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2.09.04 한여름 산사 나들이, 안성 고성산 운수암 (무한성, 무양성)
  2. 2021.04.17 안성맞춤의 고장, 안성 죽산 나들이 ~~~ 태평미륵(매산리석불입상), 죽주산성, 비봉산

한여름 산사 나들이, 안성 고성산 운수암 (무한성, 무양성)

안성 운수암 (무한성)



' 한여름 산사 나들이 ~ 안성 운수암 '
운수암 대방
▲  운수암 대방
 



 

여름 제국(帝國)이 정점에 치닫던 8월의 첫 무렵, 안성(安城) 운수암을 찾았다. 수도권에
서 당일 답사로 간단히 몸을 풀 곳을 물색하다가 운수암이 격하게 땡겨 그곳으로 길을 잡
았는데, 12시에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지하철과 시내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며 쉬엄쉬
엄 이동해 15시에 안성 서북부에 자리한 양성(안성시 양성면)에 이르렀다.

양성까지는 환승할인 시간에 맞게 무탈하게 이동했으나 여기서 공도(孔道)로 가는 시내버
스가 출발시간보다 5분 일찍 도망치면서 환승 리듬이 그만 깨져버렸다. 다음 버스는 거의
50분 뒤에나 있는 상태. 여름 제국의 무더위 핍박이 극에 달한 상태에 환승할인까지 날라
갔으니 정말로 복창이 터질 판이다.
허나 나에게 꿩 대신 닭을 고를 권한은 없어서 별수 없이 50분을 강제로 기다려 공도읍으
로 가는 안성시내버스 7번(안성터미널↔원곡)에 탑승, 10분을 더 달려 운수암입구인 방신
1리에서 두 발을 내렸다.



 

♠  운수암 입문

▲  운수암으로 인도하는 숲길 (성하길) ①

▲  운수암으로 인도하는 숲길 (성하길) ②

▲  운수암으로 인도하는 숲길 (성하길) ③

방신1리에서 운수암까지는 25분 정도 걸어가야 된다. 마을을 가로지르며 그늘도 거의 없는 길
을 10분 정도 가면 숲이 나타나면서 길도 그늘길로 변신하는데, 그늘이 짙게 깔려 무더위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며, 땀이 조금씩 나긴 해도 선선한 산바람 앞에 이내 산산히 사라진다.

길은 처음에는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다가 운수암이 가까워질수록 점차 각박해진다. 밑골고개
를 넘으면 주차장이 나오며, 여기서 더 오르면 그늘에 묻힌 쉼터와 약수터가 나온다. 약수터
에서 대자연이 베푼 샘물을 여러 번 떠마시며 더위와 갈증을 삼키고 길을 마저 걸으면 고갯길
의 끝에 늙은 느티나무가 마중을 하는데, 그 느티나무에 이르면 백운산 정상부에 자리한 운수
암이 말끔히 모습을 드러낸다.


▲  운수암 느티나무
약 160년 정도 묵은 나무로 높은 키와 큰 덩치에 걸맞게 운수암 경내에
넓게 그늘을 드리운다.

▲  삼성각에서 바라본 느티나무
아직 그 흔한 시/군 보호수 등급도 얻지 못한 야인의 신세이다.

▲  승탑(僧塔)을 가장한 석물
느티나무 부근 수풀 속에 승탑(부도탑) 1기가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겉으로 보면 영락없는 승탑이지만 현실은 경내에 흩어진
석재를 모아서 승탑 형식으로 수습한 것이다.

▲  느티나무 곁에서 바라본 운수암 경내
뿌연 연기를 내뿜은 소독차가 방금 다녀가 연기가 채 가시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소독차 연기만 보면 뭐가 그리 좋은지 열심히
달려 쫓아가곤 했는데, 이제는 무덤덤하다.


고성산(高城山, 298m)의 남쪽 봉우리인 백운산 숲속 180m 고지에 포근히 터를 다진 운수암은
화성 용주사(龍珠寺)의 말사(末寺)로 1750년에 장씨 보살(菩薩)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의
법명(法名)은 반야명(般若明)으로 근처에 살던 청상과부였는데, 남은 여생을 부처를 봉안하며
살고자 가산을 털어서 무한성(무양성) 밖에 절을 세우려고 했다.
절을 막 짓던 날 밤, 노승(또는 부처)이 꿈에 나타나 '무한성 안에 숲이 넘어진 곳이 있으니
거기에 지으시오'
현몽했다. 그래서 다음날 성 안에 들어가 살펴보니 과연 숲이 넘어진 곳이
있어 그곳에 절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렇게 조선 후기에 한 여인에 의해 창건된 운수암은 고종(高宗) 시절에 이르러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과의 인연 덕분에 크게 덕을 본다. 그의 지원으로 중건을 한 것이다. 이때 대방을
세우고 칠성탱과 산신탱, 독성탱을 봉안했는데, 이곳이 어찌 대원군과 인연을 지었는지는 모
르겠지만 그가 내린 '운수암' 현판이 대방에 있다.
1873년에는 아미타회상도(현재 용주사 성보박물관에 가 있음)를 제작했는데, 앞서 칠성탱 등
과 함께 왕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내용이 적혀 있어 왕실과 대원군 일가의 원찰(願刹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참고로 흥선대원군은 불교에도 관심이 지대해 서울 화계사(華溪寺)
와 흥천사(興天寺), 남양주 흥국사(興國寺) 등 서울 근교의 여러 절을 오가며 온갖 지원을 아
끼지 않았다.
19세기 후반에 비로전(처음에는 대웅전)을 지었고, 이후 쇠락하여 무너지기 직전인 것을 현암
(玄岩)이 1980년대부터 불사를 벌여 1986년에 대웅전(대웅보전)을 지었으며, 기존의 대웅전은
비로전으로 삼았다. 그리고 1996년에는 광음선원(光音禪院)을 세우고 1997년 범종각을 두었으
며, 이후에 3층석탑을 세워 경내의 면모를 새롭게 했다.

암자(庵子)란 이름에 걸맞게 매우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보전과 비로전, 대방, 삼성각, 광음선
원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비롯해 대
방과 비로전 등이 있으며, 운수암 자체는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25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19세기 말에 조성된 아미타회상도와 칠성탱, 독성탱, 산신탱은 신변보호를 위해 용주사 성보
박물관에 가 있다.

거의 산 정상부에 자리해 있고, 숲이 무성하여 절을 둘러싼 기운도 청정하며, 경관이 좋고 약
소하긴 하지만 동남쪽으로 약간 전망이 트여 있다. 안성과 평택 지역의 명소로 등산과 나들이
수요가 많으며, 경내까지 포장길이 잘 닦여져 있어 차량으로도 편히 접근도 가능하다.

* 운수암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방신리 85 (성하길 80-63 ☎ 031-673-7372)


▲  삼성각에서 바라본 운수암 경내



 

♠  운수암 둘러보기

▲  대웅보전 뜨락에 세워진 6면3층석탑

운수암 경내로 들어서면 대방과 3층석탑을 시작으로 광음선원과 대웅보전 등이 차례대로 마중
을 한다.
대웅전 뜨락 중앙에 자리한 3층석탑은 1990년대 후반에 마련한 것이다. 1990년대면 지금과도
꽤 가까운 시절인데, 벌써부터 기록이 누락되거나 기억이 상실되어 막연히 1990년대 말에 세
웠다고 그런다.

