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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8.13 비봉능선 밑에 포근히 깃든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승가사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2. 2019.05.22 봄맞이 산사 나들이 ~ 비봉능선 밑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금선사 (목정굴)

비봉능선 밑에 포근히 깃든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승가사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북한산(삼각산) 승가사



' 북한산 승가사 5월 나들이 '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

▲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

▲  승가사 경내

 



 

봄과 여름의 마지막 경계선인 5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날, 북한산(삼각산) 승가사를
찾았다.
간만에 승가사를 찾은 이유는 별거 없다. 그곳에 깃든 늙은 마애불과 승가대사상이 문득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니 집에서 2시간대면 충분
히 접근이 가능하다.

햇님이 중천에 머물던 14시, 승가사 아랫 동네인 구기동(舊基洞)에 도착했다. 보통 승가
사에 갈 때는 구기동계곡을 경유했으나 이번에는 지름길인 비봉4길을 이용했는데 지름길
인 대신 경사가 좀 각박하다.
비봉4길은 러시아대사관저와 건덕빌라를 지나면서 숲길로 바뀌는데, 차량 접근을 위해서
길 포장을 해놓았으나 자연과 세월이 할퀴고 간 흔적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어 노면 상태
는 영 좋지가 못하다. 그런 길을 건덕빌라 기준으로 30~40분 정도 오르면 승가사 갈림길
이 나오면서 일주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승가사까지 걸어가기 귀찮거나 체력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러시아대사관저 앞에서 출발하
는 승가사 셔틀 봉고를 타면 된다. (봉고 운행시간은 승가사에 문의 요망) 길 상태가 좋
지 않아 차가 다소 흔들리는 단점이 있으나 그것을 타면 승가사 경내 밑(호국보탑 밑)까
지 태워준다. (차비는 1천원 정도 받음)


▲  소나무가 무성한 승가산림초소 숲길 (비봉4길)



 

♠  승가사 입문

▲  청기와를 눌러쓴 승가사 일주문(一柱門)

승가사 갈림길에서 승가사로 인도하는 길은 2개인데, 그중 왼쪽(북쪽) 계단길을 오르면 승가
사의 내력과 가람 배치도가 담긴 안내문과 함께 청기와로 머리를 장식한 일주문이 마중을 한
다.
이 문은 1985년에 지어진 것으로 승가사 일대가 국립공원 건축제한구역이라 여러 번 강제 철
거를 당하기도 했다. 간신히 국립공원관리공단을 설득해 지금의 문을 마련했으며 그로 인해
북한산(삼각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절 일주문이 되었다. 평방(平枋)에는 원담(圓潭)
이 쓴 '三角山 僧伽寺'란 현판이 걸려있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  경내로 인도하는 청운교 계단길

일주문을 지나면 경내까지 숨 가쁜 경사길의 연속이다. 중간인 호국보탑까지는 경사의 패기를
조금이나마 줄이고자 청운교(靑雲橋)란 계단길을 닦았는데, 계단이 장대하여 기를 질리게 한
다. 계단 앞 좌우에는 용조각이 입을 벌리며 혹시 모를 바람직하지 않은 기운을 경계하고 있
고, 계단 중간 오른쪽에는 승가사의 내력이 담긴 사적비가 있으며, 그 계단의 끝에 승가사의
새로운 명물인 호국보탑이 자리해 있다.

▲  청운교 표석

▲  삼각산 승가사 사적비(事蹟碑)


▲  청운교 계단에서 바라본 천하
북악산(백악산) 산줄기와 서울 도심, 강남 지역까지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  승가사의 자랑, 호국보탑(護國寶塔)

끝없이 펼쳐진 계단에 기가 질린 중생은 그 계단의 끝에 장대하게 자리한 호국보탑 앞에 다시
한번 주눅에 잠긴다.
인도나 동남아의 불탑(佛塔)처럼 생긴 호국보탑은 승가사가 예로부터 호국기도 도량임을 천하
에 내세우며 조국 통일을 염원하고 동시에 절의 위세도 강조할 겸 많은 돈을 들여서 장만했다.
그러다보니 호국보탑이란 아름다운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가 세워짐으로서 탑이 없던 허
전함을 제대로 극복하게 되었다. (정식 이름은 '민족통일 호국보탑')

장엄한 모습의 이 탑은 절 밑의 바위와 나무를 싹 밀어버리고 지반을 다져 만든 것으로 1987
년에 짓기 시작해 1994년에 완성을 본 승가사의 최대 프로젝트였다. 탑의 높이는 무려 25m로
9층석탑이며, 탑신(塔身) 밑에는 감실(龕室)을 만들어 경주 석굴암(石窟庵)을 조금 재현했다.
감실에는 석굴암처럼 본존불(本尊佛)과 11면(面) 관세음보살상, 10대 제자상을 돋음새김으로
배치하고 연꽃장식 덮개를 씌웠으며, 바깥쪽에는 사천왕(四天王)을 배치해 본존불과 탑을 지
키도록 했다. 사방으로 놓인 계단을 통해 감실 내부로 들어갈 수 있으나 다소 좁으며,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된다.
탑 주위로는 문수동자상과 보현동자상,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빼곡히 배치했으며, 탑신 뱃
속에는 인도 정부에서 기증을 받은 부처의 진신사리 1과와 청옥와불(靑玉臥佛) 1좌, 나한(羅
漢)의 사리 2과, 패엽경(貝葉經) 1질, 무구정광다라니경 경판 1질, 철제구층탑 99기, 화엄경
(華嚴經) 9질을 봉안했다.

조그만 감실 불당까지 갖춘 매우 이형적(異型的)인 탑으로 지금이야 과시용이다 뭐다 해서 이
러쿵저러쿵 말이 많지만 100년 이후에는 한국미술사 20세기 석탑 부분에서 크게 이름을 날릴
유명 인사로 등극할 지도 모른다. 그러니 미래의 문화유산에게 미리 눈도장을 찍어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  온갖 조각들로 정신이 없는
호국보탑 감실

▲  호국보탑 감실에 봉안된
석가여래 본존불


호국보탑에서 경내까지는 2갈래의 길이 있다. 왼쪽 계단길로 가는 길은 호국보탑을 만들면서
새롭게 닦은 길이고, 오른쪽에 조금 가파르게 형성된 길이 기존 길이다. 그럼 여기서 승가사
의 내력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북한산(삼각산)의 주요 봉우리인 비봉(碑峰, 560m) 동쪽 430m 고지에 자리한 승가사는 756년
에 수태(秀台)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당나라 고종(高宗) 시절 중생들로부터 생불(生佛)
로 칭송을 받던 승가대사(僧伽大師)의 행적에 크게 감동을 먹고 그를 기리는 뜻에서 절 이름
을 승가사라 했는데, 동문선(東文選)에는 1107년에 이예(李預)가 쓴 중수기가 있으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옛날 낭적사(狼跡寺) 스님 수태가 승가대사의 거룩한 행적을 익히 듣고 삼각산 남쪽에 좋은
자리를 정해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돌을 쪼아 형상을 새기니 대사의 어진 모습이 더욱 우
리나라에 비추었다. 나라에서 천지의 재변과 홍수와 한발 등의 재난이 있으면 기도를 드려 물
리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언제나 효험이 있었다'

1024년 지광(智光)과 성언(成彦)이 중창했고, 1090년에는 구산사(龜山寺) 주지였던 영현(領賢
)이 선종(宣宗)의 명을 받아 중수했다. 1099년에는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숙종(肅
宗)과 함께 남경(南京, 서울 도심부로 여겨지나 확실하지 않음)을 찾아 인근 장의사(藏義寺)
와 승가사에 들렸는데, 이때 불상을 개금하고 불당을 중수했다.

