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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년의 신비가 서린 충주 미륵리사지(彌勒里寺址)
~ 하늘재 고갯길 '



여름제국의 잔여세력이 가을과 천하를 놓고 막바지 다툼을 벌이던 9월 하순, 충주전통문
화회와 충주시청에서 진행하는 충주시티투어를 다녀왔다. 충주시청에서 투어버스가 아침
9시에 출발이라 새벽부터 길을 서둘렀다. 동서울터미널에서 6시 20분께 충주(忠州)로 가
는 일반고속버스를 타고 8시에 충주터미널에 도착, 충주시청까지는 산책 삼아 두 다리를
부리니 딱 9시에 시청에 떨어진다.
버스는 9시에 출발하기로 되어 있는데, 전날 충주로 내려와 묵으신 충주전통문화회 10여
분이 느긋하게 아침까지 자시고 나타나면서 10시에 출발을 했다.

처음 행선지는 우리나라 유일의 사과나무 가로수인 달천동 사과나무가로수길이다. 4차선
도로의 가로수를 사과나무로 했다는 것이 무척 신선하다. 땅에는 잘 익은 사과들이 앞다
투어 떨어져 있는데, 그냥 가져가거나 따갈 경우 벌금을 내야 된다고 한다. 괜히 사과가
탐나서 섣튼 짓은 하지 않도록, 이런걸 그림에 떡이라고 하는 모양이다.다만 가로수 관
리인을 잘 구워삶으면 바닥에 떨어진 사과 하나는 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다음은 보물 512호인 철불좌상(鐵佛坐像)을 간직한 오래된 절집, 단호사(丹湖寺)이다.
대웅전 앞에는 철불의 불력(佛力)을 받아서일까 기묘한 모습으로 또아리를 튼 커다란 소
나무와 우산을 쓰며 똥배를 드러낸 포대화상이 절을 찾은 중생을 환하게 맞는다. 다시금
버스를 재촉하여 지름재란 고개를 넘기 전, 잠시 사문리의 오래된 당산나무숲에 들려 숲
속에 자리한 성황당(城隍堂)에 깃들여진 옛 이야기를 귀에 담고는 지름재를 넘어 첩첩산
중의 산간마을 미륵리에 이른다.

미륵리(彌勒里)는 월악산과 마역봉, 주흘산(主屹山) 사이에 안긴 산간 마을로이곳에 그
유명한 미륵리사지와 하늘재가 있다. 옛날에는 영남 지방에서 충주, 서울로 넘어가는 교
통로로 많은 나그네와 상인, 선비들이 하늘재를 통해 이곳을 거쳐갔다.

주차장에서 절터까지는 걸어서 15분 거리로 내리막 길의 연속이라 힘든 것은 없다. 길목
에는 여느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주막과 민박집 등이 나그네를 강하게 유혹하며, 때가 때
인지라 길거리에서 파는 복숭아는 지나는 이의 군침을 벌처럼 자극시킨다.


♠ 천년의 신비를 간직하며 지금도 그 해답을 주려고 하질 않는 야속한 절터,
찾는 이로 하여금 다양한 상상의 나래를 제공하는
충주 미륵리사지(彌勒里寺址) ~
사적 317호

조선 초기까지 영남(嶺南)에서 충주, 서울을 이어주던 주요 고갯길인 하늘재 아래에 자리한 거대
한 옛 절터, 미륵리사지는 창건부터, 절터에 서린 유물까지 죄다 수수께끼에 둘러쌓인 신비의 장
소로 통한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향(北向)을 취한 절터로 이곳의 비밀을 캐고자 많은 이들
이 수많은 세월을 투자하며 안간힘을 썼으나 절터는 그들을 비웃듯, 오늘도 침묵으로 일관하며
관람객을 맞이한다.