수려하고 정교한 조각이 일품인 이 탑은 특이하게 6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그래서 6면3층석탑
이라 부른다. 그가 있기 전에는 절에서 그 흔한 탑도 하나 없었는데, 탑을 아주 우람하게 세
워 그 허전함을 크게 달랠 수 있게 되었다.
탑의 구조는 밑에서부터 2층의 기단(基壇)과 3층의 탑신(塔身), 상륜(相輪)으로 이루어져 있
으며, 아직은 어린 탑이라 피부가 매우 하얗고 반질반질하다. 윗층 탑신에는 6마리의 석사자
를 배치해 탑신을 받쳐들며, 그 안에는 사천왕(四天王)과 관세음보살을 두었다.


▲  6면3층석탑 윗층 기단의 사자석과 사천왕상

◀  대방과 마주보는 광음선원(光音禪院)
1996년에 지어진 것으로 요사(寮舍) 및 선방
(禪房)으로 살아가고 있다.

        ◀  운수암 대웅보전(大雄寶殿)
북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
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82년에 짓기 시작
하여 1986년에 완성을 보았다. 그가 세워짐으
로써 기존의 대웅전은 비로전으로 현판을 갈았
다.


▲  운수암 석가여래좌상과 닫집

대웅보전 불단(佛壇)에는 석가여래상을 봉안했고, 그 뒷쪽에 삼신후불탱을 두었다. 그들 위에
는 붉은 피부의 닫집이 있는데, 1층은 적멸궁(寂滅宮), 2층은 법왕궁(法王宮), 3층은 내원궁(
內院宮)이란 현판이 걸려 있으며, 극락조(極樂鳥)와 구름 등 갖은 조각을 두어 장엄함을 더했
다.

불단 좌우에는 11면관세음보살입상과 목조지장보살입상을 봉안했는데, 이들은 2001년에 조성
된 것으로 그 주변에는 삼장탱(三藏幀)과 신중탱(神衆幀)이 자리하고 있다.


▲  운수암 대방(大房)

대웅보전 뜨락 우측에 자리한 대방은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로 양반가 같은 모습을 하고 있
다. 1870년에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지어진 26칸 규모로 위에서 보면 'H' 모양이며, 예전에
는 법당의 역할도 겸했다. 대방은 보통 왕족과 양반사대부들의 숙식/예불 편의를 위해 지어진
것으로 왕실의 지원을 받던 서울 근교 사찰의 필수 건물이었다. 이곳도 흥선대원군과 인연이
깊어 이렇게 대방을 마련했는데, 절이 서울과 멀어서 상류층 손님의 왕래가 적었다. 하여 평
시에는 운수암 승려와 신도들도 예불/숙식 장소로 사용했다.

비로전이 생기면서 법당의 짐은 덜게 되었으며, 지금은 요사와 종무소(宗務所), 공양간의 역
할을 하고 있다. 종무소는 건물 앞부분에 있는데, 신발을 벗고 툇마루를 거쳐 안으로 들어가
는 구조이며, 공양간은 서측에, 요사는 북측에 자리한다. 근래에 북측에 지붕을 덧붙여 내부
가 좀 넓어졌다.
정면 어칸에는 흥선대원군이 내린 '운수암' 현판이 있어 그와의 끈끈한 관계를 보여주며, 가
로 184cm, 세로 52cm 크기로 하얀 바탕에 푸른색으로 글씨를 썼다. 글씨체는 예서(隸書)로 3
개의 낙관이 뚜렷하다.


▲  대웅보전에서 바라본 대방 (정면에 보이는 문이 공양간임)

▲  삼성각에서 바라본 대방의 뒷모습

▲  흥선대원군이 쓴 푸른색 운수암 현판의 위엄
'庵'자가 저렇게 변할 수도 있구나. 글씨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듯
생기가 감돈다.

▲  비로전(왼쪽)과 삼성각(윗쪽)

▲  운수암 비로전(毘盧殿)

대웅보전 옆구리에는 비로전이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2번째로 늙은 건물인데, 건축 양식과 내부에 있었던 칠성탱과 산신탱이 1870년에 조성된 것으
로 보아 19세기 후반(1870년 또는 그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예전에는 대웅전의 역할을 했으며, 1980년대에 불단에 봉안된 석불(비로자나불)이 마모가 심
하고 깨진 부분이 많아 땅에 묻었다고 한다. 이후 1986년에 대웅보전이 신축되자 땅속에 파묻
은 석불을 다시 꺼내 이곳에 봉안하고 건물 이름을 비로전으로 바꾼 것으로 보이는데, 1986년
이면 40년도 채 되지 않는 지척의 시절임에도 이곳은 기록을 너무 남기지 않아 혼돈을 유발한
다.
불단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뒤에는 아미타회상도(아미타후
불탱)이 있으나 진품은 용주사 성보박물관에 가 있고 그 모조품이 대신 한다. 그 외에 현왕탱
과 신중탱이 걸려있고, 절을 세운 장씨 보살의 진영(眞影)이 걸려 있다.


▲  비로전 석조비로자나불좌상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202호

비로전의 주인인 비로자나불좌상은 고려 때 석불(石佛)로 왜정 말기에 다른 곳에서 가져왔다
고 전한다.
경내에서 가장 늙은 보물이자 옛 대웅전의 중심 불상으로 높이 107cm, 어깨 폭 82cm인데, 파
손된 부분이 많아서 1980년대에 땅속에 묻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1986년에 다시 꺼내 비
로전의 주인으로 삼았으며, 불상의 피부와 옷이 온통 하얀 것은 땅속에 묻힌 흔적과 이전에
파손된 부분을 커버하고자 백분을 발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얼굴이나 좀 고색의 때가 감돌지
나머지는 고색의 기운도 거의 잠들었다.
그는 1986년 안성시(당시는 안성군) 향토유적 16호의 지위를 얻었으나 2006년 경기도 지방유
형문화재로 지위가 높아졌으며, 연꽃과 구름 무늬가 새겨진 화강암 대좌(臺座)까지 갖추고 있
다.

불상의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히 솟아있고, 머리는 나발(螺髮)이다. 백분과 검
은색이 뒤섞여 고단해 보이는 얼굴은 통통한데, 눈과 코, 입, 귀가 선명하며, 귀는 목까지 늘
어져 중생의 소리를 경청한다. 목은 두껍고 삼도(三道)가 있었으나 훼손되었으며, 몸에 걸친
법의는 통견으로 옷 주름이 섬세히 표현되었다.
두 손은 비로자나불의 수인(手印)인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으며, 다리는 오른쪽 발을 올
려 결가부좌(結跏趺坐)하였는데, 정강이 부분에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수리한 부분이 많지만
조각솜씨는 괜찮은 편이며, 다소 경직되고 도식화된 형태를 통해 고려 때 불상으로 여겨진다.

