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묵대사'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0.01.11 모악산 눈꽃 나들이 [선녀폭포, 대원사, 수왕사, 전북도립미술관]
  2. 2016.03.27 서해바다와 새만금을 품은 고즈넉한 바닷가 절집, 김제 망해사 (새만금바람길, 심포항)

모악산 눈꽃 나들이 [선녀폭포, 대원사, 수왕사, 전북도립미술관]



' 모악산 연말 나들이 (대원사, 수왕사) '


▲  모악산 대원사

 


 

겨울 제국(帝國)의 나날이 강성해가던 연말의 어느 평화로운 날 전북 한복판에 자리한 모
악산을 찾았다.
이번 해가 새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지 정말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묵은 해가 되어 다시
금 새로운 해를 맞이해야 된다. 그래서 묵은 해를 정리할 겸, 올해 마지막 답사지를 물색
하다가 모악산 대원사가 격하게 땡겨 그곳으로 쿨하게 길을 잡았다.

아침 일찍 차디찬 새벽 공기를 가르며 서초동 남부터미널로 이동하여 전주로 가는 직행버
스를 나를 담았다. 버스도 추위가 싫었는지 남쪽을 향해 질주하여 2시간 20분만에 전주시
외터미널에 도착했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말이 있듯이 미리 점심을 먹고 움직이고자
전주(全州)에 올 때마다 거의 꼭 들리는 단골 콩나물국밥집(전주한옥마을 부근)에서 전주
의 명물인 콩나물국밥으로 뜨끈하게 배를 채웠다. 거기에 디저트로 주는 커피까지 섭취하
니 식곤증이 밀려와 나를 희롱한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나오니 하늘이 순간 시샘을 벌인 듯,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비의 양
은 다행히 적었지만 나들이에서 비가 오면 이것만큼 열받는 것도 없다. 어쨌든 비의 방해
공작을 원망하며 전주시내버스 970번(송천동↔전북도립미술관)을 타고 모악산으로 이동했
다.
모악산관광단지(전북도립미술관 종점)에 이르니 귀찮게 하던 비도 다행히 그쳤으나, 하늘
이 일그러진 인상으로 세상을 굽어보고 있어 언제 비나 눈이 투하될지 모를 상황이었다.

  모악산 표석의 위엄


 

♠  모악산(母岳山) 입문

▲  모악산 대원사계곡(시앙골, 물레방아골) 하류

전북 한복판에 장엄하게 누워있는 모악산(794m)은 전주와 완주(完州), 김제(金堤)에 걸쳐있는
산으로 호남평야와 전북 내륙 산간지대의 경계 역할을 하고 있다. 1971년 모악산 일대 42.44
㎢가 모악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정상 밑에 있는 '쉰길바위'가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
니의 모습이라 하여 '엄뫼'라 불렸는데, 그걸 한자로 표현하여 어머니의 산이란 뜻의 모악산
이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신라 후기에는 '금뫼','금산'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모악산의 원래
이름으로 보는 설도 있다.

신라 후기부터 세상을 구할 미륵(彌勒)의 출현을 열망하던 미륵신앙(彌勒信仰)의 성지(聖地)
인 금산사(金山寺)를 비롯해 귀신사(歸信寺), 대원사, 심원암 등 굵직한 오래된 절이 안겨져
있으며, 왕년에는 80여 개의 절과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새로운 종교들이 모악산을 기
반으로 여럿 생겨났는데, 증산교(甑山敎)가 그 대표적이다.
모악산은 봄 풍경이 아름다운데, 특히 금산사 입구 벚꽃길이 매우 유명하다. 하여 변산반도(
邊山半島)의 여름 풍경, 내장산(內藏山)의 가을단풍, 백양사(白羊寺)의 설경과 함께 호남4경
의 하나로 격하게 찬양을 받는다.

모악산 산행은 김제 금산사나 전주 중인동, 완주 모악산관광단지에서 시작하면 편하며, 산에
안긴 명소로는 금산사와 귀신사, 대원사, 심원암, 수왕사 등의 오래된 절과 전북도립미술관,
금산사 벚꽃길, 명당(明堂)으로 소문났으나 이곳에 묘를 쓰면 가뭄이 든다고 전하는 장군봉,
선녀폭포, 전주김씨 시조묘 등이 있다.


▲  전주김씨 세덕비(世德碑)와 전주김씨 종중공덕비(오른쪽 비석)

모악산 동쪽 자락 원기리에는 '모악산관광단지'가 넓게 터를 닦았다. 모악산을 든든한 후광(
後光)으로 삼은 이곳은 다른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토속 음식을 내세운 식당과 가게(편의점),
까페, 등산용품점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관광단지 남쪽에는 전라북도에서 2004년 10월
에 세운 전북도립미술관이 자리하여 전북 지역 현대 미술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허나 미술관은 애당초 계획이 없었기에 쿨하게 통과했다. 나의 미련한 머릿속에는 오로지 모
악산과 대원사 뿐이었기 때문이다. 혹여 대원사를 보고 나올 때 시간이 남으면 들릴까도 했으
나 역시 인연이 닿지 않았다.

평일이라 썰렁한 관광단지를 지나면 눈에 뒤덮힌 모악산의 설경이 나타나면서 전주김씨 세덕
비와 종중공덕비가 슬쩍 모습을 내민다.
여기서 가까운 산자락에 전주김씨 시조인 김태서(金台瑞)의 무덤이 있다. 그래서 이곳에 이들
비석을 주렁주렁 닦아놓은 것인데, 김태서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4째 아들인 김은열(金殷
說)의 후손으로 그의 터전인 경주가 몽골의 침략으로 고통을 받자 1254년에 가솔을 이끌고 전
주로 넘어와 정착했다. 이후 그는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고, 그를 시조로 한 전주김씨가 생
겨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남북분단의 원흉으로 북한이란 괴뢰 정부를 세운 김일성이 그의 후손이라는 점
이다. 1993년 손석우란 사람이 '터'란 책을 냈는데, 김일성이 시조 무덤의 지기(地氣)를 받아
북한을 세워 집권했으며, 음력 1994년 9월에 죽을 거라는 내용을 다루었다. 비록 달은 틀리지
만 1994년 7월 김일성이 갑자기 골로 가면서 그 책과 전주김씨 시조묘는 잠시 세상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전주김씨 시조묘는 대원사로 올라가는 길목 부근에 자리해 있어 잠시 들릴까 했으나 눈의 방
해가 심해 올라가지는 못했다. 어차피 계획에도 없던 곳이다.


▲  선녀폭포(仙女瀑布)와 폭포를 품은 사랑바위

전주김씨 세덕비에서 대원사계곡(시앙골)을 옆에 끼고 산길을 오르다보면 선녀폭포와 사랑바
위가 모습을 비춘다.
선녀폭포는 높이 5m도 안되는 조그만 폭포로 볼품은 떨어지나 무려 선녀란 이름까지 지닌 것
을 보면 옛 사람들의 마음을 많이도 앗아간 모양이다. 이런 폭포에는 꼭 옛 사람들이 심심풀
이로 지어놓은 전설이 있는 법, 그 믿거나 말거나 전설은 다음과 같다.

