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의 길목에서 찾아간 하남시 춘궁동 나들이 '

▲ 춘궁동 3층/5층석탑
여름의 제국을 남쪽으로 밀어내고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수식하던 가을의 한복판에 17년 의 숙성을 자랑하는 오랜 친구를 끌고 하남시 춘궁동을 찾았다.
하남시(河南市)는 인구 15만을 지닌 조그만 도시로 서울 동쪽에 위치한다. 수도권을 이루 는 수많은 도시의 하나지만 서울이란 커다란 그늘에 가려 제대로 빛을 못보고 있다. 원래 는 광주군(廣州郡, 현 광주시)의 일부였으나 1989년 동부읍(東部邑)과 서부면, 그리고 중 부면의 일부를 취해 하남시로 분리, 승격되었다. 하남이란 이름은 백제의 옛 도읍인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에서 유래되었다.
하남시의 구성원인 춘궁동(春宮洞)은이성산(二聖山)과 남한산(南漢山) 사이에 둥지를 튼 시골마을로 하남위례성 자리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곳은 하남시 문화유산의 보고(寶庫)로 풍부한 문화유산을 품고 있으며, 신라 때 축성된 이성산성(二聖山城)을 비롯하여 옛 절터 인 동사(桐寺)터와 춘궁리석탑 2기가 전한다. 또한 춘궁동은 행정동(行政洞)으로 법정동( 法定洞)인 교산동과 상사창동(上司倉洞)을 관리하고 있다.그래서 교산동의 광주향교(廣州 鄕校)와 선법사(善法寺) 태평2년명마애약사불, 교산동 건물유적, 상사창동의 법화사(法華 寺)터, 연자마(硏子磨)도 춘궁동에 자연스레 포함이 된다. 이렇게 볼거리들이 풍족하지만 정작 백제(百濟)와 관련된 흔적은 아직까지도 발견되지 않고 있어 하남위례성으로 보기에 도 다소 무리가 있다.게다가 춘궁동의 명소들은 헤아리기도 힘든 값비싼 가치를 지녔음에 도 등잔 밑처럼 인지도가 낮아 나그네의 발길도 그리 넉넉치가 못한 실정이다.
우리는 둔촌역(5호선)에서 하남마을버스 1번을 타고 춘궁동 골짜기의 고골낚시터(저수지) 에서 내렸다. 낚시터 입구에는 우리가 문을 두드릴 춘궁동동사지와 다보사를 알리는 이정 표가 미리 나와 마중한다. 정류장 바로 아래에 펼쳐진 푸른 물결의 저수지는 가을 가뭄의 심각성을 일깨워주듯 수량이 별로 없다. 한가로이 낚시줄을 드리운 강태공(姜太公)들만이 이곳이 낚시터임을 말해준다. 저수지 주변에는 분위기를 진하게 앞세운 까페와 주막 몇집 이 나그네를 유혹한다. 부처의 세계를 목전에 둔 속세의 마지막 유혹이라고나 할까?
수도권외곽고속도로의 아랫도리(굴다리)를 지나면 '이곳은 문화유적지이니 개발과 농사를 금한다'는 안내문이 나온다. 여기서 정면으로 숲이 무성한 곳이 보이는데 그곳에 바로 춘 궁동동사지와 석탑 2기, 그리고 그들을 보듬은 다보사가 자리해 있다.안내문의 충고를 가 슴 깊이 새기며 숲으로 들어서면 가을의 전령 코스모스가 산바람에 흩날리며 우리를 영접 한다. 숲이 베푼 산내음에 속세의 잡념을 훌쩍 털어버리며 숲 속의 절 다보사로 들어선다.
|
 ▲ 가녀린 연분홍 코스모스의 흐드러진 가을 미소 그들의 방긋 표정에 나의 마음도 두근두근 어찌할 바를 모른다.~~
 ▲ 저 길의 끝에는 옛 절터 위에 심어진 다보사(多寶寺)가 있다. 한치의 햇볕도 들어오기 힘든 다보사숲은 한참 늦가을 준비에 여념이 없다.
