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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9.15 둘레길의 정석을 거닐다.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마실길~구름정원길 나들이 (백화사, 마실길 느티나무, 화의군 이영묘역, 폭포동계곡)
  2. 2017.10.11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상이 깃들여진 첩첩한 산골의 절집, 북한산 삼천사 ~~~ (삼천사계곡)

둘레길의 정석을 거닐다.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마실길~구름정원길 나들이 (백화사, 마실길 느티나무, 화의군 이영묘역, 폭포동계곡)

 


'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마실길~구름정원길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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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실길에서 만난 은행나무숲길

▲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

▲  마실길 느티나무

 


여름이 막 기지개를 켜던 6월의 첫 무렵, 천하 둘레길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받는
북한산둘레길을 찾았다.
이번 둘레길 산책은 북한산성입구에서 시작하여 내시묘역길, 마실길, 화의군묘역, 구름
정원길 북쪽 구간을 거쳐 불광2동에서 그 끝을 맺었다. 이미 여러 번 인연을 지은 곳이
지만 내 마음을 적지 않게 앗아간 곳 중 하나라 그 마음을 찾으러 다시 그들을 찾은 것
이다. 탐방밀도 1위(1㎢당 5만여 명)로 세계 기네스북에도 당당히 올라있는 북한산(삼각
산) 탐방객의 절반 정도가 둘레길 방문자라고 하니 그의 인기가 실로 어마어마하다.


 

♠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진관동 구간

▲  내시묘역길 북한산초교 입구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서울에서 가장 작은 초등학교인 북한산초교가 있다.
(거의 시골학교 분위기임)
 

북한산둘레길 10구간인 내시묘역길은 고양시 효자동(孝子洞) 공설묘지에서 진관동 방패교육대
에 이르는 3.5km의 산길이다. 북한천(北漢川)에 걸린 둘레교를 사이로 북쪽은 고양시, 남쪽은
서울 영역으로 평지와 야트막한 산길이 전부인 아주 착한 길이다. 전주이씨 서흥군파묘역, 경
천군 송금비, 경주이씨묘역, 여기소터, 백화사, 중골마을 느티나무 등의 조촐한 명소가 있으
며, 백화사 뒤쪽 산자락에는 천하 최대의 내시묘역이었던 이사문 공파(李似文 公派)의 묘역이
있었다. 바로 그 묘역 때문에 '내시묘역길'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그 묘역의 규모는 약 8,800평으로 45기의 조선 중~후기 무덤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서
가장 오래된 묘는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전관(承傳官)을 지낸 김충영(金忠英)의 무덤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대단한 곳이 있구나 싶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묘역은 2012년 4월 귀신같이 사
라지고 말았다.

상황이 이리 된 것은 내시의 후손임을 껄끄럽게 여긴 후손들이 묘역을 파서 유골과 부장물을
챙기고 그 일대를 조경개발업자에게 팔았기 때문이다. 백화사까지 포장길이 뚫리면서 땅값이
많이 오르자 팔았다고 전하며 후손들은 땅값으로 4억 8천만원을 만졌다고 한다. 유골은 화장
하여 납골당 등에 두었고 유물 또한 후손이 가져갔으나 무덤에 배치된 문인석 등의 무거운 석
물은 버려져 여기저기 흩어졌다. 얼마나 비밀리에 콩 볶듯이 했는지 동네 사람들과 백화사 승
려들도 묘역이 없어진 것을 뒤늦게서야 알았다고 한다.

이 땅 최대의 내시묘역으로 무궁무진한 가치를 지녔던 그곳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 이제는
한낱 전설 속의 이야기처럼 되었다. 진작에 국가 지정 사적이나 지방문화재로 지정했더라면
이런 무덤 대학살(?)은 막을 수 있었을텐데 후손들의 그릇된 생각과 문화재청과 서울시 철밥
통의 직무유기, 그리고 내시묘역에 대한 전반적인 무관심과 저평가가 낳은 비극이다.
이제 내시묘역도 없는 내시묘역길이 되었으니 그 이름도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이는 갈비탕
에 갈비가 빠졌음에도 갈비탕을 칭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름을 바꾸는 것이 적당하
다고 본다. 하지만 늘 그렇듯 북한산국립공원 철밥통들은 이름 변경도 귀찮다며 계속 수수방
관하고 있다.


▲  내시묘역길 (북한산초교에서 백화사 구간)
숲이 워낙 삼삼하여 햇살도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긴다.

▲  경천군 송금비 주변 내시묘역길
길 주변은 경주이씨 경천군파 문중 땅이라 양쪽에 철책과 나무 난간을 둘러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慶川君 李海龍 賜牌地 松禁碑)
- 서울시 지방기념물 35호

한산초교입구에서 내시묘역길을 따라 자연에 묻힌 민가를 여럿 지나면 울창한 숲속에 들어
서게 된다. 마치 자연휴양림에 들어선 듯, 키가 크고 늘씬한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며 이로운
기운을 아낌없이 베풀어 속세에서 오염된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그 한 폭의 그림 같은
오솔길을 거닐다보면 조그만 오래된 비석이 활짝 마중을 나오니 그가 바로 경천군 이해룡 사
패지 송금비이다. (줄여서 '경천군 송금비', '경천군 송금물침비'라 불림)

경천군은 조선 중기에 활동했던 서예가 겸 역관(譯官)으로 이름은 이해룡(李海龍)이다. 본관
은 경주(慶州), 자는 해수(海叟). 호는 북악()으로 해서체(楷書體)를 잘 썼다고 하며 비
슷한 시대를 살았던 한호<韓濩, 한석봉(韓石峯)>에 필적하는 명필로 극찬을 받기도 했다.
그는 왜어(倭語)에 능숙해 1588년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사자관(寫字官)으로
왜열도에 갔다왔으며 많은 글씨를 그곳에 뿌리고 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역관으로 왜군과의 협상테이블에 참여해 화평교섭을 위해 노력했으
며 1595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가 되었고 1602년에 사섬시주부(簿)가 되었다.
선조(宣祖)는 왜군과의 교섭에서 큰 공로를 세운 것을 치하해 경천군에 봉했으며 지금의 백화
사 동쪽 일대의 땅을 하사했다.

광해군(光海君)은 1614년 사패지(賜牌地, 제왕
이 하사한 땅) 적당한 곳에 송금비를 세워주었
는데, 비문에는 큼지막하게 '慶川君 賜牌定界
內 松禁勿侵碑' 13자가 쓰여 있다. 그 내용은
경천군이 하사받은 땅에서 소나무를 벌목하거
나 무단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문으로 뒷면에는
'만력(萬曆) 42년 갑인(甲寅) 10월'이라 쓰여
있어 1614년 10월에 세워졌음을 귀뜀해준다.

비석에 쓰여있는 송금(松禁)은 나라에서 필요
한 목재를 확보하고자 소나무가 많은 산을 선
정해 보호하는 것으로 고려 때 시행되었다.
이곳 송금비는 조선시대 임업 정책인 송금 정
책을 보여주는 산증인으로 400년이 넘는 나이
에도 무탈하게 잘 남아있으며 조선 임업사에서
꽤 중요한 유적이자 천하에서 딱 하나 밖에 없
는 존재로 가치가 높다.
이런 비가 2기가 있다고 하나 현재는 이곳만
전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여전히 숨바꼭질
중)

▲  조성시기가 쓰여진 송금비 뒷면

비석이 바라보는 방향을 보면 철책 사이로 잠겨진 문이 보일 것이다. 그 문을 열고 숲으로 살
짝 몸을 숨기면 이곳의 주인인 이해룡의 묘역을 만날 수 있는데 이들 묘역은 경주이씨 묘역이
라 불린다. (문이 늘 잠겨있으나 느슨한 경우가 종종 있어 순수한 의도로 살짝 들어가 살펴보
는 것도 괜찮을 듯 싶음)

고색의 때가 가득해 중후한 멋을 풍기는 비석 주위에는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의자들이 마련
되어 있다. 워낙 숲속이고 평일에는 인적도 드물어 바람의 소리와 새의 노랫소리가 이곳을 이
루는 소리의 전부이다. 둘레길이 닦이면서 비로소 그 존재를 속세에 내보인 존재로 둘레길이
아니었다면 이런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북한산둘레길이 산자락에 숨겨진 많
은 명소를 속세로 꺼내주었음)

※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 찾아가기 (2018년 8월 기준)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3,4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과 3,6호선 불광역(8번 출구) 중앙차
  로 정류장에서 704, 34번 시내버스를 타고 백화사 하차, 백화사 방면 둘레길을 따라 도보
  15분
*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4번 출구) 롯데몰 정류장에서 704번, 건너편 2번 출구 정류장에서
  34, 8772번(토요일과 휴일에만 운행) 이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25


▲  경천군 송금비 주변

▲  경천군 송금비에서 백화사로 이어지는 내시묘역길
중간에 의상봉, 용출봉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있다.

