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 부산 역사 기행 (2005년 11월 19일)'
'중상편 ― 노서동 고분군(호우총,금관총) ~ 노동동 고분군(금령총,봉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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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이름 모를 영혼들이 잠들어 있는 노서동 고분군(古墳群) - 사적 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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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분(雙墳) 형태로 이루어진 노서동 134호 고분 |
인적도 없이 조용한 경주 신사를 이리저리 두리번 두리번 거리다가 다시 고분군을 찾기 위해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남쪽에 있는 그들이 서쪽으로 간다고 나올리는 없을 터,
뒤늦게 그것을 깨닫고는 남쪽으로 발길을 잡아 화랑로를 건너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니 드디어 내가 그렇게나
찾았던 노서동 고분군(사적 39호)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옛 신라의 제왕(帝王), 망족(望族, 귀족), 왕족들의 무덤들.. 신라 지배층들의 전용 사후(死後) 공간이었던
이 곳은 일반 백성들의 접근이 철저히 통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천년 제국(帝國) '신라'는
그렇게 사라지고, 지금은 이렇게 경주 시민들의 친근한 공원이 되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아침 산책을 하러 나온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무덤 주변을 한바퀴 돌며 조깅을 즐기는
경주 사람들..
왠만한 언덕보다 더 큰 옛 무덤들이 민가(民家), 건물들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서로 사이좋게 이웃해 있어
고분(古墳)의 도시 경주의 면모가 더욱 짙게 느껴진다. 특히 이런 정감(情感)있는 모습은 오직 경주에서만
볼 수 있다.
노서동 고분군은 왜정 때인 1921년부터 1926년까지 금관총(金冠塚), 서봉총(瑞鳳塚) 등이 발굴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광복 이후에는 호우총(壺?塚), 쌍상총(雙床塚) 등이 발굴되었다.
노서동 고분군의 가솔(家率)은 총 14기 정도로 사적 39호로 지정되었다.
※ 노서동, 노동동 고분군 찾아가기.. (* 2006년 1월 기준)
* 경주역에서 경주터미널 방면으로 도보 10 ~ 15분 거리, 동서 간선로인 '화랑로'로 쭉 가다가 중간에서
'서성로'로 좌회전하여 가다보면 노서동, 노동동 고분군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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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드러운 곡선의 미가 느껴지는 ~ 노서동 130호 고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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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지 바른 곳에 조용히 누워있는 ~ 노서동 132호 고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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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서동 133호 고분 - 마총(馬塚) 말의 뼈가 출토된 연유로 '마총'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고분은 발굴 이전에 이미 유린을 당한 상태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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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낙엽으로 가득한 노서동 고분군 망자(亡者)의 옛 무덤과, 자연에 법칙에 따라 이제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의 처량한 모습.. 땅으로 떨어져 이제 사라질 날만 기다리고 있는 낙엽의 마지막 절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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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서동 137호 고분 - 쌍상총(雙床塚) 1953년에 발굴된 무덤으로 부부가 나란히 누워 있는 '부부합장묘'라 하여 쌍상총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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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서동 고분에서 제일 큰 무덤 ~ 노서동 134호 고분 (사진 3장) 노서동의 가솔(家率) 중에서 유일하게 쌍분(雙墳)으로 되어 있다. 무덤의 크기로 봐서는 아마도 어느 제왕(帝王)의 무덤이 아닐까 생각이 되지만, 자세한 것은 모른다.
쌍분 사이로 속인(俗人)들이 개척한 등산로(?)가 보이는데 예전에 저 무덤 꼭대기에 올라가 천하(?)를 내려다 보곤 하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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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보여주는 산증인 - 호우총(壺?塚, 노서동 140호 고분) 우리나라 사람의 손으로 발굴된 최초의 고분으로 1946년에 국립중앙박물관 조사단에 의해 발굴되었다. 그러나 발굴 이전에 이미 봉분(封墳)은 상당히 파괴된 상태였는데, 무덤의 형태는 신라의전형적인 무덤 양식인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즉 돌을 쌓아서 목곽을 두는 무덤이다.