 ▲ 숲 속에 파묻힌 다보사 ~ 이곳이 정녕 절이 맞더냐? 숲으로 들어서면 한폭의 공원, 휴양림 같은 풍경이 나그네의 고개를 잠시 갸우뚱하게 만든다.
|
♠ 탑과 주춧돌만을 남긴 채 홀연히 사라진 드넓은 옛 절터 인적이 드물어 자연의 속삭임만이 귀를 간지럽히는 춘궁동 동사지(春宮洞 桐寺址) - 사적 352호
 |
동사터는 이성산(二聖山) 남쪽 자락에 아늑하게 안긴 44.587㎡의 드넓은 절터이다. 석탑 2기를 안테나처럼 속세에 드러내며 자연에 묻혀 기나긴 잠을 자던 이곳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1988년 이다. 그때 발굴조사로 '동사(桐寺)'라 쓰인 기와가 발견되어 절의 이름이 동사임이 드러났다. 이름에 동(桐)을 쓴 것을 보니 옛날에 절 주변에 오동나무가 많았던 모양이다.
절터의 범위는 이곳에서 수도권외곽고속도로 아랫도리까지 이른다. 1988년 발굴조사로 금당터를 비롯한 4곳의 집터가 모습을 비추었는데, 탑을 바라보며 동향(東向)을 취한 것으로 보이는 금당 (金堂)은 경주 황룡사(皇龍寺) 금당에 버금가는 거대한 건물로 그 터에는 본존불을 안치하던 직 경 5.1m의 8각형 불대좌(佛臺座)가 아련하게 남아있다. 출토된 유물은 금동불(金銅佛)과 막새기 와, 절의 이름이 새겨진 기와, 그릇과 도자기 등이다.
창건시기는 신라 후기나 후삼국시대(9~10세기 초반), 늦어도 고려 초기(10세기 중, 후반)로 여 겨진다. 특히 고려 초에 광주(廣州) 지역에는 왕규(王規, ?~945)의 광주왕씨 세력이 있었는데, 춘궁동 일대가 바로 광주의 중심이었다. (조선 후기까지 광주의 중심은 춘궁동) 태조(太祖)의 외척으로 잘나가던 왕규는 집안의 안녕과 세력의 과시를 위해 막대한 재정을 쏟아부어 동사를 세웠을 가능성도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다.
왕규는 그의 딸을 태조의 15, 16번째 비(妃)로 보내면서 막강한 권력을 누렸으며, 외손(外孫)인 광주원군(廣州院君)을 제위에 올리고자 혜종(惠宗, 재위 943~945)을 시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결국 945년 정종(定宗)에게 참살되면서 그의 세력은 풍비박산이 났다.
웅장한 규모를 자랑했던 동사는 관련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으나 고려 후기나 조선 초기까지는 법등(法燈)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탑 2개만을 남긴 채 홀 연히 증발해버리고 말았다. 절이 망한 원인은 산사태 등의 자연재해나 화마(火魔)의 유린으로 여겨질 뿐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넓직한 절터에는 근래에 터를 닦은 다보사(多寶寺)란 조그만 절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보사 는 말그대로 보물이 많은 절인데, 절터에서 많은 유물이 쏟아져 나와 그리 이름을 지은 모양이 다. 건물이라고 해봐야 법당(法堂)과 요사(寮舍) 및 종무소로 쓰이는 건물 2채가 전부이고 찾는 이도 적어 아직까진 옛 동사의 영광을 재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절터를 휘감은 숲 속으로 들어서면 마치 공원과 휴양림같은 풍경에 이곳이 정녕 절이 맞더냐? 번지수를 잘못 짚었나? 싶은 의심이 밀려온다. 하지만 맞게 찾아왔다. 예전에 2번이나 발걸음을 했던 곳인데 길눈 하나는 타의 추종을 거절하는 내가 어찌 잘못 짚을 리가 있겠는가. 대머리처 럼 허전한 절터를 나무들이 가발처럼 든든히 덮어주니 왠지 모를 따뜻함이 밀려온다. 숲 한복판 에는 조촐한 정자를 지어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에게 쉼터를 제공한다. |
 |  |
▲ 다보사 샘터 | ▲ 툇마루를 갖춘 다보사 법당 |
숲 속의 절이란 표현이 어울리는 다보사는 나무들의 속삭임이 귀를 울릴 정도로 고요하기만 하 다. 절터에 담긴 오랜 역사를 먹고 자란 늘씬한 나무들이 베푸는 신선한 기운은 속세에 유린된 중생의 마음을 치유해준다.