절의 창건시기는 절터를 지키는 유물을 통해 대략 9~10세기 경으로 여겨진다. 그 시절이면 신라
가 무너지고 지방세력이 난립하던 나말여초(羅末麗初) 시대로 절터의 중심인 미륵리석불 주변으
로 옛 석굴(石窟)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있어 석굴사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창건자에 대한 전설로 2개가 전해오고 있는데, 고려 태조의 조부(祖父)인 작제건(作帝建)이 창건
했다는 설과 신라의 마지막 자존심, 마의태자(麻衣太子)가 세웠다는 설이 있다. 허나 태조 왕건
의 왕씨 일가는 개성(開城)을 중심으로 한 해상세력인데 연고도 없는 이런 내륙까지 깊숙히 들어
와 절을 세울 이유는 없었으며, 망국(亡國)의 태자(太子) 마의태자가 무슨 재력과 세력이 있어서
이렇게 커다란 절을 세울 수 있었겠는가? 또한 고려에 협력한 충주유씨 세력이 망국(亡國)의 떨
거지가 자신의 영역에서 설치는 꼴을 팔짱만 끼고 보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방세력이 난립하던 신라 말부터 고려 초기까지 충주 지역은 충주유씨 세력이 단단히 둥지를 트
고 있었다. 그들은 신라 북부에서 큰 세력으로 성장하던 궁예(弓裔)의 태봉(泰封)에게 항복을 했
고, 보는 눈이 있는지 그의 신임이 두텁던 왕건을 지원했다. 나중에 태봉을 갈아엎고 고려를 세
운 왕건(고려 태조)은 충주 세력을 인정하고 그들을 옆구리에 끼고자 당시 충주를 다스리던 유긍
달(劉兢達)의 딸을 3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이니 이가 바로 신명순성왕후(神明順聖王后) 유씨이다.

고려왕실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충주유씨 세력정도라면 이정도의 절을 짓는 것은 쉬웠을
것이다. 그들은 가문과 외손(外孫) 왕족들(정종, 광종, 낙랑공주)의 안녕을 기원하고 자신의 세
력을 천하에 과시하고자 통행이 빈번한 하늘재 길목에 막대한 자금을 들여 석굴을 갖춘 절을 지
었을 것이다. 그리고 고개를 넘어다니는 장사꾼과 나그네를 상대로 유상으로 숙식을 제공하고 장
터를 열었으며, 그들은 무사히 고개를 넘어 자신의 소임을 마칠 수 있게 끔 절에 기도를 드리고
조금씩 시주를 했을 것이다. 그들이 여기서 쓰고 가는 숙식비와 이곳에서 이루어지던 활발한 교
역으로 충주유씨 세력은 그야말로 돈이 마를 날이 없었을 것이다.

절터는 1977~1979년, 1984년에 발굴작업이 이루어졌으며, 건물의 주춧돌을 옛날 가람배치 그대로
배치하였다. 1977년 발굴에서는 석굴의 전실(前室)에 해당되는 구역에서 초석들이 발견되어 평면
(平面)의 구조임이 드러났으며, '미륵당(彌勒堂)'이란 기와가 나오면서, 절터 이름에 미륵(彌勒)
이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보통 미륵리절터(寺址), 미륵대원(彌勒大院)터, 미륵사터 등으로 불
리우고 있으나, 이는 정확한 이름은 아닐 것이다. 절의 원래 이름은 현재로써는 알 수가 없는 실
정이다. 그리고 '명창3년금당개개와(明昌三年金堂改蓋瓦)'란 명문의 기와가 출토되어 고려 명종
22년(1192년)에 금당(金堂)의 기와를 고쳤음을 알 수 있다.


▲ 푸른 잡초로 가득한 미륵리사지


▲ 가건물로 지어진 세계사 대웅전(大雄殿)


절터 발굴로 지금까지 대략 밝혀진 절의 내력을 보면 13세기에 석굴을 구성하던 건물이 소실되어
다시 지었으며 조선 초에 대중수가 있었다. 하늘재를 대신하여 조령(鳥嶺)이 새롭게 영남과 서울
을 이어주는 길로 등장하면서 하늘재 통행량은 나날이 줄고 절의 수입도 계속 반비례하여 경제적
으로 적지 않게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조령을 넘은 왜군이 불질러버린
것으로 여겨지며, 18세기에 중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후 사세가 기울다가 1936년 대수해
를 전후로 완전히 망한 것으로 보인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며, 여전히 신비에 제대로 가려져 많은 이를 애태우게 만든다.이처럼 수수께끼에 가린 절터는 많은 이들로 하여금 다양한 상상력과 생각을 하게끔 만든다. 사
람들은 이곳에 호기심을 느끼며, 절터의 숨겨진 역사를 밝히기 위해 열심히 생각하며 연구한다.
나 역시 이곳에 매료되어 충주유씨 세력과 절을 연결시키는 나름대로의 해석을 하게 된 것이다.
절터의 비밀을 밝히려는 인간의 불타는 의지는 그 비밀이 밝혀지는 그 순간까지 쭉 이어질 것이
다.