석불 뒤에는 아미타후불탱이 걸려 있는데, 1870년에 흥선대원군의 시주로 제작된 것이다. 허
나 이 그림은 모조품으로 진품은 용주사 성보박물관에 가 있으며, 그림 화기(畵記)에는 왕과
왕비의 만수세(萬壽歲)를 기원하는 글과 대원군 일가, 명성황후(明成皇后) 일가의 시주자 명
단이 있어 운수암도 왕실 원찰(願刹)의 대우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화기에는 '高聖山 雲峀庵'이라 쓰여있어 이름은 같지만 지금과 한자(漢字)가 1글자씩 달랐음
을 보여주며, 제작시기에 대해서는 '大明 崇禎紀元後 五癸酉閏六月二十八日(대명 숭정기원후
오계유윤육월이십팔일) ~~'이라 쓰여 있어 오래전에 망한 명나라에 대한 쓸데없는 사대주의와
그리움이 여전했음을 보여주어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  현왕탱(現王幀)과 창건주 장씨 보살의 진영(오른쪽)

비로전 불단 옆에는 명부(冥府, 저승)의 왕인 현왕(現王)을 담은 현왕탱과 창건주 장씨 보살
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창건주의 진영은 언제 제작되었는지는 전하지 않으며, 그림 상단
측면에 '伽藍刱建大化主 淸信女 般若明 張氏 眞影(가람창건대화주 청신녀 반야명 장씨 진영)'
이라 쓰여 있고, 그 앞에 단을 마련해 창건주를 기린다.

▲  비로전을 지키는 호법신(護法神)들의
무리를 머금은 신중탱

▲  삼성각 산신탱

▲  삼성각 칠성탱

▲  삼성각 독성탱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삼성각은 198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이 봉안되어 있다. 그들은 삼성각이 있기 전에는 비로전에 얹혀 살았
는데, 이곳에 있던 산신탱과 칠성탱, 독성탱은 1870년에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조성된 것으
로 진품은 모두 용주사 성보박물관에 있고, 복제품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래서 그림이 꽤
선명도가 진하고 세월의 주름이 전혀 없다.



 

♠  무양성<舞陽城. 무한성(無限城)> - 안성시 향토유적 2호

▲  무한성의 북쪽 부분

조촐한 규모의 운수암을 둘러보고 절을 둘러싸고 있는 무한성(무양성)을 1바퀴 돌았다. 무한
성은 무한하다는 뜻의 성으로 성의 역사는 무한해도 규모는 그리 무한하지 못하다.
고성산 남쪽 산정(山頂)에 둥글게 닦여진 둘레 약 120m, 높이 2~4m에 조그만 퇴뫼식 산성으로
무양성(無陽城), 무양산성(舞陽山城), 무란성(舞鸞城) 등의 별칭을 지니고 있다. 무란성이란
이름은 힘이 장사인 '무란'이란 여인네가 쌓았다고 해서, 그리고 무양성은 '무양'이 운수암을
지키려는 용도로 축성했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이 산성은 언제 축성되었는지는 고성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
地勝覽)에 양성현(안성시 양성면) 남쪽 12리 지점에 있는데, 둘레 1,305척, 성 안에 못이 하
나 있다는 기록이 있고, 1899년에 제작된 양성읍지(陽城邑誌)에 '무한성 남단 아래 고성(古城
)이 있어 옛 고을터가 완연하다'
는 내용이 있다.
성 내부에는 건물터와 많은 기와파편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을 통해 막연히 삼국시대(백제 또
는 신라)에 닦여진 것으로 보이며, 고려 때 증축된 것으로 여겨진다.


▲  무한성에서 바라본 운수암

▲  무한성 서쪽 부분

무한성(무양산성)은 오랫동안 버려진 성이라 속세의 관심을 제대로 받지 못해 왕년의 위엄은
자연과 세월의 집요한 시비 앞에 거의 무너지고 말았다. 하여 지금은 남벽과 동벽, 내성벽,
성문터 등이 일부 남아있을 뿐인데, 아무리 옛 사람들이 철옹성처럼 만들었다고 해도 대자연
과 세월 앞에서는 한낱 모래성에 불과하다.

여름 제국의 뜨거운 햇살을 굴복시킬 정도로 나무와 수풀에 제대로 치여 성곽의 모습은 흐트
러졌지만 다행히 산성의 윤곽이 잘 남아있고, 성곽을 이루던 성돌도 여럿 남아있어 무한성의
존재감을 그런데로 확인할 수 있으며, 성이 들어앉은 지형은 대체로 경사가 각박해 성은 작지
만 요새지로는 아주 그만이다. 이곳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는 알기 어려우나 삼국시대에 조
성된 것이 맞다면 자기 밥값은 충분히 했을 것이며, 18세기에 운수암이 성내에 들어앉으면서
운수암을 지키는 소소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 무양성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방신리 산42


▲  무한성 서남쪽 부분

▲  숲길 같은 무한성 남쪽 부분

▲  경사가 각박한 무한성 남쪽 부분

▲  성문터로 여겨지는 부분

▲  무한성 남쪽 부분에서 바라본 천하 - 안성 공도읍 지역

▲  무한성 남쪽 부분에서 바라본 천하 - 독정저수지와 안성 원곡면 지역

▲  운수암을 뒤로하며 다시 속세로 ~~

무한성(무양산성)을 1바퀴 도니 다시 운수암이다. 무한성 성곽길은 운수암에서 시작해서 운수
암에서 끝나는 순환형 산길인 것이다.

다시 찾은 운수암에서 대방 툇마루에 걸터앉아 지금까지 고생한 두 다리를 어루만지며 땀을
씻었다. 솔솔 불어오는 고성산 산바람이 땀을 앗아가면서 몸도 좀 시원해진다. 기분 같아서는
산중에 묻힌 이곳에 며칠 신세를 지고 싶지만 그럴만한 처지도 되지 못해 쿨하게 작별을 고하
며 운수암을 나온다. 올라올 때는 무더위 때문에 힘들었지만 내려갈 때는 내리막과 초저녁 기
운의 탄력을 받아 금세 운수암입구 방신1리 정류장에 이른다.

여기서 공도와 평택을 거쳐 나의 제자리로 돌아오려고 햇으나 그러면 너무 돌아가는 것이 되
어 다시 양성으로 나왔다. 다행히 버스가 10분 만에 와서 무난히 양성까지 왔으나 용인으로
가는 용인시내버스 22-1번이 무려 40여 분 만에 오면서 다시금 환승할인이 깨져 가게 부담을
가중시키는 비운을 겪었다. 어떻게 같은 곳에서 2번 연속 그런 고통이 생기는 것인지 여기가
그만큼 벽지 비슷한 곳이라는 뜻일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여름 안성 운수암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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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2년 8월 1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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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맞춤의 고장, 안성 죽산 나들이 ~~~ 태평미륵(매산리석불입상), 죽주산성, 비봉산

안성 죽산 나들이 (매산리 석불입상, 죽주산성)



' 안성 죽산 나들이 (매산리 석불입상, 죽주산성) '
죽주산성
▲  힘차게 뻗은 죽주산성


 

새해가 밝은지 정말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겨울과 봄의 팽팽한 경계선인 3월 한복판에 이
르렀다.
올해 유난히도 혹독했던 겨울 제국(帝國)은 봄의 해방군에게 밀려 소멸 직전까지 가는 듯
싶었으나 제국의 부흥을 꿈꾸는 겨울의 잔여 세력들이 도처에서 꽃샘추위를 일으켜 시간
이 다시 1~2월로 돌아가는 듯 했다. 이렇게 꽃샘추위의 패기가 잠시 대단했던 시기에 안
성마춤(안성맞춤)의 고장으로 오랫동안 추앙받고 있는 경기도 안성(安城)으로 짧은 여정
을 떠났다.

