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22.12.29 무등산 뒷쪽에 깃든 호남 가사문학의 성지 ~ 광주 환벽당, 취가정, 담양 식영정
  2. 2022.01.18 광주 무등산옛길3구간, 충효동, 광주호 겨울 나들이 (풍암정, 원효계곡, 충효동요지, 충효동 왕버들군, 광주호호수생태원)
  3. 2020.03.31 광주의 남쪽 변두리, 대촌동~칠석동 둘러보기 (괘고정수, 고원희가옥, 고싸움놀이, 칠석동은행나무, 부용정)
  4. 2019.12.30 본인 제작 여행답사기 모음집 (2019년 12월 30일 기준)

무등산 뒷쪽에 깃든 호남 가사문학의 성지 ~ 광주 환벽당, 취가정, 담양 식영정

호남 가사문학의 성지 ~~ 환벽당, 취가정, 담양 식영정



' 무등산 뒷쪽에 깃든 호남 가사문학의 성지,
광주 환벽당, 취가정, 담양 식영정

광주 환벽당

▲  환벽당

광주 취가정 담양 식영정

▲  취가정

▲  식영정

 



 

겨울 제국이 한참 위엄을 떨치던 새해의 첫 무렵, 덜 추운 날을 가려서 호남 가사문학의
오랜 성지(聖地)이자 누정(樓亭) 문화의 대명사로 추앙을 받는 환벽당과 취가정, 식영정
을 찾았다.
이들은 증암천(창계천)을 사이에 두고 광주(光州) 땅인 서쪽에 환벽당과 취가정, 그리고
전남 담양(潭陽) 땅인 동쪽에 식영정이 자리하고 있는데 행정구역만 무심히 다를 뿐, 서
로 같은 곳이나 다름이 없다. (환벽당과 취가정이 있는 충효동 지역은 원래 담양 땅이었
음) 게다가 서로 거리도 가까워 한 덩어리로 같이 둘러보면 좋다. <소쇄원(瀟灑園)도 가
까운 곳에 있음>



 

♠  사촌 김윤제의 별서로 송강 정철이 그의 후광을 받으며 몸을 일으켰던 곳
광주 환벽당(環碧堂)- 국가 명승 107호

▲  충효교에서 환벽당, 취가정으로 이어지는 오솔길 (환벽당길)

광주호의 동쪽 끝이자 광주와 담양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충효교 남쪽 언덕에 환벽당이 살짝
깃들여져 있다.
환벽당을 품은 언덕은 소나무가 무성하여 솔내음이 아주 그윽한데 창계천(증암천) 너머 식영
정 쪽에서 바라보면 마치 거대한 옛 무덤처럼 동그랗고 두툼한 모습이다. 하여 혹시 고분(古
墳)이 아닐까 살짝 의심도 하였지만 생김새가 그러할 뿐, 그냥 자연산 언덕이다. 만약 그가
진짜로 고분이었다면 진작에 무덤 흔적이나 유물이 발견되었을 것이다. (옛 무덤을 좋아하다
보니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그렇게 보이는 모양임;;)

충효교에서 환벽당 정문까지 창계천을 따라 담백한 운치를 지닌 오솔길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
다. 그 길을 거닐며 창계천을 살짝 훔쳐보면 반석(盤石)들이 펼쳐진 예사롭지 않은 곳이 눈에
들어올 것인데, 그곳이 '조대', 그 앞 창계천이 '용소'로 환벽당을 수식하는 구수한 양념들이
다.


▲  식영정 앞 도로(887번 지방도)에서 바라본 환벽당 언덕
장대한 고분처럼 생긴 저 언덕 정상부에 환벽당이 살포시 안겨져 있다. 창계천
수면에 환벽당 언덕이 진하게 비춰지고 있어 마치 언덕 2개가 반대꼴의
모습으로 붙어있는 것 같다.

▲  창계천 조대(釣臺), 용소(龍沼)

용소는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이 우연한 물놀이로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 1501~
1572)를 만났던 현장이다.
정철은 서울 청운동(淸雲洞) 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기묘사화(己卯士禍, 1545년)와 양재역(良
才驛) 벽서사건(1547년)에 나란히 연루되어 적지 않은 고통을 당하게 된다. 아버지 정유침(鄭
惟沈)은 유배형을 당해 유배살이에 정신이 없었고 정철은 양육 관계로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꼬마 시절부터 유배살이의 혹독함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다가 1551년 명종(明宗)이 원자(元子)를 얻은 기쁨에 사면령을 내리면서 비로소 지긋지긋
한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었고, 이후 어머니를 따라 할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담양 창평(昌平)
당지산(唐旨山)으로 내려가 살았다.

어머니와 적적하게 살던 정철은 어느 여름 날, 순천에서 처가살이를 하고 있는 친형을 만나고
자 길을 떠났다. 여름의 한복판이라 날씨도 무덥고, 마침 지나는 길에 풍경도 괜찮은 곳이 있
어서 피서본능에 따라 풍덩 들어가 물장구를 쳤는데 그곳이 공교롭게도 이곳 용소였다.
바로 그 시각, 용소 위쪽 환벽당에서는 사촌 김윤제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꿈에 용소
에서 용 1마리가 나타나 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또는 청룡 1마리가 하늘로 승천했다고 함)
꿈에서 깨어나자 뭔가 찜찜하여 하인을 시켜 용소를 살펴보게 하니 마침 잘생긴 소년(정철)이
혼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꿈에 나타난 용이 아닌가 싶어 그를 소환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의 영특함
에 흠뻑 반하여 순천(順天)으로 가는 것을 만류하고 자기 슬하에 머물러 공부를 하도록 했다.
또한 그가 17세가 되자 자기 외손녀까지 짝지어주어 외손녀사위로 삼았으며 그의 뒷바라지도
넉넉히 해주어 정철의 앞날을 닦아주었다.

정철은 그렇게 사촌의 흔쾌한 지원에 힘입어 열심히 학문과 문학을 닦았고 27세에 과거에 급
제하면서 비로소 환벽당을 나오게 된다. 용소에서 잠시 물놀이를 한 인연 덕에 그의 인생을
크게 일으켜준 스승을 만났고 거기에 부인까지 얻었으며 조선 중기 가사문학(歌辭文學)을 크
게 달군 문학가로 이름까지 날렸으니 사람의 인생이란 참으로 모를 일이다.
만약 그가 여기서 물놀이를 하지 않았다면 벼슬이야 어떻게든 했겠지만 지금처럼 요란하게 이
름을 날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용소와 접한 반석(盤石)은 조대라 불리는데 김윤제가 낚시를 즐겼던 곳으로 정철을 비롯해 환
벽당을 다녀간 손님들도 낚시를 했다고 전하며 식영정 부근에서 용소까지 창계천 주변은 여름
마다 배롱나무(백일홍)가 장관을 이루어 자미탄(姿媚灘)이라 불리기도 했다.


▲  바로 위에서 바라본 조대와 용소
정철이 여기서 물놀이를 하고 낚시를 했다고 하지만 정작 그의 흔적은 창밖에 이슬처럼
남아있지 않다. 몇 겁의 세월을 견디며 이곳을 지켜온 조대, 그리고 큰 세상을
향해 흘러가는 창계천에게 정철은 기억을 못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수많은 인연의 하나일 뿐이다.

▲  늙은 쌍송(雙松)
사촌 김윤제가 정철을 만난 것을 기리고자 심었다고 전한다. 그만큼
정철이란 탐이 나는 인재를 만난 기쁨이 실로 컸던 것이다.

▲  환벽당 돌담길 (쌍송 주변)
환벽당 주위로 정겨운 기와 돌담을 둘러 바깥과의 경계를 그었다.

▲  활짝 열린 환벽당 정문(대문)

▲  환벽당으로 인도하는 돌계단이
닦여진 언덕 동쪽 부분


▲  수수한 모습의 환벽당

환벽당은 충효동(충효마을) 출신인 사촌 김윤제가 1540년대에 지은 별서(別墅, 별장)이다. 그
는 한참 시절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여기서 휴식과 여가를 즐기며 후학을 길렀는
데, 그를 거쳐간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철과 김성원(金成遠, 1525~1597) 등이 있다.

별서의 이름인 환벽(環壁)은 영천자 신잠(靈川子 申潛)이 지어준 것으로 푸르름이 고리를 두
른 듯 아름다운 곳이란 뜻이다. 별서 주위로 소나무와 배롱나무, 왕벚나무, 모과나무, 대나무
등을 심고 적당히 다듬은 호남의 대표적인 별서 원림(園林)이자 누정으로 추앙을 받고 있는데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의 '환벽당' 시에 환벽당의 초창기 모습이 묘사되어 있고, 김창흡(
金昌翕, 1653~1722)의 남유일기(南遊日記)에는 환벽당에 심어진 식물과 조경 수종이 나와있으
며, 김성원의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에는 환벽당의 모습이 그림으로 남겨져 있다.
부근에 면앙정을 짓고 머물렀던 면앙정 송순(俛仰亭 宋純)은 1563년 식영정의 시를 차운(次韻
)하면서 식영정과 환벽당이 형제의 정자라고 했으며 소쇄원과 식영정, 환벽당을 두고 '한 동
(증암천) 안의 세 명승'이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지금은 서로 행정구역이 다르지만 원래 같
은 동네였음) 또한 벽간당(碧澗堂)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었다.

식영정과 더불어 호남 가사문학의 성지이자 광주호 주변의 대표 명소로 답사객의 발길이 꾸준
히 이어지고 있는데 송시열이 쓴 제액(題額)을 비롯하여 임억령(林億齡), 조자이(趙子以), 기
대승(奇大升) 등 16~17세기 사람들이 남긴 시 현판들이 정신 사납게 걸려있다.
정철은 이곳에서 학문을 닦으면서(집은 부근 지실마을에 있었음) 김인후(金麟厚), 기대승, 임
억령(林億齡) 등을 만나 그들에게도 학문과 가사문학을 배웠으며 임진왜란 때 호남의 대표적
인 의병장인 김덕령(金德齡)은 김윤제의 종손(宗孫)으로 할아버지의 정신적인 영향을 깊게 받
았다.

이곳은 김윤제의 후손이 관리해오다가 정철의 4대손인 정수환(鄭守環)이 매입해 그의 후손들(
연일 정씨)이 애지중지하고 있으며 환벽당 옆에 후손들이 사는 집이 있어 관리의 손길이 마를
날이 없다.
환벽당은 처음에 광주 지방기념물 1호의 지위를 지니고 있었으나 2013년에 부근 용소와 조대,
쌍송과 한 덩어리로 묶여 국가 명승으로 승진되었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광주 환벽당 일
원'
)

▲  서남쪽에서 바라본 환벽당

▲  환벽당의 뒷모습

환벽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방 2칸과 마루를 지니고 있다. 처음에는 정
각(亭閣) 형태였으나 나중에 건물을 손질하면서 지금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하며, 네모난 기단
을 다지고 그 위에 집을 올린 형태로 섬돌에 신발을 벗고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방과 마루
에서 벌러덩 눕거나 음식 섭취는 안됨)

▲  글씨가 몸을 푸는 것 같은
환벽당 현판의 위엄

▲  활짝 열린 방문과 주인이 가고 없는
비어있는 방


▲  환벽당 연못과 김윤제 집이 있었던 너른 공터

환벽당을 받쳐들고 있는 석축 밑에는 3단으로 이루어진 화계(花階)와 네모난 연못이 누워있다
. 보통 별서를 지으면 앞에 연못을 두어 경치를 돋구게 하는데 이곳 역시 그렇다. 허나 연못
밑으로는 나무 몇 그루와 허전한 공터가 전부라 마치 별서를 짓다 만 것 같은데 그 공터에는
김윤제의 집 본채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연못은 본채의 후원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 본채는 어느 귀신이 떼어갔는지는 모르지만 건물을 새로 짓지 않고 자연의 공간으로 남겨
두어 환벽당의 앞뜨락 같은 모습이 되었다.

* 환벽당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387 (환벽당길 10)


▲  환벽당에 걸린 어느 검은 피부의 현판 (해석은 알아서)

▲  환벽당 돌담길 (쌍송 방향)

▲  환벽당 돌담길의 끝 부분 (취가정 방향)



 

♠  김덕령 장군의 원통한 넋을 기리고자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정자
광주 취가정(醉歌亭) - 광주 지방문화재자료 30호

▲  취가정으로 인도하는 돌계단

담백한 풍경의 환벽당을 둘러보고 동남쪽으로 향하는 '환벽당길'을 3분 정도 들어가면 취가정
을 품은 언덕이 나온다. 환벽당 돌계단에 비해 조금은 흥분이 덜한 돌계단을 오르면 그 계단
끝자락에 조촐하게 생긴 취가정이 자리해 있다.

취가정은 김윤제의 종손으로 임진왜란 시절 호남 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꼽히는 김덕령(
金德齡, 1567~1596)의 넋을 기리고자 후손인 김만식 등이 1890년에 지은 것이다. 그를 기리고
자 세운 정자일 뿐, 정작 김덕령과 관련은 없으며, 충효동과 담양 가사문학면(예전 남면) 지
역에 흩어진 정자와 별서 가운데 제일 막내로 정자의 이름인 취가는 술에 취해 부르는 노래란
뜻이다. 근처에 있는 환벽당과 식영정, 풍암정, 소쇄원 등은 모두 자연스러운 이름인데 반해
이곳은 음주와 관련된 이름을 지니고 있는데, 취가정이란 이름은 김덕령이 남긴 취시가(醉時
歌)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 취시가 - 취해서 부르는 노래
此曲無人聞           이를 듣는 이 아무도 없네
我不要醉花月         꽃과 달 아래 취하는 것도 바라지 않고
我不要樹功勳         나는 공훈 세우길 바라지 않네
樹功勳也是浮雲       공을 세우는 것은 뜬 구름이요
醉花月也是浮雲       꽃과 달 아래서 취하는 것도 뜬 구름이네
醉時歌無人知         취해서 부르는 노래, 이 노래 아는 사람 없으니
我心只願長劍奉明君   내 마음 다만 긴 칼 들어 명군 받들기 원하네


김덕령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권필(權韠, 1569~1612)은 어느 날 꿈속에서 김덕령을 만났다.
참고로 이들은 서로 만난 적은 없다고 한다. 김덕령이 억울하게 옥사(獄舍)를 당한 것을 호소
하며 취시가를 들려주었는데 이를 들은 권필이 화답의 시를 지어 위로했다고 한다. 그리고 꿈
나라를 나와서 그의 시를 활자로 남겼고 그 시의 이름을 취해 정자 이름으로 삼았다.

취시가 앞에는 서문(序文)이 쓰여 있는데,
'꿈속에서 작은 책 하나를 얻으니 바로 김덕령 장군의 시집이었다. 그 첫머리에 실린 한 편
제목이 취시가로 나도 2~3번 읽어보았는데 그 가사 내용은 이러하다~~~ 내가 꿈에서 깨어난
뒤 너무 서글퍼서 그를 위해 절구(絶句) 한 수를 지었다'
즉 이 시는 권필이 김덕령을 만난 것이 아니라 김덕령의 시집을 읽은 것이다. 그러니 꿈나라
에서 시를 접한 것이 아니라 김덕령이 남긴 시집을 통해 이미 접한 것으로 봐야 되며 그것을
마치 꿈나라에서 받은 양 표현한 것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사연이야 어쨌든 권필은 뜻을 다
펼치지 못하고 강제로 생을 마감한 그를 위로하고자 다음의 시를 덧붙여 남겼다.