요사 앞에는 조그만 거북이가 물을 베푸는 샘터가 있다. 가을가뭄이 여전함에도 동그란 석조(石 槽)에는 늘 옥계수로 넘쳐나니 가뭄은 아마도 다른 세상의 이야기인가 보다. 석조 위에는 특이 하게 우산 모양의 가리개가 떠 있어 그들을 비와 눈으로부터 지켜준다. 시원하게 몇 모금 들이 키니 오장육부가 싹 뚫린 듯, 마음이 상쾌해진다.
북쪽을 바라보는 다보사의 법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특이하게 건물 앞 쪽으로 넓직한 툇마루를 갖추고 있는데, 법당 불단에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觀音菩薩) 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의 3존불이 온후한 표정으로 중생을 위무한다.
|
 ▲ 법당 불단에 봉안된 3존불(왼쪽부터 지장보살, 석가여래, 관음보살) 3존불 뒤로는 후불탱화 대신 책들이 꽂힌 서장(書欌)이 그들의 뒤를 받쳐준다.
 ▲ 금당터에 남은 8각 불대좌(佛臺座)의 흔적
|
푸른 잡초가 얕게 뒤덮힌 샘터 우측 공터에 동그란 흔적이 중생들의 눈길을 잡아끈다. 그 가운 데로는 구멍이 뚫린 주춧돌이 하나 박혀 있는데, 바로 큰 규모를 자랑했던 옛 법당터로 불상을 모시던 8각 불대좌 아랫도리의 흔적이다. 그 주변에는 법당의 주춧돌이 어지러이 흩어져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법당의 전체적인 윤곽은 땅속에 묻혀 있다. |
♠ 동사터 동쪽에 다정히 솟아난 2기의 석탑 - 춘궁리5층석탑(보물 12호), 춘궁리3층석탑(보물 13호)

 ▲ 맵시가 돋보이는 춘궁동석탑 형제 |
동사터 동쪽 넓다란 공터에는 서로 대비되는 모습의 석탑 2기가 나란히 솟아있다. 하나는 키다 리의 5층석탑이고, 그 옆에는 몽당연필같은 3층석탑이다. 키의 차가 크긴 하지만 형과 아우처럼 서로를 보듬듯 다정한 모습이 보는 이의 마음을 훈훈하게 한다.
이들은 옛 동사의 석탑으로 고려 초기(10세기 후반 정도)에 조성되었다. 그들 동쪽으로 금당(법 당)터가 있으니 금당은 분명 이들을 바라보는 동향(東向)이었을 것이다. 그럼 절의 가람배치는 자연히 1금당 2탑(2금당 2탑이라는 의견도 있음)의 형식이 되는데 이는 신라 후기에서 고려 초 기까지 많이 나타나는 전형적인 가람배치와 일치한다.
잔디가 곱게 깔린 터 위에 뿌리를 내린 석탑 형제는 천년이 넘은 연세에도 다행히 건강상태는 양호하다. 이들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각각 '광주 춘궁리5층석탑','광주 춘궁리3층석탑'이다. 이곳이 광주에서 분리되어 하남시가 된지 20년이 훨씬 흘렀고, 자연히 춘궁리는 춘궁동으로 바 뀌었음에도 명칭은 1963년에 지정된 이름(그때는 광주군 서부면 춘궁리)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 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탑이 광주 어느 구석에 있는 것으로 오인하기 쉽상이다. 게다가 배꼽을 잡도록 웃기는 것은 석탑을 품은 동사터의 문화재명은 '하남 춘궁동동사지'라는 것이다. 같은 곳에 있음에도 석탑은 쾌쾌묵은 옛 지명의 이름을 지니고 있고, 절터는 현재 지명에 맞게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동사터가 하남시가 탄생한 이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고 행정지명이 바뀌었음에도 문화재명이 요지부동인 곳이 한둘이 아니니 이제는 옛 이름을 과감히 내버리고 현실에 맞게 고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더이상 이곳은 광주 군 춘궁리가 아닌 하남시 춘궁동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마땅한 이름으로는 '하남 춘궁동5층석탑 '과 '하남 춘궁동3층석탑'이 적당해 보인다. 하지만 석탑 형제는 세상이 그들을 뭐라고 부르던 그것은 관심 밖일 것이다. 명칭은 인간들이 알아서 부를 일이고, 그들에겐 지금의 자리에서 서 로를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 밖에는 관심이 없을테니 말이다.
