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나무'에 해당되는 글 1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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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0.09.15 노산군(단종)이 유배살이를 했던 단종애사의 애틋한 현장, 영월 청령포 (청령포 관음송)
  3. 2020.09.04 서울 도심에 이런 두멧골이?? 북악산 산주름 속에 깃든 백사실계곡, 부암동 능금마을, 평창동 소나무 (백사실약수터)
  4. 2020.03.31 광주의 남쪽 변두리, 대촌동~칠석동 둘러보기 (괘고정수, 고원희가옥, 고싸움놀이, 칠석동은행나무, 부용정)
  5. 2020.03.08 이 땅의 마지막 옛날 주막을 찾아서 ~~ 예천 삼강나루 삼강주막
  6. 2019.01.17 인천 영종도의 지붕을 거닐다. 백운산 나들이 ~~~ (양주성 금속비, 용궁사, 소원바위, 백운산둘레길)
  7. 2018.05.23 서울의 대표음식인 설렁탕의 탄생지, 제기동 선농단 ~~~ (선농대제 축제, 선농단 역사문화관, 선농단 향나무, 따끈한 설렁탕 1그릇)
  8. 2017.10.27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의 흔적을 거닐다 ~~ 낙성대, 신림동 굴참나무 (강감찬 생가터, 낙성대공원)
  9. 2017.05.08 푸른 동해바다를 거닐다. 부산 기장 봄나들이 ~~~ (죽성리왜성, 죽성항, 황학대, 죽성성당, 장어구이 1접시)
  10. 2017.04.21 서울의 아늑한 옆산, 아차산에 올라 장대했던 고구려를 추억하다~~~ (홍련봉보루, 아차산성, 서울둘레길, 아차산보루)

인왕산자락길, 황학정, 서촌(한양도성) 늦가을 나들이 ~~ (택견수련터, 감투바위, 단군성전, 행촌동 은행나무)

 


' 인왕산자락길, 황학정, 서촌 늦가을 나들이 '
인왕산자락길의 만추
▲  인왕산자락길의 만추(晩秋)


 

늦가을이 그 절정에 이르던 11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날, 서울 도심에 숨겨진 상큼
한 자락길 인왕산자락길(숲길탐방로)을 찾았다.

인왕산자락길은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동쪽 자락에 닦인
둘레길로 2개의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제1코스(2.7km)는 인왕산길을 졸졸 따라가는 길
로 윤동주문학관에서 사직단(사직공원)까지 이어진다. 경사가 완만해 그리 힘들이지 않
고 이동할 수 있으며, 인왕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여럿 손짓해 언제든 정상 쪽으
로 방향을 틀 수 있다. 다만 인왕산길이 차량 왕래가 빈번하다보니 비록 작은 소음이지
만 종종 적막을 깨뜨린다. 

본글의 주인공인 제2코스는 숲길탐방로(3.2km)로 윤동주문학관에서 산길을 따라 이빨바
위, 가온다리, 수성동계곡 윗쪽을 거쳐 택견수련터(황학정 북쪽)까지 이어진다. 인왕산
길과 서촌 주택가 사이에 자리한 길로 제1코스와 달리 차량의 눈치와 소음 걱정에서 벗
어나 아늑하고 달달한 산길의 멋을 누릴 수 있다. 다만 오르락내리락 굴곡이 조금 있어
서 약간은 힘들 수 있다. 하지만 두 다리만 멀쩡하면 삼척동자도 완주가 가능하니 걱정
따위는 인왕산 산바람에 날려보내기 바란다.
제2코스는 인왕산길(제1코스)과 서로 만날 듯 가깝게 거리를 두고, 경쟁을 하듯 펼쳐져
있다. (현실은 청운공원과 택견수련터에서만 만남) 아주 편한 길을 원한다면 제1코스를
, 차량의 눈치 없이 아늑한 산길을 꿈꾼다면 제2코스(숲길탐방로)를 이용하자. 특히 제
2코스에는 숨겨진 명소와 계곡, 약수터가 많고 풍경도 고우며, 서울 도심이 늘 옆에 파
노라마처럼 따라다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번 나들이는 제2코스를 이용하여 윤동주문학관에서 사직단(社稷壇, 사직공원)까지 이
동했다. 늦가을이 겨울 제국의 압박으로 생각보다 명이 짧아서 그가 지기 전에 그의 가
랭이라도 붙잡을 겸 서둘러서 찾았는데, 아직은 늦가을 풍경이 여전해 내 정처 없는 마
음과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오감(五感)을 크게 정화시켜 주었다. 역시 사람은 대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이후 제2코스는 인왕산자락길이라 표시하며, 제1코스는 인왕산길로 표시함)


 

♠  인왕산자락길 (수성동 이남 구간, 택견수련터)

▲  수성동에서 남쪽으로 넘어가는 인왕산자락길

수성동계곡에서 잠시 시원한 계곡 바람을 맞은 인왕산자락길은 다시 남쪽으로 각박한 오르막
길을 오른다. (북쪽 방향도 마찬가지임) 길은 잘 닦여져 있지만 그렇다고 오르막길의 야성을
완전히 잠재운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거친 것을 조금 순하게 다듬었을 뿐이다.

그 길을 오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인왕산길이고, 왼쪽 내리막길
이 인왕산자락길이다. 그러니 자락길을 놓치기 싫다면 무조건 왼쪽으로 붙자. 그 길을 내려가
면 서촌의 일원인 누상동(樓上洞) 주택가와 불과 몇 보 차이로 가까워지며 길은 다시 온순해
진다. 이후 이름 모를 계곡과 체육시설을 지나면 길은 다시 오르막을 보이나 그리 각박하지는
않으며, 그 길을 오르면 배드민턴장과 인왕산길이 모습을 비춘다.


▲  다시 오르막은 시작되고 (인왕산길 배드민턴장 방향)

▲  택견수련터로 인도하는 북쪽 계단길

인왕산길 배드민턴장 남쪽에는 화장실을 갖춘 쉼터가 닦여져 있다. 청운공원 이후 가깝게 거
리를 두며 떨어져 있던 인왕산길과 인왕산자락길은 여기서 잠시 만났다가 이내 헤어진다.
쉼터 남쪽 언덕으로 인도하는 나무 계단길이 자락길로 그 계단을 오르면 자락길의 남쪽 종점
인 택견수련터가 마중을 한다.


▲  택견수련터 주변 체육시설
저 산길의 끝에 택견수련터가 깃들여져 있다.

▲  인왕산 택견수련터

황학정 뒷쪽 산자락에 자리한 택견수련터는 이름 그대로 택견을 수련했던 현장이다. 처음에는
막연히 옛날 사람들이 택견을 닦던 곳으로 알았으나 한때 끊어질 위기에 놓였던 우리 고유의
전통 무술인 택견을 지키고 널리 알렸던 조선의 마지막 택견꾼 송덕기(宋德基, 1893~1987)가
택견을 수련했던 현장이다.

송덕기는 조선의 마지막 한량이자 택견꾼으로 유명하다. 그는 1893년 1월 19일, 이곳과 가까
운 필운동(弼雲洞)에서 하급 관리인 송태희(宋泰熙)의 2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어머니
김씨는 잡화가게를 꾸리고 있어서 생활은 비교적 여유로웠다.
당시 필운동과 사직골, 누상동, 누하동 등 서촌(웃대) 지역은 택견의 성지로 택견을 갈고 닦
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장안 제일의 택견꾼으로 '인왕산 호랑이'라 불리던 임호(林
虎)도 있었다. 그는 지금의 배화여고 앞에 살고 있었으며, 송덕기는 12살부터 또래 동네 아이
들과 그에게 택견을 배웠다.

송덕기는 선천적으로 힘이 장사이고 운동과 무예에 소질이 상당했다. (나와 완전 반대임) 하
여 16살에 마을 택견꾼과 더불어 사직골 대표로 출전하여 유각골, 옥동, 애오개의 택견꾼과
싸워 이겼으며, 이때부터 '결련택견판(택견의 시합을 지칭하는 말)'에서 그 이름을 날리기 시
작했다. 그는 비록 체격은 작았지만 동작이 매우 날쌔어 적을 정확히 타격했으며, 특히 뛰어
오르며 쓰는 발차기는 매우 일품이라 당할 자가 없었다고 전한다.
17세에 장가를 들었고, 곧 군대에 입대했으나 1주에 2~3번 정도만 출근하면 되었으므로 나머
지 시간에는 택견을 수련하여 종종 결련택견판에 나가 몸을 풀었다. 그리고 이때 이 땅에 막
소개된 축구에도 구미가 당겨 축구를 익혔다.

1910년 8월 이후, 왜정(倭政)은 우리의 상무정신이 깃든 결련택견과 온갖 택견 수련을 금지시
켜 그 맥을 끊으려고 했다. 게다가 집안에서도 계속 택견을 그만두라고 압력을 가하면서 택견
수련도 눈치를 보고 해야될 지경이었다. 당시 그의 부모는 그가 자칫 싸움꾼이 될까봐 걱정되
어 택견 수련에 무조건 정색을 표했다고 전한다.
상황이 그러하니 택견 수련 딱 10년이 되는 22살에 잠시 택견을 접어두고 대신 활쏘기로 관심
을 돌려 황학정에서 국궁(國弓)을 닦았다. 그는 궁술(弓術)에도 꽤 소질을 보여 명궁으로 명
성을 날렸는데, 죽기 전까지 활쏘기를 즐겨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을 오래 쏜 사람이자 최초의
국궁심판으로 '한국인물도감(1982년)'에 소개되기도 했다.
또한 군대에서 사병들에게 근대식 체조를 가르쳤고, '조선불교 축구단'에 선수로 스카웃되어
월급 80원을 받으며 축구 선수로 3년 동안 뛰기도 했다. 이때 매년 열리던 평양축구단과의 경
기에 참가해 큰 활약을 보여주었다.

축구를 그만둔 이후 30대 말까지 딱히 두드러지는 행적은 없으며, 40세 때 조선극장(인사동에
있었음)을 운영하던 매부를 도와 극장을 지키는 기도를 하였다. 그래서 극장 주변에서 설치던
건달들을 죄다 때려잡았고, 당시 주먹패 대장으로 유명했던 김두한(金斗漢)과도 맞짱을 뜬 적
이 있다고 한다.
이후 금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으나 소득은 없었으며, 1951년 1.4후퇴 때 경남 밀양(密陽)으
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1958년경. 경무대(청와대)의 이승구 경관이 찾아와 대통령에게 택견 시범을 보여달라고 부탁
을 했다. 당시 택견은 일정한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둘이 맞서서 상대를 때려잡는 실전무
예라 혼자 시범을 보이기가 마땅치 않아 옛날 스승(임호) 밑에서 같이 배웠던 김성한(金成漢)
을 급히 불러 1달 정도 가르친 다음 그해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생신 축하 경찰무도대회'
가 열렸던 소공동(小公洞) 유도회관에서 택견을 선보였다.
당시 권력층과 무도인들은 왜열도식 무술에 익숙해 있던 상태라 택견을 보더니 별로라며 고개
를 돌렸다. 하지만 택견에 관심이 있던 이승만은 우리 무술을 발전시켜야 된다며 당시 경무대
경호원을 가르치던 박철희에게 그를 소개해 택견을 배우도록 지시했다.

박철희는 육군사관학교 초대 태권도 교관을 지낸 사람으로 그를 자주 초청해 경호원들에게 택
견을 가르치도록 도움을 주었다.


▲  택견수련터 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1960년 제17회 로마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대표팀은 우리나라 문화를 소개하는 전시장에 선보
일 한국 문화로 택견을 선택했다. 그래서 제자 박철희와 함께 경복궁(景福宮)에서 택견 동작
을 사진 촬영했다. (당시 경복궁은 통제구역이었음)

박철희는 경무대 무도사범을 그만두고 '사단법인 택견무도원'을 설립하려고 하였다. 송덕기도
그를 전폭적으로 도왔으나 법인 설립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당시 영향력이 컸던 '수박도협회'
의 방해로 어려움에 빠졌다. 게다가 4.19와 5.16으로 나라가 계속 혼란 속에 잠겼고 법인 설
립도 계속 뜻대로 되지 않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부터 박철희의 조교
이자 같은 사직골 토박이인 김병수가 송덕기의 1등 제자가 되었다.

김병수는 당수도의 고수로 경무대 부사범을 지냈으며, 외국어대학교에 '택견권법부'를 만들었
고, 1963년에는 효자동 오리온다방 3층에 택견도장을 차리기도 했다. 또한 영어에도 능통하여
1964년 '블랙벨트(Black Belt)'와 '가라데 일러스트레이트(Karate Illustrate)'라는 미국의
유명한 무술 잡지에 택견에 대한 기사를 기고한 적이 있다.
허나 그는 해외 진출에 더 무게를 두고 있어서 1968년 1월 미국으로 건너가 버렸고, 미국 휴
스턴에 정착해 '김수가라데'란 타이틀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자연무술류'라는 새로운 체계
의 과학적 무술을 창안해 동양무도인의 대표로 위엄을 날렸다.

1972년 '태권도 가을호'에 송덕기가 '살아있는 태권도인'으로 소개되면서 당시 태권도의 1인
자였던 임창수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찾아가 배움을 받았다. 하지만 제대로 배우려는 사람이
없었고 실생활에도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아 금방 사람들이 나갔다.

그는 슬하에 자녀도 없고, 마땅한 제자도 없어서 이것저것 소일거리로 간신히 척박한 삶을 꾸
려나갔으나 1979년 부인이 세상을 떠나면서 더욱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1970년대 중반 신한승이 택견을 바로 일으켜보고자 송덕기를 찾아와 택견을 배웠다. 그는 택
견이 살려면 국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길 밖에는 없다고 여겨 문화재관리국을 수시로
찾아가 택견을 홍보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철밥통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그저 냉대만 일삼
으며 보다 체계적인 자료를 가져오라고 소위 '갑'질을 벌였다. 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들
의 요구 양식에 맞추고 택견을 약간 변형시켜가며 해당 자료를 제출했다.
그렇게 하여 간신히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76호'의 지위를 얻으면서 택견이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허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송덕기는 신한승의 그런 행동을 못마땅히 여기면서 서
로 갈라진 것이다.

송덕기는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1982년부터 젊은 제자를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83년 그 역시 국가 중요무형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고, 이를 기리고자 '택견계승회(현재
사단법인 '결련택견협회')'를 만들었다. 1984년 집 근처에 '박민태권도 도장'을 빌려 제자를
가르쳤고, 제자 중 부유했던 '최유근'의 지원으로 1986년 신촌에 '택견보존회'란 이름으로 본
격적인 택견전수관을 개관하기에 이른다.
송덕기는 너무 기뻐서 매일 나와 제자를 가르쳤는데, 택견이란 존재를 매우 생소해하는 현대
인들의 무관심과 체육관을 운영한 경험이 전혀 없는 제자들의 운영 미숙으로 결국 1년도 안되
어 문을 닫고 말았다. 그나마 남은 제자들도 거의 군대에 들어가면서 죄다 흩어졌고, 1987년
에는 활까지 놓으면서 노인정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우연히 걸린 감기가 커지면서 그해 7월 22
일 서대문적십자병원에서 9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는 1981년에 '제1회 대한민국 전통무도예술제'에서 '무도대상(武道大賞)'을 타기도 했으며,
택견을 보존하고 전수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택견의 태반은 이미 사라졌
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 택견수련터는 그가 택견을 닦았던 현장으로 그의 후학들(결련택견협
회)이 표석과 안내문을 세워 택견의 성지로 기리고 있으며, 그 주변에는 여러 체육시설이 닦
여져 있어 동네 사람들과 산꾼들이 몸을 풀고 간다. 비록 목적은 다르지만 몸을 푸는 수련터
의 역할은 거의 녹슬지 않은 것이다.


▲  수련터 옆 감투바위 암릉
주름진 바위가 황학정 옆구리까지 느긋하게 내리막을 이루며 펼쳐져 있고,
늦가을이 질러놓은 불(단풍)이 활활 타올라 바위 주변을 화사하게 돋군다.


수련터 옆에는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길게 누워있다. 이들 바위는 저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
라 조촐하게 암릉을 이루며 황학정 동쪽까지 완만하게 내려간다. 그 암릉에 송덕기와 인연이
있는 감투바위가 숨겨져 있으니 한번 숨바꼭질을 해보기 바란다.
그 암릉에 두 발을 딛으면 바로 밑에 황학정을 비롯하여 서울 도심 서부와 남산이 훤히 시야
에 잡혀 조망도 그런데로 괜찮다. 인왕산자락길 개설로 수련터를 찾은 사람들은 늘었으나 정
작 바위의 존재감이 없어 지나치기 일쑤이다. 안내문이 없다보니 수련터 바로 옆에서 바위가
예사롭지 않은 눈짓을 보내고 있음에도 다들 지나치는 것이다.
하여 감투바위 암릉은 인적이 거의 없어 무척이나 한적해 천하 최대의 대도시인 서울 도심을
멍을 때리고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기기에는 아주 좋다.


▲  감투바위

사람들이 매우 좋아한다는 감투, 그 감투를 닮은 바위가 암릉 한복판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 속세에 알려지지 않은 인왕산의 비장의 바위로 송덕기가 택견 수련을 하거나 황학정에서 활
쏘기로 몸을 풀고 이곳에 걸터앉아 나라와 택견의 미래를 걱정했다고 한다. 송덕기의 택견 수
련을 묵묵히 지켜봤을 그는 황학정과 사직단, 서울 도심을 늘 지켜보고 있다.


▲  감투바위의 뒷모습

바위 뒷통수에는 장대한 세월이 무심히 긁고 간 흔적들이 역력하다. 지금은 저런 모습이나 여
러 세대가 흘러간 이후에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지 궁금하다. 대자연 형님의 성형(成形)
속도가 매우 느려서 그렇지 성형 실력만큼은 대자연을 따를 존재가 없다.

택견수련터 서쪽에는 인왕산길과 황학정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그 길을 내려가면 윤동주문
학관부터 3.2km를 함께 한 인왕산자락길은 그 끝을 맺고 인왕산길에 합쳐진다. 소요시간은 사
진을 찍고 쉬는 시간을 합쳐서 넉넉잡아 1시간 반 정도. 경사가 좀 각박한 구간이 여럿 있지
만, 그것은 산이니까 어쩔 수 없다. 산은 산다워야 오르는 재미가 있지 않겠는가?
도로만 따라가는 인왕산길과 달리 상당수가 흙길로 이루어져 있으며, 부득이한 구간은 나무데
크를 닦아 놓았다. 자락길을 둘러싼 숲은 무성하며 도심을 향해 흘러가는 조그만 계곡들(청풍
계, 옥류동, 수성동 등)을 대부분 거쳐가면서 인왕산에도 계곡들이 꽤 숨바꼭질을 하고 있음
을 귀뜀해준다. 그 계곡들은 시내에 진입하면서 모두 강제 생매장을 당했으며, 2012년에 복원
된 수성동만 제대로 어깨를 피고 있다. (수성동 역시 조금 흐르다가 생매장 당함)
이처럼 인왕산자락길은 인왕산의 숨겨진 속살과 명소를 아낌없이 드러낸 도심 속의 보석이자
서울에 얼마 남지 않은 사각지대로 이번에 이렇게 인연을 지어 사각지대를 하나 지웠다.

* 인왕산자락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누상동, 사직동


 

♠  옛 경희궁의 흔적이자 전통 국궁(國弓)의 성지, 황학정(黃鶴亭)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5호

▲  등과정(登科亭) 바위글씨

택견수련터에서 인왕산길로 나와 남쪽(사직단 방향)으로 내려가면 황학정으로 내려가는 입구
(후문)가 나온다. 바로 그곳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커다란 바위가 누워있는데 길 쪽에서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나가면 그냥 의미없는 바위로 여기고 지나치기 쉬우나 황학정 쪽에서
보면 180도 달리 보일 것이다. 그는 옛 기록에나 남아있던 등과정의 아련한 흔적으로 황학정
방향 바위면에 '등과정' 바위글씨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등과정은 서울 장안의 이름난 활터인 서촌5사정의 하나로 그 오사정이란 등과정과 옥동(玉洞)
등용정. 삼청동 운용정(雲龍亭). 사직동 대송정(大松亭). 그리고 누상동 풍소정(風嘯亭)을 일
컫는다. 이중 삼청동(三淸洞)은 북촌의 일원인데, 어찌 서촌5사정에 꼽혔는지 모르겠다.
조선 때는 활쏘기가 양반사대부와 왕족들이 익혀야 될 교양의 일원으로 인식되어 오사정에는
늘 그들로 붐볐다. 무관 같은 경우는 직업상 여기서 활쏘기 연습으로 몸을 풀었고, 다른 이들
은 교양 및 수련의 일원으로 몸을 풀었던 것이다.
허나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군대 무기에서 활이 제외하면서 이들 오사정은 싹 철
거되었고, 등과정만 유일하게 고종 때 새겨진 바위글씨를 흔적으로 남겨 그의 옛 자리를 귀뜀
해준다. 게다가 경희궁의 활터였던 황학정이 왜정 때 이곳에 안착하면서 자연스럽게 등과정을
계승하였다.


▲  황학정8경(八景) 바위글씨

황학정 후문(등과정 바위글씨)에서 황학정으로 내려가 그 뒷쪽 바위를 잘살펴보면 황학정8경
을 담은 바위글씨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바위에 네모난 홈을 닦고 그 안에 글씨들이 담겨져 있는데, 이들은 1928년 9월 금암 손완근(
錦巖 孫完根)이 쓴 것으로 황학정8경이란 제목을 내세웠지만 정작 황학정은 1개도 없고 모두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경복궁 주변의 풍경을 다루고 있어 제목과 내용이 완전 따로 논다.
여기서 읊은 8경은 다음과 같으며, 이중 금천교와 경복궁 담장 옆 수양버들을 제외하고는 그
런데로 살아있다.

백악청운(白岳晴雲) - 구름이 맑게 갠 북악산(백악산)
자각추월(紫閣秋月) - 자하문(창의문) 문루 위에 가을 달
모암석조(帽巖夕照) - 인왕산 모자바위에 비치는 석양 빛
방산조휘(榜山朝暉) - 인왕산 바위 위의 아침 햇살
사단노송(社壇老松) - 사직단을 둘러싼 노송
어구수양(御溝垂楊) - 경복궁 담장 옆 배수로 둑의 수양버들
금교수성(禁橋水聲) - 금천교 밑을 흐르는 물소리
운대풍광(雲臺楓光) - 필운대의 단풍 광경


▲  사방이 뻥 뚫린 황학정
황학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붕 밑에 부연을 두어 처마와
추녀의 곡선이 무척 시원스럽다. 정면 중앙에 걸린 황학정 현판은
이승만(李承晩) 전대통령이 쓴 것이다.


사직단 북쪽이자 인왕산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황학정은 이 땅에 몇 남지 않은 전통 활터이
다.
조선 말까지 서울 장안에는 서촌오사정 등 활쏘기를 닦던 사정(射亭)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1894년 갑오개혁으로 군대 무기에서 화살이 제외되자 서울과 전국의 많은 사정이 문을 닫았고
황학정 자리에 있던 등과정도 그 거친 흐름을 헤어나지 못해 바위글씨만 남긴 채 휩쓸려 사라
졌다.

활쏘기를 좋아했던 고종 황제는 백성들의 심신단련을 위해 궁술(弓術)을 장려하기로 했다. 하
여 1898년 경희궁 회상전(會祥殿) 북쪽에 황학정을 지어 활터로 삼고 백성에게 개방하여 언제
든 활을 쏘도록 했다.
고종은 자주 황학정을 찾아 활쏘기를 했는데, 그가 사용했던 활 호미(虎尾)와 화살을 보관하
는 전통(箋筒)이 황학정에 전해 내려오다가 1993년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천하에 어둠이 내리던 1910년 이후, 왜정은 망국의 황궁(皇宮)인 경희궁을 철저히 산산조각을
냈다. 1918년부터 궁궐을 밀어버리면서 주요 건물을 민간에 팔아먹었고, 1922년 황학정 자리
에 고의로 총독부 전매국 관사를 지으면서 그 황학정까지 밀어버리려고 했다. 이에 국궁을 하
던 사람들이 뜻을 모아 왜정과 협상을 벌여 돈을 건네주고 그 건물을 현 자리로 가져왔다.
앞서 소개했던 택견꾼 송덕기 역시 황학정을 해체 이전했을 때 직접 참여하여 손수 건물을 해
체하고 건물 부재(部材)를 가져와 다시 재조립했다. 또한 황학정 지킴이가 되어 이곳에서 행
패를 부리거나 예의 없이 구는 사람을 혼내주어 당시 사람들은 그를 '사직골 호랑이'라고 불
렀다.

1945년 이후 황학정은 전국 활터의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으나 6.25 때 건물이 파괴되면서 활
쏘기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으며, 이후 황학정을 중수하고 한천각(閑天閣)과 국궁전시관 등 여
러 부속 건물을 지어 지금에 이른다.

전통 활터가 많이 사라진 와중에도 여전히 활터 기능을 수행하여 우리나라 전통 궁술의 성지
로 여전히 추앙을 받고 있다.
이곳에서는 궁술 대회(매년 12월에 전국궁술경연대회를 개최함)와 관련 행사, 활쏘기 체험이
열리고 있으며, 평일은 물론 휴일에도 활 쏘는 이들을 자주 구경할 수 있다. 천하 제일의 신
궁(神弓)으로 추앙받는 고구려 동명성왕(東明聖王)과 조선 이성계(李成桂)를 꿈꾸는 궁수들이
실력을 겨루는 모습도 볼만하며, 일반인을 대상으로 궁술 체험 이벤트도 열고 있다. 아직 활
을 만져본 적은 없지만 기회가 생기면 명중률을 떠나서 쏴보고 싶은 마음은 정말 굴뚝 같다.

* 황학정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산1-1 (사직로9길 15-32 ☎ 02-732-1582)


▲  황학정 내부
천정에는 황학정의 내력 등이 적힌 현판 2개가 걸려 있고, 평방(平枋)에는 태극기와
고종 황제의 어진(御眞)이 나란히 자리한다. 황룡포를 입은 그의 어진이
여기에 걸린 이유는 황학정을 세운 그를 기리고자 함이다.

▲  이승만 전대통령이 쓴 황학정 현판의 위엄

▲  화살을 쏘는 동명성왕, 이성계의 후예들

마침 황학정 회원 4명이 활쏘기를 겨루고 있었다. 여기서 과녁까지는 약 130~150m. 평소에는
매우 가깝게 여겼던 그 거리가 여기서 보니 참 까마득하게 보인다. 남산(南山)보다 더 멀리
느껴질 정도. 보는 사람도 그러한데 활을 쏘는 사람들은 오죽할까?
그들은 주황색 천을 허리에 묶었는데 이는 황학정 국궁 회원임을 뜻하는 모양이다. 정자 이름
이 누런색, 주황색 학을 뜻하기 때문이다. 과녁까지 거리도 멀고 눈도 침침하여 명중을 했는
지. 외곽에 맞췄는지. 아니면 과녁 밖으로 빗나갔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날라간 화살은 전
동식 미니 케이블카에 실려 황학정으로 옮겨진다.

▲  황학정으로 인도하는 길 (국궁전시관 옆)

▲  황학정 표석 (황학정 정문)


 

♠  단군성전과 행촌동 은행나무

▲  단군성전(檀君聖殿)

황학정에서 다시 인왕산길로 나와 남쪽으로 가면 길 동쪽에 단군성전이 마중을 한다. 단군(檀
君)은 옛 조선을 세운 천하의 시조(始祖)로 그의 단군설화는 3살짜리도 모두 알 만큼 유명하
다. 허접스럽기 그지 없는 양이(洋夷)들의 그리스, 로마 설화를 능가하는 알찬 설화로 삼국유
사(三國遺事)에 그 설화가 실려 있으니 내용을 새삼스레 풀어보면 대략 이렇다.

옛날 천하를 다스리던 최고의 신, 환인(桓因)과 환웅(桓雄) 부자가 있었다. 환웅이 하늘 아래
로 내려가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싶었는데, 환인이 아들의 뜻을 알고 지구를 살펴보니 삼위태
백산(三危太白山) 지역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만하다 여겨져 천부인(天符印) 3개와 3,000명
의 무리를 주어 지구로 내려보냈다.
환웅은 태백산 마루 신단수 밑에 내려와 그곳을 신시(神市)라 했으며, 바람과 구름, 비를 관
장하는 풍백(風伯)과 우사(雨師) 등 신하를 거느리고 곡식과 인명(人命), 질병, 형벌, 선악(
善惡) 등 사람들의 360여 가지 일을 직접 다스렸다. 이때 굴 속에 함께 살던 호랑이와 곰이
찾아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청하니, 환웅은 쑥 1자루와 마늘 20개를 주며 이를 먹으면서 100
일 동안 햇빛을 안보면 사람이 되리라 했다.
그들은 굴에 들어가 수행을 했으나 호랑이는 이를 견디지 못해 뛰쳐나갔고, 곰은 21일을 버티
면서 여자 사람이 되니 이가 곧 웅녀(熊女)이다.

웅녀는 매일 신단수 밑에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기원을 하니 환웅이 잠시 남자로 변해 웅녀
와 결혼하고 아들을 낳았다. 이가 곧 옛 조선의 시조인 단군왕검(檀君王儉)이다.

단군은 장성하여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여 옛 조선을 세우니 그때가 기원전 2,333년이
다. 우리 땅은 바로 그때를 단기(檀紀) 1년으로 삼아 지금에 이르니 무려 4,350여 년의 역사
를 지니고 있으며 단군은 무려 1,908년을 살았다고 전한다.

▲  단군성전 정문(외삼문)

▲  단군성전 뜨락 은행나무


▲  푸근한 인상의 단군왕검상 (오른쪽에 단군 영정)

※ 단군이 세운 옛 조선(고조선)
오로지 상상으로 제작된 단군상, 그리고 그의 영정, 후덕한 인상과 긴 수염, 황색 옷이 인상
적이다. 단군은 옛 조선(고조선) 군주의 명칭으로 여겨지며, 조선 군주가 정치와 제사를 모두
관장하던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였다.

옛 조선은 기원전 2333년 경에 건국되어 기원전 108년에 강제로 문을 닫은 장수국가로 한반도
를 비롯하여<남한 지역에 있던 삼한(三韓)도 조선의 간접 영역으로 보기도 함> 요동(遼東),
만주, 요서, 연해주, 산동반도를 포함한 화북(華北) 지역을 다스린 천하 대국이었다. (중원대
륙 상당수를 점유하고 있었다는 견해도 있으며, 서안 등 산서성에는 옛 조선이 세운 거대한
무덤 유적이 많이 있다고 함)

조선의 건국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여전해 기원전 2333년 건국설도 솔직히 무리가 있다. 산
소도 아까운 식민사관 패거리들은 기원전 10세기 이내로 창건 연대를 잡고 있으며, 영역도 한
반도 북부와 요동, 남만주로 크게 축소시켰다.
옛 조선의 중심지는 요동으로 보이며, 춘추전국시대에 연나라를 공격하여 대륙에 다시금 영향
력을 행사하려고 했으나 철기(鐵器)로 중무장한 연나라의 반격에 오히려 크게 밀려 요하(遼河
)를 비롯한 2,000리 이상의 땅을 잃고 만다. 당시 조선은 청동기 무기였다. 그러니 어찌 게임
이 되겠는가?
이후 대륙에서 넘어와 준왕(準王)의 신임을 받은 위만(衛滿)이 반란을 일으켜 준왕을 쫓아내
고 왕이 되었다. 준왕은 그를 따르는 신하와 배를 타고 남쪽으로 건너가 한왕(韓王)을 칭했다
고 하는데, 아마도 마한(馬韓) 영역인 전라도나 충청도로 내려간 것이 아닐까 싶다.

위만이 조선을 장악하자 철제무기를 개발하고 국력을 길러 한나라를 비롯한 주변 나라를 공격
해 사방으로 크게 영토를 넓히고 동아시아 무역을 독점하여 막대한 부를 누렸다. 이에 한나라
무제(武帝)는 조선이 동방(東方) 무역 독점으로 배를 불리며 나날이 커지는 것에 크게 위협을
느끼며 우선 주변 나라를 말끔히 정리하고 그 자신감으로 섭하(涉河)를 사신으로 보내 조선을
협박했다.
당시 조선의 군주는 조선의 마지막 제왕인 우거왕(右渠王)으로 한나라의 요구를 한마디로 거
부하며 비왕(裨王, 제후왕)을 시켜 사신을 전송케 했다. 허나 섭하는 그 호의에 배은망덕하게
도 마부로 가장한 무사를 시켜 비왕을 죽이고 도망쳤다. 이에 한무제는 잘했다고 칭찬하며 옛
조선과 가까운 요동(지금의 요동이 아님)으로 보내 요동도위(都尉)로 삼았다.

비왕이 암살된 것에 적지 않게 뚜껑이 열린 조선은 섭하가 요동도위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
자 바로 한나라를 공격해 그 요동을 점령하고 섭하를 쳐죽었다. 그렇게 조선이 먼저 공격을
하자 한무제는 그것을 구실로 조선을 공격했다. 아마도 섭하를 떡밥으로 보내 조선을 건드리
려는 수작이 아니었을까 싶다.
허나 조선의 반격과 한나라군 내부 분열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채 패했다. 하여 뚜껑이 단
단히 폭발한 한무제가 다시 군사를 다그치자 정신을 차린 한나라군은 정비를 가다듬고 공격을
가해 끝내 왕검성까지 포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하며 끙끙 앓던 차에 조선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우거왕이 반
대파에게 피살되고, 왕을 잃은 조선 조정은 그 혼란을 잠재우지 못하여 결국 성은 함락되고
만다.

이렇게 옛 조선은 망하고, 그 땅 일부에 그 유명한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는데, 그것도 조
선 사람들의 끊임없는 비협조와 반발, 그리고 고구려(高句麗)와 부여(夫餘) 등의 등장으로 그
땅에 제대로 침도 바르지 못하고 쫓겨나고 만다.
한사군의 존재에 대해서도 여전히 말들이 많으나, 식민계열 쓰레기들은 평안도와 황해도, 요
동 일부로 보고 있으며, 많은 사학자들은 요동과 요서 지역으로 보고 있다. 한사군의 하나로
유명한 낙랑(樂浪)이란 존재는 낙랑군 외에 비슷한 이름에 낙랑국도 있었다고 하는데, 낙랑국
은 평양 지역, 낙랑군은 요서로 보고 있다.
호동왕자(好童王子)와 낙랑공주(樂浪公主) 설화로 유명한 낙랑은 낙랑군이 아닌 낙랑국이다.
만약 낙랑군이라면 낙랑공주는 공주를 칭할 수가 없다. 그냥 군을 다스리는 태수(太守)의 딸
일 뿐이다.

옛 조선은 전성기였을 때 인구가 무려 1억 8천만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조선의 문화와 문
명은 중원대륙과 주변의 많은 나라에 영향을 주었다. 한자(漢字) 같은 경우도 동이족(東夷族)
으로 대표되는 조선(또는 은나라)에서 만들어 전파했다는 견해가 많으며, 그 문자가 대륙에서
크게 발전하면서 동아시아 통용 글자가 되었다.
또한 흥안령산맥(興安嶺山脈) 주변에서 일어난 홍산문명(紅山文明) 또한 조선의 찬란했던 흔
적으로 보고 있으며, 한반도와 만주에서 많이 발견되는 엄청난 양의 고인돌(지석묘) 또한 조
선의 청동기시절 흔적이다. 그리고 비파형동검도 조선을 상징하는 유물이다.

※ 단군성전(백악전)의 역사
단군성전은 1968년 이숙봉(李淑峰) 여사의 3자매(이정봉, 이숙봉, 이희수)가 세웠다. 이후 사
단법인 현정회(顯正會)로 이관되었으며, 1973년 서울시로부터 보호문화재로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1990년에는 쌍용그룹 김석원 회장의 지원으로 성전을 개축했다.

전체 대지면적 약 800㎡, 성전 52.92㎡, 태극정문(太極旌門), 관리실 등을 갖추고 있으며, 건
물 색깔이 죄다 베이지색을 띄고 있는데, 이는 박정희 시절 그가 좋아하는 색으로 칠했기 때
문이다. 이곳 뿐 아니라 많은 사당과 문화유산이 그 시절 베이지색으로 색 변경을 당했다. 성
전 현판은 김응현, 홍익인간 글씨는 원중식, 내외삼문 간판은 이현종이 썼다.
또한 옛 조선이 열렸던 유서깊은 10월 3일 개천절<어천절(御天節)이라고도 함>에는 이곳에서
개천절대제전(開天節大祭典)이 성황리에 열린다. 전통제례와 전통공연, 온갖 체험행사(제례복
체험, 국궁체험 등) 등이 열리며, 일반인도 참여 가능하다.

* 단군성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1-28 (인왕산로 22, 현정회 ☎ 02-736-6375)


▲  단군성전 앞에 펼쳐진 늦가을 동화

단군성전 남문은 바로 사직공원(사직단)과 이어진다. 허나 평소에는 늘 닫혀있고 사직공원에
서 그곳을 이어주는 길 또한 봉쇄되어 있어 별 수 없이 인왕산길로 우회해 외삼문(外三門)으
로 들어서야 된다. 그 덕분에 사직공원~단군성전 지름길에 인적이 거의 끊기면서 사람의 발자
국 대신 노란 은행잎이 가득 쌓여 늦가을 정취를 아주 진국으로 끌어올린다.
벌써부터 겨울 제국의 보이지 않는 압박이 시작되면서 은행나무와 단풍나무들은 나뭇잎을 하
나, 둘 땅바닥으로 털어낸다. 우리는 그 잎을 낙엽이라고 부른다. 늦가을에 어울리면서도 한
편으로는 우울증을 유발시키는 그 이름 말이다. 은행잎이 금지된 길과 그 주변에 수북히 쌓여
이 일대는 그야말로 노란 세상을 이룬다. 마치 황금색 비단이 쫙 깔린 듯한 모습으로 말이다.

우리야 귀를 접고 누운 그들을 보면서 늦가을 분위기를 즐기지만, 그들은 인생의 마지막을 노
래하며 서서히 끝을 준비한다. 그러고보면 사람이나 은행잎, 인간이 지은 건물이나 인생은 모
두 부질 없는 모양이다. 시작이야 어쨌든 그 종점은 다 같지 않던가.


▲  한양도성 밖 인왕산로1길 (인왕산, 무악동 방향)

▲  인왕산입구 한양도성 탐방로 (인왕산 방향)

단군성전 앞 교차로에서 서쪽 인왕산로1길로 들어섰다. 길 왼쪽(남쪽)은 사직동 주택가와 종
로문화체육센터가 있고, 오른쪽은 인왕산의 싱그러운 숲으로 그 산줄기는 경희궁(慶熙宮)까지
미치지만 숲은 여기서 뚝 끊기고 만다. 그러니 인왕산로1길이 속세와 자연의 팽팽한 경계선인
셈이다.
그 길을 4분 정도 가면 고색이 짙은 한양도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크게 5거리를 이루
는데, 성 밖 북쪽 길(인왕산로1길)은 무악동과 인왕산 쪽으로, 서쪽(사직로1가길)은 독립문
방면, 남쪽(송월1길)은 홍파동, 경희궁 쪽으로 이어지며, 5거리 동쪽(성곽 안쪽) 인왕산입구
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성곽길을 타면 인왕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  송월1길과 한양도성 (홍파동, 경희궁 방향)

▲  사직동 한양도성 (5거리 서남쪽)
인왕산에서 내려온 한양도성은 여기서 잠시 고개를 숙이고 만다.
(사직동~월암근린공원 구간 성곽은 아직 복원되지 못함)

▲  은행잎의 마지막 삶터이자 정모 현장, 한양도성 여장
나무에게 버림받은 은행잎들이 딱딱한 여장 위에 모여 앉아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한다. 여장 뿐 아니라 그 주변은 온통 황금색 은행잎의 세상이다.

▲  여장 위에 내려앉은 은행잎들

▲  행촌동(杏村洞)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1-10호

사직터널 윗쪽이자 인왕산 남쪽 자락의 끝을 잡은 행촌동은 조금은 빛바랜 산동네이다. 그렇
다고 옛날 달동네처럼 주황색 기와를 지닌 허름한 집들이 즐비한 그런 곳은 아니다. 온갖 빌
라와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찬 서울의 흔한 동네로 그 주택가 속에 행촌동 은행나무와 권율장
군의 집터, 그리고 딜쿠샤란 명소가 숨겨져 있다.

