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맞이 서울 도심(都心) 나들이 (2006년 3월 4일)'
'상편 ― 덕수궁(德壽宮) 둘러보기(대한문 ~ 중화전 ~ 석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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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상, 중, 하 3편으로 나누어 작성했습니다.
온 세상을 꽁꽁 지배하던 겨울의 제국주의(帝國主義)가 해방군(봄)의 반격에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던 3월의
첫째 주, 봄의 해방군을 두 팔 가득 맞이하고 싶은 마음에 후배 여인네와 함께 3월의 첫 주말인 3월 4일, 서울
도심으로나들이를 나왔다.
이번 도심 산책에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마티즈 불멸의 색채화가 특별전'(2005,12,3 ~ 2006,3,5)'을 관람
하고 덕수궁(德壽宮)과 정동(貞洞) 지역(구 러시아공사관, 정동교회)을 둘러 보았으며, 뒷풀이로 인사동에서
뜨끈한 저녁과 차 한잔, 그리고 떡 하나의 여유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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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대문(삼성플라자) 좌석버스 정류장에서 잠깐 눈인사를 나눈 이문(里門)터 표석 |
♠ 덕수궁 대한문(大漢門)과 수문장 교대의식
덕수궁 정문에 이르니 마침 '수문장(守門將) 교대의식'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제 조선 궁궐의 대표적인 행사로
자리 매김을 한 수문장 교대의식, 이 행사는 궁궐 휴관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열리며 행사의 내용은 매달마다
달라진다.
~ 기본 행사 : 매년 4월 ~ 7월 / 9월 ~ 11월 (* 행사 시간은 변동 가능) |
10시 ~ 11시 | 궁성문(宮城門) 개문(開門) 의식, 수문장 교대의식 |
11시 30분 ~ 12시 10분 | 제왕(帝王)의 행차 |
12시 ~ 13시 | 입직 근무, 순장(巡將) 척간(尺簡) 및 궁궐 내 순행(巡行)의식 |
13시 ~ 14시 | 수문장 교대의식, 요령장(搖鈴將) 궁성 밖 순라의식 |
13시 30분 ~ 14시 | 제왕의 행차 |
15시 ~ 16시 | 수문장 교대의식, 궁성문 폐문의식 |
~ 입직(入職) 행사 : 매년 1월 ~ 3월 / 8월 / 12월 (* 행사 시간은 변동 가능) * 궁성문 개폐 의식 생략, * 수문장 교대의식, 입직 근무 - 10시 ~ 16시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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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문 앞에서 거행되고 있는 수문장 교대의식 (1) 옛 수문장과 수문병의 복장을 한 사람들이 옛 그들의 모습을 재현하느라 여념이 없는 모습들.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분위기가 꽤 엄숙하고 진지해 보인다. 수문장 교대의식에 관한 내용은 이곳을 클릭 바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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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문 앞에서 거행되고 있는 수문장 교대의식 (2) 노란 옷을 입은 수문병들이 자신들의 차례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수문병들이 든 온갖 모습의 깃발들은 바람에 몸을 내맡기며 유유히 펄럭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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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의 소리 ~ 거대한 북 수문장 교대의식은 힘찬 북소리에 맞쳐 조금의 빈틈도 없이 진행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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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으로 덕수궁의 정문이다. 원래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으로 덕수궁의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 앞에 있던 것을 1906년(고종 43년) 지금의 시청앞 광장 쪽으로 이전하고 문의 이름을 '대한문'으로 바꿨다. 그 당시 시청앞 광장의 약 1/3 정도는 덕수궁의 영역으로 왜정(倭政) 때 지금의 태평로의 전신(前身)인 태평통(太平通)이 뚫리면서 그 영역이 크게 축소되었으며, 1968년 태평로를 크게 확장하면서 덕수궁 담장을 지금의 위치로 크게후퇴시키면서 대한문도 덩달아 지금의 위치로 물러나 앉게 되었다.
