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정중앙 강원도 양구에서 누린 선사시대로의 여행 ~ 양구 선사박물관

' 한반도의 정중앙 강원도 양구(楊口)에서 누린
선사시대로의 여행 ~ 양구 선사박물관 '
양구 가오작리 선돌
▲ 미소를 머금은 가오작리 선돌



겨울의 제국이 한참 세력을 불리던 12월 중순, 한반도의 정중앙이라 일컬어지는 강원도 양구를
찾았다. 양구는 칼처럼 솟아난 높다란 산에 둘러싸인 산간벽지로 고을 북쪽에는 분단의 애환이
담긴 휴전선이 무심히 지나간다. 북한에 넘어간 양구 땅은 수입면과 방산면 일부, 동면 일부이
다.

서울에서 양구까지는 동서울터미널과 상봉터미널에서 시외버스가 다니고 있으나 오랜만에 경춘
선열차를 타고 싶어서 춘천까지 무궁화호 열차를 이용했다. 정말 간만에 타보는 경춘선 열차,
수많은 추억이 빛바랜 일기장처럼 담겨진 경춘선에 의지하며 수도권 대학생들에게 몹시나 친숙
한 대성리, 청평, 가평, 강촌을 차례로 지나 경춘선의 임시 종점인 남춘천역에 이른다. 원래는
춘천역이 종점이나 서울~춘천 광역전철공사로 남춘천역이 잠시나마 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전
철의 개통시기는 2010년 겨울로 그것이 개통되면 보다 저렴하게 접근이 가능해질 것이며, 소요
시간은 1시간 정도(2011년 이후로 다닐 급행 고속전철은 45분)로 지금의 경춘선 무궁화호 열차
보다 훨씬 빠르다.

거의 3~4년 만에 발을 들인 강원도의 수부(首府) 춘천, 예전보다 밋밋한 아파트들이 더 솟아난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시내에서 오항리(북산면)로 넘어가는 시내버스를 타
고 북산지서에서 양구로 가는 직행버스로 갈아 타려고 했으나, 간발에 차이로 차를 놓쳐 별 수
없이 춘천터미널로 바로 자리를 옮겨 양구로 떠나는 직행버스에 나를 실어 보낸다.

양구 가는 길은 예전보다 더욱 단축되어 50분 만에 양구읍에 이르렀다.배후령터널과 아직 완성
되지 않은 소양호 일부 직선화 구간이 모두 개통되면, 소양댐 건설로 접근이 많이 불편해진 양
구 지역은 30~40분 거리로 대폭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양구는 고지대라 그런지 아랫 세상과 공기부터가 확연히 틀리다.마땅한 오염원도 거의 없어 더
욱 청정함을 더해주며, 양구군청 홈페이지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이곳에 오면 정말 10년이 젊어
지는 것 같다. 차분한 분위기의 양구읍내는 외출과 휴가나온 군인과 부대로 복귀하는 군인들이
많이 띄어 정말 북한(北韓) 코 앞까지 왔음이 실감난다. 지역 사람들보다 군인들이 더 많이 보
일 정도이니 말이다.

양구읍에서 내가 찾을 읍내 북쪽의 선사박물관까지는 2.5km거리로 걸어서 25분 거리이다.차편
도 마땅치 않아서 가볍게 걸었다.읍내를 벗어나니 도로 왼쪽으로 근래에 조성된 거대한 파로호
인공습지공원이 나를 맞는다. 그곳은 예전에는 파로호의 물을 먹고 자란 곡식이 무럭무럭 익어
가던 평야였는데, 자연습지로 새롭게 태어나 양구의 새로운 관광명소를 꿈꾼다.


♠ 우리나라 최초의 선사박물관, 양구 지역 선사인(先史人)들의 모든 것이 담겨진 ~
양구 선사박물관(先史博物館)


강원도 북쪽에 자리한 양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이다. 양구읍 상
무룡리에서 구석기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해안면 지역에서 신석기 흔적들이, 고대리 등에서 청
동기 흔적이 발견되어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살았음을 보여준다.

양구 선사박물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선사시대 전문박물관으로 양구 지역에서 발견된 선사인(先
史人)들의 유물 650여 점과 그들의 유적(고인돌과 선돌)을 전시, 보존하고 있다. 박물관은 5개
의 전시실과 고인돌공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고인돌공원 한쪽에는 움집생활, 석기제작, 고인
돌 운반 등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선사체험장이 있다. 또한 박물관 맞은 편에는 삼국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양구의 역사와 문화, 민속, 생활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양구향토사료관이 자
리해 있어 한 덩어리로 같이 둘러보길 권한다.

