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9.01.17 인천 영종도의 지붕을 거닐다. 백운산 나들이 ~~~ (양주성 금속비, 용궁사, 소원바위, 백운산둘레길)
  2. 2018.06.29 도심과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국제적인 선찰로 명성이 높은 북한산 화계사 ~~~ (화계사의 석가탄신일 야경)

인천 영종도의 지붕을 거닐다. 백운산 나들이 ~~~ (양주성 금속비, 용궁사, 소원바위, 백운산둘레길)

 


' 인천 영종도의 지붕을 거닐다. 백운산 나들이 (용궁사) '

용궁사 느티나무

▲  용궁사 느티나무

백운산 정상 백운산 산길

▲  백운산 정상

▲  백운산 산길

 


 

여름이 한참 물이 오르던 7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인천(仁川) 앞바다에 떠있는 영종도를
찾았다.
영종도(永宗島)는 천하 제일의 국제공항으로 찬양을 받는 인천국제공항을 품은 큰 섬으로
공항을 닦고자 영종도와 용유도(龍游島) 사이의 너른 갯뻘을 매립하고 삼목도(三木島) 등
의 여러 섬을 엮으면서 섬이 커졌다. 하여 영종도하면 기존의 영종도 외에 용유도와 삼목
도를 포함해서 일컬으며, 이들을 묶어 영종▪용유도라 부르기도 한다.

영종도에는 백운산이란 뫼와 용궁사란 오래된 절이 있는데 그곳에 살짝 마음이 가서 겸사
겸사 바다를 건너게 되었다. 그곳으로 가려면 공항전철(서울역↔인천공항2터미널)을 타고
운서역이나 영종역에서 접근하는 것이 제일로 좋지만 운서역과 영종역은 환승할인 무적용
역이라 나 같이 서민들에게는 조금 부담이 된다. (공항전철의 영종도 구간은 수도권 환승
할인이 되지 않음)
그래서 집 앞에 있는 1호선을 쭉 타고 동인천역까지 이동하여 인천좌석버스 307번을 타고
영종도로 들어갔다. 시간도 좀 걸리고 영종도 강제투어가 조금 심하긴 하지만 환승할인의
혜택을 받을 수 있으니 조금 일찍 부지런을 떨면 된다.

영종도에 진입하여 백운산 그늘에 자리한 전소에 두 발을 내렸다. 전소는 영종동행정복지
센터와 초등학교, 고등학교, 우체국, 아파트 등을 갖춘 오래된 마을로 서쪽에는 백운산이
, 동쪽과 남쪽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 평지에 한참 개발의 칼질이 춤을 추고 있음)
백운산 나들이는 바로 이곳 전소에서부터 시작된다.


 

♠  전소마을에서 만난 오래된 비석 무리들

▲  전소마을 비석 무리들

전소에서 문득 생각나는 존재가 있어서 백운산을 잠시 접어두고 마을 북쪽에 있는 구립하늘어
린이집을 찾았다. 그 앞에는 오래된 비석들이 3열로 각각 4기씩, 총 12기의 비석이 늘어서 있
는데, 이들은 영종도 곳곳에서 수습한 옛 영종진(永宗鎭) 첨사(僉使)의 비석으로 주로 선정비
(善政碑)와 불망비(不忘碑)가 주류를 이룬다.
선정비는 첨사의 착한 행정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고, 불망비는 첨사의 덕을 기리고자 세운 것
인데, 백성들이 진심으로 세운 것도 있겠지만 선정은 쥐뿔도 없음에도 첨사가 강제로 세운 것
도 적지 않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저런 비석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돈을 뜯어가
자신의 배때기를 채운 관리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종진은 조선시대에 영종도에 설치된 군사 기지로 처음에는 남양부(南陽府, 화성시 남양) 소
속이었다가 1875년 운양호(雲揚號) 사건으로 된통 당하면서 인천부(仁川府)로 넘어갔다. 이후
영종진이 폐지되면서 섬 전체가 부천군(富川郡) 소속이 되었다가 이후 옹진군(甕津郡) 관할로
바뀌었으며, 1989년 인천 중구(中區)에 편입되어 인천의 그늘에 있게 되었다.

이들 비석 중에 제일 우측에 유리막에 감싸인 조그만 철비(鐵碑)가 있는데, 그것이 나를 이곳
으로 오게한 양주성금속비(梁柱星金屬碑)이다. 돌로 만든 비석은 참 많지만 철이나 금속으로
만든 비석은 흔치가 않은 편으로 수도권에서도 철비는 이것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그러다보
니 다른 석비는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이 철비에만 자꾸 눈길이 간다.


▲  비석 무리의 홍일점, 양주성 금속비 - 인천 지방기념물 13호

이 철비는 높이 91cm, 폭 31cm, 두께 3cm로 황동(놋쇠)을 녹여서 만든 것이다. 1875년 운양호
사건으로 영종진이 큰 피해를 입자 흥선대원군은 인천부를 방어영(防禦營)으로 승격시키고 영
종진을 인천부 소속으로 넘겨 양주성을 영종진첨사<첨절제사(僉節制使)>로 파견했다.
양주성은 파괴된 진과 건물을 손질하고 방비를 튼튼히 했으며 전쟁으로 혼란해진 민심을 수습
해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서 떠나게 되자 백성들은 크게 아쉬
워하며 놋그릇을 모아 1877년 9월에 이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그냥 석비(石碑)도 아닌 놋그
릇을 모아 철비를 세울 정도면 양주성의 선정이 제법 대단했던 모양이다.

▲  옆에서 바라본 비석 무리

▲  비석 무리 부근에 자리한 연자방아


▲  속세를 향해 길을 늘어뜨린 용궁사 숲길 ▼

비석 무리를 둘러보고 용궁사로 길을 향했다. 전소에서 북쪽으로 조금 가면 용궁사로 인도하
는 숲길이 나오는데, 그 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용궁사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오르막길
이긴 해도 경사는 느긋하며, 숲이 매우 삼삼해 햇볕도 들어오기 힘들다.


 

♠  백운산에 안긴 영종도 유일의 오래된 절, 용궁사(龍宮寺)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15호

백운산(白雲山, 256m) 동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용궁사는 개발의 칼춤 소리로 요란한 영
종도의 별천지 같은 곳이다. 바로 절 밑에까지 개발의 칼질이 자행되어 온갖 개발 소음이 난
무하지만 용궁사는 백운산의 비호로 그 소음을 거의 모르고 살 정도로 산자락에 푹 묻혀있다.

용궁사는 영종도의 몇 안되는 문화유적으로 670년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원효는 그 시절 왕경<王京, 경주(慶州)>에 머물며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을 상
대로 불교 대중화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니 원효의 창건설은 속세살이만큼이나 참 부질
없는 소리이며, 그의 창건설을 밝혀줄 기록이나 유물도 전혀 없다.
게다가 절에서는 1,300년 묵었다는 느티나무를 증거로 천년 고찰(古刹)임을 내세우고 있는데
따지고 보면 나무의 나이도 정확한 편이 아니며, 나무가 꼭 절 창건과 관련이 있다는 보장이
없다. 나무를 제외하면 오래된 것이라고 해봐야 요사와 관음전 정도로 19세기 중/후반에 조성
된 것이 고작이다. 또한 창건 이후 19세기까지 이렇다할 내력도 남기지 못해 오랜 내력에 의
구심을 던지게 한다. 다만 백운산 봉수대 관리와 바다 조망을 구담사(舊曇寺) 승려가 담당했
는데 그 구담사가 바로 용궁사의 옛 이름이며, 옥불 전설에는 옛 이름의 하나인 '백운사(白雲
寺)'가 등장해 그것을 통해 적어도 고려나 조선 초에 조촐하게 법등(法燈)을 켰던 것 같다.