점심을 간단히 섭취하고 집 부근 방학역에서 1호선 전철을 타고 2시간 이상을 달려 평택
역에 두 발을 내렸다. 평택역은 경기도 최남단을 장식하고 있는 평택시(平澤市)의 관문으
로 역 남쪽에 있는 평택시외터미널로 이동하여 안성시내버스 370번(평택터미널↔일죽)에
몸을 실어 안성 땅으로 들어갔다.
원래는 안성 남쪽 끝에 자리한 청룡사(靑龍寺)에 가려고 했으나 차 시간이 영 맞지 않아
서 청룡사를 흔쾌히 포기하고 안성시내를 가로질러 죽산(竹山)까지 쭉 이동했다. 죽산에
서 봉업사지(奉業寺址) 5층석탑과 태평미륵, 죽주산성을 보고자 함이다.

죽산에 이르러 제일 먼저 봉업사지5층석탑(보물 435호)을 보려고 했으나 잠깐의 방심으로
한 정거장을 지나쳐 거리가 제법 멀어졌다. 게다가 시간도 17시가 넘어 해가 깔딱하기 직
전이다. 하여 봉업사지는 포기하고 바로 매산리로 들어가 태평미륵을 찾았다. 태평미륵은
죽산에서 용인으로 가는 국도변에 있어 찾기는 매우 쉽다.


▲  태평미륵(매산리 석불입상)의 조촐한 거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태평미륵과 5층석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문의 높이가 조금 낮으므로 키가 큰 사람은 자존심을 곱게 접고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뒷탈이 없다.



 

♠  태평미륵이라 불리는 고려 초기 석불, 매산리 석불입상(梅山里石佛立像)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37호

세상에서는 안성을 안성마춤(안성맞춤)의 고장이라고 부른다. 허나 혹자(或者)는 미륵불의 고
장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안성에 유난히도 미륵불(彌勒佛)이라 불리는 석불이 많기 때문
이다. 이번에 문을 두드린 매산리 석불입상은 안성을 수식하는 주요 미륵불로 오랫동안 태평
미륵(太平彌勒)이란 이름으로 지역 사람들의 숭상을 받았다.

태평미륵은 고려 초에 조성된 석불로 높이가 5.6m에 이르러 안성 지역 미륵불 가운데 가장 키
가 크다. 그의 조촐한 안식처인 미륵당(彌勒堂)도 그의 키에 맞추다 보니 자연히 높이가 올라
가 대략 7m정도 되며, 미륵당이란 이름도 태평미륵의 거처란 뜻에서 생긴 것으로 마을 이름도
미륵당이고 인근 버스정류장 이름도 미륵당이다.


▲  네모난 기단 위에 자리한 태평미륵의 위엄

석불은 제법 높은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데, 보관 밑부분에는 온갖 문양이 새겨져 있고, 네
모난 보관 윗부분에는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세월의 때가 가득 끼어있어 중후한 멋을
보인다. 근래 세수를 한 듯 보관에 비해 조금은 하얀 얼굴은 길고 넓적한 편이며, 볼살이 좀
있어 보인다.
눈썹과 굳게 감긴 눈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선의 미를 더해주며, 두 눈썹 사이로 백호
가 하얗게 남아있다. 코는 끝부분이 오목하고, 입은 다물어져 있는데, 코와 입이 지나치게 작
고 눈 또한 지나치게 커서 균형이 떨어지며, 삼도(三道)가 그어진 목도 지나치게 비대하다.

몸통은 얼굴에 비해 그리 큰 편은 아니다. 보관을 포함한 얼굴 부분이 몸통의 거의 40%를 잡
아먹기 때문이다. 너무 없어보이는 어깨는 둥글게 내려가 있는데, 왼쪽 어깨를 감싼 옷은 두
껍게 표현되었으며, 하체에는 계단식으로 처리된 U자형의 옷주름이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가
슴 앞에 대고 있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한 듯 싶으며, 손가락을 모두 구부렸다. 왼손은
배 위에 대고 있으며, 양 손목에는 2중으로 된 팔찌를 차고 있다. 몸통을 받치는 두 다리는
꼿꼿하게 서 있으며, 다소 육중하지만 다리 표현은 분명하여 알아보는데 그리 지장은 없다.


▲  태평미륵의 얼굴과 보관

▲  태평미륵의 뒷통수와 보관

▲  태평미륵의 가슴 부분과 손

고려 때 조성된 석불은 유난히 덩치가 크고 각기 제각각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논산 관촉사(
灌燭寺)의 은진미륵(恩津彌勒)처럼 키와 덩치가 대단한 석불도 부지기수이며, 개성이 넘치고
흥미진진한 모습으로 중생들의 인기를 모은다. 그 시절 유난히 커다란 석불과 지역색이 강한
석불이 많은 등장한 것은 지방 세력과 부호(富豪)들이 집안의 안녕을 빌고 자신의 세력을 과
시하려는 차원에서 앞다투어 그런 것이며, 지역 석공(石工)들이 주로 석불을 다듬다 보니 투
박하고 거칠고 조금은 부족해 보이는 토속적인 석불이 많이 나왔다.
안성 지역에 널린 미륵불도 대부분 고려 때 것으로 태평미륵 또한 죽산 지역 세력이나 부호가
장만한 것이다. 처음부터 미륵불은 아니었던 듯 싶으며, 미륵신앙(彌勒信仰)이 크게 대두되면
서 지역 백성들에 의해 미륵불로 숭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태평미륵은 논산 개태사(開泰寺) 석불입상이나 충주 미륵리사지 석불처럼 고려 초기를 대표하
는 석조보살상으로 인정되어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미륵당5층석탑 - 안성시 향토유적 20호

미륵불 앞에는 납작한 석탑 하나가 우두커니 자리잡고 있다. 겉으로 보면 3층석탑인데 안내문
에는 5층석탑이라 나와있다.
이 탑은 고려 초인 993년에 조성된 것으로 탑의 조성 시기를 알려주는 탑지석(塔誌石)이 나와
고맙게도 그의 탄생시기를 알려주고 있다. 그 탑지석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가 있으며, 태
평미륵과 한 덩어리처럼 보이나 그는 인근에서 옮겨온 것이라 태평미륵과는 관련이 1도 없다.

