 불교의 일원
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백룡으로 상징되는 존재가 비협조로 일관하자 일종의 폭력으로 그를 강제
로 추방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걸 적당히 전설로 다듬어서 창건설화로 삼은 것이다.

용을 몰아낸 도선은 연못을 메우고자 속세에 안질(眼疾)을 널리 퍼뜨렸다. 그리고 연못에 숯 한
덩이를 넣고 그 물로 눈을 씻으면 낫는다는 이야기를 퍼뜨리자 사람들이 몰려와 숯을 넣고 눈을
씻으면서 금세 연못이 메워졌다고 하며, 바로 그 자리에 옥룡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당시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던 신라 후기 상황을 이용해 창건 시주를 하면 복을 받는다
는 식으로 말을 퍼뜨려 얻은 재원으로 창건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숯을 넣어 눈을 씻는다
는 것은 시주금이나 집을 지을 때 땅 속에 묻는 숯을 제공하면 도선이 법문을 주거나, 예불 관
련 의식을 제공하거나, 절을 하고 소망을 빌었다는 뜻으로 보면 될 듯 싶다. 참고로 예전 옥룡
사 샘터에서 숯가루가 종종 섞여 나왔다고 한다.

그렇게 옥룡사를 세운 도선은 차밭을 일구어 차(茶)를 참선 수행에 사용토록 했고, 절터의 기운
이 약한 것을 채워주고자 동백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또한 그가 이곳에 머물며 명
성을 떨치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제자 되기를 청했으며, 이때 '옥룡사파(玉龍寺派)'란 지파(
支派)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사람들이 얼마나 몰려왔는지 그들을 수용하고자 동백림 동쪽에 별
도로 운암사를 세웠다고 한다.

898년 도선이 입적하자 부도와 탑비를 만들어 모셨는데, 그의 제자인 경보대사(慶甫大師, 동진
대사)가 도선의 법맥(法脈)을 이어 옥룡사를 지켰고 그 또한 이곳에 뼈를 묻었다.
도선은 죽음에 임할 때 '백(白)씨 성을 가진 애꾸눈 중을 들여서는 안된다' 유언을 남겼다고 한
다. 19세기까지 그런데로 법등(法燈)을 유지하던 옥룡사는 1878년에 화재를 만나 완전히 망하고
말았는데, 이는 그 당시 백암(白庵)이란 애꾸눈 승려가 들어와 그리 되었다고 한다.

절이 망할 때 용케도 살아남았던 도선국사와 경보대사의 부도와 비석도 1920년을 전후하여 장대
한 세월의 태클과 무지한 이들의 테러로 모두 파괴되어 넘어졌으며, 비석의 내용마저 크게 훼손
되어 내용을 알기가 어려워졌다. (조선금석총람에 다행히 비문의 내용이 있음)

이후 순천대 박물관에서 절터 일대를 조사하면서 도선과 경보대사의 부도 자리와 비석 자리, 건
물터, 석탑의 부재(部材), 깨진 비석 조각 90여 점을 발견했으며, 도선의 것으로 보이는 유골과
그 유골을 안장한 것으로 보이는 석관(石棺)이 발견되어 신라 후기 고승(高僧)의 장례 풍습을
알게 해주었다.
발굴을 마치고 절터에 풀을 입혀 산듯하게 정비했으며, 약수터 동쪽에 문화유산해설사가 머무는
안내소를 만들어 필요할 때는 그의 해설을 들을 수 있다. 현재 절터에는 건물터와 석탑의 부재
등이 남아있고, 운암사로 넘어가는 길목에 근래에 복원된 도선국사와 경보대사의 부도/탑비가
있다. 또한 그 남쪽에는 운암사가 있어 옥룡사터를 지키고 있다.

절은 없고, 전설과 역사, 황량한 절터만 남아 속인들의 상상을 무한대로 살찌우는 옥룡사터, 동
백의 그윽한 향기가 절터의 허전함을 보듬어주며, 내가 가본 수많은 절터 가운데서도 꽃밭에 둘
러싸인 천하 제일의 동백꽃 명소이자 행복한 자리가 아닐까 싶다.

