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16건

  1. 2016.06.29 한반도 배꼽 속에 숨겨진 순박한 폭포, 양구 팔랑폭포 (팔랑계곡)
  2. 2015.12.12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강원도의 지붕, 정선 나들이 (아라리촌, 정선5일장, 아우라지)
  3. 2015.10.03 하늘과 맞닿은 강원도의 남쪽 지붕 ~ 정선 함백산, 만항재 (야생화탐방로)
  4. 2015.01.28 겨울 축제의 성지, 화천 산천어축제 나들이
  5. 2014.02.12 눈꽃의 향연 속으로 ~ 태백산 눈꽃 나들이 (당골, 눈꽃축제장, 석탄박물관)
  6. 2013.11.27 단종애사가 깃들여진 강원도의 청정한 지붕, 영월 나들이 (금몽암, 낙화암, 동강...)

한반도 배꼽 속에 숨겨진 순박한 폭포, 양구 팔랑폭포 (팔랑계곡)

 


' 한반도의 한복판, 강원도 양구 나들이
팔랑폭포 (팔랑계곡) '
팔랑폭포
▲  팔랑폭포 팔랑소

 

 

 


 

겨울 제국(帝國)의 한복판인 12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강원도의 첩첩한 산골이자 한반
도의 배꼽을 자처하는 양구(楊口) 고을을 찾았다.

간만에 인연을 지은 양구에 이르러 제일 먼저 읍내 북쪽에 자리한 양구선사박물관과 파
로호 습지를 둘러보았다. 그런 다음 다시 읍내로 나와 어디로 갈까 궁리를 하다가 동면
에 있는 팔랑폭포가 격하게 땡겨 그곳으로 길을 잡았다.
양구시외터미널 군내버스 정류장에서 차 시간을 점검하니 고맙게도 10분 뒤에 팔랑리로
가는 버스가 있고, 더 고마운 것은 그 버스가 팔랑폭포 앞까지 들어가는 차였다. (폭포
앞 경유 팔랑1리 목장까지는 1일 4회 운행)

드디어 팔랑리로 가는 군내버스가 정류장에 들어와 활짝 입을 연다. 그곳까지 버스비가
생각 외로 높았지만 나에게 꿩 대신 닭을 고를 권한은 없는지라 그 돈을 내고 승차했다.
게다가 폭포 앞까지 들어가주는 버스라 나에게는 좋은 셈, 다만 그 거리만큼 구간 요금
이 다소 증가했다.

버스는 10명의 사람을 싣고 읍내에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구불구불 국도를 따라 동
면 지역으로 넘어갔다. 그날은 오전부터 약하게 비가 내렸는데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더
니만 충분히 쉬었는지 다시 비를 대지에 떨구며 양구의 산하를 촉촉히 어루만진다.
근심 어린 눈으로 차창 밖을 지켜보는 동안 버스는 남면(南面)을 지나 후곡약수터 입구
를 거쳐 30분 만에 동면 중심지인 임당리에 이른다. 여기서 여러 군부대를 지나 팔랑리
종점에서 해안분지(해안펀치볼)로 가는 길(453번 지방도)을 버리고 동남쪽 산골로 방향
을 틀어 3분 정도 올라가더니 뚝 멈춰선다. 여기가 바로 팔랑폭포 앞이었다.

운전사는 왜 하필이면 비오는 날에 왔냐며 한마디 건넨다. 그래서 적당한 답을 주니 폭
포는 높이가 낮고 볼품이 없다며 잘못 왔다고 그런다. 허나 그것은 내가 판단할 일이라
답은 안하고 대신 나가는 차 시간을 물어보니 약 20분 뒤(14:20분)에 있고 그 다음은 3
시간 뒤(17:40)에 있다고 한다. 허나 팔랑리(곰취 정류장)로 나오면 40분 간격으로 차
가 있으니 나와서 탈 것을 권했다.
고마움을 표하며 차에서 내리려고 하니 운전사가 비맞고 댕기지 말라며 자신이 쓰던 우
산을 흔쾌히 건네주었다. 아직까지 서려있는 시골의 넉넉한 인심에 무한 감동을 먹으며
운전사에게 깊이 감사를 표했다.

차에서 내리니 바로 팔랑정(八郞亭)이란 4각형 정자와 기품이 보이는 소나무가 나를 반
긴다. 여기서 조금만 가면 되겠구나 싶어 발을 떼기가 무섭게 우렁찬 물소리가 나의 귀
를 때려댄다. '아니 벌써 폭포인가? 이러면 재미없는데' 싶어서 소나무 아래 쪽을 살펴
보니 그 안쪽 계곡에 팔랑폭포가 숨어서 울고 있었다.


 

♠  오래된 소나무와 암벽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 경승지
~ 팔랑폭포(八郞瀑布)

팔랑폭포가 있는 팔랑리는 임당리와 더불어 동면의 중심격 마을이다. 조선시대에 함경도에 살
던 이학장()이란 도사()가 남쪽으로 내려와 팔랑리에 터를 일구고 살았는데, 그에게
는 유방이 무려 넷이나 달린 아내가 있었다. 그들은 4명의 쌍둥이를 낳았고, 몇 년 뒤 다시 네
쌍둥이를 낳았다고 하며, 이들 여덟 쌍둥이는 휼륭하게 성장하여 벼슬까지 했다. 그런 연유로
팔랑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팔랑의 랑(郞)은 사내를 뜻함)

팔랑1리 구석진 곳에 둥지를 툰 팔랑폭포는 폭포치고는 높이가 별로 높지는 않다. 허나 수량이
풍부하고 암벽 사이로 옥계수를 장쾌하게 쏟아내는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시원스레 해준다.
폭포 아래로 옥계수가 모이고 모여 이루어진 팔랑소(八郞沼)는 신선(神仙) 형님과 선녀 누님이
놀다간 곳이라 전하며 그에 걸맞게 청정함을 유감없이 뽐낸다. 사방은 암벽으로 둘러싸여 신비
로운 분위기까지 더한다.
그런 폭포와 팔랑소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선 소나무는 무려 300년의 세월을 먹은 오래된 나무
로 높이 18m, 밑동 둘레가 3.2m에 이른다. 이곳을 찾은 시인묵객들이 걸음을 멈춰 나무에 고된
몸을 기대며 시를 지었다고 전하며, 마을 사람들은 그를 신목(神木)이나 당산나무, 당산 할머
니라 부르며 마을의 수호신으로 애지중지하고 있다.

폭포를 빚어낸 계곡은 팔랑계곡이라 불리며, 양구 곰취축제의 현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2015
년부터는 양구읍내 레포츠공원에서 축제를 벌이고 있어 다소 한가해졌다.
양구 지역의 대표적인 명소로 한적한 산주름 속에 은둔해 있어 여름에는 피서객으로 홍수를 이
루며, 잠시 속세를 등지며 폭포를 벗삼아 지내고 싶은 곳이다.


▲  좌우로 볼록한 팔랑정(八郞亭)
정자라기보다는 조촐한 동네 사랑방 같다. 추녀에는 특이하게 풍경이 달려있어
은은한 풍경소리를 자아낸다.

▲  폭포를 바라보며 서 있는 수려한 소나무
팔랑폭포의 영원한 동반자로 300년의 장대한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한 그루의
의연하고 아름다운 소나무로 자라났다.

  폭포 쪽에서 바라본 소나무
신령이 깃들여진 듯, 그 자태가 예사롭지
 않다.

  윗쪽에서 바라본 팔랑폭포와 팔랑소
겨울 제국이 폭포를 시샘하여 씌워놓은
얼음이 일부 남아있다.


▲  겨울비의 희롱을 받으며 장쾌하게 쏟아지는 팔랑폭포
폭포로의 접근은 안전상 통제되어 있다. 물론 요령껏 들어가면 되겠지만 겨울에는
다소 위험하므로 안전한 곳에서 폭포를 감상하기 바란다. 괜히 내려가봐야
폭포를 괴롭히고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것 밖에는 되지 않는다.

▲  소나무 부근에서 바라본 팔랑소
성하(盛夏)에 한복판에 왔더라면 그대로 풍덩했을지도 모른다. 소(沼)가 다소
움푹한 곳에 들어있어 폭포 위에 있는 다리나 아래쪽 다리에서는 완전히
보이지 않으며, 소나무가 있는 곳에서만 온전하게 바라보인다.

▲  폭포 윗쪽에서 바라본 팔랑소
이곳은 혹 하늘로의 승천을 꿈꾸던 용이 열심히 몸을 풀던 곳은 아닐까?

▲  겨울에 잠긴 폭포 위쪽 계곡
얼어 붙은 채 한없이 잠들어 있던 저 계곡도 소쩍새가 울때 쯤이면
기지개를 켤 것이다.

▲  폭포 아래쪽 계곡
봄을 숨죽여 잉태하며 제국의 시련을 견디고 있는 앙상한 나무들이
계곡을 거울 삼아 초췌해진 그들의 매무새를 바라본다.

▲  저 암벽 안쪽에 팔랑폭포가 숨어 있다.

▲  황량함과 적막함만이 감싸고 도는 팔랑계곡 산책로

▲  겨울 휴식에 잠긴 팔랑1리의 산야(山野)
그들이 혹 달콤한 잠에서 깰까봐 발자국 소리를 최대한 죽여가며 속세로 나온다.
아직 15시 밖에 안된 시간이지만 흐린 날씨로 인해 마치 해질녘 모습 같다.


※ 팔랑폭포 찾아가기 (2016년 6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양구행 직행버스가 2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춘천과 홍천에서 양구행 직행버스가 3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양구터미널을 나와서 길 건너 오른쪽에 군내버스 정류장이 있다. 거기서 팔랑리 방면 군내버
  스가 40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그중에서 폭포를 경유하여 목장(팔랑1리)까지 가는 버스가 1
  일 4회 있다. (양구 기점 출발 8시50분, 13시30분, 16시50분, 19시30분)
* 목장행을 탔을 경우 팔랑폭포에서 내리면 바로 폭포이며, 팔랑리와 해안행 버스를 탔을 경우
  는 곰취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도보 20분
* 승용차편 (폭포 부근에 주차장 있음)
① 서울 → 서울양양고속도로 → 동홍천나들목을 나와서 인제 방면 → 신남교차로에서 신남 방
   면 → 신남3거리에서 좌회전 → 용하3거리에서 우회전 → 가오작리 → 동면 → 팔랑리 →
   팔랑폭포

* 폭포 주변에 민박집과 펜션이 여러 채 있다.
* 소재지 - 강원도 양구군 동면 팔랑1리


 


겨울비가 오는 촉촉한 날의 문을 두드린 팔랑폭포, 안개가 아련하게 폭포와 소나무 주변
을 감싸고 있으니 오늘이 아마도 신선과 선녀의 폭포 방문 날인 모양이다. 맑은 날과 휴
일에는 인간들로 가득해 오기가 그러니 비가 오고 한가로운 평일을 골라 이곳을 살짝 다
녀가는 모양이다. 나도 그들 틈에 끼어 놀고 싶은 마음 가득하지만 인간이 어찌 눈에 보
이지도 않는 그들과 놀 수 있겠는가?
겨울 제국에 무한으로 잠긴 채, 내년에 다가올 봄을 잉태한 폭포와 계곡, 팔랑리의 풍경
을 뒤로하며, 다시 속세로 나온다. 시간과 여건이 된다면 부근에 있는 팔랑민속관과 독
립지사 동창률(董昌律) 선생의 묘역도 가보고 싶었으나 비도 계속 오고 슬슬 저물어 갈
시간이라 쿨하게 발을 돌렸다.

폭포에서 팔랑리 곰취 정류장까지는 1.3km 정도로 걷기에는 그리 무리는 없다. 종점 주
변은 민가와 키 작은 2~3층 건물이 여럿 형성되어 있고 마을 주변에는 군부대가 가득해
이곳이 어쩔 수 없는 전방 임을 느끼게 한다. 어여 이북(以北)을 회복해야 외로운 전방
신세를 면할 수 있을텐데 말이다. 이북도 속히 찾아야 되고 주변 나라에 빼앗긴 그 엄청
난 실지(失地)도 모두 회복하여 우리의 경계를 다시 정해야 되거늘, 이북은 커녕 바다
건너 대마도(對馬島)도 못건지고 있으니 참으로 기약이 없다.

팔랑리에서 군내버스를 타고 다시 양구읍내로 돌아오니 시간은 어느덧 16시, 햇님도 퇴
근 직전이라 더 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없어서 미련 없이 시외터미널에서 춘천행 직행버
스를 타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한반도의 정중앙 양구 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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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강원도의 지붕, 정선 나들이 (아라리촌, 정선5일장, 아우라지)

 


' 강원도 정선 나들이 (아라리촌, 아우라지) '
아라리촌 연자방아
▲  아리리촌에서 만난 정겨운 풍물시(風物詩) 연자방아


밤하늘을 환하게 비추는 보름달처럼 가을이 알차게 익어가던 추석 연휴, 강원도의 지붕인
정선(旌善)을 찾았다.
서울의 동쪽 철도 관문인 청량리역에서 선물보따리를 바리바리 짊어지며 고향으로 떠나는
귀성객에 섞여 강릉(정동진)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에 나를 싣는다. 다행히 좌석이 있어
서 입석으로 가는 것은 면했다.

거의 3시간을 달려 하늘과 지척인 정선 땅에 진입, 정선의 남쪽 관문이자 태백선(太白線)
과 정선선이 갈리는 민둥산역에 두 발을 내린다. 이곳은 예전 증산역(甑山驛)으로 2009년
9월 민둥산으로 이름을 갈았다. 그 이유는 증산마을 북쪽에 억새로 유명한 민둥산(1118m)
이 있어 관광객 유치 차원에서 그리 한 것이다. 허나 역 이름만 바뀌었지 마을 이름은 그
대로 증산이다.
태백선에서 사라진 새마을호 열차도 무조건 정차했던 정선 고을의 큰 마을이자 석탄 산지
였던 증산, 지금은 민둥산을 간판으로 내걸며 인근 태백(太白)과 영월처럼 관광지로 화려
한 도약을 꿈꾼다.

칼처럼 솟은 산 사이에 아늑하게 들어앉은 증산은 하늘과도 불과 3자의 거리 만큼이나 가
까워 아랫 세상과는 공기부터가 확연히 틀리다. 그날은 날씨가 조금 더웠는데 고원지대라
조금은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역전으로 나가니 마침 정선으로 가는 군내버스가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벌리며 대기
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꿩 대신 닭을 고를 권리가 없기에 무조건 그를 잡아탔다.

강원도의 지붕답게 높이 솟은 뫼 사이로 길은 구불구불 흘러간다. 근래에 도로가 많이 정
비되어 길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그 대가로 정선에 아름다운 산하(山河)는 적지않게 상
처를 입어야 했다. 역시 강원도의 길은 제대로 토할 정도로 구불구불한 길이 매력인데 말
이다.

증산을 출발하여 40분 만에 정선군의 서울인 정선읍내에 들어섰다. 읍내에 들어서면서 바
로 정선아라리촌이 길 옆으로 지나간다. 그곳의 존재는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원래는 계
획에 없던 곳이라 지나치려 했으나,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절대로 못지나친다고 결국 정선
역 입구에서 내려서 오던 방향을 거슬러 내려와 아리리촌의 문을 두드렸다.

 


♠  정선 지역의 전통 가옥과 풍습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강원도 스타일의
 민속촌 ~ 정선 아라리촌

▲  대문을 활짝 열어 나그네를 맞이하는 아라리촌 정문

정선읍내 동쪽 조양강(朝陽江) 강변에 터를 닦은 아라리촌은 세월의 저편으로 무심히 사라져가
는 정선의 옛 가옥을 붙잡아 재현한 민속촌이다.
정선군청에서 많은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 만든 아라리촌은 2004년 10월 7일 문을 열었으며, 면
적이 34,720㎡에 이른다. 전통기와집(1동)과 굴피집(3동). 초가(1동), 너와집(1동), 저릅집(1동
), 돌집(1동), 귀틀집(1동) 등 전통가옥 9동과 주막, 농기구 공방(工房) 1동, 육모정, 초정, 서
낭당 등의 건물이 있으며, 디딜방아와 연자방아, 통방아, 장승, 고인돌, 그네 등이 민속촌 곳곳
을 수식한다.
또한 연암 박지원(朴趾源)이 쓴 양반전(兩班傳)을 테마로 하여 양반전의 주요 장면을 재현한 조
형물 10여 개가 곳곳에 배치되 또 다른 볼거리를 선사한다. 양반전은 한문소설로 그 배경이 바
로 정선이다. 중/고등학교 국어/문학 시간에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이 소설은 조선 후기 몰
락하는 양반 계급의 위선과 무능력을 풍자한 것으로 쌀을 갚지 못한 가난한 양반과 양반을 꿈꾸
는 부자, 그리고 그들을 중재하는 정선현감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아라리촌은 이런 볼거리 외에도 민속촌 주막에서 토속 음식인 곤드레밥과 순두부, 메밀 관련 음
식을 사먹을 수 있으며, 가격은 다소 밉지만, 1일 숙박체험도 가능하다. 그리고 민속촌 서쪽으
로 정선의 대지를 촉촉히 어루만지는 조양강과 강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가 놓여 있으며, 강 너
머로 칼처럼 솟은 산 사이에 둥지를 튼 정선읍내가 바라보인다.

양반전 디오라마 등을 빼고는 여타 민속마을과 별 다를 것은 없으나, 강원도 고원지대에 가옥과
생활상을 두루 살필 수 있는 현장으로 정선에 왔다면 꼭 둘러볼만하며, 넉넉잡아 30분 정도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그럼 지금부터 정선의 과거가 담겨진 아라리촌을 둘러보도록 하자.

▲  청동기시대 지배자의 무덤인 고인돌
옛것이 아닌 모형이다.

