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석불'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20.11.03 대웅전 꽃창살로 유명한 고즈넉한 산사, 논산 불명산 쌍계사 (송불암 미륵불)
  2. 2018.04.02 경북 예천 겨울맞이 나들이 ~~~ (곱게 잘늙은 개심사지5층석탑, 동본리3층석탑, 초간정과 초간정 원림)
  3. 2015.10.24 경주 남산에서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석불, 보리사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보리사 마애석불)
  4. 2015.01.10 이 땅의 유일한 오래된 쌍미륵불,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 (마애2불입상, 용암사)

대웅전 꽃창살로 유명한 고즈넉한 산사, 논산 불명산 쌍계사 (송불암 미륵불)

 


' 여름맞이 산사 나들이 ~ 논산 쌍계사, 송불암 '

▲  쌍계사 대웅전

▲  쌍계사의 자랑, 대웅전 꽃창살

▲  송불암 미륵불


 

여름이 봄을 몰아내고 제국의 기틀을 다지던 6월의 첫 무렵, 오랜만에 충남 논산(論山)을
찾았다.
논산으로 멀리 발걸음을 한 것은 그곳 쌍계사의 꽃창살이 그렇게나 아름답고 유명하다 하
여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고자 함이다. 그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겠지?
다행히 쌍계사입구까지는 시내버스가 1일 10여 회 오가고 있어 접근편도 벽지치고 양호하
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영등포역에서 호남선 무궁화호 열차에 나를 담아 논산역으로 보냈다.
논산까지는 3시간 정도가 걸렸는데, 버스 시간에 아직 여유가 있어 논산역 동쪽에 자리한
논산시내버스 종점(덕성여객)으로 이동해 차를 기다렸다. 논산시내버스는 일부 외곽 지선
을 제외하고 모두 여기서 출발한다. 
 
세월이 무지 빠르다고 하는데 정작 무엇을 기다리는 시간은 반대로 느린 것 같다. 잡생각
을 머리 속에 마구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억지로 시간을 죽이니 어느덧 출발시간이다.
그래서 타는 곳으로 나가니 쌍계사로 가는 논산시내버스 405번(논산역↔임화리)이 다가와
활짝 입을 벌린다.
그 버스를 잡아타고 논산시내를 가로질러 은진미륵(恩津彌勒)으로 유명한 관촉사(灌燭寺),
사육신(死六臣)의 하나인 성삼문(成三問)묘소<이곳에는 그의 다리 한쪽이 묻혀있다고 함>
를 지나 쌍계사입구인 중산리에서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부터 쌍계사까지 잘 닦여진 2차
선 도로(중산길)를 따라 30분 정도 걸어 들어가야 된다.


▲  중산리에서 쌍계사로 인도하는 중산길


 

♠  쌍계사(雙磎寺) 입문

▲  강병흠과 평택임씨 정려비(旌閭碑)

중산리에서 쌍계사로 가는 길은 인적도 거의 없는 고적한 길이다. 집도 이따금씩 모습을 드러
낼 뿐, 거의 산과 밭으로 이루어진 자연 지대로 살며시 스쳐가는 산바람 소리, 가끔씩 지나가
는 차량 소리가 이곳 소리의 전부이다. 그런 길을 혼자 유유자적 거니니 마치 그 길을 통째로
전세를 낸 듯한 즐거운 기분이 가득 들고 걷는 길도 그리 지루하지가 않다.

그런 길을 약 1km 정도 가면 길 왼쪽에 돌로 만든 특이한 비각(碑閣)과 그 안에 담긴 매끈한
피부의 비석이 잠깐 나좀 보고 가라며 하소연을 한다. 하여 잠시 길을 멈추고 살펴보니 강병
흠(姜抦欽)과 평택임씨(平澤林氏) 부부의 정려비이다.

비석의 주인공인 강병흠은 진주강씨로 구한말과 20세기 초반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첨지중
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3품)를 지냈으며 어려서부터 효성이 대단하기로 명성이 높았다. 어느
한겨울에 부모가 잉어를 먹고 싶다고 투정을 부리자 저수지의 두꺼운 얼음을 깨서 잉어를 잡
은 적이 있으며, 아버지가 병으로 드러눕자 밤낮으로 약을 달이며 병간호를 했는데, 꿈속에서
친할머니가 나타나 아버지의 병에는 산삼이 최고라며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하여 다음날 그
곳에 가보니 정말 산삼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몇 년 뒤 아버지가 사경을 헤매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였으며, 결국 그가 사
망하자 무려 6년씩이나 시묘살이를 했는데, 불효에 대한 자책감으로 옷자락에 항상 돌을 담고
다녔다. 하여 사람들은 그를 포석효자(包石孝子)라 부르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강병흠의 부인인 평택임씨도 대단한 열녀(烈女)라 시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했고, 남편이 죽자
자결을 했다. 그래서 그들 부부의 효행과 열행(烈行)
을 기리고자 1922년에 정려비를 세웠다.

처음에는 1칸짜리 기와 정려각을 씌웠으나 건물이 낡자 1993년에 지금의 석조물을 세우고 내
부에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김용제(金容濟)가 짓고, 이종성(李鍾聲)이 글씨를 썼으며, 비문
에는 '孝子僉知中樞府事 姜抦欽 閭配, 烈女 淑夫人 平澤林氏之閭(효자 첨지중추부사 강병흠
정려, 열녀 숙부인 평택임씨지여)'라 쓰여 있다.

           ◀  열녀 해주오씨 비석
강병흠 부부의 정려비에서 잠깐 옷깃을 여미고
다시 길을 재촉하면 얼마 안가 고색의 때를 절
반 정도 탄 해주오씨 열녀비가 모습을 비춘다.
비석 주인공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비
석의 상태로 보아 19세기 인물로 여겨지며, 앞
서 평택임씨 못지 않은 열녀였던 모양이다.

           ◀  영명각(靈明閣) 입구
쌍계사 주차장을 지나 3분 정도 오르면 늘씬한
숲길과 함께 영명각을 알리는 표석이 마중한다.
영명각은 1975년에 농업진흥공사가 금강(錦江)
유역 300핵타르의 개답(開畓) 공사를 벌이면서
무연고 무덤 유골 3,000기를 수습해 봉안한 납
골당이다.
이후 건물을 확장하여 논산시민의 납골당(논산
시 공설봉안당)으로 바쁘게 살고 있다.


▲  쌍계사 밑에 자리한 그림 같은 호수, 절골소류지(沼溜地)

영명각입구 맞은편에는 너른 호수인 절골소류지가 있다. 작봉산(불명산)이 베푼 청정한 물이
쌍계사를 끼고 졸졸졸~♪ 흐르다가 이곳에 모여 대장정을 준비하는데, 삼삼한 숲에 둘러싸인
소류지의 자태는 정말 아름답기 그지 없다.


▲  영명각 입구에서 쌍계사로 인도하는 숲길
하늘을 가릴 정도로 무성한 숲, 그 숲이 베푸는 숲내음과 그늘, 거기에 옆에
붙은 소류지까지, 이곳만큼은 여름 제국도 눈치를 보며 비켜간다.

▲  쌍계사 부도(浮屠)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80호

길을 거닐다보면 왼쪽 언덕에 옹기종기 모인 부도(승탑)의 무리를 만나게 된다. 부도는 모
두 9기로 원래는 절 주변에 흩어져 있었는데, 20세기 후반에 이곳으로 모두 집합시켰다.
고색의 내음을 깊게 내뿜고 있는 그들은 석종형(石鐘形) 6기, 옥개석(屋蓋石)을 갖춘 탑 3기
로 이루어져 있다. 석종형은 높이 150cm 내외로 4각 또는 6각의 바닥돌을 깔고 그 위의 기단
(基壇)과 석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얹혔는데, 바닥돌과 기단에는 연꽃무늬 장식을 새겨 맨돌
의 식상함을 덜어준다.
옥개석 부도는 높이 130cm 내외로 탑신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대좌를 받치는 바닥돌은 4
각 또는 6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중/하대로 구분된 기단부(基壇部)에는 연꽃무늬 연주문과
화문(花紋)이 새겨져 있고, 탑 꼭대기에는 구슬 장식이
얹혀져 있다.

이들 부도 중 2기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翠峰堂 慧燦大師之屠(취봉당 혜천대사 부도)','梅
憲~~之塔(매현 ~~의 탑)' 정도의 글씨만 확인이 가능하다. 나머지 글씨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크게 흐트러져 알 수가 없으며, 부도의 조성시기는 조선 중~후기이다.

▲  북쪽에서 바라본 쌍계사 부도

▲  쌍계사 중건비(重建碑)

부도의 보금자리 한쪽에는 중건비라 불리는 비석이 미운 오리새끼 마냥 자리를 잡고 있다. 그
는 1739년에 쌍계사를 중수하면서 세운 것으로 높이 156cm, 너비 78cm이며, 땅바닥에 자연석
을 깔아 비석을 세울 수 있도록 홈을 파고, 그 위에 대리석으로 된 비신(碑身)을 세운 다음에
지붕돌로 마무리를 한 단출한 모습이다.
쌍계사의 내력을 머금은 절의 일기장으로 비석 앞면에 절의 내력을, 뒷면에는 시주자의 이름
이 새겨져 있으며, 김낙증(金樂曾)이 찬(撰)을 하고, 이화중(李華重)이 글씨를, 김낙조(金樂
祖)가 글을 새겼다.


▲  쌍계사 봉황루(鳳凰樓)

숲길을 지나면 주차장과 봉황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숲에 감싸인 주차장 좌우로 2개의 조그만
계곡이 소류지로 흘러가고 있는데, 바로 여기서 쌍계사의 이름이 비롯되었다. 즉 2개의 계곡
이 만나는 절이란 뜻이다.

주차장을 굽어보는 봉황루는 쌍계사의 정문이다. 이곳은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도 아직 장만
하지 못해서 소류지 숲길이 그 역할을 대신하며 속세(俗世)와 절의 경계를 가르고 있는데, 제
아무리 천하의 독종, 번뇌라 한들 삼삼한 숲과 소류지의 경계를 뚫고 절까지 침투하기는 힘들
것이다. 허나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 또한 번뇌라 아무리 던져본들 그 자리를 맴돌아 결국
소류지 밑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내가 있어야 될 곳이 절이 아닌 속세이기 때문이다.

봉황루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누각이다. 정문 외에 조
촐하게 강당(講堂) 역할까지 하고 있는데, 근래 손질을 했는지 딱히 고색의 내음이 느껴지지
않는다. 1층에는 경내로 인도하는 돌계단을 늘어뜨렸으며 그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이 마치 해
가 떠오르듯 솟아오른다.
2층에는 북과 '쌍계사 봉황루 등루부운(登樓賦韻)'이란 시가 적힌 현판이 있는데, 이 시는 5
언율시(五言律詩)로 어느 노승(老僧)이 1779년에 이곳을 찾아 지은 것이다. 이를 통해 적어도
18세기에는 봉황루가 있었음을 살짝 귀뜀해준다. 그럼 여기서 잠시 쌍계사의 내력을 짚어보도
록 하자.


▲  봉황루의 뒷모습
봉황루 등루부운(登樓賦韻) - 1779년 어느 노승이 지음

고루에 나홀로 누워                  高樓我獨臥
마음은 하늘을 찾아 날아오르네       心適上飛天
산봉우리들 사이에 흰 구름이 머물고  衆峀雲留白
여러 시내에 달 그림자 비치네        群溪月影輝
석등은 불실을 밝게 비추고           夕燈明佛室
아침 비는 선문을 어둡게 하네        朝雨暗仙扉
날마다 금모래 연못을 감상하니       日賞金沙池
몸은 세속으로 돌아감을 잊네         身忘俗諦歸

▲  봉황루 2층에 있는 태극마크 북

▲  경내 북쪽 석축 위에 닦여진 돌탑들

대웅전 꽃창살로 유명한 논산 쌍계사는 작봉산(鵲峰山, 419m) 북쪽 자락에 둥지를 틀고 있다.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이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동/서/남이 모두 작봉산 산줄기
에 막혀있고, 오로지 북쪽만 뚫려있기 때문이다.
쌍계사를 품은 산의 이름은 '작봉산'으로 '불명산(佛明山)'이란 이름까지 지니고 있는데, 이
는 산의 옛 이름이 불명산이기 때문이다. 하여 쌍계사는 절에 어울리게 '불명산 쌍계사'를 칭
하고 있다.

쌍계사는 10세기 후반에 이곳에서 가까운 관촉사의 은진미륵을 세운 혜명대사(慧命大師)가 창
건했다고 한다. 허나 이는 믿을 바가 못되며, 창건자와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오리무
중(五里霧中)을 헤매고 있다. 다만 고려 후기 서화가였던 행촌 이암(杏村 李嵒, 1297~1364)이
발원하여 중건했다는 내용이 중건비에 적혀있어 이때 창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 끝 무렵에는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절의 연기(緣起)를 썼다고 전하며, 초창기 절 이름
은 백암사(白庵寺) 또는 백암(白庵)이었다.

