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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를 걱정하며 땀 흘리는 비석을 만나다 ~ 밀양 표충비(사명당비) '


▲ 나라에 큰 일이 터질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신비의 비석
밀양 표충비(表忠碑)


가을이 겨울의 성화에 못 이겨 우리 곁을 훌쩍 떠나려고 한다. 자연의 조화에 따라 겨울의 제국은
또다시 눈과 추위를 앞세워 그 세를 불리며 세상 만물을 지배하려고 든다.
가을이 꼬랑지를 보이며 그렇게 사라져 가던 11월의 하순, 나라를 걱정하며 땀을 흘린다는 신묘의
비석을 만나러 경남 밀양 고을을 찾았다.

서울에서 대구까진 저렴한 일반고속버스로 3시간 30분 만에 닿았고, 동대구에서 마산으로 가는 무
궁화호 열차에 나를 실어 50분 만에 밀양역에 발을 들여놓는다.
밀양역에서 다시금 밀양시내버스 2번에 의지해 밀양터미널로 이동하여 다시 무안, 구기 방면 시내
버스로 갈아타 간신히 무안(전남 무안군과 별개임)에 이른다.

무안은 사명대사가 태어난 고장이자, 땀 흘리는 표충비로 유명한 곳이며, 돼지국밥의 대명사인 밀
양돼지국밥의 발생지로 우리나라 돼지국밥이 태어난 곳이다.
돼지국밥의 고향에 왔으니 국밥 한 그릇 들고 가야 되지 않겠는가. 국밥을 먹기 위해 배고픈 배를
진정해 가며 여기까지 왔는데 말이다.


▲ 한상 잘 차려져 나온 무안 소고기 국밥

무안 정류장 부근으로 돼지국밥집 3곳이 장사를 하고 있다. 바로 무안식육식당, 제일식육식당, 동
부식육식당이 그것이다. 나는 그중에서 제일식육식당에 들어갔는데, 이들 세 집은 모두 다른 사람
도 아닌 친형제가 운영한다고 한다.

이들은 그들의 조부(祖父)인 고(故) 최달성씨가 왜정 시절.무안 장터에서 '양산식당'이란 허름한
돼지국밥집을 연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후 이들 형제의 부친(父親)이 '시장옥'이란 이름으로 분가해 나갔는데 그 집을 3째 아들이 물려
받으니 지금의 '무안식육식당'이다.양산식당은 막내가 이어받아 동부식육식당이 되었고, 4째 아
들은 따로 제일식육식당을차렸다.

3대에 걸쳐 세 형제가 돼지국밥의 가업을 잇고 있는 아름다운 현장으로 구수하고 담백한맛을 자
랑한다. 이들 집은 주로 암돼지를 쓴다고 하는데 돼지고기 특유의 비린내를 말끔히제거하여 먹기
가 좋다. 나는 주중에 돼지고기를 많이 먹어서 그런지 돼지국밥이 그다지 끌리지 않아 소고기국밥
을 먹었다. 가격은 소고기라 해서 비싸거나 싼 것이 아닌 둘 다 5~6천원으로 맛에 비하면 그리 아
깝지 않은 금액이다.
국밥의 밑반찬으로 송송(깍두기), 김치 등이 차려져 나왔는데 다들 밥도둑이 따로 없어 금세 그릇
과 밑반찬을 말끔히 비워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점심을 배부르게 먹고 졸음의 희롱에서 벗어나고자 커피 1잔 마시며 (식당에서 손님들에게
1잔씩 제공해 준다) 무안면사무소 옆에 자리한 표충비(사명당비)를 찾았다.