▲  6각형 모양의 정자 육모정


※ 정선 아라리촌 찾아가기 (2015년 12월 기준)
① 대중교통
* 동서울터미널에서 정선행 직행버스가 1일 9회 떠난다.
* 청량리역에서 매일 8시 20분에 정선, 아우라지행 정선아리랑열차가 운행한다. 원주역과 제천
  역, 영월역, 민둥산역을 경유하며, 일반 여객열차가 아닌 관광열차기 때문에 운임이 좀 비싸
  다. (청량리역에서 정선역까지 어른 26,100원)
* 민둥산역에서 아우라지행 정선아리랑열차가 1일 2회 떠난다. <11:25(청량리발 열차), 15:15>
* 청량리역에서 강릉(정동진)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민둥산역에서 정선행 군내버스(1일 7회)를
  타고 아라리촌(여성회관) 하차
* 원주, 강릉, 제천에서 정선행 직행버스 이용
* 정선시외터미널에서 동면(화암), 증산 방면 군내버스를 타고 아라리촌(여성회관) 하차
* 정선역에서 도보 25분, 또는 택시 이용
② 승용차편 (주차장 있음)
* 영동고속도로 → 진부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정선방면 59번 국도 → 나전3거리에서 우회
  전 → 정선제2교 4거리에서 좌회전 → 봉양5리 교차로에서 증산 방면 우회전 → 아라리촌

★ 아라리촌 관람정보 (2015년 12월 기준)
* 입장료 : 3,000원(정선군 아리랑상품권을 지급함)
* 주차비 공짜
* 관람시간 : 9시 ~ 18시 (17시까지 입장)
* 공예 체험 : 정선 5일장(2,7,12,17,22,27일)과 주말에 도자기공예, 칠보공예, 컨츄리공예 체
  험 이벤트가 열린다. 체험비는 3,000~9,000원 정도 (겨울에는 안함)
* 아리랑학당에서 정선아리랑 소리체험을 받을 수 있다. 4~11월에 운영하며, 체험비는 무료
* 소재지 -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애산리 560 일대 (애산로 37, ☎ 033-560-2059)
* 아라리촌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  옛 정선을 거닐다 ~ 아라리촌 둘러보기

▲  아라리촌 정문을 들어서면 넓은 길이 나온다.
여기서 직진을 하던 오른쪽으로 가던 상관은 없으나 나는 오른쪽길로 들어서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았다.

▲  가장 먼저 만난 양반전 조형물 (양반전 조형물 1)

정선의 어느 가난한 양반이 살았다. 그는 독서를 좋아하고 정직한 성격으로 정선에 부임하는 군
수(郡守)들이 무조건 찾아가 인사를 할 정도로 유명했다. 허나 살림이 어려워 매년 관아의 쌀을
빌려 목구멍에 풀칠을 했는데, 계속 빌리기만 했지 갚지를 못해 그 양이 어느덧 1,000섬을 넘었
다.
그렇게 정선 사또와 관원들이 오랫동안 쉬쉬하고 넘어갔으나,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결국 강원
도 관찰사(觀察使, 도지사)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관찰사는 이에 노발대발하며 정선군수를 닥달
해 양반에게 빌려준 쌀을 받아낼 것을 명령했다.


▲  전통와가 ~ 양반 가옥으로 사랑채와 안채로 이루어져 있다.

▲  이름도 생소한 굴피집

굴피집은 강원도 정선, 양양, 평창에서 많이 나타나는 원시형 산간지방 가옥으로 참나무(상수리
나무) 껍질인 굴피를 지붕에 씌우면 집의 보온이 잘되고 습기를 제대로 차단해 준다. 그래서 겨
울에는 매우 춥고 여름에는 비가 많은 곳에 적당하다.


▲  굴피집에 있는 양반전 조형물 (양반전 조형물 2)

정선현감은 양반에게 당장 쌀을 갚지 않으면 감옥에 넣겠다며 최후 통첩을 하였다. 아무리 조선
의 중심 계층이고 지체높은 양반이라 할지라도 관청에서 빌린 쌀을 한 톨도 갚지 않고 무대책으
로 일관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될 수가 없었다.

통첩을 받은 양반은 땅에 힘없이 주저앉아 어찌할 바를 모른다. 축 쳐진 그를 바라보는 마누라
는 팔짱을 끼며 한심스러운 표정으로 징하게 바가지를 긁는다. '영감~ 이제 어찌하면 좋단 말이
요~!! 무슨 말 좀 해보시오!!'


▲  양반과 부자 상인의 거래 (양반전 조형물 3)

현감의 최후통첩에 제대로 울상이 된 양반에게 희소식이 하나 날라왔다. 바로 옆집에 사는 부자
가 그 환곡을 대신 갚아주겠다는 것이다. 그 부자는 평민으로 평소 양반을 꿈꾸며 살았다. 마침
옆집 양반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되면서 이때다 싶어 자신이 환곡을 처리해줄 터이니 대신 양반의
신분을 자신에게 넘길 것을 제안한 것이다.
그의 제안에 양반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감옥에 끌려가게 될 판에 그까짓 양반 자리가 무슨
소용이랴, 당장 발등에 붙은 불조차 끄기도 벅찬데 말이다. 그래서 부자의 거래를 흔쾌히 받아
들이고 양반의 신분을 그에게 넘겼다.


▲  현감에서 절을 하는 양반 (양반전 조형물 4)

부자와 거래를 성사시킨 후, 양반은 길을 가다가 현감을 만났다. 그런데 그에게 갑자기 넙죽 절
을 하는 것이었다. 양반이나 현감이나 거의 같은 양반계급이기 때문에 아무리 벼슬이 높다고 해
도 절은 하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면 된다.
현감은 화들짝 놀라며 '아니 왜 이러시오. 일어나시오' 그를 일으켜 세우며 절을 한 연유를 물
었다. 이에 양반은 옆집 부자에게 양반의 신분을 팔았다면서 그 사연을 털어놓았다.


▲  아라리촌 북쪽에 자리한 소박한 모습의 초정(草亭)과
읍내 곳곳에서 수습해온 오래되지 않은 비석들

▲  가까이서 바라본 8각형 모양의 초정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초가 정자, 소박하고 단촐한 멋이 돋보인다.
이곳은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 및 길손님의 휴식처 역할을 하였다.

▲  따사로운 가을 햇살을 받으며 단잠에 빠진 그네

▲  아라리촌 둑방길에서 바라본 정선읍내와 조양강
읍내 뒤로 보이는 높고 웅장한 산이 정선읍의 진산(鎭山)인 비봉산(飛鳳山)이다.

▲  강바람이 살랑살랑 귀를 간지럽히는 조양강 산책로

▲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언제나 싱글벙글인 장승 3형제

뻐드렁니와 풀어진 눈을 드러내 보이며 밝은 표정으로 나그네를 맞는 장승, 장승은 마을의 안녕
을 지키고, 이정표의 역할을 하는 존재로 보통 마을 입구에 세우며, 그들 몸통에는 그들의 정체
가 쓰여져 있다.


▲  아라리촌에 살포시 찾아온 가을

▲  주막 옆에 자리한 농기구 공방
▼  공방 내부 (왼쪽은 농기구를 불에 달구어 만들던 곳, 오른쪽은
농기구와 농사와 관련된 도구들이 진열된 공간)


▲  양반이란 실체에 대경실색하는 부자 (양반전 조형물 5)

양반의 신분을 산 부자는 현감에게 이를 인정하는 증인이 되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현감은
그 문서를 만들어 주면서 양반이 지켜야 될 행동과 권리를 설명했다. 행동은 그야말로 겉치례가
상당수였으며, 권리는 그야말로 백성들을 쥐어짜고 착취하는 도둑 수준이었다. 그것을 모두 들
은 부자는 기쁨의 표정은 싹 사라지고 표정이 하얗게 질리면서
'아이고~ 그런 것이 양반이라면 차라리 안하고 말겠소~~!!'
양반을 포기하고 줄행랑을 쳤다. 그
이후 다시는 양반 타령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고 한다.


▲  파전에 동동주 1잔 들이키고 싶은 아라리촌

아라리촌에는 주막이 장사를 하고 있다. (겨울에는 안함) 초가 주막에는 산채정식, 곤드레밥 등
을 팔며, 굴피집 주막에는 순두부와 메밀콩국수, 칼국수 등을 파는데, 가격은 조금은 미운 수준
이다. 이런 곳에 왔으면 바깥에 차려진 마루에 걸터앉아 동동주 1잔에 파전 하나 걸쳐야 기분이
나는데, 그러지를 못하니 아쉬울 따름이다.


▲  이제는 굳어버린 화석처럼 아련히 남은 외겨리
외겨리는 소 1마리로 전답에 쟁기질을 하는 것을 말한다. 반대로 2마리로
하는 것을 '쌍겨리'라고 하며 척박한 산간지대 전답에서 많이 쓰였다.


▲  양반의 특혜에는 상민을 괴롭히는 몹쓸 것도 있다. (양반전 조형물 6)

현감이 말한 양반의 특혜 중에 양반이 상민의 코에 잿물을 들이붓고 머리채를 잡아 댕기며 수염
을 희롱하더라도 상민은 감히 원망하지 못한다는 내용이 있다. 그야말로 비인간적인 행위이다.


▲  이름도 외우기 쉬운 돌집
돌집은 정선 지역에서 많이 지어진 가옥 형태로 안방과 윗방, 사랑방, 도장방 그리고
정지와 외양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돌집은 얇은 판석을 두께 2cm 정도의 돌기와로
지붕을 덮어 올린 집으로, 주로 정선 지역 산지에서 나오는
청석맥을 파내 사용했다.

▲  벌거숭이 모습이 부끄러웠던지 덩굴을 걸친 돌담장

▲  산간지역에서 많이 지어진 귀틀집

귀틀집은 껍질을 벗긴 통나무를 '井' 모양으로 쌓아 벽을 만들고, 나무 틈새는 진흙으로 채웠다.
눈이 많이 와도 견딜 수 있고, 온도 유지가 용이하며, 간편하게 지을 수 있어 나무가 풍부한 산
간지대에서 많이 선호된 가옥이다.


▲  밥 생각을 간절하게 하는 귀틀집 부엌

▲  투박한 모습의 너와집

너와집은 귀틀집과 더불어 산간지대를 주름잡았던 집이다. 200년 이상 된 소나무 토막을 쪼깬
널판으로 지붕을 이었으며, 안방과 건넌방, 사랑방과 대청, 부엌, 봉담, 외양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부는 정선 지역에서 많이 나타나는 '화티'가 있는데, 이는 부뚜막 귀퉁이에 진흙을 쌓아 2개
의 구멍 중 위쪽은 불을 피워 음식을 하거나 내부를 밝히고, 아래쪽은 불씨 보관용으로 쓰였다.


▲  일반 초가와 비슷한 저릅집

저릅집은 정선과 삼척 지역에서 많이 나타나는 초가로 대마의 껍질을 벗기고 줄기를 이엉으로
이은 집이다. 다른 말로 겨를집이라고도 한다.

       ◀  통방아가 담겨진 삼각형 건물
통방아는 '물방아','벼락방아'라고도 한다. 확(
곡식을 넣는 돌통), 공이(찧는 틀), 수대 등으
로 이루어져 있는데. 3~5㎝ 정도의 커다란 통나
무를 이용하여 앞쪽에는 공이를 박고, 뒤쪽에는
물이 담길 수 있도록 구이통을 팠다. 그리고 귀
대를 통해 구이통 속으로 흘러 들어온 물에 의
해 공이가 올라가고 내려가면서 확에 있는 곡식
을 찧게 된다.


▲  물레방아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물레방아는 흔히들 우리 고유의 것으로 알고 있다. 허나 그것은 조
선 후기에 청나라에서 가져온 것으로 앞서 양반전의 저자인 연암 박지원이 청에 사신으로 갔다
가 물레방아의 위력에 반해 그것을 연구하였다.
이후 안의(安義, 경남 함양)현감이 되자 안의 북쪽 용추계곡에서 물레방아를 시범 운영을 하였
으니 그것이 바로 이 땅 최초의 물레방아이며, 용추계곡은 우리나라 물레방아의 탄생지가 되었
다. 그 이후 전국으로 빠르게 보급되어 농업 생산력의 흔쾌한 증진을 가져왔다.


▲  돌탑과 장승
마을 입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승과 돌탑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의 기능과
마을을 알리는 이정표의 역할을 하였다.

▲  서낭당(성황당)

서낭당은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성황신(城隍神)의 보금자리로 시골 마을에는 꼭 1개씩은 있다.
보통은 마을 입구나 이웃 마을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세웠으며 지금도 성황제(城隍祭)를 지내
는 마을이 많다. 당 주위에는 금줄과 돌담을 둘러 잡인의 출입을 금하며, 장승이나 돌탑을 주변
에 세웠다. 마을에서 가장 신성하고 중요한 곳이다 보니 이곳에 대한 정성은 정말 대단했다.


▲  서낭당에 모셔진 성황신도(城隍神圖)

성황신도는 하나지만 각각 다른 모습의 성황신 2인이 담겨져 있다. 그들 머리 뒤로 공통적으로
금색의 동그란 것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광배(光背)의 일종인 두광(頭光)이다. 푸근한 인상이
매력적인 왼쪽 성황신은 하얀 옷을 걸치고 있는데, 오른손에 지팡이, 왼손에 산삼을 거머쥐며
서 있다. 빨간 옷은 입은 오른쪽 성황신도 왼쪽만큼이나 인자함이 깃든 표정으로 있는데, 오른
손에 지팡이를, 왼손으로 귀여움이 묻어난 호랑이를 살짝 어루만지고 있다.
산신과 호랑이 외에 동자와 나무, 산 등이 담겨져 있어 산신도(山神圖)와 비슷하다.

이렇게 하여 양반전과 정선의 옛 모습을 담은 아라리촌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  느긋하게 팔자걸음을 걷는 양반 (양반전 조형물 7)
현감이 부자에게 말한 양반의 겉치례 중에는 팔자걸음으로 느릿느릿 걸어야
되는 내용도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은 정선 5일장이었다. 그래서 읍내로 넘어가 장터의 중심지인 중앙시
장에서 간단하게 메밀전병과 메밀전을 사먹고 여량, 아우라지로 가고자 정선터미널로 이동했다.
정선 땅은 구절양장(九折羊腸)의 험준한 산악지대라 교통이 매우 좋지가 못하다. 강원도 안에서
도 매우 첩첩한 산골이라 평창, 영월과 더불어 산다삼읍(山多三邑)이라 일컬어진다.

정선터미널에서 그나마 많이 있는 강릉행 직행버스(1~2시간 간격)를 타고 정선의 험준한 산하를
넘어 25분 만에 여량면(餘糧面)의 중심지인 여량에 이르렀다. 여량은 말그대로 식량의 여분이
있다는 뜻으로 험한 산골임에도 너른 들과 논이 있어 논농사가 가능했다. 그래서 식량이 남을
정도로 풍족했다고 전한다.

여량정류장에서 북쪽으로 가면 정선선의 실질적인 종점인 아우라지역이 나온다. 정선선의 종점
은 여기서 7.2km를 더 들어가야 되는 구절리(九切里)역이지만, 관광열차는 아우라지에서 바퀴를
접고 더 이상 들어가지 않으며, (무궁화호 열차는 폐선되고 비싼 관광열차가 대신 들어옴) 대신
레일바이크(Railbike)가 그 구간을 쑤시고 다닌다.

아우라지역은 원래 여량역이었으나 2000년에 아우라지로 간판을 갈았다. 이 역은 현재 역무원이
없는 무배치 간이역으로 역건물과 플랫폼, 철로가 전부이다. 역과 철로시설을 보호하는 담장도
없이 사방이 개방된 형태로 자유롭게 역 내부를 거닐 수 있으며, 하루에 2번 외부세계를 이어주
는 정선아리랑열차가 운행된다.

아우라지역을 지나면 두 물줄기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곳, 아우라지가 바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  정선선 아우라지역 ~ 조촐한 간이역의 모습이 너무나 정겹다.


♠  정선아리랑의 발상지이자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정선의 제일가는 명승지, 아우라지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 장마가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몰려든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 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장철 임그리워서 나는 못살겠네
아리랑 아리랑 아리라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정선읍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여량에는 정선아리랑의 발상지로 알려진 아우라지가 있다. 이
곳은 평창군 도암면에서 발원한 송천(松川)과 삼척시 하장면에서 발원한 골지천(骨只川)이 만나
는 곳으로 두 물줄기가 하나로 어우러진다는 뜻에서 아우라지라 불린다. 여기서 하나가 된 물줄
기는 조양강으로 간판을 바꾸고 남한강으로 흘러간다.

구름을 허리에 두르며 칼처럼 솟아난 높은 산과 시리도록 맑은 두 물줄기가 합쳐진 곳이라 경관
이 한 폭의 수묵담채화처럼 아름답기 그지없다. 예전에는 여량에서 강을 건널 때는 나룻배를 타
야 했으며, 섶다리를 따로 만들어 통행하기도 했으나 장마철만 되면 떠내려가기가 바쁘니 자연
히 나룻배의 의존도는 컸다. 강의 수심은 그리 깊지는 않아 두 다리로 건너도 무관하지만 그렇
다고 1년 내내 그렇게 건널 수도 없는 노릇이다.
허나 아우라지가 정선5일장만큼이나 유명해지면서 정선군은 푸른 산과 맑은 강, 강변을 가득 메
운 자갈돌, 푸른 하늘과 구름 밖에 없던 이곳을 열심히 꾸미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요란하게 꾸
민 것은 아니다. 골지천에 여량교(餘糧橋)란 다리를 놓고, 그 너머에 여송정(餘松亭)이란 2층
정자를 지었으며, 거기서 송천 너머까지 소박하게 징검다리를 놓아 조금은 돌아가긴 하지만 이
제는 배에 의지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허나 나룻배는 이곳 아우라지의 상징, 그것을 없애는 것
은 갈비탕에서 갈비를 빼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관광용으로 남겨두어 호기심 가득한 관광
객을 실어나른다. 배삯은 편도 500~1,000원으로 저렴하다. (배삯은 변경될 수 있음)

이곳으로 흘러드는 송천을 양수(陽水), 골지천을 음수(陰水)라 하여 장마 때 양수가 많으면 대
홍수가 예상되고 음수가 많으면 장마가 끊긴다는 옛말이 전해오며, 남한강 1천리 길을 따라 목
재를 운반하던 뗏목 시발점으로 각지에서 모여둔 뗏꾼의 아라리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특히 정
선아리랑의 발상지로 유명한데, 그 애달픈 사연은 다음과 같다.

