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4.03.31 첩첩한 산주름에 포근히 깃든 고즈넉한 산사, 3층 법당 대웅전을 지닌 화순 쌍봉사
  2. 2023.05.17 화순 만연산, 만연산 오감연결길, 만연사 늦가을 나들이 <만연폭포, 큰재, 만연저수지>

첩첩한 산주름에 포근히 깃든 고즈넉한 산사, 3층 법당 대웅전을 지닌 화순 쌍봉사

화순 쌍봉사



' 늦가을 산사 나들이, 화순 쌍봉사 '

▲  쌍봉사 대웅전

'쌍봉사 삼청각에서 읊다'

시내 사이로 멋들어지게 지은 다리 누각이여
삼청이라는 글씨만 봐도 눈이 상쾌하구나
못에 비친 달은 고기들의 맑은 거울이요
구름 걷힌 산봉우리 학은 둥지를 사랑하네
금빛들에 머문 안개는 항상 서기를 드러내고
옷빛계곡에서 부는 솔바람은 언제나 차가워라
난간에 기대어 처마 밑에 흐르는 물을 다시 보니
낙화도 뜻이 있는지 잔물결 따라 쫓아가네

* 고려 명종 때 문인인 김극기(金克己)가 쌍봉사 삼청각에서
지은 시 (현재 삼청각은 없음)
 



 

늦가을이 깊어가던 10월의 끝 무렵에 광주 동남쪽에 넓게 자리한 전남 화순(和順)을 찾
았다.
오전에 일행들과 만연산(萬淵山, ☞ 관련글 보기)을 둘러보고 화순 읍내로 내려가 점심
으로 한정식을 섭취했는데, 화순에서 유명한 밥집이라 사람들로 내내 미어터져 겨우 자
리를 잡아 먹었으나 맛은 그저 그랬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운주사(雲住寺)와 더불어 화순 지역의 대표적인 고찰(古刹)로 꼽히
는 쌍봉사를 찾았는데, 쌍봉사는 화순군 남쪽 끝인 이양면 산골에 있는 절로 화순 읍내
에서 30km 이상 떨어져 있다.



 

♠  쌍봉사(雙峯寺) 입문

▲  흙탕물이 되버린 연못

쌍봉사로 들어서니 제일 먼저 동그란 연못이 마중을 한다. 주차장 옆에 자리한 이 못은 소나
무가 깃든 동그란 섬을 복판에 띄워놓아 운치를 우려내고 있는데. 고려 때 김극기가 지은 시
를 통해 그 시절 삼청각과 연못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비록 삼청각은 세월의 거친 흐름
으로 형편없이 떠내려갔지만 연못은 오랫동안 살아남아 천왕문 직전에 넓게 누워있었다.
허나 관리 소홀과 주차장 조성으로 연못을 밀어버리는 우를 범했으며, 근래에 작게나마 연못
을 다시 닦았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주변 공사로 연못이 뿌연 흙탕물이 되어버린
채, 나를 맞이한다. 마치 흙탕물 같은 속세와 그보다 더한 종교계를 상징하듯이...


▲  연못 바위에 걸터앉은 돌거북

평범해보이는 연못에 눈길을 진하게 끄는 존재가 하나 있다. 바로 거북 모양의 돌이다. 수면
위로 머리를 내민 돌에 걸터앉은 작은 돌거북으로 거북의 등껍질과 얼굴, 발이 묘사되어 있는
데, 전체적으로 보면 거북선처럼 보이고, 등껍질 주위로 시선을 좁히면 기어가는 거북처럼 보
여 2가지의 시각 효과를 보인다. 그는 연못을 새로 지으면서 장식용이나 비보풍수(悲報風水)
의 일환으로 설치된 듯 싶다.

          ◀  쌍봉사 천왕문(天王門)
연못을 지나면 절의 2번째 문인 천왕문이 계단
을 늘어트리며 마중을 나온다. (1번째 문인 일
주문은 연못 남쪽에 있음)
이곳은 석가여래의 경호부대인 사천왕(四天王)
의 집으로 좌우로 길게 돌담을 둘러 속세의 기
운을 경계한다.


▲  쌍봉사 대웅전(大雄殿)과 그 주변

천왕문을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3층 모습의 늘씬한 대웅전을 중심으로 너른 경내가 펼쳐진다.
대웅전 좌우와 뒤쪽으로 지장전, 극락전, 호성전, 나한전, 요사, 종무소 등이 포진해 있으며,
천왕문과 대웅전 사이가 거의 풀밭이라 다소 허전하게 다가온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쌍봉사
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쌍봉사는 9세기에 철감선사 도윤(澈鑒禪師 道允, 798~868)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825년
선비족 나라인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847년에 돌아왔는데, 화순 지역을 지나다가 이곳의 수려
한 풍경에 퐁당 반해 절을 세웠다고 한다.
허나 곡성 태안사(泰安寺, ☞ 관련글 보기)에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동리산문(桐裏
山門)을 열었던 적인선사 혜철(寂忍禪師 惠哲)이 839년 당나라에서 돌아와 쌍봉사에서 첫 하
안거(夏安居)를 지냈다는 기록이 태안사 적인선사비에 쓰여 있어 적어도 8세기나 9세기 초부
터 절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쌍봉사는 839년을 창건시기로 삼고 있음)
하여 실질적인 창건자는 철감선사가 아니며, 그는 신라로 돌아와 이곳에 머물면서 구산선문의
일원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기초를 닦고 절의 이름을 크게 날렸다.

