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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1.08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 나들이 (한양도성, 남산서울타워, 목멱산봉수대, 백범광장)
  2. 2020.10.14 듬직하게 생긴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 인왕산 나들이 (인왕산길, 한양도성, 치마바위, 기차바위)
  3. 2020.07.16 초여름 산사 나들이 ~ 도심에서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나한도량을 내세우고 있는 수락산 학림사 (수락산 귀임봉)
  4. 2020.06.29 도심 속에 숨겨진 상큼한 지붕길, 동작충효길 고구동산길~서달산자락길~현충원길 나들이
  5. 2020.06.01 북한산둘레길3구간 흰구름길~삼성암 늦봄 나들이 (빨래골에서 구름전망대, 화계사까지) 2
  6. 2020.05.09 서울의 북쪽 끝 지붕, 도봉산 봄나들이 [무수골, 원통사계곡, 원통사, 우이암 관음봉까지]
  7. 2020.01.24 수도권 고구려 유적의 성지이자 서울의 부드러운 동쪽 지붕, 아차산~용마산~망우산 나들이
  8. 2019.12.01 서울의 남쪽 지붕, 관악산 늦가을 나들이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 사당능선, 거북바위, 관음사] 2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 나들이 (한양도성, 남산서울타워, 목멱산봉수대, 백범광장)

 


'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 나들이 '

▲  남산서울타워

▲  남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  백범광장 주변


 

여름이 빠르게 익어가던 6월 끝 무렵, 일행들과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南山)을
찾았다.
서울 한복판에 누워있는 남산은 내 어릴 적 즐겨찾기 장소로 고등학교 1학년까지 남산 인
근에 살면서 뒷동산 삼아 활보했던 추억 깊은 현장이다. 나는 남산의 물을 먹고 자랐으며,
남산에서 친구들과 뛰어놀고, 남산 정상에 올라 천하를 바라보며 나름대로의 꿈을 키웠다.
고등학교 이후 남산과 먼 곳에 살게 되면서 다소 뜸해졌고, 가끔 찾는 정도에서 머물다가
2015년 이후 오후와 저녁, 평일, 휴일을 가리지 않고 발걸음을 크게 늘리고 있다.

햇님의 기운이 가장 왕성한 14시, 동대입구역(3호선)에서 출발하여 장충단공원을 거쳐 국
립극장으로 이동했다. 국립공원교차로에 이르니 남산의 너른 품으로 인도하는 남산공원길
이 가파른 경사를 들이밀며 우리를 맞이한다.


 

♠  남산 품에 안기다 ~~~

▲  남산공원길 (남산북측순환로 입구)

국립극장 정문을 지나면 남산의 대동맥인 남산공원길이 시작된다. 길은 2갈래로 북쪽 길은 남
산북측순환로 입구에서 남산 북쪽 자락을 거쳐 회현동(會賢洞) 소파로로 이어지며, 예전부터
오로지 뚜벅이 전용 산책로로 이용되어 차들의 바퀴 자국을 철저히 금하고 있다. 크게 오르락
내리락 부분이 없는 느긋한 길로 장충단공원과 필동(筆洞), 남산1호터널로 내려가는 길이 있
으며,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諸葛亮)을 봉안한 와룡묘(臥龍廟)란 오래된 사당이 있다.
그리고 남쪽 길(2차선)은 남산 정상과 남산서울타워로 인도하는 길로 차량 통행이 가능하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왕복 운행이었으나 일방통행으로 변경하면서 '국립극장→남산서울타워→
남산도서관' 방향으로만 바퀴를 굴릴 수 있다.

내가 남산에서 무척 가까운 신당동과 금호동(金湖洞)에 살던 시절, 가족이나 친구와 남산에
물을 뜨러 많이 갔었는데, 가족과 갈 때는 주로 평일 저녁을 이용했다. 그때는 약수터 입구까
지 차를 끌고 가서 약수를 뜬 다음 북측순환로 입구에 있던 차량 매표소까지 후진하여 국립극
장으로 내려갔지. 일방통행로라 그렇게 가는 것은 위법이긴 하나 거리도 그리 길지 않고, 매
표소 아저씨의 쿨한 묵인도 있어서 몇년을 그렇게 했었다.
이후 남쪽 길의 40% 정도를 뚜벅이길로 만들고 남산의 건강을 위해 차량 통행의 크게 제한을
두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반 차량은 절대로 바퀴를 들일 수 없게 되었으며, 오로지 시내버스
(02, 04번)와 시티투어버스, 관광버스, 공원/긴급 차량만 들어올 수 있다. 차를 끌고 온 경우
에는 국립극장 주차장에 차를 두고 걸어서 이동하거나 02, 04번 시내버스를 타야 된다.


▲  뚜벅이들의 낙원이 된 남산 남측순환로

남산북측순환로입구에서 남쪽 길로 접어들면 숲 사이로 빛바랜 한양도성이 모습을 비춘다. 그
리 멀지 않은 과거(2010년 이후)에 성곽 옆에 탐방로를 내었는데, 남산 정상까지 질러 가고
싶다면 그 길을 이용하면 된다. 다만 경사가 좀 각박하여 조금은 힘들 수 있으나 짧은 거리라
서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거닐 수 있다. 게다가 숲이 짙어서 대낮에도 그늘이 가득해 한여
름에는 시원하다.

성곽 앞에 난 산길의 일부는 예전부터 있던 길이다. 그 길의 끝에는 남산에서 제법 잘나갔던
남산약수터가 있었다. 남산산악회가 관리하는 곳으로 어린 시절 여러 번 가봤었지. 그곳은 입
구에 철문까지 설치했으며, 오로지 이른 아침에만 문이 열려 아무 때나 접근이 어려웠다. 다
행히 그곳 산길이 개방되어 이제는 자유의 공간이 되었으며, 약수터 주변에는 남산산악회 건
물과 체력 단련시설이 있다.

성곽길(남산산악회 입구)을 지나 5분 정도 가면 오른쪽에 계단길이 나온다. 그 계단을 2~3분
오르면 운동시설을 갖춘 상춘약수터가 나오는데, 예전 신당동, 금호동 시절 우리집 단골 약수
터였다. 약수터 옆에는 약수로 몸을 씻는 노천탕이 있었는데, 약수로 냉수마찰을 하면 겨울에
감기가 안걸린다고 해서 한때 인기가 대단했었다.
예전에는 서울에 노천 목욕터를 가진 약수터가 적지 않았는데, 대중이 이용하는 약수터에 아
저씨와 노공(老公)들이 벌고 벗고 씻는다는 것이 오랫동안 문제로 지적되었다. 하여 차츰 사
라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기억 속의 풍물시(風物詩)가 되어버렸다.


▲  남산 남측순환로 (4월 풍경)

상춘약수터입구를 지나 계속 남측순환로를 따라 가면 크게 구부러지는 남쪽에 2개의 조망대가
있다. 이 구간은 남쪽이 확 트여있어 조망이 일품인데, 바로 밑에 용산구 지역을 비롯해 한강
과 동작구, 강남/서초구, 관악산 등이 시야에 잡힌다. 대기만 청정하다면 보이는 범위는 더욱
넓어진다. 그럼 여기서 잠시 남산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서울의 한복판이자 도심 남쪽에 누운 남산(262m, 270m)은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낙산(낙타
산)과 더불어 한양 내사산(內四山)의 일원이다. 서울의 영원한 남주작(南朱雀)으로 북현무(北
玄武)인 북악산(백악산)을 바라보고 있으며, 도성 남쪽에 있어서 남산이란 아주 평범한 이름
을 지니고 있다.
천하에는 남산이란 산이 참 많은데, 이들의 공통점은 시내와 아주 가깝고 시민들이 많이 안기
는 휴식처이며, 경주(慶州) 남산(468m)을 제외하면 산세가 낮고 완만해 누구든 편히 오를 수
있는 친근한 산이라는 것이다. 서울 남산도 대체로 편히 안길 수 있는 스타일로 그 걷는 것도
싫다면 남산을 오르는 시내버스나 시티투어버스,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금세 정상까지 간다.

남산의 원래 이름은 목멱산(木覓山)으로 그 옛말인 '마뫼'는 남산을 뜻한다. 인경산(引慶山),
잠두봉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1395년 태조 이성계가 남산을 높여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
하고 그를 위한 사당인 목멱신사(木覓神祠)를 산꼭대기에 세웠다. 이후 매년 제를 올리면서
국사당(國師堂)으로 이름을 갈았다.
남산 능선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한양도성이 걸쳐져 있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전국에
서 날라오는 봉화를 받았다. 조선시대 봉화는 5개 노선이 있었는데, 그 종점이자 중심지가 바
로 남산이다.

임진왜란 때는 한양을 점령한 왜장이 산허리에 왜장대(倭將臺)란 성을 쌓았으며, 병자호란 이
후 어영청(御營廳)과 금위영(禁衛營) 분영이 남산에 설치되어 서울을 지켰다. 왜정 때는 왜군
헌병대가 산자락에 있었고, 1945년 이후에는 중앙정보부가 1호터널 북쪽에 말뚝을 박으며 갖
은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남산은 도성 경승지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양반들이 세운 정자와 그들이 새긴 바위글씨가 즐
비했는데, 지금은 바위글씨 극히 일부를 빼면 남아있는 것이 없다. 또한 가난한 선비와 하급
관리들이 산자락에 많이 살았으며, 개화기 이후 왜인들이 남산 북쪽과 남촌(南村)이라 불리는
청계천 이남에 두루 터를 닦고 살았는데, 왜정 때는 남산도서관 자리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 남산 중턱에는 왜성대공원과 경성신사(京城神社)를 지어 그들의 성지(聖地)로 만들었다.
특히 조선신궁을 짓는 과정에서 남산의 오랜 성역인 국사당이 신궁보다 높은 곳에 있다며 왜
정이 속좁게 징징거려 어쩔 수 없이 인왕산으로 자리를 옮기는 비운을 감당해야 했다. 그렇게
남산의 중심은 토박이 목멱대왕에서 왜열도의 온갖 잡귀들로 바뀌게 된다.
그렇게 왜정이 남긴 자국들은 1945년 이후 대부분 지워졌으나 조선신궁 계단과 일부 소소한
흔적들은 자신의 정체를 꼭꼭 숨기며 1945년 8월 패전 때 연합군에 살려달라고 징징거린 왜왕
(倭王)처럼 구차한 목숨을 연명한다.

1962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케이블카가 놓여 남산의 이름 두 자를 떨쳤고, 1965년 조선신궁
자리에 남산도서관을, 1969년에는 백범 김구(白凡 金九)의 동상을 세워 주변을 백범광장으로
삼았다. 1973년에는 국립극장이 지어졌으며, 1975년에는 6년의 대공사 끝에 천하 최대의 타워
인 남산서울타워가 완성되어 남산의 높이를 배로 높였다. 이 타워는 1980년에 공개되어 남산
과 서울의 굳건한 상징이 되었다.


▲  남측순환로 아랫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한남동과 보광동(普光洞), 한강을 비롯하여 강남 일대가 상쾌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우리 애국가에 보면 '남산 위에 저 소나무'란 구절이 나온다. 그 구절에서 보이듯 남산은 북
악산(백악산)과 더불어 소나무로 유명했는데, 특히 금송(金松)이 많이 자랐다. 소나무 외에도
다양한 꽃과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며 산을 아름답게 수식하고 있고, 도심 한복판에 솟아있어
학의 등에 올라탄 듯 국보급의 조망은 물론 도심 야경도 풍족하게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산 곳곳에 약수터가 뿌리를 내려 나그네의 목을 아낌없이 축여주었는데, 그중에서 부
엉바위 약수터가 제일 유명했다. 허나 이 약수는 남산3호터널이 뚫리면서 그 혈이 막혀 사라
진 상태이며, 다른 약수터도 상당수 문을 닫거나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그 흔한 계곡도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겨우 실처럼 흐르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여럿 있을 뿐
이다.

남산은 남산공원길 남측순환로와 북측순환로, 여러 갈래의 계단길이 있는데, 계단길은 장충단
공원에서 정상까지, 백범광장에서 정상까지 이어지는 계단길이 대표적이며, 남산1호터널과 남
산동, 후암동(厚岩洞)에서 오르는 계단길이 있다. 길 외에는 싹 철조망을 쳐놓아 산으로에 접
근을 막았으나 근래에 모두 풀어버렸다. 허나 철조망을 없앴다고 해서 산자락 곳곳을 쑤시고
다니면 안된다. 무조건 지정된 길로 가야 남산도 좋고, 사람도 좋은 것이다.

남산에는 한양도성과 장충단공원, 와룡묘, 남산봉수대, 한양공원 표석, 남산골한옥마을 등의
문화유산과 백범광장, 안중근의사기념관, 남산야외식물원, 남산서울타워 등의 명소가 있으며,
산 전체가 남산공원(남산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도심 속 나들이 명소이자 조촐한
등산 명소로 그 인기가 식을 줄을 모르며, 예로부터 서울에 오면 꼭 가봐야 되는 서울의 상징
적인 명소로 지방 사람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까지 평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수십만 씩 몰려
드는 서울 관광의 성지이다. 하여 한적한 분위기는 좀 누리기가 어렵다. (서울을 찾은 외래
관광객의 1/3 이상이 남산을 찾는다고 함)

남산이 없는 서울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아니 상상하기도 싫다. 도심 속의 허파이자 꿀단
지로 남산이 있으니 인근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조선 왕궁이 합세해 도심의 녹지 비율이
좀 되는 편이지 그가 없었다면 서울은 더 지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개인적으로 내 옛
추억이 몇 권씩 녹아있는 현장으로 나에게도 꽤 의미심장한 곳이라 할 수 있는데, 내가 제일
많이 오른 산이 바로 남산으로 어림잡아도 500번 이상은 올랐을 것이다.


▲  남산 포토아일랜드 남측 지점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한남동과 보광동, 강남, 관악산과 우면산 산줄기

▲  남산 포토아일랜드 남측 지점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해방촌과 이태원, 용산구 지역

▲  남산 포토아일랜드 남측 지점 조망대에서 바라본 남산서울타워
서울타워는 동양에서 제일 높은 타워로 높이가 236.7m에 달한다. 하늘을
찌를 듯 늘씬하게 솟은 저 타워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보면 볼수록
신기할 따름이다.

▲  다시 만난 한양도성 - 성곽 밑에도 탐방로가 닦여져 있다.

남산 정상을 코앞에 둔 남산서울타워 종점(02, 04번 종점)에 이르니 온갖 관광객들로 뒤엉켜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룬다. 여기서는 오로지 시내버스만 길게 바퀴를 접을 수 있으며 나머지
버스는 승하차가 끝나자마자 바로 자리를 떠야 된다. (주차 공간이 별로 없음)
무수한 인파 속으로 몸을 던져 하나의 점이 되어 서쪽 오르막길을 3분 정도 오르면 남산 정상
과 남산서울타워 밑에 이르며, 오르막길 대신 서남쪽 남측순환로를 내려가면 남산도서관으로
이어진다.

* 남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남산동, 회현동 / 용산구 용산동2가, 후암동 
* 남산공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02-3783-5900)


▲  남산서울타워 종점에서 바라본 서울타워
남산 어디서든 구석진 곳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 서울타워가 바라보인다.


 

♠  남산 정상

▲  정상 동쪽 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도심과 서울 북부)

하늘과 맞닿은 남산 정상에는 남산서울타워와 팔각정, 남산봉수대가 둥지를 틀고 있다. 남산
서울타워(N서울타워)는 남쪽에, 팔각정은 중앙, 남산봉수대는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중
에서 인파가 가장 많은 곳은 남산서울타워와 팔각정 주변이다.

남산서울타워는 236.7m의 키다리 타워로 아시아 최대를 자랑한다. 남산을 든든한 기반으로 삼
아 기둥과 철탑 하나로 하늘을 받들고 있는 웅장한 탑으로 TV와 라디오 방송을 수도권으로 송
출하고자 1969년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 전파탑으로 세워졌다. 1971년 공중선 철탑이 완
성되었고, 1975년 7월에 최종 마무리가 되어 전국 인구의 48%가 이 타워의 전파탑을 통해 방
송을 시청하고 있다고 한다.