그럼 지금부터 선사시대(先史時代)로의 여행을 떠나 보자. 참고로 선사시대는 글자가 생기기 이
전 시대를 말한다. (내가 제일로 싫어하는 시대가 선사시대인데...)

♣ 전시실 현황
제1전시실- 선사시대의 개관을 모형과 사진으로 설명
제2전시실- 상무룡리 구석기 유물 전시
제3전시실- 상무룡리 유물과 타지역 유물 비교전시, 구석기시대 사냥모습 디오라마 설치
제4전시실- 신석기, 청동기시대 유물 전시
제5전시실- 고대리 고인돌 모형 및 발굴과정 패널전시

※ 양구선사박물관, 양구향토사료관 찾아가기 (2010년 1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과 상봉터미널에서 양구행 직행버스가 1일 10여 회 떠난다.
* 춘천, 홍천에서 양구행 직행버스가 거의 1시간 간격으로 운행한다.
* 양구터미널에서 파로호, 방산 방면으로 도보 25분, 또는 택시 이용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주차료 없음)

① 서울 → 46번 경춘국도 / 서울~춘천고속도로 → 춘천 → 배후령 → 양구읍 → 선사박물관
② 서울 → 6번 국도 → 양평 → 홍천 → 신남 → 양구읍 → 선사박물관

★ 양구 선사박물관 관람정보
* 입장료 - 어른 1,000원 (단체 20인 이상 700원) / 어린이,중고생,군인 500원 (단체 300원)
* 6세 이하, 65세 이상은 공짜
* 이웃에 자리한 양구향토사료관은 입장료 없음
* 관람시간(향토사료관도 동일) : 9시 ~ 18시 (11 ~ 2월은 9시 ~ 17시까지)
* 휴관일(향토사료관도 동일) : 1월 1일, 설날과 추석, 매주 월요일
* 소재지 -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하리 510 (☎ 033-480-2677)
* 선사박물관 홈페이지는 아래 고인돌 사진이나 위에 선사박물관 사진을 클릭한다.


♠ 선사시대로의 여행 (1) ~ 선사박물관 내부 둘러보기


▲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사용했다는 돌덩어리들

수만 년 전, 이 땅에 살았던 거의 미개(未開) 수준에 가까웠던 구석기 사람들, 그들은 신석기
이전에 들이닥친 빙하기(氷河期)로 거의 다 얼어 죽었다. 수억 년 전 지구를 지배했던 공룡들처
럼.. 허나 인류는 단순무식한 공룡과는 달리 두뇌가 뛰어나 일부는 빙하기를 이겨냈는데 그들의
후손들이 바로 신석기 시대를 주도하게 된다.


▲ 방산면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물들
구석기시대 유물은 정말 전문고고학자가 아닌 이상 식별하기가 어렵다.
단순히 자연산 돌로 보이는 저것들이 구석기 사람들의 생활도구였으니 말이다.


▲ 구석기 사람들의 생활 모습

구석기 사람들은 가족 중심의 씨족공동체(氏族共同體)를 형성하며 살았다고 하는데 그들은 주로
동굴이나 강가에 살았다고 한다.
그들의 생활모습을 재현한 디오라마를 보니 동굴 주변으로 5명 정도가 돌덩어리와 사냥에서 잡
은 동물을 손질하고 있다. 중간 부분에는 2명이 주먹도끼를 들고 숲 속으로 뛰어가고 있고 왼쪽
에는 2명이 산짐승 1마리를 잡아 동굴로 오고 있다. 저들은 아마도 그날 저녁에 푸짐한 고기잔
치를 벌였을 것이다.


▲ 구석기 사람들의 사냥 모습
8명이 멧돼지를 에워싸고 돌을 던지거나 돌도끼를 휘두르고 있다.
산짐승의 저항이 완강했는지 1명이 그의 공격으로 쓰러졌다.


▲ 돌을 쪼개고 있는 구석기 사람들
오른쪽에 반궤좌(跪坐)를 한 사람은 돌 위에 조그만 돌을 얹어 붙들고 있고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은 뗸석기와 격지를 이용하여 돌을 쪼개고 있다.