노서동에 있는 고분 중에서 금관총이나 서봉총도 꽤 유명하지만 이 호우총 역시 대단한 관심을 받고 있는 무덤으로 특히 우리나라 역사학계를 흥분시킨 유물이 나왔던 무덤으로 이름이 높은데, 이 무덤에서는 뚜껑이 달린 명문(銘文)이 쓰인 청동호우(靑銅壺?)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그 명문에는 '을묘년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호우십(乙卯年 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 壺?十)'이라 쓰여 있는데 그 서체가 압록강(鴨綠江) 건너에 있는 광개토대왕비(廣開土 大王碑)의 글씨체와 같은 예서체(禮書體)로되어 있어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물로 크게 주목을받았다.
여기서 을묘년은 장수태왕(長壽太王) 2년인 415년으로 선제(先帝)인 광개토대왕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이 호우는 장수태왕이 그 당시 신라왕―실성왕(實聖王)― 이나 혹은친(親) 고구려파 망족(望族)들에게 하사한것으로 보이며, 이 '호우'로 인해, 무덤의 애칭(?)이 호우총이 되었다.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력을 받게 된 것은 내물왕(奈勿王) 때로, 백제는 속방(屬邦)인 왜국(倭國)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약소국이나 다름이 없던 신라정부는급히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게 되고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은 친히 5만의 군사를 이끌고 396년 신라로 친정(親征), 경주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왜군을 공격한다.
고구려군에게 와해(瓦解)된 왜군은 급히 가야로 줄행랑을 치는데, 광개토대왕은 이들을 추격하여 깨끗히 섬멸시킨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가야(伽倻)연맹까지 고구려군의 파상적인 침공을 받아 상당한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그것이 결국 가야 연맹을 분열과 파멸에 이르게만든다. 또한 고구려의 남진(南進) 정책으로 백제, 신라, 가야의 많은 사람들이전란(戰亂)을 피해 바다를 건너 왜열도로 피난을 갔는데. 어느 사학자는 그 피난 행렬을 이끈 이가 기존의왜왕실을 뒤엎고 왕이 된 인덕왕(仁德王)―오사까(大阪) 시내 한복판에 그의 거대한 묘(전방후원분)가 있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고구려의 구원으로 국난의 위기를 넘긴 신라는 고구려에 의존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고구려의속국이 되는데 충주에 있는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에 의하면 고구려는 신라를동이(東夷)라 낮춰 표현하고 있으며 신라의 군주를 동이매금(東夷寐錦)이라 표현했는데 '매금'은 신라 군주의 고유 명칭인 마립간(麻立干)의 다른 표기이다.
신라왕은 충주(忠州)까지 나와 고구려 태왕(太王)이 내린 의복, 서적 등의 하사품을 받았으며, 고구려는 군사를 서라벌부근에 주둔시켜 신라의 내정을 간섭하였다. 또한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으나,장수태왕 연간(年間)에 고구려의 불교가 신라에 전래되었다.
그러나 5세기 후반, 신라는 고구려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475년 위례성(慰禮城) 패전의 아픔을 간직한 백제와 나제동맹(羅濟同盟)을 맺으며 고구려에 저항, 북쪽으로의 진출을시도하며 영토를 넓히는데 그 사업은 진흥왕(眞興王) 연간까지 계속되었다.
또한 신라 정부는 고구려에서 전래된 불교―고구려화(化) 된 불교―를 매우 강력하게 탄압을 하게 되는데 경주 서출지(書出池)의 전설이그 탄압의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호우총에서는 호우 외에도 금동관(金銅冠), 금제 관드리개, 가는 고리식 금귀고리, 곱은옥이달린 유리구슬, 목걸이, 금팔찌 1쌍과 반지 5쌍, 은제 허리띠와 금동장단룡 환두대도(金銅裝單龍環頭大刀) 1점이 출토되었으며 마구류(馬具類)와 목칠기, 토기, 목심칠면(木心漆面) 등이출토되었다.