1980년 10월 속세에 개방되어 남산의 소중한
꿀단지이자 야경과 조망의 진정한 성지로 자리
매김을 했는데,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道峯
山). 수락산(水落山). 관악산(冠岳山), 불암산
(佛岩山) 정상을 빼고 서울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다. 그러다보니 콧대가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밑에서 그를 보려면 고개가 그냥 까
딱 넘어가 버린다.
게다가 입장료도 꽤 야박한 편, 그래도 관광
수요는 늘 꾸준하여 외국인 선정 서울 명소 1
위의 지위(2012년 서울시청 설문조사 결과)를
누리기도 했다.

 

◀  바로 밑에서 바라본 남산서울타워의 위엄

남산을 안방처럼 들락거린 나도 초등학교 시절에 가족, 친척과 2~3번 타워에 오른 적이 있었
다. 허나 그 이후에는 이상하게도 인연이 닿지 않아 그의 품에 오른 적이 없었다. 정상에 오
더라도 그냥 타워 밑도리와 정상 주변에서 좀 머물다가 내려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막상 가려
고 해도 이상하게 땡기지가 않는다.

* 남산서울타워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2가 산1-3 (남산공원길 105 ☎ 02-3455-
  9277)
* 남산서울타워 홈페이지는 아래 팔각정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남산 팔각정(八角亭)

팔각정은 남산서울타워와 더불어 남산의 주요 장식물로 이곳에는 원래 1959년에 이승만 대통
령을 치켜세우고자 세운 우남정(雩南亭)이 있었다. 여기서 우남은 이승만의 호로 1960년 4.19
의거로 그가 물러나자 바로 철거되었다.
이후 1968년 11월 탑골공원 팔각정을 모델로 삼아 지금의 팔각정을 지었으며, 남산 정상을 수
식하는 존재로 삼았다. 정자 서쪽에는 한양도성 여장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산바람이 주변
에늘 머물고 있어 한여름에도 시원하다. 정자 자체는 60년도 채 안된 존재이지만 관광객들로
늘 붐비며, 매년 1월 1일 새해 해맞이 행사가 성황리에 열린다.


▲  옛 국사당(國師堂)터 표석

남산 정상은 늘 사람들로 미어터지나 팔각정 부근 구석에 누운 국사당터 표석에 눈길을 주는
이는 거의 없다. 애처로운 눈빛을 보이며 눈길과 관심을 호소하지만 맨날 외면을 받는 그 표
석, 표석에 쓰인 국사당은 남산의 수호신인 목멱대왕의 사당으로 1395년에 태조가 세웠다.
1404년 목멱대왕을 호국(護國)의 신으로 높이면서 목멱신사(木覓神祠)라 불리기도 했던 남산
의 성역이자 중심이었으나 1925년 왜정이 조선신궁을 지을 때 국사당이 그보다 높은 곳에 있
는 것에 쓸데없이 아니꼬움을 드러내면서 다른 데로 옮기라고 난리를 쳤다. 그래서 태조와 무
학대사(無學大師)가 기도를 했던 곳이라 전하는 인왕산 선바위 밑으로 눈물을 머금고 이사를
가게 되었고, 목멱대왕의 남산은 왜열도의 온갖 잡귀들이 판을 치는 일그러진 현장이 되었다.

국사당을 핍박했던 왜정도, 조선신궁도 다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그곳에 건방지게 들어앉던 왜
열도의 잡귀들도 추방되었지만 남산의 주인인 국사당은 끝내 제자리로 오지 못하고 인왕산에
뿌리를 내려 선바위와 함께 기도처의 성지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로 미어터
지는 이곳에 다시 와봐야 너무 시끄러운 나머지 국사당 신들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다. 그
만큼 남산은 많이도 변했다.


▲  남산 목멱산봉수대(木覓山烽燧臺) - 서울 지방기념물 14호

정상 북쪽에는 남산의 오랜 상징물인 남산봉수대가 도심을 바라보고 있다. 남산의 옛 이름을
취해 목멱산봉수대('목멱산봉수대터'가 문화재청 지정 명칭임)라 불리기도 하며 서울에 있다
고 해서 '경(京)봉수대'란 별칭도 있으나 그냥 속편하게 남산봉수대라 불러도 문제는 없다.

봉수대란 불을 피우거나 연기를 이용해 변방의 소식을 알리던 옛날 통신 수단으로 산꼭대기에
주로 설치되었다. 낮에는 연기로 알리고, 밤에는 불을 피워 소식을 전했으며, 비가 많이 오는
경우에는 봉수지기가 직접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봉수대는 크게 5개 노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변경인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
滿江), 남해바다에서 시작하여 이곳 남산을 종점으로 삼았으며, 평소에는 봉화 1개, 적이 나
타나면 2개, 경계에 다다르면 3개, 경계를 넘으면 4개, 전쟁이 터지면 5개를 올렸다.

남산봉수대는 1394년에 설치되어 하루도 연기가 마를 날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살았으며, 동
쪽에서부터 서쪽을 향해 5개소가 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1895년 봉수제도가 폐지되면서 문
을 닫았고, 왜정 때 말끔히 철거되면서 그 위치를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청구도(靑
邱圖)를 통해 봉수대터 1곳을 발견하니 그곳이 지금 봉수대로 철저한 고증을 통해 1994년 복
원되었다. (나머지 4곳은 아직도 위치가 아리송하다고 함;;;)

이곳 봉수대는 벽돌로 쌓은 5개의 봉수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금은 불과 연기를 피울 일이
없는 죽은 봉수대로 남산 정상을 수식하는 상징적인 존재이자 조선시대 봉수제도의 중앙봉수
대 의미 밖에는 없다. 그것이 현역에서 은퇴한 사물의 쓸쓸한 뒷모습이다. 봉수대는 관람이
가능하며, 여기서 바라보는 조망이 가히 차관도 아닌 장관이라 이곳이 왜 조선 봉수대의 중심
이 되었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남산이 서울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고 조망이 뛰어나 사방에
서 날라오는 봉수대 연락을 받기에 아주 좋기 때문이다.
참고로 서울에는 남산 외에도 무악봉(毋岳峰) 동봉수대와 봉화산(烽火山) 봉수대, 봉산 봉수
대, 개화산 봉수대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근래에 복원된 따끈따끈한 상태로 무악산 동봉
수대와 봉화산 봉수대는 서울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8-1


▲  목멱산봉수대 내부
불을 피우는 봉수대는 벽돌로 쌓고 그 밑도리는 성벽처럼 돌을 다듬어서 쌓았다.
1994년에 복원된 상태라 고색의 때는 채 익지 못했으며 아직까지는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피부를 지녔다.

▲  남산봉수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서울 도심 동부와 성북/강북/도봉 권역과 동대문/중랑/성동 권역을 비롯하여
멀리 수락산과 불암산 등이 흔쾌히 두 눈에 잡힌다.

▲  남산봉수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바로 앞에 보이는 것은 남산케이블카 승차장이다. 그 너머로 서울 도심과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줄기가 바라보인다.


 

♠  남산 마무리

▲  성곽길에서 바라본 용산과 여의도, 서울 서남부 지역

산 정상에서 남산도서관, 백범광장으로 내려가는 성곽길은 경사가 매우 급한 편이다. 내려
갈 때야 상관은 없지만 올라갈 때는 거의 혼이 다 빠진다.

남산케이블카를 지나면 도심을 향해 튀어나온 잠두봉 전망대가 손짓을 하는데, 여기서 바라보
는 조망 맛이 아주 일품이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달까지 올라간 서울의 심장부를
바로 발 밑에 두며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가까이로 남산3호터널을 오가는 차량의 물결이
개미들의 행진처럼 보이며, 키다리급의 온갖 성냥갑 건축물들이 여기서만큼은 손가락보다 작
게 다가온다.


▲  남산 정상에서 남산도서관으로 내려가는 성곽길
장충단공원에서 올라가는 것보다 거리는 매우 짧지만 대신 경사가 좀 각박하다.
남산 산길 가운데 가장 경사진 곳으로 장충단공원이나 국립극장에서 올라가
정상을 찍고 남산도서관 방면으로 내려가는 것을 추천한다.
(그래봐야 넉넉히 2시간이면 족함)

▲  잠두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서울 도심과 인왕산,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산줄기가 바라보인다.

▲  잠두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서울 도심 동부와 동대문, 성북/강북/도봉 권역과 수락산, 불암산 산줄기 등

▲  잠두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남대문시장과 시청, 광화문을 중심으로 한 서울 도심과 안산(鞍山), 인왕산 등


정상에서 서쪽 성곽길을 따라 20분 정도 내려가면 시립남산도서관이다. 이제 남산도 다 내려
온 것이다.

여기서 안중근의사기념관과 2020년 11월에 닦여진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을 지나면 백범 김구
선생을 기리고자 닦은 백범광장이 나온다. 공원을 이루고 있는 광장 남쪽에는 한양도성이 복
원되면서 나무와 온갖 꽃을 심은 녹지 공간이 대폭 늘어났다. 바로 옆이 키다리 빌딩이 즐비
한 도심이건만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완전 딴 세상을 이루고 있으니 그 역시 남산이 있으니
가능한 것이다.


▲  백범광장 터널과 서울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
한양도성과 남산을 복원하면서 예전에 도로 공사로 줄기가 끊긴 백범광장과
남산 사이의 산줄기를 다시 이어붙여 그 밑에 터널(소월로3길)을 냈다.

▲  휴일 오후 한가로움이 느껴지는 백범광장과 서울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

▲  백범광장 남쪽에 다시 재현된 한양도성 - 사적 10호

백범광장 남쪽과 서쪽에는 근래 복원된 아주 따끈따끈한 성곽이 있다. 이들은 한양도성의 일
원으로 왜정 때 끊어진 남대문과 남산 구간의 일부이다.
오랫동안 잊혀진 이들을 끄집어내고자 백범광장 주변을 싹 뒤집어 조사를 벌였고, 땅속에 묻
힌 성터가 발견되어 그 자리를 바탕으로 성벽과 여장을 복원했다. 재현된 구간은 200m 정도로
최근 지어진 탓에 피부가 아주 하얗고 반질반질하여 마치 벽에다 그린 성벽 벽화 같다. 남산
도서관 북쪽 성곽터를 조사하여 2020년 11월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을 내었으며, 나머지 사라진
구간도 복원 계획에 있다.


▲  한양도성 백범광장 구간
하얀 피부의 성곽 여장 너머로 서울역 동쪽에 자리한 여러 키다리 빌딩이 보이며,
성곽 안쪽에도 탐방로를 내어 억새를 비롯한 온갖 나무와 꽃을 심었다.

▲  한양도성 백범광장 구간 서쪽 부분
성곽은 계속 달리고 싶다~~!! 허나 왜정과 개발의 칼질로 끊어진 구간이
적지 않고 복원 속도도 굼벵이보다 느려 그런 날은 아직도 멀었다.

▲  한양도성에서 바라본 후암동과 이태원, 용산구 지역
천하를 비추던 햇님은 엄청난 광을 쏟아부으며 슬슬 커텐을 칠 준비를 하고
회색빛 도시도 석양이 짙어지면서 점차 검은 도화지 속에 묻혀간다.

▲  온갖 야생화가 살랑거리는 백범광장 서부

▲  도동3거리에 있는 남산공원 마크

백범광장과 한양도성 백범광장 구간을 뒤로하고 남산공원 출입구의 하나인 도동3거리로 나오
니 시간은 18시가 넘었다. 햇님도 그 기운이 다했는지 84,000광 보다 더 진한 석양을 비추며
슬슬 꽁무니를 내빼고 토끼의 달나라가 하늘 높이 떠올라 땅꺼미의 기운을 북돋는다.

이렇게 하여 간만에 찾은 남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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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2월 2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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듬직하게 생긴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 인왕산 나들이 (인왕산길, 한양도성, 치마바위, 기차바위)