아주 먼 옛날, 보름달이 뜨면 하늘나라 선녀들이 선녀폭포로 내려와 목욕을 했다. 다른 유사
전설에서는 그냥 목욕만 하고 돌아갔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목욕 외에 수왕사에 들려 약수도
마시고 모악산 신선과도 어울려 놀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나뭇꾼이 우연히 폭포 옆을 지나다 목욕 중인 선녀를 발견했고 그들의 아름
다운 자태에 미치도록 넋이 나간 그는 결국 상사병 비슷한 병을 얻어 몸저 눕게 되었다.

병으로 힘들어하던 나뭇꾼은 기왕 이 지경이 된 거 선녀의 모습을 1번만 더 보고 죽자며 보름
달이 뜬 날 폭포를 찾아와 그들을 훔쳐봤다. 그러다가 뜻밖에 한 선녀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
는데, 그 선녀도 나뭇꾼이 좋았는지 둘만 살짝 대원사 백자골 숲으로 자리를 옮겨 사랑을 속
삭이며 예민한(?) 일을 벌이려는 찰라, 갑자기 뇌성병력이 그들을 내리치면서 선녀와 나뭇꾼
은 돌이 되고 말았다.
하늘의 시샘에 돌이 된 그들의 모습이 마치 떨어질 줄 모르고 사랑을 속삭이는 듯 하다 하여
사랑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여기서 치성을 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산길에
서 보면 폭포의 모습이 그리 실감나진 않으나, 바로 앞에서 보면 조금은 그럴싸하게 보인다.


▲  대원사계곡(시앙골)을 따라 이어진 모악산 산길

▲  겨울에 잠긴 모악산 산길
겨울 제국에게 모든 것을 털린 나무들은 숨죽이며 봄을 잉태하고 있다.

▲  속세를 향해 흘러가는 대원사계곡(시앙골)
소쩍새가 울 때면 겨울에 묻힌 계곡도 얼음을 박차고 일어날 것이다.


모악산관광단지에서 20분 정도 야트막한 산길을 오르면 대원사가 반갑게 모습을 비춘다. 시앙
골다리를 건너 계단을 오르면 오른쪽에 경내로 인도하는 계단이 놓여져 있고, 그 길을 오르면
비로소 대원사 경내에 이르게 된다.


▲  대원사 직전에 걸린 크리스마스 축하 현수막

▲  대원사 경내로 인도하는 시앙골다리와 계단길


 

♠  모악산 동쪽 자락에 안긴 고즈넉한 산사
대원사(大院寺)

모악산 동쪽 자락에는 고색과 숲내음이 깃든 대원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겨울 제국이
내린 두터운 눈을 뒤집어쓰며 겨울 산사의 고적함을 진하게 우려내고 있는데, 종종 나타나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와 추녀 밑에 달린 풍경(바람방울)이 들려주는 그윽한 풍경소리가 고요
한 경내를 살짝 어루만진다.

대원사는 670년에 보덕(普德)의 제자인 일승(一乘), 심정(心正), 대원(大原)이 창건했다고 전
한다. 보덕은 고구려 승려로 열반종(涅槃宗)의 개산조(開山祖)인데, 고구려의 대막리지(大莫
離支)인 연개소문(淵蓋蘇文, ?~666)이 당나라에서 도교(道敎)를 받아들이자 이를 개탄하며 백
제로 넘어갔다. 이때 신통력으로 완주 고덕산(高德山)으로 날라와 경복사(景福寺)를 세웠다고
하며, 절을 세운지 얼마 안가서 고구려가 망했다.

보덕의 제자인 일승, 심정, 대원은 경복사가 보이는 지금의 자리에 절을 세워 대원사(大原寺)
라 했다고 전한다. 보덕의 설화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나와있지만 대원사 창건까지는 나
와있지 않아 670년 창건설(또는 660년)에 썩 신뢰는 가지 않는다. 게다가 창건 시기를 입증해
줄 신라 후기 유물과 유적은 전혀 없으며, 1066년에 원명국사(圓明國師)가 중창했다는 이야기
가 있어 이때 창건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1374년 나옹(懶翁)이 중창을 했다고 하며, 1415년에 다시 중창을 벌였다. 그러다가 1597년 정
유재란으로 말끔히 파괴되자 1606년 부처로 추앙받는 진묵(震默)이 다시 일으켜 세웠고, 1733
년 동명 천조(東明 千照)가 중창을, 1886년에는 금강산 건봉사(乾鳳寺) 승려인 금곡(錦谷)과
인오 등이 중창했다. 금곡은 함수산(咸水山) 거사와 함께 대웅전과 명부전을 중건했으며, 내
원암(內院庵)에 있던 염불당을 가져왔다.

1950년 6.25전쟁으로 대부분이 파괴된 것을 덕운이 1959년부터 불사를 일으켜 하나씩 건물을
일으켜 세웠다. 1993년 칠성각을 부시고 요사채를 지었으며, 삼성각을 다시 지었다. 그리고
2001년 이후 명부전과 대웅전 수미단을 손질해 지금에 이른다.

예전에는 비록 음은 같지만 가운데 한자만 살짝 다른 대원사(大圓寺)였으나 근래 지금의 한자
로 갈렸으며, 대웅전과 삼성각, 명부전, 나한전, 범종각, 요사 등 약 10동 정도의 건물이 조
촐한 경내를 메우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삼세불좌상과 용각부도가 있고, 1606년에 조성
된 목각사자상(전북 지방민속문화재 9호)도 있었으나 1988년에 도난을 당했다. 그러다가 1999
년에 서울 가회동(嘉會洞)의 어느 화랑에서 발견되었으나 공소시효를 주장하며 돌려주지 않았
으며, 서울 인사동에 어느 작자에게 넘어가면서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1999년에
지방문화재에서 정리되었음) 그 밖에 오래된 5층석탑 2기와 승탑(부도) 6기가 절의 숙성된 내
력을 알려준다.

이곳은 천하대복지(天下大福地)의 최길상(最吉祥)으로 치는 명당으로 효의 절, 어머니 절, 발
원을 이루는 기도처로 꼽히며, 특히 증산교를 세운 증산 강일순(甑山 姜一淳, 1871~1909)이
도를 깨우친 현장이기도 하다.
매년 1월 1일에는 '촛불기원 해맞이 타종제' 행사가, 4월에는 '모악산 진달래 화전축제'를 열
어 속세에 큰 호응을 받고 있는데, 화전축제는 이곳의 백미(白眉)로 꼽힌다.

▲  매점과 찻집으로 쓰이는 소화당(笑話堂)

▲  소화당 현판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소화당이란 조그만 목조집이 마중한다. 이 건물은 불교용품과 기
념품, 커피, 전통차를 파는 매점으로 커피는 무려 3,000원대를 받는다. 건물 옆에는 잠시 쉬
어갈 수 있도록 파라솔이 달린 탁자와 의자가 놓여져 있고, 건물 정면에는 소화당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있는데, 마치 미소를 머금고 있는 듯한 상큼한 모습이다.


▲  겨울 산사의 내음을 진하게 보여주는 대원사 경내

▲  대원사 아랫쪽 5층석탑

소화당을 지나면 바로 대웅전 뜨락이다. 정면에는 대웅전이 마주보고 있고, 오른쪽에는 요사
와 모악당, 샘터, 왼쪽에는 5층석탑과 범종각, 명부전 등이 뜨락을 둘러싸고 있다.
바로 왼쪽에 보이는 5층석탑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20세기 중반 이후에 손질하면서 4
사자5층석탑으로 성형되었다. 그러다보니 고색의 내음이 다소 떨어진다. 그 뒷쪽에는 범종(梵
鍾)의 보금자리인 범종각이 있다.