딜쿠샤 곁에 자리한 행촌동 은행나무는 약 420살에 이르는 장대한 나무로 행촌동의 오랜 터줏
대감이다.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이란 덧없는 양분과 동네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
어 높이 23m, 둘레 6.8m에 이르는 큰 나무로 어엿하게 성장했다. 허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이
이곳까지 미치면서 그의 보금자리는 주택에 밀려 많이 좁아졌고, 주택 사이에 비좁게 자리해
있으나 건강은 아직 양호하다.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이자 이곳에 살았던 권율(權慄)장군이 손수 심었다고 전하며, 주인
은 오래 전에 갔지만 그의 사연을 끈질기게 붙들며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로 이 나
무 때문에 동네 이름이 행촌동(은행나무 마을)이 된 것이다. 참고로 은행나무는 태반이 사람
이 심은 것이며, 자연적으로 싹을 내린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서울에서 오래되고 아름다운 은행나무를 꼽으라면 방학동(放鶴洞) 은행나무, 성균관(문묘) 은
행나무(대성전 은행나무 포함), 그리고 이곳 은행나무를 격하게 내세우고 싶다.

▲  남쪽에서 바라본 행촌동 은행나무

▲  북쪽에서 바라본 행촌동 은행나무


▲  은행나무 그늘에 자리한 권율장군 집터 표석

은행나무가 있는 곳은 권율(1537~1599)의 집터로 인근 필운동(弼雲洞) 배화여고에도 그의 집
이 있었다. 필운동 집은 그의 사위이자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오성 이항복(李恒福)에게 물
려주었는데 그 집이 필운대(弼雲臺)이다. (현재 필운대 바위글씨가 남아있음)

그럼 임진왜란의 영웅, 권율(權慄)은 누구일까?
권율은 안동 권씨로 자는 언신(), 호는 만취당()과 모악(). 시호는 충장()
이다. 1582년 식년시 문과(式年試 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는데, 임진왜란 시절 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것으로 보아 무예도 제법 갖추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는 승문원정자()와 전적()을 거쳐 1587년 전라도도사(全羅道都使)와 예조정
랑(禮曹正郞), 경성판관(鏡城判官)을 지냈으며, 1591년 평안도 의주목사(義州牧使)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급히 광주목사(廣州牧使)로 임명되어 그곳으로 달려갔으며 전라도
순찰사(巡察使) 이광(李珖)과 방어사(防禦使) 곽영()이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군사 4만을
모아 서울로 올라오자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었다.
이광과 곽영은 수원과 용인에 진을 치고 주변에 있는 왜군을 토벌하고자 했는데, 권율은 주변
에 조금씩 흩어진 적들을 치지 말고 임진강(臨津江)에서 그들의 서진(西進)을 막아 군량미를
운반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 다음 적의 빈틈을 노리면서 조정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고 의견을 냈다. 허나 뇌에 주름이 가득한 이광은 그 말을 무시하고 오로지 머릿수에 의지해
용인에 있는 왜군을 공격했다.
이광의 군사는 4만(왜국은 10만이라고 주장함)에 이르렀으나 대부분이 칼과 창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오합지졸이었다. 그에 반해 왜군은 왜열도에서 나름 알아주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가 수백 명의 정예 기병으로 저항을 했다.
허나 조선군은 겨우 수백에 불과한 왜군에게 형편없이 깨지고 싸움에 서툴렀던 선봉장 이시지
(李詩之)와 백광언(白光彦)이 전사하는 등, 그야말로 개망신을 당했다. 허나 권율은 이를 직
감하고 신중하게 처신해 휘하 군사를 잃지 않고 광주로 물러나 후일을 도모했다.

1592년 가을, 전라도 남원으로 내려가 1,000명의 군사를 모집해 동복현감(同福縣監, 전남 화
순) 황진(黃進)과 함께 이치(梨峙)에서 전주(全州)로 진출하려는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왜군을 막았다. 초반에 황진이 조총에 맞아 부상을 입으면서 군사의 사기가 잠시 떨어졌으나
권율이 군사를 독려하여 왜군을 격퇴하고 승리를 거뒀다. 그 공으로 전라도 감사(監事)로 승
진하게 된다.
1592년 12월, 서울 수복을 위해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천안 직산(稷山)에서 머물렀는데, 체찰
사(體察使) 정철(鄭澈)이 그 많은 인원을 먹일 군량이 없으니 돌아가서 관내를 지키는 것이
좋겠다고 편지를 보냈다. 허나 행재소(行在所)에서 북상하라는 명이 떨어지면서 곧바로 군을
이끌고 수원 남쪽 독산성<禿山城, 오산 세마대(洗馬臺)>에 들어가 진을 쳤다.
한편 권율이 독성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은 왜장 우키타(宇喜多秀家)는 후방과 차단될 것이
두려워 서울에 있던 군사를 이끌고 독산성을 공격했다. 허나 권율은 성문을 굳게 닫고 수비만
할 뿐, 좀처럼 성 밖으로 나오질 않아 왜군의 피해는 나날이 늘어갔다.
뚜껑이 열린 우키타는 사람을 보내 독산성의 약점을 탐지한 결과 물이 부족하다는 정보를 입
수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바로 성 밑에 큰 못을 파니 과연 성 안에 물이 마르면
서 조선군의 식수에 비상이 걸렸다.

허나 권율은 당황하지 않았다. 비범한 인물답게 명쾌한 꾀를 낸 것이다. 그래서 동이 트는 이
른 아침에 왜군이 잘보이는 곳에 말을 세워놓고 쌀을 부어 말을 씻기는 시늉을 벌였다. 그것
을 본 단순한 왜군은 성 안에 물이 부족하다는 것이 거짓임을 알고 크게 동요했다고 한다. 바
로 그때를 이용해 유격전을 펼치며 타격을 가하자 발작한 우키타는 영책(營柵)을 불지르고 바
로 서울로 줄행랑을 쳤다. 그들이 도망칠 때 정예 기병 1,000명을 보내 퇴로를 차단하고 왜군
수천을 죽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세마대 전투)

1593년 1월, 서울 수복을 위해 조경(趙儆)을 보내 근교에 마땅한 곳을 물색하다가 행주산성(
幸州山城)으로 들어가 목책(木柵)을 쳤다. 그곳은 서울과도 가깝고, 한강을 끼고 있으며, 조
망도 좋고, 인근에 여러 요새와 함께 연합 작전을 펴기에 아주 좋은 위치였다. 허나 석성(石
城)이 아닌 야트막한 토성(土城)이라 수비전에는 썩 유리한 편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서둘러
목책을 엮은 것이다.
목책이 완성되자 독산성에 병력 일부를 남기고 모두 불러들였으며, 별도로 4,000명을 뽑아 전
라병사(全羅兵使) 선거이(宣居怡)를 시흥 호암산(虎巖山, ☞ 관련글 보러가기)으로 보내 후방
을 돕도록 했다. 그리고 처영(處英)이 이끄는 승병(僧兵) 1,000명이 행주산성에 합류했다.

권율은 소수의 군사를 보내 서울을 공격했고, 고양 혜음령에서 왜군에게 깨진 명나라군을 도
와 그들의 전멸을 막아주었다. 권율의 활약에 적지않게 염통이 쪼그라든 우키타는 행주산성을
쓸어버리기로 마음 먹고 서울과 인근의 군사를 싹 긁어모아 무려 3만의 대군으로 1593년 2월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그때 행주산성에 있던 조선군은 승병을 합해서 겨우 약 2,800명, 그 외에 군사들을 도우러 성
에 들어온 밥할머니를 중심으로 한 아낙네들과 지역 사람들이 있었다.

왜군은 7부대로 나눠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행주산성이 견고한 성이 되지 못해 여러 번
위기가 있었으나 군사들은 일당백의 위엄을 드러내며 적들을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로 만들었
으며, 화차(火車)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등의 새 무기도 크게 활약을 했다. 또한 밥할머
니의 행주치마 부대는 치마로 돌을 나르고 군사들의 밥을 나르는 등, 서로가 단결하니 왜군은
결국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사한 군사들의 시신을 모아 불태우고 줄행랑을 쳤다.
이 싸움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니 권율과 조경, 처영, 조선군과 승군, 밥할머
니의 아낙네들, 지역 사람들이 빚어낸 대작품이었다.

이후 파주로 옮겨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부원수 이빈(李薲)과 함께 후방을 지켰으며, 전라
도로 내려갔다가 그해 6월 행주대첩의 공으로 도원수(都元帥)로 승진해 경상도에 주둔했다. 1596년에 도망친 병사를 즉결처분한 것으로 잠시 해직되기도 했으나 바로 한성판윤(漢城判尹)
에 임명되어 호조판서(戶曹判書)와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터지자 명나라군과 함께 왜군이 머무는 울산성(蔚山城)을 공격
했다. 허나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겁에 질려 도망치는 바람에 함락시키지 못했으며, 순천
으로 자리를 옮겨 순천 예교(曳橋)에 있던 왜군을 공격했으나 비리비리한 명나라군의 비협조
로 함락시키지 못했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내려왔으나 그해 7월 인생을 마감하니 그의 나이
62세였다. 선조(宣祖)는 그에게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했으며,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
등으로 삼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봉해 그의 공을 기렸다.

권율은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한 명장으로 바다에 이순신(李舜臣)이 있다면 육지에는 정기룡(
鄭起龍)과 곽재우(郭再祐), 권율이 있었다. 비록 초창기 용인 싸움에서 어리버리한 상관들 때
문에 졌고, 정유재란 때는 밥버러지 명나라군 때문에 적지 않은 고생을 했지만 그 외에는 모
두 대승을 거두었다. 특히 행주대첩은 적은 군사로 10배 이상의 왜군을 물리친 우리 전쟁사의
길이 빛나는 장쾌한 대첩이다.
그의 활약과 공훈에 대해서는 '권원수실적(權元帥實蹟)'이란 책이 전하고 있으며, 그의 묘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에 있으나 인근이 유원지화되어 늘 시끄러우니 숙면이나 제대로 취하고 있
을지 모르겠다.

행촌동 은행나무를 끝으로 늦가을 한복판에 달달하게 벌였던 인왕산과 황학정, 행촌동 나들이
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딜쿠샤는 시간 관계로 사진에 담지 않고 통과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행촌동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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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1월 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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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군(단종)이 유배살이를 했던 단종애사의 애틋한 현장, 영월 청령포 (청령포 관음송)

 


' 단종애사의 현장, 영월 청령포 '

▲  서강 너머에서 바라본 청령포


 

 

봄이 천하만물의 격한 지지를 받으며 겨울 토벌에 여념이 없던 3월의 끝 무렵에 친한 후배
와 강원도 내륙 지역을 찾았다.

아침 일찍 서울을 출발하여 홍천(洪川)의 여러 벽지 명소를 찍고 평창(平昌)을 거쳐 영월(
寧越) 땅으로 들어섰다. 이날 최종 목적지는 충북 단양(丹陽)으로 갈 길은 아직 멀지만 일
몰까지는 아직 여유가 넘치고 오랜만에 들어온 곳이라 그냥 지나치기는 섭하다. 하여 읍내
직전에 있는 선돌을 보려고 했으나 실수로 놓쳐버려 이미 2번이나 인연을 지었던 청령포를
복습하기로 했다.

청령포는 영월읍내와 무척 가까운 곳으로 주차장에 이르니 16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주차장
은 거의 만땅이다. 간신히 자리를 잡아 차량을 잠재우고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입해 유료
(有料)의 땅, 청령포로 들어선다.


 

♠  하늘이 빚은 천연 감옥, 청령포(淸泠浦, 명승 50호)

▲  청령포 나룻터와 서강 너머로 보이는 청령포

입장료를 내고 서강(西江) 강변으로 내려가면 청령포 나룻터(선착장)가 나온다. 청령포는 창
살도 필요 없는 궁벽한 곳이라 섬이 아닌 육지임에도 무조건 배를 타고 건너야 된다. 나룻배
는 2척이 다니고 있는데, 평일은 보통 1척, 주말과 휴일은 2척을 굴리며, 정해진 출발 시간이
없이 사람이 어느 정도 차면 시동을 걸고 느릿느릿 청령포로 이동한다.
하지만 거리가 가까워 배를 돌리기가 무섭게 맞은편 강변에 닿는다. 소요시간은 길게 늘려봐
야 3~4분 정도로 배멀미가 나올 틈도 없으며, 수면이 잔잔하고 중간 부분을 제외하면 수심도
얕다. 허나 온갖 어이없는 재해와 재난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것이 이 땅의 현실이라 너무 방
심은 하지 말자.


▲  청령포와 속세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 청령포 나룻배

▲  나룻배에서 바라본 청령포 나룻터(선착장)

청령포에 대한 설래임을 간직한 나그네를 태운 배는 180도 돌리기가 무섭게 청령포 강변에 닿
는다. 청령포 강변은 인공(人工)이 가해지지 않은 자연산 강변으로 돌이 무지 많으며, 배를
타고 내리는 시설도 따로 없어 그냥 강변 모래벌에서 타거나 내리면 된다.


▲  별 꾸밈없이 자연 그대로 놓아둔 청령포 강변

▲  소나무숲에 묻힌 청령포
청령포의 핵심이자 상징인 단종 유배처가 저 송림에 묻혀있다.


청령포 강변에는 돌이 무지 많다. 그런 돌밭을 지나면 소나무숲이 나오는데, 그 숲속에 단종
애사의 쓰라린 현장, 단종 유배처가 깃들여져 있다.
강변에는 탐방로가 따로 닦여져 있지 않으며, 울퉁불퉁한 돌밭을 알아서 통과해 소나무숲에
안기도록 되어있다. 대신 소나무숲에는 단종어소와 망향탑, 노산대, 관음송까지 나무데크 탐
방로를 닦아두었다.

청령포는 유독 소나무가 많다. 이곳이 솔내음이 그윽한 공간이 된 것은 단종이 유배된 인연으
로 오랫동안 금표(禁標) 구역에 묶였기 때문이다. 금표란 왕릉이나 왕족 묘역, 제왕(帝王)이
내린 땅, 나무 보호와 국가 시설 보호를 위한 금지된 땅으로 이곳에는 허가된 사람 외에는 함
부로 출입할 수 없었고, 나무 벌채도 일절 금지된다.

청령포 소나무숲은 이곳에서 가장 늙은 나무인 관음송을 시작으로 점차 숲을 이룬 것으로 여
겨지며 수십 년에서 100~400년 묵은 소나무들이 삼삼하게 우거져 하늘을 가리고 단종의 유배
처를 소중하게 품고 있다. 그럼 여기서 청령포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소나무숲에 감싸인 단종어소

청령포는 단종애사(哀史)의 주요 현장이자 장릉(莊陵)과 더불어 영월에 왔다면 꼭 들려야 되
는 영월의 대표 명소이다. 이곳이 크게 유명세를 탄 것은 소년왕 단종의 유배지란 점과 하늘
의 감옥 같은 척박한 지형, 그리고 270도나 크게 굽이쳐 흐르는 서강의 환상적인 모습 때문일
것이다.
서강은 형제인 동강(東江)과 속히 합세해 한강을 따라 보다 큰 세상으로 나가고 싶지만 칼처
럼 솟은 산의 낙원인 강원도의 지형상 그것은 불가능하다. 장대한 세월 동안 오로지 굴곡 노
선 직선화를 위해 청령포 뒷쪽을 열심히 쪼아댔지만 지형이 단단하여 아직까지 성과가 없다.
하지만 직선화를 향한 굳은 집념은 여전하여 지금도 직선화 프로젝트를 놓지 않고 있다.

청령포의 주인공인 단종은 조선 6대 군주로 1441년 7월 23일, 문종(文宗)과 현덕왕후(顯德王
后) 권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휘(諱, 제왕의 이름)는 홍위(弘暐)로 1448년에 왕세손(王
世孫)에 책봉되었으며,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윤상(尹祥)에게 학문을 배웠다.
1450년 세종(世宗)이 승하하고 그의 첫 아들인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단종은 자연히 왕세자(
王世子)가 되었으며, 문종이 늘 병을 달고 살다가 재위 2년 만인 1452년 5월 18일, 승하하자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11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철부지 어린 왕자가 왕위에 오르니 왕을 둘러싼 권력 구도가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초반
에는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은 김종서(金宗瑞)와 황보인(皇甫仁) 등이 단종을 보필하며 주도
권을 잡았는데, 세종의 아들이자 문종의 아우 일부가 능력도 좋고 야망이 크니 은근히 위협이
되었다. 그중에서 안평대군(安平大君)은 문무(文武)가 뛰어나고 다재다능했는데, 김종서와 뜻
이 통해 수양대군(首陽大君)을 견제하며, 의정부(議政府) 중심의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
를 추진했다.
그들의 견제에 위기를 느낀 수양은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 홍달손(弘達孫) 등을 수하에
두고 기회를 엿보다가 1453년 10월, 불시에 김종서 집을 습격해 김종서를 죽이고, 왕명을 빙
자해 신하들을 모두 소환해 황보인과 조극관(趙克寬) 등을 때려죽였다. 이 사건이 그 이름 돋
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수양은 스스로 영의정에 올라 정권과 병권을 움켜쥐었고, 정인지(
鄭麟趾)와 한확(韓確) 등 자신의 측근을 정승에 앉혔다. 또한 자신을 찬양하는 교서(敎書)를
짓게 해 왕의 이름으로 받기도 했다.
그렇게 수양의 위세가 강해지며 어린 왕 단종을 은근히 정신적으로 압박하자 의지할 데도 없
고 정신적 두려움에 염통이 쪼그라들던 단종은 결국 1455년 6일 11일, 큰숙부 수양에게 양위
의 뜻을 전하고 친히 대보(大寶)를 넘겼다. 이렇게 해서라도 숙부의 칼날을 피하고 목숨을 부
지하고자 함이었다. 하여 수양은 조선 제7대 군주인 세조(世祖)가 되었고, 단종은 상왕(上王)
으로 물러앉아 창덕궁(昌德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나무는 가만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가만두질 않는다고 했던가? 세조의 왕위 찬탈에 잔뜩 반감
을 품은 박팽년(朴彭年)과 성삼문(成三問), 김문기(金文起) 등 많은 사대부(士大夫)들은 세조
와 그의 측근을 몰아내고 단종 복위를 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다가 1456년 6월 명나라 사신이 오자 세조는 그들에게 연회를 베풀기로 했는데, 그때 칼
을 들고 제왕 뒤에 서서 호위하는 운검(雲劍)의 역할을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成勝)이 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 세조를 처단하기로 한 것이다. 허나 뭔가 찜찜했던 세조는 운검을 세우지
않으면서 그 좋은 기회는 사라지고 만다.
이후 적당한 기회는 오지 않았고, 단종 복위에 가담한 김질(金質)은 초조하다 못해 염통이 검
게 타들어가 장인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밀고를 해버렸다. 이렇게 일어난 것이 그 유명한 사
육신(死六臣) 사건이다.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河緯地) 등의 단종 복위 추진에 뚜껑이 제대로 뒤집힌 세조는 그들을
고문하고 용산 새남터로 보내 사지를 절단 내어 죽였다. 그리고 단종은 사육신 등과 밀모를
했다고 여겨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 유배처를 꼼꼼히 물색하다가 육지 속의 작은 섬과도
같은 이곳 청령포로 유배를 보낸 것이다.
하여 1457년 6월 22일 노산군으로 격하된 단종은 강제로 유배길에 올랐고 영도교(永渡橋, 청
계7가와 청계8가 사이)까지 따라온 부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와 단장의 이별을 나누었다.
이때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使) 어득해(魚得海)가 50명의 군사를 대동해 노산군을 호종했으
며, 영월까지는 6일이 걸려 6월 28일 청령포에 도착했다.

청령포에는 단종이 머물 기와집이 급하게 마련되었다. 그는 그 집에 머물며 책을 읽거나 노산
대에 올라 서울과 왕비를 그리워했으며, 관음송 가지에 걸터앉아 쉬기도 했다. 그렇게 하늘이
내린 자연산 감옥, 청령포에서 우울하게 생활하다가 그해 가을 홍수로 청령포 상당수가 물에
잠기게 되자 영월 객사(客舍)인 관풍헌(觀風軒)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청령포 생활은 끝을 맺
는다.
허나 순흥(順興, 영주시 순흥면)으로 유배된 그의 또 다른 숙부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순흥부
사(府使) 이보흠(李甫欽)과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된통 걸리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세조는 다
시 한번 뚜껑이 열리게 된다. '노산군을 저리 두면 계속 역모가 생길 것이다' 생각한 세조는
결국 후환을 제거하고자 조카에게 사약을 보내는 비정함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단종은 1457년 10월 24일 유시(酉時), 숙부가 보낸 쓰디쓴 사약을 들이키고 진한
피를 토하며 힘없이 쓰러지니 그때 그의 나이 불과 16세였다.

청령포는 북과 동, 남쪽 등 전체의 ¾이 서강에 감싸여 있고, 북쪽은 급하게 솟아나 낭떠러지
를 이룬다. 서쪽은 비록 땅과 붙어있긴 하나 육육봉(六六峰)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에 막혀
있어 어지간한 독종이 아닌 이상은 넘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다. 자연히 외부와 단절된 상태
로 고적하게 살아야 했으며, 첩첩한 산주름 속에 단단히 묻힌 외로운 곳이다보니 온갖 산짐승
들이 가득해 해가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을 정도였다.

그가 청령포에 있을 때,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거의 밤마다 몰래 찾아와 단종을 위로했
고, 생육신(生六臣)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원호(元昊)는 청령포와 가까운 제천시 송학면에 관
란정(觀瀾亭)을 짓고 매일같이 단종에게 진상할 음식과 서신을 표주박에 담아 서강에 띄워보
냈다. 그것을 청령포에 있던 단종이 받아보았고, 단종이 다시 떠내려보내면 이상하게도 강을
역류하여 관란정으로 갔다고 전한다.

때묻지 않은 강과 칼처럼 솟은 산, 삼삼하게 우거진 소나무, 거기에 역사까지 어우러진 아름
다운 명소로 수십~수백 년 묵은 소나무 덕에 4계절 내내 솔내음이 가득하며, 비록 단종에게
청령포는 지옥보다 더한 곳이겠지만 오늘날 나그네들에게는 잠시나마 정처 없는 마음을 내던
지고 싶은 아름다운 명소이다. 이런 곳에 오면 사진기도 흥분하여 작품들이 마구 나오며, 영
월의 대표 꿀단지이자 단종을 상징하는 명소로 많은 이들이 찾아온다.

청령포 일대는 국가 명승 5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영월10경 중 제2경으로 찬양을 받고 있다.

*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산67-1, 68 (청령포로 133, ☎ 033-374-1317)


 

♠  청령포 둘러보기

▲  단종어소(端宗御所) 기와집

청령포 소나무숲에 들어서면 왼쪽(남쪽)에 돌담에 둘러싸인 단종어소가 있다. 이곳은 단종이
유배 생활을 했던 공간으로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쪽에 단종이 머물던 팔작지붕 기와집
이 있고, 동쪽에 궁녀와 시녀가 살던 초가 1동(행랑채)이 있다.
단종이 사라지자 화마(火魔)도 크게 뚜껑이 열렸는지 슬그머니 태워먹으면서 아련하게 터만
남아있던 것을 2000년에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참고하여 그럴싸하게 재현했다.

기와집과 행랑채 초가에는 단종과 궁녀, 시녀, 아전을 재현한 밀납인형이 있으며, 가구와 책
장, 이불, 장독대 등을 갖다놓아 당시의 모습을 최대한 묻어나게 했다.


▲  방 3개, 부엌, 창고로 이루어진 5칸짜리 초가 행랑채
시녀와 궁녀들은 여기서 생활했는데, 한 방에 2명씩 6명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방 옆에는 부뚜막 연기가 슬쩍 피어오를 것 같은 부엌이 있고 그 옆에
음식물과 물건을 보관하던 창고(광)가 있다.

▲  초가 행랑채와 돌담, 그리고 삼삼하게 우거진 소나무숲

▲  깨끗하게 정리된 시녀의 작은 방

▲  속 빈 강정처럼 놓여진 장독대

▲  바느질하는 침모(針母)의 모습
단종을 위해 침침한 눈을 극복하며
옷 수선에 여념이 없다.

▲  부뚜막으로 이루어진 부엌
나이든 시녀가 단종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단종이 비록 강원도 산골로 쫓겨났지만 전직 제왕에다가 왕족이니 그의 생활공간은 관청 건물
못지 않은 규모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 바로 그의 공간인 것이다.

단종은 햇살이 잘들어오는 남쪽 방에 푸른 도포를 입고 책을 읽는 잘생긴 도련님처럼 재현되
었는데, 바로 옆방에는 어소를 관리하고 단종의 시중을 드는 아전이 바짝 엎드려 단종에게 인
사를 올리고 있고 그 곁에는 다기(茶器)를 머금은 조그만 상이 있다.


▲  기와집 내부, 단종의 방

▲  책을 보며 시름을 달래는 단종

▲  시녀가 생활하던 기와집 방


▲  단종이 지은 어제시(御製詩)
단종의 한과 상처 받은 어린 마음이 잘 나타나 있어 나그네의 옷깃을 잠시
여미게 한다.

천추의 원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 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해매니
푸른 솔은 옛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 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물에 부딪쳐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  단묘재본부시유지비(端廟在本府時遺址碑)

어소 기와집 옆에는 비석을 품은 1칸짜리 비각(碑閣)이 있다. 그 안에는 1763년에 영조(英祖)
의 명으로 세운 유지비가 있는데, 이는 터만 아련하게 남은 단종어소의 위치를 알리고자 세운
것으로 비석의 높이는 162cm이다.
하얀 피부의 네모난 기단(基壇) 위에 오석(烏石)으로 된 비신(碑身)을 세웠는데, 그 앞면에
비석의 이름이 된 '단묘재본부시유지비'라 쓰여있고, 뒷면에 '歲皇明崇禎戊辰紀元後三癸未季
秋 涕敬書令原營竪石 地名 淸泠浦'라 쓰여있어 조성 시기와 이곳 지명을 알려준다.
여기서 황명(皇明)은 조선이 쓸개까지 내주며 엄청나게 굽신거리고 떠받들던 명나라이고, 숭
정은 명나라 마지막 제왕인 의종(毅宗)의 연호로 숭정 무진은 1628년이다. 그때를 기준으로
계미(癸未)년이 3번이 지난 해의 가을에 세우니 그때가 1763년 가을이다. (조선의 군주와 위
정자, 선비 상당수는 명나라가 망한 이후에도 명에 대한 아주 꼴사나운 사대주의를 일삼으며
명을 그리워하고 나라의 국력을 개판으로 만듬)
'涕敬書令原營竪石'은 원주감영에 영을 내려 슬픔과 공경으로 세웠다는 뜻이며, '지명 청령포
'는 말 그대로 이곳의 지명이 청령포임을 뜻한다.

오랫동안 홀로 단종어소터를 지키며 소나무 그늘에 있다가 2000년에 비석 주변에 어소가 복원
되면서 어소 뜨락에 있게 되었다. 물론 비석의 위치는 그대로이다.


▲  비각에 소중히 담긴 단묘재본부시유지비

▲  햇님도 맥을 못출 정도로 무성함을 자랑하는 청령포 소나무숲
아직 대낮임에도 숲속은 벌써부터 어두컴컴하다.

청령포 한복판에는 관음송이라 불리는 장대한
소나무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는 청령포 소
나무의 시조로 다른 소나무들보다 하늘과 더욱
맞닿아있어 그의 위치와 위엄을 실감케 한다.

관음송의 높이는 30m, 가슴높이 둘레 5.19m로
1.6m 높이에서 줄기가 2갈래로 갈린다. 다른
소나무에 비해 줄기 피부가 유난히 붉고 줄기
중간에 잔가지가 없이 매끈하게 자란 제법 아
름다운 소나무로 단종이 이 나무 줄기에 걸터
앉아 시름을 달랬다고 전한다.
지금이야 아주 큰 나무가 되어 오를 엄두도 솟
지 않지만 당시 관음송의 나이를 60~80년 정도
로 추정하고 있으니 줄기가 갈라지는 곳까지는
능히 올랐을 것이다.
나무의 나이는 약 600여 살로 보고 있으며, 그
의 이름은 관세음보살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다고 해서
관(觀), 그의 슬픈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음(
音)을 붙여 관음송이라 했다고 한다. 이 이름
은 후대에 단종을 섬기던 영월 주민들이 지어
낸 것으로 보인다.

▲  청령포 관음송(觀音松)
- 천연기념물 349호

나라에 큰 일이 터질 때마다 나무의 피부가 검게 변해 나라의 변고를 알려주었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매우 애지중지하고 있다. 어쩌면 단종의 혼이 깃든 나무로 여기고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  단종의 손때가 담긴 망향탑(望鄕塔)

관음송에서 북쪽 벼랑으로 가는 길이 2갈래 있다. 왼쪽으로 가면 망향탑, 오른쪽은 노산대로
북쪽 벼랑은 한 줄기로 이어져 있어 어느 곳을 먼저 오르던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서강이 크게 굽이쳐 흐르는 곳에 천연의 감옥인 청령포가 빚어져 있고 3면이 죄다 강에 막혀
있는데 그중 북쪽은 각박하게 벼랑이 형성되어 있어 나름 절경을 자아내며, 여기서 바라보는
경치 맛이 아주 일품이다. 물론 단종에게는 이 모든 것이 지옥처럼 보였겠지만 우리 같은 나
그네들에게는 하루 머물고 싶은 천연의 명소이다.

노산대와 육육봉 사이 벼랑 위에 돌로 쌓여진 조그만 돌탑이 있다. 세상에서는 그를 망향탑이
라 부르는데, 단종이 청령포 생활을 했을 때, 궁궐과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이곳에 오를 때마
다 여기저기 흩어진 잡석을 주워 쌓았다고 한다. 청령포에서 대략 1달 가량 머물렀고 딱히 할
것도 없는 처지이니 이곳을 찾는 횟수가 꽤 많았음을 망향탑이 보여준다. 돌탑을 이루는 돌
가운데, 묵은 때가 담긴 돌은 단종의 손길이 닿았던 것으로 보이며, 하얀 피부의 돌은 근래에
얹혀진 것이다. 현재는 문화유산 보호 철책을 둘러 탑을 보호하고 있다.

과연 단종이 직접 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청령포에 남긴 유일한 흔적으로 그의 착잡한
마음을 가늠케 한다.


▲  망향탑과 노산대(소나무가 우거진 벼랑), 그리고 서강

▲  망향탑 서쪽 막다른 곳

망향탑 서쪽은 길이 막혀있다. 아주 가늘게 육육봉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으나 통행이 금지
되어 있고, 양쪽이 거의 벼랑이라 오르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산길 북쪽은 서강이 오랜 세월
을 두고 깎은 거의 수직 각도의 벼랑이며, 남쪽은 수직 정도는 아니지만 각박하긴 마찬가지이
다.

이곳에 전설을 남긴 단종도 이 가느다란 산길을 보며 도망칠 생각이 굴뚝 같았을 것이다. 허
나 그게 녹록치 않음을 알고 있고, 군사들이 그를 감시하고 있으며, 구중궁궐(九重宮闕)에서
편하게 자란 그가 이런 산을 넘는 것도 무척이나 어렵다.


▲  망향탑에서 바라본 서강
단종의 구슬픈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서강 강물은 예나 지금이나
청령포 곁을 보듬으며 유유히 자신의 갈 길을 간다. 하긴 서강이 그의
사연을 굳이 알 필요가 없다.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부질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  노산대(魯山臺)

▲  금표비에서 바라본 노산대(魯山臺)

망향탑 동쪽에 각박하게 생긴 층암절벽이 있는데, 그 꼭대기에 노산대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이곳은 단종이 저녁 노을이 질 때나 마음이 갑갑할 때 친히 올라 시름을 달래던 곳이라 전하
며, 그 연유로 노산대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망향탑 못지 않게 각박한 벼랑 위에 자리해 있는데, 지금이야 탐방로가 잘 닦여져 있어 접근
하기가 쉽지만 탐방로가 없다면 결코 쉽게 오르지 못할 언덕이다. 관음송과 금표비 북쪽에 자
리하며, 여기서 바라보는 서강과 주변 풍경이 제법 일품이다.


▲  금표비와 관음송 주변 소나무숲

▲  청령포 금표비(禁標碑)

노산대를 내려와서 나룻터로 가다보면 소나무숲 그늘에 고색의 때가 잔뜩 묻어난 금표비를 만
나게 된다.
이 비석은 단종이 유배된 청령포에 일반 백성들의 출입과 나무 벌채를 금하고자 1726년에 세
운 것으로 앞면에는 한문으로 '청령포 금표'라 쓰여 있고, 뒤면에 '동서 300척, 남북으로 490
척과 이후에 진흙이 쌓여 생기는 곳 또한 금지한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이를 통해 단종 시
절에도 그런 제약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측면에 '숭정(崇禎) 99년'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어 1726년임을 알게 해준다.
비석은 300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세월의 거친 손때로 피부가 잔뜩 헝클어져 있다. 혹 단종의
사연에 비석이 크게 운 것은 아닐까?

청령포 산책은 '나룻터 → 단종어소 → 관음송 → 망향탑 → 노산대 → 금표비 → 나룻터' 순
으로 했는데, 그 반대로 해도 무관하며, 이들은 청령포의 주요 구성원들이니 꼭 살펴보기 바
란다.


▲  금표비 주변 소나무숲

▲  배를 타고 다시 속세로 나오다 (청령포 강변)

금표비를 둘러보고 강변으로 나오니 어느덧 17시 반이 되었다. 청령포의 빼어난 경치에 잠시
눈 호강을 누린 관광객들이 우루루 몰려나와 대기하고 있는 배에 올라탄다. 이 배가 오늘의
마지막 배는 아니며, 관람시간이 18시까지라 청령포에 단 1명도 남지 않을 때까지 운행한다.

배를 타고 잠시만에 청령포 나룻터에 도착, 졸고 있는 차량을 깨워 영월의 이웃 고을인 충북
단양으로 이동했다.
이렇게 하여 청령포 나들이는 막을 고하며, 끝으로 단종에게 사약을 전달했던 금부도사(禁府
都事) 왕방연(王邦衍)이 비통한 심정으로 청령포를 바라보며 지은 시를 소개한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 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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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에 이런 두멧골이?? 북악산 산주름 속에 깃든 백사실계곡, 부암동 능금마을, 평창동 소나무 (백사실약수터)

 


' 서울 도심 속의 두메산골을 거닐다 '
(부암동 능금마을, 백사실계곡, 북악산 북쪽 자락)


▲  부암동 능금마을(뒷골마을)

▲  은덕사에서 바라본 부암동

▲  평창동 소나무


 

여름 제국의 무더위 갑질이 극성이던 8월의 첫 무렵, 일행들과 북악산(백악산) 북쪽 자락
을 찾았다.
북악산 북쪽 자락(부암동, 평창동 지역)에는 나의 오랜 즐겨찾기 명소인 백석동천(白石洞
天, 백사실계곡)을 비롯해 능금마을(뒷골마을), 평창동(平倉洞) 소나무 등의 명소가 깃들
여져 있는데 여름 제국의 핍박도 피할 겸, 간만에 그들을 복습할 생각으로 북악산의 품을
찾은 것이다.

세검정초교 정류장에서 홍제천(弘濟川)을 건너 백석동천의 북쪽 관문인 현통사(玄通寺)와
백사폭포로 접근했다. 그곳을 지나면 백사골(백사실)의 속살로 들어서게 되는데 백사폭포
와 계곡 곳곳에 자리를 피고 피서 삼매에 빠진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띈다.
숲속에 진하게 묻힌 백석동천 중심부에 이르면 이곳의 상징인 별서(別墅)터가 있고, 그곳
을 지나 은행나무와 소나무숲을 지나면 백석동천 바위글씨가 모습을 비춘다. 그리고 여기
서 동쪽 산길로 들어서면 잘생긴 반석과 바위들이 늘어선 백사골 상류가 나타난다.

백석동천은 백사골, 백사실, 백사실계곡 등으로 널리 불리고 있는데, 정식 이름은 백사실
(백사실계곡)으로 백사골은 백사실계곡을 줄여 표현한 이름이다. 백석동천은 백사골의 엄
연한 일부로 백사폭포에서 백석동천 바위글씨와 백사골 상류 외나무다리 직전까지를 주로
일컫는다.


 

♠  백사골 상류 (능금마을로 가는 산길)

▲  백석동천의 남쪽 끝을 잡고 있는 외나무다리

백사골 상류의 너른 반석을 지나면 2012년에 지어진 외나무다리가 깊은 산골의 고적하고도 정
겨운 풍경을 자아낸다. 길쭉한 통나무 2개를 엮어서 놓은 것으로 겨우 1명이 지나다닐 정도로
좁은데 만약 이런 다리에서 원수를 만난다면 어찌해야 될까? 다리 길이도 짧고, 다리 밑 수심
도 매우 얕으며, 다리 곁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여울이 있어서 굳이 다리를 두고 싸울 필요
는 없을 것이다.


▲  가까이서 바라본 외나무다리

사람도 많고, 차량도 많고, 빌딩도 많고, 돌아다니는 돈도 많고, 그저 복잡하고 각박하게 보
이는 서울 도심 지척에 이런 다리가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신기할 따름이다. 백사골은 그 존
재 자체로도 예사롭지 않지만 캐면 캘수록 보물이 더 나올 것 같은 마르지 않는 샘이나 신세
계 같다.
백사폭포에서 시작된 백석동천은 이 외나무다리에서 사실상 끝이 나며 백사골은 능금마을 안
쪽까지 이어진다.


▲  백사골 상류의 평화로운 풍경
푸른 옷을 걸친 큰 나무가 하늘이 두려웠는지 아니면 겸손함 때문인지
곧게 자라나지 않고 허리를 푹 숙이고 있다.

▲  백사골 냇물이 잠시 쉬어가는 조그만 못

백사골에는 푸른 이끼 옷을 입은 바위들이 참 많다. 이끼가 마음 놓고 자라고 있다는 것은 여
기가 그만큼 깨끗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무성한 이끼를 만나는
것은 정말 힘들지, 백사골의 이런 청정함과 순수함이 앞으로도 영원했으면 좋겠다.


▲  온갖 채소와 과일이 숙성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백사골 밭두렁

▲  남쪽에서 본 백사골 밭두렁

백사골 밭두렁은 여러 채소와 과일이 자라나고 있다. 비닐하우스와 밭을 지키는 원두막 같은
것도 있어 마치 산간지방의 깊은 산골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라 백석동천에서 여러 번 놀
란 가슴을 또 놀라게 만든다.


▲  백사골 산길에서 만난 연분홍 코스모스의 위엄

수줍은 미소를 보이며 정처없는 나그네의 마음을 마구 들쑤시는 코스모스들~ 코스모스가 가을
꽃의 상징이다 보니 6~8월에 왠 코스모스가 피나 싶겠지만, 성질 급한 코스모스는 이미 6월부
터 꽃망울을 피운다. 그러니 전혀 이상할 것은 없다.


▲  완전 시골 둑방길을 거니는 기분 ~ 능금마을 백사골 둑방길

계곡 너머로 2012년에 지어진 커다란 농원용 비닐하우스가 있다. 도심에 있는 잇점을 살려서
요즘 잘나가는 허브 식물이나 과일 농장, 채소 농장, 농사 체험 현장 등으로 꾸리면 괜찮을
듯 싶다. 아무리 도심 속이라고 해도 이곳이 농촌인 것은 변함이 없다.


▲  능금마을에서 백석동천으로 내려가는 둑방길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두메산골마을
부암동 능금마을(뒷골마을)


▲  능금마을

부암동(付岩洞) 능금마을(뒷골마을)은 백사골 상류이자 북악산 북쪽 자락에 둥지를 튼 두멧골
이다. 행정구역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으로 주소는 분명 서울 종로구가 맞는데 분위기는
번잡한 도심을 제대로 비웃듯 첩첩한 산주름 속에 박힌 외딴 산골마을이라 그야말로 서울 도
심 속의 산골마을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능금나무가 많아 능금나무골, 능금마을이라 불렸는데, 뒷골마을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다. 이 이름은 북악산(백악산) 뒷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 북악산 앞쪽인 청
와대 일대를 앞골이라 불렀다. 예전에는 뒷골마을로 많이 불려 나도 입버릇처럼 그렇게 부르
고 있으나 요즘에는 능금마을로 크게 부르고 있으며, 마을에는 약 10여 가구에 50~60명 정도
의 주민이 살고 있다.

마을의 지형은 백사골이 흐르는 북쪽은 내리막이고, 서쪽과 남쪽, 동쪽은 모두 산으로 막혀있
다. 창의문(자하문)에서 넘어오는 유일한 포장길인 남쪽 골목길(백석동2길)은 속세살이처럼
각박한 고개를 넘어야 되는데, 지형이 이렇다보니 시내보다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며, 아랫
세상보다는 조금은 춥다.