철감선사는 절의 앞쪽과 뒷쪽 산봉우리가 2개여서 도호(道號)를 쌍봉이라 했는데, 그의 명성
을 들은 신라 경문왕(景文王)은 그를 불러 스승으로 삼았다고 하며, 그의 도호를 따서 절 이
름을 쌍봉사라 하였다.
철감의 열성제자였던 징효절중(澄曉折中)은 스승의 법맥을 이어받아 영월 법흥사(法興寺)에서
사자산문을 본격적으로 개창했다. 그는 891년 쌍봉사에 들려 스승인 철감선사탑비에 예를 올
렸다고 전한다.

1081년 혜소국사(慧昭國師)가 창건 당시의 모습대로 중건했다고 하며, 공민왕(恭愍王) 시절에
전라도관찰사인 김방(金倣)이 돈을 내어 절을 중창했다. 조선 세조(世祖)는 쌍봉사 토지에 면
세 혜택을 주었으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28년에 다시 일으켜 세웠다.
1667년과 1724년에 중창했으나 조광조(趙光祖) 등을 배향한 인근 죽수서원(竹樹書院)의 말사
로 들어가면서 매년 66가지의 봉물을 상납하느라 허리가 거의 아작날 지경이었다고 전한다.
6.25전쟁 때 대웅전과 극락전 등을 제외하고 상당수의 건물이 파괴되는 비운을 겪었으며 1984
년에 대웅전이 전소되어 쓰러지는 고통을 겪었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나한전, 호성전, 극락전, 지장전, 종무소, 요사, 범종각 등 10여 동의 건
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보로 지정된 철감선사탑과 보물인 철감선사탑비와 목조지
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지방문화재인 극락전과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대웅전 목
조삼존불상 등이 있다.
그 외에 조선 후기에 세워진 쌍봉사 사적비(事蹟碑)와 승탑(僧塔, 부도) 5기, 관찰사 윤웅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등이 있으며, 절 자체는 '화순 쌍봉사'란 이름으로 전남 지방기념물
247호
로 지정되어 있다.

쌍봉사는 이 땅의 승탑(僧塔, 부도) 중 우수급에 속하는 철감선사탑과 우수급 비석인 철감선
사탑비, 그리고 비록 화재로 다시 지었지만 3층 목탑 양식의 대웅전으로 유명하다. 아마 그들
이 없었다면 이곳은 그저 그런 옛 절로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첩첩한 산주름 속에 푹
묻혀있어 산사(山寺)의 내음도 진하며 절 앞까지 2차선 신작로가 닦여져 차량 접근성은 좋다.
단 대중교통이 영 좋지 못한 것은 함정이다.

* 쌍봉사 소재지 :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중리 741 (쌍산의로 459, ☎ 061-372-3765)


▲  옛 모습 그대로 재현된 대웅전 (옆에서 바라본 모습)

쌍봉사 대웅전은 3층 목탑(木塔) 스타일의 건물이다. 높이 12m의 홀쭉한 정방형 집으로 2층에
대웅전 현판이 걸려있으며, 1962년 해체수리를 했을 때, 3층 중도리에서 고맙게도 상량문(上
樑文)이 튀어나왔다. 그 문서를 통해 1690년에 중창했고, 1724년에 3번째 중창이 있었음이 밝
혀졌으나 정작 중요한 첫 조성시기와 1번째 중창 시기는 나와있지 않았다.

건물의 조성시기는 조선 중기로 여겨지며, 원래는 대웅전이 아닌 목탑이었다고 전한다. 경내
에는 지금도 그렇지만 이렇다할 탑이 없는데, 이 건물이 탑의 역할을 대신 하고 있던 것이다.
법주사(法住寺)의 5층 팔상전(八相殿)과 더불어 이 땅에 몇 없는 목탑 스타일의 건물이자 거
의 유일한 3층 목탑으로 그 가치가 대단하여 일찌감치 국가 보물 163호의 지위를 누렸다.

6.25 시절에는 절의 상당수 건물이 파괴되었으나 대웅전은 총탄이 비켜가 구사일행으로 살아
남았다. 그 큰 난리에도 살아남았건만 1984년 4월 어느 어리석은 신도가 촛불을 잘못 다룬 통
에 화마(火魔)의 부질없는 먹이가 되어 쓰러지고 말았다.
이후 허무하게 사라진 대웅전을 다시 소환하고자 1985년 8월 복원공사를 벌여 1986년 12월 완
성을 보았으나 국가 보물의 지위는 끝내 박탈되고 말았다.
 
1962년 해체수리 때 본래 지붕이 사각이란 것이 확인되어 기존의 팔작지붕 대신 사각의 사모
지붕으로 바꾸었으며, 상륜(相輪) 부분을 보완했다.