 


~~~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 인왕산 나들이 ~~~

▲  인왕산 (가운데 봉우리가 정상)


 

♠  인왕산(仁王山) 입문

▲  인왕산 만수천약수터

봄이 한참 무르익던 4월의 끝 무렵, 일행들과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이자 내 즐
겨찾기 뫼의 하나인 인왕산을 찾았다.
인왕산은 10대 시절 선바위 답사를 시작으로 50번 넘게 인연을 지었는데, 낮 뿐만 아니라 야
간(19시 이후)에도 적지 않게 올라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나의 마음을 비추고 있다. 특히
인왕산에서 바라보는 서울 도심 야경(夜景)은 아주 일품으로 꼽힌다.

경복궁역(3호선)에서 출발하여 인왕산길로 들어서 창의문(彰義門, 자하문) 방면으로 가다보면
인왕천약수터로 인도하는 길이 살짝 손짓을 한다. 이 코스는 인왕산에서 가장 잘나가는 약수
로 추앙을 받던 인왕천약수터를 거쳐 인왕산 능선(한양도성)으로 이어지는데 길이 좀 각박하
다. 하여 그 코스는 쿨하게 통과하고 다음에 나오는 석굴암입구(수성동계곡 상류)에서 인왕산
의 깊은 품으로 들어섰다.

석굴암입구로 들어서면 바로 조촐한 모습의 정자가 나오면서 길이 2갈래로 갈리는데 직진하면
이름도 꽤 낯이 익은 석굴암(石窟庵)이란 석굴 암자가 나온다. 허나 그곳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은 사실상 막혀있어 정자 옆 북쪽 산길로 올라가야 된다. (석굴암에서 정상으로 통하는 길
이 있긴 하나 통행 금지임)
석굴암입구 정자에서 북쪽 산길을 5분 정도 오르면 160m 고지에 자리한 만수천약수터가 마중
을 한다. 인왕산에 무수히 널린 약수터의 하나로 부적합 빨간줄과 양호 사이를 왔다갔다하고
있어 앞날이 좀 어려워 보인다. 물론 샘터 주변을 계속 관리해주고 비도 적당량 내려주면 청
색 신호가 뜨는 것은 시간문제이나 날씨 변덕도 심하고 서울 도심이 바로 코앞이라 인왕산 지
하수에도 비상이 걸렸다.

약수터 주변은 나무가 삼삼하여 하늘이란 단어를 거의 잊게 할 정도로 덩치가 큰 바위들이 주
변에 여럿 포진해 있어 약수터의 잔잔한 장식물이 되어주고 있으며, 간단한 체육시설과 의자
등이 놓여져 있어 잠시 두 다리를 쉬어가도록 배려했다.


▲  만수천약수터 주변 풍경

큰 바위 밑에는 조그만 자연산 동굴이 있다. 지금은 들어가지 못하게 철창을 씌웠지만 예전에
는 기도나 굿 장소로 쓰였다. 인왕산이 잘생긴 바위가 많고 기가 센 산이라 하여 호랑이가 담
배 맛을 알던 시절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이자 굿터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굴 앞을
지나니 동굴이 내뱉은 약간 시원한 바람이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  만수천약수터 뒤쪽 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서촌과 경복궁, 종로)

만수천약수터에서 갑자기 흥분한 산길을 7~8분 정도 오르면 능선(만수천약수터 뒤쪽 능선)에
이른다. 이제부터는 숲속에 가려진 산길이 아닌 천하를 굽어보며 걷는 능선길이 시작되는 것
이다. 그 길을 10분 정도 가면 한양도성이 흐르는 성곽길(인왕산 주능선)과 만나게 된다.

성곽길과 만나는 갈림길에서 오른쪽(동쪽)으로 내려가면 창의문과 부암동(付岩洞)으로 이어지
며, 왼쪽(서쪽)은 인왕산 정상이다. 우리야 정상이 목적이니 왼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성곽길은 발을 내딛기가 무섭게 경사가 슬금슬금 각박해져 호흡마저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런
길을 10여 분 오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성밖 계단을 내려가면 기차바위 능선이며, 성
곽길을 고수하면 정상이다. 이미 인왕산의 어깨까지 올라탄 상태라 서울 시내가 고루고루 내
려다보여 마치 하늘을 배회하는 큰 새의 등에 올라탄 기분이며,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조망의
품질도 더욱 올라간다.


▲  인왕산의 허리를 따라 흘러가는 한양도성(漢陽都城) - 사적 10호

▲  인왕산 북쪽 능선 성곽길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콧대가 높은 천하 굴지의 대도시 서울이 내 발 밑에 펼쳐져 있다. 마치 이 도시가
나의 세상이 된 듯 거만한 착각이 피어올라 잠시나마 기분이 즐거워진다.
허나 현실은 마음 편히 드러누울 땅도 제대로 없다는 것.

▲  정상 북쪽 성곽길 - 저 바위 꼭대기가 인왕산 정상이다.

기차바위로 인도하는 갈림길에서 성곽길은 잠시 진정을 되찾으나 정상을 코 앞에 두고 다시금
격한 흥분을 보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존심을 곱게 접고 묵묵히 길을 임하면 좀처럼 닿
지 않을 것 같던 인왕산 정상에 도달하게 된다.


▲  애틋한 사랑 이야기와 어둠의 역사를 안고 있는 인왕산 치마바위

인왕산 정상 동쪽에 붙어있는 커다란 바위는 인왕산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치마바위이다. 병
풍처럼 넓어서 병풍바위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 바위에는 중종과 단경왕후 신씨의 슬픈 사연
이 깃들여져 있다. 그 사연은 서울 장안에서 꽤 알려진 이야기로 내용은 대략 이렇다.

조선 11대 군주인 중종(中宗)의 첫 부인은 신수근(愼守勤, 1450~1506)의 딸인 단경왕후(端敬
王后) 신씨(1487~1557)이다.
1506년 박원종(朴元宗)과 성희안(成希顔), 홍경주(洪景舟) 등이 반란을 일으켜 연산군(燕山君
)을 폐위시키고 그의 이복 동생인 진성대군을 익선관(翼善冠)을 씌운 채로 급히 왕위에 올리
니 그가 곧 중종이다. <이 사건을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고 부름>
단경왕후의 아비인 신수근은 반란파에 협조하지 않아 그 형제가 모두 살해되고 말았다. 그들
에 의해 얼떨결에 왕이 된 중종은 부인을 지키고자 재빨리 왕후로 봉했으나 반란파들은 역적
의 딸을 그냥 둘 수 없다며 당장 내쫓을 것을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왕후나 그 소
생 왕자에게 보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종은 그들을 달래고자 반정 때 몰수한 연산군 측근과 반란 비협조 인물들의 재산을 나눠주
고 기녀(妓女) 300여 명을 주며 회유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심지어 유자광(柳子光)은 중종의
생모이자 대비(大妃)인 정현왕후(貞顯王后)를 찾아가
'중전 신씨를 쫓아내지 않으면 임금을 내쫓겠습니다!!'

협박을 하기도 했다. 이미 반란으로 왕을 한번 갈아치웠으니 그들에게는 그런 것은 일도 아니
었다.
상황이 점점 고통스럽게 변해가자 신씨는 울면서
'소첩이 전하(殿下)를 위해 나가겠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전하에 대한 변치 않은 마음으로 인
왕산 바위에 치마를 걸어두겠사오니. 상황이 좋아지면 꼭 찾아오세요 ㅠㅠ'


그렇게 말하고는 스스로 경복궁을 나가 옛날에 살았던 인왕산 동쪽 본가에 들어갔다. 그리고
는 매일마다 인왕산에 올라 중종과 같이 살던 시절, 자주 입었던 붉은 치마를 바위에 널었다.
그 소식을 들은 중종은 수시로 경회루(慶會樓)에 올라 치마바위를 바라보며 그녀에 대한 생각
에 눈시울을 붉혔다.
반란파들은 그 꼴이 보기 싫어 서둘러 새 왕비를 맞을 것을 요구했고, 그래서 장경왕후(章敬
王后) 윤씨가 새 왕비로 들어오게 된다. 또한 10여 명의 후궁까지 맞아들이면서 신씨에 대한
추억과 그녀의 존재감은 완전히 흐릿해진다.

신씨는 왕이 사직단(社稷壇)에 사직대제(社稷大祭)를 지내러 올 때를 기다려 말죽을 쑤어 사
직단 정문에서 기다렸다. 그래서 왕의 말에게 직접 먹이는 등 남편에 대한 애정을 표했지만
결국 남편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1557년 70세의 나이로 소생도 없이 한 많은 삶을 마감
하고 만다. (중종은 1544년 56세의 나이로 승하함)
신씨가 죽자 세상에서는 치마를 널었던 병풍바위를 치마바위라 불렀으며, 소년왕 단종(端宗)
의 부인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와 더불어 왕실 여인들의 '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 토
막으로 두고두고 우려먹으며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다.

치마바위 밑에는 20세기에 조성된 미륵마애불이 숨겨져 있으며, 바위 피부에는 옥의 티로 황
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와 왜왕 만세 등의 바위글씨가 요란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들 글씨
는 1939년 가을 '대일본청년단대회'가 열린 것을 기념하고자 왜정과 친일 패거리들이 지원하
여 새겨진 것으로 서울 장안 어디에서든 다 보이는 바위라 하여 이곳에 새겼다고 한다. 글씨
는 해방 이후에 죄다 쪼아 지웠으나 그 흔적은 조금씩 남아 어둠의 시절의 쓰라린 한 단면을
보여준다.


 

♠  인왕산 정상부

▲  정상 동쪽에서 바라본 인왕산 북쪽 자락과 북악산(백악산)
왼쪽에 보이는 바위 능선이 기차바위이다.

▲  인왕산 정상 남쪽
인왕산 정상은 오로지 남쪽으로만 진입이 가능하다. 서쪽은 성곽 바깥이고
동쪽과 북쪽은 꽤 각박한 낭떠러지기 때문이다.


인왕산은 해발 338m(또는 340m)의 바위 봉우리로 북악산(342m)과 낙산(洛山), 남산과 더불어
서울을 안쪽으로 둘러싼 내사산(內四山)의 일원이다.
동북쪽으로 자하문고개를 경계로 북악산(백악산)과 이어져있고 서쪽은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안산(鞍山, 295.9m)과 마주보고 있으며, 북쪽은 홍제천(弘濟川)을 통해 북한산(삼각산)과 이
어진다.
인왕산의 다른 이름으로 필운산(弼雲山)이란 명칭이 있는데, 이는 제왕이 있는 궁궐 오른쪽<
제왕이 정전(正殿)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에 있어 '군주는 오른쪽에서 모신다'
는 의미이다. 배화여고 뒷쪽에 있던 이항복(李恒福)의 집 이름인 필운대(弼雲臺)도 여기서 비
롯되었다.


경복궁 서쪽인 서촌(西村, 웃대)과 사직동, 의주로, 부암동, 홍제동 사이에 남북으로 길게 누
워있으나 동서의 폭이 좁아 남북과 달리 경사가 꽤 가파르다. 시내에서 볼 때는 산세가 작아
서 금방이면 올라갈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착시현상을 노린 인왕산의 속임수이다. 그의 품에
들어가보면 보기와 달리 넓고 장대한 모습에 놀라게 된다.
사직공원(사직단)과 독립문역에서 인왕산 정상까지 40~50분 정도 걸리며, 정상을 찍고 홍제동
환희사(歡喜寺)나 개미마을, 홍지문, 창의문 쪽으로 내려가면 보통 2시간 내외면 충분하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견고한 돌산으로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능선을 따라 선바위와 치마바위,
모자바위, 범바위, 기차바위 등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걸쭉한 바위들이 산의 장대
한 경관을 돕고 있으며, 정상을 이루는 바위 봉우리는 북악산에 버금갈 정도로 웅장해 우백호
에 걸맞는 위엄을 드러낸다. 18세기에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명성을 날린 겸재 정선(鄭敾
)은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비롯해 인왕산의 주요 명소와 장면을 그림에 담아
인왕산을 극찬했다.

돌산이다보니 물이 귀할 것처럼 보이지만 약수터가 제법 많아 곳곳에서 나그네의 목을 축여준
다. 하지만 산의 폭이 좁고 경사가 급하여 속시원한 계곡은 거의 없으며, 그나마 개발의 칼질
과 급격한 도시화로 대부분 사라져 수성동(水聲洞)계곡과 큰절골(환희사계곡)만 그나마 좀 남
아있고 청풍계(淸風溪)와 청계동천(淸溪洞天), 백운동천(白雲洞天) 등은 일부만 살아있다.


▲  인왕산 정상 바위
저 바위가 인왕산의 실질적인 정상으로 높이는 1.5m 정도 된다. 바위의 남쪽과
북쪽 피부에는 움푹 패여 하얗게 서린 곳이 많은데, 이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오가면서 생긴 상처이다.


인왕산은 1968년 1.21사건(김신조 공비 패거리 침투 사건)으로 정상 주변과 성곽 능선이 폐쇄
되면서 선바위와 환희사 주변, 인왕산길을 비롯한 산 밑도리만 겨우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러
다가 김영삼 정권 때 다시 속세에 개방되었다. 허나 서울 도심을 지키는 요충지라 군부대 시
설이 성곽 능선과 산자락 곳곳에 남아있어 금지된 땅이 다소 있으며, 사진을 찍을 때도 약간
주의를 기울어야 된다.
또한 매주 월요일은 인왕산 정상 주변과 성곽 능선(인왕산 주능선)은 입산이 통제되며, 월요
일이 휴일인 경우에는 다음 날 통제된다. 다만 성곽 능선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제한이 없
다.

인왕산에는 많은 명소가 있는데, 선바위와 국사당(國師堂), 치마바위, 장안 제일의 경승지였
던 수성동계곡, 벽화로 유명해진 홍제동(弘濟洞) 개미마을, 석굴사원인 석굴암(石窟庵), 지방
문화재 불상을 2기나 간직한 환희사 등이 있다. 또한 국사당과 선바위 일대는 토속신앙과 무
속(巫俗), 불교가 어우러진 이색 현장으로 서울 지역 무속신앙의 성지(聖地)이기도 하다.

600년 동안 서울의 우백호로 있다보니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도 많이 서려있다. 태조 때 서울
을 도읍으로 정하고 궁궐 자리를 정할 때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북악산
과 남산을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로 삼자고 했다. 허나 정도전(鄭道傳)은
'옛부터 제왕은 남면(南面)을 하여 천하를 다스렸지 동향을 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

태클을 걸면서 무학의 뜻은 꺾이고 만다.
이에 발끈한 무학은
'내 주장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후에 다시 도읍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탄식했다고 한다.
또한 신라 후기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었다고 전하는 '산수비기(山水秘記)'에는
'도읍을 정할 때 승려의 말을 들으면 국가가 기운이 연장될 것이나 만일 정씨 성을 가진 사람
의 말을 들으면 5대가 지나지 않아서 혁명이 일어나고, 200년 만에 큰 난리가 터져 백성이 어
육이 될 것이다'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과연 5대(정확히는 6대) 만에 세조(世祖)가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
년)을 일으켜 조정을 갈아 엎었고, 딱 200년 만에 임진왜란이 터졌다. 이 내용은 19세기에 편
찬된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실려있는데 아마도 불교를 배척한 정도전과 사대부의 억불숭유 정
책을 신랄하게 까고자 불교 쪽에서 그럴싸하게 지은 전설을 그대로 인용한 듯 싶다.


▲  성곽과 벼랑으로 완전히 막혀있는 정상 북쪽 성곽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주역이던 이괄(李适)은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반란
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했다. 이에 인조는 서인 패거리를 이끌고 급히 충청도 공주(公州)로 줄
행랑을 쳤다.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은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을 치고자 인왕산 서쪽 안산
에 진을 치자 도성을 점령하여 잔뜩 자만감에 빠진 이괄은 도성 사람들에게
'내가 저것들을 단숨에 때려잡을 것이니 나와서 싸움이나 구경하도록'
말하며 자신감을 강하게 내비췄다. 그리고 군사<임진왜란 때 투항한 항왜(降倭)들이 많았음>
들을 이끌고 인왕산 서쪽으로 나가 장만의 군사와 대치하니 도성 백성들은 그 싸움을 구경하
고자 인왕산에 잔뜩 모였다. 그 시절 백성들은 하얀 옷을 많이 입었는데, 산을 가득 메운 그
들로 인해 산이 마치 하얀 백로처럼 보였다고 한다.

관군을 맞은 이괄은 처음에는 여유롭게 전쟁을 진행했으나 난데없이 불어닥친 강풍에 기가 꺾
여 장만에게 몰리고 말았다. 하여 서둘러 도성으로 도망쳤으나 백성들이 성문을 걸어잠구면서
결국 도성을 버리고 한강을 건너 이천, 여주로 줄행랑을 쳤다. 허나 부하에게 살해되어 결국
목없는 귀신이 되었고, 살아남은 이괄의 부하들은 목을 붙잡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후금(
後金)으로 도망가 청태종(淸太宗)에게 조선을 치라고 들쑤셨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정묘호란
(丁卯胡亂)이다.

끝으로 인왕산은 호랑이들이 많았는데, 무서운 정도는 천하 제일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궁궐
에 수시로 나타나 난리를 치기 일쑤였고, 심지어 종묘(宗廟)까지 침입했다. 백성들의 피해도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없다. 머리는 인왕산 호랑이 같다'란 말도 나
왔으니 인왕산은 그야말로 조선 호랑이의 성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호랑이는 온데간데 없고
그들의 먼 친척인 고양이만 종종 보일 뿐이다.
또한 북악산과 인왕산을 비롯한 서울 호랑이들은 지방 호랑이와 달리 곶감 따위는 눈도 꿈쩍
안했다고 한다. 그들이 무서워한 것은 다름 아닌 수진궁(壽進宮) 귀신이었다고 하는데, 다음
과 같은 재미난 전설이 걸쭉하게 전해온다.

옛날에 북악산(혹은 인왕산) 호랑이가 먹을거리를 찾으러 경복궁에서 안국동으로 넘어가는 송
현(松峴)고개로 마실을 나왔다. 마침 어느 집에서 애기가 징징거리고 우는데, 그 어머니가
'문 앞에 호랑이가 왔어. 뚝!'
허나 애기는 계속 징징거린다. 그러자
'애기야 곶감 줄께. 뚝!'
곶감이란 말에 호랑이는 잠시 염통이 쫄깃해졌으나 역시 울음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곶감의 시대는 이제 갔구나. 이제 흔쾌히 식사나 해야겠다'
환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수진궁 귀신이닷!!'
외치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물을 뚝 그쳤다는 것이다. 그러자 호랑이가 지례 겁을 먹으

'엥 수진궁 귀신..? 이건 말도 안돼'
꼬리를 접고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 호랑이는 수진궁 귀신이어야 쫓을 수 있다는
속담이 생긴 것이다. (참고로 수진궁은 혼인을 못하고 죽은 조선 왕족의 사당임)


▲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북악산과 인왕산 북쪽 능선

인왕산 정상에 올라서면 서울 도심과 서촌(웃대)를 비롯하여 서대문구, 마포구, 은평구, 여의
도, 영등포구, 강서 지역, 동작구, 강남 지역, 동대문구, 성북구, 광진구, 강동 지역, 국립현
충원, 관악산, 삼성산, 호암산, 우면산, 아차산 등 많은 존재들이 고루고루 시야에 들어온다.
높이는 338m(340m)에 불과하나 조망만큼은 한라산과 백두산이 부럽지 않다.
또한 사방이 모두 트여있어 해돋이와 일몰 풍경이 진국이며, 남산(南山)과 함께 서울 도심의
새해 해돋이 명소로 유명하다. 또한 도심이 바로 밑이라 여기서 바라보는 도심 야경 맛이 아
주 좋다. (서울 도심 야경은 인왕산을 제일로 쳐줌)

* 인왕산 정상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부암동, 서대문구 홍제동


▲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촌(웃대)과 서울 도심.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서울의 장대함

▲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와 남산(가운데 솟은 산)
저 멀리 관악산과 삼성산, 우면산, 대모산, 남한산까지 싹 시야에 잡힌다.

▲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안산과 서대문구, 마포구, 여의도,
영등포, 강서 지역


 

♠  인왕산 기차바위

▲  기차바위 능선

인왕산 정상에서 잠시 머물다가 기차바위 갈림길로 다시 내려와 성곽길을 버리고 기차바위로
방향을 잡았다. 철계단을 타고 성 밖으로 내려가 북쪽으로 가면 인왕산의 으뜸 바위로 추앙을
받는 기차바위가 모습을 드러낸다.


▲  인왕산의 북쪽 하늘길, 기차바위 능선 (북쪽 방향)

인왕산 바위의 갑(甲)으로 칭송을 받는 기차바위는 기차처럼 길쭉한 바위 능선이다. 그렇다고
기차처럼 생기지는 않았으며, 그저 길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 것 같다. 어린이들이
부르는 노래에도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 바나나는 길어, 길면 기차.' 이런 구절이 있다.
그만큼 기차는 길쭉한 존재의 대명사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기차바위 능선은 약 300m 정도로 순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거닐면 실감이 덜하겠지만
세검정초교에서 북악산 백사실(백사골)로 올라가는 길이나 부암동 산복길(백석동길)에서 바라
보면 꽤 두툼한 바위 능선임을 알 수 있다. 사방이 확 트여있어 조망은 1급이나 단 양쪽이 일
체의 자비도 없는 낭떠러지이니 난간을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한다.


▲  기차바위 능선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시내

가까이로 북악산(백악산)과 서촌(웃대), 경복궁, 서울 도심부부터 멀리 아차산~용마산~망우산
산줄기, 강동구 지역, 남양주와 하남, 성남 지역 산줄기까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와 눈 속에
서 아주 살살 녹는다.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평창동, 북한산(삼각산) 남쪽 산줄기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로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에 포근히 감싸인 부암
동과 신영동, 평창동(平倉洞), 북악산 북쪽 자락과 북한산 남쪽 산줄기가 장쾌하게 시야에 들
어온다. 이렇게 보니 서울의 한복판이 아닌 산악 지방의 소도시를 보는 기분인데, 뫼를 오르
는 재미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조망 맛을 보기 위함이다.


▲  기차바위 북쪽에서 바라본 인왕산 정상(왼쪽)과 안산(鞍山)

▲  기차바위에서 홍제동, 환희사로 내려가는 산길

▲  옥동약수터

기차바위 능선을 지나 북쪽 갈림길에서 홍제동으로 인도하는 서쪽 길로 내려갔다. 중간에 다
시 왼쪽으로 빠져 환희사 방면으로 내려가다가 옥동약수터를 만났는데, 물이 실타래보다 적게
나오고 수질 또한 부적합 빨간 딱지를 받은 상태라 손을 대지 않았다. 마침 약수터에 있던 노
인이
'약수터 주변 정비를 안해서 그렇지, 마셔도 괜찮다. 난 이 물을 20년 동안 마셨다'
며 괜찮다고 그런다. 허나 부적합이란 단어가 계속 마음에 걸려 끝내 마시지는 않았다.

노인의 말로는 이곳을 관리하는 동네 노인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다들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
거나 생명이 다해 거의 해체되어 관리하는 이들이 없다고 한다. 왕년에는 인왕산의 제일 가는
약수임을 자랑했으나 지금은 많이 초췌해졌다면서 서대문구청에 지속적으로 민원을 넣었지만
철밥통에 걸맞게 앵무새처럼 알겠다고만 할 뿐, 약수터 관리에 그리 신경을 안쓴다고 한다.


▲  옥동약수터 주변 동굴

옥동약수터에서 잠시 두 발을 쉬었다가 다시 길을 재촉했다. 가다보니 또 다른 약수터를 만났
는데, 그 약수터는 아예 물이 말라버렸다. 약수터 주변에는 운동시설과 의자들이 있고 그들
뒤로 조그만 자연산 동굴이 있는데, 그곳도 기도와 무속 행위로 말썽이 많자 아예 철조망으로
입을 막아버렸다, 굴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산산이 불어와 몸을 꼬질꼬질하게 뒤덮던 땀방울을
제대로 단죄한다.

동굴을 뒤로하고 5분 남짓 내려가니 인왕산 서쪽 자락에 안긴 조그만 비구니 산사, 환희사(歡
喜寺)가 모습을 비춘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상 2개를 간직한 20세기 현대사찰로 오랜만에
발을 들일까 했으나 이미 18시가 넘어서 쿨하게 통과했다. 환희사는 18시 정도가 되면 대문을
걸어잠군다.
속세애서 절까지는 차량이 마음껏 바퀴를 굴리게끔 길이 닦여져있는데, 그 길을 5분 정도 내
려가면 인왕산을 건방지게 가리고 선 홍제원현대아파트와 인왕산현대아파트가 나온다. 이제
완전히 속세로 내려온 것이다. 두 아파트 사이를 가르는 통일로34길을 내려가니 서울의 주요
간선도로인 의주로(義州路)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하여 간만에 찾은 인왕산 나들이는 다음을 기약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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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9월 2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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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산사 나들이 ~ 도심에서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나한도량을 내세우고 있는 수락산 학림사 (수락산 귀임봉)

 