왕년에는 500~600여 칸의 건물이 있을 정도로 호서(湖西) 제일의 대가람(大伽藍)을 자랑했는
데, 극락전을 비롯해 선원(禪院), 관음전, 동당(東堂), 서당(西堂), 명월당, 백설당, 장경각
등의 건물이 경내를 가득 채웠다고 한다. 허나 그렇게 잘나갔던 쌍계사는 조선시대를 거치면
서 크게 야위어 갔고, 여러 번의 화재로 1716년에 대웅전 등을 중창했으나 1736년 다시 화재
가 찾아와 1739년에 중건을 하고 중건비를 세웠다.
조선 후기와 왜정(倭政) 때는 그런데로 절을 유지했으며, 6.25 시절에는 다행히 총탄이 비켜
가 별 피해는 없었다. 이후 별다른 큰 불사(佛事) 없이 지금에 이른다.

절은 지형을 이용해 넓게 터를 다졌는데, 북쪽과 서쪽, 동쪽에 석축과 돌담을 쌓고, 북쪽 가
운데에 봉황루를 내어 정문으로 삼았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해 봉황루, 나
한전, 칠성각, 명부전, 요사 등 8~9동의 건물이 있으며, 대웅전 뜨락이 매우 넓은 것이 특징
이다. 한때는 그 뜨락에도 건물이 가득했으나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모두 사라지면서 수풀
만 무성하게 된 것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과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지방문화재인 부도
가 있으며, 계룡산 갑사(甲寺, ☞ 관련글 보러가기)에 머물고 있는 월인석보(月印釋譜) 판각
이 원래 이곳에 있던 것으로 여기서 만들었다고 전한다.

쌍계사에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많이 서려 있다. 그 전설을 모두 다루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므로 그중 일부만 끄집어 보도록 하겠다.

① 창건설화 - 먼 옛날, 하늘의 상제(上帝)가 이 땅에 절을 하나 짓고자 자신의 아들을 내려
보냈다. 아들은 지금의 자리에 절을 세우기로 하고 천하에 진귀한 나무를 구해와서 주변 경치
와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절을 세웠다.
② 하마비(下馬碑) 전설 - 때는 고려 후기 어느 날, 쌍계사 주지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승
려 1명이 나타나
'그곳에 쫓기는 승려가 찾아 올 것이니 잘 대접하시오. 허나 임금 왕(王) 자의 성을 가진 사
람이 말을 타고 들어오면 큰일이 날 것입니다!'
이후 세상이 더 혼란해지면서 많은 승려가 난을 피해 쌍계사로 들어오니 주지는 그들을 모두
맞아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산을 뒤흔들 듯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탄 군사가 절을 향해 달
려오고 있던 것이다. 절에 있던 사람들이 불안에 떨자 주지는 목탁을 치며 불경을 외기 시작
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사람 모두 독경을 외웠는데,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절로 치닫던 말들이
절 앞에서 서로 뒤엉키며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말을 탄 군사들은 말들의 때아닌 발작 증세
에 모두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이후에도 똑같은 일이 계속 생기자 어느 누구도 말을 타고 절에 들어갈 생각을 못했다. 또한
말이 때거지로 죽은 곳에 말에서 내리라는 뜻의 하마비를 세웠는데, 세월이 지나자 엉뚱하게
도 죄 지은 사람의 죄를 풀어주는 영험이 있는 비석으로 둔갑되어 불공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
다.

* 쌍계사 소재지 :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중산리 3 (중산길 192 ☎ 041-741-2251)


▲  봉황루에서 바라본 대웅전의 위엄


 

♠  쌍계사 둘러보기

▲  쌍계사 연리근(連理根)

논산 쌍계사는 솔직히 대웅전만 알았지 나머지는 아는 것이 없었다. 절의 역사도 제법 오래되
고 보물로 지정된 장대한 대웅전도 있으니 절 규모도 어느 정도 될 것이라 생각을 했는데, 정
작 경내로 들어서니 내 생각과는 완전 다른 허전한 모습의 쌍계사가 나를 맞이했다.

봉황루를 들어서면 바로 정면으로 대웅전이 보이는데, 바로 코 앞에 있는 것이 아니다. 거리
도 제법 떨어져 있다. 봉황루와 대웅전 사이에는 뜨락이 넓게 펼쳐져 있으나 그냥 뜨락만 있
을 뿐, 연리근 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옛날에는 그 자리에 건물이 가득 있었겠지만 다 사라
지고 빈 자리만 남은 것이다. 뜨락 서쪽에는 오래된 연리근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고, 동쪽에
는 조그만 요사와 선방이 자리한다. 그리고 건물 상당수는 대웅전 좌우와 뒷쪽에 띄엄띄엄 떨
어져 있다.
이렇게 경내에 놀고 있는 땅이 많으니 요란하게 중창불사를 벌일 만도 한데 아직은 그럴 생각
은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뜨락이 너무 허전하니 조촐하게 건물 몇 개라도 세워 그 공허함을
달랬으면 좋겠다. 세상에 이렇게나 넓은 법당(法堂) 뜨락도 처음 보고, 경내 중심에 이렇게
공터가 넓은 절도 처음이다.


▲  남쪽에서 바라본 쌍계사 연리근

대웅전 뜨락 서쪽을 혼자 차지하고 있는 연리근은 겉으로 보면 1그루 같지만 엄연한 2그루의
느티나무(괴목나무)이다. 이들은 서로 뿌리가 만나 이렇게 하나의 나무처럼 되었는데, 뿌리가
만나면 연리근, 줄기가 서로 겹치면 연리목(連理木), 가지가 하나가 되면 연리지(連理枝)라고
부른다.

이 연리근은 수백 년(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음) 묵은 장대한 나무로 쌍계사의 오랜 내력을 알
려주는 소중한 산증인이다. 나무의 덩치가 대단하여 그늘 또한 넓기 그지 없는데, 나무 밑에
는 쉼터가 조성되어 있으며, 그늘의 질감과 솔솔 불어오는 산바람으로 이곳만큼은 무더위를
잊어도 좋다.


▲  요사(寮舍)와 선방(禪房, 오른쪽 맞배지붕 건물)
선방은 종무소(宗務所)의 역할도 겸하고 있으며, 그 앞에 조그만 건물은
찻집으로 전통차를 무료로 제공한다. (일부는 유료)

▲  동그란 석조(石槽)
작봉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것일까? 석조에는 그가 베푼 옥계수로 작은
바다를 이룬다. 목마름을 단죄하고자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담아 입에 들이키니 목구멍이 시원하다며 쾌재를 외친다.

▲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좌측에는 명부전과 나한전, 칠성각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명부전은 20세기 초에 지어
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무독귀왕(無毒鬼
王), 도명존자(道明尊者), 저승의 10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는
데, 보통 절 건물은 가운데 문은 닫고 좌/우측 문을 열어두어 통행하게 하나 여기는 그 반대
로 가운데 문을 이용토록 했다.


▲  명부전 중심에 앉아있는 온후한 표정의 지장보살상과
무독귀왕(왼쪽), 도명존자(오른쪽)

▲  명부전 식구들
저승의 10왕과 판관(判官), 금강역사(金剛力士), 동자(童子) 등


▲  나한전(羅漢殿)
20세기 초에 지어진 팔작지붕 건물로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이
봉안되어 있다.

▲  나한전 석가여래상과 석가후불탱

▲  가지각색의 모습을 지닌 조그만
16나한(十六羅漢)들

  ◀  나한전의 젊은 버전, 칠성각(七星閣)
경내에서 가장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칠성(七
星)을 비롯해 산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
자)이 봉안되어 있다.

▲  칠성각 내부 - 왼쪽부터 산신탱과
칠성탱, 독성탱

▲  칠성각에서 바라본 대웅전 뜨락
(왼쪽 나무가 연리근, 오른쪽 건물이 요사)


▲  석조관세음보살상

경내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최근에 장만한 관세음보살상이 자리를 폈다. 관세음보살의 얼굴이
풍만하고 복스러운 것이 마치 중년 비구니 같은데, 비가 내려도 얼굴 부분은 절대로 젖지 않
는다고 한다. 하여 절에서 신비한 관세음보살상이라며 크게 치켜세우고 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참 어려운 현상 같은데, 그게 계속 되는 것을 보면 단순한 석조보살상은 아닌 모양이다.

관세음보살상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寶冠)이 씌워져 있으며, 얇아보이는 옷을 걸치며 가슴 주
위로 여러 장식을 둘렀는데, 앉아있는 대좌(臺座)에는 연꽃 무늬가 가득하다.


▲  관세음보살상에서 바라본 쌍계사 경내

▲  쌍계사 대웅전 - 보물 408호

쌍계사에 왔다면 꼭 봐야되는 것, 바로 이곳 법당인 대웅전이다. 바깥만 볼 것이 아니라 안에
도 말끔히 살펴보자. 그래야 저승에 가서도 염라대왕 형님에게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
만큼 쌍계사에서 대웅전의 비중은 막대하며 '대웅전은 곧 논산 쌍계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
다.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대웅전은 법당에 걸맞게 경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솔직히 너무 일
방적으로 큼) 이상하리만큼 경내에 노는 공터가 많아 참 허전하기 그지 없는데, 그 허전함과
절의 조촐함을 대웅전이 제대로 커버를 해줄 만큼 든든한 모습이라 사진에 나오는 사람과 대
웅전을 비교하면 크게 실감이 날 것이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살짝 치켜진 추녀마루의 선이 참 곱다. 마
치 큰 새가 날개짓을 하는 모습 같은데, 지붕이 건물 2층과 맞먹을 정도로 육중하기 그지 없
어 건물 밑도리가 그 큰 지붕을 어떻게 받쳐들까? 쓸데없는 걱정이 들 정도이다. 평방(平枋)
위에는 촘촘히 박힌 공포가 그 지붕을 받들고 있는데, 안쪽은 5출목(出目), 밖은 4출목이다.
이처럼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포를 심어놓은 양식을 다포(多包)양식이라고 한다.

대웅전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작봉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절이 세워진 고려 때부터 있었을
것이다. 화재로 무너진 것을 1716년에 중창했고 화재로 또 전소된 것을 1739년에 다시 지었다.

건물 기둥은 굵고 희귀한 나무를 사용했는데, 그중 가운데 좌측 2번 째 기둥이 칡덩굴나무로
되어있다. 이 기둥은 윤달이 들은 해(4년에 1번, 2016년, 2020년, 2024년~)에 몸으로 안고 돌
면 죽을 때 고통을 면하게 된다고 한다.
1번을 안고 돌면 하루를 앓다가 가고, 2번을 안으면 2일, 3번 돌면 3일이라고 하는데, 유난히
3을 좋아하는 이 땅의 사람들의 습성상 3일은 앓고 가야 서운하지 않는다며 보통 3번을 안고
간다고 한다.
또한 염라대왕이 논산 쌍계사 출신인지 '자네 논산 쌍계사 다녀왔는가?' 물어본다고 한다. 그
러니 만약을 대비하여 쌍계사를 꼭 챙겨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대웅전 문짝에 피어난 아름다운 꽃창살무늬

쌍계사하면 대웅전 꽃창살을 빼놓을 수 없다. 이곳을 다녀간 답사쟁이들은 하나 같이 꽃창살
을 쌍계사 제일로 찬양하기 때문이다. 나도 꽃창살의 풍문을 듣고 이곳에 온 것인데, 직접 그
들을 보니 그 말이 과연 허언이 아니었다. 꽃창살의 갑(甲)으로 칭송받는 부안 내소사(來蘇寺
) 대웅보전의 염통까지 제대로 쫄깃하게 할 정도로 말이다.
회오리 모양과 바람개비 모양의 꽃잎 문양이 문짝마다 주렁주렁 달려있는데, 꽃잎 사이로 나
뭇잎 문양까지 달려 있어 실제 꽃잎이 달려있는 듯하다. 물론 자연산 보다는 좀 못해도 진짜
꽃들도 시샘을 보낼 정도로 정말 정교하고 아름답기 그지 없다.


▲  대웅전 소조석가여래3불좌상 - 보물 1,851호

대웅전 불단에는 장대한 모습의 소조석가여래3불좌상이 각자 스타일에 맞는 후불탱을 뒤에 걸
치며 후덕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대웅전이 크니 집 주인인 석가여래와 그의 협시불(夾侍佛)
까지 덩달아 장대하여 대웅전과 꽃창살에 놀란 눈과 가슴을 더욱 놀라게 만든다.

이들은 흙으로 빚어 도금을 입힌 것으로 조각승 원오(元悟)가 수조각승을 맡아 신현(信玄)과
청허(淸虛), 신일(神釰), 희춘(希春) 등 4명과 함께 1605년에 조성했다. 그때 쌍계사는 무려
2층짜리 건물을 세우고 그 안에 저들을 봉안한 것으로 보이는데, 석가여래 좌우로 약사여래(
藥師如來)와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자리해 3불을 이루고 있다.
앙련(仰蓮)과 복련(앙련의 반대)이 새겨진 대좌(臺座) 위에 결가부좌로 장엄하게 앉아있는데,
석가여래는 오른손을 무릎 밑으로 내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으며, 커다란 덩치
에 비해 손과 팔은 작아 보인다. 옷은 양쪽 어깨를 덮고 있지만 오른쪽이 더 진하며, 이를 변
형 편단우견(偏袒右肩)이라고 부른다. 가슴에는 수평의 승각기가 보이며, 법의(法衣) 자락도
규칙적인 간격을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고, 좌우 불상도 크기만 약간 작을 뿐, 대체로 석가여
래를 따라하고 있다. 다만 다른 점은 편삼을 입고 그 위에 법의를 걸쳤다는 것이다.