옛날 여량에 혼인을 약속한 남녀가 있었다. 총각은 뗏사공으로 나무를 팔아 돌아오면 처녀와 혼
인하기로 다짐을 하고 조양강에 배를 띄워 아우라지를 떠났다. 하지만 총각은 1년이 가도 2년이
가도 돌아오지 못했다. 아마도 가는 도중에 드센 여울에서 배가 뒤집혀 목숨을 잃은 듯 싶다.
기다림의 시간은 점점 절망적으로 변했다. 아우라지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처녀는 결국 아우라지
강에 몸을 던져 죽고 만다. 그녀가 그를 기다리며 애절한 마음을 적어 읆은 것이 바로 정선아리
랑의 시초라는 것이다. 이 전설 외에도 장마로 인해 강을 사이에 두고 만나지 못하는 남녀의 한
스러운 마음을 담은 것이 아리랑의 가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구전(口傳)으로 전해오던 아우라지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고자 여송정을 세우고, 그 옆에
처녀상을 1987년에 세웠는데, 지금의 것은 1999년에 새로 만든 것이다. 또한 아우라지비를 세워
이곳이 정선아리랑의 발상지임을 아련히 전한다.
그리고 속세에 거의 알려지진 않았지만 2개의 물줄기가 만나는 아우라지 자갈밭에서 신석기시대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유물은 어디 박물관이나 발굴을 주관한 대학교 수장고에서 잠
을 자고 있겠지만, 유적은 발굴 이후 사라져 지금은 흔적 조차 더듬을 수 없다. 이들 유적과 유
물을 통해 선사시대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살짝 알려준다.


▲  아우라지역에서 동쪽으로 바라보이는 왕재산(997m)

▲  단장의 사연을 담은 아우라지 노래비

▲  아우라지의 명물값을 톡톡히 하는 나룻배
예전에는 뱃사골이 직접 노를 저어서 배를 움직였으나, 지금은 강을 가로지른
굵은줄을 잡으며 배를 움직인다.


강 건너편까지 다리가 놓여져 굳이 돈 주고 느림보 나룻배를 이용할 필요는 없겠지만, 아우라지
의 상징이자 이 세상에서 자꾸만 사라지고 있는 우리의 정겨운 풍물의 하나이다. 시멘트 다리에
떠밀려 나룻배는 점점 그 설 자리를 잃어가고 이제는 손에 꼽을 정도만 간신히 명맥을 유지한다.


▲  평창에서 온 송천이 삼척에서 온 골지천과 하나가 되는 현장 ~ 아우라지

▲  조양강의 북쪽과 남쪽을 끈끈하게 붙들어 맨 여량교

초승달이 아우라지의 물을 뜨려는 달나라 토끼의 조정으로 인간 세상으로 깊히 내려오다가 그만
다리에 걸려 꼼짝달싹 못하는 것 같다.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한폭의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내는
아우라지의 풍경은 정말 집으로 살며시 훔쳐와 혼자서만 두고두고 보고 싶다. 이곳을 지나던 조
각구름도 아우라지의 풍경에 홀딱 반했는지 갈 길을 멈추고 한없이 머물고 있다.

▲  측면에서 본 초승달 모형
마치 날카로운 칼날을 보는 듯 하다.
저기에 손을 댔다가는 피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  아우라지의 명물, 아우라지 처녀상
오늘도 기약없는 님을 기다리는 것일까? 그녀의
모습에 처절함과 비장함이 엿보인다.


▲  아우라지를 굽어보는 여송정
1997년 주민들이 모든 1억원으로 지은 정자로 여량과 송천의 앞글자를 따서
여송정이라 하였다. 정선아리랑 설화에 나오는 총각은 여량에, 처녀는
송천 건너에 살았다고 전한다.

▲  송천을 따라 이어진 여송정 옛길
2010 정선비전 100대 시책사업의 하나로 조성된 길로 옛날부터 이곳
주민들이 이용하던 길이다.

▲  여송정에서 바라본 조양강, 그리고 정선의 산하
저 강물에 이 몸 하나 의지할 조그만 조각배를 띄우고
서울까지 흘러가 보고 싶다. 물론 위험한 짓이지만 ~~

▲  조양강 자갈밭에 조성된 돌탑들
이 주변에서 신석기시대 유적과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물론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아우라지를 정신없이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7시가 넘었다. 아쉽지만 내가 있어야 될 서울로
돌아가야 될 시간이다. 원래는 나전과 진부를 거쳐 서울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아우라지역에 청
량리로 가는 열차가 대기하고 있으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아우라지에서 잠시 머문 열차는 17시 10분 외마디 기적소리로 이곳의 정적을 살짝 깨뜨리며 첩
첩한 산주름에 묻힌 아우라지를 떠난다. 이리하여 강원도의 지붕 정선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
을 걷는다.

※ 정선 아우라지 찾아가기 (2015년 12월 기준)
* 청량리역에서 아우라지행 정선아리랑열차가 매일 8시 20분에 떠난다. (민둥산역 경유)
* 민둥산역에서 아우라지행 정선아리랑열차가 매일 2회 떠난다. (11:25, 15:15)
* 강릉에서 정선행 직행버스(1~2시간 간격)를 타고 여량 하차
* 정선터미널에서 강릉행 직행버스나 여량, 임계 방면 군내버스 이용
* 승용차로 갈 경우 (주차장 있음)
① 영동고속도로 → 진부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정선방면 59번 국도 → 나전3거리에서 임계
   방면으로 좌회전 → 나전 → 아우라지
* 구절리역에서 아우라지역까지 레일바이크를 이용할 수 있다. 거리는 7.2km로 동절기에는 1일
  4회(8:40, 10:30, 13:00, 14:50), 하절기에는 16:40분이 추가되어 1일 5회 다닌다. 이용요금
  은 2인승 25,000원, 4인승은 35,000원이며, 10대 이상 단체 예약시는 10% 할인된다. 레일바이
  크 예약 및 자세한 정보는 ☞ 여기를 클릭한다 (문의 ☎ 033-563-8787)
* 소재지 - 강원도 정선군 여량면 여량리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8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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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5년 12월 4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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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맞닿은 강원도의 남쪽 지붕 ~ 정선 함백산, 만항재 (야생화탐방로)

 


' 강원도의 남쪽 지붕, 함백산(咸白山) 나들이 '

▲  함백산 꼭대기


 


얄미운 여름 제국(帝國)이 한참 기반을 다지던 6월 끝 무렵에 일행들과 강원도 태백, 정선 지
역을 찾았다.
오전에 삼척(三陟) 통리협곡에 숨어있는 미인폭포(美人瀑布)를 둘러보고 태백(太白)으로 넘어
와 돌솥밥정식으로 배불리 점심을 먹으며 시장한 배를 달랜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그날의 마
지막 답사지인 함백산으로 이동했다.

태백에서 고한으로 이어지는 38번 국도를 따라 두문동재터널을 지나는데 이 터널이 생기기 전
에는 한계령(寒溪嶺)이 애교로 보일 정도로 꽤나 험준함을 자랑하던 두문동재(싸리재)를 뱀의
허리에 올라탄 듯 꼬불꼬불 넘어야 했다. 싸리재의 높이는 무려 1268m, 약 20여 년 전 고한에
서 태백으로 가는 완행버스를 타고 넘은 적이 있었지. 그 시절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어느
새 고개 밑에 땅굴이 뚫려 고개의 압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두문동재를 넘어 고한읍을 코앞에 둔 상갈래3거리에서 함백산로로 좌회전하여 잠시 태백선 철
로와 나란히 달린다. 허나 정암터널에서 철로는 사라지고 대신 정선 굴지의 명소로 추앙을 받
는 정암사(淨巖寺)가 잠시 들렸다가라며 손을 내민다. 이곳은 수마노탑(水瑪瑙塔)으로 유명한
절로 거의 10여 년 전, 발자국을 남긴 바가 있다. 그때의 빛바랜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가
무섭게 정암사를 지나쳐 한적한 고갯길을 정신없이 오르니 1100m 고지에 자리한 만항(晩項)마
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만항마을(고한1리)은 만항재 북쪽에 자리한 깊은 산골로 왜정 때 탄광이 개발되면서 1970년대
까지 번영을 누렸던 곳이다. 하지만 석탄의 시대가 저물면서 정선,태백 일대를 검게 주름잡던
탄광(炭鑛) 상당수가 문을 닫았고, 만항마을의 탄광 역시 그 거친 흐름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
라지면서 존재감도 느끼기 힘든 적막한 마을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가 대자연이 내린 소중한 선물을 바탕으로 매년 여름에 함백산 야생화축제롤 속세에 선
보이면서 마을의 부흥을 다시 꿈꾸고 있다.

만항마을을 지나 만항재를 힘겹게 오르던 버스는 함백산 소공원에서 그 장대한 바퀴를 멈춘다.
이곳은 만항재쉼터(약 1300m) 동쪽으로 함백산 등산로 기점의 하나이다. 이미 해발 1300m까지
편하게 올라왔으니 여기서부터 달랑 해발 273m 정도만 오르면 된다. 꼭대기까지는 1시간 20분
정도 걸린다고 하며 등산이 싫은 사람은 이곳에 펼쳐진 야생화를 둘러보라고 그런다. 허나 야
생화는 아직 철이 아닌지라 꽃망울을 터트린 꽃은 별로 없었고, 나는 함백산에 마음을 빼앗긴
상태라 함백산 트래킹에 나섰다.

우리가 오른 만항재는 북한과 만주, 왜열도 등, 실지(失地)를 제외한 이 땅에서 가장 높은 고
개로 4발 수레로 속편히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이기도 하다.
만항재의 높이는 1,330m로 고한과 태백산(太白山) 북쪽을 이어주며, 탄광의 쇠퇴와 주변 도로
의 개선으로 많이 한가해졌으나, 근래 관광/드라이브 수요가 많이 늘어났다. 천상(天上)의 드
라이브 코스로 명성을 누리고 있지만 고개의 굽이가 각박하고 난이도가 높으니 각별히 주의가
요망된다. 단순히 인왕산길/북악산길을 생각하고 오면 큰 오산이다.


▲  만항재 야생화 탐방로 입구
저 숲속에 많은 야생화들이 수줍은 미소를 머금으며 숨어있다. 이 탐방로는
만항재쉼터까지 이어진다.

▲  야생화 옆에 심어진 야생화 탐방로 표석


♠  구름 속의 등산, 함백산 더듬기

▲  함백산 만항재 기점

함백산으로 오르는 등산 기점은 만항재와 적조암입구(만항마을 북쪽), 두문동재, 태백 절골 등
이 있다. 이중에서 가장 쉬운 코스는 만항재로 1시간 20분이면 정상에 이른다. 우리가 가는 코
스가 바로 만항재 코스로 기점에서 윗사진에 나온 창옥봉(1238m)을 넘으면 커다란 산이 앞에 나
타나는데, 그 산이 바로 함백산이다. 산행 시간을 조금이나마 줄이고 싶다면 태백선수촌과 오투
리조트로 넘어가는 수레길로 가면 함백산 아랫도리이다. (창옥봉 산길과 만남)

창옥봉 코스는 경사가 완만하고 숲이 무성하여 오르는데 별로 힘든 것은 없으나 문제는 함백산
이다. 꽤 높은 산이다보니 가까운 거리임에도 오르는 것이 만만치가 않다. 그렇다고 낭떠러지나
암벽을 타야 되는 정도는 아니지만 산길 경사가 속세살이처럼 무척이나 각박하다. 게다가 날씨
도 여름이니 힘든 정도는 더하다. 그래서 40명이 넘는 일행 중 함백산 정상까지 오른 이는 12명
에 불과하며, 18명 정도는 중간 포기, 10여 명은 아예 만항재 야생화밭에 눌러앉았다.

해발 1,300m가 넘는 만항재와 함백산 주변은 하늘과 무척이나 가까운 곳이라 그런지 한기가 느
껴질 정도로 선선하며, 사방이 구름으로 덮여있다. 그래서 시야도 썩 좋은 편은 아니다. 거기에
안개까지 손을 보태면서 시야는 더욱 흐려진다. 하얀 구름이 산길을 오르는 나의 몸을 관통해
지나가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진한 구름과 안개 속을 거니는 것이다.
아직 야생화철이 아니라 피어있는 꽃은 적지만 온갖 수풀들이 앞다투어 자라나고 있으며, 숲도
제법 울창하여 천상의 화원(花園)이 따로 없다.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숲은 조금씩 변화를 보이
는데, 정상에 가까워지면 하늘을 가리고 선 숲은 사라지고 잡초만 무성하다. 거기에 오리무중(
五里霧中) 보다 더한 안개까지 자욱히 끼었으니 인간이 가서는 안될 하늘나라나 신선 세계의 경
계를 넘어선 것은 아닌지 걱정까지 들 정도이다. 갑자기 신선이나 하늘나라 관계자가 튀어나와
왜 우리 경계를 침범했냐고 잡아갈 것 같은 분위기였지. 만약 정말 그렇다면 뭐라고 변명을 해
야 될까? 그냥 길이 있어서 올라왔다고 하면 되려나?

하늘과는 한뼘도 안될 정도로 높은 함백산 정상에는 정상 표석과 돌탑이 세워져 신비로운 풍경
을 더해준다. 물론 표석과 돌탑은 근래에 세운 것이다. 힘들게 정상까지 올라와 마치 새나 용의
등에 올라탄 듯 천하를 바라보는 재미도 참 쏠쏠한데, 안개가 주변을 싹 지워버렸으니 굽어보는
재미 마저 없다. 솔직히 20m 앞도 흐릿하게 보일 정도이다.


▲  함백산 서쪽인 창옥봉 산길
오르막으로 시작된 산길은 이곳에서 조금 급해진다. 허나 이곳을 지나면
다시 진정을 되찾으면서 마실 수준으로 길이 완만해진다.

▲  실타래처럼 가늘게 변하는 창옥봉 산길

▲  숲터널을 이룬 산길 -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하니
혹 하늘 위로 올라선 것은 아닐까?

▲  창옥봉 정상(1238m)에 자리한 함백산 기원단(祈願壇)

창옥봉 정상부에는 태백산 천제단(天祭壇)과 비슷하게 생긴 돌로 쌓은 제단(祭壇)이 있어 마음
을 잠시 숙연하게 만든다.
함백산 기원단이라 불리는 이 제단은 큰 돌로 고인돌처럼 얹혀 제단을 만들고 그 3면에 돌로 담
을 두른 형태로 오랜 옛날부터 주변 백성들이 하늘에 제를 올리고 소원을 들이밀던 민간신앙의
현장으로 전해진다.

왜정 이후 함백산 주변에 많은 탄광이 들어서자 붕괴사고를 비롯한 온갖 사고가 끊임없이 일어
났는데, 광부의 가족들이 이곳을 찾아 무사 안전을 기도했다. 허나 탄광이 사라지면서 그 풍습
도 사라졌고 지금은 함백산을 꾸며주는 오랜 장식물이자 산악/민간신앙의 현장으로 조용히 자리
를 지킨다.


▲  기원단 바깥부분 (기원단 돌담)

▲  함백산의 위엄

창옥봉을 넘어서니 바로 앞에 커다란 산이 우리를 단단히 주눅들게 만든다. 저 산이 바로 우리
가 올라야 될 함백산. 그래도 꽤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물론 거리상으
로는 절반은 왔음) 지금까지 함백산의 조삼모사(朝三暮四) 장난에 보기 좋게 속은 것이다. 본격
적인 산행은 이제부터~~~ 지금까지는 그저 몸풀기용.. 비로소 본색을 드러낸 함백산의 위엄 앞
에 일행 상당수는 기가 질려 산행을 포기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  함백산 남쪽을 가로질러 태백선수촌, 오투리조트로 넘어가는 서학로

▲  함백산으로 오르는 산길
서학로와 만나는 곳에서 함백산 정상까지 40분 정도를 더 올라가야 된다.
처음에야 경사가 만만하지만 하늘과 가까워질 수록 서서히 각박해진다.

▲  함백산 정상부 산길 (1)

경사가 각박한 숲길을 힘겹게 올라서면 키 작은 나무와 잡초만 무성한 함백산 정상부에 이른다.
하늘과 지척이라 안개가 자욱하여 주변이 보이질 않는다. 이 길을 계속 가면 나도 저 안개 속에
묻혀 속세에서 영영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함백산 꼭대기를 인간들에게 보이기 싫은 하늘의 수
작을 뚫고 계속 길을 임한다.


▲  함백산 정상부 산길 (2)
정상은 가까워진 듯 싶은데, 안개가 떼어갔는지 좀처럼 나오질 않는다.

▲  함백산 정상 밑에 자리한 동그란 함백산 안내문

▲  함백산 안내문에서 싸리재, 적조암입구로 내려가는 길

▲  안개에 둘러싸여 희미하게 보이는 돌탑이 바로 함백산 정상(1572.9m)이다.

▲  드디어 도착했다. 함백산 정상 (정상 표석과 돌탑)

함백산이 내린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드디어 당당하게 함백산 정상에 두 발을 딛는다. 나의 등
장에 함백산도 조금은 쫄았는지 급히 안개를 소환하여 정상 주변을 안개로 두르나 소용이 없는
짓이다. 이미 정상은 나에게 적나라하게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일행 가운데 3번째로 정상에 도착했는데, 정상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서 오른 이들은 내
려갔음) 아무도 없는 꼭대기에 나홀로 있으니 마치 산신이 되어 산을 접수한 기분이다. 정상을
하얗게 감싼 안개는 함백산을 신비로운 풍경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하늘과 가까운 이곳에 발을
들이면 마치 큰일날 것처럼 말이다. 허나 이곳도 엄연한 인간의 세상이다. 하늘과 가깝다고는
해도 하늘의 세상은 아닌 것이다.