▲  대원사 대웅전(大雄殿)

동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전은 대원사의 중심 건물(법당)로 석축 위에 높이 자리해 있다. 정면
과 측면이 각각 3칸인 주심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법당치고는 매우 작은 덩치인데 1886년에 지
어졌으나 6.25때 불탄 것을 1959년 이후에 다시 지었다.
불단(佛壇)에는 목조3세불좌상과 삼신후불탱 등이 있으며, 지금은 없지만 괴목(槐木)으로 만
든 목각사자상이 있었다. 이 사자상은 진묵대사가 축생(畜生)들을 천상(天上)으로 천도하고자
만든 것이라 하며 그 위에 북을 올려놓고 쳤다고 한다. 허나 1988년 불의의 도난을 당했고 다
행히 1999년에 서울 가회동에서 발견되었으나 소유자인 이영옥이 이현수란 사람에게 팔아먹는
등 우여곡절이 심해 아직까지 제자리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  대원사 목조삼세불좌상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215호

대웅전 불단에는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목조3세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얼굴부터 밑도
리까지 하나 같이 두텁게 생긴 이들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로 아미타불(阿彌陀佛)과 약
사불(藥師佛)을 거느린 3세불(三世佛)로 17세기에 조성된 것이다.
석가여래와 약사불, 아미타불로 이루어진 3세불은 조선 중/후기에 많이 나타나는 불상 형태로
중앙에 자리한 석가여래는 중심 불상답게 키가 제일 크며(130cm), 좌우 불상은 116cm 정도이
다. 앞으로 조금 내민 얼굴은 다소 경직되고 딱딱한 표정으로 볼살이 많고 이마가 넓으며, 꼽
슬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수인(手印)만 서로 다를 뿐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의 비슷한 모습이며, 윗도리가 아랫도리보다
다소 살이 찐 모습으로 17세기 호남에서 활동하던 조각승들의 조각 스타일이 잘 반영되어 있
다. 그들 뒤에는 화려한 색채의 삼신후불탱이 든든하게 자리해 있다.


▲  대원사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우측에는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된 명부전이 대웅전을 바라보
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1887년에 금곡이 지었으며, 2001년
에 중수했다.


▲  조선 후기에 조성된 명부전 지장보살상
그 좌우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가 그를 보좌한다.

▲  명부전 10왕(시왕)과 판관(判官), 금강역사상

▲  명부전 윗쪽에 자리한 적묵당(寂默堂)

▲  종무소로 쓰이는 모악당(母岳堂)

▲  모악당 뒷쪽에 자리한 나한전(羅漢殿)

▲  나한전에 봉안된 석가여래와 거울 광배

나한전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羅漢)의 거처이다. 석가
여래의 광배(光背)가 매우 특이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광배 테두리는 검은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광배 중앙에 거울까지 달려있어 잠시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아마도 그런 의
도로 거울을 갖추었을 것이다.

  나한전 석가후불탱(19세기 작)과
색채감이 돋보이는 16나한상

  모악당 옆에 자리한 샘터


  경내 윗쪽에 자리한 5층석탑

경내 뒷쪽 언덕에는 고색이 느껴지는 5층석탑이 경내를 굽어보고 있다. 대원사는 특이하게 오
층석탑이 2기나 있는데, 법당 앞이 아닌 다들 구석에 자리해 있다. 아마도 비보풍수(裨補風水
)의 일환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이 탑은 2중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석축을 기반 삼아, 네모난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2
중의 기단(基壇)과 5층의 탑신(塔身), 얇은 머리장식을 차례대로 얹혔는데, 탑신 지붕돌이 다
소 헝클어지고, 머리 장식 상당수가 사라진 것 외에는 그런데로 상태는 괜찮다.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용각부도 다음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대원사 아랫 승탑군(僧塔群)

5층석탑에서 경내 뒷쪽을 거쳐 북서쪽 산길을 조금 오르면 녹색 철책에 둘러싸인 승탑군(부도
군)을 만나게 된다.
승탑<부도(浮屠)>이란 승려의 사리를 머금은 탑으로 대원사에는 9기(또는 10기)의 오래된 승
탑이 전하고 있는데, 용각부도 1기만 제외하고 모두 조선 중/후기 것이다. 이중 대웅전 남쪽
밑에 있던 승탑 3기(또는 4기)는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진 상태이고, 경내 윗쪽에 2개 그룹으
로 4기와 2기 등 총 6기만 전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대원사는 잃어버린 것이 참 많다. 절의
초창기 역사도 그렇고, 목각사자상, 거기에 승탑까지 말이다.

  대원사 용각부도(龍刻浮屠)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71호

대원사 승탑 중의 아주 유별나게 눈에 띄는 존재가 있다. 바로 검은 피부로 이루어진 용각부
도(용각승탑)이다.
높이 187cm의 이 승탑은 이름 그대로 용이 새겨진 것으로 옥개석 아랫부분에는 대모양의 무늬
위에 겹잎으로 된 18개의 연꽃무늬가 있으며, 그 위에 구름무늬를 새기고 가운데 부분에 여의
주(如意珠)를 두고 다투는 2마리 용을 진하게 새겨놓았다. 승탑의 피부가 완전 흑백이라 실감
이 덜해서 그렇지 만약에 칼라였다면 진짜 용도 시샘을 했을 것이다. 용의 비늘과 피부, 구름
무늬 등이 아주 실감나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탑은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용무늬까지 새겨진 것으로 보아 어느 고승의 승
탑으로 여겨진다. 그 고승의 덕과 업적이 대단했던지 제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저 탑을 조성해
스승의 넋을 기렸던 모양이다.

장대한 세월을 거치면서 반질반질했던 피부는 검은 피부로 대부분 타버렸고, 군데군데 주근깨
같은 것도 달려있지만 이들은 세월이 달아준 훈장으로 보면 될 것 같다. 머리 장식과 기단부
가 조금 깨진 것을 보면 대부분 잘 남아있는데, 머리 장식은 다른 데서 가져왔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대원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자 제일 가는 꿀단지로 이렇게 화려한 용 문양을 지닌
승탑은 처음 본다. 그러다보니 지닌 다른 승탑은 거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용각부도 주변에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승탑 3기가 있다. 매력 만점의 용각부도에 단단히 묻
힌 탓에 그리 주목은 못받고 있지만 조선시대에 흔한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스타일의 탑으
로 용각부도와 긴 시간을 뛰어넘으며 나란히 자리한 모습이 마치, 부모와 자식들 같다. 그 옆
에는 마치 버섯이나 양봉통처럼 생긴 조그만 승탑이 있어 귀엽기 그지 없는데, 이들 탑의 주
인에 대해서는 그다지 전해오는 것이 없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대원사 윗 승탑군

아랫 승탑군에서 윗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녹색 철책에 둘러싸인 윗 승탑군이 나온다. 이곳에
는 2기의 승탑이 있는데, 검은 때가 자욱한 왼쪽 탑은 기단부와 바닥돌을 갖추고 있고, 하얀
피부가 역력한 오른쪽 탑은 바닥돌 위에 바로 탑을 올렸다. 이들은 조선 중/후기에 조성된 것
으로 탑의 주인에 대해서는 전하는 것이 없다.
이들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해 있어 여기서 더 이상 올라갈 공간이 없다.
주변은 대원사 소유의 숲이며 공식 탐방로도 없기 때문이다. (비법정 탐방로만 있음)