이들 뱃속에서는 아주 고맙게도 발원문(發願文) 등 복장유물 4점이 나왔는데, 발원문에 통해
1605년이라는 조성 시기와 조성 목적, 제작에 참여한 승려 이름을 알게 되었다. 분명한 제작
시기와 함께 조각승 원오의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어 충남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15
년 3월 국가 보물로 승진되었다.


▲  대웅전 천정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대웅전에 발을 들였다면 고개를 들어 천정을 보기 바란다. 온갖 기묘한 조화로 이루어진 천정
이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 받은 두 눈을 어느 정도 정화를 시켜줄 것이다.
천정에는 커다란 들보와 섬세하게 짜여진 공포, 용머리, 닫집, 25개의 네모로 이루어진 우물
천정(석가여래, 약사여래, 아미타불 천정에 우물천정 하나씩 있음), 극락조<極樂鳥, 가릉빈가
(迦陵頻伽)> 등이 정신없이 짜여져 있다. 들보와 공포에는 단청이 곱게 칠해져 있고, 용은 동
쪽 들보에 몸을 대고 불단을 굽어본다. 불상 위에는 붉은 기와집의 닫집과 천개(天蓋)가 있는
데, 마치 조그만 궁궐을 보는 듯 하며, 하얀 극락조가 날개를 퍼득이며 천정을 날고 있다. 그
야말로 휘황찬란이라 사람들의 정신을 쏙 빼놓는다.


▲  우물천정과 두툼한 들보, 그 들보에 몸을 기댄 용, 그리고
칠보궁(七寶宮)이란 현판을 내건 붉은 기와집의 닫집

▲  극락조가 날아다니는 천정 (들보와 닫집, 보개, 우물천정)
이곳이야말로 불국토(佛國土)의 축소판이 아닐까?

▲  대웅전 천정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불법(佛法)을 지키는 호법신(護法神)들을
빼곡히 담은 그림으로 법당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  대웅전 앞에 놓인 헝클어진 석재들
석탑의 일부로 여겨지는 연꽃무늬 석재와
맷돌의 일부가 나란히 놓여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었다.


▲  이렇게 큰 뜨락을 본 적이 있는가? 대웅전에서 바라본 뜨락과 봉황루

박석이 깔린 길이 봉황루에서 대웅전 앞까지 정연하게 펼쳐져 있다. 지금은 이렇게 허전한 공
간으로 있지만 혹시 아는가? 나중에 조그만 도시처럼 번잡한 공간이 될지도? 허나 너무 복잡
한 모습보다는 이렇게 여백의 미가 넘치는 모습이 더 좋아 보인다.


▲  쌍계사를 뒤로하며 소류지에 버려둔 번뇌와 다시 만나다 ~~

겉모습은 작지만 대웅전 하나로도 알맹이가 큰 쌍계사를 1시간 30분 정도 둘러보았다. 대웅전
내부를 뚫어지라 살펴보았고, 이곳에 서린 문화유산은 불상의 복장유물을 제외하면 모두 눈에
넣었다. 또 오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잠깐이나마 그곳에 정이 들었는지 속세로
나가는 길에도 여러 번씩 뒤를 돌아보았다.

쌍계사에서 중산리로 나와 가게 문에 부착된 버스 시간을 보니 20분 뒤에 온다고 그런다. 딱
히 할 것도 없어서 정류장 주변을 서성이며 안그래도 빠른 시간을 억지로 죽이고 있으니 시내
로 나가는 시내버스가 나타나 활짝 입을 연다. 하여 그 버스를 잡아타고 다시 논산역으로 나
왔다.

아직 일몰까지 여유가 넘쳐서 어디로 갈까 궁리를 하다가 우리나라 서원의 주요 성지(聖地)로
추앙을 받는 돈암서원(遁岩書院)을 가보기로 했다. 허나 서원은 격하게 땡기지는 않아서 다른
곳을 물색하다가 연산에 자리한 송불암 미륵불로 장소를 바꿨다. 서원보다는 절이 볼 것도 많
고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논산시내에서 송불암이 있는 연산(連山)까지는 시내버스와 시외직행버스가 제법 다닌다. 대전
으로 가는 주요 길목인데다가 구한말까지는 충청도의 주요 고을(연산현)이었기 때문이다.

논산역에서 연산, 계룡시 방면으로 가는 논산시내버스 303번을 타고 1번 국도를 신나게 달려
연산에 진입, 연산 남쪽인 연산구4거리에서 내렸다. 여기서 우회국도 개설로 많이 한가해진
옛 1번 국도 2차선 도로(황룡재로)를 따라 동쪽(계룡 방면)으로 6~7분 정도 가면 송불암 입구
이고, 거기서 송불암 이정표를 따라 오른쪽 길로 들어가면 그 길의 끝에 송불암이 모습을 비
춘다.


 

♠  오래된 미륵불과 소나무를 간직한 조그만 절
~ 논산 송불암(松佛庵)

▲  송불암으로 인도하는 숲길

송불암은 옛 절터에 지어진 작은 비구니 절로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이곳에 서린 오래된 미
륵불을 보고자 함이다.

송불암에 있던 옛 절은 미륵불을 통해 고려 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보다 동쪽으로
50m 떨어진 산자락에 있었다고 하며, 절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미륵불과 주춧돌만 아련히 남아오다가 1946년에 인근 신양리에 살던 동상태의 어머
니가 2칸짜리 집을 짓고 절로 삼아 미륵불을 관리했다. 이것이 현재 송불암의 시작이다.
이후 1970년에 승려 경연이 절을 물려받아 주지승이 되었는데, 미륵불 바로 옆에 소나무가 석
불과 조화를 이루며 지붕처럼 퍼져 있다고 하여 송불암이라 하였다.

송불암에는 믿거나 말거나 창건 설화가 한토막 전해오고 있으니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시대 어느 날, 법력이 높은 노승(老僧)이 기도를 마치고 걸망을 짊어지며 천하를 돌아다
니다가 연산 고을 인근 황룡산에 올라 땅을 살펴보니 절을 지으면 크게 될만한 명당(明堂) 자
리였다. 하여 그곳을 점찍어두며 주변을 보니 광산김씨가 중심이 된 부자 마을이 있었고, 마
을 외딴 자리에 집이 있었다. 그래서 그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니 광산김씨 청년이 나와 무
슨 일이냐고 물었다.
노승은
'황룡산에 명당 자리가 있다기에 여기서 불법(佛法)을 전할까 하오'

답을 하니 청년은
'이곳은 유생이 많아서 불교를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오'

하였다. 그러자 노승은
'그러면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풀막을 짓고 도를 깨우쳐 볼까 하오'
그러니 청년이
'그러면 무엇을 먹고 입으며 혼자 쓸쓸히 어떻게 살려고 하시오?'
물었다. 노승은
'원래 중은 풀뿌리, 나무열매로 양식을 삼고, 송락과 초목으로 의복을 대신하며, 법당이 없으
면 바위굴을 불당으로 삼소. 그러니 문제될 것이 무엇이 있겠소?'
노승
의 시원스런 답에 청년은 감동을 먹고 오늘 날도 저물었으니 일단 하룻밤 자고 가라며 호
의를 베풀었다.

이렇게 청년집에서 하룻밤을 머문 노승은 다음날 아침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때 청년의
어머니를 보게 되었는데, 얼굴을 보니 3일 뒤에 죽을 상이 아닌가? 이걸 청년에게 말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궁리하다가 한숨을 쉬며 그에게 전해주었다.
'덕분에 잘 쉬었소. 대접에 대한 보답으로 이 말씀을 드리고자 하니 부디 화를 내지 마시오.
아까 당신의 아머니를 잠깐 뵈었는데, 3일 후 아침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실 것이오. 그러면
인근 범바위골에 묘를 쓰되 황금돌을 절대 건드리지 마시오. 그곳이 괜찮은 명당자리요'
그 말을 들은 청년은 갑자기 뚜껑이 뒤집혀
'뭐라고? 이 땡중이 미쳤나? 빨리 꺼져!!'
성을 내며 노승을 쫓아냈다.

그런데 과연 3일 후 아침, 청년의 어머니는 죽고 말았다. 이에 청년은 크게 놀라 통곡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노승이 한 말을 상기시켜 보았다. 범바위골에 묻으라는 말이 생각나 그곳에 묘
자리를 정하고, 땅을 파니 황금돌이 나왔는데, 돌을 건드리지 말라는 말까지는 기억이 안나서
그만 그 돌을 들어내고 말았다.
그러자 그 속에서 수많은 벌이 앵~ 나오는 것이 아닌가? 바로 이 땅에 흔치 않던 벌명당이었
던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살던 벌들은 노승 때문에 보금자리를 빼앗기게 되었고, 벌의 우두
머리가
'그 땡중 때문에 우리 터전을 빼앗겼다. 빨리 그 작자를 단죄하러 가자~~!'
잔뜩 이를 갈고 무더기로 날라다니며 노승을 찾아 다니다가 인근을 지나던 그를 발견하고 집
중 폭격을 가해 말그대로 벌집을 만들어 죽였다.

이후 노승의 저주가 씌워진 탓인지 연산마을에는 10년 홍수, 10년 가뭄, 10년 전염병으로 완
전 몹쓸 땅이 되버렸다. 마을의 실세이던 광산김씨 집안에서 회의를 열어 상황이 이리 된 것
은 우리들 때문에 노승이 벌에 쏘여 죽은 것이라 규정하고 그의 넋을 위로할 겸 절을 세우고
미륵불을 조성했다. 그랬더니 재앙은 멈추고 마을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고 한다.
또한 미륵불 곁에 소나무 1그루가 홀연히 자라나 그를 향해 가지를 뻗으면서 위로 자라지 않
고 아래로만 자라니 사람들은 그 소나무가 노승의 후신이라 여기며 기도를 올렸고 소원을 성
취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여기서 출가하여 크게 된 승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전
한다.

물론 전설을 다 믿으면 이는 순진한 것이다. 하지만 이 전설을 통해 마을의 평안을 위해 마을
사람들이 절을 세웠음을 알 수 있으며, 딱히 뒷끝이 없는 다른 벌명당 전설과 달리 승려의 말
을 지키지 않다가 명당의 기운은 커녕 오히려 마을이 풍비박산이 나자 그 승려를 위로하고자
절을 세워 간신히 마을의 안녕을 되찾았다는 내용이 이채롭다. 일종의 승려 말을 들으면 자다
가도 떡이 나오니 승려와 절, 불상을 잘 대접하라는 옛 석불사의 뜻이 아닐까?

▲  개구리의 조촐한 운동장, 동그란 연못

▲  대웅전 앞 연꽃 석조

송불암은 대웅전과 요사, 선방 등 4~5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다. 비구니 절이라 경내는 깔끔하
고 정갈하며, 경내 동쪽에 창건 설화에 나오는 소나무와 이곳의 후광이자 든든한 밥줄인 미륵
불이 자리해 있다.

▲  2000년에 새로 지어진 대웅전

▲  대웅전 서쪽에 자리한 요사


▲  미륵불과 소나무가 있는 경내 동쪽

▲  송불암 미륵불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83호

송불암 미륵불은 서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높이는 4.25m, 둘레 1m로 머리에는 네모난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얼굴은 넉넉한 인상으로
눈과 눈썹, 코, 입이 모두 완연하게 남아있으며, 두 귀는 목까지 늘어져 있고, 목에는 삼도(
三道)가 그어져 있다.
몸통에는 법의(法衣)를 걸쳤는데, 얇은 새김으로 새겨진 옷주름선은 발목까지 내려왔으며, 왼
손은 가슴에 대고 있고, 오른손은 몸 옆에 붙이고 있는 모습이 마치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것 같다. 그가 서 있는 대좌(臺座)에는 연화무늬가 있고, 옷자락 밑으로 석불의 발과 발가락
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석불 옆에는 창건설화에 나오는 소나무가 누워있다. 정말 노승의 넋이 담긴 것인지 하늘로 곧
게 자라지 못하고 석불을 향해 아래로만 자라나 끝내는 석불의 하늘을 가린 것이다. 그 모습
이 마치 석불의 불력(佛力)이나 매력에 끌린 듯 그를 덮고 있었는데, 소나무가 갈수록 오버(?
)를 하면서 석불이 마치 소나무를 이고 있는 모습처럼 보이자 2000년에 지금의 자리로 석불을
옮기고 소나무를 싹둑 정리했다.


▲  송불암 소나무 - 논산시 보호수

미륵불과 더불어 송불암의 오랜 명물인 소나무는 미륵불 앞에 마치 절을 하고 있는 듯한 모습
을 하고 있다. 그의 미륵불에 대한 마음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석불에게 큰 부담을 주었던 존
재이기도 한데. 2000년에 미륵불을 현 자리로 옮기고 소나무를 크게 손질하여 얌전하게 만들
었다.
나무의 나이는 약 270년으로 그 적지 않은 나이에 비해 높이는 낮다. 다만 아랫쪽으로만 성장
을 하여 지금처럼 처진 소나무가 되버린 것이다.


▲  소나무 그늘에 있는 석탑

소나무 그늘과 석불 주변에는 세월에 지쳐 쓰러진 주춧돌과 석탑의 잔재가 남아있다. 이들은
미륵불과 더불어 옛 석불사의 유물로 석탑은 2기가 있는데, 윗 사진의 탑은 아랫도리만 간신
히 남아있으며, 그 주위에 버려진 주춧돌과 자잘한 돌들이 모여 있어 서로를 의지한다.