1422년 세종(世宗)이 전국의 사찰을 통합해 선종(禪宗)과 교종(敎宗) 2개로 나누자 선종에 줄
을 섰으며, 그 시절 고승(高僧)으로 이름을 날린 함허(涵虛)가 여기서 수행을 했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간신히 일으켜 세웠으나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이곳까지 기
어들어온 청나라군에게 다시 파괴되고 만다. 이후 중건했으나 숙종(肅宗) 시절, 인현왕후(仁
顯王后) 복귀로 궁지에 몰린 희빈장씨(禧嬪張氏)가 이곳에 관련 죄인을 숨겼는데, 그것이 발
각되자 절은 다시 쑥대밭이 되었다.


▲  동정각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승가사 남쪽 산줄기와 북악산(백악산) 너머로 서울 도심과 강남,
강동, 성남시 지역까지 흔쾌히 바라보인다.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임금은 1782년에 그렇게나 고대하던 아들을 얻었다. 바로 의빈성
씨(宜嬪成氏) 소생인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이다.
1784년 7월 불과 2살에 불과한 그를 세자로 봉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청나라 건륭제(乾隆帝)
는 경축의 뜻을 보내며 세자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고자 미얀마에서 보낸 옥불(玉佛)을 특별히
선물로 보내주었다.
정조는 그 옥불의 거처를 두고 고심하다가 왕실의 원찰이던 승가사를 중건해 그곳에 두었다.
절 중건은 당시 팔도도승통(八道都僧統)이던 성월선사(城月禪師)가 맡았으며, 옥불은 세자의
장수를 기원하는 불상이라 하여 장수불(長壽佛)이라 하였고, 그 불상이 담긴 건물은 장수전(
長壽殿)이라 불렸다.

장수전을 얼마나 화려하게 지었던지 몇백 척 높이의 층층대 위에 우뚝 솟아있으며, 단청은 너
무 화려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빼앗을 지경이었다. 내부에는 천정에 황금구슬을 아로새겼고 한
쌍의 침향등과 술 장식을 드리웠으며, 건륭제가 준 시가 적혀있었다. 그 밑 유리상자 안에 옥
불이 안치되어 있었다.
건물도 으리으리하고 게다가 보기 힘든 미얀마산 불상까지 머금고 있으니 이를 보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절은 그야말로 시장통처럼 시끌벅적하였다. 일반 백성들부터 사대부, 왕족까
지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드니 절은 자연히 예전의 명성을 되찾게 되었다.

허나 옥불의 바램과 달리 문효세자는 겨우 4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가 죽었으니 장수불
과 장수전의 존재 이유는 자연히 사라지게 되었고, 이후 장수전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장수불 또한 행방이 묘연하니 아마도 정조가 화가 나서 슬쩍 없앤 모양이다. (조선의 청나라
에 대한 불편한 감정도 그들이 없어지는데 적지 않게 영향을 줬을 것임)

▲  승가사 승가굴(약사전)

▲  파괴된 비석의 아랫도리(비좌)

19세기 이후에는 명성황후와 엄귀비의 후원을 받아 절을 중수했으며, 1941년에 도공(道空)이
중수를 했다. 이후 비구니 도원(道圓)이 절을 꾸렸으나 6.25 때 절이 싹 파괴되는 비운을 겪
는다.
1957년 도명(道明)이 산신각과 향로각, 동정각, 대방, 요사를 지어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웠고
1971년에는 상륜(相侖)이 주지로 부임, 마애여래좌상으로 오르는 108계단을 대리석으로 업그
레이드하고 절 진입로를 확장하는 한편, 전기를 가설했다.
1976년에는 범종을 만들어 동정각에 봉안했고, 1994년에 호국보탑을 지어올려 현재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각박한 산자락에 터를 닦았지만 주어진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 정신없이 건물을 닦았으며, 법
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명부전과 영산전, 향로각, 산신각, 동정각, 약사전 등 10여 동의 건물
이 경내를 가득 채우고 있다.
큰 전쟁 때마다 파괴되는 고통을 겪으면서 겉으로 보이는 고색의 내음은 거의 말랐으나 구기
동 마애여래좌상과 석조승가대사좌상 등 국가 보물 2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성월선사의 탑과
탑비, 옛 석탑의 부재(部材)와 비좌 등이 남아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한다.

승가사는 비구니 사찰로 북한산(삼각산) 제일의 선원(禪院)을 칭하고 있으며, 경관이 빼어나
고 국보급 조망을 지니고 있어 예로부터 경승지로 명성이 높았다. 조선 때는 서쪽의 진관사(
津寬寺), 남쪽의 삼막사(三幕寺), 동쪽의 불암사(佛巖寺)와 더불어 서울 근교의 명승 사찰로
꼽혔는데, 승가사는 그 북쪽으로 그들 가운데 단연 갑(甲)으로 칭송을 받았다. 그러다보니 많
은 문인들이 문이 닳도록 찾아와 시와 글을 남겼는데, 고려 고종(高宗)의 스승이던 유원순(兪
元淳)도 이곳에 안겨 다음의 걸쭉한 시를 남겼다.

기구한 돌다리에 구름을 밟고 올라가니 좋은 집 높이 있어 조화의 고장 같아라.
가을 이슬 가늘게 떨어지니 천리 안계(眼界) 상쾌하고
석양이 멀리 잠기니 저 강물이 밝게 빛난다.
공중에 오락가락 가는 아지랑이 향불 연기에 이었고
골짜기에서 우는 한가한 새소리 풍경소리를 대신하네.
그보다 부러운 일은 높은 스님의 생각하는 일인 것이
인간세상의 명리에는 도무지 마음에 없다네.


구름도 능히 잡힐 듯한 높은 산중에 묻혀 있어 제아무리 무거운 번뇌라도 감히 따라오기 힘들
다. (번뇌는 절 밑에서 얌체처럼 기다리고 있음, 결국 해탈은 꿈임) 속세와도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어 산사(山寺)의 내음도 진하며, 절을 둘러싼 숲이 삼삼해 공기도 청정하다. 게다가
서울 도심과도 가까워 멀리 갈 것도 없이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거나 마음을 싹둑 가
다듬고 싶을 때 언제든 와서 안기고 싶은 곳이다.

* 승가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1 (비봉4길 213, ☎ 02-379-2996)



 

♠  승가사 둘러보기 (대웅전 주변, 성월선사 승탑과 탑비)

▲  연등이 허공을 가득 메운 대웅전(大雄殿) 뜨락

동정각의 아랫도리를 들어서면 경내의 핵심인 대웅전 구역이다. 대웅전 뜨락을 중심으로 서쪽
에는 서래당, 동쪽에는 적묵당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승가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77년에 짓기 시작
하여 1980년에 완성을 보았다. 건물 좌우벽과 뒷쪽에는 부처의 생애를 머금은 전생도와 심우
도가 그려져 있는데, 그림 옆에 해석을 달아놓아 이해를 돕게 했다.

뜨락 서쪽에 자리한 서래당(西來堂)은 정면 7칸, 측면 6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1986년 중창되
었다. 겉으로 보면 1층이지만 엄연한 2층으로 뜨락에 노출된 부분은 종무소(宗務所)와 주지실
로 쓰이며 호국대탑에서 경내로 오르는 길목인 아랫층에는 공양간이 있다. 공양간은 장작으로
땐 밥과 국을 공양으로 제공하는데, 일요일과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에는 산꾼과 답사꾼도
공양이 가능하다. (절 사정으로 공양을 주지 않는 경우도 가끔 있음)
서래당 맞은편에 자리한 적묵당(寂默堂)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선방(禪房
)의 역할을 하고 있다. 1985년에 중창되어 매년 100여 명의 비구니가 수행 안거(安居)를 하고
있는데, 내부에는 소조여래좌상 1구와 1966년에 제작된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 석가여래좌상과 후불탱

대웅전 내부는 황금색으로 개금(改金)된 목각탱(木刻幀)들로 두 눈이 부실 지경이다. 불단에
자리한 석가여래상은 꽤나 단련을 했는지 어깨가 쩍 벌어져 있으며, 두터운 얼굴은 다소 경직
된 표정을 머금고 있다. 그의 좌우로 그 흔한 협시(夾侍)보살은 없지만 대신 뒷쪽에는 호화로
운 금동후불탱을 배치해 그를 든든히 받쳐준다.
후불탱(後佛幀)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그를 바라보고 있으며
8대 보살과 아난(阿難), 가섭(迦葉)이 그를 에워싸 그의 이야기를 듣는 모습이다. 붉은 지붕
의 닫집 또한 화려하기 그지없으며, 극락조(極樂鳥)와 연꽃이 장식되어 있다.