※ 옥룡사터, 옥룡사 동백나무숲 찾아가기 (2015년 4월 기준)
① 광양까지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광양행 고속버스가 1일 7~8회 떠난다.
* 동서울터미널에서 광양행 고속버스가 60~9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부산(사상)에서 광양행 직행버스가 40~9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부천, 수원, 성남, 안산에서 광양행 직행버스 이용
* 대전(복합), 대구(서부), 광주, 진주, 마산, 여수에서 광양행 직행버스 이용
* 부전역, 창원역, 마산역, 진주역, 광주송정역에서 경전선 열차를 타고 광양역 하차, 운행횟수
  가 별로 없으며(편도 1일 4회 이내) 역에서 광양터미널까지 버스나 택시로 나와야 된다.
* 순천시내(삼산동, 순천대, 순천터미널, 순천역)에서 77, 777번 시내버스를 타고 광양터미널
  종점 하차
② 현지 교통
* 광양터미널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21번 시내버스를 타고 옥룡사 입구 하차 (1일 5회 운행) 옥
  룡사터까지 도보 15분 / 21-2, 21-3번 버스를 타고 추동 하차 (1일 13회 운행), 추동에서 옥
  룡사터까지 도보 25분
③ 승용차 (옥룡사터와 운암사에 주차장 있음)
* 남해고속도로 → 광양나들목을 나와서 광양읍내로 우회전 → 우시장4거리에서 우회전 → 옥룡
  입구에서 우회전 → 옥룡면사무소 → 추동에서 직진 → 옥룡사터 또는 운암사

* 도선국사 천년숲길(둘레길)은 옥룡사터 주차장에서 옥룡사터를 거쳐 백계산 정상과 금목재를
  지나 백운산자연휴양림에 이르는 약 7km의 산길이다. (백계산 정상은 둘레길 범위 아님)
* 옥룡사터 소재지 - 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추산리304-1 (백계1길 71 ☎ 061-762-3578)

▲  복원된 도선국사, 경보대사 탑/탑비

▲  언덕 너머로 보이는 운암사 약사여래불


♠  전설의 옥룡사터 둘러보기

▲  잡초에 묻힌 옥룡사터 앞부분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옥룡사터는 제법 넓은 규모이다. 찬란했던 절이 화마(火魔)의 좋은 먹
이가 되어 끔찍하게 유린당했던 1878년의 대혼돈을 간직한 절터에는 받쳐들 대상을 상실한 채,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는 주춧돌과 석축이 고개를 내밀며 세월을 원망한다. 봄의 기운을 받아
성장한 잡초들은 옥룡사의 그 아픔을 덮고자 절터를 푸르게 수놓으며 그 허전함을 약간이나마
달래준다.

절터는 남쪽이 낮고 북쪽이 높은 형태로 남쪽에는 천왕문이나 중요성이 낮은 건물이 포진해 있
었을 것이고, 중간 부분에 법당(法堂)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쪽에 삼성각(三聖閣)이나
도선국사와 경보대사의 영정을 봉안한 일종의 영각(影閣)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터
만 앙상하게 남았을 뿐, 건물터의 구체적인 정체는 밝혀지지 못했다. 그저 상상 속에서 '이곳은
이 런 건물이 있었고, 이렇게 생겼겠구나?' 스케치 할 수 밖에는 없다. 그 가운데 정답은 있겠
지만 어느 누구도 100% 정답은 알 수 없다. 그저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라~~!


▲  절터 뒤쪽 석축 - 절터와 동백숲의 경계 역할을 하고 있다.

▲  절터 한복판에 있는 이것은 무엇인고?

예전 시골에서 김치나 숙성을 요하는 음식을 담던 공간과 비슷하게 생겼다. 허나 사람들이 떠나
간 절터에서 그런 공간은 전혀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위한 공간일까? 옛날
절터 한가운데에 있었다는 샘터의 흔적이 아닐까 여겨진다. (절터 남쪽에 있는 샘터의 조상으로
여겨짐) 이럴줄 알았으면 문화유산 해설사에게 물어보는 건데, 그만 깜박했네..


▲  붉은 주춧돌이 3열 종대를 이룬 건물터 - 무슨 건물이 있었을까?

▲  붉은 주춧돌의 위엄 - 주춧돌의 피부가 유난히 붉다. 저들은
1878년 이곳에서 일어난 기억 밖으로 꺼내기 조차 껄끄러운
대재앙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  유난히 넓은 건물터 - 법당과 그 부속 건물이 있던 자리는 아닐까?

▲  절터에서 가장 높은 부분 - 무슨 건물이 있었을까?
나한테만 살짝 이야기해주면 안될까?

▲  절터에 버려진 기와 조각들 - 기와조각을 맞추며 잃어버린
옥룡사의 모습 맞추기 퍼즐을 해보고 싶다.