절터의 구조는 북쪽을 바라보는 북향으로 절 입구는 남쪽에 나 있다. 절의 법당(法堂)인 석굴은
경내 제일 남쪽에 있으며, 그 가운데에 미륵리석불이 서 있다. 석불 앞에는 5층석탑이 서 있어 1
금당 1탑 형식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

* 미륵리사지에 얽힌 마의태자의 전설
마의태자는 신라의 마지막 군주인 경순왕(敬順王)의 아들이다. 부안김씨(扶安金氏)와 통천(通川)
김씨, 부령(富寧)김씨에서 시조로 삼고 있으며, 12~13세기에 동북아시아를 호령했던 금(金)나라
황실의 조상이다. 그러니까 금나라는 신라 김씨 왕족이 옛 고구려의 땅으로 넘어가 세운 제국이
되는 셈이다. 태자의 본명은 김일(金鎰)이라고 전하며, 마의태자란 이름은 금강산에 들어가 평생
베옷을 입고 살았다 하여 유래된 것이라 한다.

현재 마의태자와 관련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記) 경순왕 조와 삼국유사(
三國遺事) 경순왕조에 1~2줄 정도가 전부인데, 그 내용이 모두 비슷하다.
'경순왕 9년 - 왕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을 청하자 왕자(마의태자)는 통곡하고 왕 곁을 떠나 개골
산(금강산)으로 들어가 바위를 의지하여 초가집을 짓고 베옷과 초식으로 일생을 마쳤다'


▲ 가지런히 놓여진 주춧돌


▲ 거대한 귀부


935년 6월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마의태자는 망국의 한과 고려에 항복한 부왕(父王)에
대한 원망을 가득 품으며 쓸쓸히 서라벌을 떠났다. 서라벌을 떠나면서
'반드시 신라를 재건하리
라'
굳게 다짐을 했을 것이며, 그래도 일국의 태자였으니 그와 뜻을 같이하며 따라간 이들도 어
느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그가 떠났을 때 누이동생인 덕주공주(德周公主)도 동행 했다고 한다.
허나 덕주공주와 관련된 기록은 전혀 없으며, 이곳과 덕주사에 그녀와 관련된 전설이 아련하게
전해올 뿐이다.

이렇게 남매가 오붓하게 북쪽으로 가던 중, 지금의 문경시 마성에서 하룻밤 머물게 되었다. 그런
데 그날 밤 이들 남매의 꿈속에 관음보살(觀音菩薩)이 나타나 말하기를

'이곳에서 서쪽 고개를 넘으면 서천에 이르는 큰 터가 있으니 그곳에 절과 석불을 세우고, 북두
칠성이 마주 보이는 자리에 영봉을 골라 마애불을 만들면 억조창생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으니
포덕(佈德)함을 잊지말라!!'
잠에서 깨어난 오누이는 서로가 같은 꿈을 꾸었음을 알게 된다. 이에 힘을 얻은 그들은 바로 서
쪽 고개를 넘으니 고개 마루에 있는 큰 바위에 황금빛이 나는 포경문(布經文)이 놓여져 있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곳에 파란 별빛을 받고 있는 최고봉이 보이는 장소를
택해 석불을 세우고 별빛을 받고 있는 최고봉(월악산 영봉) 아래에 마애불을 만들어 석불입상을
바라보게 하였다.

이렇게 석불과 마애불, 절을 세우고, 8년 동안 이곳에 머물렀다고 하는데, 마의태자는 잠시 잊었
던 신라 재건의 꿈을 위해 다시 길을 떠나게 된다. 덕주공주는 월악산 영봉 아래 덕주사(德周寺)
에 머물면서 오라버니와 부친을 위해 열심히 예불을 드렸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전설이...

어쨌든 마의태자는 천년 신라의 마지막 자존심이며, 신라의 멸망을 그나마 덜 허전하게 만든 인
물로 지금까지 많은 이들의 관심과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허나 태자가 무슨 돈과 힘이 있
다고 그런 절을 세웠을까? 태자에게 무슨 신통력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취미생활로 돌을 다듬
는 석공 기술을 익혔나? 모두 아닐 것이다. 마의태자의 창건 설화는 후대인들이 만들어 낸 옛날
이야기일 뿐이다. 후대 사람들이 오리무중(五里霧中)에 휩싸인 절터의 창건설화를 빚으면서 그들
오누이를 창건자로 등장시켜 나름대로 그럴싸하게 이야기를 꾸몄던 것이다.

현재 절터 서쪽에는 근래에 지어진 세계사(世界寺)란 조그만 절이 절터를 지키고 있으며, 한참
사세를 넓히는 중이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석불입상과 5층석탑, 지방문화재인 3
층석탑과 귀부, 석조보살의상(石造菩薩倚像) 등이 있으며, 절터를 둘러보고 가볍게 하늘재 산책
을 즐겨보는 것도 괜찮다. 길도 그다지 험하지 않으며 1시간 정도면 고개를 넘어 문경시 관음리
에 이를 수 있다.