   ◀  대웅전 계단 우측에 누운 석조(石槽)
석조는 물을 담아두는 통이지만 첩첩한 산골이
라 물 사정이 너그럽지 못해 거의 항상 비워둔
다. 하여 물을 마시려면 꼭지를 틀어 바가지에
받아 마시면 된다.


▲  연등의 물결이 하늘과 땅을 가르는 대웅전 뜨락과
그 끝에 자리한 동정각(動靜閣)


대웅전 맞은편에는 범종(梵鍾)의 보금자리인 동정각이 마치 천상(天上) 세계의 누각처럼 높다
랗게 들어앉아 속세를 굽어본다. 동정각은 2층 규모로 아래층은 경내와 속세를 이어주는 통로
이고, 윗층은 범종의 거처로 기존 범종각과는 다른 6각형 정자(亭子)식 건물이다.

동정각에 고이 간직된 범종은 1976년에 봉안된 것인데 그 종을 운반할 때 15명이 꼬박 매달려
무려 1달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때는 차들이 감히 올라올 수도 없었던 산속이라 종 밑에 나무
토막을 깔고 밀어올리는 옛 방식으로 종을 운반했기 때문이다.
아침 4시와 저녁 6시가 되면 잠든 종을 살짝 깨우며 종소리를 속세로 흘려보내는데, 그 종소
리가 매우 은은하다.


▲  동정각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승가사 남쪽 산줄기, 북악산,
서울 도심과 강남, 강동 지역 등)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영산전(靈山殿)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81년에 중창되었다. 석가3존상을 비롯하여
석가후불탱, 16나한탱, 신중탱 등이 들어있는데, 대웅전의 탱화들처럼 천편일률적으로 모조리
금색을 입혀 등장인물이 다른 것 빼고는 거기서 거기 같고, 너무 찬란함에 치중한 나머지 거
부감과 식상함마저 적지 않게 들게 한다. (지나친 화려함은 오히려 소박함보다 못함) 이들 탱
화는 1987년에 김광한, 김광열 형제가 조성했다.


▲  산신각(山神閣)

영산전 좌측 높은 벼랑 위에 산신의 거처인 산신각이 있다. 달랑 1칸 밖에 안되는 조촐한 건
물로 화재로 무너진 것을 1984년에 다시 지었는데, 그때 서쪽을 바라보고 있던 건물을 남향(
南向)으로 조정했다. 내부에는 1986년에 김광한/김광열 형제가 만든 산신탱이 있으며, 역시
금칠로 도배를 해놓았다. (불교에서 제일 좋아하는 색이 황금색이라고 함)


▲  산신과 호랑이, 동자 2명, 나무 등이 묘사된 산신탱

▲  철책 너머로 바라본 성월선사의 승탑(僧塔, 부도)과 탑비

영산전 동쪽은 통제구역으로 중생들의 발길을 막고 있는데, 그곳에 성월선사의 탑이 있어 살
짝 문을 열고 들어가보았다.

통제구역으로 들어서면 계곡이 나오는데, 그 건너에 푸른 철책이 쳐져 있고 바로 그 안에 성
월대사의 승탑과 비석이 마치 철창 안에 갇힌 양 고적하게 자리해 있다. 그곳을 가려면 철책
문을 지나야 되나 갑자기 새가슴이 되어 그곳까지는 가지 않고 계곡 너머에서 바라보는 것으
로 만족했다.
성월선사의 탑과 탑비는 1802년 8월에 조성된 것으로 비석에 '朝鮮國 正憲大夫 城月堂 碑銘竝
序(조선국 정헌대부 성월당 비명병서)','嘉慶 七年 壬戌 八月日立(가경 7년 임술 8월일입)'이
라 쓰여 있어 탑의 주인과 조성시기를 고맙게도 알려주고 있다. 승려임에도 정헌대부의 지위
를 받은 것이 이채로운데, 서울에 흔치 않은 19세기 승탑이고 조성 관련 내용을 머금은 비석
까지 지니고 있어 지방문화재의 자격은 충분해 보인다.

▲  명부전(冥府殿)

▲  명부전 지장탱

대웅전 우측 옆구리로 들어서면 약사전과 마애불로 인도하는 길이 나온다. 그 길을 1단계 오
르면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봉안한 명부전이 마중을 한다.

대웅전과 약사전 사이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1972년 착공
해 1975년에 완성을 보았다. 1년 정도면 능히 만들고도 남을 규모지만 궁색한 산중이라 공사
가 더뎌 3년이나 걸린 것이다.
건물 내부에는 특이하게도 지장보살상 등의 독립적인 불상/보살상은 없고 지장보살과 명부(冥
府, 저승)의 식구를 싹 몰아 넣은 지장탱이 전부이다. 이 탱화는 1983년에 김원각, 김석담이
조성한 것으로 다른 건물의 탱화와 마찬가지로 금칠로 도배를 했다. 다만 다른 것은 지장보살
의 머리만 푸른 색을 입혀 약간의 차별화를 두었다.


▲  약사전 앞에 놓인 옛 석탑의 흔적

명부전에서 1단계 더 올라서면 승가굴(약사전)이 나온다. 약사전 앞에는 늙은 석탑의 흔적이
우수에 잠긴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데, 두툼하게 생긴 지붕돌과 탑신이 한 덩이씩만 남았다.
그들에 대한 정보가 없어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나 이 땅에 흔한 3층석탑이 아닐까 싶은데, 임
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절이 파괴되면서 같이 비극을 맞았을 것이다.
이후 일부만 남은 채, 버려진 것을 비좌와 함께 수습하여 약사전 앞에 두었으며, 탑의 사라진
부분이 많아서 복원까진 엄두도 못 내고 그저 승가사의 옛 유물로 한가로운 여생을 보낸다.


▲  나는 누군가? 여긴 어딘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비좌(碑座)

향로각 앞에는 비석을 받치던 비좌가 초췌하게 누워있다. 고색의 때로 가득한 이 비좌는 화강
암으로 다진 것으로 3단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넓직한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무슨 비석의 아랫도리인지는 북한산(삼각산) 귀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승가사에 고려 중기 승
려인 탄연(坦然, 1070~1159)이 쓴 승가굴 중수비(重修碑)가 있었다고 하니 그 비석의 아랫도
리가 아닐까 의심된다.
조선 중기 이후 전쟁으로 여러 번 절이 파괴되면서 비석 윗도리가 몽땅 날라가 그의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게 되었고, 비좌 자신도 그때의 충격으로 기억조차 상실했다.

사라진 비신과 이수(螭首)는 경내와 그 주변을 싹 뒤집으면 일부라도 나올 듯 싶은데, 그 작
업도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  승가사의 오랜 보물들 (승가굴,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  자연산 석굴인 승가굴에 터를 닦은 약사전(藥師殿)

약사전은 큰 바위 밑도리에 있는 자연산 석굴이다. 승가사를 세웠다는 수태가 바위를 뚫어 굴
을 만들고 돌을 쪼아 승가대사상을 새겼다는 창건 설화가 깃든 늙은 굴로 승가굴(僧伽窟)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고려 중기에는 탄연이 이곳에서 수행하면서 정체가 아리송한 승가굴 중수비를 남겼으며, 조선
세종 때는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의 쾌유를 빈 인연으로 약사전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전한다.

1960년대 이후 석굴을 크게 손질하여 안과 바깥에 돌로 벽을 쌓고, 승가대사상의 불단과 연화
대를 만들었으며, 그 앞에 기도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인등(引燈)을 대사상 좌측에 배치해
내부를 환하게 밝혀준다. 석굴은 그리 넓지는 않으나 굴의 본능상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
는 따스하다.