將軍昔日把金戈   장군은 지난날에 창을 잡고 나섰건만 
壯志中摧奈命何   씩씩한 뜻 중도에 꺾이니 운명을 어이하랴 
地下英靈無限恨   지하에서 영령이 품었을 무한한 한이 
分明一曲醉時歌   한 곡조 취시가 속에 분명히 드러나네


▲  취가정의 앞 모습

취가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방 1칸과 툇마루를 지니고 있다. 6.25때 파
괴된 것을 1955년에 중건하여 고색의 기운은 덜하며 설주 송운회(雪舟 宋運會)가 쓴 취가정
현판과 송근수(宋近洙, 1818~1903)의 취가정기, 김만식과 최수화의 시 현판이 걸려있다.

취가정 주위로 굴뚝과 취시가를 머금은 표석, 후손들의 집이 있으며, 동쪽 창계천 너머로 식
영정과 소쇄원 주변이 바라보인다. (방과 마루는 들어갈 수 있으며 섬돌에 신발을 벗고 들어
가면됨, 허나 벌러덩 눕거나 음식 섭취 행위는 자제 바람)

▲  송운회가 쓴 취가정 현판의 위엄

▲  취가정 상량문(上樑文)


▲  김덕령의 취시가와 권필의 화답시를 머금은 현판

▲  적막에 사로 잠긴 취가정 주변
(왼쪽은 굴뚝, 오른쪽은 취시가를 머금은 비석)

▲  취가정 옆구리에 짧게 펼쳐진 메타세콰이어 숲길
늘씬하게 솟은 메타세콰이어가 취가정의 주변 풍경을 화사하게 돋군다.

▲  겨울 제국에게 강제로 봉인을 당한 채, 소쩍새의 울음을 기다리는
충효동 논두렁 - 논두렁 너머로 무등산(無等山)이 바라보인다.


취가정을 둘러보니 벌써 17시 직전이다. 햇님은 무거워진 고개를 자꾸 꺾으려고 하고 달은 그
틈을 타 검은색 물감을 마구 뿌리며 나에게 철수를 강요한다. 허나 그런 것으로 나는 쉽게 무
너지지 않는다. 일몰까지는 약간의 여유가 있어 부근에 있는 식영정을 그날의 마지막 스페셜
메뉴로 정하고 충효교로 나와 다리를 건너 담양 땅으로 넘어갔다.

담양 관할로 넘어가면 바로 한국가사문학관인데 그 서북쪽 언덕에 환벽당과 더불어 호남 지역
가사문학의 성지로 격하게 추앙받고 있는 식영정이 뉘어져 있다.

* 취가정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396-1 (환벽당길 42-2)



 

♠  석천 임억령의 별서이자 정철이 지은 성산별곡의 무대
담양 식영정(息影亭) - 국가 명승 57호

▲  식영정과 성산별곡 시비

환벽당과 쌍벽이자 콤비를 이루고 있는 식영정은 1560년에 김성원이 장인인 석천 임억령(林億
齡)을 위해 지은 것이다. 그때 자신이 머물 서하당(棲霞堂)도 옆에 같이 지었다.
그는 정철의 처외재당숙(장모의 6촌 형제)으로 김윤제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식영정을 거쳐갔
던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高敬命), 정철을 가르켜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불렀다. <그 연
유로 식영정을 사선정(四仙亭)이란 부르기도 했음>
그들은 성산(식영정 주변)의 경치 좋은 명소 20곳을 골라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이십영(
二十詠)'을 지었는데 정철은 이곳에서 성산별곡(星山別曲)을 비롯해 하당야좌(霞堂夜坐) 1수,
소쇄원제초정 1수, 서하당잡영 4수 등 많은 시와 가사를 내놓으면서 가사문학의 산실로 일컬
어진다.

식영정이란 이름은 '그림자가 쉬어가는 정자'란 아주 문학적인 뜻으로 정철이 자주 놀러온 곳
이다. 환벽당, 송강정(松江亭)과 함께 정철과 깊게 관련된 곳이라 하여 '정송강유적'이라 부
르기도 하며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방과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방은 가
운데가 아닌 귀퉁이에 두었고 앞면과 옆면을 마루로 깔았으며 자연석 기단 위에 두리기둥을
세운 굴도리 5량의 헛집구조이다.
이곳은 전남 지방기념물 1-1호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2009년 '담양 식영정 일원'이란 이
름으로 국가 명승으로 승급되었다.

식영정 옆 창계천 주변에는 노자암(鸕鹚巖), 방초주(芳草洲), 서석대(瑞石臺), 자미탄, 견로
암 등의 명소가 있었으나 광주호가 조성되면서 거의 생매장을 당하거나 파괴되어 전설 속의
존재가 되버렸으며 서하당 등 식영정 주변의 건물도 모두 사라져 식영정 홀로 자리를 지켰다.
예전 2000년에 왔을 때는 식영정과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부용당, 장서각 등이 전부였는데 그
새 서하당 등을 다시 지어 주변이 조금은 채워졌다.


▲  부용당(芙蓉堂)과 연지(蓮池)
식영정에 이런 존재가 있었나 싶어 살펴보니 복원된 것이 아닌 단순히 식영정을
수식하고자 1972년에 지은 것들이다. 2칸짜리 부용당이 연못에 두 발을
담구며 혹독한 겨울살이에 지친 몸을 달랜다.

▲  서하당
1560년에 김성원이 자신의 거처로 지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터만 남아오다가 근래에 복원되어
새롭게 솟아났다.

▲  장서각(藏書閣)과 고직사(庫直舍)
송강집(松江集) 목판을 보존하고자
1973년에 세웠다.

▲  '송강 정철 가사의 터' 비석
식영정은 정철이 성산별곡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남겼던 현장이다.

▲  태극마크가 그려진 성산사 정문(삼문)

▲  성산사(星山祠)

성산사는 석천 임억령, 서창 조흡, 정철의 5대손으로 1721년부터 식영정을 지켜온 소은 정민
하(簫隱 鄭敏河), 소은의 아들인 계당 정근(溪堂 鄭根) 등 7명을 봉안한 사당이다. 수재(水災
)로 파괴된 것을 1861년 정조원(鄭祚源)이 송씨에게서 환벽당을 다시 인수하면서 그 주변에
복원했으나 곧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강제 철거되어 사라진 것을 2005년 담양군에서
원래 자리였던 식영정 뒤쪽에 복원했다.

성산사 뒤에는 대나무가 두텁게 숲을 이루고 있는데 그들이 사각사각 풍월을 선사하며 속세에
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청각을 어루만져 준다. 그리고 숲 사이로 좁게 내려오는 계곡에서는 청
량하면서도 소름 끼칠 정도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데 겨울이라 그렇지 더울 때는 밀양(密
陽) 얼음골(☞ 관련글 보기)의 차디찬 바람에 못지않다.


▲  성산사를 감싸고 있는 짙은 대나무숲

▲  성산사에서 식영정으로 인도하는 오솔길

▲  멋지게 잘 늙은 식영정
식영정 툇마루와 방은 접근이 가능하다. 아무리 비어있는 정자라고 해도
문화유산의 지체 높은 몸이니 그냥 구경만 하거나 툇마루에
몸을 기대어 쉬기만 하자~~!

▲  글씨가 율동을 부리는 듯한 식영정 현판의 위엄
'정'자는 연이 하늘로 오르거나 개구리가 움직이는 것 같고 '식'자는
하늘로 비상하는 비행물체를 그린 것 같다.

▲  보면 볼수록 정감이 넘치는 식영정의 뒷모습
요즘도 장작을 떼는지 아궁이 주변 피부가 다소 시커멓다.

▲  식영정 안내문에서 식영정으로 바로 이어주는 돌계단길

▲  고직사 밑에 있는 옛 건물터
고직사와 도로 사이에 조금 움푹 들어간 희미한 흔적이 있다. 식영정을
수식하던 건물터로 여겨지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식영정을 1바퀴 둘러보니 어느덧 18시이다. 더 둘러보고 싶어도 검은 기운이 자욱해지고 찬바
람까지 마치 칼처럼 찔러대니 이를 견뎌낼 재간이 없다. 어차피 그날 목적한 것을 모두 보았
고 거기에 식영정까지 덤으로 챙겼으니 여기서 길을 접어도 여한은 없다. 솔직히 눈과 다리가
쉴 겨를도 없이 많은 것을 보아서 머리가 좀 아프다.

이렇게 하여 새해 시작에 찾아간 광주 충효동, 가사문화권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2년 12월 15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 본인의 티스토리(tistory)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2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광주 무등산옛길3구간, 충효동, 광주호 겨울 나들이 (풍암정, 원효계곡, 충효동요지, 충효동 왕버들군, 광주호호수생태원)

광주 무등산 겨울 나들이 (풍암정, 충효동 지역, 광주호 주변)


' 광주 무등산 겨울 나들이 '

  무등산 옛길 3구간  
충효동 2호 가마터 굴뚝

▲ 무등산 옛길 3구간
◀ 충효동 2호 가마터 굴뚝
 ▶ 풍암정

풍암정

 



 

다사다난으로 얼룩졌던 묵은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해가 또다시 밝았다. 새해만 되면 심리
상 긍정적인 기대감이 커지기 마련인데, 올해는 제발 만사가 형통(亨通)하기를 염원하며
시간을 가리지 않고 늘 불끈 솟는 나의 역마살 기운을 풀고자 예전부터 목말라했던 무등
산의 뒷통수(광주 금곡동, 충효동 지역)를 새해 첫 답사지로 정했다.

그나마 덜 추운 날을 가려 길을 나섰지만 겨울 제국(帝國)의 한복판(1월)이라 추운 것은
여전했다. 아침 일찍 매서운 새벽 기운을 가르며 영등포역으로 넘어가 광주로 가는 누리
로<무궁화호 열차와 동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심전심이라고 견고한 무쇠덩어리 열차
도 나처럼 추운 날씨가 싫었는지 따뜻한 남쪽을 향해 불이 나게 바퀴를 굴려 4시간 만에
광주(光州) 도심에 자리한 광주역에 도착했다.

예전과 다르게 많이 초췌해진 광주역을 나와 역 동남쪽 정류장에서 무등산(無等山)의 품
으로 깊숙히 들어가는 광주시내버스 1187번(덕흥동↔원효사)을 탔다. 버스 번호인 '1187
'은 광주의 진산(鎭山)인 무등산의 키 높이로 금남로와 옛 전남도청(국립아시아문화전당
), 산수5거리를 두루 지나 광주에서 제일 험한 고개로 꼽히는 잣고개를 넘는다. 그 고개
를 힘겹게 넘으면 대도시 광주의 모습 대신 무등산에 묻힌 산골 풍경이 싱그럽게 펼쳐져
광주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2차선 도로(무등로)를 따라 옛 무진주(武珍州)의 성곽 유적과 은빛물
결이 출렁이는 제4수원지, 충민사(忠愍祠), 충장사(忠壯祠) 등을 차례로 지나 원효사(元
曉寺) 직전인 풍암정 정류장에서 두 발을 내렸다.

풍암정 정류장은 뭔가 있을 것 같은 이미지와 달리 정류장 표시판이 전부인 완전한 산골
의 한복판이다. 이거 어디로 가야되나 두리번거리니 길 건너에 무등산옛길 3구간을 알리
는 이정표가 반갑게 손짓을 보낸다.



 

♠  무등산 옛길 3구간과 풍암정

▲  사촌 김윤제 재실(齋室) 입구 비석

무등산 옛길은 광주광역시가 무등산에 닦은 도보길로 무등산 북쪽 자락의 여러 길을 잇고 엮
어서 '무등산 옛길'이란 이름으로 천하에 내놓았다. 모두 3코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나는 3구
간(장원3거리~환벽당, 11.3km)의 신세를 잠깐 졌다. 3구간은 중간에 임진왜란 시절 의병을 일
으킨 김덕령(金德齡, 1567~1596)의 소소한 흔적이 깃든 무등산 의병길과도 만난다.

무등산 옛길로 들어서니 사촌 김윤제의 재실을 알리는 빛바랜 비석이 마중을 한다. 비석을 받
쳐든 네모난 기단석(基壇石)에는 푸른 이끼로 가득해 이곳이 청정한 곳임을 알려주는데, 인적
도 없는 옛길을 더듬어 내려가면 숲속에 묻힌 김윤제의 재실, 귀후재(歸厚齋)를 만나게 된다.
그저 나무 밖에는 없을 것 같은 이런 외딴 곳에 기와집이 묻혀 있으니 마치 전설에 나오는 귀
신의 집이나 폐가를 만난 기분이다.
허나 그 집은 귀신 집도, 버려진 집도 아니며 김윤제의 후손(광산김씨)이 머무는 엄연한 살아
있는 집이다.


▲  담장 너머로 바라본 귀후재

귀후재의 주인인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 1501~1572)는 그 유명한 송강 정철(鄭澈)의 스승
으로 충효동 지역에 살면서 이른바 가사문학(歌詞文學)을 크게 일군 사람이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광주호 남쪽에 사촌의 별장이던 환벽당(環碧堂)이 있는데, 그는 거기서 어린 정철
을 발견하여 제자로 삼은 일화는 꽤 유명하다.

매년 음력 3월 3일, 후손들이 귀후재에서 제사를 지내며 사람이 머무는 공간이라 내부 관람은
어렵다. 하지만 고색이 깃든 돌담 너머로 내부가 왠만큼 보이며 귀후재 본채는 근래 손질되어
고색의 기운은 싹 빠져버렸으나 돌담과 대문은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  고색이 깃든 귀후재 대문
지붕은 새로 갈았지만 그 외에는 낡은 모습 그대로이다.

▲  무등산 옛길 3구간 (귀후재 주변)
누렇게 뜬 낙엽들이 가득 깔려 산길의 촉감을 부드럽게 해준다.

▲  무등산에서 가장 예민한 곳, 무등산 지진관측소

귀후재를 지나 편백림으로 들어서면 원효계곡 상류에서 내려온 무등산 의병길(제철유적지~치
마바위~풍암제, 3.5km)과 만난다. 여기서부터는 느긋한 숲길의 연속으로 편백림을 지나면 기
상청에서 설치한 무등산 지진관측소가 왼쪽(북쪽)에 나타난다.

