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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6.24 인왕산 그늘에 깃든 서울 도심의 꿀명소, 서촌~청운공원 나들이 <선희궁터, 옥류동 청휘각터, 백세청풍 바위글씨, 송강정철 집터> 2
  2. 2019.12.19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달달한 숲길, 인왕산자락길 (청운문학도서관, 청운공원에서 수성동계곡까지)
  3. 2018.12.04 시문학의 성지이자 도심 속의 상큼한 언덕, 청운동 윤동주시인의 언덕 ~~~ (윤동주소나무, 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4. 2014.04.09 풍경과 조망이 일품인 서울 도심의 상큼한 명소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인왕산 그늘에 깃든 서울 도심의 꿀명소, 서촌~청운공원 나들이 <선희궁터, 옥류동 청휘각터, 백세청풍 바위글씨, 송강정철 집터>

서촌 늦가을 나들이



' 서촌 늦가을 나들이 '
옛 청휘각터에서 바라본 서촌(웃대)과 서울 도심
▲  옛 청휘각터에서 바라본 서촌(웃대)과 서울 도심
 



 

늦가을이 막바지에 이르던 11월 한복판에 서울 도심의 꿀명소로 크게 추앙을 받고 있는
서촌(西村, 웃대)을 찾았다.
서촌은 원래 서대문과 경희궁(慶熙宮) 주변을 일컬었고, 경복궁 서쪽 동네는 웃대라 불
렸는데,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이들 지역은 서촌으로 합쳐졌다. 요즘에는 경복궁(
景福宮)과 인왕산(仁王山) 사이 지역을 서촌이라 크게 부르고 있으며, 세종이 1397년에
태어난 곳이라 해서 세종마을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서촌은 가까운 북촌(北村)과 인왕산, 북악산(백악산), 부암동과 더불어 나의 마음을 계
속해서 훔치고 있는 내 즐겨찾기 명소로 한때는 북촌처럼 구석구석 누비고 다녀 안가본
골목이 없을 정도이다. 허나 사람의 마음은 갈대라고 다른 즐겨찾기 명소들이 생겨나면
서 조금은 시들어졌다.

늦가을이 깊어감에 따라 서촌 앓이가 다시금 도지면서 오래간만에 그곳을 찾았는데, 이
번에는 신교동과 옥인동, 청운동(淸雲洞)의 일부 명소들을 복습했다. (본글에서 선희궁
터와 백세청풍 바위글씨, 청운공원 일부는 늦여름에 담은 사진을 이용했음)


▲  백세청풍 바위글씨

▲  청운공원의 늦가을 풍경



 

♠  영조의 후궁인 영빈이씨의 사묘(私廟), 선희궁터 사우(祠宇)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2호

서촌 북부에 자리한 신교동(新橋洞)에는 국립서울농학교가 있다. 그 학교 교정에는 고색이 깃
든 기와집이 하나 숨겨져 있는데, 그곳이 바로 옛 선희궁터의 사우이다.

선희궁은 영조(英祖, 재위 1724~1776년)의 후궁인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신주(神主)를 봉안했
던 왕실의 사묘<私廟, 사친묘(私親廟)라고도 함>이다. 사묘란 왕후(王后) 반열에 들지 못하거
나 추존되지 못한 제왕의 생모(生母)나 친할머니를 위해 지은 사당이다.

영빈이씨는 창경궁 선인문(宣人門)에서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로 1764
년 한 많은 인생을 마감했다. 아들을 죽인 자책감에 늘 괴로워하던 영조는 영빈에게 의열(義
烈)이란 시호를 내리고, 1765년 현재 자리에 사당을 지어 의열묘(義烈廟)라 했으며, 사도세자
의 아들인 정조(正祖)는 선희궁으로 이름을 높였다.

1870년 선희궁 신주를 육상궁(毓祥宮)으로 옮겼다가 1896년 원위치시켰으며, 1908년 순종(純
宗)이 칙령(勅令)을 내려 나라에서 관리하는 사묘(祠廟)을 대거 정리하면서 육상궁에 통합시
키고 선희궁은 사우를 제외하고 모두 철거했다.
그 빈터에는 1931년 제생원(濟生院) 소속 맹아부(盲兒部)가 둥지를 틀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서울농학교와 서울맹학교의 전신이다.


▲  반지하처럼 살아가고 있는 옛 선희궁터 초석

신교동교차로에서 필운대로를 따라 서울농학교로 다가서면 길 오른쪽(북쪽)에 세월의 무게에
짓눌린 듯, 콘크리트 밑에 깔린 길다란 석축(石築)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이들은 선희궁을
받치던 늙은 초석들로 지금은 그 위에 학교 운동장을 깔았다.


▲  왕실 사당으로써의 위엄과 기품을 잃지 않은 선희궁터 사우

▲  벽돌로 3면을 두룬 선희궁 사우의 뒷모습

▲  화려한 단청이 눈을 부시게 하는 사우 내부
텅 빈 내부에는 부질없는 먼지만이 가득하다.


서울농학교 안쪽에 자리한 선희궁 사우는 툇마루를 갖춘 맞배지붕 건물이다.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 정면을 제외하고 모두 벽돌로 둘렀으며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무심한 세월의 때가
아낌없이 깃들여진 기단 위에 가지런히 들어앉아 나름대로 위엄과 기품을 드러내고 있지만 한
참 후배인 키다리 학교 건물 속에 파묻혀 오히려 초라하게 다가온다.

교정에는 옛 선희궁의 식구였던 늙은 느티나무와 은행나무가 있다. 은행나무는 사우 부근에, 
느티나무는 학교 정문에 있는데 정문에 있는 느티나무는 나이가 250년이 넘었다. 250년이면
선희궁과 나이가 비슷하니 아마도 선희궁을 짓고 기념 식수로 심은 듯 싶으며, 높이 16m, 둘
레는 4.3m에 이른다. 사람들의 오랜 보살핌과 세월이란 마르지 않는 양분으로 나날이 커져가
는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는 올해도 변함없이 교정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준다.


▲  신교동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27호
학교 아이들에게 그늘을 드리우며 삭막한 속세에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삶의
희망을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소중한 정자나무이다.


▲  200여 년 묵은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1-15호
앞의 느티나무와 달리 하늘로 곧게 솟아 늘씬한 자태를 뽐낸다.

▲  서울맹학교 정문과 우당기념관 앞에 자리한 잘생긴 은행나무
나이는 약 100년대로 여겨진다. 그가 걸쳤던 황금옷의 실타래가 풀어지면서
슬슬 앙상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데, 그 모습이 한라산(漢拏山)과
덕유산 고지대에서 볼 수 있는 구상나무와 비슷해 보인다.


* 선희궁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교동 1-1 서울농학교 내 (필운대로 103)



 

♠  서촌의 주요 명소였던 옛 청휘각(晴暉閣)터

▲  옥인동(玉仁洞) 산자락에 깃든 청휘각터(옥인동 산47번지)

서촌의 서부를 달리는 필운대로에서 옥인동 북서쪽 주택가를 가로질러 인왕산 자락으로 향하
면 자연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골목길(옥인5길)이 나온다. 길 동쪽은 서촌 주거지, 서쪽은
숲이 무성한 인왕산으로 서촌을 비롯한 서울 도심이 훤히 바라보이고, 인왕산 숲속이라 풍경
도 뛰어나 아름다운 절경만 보면 사죽을 못쓰던 옛날 사람들의 흔적이 반드시 있을 듯싶은데,
그 예상대로 청휘각터를 알리는 이정표가 발길을 오래도록 머물게 한다.

청휘각은 인왕산 동쪽 계곡의 하나인 옥류동(玉流洞)에 있던 정자이다. 그 옥류동은 인근 청
풍계와 수성동(水聲洞)과 더불어 혼란의 20세기를 거치면서 거의 생매장을 당해 약간의 시냇
물만 남아있는 정도로 개울은 거의 사라졌지만 숲은 여전하여 옛날의 경치를 조금 간직하고
있다.
청휘각이란 '비가 개인 뒤에 맑은 햇살이 비치는 누각'이란 시적(詩的)인 뜻이다. 조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이곳에 집을 짓고 그 후원에 지은 누정이 바
로 청휘각으로 겸재 정선은 장동 일대(청운동 지역)의 명소 8곳을 선정해 그림으로 남겼는데,
청휘각 생전의 모습이 바로 그 그림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정선이 아니었다면 청휘각의 생
김새조차 모를 뻔했다.


▲  겸재 정선이 그린 청휘각

정선이 그린 청휘각 그림을 보면 청휘각 주변은 온통 소나무를 비롯한 숲과 개울 뿐이다. 정
자 밑에는 서촌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데, 청휘각을 후원으로 삼았다는 김수항 집은 나와있
지 않아 그 집은 진작에 사라진 모양이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으로 많은 문인(文人)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청휘각은 대중적인 명
소가 되었으며, 그렇게 착했던 청휘각이 언제 사라졌는지는 인왕산 산신(山神)도 모르는 실정
이나 20세기 초반 어둠의 시절을 겪으면서 슬쩍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해방과 6.25이
후 정자 밑까지 집들이 들어차 달동네처럼 변하면서 옥류동 계곡마저 희생되고 말았다. 허나
다행히도 청휘각 주변은 개발제한구역에 묶여 아직 자연 지대를 유지하고 있어 청휘각 그림에
담긴 풍경의 절반 정도는 아직 유효하다.

청휘각은 서촌에 널린 소소한 명소에 불과하나 풍경만큼은 능히 갑(甲) 수준이다. 서촌의 조
그만 보탬도 줄 겸, 그리고 잃어버린 옛 경승지를 되찾는 차원에서 그림과 관련 자료를 참조
해 청휘각을 복원했으면 좋겠다. 골목길 밑을 제외하면 모두 숲이니 잃어버린 정자를 다시 일
으킬 공간도 충분하며, 숲과 계곡도 옛 모습 그대로 재현을 시킨다면 정말 금상첨화가 될 것
이다. 


▲  청휘각터로 인도하는 옥인5길 골목길
인왕산과 가까운 옥인동 윗동네는 아직 달동네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  인왕산과 서촌(웃대) 주거지의 경계를 가르는 옥인5길 골목길

▲  옥인동에서 바라본 청운동 주택가와 북악산(백악산)



 

♠  김상용(金尙容) 집터와 정철(鄭澈) 집터

▲  김상용 집터에 남아있는 백세청풍(百世淸風) 바위글씨

서촌의 북쪽 끝을 잡고 있는 청운동은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 사이에 포근히 자리해 있다.
예로부터 절경을 자랑하던 이곳에는 늙은 바위글씨들이 여럿 전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백세청풍 바위글씨다. 바위글씨란 바위에 새긴 글씨로 어려운 말로
각자(刻子)라고 하는데, 요즘은 순수 우리말인 바위글씨로 많이 불린다.

백세청풍 바위글씨는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 새긴 것이다. 지금은 달랑 4자만 남아있지
만 원래는 '대명일월(大明日月) 백세청풍' 8글자로 앞의 4글자는 왜정 때 영구히 지워지고 말
았다.
또한 이들 글씨의 보금자리인 바위 위에 높게 석축을 쌓고 커다란 주택을 세우면서 석축에 제
대로 깔린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그 형태가 완전히 사람 발에 깔린 개미 같다. 그나마 뒤늦
게나마 바위 앞에 철책을 둘러 보호에 나서고는 있으니 문화유산 보존에 야박한 이 땅의 현실
에서는 그것으로도 다행이다. 기분 같아서는 바위를 뭉개고 있는 집들과 석축을 말끔히 지워
버려 바위에게 자유를 주고 싶을 정도이다.

바위글씨의 주인공인 김상용은 1607년 이곳에 들어와 집을 짓고 살았는데, 주변 풍경이 수려
해 청풍각(淸風閣)이란 별도의 건물을 짓고 바위에 8글자를 새겼다. 그 연유로 이곳을 흐르던
계곡이 청풍계(淸風溪)라 불리게 되었으며, 청풍계와 인근 백운동(白雲洞)의 이름을 따서 지
금의 청운동이 되었다. <옛날에는 장동(壯洞)이라 불림>
서촌의 경승지이자 서울 굴지의 명소로 찬양을 받았던 청풍계는 고약했던 왜정(倭政) 시절에
왜열도 재벌인 미쓰이(三井)가 이곳을 매입하여 건물을 지으면서 개념없이 마구 아작을 내기
시작했다. 졸졸졸~ 흐르던 개울을 생매장시키고 바위를 깨뜨렸으며, 계곡에 단 1채 남았던 옛
건물인 태고정(太古亭) 마저 인부들의 숙소로 유린하면서 끝내 밀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바
위글씨까지 손을 대어 글씨의 절반을 지워버렸다.

해방 이후 이곳에는 민가들이 들어차 청풍계가 다시 돌아올 여유도 주지 않았고, 졸부들의 저
택까지 백세청풍 바위에 깔고 앉으면서 이제는 전설 속의 이름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인왕제
색도(仁王霽色圖)를 남긴 겸재 정선이 청풍계의 암울한 미래를 예견이나 했는지 이곳의 풍경
을 여러 장의 화폭에 담으면서 옛 모습을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다만 김상용의 집은 정선의 그림에 나오지 않아 겸재 이전에 사라진 모양이며, 이제는 백세청
풍 바위글씨만이 겨우 남아 그의 집터임을 아련히 귀띔해줄 따름이다.