마을 중앙부에는 창의문으로 나가는 골목길(백석동2길)의 종점이 있다. 그 종점이 마을 사람
들의 차량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으로 여기서 더 이상 차량은 들어갈 수 없다. 게다가
궁벽한 곳이다보니 쓰레기도 1주에 이틀 정도만 수거하러 온다.
주차장 북쪽에는 슬레이트 지붕 여러 채와 2층짜리 빌라 1동, 비닐하우스가 여럿 있으며, 동
쪽으로 백사골을 따라 여러 가옥과 밭, 과수원이 펼쳐져 있다. 북악산이 베푼 백사골은 마을
을 동쪽에서 북쪽으로 가로지르며 백석동천과 홍제천으로 흘러간다.

시내에서 마을로 들어가려면 백사골을 거치거나 창의문(자하문)에서 북악산 허리에 둘러진 부
암동 산복길(백석동길)을 이용해야 된다. 세검정초교에서 접근할 경우는 마을까지 30여 분 걸
리며, 창의문에서 갈 때는 산복길(백석동길)을 따라 20여 분 걸어야 되는데 중간에 고개를 하
나 넘어야 된다. 차량으로 갈 경우에는 창의문에서 부암동 산복길을 타거나 북악산길로 접근
하면 되며, 그 흔한 대중교통의 혜택도 미치지 않는 시내 속 벽지이다.

마을 사람들은 대체로 농사를 짓거나 시내로 출퇴근을 한다. 서울에서 공기가 1등급으로 맑고
청정한 계곡물이 흐르니 조촐하게 밭농사나 과수원을 하기에 적당하다. 백사골의 깨끗한 물을
먹고 자란 농작물(오이나 배추, 상추 등)은 밭과 비닐하우스에서 주민들의 갖은 정성을 거쳐
시내로 팔려 나간다.

이곳이 인구 1,000만을 지닌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 도심에 있음에도 개발의 칼질을 굴복시
키며 두메산골로 남을 수 있던 것은 푸른 기와집과 국무총리공관, 수방사 군부대를 비롯한 국
가의 예민한 장소를 품은 북악산 자락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북악산 주변은 개발제한구역
및 군사보호구역으로 상당수 묶여있다. 게다가 인왕산(仁王山)과 더불어 조선시대부터 서울을
지키는 전략적인 곳으로 군부대가 주변에 있으며, 북악산(백악산) 한양도성 능선을 따라 철책
과 초소가 줄지어 있다. 상황이 이러니 천박한 개발의 칼질도 무릎을 끓은 것이다.
북악산 북쪽 자락에 안긴 부암동과 성북동(城北洞)에 키다리 건물이 없는 것도, 녹지 비율이
두드러지게 높은 것도, 전원(田園) 분위기를 물씬 간직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북
악산과 인왕산의 성격이 180도 확 달라지거나 예민한 국가 시설들을 다른 데로 이전하지 않는
이상은 능금마을은 서울 도심 속의 두멧골로 영원히 남을 것이며, 쭉 그리 되기를 염원해 본
다.
물론 마을 사람들이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집 보수나 신축 등은 어느 정도 보장해줘야 될 것
이며, 북악산 나들이나 답사/출사를 이유로 그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동은 삼가해야 될 것이
다. 어차피 도심 속의 두멧골이란 상징성 외에는 명소라 할 만한 것은 없다. 그냥 지방 시골
에 널린 시골마을과 비슷하며 백석동천과 부암동 답사의 후식용으로 삼으면 적당하다.


▲  능금마을 북쪽 구역 (빌라 뒷쪽)

능금마을은 여러 번 와봤지만 딱히 명승지까지는 아니라서 제대로 둘러본 적은 없다. 하여 이
번에 제대로 마을의 속살을 살펴보기로 했다. 숨겨진 속살을 발견하고 보는 재미만큼 쏠쏠한
것은 없다.

주차장에서 빌라가 보이는 북쪽 골목길을 오르면 조금은 낡아보이는 산동네 기와집과 번듯하
게 지은 2층 빌라가 나란히 나타나 마을의 어제와 오늘을 대변하는 듯 하다. 작지만 빌라까지
들어섰고 근래에 새로 몸단장을 한 주택이 여럿 있을 정도면 개발 제한도 어느 정도 풀린 모
양이다.
빌라의 옆구리를 지나면 그나마 포장된 길은 끝나고 흙길로 변신하는데, 마치 백두대간 깊숙
한 곳에 숨겨진 화전민(火田民) 마을에 들어선 기분이며 밭두렁과 수풀이 우거진 그 길의 끝
에는 전원주택처럼 생긴 아담한 집이 있다.

다시 주차장으로 나와서 백사골을 따라 이어진 동쪽 골목길로 들어선다. 이 길도 좁다보니 자
전거나 오토바이 등만 겨우 바퀴를 굴릴 수 있는데, 동쪽 골목길은 세월을 먹은 집들이 여럿
있으며, 밭과 과수원이 제법 펼쳐져 목가적(牧歌的)인 풍경을 연출한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는 전원주택 스타일의 정원 넓은 집이 있다.

동쪽 골목길 중간에는 북악산길로 이어지는 샛길이 있다. 따로 이정표는 없지만 조금은 가파
르게 동쪽으로 이어진 길이 바로 그 길이다.

* 능금마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산50~69


▲  경작물이 무성하게 익어가는 동쪽 골목길

▲  백사골과 나란히 한 능금마을 동쪽 골목길
문명의 혜택이 전혀 들어오지 못할 것 같은 이 산골에도 전기와 전화는
모두 들어온다.

▲  능금마을 동쪽 골목길 밭두렁

▲  경작물이 익어가는 동쪽 골목길


▲  부암동에서 능금마을로 인도하는 각박한 고갯길
길의 경사가 각박해 내려가기는 쉬워도 오르는 건 조금 힘들다. (그래도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음)


 

♠  백사실약수터와 여러 돌탑들

▲  외나무다리 주변에 펼쳐진 하얀 피부의 반석
저 반석을 내려가면 계곡 오른쪽으로 백사실약수터로 인도하는 산길이 나온다.


능금마을을 둘러보고 다시 백석동천으로 내려가 외나무다리를 지나면 윗 사진의 넓은 반석이
나온다. 반석(磐石)을 지나면 바로 계곡 건너로 넘어가는 부분이 있는데 그곳을 건너면 백사
실약수터를 알리는 조그만 이정표가 조용히 손짓한다.
백석동천(백사실)을 15년 넘게 들락거렸지만 백사실약수터는 한참의 세월이 흐른 이후에야 인
연을 지은 곳이다. 별서터와 바위글씨들, 능금마을이 전부인줄 알고 등잔 밑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탓으로 무슨 일이든 방심은 정말 금물이다.


▲  백사골 돌탑

백사실약수터로 인도하는 산길을 30초 정도 가면 산등성이에 수북하게 쌓인 돌탑이 마중을 한
다. 이곳을 지나던 중생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은 돌탑으로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악신
앙(山岳信仰)의 현장이다.
백석동천 별서터가 지배층의 산물이라면 이 탑은 백성들의 한 줄기 희망과 애환이 만들어낸
산물로 별서터는 터만 남은 채, 성장이 멈추었지만 이 탑은 지금도 지나가는 이들에 의해 조
금씩 성장하고 있다.


▲  정면에서 바라본 돌탑 가족들 (얼핏 보면 3기처럼 보이나 4기임)

▲  옆에서 본 돌탑 가족

백석동천에서 백사실약수터로 오르는 산길에는 돌탑이 유난히도 많다. 앞 돌탑에서 3분 정도
가면 돌탑 4기를 만나게 되는데, (조금 후미진 곳에 있음) 이중 1기는 나머지 3기를 다 합쳐
도 한참이나 모자를 정도로 유별나게 크다. 그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으나 앞 돌탑과
달리 규칙적인 모습이고 그리 묵은 티가 보이지 않아 근래에 백사실 수식용으로 닦여진 것으
로 보인다.

돌탑을 만들려면 서로 비슷한 덩치로 만들 것이지 하나만 지나치게 크고 나머지는 완전 쥐꼬
리만한 크기라 마치 어미와 꼬마 3형제를 보는 듯 하다. 꼬마 탑도 어엿한 돌탑을 이루는 어
미탑처럼 장차 큰 탑으로 성장하길 기대해본다.


▲  백사실약수터로 오르는 적막한 산길

▲  소나무 산길 (백사실약수터 방향)
길을 가다가 뜬금없이 산신이나 신선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선녀 누님이
갑자기 나타나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첩첩한 산주름의 산길이다.

▲  백사실약수터와 북악산길로 인도하는 산길

백사실약수터는 백사골의 거의 유일한 약수터이자 백사골의 오랜 은자(隱者)로 능금마을 뒷쪽
(북쪽)에 숨겨져 있다. 북악산이 속세에 베푼 소중한 샘터로 백사골의 청정한 기운을 머금은
탓인지 수질도 청정하고 맛도 좀 달콤한 기분이다.
벽돌을 다진 약수터 주변은 산뜻하게 정비되어 두 다리를 쉴 수 있는 의자와 간단한 운동시설
이 닦여져 있다. 약수터 뒷쪽에는 나무 기둥 난간이 둘러진 공간이 있는데, 그 안에 여러 식
물이 담겨져 있어 마치 신선의 묘약(妙藥)이나 신선초(神仙草)가 자라는 듯한 기분이다. 그리
고 약수터 동남쪽으로 산길이 나 있는데, 그 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북악산길이 마중을 한다.


▲  백사실약수터 인근 바위에 심어진 조촐한 돌탑
이 돌탑도 앞에 돌탑 가족과 마찬가지로 근래에 조성된 것 같다. 그 모습이
산이나 계곡에 널린 일반적인 산악신앙의 돌탑이 아닌 조그만
봉수대(烽燧臺)처럼 보인다.


 

♠  북악산 백사실 동쪽 능선

▲  백사실 동쪽 능선길

백사실 동쪽 능선은 북악산길에서 시작되어 백사실약수터, 은덕사를 지나 북쪽으로 KT기지국,
평창동조망점까지 내려가듯 이어진다. 백사실의 동쪽 지붕으로 중간중간에 현통사와 백사골(
백석동천), 평창동으로 내려가는 산길을 늘어뜨렸으며, 소나무를 비롯한 갖은 나무들이 삼삼
하게 우거져 있다.
백사골에 왔다면 별서터와 계곡만 살피지 말고 백사실약수터와 1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진 백사
골 동쪽 능선도 한번 거닐기 바란다.


▲  소나무가 우거진 동쪽 능선에 걸터앉은 은덕사(恩德寺)

백사실 동쪽 능선을 걷다 보면 왼쪽에 건물 하나가 손짓한다. 소나무숲을 병풍으로 삼아 서쪽
을 바라보고 있는 그는 은덕사란 조그만 절로 건물 1동이 전부이다. 그러다보니 하나의 건물
에 법당(法堂)과 요사(寮舍), 종무소의 역할까지 싹 담겨져 있는데, 절집에 흔한 기와집이 아
닌 별장이나 전원주택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법당 앞에는 잔디가 입혀진 뜨락이 있으며, 이곳에서 가꾸는 여러 농작물이 한참 숙성의 과정
을 밟고 있다. 또한 절 앞에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는 꼭 가보도록 하자. 여기서 보는 조망
맛이 그런데로 일품이다.


▲  은덕사 앞 바위에서 굽어본 부암동

은덕사 앞 바위에 올라서면 산주름에 묻힌 부암동 북부와 홍지동이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다
만 자하문터널과 하림각이 있는 부암동 남부는 백사실 서쪽 능선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저 너머에 멋드러진 바위를 여럿 품고 있는 산은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이자 우리나라
호랑이의 성지(聖地)였던 인왕산으로 나와 비슷한 위치에서 바라보인다. 그리고 바로 밑에 보
이는 기와집들은 백사폭포 위에 자리한 현통사로 백사폭포의 우렁찬 폭포수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 두 귀를 멍하게 한다. 은덕사 바위에서 현통사로 바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는데, 경사가
다소 각박하므로 조심해야 된다.


▲  솔내음이 진동하는 백사실 동쪽 능선길

▲  평창동 조망점 바위

백사실 동쪽 능선의 북쪽 끝에는 KT기지국이 있다. 그곳에 이르기 전에 오른쪽으로 산길이 하
나 나있는데, 바위가 그 길의 끝을 장식하고 있다. (더 이상 내려가는 길도 없음)
이 바위는 딱히 이름은 없으나 백사골에 있는 안내도에는 단순히 조망점이라고 나온다. 북쪽
을 바라보고 선 이 바위에 올라서면 평창동과 북한산(삼각산) 남쪽 산줄기가 시야에 들어오는
데 본글에서는 평창동이 보이는 곳이란 뜻에서 평창동 조망점이라 칭하도록 하겠다.


▲  평창동 조망점에서 바라본 천하 - 왜 이리 옥의 때가 많은지..?

평창동 조망점에서 훤히 바라보이는 평창동은 성북동(城北洞)과 한남동(漢南洞), 장충동(奬忠
洞)과 더불어 서울의 대표적인 부자 동네이다. 강남이 부자라고는 하지만 이들 동네 앞에서는
감히 이름도 꺼내지 못하는 그들의 후배에 불과하다.
평창동은 북한산과 북악산 사이에 자리한 산악 지대로 나름 명당(明堂) 자리로 명성이 자자하
다. 게다가 경관도 수려하여 해방 이후 돈 꽤나 만지던 이들이 조금씩 들어와 살더니만 이제
는 완전 졸부들의 씁쓸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물론 서민들도 적지 않게 살고 있음)

성북동이 우리나라의 0.1% 부자들이 산다고 하지만 평창동도 그에 못지 않다. 완전 산동네로
차량이 없으면 왕래도 힘든 곳이지만 명당의 기운과 수려한 경승지의 덕을 보고자 졸부들이
가득 밀려와 북한산을 건방지게 압박했다. 그래서 산자락 곳곳에 무식하게 큰 저택과 빌라를
짓고 자연을 훼손하면서 북한산 남쪽 경관은 적지않게 손상되고 말았다. 다행히 평창동 윗쪽
이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으로 꽁꽁 묶여있어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북한산성 밑까지 졸부
들이 싹 밀어버릴 뻔했다.

조망점에서 보이는 천하는 정말 1폭의 그림이 분명한데, 옥의 티가 너무 많다. 내게 저 장면
을 손질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졸부들의 집을 지우개로 다 지우고 그들로 파괴된 숲과 계곡
을 그려 자연의 모습으로 채색하고 싶다.


 

♠  평창동에 숨겨진 오래된 소나무

▲  평창동 소나무 밑 오솔길 (평창동 방향)

평창동 조망점에서 다시 은덕사 쪽으로 나오면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이 있다. 여기서 직진(남
쪽)하면 백사실 동쪽 능선을 쭉 타게 되고, 오른쪽(서쪽)은 현통사, 왼쪽(동쪽)은 평창동으로
이어진다. 나는 평창동 소나무를 보고자 평창동 방향을 택했다.

갈림길에서 동쪽으로 2분 정도 내려가면 평탄한 곳이 나타나면서 1차선 크기의 비포장 오솔길
이 펼쳐진다. 이 길은 묘각사 입구까지 이어지는데, 햇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삼삼한 숲속
에 포장도 씌우지 않은 흙길이라 그냥 지나치기 아쉬울 정도로 매우 정겹기만 하다. 그 길 오
른쪽에는 3~4m 높이로 닦인 석축이 길게 이어져 있어 옛 산성(山城)이나 건물터 유적이 아닐
까 싶은 기대감을 안긴다. 허나 그 석축은 산성도 아니고 옛 건물터 등의 문화유적도 아니다.
자세한 사연까지는 모르겠지만 군부대나 체육 시설을 만들면서 넓게 땅을 다지고 석축을 쌓은
것으로 지금은 배드민턴장과 쉼터가 있어 동네 주민들의 조촐한 쉼터 역할을 한다. 바로 저곳
에 오래된 소나무가 깃들여져 있다.


▲  평창동 소나무 밑 오솔길 (백사실 능선, 은덕사 방향)

평창동 소나무를 보고자 석축 서쪽 끝에서 접근을 시도했으나 철책의 위엄 앞에 돌아서고 말
았다. 석축 밑 오솔길을 거닐면 중간에 그 소나무가 보이나 주변 나무들이 시선을 방해해 제
대로 사진에 담을 수가 없다.
석축 윗부분이 사유지라 출입이 통제된 것이라 여겨 살짝 들어갈 길을 찾던 중, 석축 동쪽 끝
에서 그곳으로 인도하는 길이 슬쩍 손을 내민다. 서쪽 끝과 달리 방해물도 없어 그 길을 오르
니 숲에 둘러싸인 제법 너른 터가 나온다. 


▲  석축 윗쪽에 넓게 닦여진 배드민턴장

▲  평창동 소나무 - 서울시 보호수 1-17호

북악산 북쪽 자락에 숨겨진 평창동 소나무는 280년 정도 묵은 늙은 나무이다. 그의 신상이 적
힌 안내문에는 보호수 지정일 기준으로 230년이라고 나와있는데, 그가 보호수로 지정된 것은
1968년 7월 3일이다. 그 이후 50여 년이 무심하게 흘렀으니 약 280~290년 정도로 보면 된다.
무한리필로 쏟아지는 세월을 든든한 양분으로 삼아 높이 13m, 둘레 2.24m의 어엿하고 기품 넘
치는 나무로 성장했는데, 그의 생김새가 속리산(俗離山)에 있는 정2품송(正二品松)과 좀 비슷
하여 그리 낯설지는 않은 모습이다.

서울에서 100년 이상 묵은 나무 중, 소나무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보호수나 문화재로 지정
된 것은 이곳과 여기서 가까운 석파정(石坡亭) 소나무 정도이다. 그중에서도 평창동 소나무가
나이가 제일 많아 서울에서 가장 늙은 소나무라 봐도 무리는 없다.
이 나무를 누가 심었고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전해오는 것은 없지만 백사실로 가는 길목에 자
리해 있어 그곳을 찾거나 백사실에 머물던 사람이 심은 것이 아닐까 싶다.


▲  서쪽에서 바라본 평창동 소나무의 위엄

하늘에 대한 경외심 때문일까?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40도 정도 고개를 숙였다. 벼도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고 이 나무 역시 나이를 먹으면서 그렇게 고개를 꺾은 모양이다. 그만큼 숙성될
수록 겸손을 차리라는 대자연 형님의 심오한 뜻이 담긴 것은 아닐까 싶다. 자연물은 그 뜻을
받들고 잘 지키는데, 동물과 신(神)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며 온갖 민폐를 아끼지
않는 인간들은 왜 단순한 그것을 지키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 인간은 신이 아닌 늘 애매한 존
재로 남아있는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고개를 수그린 소나무의 자태가 곧게 서있는 모습보다는 기품과 운치가 더 진해
보이는 것 같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일 줄 모르는 사람보다는 자신을 낮추며 겸손을
보이는 사람이 더 값어치가 있어 보인다.
평창동 소나무를 끝으로 한여름 북악산 북쪽 자락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평창동 소나무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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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20년 8월 1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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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남쪽 변두리, 대촌동~칠석동 둘러보기 (괘고정수, 고원희가옥, 고싸움놀이, 칠석동은행나무, 부용정)

 


~~~ 봄맞이 광주 대촌동, 칠석동 나들이 ~~~


▲  칠석동 은행나무


 

울 제국이 드디어 무너지고 봄이 천하 평정에 열을 올리던 3월의 끝 무렵, 남도의 중심
지 광주(光州)를 찾았다. 광주 지인의 초청으로 간만에 가게 되었는데, 그는 자연과 문화
유산에 두루 정통하고 숲과 자연을 강의하는 교수로 꽤 저명한 분이다. 그런 이의 초청을
받았으니 본인 입장에서는 그저 영광스러울 뿐이다.

아침 일찍 호남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4시간 여를 총알처럼 달려 광주역에 발을 내린다.
거기서 지인분 부부를 만나 전남대와 중외공원으로 이동하여 남도 매화(梅花)와 산수유를
구경하고 전남대 북쪽에서 남도 정식으로 며칠을 굶어도 끄떡없을 정도로 가득 배를 채웠
다. 그렇게 점심을 먹자 그들은 광주 답사를 시켜주겠다며 내가 희망하는 곳의 하나인 대
촌동으로 흔쾌히 인도해주었다.

대촌동(大村洞)은 광주 남구(南區)의 일원으로 도심과 가깝지만 동네 전체가 전형적인 시
골로 평야 등의 경작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또한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아가던 시절부터
많은 문인들이 집이나 정자를 짓고 살면서 포충사와 괘고정수, 양과동정, 고씨삼강문, 칠
석동 은행나무, 부용정, 고원희가옥 등 고색의 명소를 무수히 간직하고 있다.
이중 제일 먼저 포충사를 찾았는데 이곳은 별도의 글에서 소개하도록 하겠으며, 여기서는
괘고정수와 고씨삼강문, 고원희가옥, 칠석동 은행나무, 부용정 등을 다루도록 하겠다.


 

♠  광산이씨 이선제(李先齊)의 후손과 생사고락을 같이한 600년 묵은
왕버들, 괘고정수(掛鼓亭樹) - 광주 지방기념물 24호

충사 북쪽 만산마을 입구에는 괘고정수라 불리는 거대한 나무가 있다. 남부 지방은 산수유
와 매화꽃, 벚꽃 등이 이미 만발을 넘어서고 있는데, 나무들은 아직도 다 쓰러져가는 겨울의
눈치를 보며 벌거숭이 모습으로 완연한 봄을 열망한다.
처음에는 느티나무나 은행나무인줄 알았는데 안내문을 보니 왕버들이라고 한다. 버들 중의 왕
이라는 왕버들이 저렇게까지 자랄 수가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인데, 잎이 어느 정도 붙으면
나무 구분이 가능하나 한결같이 벌거숭이 상태에서는 일반인들은 이게 느티나무인지 버들인지
구분이 쉽지 않다.

이 왕버들은 조선 초기 문신으로 광주 원산동이 고향인 이선제(1389~1454)가 심었다고 전한다
. 나무의 나이는 550~600년 정도로 여겨지며, 높이는 15.4m, 가슴 높이 둘레가 1.7m, 수관(樹
冠) 너비는 13m 정도이다. 
이선제는 광산이씨 집안으로 자는 가부(家父), 호는 필문(
畢門)이다. 권근(權近)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419년
증광시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1423년 고려사(高麗史)를 개수할 때 사관(
史官)으로서 정도전(鄭道傳) 등이 편찬한 고려사가 당시 이색(李穡), 이인복(李仁復)의 금경
록(金鏡錄)를 바탕으로 작성해 사실과 다른 것이 많음을 지적하며 원전(原典)을 따르자고 주
장했다.
1431년 집현전 부교리로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이 되어 태종실록 편찬에 참여했고, 병조참의
(兵曹參議)와 강원도관찰사, 예조참의 등을 거쳐 1448년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이후 정창손(鄭昌孫), 김종서(金宗瑞) 등과 '고려사'를 개찬(改撰)했으며 예문관(藝文
館) 제학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선제는 이 나무를 심으면서 나무가 죽으면 가문도 망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과거에 붙으면 이 나무에 북을 걸고 축하 잔치를 벌였는데, 그 연유로 괘고정
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곳에 괘고정이란 정자(亭子)가 있었던 것은 아니며,
그의 이름이 괘고정이다. (나중에 혼란을 막고자 나무를 뜻하는 '樹'를 붙임)


1589년 이선제의 5대손인
이발(李潑)이 정여립(鄭汝立) 사건에 연루되어 본인과 가족들이 처
단되자 나무가 비실비실 말라죽기 시작했다고 하며, 그때 이선제의 관직도 삭탈당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자 이발의 억울함이 밝혀졌고, 나무도 그 한을 풀었는지 이발이 죽고 300
여 년이 흐른 19세기 후반에 다시금 정신을 차리며 살아났다고 전한다. 이렇게 광신이씨 집안
과 생사고락을 같이한 나무로 그 집안에서 애지중지 관리하고 있으며, 여기서 서북쪽으로 조
금 들어가면 이선제의 부조묘(不祖廟)와 묘역이 있어 이 일대가 이선제 집안의 성지(聖地)나
다름이 없다.

* 소재지 :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579-3


▲  옆에서 바라본 괘고정수의 위엄

▲  슬슬 기지개를 켜는 원산들
영산강의 지류인 대촌천의 물을 먹으며 올해도 풍년 예감을 꿈꾼다.


 

♠  고경명(高敬命) 집안의 충절을 기리고자 세운
고씨삼강문(高氏三綱門) - 광주 지방기념물 12호

제봉산(霽俸山, 164m) 서쪽에 자리한 압촌동(鴨村洞)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나 제대
로 싸우지도 못하고 패한 제봉 고경명(霽俸 高敬命, 1533~1592)이 살던 곳이다. 그의 집터에
는 그 후손이 왜정(倭政) 초기에 지은 기와집(고원희 가옥)이 있으며, 마을 입구에는 고경명
일가의 충절을 기리고자 나라에서 세운 고씨삼강문이 자리한다.
또한 마을을 서쪽에 품은 제봉산은 고경명의 호에서 비롯된 것으로 고경명이 어린 시절 뛰어
다니던 산이라 동네와 산 일대에 온통 고경명의 체취가 진동을 한다. 근래에는 고원희 가옥의
일부를 손질해 닦은 광주콩종합센터가 호남 지역 콩의 성지(聖地)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으며,
마을 북쪽에는 광주국제영어마을이 들어서 이 땅의 아주 몹쓸 전염병인 영어 사대주의(事大主
義)에 쓸데없이 일조하고 있다.

압촌제(鴨村堤)를 바라보며 자리한 고씨삼강문은 이 땅에 흔한 정려각의 하나로 고경명과 그
의 일가의 충절을 뼛속 깊이 기리고자 만든 것이다. 1충(忠), 3효(孝), 2열(烈), 1절의(節義)
등 7명의 정려(旌閭)가 봉안되어 있는데, 여기서 1충은 고경명, 3효는 그의 아들인 고종후(高
從厚), 고인후(高因厚), 손자 고부금(高傅金)이며, 2열은 고경명의 딸인 노상룡(盧尙龍)의 부
인, 질부인 고거후(高居厚)의 처 광산정씨(光山鄭氏), 1절은 고경명의 동생인 고경형(高敬兄)
이다.

고경명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남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북쪽으로 가다가 충남 금산
(錦山)에서 무모한 전술로 의병을 다 말아먹고 전사했다. 그의 맏아들인 고인후는 금산 전투
에서 살아남아 귀향했으며, 1593년 다시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晉州城) 전투에 참여했으나 성
이 함락되자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
2째 아들인 고종후는 금산에서 아버지와 함께 전사했으며, 고경명의 손자인 고부금은 효자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2열에 해당되는 고경명의 딸과 고거후의 처 광산정씨는 정유재란(丁酉再
亂) 때 왜군에게 잡히자 자결했으며, 1절에 해당되는 고경형은 진주성 싸움 때 성이 함락되자
조카인 고인후와 함께 남강에 뛰어들었다.

이들이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받은 것은 1595년부터로 고경명과 고경형 형제, 고종후/인후 형
제가 제일 먼저 정려되었고, 고경명의 딸이자 노상룡의 처는 1597년, 고부금은 1655년, 고거
후의 처 광산정씨는 1844년에 정려되어 바로 그해에 정려각이 지어졌다.
정려각은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사방에 홍살을 설치해 내부를 지키고 있고,
앞뒤 2열로 7명의 정려 현판을 달았다. 건물 밖은 돌담을 둘렀고, 바로 옆에는 고씨 집안의
제각(祭閣)인 추원각(追遠閣)이 자리해 그 집안의 자랑이자 보물인 삼강문을 지킨다.

* 고씨삼강문 소재지 -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 산14 (압촌길66)

▲  태극마크가 그려진 고씨삼강문 정문

▲  조촐한 모습의 고씨삼강문

▲  고경형의 정려

▲  고부금의 정려

▲  고인후의 정려

▲  고종후의 정려

▲  고경명의 딸이자 노상룡의 처 정려

▲  고거후의 처 광산정씨의 정려


▲  고씨삼강문의 주인으로 추증 관직이 제일 많은 고경명 정려

▲  고씨삼강문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추원각
장흥고씨 집안의 제각(祭閣)이다.

▲  평화로운 전원 분위기의 압촌동 - 고씨삼강문과 고원희가옥, 제봉산,
광주콩종합센터 등의 명소를 간직하고 있는 시골 마을이다.

▲  고원희 가옥(광주 지방문화재자료 8호) 외경

고씨삼강문에서 동쪽으로 2분 남짓 들어가면 그 골목의 끝에 고원희가옥이란 기와집이 소나무
숲을 병풍으로 두르며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이 집은 이름 그대로 고원희란 사람의 주택으로 고경명의 옛 집터이기도 하다. 그의 후손들은
계속 이곳에 살았는데, 옛집이 낡아서 무너질 지경에 이르자 1917년에 고원희의 아버지인 고
종석(高琮錫)이 지금의 집을 지으면서 300년 넘게 숙성된 고색의 때는 싹 날라가고 만다. 허
나 사람도 살아야 되니 그건 어쩔 도리가 없는 것 같다. 비록 집은 새로 갈았으나 고경명이
살던 옛 터전을 계속 지키고 있으니 그것으로도 의미는 충분하다.

새집 이전에는 이 지방의 유서 깊은 고택(古宅)답게 건물이 꽤 많았으나 지금은 대문과 사랑
채, 안채, 곳간채, 사당 등이 남아있어 규모가 많이 줄어들었다. 게다가 2012년 가옥의 서쪽
부분을 광주광역시와 저절로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 같이 만든 광주콩종합센터에 떼어주면서 면
적이 더 줄었다.

현재 집은 고원희씨 일가가 살고 있다. 결과는 완전 시궁창이나 임진왜란 때 호남 최초의 의
병이란 타이틀을 쥐고 있는 고경명의 후손이지만 왜정과 해방, 현대(現代)라는 임진왜란보다
훨씬 험난한 세월의 흐름을 거치면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왜정 때는 집안에서 뜻밖에 친
일파가 나와 형제 간의 다툼이 생겼고 해방 이후에는 우익과 좌익의 대립으로 집안이 쪼개졌
다.
지금까지도 집안은 안정되지 못하여 다른 일가들은 모두 외지로 나가고 고원희 일가만 선조의
터전을 지키고 있다. 가옥 내부를 둘러보려면 그에게 허가를 받아야 되나 우리는 굳이 내부는
들어가지 않았다.

▲  고원희가옥 돌담과 대문

▲  광주콩종합센터에서 바라본 고원희가옥

집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와 곳간채가 나타난다. 대문 옆에는 차량을 위해 담장을 트고 완전
히 개방된 문을 냈으며, 안마당을 사이에 두며 안채가 있고 그 오른쪽에 부조묘(不祧廟)라 불
리는 사당을 두었다. 현재 가옥은 1917년에 싹 갈았지만 부조묘는 이전 것을 그대로 쓰고 있
어 여기서 그나마 오래된 건물인데, 고경명과 고종후, 고인후를 봉안하고 있다.
여기서 부조묘란 나라의 공이 있는 사람의 신위(神位)를 봉안한 특별한 사당으로 보통 조상의
신위는 4대가 지나면 무조건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된다. 허나 부조묘는 그럴 필요가 없는 불
천지위(不遷之位)의 특권을 누린다. 이런 사당은 제왕의 허가가 반드시 필요하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17년에 지어졌음을 알리는 상량문(上樑文)
이 있다. 근데 골 때리는 것은 조성 시기에 대한 표현인데, '숭정기원후 오갑정사 윤이월초
구일(崇 禎紀元後 五甲丁巳 閏二月初 九日)'이라 쓰여있다. 여기서 숭정은 명나라의 마지막
제왕인 의종<毅宗, 숭정제(崇禎帝)>의 연호이다.
명(明)에 대한 지극한 사대주의를 벌이며 아시아의 호구 약소국으로 온갖 개망신을 당하며 살
아온 조선, 단군(檀君)이 세운 조선(고조선)은 대륙까지 호령했던 큰 나라였으나 1392년에 세
워진 조선은 그 반대였다.
1644년 명나라가 망한 이후, 청나라 제왕의 연호 대신 숭정이란 연호를 계속 우려먹으며 명나
라를 쓸데없이 그리워했는데, 심지어 17세기 중반 명나라의 재건을 꿈꾸며 중원대륙 남부에서
난을 일으키다 청나라에게 개털린 남명(南明)의 제왕 영력(永歷, 1646년부터 시작됨)의 연호
까지 썼다. 물론 청나라에 반감도 명과 남명의 연호를 쓰게 하는데 한몫했다.

고종이 황제 위에 오른 1897년 이후로는 더 이상 숭정이란 이름을 쓰지 않은 줄 알았더만 왜
정 때도 그 쾌쾌묵은 숭정으로 연대(年代)를 표시한 것이다. 개화기 이후 양력(陽曆)이 들어
와 그 아니꼬운 왜왕의 연호 대신 양력이나 육십갑자(六十甲子)로 표시하면 될 것을 어찌하여
그 염병할 명나라 사대주의의 더러운 산물인 숭정 기원후~~~를 써야 했는가..? 집을 새로 지
었다는 고종석도 명나라에 대한 꼴통 사대주의가 팽배했던 조선 후기의 그 흔한 우둔한 유생
의 하나였던 모양이다. 아니 왜정 때까지 명나라의 썩어빠진 연호를 꼭 써야 했는가? 그것을
들으니 이 집에 대한 정덜미가 싹 떨어지다 못해 칵~ 침이 뱉고 싶어진다.

* 고원희가옥 소재지 :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 99 (압촌1길 12)

▲  차량 출입문에서 바라본 가옥 내부

▲  고원희가옥 앞쪽 돌담길과 정자


▲  담장 너머로 바라본 부조묘
고경명과 고종후, 고인후의 위패가 봉안된 사당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단청을 곱게 입혀서 그런지 새 건물처럼 보인다.

▲  고원희가옥 뒤쪽 제봉산 소나무숲

고원희가옥 뒤쪽에는 소나무숲이 우거져 솔내음을 진하게 우려내고 있다. 이곳에는 의자와 평
상이 여럿 설치되어 있고 나무 그늘이 햇살을 막아주고 있어 소풍이나 나들이 쉼터로도 아주
좋은 곳인데, 유치원과 초등학생들의 숲/자연 학습 공간으로도 쓰이고 있으며, 여기서 산길을
따라 제봉산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다.


▲  바람의 차디찬 소리만이 살포시 적막을 깨뜨리는 소나무숲

▲  고원희가옥 앞쪽에 자리한 연못

▲  광주콩종합센터 정문

고원희가옥 앞쪽에는 근래 지어진 네모난 정자와 키가 큰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다. 정자 옆에
는 동그란 연못이 봄을 품고 있는데, 이 연못은 가옥을 새롭게 갈던 1917년 이후에 판 거라고
한다. 연못이긴 하나 수심이 얕으며, 개구리들이 늦잠을 자고 있는지 보이지는 않는다.

여기서 연못 너머 북쪽을 보면 고원희가옥과는 조금 다른 기와집의 무리와 장독의 행렬이 두
눈에 들어올 것이다. 이들은 2011년 9월에 결성된 '저절로소비자생활협동조합'에서 광주 남구
청과 고원희 일가의 도움을 받아서 2012년 7월에 문을 연 광주콩종합센터이다. 이곳도 엄연히
고원희가옥에 딸린 토지였는데, 가옥 집주인이 흔쾌히 땅을 제공하여 기존의 기와집을 손질해
콩센터가 들어선 것이다.

이곳은 이름 그대로 콩과 그를 빚어서 만든 장류에 모든 것을 담고 있는데, 장류(된장, 간장)
제조 및 보관/숙성, 판매와 장독대 설치 및 제공, 콩재배와 가공 관련 교육과 훈련, 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그 외에 두부만들기, 천연염색체험, 인절미/화전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도 있
어 가족 단위나 교육을 겯드린 어린이 소풍/견학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센터 동쪽에는 요즘에는 보기가 힘든 장독대들이 하나도 아니고 수백 개가 길게 늘어서 정겨
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는데, 다들 콩 장류나 음식들이 담겨져 있어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다.
광주콩종합센터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해당 홈페이지로 이동됨)


▲  광주콩종합센터 장독대의 행렬 ▼


 

♠  칠석동(漆石洞)에서 만난 명소들

▲  부용정(芙蓉亭) - 광주 지방문화재자료 13호

대촌동 남쪽에 자리한 칠석동은 옻돌마을이라 불린다. 이 땅에 흔한 시골 마을의 하나로 이곳
에는 무려 3가지의 오래된 명물이 전하고 있다. 그 명물이란 은행나무와 부용정, 고싸움놀이
로 이중 은행나무는 광주에서 가장 늙은 나무이며, 부용정은 광주에서 가장 먼저 향약이 시행
된 곳이다. 그리고 고싸움은 남도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로 명성이 자자하다.
이들 명소는 하칠석마을에 있는 고싸움놀이테마파크(공원)에 몰려있어 속 편하게 한 덩어리로
둘러보면 되며, 부용정과 은행나무 외에 고싸움놀이와 관련된 고싸움놀이전수관, 고싸움놀이
4D영상체험관 등이 있어 남도 고싸움의 성지(聖地) 역할도 겸한다.


▲  옆에서 본 부용정과 부용정석비

고싸움놀이테마파크(이하 고싸움공원) 동쪽에 자리한 부용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
붕 건물이다. 보통 오래된 정자들이 팔작지붕을 취한데 반해 여기는 맞배지붕을 지녀 정자보
다는 누각이나 당(堂)을 칭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은 모습인데, 특이하게도 공포 덩어리가
없는 민도리식으로 12개의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다. 2단의 석축 위에 자리해 자못 웅장해
보이며, 내부를 가리는 벽이 없어 사방이 뻥 뚫려있다.

이 정자는 1418년에 이 동네 출신인 김문발(金文發, 1359∼1418)이 세웠다. 그는 광산(광주)
김씨로 증참판을 지낸 김거안(金巨安)의 아들이며, 호는 부용이다. 그래서 정자 이름도 부용
정이 되었다.
고려 우왕 때는 도평의녹사(都評議錄事)를 지냈는데, 전라도에 침투한 왜구를 격퇴한 공으로
돌산만호(突山萬戶)가 되었으며, 조선으로 세상이 바뀌면서 1394년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
使) 김빈길(金賓吉), 만호 김윤검(金允劒) 등과 왜선 3척을 잡은 공으로 태조 이성계에게 활
과 화살, 은기(銀器) 등을 하사 받았다. 1406년에는 전라도수군단련사(全羅道水軍團撫使)로서
왜선 1척을 잡았고, 1407년에는 상호군(上護軍)이 되어 이추(李推)와 대호군(大護軍) 강원길
(姜元吉)과 함께 요동에서 넘어온 피난민을 압송해 돌려보냈다.
이후 경기수군도절제사와 충청전라도수군도체찰추포사(忠淸全羅道水軍都體察追捕使)를 역임했
으며, 1411년 충청도수군절제사로 승진했으나 병으로 인해 벼슬을 사양했다. 이듬해에는 전라
도수군절제사가 되었고, 1418년 황해도관찰사를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는 고향인 칠석동에서 부용정을 짓고 여씨(呂氏)의 남전향약(南田鄕約)과 주자(朱子)의 백
록동규약(白鹿洞規約)을 참조하여 향약을 만들어 고향의 풍속을 단속했는데, 이는 광주 향약
좌목(鄕約座目)의 유래가 되었다. 즉 광주에서 가장 먼저 향약이 시작된 곳인 셈이다. 고향
백성들의 교화에 힘쓰는 한편, 이시원(李始元), 노자정(盧自亭) 등과 학문을 논하며 아주 한
가롭게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부용정은 김문발이 세상을 뜬 이후에도 이 지역의 이름있는 명소로 남아서 양응정(梁應鼎)과
고경명(高敬命), 이안눌(李安訥), 박제형(朴濟珩) 등 지역의 명사들이 찾아왔다. 그들이 남긴
편액이 무수히 장식되어 있으며, 정자 옆에는 부용정의 내력이 소상히 담긴 부용정석비가 자
리해 있는데, 이는 1984년에 세워진 것이다.
막힘이 하나도 없이 사방이 뚫려 있고,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마루 형태라 여름 제국 시절에
는 완전 극락과 같은 곳이다. 바람도 솔솔 불어오니 이곳에서 책을 보거나 낮잠을 자거나 바
둑을 두면 정말 꿀맛이 따로 없을 것이다. 다만 겨울 제국 시절에는 지옥이다.

▲  고싸움놀이테마파크(공원) 표석

▲  돌담 안에 담긴 널뛰기


▲  칠석동 은행나무 - 광주 지방기념물 10호

고싸움공원 남쪽에는 앞서 괘고정수를 능가하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자리해 있다. 덩치가 얼마
나 크던지 그의 앞에서는 아무리 잘난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저 주눅이 들 수 밖에 없다. 대자
연 형님의 위대한 힘과 철도 녹여 먹을 정도의 장대한 세월이 그를 산만한 덩치로 만든 것이
다.

나무의 나이는 650년 이상 묵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예전에는 800년 이상 묵은 것으로 알려졌
다. 그러다가 요즘은 650년 정도로 자리를 잡은 듯 싶다. 이 땅에 널린 은행나무는 다른 나무
와 달리 태반이 사람이 심은 것으로 부용정의 주인인 김문발이 심었다는 이야기가 한 토막 전
해오기 때문이다. 그는 14세기 중반에서 15세기 초반 걸쳐 살던 사람이니 그가 심은 것이 맞
다면 600년~650년 정도가 된다.
아무리 먹어도 줄지 않는 세월을 수백 년이나 꾸역꾸역 섭취하여 그의 키는 26m에 이르며, 7m
높이에서 가지가 무수히 갈라져 나와 큰 나무의 위엄을 제대로 과시한다. 그의 전체 둘레는
13.3m, 수관의 너비는 동서 30m, 남북 26m로 광주에서 제일 크고 오래된 나무로 꼽힌다.

예로부터 칠석동 옻돌마을 사람들이 서낭나무로 받들어 정월 대보름날 밤에 당산제(堂山祭)를
지낸다. 이 나무는 할머니당산, 그리고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들판에 할아버지 당산이라 불리
는 소나무가 있는데, 보통은 같은 종류의 나무를 노부부나 부부로 삼지만 여기는 서로 다른
나무를 노부부로 삼은 것이 특징이다. 나이와 덩치, 명성이 할머니 당산인 은행나무가 압도적
으로 우세해 할아버지 당산 소나무는 당산제 외에는 관심도 거의 못받는 우울한 실정이다. (
우리도 할아버지 당산은 안갔음)
은행나무는 귀신이 좋아하는 나무의 하나라 옛 사람들은 늙어보이는 나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고려 후기부터 마을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 고마운 존재로
이곳 사람들의 은행나무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대보름날 당산제가 끝나면 다음날 16일부터 마을을 동서로 상촌(上村)과 하촌(下村)으로 나누
어 고싸움놀이를 벌인다. 현재 칠석동은 상칠석, 하칠석으로 구분되어 있으니 바로 여기서 비
롯되었다. 이때 고싸움에 쓰이는 고는 제일 먼저 이 나무를 돌아야 된다. 그러니까 칠석동 고
싸움놀이는 은행나무에서 그 서막을 여는 것이다.
이 마을은 전주이씨와 김문발의 광산김씨가 오랫동안 터를 일군 마을로 평야지대에 자리해 있
는데, 풍수지리적으로 이곳은 와우(蝸牛) 형국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소가 매우 사나워 이리
저리 날뛰므로 고삐를 매어두고자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하여 풍수상 부실한 부분을 커
버해주는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  꽤나 굵직해진 은행나무 밑도리의 위엄
1그루가 아니라 여러 그루가 한 지붕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무 앞에는 상석이 놓여져 있으며, 여기서 당산제를 지낸다.

▲  나무에 칭칭 감겨진 금줄

나무가 아직은 정정하다고 해도 늙은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600년 이상의 노구를 지탱하기
힘들어 기둥을 여러 개 세워 지구의 중력에 힘겹게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보면
정말 세월보다 무거운 것은 천하에 아무 것도 없다. 손으로 만질 수가 없을 따름이지 세월의
무게는 무한대(∞)이기 때문이다,


▲  고싸움놀이4D영상체험관에 재현된 고싸움놀이의 위엄

은행나무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고싸움놀이4D영상체험관(이하 영상체험관)에 잠시 발을 들
였다.
이곳은 남도의 명물 고싸움놀이에 대한 온갖 자료와 영상, 디오라마 등을 담고 있는데, 단순
한 보여주기를 떠나 4D영상관과 4D입체게임 등 최첨단의 신선한 아이템을 준비해 민속놀이에
대한 관심이 적은 어린이와 젊은층을 겨낭한 점이 눈에 띈다. 그냥 이 땅에 흔한 박물관이나
체험관처럼 만들면 주목도 못받고 묻힐 우려가 크니 광주시에서 아주 통 크게 체험관을 지른
것이다.
 
영상관에서는 4D영상으로 고싸움 놀이를 아주 실감나게 시청할 수 있으며, 칠석마을 사람들이
이곳 풍수의 허한 부분을 커버하고자 은행나무를 심고 고싸움놀이를 하는 내용도 소상히 나온
다. 영상체험관은 관람, 입장은 공짜이나 영상관만큼은 입장료를 받고 있는데, 시청 시간은
20분 정도이다. (상영시간은 문의 요망)
그리고 4D입체게임은 우리나라 최초의 리얼타임 입체 영상게임으로 2팀으로 나누어 승패를 가
른다. (자세한 것은 안해봐서 모름) 또한 고라이더라는 코너는 고싸움 관련 O,X 퀴즈를 풀어
90점 이상이면 고라이더를 공짜로 태워준다. 고라이더는 고의 제일 높은 부분에 올라타는 것
이다.

2층은 일반적인 전시실로 '고싸움놀이 현장체험' 코너에서는 고싸움놀이를 재현한 거대한 디
오라마가 있으며, 여기서 퍼즐게임을 통해 고싸움에 등장하는 인물을 확인할 수 있다. '세계
속의 고싸움 놀이'는 우리의 옛 땅인 왜열도와 중원대륙, 그리고 인도 등 다른 나라의 고싸움
놀이를 집대성했고, '당산제는 어떻게 지내나요?' 코너는 고싸움 캐릭터인 고동이와 고순이와
함께 고싸움놀이 당산제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 외에 '고싸움놀이 노래시설'에서는 고싸움놀이에 등장하는 소리(원음)를 들을 수 있다. 그
렇다면 고싸움 놀이는 무엇일까?

'광주 칠석 고싸움놀이'는 국가무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된 남도의 주요 민속놀이로 광주 칠
석동이 그 중심이다. 매년 음력 정월 10일경부터 2월 초하루까지 20일 정도 펼쳐지는데, 은행
나무와 할아버지 당산 소나무에 당산제를 지내는 정월 대보름날이 절정이다.
고싸움의 고는 옷고름, 고맺음, 고풀이란 뜻으로 노끈 한 가닥을 길게 늘여 둥그런 모양으로
맺은 것이다. 그래서 고싸움이란 놀이에서 사용하는 고가 서로 싸움을 벌인다는 데서 연유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싸움의 유래에 대해서는 딱히 전하는 기록은 없으며, 믿거나 말거나 속설에 따르면 땅의 거
센 기운을 누르고자 사람들을 동원해 땅을 밟는 놀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매우 가
까운 나주 남평(南平) 지방에서는 1950년대까지 활발하게 놀이를 진행했으며, 장흥과 강진,
영암 지방에서도 줄다리기 이전에 고싸움을 벌인 것으로 보아 줄다리기와 연관된 것으로 보인
다. 줄다리기와 고싸움은 놀이의 시기가 같고, 칠석의 상촌은 남자, 하촌은 여자를 상징해 여
자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여기는 것은 다른 줄다리기나 남녀 성대결 민속 놀이와 비슷하다.
허나 고싸움은 지휘자가 고 위에 올라가 게임을 지휘하며 하루도 아닌 20일 정도 격렬하게 진
행되는 점은 기존 줄다리기와는 다르다.

고싸움놀이의 구성은 상촌인 우대미와 하촌인 아랫대미가 너비 2m 이상의 골목길을 경계선으
로 나뉜다. 편단은 줄을 타고 싸우는 우두머리인 '줄패장', 고를 메는 '몰꾼', 고의 몸과 꼬
리를 잡는 꼬리줄잡이이며, 응원단으로 농악대, 깃발잡이, 횃불잡이 등이 있다.
승부는 상대방의 고를 어떤 방법으로든지 땅에 닿게 함으로써 결정이 나는데 이때 농악과 함
께 기수(旗手)와 횃불이 동원되어 온 마을 사람들이 참여한다. 만약 승부가 나지 않으면 고를
풀어 그 줄로 2월 초하룻날에 줄다리기로 최종 결판을 내기도 한다. 고싸움은 우리나라 민속
놀이 중 가장 패기가 높고 격렬한 남성적인 놀이로 강인한 협동심과 줄패장의 지휘력이 중요
하다. 고 위에 탄 줄패장의 지휘로 이리저리 움직이고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화끈한 민속놀이로 인기를 누렸던 고싸움은 왜정 이후 시들시들해지다가 1945년을 전
후해서 잠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다가 동네에 뜻 있는 이들의 노력으로 다시 재현되었으며,
1969년 10월 대구에서 열린 제10회 전국민속예술 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아 고싸움의 위
엄을 천하에 드러냈다. 이후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도 선보여 대단한 관심을 받았으며, 광주
시의 든든한 지원에 힘입어 고싸움의 성지인 칠석동에 고싸움전수회관과 영상체험관, 테마공
원을 만들어 고싸움을 천하에 알리고 보존하는데 힘쓰고 있다.
처음 칠석동에 왔을 때 단순히 은행나무와 부용정만 생각했지 고싸움놀이는 크게 생각을 안했
는데, 이렇게 영상체험관을 살펴보고 본글을 작성하면서 고싸움에 대한 관심에 조금 불이 짚
여졌다. 고싸움놀이는 정월대보름에 주로 열린다고 하니 그때를 노려 고싸움의 실감나는 현장
을 구경하러 가야겠다.

* 고싸움놀이테마공원 소재지 : 광주광역시 남구 칠석동 619, 996일대 (☎ 062-607-2340,46)



고싸움놀이 영상체험관을 끝으로 광주 대촌동 투어는 마무리가 되었다. 그때 시간은 16시, 햇

님이 퇴근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지만 오늘 너무 많은 곳을 둘러봐서 배가 부르다 못해
터질 지경이다. 게다가 투어를 시켜준 이들도 피곤한 상태, 여기서 더 본다면 이건 과식이다.
하여 미련 없이 그들이 사는 봉선동으로 넘어와 커피집에서 커피 1잔의 여유를 누린 다음, 인
근 지하철역인 소태역(광주1호선)에서 그들과 작별을 고하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봄맞이 광주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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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3월 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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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마지막 옛날 주막을 찾아서 ~~ 예천 삼강나루 삼강주막

 