무덤의 조성시기는 대략 5세기 중 ~ 후반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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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우총에서 나온 호우와 호우 뚜껑(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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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우에 새겨진 명문(銘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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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덤인가? 언덕인가? ~ 노서동 136호 고분 나무가 외람되게도 무덤에 뿌리를 내리며 그렇게 자라나고 있다. 저 나무는 무덤을 그냥 평범한 언덕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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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서동 135호 고분 134호 고분 다음으로 규모가 큰 무덤으로 무덤 아랫 쪽에 나무가 자라나 있다. 이미 겨울을 준비하고 있는 저 나무는 혹시 저 무덤의 '손(手)'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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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웨덴 왕자(王子)가 파헤친 무덤 ~ 서봉총(瑞鳳塚) 발굴의 휴유증 때문인지 봉분(封墳)은 없어지고 무덤의 흔적만 허전하게 남아 있다. 이 무덤은 1926년에 발굴되었는데, 금관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이 고분은 스웨덴 왕자가 파헤친 것으로 유명한데,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1926년 스웨덴의 왕자이자 고고학자인 아돌프가 그의 마누라 루이스와 함께 왜국을 방문했다. 아돌프는 한참 발굴작업이 이루어 지고 있는 경주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경주에 가게 해달라고 왜국 정부에 요구를 하였다. 국빈(國賓) 방문한 왕자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던 왜국은 그의 경주 방문을 허가. 꿈에 그리던 경주 땅을 밟게 되었다.
경주에 이르러 한참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인 노서동 고분군을 방문했는데, 그는 방문기념으로 직접 서봉총 발굴작업에 뛰어들어 손수 서봉총의 금관을 꺼냈다.
그 이후 스웨덴으로 귀국, 스웨덴의 왕(구스타프 6세)이 되었는데, 그는 서봉총을 파헤치며 금관을 꺼내던 그 순간을 잊지 못했으며 그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그가 꺼낸 금관에는 '鳳'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는데, 스웨덴의 가차자(假借字) 표기인 서전(瑞典)의 '서'와 금관 명문의 '봉'을 따서 무덤의 이름을 서봉총이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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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6세 서봉총 발굴기념비 남의 나라의 왕에게 굳이 폐하(陛下)라는 표현과 '윤허(允許)'등의 존대어까지 써가며 존대를 할 필요가 있을까? 비문(碑文)의 내용에서 '폐하','윤허'라는 단어는 빼버리고, '께서','하시어'등의 표현은 '~는','하여'로 낮춰 썼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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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웨덴 아돌프 왕자가 손수 꺼냈던 서봉총 금관 - 보물 339호 (문화재청 사진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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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서동 128호 고분 ~ 금관총(金冠塚) 노서동의 고분 중에서 제일 유명한 무덤으로 이 곳에서 나온 금관(金冠)은 역사. 미술사, 경주 관련 서적 등의 단골 모델로 크게 활약하고 있다.
이 무덤은 1921년, 부근 주민이 담장을 손보다가 우연히 유물이 발견되어 당시 교토제국대학교(京都帝大)의 총장 하마다(濱田耕作)가 발굴하였는데, 이 때 금그릇, 은그릇, 금반지, 팔찌, 유리잔, 말안장, 토기 등 수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처음으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신라의 금관(金冠)과 금제(金製) 허리띠를 바라본 왜의 사학자들은 그 화려한 모습에 좀처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고한다. 이들 유물들은 왜의 고고학계는 물론 세계 고고학계에 큰 주목을 받았으며 '경주' 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고분은 금관이 나왔다 하여 금관총이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금관이 나온 것으로 봐서 신라의 어느 제왕의 능(陵)으로 생각되나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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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관총 금관 - 국보 87호 (문화재청 사진 참조) ▼ 금관총 금제 허리띠 - 국보 88호 (문화재청 사진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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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관총 나무 금관총에 묻힌 주인공의 혼이 저 나무로 환생한 것은 아닐까? |
♠ 노서동 고분군의 동쪽 이웃 ~ 노동동 고분군(古墳群) - 사적 38호
도로를 사이에 두고 그 서쪽은 금관총, 호우총이 중심이 된 노서동 고분군, 그 동쪽은 봉황대, 금령총이
중심이 된 노동동 고분군이 각각 자리해 있다.