▲  대웅전 목조삼존불상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251호

대웅전의 겉모습이 비록 3층이긴 하나 무늬만 3층이지 완전 하나의 공간이다. 내부에는 목조3
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그의 열성제자인 가섭존자(迦葉尊者)와 아난존
자(阿難尊者)가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이며 서 있다. 이들은 1984년 대웅전이 화재로 무너지
면서 자칫 화마의 먹이가 될 뻔했으나, 절 부근에 있던 마을 농부가 불길을 보고 달려와 저들
을 등에 업고 탈출시키면서 화를 면했다.
이후 대웅전이 복원되자 석가여래상과 존자상을 새로 개금(改金)하고 채색하여 제자리로 옮겼
다.

석가여래의 얼굴은 거의 4각형 모습으로 꽤나 복스러워 보이는데 머리는 꼽슬인 나발이며, 눈
은 지그시 감고 있고, 붉은 입술에는 미소가 깃들여져 있다. 중생들의 고충을 빠짐없이 들으
려는듯, 귀는 크고 두꺼우며 어깨를 감싼 옷은 두툼해 보인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펴서 무릎
안쪽에 올려놓았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구부려 오른쪽 발바닥 위에 놓았다.
그의 왼쪽에는 다소 늙어보이는 가섭존자가 있는데 표정이 매우 밝고 손이 매우 두껍다. 그에
반해 아난존자는 명상에 잠긴 조금은 늙은 동자승 같은 모습이다.

이들 3존불은 1694년에 조성된 것으로 발원문(發願文)을 통해 조성시기와 참여자 이름이 드러
나 있으며, 만들어진 시기가 확실해 다른 조각상의 표준이 된다. 대웅전 화재 때 중생에 의해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 만큼, 절과 불교의 이익을 위해 살지 말고, 중생의 고충을 위로하면서
그들을 위해 살아가기를 바란다.


▲  호성전(護聖殿)

호성전은 이 땅에서 거의 흔치 않은 T자형 맞배지붕 집으로 절 건축물 중에 T자형은 오직 이
곳 하나 뿐이다.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건물은 제외) 앞서 대웅전처럼 매우 희귀한 형
태의 집이라 국가 지정문화재로 삼아도 손색은 없겠으나 아쉽게도 6.25때 파괴되어 다시 지어
진 것이라 그 자격은 떨어진다.

이 건물은 쌍봉사에 많은 혜택을 주었던 세조의 위패를 봉안한 건물로 전해진다. 허나 지금은
철감선사와 그의 사형(師兄)인 조주종심(趙州從諗, 조주대사)의 진영(眞影)이 봉안되어 있다.
철감은 825년 당나라로 건너가 남천보원(南泉普願. 남천선사)의 제자가 되었는데, 그때 조주
선사를 만났다. 조주는 철감보다 20살 연상으로 남천에게 '평상의 마음이 도(道)이다'는 말을
듣고 바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한다.
철감과 조주는 친한 선후배 관계로 10년 정도 남천의 문하에서 정진했으며, 철감이 조주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으므로 그들의 진영을 마련해 호성전에 봉안했다. 조주의 진영은 하북성(河
北省) 백림선사에 있는 송나라 때 판각된 그의 초상화 영인본(影印本)을 참고해 제작했을 정
도로 크게 공을 들였다.


▲  늙은 티가 너무 풍기는 조주대사의 진영와 중년의
중후함이 느껴지는 철감선사의 진영

▲  나한전(羅漢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의 거처이다. 6.25때 파괴된 것을 다시 세웠다.

▲  극락전(極樂殿) - 전남 지방문화재자료 66호

두툼한 맞배지붕을 지닌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아미타불의 거처이다. 조선 중
기 건물로 6.25때 대웅전과 함께 운좋게 살아남았으며, 대웅전이 1984년 화재로 무너지자 경
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이란 타이틀을 지니게 되었다.
극락전 앞에는 수백 년 정도 묵은 단풍나무 2그루가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늦가을 운치
를 우려내고 있는데 그들은 대웅전 화재 때 천하를 집어삼킬 정도로 강렬했던 화마의 공격으
로부터 극락전을 지킨 존재들이다. 온 몸으로 막는 과정에서 나무들은 가지를 적지 않게 잃었
으나 덕분에 극락전은 무사했다. 만약 극락전까지 허무하게 날라갔다면 경내에 오래된 건축물
은 전멸하게 된다.


▲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252호

극락전의 주인인 아미타여래좌상은 1694년에 조성된 것이다. 그의 좌우에는 같은 시기에 조성
된 관세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협시해 있었으나 1989년 8월, 어느 나쁜 손에
도난을 당해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하여 새로 협시보살상을 장만해 아미타불의 허
전한 옆구리를 채웠다.
아미타불은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것으로 얼굴은 거의 네모진 큰 모습이며, 덩치도 제법
있어 보인다. 머리는 나발(꼽슬)에 무견정상(無見頂相)이 솟아있으며, 얼굴은 거의 무표정 같
다. 목에는 삼도가 그어져 있고 어깨를 감싼 옷의 주름은 매우 뚜렷하다. 오른손은 올리고 왼
손은 내린 모습인데, 양손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으며,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에
걸치며 앉아있다.

대웅전의 목조삼존불상과 같은 해에 조성된 것으로 조각 형식이 비슷해 같은 사람이 만든 것
으로 여겨지며, 대웅전의 그것보다 허리가 곧고 늘씬한 모습이라 대웅전 삼존불 다음으로 조
성된 듯 싶다.