무등산 지진관측소는 이 땅에서 지진 관측이 가장 잘되는 곳이다. 굴을 파고 '초광대역지진계
' 등 여러 관측 시설을 닦았는데, 이곳이 얼마나 예민한 곳인지 지구 반대편의 지진도 잡아내
며, 사람의 발소리까지 실시간 관측되어 기상청에 고스란히 제공된다. (관측소 내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음)


▲  겨울에 잠긴 무등산 옛길 3구간(무등산 의병길) - 풍암정3거리 부근

▲  풍암정으로 인도하는 대나무 길

풍암정3거리(풍암정 입구)에서 잠시 곧게 뻗은 길을 버리고 풍암정으로 인도하는 오른쪽(남쪽
) 길로 들어섰다. 그 길의 끝에는 원효계곡의 백미(白眉)로 추앙을 받는 풍암정이 있는데, 무
등산 옛길 3구간이나 무등산 의병길에 발을 들였다면 풍암정은 꼭 살펴봐야 나중에 명부(저승
)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  풍암정 옆구리로 흘러가는 청정한 원효계곡

▲  풍암정 앞 징검다리

속세에서 풍암정으로 가려면 반드시 원효계곡을 가르는 징검다리를 건너야 된다. 큼지막한 돌
이 잘 놓여져 있어 통행에 그리 어려움은 없으며, 수심도 얕아 설령 발을 헛디뎠다고 해도 크
게 걱정할 것은 없다.
풍암정 입구에서 무등산 옛길 3구간은 풍암정을 거쳐 풍암제 남쪽 산자락으로 이어지며, 무등
산 의병길은 좋은 길을 계속 고집하며 풍암제까지 곧게 펼쳐진다.


▲  계곡 징검다리에서 바라본 풍암정

▲  풍암정(楓巖亭) - 광주 지방문화재자료 15호

풍암정은 원효계곡(元曉溪谷) 하류에서 가장 경치 좋은 곳에 자리해 있다. 좌/우 2칸, 총 4칸
의 조촐한 팔작지붕 정자로 돌로 두텁게 기단(基壇)을 쌓고 덤벙주초를 놓은 다음, 원형 기둥
을 세우고 정자 중앙에는 팔각 기둥을 세웠다.
정자 한복판에는 1명 정도 누울 수 있는 작은 방을 두고 북쪽에 문을 내었으며, 그 주변은 모
두 판자마루로 둘러 여름 별장으로는 아주 좋게 다져 놓았다. 정자의 천장은 연등 천장이며,
가운데는 우물천장으로 닦았다.

마치 신선(神仙) 세계의 축소판처럼 탐이 나는 풍경의 풍암정은 조선 중기에 활약했던 김덕보
(金德普, 1571~1627)가 지었다. 그의 호는 풍암(楓巖), 자는 자룡(子龍)으로 그에게는 애국심
이 매우 높은 형이 둘이나 있었으니 큰 형은 김덕홍(金德弘), 작은 형은 그 유명한 광주 출신
의병장인 김덕령이다.

김덕홍은 1592년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高敬命) 휘하에서 활동했다. 허나 금산(錦山
) 전투에서 고경명의 어리석음으로 크게 패하면서 제대로 몸도 풀지 못하고 전사를 하고 만다.
그리고 2째 형인 김덕령은 직접 의병을 일으켜 여러 곳에서 왜군을 때려잡고 이몽학(李夢鶴)
의 난(1596년)까지 진압하는 등 공이 많았으나 선조(宣祖) 임금과 그 패거리들이 역적으로 몰
아세우면서 혹독한 고문 휴유증으로 29세의 한참 나이로 옥사(獄死)하고 만다.

큰 형은 전쟁에서 죽고 작은 형은 전공이 큼에도 권력층의 농간으로 맥없이 져버리니 김덕보
의 충격은 실로 상당했을 것이다. 그래서 썩어빠진 나라와 세상을 원망하며 은둔생활에 들어
갔다.

▲  옆에서 바라본 풍암정

▲  풍암정사(楓巖精舍) 현판

뒤늦게 형들의 공을 인정한 조정은 그를 달래며 달콤한 벼슬을 주려고 했으나 모두 쿨하게 거
절했다. ('장릉참봉'을 잠시 맡은 것이 전부임) 그리고 고향(충효동) 부근 원효계곡에 정자를
짓고 단풍과 바위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치란 뜻에서 풍암정이라 이름을 지었으며, 그 '풍암
'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정자 내부에는 1614년 정홍명(鄭弘溟)이 쓴 풍암기(楓巖記)와 임억령(林億齡), 안방준(安邦俊
) 등이 쓴 현판이 있으며, 고경명의 '차풍암정액(次楓巖亭額)'이란 시 현판이 있는데, 1614년
이전부터 정자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어 임진왜란 이전(1590년대)이나 1610년대 초반에 지어
진 것으로 여겨진다.


▲  풍암정 옆에 자리한 커다란 바위들
바위들이 푸른 이끼옷을 걸치며 풍암정의 경치를 한껏 수식해준다.

▲  풍암정의 빛바랜 일기장, 1614년에 정홍명이 쓴 풍암기

풍암정은 '풍암정사'란 별칭도 가지고 있는데, 김덕보와 친분이 있는 문인(이안눌, 안방준 등
)들이 놀러와 시문을 남겼으며 이후로도 많은 시인, 묵객들의 마루가 닳도록 찾아왔다. 현재
김덕보의 후손(광산김씨 문중)이 소유하고 있으며, 마루에는 앉거나 들어갈 수 있으나 방은
잠겨있어 들어갈 수 없다.

* 풍암정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718 (풍암제길 117)


▲  풍암정의 탄생 시기를 한층 올려주고 있는 고경명의
차풍암정액 현판 (오른쪽 현판)

▲  곧게 뻗은 그림 같은 길, 무등산 의병길 (풍암정3거리 동쪽)

한여름이나 늦봄에 왔더라면 정자 마루에 벌러덩 누워 낮잠을 청했을 것이다. 무등산 산바람
과 원효계곡 물바람이 사이좋게 무더위를 단죄하여 낮잠 맛이 꿀맛일테니 말이다. 허나 겨울
제국의 한복판에 왔으니 마루에서 괜히 잠을 청했다가는 큰일나는 수가 있다.
그렇게 풍암정을 둘러보고 풍암정3거리로 나와 잠시 잊었던 무등산의병길을 마저 걸었다. 겨
울에 잠긴 숲길을 걷다보면 '풍암제'란 너른 호수가 은빛물결을 글썽이며 풍암정에게 빼앗겼
던 내 마음을 다시금 앗아가는데, 이 호수는 원효계곡의 물을 먹고 자라 아주 청정한 빛깔을
띄고 있다. 허나 아쉽게도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꽁꽁 묶여 있어 호수 접근은 통제되어 있다.


▲  원효계곡의 물을 먹고 자란 금지된 호수, 풍암제(楓巖堤)

▲  풍암제에서 충효동 도요지로 인도하는 길 (풍암제길)

풍암제를 지나면 무등산국립공원 경계선을 알리는 안내문이 나온다. 그 안내문의 서쪽(풍암정
방향)이 무등산국립공원 영역, 동쪽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자유의 공간이다.



 

♠  무등산의 흙으로 분청사기와 백자를 빚었던 옛 가마터 유적
광주 충효동 요지(忠孝洞 窯址) - 사적 141호

▲  광주역사민속박물관의 일원인 무등산 분청사기(粉靑沙器)전시실

풍암제에서 동쪽(충효동 방면)으로 10분 정도를 가면 무등산 분청사기전시실이 마중을 나온다
. 이곳은 충효동 가마터(4기)와 주변 가마터에서 발견된 분청사기와 백자를 전시하고 이들 유
적을 정리한 곳으로 가마터 자리 위에 터를 다져 1998년 12월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전시실
옆에는 충효동 2호 가마터가 보호각에 감싸여 보존되고 있는데 여기서 많은 분청사기와 백자
들이 무등산이 베푼 양질의 흙을 먹고 태어났다.

무등산 북쪽에 둥지를 튼 충효동 가마터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기록<광주의 자
기소(瓷器所) 1곳이 고을 동쪽 이점(梨岾)에 있음>과 출토 유물의 연도를 통해 늦어도 1430년
정도, 빠르면 고려 후기(14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충효동 2호 가마의 구조는 길이 20.6m, 폭 1.3m의 땅굴 모습으로 사람이 왕래하는 출입시설과
도자기를 집어넣는 번조실, 굴뚝시설를 갖추고 있으며, 진흙을 중심으로 돌을 섞어서 쌓은 형
태이다. 특히 아궁이(번조실)부터 굴뚝 부분까지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어 가마의 변화 과정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어준다.

여기서는 분청사기와 백자가 생산되었는데<상감청자(象嵌靑瓷)도 일부 만들어짐> 처음에는 분
청사기가 중심을 이루었다. 분청사기는 작은 것이 주류를 이루던 백자와 달리 크고 작은 것이
모두 있고 종류도 접시와 종지, 잔, 병, 항아리, 벼루, 제기 등 다양하며, 국화와 나비, 모란
, 물고기, 게, 구름 등이 분청사기 피부에 새겨졌다.
이후 백자까지 손을 대었는데, 분청사기는 박지(剝地)와 조화(彫和) 등 장식과 제작이 간단하
고 질이 조잡한 귀얄문이 주류를 이루면서 점차 쇠퇴를 하게 되었고, 반면 백자는 질이 좋은
탓에 크게 흥하면서 생산량이 늘어났다. 하여 분청사기 가마에서 백자 전문 가마로 완전히 바
뀌게 된다. (분청사기는 대체로 16세기부터 생산이 중단됨)
여기서 생산된 도자기는 왕실과 귀족들에게 주로 납품되었으며, 제작지를 알리는 내용과 제작
자의 이름, 제작시기, 수량, 관용(官用) 임을 알리는 '공(公)' 등 명문이 새겨진 백자와 분청
사기가 많이 나왔다. <'어존'이라 쓰인 한글 명문도 발견됨>

그렇게나 잘나갔던 충효동 가마는 16세기 초 정도에 돌연 폐업을 하여 사라지게 된다. 자세한
사연은 모르겠으나 아마도 다른 가마와의 경쟁에서 밀리거나 흙이 고갈되어 사라진 것으로 보
인다.
이후 터만 아련히 남아오다가 왜정(倭政) 시절부터 광주가마, 무등산가마, 석곡면가마 등으로
불렸으며, 막연히 명품 자기를 생산했던 곳으로 전해져 왔다. 허나 딱히 조사는 이루어지지
못한 채, 방치되어 오다가 1961년에 처음 학계에 소개되었으며, 1963년에 이르러 국립중앙박
물관이 가마터의 퇴적층(堆積層) 일부를 들추면서 이곳의 성격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1991년 국립광주박물관이 2차례에 발굴을 벌여 4기의 가마가 확인되었고 높이 3m에 퇴적
층위가 조사되었으며 분청사기가 변화하는 과정과 백자가 발전하는 양상이 구체적으로 밝혀졌
다.
그 4기 중 제일 상태가 좋은 것이 바로 이곳 2호 가마로 그 터를 손질해 특별히 보호각을 씌
우고 속세에 개방했다. 그리고 분청사기 전시실 자리에서 발견된 가마터 등 나머지 3기는 보
존을 위해 땅에 고이 묻었다. (이들 가마터 4기는 '충효동 요지'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됨)

충효동에는 이들 외에도 여러 가마터가 있으며 발견되지 않은 것도 여럿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충효동에서 가까운 담양군 가사문학면(옛 남면) 지역(광주호 주변)에도 가마터가 여럿
전하고 있어서 이 일대가 거대한 분청사기, 백자 생산지였음을 알려준다.
허나 이들 가마들은 16세기 이후 거의 버려지면서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의 괴롭
힘 속에 모두 녹아버렸고 그나마 남은 흔적도 속세의 무관심과 도굴, 천박한 개발의 칼질 등
으로 대부분 목이 떨어졌다.


▲  온전하게 남은 분청사기의 고운 맵시
분청사기는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잠깐 유행했던 도기, 자기 양식이다.

▲  분청사기 접시와 깨진 대접들

▲  분청사기 벼루와 하얀 뚜껑

분청사기 전시실은 독립적인 박물관이 아닌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소속의 전시실이다. <광주역
사민속박물관 무등산 분관으로 보면 됨> 그러다보니 규모는 작은 편이며, 충효동에서 발견된
유물 상당수는 역사민속박물관이나 광주국립박물관에 가 있고 이곳과 주변에서 나온 도기, 자
기와 복제품 등 200여 점이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


▲  장대한 세월에 의해 헝클어져 겨우 조각만 남은 분청사기 파편

▲  담양군 경상리 저수지 상류에서 발견된 경상리 유적 토기들

▲  화암마을 백자가마터에서 수습된 백자 파편들

▲  분청사기 접시와 제기(祭器, 가운데), 그리고 백자 접시 파편

▲  백자 잔(위쪽)과 깨진 대접

▲  재현된 충효동 가마의 왕년의 모습 (오른쪽이 2호 가마터)

▲  충효동 2호 가마터를 품고 있는 누런 보호각

분청사기 전시실 옆구리에는 충효동 2호 가마터를 품은 가마터 보호각이 있다. 지금이야 누런
피부의 가마터만 남아 실감도 덜하고 여기서 더 이상 도자기를 빚을 일도 없지만 그 흔적만
보더라도 예사 가마터가 아님을 느끼게 한다. 그 잘나갔던 충효동 가마가 한낱 황량한 가마터
가 되버렸으니 세월이 참 무상할 따름이다.


▲  충효동 2호 가마터 굴뚝과 아궁이 흔적
굴뚝과 아궁이 위에는 흙을 두툼하게 씌워 땅굴 방식으로 그 속살을 가렸다.

▲  옆에서 바라본 충효동 2호 가마터

▲  충효동 2호 가마터 아궁이와 누런 퇴적층위

▲  무등산 분청사기 전시실에서 바라본 충효동, 금곡동 지역
오늘도 무등산의 뒷통수 지역은 평화롭기 그지 없다.
(이 지역은 원래 담양군 땅이었음)


* 충효동 요지, 무등산 분청사기전시실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157 (풍암제길 14,
  ☎ 062-613-5379)



 

♠  충효동 광주호 주변 명소들

▲  충효동 왕버들 군(群) - 천연기념물 539호

충효동 요지를 둘러보고 바로 북쪽에 있는 금곡마을로 이동했다. 여기서 환벽당과 취가정, 왕
버들이 있는 충효동까지 걸어가려고 했으나 거리도 2km에 이르고 뚜벅이 길이 닦여져 있지 않
은 2차선 길(송강로)을 따라가야 되므로 차량의 눈치와 위협을 적지 않게 받아야 된다. 이 길
말고도 금곡에서 평촌 방면 매봉로를 따라 취가정, 환벽당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는데, 차량의
왕래는 적지만 역시나 2km 정도를 걸어야 된다.

걷는 것이 싫다면 약간의 돈을 들여 문명의 이기(利己)인 시내버스를 타면 되지만 배차간격이
무려 50~60분에 이른다는 함정이 있다. 하여 스마트폰 버스어플을 검색해 15분 이내에 차가
오면 충효동으로 넘어가고, 그 이상을 넘거나 시내 방향 버스가 15분 이내에 오면 인연이 아
니라 여기고 쿨하게 광주 시내로 넘어가기로 했다.
다행히 6~7분 뒤에 충효동 방향 버스가 온다고 하여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는데 기다리는 시간
만큼 길고 지루한 것은 없다. 초고속으로 흘러만 가는 시간의 속도를 조금이나마 늦추고 싶다
면 무언가를 애타게 기다리면 된다. (퇴근시간을 기다리거나, 차를 기다리거나, 누군가를 기
다리거나 등) 그러면 그 시간만큼은 느리고 답답하게 느껴질 테니까. 허나 그 역시 부질없는
시간 장난에 불과하다.
과연 어플의 안내대로 광주시내버스 187번(충효187번, 장등동↔연천리)이 반갑게 모습을 드러
냈다. 그를 타니 불과 5분만에 충효동 동쪽 끝인 환벽당에 이르렀는데, 도보로 갔더라면 아무
리 빨라도 20분은 걸렸을 것이다.