▲  내시묘역길 중간에 자리한 백화사(白華寺)

경천군 송금비에서 6~7분 정도 가면 백화사란 조그만 절이 모습을 비춘다. 이곳은 중골마을의
동쪽 끝으로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고양이가 생선 가게를 못지나친다고 잠깐 살펴보기로 했다.
어차피 시간도 넉넉하다.

백화사는 1930년경에 지어진 비구니 절로 자세한 내력은 딱히 모르겠다. 조촐한 경내에는 종
무소(宗務所)의 역할을 겸하는 요사(寮舍)와 대웅전(大雄殿), 삼성각(三聖閣) 등 5~6동 정도
의 건물이 있으며 대웅전 옆에는 아주 도드라지게 새겨진 잘생긴 마애3존불이 있다.


▲  백화사 마애3존불

백화사 마애3존불은 바위 윗부분을 싹둑 다듬고 석가불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문수보살(文
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배치해 석가3존불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1960년대 이후에 조성된 것들로 그 조각수법이 뛰어나고 돋음새김으로 사실감있게 다
듬어 그들이 마치 내 앞에 나타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비록 숙성 기간이 적어 고색의 때
는 끼지도 못했지만 50년 이상 지나면 그 작품성을 인정받아 지방문화재의 지위는 거뜬히 따
낼 것으로 보인다.

가운데 연꽃대좌(臺座)에 앉은 석가불은 선정인(禪定印)을 선보이며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
아있는데 꽤나 몸을 단련한듯, 어깨와 가슴이 매우 당당하다. 좌우 협시불은 시무외인으로 그
들 나름대로의 제스쳐를 취하고 있고, 3존불 모두 두광(頭光)을 가지고 있어 그들의 광명(光
明)을 표현한다.

* 백화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318-2 (의상봉길 70-7, ☎ 02-381-9103)


▲  백화사 삼성각(三聖閣)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칠성과 산신,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거처이다. 창건 초기부터 있었다고 하며 현재는 이곳에 큼직한 대웅전이
들어앉아있고 삼성각은 마애불 뒤쪽으로 자리가 옮겨졌다.

▲  경내 남쪽에 자리한 돌탑
경주 첨성대(瞻星臺)와 비슷한 모습으로 가지각색의 돌이 협동심을 보이며
어엿한 돌탑을 이루었다.

▲  중골마을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2-10호

백화사를 지닌 중골마을은 산에 감싸인 산골마을로 여기소마을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곳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지나가는 나그네의 발길을 잡고 있는데 높이 19m, 둘레 4.7m로 추정 나이
는 210년 정도이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치가 165년~) 이 일대는 이사문 내시
집안이 살던 곳으로 그 후손이 심은 것으로 보이며 오늘도 마을에 시원한 그늘을 베풀어 자연
의 넉넉한 마음을 보여준다.


▲  여기소(汝其沼)터 표석

백화사 정류장에서 백화사로 가는 길목 초입에 여기소터 표석이 있다.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아련히 전해오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조선 숙종 시절 북한산성(北漢山城)을 크게 증축했을 때 지방 관리로 있다가 공사 현장에 파
견된 관리가 있었다.
그와 깊은 관계를 맺었던 기생은 그를 보고자 먼 길을 마다하고 여기까지 왔으나 공사 관계자
들이 만나지 못하게 했다. 하여 너무 열받은 나머지 이곳에 있던 연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하며 '너의 그 사람이 잠긴 못'이란 뜻에서 '여기소'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조금만 기다리면 공사가 끝날 것을 뭐가 그리 급해서 섣부른 행동을 했을까? 옛말에도 급하면
돌아가라고 했거늘, 그 속담만 얌전히 지켰으면 해피 엔딩으로 끝났을텐데 말이다. 아마도 꽤
나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모양이다.
이후 기생의 한이 서린 연못은 매립되었고 그 자리에 표석을 두어 여기소의 흔적과 교훈을 아
련히 일깨운다.


▲  내시묘역길 남쪽 구간 (북한산 글램핑장 주변)
내시묘역길도 그렇고 북한산둘레길은 민가와 농장, 경작지, 개인 토지를
이리저리 피해가느라 우리네 인생처럼 굴곡이 좀 크다.

▲  내시묘역길의 남쪽 끝을 잡다 (방패교육대 직전)


 

♠  북한산둘레길 9구간, 마실길

▲  마실길 북쪽 시작점을 지나다~

내시묘역이 없는 내시묘역길은 여기서 마실길로 간판을 바꾸어 달린다. 방패교육대에서 진관
생태다리까지 이어지는 1.5km 구간으로 완전 평지 수준이고 북한산둘레길 구간 중 가장 짧고
편한 길로 살랑살랑 거닐기에 아주 좋다. 하여 마실길이라 불린다.
이 코스에는 오래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숲길, 삼천사계곡, 진관사계곡, 숙용심씨묘표, 영산
군묘역, 화의군묘역, 진관동 느티나무 등의 명소가 있어 짧은 거리에 비해 볼거리가 아주 풍
부하며 진관사(津寬寺)와 삼천사(三千寺)도 아주 가까워 답사 코스로 아주 안성맞춤이다.


▲  진관천 옆구리를 지나는 벼랑길 (마실길)

마실길을 들어서면 진관천 벼랑에 닦여진 나무데크길이 나온다. 깎아지른 벼랑에 잔도(棧道)
처럼 길을 낸 것으로 동쪽은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다듬은 벼랑이, 서쪽은 진관천이 삼
천사계곡과 진관사계곡 물을 모두 머금으며 창릉천으로 흘러간다.
예전에는 피서의 성지로 여름마다 북새통을 이루었으나 서쪽에 연서로가 닦이면서 풍경이 조
금 깎여지고 지나는 차량의 소음도 적지 않아 요즘에는 삼천사계곡과 진관사계곡 중/상류로
많이 넘어갔다.


▲  삐죽 고개를 내민 바위로 약간 구부러진 계곡 벼랑길

▲  식당을 지나 삼천사계곡을 건너는 마실길

진관천 벼랑을 통과한 마실길은 삼천사입구에 이른다. 삼천사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
(磨崖佛)을 지닌 오래된 절로 그곳이 땡기면 잠시 둘레길을 놓아두고 갔다와도 상관없다. (20
분 정도 걸림)
삼천사입구에서 삼천사계곡 구간에는 농장과 식당이 여럿 있는데 그들을 지나 삼천사계곡을 건
너야 다음 코스로 진행이 된다. 평일에는 썰렁하지만 휴일에는 맛있는 냄새가 아주 진동을 하
여 그 유혹을 무시하기가 어렵다. 어찌 식당 앞도 아니고 한복판을 지나가게 했는지는 모르지
만 주변에 마땅한 길이 없어 기존 길을 활용한 모양이다.


▲  마실길 돌탑 구간

삼천사계곡을 건너면 'S'자로 살짝 구부러진 길이 나오고 길 왼편으로 비슷하게 생긴 돌탑 4
형제가 마중을 한다. 이들 돌탑은 둘레길을 닦으면서 수식용으로 지어진 것으로 오래된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들이 있어 둘레길을 아기자기하게 꾸며준다.


▲  나란히 자리한 돌탑 4형제

▲  마실길의 오랜 터줏대감,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2-11호

돌탑을 지나면 울창한 모습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나그네의 두 눈을 단단히 동여맨다. 동화 속
푸른 언덕이나 초원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나무로 나이가 약 170년에 이른다.
자꾸만 먹어도 끝이 없는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높이 18m, 둘레 4.2m에 큰 나무로 성장했는데
그의 위치는 진관동 132-20번지로 북한산둘레길이 생기기 이전에는 삼천사계곡과 진관사계곡
사이에 어정쩡하게 자리해 찾는 이는 거의 없었다. 삼천사와 진관사를 수없이 들락거린 나 조
차도 둘레길의 안내로 2012년 이후에나 그를 만났으니 앞서 경천군 송금비와 더불어 둘레길이
캐준 소중한 보물이다.