~~~ 예천 삼강주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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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힘겹게 겨울 제국을 몰아내며 천하 해방에 열을 올리던 3월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와
이틀 일정으로 강원도 내륙과 충북 동부, 경북 서북부 지역을 돌았다.
강원도 홍천과 평창, 영월 지역을 둘러보고 충북 땅으로 넘어가 내 시골인 단양(丹陽) 외
가쪽 친척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사촌들과 늘어지게 회포를 풀었다. 오랜만에 찾은 시골
이지만 다음 날도 갈 길이 멀기에 나머지 회포는 불투명한 미래로 넘기고 아침 10시에 콩
볶듯 길을 나섰다.

간만에 단양에 왔으니 단양 명소는 1곳 가줘야 서운함이 덜하겠지? 하여 단양팔경의 일원
인 사인암(舍人岩)을 둘러보고 바로 경북 땅으로 넘어갔다. 사인암에서 방곡을 거쳐 남쪽
으로 내려가면 바로 경북 문경(聞慶)으로 이어진다.

경북으로 갈아타면서 어디를 갈까 궁리를 하다가 한때 천하의 주목을 격하게 받았던 삼강
주막을 가기로 했다. 그밖에 예천 명봉사(鳴鳳寺)와 문경 김룡사(金龍寺) 등도 뜨겁게 거
론이 되기는 했으나 이미 절을 여럿 들린 터라 바로 삼강주막으로 총알처럼 이동했다.
(강원도와 단양 사인암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음)


 

 

♠  이 땅에 마지막 옛날 주막, 이제는 예천 제일의 꿀단지로 부상한
삼강주막(三江酒幕) - 경북 지방민속문화재 134호

낙동강(洛東江)과 내성천(乃城川), 금천 3개의 물줄기가 만나는 예천 삼강(三江)포구에 이 땅
의 마지막 전통 주막으로 추앙받고 있는 삼강주막이 있다. 지붕과 집이 온통 누런 피부로 이
루어진 초가(초가집)로 싸리나무 담장으로 둘러진 초가가 진짜 삼강주막이며, 나머지는 예천
군에서 이곳을 관광지로 격하게 띄울 때 새로 닦아놓은 것들이다.

삼강포구(삼강나루)는 안동과 의성, 청송, 군위, 영천, 대구, 경주, 울산 등 경북 내륙과 경
남 동부 지역에서 서울로 갈 때 거의 거쳐가야 된다. 그러다보니 일찌감치 교통 요충지로 성
장하여 상인과 나그네들을 위한 숙박시설과 장터가 발전했다. 청운(淸雲)의 꿈을 가지고 과거
를 보러가는 영남 선비들도 적지않게 삼강나루의 신세를 졌으며, 양반과 선비, 상인(보부상),
뱃사공, 농사꾼 등 다양한 계층이 자리를 비비며 국밥과 술을 먹고, 주막 방에서 같이 자고,
배를 타던 현장이다. 삼강주막은 바로 그런 삼강나루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아 지어진
주막의 하나이다.

삼강주막은 1900년 경에 지어진 이 땅의 흔한 초가이다. 물론 그 건물이 있기 전부터 주막은
쭉 있었다. 주막의 규모는 조그만 초가 1동이 전부로 방 2개와 툇마루 1개, 부엌을 갖춘 집약
적 평면구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변소는 바깥에 따로 설치했다. 겉으로 보면 그저 흔
한 초가이지만 이 땅에 유일한 옛 주막으로 어마어마한 희소성을 지니고 있어 건축사 자료로
도 아주 휼륭한 존재이다.

삼강나루를 거쳐간 사람들은 이곳에서 밥을 먹거나 하룻밤 머물면서 주막의 가치를 반질반질
하게 해주었고, 마르지 않고 쏟아지는 손님들로 주막 주인은 삽으로 돈을 쓸어담을 정도로 번
영을 누렸다. 또한 삼강나루에 있던 장터와 다른 주막들도 다 같이 번영을 누리며 경북 북부
제일의 교통 요충지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큰 홍수로 삼강나루는 큰 피해를 입었는데 그때 다른 주막과 건물은 죄
다 떠내려가고 오로지 이 주막만 살아남아 이곳의 유일한 주막으로 독점을 누렸다.

1940년대 후반, 삼강주막의 마지막 주모(酒母)라 불리는 유옥연 할머니(1917~2005)는 이 주막
을 인수했다. 그때 그의 나이 30대, 1940년에 남편을 여윈 그녀는 2남2녀를 키우고자 주막 경
영에 뛰어든 것이다.
이곳이 교통 요충지라 목이 좋고 음식 솜씨도 뛰어나 강에 다리가 놓이기 이전까지는 그런데
로 먹고 살았다. 허나 시대가 격하게 흘러 1980년대에 다리(삼강교)가 생기자 사람들의 발길
은 95% 이상 끊기게 된다.
그러다보니 주막과 동고동락하던 나룻배는 망했고, 주막 역시 경영에 영원한 빨간불이 켜지면
서 크게 궁색한 처지가 된다. 기껏해야 동네 단골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녀는 그의 전
부가 담긴 주막을 놓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주막은 곧 그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업
종을 전환하기에도 여의치 않았다. 그렇게 이 땅의 마지막 주모로 60여 년을 살다가 2005년
10월에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면서 그때서야 강제로 주막을 놓게 된다.

주인이 가고 없는 주막은 자연히 폐가로 버려져 쓰러지기 직전까지 갔으나 이곳의 가치를 뒤
늦게 깨달은 예천군에서 2007년에 이곳을 인수해 예전 모습으로 복원했다. 그리고 주막을 운
영할 주모를 공개적으로 선별해 인근 마을에 사는 권씨 할머니가 주모로 뽑혀 유옥연 할머니
의 뒤를 이었으나 군청과 마을과의 갈등으로 지금은 예천군에서 삼강마을에 위탁을 맡겨 마을
에서 공동 운영한다.

옛 주막은 아직 쓸만하지만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귀한 몸이고, 건물이 협소해 주막으로 활용
하지 않고 그냥 문화유산 관람용으로 두었다. 주막 뒷쪽에는 500년 묵은 회화나무가 예나 지
금이나 그늘을 드리우고 있으며, 주막 주변에 초가(1930년대 홍수로 사라진 사공과 보부상숙
소도 재현함)와 원두막을 잔뜩 지어 주막의 역할을 대신한다. 그래서 주막 음식은 새 집에 들
어가서 먹어야 된다.
주막 앞에는 누런 흙이 곱게 입혀진 뜨락이 펼쳐져 있고, 그 앞에 조촐하게 돌담길이 재현되
어 정겨움을 더한다. 이는 예천군에서 삼강주막을 관광지로 키우면서 달아놓은 것이다. 그만
큼 이곳에 대한 기대가 큰 것이다. 열렬한 홍보와 투자 끝에 이제는 회룡포(回龍浦)와 더불어
예천 제일의 명소로 우뚝 섰으며, 하루 방문객 수는 주말 기준 최대 300~400명 정도 된다.
하지만 너무 겉모습과 상업주의에 열중한 나머지 주막의 구수한 맛이 변질되어 '옛날 주막 분
위기가 안난다','너무 돈장사가 아닌가?','완전 민속촌을 재현했다' 등의 쓴소리도 적지 않게
나온다. 어떤 신문은 이곳에 있는 청량음료 자판기를 두고 날카로운 지적을 쏟아내기도 했다.

허나 이곳에서 파는 음식은 맛도 그런데로 괜찮고, 가격도 적당하다고 본다. 또한 두부와 도
토리묵, 막걸리, 칼국수 등은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들어서 판매하며, 주말에 찾을 경우 엄청
나게 밀려드는 사람들로 좀 어수선하기는 해도 옛 주막을 바탕으로 소소하게 전통의 장을 만
든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원래부터 주막이었고, 주막 주변은 장터였기 때문이다. 게다
가 주막 남쪽에 자리한 삼강마을은 삼강주막마을로 이름을 바꾸고 전통체험과 농촌체험, 민박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삼강주막을 중심으로 매년 9~10월에 3일 일정으로 '삼강주막 나루터 축제'를 벌이고 있
는데, 막걸리 마시기, 막걸리와 전통음식 전시/판매, 공연과 가요제, 민속놀이 체험, 예천군
특산물장터, 사진/그림 전시 등 다양한 이벤트가 열린다.

* 삼강주막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166-1 (삼강리길 27 ☎ 055-655-3132)
* 삼강주막마을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삼강주막 동쪽에 재현된 누런 돌담길
푸른 대나무까지 머금고 있으니 그 풍경이 참 정겹기 그지 없다.
이 돌담길은 삼강주막을 관광지로 꾸미면서 닦여진 것이다.

▲  온통 누런색으로 이루어진 삼강주막 관광지

▲  초가 원두막 2채와 삼강주막(오른쪽 초가)

주모 할매가 방이나 부엌에서 튀어나와 '술 한잔 들고 가이소~!','국밥 1그릇 들고 가이소~!'
할 것 같은 삼강주막, 옛 주모가 가고 없는 삼강주막은 이제 현역에서 물러나 옆에 재현된 후
배 초가들에게 그 짐을 넘겼다.
솔직히 기존 주막을 손질하여 그 방이나 툇마루, 마당에 놓인 상에서 살랑살랑 불어오는 강바
람을 벗삼아 술 1사발, 국밥 1그릇을 섭취해야 진정한 옛 주막 멋이 날 것인데, 지방문화재(
국가민속문화재로 삼아도 손색은 없어 보임)로 지정된 귀한 몸이라 그것까지는 싫었던 모양이
다. 그러다보니 툇마루와 주막 방은 접근이 통제되어 있고, 오로지 부엌만 들어갈 수 있어 완
전 금지된 주막이 되어 버렸다.

허나 오래된 기와집과 초가 가운데 식당이나 민박, 전통체험 공간으로 활용되는 집들이 적지
않다. 삼강주막은 길어봐야 100여 년 정도 되었고, 근래 손질을 하여 거의 새집처럼 되었기
때문에 한가하게 눈요깃감으로 둘 것이 아니라 주막 체험용으로 좀 바쁘게 굴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다만 집이 좁기 때문에 보조용 초가를 여럿 두어 수용 공간을 늘리고, 음식 조리는
보조용 초가나 조리 공간을 두어 처리하면 될 것이다.

▲  옆에서 바라본 삼강주막과 회화나무

▲  낙동강 둑에서 바라본 삼강주막


▲  구수한 모습의 삼강주막 툇마루
삼강나루가 잘나가던 시절에는 저 좁은 툇마루와 방은 늘 빈자리가 없었다.
허나 지금은 문화유산 보호를 이유로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없는
금지된 공간이 되었다.

▲  삼강주막 부엌
연기에 그을린 검은 때가 삼강주막의 왕년의 위엄을 살짝 귀뜀해준다.
밥과 국을 끓이던 쇠솥은 무심하게 내려앉은 먼지의 눈치를 보며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옛날을 그리워한다.

▲  벽화처럼 자리한 삼강주막의 백미, 외상결재장부

삼강주막에 왔다면 꼭 봐야되는 것이 있다. 바로 부엌과 바깥 흙벽에 새겨진 외상결재장부이
다. 장부라고 해서 종이에 쓰인 것은 아니며, 그 흔한 한글과 한자, 숫자도 없다. 세로와 가
로로 그어진 줄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하여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수수께끼의 추상화나
문자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이들은 옛 주모인 유옥연 할매의 작품으로 그는 글자를 모르던 까막눈이라 자신만의 전용 글
자를 만들어 이렇게 외상장부를 작성했다. 예나 지금이나 단골 외상 손님은 늘 있는 법이라
그들의 편의를 위해 벽에 그만의 표시법으로 장부를 만들어 손님을 관리했으며, 외상을 했을
경우 세로로 줄을 긋고, 외상값을 치룬 경우에는 가로로 줄을 그었다. 줄은 불쏘시개를 이용
해 흙벽에 그었다. 허나 세로줄만 있고 가로줄이 없는 것도 적지 않아 외상값을 다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글자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주모 할매의 깊은 뜻과 철학, 외상 손
님에 대한 넉넉한 마음이 깃들여져 있다.


▲  부엌에 빼곡히 새겨진 외상결재장부 ▼


▲  주막 밖에 차려진 재래식 변소
삼강주막은 건물이 작기 때문에 싸리나무 담장 밖에 따로 변소를 두었다.
현재 변소는 무늬만 남은 상태~~ 변을 보려면 주막 외곽에 설치된
현대식 변소를 이용하기 바란다.

▲  주막 밖에 덩그러니 놓인 들돌

변소 뒷쪽에는 '들돌'이란 이름으로 살아가는 커다란 돌이 놓여져 있다. 처음에는 그냥 돌로
여겼으나 옆에 있는 들돌의 유래 안내문을 보니 180도 달라 보인다.
들돌이란 일종의 성인식 도구로 옛날 농촌의 남자 아이들이 성장하여 농부(어른)로 인정을 받
는 의례에서 생겨났다. 즉 10대 중반에 저 돌을 들어야 진정한 어른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다. 돌의 무게는 10~20kg 정도 될 것 같은데, 성인식 도구치고는 좀 무겁고 거친 것 같다. 하지만
어찌하랴?? 농촌에서 살려면 힘을 써야 되는 일이 1~2가지가 아니니 말이다.
또한 삼강나루는 사람과 물류의 왕래가 빈번했는데, 그에 따라 물건을 나를 인력이 많이 필요
했다. 그래서 이 돌을 들 수 있는 정도에 따라 품값을 정했다고 한다. 돌을 완벽하게 들면 좀
많이 받고, 못들면 그냥 아웃, 중간 정도 들면 중간 정도 품삯을 받았다. 이 돌은 삼강주막과
더불어 이곳에 전하던 오래된 유물로 겉보기와 달리 역사적 값어치가 충분하다.


▲  삼강주막의 오랜 벗, 회화나무 - 예천군 보호수 11-27-12-23호

강주막 뒷쪽에는 커다란 회화나무가 넓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삼강주막의 오랜 터줏대감
이자 이곳의 듬직한 정자나무인 그는 약 500년 정도 묵은 것으로<197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
시 추정 나이가 약 450년> 높이는 20m 정도 되며, 그 북쪽에는 낙동강 둑방길과 낙동강이 있
다.


▲  강바람만 가득한 낙동강 삼강나루터 (오른쪽 다리가 삼강교)

강주막 뒷쪽 둑방을 오르면 잃어버린 땅(북한, 요동반도, 만주, 연해주, 왜열도 등)을 제외
한 이 땅에서 가장 긴 강, 낙동강이 도도한 물결을 드러낸다. 이곳이 바로 삼강주막의 든든한
밥줄이자 경북 북부 제일의 교통 요충지인 삼강나루터로 문경에서 내려온 주흘산맥(主屹山脈)
과 안동에서 온 학가산맥(鶴駕山脈), 그리고 멀리 대구에서 올라온 팔공산맥(八公山脈)의 끝
자락이 만나며,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이 하나가 되는 곳이다. 그래서 지명도 3개의 물줄기가
만난다는 뜻의 '삼강'이 되었다.

예로부터 수륙교통의 요충지이자 경상도에서 서울과 중부지방으로 이동할 때 거쳐가던 길목으
로 이곳을 지나 문경새재를 넘어 북쪽으로 올라갔다. 또한 소금배가 이곳까지 올라와 교류를
했고, 서울과 대구(大邱)를 잇는 군사도로의 역할도 했기 때문에 1960년대까지는 그런데로 성
황을 이루었다. 나룻배는 2척을 굴렸는데, 큰 배는 주로 가축과 화물을, 작은 배는 사람을 수
송했으며, 장날에는 밀려드는 수요로 최대 30회 이상을 운행했다.
허나 현대화의 거친 물결과 어미도 몰라보는 개발의 칼질이 이곳까지 불어닥치면서 1980년대
나룻배를 대체할 삼강교가 강 위에 놓이게 된다. 그로 인해 나룻배는 밥줄이 끊겨 사라지고
삼강나루의 영광 또한 신기루처럼 사라졌으며 겨우 삼강주막만 남아 나룻터를 지켰던 것이다.

2007년 이후 쓰러진 삼강주막이 복원되고, 이곳 일대가 예천군의 야심 속에 관광지로 부상하
면서 2013년에 체험학습용으로 나룻배 1척을 장만해 나룻터에 띄워놓았다. 하지만 내가 찾았
을 때는 배는 움직이기는 커녕 늦은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아마도 봄이 천하를 완전히 해방
시킨 이후에 움직일 모양이다.

▲  삼강나루를 한방에 보내버린 삼강교

▲  낙동강 둑방길과 낙동강 물줄기


▲  삼강주막 옆에 재현된 보부상과 사공 숙소 초가집

삼강주막 서쪽에는 누런 피부의 초가들이 즐비하여 자칫 삼강주막의 오랜 일원으로 생각하기
쉽다. 허나 현실은 근래에 닦아놓은 것들로 삼강주막을 너무 말끔히 손질을 한 탓에 기존 주
막과 새 초가가 서로 비슷한 모습과 피부를 지니게 되어 서로 구별이 가질 않는다.

새 초가 가운데 보부상 숙소와 사공 숙소라 불리는 초가가 있다. 원래 1900년대에 지어진 숙
소가 있었으나 1934년 대홍수 때 다 떠내려가고 사라진 것을 2008년에 마을 노인들의 증언과
고증을 바탕으로 삼강주막과 비슷한 구조로 지었다. 허나 이곳에는 더 이상 보부상과 사공이
없어 그 이름과 달리 현역에서 물러난 삼강주막의 역할을 대신하여 밥과 술을 먹는 길손들이
이용한다.


▲  주막으로 쓰이는 조그만 초가 (방 안에서 음식 섭취 가능)

▲  내부가 비어있는 초가 창고

삼강주막을 둘러보니 어느덧 13시가 넘었다. 점심도 아직 들지 못한 상태이고 그 유명한 삼강
주막에 발을 들였으니 주막 밥은 한번 먹어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
다. 하여 파전과 두부, 도토리묵, 잔치국수, 소고기국밥을 두루두루 시켰다. 다만 차량을 가
져왔기 때문에 아쉽지만 막걸리 등의 곡차(穀茶)는 섭취하지 않았다.

이곳이 주막이긴 하지만 사극처럼 시골 아낙네들이 옛 복장을 입고 머리를 딴 주모가 밥이나
술상을 갖다주는 것은 기대하지 말자. 그런 주모는 이제 없기 때문이다. 주막 초가들 한쪽에
음식을 조리하는 건물이 있는데, 거기서 음식을 주문하고 계산을 해야 되며, 음식이 나오면
음식이 든 쟁반을 들고 적당한 곳에 앉아 먹으면 된다. 주말에는 사람들이 많아 길게 줄을 서
야 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우리는 음식을 들고 비어있는 초가로 들어가 즐거운 점심 시간을 가졌다. 곡차가 없어 아쉽긴
했지만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든 것들이라 음식 맛도 그런데로 괜찮았고, 가격도 시중과 거의
비슷하거나 저렴한 편이다. 시장한 점심 기운을 잠재우고자 열심히 숟가락과 젓가락을 놀리니
많아보였던 음식들은 이내 바닥을 드러내고, 반찬으로 나온 김치와 송송(깍두기)도 밥도둑이
따로 없어 그것 마저 동이 났다. 역시 금강산은 식후경(食後景)이다.


▲  삼강주막에서 먹은 음식의 위엄
두부와 도토리묵, 파전, 잔치국수, 소고기국밥


아직 해가 중천이라 다음 답사지를 물색하다가 속리산(俗離山) 동쪽에 숨겨진 폭포를 찾기로
하고 인절미를 약간 구입해 다시 길을 떠났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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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영종도의 지붕을 거닐다. 백운산 나들이 ~~~ (양주성 금속비, 용궁사, 소원바위, 백운산둘레길)

 


' 인천 영종도의 지붕을 거닐다. 백운산 나들이 (용궁사) '

용궁사 느티나무

▲  용궁사 느티나무

백운산 정상 백운산 산길

▲  백운산 정상

▲  백운산 산길

 


 

여름이 한참 물이 오르던 7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인천(仁川) 앞바다에 떠있는 영종도를
찾았다.
영종도(永宗島)는 천하 제일의 국제공항으로 찬양을 받는 인천국제공항을 품은 큰 섬으로
공항을 닦고자 영종도와 용유도(龍游島) 사이의 너른 갯뻘을 매립하고 삼목도(三木島) 등
의 여러 섬을 엮으면서 섬이 커졌다. 하여 영종도하면 기존의 영종도 외에 용유도와 삼목
도를 포함해서 일컬으며, 이들을 묶어 영종▪용유도라 부르기도 한다.

영종도에는 백운산이란 뫼와 용궁사란 오래된 절이 있는데 그곳에 살짝 마음이 가서 겸사
겸사 바다를 건너게 되었다. 그곳으로 가려면 공항전철(서울역↔인천공항2터미널)을 타고
운서역이나 영종역에서 접근하는 것이 제일로 좋지만 운서역과 영종역은 환승할인 무적용
역이라 나 같이 서민들에게는 조금 부담이 된다. (공항전철의 영종도 구간은 수도권 환승
할인이 되지 않음)
그래서 집 앞에 있는 1호선을 쭉 타고 동인천역까지 이동하여 인천좌석버스 307번을 타고
영종도로 들어갔다. 시간도 좀 걸리고 영종도 강제투어가 조금 심하긴 하지만 환승할인의
혜택을 받을 수 있으니 조금 일찍 부지런을 떨면 된다.

영종도에 진입하여 백운산 그늘에 자리한 전소에 두 발을 내렸다. 전소는 영종동행정복지
센터와 초등학교, 고등학교, 우체국, 아파트 등을 갖춘 오래된 마을로 서쪽에는 백운산이
, 동쪽과 남쪽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 평지에 한참 개발의 칼질이 춤을 추고 있음)
백운산 나들이는 바로 이곳 전소에서부터 시작된다.


 

♠  전소마을에서 만난 오래된 비석 무리들

▲  전소마을 비석 무리들

전소에서 문득 생각나는 존재가 있어서 백운산을 잠시 접어두고 마을 북쪽에 있는 구립하늘어
린이집을 찾았다. 그 앞에는 오래된 비석들이 3열로 각각 4기씩, 총 12기의 비석이 늘어서 있
는데, 이들은 영종도 곳곳에서 수습한 옛 영종진(永宗鎭) 첨사(僉使)의 비석으로 주로 선정비
(善政碑)와 불망비(不忘碑)가 주류를 이룬다.
선정비는 첨사의 착한 행정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고, 불망비는 첨사의 덕을 기리고자 세운 것
인데, 백성들이 진심으로 세운 것도 있겠지만 선정은 쥐뿔도 없음에도 첨사가 강제로 세운 것
도 적지 않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저런 비석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돈을 뜯어가
자신의 배때기를 채운 관리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종진은 조선시대에 영종도에 설치된 군사 기지로 처음에는 남양부(南陽府, 화성시 남양) 소
속이었다가 1875년 운양호(雲揚號) 사건으로 된통 당하면서 인천부(仁川府)로 넘어갔다. 이후
영종진이 폐지되면서 섬 전체가 부천군(富川郡) 소속이 되었다가 이후 옹진군(甕津郡) 관할로
바뀌었으며, 1989년 인천 중구(中區)에 편입되어 인천의 그늘에 있게 되었다.

이들 비석 중에 제일 우측에 유리막에 감싸인 조그만 철비(鐵碑)가 있는데, 그것이 나를 이곳
으로 오게한 양주성금속비(梁柱星金屬碑)이다. 돌로 만든 비석은 참 많지만 철이나 금속으로
만든 비석은 흔치가 않은 편으로 수도권에서도 철비는 이것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그러다보
니 다른 석비는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이 철비에만 자꾸 눈길이 간다.


▲  비석 무리의 홍일점, 양주성 금속비 - 인천 지방기념물 13호

이 철비는 높이 91cm, 폭 31cm, 두께 3cm로 황동(놋쇠)을 녹여서 만든 것이다. 1875년 운양호
사건으로 영종진이 큰 피해를 입자 흥선대원군은 인천부를 방어영(防禦營)으로 승격시키고 영
종진을 인천부 소속으로 넘겨 양주성을 영종진첨사<첨절제사(僉節制使)>로 파견했다.
양주성은 파괴된 진과 건물을 손질하고 방비를 튼튼히 했으며 전쟁으로 혼란해진 민심을 수습
해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서 떠나게 되자 백성들은 크게 아쉬
워하며 놋그릇을 모아 1877년 9월에 이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그냥 석비(石碑)도 아닌 놋그
릇을 모아 철비를 세울 정도면 양주성의 선정이 제법 대단했던 모양이다.

▲  옆에서 바라본 비석 무리

▲  비석 무리 부근에 자리한 연자방아


▲  속세를 향해 길을 늘어뜨린 용궁사 숲길 ▼

비석 무리를 둘러보고 용궁사로 길을 향했다. 전소에서 북쪽으로 조금 가면 용궁사로 인도하
는 숲길이 나오는데, 그 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용궁사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오르막길
이긴 해도 경사는 느긋하며, 숲이 매우 삼삼해 햇볕도 들어오기 힘들다.


 

♠  백운산에 안긴 영종도 유일의 오래된 절, 용궁사(龍宮寺)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15호

백운산(白雲山, 256m) 동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용궁사는 개발의 칼춤 소리로 요란한 영
종도의 별천지 같은 곳이다. 바로 절 밑에까지 개발의 칼질이 자행되어 온갖 개발 소음이 난
무하지만 용궁사는 백운산의 비호로 그 소음을 거의 모르고 살 정도로 산자락에 푹 묻혀있다.

용궁사는 영종도의 몇 안되는 문화유적으로 670년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원효는 그 시절 왕경<王京, 경주(慶州)>에 머물며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을 상
대로 불교 대중화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니 원효의 창건설은 속세살이만큼이나 참 부질
없는 소리이며, 그의 창건설을 밝혀줄 기록이나 유물도 전혀 없다.
게다가 절에서는 1,300년 묵었다는 느티나무를 증거로 천년 고찰(古刹)임을 내세우고 있는데
따지고 보면 나무의 나이도 정확한 편이 아니며, 나무가 꼭 절 창건과 관련이 있다는 보장이
없다. 나무를 제외하면 오래된 것이라고 해봐야 요사와 관음전 정도로 19세기 중/후반에 조성
된 것이 고작이다. 또한 창건 이후 19세기까지 이렇다할 내력도 남기지 못해 오랜 내력에 의
구심을 던지게 한다. 다만 백운산 봉수대 관리와 바다 조망을 구담사(舊曇寺) 승려가 담당했
는데 그 구담사가 바로 용궁사의 옛 이름이며, 옥불 전설에는 옛 이름의 하나인 '백운사(白雲
寺)'가 등장해 그것을 통해 적어도 고려나 조선 초에 조촐하게 법등(法燈)을 켰던 것 같다.

절의 사적(事蹟)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중반으로 그것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과의 인연 덕분에 남게 된 것이다. 대원군은 불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부인 민씨(閔氏)가 불
교 신자라 자연히 절 출입이 잦았다. 하여 서울과 경기도의 여러 절(화계사, 흥천사, 수락산
흥국사, 안성 운수암 등)과 흔쾌히 인연을 맺으며 기도를 하고 여러 승려와 교분을 쌓았는데,
용궁사도 그런 절의 하나였던 모양이다.
배를 타고 들어가야 되는 섬인데도 어떻게 인연을 지었는지 이곳을 찾아 기도를 올렸다고 하
며, 1854년에 절을 중창했다. 이때 용궁사로 이름을 갈게 하면서 현판을 써주었는데 이는 관
음전 옥불이 바다 용궁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권한 것이라고 한다. 이후 대원군은
고종(高宗)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약 10년 동안 이곳에 머물며 기도를 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용궁사와 대원군과의 인연은 요사에 걸린 그의 현판이 모든 것을 대변해주니 창건설은
몰라도 대원군 중창설은 더 이상 왈가왈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대원군 이후 딱히 적당한 내력은 없으며, 영종도가 인천에 편입되자 절과 경내에 있는 느티나
무가 인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관음전, 칠성각, 용황각, 요사채 등 6~7동의 건
물이 있으며, 문화유산으로는 오래된 느티나무와 수월관음도 등이 있다. 절 자체는 지방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절과 느티나무 때문
이다. (그것도 아니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음)

영종도 유일의 오래된 절로 태고종(太古宗) 소속이며 그렇게 깊은 골짜기는 아니지만 절을 둘
러싼 숲이 삼삼하여 바쁘게 변해만 가는 영종도에서 이곳만큼은 시간이 멈춰있는 것 같다. 숲
이 속세의 소음을 걸러주니 산사(山寺)의 분위기도 그윽하며, 절이 조촐한 규모라 눈에 쏙 넣
고 살피기에도 별 부담이 없다.
근래에 절에서 백운산 정상을 잇는 산길을 손질하여 백운산 둘레길로 삼았는데 절을 둘러보고
둘레길을 따라 40분 정도 오르면 영종도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백운산 정상에 이른다. 절만
둘러보고 가면 많이 허전할 것이니 백운산도 같이 겯드린다면 영종도 여로(旅路)를 더욱 알뜰
하게 꾸며줄 것이다.

※ 영종도 용궁사 찾아가기 (2018년 12월 기준)
* 공항전철 영종역(1번 출구)에서 중구 지선 3번, 4번을 타고 용궁사입구 하차. 이 방법이 제
  일 최적이나 배차간격이 허벌나게 길고 영종역에서 서로 타는 곳이 틀리다.
* 공항전철 영종역(1번 출구)에서 203번, 598번 시내버스를 타고 전소 하차 (598번은 크게 돌
  아가므로 203번이 나음)
* 서울 1호선 동인천역(4번 출구)에서 307번 좌석버스를 타고 전소 하차
* 인천 1호선 동막역(3번 출구)에서 304번 좌석버스를 타고 전소 하차
* 승용차
①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 금산나들목을 나와서 영종하늘도시 방향 → 운남교차로에서 우회
   전 → 용궁사입구에서 우회전 → 용궁사 주차장
② 인천대교 → 영종나들목을 나와서 영종하늘도시 방향 → 운남로 → 전소 → 용궁사입구에
   서 좌회전 → 용궁사 주차장
* 소재지 : 인천광역시 중구 운남동 667 (운남로 199-1 ☎ 032-746-1361)


▲  용궁사 샘터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샘터가 마중한다. 산사에 으레 있는 샘터이건만 요즘처럼 더울 때
는 보물급 문화유산보다 100배 더 반가운 존재이다. 네모난 석조(石槽)에는 백운산이 내린 약
수가 가득 담겨져 있는데,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목구멍이 시원해진
다.