▲ 미륵리 석등


▲ 미륵리석불입상과 석굴유적


※ 미륵리사지 찾아가기 (2009년 10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미륵리, 송계(월악산) 방면 직행버스가 1일 8회 떠난다.
(동서울 출발시간 - 6:40, 8:40, 10:40, 12:40, 14:40, 16:40, 17:40, 18:40 / 12,400원)
* 동서울터미널과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충주행 고속버스가 15~3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수원, 성남, 청주, 대전(동부), 대구(북부), 부산(노포동)에서 충주행 직행버스 운행
* 충주터미널 밖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미륵리, 송계행 충주시내버스 245, 246번이 1일 10회 운행
이들은 수안보를 경유하며, 245번(1일 2회)은 미륵리까지만 운행

* 승용차로 갈 경우
① 영동고속도로 → 중부내륙고속도로 → 충주나들목을 나와 충주 방면 → 달천4거리에서 우회전
→ 수안보 → 월악산 방면 597번 지방도 → 미륵리 → 미륵리사지

② 영동고속도로 → 중앙고속도로 → 단양나들목 → 북하3거리에서 충주방면 36번 국도 → 단성
→ 수산 → 덕산 → 월악교에서 송계방면 597번지방도 → 한수(송계) → 미륵리사지


★ 미륵리사지 관람정보
* 미륵리석불입상 뒤쪽 석굴 유적은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굳이 넘어가려고 하지 말 것.
* 절터에서 하늘재로 가다보면 하늘재표석이 나온다. 눈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높은 언덕이 바로
보일텐데 거기에 미륵리3층석탑이 서 있다. 지나치기 쉬우므로 꼭 살펴보자.
* 소재지 -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35 (☎ 세계사 043-846-3987)


▲ 일직선으로 놓여진 미륵리5층석탑과 석등


♠ 미륵리사지 연화문 당간지주(蓮花紋 幢竿支柱) ~ 미륵리귀부

절터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육중한 덩치의 돌기둥, 당간지주를 만나게 된다. 하늘을 마주하며 누
워있는 그들은 다른 말로 석주(石柱)라고도 하는데, 보통 절 입구에 세우며, 괘불이나 깃발 등을
세울 때 쓰인다.

보통 당간지주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나, 이 석주는 무척이나 딱딱할 것 같은 가운데 부분에 화사
한 자태의 연꽃무늬(蓮花文)가 피어 있다. 마치 아무 것도 없는 황야에 홀로 피어난 꽃처럼 말이
다. 연꽃은 돌기둥 양쪽에 새겨져 있는데 왼쪽 것은 온전한 반면 오른쪽 것은 가운데에 금이 가
버렸다. 이처럼 연화문이 새겨진 당간지주를 연화문당간지주라고 부르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경주
보문동(普門洞)과 이곳 밖에는 없다고 한다.

지금은 비록 누워서 하늘을 쳐다보는 신세가 되었지만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았을 그의 위세가 가
히 상상이 간다. 절이 그리 곱게 문을 닫지 못했음을 말없이 보여주는 유물이라 하겠으며, 당간
지주 왼쪽으로는 석등이 심어진 자리만 남아있는 석등대석(石燈臺石)이 동병상련의 이웃처럼 나
란히 자리한다.


▲ 딱딱한 돌기둥에 피어난 한 송이 아리따운 연꽃(연화문)

▲ 물이 마를 날이 없는 둥그런 석조(石槽)

귀부 앞쪽의 둥그런 석조는 자연과 미륵리석불의 중생을 향한 넉넉한 마음가 담겨져 있는 듯, 언
제나 물로 가득하다. 절터를 찾은 중생의 목마름을 해소하는 고마운 존재로 물을 마셔보니 시원
하고 달콤하다. 더울 때 마셔서 그런가?