고려 때 흔하게 보이는 석탑과 달리 기단(基壇)이 1층으로 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며, 바닥돌과
기단부, 1층 탑신(塔身)까지는 온전하게 남아있으나 2층과 3층, 4층은 탑신은 사라지고 지붕
돌만 애처롭게 남아있고, 5층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완전히 사라졌다. 지붕돌은 귀퉁
이가 좀 상한 것 빼고는 거의 멀쩡하다.
탑에는 고된 세월의 때가 가득해 고색의 멋을 드러내고 있으며, 높이는 1.9m에 불과하나 탑신
이 온전하게 남았더라면 가히 5m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 매산리 석불입상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365-3 (미륵당길 32)



 

♠  죽산을 지키던 오랜 갑주이자 1236년 몽골군을 때려잡았던
전승의 현장, 죽주산성(竹州山城) - 경기도 지방기념물 69호

▲  죽주산성 남치성(南雉城)

태평미륵을 친견하고 차량들이 쌩쌩 바퀴를 굴리는 17번 국도를 따라 북쪽(용인 방면)으로 10
분 정도 가면 죽주산성을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을 한다. 그의 지시에 따라 왼쪽의 완만한 산
길을 오르면 한자로 된 죽주산성 표석이 나오고, 몇 굽이를 더 오르면 죽주산성 안내문과 비
봉산 안내도가 있는 너른 공간이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북쪽)에는 근래에 세워진 성은사(聖
恩寺)란 작은 절이 있고, 왼쪽에 산으로 오르는 조금은 각박한 길을 2분 정도 임하면 죽주산
성 동문이 모습을 비춘다.
산성 입구에서 동문까지 계속 오르막길이라 10분 정도 걸리며 길이 포장되어 있어 차량 접근
도 용이하다.


▲  윗도리는 사라지고 아랫도리만 남은 죽주산성 동문(東門)
동문은 윗도리인 문루(門樓)는 없고, 아랫도리인 성곽과 홍예만 남아있어
대머리처럼 허전한 모습이다.


비봉산(飛鳳山, 369m) 동쪽 자락에 둥지를 튼 죽주산성은 신라 후기에 축성된 것으로 외성(外
城)의 둘레가 1,688m, 높이는 2.5m~5m에 이른다. 돌로 튼튼하게 다진 산성(山城)으로 성 내부
중앙에는 1,500m 길이의 내성(內城)과 270m 길이의 중성(中城)을 두어 방어력을 한층 높였다.

죽주산성 남쪽에는 죽산 고을이 있는데, 지금은 안성시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신라 말부터 조
선시대까지 안성을 능가하는 큰 고을로 죽주(竹州)라 불리기도 했다. 산성의 이름은 바로 죽
주에서 비롯된 것으로 죽산 고을의 중심지로 여겨지기도 한다.
신라가 내리막을 타던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887~897) 시절에 기훤(箕萱)이 반란을 일으켜
이 성을 접수해 세력을 키웠으며, 후고구려(後高句麗)를 세운 궁예(弓裔)가 그의 밑에 들어가
잠시 일하기도 했다.

▲  동문 남쪽 성벽

▲  동문 안쪽

고려 때는 성을 수리하여 관리한 것으로 보이며, 1236년 몽골(원나라)의 3번째 고려 침공 때
몽골군의 공격을 받았다. 그때 죽주산성을 지켰던 장수는 죽주방호별감(竹州防護別監)인 송문
주(宋文胄)로 일찍이 1231년 몽골의 1차 공격 때 귀주성<貴州省, 평북 구성시(龜城市)>에서
박서(朴犀)를 도와 몽골군을 크게 때려잡았던 인물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귀주성 싸움을 간
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고려가 몽골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1218년 서경(西京, 평양) 근처인 강동성(江東城) 전투였다.
신라 왕족과 고려 사람, 발해 유민,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에게 털린 거란족의 잔당들이
몽골과 동진국(東眞國) 연합군에게 쫓겨 고려 땅으로 침투해 강동성을 점거하자 당시 고려의
실권자인 최충헌(崔忠獻)은 김취려(金就礪)를 보내 몽골+동진국 연합군과 강동성을 탈환하고
거란 잔당을 토벌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몽골의 강요로 형제국 동맹을 맺었으나 힘만 앞세운 몽골의 무식한 오만함
과 무리한 공물(貢物) 요구에 고려는 그야말로 진절머리가 났다. 심지어는 몽골의 사신이 고
려 제왕의 어좌(御座) 바로 옆까지 가서 국서(國書)를 주는 무례까지 범하는 등, 고려와 몽골
의 관계는 나날이 악화되었다.
그런 와중에 1225년 몽골 사신인 저고여(著古與)가 압록강(鴨綠江) 부근에서 의문의 개죽음을
당하자 몽골은 크게 발작하여 고려의 만행이라 규정했다. 그리고 군사를 꾸려 그 유명한 살리
타이를 총대장으로 삼아 1231년 고려를 공격하니 그 지긋지긋한 반백년의 고려 vs 몽골 전쟁
의 서막이 열린다.

▲  남치성 부근 성곽

▲  내성 북쪽

압록강을 건넌 몽골군은 순식간에 고려의 북계(北界, 평안북도) 몇몇 도시를 점령했다. 허나
정주(定州)와 서경(西京)을 점령하지 못해 북계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고 고려군의 무력 또
한 만만치가 않아 몽골군은 크게 고전을 하게 된다. 절치부심에 빠진 살리타이는 든 것도 없
는 머리통을 열심히 굴려 북계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귀주성을 공격해 전세를 만회하기로 했
다.

몽골군이 철주성(鐵州城, 평북 철산군)을 점령하고 귀주를 공격하려하자 주변 지역의 고려 장
수와 군사들, 백성들이 귀주성으로 쏙쏙 모여 결전을 준비했다. 귀주성에는 서북면병마사(西
北面兵馬使)인 박서(朴犀)와 부하 장수인 송문주가 지키고 있었다.
귀주성에 당도한 몽골군은 항복 권고 한마디도 없이 바로 공성전(攻城戰)에 들어갔다. 귀주성
은 산자락에 자리한 탓에 공격이 쉽지 않은데, 단순한 살리타이는 단지 머릿수만 믿고 군사를
나눠 쉬지 않고 돌리면서 공격했다. 그렇게 고려군을 지치게 만들어 나중에 한꺼번에 들이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성을 오르기도 전에 고려군의 화살비에 많은 군사가 죽어나갔다.
이렇게 몽골군이 고전하는 틈을 노려 김경손(金慶孫)이 12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성밖으로 나
가 적군을 무수히 죽였으며, 검은 말을 타고 있던 적장을 화살로 쏘아 죽이자 몽골군은 전의
를 잃고 바로 줄행랑을 쳐버렸다.

1차 공성전에서 단단히 개망신을 당한 살리타이는 잠시 작전을 바꾸어 항복한 위주부사(渭州
副使) 박문창(朴文昌)을 보내 항복을 권했다. 허나 박서는 '어찌 오랑캐에게 항복을 한단 말
이냐. 너도 고려의 신하이거늘 자존심도 없냐!'
답을 하고 그 자리에서 박문창을 죽여 그 목
을 몽골군에게 보냈다.
뚜껑이 단단히 폭발한 살리타이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성을 공격했는데 이번에는 방패차
와 성문을 부시는 충차(衝車)를 앞세워 성문을 집중공격했다. 허나 성이 산자락이고 성 북쪽
과 동쪽에 동문천(東門川)이 흐르면서 행군은 느릴 수 밖에 없었다. 겨우 하천을 건너 성문
앞에 이르렀으나 고려군이 불화살과 큰 돌을 날려 보내면서 충차와 방패차는 산산이 박살이
나고 몽골군은 죄다 사지가 헝클어진 귀신이 되고 말았다.