  아랫 승탑군에서 바라본 대원사의 뒷모습

  모악산 산길과 이어진 대원사 남쪽 문

  대원사 돌담을 따라 이어진 모악산 산길

승탑을 끝으로 대원사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원래는 대원사만 보고 전주로 쿨하게 철수하
려고 했으나, 여기서 정상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물맛이 일품이라는 오래된 절, 수왕사가
있다고 하여 시간도 아직 이르고 해서 거기까지 발을 넓혀보기로 했다. 기왕 모악산의 품에
들어섰으니 그 품을 더 파고들어야 아쉬움이 없겠지. 다행히 수왕사까지는 1km 남짓이다. (산
에서 1km는 평지의 1km보다 훨씬 김)
허나 문제는 산에 눈이 많이 쌓여있고 얼음 길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걱정이 좀 되었다. 올라갈 때야 별로 문제는 안되지만 문제는 내
려올 때가 아니던가? (트래킹화를 신고 온 것이 전부임) 허나 이미 내 마음은 수왕사에 올라
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라 거기까지 무작정 올라가기로 했다. 내려갈 때 걱정은 나중이다.

* 대원사 소재지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997 (모악산길 243, ☎ 063-221-8502)


 

♠  모악산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고적한 산사
수왕사(水王寺)

  모악산 정상과 수왕사로 인도하는 눈덮힌 산길

대원사에서 수왕사까지는 산길을 20분 정도 올라가야 된다. 겨울이 내린 눈과 얼음이 두텁게
깔려있어 올라가고 내려가는 길이 그리 넉넉치가 않은데, 앞만 보고 열심히 오른 끝에 해발
약 560m에 자리한 수왕사입구 쉼터에 이르렀다.
여기서 서쪽으로 난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모악산 정상이고, 남쪽으로 나있는 벼랑길로 가면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고적한 절집, 수왕사가 반갑게 모습을 비춘다.


  수왕사입구 쉼터

  수왕사입구 쉼터에서 수왕사로 인도하는 벼랑길
안전한 통행을 위해 벼랑길에 철난간을 둘러 절을 찾은 이들을 배려했다.


  소박한 모습의 수왕사 경내

해발 570m 고지에 자리한 수왕사는 모악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절이다. 이곳은 약수가 유
명하여 '물왕이절','무량(無量)이절'이라 불렸는데, 680년에 완주 경천사를 지은 보덕이 수도
장으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입증할 유적이나 관련 역사 기록이 전혀 없어 신빙성은
없으며, 이곳 밑에 대원사가 있어 대원사나 금산사 승려의 참선 장소로 쓰였다가 조선 때 건
물을 심으면서 절이 된 것이 아닐까 싶다.

1125년에 원명국사(圓明國師)가 중창했다고 하나 이 역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며, 1597년 정
유재란(丁酉再亂)으로 불탄 것을 1604년 진묵대사가 중건하여 머물렀다. 6.25전쟁이 한참인
1951년 1월 10일, 모악산 일대를 어지럽히던 공비를 토벌하고자 작전상 소실된 것을 1953년에
천석진사(千錫振師)가 다시 세웠다.

이곳은 모악산 정상 북쪽 밑으로 가파른 곳에 간신히 터를 닦은 탓에 절이 매우 단출하다. 법
당과 요사, 진묵조사전이 좁은 경내를 이루고 있으며, 근래에 새로 지어진 탓에 고색의 내음
은 진작에 날라가버렸다. 오래된 유물도 없고, 건물도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여염집 스타일이
라 겉으로 보이는 절집 분위기도 다소 떨어진다. 게다가 첩첩한 산속에 묻혀있다보니 머무는
승려도 거의 없고 절을 찾는 신도나 산꾼도 별로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대원사에 많이 의존
을 한다.
또한 수왕사는 완주 지역 전통민속주로 꼽히는 송화백일주(松花百日酒), 송죽오곡주(松竹五穀
酒)를 생산하는 현장으로 주지승인 벽암(碧岩)이 수왕사 약수로 직접 술을 빚는다. 그는 대한
민국 전통식품 명인 1호로 지정된 전통민속주의 장인이자 수왕사의 자랑으로 술을 멀리하는
절에서 곡차(穀茶)로 빗대 표현되는 술을 직접 만든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수왕사 법당

  법당 내부 (석가3존불과 여러 탱화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수왕사 법당은 금동으로 치장된 석가3존불과 석가후불탱, 신중탱, 용왕탱
이 봉안되어 있다. 절은 작고 초라해도 법당 내부에 봉안된 존재만큼은 다른 절 못지 않은데,
바다와 전혀 관련도 없을 것 같은 이곳에 용왕탱이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는 수왕사가 거
의 약수로 지탱하는 절이다보니 물을 관리하는 용왕(龍王)이 담긴 용왕탱을 봉안해 매일 좋은
물이 나오도록 기원하는 것이다.

  법당 신중탱(왼쪽)과 용왕탱(오른쪽)

  수왕사 약수터

수왕사의 든든한 후광인 약수터는 겨울 제국의 심술로 얼음에 완전 봉해진 상태이다. 그래서
이곳의 명물인 약수를 마시지 못했지. 선녀도 와서 마신다는 물인데 이렇게 막혀버렸으니 여
기까지 온 보람이 크게 떨어진다.


  진묵조사전(震默祖師殿)

보통 절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산신각이나 삼성각을 두기 마련이나 이곳은 절
을 중창한 진묵대사를 봉안한 진묵조사전을 그 자리에 두었다. 여기서만큼은 산신이나 칠성,
지장보살보다 진묵대사를 더 크게 여기기 때문이다.
바위 밑 가파른 곳에 간신히 자리를 닦고 진묵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1칸 크기의 집을 두었
는데, 그곳까지 인도하는 돌계단을 법당 옆까지 늘어뜨려놓았다.


  하늘색 두광(頭光)까지 갖춘 진묵대사의 진영

진묵(1562~1633)은 수왕사와 대원사의 중창주이자 석가여래의 소화신(小化身)으로 격하게 추
앙을 받는 고승으로 그의 흥미로운 이적과 일화가 많이 남아있다.
그가 동자승이던 시절, 주지승이 그에게 향불을 피우게 하니 주지승 꿈에 제천(諸天) 등이 나
타나 '부처가 향을 피우니 우리는 받을 수 없소!' 했다는 것, 8만대장경을 모두 암송하고 무
슨 책이든 바로 다 외워버려 따로 스승이 필요 없었다는 것. 해인사에 불이 나자 소나무잎에
물을 묻혀 뿌리니 큰 비가 내려 불이 진화되었다는 것, 동네 사람들이 물고기 매운탕을 먹고
가라며 놀리자 탕이 담긴 가마솥을 번쩍 들어 다 흡입한 다음, 엉덩이를 까서 변을 누니 물고
기가 살아서 나왔다는 설화 등, 술을 흔히 곡차(穀茶)라 부르는데, 이는 그가 술을 즐겨 마시
며 곡차라고 했다는 것, 어머니의 무덤을 '무자식 천년향화지지(無子息 千年香火之地)'란 명
당에 썼다는 것 등 재미나고 신비로운 일화가 전해져 온다.