◀ 석조 부근에 우두커니 서 있는 커다란
돌덩어리 (정체를 모르겠음)


▲ 절터 사이를 흐르는 미륵리 계곡

▲ 미륵리사지 귀부(龜趺)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269호

석조를 지나면 입을 벌어지게 만드는 거대한 귀부(돌거북)가 북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 우리나라
에서 가장 큰 귀부로 현재 자리에 있던 바위를 쪼개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귀부의 등 부분에는
비석을 세웠던 비좌(碑座, 비신을 세웠던 구멍)가 있으나 비신(碑身)은 없다. 없어진 비신의 정
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많으나 거의 절의 사적비(事蹟碑)로 여기고 있다. 만약 사적비가 맞다면,
수수께끼에 묻힌 절터의 정체를 시원히 밝혀줄 유일한 단서가 될 수 있다. 허나 그 비신조차 어
떻게 되었는지도 알 수가 없으니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귀부의 형태를 살펴보면, 거북의 머리는 다른 귀부와 마찬가지로 앞쪽으로 쑥 내밀고 있으며, 돌
거북의 양쪽 발은 지금이라도 엉금엉금 기어갈 듯,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왼쪽 등 부분에는 새
끼 거북이들이 새겨져 눈길을 끄는데, 이들은 귀부의 꼭대기를 향해 열심히 올라가는 자세를 취
하고 있다. 설마 이 돌거북의 새끼는 아니겠지? 그리고 거북의 등 부분에는 다른 귀부에 흔히 있
는 등껍질(등갑문, 龜甲文)이 없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거대한 귀부를 세웠던 이곳의 화려했던 역사와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는 값진 유물로, 돌거북의
닫혀진 입이 열리는 그날, 숨겨진 절의 역사가 술술 밝혀 질 것이다.


▲ 정상을 향해 열심히 발걸음을 하는 새끼거북들
세상을 사는 것이 저 귀부를 오르는 새끼거북과 다를 것이 뭐가 있을까..?
그저 밑바닥으로 곤두박질 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미륵리 5층석탑 ~ 보물 95호

돌거북과 석불입상 중간에 키가 제법 큰 5층석탑이 서 있다. 탑 앞에는 석등이 세워져 있고, 그
정면에 석불입상이 세워져 있는데, 이를 통해 미륵리사지의 가람배치가 석불입상을 중심으로 한

석굴(금당)-석등-석탑
의 형태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화강암을 다듬어서 만든 6m의 탑으로, 1층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얹히고 상륜부
(上輪部)에는 노반, 복발, 찰주 등이 남아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옆으로 넓어진 방형중층(方形
重層)의 양식을 갖춘 고려 석탑으로 다른 탑에 흔히 있는 우주와 탱주가 없다. 옥개 받침은 모두
5단으로 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작품성과 세련미가 다소는 떨어진다.

상륜부에는 탑신부의 6층 옥개석으로 착각할 만큼 큼직한 노반이 있고 정상에는 철로 만든 찰주
(
擦柱)
가 남아 있는데, 산바람 때문인지 다소 우측으로 휘어져 있다. 참고로 찰주가 제대로 남아
있는 석탑은 우리나라에 몇 되지 않는다.


▲ 정면에서 바라본 5층석탑


▲ 5층석탑 옆에 자리한 4각형 석등


▲ 미륵리석등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19호


▲ 미륵리석등 너머로 바라본 하늘


5층석탑을 주변으로 모습도 제각각인 2기의 석등이 자리해 있다. 5층탑 우측에 솟아난 4각형모양
의 석등은 절이 파괴될 당시 땅 속에 묻힌 것을 1977년 절터를 발굴하면서 발견되어, 지금의 위
치에 세운 것이다.
이 석등은 고려시대 것으로 지대석에 복련(覆蓮, 잎을 아래로 내린 연꽃) 하대석을 얹고, 그 위
에 4각의 기둥을 세웠으며, 다시 그 위에 4각형의 상대석과 화사석(火舍石)을 세웠다. 기둥에는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이 시선을 끄는데 그도 넓직한 광배(光背)를 가지고 있다.
5층석탑과 석불 사이에 자리잡은 석등은 역시 고려시대 것으로 제법 균형이 잡힌 작품이다. 마치
부석사(浮石寺) 석등과 형제가 아닌가 싶은... 석등의 높이는 약 2.3m로 석등이 아래부터 복련하
대석, 그 위에 8각 기둥과 앙련의 상대석, 8각의 화사석에 옥개석을 놓았고, 상륜부에 보주가 있
다. 참고로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광명등(光明燈)으로 불리기도 한다.


♠ 미륵리 석불입상 ~ 보물 96호

석등을 지나면 비로소 미륵리사지의 간판인 미륵리석불입상 앞에 이르게 된다. 석불은 절터에서
가장 남쪽에 자리해 있으며, 북쪽으로 넓직한 절터를 굽어보고 있다.