▲  가장 높은 곳에서 바라본 옥룡사터 전경
옥룡사터가 동백숲에 단단히 묻혀 있어 속세에서는 절터의 속살이 보이지 않는다.

▲  절터에서 수습된 석탑 부재와 여러 석재(石材)들

옛 석탑의 일부를 이루던 돌(지붕돌과 탑신 부분)과 건물 주춧돌 등으로 쓰인 석재를 이곳에 수
습했다. 절이 그리 곱지 않게 파괴되었음을 알리는 증인들로 절이 파괴되고 절터에 대한 도굴과
속인들의 석재 절도 행위, 장대한 세월과 자연의 괴롭힘으로 형편없이 뜯겨져 초췌한 모습이 되
고 말았다. 보금자리를 잃은 저들을 도와줄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세상의 버림을 받은 그들은 이곳에 모여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왼쪽에 세워진 돌기둥은 석
련(石蓮)이나 그릇 형태의 석물을 받치던 기둥으로 여겨지며, 조금의 힘만 가해도 흔들거린다.
그러니 괜히 때려 눕히지 말기 바란다.


▲  가까이서 본 석탑의 부재들
그 모습이 마치 파괴된 지 수백 년이 넘은 탑 같다.

▲  절터에서 수습된 기와조각들이 한데 모여 그들만의 조그만 세상을 이루었다.

▲  절터 동쪽 부분

▲  동쪽 부분에서 바라본 절터 전경
속세를 바라보며 자리했을 옥룡사의 모습은 자못 웅장했을 것이다.
지금은 대머리처럼 빈 자리만 요란하니 그 실감이 적을 뿐이다.

▲  절터 동쪽에 있는 토굴

절터 동쪽의 동백림을 보면 동백림 밑에 조그만 토굴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암석을 깨고 뚫은
토굴은 완전 몸을 반으로 접고 들어가야 될 정도로 입구가 좁다. 내가 들어가다가는 굴이 무너
질 것 같아서 몸도 사릴 겸 바깥에서 내부를 살폈으나, 내부가 어두워 보이는 건 거의 없다. 그
런데 절터에 왠 생뚱 맞게 굴이 있는 것일까? 설마 북한이나 왜열도 애들이 여기까지 굴을 파고
내려온 것은 아니겠지?
언제 생긴 굴인지는 모르겠으나 옥룡사 시절부터 있었다면 식량을 보관하던 창고나 독한 수행을
위한 공간이 아닐까 싶다. 몇몇 고승들은 절 부근에 굴을 파고 들어가 수행하면서 1주 정도에 1
번씩 음식을 들이는 것 외에는 바깥에서 굴을 막게 했다. 오로지 수행에 전념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수행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판사인 효봉(曉峰, 1888~1966)이 있다.


♠  동백나무숲 산책

▲  옥룡사 동백숲 서쪽 산책로

옥룡사터에서 동백숲 산책로는 2갈래가 있다. 연못을 거쳐 동백숲 서쪽으로 가는 산책로는 나무
로 신작로를 내어 경사도 완만하다. 허나 5분 정도 가면 철조망 앞에서 길은 끊어지고 만다. 마
치 휴전선 철조망처럼 말이다. 철조망 너머는 어느 개인의 땅으로 그 구역에는 동백나무는 없고
그냥 숲과 초원만 있다. 예전에는 동백숲까지도 개인 소유였으나 이제는 광양시청에서 관리하며,
관람객들은 여기서 길을 180도 돌아 다시 옥룡사터로 나와야 된다. 굳이 철조망을 넘어봐야 볼
것도 없으니 괜히 무리하지 않도록 한다.


▲  순홍의 아름다움으로 천하를 매혹시킨 동백꽃의 위엄

▲  동백숲 동쪽 산책로 고개

옥룡사터에서 오르막으로 된 동쪽 산책로(운암사 방면)를 오르면 바로 고개 중턱이다. 길은 여
기서 2갈래로 갈리는데, 동쪽 내리막으로 가면 운암사이며, 왼쪽으로 가면 도선국사 천년숲길로
백계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정상까지는 2.7km, 금목재는 3.7km이다. 나는 절터와 동백숲을 보러
온 터라 등산은 하지 않았다.

고개 갈림길에는 동백나무 밑에 쉼터를 만들어 잠시 두 다리를 쉬어가게 배려했다. 쉼터에는 고
개가 꺾여 떨어진 동백꽃이 정신없이 흩어져 있어 한폭의 멋드러진 수채화를 자아낸다.