* 수왕사 소재지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산13 (모악산길 246, ☎ 063-287-0485)


  수왕사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나무들이 있어서 시야는 별로)

수왕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5시가 넘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뒷쪽인 모악산 정상까
지 오르고 싶었으나 시간도 늦고 산길도 가파르며 거기에 눈과 얼음까지 덮여있으니 오를 엄
두가 나지 않는다. 아이젠이라도 있었으면 모르지만 그것도 없다. 이럴 때는 건방 떨지 말고
자존심을 곱게 접고 무조건 내려가는 것이 상책, 안그래도 수왕사까지 눈길을 뚫고 무리하게
올라온 터라 내려가는 것도 걱정인데 자꾸 일을 벌여봐야 좋을 것이 없다.

산길을 기어가듯 조심에 조심을 기하며 내려가 별탈없이 대원사에 도착했다. 여기서 관광단지
까지는 길이 완만하기 때문에 별 어려움은 없다. 처음에는 대원사만 보려고 들어왔는데, 수왕
사까지 보너스로 겯드리면서 모악산에서의 일정이 다소 연장되었다.

전북도립미술관 종점에 이르니 마침 전주시내버스 970번이 바퀴를 접고 쉬고 있어 그것을 타
고 미련없이 전주시내로 나갔다.
이렇게 하여 연말의 모악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9년 12월 23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9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서해바다와 새만금을 품은 고즈넉한 바닷가 절집, 김제 망해사 (새만금바람길, 심포항)



' 서해바다와 새만금을 품은 고즈넉한 절집, 김제 망해사 '

(새만금바람길, 심포항)

▲  새만금바람길



제국(帝國)의 부흥을 노리는 겨울의 잔여 세력과 겨울로부터 천하를 해방시키려는 봄이 팽
팽히 맞서던 3월의 어느 날, 호남의 곡창지대인 전북 김제(金堤)를 찾았다.

해가 아직 솟지도 않은 새벽 5시, 아침에 차디찬 공기를 가르며 집을 나섰다. 좌석은 불편
하지만 매우 저렴한 1호선 전철에 몸을 싣고 천안역까지 쭉 내려간 다음, 바로 목포(木浦)
행 호남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10시 30분 정도에 김제역에 도착했다.

김제에 이르니 불청객 하나가 나의 미간을 잠시 찌푸려지게 했다. 바로 비이다. 비록 가랑
비 수준이라 애교로 넘길 만 했지만 나들이에 비가 오는 것만큼 짜증나는 것은 없다. 그날
기상청 정보에는 새벽에 비가 그치고 차차 맑아진다고 했으나 아직도 비가 오고 있으니 역
시나 기상청의 날씨 적중률은 아무도 못말린다.
비가 속히 그치길 고대하며 거전리로 가는 김제시내버스 19번을 타고 50여 분을 달려 망해
사에 발을 내리니 하늘도 그새 지쳤는지 더 이상 비를 내리지 않았다. 대신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지으며 나를 노려본다.


 

♠  망해사 입문 (곽경렬 묘소, 망해사 부도)

▲  망해사로 인도하는 소나무 숲길

망해사 입구에서 절을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오르막길을 오르니 푸른 소나무들이 숲길을 이루며
운치를 진하게 드러낸다. 망해사는 절의 필수 요소라 할 수 있는 일주문(一柱門)을 갖추지 못하
여 숲길이 자연히 일주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소나무가 베푼 솔내음이 바다내음과 어우러져 속세에서 염치없이 따라온 번뇌를 싹 털어가니 잠
시나마 마음이 가벼워진 것 같다. 허나 번뇌가 해보다 무거워 멀리 가지는 못하고 절 입구에 우
두커니 매달려 기다리고 있고, 사람들도 절을 나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속세(俗世)의 야성
을 되찾으니 해탈(解脫)은 정녕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소나무 숲길을 5분 정도 들어가니 길 바로 왼쪽에 애국지사 곽경렬(郭京烈)의 묘역이 나의 발길
을 멈추게 한다. 여기서 처음 들어보는 이름, 곽경렬, 그는 과연 누구일까?


▲  곽경렬 선생 묘역

곽경렬(郭京烈, 1901~1968)은 현풍곽씨로 김제 진봉면에서 태어났다. 봉수(奉守)란 이름도 가지
고 있으며, 1915년 박상진()과 채기중() 등이 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
)을 통합해 대구(大邱)에서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자 불과 14세에 어린
나이로 가담해 독립 활동에 뛰어들었다.

대한광복회는 군자금을 조달해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여러 혁명 기지를 확보하여
폭동을 일으켜 왜정(倭政)을 몰아낼 생각을 했다. 허나 친일 부호(富豪)들이 협조를 해주지 않
고 자신의 뱃대기만 불리자 친일 부호 처단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이에 곽경렬은 유장렬(
), 한훈() 등과 친일 반역자를 처리하는 행형부(行刑部)의 요원이 되어 전남 지역 친
일 부호를 여럿 처단했으며, 오성()의 헌병 분견소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했다.
1916년 왜경의 추격으로 잠시 만주로 넘어갔다가 다시 들어와 활동했으며, 1918년 친일파로 방
향을 바꾼 밥버러지 이종국()의 밀고로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드러나면서 다시 은신했다.
1919년에는 전북 옥구군 대야면에서 김영순의 지원을 받아 27원을 상해임시정부로 보냈으며, 계
속해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이다가 1924년 왜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1926년 전주지방
법원에서 3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1929년 4월 1일 전주감옥에서 출소했으나 왜정의 잔인한 고문에 몸이 상하여 더 이상 독립활동
을 하지 못하고 고향에서 은거하고 말았다. 마음에서는 늘 독립의 의지를 불태웠으나 몸이 만신
창이가 되었으니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후로는 조용히 지내다가 1968년 67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1982년 이 땅의 정부는 그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어 뒤
늦게나마 그의 애국 정신을 기렸다. 또한 지원금을 보내 무덤에 상석(床石)과 비석(碑石), 망주
석(望柱石)을 갖추게 했으며, 봉분(封墳)에 호석(護石)을 둘렀다.

그의 묘역은 망해사로 가는 길목에 있으므로 그냥 지나치지 말고 잠시 발길을 멈추고 무덤 앞에
옷깃을 여미는 예를 보이기 바란다. 바로 길가에 있으니 시간도 크게 잡아먹지 않는다. 다만 무
덤 주변에 마땅한 안내문도 없고, 그냥 '애국지사 곽경렬 선생 묘소'임을 알리는 표석이 전부라
자세한 사연을 알지 못하여 지나치기가 쉽다.

▲  곽경렬 선생 묘소를 알리는 표석

▲  뒤에서 본 곽경렬 묘소

곽경렬 묘소 아랫쪽 산비탈에는 누런 옷을 입은 무덤들이 즐비하다. 이곳은 망해사의 사하촌(寺
下村)인 명동마을의 공동묘지로 절로 가는 길목에 이렇게 백성들의 무덤이 1~2기도 아니고 무더
기를 이루는 광경은 거의 본 적이 없는데, 소나무 그늘 밑에 옹기종기 둥지를 튼 묘역이 은근
포근해 보이기도 한다.