▲  용왕의 공간, 용황각(龍皇閣)

▲  용황탱과 관음보살탱화

샘터를 지나면 석축 위에 세워진 용황각이 나온다. 용황각이란 이름은 여기서 처음 만나는데
일반적인 용왕(龍王)을 용황으로 격을 높여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왕을 황제로 높인 것
과 같은 이치~) 아무래도 섬이다보니 바다를 터전으로 삼은 섬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우상인
용왕을 봉안한 것인데 용왕을 용황으로 높여 특별 대접을 하며 주민들의 용왕신앙을 돕고 있
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용황각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로 밑에는 약수터가
있는데, 이 샘터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샘터 위에 석축(石築)을 다지고 건물을 세운 터라 주
춧돌의 키가 높으며, 북쪽에 트인 문을 통해 용황각으로 들어서면 된다. (동쪽 문 바깥은 허
공이라 추락 주의 요망)
용황각 불단에는 용황이 담긴 용황탱이 봉안되어 있는데, 용황의 머리에는 두광(頭光)이 반짝
반짝 윤을 내고 있으며, 용황탱 옆에는 관음보살(觀音菩薩) 누님이 그려진 탱화가 나란히 자
리해 있다.


▲  용궁사 느티나무(할아버지나무) - 인천 지방기념물 9호

요사 앞에는 용궁사의 오랜 자연산 보물이자 이곳의 터줏대감인 느티나무 2그루가 넓게 그늘
을 드리우고 있다.
이들 나무 가운데 요사 동쪽에 자리한 나무는 나이가 무려 1,300년을 헤아린다고 한다. 나무
의 덩치가 참 크긴 하지만 1,300살로는 보이지 않고 훨씬 젊어보이는데, (한 600~700살 정도)
요즘 하도 거품이 많은 세상이라 나이 재측정이 필요해 보인다. 실제 예로 서울에서 가장 오
래된 나무로 손꼽히던 방학동(放鶴洞) 은행나무도 나이가 830년을 호가한다고 했지만 2013년
에 지방기념물로 지정되면서 다시 나이를 재본 결과 600년 정도 된 것으로 나왔다. 그러니까
230년 정도의 적지않은 거품이 끼어있던 셈이다.

요사 동쪽 느티나무는 높이 20m, 나무둘레 5.63m에 이르는 장대한 나무로 여기서는 할아버지
나무라 불린다. 그리고 요사 북쪽 느티나무는 할머니나무라 불리는데 덩치는 할아버지나무보
다 작으며, 그 나무보다 후대에 심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할아버지나무는
할머니 나무쪽으로만 늘 가지를 뻗는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옛부터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
낙네들의 치성 장소로 애용되었는데, 절이 있기 전부터 기자(祈子) 신앙의 현장으로 널리 쓰
인 듯 싶다.
이후 절이 들어서면서 예불을 먼저 올리고 용황각 밑의 약수를 마신 다음 할아버지나무에 기
원을 하는 순서로 변경되었으며,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아이를 낳는다고 전한다.

▲  서쪽에서 바라본 느티나무
(할아버지나무)

▲  요사 북쪽에 자리한 느티나무
(할머니나무)


▲  용궁사 요사(寮舍)

두 느티나무 그늘에 자리한 요사는 대원군이 1854년에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관음전과 더불
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는데 승려의 생활공간 및 공양간,
대중방(大衆房)의 역할을 하고 있다.

건물 동쪽에는 툇마루 2칸을 두었으며, 서쪽을 제외한 나머지는 벽으로 막았다. 정면 가운데
칸에는 용궁사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절 이름을 용궁사로 바꿀 것을 제
안하며 친히 써준 것으로 그의 호인 석파(石坡)가 쓰여있어 대원군과의 진한 인연을 가늠케
한다. 그는 어찌하여 바다 건너 이곳까지 애써 인연을 지었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  흥선대원군이 1854년에 남겼다는 '용궁사' 현판의 위엄
용궁사에서 느티나무 다음으로 애지중지하는 존재로 이 현판이 없었다면
대원군 중창설도 자칫 신뢰를 잃을 뻔 했다.

▲  두목 포스가 느껴지는 묘공(猫公)의 위엄

요사에는 용궁사에서 기르는 누런 털의 묘공(고양이)이 있었다. 요사와 할배나무 주변을 순찰
하면서 여름 오후를 보내고 있는데,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니 묘공 특유의 관심 소리를 내며
내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하여 잠자리를 잡아서 조공(?)으로 바칠려고 했으나 이곳 잠자리는
눈치가 100단인지 하나도 잡지 못했다. 한때 외갓집이 있는 단양(丹陽) 시골의 잠자리 씨를
거의 마르게 할 정도로 잠자리를 잘 잡았는데, 이젠 나도 늙은 모양이라 오히려 그들에게 희
롱을 당할 판이다.

묘공 하나가 요사 툇마루에 앉아있다가 더운지 아랫 돌에 벌러덩 누워 강렬한 포스를 보이니
마치 두목 포스 같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꼬랑지를 살랑거리며 경내를 지키는 그들이 있기에
용궁사는 오늘도 무탈하다.


▲  대웅보전(大雄寶殿)

용황각 뒤쪽에는 가건물로 된 대웅보전이 있다. 이곳은 관음도량을 칭하는지라 정식 법당(法
堂)은 관음전으로 2000년 이후 합판으로 대웅보전을 지어 새로운 법당으로 삼았으나 건물의
볼품은 많이 떨어진다.
내부에는 석가3존불과 지장보살상, 신중탱 등이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 우측 부분은 종무소(
宗務所)로 쓰이고 있다.

▲  포근한 인상의 석가3존불

▲  조금은 빛바랜 신중탱(神衆幀)

▲  한참 몸단장 중인 관음전(觀音殿)

▲  관음전 뒤쪽에 자리한 석조관음보살입상

요사 바로 뒤쪽에는 이곳의 법당인 관음전이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관음전은 대원군
이 세운 것으로 전해지며 요사와 함께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내가 갔을 때는 마침
보수공사 중으로 불단에 있던 관음보살상은 칠성각으로 잠시 거처를 옮겼으며, 김규진(金圭鎭
)이 쓴 주련(柱聯)도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관음전에는 바다에서 건졌다는 옥불(玉佛)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사연이 아련하게 전해온
다.
때는 조선 중기(또는 후기)의 어느 평화로운 날, 영종도 월촌에 어부(漁夫) 손씨(또는 윤씨)
가 살고 있었다. 거의 매일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로 입에 풀칠을 하며 살고 있었는데, 그날도
바다로 나가 그물을 치며 대어를 기대했다. 허나 원하는 물고기는 없고 왠 옥불 하나가 걸려
든 것이 아닌가? 이에 어부는 단단히 흥분하여
'물고기는 하나도 없고 왠 이런 게 걸리고 앉았냐!'
투덜거리며 옥불을 바다에 내던지고 다시 그물을 쳤다. 그런데 그물을 건져올리니 아까 옥불
이 또 걸려든 것이다. 그래서 육두문자 요란하게 내뱉고 다시 내던졌으나 이후에도 계속 옥불
만 그물에 걸려든다. 이에 어부는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라 여기고 불상을 백운사(白雲寺, 지
금의 용궁사)에 넘겼다.
그 이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백운사 앞을 말이나 소를 타고 지나가면 무조건 멈춰서 움직
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절 앞을 지날 때는 말과 소에서 내려서 지나갔으며,
불상의 영험이 있다는 이야기가 주변에 퍼져 육지에서도 많은 이가 찾아와 불전함이 매일 터
져나갈 정도였다. 또한 불상을 발견하여 절에 넘긴 어부도 이후 풍어(風魚)를 누리면서 부자
가 되었다고 전한다.

19세기 중반 용궁사를 찾은 대원군은 이 사연을 전해듣고 불상이 바다 용궁(龍宮)에서 나왔으
니 절 이름을 용궁사로 고칠 것을 제안하며 현판을 써주었다. 그 현판이 바로 요사에 걸린 그
것이다.
바다에서 건졌다는 옥불은 인근을 지나다가 침몰한 배에 있던 것이거나 절이 파괴되면서 버려
져 바닷속을 방황한 불상으로 여겨진다. 그 옥불이 있었다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느티
나무 제외)이 되었을 것인데, 왜정(倭政) 때 도난을 당해 지금은 없으며, 새로 만든 조그만
관음보살상이 그 자리를 조금이나마 대신한다.


▲  날렵한 처마선이 인상적인 칠성각(七星閣)

관음전 옆에는 근래에 지어진 석조관음보살입
상과 칠성각이 자리해 있다. 칠성각은 칠성(七
星)을 봉안한 건물이지만 칠성 외에 산신(山神
)과 독성(獨聖)도 함께 담고 있어 삼성각(三聖
閣)의 역할을 하고 있다. (관음전 중수로 그곳
에 있던 관음보살상과 수월관음도가 이곳의 신
세를 지고 있었음)

칠성각에 봉안된 칠성탱과 산신탱, 독성탱은
20세기 초반에 그려진 것으로 고색의 기운이
제법 역력하다.

▲  다른 산신탱과 달리 꽤 젊어보이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 등이 담긴 산신탱

▲  독성과 동자가 그려진 독성탱

▲  칠성 가족을 빼곡히 머금은 칠성탱


▲  관음보살상과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76호
관음보살상 뒤에는 수월관음도가 후불탱으로 걸려있다. 그 탱화는 1880년에 축연
(竺演)과 종현(宗現)이 그린 것으로 3폭의 비단을 이어서 만들었는데 화폭
규모는 세로 135.5cm, 가로 174.3cm으로 가운데 화폭은 102.2cm, 향좌폭
29.3cm, 향우폭 33.5cm으로 화폭이 제일 넓다.

▲  경내 뒤쪽에 자리한 소원바위

용궁사의 다른 명물로는 소원바위가 있다. 관음전 뒤쪽 산자락에 있는 이 바위(바위라기보다
는 커다란 돌판~)는 소원을 빌면서 바위 위에 작은 돌을 시계 방향으로 돌려 자석에 붙는 듯
한 무거운 느낌이 들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가볍게 돌아가면 꽝~!!) 바위 앞에 하는
요령이 적혀있는데 우선 바위 뒤쪽에 놓인 불상 앞에 조공(돈)을 바치고 (역시나 돈이다~!!)
그런 다음 생년월일과 소원을 말하며 3배를 올리고 돌을 돌리라고 나와있다.
나는 조공을 바치지 않고 (절이 나보다는 경제 사정이 훨씬 좋으니~~) 그냥 소원을 빌고 3배
를 하며 돌을 돌렸다. 기분상인지는 모르겠지만 돌이 순간 무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소원이 접수된 모양이다. 하여 다시 한번 해봤는데 역시나 무거웠다. 혹여 접수 대상이 아니
더라도 돌의 무거움은 누구나 같은 것이 아닐까? 아니면 기분상일까? 과연 소원 성취가 이루
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소원이 꼭 이루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를 잠시 들뜨게 한다. (허나
현실은 소원 성취 그딴거 없음~~~)


 

♠  안개 낀 백운산(白雲山)을 오르다.

▲  용궁사에서 백운산으로 오르는 백운산둘레길

용궁사에서 50분 정도를 머물다가 절을 등지며 백운산둘레길에 발을 들였다. 백운산 정상까지
오를까 말까 궁리를 하다가 일몰까지는 아직 시간도 넉넉하고 용궁사와 둘레길만 보고 철수하
기에는 너무 싱거워 흔쾌히 정상까지 가기로 했다.

백운산둘레길은 영종도의 지붕인 백운산 주위를 도는 산길로 4.4km 정도 된다. 시작점은 접근
성이 좋은 용궁사에서 하는 것이 좋은데, 용궁사에서 25분 정도 오르면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여기서 둘레길과 작별하고 15분 정도 오르면 정상으로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 대체로
경사는 느긋한 편이다. 수목이 울창하여 햇볕이 들어올 틈이 거의 없으며 산바람도 넉넉히 불
어 땀을 제대로 털어간다. 다만 약수터가 없기 때문에 용궁사에서 물배를 채우거나 물통을 채
워 산행에 임하기 바란다.


▲  쉼터로 조성된 6각형 정자 (용궁사 부근)

▲  둘레길에 왠 연자방아?
1981년 12월에 용궁사 신도가 기증한 연자방아로 왜 아무런 필요도 없는 이곳에
두었는지 모르겠다. 절에 두거나 산 밑에 두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  잠시 미친 경사를 보여주는 둘레길

▲  백운산 봉수대(烽燧臺)터

둘레길과 정상 방면 산길이 갈리는 곳에 백운산 봉수대가 있었다. 이 봉수대는 서해바다의 동
태를 살피며 위급시 봉화를 피워 인천 철마산(鐵馬山)과 백운산(白雲山)에 알렸는데, 구담사(
용궁사) 승려(1명 또는 3명)와 봉수지기 2명이 봉수대를 지켰다고 한다.

서해를 지키던 당당한 모습의 봉수대는 세월의 장대한 흐름에 사라진지 오래이고 이곳과 정상
으로 가는 길목에 약간의 돌무더기가 남아있다. 여기서는 두께 1cm 정도의 경질와편 등이 나
오고 있어 봉수대의 옛 흔적을 희미하게 더듬을 수 있다.


▲  정상 동쪽에 자리한 헬기장

▲  헬기장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

▲  백운산 정상 전망대

용궁사에서 40분 정도 오르면 영종도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백운산 정상에 도달한다. 정상
에는 전망대를 두어 조망(眺望)의 나래를 누리게 했는데, 가는 날이 문닫는 날이라고 안개가
자욱히 끼어 100m 전방도 보이지를 않는다. 보물급 조망을 기대하고 올라왔건만 서해바다가
빚은 안개의 심술에 그 기대는 산산히 허물어지고 말았다.

전망대에는 인천국제공항과 공항신도시, 용유도(龍游島), 서해바다, 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섬
들이 보인다는 전망 안내문과 사진이 있지만 오리무중과 같은 안개가 그 모든 것을 다 앗아가
버려 전망 안내문이 참 무색하게 되었다.

▲  우두커니 서 있는 백운산 정상 표석

▲  백운산 정상 전망대


▲  안개 속에 몸을 가린 백운산 남쪽 봉우리

▲  정상에서 전소로 내려가는 산길 (1)

▲  정상에서 전소로 내려가는 산길 (2)

진한 안개에 털려 정체성을 잃은 정상 전망대를 벗어나 전소 쪽으로 내려갔다. 어차피 보이는
것도 없으니 더 머물러봐야 의미도 없고, 시간도 어느덧 18시가 넘었다.
내려갈 때는 동남쪽 전소 방향으로 내려갔는데 이 길도 대체로 완만한 편이다. 안개가 자욱해
도 전방 50m 까지는 보이기 때문에 하산에 별로 무리는 없었다. 야속한 안개를 뚫고 20분 정
도 내려가니 산속에 묻힌 집이 나오고, 군사 훈련시설을 지나니 울퉁불퉁했던 흙길은 끝나고
신작로가 앞에 펼쳐진다.

신작로를 따라 시골스러운 전소마을 서쪽을 지나면 영종자이아파트와 영종국제물류고등학교가
나오고 영종동의 주요 간선도로인 운남로가 나타난다.

이렇게 하여 영종도 백운산 나들이는 바다 안개를 뒤로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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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대표음식인 설렁탕의 탄생지, 제기동 선농단 ~~~ (선농대제 축제, 선농단 역사문화관, 선농단 향나무, 따끈한 설렁탕 1그릇)



' 설렁탕의 탄생지, 제기동 선농단 (선농대제) '


▲  선농단 선농대제 제례상 (2012년)


 

 

봄이 한참 절정에 이르는 4~5월이 되면 천하 방방곳곳에서 다양한 축제와 문화행사가 열
려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에서는 종묘대제(5월 1주 일요일)와 연등회(석가
탄신일 1주 전 토~일), 석가탄신일(음력 4월 8일), 선잠제향(5월 중), 선농대제(4월) 등
이 열리는데(그 외에도 더 있음) 이들 축제 중에서 비싼 설렁탕을 무려 공짜로 제공하는
착한 축제가 있어 눈길을 끈다. 바로 제기동 선농단에서 열리는 선농대제(先農大祭)이다.
< 3글자로 줄여서 선농제(先農祭)라고도 함>


▲  제기동역에서 선농단으로 이어지는 가로수길(왕산로19길)
선농단 입구인 함경면옥에서 선농단 방향으로 약 110m의 꿀 같은 숲길이
펼쳐져 있다.

▲  담장 너머로 보이는 선농단 향나무
향나무가 있는 곳이 바로 선농대제의 뜨거운 현장인 선농단이다.


드디어 선농대제가 열리는 4월 말 토요일, 따사로운 오전 햇살의 응원을 받으며 도봉동(
道峰洞) 집을 나섰다.
1호선 전철을 타고 20여 분을 달려 제기동역에서 하차했는데 선농대제 관람과 잘 숙성된
설렁탕을 먹는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설랜다. 그렇다고 설렁탕 때문에 온 것은 절
대로 아니다. 어디까지나 우리의 고유 전통 행사인 선농대제를 참관하러 온 것이다. (참
관하러 간 것임~~~ 강조!! 근데 왜 발이 저리지..??)

선농단 입구에 이르니 선농대제를 알리는 현수막이 시원한 봄바람에 펄럭이며 대제를 구
경하러 온 사람들을 인도한다. 현수막은 촘촘하게 배치되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으
며, 이제 막 제왕(帝王)의 제례 행렬이 끝나고 제례를 봉행(奉行)할 시간(10:30~12시)이
되어 선농단 주변은 제관(祭官)과 행사요원, 취재진, 나들이객, 동네 사람 등 수천 명의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 회색빛 도시 속에 조용히 묻혀지내는 망국의 제단 선농단, 국가
지정문화재라는 굵직한 지위를 누리고 있지만 원래 임무인 제단에서 강제 은퇴한 몸이라
꽤 적적한 신세이다. 그런 그에게도 천하가 미치도록 주목을 하는 때가 1년에 딱 하루가
있으니 바로 선농대제일이다.


 

♠  설렁탕의 탄생지, 농사의 중요성을 알리고 풍년을 기원하던
조선의 주요 국가 제단, 선농단(先農壇) - 사적 436호

▲  선농단 (선농대제가 끝난 직후의 모습)

선농단은 종암초교 남쪽이자 제기동 주택가 한복판에 고즈넉하게 누워있다. 이곳은 1476년에
조성되었는데, 처음 이름은 관경대(觀耕臺)로 조선의 제왕들이 신하를 거느리고 농사의 소중
함을 알렸다는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제를 지내 풍년을 기원했다. 이 제사를
선농제(선농대제)라고 하며, 거기서 선농단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선농
제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청동기시대부터 농사가 시작되었다고 하니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은 그때부터 있었다. 하지만
제왕이 직접 제사를 챙기고 농사를 권장했다는 기록은 신라 초인 기원전 41년에 처음으로 나
타난다.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왕비와 함께 6부(六部)를 순행(巡行)하여 농사와 잠사(
蠶事)를 권장하고 감독했다고 하며, 매년 경칩(驚蟄)이 지나고 첫 해일(亥日)을 택하여 왕이
제를 지내고 적전을 갈거나 또는 관리를 보내 제를 지냈다.
그러다가 나중에 경주 동쪽인 명활산성(明活山城) 남쪽 웅살곡(熊殺谷)에서 선농제를 지냈으
며, 입하(立夏) 뒤 첫 해일에 후농제(後農祭)를 지냈다. 선농제란 이름은 바로 신라 때 생겨
난 것이다.

고려 때는 983년 1월, 성종(成宗)이 원구단(園丘壇)에서 기곡제(祈穀祭)를 지내고 몸소 적전
을 갈아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제를 지냈다. 하여 이때부터 이 땅의 토속적인 농사 신(神) 대
신에 중원대륙에서 가져온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제를 지낸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성종은 송
나라와 교류를 하며 중원(中原) 문화에 깊이 심취해 그곳의 문화와 제도를 마구잡이로 가져온
군주이기 때문이다.
허나 고려는 황제(皇帝)가 원구단에 나가 하늘에 제를 지낼 때, 풍년을 같이 기원했고, 매년
열리는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에서도 일종의 기곡제(祈穀祭)를 지내 별도의 선농제
는 거의 갖지 않았다.

그러던 선농제가 크게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조선 초부터이다. 태조 때 적경공제지법(籍耕供
祭之法)을 제정하고 태종 때는 적전단(籍田壇)을 수축했으며, 1430년에는 박연(朴堧)의 건의
로 선농지악(先農之樂)에 쓰이는 토고(土鼓)를 대체하고자 가죽 테를 한 북을 만들어 사용하
였다. 그러다가 1476년 성종의 왕명으로 관경대를 만드니 그것이 지금의 선농단이며, 사직단(
社稷壇), 선잠단(先蠶壇), 영성단(靈星壇)과 더불어 국가의 주요 제단으로 큰 대접을 받았다.

선농제를 지낼 때는 제왕이 직접 신하를 거느리고 제를 지냈으며, 그것이 끝나면 동적전<제기
동과 전농동(典農洞) 일대>으로 이동한다. 거기서 적전을 관리하는 적전령(籍田令)이 푸른 보
자기에 감싸인 쟁기를 제왕에게 올리며, 그것을 받은 제왕은 직접 쟁기를 잡고 밭에 5번 쟁기
질을 하는 이른바 친경(親耕) 쇼를 벌였다.
쟁기가 끝나면 관경대로 올라가 백성 가운데 특별히 선발된 70세 이상 노인들을 위로하고 그
들이 밭을 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런 다음 농작물 씨앗이 얼어죽는 것을 막는 절차까지 마
무리 되면 의식이 끝났음을 선포하고 궁궐로 돌아간다. 이렇듯 친경의례는 농사의 소중함을
제왕이 몸소 보여주고 비록 잠깐이지만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으로도 활용되었
다.
허나 친경의례는 성종 이후 어쩌다 1번 벌일 정도로 거르는 경우가 많았으며(연산군 1회, 중
종 2회, 명종 1회, 선조 1회, 광해군 1회~) 인조에서 현종까지는 아예 하지도 않았다. 숙종(
肅宗)은 의식을 치루려고 단단히 준비까지 했으나 날씨가 받쳐주지 못해 무산되었으며, 영조
시절에 비로소 다시 치러지게 된다.

동적전이 있던 제기동과 전농동 지역은 지금은 완전 주택가라 썩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20세
기 초까지만 해도 너른 경작지였다. <제기동(祭基洞)은 제사를 지내는 터란 의미로 선농단에
서 비롯된 이름임>
왕실에서 관리하던 적전(籍田)은 2곳이 있었는데 선농단 근처에 동적전이 있었고, 개성(開城)
동쪽 전농동에 서적전(西籍田)이 있었다. 동적전은 제사용 곡식을 저장했는데, 선농단(관경대
)과 희우정(喜雨亭), 필분각(苾芬閣)이 있었고, 다수의 창고가 있었다. 반면 개성에 있는 서
적전에는 형향각(馨香閣)과 창고가 있었다.
동적전에서 나온 곡물은 종묘제례에 주로 썼으며, 서적전 곡물은 왕실에서 벌이는 온갖 제사
의식에 동원되었다. 이들 적전에서 쓰고 남은 곡물은 백성을 구휼할 때 쓰거나 의약청(議藥廳
), 산실청(産室廳) 및 제왕과 왕비의 예장(禮葬)에 사용했다.

▲  청량대 표석

▲  선농단 북쪽 홍살문

이렇듯 왕실의 주요 행사로 바쁘게 살았던 선농제는 1909년까지 잘 유지되었으나, 1908년 이
후 향사이정(享祀釐正)에
관한 순종의 칙령(勅令)에 따라 국가 제단을 정리하면서 사직단에
통합되었다. 허나 동적전 친경의례는 1910년 5월까지 이루어졌는데 그때 순종이 신하와 백성
을 거느리고 친경을 하는 장
면이 빛바랜 흑백사진으로 남아있다.

왜정(倭政) 때는 지역 사람들에 의해 선농제가 조촐히 진행되었으나 1940년대 왜정이 망국의
제단을 욕보이고자 선농단 주변에 청량대공원(청량대)을 닦으며 제단을 아작내고 동적전이 있
던 곳에는 전농공원을 닦았다. 이때 제단 북쪽 땅이 떨어져나가 보통학교(현 종암초교, 1922
년 개교)가 지어졌고, 1935년에 제단 남쪽에 경성여자사범학교(현 서울대 사범대학)가 들어서
면서 남쪽 땅까지 썰려나갔다. 또한 군수물자 징수란 명목으로 제사 도구를 거의 뜯어가 제사
도 중단되고 말았다.
어둠의 시절 이후에도 수난은 여전하여 1946년 이후 제단 주변에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차 30
년 이상 잠수 아닌 잠수를 타며 주택가에 묻혀있었다. 그러는 사이 선농단의 이름도, 존재감
도 모두 희미해져 세상의 뇌리 속에서 완전히 잊혀져 갔다.
그러다가 1979년 제기동에 뜻있는 이들이 '선농단친목회'를 결성하여 자비를 들여 1년에 1번
씩 치제(致祭)를 올리기 시작했다. 세상의 무관심 속에 세월의 저편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선
농단의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그렇게 선농단은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고, 동대문구와 같이 제례를 지내다가 1988년 행
정기관장 최초로 동대문구청장이 선농제 초헌관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후 1992년에는 '선
농대제 보존위원회'가 결성되었고, 동대문구의 흔쾌한 지원과 폭풍 홍보에 힘입어 지역의 대
표 축제이자 문화행사로 제대로 거듭났다. 행사 규모도 비록 옛날만큼은 못해도 나날이 커져
갔다.
그러다가 선농단 복원 여론이 강하게 피어나면서 2013년 8월, 선농단 주변에 장막을 치고 복
원 공사에 들어갔고 2015년 4월 공사가 완료되어 다시금 세상에 위엄을 드러냈다. 옛 선농단
의 모습이 상당수 회복된 것이다. 또한 선농단 북쪽에는 선농단 역사문화관을 닦아 선농단과
선농대제의 이해를 돕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선농단의 구조는 단 주위로 크게 터를 다지고 그 한복판에 단을 두었다. 단이라고 해서 높이
구축된 것은 아니며 땅바닥에서 조금 솟은 정도이다. 제단 테두리는 돌로 잘 다지고 안쪽은
흙으로 다졌는데, 2015년 원래 모습으로 복원되면서 부득이 하얀 피부의 석재가 다소 섞여있
다. 기존에 쓰였던 옛 석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여 오래된 돌과 새 돌이 어색하게 조화
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새 돌도 선배 돌을 닮아가며 고색의 기운을 머금을 것
이다.
제단 외곽에는 낮은 키의 토담을 쌓았고, 동쪽과 서/남/북쪽 테두리 중앙에 붉은 피부의 홍살
문을 세웠는데. 이들 문과 토담은 2015년에 복원된 것이다. 선농단 남쪽에 1단의 석축을 두었
으며, 단 서남쪽에는 500년 이상 묵은 향나무가 영욕의 세월을 견딘 제단을 굽어보고 있다.

▲  선농대제의 한 모습

▲  펄펄 끓는 가마솥 설렁탕

선농대제는 처음에는 정월 길(吉) 해일(亥日)에 했으나 태종(太宗) 때 경칩이 지난 첫 해일로
변경되었다. 그때가 농사가 시작되는 3월이기 때문이다. 음력 2월 첫 신일(辛日)에도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며, 1910년에는 양력 5월에 거행되었다. 그러다가 1979년 이후에는 4월 말~5월
초/중순 사이에 하다가 지금은 4월 하순 토요일에 하고 있다.


제향(祭享)은 10변(籩) 10두(豆)의 중사(中祀)로 거행하고, 친림제향 때는 아헌관(亞獻官)은
왕세자(王世子)나 황태자(皇太子)가, 종헌관(終獻官)은 영의정이 맡았다. 집례(執禮)의 창홀
(唱笏)에 따라 음악을 연주하고 육일무(六佾舞)를 추며, 제례 봉행 순서는
① 전폐례<奠幣禮, 농업신에게 예물을 올리는 의식> → ② 천조례<薦俎禮, 제신(祭神)에게 음
식을 올리는 진찬(進饌)의식> → ③ 초헌례<初獻禮, 초헌관이 1번째로 농업신에게 작을 올리
는 의식> → ④ 아헌례<亞獻禮, 아헌관이 2번째로 농업신에게 작을 올리는 의식> → ⑤ 종헌
례<終獻禮, 종헌관이 3번째로 농업신에게 작을 올리는 의식> → ⑥ 음복례<飮福禮, 제관이 제
사를 마치고 신이 내린 제물을 먹는 의식> → ⑦ 망료례<望燎禮, 폐백과 축문을 태워 땅에 묻
는 의식> 순으로 거행된다.

영신악(迎神樂)은 경안지악(景安之樂)을 연주하고 전폐례에는 숙안지악(肅安之樂). 진찬례에
는 옹안지악(雍安之樂), 초헌례에는 수안지악(壽安之樂)을 연주하며 일무생들은 문무(文舞)를
춘다. 이어서 서안지악(舒安之樂)을 연주할 때는 일무생들은 무무(武舞)를 추기 시작하며, 아
헌례와 종헌례 때는 수안지악을 다시 연주하고 철변두(徹籩豆)할 때는 옹안지악을, 송신할 때
는 경안지악을 연주한다. (절차가 매우 복잡함)

제사 제물로는 소와 돼지, 양의 고기와 피, 쌀과 기장, 과일, 떡, 술 등을 올렸으며, 모든 행
사가 끝나면 친경에 쓰인 소를 잡고, 제물로 쓰인 소고기를 넣어 탕을 끓였다. 그리고 제물로
쓰인 쌀과 기장으로 밥을 짓고 돼지고기는 편육으로 썰었는데, 탕에 밥을 말고 편육과 여러
반찬을 겯드려 행사에 참여한 신하와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제물에 김치가 없기 때문에 파를 씻어다 놓았고, 간장도 쓰지 않기 때문에 소금으로 탕의 간
을 맞추었다. 오늘날 설렁탕을 먹을 때 파와 소금을 겯드리는데, 그 전통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선농단에서 끓인 탕이라 하여 '선농탕(先農湯)','설농탕','설롱탕'이라 불렸
으며,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가운데 글자가 살짝 움직여 지금은 '설렁탕'으로 주로 불린다.
우리나라 대표 음식의 하나이자 서울의 토박이 음식 설렁탕은 이렇게 선농대제 뒷풀이 음식으
로 태어난 것이다.

또한 설렁탕의 옛 이름 중 하나인 설농탕의 유래에 대해서 1940년에 홍선표가 쓴 '조선요리학
'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는 앞서 선농탕과는 약간 다른 것이라 햇갈림을 준다.
'세종대왕이 선농단에서 친경하던 때에 비가 심하게 내려서 촌보(寸步)를 옮기지 못할 형편에
이르렀다. 신하들이 배가 고파서 견디기가 힘드니 왕이 친경에 쓰던 소를 잡아서 맹물에 넣고
끓이라 하였다. 고기 끓인 국물에 소금을 넣어 먹으니 이것이 설농탕이다'

그 외에 오랫동안 탕을 끓이면 국물이 흰빛을 띠어 '눈처럼 뽀얗다','눈과 같이 무르녹는다'
는 뜻에서 설롱탕이 되었고, 그것이 설렁탕으로 변했다는 견해도 있다. 허나 보통은 선농탕
유래를 많이 신뢰한다.

동대문구의 대표적인 문화행사로 거듭난 선농대제는 보통 10시부터 시작된다. 왕산로에서 선
농단까지 짧게 어가행렬을 비롯한 제례행렬을 선보이며, (예전에는 동대문구청에서 출발했음)
10시 20분 정도에 개회식을 갖고 10시 30분부터 12시까지 제례를 봉행한다.
제례를 치르는 동안 선농단 북쪽 종암초교에서 동대문구 공무원과 새마을단체 사람들이 점심
을 준비하며 12시부터(보통 11시 30분 이후부터 배식함) 선농대제의 백미(白眉)이자 상징인 '
전통
설렁탕 재현 및 나누기' 시간을 갖는다. 설렁탕은 누구든 먹을 수 있으며, 전통에 따라
탕에 밥이
말아져 나온다. 반찬으로는 설렁탕의 단짝인 김치와 깍두기를 비롯해 떡과 생수가
제공된다.
설렁탕은 넉넉히 준비하기 때문에(보통 2,000~3,000명 분을 준비함~)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
다. 초반에 가면 사람이 너무 미어터져 밥이 오기까지 상당한 인내를 요하니 차라리 사람이
많이 빠져나간 12시 30분 이후에 먹기를 권한다. 음식은 각자가 알아서 챙겨먹는 것이 아닌
새마을단체 사람들과 자원봉사 학생들이 알아서 갖다준다. 늦게 갔을 경우에는 밥을 먹을 의
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으며, 가급적 13시 이전에 가는 것이 좋다. (떡과 김치 깍
두기 등이 빨리 떨어
짐)

공짜 설렁탕이지만 맛은 생각 외로 괜찮아 왠만한 설렁탕 전문점을 울게 할 정도이다. 시중에
서 거의 7,000~9,000원 하는 설렁탕을 선농대제의 일환으로 공짜로 먹을 수 있으니 정말 좋은
축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13시부터는 선농단 역사문화관에서 설렁탕 요리대회(설롱 요리대회)가 열리며 요리가
끝나면 시식 기회를 제공한다. (대회 참가 자격은 동대문구 관내 식당이나 학교, 단체에 한함
) 음식을 맛보고 괜찮은 음식에게 점수를 주면 되며 그것을 토대로 요리대회 승부를 결정한다.

※ 선농단, 선농단역사문화관 찾아가기 (2018년 5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제기동역 1번 출구를 나가면 바로 선농단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그의 지시
  에 따라 오른쪽으로 나무가 우거진 가로수길을 5분 들어가면 선농단이 나온다. 선농단 역사
  문화관은 그 북쪽 3거리(종암초교 정문 동쪽)에 자리한다.
* 지하철 6호선 안암역(3번 출구)에서 성북구 마을버스 04번을 타고 종암초교에서 하차, 여기
  서 길 반대쪽으로 건너면 종암초교로 인도하는 골목길(무학로44길)이 있는데 그 길로 도보
  3분
* 선농단 관람 시간 : 10시 ~ 18시까지 (11~2월은 17시까지)
* 선농대제는 4월 하순 토요일에 열린다. (4월 중순 쯤에 선농단 역사문화관에 전화문의를 해
  보는 것이 제일 좋음)
* 선농단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274-1 (무학로44길 38, 선농단역사문화관 ☎
  02-355-7990)
* 선농단역사문화관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남쪽 홍살문에서 바라본 선농단과 선농대제


 

♠  선농단과 선농대제 둘러보기

▲  서남쪽에서 바라본 선농단과 선농대제

선농단에는 푸른색 시트 커버를 걸친 제사상 4개가 놓여져 있다. 이중 큰 상은 선농단 북쪽과
동쪽에 배열하니 이들은 농업신인 선농씨와 후직씨의 밥상이며, 다른 조그만 상 2개는 선농단
밑에 둔다.
제단에서 남쪽 홍살문까지 붉은 카페트를 쫘악 깔고, 서쪽과 남쪽에도 붉은 카페트를 깔아 바
로 남쪽으로 향하게 했는데, 이들은 제왕을 비롯한 제관이 움직이는 동선이다. 제단 남쪽 정
면 길로 제단으로 들어가 의례를 치른 다음, 서쪽이나 동쪽 카페트를 따라 다시 남쪽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선농단 주위로 갑옷을 입거나 무관 복장을 갖춘 무관(武官)들이 삼엄하게 늘어서 있어 선농대
제의 엄숙함을 한껏 고조시킨다. 1시간 반 가까이 저렇게 서 있는 것도 그리 쉽지는 않을텐데
말이다. 허나 옛날과 달리 그저 자리만 지키면 되며, 옆 사람과 수다를 떠는 모습도 쉽게 목
격이 된다. 그것이 옛날과 오늘날 선농대제의 차이이다. 만약 옛날에 그렇게 산만하게 행동했
다면 바로 파직감이다. 그만큼 까다로움을 요구했던 국가의 제례의식이었기 때문이다.


▲  전통 방식으로 재현된 가마솥 설렁탕 부뚜막

선농단 서쪽에는 누런 피부의 부뚜막을 설치하여 정겨운 가마솥을 걸고 설렁탕을 끓이고 있다.
장작을 넣어 부뚜막을 계속 흥분시키면서 탕을 숙성시키고 있는데, 선농대제가 무르익을 수록
설렁탕도 그만큼 익어간다.


▲  동남쪽에서 바라본 선농대제

선농단 남쪽 밑에는 금관조복(金冠朝服)을 갖춘 제관들이 홀(忽)을 쥐어들며 3줄로 늘어서 있
다. 이들 상당수는 선농대제 보존위원회 위원들로 석전대제와 사직대제, 종묘대제 보존위원들
도 섞여있다. 제왕은 보통 동대문구청장이 담당하고 있는데, 대례복(大禮服)과 12면류관을 갖
춘 자못 제왕다운 모습으로 대제에 임하고 있다.
제관들은 노천에 멍석을 깔고 앉거나 절을 하지만 제왕은 그들 동쪽에 차려진 노란색 천막 안
에서 햇살을 피하며 대기한다. 그리고 의식을 행할 때는 옆에 자리한 내관이 붉은 일산(日傘)
을 받쳐들고 그를 따르니 역시나 제왕이나 우두머리 자리가 좋긴 좋다.

제관 자리 남쪽에는 하얀 천막이 쳐져 있고 의자가 넉넉히 놓여져 있어 행사 관계자들과 세금
이나 축내는 구의원과 국회의원 밥버러지들, 지역 유지들, 관람객들이 앉아있으며 제관들 서
쪽에는 붉은 옷을 입은 여인들이 무리를 지어 앉아있는데 이들은 일무(佾舞)를 맡은 사람들이
다. 그리고 그들 북쪽에는 제례악을 맡은 사람들이 각기 악기 1개 또는 2개씩 거느리며 악기
를 조정한다.


▲  선농대제에 임하고 있는 제관들
전통 행사로 진행되는 지금도 이러한데 옛날에는 정말 숨소리도 내기 힘들 정도로
정성과 엄숙을 다했다. 그때는 조금의 실수나 긴장 풀린 모습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만약 걸리면 파직을 시키거나 징계를 주었다.

▲  동쪽 홍살문 남쪽에서 바라본 선농대제
(노란 천막은 제왕이 대기하는 특별 공간)

▲  제례 봉행이 시작되면 제관들은 전폐례부터 망요례까지 무려 7개의 의식을
수행해야 된다. 그때마다 단으로 올라가 의식을 치루고 다시 내려와
대기하다가 다음 의식이 시작되면 또 올라간다.

▲  선농단 남쪽에서 대기하고 있는 일무생들
사단법인 아악일무보존회 사람들로 모두 여자들이 맡는다. 앳된 20대부터
중년층에 이르기까지 36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  문무(文舞) 율동을 선보이는 일무생들

▲  제례악을 맡은 사람들 (경기도립국악단)

▲  서쪽에서 바라본 선농단과 선농대제

▲  북서쪽에서 바라본 선농단과 선농대제

▲  음복례가 진행되고 있는 선농단
음복례는 제관이 제사를 마치고 제물로 올린 술을 마시는(음복) 의식이다.

▲  음복례도 거의 끝나가고

▲  대제의 마지막 단계, 망요례

음복례가 끝나면 폐백과 축문을 태우고 선농단 북쪽에 마련된 공간에 묻는다. 망요례를 끝으
로 1시간 반에 걸친 선농대제는 마무리가 되며, 원래대로라면 친경 의식도 해야 되나 부근에
친경을 벌일 경작지가 없기 때문에 계속 생략되고 있다. 그러니 선농대제는 '설렁탕 나누기'
를 포함해 2/3 정도만 재현되고 있는 셈이다. 허나 어찌하겠는가? 아무리 전통 행사라고 해도
시대에 맞게 변형과 축소는 어쩔 수가 없다.


▲  망요례를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제관들
다들 속으로 '이제 행사도 끝났으니 밥 묵으러 가자~~!' 이랬을 듯~~

▲  선농대제에서 활약한 전통 악기들
궁중 의례나 종묘제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몸값 비싼 악기들이 주류를 이루어
선농대제의 높은 품격을 보여준다.