|

| 
|
▲ 춘궁동5층석탑 (보물 12호) | ▲ 춘궁동3층석탑 (보물 13호) |
석탑 형제의 맏이인 춘궁동5층석탑은 2중의 기단(基檀)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얹힌 형태로 탑신을 구성하는 네모난 돌이 벽돌처럼 다듬어서 쌓은 이른바 모전석탑(模塼石塔)을 연상케 한 다. 1층 탑신은 위, 아래로 2단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아랫부분은 4개의 네모난 돌을 두고, 그 위에 1장의 돌을 얹었다. 이는 고려 때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양식이라고 한다. 지붕돌을 구성하 는 돌도 1~3층은 4장, 4층은 2장, 5층은 1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위로 갈수록 적절하게 축소되 는 모습이 탑의 맵시를 더욱 균형적이고 안정적이게 해준다. 지붕돌 모서리는 뚜렷하게 치켜올 려 시원한 맛을 준다. 탑의 꼭대기는 머리장식인 노반(露盤)으로 마무리를 하였다,
지붕돌 모서리의 각도 정도나 기단을 2중으로 한 것은 신라 후기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지붕돌 받침수가 3~4단으로 줄어들고 기단 가운데에 새긴 기둥 수가 줄어든 것으로 보아 절이 창건된 시절인 고려 초기(10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1966년 탑을 보수할 때 납석으로 만 든 조그만 탑들이 여럿 나왔다. 오랜 세월이 무수히 흘렀음에도 온전하게 남아 있으니 정말 다 행이 아닐 수 없다.
석탑 형제의 막내인 춘궁동3층석탑 역시 2중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얹혔다. 높이 3.6m의 이 탑은 기단의 아랫부분 일부가 떨어져 나가고 탑신의 기둥과 지붕돌의 모서리 일부에 세월이 할 퀴고 간 상처가 배여있어 안타까움을 건넨다. 하지만 그 나이에 그 정도면 그래도 양호한 편이 다. 지붕돌 모서리는 5층탑처럼 치켜올림이 뚜렷하며 1층과 2,3층 탑신의 크기가 줄어드는 비율 에 따라 지붕돌도 작아지고 있어 안정적인 인상을 준다. 탑의 양식도 신라 후기 탑 양식을 지니 고 있어 빠르면 고려 초기, 늦어도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1966년 탑을 수리할 때 곱돌로 된 조그만 탑이 발견되기도 했으며, 옆의 5층석탑과 모양과 조성시기에서 크게 차이 가 나 다른 곳에서 가져왔을 가능성도 있다.
|
 ▲ 누가 하얀 소금을 무책임하게 뿌린 것일까? 절터를 가득 메운 나무쑥갓(마가렛)의 하얀 물결
|
절터의 구체적인 가람 배치는 금당을 제외하고는 자료가 없어서 모르겠다. 지금은 들꽃과 들풀, 나무. 낙엽이 골고루 넓은 절터를 나누어 메우고 있으나 이 일대를 건물로 가득 메웠을 동사의 웅장한 모습이 머리 속에 대충이나마 그려져 실제 그 광경을 대했다면 황룡사처럼 가히 볼만했 을 것이다. 오직 상상 속에서만 살아 숨쉬는 동사의 옛 모습, 지금은 자연이란 존재가 폐사(廢 寺)의 상처를 지닌 절터를 따스히 덮어준다.