 

♠  쌍봉사 마무리

▲  지장전(地藏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 식구들의
거처이다. 조선 후기에 지어졌으나 6.25때 파괴된 것을 이후에 다시
세웠다.

▲  지장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지장탱

지장전에 봉안된 지장보살3존상과 시왕상(十王像)은 1667년경에 운혜(雲惠)를 비롯한 그의 일
파 조각승들이 조성했다. 아주 고맙게도 조성발원문이 나왔고, 쌍봉사 사적기(事蹟記)와 '능
주지 사자산 쌍봉사제전 기문집록(綾州地 獅子山 雙峰寺諸殿記 文輯錄)' 등에 조성 관련 내용
이 나와있다.
이 지장보살상의 조성시기가 밝혀지면서 해남 대흥사(大興寺) 지장시왕상, 강진 백련사(白蓮
寺) 지장시왕상, 미황사(美黃寺) 지장시왕상, 순천 동화사(桐華寺) 지장시왕상 등 운혜 계열
의 조각으로 여겨지는 조각상들의 조성 연대 추정에 단서를 제공하고 있으며, 명계조각(冥界
彫刻)이라는 종교적 엄숙성과 17세기 불교 조각계가 추구한 대중적 평담성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여 '쌍봉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이란 이름
으로 국가 보물 1,726호로 지정되었다.

얼굴이 거의 네모난 지장보살상은 양 어깨를 덮은 옷을 입고 있으며, 아미타수인을 선보이고
있다. 그의 좌우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가 서 있는데, 도명존자는 합장
인을 선보이고 있고, 무독귀왕은 가슴에 모은 두 손이 옷에 감추어져 있다. 그들 뒤로는 근래
조성된 지장탱이 있는데, 지장보살의 푸른 대머리에서 반짝반짝 빛이 난다.


▲  의자에 앉아있는 시왕상과 불꽃을 휘날리고 있는 금강역사상

▲  경내에서 철감선사탑으로 인도하는 숲길 ①

쌍봉사에 왔다면 경내만 살피지 말고 철감선사탑과 탑비도 꼭 둘러보기 바란다. 경내에서 서
북쪽으로 난 숲길을 조금 올라가면 그 길의 끝에 쌍봉사 제일의 보물인 그들이 있다.


▲  경내에서 철감선사탑으로 인도하는 숲길 ②
늦가을이 철감선사탑과 탑비에 퐁당퐁당 반했는지 한참을 머물고 있다.

▲  철감선사탑 - 국보 57호

철감선사는 쌍봉사에 머물며 사자산문의 기초를 닦다가 868년 70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그의
입적 소식을 들은 경문왕은 크게 아쉬워하며 '철감'이란 시호를 내려 탑과 탑비를 세우게 했
는데, 그가 입적한 그해에 탑과 비석이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철감의 제자들은 우수한 석공을 초빙하여 스승의 승탑을 조성했다. 비록 2.3m의 낮은 높이지
만 온갖 정성을 들여 탑의 밑도리부터 윗도리까지 조각을 했으며, 탑은 전체적으로 8각의 형
태로 8각 바닥돌 위에 기단부를 두었다. 기단부는 밑돌, 가운데돌, 윗돌 세 부분으로 이루어
져 있는데, 밑돌과 윗돌 장식이 꽤 화려하며, 2단으로 마련된 밑돌은 8마리의 사자가 구름 위
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시선을 앞으로 향하며 제각각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윗돌은 2단으로 두어 밑에 연꽃무늬를 두르고, 윗단에 극락조<極樂鳥, 가릉빈가(迦陵頻伽)>가
악기를 다루는 모습을 새겼다.

철감의 사리가 깃들여진 탑신(塔身)에는 8개의 모서리마다 둥근 기둥 모양을 새기고, 각 면마
다 문짝 모양, 사천왕상, 비천상(飛天像) 등을 조각했다. 지붕돌에는 아주 현란한 조각 솜씨
가 깃들여져 있는데,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패여 있고, 각 기와 끝에는 막새기와가 표현
되어 있으며, 처마에는 서까래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허나 너무 완벽하면 재미가 없는지
라 머리장식은 장대한 세월에게 싹 날라가 없어진 상태이다.

신라 후기 대표적인 승탑이자 9세기에 조성된 승탑 중 제일로 꼽히는 명작으로 1,100년의 적
지 않은 나이에도 조각이 살아있어 잔잔한 감동을 준다. 자연과 세월도 보는 눈이 있는지 그
를 비켜간 모양이다.

▲  내 시선을 계속 잡아두고 있는 철감선사탑의 위엄

▲  철감선사탑비 - 보물 170호

탑 옆에 자리한 탑비는 철감선사의 행장을 머금은 비석이다. 용 머리의 귀부(龜趺)와 비신(碑
身), 이수(螭首)로 이루어져 있으나 탑비에 군침을 흘린 세월이 비신을 잡아가버려 현재는 귀
부와 이수만 남은 상태다. 하여 비석에 무슨 내용이 들어있었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네모난 바닥돌 위에 용머리의 귀부를 두었는데, 여의주를 입에 머금고 있는 모습이며, 오른쪽
앞발을 살짝 올리고 있어 앞으로 슬금슬금 기어가는 것 같다. 이수는 용조각을 생략하고 구름
무늬만 가득하다.
탑과 더불어 868년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조각 수법이 휼륭해 신라 말 대표적인 탑비로
꼽힌다. 이 역시 철감을 향한 제자들의 지극정성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  가까이서 바라본 철감선사탑비
거북이 등짐을 지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 같다.