이 불상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마의태자가 세웠다고 전한다. 마의태자 전설로 봐서는 고려
초에 충주유씨 세력이 경주 석굴암(石窟庵)을 모델로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어 웅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크게 만든 이유는 가문의 번영과 안녕을 빌고, 주변 세력과 고려 정부에게 일종
의 세력 과시를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석불의 생김새를 살펴보면, 불상의 높이는 10.6m이다. 석불의 머리는 꼽슬머리인 나발을 하고 있
으며, 머리 위에 갓을 쓰고 있다. 두 눈썹 사이에는 동그란 모양의 백호가 있으며, 눈썹은 약간
'∩'모습을 하고 있다. 눈은 졸고 있는 듯 지그시 감겨 있으며, 코는 적당한 크기이다.

입은 작지만 입술이 두꺼워서 마치 립스틱을 찐하게 바른 여인네의 입술 모습을 하고 있으며, 양
쪽 귀는 눈썹부분에서 턱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특이하게 얼굴과 목 부분이 때가 없는 듯 매우
하얀 것이 특징인데, 그 원인에 대해서는 밀양의 표충비처럼 속시원한 해답이 없다고 한다. 비가
내려도 머리에 쓴 갓 때문인지 빗방울이 얼굴과 목부분에 전혀 접근을 못한다고 하니 그저 신비
로울 따름이다. 매일 얼굴과 목을 고양이 세수처럼 씻는 나보다 더 하얗다.

얼굴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면 근심 없이 편안히 잠든 표정처럼 편안해 보인다. 어떤 이는 불상의
표정에 귀여움이 넘쳐난다고도 그런다. 목에는 좌우로 획 그어놓은 삼도(三道)가 희미하게 표현
되어 있다. 여기까지는 모든 것이 좋은데, 목 아랫부분이 좀 허전하다.

석불의 가슴 부분에는 손이 표현되어 있는데, 그냥 돌의 옆 부분을 다듬은 듯 하며, 오른손은 설
법인(說法印)을 취하며, 손을 가슴 앞에 대고 있고, 왼손은 동그란 모양의 보주(寶珠) 혹은 약합
을 쥐고 있다.
가슴 아랫부분은 그냥 돌만 적당하게 끼어 놓은 형태로 그리 꾸밈이 없다. 아마도 석공(石工)의
실력이 별로였던가 아니면 조성 중에 자금이 바닥나거나 안좋은 사정이 생겨서 저정도로 끝낼을
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는 거상(巨像)을 다루던 기술력이 급격히 떨어지던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 미륵리 석조보살의상(彌勒里石造菩薩倚像)
- 충북 지방문화재자료 47호

석불을 동,서,남으로 에워싼 석굴은 경주 석굴
암을 본따서 만들었다고 한다. 석굴은 9.8x10.
75m의 넓이로 높이 6m까지 석축을 무사석(武砂
石)으로 만들었고, 그 가운데에 석굴을 만들어
석불을 모셨다. 석불 위에는 목조 건물을 지어
석불을 보호했으나 지금은 없다. 이처럼 고려
초기에 유행하던 거대한 석불 양식을 따르고 있
는 이 석불의 정체는 미륵불 또는 약사불로 보
고 있으나, 미륵불로 무게가 크게 쏠린 듯하다.

석불 앞에는 기도를 드리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
고, 그 좌측으로 훼손이 심한 4각형의 돌이 놓
여져 있다. 얼핏 보기에는 그냥 돌처럼 보이지
만,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 돌에도 보살이 하나
새겨져 있다. 이 보살을 석조보살의상이라고 하
는데, 의상은 돌에 의지한 상을 말한다. 높이는
95cm, 어깨폭은 27cm이다.


♠ 미륵리사지 공기돌바위 ~ 3층석탑


▲ 온달장군이 가지고 놀았다는 공기돌바위
거북바위 위에 동그랑땡 모양의 돌이 놓여져 있는데, 큰 바위와 돌은
붙어있지 않고 서로 떨어져 있다. 저 바위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석불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에 계곡이 흐르는데, 그 계곡 건너에 거북바위란 제법 큰
바위가 있다. 그 바위 위에 동그랑 돌이 하나 놓여져 있는데, 이 바위가 바로 공기돌바위다.

이 바위는 직경이 1m정도 되며, 밑의 거북바위와는 완전 별개의 바위다. 설악산의 흔들바위와 비
슷한 형태로 보면 될 듯 싶다. 흔들바위도 아래 바위와 나란히 자리해 있지만, 서로 붙어있는 것
이 아닌 각자의 몸뚱이를 갖고 있다. 그렇다고 이 바위가 설악산의 그것처럼 흔들거리는 것도 아
니다. 내가 한번 밀어봤는데, 꿈쩍도 안한다. 어떻게 저렇게 얌체같이 들어앉을 수 있을까? 참으
로 기이한 바위로다. 이렇게 엉뚱한 바위에는 하나같이 황당한 전설이 따르는 법, 이 바위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 바위에 얽힌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의하면..