▲  석불 옆에 자리한 조그만 석탑
몇층인지는 모르겠으나 탑신의 일부와 옥개석이 이리저리 깨진 채 남아있다.
그 위로 동그란 돌이 마치 공기돌처럼 놓여있다.

▲  미륵불 주변에 흩어진 주춧돌들 ▲
이들은 미륵불을 보호하던 건물의 주춧돌로 거의 정사각형 모양의 보호각이
미륵불을 품고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석불의 높이가 4m가 넘으니 그 건물
또한 장대했을 것이나 임진왜란 이후 사라지고 간신히 주춧돌만 남아
받쳐들 대상을 상실한 채, 허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  미륵불의 뒷모습과 소나무
미륵불 뒷모습은 딱히 손질을 하지 않아 울퉁불퉁하다.

▲  미륵불의 귀여운 발과 연꽃무늬 대좌
발가락이 상식 밖으로 지나치게 커서 그 모습이 마치 손에 낀 장갑이나
글러브 같다.

▲  송불암과 논산을 뒤로하며~~~

송불암을 30분 정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시간은 어느덧 17시, 더 이상 갈 곳도, 마음을
줄 곳도 없다. 시간이 늦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여름 맞이 논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 송불암 소재지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연산리 36-3 (황룡재로 92-18 ☎ 041-733-6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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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0월 1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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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예천 겨울맞이 나들이 ~~~ (곱게 잘늙은 개심사지5층석탑, 동본리3층석탑, 초간정과 초간정 원림)



' 경북 예천 나들이 '
(개심사지5층석탑, 초간정 일대)

▲  예천 초간정


 

 

겨울 제국(帝國)이 늦가을을 몰아내고 천하 지배의 반석을 다지던 11월의 마지막 주말에
경북 예천(醴泉)을 찾았다.
초겨울의 냉랭한 기운이 짙게 감돌던 이른 아침, 도봉동 집을 나서 동서울터미널에서 예
천행 직행버스에 나를 싣고 2시간 20여 분을 달려 용궁(龍宮)에 두 발을 내렸다. 거기서
20분 정도를 기다려 안동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잡아타고 예천터미널 다음 정류장인 남본
교차로에서 하차했다. (예천터미널에서 남본교차로까지 약 1.2km, 거기서 환승하거나 걷
기도 애매하여 용궁에서 갈아탔음)

남본교차로 북서쪽에 안면이 2번 정도 있는 개심사지5층석탑이 있는데, 여기서 남쪽에서
오는 일행들과 만나기로 했다. 길을 일부러 더디게 왔음에도 일찍 도착하여 30분 정도를
오들오들 떨며 기다리니 남쪽 일행을 태운 관광버스가 구세주처럼 내 앞에 나타났다. 오
랜만에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바로 지척에 있는 개심사지5층석탑으로 다가섰다.
(그때 시간 대략 10시)


 

♣  너무나 곱게 늙은 단아한 모습의 고려 초기 석탑
개심사터 5층석탑(開心寺址 五層石塔) - 보물 53호

▲  옛 개심사터를 홀로 지키고 선 5층석탑

남본교차로 서북쪽 벌판 한복판에 맵시가 도드라진 5층석탑이 있다. 이 탑은 고려 초에 창건
되어 신기루처럼 사라진 옛 개심사(開心寺)의 유일한 흔적으로 윗층 기단(基壇)에는 아주 감
사하게도 탑과 관련된 내용<석탑기(石塔記)>이 새겨져 있어 그의 신상명세를 조금이나마 알려
준다. 다만 그 글씨들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크게 닳고 깨져서 알아보기는 힘들다.

석탑기에 따르면 그는 1010년에 세워졌으며, 이곳에 개심사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고려 3대 제왕인 정종(定宗, 재위 945~949)이 거란(요나라)과의 전쟁에 대비코자 조직한 광군
(光軍)에 대한 내용이 짧게 깃들여져 있어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  개심사터와 5층석탑으로 인도하는 길

고려 초에 세워진 석탑답게 2중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땅바닥에 접한
아랫층 기단에는 몸통은 사람이고 머리는 동물인 지신상(支神像)을 1면에 3개씩 모두 12지신
상을 새겼다.
윗층 기단에는 부처의 법을 지키는 8명의 존재, 팔부중상(八部衆像)이 있는데 1쪽 면에 2명씩
8명을 맞추었으며 이들은 불법(佛法) 대신 이 탑을 지킨다. 개심사는 이미 오래전에 녹아 없
어졌지만 이 탑은 그들의 가호 덕에 1,000년의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도 너무 온전하고 생동
감 있게 살아있어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들의 모습은 탑이 심어진 시기에
고려 군사의 모습으로 불상의 얼굴도 그렇고 의복(衣服)이나 보살상, 불교 관련 존재들의 모
습은 왕족이나 귀족, 승려, 여인들을 모델로 많이 삼았다. 그러니 무인(武人) 계통의 팔부중
상은 당시 늠름했던 고려 군사를 참고하여 만들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부처나 보살의 얼굴이
나 불교 관련 존재들의 모습과 의복 등은 딱히 정형화된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  12지신상과 팔부중상이 새겨진 석탑의 기단부 ▼
제일 밑에 3인 1조로 자리한 존재가 12지신상, 윗부분에 무기를 들고
2인 1조로 지키고 선 존재가 팔부중상이다.

윗층 기단과 1층 탑신 사이로 탑신을 떠받들기 위해 연꽃무늬의 괴임돌을 두었는데 이는 고려
탑의 특징이다. 1층 탑신의 남쪽에는 문고리와 인왕상을 새겼는데, 혹 열쇠가 있어 저 문고리
를 딸 수만 있다면 탑 안에 안치된 보물과 개심사의 정체를 흔쾌히 밝혀줄 존재가 나오지는
않을까 싶은 엉뚱한 생각이 든다. 우리집 열쇠라도 들이밀어 저 문고리를 풀어보고 싶다.

탑의 높이는 4.33m, 기단 폭 2.15m로 체감률이 안정되어 안정적인 비례를 이루고 있으며 예천
에 왔다면 꼭 보고 가야되는 이 고을의 소중한 보물이다. 또한 2011년 가을에는 탑 주변 논을
갈아엎고 주변 정비 및 개심사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발굴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이렇게 잘 생긴 탑을 보니 절의 모습 또한 대단했을 듯 싶으나 언제 사라졌는지는 알려진 것
이 없다. 다만 절터의 위치가 한천(漢川) 가에 있어 아주 오래 전에 홍수로 망한 듯 싶다. 어
째서 산에 세우지 않고 평지인 이곳에 터를 닦았는지는 모르지만 이 자리가 예천에서 안동(安
東)과 영주로 넘어가는 길목이고, 안동과 경북 동해안 지역에서 개경(開京)으로 가려면 이곳
을 거쳐 하늘재를 넘어야 했다. 그러니 예천 토박이 세력에서 그 길목의 절을 세워 지역간의
교역과 길손들의 숙식 제공 장소로 삼았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다만 절이 너무 일찍 사라져버
려 그 정답을 알 수 없는 것이 흠이면 흠이다.


▲  1층 탑신에는 문고리를 사이에 두고 2명의 인왕상(仁王像)이 있다.
그 아래로 연꽃 무늬가 새겨진 괴임돌이 보이는데 너무 선명하게
남아있어 탑의 나이를 의심케 만든다.

▲ 석탑기가 새겨진 1층 탑신 피부
심술쟁이 자연이 석탑의 피부를 마구 건드리면서 글씨를 확인하는 것이 매우
어렵게 되었다.

※ 예천 개심사터 5층석탑 찾아가기 (2018년 3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예천행 직행버스가 1~2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대구북부정류장과 동대구터미널에서 예천행 직행버스를 타고 예천터미널 전인 남본교차로(
  보통 삼거리라고 부름)에서 내리면 바로 탑이 보인다. (대구북부에서 1일 6회, 동대구에서
  1일 7회 운행)
* 영주, 안동에서 예천행 직행버스를 타고 3거리(남본교차로) 하차
* 상주, 김천에서 예천 경유 영주, 안동행 직행버스를 타고 예천터미널 다음인 3거리에서 하
  차
* 예천터미널과 예천역(경북선)에서 영주 방면 4차선 길(충효로)을 따라 한천을 건너 17분 정
  도 걸으면 남본교차로이다.
* 승용차
① 중앙고속도로 → 예천나들목을 나와서 예천 방면 928번 지방도 → 동본4거리에서 좌회전
   → 남산교차로에서 우회전 → 남본교차로에서 직진 → 개심사지5층석탑
*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남본리 200-3


 

♠ 이름 없는 옛 절터를 지키고 있는 신라 후기 석불과 석탑
예천 동본리(東本里) 3층석탑 /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

▲  동본리3층석탑 - 보물 426호

▲  동본리 석조여래입상 - 보물 427호

개심사지5층석탑을 둘러보고 예천읍의 젖줄인 한천을 건너 한천 둑방길을 따라 동쪽으로 가니
동본리3층석탑과 석조여래입상이 나란히 우리를 마중한다.
이렇게 잘생긴 석탑과 석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절과 관련된 기록은 하나도 없고, 절터의 흔적도 딱히 나오지를 않아 현재로써는 그 절의 정
체를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절터의 흔적을 제대로 캐내려면 언제 한번 날을 잡아서 주변을 싹
뒤집어야 그나마 좀 나올 것이다. 다만 이곳이 한천변인지라 홍수의 흥분으로 강제로 문을 닫
았을 가능성이 크며 그렇게 절의 이름 석 자도 세상에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급하게 떠내려
간 모양이다.

절이 읍내에 있고 석탑과 석불의 조성시기가 신라 후기라고 하니 예천 토박이 세력의 지원으
로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그 세력의 원찰(願刹) 역할을 했을 수도 있겠다. 다만 너무 오
래전의 일이라 속시원한 정답은 없다. 석불이 흔쾌히 입만 열어준다면 정말로 좋을텐데, 너무
머나먼 시기의 일이라 기억도 흐릿할 것이며. 집을 잃은 상처가 너무 커 입 밖에 드러내는 것
조차 싫어할 것이다.

절이 사라진 이후, 상류에서 떠내려온 흙들이 차곡차곡 주변에 쌓여갔으며, 그 흙에 논과 밭
이 들어서면서 절터의 흔적은 더욱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다만 탑과 석불은 마을 사람들이 신
앙 대상으로 삼아 정성으로 살펴주면서 지금도 정정한 모습을 자랑한다. 절의 이름을 모르니
석탑과 석불은 속 편하게 동네 이름을 따서 동본리 3층석탑과 석조여래입상이란 이름으로 살
아가고 있다.

▲  정면에서 바라본 동본리3층석탑

▲  동본리 석조여래입상의 뒷모습

우선 동본리3층석탑을 살펴보면 땅바닥에 네모난 바닥돌을 두고 그 위에 기단을 두었는데 그
밑 부분에 가운데돌을 두어 기단을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윗층 기단에는 무슨 존재를 새겼는
데 이는 탑을 지키는 사천왕상(四天王像)으로 그런데로 모습을 갖추고 있다.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1층과
2층은 5단, 3층은 4단이다. 1층이 윗층들보다 피부가 하얀데 이는 후대에 손질을 가한 듯 싶
으며, 탑이 윗층으로 갈수록 일정한 비율로 줄어드는 것이 원칙이지만 1층은 그 비율을 깨고
조금은 육중해 보인다. 탑 꼭대기에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을 하나의 돌로 만들었는데 고
색의 때가 적어 1층 탑신을 손질할 때 새로 끼워놓은 듯 싶다.
탑신 지붕돌 밑면의 수가 줄어들고, 괴임돌이 간략해진 점으로 신라 후기 탑으로 평가받고 있
으며, 개심사지5층석탑만큼은 아니지만 건강 상태도 썩 양호한 편이다.

3층석탑과 나란히 한 석조여래입상은 신라 후기에 조성된 키 3.46m의 석불이다. 머리를 보면
꼽슬인 나발(螺髮)로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주렁주렁 달아놨으며, 머리 꼭대기에는 육계
(肉髻)가 두툼하게 솟아있다. 후덕함이 묻어난 둥근 넓쩍한 얼굴에는 좌우로 길다란 눈이 지
그시 감겨져 있는데 왼쪽 눈이 오른쪽에 비해 너무 희미하고 존재감이 떨어져 마치 애꾸눈을
보는 듯 하다. 코는 끝부분이 두툼하며,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있고, 입은 옛날의
일을 감추고 싶은지 다물어져 있다. 귀는 중생의 고충을 빠짐없이 들으려는 듯, 어깨까지 축
늘어져 있다.
그의 몸통을 보면 얼굴과 상반신의 비율이 너무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는데 그만큼 얼굴을 크
게 만들어 신체비례가 많이 떨어진다. 얼굴과 몸통을 이어주는 목이 꽤 두꺼우며, 어깨가 좁
고 팔이 짧아 다소 기죽은 느낌을 준다. 오른팔은 옆으로 내려 옷자락을 붙들고 있고, 왼팔은
앞으로 들어 새끼 손가락을 제외한 손가락을 안으로 굽혔다. 몸에 걸친 옷은 통견의(通肩衣)
로 옷의 주름이 선명하게 표현되어 마치 진짜 옷을 걸친 것 같으며 이런 옷주름 표현은 신라
후기 불상에서 많이 나타나는 모습이다.