조선 중기 가사문화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받는 환벽당과 식영정(息影亭), 취가정(醉歌
亭)을 둘러보고 송강로 주변에 주렁주렁 자리한 여러 명소(왕버들군, 정려비각, 광주호 호수
생태원)를 살펴보았다. 환벽당과 식영정, 취가정은 내용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본글에서는 왕버들군과 정려비각, 광주호만 간단히 다루도록 하겠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겨울의 포로가 되버린 채, 개골(皆骨)
상태로 숨죽이고 있는 충효동 왕버들 -
왕버들의 아름다움을 보려면 늦봄이나 여름,
가을에 와야 된다. 겨울에는 죄다 처량한
개골 상태라 거의 거기서 거기 같다.

광주호 호수생태원 진입광장 맞은편에 장대한 세월을 머금은 왕버들 3형제가 있다. 이들은 충
효동에서 가장 늙은 존재로 추정 나이는 약 430~450년에 이르는데, 가장 큰 것은 높이가 13m,
둘레 8.9m, 작은 것은 높이 8m, 둘레 7.2m로 키와 둘레의 차이가 약간 있을 뿐 덩치는 다 고
만고만하다.
이들 나무는 '김덕령나무'라 불리기도 하는데, 김덕령이 태어났을 때 집안에서 심었다고 전한
다. 하지만 단순히 그의 탄생 기념으로 심은 것은 아니며 마을을 지키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
)의 일환으로 심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소나무 1그루, 매화나무 1그루, 왕버들 5그루가 한 식
구를 이루고 있었지만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다들 사라지고 지금은 왕버들 3그루만이 자리
를 지킨다.

* 충효동 왕버들군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1021


▲  충효동 정려비각(旌閭碑閣) - 광주 지방기념물 4호

왕버들 곁에는 기와집으로 된 정려비각이 자리해 있다. 이곳 출신인 김덕령과 그의 부인(흥양
이씨), 그의 형제(김덕홍, 김덕보)의 충(忠), 열(列), 효(孝)를 골고루 기리고자 1789년에 정
조 임금이 세운 것으로 정려비(旌閭碑)의 높이는 220cm, 너비 68cm이다.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비석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비각(碑閣) 안에 고이 깃들여져
있는데, 비각 주변에 기와 돌담을 두르고 북쪽으로 문을 냈다.

김덕령과 김덕홍은 앞서 풍암정에서 언급한 그대로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싸웠고, 김덕보
는 먼저 떠난 형들을 대신해 어머니를 잘 봉양했으며, 흥양이씨 부인은 정유재란(1597)때 담
양 추월산(秋月山)으로 피신을 갔으나 왜군의 추격으로 생포될 위기에 처하자 자결을 하였다.
그래서 충, 효, 열 3가지가 성립되어 뒤늦게나마 정려비를 받은 것이다.

비석 앞면에는 '조선국증좌찬성 충장공 김덕령 증정경부인 흥양이씨 충효지리(朝鮮國贈左贊成
忠壯公 金德齡 贈貞敬夫人 興陽李氏 忠孝之里)'라 쓰여있고, 뒷면에는 김덕령 일가의 충, 효,
열을 찬양하며 충효리의 유래를 담고 있다. 바로 이 정려비에서 충효동의 이름이 비롯된 것이
다. 비각 안에는 정려비 외에 상량문(上樑文), 중수기(重修記) 등이 걸려 있다.

* 충효동 정려비각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440 (충효샘길 7)


▲  정려비각에 소중히 담긴 김덕령 일가 정려비

▲  정려비의 빛바랜 일기장, 상량문

▲  왕버들 옆에 자리한 상징정원

상징정원은 광주의 대표 명물인 무등산 수박을 상징화하여 닦은 조촐한 공간이다. 대나무를
엮어 만든 무등산 수박쉼터와 수박을 형상화한 무등산 수박 토피어리, 무등산 수박밭의 고랑
을 묘사한 무등산 수박밭, 그리고 아름다운 가을꽃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의 존재 이유는
무등산 수박 찬양이다. (그래서 이곳의 주제도 '꽃으로 수박파티'임)


▲  무덤처럼 생긴 충효동 조산(造山) - 광주호 호수생태원 내부
충효동 사람들은 이 조산을 '말무덤'이라 부른다. 비보풍수에 따라 마을의
허한 부분을 달래고자 인공적으로 쌓은 것으로 건너편 입석(조탑)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  푸른 물결 글썽이는 광주호와 그 옆구리에 닦여진 광주호 호수생태원

광주와 전남 담양(潭陽) 경계에 자리한 광주호는 영산강(榮山江)의 주요 지류인 고서천(古西
川)에 광주댐을 닦으면서 조성된 너른 호수이다. 1974년 공사를 시작해 1976년 완성을 보았는
데, 무등산과 하늘이 거울로 삼을 정도로 풍경이 아름다우며, 주변에 소쇄원, 환벽당, 식영정
, 충효동 왕버들 등 쟁쟁한 명소도 즐비해 광주 외곽의 주요 명소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광주호 남쪽 충효동에는 2006년 3월에 닦여진 호수생태원이 있다. 면적은 184,948㎡로 자연관
찰원<수생식물원, 야생초화원, 암석원, 채원(菜園), 생태연못>, 습지보전지, 버드나무 군락지
, 칠성바위, 자미탄, 전망대, 관찰대, 쉼터 등이 있으며 철새를 비롯한 여러 새들이 잠시 들
리거나 살아가는 곳으로 그들의 삶도 훔쳐볼 수 있다.
관람시간은 딱히 제한은 없으나 이곳 생태환경이 너무 좋다보니 야생동물의 출현이 잦다. 하
여 일몰 이후에는 가급적 들어가지 말 것을 권하고 있다. (호수생태원 보호 목적도 있음)


▲  호수생태원 탐방로
탐방로 외에는 자연의 공간이니 애써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  겨울 제국의 심술로 누렇게 뜬 호수생태원

▲  호수생태원에서 바라본 담양 쪽 (소쇄원, 식영정 방면)

호수생태원은 햇님 퇴근 시간이 임박해옴에 따라 간단히 1바퀴 둘러보고 마무리를 지었다. 광
주에 발을 내린 것이 정말 1시간 전 같은데 세상은 벌써 타들어가 검은 도화지로 배경이 바뀌
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겨울 제국의 기운도 높아지고 출사도 어려우니 더 이상 둘러보는
것은 의미가 없지. 그래도 그날 목적한 곳을 다 둘러보았으니 뿌듯하기 그지 없다.

마침 시내로 나가는 시내버스 시간이 임박하여 광주호 호수생태원 정류장으로 이동했다. 여기
서 버스 1대를 놓치면 50~60분을 꼼짝없이 강제 대기를 해야 된다. 어두워진 공간에서 추위를
견디며 1시간 가까운 시간을 기다리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워 발을 재촉하여 정류장에 이르니
광주시내버스 187번이 딱 맞춰서 반갑게 다가선다. 하여 충효동과 무등산에 대한 미련을 흔쾌
히 버리고 차에 올라서니 버스는 외마디 부릉소리를 고적한 충효동에 남기며 광주 시내로 넘
어갔다.

이렇게 하여 새해 시작부터 벌인 광주 무등산 뒷통수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광주호호수 생태원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439-1 (충효샘길7 ☎ 062-613-7891)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1년 12월 31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다음(daum) 블로그 ☞ 보러가기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2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광주의 남쪽 변두리, 대촌동~칠석동 둘러보기 (괘고정수, 고원희가옥, 고싸움놀이, 칠석동은행나무, 부용정)