▲ 신석기(新石器) 사람들의 생활 모습

한반도와 요동에 살던 구석기 사람들은 빙하기로 거의 다 사라지고 빙하기를 이겨낸 일부 사람
들이 새롭게 신석기시대를 열었다. 그들은 강가와 언덕에 움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디오라마
로 재현된 어느 단란한 신석기 인의 가족, 가장이 사슴을 잡아와 손질을 하고 있으며 그 오른쪽
에는 아들로 보이는 꼬마가 신나는 모습으로 산짐승을 바라본다. 아마도 고기 먹을 생각에 신이
난 모양이다. 움집에선 꼬마의 어미가 조리도구 같은 것을 가지고 나온다.


▲ 빗살무늬토기 - 즐문토기(櫛文土器)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 학창시절 때 지겹도록 들어봤을 것이다. 이 토기
는 신석기 사람들이 고기와 천연과실(天然果實) 등을 담거나 저장할 때 사용했다고 하며 누런
색의 토기 겉면으로 빗무늬가 새겨져 있다. 원시 수준의 인류가 저 정도의 잘 생긴 토기를 만들
기까지는 무려 100만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 청동검을 만들던 거푸집

한반도와 요동에 살던 신석기 사람들은 청동기(靑銅器)로 무장한 새로운 종족(種族)들의 공격을
받으면서 그들에게 동화되어 버렸다. 이로써 모든 것을 돌로 해결하던 석기시대(石器時代)는 끝
나고 그 당시로는 새로운 소재인 광물(鑛物)을 이용하는 시대가 시작되면서 인류의 수준은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되었다. 청동기시대는 도구의 발달과 함께 농업이 발전하면서 사유재산(私有財産
) 개념이 생겨나고 농업 생산량에 따른 빈부격차가 생겨나면서 자연히 계급제도가 생겨났다.

청동검(靑銅劍)은 부족의 우두머리 또는 샤먼이라 불리는 무당(巫堂)들이 권력의 상징으로 소유
한 것으로 거푸집을 만들어 구리와 주석을 섞어 넣은 다음 불에 달궈서 다듬은 그 당시로는 매
우 첨단에 가까운 도구였다.


▲ 제5전시관에 있는 고대리 2호 고인돌
이 고인돌은 뚜껑돌이 2개로 쪼개진 채로 발견된 탁자식 고인돌로
발견 이후 선사박물관 전시실로 옮겨 그 당시 모습 그대로 재현해놓았다.


▲ 고인돌 만드는 과정 (1)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에 등장한 것으로 지배자의 무덤이 대부분이다.
지배자가 죽으면 그 다음 후계자나 지배층이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총동원하여 바위와 암벽에서 돌을 떼어 다듬게 한다.


▲ 고인돌 만드는 과정 (2)
암벽에서 떼어내 다듬은 뚜껑돌을 마을 사람 20여 명이 낑낑대며 끌고 있다.
돌 아래에 길다란 나무막대를 깔아 끌고 가기 용이하게 하였다.
왼손으로 동쪽을 가르키며 공사를 독려하는 사람은 새로운 지배자나
그에게 위임을 받은 지배층급의 공사감독관이다.


▲ 고인돌 만드는 과정 (3)

고인돌을 세울 곳에 돌로 기둥을 세우고, 그 높이만큼 흙을 쌓는다. 그 다음에 뚜껑돌을 가지고
와 기둥 위에 갖다놓고, 흙을 조심스레 허물면서 기둥이 무너지지 않도록 손질한다. 지금의 건
축기술로 저 정도의 고인돌쯤은 금방 만들어 버리지만 그 시절은 사람 머리 수에 크게 의존하던
시기였으므로 고인돌 공사는 최소 반년 이상은 걸렸을 것이다.


▲ 김해토기(金海土器)

김해토기는 말그대로 경남 김해지역에서 발견되는 철기시대(鐵器時代) 토기로 변한연맹(弁韓聯
盟)의 하나인 구야국(狗倻國, 지금의 김해) 사람들이 사용하던 토기로 생각된다.