~~~~~ 초여름 산사 나들이, 수락산 학림사 ~~~~~

▲  학림사 경내

▲  학림사 석불좌상

▲  수락산

 


 

여름 제국의 무더위 갑질이 슬슬 고개를 들던 7월의 첫 무렵, 서울의 동북쪽 지붕인 수락
산을 찾았다.
수락산(水落山, 638m)은 그의 그늘인 상계1동에 8년을 살면서 수없이 안겼던 뫼로 지금은
도봉산(道峯山) 그늘인 도봉동에 살고 있지만 가끔식 중랑천(中浪川)을 건너 수락산의 품
을 찾는 편이다.
수락산에는 다양한 코스가 있는데, 이번에는 오랜만에 학림사로 올라가기로 했다. 지하철
4호선의 북쪽 종점인 당고개역에서 상계3,4동 달동네를 가로질러 수락산의 품으로 들어섰
는데, 길이 좀 복잡하긴 해도 햇갈릴만 하면 이정표가 나타나 길을 안내하니 헤맬 염려는
거의 없다.

달동네를 벗어나니 여름 제국(帝國)의 은혜로 연두연두하게 익은 숲길이 그림처럼 펼쳐진
다. 차량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포장길이 닦여져 있으며, 길의 경사가 완만하여
그리 힘든 것은 없다.


▲  녹음에 잠긴 학림사 가는 길

▲  학림사 200m 직전 (학림사 부도 앞)


 

♠  학림사 입문 (부도와 석불좌상)

▲  학림사 부도(浮屠)

숲길을 어느 정도 오르면 발을 잠시 쉴 수 있는 나무 벤치와 수락산 안내도, 그리고 늙은 티
가 풍기는 부도(승탑) 2기가 마중을 한다.

이들 부도는 학림사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존재로 그들의 모습이 마치 다정함이 물씬 풍기는
부부처럼 다가온다. 왼쪽에 조금 평퍼짐한 부도는 남편, 오른쪽에 홀쭉한 부도는 아내, 그들
이 나에게 기념촬영을 요청하는 것 같다.
이들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네모난 기단(基壇) 위에 대추알 모양의 길쭉한 탑을 얹히
고 머리장식을 올렸는데, 누구의 부도인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으나 그중 1기에 '상궁(尙宮)~
' 명문이 있어 학림사에서 여생을 마친 궁궐 상궁의 부도임을 귀뜀해준다. 부도는 원래 경내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보이며, 부도에는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이
자욱해 중후한 멋을 풍긴다.

▲  나무 벤치와 부도

▲  부도의 뒷모습


▲  학림사 약사전(藥師殿)

부도를 지나 학림사 안내문에 이르면 오른쪽에 약사전으로 인도하는 계단이 있다. 안내문 옆
높은 곳에 담장을 두르고 들어앉은 약사전에는 학림사에서 자랑하는 오랜 보물이자 영험하기
로 이름난 석불좌상(약사여래상)이 봉안되어 있다.
내가 지금까지 접해온 약사전은 모두 경내에 있었다. 허나 이곳은 특이하게도 경내로 들어서
는 길목에 세워두어 중생들로 하여금 가장 먼저 찾게 하였으니 그만큼 약사불이 학림사의 간
판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곳 약사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조그만 맞배지붕 건물로 건물 이름이 쓰인 현판을 보니
글씨에 생명을 불어넣은 듯, 힘이 넘쳐보이는데 '藥(약)'자가 '茶(다)'로 보인다. 건물 주변
으로는 담장이 빙 둘러져 있으며 건물 앞에는 석등 1기가 멀뚱히 서 있다.


▲  학림사 석불좌상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2호

약사전의 주인장인 석불좌상은 키가 불과 77cm(어깨 너비 53cm)에 불과한 아주 왜소한 석불이
다. 신체 비례가 너무 떨어져 얼굴 높이가 신체의 거의 2/5에 이를 지경이며, 석불이 앉아있
은 연화대좌(蓮花臺座)는 높이 42cm로 석불보다 덩치가 더 크다. 연꽃이 위로 향한 앙련(仰蓮
)과 아래로 향한 복련(伏蓮)이 대좌를 화사하게 꾸며주고 있는데, 자신보다 큰 대좌 위에 앉
은 모습이 마치 조그만 아이가 커다란 의자에 걸터앉은 것 같다.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이 석불
은 거의 네모난 얼굴로 두 눈은 살짝 감겨져
있고 코는 깎여나가 윤곽만 남아있다. 입술에
는 약간의 미소가 드리워져 있고, 중생의 소망
을 모두 들으려는 듯, 커다란 두 귀를 지녔다.

목은 두꺼워서 어깨와 단단히 붙었고, 가슴 앞
에 모은 그의 손에는 조그만 약합이 들려져 있
어 그가 약사여래임을 살짝 귀뜀해준다. 배꼽
밑 아랫도리는 보이지가 않는데, 오래전에 사
라진 것으로 여겨지며, 그 모습을 통해 아마도
입상(立像)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럼 여기서 잠시 학림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옆에서 바라본 석불좌상과 대좌


▲  학림사 경내 직전 (오른쪽 계단은 용굴암, 수락산 정상 방면)


덕릉고개 너머에 있는 흥국사(☞ 관련글 보러가기)가 약사도량(藥師道場)으로 좀 유명하다면
학림사는 나한도량(羅漢道場)으로 명성이 조금 자자하다.
학림사란 이름은 절이 들어앉은 위치가 학이 알을 품고 있는 이른바 학지포란(鶴之抱卵)의 지
세라 하여 유래된 것이라 한다. 이런 지세에는 무거운 돌로 만든 탑이나 석물은 가급적 피해
야 된다는데 근래에 3층석탑과 5층석탑, 석불 등을 잔뜩 지어놓아 자칫 알이 깨져 탈이 나지
않을까 우려된다.

이곳은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이다. 671년에 원효대사(元曉大
師)가 창건했다고 전하나 신빙성은 없으며, 1881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순항(金淳
恒)이 쓴 '학림암중수기(鶴林庵重修記)'에
'절의 내력을 적은 문서가 모두 사라져 절을 창건한 이와 절의 사적(事蹟)을 알지 못한다'

였으니 원효대사의 창건설이 근거가 없음을 보여준다. 또한 고려 후기에는 나옹화상 혜근(懶
翁和尙 慧勤, 1320~1376)이 머물렀다고 하지만 학림암중수기에는 언급조차 없다.

중수기에 본격적으로 기록이 나타나는 건 16세기 이후로 임진왜란 시절인 1597년에 절이 소실
되었다고 한다. 1624년 무공화상(無空和尙)이 터만 남은 이곳에 법당을 지어 절을 다시 일으
켜 세웠으며, 1780년에 최백(崔伯), 궤징(軌澄) 두 승려가 중수하고 1830년에 다시 손질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거의 문 닫기 직전에 이르자 1880년 영상(景惺), 경선(慶船) 두 승려가 나서
절을 일으켜보려고 했다. 허나 돈이 한 푼도 없어 애태우다가 마침 판관 하도일(判官 河道一)
이 절을 찾아오자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절의 사정을 전해들은 하도일은 서울로 돌아가 명성황후(明成皇后)에게 학림사 중수를 건의했
고 이에 황후는 천금의 하사금을 지원했다. 그 돈으로 중수가 마무리되자 단청은 찬란하여 빛
을 발했다고 하며, 부처의 성전은 의연하게 자리잡았다고 중수기에는 적고 있다.

1918년 4월 주지 금운(錦雲)이 중수를 했는데 승려 연응(淵凝)이 '학림암대방여각전각중수기(
鶴林庵大房與各殿閣重修記)'에
'전각이 낡고 기울어 거꾸로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 보다 못한 금운화상이 발심해 작
은 물건까지도 모두 보시(報施)해 다시 세우니, 가히 후세의 귀감이 될만하다'
고 기록했으니
중수 이전 절의 상태가 가히 짐작이 간다.
또한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역과 지척이라 매년 봄과 가을 제사 때마다 많은 제물을 부담
했다. 심지어는 절을 묘역에 포함시키는 등 그 폐해가 컸다고 하며, 1927년에는 도정궁(都正
宮) 소유가 되면서 절을 찾는 중생이 줄어 수입이 감소하기도 했다.

흥국사처럼 왕실의 원찰(願刹)은 아니나 궁궐 상궁들이 자주 드나들며 자신들의 안녕을 빌었
고 퇴직하여 오갈 데 없는 상궁들이 기거하기도 했다.
6.25 때 상당수의 건물이 파괴되어 다시 쇠퇴의 늪에 빠졌으나 1985년 전각들을 개축하고 대
웅전, 오백나한전 등을 새로 지었으며, 1994년에 노원역 부근에 7층 규모의 불교회관을 지어
올리면서 사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선불당, 청학루, 약사전, 삼성각, 오백나한전 등 9
~10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삼신불괘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11호
)
와 석불좌상, 석조약사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 등 지방문화재 3점이 있다. 이중 괘불(掛佛
)은 평소에는 친견하기가 어려워 아예 만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으며,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여래좌상과 부도 2기 등의 비지정문화재가 추가로 전하고 있다.

학이 알을 품은 지세라 그런지 포근함이 느껴지며, 비록 시내와 가깝지만 첩첩한 산골에 들어
선듯 산사(山寺)의 고즈넉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4동 산1
(덕릉로129가길 241 ☎ 02-936-1700)


▲  학림사 옆구리로 흐르는 계곡
계곡과 나란히 한 산길을 1km 오르면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조그만 암자,
용굴암(龍窟庵)이 나온다.


 

♠  학림사 경내 둘러보기

▲  학림사 해탈문(解脫門)과 108계단

약사전을 지나 100m 정도 가면 경내로 인도하는 108계단 앞에 이른다. 계단 중간에는 해탈문
이 걸려있는데, 문 바깥 쪽에는 우람한 모습의 금강역사(金剛力士)상이 그려져 있고, 안에는
사자를 탄 천진난만한 표정의 문수동자(文殊童子)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普賢童子)가 중생
을 맞는다. 그들 뒤로 부처의 경호원인 사천왕상(四天王像)이 그려져 있어 천왕문(天王門)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

▲  사자에 올라탄 문수동자

▲  108계단에서 만난 원숭이들 - 그들의 자세에는 모두 심오한 뜻이 담겨져 있다.

108계단에는 4쌍(8마리)의 귀여운 원숭이 조각이 배치되어 있다.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원숭이
부터 눈을 가린 원숭이, 귀를 막은 원숭이, 두 손을 번쩍 들며 만세를 외치는 원숭이까지 적
당히 거리를 두며 자리하고 있는데, 이들의 자세는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학림사에서
그저 눈요기나 하라고 갖다놓은 것은 아닐텐데 말이다.
우선 손으로 입을 가린 원숭이는 나쁜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나쁜 말을 내뱉을 바에는 차
라리 손으로 입을 막는 것이 좋다. 그 다음 눈을 가린 원숭이는 나쁜 것을 보지 말란 뜻이며,
귀를 막은 원숭이는 나쁜 말을 듣지 말라는 뜻이다. 끝으로 두 손을 들며 만세를 외치는 원숭
이는 이들을 모두 지키며 열심히 정진하면 해탈의 환희를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만세를 외치는 원숭이를 제외한 3가지의 원숭이는 속인(俗人)들에게 중요한 충고 3가지를 자
세로써 보여주고 있다. 나쁜 것을 말하지 않고, 보지 않고, 듣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정말 극
락처럼 아름다울 것인데 사람은 동물과 신(神) 중간에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존재라 좀처
럼 지키려 들질 않는다. 원숭이의 메세지를 뼛속 깊이 새기며 계단 끝에 이르면 청학루 뜨락
이다.


▲  학림사 청학루(靑鶴樓)와 똥배 포대화상(布袋和尙)

108계단의 끝에는 포대화상과 2층 누각의 청학루가 자리해 있다. 설법전(說法殿)이라 불리기
도 하는데, 대웅전으로 통하는 1층 좌우에 종무소(宗務所)가 있고, 2층은 강당(講堂)으로 쓰
인다. 2층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면 불암산이 비슷한 높이에서 바라보이며, 돌로 다진 청학루
밑에는 공양간 등이 들어있다.