 


~~~ 봄맞이 광주 대촌동, 칠석동 나들이 ~~~


▲  칠석동 은행나무


 

울 제국이 드디어 무너지고 봄이 천하 평정에 열을 올리던 3월의 끝 무렵, 남도의 중심
지 광주(光州)를 찾았다. 광주 지인의 초청으로 간만에 가게 되었는데, 그는 자연과 문화
유산에 두루 정통하고 숲과 자연을 강의하는 교수로 꽤 저명한 분이다. 그런 이의 초청을
받았으니 본인 입장에서는 그저 영광스러울 뿐이다.

아침 일찍 호남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4시간 여를 총알처럼 달려 광주역에 발을 내린다.
거기서 지인분 부부를 만나 전남대와 중외공원으로 이동하여 남도 매화(梅花)와 산수유를
구경하고 전남대 북쪽에서 남도 정식으로 며칠을 굶어도 끄떡없을 정도로 가득 배를 채웠
다. 그렇게 점심을 먹자 그들은 광주 답사를 시켜주겠다며 내가 희망하는 곳의 하나인 대
촌동으로 흔쾌히 인도해주었다.

대촌동(大村洞)은 광주 남구(南區)의 일원으로 도심과 가깝지만 동네 전체가 전형적인 시
골로 평야 등의 경작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또한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아가던 시절부터
많은 문인들이 집이나 정자를 짓고 살면서 포충사와 괘고정수, 양과동정, 고씨삼강문, 칠
석동 은행나무, 부용정, 고원희가옥 등 고색의 명소를 무수히 간직하고 있다.
이중 제일 먼저 포충사를 찾았는데 이곳은 별도의 글에서 소개하도록 하겠으며, 여기서는
괘고정수와 고씨삼강문, 고원희가옥, 칠석동 은행나무, 부용정 등을 다루도록 하겠다.


 

♠  광산이씨 이선제(李先齊)의 후손과 생사고락을 같이한 600년 묵은
왕버들, 괘고정수(掛鼓亭樹) - 광주 지방기념물 24호

충사 북쪽 만산마을 입구에는 괘고정수라 불리는 거대한 나무가 있다. 남부 지방은 산수유
와 매화꽃, 벚꽃 등이 이미 만발을 넘어서고 있는데, 나무들은 아직도 다 쓰러져가는 겨울의
눈치를 보며 벌거숭이 모습으로 완연한 봄을 열망한다.
처음에는 느티나무나 은행나무인줄 알았는데 안내문을 보니 왕버들이라고 한다. 버들 중의 왕
이라는 왕버들이 저렇게까지 자랄 수가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인데, 잎이 어느 정도 붙으면
나무 구분이 가능하나 한결같이 벌거숭이 상태에서는 일반인들은 이게 느티나무인지 버들인지
구분이 쉽지 않다.

이 왕버들은 조선 초기 문신으로 광주 원산동이 고향인 이선제(1389~1454)가 심었다고 전한다
. 나무의 나이는 550~600년 정도로 여겨지며, 높이는 15.4m, 가슴 높이 둘레가 1.7m, 수관(樹
冠) 너비는 13m 정도이다. 
이선제는 광산이씨 집안으로 자는 가부(家父), 호는 필문(
畢門)이다. 권근(權近)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419년
증광시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1423년 고려사(高麗史)를 개수할 때 사관(
史官)으로서 정도전(鄭道傳) 등이 편찬한 고려사가 당시 이색(李穡), 이인복(李仁復)의 금경
록(金鏡錄)를 바탕으로 작성해 사실과 다른 것이 많음을 지적하며 원전(原典)을 따르자고 주
장했다.
1431년 집현전 부교리로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이 되어 태종실록 편찬에 참여했고, 병조참의
(兵曹參議)와 강원도관찰사, 예조참의 등을 거쳐 1448년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이후 정창손(鄭昌孫), 김종서(金宗瑞) 등과 '고려사'를 개찬(改撰)했으며 예문관(藝文
館) 제학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선제는 이 나무를 심으면서 나무가 죽으면 가문도 망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과거에 붙으면 이 나무에 북을 걸고 축하 잔치를 벌였는데, 그 연유로 괘고정
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곳에 괘고정이란 정자(亭子)가 있었던 것은 아니며,
그의 이름이 괘고정이다. (나중에 혼란을 막고자 나무를 뜻하는 '樹'를 붙임)


1589년 이선제의 5대손인
이발(李潑)이 정여립(鄭汝立) 사건에 연루되어 본인과 가족들이 처
단되자 나무가 비실비실 말라죽기 시작했다고 하며, 그때 이선제의 관직도 삭탈당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자 이발의 억울함이 밝혀졌고, 나무도 그 한을 풀었는지 이발이 죽고 300
여 년이 흐른 19세기 후반에 다시금 정신을 차리며 살아났다고 전한다. 이렇게 광신이씨 집안
과 생사고락을 같이한 나무로 그 집안에서 애지중지 관리하고 있으며, 여기서 서북쪽으로 조
금 들어가면 이선제의 부조묘(不祖廟)와 묘역이 있어 이 일대가 이선제 집안의 성지(聖地)나
다름이 없다.

* 소재지 :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579-3


▲  옆에서 바라본 괘고정수의 위엄

▲  슬슬 기지개를 켜는 원산들
영산강의 지류인 대촌천의 물을 먹으며 올해도 풍년 예감을 꿈꾼다.


 

♠  고경명(高敬命) 집안의 충절을 기리고자 세운
고씨삼강문(高氏三綱門) - 광주 지방기념물 12호

제봉산(霽俸山, 164m) 서쪽에 자리한 압촌동(鴨村洞)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나 제대
로 싸우지도 못하고 패한 제봉 고경명(霽俸 高敬命, 1533~1592)이 살던 곳이다. 그의 집터에
는 그 후손이 왜정(倭政) 초기에 지은 기와집(고원희 가옥)이 있으며, 마을 입구에는 고경명
일가의 충절을 기리고자 나라에서 세운 고씨삼강문이 자리한다.
또한 마을을 서쪽에 품은 제봉산은 고경명의 호에서 비롯된 것으로 고경명이 어린 시절 뛰어
다니던 산이라 동네와 산 일대에 온통 고경명의 체취가 진동을 한다. 근래에는 고원희 가옥의
일부를 손질해 닦은 광주콩종합센터가 호남 지역 콩의 성지(聖地)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으며,
마을 북쪽에는 광주국제영어마을이 들어서 이 땅의 아주 몹쓸 전염병인 영어 사대주의(事大主
義)에 쓸데없이 일조하고 있다.

압촌제(鴨村堤)를 바라보며 자리한 고씨삼강문은 이 땅에 흔한 정려각의 하나로 고경명과 그
의 일가의 충절을 뼛속 깊이 기리고자 만든 것이다. 1충(忠), 3효(孝), 2열(烈), 1절의(節義)
등 7명의 정려(旌閭)가 봉안되어 있는데, 여기서 1충은 고경명, 3효는 그의 아들인 고종후(高
從厚), 고인후(高因厚), 손자 고부금(高傅金)이며, 2열은 고경명의 딸인 노상룡(盧尙龍)의 부
인, 질부인 고거후(高居厚)의 처 광산정씨(光山鄭氏), 1절은 고경명의 동생인 고경형(高敬兄)
이다.

고경명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남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북쪽으로 가다가 충남 금산
(錦山)에서 무모한 전술로 의병을 다 말아먹고 전사했다. 그의 맏아들인 고인후는 금산 전투
에서 살아남아 귀향했으며, 1593년 다시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晉州城) 전투에 참여했으나 성
이 함락되자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
2째 아들인 고종후는 금산에서 아버지와 함께 전사했으며, 고경명의 손자인 고부금은 효자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2열에 해당되는 고경명의 딸과 고거후의 처 광산정씨는 정유재란(丁酉再
亂) 때 왜군에게 잡히자 자결했으며, 1절에 해당되는 고경형은 진주성 싸움 때 성이 함락되자
조카인 고인후와 함께 남강에 뛰어들었다.

이들이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받은 것은 1595년부터로 고경명과 고경형 형제, 고종후/인후 형
제가 제일 먼저 정려되었고, 고경명의 딸이자 노상룡의 처는 1597년, 고부금은 1655년, 고거
후의 처 광산정씨는 1844년에 정려되어 바로 그해에 정려각이 지어졌다.
정려각은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사방에 홍살을 설치해 내부를 지키고 있고,
앞뒤 2열로 7명의 정려 현판을 달았다. 건물 밖은 돌담을 둘렀고, 바로 옆에는 고씨 집안의
제각(祭閣)인 추원각(追遠閣)이 자리해 그 집안의 자랑이자 보물인 삼강문을 지킨다.

* 고씨삼강문 소재지 -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 산14 (압촌길66)

▲  태극마크가 그려진 고씨삼강문 정문

▲  조촐한 모습의 고씨삼강문

▲  고경형의 정려

▲  고부금의 정려

▲  고인후의 정려

▲  고종후의 정려

▲  고경명의 딸이자 노상룡의 처 정려

▲  고거후의 처 광산정씨의 정려


▲  고씨삼강문의 주인으로 추증 관직이 제일 많은 고경명 정려

▲  고씨삼강문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추원각
장흥고씨 집안의 제각(祭閣)이다.

▲  평화로운 전원 분위기의 압촌동 - 고씨삼강문과 고원희가옥, 제봉산,
광주콩종합센터 등의 명소를 간직하고 있는 시골 마을이다.

▲  고원희 가옥(광주 지방문화재자료 8호) 외경

고씨삼강문에서 동쪽으로 2분 남짓 들어가면 그 골목의 끝에 고원희가옥이란 기와집이 소나무
숲을 병풍으로 두르며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이 집은 이름 그대로 고원희란 사람의 주택으로 고경명의 옛 집터이기도 하다. 그의 후손들은
계속 이곳에 살았는데, 옛집이 낡아서 무너질 지경에 이르자 1917년에 고원희의 아버지인 고
종석(高琮錫)이 지금의 집을 지으면서 300년 넘게 숙성된 고색의 때는 싹 날라가고 만다. 허
나 사람도 살아야 되니 그건 어쩔 도리가 없는 것 같다. 비록 집은 새로 갈았으나 고경명이
살던 옛 터전을 계속 지키고 있으니 그것으로도 의미는 충분하다.

새집 이전에는 이 지방의 유서 깊은 고택(古宅)답게 건물이 꽤 많았으나 지금은 대문과 사랑
채, 안채, 곳간채, 사당 등이 남아있어 규모가 많이 줄어들었다. 게다가 2012년 가옥의 서쪽
부분을 광주광역시와 저절로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 같이 만든 광주콩종합센터에 떼어주면서 면
적이 더 줄었다.

현재 집은 고원희씨 일가가 살고 있다. 결과는 완전 시궁창이나 임진왜란 때 호남 최초의 의
병이란 타이틀을 쥐고 있는 고경명의 후손이지만 왜정과 해방, 현대(現代)라는 임진왜란보다
훨씬 험난한 세월의 흐름을 거치면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왜정 때는 집안에서 뜻밖에 친
일파가 나와 형제 간의 다툼이 생겼고 해방 이후에는 우익과 좌익의 대립으로 집안이 쪼개졌
다.
지금까지도 집안은 안정되지 못하여 다른 일가들은 모두 외지로 나가고 고원희 일가만 선조의
터전을 지키고 있다. 가옥 내부를 둘러보려면 그에게 허가를 받아야 되나 우리는 굳이 내부는
들어가지 않았다.

▲  고원희가옥 돌담과 대문

▲  광주콩종합센터에서 바라본 고원희가옥

집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와 곳간채가 나타난다. 대문 옆에는 차량을 위해 담장을 트고 완전
히 개방된 문을 냈으며, 안마당을 사이에 두며 안채가 있고 그 오른쪽에 부조묘(不祧廟)라 불
리는 사당을 두었다. 현재 가옥은 1917년에 싹 갈았지만 부조묘는 이전 것을 그대로 쓰고 있
어 여기서 그나마 오래된 건물인데, 고경명과 고종후, 고인후를 봉안하고 있다.
여기서 부조묘란 나라의 공이 있는 사람의 신위(神位)를 봉안한 특별한 사당으로 보통 조상의
신위는 4대가 지나면 무조건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된다. 허나 부조묘는 그럴 필요가 없는 불
천지위(不遷之位)의 특권을 누린다. 이런 사당은 제왕의 허가가 반드시 필요하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17년에 지어졌음을 알리는 상량문(上樑文)
이 있다. 근데 골 때리는 것은 조성 시기에 대한 표현인데, '숭정기원후 오갑정사 윤이월초
구일(崇 禎紀元後 五甲丁巳 閏二月初 九日)'이라 쓰여있다. 여기서 숭정은 명나라의 마지막
제왕인 의종<毅宗, 숭정제(崇禎帝)>의 연호이다.
명(明)에 대한 지극한 사대주의를 벌이며 아시아의 호구 약소국으로 온갖 개망신을 당하며 살
아온 조선, 단군(檀君)이 세운 조선(고조선)은 대륙까지 호령했던 큰 나라였으나 1392년에 세
워진 조선은 그 반대였다.
1644년 명나라가 망한 이후, 청나라 제왕의 연호 대신 숭정이란 연호를 계속 우려먹으며 명나
라를 쓸데없이 그리워했는데, 심지어 17세기 중반 명나라의 재건을 꿈꾸며 중원대륙 남부에서
난을 일으키다 청나라에게 개털린 남명(南明)의 제왕 영력(永歷, 1646년부터 시작됨)의 연호
까지 썼다. 물론 청나라에 반감도 명과 남명의 연호를 쓰게 하는데 한몫했다.

고종이 황제 위에 오른 1897년 이후로는 더 이상 숭정이란 이름을 쓰지 않은 줄 알았더만 왜
정 때도 그 쾌쾌묵은 숭정으로 연대(年代)를 표시한 것이다. 개화기 이후 양력(陽曆)이 들어
와 그 아니꼬운 왜왕의 연호 대신 양력이나 육십갑자(六十甲子)로 표시하면 될 것을 어찌하여
그 염병할 명나라 사대주의의 더러운 산물인 숭정 기원후~~~를 써야 했는가..? 집을 새로 지
었다는 고종석도 명나라에 대한 꼴통 사대주의가 팽배했던 조선 후기의 그 흔한 우둔한 유생
의 하나였던 모양이다. 아니 왜정 때까지 명나라의 썩어빠진 연호를 꼭 써야 했는가? 그것을
들으니 이 집에 대한 정덜미가 싹 떨어지다 못해 칵~ 침이 뱉고 싶어진다.

* 고원희가옥 소재지 :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 99 (압촌1길 12)

▲  차량 출입문에서 바라본 가옥 내부

▲  고원희가옥 앞쪽 돌담길과 정자


▲  담장 너머로 바라본 부조묘
고경명과 고종후, 고인후의 위패가 봉안된 사당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단청을 곱게 입혀서 그런지 새 건물처럼 보인다.

▲  고원희가옥 뒤쪽 제봉산 소나무숲

고원희가옥 뒤쪽에는 소나무숲이 우거져 솔내음을 진하게 우려내고 있다. 이곳에는 의자와 평
상이 여럿 설치되어 있고 나무 그늘이 햇살을 막아주고 있어 소풍이나 나들이 쉼터로도 아주
좋은 곳인데, 유치원과 초등학생들의 숲/자연 학습 공간으로도 쓰이고 있으며, 여기서 산길을
따라 제봉산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다.


▲  바람의 차디찬 소리만이 살포시 적막을 깨뜨리는 소나무숲

▲  고원희가옥 앞쪽에 자리한 연못

▲  광주콩종합센터 정문

고원희가옥 앞쪽에는 근래 지어진 네모난 정자와 키가 큰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다. 정자 옆에
는 동그란 연못이 봄을 품고 있는데, 이 연못은 가옥을 새롭게 갈던 1917년 이후에 판 거라고
한다. 연못이긴 하나 수심이 얕으며, 개구리들이 늦잠을 자고 있는지 보이지는 않는다.

여기서 연못 너머 북쪽을 보면 고원희가옥과는 조금 다른 기와집의 무리와 장독의 행렬이 두
눈에 들어올 것이다. 이들은 2011년 9월에 결성된 '저절로소비자생활협동조합'에서 광주 남구
청과 고원희 일가의 도움을 받아서 2012년 7월에 문을 연 광주콩종합센터이다. 이곳도 엄연히
고원희가옥에 딸린 토지였는데, 가옥 집주인이 흔쾌히 땅을 제공하여 기존의 기와집을 손질해
콩센터가 들어선 것이다.

이곳은 이름 그대로 콩과 그를 빚어서 만든 장류에 모든 것을 담고 있는데, 장류(된장, 간장)
제조 및 보관/숙성, 판매와 장독대 설치 및 제공, 콩재배와 가공 관련 교육과 훈련, 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그 외에 두부만들기, 천연염색체험, 인절미/화전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도 있
어 가족 단위나 교육을 겯드린 어린이 소풍/견학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센터 동쪽에는 요즘에는 보기가 힘든 장독대들이 하나도 아니고 수백 개가 길게 늘어서 정겨