▲  느티나무 주변 풍경

▲  은행나무숲길 옆에 닦여진 돌탑들
늘씬하게 솟은 은행나무숲과 돌탑이 나란히 있으니 마치 신성한 어딘가로
들어서는 기분이다.

▲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은행나무숲길 (왼쪽은 늦봄, 오른쪽은 여름)

마실길에서 가장 으뜸인 곳이자 북한산둘레길 서쪽 구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바로 170
년 묵은 느티나무와 그 옆에 자리한 은행나무숲길을 꼽고 싶다. (솔직히 둘레길 주변에서 이
보다 아름다운 풍경은 별로 없었음)
수목원이나 휴양림의 그림 같은 숲속길이나 산책로를 거니는 듯한 즐거운 기분이 드는 곳으로
느티나무 주변을 곱게 손질하고 나무와 꽃을 많이 심어 마실의 기분을 진하게 들게 했다. 게
다가 늘씬하게 솟은 은행나무로 조촐하게 은행나무숲길을 내면서 전남 담양의 명물, 메타세콰
이어 가로수길에 못지 않은 맵시를 자랑한다. 
산책로 주변에는 쉬어갈 수 있는 의자가 여럿 있다. 굳이 의자가 아니더라도 돗자리를 가져와
은행나무 그늘이나 주변에 깔고 간식을 먹으며 수다 몇 송이를 피우면 정말 소풍이 따로 없을
것이다.

은행나무숲길은 북한산둘레길이 지나는 명소 가운데 가장 내 마음을 홀린 곳으로 집으로 훔쳐
와 나 혼자서 두고두고 보고 또 보고 누리고 싶다. 이런 곳에서는 정말 옛 사람들처럼 시 1수
읊어줘야 운치가 나거늘, 시적(詩的) 감각이 떨어지고 인간의 하찮은 말과 언어로 자연의 아
름다움을 표현하고 희롱한다는 것이 실례가 되는 일인듯 싶어 그저 탄성만 질렀다.


▲  봄과 여름, 가을이 앞다투어 머물다 가는 은행나무숲의 위엄
겨울은 그 시샘이 더 높아 아예 은행나무의 옷을 다 벗겨가 버린다.


 

♠  화의군 이영 묘역과 구름정원길

▲  화의군 이영(和義君 李瓔) 묘역 - 서울 지방기념물 24호

은행나무숲에서 진관사계곡을 건너 계단을 오르면 진관사로 인도하는 도로(진관길)가 나온다.
여기서 동쪽은 진관사로, 서쪽은 은평한옥마을로 이어지며 마실길은 바로 서쪽에 있는 3거리
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튼다. (3거리 서남쪽에 오래된 느티나무 4형제가 있음) 그리고 바로 정
면에 있는 산자락에 무덤들이 여럿 눈에 보일 것인데 그들은 영산군 이전(寧山君 李恮) 묘역
이다. (영산군 묘역은 별도의 글에서 소개함)

서쪽 3거리에서 은평한옥마을 동부를 가르는 마실길(연서로48길)을 따라가 진관생태다리를 지
나서 동쪽 산자락에 홍살문과 사당이 있다. 그리고 그 뒤로 무덤이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화
의군 묘역이다.

화의군(和義君, 1425~?)은 세종의 9번째 아들로 이름은 이영(李瓔), 자는 양지(良之)이며 생
모는 영빈 강씨(令嬪 姜氏)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매우 좋아해 매일 책에 파묻혀 살았다고 하며, 초서(草書)와 예서(禮
書)에 쓸데없이 능했다. 또한 이미 6살에 한시(漢詩)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人生斯世 忠孝爲大  
사람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충효가 크다 하니
忠能保國 孝能匡世 
 충성으로 나라를 보전할 수 있고 효도로써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다.

1433년에 화의군에 봉해졌고 1436년 11살의 어린 나이로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했다. 1441년
에는 사춘기 시절의 호기심 때문인지 이복형인 임영대군(
臨瀛大君)과 함께 여염집 여자를 남
장을 시켜 궁 안으로 납치해 온 적이 있었는데 그만 부왕(父王)인 세종에게 들켜 된통 혼이
났다. 그 벌로 그에게 주어진 화의군의 직첩(職牒)과 과전(科田)이 몰수되었다.
허나 1447년 다시 화의군에 봉해졌으며, 얼마 뒤, 남의 기첩(妓妾)을 가로챈 일로 직첩이 또
몰수되었다. 그러다가 맏형(문종)이 재위에 오른 1450년에 다시 환원되었다.

화의군은 누이동생인 정의공주(貞懿公主)와 더불어 훈민정음에 제법 조예가 깊었는데 정음청
(正音廳)에서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훈민정음(訓民正音) 프로젝트에 참
여하였고, 평소 친분이 있던 박팽년의 매부 박중손(朴仲孫)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세 아들을
두었다.
1455년 2째 형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조카를 밀어내고 재위에 오른 이후, 4째 형인 금성대
군(錦城大君)을 비롯한 60여 명의 무인과 활쏘기 사냥을 나갔다가 대간(臺諫)들로부터 탄핵을
받아 변경으로 귀양 갔다가 그 이듬해 풀려났다. 그리고 성삼문과 박팽년, 유응부(兪應孚) 등
이 단종(端宗) 복위를 꾀하다 걸려들자, 세조는 화의군에게
'그것들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는가?' 물었는데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엎드려
있었다고 한다. 잘못하면 자신까지 화를 당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1457년, 순흥(順興, 경북 영주시 순흥면)으로 귀양간 금성대군과 단종 복위를 몰래 꾀하였고
영월로 유배간 단종이 결국 사사(賜死)되자 복위에 가담한 죄로 충청도 금산(錦山)으로 유배
되었다. 이때 그에게 주어진 모든 관직과 왕족의 특권, 재산이 싹 몰수되었으며, 그의 이름과
자손들의 이름은 왕실 종친록(宗親錄)에서 제명되는 치욕을 맞는다.
그가 금산으로 유배된 이후, 그의 인생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전해오고 있다.
① 1460년 단종 복위 사건으로 사사(賜死)되었다는 것, (화의군 묘역 안내문, 화의군파 족보,
   은평문화원에서 편찬한 '은평구의 문화유산')
② 거의 60~70세까지 유배지에서 살다가 와석종신(臥席終身) 했다는 것. (조선왕조실록..)

화의군이 죽은 이후, 그의 세 아들과 자손들은 죄인의 신분으로 고통스럽게 살아오다가 성종
시절에 들어와 세조의 부인이자 화의군의 형수인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의 지시로 도성(都
城) 밖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중종 시절에는 화의군의 손자 이윤(李允)의 상언(上言)에 따라
복관(復官)되면서 신분이 회복되는 한편, 종친록에 다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1552년에는 금산에 있던 화의군의 묘소를 현재 위치인 양주(楊州) 땅 신혈리(新穴里, 현 서울
진관동)로 이장했으며, 1736년 영조(英祖)는 그에게 '충경(忠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또한
1791년에 영월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만들 때 단종에 대한 충절이 인정되어 그 제단
에 배향되었다.
 
화의군 묘역에는 그의 차자(次子)인
'여성군 번(驪城君 轓)', 3자인 '금난수 식(金蘭守 軾)',
증손자인 '태산군 황(泰山君 凰)'의 묘가 있으며, 묘역 밑에 충경사
(忠景祠)란 사당을 세워
화의군 부부와 그의 생모의 신위(神位)를 봉안했다. 또한 그 주변에는 화의군의 후손들이 살
고 있었는데 은평뉴타운 개발의 칼질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묘역 주변에는 충경사 사당
과 재실(齋室)만 남게 되었다.

화의군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조선 왕족의 하나로 단종 복위운동에도 참여했었고 훈
민정음 프로젝트에도 크게 활약하는 등,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던 인물이다. 물론 여자를 너무
밝혀 남의 여자를 마구 건드렸던 진상은 좀 있었지만...
그의 우울했던 인생 만큼이나 그의 묘역 또한 긴 세월을 비지정문화재의 영욕을 간직하며 지
내오다가 2005년 말에서야 뒤늦게 지방기념물로 지정되면서 팔자가 조금은 펴졌다.