절의 사적(事蹟)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중반으로 그것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과의 인연 덕분에 남게 된 것이다. 대원군은 불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부인 민씨(閔氏)가 불
교 신자라 자연히 절 출입이 잦았다. 하여 서울과 경기도의 여러 절(화계사, 흥천사, 수락산
흥국사, 안성 운수암 등)과 흔쾌히 인연을 맺으며 기도를 하고 여러 승려와 교분을 쌓았는데,
용궁사도 그런 절의 하나였던 모양이다.
배를 타고 들어가야 되는 섬인데도 어떻게 인연을 지었는지 이곳을 찾아 기도를 올렸다고 하
며, 1854년에 절을 중창했다. 이때 용궁사로 이름을 갈게 하면서 현판을 써주었는데 이는 관
음전 옥불이 바다 용궁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권한 것이라고 한다. 이후 대원군은
고종(高宗)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약 10년 동안 이곳에 머물며 기도를 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용궁사와 대원군과의 인연은 요사에 걸린 그의 현판이 모든 것을 대변해주니 창건설은
몰라도 대원군 중창설은 더 이상 왈가왈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대원군 이후 딱히 적당한 내력은 없으며, 영종도가 인천에 편입되자 절과 경내에 있는 느티나
무가 인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관음전, 칠성각, 용황각, 요사채 등 6~7동의 건
물이 있으며, 문화유산으로는 오래된 느티나무와 수월관음도 등이 있다. 절 자체는 지방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절과 느티나무 때문
이다. (그것도 아니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음)

영종도 유일의 오래된 절로 태고종(太古宗) 소속이며 그렇게 깊은 골짜기는 아니지만 절을 둘
러싼 숲이 삼삼하여 바쁘게 변해만 가는 영종도에서 이곳만큼은 시간이 멈춰있는 것 같다. 숲
이 속세의 소음을 걸러주니 산사(山寺)의 분위기도 그윽하며, 절이 조촐한 규모라 눈에 쏙 넣
고 살피기에도 별 부담이 없다.
근래에 절에서 백운산 정상을 잇는 산길을 손질하여 백운산 둘레길로 삼았는데 절을 둘러보고
둘레길을 따라 40분 정도 오르면 영종도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백운산 정상에 이른다. 절만
둘러보고 가면 많이 허전할 것이니 백운산도 같이 겯드린다면 영종도 여로(旅路)를 더욱 알뜰
하게 꾸며줄 것이다.

※ 영종도 용궁사 찾아가기 (2018년 12월 기준)
* 공항전철 영종역(1번 출구)에서 중구 지선 3번, 4번을 타고 용궁사입구 하차. 이 방법이 제
  일 최적이나 배차간격이 허벌나게 길고 영종역에서 서로 타는 곳이 틀리다.
* 공항전철 영종역(1번 출구)에서 203번, 598번 시내버스를 타고 전소 하차 (598번은 크게 돌
  아가므로 203번이 나음)
* 서울 1호선 동인천역(4번 출구)에서 307번 좌석버스를 타고 전소 하차
* 인천 1호선 동막역(3번 출구)에서 304번 좌석버스를 타고 전소 하차
* 승용차
①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 금산나들목을 나와서 영종하늘도시 방향 → 운남교차로에서 우회
   전 → 용궁사입구에서 우회전 → 용궁사 주차장
② 인천대교 → 영종나들목을 나와서 영종하늘도시 방향 → 운남로 → 전소 → 용궁사입구에
   서 좌회전 → 용궁사 주차장
* 소재지 : 인천광역시 중구 운남동 667 (운남로 199-1 ☎ 032-746-1361)


▲  용궁사 샘터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샘터가 마중한다. 산사에 으레 있는 샘터이건만 요즘처럼 더울 때
는 보물급 문화유산보다 100배 더 반가운 존재이다. 네모난 석조(石槽)에는 백운산이 내린 약
수가 가득 담겨져 있는데,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목구멍이 시원해진
다.

▲  용왕의 공간, 용황각(龍皇閣)

▲  용황탱과 관음보살탱화

샘터를 지나면 석축 위에 세워진 용황각이 나온다. 용황각이란 이름은 여기서 처음 만나는데
일반적인 용왕(龍王)을 용황으로 격을 높여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왕을 황제로 높인 것
과 같은 이치~) 아무래도 섬이다보니 바다를 터전으로 삼은 섬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우상인
용왕을 봉안한 것인데 용왕을 용황으로 높여 특별 대접을 하며 주민들의 용왕신앙을 돕고 있
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용황각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로 밑에는 약수터가
있는데, 이 샘터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샘터 위에 석축(石築)을 다지고 건물을 세운 터라 주
춧돌의 키가 높으며, 북쪽에 트인 문을 통해 용황각으로 들어서면 된다. (동쪽 문 바깥은 허
공이라 추락 주의 요망)
용황각 불단에는 용황이 담긴 용황탱이 봉안되어 있는데, 용황의 머리에는 두광(頭光)이 반짝
반짝 윤을 내고 있으며, 용황탱 옆에는 관음보살(觀音菩薩) 누님이 그려진 탱화가 나란히 자
리해 있다.


▲  용궁사 느티나무(할아버지나무) - 인천 지방기념물 9호

요사 앞에는 용궁사의 오랜 자연산 보물이자 이곳의 터줏대감인 느티나무 2그루가 넓게 그늘
을 드리우고 있다.
이들 나무 가운데 요사 동쪽에 자리한 나무는 나이가 무려 1,300년을 헤아린다고 한다. 나무
의 덩치가 참 크긴 하지만 1,300살로는 보이지 않고 훨씬 젊어보이는데, (한 600~700살 정도)
요즘 하도 거품이 많은 세상이라 나이 재측정이 필요해 보인다. 실제 예로 서울에서 가장 오
래된 나무로 손꼽히던 방학동(放鶴洞) 은행나무도 나이가 830년을 호가한다고 했지만 2013년
에 지방기념물로 지정되면서 다시 나이를 재본 결과 600년 정도 된 것으로 나왔다. 그러니까
230년 정도의 적지않은 거품이 끼어있던 셈이다.

요사 동쪽 느티나무는 높이 20m, 나무둘레 5.63m에 이르는 장대한 나무로 여기서는 할아버지
나무라 불린다. 그리고 요사 북쪽 느티나무는 할머니나무라 불리는데 덩치는 할아버지나무보
다 작으며, 그 나무보다 후대에 심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할아버지나무는
할머니 나무쪽으로만 늘 가지를 뻗는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옛부터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
낙네들의 치성 장소로 애용되었는데, 절이 있기 전부터 기자(祈子) 신앙의 현장으로 널리 쓰
인 듯 싶다.
이후 절이 들어서면서 예불을 먼저 올리고 용황각 밑의 약수를 마신 다음 할아버지나무에 기
원을 하는 순서로 변경되었으며,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아이를 낳는다고 전한다.

▲  서쪽에서 바라본 느티나무
(할아버지나무)

▲  요사 북쪽에 자리한 느티나무
(할머니나무)


▲  용궁사 요사(寮舍)

두 느티나무 그늘에 자리한 요사는 대원군이 1854년에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관음전과 더불
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는데 승려의 생활공간 및 공양간,
대중방(大衆房)의 역할을 하고 있다.