곽경렬 묘소를 둘러보고 다시 2분 정도 길을 재촉하면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바로 망해사에 이르게 되는데, 망해사를 외면하고 그냥 직진하면 새만금바람길이 펼쳐진다. 이
바람길은 여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진봉면사무소에서 망해사를 거쳐 거전리로 이어지며, 생
각치도 못하게 보랏빛처럼 등장한 바람길에 군침이 가득 돌았지만 망해사를 목표로 하고 왔으니
일단 그곳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  고색의 때를 간직한 망해사 부도(浮屠) 4기

바람길과 갈리는 3거리에서 망해사로 내려가면 길 왼쪽에 제일 먼저 고색의 기운이 넘치는 부도
4기를 만나게 된다.
이 부도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가운데가 볼록한 석종형(石鐘形)부도이다. 마치 대추처럼
생긴 것이 크기도 조촐하여 참 귀여운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이들은 청심당(淸心堂), 만화당(
萬化堂), 심월당(心月堂), 덕유당(德有堂) 등 망해사에서 활동했던 승려의 승탑(僧塔)이다. 이
중 1기는 너무 작아 포도알처럼 보이며, 나머지는 거의 비슷한 모습이다. 부도의 형태는 땅바닥
에 자연석을 활용한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대추 모양의 탑신을 얹힌 다음, 모자처럼 생긴 지붕
돌을 올렸다.

▲  가까이서 본 부도 - 모자를 쓴 사람의 얼굴이나 허수아비 얼굴처럼 보인다.


▲  해우소 부근에서 바라본 서해바다 (새만금)
날씨가 흐리고 바다 안개가 자욱해 시야가 속세처럼 좋지 못하다.

▲  바닷가 사찰, 망해사 경내에 이르다.

부도군을 지나면 볼일을 보며 근심을 터는 해우소(解憂所)가 나온다. 그곳을 지나면 철난간 너
머로 물줄기가 보이는데, 그가 바로 서해바다이다.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바다 안개가 오
리무중(五里霧中)을 이루고 있어 시야가 완전 꽝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망해사의 내력을 살펴
보도록 하자.

※ 속세를 등지고 서해 바닷가에 자리한 고찰, 김제 망해사(望海寺)
우리나라에는 오래된 절이 별처럼 많이 흩어져 있다. 허나 바닷가에 자리한 절은 정말 손에 꼽
을 정도인데, 서해바다 같은 경우에는 이곳 망해사가 유일하다. 물론 안면도(安眠島)에 있는 안
면암(安眠庵, ☞ 관련글 보러가기)도 바닷가에 있지만 내력이 무지 짧아 고찰에 끼지 못한다.
그외에 남해바다에는 여수 향일암(向日庵)이 있고, 동대해(東大海)에는 양양 낙산사(洛山寺)와
홍련암(紅蓮庵), 휴휴암(休休庵), 동해 감추사(甘湫寺), 부산 해동용궁사(海東龍宮寺) 등이 있
다.

망해사란 절 이름 그대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이곳은 642년(의자왕 원년) 부설(浮雪)이 창건
했다고 전한다. (다른 자료에는 671년이라고 나옴) 허나 안타깝게도 신뢰도는 떨어지며, 754년
(경덕왕 23년)에 당나라 승려인 통장(通藏)법사<또는 중도법사(中道法師), 도장(道藏)법사>가
세웠다는 설도 있으나, 이름만 서로 다를 뿐 같은 인물로 여겨는 설도 있다. 허나 이 역시 확실
한 것은 아니다.

고려 때에는 1073년(문종 27년)에 심월(心月)대사가, 1371년에는 지각(知覺)선사가 중창했다고
하며, 조선으로 들어와서는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절이 무너져 바다에 가라앉았다고 한
다. 그러다가 1624년 경(또는 1589년 경)에 김제 출신 고승인 진묵대사(震默大師)가 절을 일으
켜 세웠다. 이때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악서전(낙서전)이 지어졌다.

진묵대사는 해인사(海印寺)의 8만대장경을 모두 암송했다는 이야기부터 물고기를 끓인 죽을 먹
고 대변을 보면서 그들을 환생시킨 이야기까지 정말 많은 이적(異蹟)과 재치를 남긴 고승으로
유명한데, 이곳에도 그의 설화가 하나 전해온다.
진묵이 망해사에고 머물 때, 바닷가에서 굴을 따서 먹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놀라서 '왜
승려가 육식을 하시오?'
그러자 진묵이 '이것은 굴이 아니고 석화(石花)요' 답했다고 한다. 참
고로 굴을 석화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어원이 진묵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는 만화(萬化, 1850~1919)와 심월(心月)이 절을 중창하고 불도를 닦았으며, 1915년
에 계산(桂山)이 중창했다. 1933년에는 주지 김정희가 악서전을 중수하고 보광명전(普光明殿)과
칠성각을 신축했으며, 1977년에 요사와 망해대를 짓고, 악서전, 보광명전을 중수했다.
1984년에는 기존의 보광명전과 칠성각을 부시고, 그 자리에 대웅전(大雄殿)을 지었는데, 나중에
극락전으로 이름을 갈았다. 1986년에는 악서전을 해체 복원하였고, 1989년에 범종각을 지었으며,
1991년에 극락전을 중수했다.

그리 넓지 않은 조촐한 크기의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악서전과 삼성각, 종
각, 요사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요사를 빼고는 모두 바다가 있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
이 이곳의 특징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팽나무와 악서전이 있으며, 이들 모두 조선 중기 것이다.
(이전 시대 유물은 없음) 또한 절 이름의 유래에 대해선 딱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바닷가에 있
어 섬들을 바라볼 수 있고, 서해 일몰을 구경할 수 있는 경승지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보인
다. (창건 시절부터 망해사로 불린 듯 함)

바닷가 언덕에 자리해 있어 파도 소리가 번뇌에 잠긴 정신을 깨워주며, 파도 소리와 풍경 소리,
발자국 소리가 전부인 고요한 절이다. 게다가 높이는 바다에 닿을 정도로 낮지만 산사(山寺)의
분위기도 조금은 서려있다. 또한 이곳에서 보는 저녁 일몰은 번뇌가 녹아버릴 정도로 대장관이
며, 바다에 점처럼 그려진 섬들까지 이곳의 풍경을 한몫 거들고 있으니 조물주(造物主)도 시샘
을 할 지경이다.
허나 1990년대부터 시작된 새만금 사업으로 망해사 앞바다는 크게 수정될 위기에 처했다. 새만
금 개발 계획을 보면 절 앞바다를 메워 거의 강처럼 만든다고 한다. 그리되면 바닷가 절이 아
닌 강가의 절이 되며 수평선 너머로 펼쳐진 너른 바다를 더 이상 못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절 풍경도 크게 손상될 것이고, 바다를 바라본다는 뜻의 절의 이름마저 무색하게 된다. 인간들
의 무분별한 개발에 망해사의 경관은 물론이고 군산(群山)에서 김제 앞바다를 거쳐 부안(扶安)
에 이르는 바다와 갯뻘 대부분이 강제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망해사를 중심으로 서해바다를 향해 솟은 야트막한 산자락에 새만금바람길이 조성되었다. 절을
둘러보고 후식으로 바람길을 따라 서쪽인 심포항이나 동쪽인 진봉면사무소 방면으로 걷는 것도
괜찮다. 망해사가 거의 중간이고 길도 험하지 않아 1시간 반 정도면 충분히 서쪽 끝과 동쪽 끝
에 닿는다. 바다가 늘 옆에 있어 바다내음과 산내음에 마음마저 즐거워지는 길이다.