다시 개망신을 당한 살리타이는 이번에는 성 밑에 굴을 파고 침투하는 방법을 썼다. 이 작전
에는 '두거'라는 물을 먹인 소가죽을 쓴 이동식 상자와 두거 보호용 누차(樓車)를 보냈는데,
고려군은 용광로에 쇠를 녹여 쇳물을 통에 담아 누차를 향해 마구 던졌다. 쇳물을 뒤집어쓴
누차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이면서 누차에 탄 몽골군은 죄다 즉석 통구이가 되었다.
또한 몽골군이 판 갱도에 군사를 보내 굴을 떠받치던 목재 버팀목을 불태우면서 갱도가 무너
져 삽질을 하던 몽골군도 죄다 생매장을 당했다. 그리고 날카로운 가시가 있는 나무를 모아
띠로 묶은 다음 불을 붙여 두거 위로 던졌다. 가시나무 가지가 두거에 그대로 박히면서 계속
타오르니 아무리 물을 먹인 소가죽도 소용이 없었고, 그대로 불이 옮겨타면서 작전에 임한 몽
골군은 그대로 폐기처분되고 만다.

▲  서문터 북쪽 성곽

▲  내성(內城)

이렇게 30일 이상 처절하게 공격을 퍼부었지만 귀주성은 건재했다. 기가 확 질러버린 몽골군
은 인근에 있던 군사들까지 싹 소환해 30여 대의 포차(砲車)를 급히 마련하여 다시 성을 공격
했다.
포차가 무수히 돌덩어리를 날리니 성곽 곳곳에 금이 가고 성내(城內)의 건물도 적지 않게 피
해를 입었다. 성벽의 무너진 틈새를 이용해 몽골군이 기들어오려 했으나 그 앞에 검차(檢車)
를 설치해 적군을 쫓아냈다. 그리고 무너진 틈을 쇠사슬을 엮어서 막았다.

몽골군의 끊임없는 공격에 단단하던 귀주성의 성벽도 슬슬 지쳐 내려앉기 시작했다. 하여 박
서는 정예병을 뽑아 성 밖으로 보내 몽골군을 공격했다. 고려군의 기습에 몽골군은 적지 않게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가 되었고, 혼란한 틈을 타 박서가 포차공격을 퍼부으니 그들은 목을 붙
잡고 후퇴했다.

단단히 똥줄을 탄 살리타이는 항복한 고려 왕족의 서신을 이용해 제발 투항좀 해주십사 부탁
을 했으나 박서는 살리타이의 사신을 내쫓았다. 이에 다시 발작한 살리타이는 운제(雲梯) 등
의 공성무기를 모두 동원해 공격에 들어갔다. 허나 고려는 운제 사다리를 파괴하고자 자물쇠
의 걸쇠 모양으로 구부러진 크고 무거운 칼 대우포를 개발해 비치한 상태였다. 대우포의 공격
에 운제는 죄다 박살이 났고, 사다리에 올라탄 몽고군은 목 없는 귀신이 되었다.

천하 최강의 깡패 나라로 악명을 날린 몽골군은 그보다 더 독한 귀주성 앞에 형편없이 꼬랑지
를 내렸고, 결국 공격 1달 만에 공격을 멈추었다. 또한 개경(開京)을 점령하고 돌아오는 몽골
군까지 격파되면서 몽골군의 간이 완전 쫄깃해졌다.
하지만 귀주성과 정반대의 상황이던 고려 조정은 개경이 함락된 휴유증에 몽골과 화의(和議)
를 맺었고, 당시 고려 군주인 고종(高宗)이 지병마사(知兵馬使) 최임수()를 보내 항복
을 종용하는 칙서(勅書)를 전하니 박서는 분을 삼키며 어쩔 수 없이 창칼을 내던지고 몽골군
에게 항복하고 만다.
자신들의 힘이 아닌 고려 군주의 칙명으로 어거지로 귀주성의 항복을 받은 몽골군은 씁쓸한
마음을 금치 못하며 막대한 피해를 입은 채 철수했는데, 당시 전쟁에 참여한 몽골 장수는 이
런 말을 남겼다.
'나는 소년 시절부터 군에 있으면서 천하 곳곳의 성지(城地)에 대한 공성전을 무수히 보았지
만 이처럼 지독한 공격을 당하면서도 항복하지 않은 성을 본 일이 없다. 이 성을 지킨 장수들
은 훗날 모두 장상(將相)이 될 것이다'
역사에 전하지는 않지만 박서도 아마 몽골군에게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내가 전쟁터에서 늙었지만 너희처럼 징글징글한 오랑캐는 처음이다. 너희들도 고생 많았다'

귀주성대첩 이후 박서는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로 승진을 했고
송문주는 낭장(郎將)으로 특진되었다가 몇 년 뒤 죽주방호별감이 되어 죽주를 지키게 되었다.

1236년 몽골군이 다시 고려를 침범해 죽산 인근에 이르자, 송문주는 백성을 이끌고 죽주산성
으로 들어갔다. 전에 귀주성에서 송문주에게 혹독하게 당한 몽골군은 그의 이름 3자에 잠시
염통이 쫄깃해져 서둘러 항복을 권했으나 거절당하자 포를 쏘면서 맹렬히 성을 공격했다.
성문이 부서지는 피해가 있었지만 고려군도 바로 포로 응수하면서 적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
혔고, 몽골군은 짚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화공(火攻)을 펼쳤으나 송문주는 성문을 열고 그
들을 기습해 수천의 몽골군을 고깃덩어리로 만들었다. 다시 한번 귀주성의 영웅에게 제대로
털린 몽골군은 공격 15일 만에 목을 붙잡고 줄행랑을 쳤다.

▲  송문주 장군의 사당인 충의사

▲  북치성(北雉城), 포루(砲樓)

송문주는 귀주성에서 몽골군을 질리도록 경험하여 그들의 전법을 꿰뚫고 있었다. 그리하여 효
과적으로 대응을 할 수 있었고, 다시 빛나는 승리를 취하게 된 것이다. 죽산 백성들은 그런
그를 '귀신','신명(神明)'이라 부르며 존경했으며, 그 공으로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이 되었
다. 또한 백성들은 그를 기리고자 성 안에 사당을 지어 매년 제사를 올렸다.
참고로 박서는 죽산박씨(竹山朴氏)로 죽산이 고향이다. 바로 그 죽주산성에서 그의 부하장수
였던 송문주가 몽골군을 격퇴했으니 이것도 참 인연인가 보다. 몽골 애들 입장에서는 지독한
곳에서 지독한 적장과 적군을 만나 허벌나게 개고생을 한 것이다.

조선시대로 들어와서는 충청도의 주요 고을인 청주(淸州)와 충주(忠州)에서 서울로 통하는 요
충지라 애지중지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잠시 점거했으나 황진(黃進)이 기습작전으로
탈환하면서 왜군은 더 이상 용인과 이천 지역을 넘보지 못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시절에는 남한산성(南漢山城)을 구하고자 지방에서 올라온 군사들
이 진을 쳤으나 인조(仁祖)가 삼전도(三田渡)에서 머리를 박고 항복하자 분을 삼키며 철수했
다.