▲  철감선사탑비의 옆모습

▲  철감선사탑비의 뒷모습

철감선사탑, 철감선사탑비를 끝으로 쌍봉사 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그들에게 꽂힌 시선이
좀처럼 떼어지지를 않아서 나올 때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는지 모른다.

쌍봉사 이후 내용은 생략하며 본글은 여기서 쿨하게 마무리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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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만연산, 만연산 오감연결길, 만연사 늦가을 나들이 <만연폭포, 큰재, 만연저수지>

화순 만연산(만연사)



' 화순 만연산 늦가을 나들이 '
만연산 오감연결길
▲  만연산 오감연결길
 


 

가을이 늦가을로 익어가던 가던 10월의 끝 무렵, 광주(光州) 동남쪽에 자리한 전남 화
순(和順)을 찾았다.
이번에는 남동임해지역 일행들과 같이 가기로 했는데, 만연산 큰재에서 10시에 만나기
로 했다. (그들은 남동임해지역, 나는 서울에서 출발) 그 시간을 맞추려면 1박이 아닌
이상은 비행기나 고속열차를 타야 되는데, 하늘길은 첫 비행기가 9시대라 부득불 고속
열차를 타야 된다.
그래서 수서역 출발 SRT 고속열차를 타고자 햇님이 출근하기가 무섭게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서울 남쪽 끝부분에 매달린 수서역으로 이동, 목포(木浦)로 가는 SRT 첫 차
에 나를 담았다.

열차는 오송역, 익산역, 정읍역을 거쳐 1시간 30여 분 만에 광주송정역으로 나를 고스
란히 옮겨 주었다. 여기서 광주1호선을 타고 광주 도심을 가로질러 소태역으로 이동하
여 화순으로 가는 광주152번(전남대치과병원↔화순 도웅리)을 타고 너릿재터널을 넘어
화순읍내로 진입, 화순우체국에서 하차하여 만연산이 보이는 북쪽으로 15분 정도 걸으
니 신기교차로가 나온다. 여기서 큰재로 이어지는 안양산로를 들어서면 만연폭포로 인
도하는 시골길이 살짝 손을 내민다. 여기서부터 만연산 더듬기가 시작된다.


 

♠  만연산(萬淵山) 둘러보기 (만연폭포, 큰재, 오감연결길)

▲  만연산으로 인도하는 유천리 시골길

만연산(해발 668m)은 화순읍내의 든든한 뒷산으로 무등산국립공원의 일원이다. 북쪽으로 무등
산(無等山)과 이어져 있으며 산세는 완만하고 숲도 짙다. 서남쪽 자락에는 만연사가 안겨있는
데, 그곳 창건설화로 인해 나한산(羅漢山)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물맞이 명소로 유명한 만
연폭포가 큰재 밑에 숨어있고, 만연산 물을 먹고 자란 만연저수지가 산 밑에 누워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낸다.

이 산은 숲과 둘레길을 닦아 건강을 주제로 한 이름을 붙여 속세에 내놨는데 만연사 주변 숲
을 다듬어 '치유의 숲'이라 하였다. 또한 '건강회복숲','건강오름숲' 등의 숲과 '오감연결길
(3.1km)','치유숲길(3.3km)','만연산숲길(1.4km)' 등의 둘레길을 다져 천하에 크게 어필하고
있다. 또한 큰재 북쪽에는 만연산 산림공원(철쭉공원)이 닦여져 있어 '한국의 알프스'란 별명
을 지니고 있으며, 봄철에는 철쭉의 향연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  만연폭포로 가면서 바라본 화순읍내
읍내 한복판에 발을 내딘 것이 정말 몇 분 전 같은데 그새 읍내와 저만치
떨어져 버렸다. 내가 정말 저기서 왔는지 헷갈릴 정도로 말이다.

▲  글씨가 또렷한 만연폭포 비석

▲  만연폭포 돌담 바깥


▲  인공티가 진한 만연폭포(萬淵瀑布)

화순 땅에서 만연폭포가 제법 이름이 있어서 잘생긴 자연산 폭포라 여기고 기대를 했으나 정
작 와보니 물맞이 장소로 지어진 조그만 인공폭포가 나를 맞이했다. 처음에는 '번지수를 잘못
짚었나' 싶어 주변을 두리번 거렸으나 그 폭포가 맞았다. 얼마나 허무감이 들던지 새벽 일찍
부터 부산을 떤 보람이 싹 사라지는 기분이다. 허나 어찌하리오. 이것도 엄연한 폭포이니 있
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 밖에는 없다. (만연폭포 도착시간은 8시 40분 정도)

나에게 허탈감을 선사했던 만연폭포는 만연산 남쪽 끝 170m 고지에 걸려있다. 인근 계곡물을
가져와 10m 정도의 폭포를 다지고 그 밑에 물맞이와 목욕 공간을 닦았다. 남자용과 여자용이
분리되어 높이 2m 이상으로 담장이 쳐져 있으며 옷을 갈아입는 공간도 설치되어 있다. 옛날부
터 물맞이 명소로 유명해 신경통 환자와 노인들이 많이들 찾고 있고 물이 차갑고 숲속에 짙게
잠겨 있어 피서의 성지(聖地)로도 존재감이 크다.
허나 약간은 쌀쌀한 늦가을 아침이라 폭포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름에 왔었다면 벌써부터 사
람들로 봐글봐글했을 것이다.