♠ 밀양 4대 기적에 하나,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며 나라를 걱정하는 신묘한 비석 ~
표충비(表忠碑, 사명당비)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15호



▲ 위에는 표충비각, 아래는 땀흘린 자욱이 역력한
표충비의 비신(碑身)


밀양에는 예로부터 전해온다는 4가지의 기적(奇蹟, 신비)이 있다.
1. 한여름 더위에도 얼음이 언다는 얼음골
2.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표충비
3.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마다 나타난다는 태극나비
4. 무봉사 대나무밭에서 한겨울 눈 속에 새 순이 솟아 오르는 일


1번의 얼음골은 아직 가본 적은 없지만 워낙 유명하여 따로 설명이 필요가 없을 것이고, 3번과 4
번 직접 본 적도 없을 뿐더러 요즘 나라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면 경사라 할만한 것이 없으니
태극나비가 나타나 덩실덩실 춤출일은 없을 것이다.
이들 4가지 기적을 대표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이번에 문을 두드린 표충비이다. 세계 7대 불가
사의도 가히 무릎을 끓을 정도의 그야말로 신물(神物)이기 때문이다.

팔작지붕을 얹힌 표충비각 안에 소중하게 들어앉은 표충비는 1742년(영조 18년) 사명대사의 5대
법손(法孫)인 태허당 남붕선사(泰虛堂 南鵬禪師)가 사명대사(四溟大師)와 서산대사(西山大師)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문의 내용은 도곡 이의현(陶谷 李宜顯)이 짓고, 퇴어 김진상(退漁 金鎭商)이 글씨를 썼으며,
지수제 유척기(知守齊 兪拓基)가 전액(篆額)을 썼다.
비석으로 쓰인 돌은 오석<烏石 = 흑요암(黑曜巖)>이라 불리는 검은돌로 경산(慶山)에서 가져왔다
고 하며 귀부와머릿돌 부분은 따로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비석의 높이는 2.75m, 비석의 머리부분과 기단석까지 합치면 3.9m에 이르며, 너비는 98cm, 두께
는 56cm에 거대한 비석이다.


▲ 표충비의 앞면 -
사명대사 공덕비문(功德碑文)

▲ 표충비의 뒷면 -
서산대사 공덕비문(功德碑文)

비석 앞면은 사명대사의 행적과 함께 그를 찬양하는내
용이 빼곡히 적혀 있으며, 뒷면은 사명대사의 스승인 서
산대사의 행적과 찬양이, 비석 양 옆면에는 그들을 배향
한표충사(表忠祠)의 사적(事蹟)이 쓰여져있다. 표충사
는 원래 이곳에 있었으나 1839년 밀양 동쪽 재약산(載藥
山)에 있는 표충사(表忠寺)로 이전되어 표충서원(表忠書
院)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일명 '사명당비','사명대사비'라 불리는 이 비석이세인
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바로 나라에 큰 사건이터질 때
마다 물(땀)이 흘러내려오는 신비의 비석이기 때문이다.
비에 물이 맺혀 흘러내리는 모습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
이 땀을 흘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며, 비석의 땀은 놀
랍게도 사람 몸에서 나는 땀처럼 짠맛이난다고 한다.
아무리 훑어봐도 그저 생명이 없는 딱딱한 돌에 불과한
데 어디서 왜 그런 땀들이 나오는 것일까?

호기심 많은 과학자들은 이 신기한 현상에 대해 열심히
연구를 했다. 허나 그 원인을 아직도 속시원히 풀어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다. 어떤 지질학자는
'기류에 따
라 온도가 5도 이상 차이가 나면서 생기는 물방울 현상
에 불과하다. 사람의 땀처럼 소금기를 보이는 것은 비석
을 이루는 돌의 성분 때문'
이라 잘라 말한 적이 있으나,
바깥기온이 5도 이상 차이가 나지 않는 동지섣달에도 땀
을 흘리며 물방울이 얼지 않고 흐르는 이유에 대해서 사
람들이 반문하니 거기에 대해서는 두 손을 들었다고 전
한다. 아무리 위대한현대과학도 표충비 앞에서는 어린
아이 장난에 불과한 모양이다.

나는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지극히 짧은 생각으로 사람
들이 몰래 장난을 치거나 거짓 또는 조작일 것이란 생각
도 했었다. 허나 실상 와서 살펴보니 그런 것은 아니었
다. 오히려 그런 부정적인 생각은 나라 걱정에 여념이
없는 표충비에대한커다란 실례가 될 것이다.