함백산(1572.9m)은 북한과 만주, 왜열도 등 잃어버린 땅을 제외한 이 땅에서 6번째로 높은 산이
다. 태백산 북쪽에 자리해 있으며, 태백시 서쪽을 크게 감싸고 있는데, 예전 이름은 대박산(大
朴山)이었다. 신경준(申景濬)의 산경표(山經表)에는 대박산으로 나와 있으며, 함박산(函朴山)이
라 불리기도 했다.
이 산은 상/중/하함박산이 있어 3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며, 상함박산은 지금의 은
대봉, 중함박산은 본적산, 하함박산은 바로 이곳이다. 대박/함박이라 불리던 것이 언제부터 함
백산으로 이름이 갈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에 변경된 것으로 보이며, 함백이나 대박,
함박 모두 '크게 밝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인근 태백산에 가려 존재감이 덜하긴 하지만 태백
산 못지 않게 위엄 돋는 산이다.

함백산 정상에는 근래에 세운 함백산 표석과 돌탑이 제단처럼 자리해 있는데, 표석은 네모난 단
(壇) 위에 세워져 있으며, 돌탑은 그 뒤에 자리해 표석을 수식한다. 내가 오른 산 가운데서 2번
째로 높은 산으로 제일 높은 곳은 한라산(漢拏山, 1950m)이고, 그 다음이 이곳 함백산이다.

정상 일대는 선선함을 넘어 쌀쌀하다. 여름의 제국도 고개를 숙이고 비켜간다는 함백산, 무더위
는 함백산과 태백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그 쌀쌀한 정상을 혼자 지키고 있으니 잠시 뒤 다른
일행들도 쏙쏙 모습을 드러내 꼭대기로 올라온다. 그래서 앞서 간 사람 2명을 포함해 12명이 정
상을 찍게 되었다.
정상에 올랐으면 내려가는 것도 당연한 일인데, 사람의 마음이 그렇지가 못해 계속 정상에 머물
고 싶은 욕심이 일어난다. 등산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고, 정상에 올라섰으면 적당히 머물다가
내려가야 뒷탈이 없는데, 그걸 지키지 못해 탈이 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산도 마찬가지로 정상
에 왔으면 잠시 머물다가 다음 사람을 위해 넘겨주는 것이 예의이지만 기념사진을 찍는다 뭐한
다 해서 금방 비켜주지를 않는다. 정상이란 그저 잠시 지나가는 경유지일뿐인데, 왜 이리도 욕
심이 큰지 특히나 이 땅의 상류층과 위정자들이 더한 것 같다. 적당히 먹고 좀 내려와라. 많이
먹었다 아이가..?

하늘을 향한 비밀의 문 같은 함백산 정상에서 약 15분 정도 머문 것 같다. 힘들게 올라온 정상
과 작별하기가 너무 아쉬워 제일 끝으로 내려갔는데, 그래도 아쉬운지 몇 번이나 정상을 돌아봤
는지 모른다. 다음에 또 인연이 있을까?? 서울에서 가까우면 종종 찾아오겠는데, 500리가 넘는
곳이니 그것도 쉽지가 않다.


▲  정상 돌탑의 뒷모습


▲  정상에서 속세로 내려가는 길 (만항재 방면)

▲  함백산 밑 서학로

속세로 내려갈 때는 올라갈 때와 달리 금방 내려갔다. 올라가는 것은 어려워도 내려가는 건 반
대로 쉽기 때문이다.

내려갈 때는 만항재 기점까지 가지 않고 태백선수촌으로 넘어가는 길과 만나는 지점까지만 갔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관광버스가 그곳까지 몸소 바퀴를 굴렸기 때문이다. 하늘의 기가 서린 함
백산의 청정한 기운을 온몸으로 누린 일행들이 모두 타자 만항재 기점으로 이동해 나머지 일행
을 태우고 속세로 내려왔다.

이렇게 하여 함백산을 비롯한 그날의 강원도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 만항재, 함백산 찾아가기 (2015년 9월 기준)
* 청량리역, 양평역, 원주역, 제천역, 동해역에서 영동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고한역 하차
* 동서울터미널에서 고한(고한사북)행 직행버스가 20~5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수원, 안산, 부천, 고양, 의정부, 성남, 원주, 제천, 대구(북부), 부산(노포동), 포항
  에서 고한(사북고한)행 직행버스 이용
* 고한사북터미널과 고한역에서 만항행 군내버스 이용 (고한사북터미널에서 7:30, 9:50, 14:10,
  19시 출발) → 적조암 코스는 적조암입구에서 내리면 되며, 만항재 코스는 만항마을 종점에서
  40분 올라가야 된다. (택시를 타고 들어가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로움)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중앙고속도로 → 제천나들목을 나와서 38번 국도 직통 → 고한터널을 지나 상갈래교차로에서
   함백산로로 직진 → 정암사 → 적조암입구 → 만항마을 → 만항재
② 중앙고속도로 → 제천나들목을 나와서 38번 국도 직통 → 석항에서 태백방면 31번 국도 →
   상동읍 → 화방재에서 만항로로 좌회전 → 만항재

* 매년 8월 초/중순에 만항재 산상의 화원, 야생화공원, 고한시장 일대에서 함백산 야생화 축제
  가 열린다. 함백산 산신제와 등반대회, 숲속음악회, 야생화 분재와 사진/작품 전시, 축하공연,
  향토음식 장터등의 프로그램이 있으며, 자세한 축제 정보는 ☞ 함백산 야생화 축제 홈페이지
  참조 (☎ 문의 고한함백산축제위원회 033-592-5455)
* 만항재(만항재마을, 야생화공원) 소재지 -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고한리
* 함백산 소재지 -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고한리 / 태백시 황지동


▲  함백산 지도 (정선 관광문화 홈페이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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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9월 22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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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축제의 성지, 화천 산천어축제 나들이

 


' 화천 산천어축제 나들이 '

▲  화천 산천어축제 맨손잡기 현장


 

묵은 해가 저물고 새해가 떠오르면 천하 곳곳에서 다채로운 겨울 축제가 열린다. 겨울 제국(
帝國)의 철권통치에 기가 죽어 집밖을 나서기가 쉽지는 않지만 축제는 사람들로 하여금 겨울
제국에 맞설 수 잇는 명분을 준다. 축제를 보러~ 즐기러~~ 강원도 내륙과 경기도 동북부, 경
북 내륙, 전북 내륙, 왜열도 북해도 등 겨울 축제의 성지(聖地)를 찾아 사람들은 먼 길도 마
다하지 않고 성지 순례를 떠난다.

우리나라 겨울 축제의 오랜 성지는 뭐니뭐니해도 태백산(太白山) 눈꽃축제일 것이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 태백산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드는 강력한 라이벌이 여럿 등장했으니, 그중 하
나가 바로 화천 산천어축제이다. 올해 같은 경우는 토/일요일에만 10만 명 이상이 찾을 정도
로 나날이 대성황을 이루고 있는데, 이제는 이 땅을 넘어 해외에도 널리 알려지면서 외국 관
광객들도 적지 않게 찾아온다. 예전 미국(米國) 양키의 모 방송에서는 세계의 겨울 7대 불가
사의의 하나라며 이 축제를 격하게 띄워주기도 했다.

화천 산천어축제는 이미 2010년 겨울에 참여한 적이 있으나 화천읍 본행사장이 아닌, 토고미
마을에서 낚시를 했다. 그때 일행 10여 명이 얼음 구멍에 달라붙어 3시간 동안 고작 1마리를
잡는게 그쳤지.. (☞ 관련글 보러가기) 그때 산천어를 잡지 못한 아쉬움이 너무 커서 다음에
간다면 반드시 산천어의 씨를 말리리라 부질없는 다짐을 했다. 그러다가 이번 1월에 다시 기
회를 잡아 후배 여인네와 화천을 찾았다.

화천 산천어축제와 평창 송어축제, 가평/인제 빙어축제 등에 가려면 견지대라는 조그만 낚시
대를 가져가야 된다. 물론 현지에서 구입해도 상관은 없지만 인터넷에서 견지대, 미끼, 훌치
기 도구를 합쳐서 거의 5천원 이내에 파는 것을 축제장 현지에서는 견지대 하나만 사도 무려
5천원 이상을 요구한다. 게다가 축제 기간이라 수요가 많으니 현지 상인들이 배가 불러 불친
절하게 구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니 인터넷과 낚시전용가게에서 미리 사가지고 가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다. 나는 며칠 전 인터넷에서 3천원대 견지대와 미끼를 구입했다.

드디어 낚시를 떠나는 날 아침, 월척을 꿈꾸며 집을 나섰다. 겨울의 차디찬 태클을 물리치며
전철을 타고 상봉역으로 이동, 거기서 여인네를 만나 춘천(春川)행 전철을 타고 80분을 달려
남춘천역에 발을 내렸다. (상봉~춘천 경춘선 전철은 20~30분 간격으로 운행)

남춘천역에서 인근에 자리한 춘천터미널로 이동하여 화천행 직행버스를 타는데, 군부대 면회
수요와 산천어축제 수요로 인해 거의 50~60m 정도의 대기줄이 형성되어 있었다. 기겁을 할만
한 그 대기줄 앞에 언제 버스를 타고 가나?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임시차가 적절히 투입되어
줄을 선지 30분 만에 춘천을 뜰 수 있었다. (춘천~화천 직행버스는 30~40분 간격)

만석의 기쁨을 누리며 춘천터미널을 출발한 우리의 버스는 춘천역에서 승객 20여 명을 더 태
워 완전 짐짝수송이 되었다. 그런 상태로 춘천시내를 벗어났고 춘천댐을 지나니 단단히 얼어
붙은 북한강이 나그네를 맞이한다. 여전히 2차선을 고집중인 화천행 5번 국도를 구불구불 따
라 하얀 수채화가 된 강원도의 산하(山河)를 즐기며 출발 50분 만에 화천터미널에 도착했다.


♠  화천 산천어축제 들어가기

▲  천일막국수에서 먹은 막국수의 위엄

화천에 도착하니 점심 직전이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아주 의미심장한 말이 있듯이 점
심을 먼저 들고 낚시에 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축제장에도 먹을 곳이 많지만 강원도 산골의
향토 음식인 막국수가 진하게 땡긴다. 그래서 미리 적당한 막국수집을 조사하여 화천3거리 부근
에 자리한 천일막국수를 찾았다.

시골 식당의 향기가 묻어난 이 집은 막국수와 편육, 닭갈비 등을 내놓고 있는데, 막국수의 맛을
1마디로 표현하면 달콤하다. 남북분단을 상징이나 하듯 반토막난 삶은 계란과 오이, 깨, 육수가
어우러져 춘천/화천 스타일의 막국수를 자아내고 있었는데, 반찬은 김치와 나박김치가 전부이다.
정식이나 백반도 아니고 국수이니 반찬은 저 정도면 충분하지. 그렇게 기분 좋게 점심을 마치고
무료로 제공되는 후식 커피를 1잔씩 마시며 밖으로 나오니 밥 먹기 전에는 제법 칼처럼 날카롭
던 화천의 바람이 조금은 시원하게 다가온다.


▲  화천3거리 스케이트장과 산천어등
▲  중앙로에 조성된 선등거리 (화천3거리에서 화천대교 방향)

화천읍내는 산천어축제로 읍내 전체가 거의 잔치 분위기였다. 화천3거리에는 스케이트장이 조성
되어 있고, 화천3거리에서 화천대교로 이어지는 중앙로에는 온갖 산천어등을 허공에 잔뜩 메달
아 거대한 선등거리를 이루고 있다. 햇님의 위엄이 천하 구석구석 미치고 있는 시간이라 등들이
단순한 모형으로 잠자코 있지만 해가 커텐을 치고 나면 서로 몸을 밝히며 장대한 등축제 거리로
변신한다.
산천어축제에 왔다면 낮에는 산천어 낚시와 여러 체험거리를 즐기고, 저녁에는 선등거리의 둥축
제를 구경하면 산천어축제의 낮과 밤을 고루고루 둘러보게 된다.


▲  화천천 위에 조성된 산천어축제장의 레포츠 공간

산천어축제의 중심은 화천읍내 북쪽과 동쪽을 흐르는 화천천(華川川)이다. 이 하천은 북한강 지
류의 하나로 겨울 제국이 입힌 얼음을 30cm 이상 두께로 불려 그 위에 축제장을 깔았는데, 축제
장 길이가 약 1.8km 정도 된다. 축제가 끝나면 축제의 장이던 화천천 얼음판을 녹여 그 흔적을
지운다. 그래서 다른 때에 오면 이곳이 정말 흥성하던 그 축제의 현장인지 고개가 갸우뚱할 정
도이다.


▲  산천어축제의 백미, 산천어 맨손잡기 현장 (배머리교 서쪽)

▲  산천어 용사들이 비장의 각오로 맨손잡기 현장으로 들어오고 있다.

▲  차가운 물에 발을 담구며 몸을 푼다. (맨손잡기 현장)

▲  드디어 시작된 산천어 맨손잡기 (산천어 학대 현장)

배머리교 서쪽에는 산천어 맨손잡기 현장이 있다. 호랭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되듯
이 산천어를 맨손으로 잡으려면 물에 흔쾌히 들어가야 된다. 한여름이면 들어갈 만하지만 동황
제(冬皇帝)의 위엄에 천하가 오들오들 떠는 1월의 한복판에 차디찬 물에 들어가는 것은 그리 쉽
지가 않다. 그렇다고 행사를 위해 특별히 따스한 물을 내주느냐. 그것도 아니다. 온수가 나오면
산천어가 힘을 못쓰기 때문에 공정한(?) 게임 법칙에 따라 차가운 물을 링에 풀었다.

산천어 맨손잡기는 산천어낚시 입장료와 별개로 가격이 다소 야박하다. 거의 1~2시간 간격으로
맨손잡기(평일은 1일 4회, 주말은 6회 이상)를 진행하는데, 입장료를 내고 참가를 신청한 다음
탈의실로 들어가 행사장에서 준비한 붉은 반팔 티와 검은 반바지로 갈아입고 순서대로 맨손잡기
링 바깥에 대기한다.
진행자의 지시에 따라 링으로 들어가 앉으면서 반드시 발을 물에 담가야 되며, 여기서 잠시 몇
가지 게임을 하다가 서로에게 물공격을 가하면서 차가운 물에 적응한 다음 온몸을 내던져 산천
어를 잡는다. 산천어가 잘 잡히지 않다보니 온몸이 물에 풍덩하기 일쑤고 적어도 하반신은 물에
젖기 마련이다. 산천어는 1인당 3마리 이하로 제한하고 있으며, 용감하게 나선 사람은 사회자가
특별히 1~2마리를 얹혀주기도 한다. 게임 시간(링에서 물고기 잡는 시간)은 3분 정도로 물이 매
우 차가워 감기 걸리기 쉽겠구나 싶지만 오히려 냉기로 겨울 제국에 대항하는 것이니 감기도 스
스로 도망친다. 그렇게 산천어를 무자비하게 탄압한 다음, 밖으로 나와 따뜻한 물이 나오는 족
욕장 천막에 들어가 씻으면 된다. 링에 나선 사람 중에 양이(洋夷)들도 적지 않은데, 산천어 하
나 잡겠다고 아주 목숨을 건다.

맨손잡기 현장을 구경하려면 링 주변보다는 바로 옆에 있는 배다리교 위에서 보는 것이 괜찮다.
옆에서 보는 거와 위에서 보는 거는 정말 천지 차이다. 그렇게 그 현장을 둘러보고 산천어 얼음
낚시터로 갔다.
얼음낚시터는 현장접수 장소와 예약접수 장소로 구분되어 있는데, 여인네가 미리 인터넷에서 예
약을 해서 예약접수 장소로 가면 된다. 그 장소는 맨손잡기 바로 서쪽에 자리한다. 반면 현장접
수는 배머리교 남쪽에 있는데, 주말에 가는 경우에는 일찍 가야 좋은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예약 접수 장소로 가서 예약을 확인하면 표를 2장 준다. 하나는 그냥 표이고, 다른 하나는 출입
증으로 잘보이는 곳에 달아야 된다. 단순 1회 입장이 아닌 1일 내내 입장으로 바깥으로 잠시 나
갔다 들어올 때 그걸 보여주면 된다. 그러니 꼭 잘 간수해야 된다.


♠  화천 산천어축제 즐기기

▲  산천어를 낚기 위한 얼음구멍
얼음구멍을 파려면 현장에 준비된 얼음끌대를 쓰면 된다.


표를 받고 예약접수 얼음낚시터로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허벌나게 많다. 거의 화천군 인구를 초
과한 머릿수(화천군 인구가 27,000명)인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으니 축제로 벌어들인 돈이
어마어마하겠지. 포크레인 수십 대를 동원하여 돈을 쓸어담아도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이 축제를 통해 음식점과 숙박업소, 온갖 가게들, 화천을 운행하는 시외버스 회사, 화천에 온갖
관광지들도 그 덕을 적지 않게 받았을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인공으로 뚫은 얼음 구멍 하나씩 차지해 월척을 꿈꾸는 강태공(姜太公)이 되
어 낚시에 임한다. 우리도 간신히 적당한 자리를 찾아 낚시를 시작했는데, 과연 잡히기나 할련
지 모르겠다. 그 인파 가운데 고기를 낚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편, 한동안 낚시에 정적이 감
돌다가 '와 잡았다!' 소리에 일제히 그곳을 향해 부러움 반 경쟁심 반으로 시선이 모아진다.