청동기 사람들은 대륙에서 넘어온 철기(鐵器)로 무장한 세력들의 공격을 받아 무너지는데 그 대
표적인 사건이 바로 조선(朝鮮)과 연(燕)나라의 전투였다. 한반도와 요동(遼東), 요서(遼西)에
웅거한 조선은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북경 지역에 있던 연나라를 공격했다. 허나 철기로 무장
한 연나라군의 반격으로 크게 낭패를 보면서 되려 2,000리의 영토를 빼앗겼다. 강대국으로 대륙
을 떨게 한 조선의 패배 원인은 바로 철기란 존재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철기시대가 시작된 이
후 청동기는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 선사시대로의 여행 (2) ~ 고인돌과 선돌 콜렉션
- 양구 고인돌공원

박물관의 북쪽 뜰은 고인돌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고대리와 공수리를 비롯한 양구 전역에서
옮겨온 고인돌과 선돌 20여기가 전시되어 있다. 그중 대부분을 이루는 고대리, 공수리 출신 고
인돌은 지방문화재자료이며, 고대리 출신 중에서 큰 고인돌은 따로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공원만 둘러볼 경우에는 박물관 입장료를 낼 필요가 없으며, 일광욕을 즐기는 고인돌 사이로 벤
치와 원두막 등의 편의시설이 자리해 있어 소풍 장소로도 손색이 없다. 공원을 가득 메운 고인
돌을 둘러보면 마치 우리나라 전역에 있는 고인돌을 모두 만난 기분이다.

공원 서쪽에는 복원된 신석기시대 움집이 길게 늘어서 있으며, 고인돌 운반과 석기제작, 수렵체
험, 움집생활 등을 체험할 수 있는 선사체험장이 자리해 있다. 체험관련 문의는 033-480-2677


▲ 뚜껑돌만 있는 고인돌
얼핏보면 평평한 바위처럼 보인다. 이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부족장(部族長)의 무덤으로
돌 밑에 그의 시신과 기타 유물을 묻고 그 위에 돌을 얹혔다.


▲ 앉은뱅이가 되버린 고인돌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저렇게 주저 앉은 고인돌,
세상만물 중에 감히 세월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다.


▲ 너희들 고인돌 맞아?
저 돌덩어리도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채 뜰 장식용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 세월의 때가 가득 낀 고인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얀 피부를 자랑했던 돌은 새카맣게 익었다.


▲ 너희들도 고인돌이냐? 돌이 고여 있으니 고인돌로 쳐 줘야지..



▲ 공수리, 고대리에서 옮겨온 고인돌 무리 (사진 2장)

양구에서 고인돌이 제일 많이 발견된 곳은 바로 파로호의 상류인 고대리와 공수리 지역으로 지
금은 거의 대부분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양구 고인돌의 대표격인 고대리 고인돌은 약 10기 정도
남아있는데, 고대리는 북한강(北漢江)의 최상류로 예로부터 사람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청동기시대에 고대리 지역에 상당한 규모의 부족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부족은 점차 주변
으로 영향력을 확대하여 양구 지역을 지배하는 세력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험한 산악지형에 의
지하여 별다른 외침 없이 오랫동안 독자적인 세력을 누리다가 점차적으로 고조선에게 복속(服屬
)되었을 것이고 그 이후로는 고구려(高句麗)의 지배를 받았다.

강원도 지방기념물 9호인 고대리 고인돌은 양구의 다른 고인돌보다 더 웅장하고 위엄이 있어 보
인다. 청동기 사람들의 건축물인 고인돌은 부족장의 무덤 역할 외에도 하늘에 제를 지내는 제단
(祭壇)의 역할도 하였다고 한다. 공수리와 고대리에서 옮겨온 고인돌 무리는
강원도 지방문화재
자료 109호~110호
이다.



▲ 뚜껑돌만 있는 고인돌

우리나라에 있는 고인돌은 크게 2가지로 뚜껑돌과 기둥이 있는 이른바 탁자식 고인돌과 뚜껑돌
만 있는 고인돌로 나눌 수 있다. 예전에는 탁자식 고인돌은 남방식 그렇지 않은 것은 북방식으
로 쓸데없이 구분했으나 남쪽에서도 북방식이 많이 발견되고, 북쪽에서도 남방식이 많이 발견되
면서 이제는 그런 식의 구분은 의미가 없어졌다.


▲ 청동기 사람들의 삶과 애환이 담긴 고인돌의 뚜껑돌 아랫도리로
석실(石室) 부분이 보인다.


▲ 공원에 덩그러니 놓여진 원두막
앞쪽에 누워있는 돌덩어리 역시 고인돌이다.