※ 예천 동본리3층석탑/석조여래입상 찾아가기 (2018년 3월 기준)
* 예천시외터미널 옆 군내버스 정류장에서 예천읍내로 들어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동본리정류
  장에서 내린다. 버스에서 내려 왼쪽을 보면 바로 3거리가 나오는데, 그 3거리에서 오른쪽으
  로 2분 가면 동본교란 다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으로 길을 건너 한천 둑방길을 1분 정도
  가면 왼쪽에 내려가는 길이 나오는데 그 길로 가면 바로 동본리3층석탑과 석조여래입상이다.
* 개심사지5층석탑에서 접근할 경우에는 남본교차로에서 북쪽(읍내 방향)으로 가다가 예천교
  를 건너 오른쪽 한천 둑방길로 12분 정도 걸으면 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3층석탑 앞에 조그만 공터 있음)
① 중앙고속도로 → 예천나들목을 나와서 예천 방면 928번 지방도 → 동본4거리 직진 → 동본
   교를 건너서 우회전 → 바로 보이는 왼쪽 길로 내려가면 동본리3층석탑이다.
*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동본리 474-4


 

♠  조선 중기에 세워진 사대부의 별서(別墅)이자 예천 제일의 경승지
초간정(草澗亭)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143호

예천읍에서 용문사(龍門寺)로 가는 길목인 죽림리에 초간정이라 불리는 경승지가 있다. 간장
의 하나인 초간장과 겨우 받침 하나 사이로 이름이 너무나 비슷하여 나도 모르게 초간장이라
불리게 되는 이곳은 조선 중기 학자이자 예천 출신인 초간 권문해(草澗 權文海, 1534~1591)가
세운 별서(別墅, 별장)이다.

권문해는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보물 878호)'을 쓴 인물로 조
선과 요동(遼東), 만주, 명나라에 전해오는 수많은 문헌을 참고하여 옛 조선부터 삼국시대와
고려를 거쳐 자신이 살고 있는 시절(조선 명종 시절)까지 이 땅의 역사와 지리, 인물, 문학,
식물, 동물 등을 집대성하여 운별(韻別)로 분류했다. 책의 이름인 대동(大東)은 '동방대국(東
方大國)'으로 조선을 뜻하며, 운부군옥(韻府群玉)은 운별로 배열한 책이란 뜻이다.

이 책은 초간이 대구부사(大邱府使)를 지내던 1589년 20권 20책으로 편찬을 완료해 3벌을 정
서해두었다. 허나 1벌은 임진왜란 때 잃어버리고, 다른 1벌은 정구(鄭逑)가 빌려갔다가 개념
없게도 실수로 불에 태워버렸다. 그래서 겨우 1벌만 남아 초간의 외아들인 권별(權鼈, 1589~
1671)이 정산서원(鼎山書院) 원장으로 있을 때 정서하여 그 서원에 보관했으며, 1812년 간행
을 시작해 1836년 완료했다. 이후로도 여러 번 복판(腹板)을 했다.

초간은 1582년 집 부근인 이곳에 정자를 지어 자신의 호를 따서 초간정이라 하였다. 그는 계
곡이 크게 굽이쳐 흘러 기암절벽과 소(沼)를 이루는 지금의 자리에 눈독을 들이고 바위 위에
돌을 쌓고 터를 다져 조촐하고 정자를 지었다. 지금은 팔작지붕 건물이지만 이는 1870년에 다
시 지은 거라 원래 모습은 알 수 없다. 아마도 지금보다 더 소박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여기서 휴식과 독서를 하였고 벗들과 어울려 곡차(穀茶) 1잔의 여유를 즐겼으며 별서 주
변에 소나무를 잔득 심어 이곳의 운치를 한껏 부풀렸다.
허나 임진왜란 때 여기까지 기어들어온 왜군에 의해 부질없이 파괴되었으며, 1612년 후손들이
다시 세웠으나 1636년 불에 타 없어졌는데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불에 탔다고 나온다. 허나
병자호란 시절 청나라군은 경기도에서 더 이상 내려가지 않았으므로 전란이 아닌 불을 잘못
취급하거나 우연히 화재를 입은 것으로 봐야 된다. 이후 오랫동안 터만 전해오다가 1870년 후
손들이 초간의 서적을 보관하고자 조그만 기와집으로 새로 짓고 담장과 부속건물을 갖추니 이
것이 지금의 초간정이 되겠다.

초간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앞면 왼쪽 2칸에 온돌방을 두었고, 나머지 4
칸은 대청마루로 삼아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끔 난간을 둘렀다. (그래봐야 난간의 높이가 낮음
) 또한 1636년 화재로 건물이 무너지고 초간정 현판 또한 사라져 자취를 감추었는데 어느 날
늪에서 오색무지개가 피어오르자 종손(宗孫)이 이게 뭔가 싶어 그곳을 파보았더니 글쎄 현판
이 나왔다는 것이다. 즉 정자 앞 늪에서 현판을 발견한 것이다. 정말 현판이 오색무지개를 발
산했는지는 생각해볼 일이지만 전설 내용이 다소 불교틱하다.

아름드리 노송(老松)이 조촐하게 숲을 이루고 기암을 휘돌아 흐르는 물은 소를 이루어 절경을
자아낸 예천 제일의 경승지로 용문사로 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여행꾼과 답사객들이 문턱이
닳도록 찾아온다. 다행히 초간정은 일반에 개방을 하고 있어 신발을 벗고 정자까지 들어갈 수
있으며 그 서쪽에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리한 기와집(초간정 부속 건물)은 민박으로 1박
머물 수 있다. 또한 초간정 주위로 심어진 나무들은 '초간정 원림(園林)'이란 이름으로 국가
명승 51호로 지정되었다.


▲  초간정 주차장에서 바라본 초간정과 소나무들
소나무가 초간정을 향해 거의 30도 고개를 숙였다. 자신들을 있게 해준 초간에
대한 일편단심의 표현일까?

▲ 바위 위에 석축을 쌓고 그 위에 둥지를 튼 초간정의 모습
자연에 거스르며 무식하게 크기만 한 현대식 별장보다는 소박하지만 저런 전통 기와집도
나름 정감이 많이 든다. 나도 나중에 경관이 적당한 곳에 조촐하게 전통식 정자나
한옥을 짓고 머물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 과연 뜻대로 될련지? ㅠㅠ

▲  초간정 옆에서 90도로 굽이쳐 흐르는 계곡
초간이 바로 저 풍경에 반해서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높이는 낮지만 나름대로
기암절벽을 이루며 소소하게 그림 같은 절경을 자아낸다.

▲  초간정 상류 개울
초간정 원림의 서쪽 끝으로 소나무들이 개울을 향해 한결같이 30도로 구부러진
모습을 보이고 있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  개울 다리에서 바라본 초간정

▲  초간정 옆구리에 자리한 부속 기와집
1870년 초간정을 다시 일으켜 세울 때 그 곁에 부속 건물을 지어 초간의 서적
보관 및 정자 관리인의 숙소로 삼았는데, 현재는 민박으로 쓰이고 있다.

▲  초간정 부속 기와집 내부

▲  초간정으로 들어가는 문

이곳이 초간정으로 접근하는 유일한 문으로 문이 좁고 낮다. 왠만한 성인 남성은 고개를 숙이
고 들어가야 되고 한 사람이 지나가면 문이 꽉 찬다. 이는 당시 사람들의 키와 덩치가 반영된
탓도 있지만 자기 자신을 낮추고 겸손을 갖추라는 의미도 담겨져 있다.


▲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머리에 짊어진 초간정
좌측에 마련된 섬돌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 오르면 된다. 단 섬돌과
대청마루까지는 높이가 좀 있으므로 주의요망

▲  초간정에 걸린 초간정사(草澗精舍) 중수기
글씨가 깨알같이 적혀 가독성이 다소 떨어지는 초간정사 중수기는 1870년 초간정을
다시 세웠을 때 작성된 것으로 초간정사는 초간정의 예전 이름이다.

▲  초간정 내부 대청마루
겉으로 보면 좀 부실해보여도 속은 현대식 건물 이상으로 매우 견실하다.

▲  초간정에서 바라본 계곡 건너편

초간정은 동쪽을 향한 건물로 정자를 받치는 기둥 중의 도끼 자국이 있다고 한다. 나는 그 자
국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는데, 조선 후기판 판문점(板門店) 도끼만행사건 비스므리한 일이 일
어났던 현장이라고 하며 다음의 전설이 전해온다.

조선 후기에 인근에 살던 선비가 과거준비를 하다가 초간정 난간을 100바퀴 돌면 과거 급제한
다는 전설을 믿고 난간을 돌았다. 허나 100바퀴를 다 돌기도 전에 어지럼증과 체력 고갈로 그
만 쓰러지면서 정자 밑에 있는 소(못)에 떨어져 죽었는데, 남편을 잃은 부인이 뚜껑이 폭발해
도끼를 들고 찾아와 도끼질을 했다고 한다. 그 도끼자국이 바로 그때 찍힌 자국이라는 것이다.
선비가 빠져 죽었다는 소는 옛날에는 매우 깊어서 명주꾸리 1개를 펴도 모자랄 정도였다고 한
다. 허나 지금은 많이 메워져 옛날의 명성은 많이 죽은 상태이다.

이런 경승지에 전설이 하나만 있으면 초간정도 초간 선생도 매우 섭할 것이다. 그래서 옵션으
로 전설이 더 전해온다.
때는 바야흐로 1864년경, 초간정을 소유한 예천권씨 집안에서 정자 주위를 거꾸로 100바퀴 도
는 사람에게 정자를 주겠다고 광고를 냈다고 한다. 그러자 어느 초립동이가 나서서 99바퀴까
지 돌았으나 나머지 1바퀴를 도는 과정에서 그만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이에 화
가 난 그의 어머니가 도끼를 들고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전설로는 옥매(玉梅)라는 예천 제일의 기생이 초간정에서 장고춤을 추다가 그
만 발을 헛디뎌 떨어져 죽었는데 화가 단단히 난 그녀의 어머니가 도끼를 들고 찾아와 도끼질
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아름답고 풍류가 넘치는 곳에 왠 난데없이 무시무시한 도끼질 자국이 있는지 참 옥의
티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실수로 떨어져 죽어도 그렇지 죽은 이의 부인이나 어머니 등, 여
인들이 도끼를 들고 찾아와 난동을 부렸다는 것도 쉽사리 이해가 가질 않는다. 도끼가 보기와
달리 은근히 무게가 나가는 것인데 말이다. 어쨌든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지만 정
자를 새로 지을 때 목수의 실수로 도끼 자국이 생긴 나무 기둥을 그대로 썼을 수도 있을 것이
고, 19세기 중/후반 지배층의 수탈과 학정이 극에 달한 시절에 인근 백성들이 찾아와 난동을
부린 흔적일 수도 있겠다.


▲  초간정 바로 밑에서 무섭게 입을 벌리고 있는 소(못)

초간정 관람시 반드시 유의해야될 점이 있다. 문이 봉해진 온돌방은 통제구역이므로 애써 들
어가서는 안되며 그걸 어기면 자칫 속세에 개방한 초간정의 문이 쾅 닫혀질 수도 있다. 그리
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난간 부분에서 장난을 치거나 무리해서는 안된다. 난간 너머는 바로
초간정을 끼고 흐르는 개울로 정자와 개울까지는 높이가 약 6~7m 정도 되는 아슬아슬한 낭떠
러지이다. 게다가 난간의 높이도 난쟁이 반바지를 반 접은 정도 밖에 안될 정도로 낮고 오래
된 탓에 조금 부실하다. 괜히 난간에 기대거나 아찔하게 장난을 치다 소로 떨어져 사고를 당
할 수 있다.
소의 깊이가 예전보다는 온순해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소는 소이다. 정자 위에서 소를 바라보
면 여전히 밑바닥이 보이질 않으니 깊은 것은 여전하다.


▲  초간정을 끼고 동쪽으로 흘러가는 개울
개울 주변에 대자연이 빚은 기암절벽이 심심치 않게 늘어서 초간정의 정취를
더욱 돋군다.

▲  하늘을 받치고 선 초간정 소나무
초간정을 둘러싼 소나무 숲은 초간정의 구수한 상징이다.

▲  초간정의 새로운 명물, 구름다리
초간정 동쪽 개울에 흔들거리는 구름다리를 닦았다. 초간정으로 들어갈 때는 주차장에서
다리를 건너 진입하고, 나올 때는 초간정 동쪽 소나무 숲을 거쳐 구름다리를 건너
주차장으로 나가면 된다.

▲  초간정 구름다리에서 바라본 초간정 방향
개울이 조그만 협곡을 그리며 연주하는 물소리에 속세에서 오염된 청각이
잠시나마 정화되는 것 같다.

▲  초간정 구름다리에서 바라본 동쪽
초간정 방향과 달리 평범한 개울로 흘러간다. 개울 양쪽에는 소나무가
가로수처럼 늘어서 속세로 흘러가는 개울을 배웅한다.