산천어축제장에서 풀어놓는 산천어는 이곳 토종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구입하거나 수입한 산천
어(송어의 일종)를 푼 것이다. 일정 시간이 되면 산천어를 담은 차가 와서 랜덤으로 아무 구멍
이나 산천어를 풀어넣는데, 그때가 되면 가라앉은 낚시터의 분위기와 강태공들의 사기가 다시
상승된다. 이때 산천어를 가져온 인부들에게 이곳에 제발 넣어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낚시를 하려면 싱싱한 미끼와 온갖 도구가 필요한데, 이곳은 수질 오염을 이유로 생미끼와 훌치
기를 금하고 있다. 그러니 오로지 견지대 등의 낚시대와 물고기 모양의 미끼에 의존해야 된다.
물론 훌치기 등의 도구를 몰래 들이거나 경험치가 풍부하면 많이 잡을 수는 있지만 상당수는 오
로지 축제장의 요구에 따라 견지대에 의존한다. 그러니 장소와 운빨이 매우 중요하다. 운이 좋
으면 1마리 잡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세월만 낚는 것이다.
축제장으로 들일 수 있는 것은 낚시 의자와 깔고 앉을 것, 그리고 간식거리 정도이다. 얼음박스
는 반입이 안되며, 대신 물고기를 담을 수 있는 봉투를 1인당 1개씩 준다. 또한 1인당 3마리로
제한을 하고 있으나 그건 따로 검사를 하지 않는다.

산천어축제는 인간에게는 여가를 즐기는 축제와 체험의 현장이다. 허나 산천어에게는 자신을 죽
이는 학살의 현장이다. 미끼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그날 그들의 인생은 무참히 끝나기 때문이다.
혹 잡히지 않더라도 물을 가둬서 얼음을 얼린 터라 밖으로 탈출하는 건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수명을 며칠 연장하는 꼴 밖에는 되지 않으며, 결국에는 모두 횟감이나 구이로 전락하게 된다.


▲  드디어 잡힌 산천어의 위엄
낚시에 임한지 1시간 여 만에 드디어 산천어 1마리가 걸려들었다.
우리가 그들의 인생을 이렇게 쫑나게 만드는구나..

▲  산천어 2마리 포획

▲  산천어보다 사람이 더 많은 산천어 얼음낚시 현장

▲  산천어 얼음낚시터에서 바라본 화천의 산과 하늘
유난히 맑고 푸른 하늘이 산천어바보들을 바라본다. 그날 하늘나라로
강제로 소환된 산천어가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늘나라 수용능력이
초과되어 어쩔 수 없이 환생한 산천어도 혹 있지는 않을까?


3시간 동안 낚시를 하면서 4마리를 잡았다. 4마리를 강제로 세상 및 황천 구경을 시켜준 셈이다.
시간도 벌써 16시에 이르렀고, 슬슬 인원도 빠지는 분위기라 산천어 탄압을 그만두고 자리를 정
리했다.

잡은 산천어를 들고 어떻게 요리해 먹을까 궁리하다가 절반은 회, 나머지는 구이로 먹기로 했다.
그런데 회와 구이를 해주는 행사 천막은 기다리는 사람들로 꼬리에 꼬리를 물며 길게 늘어서 있
었다. 힘들게 잡은 산천어를 잡아먹는 것도 참 쉬운 것이 아니구나, 그렇다고 집까지 가져갈 수
도 없는 노릇이니 무작정 그 대열에 합류했다.

회(회센터)와 구이 장소(구이터)는 서로 떨어져 있는데, 구이터가 대기 인원이 좀 적어 먼저 되
었고 회센터는 40분 정도 기다려 회뜨는 곳까지 왔다. 여기서 산천어를 넘기면 칼로 잘 다져 회
로 만들어주는데, 회와 구이 모두 1마리당 2,000원이다.
잡은 산천어가 많은 경우에는 옆 사람에게 1~2마리 넘기라 권하기도 하며, 그렇게 산천어의 한
맺힌 하직 현장을 거쳐 회를 받는 곳으로 가서 계산을 하면 되는데, 이때 소주와 상추, 초장도
구입할 수 있다. 허나 그냥 회만 먹기는 뭐하니 태반이 소주나 상추, 초장을 구입한다. 이들을
모두 구입하면 2마리 기준으로 9,000~10,000원 정도 든다. 초장은 다 먹지도 못할 정도이나 상
추는 좀 부족하며, 소주는 3천원 정도이다. 그리고 다른 먹거리를 원한다면 인근에 있는 먹거리
천막에서 오뎅이나 메밀전병 등을 사들고 와도 된다. 또한 산천어를 잡지 못했을 경우 산천어회
도 사먹을 수 있는데, 이건 가격이 대개 비싸다. (2~3만원선)

그렇게 회와 구이를 들고 빈 자리에 가서 자신을 희생해 (물론 강제로 희생된 것이지) 신(神)과
동물들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는 인간들에게 일용의 양식을 주신 산천어에게 고마움
과 위로를 올리며 조촐하게 낚시 뒷풀이를 한다. 우리가 잡은 산천어로 이렇게 한상 차려 먹게
되니 소원은 성취한 셈이다. 산천어에게는 미안하지만 인간 입장에서는 이 아비규환 같은 세상
을 살아가려면 먹고 살고 즐겨야 되지 않겠는가?
부디 산천어와 송어/빙어축제 때 학살된 물고기들은 다음 세상에 꼭 인간이나 그 이상의 존재로
태어나 한을 풀기를 바랄 뿐이요. 반대로 그들을 많이 잡은 사람들에 한해 내세에는 송어나 산
천어로 태어나 축제장에서 그들의 입장을 실감나게 체험해야 서로가 공평할 것이다.


▲  산천어회와 산천어구이
회와 구이 모두 맛이 좋다. 2마리를 회로 떴는데 양은 몇 젖가락 되지도 않는다.
저중에 남은 것은 쌈장 뿐..

▲  산천어축제 스케이트장

▲  산천어축제 얼음썰매장

산천어회와 구이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나머지 축제 현장을 둘러보았다. 한참 즐거움에 빠져있
는 얼음썰매장과 스케이트장을 비롯해 현장접수 얼음낚시터, 사륜구동(ATV) 체험장 등을 지나
화천 농산물과 먹거리를 파는 천막으로 갔다.
여기서 산천어축제 입장권과 같이 받은 농특산물교환권 5천원권 2장으로 다시금 먹거리를 사먹
으려고 했는데, 오로지 농특산물 구입에만 쓸 수 있다고 그런다. 그 교환권 외에 화천사랑상품
권도 있는데 이것만 먹거리에 사용이 가능하다. 허나 그건 얼음썰매나 기타 레포츠를 이용해야
받을 수 있다. 햇님이 꼴까닥 넘어가기 전이고 몸도 지쳐있어 썰매나 사륜구동 등을 타기도 뭐
해 살짝 자비를 청하니 메밀전병만 해주겠다고 그런다. 마침 내가 먹고 싶은 것이 그거였는데..
그래서 메밀전병과 화천동동주 1병을 더해서 다시금 배를 채운다.

메밀전병은 좀 맵기는 했지만 맛은 고소했고, 거기에 동동주까지 걸치니 몸이 싹 대펴지면서 졸
음이 나를 희롱하려 든다. 아까 먹은 산천어회/구이도 완전 소화가 되지 않은 상태에 그들까지
뱃속에 넣으니 배가 터지려고 그런다. 그래서 그날은 따로 저녁은 먹지 않았다.


▲  산천어축제 레포츠 장소

▲  화천천과 북한강이 하나가 되는 곳 (화천교)

산천어축제장 남쪽에는 현장접수 낚시터와 얼음을 얼리지 않은 루어낚시터가 있다. 그곳을 지나
면 화천교가 나오며, 여기서 화천천과 북한강이 만난다.
북한강은 얇게 얼음이 얼었는데, 주변은 온통 눈의 세상이다. 화천대교를 지나니 강 남쪽 위라
리로 이어지는 부교(浮橋)가 놓여져 있는데, 강 남쪽에 산천어축제 관광객을 위한 주차장이 있
어 접근 편의를 위해 가설한 것이다. 다리의 길이는 350m 정도로 깊은 강을 건너야 되는 터라
체감 거리는 한 1km 정도 되는 것 같다. 쫄깃해지는 염통을 진정시키며 그 부교를 건너면 화천
체육관과 화천민속박물관이다.


▲  얼어붙은 북한강 - 소쩍새가 우는 날이면 강도 얼음을 박차고 일어나겠지

▲  북한강 부교 - 다리가 조금씩 흔들려 간을 은근히 쫄깃하게 만든다.
강 북쪽은 화천읍내, 다리 건너로 보이는 강 남쪽은 화천민속박물관,
화천체육관 등이 있는 하남면 위라리이다.

▲  영롱하게 피어난 선등거리 (화천읍내 중앙로)

북한강 부교를 왕복하고 화천대교로터리로 나오니 여기서 화천3거리까지 길게 선등거리가 형성
되어있다. 마침 햇님이 퇴근하고 달님이 세상을 비추는 시간이라 햇님의 위엄에 움츠려있던 산
천어 선등이 서로 오색영롱한 불빛을 다투며 어두운 읍내 거리를 비춘다.
선등거리는 중앙로를 중심으로 읍내에 약 5km 정도 형성이 되어있는데, 총 24,000여 개의 산천
어등이 읍내를 장엄한다. 산천어의 수많은 피로 화천의 겨울과 백성들을 책임지며, 산천어축제
도 이렇게 발전한 것이니 선등도 모두 그들로 채운 것이다.
이 거리는 보통 12월 말부터 2월 말까지 운영하며, 17시 30분에서 22시까지 불을 밝힌다.


▲  어둠 속 터널 같은 선등거리 (화천읍내 중앙로)

선등거리를 지나 화천터미널로 나오니 산천어축제나 군면회를 마치고 바깥으로 나가려는 사람들
이 몇십m 길게 줄을 이루고 있었다. 다행히 임시차가 배차되어 앉아 갈 수 있었는데, 서서 가는
사람들은 춘천역까지 다리를 혹사시켜야 했다.
춘천터미널에서 두 발을 내려 터미널 옆에 자리한 이마트에 잠시 들렸다가 남춘천역으로 이동하
여 상봉행 전철을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전철은 자리가 널널해 넓게 자리를 누리며, 잠시 꿈나
라 투어를 청했다. 꿈나라에서도 산천어를 잡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러다 산천어에게 쫓기
는 꿈을 꾸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이렇게 하여 화천 산천어 축제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 화천 산천어축제 찾아가기 (2015년 1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화천행 직행버스가 30~4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춘천에서 화천행 직행버스가 30분 간격으로 떠난다. (춘천역 경유)
* 서울에서 경춘선 전철이나 경춘선 Itx-청춘 열차를 타고 남춘천역(춘천터미널 도보 7분 거리)
  이나 춘천역 하차
* 화천터미널에서 산천어축제장인 화천천까지는 도보 15분 이내 거리, 맨손잡이 장소와 예약접
  수 얼음낚시터는 배다리교 서쪽, 현장접수낚시터는 화천군청 옆 화천초등학교 방면으로 가면
  된다. (무조건 화천천만 찾으면 됨)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주차는 화천군청이나 화천초교, 화천대교 남단, 화천정보산업고, 홍천국
  토관리사무소 화천출장소 등을 이용하면 됨)
① 서울 → 경춘국도 → 춘천시내<또는 403번 지방도(서면) 경유> → 춘천댐 → 화천읍내(산천
   어축제장)
② 중앙고속도로 → 춘천나들목을 나와서 양구 방면 46번 국도 → 신북교차로 → 용산교차로 (
   또는 오음리, 파로호 경유) → 화천읍내

★ 얼음나라 화천 산천어축제 관람정보 (2015년 1월 기준)
* 축제 기간 : 2015년 1월 10일부터 2월 1일까지 (8:30~18:00)
* 입장료 - 중학생 이상과 어른 12,000원 / 초등학생과 경로, 국가유공자 8,000원
* 영유아 얼음낚시는 입장료 없음 (금,토 1일 3회 / 일요일 1일 2회 운영)
* 낚시 시간은 8:30~18:00, 1일 최대 인원은 1만4천명 (예약 6천명, 현장 8천명)
* 산천어축제 관련 정보나 온갖 체험 정보, 온라인 예약은 ☞ 이곳을 클릭한다.
* 소재지 -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화천천 일원 (☎ 1688-3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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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1월 20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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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의 향연 속으로 ~ 태백산 눈꽃 나들이 (당골, 눈꽃축제장, 석탄박물관)

 

' 태백산(太白山) 눈꽃 나들이 '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태백산 설경

장공(長空)에 뛰어들어 안개 속에 파묻히니
 비로소 정상에 오른 줄 알았네
 둥근 해는 머리 위에 나직하고
 주위의 뭇 산봉우리들이 눈 아래에 내려앉네
 구름 따라 몸이 날으니 학(鶴)의 등에 올라탄 듯
 돌을 밟고 허공에 길이 걸렸으니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인가
 비 그치자 골짜기마다 시냇물이 흘러넘치니
 굽이굽이 오십천(五十川) 건널 일이 걱정스럽네


*
고려 후기 문신인 근재 안축(謹齋 安軸, 1282~1348)이 태백산에 올라 지은 시

 


겨울의 한복판이자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인 설날 연휴를 맞이하여 진한 설경을 맛보고자 강원
도 태백(太白)을 찾았다. 마침 후배 하나가 태백 서쪽 동네인 고한(古汗)에 잠시 머물고 있어
서 그와 함께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인 태백산을 찾기로 했다.

원래는 설 연휴 전날 아침에 일찌감치 열차를 타고 가려고 했으나 급히 일이 생겨서 내려가는
것을 취소했다. 그러다가 그날 오후에 급히 연락을 넣어 심야 열차로 가겠다고 하니 사북역에
서 대기하여 합류하겠다고 그런다.

설날 연휴인지라 태백까지 열차표를 힘들게 예약히고 21시 반에 대문을 나섰다. 방학역에서 1
호선 전철을 타고 회기역에서 신통치 못한 배차를 자랑하는 중앙선 용문(龍門)행 전철로 갈아
타서 근 1시간을 달려 용문역에 두 발을 내린다. 여기서 잠시 대기를 타다가 강릉(江陵)행 심
야 무궁화호 막차에 몸을 싣는다.
거의 2년 만에 타보는 추억의 심야열차, 옛날에는 서울에서 당일로 오가기 버겨웠던 광주, 목
포, 여수, 경주, 부산, 동해 등 장거리를 갈 때 많이 타고 다녔는데, 도로망이 나날이 좋아지
면서 안그래도 비좁은 국토가 더 좁아져 2006년부터 탈 일이 크게 줄었다. 그러다가 이제는 1
년에 1회도 타질 않는다.

용문에서 태백까지는 3시간 반 정도 걸린다. 자리에 앉아 잠을 간곡히 소환해 봤지만 잠이 좀
처럼 강림하질 않으니 아무래도 잠님이 나를 원치 않은 듯 싶다. 한밤중이라 차창 밖 풍경은
온통 검은 도화지라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고 심심치 않게 보이는 불빛이 그런 도화지에
살짝 작은 점을 찍는다. 그렇게 뜬 눈으로 원주와 제천, 영월, 예미를 지나 사북역에 이르니
대기하던 후배가 열차에 올라타 옆 자리에 앉는다.

정선과 태백의 경계를 가르는 두문동재터널을 지나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태백 관내로 들어서
니 창 밖 풍경이 다소 달라지기 시작한다. 정선 땅까지 별로 보이지도 않던 눈이 터널을 지나
서부터는 완전 눈천지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차창 밖 검은 도화지는 하얀 색이 추가되어 2색
의 흑백 도화지가 되었다. 단지 터널 하나에 천지가 뒤바뀐 것이다.

열차는 강원도의 산주름을 열심히 지나 드디어 태백역에 도착했다. 열차가 멈추자 등산복으로
중무장한 사람들이 우루루 나와 적막이 감돌던 태백역에 잠시나마 활력을 불어 넣는다.
밥이나 먹을 겸 식당을 찾아보니 역전 주변 식당은 죄다 자고 있었고, 실비집 한 곳만 환하게
불을 밝히며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집에 들어가니 열차에서 내린 등산객 10여 명 정
도가 밥을 먹으며, 몸을 녹이고 있었다.
우리는 김치찌개를 먹었는데, 생각한 것과 달리 맛이 괜찮았다. 고기도 풍부하게 들어가 있고
밑반찬도 가짓수가 많아서 찬이 제법 풍성했다. 저녁을 먹고 왔지만 다시 시장기가 강하게 돋
으면서 밥을 2그릇이나 먹고 찌개와 반찬을 죄다 비우고서야 식당을 나섰다.

아침이 멀지 않았으니 찜질방에서 잠시 눈이나 붙이자고 했으나 후배는 여관에서 편하게 자자
면서 자기가 방값 내겠다고 그런다. 그래서 터미널(역 앞에 터미널 있음) 인근 여관에 들어가
눈을 붙였다.
아침 8시 반이 되자 찬란한 여명의 재촉에 스르륵 잠에서 깨었다. 4시간 밖에는 못잤지만, 더
이상 잠도 오질 않는다. 나는 태백산을 보러 여까지 온 것이지 잠이나 퍼자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도 꿈나라에서 허우적거리는 후배를 강제로 깨워 9시 반에 여관을 나섰다.

고원(高原)의 도시, 태백이라 제법 추울 줄 알았더만 아침임에도 그다지 춥지는 않다. 터미널
로 들어서니 마침 당골로 가는 태백시내버스 7번이 기지개를 켜고 있어 그것을 잡아타고 태백
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터미널에서 당골 종점(태백산관리사무소)까지는 20~25분 정도 걸린다.


▲  당골 종점(태백산관리사무소 앞)


♠  하얗게 분을 칠한 태백산(太白山, 1567m) 간보기

▲  태백산관리사무소에서 당골광장으로 오르는 길

버스에서 내리니 바로 매표소를 겸하고 있는 태백산관리사무소 앞이다. 우리나라의 신령스러운
산인 태백산의 안기려면 반드시 매표소를 거쳐야 되는데, 등산객들의 호주머니를 뚫어지라 쳐다
보는 그곳에서 입장권을 구입하고 안으로 들어서니 하얗게 분을 바른 태백산의 모습이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와 마음을 말끔히 정화시켜준다.