▲  가까이서 본 백세청풍 바위글씨
옛날 글씨는 왼쪽이 아닌 오른쪽부터 읽는다. 괜히 풍청세백이라 읽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자~
 

그럼 바위에 새겨진 백세청풍은 무슨 뜻일까? 백세(百世)는 100세대를 뜻한다. 대략 1세대를
30년으로 잡으니 무려 3,000년이 된다. 쉽게 말하면 오랜 세월을 뜻한다. 청풍에서 청(淸)은
맑고 높다는 뜻이고 풍(風)은 군자의 덕과 절개를 뜻한다. 그러니까 오래도록 부는 맑은 바람
, '영원토록 변치 않는 높은 선비의 절개','대대로 맑은 가풍을 유지한다'는 의미로 그 유명
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백이와 숙제는 옛 조선(고조선)의 제후국이었던 고죽국(孤竹國) 사람들로 여기까지는 별 이상
은 없다. 김상용도 선비이자 양반이므로 그런 글귀를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며, 양반들에게는
이상향과 같은 내용으로 그들이 자주 쓰던 글귀였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은 지워진 대명일월은 무엇일까? 있는 그대로 풀이하면 크고 밝은 해와 달이다. 그
것도 맞긴 하지만 여기서 대명(大明)은 조선이 자존심도 버리며 지극히 섬기고 받들던 명나라
를 뜻한다. 그러니 명나라의 해와 달, 즉 명나라의 세상을 의미하며, 거기에 백세청풍까지 더
하면 명나라에 대한 절개를 지키자는 뜻이 된다.
조선의 위정자들 상당수는 명나라를 '황명(皇明)','대명(大明)' 등이라 높여 불렀다. 게다가
조선의 정치 이념이자 선비와 사대부들이 익혔던 성리학(性理學)도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를
더욱 부추겼다.
성리학이 문치(文治)에는 좋을지 몰라도 문을 강조하고 무(武)를 멀리하는 함정이 있고, 주희
(朱熹)가 몽골 원나라에게 완전히 구겨진 한족(漢族) 잡종들의 체면을 만회하고 한족 중심의
중화사상을 고취시키려는 의도로 만든 학문이다. 그러다보니 조선의 위정자와 사대부들은 점
점 명에 대한 꼴사나운 사대주의에 젖게 되고 국방까지 덩달아 등한시 하면서 명나라도 한때
두려워했고 툭하면 북방 세력(여진족 등)을 초토화시켰던 조선의 군사력은 크게 떨어진다.
게다가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 조금 도와준 것을 가지고 '재조지은(再造之恩)'이
라 떠벌리며 더욱 명나라에 딸랑거렸다.

그 명나라가 1644년 풍비박산이 났으니 조선의 선비와 위정자들은 완전 어버이를 잃은 양 크
나큰 충격에 빠졌다. 물론 병자호란의 치욕을 안겨준 청나라에 대한 적대감도 명에 대한 그리
움에 한몫 했다. 명이 사라진 이후 조선 지배층과 유생들 사이에서 '명나라를 회복해야 된다'
,'명나라의 세월로 돌아가야 된다'는 아주 거지 같은 사상이 지배적으로 형성되었는데, 바로
그때 생겨난 단어가 바로 '대명일월' 4자이다. 그들의 꼴통 사대주의로 나라를 말아먹고 백성
들을 도탄에 밀어넣은 지배층과 유학자들의 고리타분하고 시대착오적인 이념이 담겨 있는 것
이다.

그런데 김상용이 글씨를 새긴 것은 명이 망하기 이전이므로 '대명일월'이란 단어는 아직 두드
러지지 않은 상태다. 그가 1637년에 죽었지만 그때까지도 명은 질기게 명줄을 유지하고 있었
다. 그러면 백세청풍은 몰라도 대명일월은 다른 사람이 새겼을 가능성이 큰데, 그의 후손이나
후학들이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강화도에서 자결한 김상용을 기리고 명나라를 사모하는 뜻에
서 새겼을 가능성이 크다.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에 따르면 명나라에 대한 꼴통 사대주의의 1
인자였던 송시열(宋時烈)의 글씨라는 말이 있다.


※ 김상용(1561~1637)은 누구인가?
김상용은 안동 김씨로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이다. 1590년 증광시(增廣試)에 급제
하여 검열관(檢閱官)이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권율(權慄)장군의 종사관으로 활약했다.

1598년 승지(承旨)가 되어 명나라에 성절사(聖節使)로 다녀왔으며, 서인(西人)의 일원으로 대
사성(大司成)을 비롯, 여러 외직을 거쳤다. 1623년 서인패거리가 광해군(光海君)에게 반기를
들며 창의문을 뚫고 도성을 범하는 파렴치한 반란을 일으키자<인조반정(仁祖反正)> 거기에 참
여해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라는 큰 자리를 얻었으며, 예조와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1627년
에 유도대장(留都大將)이 되었다.

1630년 나이가 70살에 이르러 조정에 사직을 청했으나 인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우
의정(右議政)에 임명했다. 드디어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터지자, 그는 빈궁(嬪宮)과 원손(
元孫)을 호종하여 급히 강화도로 줄행랑을 쳤다. 허나 1637년 1월 청나라군이 강화해협을 건
너 손쉽게 강화성을 점령하자 그 분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남문 문루(門樓)에 화약을 잔뜩 쌓
아 불을 질러 자살했다.

그 당시로는 드물게 76살씩이나 살았던 인물로 자살을 택한 덕에 죽어서는 충신의 대접을 제
대로 받았다. 인조는 그에게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강화군 선원면에 그의 사당을
세워 그의 충절을 기렸다. <선원면이란 지명은 바로 그의 호에서 유래됨>


▲  송강 정철 집터

청운초등학교 앞 자하문로 길가에는 송강 정철의 집터를 알리는 표석과 그의 시가 담긴 시비(
詩碑)들이 줄지어 있다. 정철은 조선 가사문학(歌詞文學)의 1인자로 사미인곡(思美人曲)을 비
롯한 그의 작품들은 초,중,고등학교 국어/문학 교과서에 아주 지겹도록 등장해 일명 학생들과
대입 수험생들의 적이라 불리기도 하며, 국문학사에서도 큰 무게를 가진 인물이다.

※ 송강 정철(1536~1593)은 누구인가?
정철은 연일정씨로 서울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시호는 문
청(文淸)이며, 기대승(奇大升)과 김인후(金麟厚)의 제자이다.
그는 맏누이가 인종(仁宗)의 귀인(貴人)이고, 2째 누이가 계림군(桂林君)의 부인이 되면서 궁
중에 자주 들락거렸는데, 나중에 명종(明宗)이 되는 경원대군(慶原大君)과 친했다. 1545년 을
사사화(乙巳士禍) 때 계림군이 연관이 되자 정철 일가는 거의 풍비박산이 나고 정철 부자는
유배형에 처해졌다.

1551년 유배에서 풀려나자 그의 일가는 집안의 고향인 담양 창평(昌平)으로 집을 옮겼다. 송
강은 형이 장가를 들어 살고 있는 순천에 가다가 우연히 김윤제(金允悌)의 별장(환벽당) 밑
창계천에서 목욕을 한 것이 인연이 되어 김윤제(金允悌)의 문하가 되었다.
(환벽당과 창계천 관련 글 ☞ 보러가기)
그는 여기서 10년 동안 공부를 했으며, 이때 기대승 등 당대 학자들에게 학문을 배우고 이이
(李珥)와도 교유했다.

1561년 진사시(進士試)에 붙고, 1562년 별시(別試)에 장원으로 붙으면서 전적(典籍) 등을 역
임했으며, 1566년 함경도(咸鏡道) 암행어사를 지낸 뒤 이이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78년 장악원정(掌樂院正)이 되고 도승지(承旨)로 승진했다. 하지만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동인(東人)의 공격을 받으면서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했다.

1580년 강원도 관찰사(觀察使)가 되었고, 3년 동안 전라도와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많은
시를 남겼다. 이때 그 유명한 관동별곡(關東別曲)이 탄생했으며,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백성들에게 널리 알렸다. 그리고 1585년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4년을 쉬면서 사미인곡과
속미인곡(續美人曲)을 비롯한 굴지의 작품을 남겼다.

1589년 우의정(右議政)이 되었고, 곧 이어 일어난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을 직접 다스리
게 되면서 라이벌인 동인 세력을 철저히 때려잡았다. 그 공로로 1590년 좌의정(左議政)이 되
었다.
1591년 광해군을 세자(世子)로 책봉할 것을 건의했으나 당시 선조(宣祖)는 인빈(仁嬪)김씨 소
생의 신성군(信城君)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송강의 건의에 뚜껑이 뒤집힌 선조는 그를 진주
와 평안도 강계(江界)로 유배를 보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왕의 소환을 받아 왕을 의주(義州)까지 호종했으며, 1593년 명나라
에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왔다. 이후 동인의 모함으로 관직에서 떨려나 강화 송정촌(松亭村)
에 머물다가 57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는 조선 가사문학의 상징으로 고산 윤선도(尹善道)와 쌍벽을 이루며, 작품으로는 시조 70수
가 전한다.


▲  송강의 시비 ①
산사야음(山寺夜吟)과 함흥객사에 핀 국화

산사야음(山寺夜吟)
우수수 지는 나뭇잎 소리를
성근 빗소리로 잘못 알고
동자승 불러 나가보랬더니
시내앞 나뭇가지에 달만 걸렸네

▲  송강의 시비 ②
백성들 교화용으로 만든 훈민가

▲  송강의 시비 ③ 사미인곡
임금을 그리며 섬기는 마음을 담은 가사이다.

▲  송강의 시비 ④ 관동별곡

▲  송강의 시비 ⑤ 성산별곡(星山別曲)


* 백세청풍 바위글씨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52-111
* 정철 집터 표석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123



 

♠  인왕산 중턱에 깃든 상큼한 공원, 청운공원(淸雲公園)

▲  가을옷을 곱게 걸친 청운공원과 공원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서촌의 북쪽 끝이자 인왕산 중턱에 넓게 자리한 청운공원은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
은 공원이다. <산 전체 또는 대부분이 공원으로 지정된 남산과 안산(鞍山), 낙산공원은 제외>

윤동주시인의 언덕이란 새로운 꿀단지를 북쪽에 달고 있는 이곳은 인왕산 동쪽 자락으로 청운
동 주택가와도 약간 거리를 둔 자연 지대이다. 인왕산길이 공원의 북쪽과 서쪽을 지나며, 자
하문고개에서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로 간판을 바꾸고 북악산(백악산) 뒷쪽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공원을 가로지르는 골목길(자하문로35길)은 윤동주문학관에서 공원을 지나 청운동 주
택가를 거쳐 자하문로로 내려간다.

청운공원은 인왕산 품에 조성된 평범한 시민공원으로 산자락에 조성된 것 외에는 딱히 볼거리
는 없었다. 그러다가 2007년에 인왕산 돌을 모아 일종의 돌아파트를 지었고, 2009년 이후 공
원 북쪽에 윤동주시인의 언덕과 윤동주문학관이 닦였으며, 2014년에 이 땅 최초의 한옥 공공
도서관인 청운문학도서관이 들어서 볼거리도 크게 늘었다.
또한 이곳은 산자락에 있기 때문에 서울 도심과 부암동, 홍지동 일대가 훤히 바라보여 조망도
일품이며,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의 청정한 기운이 늘 깃들여져 있어 공기도 맑다. 게다가
서울 장안의 주요 해맞이 성지(聖地)로 매년 1월 1일 해맞이 축제가 열리며, 나무와 꽃이 울
창하여 봄꽃 명소, 늦가을 단풍 명소로 격하게 칭송을 받는다.

청운공원에 가려면 자하문고개에서 접근하는 것이 가장 좋으며, 자하문터널 남쪽에서 자하문
로35길을 따라 올라가는 길도 있는데, 그건 경사가 좀 각박하다. 그리고 청운동 안쪽에 자리
한 유진인재개발원 정문 못미쳐에 청운공원으로 오르는 산길이 가늘게 이어져 있고, 사직공원
과 수성동계곡에서 인왕산길을 타고 접근하는 것도 괜찮다. 


▲  청운공원에서 바라본 북악산(백악산)의 위엄

늦가을 단풍이 한참 절정을 이르는 때라 나무들이 진한 붉은색과 노란색, 녹색 등으로 단단히
물들었다. 겨울 제국(帝國)의 시련을 목전에 두고 자신의 남은 끼와 기력을 모두 발산한 나무
들. 그리고 죽음 앞에서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무지개처럼 짧은 삶을 원망하는 나뭇잎
들. 인간은 그들을 통해 늦가을의 정취를 즐기면서도
'올해도 이제 저물었구나, 좀 있으면 강제로 1살을 더 먹네'
늦가을과 연말 우울증에 한숨을
쉰다.


▲  청운공원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그리고 일몰 직전의 하늘

▲  고양이 같은 인왕산 호랑이상

천하 호랑이의 대명사이자 하늘 아래 제일 무서운 존재였던 인왕산 호랑이, 이제는 숱한 설화
만을 남긴 채, 우리들 뇌리에서 거의 잊혀지고 말았다.
그들을 그리며 만들었다는 인왕산 호랑이상, 어린이들이 울고 갈 정도로 매섭게 좀 만들 것이
지, 너무 순둥이처럼 만들어서 졸지에 호랑이 탈을 쓴 인왕산 고양이상이 되어버렸다. 곶감도
우습게 봤다는 천하 제일의 인왕산 호랑이를 제대로 모욕한 셈이다.


▲  인왕산 돌로 만든 '인왕산에서 굴러온 바위(인왕산 돌아파트)'

서시정에서 윤동주문학관으로 내려가면 돌의 거대한 보금자리를 만나게 된다. 이것은 2007년
서울시에서 추진한 '서울 도시갤러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조성된 것으로 인왕산과 그 주변
에서 주운 돌을 정리하여 그들의 조촐한 아파트로 만들었다.

* 청운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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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달달한 숲길, 인왕산자락길 (청운문학도서관, 청운공원에서 수성동계곡까지)

 


' 서울 도심에 숨겨진 상큼한 숲길, 인왕산자락길 '

▲  인왕산자락길 (은행나무숲길)

▲  인왕산자락길 가온다리

▲  이빨바위

 


 

늦가을이 존재감을 진하게 드러내며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물들이던 11월의 어느 평화
로운 날, 인왕산 품에 숨겨진 인왕산자락길(숲길탐방로)을 찾았다.

인왕산자락길은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동쪽 자락에 닦인
둘레길로 2개의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제1코스(2.7km)는 인왕산길을 졸졸 따라가는 탐
방로로 윤동주문학관에서 인왕산길을 따라 사직단(사직공원)까지 이어진다.
경사가 거의 느긋하여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지 마음 편히 거닐 수 있으며, 시내와
도 무척이나 가까워 언제든 도시로의 탈출이 가능하다. 다만 인왕산길이 차량들 왕래가
빈번하다보니 비록 작은 소음이지만 종종 적막을 깨뜨린다.