6세기 후반,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상류 지역으로 진출한다. 이에 고구려(高
句麗)의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년)은 온달(溫達)장군을 죽령으로 파견하여, 신라의 칩입을
막도록 하였다.

죽령(竹嶺) 전선에 도착한 온달장군은 신라군에게 겁도 주고 자신의 힘도 과시할 겸, 매일 이 공
기돌 바위를 한 손에 또는 두 손에 들고 가지고 놀았다고 한다. 매일마다 공기돌바위로 체력단련
을 했던 모양이다. 저 바위 무게가 적어도 몇 톤은 될텐데, 온달장군의 몸무게는 기껏해봐야 60~
70kg 정도로 생각하면 자신의 수십 배가 넘는 바위를 들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온달이 무슨 기인
이나 괴물도 아닌데 말이다.

이 전설은 후대 사람들이 마의태자의 전설처럼 꾸며낸 이야기로 액면 그대로 믿으면 정말로 곤란
하다. 바위의 정체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는지라, 온달장군을 좋아했던 옛 사람이 그를 주인
공으로 하여 전설을 그럴듯하게 만든 것이다. 이런 전설을 지하에 있는 온달장군이 들으면 어떻
게 생각하려나? 실제로 온달은 죽령 전선으로 파견된 적이 없다. 또한 충주 동쪽의 나의 시골인
단양(丹陽)은 산수(山水)가 좋은 고을로 이름 난 곳인데, 그곳 영춘면에 온달이 전사했다고 전하
는 온달산성이란 오랜 산성(山城)이 있다. 허나 실제로 그가 전사한 곳은 서울의 아차산성(阿且
山城)으로 이는 삼국사기와 기타 여러 사서에 나와 있다.

현재 이 바위와 관련된 내용은 위의 전설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어째서 절터에 이 바위가 건방
지게 둥지를 텄는지도 알 수 없다. 혹시 석불입상이 심심풀이로 부근에 굴러다니던 바위를 저기
다가 집어던진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런지 이 바위가 더욱 신비롭게 다가오며, 수수께끼에 둘러
싸인 절터를 더욱 신비의 늪으로 빠져들게 한다.

공기돌바위를 더듬거리듯 만져보고 있던 중 절터 안내를 담당하고 있는 문화유산해설사 아저씨가
나타났다. 그에게 바위의 대해 질문을 하니,
'이 바위에 대해선 밝혀진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
에 나도 모른다. 이 절터 자체가 의문투성이라...'


▲ 옛 미륵리절터
화려했던 전각들은 장대한 세월의 흐름 속에 녹아 없어지고 받쳐들던 주춧돌만이
황량하게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일깨워 준다. 이곳은 나그네의 숙식을 제공하고
장터가 열렸던 일종의 역원(驛院) 자리로 여겨진다.


공기돌바위를 이리저리 만져보고 돌거북(귀부) 왼쪽으로 가면 잡초와 주춧돌만 무성한 넓은 절터
가 나온다. 이곳은 미륵리사지의 동쪽 부분으로 나그네의 숙식을 제공하고 장터가 열렸던 곳으로
여겨진다. 옛날에는 건물과 사람들로 가득했겠지만 지금은 그 터만이 남아, 세월의 덧없음을 느
끼게 한다. 절터 주변에는 보호철책이 둘러져 속인의 접근을 막는다.

절터 옆쪽으로 하늘재로 오르는 오솔길이 있다. 이 길은 한자로는 계립령(鷄立嶺)이라 부르는데,
신라 아달라왕(阿達羅王) 3년(156년)에 개척되어 조선 초기에 조령이 뚫리기까지 충주에서 경상
도로 넘어가는 주 교통로였다. 옛날 이 고갯길을 지나던 나그네와 보부상, 선비들은 미륵리석불
입상에게 자신의 소원과 가족의 안녕을 빌었을 것이다.

길 왼쪽에는 깨끗한 계곡이 흐르고 있는데, 보기만 해도 시원하기 그지없다. 절터에서 2분 정도
올라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하늘재다. 갈림길에는 하늘재의 내력과 유래
가 적힌 표석이 세워져 있고, 그 앞에 표석을 호위하려는 듯 솟대들이 솟아 있다.