이곳에 온 목적은 오랜만(거의 7년 만)에 태백산 정상(1567m)과 천제단(天祭壇, 1561m)을 보고
자 함인데, 후배가 겨울 산행에 아주 바람직하지 못한 신발을 신고 있어서 정상까지 가는 것은
어려웠다. 괜히 그랬다가 119헬기를 불러야 될 상황까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식
총(虎食塚)까지만 갈까 하다가 눈이 제법 많고 미끄러워 후배가 오르기 힘들다고 투정하여 당골
광장에서 1km 정도만 오르고 철수하고 말았다.

태백산은 우리나라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남쪽 척추인 태백산맥(太白山脈)의 중심 산으로 위엄
돋는 산의 이름만큼이나 험준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허나 정작 올라보면 별로 힘들지 않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금강산(金剛山)이나 설악산과 달리 순수 흙으로 이루어진 육산(肉山)이
라 능선의 곡선이 완만하고 산세가 부드럽기 때문이다. 게다가 버스와 수레로 800~900m 고지(당
골, 백단사, 유일사, 금천동)까지 올라갈 수 있어 거기서부터 등산에 임하면 되며, 제일 단거리
인 유일사와 백단사에서 정상까지 2시간, 당골에서는 2시간 30분(문수봉 경유는 3시간 30분) 정
도면 충분히 닿는다. (금천에서는 4시간 소요)

매표소에서 당골광장까지는 야트막한 오르막 길의 연속이다. 4발 수레들도 마음껏 바퀴를 굴리
게끔 2차선 도로가 놓여져 있는데, 길이 온통 눈투성이라 수레들도 겁을 먹고 가기를 꺼려한다.


▲  태백산 눈썰매장 입구

▲  한참 몸단장중인 눈조각품

태백산은 사계절이 모두 아름다운 곳이지만 눈으로 뒤덮힌 겨울이 단연 갑(甲)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겨울 산행의 성지(聖地)로 백설(白雪)이 두텁게 쌓인 겨울 산행의 장쾌함을 누리고자
많은 산꾼들이 몰려온다. 봄과 여름, 가을보다는 겨울 산꾼이 훨씬 많다고 하니 기온이 낮을 수
록 찾는 이가 반비례로 늘어난다. 그리고 겨울의 한복판인 1월에는 눈꽃축제(눈축제)를 벌이는
데, 이 축제는 겨울 축제의 성지이자 대명사로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미국(米國)을 비롯한 여
러 나라에서 이 축제를 찬양했고, 미국의 CNN방송은 한국에서 가봐야 될 50곳의 하나로 선정하
며 찬양의 수준을 높였다. 솔직히 태백산은 국내에서만 머물기는 진짜 아까운 산이다. 국내 명
소/축제를 넘어 세계적인 겨울 축제와 명소의 성지로 우뚝 서기를 고대해 본다.

태백산은 겨울 산행의 성지, 겨울 축제의 성지이지만, 호랑이가 담배맛을 알던 옛날부터 제천의
식(祭天儀式)을 거행하던 성지였다. 산 정상에는 천제단(天祭壇, 중요민속문화재 228호)과 장군
단(將軍壇)이 있는데, 이들은 천하의 국조(國祖)인 단군(檀君)을 비롯하여 어린 나이에 숨져 태
백산신으로 추앙 받은 단종(端宗)에게 제를 올리던 곳으로 돌로 쌓은 조촐한 제단이지만 강화도
참성단(塹星壇)만큼이나 신령스러운 기운이 가득하다. 이렇게 하나도 아니고 3가지의 성지로 일
컬어지니 태백산의 명성은 나날이 하늘을 찌른다.


▲  설송(雪松) 밑에 자리한 석탄박물관 표석

▲  태백석탄박물관(太白石炭博物館)

당골광장 동북쪽에 자리한 태백석탄박물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석탄 전문 박물관으로 1997년 5월
에 문을 열었다. 초창기에는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으나 꾸준히 업그레이드를 벌여 이제는 태백
에서 꼭 가봐야되는 명소로 단단히 부각되었다.

박물관 규모는 지상 3층, 지하 1층으로 8개의 전시실과 야외전시장을 갖추고 있으며, 단순히 석
탄 관련 내용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역사와 지질(地質)을 시작으로 광물(鑛物)의 탄생
과 종류, 화석(化石), 석탄과 탄광 관련 문서와 기계/장비, 탄광 정책 관련 자료, 태백 관련 향
토자료, 탄광 광부들의 생활상, 탄광갱도 체험 등을 다루고 있다. 특히 3층에서 지하로 내려갈
때 엘리베이터는 층수가 아닌 -100m 단위로 거의 -900m까지 수치가 내려가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 마치 탄광 엘리베이터를 탄 듯한 오싹함을 선사한다. 지하층으로 내려오면 탄광 체험 갱도관
이 있으며, 그곳을 나오면 기념품과 특산품을 파는 기념품점이 나온다.

태백석탄박물관은 지금까지 2번 구경을 했는데, 이번에는 내려올 때 관람을 했다. 박물관과 관
련된 내용은 이쯤에서 정리를 하겠으며, 전시실을 모두 둘러보는데, 보통 1시간 반 정도, 길게
는 2시간 정도 잡으면 된다.


▲  제1전시실 지질관에서 만난 자수정(紫水晶)의 위엄
지질관에서는 자수정 같은 귀에 익은 광물부터 낯설은 광물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와 지구 곳곳에서 수집한 광물 진품이 진열되어 있다.


※ 태백석탄박물관 관람정보 (2014년 2월 기준)
* 관람시간 : 9시 ~ 18시 (17시까지 입장해야 됨, 쉬는 날 없음)
* 입장료는 공짜인 듯 싶지만 엄연히 태백산도립공원 입장료에 포함되어 있음
* 소재지 - 강원도 태백시 소도동 166 (천제단길 195 ☎ 033-552-7730 / 033-550-2743)
* 석탄박물관 홈페이지는 위의 자수정 사진을 클릭한다.


▲  당골광장 부근에 조성된 공원과 연못
소쩍새가 우는 그날이면 연못도 거추장스러운 얼음을 박차고 기지개를 켤 것이다.

▲  당골광장에서 문수봉으로 올라가는 길
당골광장에서 산길은 2개로 갈리는데, 왼쪽은 제당골과 문수봉으로, 오른쪽은
호식총과 망경사, 천제단으로 이어진다. 문수봉으로 가도 천제단까지
갈 수 있으나 3시간 30분 정도 잡아야 된다.

▲  막바지 매뭇새를 다듬고 있는 눈축제장

태백산의 백미(白眉) 중 하나인 눈축제는 보통 1월 중순에 열린다. 허나 우리가 갔을 때는 열리
기 직전이라 축제 분위기도 누리지 못하고 축제를 위해 조성된 눈조각품만 바깥에서 보는 것으
로 만족해야 했다.


▲  설림(雪林)으로 들어서다 (문수봉 방면)

▲  설림에 한가운데에 서다.
키가 큰 늘씬한 수목들이 앞다투어 하늘을 가리면서 산길이 좀 어둡다.
나무들은 겨울 제국이 내린 눈을 소복으로 삼으며 묵묵히 봄을 기다린다.

▲  고려 후기 문인인 안축(安軸)이 태백산에 올라 지은 시가 담긴 표석
시의 내용은 앞부분에 있음 (당골광장에서 망경사 방면)


♠  태백산 마무리

▲  태백산의 또 다른 수호신 석장승 - 강원도 지방민속문화재 4호

당골광장에서 단군성전 입구를 지나면 길 오른쪽에 별다른 모양이 없는 석상이 마중한다. 이 석
상은 바로 석장승으로 원래는 북쪽으로 1.2km 떨어진 미루둔지(장승둔지)에 있었는데, 1960년대
에 망경사로 옮겼다가 1987년 태백문화원이 지금의 자리에 안착시킨 것이다. 

장승의 모습을 보면 얼굴 부분이 손상된 문인석(文人石)처럼 보이기도 하며, 미륵상으로 보이기
도 한다. 얼굴이 워낙 심하게 손상되어 원래 모습을 알기 힘들며, 머리에는 관(冠)처럼 생긴 것
을 쓴 것으로 보인다. 얼굴 양쪽에는 귀로 보이는 길쭉한 부분이 있다.
그의 탄생시기는 딱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천제단 가는 길목인 태백산 북쪽에 자리해 있어 성
역(聖域) 임을 알리는 역할과 이정표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덩달아 산신의 수호신상의 역
할까지 겸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코 부분이 많이 닳아있어 마을의 수호신까지 겸한 것으로 여
겨진다. 예전에는 장승 옆에 3마리의 오리가 새겨진 솟대가 있었으나 지금은 어디로 마실을 갔
는지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에는 석장승이 많이 전해오고 있지만
정작 강원도에는 이 장승이 유일하다. 옛날에는
태백산 정상 천제단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장승
<장생(長生)>을 많이 세워 성역(聖域) 및 이정
표의 역할을 했으며, 장승모랭, 장승백이, 장승
둔지, 장승거리 등의 지명이 남아있어 태백 땅
에 장승이 제법 많았음을 보여준다.
허나 무심한 세월과 몰지각한 사람들의 만행으
로 장승은 죄다 자취를 감추어 이제는 전설 속
의 이야기가 되었으며, 오로지 당골의 석장승만
살아 남아 태백이 왕년에는 장승의 낙원이었음
을 아련하게 귀뜀해줄 따름이다. 참고로 태백의
조선시대 지명인 장생은 바로 장승에서 유래된
것이다.
<태백을 이루는 동네의 하나인 장성(長省)이 장
생에서 변경된 이름임>


▲  태백산으로 올라가는 하얀 숲터널 (석장승에서 망경사 방면)

▲  당골계곡과 함께 이어진 산길
이 세상에 색깔은 하얀색과 하늘색, 갈색(나무 줄기) 밖에 없는 것 같다.

▲  설림 속을 거닐다
집으로 고이 훔쳐와 혼자서만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절경이다. 허나 나는 조물주가
아닌지가 저 풍경을 가져오지는 못하고 대신 사진이란 것으로
그 장면을 복사해 담아가지고 왔다.

▲  단군성전 앞에 마련된 단군상
명세기 우리의 국조(國祖)인데, 보호각 하나 놓아드려야 되는거 아닐까?
저렇게 눈과 바람을 맞게 놔두는 것은 그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  단군성전(檀君聖殿)

석장승을 지나 대략 1km 정도만 전진하고 발걸음을 접고 말았다. 후배가 힘들다고 그러니 더 이
상 끌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 수 없이 다음 인연을 고대하며 발길을 접
었다. 발을 돌린 지점은 아마도 해발 1,000m 정도 될 것이다. (당골광장이 거의 850m임)

내려가는 길에 당골광장 남쪽에 자리한 단군성전에 들렸다. 이 성전은 옛 조선(朝鮮)의 시조이
자 우리의 국조인 단군의 사당으로 1975년에 구성된 '국조단군봉사회'가 1982년에 성금을 모아
창건하고 단군성전이라 하였다. 그의 사당을 이곳에 지은 것은 그에게 제를 지내는 천제단으로
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1993년에 태백산도립공원 개발계획에 따라 성전을 수리했으며, 매년
10월 3일 개천절(開天節)에 제례를 올리고 있다. 성전 현판의 글씨는 신덕선이 썼다.

비록 오래된 문화유산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뿌리를 생각하게 하는 의미심장한 현장이다. 하지
만 등산객과 탐방객들 대부분은 그냥 지나치고 만다. 등산로에서 계단을 타고 조금 올라가야 되
는 곳에 있기도 하지만 썩어빠진 이 땅의 권력층에 의해 점차 오염되가는 역사교육의 부실과 무
관심 조장도 한몫한다.


▲  단군성전에 봉안된 단군 영정

오로지 상상으로 그려진 단군의 영정(影幀), 후덕한 인상과 긴 수염, 황색 옷이 인상적이다. 단
군은 옛 조선 군주의 명칭으로 여겨지며, 조선의 군주가 정치와 제사를 모두 관장한 제정일치(
祭政一致) 사회였다.

옛 조선은 기원전 2333년 경에 건국되어 기원전 108년에 문을 닫은 장수국가로 한반도를 비롯하
여<남한 지역에 있던 삼한(三韓)>도 조선의 간접 영역으로 보기도 함> 요동(遼東)과 만주, 요서,
화북(華北) 일부를 다스린 동아시아 강대국이다. 조선의 건국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여전하나
산소도 아까운 식민사관(植民史觀) 패거리들은 기원전 10세기 이내로 창건 연대를 잡고 있으며,
영역도 한반도 북부와 요동으로 크게 축소시켰다.

조선의 중심지는 요동으로 보이며, 춘추전국시대에 연나라를 공격하여 대륙의 지배권을 차지하
려했으나 철기(鐵器)로 중무장한 연나라의 반격에 오히려 크게 밀려 요하(遼河)를 비롯한 서쪽
2,000리의 땅을 잃고 만다. 당시 조선은 청동기 무기였다. 그러니 어찌 게임이 되겠는가?
이후 대륙에서 넘어와 준왕(準王)의 신임을 받은 위만(衛滿)이 반란을 일으켜 준왕을 남쪽으로
쫓아내고 왕이 되었다. 준왕은 그를 따르는 신하와 배를 타고 남쪽으로 건너가 한왕(韓王)을 칭
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마한(馬韓) 영역인 전라도나 충청도로 내려간 것이 아닌가 싶다.

위만이 조선을 장악하자 철기무기를 개발하고 국력을 길러 한나라를 비롯한 주변 나라를 공격해
영토를 확장하고 동아시아 무역을 독점해 막대한 부를 누렸다. 이에 한나라 무제(武帝)는 조선
이 동방(東方) 무역 독점으로 배를 불리며 나날이 국방력을 다지는 것에 크게 위협을 느끼며 우
선 주변 나라를 말끔히 정복하고 그 자신감으로 조선을 협박했다.
조선이 반발하며 먼저 대륙을 공격하자 한무제는 이때다 싶어 군사를 보내 반격을 가했는데, 한
나라군 내부 분열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패했다. 그러자 뚜껑이 단단히 열린 한무제가 다시
군사들을 다그치자 정신을 차린 한군(漢軍)은 정비를 가다듬고 반격을 가해 끝내 왕검성까지 포
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하며 끙끙 앓던 차에 조선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조선의 마지막
군주인 우거왕(右渠王)이 반대파에게 피살되고, 왕을 잃은 조선 조정은 그 혼란을 잠재우지 못
해 결국 성은 함락되고 만다.

이렇게 옛 조선은 망하고, 그 땅 일부에 그 유명한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는데, 그것도 조선
유민들의 끊임없는 비협조와 반발, 그리고 고구려(高句麗)와 부여(夫餘)의 등장으로 그 땅에 제
대로 침도 바르지 못하고 쫓겨나고 만다.
한사군의 존재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은데, 식민계열 쓰레기들은 평안도와 황해도, 요동 일부로
보고 있으며, 강단사학자와 많은 사학자들은 요동과 요서 쪽으로 보고 있다. 한4군의 하나로 유
명한 낙랑(樂浪)이란 존재도 낙랑국과 낙랑군(樂浪郡) 2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아직 의견이 분
분하나 대체로 낙랑국은 평양 지역, 낙랑군은 요서로 보고 있다. 그러니 호동왕자(好童王子)와
낙랑공주(樂浪公主) 설화로 유명한 낙랑은 낙랑군이 아닌 낙랑국으로 보는 것이 맞다. 만약 낙
랑군이라면 낙랑공주는 공주를 칭할 수가 없다. 그냥 군을 다스리는 태수(太守)의 딸일 뿐이다.

옛 조선은 전성기였을 때 인구가 무려 1억 8천만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조선의 문화와 문명
은 중원대륙과 주변의 많은 나라와 민족에 영향을 주었다. 한자(漢字) 같은 경우도 동이족(東夷
族)으로 대표되는 조선에서 만들어 대륙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으며, 그 문자가 대
륙으로 넘어가 크게 발전하면서 동아시아 통용 글자가 되었다. 또한 대흥안령산맥 쪽에서 발생
한 홍산문명(紅山文明)도 조선의 찬란했던 흔적이며, 한반도와 만주에서 많이 발견되는 엄청난
양의 고인돌(지석묘) 또한 조선의 청동기시절 흔적이다.


▲  하얀 기와집이 된 단군성전 삼문(三門) - 단군성전에서 바라본 모습
성전 뜨락에는 눈이 수북하게 덮여 설경의 극치를 이룬다.

▲  단군성전 삼문 - 바깥에서 본 모습
눈이 지붕에 가득하니 혹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눈 자체는 거의 무게가 없지만 저리 두툼하게 쌓이면 정말 몇톤이 되버린다.

▲  석장승에서 당골광장으로 내려가는 길

▲  눈축제를 위해 조성된 커다란 눈 이글루
마치 눈을 뒤집어 쓴 거대한 석실고분(石室古墳) 같다.

▲  당골광장에서 당골 종점으로 내려가는 길

▲  당골 통나무집에서 먹은 곤드레밥과 반찬들

정상까지 오르지 못한 아쉬운 마음을 눈 속에 애써 묻으며 당골 종점으로 나왔다. 그때 시간은
12시, 뱃속에서 배고프다고 난리를 친다. 하여 허기진 배를 달래고자 적당한 곳을 찾다가 통나
무집이란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폈다.

이곳은 여행사 단체 손님들로 북적거렸는데, 신발을 벗어야 되는 뜨끈한 방에 들어가 곤드레밥
과 해물파전, 동동주, 소고기국밥을 시켰다. 잠시 뒤 콩나물과 더덕, 김치, 두부 등 8가지의 정
갈한 밑반찬이 앞에 펼쳐진다. 이들 가운데 양념장이 버무러진 커다란 두부는 반찬의 갑(甲)으
로 두부 맛이 좋아 2번 정도 더 시킨 것으로 기억이 난다.