본글의 주인공인 제2코스는 숲길탐방로(3.2km)로 윤동주문학관에서 산길을 따라 이빨바
위, 가온다리, 수성동계곡 윗쪽을 거쳐 택견수련터(황학정 북쪽)까지 이어진다. 인왕산
길과 서촌(西村, 웃대) 주택가 사이에 자리한 길로 제1코스와 달리 차량의 눈치와 소음
걱정에서 벗어나 아늑하고 달달한 산길의 멋을 느낄 수 있다. 다만 오르락 내리락 굴곡
이 다소 있어서 약간은 힘들 수 있다. 하지만 다리만 멀쩡하면 삼척동자도 능히 완주할
수 있으니 걱정 따위는 인왕산 산바람에 날려보내기 바란다.

제2코스는 인왕산길(제1코스)과 서로 만날 듯 가깝게 거리를 두고, 경쟁을 하듯 펼쳐져
있다. (현실은 청운공원과 택견수련터에서만 만남) 아주 편한 길을 원한다면 제1코스를
, 차량의 눈치 없이 아늑한 산길을 꿈꾼다면 제2코스(숲길탐방로)를 이용하자. 특히 제
2코스에는 숨겨진 명소와 계곡, 약수터가 많고 풍경도 고우며, 서울 도심이 늘 옆에 파
노라마처럼 따라다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번 나들이는 제2코스를 이용하여 윤동주문학관에서 사직단(社稷壇, 사직공원)까지 이
동했다. 늦가을이 겨울 제국의 압박으로 생각보다 명이 짧아서 그가 지기 전에 그의 가
랭이라도 붙잡을 겸 서둘러서 찾았는데, 아직은 늦가을 풍경이 여전해 내 정처 없는 마
음과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오감(五感)을 크게 정화시켜 주었다. 역시 사람은 대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이후 제2코스는 인왕산자락길이라 표시하며, 제1코스는 인왕산길로 표시함)


▲  윤동주문학관 앞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바로 앞에 붉은 뒷통수를 보인 주택들은 청운벽산빌리지이다.


 

♠  우리나라 최초의 한옥 공공도서관, 인왕산 동쪽 자락에 자리해
문학의 향기를 흩날리는 청운문학도서관 (청운공원)

▲  윗쪽에서 바라본 청운문학도서관

'한옥으로 지어진 도서관이 있다? 없다?'란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해야 될까? 2014년 11월 중순
까지는 '없다'로 해야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있다'로 바뀌었으니 그 정답을
바꾼 첫 현장이 바로 청운공원에 자리한 청운문학도서관이다.

윤동주문학관에서 청운공원, 인왕산자락길로 이어지는 2차선 길(자하문로35길)을 따라 3~4분
정도 가면 왼쪽(남쪽) 밑에 근래 지어진 산뜻한 한옥들이 모습을 비춘다. 처음에는 전통체험
공간으로 여겼으나 확인해보니 종로구에서 닦은 청운문학도서관이다. 콘크리트 건물이 진리를
이루고 있는 현실에서 한옥으로 도서관을 지을 생각을 하다니 그 생각이 참 기발하다. 그 발
상 덕분에 이 땅 최초의 한옥 공공도서관이란 근사하면서도 변치 않을 타이틀을 지니게 되었
다.

종로구가 '책읽는 종로만들기' 프로젝트를 야심차게 추진하면서 짜투리 공간을 활용하여 조그
만 공공도서관(일반 도서관 11곳, 문학 또는 예술로 특화된 도서관 7곳) 18곳을 지었는데 청
운문학도서관은 문학 특화 도서관으로 2014년 11월 19일에 문을 열었다.
종로구의 16번째 공공도서관으로 문학 특화 도서관이 된 것은 바로 옆에 윤동주문학관과 윤동
주시인의 언덕 등 현대 문학의 성지(聖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히 문학 특화의 목적
을 띄게 된 것이다. 그래서 종종 문학인과 명성이 있는 지식인을 초청해 문학 관련 프로그램
이나 강좌를 운영하고 있으며, 윤동주문학관과 한 덩어리를 이루며 도심 속 문향(文香)의 성
지로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이곳은 인왕산 동쪽 자락이자 청운공원 한복판으로 주변이 온통 싱그러운 자연에 감싸여 풍광
이 곱다. 그러다보니 정녕 이곳이 서울 도심 한복판이 맞는지 고개가 절로 갸우뚱거린다. 마
치 머나먼 산골로 순간이동을 당한 즐거운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변 자연과 흔쾌히 어우러진 모습과 한옥의 미를 잘 드러내고 있어 '서울의 아름다운
건물 찾기 공모전'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건물에 쓰인 기와는 돈의문(敦義門) 뉴타운 개발로
철거된 한옥 기와 중, 괜찮은 것 3,000여 장을 추려내 재활용했다.

도서관의 규모는 734.35㎡로 본관(지하 1층, 지상 1층)과 조그만 별당으로 이루어진 조촐한
모습이며, 열람석 수는 115석, 소장 서적은 21,985권(2018년 1월 1일 기준)이다. 도서관 이용
방법과 책 대출 방법 등은 다른 도서관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관련 홈페이지 참조), 10시부터
22시까지 운영을 한다. (일요일은 19시까지, 매주 월요일은 쉼)

굳이 책을 빌리거나 독서를 하지 않더라도 나들이로 잠시 들릴만하다. 주변에 청운공원과 윤
동주문학관, 윤동주시인의 언덕, 인왕산, 부암동, 창의문, 북악산, 서촌 등의 굵직한 명소가
많고 한옥으로 지어진 매력 때문에 북촌(北村)의 필수 관광지로 꼽히는 정독도서관처럼 자연
스럽게 명소처럼 되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4-20 (자하문로36길 40, ☎ 070-4680-4032~3)
* 청운문학도서관 홈페이지는 아래 '남쪽에서 도서관 본관' 사진을 클릭한다.

▲  남쪽에서 바라본 도서관 본관
본관 지하층 앞쪽에 주차장이 있다.

▲  운치를 더해주는 도서관 돌담


▲  청운문학도서관 본관

도서관 본관은 'ㄱ'자 모습의 팔작지붕 한옥이다. 겉으로 보면 1층 같지만 그 밑에 지하층을
품고 있어서 지상 1층, 지하 1층 규모를 이루고 있다. 지하는 서고(書庫), 지상은 열람실 및
교육 공간으로 쓰이며, 교육이나 강좌 프로그램이 없을 때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책을 읽으며
문향을 즐기면 된다.


▲  온갖 화초와 동물이 새겨진 도서관 담장의 위엄
이보다 우아한 도서관 담장이 또 있을까? 전통식 고급 담장에 충실하고자
다양한 화초와 동물 문양을 넉넉히 담아 넣었다.

▲  메마른 연못에 다리를 담군 1칸짜리 별당(別堂)

본관 서쪽에는 1칸짜리 별당이 자리해 있다. 별당 옆에는 연못이 있으나 내가 갔을 당시에는
물이 없는 휴업 상태였다. 만약 연못에 물이 차있고, 연꽃까지 두둥실 떠있었다면 그 운치가
몸살나게 죽여줬을 것이다.
별당은 늘 열린 공간으로 누구든 들어가서 책을 보면 된다. 가끔 명사들을 초청해 여기서 강
연이 열리기도 한다. 허나 이곳은 엄연한 도서관의 일원이기 때문에 대놓고 낮잠을 자거나 음
식을 섭취하는 행위 등은 하지 말자.


▲  탁자만 외로이 놓여진 별당 내부
여기서 책을 읽는다면 내용이 무엇이든 머릿속으로 술술 잘 들어올 것 같다.
그만큼 독서의 명당 자리이다.

▲  청운문학도서관 서쪽 출입구 (별당 옆에서 바라본 모습)

▲  붉게 타오른 단풍이 마중을 하는 청운문학도서관 서쪽 출입구
(바깥에서 바라본 모습)

▲  붉은 단풍이 진하게 아른거리는 청운공원 숲길 (인왕산자락길)
늦가을 단풍이 소리 없이 내려앉으면서 내 마음도 덩달아 알록달록 물들어간다.
(청운문학도서관 서남쪽, 인왕산자락길)

▲  늦가을의 붉은 수채화 속을 거닐다 (청운공원 인왕산자락길)

청운문학도서관 서쪽 출입구를 나오면 몸을 푸는 운동시설과 분수대가 있는 청운공원 서쪽 구
역이다. 여기서 오른쪽 산길을 오르면 인왕산자락길이 펼쳐진다. (인왕산길과도 연결됨)

청운공원은 종로구의 지붕인 인왕산 동쪽 자락에 자리를 닦은 공원으로 2007년에 인왕산 잡석
들을 모아서 만든 '인왕산에서 굴러온 바위(돌아파트)'와 2009년에 공원 동쪽을 떼서 만든 윤
동주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 등이 있다. 2014년에는 청운문학도서관까지 지어지면서 공원
을 더욱 알차게 수식해준다.
도심보다 한층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탓에 서울 도심과 남산, 부암동, 홍지동 일대가 훤
히 바라보여 조망도 일품이며,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 경계에 자리해 있어 바로 밑에 펼쳐
진 도심보다 청정한 공기를 자랑한다. 또한 서울 장안의 주요 해맞이 명소로 매년 1월 1일 아
침에 해맞이 축제가 열리며, 나무와 각종 꽃이 가득해 봄에는 벚꽃과 진달래, 개나리가 봄의
향연을 열고, 가을에는 오색영롱한 단풍잎이 가을의 향연을 베푼다.

청운공원 서쪽 구역에는 꿈의 분수라 불리는 바닥분수와 넓은 운동장이 있다. 꿈의 분수는 매
일 2회 조촐하게 분수쇼를 선보이는데, 그리 현란한 편은 아니며, 그냥 주변을 시원하게 해주
는 정도이다. 가동 기간은 4월부터 10월까지로 1차는 11시에서 13시까지, 2차는 15시부터 16
시까지이며, 겨울에는 무조건 쉰다. (가동 기간과 시간은 언제든 변경될 수 있음)
분수쇼는 전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분수와 어울려 물놀이를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러니
그냥 눈으로만 보기 바란다.

* 청운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7-4 일대


▲  꿈의 분수가 있는 청운공원 서쪽 구역, 그 너머로 서울 도심이
장대하게 펼쳐져 있다.

▲  청운공원 서쪽 구역에서 바라본 북악산(백악산)의 위엄


 

♠  인왕산자락길 이빨바위에서 해맞이동산까지

▲  인왕산 이빨바위
그저 단단해 보이는 뚜껑돌 위에도 자연은 피어나고 있었다.
 

청운공원에서 인왕산자락길로 들어서 1굽이 지나면 이빨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검은 이빨을 드
러내며 발길을 붙잡는다.
바닥에 누운 커다란 암석과 뚜껑돌처럼 놓인 암석 중간에 마치 동물의 이처럼 생긴 부분이 있
어 눈길을 끄는데 그로 인해 이빨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그는 자락길을 닦으면서 발굴
된 것으로 나도 그의 존재는 처음인데 사람의 틀니나 해골의 입처럼 보이기도 하며, 배가 고
파서인지 모르지만 햄버거처럼 보이기도 한다. 제 눈이 안경이라고 사람마다 눈에 비치는 모
습이 다 같을 수는 없다.

이처럼 잘생기거나 요상하게 생긴 바위에는 꼭 믿거나말거나 전설이 있기 마련이나 눈썰미가
좋은 옛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는지 그에게 깃든 전설은 딱히 없다. 다만 자락길을
닦으면서 초반에 종로구청에서 인왕산 치마바위와 인연이 깊은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와 중
종(中宗)의 이야기를 어거지로 지어서 당당하게 안내문까지 부착했는데, 그 내용이 실로 개판
에 똥판 수준이라 말들이 많자 그 안내문을 떼어버렸다. 대신 '건강한 치아는 오복 중의 하나
! 이빨바위를 보며 건강과 평안을 빌어보십시오'
란 조그만 돌 표석을 달았다. 차라리 엉터리
전설보다는 돌 표석 안내문이 훨씬 깊이가 있어 보인다.


▲  이빨바위 남쪽 쉼터 (운동시설이 여럿 있음)

▲  소나무 숲 사이로 바라보이는 서촌(웃대)과 서울 도심
자락길을 한 굽이 넘을 때마다 서울 도심은 조금씩 모습을 달리한다.

▲  조그만 계곡(청풍계로 여겨짐)을 건너는 나무데크 탐방로
(청운마루와 이빨바위 사이)

인왕산은 단단하게 생긴 바위 산이라 계곡과 샘터가 거의 없을 듯 싶지만 겉보기와 달리 많은
계곡과 샘터를 지닌 부드러운 산이다. 다만 서울 도심에 자리한 탓에 개발의 칼질이 계곡을
마구 끊어버리면서 눈에 보이는 것이 거의 없을 뿐이다.

인왕산 품에는 2012년에 복원된 수성동계곡을 비롯해 백운동(白雲洞), 청풍계(淸風溪), 청계
동천(淸溪洞天), 옥류동(玉流洞) 등 서울 장안의 경승지로 명성을 날렸던 계곡들이 많다. 허
나 수성동(水聲洞)을 제외하면 다들 조그만 편이며, 수성동 상류와 홍제동 환희사계곡이 그나
마 제대로 남아있다. 그 외 계곡들은 주택가 등 시가지 확장으로 모조리 강제 생매장을 당해
산 속 상류에만 여리게 물줄기가 남아있을 뿐이다. 인왕산자락길은 시내에서 모두 실종된 듯
보이는 인왕산 서촌(웃대) 방면 계곡들의 상류를 거의 만나볼 수 있는 소중한 현장으로 인왕
산을 달리 보는 계기를 선사해준다.