건물 동쪽에는 툇마루 2칸을 두었으며, 서쪽을 제외한 나머지는 벽으로 막았다. 정면 가운데
칸에는 용궁사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절 이름을 용궁사로 바꿀 것을 제
안하며 친히 써준 것으로 그의 호인 석파(石坡)가 쓰여있어 대원군과의 진한 인연을 가늠케
한다. 그는 어찌하여 바다 건너 이곳까지 애써 인연을 지었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  흥선대원군이 1854년에 남겼다는 '용궁사' 현판의 위엄
용궁사에서 느티나무 다음으로 애지중지하는 존재로 이 현판이 없었다면
대원군 중창설도 자칫 신뢰를 잃을 뻔 했다.

▲  두목 포스가 느껴지는 묘공(猫公)의 위엄

요사에는 용궁사에서 기르는 누런 털의 묘공(고양이)이 있었다. 요사와 할배나무 주변을 순찰
하면서 여름 오후를 보내고 있는데,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니 묘공 특유의 관심 소리를 내며
내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하여 잠자리를 잡아서 조공(?)으로 바칠려고 했으나 이곳 잠자리는
눈치가 100단인지 하나도 잡지 못했다. 한때 외갓집이 있는 단양(丹陽) 시골의 잠자리 씨를
거의 마르게 할 정도로 잠자리를 잘 잡았는데, 이젠 나도 늙은 모양이라 오히려 그들에게 희
롱을 당할 판이다.

묘공 하나가 요사 툇마루에 앉아있다가 더운지 아랫 돌에 벌러덩 누워 강렬한 포스를 보이니
마치 두목 포스 같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꼬랑지를 살랑거리며 경내를 지키는 그들이 있기에
용궁사는 오늘도 무탈하다.


▲  대웅보전(大雄寶殿)

용황각 뒤쪽에는 가건물로 된 대웅보전이 있다. 이곳은 관음도량을 칭하는지라 정식 법당(法
堂)은 관음전으로 2000년 이후 합판으로 대웅보전을 지어 새로운 법당으로 삼았으나 건물의
볼품은 많이 떨어진다.
내부에는 석가3존불과 지장보살상, 신중탱 등이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 우측 부분은 종무소(
宗務所)로 쓰이고 있다.

▲  포근한 인상의 석가3존불

▲  조금은 빛바랜 신중탱(神衆幀)

▲  한참 몸단장 중인 관음전(觀音殿)

▲  관음전 뒤쪽에 자리한 석조관음보살입상

요사 바로 뒤쪽에는 이곳의 법당인 관음전이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관음전은 대원군
이 세운 것으로 전해지며 요사와 함께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내가 갔을 때는 마침
보수공사 중으로 불단에 있던 관음보살상은 칠성각으로 잠시 거처를 옮겼으며, 김규진(金圭鎭
)이 쓴 주련(柱聯)도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관음전에는 바다에서 건졌다는 옥불(玉佛)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사연이 아련하게 전해온
다.
때는 조선 중기(또는 후기)의 어느 평화로운 날, 영종도 월촌에 어부(漁夫) 손씨(또는 윤씨)
가 살고 있었다. 거의 매일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로 입에 풀칠을 하며 살고 있었는데, 그날도
바다로 나가 그물을 치며 대어를 기대했다. 허나 원하는 물고기는 없고 왠 옥불 하나가 걸려
든 것이 아닌가? 이에 어부는 단단히 흥분하여
'물고기는 하나도 없고 왠 이런 게 걸리고 앉았냐!'
투덜거리며 옥불을 바다에 내던지고 다시 그물을 쳤다. 그런데 그물을 건져올리니 아까 옥불
이 또 걸려든 것이다. 그래서 육두문자 요란하게 내뱉고 다시 내던졌으나 이후에도 계속 옥불
만 그물에 걸려든다. 이에 어부는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라 여기고 불상을 백운사(白雲寺, 지
금의 용궁사)에 넘겼다.
그 이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백운사 앞을 말이나 소를 타고 지나가면 무조건 멈춰서 움직
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절 앞을 지날 때는 말과 소에서 내려서 지나갔으며,
불상의 영험이 있다는 이야기가 주변에 퍼져 육지에서도 많은 이가 찾아와 불전함이 매일 터
져나갈 정도였다. 또한 불상을 발견하여 절에 넘긴 어부도 이후 풍어(風魚)를 누리면서 부자
가 되었다고 전한다.

19세기 중반 용궁사를 찾은 대원군은 이 사연을 전해듣고 불상이 바다 용궁(龍宮)에서 나왔으
니 절 이름을 용궁사로 고칠 것을 제안하며 현판을 써주었다. 그 현판이 바로 요사에 걸린 그
것이다.
바다에서 건졌다는 옥불은 인근을 지나다가 침몰한 배에 있던 것이거나 절이 파괴되면서 버려
져 바닷속을 방황한 불상으로 여겨진다. 그 옥불이 있었다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느티
나무 제외)이 되었을 것인데, 왜정(倭政) 때 도난을 당해 지금은 없으며, 새로 만든 조그만
관음보살상이 그 자리를 조금이나마 대신한다.


▲  날렵한 처마선이 인상적인 칠성각(七星閣)

관음전 옆에는 근래에 지어진 석조관음보살입
상과 칠성각이 자리해 있다. 칠성각은 칠성(七
星)을 봉안한 건물이지만 칠성 외에 산신(山神
)과 독성(獨聖)도 함께 담고 있어 삼성각(三聖
閣)의 역할을 하고 있다. (관음전 중수로 그곳
에 있던 관음보살상과 수월관음도가 이곳의 신
세를 지고 있었음)

칠성각에 봉안된 칠성탱과 산신탱, 독성탱은
20세기 초반에 그려진 것으로 고색의 기운이
제법 역력하다.

▲  다른 산신탱과 달리 꽤 젊어보이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 등이 담긴 산신탱

▲  독성과 동자가 그려진 독성탱

▲  칠성 가족을 빼곡히 머금은 칠성탱


▲  관음보살상과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76호
관음보살상 뒤에는 수월관음도가 후불탱으로 걸려있다. 그 탱화는 1880년에 축연
(竺演)과 종현(宗現)이 그린 것으로 3폭의 비단을 이어서 만들었는데 화폭
규모는 세로 135.5cm, 가로 174.3cm으로 가운데 화폭은 102.2cm, 향좌폭
29.3cm, 향우폭 33.5cm으로 화폭이 제일 넓다.

▲  경내 뒤쪽에 자리한 소원바위

용궁사의 다른 명물로는 소원바위가 있다. 관음전 뒤쪽 산자락에 있는 이 바위(바위라기보다
는 커다란 돌판~)는 소원을 빌면서 바위 위에 작은 돌을 시계 방향으로 돌려 자석에 붙는 듯
한 무거운 느낌이 들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가볍게 돌아가면 꽝~!!) 바위 앞에 하는
요령이 적혀있는데 우선 바위 뒤쪽에 놓인 불상 앞에 조공(돈)을 바치고 (역시나 돈이다~!!)
그런 다음 생년월일과 소원을 말하며 3배를 올리고 돌을 돌리라고 나와있다.
나는 조공을 바치지 않고 (절이 나보다는 경제 사정이 훨씬 좋으니~~) 그냥 소원을 빌고 3배
를 하며 돌을 돌렸다. 기분상인지는 모르겠지만 돌이 순간 무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소원이 접수된 모양이다. 하여 다시 한번 해봤는데 역시나 무거웠다. 혹여 접수 대상이 아니
더라도 돌의 무거움은 누구나 같은 것이 아닐까? 아니면 기분상일까? 과연 소원 성취가 이루
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소원이 꼭 이루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를 잠시 들뜨게 한다. (허나
현실은 소원 성취 그딴거 없음~~~)


 

♠  안개 낀 백운산(白雲山)을 오르다.