▲  묘역 서쪽에 자리한 화의군 신도비
(神道碑)

▲  화의군 사당인 충경사와 붉은 피부의
홍살문


충경사 앞에는 성역(聖域)을 표시하는 홍살문이 차가운 인상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홍살문
과 충경사의 배치가 일직선으로 되어 있지 않고 조금은 북쪽으로 삐뚤어져 있다. 둘의 방향이
일치해야 좀 안정감있게 보이는데 말이다
서북쪽을 향하고 있는 충경사와 홍살문은 1970년 이후에 지어졌으며 사당 남쪽 언덕에 화의군
의 묘역이 자리해 있다.


▲  화의군 묘역으로 인도하는 오솔길

묘역 주변은 잘 익은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운치를 자아낸다. 묘역 주변은 묘역 보호를 위
해 사람 키보다 높게 철책을 둘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묘역으로 인도하는 문은 충경사
뒤쪽에 있는데 늘 굳게 잠겨져 있어 철책 너머로 보던가, 중간중간 보이는 허술한 곳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던가 해야된다. 허나 철책 밖에서도 보일 만큼 보이니 괜히 무리는 하지 말자.


▲  서북쪽을 바라보고 선 화의군 묘역

▲  곡장을 병풍처럼 두른 화의군 묘와 그의 아들인 금난수 식의 무덤

화의군묘는 일반 사대부(士大夫)의 무덤처럼 조촐한 크기로 곡장을 봉분(封墳) 뒤쪽에 병풍처
럼 둘러 무덤의 품격을 조금 높였다. 무덤 앞에는 상석(床石)과 묘표, 장명등이 있고 그 양쪽
으로 문인석 1쌍과 근래에 지은 무인석(武人石) 1쌍이 나란히 무덤을 지킨다. 게다가 근래에
봉분 밑도리에 엉뚱하게도 12지신상을 두룬 호석(護石)을 둘러 서로가 너무 어색한 조화를 보
인다.
봉분에 비해 호석을 너무 크게 둘러 근래에 지어진 무덤처럼 요상한 모습이 되었으며, 12지신
상의 모습도 지금 당장이라도 산으로 뛰어갈 것 같은 생동감 있는 모습이라 다들 산만해 보여
오히려 없는 것보다 못한 것 같다. 물론 무덤에 대한 후손들의 지극정성을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으나 그 정성이 너무 지나쳐 조선 초기 무덤을 20세기 무덤으로 품격을 떨어뜨렸다.
문화재로 지정된 무덤은 크게 망가지지 않은 이상은 초창기의 모습을 지켜주는 것이 무덤 주
인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싶다. 무덤을 너무 기존의 모습과 다르게 치장해버리면 무덤 주인이
잠시 마실갔다가 자신의 무덤도 찾지 못하고 헤매지 않겠는가?

※ 화의군 이영 묘역 찾아가기 (2018년 8월 기준)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3번 출구) 가변차로 정류장에서 701, 7211번 시내버스를, 중앙차
  로 정류장에서 704번 시내버스를 타고 푸르지오 521동 정류장에서 하차 (701, 7211번을 타
  는 것이 더 빠름) 정류장 남쪽에 자리한 제각말아파트교차로에서 동쪽 길(연서로48길)을 3
  분 정도 가면 오른쪽(남쪽)에 화의군 묘역이 있다.
* 지하철 3/6호선 불광역(8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701, 704번(구파발역 경유), 가변
  차로 정류장에서 7211번을 타고 푸르지오 521동 정류장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144 (연서로48길 22)


▲  화의군묘역 인근 구름정원길에서 만난 주인 잃은 비좌(碑座)

화의군 묘역 남쪽에 북한산(삼각산)과 조선시대 최대의 공동묘지였던 이말산(莉茉山)을 이어
주는 진관생태다리가 있다. (밑에 터널을 두고 그 위에 산줄기를 만듬) 여기서부터 잠시나마
정들었던 마실길은 막을 내리고 북한산둘레길 8구간인 구름정원길로 이름이 갈린다.

구름정원길은 진관생태다리에서 북한산생태공원 상단까지 4.9km 거리이다. 옛 기자촌터 뒤쪽
으로 구름정원이란 이름이 참 어여쁜데 그 이름 그대로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구름과 조금
이나마 가까워지는 구간으로 평지 일색의 마실길과는 완전 차원이 틀려 마실길에 적응된 몸이
조금 괴로워함을 느낄 것이다.

진관생태다리에서 10분 이상 올라야 비로소 옛 기자촌 뒷쪽 산능선에 이르는데, 길 중간에 주
인을 잃은 비좌와 동자석 등을 여럿 만날 수 있다. 허나 대부분 속인들은 둘레길에 눈이 멀어
그들을 지나치고 만다. 이곳을 비롯하여 이말산과 내시묘역길 주변에는 왕족과 사대부, 상궁,
내시들의 무덤이 즐비하며 이 비좌와 동자석도 그들 무덤에 세워진 것들이다.
그러다가 자연재해로 묘가 사라지고 비석 또한 파괴되어 이렇게 비석의 아랫도리인 비좌만 간
신히 남아 햇볕을 보고 있다. 이 비좌의 주인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분명 주변을 싹 뒤
집어 엎으면 유력한 단서가 나올 듯 싶은데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인 이상 비좌와 동자석의 주
인을 찾는 시도는 없을 듯 싶다.


▲  기자촌 지킴터에서 바라본 향로봉

▲  기자촌 지킴터에서 바라본 북한산 서쪽 줄기와 은평구 동부 지역

기자촌지킴터에 이르면 동쪽으로 북한산(삼각산) 향로봉, 남쪽으로 은평구 동부 지역, 서쪽으
로는 개발의 칼질로 거의 허허벌판이 된 옛 기자촌이 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기자들의 생활
터전으로 제공했다고 하는 기자촌(記者村)은 서울 지역 달동네의 상징으로 쇠락된 것을 2008
년 이후 모조리 갈아엎었다.
이곳도 은평뉴타운 개발지의 일부로 현재는 근린공원이 닦여져 있다. 기왕 이렇게 밀어버린거
후회가 없게끔 잘 다듬었으면 좋겠고, 진관동 일대에 대한 개발의 난도질도 이곳에서 그만 멈
췄으면 좋겠다.


▲  구름정원길 중간인 폭포동 선림사 주변 계곡

기자촌지킴터에서 약 15분 정도 가면 기자촌 남쪽인 폭포동 선림사(禪林寺)에 이른다. 폭포동
(瀑布洞)이란 이름은 금지된 구역으로 묶인 산 위쪽 바위에 있는 폭포에서 비롯된 것으로 평
소에는 보기 힘들며 비가 많이 온 날과 그 이후에만 잠깐씩 만날 수 있는 특별한 폭포이다. 

이곳은 숲이 삼삼하고 계곡은 작으나 맑은 물이 흐르고 반석과 바위가 많아 피서를 즐기기에
적당한 곳이다. 여기서 아파트가 보이는 서쪽 산길로 내려가면 바로 은평뉴타운의 동남쪽 끝
인 폭포동 힐스테이트아파트이다. 이 아파트는 완전 산속에 묻힌 아파트단지로 교통이 썩 좋
지는 못해 버스를 타려면 도보 10분 거리인 은평경찰서까지 걸어나가야 된다.


▲  하얀 피부의 반석 사이로 물이 졸졸 흐르는 폭포동 계곡

▲  폭포동 계곡에서 만난 어느 문인석과 망주석(望柱石)

이들은 인근 산자락에 있다가 사라진 사대부묘에서 수습된 것으로 여겨진다. 홀(忽)을 쥐어든
문인석은 근심이 있는 표정으로 눈을 살짝 감으며 상념에 잠겨 있고, 오른쪽 망주석에는 꼬랑
지가 긴 세호(혹은 다람쥐)로 보이는 동물이 두드러지게 새겨져 있다.