대제가 끝나자 선농단 주변의 통금은 모두 풀렸다. 제관들과 행사 요원들, 높은 작자들은 기
념사진을 찍거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하나 둘 밥 먹으러 사라지고, 제단 주변은 관리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어수선한 상황이 되었다. 대제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제단으로 들어와
초롱초롱 호기심 어린 눈으로 제삿상과 제물, 제기, 악기 등을 살펴보고 사진에 담느라 부산
하다. 그렇다고 제물과 제기를 가져가지는 말자~! 그냥 손으로 쓱쓱 어루만지고 끝내면 된다.


▲  선농대제 제삿상 <후직씨에게 올리는 제삿상, 2012년>

▲  금동 빛깔의 장엄스런 제기들
사극에서나 보던 고급 제기들이 속인들의 호기심을 건드린다. 백성들은 감히 쓰지도,
만지지도 못했을 저들을 직접 두 눈에 담으니 기분이 참 새롭다. 저들은 가격이
얼마나 하려나? 몇 개 장만하여 내 밥그릇으로 쓰고 싶다.

▲  제주(祭酒)을 담은 그릇과 의식 때마다
손을 씻는 정화수와 수건들

▲  창고로 퇴장하는 제기들
이제 1년 뒤에나 볼 수 있겠구나...


▲  가벼운 태풍이 지나간 듯 어수선한 선농단 (대제 직후의 모습)

제관과 행사요원들이 밥 먹으러 가고 선농대제로 잠시 긴장을 탔을 선농단은 제사 소품이 어
지럽게 깔린 채, 휴식을 취하고 있다.
저 소품들은 점심 이후에 모두 정리되어 창고로 옮겨지며, 제단 주변을 깨끗히 손질하여 언제
시끌벅적한 대제를 지냈냐는 듯 원래의 적막한 모습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아무리 점심시간이
라고 하지만 제단 위에 저렇게 소품을 방치하는 것은 좀 결례가 아닐까 싶다. 선농단이 마치
제례용품 창고가 되버린 듯한 씁쓸한 현장처럼 보여 적어도 제단 밖으로 모두 옮겨놓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싶다.


 

♠  선농단 마무리 (향나무, 설렁탕, 선농단 역사문화관)

▲  선농단 향나무 - 천연기념물 240호

선농단 서쪽에는 나이도 지긋한 오래된 향나무가 넓게 그늘을 베풀고 있다. 그는 선농단의 오
랜 상징이자 얼굴로 나이가 무려 500년 이상을 헤아린다. 20세기 후반에도 추정 나이가 500년
이었다고 하니 선농단과 나이가 그런데로 비슷할 듯 싶으며, 1476년 선농단을 닦을 때 성종이
기념으로 심거나 15세기 후반 선농대제 기념으로 심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천하에 널리고 널
린 나무 중에 유독 향나무를 심은 것은 제사 때 피울 향을 충당하고자 함이다.

아무리 먹어도 줄지 않는 세월이란 무한 양분과 국가 제단에 자리한 잇점으로 관리들과 귀족
들의 보살핌이 대단했다. 게다가 대제 때마다 곡차(穀茶)의 기운을 듬뿍 받으니 키가 13.1m,
둘레 2.28m에 어엿한 나무로 성장했다. 대제가 끝나면 막걸리를 비롯하여 제사에 쓰인 술은
이 나무에 모두 부었다고 하며, 어렸을 때부터 강제로 술에 길들여지다보니 이제는 내성이 생
겨 어지간한 술에도 눈 까딱하지 않을 것이다.


▲  선농단의 흑역사, 바닥에 눕혀진 청량대(淸凉臺) 표석

향나무 북쪽에는 '청량대' 3자가 쓰인 표석이 표석이 벌러덩 누워있다. 여기서 청량대는 왜정
이 선농단을 욕보이고자 제단 주변에 닦은 공원으로 '청량대공원'이라 불렸다. 공원 앞에 청
량대 표석을 세워 선농단의 이름을 억지로 대신했는데, 1945년 8.15이후 제기동과 용두동 주
민들이 몰려와 왜정이 세운 청량대 표석을 때려 눕혀 땅에 묻어버리면서 어둠의 시절에 대한
울분을 조금이나마 달랬다.
그러다가 2013년 이후 선농단을 복원할 때 다시 꺼내서 이곳에 눕혀놓았다. 90도로 세워놓으
면 왜정 잔재에 기만 살려주는 꼴이 되니 이렇게 눕힌 것이다. 비록 왜정이 남긴 고약한 흔적
이지만 기왕 다시 햇살을 보게 된 거 이런 상태로 선농단 곁에 두어 후대에 경계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 허나 이 땅에는 아직도 때려눕힐 왜정의 잔재가 너무 많다. 그것들을 모두 잡는
그날, 이 땅에 진정한 광명이 올 것이나 그럴려면 아직도 까마득하니 그저 곡소리만 나올 뿐
이다.


▲  선농대제는 끝났지만 숙성의 끝을 향해 부뚜막에 몸을 기대며
제 갈 길을 고집하는 가마솥 설렁탕


선농대제도 다 끝나고 사람들도 대부분 빠져나간 선농단에서 유일하게 펄펄 흥분을 내는 존재
가 있다. 바로 황토색 부뚜막에 걸린 가마솥 설렁탕이다. 부뚜막에는 아직도 온기(溫氣)가 여
전해 뜨거운 입김을 불어대며 탕이 아주 사골이 되도록 펄펄 숙성시키고 있는데 탕 국물이 아
주 하얗게 변해 뽀얀 눈이 내려앉은 것 같다.
설렁탕 나누기 행사에서 이 가마솥 설렁탕을 쓸 것 같지만 절대로 쓰지 않는다. 동대문구에서
따로 조리하여 가져와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이 설렁탕은 어디까지나 재현용이며 가마솥 안에
는 국물만 보일 뿐 고기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허나 냄새만큼은 설렁탕 냄새 비슷하여 아
마도 소뼈 등을 넣고 삶은 듯 싶다.


▲  선농단 북쪽 밑에 자리한 선농단 역사문화관

선농단 역사문화관은 선농단을 복원하면서 새로 닦은 것으로 2015년 4월에 문을 열었다. 이곳
에는 선농단과 선농대제의 역사와 유물, 디오라마를 비롯하여 설렁탕의 깊은 유래, 농업의 역
사와 농기구들을 다루고 있으며, 어린이를 위해 선농단 탁본 체험, 선농대제 의복 체험, 선농
대제 사진 촬영 등의 여흥거리도 준비되어 있다.
지하 2층 규모로 지하 1층에는 선농단과 선농대제, 어가행렬, 제왕의 친경의례 등을 다루었고,
지하 2층은 설렁탕과 농업 관련 유물과 서적 전시, 체험 코너, 청소년 쉼터와 배움터, 중정(
시간의 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정 같은 경우는 향나무 남쪽에 있었던 옛 선농단을 투영
한 곳으로 내,외부에 24절기를 표현하여 그 24절기에 따라 빛과 그림자가 햇님의 운행에 따라
시간과 계절, 날씨의 변화된 조건에서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알려주는 공간이다.

허나 다른 박물관, 전시관과 비교해서 크게 두드러지는 부분이나 매력은 별로 없으며, (체험
코너나 중정 정도~) 전시 유물도 좀 빈약한 실정이다. 그러다보니 관련 해설과 사진, 디오라
마가 주류를 이루고 있어 선농단 후식거리로 1바퀴 둘러보며 선농단을 복습하는 공간으로 활
용하면 될 것이다. 특히 아이들을 동반하여 왔다면 꼭 들려서 체험 코너에서 놀게 해주는 것
도 좋다. (선농대제 의복 체험, 사진 촬영 등)


문화관 정문에는 전통 찻집과 기념품점이 있어 잠시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도 누릴 수 있으며,
마침 정문 앞에서 설렁탕 요리 대회(설롱 요리대회)가 열리고 있어서 분위기가 가마솥 설렁탕
처럼 아주 뜨거웠다.

★ 선농단 역사문화관 관람정보 (2018년 5월 기준)
* 관람시간 : 9시~18시 (겨울 11~2월에는 17시 30분까지)
* 관람료 : 무료 (매주 월요일과 법정공휴일은 휴관)
* 상설 전시 해설 : 1일 6회 (10~16시까지 매시 정각, 12시는 없음)
* 단체 전시 해설은 10~20명 단체에 한하며 관람 5일 전까지 전화로 신청 요망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274-1 (무학로44길 38, ☎ 02-355-7990)


▲  선농단과 동적전의 위치

▲  1739년에 작성된 친경의궤(親耕儀軌)

▲  동적전식례(東籍田式禮)
동적전에 관해 기록한 책으로 1824년부터 1853년까지 쓰였다.

▲  신농씨 제례상

▲  선농대제에서 먹은 설렁탕의 위엄

선농단과 선농대제를 둘러보고 그날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설렁탕을 먹으러 종암초교로
이동했다. 선농단 일대를 동분서주하다 보니 시장기가 무척 치솟아 뱃속이 아주 반란 직전이
다.

설렁탕은 동대문구청에서 마련하여 제공하는 것으로 행사 관계자는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무
료로 대접하고 있다. 그러니 누구든 와서 운동장에 설치된 천막에 앉으면 설렁탕과 김치, 깍
두기, 떡, 생수, 1회용 숟가락과 젓가락을 제공받는다. 직접 줄을 서서 음식을 받는 것이 아
닌 자원봉사자들이 직접 갖다주는 방식으로 초반에 가면 자리를 잡기도 힘들뿐 더러, 음식이
내 앞에 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려 차라리 좀 늦게 가는 것이 낫다.
12시 30분 이후에는 빈 자리가 많아서 적당한 곳에 앉아 음식을 나르고 치우느라 바쁜 그들에
게 1그릇 청하니 바로 잘차려진 설렁탕을 가져다준다. 혹자(或者)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
다. '공짜 설렁탕이니 맛도 별로고 고기도 별로일 것이다'
하지만 동대문구가 지역 이름과 선농단, 선농대제의 이름을 걸고 제공하는 설렁탕인지라 맛은
시중의 유명 설렁탕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 그러니 안심하고 먹자. 파도 넉넉히 들어있고, 고
기도 그런데로 담겨져 있으며, 김치와 깍두기도 맛이 괜찮다. (예전에는 밥과 탕을 따로 주었
으나 이제는 탕에 말아서 제공함)

설렁탕의 양은 사람마다 틀리겠지만 나한테는 좀 적었다. 뱃속도 1그릇을 더 조공으로 보내라
고 극성인지라 1그릇을 더 청하여 2그릇을 비웠다. 어차피 늦게 가면 초반과 달리 음식 여유
가 있기 때문에 1그릇을 더 먹고 반찬을 더 축내도 상관은 없다. 그날 배식이 어여 끝나야 설
렁탕 나누기 행사도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분 좋게 설렁탕 섭취를 마치고 나오니 시간은 어느덧 13시 20분이 되었다. 선농단에
3시간 가까이를 머물며 선농단과 선농대제, 선농단 역사문화관, 향나무, 거기에 설렁탕까지
정말 남부럽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눈과 입, 코, 귀 등 5각(五覺)이 즐거웠던 답사였다.
이렇게 하여 내년 선농대제와 설렁탕을 벌써부터 고대하며 '설렁탕의 고향, 선농단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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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의 흔적을 거닐다 ~~ 낙성대, 신림동 굴참나무 (강감찬 생가터, 낙성대공원)



'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의 흔적을 찾아서~~ '
(낙성대, 신림동 굴참나무)

▲  낙성대 3층석탑

▲  낙성대 안국사

▲  신림동 굴참나무



봄이 한참 전성기를 누리며 천하만물을 곱게 물들이던 5월의 첫 주말에 일행들과 낙성대를
찾았다.
이제 5월의 시작임에도 철모르고 찾아온 따스함을 넘어선 더운 기운에 여름이 벌써 근처까
지 진군한 모양이다. 이번 여름은 작년보다 더 더울 거라고 구라청으로 유명한 기상청에서
입을 모으고 있으니 여름 제국의 시련을 어떻게 견딜지 벌써부터 한숨이 나온다.

오후 3시에 낙성대역(2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부근 마트에서 간단하게 음료수와 김밥을 사
들고 낙성대(안국사)로 향했다. 그곳으로 갈 때는 낙성대입구에서 서울대 후문으로 통하는
낙성대로를 따라가면 손을 뒤집듯 쉽게 갈 수 있지만 그렇게 가지 않고 낙성대동 주택가로
조금 돌아갔다. 그 이유는 밀림 같은 주택가 속에 옛 낙성대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  강감찬 장군이 탄생했던 유서 깊은 현장, 허나 지금은 주택가 속의
외로운 공원이 된 옛 낙성대<(落星垈), 강감찬 생가터>
-
서울 지방기념물 3

▲  옛 낙성대 (강감찬 생가터)

봉천동 218번지(낙성대동) 주택가 속에 옛 낙성대가 묻혀 있다. 이곳은 관악구 출신이자 귀주
대첩의 영웅인 강감찬 장군(948~1031)이 태어난 곳으로 흔히 낙성대하면 여기서 남쪽으로 1
정도 떨어진 안국사(安國祠) 일대를 일컫지만 원래 낙성대는 이곳이다. 낙성대란 이름은 별이
떨어진 터란 뜻으로 세종실록(世宗實錄)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다음과 같은 탄생설
화가 한 토막 전해온다. <낙성대는 절대로 이상한 대학교의 이름이 아님~~!!>

948년 어느 날 밤, 중원대륙 사신(使臣)으로 표현된 인물(그냥 사신으로 나오기도 함)이 근처
를 지나다가 하늘에서 큰 별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신기한 광경에 입이 떡 벌어진 그
는 별이 떨어진 집을 찾아가니 그 집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자 금주(衿州, 서울 관악
, 금천구 지역) 지역 세력가인 강궁진(姜弓珍)의 집이었는데 마침 그의 부인이 아들을 낳으
니 그가 바로 강감찬이라는 것이다
이후 송()나라 사신이 고려에 왔다가 그를 만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곡성(文曲星)을 못
본지 오래되었는데 여기서 지금 뵈옵습니다'
하며 꾸벅 절을 했다고 한다. 여기서 문곡성은 도
(道家)에서 말하는 9개의 별 가운데 4번째 별로 학문을 관장하는 별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떨어진 별이 문곡성이라고 하나 강감찬의 학문이 매우 뛰어나 문곡성을 빌려 표현했을 것이다.

당시 고려는 중원(中原)의 후한(後漢), 진나라 등과 교류를 했는데 고려와 중원의 사신, 무역
상인들은 개경(開京) 인근 벽란도(碧瀾渡, 예성강 하류)에서 배를 타고 서해바다를 오갔다. <
중간에 흑산도나 가거도를 경유하기도 함> 그러니 굳이 내륙인 서울<당시 남경(南京)>로 돌아
갈 이유는 없다.
이곳을 거쳐가지도 않았을 사신을 애써 끌어들인 것은 온갖 문화가 혼합된 중원의 문화를 좋아
하고 중원대륙을 동경하던 옛 사람들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지며 앞서 문곡성의 예를
통해 문곡성의 화신(化身)으로 여기고 그의 탄생일에 맞춰 그 별이 떨어진 것으로 탄생설화를
꾸민 듯 하다. 그리고 송나라 사신이 그에게 문곡성이라 존칭하며 굽신거렸으니 그에 맞게 중
원대륙 사신을 등장시킨 것으로 보인다.

또한 별은 나라를 세운 시조(始祖)나 영웅의 탄생설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들이 태어났을 때 흔히 별이 떨어졌다 하늘이 기뻐서 별을 내렸다는 식으로 탄생을 추켜세우는
것으로 설화처럼 정말로 별이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짜로 떨어졌다면 강감찬 집은 물론
이고 그 주변은 정말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하늘에 떠 있는 별은 우스개 소리로 딸 수 있을
정도로 작아보이나 그게 코 앞에 다가왔을 때는 꽤나 난감한 상태가 됨>

이곳에 있었다는 강감찬 생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어떠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의
집안이 후삼국시대부터 금주 지역을 다스리던 세력가였으니 집은 제법 컸을 것이다. 허나 세월
의 장대한 흐름 속에 집이 녹아내리면서 생전의 모습을 알 수 없게 되었으며, 강감찬이 세상을
뜬 이후, 그를 흠모하던 사람들은 이곳이 별이 떨어진 곳이라 하여 낙성대라 불렀다.
13세기 경, 지역 사람들과 후손들이 그의 공덕과 그의 탄생지를 길이 알리고자 생가터에 3층석
탑을 세우니 그것이 낙성대3층석탑이며, 탑의 영향으로 이곳 일대를 탑골이라 불렀다.

이후 3층석탑 홀로 이 자리를 지키다가 1974년 이곳 남쪽에 사당인 안국사를 세우면서 탑을 그
곳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는 대신 유허비를 세우고 나무와 꽃을 심어 주변을 산뜻하게 정비했다.
안국사가 조성되면서 그곳이 새 낙성대가 되었으며, 기존의 낙성대는 옛 낙성대가 되어 '낙성
대유지(遺址)'란 이름으로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근래에 '강감찬생가터(낙성대)'로 명칭
이 갈렸다.

현재 이곳에는 낙성대유허비와 옛 강감찬 향나무의 뒤를 이은 160년 묵은 향나무가 있으며,
무와 꽃이 가득하여 조촐하게 소공원의 역할을 한다. 강감찬생가터라고 하지만 생가와 관련된
어떠한 흔적도 전해오지 않으나 땅을 파보면 건물 주춧돌이나 당시 유물이 고개를 들고 나오지
않을까 싶다. 나중에 이 주변을 재개발하거나 싹 밀어버릴 기회가 있을 때 꼭 발굴조사를 벌였
으면 좋겠다.

강감찬생가터(옛 낙성대) 찾아가기 (201710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4번 출구를 나와서 50m 정도 가면 왼쪽으로 낙성대역길이 나온다,
  길을 3분 정도 가면 오르막이 나오면서 길이 왼쪽(동쪽)으로 꺾이는데 그 꺾인 길로 2번째
  골목길인 낙성대역4길로 2분 정도 가면 오른쪽에 나무가 우거긴 옛 낙성대가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낙성대동) 218-14


▲  수목으로 우거진 옛 낙성대

▲  낙성대유허비(落星垈遺墟碑)

옛 낙성대 한복판에 자리한 유허비는 낙성대의 상징이던 3층석탑이 새 낙성대로 옮겨짐에 따라
허전한 옛 자리를 지키고자 1974년에 세워진 것이다. 안국사 안에 세워진 강감찬사적비를 모델
로 하여 똑같이 만들었는데, 고개를 높이 쳐들며 엉금엉금 기어가는 듯한 거북 머리 귀부(龜趺
)를 밑에 깔고 그 등에 비좌(碑座)를 만들어 '강감찬장군 낙성대유허비'라 쓰인 비신(碑身)
세웠으며 그 위에 2마리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이수(螭首)로 마무리를 지었다.
비석 높이는 2m 정도로 안국사의 강감찬사적비보다 키가 작고 품격이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나
1997년에 다시 손질했다.


▲  강감찬 향나무

옛 낙성대의 명물로는 제자리를 떠난 3층석탑과 함께 오랜 숙성을 자랑하는 나이 지긋한 향나
무가 있었다. 향나무는 강감찬과 더불어 자랐다고 전해져 일명 '강감찬나무'라 불리는데 그것
이 맞다면 나이가 무려 1,100살이 된다. 허나 실제 나이는 그 정도까지 미치지 못하며 조선시
대에 강감찬을 흠모하던 지역 사람들이나 후손이 심은 것으로 보인다. 그게 시간이 지나면서
강감찬과 연관된 나무로 묶여진 것이다.
이 나무 외에도 인근 난곡에 그가 심었다고 전하는 굴참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도 강감찬나무란
별명을 지니고 있다. (본글 끝 부분에 있음)

낙성대 향나무는 낙성대와 강감찬을 상징하는 자연 명물로 1968 서울시 보호수 1-23로 지
정되었으나 1987년 무심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숨줄을 놓고 말았다. 그래서 그
에게 부여된 보호수 등급은 해제되었고 죽은 몸뚱이도 문드러져 전설 속의 나무가 되었다.
이후 1996년 관악구에서 옛 낙성대를 확장/정비하면서 향나무의 빈자리를 채울 계획을 세웠고
적당한 나무를 물색하다가 그해 11월 경기도 고양시(高陽市)에서 150년 묵은 향나무를 구입해
비록 씨는 다르지만 강감찬나무의 후예로 삼있다. (나무 앞에 그와 관련된 유래를 머금은 표석
이 누워있음)


 

♠  낙성대공원과 낙성대3층석탑

▲  봄이 파릇파릇 익어가는 낙성대공원

옛 낙성대를 둘러보고 안국사가 있는 새 낙성대로 이동했다. 낙성대역에서 서울대후문으로 가
는 길목에 자리한 이곳은 19746월에 조성되었는데 크게 안국사와 낙성대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전 공원에는 팔작지붕 기와집 매점이 전부였으나 그새 빨간 피부의 도서관과 야외놀이
마당, 전통혼례식장 등을 새로 그려넣어 그때보다 더 활력이 넘쳐보인다.

봄이 내려앉은 공원에는 산책,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거의 시장통을 이루었고, 공원 북쪽에 자
리한 전통혼례식장에서는 혼례가 열리고 있어 하객들의 발길이 분주했다. 우리는 그런 풍경의
일부가 되어 의자에 앉아 바깥에서 가져온 음료수와 김밥을 먹으며 잠시 두 다리를 쉬었다.


▲  빨간 카페트가 깔린 관악예절원 전통혼례장

▲  안국사로 인도하는 그림 같은 숲길
오랜만에 찾은 새 낙성대에 이런 숲길이 있었다니 결코 낯선 곳이 아님에도
처음 만난 듯 신선하기만 하다. 집으로 살짝 가져와 혼자서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아름다운 숲길이다.


낙성대공원에서 안국사로 가는 길은 크게 2개이다. 하나는 숲길(윗 사진)로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안국사 정면으로 난 홍살문으로 가는 것인데 우리는 숲길로 들어가 홍살문으로 나오기
로 했다.
숲길 좌우에는 나무들이 봄이 안겨준 좋은 세상에 심취하며 한참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들이
없다. 그 풍경이 고와 벌써부터 눈이 호강을 누릴 지경인데 늦가을이면 그 화사함에 두 눈이
멀지도 모르겠다.


▲  안국사의 정문인 안국문(安國門)

숲길을 들어서니 안국사 관리사무소가 나오고, 그 옆으로 안국사의 외삼문(外三門)인 안국문이
윤기가 흐르는 청기와 맞배지붕을 드러내며 위엄을 뽐낸다. 사당은 안국문부터 내삼문을 거쳐
본전까지 모두 서북향(西北向)을 하고 있는데, 이는 지형상에 이유도 있겠지만 강감찬이 고려
때 인물이므로 옛 고려의 국도(國都)인 개경(開京)을 바라보게끔 서북향으로 설정한 것이 아닐
까 싶다. 개경(개성)은 여기서 서북향이다.

안국문은 3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운데 문은 사당 주인만 왕래하는 특별한 문으로 제
향 외에는 닫아둔다. 속인들은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왼쪽 문으로 나가면 된다. 안국문 앞 계
단은 약 3m 높이로 문의 위엄을 수식하고 있으며, 계단 남쪽에는 낙성대 안내문과 낙성대 바위
글씨가 있다.


▲  커다란 돌에 새겨진 낙성대 바위글씨

낙성대 안내문 옆에 자리한 낙성대 바위글씨는 낙성대가 완성되자 박정희 전대통령이 남긴 낙
성대 3글자를 자연산 바위에 새긴 것이다.
1974년 청와대와 서울시는 강감찬 장군을 기리고 그를 통해 백성들의 나라사랑 정신과 충효의
지를 높이고자 그의 사당을 짓기로 했다. 당시 서울에는 옛날에 잘나갔던 장군의 사당이 하나
도 없던 상황. 그런 상황에 관악구 출신인 강감찬은 정말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의
유적인 낙성대는 3층석탑과 향나무만 있었을 뿐, 제를 지내는 어떠한 시설도 없었다.
그래서 자리가 넓은 관악산 북쪽 자락에 넓게 터를 다져 사당을 지었는데 그해 411일 상량
식을 가졌고 불과 2달 만인 610일에 뚝딱 완성을 보았다. 45천이 들었으며 강감찬이 국
내외적으로 크게 불안정했던 고려를 반석 위에 올려 나라가 평안해진 것처럼 나라의 평안을 염
원하는 뜻에서 사당 이름을 안국사라 하였다.

바위글씨 앞 표석에는 박대통령께서 하사하셨다는 식으로 아주 재미없게 쓰여 있어 독재시대의
우울했던 단면을 보여준다. <사당을 지어 영웅을 기리는 것은 좋으나 그 사당을 지은 이를 너
무 높인 것이 옥의 티임>


▲  안국문과 내삼문 중간 (안국문에서 바라본 모습)

안국문을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내삼문이 보이고, 좌우로 3층석탑과 강감찬장군사적비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서울의 유일한 옛 시대 장군의 국립 사당이라 <민간신앙으로 지어진 원효로 남
(南怡) 장군 사당, 보광동 김유신장군 사당은 제외> 경내가 꽤 깔끔해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  3층석탑과 마주보고 있는 강감찬장군 사적비(事蹟碑)
1974년에 지어진 것으로 옛 낙성대에 있는 유허비와 같은 모습이다.

▲  낙성대3층석탑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

강감찬사적비 맞은편에는 낙성대의 오랜 상징인 낙성대3층석탑이 자리해 있다.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왜 이곳에 뜬금없이 절탑이 있지~?','인근 절이나 절터에서 가져온 것인가~?'
고개를 갸우뚱하지만 그는 겉모습만 그렇지 불교와는 관련이 없는 석탑이다.

이 탑은 고색의 기운이 없는 낙성대 안국사에서 유일하게 고색의 내음을 뿌려주는 존재로 13
, 지역 사람들과 후손들이 강감찬의 공덕을 기리고자 그의 생가터에 세운 것이다. 공덕을 기
린다고 하면 흔히 비석을 세우기 마련이나 불교 국가인 고려답게 불탑(佛塔) 모양의 탑을 세워
강감찬을 큰 존재로 추앙한 것이다. 이를 통해 옛 금천 지역 사람들의 그에 대한 존경심이 얼
마나 지극했는지를 가늠케 하며 지금은 금지된 도시가 되버린 개성(開城)에도 그를 위해 세운
석탑이 전하고 있다.
이 땅에서 석탑을 불탑도 아닌 영웅을 기리고자 세운 경우는 강감찬 외에도 경남 남해(南海)
정지(鄭地) 장군 석탑이 있다. 그는 14세기에 남해 관음포(觀音浦)에서 왜구를 격퇴해 남해 백
성을 구했는데 지역 백성들이 그의 전승을 기리고자 세웠다.

탑이 영락없는 불탑이라 다른 절에 있던 탑을 가져와 낙성대의 상징물로 삼은 것이 아닌가 여
기는 경우도 있지만 낙성대 주변에서 마땅한 절 흔적이 없다. 오로지 강감찬을 찬양하고자 세
운 탑이라고 봐야된다. 조성시기가 13세기인 것을 보면 그 당시 무척이나 징그러웠던 몽고(
나라)와의 전쟁에서 거란족(요나라) 토벌의 영웅, 강감찬을 그리며 그의 혼령이 몽고를 속시원
히 때려잡아주기를 바라는 뜻도 담겨져 있을 것이다.

탑의 높이는 4.5m로 순 화강암으로 지어졌는데 밑에 바닥돌을 두고 그 위에 길쭉한 기단부(
壇部)를 세운 다음, 3층 탑신(塔身)을 얹혔다. 1층 탑신에는 '강감찬 낙성대'라 쓰여 있어 이
탑의 정체를 알려주고 있으며 머리장식은 훼손되어 남아있지 않다. 거의 800년을 묵은 탑이지
만 아직 정정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강감찬의 왕년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이 탑은 옛 낙성대에 있었으나 1974년 제자리를 떠나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낙성대의 오랜 상징
으로 이곳에 왔다면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큼은 꼭 살펴보기 바란다. 3층석탑이 없는 낙성대
는 갈비가 없는 갈비탕과 같기 때문이다. 안국사도 그가 있기에 빛을 발하는 것이다.


▲  1층 탑신에 희미하게 새겨진 '강감찬 낙성대(姜邯贊 落星垈)'

▲  서쪽에서 바라본 낙성대3층석탑

▲  남쪽에서 바라본 낙성대3층석탑

       ◀  푸르게 익은 낙성대 은행나무
1974년 안국사가 완공되자 박정희 전대통령이
그 기념으로 보낸 나무이다. 나무 앞에 관련
내용이 적힌 표석이 누워있는데 '~~각하께서 ~
~하사하시었다'는 식으로 적혀있어 그 표현에
다소 거부감을 들게 한다.
그래도 역사의 산물이니 어찌하랴. 좋은 뜻에
서 안국사를 세운 것은 분명하니 이런 시대도
있었음을 알리는 뜻에서 그냥 두는 것도 좋을
듯 싶다.


▲  본전을 가리고 선 내삼문(內三門)
저 문을 들어서면 안국사의 본전이 나온다.


 

♠  낙성대 안국사(安國祠)

▲  안국사 본전(本殿)

안국사 가장 안쪽에 자리한 본전은 말그대로 이곳의 중심 건물로 강감찬 장군의 영정이 봉안되
어 있다. 가운데 칸에 그의 영정이 자리해 있고, 그 좌우로 그의 생애의 주요 장면(탄생, 조정
출사, 귀주대첩, 영파역에서 현종을 알현하는 모습 등)을 머금은 기록화가 걸려있는데 오직 상
상으로 그려진 것이라 그 당시와는 다소 떨어지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3중으로 된 기단 위에 높이 들어앉아 서북쪽을 바라보는 이 건물은 정면 5, 측면 3칸의 팔작
지붕 건물로 청기와를 입혔다. 고려 후기 대표적인 건축물인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
殿)을 본따서 지었는데 무량수전 기둥을 따라서 배흘림기둥을 취했다. (기둥 가운데가 볼록함)


▲  옆에서 본 안국사 본전의 위엄

▲  닫집 안에 봉안된 강감찬 장군의 영정

강감찬은 키가 작고 외모가 볼품이 없으며 평소에는 해지고 때가 묻은 옷을 입고 다녀 많은 사
람들이 그를 몰라봤다고 전한다. 허나 거란() 토벌의 대영웅을 그렇게 수수하게 그리는 것은
좀 아닌 듯 싶어 매우 늠름하고 매서운 눈초리로 표현했다.
이 영정은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 1912~2005)1974년에 그린 것이다. 강감찬 생전의 모습
을 담은 그림이 전혀 없고 달랑 키가 작고 외모가 별로라는 내용만 있으니 나름 상상을 발휘하
여 그린 것이다. 그러니 실제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월전이 그린 강감찬 영정이 그의 표준 영
정이 되어 그와 관련된 사당에는 그의 그림이 사당 중앙을 장식하고 있다.
게다가 월전은 조선의 마지막 어진(御眞) 화가이자 친일 화가로 추잡한 경력을 남긴 김은호(
殷鎬)의 제자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화풍을 좀 닮은 것 같다.

이곳 영정은 1998111일에서 12일 사이에 그만 도난을 당했는데 관리인의 신고를 받은 관
악구청은 이를 세상에 알리지 않고 몰래 월전을 찾아가 새로 그려줄 것을 요청했다. 허나 고령
의 나이를 이유로 거절당하자, 급하게 신림동에 사는 금광복이란 화가에게 영정과 똑같이 그려
줄 것을 의뢰하며 160만원을 건네 주었다.
그가 그림을 그려 표구점에 맡기자 구청에서 그 몰래 영정을 가져왔으며, 새로 영정을 봉안할
때 제를 지내 예를 갖춰야 함에도 그런 절차도 없이 3월에 그냥 봉안해 버리는 무례를 범했다.
영정 도난 사건은 냄새를 킁킁 맡은 언론사의 취재로 7월에서야 드러나 관악구청은 두고두고
욕을 먹었는데 당시 사건을 맡은 관악경찰서도 무명 화가의 그림이라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단
하여 수사를 일찍 종결시킨 것이 드러나 둘 다 쌍으로 욕을 얻어먹었다. 이에 관악구청 철밥통
관계자는 좀 무안했는지 무속인이 가져간 것으로 둘러댔으나 영정은 끝내 찾지 못했다.
그래도 진짜 영정이 아닌 상상으로 그려진 영정이라 망정이지 수백 년을 이어져 내려온 진품이
었다면 정말 관악구청과 관악경찰서는 분노한 대중들에게 제대로 테러를 당했을 것이다.


▲  강감찬과 고려 군사들이 일군 대작품, 귀주대첩도(龜州大捷圖)

▲  거란군을 토벌하고 개선한 강감찬 장군과 고려군을 현종이
영파역(迎破驛)에서 직접 맞이하는 모습을 담은 기록화

▲  본전 뒤쪽 풍경 - 나무들도 강감찬을 존경하는지 저마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본전에 그늘을 드리운다.

▲  차가운 이미지의 상징, 안국사 홍살문 - 그 앞에 어린이들이
정신없이 뛰어놀고 있어 근엄한 홍살문의 역할을 무색하게 만든다.

▲  강감찬 장군 동상

낙성대공원 서쪽에 자리한 강감찬 장군의 동상은 말을 달리며 칼을 휘두르는 장군의 모습을 하
고 있다. 청동(靑銅)으로 다져진 이 동상은 199710월에 세워진 것으로 1990년대부터 관악구
의회와 관악문화원에서 동상 건립을 추진했으나 돈이 딸려서 계속 연기되었다.
그러다가 1997년 서울시의 흔쾌한 지원으로 기존의 동상과는 다르게 갖은 요소를 넣어 제법 큰
규모로 건립해 낙성대의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한다.


강감찬(姜邯贊) 장군(948~1031)의 생애

강감찬은 금천강씨<금주(衿州)강씨)로 금천 지역 세력가인 강궁진(姜弓珍)의 아들이다. 금천강
씨는 진주강씨에서 분파되었는데 그 시조인 강여청(姜餘淸)이 신라 말에 금천 지역으로 넘어와
터전을 일구었으며 그 4세손이 바로 강궁진으로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이 되었다.

고려 초기 명장(名將)으로 김유신(金庾信)과 최영(崔瑩), 남이(南怡), 이순신(李舜臣) 등과 더
불어 이 땅의 민중들에게 적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다보니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그
들을 통해 크게 부풀려져 신화처럼 된 경우가 적지 않은데 앞서 그의 탄생 설화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강궁진이 휼륭한 아들을 얻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부인에게 가는 도중 여우 부인
을 만나 그와 인연을 맺어 낳은 것이 강감찬이란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탄생 설화와 여우부인
이야기는 흔히 시조나 위인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설화라 100% 믿으면 곤란하다.

강감찬의 어릴 적 이름은 은천(殷川)이다. 관악구에 '은천로'란 도로가 있고, 그의 이름을 딴
'은천동'이란 행정동명(봉천본동과 봉천9동을 통합한 동네)도 있다. 또한 그의 시호인 인헌(
)을 딴 '인헌동'이란 행정동명과 학교들이 부지기수며, 그와 관련된 명소도 적지 않아 관악
구가 완전 강감찬의 세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30대까지 금천에서 대부분을 지냈으며 종종 관악산에 올라가 심신을 단련
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오랫동안 야인 생활을 하던 그는 35살이던 성종(成宗, 재위 981~997) 시절에 과거에 응
, 갑과(甲科)로 급제해 조정에 출사했다. 이때 예부시랑(禮部侍郞)에 임명되었는데, 흔히 그
를 장군이라 하여 무인으로 알기 쉽지만 문과(文科)로 들어온 문인(文人)이었다. 허나 거란과
의 싸움에 출전했고 귀주대첩을 이뤄낼 정도로 무예와 지략이 뛰어나 동북9성 여진정벌의 영웅
인 윤관(尹瓘)과 더불어 문무를 두루 겸비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가 문인으로 출사한 것은 광종(光宗, 재위 949~975)이 지방 세력을 때려잡고 왕권을 강화하
는 과정에서 무인들이 대거 털렸기 때문이다. 지방 세력 태반은 병사를 소유한 무인들로 그들
을 털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시행하고 과거제도(科擧制度)를 도입해
인재를 발탁했는데 조선과 달리 문과만 치루었다. 그러다보니 문과를 거쳐야만 출세가 쉬웠다.
강감찬도 그런 상황에서는 어찌할 도리 없이 문과에 응시해야 했다.

그의 관직생활과 관련하여 여러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오는데 그 일부를 살펴보면
그가 어느 고을에 수령(守令)으로 부임을 했다. 그 고을의 관속(官屬)들은 그가 나이가 어
리다고 무시했는데 강감찬은 그들에게 뜰에 세워둔 수숫대를 소매 속에 다 집어넣으라고 했다.
그들이 그건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흔들자 강감찬 왈 '겨우 1년 자란 수숫대도 소매에 다 집어
넣지 못하면서 20년이나 자란 나를 너희들 소매 속에 넣으려고 하나?'
호통을 치니 관속들이
그제서야 잘못했다고 빌었다. 허나 강감찬이 35살 이후에 벼슬살이를 했으므로 나이가 크게 맞
지가 않는다.

그가 강원도 원주(原州)로 출장을 가서 하룻밤 머물렀는데, 객사(客舍) 옆 연못에는 개구리
들이 많아 늘 시끄럽게 울었다. 원주 수령은 강감찬이 편히 잠을 자게끔 하인을 배치해 개구리
의 입을 막게 했는데 아무리 돌팔매질에 나무로 연못 수면을 때려도 오히려 더 크게 우는 것이
. 이를 본 강감찬은 미소를 지으며 부적을 쓰고 연못에 몰래 넣으니 개구리 울음소리는 뚝
그쳤다.
이후 개구리 울음 소리는 커녕 개구리 구경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원주 강원감영 선화
당 연못 설화)

그가 지방으로 출장을 가다가 충북 옥천(沃川)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다. 그곳은 모기가
징그럽게 극성이라 백성들이 찾아와 귀주대첩 때 거란군을 쓸어버린 것처럼 모기 좀 어떻게 해
달라고 간청을 했다. 그러자 그가 하천으로 나와 모기들에게 '너희가 아무리 미물이라 해도 백
성을 괴롭히는 행위는 용서하지 못한다. 씨가 마르기 싫거든 당장 떠나라'
호통을 치니 모기들
이 크게 쫄아 다음날 모두 사라졌다. 그곳은 지금도 모기가 거의 없다고 한다. (옥천 청석교
설화)

그가 남경(南京, 서울)을 다스리고 있을 때, 북한산(삼각산)과 남산 등에 호랑이가 득실거
려 호환(虎患) 피해가 극성이었다. 이에 부하를 산으로 보내 승려를 데려오게 하여 그를 크게
꾸짖으니 승려가 호랑이로 변신하여 잘못했다고 굽신거리며 부하 호랑이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또는 강감찬이 호랑이들에게 새끼도 평생 1번 낳게 하고 몇몇 산에서만 살게 했다
고 함)

1009년 강조(康兆)가 목종(穆宗)을 폐하고 태조의 손자인 대량원군<大良院君, 현종(顯宗)>
옹립한 이른바 강조의 난이 일어났다. 고려가 강동6(江東六州)를 점거하고 주지 않는 것에
불쾌감을 드러낸 거란<요나라()> 성종(聖宗)은 강조의 난을 구실로 30만 대군을 이끌고 친히
고려에 쳐들어왔다.
강조는 40만 대군을 이끌고 검차(檢車)를 이용하여 그들을 여유롭게 때려잡았으나 그만 방심하
여 오히려 역전을 당하고 만다. 강조가 패하자 고려 조정은 벌통이 여러 개나 뒤집힌 듯 큰 혼
란에 빠졌고 염통이 쫄깃해진 많은 신하들이 항복을 주청했으나 강감찬과 하공진(河拱辰)은 강
력히 반대했다.
결국 개경이 함락되었고 현종은 멀리 나주(羅州)까지 힘에 겨운 몽진을 했으나 양규(楊規),
숙흥(金叔興), 강감찬 등의 활약으로 거란은 크게 피해를 입고 줄행랑을 쳤다.

그 이후 한림학사(翰林學士), 서경유수(西京留守),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서북면행
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 등을 지냈으며, 서경유수와 내사시랑평장사로 임명한다는 현종의
조서(詔書)에는 '경술년(1010) 오랑캐(거란) 무리가 우리나라 한강 연안까지 깊숙히 쳐들어
온 전란이 있었다. 그때 강공(강감찬)의 전략을 쓰지 않았다면 온 나라가 오랑캐 옷을 입을 뻔
했다'
적혀있어 그의 공이 실로 엄청났음을 가늠케 한다.