이곳에는 사람들이 붙여놓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하고 있는데 내용은 이렇다. 어느 옛날,
'만석이'와 '연순이'란 남녀가 있었다. 그들은 서로 좋아하여 혼인을 약속하였으나 만석이가
전쟁터에 끌려가면서 한참 동안 돌아오지 못했다.
연순이는 다른 곳으로 시집을 보내려는 부모의 극성을 견디며 버텼으나 결국 굴복해 다른 사
람에게 시집을 갔다. 그런데 바로 그날 만석이가 몰골이 상한 상태로 마을에 돌아온 것이다.
소식을 들은 연순은 바로 신방을 뛰쳐나와 꿈에 그리던 만석이를 만났고 그렇게 둘은 폭포에
이르게 되었다. 허나 이제 와서 어긋난 인연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 저 세상에서 나머지 사
랑을 일구자며 폭포 밑으로 떨어져 죽었다.
그 사연으로 그들의 이름 앞 자를 따서 만연폭포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허나 현실은 만연
사에서 산 이름이 비롯되었으며, 산 이름에서 폭포 이름이 비롯된 것이다. 게다가 그들이 투
신을 할만한 절벽이나 못(소)도 주변에 딱히 없다.

* 만연폭포 소재지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유천리


▲  만연폭포의 삼삼한 숲길
폭포 주변에는 폭포에 물을 대주는 계곡이 흘러간다. 계곡 역시 피서지로
아주 좋은 곳으로 여름 제국도 이곳만큼은 눈치를 보며 피해간다.

▲  큰재로 이어지는 만연산 남쪽 숲길

▲  큰재 정상

만연폭포 주변 그늘에서 조금 머물다가 큰재로 길을 재촉했다. 숲길로 그곳까지 가려고 했으
나 길을 잘못 들어 '안양산로'로 나오게 되면서 별 수 없이 지나가는 차량의 눈치를 보며 그
길의 신세를 졌다. (뚜벅이길이 길 옆에 닦여져 있음)
구불구불 고갯길을 20여 분 오르니 비로소 해발 350m 고지인 큰재 정상에 이르렀다. (그때 시
간 9시 30분) 경사가 느슨한 길은 분명했으나 전날 잠을 제대로 청하지 못한 탓에 대관령처럼
은근히 높고 거칠어 보였다.

큰재는 화순읍에서 이서면을 빠르게 잇는 고갯길로 만연산 동부에 자리한다. 만연산 등산로의
동쪽 기점으로 만연산숲길이 여기서 시작되며, 고개 너머로 높은 산이 시야에 보이는데 그 산
이 바로 무등산이다. 무등산이 생각 외로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무등산은 광주, 담양, 화순
에 걸쳐있는 큰 뫼임)


▲  큰재에서 바라본 무등산의 위엄

▲  큰재약수터

큰재에 도착해 그늘진 서쪽 숲속 쉼터로 들어가 잠시 꿀휴식을 취했다. 그곳에는 큰재약수터
가 있어 만연산이 베푼 물을 마음껏 음미했는데 화순읍내에서 이곳까지 두 발로 올라온 고생
끝에 마신 물이라 거의 꿀맛 같다. 수질은 아직 정정하여 섭취에 문제는 없었으며, 여기서 40
분 정도 머물다가 남동임해지역에서 온 일행들과 만나 만연산 숲길로 들어섰다.


▲  만연산 숲길 (큰재 서쪽)

만연산숲길은 큰재에서 오감연결길을 이어주는 1.4km의 숲길이다. 큰재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내리막길과 평탄한 길이 계속 이어지며 숲도 삼삼하다. 단 반대로 갈 경우에는 오르막길의 연
속이라 조금 힘들 수 있다. 울퉁불퉁한 구간에는 나무데크길을 닦아 통행의 편의를 극대화시
켰다.


▲  만연산 숲길 ①

▲  만연산 숲길 ②

▲  만연산 숲길에서 만난 돌너덜지대

▲  만연산 숲길에서 바라본 화순읍내와 푸르른 가을 하늘

▲  만연산 오감연결길 쉼터

오감연결길은 큰재 밑 유천리에서 만연산 치유의숲센터까지 이어지는 3.1km의 숲길이다. 해발
고도가 좀 차이가 나는 만연산숲길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비슷한 높이를 유지하고 있어 오
르락 내리락이 적다. 그러다보니 거의 구름 위를 거닐듯 편안하며 숲 또한 짙어서 지루할 틈
이 거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탐스러운 길이다.