반찬을 먹고 있으니 곤드레밥과 소고기국밥 등의 식사가 나타난다. 곤드레밥은 정선과 평창, 영
월, 태백 지역의 토속음식으로 곤드레나물을 비롯한 산채 나물과 김가루가 버무려진 일종의 비
빔밥이다. 곤드레밥에는 늘 구수한 된장찌개가 짝궁처럼 나타나는데, 이곳의 찌개는 두부가 풍
부하다. 그렇게 먹고 있으려니 동그란 해물파전과 동동주가 3차로 나타난다.
파전은 가격에 비해 좀 커보인다. 허나 반찬과 곤드레밥으로 어느 정도 배가 들어찬 상태기 때
문에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파전은 일부를 남기고 거진 다 먹었는데, 뱃속에서 그만
보내라고 북소리가 울린다. 그러다보니 동동주는 둘이서 절반 밖에 마시질 못했다.


▲  해물파전의 위엄

이렇게 풍성하게 점심을 먹으니 졸음이 슬쩍 나를 희롱하며 배 깔고 한숨 자라고 보챈다. 졸음
의 희롱을 과감히 내던지고, 커피와 식당 내부 연탄 난로에서 대핀 보리차를 여러 잔 마시며 식
곤증과 추위를 몰아내고 밖으로 나선다.

이렇게 태백산과의 짧은 인연을 마치고, 어디로 갈까 머리를 굴리다가 미인폭포로 가기로 하고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그곳으로 향했다. 이후 내용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기 바란다.
(☞ 미인폭포 보러가기)

★ 태백산 당골 찾아가기 (2014년 2월 기준)
① 철도 이용
* 청량리역과 양평역, 원주역, 제천역에서 태백역으로 가는 강릉행 무궁화호 열차가 1일 6회(휴
  일에는 7회) 운행한다.
* 강릉역과 동해역에서 청량리행 열차(1일 6회, 휴일 7회)를 타고 태백역 하차
② 시외버스 이용
* 동서울터미널에서 태백행 직행버스가 20~4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부산에서 태백행 직행버스가 1일 6회, 대구(북부)에서 태백행 직행버스가 1일 10여 회(직통은
  1일 9회 운행) 떠난다.
* 인천, 고양, 의정부, 부천, 성남, 안산, 수원에서 태백행 직행버스 이용
* 원주, 제천, 삼척, 강릉, 영주에서 태백행 직행버스 이용
③ 현지교통
* 태백역전에 있는 태백터미널에서 당골행 7번 시내/좌석버스가 1일 20여 회 운행
④ 승용차
* 중앙고속도로 → 제천나들목을 나와서 영월 방면 38번 국도 → 영월 → 고한 → 태백시내 →
  당골주차장
* 중앙고속도로 → 제천나들목을 나와서 영월 방면 38번 국도 → 영월 → 상동 → 유일사/백단
  사 → 당골주차장

※ 태백산 관람 정보 (2014년 2월 기준)
* 입장료(단체는 30인 이상) : 어른 2,000원 (단체 1,500원) / 학생,군인 1,500원 (단체 1,000
  원) / 어린이 700원 (단체 500원)
* 주차비 : 대형 4,000원 / 소형 2,000원
* 태백산 눈축제는 1월 중/하순에 2주 정도 열린다. (열리는 시기는 매해마다 다름)
* 당골에는 콘도형 태백산민박촌이 있다. 현재 15동 73실이 있으며, 인터넷에서 예약하면 된다.
  ☞ 태백산 민박촌 홈페이지 가기 (문의 ☎ 033-553-7440~41)
* 태백산 눈썰매장 이용료 : 어른 5,000원 / 어린이 4,000원
* 태백산 당골 소재지 - 강원도 태백시 소도동 (태백산도립공원 사업소 ☎ 033-550-2741~42)
* 태백산도립공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4년 2월 4일부터
 
* 글을 보셨다면 그냥 가지들 마시고 바로 밑에 있는 네모난 박스 안의 손가락 View on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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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애사가 깃들여진 강원도의 청정한 지붕, 영월 나들이 (금몽암, 낙화암, 동강...)

 


♠ 단종애사가 서린 강원도의 청정한 지붕, 영월(寧越) 나들이 ♠
영월 금몽암
▲  단종의 꿈속에 나타났던 절, 영월 금몽암(禁夢庵)


 

가을이 맛있게 익어가던 9월의 끝무렵에 강원도의 지붕인 영월을 찾았다. 우선 평창(平昌)
에 들려 미답처인 남산공원과 송학루, 노성산성 등을 둘러보고(☞ 관련글 보러가기) 평창
터미널에서 영월로 넘어가는 군내버스에 나를 담고 영월로 넘어갔다. 언제 봐도 시리도록
좋은 강원도의 아름다운 산하(山河)와 칼처럼 솟은 고개를 마음껏 구경하고 체험하며 40
여 분을 달려 영월읍내 북쪽에 자리한 장릉(莊陵)에 두 발을 내린다.

장릉은 소년왕 단종(端宗, 1441~1457)의 능으로 영월에 왔다면 꼭 찾아야 칭찬을 듣는 영
월의 대표급 명소이다. 방랑시인 김삿갓과 더불어 영월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영월을 먹여
살리는 밥줄이기도 한데, 내가 장릉에서 내린 것은 장릉을 보고자 함이 아니라 다른 미답
지를 보고자 함이다. 장릉은 20대 중반에 이미 2번 거쳐간 곳이라 그리 땡기진 않는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의미심장한 말이 있듯이 절로 가기 전에 우선 점심을 먹기
로 했다. 오랜만에 장릉보리밥을 먹을까? 아니면 말로만 듣던 강원도의 먹거리 곤드레밥
을 먹을까? 둘을 놓고 궁리하다가 곤드레밥을 파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곤드레는 강원도 700m이상 고지에서 자라는 나물로 학명(學名)은 고려엉컹귀이다. 곤달비
로도 불리며, 영양가가 풍부하고 맛이 좋아 옛부터 강원도 산골의 먹거리로 절찬리에 애
용되었다. 곤드레밥은 바로 곤드레나물을 뒤집어 쓴 밥으로 콩나물밥과 성격이 비슷하다
보면 된다. 밥에는 곤드레나물과 김가루가 들어가 있으며, 산나물 일색의 밑반찬과 간장,
뚝배기에 담긴 된장조치(찌개)를 잘 비벼먹으면 휼륭한 곤드레밥이 된다.

밥을 먹고나니 바로 포만감의 행복과 함께 식곤증이 한숨 자라며 나를 희롱하려 든다. 하
지만 가야될 곳이 있기에 희롱을 뿌리치고 후식으로 커피 1잔 들이키며 보덕사로 길을 재
촉했다.


▲  장릉 건너편 주막에서 먹은 곤드레밥의 위엄

▲  장릉 배견정(拜鵑亭)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오래된 갈참나무
이 나무는 나이가 무려 400년에 이른다고 하며, 높이가 21m, 둘레가 3.8m에 달한다.
강원도-영월-35호


♠  오랜 역사를 간직한 장릉의 원찰(願刹) ~
발본산 보덕사(鉢本山 報德寺)

▲  수목이 울창한 보덕사 서쪽 부분

장릉에서 보덕사, 금몽암을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5분 정도 들어가면 길 오른쪽 개울 너머로 장
릉의 수호사찰인 보덕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 절은 668년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세운 지덕사(旨德寺)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
시절 의상은 당나라에 머물던 시기(661년에 건너가 670년에 귀국함)이므로 그가 세웠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는다. 그 외에 686년(신문왕 5년)에 의상이 세웠다는 설도 있고, 714년에 혜각선사
(蕙覺禪師)가 세웠다고 우기기도 하나 대체로 신라 후기나 고려 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1132년(인종 10년) 설허(雪虛)와 원경국사(元敬國師)가 극락보전과 사성전, 염불암, 침운루(沈
雲樓) 등을 증축했으며, 1457년에는 노릉사(魯陵寺)로 이름을 갈았다. 1705년 장릉을 관
리하는
원찰(願刹)로 지정되면서 한의(漢誼)와 천밀(天密)선사가 큰 종을 만들었으며, 1726년에
는 장릉
의 제수(祭需)를 담당하는 절인 조포사(造泡寺)로 지정되면서 왕실에서 많은 지원을 받
게 된다.
이때 왕실에 바짝 잘보이고자 나라의 덕을 갚는다는 뜻의 보덕사로 이름을 고쳤다.


1854년 불의의 화재로 극락보전과 종각이 전소되어 1868년에 중수했으며, 그 시절 절의 규모가
상당하여 절에 속한 밭이 1,000석, 승려는 무려 100명이 넘어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말사(末
寺) 가운데 가장 컸다고 한다. 허나 6.25전쟁으로 극락보전과 해우소를 제외한 대부분이 소실되
어 쪽박을 차게 되었고, 이후 꾸준한 불사를 벌여 예전의 모습을 서서히 회복하고 있다.

보덕사는 발본산(鉢本山) 자락에 안겨있는 산사(山寺)가 분명하지만 절이 들어앉은 터가 평지이
고 마을과도 가까워 산사의 분위기는 조금 떨어진다. 절에서는 발본산 대신 한참이나 멀리 떨어
진 '태백산(太白山) 보덕사'라 칭하고 있으며, 여기서 바라보는 서쪽 동을지산(冬乙旨山)의 일
몰 풍경이 매우 아름답기로 명성이 자자하다. 또한 석양(夕陽)에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절의 범
종소리는 영월8경의 하나로 손꼽혔다.

제법 넓은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산신각과 선방, 사성전, 칠성각 등 8~9
동의 건물이 있으며, 선방과 칠성각 등을 제외하고는 모두 서향(西向)을 취했다. 소장문화유산
으로는 지방문화재인 극락보전과 해우소가 있다.


▲  보덕사로 인도하는 극락1교와 일주문(一柱門)

▲  천왕문에서 바라본 일주문 주변

속세에서 보덕사에 들어가려면 계곡 돌다리를 건너야 된다. 돌다리는 모두 2개로 극락(極樂)이
란 이름을 지녔는데, 일주문 앞 다리는 극락1교, 그 북쪽 것은 극락2교이다. 다리는 근래에 지
어진 탓에 손대기가 아쉬울 정도로 무척이나 하얀 피부를 자랑한다.

번뇌를 계곡에 내던지고 다리를 건너면 다리의 이름 그대로 극락을 염원하는 보덕사 경내가 펼
쳐진다. 절은 계곡만으로도 안심이 되질 않는지 계곡 쪽에 기와를 얹힌 흙담장을 길게 둘러 속
세와 부처 세계의 경계를 다시 한번 그었다. 즉 2중으로 경계선을 설치해 속인들이 지니고 오는
번뇌와 절에 놀러오는 화마(火魔) 등의 악귀를 철저히 경계하는 것이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천왕문까지 길이 곧게 이어
져 있다. 그 좌우로 나이가 지긋한 아름드리 나
무들이 앞다투어 중생을 영접한다. 그들 중에선
왼쪽 사진의 느티나무가 가장 연세가 높아 무려
600살이 넘었다고 한다. 거의 보덕사 내력의 절
반 가까이를 산 셈이다. 높이는 25m에 이르러
그 꼭대기는 거의 하늘에 맞닿아 있는 듯하며,
영월군 보호수의 하나로 주변 나무와 함께 자연
과 어우러진 보덕사의 아름다움을 매섭게 드높
인다.

길 오른쪽에는 연꽃과 개구리의 운동장인 조그
만 연못이 자리해 있다. 가을임에도 아직도 백
련(白蓮) 일부가 자꾸 떨구어지는 고개를 간신
히 붙잡으며 올해의 막바지 아름다움을 선보인
다.


▲  청초한 아름다움을 지닌 백련의 보금자리 보덕사 연못

▲  맵시가 고운 관음보살상

▲  사천왕의 보금자리인 천왕문(天王門)


▲  보덕사 해우소(解憂所) - 강원도 지방문화재자료 132호

천왕문 우측에서 약 50m 떨어진 곳에 고색의 때가 가득한 창고처럼 보이는 2층 건물이 있다. 바
로 보덕사 해우소이다.
절에서는 뒷간을 해우소라고 부른다. 해우(解憂)는 근심을 풀거나 해결한다는 뜻으로 볼일을 보
면서 몸 속의 노폐물이 싹 내려가는 것을 해우로 비유했다. 뒷간에서 보는 볼일처럼, 볼일을 볼
때 나오는 고약한 냄새처럼 세상사 근심걱정도 싹 내려가고 냄새로 싹 사라지면 얼마나 좋을까?

보덕사 해우소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형태를 띈 맞배지붕 건물로 상량문(上樑文)에 따르
면 1882년(고종 19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내부는 앞뒤 2열로 분리하여 각각 6칸씩 볼일 보는
곳을 두었으며, 남녀 사용을 구분했다. 오래된 건물임에도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화장실의
기능을 변함없이 수행하고 있으며, 선암사(仙巖寺) 해우소와 더불어 문화재로 지정된 이 땅에
흔치 않은 옛 해우소이다.


▲  보덕사 극락보전(極樂寶殿) - 강원도 지방문화재자료 32호

천왕문을 지나면 조그만 돌맹이가 잔잔히 깔린 넓은 뜨락과 극락보전, 선방(禪房), 5층석탑 등
이 나타난다.
극락보전은 보덕사의 법당으로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
붕 건물로 1161년 원경국사가 세웠다고 전하며, 지금의 건물은 1868년 화마에 희생된 것을 다시
지은 것으로 건물 현판은 해강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이 썼다고 한다. 마치 학이 하늘을 향
해 날개짓을 하듯 추녀를 치켜올린 극락전의 모습이 시원스럽다.

극락전 불단(佛壇)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대동한 목조아미
타3존불이 모셔져 있으며, 그 뒤로 색채가 고운 후불탱화가 병풍처럼 자리한다.

▲  극락보전 목조아미타3존불
눈을 지그시 뜨며 엷은 미소를 드러낸 그들이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을 따스히 맞는다.

▲  극락보전 옆에 자리한 석종형 승탑(僧塔)
1820년에 조성된 것으로 화엄대강사 설허당
대선사(華嚴大講師 雪虛堂大禪師)의 승탑이다.

       ◀  작고 단촐한 산신각(山神閣)
산신각은 근래에 지어진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에게 무척 친숙한 산신(山
神)의 보금자리이다. 건물 내부 우측 벽에는 태
백산신으로 추앙된 단종과 그에게 산머루를 바
치는 추익한(秋益漢)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 있
다.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도


▲  단종과 추익한의 마지막 만남이 담긴 그림

단종을 수식하는 충신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추익한(1383~1457)은 1411년 문과(文科)에 급제하
여 한성부윤(漢城府尹)과 호조정랑(戶曹正郞) 등을 지낸 인물이다. 1433년 퇴직하여 영월로 내
려와 학문과 자연을 벗삼으며 팔자 좋은 시간을 보내던 중, 1456년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를 왔다.
그는 단종을 자주 찾아가 문안을 올리며, 시문을 지어주었고, 산에서 따온 산머루와 다래를 진
상하며 우울해하던 단종을 늘 다독거려주었다. 그러다가 1457년 10월 24일, 그날도 여전히 산에
올라가 단종에게 줄 산머루를 따고 있는데, 난데없이 곤룡포(袞龍袍)를 걸친 단종이 백마를 타
고 그 앞에 나타났다. 추익한은 깜짝 놀랐지만 반가운 마음을 보이며 산머루를 올렸다. '전하!
여기 산머루가 맛이 좋습니다. 한번 들어보십시요'

그러자 단종이 '나는 태백산으로 가는 길입니다. 머루는 관풍헌(觀風軒)에 갖다두십시요~' 하고
는 말을 몰아 급히 사라지는 것이다. 난데 없는 단종 출현에 마음이 불안하여 서둘러 읍내로 내
려가니 글쎄 단종은 이미 처단되어 그 시신이 동강(東江)에 버려진 것이 아닌가. 그가 산에서
본 단종은 태백산으로 가던 단종의 혼으로 추익한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던 것이다. 산신각 우측
의 이 그림은 바로 그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단종이 죽자 추익한은 크게 애통해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 그를 따랐다. 이에 영월 사람들은
그를 추충신(秋忠臣)이라 부르며 사당을 지어 그의 뜨거운 충절의 얼을 기렸다.

▲  사성전 우측의 칠성각(七星閣)
칠성(七星)과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이다.

▲  선방 옆에 자리한 보덕사 샘터
중생에 대한 부처와 자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듯, 가뭄에도 물이 마를 날이 없다.


▲  경내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사성전(四聖殿)

사성전은 부처와 보살, 나한(羅漢), 신중(神衆)을 봉안한 건물로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
겨진다. 지금의 건물은 6.25 이후에 중수한 것으로 석가불과 미륵불, 제화갈라의 3존불과 나한
상, 장군상 등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들 불상은 1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불상에서 19세
기 중반 유물이 쏟아져 나와 후불탱화와 더불어 지금은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가 있다.

※ 영월 보덕사 찾아가기 (2013년 11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영월행 직행버스가 30~60분 간격으로 떠나며, 강남 센트럴시티에서 영월행
  고속버스가 1일 4회 떠난다.
* 청량리역, 양평역, 원주역에서 강릉, 아우라지행 무궁화호 열차가 1일 7~8회 떠난다.
* 인천, 대전(동부), 원주, 제천, 태백에서 영월행 직행버스 이용
* 영월터미널 부근 군내버스 정류장에서 연당, 마차, 주천 방면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장릉
  에서 내리거나 도보 30분
* 영월역에서 장릉까지 바로 이어주는 교통편이 없다. 택시를 타고 바로 가는 것이 편하며, 걸
  어갈 경우에는 1시간 정도 잡아야 된다.
* 승용차로 갈 경우 (경내에 주차장 있음)
① 중앙고속도로 → 제천나들목을 나와서 제천, 영월방면 38번 국도 → 방절터널을 지나 서영월
   나들목에서 우회전 → 청령포교차로에서 좌회전 → 청령포입구에서 좌회전 → 장릉3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바로 나오는 3거리에서 보덕로로 좌회전 → 보덕사 주차장
*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1100 (☎ 033-374-3169)


♠  단종의 꿈속에 나타났던 조그만 산중암자, 절집보다는 양반가의 분위기가
진하게 풍기는 금몽암(禁夢庵) - 강원도 지방문화재자료 25호

보덕사에서 100m 정도 오르면 보덕사의 옆구리로 흐르는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있다. 다리에는
보주(寶珠)를 상징하는 듯한 둥그런 돌이 난간의 역할을 대신한다. 다리를 건너서부터 길은 시
멘트길에서 흙길로 변화되고 민가도 눈에 띄게 줄어든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자리를 바꾼 계
곡 건너는 범인(凡人)은 함부로 들어가선 안되는 신성한 구역처럼 소나무가 빽빽하다. 바로 장
릉(莊陵)을 안고 있는 동을지산이다. 영월에서 장릉은 완전 성역(聖域)이나 다름없다.