※ 춘궁동동사터(다보사) 찾아가기 (2010년 2월 기준) * 지하철 5호선 둔촌역(3번 출구)에서 1번 마을버스나 80번 시내버스를 타고 고골낚시터 하차, 도보 10분 * 지하철 2,8호선 잠실역(7번 출구), 5호선 올림픽공원역(2번 출구)에서 30-5번 시내버스를 타 고 고골낚시터 하차. * 승용차로 갈 경우 (절까지 접근 가능하며 경내에 주차장 있음) ① 서울 잠실역 → 올림픽대교 남단5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직진 → 서부입구4거리(서하남나들목) 에서 직진 → 고골낚시터에서 우회전 → 굴다리를 지나 직진하면 다보사 ② 서울 천호동 → 길동4거리 지나서 보훈병원으로 우회전하여 직진 → 서부입구4거리에서 좌회 전 → 고골낚시터에서 우회전 → 다보사 ③ 수도권외곽고속도로 → 서하남나들목을 나와서 하남방면으로 우회전 → 고골낚시터에서 우회 전 → 다보사 * 소재지 -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41일대 (다보사 ☎ 031-792-9663)
|
♠ 경기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던 향교, 광주 고을의 중등교육기관 광주향교(廣州鄕校)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3호
 ▲ 광주향교 대성전(大成殿) |
춘궁리동사지와 고려시대 석탑 2기를 품은 다보사를 뒤로 하고 고골낚시터 정류장에서 하남시내 쪽으로 걷다보면 이성산성을 알리는 이정표가 잠시 들렸다 가라며 손짓을 한다. 허나 그곳은 오 늘의 목적지가 아니므로 그냥 지나쳤다. 춘궁동주민센터와 서부농협을 지나면 고골4거리가 나오 는데, 정면 길 건너편에 운치가 서린 소나무가 그림처럼 자리한 한옥과 담장이 보일 것이다. 바 로 그곳이 옛 광주고을의 교육을 맡았던 광주향교이다.
향교는 조선정부가 지역 백성들의 교육 및 교화를 위해 고을마다 세운 국립지방교육기관으로 오 늘날의 국립중학교와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초등학교인 서당(書堂)을 졸업한 학생들은 향 교로 진학하여 소과(小科)에 응시하거나 서원(書院)으로 진학했다. 교육 외에도 조선정부가 신 봉하던 공자 등의 유교성현(儒敎聖賢)에게 제사를 지내는 기능도 지니고 있다.
광주향교가 언제 세워졌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1703년 옛 광주관아 서쪽에 있던 것 을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향교의 구조는 앞쪽에 학생들을 가르키던 명륜당(明倫堂)이 있고 우리나라 및 중국의 유교성현에게 제를 지내는 대성전이 뒤에 있는 유식한 말로 전학후묘(前學 後廟)의 형태이다. 명륜당 양쪽으로 기숙사로 쓰이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고, 대성전 좌우로 제사 공간인 동무(東撫)와 서무(西憮)가 있다. 그외에 내삼문과 외삼문, 향교지기의 숙 소인 수복실(守僕室)이 있다.
이 향교는 수도권에서 가장 큰 향교이자 평지에 세워진 유일한 향교로 갑오경장(甲午更張, 1894 년) 이후 다른 향교와 마찬가지로 교육의 기능은 사라지고 오로지 제사 기능만 남아있다. |
 ▲ 향교 앞에 세워진 하마비(下馬碑)
|
향교 앞에는 조그만 하마비가 빛바랜 옛 향교의 권위를 조금이나마 드러내 보인다. 하마비는 하 마 서식지가 아닌 말에서 내려 걸어가란 뜻의 명령이 담긴 비석이다. 보통 궁궐이나 관아, 왕릉 , 격이 높은 사당, 향교, 서원 앞에 하마비를 세우는데 말을 탄 관원과 사람들은 그 앞에선 모 두 말에서 내려야 했다. |
 |  |
▲ 점차 노란색으로 물들어가는 은행나무 수령 450년 / 지정번호 하남-3호 / 높이 32m / 둘레 6.7m | ▲ 아직 푸른색 옷을 고수하는 은행나무 수령 450년 / 지정번호 하남-2호 / 높이 30m / 둘레 2.9m |
향교 주변(주로 담장 서쪽)에는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많다. 그중 3그루는 하남시 지정 보호수로 나이가 무려 450년에 이른다. 키가 30 ~ 32m에 이르고 둘레는 2.9 ~ 6.7m로 늘씬한 자태를 자랑 한다.