대한문의 현판(懸板)은 당시 궁전대신(宮殿大臣)인 남정철(南廷哲)이 썼으며, 문의 이름을 '대안(大安)'에서 '대한(大漢)'으로 바꾼 것과 그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그 중 내가 아는 것만 열거해 본다면,
1. '대한'은 큰 하늘(은하수)을 뜻한다. <이근명(李根命)이 쓴 대한문 상량문(上樑文)> 2. 전비서승 유시만(前秘書丞 柳時萬)이 고종에게 상주(上奏)하기를 '안(安)을 한(漢)으로 고치면 국조(國祚)가 연창(延昌)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바꿨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
3.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高宗)을 빗대어 '큰 놈이 드나드는 문'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고치 게 하였다고?? 한(漢)에는 놈이라는 뜻도 있음, 4. '갓을 쓴 여자(安)' 즉 배정자(裵貞子)가 궁궐을 들락날락거리는 꼴이 상서롭지 못하여 남자를 뜻하는 한(漢)으로 바꿨다. <경성오백년(1926)>, <조광> 1937년 11월호, <경성과 인천(1929)>. <경성의 광화(1926)>.
5.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상징한다. - 대한은 중국의 한족(漢族)을 뜻한다나?? |
♠ 서울 5대 궁궐의 한 곳, 대한제국의 황궁이자, 도성(都城)의 서궐(西闕) - 덕수궁(德壽宮)
덕수궁은 어린 시절부터 2004년 3월까지 약 20번 이상을 들락날락 했던 곳이라. 별로 이렇다할 느낌은 없다.
그냥 '오랜만에 찾아왔네' 이정도... 아마도 너무 많이 찾아왔던 탓이겠지,
2004년 3월 이후, 2년 만에 다시 서궐에 발걸음을 하였으나, 예전과 달라진 것은 전혀 없어 보인다.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는 덕수궁..
~~~ 덕수궁(사적 124호)의 간략한 역사 ~~~
 | 덕수궁은 왕궁 전용으로 만들어진 경복궁, 창덕궁과는 달리왕족의 일개 사저(私邸)에서 시작되었다.
임진왜란으로 평안도 의주까지 줄행랑을 친 선조(宣祖)의 조선 정부는 1593년 10월, 17개월에 걸친 피난 생활을 끝내고 부푼 기대로 다시 도성 으로 돌아왔으나그들을 맞이한 것은 말끔히 파괴된 궁궐들 뿐이었다.
전쟁통이라 궁궐 재건은 거의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에서 급한 데로 주변 으로 마땅한 거처를 알아보니 마침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살았던 집이 |
그나마 상태가 양호하여 그 곳을 임시 행궁(行宮)으로 삼으면서 서궐(西闕), 즉 덕수궁이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월산대군의 집은 상당히 협소하여 부근 왕족의 집을 궁내(宮內)에 포함시키고, 행궁 주변으로 목책(木 柵)을 세우고 문을 세웠으며, 1597년에 담장을 쌓았다. |
1598년 12월, 드디어 6년에 걸친 대전쟁은 끝났으나, 재정의 파탄으로 궁궐 재건은 거의 어림도 없는 상황에서 1607년 행궁 북쪽에 별전(別殿, 지금의 석어당)을 세워 궁역(宮域)을 약간 넓혔고, 그 이듬해(1608년) 선조는 그 전각에서 붕어(崩御)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어 광해군(光海君)이 행궁의 서청(西廳, 즉조당)에서 제위 에오르는데, 그는 1611년 행궁의 이름을 경운궁(慶運宮)이라 명하고, 그 영역을 지금의 정동 예원학교까지 확장시켰으며 창덕궁과 창경궁을 재건 |  |
하여 1611년 창덕궁이 완공되었다. 1613년 영창대군(永昌大君) 살해 사건으로 광해군이 곤경에 처하게 되자 영창대군의 생모(生母)인 인목대비 (仁穆大妃)를 덕수궁에 홀로 유폐시키고 궁의 이름을 서궁(西宮)이라 낮춰 불렀다. |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해군은 폐위되고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이 제위에 오르니 이가 곧 인조이 다. 그는 경운궁에 친히 행차하여 인목대비를 알현하고, 즉조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여 같이 창덕궁으로돌아 왔다. 그 이후, 궁의 이름을 명례궁(明禮宮)이라 하였으며, 궁에 속해 있던 여러집들과 땅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 면서 이 곳은 거의 평범한 별궁(別宮)수준으로 축소되어 버린다. 그 이후 영조 49년(1773년), 영조는세손(世孫, 정조)을 데리고 즉조당에서 선조의 환도어거(還都御居) 삼주갑 (三週甲, 60년이 3번 지남) 기념식으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으며, 고종 13년(1876년). 