대 맞은편에는 언덕이 하나 있는데, 그 언덕
위에 3층석탑 1기가 외로이 서 있다. 이 탑은 2
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고려
초기 석탑이다. 미륵리 절터에 있는 유물 중 가
장 높은 곳에 자리하여 전망이 좋다. 여기서 바
로 앞에 넓은 절터가 보이고, 미륵리석불입상의
머리도 가까이에 보인다. 그런데 이 탑은 절터
에서 동쪽으로 다소 멀리 떨어져 있는데, 왜 이
곳에 탑을 세웠는지는 역시 알 수 없다. 아마도
탑 자신도 모를 것이다. 역시 모르는 것 투성이다. 이 절터의 비밀은 언제나 밝혀질련지? 덕분
에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수 있었던 미륵리절
터, 이 석탑을 끝으로 베일 속에서 가려진 절터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 미륵리 3층석탑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33호
미륵리사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것으로
2층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세웠다.


♠ 하늘재 고갯길 - 명승 49호

미륵리사지를 지나 문경 관음리까지 이어진 하늘재는 2천년 가까이 된 오래된 고갯길이다. 5세기
중반, 신라로 진출하려는 고구려군이 이 고개를 넘었을 것이며, 6세기 중반 한강으로 진출한 신
라군 역시 죽령과 이 고개를 넘었다. 신라와 후백제를 치러 가던 태봉과 고려의 군사도 이 고개
의 신세를 졌다.

이름도 이쁜 하늘재는 오랜 역사와 숨결을 간직한 고갯길로 고개를 거닐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그 옛날 고개를 넘나들던 옛 사람이 되버린다. 다만 다른게 있다면 옛날에는 먹고 살아가기 위해,
출세를 위해, 전쟁을 위해 고개를 넘었지만 지금은 답사나 산책, 등산 등의 여가로 넘고 거니는
고갯길이라는 것이 다르다. 지금은 2명 정도 다닐 수 있는 등산로로 정비되었지만 예전에는 그것
보다 더 작은 오솔길이었다. 근래에 하늘재 트랙킹이 인기를 끌면서 길을 정비하고 자연을 접할
수 있게끔 자연관찰로도 만들었다.

하늘로 통할 것 같은 하늘재길, 고개 정상은 혹 선녀와 신선이 사는 하늘나라가 아닐까? 청명한
산내음이 가득 진동하여 속세의 때를 날려주며, 계곡에는 만지기조차 두려운 깨끗한 계곡물이 졸
졸졸 노래를 부르며 큰 세상으로 흘러간다. 산책 겸 사색 코스로 제격인 하늘재는 아쉽지만 시간
관계상 중간에서 되돌아나왔다. 나중에 일찍 찾아와 문경까지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 절터 옆쪽으로 하늘재로 가는 길이 열려있다.


▲ 저 산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혹여 하늘로 연결되지는 않았을까?
차마 뒤돌아서기가 아까운 하늘재 고갯길, 누군가 제어하지 않았다면 고개의 매력에
젖어들어 나 혼자라도 고개를 넘었을 것이다.

▲ 한더위에도 무척 시원할 것 같은 하늘재 고갯길
울창하게 우거진 하늘재 숲은 한치의 햇빛도 허용치 않는다.

▲ 하늘재 고갯길은 경사가 여유로워 누구든 쉽게 거닐 수 있다.

이렇게 하늘재를 신선처럼 거닐고 나오는 길에 빈신사지(頻迅寺址) 사자석탑을 보려고 했으나 시
간상 통과하고 송계계곡이 있는 송계(松溪)로 나왔다.
송계에서 뜨끈한 된장찌게와 파전으로 맛있게 점심을 먹고 미륵리사지에서 사온 복숭아로 후식을
삼았다. 된장찌게는 지금까지 먹은 된장 중에서 맛이 다소 특이하여 숟가락이 잘 가려고 하질 않
았다. 대신 밑반찬이 깔끔하고 정갈하니 밥강도가 따로 없다.

충주로 나오면서 이번 충주시티투어의 마지막 장소인 월악선착장에 잠시 들린다. 충주댐을 막아
형성된 거대한 충주호가 바라보이는 이곳에서 단체사진을 찍으며 공식적인 시티투어 일정은 마무
리가 되었다. 이후의 내용은 생략하며 본글은 여기서 끝을 맺는다.


▲ 월악선착장 휴게소에서 바라본 내륙의 바다, 충주호(忠州湖)
주변 산들이 호수를 거울삼아 그들의 매무새를 다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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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2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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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일 - 2009년 10월 2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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