▲  폭포동에서 불광2동으로 넘어가는 구름정원길 (선림사 뒷쪽)

▲  선림사 남쪽 구름정원길

북한산성입구에서 시작된 북한산둘레길 나들이는 선림사 남쪽 불광2동에서 쿨하게 마무리 지
었다. 햇님의 퇴근시간이 임박했고 이른 무더위와 장거리 도보로 적지않게 지쳤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날 목적한 곳을 다 살펴보았으니 나름 뿌듯하며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니
자주는 아니어도 이렇게 종종 찾을 수 있어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하여 북한산둘레길 산책은 흔쾌히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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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상이 깃들여진 첩첩한 산골의 절집, 북한산 삼천사 ~~~ (삼천사계곡)

 


' 도심과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삼각산) 삼천사 '

▲  삼천사 대웅보전


 

♠  삼천사 입문

▲  알록달록 연등이 길을 안내하는 삼천사 길

따사롭던 5월의 첫 주말, 일행들과 북한산(삼각산) 삼천사를 찾았다. 연신내역에서 그들을 만
나 서울시내버스 7211번(진관차고지↔신설동)을 타고 삼천사/진관사입구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차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잘 닦여진 길을 따라 그곳으로 다가섰다.


▲  그늘에 자리한 족구장 - 이곳은 절터였다.

삼천사 숲길을 들어서면 식당을 옆에 낀 너른 공터가 나온다. 지금은 식당에 딸린 공간이지만
예전에는 사슴농장이 있었지~. 사슴의 숙성된 뿔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던 시절이 정말 엊그
제 같거늘, 그들은 죄다 어디로 갔는지 그들의 안부가 새삼 궁금해진다.

겉으로 보면 산이나 계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당과 농장의 쉼터이지만 놀랍게도 이곳에 옛
절터의 흔적(삼천리골사지1)이 아주 희미하게 묻혀있다. (안내문은 없음) 그 절터는 공터를 중
심으로 주변 식당들까지 아우르고 있는데, 아직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해 절의 정체
를 알 수 없다. 다만 진관사(津寬寺)가 근처에 있어 그의 전신(前身)이라는 신혈사(神穴寺)터
로 보기도 하며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편의상 '삼천리골사지(寺址) 1'로 분류했다.
<삼천리골사지2는 삼천사계곡 상류에 있으며 삼천사터의 일부로 여겨짐>
여기서는 다량의 토기와 기와, 청자파편 등이 나왔는데, 행락지로 먹고 사는 사유지다보니 훼
손이 심각해 하루 속히 발굴조사가 절실해 보인다. 혹시 아는가 이곳이 정말 고려 8대 제왕인
현종(顯宗)과 인연이 아주 깊다는 신혈사의 마지막 흔적이었을지도?


▲  녹음(綠陰)이 짙은 삼천사 가는 길
저 짙푸른 녹음 속에 나를 잠시 숨겨본다.


삼천리골사지1을 지나면 식당들이 줄지어 나타나는데, 그 와중에 '삼천탐방지원센터'로 변신한
옛 매표소가 모습을 드러낸다. 예전에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입장료를 내야했으나 2007년
국립공원 입장료가 폐지되면서 더 이상 매표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삼천탐방지원센터에서 3분 정도 가면 고개가 나타난다. 고개 앞에는 삼천사를 알리는 돌기둥이
멀뚱히 서 있는데 여기서 고갯길과 계곡길로 갈린다. 어느 길로 가던 삼천사는 나오게 되어 있
으나 시멘트길인 고갯길은 다소 각박하고 돌아가는 편이며, 차량들의 왕래가 잦다. 반면 계곡
길은 빠르게 갈 수 있는 지름길로 계곡 주변에 주막들이 여럿 모여 앉아 절을 목전에 둔 속세
의 마지막 유혹을 펼친다.


▲  미타교 직전 고갯길

▲  계곡의 아름다운 경관을 크게 들쑤신 미타교(彌陀橋)

계곡길을 5분 정도 오르면 고갯길과 다시 만나면서 약간 경사가 진 고개가 나타난다. 그 고개
를 넘으면 북한산 일품 계곡의 하나로 널리 추앙받는 삼천사계곡(삼천리골) 중류가 나타난다.

이곳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초소에 출입신고를 하고 신분증을 맡겨야만 들어갈 수 있던 금지
된 구역이었다. 물론 삼천사 승려와 신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1992년 통행제한이 풀
리면서 삼천사계곡을 통해 북한산성(北漢山城)과 비봉능선까지 오를 수 있게 되었다. 허나 계
곡 주변에는 군사시설 일부가 옥의 티처럼 남아있으며, 삼천사와 옛 군부대 수영장 사이 계곡
은 여전히 금지된 계곡으로 묶여 속인들의 발길을 거부하고 있다. (옛 수영장 이후와 삼천사
위쪽 계곡은 출입이 가능함)

삼천사로 가려면 계곡을 1번 건너야 되는데 예전에는 키 작은 다리가 놓여있었으나 2011년 이
후 높이와 폭을 높여 미타교란 하얀 피부의 돌다리를 새롭게 깔았다. 다리를 업그레이드한 것
은 좋으나 문제는 주변 환경을 고려치 않고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을 크게 들쑤시며 만들었다는
것이다.

계곡 다리(미타교)에서 삼천사 중간의 짧은 계곡 풍경(밑에 있는 2011년 사진 참조)은 개인적
으로 참 좋아했던 풍경이었는데 다리를 놓으면서 잘생긴 바위와 반석을 깨뜨리고 자잘한 돌이
계곡 주변을 적지 않게 차지하면서 심히 안좋게 변해버린 것이다.


▲  예전의 경치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미타교 주변)
계곡에 자잘한 돌들만 가득하여 마치 돌의 무덤처럼 황량하기 그지 없다.

▲  이제는 전설이 되버린 미타교 주변 삼천사계곡의 옛 모습 (2011년)
선녀 누님이 살짝 내려와 목욕을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고운 절경이었다.
허나 지금은 선녀는 커녕 맷돼지도 외면할 것 같다.


너무나 이질적으로 변해버린 삼천사계곡에 안타까움의 한숨을 여러 번 날려 보낸다. 자꾸 예전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려 부질없이 변해버린 현실을 인정하기가 싫다.

미타교를 건너면 각박한 경사의 오르막길이 중생을 주눅들게 만든다. 그 길을 3분 정도 오르면
옛 발해(渤海)의 국도(國都)인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의 석등(石燈)을 닮은 우람한 석등 1쌍
이 힘들게 올라온 중생들을 맞이하니 여기서부터 산사의 향기와 오래된 마애불의 인자함이 깃
든 산사, 삼천사 경내가 흔쾌히 펼쳐진다.
그럼 여기서 잠시 삼천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경내 직전에 자리한 석등 1쌍

북한산(삼각산) 서쪽 삼천사계곡에 둥지를 튼 삼천사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磨崖佛)
을 품은 절이자 도심에서도 멀리 떨어진 첩첩한 산골의 산사이다. 1992년까지만 해도 사찰 출
입의 제한이 많았으나 비봉능선과 북한산성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개방되면서 자유의 공간이
되었다.

삼천사는 삼국시대가 한참 정리되고 있던 661년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하
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으면 정말로 곤란하다. 그가 세웠다는 기록이나 유물도 전혀 없고 그
당시 신라를 둘러싼 천하의 정세도 한가롭게 절이나 세울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불교에
지나치게 목숨을 걸었던 신라(新羅)도 그 시절에는 왕경(王京, 경주)을 중심으로 절이 세워지
고 있었으며 원효대사 역시 바쁘게 움직였던 시기이므로 절을 지을 겨를이 없었다.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달은 원효대사, 무열왕(武烈王)과
의 친분으로 그의 딸인 요석공주(瑤石公主)에게 장가들어 신라 왕실의 일원이 되었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달래고자 귀족 중심으로 돌아가던 불교의 대중화를 꾀하면서 당시 신라 불교
의 1인자였던 자장율사(慈藏律師)를 강원도 산골짜기로 밀어내고 의상(義湘)과 더불어 신라 불
교의 지존으로 우뚝 선 인물이다.