청운마루 직전에 이르면 넓게 닦인 나무데크 공간이 나온다. 그 밑에도 조그만 계곡이 가늘게
흐르고 있는데, 위치를 봐서는 청풍계(淸風溪) 상류로 짐작된다.
조선 중기 인물인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 청풍계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주변 풍경이 수
려해 청풍각(淸風閣)이란 별도의 건물을 지었다. 바로 그 건물로 인해 이곳 계곡이 청풍계란
간판을 달게 되었고, 청풍계와 인근 백운동의 이름을 따서 청운동이 되었다. <옛날에는 장동(
壯洞)이라 불림>

이곳 역시 주택가에 이르러서는 강제 생매장을 당해 청계천으로 흘러가며, 계곡 왕년의 모습
은 겸재 정선
(謙齋 鄭敾)이 그린 장동8경첩에 잘 남아있다.


▲  인왕산자락길의 구름다리인 가온다리

청풍계 추정 계곡을 건너 고개를 넘으면 '청운마루'라 불리는 나무로 다진 조망대가 있고, 바
로 조망대 정면(남쪽)에 인왕산자락길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가온다리가 펼쳐져 있다.
그는 일종의 흔들다리로 지방의 산이나 호수, 섬에서나 볼 수 있는 관광용 흔들다리가 이렇게
서울 도심에 버젓히 나타나 내 앞에 아른거리니 '서울에서 이제 흔들다리나 구름다리를 다 보
는구나~! 내가 너무 오래살았나?' 그저 충격과 놀라움 그 자체였다.
흔들다리의 성지인 파주 감악산(紺岳山), 원주 소금산, 청양 천장호 등 스케일이 큰 흔들다리
만은 못해도 서울에 거의 흔치 않은 흔들 구름다리로 흔들다리의 이름값은 하고 있으며, 이곳
이 깊은 협곡을 이루고 있어 눈요기도 시킬 겸, 이렇게 높이 구름다리를 닦은 것이다.

처음에는 다리 이름이 딱히 없었으나 언제부터인가 '가온다리'란 간판을 달게 되었는데, 사람
의 중량과 다리를 흥분시키는 정도에 따라 흔들리는 강도가 조금씩 다르다. 가벼운 사람이 건
너면 거의 미동 정도로 흔들리고, 무게가 좀 있거나 다리를 막 건드리면 조금은 출렁거려 사
람에 따라 염통이 쫄깃해지는 짜릿함도 느낄 수 있다.


▲  북쪽에서 바라본 가온다리

다리 저 밑에는 계곡이 흐르고 있는데, 위치를 봐서는 옥류동(玉流洞)계곡으로 여겨진다. 옥
류동에는 청휘각(晴暉閣)이란 유명한 정자가 있었는데, '청휘'란 이름은 '비가 개인 뒤에 맑
은 햇살이 비추는 누각'이란 상큼한 뜻으로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집 후원에 지었다.
이후 옥류동의 대표 명소로 이름을 날렸고, 겸재 정선이 그린 장동8경첩에 그 존재가 남겨져
있다.
그토록 아름답던 청휘각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흔적 조차 더듬기 어렵게 되었고, 옥류동
도 왕년의 위엄을 잃은 채, 인왕산 숲속에서나 겨우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
고보면 인왕산은 20세기를 거치면서 인간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상실 당했다. 게다가 서울 도
심에 자리해 있으니 그 희생의 정도는 매우 컸다.


▲  남쪽에서 바라본 가온다리

▲  가온다리 남쪽에서 바라본 청운동(淸雲洞) 지역과 북악산(백악산)
그들 너머로 북한산(삼각산) 남쪽 줄기가 살짝 모습을 비춘다.

▲  남쪽 밑 계단에서 바라본 가온다리

▲  청와대를 꿈꾸는 청와마루

가온다리를 건너 고개 1굽이를 넘으면 청와마루가 마중한다. 이곳은 청와대가 정면에 보이는
위치라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청와대와 함께 서촌(웃대)과 북악산(백악산), 서울 도
심부가 사이 좋게 시야에 들어온다.


▲  청와마루에서 바라본 서촌(웃대)과 북악산, 청와대

▲  숲 너머로 보이는 서울 도심 (청와마루 남쪽)

숲 사이로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도심이 모습을 비춘다. 인왕산자락길은 서
울을 잊게 할 정도로 싱그러운 산길이나, 번잡한 도심이 늘 옆에 머물며 감시의 눈길을 떼지
않는다. 마치 이곳이 시골이 아닌 서울 한복판임을 잊지 말라는 듯이...


▲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은행나무숲길

버드나무약수터와 청와마루 사이에는 은행나무가 조촐히 우거진 숲길이 있다. 비록 숲길의 거
리는 얼마 되지 않으나 은행잎이 황금 비단처럼 깔려 있으니 대자연 형님의 초청을 받아 잔칫
집이나 연회장에 들어서는 기분이다. 그만큼 감동의 너울은 컸다. 이곳의 아름다움은 두고두
고 망막과 가슴 속에 은은히 남아 아른거렸고 그들이 그리워 이후에도 여러 번 찾아왔다.


▲  은행잎이 깔린 은행나무숲길
땅바닥에 귀를 접고 누워있는 은행잎과 온갖 단풍잎들, 우리는 그들을
우울한 이름의 두 글자 '낙엽'이라고 부른다.

▲  은행나무숲길 (남쪽에서 바라본 모습)

▲  버드나무약수터 체육시설

은행나무 숲길에서 1굽이 지나면 버드나무약수터 체육시설이 마중을 한다. 옥인동(玉仁洞) 주
민들의 체력 단련을 위해 닦여진 것으로 늦가을 절정에 잠긴 나무들이 흩날린 누런 낙엽과 은
행잎이 바닥을 잔잔히 덮으며, 흙길의 촉감을 부드럽게 해준다.


▲  샘터의 기능을 잃은 옛 버드나무약수터

버드나무약수터는 인왕산의 유명 약수로 위엄을 떨쳤던 샘터이다. 허나 부적합 판정으로 샘터
의 기능은 끊겼고, 대신 남쪽에 새로 샘터를 파서 버드나무약수터란 간판을 달았으나 그 역시
약수의 기능을 상실해 생태연못으로 새롭게 살아가고 있다.


▲  좁은 샘터에서 유유자적 살고 있는 물고기들
저들은 무엇을 먹고 살아갈까? 좁은 샘터에 마땅한 수초도 없을텐데 말이다.

▲  늦가을도 몸을 푸는 버드나무약수터 체육시설 주변

▲  약수터의 추억을 지닌 옥인동(玉仁洞) 생물서식공간

이곳은 원래 버드나무약수터로 사진에 보이는 돌거북이 인왕산이 빚은 물을 열심히 베풀고 있
었다. 허나 세월을 너무 안좋게 타서 부적합 빨간 딱지를 받게 되었고, 끝내 딱지를 벗어나지
못하자 약수터 폐쇄 대신 여기서 나오는 물을 활용해 그 앞에 조그만 생태연못을 만들어 옥인
동 생물서식공간으로 삼았다. 그래서 조금은 어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약수터가 생태연못(생태공간)으로 거듭난 현장으로 이런 예는 천하에서 이곳이 거의 유일할
듯 싶다.


▲  버드나무약수터에서 수성동으로 이어지는 인왕산자락길

▲  해맞이동산 북쪽 인왕산자락길


 

♠  인왕산자락길 (산들수목원약수터에서 수성동까지)

▲  낙엽이 짙게 깔린 산들수목원약수터 해맞이동산

산들수목원약수터는 버드나무약수터와 수성동 사이에 자리해 있다. 약수터 이름치고는 좀 긴
편으로 단순히 이름만 봐서는 산들수목원에 깃든 약수터로 착각할 수 있으나 그런 이름의 수
목원은 여기에 없으며, 수목원 같은 시설도 전혀 없다. 어찌하여 속칭 낚시성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직까지는 수질이 양호하여 마셔도 무리는 없다.


▲  산들수목원약수터

마침 주변에 있던 아저씨들이 인왕산에서 제
일로 물맛이 좋다며 1모금 권하길래 졸고 있
는 바가지를 깨워 마셔보았다. 약수터는 수도
꼭지로 물을 통제하고 있어 물을 마시려면 꼭
지를 돌려야 된다. 그러면 물이 쏴~ 쏟아진다. 
물을 마셔보니 딱히 특별한 맛은 느껴지지 않
는 이 땅에 흔한 약수 맛이다.

약수터 주변에는 '해맞이동산' 표석이 있는데, 해맞이에 걸맞게 동쪽을 향하고 있다. 여기서
는 매년 1월 1일 해맞이행사가 열린다.


▲  산들수목원약수터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서촌, 남산,
그리고 푸른 하늘

▲  산들수목원약수터에서 수성동으로 넘어가는 인왕산자락길
늦가을 단풍이 곱게 자연산 터널을 이루며 산책의 흥을 돋군다.

▲  자연산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수성동계곡 상류

산들수목원약수터에서 자락길을 따라 고개를 넘으면 수성동계곡 상류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는 인왕산길에서 내려오는 산길과도 만나는데, 상류는 복원된 계곡 중심부와 달리 거의 자연
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자연산 바위와 온갖 잡석이 좁은 계곡을 가득 메우고 있고,
그 사이를 인왕산이 베푼 계곡물이 거의 소리도 없이 흘러간다.
이곳은 청계천의 주요 발원지이기도 하며 수질이 양호해 도룡뇽, 가재, 개구리, 버들치 등이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좁은 계곡이나 그들에게는 이만한 보금자리가 없을 것이다.

계곡 주변은 나무가 무성하여 한여름에도 더위를 잊게 하며, 산길을 따라 1분 올라가면 인왕
산길(석굴암입구)이 나오고, 반대로 2분 정도 내려가면 수성동계곡 중심부와 그를 내세운 공
원이 나온다.


▲  수성동계곡의 또다른 상류

수성동의 상류는 3개 정도 된다. 석굴암에서 오는 계곡과 그 남쪽에서 오는 계곡, 인왕천약수
터에서 오는 계곡이 서로 상류를 자처하며 수성동으로 내려온다. 수성동은 이들을 통해 인왕
산의 맑은 물을 접수받아 청계천으로 흘려보낸다.

상류 계곡들은 계곡 중심부와 달리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이 계곡 역시 바위
틈의 좁은 협곡을 타고 물이 내려온다. 수량이 많으면 폭포도 신이 나고 폭포 밑에도 많은 물
이 고여 조촐히 담(潭)을 이룰텐데, 가을 가뭄이 풍년 수준이라 간신히 물만 축이는 실정이다
. 물과 흙이 있어야 될 자리에는 잡초만 무성해 폭포의 위기감을 더해준다.


▲  협곡을 그리며 내려오는 수성동의 또 다른 상류
인왕천약수터에서 내려온 계곡


인왕산에서 제법 이름이 있는 인왕천약수터도 수성동에 물을 보태고 있었다. 이 물줄기는 거
의 90도 각도가 진 암벽 사이의 좁은 공간을 타고 내려오는데 그 풍경이 나름 절경을 이루며,
조그만 폭포 앞에는 얕은 못과 모래밭이 있어 어린이들이 흙장난을 하며 놀기에 아주 적당하
다.
모래 옆과 다리 주변에 돌로 쌓은 인공의 흔적이 조금 끼어있어 약간의 어색함을 주나 그 외
에는 예전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어 수성동 상류의 원초적 모습을 살피는데 도움을 준다.


▲  수성동 중심으로 내려가는 상류 (인왕천약수터에서 내려온 물줄기)

▲  수성동 풍경을 더욱 돋보이게 꾸며주는 사모정

수성동계곡 한복판에는 이곳의 구수한 양념인 사모정이란 네모난 정자가 자리해 있다. 사모정
이란 네모난 정자를 뜻하는 것으로 달랑 1칸 크기의 아주 조그만 팔작지붕 건물이다.
새색시처럼 단아한 모습으로 계곡을 굽어보고 있는 그는 옛날부터 이곳을 스쳐갔던 정자는 절
대 아니며 계곡을 복원하면서 장식용으로 달아놓은 것이다. 정선이 그린 수성동 그림에도 정
자는 나와있지 않고, 수성동 관련 기록에도 정자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기 때문이다. 허나 계
곡과 나무만 있는 계곡에 전통 양식의 정자(亭子)를 하나 두니 수성동의 풍경이 한층 더 살아
나는 것 같다. 그럼 여기서 수성동에 대해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  사모정 앞을 흐르는 수성동계곡 - 서울 지방기념물 31호

인왕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수성동계곡은 인왕산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서울의 주
요 경승지로 조선 후기에 편찬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와 한경지략(韓京識 略) 등에 서
울 명승지로 절찬리에 언급된 곳이다. 이 계곡을 예로부터 수성동(水聲洞)이라 불렀는데, 이
는 계곡에 있는 '기린교' 돌다리 밑에 물소리가 청아하고 좋기로 명성이 자자하여 유래된 이
름이다.

수성동계곡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유명한 겸재 정선(鄭敾)이 그린 장동팔경첩(壯洞八景
帖), 즉 장동(壯洞) 지역에 이름난 명소 8곳을 그린 그림의 '수성동'이란 제목으로 어깨를 피
고 등장한다. 여기서 장동은 효자동(孝子洞)과 청운동 일대로 북촌과 더불어 왕족과 사대부(
士大夫)들이 앞다투어 집과 별장을 지었던 금싸라기 땅이다. 특히 이 지역에는 인왕산과 북악
산이 빚은 절경이 많은데, 그중에 장동8경이 대표적이다. (지금은 수성동과 창의문, 대은암
바위글씨 정도만 남아있음)

수성동에 가장 먼저 집을 지은 귀족은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이다. 그는 계
곡 아랫쪽 기린교 부근에 비해당(匪懈堂)이란 집을 짓고 살았는데, 나중에 창의문 북쪽에 무
계정사(武溪精舍)란 별장까지 장만했다.
영조(英祖) 시절에는 겸재 정선이 인왕산을 모델로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란 그림
을 남기면서 수성동을 비롯한 장동8경을 화폭에 담았는데 수성동 그림은 계곡 복원에 아주 큰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그 그림에는 기린교를 건넌 선비 3명과 시중을 드는 동자(童子) 1명이
계곡 상류로 걸어가는 모습이 담겨져 있고, 가벼운 붓놀림으로 이끼가 끼어있는 바위와 질감
을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도 비오는 날에 이곳을 찾아 '수성동 빗
속에서 폭포를 구경하다(水聲洞 雨中觀瀑)'란 시를 지어 수성동을 격하게 찬양했다.