조선 후기에는 조정의 무관심과 관리소홀로 방치되어 나무로 다진 문루 등의 건물은 사라지고
견고한 성곽만 남게 되었다. 성곽 대부분이 남아있으나 외성 북부와 중성은 거의 주저앉았고,
외성 남부와 내성도 곳곳이 벗겨지거나 무너져 아픈 속살을 드러냈으나 2006년 이후 보수공사
를 벌여 외성 남쪽과 내성, 치성(雉城)을 손질해 왕년의 위엄을 조금은 되찾았다.

산성에는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으며, 그 외에 성문터 3~4개가 더 있다. 남쪽 끝과 북
쪽 끝에는 치성(남치성, 북치성)을 두었고 외성 북쪽에도 조그만 치성을 3개 정도 만들어 수
비력을 드높였으며, 남치성에는 장대(將臺)터가 아련히 남아있고, 북치성에는 포루(砲樓)터가
있다. 우물은 2개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현재 약수터로 쓰인다. 또한 남문 밖에는 도랑을 판
자리가 있어 조촐하게 해자(垓子)를 두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성 내부는 분지(盆地)로 북쪽
과 남쪽을 제외하고는 지형이 평탄해 군사시설과 집이 있었을 것이다. 현재는 송문주 장군의
사당인 충의사와 절 건물로 쓰이는 집 몇 동이 있다.

죽주산성과 비봉산은 근래에 등산로를 정비하면서 이정표와 안내문을 설치했으며, 비봉산 정
상을 거쳐 삼죽면이나 죽산리로 내려가도 된다. 산성은 외성 남쪽과 내성 북쪽을 돈다면 대략
30~40분 정도 걸리며, 아직 복원되지 않은 외성 북쪽까지 모두 돌 경우에는 2시간이 넘는다.


▲  죽주산성 안내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음)

안성의 주요 명소이자 대몽항쟁의 승전지로 의미가 깊은 곳이지만 이리저리 헝클어진 모습을
보면 인간의 창조물은 대자연 앞에서는 그저 허술한 모래성임을 뼛속 깊이 느끼게 될 것이다.
근래에 복원을 하였지만 고색의 때가 자욱한 옛돌과 하얀 피부의 새돌이 어색한 조화를 이루
고 있으니 한참의 시간을 흘려보내야 서로가 조화를 이룰 것이다.

남치성에 이르면 죽산면 중심지(죽산리)가 두 눈에 바라보이고, 북치성에는 백암 지역이 시야
에 들어와 조망이 일품이며, 평택과 충주, 청주로 통하는 길목에 가파른 곳에 의지해 자리해
있어 천하의 요새임을 실감할 것이다.

* 죽주산성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산105-1, 106


 

♠  죽주산성 둘러보기 (충의사, 남치성, 서문, 북문)

▲  산성 안 풍경 (동문에서 바라본 모습)

동문을 들어서면 포근하게 분지 지형을 이룬 산성 내부가 조촐하게 펼쳐진다. 바로 정면에는
잡초가 무성한 초지(草地)인데, 이 일대에는 군사시설과 창고(倉庫), 집들이 있었을 것이다.
초지 너머로 집들이 띄엄띄엄 간격을 두고 있는데, 가장 왼쪽에 어렴풋이 보이는 기와집이
송문주 장군 사당인 충의사이다.


▲  죽주산성에 유일한 약수터 (죽주산성약수터)

산성이 축성된 신라 후기부터 있던 것으로 여겨지는 샘터로 오랫동안 이곳의 목을 축여준 소
중한 샘이다. 1236년 송문주가 이끈 군사와 백성들도 저 물을 먹고 몽골군을 때려잡았으니 이
곳을 지킨 고려 사람들의 힘을 무한대로 솟게 만든 신비의 영천(靈泉)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탐방객과 인근 주민들이 마시는 그저 흔한 약수로 특별한 맛은 없으며, 성내에는 우물이 2개
가 있었는데, 지금은 이 약수터만 남았다.


▲  누런 잡초로 가득한 동문 안쪽 초지 (약수터에서 바라본 모습)
바로 이곳에 군사시설과 백성과 군사들의 집이 있었을 것이다. 장대한 세월에
푹 파묻힌 이곳을 똑똑 깨우면 죽주산성의 숨겨진 많은 것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  송문주 장군 사당(충의사)으로 인도하는 오솔길
푸른 갑주를 입은 소나무들이 길 양쪽에 2열로 늘어서 사당 손님들을 마중한다.
혹 송문주 장군의 병사들이나 그를 존경하던 백성들의 혼이 소나무로
부활한 것은 아닐까?

▲  송문주 장군의 사당인 충의사(忠義祠)

성내 서쪽 산자락에 송문주 장군의 사당인 충의사가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돌로 터를
다지고 그 위에 지은 조그만 맞배지붕 집으로 아래를 향해 돌계단을 늘어뜨렸다.
이 사당은 죽산 백성들이 송문주를 기리고자 세운 것으로 백성들은 그를 귀신, 신명이라 부르
며 존경을 표했다. 그리고 나중에 사당까지 손수 지어 그를 길이길이 추모했다.

사당의 조성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송문주가 세상을 뜬 13세기 말 이후로 보이며, 처음에는
조그만 영당(影堂)으로 여러 차례 보수를 했다가 근래에 지금의 건물로 업그레이드되면서 충
의사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전남 여수(麗水)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타루비(墮淚碑)처럼 백성과 군사들이 송문주의 공덕을
기리고자 세운 백성들의 정이 서린 의미 깊은 사당으로 오늘날 저런 사당을 지어 추모할 위정
자(爲政者)가 없음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  숲속에 자리한 충의사 - 바로 뒤쪽에 내성 남쪽 성곽이 있다.

▲  산비탈에 의지해 닦여진 서남쪽 성곽

▲  중간에 잠시 길을 접은 남치성(南雉城)
성곽이 약간 비스듬히 쌓였는데, 이는 고구려 축성술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런 축성 양식을 들여쌓기라고 한다.

▲  남치성 장대(將臺)터

산성 서남쪽을 이루는 남치성에는 장대터가 있다. 이곳에 올라서면 안성의 서부 지역인 죽산
과 일죽 일대가 두 눈에 훤히 바라보여 조망이 일품이며, 지금은 성을 지키고 산불을 감시하
는 조그만 초소가 이곳을 지킨다.


▲  남치성에서 바라본 죽산 일대 (멀리 보이는 산은 도덕산)

▲  남치성에서 바라본 일죽 일대

▲  죽주산성 남문(南門)
남문 앞에 도랑을 둔 흔적이 있어 해자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안그래도
오르기 힘든 산비탈인데, 성 앞에 해자까지 두었으니 어찌 적들이
쉽게 점령할 수 있겠는가.

▲  끊김이 없이 힘차게 질주하는 산성 서남부 성곽 (남치성에서 본 모습)

▲  저렇게 보잘것 없는 자연석들이 모여 견고한 죽주산성이 탄생했다.
사람이나 동물, 사물은 어디에 있고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가치와 팔자가 달라진다.

▲  유연한 곡선을 자랑하는 서쪽 성곽
성곽에는 여장 등의 안전시설이 없고, 성곽길을 이루는 돌도 거칠고 모가 많아서
걷는데 반드시 주의해야 된다. 가급적이면 흙과 성돌 사이 부분으로
걷거나 안쪽 흙길로 걷는 것이 좋다.