▲  떠나기가 몹내 아쉬워 잠시 뒤돌아본 초간정

초간정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 와서 보니 정말 그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님
을 알게 되었다. 개울 북쪽에 신작로(용문경천로)가 생긴 것과 현대의 이기(利器)들이 들어온
것 외에는 딱히 달라진 것이 없는 옛 모습으로 주변 경치와 어우러져 1폭의 수묵담채화(水墨
淡彩畵) 같은 절경을 자아내 사람들의 정처 없는 마음을 사뿐히 앗아간다.
겉으로 보면 작고 수수해 보여 누구나 쉽게 만들겠지 싶지만 조선시대에 저 정도의 별장을 소
유하려면 어느 정도의 재력과 지위가 있어야 했음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즉 지배층의 전유
물이었던 것이다. 허나 지나치게 큰 별장과 달리 소소한 모습에 정감이 많이 가며, 정자를 둘
러싼 풍경과 소나무 숲(초간정 원림)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지배하려 드
는 오늘날 인간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초간정을 1시간 정도 둘러보고 여기서 가까운 용문사로 길을 향했다. 이후는 본글의 내용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초간정 찾아가기 (2018년 3월 기준)
* 예천터미널(예천역 북쪽) 옆 군내버스 정류장에서 용문사, 두천, 사부리로 가는 군내버스(1
  일 7회 운행)를 타고 원류(초간정)에서 내린다.
* 승용차 (주차장 있음)
① 중앙고속도로 → 예천나들목을 나와서 예천 방면 928번 지방도 → 동본4거리에서 우회전
→ 우계교차로에서 좌회전 → 백전3거리에서 우회전 → 용문 → 초간정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보통 9시부터 18시까지 (겨울에는 16~17시까지)
* 초간정에 딸린 기와집(초간정민박)에서 민박이 가능하다. (민박 관련 문의는 ☞ ☎ 054-655
  -9233
)
*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166 (용문경천로 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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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8년 3월 15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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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에서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석불, 보리사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보리사 마애석불)

 


경주 남산 나들이 (동남산 미륵곡, 보리사)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신라(新羅) 1,0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땅 경주(慶州), 그 두 자를 들으면 나도 모
르게 가슴이 시려온다. 경주는 밤하늘에 흐르는 별만큼이나 온갖 문화유산이 반짝이고, 융
단처럼 부드러운 잔디의 잎파리만큼이나 깃들여진 신화와 전설이 속삭이는 마음의 고향 같
은 곳이다.

경주는 늘 가고 싶고, 머물고 싶은 곳이며, 나에게 늘 정신적으로나 지적으로 아낌없는 포
만감을 안겨주는 풍요로운 곳이다. 하지만 그만큼 부담이 큰 곳 또한 경주이다. 그곳에 서
린 문화유산을 개미목보다 짧은 지식과 하찮은 작문 솜씨로 감히 다룬다는 것이 은근히 두
렵고 떨려 주저한 적도 적지 않았다. 허나 그렇게 걱정을 하면서도 그만큼 많이 찾은 곳이
또한 경주이다.

경주 땅 한복판에는 이름도 친근한 남산(南山, 468m)이 길게 누워있다. 바로 옛 금오산(金
鰲山)으로 경주는 물론 신라에서도 꽤 비중이 높아 '남산에 오르지 않고선 경주를 봤다고
우기지 마라~!'
는 의미심장한 말이 있을 정도로 경주의 필수 답사 코스로 꼽힌다.

신라의 시작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현장(나정, 서출지, 포석정)을 넉넉히 품고 있으
며, 신라의 많은 제왕(박혁거세, 일성왕, 정강왕 등)이 그의 품에 앞다투어 잠들어 있다.
게다가 골짜기가 깊고 기암괴석이 만물상을 이루는 등, 자연미도 풍부하며, 남산을 불국토
(佛國土)로 여긴 신라 사람들이 여기저기 빚어놓은 불교 문화유산이 아낌없이 함축되어 있
는 그야말로 보물의 산이다.
남산에는 40여 곳의 크고 작은 골짜기가 있다. 그 골짜기에 깃들여진 절터만 100곳이 넘으
며, 80여 개의 불상, 70여 개의 석탑 등이 살아 숨쉬고 있어 그야말로 거대한 야외 박물관
을 이룬다. 그러다보니 남산 전체가 사적 311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처럼 뫼 전체가 통
째로 사적으로 지정된 예는 오로지 이곳이 유일하다. (낭산 등의 조그만 산은 제외)
남산은 위치상 통일전과 보리사가 있는 동남산, 포석정과 배리삼존불, 삼릉이 있는 서남산
(西南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번에 문을 두드린 곳은 동남산(東南山) 구역 보리사이다.

동남산 밑에는 갯마을이란 시골 마을이 있다. 그 옛날에 형산강(兄山江) 나룻배가 여기까
지 들어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마을 입구에는 보리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고, 마을
남쪽에는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원이 넓게 자리를 닦고 있어 동네가 온통 푸르다. 토함산(
吐含山)에서 발원한 남천(南川)은 동남산 주변을 부드럽게 감싸돌며 '배반평야'라 부르는
너른 평야를 촉촉히 어루만진다.

걷는 소리가 미안할 정도로 조용함이 깃든 갯마을을 벗어나면 대나무로 창창한 오르막길이
나온다. 그 길의 끝에는 미륵곡 석불의 거처인 보리사가 자리해 있다. 절까지 걸어서 12분
정도 걸리는데, 보리사를 중심으로 남천으로 흐르는 계곡을 미륵골(彌勒谷)이라 부른다.


▲  대나무숲이 터널을 이루는 보리사, 미륵곡 가는 길
남산이 베푼 산바람이 이곳을 스치면서 대나무의 향연이 그윽히 울려 펴진다.

▲  보리사 밑에 자리한 부도와 때깔이 고운 비석들


♠  소나무 숲에 터를 돋군 조그만 산사, 남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불
미륵곡 석불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 남산 보리사(菩提寺)

남산에 100곳이 넘는 절이 있었다고 하나 온전하게 법등(法燈)을 이어온 절은 하나도 없는 실정
이다. 지금 절들은 근래 옛터에 다시 지은 것들이며 내가 찾은 보리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동남산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보리사는 비구니 사찰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으로 불국사(
佛國寺)의 말사(末寺)이며, 남산에 있는 절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절의 창건시기와 구체적인 사적에 대해서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장대한 세월에 묻히
고 역사는 산산이 흩어져 온전한 모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신
라 헌강왕(49대, 憲康王)과 정강왕(50대, 定康王)의 능이 보리사 동남쪽에 있다는 기록이 있고
경내에 석조여래좌상과 복원된 3층석탑이 있어 신라 때 절임을 가늠케 할 뿐이다. 허나 정강왕
릉과 헌강왕릉의 위치도 확실한 것이 아니라서 이곳이 신라 때 보리사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
五里霧中)이다.

현재 보리사는 1911년 포항 보경사(寶鏡寺)에서 온 박덕염(朴德念) 비구니가 세운 것으로 절단
되어있던 미륵곡 석불의 머리와 광배를 이어 붙였으며, 1932년에는 남법명(南法明) 비구니가 중
수했다. 1977년 추묘운(秋妙雲)이 주지로 머물면서 3~4년에 걸친 불사 끝에 현재의 면모를 지니
게 되었다. 원래는 지금보다 약간 위쪽인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주변이 경내 중심이었으나 1981
년 지금의 자리로 약간 내려왔다.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산신각, 범종각, 육화당 등 6~7동의 건물을 지녔으며, 비구니 사찰이
라 경내는 깔끔하고 단아하다. 대웅전 앞뜰에는 잔디를 곱게 입혔고 그 사이로 돌을 심어 각 건
물을 이어주는 돌길을 내었다. 자투리공간에는 온갖 화초를 심었으며, 여승의 보살핌을 받은 꽃
들은 한참 꽃망울을 피워 그들의 은혜에 화답한다.


▲  솔내음이 깃든 경내 뒤쪽 부분 (사진 중앙 석불이 미륵골 석조여래좌상)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남산에서 가장 우수한 명품 석불로 꼽히는 석조여래좌상이 있으며, 경내에
서 조금 떨어진 남쪽 바위에 마애석불이 있다.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곳에 오르면 배반평야와 낭산(狼山), 토함산이 두 눈에 바라보인다. 비
록 높이는 낮지만, 꽤 높은 곳에 올라 천하를 바라보는 기분이다.
절을 에워싼 싱그러운 소나무의 솔내음과 아늑하고 조용한 산사 분위기, 그리고 미륵곡 석불의
인자함과 우아함이 배여 있는 보리사, 속세에 찌든 마음의 여유를 찾기에 이만한 곳도 없을 것
이다.


▲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에 바라본 보리사 경내

※ 남산 보리사 찾아가기 (2015년 10월 기준)
① 경주까지
* 서울역, 광명역, 천안아산역, 대전역에서 부산행 경부선 고속전철 이용 (신경주역 하차)
* 청량리역, 양평역, 원주역, 제천역에서 경주, 부전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1일 2회 운행)
* 동대구역, 부전역, 해운대역, 태화강역에서 경주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 동서울터미널에서 경주행 고속/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고양, 의정부, 부천, 성남, 수원, 춘천, 원주, 청주, 전주, 구미, 안동, 창원, 대구(동
  부, 서부), 부산, 울산에서 경주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② 현지교통
* 경주시외터미널 건너편, 경주고속터미널 건너편, 경주역(경주우체국)에서 11번 시내/좌석버스
  를 타고 갯마을 하차, 도보 12분
* 신경주역에서 50, 51, 60, 61, 70, 700번 시내버스를 타고 경주시외터미널 건너편이나 경주역
  (경주우체국)에서 11번 버스로 환승
* 보문관광단지와 불국사, 불국사역에서 10번 시내버스를 타고 갯마을 하차
② 승용차 (경내까지 진입 가능)
* 경부고속도로 → 경주나들목을 나와서 직진 → 고운교 직전에서 문천길로 우회전 → 화랑교
  직전, 갯마을에서 우회전 → 보리사

*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산 67 (갯마을길 41-30 ☎ 054-748-0794)


▲  대웅전 석가3존불과 후불탱

보리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1981년에 지어진 것이다. 불단(佛壇)에는 금동석가3존불과 후
불탱화가 있으며 그들이 발하는 금빛에 가히 눈이 멀 지경이다. 석가3존불 우측에는 육환장(六
環杖)을 든 지장보살의 보금자리가 있으며, 좌측벽에는 신중도(神衆圖)도 걸려있다.

아무도 없는 대웅전의 고요함을 살짝 깨뜨리며
안으로 발을 들여 향을 피우고 석가3존불에게
예불을 올린다. 예불이라고는 하지만 개인적인
소망도 살짝 넣어 그에게 내밀었다. 소망이 과
연 접수가 될련지는 미지수이지만 예불을 한 것
만으로도 마음이 평안해진다.

석가3존불 우측에는 나의 시선을 붙잡아 맨 귀
여운 존재가 있었다. 바로 연꽃을 든 동자상이
다. <거의 동녀(童女)처럼 보임>
그는 자신의 키에 2배나 높은 연분홍 연꽃을 들
고 있는데, 부처의 법을 상징하는 조그만 코끼
리가 그 곁에 자리해 소소하게 동심을 자아낸다.
 

◀  연꽃을 든 동자상과 코끼리상


▲  보리사 3층석탑

대웅전 뜨락 우측에는 누렇게 바랜 3층석탑이 서 있다. 보통 법당 정면에 탑을 세우지만 보리사
는 다소 우측으로 치우쳐진 특이한 배치를 취했다.
이 탑은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주변에 흩어져 있던 탑재를 끼워맞쳐 복원한 것이다. 없는 부분은 
새롭게 때웠는데,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을 얹힌 전형적인 신라 후기 탑으로 하얀 빛
의 상륜부(相輪部)를 제외하고 오랜 세월의 때가 가득하여 제법 고색의 기운을 드러낸다.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  자비롭고 우아한 표정에 가슴을 설레게 하는
신라시대 명품 불상,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 보물 136호


보리사 경내 뒤쪽, 담을 두르고 있는 한층 높은 곳에 보리사에 든든한 밥줄, 미륵곡 석조여래좌
상(석불좌상)이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동남산을 대표하는 석불로 8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1,300년이란 나이가 정말 무색할 정도로 정정한 모습을 지녀 보는 이로 하여
금 놀라움을 선사한다. 그 장대한 세월 동안 그를 괴롭힌 존재가 한둘이 아닐진데 어찌 저리 멀
쩡할 수가 있을까?
그의 건강비결이 사뭇 궁금해진다. 물론 그에게도 적지 않은 시련은 있었다. 그를 관리하던 절
보리사로 단정지울 순 없음―
은 거친 세월의 물결에 휩쓸려 가고 현재 보리사가 터를 닦기 전에
는 불상의 머리와 광배가 몸통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기품이 있는 신라의 귀족 여인을 모델로 한 것을 아닐까? 우아한 기품과 인자함이 서린 그의 표
정은 보기만 해도 가슴을 요동치게 한다. 기분 같아서는 그를 보쌈하여 우리집에 갖다놓고 싶지
만 그를 업다가는 자칫 내가 그에게 깔려 골로 갈 상황이니 감히 그러지도 못한다.