▲ 겨울잠에 잠긴 선사체험장 (고인돌 운반 체험장)

고인돌을 만들 때 바닥에 나무를 깔고 돌에 줄을 묶어 여러 사람들이 등에 들쳐메 줄을 끄는 형
식으로 돌을 운반했다고 한다. 선사체험장은 그들의 그런 수고로움과 그들의 생활을 직접 몸으
로 때우는 체험의 장으로 만든 것인데, 그냥 돌덩어리 하나와 나무, 단단한 줄만 아무렇게나 처
박혀 있을 뿐, 안내문이나 안내도우미는 하나도 없다. 아마도 체험을 신청한 단체 손님에게만
해주는 모양이다.



▲▼ 신석기 사람들이 살던 움집

일명 해안펀치볼이라 불리는 해안면 지역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 움집을 복원한 것이다. 신석기
사람들은 강가나 바닷가에 움집을 짓고 씨족단위로 살았는데 밖에서는 작아 보이던 움집이 내부
로 들어서면 상당히 넓게 다가온다. 적어도 10명 정도는 거뜬히 살았을 것이다.

집터 가운데에는 불을 피우던 화로자리가 있어 고기 등을 굽거나 추운 날씨 난방을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짚풀로 엉성하게 만들어 추울 것만 같은 움집은 밖과 달리 어느 정도 따뜻함이
깃들여져 있다. 지금은 주거지가 아닌 움집생활 체험장소로 쓰이며, 집으로 들어가는 문은 사람
키의 절반 정도 크기로 몸을 크게 숙이고 들어가야 된다. 마치 동굴을 들어가듯 말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무더운 여름이나 따스한 봄, 가을에 선사시대 생활 체험으로 하루 정도 지내봤으면
좋겠다. 움집에서의 하룻밤은 어떨까? 물론 옷은 중요한 데만 걸치고 말이다.


▲ 선사박물관 우측에 근래에 만든 이상한 물체가 놓여져 있다.
나무 장작 위에는 황금알의 모형으로 보이는 커다란 물체가 알처럼 놓여져 있다.
알 위에는 하얀 꽃이 수줍은 듯 매달려 있는데, 무엇을 상징하고 무슨 연유로
저곳에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음, 궁금하면 박물관에 문의 요망


▲ 내가 좋아하는 돌덩어리, 보면 볼수록 정이 드는 가오작리 선돌

박물관 앞뜰에는 미소가 아름다운 선돌 1기가 서 있다. 박물관 안내자료나 홈페이지에 메인으로
자리할 만큼 박물관의 상징물로 자리매김한 선돌로 원래는 광치령 부근 가오작리에 있었다.

선돌은 말그대로 서 있는 돌로 유식한 말로는 입석(立石)이라고 부른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기
복(祈福) 행위를 위해 만든 것으로 태양숭배를 상징하기도 하고 혹은 성기신앙(性器信仰)의 대
상물로 만들었다고도 한다. 허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정표나 마을의 위치를 알려주는 역할로 변
화되었다고 한다. 선돌은 이렇게 옛 선사인들의 소박한 건축물로 잘생긴 돌을 일으켜 세워 약간
손질을 가하여 신앙의 대상물로 삼았다.

가오작리 선돌은 바닥에 누운 평퍼짐한 돌 위에 일으켜 세운 3m의 돌로 아랫부분은 다소 볼록하
여 풍만해 보인다. 중간에서 폭이 다소 넓어졌다가 위로 갈수록 일정하게 줄어들면서 머리부분
에서는 세모로 마무리를 지었다. 몸매도 선돌치고는 괜찮지만, 그만의 특징은 머리에 눈과 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눈은 어린이처럼 해맑고 동그라며, 입은 살짝 구부러진 것이 은연중 미
소를 띄운다. 돌덩어리도 저렇게 웃을 수가 있을까? 저 미소는 혹 선사인의 미소는 아닐까? 정
말로 어여뻐 보이는 돌의 미소는 나의 시선을 오랫동안 붙잡아 놓아주려하질 않는다. 마음같아
서는 집뜰로 몰래 가져와 두고두고 보고 싶지만 그도 엄연한 무거운 돌덩이라 차마 그러지를 못
한다. 선돌의 눈과 입은 그가 광치령 부근에 살던 시절, 주민들이나 군인들이 심심풀이로 새겼
다고 하는데 확실한 것은 모르겠다.

이렇게 하여 양구 선사박물관을 통한 선사시대로의 여행은 이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0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단 블로그는 한달까지이며, 원본
은 2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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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읽으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고 댓글 하나씩 꼭 달아주세요.
*공개일 - 2010년 1월 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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