이 계곡은 첩첩한 산주름 속이 아닌 도성(都城) 안에 자리하여 접근성 또한 아주 착했다. 그
래서 사대부 외에도 중인과 평민들도 많이 발걸음을 했는데, 인근 송석정(宋石亭)과 더불어
조선 후기 중인층을 중심으로 한 위항문학(委巷文學, 중인/평민/서얼들이 주도하는 문학활동)
의 성지(聖地)로도 명성을 날렸다.


▲  겸재 정선이 그린 수성동 그림 (기린교 돌다리가 그려져 있음)

이렇게 인왕산을 든든한 후광으로 두르며 장안의 경승지로 인기를 누렸던 수성동은 1960년대
이후 개발의 칼질이 정신없이 그어지면서 아작나기 시작했다. 1971년 옥인시범아파트 9동이
건방지게 수성동계곡을 깔고 앉았던 것이다. 하여 참으로 아름답고 착했던 수성동의 경관은
99% 망가지고 말았다.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인근 청풍계나 옥류동처럼 계곡이 거의 증발하는 꼴은 면했지만 아파트
로 인해 계곡 폭도 줄어들고 아파트 사이를 마치 버려진 하천처럼 흘러가면서 완전 천덕꾸러
기 신세가 되어버렸다. 아파트 9동 앞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해 어두컴컴한 지하를 거쳐 역시
나 생매장된 청계천으로 서글프게 흘러가야 했으며, 수성동 뿐만 아니라 도심의 많은 경승지
들이 인간의 욕심 앞에 큰 고통을 받으며 꽃잎처럼 지고 말았다.

그 이후 수성동의 이름 3자는 속인(俗人)들의 뇌리 속에서 점차 시들어가고 동네 사람들만 세
월의 저편으로 잊혀져 가던 계곡의 이름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서울 전문을 자처하는 본인
역시 수성동의 존재를 안 것은 2011년, 그 이전에는 인왕산에 이런 곳이 있는 것도 몰랐고 그
런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존재감이 밑바닥을 기었던 것이다.
 
옥인시범아파트에 깔린 채, 40년 가까이 고통스럽게 살았던 수성동계곡. 개발의 칼질에 빼앗
긴 계곡에도 과연 봄이 올 것인가? 이러다가 수성동 이름 3자가 영구히 지워지는 것은 아닐까
?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계곡을 해방시킬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수성동에게는
절망의 시절이었다.
허나 자연과 인간의 대결에서 거의 자연이 이기듯, 수성동에게도 좋은 소식이 날라왔다. 옥인
아파트가 2008년 재난안전위험시설 C급으로 지정되면서 철거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수성동
의 가치를 뒤늦게 깨달은 서울시는 아파트를 밀어버리고 계곡을 복원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우
선 2010년 10월 21일 기린교를 비롯한 수성동계곡 일대를 서울시 지방기념물로 삼아 늦게나마
문화유산으로 대우를 해주기 시작했다.
이후 인왕산을 가리며 계곡의 목을 조르던 옥인아파트는 입주민을 싹 내보내고 2011년까지 모
두 철거되었으며, 아파트 주변을 통제하고 1년의 복원공사를 벌여 2012년 7월 마무리되었다.

계곡 복원을 위해 전문가와 사회단체, 문화재청에 자문을 구했고 정선의 수성동 그림을 적극
참조했다. 또한 옛 경관을 어느 정도 재현하고자 소나무를 중심으로 상수리나무, 참나무, 산
철쭉 등 우리 고유의 나무 18,477그루를 심었으며, (그중에 구부러진 소나무가 제일 많음) 돌
단풍과 바위취 등 다양한 화초를 심어 주변과의 조화를 꾀했다.
그리고 좁아진 계곡을 크게 넓혀서 계곡 양쪽에 전통 방식으로 돌을 쌓아 암석 지형을 최대한
회복하고자 했으며, 계곡 중간에 전통식 정자를 세워 선비와 지배층의 풍류를 조금이나마 느
끼도록 했다. 그리고 정선이 수성동 그림을 그린 곳으로 추정되는 계곡 아랫쪽(기린교 동쪽)
에 관람공간을 조성해 정선의 눈으로 계곡을 바라볼 수 있게끔 했으며, 계곡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산책로를 닦아 인왕산과 어우러진 시민공원의 성격도 겸하게 했다.

수성동계곡 공원에는 복원된 계곡을 비롯하여 이곳의 터줏대감이자 유일한 오래된 존재인 기
린교가 있으며, 옥인아파트 주민들의 요청으로 공원 북쪽에 아파트의 잔재를 일부 남겨 수성
동을 거쳐간 개발 지상주의의 그릇됨을 일깨우게 했다.
상류 부분과 사모정 주변은 계곡 출입이 그런데로 가능하나 계곡 하류와 기린교 주변은 통제
하고 있다. 게다가 계곡을 복원했다고는 하지만 완전 옛날 모습은 아니며 여전히 비슷한 자리
(옛 옥인아파트 9동 자리로 지금은 계곡 관람공간으로 바뀜)에서 지하로 생매장을 당해 청계
천으로 흘러간다.
청계천까지 이어지는 전 구간을 모두 끄집어내어 복원하면 좋겠지만 이미 시가지가 꽉 들어차
거의 불가능하다. 계곡이 생매장되는 구역은 계곡이 상당히 밑으로 내려간 상태이고, 주변 바
위들도 날카로운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어 사고의 위험이 있다. 기린교 같은 경우는 계곡이 3m
밑에 흐르고 있으므로 조금 아찔하다.

도시 개발의 칼질에 희생된 수성동은 개발의 난도질이 무조건 능사가 아님을 보여준다. 안그
래도 사람도 허벌나게 많고, 빌딩도 많고, 공기도 탁한 서울 도심에 마음 편히 의지할 수 있
는 공간이 하나 더 생겼으니 그 가치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비슷하다 할 것이다.
비록 완전하게 복원된 것은 아니나 가급적 옛 모습을 되살리고자 했고, 복원공사를 벌이는 중
에도 여러 의견을 수렴해 어색함을 최대한 줄이고자 했다. 그래서 인왕산이 베푼 옥계수를 모
아 계곡을 재현했으니 어설프게 재현되어 전기와 세금만 축내는 청계천과 달리 살아있는 계곡
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79-1, 185-3외


▲  도심을 향해 흘러가는 수성동계곡 (사모정 주변)

인왕산자락길은 수성동계곡 상류를 지나간다. 이번은 어디까지나 자락길이 중심이라 그가 지
나는 부분만 살폈을 뿐, 기린교를 비롯한 나머지는 모두 통과했다. 수성동은 이미 20번을 넘
게 가본 곳이고 자락길 종점까지 아직 갈 길이 멀기 때문에 굳이 자세히 살펴볼 필요는 없었
다.


▲  수성동에서 남쪽으로 넘어가는 인왕산자락길
내용 분량 관계로 본글은 여기서 마무리를 짓는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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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9년 11월 2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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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학의 성지이자 도심 속의 상큼한 언덕, 청운동 윤동주시인의 언덕 ~~~ (윤동주소나무, 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 서울 도심의 신선한 명소, 윤동주 시인의 언덕(청운공원) ~~~

▲  윤동주시인의 언덕 소나무


 

♠  청운공원에 마련된 새로운 명소, 문향(文香)이 깃든
윤동주(尹東柱) 시인의 언덕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정상에 세워진 서시 시비(詩碑)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서시(序詩)


서울 도심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자하문(紫霞門)고개 정상에 '윤동주시인의 언덕'이 도심
을 굽어보고 있다. 창의문(彰義門, 자하문) 남쪽에 둥지를 튼 이곳은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
늘과 가까운 공원이자 인왕산 동쪽 자락에 조성된 청운공원(淸雲公園)의 일부로 2009년 6월,
윤동주 시인을 기념하고자 공원에서 가장 높은 북쪽에 조촐하게 자리를 닦았다.
언덕의 이름이 그의 이름에 걸맞게 매우 시적(詩的)이면서도 서정적이라 가슴에 꽤 와닿는데
그 이름은 '윤동주 문학사상선양회'의 회장을 맡았던 박영우씨가 지은 것이다.

윤동주 언덕이라 하여 크게 특별한 것은 없다. 높다란 언덕에 잔디를 입히고, 소나무와 여러
키 작은 나무를 심었으며, 윤동주의 시를 머금은 비석을 여럿 세운 그저 평범한 공원이다 성
곽과 소나무 사이로 시원하게 불어오는 산바람에 속세에서 오염된 머리와 마음이 정화되며,
앞뒤로 보이는 조망(眺望)도 가히 명품이다. 게다가 공원의 분위기도 조용하고 차분하여 절로
시 한 수 읊고 싶은 마음을 솟구치게 하는 그야말로 시상(詩想)의 공간이다. <언덕의 이름도
시상을 크게 적지 않게 돋구고 있음>

이곳이 윤동주의 언덕이 된 사연은 대략 이렇다.
윤동주는 1941년 누상동(樓上洞)에 있는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연희전문대학(현 연세대) 후배
인 정병욱(鄭炳昱)과 하숙생활을 했다. 그는 하숙집에서 가까운 자하문고개와 지금의 청운공
원 일대를 수시로 찾아와 시를 짓고 구상을 했다고 하는데, '별헤는 밤'과 '서시'를 바로 이
언덕에서 지었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윤동주기념사업회에서 서울시와 종로구청의 협조를 얻
어 언덕을 조성한 것이다.

그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하고자 했는데, 그 서문(序文)으로 지어진 것이 바로 서
시로 출간까지는 하지 못하고, 3부를 필사하여 이양하(李敭河)와 정병욱에게 1부씩 증정했다.
이후 세상이 좀 진정되면서 정병욱이 보관하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세상에 공개하였다.


▲  윤동주의 초상화 - 연희전문학교 졸업사진을 초상화한 것이다.

※ 윤동주(1917~1945년)의 간략한 생애
윤동주는 왜정 때 대표적인 시인으로 그의 이름 3자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중/고
등학교 국어/문학 교과서에 서시를 비롯한 그의 굵직한 작품들이 정말 지겹게 나오니 말이다.
지금도 이름이 또렷한 윤동주는 1917년 12월, 두만강(豆滿江) 이북인 북간도(北間島) 명동촌(
明洞村)에서 윤영석()과 어머니 김룡()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대랍자()학교를 다니던 중 용정(龍井)으로 이사를 가면
서 1933년 그곳 은진()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다가 1935년 본토로 넘어와 평양 숭실(崇
實)중학교에 들어갔으나 신사참배 문제로 왜정(倭政)에 의해 강제로 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다
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光明)학원의 중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서울 연희전문학교(연세대) 문과에 진학하여 1941년에 졸업했는데, 학교 기숙사의 식사
가 부실해지면서 후배 정병욱과 누상동에 하숙집을 얻어 잠시 살다가 그해 5월 그믐날에 다른
하숙집을 알아보고자 옥인동을 기웃거리던 중, 우연히 전신주에 붙어있던 하숙집 광고 쪽지를
보았다.
그래서 혹시나해서 그 집을 찾아가니 문패에는 '김송(金松)'이라 쓰여 있었다. 마침 그는 소
설가 김송을 존경하고 있었는데, '설마 그 김송?' 생각하며 문을 두드리니 글쎄 그 김송이 나
타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김송 집에서 4개월 정도(1941년 5월~9월) 하숙을 했으며, 저녁 식사가 끝나면 김
송 가족과 대청에서 차를 마시며 음악을 즐기거나 문학 이야기를 나누었고, 때로는 성악가인
김송 부인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듣기도 했다.

김송 집에 머무는 동안 인근 자하문고개를 수시로 올라가 시를 구상했다고 하며 그 현장이 바
로 윤동주시인의 언덕이다. 또한 이때 많은 시가 쓰여졌는데, 마음을 주고 받는 후배가 곁에
있었고, 자신이 존경하는 이의 집에 머물며 그의 가족에게 호의를 받으니 마음도 즐겁고 덩달
아 작품 구상도 잘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붓과 머리가 흥분하여 좋은 시가 나오는 것은 자명
한 것이다.

1941년 9월, 김송과 작별하고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東京) 릿쿄(敎)대학 영문과에 들어갔으
며, 1942년 도시샤대학(同學) 영문과로 자리를 옮겼다. 허나 1943년 7월 학업을 멈추고
잠시 고향으로 가려다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왜경에 급히 체포되었다.
왜경은 그에게 변론의 기회도 제대로 안주고 무조건 징역 2년형을 때려 후꾸오카 형무소에 집
어넣었는데 거기서 잔인한 생체 실험의 희생자가 되어 결국 해방을 목전에 둔 1945년 2월, 회
한의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28세였다. 목격담에 따르면 그는 정체를 아리
송한 주사를 계속 강제로 맞았다고 하니, 결국 왜국의 비인간적인 만행에 천재시인 윤동주는
제대로 꽃도 피우지 못하고 강제로 눈을 감게 된 것이다.

윤동주는 조부(祖父)의 영향으로 시에 천재적인 소질을 발휘했다. 그의 동생인 윤일주(
)와 당숙인 윤영춘()도 시인이었다고 하니, 그의 집안은 문학적 소질이 다분한 지식인
집안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15살에 시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첫 작품은 '삶과 죽음'과 '초한대'이다. 이후 '병아리(
1936년 11월)','빗자루(1936년 12월)','오줌싸개 지도(1937년 1월)','무얼 먹구사나(1937년 3
월)','거짓부리(1937년 10월)' 등을 간도 연길(延吉)에서 발간된 '카톨릭소년' 잡지에 소개했
다.
연희전문대학 시절에는 조선일보에 '달을 쏘다'를 냈고, 학교 교지 '문우(文友)'에 '자화상',
'새로운 길' 등을 실었다. 그리고 '쉽게 쓰여진 시'가 1946년 경향신문에 실렸다.