※ 김제 망해사 찾아가기 (2016년 3월 기준)
① 김제까지
* 용산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 광주역, 광주송정역, 목포역에서 호남선 열차
  를 타고 김제역 하차 (고속전철은 정차 안함)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김제행 고속버스가 1일 4회 떠나며, 동서울터미널에서
  김제행 직행버스가 1일 6회 떠난다.
* 인천, 성남, 전주, 익산, 군산에서 김제행 직행버스 이용 (군산에서 올 경우에는 만경에서 내
  리면 편함)
② 현지 교통
* 김제역(김제역3거리 북쪽, 김제역1승강장)과 김제시외고속터미널 앞에서 김제시내버스 18, 19
  번을 타고 망해사 하차. 두 노선 합쳐서 1일 20회 운행(주말, 휴일에는 14회)하며 만경정류장
  을 경유한다.
* 망해사 정류장에서 망해사까지 도보 7~8분
③ 승용차 (경내에 주차장 있음, 주차비는 공짜)
* 서해안고속도로 → 서김제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만경3거리 직진 → 만경4거리 좌회전 →
  진봉 → 망해사입구에서 우회전 → 망해사 (경내까지 진입 가능)

* 소재지 -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1004 (심포10길 94 ☎ 063-545-4356)

▲  망해사 악서전

▲  망해사 삼성각


 

♠  조촐한 망해사 둘러보기

▲  망해사 팽나무 - 전북 지방기념물 114호

경내에는 오래된 팽나무가 2그루 있다. 그중 하나가 요사 앞에서 바다를 굽어보고 있는데, 조선
인조(또는 선조 때인 1589년) 때 진묵대사가 악서전을 짓고 그 기념으로 심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나이는 대략 400년 정도가 된다. 나무의 높이는 17m, 가지 길이 동서 16.7m, 남북 17m이
며, 다른 팽나무는 악서전 옆에 있는 것으로 높이 21m, 가지 길이 동서 24.8m, 남북 22m이다.

이들 나무는 중창 기념으로 심은 것도 되지만 수시로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봄마다 문을 두드리
는 황사 바람을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절이 바닷가에 있어 일몰도 배부르게 볼 수 있고 경
관도 아름답지만 대신 바람과 태풍에는 무지 취약하기 때문이다.

팽나무는 겨울 제국에게 모든 걸 털리고 앙상한 가지만 드러낸 채, 제국의 혹독한 시련을 말없
이 견디고 있다. 이제 봄도 상륙했으니 조만간 겨울의 망령에서 완전히 해방이 될 것이다.

▲  망해사 요사(寮舍)

▲  팽나무 쪽에서 본 요사

팽나무 부근에 자리한 요사는 1997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ㄱ'자 건물이다. 요사는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공양간과 종무소(宗務所)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  바다를 향한 범종각(梵鐘閣)

범종각은 1989년에 세워진 것으로 너른 바다에 은은한 종소리를 울려 보낸다. 요즘은 새만금 사
업으로 인해 잔뜩 격앙된 서해바다와 갯벌 식구, 사업을 찬성 또는 반대하는 사람들을 달래주느
라 종을 33번 쳐도 모자를 듯 싶다. 종은 계속 바다에 종소리를 실어보내고 싶건만 그 바다가
없어지면 얼마나 허전할 것인가..?


▲  망해사 극락전(極樂殿)

바다가 있는 북쪽을 굽어보는 극락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원래는 대웅전이었다. 1984년에 보광명
전과 칠성각을 부시고 그 자리에 만든 것으로 1991년에 중수했으며, 이후 극락전으로 이름을 갈
았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로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3존불
이 봉안되어 극락전의 이름값을 하고 있으며, 지장보살과 지장시왕탱, 아미타후불탱, 진묵대사
의 초상 등이 건물 내부를 수식한다.


▲  망해사 악서전(樂西殿) - 전북 지방문화재자료 128호

극락전 옆에는 담장을 두른 공간이 있는데, 그 안에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악서전(낙서전)이 있
다. 악서전 옆에는 오래된 팽나무가 하늘 높이 자라나 악서전을 바다 바람으로부터 지켜준다.

이 건물은 1624년(또는 1589년)에 진묵대사가 지은 것으로 전하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ㄱ'자
형 팔작지붕 건물로 기둥 위에 공포를 얹힌 주심포(柱心包) 식이다. 4개의 주련이 걸려있으며,
단청(丹靑)이 칠해져 있으나 색이 많이 바랜 상태이다. 1933년과 1977년에 수리를 했으며, 1986
년에 해체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내부에는 절을 거쳐간 승려들의 진영(眞影)과 석가3존불이
봉안된 불단이 있으며, 그 뒤에는 아미타후불탱화가 든든하게 걸려있다.

악서전(발음에 따라 낙서전)이란 이름은 서해바다를 즐긴다는 뜻으로 자연 속에 있기를 좋아했
던 팔자 좋은 사대부(士大夫)의 집 이름 같다. 처음에는 승려의 거처 및 법당의 역할을 겸했으
나, 지금은 승려의 생활공간 및 수행처로 쓰여 일반인의 접근을 통제하고 있다. 그래서 키는 작
지만 토담을 주위로 둘렀고 사립문은 늘 닫혀있다.
기둥의 모양은 불규칙하고 자연의 나무를 기둥으로 사용했으며, 건물 크기는 작지만 평온한 분
위기를 간직하여 살짝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허나 그 충동을 억제하고 담
장 너머에서 열나게 사진에 담는 선에서 악서전에 대한 욕구를 잠재웠다.


▲  낙서전과 팽나무, 범종각

▲  범종각 옆 샘터
망해사의 샘물이 치솟던 곳으로 범종각 옆에 땅을 파고 돌로 단단하게 석축을 엮어
샘터로 내려가는 계단을 마련했다. 현재는 겉모습만 남은 죽은 샘터로
우물 안에는 물이 가득 고여있으나 마실 수는 없다.
(절에서는 삼성각 부근에 별도의 물탱크를 두어 식수를 해결함)

▲  삼성각(三聖閣)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삼성각이 둥지를 트며 천하를 굽어보고 있다. 이 건물은 제일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극락전 위쪽에 터를 다지고 계단을 내었다.
삼성각에는 산신탱과 독성탱, 칠성탱이 봉안되어 있으며, 이들은 원래 칠성각에 있었으나 철거
되면서 오랫동안 극락전에 얹혀 살았다.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  불화(佛畵)같은 이미지의 칠성탱

◀  여인처럼 다소곳이 앉아있는 독성(獨聖,
나반존자)이 그려진 독성탱


▲  망해사 뜨락에서 바라본 서해바다

절에 들어왔을 때보다는 시야가 조금은 좋아졌지만 바다 건너는 여전히 안개에 감싸여 있다. 뜨
락과 해안 사이에는 텃밭을 닦아 여러 채소를 기르고 있으며, 바다 쪽에는 철책이 금줄처럼 둘
러져 있어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일반인 출입 통제 구역임)


 

♠  새만금바람길 산책 (심포항, 거전리)

▲  새만금바람길 (망해사 부근)

해사를 25분 정도 둘러보고 새만금바람길로 이동했다. 새만금바람길은 진봉면사무소에서 진봉
방조제, 전선포, 망해사, 두곡서원 뒤쪽, 심포항, 봉화산봉수대를 거쳐 거전리로 이어지는 10km
의 산책로이다. 요즘 산이나 특정 지역을 도는 둘레길이 크게 인기를 누리고 있는데, 이 바람길
역시 상큼하게 등장한 도보길 유행에 따라 김제시청에서 야심차게 닦은 것이다.