▲  용궁사에서 백운산으로 오르는 백운산둘레길

용궁사에서 50분 정도를 머물다가 절을 등지며 백운산둘레길에 발을 들였다. 백운산 정상까지
오를까 말까 궁리를 하다가 일몰까지는 아직 시간도 넉넉하고 용궁사와 둘레길만 보고 철수하
기에는 너무 싱거워 흔쾌히 정상까지 가기로 했다.

백운산둘레길은 영종도의 지붕인 백운산 주위를 도는 산길로 4.4km 정도 된다. 시작점은 접근
성이 좋은 용궁사에서 하는 것이 좋은데, 용궁사에서 25분 정도 오르면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여기서 둘레길과 작별하고 15분 정도 오르면 정상으로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 대체로
경사는 느긋한 편이다. 수목이 울창하여 햇볕이 들어올 틈이 거의 없으며 산바람도 넉넉히 불
어 땀을 제대로 털어간다. 다만 약수터가 없기 때문에 용궁사에서 물배를 채우거나 물통을 채
워 산행에 임하기 바란다.


▲  쉼터로 조성된 6각형 정자 (용궁사 부근)

▲  둘레길에 왠 연자방아?
1981년 12월에 용궁사 신도가 기증한 연자방아로 왜 아무런 필요도 없는 이곳에
두었는지 모르겠다. 절에 두거나 산 밑에 두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  잠시 미친 경사를 보여주는 둘레길

▲  백운산 봉수대(烽燧臺)터

둘레길과 정상 방면 산길이 갈리는 곳에 백운산 봉수대가 있었다. 이 봉수대는 서해바다의 동
태를 살피며 위급시 봉화를 피워 인천 철마산(鐵馬山)과 백운산(白雲山)에 알렸는데, 구담사(
용궁사) 승려(1명 또는 3명)와 봉수지기 2명이 봉수대를 지켰다고 한다.

서해를 지키던 당당한 모습의 봉수대는 세월의 장대한 흐름에 사라진지 오래이고 이곳과 정상
으로 가는 길목에 약간의 돌무더기가 남아있다. 여기서는 두께 1cm 정도의 경질와편 등이 나
오고 있어 봉수대의 옛 흔적을 희미하게 더듬을 수 있다.


▲  정상 동쪽에 자리한 헬기장

▲  헬기장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

▲  백운산 정상 전망대

용궁사에서 40분 정도 오르면 영종도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백운산 정상에 도달한다. 정상
에는 전망대를 두어 조망(眺望)의 나래를 누리게 했는데, 가는 날이 문닫는 날이라고 안개가
자욱히 끼어 100m 전방도 보이지를 않는다. 보물급 조망을 기대하고 올라왔건만 서해바다가
빚은 안개의 심술에 그 기대는 산산히 허물어지고 말았다.

전망대에는 인천국제공항과 공항신도시, 용유도(龍游島), 서해바다, 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섬
들이 보인다는 전망 안내문과 사진이 있지만 오리무중과 같은 안개가 그 모든 것을 다 앗아가
버려 전망 안내문이 참 무색하게 되었다.

▲  우두커니 서 있는 백운산 정상 표석

▲  백운산 정상 전망대


▲  안개 속에 몸을 가린 백운산 남쪽 봉우리

▲  정상에서 전소로 내려가는 산길 (1)

▲  정상에서 전소로 내려가는 산길 (2)

진한 안개에 털려 정체성을 잃은 정상 전망대를 벗어나 전소 쪽으로 내려갔다. 어차피 보이는
것도 없으니 더 머물러봐야 의미도 없고, 시간도 어느덧 18시가 넘었다.
내려갈 때는 동남쪽 전소 방향으로 내려갔는데 이 길도 대체로 완만한 편이다. 안개가 자욱해
도 전방 50m 까지는 보이기 때문에 하산에 별로 무리는 없었다. 야속한 안개를 뚫고 20분 정
도 내려가니 산속에 묻힌 집이 나오고, 군사 훈련시설을 지나니 울퉁불퉁했던 흙길은 끝나고
신작로가 앞에 펼쳐진다.

신작로를 따라 시골스러운 전소마을 서쪽을 지나면 영종자이아파트와 영종국제물류고등학교가
나오고 영종동의 주요 간선도로인 운남로가 나타난다.

이렇게 하여 영종도 백운산 나들이는 바다 안개를 뒤로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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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과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국제적인 선찰로 명성이 높은 북한산 화계사 ~~~ (화계사의 석가탄신일 야경)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북한산 화계사의 야경 '


▲  화계사 대웅전과 초파일 연등의 향연


 

올해도 변함없이 내가 좋아하는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이하 초파일)이 다가왔다. 초파
일만 되면 어김없이 내가 서식하는 서울 장안의 오래된 절이나 비록 역사는 짧지만 문화
유산을 간직한 현대 사찰을 중심으로 초파일 순례를 가장한 절 투어를 벌이고 있다. 허나
이번에는 전날 과음으로 인해 새벽 4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왔고 14시가 넘어서야 겨우
천근만근 같은 두 눈이 떠졌다. 그래서 15시가 넘어서 겨우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자꾸 기울어만 가는 햇님을 원망하며 열심히 걸음을 재촉해 숭인동에 있는 낙산 청룡사(
靑龍寺, ☞ 관련글 보러가기), 삼선동 정각사(正覺寺)를 둘러보고 삼선교(한성대입구역)
로 나오니 벌써 18시를 가르킨다.
3시간 가까이 바쁘게 움직였더만 몸도 좀 피곤하여 더 이상의 욕심을 버리고 철수하려고
했으나 화계사로 가는 151번 시내버스(우이동↔흑석동)를 보는 순간 마음이 변덕을 부려
계획에도 없던 화계사(華溪寺)로 길을 향했다.
아직 해가 조금은 남아있어 벌써 발길을 돌리기에는 다소 아쉬웠고, 연등의 향연이 펼쳐
지는 초파일 야경은 꼭 봐줘야 된다. 게다가 1년에 딱 하루 밖에 없는 날이니 제대로 즐
겨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화계사에 이르니 저녁 시간임에도 절을 찾는 수요가 엄청났다. 많은 사람들이 절에서 나
오고 또 그만큼 들어가기를 반복하여 화계사입구(한신대교차로)는 사람과 차량으로 북새
통을 이루었다. 하긴 서울 동북부 지역(도봉/강북/노원구)에서 도선사(道詵寺) 다음으로
크고 유명한 절집이니 사람들이 미어터지는 것은 당연하다. 썰물처럼 밀물처럼 들어가고
나오는 인파 속을 헤엄치며 간신히 일주문(一柱門)을 들어섰다.

경내를 코 앞에 둔 장소에서 신도 아줌마들이 백설기라 불리는 두툼한 떡을 나눠주고 있
었는데 그 떡을 1개 챙기며 초파일 야경에 잠긴 화계사 경내로 들어섰다. 햇님도 뉘엿뉘
엿 저물어 그만의 비밀 공간으로 숨어들고, 그 틈을 타 달님이 어둠을 내리니 조용히 웅
크리던 연등은 일제히 몸을 불살라 어둠을 몰아낸다. 바로 초파일 풍경의 백미(白眉)인
연등의 향연이 두근두근 시작된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화계사의 내력에 대해 간단
히 살펴보도록 하자.