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는데, 다들 콩 장류나 음식들이 담겨져 있어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다.
광주콩종합센터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해당 홈페이지로 이동됨)


▲  광주콩종합센터 장독대의 행렬 ▼


 

♠  칠석동(漆石洞)에서 만난 명소들

▲  부용정(芙蓉亭) - 광주 지방문화재자료 13호

대촌동 남쪽에 자리한 칠석동은 옻돌마을이라 불린다. 이 땅에 흔한 시골 마을의 하나로 이곳
에는 무려 3가지의 오래된 명물이 전하고 있다. 그 명물이란 은행나무와 부용정, 고싸움놀이
로 이중 은행나무는 광주에서 가장 늙은 나무이며, 부용정은 광주에서 가장 먼저 향약이 시행
된 곳이다. 그리고 고싸움은 남도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로 명성이 자자하다.
이들 명소는 하칠석마을에 있는 고싸움놀이테마파크(공원)에 몰려있어 속 편하게 한 덩어리로
둘러보면 되며, 부용정과 은행나무 외에 고싸움놀이와 관련된 고싸움놀이전수관, 고싸움놀이
4D영상체험관 등이 있어 남도 고싸움의 성지(聖地) 역할도 겸한다.


▲  옆에서 본 부용정과 부용정석비

고싸움놀이테마파크(이하 고싸움공원) 동쪽에 자리한 부용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
붕 건물이다. 보통 오래된 정자들이 팔작지붕을 취한데 반해 여기는 맞배지붕을 지녀 정자보
다는 누각이나 당(堂)을 칭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은 모습인데, 특이하게도 공포 덩어리가
없는 민도리식으로 12개의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다. 2단의 석축 위에 자리해 자못 웅장해
보이며, 내부를 가리는 벽이 없어 사방이 뻥 뚫려있다.

이 정자는 1418년에 이 동네 출신인 김문발(金文發, 1359∼1418)이 세웠다. 그는 광산(광주)
김씨로 증참판을 지낸 김거안(金巨安)의 아들이며, 호는 부용이다. 그래서 정자 이름도 부용
정이 되었다.
고려 우왕 때는 도평의녹사(都評議錄事)를 지냈는데, 전라도에 침투한 왜구를 격퇴한 공으로
돌산만호(突山萬戶)가 되었으며, 조선으로 세상이 바뀌면서 1394년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
使) 김빈길(金賓吉), 만호 김윤검(金允劒) 등과 왜선 3척을 잡은 공으로 태조 이성계에게 활
과 화살, 은기(銀器) 등을 하사 받았다. 1406년에는 전라도수군단련사(全羅道水軍團撫使)로서
왜선 1척을 잡았고, 1407년에는 상호군(上護軍)이 되어 이추(李推)와 대호군(大護軍) 강원길
(姜元吉)과 함께 요동에서 넘어온 피난민을 압송해 돌려보냈다.
이후 경기수군도절제사와 충청전라도수군도체찰추포사(忠淸全羅道水軍都體察追捕使)를 역임했
으며, 1411년 충청도수군절제사로 승진했으나 병으로 인해 벼슬을 사양했다. 이듬해에는 전라
도수군절제사가 되었고, 1418년 황해도관찰사를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는 고향인 칠석동에서 부용정을 짓고 여씨(呂氏)의 남전향약(南田鄕約)과 주자(朱子)의 백
록동규약(白鹿洞規約)을 참조하여 향약을 만들어 고향의 풍속을 단속했는데, 이는 광주 향약
좌목(鄕約座目)의 유래가 되었다. 즉 광주에서 가장 먼저 향약이 시작된 곳인 셈이다. 고향
백성들의 교화에 힘쓰는 한편, 이시원(李始元), 노자정(盧自亭) 등과 학문을 논하며 아주 한
가롭게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부용정은 김문발이 세상을 뜬 이후에도 이 지역의 이름있는 명소로 남아서 양응정(梁應鼎)과
고경명(高敬命), 이안눌(李安訥), 박제형(朴濟珩) 등 지역의 명사들이 찾아왔다. 그들이 남긴
편액이 무수히 장식되어 있으며, 정자 옆에는 부용정의 내력이 소상히 담긴 부용정석비가 자
리해 있는데, 이는 1984년에 세워진 것이다.
막힘이 하나도 없이 사방이 뚫려 있고,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마루 형태라 여름 제국 시절에
는 완전 극락과 같은 곳이다. 바람도 솔솔 불어오니 이곳에서 책을 보거나 낮잠을 자거나 바
둑을 두면 정말 꿀맛이 따로 없을 것이다. 다만 겨울 제국 시절에는 지옥이다.

▲  고싸움놀이테마파크(공원) 표석

▲  돌담 안에 담긴 널뛰기


▲  칠석동 은행나무 - 광주 지방기념물 10호

고싸움공원 남쪽에는 앞서 괘고정수를 능가하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자리해 있다. 덩치가 얼마
나 크던지 그의 앞에서는 아무리 잘난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저 주눅이 들 수 밖에 없다. 대자
연 형님의 위대한 힘과 철도 녹여 먹을 정도의 장대한 세월이 그를 산만한 덩치로 만든 것이
다.

나무의 나이는 650년 이상 묵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예전에는 800년 이상 묵은 것으로 알려졌
다. 그러다가 요즘은 650년 정도로 자리를 잡은 듯 싶다. 이 땅에 널린 은행나무는 다른 나무
와 달리 태반이 사람이 심은 것으로 부용정의 주인인 김문발이 심었다는 이야기가 한 토막 전
해오기 때문이다. 그는 14세기 중반에서 15세기 초반 걸쳐 살던 사람이니 그가 심은 것이 맞
다면 600년~650년 정도가 된다.
아무리 먹어도 줄지 않는 세월을 수백 년이나 꾸역꾸역 섭취하여 그의 키는 26m에 이르며, 7m
높이에서 가지가 무수히 갈라져 나와 큰 나무의 위엄을 제대로 과시한다. 그의 전체 둘레는
13.3m, 수관의 너비는 동서 30m, 남북 26m로 광주에서 제일 크고 오래된 나무로 꼽힌다.

예로부터 칠석동 옻돌마을 사람들이 서낭나무로 받들어 정월 대보름날 밤에 당산제(堂山祭)를
지낸다. 이 나무는 할머니당산, 그리고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들판에 할아버지 당산이라 불리
는 소나무가 있는데, 보통은 같은 종류의 나무를 노부부나 부부로 삼지만 여기는 서로 다른
나무를 노부부로 삼은 것이 특징이다. 나이와 덩치, 명성이 할머니 당산인 은행나무가 압도적
으로 우세해 할아버지 당산 소나무는 당산제 외에는 관심도 거의 못받는 우울한 실정이다. (
우리도 할아버지 당산은 안갔음)
은행나무는 귀신이 좋아하는 나무의 하나라 옛 사람들은 늙어보이는 나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고려 후기부터 마을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 고마운 존재로
이곳 사람들의 은행나무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대보름날 당산제가 끝나면 다음날 16일부터 마을을 동서로 상촌(上村)과 하촌(下村)으로 나누
어 고싸움놀이를 벌인다. 현재 칠석동은 상칠석, 하칠석으로 구분되어 있으니 바로 여기서 비
롯되었다. 이때 고싸움에 쓰이는 고는 제일 먼저 이 나무를 돌아야 된다. 그러니까 칠석동 고
싸움놀이는 은행나무에서 그 서막을 여는 것이다.
이 마을은 전주이씨와 김문발의 광산김씨가 오랫동안 터를 일군 마을로 평야지대에 자리해 있
는데, 풍수지리적으로 이곳은 와우(蝸牛) 형국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소가 매우 사나워 이리
저리 날뛰므로 고삐를 매어두고자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하여 풍수상 부실한 부분을 커
버해주는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  꽤나 굵직해진 은행나무 밑도리의 위엄
1그루가 아니라 여러 그루가 한 지붕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무 앞에는 상석이 놓여져 있으며, 여기서 당산제를 지낸다.

▲  나무에 칭칭 감겨진 금줄

나무가 아직은 정정하다고 해도 늙은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600년 이상의 노구를 지탱하기
힘들어 기둥을 여러 개 세워 지구의 중력에 힘겹게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보면
정말 세월보다 무거운 것은 천하에 아무 것도 없다. 손으로 만질 수가 없을 따름이지 세월의
무게는 무한대(∞)이기 때문이다,


▲  고싸움놀이4D영상체험관에 재현된 고싸움놀이의 위엄

은행나무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고싸움놀이4D영상체험관(이하 영상체험관)에 잠시 발을 들
였다.
이곳은 남도의 명물 고싸움놀이에 대한 온갖 자료와 영상, 디오라마 등을 담고 있는데, 단순
한 보여주기를 떠나 4D영상관과 4D입체게임 등 최첨단의 신선한 아이템을 준비해 민속놀이에
대한 관심이 적은 어린이와 젊은층을 겨낭한 점이 눈에 띈다. 그냥 이 땅에 흔한 박물관이나
체험관처럼 만들면 주목도 못받고 묻힐 우려가 크니 광주시에서 아주 통 크게 체험관을 지른
것이다.
 
영상관에서는 4D영상으로 고싸움 놀이를 아주 실감나게 시청할 수 있으며, 칠석마을 사람들이
이곳 풍수의 허한 부분을 커버하고자 은행나무를 심고 고싸움놀이를 하는 내용도 소상히 나온
다. 영상체험관은 관람, 입장은 공짜이나 영상관만큼은 입장료를 받고 있는데, 시청 시간은
20분 정도이다. (상영시간은 문의 요망)
그리고 4D입체게임은 우리나라 최초의 리얼타임 입체 영상게임으로 2팀으로 나누어 승패를 가
른다. (자세한 것은 안해봐서 모름) 또한 고라이더라는 코너는 고싸움 관련 O,X 퀴즈를 풀어
90점 이상이면 고라이더를 공짜로 태워준다. 고라이더는 고의 제일 높은 부분에 올라타는 것
이다.

2층은 일반적인 전시실로 '고싸움놀이 현장체험' 코너에서는 고싸움놀이를 재현한 거대한 디
오라마가 있으며, 여기서 퍼즐게임을 통해 고싸움에 등장하는 인물을 확인할 수 있다. '세계
속의 고싸움 놀이'는 우리의 옛 땅인 왜열도와 중원대륙, 그리고 인도 등 다른 나라의 고싸움
놀이를 집대성했고, '당산제는 어떻게 지내나요?' 코너는 고싸움 캐릭터인 고동이와 고순이와
함께 고싸움놀이 당산제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 외에 '고싸움놀이 노래시설'에서는 고싸움놀이에 등장하는 소리(원음)를 들을 수 있다. 그
렇다면 고싸움 놀이는 무엇일까?

'광주 칠석 고싸움놀이'는 국가무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된 남도의 주요 민속놀이로 광주 칠
석동이 그 중심이다. 매년 음력 정월 10일경부터 2월 초하루까지 20일 정도 펼쳐지는데, 은행
나무와 할아버지 당산 소나무에 당산제를 지내는 정월 대보름날이 절정이다.
고싸움의 고는 옷고름, 고맺음, 고풀이란 뜻으로 노끈 한 가닥을 길게 늘여 둥그런 모양으로
맺은 것이다. 그래서 고싸움이란 놀이에서 사용하는 고가 서로 싸움을 벌인다는 데서 연유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싸움의 유래에 대해서는 딱히 전하는 기록은 없으며, 믿거나 말거나 속설에 따르면 땅의 거
센 기운을 누르고자 사람들을 동원해 땅을 밟는 놀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매우 가
까운 나주 남평(南平) 지방에서는 1950년대까지 활발하게 놀이를 진행했으며, 장흥과 강진,
영암 지방에서도 줄다리기 이전에 고싸움을 벌인 것으로 보아 줄다리기와 연관된 것으로 보인
다. 줄다리기와 고싸움은 놀이의 시기가 같고, 칠석의 상촌은 남자, 하촌은 여자를 상징해 여
자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여기는 것은 다른 줄다리기나 남녀 성대결 민속 놀이와 비슷하다.
허나 고싸움은 지휘자가 고 위에 올라가 게임을 지휘하며 하루도 아닌 20일 정도 격렬하게 진
행되는 점은 기존 줄다리기와는 다르다.

고싸움놀이의 구성은 상촌인 우대미와 하촌인 아랫대미가 너비 2m 이상의 골목길을 경계선으
로 나뉜다. 편단은 줄을 타고 싸우는 우두머리인 '줄패장', 고를 메는 '몰꾼', 고의 몸과 꼬
리를 잡는 꼬리줄잡이이며, 응원단으로 농악대, 깃발잡이, 횃불잡이 등이 있다.
승부는 상대방의 고를 어떤 방법으로든지 땅에 닿게 함으로써 결정이 나는데 이때 농악과 함
께 기수(旗手)와 횃불이 동원되어 온 마을 사람들이 참여한다. 만약 승부가 나지 않으면 고를
풀어 그 줄로 2월 초하룻날에 줄다리기로 최종 결판을 내기도 한다. 고싸움은 우리나라 민속
놀이 중 가장 패기가 높고 격렬한 남성적인 놀이로 강인한 협동심과 줄패장의 지휘력이 중요
하다. 고 위에 탄 줄패장의 지휘로 이리저리 움직이고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화끈한 민속놀이로 인기를 누렸던 고싸움은 왜정 이후 시들시들해지다가 1945년을 전
후해서 잠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다가 동네에 뜻 있는 이들의 노력으로 다시 재현되었으며,
1969년 10월 대구에서 열린 제10회 전국민속예술 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아 고싸움의 위
엄을 천하에 드러냈다. 이후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도 선보여 대단한 관심을 받았으며, 광주
시의 든든한 지원에 힘입어 고싸움의 성지인 칠석동에 고싸움전수회관과 영상체험관, 테마공
원을 만들어 고싸움을 천하에 알리고 보존하는데 힘쓰고 있다.
처음 칠석동에 왔을 때 단순히 은행나무와 부용정만 생각했지 고싸움놀이는 크게 생각을 안했
는데, 이렇게 영상체험관을 살펴보고 본글을 작성하면서 고싸움에 대한 관심에 조금 불이 짚
여졌다. 고싸움놀이는 정월대보름에 주로 열린다고 하니 그때를 노려 고싸움의 실감나는 현장
을 구경하러 가야겠다.

* 고싸움놀이테마공원 소재지 : 광주광역시 남구 칠석동 619, 996일대 (☎ 062-607-2340,46)



고싸움놀이 영상체험관을 끝으로 광주 대촌동 투어는 마무리가 되었다. 그때 시간은 16시, 햇

님이 퇴근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지만 오늘 너무 많은 곳을 둘러봐서 배가 부르다 못해
터질 지경이다. 게다가 투어를 시켜준 이들도 피곤한 상태, 여기서 더 본다면 이건 과식이다.
하여 미련 없이 그들이 사는 봉선동으로 넘어와 커피집에서 커피 1잔의 여유를 누린 다음, 인
근 지하철역인 소태역(광주1호선)에서 그들과 작별을 고하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봄맞이 광주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0년 3월 9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20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본인 제작 여행답사기 모음집 (2019년 12월 30일 기준)

 

서울 - 118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글 링크
1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 심우장, 성락원, 선잠단터 2013, 11

☞ 블로그글 보기

2 종로구 경복궁, 인사동 2006, 1

☞ 블로그글 보기

3 종로구 창경궁 (1) 2006, 10

☞ 블로그글 보기

4 종로구 창경궁 (2) 2006, 10

☞ 블로그글 보기

5 강남구 봉은사 1 (사월초파일) 2007, 5

☞ 블로그글 보기

6 강남구 봉은사 2 (사월초파일) 2007, 5

☞ 블로그글 보기

7

종로구
서대문구

세검정, 대원군별장, 홍지문
옥천암 마애좌상

2007, 8

☞ 블로그글 보기

8

종로구

북한산 금선사

2008, 7

☞ 블로그글 보기

9

금천구

호암산 호압사

2008, 11

☞ 블로그글 보기

10

금천구

호암산 (호압사, 석구상, 한우물, 호암산성) 2009, 3

☞ 블로그글 보기

11

종로구

선희궁터, 청와대분수대, 청와대앞길,
경복궁신무문, 인사동

2009, 4

☞ 블로그글 보기

12

강남구

대모산 불국사 (사월초파일)