노동동 고분군은 노서동의 그것보다는 보호구역의 범위가 적으며, 가솔(家率)들의 수 역시 노서동의 절반 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대릉원(大陵苑)의 황남대총(皇南大塚) 다음으로 규모가 큰 봉황대(鳳凰臺)가 노동동 고분군의 듬직한
가장의 역할을 하며 노서동 고분들을 압도하고 있으며 금령총에서는 금관총과 호우총에 못지 않은 진귀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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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동 127호 고분 ~ 금령총(金鈴塚) 무덤의 봉분(封墳)은 발굴의 휴유증으로 없어지고 그 흔적만 허전하게 남아 있다. 이 고분은 1924년에 발굴되었는데 소년의 것으로 보이는 금관(金冠)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그 금관에 금방울(金鈴)이 달려 있던 까닭에 금령총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 금령총에서 나온 금관 - 보물 338호 (문화재청 사진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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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동 고분군의 듬직한 가장(家長) - 봉황대(鳳凰臺) 이 무덤은 밑바닥 지름이 82m, 높이가 22m로 신라의 무덤 중에서 황남대총(皇南大塚) 다음으로 2번째로 큰 무덤이다.
봉황대는 고분이라기 보다 차라리 하나의 산에 가깝다. 무덤에서 세상 모르게 자라고 있는 저 고목(古木)들도 자신들이 있는 그 곳이 설마 무덤인 줄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봉황대에 묻힌 신라의 제왕 혹은 망족(望族)이 누구인지는 모르나. 아마도 마음이 넓은 사람일 것이다. 자신의 무덤에 버젓히 자라난 나무들에게 아무런 군소리도 하지 않으니.. 거대한 무덤과 거기에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나무들.. 마치 어미와 자식을 보는 것 같다. 무덤은 어미, 나무는 자식, 무덤이 저 나무들을 키웠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어느 옛날, 인근에서 날라온 나무의 씨앗이 우연히 이 무덤에 떨어져, 그 자리에서 싹을 텄는데, 봉황대는 그런 그들을 내치지 않고 마치 자식처럼 따뜻하게 보살펴 주었다. 그들에게 양분을 듬뿍 제공하고, 살아갈 수 있는 터전도 제공하고.. 그래서 나무는 저렇게 장성(長成)하게 되고, 무덤의 하해(夏海)와 같은 은혜를 받은 나무들은 그 은혜에 보답하려는 듯, 비와 눈이 오면 무덤의 우산 역할을 해주고, 강렬한 햇빛이 내리쬐는 여름에는 무덤의 양산 역할을 해주며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 준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서로를 의지하며 거의 부모와 자식처럼 정겹게 살아온 그들의 모습이 너무 보기가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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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황대(鳳凰臺) 속인들이 개척한 등산로(?)가 눈에 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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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망국(亡國)의 전설이 서린 봉황대(鳳凰臺) 이 고분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전설이 서려 있다.. 무덤의 주인이 듣는다면 엄청 우울해 하겠지만..
고려를 건국(建國)한 왕건(王建)은 도선국사(道詵國師)와 상의하여 신라를 빨리 붕괴시킬 계략을 꾸몄다. 도선국사는 경주의 지형이 주행형(舟行形)이니 배를 빨리 침몰시키는 방법을 마련하라고 건의하였다.