1018년 거란 성종은 강동6주와 고려 굴복시키기에 대한 미련을 다시 드러냈다. 오랫동안 옛 조
선과 고구려, 발해의 지배를 받아오던 거란족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으킨 큰 나라, 요나라
10~11세기에 천하 강국으로 위엄을 날렸지만 고려를 비롯한 인접 국가와의 계속되는 전투로
상황이 넉넉치 못했다. 그래서 간신히 10만 명을 정예병이라고 쥐어짜 소배압(蕭排押)을 총대
장으로 삼아 고려로 보냈다.
참 지긋지긋한 거란의 3번째 침공을 맞이하여 현종은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로 삼고 208
천의 군사를 주어 거란을 막게 했다. 그때 강감찬의 나이는 칠순이었다. 남들 같으면 이미 꺾
이고도 남을 나이에도 총대장이 되어 말을 타고 종횡무진하니 그의 건강과 무예가 남달랐음을
보여준다.

거란군이 압록강을 넘어오자 강감찬은 재미없는 수성전을 버리고 적극적인 공세를 취했다.
12천을 뽑아 압록강 하류 흥화진(興化鎭) 동쪽에 매복시켰는데, 거란군은 꼭 거치던 흥화
진을 그냥 놔두고 고려군이 매복된 곳으로 기어들어왔다. 이때 강감찬은 쇠가죽으로 강물을 막
게하고 거란군이 그 강을 건너자 쇠가죽으로 다진 둑을 터뜨려 그들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
으면서 매복시킨 기병으로 호되게 후려쳤다.
여기서 2만 정도를 잃은 소배압은 자(慈州)에서 강감찬의 부장인 강민첨(姜民瞻, ?~1021)
공격에 큰 타격을 받았음에도 개경만 점령하면 게임 끝이라는 무모한 생각에 무작정 개경으로
달려갔다. 이에 강감찬은 추격과 매복을 골고루 구사했고, 개경 점령에 눈이 뒤집힌 소배압은
개경과 가까운 신은(新恩)까지 진출했으나 식량도 부족하고 피해가 막대한 아군의 상황을 간신
히 깨닫고는 길을 돌려 열심히 줄행랑을 쳤다.

허나 그 길목에는 이미 고려군이 쫘악 깔려 열심히 그들을 사냥했고, 거란군이 귀주(龜州)까지
후퇴하자 강감찬은 성을 나와 귀주 벌판에 진을 치며 그들을 기다리니 이윽고 소배압의 거란군
은 병든 닭새끼처럼 귀주에 나타났다. 벌판에 진을 친 고려군을 보고 소배압은 간이 배밖으로
튀어나와 '이렇게 돌아갈 수는 없다. 우리의 우수한 기마병의 힘을 보여주마. 각오해라!' 다짐
하며 고려군과 진검 승부를 걸었다.
이에 강감찬은 그들을 크게 포위해서 잡는 작전을 펼쳤다. 기마병을 선두로 하여 보병과 사수(
射手)를 적절히 배치해 그들을 맹렬히 공격했으며 병마판관(兵馬判官) 김종현(金宗鉉)의 군사
도 때마침 합세하여 안그래도 힘이 딸리는 거란군은 더욱 밀려 거의 전멸을 당하고 소배압은
간신히 목을 붙잡고 도망쳤다. 이때 살아서 돌아간 군사는 불과 수천에 불과했으니 그야말로
거란에게는 개망신에 가까운 패배였으며 이 대승을 두고 고려사에서는 '거란의 패함이 아직 이
와 같이 심함이 없었다'
고 기록을 했다.

거란 성종은 부하를 죄다 잃고 돌아온 소배압을 보자 크게 발작하여 '너가 적지에 너무 깊숙히
들어가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다. 무슨 얼굴로 짐을 보려고 하는가? 너의 얼굴 가죽을 벗겨 죽
여야 되나 내가 참는다'
질책하고 멀리 귀양보냈다.

강감찬은 귀주대첩이란 대작품을 일구고 부하 장졸과 함께 수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들고 개경
으로 개선하자 현종은 크게 기뻐하며 친히 도성 밖 영파역까지 마중을 나와 연회를 베풀었다.
현종은 친히 금으로 만든 8가지의 꽃을 그의 머리에 꽂아준 뒤 왼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오른
손으로 축배를 들어 위로하고 찬양하니 강감찬은 '폐하의 분에 넘치는 황은(皇恩)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사의를 표했다.

현종은 그에게 식읍(食邑) 300호를 하사하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으로 책봉(
)했다. 1030년에는 현종에게 개경 주변에 나성(羅城)을 쌓을 것을 건의, 둘레 23km에 이르는
개경도성(都城)이 구축되었으며 그 공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문하시중이 되자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나 현종은 절대로 안된다며 3일에 1번씩 입궐
토록 했으며 이듬해(1031) 6월이 되어서야 겨우 사직이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그해 1031, 83세에 나이로 장대했던 삶을 마감하니 덕종(德宗)3일 동안 조회를 멈
추고 그를 애도했으며 인헌(仁憲)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특지검교태사시중 천수국 개국후(開國
)를 추증(追增)했다. 이후 수태사 겸 중서령(中書令)까지 더하여 현종 묘정(廟庭)에 배향(
)되었다.

강감찬은 키가 작고 외모도 별볼일 없었으나 학문을 매우 좋아하고 무예와 지략, 기개가 뛰어
났다. 그리고 성품이 청백하고 검소하여 재산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평시에는 해지고 때가 묻은
허름한 옷을 입고 다녀 그의 얼굴을 모르는 이들은 일반 백성으로 오인하기 일쑤였다. 또한 엄
숙한 태도로 국사를 처리하고 국책을 결정할 때는 당당한 국가의 중신으로 그 역할을 다했으며,
백성들도 잘 보살펴 그들은 나라가 평온한 것이 강감찬의 공으로 여기고 추앙했다.

그는 고려가 한참 거란과의 싸움으로 안정되지 못한 11세기 초반, 안으로는 내정을 살피고 지
지기반이 부실한 현종을 도왔으며, 밖으로는 거란을 토벌해 국내외적으로 나라를 안정시켜 고
려를 작지만 강한 나라로 우뚝 서게 했다. 고려와의 3차례 전투에서 모두 깨지고 거기에 귀주
대첩에서 완전히 게임이 끝나니 거란도 이제 힘이 딸려 더 이상 강동6주 반환과 고려 제왕의
입조(入朝)를 요구하지 못했고 오히려 고려의 침공을 걱정해야될 판이었다. 고려 역시 오랜 전
쟁으로 지쳐 더 이상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고 12세기 초까지 압록강 가교 사건 등을 제외하고
는 양국은 별무리 없이 평화로운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는 '국가가 장차 화패(禍敗)가 올 때 반드시 명현을 내시어 이를
구하시는구나. 목종(穆宗) 말년과 현종 원년에 역신(逆臣)이 난을 일으키고 거란이 내습해 안
으로는 내홍, 밖으로는 환란이 있어 국가가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만약 강공(姜公)이 없었
더라면 장차 나라가 어찌 됐을지 알 수가 없다'
는 내용이 있어 그의 존재감과 공이 얼마나 두
터웠는지 보여준다. 그의 찬란한 이름은 현재까지 고스란히 전해져 3척동자도 '강감찬하면 귀
주대첩~!'을 떠올릴 정도로 이 땅의 대표적인 위인의 하나로 우리 마음 속에 영원히 녹아내리
고 있다.

그의 저서로는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 구선집(求善集) 등이 있으나 전하지는 않아 무슨 내용
의 책인지는 알 수 없으며 그의 묘는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에 있는데 오랫동안 무
덤의 위치를 몰라 애태우던 것을 1963년 후손들이 지석(誌石)을 발견하여 무덤을 복원했다.

낙성대 안국사(낙성대공원) 찾아가기 (201710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4번 출구를 나와서 50m 정도 가면 낙성대역길이 나오고 그 길로 접어
  들어 왼쪽(남쪽)으로 가면 관악구 마을버스 02번 정류장이 있다. (버스가 늘 대기하고 있음)
  그 버스를 타고 낙성대공원(영어마을) 하차
* 낙성대역 4번 출구를 나와서 3~4분 직진하면 낙성대입구 교차로이다. 거기서 왼쪽(남쪽) '
  성대로'로 진입하여 도보 12(낙성대역에서 도보 15)
* 매년 103째 주에는 낙성대공원에서 관악 강감찬축제가 열린다. 원래는 '낙성대 인헌제'
  1988년 추석(920) 때 처음 시작되었으며, 나중에 관악구의 주요 축제인 '관악산 철쭉제
  '와 통합하여 관악 강감찬축제로 이름을 갈았다.
  강감찬 추모제향을 시작으로 강감찬을 주제로 별페스티벌, 출병식과 전승행렬 거리 퍼레
  이드, 주민화합 한마당, 고려촌 테마부스, 작은 음악회 등 다양한 행사와 볼거리가 열리며
  올해(2017)1020~21일에 열린다. (문의 관악구 문화체육과 ☎ 02-879-5605)
* 안국사 관람시간 : 9~18(겨울은 17시까지, 낙성대공원은 24시간 개방, 입장료 없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228 (낙성대로 77 ☎ 02-877-6896)


 

♠  난곡(蘭谷)에서 만난 오래된 나무들

▲  난곡로 느티나무공원에 자리한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21-1

낙성대를 둘러보고 아직 햇님 퇴근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어 또다른 강감찬 나무를 찾고자 관악
구 서남쪽 끝으머리에 박힌 난곡으로 이동했다.
난곡은 서쪽으로 금천구 독산동, 남쪽은 금천구 시흥동(始興洞)과 맞닿아 있으며 예전에는 신
림동(新林洞)의 일원으로 그 기치 아래 똘똘 뭉쳐있었으나 신림1~10동이 모두 별도의 이름을
칭하게 되면서 신림7동이던 난곡은 난곡동과 난향동으로 분리되었다.

서울 달동네(산동네)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던 현장으로 달동네 스타일의 분홍색 기와집과 판자
집이 가득했으나 1999년 이후 10년이 넘게 재개발의 칼질이 요란하게 몸을 풀면서 동네 상당수
가 성냥갑 아파트와 단독주택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음지에는 아직도 달동네의 흔적이 남아있
으며 재개발의 과정에서 많은 가난한 서민들이 강제로 터전을 떠나야 했다. 개발의 칼질은 늘
있는 것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일반 백성들에게는 지나치게 포악하다.

난곡이란 이름은 난초 골짜기란 뜻으로 달동네 이름과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이곳이 난곡이
라 불리게 된 것은 정정공(貞靖公) 강사상(姜士尙)의 손자인 강홍립(姜弘立, 1560~1627)이 이
곳에서 말년을 보낼 때 난초를 많이 길러 유래되었다는 설과 원래 이름은 낭곡(狼谷)이었는데
강사상의 아들인 강서(姜緖)가 동네 이름이 별로라고 하여 난곡으로 바꾸고 자신의 호도 그리
했다는 설이 있다. 강홍립은 난곡 위쪽에 자리한 조부(祖父), 강사상의 묘역에 묻혀 있다.

난곡에 이르러 난우중학교 정류장에서 내리니 커다란 느티나무가 마중을 나온다. 그 주위로 '
난곡로 느티나무공원'이 조촐히 터를 이루고 있는데 공원에는 운동시설 여럿이 닦여져 있다.
그 나무의 정체가 궁금해 안내문을 살피니 무려 410살을 먹은 나무로 1972년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그때 추정 나이가 약 370)
마르기는 커녕 오히려 넘쳐나는 세월의 샘을 양분으로 삼아 키 17m, 둘레 496cm로 어엿한 노거
수로 성장했는데 나무 주위로 속인들의 주택과 건물이 뿌리를 내려 그를 위협한다, 그래도 그
들에 굴하지 않고 정정함을 과시하며 오늘도 공원에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운다.

난곡로 느티나무 찾아가기 (201710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림역(5번 출구)에서 506, 5522(B), 5523번 시내버스를 타고 난우중학교 입구
  에서 하차하면 바로 보인다.
* 지하철 2호선 신대방역(2번 출구 남쪽 80m 지점)에서 5522(B), 5524번 시내버스 이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난곡동 697-40


▲  건영2차아파트 남쪽 주차장에서 바라본 굴참나무

곡로 느티나무를 둘러보고 난곡의 명물인 신림동 굴참나무를 보고자 건영2차아파트로 이동했
. 거리는 1km 남짓, 햇님은 퇴근 본능이 발동해 자꾸만 꽁무니를 숨기려고 한다. 날이 어두
워지면 디카도 흥분하지 못해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길은 바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잠시 마트에 들려 음료수로 불만에 잠긴 목을 좀 축이고
미로 같은 골목길을 뚫으며 난곡초교 방면으로 가니 서쪽으로 건영2차아파트가 보인다. 그 아
파트로 다가서면 나를 이곳으로 부른 거대한 굴참나무가 마중을 한다.

이 굴참나무는 키 17m, 가슴 높이 둘레 2.5m, 나무 밑부분 둘레가 2.9m로 나이가 무려 1,000
을 헤아린다고 전한다. 강감찬 장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꽂은 지팡이가 나무로 자랐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 연유로 '강감찬나무'란 별칭을 가지고 있으며, 1018년 거란군을 공격하러 출정할 때
이 나무를 심고 무사 귀환을 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과연 강감찬과 관련이 있는 나무인지는 귀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관악구 지역은 그의 고향으로
그가 남긴 유적과 전설이 허다하며 백성들이 그를 기리고자 붙인 전설도 여럿 있다.
 
나무의 나이가 1,000년이 맞다면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가 된다. 아파트 주민들도 강감찬
의 지팡이가 자란 나무로 여기고 있는데 그 장대한 세월에 비해 덩치가 작아 고개를 좀 갸우뚱
하게 한다. 그래서 요즘에는 원래 나무는 옛날에 죽고 그의 후손이 자라나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는 쪽으로 무게가 쏠리고 있다. 추정 나이는 250년 정도로 여겨지나 이 역시 정확한 것은 아
니다. (사람은 나이가 적으면 좋지만 문화유산은 오히려 많아야 빛을 보는 법임)

굴참나무는 참나무과에 속하는 낙엽교목(落葉喬木)으로 세포벽(細胞壁)은 물에 젖지 않아 방수
, 방음, 방열 효과가 있어 이 나무로 코르크(cork)를 생산하며 이 나무 껍질로 지붕을 얹힌 집
이 강원도에서 옛날에 많이 보였던 너와집이다.
나무 인근에는 강감찬 장군의 사당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의 어린 시절 이름을 딴 은천사(殷川
)란 조그만 절이 나무를 지키고 있으며, 매년 2회 음력 71일과 101일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제사를 지낸다. (예전에는 매년 정월 대보름에 지냈다고 함)

이 나무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신림동 굴참나무'이다. 이는 이곳이 신림동 관할이기 때문인
데 이제는 신림동이 아닌 난곡동이라 불리고 있으니 명칭을 변경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난곡
동 굴참나무'로 말이다. 물론 그렇게 부르던 저렇게 부르던 그에게는 관심 밖일 것이다. 자신
은 그저 가만히 있는데 사람들이 가만 두지를 않으니 말이다.

나무의 높이는 앞서 느티나무와 비슷하고, 둘레는 거의 60% 수준으로 얇으나 대신 가지가 좌우
로 넓게 퍼져있어 전체적인 모습은 느티나무를 압도한다. 게다가 강감찬과 관련도 있고 나이도
오래되다보니 그런 것들이 이들 나무의 팔자를 바꿔놓은 것이다. 느티나무는 겨우 보호수 등급
, 굴참나무는 국가 지정 천연기념물의 귀한 존재로 말이다.

예전에는 이곳이 동네의 높은 곳으로 아랫 동네를 굽어보고 있었으나 철이 없는 개발의 칼질은
나무 주위로 높게 석축을 쌓고 그곳에 터를 다져 건방지게 아파트와 주차장을 올렸다. 아파트
주차장이 나무의 허리 높이 정도 되는데, 나무 밑에서 보면 그런데로 나무가 커 보이지만 주차
장에서 보면 나무가 몇십 년 밖에 숙성되지 않은 그저 그런 나무로 보인다.
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1982, 건영2차아파트는 그보다 훨씬 이후에 들어섰다.
무리 개발의 칼질이 개념을 밥말아 먹어도 천연기념물의 지위를 지닌 굴참나무의 위엄을 건드
리지 말았어야 했거늘, 나무 바로 옆에 아파트를 두게 했으니 참 딱할 따름이다. 나무 동쪽에
있는 집들은 그렇다쳐도 아파트는 좀 가혹했다.
철학과 역사의식이 빈약한 이 땅의 자본주의의 폐해라고나 할까?


▲  동쪽 주택가에서 바라본 굴참나무
태극마크가 새겨진 파란 피부의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가면 바로 나무 앞이다.

▲  굴참나무의 밑도리
예전에는 이보다 더 너른 땅을 누리고 살았건만 개발의 칼질은 그의 영역을
빼앗아 구석살이 신세로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보니 나무 자리가 정말
답답해 보인다. 마치 맹수를 좁은 우리에 가둬놓은 기분..

▲  아파트 주차장에서 바라본 굴참나무의 밑도리

▲  나무 북쪽에 어이없게도 쓰레기통과 분리수거통을 두어 나무에게
제대로 민폐를 부린다. 쓰레기 악취가 그의 건강에
해를 주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  주렁주렁 매달린 굴참나무 꽃
신림동 굴참나무를 끝으로 관악구에서 즐긴 강감찬 장군의 흔적 더듬기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신림동 굴참나무 찾아가기 (201710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림역(5번 출구)에서 506, 5522(B), 5523번 시내버스를 타고 남강중입구 하차
* 지하철 2호선 신대방역(2번 출구 남쪽 80m 지점)에서 5522(B), 5524번 시내버스 이용
* 난곡(난향동) 종점 방향 남강중입구 정류장에서 내린 방향을 기준으로 오른쪽(북쪽)으로 가
  면 난곡로35길이 나온다. 그 골목길을 계속 들어가면 건영2차아파트가 나오는데, 아파트단지
  로 들어서 쭉 들어가면 나무가 나오며, 아파트 대신 난곡로35번길을 계속 고집하면 난곡초교
  석축으로 막다른 곳이 나오는데 거기서 오른쪽(서쪽)으로 가도 나무가 나온다. 남강중입구
  정류장에서 도보 7~8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721-2 (난곡로352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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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동해바다를 거닐다. 부산 기장 봄나들이 ~~~ (죽성리왜성, 죽성항, 황학대, 죽성성당, 장어구이 1접시)

 


' 부산 기장 동해바다 나들이 (기장 죽성리 일대) '

▲  죽성리왜성에서 바라본 죽성리와 동해바다
(정면에 큰 나무가 죽성리해송)

▲  죽성리왜성

▲  죽성리 월전포구


 

 

지루했던 겨울이 저물고 봄이 완전히 천하를 접수했던 4월의 한복판에 겨울로부터 해방된
기분도 만끽할 겸, 그리운 얼굴도 보고자 간만에 부산을 찾았다.
부산(釜山)은 이 땅의 2번째 대도시이자 천하 제일의 항구 도시로 북쪽은 울산 울주군(蔚
州郡), 서쪽은 경남 창원과 김해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동쪽은 너른 동해바다를 품고 있
으며, 남쪽은 바다 건너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는 큰 지역이다.

부산으로 내려가던 중, 잠시 대구에서 발길을 멈추고 팔공산(八公山)에 안긴 파계사(把溪
寺)와 성전암(聖殿庵)을 둘러보며 산사(山寺)의 봄 풍경을 즐겼다. (☞ 관련글 보러가기)
그런 다음 동대구 고속터미널에서 고속버스로 부산으로 내려가 광안동(廣安洞)에 있는 친
한 형님 집에 문을 두드렸다.

저녁을 먹고자 광안리 해변 인근을 거닐다가 소금구이 닭갈비집이 눈에 띄어 그곳에 자리
를 피고 닭갈비에 소주를 여러 잔 걸치며 간만에 회포를 풀었다. 물론 1차로 끝나면 섭하
지. 하여 집으로 돌아와 2차를 하며 다음날 나들이 장소를 모의하다가 새벽 1시에 꿈나라
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찬란한 여명의 재촉을 받으며 부시시 잠에서 깨니 벌써 9시였다. 그
날 일정은 다소 길기 때문에 잠에서 벗어나기 싫은 게으른 몸을 억지로 끌며 세수를 하고
10시에 광안동을 나섰다. 광안역 정류장에 이르니 그의 후배 하나가 합류하여 3명이서 기
장군(機張郡) 동해바다 나들이를 떠나게 되었다.

광안역에서 부산시내버스 39번(기장읍 교리↔용호동)을 타고 수영로터리, 해운대, 송정역
, 청강리를 지나 기장읍내 한복판에 자리한 기장지구대에서 내렸다. 그런 다음 건너편 정
류장에서 죽성리로 가는 기장군 마을버스 6번을 기다리니 5분도 안되어 버스가 나타나 활
짝 입을 벌린다.
주말 나들이 수요로 조그만 마을버스는 바퀴가 가라앉을 정도로 만석을 이루었다. 우리는
재빨리 탑승하여 앉아갈 수 있었지만 조금만 늦었어도 입석 신세를 면치 못할 뻔했다. 비
록 죽성리까지 10분 정도 거리에 불과하지만 서서 가는 것은 애나 어른이나 힘든 것은 마
찬가지이다.
버스는 시간이 되자 읍내에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몸을 움직였다. 죽성사거리와 기장
군청 남쪽 고개, 신천리를 지나 죽성초교에서 두 발을 내리니 바로 남쪽 언덕에 우리의 1
번째 목적지인 죽성리 해송이 기다리고 있었다.


 

  6그루가 합심하여 하나의 거대한 나무를 이룬 오래된 소나무
죽성리해송(竹城里海松) - 부산 지방기념물 50호

▲  죽성리해송의 위엄

죽성리 두호마을 서쪽에는 얕으막한 언덕이 푸른 초원처럼 누워있다. 대부분 경작지가 이루어
진 그 언덕 정상에는 유난히도 초록 빛을 발하는 장대한 소나무가 동대해(東大海)를 굽어보고
있으니 그 나무가 바로 이곳의 오랜 명물인 죽성리 해송이다.

죽성리 해송은 소나무의 일종인 곰솔로 줄기 껍질이 다른 소나무보다 검다고 해서 흑송(黑松)
이라 불리기도 하며, 바닷가 소나무란 뜻의 해송(海松)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곰솔은 남쪽
바닷가에서 많이 자라고 있는데 소금기가 서린 짠 바닷바람에도 잘 견딘다.
이 나무는 겉으로 보면 1그루로 보이지만 6그루의 나무가 한 지붕을 이룬 것으로 높이 약 10m,
나무 지름이 30~40m에 달한다. 나이는 250~300년 정도로 여겨지며 언덕에 있는 경작지를 바닷
바람의 핍박으로부터 보호하고자 심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 곰솔 가족은 강인한 협동심을 보이
며 서로를 보듬고 있으며, 거의 하나의 나무처럼 자라고 있어 안내문을 살피지 않으면 정말 1
그루의 나무로 오인하기 쉽다.
나무의 키가 훤칠하게 크고 덩치도 제법 있으며, 반경 0.5리 이내에는 키 큰 나무도 거의 없어
세상 중심에 서 있는 큰 나무처럼 웅장함을 진하게 풍긴다. 그리고 나무의 자태도 아름답고 바
다가 바라보이는 언덕 정상에 자리해 있어 사진쟁이와 그림쟁이들이 많이 찾는다.

해송의 그늘로 들어서면 나무들 사이로 조그만 당집인 국수당이 끼여있다. 나무가 제법 풍채를
드러내며 자라나자 마을 사람들이 나무 사이에 당집을 만들어 마을 성황신을 모시는 국수당으
로 삼았는데,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제물을 푸짐하게 차리고 풍어제(風魚祭)를 지낸다. 이 땅
의 어느 마을이든 마을의 안녕을 책임지는 당집이 있지만 나무 사이에 당집을 둔 경우는 별로
없다.

* 죽성리해송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249


▲  죽성리해송에서 바라본 죽성리 두호마을과 동대해

▲  해송 밑에 둥지를 틀어 마을을 지키는 국수당(성황당)
태극 문양이 그려진 국수당은 풍어제 등 당제(堂祭) 외에는 굳게 닫혀져 있다.
나무 밑도리 사이에 당집이 깃든 흔치 않은 곳으로 당집 좌우에는
돌로 벽을 만들어 내부를 보호한다.

▲  솔잎과 솔방울, 거기에 장대한 세월의 무게까지 듬뿍 더해져 가지가
거의 땅으로 내려 앉았다. <철기둥을 세워 가지가 땅에 완전히
주저앉지 않도록 막고 있음>

▲  죽성리해송 인근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기장 미역
기장은 미역이 유명하다. 이렇게 해송 인근에 널어두었으니 해송의 기운도
양념으로 듬뿍 더해져 더욱 최상품으로 끌어올려줄 것이다.


 

  죽성리에서 만난 임진왜란의 쓰라린 흔적
죽성리왜성(竹城里倭城) - 부산 지방기념물 48호

▲  죽성리해송에서 바라본 죽성리왜성 (산꼭대기에 보이는 성)

죽성리해송에서 서쪽(바다와 반대쪽)을 보면 높다란 언덕 위로 성곽 하나가 손에 잡힐 듯 가까
이에 보일 것이다. 그 성곽이 바로 임진왜란이 이곳에 남긴 쓰라린 흔적, 죽성리왜성이다.

해송에서 정겨운 시골길을 5분 정도 가면 왜성을 품은 언덕 밑에 이른다. 이곳에는 주차장, 해
우소가 있는데, 여기서 성으로 인도하는 나무 계단을 타고 2~3분 오르면 왜성의 아랫도리에 이
른다. 계단은 답사 편의를 위해 기장군에서 닦은 것으로 계단 옆에 흙길이 나란히 이어져 있으
니 개인 취향대로 움직이면 된다.
왜성 아랫도리에서 조금 더 오르면 왜성의 중심부이고, 중심부 서남쪽에 왜성 꼭대기가 있는데,
그곳에는 왜성의 본부라 할 수 있는 천수대(天守臺)터가 있다. 천수대의 모습은 왜열도 오사까
성(大阪城)에 있는 푸른 지붕을 지닌 큰 기와집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죽성리왜성은 1593년 봄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왜군과 지역 주민을 동원해 쌓은 순수
100%의 왜성(倭城)이다. 한참 북진을 하며 세를 과시하던 왜군은 1593년에 접어들어 조선의 대
대적인 토벌 작전과 왜열도에서는 맛보기 힘든 강추위로 고전하면서 순식간에 울산과 기장, 부
산, 창원 등 경상도 해안 지역으로 밀려났다.
더 이상 밀려나기 싫었던 왜군은 바다와 무척이나 가까운 산과 언덕에 성을 쌓고 자기 집 마냥
들어앉아 장기전을 준비했다. 그들이 해안가 언덕을 선호한 것은 수비력 강화와 서로 간의 긴
밀한 연락 및 병력/군수물자 수송 편의, 그리고 위급시 신속히 줄행랑을 치고자 함이다.

이 왜성은 죽성리 뒤쪽 언덕에 자리해 있는데, 서생포왜성(西生浦倭城)과 부산왜성 중간에 자
리해 서로를 연결하였다. 성 둘레는 약 960m, 성벽 높이 4m로 3단으로 축성되었으며, 성내(城
內) 면적은 11,776평 정도로 왜성 가운데 큰 편에 속한다. 장방형(長方形)의 크고 작은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성벽은 안쪽으로 조금씩 기울어진 이른바 들여쌓기 공법이다. 이 공법은 천하
제일의 축성술(築城術)을 자랑했던 고구려(高句麗)의 축성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부산왜성과 형태가 비슷하며, 왜열도에서는 기장성(機張城)이라 부른다. 지금도
왜열도에서 많이 답사를 온다고 하는데, 1598년 왜군이 도망친 이후 성이 버려지면서 천수대와
성문, 주요 시설이 사라졌고, 마을 사람들이 밭을 일구거나 집을 지으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
다. 허나 성곽은 쓸데없이 잘 남아있어 왜성 가운데 건강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한때 사적 52호의 외람되는 지위를 누리기도 했으나 1997년 사적에서 정리되어 버려졌다가 부
산시에서 지방기념물로 수습해 죽성리해송, 죽성성당, 죽성리 해변과 한 덩어리로 묶어 기장군
의 주요 명소로 키우고 있다.

왜성 주변은 상당수 경작지로 쓰이고 있으며, 왜성 북쪽과 계단이 있는 남쪽에는 소나무가 조
금 우거져 마치 양쪽에만 머리숱이 조금 있는 대머리를 보는 듯 하다.


▲  죽성리왜성으로 오르는 나무 계단
계단 주변은 유난히 소나무가 무성하여 이 땅을 요란하게 거치고 간 아픈 과거를
조금이나마 덮어주는 듯 하다. 그런다고 그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  풀이 잔잔히 돋아난 죽성리왜성의 아랫부분

▲  약간 비스듬히 누운 죽성리왜성의 본성(本城)

▲  왜성 외곽에서 본성으로 이어지던 성문터
왜성은 작은 산이나 언덕에 짧게 몇 겹으로 두룬 덩어리 같은 형태라 딱히
긴 성이 없다. 그나마 서생포왜성이 좀 긴 편에 속한다.

▲  죽성리왜성에서 바라본 죽성항과 두호마을
저 포구에 배를 정박해 주변 왜성과 수시로 연락을 취하며 병력과 물자를
수송했고 끝내는 저곳을 통해 줄행랑까지 쳤다.

▲  죽성리왜성에서 바라본 죽성리
평화로운 어촌 풍경에 속세에서 오염된 안구와 마음이 정화되는 듯 하다.
바닷가에 죽성리 두호마을과 월전마을(사진 오른쪽)이 형성되어 있고,
마을과 포구 주변에는 경작지가 많아 나무가 별로 없다.

▲  왜성 성곽에 뿌리를 내린 나무
하늘을 향해 무언가를 애타게 열망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  왜성의 중심인 본환(本丸, 본성)

▲  연병장처럼 넓은 본환 - 잡초가 잔잔히 녹색 물결을 이룬다.

▲  죽성리왜성 서쪽에 길게 누운 봉대산(烽臺山) 북쪽 자락

죽성리왜성은 계곡이 없는 낮은 언덕에 자리해 있어 물이 나오는 곳이 없다. 왜성 서쪽에 있는
봉대산에서 식수를 운반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군이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후방이라 물 수송에
는 그리 어려움은 없었다. <봉대산에는 봉수대(烽燧臺)가 있었음>

▲  본환의 서북쪽 성곽

▲  북쪽에서 바라본 본환 내부


▲  죽성리왜성의 꼭대기인 천수대(天守臺)터

왜성 정상부에 자리한 천수대는 왜장이 자고, 먹고, 부하들을 지휘하던 공간으로 사방이 확 트
여 조망(眺望)도 일품이다. 천수대의 모습은 왜열도 오사까성이나 구마모토성 천수각의 축소판
으로 보면 될 듯 싶다. 지금은 풀만 무성하나 바다를 바라보며 우뚝 자리했을 천수대의 모습이
자못 대단했을 것이며, 조선군의 공격 가능성이 적은 후방이라 왜장은 무척 편하게 지냈을 것
이다. (조선군이 서생포왜성을 점령해야 이곳을 마음 편히 공격할 수 있었음)

※ 죽성리해송, 죽성리왜성 찾아가기 (2017년 4월 기준)
① 부산시내에서 기장읍까지
* 지하철 2호선 해운대역(1/7번 출구)에서 39, 181번 시내버스를 타고 기장지구대 하차 (181번
  은 해동용궁사, 대변으로 다소 돌아감)
* 지하철 2호선 장산역(5/7번 출구 사이)에서 182번 시내버스를 타고 기장지구대 하차 (30~40
  분 간격)
* 지하철 4호선 안평역(4번 출구)에서 36, 183, 188번 시내버스를 타고 기장지구대 하차 (183,
  188번을 탔을 경우 기장중학교, 기장성당에서 내려도 됨)
* 부산대병원(1호선 토성역 9번 출구), 남포동, 부산역, 경성대 부경대역(1번 출구)에서 1003
  번 급행좌석버스를 타고 기장성당이나 기장지구대 하차
* 동해선 전철(부전↔일광)이나 동해남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기장역에서 하차, 1번 출구
  를 나와서 4분 정도 걸으면 기장중학교 정류장이다.
② 기장에서 죽성리까지
* 기장지구대, 기장중교(기장역 1번 출구), 기장성당에서 기장군 마을버스 6번(20~40분 간격)을
  타고 죽성초교 하차, 해송까지는 도보 5~6분, 왜성은 10분 정도 소요 / 황학대는 두호마을에
  서 내리면 되며, 월전마을은 월전 종점에서 내리면 된다.
③ 승용차
* 부산시내(반송/해운대) → 죽성4거리에서 죽성리 방면 죽성로로 진입 → 죽성초교 → 죽성리
  해송, 죽성리왜성, 죽성성당 (왜성 밑에 주차장 있음 / 해송은 인근 길가에 주차)

* 죽성리왜성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603일원


 

  죽성리 바닷가 둘러보기 (황학대, 죽성성당)

▲  죽성항 (오른쪽에 나무가 우거진 곳이 황학대)

▲  죽성리의 오랜 경승지, 황학대(黃鶴臺)

씁쓸한 화석으로 이 땅에 남아있는 죽성리왜성을 둘러보고 죽성항(죽성포구)으로 나왔다. 죽성
리는 동대해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어촌이지만 볼거리와 해산 먹거리가 풍성하
여 생각 외로 머무는 시간을 길게 만든다. 우선 앞에서 언급한 죽성리해송과 왜성이 있고, 바
닷가에는 황학대와 드라마 촬영지였던 죽성성당이 있으며 마을 남쪽에는 월전마을이 있다. 먹
거리는 죽성리 북부인 두호보다는 남부인 월전이 더 많은데, 이곳은 장어구이가 유명하다.

죽성항에는 소나무가 우거진 조촐한 바위 동산이 포구의 운치를 조금 돋구고 있다. 이 동산은
기장의 오랜 명승지인 황학대로 예전에는 거의 섬이었으나 방파제와 항만 시설이 닦이면서 육
지로 흡수되었다.


▲  황학대의 동남쪽 부분

황학대는 조선 중기에 활동했던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윤선도야 워
낙 유명한 인물이니 모르는 이는 거의 없겠지만 그가 여기서 오랫동안 유배살이를 했던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나도 여기서 처음 알았음~~

그는 1616년(광해군 8년) 광해군(光海君)을 지지하는 북인(北人) 일파의 죄상을 밝히는 병진소
(丙辰疏)를 올린 것이 원인이 되어 서울에서 2,000리 이상 떨어진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떨려
났다. 그러다가 1년 뒤, 거기서 3,000리 이상 떨어진 기장 죽성리로 이송되어 7년이나 유배생
활을 했다. 귀양살이 때문에 조선 땅을 남북으로 완전 종주를 했던 것이다. 토가 나올 정도로
그 먼거리를 강제로 이동하느라 고산도 무척 진을 뺐을 것이다.

윤선도는 백사장 건너에 있는 송도(松島)를 옛날 신선이 황학(黃鶴)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서린 양자강(揚子江) 하류의 황학루(黃鶴樓)와 견주어 황학대로 멋대로 이름을 갈고 매
일같이 찾아와 시를 짓고 책을 읽으며 시름을 달랬다.
그는 여기서 견회요(遣懷謠), 우후요(雨後謠) 등의 주옥 같은 시 6개를 남겼으며, 죽성리 뒷산
인 봉대산에 자주 올라가 약초를 캐어 병에 걸린 지역 사람들에게 약을 지어주거나 치료를 해
주니 죽성 사람들은 그를 서울에서 온 의원님이라 부르며 존경했다고 한다.

이곳에 오르던 윤선도도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20세기 후반에 방파제와 항만 공사로 백사장 또
한 이슬처럼 사라졌으며, 강제로 연륙되어 육지의 일부가 되버리면서 옛 운치도 다소 녹아내렸
다. 게다가 이곳을 덮고 있는 소나무도 1995년 수해로 뿌리가 뽑히는 피해를 입었는데, 이후로
도 계속 나무들이 말라가면서 황학대는 그야말로 세월의 무덤 같은 곳이 되버렸다.
다행히 기장군청에서 1,000만원의 돈을 들여 황학대를 살피면서 나무들이 다시 살아났고 웃음
을 잃었던 황학대의 표정도 밝아지면서 이곳의 풍경을 크게 수식해주는 꿀단지가 되었다.


▲  황학대의 정상 부분
윤선도 뿐 아니라 지역 선비들과 동네 사람들이 술 1잔의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  두호마을 당집
바다에 제를 지내는 당집으로 굳게 닫힌 문짝에 3색 태극마크가 그려져 있다.

▲  죽성항의 평화로운 풍경
바깥 세상은 아비규환처럼 숨가쁘게 흘러가건만 이곳은 모든 게 정지된 듯
그저 한가롭기만 하다. 죽성리왜성이 활용되던 임진~정유란 시절에는
왜군들의 배로 득실거렸던 현장이기도 하다.

▲  바닷가에 자리한 죽성성당

두호마을 남쪽 바닷가에는 서양 동화에나 나올법한 작은 성당(聖堂)이 있다. 이 성당은 2009년
에 방영된 드라마 '드림(Dream)'의 촬영장으로 콩 볶듯이 지어진 것으로 겉모습만 성당이다.
아담하게 생긴 성당과 주변의 해안 풍경이 아름다워 죽성리의 새로운 명소로 추앙받고 있으며,
처음에는 죽성성당이라 불리다가 드라마 이름을 따서 '드림성당'으로 바꾼 것을 다시 죽성성당
으로 갈았다. 지어진지 10년도 되지 않았건만 건물이 벌써부터 노화현상을 보여 2017년 2월 새
로 지었는데, 이때 지역 사람들이 종교적인 부분을 지워줄 것을 요청하여 마리아상과 십자가를
싹 치워버렸다. 그래서 정체가 더 아리송한 성당 아닌 성당이 되어버렸다.

▲  세월의 저편으로 사라진 하얀 피부의
성모마리아상 (지금은 없음)

▲  옆에서 바라본 죽성성당
성당 바로 옆에 등대가 붙어있다.


▲  죽성성당 주변 바닷가에 드러누운 울퉁불퉁 바위들

▲  죽성리의 어느 장어구이집에서 먹은 장어구이

죽성리 일대를 정신없이 누비니 어느덧 13시가 넘었다. 아침도 먹지 못한 터라 뱃속은 그야말
로 폭동 직전, 하여 불만에 잠긴 뱃속을 달래고자 점심 장소를 물색하다가 월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적당한 식당이 눈에 띄어 그곳으로 들어갔다.
두호마을은 회와 조개, 장어구이를 다루는 식당이 여럿 있지만 장어구이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월전마을에 밀려서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다. 그에 반해 우리가 들어간 식당과 월전마을의 많
은 식당들은 봐글봐글하다.

우리는 주차장이 바라보이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황제처럼 먹을 요량으로 남정네에게 무척
이나 좋다는 장어구이와 모듬조개구이를 주문했다. 이렇게 장어와 조개구이를 먹으니 곡차 1잔
을 겯드려야 되겠지. 그래서 동동주도 넉넉히 시켰다.


▲  모듬조개구이의 위엄

자신을 불태우는 숯불 위에 먼저 장어를 올려 모락모락 익혀 입에 넣는다. 장어는 맛이 좀 별
로였으나 장어 후속으로 구운 모듬조개구이는 맛깔스러웠다. 큰 조개 안에 조개살을 비롯해 파
와 마늘 등이 버무려져 하나의 작품처럼 나왔는데, 숯불 위에서 지글지글 구우니 거기서 나오
는 육수(조개의 눈물)가 제법 끝내줬다. 그래서 서로 조개를 더 챙기려고 아우성을 떨었다.

밑반찬은 김치와 도토리묵, 상추, 산채나물 등 대략 8가지 정도가 펼쳐졌다. 밑반찬도 그런데
로 맛이 괜찮아 밥도둑이 따로 없었으며, 금세 동이 나고 더 달라고 한 것이 가히 5번은 넘을
듯 싶다. 동동주도 금세 1동이를 비워 하나를 더 불렀는데 배가 불러 간신히 2번째 동이를 비
웠고, 메밀막국수로 식사를 기분 좋게 마무리하였다.
그렇게 점심을 먹어대니 폭동 직전이던 뱃속은 며칠을 굶어도 끄떡 없을 정도로 가득 찼고, 식
곤증의 일환으로 졸음이 슬쩍 마수를 부리자 후식 커피로 그들을 쫓아내며 다시 길을 재촉했다.
일행들은 송정(松亭)까지 걸어가자고 했으나 여기서 거기까지는 20리가 넘는 거리이다. 하지만
일단 갈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가보기로 했다.