▲  서서히 초파일 저녁 향연을 준비하는 화계사 연등
(대적광전에서 바라본 모습)


 

♠  화계사 입문 (범종각 주변)

▲  화계사 일주문 장엄등의 위엄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화계사는 1522년 신월선사(信月禪師)가 창건했
다고 전한다.
신월은 서평군 이공(西平君 李公)의 도움을 받았는데, 나무를 벌채를 하지 않고 인근 부허동(
浮虛洞)에 있었다고 전하는 보덕암(普德庵) 건물(법당과 요사 50칸)을 가져와 절을 세웠다. 아
마도 서평군이 그곳을 접수하여 절 건립에 제공했던 모양이다.
화계사 건립에 희생된 보덕암은 고려 광종(光宗) 때 법인대사(法印大師) 탄문(坦文)이 창건했
다고 전하나 확실한 것은 없다. 보덕암 건물을 단순히 옮겨왔다는 이유로 화계사의 창건시기를
고려 초로 우기기도 했으나 이는 단순히 건물만 가져왔을 뿐, 절의 이름과 성격은 다르므로 엄
연한 별개로 봐야 된다. 그래서 1522년을 창건 시기로 크게 삼고 있으며, 대적광전 앞에 450년
묵은 느티나무가 있어 절의 창건시기를 그런데로 받쳐준다.

1618년 9월 불의의 화재를 만나 절이 싹 잿더미가 되었다. 이때 도월(道月)이 덕흥대원군(德興
大院君) 집안의 지원을 받아 중창 불사를 벌여 1619년 3월 완성을 보았다.
이후 절이 크게 쇠퇴했으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 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민씨(府大
夫人閔氏)와의 인연 덕분에 다시금 흥한 기운을 얻게 된다. 당시 화계사는 민씨 외가의 원찰(
願刹)로 민씨는 자주 이곳을 찾아 불공을 올렸는데 그러다보니 대원군도 부인 손에 이끌려 이
곳을 찾았다.
당시 대원군과 화계사와의 끈끈한 인연, 그리고 대원군의 야망을 엿보게 하는 설화 한 토막이
세월의 바람을 타며 은은히 전해온다.


▲  반야용선(般若龍船) 장엄등
석가탄신일 1주 전 토요일에 열리는 서울 연등회(燃燈會) 제등행렬에
단골로 참여하는 장엄등이다.


때는 바야흐로 안동김씨 세력이 신나게 나라를 말아먹던 시절의 어느 여름날<헌종(憲宗) 때로
여겨짐>, 대원군은 남루한 옷차림으로 화계사를 찾았다. 무더운 여름이라 참을 수 없는 갈증으
로 꽤 지친 상태였는데 절 앞 느티나무에 이르니 왠 동자승(童子僧)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꿀
물이 든 사발을 내밀었다.
대원군은 지옥에서 부처를 만난 듯, 사발을 신나게 들이키고 물을 준 이유를 물었다. 동자승이
괜히 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자 동자 왈 '만인(萬印) 스님께서 이러이러한 손님이 오실
것이니 꿀물을 드리고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대원군은 자신이 올 것을 짐작했던 만인의 예지력에 크게 감탄하며 동자승의 안내로 만인의 방
으로 들어갔다.

대원군과 만인, 이들은 이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지 이번이 초면인지는 모르겠으나 금세 심금
을 터놓고 판이 큰 이야기꽃을 피웠는데 대원군은 안동김씨를 몰아내고 왕권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며 자신의 야망을 드러냈다. 허나 만인은 그의 야망은 물론이고 장차 나라를
좌지우지할 인물이 될 것을 예견하고 있던 터라 크게 놀라진 않았다.
그래도 시치미를 한번 뚝 떼며, '이것도 다 인연의 도리인데, 소승이 어찌하겠습니까? 흔쾌히
알려 드리지요'
그렇다면 그 방법은 무엇이냐? 충청도 덕산(德山,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가야사(伽倻寺) 금탑
자리가 제왕(帝王)이 태어날 명당(明堂)이니 연천(漣川)에 있는 남연군(南延君,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의 묘를 그곳으로 옮기라는 것이다. 그러면 장차 제왕이 될 왕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명당 자리를 알려주는 것은 좋으나 그 자리에 이미 절이 있다. 절에 몸 담은 승려로써 참으로
몹쓸 말을 한 꼴이 된다. 허나 그렇게 흥선대원군이란 든든한 후광(後光)을 얻게 됨으로써 가
야사에게는 미안하지만 화계사는 이전보다 더 흥하게 된다. 그게 바로 만인이 노린 것이다.

대원군은 돈을 마련하여 가야사를 찾아가 그곳 주지승과 흥정했다. 돈에 함빡 넘어간 주지승은
자기 절에 불을 지르며 탑을 부셨고, 대원군은 남연군 묘를 그곳으로 이전했다. 이후 아들 이
재황(李載晃)이 태어났고, 1863년 조대비(趙大妃)의 지원을 받아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고종(高
宗)이다. 이렇게 대원군의 꿈은 그런데로 이루어진다. 동시에 만인의 꿈도 실현된다. 허나 그
러면 무엇하랴? 3대도 못가서 나라를 보기 좋게 말아먹었거늘...

▲  대적광전(大寂光殿)

▲  보화루<寶華樓, 화장루(華藏樓)>

고종 이후, 화계사는 날개를 겹겹히 달게 되는데, 1866년 대원군의 두둑한 지원으로 절을 중수
했으며 이때 지어진 것이 대웅전과 보화루(화장루)이다. 1870년에는 용선(龍船)과 초암(草庵)
이 대웅전을 중수했고, 1875년 화산재근(華山在根)이 대웅전의 아미타후불탱을, 성암승의(性庵
勝宜)가 신중탱과 현왕탱, 지장탱 등을 조성했다.

1876년에는 초암이 전년에 궁궐에서 받은 자수(刺繡)로 만든 관음상(觀音像)을 봉안하고자 관
음전을 고쳐지었다. 이 관음상은 1874년 2월 훗날 순종(純宗)이 되는 왕자가 태어나자 그의 수
명장수를 기원하고자 모후(母后)인 명성황후(明成皇后)와 조대비, 효정왕후(孝定王后) 홍씨(헌
종의 왕후로 홍대비)의 발원으로 궁녀들이 수를 놓아 만든 것이다. 기존 관음전이 1칸 밖에 안
되는 작은 건물이라 상궁들이 돈을 내었고, 넉넉한 재정 지원에 장인들도 앞을 다투어 건립에
참여해 건물을 짓고 단청하는데 불과 며칠 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1877년에는 왕명으로 황해도 배천군(白川郡)에 있던 강서사(江西寺)의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을
가져와 화계사에 주었고, 이들을 봉안하고자 1878년 시왕전을 고쳐지었다. 또한 1880년 조대비
가 명부전에 불량답(佛糧畓)을 내렸으며, 1883년 금산(錦山)이 조대비와 홍대비의 지원으로 관
음전의 불량계(佛粮契)를 세웠으며 1885년 산신각을 중수했다.
1897년에는 큰 종을 영주 희방사(喜方寺)에서 가져왔으며 중종(中鐘)은 경도에서 구입하고, 운
판은 멀리 해남 미황사(美黃寺)에서 가져왔다. 이렇게 고종과 순종 시절에는 왕비와 대비, 상
궁의 발길이 빈번해 속세에서는 이곳을 궁(宮)절이라 불렀다. 그만큼 왕실과의 끈이 두터웠던
것이다.