▲  석조승가대사좌상(石造僧伽大師坐像) - 보물 1000호

약사전에는 승가대사상이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약사여래(藥師如來)의 역할과 직무를 대
신 하고 있는 그는 인도 출신 승려로 당나라에서 크게 활약했다. 그의 덕이 대단했던지 관세
음보살의 화신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으며, 그의 인기가 신라까지 전해져 승가사를 세운 수
태가 그의 상까지 만들어 이곳에 봉안했다고 한다.
허나 이 석상은 전설과 달리 신라 후기가 아닌 1024년에 지광(智光)이 동량이 되고 광유(光儒
) 등이 조각을 했다. 조성 관련 내용은 광배 뒤쪽에 새겨져 있어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확실
한 조각품으로 당시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으며, 석상 높이는 76cm, 광배 높이 130cm로 호분(
胡粉)을 입혀 몸 전체가 하얀 천사처럼 되었으나 근래 호분을 벗겨내어 순백(純白)에서 벗어
났다.


▲  인등의 강렬한 빛을 즐기고 있는 석조승가대사좌상
(호분을 벗기기 전, 2012년 어느 날)


승가대사상은 하얀 피부의 석상으로 나이가 어느 정도 든 후에 호분을 입힌 것으로 여겨진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어 지장보살의 이미지를 주고 있으며, 손자나 손녀를 맞는 할머니와
같이 포근하고도 정이 넘치는 인상이라 그에게 다가서면 '세상 살기 힘들지?' 그러면서 손으
로 어루만지며 다독거려줄 것 같다.

그의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있고, 눈은 살짝 뜨며 정면을 바라본다. 코는 오똑하
고 입술은 무척 붉으며, 볼살이 많고 광대뼈가 나왔다. 두 귀는 두건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
고, 몸에 걸친 옷은 목 부분을 빼고는 노출된 부분이 없는데 부처나 보살의 복장과 비슷하다.
그가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 연꽃 대좌는 근래 만들어진 것으로 오른손을 가슴 앞에
대고 있으며 제천 빈신사지(頻迅寺址)의 4사자3층석탑 석상과도 유사한 면을 보인다. 또한 상
체가 길고 무릎이 넓어 고려 초에 유행했던 철불(鐵佛)과도 비슷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의 뒷쪽에 달린 광배(光背)도 꽤나 명품이다. 커다란 배의 모양을 한 이른바 주형거신광배
(舟形擧身光背)로 신광(身光)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머리 뒤쪽인 두광(頭光)은 신광
과 일부 교집합을 이루면서 둥근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앙증맞은 모습의 연꽃잎을 무늬로 두르
고 그 바깥쪽을 덩굴무늬와 모란꽃 무늬로 치장했다. 또한 광배 외곽 부분에는 불꽃무늬를 정
교하고 실감나게 새겨 광배의 아름다움을 더했다.

천하에 흔치 않은 늙은 승려상으로 1,000년의 지긋한 나이와 오랜 세월 어두컴컴한 석굴에서
광합성 작용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살았지만 건강과 피부만큼은 젊은 불상이나 석상 못지
않게 양호하여 방부제 외모를 자랑한다. 조선 중기와 현대에 일어난 3차례에 큰 전란으로 절
은 사라지기 바뻤지만 마애여래좌상과 함께 온전하게 살아남아 자리를 지켰고 이렇게 승가사
의 늙은 보물이지 꿀단지로 변함없이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 석상은 예전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2호였으나 나중에 재평가를 받아 국가 보물로 승진
되었다. 그런데 지정 번호가 우연히도 딱 1,000호이다. 매우 흔한 숫자이지만 결코 쉽게 꿰찰
수 없는 번호를 차지한 것이다. 외우기도 쉽고, 기억하기도 좋고, 게다가 이 땅의 사람들이
많이 쓰는 숫자이니 이런 우연이 참 어디에 있을까 싶다.


▲  가양심신(可養心神) 바위글씨

승가굴을 지나면 향로각(香爐閣)이란 돌로 다진 동그란 건물이 있다. 그 직전에 바위가 누워
있는데 그의 피부에 마치 뱀이 기어간 흔적 같은 꼬부랑 바위글씨가 깃들여져 있다.
그는 '가양심신' 바위글씨로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비봉에 있는 진흥왕순수비를 손수 탁본하
고 승가사에 잠시 들렸을 때 남긴 것으로 여겨진다. 이 4자는 마음을 수양하기 좋은 길지라는
뜻으로 승가사가 정신 수양과 독서를 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란 의미로 그렇게 한 글자 남기고
간 모양이다.


▲  마애불로 인도하는 108계단의 위엄 ①

향로각을 지나면 장대하게 펼쳐진 계단이 나타나 중생들을 다시금 주눅을 들게 하는데, 그 계
단은 불교에서 좋아하는 숫자인 108계단으로 그 계단의 끝에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연화교(蓮花橋)란 약간 볼록 튀어나온 조그만 다리를 건너 108계단에 임하면 되는데, 그렇게
까지 각박한 경사도는 아니어서 그리 힘들지는 않다. 속세의 부질없는 삶처럼 서두르지 않고
쓸데없는 자존심을 곱게 접어 천천히 한 계단씩 임하면 까마득하게 보이던 마애불이 마치 해
가 떠오르듯 크고 웅장하게 솟아오르며, 그 계단의 끝에 이르면 마애불의 거대한 위엄이 다시
한번 눈과 마음을 놀라게 만든다.


▲  마애불로 인도하는 108계단의 위엄 ②

▲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 보물 215호

승가사 북쪽에 자리한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이하 마애불)은 경내와 10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다. 이곳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비봉능선의 일원인 사모바위의 바로 남쪽
밑이다.
승가사에서 승가대사상과 더불어 경내에서 가장 늙은 보물이나 지정 명칭은 '승가사 마애여래
좌상'이 아닌 지역 이름을 딴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이다. 보통은 그 불상을 소유하거나 관리
하는 절의 이름을 앞에 붙이기 마련인데, 경내와 약간 거리가 있고 승가사 소유가 아닌 국가
소유로 되어 있어 지역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문화재 지정 명칭은 '서울 북한산 구기동 마
애여래좌상')

이 마애불은 신라 말 또는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왜정(倭政) 시절에 왜열도 학
자들이 고려 때 것이라며 지들 멋대로 평가를 했는데, 월북미술가인 김용준이 1947년 12월 14
일자 경향신문 칼럼에
'눈썹과 눈으로부터 코 입술이 모두 예쁘고 시원스런 표현이라든지 신라 석조의 특색인 턱 아
래 한 곡선을 그어 아래턱을 만든 솜씨며, 얼굴 모양의 턱이 꽉 받치고 원만후덕하고 복스러
운 맛이라든지 의복과 가부좌의 자세며 8각형으로 된 천개(天蓋)를 반쯤 돌을 파고 넣은 것과
연좌(蓮座)의 유려한 선'
등을 들어 신라 것이라 평가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인 삼천사지(三千寺址) 마애여래입상도 신라 말~고려 초기 것으
로 여겨지고 있어 이 둘은 서로 나이가 비슷하다.