▲  외성과 내성이 갈리는 서문(西門)

완만하게 오르막길을 형성하던 성곽길은 서문을 코앞에 두고 갑자기 내리막을 이룬다. 내리막
을 이루기 전인 서문 남쪽이 죽주산성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그 내리막의 끝에 커다
란 장대석을 머리에 인 서문이 있다. 서문에서 성곽은 2갈래로 갈리는데, 서문을 지나 북쪽으
로 흐르는 성곽은 죽주산성의 본성인 외성이고, 서문 남쪽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는 성곽이 내
성이다.


▲  죽주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인 서문 남쪽 부분

▲  서문에서 바라본 비봉산

▲  뼈대만 남은 서문 안쪽

▲  서문 바깥쪽

서문의 높이는 문의 높이는 2m 정도로 비봉산 정상이나 죽산으로 가려면 이 문을 이용하면 된
다.


▲  서문 동쪽으로 흘러내려가는 내성

▲  서문 북쪽 성곽

성곽을 이루는 성돌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애환과 사연이 차곡차곡 깃들여져 있다. 산성
축성에 동원된 백성들의 애환부터 신라 후기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이곳에 웅거한 지방 세력
의 사연, 성을 지키던 병사들의 애환과 장수들의 꿈, 1236년 피를 흘리며 이곳을 지킨 고려군
과 백성들의 함성, 그때 전사힌 이의 원통한 넋, 이곳에서 고깃덩어리가 되어 지옥으로 떨어
진 몽골군의 넋까지, 그 모든 것이 함축적으로 깃들여져 산성의 경력과 가치를 드높인다.


▲  자연과 세월에 의해 헝클어진 서문 북쪽 성곽(외성 북부) ▼

외성 북부는 서문 구간을 제외하면 거의 헝클어진 채, 간신히 산성의 윤곽만 남아있다. 이곳
성곽의 높이는 2m 정도로 성곽을 이루던 성돌은 뒤죽박죽이 되었고 그러다보니 성곽길도 거칠
어져 이동하기가 쉽지가 않다. 아직 여기까지는 복원의 손길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외성 북부에는 서치성(西雉城)과 동치성(東雉城) 2개가 있으며, 외성 북문터와 수구(水口)터
등이 있다. 성곽길이 별로 좋지 못하고 급내리막길이라 조금만 가다가 바로 서문으로 돌아왔
다.


▲  남쪽으로 90도 꺾은 내성 - 숲 너머에 보이는 성도 내성임

▲  내성 (내성 북문 부근) - 내성은 높이가 2m 정도이다.

▲  내성 북문~북치성 구간은 성곽길을 동네 담장마냥 시멘트로 발라버려
적지 않은 옥의 티를 보인다. 저럴거면 복원의 의미가 없지 않는가.

▲  내성 북문(北門) - 서문과 비슷한 구조이다.


 

♠  죽주산성 마무리 (북치성 주변)

▲  북치성(北雉城) 포대와 겨울에 잠긴 나무 1그루

죽주산성의 동북쪽 끝으머리에는 세상을 향해 고개를 내민 북치성이 있다. 이곳은 서문에서
갈라진 내성과 외성이 다시 만나는 곳으로 내성의 동쪽 종점이기도 한데 가파른 곳에 자리한
남치성과 달리 평탄하고 너른 공간으로 돌로 쌓은 포대와 커다란 나무 1그루가 북치성을 지킨
다.
시야가 확 트인 이곳에 올라서면 안성 죽산면/일죽면 북부 지역을 비롯해 용인 백암면 지역이
바라보여 조망이 좋아 전략적 요충지임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북치성 끝부분에 마련된 포대는 돌을 던지거나 화포(火砲)를 쏘는 대포나 무기를 비치한 곳으
로 1236년에 이곳에서 적군을 향해 무수히 돌을 날려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후 이곳에서는
전쟁이 벌어진 일이 없어 그냥 겉모습만 남아있다가 거친 세월의 흐름 속에 거의 떠내려가면
서 포대의 일부만 남아있던 것을 지금의 모습으로 손질했다.


▲  북치성 포대

▲  포대 가운데 부분

포대는 'ㄷ'자 모습으로 높이는 1m 정도이며,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끔 그 석축 안에 돌을 날
려보내는 무기를 엄폐시켜 전쟁 때 요긴하게 써먹었다.
포대를 이루고 있는 돌은 주변에서 가져온 큰 돌을 네모나게 다듬은 것으로 석축 밑도리에 동
그란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는 성 밑을 바라보는 용도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포대의 위치가
북치성 끝부분이라 전쟁이 한참일 경우에는 석축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전방을 확인하기에는
위험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또한 포대 정중앙에 주춧돌처럼 놓인 돌은 돌을 날리는 무기를 두
었던 곳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 널린 오래된 산성과 석성(石城) 가운데, 이렇게 포대까지 갖춘 성은 거의 흔치가
않다. 강화도(江華島)를 비롯한 서해바다 쪽에 포대를 둔 성이 많지만 이들은 바다에 설치된
화포용 요새이다.


▲  북치성에서 바라본 천하 - 죽산면과 일죽면 북부 지역과 용인 백암면

▲  북치성에서 동문으로 이어지는 동쪽 성곽
서쪽 성곽과 달리 경사가 좀 완만하여 길이 부드럽다.

▲  동문 북쪽 성곽

동문 주변은 자연과 세월에 의해 가루가 되거나 뭉개진 성돌이 많아 하얀 피부의 새 성돌을
많이 입혀 복원했다. 그러다보니 늙은 성돌과 새 성돌이 어색한 조화를 보인다. 하지만 어쩌
겠는가. 늙은 성돌이 많이 사라져 상황이 여의치가 않은 것을 말이다.

동문을 시작으로 죽주산성을 1바퀴 둘러보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니 시간은 어느덧 19시가
되었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어느 정도 어두워진 상태였다. 서쪽으로 지는 해를 억지로 잡
아가면서 동문을 들어선 것이 17시 20분이었으니 1시간 30분 동안 둘러본 셈이다. 물론 서문
북쪽인 외성 북부는 조금 가다가 말았지만 거긴 성벽 상태가 영 좋지 못해 그런 것이니 거의
80%는 본 것이나 다름이 없다.

동문을 나와 다시 속세로 내려가니 세상은 비로소 완연한 검정 도화지가 되었다. 상경(上京)
코스를 어떻게 잡을까 머리를 굴리다가 백암에서 저녁을 먹고 용인(龍仁)을 거쳐 올라가기로
했다. 하여 죽주산성 정류장에서 용인시내버스 10-1번을 타고 백암으로 넘어가 저녁으로 백암
의 명물인 백암순대국밥을 섭취했다.
백암 계통의 순대국은 처음 먹어보는데, 내장은 적으면서 고기와 순대 덩어리가 많아 비린내
도 거의 없고, 담백하고 얼큰하여 1그릇을 뚝딱 빈 그릇으로 만들었다. 뜨끈한 국물에 졸음이
몰려와 나를 희롱하니 서비스로 제공되는 커피를 마시며 졸음을 단죄한다. 이렇게 저녁을 먹
고 장거리를 이동하여 집에 들어오니 거의 자정~~

이렇게 하여 꽃샘추위 속에 찾아간 안성 죽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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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3월 2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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