1910년 12월, 월명(越溟)이 임종할 때 강원도 양양에 있던 논 276두락(斗落)을 절에 헌납하면
서 만일염불회가 세워졌으며, 1911년 사찰령(寺刹令)으로 봉은사(奉恩寺)의 수반말사로 편입되
었다.
1921년 3월 현하(玄荷)와 동화(東化) 두 화주가 김창환, 민준기 등의 시주로 관음전과 시왕전
을 중수 단청했고, 이듬해에 대웅전 개금불사를 벌였다. 1925년에는 주지 한찬우(韓讚雨)가 김
종하, 오정근의 지원으로 법당 및 대방 앞뒤 축대를 쌓아 이듬해 7월 완성했으며, 1933년 7월
한글학회 주관으로 한글맞춤법 통일안 마련을 위한 모임이 이곳에서 열렸다. 그때 논의된 통일
안은 그해 10월 세상에 발표되었다.
1937년에는 종식(鍾植)이 낡은 건물을 정비했고, 북한산성(北漢山城)으로 올라가는 길목 바위
에 마애관음상을 조성했다. 그리고 1938년에는 승려 안진호가 '삼각산화계사약지(三角山華溪寺
略誌)'를 편찬했다.

6.25전쟁 때는 다행히 총탄이 비켜가 별 피해는 없었으며, 1964년 최기남 거사의 가족이 기증
한 최기남의 오백나한을 봉안하고자 천불오백성전을 세웠고, 1972년에 진암(眞菴)이 범종각을
지었다. 1973년에는 대웅전 삼존불을 조성했으나 이듬해 관음전이 불에 타면서 소실되었으며,
1975년 진암화상이 퇴락한 산신각을 증축해 삼성각으로 이름을 갈았다.
1991년 4층 규모의 대적광전을 세웠고, 1992년 국제선원을 개원해 외국인 승려의 필수 수행처
로 자리매김했다. 2001년에는 명부전을 보수하면서 지장보살상을 개금했고, 2005년에 대웅전을
보수해 지금에 이른다.

▲  대웅전을 바라보는 명부전(冥府殿)

▲  천불오백성전

화계사가 외국인 승려의 성지가 된 것은 숭산행원의 오랜 노력 덕분이다. 그는 1970년대에 미
국으로 건너가 서양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국 불교를 포교했다.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 많이 방
황하던 그들은 숭산의 포교와 설법에 적지 않게 감명을 받았고, 그가 해외에 머무는 동안 5만
명이 넘는 서양 사람들이 앞다투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숭산이 해외에 세운 선원은 30개 나라에 120곳이 넘으며, 미국에서 처음 세운 '프로비던스 선
원(禪院)'에서는 1982년 천하의 종교 지도자들이 모여 세계평화회의를 열기도 했다. 그의 열성
적인 해외 포교로 화계사를 찾는 외국인 승려와 승려 희망자가 늘자 계룡산(鷄龍山) 무상사에
제2의 국제선원을 닦아 이들을 수용해 가르치고 있다.

화계사 국제선원 출신 외국인 승려 중에 그 유명한 미국인 현각이 있다. 그는 카톨릭교 집안에
서 태어나 하버드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는데, 우연히 숭산의 설법을 듣고는 크게 감명을 받아
불교로 갈아탔고 화계사를 찾아 승려가 되었다. 꽤 열심히 활동하여 현정사(現靜寺, 경북 영주
부석면)의 주지를 지내기도 했으며, 화계사 국제선원의 선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렇듯 국제적인 수행처로 명성을 날리면서 경내에서 외국인 승려를 보는 것은 이제 일상 생활
이 되었다.

화계사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삼성각, 보화루, 대적광전, 조실당, 천불오
백성전, 교육관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을 지니고 있으며, 이중 대적광전이 단연 규모가
크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사인비구 제작 동종과 목조지장보살3존상 및 시왕상 일괄등 국가 보
물 2점과 대웅전, 목조관음보살좌상 및 복장유물, 아미타괘불도 및 오래여도, 탑다라니판, 천
수천안관음변상판 등 지방문화재 9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400년이 넘은 느티나무 3그루가 서울
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절의 오랜 내력을 대변해준다. (보호수 나무는 이번에 담지 않았음)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깝고 교통편 또한 착하여 접근성도 우수하며, 주택가가 바로 지척이지
만 삼삼한 숲에 포근히 감싸여 있어 고즈넉한 산사의 멋을 누리기에는 그리 부족함이 없다. 국
제적인 사찰이라 어색한 한국말을 구사하며 인사를 건네는 외국 승려와 수행자의 모습에서 우리
나라 불교의 높은 위상과 인기를 새삼 느끼게 한다.

※ 화계사 찾아가기 (2018년 6월 기준)
* 지하철 우이신설선 화계역 2번 출구에서 도보 12분
* 지하철 4호선 미아삼거리역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151번, 1165번 시내버스를 타고 화계사입구
  , 한신대대학원 하차, 도보 10분
* 지하철 4호선 미아역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151번 시내버스 이용

* 화계사에서 템플스테이(Temple Stay)를 운영하고 있다. 체험형은 매주 토/일요일에 1박 2일
  일정으로 진행되며 참가비는 5만원이다. (1박 2일 기준) 자유롭게 머물다 가는 휴식형은 화~
  금요일에 운영하며 예불과 식사시간만 지키면 된다. (1박 2일에 5만원) 자세한 정보는 화계
  사 홈페이지 참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1동 487 (화계사길 117 ☎ 02-902-2663, 02-903-3361)
* 화계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천하를 향해 연등을 늘어뜨린 범종각(梵鍾閣)

대적광전 옆에 자리한 범종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4물(四物)이
라 불리는 범종과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의 보금자리이다.
범종각은 원래 대적광전 서남쪽에 있던 것으로 2층으로 이루어진 6각형 건물이었다. 1972년 진
암(眞菴)이 대방(보화루)에 얹혀살던 영주 희방사(喜方寺) 출신 동종과 대웅전 처마 밑에 매달
려 거의 썩기 직전이던 법고를 위해 지은 것으로 기존 건물을 부시고 지금 자리에 번듯하게 새
범종각을 지었다.

온갖 연등과 장엄등으로 몸을 치장한 범종각에
는 특이하게 종이 2개씩이나 달려있다. 큰 종은
1978년에 진암이 만든 것이며, 그 옆에 난쟁이
반바지 반 접은 정도의 작은 종은 1683년에 제
작된 것으로 1898년 희방사에서 올라왔다. 무게
는 300근 정도 된다.
이 동종은 17세기에 활약했던 사인(思印) 비구
가 만든 8개의 종 가운데 하나이다. 사인은 손
재주가 좋은 승려로 종을 매우 잘만들었는데,
그가 만든 종이 이곳과 강화도, 안성 청룡사(靑
龍寺), 의왕 청계사(淸溪寺), 홍천 수타사(壽陀
寺), 문경 김룡사(金龍寺), 포항 보경사(寶鏡寺
), 양산 통도사(通度寺)에 전하고 있다.

▲  화계사 동종 - 보물 11-5호

이들 종은 모두 보물 11호 계열의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으나 원래는 강화도 동종만 11호였다.
그러다가 2000년에 사인이 만든 종을 죄다 보물로 삼으면서 화계사 동종도 그 혜택을 받게 되
었다. (그 이전에는 비지정이었음) 그만큼 사인이 만든 종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우수 종으
로 전통적인 신라 범종 양식을 지키면서 거기의 자신만의 독창성을 집어넣었다.

경내에서 2번째로 오래된 보물로 종 윗부분 용뉴에 쌍용(雙龍)을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상대(
上帶)에는 범자(梵字)를 2줄로 배치했고, 그 밑에 조선 후기 양식을 지닌 유곽(遊廓) 4좌를 두
었다. 유곽대는 도식화된 식물무늬로 채우고, 유곽 안에 있는 9개의 유두는 여섯 잎으로 된 꽃
받침 위에 둥근 꽃잎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유곽 사이에는 '종면경석(宗面磬石)','혜일장명(
惠日長明)','법주사계(法周沙界)'란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안성 청룡사 동종에서 같은 내용이
있다. 종 밑도리에는 가는 두 줄의 띠를 둘렀고, 띠 안에 연꽃을 새겨놓았다.
사실성과 화사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며, 종 조성과 관련된 명문(銘文) 200자 정도가 새겨져 있
어 종의 탄생 정보를 알려준다.