삼천사가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661년, 당나라 고종(高宗)은
'이제 백제도 망했으니 고구려를
쳐도 별무리는 없을 것이다!'
싶은 엉뚱한 생각에 단독으로 고구려 공격을 감행했다. 이번 전
쟁에서는 당나라의 맹장으로 손꼽히는 방효태(龐孝泰)를 주장(主將)으로 하여 많은 군사를 보
냈는데 방효태는 천하장사로 손가락질 받던 그의 아들 12명(혹은 13명)을 모조리 데리고 나가
고구려 정벌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당군은 요하(遼河)를 건너 요동(遼東)을 용케도 통과, 압록강 부근에서 고구려군을 격퇴했다. 그 기세를 타고 평양성(平壤城) 부근인 사수<蛇水, 대동강의 지류인 합장강으로 여겨짐>까지
진격했으나 연개소문(淵蓋蘇文)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10만 대군은 몰살을 당했고 고구려를 꼭
무너뜨리겠다고 헛소리를 했던 방효태는 그의 아들과 나란히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만다.

한편 서해바다를 건너 평양 서쪽으로 기들어온 소정방(蘇定方)은 방효태의 대군이 절단났다는
소식에 그야말로 큰 충격에 빠졌다. 날씨는 춥지. 식량은 부족하지. 언제 고구려군이 들이닥쳐
자신들의 목을 댕강 칠지 모를 위험한 상황에 빠진 것이다.
하여 소정방은 쫄깃해진 간을 부여잡고 신라에 급히 사자를 보내 식량과 원군을 요구했다. 당
나라에 지나치게 저자세를 취하며 그들의 비유를 맞추느라 급급했던 신라는 소정방의 요구를
흔쾌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 요청을 무시하면 나중에 고구려를 치거나 공격을 받았을
때 도움을 받기가 어렵게 될 것이고 고구려에게 계속 고통을 받게 된다.
그래서 김유신(金庾信)으로 하여금 군량을 수송케 했는데 이때 분황사(芬皇寺)에 있던 원효가
그를 따라 종군(從軍)하게 된다.

김유신의 수송부대가 추운 겨울을 뚫고 고구려의 영역으로 들어오자 고구려군은 그들을 때려잡
기 위해 길목에 매복을 했는데, 소정방이 이를 알아내고 급히 복잡하게 쓰인 암호문을 보냈다.
그 암호문을 바로 원효가 해독한 것이다. 그래서 김유신은 고구려군을 격퇴하고 무사히 군량을
수송할 수 있었다.
이것이 661년부터 662년 초까지 원효대사의 행적이다.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던 그가 언제 고구
려와 신라의 접경 지역이자 전운이 감도는 북한산(삼각산)에 절을 세웠겠는가? 이것으로 이미
원효 창건설은 끝이 났다. 그렇다면 절은 언제 지어졌을까?
경내에 있는 마애불과 옛 절터의 유물을 통해 이르면 신라 말, 늦어도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
로 여겨지며 조선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18세기에 간행된 북한지(北漢
誌)에는 최
대 3,000명이 머물 정도로 번창했다고 쓰여 있다.

▲  삼천사지 대지국사탑비

▲  삼천사터 금당(金堂) 구역

고려 초에는 개경 현화사(玄化寺)의 초대 주지를 지낸 대지국사 법경(大智國師 法鏡)이 주지로
있었으며, 고려 왕실의 각별한 지원을 받아 큰 절로 성장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
(西山大師)의 지휘 아래 승병(僧兵)의 주요 집결지가 되었으나 왜군의 공격으로 파괴되고 말았
다. 그때까지만 해도 절은 지금보다 1.5km 안쪽 산속에 있었으며 절 이름은 지금과 음은 같지
만 한자가 1글자 틀린 삼천사(三川寺)였다.
그 이후 진영화상이 삼천사의 암자가 있던 지금의 자리에 절을 중건하여 3천 명을 뜻하는 삼천
사(三千寺)로 이름을 갈았으며 6.25때 파괴된 것을 1960년에 중건했다.

1970년대 성운(聖雲)화상이 주지로 들어와 절에 있는 마애불이 오래된 불상임을 밝혀내었고 20
년 동안 계속 불사(佛事)를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또한 1994년에 사회복지법인 인덕원
을 설립해 복지사업에도 손을 뻗쳤다.
경내에는 대웅보전과 산령각, 천태각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
로 지정된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또한 옛 삼천사터(고양시 북한동)에는 대지국사의 탑비(塔碑)
와 절터 주춧돌이 어지럽게 남아있는데 오랫동안 주목도 받지 못한 채, 버려져 있다가 서울역
사박물관에서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여 500여 점의 유물을 건져냈다. (2009년
이후에도 여러 번 발굴조사를 했음)
이처럼 북한산(삼각산) 제일의 절터 유적임에도 이상하게도 북한산 관련 지도에는 제대로 표시
조차 되어 있지 않으며, 그에 합당한 지정문화재의 지위도 얻지 못한 채, 계속 방치되고 있다.
(사적이나 지방기념물 등급이 적당해 보임) 또한 이곳에 있는 대지국사비는 태고사(太古寺) 원
증국사탑비와 더불어 북한산에 있는 고려 때 비석이자 북한산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이나 그 역
시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다. (절터 관람은 가능함)

※ 북한산 삼천사 찾아가기 (2017년 9월 기준)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3번 출구)에서 701, 7211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나고,삼천사(진관사
  ) 입구 하차 → 삼천사까지 도보 30분
*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3번 출구에서 7723번 시내버스 또는 1번과 2번 출구 중간에서 7211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나고,삼천사(진관사)입구에서 하차
* 3호선 구파발역 2번 출구에서 삼천사 셔틀버스가 1일 4회 운행한다. (구파발역 출발 시간은
  8:20, 10시, 11시, 13:30) 법회와 절 행사가 있는 날에는 오전 8시부터 11시 30분까지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석가탄신일에는 저녁까지 수시로 운행
* 삼천사까지 차량 접근이 가능하며 경내에 조그만 주차장이 있음

* 삼천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 25-2 (연서로54길 127 ☎ 02-353-3004)
* 삼천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삼천사 종형사리탑과 마애여래입상


 

♠  삼천사 5층석탑, 대웅보전 주변

▲  나한사리를 머금은 5층석탑

삼천사 경내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4마리의 석사자가 탑신(塔身)을 받들고 있는 5층석탑을 만
나게 된다. 1988년 삼천사 주지인 성운화상이 미얀마의 마하시사사나 사원을 방문했을 때, 그
곳 대승정(大僧正)인 아판디타에게 부처 사리 3과와 나한사리를 선물로 받았는데, 부처사리는
마애불 앞 종형사리탑에 봉안하고 나한사리는 일주문 앞에 이 탑을 조성하여 봉안했다.

이 탑은 바닥돌을 먼저 깔고 그 위에 여러 단으로 된 기단부(基壇部)를 둔 다음, 4마리의 사자
와 5층 탑신, 머리장식을 차례대로 갖춘 형태로 구례 화엄사(華嚴寺)와 제천 빈신사지(頻迅寺
址)의 4사자 석탑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


▲  삼천사의 새로운 명물, 세존진신사리 불탑(佛塔)

5층석탑을 지나면 바로 9층석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법당도 아닌 경내 외곽에 서로 다른 모습
의 탑을 2개씩이나 지어 올린 경우는 거의 흔치가 않은데 삼천사는 법당 앞에 탑을 둘 공간이
여의치가 않아 공간이 넉넉한 이곳에 탑을 심은 것이다.

9층석탑 자리는 원래 주차장의 일부로 미얀마 대승정에게 받은 부처의 진신사리 7과를 봉안하
고 절의 위엄도 제대로 드러낼 겸, 거대한 탑을 또 짓기로 결정하고 2012년 초에 자리를 닦아
그해 5월 완성을 보았다. 이 탑 역시 9층석탑처럼 높게 기단부를 쌓고 그 위에 탑을 올렸는데
탑은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8각9층석탑을 비슷하게 재현했으며 탑의 꼭대기를 장식하고 있
는 4두의 금빛 사자상은 인도의 사르나트 아쇼카 석주(石柱)의 사자상을 모방한 것이다.
금빛 사자상은 8정도(八正道)의 가르침이 담긴 법륜(法輪)에 안치되었고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군주로 평화와 생명존중을 천명한 아쇼카왕(인도 마가다왕조의 3대 왕)의 '담마 왕령(王令)'
정신을 새기고자 아쇼카왕의 상징인 4두 사자상을 꼭대기에 얹혔다. 그리고 9류 중생의 안녕과
화엄 10지에 이른 후 정토세계의 9품 연대에 오르기를 발원하는 보리심을 9층탑으로 묘사했다.