진봉방조제와 심포항 부분을 제외하고는 바닷가에 솟은 야트막한 산줄기의 산길이며, 길을 손질
하고 이정표를 설치했다. 그리고 새만금의 이름을 따서 새만금바람길이라 했으니 그 흔한 둘레
길 대신 바람길을 칭한 것이 이채롭다. 아직까지는 인지도가 낯선 까닭에 사람들의 발길은 별로
없으나 차차 김제 지역의 꿀단지가 될 것이라 믿는다. 그럴 싹수가 충분히 보이기 때문이다.
 
바람길 거리가 10km라 좀 길어보이지만 산길의 소나무가 무성하고 서해바다도 바로 옆에 바라보
여 산내음과 바다내음에 마음이 상쾌해진다. 그런 길에 열중하여 걷다 보면 정말 거리가 모자를
정도이다. 소요시간은 2~3시간 정도로 약간 가파른 구간이 몇 있을 뿐, 그외에는 그냥 이 땅에
흔한 둘레길 수준이다.


▲  망해사 전망대

망해사는 바람길의 중간 정도로 나는 심포항 쪽으로 이동했다. 보도블록이 깔린 바람길로 접어
들면 곽경렬 선생의 추모비가 나오고, 그 비석을 지나면 흙길로 변신한다. 흙의 촉촉한 기운을
느끼며 걷다보면 곧 망해사전망대가 마중을 나온다.
이 전망대는 3층 규모로 꼭대기에 올라서면 새만금 개발로 혼돈한 서해바다가 두 눈에 바라보인
다. 그리 부담없이 지어진 전망대라 딱히 다른 시설은 없으며, 전망대에 올라 잠시 천하를 조망
(眺望)하고 다시 길을 재촉하면 솔내음이 진동하는 소나무 숲길이 펼쳐진다.


▲  소나무 너머로 보이는 서해바다

▲  모습을 드러낸 심포항(深浦港)

망해사에서 바람길을 따라 1.5km 정도 가면 심포항이 모습을 드러낸다. 심포항은 진봉면 심포리
(深浦里) 바닷가에 둥지를 튼 어촌으로 만경강(萬頃江) 최하류에 자리해 있다.
심포항은 한때 100여 척이 넘는 어선이 드나들던 큰 어항(漁港)으로 갯벌이 넓게 펼쳐져 조개의
집산지 및 체험 장소로 명성이 높았다. 허나 새만금 공사와 연안 어업의 쇠퇴로 인해 왕년의 모
습은 크게 꺾인 상태이며, 수천만 평을 자랑하던 갯벌은 새만금 개발 앞에 사라질 위기에 처했
고, 포구 앞바다는 거의 담수호(淡水湖) 수준이 되었다.
그래도 아직은 어촌의 분위기가 남아있어 조개류나 생선 등을 구입할 수 있으며, 조개구이와 해
물칼국수, 해산류를 파는 식당과 민박 등의 숙박업소도 여럿 자리해 있다. 또한 심포항은 일몰(
日沒) 풍경이 아주 일품으로 전국적인 일몰 명승지로 유명하다.


▲  한가로운 심포항 동쪽 부분

▲  바닷가에 몸을 기대며 단잠에 빠진 어선들
새만금 개발이 완료되면 저 어선들의 미래는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  심포항 중간 부분

▲  심포항 서쪽 부분

심포항은 주말 오후임에도 한가롭기 그지없다. 어항이 동서로 긴 편인데, 핵심은 바로 서쪽 부
분이다. 이곳에는 식당과 조그만 어시장이 형성되어 있는데, 인적이 드문 동쪽 부분과 달리 사
람들이 제법 몰려있었다. 식당에도 사람들이 절반 정도 차 있는 상태였고, 상인들과 가격을 흥
정하는 사람도 눈에 띈다.

심포항에서 바람길은 봉화산 산자락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서 길을 잘못 들었다. 괜히 바람길을
고집하다가 바람맞을까 염려되어 여기서 쿨하게 바람길을 접고 버스가 다니는 지평선로로 나왔
다. 심포항에서 지평선로 안하3거리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이다.
아직은 버스 시간이 있어서 거전리 방향으로 더 걷다가 거전리 입구인 길곤마을에서 길을 멈추
고 버스정류장에 들어가서 쉬었다.


▲  푸른 싹이 돋아난 김제평야의 위엄(거전리 방향)
올해 처음으로 본 푸른 싹들이다.

▲  풍년을 미리 예감하는 김제평야 (내륙 방향)

버스정류장에서 호남평야(湖南平野)의 일부인 김제평야를 보니 정말 넓기는 넓다. 지평선 너머
까지 끝없이 펼쳐져 마치 대륙의 농경지를 보는 듯 하다. 아직은 겨울 제국에서 해방되지 못한
평야 바깥 세상과 달리 평야에는 푸른 싹이 돋아나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그것이 올해 처음으
로 본 푸른 새싹이었다.
이제 봄이 턱밑까지 오긴 했구나 실감을 하고 있으려니 남쪽에서 날아온 한 무리의 철새들이 오
랜 비행에 지쳤는지 우루루 평야에 착륙한다. 그리고 잠시 쉬더니 북쪽으로 힘찬 날개짓을 하며
길을 떠났다. 나도 북쪽으로 가야되는데 흔쾌히 태우고 가면 안될까?
손짓을 했지만 내가 저들보다 무거우니 현실은 불가능하다. 괜히 화물 초과 수송으로 저들에게
항공법 위반 벌금을 물리면 나로써도 면목이 없을 뿐이다.

그렇게 버스를 기다리니 거전리에서 맨몸으로 나오는 김제시내버스 19번이 다가온다. 버스에 올
라 만경까지 간다고 하니 같은 행정 구역에 가까운 거리임에도 구간 요금을 징수한다. 허나 나
에게 꿩 대신 닭을 고를 권한은 없었다. 그 버스가 아니면 걸어가거나 지나가는 차량을 잡아타
야 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만경(萬頃)에서 익산(益山)으로 넘어갈 요량이었으나 버스가 너무 기어가서 만경까지
무려 23분씩이나 걸렸다. 그래서 간만에 차이로 익산시내버스 15번(원광대↔만경)을 놓치고 말
았지. 운행 시간을 너무 널널하게 짠 느림보 김제버스 때문에 결국 만경에서 1시간 강제 체류를
하게 되었다.
1시간에 긴 시간을 억지로 흘려보내며 익산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탔지만 시간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늦어진 터라 이후 일정을 다음으로 넘기고 익산역에서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내 제
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봄맞이 김제 망해사 나들이는 약간의 여운을 남기며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상업적 이용은 댓글이나 메일, 전화연락 등으로 반드시 상의바람, 무단 사용은 안됨)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 모니터와 컴퓨터 사양, 사용 기기(컴퓨터와 노트북, 스마트폰 등)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다음 까페에 올린 글은 2015년 9월부터 문장 줄 간격이 좀 늘어져서 나옵니다. (다음
   에 계속 시정을 요청했으나 소용이 없었음) 그러니 보기에 조금 불편하더라도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다만 다음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글은 간격 늘어짐이 없이 정상적으
   로 나오고 있으니 블로그글을 보셔도 됩니다.
 * 공개일 - 2016년 3월 22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6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