이 종이 제자리(희방사)를 떠나 이곳으로 온 것은 왕실의 화계사 사랑이 뜨겁기 때문이다. 덕
분에 화계사의 보물은 그만큼 늘어났으며 이곳의 범종 역할을 하면서 하루에 2번 종소리를 날
렸다. 그러다가 1978년 그 곁에 새 범종을 매달면서 그 역할을 후배에게 물려줬고, 국가 지정
보물이란 큰 명예직을 얻게 되면서 더 이상 종소리를 울리지 않았다.
그의 나이는 이제 340년 남짓, 아직은 한참 몸을 풀 무탈할 나이이나 절에서 그의 몸을 무척
아끼면서 이제는 거의 무늬만 종이 되었다. 종은 종의 역할을 해야 종다운 것이지, 저렇게 그
림의 떡처럼 두는 것은 옳지 못하다. (다만 종의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경우는 예외)


▲  연등으로 활활 타오르는 범종각과 그 주변

▲  범종각에 걸린 붉은 연등과 네모 연등, 6각형 연등

시대가 바뀌면 연등과 장엄등에도 변화를 줘야 된다. 그래서 기존의 연등 모습을 탈피하여 네
모, 6각형, 8각형, 온갖 모습의 등까지 다양하게 등장했다. 그런 연등에 그려놓는 그림이나 등
의 형상도 불교 외에도 다채롭게 담고 있어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데 왼쪽 네모 등에는 코끼리
를 탄 두광(頭光)을 두룬 관음보살 누님이 귀엽게 깃들여져 있고, 오른쪽 6각형 연등에는 함박
웃음을 짓고 있는 토끼가 그려져 있어 웃음바이러스를 살짝 건네준다.


▲  기도하는 동자승을 담은 네모난 등(왼쪽)과 카톡 이모티콘
무지(muzi)를 담은 8각형 등

▲  8각형 등에 깃든 카톡 캐릭터 프로도의 위엄
연등에는 현재 유행하는 캐릭터나 온갖 군상(群像)의 존재를 담고 있어
21세기를 살아가는 변형 연등의 살아가는 정석을 보여준다.

▲  카톡 캐릭터 악동복숭아(어피치, apeach)를 담은 장엄등

▲  연꽃과 달이 그려진 연등

▲  카톡 이모티콘 네오를 담은 8각형 연등


▲  부엉이 부부와 흩날리는 봄꽃이 담긴 6각형 연등

▲  대적광전과 보화루 사이의 허공을 장악한 연등
하늘이 갑자기 건물 높이만큼 확 내려앉은 기분이다.

▲  보화루에 걸린 '삼각산 제일선원(第一禪院)' 현판

대웅전과 대적광전 사이에는 보화루가 자리해 있다. 화장루라 불리기도 하는데 1866년에 지어
진 건물로 대방(大房), 큰방이라 불리기도 한다.
대방은 조선 후기에 왕실의 지원을 두둑히 받던 서울 근교 절에서 많이 나타나는 건물로 이곳
을 비롯해 돈암동 흥천사(興天寺), 남양주 흥국사(興國寺), 고양 흥국사, 파주 보광사(普光寺)
등에 남아있다. 대방의 역할은 승려의 숙식 및 예불의 목적도 있지만 서울에서 온 왕족과 사대
부들의 숙식 편의를 제공하고 그들만의 별도 예불처를 두어 법당에서 백성들과 함께 예불을 보
는 번거로움을 덜어주려는 것이 주목적이다. 그러니까 왕족과 귀족을 위한 조금은 아니꼬운 특
별 서비스 공간인 셈이다. 그들이 주요 밥줄이나 다름이 없으니 절 입장에서는 그렇게라도 해
야 절도 꾸리고 속칭 소고기도 사묵을 수 있다.

보화루 현판은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제자인 위당 신관호(威堂 申觀浩)가 쓴 것이며, 화계사
현판은 1866년 대원군이 절 중수 자금과 함께 보내준 친필 현판이다. 이 현판에는 '대원군장(
大院君章)','석파(石坡)'가 쓰여 있는데, 예서체와 해서를 혼합해서 쓴 명필이다.
1933년에는 이희승(李熙昇), 최현배(崔鉉培) 등 한글학회 소속 국문학자 9명이 보화루에 머물
면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집필했던 유서 깊은 현장으로 그해 10월 그 통일안이 발표되었다.

현재 보화루는 큰방과 종무소로 쓰이고 있으며, 1974년 불에 탄 관음전에 있었던 관음보살상을
봉안해 관음전(觀音殿)의 역할도 겸한다. 그리고 건물을 받치는 석축 높이 때문에 누(樓) 비슷
한 성격을 지녔으나 대적광전을 지으면서 계단을 없애고 평평하게 다졌으며, 예전에는 보화루
가 외부에서 경내를 감싸서 가리는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대적광전이 그 역할을 몇배 이상으로
휼륭히 해내고 있다.


 

♠  화계사 대웅전 주변

▲  윤장대(輪藏臺) 장엄등

보화루 옆에는 윤장대를 흉내낸 장엄등이 중생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무로 만든 윤장
대는 여럿 봤지만 장엄등으로 된 그것은 처음인데 윤장대란 서적이나 장경판(藏經板)을 넣어
두던 일종의 장경각(藏經閣)이다.
법회 때 경전을 안에 넣고 손잡이를 잡아 돌리며 염불을 했는데 옛날에는 일반 백성들 상당수
가 까막눈이었고 설령 한자를 알아도 불교 경전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하여 '윤장대
를 1번 돌리면 경전을 1번 읽은 것과 같다 / 경전을 이해한 것과 같다 / 소망이 이루어진다 /
윤장대를 못보고 저승에 가면 혼난다'는 식으로 중생들에게 영업을 했다.
비록 장엄등이지만 그 성격에 맞추어 손잡이까지 두어 돌려보도록 했다.


▲  대웅전 옆구리를 가득 메운 연등

▲  화계사 대웅전(大雄殿)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5호

좌우로 명부전과 삼성각을 거느리며 동쪽을 굽어보고 있는 대웅전은 화계사의 법당(금당)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866년 대원군의 지원으로 지어졌으며, 1870년에 중건
했다. 당시 환공야조(幻空冶兆)가 쓴 '화계사 대웅보전 중건기문(華溪寺大雄寶殿重建記文)'에
따르면 석수(石手) 30명, 목공(木工) 100명이 불과 수개월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건물 정면에는 각 칸마다 사분합(四分閤)의 띠살문이 설치되어 있어 문짝을 위로 올릴 수 있
다. 그래서 초파일이나 한여름에 가면 보통 문이 위로 들려져 있다. 대웅전 현판은 조선 후기
명필인 몽인 정학교(夢人 丁學敎)의 것으로 여겨지며, 주련(柱聯)은 추사 김정희의 수제자인
신관호(申觀浩)가 쓴 것으로 내용은 이렇다.

비로해장전무적(毘盧海藏全無跡) - 비로자나의 법해에는 완전한 자취가 없고
적광묘사역무종(寂光妙士亦無蹤) - 적광묘사 또한 아무런 흔적이 없네.
겁화동연호말진(劫火洞然毫末盡) - 겁화가 훨훨 타서 털끝마저 다해도
청산의구백운중(靑山依舊白雲中) - 푸른 산은 옛과 같이 흰구름 속에 솟았네.