2009, 5

☞ 블로그글 보기

13

은평구

북한산 삼천사 (사월초파일)

2009, 5

☞ 블로그글 보기

14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 이종석 별장

2009, 6

☞ 블로그글 보기

15

노원구 수락산 학림사 2009, 8 ☞ 블로그글 보기

16

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 2009, 12 ☞ 블로그글 보기

17

성북구 성북동 길상사 2010, 4 ☞ 블로그글 보기

18

은평구 태화산 수국사 2010, 7 ☞ 블로그글 보기

19

종로구 부암동 뒷골마을, 북악산길, 창의문 2011, 3 ☞ 블로그글 보기

20

관악구

관악산 관음사, 효민공이경직묘역,
사당동백제요지, 구벨기에공사관

2011, 4 ☞ 블로그글 보기

21

성북구

돈암동 흥천사

2011, 5 ☞ 블로그글 보기

22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

2011, 5 ☞ 블로그글 보기

23

종로구

가회박물관, 삼청동(북촌), 인사동

2011, 9 ☞ 블로그글 보기

24

성북구

성북동 삼청각, 홍련사, 북악산

2011, 10 ☞ 블로그글 보기
25 도봉구

방학동 은행나무, 원당샘, 안맹담/정의공주묘
목서흠묘역

2011, 12

☞ 블로그글 보기

26

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 2012, 2 ☞ 블로그글 보기
27

종로구

장의사지당간지주, 세검정, 석파정별당, 홍지문

2012, 2 ☞ 블로그글 보기
28

강서구

구암공원(광주바위), 허가바위, 허준박물관

2012, 3 ☞ 블로그글 보기
29

노원구

불암산 학도암, 이윤탁한글영비

2012, 4 ☞ 블로그글 보기
30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

2012, 5 ☞ 블로그글 보기
31

동작구

상도동 사자암

2012, 5 ☞ 블로그글 보기
32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창빈안씨묘역, 호국지장사)

2012, 6 ☞ 블로그글 보기
33

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백사골)

2012, 8 ☞ 블로그글 보기
34

성북구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북악산길

2012, 9 ☞ 블로그글 보기
35

성북구

성북동 심우장, 최순우옛집, 선잠단터

2012, 10 ☞ 블로그글 보기
36

종로구

북촌문화센터, 관상감관천대, 계동길, 창덕궁길,
요금문, 고희동가옥, 백흥범가옥, 빨래터

2013, 1 ☞ 블로그글 보기
37

성북구

성북동 길상사 2013, 4 ☞ 블로그글 보기
38 종로구

석파정별당(석파랑), 부침바위터, 무계정사터,
현진건집터, 청계동천, 반계윤웅렬별장

2013, 4

☞ 블로그글 보기

39

종로구

재동백송, 재동초교, 백인제가옥, 북촌3경 일대,
정독도서관(서울교육박물관), 안국동 윤보선가

2013, 5

☞ 블로그글 보기

40

강북구

북한산 본원정사

2013, 5

☞ 블로그글 보기

41

성북구

정릉동 경국사

2013, 5

☞ 블로그글 보기

42

종로구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2013, 7

☞ 블로그글 보기

43

도봉구

도봉산 (자운봉, 포대능선, 만월암, 도봉서원,
광륜사)

2013, 10

☞ 블로그글 보기

44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

2013, 10

☞ 블로그글 보기

45

금천구

호암산 (석구상, 호암산성터, 한우물, 불영암,
칼바위)

2013, 12

☞ 블로그글 보기

46

종로구

윤동주시인의 언덕(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2014, 3

☞ 블로그글 보기

47

종로구
중구

서울연등회 (서울연등축제)
조계사, 우정국로, 청계천, 광통교

2014, 4

☞ 블로그글 보기

48

종로구

북한산 승가사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2014, 5

☞ 블로그글 보기

49

중구

환구단(원구단), 덕수궁 대한문, 성공회 서울성당,
양이재, 구세군 중앙회관

2014, 6

☞ 블로그글 보기

50

서대문구

봉원사 (서울연꽃문화축제) 2014, 8

☞ 블로그글 보기

51

종로구

동대문성곽공원, 이화마을, 낙산(낙산공원) 2014, 9

☞ 블로그글 보기

52

성북구

성북동 선잠단터, 최순우옛집, 삼청각 2014, 10

☞ 블로그글 보기

53

종로구

인왕산 인왕사, 국사당, 선바위, 해골바위 2015, 3

☞ 블로그글 보기

54

종로구

서울연등회(연등축제), 조계사 2015, 5

☞ 블로그글 보기

55

성북구

정릉 봉국사 2015, 5

☞ 블로그글 보기

56

동작구

국립현충원(창빈안씨묘역, 부안군이석수묘역),
동작충효길(현충원길), 이수폭포

2015, 6

☞ 블로그글 보기

57

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 (백사실)

2015, 8

☞ 블로그글 보기

58

성북구
종로구

북악산 주능선 (숙정문, 촛대바위, 청운대,
백악마루, 창의문)

2015, 11

☞ 블로그글 보기

59

종로구

배화여고생활관, 이상범가옥, 백호정, 자수궁터,
송석원터

2015, 12

☞ 블로그글 보기

60

종로구

창덕궁 후원뒷길, 흥덕사터, 북묘하마비,
우암 송시열집터

2016, 1

☞ 블로그글 보기

61

종로구

북촌(고희동가옥, 기기국번사창, 삼청동길) 2016, 2

☞ 블로그글 보기

62

중구
용산구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 남산공원길, 남산 정상
(팔각정), 남산야외식물원

2016, 4

☞ 블로그글 보기

63

도봉구

도봉산 천축사, 마당바위, 자운봉, 포대능선

2016, 5

☞ 블로그글 보기

64

서대문구

인왕산 개미마을, 환희사, 큰절골

2016, 5

☞ 블로그글 보기

65

강동구

암사동 선사유적지

2016, 6

☞ 블로그글 보기

66

서대문구

봉원사 (서울연꽃문화축제)

2016, 8

☞ 블로그글 보기

67

종로구

인왕산 수성동계곡

2016, 8

☞ 블로그글 보기

68

강북구

북한산 구천폭포(구천계곡),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2016, 8

☞ 블로그글 보기

69

은평구

북한산 진관사, 진관사계곡

2016, 8

☞ 블로그글 보기

70

성북구

심우장, 수연산방, 최순우옛집

2016, 9

☞ 블로그글 보기

71

강남구

대모산, 불국사, 구룡산

2016, 10

☞ 블로그글 보기

72

종로구

부암동 무계원, 무계정사터(안평대군 이용집터),
청계동천, 반계 윤웅렬별장

2016, 11

☞ 블로그글 보기

73

종로구

한양도성, 행촌동 은행나무, 딜쿠샤, 홍난파가옥
, 월암근린공원

2016, 12

☞ 블로그글 보기

74

금천구

호암산 (삼성산성지, 호압사, 호암산 정상)

2016, 12

☞ 블로그글 보기

75

서대문구

안산, 무악동봉수대 (안산자락길, 무악정)

2017, 1

☞ 블로그글 보기

76

종로구

중앙고등학교(본관, 서관, 동관), 창덕궁 신선원전

2017, 2

☞ 블로그글 보기

77

성북구

보문동 보문사 2017, 3

☞ 블로그글 보기

78

광진구

홍련봉 보루,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아차산1/5/6보루, 고구려정

2017, 4

☞ 블로그글 보기

79

동대문구
노원구

회기동 연화사
월계동 기원사

2017, 5

☞ 블로그글 보기

80

성북구

개운산 보타사 2017, 5

☞ 블로그글 보기

81

동작구

국립현충원 호국지장사 2017, 6

☞ 블로그글 보기

82

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 (백사실)

2017, 7

☞ 블로그글 보기

83

종로구

삼청공원, 북악산 말바위

2017, 8

☞ 블로그글 보기

84

은평구

북한산 삼천사 (삼천사계곡)

2017, 9

☞ 블로그글 보기

85

관악구

강감찬생가터, 낙성대(안국사), 난곡로 느티나무,
신림동 굴참나무

2017, 10

☞ 블로그글 보기

86

종로구
성북구

한양도성, 낙산공원, 비우당, 자지동천,
삼군부총무당(삼선공원)

2017, 10

☞ 블로그글 보기

87

종로구

서촌 박노수가옥(박노수미술관), 옛 윤덕영 집

2017, 11

☞ 블로그글 보기

88

종로구
은평구

북한산둘레길 옛성길, 구름정원길, 탕춘대성 암문

2017, 12

☞ 블로그글 보기

89

강서구

양천향교, 궁산, 소악루, 양천고성터, 관산성황당

2017, 12

☞ 블로그글 보기

90

성북구

성북동 길상사

2018, 1

☞ 블로그글 보기

91

종로구

장면 가옥, 흥덕사터, 북묘 하마비, 송시열집터

2018, 2

☞ 블로그글 보기

92

강서구

능말 은행나무/느티나무,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
개화산 약사사

2018, 3

☞ 블로그글 보기

93

종로구
서대문구

세검정, 석파정 별당(석파랑), 홍지문과 탕춘대성
옥천암과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2018, 4

☞ 블로그글 보기

94

동대문구

선농단(선농대제), 선농단 향나무,
선농단역사문화관

2018, 5

☞ 블로그글 보기

95

성북구

안암동 개운사

2018, 5

☞ 블로그글 보기

96

종로구

낙산 청룡사

2018, 5

☞ 블로그글 보기

97

강북구

북한산 화계사

2018, 6

☞ 블로그글 보기

98

은평구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마실길, 구름정원길,
경천군 송금비, 백화사, 화의군묘역

2018, 8

☞ 블로그글 보기

99

노원구

수락산 벽운동계곡, 염불사, 영원암, 귀임봉

2018, 9

☞ 블로그글 보기

100

구로구

궁동저수지생태공원, 정선옹주묘역, 구로올레길,
지양산

2018, 10

☞ 블로그글 보기

101

종로구

윤동주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2018, 11

☞ 블로그글 보기

102

성북구

북악산 북악하늘길1산책로, 2산책로(김신조루트)

2018, 11

☞ 블로그글 보기

103

광진구

아차산성, 아차산1보루, 3보루, 5보루

2019, 1

☞ 블로그글 보기

104

성북구

성북동 최순우옛집, 수연산방(상허 이태준 가옥)

2019, 2

☞ 블로그글 보기

105

종로구
서대문구

박종화가옥, 보현산신각, 홍지문, 산모퉁이까페
옥천암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2019, 4

☞ 블로그글 보기

106

종로구

북한산 금선사 (목정굴)

2019, 4

☞ 블로그글 보기

107

중랑구

숙선옹주묘역, 봉화산(아차산봉수대터),
봉화산둘레길, 충익공 신경진 묘역

2019, 5

☞ 블로그글 보기

108

노원구

불암산 학도암, 중계본동 느티나무

2019, 5

☞ 블로그글 보기

109

강북구

수유동 분청사기가마터, 신익희묘, 김병로묘,
유림묘, 북한산둘레길 순례길

2019, 5

☞ 블로그글 보기

110

도봉구

무수골, 무수골느티나무, 전주이씨영해군파묘역

2019, 7

☞ 블로그글 보기

111

서대문구

봉원사(서울연꽃문화축제)

2019, 8

☞ 블로그글 보기

112

노원구

수락산 노원골, 수락산보루, 동막골, 도선사

2019, 8

☞ 블로그글 보기

113

종로구

북촌문화센터, 김형태가옥, 이준구가옥,
북촌 가회동 일대

2019, 9

☞ 블로그글 보기

114

도봉구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능원사, 도봉사, 윗무수골

2019, 10

☞ 블로그글 보기

115

종로구

월암근린공원(한양도성), 홍난파가옥, 딜쿠샤,
행촌동 은행나무, 황학정

2019, 10

☞ 블로그글 보기

116

관악구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 관악산 사당능선,
선유천국기봉, 관음사국기봉, 관음사

2019, 11

☞ 블로그글 보기

117

종로구

청운문학도서관, 청운공원, 인왕산자락길
(이빨바위, 가온다리, 산들수목원약수터)
수성동계곡

2019, 11

☞ 블로그글 보기

118

금천구

호압사, 호암산, 석구상, 호암산성터,
한우물, 불영암, 칼바위

2019, 12

☞ 블로그글 보기

 

경기도, 인천 - 43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글 링크

1

부천

야인시대촬영장, 루미나리에축제 2003, 10

☞ 블로그글 보기

2 고양 북한산성(대서문, 중흥사터, 북한산행궁터) 2007, 1

☞ 블로그글 보기

3 고양 북한산성(태고사, 산영루터, 북한산성계곡) 2007, 1

☞ 블로그글 보기

4 성남 망경암, 봉국사 (사월초파일) 2007, 6

☞ 블로그글 보기

5

오산
수원

오산 물향기수목원 / 수원 팔달문

2007, 12

☞ 블로그글 보기

6 남양주

수락산 흥국사

2008, 3 ☞ 블로그글 보기
7 남양주

덕릉마을 산신각, 덕흥대원군 묘역

2008, 5 ☞ 블로그글 보기

8

파주 용미리 마애2불입상, 용암사 2008, 10 ☞ 블로그글 보기
9

안양

안양사, 석수동마애종, 석수동석실고분 2009, 3 ☞ 블로그글 보기
10

안성

서운산 석남사 (사월초파일)

2009, 5 ☞ 블로그글 보기
11

하남

춘궁동동사지(동사지3/5층석탑), 광주향교

2010, 2 ☞ 블로그글 보기
12

안양

삼성산 염불암, 중초사지당간지주, 안양예술공원

2010, 12 ☞ 블로그글 보기
13

양평

용문산 사나사, 사나사계곡

2011, 5 ☞ 블로그글 보기
14

강화

강화도 선원사 (연꽃축제)

2011, 8 ☞ 블로그글 보기
15

고양

북한산성 중성문, 노적사, 중흥사터, 봉성암,
산영루터

2011, 8 ☞ 블로그글 보기
16

포천

반월성, 청성공원, 포천향교

2011, 10 ☞ 블로그글 보기
17

하남

선법사(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

2011, 11 ☞ 블로그글 보기
18

고양

한미산(노고산) 흥국사

2011, 12 ☞ 블로그글 보기
19

고양

중남미문화원, 벽제관터

2012, 5 ☞ 블로그글 보기
20

강화

장정리 석조여래입상, 장정리5층석탑, 고려궁터,
김상용 순절비

2012, 8 ☞ 블로그글 보기
21

이천

관고리 석불입상, 설봉공원(설봉저수지),
설봉서원, 설봉산 영월암

2012, 10 ☞ 블로그글 보기
22

양평

용문산 용문사, 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

2012, 11 ☞ 블로그글 보기
23

파주

고령산 보광사

2013, 2 ☞ 블로그글 보기
24

화성

제암리 3.1운동순국유적 2014, 3 ☞ 블로그글 보기
25

파주

용미리 마애2불입상, 용암사 2014, 12 ☞ 블로그글 보기
26

의정부

도봉산 회룡사, 석굴암, 회룡골 2015, 7 ☞ 블로그글 보기
27

고양,
서울
종로구

북한산 북한산성계곡, 태고사, 행궁터,
금위영이건기비, 금위영유영지, 경리청상창터,
대남문, 문수사

2015, 12 ☞ 블로그글 보기
28

의왕

청계산 청계사

2016, 2 ☞ 블로그글 보기
29

강화

외포리, 석모도 보문사

2016, 7 ☞ 블로그글 보기
30

포천

백운산 백운계곡, 흥룡사

2016, 7 ☞ 블로그글 보기
31

양주
서울

우이령길(교현리~우이동), 우이동유원지

2016, 11 ☞ 블로그글 보기

32

인천

소래철교, 소래포구(소래어시장), 장도포대지
(댕구산), 논현포대

2017, 2 ☞ 블로그글 보기

33

수원

서호(서호공원), 항미정 2017, 6 ☞ 블로그글 보기

34

광명

광명동굴, 가학산 2017, 7 ☞ 블로그글 보기

35

양주

오봉산 석굴암, 우이령길 2017, 11 ☞ 블로그글 보기

36

안양

안양예술공원, 안양사지, 김중업건축박물관,