신라의 미소로 손색이 없으며, 남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상으로 내세워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
는 미륵곡 석불은 신라 불상의 백미(白眉)라 일컬어지는 토함산 석굴암(石窟庵) 본존불과 크게
대비된다. 석굴암 본존불은 미소라기보단 나 같은 범인(凡人)들은 차마 접근하기 조차 어려운
위엄이 서려있다. 그 앞에서는 차마 두려워 머리를 조아리기 바쁠 것이다. 그에 반해 미륵곡 석
불은 그 누구라도 기꺼이 안아주고 보듬어 줄 것 같은 대인적인 느낌이 강하게 밀려온다.

그가 앉은 연화대좌(蓮花臺座)도 그를 닮아서인지 돌이 무색할 정도로 너무 아름답다. 마치 살
아있는 연꽃이 하늘로 향해 꽃봉오리를 펼쳐보이는 모습은 진짜 연꽃도 시샘할 정도이다. 대좌
높이는 약 1.35m로 그 밑부분에는 땅을 향해 꽃잎을 펼친 연꽃이 묘사되어 있다. 석불이 잠시
마실을 나간 사이에 살짝 앉아보고 싶지만 그가 좀처럼 일어날줄 모르니, 그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대좌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있는 그는 앉은키 높이가 2.4m로 그의 머리는 나발(螺髮)
이다. 부처가 인도 사람이다보니 인도 사람의 머리스타일을 취한 것이다. 머리 꼭대기에는 육계
가 큼지막하게 솟아 있다.
내면에서 우러나온 미소가 만면에 가득한 그의 얼굴을 살펴보면 가늘고 긴 눈썹 아래로 지그시
뜬 두 눈이 속세를 바라본다. 넓직한 이마 가운데로 둥그런 백호가 있으며, 코는 오목하고 적당
한 크기이다. 미소가 서린 입은 정말 단아한 모습으로 정말 훔치고 싶은 입술이다. 볼은 두툼하
고, 다소 두터워 보이는 목에는 삼도가 획 그어져 있으며, 그의 몸을 걸친 법의(法衣)는 주름이
섬세히 표현되어 있다. 다리 위에 사뿐히 놓은 그의 왼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상징한다.

석불이 기대고 있는 광배(光背)는 높이 2.7m, 폭 1.9m로 석불과는 다른 돌이다. 광배 역시 화려
함의 극치로 당초(唐草)무늬와 보상화문(寶相華紋), 화불 등이 마치 살아있는 줄기를 보듯 유려
(流麗)하게 묘사되어 눈길을 강하게 잡아 맨다.

미륵곡 석불에는 또 다른 불상이 교묘하게 숨어
있다. 분명 겉으로 봐서는 하나의 석불인데, 또
어디에 불상이 있는 것일까? 바로 광배 뒤에 새
겨진 마애불(磨崖佛)이 그 답이다. 자세히 보면
선으로 처리된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두 불상이 등을 맞대며 동거동락하는 신선한 형
태로 광배 뒤쪽에도 불상이 있는 경우는 이 땅
에서는 그 예가 거의 없어 매우 신선하게 다가
온다.
광배에 깃들여진 마애불은 약사여래(藥師如來)
로 그의 왼손에는 약합이 들려져 있다. 그런 이
유로 광배 앞에 있는 석불을 서방정토(西方淨土
)의 주인인 아미타불로 보기도 한다.

얼굴 부분은 마모가 심해 확인하기 어려우며 전
체 높이는 1.3m다. 미륵곡 석불과 마찬가지로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있다. 중생들의
병을 치료할 약이 담겨져 있을 약합을 소중히
간직한 약사불은 동방세계의 주인이다.

석불 부근에는 옛 보리사의 흔적으로 보이는 탑재 일부와 돌덩어리가 놓여져 있으며, 석불 주변
은 소나무가 울창하다.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인 소나무는 솔내음으로 불상 주변을 깨끗히 정화해
주며 그에 대한 흠모의 뜻을 표한다.


♠  보리사의 숨겨진 신라 후기 마애불
보리사 마애석불(磨崖石佛)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193호

▲  바위에 살짝 깃들여진 보리사 마애석불

보리사 경내를 둘러보고 부근에 숨겨진 마애석불을 보고자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마애불을
온몸으로 알리는 이정표의 안내로 청명한 기운이 서린 대나무 숲길을 지나 4~5분 정도 가면 이
정표가 없는 갈림길이 나그네의 마음을 혼돈으로 밀어넣는다. 여기서 어디로 가야 마애불이 나
올까? 지나가는 사람도 없으니 순전히 나의 판단에 의지해야 된다. 나름 직감이 좋기로 명성이
자자했지만 조금씩 늙어감에 따라 그 직감도 종종 헛탕을 칠 때가 있다.
여기서 확률은 반반. 길의 상태를 보니 오른쪽 길은 가파르고 폭도 가늘어 사람의 왕래가 별로
없어 보였다. 그러니 정답은 아닐 듯 싶다. 그에 반해 직선 길은 오른쪽 길보다 폭도 굵고 사람
들의 왕래도 조금은 있어 보였다. 하여 직선 길에 모든 것을 걸고 그만 직진을 해버렸다. 허나
그게 함정이었다.


▲  마애석불로 가는 대나무 숲길

마애불을 만난다는 생각에 기대를 잔뜩 품으며 열심히 길을 재촉했으나 아무리 가도 나올 생각
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깊이 들어설 수록 길의 상태도 우울해진다. 그런데 어디선가 까마귀 1
마리가 나타나 요란하게 까악까악~~!을 외치며 내 허공을 심상치 않게 맴도는 것이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내 머리 위에서 계속 맴돌며 시끄럽게 울어대는 것이 수상하다. 내가
그의 영역을 침범하여 뚜껑이 열려 경고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뜻일까?
인적도 없는 궁벽한 산길에서 홀로 까마귀의 난데없는 태클을 받으니 오싹한 기분이 나를 엄습
하고 순간 염통이 쫄깃해진 나는 심상치 않다 여겨 서둘러 길을 돌렸다.

발걸음을 빨리 하여 다시 갈림길에 이르렀는데, 그래도 마애불에 대한 미련은 여전하여 비탈진
왼쪽(진행 방향 기준) 오르막길로 들어선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방금 전만 해도 내 상공을
맴돌던 까마귀가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다. 어쨌든 까마귀의 압박에서 벗어나 안도의 한숨을 쉬
며, 산길을 오르니 그 길의 끝에 보리사 마애석불이 잔잔한 미소를 드리우며 나를 기다리고 있
는 것이 아닌가?
아까 그 까마귀는 혹여 내가 길을 잘못 들어서자 이를 알리고자 목을 터지라 소리를 질렀던 것
은 아닐까? 그는 사람 말을 할 줄 모르고, 나는 까마귀 말을 모르니 엉뚱한 길로 빠진 나를 깨
우치고자 까악~ 소리를 높여 갔고, 다시 길을 돌려 맞는 길로 들어서니 그제서야 소리를 접고
사라진 것이다. 물론 그의 영역을 침범하여 나를 쫓아내고자 그리 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목적
이야 어찌되었든 까마귀의 경고로 마애불을 찾았으니 그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설마 마애불이
전설처럼 까마귀로 현신하여 길을 알려준 것은 아니겠지? 허나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르면 그런
전설이 나돌지도 모르겠다.

보리사에서 남쪽으로 10분 정도 떨어진 가파른
산자락에 절벽을 이룬 커다란 바위가 있다. 그
바위에 바로 결가부좌를 튼 마애석불이 아늑히
들어앉아 속세를 굽어본다.
오르기도 쉽지 않은 비탈진 곳에 숨은 이 불상
은 미륵곡 석불보다 나중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
는 신라 후기 석불로 바위벽을 얕게 파서 불상
의 광배로 삼은 다음 1.1m 정도의 작은 불상을
돋음새김으로 새겼다.

머리 꼭대기에는 육계가 두툼히 솟아있고, 머리
칼은 꼽슬인 나발이다.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
진 눈썹 아래로 지그시 뜬 눈이 있으며, 다물어
진 입술에는 그만의 미소가 잔잔히 새어 나온다.
길쭉한 두 뒤는 어깨에 닿으며, 목에는 삼도가
굵직하게 그어져 있다. 법의(法衣)는 그의 몸을
덮고 있으며, 옷주름의 선이 부드럽다. 전체적
으로 위쪽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선의 굵기가
희미해지고 있으며 아랫도리는 선명도가 좀 낮
다.

그가 앉아있는 대좌는 하늘을 향해 잎을 벌린 앙련(仰蓮)이 희미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불상 앞
은 조금의 평지도 허락치 않는 급경사로 절을 하거나 예불을 올리기가 심히 마땅치 않다. 

불상 앞에 이르면 남쪽으로 배반평야가, 동쪽으로 낭산이 두 눈에 박힐 정도로 조망이 좋다. 마
애불의 존재를 아는 이가 적어 여기까지 기를 쓰고 올라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들 보리사 경
내에 있는 미륵곡 석불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석불의 미소에 마음이 즐거워지는 곳 보리사, 그의 건강과 단아한 미소가 미륵불이 온다는 56.7
억년 이후까지 지속되기를 소망하며 본글을 마무리 짓는다.


▲  마애석불에서 바라본 배반평야와 경주 남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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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유일한 오래된 쌍미륵불,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 (마애2불입상, 용암사)

 


' 가을의 길목에서 만난 쌍미륵불 ~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龍尾里 石佛立像)'

파주 용미리석불입상 (마애2불입상)
▲  용미리 마애2불입상 (용미리 석불입상)
(* 용미리 석불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용미리 마애2불입상'이나 오랫동안
용미리 석불입상, 용미리 석불이라 불렸으므로 본글에서는 이들 명칭을 같이 썼음)


 

늦가을이 한참 여물어가던 10월 한복판에 쌍미륵불로 유명한 용미리석불(마애2불입상)을 찾
았다.
파주시 문산, 파주, 광탄 지역에서 서울을 이어주는 서울시내버스 703번(문산 선유리↔서울
역)을 타고 고양시 동부와 해음령, 용미리 남부 지역을 지나 용미1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넘
으면 고개 중턱 숲 사이로 고개를 내밀며 따뜻한 눈길을 보내는 무엇인가가 눈에 들어올 것
이다. 바로 용미리석불이다. 석불 밑에는 그를 후광으로 절을 꾸리는 용암사란 조촐한 절이
있다.


▲  용암사를 알리는 표석

용암사 입구에는 절을 알리는 표석(標石)과 문화재가 있음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있어 석불
을 찾은 중생을 인도한다. 경내 남쪽에는 넓게 주차장이 닦여있으며, 경내까지 계단이 이어져
있다.
경내로 가는 길은 푸른 옷을 걸친 숲길이다. 나무들이 베푼 산내음이 코끝을 강하게 스치면서
번잡한 마음과 뇌리가 말끔히 정화된 듯, 시원해짐을 느끼며, 다른 절과 달리 절의 정문인 일
주문(一柱門)이 없다. 허나 그런 문이 꼭 있어야 할 필요는 없겠지. 울창한 숲길로 들어섬으
로서 부처의 세계로 발을 내디딘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 용미리 마애2불입상을 지키는 조그마한 산사(山寺)
~ 장지산 용암사(長芝山 龍巖寺)

▲  용암사의 법당인 대웅보전(大雄寶殿)과 석등, 5층석탑

용미1리의 동쪽을 이루고 있는 장지산 서쪽 자락에는 용미리석불입상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산사, 용암사가 포근히 안겨 있다.

용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남양주 봉선사(奉先寺)의 말사(末寺)이다. 창건 시
기는 전해오는 것은 없으나 경내 북쪽에 용미리 석불이 있고, 석불 조성과 관련된 절의 창건 설
―절 이름은 전해오지 않음―가 전해오고 있어 석불이 만들어진 11세기로 여겨진다. 허니 창
건 이후 이렇다 할 사적(事績)을 남기지 못했으며, 1936년 파주 지역 유지들이 돈을 모아 지금
의 절을 세우고
승려 혜성(慧城)이 그 불사를 담당하여 절 이름을 용암사라 하였다.

절을 이루는 건물로는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범종각, 요사, 삼성각 등 5~6동의 건물이 있으며 지
금의 절은 1970년대 이후에 새롭게 지어진 것이라 고색(古色)의 멋은 찾아 볼 수 없다. 허나 절
집의 규모가 작고 조촐하여 아늑하기 그지없으며 건물들도 절의 규모 마냥 적당한 크기를 지니
고 있어 두 눈에 넣고 살피기에 별 무리가 없다.

경내로 들어서면 정면에 대웅보전이 있고 그 앞뜰에 5층석탑과 석등 2기가 하얀 피부의 반질반
질한 맵시를 드러내 보인다. 석등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참배 기념으로 세운 것으로 국토
통일 천일기도 광명등(光明燈)이란 기나긴 이름을 지니고 있으며, 뜨락 중앙에 자리한 5충석탑
은 예전에 대웅전을 중수했을 때 세웠다.
작지만 위엄이 서려 보이는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78년에 지어졌
다. 석가3존불을 중심으로 뒤에 석가후불탱화가 있으며 주변으로 지장탱화, 감로탱화 등의 불화
(佛畵)가 건물 내부를 화려하게 수식한다.

절의 가람배치는 하나의 금당(=법당, 대웅보전)과 하나의 탑이 있는 1금당 1탑 형식으로 금당과
탑이 용미리 석불을 닮아서 그런지 한결같이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하긴 절이 들어앉은 지형을
보니 남향(南向)으로 법당을 세우기는 상당히 어려워 보인다.