직각을 이루며 솟은 거대한 바위의 남쪽 피부에 얇게 홈을 파고 돋음새김으로 도드라지게 결
가부좌로 앉은 불상을 새겼는데, 그의 건강을 위해 전실(前室, 보호각)을 만들고 머리 위에 8
각의 머릿돌(천개)을 끼어 얼굴을 보호했다. 그러다보니 건강 상태는 양호하며, 피부도 얼굴
일부를 빼고는 하얀 편이다.
허나 그렇다고 그의 상태가 늘 좋았던 것은 아니다. 1968년 김신조의 공비패거리가 서울에 침
투했을 때, 이들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게 총상을 입었던 것이다. 하여 마애불의 생애
최초로 큰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의 갑옷과 같던 보호각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사라지고 보호각을 끼던 구멍 4개
만 윗쪽과 중간에 아련히 남아있다. 아마도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거나 자연재
해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  옆에서 바라본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  마애여래좌상의 얼굴
(양쪽에 보이는 구멍 4개는 보호각의 흔적들)


마애불의 얼굴은 후덕한 인상의 승가대사상과 달리 조금 경직되고 근엄한 표정 같다. 이마 중
간에는 백호가 살짝 찍혀 있고, 진한 눈썹은 무지개처럼 구부러져 있으며, 두 눈은 감겨 있어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다. 코는 끝이 두툼하고 입술은 두꺼우며, 붉은색을 칠한 흔적이 있는지
빨간 기운이 조금 남아있다. 귀는 중생의 소리를 모두 들으려는 듯 어깨까지 축 내려왔으며,
볼살이 좀 많다.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껍게 솟아 있는데, 바로 위에 머릿돌을 끼워 넣어 앞
으로 크게 돌출시켜 그의 모자로 삼았다. 모자가 큰 덕분에 얼굴에는 세월이 훈장처럼 달아준
검은 여드름이 여럿 있는 것 외에는 멀쩡하며 피부도 하얗다. 그리고 모자 밑부분에는 연꽃무
늬가 새겨져 있다.
몸통과 머리를 잇고 있는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어깨는 꽤나 단련을 했는지 당당
하고 듬직한 모습이다. 불상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오른쪽 어깨와 가슴, 젖꼭지를 속시
원히 드러내고 왼쪽 어깨를 옷으로 가린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의 옷 스타일을 하고 있는
데, 우견편단은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이 단연 으뜸으로 신라 후기부터 고려시대 불상에 많이
나타난다.
몸에 걸친 옷은 얇은 편으로 왼쪽 어깨와 배, 두 다리를 가리고 있으며, 왼팔에 묘사된 옷주
름은 세로로 그어져 있어 기하학적인 추상성(抽象性)을 드러내고 있다.


▲  마애불의 가슴과 아랫부분, 그리고 연꽃이 활짝 열린 연화대

가슴을 비롯한 상반신은 아주 묵직한 모습으로 거대한 마애불의 위엄을 더욱 드높인다. 허리
는 밑부분이 쏙 들어가 괜찮은 몸매를 보이고 있으며 팔은 강철처럼 매우 두꺼워 보인다. 그
리고 오른손은 무릎에 대고 왼손은 배꼽 밑에 두어 이른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제스쳐
를 취했다. 또한 오른쪽 발바닥은 하늘을 향해 있는데, 발바닥을 훤히 드러낸 불상이 천하에
그리 흔치가 않다.

불상이 앉아있는 연화대좌(蓮花臺座)는 꽃잎이 하늘을 향해 빵빵 열려있는 앙련(仰蓮)이 윗쪽
에, 반대로 꽃잎이 땅을 향한 복련(伏蓮)이 밑에 있는데, 연꽃무늬가 2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연꽃잎도 너무 화사하기 그지 없어, 적당하게 색만 입히면 진짜 연꽃이 따로 없을
것이다.
기존 전통의 불상 양식에서 추상성을 조금 보태어 웅장하게 만든 마애불로 신라 말~고려 초의
대표적인 마애불이자 준수한 작품으로 일찌감치 인정받아 북한산에 있는 불교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먼저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받았다.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과 태고사 원증국사탑비
는 1980년대에 지정됨> 게다가 상태도 양호하고 선각(線刻)도 선명하여 조성된 지 얼마 안된
따끈따끈한 석불 같다.

신라 말에서 고려 중기까지는 전국적으로 큰 마애불과 석불이 많이 조성되었다. 게다가 비슷
한 모습이 아닌 지역마다 다른 색을 보여 개성도 강하다. 구기동 마애불은 자세한 기록은 없
으나 당시 지방 세력의 지원으로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승가사가 고려 황실과도 인연이 깊
은 절이라 제왕과 황실의 지원으로 수준 높은 석공들을 투입해 조성했을 가능성도 높다.

마애불을 보면서 느끼는 거지만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장비와 기술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
다고 바위가 불상을 새기기 좋게 드러누워있던 것도 아니다. 줄을 매달고 올라가 일일이 정을
대고 쪼아야 되는데, 그것도 그리 쉽지가 않다. 거의 몇 년에서 10년 이상은 족히 걸렸을 것
이며, 지극한 정성이 아니면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그 당시 석공(石工)의 뛰어난 능력과 정
성, 그들이 공사에 전념하게끔 뒤를 받쳐준 지원 세력이 합작으로 이루어낸 대작품이라 할 것
이며 이런 명품급 마애불이 내가 살고 있는 서울에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마애불이 있는 바위 밑에는 근래에 돌로 벽을 쌓았고, 그 앞에 향로와 용이 휘감고 있는 돌기
둥을 만들어 단(壇)을 설치했다. 그리고 그 앞을 돌출시켜 양쪽으로 계단을 내었으며, 기도는
그 앞에 마련된 공간에서 하면 된다. 그리고 바위 주변은 문화유산 보호를 이유로 출입이 통
제되어 있으니 괜히 바위를 오르거나 마애불을 만지는 등의 짓은 하지 않도록 한다. 또한 매
일 10시부터 11시(시간은 변경 가능)까지는 승가사에서 기도를 올리는 관계로 출입을 금하고
있다.

*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2-1


▲  구기동 마애불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  쌀가마니를 축내는 쥐새끼들 (경내에서 호국보탑으로 내려가는 길)
이 땅의 우울한 현실을 날카롭게 묘사한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온다. 우리나라도 가만 보면 고양이보다는 쥐가 더 살기 좋은 세상 같다.
(이 땅에서 권력도 잡고 돈도 많이 챙기려면 쥐처럼 살아야 됨)

▲  승가사를 뒤로하며 다시 제자리로

마애불을 끝으로 간만에 찾은 승가사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해질녘까지는 시간이 넉넉하게
있지만 이곳은 막다른 곳이라 다른 곳을 가려면 승가사 갈림길로 한참이나 내려가야 된다. 경
내에서 바로 위쪽 사모바위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었다면 그곳을 거뜬히 찍고 내려갔을 것인데,
그 점이 참 아쉽다.
이렇게 하여 5월 승가사 나들이는 다음의 인연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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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맞이 산사 나들이 ~ 비봉능선 밑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금선사 (목정굴)

 


' 봄맞이 산사 나들이, 북한산 금선사 '

▲  금선사 목정굴 수월관음보살좌상


 

♠  금선사(金仙寺) 입문 (목정굴)

▲  목정굴 입구

봄이 한참 익어가던 어느 평화로운 주말, 일행들과 북한산(삼각산) 금선사를 찾았다. 비봉과
사모바위를 간직한 비봉능선을 오르면서 그 길목에 자리한 금선사를 오랜만에 들리게 되었는
데, 비봉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목정굴을 알리는 표석이 마중을 나온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어느 길로 가든 금선사로 이어지나 나는 목정굴 코스를 선호
한다. 그만큼 목정굴은 금선사의 상징으로 그가 없는 금선사는 갈비가 없는 갈비탕과 다름이
없다. (비봉능선으로 바로 가고자 한다면 오른쪽 길로 가면 됨)


▲  문짝이 없는 무당문(無堂門)

목정굴 방면으로 길을 잡으면 잠시 내리막길이 나타나면서 봄가뭄에 영혼까지 털린 말라버린
계곡이 나온다. 계곡에 액체가 좀 있어야 무거운 번뇌를 잠시나마 흘려보낼 수 있을텐데, 그
럴 물도 없으니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그런 계곡을 건너면 다시 오르막길이 펼쳐지면서 문짝
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무당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문은 2008년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 이름은 무무문(無無門)이다. '무무'란 불법(佛法)의 깊
은 진리를 깨닫는데 한계가 없다는 뜻으로 일주문이 없던 시절에는 나름 일주문의 역할도 하
였으며, 대자연의 넓은 마음이 담긴 듯, 문짝도 담장도 없는 그냥 문의 형태만 취하고 있다.