고종도 친히 즉조당 에서 전배(展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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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겁에 잔뜩 질린 고종은 경운궁으로 급히 거처를 옮기는데, 그 이유는 경운궁 주변으로 러시아, 영국, 미국 등 서구 제국(諸國)들의 공사관(公使館)이 널려 있어 경복궁보다는 가급적 안전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경운궁을 정궁으로 삼은 고종은 1896년 '건양(建陽)'이란 연호(年號)를 사용하고, 1897년 황제 위(皇帝 位)에 오르면서 덕수궁을 황궁(皇宮)에 걸맞는규모로 크게 확장시킨다. 그 결과 덕수궁은 현재 영역의 거의 2배 이상으로넓어졌으며 수십 동의 전각(殿閣)을 갖춘 우람한 황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  |
1900년 이후에는 전통 한식(韓式)에서 벗어난 서양식(西洋式) 건물을 여러 채 만들게 되는데, 석조전(石造殿)과 정관헌(靜觀軒), 중명전(重明殿)이 그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다. 1904년 화재로 중화전을 비롯한 주변 전각들이 불에 타서, 다시 중수하였 으며 1907년 고종은 황태자(皇太子)에게 제위(帝位)를 이양(移讓)하고 경운궁에 물러나 앉게 되는데, 이 때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여기서 '덕수(德壽)'란 덕을 누리며 오래오래 살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데 이는 선제(先帝, 고종)에 대한 지극한 효심(孝心)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겠다. 물론 덕수궁이란 이름은 조선 초기에도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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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이후, 왜정은 시가지 개발이란 명목으로 덕수궁의 영역을 크게축소시켜 갔으며, 1919년 2월, 고종이 덕수궁에서 붕어하자 수많은 백성들이 대한문 앞으로 몰려와 애도를 표하였다. 1926년 6월, 순종이 덕수궁에서 붕어하면서 그의 인산(因山)일을 계기로6.10 만세운동이 벌어졌으며, 1938년 창경궁에 있던 이왕가(李王家)박물관을 석조전으로 이전하면서 덕수궁은 박물관의 거대한 뜰로 전락되어 버린 다. 해방 이후, 덕수궁 서쪽은 미국대사관이 떡하니 차지해 버리고 그 과정에서 중명전이 미국대사관으로 넘어가 버렸으며, 궁궐의 북쪽은 시가지로, 동쪽은 도로에 편입되어 그 영역은 한없이줄어들어갔다. 덕수궁은 경복궁처럼 언젠가 복원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될 필요가 있는데 미국대사관과 꽉 들어차버린 시가지 때문에그마저도 용이하지는 못할 것 같다.
현재 덕수궁은 중화전, 석어당을 비롯한 10여동의 고풍스러운 전각과 석조전, 정관헌 등의 서양식 전각 3동이 남아 있으며, 궁내(宮內)에는 나무와 꽃들로 가득하여황궁으로써의 면모와 위엄, 그리고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 덕수궁 찾아가기 (2006년 8월 기준) ~ 1. 지하철 1,2호선 시청역에서 도보 5분 /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서 도보 15분 2. 시내버스와 좌석버스로 시청(덕수궁앞), 시청(서소문), 삼성플라자, 서울신문사, 광화문(동화면세점) 앞에서 하차,
~ 덕수궁 입장료 (2006년 8월 기준) ~ * 대인 (19 ~ 64세) - 1000원 (단체 30명 이상 - 800원) * 중고생,어린이 - 500원 (단체 10명 이상 - 400원) * 6세 이하와 65세 이상은 공짜 ~~ * 덕수궁 입장권으로 덕수궁미술관도 함께 관람할 수 있음 (단 특별전은 제외)
~ 덕수궁 관람시간 (2006년 8월 기준) ~ * 3 ~ 10월 : 평일 9시 ~ 18시 / 휴일 9시 ~ 19시 * 11 ~ 2월 : 9시 ~ 17시 30분 * 매주 월요일은 휴관하며,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밤 21시까지 야간 개장 ~ |
♠ 덕수궁의 중심 - 중화전(中和殿), 중화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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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문의 뒷모습과 금천교(禁川橋) |
 | ◀ 우두커니 서 있는 하마비(下馬碑) 대한문을 들어서면 길 왼쪽으로 '하마비'라 불리는 조그만 비석(碑石)을 만나게 된다. 비신(碑身)에는 '大小人員皆下馬'라 쓰여 있는데 이는 대소관리들은 이 곳에서 모두 말에서 내려 황제에 대한 예를 갖추고 궁내 (宮內)로 들어오라는뜻이다.