누상동 김송의 집에서 하숙을 하던 1941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란 제목으로 시집을 내
려고 했으나 내지 못하고 대신 3부를 필사해 정병욱과 이양하에게 1부씩 주었다. 바로 그 시
집의 서문(序文)으로 지어진 것이 그 유명한 서시로 해방 이후 1948년에 이르러 정병욱과 윤
일주에 의해 정음사에서 출간되었다.

그의 시는 청소년 시절에 지은 시와 성년 이후의 시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청소년기에 쓰여진
시들은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고 대체로 어린 시절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
다. 대표작으로는 '겨울'과 '버선본' 등이 있다. 그리고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는 자아성
찰의 철학적 감각이 강하고, 왜정 시절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담은 시가 주류를 이루니 '서
시','자화상','또 다른 고향','별헤는 밤'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대표 시로 어둠의 시절에 깊은 우수 속에서도 티없이 순수한 인생을 살아가려는 그의 내
면 세계를 표현했다.

그는 비록 뜻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나보다 더 창창한 나이에 세상을 떴지만 그의 시는 우
리나라 뿐 아니라 왜열도와 중원대륙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적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특히 그가 다닌 릿쿄대학과 도시샤대학에는 그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어 해마다 많은 이
들이 헌화를 하고 그를 기린다.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아시아를 뛰어넘는 세계 문학계
의 큰 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윤동주가 세상을 뜨자 그의 시신을 간도 용정으로 가져와 묘를 썼다. 허나 그 무덤도 한때 위
치를 몰라 방황하다가 연길대학교에 교환교수로 온 왜인 교수의 노력으로 간신히 묘비를 찾았
다. 이후 우리나라와 중원대륙의 공산당 정부가 국교를 맺자 가족들은 봉분을 단장하고 묘비
도 새로 세웠으며, 그의 명동촌 생가는 1994년에 복원되었다. 또한 그가 다닌 명동소학교는
윤동주 관련 단체의 지원으로 옛 건물을 복원하여 윤동주기념관으로 거듭났다.

우리나라에는 굵직한 시인들이 꽤 많지만 윤동주만큼 인기와 사랑이 대단한 시인도 손에 꼽을
것이다. 우리나라를 넘어 다른 나라에서도 그의 팬들이 많으니 말이다. 비록 왜의 잔악무도한
만행으로 일찍 눈을 감게 되었지만 그의 작품을 통해 그의 혼은 우리들 마음 속에 길이길이
깃들여져 있으며,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촉촉히 적셔주는 영원한 문학신(文學神)이다.


▲  언덕 정상에 박힌 윤동주시인의 언덕 표석

윤동주시인의 언덕은 그 이름만 들어도 마음의 여유가 생길 듯한 느긋한 언덕으로 생각하기가
쉽지만 현실은 조금 가파른 언덕이다. 서울을 지키는 인왕산과 북악산(北岳山, 백악산)이 만
나는 자하문고개에 있다보니 그런 것인데, 고갯길에서 언덕 동쪽으로 오르는 길이 경사가 좀
각박하지만 지름길이며, 윤동주문학관 뒷쪽으로 오르는 길과 청운공원으로 가는 길(자하문로
35길)을 이용하는 것이 언덕의 날카로운 기세를 피하기가 좋다.


▲  늦가을 햇살 속에 한가롭게 졸고 있는 야외 공연장

푸른 잔디와 나무들이 아낌없이 수식하고 있는 언덕 정상에는 언덕의 이름을 드러낸 두툼하게
생긴 표석이 누워있고, 조그만 야외 공연장이 있다. 이곳에서는 윤동주 시 낭송회와 백일장,
문예 관련 여러 행사와 공연이 열린다.


▲  시비 앞면을 장식하는 '서시'

▲  시비 뒷면을 장식하는 '슬픈족속'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이 시는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 재학 초기에 쓴 것으로 어둠의 시절
속에서 살아가는 민족의 슬픈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흰색은 백의민족인 우리를 뜻한다고 하며,
삶과 밝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언덕 정상 남쪽에는 서시가 적힌 커다란 시비가 있는데, 대부분은 앞면만 보고 지나친다. 허
나 뒤에도 시가 숨겨져 있으니 시비의 속임수에 속지 말자. 뒤에 새겨진 시는 슬픈족속이다.


▲  늦가을도 잠시 길을 멈춘 윤동주 시인의 언덕 북쪽 산책로
<오른쪽에 보이는 건 한양도성(사적 10호)>


언덕 북쪽에는 옛 한양도성의 성곽(城郭)이 길게 둘러져 있다. 이 언덕은 성곽 안쪽으로 성곽
을 따라 길이 나 있는데 서쪽으로 인왕산과 이어지나 인왕산길로 잠깐 끊기며, 동쪽으로 자하
문과 이어지지만 문 서쪽에 언덕을 깎고 자하문로를 뚫으면서 서로가 끊겨버렸다. 그래서 윤
동주 언덕의 성곽은 양쪽이 끊어진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소나무 (윤동주 소나무)

언덕 성곽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청청한 소나무 1그루가 마치 성곽을 지키는 군사처럼 서 있
다. 나무 곁에 서면 성곽 여장 너머로 도성 밖 경승지이자 도심 속의 전원(田園)마을인 부암
동과 평창동(平倉洞)이 앞다투어 두 눈 아래 펼쳐지고 그 너머로 서울의 진산(鎭山)인 북한산
(삼각산)이 든든한 모습으로 서울을 살핀다.

이 나무는 윤동주가 시를 구상하던 곳이라고 하며, 일명 윤동주 소나무라 불리기도 한다. 흔
히 볼 수 있는 소나무지만 어둠의 시절, 민족을 향한 독야청청(獨也靑靑)한 그의 얼이 깃들여
진 듯 청초하고 고고해 보이며, 높은 곳에 우뚝 솟아 주변을 보는 모습도 예사롭지가 않아 보
인다. 정말 그가 저 나무 그늘에서 시를 구상했는지 낮잠만 잤는지는 모르겠지만 윤동주 언덕
을 상징하는 의미 깊은 나무로 나름 분주한 삶을 살고 있다.


▲  윤동주 소나무에서 바라본 천하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사이에 포근히 둥지를 튼 부암동과
홍지동(弘智洞) 일대, 그리고 저 멀리 북한산 봉우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  윤동주 소나무에서 바라본 인왕산과 인왕산길

▲  윤동주 영혼의 터

야외공연장에서 창의문 쪽으로 내려가면서 오른쪽 잔디밭을 유심히 살펴보면 땅에 박힌 표석
이 하나 눈에 달려올 것이다. 그 표석은 윤동주 영혼의 터로 서시 시비의 뒷면처럼 많이들 지
나치는데, 이곳은 간도 용정에 있는 그의 무덤에서 흙 한줌을 가져와 뿌린 곳으로 그 위에 표
석을 박았다. 즉 그의 소소한 가묘(假墓)가 되는 셈이다. 영혼의 터라고 하니 조금은 오싹한
기분도 들긴 하지만 그만큼 근사한 시적 표현이기도 하다.


▲  솔내음이 나래를 펼치는 서시정(序詩亭)

언덕 서쪽 밑에는 서시정이라 불리는 단촐한 모습의 정자가 도심을 굽어보고 있다. 2009년 언
덕을 꾸미면서 지은 것으로 윤동주의 서시를 따서 서시정이라 하였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정자로 이곳에 몸을 들여 남쪽을 보면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의 심장부가 장엄하게 펼쳐진다. (특히 야경이 멋짐)


 

♠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시민공원
청운공원(淸雲公園)

▲  가을옷을 곱게 걸친 청운공원과 공원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서촌(웃대)의 북쪽 끝이자 인왕산 자락에 자리한 청운공원은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
은 공원이다. <산 전체 또는 대부분이 공원으로 지정된 남산과 안산(鞍山), 낙산공원은 제외>
윤동주시인의 언덕이란 새로운 꿀단지를 동쪽에 달고 있는 이곳은 인왕산 동쪽 자락으로 청운
동 주택가와도 약간 거리를 둔 자연 지대이다. 인왕산길이 공원의 북쪽과 서쪽을 지나가며 자
하문고개에서 북악산길로 간판을 갈고 북악산 뒷쪽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공원을 가로지르는
골목길(자하문로35길)은 윤동주문학관에서 공원을 지나 청운동 주택가를 거쳐 자하문로로 내
려간다.

청운공원은 평범한 시민공원으로 산자락에 조성된 것 외에는 딱히 볼거리는 없었다. 그러다가
2007년에 인왕산 돌을 모아 일종의 돌아파트를 지었고, 2009년 이후 공원 동쪽에 윤동주시인
의 언덕과 윤동주문학관이 들어서면서 예전보다 인기가 늘어졌다. 윤동주언덕도 엄연히 청운
공원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공원이 산자락에 있기 때문에 서울 도심과 부암동, 홍지동 일대가 훤히 바라보여 조망도 그런
데로 일품이며, 북악산과 인왕산의 청정한 기운이 늘 깃들여져 있어 공기도 맑다. 게다가 서
울 장안의 주요 해맞이 성지(聖地)로 매년 1월 1일에 해맞이 축제가 열리며, 나무와 각종 꽃
들이 울창하여 봄에는 벚꽃과 진달래, 개나리가 봄의 향연을 열고, 가을에는 오색영롱한 단풍
잎이 늦가을의 향연을 베푸는 도심 속 경승지이다.

청운공원에 가려면 자하문고개(교통편은 아래 윤동주문학관 참조)에서 접근하는 것이 가장 좋으며, 자하문터널 남쪽에서 자하문로35길을 따라 올라가는 길도 있는데, 그건 경사가 좀 각박
하다. 그리고 청운동 안쪽에 자리한 유진인재개발원 정문 못미쳐에 청운공원으로 오르는 산길
이 가늘게 이어져 있고, 사직공원과 수성동(水聲洞)계곡에서 인왕산길을 타고 접근하는 것도
괜찮다. 


▲  청운공원에서 바라본 북악산(백악산)의 위엄

늦가을 단풍이 한참 절정을 이루던 때라 진한 붉은색과 노란색, 녹색 등으로 단단히 물들었다. 겨울 제국(帝國)의 시련을 목전에 두고 자신의 남은 끼와 기력을 모두 발산하는 나무들과 죽
음 앞에서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무지개처럼 짧은 삶을 원망하는 나뭇잎들.. 인간은 그
들을 보며 늦가을의 정취를 즐기면서도 '올해도 이제 저물었구나, 좀 있으면 강제로 1살을 더
먹네' 늦가을과 연말 우울증에 한숨을 쉰다.


▲  청운공원 서부 (오른쪽에 보이는 동그란 존재가 '꿈의 분수')

▲  청운공원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그리고 일몰 직전의 하늘

청운공원 서쪽에는 꿈의 분수라 불리는 바닥분수와 넓은 운동장이 있다. 꿈의 분수는 매일 2
번 정도 조촐하게 분수쇼를 선보이는데, 그리 현란한 편은 아니며, 그냥 주변을 시원하게 해
주는 정도이다. 가동기간은 4월부터 10월까지로 1차는 11시에서 13시까지, 2차는 15시부터 16
시까지이며, 겨울에는 무조건 쉰다. (가동 시간은 변경될 수 있음)
분수쇼는 전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분수와 어울려 물놀이를 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그러
니 그냥 눈으로만 보기 바란다.


▲  윤동주 시인의 언덕 남쪽에 자리한 인왕산 호랑이상

천하 호랑이의 대명사이자 하늘 아래 제일 무서운 존재였던 인왕산 호랑이, 이제는 숱한 설화
만을 남긴 채, 우리들 뇌리에서 거의 잊혀지고 말았다.
그들을 그리며 만들었다는 인왕산 호랑이상, 어린이들이 울고 갈 정도로 매섭게 좀 만들 것이
지 너무 순둥이처럼 만들어 졸지에 호랑이 탈을 쓴 인왕산 고양이상이 되어버렸다. 곶감도 씹
어먹었다는 천하 제일의 인왕산 호랑이인데 그들을 제대로 모욕한 셈이다.


▲  인왕산 돌로 만든 '인왕산에서 굴러온 바위(인왕산 돌아파트)'

서시정에서 윤동주문학관으로 내려가면 돌의 거대한 보금자리를 만나게 된다. 이것은 2007년
서울시에서 추진한 '서울 도시갤러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조성된 것으로 인왕산과 그 주변
에서 주운 돌들을 정리하여 그들의 조촐한 아파트로 만들었다. 


 

♠  윤동주 언덕 밑에 자리한 윤동주문학관

▲  화려한 나비를 꿈꾸는 윤동주 문학전시관(윤동주문학관)

윤동주시인의 언덕 밑이자 자하문고개 정류장 부근에 시인 윤동주를 집대성한 '윤동주문학관'
이 심플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이곳에는 원래 청운동 수도가압장 건물이 있었는데 빈 채로 버려져 있던 것을 2009년 윤동주
의 언덕을 만들면서 우선 급한데로 문학관으로 손질하여 정신적 영혼의 가압장이 되었다. 속
은 문학관일지 몰라도 겉은 문학과는 담을 쌓은 우울한 모습이었는데,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에서 서울시와 종로구청의 지원을 받아 오랜 번데기 생활 끝에 2012년 7월 25일 지금의 모습
으로 화려하게 태어났다.

내가 이곳을 처음 찾은 것은 2011년 3월로 그해 연말까지 여러 번 발걸음을 했는데, 당시 내
부는 좀 어수선했다. 공개시간이 있긴 하지만 평일에는 일찌감치 문을 닫는 경우가 많았으며,
처음에는 정문 옆에 조그만 문으로 입장을 해야 했다. 그런 공간이 이제는 윤동주를 닮은 세
련된 문학적 공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번데기를 탈피한 이 문학관은 2012년 대한민국 공공건축 부분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았으며 우
리나라 현대건축 Best 20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화려하다 못해 눈부신 나비로 태어난
셈이다. (2014년 서울시 건축상 대상을 받았고, 2015년에는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됨)

문학관은 3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있는데, 제1전시실(시인채)에는 윤동주의 손때가 진하게 담
긴 친필 원고와 온갖 문서와 서적들, 사진, 윤동주 모교의 의자와 등사기(謄寫機), 떡판 등
그의 유품 133점이 전시되어 있고, 제2전시실(열린우물)은 옛 가압장의 물탱크 윗부분을 개방
하여 중정(中庭)으로 만들어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공간으로 삼았다. 그리고 제3전시실(닫힌
우물)은 물탱크를 원형대로 보존하면서 그 안에 윤동주의 생애와 문학 세계를 담은 동영상을
상영한다. 그 외에 '별뜨락'이란 쉼터를 만들어 서울 도심을 굽어볼 수 있게 했다.