청학루 앞에는 4명의 동자승을 안고 있는 똥배 포대화상이 연꽃대좌 위에 앉아 있다. 복덕원
만(福德圓滿)한 인상을 지닌 그는 많은 절에서 볼 수 있는데, 그는 몸집이 비대하고 배가 축
나왔으며, 항상 커다란 자루를 등에 짊어지고 지팡이를 짚으며 시주를 하거나 인간사의 길흉
을 점쳤다는 승려로 미륵불의 화신으로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그의 배를 만지면 복이
오거나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속설이 있어 많은 이들이 그의 배를 살살 문지르며 소망을 들
이민다.


▲  청학루에서 바라본 불암산의 위엄

▲  학림사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나한도량을 자처하는 절답게 대웅전 밑에 오백나한이 봉안된 오백나한전을 두었다. 1985년에
지어진 것으로 건물 안에는 오래된 약사여래상이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대
동하여 약사여래3불좌상을 이루고 있으며 그 좌우로 16나한상, 그 뒤로 조그만 500나한을 빼
곡히 배치해 놓았다.
이 땅의 7,000만 인구처럼 가지각색의 모습과 표정, 색채를 지닌 500나한의 모습은 이곳을 둘
러보는 중생들에게 웃음을 머금게 한다.


▲  오백나한전 내부 오백나한상과 약사여래3불좌상, 16나한상
오백이 넘는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앞을 향하고 있으니 건물로 들어서는
내가 부담스러워 마주보기가 쑥쓰러울 지경이다.

▲  석조약사여래3불좌상 및 복장유물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6호

500나한과 16나한 등 대식구를 거느리고 있는 약사여래3불좌상은 가운데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조성 시기는 수락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
나 조선 중기 또는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나한(羅漢)들이 죄다 칼라 색채를 지닌데
반해 약사여래3불좌상은 온통 하얀 피부과 검은 머리로 이루어져 흑백사진을 이룬다.
이들은 옥돌로 조성된 것으로 머리를 약간 앞으로 내밀고 있는 구부정한 자세이다. 표정은 동
자승을 모델로 했는지 작고 귀엽기 그지 없으며,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 선정인(禪定印)을
취하고 있다. 가운데 약사여래는 약합을 들고 있어 그의 정체를 알려주며, 불상의 바닥면에는
복장공이 있고, 내부에는 복장(腹臟)이 들어있으나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모르겠다.


▲  오백나한전과 마주한 선불당(選佛堂)
승려들의 수행공간으로 선불장(場)이라 불리기도 한다.

▲  웃음을 묻어나게 하는 동자상
해맑은 표정의 동자가 엉덩이를 요염하게 쳐들며 연꽃 향기에 심취해 있다.
동자승의 연꽃 심취를 돕고자 대웅전과 소나무가 그에게 늘 그늘을
드리우며 여름 햇살을 막아준다.

▲  대웅전(大雄殿)과 5층석탑

높은 계단 위에 위엄 돋게 자리한 대웅전은 학림사의 법당(法堂)으로 1985년에 새로 지은 것
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신라 후기에 조성되었다고 우기고 있
는 청동석가여래좌상이 있으며, 석가여래상 뒤로 1985년에 제작된 아미타후불탱화가 있고 좌
우 벽면에는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지장탱화와 신중탱화, 천불탱 등이 깃들여져 있다.


▲  대웅전 석가여래3존상

대웅전 내부는 마침 영가(靈駕)를 위한 49재 중이라 들어가지는 못하고 바깥에서 살짝 담았다
. 유난히 귀가 큰 석가여래상은 청동(靑銅)으로 빚어 금색을 입힌 것으로 좌우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각자의 제스쳐를 취하며 앉아있다.
절에서는 이 석가여래상이 신라 후기(또는 고려 초기) 불상이라고 우기고 있으나 절의 역사나
불상의 양식을 볼 때 조선 불상으로 여겨진다. 옛날이야 신라 불상이라고 우기면 다 통했지만
이제는 불교미술사학과 불상의 시대별 양식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상태이니 함부로 우기다가
는 망신만 당한다. 그만큼 시대는 바뀌었다.


▲  멋드러진 노송(老松) 1그루
대웅전 뜨락에 그늘을 드리우는 소나무로 그의 나이는 정확하게 가늠할 수는 없으나
약 100~150년 정도로 여겨진다. 보호수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3층석탑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탑으로 2중으로 된
기단부가 탑의 40% 정도를 차지한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청학루와
오백나한전, 5층석탑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삼성각(三聖閣)
1985년에 지어진 1칸짜리 건물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 나반존자)의 보금자리이다.

▲  등장 인물이 무지 많은 칠성탱

▲  산신과 호랑이, 동자가 담긴 산신탱

▲  독성 할배가 그려진 독성탱

▲  특이한 모습의 4사자 3층석탑
사자가 있는 부분이 1층을 이룬다.


▲  석조미륵불입상(石造彌勒佛立像)

경내 서쪽에 서 있는 석조미륵불입상은 근래에 세운 것이나 몸통에 검은 때가 약간 입혀져 나
이가 조금 들어 보인다. 처음에는 100년 이상 먹은 미륵불인가 싶었는데 대략 20년 정도 되었
다고 한다.
온후한 표정을 지닌 석불로 연화대좌 위에 우뚝 서 있으며 머리 위에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
데 생김새가 석탑의 옥개석(屋蓋石)과 상륜부(相輪部)를 얹혀놓은 것 같다.

이렇게 학림사를 1시간 정도 둘러보고 옆 산길을 통해 노원골 남쪽 능선으로 올라갔다. 여기
서 능선을 통해 귀임봉을 거쳐 노원골로 내려갈 생각에서였다.


 

♠  수락산 귀임봉

▲  노원골 남쪽 능선길 (당고개공원 갈림길)

노원골 남쪽 능선길은 영원암 뒷쪽 노원골갈림길에서 귀임봉을 거쳐 수락산보루(堡壘)까지 이
어지는 환상의 지붕길이다. 경사가 완만하고 느긋하며 마치 구름 위를 거닐듯 편안한 길로 좌
우로 좁게나마 천하가 펼쳐져 있어 조망 또한 좋다. 예전 상계1동에 살 적에 즐겨찾던 산길로
약간의 오르막만 감내하면 도달할 수 있다.


▲  귀임봉 조망대

약간의 오르막, 내리막이 있을 뿐, 완만한 곡선을 이루던 능선길은 귀임봉에서 아주 조금 흥
분기를 보인다. 다시 하늘과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귀임봉은 해발 280m로 거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꼭대기 동쪽에는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는
데, 수락산 산줄기와 정상, 덕릉고개, 불암산, 상계3,4동 지역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귀임봉에서 바라본 수락산 (왼쪽에 높은 봉우리가 정상)

▲  귀임봉에서 바라본 수락산 남쪽 줄기와 덕릉고개, 불암산 북쪽 줄기

▲  귀임봉에서 바라본 불암산과 당고개역, 상계3,4동 지역

▲  귀임봉 서쪽 바위길
하얀 피부의 잘생긴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현장으로 대자연이
수락산 끝에 살짝 빚어놓은 작품이다.

▲  귀임봉에서 바라본 상계동과 도봉동,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의
장대한 산줄기

▲  귀임봉 서쪽에서 바라본 상계동과 중계동, 창동, 도봉구 지역
산 밑이 온통 아파트 일색~~ 이 땅에 너무 흔한 풍경이다. 가까이에 보이는
봉우리 정상에 수락산보루가 깃들여져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회색빛
아파트의 물결이 거치게 출렁이는 외로운 섬을 보는 듯 하다.

▲  귀임봉 서쪽에서 바라본 상계동과 중계동, 노원구, 중랑구 지역

수락산보루까지 가려고 했으나 일몰시간이 자꾸 눈치를 주어 보루 봉우리 직전에서 노원골로
철수했다. 아쉽긴 하지만 일몰 직전이라 설령 가서 사진에 담더라도 대부분 일그러지게 나올
것이다. 하여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흔쾌히 미루고 미련 없이 속세로 내려왔다. 어차피
집과도 가깝고 나에게도 매우 익숙한 곳이다.

이날 수락산 코스는 '당고개역 → 학림사 → 노원골 남쪽 능선 → 귀임봉 → 노원골'로 소요
시간은 출사 시간을 포함하여 3시간 정도이다.
이렇게 하여 수락산 학림사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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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6월 2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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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숨겨진 상큼한 지붕길, 동작충효길 고구동산길~서달산자락길~현충원길 나들이

 


' 동작구의 지붕을 거닐다 '
(동작충효길 고구동산길~서달산~현충원길)

▲  고구동산길 잣나무숲길

▲  서달산 정상

▲  현충원길


 

더운 여름이 저물고 가을이 조금씩 세력을 다지던 초가을의 어느 평화로운 날, 일행들과
동작충효길을 찾았다.
동작충효길은 서울 동작구(銅雀區)가 야심차게 내놓은 도보길이다. 도보길 유행에 따라 제
주올레길, 지리산둘레길, 북한산둘레길, 서울둘레길, 해파랑길 등 온갖 둘레길이 생겨났는
데, 동작구도 그 시류를 타고 산과 공원, 한강을 잇는 도보길을 닦아 동작충효길이란 간판
을 내건 것이다. 여기서 충효(忠孝)는 동작구 관내에 있는 국립현충원과 노량진 사육신묘(
死六臣墓)에서 따온 명칭이다.

동작충효길은 총 7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별로 넓지 않은 동작구에 이렇게 많은 코스가
가능한 것일까? 고개가 갸우뚱하긴 하지만 충분히 쥐어짜면 못할 것도 없다.
제1코스는 본글의 주인공인 고구동산길(3.4km)로 노들역에서 서달산을 거쳐 현충원 상도출
입문까지, 제2코스는 현충원길(3.4km)로 현충원 상도출입문에서 동작역까지 이어진다.
제3코스는 한강나들길(4.6km)로 동작역에서 한강을 따라 노량진역까지, 제4코스는 노량진
길(3.4km)로 노량진역에서 용마산을 거쳐 신대방3거리역까지. 제5코스는 보라매길(2.9km)
로 신대방3거리역에서 보라매공원을 거쳐 보라매역까지 이어진다.
제6코스는 동작마루길(4.8km)로 신대방3거리역에서 국사봉을 거쳐 현충원 상도출입문까지,
제7코스는 까치산길(4.4km)로 현충원 상도출입문에서 까치산을 거쳐 사당역까지 이어진다.


 

♠  동작충효길 고구동산길 (고구동산)

▲  고구동산길 노들역 시작점

동작충효길1코스 고구동산길 나들이는 노들역 4번 출구에서 시작하면 아주 편리하다. 지하철
9호선이 노들역을 지나가고 있고, 부근에 1호선(노량진역)이 빗자루 배차로 운행하고 있으며,
수많은 시내버스 노선이 노들역 주변을 물 흐르듯 빈번히 운행해 접근성이 아주 좋기 때문이
다.

노들역에서 상도터널 쪽으로 가면 서쪽에 나무가 우거진 산이 보이고, 그곳으로 인도하는 계
단길이 살짝 손을 내민다. 그 길이 바로 고구동산길 북쪽 시작점이다. 그 계단을 오르면 '고
구동산'이란 조그만 뫼의 품에 들어서게 되면서 동작충효길 고구동산길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고구동산길(3.4km)은 노들역에서 국립현충원 상도출입문까지 이어지는 길로 고구동산과 서달
산 등 뫼 2개를 지난다. 이들은 모두 숲을 지니고 있어 길 대부분이 숲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택가와 아파트 사이에 완충지대처럼 자리한 숲을 따라 길이 이어진다. 중앙대 후문에서 서
달산 생태다리 구간은 상도동과 흑석동(黑石洞)의 경계를 가르는 산줄기를 지나가며, 잣나무
숲과 소나무숲이 짙게 닦여져 있어 예사로운 숲길이 아님을 느끼게 한다. 또한 서달산 정상까
지 이어지는 동작구의 북쪽 지붕길이기도 하다.


▲  한낮에도 어두울 정도로 짙게 우거진 고구동산길
(본동 신동아아파트 옆)

▲  본동 신동아아파트 옆을 흐르는 고구동산길 ①

▲  본동 신동아아파트 옆을 흐르는 고구동산길 ②

▲  노량진근린공원 고구동산길

▲  노량진근린공원 조망대

고구동산은 노량진과 상도동(上道洞) 사이에 자리한 조그만 뫼로 산 중앙(상도터널 윗쪽, 본
동) 정상부에 노량진근린공원이 자리해 있다.
노량진근린공원에는 게이트볼장과 배드민턴장, 축구장, 농구장, 간단한 운동기구 등의 운동시
설과 조망대, 산책로, 정자쉼터 등이 있으며, 조망대는 한강과 여의도가 훤히 바라보이는 곳
에 위치해 있어 조망이 시원하다. 특히 천하 제일의 불꽃축제로 추앙을 받는 여의도불꽃축제
를 바로 가까이서 구경할 수 있는 명당으로 불꽃의 향연을 코 앞에서 누릴 수 있다.

* 고구동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 흑석동 (노량진근린공원 : 동작구 본동 486-2)


▲  노량진근린공원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여의도와 63빌딩, 한강, 마포 지역이 바라보인다.

▲  노량진근린공원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1호선 전철과 온갖 철도가 매일 수백 차례씩 오가는 한강철교를 비롯해
원효로, 마포 지역과 멀리 북한산(삼각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  노량진근린공원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숲 너머로 한강과 노들섬, 용산, 남산(南山) 등이 바라보인다.

▲  노량진근린공원에서 중앙대 후문으로 넘어가는 고구동산길
공원을 지나 남쪽으로 가면 다시 싱그러운 숲이 펼쳐진다. 고구동산길은
그 숲속을 가르며 중앙대후문까지 거침없이 흘러간다.

▲  푸른 철책이 둘러진 고구동산길 (강남초교 동쪽)

▲  강남초교 동쪽을 흐르는 고구동산길 (남쪽에서 바라본 모습)


 

♠  고구동산길의 백미, 잣나무숲길

▲  서달산으로 인도하는 고구동산길

고구동산에서 남쪽으로 나오면 차량들이 오가는 흑석로가 나온다. 여기서 잠시 숲길이 끊기면
서 처음 온 사람들을 적지 않게 동요하게 하는데, 그렇다고 너무 당황할 필요는 없다. 고구동
산길은 여기서 상도동 패리스아파트까지 잠시 시멘트 도로의 신세를 지는 것일 뿐, 끊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구간을 제외하면 거의 흙으로 된 산길(숲길)이다.

흑석로로 진입하여 오른쪽(서쪽)으로 가면 중앙대후문이다. 후문 입구 커브를 지나면 바로 3
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남쪽) 길(상도로53길)로 조금 가면 고구동산길의 부활을 알리
는 나무계단길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고구동산길의 나머지 부분과 서달산이 흔쾌히 펼
쳐진다.


▲  중앙대와 상도동 사이를 지나는 고구동산길

중앙대후문~서달산 생태다리 구간은 상도동과 흑석동의 경계를 이루는 산줄기를 따라 이어진
다. 이 산줄기는 개발의 칼질이 미치지 않은 자연 공간으로 그 능선에 동작충효길을 살짝 얹
혔는데, 산줄기는 길지만 산길 좌우로 주택과 아파트가 진하게 보일 정도로 그 폭은 좁다.


▲  고구동산길의 자랑, 잣나무숲길

고구동산길 중간인 중앙대후문~숲속도서관 사이에 잣나무숲이 짙게 자리를 닦았다. 이곳은 고
구동산길의 자랑이자 백미로 동작구가 동작충효길을 만들면서 잣나무를 더욱 확충했다.
잣나무는 피톤치드(Phytoncide)를 많이 베푸는 나무로 그들이 우거진 숲은 산림욕 장소로 아
주 좋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한복판에 이런 잣나무숲이 있다니 그저 놀
라울 따름인데, 동작충효길은 나에게 여러 번 신선한 충격과 공포를 주니 범상치 않은 둘레길
이 분명하다.


▲  잣나무숲길 ①

▲  잣나무숲길 ②
이곳에서 만큼은 서울을 잊어도 좋다. 도시와 머나먼 산골이라 우겨도
손색이 없으니 말이다.