왕건은 풍수가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 신라 정부에 다음에 내용이 쓰인국서(國書) 를 전달한다 '귀국 황성(皇城)의 지형은 봉황형(鳳凰形)인데 그 봉황이 지금 날아 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선 봉황의 알을 만들어 알에 애착을 갖도록 만든 뒤 맑은 물을 좋아하는 봉황을 위해 곳곳에 샘을 파서 영원히 날아가지 못하도록 날개 죽지에 금을 넣어 두십시요'
왕건의 건의에 귀가 솔깃해진 신라 정부는 제대로 검토도 하지 않은 채, 왕건의 건의안을 따랐고 결국 신라는 스스로 멸망을 재촉했다는 것이다. 즉 위에 나오는 봉황의 알은 흙으로 산을 만드는 것이니 배는 더욱 무거워지고 곳곳에 판 샘은 배 바닥에 구멍을 뚫는 격이며, 날개죽지에 금을 넣어두는 것은 돛대를 부러뜨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봉황의 알이 지금의 '봉황대'라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전설.. 물론 이 전설은 후대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로 신라 왕족의 묘가 졸지에 신라의 망국(亡國)을 재촉하는 전설의 중심소재가 되어 버렸으니, 묘에 잠든 그의 서운함은 오죽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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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황대에 자라난 나무들을 보니 문득 계림황엽(鷄林黃葉)이 생각난다. 나무의 옷 색깔이 모두 한결같이 누런 색, 즉 황엽(黃葉)이다. 계림황엽은 신라의 망국(亡國)을 상징하는 단어로 최치원(崔致遠)이 쓴 글에 '곡령 청송(鵠嶺靑松) 계림황엽(鷄林黃葉)'이라는 구절이 있다. 그 뜻은 곡령 즉 송악(松嶽, 개성)의 고려는 청송과 같이 푸르고 성하며, 계림 즉 신라는 누런 잎으로 시들었다는 뜻이다.
안그래도 신라 망국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데 나무들까지 계림황엽을 흉내내니 무덤의 주인은 정말 곡차(穀茶) 한잔 걸치고 싶을 것이다. |
이렇게 노동동 고분군을 둘러보니 어느덧 시간은 8시가 되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될까? 이미 갈 곳은 정해둔 상태로 그 곳으로 직접 가기만 하면 된다.
경주역에서 모화(毛火) 방면으로 가는 경주좌석버스 600번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간다.
가는 도중, 옛 추억이 서린 반월성(半月城), 국립경주박물관, 안압지(雁鴨池), 낭산(狼山) 등이 차창 밖으로
무심히 스쳐 지나간다. 나의 예전 발자욱이 남아 있을 그 곳... 다시 찾아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으나 경주
지역의 헤아리기 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수없이 널린 문화유적들은 솔직히 부담이 너무 크다.
그것들을 보고 이렇게 글로 쓰는 것도 솔직히 겁도 나고 자신도 없다. 그렇다고 대충 쓴다면 이는 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차라리 안보고, 안쓰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불국사(佛國寺) 입구를 지나 괘릉(掛陵)을 한 정거장 앞 둔, 영지입구에서 하차, 영지 방면으로 걸어갔다.
영지 못미쳐에 이르니 영지암(影池庵)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오고, 그 이정표를 따라 별로 암자 같지도 않은
영지암에 이르니, 아사녀(阿斯女) 석불로 유명한 영지석불좌상이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맞이한다.
~~ 아쉽지만 중상편은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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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사, 촬영 일시 - 2005년 11월 19일
* 중편 작성 시작일 - 2006년 1월 2일
* 중편 작성 완료일 - 2005년 1월 3일
* 중편 숙성기간 ~ 2006년 1월 6일 ~ 1월 28일
* 공개일 - 2006년 1월 28일부터
* 2005년 1월 27일, 상편과 중편을 상, 중상, 중하편으로 분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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