하마비를 지나면 금천교라 불리는 돌다리가 나오며, 그 다리를 건너면 그리 넓지 않은 덕수궁 내부가 한없이 펼쳐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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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전의 정문인 중화문(中和門) - 보물 819호 덕수궁의 정전(正殿)인 중화전의 정문으로 1902년(고종 39년)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경복궁의 근정문(勤政門)처럼 중층(重層, 2층) 구조로 되어있었으나 1904년에 중화전과 더불어 화재로 무너진 것을 1906년에 단층 구조로 다시 세워진 것이다.
원래 중화문 양쪽으로 길다란 행각(行閣)이 이어져 있었으나, 왜정 때 왜인들이 고의적 으로 파괴하여 옛 행각의 자리는 마음 한쪽 구석이 텅빈 듯, 너무나도 허전하다. 문이란 이쪽 공간에서 저쪽 공간을 이어주는 통로인데, 문 양쪽으로 그보다 더 큰 통로 (?)가 뻥~ 뚫려져 있으니 말이다. 오히려 저 문의 존재의 이유가 의문스러울 정도. 그나마 행각이라도 복원을 했더라면 지금보다는 훨씬 보기가 좋을 것을..
중화문은 남향(南向),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은 동향(東向)을 하고 있다. 원래 정문이란남향이 원칙이지만(창경궁 제외) 덕수궁은 정말 제각각이다. 대한문과 중화문이 따로 노니, 게다가 황궁(皇宮)의 5문(五門) 원칙도 지켜져 있지 않다. 보통 황궁의 정문에서황궁의 정전까지는 5개의 문을 지나야 되는데, 덕수궁은 겨우 2개, 제후국(諸侯國) 궁궐 원칙에 따라 조성된 창덕궁, 경복궁에 비해 1개가 적으니, 이는 어찌된 영문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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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수궁의 정전(正殿), 중화전(中和殿) - 보물 819호 덕수궁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이 건물은 1902년(고종 39년)에 세워진 것으로, 처음에는 중층(重層, 2층)이었으나 1904년 화재로 심하게 파괴되어, 1906년에 지금의 단층(單層)형태로 다시 세운 것이다. 왜 중층이 아닌 단층으로 중수를 했는지는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석조전과 정관헌 등의 양관(洋館) 건립에 따른 엄청난 공사비용과 그 당시 넉넉치 못했던 국가의 재정 때문일 것이다.
비록 다른 궁궐의 정전과 달리 단층으로 되어 있지만, 나름대로 황궁의 위엄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결코 작지 않은 중화전의 우람한 모습.. 주변 강대국에 끼여 숨조차 쉬기 힘들었던20 세기 초반, 작지만 황제국의 위엄을 드러내 보이며, 열심히 부국강병을 꿈꾸었던 고종의 거창했던 꿈이 중화전을 비롯한 덕수궁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것 이다.