▲  잣나무숲길 ③④

▲  잣나무숲길 ⑤

▲  잣나무숲길 ⑥

잣나무숲 남쪽에는 숲에 완전히 묻힌 동작충효
길 숲속도서관이 있다. 숲이 얼마나 삼삼한지
한낮에도 거의 어두울 지경인데, 숲내음이 가
득한 숲속 한복판에 어린이와 동네 주민을 위
해 초소 건물을 손질하여 도서관을 닦았다.
이런 숲속이라면 아무리 어려운 책이라도 술술
머리 속에 잘 들어올 것만 같은데, 9시부터 18
시까지 운영하며, 평일에는 가끔 빗장을 닫아
거는 경우가 있다. 도서관 북쪽에는 청강정이
란 네모난 정자가 있으며 주변에 의자와 탁자
를 지닌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  4각형 정자인 청강정(淸康亭)


▲  장봉옥 영모비와 송덕비 <백운암 창건주 장대보화(張大寶華) 송덕비>

숲속도서관에서 초화원 쪽으로 조금 가면 장봉옥 송덕비와 영모비를 만날 수 있다. 단 고구동
산길에서 남쪽으로 조금 비껴있기 때문에 지나치기가 쉽다.

비석에 쓰인 장대보화 장봉옥(1904~1981)은 누구일까? 내 돌머리에는 전혀 정보가 없는 존재
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나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진정한 보살행(菩薩行)을 실천했던 여
인이었다. 그리고 이름 대신 쓰인 대보화(大寶華)는 그의 법명(法名)이다.

장봉옥은 1904년 8월 평양에서 태어났다. 동덕여학교를 졸업하여 돈이 많은 친일파 관료의 소
실(첩)로 들어갔는데, 남편 몰래 조경한(趙擎韓) 등의 독립운동가를 도우며 독립운동 자금도
넉넉히 지원했다. 그래서 해방 이후 신문에서는 그를 '광복군의 어머니'라 표현하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 1930년대부터 어머니를 따라 절을 다녔는데, 안국동에 있
는 선학원(禪學院)에 들어가 열심히 수행을 하며 깊은 불심을 다졌고, 그 인연으로 불교계에
주요 승려, 인사들과 두루두루 알고 지냈다. 그리고 1950년대에 마야부인회를 조직하여 불교
지도자의 면목까지 보여주었다.

6.25 이후 어머니가 별세하자 그의 명복을 빌고자 그동안 모은 돈을 싹 털어 현재 비석이 있
는 자리를 중심으로 20,000평의 부지를 매입해 1961년에 백운암(白雲庵)을 지었다. 백운암은
현재 상도선원(上道禪院)의 모태가 된다.
또한 남편이 죽자 그의 막대한 재산까지 물려받았는데, 그 돈으로 크게 사업을 벌여 큰 돈을
벌었으며, 도심 한복판인 무교동(武橋洞) 일대 땅을 거의 가지고 있을 정도로 막대한 재력을
자랑했다. 그 재력을 기반으로 온갖 불사(佛事)에 나서 불교계에서 '불사를 많이 일으킨 화주
보살'로 격하게 칭송을 받았다.

그는 백운암 주변에 160여 채의 연립주택을 지어 '나라사랑반'이란 이름 짓고 전몰군경의 유
가족과 집이 없는 어려운 이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했다. 그리고 노인대학을 지어 노인들을 배
려했고, 1964년 성조장학회를 세워 학생과 청년, 어려운 이웃을 넉넉히 도왔다. 그 장학회는
지금도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어쨌든 그 공로로 1966년 서울시경으로부터 '청소년 선도 유공
자 표창장'을, 1979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한평생 모은 재산을 어려운 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풀면서 불법(佛法)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
았고, 노승과 불교 수행자들에게도 극진히 대접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그를 '살아있는
보살'이라 추앙했고, 조계종 5대 종정을 지낸 서옹(西翁)도 그를 크게 찬양하며 종종 백운암
에 들려 법문을 전했다.

딱히 자녀가 없던 그는 수양딸을 1명 맞이했는데, 그가 1982년 어음사기 사건으로 천하를 크
게 경악하게 했던 '장영자' 그 사람이었다. 장영자도 불교 신자로 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
던 장봉옥은 그를 수양딸로 삼아 많은 것을 베풀었던 것이다.
그는 장영자 사건 1년 전(1981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만약 더 살았더라면 못된 수양딸로 인
해 자칫 명예가 크게 훼손되었을 지도 모른다.

지붕돌을 지닌 장봉옥 송덕비는 1974년 서옹이 직접 비문을 쓰고 지어준 것이다. 그 옆에 자
리한 영모비는 독립운동가로 그의 신세를 졌던 백강 조경한(1900~1993)이 그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나라사랑반' 주민과 상도동 주민들을 대표해 1982년 4월에 세운 것이다. 그는 비문(碑
文)에
'나라사랑반 주민들이 장여사의 시은(施恩)을 잊지 않기 위해 비를 세우니 이 땅에 보은의 씨
앗이 살아있음을 기뻐하며 기꺼이 비문을 쓴다'
고 소감을 밝혔다.

이들 비석과 장봉옥의 무덤은 백운암 뒷쪽에 있었으나 이 일대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절은
아랫쪽으로 자리를 옮겼고, 비석과 묘소까지 제자리를 잃고 김포로 옮겨졌다. 그러다가 2010
년 비석만 지금의 자리로 돌아와 옛 백운암 자리를 쓸쓸히 지키고 있다.
사회와 어려운 이들을 위해 헌신했던 인물의 흔적이건만 이 땅의 천박한 개발의 칼질과 부동
산 수익에 눈이 어두운 졸부와 위정자들은 그런 이들의 흔적마저 온전히 놔두지를 않는다. 이
게 이 나라의 몹쓸 현실이다.


 

♠  서달산 서쪽 자락 (초화원, 생태다리, 서달산자락길)

▲  온갖 화초가 향연을 벌이는 초화원(草花園)

장봉옥 송덕비를 지나면 온갖 화초가 자라고 있는 초화원(서달산 야생초화원)이 모습을 드러
낸다.
이곳은 서달산의 서쪽 자락으로 이 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할미꽃과 구절초, 붓꽃, 톱풀 등
야생화 30여 종을 음지와 양지에 맞게 배치했다. 이곳 역시 동작충효길을 닦으면서 조촐한 규
모로 조성된 것으로 화초가 한참 기지개를 켜는 봄이나 무성함을 이루는 여름, 처절한 아름다
움을 선보이는 가을에 와야 제대로 된 초화원을 누릴 수 있다.


▲  녹음(綠陰)이 짙은 초화원

▲  초화원 수풀들

▲  상록잔디패랭이


▲  초화원과 이웃한 암석원(Rock Garden)
둥근 바위와 꼬리풀 등 30여 종의 꽃과 풀이 돌과 함께 배치한 공간으로
초화원과 거의 비슷하다.

▲  옥잠화

▲  이름도 참 특이한 큰꿩의비름만추

▲  이름도 초롱초롱한 초롱꽃

▲  여름이 깃든 암석원 내부


▲  숲이 무성한 초화원 남쪽

초화원과 암석원 주변에는 자연학습원과 수목학습원, 2015년 11월에 닦여진 유아숲체험장 등
이 있다. 이들은 나무와 여러 화초를 심은 공간으로 그리 넓지 않은 산자락을 활용하여 자연
과 관련된 많은 것을 닦아 놓아 집약적 공간 활용도는 정말 높다.


▲  수목학습원 부근 숲길

▲  서달산 생태육교

서달산 생태육교는 상도동과 흑석동을 잇는 도로(서달로)로 인해 강제로 끊긴 서달산 자락을
연결하고 양쪽 산의 동물 이동을 위해 닦여진 것이다. 육교 밑에는 터널을 뚫어 차량의 통행
을 배려했으며, 생태육교 윗도리에는 산책로를 닦고 나무와 온갖 풀을 심어 산의 자연스런 일
부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감쪽 같이 만들었다.
육교 동북쪽에는 달마사(達磨寺)란 80여 년 묵은 절이 있는데, 그 절 이름을 따서 육교 동쪽
산자락을 달마공원이라 부르기도 하며, 고구동산길과 별도로 '서달산자락길'이 따로 가지를
뻗어 숭실대 후문 쪽으로 이어진다.


▲  서달산 생태육교에서 바라본 흑석동과 한강, 남산

▲  조그만 새집을 주렁주렁 머금은 나무조각과 의자
새집이긴 하지만 너무 작아서 어느 새도 들어오기 어렵다. 하여 새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 같은 장식물이다.

▲  소나무숲을 따라 이어진 서달산자락길

생태육교 동쪽 서달산 자락에는 소나무숲이 짙게 우거져 있다. 그래서 이곳을 피톤치드체험장
으로 삼았는데, 앞서 잣나무숲 만큼이나 삼삼해 다시금 이곳이 서울임을 잊게 만든다.
소나무숲 밑부분에는 나무로 도보길을 닦아 서달산자락길을 내었는데 숭실대 후문까지 이어지
며, 고구동산길과 서달산 정상으로 가려면 무조건 산을 오르면 된다.


▲  하늘을 훔친 서달산 소나무숲
피톤치드가 진하게 꿈틀거리는 싱그러운 자연의 현장이다.

▲  국립현충원 서남쪽 철책길 (서달산 정상 북쪽)
현충원과 속세의 경계에 푸른색 철책을 삼엄하게 둘러놓아 국가의 성역을 지킨다.
그 철책을 따라 산길이 나있는데, 고구동산길도 그 철책길을 잠시 거쳐간다.


 

♠  서달산(西達山) 정상과 현충원길

▲  서달산 정상

서달산(179m)은 동작구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뫼로 동작구의 대표 지붕이다. 국립현충원을
품은 특별한 뫼로 화장산(華藏山)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현충원 뒷쪽에 자리한 화장사(華藏寺,
현재 호국지장사)에서 유래된 이름이며, 산세가 마치 공작이 날개를 펼친 모습이라 하여 공작
봉(孔雀峰)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서달산의 범위는 현충원 주변과 달마공원, 서달로 서쪽 잣나무숲까지로 숲이 무성하여 동작구
의 허파 역할을 한다. 현충원이 조성되면서 서달산 정상을 비롯한 현충원 외곽이 현충원 영역
에 꽁꽁 묶였는데, 동작구가 그 외곽을 시민 공간으로 삼고자 서울시, 국방부와 협상해 2009
년 8월 현충원 영역(묘지공원)에서 근린공원으로 풀렸다. 즉 현충원 철책 바깥은 자유의 공간
으로 해방된 것이다.
이를 기리고자 2010년 봄, 정상에 동작대란 조망대를 세웠고, 주변 산길과 숲을 정비해 아주
휼륭한 시민들의 쉼터로 거듭났다.

서달산 정상에는 정상 표석과 토지지신(土地之神) 표석, 동작대, 쉼터, 운동장 등이 있으며, 산세도 완만하다. 이곳에 편히 오려면 국립현충원과 호국지장사를 거치거나 달마사, 중앙대
후문에서 접근하면 되며, 노들역이나 동작역에서 동작충효길을 따라 들어가도 된다.


▲  서달산 정상에 세워진 동작대(銅雀臺)

동작대는 서달산의 새로운 명물이자 상징물로 2010년 봄에 지어진 3층짜리 8각형 정자(亭子)
이다. 동작대하면 3세기 초반, 조조가 업(業) 부근에 세운 동작대가 떠오를 것인데, 이 동작
대는 그 동작대와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한자만 같음) 그 이름도 동작구에서 따온 것이다.
정자 옆에는 윗층으로 인도하는 나무 계단을 별도로 내어 새로운 정자 형태를 그려내고 있는
데, 정자가 아무리 높아도 숲에 몽땅 감싸여 있어 조망은 별로 시원치 못하다. 

동작구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동작대 3층에 올라 나무들의 눈치를 피해가며 주변을 두리번
거리면 상도동과 사당동, 관악구 지역, 관악산, 여의도 등이 시야에 잡히며, 북쪽은 겨우 서
달산 정상만 시야에 들어온다.

▲  동작대 현판의 위엄

▲  동작대에서 바라본 상도동 지역

▲  동작대에서 바라본 관악산(冠岳山)의
위엄

▲  서달산 정상에서 상도출입문으로
이어지는 고구동산길


▲  동작충효길의 허브, 국립현충원 상도출입문 앞 갈림길

▲  현충원과 속세를 이어주는 국립현충원 상도출입문

서달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7~8분 가면 현충원 상도출입문이 나온다. 노들역에서 시작된 고구
동산길은 여기서 흔쾌히 그 끝을 맺는데, 고구동산길 뿐만 아니라 현충원길(2코스)과 동작마
루길(6코스), 까치산길(7코스) 등 무려 4코스의 시작점이자 종점이기도 하다.

상도출입문은 현충원의 남쪽 후문으로 6시부터 18시까지(주말과 현충일은 19시까지) 문을 열
어둔다. 그 문을 들어서면 바로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와 국립현충원으로 이어지며 문 안쪽
에는 초소가 있어 혹시나 방향을 잃고 들어올지 모를 속세의 나쁜 기운을 경계한다.

우리는 여기서 현충원길로 갈아타 동북쪽으로 이동했다. 현충원길(3.4km)은 상도출입문에서
동작역까지 이어지는 숲길로 현충원 철책을 따라 이어져 마치 국경선을 거니는 기분을 들게
한다.
철책 안쪽은 영원한 성역인 현충원이요, 우리가 걷는 바깥은 속세이다. 이 구간 역시 서달산
동쪽 자락으로 숲이 짙으며 길 북쪽 종점(동작역, 이수폭포)을 제외하면 각박한 구간은 없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사당2,3동과 정금마을로 내려가는 산길이 여럿 있다.


▲  현충원길에서 바라본 한강
숲 너머로 한강에 발을 담군 동작대교와 반포대교, 한남대교 등이 바라보인다.

▲  끝없이 펼쳐진 현충원길과 현충원 철책의 위엄

▲  푸른 철책과 함께 이어지는 현충원길 ①

▲  푸른 철책과 함께 이어지는 현충원길 ②

▲  길 중간중간에 설치된 메모리얼 게이트(Memorial Gate)

현충원길에는 메모리얼 게이트란 문이 심심치 않게 있다. 이 문은 현충원에 봉안된 순국선열
을 추모하는 뜻에서 세운 것으로 태극기를 형상화하여 문의 지붕은 태극모양처럼 넝실거리게
했고, 기둥은 건, 곤, 감, 리로 표현했다고 한다. 허나 그런 심오한 의미와 다르게 문의 이름
은 어렵게 영어로 되어있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다.
문 이름은 보나마나 서울시나 동작구청 공무원들이 없는 지식 쥐어짜서 만든 이름으로 보이는
데, 굳이 영어로 이름을 삼아야 폼이 나는 것일까? 그냥 순국선열의 문이나 애국의 문으로 하
면 정녕 안되는 것일까? 이 땅의 정말 과하기 그지 없는 영어 사대주의는 실로 역겹기가 그지
없다.


▲  굳게 닫힌 사당출입문
현충원의 동쪽 후문으로 개방 시간은 앞서 상도출입문과 같다.

▲  푸른 철책과 함께 이어지는 현충원길 ③

현충원길은 예전에 완주를 했기 때문에 1/3 정도만 거닐다가 사당3동으로 쿨하게 빠졌다. 일
몰도 적지 않게 눈치를 주고 있고, 나와 일행도 모두 지쳤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동작충효길(고구동산길, 현충원길), 서달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나
중에 억지로라도 인연을 지어 동작충효길의 나머지 구간도 모두 맛보고 싶다.

* 서달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상도동, 사당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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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둘레길3구간 흰구름길~삼성암 늦봄 나들이 (빨래골에서 구름전망대, 화계사까지)

 


' 북한산 늦봄 나들이 (빨래골, 삼성암, 흰구름길) '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과 도봉산

▲  삼성암(삼성사)

▲  빨래골 숲길


 

북한산(삼각산, 836m)은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의 듬직한 진산(鎭山)으
로 나의 오랜 즐겨찾기의 하나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그의 품을
드나들면서 그가 품고 있는 수많은 명소를 섭렵했지만, 아직도 미답처(未踏處)가 무수히
남아있어 나를 무척 애를 태우게 한다.
미답처 식구 중에는 북한산 동쪽 자락(수유/우이지구)에 안긴 삼성암과 빨래골도 포함되
어 있는데, 이들을 뼛속 깊이 새겨두었다가 5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길을 나섰다.