▲  대웅전 석가3존불과 아미타후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89호)

초파일 순례객들로 정신이 없는 대웅전 내부에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
大勢至菩薩)로 이루어진 금동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이들은 1873년에 조성된 것으로 포근하고 후덕한 표정으로 초파일 생일 인사를 받고들 있는데
그들 뒤로 1875년에 화산당 재근(華山堂 在根)이 그린 아미타후불도가 고색의 향기를 풍기며
든든히 자리해 있으며, 불단 우측에는 법당의 필수 그림으로 1969년에 제작된 신중탱(神衆幀)
이 자리를 지킨다.


▲  연등 위에 하늘이 있고, 그 밑에 인간과 세상이 있다.
연등 밑의 세상, 대웅전에서 바라본 모습

▲  영가(靈駕, 죽은 사람)를 위한 하얀 연등의 엄숙한 향연
대웅전 앞에는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오색 연등의 화려한 향연이 펼쳐지고 있고
뒷쪽에는 죽은 이들을 위한 하얀 연등의 엄숙하면서도 조금은 오싹한 향연이
펼쳐져 잠시 마음을 숙연케 한다.

▲  삼성각(三聖閣)에서 바라본 연등의 향연

▲  1975년에 조성된 삼성각 칠성탱(七星幀)

천불오백성전 뒤쪽이자 대웅전 우측 높은 곳에는 삼성각이 있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
리한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원래는 1885년에 중수된 산신각(山神閣
)이 있었다. 허나 나이를 먹을수록 퇴락하여 볼품이 없어지자 1975년 주지 진암이 기존의 산
신각을 부시고 새로 지으면서 삼성각으로 이름을 갈았다.
내부에는 산신과 독성, 칠성이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을 다시 지은 탓에 고색의 내음은 싹 말
라버렸다.


▲  명부전 목조지장보살3존상 및 시왕상 일괄 - 보물 1822호
그 뒷쪽에 자리한 지장시왕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90호)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878년 초암이 조대비
의 지원을 받아 지었다.
2001년에 건물을 중수하면서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을 개금하거나 개채(改彩)했으며, 명부전 현
판과 주련 글씨는 대원군의 친필로 전해진다.

불단에는 지장보살3존상과 시왕상(十王像)이 봉안되어 있는데, 예전에는 고려 말에 나옹화상(
奈翁和尙)이 만든 것으로 전해졌으나 불상 뱃속에서 나온 발원문(發願文)을 통해 1649년에 황
해도 배천군 강서사(江西寺)에서 승려 영철(靈哲), 인명(印明), 상원(尙元), 운혜(云惠) 등이
조성했음이 밝혀졌다.
대적광전 주변에 있는 보호수 느티나무를 제외하고 화계사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지만 이들
은 원래부터 화계사 것이 아니었다. 배천군 강서사에서 만들어 광조사(廣照寺)에 봉안했던 것
으로 이들이 이곳에 온 사연은 대략 이렇다.

부모를 따라서 화계사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 금수저 고종은 그곳에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이 없
음을 알았다. 그도 그것이 절의 필수 요소임을 알았던 모양이다. 하여 화계사에 가장 뛰어난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을 선사하고자 천하를 수소문하니 광조사의 것이 좋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래서 광조사에 의견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1877년 왕명으로 화계사로 가져왔는데 불상 운
송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설화가 아련히 전해온다.

화계사 승려 봉흔(奉欣)과 위운(威雲), 봉림(奉林)은 광조사를 찾아가 왕명을 전달하고 그곳
의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일체를 접수했다. 허나 물가에 이르니 준비되어야 될 배가 없었다.
그들은 당황하여 어찌해야 되나 궁리를 하던 중, 마침 배 1척이 나타났다. 그들은 배를 세우
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뱃사공이 흔쾌히 승낙하며 '나도 당신들을 찾은 모양이오! 어젯밤 꿈
에 할아버님이 나타나 내일 날이 밝기 전에 배를 이끌고 강서사로 급히 가라고 하셨는데 아마
도 부처가 지휘했던 모양이오!'
말하면서 흔쾌히 불상을 싣고 서울로 향했다.
보통 배천군에서 서울까지는 뱃길이 2~3일 정도 걸리는데 그날은 유난히도 바람이 잘 맞아 불
과 반나절도 안되어 뚝섬에 도착했다. 불상을 화계사로 모두 옮기고 사공에게 배삯을 후하게
주었는데 사공은 쿨하게 돈을 거절하며 '할아버님의 현몽과 강바람의 순풍으로 보아 부처의
도움이 있었음이 분명한데 어찌 배삯을 받겠소? 그 돈으로 차라리 시왕전의 내 장등(張燈)이
나 하나 해주시오'
부탁을 했다. 그래서 수십 년 동안 시왕전에 그의 장등을 밝혔다고 전한다.

▲  우측 시왕상과 시왕탱

▲  좌측 시왕상과 시왕탱

푸른 승려 머리의 지장보살상은 후덕한 표정을 지으며 중생을 맞이한다. 몸의 신체 비례가 잘
맞아떨어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표현이 부드러워 귀족적인 기풍을 드러낸다. 몸에 걸친 법
의(法衣)는 두께가 상당한데 옷의 주름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그의 좌우에 서 있는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도 주인을 따라 황해도에서 이
곳으로 강제로 따라왔다. 주인과 마찬가지로 조각솜씨가 뛰어나며, 그들 좌우에 늘어선 저승
의 시왕상과 판관(判官), 동자, 사자, 장군상 역시 그곳 출신으로 꽤 준수한 모습이다. 조선
중기 불상과 시왕상을 대표할 만한 존재로 뱃속에서 복장 유물까지 나와 그들의 가치를 더욱
돋구어 주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2014년 3월 비지정문화재에서 국가 지정 보물로 특진되었
으니 불상을 만든 옛 사람들의 조그만 배려가 그들의 몸값을 비싸게 만들어준 것이다.

지장보살상 뒤에 걸린 지장시왕도와 시왕상 뒤쪽에 걸린 시왕도와 사자도는 1878년 화산재근(
華山在根)과 혜과봉간(慧果奉侃) 등이 상궁들의 시주를 받아 그린 것으로 이들은 순수 화계사
의 불화이다. <'화계사 명부전 시왕도 및 사자도(使者圖)'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92
로 지정됨>


▲  한참 물이 오른 보화루 뜨락 연등
아까보다 빛이 더욱 짙어져 아쉽게 저물어가는 초파일의 밤을 붙잡는다.

▲  마애3존불을 담은 장엄등

▲  계단에 두광(頭光)처럼 떠있는 연등

▲  화계사 초파일의 밤은 그렇게 깊어져만 간다.

화계사는 많이 발걸음을 했던 절이라 이번에는 연등과 장엄등이 중심이 된 초파일 야경을 구
경하는데 거의 집중했다. 그러다보니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들과 대적광전, 천불오백성전, 일
주문, 삼성각 내부(칠성탱 제외) 등은 아예 담지도 않았다. 오로지 연등이 주인공이 된 야경
을 주로 담았다. 왜냐 오늘은 초파일(석가탄신일)이니까..

연등의 향연에 취해 거의 2시간 가까이 경내에 머물렀다. 21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여전히 사
람들은 꾸역꾸역 들어오고 경내는 여전히 부산하다. 연등은 더욱 농도를 높이며 절에서 어둠
을 몰아낸다.
이렇게 하여 석가탄신일 나들이는 내년 초파일을 애타게 고대하며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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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8년 6월 1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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