▲  고개에서 바라본 천하 - 삼삼한 동백숲 너머로 하늘과 천하가 보인다.

▲  복원된 도선국사탑/탑비와 경보대사 탑/탑비

고개에서 동백숲을 가로질러 운암사 방면으로 내려가면 부도 2기와 비석 2기를 만나게 된다. 처
음에는 근래에 지어진 운암사 관련 승려의 탑/탑비로 생각했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그게 아니었
다. 바로 옥룡사를 세우고 꾸리던 도선국사와 경보대사의 복원된 탑/탑비였다.

도선국사와 경보대사의 탑/탑비는 1920년대에 처참하게 파괴되어 쓰러졌으며, 탑비의 비문(碑文)
도 훼손되었다. 다행히 1919년 왜정(倭政)에서 발간한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비문의 내
용이 있어 도선과 경보의 인생을 조금이나마 알려준다. 이후 순천대에서 절터를 조사할 때 탑과
탑비의 조각을 수습했고, 도선/경보의 유골을 안장한 것으로 보이는 석관이 발견되어 화재가 되
기도 했다.
지금의 탑과 탑비는 옥룡사터를 정비하면서 신라 후기와 고려 초기의 부도/비석 양식에 맞게 복
원된 것이라 원래 모습과는 좀 다를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나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  선각대사 도선 징성혜등탑(澄聖慧燈塔)

▲  동진대사(洞眞大師) 경보 보운탑(寶雲塔)

도선국사야 워낙 유명한 인물이니 따로 설명은 필요없을 듯 싶다. 그가 898년에 세상을 뜨자 효
공왕은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와 함께 징성혜등(澄聖慧燈)이란 탑 이름을 내렸으며, 탑비
는 고려 의종 때 세워졌다.

경보대사(869~948)는 도선과 고향이 같은 전남 영암(靈岩)에서 알찬(閼粲) 김익량(金益良)의 아
들로 태어났다. 19세에 팔공산 부인사(符仁寺)로 출가했으며, 옥룡사에 들어와 도선의 1등 제자
가 되어 선율(禪律)을 익혔다. 화엄사(華嚴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정식 승려가 되었고
보령 성주사(聖住寺)와 강릉 굴산사(掘山寺)에서 선종(禪宗)을 배웠다.

892년 당나라로 건너가 이름 있는 절을 돌아다니다가 무주<撫州, 강서성(江西省)> 소산에서 조
동종(曹洞宗)의 광인(匡仁)을 만났다. 광인은 '가자미 바다에서 온 용'이라고 하면서 선법(禪法
)을 전했다. 이후 광인의 소개로 강서 지방의 노선(老善)을 찾아갔는데, 그가 '흰구름에 가리어
길이 막혔네' 운을 띄웠다. 그러자 경보가 '본디 푸른 하늘 길에 흰구름이 어찌 있나?' 답을 하
니 노선이 감동해 곁에 있게 해주었다.

거기서 얼마 동안 있다가 노선의 만류를 뿌리치고 당나라 전국을 돌아다녔으며, 921년 귀국하여
임피군(臨陂郡, 전북 군산)에 발을 내리니 후백제(後百濟)의 군주 견훤(甄萱)이 남복선원(南福
禪院)에 머물게 하면서 스승으로 예우했다. 이후 다시 옥룡사에 들어왔다가 936년 견훤이 숨을
거두자 태조 왕건(王建)이 왕사(王師)로 삼았다.

943년 태조가 붕어(崩御)하자 혜종(惠宗)과 정종(定宗)의 왕사가 되었으며, 정종의 명으로 개경
(開京)에 머물다가 옥룡사로 다시 내려와 상원(上院)에 머물렀다. 948년 열반에 임하면서 제자
들에게 '옷차림을 바로 하고, 음식을 평등히 하고, 선열(禪悅)로써 맛을 삼아라'는 임종게(臨終
偈)를 내리며, '탑과 비석을 세우지 말아라' 당부하고 눈을 감으니 그때 나이 79세 법랍(法臘)
62세였다.

그가 입적하자 정종은 옥룡선화상(玉龍禪和尙)이라 부르고, 동진대사란 시호와 보운(寶雲)이란
탑 이름을 내렸다. 비석은 958년 김정언(金廷彦)이 짓고, 비문은 제자인 현가(玄可)가 썼으며,
계묵(繼默)이 새겨서 옥룡사에 세웠다.