전각 앞에는 품계석(品階石)이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으며, 정전을 에워싸고 있어야 될 행각이 없어 그 허전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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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전 어좌(御座)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를 배경으로 옥좌에 위엄있게 앉아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신하들과 외교사절단, 외국 공사(公使)를 바라보았을 고종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저 어좌에 앉는 기분이란 과연 어떨까? 살짝 몰래앉아 봤으면 좋으련만.. | ▲ 중화전을 지키고 있는 정(鼎, 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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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마(火魔) 퇴치용으로 설치된 '드므' 청동(靑銅)으로 만든 솥으로 일종의 방화수(防火水)를 담아두던 물통이다. 궁궐 전각들이 한결같이 나무로 지어진 것이다보니 불 앞에서는 그저 한없이 무력해질 수 밖에 없는데, 이를 두고 옛 사람들은 화마(火魔)라는 귀신이 불장난을 벌인다고 생각 했다. 그래서 전각 주변으로 드므를 설치했는데, 이는불지르러 온 화마를 막기 위함으로, 화마가 불장난을하기 직전 호기심 삼아 드므 내부를살펴본다는 것이다. 드므 안에는 물이 잔뜩 고여 있는데, 그 물에비친 자신의 괴물 같은 모습에 그만 혼비백산하여불장 난이고 뭐고 바로 줄행랑을 친다고 하며. 이렇게 해서 화재를 막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옛 선인들의 재치가 둠뿍 담긴 드므 이야기.. 그러나 화마는 그렇게 어리석지는 않았다.중화전을 비롯한 덕수궁이 화재로 몇 번씩이나 피해를 봤으니 말이다. |
♠ 덕수궁에서 제일 오래된 전각 - 석어당(昔御堂), 즉조당(卽祚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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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목대비의 꾸짖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석어당(昔御堂) 즉조당과 더불어 덕수궁에서 제일 오래된 전각이자 유일한 중층(重層) 건물로 덕수궁의전신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사저(私邸)가 있었던 자리라고 전한다.
왜군의 공격으로 평안도 의주까지 줄행랑을 친 선조는 1593년 7월, 환도(還都)하여 이곳을침전 (寢殿)으로 삼았으며 1608년에 이 곳에서 붕어하였다.
광해군 연간(年間)에는 영창대군의 모후, 인목대비(仁穆大妃)가 광해군에의해 유폐되었던 곳으 로,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은 이 곳으로 끌려들어와 인목대비앞에 무릎을 꿇린 채 호되게 잔소리를 들어야 했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에 대한 원한이 뼈에 단단히 사무친 상태라 자신 앞에 무릎을 꿇은 폐주(廢主) 광해군을 노려보며, 폐주가 저질렀다는 거의 어거지에 아까운 36가지의 죄목들을 일일이 언급하 면서 그를 당장 죽이라고 난리를 부렸으나 인조를 비롯한 대신들이 만류하여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 이후, 1904년화재로 불에 탄 것을 1906년에다시중수하였다. 이 전각은 다른 여타 건물과 달리 화려한 단청이 칠해져 있지 않으며, 망와(望瓦) 외에는이렇다 할 장식물이 없다. 거의 일반 사대부가(士大夫家)처럼수수한모습 그 자체.그래서그런지 덕수 궁의 다른 전각들보다 더 돋보이는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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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조당(卽祚堂) <2001년 촬영, 김광수님 제공> 덕수궁에서 제일 오래된 측에 속하는 전각으로 광해군과 인조가 즉위를 했던 곳이다. 영조 39년(1773)에는 영조가 세손(世孫, 정조 임금)과 함께 선조의 환도어거(還都御居)삼주갑 (三週甲)을 기념하며 친히 사배례(四拜禮)를 했던 곳이며,고종 역시 이 곳에서전배(展拜)를 하였다. 고종의 후궁이자 덕혜옹주(德惠翁主)의 생모(生母)인 엄비(嚴妃)가 1907년부터 거처했던곳으로 1911년 7월 이 곳에서 병사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904년 덕수궁 대화재로 소실된 것을 1906년에 중건한 것으로 정면 7칸,측면 4칸 의 몰익공식(沒翼工式) 형태를 하고있으며 궁내(宮內) 여타 건물과 달리 툇마루를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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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즉조당 천정
잠시 툇마루에 걸터앉아 전내(殿內)에 숨어있 는 천정을 훔쳐보듯 바라보았다. 천정에 그려진 알록달록 단청(丹靑)으로 건물 내부가 너무 환하다 못해 눈이 부실지경..
네모 안에는 한결같이 용으로 보이는 무엇인 가가 빼곡히 그려져 있는데 그 정체는잘 모 르겠다. |
~~ 아쉽지만 상편은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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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사, 촬영 일시 - 2006년 3월 4일
* 상편 작성 시작일 - 2006년 3월 26일
* 상편 작성 완료일 - 2006년 4월 7일
* 상편 숙성/방치 기간 ~ 2006년 4월 8일 ~ 7월 26일
* 공개일 - 2006년 7월 26일부터
* 2006년 4월 29일, 상편과 하편을 상, 중, 하로 분리, 재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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