탑이 완성되자 진신사리 7과를 비롯해 조그만 금동석가불과 지장보살상, 관음보살상, 대장경(
大藏經) 1질, 600명의 신도들이 손수 제작한 금강경(金剛經) 600부, 신도들이 기증한 갖은 고
가품을 탑에 넣었다.
탑에게 주어진 첫 이름은 '세존진신 다보 9층대탑(世尊眞身 多寶 九層大塔)'이었으나 '세존진
신사리 불탑'으로 간단히 줄였다. 탑이 얼마나 큰지 사람들이 거의 개미로 보이며, 장대한 탑
의 모습이 마치 삼천사의 탄탄한 재정과 세를 부질없이 과시하는 것 같다.


▲  군인들의 안녕을 위해 노력하는 지장보살입상(地藏菩薩立像)

9층석탑을 지나면 오른쪽 높은 곳에 화강암 통돌로 조성된 지장보살입상이 자리해 있다. 이 보
살상은 9층석탑과 5층석탑은 물론 절 서쪽에 있는 34사단 유격훈련장 방향(산을 올려다보면 유
격장이 보임)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34사단 장병들이 이곳에서 로프를 타고 훈련을 하는데 해마다 사고가 일어났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삼천사 주지승이 장병들의 덧없는 희생을 막고 더 이상의 사고와 살생이 일어나지 않도록
발원하는 뜻에서 유격훈련장이 보이는 곳에 지장보살입상을 세웠는데, 신기하게도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지장보살 형님의 가호가 진하게 피어나 그들
을 지켜준 모양이다.

어진 어미의 모습처럼 자리한 보살상은 8각의 기단을 밑에 깔고 연꽃이 새겨진 대좌(臺座) 위
에 여의주를 오른손에 들고 서 있으며 8각 대좌에는 무독귀왕(無毒鬼王)와 도명존자(道明尊者)
, 시왕상 등이 새겨져 있다.


▲  연꽃의 와신상담 현장, 연못 (일주문 앞)

▲  삼천사 일주문(一柱門)

9층석탑을 지나면 문짝을 단 큰 문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일주문이라 부른다. 보통 일주문은 절
입구나 길목에 세우기 마련으로 미타교와 5층석탑 사이에 일주문을 둘 자리가 넉넉하나 삼천사
는 그 자리를 모두 내버리고 특이하게 대웅보전 입구에 갖다 놓았다.
세로로 걸린 현판에는 '三角山 三千寺'라 쓰여 있는데 쓰여진 글씨가 꽤 걸출하여 하늘로 날라
갈 것만 같다.


▲  새끼두꺼비 2마리를 등에 짊어진 어미 두꺼비상 (일주문 난간)
절의 지형 때문에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갖다둔 것은 아닐까?

▲  삼천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일주문을 들어서면 종무소(宗務所)와 법당인 대웅보전(대웅전)이 차례로 모습을 비춘다. 예전
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절의 법당)을 칭했는데 건물이 얼마나 허벌나
게 큰지 가히 절 이름값을 하고도 남음이 있다. 지붕 용마루 양쪽에는 치미가 날카롭게 솟아
북한산 봉우리와 어울려 장관을 이루고 있고, 건물 내부에는 석가3존불을 비롯해 지장보살상,
신중탱, 16나한, 500나한상 등이 빼곡히 자리를 채운다.

▲  대웅보전 앞에도 2마리의 새끼를
등에 진 두꺼비상이 있다.

▲  등장 인물로 빼곡한 신중탱(神衆幀)
모두 104명이 담겨져 있다.


▲  호화로움이 묻어난 석가3존불과 후불(後佛)목각탱

석가불이 조그만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좌우에 거느리며 석가3존불을 이
룬다. 그들 뒤에는 호화롭고 복잡해 보이는 후불목각탱화(木刻幀畵)가 병풍처럼 자리해 있는데
이들은 삼세불화(三世佛畵)를 표현한 것으로 가운데에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를 배치하고 왼
쪽에 약사회도(藥師會圖), 오른쪽에 극락회도(極樂會圖)를 배치했다.

▲ 석가3존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나눠진 16나한(羅漢)과 500나한들
우리나라 인구처럼 가지각색의 모습과 표정, 의상을 취하고 있어 다들 개성들이 넘친다.


 

♠  서울에서 제일 오래된 명품급 마애불이자 삼천사계곡의 영원한 은둔자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 보물 657호

▲  마애불과 그에게 보금자리를 내준 눈썹바위

대웅보전 옆구리를 지나면 왼쪽으로 범상치 않은 모습의 눈썹바위를 만나게 된다. 그 바위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마애불이 한결같은 모습으로 깃들여져 있으니 그가 바로 서울에서 가장 오
래된 마애불인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이다.

불상 앞에는 그에게 예불을 올리는 석조 공간이 넓게 닦여져 있는데 그 공간 밑에는 삼천사계
곡이 일조권을 강제로 빼앗긴 채 숨죽여 흘러간다. 한참 학창 시절이던 1992년 가을, 두근거리
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지금처럼 계곡을 가리고 앉은 돌로 다진 공
간이 없었고 계곡을 건너면 마애불 앞에 조그만 예불 공간이 전부였다.

서울에 있는 4개의 고려시대 마애불<① 승가사 마애여래좌상 ☞ 관련글 보러가기, ② 안암동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 관련글 보러가기, ③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④ 삼천사 마애여래입상>
의 일원으로 고려 초기(멀리 신라 말로 보기도 함)에 조성된 선각(線刻) 마애불이다. 불상 대
부분은 선을 그어 처리했지만 일부는 약간 튀어나온 얕음새김으로 전체 높이는 3m, 불상의 높
이는 2.6m이다.

이 마애불은 윤곽을 따라 금분이 칠해져 있었으나 2000년 이후에 사라졌고, 그의 왼쪽(불상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 부분에는 약간 붉은 색채를 띠고 있는데, 이는 그에게 채색을 했던 흔
적들이다. 마애불에 색을 입힌 경우는 이곳과 경북 칠곡군 왜관(倭館) 부근에 있는 노석리 마
애불상군 등이 있다.


▲  마애불 양쪽에는 네모난 구멍이 2개 있는데 저들은 마애불을 보호했던
보호각의 아련한 흔적으로 그가 감싸주던 부분은 어둠 속의 촛불처럼
유난히도 밝고 하얗다. 마치 광배(光背)에서 나온 빛이 그의 주변을
환하게 밝혀주는 것처럼 말이다.


불상의 머리 뒷쪽에 2겹으로 된 둥근 두광(頭光)이 그를 밝히고 있고 소발(素髮)한 머리 위에
는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얼굴은 작고 갸름한 편으로 눈은 지그시 감아 명
상에 잠긴 모습이며 코의 끝부분은 두툼하다. 입은 살짝 오무려 약간의 미소를 선보이고 있고
눈썹 사이에는 둥그런 백호(白毫)가 박혀있다.
그의 키는 얼굴에 비해 꽤 긴 편으로 조금은 두꺼워 보이는 법의(法衣)를 걸치며 두 어깨를 가
렸고 발 밑에는 연화대좌(蓮花臺座)가 있으며, 몸 뒤에는 반짝반짝 윤기를 흐르는 광배(光背)
가 새겨져 있다.
신체적인 균형이 그런데로 비슷하며 몸매는 단정하고 단아한 인상을 풍긴다. 오른손은 아래로
내렸고 왼손은 배 앞에서 받쳐든 모습인데, 이는 부처의 성도(成道)를 상징한다고 한다.

불상 어깨 좌우와 윗부분에는 네모난 구멍과 좌우로 길게 파여진 홈이 있는데 이는 자연현상이
아닌 마애불을 보호하던 목조 가구(架構)를 씌우던 흔적이다. 그 가구는 오래 전에 자연재해나
화재로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그가 사라진 이후에는 불상 위쪽에 있는 눈썹바위의 보호를 받으
면서 눈과 비를 피했다. 게다가 첩첩한 계곡 바위에 자리한 탓에 태풍과 거센 바람의 공격을
피하기에 좋아 거의 천 년의 세월을 살았음에도 바위에 진하게 현신한 듯 건강상태는 좋다.