나말여초 시절에 크게 활약한 그들의 탑/비가 잘 살아있었다면 정말 국보급에 대접을 받았을 것
이고, 우리나라 미술사/역사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텐데, 그 점이 참 아쉽다. 그래도
그 유명한 도선국사가 고이 잠든 승탑(僧塔)을 보니 유명인사를 만난 듯 감개가 무량하다.


▲  운암사에서 도선/경보대사 탑으로 인도하는 동백숲길


♠  동백나무숲 동쪽 끝에 자리한 옥룡사의 이웃 사찰
백계산 운암사(雲岩寺)

▲  1칸 크기의 단촐한 운암사 산신각(山神閣)

도선/경보대사 탑에서 동쪽으로 3분 정도 내려가면 새집 냄새가 물씬 진동하는 운암사가 나온다.
옥룡사 동백나무숲은 운암사에서 더 이상 가지를 뻗지 못하고 길을 멈추는데, 여기가 바로 동백
숲의 동남쪽 한계선이다. 

운암사는 겉으로 보면 아주 최근에 지어진 역사도 거의 없는 절집으로 보인다. 나도 그렇게 생
각을 했으니까. 게다가 절을 알리는 안내문도 없으니 그런 생각을 더욱 키우게 한다. 하지만 겉
보기와는 달리 옥룡사와 관련이 있는 오래된 절로 도선국사가 옥룡사에 몰려드는 사람들을 수용
하고자 865년(옥룡사는 864년에 창건)에 창건했다고 한다. 옥룡사와 동백숲을 사이에 두고 이웃
한 절로 도선은 두 절에 머물며 제자를 양성했으며, 그 이후 쭉 옥룡사와 생사고락을 같이 했을
것이다. (옥룡사의 부속 사찰로 생각됨)

17세기까지 법등을 이어왔으나 차차 기울다가 18세기(또는 1878년)에 망하고 말았다. 망한 이유
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리고 100여 년 뒤에 옥룡사마저 망하니, 도선이 세운 두 절은
100년 간격(또는 비슷한 시기)으로 사라져버렸다.

옥룡사와 달리 터도 희미하게 남아있던 것을 1969년에 승려 박득수가 이 자리를 매입해 절을 짓
고 운암사라 했다. 한때 옥룡사 재건을 위해 절터에 조그만 건물도 들어섰으나 운암사의 탄생으
로 말미암아 그곳에 모두 통합되었다. 어차피 동백림에 있는 절이고 역사도 거의 같으니 옥룡사
까지 무리하면서 지을 필요는 없다. 운암사가 옛 운암사와 옥룡사의 뒤를 이어 지금의 자리를
지키면 그만인 것이다.

다시 태어난 운암사는 옥룡사와 동백숲 덕분인지 짧은 시간에 벌써 많은 건물을 지어올렸다. 특
히 2007년에 완성된 황동(黃銅) 약사여래입상은 우리나라 최대 규모로 무려 40m에 이르며, 속리
산 법주사(法住寺)의 청동미륵불보다 13m가 높다. 허나 아래 10m는 약사전(藥師殿)으로 쓰이고
있어 실질적인 불상 높이는 30m이다. 그래도 법주사보다는 키다리이다. 황동이 자그만치 75톤이
소요되었다고 하며, 도선국사의 도선비기(道詵秘記)에 따라 만들었다고 한다. (도선비기의 내용
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데..)

경내에는 대웅전과 조사전, 약사전, 삼성각, 명부전, 요사 등 8~9동의 건물이 있으며, 고색(古
色)의 내음은 전혀 없다. 소장 문화유산은 하나도 없으며, 건물도 모두 새것이라 새집 냄새가
진동한다. 그리고 하나같이 규모가 장대하고 돈을 꽤나 들인 듯, 장엄하고 화려하다.


▲  산신각 산신탱 - 산신(山神)과 호랑이, 동자 2명 등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인다.

▲  조사전(祖師殿) - 운암사를 세운
도선국사의 진영(眞影)이 봉안되어 있다.

▲  산신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이 봉안된
삼성각

▲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된
명부전(冥府殿)

▲  똥배와 축쳐진 귀가 매력인
포대화상(布袋和尙)


▲  운암사의 법당인 대웅전(大雄殿)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석가3존불과 문수,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  3불 2보살이 봉안된 대웅전 불단(佛壇)

▲  정면에서 본 약사전과 약사여래불

▲  약사여래불 주변

운암사의 명물인 황동 약사여래불은 2006년 여름에 짓기 시작하여 2007년 5월에 완성을 보았다.
이 땅에서 가장 큰 불상으로 무려 30m의 장대한 키를 자랑하며, 불상 밑에는 약사전이 있는데,
그 건물 높이가 10m로 일종의 대좌(臺座) 역할을 한다. 그 높이까지 합치면 40m에 이르는 거구
이다.