이 길은 다산 정약용(丁若鏞)과도 인연이 깊다고 한다. 그가 10대 시절이던 1777년 화순현감
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화순에서 잠시 머문 적이 있는데, 그때 만연산을 자주 찾아 독서
를 즐기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웠다고 한다. (만연산 동림암에서 거처하기도 했음)
산림청에서 '치유의 숲' 사업의 일환으로 만연산에 둘레길을 닦고 숲을 정비했는데 누구나 편
하게 산길을 거닐고 오감(五感 :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자극하여 건강을 증진시킨
다는 의미에서 오감연결길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곳 숲에서는 피톤치드와 음이온이 풍부
하게 쏟아져 나오는데, 이들은 몸과 마음을 순화시키고 속세의 스트레스를 줄여주어 면역력을
높여준다.


▲  오감연결길 속으로 빠져들다 ①

▲  오감연결길 속으로 빠져들다 ②

▲  오감연결길 속으로 빠져들다 ③

▲  오감연결길 속으로 빠져들다 ④


 

♠  만연산 자락에 안긴 고즈넉한 산사
화순 만연사(萬淵寺)

▲  '나한산 만연사' 현판을 내건 만연사 일주문(一柱門)

큰재에서 시작된 만연산 둘레길 산책은 만연산 치유의숲센터에서 쿨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여
기서부터 흙길 대신 읍내를 향해 뻗은 딱딱한 포장길(진각로)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이
곳에서 반대 방향(북쪽)으로 올라가면 만연사의 부속암자인 선정암(禪定庵)이 나온다.

읍내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니 만연사를 알리는 표석이 마중을 나온다. 그의 안내로 동쪽 길을
오르면 '나한산 만연사' 현판을 내건 일주문이 나오고 그 너머로 화우천이란 2층 누각 건물이
경내를 가리며 앉아있다.
일주문 앞에는 하늘 높이 솟은 큰 전나무가 있는데 높이가 27m에 이른다. (둘레는 3m) 기껏해
야 높이 2m도 안되는 인간들을 제대로 주눅 들게 만든 그는 진각국사(眞覺國師)가 만연사 창
건 기념으로 심었다고 하며 추정 나이가 무려 770년 이상을 헤아린다고 한다. 허나 그 품격에
걸맞게 지방문화재나 천연기념물의 지위도 얻지 못했고 딱히 안내문 조차 없어서 속세의 대접
이 너무 형편없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자세한 사연을 알지 못한 채, 속절없이 그
앞을 지나간다. (나무 사진은 너무 흐리게 나와서 생략했음)


▲  경내를 가리고 선 화우천(華雨天)
이름도 특이한 화우천은 2층 누각 건물로 강당과 매점, 종무소를 품고 있다.
화우천은 하늘에서 빛나는 비가 내린다는 뜻(또는 불교에서 좋아하는
꽃비가 하늘에서 내린다는 뜻) 정도 될 것이다.

▲  대웅전 뜨락에 우두커니 선 늙은 괘불대 (조선 후기 유물)

만연산 서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만연사는 조계종 소속으로 순천 송광사(松廣寺)의 말사(末寺
)이다. 1208년에 만연선사(萬淵禪師)로 표현된 진각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그는 무등산
원효사(元曉寺)에서 수도를 마치고 송광사로 돌아오다가 만연산 골짜기에서 잠시 쉬었다. 그
자리가 현재 만연사 나한전 자리라고 한다.
잠시 쉰다는 것이 꾸벅 잠까지 들었는데 16나한이 석가여래를 봉안할 역사(役事)를 하고 있는
꿈을 꾸었다. 꿈이 하도 이상하여 주위를 둘러보니 그새 눈이 내려 천하를 뒤덮고 있었는데,
글쎄 그가 누웠던 자리 주변만 눈이 녹고 김이 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신기한 광경에 보
통 자리가 아님을 여기고 그 자리에 토굴을 짓고 불도를 닦다가 만연사를 세웠다고 하며 꿈
속에 16나한이 나왔다고 해서 산 이름을 나한산이라 했다고 한다.

창건 이후 400년 동안 적당한 사적을 남기지 못했으나 왕년에는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사리각
(舍利閣)과 대웅전, 시왕전(十王殿), 나한전, 승당(僧堂), 선당(禪堂), 동산실(東山室), 서상
실(西上室), 동별실(東別室), 서별실(西別室), 수정료(守靜寮), 송월료(送月寮) 등 3전8방(三
殿八房)과 대웅전 앞에 규모가 큰 설루(說樓)와 사왕문(四王門), 삼청각(三淸閣), 그리고 학
당암(學堂庵), 침계암(枕溪庵), 동림암(東林庵), 연혈암(燕穴庵) 등의 부속 암자를 지니고 있
던 큰 절이었다.

1636년 병자호란 시절에는 만연사에서 종이와 식량 등을 마련해 전방에 보냈으며, 1793년 화
재로 진언집(眞言集) 판각이 불탔으나 이듬해 중건했다.
구한말에 이동백(李東伯), 이날치(李捺致) 등의 명창(名唱)이 이곳을 찾아와 소리를 닦았고,
임방울(林芳蔚)과 정광수 등의 명창들은 여기서 창악을 가르키며 소리를 익혔다. 또한 다산
정약용은 10대 시절, 만연사 동림암에서 잠시 머물며 독서를 했다.