표충비의 땀에 대해서는 사명대사가 죽어서도 나라를걱
정하며 흘리는 눈물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비석에
그의 혼이 깃들여져 영원히 이 나라와 함께하겠다는 그
의 충정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기묘한 것은 표충비가 땀을 흘리면 둘이 무슨 약속이라도 했는지 전남 송광사(松廣
寺) 대웅전의 3존불도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다. 절의 기록을 보면 그동안 5번만 어긋났을 뿐 물
기가 흘렀던 시기가 같아서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항간에는 '오경(五庚)이 지난 후 홍제존자(弘濟尊者·사명대사)가 통곡을 한다'
참언(讖言)이 나돌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으나 대사가 입적(入寂)한경술년(1610년)이 5번이 지난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예언한 참언으로 그 해 가야산(伽倻山) 홍제암(弘濟庵)에 있는사명대사비
가 눈물을 흘리면서 비로소 그 뜻을 헤아렸다고 한다.
1943년 홍제암 사명대사비가 다시금 눈물을 보이자 겁에 질린 왜인(倭人) 합천경찰서장이 비석을
4조각으로 절단하여 땅에 묻어버린 것을 1958년 비 조각을 수습하여 다시 세웠다.

밀양 표충비가 땀을 보인 횟수는 정말 헤아릴
수가 없지만, 그중 근대에 있었던 중요한 건수
만을 추스려 본다면다음과 같다.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 3말 1되를 흘렸다고
함) / 1910년 경술국치 / 1919년 3.1만세운동 /
1923년 왜국 관동대지진 / 1945년 광복/ 1948
년 이승만 대통령 취임식 / 1949년 여수, 순천
공비반란사건 / 1950년 6.25전쟁 발발 2일전(3
말 8되 흘림) / 1960년 4.19의거/ 1961년5.16
사건 / 1979년 박정희대통령 사망5일 전(10시
간 동안 땀을 흘림) / 1983년KAL기추락(4시간
동안 땀 흘림) / 1983년 미얀마 랑군테러사건 /
1994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 1996년 6,28 북
한 수해 (3시간동안 땀흘림) / 1996년 강릉 잠
수함사건(9시간 동안 흘림) / 1997년 I.M.F /
1999년 1,14왜국과 독도 영유권 대립 / 2004년
6월 김선일씨 피살사건(1되 흘림)/ 2007년 3월
21일 전국을 강타한 폭설을 예견? 30리터 흘림/
그 해 3,29 노대통령 탄핵 소추안 가결 사건을
예견? 20리터 흘림 /
12월말 이명박 대통령 당
선 3리터나 흘림 /
2008년에는 6월 말에 처음으로 땀을 보여 세상
을 놀라게 했는데 바로 현정권의 어거지성 소고
기협상과 촛불시위 탄압으로 6월 18일 12시40분
부터 다음날 오전 4시까지 무려 10.8리터의 땀
을 흘린 것이다.


▲ 땀자욱으로 가득한 표충비
검은색 윤이 반들반들한 비석에는 지난 날 흘린
땀자욱이 말라 희뿌연 선을 비면에 어지럽게
그려놓는다.
가까이서 냄새를 맡는다면 짠 냄새가 진동을
할것만 같다.