▲  커다란 바위에 조성된 목정굴

목정굴로 인도하는 계단의 끝에 이르면 3면이 바위로 막힌 막다른 곳이 나온다. 만약 전쟁에
서 이런 곳으로 내몰려 적의 공격을 받으면 그야말로 아작나기 좋은 지형으로 정면에 보이는
바위에 목정굴이란 석굴(石窟)이 깃들여져 있다.

목정굴은 조그만 자연산 동굴로 오랫동안 기도처로 이용된 도심의 숨겨진 굴이다. 태조 이성
계의 국사(國師)이자 금선사를 창건했다고 전하는 무학대사(無學大師)가 기도를 올렸다고 전
하며, 조선 23대 군주인 순조의 탄생설화를 간직한 현장이기도 하다.

석굴 내부는 원래 공터였으나 1996년 동굴을 대폭 손질하면서 수월관세음보살상(수월관음보살
)과 예불공간 등을 만들고 보살상 우측에 경내로 인도하는 계단을 뚫었으며, 수월관세음보살
을 봉안하면서 금선사는 대내외적으로 관음도량을 칭하게 되었다.
그리고 목정굴에는 숨겨진 볼거리가 여럿 있는데, 요란하게 비가 내릴 때는 목정굴 앞에 임시
로 폭포가 형성되어 힘차게 물을 쏟아내며, 석굴 앞 우측 바위를 잘 살펴보면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삼매부처상이 있으니 술래의 심정으로 잘 찾아보기 바란다. (난 찾지 못했
음)


▲  목정굴의 주인, 수월관세음보살(水月觀世音菩薩)

목정굴 안에는 수월관세음보살 누님이 환한 미소로 중생을 맞이한다. 석굴 내부는 무척 시원
하여 이른 무더위를 단죄하고 있으며, 겨울에는 수월관음의 따뜻한 마음이 동굴 내부에 가득
서린 듯 추운 몸을 녹이기에는 아주 그만이다. 동굴 천정에선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고
석굴 구석으로 흐르는 물과 그들이 내는 졸졸졸~♪ 음악 소리가 경쾌하기 그지 없다.

앙련(仰蓮)으로 뒤덮힌 대좌(臺座) 위에 여인들도 시샘할 정도로 어여쁘게 앉아있는 수월관음
은 왼손에 감로수(甘露水)가 담긴 정병(淨甁)을 쥐어들고 있는데, 병의 크기가 다른 관세음보
살상의 정병보다 조금 커보인다. 그의 정병을 보니
왜 자꾸 동동주나 막걸리 술병 생각이 나
는 걸까? 정말 저게 술병은 아닐까? 설마 그럴리는 없겠지. 관세음보살 누님이 왜 술을 마시
겠는가? 하지만 그의 하얀 얼굴은 술에 약간 취한 듯, 졸린 표정처럼 보이기도 하니 혹 고적
한 석굴에서 건전하게 몰래 마신 것은 아닐까?

수월관음 앞에는 예불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불단에는 꽃 등이 놓여져 있어 중생들의 높인 인
기를 실감케 한다. 그의 우측에는 금선사로 오르는 계단길이 있는데, 높이가 낮고 물이 흐르
고 있어 조심해서 오르기 바란다. 잘못하면 암벽에 머리가 쾅 부딪칠 수 있어 암벽을 아프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  옆에서 바라본 수월관세음보살상

▲  경내로 인도하는 비좁은 계단

목정굴에는 금선사의 대표 설화인 순조 탄생 설화가 전해오고 있으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조선 22대 군주인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는 첫 아들인 문효세자(文孝世子)를 잃고 서른
이 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해 늘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788년경, 팔공산 파계사(把溪寺) 승려인 용파(龍波)가 상경하여 정조를 알현하면서
불교계의 폐단과 승려 차별을 시정해 줄 것을 탄원했는데, 정조는 불교 개혁을 약속하면서 대
신 왕자의 탄생을 기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아무리 용을 써도 아들을 얻지 못하니 이참에 부
처의 힘을 빌려보고자 했던 것이다.

불교계의 개혁을 위해서라면 지옥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굳었던 용파는 왕의 어려운
숙제를 기꺼이 수용하며 금선사에 머물던 농산(聾山)을 찾아가 같이 기도에 들어갔다. 그들은
같은 곳에서 기도를 하지 않고, 농산은 목정굴에서, 용파는 수락산 동쪽 내원암(內院庵)에서
따로 300일 이상 기도를 올렸다.
 
기도가 한참 무르익을 무렵, 용파는 선정(禪定)에 들어 천하를 살펴보니 왕자의 몸을 받아 태
어날 사람이 농산 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하여 농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이번 기회에
금수저로 태어나 팔자를 필 것을 권하니 농산은 흔쾌히 수락했다. 왕자로 태어나는 것인데 어
느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래서 정조의 후궁인 수빈박씨(綏嬪朴氏)의 꿈에 나타나 왕자로 환생
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기도를 마치고 열반(숨을 거둠)에 들었다고 한다.

이때 왕실에 무기명 서찰 하나가 올라왔는데 그 서찰에는 '경술(庚戌) 6월 18일 세자탄강(世
子誕降)'이라 적혀 있었다고 하며 바로 그날 순조가 태어났다.
순조가 태어나던 날, 도성(都城) 서북쪽으로부터 맑고 붉은 서기(瑞氣)가 궁궐에 닿아 수빈박
씨의 산실(産室)을 휘감았다. 정조는 이상히 여겨 사람을 보내 그 서기의 출처를 찾아보니 바
로 목정굴이었다고 하며, 굴 안을 살피니 좌선을 한 채, 정수리에서 서기를 발산하고 있는 농
산의 시신을 발견했다.
농산이 죽어서 자신의 아들로 다시 태어난 것을 알게 된 정조는 크게 기뻐하며 승려를 차별하
던 폐습을 없애고 내수사(內需司)에 명을 내려 금선사를 크게 중창케 했다. 그 인연으로 지금
까지 순조의 탄신제(誕辰祭)를 지내고 있다.

이 설화대로 농산이 정말 순조로 환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경지가 깊은 승려라고 해
도 그건 사람의 능력 밖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전설이 대구 파계사에도 한 토막 전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내용이 거의 똑같다. 거기서는 숙종(肅宗)이 왕자<영조(英祖)>의 탄생을
부탁하는데, 그 부탁을 받은 승려가 파계사 부근 성전암(聖殿庵)의 현응(玄應)이다. 이 현응
의 법명은 용피<龍被, 또는 용파(龍波)>로 금선사의 용파와 이름까지 같다. 그러니 파계사의
영조 탄생 설화를 금선사에서 등장 인물만 조금 바꾸는 선에서 그대로 모방한 듯 싶다.

설화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곤란하지만 용파로 상징되는 파계사 승려와 농산으로 상징
되는 금선사 승려가 왕자의 탄생을 위해 기도를 올린 듯 싶으며, 그들 기도가 효과를 봤거나
아니면 기도 도중 농산이 사망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을 파계사 전설을 가져와 '농산이 왕
자로 환생했다'는 식의 그럴싸한 전설로 포장한 것이다. 어쨌든 순조 탄생을 기원한 인연으로
왕실의 넉넉한 지원을 받았고, 수락산 내원암 사적기(史蹟記)에는 농산, 용파 두 승려가 주고
받은 서신의 내용이 남아있다고 한다.


▲  목정굴 바위 정상

▲  목정굴 정상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수월관세음보살 우측에 뚫린 좁고 어두운 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르면 목정굴 정상이 나오면서
다시금 찬란한 햇살을 보게 된다. 정상에서는 목정굴 밑 계곡을 비롯해 숲 너머로 탕춘대 능
선과 인왕산(仁王山) 등이 시야에 들어오며, 여기서 목정굴 입구에서 갈라진 오른쪽 산길과
다시 하나가 되어 경내로 이어진다.
경내로 향하면 절을 가리고 선 2층짜리 설선당이 나타나고 그 앞에 금선사 발전에 크게 기여
한 민영택 여사를 비롯한 공덕비(功德碑) 3기와 대원각의 승탑이 있어 그들의 이름 3자를 영
원히 기린다.