은행나무는 우리 지구에서 제법 오래된 식물로 살아있는 화석으로 일컬어진다. 다른 나무와 달 리 인간이 심은 것이 주류를 이루는데, 향교나 서원, 선비와 양반의 집 뜨락에는 꼭 은행나무가 있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공자(孔子)가 은행나무 아래서 강의를 했다는 행단(杏壇)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한참 절정에 다다른 은행나무는 점차 푸른 옷에서 노란 옷으로 갈아입으며 흘러가는 늦가을을 아쉬워 한다. 나무 아래로는 힘없이 내려앉은 은행잎이 한잎, 두잎 땅을 덮는다. 죽음 앞에서는 처절한 아름다움을 보이는 것일까? 노란색이 잔뜩 물들어 늦가을 풍경의 아름다움을 내비친다. 한줌의 재가 되기 싫어 몸부림치는 은행잎의 마지막 발악,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운명인걸 어찌 하리요..
|
 ▲ 현역에서 물러나 쓸쓸함만이 감도는 광주향교 명륜당(明倫堂)
|
우리는 향교 내부로 진입을 시도했으나, 향교로 들어서는 외삼문(外三門)은 굳게 입을 봉한 채 좀처럼 열리려 하질 않는다. 마치 유교의 폐쇄성을 여실히 드러내듯 말이다. 하긴 지금까지 다 녀본 많은 향교 중에서 속살을 시원스레 보여준 곳은 포천향교와 장수향교, 황간향교 뿐이다.
여전히 속세의 관심도가 부족한 향교는 거의 껍데기만 남은 채, 죽어 있는 상태나 다름없다. 절 이나 민속마을처럼 다양한 볼거리도 없고 향교의 모습이 공산품 찍어대듯 그 모습의 그 모습이 라 개성이 많이 떨어진다. 또한 일부를 제외하고는 늘 닫힌 모습으로 일관하기 때문에 접근하기 도 어렵다. 그런 것들이 바로 세상으로 하여금 향교에 대한 관심을 멀어지게 만든다.
※ 광주향교 찾아가기 (2010년 2월 기준) * 지하철 5호선 둔촌역(3번 출구)에서 1번 마을버스나 80번 시내버스를 타고 서부농협 하차, 내 린 자리에서 바로 왼쪽을 보면 길 건너로 소나무와 은행나무가 우거진 한옥이 보일 것이다. 바로 거기 * 지하철 2,8호선 잠실역(7번 출구), 5호선 올림픽공원역(2번 출구)에서 30-5번 시내버스를 타 고 서부농협 하차 * 승용차로 갈 경우 (향교 앞에 조그만 주차장 있음) ① 서울 잠실역 → 올림픽대교 남단5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직진 → 서부입구4거리(서하남나들목) 에서 직진 → 고골4거리에서 고골로 우회전 → 광주향교 주차장 ② 서울 천호동 → 길동4거리 지나서 보훈병원으로 우회전하여 직진 → 서부입구4거리에서 좌회 전 → 고골4거리에서 고골로 우회전 → 광주향교 주차장 ③ 수도권외곽고속도로 → 서하남나들목을 나와서 하남방면으로 우회전 → 고골4거리에서 고골 로 우회전 → 광주향교 주차장
* 향교 내부 관람은 거의 어렵다. 향교 관계자의 허락이 필요하다. * 소재지 - 경기도 하남시 교산동 227-3
|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0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단 블로그는 한달까지이며, 원본
은 2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작게 처리된 사진은 마우스로 꾹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글을 읽으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고 댓글 하나씩 꼭 달아주세요.
* 공개일 - 2010년 2월 18일부터
Copyright (C) 2010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