밀양시청은 비석의 땀흘림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기 위해 2005년 4월 표충비에 폐쇄회로 TV를 설치
했다. 그래서 보다 정확하게 신묘한 현상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2008년 6월 이후로도 땀을
분명 흘렸을 것 같은데 밀양시청이 쉬쉬하는건지 아니면 정말로 없는건지 아무리 찾아도 관련 정
보는 없으며 이번 2009년에는 땀흘림 현상은 더욱 심해질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신묘한 현상은 비석이숨을 쉬는 동안계속 이어질 것이다. 아무래도 요즘나라돌아가는 꼬
라지를 보면 정말 땀을바가지로 흘릴 일 밖에는 없으니 말이다. 나라가 어여 안정이 되어 더 이
상 우울한 사건이 아닌 경사스런 일로 그 신비를 보여줘야될텐데 친일파로 가득한 위정자들이 그
럴 생각을 하지 않으니 작금의 현실이그저 딱할 따름이다. 표충비에게 계속 그런 수고로움을 안
기다가는 그 땀방울이 모이고 모여 결국 이 조그만 나라가 침몰할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어이상실인 것은 표충비 주변에 2기의석등(石燈)이 서 있는데 나중에 안사실
이지만 그 석등은 한국식이 아닌 '카스카도르(春日燈籠)'라는 왜식(倭式) 석등이라고 한다.
이렇게 신성한 곳을 왜식 석등이 불을 밝혀주고 있다니 이거이거 나라가 어찌되려고 하는지 논개
(論介) 누님의 영정(影幀)을 친일파가 버젓히 그려 바친 것처럼 표충비의 불편한 심기가 눈에 보
이는 듯하다. 그런 거 하나 제대로 살피지 못한 잘못된 현실에 비석의 심정은 아마도 땀으로 석
등을 녹여 없애버리고 싶을 것이다.

땀을 흘리는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신비로운 비석이라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나라를 걱정하는
비석을 직접 체험한다. 비석 남쪽에는 사명대사의 시호를 딴 홍제사(弘濟寺)가 있으며, 비석을
후광으로 삼아 절을 꾸린다. 무생물인 비석도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굴뚝같구먼 애국에 담쌓
고그저 자신의 이익에 눈이 뒤집힌 위정자들과 다수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디 각성해야 될 것
이다.


※ 표충비, 홍제사 찾아가기 (2009년 1월 기준)
* 밀양시외터미널에서 무안까지 밀양시내버스와 직행버스가 1일 30회 정도 운행
* 부산 서부터미널(2호선 사상역 3,5번 출구)에서 무안, 구기 행 직행버스가 1일 6회 떠난다.
(부산 출발시간 - 8시, 10시, 12:40, 14:40, 16:40, 18:40분)
* 무안 정류장에서 표충비까지 걸어서 3분 거리
* 승용차
① 대구~부산 고속도로 → 남밀양나들목 → 예림 → 마암터널 → 제대4거리에서 좌회전(1080번
지방도 진입) → 마흘리 → 무안 표충비
② 대구~부산 고속도로 → 밀양나들목 → 긴늪4거리 → 밀양시청 → 신촌4거리에서좌회전 →
농업연구소4거리에서 우회전(1080번 지방도 진입) → 제대4거리 → 마흘리 → 무안표충비

* 표충비 앞에 조그만 주차장이 있음
* 관람비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9시부터 18시까지
* 주변 먹거리는 앞에서 언급한 돼지국밥집 3곳이 있다. (제일식육식당 ☎ 055-353-2252)
* 소재지 -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903-2 (☎ 홍제사 055-352-0125)


♠ 표충비 주변 둘러보기


▲ 표충비로 들어서는 삼문(三門)

표충비는 나라를 생각하는 신묘한 비석에 걸맞게 거의 성역화(聖域化) 되었다.
사명대사의 혼이 놀러왔는지 좌,우문이 아닌 가운데 문을 열어놓은 삼문을 들어서면 깔끔히정돈
된 표충비 역내(域內)가 펼쳐진다.
삼문 안쪽 우측으로는 화장실이 있고, 좌측으로는 물이 가득 담긴 'ㄴ'모양의커다란 석조(石槽)
가 놓여져 있는데, 그 옆에 큰 우산을 펼쳐놓은 듯한 기묘(奇妙)한자태의 오랜 향나무 1그루가
솟아나 있다.


▲ 무안리 향나무 - 경남 지방기념물 119호

이 향나무는 높이가 1.5m, 둘레가 1.1m로 처진향나무 마냥 넓고 둥그렇게 펼쳐져 있다.마치 큰
우산을 활짝 펼쳐놓은 것 같은데, 나무 아래 그늘에는 쉬었다가게끔 둥그런 의자가 베풀어져 있
다. 더운 여름 저곳에 누워 잠을 자면 더위 걱정이 들지 않을 정도로 무척 시원할 것 같다.