▲  민영택을 비롯한 공덕비 3형제

▲  절을 크게 일으킨 대원각의 승탑(僧塔)


▲  2층 규모의 설선당(設禪堂)

경내를 꽁꽁 가리고 있는 설선당은 근래에 지어진 따끈따끈한 건물로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하에는 밥을 먹는 공양간이 있으며, 1층과 2층은 종무소와 선방(禪房), 템
플스테이 장소로 쓰인다. 휴일 점심에는 산꾼과 답사꾼에게 흔쾌히 공양밥을 제공하는데 맛이
제법 괜찮다. (주로 비빔밥을 제공함)


▲  연등의 고운 물결, 설선당과 반야전 뜨락

설선당 밑도리에 난 문을 들어서면 숲에 감싸인 금선사 경내가 조촐하게 펼쳐진다. 설선당 옆
에는 청기와로 치장된 2층짜리 반야전이 있는데, 그는 2006년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는 그 좌
측 소나무 앞에 법당인 대웅전(大雄殿)이 있었다.
대웅전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석가3존불과 신중도를 머금고 있었으나 2005년 후반에
부셔버리고 옆 공터에 크게 반야전을 지었다. 건물 윗층에는 대웅전에 있던 석가3존불을 가져
와 예전 대웅전의 역할을 담당하게 했고, 아랫층은 별도로 해행당(解行堂)이란 이름으로 요사
(寮舍)와 템플스테이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금선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2층으로 이루어진 반야전(般若殿)

북한산(삼각산) 서남부의 대표적인 능선인 비봉능선 남쪽 밑에 금선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은 조계종 소속으로 종로1가에 있는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인데, 예로부터
여러 가지 영험담이 전해지고 있는 기도처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것이 앞서 목정굴에서 소개
한 순조 탄생 설화이다.
       
이 절은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의 부탁으로 새 왕조의 도읍지를 정하고자 북한산(삼각산) 일
대를 살펴보던 중, 지금의 절 자리에 북한산의 강인한 정기가 서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부처
가 여기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으로 여기고 절을 세웠다고 한다. 여기서 금선(金仙)은 부처의
별칭으로 창건 설화의 진위여부는 장담하기 어려우나 조선 초나 중기에 산문을 연 것은 분명
해 보인다.

이후 서울 근교 기도도량으로 이름을 떨치면서 많은 왕족과 양반, 상궁(尙宮)들이 자주 찾았
다고 하며, 순조의 탄생을 기원한 인연으로 왕실의 넉넉한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다. 허나 왜
정(倭政) 때 절은 폐허가 되었으며, 1949년 승려 도공(道空)이 중건했다.
1996년 목정굴을 손질해 수월관세음보살을 봉안했고, 2008년에 반야전을 지었으며, 계속해서
설선당과 범종루, 일주문 등을 달아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절의 초창기 영역은 목정굴과 반야전 일대였으나 계곡을 따라 윗쪽으로 영역을 넓히면서 대적
광전과 삼성각을 지었고, 그 중간에 적묵당과 연화당을 지으면서 건물이 한데 몰려있지 않고
서로 떨어져 있다. 첩첩한 산주름 속에 비좁게 자리한 탓에 경내가 길고 가늘게 이어진 것이
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적광전을 비롯해 반야전, 설선당, 삼성각, 연화당, 적묵당, 범종루 등 10
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신중도가 있으나 오래된
유물도 그게 전부이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으로 금선사의 모든 것이 좌초되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외에 기도처로 유명한 목정굴이 경내 밑에 자리해 있다.

서울 도심에서 불과 10리도 안되는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로 고적한 산사의 멋과 여유를 누릴
수 있으며, 풍경도 아름답다. 또한 최근에 템플스테이(Temple stay)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단
단히 재미를 보고 있으며 특히 외국인들의 수요가 많은 편이다.

* 소재지 - 서울 종로구 구기동 196-2 (비봉길 137 ☎ 02-395-9911)
* 금선사 홈페이지는 밑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순조의 탄생설화를 간략하게 담은 반야전 벽화
왼쪽은 용파가 정조를 알현하며 그에게 어려운 숙제를 받는 장면, 중간은
금선사에서 기도에 들어간 용파, 오른쪽은 승려의 육신을 버리고
왕자로 다시 태어난 농산


 

♠  금선사 둘러보기

▲  옛 대웅전터와 오래된 소나무

반야전을 지나면 옛 대웅전이 있던 터와 소나무가 있다. 대웅전은 2005년에 사라졌으나 그 곁
을 지키던 소나무만이 무성하게 솔잎을 피우고 있는데, 나이는 약 200년 정도 묵었다고 한다.

경내에서 목정굴 다음으로 오래된 자연물로 아직 그 흔한 보호수(保護樹) 등급도 얻지 못했지
만 금선사의 오랜 내력을 밝혀주는 몇 안되는 존재라 그가 마음껏 몸을 풀 수 있도록 넓게 공
간을 제공하였다.


▲  옆에서 본 소나무

이 소나무는 장대한 나이에 비해 키는 작다. 하늘로 향하지 못하고 대신 옆으로 몸집을 무한
정 불려 처진소나무처럼 된 것이다. 절에 있는 나이 지긋한 소나무 중에 이런 나무가 적지않
아 참으로 신기할 따름인데, 절에서 주장하는데로 나무에게도 과연 불심(佛心)이란 것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자랄 수 밖에 없는 그들의 팔자인 것일까? 궁금하다.

▲  대적광전으로 인도하는 해탈문
(解脫門)과 108계단

▲  윗층과 아랫층의 이름과 용도가
서로 다른 연화당(蓮華堂)


소나무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왼쪽 해탈문은 대적광전으로 바로 이어지는 108계단길로 근
래에 닦여졌다. 그리고 오른쪽 길은 계곡을 따라 연화당, 적묵당, 삼성각을 거쳐 대적광전으
로 이어지는데, 대적광전까지 빨리 가고 싶다면 약간 각박하긴 하지만 108계단길을 이용하면
되고 느긋하고 편하게 가고 싶다면 계곡길을 이용하면 된다.

계곡길을 따라가면 계곡 건너에 나무 다리를 늘어뜨린 2층짜리 연화당을 만나게 된다. 이 건
물은 1층과 2층이 이름과 성격이 서로 틀린데, 1층은 연화당이라 불리는 납골당(納骨堂)으로
영가(靈駕)를 위한 공간이며, 그 중심에 지장보살좌상이 들어앉아 그들의 극락왕생을 챙겨준
다. 금선사의 든든한 밥줄로 약 600여 기의 유골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2층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인 미타전(彌陀殿)으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중심으
로 한 아미타3존불과 2004년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  연화당 앞에 놓인 나무 다리와 갈증에 빠진 계곡
봄가뭄으로 계곡이 바짝 타들어가면서 물방울도 보이지를 않는다.
계곡 위에 걸린 다리가 무색할 지경..

▲  소나무 뒤에 자리한 적묵당(寂默堂)

연화당 맞은편 석축 위에는 적묵당이 터를 닦았다. 이 집은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저리보면 1
층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3층이니 겉모습에 속지 말자. 팔작지붕을 짊어진 3층은 주지승의 거
처이며 그 밑에 가려진 1층과 2층은 일반 승려의 거처이다.


▲  계곡 위에 무지개처럼 걸린 홍예다리

▲  경내 윗쪽에 자리한 큰 바위와 약수터

적묵당과 연화당을 지나면 계곡 위에 걸린 홍예다리가 나온다. 근래 마련된 돌다리로 비록 고
색의 내음은 익지도 못했지만 여인의 눈썹처럼 선이 아름답다. 거기에 오색영롱한 연등을 잔
뜩 머금고 있으니 더욱 화사해 보인다.
그 다리를 건너면 바로 대적광전과 삼성각으로 이어지며,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계곡길을 좀 들
어가면 그 길의 끝에 커다란 바위가 웅크리고 있다. 바위 위에는 비봉능선으로 오르는 산길이
있으나 여기서는 올라가는 정식 길은 없으며, 바위 밑은 안쪽으로 쑥 들어가 조촐하게 그늘진
공간이 있는데, 비와 눈을 피하기에 아주 좋은 터로 북한산(삼각산)이 베푼 물이 용솟음치는
약수터가 수줍은 듯 자리한다.
금선사 경내를 가로지르는 계곡의 절반은 이곳에서 시작되어 흐르며, 그 옆에는 봄가뭄에 말
라비틀어진 조그만 폭포가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바위에게 주어진 이름은 딱히 없으며, 바위의 준수하고
거대한 용모를 보니 절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으로 쓰였던 듯 싶다.