국악(國樂)의 성지로 추앙까지 받으며 명성을 드날렸던 만연사는 6.25전쟁 때 정신 나간 총탄
의 먹이가 되어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이후 1978년부터 4년 동안 주지 철안(澈眼)이 중창
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나한전, 명부전, 한산전, 화우천, 요사채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부속암자는 선정암과 성주암(聖住庵)이 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보물 1,345호
지위를 가지고 있는 괘불탱(掛佛幀)과 선정암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관음보살좌상이 있
는데, 괘불은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등 특별한 날에만 잠깐씩 외출을 하는 비싼 존재라
친견은 매우 어려우며 그 외에 석가3존상과 시왕상, 16나한상, 진각국사가 심었다고 전하는
700년 이상의 전나무가 전해 절의 오랜 내력을 유감없이 증명하고 있다. (원주 고판화박물관
에는 만연사에서 1777년에 발간된 '진언집'이 전시되어 있음)


▲  높이 자리를 다지고 그 위에 들어앉은 대웅전(大雄殿)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만연사의 중심 건물(법당)이다.

▲  대웅전 석가3존상
향나무로 다져 도금을 입힌 것으로 무려 고려 후기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맞는다면
전나무를 제외하고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로 정말 지정문화재감인데 아직까지
무명으로 있는 것을 보면 탄생 시기에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  명부전(冥府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들어있다. 건물 앞에 야자수가 펼쳐져 있어 이곳이 따스한 남쪽임을
알려준다. (전남 내륙에서 야자수를 보는 건 처음임)

▲  달랑 1칸의 단출한 모습인 산신각(山神閣)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건물로 산신과 동자, 호랑이 등
산신 식구를 머금은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  나한전(羅漢殿)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의 거처이다. 절을 창건한 진각이 피곤에 쩔어 잠을 잤던
곳이 바로 이 자리라고 하며, 그의 꿈 속에 나타난 16나한 덕에 만연사가 탄생했으니 그들의
거처를 마련해 애지중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  만연사 장독대
장독대 주위로 녹색 펜스를 쳐서 이곳에서 숙성되는 것들의 중요성을 알려준다.
(장독대에서 숙성된 된장과 고추장을 속세에 판매하고 있음)

▲  만연사의 명물, 연등이 달린 배롱나무

대웅전 앞에는 만연사의 명물인 배롱나무가 있다. 늦여름과 초가을에 백일홍을 펼쳐보이는 나
무로 인간이 달아놓은 꽃인 연등이 대롱대롱 걸려 있어 백일홍의 빈 자리를 채워준다. 햇님이
퇴근한 이후에는 연등에 불을 밝혀 요염한 야경을 선사하며 겨울 제국(帝國) 시절에는 눈덮힌
풍경도 아름다워 나무를 담으려는 사진쟁이들의 발길이 잦다.
단순히 나무만 있었다면 감흥이 덜했겠지만 붉은 연등을 앙증맞게 걸쳐놓은 주지승의 작은 센
스가 그를 일약 만연사의 스타로 만든 것이다. 자연과 인공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현장이라
고나 할까?


▲  앞에서 바라본 배롱나무의 위엄

▲  만연산 밑에 그림처럼 펼쳐진 만연저수지 (북쪽에서 본 모습)

만연사를 둘러보고 읍내 쪽으로 4분 정도 가면 너른 호수인 만연저수지(만연제)가 모습을 드
러낸다. 만연산이 베푼 물을 먹고 자란 그는 1945년에 조성된 80년 묵은 저수지로 유역 면적
264ha, 수혜 면적 55ha, 만수 면적 4ha, 유효 저수량은 약 22만 톤이다. (제방 높이 13m, 제
방 길이 165m)
저수지 주변에는 공원과 산책로를 닦아 만연호수공원으로 삼았으며, 화순군에서 세운 석봉미
술관이 호수 남쪽에 뿌리를 내려 현대 미술의 향기까지 호수에 덧붙여졌다.

은빛 물결이 출렁이는 수면에는 만연산과 주변 나무들, 지나가는 구름과 햇님, 달님, 하늘이
고스란히 비춰져 그들의 아름다운 거울 역할을 한다. 남쪽 제방에서는 화순읍내가 훤히 바라
보여 조망도 괜찮으며 산 바람과 호수 바람이 어우러져 은근히 시원하다.


▲  만연저수지 제방 (제방 너머로 화순읍내가 바라보임)

▲  남쪽에서 바라본 만연저수지
저수지 속에도 또 다른 만연산이 짙게 피어있다.


만연저수지를 끝으로 아침부터 시작된 만연산 더듬기는 마무리가 되었다. 만연산을 80% 이상
살핀 것은 아니지만 만연폭포와 만연산 숲길, 큰재, 오감연결길, 만연사, 만연저수지까지 만
연산의 주요 명소는 거진 둘러보아 정신적, 기분학적으로 포만감이 아주 넘친다. 이번에 인연
을 짓지 못한 곳은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이란 강물에 모두 던져버리면 된다. 그것이 돌고 돌
아 나에게 온다면 다시 인연을 짓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마는 것이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만연사 소재지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동구리 179 (진각로 367, ☎ 061-374-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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