지금은 이렇게 답사객과 순례객의 발길이 빈번하지만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리 주목을 받
지 못했다. 게다가 민간인 통제구역에 묶여 출입도 부자유스러우니 아는 사람과 절 신도만 조
금 찾는 정도였다. 허나 삼천사와 삼천사계곡에 꽁꽁 씌워진 통제의 굴레가 벗겨지면서 삼천사
의 존재와 함께 마애불의 이름도 약간이나마 알려지면서 찾는 이가 늘었다.


▲  바위에 현신한 듯 두드러진 모습의 마애불 윗부분
불상을 수식하고 있는 두광과 신광은 마치 몸에 빛이 발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도록 그의 모습을 더욱 신비롭게 꾸며준다.


▲  마애불의 아랫도리
연꽃으로 치장된 연화대좌 위에 불상이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몸에 걸쳐진
법의 밑에 그의 두 발이 나와 있는데 발가락이 다소 두터워 보인다.


내가 그의 존재를 알아챈 것은 1992년 가을, 진관사 부근 야산에 숨어있는 줄 알고 부근 야산
을 열심히 뒤적거리다가 미지의 세계나 다름이 없던 삼천사까지 들어왔다. 당시 적멸보궁이던
대웅보전 뒷쪽에서 나와 숨바꼭질을 한 마애불을 발견하고
'서울에도 이렇게 휼륭한 마애불이 있었다니!!' 감탄을 연발하며 북악산(백악산)의 백석동천<
白石洞天, 백사실계곡 ☞ 관련글 보러가기>처럼 그에게 은근슬쩍 빠져들고 말았지. 하여 매년
적어도 1~2회 정도 그를 찾고 있다. 나는 이곳에 들어올 때마다 점점 늙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그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비록 인간이 만든 조각물이긴 하지만 여
전히 정정함을 잃지 않으며 오늘도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을 맞느라 여념이 없다.

지금은 삼천사 경내지만 예전에는 옛 삼천사로 가던 길목으로 조그만 암자와 계곡, 바위만 있
었다. 그러다가 마애불 주변에 삼천사를 세우면서 지금처럼 경내 한복판이 되었고, 지금의 삼
천사를 일군 성운의 노력으로 오래된 마애불임을 입증받아 1979년 국가 보물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

이 마애불은 영험(靈驗)이 있기로 소문이 자자해 많은 중생들이 먼 거리를 걷는 수고로움을 마
다하지 않으며 이곳을 찾는다.


▲  마애불 좌측 면에 새겨진 '일붕선사좌선대(一鵬禪師坐禪坮)' 바위글씨
20세기 큰 승려로 추앙받는 일붕(一鵬) 서경보 선사가 이곳에서
좌선한 것을 기리고자 새긴 것이다.

▲  꼬랑지가 인상적인 귀여운 다람쥐상 (마애불 예불 장소 난간)
(그의 존재의 이유는 모르겠음)

▲  부처의 진신사리를 머금은 종형사리탑(鐘形舍利塔)

마애불 앞에는 네모난 기단 위에 심어진 석종형(石鐘形) 사리탑이 있다. 이 탑은 1988년에 성
운화상이 미얀마 마하시사사나 사원의 아판디타 대승정에게서 받은 부처의 진신사리 3과를 봉
안하고 있는데 그 연유로 서울에서 제일 처음 적멸보궁을 마련하여 석가의 진신사리를 머금은
사찰임을 천하에 어필했다.
마애불과 함께 삼천사의 성역으로 무척 애지중지되다가 2012년 진신사리를 담은 거대한 9층석
탑이 지어지면서 중요성이 조금은 떨어졌다.

◀  종형사리탑 우측의 세존진신사리비
미얀마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봉안한
과정과 이유를 소상히 담아 넣었다.


 2층 규모의 산령각(山靈閣)

마애불이 의지하고 있는 눈썹바위 옆구리에는 2층짜리 산령각이 있다. 산령각이란 절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산신각(山神閣)의 다른 이름으로 삼천사는 그 흔한 이름 대신 천태각이나 산령각
처럼 생소하고 어려운 이름을 선택해 중생들을 아리송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산신
각이긴 하지만 독성(獨聖)과 칠성(七星)까지 모두 아우르고 있어 삼성각(三聖閣)의 역할을 한
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산령각은 2층으로(1층은 창고 등으로 쓰임) 내부 중앙에는 금
칠을 한 거대한 산신탱이 걸려있다. 예전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童子) 등은 나무로 돋음새
김으로 새기고 나머지는 그림으로 상큼하게 처리했으나 돈을 좀 벌었는지 죄다 도금을 하여 금
색 옷으로 갈아입혔다.
화려하게 하는 것까지는 좋으나 산신의 수염과 동자의 머리를 빼고는 모조리 색이 같아서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벌이듯 분간이 쉽지 않아 눈만 아프다.

이렇게 산신탱은 삼천사에서 마애여래입상, 세존진신사리탑 다음으로 자랑하는 보물로 비록 고
색의 기운은 없지만 다른 절과 달리 산신을 크게 내세운 산신도량으로 절을 키우면서 '북한산(
삼각산) 산신이 보좌를 튼 절'임을 진하게 자처하고 있다.


▲  요란한 금칠의 산신탱과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올려진 공양미들

 독성(나반존자) 할배가 그려진 독성탱

 칠성들의 회합 현장, 칠성탱


▲  산령각과 마주한 눈썹바위 - 오랜 세월의 주름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  산령각에서 굽어본 마애불 예불 공간과 종형사리탑 주변,
그리고 대웅보전의 두툼한 뒷모습

▲  산령각에서 굽어본 삼천사 위쪽 다리
저 다리는 삼천사계곡 등산로로 북한산성과 비봉, 옛 삼천사터로 이어진다.
다리 주변 계곡에는 중생들이 쌓아올린 기하학적인 돌탑들로 가득해
조그만 돌탑의 세상을 이룬다.

 삼천사의 독특한 불전 ~ 천태각(天台閣)

산령각 옆에는 천태각이라 불리는 벽돌 건물이 있다. 천태각은 16나한의 하나로 천태산(天台山
)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의 보금자리로 독성각(獨聖閣)과 비슷하다. 삼천사
는 독성각이란 보편적인 이름을 취하지 않고 그가 일어난 천태산의 이름을 따서 천태각이라 했
는데 산령각에 독성탱이 있음에도 별도로 그만의 건물까지 두어 대우하고 있다.

이 건물은 199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건물 안에는 108개의 인등(引燈)이 내뿜는 열기와 기름냄
새로 가득해 더울 때 오면 정말 한증막이 따로 없다. 인등은 기름을 담고 심지를 넣어 불을 켠
것으로 하루 종일 불을 밝힌다. 그래서 건물 내부가 더운 것이다.
건물 지붕에는 매일 치솟는 열을 외부로 배출하고 공기를 통하게 하여 내부 온도를 유지시키는
통풍구가 있으며, 다른 건물과 달리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2개로 바깥 문인 여닫이문은 언제나
열려있으나 안쪽 문인 미닫이문은 인등을 지키기 위해 항시 닫혀져 있다. 문을 들락날락 거릴
때는 반드시 문을 닫아야 인등의 건강에 지장이 없다.


 천태각의 주인, 독성상과 자연석으로 간단하게 손질한 16나한들

천태각 독성은 대머리의 둥근널쩍한 얼굴, 길다란 귀, 약간 두꺼워 보이는 옷(얼마나 더울까?)
, 그리고 배 앞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결가부좌(結跏趺坐)를 취한 여유로운 모습이다. 명
상에 잠긴 그의 익살스런 표정은 보는 이들에게 웃음을 머금게 하며 그 좌우에는 조그만 16나
한상이 포진해 있는데 그들은 전국 각지에서 가져온 자연석으로 정성스럽게 조성한 것이다.


▲  삼천사 위쪽 계곡을 가득 메운 돌탑의 물결

▲  삼천사 돌담길 (삼천사계곡 산길)

삼천사에서 북한산(삼각산)으로 오르려면 종형사리탑 좌측에 있는 대문으로 나가거나 일주문에
서 오른쪽 길로 가야 된다. 마치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기와집이나 궁궐 담장길을 거닐 듯, 운
치가 깃들여진 돌담길은 삼천사의 또다른 명물이라 할만하다.


 아비규환의 속세로 무거운 발걸음을 하다~~

 연등의 전송을 받으며 ~~
이렇게 하여 봄의 한복판에 찾아간 북한산 삼천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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