대웅전 주변에는 요사, 범종각이 있고, 석불로 가는 길목에 삼성각(三聖閣)이 있다.

▲  용암사 삼성각(三聖閣)
칠성과 산신, 독성을 봉안한 건물로 원래는
용미리석불에게 기도를 올리는 용도로
세워졌다.

▲  삼성각 부근 공터에 놓여진 돌들
1936년 지금의 용암사를 세울 때 지어진
건물의 주춧돌로 여겨진다.


▲  용미리 석불에서 떨어져 나온 7층석탑과 동자불상

삼성각 좌측에는 소박한 모습의 아담한 동자불상(=동자상)과 날렵한 몸매를 자랑하는 7층석탑이
나란히 자리를 지킨다. 그 사이로는 이들의 유래가 적힌 표석이 누워 있다.

이들은 원래 용미리석불과 한 몸으로 지내던 것으로 1980년대 이전 석불 사진을 보면 동자불상
은 석불의 오른쪽(석불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 어깨 위쪽, 7층석탑은 그 오른쪽 아래에 있었
다. 이들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시주로 달아놓은 것이라고 하며, 이승만의 어머니가 용미
리석불에서 아들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려 그를 낳았다고 한다. 그래서 1954년 이승만이 용암사
를 방문하여 남북통일과 자손을 염원하고자 그들을 만들었는데, 어이없이도 이것을 용미리석불
에 주렁주렁 단 것이다.

그 이후 동자상과 7층석탑이 석불의 미관을 망치고 문화재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강하게 일어나
면서 1987년 석불에서 떼어내 요사 뒤쪽에 두었다가 2009년에 석불 밑인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
여 기념표석을 세웠다. 1987년 이전에는 동자상 때문에 2체불이 아닌 3체불(體佛)로 오인을 받
는 경우가 많았다.
7층석탑은 군살이 없는 날씬한 모습으로 백제의 칠지도(七支刀)를 연상케 만드며 동자상은 어린
동자를 보듯 포근한 표정이다. 그래도 이들은 60년 묵은 것들이라 반백년 세월의 때가 진하게
얼룩져 있다.

절에서 북쪽으로 난 계단을 따라 가볍게 1분 정도 오르면 나를 다시금 이곳으로 오게한 주인공,
머리 둘, 몸통 둘이 달린 거대한 불상, 용미리 마애2불입상을 만나게 된다.


▲  요사 뒤쪽에 있던 시절의 동자상과 7층석탑 (2007년 이전)


♠  숨막히게 거대한 고려시대 석불, 독특한 개성과 멋이 넘쳐흐르는
용미리 마애2불입상(磨崖二佛立像, 석불입상) - 보물 93호

고양시 동부와 파주시 동부를 이어주는 용암사 고개, 지금은 2차선 도로(혜음로)가 흘러가고 있
지만 옛날부터 황해도와 개성(開城), 파주(坡州) 지역에서 서울을 이어주는 주요 길목으로 사람
과 물자의 왕래가 빈번했다.
그 고개 동쪽이자 용암사 북쪽 산자락에는 고려 전기에 조성된 거대한 석불, 용미리 마애2불입
상이 커다란 바위를 몸통 삼아 자리해 있다. 무덤에 깃들여진 망자(亡者)의 극락왕생을 기원하
는 것일까? 용미리 시립묘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석불은 오랫동안 미륵불(彌勒佛), 쌍미륵
불 등으로 불려왔으며, 광탄면에 있다고 해서 '광탄석불'로도 불렸다. 예전에 불광동서부터미널
에서 광탄까지 시외완행버스가 다니던 시절에는 석불 아래 정류장 이름도 '미륵불'이었다.
이 석불은 11세기 후반에 고려 선종(宣宗)의 3째 부인인 원신궁주(元信宮主)의 지원으로 조성된
것으로 전하며 석불의 위용은 한때 잘나갔던 궁주의 위세를 보여주는 듯 하다.

바위에 전신상(全身像)을 새기고 그 위에 다른 돌로 머리와 갓, 목 부분의 불두(佛頭)를 만들어
얹힌 형태로 머리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바위에 선각(線刻)으로 처리되어 마애불(磨崖佛)로
봐도 상관은 없다. 이런 형태의 마애불로 안동 제비원석불(이천동 마애여래입상)이 그 대표격인
데, 그 석불 역시 자연바위에 몸을 새기고 그 위에 다른 돌로 머리를 얹혔다.

본 석불의 가장 큰 특징은 머리가 2개, 즉 우리나라 유일의 쌍두불(雙頭佛)이라는 것이다. 절과
속세에서는 그를 쌍미륵불로 추앙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몸 하나의 머리가 둘 달린 괴물은 아니
다. 비록 하나의 바위에 의지해 있지만 바위 사이로 마치 둘을 가르듯 틈이 나 있으므로 몸통
둘의 머리 둘로 봐도 무방하다.


▲  석불 앞에 마련된 기도처
중생의 소망이 한가득 담겨진 연분홍 연등의 행렬이 아무도 없는
기도처 주변을 따스히 감싸 흐른다.


석불의 높이는 19.85m, 반올림하면 근 20m에 이르는 장대한 불상으로 바위에 그대로 만든 탓에 
신체비례가 다소 떨어진다. 하지만 그런 것이 바로 고려시대 석불이 지닌 강한 특징이자 개성이
니 이에 대해 뭐라 중얼거릴 수는 없을 것이다. 고려 때 만들어진 불상은 다른 시대와 달리 덩
치가 유난히 크며 얼굴과 외모가 수려한 불상보다는 생김새가 정말 가지각색인 개성파 불상들이
많다. 용미리 석불 역시 그 시대의 유행에 충실하여 불상이라기 보다는 세속적인 특징이 배어있
는 석불이라 하겠다.


▲  아래서 바라본 용미리 석불
900년의 세월을 견뎌 내면서도 그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바위 사이의 틈을 경계로 왼쪽의 불상은 선비마냥 둥근 갓을 쓴 원립불(圓笠佛)이다. 보통 불상
들은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기 마련인데, 그런 화려함 대신 사람들이 많이 쓰고 다니는 갓을
씌워 놓아 무척 친근하게 다가온다. 은연히 미소가 깃들여진 그의 얼굴은 거의 네모난 모습으로
논산 관촉사(灌燭寺)의 은진미륵(恩津彌勒)과도 좀 비슷한 생김새이다. 불상의 얼굴이라기보다
는 그만의 특유하고 재미난 색채가 강하게 배어있으며, 목은 원통형이고 두 손은 가슴 앞에 대
고 연꽃을 살짝 들고 있다. 그리고 몸통이 들어앉은 바위에는 옷을 입혀놓았는데, 옷의 주름을
선각으로 세심히 처리했다.

오른쪽 불상은 동그란 갓 대신 네모난 갓, 즉 방립불(方笠佛)을 머리에 걸쳤으며 눈썹과 눈이
길다.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아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이고 있으며, 왼쪽 불상보다 키가 약간 크
지만 덩치는 좀 작다. 하지만 듬직한 몸집에 넓은 어깨를 가지고 있어 은근히 웅장해 보인다.

지역 구전에 따르면,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男像), 네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女像)이라고 하는
데 듣고 보니 정말 그럴듯한 모습이다. 금슬이 짙은 부부처럼 다정히 자리하여 중생들을 살펴보
는 모습이 꽤 훈훈해 보인다.

이들의 작품성은 별로 우수한 편(안내문에 그리 나옴)은 못되지만 고려 왕족의 탄생설화가 담겨
져 있고 지방색이 짙은 고려 불상의 특징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소망을 들어주기로 소문이
자자하여 찾는 이들의 행렬이 줄을 잇는다. 특히 아이가 없어 애태우거나 아이를 원하는 이들의
소망을 잘 들어준다고 한다.

▲  측면에서 바라본 용미리 석불

▲  용미리 석불의 전경


※ 용미리 석불입상의 설화
고려 13대 군주인 선종(宣宗, 재위 1083~1094)은 적당한 후사가 없어 늘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3번째 부인인 원신궁주<元信宮主, 인주이씨 평장사 이정(李頲)의 딸>의 꿈
에 도승 2명이 나타나 하소연했다. '우리는 파주 장지산에 있습니다. 식량이 떨어져 배가 고프
니 이곳에 있는 두 바위에 불상을 새겨주세요'

이상하게 생각한 궁주는 사람을 보내 확인해 보니 그럴싸한 큰 바위가 하나 발견되어 바로 불상
조성에 들어갔다. 그러고 얼마 뒤, 그 도승이 다시금 꿈 속에 나타나 왈 '왼쪽 바위에 미륵불을,
오른쪽 바위에 미륵보살상을 만들어 공양하고 기도를 드리면 아이를 원하는 사람은 아들을 얻고,
병이 있는 사람은 완쾌가 될 것입니다'

도승의 부탁대로 두 불상을 새기고 그 밑에 절(이름은 전해오지 않음)을 세워 기도를 올리니 과
연 몇달 뒤, 그렇게나 소망하던 아들 한산후 왕윤(漢山侯 王昀)이 태어났다.

허나 선종은 위의 설화와 달리 아들 왕욱<王昱, 2째 부인 사숙왕후(思肅王后)의 소생으로 14대
헌종>이 있었다. 그러나 태자(太子) 왕욱은 심히 병약하여 늘 병을 달고 살았으며 소갈증(消渴
症, 당뇨병)까지 앓고 있던 상황이라 만약을 위해 건장한 아들을 하나 더 얻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보람이 있는지 원신궁주는 한산후 외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아들 2명을 더 낳아 더욱 승승장
구하게 된다.

1094년 선종이 붕어하고 헌종이 제위에 오르자 자신의 오라버니인 '이자의(李資義)'와 공모하여
한산후를 왕위에 세우려고 모반을 꾀하다가 선종의 아우인 계림공 왕희(鷄林公 王熙, 뒤에 15대
숙종)에게 보기 좋게 털렸다. 결국 원신궁주 모자는 그 대가로 이름이 전하지 않는 머나먼 곳으
로 추방당하고, 그들의 행적과 사망 시기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허무하게 잊혀
져 갔다.


▲  앞쪽만 멀뚱히 바라보는 용미리 석불의 뒷통수
저들이 바라보는 곳은 용미리시립묘지 1구역이다.


석불과는 이미 여러 번의 안면이 있다. 몇년 만에 찾았음에도 그들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반면에 나는 그만큼의 세월이 누적되어 인정하긴 싫지만 그만큼 늙고 변해 있었다. 향
을 피워 그들에게 삼배(三拜)의 예를 올리며 마음 속으로 간절히 무언가를 소망한다.
평소에는 찾아와 안부도 전하지 않으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만 찾아와 '이러이러하니 제발좀 살
펴달라'
소망을 비는 것도 조금은 염치가 없는 것 같다. 정작 저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는 나는
과연 그들을 지킬 수 있을까? 나뿐만은 아니지만 소원만 빌러 오는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느껴지
기도 한다.

예불을 올리고 석불의 뒷쪽으로 올라갔다. 석불의 머리 부분까지는 산길이 나 있는데, 그들의
높이가 20m에 이르러 거의 조그만 언덕을 오르는 것 같다. 경사가 다소 있는 산길을 올라 문화
유산 보호 철책을 넘어 석불의 뒷통수로 살짝 숨어든다. 마치 앞쪽만 죽어라 쳐다보는 사람의
뒤쪽으로 살며시 다가가 팍 기습을 하려는 듯이 말이다.
석불의 뒷부분은 밋밋하고 간소하게 표현된 뒷머리와 목덜미가 전부이다. 그런 머리 위로는 머
리 크기만한 갓이 씌워져 있는데, 갓보다는 탑이나 석등의 윗부분을 보는 것 같다.

천하에 어느 누구도 당해낼 수 없는 무구한 세월의 시련, 그것을 100년도 아닌 900년이나 견뎌
내면서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모습을 간직한 석불을 친견하면서 나도 그처럼 영원히 한결같
은 인생을 살았으면 싶다.

~~~ 이렇게 하여 용미리 석불 답사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 용미리 마애2불입상(용암사) 찾아가기 <2015년 1월 기준>
* 서울시내버스 703번(문산 선유리↔서울역)을 타고 용암사(용미리 마애2불입상)에서 내린다.
* 703번과 환승이 가능한 전철역 - 5호선 광화문역(6번 출구), 1/2호선 시청역(8번 출구), 1/4
  호선 서울역(3,9-1번출구), 5호선 서대문역(6번 출구), 3호선 독립문역(1번 출구), 3호선 녹
  번역(1번 출구), 3/6호선 불광역(8번 출구), 3/6호선 연신내역(3번 출구), 3호선 삼송역(8번
  출구를 나와서 도보 2분)
* 승용차
① 서울시내 → 구파발4거리에서 고양,파주방면 → 대자3거리에서 의정부방면 39번 국도 → 고
   양2교 교차로에서 좌회전 → 고양동4거리에서 광탄 방면 → 벽제3거리에서 광탄방면 좌회전
   → 용미리 → 용암사 주차장
② 수도권외곽고속도로 → 통일로나들목을 나와 파주방면 → 대자3거리에서 의정부방면 39번 국
   도 → 고양2교 교차로에서 좌회전 → 고양동4거리에서 광탄 방면 → 벽제3거리에서 좌회전
   → 용암사 주차장

*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산8,9 (용암사 ☎ 031-942-0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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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12월 3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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