▲  남쪽에서 본 월전마을 (월전포구, 월전방파제)

죽성리의 남부를 이루고 있는 월전마을에서 대변까지는 3km 정도 된다. 이 구간을 운행하는 시
내버스나 마을버스는 일체 없으며, 1.5~2차선 정도의 길이 바다와 적당히 거리를 두며 이어진
다. 월전 남쪽에는 식당을 비롯해 분위기를 내세운 카페들이 뿌리를 내렸고, 그 이후 대변(大
邊) 동쪽까지는 드문드문 민가(民家)가 보일 뿐이다.
휴일이라 그런지 월전, 죽성으로 외식을 가거나 나들이를 나온 차량들이 3분이 멀다하고 지나
갔고 대변에서 월전 구간을 걸어서 이동하는 도보꾼도 종종 눈에 띈다. 바닷가는 중간에 등대
가 있는 곳을 빼고는 어디든 자유롭게 바다 곁으로 내려갈 수 있다.


내용 분량상 본글은 여기서 끝 ~~ 이후 내용은 언젠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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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아늑한 옆산, 아차산에 올라 장대했던 고구려를 추억하다~~~ (홍련봉보루, 아차산성, 서울둘레길, 아차산보루)

 


' 수도권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나들이 (아차산성) '

▲  아차산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  아차산5보루

▲  아차산성

 


 

아차산은 해발 287m(또는 285m)로 용마산과 망우산을 거느린 큰 산줄기이다. 서울 강북의
동남쪽 벽으로<동북쪽 벽은 수락산과 불암산> 서울 광진구와 중랑구, 경기도 구리시의 경
계를 이루고 있으며, 예전에는 중랑구 봉화산(烽火山)까지 아차산의 영역이었다. <봉화산
에 있는 봉수대를 '아차산 봉수대'라 부름>

아차산은 음은 같지만 한자 표기만 해도 무려 4개(阿嵯, 峨嵯, 阿且. 峩嵯)씩이나 되는데,
삼국시대에는 아차(阿且), 아단(阿旦)이라 불렸으며, 고려 때 이르러 지금 널리 쓰이는 '
아차(峨嵯)'란 이름이 나타난다. ('峩嵯'도 이때 나타남)
아단(旦)이란 이름은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세우고 이름을 단(旦)으로 고치자 제
왕의 이름을 피하는 법칙에 따라 '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갈았다는 이야기가 있
으며 조선 때는 악계산(嶽溪山), 남쪽을 향해 솟은 산이라 하여 남행산(南行山)이란 별칭
까지 있었다.


겉으로 보면 수도권에 널린 흔하고 흔한 산이지만 천하가 서울의 북현무(北玄武) 북악산<
北岳山, 백악산 342m>보다 키가 더 작은 이 산을 주목하고 있다. 바로 고구려의 영광스러
운 역사가 진하게 배여있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과 만주, 요동, 요서(遼西) 등 차디찬 북
(北方)을 제외한 남한 영역에서 고구려 유적이 몰려있는 유일한 현장으로 그 값어치는 실
로 대단하다.
천박한 오랑캐 강대국들에게 둘러싸여 안그래도 좁아터진 땅, 남과 북으로 갈라진 채, 70
여 년 넘게 아옹다옹거리며 살아온 우리에게 너른 대륙과 바다를 다스렸던 고구려(高句麗
)와 발해(渤海), 백제(百濟), 옛 조선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이 너무 크기 때문일 것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아차산은 거의 동네 뒷산이었다. 그러다가 1989년 큰 산불이 터졌는
데, 이를 진화하는 과정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길게 이어진 이상한 돌무지와 산봉우리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파인 구덩이들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그들을 들춰보니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아차산 장성(長城)과 보루들이었다.
아차산장성은 아차산에서 용마산, 망우산까지 이어진 장대한 성으로 돌성과 토성(土城)으
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차산 주능선을 반달 모양으로 좌우 2겹으로 감싼 형태로 조성되었
는데, 중랑천을 건너 서울시립대 뒷산인 배봉산(拜峰山, 해발 110m)까지 이어졌다는 학설
도 있으며, 백제의 첫 도읍으로 한강 이북 어딘가에 있었던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의 흔
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들의 발견으로 아차산에 대한 호기심이 격하게 솟은 구리시(구리문화원)는 1994년 아차
산 일대를 조사하여 15개의 보루를 발견했고, 1997년 이후 아차산4보루를 비롯해 땅 속에
잠긴 보루와 유물을 끄집어냈는데, 이들이 거의 고구려 것으로 밝혀지면서 고구려 유적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남한에 한줄기 단비를 선사했다.

보루의 무더기 출현에 힘입어 아차산 일대가 고구려 유적의 꿀단지로 격하게 떠오르자 서
울 광진구(廣津區)와 경기도 구리시가 이곳을 둘러싸고 서로 고구려의 도시임을 자처하며
오랫동안 쓸데없는 소모전을 벌이기도 했고, 아차산의 존재감이 나날이 커짐에 따라 등산
과 답사 수요까지 계속 상승 곡선을 달리게 되었다. 게다가 완만한 산세와 일품 조망으로
야간 등산(야등) 수요까지 늘어나 서울 야등의 성지(聖地)로 추앙받고 있으며, 천하 둘레
길의 성지인 서울둘레길 2코스(용마·아차산코스)도 이곳에 숟가락을 얹히며 남북으로 흘
러간다.

이처럼 든든한 후광인 고구려 유적과 완만하고 아름다운 산세 덕에 관악산(冠岳山), 수락
산(水落山) 등 쟁쟁한 뫼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 아차산, 하지만 만약 고구려 유적이 없
었다면 아차산은 그저 그런 평범한 산으로 조용히 누워있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사람도
그렇고 산도 그렇고 때와 장소를 정말 잘 만나야 된다.


 

♠  고구려를 품은 꿀단지, 아차산 입문

▲  친수계곡 입구에 자리한 아차산 표석과 사슴 모형등

계절의 여왕으로 추앙받는 5월의 평화로운 주말, 일행들과 아차산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가운
데에 걸려있던 14시, 아차산역(5호선)에서 길을 시작하여 음료수와 떡, 과자 등을 사들고 아차
산으로 인도하는 골목길을 쫓았다.

아차산은 1991년 중학교 시절에 처음 인연을 지었다. 이후 20년 동안 인연이 없다가 2011년 야
간 등산으로 여러 번 찾았고, 2014년 여름 이후 야간과 낮 산행으로 발길이 무척 잦아졌다. 내
가 좋아하는 뫼의 하나다보니 아무리 많이 가도 질리기는 커녕 집에 온 듯, 반갑기만 하다. 그
아차산에 퐁당퐁당 빠진 큰 이유는 그곳에 서린 고구려의 흔적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다음
은 빼어난 절경과 완만한 산세)

아차산 남쪽 밑에 자리한 아차산 생태공원에서 잠시 발을 멈추어 속세에서 사온 먹거리를 섭취
하고 잠시 아차산을 등지며 남쪽에 솟은 홍련봉을 오른다. 그 언덕은 구의2동 주택가와 아차산
공원 사이에 자리한 조그만 뫼로 아차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고 있는데, 그 정상에는 아차산 보
루의 최남단인 홍련봉 보루(堡壘) 유적이 깃들여져 있다.


▲  홍련봉 보루 입구 (아차산 만남의 광장 맞은편)
홍련봉 코스는 딱 1보루까지만 길이 이어져 있다. 그래서 다시 이곳으로
내려와야 된다. (1보루 이후는 길이 막힘)


▲  한참 조사를 받고 있는 홍련봉(紅蓮峰) 2보루 - 사적 455호

해발 60m 정도의 홍련봉 정상은 급한 경사와 달리 넓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은 장대한
기골을 지닌 아차산과 연결되어 있고, 동쪽과 서쪽, 남쪽은 평지라 조망도 나름 괜찮다. 또한
지척에 보이는 한강 너머로 강동, 송파 지역이 흔쾌히 두 눈에 들어오니 이런 곳에 산성이나
보루를 구축하면 제법 아름다운 요새가 된다.
하여 이곳에 일찌감치 매료된 옛 사람들은 보루를 3개씩이나 닦았는데 정상 북서쪽(북보루, 2
보루)과 남동쪽(남보루, 1보루)에 10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보루를 세웠으며, 홍련봉 남쪽 작
은 봉우리에도 보루 유적이 있다. 허나 그 유적은 정립회관 체육시설과 군사시설로 이미 아작
난 상태이다.

가는 날이 문닫는 날이라고 우리가 갔을 당시 2보루는 한참 발굴조사를 받느라 여념이 없었다.
2004년 이후 여러 차례 조사를 벌였지만 아직도 다 캐내지 못한 옛날 이야기 보따리를 끄집어
내려는 학자들의 불굴의 집념은 계속 되고 있었다. 그래서 보루 주변은 접근이 통제된 상태라
그 통제에 순응하며 금줄 너머로 그 뜨거운 현장을 지켜보았다.
발굴로 인해 강제로 흙색 속살을 드러내며 황량한 몰골이 되었지만 발굴이 끝나면 다시 자연의
옷과 돌을 입혀 보루를 산듯하게 복원할 계획이다.

2보루는 둘레 약 190m의 타원형 모양으로 남북 폭이 최대 85m, 동서 42m이다. 정상 일대를 평
탄하게 다듬고 조촐하게 보루를 쌓았는데 북서쪽에서 약 40m까지는 보루 주위의 토루(土壘)와
비슷한 높이로 흙이 깎여져있고 남동쪽 부분은 토루보다 2m가 낮다.


▲  홍련봉(紅蓮峰) 1보루 - 사적 455호

2보루에서 동쪽 숲길을 100m 가면 1보루가 나온다. 여긴 발굴조사가 끝났는지 2보루와 달리 인
적이 없어 한적했는데, 넓직한 푸른 덮개로 보루의 속살을 가리고 있었다.
이 보루는 서쪽 2보루와 비슷한 모습으로 둘레가 약 150m에 이르는 타원형이다. 폭은 최대 57m
, 최소 36m 정도이며, 남한 최초로 고구려 연꽃무늬 와당이 발견되어 아차산 보루의 중심 역할
을 했던 곳으로 여겨진다. 발굴 휴유증을 보듬고자 덮개를 뒤집어쓰며 곤히 잠든 보루를 건들
기가 그래서 굳이 그의 등에는 올라가지 않았다.

홍련봉 보루는 아차산보루와 달리 오래전에 확인이 된 유적으로 1942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성터로 나와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속세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버
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1994년 구리문화원이 아차산 일대를 뒤집으며 문화유적 정밀지표 조사
를 벌였고, 이곳이 고구려 보루로 크게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하여 2004년 고려대 매장문화재
연구소에서 홍련봉1보루의 속살을 털면서 고구려의 신성한 유적임이 밝혀진 것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홍련봉 보루의 신상을 털어보면 대략 이렇다. 아차산보루와 비슷한 5~6세기에
고구려가 쌓은 것으로 보루 안에 온돌을 갖춘 건물과 물을 보관하는 저수시설, 물을 밖으로 내
보내는 배수시설, 토기와 기와를 생산하던 조그만 가마터가 있었다. 북쪽 평탄지에는 저수시설
이 나왔는데, 바닥에 목재를 깔았던 흔적이 있으며, 흙을 파서 찰흙을 입힌 뒤 석축으로 벽면
을 쌓았다. 2005년에 확인된 가마터 흔적에서는 온돌 3기가 나왔고, 온돌을 폐기한 후 모래를
섞은 흙을 다져 가마터 시설을 조성한 흔적이 나왔다.
또한 보루 내부에서 외부로 이어지는 완벽한 배수시설 구조가 나왔으며, 보루 밖에는 'ㄴ'자로
판 후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도로 시설이 나왔고, 2013년 여름 이후에는 마른 해자의 흔적까지
쏟아져 나오면서 세상을 크게 놀라게 했다. 이는 남한에서 최초로 확인된 고구려 해자였던 것
이다. 해자란 방어력을 높이고자 성곽 주위에 두룬 물줄기로 북서쪽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에
서 드러났는데 규모는 길이 204m, 폭 1.5~2m, 깊이 0.6~2.5m, 단면 형태는 'U'자형과 'V'자형
이다.
이들은 흙을 파서 내,외벽을 이루고 있는데, 외벽 일부에는 배수로가 설치된 구간을 석축으로
쌓거나 따로 배수시설을 연결했으며 동/서쪽 내벽은 석축 성벽이다.

그리고 고구려 토기와 연꽃무늬 와당(기와), 철제 깃대, 철촉, 삽날 등 다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토기 중 '官瓮(관옹)'이 새겨진 붉은 토기와 '庚子(경자)'가 새겨진 토기가 있었다.
여기서 경자는 520년(또는 460년)을 뜻하며, 이를 통해 보루가 바쁘게 움직이던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여러 유물과 시설이 발견되면서 비슷한 시설 흔적이 나왔던 아차산3보루와 더불어 아차
산의 군수물자를 책임지던 병참기지(兵站基地)로 여겨지며, 연꽃무늬 와당을 통해 아차산 보루
의 중심지였음을 귀뜀해준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곳이 아차산의 중요한 목구멍이 되었을까? 아마도 한강이 가까운 탓이 아닐
까 싶다.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시절 고구려는 중원대륙 진출에 대한 몸풀기로 아리수(阿利
水, 한강) 이북을 점령했고, 장수태왕(長壽太王) 말엽인 475년에는 한강을 건너 경북 중부까지
장악했다.
한강은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요충지로 그 강을 통해 아차산을 비롯한 남쪽 후방으로 물자를 수
송했을 것은 뻔한 이치이니 강과 가깝고 아차산과 바로 이어지는 홍련봉과 인근 구의동(정립회
관), 자양동에 보루를 쌓아 아차산의 병참기지로 삼은 것이다.

허나 6세기 중반 신라가 백제의 뒷통수를 후려치며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그 기세로 아차산까
지 공격하자 고구려군은 강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털리고 말았다. 이는 온달(溫達)장군의 설화
를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신라는 이곳을 활용하여 한강과 서울 지역을 수비하고 고구려를 견
제했으나 8세기 이후 군사기지로서의 중요성이 떨어지면서 완전히 버려지게 된다.
그렇게 사람의 손길이 끊어진 보루는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완전히 헝클어졌고, 대자연의 힘
에 의해 아차산의 일부로 완전히 녹아버렸다. 그 억겁의 세월동안 자연에 강제로 묻히며 한이
단단히 쌓였을 홍련봉보루, 이제 그 한을 풀고 이곳에 묻힌 이야기 보따리(특히 고구려)를 모
두 풀어주기를 염원해본다.

홍련봉 보루는 '아차산 홍련봉 보루 유적'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기념물 21호의 지위를 누리
고 있었으나 사적 455호로 지정된 '아차산 일대 보루군'의 일원으로 흡수되었다.

* 홍련봉 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구의동 4-13


▲  홍련봉 1보루 밑에서 바라본 천하
숲 너머로 바로 보이는 아파트가 워커힐아파트이다.

▲  홍련봉 보루 조감도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

▲  아차산 소나무숲 입구

홍련봉 보루를 둘러보고 다시 내려와 아차산으로 인도하는 소나무숲으로 들어섰다. 아차산성으
로 가려면 이곳을 거쳐가는 것이 제일 빠르기 때문이다.

이 소나무숲은 아차산생태공원의 일원으로 소나무와 들꽃이 어우러진 상큼한 공간이다. 소나무
가 삼삼하여 따가운 햇살도 이곳만큼은 힘을 쓰지 못하며 달달한 솔내음을 머금은 솔바람이 살
포시 다가와 벌써부터 피어난 땀과 속세의 무성한 번뇌를 앗아간다. 소나무 그늘에는 들꽃이
가녀린 미소를 머금으며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에 무책임하게 돌을 던지고, 그런 꽃내음과
솔내음이 어우러져 조촐하게 극락을 연출한다.


▲  아차산 소나무숲의 한복판


 

♠  삼국시대 주요 격전지였던 아차산성(阿且山城) - 사적 234호

▲  아차산성 서벽 (1)

아차산 남쪽 자락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아차산성이 장대한 세월을 머금으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아차산생태공원에서 소나무숲을 지나 10분 정도 오르면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덥수룩하
게 자라난 나무와 수풀로 오랫동안 고통 받아오던 것을 2013년 이후 성곽 주변을 꾸준히 다듬
으면서 북쪽과 남쪽 성벽도 그런데로 확인이 가능하다.
허나 아무리 꾸준히 이발을 하고 숯을 쳐내도 대자연의 의해 금세 수풀이 자라 성곽을 가리려
드니 역시나 인간의 피조물은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돌이나 모래알에 불과하다.

아차산성은 언제 축성되었는지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나 백제 9대 제왕인 책계왕(責稽王)이 위
례성(慰禮城)과 함께 수축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백제 초기(1~2세기 경)에 국도(國都)
인 위례성 주변 수비와 고구려의 남진을 막고자 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귀신도 지릴
정도로 상당히 오래 묵은 성이다.
처음에는 아단성(阿旦城)이라 불렸는데, 5세기 이후부터 단(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변
해 아차산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 한문은 비슷한 모양으로 인해 금석문(金石文)과 판각인쇄
에서 같이 쓰이는 경우가 많았으며, 음은 같지만 한자만 달리 하여 '峨嵯山城'이라 쓰는 경우
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문화재청에서 삼국사기에 나온 한자(阿且山城)를 정식 명칭으로 삼으
면서 한자 논쟁은 그런데로 종결이 되었으나 아차산의 공식 한자 표기인 '峨嵯山'과 달리 그
산성은 예전 한자로 따로 노는 이상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아차'란 이름 외에도 장한성(長
漢城), 광장성(廣壯城)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으니 한자 이름도 그렇고 별칭까지 참 복잡하다.
그만큼 이곳은 역사적으로도 꽤 복잡했던 곳이다.

4세기 후반 고구려의 위대한 군주, 광개토대왕(재위 392~413)이 한강 이북을 말끔히 장악하면
서 이곳은 백제의 심장을 겨낭한 고구려의 화살이 되었다. 위례성으로 여겨지는 서울 강동/송
파 지역이 훤히 바라보이는 잇점을 지닌 아차산을 흔쾌히 활용한 것이다.
그렇게 위례성(한성)을 새가 땅을 바라보듯 감시하며 기회를 엿보던 중 개로왕(蓋鹵王)이 고구
려의 최대 라이벌이자 동시에 백제 자신의 라이벌<동성왕(東城王) 시절에 산동반도에서 북위의
대군을 크게 때려잡은 사건이 있었음>이기도 했던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같이 치
자고 들쑤시는 일이 발생했다. (북위는 백제의 요구를 거절함)
이에 뚜껑이 열린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은 3만의 군사를 휘몰아 한성<漢城, 위례
성과 하남위례성을 한성이라 부름>을 공격했다.

고구려군은 화공(火攻)으로 성문과 도성(都城)을 불태웠고, 개로왕은 급히 도성을 버리고 줄행
랑을 치던 중, 자신의 장수인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尒萬年)을 만났다. 허나 이들
은 개로왕의 미움을 받아 고구려에 투항한 상태로 그를 잡고자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런 사실을 알 턱이 없던 개로왕은 크게 안심을 했으나, 그들이 왕에게 절을 하면서 바로 그의
얼굴을 향해 침을 3번 뱉고 온갖 육두문자를 내뱉은 다음 포박하여 고구려에 바쳤다.

그렇게 포로가 된 개로왕은 아차산성으로 끌려와 비참하게 살해되었고, 바다 건너 왜열도와 중
원대륙의 무수한 해안 영토를 거느렸던 백제의 도읍 위례성(한성)은 철저히 파괴되어 이 땅에
서 영구히 지워지고 말았다. 바로 장수태왕의 그 만행 때문에 이 땅의 학자들이 위례성을 찾느
라 오랫동안 진땀을 뺐던 것이다. (장수태왕 큰형님 너무 나빠여~~!)


▲  아차산성 서벽 (2)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고구려는 아차산성을 보조하고 한강과 중랑천, 구리 지역을 효과적
으로 수비하고자 아차~용마~망우산 산줄기에 조그만 보루를 주렁주렁 달아놓았다.
이곳에 설치된 보루는 발견되지 않은 것까지 고려하여 최대 30개 정도로 여겨지며, (현재 17기
가 발견됨) 이들 보루는 북쪽으로 봉화산과 수락산, 사패산(賜牌山), 불곡산, 양주, 연천 지역
까지 이어지는데, 주목할 점은 오직 서울과 경기 북부에서만 발견되는 고구려의 독특한 요새라
는 점이다. 이는 오랜 라이벌인 백제를 크게 의식하고 경계하고 있었음을 뜻하며 그만큼 백제
는 고구려의 강력한 적이었다.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 시절 온달이 이곳에 쳐들어온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전
하며, 이후 신라가 접수해 고구려를 막는 요충지로 삼았다. 한때는 북한산성(北漢山城)이라 불
리기도 했고, 7세기 중반까지 고구려가 종종 건드렸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대륙을 다스렸던 고구려가 사라지고(668년) 신라가 황해도와 강원도 지역을 간신히 장악하면서
아차산은 전방 신세에서 벗어났다. 즉 좁아터진 신라 땅의 한복판이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아
차산은 할 일이 크게 줄어들어 한가한 신세가 되었고, 결국 산성과 보루는 완전히 버려지게 되
었다. (신라 말에 모두 버려진 것으로 여겨짐) 보루는 대자연과 세월의 의해 모두 아작이 났지
만 아차산성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며 그 자리를 지켜왔다.


▲  아차산성 구조와 관련 사진들

산성의 둘레는 약 1,038m(길게 잡으면 1,125m)로 산허리에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테뫼식성이다.
아차산 남쪽 자락에서 워커힐 뒤쪽까지 이어져 있으며, 동문터와 남문터, 서문터, 수구(水口)
터, 곡성(曲城)터, 장대(將臺)터, 건물터, 온달장군이 마셨다고 전하는 우물이 있다. 장대(장
대터)는 전쟁시에는 장수들 지휘소로, 평상시에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쓰였다고 하며, 커
다란 왕개벚꽃나무 1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덩치로 봐서 100~2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진다.
성벽 높이는 평균 10m, 성 내부 면적은 약 103,375㎡이며, 광나루까지 성을 쌓은 흔적이 발견
되었으나 워커힐이 들어서면서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1997년과 1999년 광진구에서 부분 발굴조사를 벌여 고구려와 백제, 신라 토기와 기와파편, 흙
으로 만든 인물상, 철로 만든 솥과 쟁기날 등을 건졌고, 신라의 북한산성이 대충 이곳임이 밝
혀졌다.
그리고 2015년 광진구가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한국고고환경연구소와 함께 아차산성 남벽과
배수구 일대 4,575
를 대상으로 조사를 벌였는데, 그 결과 여러 흥미로운 존재들이 햇살을 보
았다. 고구려의 연꽃무늬 기와인 '연화문와당'이 나왔고 (홍련봉 1보루에서 발견된 와당과 비
슷한 형태임) 남벽 90m 외벽에서는 신라 건축의 특징인 외벽 보축(補築) 시설과 물을 내보내는
출수구 3곳, 내벽에서는 입수구 2곳이 나왔다. 또한 망대(望臺)터에서는 내외성벽을 비롯한 치
성(雉城)과 방대형 시설이 나왔으며, 신라의 연화문와당 10여 점과 '북한산성'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신라의 북한산성이 이곳임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었다.

허나 아차산성의 적지 않은 부분이 워커힐 관련 사유지로 묶여 있어 아직까지도 건드리지 못한
부분이 많다. 산성은 물론 그 주변까지 모두 뒤집으면 보다 많은 유물과 숨겨진 이야기가 쏟아
져 나올 것인데 그 점이 몹시 아쉽다.

1999년 이후 헝클어진 산성을 복원 정비하였고, 그들의 건강과 사유지 보호를 위해 산성 주변
에 철책을 둘러놓아 출입을 막고 있다. 그래서 이 땅에 널린 산성(山城) 유적 중 유일하게 접
근이 통제된 까칠한 성곽이 되었는데<휴전선과 민통선 지역의 성곽 유적은 제외> 2014년 이후
부터 서울시와 워커힐이 협의하여 산성을 개방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감감
무 소식이다.
<2017년 광진구청장이 신년사에서 아차산성을 복원 정비하고 4계절 힐링공간을 위한 아차산 문
화벨트 조성사업을 마무리해 아차산둘레길과 연계한 문화탐방 명소로 만들겠다고 언급했음>

서벽과 북벽 일부, 남벽 일부는 산길에서 휴전선 너머를 바라보듯 만날 수 있으나 그 외는 어
림도 없다. 다만 1년에 딱 1번 아차산성의 속살이 강제로 해방되는<인터넷 용어로 민주화가 되
는> 날이 있는데, 바로 1월 1일 아침, 아차산 해맞이 행사 때이다. 그렇다고 정식 개방되는 것
은 아니다. 그때만 되면 산꾼들이 해돋이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산성으로 마구 넘어 들어가는데
그 행렬에 살짝 묻어 들어가면 된다. 물론 정당한 방법은 아니나 그때만큼은 아차산 일대가 수
만 명에 달하는 해돋이 인파로 북새통을 이루니 단속반도 거의 손을 못쓴다. 어차피 산성에 해
꼬지만 안하면 된다.

아차산성 내부를 정당하게 둘러보고 싶다면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아차산 생태공원에 있음)'
에 문의하거나 '한강문화재연구원'에 도움을 청해보자. 나도 아직 아차산성의 속살로 들어간
적이 없다. 그곳이 속칭 민주화되기를 몇 년째 기다리고는 있지만 그 민주화라는 것이 참으로
힘들다. 마치 이 땅의 민주화가 힘들게 자리를 잡은 것처럼 말이다.

※ 아차산성 찾아가기 (2017년 4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구의역(1번 출구)에서 광진구마을버스 03번을 타고 영화사입구 하차, 동쪽으로
  펼쳐진 '영화사로'를 따라 10분 정도 가면 아차산생태공원 만남의광장이며, 여기서 소나무숲
  산길로 들어서 10분 정도 오르면 된다.
* 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1번 출구)에서 아차산생태공원까지 도보 15분 (길이 좀 복잡함)
* 지하철 5호선 아차산역(2번 출구)에서 아차산생태공원까지 도보 17분
* 아차산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5-11 (워커힐로 177)


▲  아차산성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부분
저곳에서는 산성을 지휘하는 장대터가 발견되었다.


▲  아차산성 서벽 앞 산길 - 철책 너머가 금지된 성, 아차산성이다.

▲  낙타고개

아차산성 서쪽 옆구리를 지나면 낙타고개가 마중을 나온다. 이곳은 아차산성이 있는 남쪽 봉우
리와 1보루로 이어지는 능선 사이에 쑥 들어가 있는데, 그 모습이 낙타의 목이나 등 부분의 굽
은 모양처럼 생겼다 해서 낙타고개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그대로 직진하면 아차산 주능선이며, 서쪽은 친수계곡과 영화사, 동쪽은 온달
샘석탑과 대장간마을, 우미내계곡으로 이어진다.


▲  낙타고개에서 아차산 정상으로 달려가는 숲길

▲  무덤 갈림길

낙타고개에서 아차산 정상까지는 야간 등산에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산길이 잘 닦여져 있다.
그 길을 조금 가면 석축으로 자리를 다지고 들어앉은 조그만 무덤이 나오는데, 여기서 길은 두
갈래로 갈린다. (누구 무덤인지는 모르겠으나 위치 하나는 좋아 보임)
아차산 정상과 주능선, 보루가 목적이면 왼쪽 계단길을, 범굴사(대성암)와 아차산3층석탑을 원
한다면 오른쪽 길로 간다.


 

♠  아차산 주능선 더듬기 (아차산1보루, 5보루)

▲  해맞이광장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1)
광진구와 송파(잠실), 강남, 대모산, 관악산 지역


무덤 갈림길에서 주능선을 오르면서 뒤와 옆을 살짝 돌아보는 여유를 누려보자. 그러면 허벌나
게 기가 막힌 조망이 두 눈으로 바로 달려올 것이다. 아차산이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 주
변이 거의 평지라 하늘 밑에 펼쳐진 천하를 훤히 굽어볼 수 있다. 이런 장쾌한 조망은 아차산
정상을 지나 용마산까지 이어지는데, 이 일품 조망 때문에 고구려가 보루를 잔뜩 달아 군사기
지로 삼았고 신라 또한 이곳을 애지중지했던 것이다.


▲  해맞이광장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2)
광진구, 강동, 송파, 남한산성, 대모산 지역

▲  광진구 해맞이광장 비석

무덤갈림길과 1보루 사이에 해맞이광장이 조촐하게 터를 닦았다. 이곳은 묵은 1,000년이 지고
새로운 1,000년이 도래하던 2000년 1월 1일 아침 7시, 광진구청에서 하늘과 가까운 이곳에서
새천년 해맞이 행사를 치른 것을 기리고자 돌을 쌓아 비석을 세우고 해맞이 광장으로 삼은 것
이다. 여기서는 지는 해는 물론 뜨는 해도 맞이할 수 있으며, 광진구가 야심차게 닦은 서울의
주요 해돋이 성지로 매년 1월 1일 아침마다 '아차산 해맞이축제'가 절찬리에 열린다.


▲  해맞이광장에서 바라본 천하 (1)
광진, 성동, 송파, 강남, 대모산, 관악산 지역


▲  해맞이광장에서 바라본 천하 (2)
강동구와 하남시, 남한산성과 검단산(黔丹山)

▲  해맞이광장에서 바라본 천하 (3)
'S' 라인을 보여주고 있는 한강과 구리, 강동구, 하남시, 남양주시 와부읍 지역

▲  아차산1보루 - 사적 455호

해맞이광장을 지나면 두툼히 살이 오른 아차산1보루터가 나온다. 이곳이 넘버원 1보루가 된 것
은 별 이유 없다. 남쪽을 기준으로 발견된 순서대로 나열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해발 250m에 자리한 1보루는 봉우리를 활용해 닦은 것으로 1994년 발굴조사 때 고구려 토기가
여럿 나왔다. 동쪽과 남쪽에서 보루 성벽이 확인되었는데, 보루의 정체가 알려지기 훨씬 이전
부터 보루의 남쪽 성벽 흔적을 밀어버리고 산길을 냈으나, 정체가 밝혀진 이후에는 보루 주변
에 나무 난간을 둘러 접근을 통제하고 그 옆구리에 우회길을 내었다. 그러다가 2015년 이후로
다시 보루를 개방하면서 자유로운 공간이 되었다.

아차산 보루 중 가장 남쪽으로(홍련봉 보루 제외) 5보루와 함께 아차산성과 아차산 정상을 이
어주는 요새였으며, 동과 남, 서쪽이 확 트여있어 자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다. 특히 5보루
와 남쪽 해맞이광장과 더불어 서울의 이름난 해돋이 명소로 추앙을 받고 있어 1월 1일만 되면
사람들로 봉우리가 무너질 지경이다.

보루의 구체적인 생김새는 제대로 파악되지 못했으나 고구려의 축성 양식과 복원된 아차산4보
루를 흔쾌히 참고하여 보루의 모습과 거기서 머물던 고구려 군사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어차피 산의 일부로 흡수된 폐허의 현장이고 그들의 생전의 모
습을 담은 사진이나 기록도 없으니까 말이다.

고구려는 아차산을 비롯하여 홍련봉, 구의동, 자양동, 용마산, 망우산, 수락산, 봉화산, 사패
산, 천보산, 불곡산, 연천 지역까지 많은 보루를 설치하여 아차산성 등의 주요 성을 보조하며
주변 지역을 지켰는데, 이들 보루 중,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아차산 보루 6곳, 용마산 보루 7
곳, 망우산 3곳, 수락산 1곳, 홍련봉 2곳을 '아차산 일대 보루군'으로 묶어 사적 455호로 지정
했다.


▲  아차산1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광진, 성동구, 동대문구 지역)

▲  아차산5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5보루터는 해발 267m 봉우리에 둥지를 튼 보루로 둘레 158m, 내부 면적은 1,818㎡ 정도
이다. 봉우리를 활용하여 보루를 다졌는데 보루에 씌웠던 성벽은 거친 세월의 흐름 속에 죄다
휩쓸려 사라지고 겨우 흔적 일부만 있는 형편이다. 북쪽 비탈면에 석축 일부가 남아있으나 보
존을 위해 흙으로 덮었으며, 보루를 잡아먹은 봉우리는 예전보다 살이 두툼해진 상태이다.

그의 정체가 밝혀지기 이전에는 주능선 산길이 보루 복판을 가로질러 흘러갔으나 보루임이 밝
혀진 이후에는 그의 건강을 위해 서쪽에 우회길을 닦았다. 다른 보루와 달리 신라 후기 토기가
여럿 출토되었고, 봉우리 모습이 마치 신라 스타일의 고분과도 비슷해 이를 두고 신라가 고구
려 보루를 밀어버리고 무덤을 만든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고보니 정말 신라 고분처럼
생겼다. 허나 신라는 산능선에 무덤을 잘쓰지 않는 편이라 이 역시 설에 불과하다.

5보루터는 쿨하게 개방되어 있다. 길이 봉우리 남북으로 닦여져 있으며, 그 봉우리에 올라서면
1보루를 비롯해 아차산 능선과 한강, 서울 강동구와 송파구, 광진구, 강남구, 대모산, 구리시,
남양주시(도농, 덕소 지역), 하남시 지역이 훤히 시야에 잡혀 왜 이곳에 보루를 쌓았는지 십분
이해가 간다.


▲  아차산5보루 정상에 닦여진 돌탑

이곳을 스쳐간 산꾼들이 하나씩 얹힌 돌이 모여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돌탑을 이루고 있
는 돌 대부분은 헝클어진 5보루 성돌로 여겨지며, 그 성돌이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인 돌
탑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렇게 그들의 삶은 돌고 도는 모양이다.


▲  아차산5보루 남쪽 부분

▲  아차산5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1)
사진 중앙에 보이는 곳이 태왕사신기 촬영지로 조성된 고구려대장간 마을이다.

▲  아차산5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2)
푸른 한강을 사이에 두고 구리시와 남양주시(도농, 덕소), 서울 강동구,
하남시 지역이 바라보인다.

▲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

5보루를 지나 계속 주능선을 고집하면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로 지정된 키 작은 소나무를 만나
게 된다.
아차산이 광진구의 소중한 꿀단지라 광진구가 그에게 들이는 정성은 참 대단하다. 그만큼 기대
하는 것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 정성의 하나로 2009년 가을, 아차산에 있는 소나무 중
괜찮은 것을 골라 아차산의 새로운 명물로 키우려고 계획을 세웠는데, 바로 이 나무가 그 대상
이 되어 명품소나무 1호란 그럴싸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이 소나무는 바위 틈에 단단히 뿌리를 내려 천하를 굽어보고 있는데, 가지는 굴곡이 자연스러
우며, 피부가 붉고 아름다워 단아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그의 나이는 40~50년 남짓으로 여
겨지며 나무 곁에는 천하를 굽어보게끔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에서 바라본 광진, 성동, 동대문구 지역
오른쪽 구석에 남산서울타워도 보인다.

▲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에서 바라본 용마산, 아차산 산줄기

▲  아차산 명품소나무 2호

명품소나무 1호를 지나면 바로 명품소나무 2호가 나온다. 이 나무는 밑둥부터 여러 가지로 솟
아올라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모습이 마치 고구려의 기상을 닮았다하여 명품소나무 2호의 감
투를 받았다. 그 역시 1호 나무와 함께 광진구청의 보살핌을 받으며 아차산의 차세대 명물을
꿈꾼다. (명품소나무 3호는 아직 없음)


▲  명품소나무2호에서 아차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길


 

♠  아차산 마무리

▲  아차산6보루

명품소나무 2호와 아차산3보루 사이에 아차산보루의 막내라 할 수 있는 6보루가 언덕처럼 봉긋
이 자리해 있다.
언덕처럼 솟은 터가 바로 6보루터로 2005년 3보루 발굴조사에 참여했던 사람이 우연히 발견했
다. 허나 아직까지 발굴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 생김새가 보루터 비슷하게 생겨서 아
차산6보루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추정 둘레는 약 80m 정도로 이곳에서 나왔던 옛 불씨는 흙을
덮어 보존하고 있다. 아차산 주능선 바로 동쪽으로 적지 않은 아차산의 과거를 간직하고 있으
리라 여겨지며 속히 조사를 벌여 6보루의 정체성을 밝혀주었으면 좋겠다.


▲  아차산6보루 부근에서 바라본 5보루

▲  아차산6보루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1)
가운데 보이는 산자락에 아차산성이 누워있고, 그 너머로 한강과 강동,
송파 지역이 바라보인다.

▲  아차산6보루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2)
강동구와 하남시 지역

아차산의 품에 들어설 때 처음에는 아차산 정상까지 가려고 했다. 허나 그 힘찬 발걸음은 6보
루에서 뚝 멈추고 말았다. 일몰 시간도 지척인데다가 다들 힘들다고 하소연을 했기 때문이다.
하여 아쉽지만 주능선은 이쯤에서 놓아두고 동쪽으로 내려가 범굴사(대성암)을 경유하여 무덤
갈림길로 돌아왔다.


▲  범굴사 부근에서 바라본 한강과 강동, 구리, 하남 지역

▲  범굴사 부근에서 바라본 강동, 송파 지역

▲  크고 아름다운 이름을 지닌 고구려정(高句麗亭)

무덤 갈림길에서 낙타고개 방면으로 내려가면 서쪽에 붉은 기와를 지닌 2층 고구려정이 손짓을
한다.
아차산에 딱 어울리는 이름을 지닌 고구려정은 팔각정 모습으로 이곳에는 원래 1984년에 지어
진 콘크리트 팔각정이 있었다. 허나 노후로 정자 전체가 기울어지는 현상이 발생하자 2008년 1
월에 철거했으며, 고구려 유적의 성지에 걸맞게 고구려 스타일로 다시 짓기로 하고 2009년 2월
착공하여 그해 7월 완성을 보면서 정자 이름을 고구려정이라 하였다.
정자에 쓰인 목재는 300년 이상 묵은 금강송을 사용했는데, 기와는 고구려 왕궁인 평양 안학궁
(安鶴宮)과 홍련봉보루에서 출토된 기와의 붉은 색상과 문양을, 단청 문양과 현무, 주작 그림
은 쌍영총(雙楹塚)과 강서(江西)중묘 등 고구려 고분 벽화를 참고해 남한 최초로 고구려 건축
양식을 재현한 의미 깊은 현장이다.

고구려정은 바위 위에 곧게 자리해 고구려가 늘 응시하던 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정자 밑에
넓게 닦여진 넓적바위는 예로부터 기가 왕성한 장소로 알려져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한다.
정자 내부는 마루로 이루어져 1층에서 신발을 벗고 계단을 통해 올라가면 되는데 솔솔 불어오
는 산바람에 번뇌를 휘날리며 독서를 하게끔 도서함이 갖추어져 있다. (독서는 자유이나 책을
가져가는 것은 안됨)

▲  야외 도서관을 꿈꾸는 고구려정 도서함

▲  천정에 그려진 주작(朱雀)의 위엄


▲  천정에 장엄하게 그려진 현무(玄武)와 연꽃무늬의 위엄

▲  고구려정에서 바라본 천하 (광진구 구의/자양/성수동 지역과
송파, 강남 지역)

▲  주름진 하얀 피부를 지닌 거대한 넓적바위
아차산 동쪽 자락인 우미내계곡 북쪽에도 이런 비슷한 바위가 누워있다.

▲  밑에서 바라본 고구려정

고구려정에서 잠시 다리를 쉬었다가 정자 밑으로 펼쳐진 넓적바위를 타고 내려갔다. 바위 자체
가 산길로 쓰이고 있는데, 미끄러운 면이 별로 없어 산행에는 크게 불편은 없다. 다만 비/눈이
오거나 얼음이 언 경우에는 바위도 흥분기를 보이니 각별히 주의해야 된다.

아차산공원(동의초교 동쪽)으로 내려오니 어느덧 19시, 그렇게 높이 올라간 것은 아니지만 하
늘과 조금이나마 가까운 곳을 갔다왔더니 시장기도 강하게 요동을 친다. 그래서 어린이대공원
후문 부근에서 뜨끈한 갈비탕에 파전, 거기에 곡차(穀茶) 여러 잔을 겯드리며 황제처럼 저녁을
먹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아차산 나들이는 흐릿한 과거의 일부가 되어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어린이대공원 후문 부근 식당에서 먹은 갈비탕과 파전의 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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