석수동 마애종, 안양사

2018, 1 ☞ 블로그글 보기

37

강화

월곶돈대, 연미정, 강화평화전망대

2018, 6 ☞ 블로그글 보기

38

과천

관악산 문원계곡, 문원폭포, 문원하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보광사

2018, 7 ☞ 블로그글 보기

39

군포

수리산(철쭉동산, 수리산 산림욕장, 수리산
둘레길), 수리사, 반월호수

2018, 9 ☞ 블로그글 보기

40

인천

양주성금속비, 용궁사, 영종도 백운산

2018, 12 ☞ 블로그글 보기

41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 (구석기 겨울여행축제)

2019, 1 ☞ 블로그글 보기

42

강화

교동도 (교동읍성, 교동향교, 화개사, 화개산)

2019, 6 ☞ 블로그글 보기

43

화성

봉림사, 구봉산 당성

2019, 10 ☞ 블로그글 보기

 

강원도 - 23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링크

1

양양

낙산사, 홍련암, 오색약수, 성국사, 설악산 주전골 2004, 3

☞ 블로그글 보기

2 강릉 객사문, 오죽헌, 경포대, 굴산사터, 신복사터 2004, 6

☞ 블로그글 보기

3 평창 대관령 양떼목장 2006, 8

☞ 블로그글 보기

4

강릉
동해

경포대해수욕장, 등명낙가사, 묵호항 2006, 8

☞ 블로그글 보기

5 동해 감추사, 감추해변 2007, 2

☞ 블로그글 보기

6 태백 구문소 2007, 2

☞ 블로그글 보기

7

양구

양구 선사박물관 2010, 1

☞ 블로그글 보기

8

화천

토고미마을(산천어축제), 딴산 2011, 1 ☞ 블로그글 보기
9

화천,양구
춘천

화천 평화의댐, 세계평화의종공원,
춘천 윗샘밭

2011, 2 ☞ 블로그글 보기
10

평창

남산공원, 송학루, 노산성

2011, 12 ☞ 블로그글 보기
11

삼척

미인폭포(통리협곡), 여래사

2012, 6 ☞ 블로그글 보기
12

정선

정선5일장, 봉양리뽕나무, 아우라지

2012, 7 ☞ 블로그글 보기
13

영월

보덕사, 금몽암, 낙화암, 금강정, 금강공원

2013, 11 ☞ 블로그글 보기
14

태백

태백산 (당골, 석탄박물관, 석장승, 눈꽃축제장,
단군성전)

2014, 2 ☞ 블로그글 보기
15

동해

추암(추암해수욕장, 촛대바위), 해암정,
추암조각공원, 북평5일장

2014, 7 ☞ 블로그글 보기
16

화천

화천 산천어축제(화천읍내, 북한강) 2015, 1 ☞ 블로그글 보기
17

정선,태백

함백산, 만항재 2015, 9 ☞ 블로그글 보기
18

정선

아라리촌, 아우라지 2015, 12 ☞ 블로그글 보기
19

양구

팔랑폭포, 팔랑계곡 2016, 6 ☞ 블로그글 보기
20

삼척

미인폭포(통리협곡), 여래사

2016, 7 ☞ 블로그글 보기
21

홍천

삼봉약수, 삼봉자연휴양림, 운두령

2017, 6 ☞ 블로그글 보기
22

춘천

사명산 추곡약수, 천전리 고인돌

2018, 2 ☞ 블로그글 보기
23

원주

치악산 구룡사, 구룡사계곡, 학곡리 황장금표

2019, 3 ☞ 블로그글 보기

 

충청북도 - 1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링크
1

보은
대전

보은 삼년산성
대전 동춘당 / 송애당 / 법동 석장승

2003, 12

☞ 블로그글 보기

2 영동 영동향토민속자료전시관, 가학루, 황간향교 2008, 12

☞ 블로그글 보기

3 충주

단호사, 사문리당산나무숲, 미륵리사터,
하늘재, 충주호

2009, 10

☞ 블로그글 보기

4 단양

사인암, 청련암, 중선암, 북상리 시골

2011, 11

☞ 블로그글 보기

5 괴산

각연사 (각연사계곡)

2012, 1

☞ 블로그글 보기

6 괴산

원풍리 마애2불병좌상, 홍범식고가, 개심사

2012, 3

☞ 블로그글 보기

7

옥천

정지용 생가(정지용문학관), 육영수생가,
죽향리초교 구교사, 죽향리사지3층석탑, 옥천성당

2016, 6

☞ 블로그글 보기

8

청주

낙가산 보살사, 명암약수터, 명암저수지

2017, 3

☞ 블로그글 보기

9

단양

북상리 시골, 사인암, 청련암

2017, 8

☞ 블로그글 보기

10

단양

구인사 (구봉팔문)

2018, 3

☞ 블로그글 보기

11

괴산

산막이옛길 (괴산호, 등잔봉)

2019, 7

☞ 블로그글 보기

 

대전, 충청남도, 세종 - 16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링크
1 천안 태화산 광덕사 2009, 7

☞ 블로그글 보기

2

당진
태안

행담도, 꽃지해수욕장, 방포항, 안면도자연휴양림,
안면암

2009, 8

☞ 블로그글 보기

3 대전

식장산 고산사

2009. 11 ☞ 블로그글 보기
4 공주

계룡산 동학사

2012. 3 ☞ 블로그글 보기
5 공주

계룡산 남매탑, 삼불봉, 천진보탑, 용문폭포

2012. 3 ☞ 블로그글 보기
6 공주

계룡산 갑사

2013. 2 ☞ 블로그글 보기
7 태안

신진도(안흥외항), 마도, 안흥항, 안흥성(태국사)

2013, 8 ☞ 블로그글 보기
8 홍성

용봉산 (신경리 마애여래입상, 용봉산자연휴양림)

2014, 6 ☞ 블로그글 보기

9

당진
아산

장고항, 삽교호관광지, 외암리민속마을

2015, 11 ☞ 블로그글 보기

10

예산

금오산 향천사

2016, 1 ☞ 블로그글 보기

11

대전

계족산(계족산성, 계족산 황톳길), 장동산림욕장

2016, 10 ☞ 블로그글 보기

12

보령

성주사지, 성주천 가로수길

2017, 2 ☞ 블로그글 보기

13

서산

해미읍성, 해미순교성지

2017, 12 ☞ 블로그글 보기

14

대전

장태산자연휴양림, 형제산

2018, 7 ☞ 블로그글 보기

15

천안

태조산 각원사, 성불사 2019, 1 ☞ 블로그글 보기

16

세종

비암사, 도깨비도로 2019, 3 ☞ 블로그글 보기

 

전라북도 - 15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링크

1

부안 상록해수욕장, 내소사, 곰소항 2003, 9

☞ 블로그글 보기

2 장수 의암사(논개사당) 2008, 11

☞ 블로그글 보기

3

무주
장수

한풍루, 무주향교
의암송, 장수향교

2009, 3

☞ 블로그글 보기

4 전주 전주한옥마을, 오목대(이목대), 한벽당 2012, 1

☞ 블로그글 보기

5 군산

동국사, 은적사, 발산초등학교

2012, 12

☞ 블로그글 보기

6 군산

응항, 선유도, 고군산군도 일주

2014, 7

☞ 블로그글 보기

7 순창

강천산(강천산계곡, 구장군폭포), 강천사, 삼인대

2015, 8

☞ 블로그글 보기

8 임실

오수 의견비, 오수망루, 오수리석불, 해월암

2015, 10

☞ 블로그글 보기

9

김제 망해사, 새만금바람길, 심포항 2016, 3

☞ 블로그글 보기

10

부안 변산 내소사 2016, 9

☞ 블로그글 보기

11

무주 적상산(적상호, 적상산성, 적상산사고), 안국사 2016, 12

☞ 블로그글 보기

12

무주

무주머루와인동굴, 덕유산무주리조트(곤도라),
덕유산 설천봉

2017, 1

☞ 블로그글 보기

13

김제 모악산 귀신사 2017, 11

☞ 블로그글 보기

14

완주 종남산 송광사 2018, 4

☞ 블로그글 보기

15

완주 모악산 대원사, 수왕사 2019, 12

☞ 블로그글 보기

 

광주, 전라남도 - 14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링크

1

장성
담양
나주

장성 방울샘,
담양 관방제림 / 담양읍 5층석탑 / 석당간
나주 남고문 / 정수루

2004, 1

☞ 블로그글 보기

2 영광 내산서원 2007, 4

☞ 블로그글 보기

3

나주
광주

정수루, 금성관
광주 풍영정

2007, 4

☞ 블로그글 보기

4

순천 금전산 금둔사 2009, 11 ☞ 블로그글 보기

5

순천 개운산 동화사 2010, 1 ☞ 블로그글 보기

6

순천 조계산 천자암 2010, 2 ☞ 블로그글 보기

7

장성 백암산 백양사 2011, 9 ☞ 블로그글 보기

8

광주 무등산 원효사 2011, 10 ☞ 블로그글 보기

9

구례 지리산 천은사(천은제) 2012, 4 ☞ 블로그글 보기

10

곡성 동리산 태안사(태안사계곡) 2013, 5 ☞ 블로그글 보기

11

광양 백계산 옥룡사터 (동백나무숲, 운암사) 2015, 4 ☞ 블로그글 보기

12

목포

노적봉, 유달산(목포시사), 달성사,
국립해양유물전시관, 갓바위

2017, 9 ☞ 블로그글 보기

13

나주

덕룡산 불회사, 불회사 석장승

2018, 12 ☞ 블로그글 보기

14

영광

불갑산 불갑사(꽃무릇군락지)

2019, 9 ☞ 블로그글 보기

 

대구, 경상북도 - 23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링크

1

경주

반월성, 석빙고, 남산 서쪽(용장사터, 천룡사터)

2003, 5

☞ 블로그글 보기

2

문경 문경새재(여궁폭포, 혜국사, 주흘산, 주흘관) 2006, 12

☞ 블로그글 보기

3

달성 비슬산(유가사 / 암괴류), 현풍석빙고 2007, 10

☞ 블로그글 보기

4

구미 의구총, 낙산리고분군, 낙산리3층석탑 2009, 2

☞ 블로그글 보기

5

예천
상주

개심사지5층석탑
용화사(증촌리석불좌상/입상), 전고령가야왕릉

2009, 4

☞ 블로그글 보기

6

경주

남산 불곡 석불좌상, 신문왕릉 2009, 7 ☞ 블로그글 보기
7 경주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불무사)

2009, 9 ☞ 블로그글 보기
8

영덕
울진

고래불해수욕장, 후포항, 월송정, 월송해변 2011, 6 ☞ 블로그글 보기
9

달성

다람재, 도동서원, 이노정 2012, 12 ☞ 블로그글 보기
10

청도

남산 낙대폭포 2013, 7 ☞ 블로그글 보기
11

달성

비슬산 용연사 2014, 2 ☞ 블로그글 보기
12

예천

회룡포, 비룡산 2014, 7 ☞ 블로그글 보기
13

경산

팔공산 갓바위, 선본사 2014, 11 ☞ 블로그글 보기
14

경주

효소왕릉, 성덕왕릉, 성덕왕릉귀부 2014, 12 ☞ 블로그글 보기
15

경주

남산 보리사(미륵곡 석조여래좌상) 2015, 10 ☞ 블로그글 보기
16

안동

도산서원 2016, 1 ☞ 블로그글 보기
17

대구

팔공산 파계사, 대비암, 성전암 2016, 4 ☞ 블로그글 보기
18

경주

효현동3층석탑, 법흥왕릉, 율동 마애여래3존입상 2016, 11 ☞ 블로그글 보기
19

의성

문소루, 구봉산, 금성산고분군, 문익점면작기념비 2016, 12 ☞ 블로그글 보기
20

예천

개심사지5층석탑, 동본리석조여래입상과
3층석탑, 초간정(초간정 원림)

2018, 3 ☞ 블로그글 보기
21

상주

장각폭포, 오송폭포(성불사), 옥양폭포

2018, 6 ☞ 블로그글 보기
22

영주
봉화

휴천동 지석 및 입석
오전약수, 삼계서원, 석천계곡, 석천정사

2019, 6 ☞ 블로그글 보기
23

경주

감산사, 연지암, 숭복사(숭복사터)

2019, 8 ☞ 블로그글 보기

 

부산 - 17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링크
1

수영구
강서구

광안리해수욕장, 가덕도(외양포, 대항, 세바지)

2008, 4

☞ 블로그글 보기

2

강서구
서구

망상도/유주암, 송도해변, 송도해수욕장

2008, 9 ☞ 블로그글 보기
3

기장군

불광산 (장안사. 장안사계곡) 2009, 1 ☞ 블로그글 보기
4

기장군

불광산 (척판암, 백련암) 2009, 1 ☞ 블로그글 보기

5

서구
북구

내원정사, 만덕사(만덕사 당간지주), 알터유적 2009, 9 ☞ 블로그글 보기

6

금정구

금정산(금정산성, 국청사) 2011, 1 ☞ 블로그글 보기

7

금정구

금정산 미륵사, 금성동 2011, 1 ☞ 블로그글 보기

8

강서구

가덕도(가덕도등대, 외양포, 대항, 새바지) 2012, 7 ☞ 블로그글 보기

9

사상구
강서구

백양산 운수사, 백양산 숲길,
범방동3층석탑, 부산경남경마공원

2012, 12 ☞ 블로그글 보기

10

사하구

몰운대, 다대포

2013, 7 ☞ 블로그글 보기

11

남구

백운포, 오륙도 (오륙도등대, 등대섬) 2014, 1 ☞ 블로그글 보기

12

사하구
서구

승학산, 구덕문화공원 2014, 11 ☞ 블로그글 보기

13

금정구

금정산(고당봉, 금샘), 원효암, 금정산성 2015, 4 ☞ 블로그글 보기

14

해운대구

해운대 동백섬, 해운대해수욕장, 미포,
달맞이길, 문텐로드, 청사포, 구덕포, 송정해수욕장

2015, 7 ☞ 블로그글 보기

15

연제구

배산, 배산성터

2016, 9 ☞ 블로그글 보기

16

기장군

죽성리해송, 죽성리왜성, 황학대, 두호포구,
기장성당, 월전포구

2017, 4 ☞ 블로그글 보기

17

기장군

월전~대변 해안가, 대변항, 죽도, 연하리 해변,
오랑대, 해동용궁사

2017, 7 ☞ 블로그글 보기

 

울산, 경상남도 - 2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링크

1

울산
부산

처용암
옥련선원 / 정묘사(배롱나무)

2003, 9

☞ 블로그글 보기

2 창원 무학산(관해정), 가포해변 2006, 11

☞ 블로그글 보기

3

김해

김해 수로왕릉

2006, 11

☞ 블로그글 보기

4

진주
사천

진주 금선암
사천읍성(산성공원), 대방진굴항

2008, 1 ☞ 블로그글 보기
5

함안
창원

함안박물관, 말산리/도항리고분군
진해 우체국

2008, 1 ☞ 블로그글 보기
6

창원

불모산 성흥사, 대장동계곡

2008, 9 ☞ 블로그글 보기
7

밀양

밀양 표충비, 무안리 향나무(홍제사) 2009, 1 ☞ 블로그글 보기
8

양산

천성산 홍룡사(홍룡폭포), 원효암 2009, 6 ☞ 블로그글 보기

9

울산 일산해수욕장, 대왕암공원 2009, 7 ☞ 블로그글 보기

10

창녕

창녕석빙고, 송현동석불좌상, 송현동고분군,
진흥왕척경비, 만옥정공원, 남지철교

2010, 5 ☞ 블로그글 보기

11

거창

수승대(귀연서원, 요수정)

2011, 7 ☞ 블로그글 보기

12

울주
밀양

서생 나사리해변,
밀양 얼음골(천황사)

2011, 7 ☞ 블로그글 보기

13

함양

상림공원, 한남군묘역

2012, 7 ☞ 블로그글 보기

14

산청

목면시배유지, 배산서원, 덕천서원, 남명조식유적

2012, 9 ☞ 블로그글 보기

15

남해

호구산 용문사, 남해자생식물단지, 미국마을,
용소리/금평해변

2012, 11 ☞ 블로그글 보기

16

통영

통영 달아공원

2013, 3 ☞ 블로그글 보기

17

울주

가지산 석남사 (석남사계곡)

2013, 9 ☞ 블로그글 보기

18

고성

연화산 옥천사, 공룡발자국화석

2013, 11 ☞ 블로그글 보기

19

창원

불모산 성주사 (성주사계곡)

2014, 10 ☞ 블로그글 보기

20

울주

서생포왜성

2016, 6 ☞ 블로그글 보기

21

산청

덕양전, 전 구형왕릉, 왕산(유의태약수터,
왕산사지)

2018, 10 ☞ 블로그글 보기

 

제주도 - 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링크

1

제주

외도 월대, 수산봉, 수산리곰솔, 납읍리
납읍 금산공원(납읍리 난대림)

2019, 3 ☞ 블로그글 보기


 

기타 지역 - 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링크

1

왜열도

동경 지역(긴자, 록뽕키, 우에노, 도쿄도청타워,
아사쿠사<관음사>, 신주쿠, 코쿄, 디즈니랜드)

2002, 6

☞ 블로그글 보


1. 천하에 공개된 글 중에서 하자가 없는 글만 선정해서 지역별로 모았습니다.
2. 2003년 4월 이전 글은 모두 제외했습니다.
3. 답사기 내용과 사진을 전체 혹은 일부라도 퍼갈 경우, 반드시 출처와 원작자(박융) 이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4. 사진이 일부 뜨지 않는 글들이 약간 있습니다. 이 점 널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5. 공개된 글 중, 추후 업데이트 판이 나올 경우, 이전 판은 모음집에서 삭제 될 수 있으며 2개 이상의 시리즈로
   작성된 글 중 추후 본인 필요에 따라 1개나 2개로 통폐합 정리될 수 있습니다.
6. 지역 별로 분류했으나 지역이 2개 이상 겹치는 글은 먼저 간 곳을 기준으로 했습니다.
7. 최종 업데이트 2019년 12월 30일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