빨래골은 도봉동 집에서도 무척 가까운 곳이라 여유롭게 15시에 길을 나섰다. 수유역(수
유리)으로 이동하여 강북구 마을버스 03번(빨래골↔수유역)에 나를 담아 수유1동 구석에
자리한 빨래골 종점으로 보냈다.


▲  북한산(삼각산)의 싱그러운 품으로 인도하는 관문, 빨래골공원지킴터
여기서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과 만난다.


 

♠  북한산 빨래골

▲  봄가뭄으로 부실한 모습을 비추는 빨래골 (수유리 빨래터)

빨래골은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에 묻힌 조그만 골짜기이다. 작은 냇가 같은 모습으로 딱
히 유별난 구석은 없으며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을 거닐 때 아주 잠깐 스쳤을 뿐, 제대로 살
펴본 적은 없었다. 그저 골짜기 이름을 통해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동네 아낙네
들이 빨래를 하던 곳으로만 막연히 알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정답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곳이 왜 빨래골이 되었을까?

북한산 동쪽 밑에 자리한 수유동(水踰洞)은 북한산 계곡 물이 많아 '무너미'라 불렸다. 무너
미란 저수지 물이 나태하게 고여있는 것을 막고자 한쪽 둑을 조금 낮추어 물이 넘치면 자연히
흐르게끔 만든 것으로 물이 풍부하다보니 일찌감치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 마을이 이제는 서
울 동북부 부도심이자 강북구(江北區)의 중심지로 어엿하게 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수유동(
수유리) 아낙들이 여기서 빨래를 해서 빨래골이 된 것일까? 물론 그들도 빨래를 하긴 했으나
단순히 그것 때문은 아니다.

조선 왕궁에는 궁궐의 허드렛일을 처리하던 무수리들이 많았다. 그들은 제왕(帝王) 내외와 왕
족들, 궁궐에서 일하는 환관(내시)과 상궁(尙宮), 궁녀, 군사의 옷을 개천(청계천)이나 인근
산골에서 빨았는데, 궁궐 식구들이 많다보니 하루에 나오는 빨래 양이 어마어마했다. 이들 빨
래 중에는 속옷 등의 예민한 옷이나 특별히 다뤄야 되는 빨랫감도 많아 청계천에서 같이 처리
하기가 그랬다. 하여 그런 것들은 특별히 이곳 빨래골에서 처리를 했다. 그래서 '빨래골'이라
불리게 된 것이며, 지역 이름을 따서 '수유리 빨래터'라 부르기도 했다.
여기서 그나마 가까운 궁궐인 창경궁(昌慶宮)까지는 약 7km 거리인데, 계곡 물이 풍부하고 매
우 구석진 한적한 곳이라 이곳을 고른 것 같다. 어쨌든 무수리들은 무거운 빨랫감을 짊어지고
동소문(東小門, 혜화문)을 나와 단장의 미아리고개(또는 아리랑고개)를 넘어 여기까지 낑낑대
고 올라왔다.
그들은 빨래를 마치면 잠시 달콤한 휴식을 취하며 궁궐에서 누리기 힘든 자유를 만끽했고, 한
여름에는 조촐히 물놀이도 즐겼을 것이다. 비록 궁궐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은 고단하지만 휴
양도 누릴 수 있으니 일종의 휴가나 마찬가지라 무수리들의 선호도 대단했을 것이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들의 휴식시설도 있었다고 전하며, 환궁(還宮)이 여의치 않은 경우
인근 화계사(華溪寺)에서 숙박 신세를 지기도 했다.

* 빨래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 127-1일대


▲  윗쪽에서 바라본 빨래골

▲  2004년에 심어진 빨래골 표석
이곳 빨래골은 궁궐 무수리 뿐 아니라 지역 아낙들의 즐겨찾기 빨래터였다.

▲  녹음(綠陰)이 짙은 삼성암 숲길
속세의 번뇌와 먼지를 털기에는 좋은 길이다. 잔잔히 불어오는 산바람에 번뇌를
실어 멀리 날려보내고 싶으나 그 번뇌가 너무 무거워 결국 내가 내려가는
길목에 매복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삼성암 일주문(一柱門)

빨래골 숲길을 오르면 삼성암으로 인도하는 잘 닦여진 오르막길이 나온다. 경사는 그리 각박
하지는 않지만 약간의 더위로 인해 조금은 지친다.
자존심을 곱게 접고 그 언덕길을 조금 오르면 삼성암의 정문인 일주문이 마중한다. 오르막길
에서 봐서 그런지 한층 웅장해보이는데, 이곳의 정체를 알려주는 일주문 현판에는 '삼각산 삼
성암'이 아닌 '삼각산 삼성사'라 쓰여있다. 근래 암(庵)에서 사(寺)로 격을 높이면서 삼성사
를 칭하고는 있으나 속세에서도, 절에서도 삼성암이란 이름을 많이 쓴다. (심지어 삼성암 홈
페이지에도 삼성암이라 나옴)


▲  8각형으로 이루어진 만월당 현종종사탑(滿月堂 玄宗宗師塔)

일주문을 지나 한 굽이 오르면 숲속에 때깔이 고운 부도<浮屠, 승탑(僧塔)> 2기와 비석이 뜨
겁게 눈길을 보낸다. 그들 중 8각형으로 이루어진 맵시가 고운 탑은 '만월당 현종종사'의 사
리가 담긴 승탑으로 만월당은 20세기 후반, 삼성암 주지로 있으면서 절을 크게 일으킨 승려이
다. 그러다보니 그의 제자와 신도들이 크게 정성을 기울여 아름다운 승탑을 지었다.

◀  보광당 중현대선사비(寶光堂 重玄大禪師碑)
중현대선사(박중현)는 왜정 후기에 삼성암
대방을 지은 승려이다.

◀  본공당 성학대선사탑(本空堂 性學大禪師塔)
본공당은 1961년 이후 만월당을 도와
여러 건물을 지은 승려이다.


▲  활짝 열린 삼성암 정문


 

♠  북한산 동쪽 자락에 둥지를 튼 조그만 산사, 독성도량을 칭하고 있는
삼성암(三聖庵, 삼성사)

▲  삼성암 외경

삼성암은 빨래골 상류 숲속에 묻힌 조그만 산사로 1872년에 고상진(高商鎭) 거사가 창건했다
고 전한다. 원래 삼성암 자리에는 천태굴이란 조그만 굴이 있었는데, 북한산(삼각산)에 숨겨
진 기도처로 많은 승려가 수도를 했다고 전한다. (천태굴이란 이름은 삼성암이 독성도량을 칭
한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보임)

19세기 후반, 서울에 살던 박선묵은 16세에 불교에 귀의했다. 그는 1870년 봄, 고상진, 유성
종 등 7명과 이곳 천태굴에 들어와 3일 동안 독성기도를 올리고 돌아오다가 '이곳의 지세가
절을 지으면 딱 좋은 터요!'
절을 지을 것을 제안, 2년 동안 준비하여 1872년 봄, 여러 칸의
건물을 짓고 작은 절이란 뜻에 '소난야(小蘭若)'라 하였다. 이후 주변 산지를 조금씩 매입했
고 1881년에 독성각을 장만해 절 이름을 삼성암으로 갈면서 본격적으로 독성도량을 칭했다.

1936년 봄, 한동운(韓東雲)이 신도 김용태의 지원으로 칠성각을 다시 짓고, 돌다리와 계단을
닦았으며, 요사를 수리하고 기와를 바꾸는 등 절의 규모가 한층 커졌다. 허나 1942년 7월 폭
우의 희롱에 잔뜩 흥분한 뒷산이 산사태를 일으켜 절을 덮치면서 그만 폐허가 되고 만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화계사 주지 박회경(朴會鏡)이 중창의 뜻을 밝혔고, 삼성암 승려 박중현
(보광당), 김성섭 등과 함께 쓰러진 절을 일으켜 세웠다. 이때 김용태가 목재를 지원했고, 인
근의 여러 절이 흔쾌히 도움을 주어 1943년 3월 대방 등 12칸을 세웠으며, 그 기념으로 승려
김태흡(金泰洽)이 '화계사삼성암중건기'를 지었다. 그리고 그해 7월 독성각을 다시 세웠다.
현재의 가람은 1961년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본공당, 세민(世敏), 현종(만월당) 등이 계속해
서 규모를 불렸다. 세민은 주지가 되자 대웅전을 고치고 범종루를 지었으며, 현종이 그 마무
리를 지어 지금의 삼성암을 이루게 되었다. 근래에 '사(寺)'로 격을 높였으나 여전히 삼성암
으로 많이 불린다.

삼성암은 초창기부터 독성도량을 칭했다. 그래서 중부 지역의 이름난 독성 기도도량을 자처하
고 있고 그 명성을 누리고 있는데, 독성이 머무는 곳으로 알려져 독성기도를 하러 많은 이들
이 온다. 아직 절의 내력도 짧고 문화유산도 빈약하니 독성도량을 내세워 절의 존재를 천하에
홍보하는 것이다. 나 역시 삼성암의 이름 3자만 아련히 듣고 있었을 뿐, 관심도 보이지 않다
가 그런데로 묵은 절임을 알고 뒤늦게 살짝 찾아온 것이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독성각, 명부전, 칠성각, 요사 등 8~9동 정도의 건물이 있
으며, 겉보기와 달리 건물도 제법 있고, 면적도 넓다. 소장 문화유산은 아직 없으나 1908년에
조성된 산신탱과 철원(鐵原) 심원사에서 넘어온 조그만 아미타불, 그리고 상궁윤씨의 헌답기
념비 등이 절의 100년 내력을 살짝 귀뜀해준다.

도심과 무척이나 가깝지만 숲속에 짙게 감싸여 있어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기분이며, 사람
들의 발길도 그리 많은 편이 아니라서 고적한 산사의 멋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 바람에 잠을
깬 풍경물고기의 풍경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정도로 말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1동 산164-5 (인수봉로23길 235 ☎ 02-988-9300, 1996)
* 삼성암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청기와를 눌러쓴 삼성암 명부전(冥府殿)

활짝 열린 정문을 들어서 온갖 봄꽃이 미소 짓는 오르막 길을 오르면 청기와를 지닌 2층 명부
전이 나온다. 2층이긴 하지만 1층은 종무소(宗務所) 등으로 쓰이고 있어 2층이 진짜 명부전인
데, 원래 이름은 지장전(地藏殿)이었다. 그 뒷쪽에는 요사, 선방(禪房) 등이 자리해 있고, 옆
에는 범종각이 있다.


▲  범종을 비롯한 사물(四物)의 보금자리, 범종각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범종과 법고, 목어, 운판 등이 담겨져 있다.

▲  북한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샘터

▲  대웅전 맞은편에 자리한 영월각(소법당)


▲  탐스럽게 익은 불두화(佛頭花)의 위엄

▲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한 관세음보살상
약간은 통통해 보이는 관세음보살 누님이 어진 표정으로 정병(政柄)을
쥐어들며 중생들을 맞이한다.

▲  청기와로 단장된 대웅전(大雄殿)

명부전에서 1단 더 오르면 법당(法堂)인 대웅전이 나온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
물로 머리에 푸른 청기와를 입혀 고급지게 꾸몄으며, 내부에는 아미타3존불과 철원 심원사(深
源寺)에서 넘어온 조그만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이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그곳 천불전(千佛殿)에 봉안된 천불(千
佛)의 하나였으나 6.25전쟁으로 심원사가 파괴되자 승려들이 부랴부랴 그것을 챙기고 이곳으
로 넘어왔고, 그 불상을 아미타불로 삼아 대웅전의 중심 불상으로 삼은 것이다. 현재 서울에
는 심원사에서 넘어왔다는 불상과 보살상이 여럿 있어 심원사가 왕년에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허나 그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온 나는 그만 대웅전 내부를 살피지 않고 지나쳤다. 모두 근래
에 조성된 따끈따끈한 불상과 불화만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웅전은 20세기 중반에 지어진 것으로 동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남쪽에는 삼성암의 자랑
인 독성각이 있고, 북쪽에는 칠성각과 관세음보살상, 헌답기념비 등이 있다.


▲  오색 연등이 하늘을 가린 대웅전 뜨락
곧 다가올 석가탄신일을 맞이하여 일찌감치 오색 연등으로 대웅전 뜨락을 곱게
수놓았다. 하늘을 훔친 연등의 위엄으로 대웅전 머리는 가려져 마치
자욱한 하얀 안개로 산 윗부분이 가려진 것 같다.


▲  바위 위에 자리한 '상궁 청신녀(淸信女) 윤씨 실상행(實相行)
헌답기념비(獻畓紀念碑)'
약간 검은 피부로 이루어진 조그만 비석으로 구한말에 상궁 윤씨가 전답을
시주한 것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다. 그 전답은 삼성암의 살을
찌우는데 크게 보탬이 되었다.

▲  산신각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칠성각(七星閣)

대웅전 좌측 안쪽에는 칠성각이 자리해 있다. 산신(山神)과 칠성의 보금자리로 '칠성각' 현판
외에 주원영 거사가 쓴 '영모각(靈母閣)' 현판도 내밀고 있는데, 여기서 '영모(靈母)'는 산신
할매의 다른 표현 같다.

칠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그 역시 청기와를 지니고 있는데, 19세기 말
에 지어진 것으로 1936년에 수리한 것을 근래에 산뜻하게 청기와를 입혔다.
건물 바로 뒷쪽에는 벼랑이 바짝 붙어있어 산사태에 다소 취약해 보이는데, 1984년 여름 장마
의 희롱으로 산사태가 일어나 적지 않은 흙과 물이 거세게 칠성각을 향해 밀려왔다. 붕괴 직
전에 놓였으나 뿌리채 뽑혀 떠내려오던 소나무 1그루가 마치 문어가 감싸듯 그 줄기와 뿌리가
칠성각을 감싸 무너지지 않게 지켜준 이변이 발생했다. 우연인지 칠성/산신의 가호인지는 모
르겠으나 어쨌든 산신각은 위기를 모면했고, 절에서는 그 소나무를 치우고 3일 동안 산신 기
도를 올렸다.


▲  등장 인물이 많은 칠성탱 (왜정 때 그려짐)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고색이 느껴지는 산신탱은 1908년 석옹 철유(石翁 喆裕)가 출초(出草, 초안을 그림)하고 두흠
(斗欽)과 윤오(允旿) 등이 참여해 구산동 수국사(守國寺)에서 그린 것으로 나중에 삼성암으로
넘어왔다.
붉은 옷을 입고 하얀 수염을 휘날리는 산신은 호랑이에 기대 앉아있는데, 꼬랑지를 살랑살랑
거리는 호랑이가 고양이처럼 귀엽기만 하다. 산신의 왼손에는 잘생긴 부채가 있고, 그들 뒤에
는 그의 활동무대인 산이 그려져 있다. 심원사에서 넘어온 아미타불을 제외하면 경내에서 가
장 늙은 보물로 아직 그 흔한 지정문화재 등급은 얻지 못했다.


▲  벼랑 위에 자리한 독성각(獨聖閣)

대웅전 우측 벼랑 위에는 삼성암의 얼굴이자 후광(後光)인 독성각이 걸려 있다. 보통 절에서
산신각이나 산신이 봉안된 삼성각(三聖閣)이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기 마련이나 삼성각
은 독성도량답게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의 거처인 독성각을 가장 하늘 가까이에 두어 매우
애지중지하고 있다.

독성각은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조그만 팔작지붕 건물로 그 역시 청기와를 쓰고 있
다. 1881년에 처음 지어졌다고 전하며, 1942년 산사태로 무너진 것을 이듬해 7월에 다시 지었
다. 현재 건물은 근래 손질된 것으로 지형적인 탓에 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정면에 유리창을
내어 비록 좁지만 경내를 굽어볼 수 있게 했다. 들어앉은 위치가 경사가 각박하고 자리가 협
소해 지그재그로 돌계단을 내었는데, 비록 그 거리는 짧으나 계단이 우중층하니 주의가 좀 필
요하다.