문학관에 진열된 윤동주의 유품 가운데 주목을 끄는 존재가 하나 있는데, 그건 그의 생가에서
가져온 나무 우물이다. 우물의 목판은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회장인 박영우씨가 직접 간도 용
정에서 가져온 것으로 땅을 깊게 파고 그 우물을 보호하고자 나무 판을 4단으로 얹힌 점이 특
징이며, 이곳에 안착한 우물은 이제 우물 기능은 상실되고 무늬만 남은 늙은 우물이 되었다.
전시관 안이다보니 깊게 땅을 뚫을 수도 없고, 마땅한 수맥도 없기 때문이다.


▲  윤동주문학관에 진열된 그의 유품과 초상화들 (2012년 이전)

▲  윤동주의 모교에서 가져온 조그만 의자 (2012년 이전)

요즘 초등학교에서 저런 나무 의자를 쓸까? 내 초등학교 시절(1~3학년)까지만 해도 저거와 똑
같은 의자에 앉았는데, 기억도 흐릿한 그 시절의 추억을 잠시나마 소환해준 정겨운 의자이다.


▲  윤동주의 마지막 사진

윤동주가 교토 도시샤대학에 재학하던 시절, 학교 친구들과 우지강<우지천(宇治川), 요도가와
강> 강변으로 마실을 나가 찍은 사진이다. 이때 왜인 친구들이 노래를 불러달라고 청하자 그
는 아리랑을 우수에 찬 모습으로 불렀다고 한다.
허나 그때까지만 해도 윤동주나 그의 친구들이나 그것이 마지막 사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
다. 얼마 뒤 그는 왜경에 끌려가 후꾸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으로 비온 뒤 잠깐 모습을 드
러낸 무지개처럼 짧은 인생을 마감했으니 말이다.
그가 불의의 죽음을 당하자 그의 친구들은 크게 통곡하며 그를 애도했다.


▲  윤동주 생가에서 수습해온 나무 우물
우물 위에 두룬 나무판을 가져와 복원한 것이다. 대략 100년 정도 묵었다고 하며.
고된 세월의 때가 가득 입혀져 중후한 멋을 풍긴다.
 

※ 윤동주시인의 언덕(청운공원) 찾아가기 (2018년 11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자하문고개(윤
  동주 문학관)에서 하차, 길 건너편에 윤동주문학관과 언덕이 있다.
*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에서 1020, 7212번 시내버스 이용

★ 윤동주문학관 관람정보 (2018년 11월 기준)
* 문학관 관람시간 : 10시 ~ 18시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 추석은 쉼)
* 윤동주 시인의 언덕은 관람시간 제한이 없는 열린 공간이다.
* 입장료 없음. 문학관 해설사 운영
* 매년 5월에 윤동주문화제가 열린다. (시낭송회와 백일장, 윤동주상 시상식, 문학콘서트, 문
  학둘레길 걷기대회 등의 행사가 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3-100 (창의문로 119 ☎ 02-2148-4175)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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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8년 11월 9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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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조망이 일품인 서울 도심의 상큼한 명소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 서울 도심의 신선한 명소, 윤동주 시인의 언덕 '
(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윤동주시인의 언덕 소나무


♠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에 터를 닦은 서울의 새로운 명승지
문향(文香)이 가득 깃들여진 '윤동주(尹東柱) 시인의 언덕'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정상에 심어진 서시 비석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서시(序詩)


서울 도심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자하문(紫霞門)고개 정상에 윤동주시인의 언덕이 도심을 굽
어보고 있다. 옛 한양도성(漢陽都城)의 성문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 서쪽에 둥지를 튼 이곳
은 인왕산 동쪽 자락에 조성된 청운공원의 일부로 2009년 6월, 천하의 큰 시인 윤동주를 기리고
자 공원에서 가장 높은 곳인 북동쪽에 자리를 닦고 그의 이름을 따서 '윤동주시인의 언덕'(이하
윤동주 언덕)이라 하였다.
언덕 이름이 그의 이름에 걸맞게도 무척 시적(詩的)이면서도 서정적인데, 그 이름은 지금의 윤
동주 언덕을 있게 한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의 회장 박영우씨가 지은 것이다.

하늘과 맞닿은 윤동주 언덕은 천하에서 가장 큰 윤동주의 유적 겸 기념지이자 38선 이남에서 거
의 유일한 윤동주 기념터로 그의 시를 머금은 비석과 그의 혼이 깃든 영혼의 터, 그를 집대성한
윤동주문학관이 있으며, 야외공연장과 정자(서시정), 벤치 등도 갖추었다. 언덕 좌우는 북악산(
北岳山)과 인왕산(仁王山)으로 막혀있지만, 대신 남북으로 뻥 뚫린 형태로 북악산과 인왕산, 북
한산(삼각산)의 산바람이 모여들며, 앞뒤로 바라보이는 조망(眺望)은 가히 천하 명품급이다. <
특히 도심 야경이 갑(甲)> 게다가 공원의 분위기도 조용하고 차분하여 시 한 수 절로 생각나게
하니 그야말로 시상(詩想)의 공간이다. <언덕의 이름도 제법 시상을 돋군다>

그럼 어째서 이곳이 윤동주의 언덕이 되었을까?
윤동주는 이곳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살지도 않았다. 다만 1941년 누상동(樓上洞)에 있던 소설
가 김송의 집에서 연희전문대학(현 연세대) 후배인 정병욱(鄭炳昱)과 하숙 생활을 했는데, 이때
하숙집에서 가까운 자하문고개와 청운공원을 수시로 찾아와 시를 구상했다고 하며, '별헤는 밤
'과 '서시'를 바로 이 언덕에서 지었다고 한다.
바로 그 인연으로 윤동주기념사업회에서 서울시청과 종로구청의 협조를 얻어 그의 언덕을 닦게
된 것이다.

그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하고자 했는데, 그 서문(序文)으로 지어진 것이 바로 서시
이다. 허나 출간은 하지 못하고, 3부를 필사하여 이양하(李敭河)와 정병욱에게 1부씩 증정했으
며, 해방 이후 정병욱이 보관하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세상에 공개하였다.


▲  윤동주 형님의 초상화 - 연희전문학교 졸업사진을 초상화한 것이다.

※ 윤동주(1917~1945년)의 간략한 생애
윤동주는 왜정 시절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그의 이름 석자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중/
고등학교 국어/문학 교과서에 서시를 비롯한 그의 굵직한 작품들이 정말 지겹게 나오니 말이다.
숙성이 덜 되던 학창 시절, 나는 시를 싫어했다. 무조건 외우면 장땡인 암기 위주의 잘못된 교
육의 폐해 탓일 것이다. 그런 일그러진 교육과 나의 굳건한 돌머리 앞에서 시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고, 국어/문학 선생이 무조건 가르친 내용대로 외워야 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20세기에 활약했던 윤동주나 김영랑(金永郞), 이육사(李陸史) 등의 유명
문학가들의 이름과 그들의 작품을 보면 정말 이가 갈리곤 했다.
허나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흐르고 나이도 강제로 더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시에 대한 관심이 커지
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시의 내용도 조금씩 이해를 하게 되었고 김광섭(金珖燮)의 '성북동비둘
기'란 시가 무척 땡겨 그 시가 태어난 성북동 성락원(城樂苑, 명승 35호)에 걸터앉아 그 시를
읊고 싶은 생각까지 했었다. (성락원 비공개로 아직까지 실현하지 못했음) 비록 머리가 돌 수준
이라 시를 완벽히 외우지는 못하지만 즐겨찾는 관심사의 하나가 된 것은 분명하다.

학창 시절 그렇게나 나를 괴롭혔던 윤동주는 1917년 12월, 두만강(豆滿江) 이북인 북간도(北間
島) 명동촌(明洞村)에서 윤영석()과 어머니 김룡()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대랍자()학교를 다니다가 용정(龍井)으로 이사가면서 1933
년 그곳 은진()중학교에 들어갔다.

1935년 조선 본토로 넘어와 평양 숭실(崇實)중학교로 학교를 옮겼으나 신사참배 문제로 왜정(倭
政)에 의해 강제로 학교가 문을 닫았다. 그래서 다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光明)학원의 중학부
를 졸업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서울 연희전문학교(연세대) 문과에 진학하여 1941년에 졸업했다.
그때 누상동 김송의 집에서 정병욱과 하숙생활을 했었다.
학문의 열기가 뜨거웠던 그는 그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東京) 릿쿄(敎)
대학 영문과에 들어갔으며, 1942년 도시샤대학(同學) 영문과로 옮겼다.

1943년 7월 학업을 멈추고 잠시 고향에 가려고 했으나 독립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왜경에 체포되
었다. 왜경은 그에게 변론의 기회도 제대로 주지 않고 징역 2년형을 때려 후꾸오카 형무소에 집
어넣었는데 거기서 잔인한 생체실험의 희생자가 되어 결국 해방을 목전에 둔 1945년 2월,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28세였다. 목격담에 의하면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
를 계속 강제로 맞았다고 하니, 결국 왜국의 비인간적인 만행에 천재시인 윤동주는 제대로 꽃도
피우지 못하고 강제로 눈을 감게 된 것이다.

윤동주는 그의 조부(祖父)의 영향으로 시에 천재적인 소질을 발휘했다. 그의 동생인 윤일주(
)와 당숙인 윤영춘()도 시인이었다고 하니, 그의 집안은 문학적 소질이 다분한 지식
인 집안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15살에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첫 작품은 '삶과 죽음'과 '초한대'이다. 이후 '병아리(1936
년 11월)','빗자루(1936년 12월)''오줌싸개 지도(1937년 1월),'무얼 먹구사나(1937년 3월)','거
짓부리(1937년 10월)' 등을 간도 연길(延吉)에서 발간된 '카톨릭소년'이란 잡지에 소개했다.
연희전문대학 시절에는 조선일보에 '달을 쏘다'를 냈고, 학교 교지 '문우(文友)'에 '자화상','
새로운 길'등이 실렸다. 그리고 '쉽게 쓰여진 시'가 1946년 경향신문에 실렸다.
앞서에서 언급했던 누상동 하숙 시절,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란 제목으로 시집을 내려고 했으나 내지 못했다. 그때 그가 남긴 시들은 정병욱과 윤일주에 의
해 1948년 정음사에서 출간되었다.

그의 시는 청소년 시절에 지은 시와 성년 이후의 시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청소년기에 쓰여진 시
들은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고 대체로 어린 시절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다.
대표작으로는 '겨울'과 '버선본' 등이 있다. 그리고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는 자아성찰의
철학적 감각이 강하고, 왜정 시절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담은 시가 주류를 이루니 '서시','자
화상','또 다른 고향','별헤는 밤'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대
표 시로 어둠의 시절에 깊은 우수 속에서도 티없이 순수한 인생을 살아가려는 그의 내면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그는 비록 뜻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나보다 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지만 그의 시는 우리나
라 뿐 아니라 왜열도와 중원대륙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적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특히
그가 다닌 왜열도의 릿쿄대학과 도시샤대학에는 그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어 해마다 많은
이들이 헌화를 하고 그를 기린다.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아시아를 뛰어넘는 세계 문학계
의 큰 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윤동주가 세상을 뜨자 그의 시신을 간도 용정으로 옮겨 묘를 썼다. 허나 그 무덤도 한때 위치를
몰라 가족들이 방황하다가 연길대학교에 교환교수로 온 왜인 교수의 노력으로 간신히 묘비를 찾
았다. 이후 우리나라와 중원대륙의 공산당 정부가 국교를 맺자 가족들은 봉분을 단장하고 묘비
도 새로 세웠으며, 그의 명동촌 생가는 1994년에 복원되었다. 또한 그가 다닌 명동소학교는 윤
동주 관련 단체의 지원으로 옛 건물을 복원하여 윤동주기념관으로 거듭났다.

우리나라에 참으로 굵직한 시인들이 많지만 윤동주만큼 인기와 사랑이 큰 시인도 손에 꼽을 것
이다. 우리나라를 넘어 다른 나라에서도 그의 팬들이 많으니 말이다. 비록 왜의 잔악무도한 만
행으로 일찍 눈을 감게 되었지만 그의 작품을 통해 그의 혼은 우리들 마음 속에 길이길이 깃들
여져 있으며,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촉촉히 적셔주는 영원한 문학신(文學神)이다.


▲  인왕산길 바로 옆에 자리한 윤동주시인의 언덕

서울의 새로운 꿀명소이자 문학의 성지(聖地)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윤동주시인의 언덕은 그 이
름만 들어도 마음의 여유가 생길 듯한 느긋한 언덕으로 생각하기 쉽다. 허나 현실은 세상처럼
가파른 언덕이다. 인왕산과 북악산이 만나는 자하문고개에 있다보니 그런 것인데, 고갯길에서
언덕 동쪽으로 오르는 길이 경사가 좀 각박하지만 지름길이며, 윤동주문학관 뒷쪽으로 오르는
길도 있다. 언덕의 날카로운 기세를 좀 피하고 싶다면 청운공원으로 가는 길(자하문로35길)을
이용하여 서시정으로 조금 우회하는 것도 괜찮다.


▲  늦여름 햇살 속에 한가롭게 졸고 있는 야외 공연장

푸른 잔디와 키 작은 나무들이 아낌없이 수식하고 있는 언덕 정상에는 언덕의 이름을 밝힌 두툼
하게 생긴 표석과 야외 공연장이 있다. 공연장에서는 윤동주 시 낭송회와 백일장, 문예 관련 여
러 행사와 공연이 열린다.