▲  바위 밑에 자리한 샘터 (물은 안마셨음)

▲  연등의 조촐한 향연이 펼쳐진 홍예다리


▲  삼성각(三聖閣)

홍예다리를 건너면 바로 대적광전 좌측에 자리한 삼성각이 마중을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
의 맞배지붕 건물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이 봉안되어 있으며, 원
래는 그들이 각각 별도의 건물을 지니고 있었으나 2005년에 현 건물을 증축하면서 이곳에 싹
모아두었다.


▲  봄 햇살이 내려앉은 대적광전(大寂光殿)

삼성각과 이웃한 대적광전은 금선사의 공식 법당으로 높직한 곳에 들어앉아 경내를 굽어본다.
비로자나불의 거처로 2005년에 지어졌는데, 옛 대웅전에 있던 불상과 신중도, 그리고 2005년
에 마련된 금고(金鼓)를 가지고 있다.


▲  대적광전 비로자나3존불

대적광전 불단에는 비로자나불이 지권인(智拳印)의 제스처를 보이며 앉아있고, 그 좌우로 노
사나불(盧舍那佛), 석가불이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중생을 지그시 바라본다. 그들 뒤로
든든히 자리잡은 후불탱은 2005년에 제작된 것으로 색채가 무지 곱다.

       ◀  금선사 신중도(神衆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61호

대적광전 좌측 벽에는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목정굴과 느티나무 등의 자연물 제외)인
신중도가 액자 속에 소중히 깃들어져 있다.
주위에는 비로사나후불탱과 새로 만든 신중도
등의 번쩍이는 그림이 있으나 고색이 자욱한
신중도에만 오로지 눈길이 쏠린다.

신중도란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신의 무리를 
담은 것으로 조선 후기에 널리 그려진 불화이
다. 이들은 원래 인도의 토속신이었으나 불교
의 일원으로 흡수되었으며, 지금은 그들의 뜻
과 다르게 부처와 경전을 수호하는 호법신(護
法神)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흐
르면서 그 수호의 범위가 확대되어 나라를 지
키거나 사람들의 재앙을 막는 역할까지 떠맡게
되어 업무량이 과중하게 늘었다.

이 신중도는 1887년에 제작된 것으로 그림 밑부분에 딸린 화기(畵記)에 따르면 김지(金地)가
책임 화원, 경순과 채준이 각각 출초(出草)와 편수(片手)를 담당했다. 또한' 신중탱(神衆幀)
'이란 명문이 쓰여 있어 그림의 성격까지 소상히 알려준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신중탱이
아닌 '신중도')

그림 윗부분에는 연꽃가지를 비껴들고 있는 제석천(帝釋天)을 중심으로 홀을 들고 선 일월자
천(日月自天), 공양물을 든 천동(天童)과 천녀(天女)가 그려져 있으며, 밑부분에는 위태천(
韋太天)과 팔부중(八部衆), 산신 등이 빼곡히 자리해 있다.
오래되고 괜찮은 신중도로 평가를 받아서 2002년 서울시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장대한 내력에 비해 오래된 볼거리가 없어 애태우던 금선사에 한줄기 빛을 선사했
다.


▲  물감이 채 마르지도 않은 대적광전의 새 신중도
대적광전에는 신중도가 무려 2개씩이나 걸려있다. 신중도는 법당을 지키는
그림으로 1개도 아닌 2개나 있으니 제법 든든할 것이다.

▲  반야전에서 대적광전을 이어주는 108계단
누런 털을 걸친 묘공(猫公)이 묵묵히 계단을 오르며 자연을 음미하고 있다. 처음에는
숲으로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으나 내 옆을 유유히 지나쳐 대적광전으로 향했다.
그는 금선사에서 기르는 묘공으로 이 시간대에 늘 경내를 순찰하는 모양이다.

▲  대적광전으로 향하는 묘공의 위엄
대적광전 주변에 그만의 꿀단지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이 옆에
있는데도 경계나 인사는 커녕 마치 무인지경으로 내 옆을 지나간다.

▲  속세를 향해 종소리를 울려라~~!
범종각(梵鍾閣)

▲  현판 글씨가 일품인 일주문(一柱門)


10년이 아니라 단지 몇 년만으로도 거뜬히 강산이 변하는 21세기, 오랜만에 발을 들인 금선사
도 조금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 없던 건물이 마구 솟아나 절을 달리 보이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신중도와 대적광전, 소나무 등 기본적인 존재들은 늘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
니 마치 옛 지기와 오랜만에 상봉한 기분이다.

이렇게 경내를 둘러보고 금선사와의 짧은 인연을 마무리 지으며 비봉능선으로 발길을 재촉했
다. 앞서 절에 들어왔을 때는 목정굴로 왔지만 이번에는 목정굴 동쪽 산길로 갔는데, 근래에
지어진 2층 범종각과 일주문이 잘가라며 차례대로 배웅을 한다.
범종각은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메시지를 머금은 범종과 목어, 운판, 법고의 보금자리로 1
층은 통로, 2층은 범종각으로 쓰인다. 그 범종각을 지나면 바로 일주문이 나오는데, 그가 있
기 전에는 금선사에 그 흔한 일주문도 없었다.

명필을 자랑하는 일주문 현판은 학정 이돈흥(鶴亭 李敦興)이 쓴 것으로 '金仙寺'가 아닌 '金
僊寺(금선사)'로 쓰여 있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비록 음은 같지만 중간 한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허나 그 금선(金仙)이나 이 금선(金僊)이나 서로 같은 뜻이며, 다른 말로 대선(大
仙)이라 불리기도 한다.


▲  길목에 자리한 동자석(童子石)

일주문에서 한굽이 내려가면 동자석과 아리송하게 생긴 돌 하나가 내 발길을 붙잡는다. 동자
석은 두 손으로 홀을 쥐어들고 있어 문인석(文人石)의 냄새도 풍기는데, 그에 대한 자세한 정
보는 없지만 생김새와 몸에 낀 고색의 때를 봐서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키는 말그대로 어린이 키와 비슷한데, 절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고 귀족들의 묘역에만 사용할
수 있는 동자석이 절로 가는 길목에 떡하니 서 있으니 그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다. 인근에 헝
클어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사대부(士大夫)의 묘에서 가져왔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정작 금
선사 부근과 구기동, 평창동에는 사대부의 묘가 전하지 않는다. (한양도성 밖 10리 이내에는
무덤을 쓸 수 없음)
그러니 절의 수호 의미나 이정표의 역할로 절의 단골 귀족(왕족, 사대부)이 세워준 것으로 여
겨진다. 그렇다고 절 자체적으로 감히 세울 리는 없을테고 말이다. 어쨌든 뭔가 특별한 의미
가 담겨져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며, 그로 인해 금선사의 격이 조금은 달라 보인다.


▲  이 돌의 정체는 무엇인고?

동자석 건너편에는 정체가 아리송한 돌덩어리가 서 있다. 동자석처럼 날씬하게 서 있지만 아
무런 조각이 없기 때문이다. 자세한 사연이야 낸들 알 도리는 없지만 무언가를 만드려다가
만 것 같은 99% 부족한 모습으로 자세히 바라보면 남근석(男根石)과도 비슷해 보인다.


▲  동자석과 정체가 묘연한 돌상의 뒷모습

▲  금선사를 뒤로하며~~~ (동자석과 목정굴 입구 중간)
본글은 여기서 끝. 금선사 이후 내용은 생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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