이 나무는 1742년 표충비를 세운 남붕선사가 비석을 세운 기념으로 심은 것이라고 하는데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지 않고 좌우로 덩치를 불려 처진향나무가 되었다. 이는 자연 현상이 아닌 나무의
원줄기를 자르고 옆가지를 팔방으로 뻗게하여 지금의 모양이 되게끔 다듬고 가꾼결과이다.
이런 향나무는 우리나라에서도 유일하며 표충비 앞에 있어서 그런지 그 모습 또한 신비롭기 그지
없다.


▲ 표충각(表忠閣)

향나무에서 서남쪽 방향으로 팔작지붕을 머리에 얹힌 '표충각'이 있다.
이 건물은 표충사에 있는 표충서원을 축소해서 지은 것으로 임진왜란 때 나라를 지키고 중생 구
제에 온 몸을 바친생불(生佛) 3명,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영규대사의 진영(眞影)이 모셔져 있다.
그중에서 서산대사가 제일 어른이라 마땅히 가운데에 있어야 되겠지만 홍제사는 사명대사를 모신
사찰이라 여기선 사명대사가 그 중심의 자리를 누리고 있다. 사명대사 우측에는 영규대사, 좌측
에는 서산대사의 진영이 나란히 자리한다.


▲ 서산대사(1520 ~ 1604)의 진영


▲ 영규대사(靈圭大師, ? ~ 1592)

선조 임금의 눈물어린 하소연에 감읍(感泣)하여
승병을 일으켜 토왜(討倭)에 앞장섰다.
그는 사명대사의 스승으로 승병을 지휘하다가
사명에게 그 임무를 넘겨주었다.

중봉 조헌(重峯)과 의기투합하여 충청도 일대
에서 활약한 승병으로 금산 연곤평 전투에서
불과 700명의 결사대로 15,000명의 왜군과 맞
써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 사명대사(1544 ~ 1610)
밀양 무안이 낳은 생불로 임진왜란 때 그의 활약
은 실로 대단했다.
왜군을 비롯 왜국 실권자 도쿠가와이에야스도 감
히 존경하고 두려워했던 인물로 전쟁 이후 왜열
도를 방문하여 조선인 포로 송환 및두 나라 관
계 개선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작자 미상의 옛 소설 '임진록(壬辰錄)'은 사명대
사를 주인공으로 하여 그의 신통력으로 왜열도를
평정하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 표충비각 우측에 베풀어진 샘터


♠ 홍제사(弘濟寺) 둘러보기


▲ 홍제사 설법보전(設法寶殿)

표충비 남쪽에 자리한 홍제사는 근대에 세워진 절로 표
충비를 관리한다.
절의 건물은 1980년대 이후 것들로 대부분 현대그룹 고
(故) 정주영 회장의 시주로 지어진 것들이다. 당우(堂
宇)로는 법당(法堂)인 설법보전을 비롯하여경충당, 범
종각, 표충각 등 5~6동이 있으며 표충비를 든든한 후광
으로 삼아 절을 꾸려 나간다.
사명대사를 모신 사찰로 절의 이름은 그의 시호인 홍제
존자(弘濟尊者)에서 따왔다.


▲ 졸음의 희롱을 즐기는 귀여운 강아지


홍제사 경내에는 3마리의 백구(白狗)가 있다. 2마리는 아마도 부부인듯 하며, 그들의 새끼인강
아지는 경충당(景忠堂) 툇마루 아래 바나나 상자에 들어앉아 졸음의 희롱을 즐기는 모습이집으
로 보쌈해 키우고 싶을 정도로 귀엽기 그지없다. 경충당은 1980년에 지은 요사(寮舍)로 절의 주
지승이 기거한다.

표충비를 둘러보고 다시 밀양역으로 나와 그리운 이들과 곡차 한잔하기 위해 철마를 타고 부산으
로 내려갔다.
이후 내용은 굳이 쓸 필요가 없는 사적인 것들이라 내용전개상 생략한다. 더 이상 표충비에게 수
고로움을 주지 않는 그런 나라를 염원하며 여기서 본글을 마무리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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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09년 1월 1일부터
* 최종 업데이트 - 2009년 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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