다리를 건너 500m 정도 가면 숲이 울창한 발본산의 품으로 들어서게 되며, 비로소 나그네를 핍
박하던 뜨거운 햇빛에서 자유롭게 된다. 여기서 절까지는 아름다운 숲길로 길 옆에 청류(淸流)
의 개울이 졸졸졸 노래를 흐르며 한강(漢江)으로 흘러간다. 나무들이 베푼 청정한 기운에 속세
에서 지니고 온 번뇌가 싹 씻겨내려간 듯 마음이 시원해진다.


▲  가을에 슬슬 물들어가는 금몽암 숲길
보덕사와 달리 인적이 뜸한 금몽암 숲길, 숲길에 충만한 맑고 청정한 기운을
나 혼자 독점하며 마음껏 누려본다. 이곳의 맑은 공기, 우리집으로 훔쳐와
영원히 맛보고 싶을 따름이다.

▲  금몽암을 찾은 나그네를 오래된 호도나무

금몽암에서 식량을 충당하고자 심은 호도나무로 나이가 무려 250년에 달한다. 결코 없어지지 않
는 오랜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키가 18m에 이르는 어엿한 나무로 성정했으며, 나무 둘레는 0.6m
이다. 강원-영월-58호

▲  제법 묵은 티가 풍기는 금몽암 해우소

▲  보관(寶冠)을 쓴 홀쭉한 미륵불

푸르른 숲길의 끝에는 양반가의 별장 같은 금몽암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그런데 생겨 먹
은 것은 절집과는 거리가 있는 양반가의 기와집 형태를 띄고 있어 이곳에 온 나그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내가 번지수를 잘못 짚었나?' 허나 그곳은 엄연한 절집 금몽암이다.

금몽암은 의상대사가 세웠다는 보덕사의 전신(前身), 지덕사(旨德寺)의 옛 자리라고 전하나 근
거는 없다. 암자의 이름이 특이하게도 '궁궐<'禁'에는 궁궐이란 뜻도 있음>에서의 꿈'을 뜻하는
금몽암인데 이는 단종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와서 관풍헌(觀風軒)에서 마지막 해를 보내던 1457년 어느 날, 근교를 거
닐다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데, 궁궐에 있을 때 꿈 속에서 본 절과 완전 같았다고 한다. 그래
서 '궁궐에서 꿈꾸었던 암자'란 뜻에서 금몽암(금몽사)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 단종을 배향(配享)하는 원당(願堂)이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10년에 영
월군수 김택용(金澤龍)이 중수하여 노릉암(魯陵庵)이라 하였다. 1662년 군수 윤순거(尹舜擧)가
절을 수리하여 지덕암이라 했으나 1698년 보덕사가 장릉의 원찰(願刹)이 되면서 암자는 문을 닫
았다. 그러다가 1745년(혹은 1770년) 장릉 참봉(參奉) 나삼(羅蔘)이 기와집을 짓고 암자로 삼아
금몽암이라 했다.

금몽암은 'ㄱ'자 모습의 툇마루를 갖춘 16칸의 기와집이 전부다. 돌로 높이 석축을 쌓아 그 위
에 높다랗게 지어졌는데, 그 안에 법당과 선방(禪房), 공양간이 담겨져 있으며, 절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주문(一柱門)이나 천왕문, 석탑은 아예 없다.


▲  모습을 드러낸 금몽암
절집보다는 양반가의 별장에 들어선 기분이다. 이렇게 봐서는 그 누가
절이라 여기겠는가~~?

▲  금몽암으로 들어서는 대문
빗장을 열고 열고 들어가면 금몽암 본당과
좁은 뜨락이 나온다.

▲  언제봐도 늘 정겨운 돌담장
울긋불긋한 담쟁이덩굴을 이불로 걸치며
초가을의 단잠을 즐긴다.


▲  금몽암 현판이 걸린 금몽암 본전(本殿)


▲  불단에 봉안된 석가3존불
가운데 석가불이 좌우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대동하며 환한 미소로
중생을 맞는다. 저들은 1978년에 조성되었다.

▲  석가의 설법장면을 담은 영산회상도

▲  불단 한쪽에 자리한 지장보살상


▲  누각 형태의 금몽암의 북쪽 부분
강당 및 손님 맞이 공간으로 벽을 두지 않고 활짝 속살을 보이고 있으며,
그 밑에는 창고가 있다.

▲  북쪽 부분 내부
순전히 나무로 이루어진 우리네 전통 한옥의 형태로 이곳에 자리 피고 앉으면 숲과
계곡에서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의 희롱을 즐기며 더위를 잊기에 아주 좋다.
탁자에는 차 1잔의 여유를 누리게끔 다기(茶器)가 놓여져 있다.


▲  속세에 숨겨진 숨겨진 금몽암 본전 뒤쪽 부분

본전 기와집이 전부인줄 알았더만 그게 아니었다. 그 뒤쪽에도 저렇게 공간이 있었다. 허나 본
전에 완전히 가려져 외부에는 잘 드러나지 않은 비탈진 공간으로 장독대와 근래에 지어진 정면
1칸, 측면 1칸의 조촐한 산신각이 자리를 채운다.

부엌 남쪽에는 산에서 해온 듯한 장작더미가 정겨운 풍물시(風物詩)를 연출한다. 절 남쪽 그러
니까 앞의 호도나무 뒤쪽 산자락에는 절에서 꾸리는 넓지 않은 밭이 있으며, 주차장 부근에 옥
계수가 쏟아지는 약수터가 있는데 물맛이 개운하다.

속세의 기운이 들어오기 힘들 듯한 깊은 산중에 터를 닦은 금몽암, 마치 첩첩산 산골에 남몰래
자리한 신선의 별장에 들어선 듯 기분이다. 부엌이 현대화된 것 외에는 조선 후기 한옥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울창한 숲속에 자리해 있어 속세를 잠시 등지고 싶을 때 소리 없이 다
가가 살짝 안기고 싶은 절집이다.

※ 금몽암 찾아가기 (2013년 11월 기준)

* 보덕사에서 12분 정도 걸으면 금몽암이다. (절 앞에 주차장 있음)
*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1117 (보덕사 ☎ 033-374-3169)


♠  단종애사의 현장 낙화암과 민충사, 금강정을 품으며
쪽빛 물결의 동강을 굽어보는 영월 금강공원(錦江公園)

영월 땅에 무수히 서려있는 단종애사(端宗哀史)의 현장 가운데 낙화암(落花岩)을 빼놓을 수 없
다. 낙화암하면 흔히 부여(扶餘)의 낙화암을 떠올릴 것이다. 660년 7월 나당(羅唐)연합군에게
백제의 도읍인 사비성(泗泌城, 부여)이 털리자 여인 수백 명이 한 송이의 가련한 꽃잎이 되어
떨어진 그 현장 말이다. 그 연유로 낙화암이란 이쁘고도 구슬픈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인데, 그런
낙화암이 부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부여의 그곳처럼 깎아지른 낭떠러지에 벽수(碧水)가 흐르
는 곳, 거기에 적절한 사연을 가진 여인네가 몸을 던지면 그곳이 바로 낙화암이 되기 때문이다.
영월의 낙화암 역시 그런 조건을 갖추었는데, 이곳에서 몸을 던진 여인은 단종을 시종하던 시녀
(侍女) 6명이다.
그들 중 궁녀(宮女)는 서울에서 같이 내려왔고, 관비(官婢)는 영월 관아에서 단종의 편의를 위
해 딸려주었다. 1457년 10월 24일 유시(17~19시)에 단종이 쓰디쓴 사약을 마시며 인생을 강제로
내려놓자 궁녀와 관비는 슬피 울면서 바로 이곳에서 몸을 던져 단종의 뒤를 따랐다. 이때 죽은
이는 궁녀 자개(者介)와 불덕(佛德), 관비 아가지(阿加之), 무녀 용안(龍眼), 내은덕(內隱德),
덕비(德非)로 전한다. 그들의 넋은 단종의 무덤을 찾아와 두견(杜鵑)이 되었다고 전하는 단종의
영혼 앞에 울면서 절을 했다고 하는데, 그 현장이 장릉 동쪽의 배견정(拜鵑亭)이라는 것이다.

영월 낙화암은 동강을 굽어보는 아찔한 절벽으로 금강정에서 동쪽으로 50m 떨어져 있다. 충절의
꽃을 피운 단장의 현장이라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이곳의 애절한 사연을 아는지 모
르는지 동강은 그저 그의 갈 길만 재촉할 뿐이다. 대자연이 빚은 빼어난 경승지라 풍경은 차관
도 아닌 장관을 이루며, 칼같이 솟은 산자락 사이로 동강과 서강 2개의 강이 만나는 곳에 베개
삼아 누워있는 영월 고을의 포근함이 느껴진다.

이렇게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는 정자나 누각이 있기 마련으로 조선 세종 때 지어진 금강정이란
정자가 있다. 또한 단종의 뒤를 따른 시녀의 넋을 모신 민충사가 낙화암을 바라보고 있으며, 영
월의 춘향으로 일컬어지는 고경춘의 순절비가 시녀들이 충절을 바치며 몸을 던진 그 자리에 서
있다. 이 일대를 통틀어서 금강공원이라 불리는데, 수목이 울창하고 청정한 동강이 바로 아래라
선선한 강바람이 언제나 공원에 감돈다. 수목에 감싸인 호젓한 산책로는 햇빛이 들어오기 버겨
울 정도로 한여름의 염통마저 쫄깃하게 만든다.

금강정과 낙화암 강변은 천길 낭떠러지라 탐방에 주의가 필요하며, 공원 바로 서쪽에는 KBS영월
방송국이 늘씬한 방송탑을 하늘 높이 띄우고 있다. 그리고 공원 뒤쪽에는 영월8경의 하나인 봉
래산(蓬萊山, 800m)이 장대한 모습으로 읍내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 정상에는 영월의 신세대 명
소로 주목을 받는 별마로천문대가 있다.


▲  영월대교에서 바라본 동강과 낙화암(왼쪽)
멀리 보이는 다리는 태백으로 통하는 38번 국도이다.

▲  영월읍내 비석거리와 창절서원(彰節書院)에서 가져온 오래된 비석들
선정비와 불망비 등 고을 원님을 찬양하는 비석이 주류를 이룬다. 허나 저들 중에
속칭 비석치기의 대상이 된 비석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  자연의 아름다움이 깃들여진 전나무 숲길
늘씬한 자태를 선보이며 하늘을 향해 솟은 전나무들, 그들의 그늘에는
영월이 낳은 인물들의 기념비가 싹을 틔웠다.


▲  금강공원 산책로
한참 푸르름의 절정에 이른 나무들 사이로 호젓한 산책로가 나그네를 반긴다.
저 길을 거닐다가 갑자기 신선이나 선녀에게 잡혀가는 것은 아닐까?


▲  금강정(錦江亭) - 강원도 지방문화재자료 24호

금강공원 중간 부분에는 영월읍민의 오랜 휴식처인 금강정이 동강을 굽어보고 있다. 조망이 장
관인 금강정은 1428년 영월군수 김복항(金福恒)이 이곳 절경에 감탄하여 가산(家産)을 털어 지
은 정자라고 전한다. 1684년에는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이곳 경관에 반해 금강정기(錦江
亭記)를 썼으며, 이승만(李承晩) 대통령도 '錦江亭' 현판을 남기며 이곳에 대한 마음을 비췄다.

금강정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현판이 가운데가 아닌 좌측으로 조금 쏠려 자
리한 것이 특이하며, 정자 앞에는 근래에 만든 조망대가 있는데, 동강과 영월읍내 남쪽이 훤히
바라보여 두 눈이 제대로 호강을 누린다.


▲  금강정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1)
동강에 다리를 담구며 영월읍의 남과 북을 이어주는 2개의 다리(영월대교, 동강대교)가
멀리 바라보인다. 다리 아래로 시리도록 맑은 동강이 넓은 세상을 향해 길을 재촉한다.

▲  금강정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2)

▲  단종의 뒤를 따른 6명 시녀의 혼이 깃들여진 민충사(愍忠祠) -
강원도 지방문화재자료 27호

금강정 뒤쪽 언덕에는 영월 낙화암의 주인공인 6명의 시녀를 기리는 민충사가 자리해 있다. 시
녀의 사당이라 그런지 사당은 매우 소박하고 조촐한 규모로 1742년(영조 18년)에 지어져 민충(
愍忠)이란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1791년 영월부사 박기정(朴基正)이 중수했다. 그후 6.25 때
파괴된 것을 영월군수 남원수(南元壽)가 다시 지었고, 그들이 동강에 몸을 던진 매년 음력 10월
24일에 영월군수가 제주(祭主)가 되어 제를 올린다.


▲  썰렁한 민충사 내부
시녀와 종인(從人) 2개의 신위(神位)가 멋떨어진 책상 위에 봉안되어 있다.
그들은 천한 신분인지라 개인별로 신위를 두지 않고 달랑 2개로 압축을 했는데
아무리 충절의 여인네라 한들 거기서도 계급상의 차별은 엄연히 존재했다.

▲  낙화암에 세워진 2기의 비석
민충사에 주인공인 6명의 시녀를 기리는
비석이다.

▲  낙화암을 다시금 빛낸 영월의 춘향(春享)
기생 고경춘(高瓊春)의 비석

낙화암을 지나면 고색이 짙은 조그만 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세월이 달아준 고된 세
월의 때로 얼룩진 이 비석은 영월의 춘향인 고경춘을 기리고자 세운 비석이다.
그녀는 1757년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생부인 고순익(高舜益)은 마음이 좋은 선비로
평소에 단종을 추모하며 살았다고 전한다. 딸이 태어나자 단종(노산군)이 점지해준 옥같은 딸이
란 뜻에서 이름을 노옥(魯玉)이라 했다.

노옥은 용모가 곱고 문학도 뛰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고을에서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허
나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면서 남동생과 어렵게 생활하는 처지가 되었고, 추월(秋月)이란 늙은
기생의 수양딸로 들어갔으나, 그 역시 생활이 넉넉치 못해 할 수 없이 기생(妓生)이 되고 만다.

기생이 되면서 경춘(瓊春)이란 기명(妓名)을 사용했는데, 늘 몸가짐을 바로하여 명성이 날로 높
아져 갔다. 그러다가 16세 때 장릉에서 영월부사 이만회(李萬恢)의 아들인 이수학(李秀鶴)을 만
나면서 춘향과 이몽롱처럼 그들은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허나 부사는 임기가 만료되어 서
울로 돌아갔고, 이수학 역시 과거를 본다며 상경을 했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여 돌아와 청혼을
할테니 3년을 기다려 달라고 청했고, 서로 끝없는 이별의 눈물을 뿌리며 그렇게 헤어지게 된다.

그후 새로 부임한 부사가 오자마자 병으로 죽자 그 대타로 문장가인 신광수(申光洙)가 영월부사
로 오면서 경춘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그는 경춘의 미모에 군침을 흘리고는 수청을 강요했는데,
경춘은 예전 부사의 아들인 이수학과의 관계를 말하며 수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뚜껑이 열린 신
광수는 수청을 들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집요하게 위협을 했다. 아무리 하소연을 해도 부사
는 고집불통이었다. 서울에 있는 이수학에게 연통을 띄워 어떻게든 도움을 청하면 되지 않았을
까 싶지만 영월과 서울은 먼 거리라 연통을 급히 띄울 처지도 되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면서 부모의 산소를 찾아가 하직 인사를 올린 후, 낙화암에서
이수학이 준 사랑의 증표를 꼭 지닌 채, 300년 전 단종을 위해 죽은 시녀들처럼 한 송이의 의로
운 꽃이 되어 동강으로 지고 말았다. 그때 그녀의 나이 불과 16세, 때는 1773년이었다.

그해 12월 신광수는 여러 비리가 밝혀져 관직에서 떨려났으며, 경춘이 순절한 지 20여년이 지난
1795년 순찰사(巡察使)인 손암 이공(遜岩 李公)이 영월을 순시했을 때 경춘의 서글픈 사연을 전
해 듣고 비석 건립을 후원했다. 이때 평창부사 남의로(南義老)가 글을 짓고 영월부사 한정운(韓
鼎運)이 글씨를 써 그녀가 투신한 현장에 '월기경춘순절지처(越妓瓊春殉節之處)'란 비석을 세우
며, 춘향보다 더 매서운 정절을 지닌 그녀의 의기(義氣)를 기렸다. 그런데 그녀와 혼인을 약속
했던 이수학은 서울로 올라간 이후 어찌되었는지는 내용이 없어 모르겠는데, 아마 곧게 죽지는
못했을 듯 싶다.
금강공원을 끝으로 강원도의 지붕, 영월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닫는다. ~~~

※ 금강공원 (금강정, 민충사, 낙화암) 찾아가기 (2013년 11월 기준)
* 영월역을 나와서 왼쪽(읍내 방면)으로 가면 덕포4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읍내 방면 북쪽 길로
  가면 영월대교인데, 다리를 건너면 바로 KBS영월방송국으로 오르는 금강공원길이 나온다. 그
  길로 접어들면 금강공원으로 이어진다. (찾기는 매우 쉬움)
* 영월터미널에서 중앙로를 따라 영월역 방면으로 10분 정도 곧게 가면 왼쪽에 KBS영월방송국으
  로 오르는 금강공원길이 나온다.
*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78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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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11월 2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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