불상이 큰 것까지는 좋은데, 너무 높이에 연연하다보니 약사불의 표정이 영 어색하다. 보는 이
의 눈에 따라 얼마든 달리 보일 수 있겠으나 그 흔한 미소도 없고, 표정도 그리 밝아보이진 않
는다. 게다가 지나치게 크다보니 그리 정감도 가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느라 애궂은 고개만 아
프다. 그냥 외형만 중시하는 그런 분위기인 것이다. 물론 한참의 시간이 지나면 21세기 초반 불
상 양식을 잘보여준다며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누릴 것이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그의 왼손에는 그의 필수품인 약합이 들려져 있고, 오른손은 시무외인 비슷
한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  절 남쪽 언덕 너머로 본 약사여래불
마치 언덕 위에 서 있는 듯 시각을
혼란시킨다.

▲  코끼리를 탄 관음보살상
약사전 앞에 2기의 코끼리를 탄 관음보살상이
있다. 이들도 장대한 규모인건 마찬가지~~
불교가 인도에서 태어난 존재이다 보니 자연히
코끼리가 많이 등장한다. (부처의 법을 상징)


▲  약사전(藥師殿)에 봉안된 약사여래불과 후불탱화

▲  운암사 연못

경내 남쪽이자 약사전 동쪽에는 동그란 모습의 큰 연못이 기를 질리게 한다. 처음 그를 봤을 때
는 무슨 수영장인 줄 알았다. 절에 왠 수영장 같은 것이 있나 싶었는데, 물 속을 살펴보니 물이
잔뜩 오른 물고기가 꼬리를 흔들며 순찰하는 모습을 보고 비로소 연못인 줄 알았다.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이 아닌 완전 새로운 형태의 연못으로 그 동쪽에 기도를 하고 물고
기를 방생(放生)하는 공간이 있으며, 연못 주위로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자 철난간을 빙 둘러 삼
엄한 분위기까지 자아낸다. 연못을 짓더라도 전통 양식에 맞춰 정겹게 만들었으면 좋으련만 지
나치게 옥의 티를 내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  연못을 순찰하는 물고기의 위엄
다양한 피부의 잉어들이 회, 매운탕 생각을 간절하게 만든다.
오늘 저녁은 정말 매운탕 1그릇 먹어야겠다.

▲  옥룡사터, 운암사를 뒤로 하며~~

운암사를 둘러보고 약사전에 들어가 3배를 올리며 일종의 신고식을 마친 다음, 절을 나섰다. 이
제 내가 있어야 될 아비규환의 속세(俗世)로 돌아가야 될 시간이 온 것이다. 옥룡사터와 동백나
무 숲, 거기에 덤으로 운암사까지 둘러보고 나오니 어언 3시간의 시간이 흘렀다. 제자리로 돌아
가야 될 시간이 이르면 왜 이렇게 한숨이 나오고 다리에 힘이 빠지는지 모르겠다.
이제 4월이건만 여름의 제국이 벌써 도래했는지 날씨가 초여름 수준이다. 그래서 동백숲 적당한
곳에 자리 피고 한숨 자고 갈려고 했으나 그런 여유까지는 부리지 못했다.

추동으로 나와 버스 시간을 알아보니 20분 뒤에 있다고 한다. 마땅히 쉴 공간도 없어서 버스정
류장 옆인 보건지소 부근에 머물며 차를 기다리는데, 무려 15분씩이나 늦게 온다. 장날 때문에
늦은 것이라고 한다. 그 버스를 타고 광양읍내로 나와 순대국으로 점심을 먹고 광양터미널에서
순천시내버스 77번을 타고 순천시내로 이동했다.

순천(順天)도 정말 오랜만에 오는 곳인데, 어디로 갈까 궁리를 하다가 날씨가 시간 개념도 없이
덥다보니 지치기도 하고, 전날 잠을 적게 자서 피곤도 하고, 시간도 애매하고, 거기에 오늘 너
무 많은 곳을 둘러보면 탈이 날 것 같아서 내키지는 않지만 일찍 철수하기로 했다. 그래서 순천
역으로 이동하여 용산(龍山)행 무궁화호를 타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광양 동백꽃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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