▲  언덕 정상에 박힌 윤동주시인의 언덕 간판 표석

▲  시비 앞면을 장식하는 '서시'

▲  시비 뒷면을 장식하는 '슬픈족속'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이 시는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 재학 초기에 쓴 것으로
어둠의 시절 속에서 살아가는 민족의 슬픈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흰색은 조선 민중과
삶, 밝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언덕 정상 남쪽에는 서시가 적힌 커다란 시비(詩碑)가 있는데, 대부분은 앞면만 보고 지나친다.
허나 뒤에도 시가 숨겨져 있으니 시비의 속임수에 속지 말자. 뒤에 새겨진 시는 슬픈족속이다.


▲  윤동주 시인의 언덕 북쪽을 장식하는 한양도성 성곽길 (사적 10호)

언덕 북쪽에는 옛 한양도성의 성곽(城郭)이 길게 둘러져 있다. 이 언덕은 성곽 안쪽으로 성곽을
따라 길이 나 있는데, 서쪽으로 인왕산과 이어지나 인왕산길로 잠깐 끊기며, 동쪽으로 자하문과
이어지지만 문 서쪽에 언덕을 깎고 창의문로를 뚫으면서 서로가 끊겨버렸다. 그래서 윤동주 언
덕의 성곽은 양쪽이 강제로 끊긴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소나무 (윤동주 소나무)

언덕 성곽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청청한 소나무 1그루가 마치 성곽을 지키는 군사처럼 서 있다.
나무 곁에 서면 성곽 여장 너머로 도성 밖 경승지이자 도심 속의 전원(田園) 마을인 부암동(付
岩洞)과 평창동(平倉洞)이 앞다투어 두 눈 밑에 펼쳐지고 그 너머로 서울의 진산(鎭山)인 북한
산(삼각산)이 든든한 모습으로 서울을 살핀다.

이 소나무는 윤동주가 시를 구상하던 곳이라 하여 일명 윤동주 소나무라 불린다. 흔히 이 땅에
서 볼 수 있는 소나무이지만 어둠의 시절, 독야청청(獨也靑靑)한 그의 얼이 깃들여진 듯 청초하
고 고고해 보이며, 높은 곳에 우뚝 솟아 주변을 보는 모습도 예사롭지가 않아 보인다. 정말 그
가 저 나무 그늘에서 시를 구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윤동주 언덕을 상징하는 의미 깊은 나무로
나름 분주한 삶을 살고 있다.


▲  윤동주 소나무에서 바라본 천하
인왕산과 북악산, 북한산(삼각산) 사이에 포근히 둥지를 튼 부암동과 홍지동(弘智洞)을
비롯하여 북한산 남쪽 봉우리들도 바라보인다.

▲  윤동주 영혼의 터

야외공연장에서 자하문 쪽으로 내려가면서 오른쪽 잔디밭을 유심히 살펴보면 땅에 박힌 표석 하
나가 눈에 달려올 것이다. 그 표석은 윤동주 영혼의 터로 서시 시비의 뒷면처럼 많이들 지나치
는데, 이곳은 간도 용정에 있는 그의 무덤에서 흙 한줌을 가져와 뿌린 것으로 그 위에 표석을
박았다. 즉 그의 소소한 가묘(假墓)가 되는 셈이다. 영혼의 터라고 하니 조금은 오싹한 기분도
들긴 하지만 그만큼 근사한 시적 표현이기도 하다.


▲  솔내음이 나래를 펼치는 서시정(序詩亭)

언덕 서쪽 밑에는 서시정이라 불리는 단촐한 모습의 정자가 도심을 굽어보고 있다. 2009년 언덕
을 꾸미면서 지은 것으로 윤동주의 대표작인 서시를 따서 서시정이라 하였다. 정면 1칸, 측면 1
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정자로 이곳에 몸을 들여 남쪽을 보면 천하 제일의 도시로 콧대가 이만
저만이 아닌 서울의 심장부가 두 눈 밑에 그림처럼 펼쳐진다. (특히 야경이 멋짐)


♠  서촌의 지붕이자 윤동주 언덕을 옆구리에 낀 시민공원
청운공원(淸雲公園)

▲  가을옷을 곱게 걸친 청운공원과 공원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서촌의 북쪽 끝이자 인왕산 자락 동북쪽에 청운공원이 넓게 자리를 닦았다. 이곳은 청운동 주택
가와도 제법 거리를 둔 자연 지대로 윤동주시인의 언덕이란 신선한 꿀단지를 옆구리에 품고 있
다. 인왕산길이 공원의 북쪽과 서쪽을 지나가며, 이 길은 자하문고개에서 북악산길로 간판을 바
꾸고 북악산 뒷쪽을 통해 성북구로 달려간다. 그리고 공원을 가로지르는 골목길(자하문로35길)
은 윤동주문학관에서 공원을 지나 청운동 주택가를 거쳐 자하문로로 내려간다.

청운공원은 인왕산 품에 조성된 시민공원으로 산자락에 조성된 것 외에는 딱히 볼거리는 없었다.
그러다가 2007년에 인왕산 돌을 모아 일종의 돌아파트를 지었고, 2009년 이후 공원 동쪽에 윤동
주시인의 언덕과 윤동주문학관이 자리를 닦으면서 예전보다 더 값비싼 존재가 되었다.
공원이 산자락에 있기 때문에 서울 도심과 부암동, 홍지동 일대가 훤히 바라보여 조망도 일품이
며, 북악산과 인왕산의 청정한 기운이 늘 깃들여져 있어 공기도 맑다. 게다가 서울 장안의 주요
해맞이 성지(聖地)로 매년 1월 1일에 해맞이 축제가 열리며, 나무와 각종 꽃들이 울창하여 봄에
는 벚꽃과 진달래, 개나리가 봄의 향연을 열고, 가을에는 오색영롱한 단풍잎이 가을의 향연을
베푸는 도심 속의 경승지이다.

청운공원에 가려면 자하문고개에서 접근하는 것이 가장 좋으며, 자하문터널 남쪽에서 자하문로
35길을 따라 올라가는 방법도 있는데, 그건 경사가 제법 각박하다. 그리고 청운동 안쪽에 자리
한 유진인재개발원 정문 직전에 청운공원으로 오르는 산길이 가늘게 이어져 있고, 사직공원과
수성동(水聲洞)계곡에서 인왕산길을 타고 접근하는 것도 괜찮다.


▲  청운공원에서 바라본 북악산(백악산)의 위엄

늦가을 단풍이 한참 절정을 이루던 때(11월 초)라 나무들이 진한 붉은색과 노란색, 녹색 등으로
단단히 물들었다. 겨울 제국(帝國)의 시련을 목전에 두고 자신의 남은 기력을 모두 발산하는 나
무들.. 죽음 앞에서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무지개처럼 짧은 삶을 원망하는 나뭇잎들.. 인
간은 그들을 보며 늦가을의 정취를 즐기면서도 '올해도 이제 저물었구나, 좀 있으면 강제로 1살
을 더 먹네' 늦가을과 연말 우울증에 부질없는 한숨을 쉰다.


▲  청운공원 서부 (꿈의 분수 주변)

▲  청운공원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그리고 일몰 직전의 하늘

▲  공원 서부에 자리한 청운공원 꿈의 분수

청운공원 서쪽에는 꿈의 분수라 불리는 바닥분수와 넓은 운동장이 있다. 꿈의 분수는 매일 2번
씩 조촐하게 분수쇼를 선보이는데, 그리 현란한 편은 아니며, 그냥 주변을 시원하게 해주는 정
도이다. 가동기간은 4월부터 10월까지로 1차는 11시에서 13시까지, 2차는 15시부터 16시까지이
며, 겨울에는 무조건 쉰다.
분수쇼는 전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분수와 어울려 물놀이를 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그러니
그냥 눈으로만 보기 바란다.


▲  고양이 같은 인왕산 호랑이상

천하 호랑이의 대명사이자 하늘 아래 제일 무서운 존재였던 인왕산 호랑이, 이제는 숱한 설화만
을 남긴 채, 우리들 뇌리에서 거의 잊혀지고 말았다.
그들을 그리며 만들었다는 인왕산 호랑이상, 어린이들이 울고 갈 정도로 매섭게 좀 만들 것이지
순둥이 비슷하게 만들면서 졸지에 호랑이 탈을 쓴 인왕산 고양이상이 되어버렸다. 곶감도 우습
게 봤다는 천하 제일의 인왕산 호랑이를 제대로 모욕한 셈이다.


▲  인왕산 돌로 만든 '인왕산에서 굴러온 바위'

서시정에서 윤동주문학관으로 내려가면 돌의 거대한 보금자리를 만나게 된다. 이것은 2007년 서
울시에서 추진한 '서울 도시갤러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조성된 것으로 인왕산과 그 주변에서
주운 돌을 정리하여 그들의 조촐한 아파트로 만들었다.


♠  윤동주 언덕 밑에 마련된 윤동주문학관

윤동주시인의 언덕 밑이자 자하문고개 정류장 부근에 시인 윤동주를 집대성한 '윤동주문학관'이
심플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이곳에는 원래 청운동 수도가압장 건물이 있었는데, 빈 채로 버려져 있던 것을 2009년 윤동주의
언덕을 만들면서 우선 급한데로 손질해 문학관으로 삼으면서 우리네 정신적 영혼의 가압장이 되
었다. 속은 문학관일지 몰라도 겉은 문학과는 담을 쌓은 우울한 모습이었는데, 윤동주문학사상
선양회에서 서울시청과 종로구청의 지원을 받아 오랜 번데기 생활 끝에 2012년 7월 25일 지금의
모습으로 화려하게 태어났다.

내가 이곳을 처음 찾은 것은 2011년 3월로 그해 연말까지 여러 번 발걸음을 했는데, 당시 내부
는 좀 어수선했다. 공개시간이 있긴 하지만 평일에는 일찌감치 문을 걸어잠군 경우가 많았으며,
처음에는 정문 옆에 난 조그만 문으로 입장을 해야 했다. 그런 공간이 이제는 윤동주를 닮은 세
련된 문학적 공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번데기를 탈피한 이 문학관은 2012년 대한민국 공공건축 부분에서 무려 국무총리상을 받았으며,
우리나라 현대건축 Best 20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화려하다 못해 눈부신 나비로 태어난
셈이다.

문학관은 3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있는데, 제1전시실(시인채)에는 윤동주의 손때가 담긴 친필
원고와 온갖 문서와 서적들, 사진, 윤동주 모교의 의자와 등사기(謄寫機), 떡판 등 그의 유품
133점이 전시되어 있고, 제2전시실(열린우물)은 옛 가압장의 물탱크 윗부분을 개방해 중정(中庭
)으로 꾸미면서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공간으로 삼았다. 그리고 제3전시실(닫힌우물)은 물탱크
를 원형대로 보존하면서 그 안에 윤동주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담은 동영상을 상영한다. 그외에
'별뜨락'이란 쉼터를 만들어 서울 도심을 굽어볼 수 있게 했다.

문학관에 진열된 윤동주의 유품 가운데 그의 생가에서 가져온 나무 우물이 있다. 우물의 목판은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회장인 박영우씨가 직접 간도 용정에서 가져온 것으로 땅을 깊게 파고 그
우물을 보호하고자 나무 판을 4단으로 얹힌 점이 특징이다. 허나 이곳에 안착하면서 우물의 기
능은 상실되고 무늬만 남은 늙은 우물이 되었다. 전시관 안이다보니 깊게 땅을 뚫을 수도 없고,
더군다나 마땅한 수맥도 없기 때문이다.


▲  번데기 속을 헤매던 윤동주문학관 예전 모습 (2011년)

▲  윤동주문학관에 진열된 그의 유품과 초상화들

▲  윤동주 모교에서 가져온 조그만 의자
내 초등학교 시절(1~3학년)까지만 해도 저거와 똑같은 의자에 앉았는데,
기억도 흐릿한 그 시절의 추억을 잠시나마 소환해준 정겨운 의자이다.

▲  윤동주의 마지막 사진

윤동주가 교토 도시샤대학에 재학하던 시절, 학교 친구들과 우지강<우지천(宇治川), 요도가와강
> 강변으로 마실을 나가 찍은 사진이다. 이때 왜인 친구들이 노래를 불러달라고 청하자 그는 아
리랑을 우수에 찬 모습으로 불렀다고 한다. 허나 그때까지만 해도 윤동주나 그의 친구들이나 그
것이 마지막 사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얼마 뒤 그는 왜경에 끌려가 후꾸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으로 비온 뒤 잠깐 모습을 드러낸 무지개처럼 짧은 인생을 마감했으니 말이다.
그가 불의의 죽음을 당하자 그의 친구들은 크게 통곡하며 그를 애도했다.


▲  윤동주 생가에서 수습해온 나무 우물
우물 위에 두른 나무판을 가져와 복원한 것이다. 대략 100년 정도 묵었다고 하며.
고된 세월의 때가 가득하여 중후한 멋을 풍긴다.


※ 윤동주시인의 언덕(청운공원) 찾아가기 (2014년 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자하문고개(윤동
  주문학관) 하차, 길 건너편에 윤동주문학관과 언덕이 있다.
* 지하철 1호선 종각역(1번 출구)과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에서 1020, 7212번 시내버스 이용

★ 윤동주시인의 언덕(청운공원) 관람정보 (2014년 4월 기준)
* 문학관 관람시간 : 10시 ~ 18시 (매주 월요일, 1월 1일, 추석과 설날 연휴는 쉼)
* 윤동주 언덕과 청운공원은 관람시간 제한이 없는 열린 공간이다.
* 입장료 없음. 문학관 해설사 운영
* 매년 5월에 윤동주문화제가 열린다. 시낭송회와 백일장, 윤동주상 시상식, 문학콘서트, 문학
  둘레길 걷기대회 등의 행사를 가지며, 문학둘레길 걷기는 인사동 남인사마당을 출발하여 만해
  당(한용운 가옥), 시인마을 보안여관, 이상(李霜)의 집, 윤동주 하숙집터, 세종대왕 생가터,
  정철집터 등을 거쳐 윤동주 언덕까지 걷는 4시간 코스이다.
* 윤동주시인의 언덕(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다음 까페 ☞ 보러 가기
* 연세대 윤동주기념사업회 ☞ 보러 가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3-100 (창의문로 119, 문의 ☎ 02-2148-4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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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4월 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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