▲  독성각에서 바라본 대웅전 옆구리

▲  목각으로 이루어진 독성탱

독성각에는 나무로 조각되어 곱게 채색을 입힌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그림 가운데에 두광(
頭光)을 갖춘 독성 할배가 앉아있고, 그 옆에 동자가 서 있으며, 독성 좌우에는 늙은 큰 소나
무가 있고, 뒷쪽에는 독성의 활동 무대인 천태산(天台山)이 주름진 선을 이루고 있다.

독성각이 19세기 후반부터 있던 것으로 보아 그와 연배가 비슷한 독성탱이 있었을 것이나 지
금 독성탱은 20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고색의 기운은 여물지 못했다. 삼성암은 독성을 주
인으로 삼아 독성도량을 칭하고 있으며, 중부 지방 제일의 독성 도량을 자처하고 있지만 역시
나 아는 사람만 찾을 뿐이다. 나도 이곳에 오기 얼마 전에야 겨우 그 사실을 접했다.

독성탱 앞에는 중생들의 소망이 담긴 조그만 원등(願燈)이 무리를 지어 모여 장관을 이루는데,
이들이 강인한 협동심으로 몸을 불사르며 독성각 내부를 환히 밝힌다.


▲  마치 자수를 놓은 듯, 꽃잎과 새 등이 그려진 독성각 우물천정

▲  삼성암을 뒤로하며... (일주문 부근)


 

♠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  삼성암 일주문 밑에 자리한 세심천 약수터

그날의 목적지인 삼성암을 둘러보고 뿌듯한 마음을 품으며 절을 나왔다. 다음 인연이 언제가
될지는 장담할 수 없으나 그때가 되면 이번에 놓친 대웅전의 조그만 아미타불을 꼭 친견하고
싶다. 
절을 뒤로 하며 일주문에 이르니 부근에 세심천약수터가 있다. 산에 왔다면 뫼가 베푼 약수는
꼭 마셔봐야 그 산의 맛과 마음을 아는 법, 하여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들이킨다. 허
나 봄가뭄으로 물이 답답하게 나와 조그만 바가지를 채우는데 꽤 인내를 요했다. 삼성암은 그
래도 물이 넉넉했는데, 이곳은 그렇지가 못하다.
약수터 주변에는 운동시설과 의자 등의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오랫동안 동네 사람들의 몸
풀기 장소로 쓰였던 듯 싶다.


▲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약수터를 나와 빨래골로 내려가지 않고 화계사로 질러가는 산길로 방향을 잡았다. 숲에 묻힌
그 길을 정신없이 내려가면 천하 둘레길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받는 북한산둘레길이 모
습을 비춘다.
북한산둘레길은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道峯山), 사패산(賜牌山)의 밑도리를 지나는 21개
구간, 71.5km의 장대한 산길인데, 삼성암 입구와 빨래골을 지나는 길은 그 둘레길의 일원인
흰구름길이다. 이름도 참 어여쁜 흰구름길(북한산둘레길 3구간)은 이준열사묘역입구에서 북한
산(삼각산)과 속세의 경계를 넘나들다가 북한산생태숲(성북생태체험관)에 이르는 4.1km의 산
길로 구름을 만날 것 같은 길 이름과는 달리 현실은 해발 100~150m를 왔다갔다하는 구름도 만
질 수 없는 얕은 높이이다. 그러니 괜히 이름에 속지 말자~~!

흰구름길은 북쪽으로 순례길(북한산둘레길 2구간), 서남쪽으로는 솔샘길(둘레길 4구간)과 이
어지며, 그리 각박한 경사가 없는 정말 착한 산길이다. 별로 힘들지 않은 코스라 마실 삼아
가다보면 길게 잡아도 1시간 20분 내외면 완주할 수 있는데, 이 구간에는 화계사(☞ 관련글
보기)와 본원정사(☞ 관련글 보기), 삼성암 등의 오래된 절과 냉골, 빨래골 등의 계곡, 조병
옥(趙炳玉, 1894~1960)박사묘, 구름전망대 등의 명소가 있어 무작정 앞사람의 뒷통수만 보며
산길만 걸을 것이 아니라 이들을 여럿 겯드려서 거닐면 정말 영양가 높은 둘레길 산책이 될
것이다.

흰구름길 구간에는 냉골(화계사와 본원정사 중간)이란 깊은 골짜기가 있다. 도로가 냉골 윗쪽
에 자리한 영락교회기도원까지 닦여져 있어 차량들도 마음 편히 바퀴를 굴릴 수 있는데, 냉골
공원 지킴터에서 칼바위능선으로 조금 오르면 현대사의 주요 인물인 유석(維石) 조병옥박사의
묘소가 있다.

또한 화계사 남쪽 산자락에는 속세를 향해 고
개를 든 3층짜리 전망대가 있다.
이 전망대는 둘레길의 이름을 따서 구름전망
대라 부르는데, 그렇다고 구름까지 닿는 높이
는 아니다. 전망대 꼭대기까지는 계단이 빙글
빙글 늘어져 있으며, 20m 내외의 높이인 전망
대 꼭대기에 올라서면 강북구와 도봉구, 성북
구, 노원구를 비롯해 북한산(삼각산) 동쪽의
주요 봉우리와 도봉산, 수락산(水落山), 불암
산(佛巖山) 등이 거침없이 들어와 조망이 제
법 일품이다.


◀  나무로 지어진 구름전망대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 동쪽 자락과 도봉산(오른쪽 산줄기)

녹색 물결이 일렁이는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 그 너머로 이 산의 대표 봉우리인 백운대(
白雲臺, 북한산 꼭대기)와 인수봉(仁壽峯)을 비롯해 북한산 동쪽 봉우리 능선이 흔쾌히 시야
에 들어온다.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수유동, 우이동, 도봉구, 노원구 지역)
정면 왼쪽에 보이는 산이 도봉산, 오른쪽에 멀리 보이는 산이 수락산이다.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수유동, 쌍문동, 도봉구, 노원구 지역)
정면에 멀리 보이는 산이 수락산, 그 오른쪽이 불암산이다.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수유동, 미아동, 월곡동, 성북구 지역)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미아동, 길음동, 월곡동, 성북구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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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닦여진 흰구름길 (화계사 남쪽)

▲  화계사 직전 (흰구름길과 만나는 구간)

간만에 찾은 흰구름길은 화계사까지만 거닐었다. 햇님의 퇴근 시간도 슬슬 임박했고 종종 왔
던 곳이라 그렇게까지 무리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멀리 가고 요란하게 간다 한
들 그 일정의 끝은 언제나 집이다.
이렇게 하여 삼성암을 겯드린 북한산둘레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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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북쪽 끝 지붕, 도봉산 봄나들이 [무수골, 원통사계곡, 원통사, 우이암 관음봉까지]

 


' 도봉산 봄나들이 (무수골, 원통사, 우이암)'


▲  도봉산 우이암(관음봉)

▲  도봉산 원통사

▲  무수골 숲길


 

봄이 파릇파릇 익어가던 4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주말, 친한 여인네들과 서울의 영
원한 북쪽 지붕, 도봉산(道峯山)을 찾았다. 도봉산은 내가 살고 있는 도봉동(道峰洞)과
도봉구의 듬직한 뒷산으로 우리집에서도 훤히 보이는 천하의 명산(名山)이다.

둥근 해가 하늘 가운데에 걸린 13시, 집에서 가까운 도봉역(1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분
식집과 마트에서 김밥과 간식을 두둑히 사들고 도봉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이번 산행은
무수골에서 시작하여 원통사와 우이암(관음봉), 문사동계곡을 거쳐 도봉산 종점에서 마
무리를 지었는데, 소요시간은 4시간 정도이다.


▲  너른 암반이 많은 무수골 하류 무수천(無愁川)


 

♠  서울에 숨겨진 별천지이자 아름다운 산골 마을, 무수골

▲  무수골길 (무수골 주말농장 부근)

무수골을 겯드린 도봉산 나들이는 도봉역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도봉역 1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도봉역4거리인데, 여기서 도봉산이 바라보이는 서쪽으로 길을 건너면 바로 무수골로 인
도하는 무수천 둑방길(도봉로169길)이 나온다. 여기서는 문사동계곡에서 시작된 도봉천과 무
수골에서 시작된 무수천이 만나며 이들은 도봉천으로 합쳐져 중랑천으로 흘러간다.

무수천 둑방길을 10분 정도 가면 도봉초등학교가 나온다. 여기까지는 단독주택과 빌라가 많은
서울에 흔한 주택가 풍경이나 여기서부터 속인(俗人)들의 집이 크게 줄어들면서 서서히 시골
풍경으로 그림이 바뀐다. 그런 풍경 뒤로 북한산(삼각산) 북쪽 봉우리와 도봉산의 지붕이 바
라보여 뒷배경도 아주 탄탄하며, 무수골 마을버스 종점(도봉08번)을 지나면 완전한 산골 분위
기로 풍경이 변한다.

무수천은 수심이 매우 얕은 하천으로 비가 많이 내릴 때만 잠깐 물이 불어날 뿐, 평소에는 물
이 적은 마른 하천<건천(乾川)>이다. 그러다보니 가뭄 때는 갈증을 너무 심하게 타서 툭하면
맨바닥을 드러내기도 한다. 2007년 이후, 무수골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을 벌이면서 무
수골 아랫쪽(도봉초교 주변) 주거 환경이 어느 정도 개선이 되었는데, 이때 무수천을 정비하
여 하천 양쪽에 중랑천과 이어지는 산책로를 내었다. (무수골 주말농장 동쪽까지 이어짐)


▲  세일교 주변 (오른쪽 길은 무수골 북부, 도봉옛길 방면)

도봉산 동남쪽 자락에 포근히 묻힌 무수골은 도봉산에 널린 수많은 골짜기의 하나이다. 허나
그저 숲과 계곡, 바위만 있는 계곡이 아닌 밭두렁과 산골마을, 심지어 논두렁까지 지닌 산골
마을로 좁게는 도봉산과 도봉구, 넓게는 서울의 숨겨진 비경으로 꼽힌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백두산만큼 높은 서울 바닥에 그런 서울을 비웃는 뜻밖의 별천
지가 있다니? 무수골에 발을 들인 나그네는 그곳의 뜻밖에 풍경에 무한 감동을 먹으며 넋을
잃고 만다. 흔히 서울 하면 사람과 차량, 키다리 건물로 즐비한 번잡한 대도시로만 생각하기
일쑤이니 그 감동의 정도는 더욱 클 것이다. 솔직히 서울이라고 해서 꼭 시가지만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무수골이 이렇게 때 묻지 않은 산골로 남게 된 것은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에
포함되어 개발의 칼날을 부러뜨렸기 때문이다.

무수(無愁)골이란 이름은 근심이 없는 골짜기란 뜻이다. 바깥 세상은 늘 근심의 연속인데, 이
곳은 근심이 없는 이름을 지니고 있으니 이 얼마나 극락정토(極樂淨土)다운 이름인가? 그 유
래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조선 4대 군주인 세종(世宗)이 이곳에 왔다가 원터약수터에서 약수를 마시고 '물도 좋고 풍경
이 좋은 이곳이야말로 아무런 근심이 없는 곳이다!'
찬양하여 무수골이 되었다고 하며, 세종
이 그의 아들인 영해군 이당(李瑭)의 묘역을 둘러보고 원터약수터에서 물을 마시며 근심 없는
곳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허나 영해군은 1477년에 죽었고 세종은 1450년에 죽었으니 서
로 시기가 맞지 않으며, 성종이 영해군의 묘역이 완성되자 직접 찾아와 참배하며 근심이 없는
곳이라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근심이 없는 노인네인 무수옹(無愁翁) 이야기도 한토막
전해오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때는 조선의 어느 시절, 나랏일로 골치가 아프던 왕은 세상에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의문을 품으며 이른바 무수인(無愁人)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아무리 잘나가는 부자도,
사대부도, 왕족도, 어린이도 몇 가지씩 가지고 있는 것이 걱정이니 찾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다가 드디어 무수인 자격에 맞는 노인을 찾았다. 그 노인은 아들이 무려 12명으로 모두
장가를 보냈으며, 아들과 며느리의 효성이 지극하여 노인은 만사가 즐거웠다. 하여 주변 사람
들은 그를 무수옹이라 불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왕은 급히 그를 소환해 이유를 물으니 노인
이 머리를 조아리며
'소인은 아직 몸도 멀쩡하고, 마누라가 잘 보살펴주고 있으며, 자식과 며느리가 효도하고, 벗
들도 많고, 자손들도 건강하고, 전하께서 나라도 잘 다스려 주시고, 봄과 여름, 가을, 겨울도
있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샘이 단단히 난 왕은 그를 시험할 생각으로 구슬을 건네주며 1달 후에 가져오라고 명을 내렸
다. 노인은 왕에게 성대한 대접을 받고 집으로 오다가 한강에서 배를 탔는데, 뒤에 따라오던
사람이 노인에게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하여 구슬을 꺼내 보이니 그때 그 사람이
실수인양 팔꿈치를 치는 바람에 구슬이 한강에 빠지게 되었다. 그 사람은 구슬을 물에 빠트리
게 하려고 왕이 보낸 사람이었다.

구슬을 잃어버린 노인은 구슬을 어떻하나? 노심초사하다가 결국 식음을 전폐하고 몸저 눕게
되었다. 가족들이 이유를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고 혼자 끙끙 앓으니 결국 건강까지 극도로
나빠졌다. 걱정이 된 자식들은 잉어를 잡아 푹 고아주려고 했는데, 그 잉어 배에서 구슬이 나
왔다. 알고보니 강에서 잃어버린 그 구슬이었던 것이다. 노인은 너무 기뻐 그동안의 근심을
다 털어버리고 잉어 요리를 폭풍 섭취해 건강을 되찾았고, 1달 뒤, 궁궐에 들어가 구슬을 바
쳤다. 왕이 낸 숙제를 휼륭하게 소화한 것이다.
깜짝 놀란 왕은 그 사연을 듣고 감복했고, 이후 노인은 잘 먹고 잘 살며 쓸데없이 오래 살았
다고 전한다. 이런 무수옹 이야기는 이곳 무수골 뿐 아니라 전국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옛
전설의 하나이다.


무수골은 음은 같지만 뜻이 다른 무수(無袖)골(무수동)이란 이름도 있다. 이는 무수골에 묻힌
영해군 이당의 무덤 자리가 신선이 소매를 펼치고 춤을 추는 형국인 선인무수지형(仙人舞袖之
形)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춤을 뜻하는 '舞'가 '無'로 바뀜)
또한 영해군이 묻히기 이전에는 대장장이들이 많이 살았는데, 그들이 운영하는 대장간이 계곡
에 즐비했다고 한다. 그래서 '무쇠골', '수철동(水鐵洞, 무쇠골을 한자로 표현)'이라 불리다
가 영해군이 묻힌 이후 무수골(무수동)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또한 무수골에 있던 무수울에 서낭당이 있어 이 마을을 '서낭당(성황당)'이라 불렸는데, 그게
무수골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체로 성황당은 무수골 하류(도봉초교 주변)를 일컬으
며 그 이름은 아직까지 살아남아 버스정류장 이름(도봉역, 성황당)으로도 절찬리에 쓰이고 있
다.

참고로 무수골은 무수울, 무시울, 모시울, 성황당 등으로도 불렸는데, 무수울은 무수골 마을
의 대표 이름으로 조선 때 양주목 해등촌면(海等村面)을 이루던 12개 리의 하나였다. 무수골
은 윗말(무시울), 중간말, 아랫말로 나눠졌으며, 개성이씨가 먼저 터를 닦은 이후, 전주이씨
(영해군의 후손들), 안동김씨, 함열남궁씨, 진주류씨도 이곳에 무덤을 쓴 인연으로 정착하여
오랜 토박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무수골은 도봉산으로 인도하는 기점의 하나로 굳이 등산이 아니더라도 답사와 나들이, 피서,
농촌 체험 등으로도 안길 수 있는 꿀단지 명소이다. 전주이씨영해군파 묘역을 비롯해 무수골
에 가장 먼저 묻힌 개성이씨의 호안공 이등(胡安公 李登)과 의령옹주(義寧翁主) 묘역, 200여
년 묵은 느티나무, 진주류씨묘역(도봉옛길 중간에 있음), 함열남궁씨 묘역 등의 문화유산이
즐비해 답사지로도 손색이 없으며(옛 무덤 답사지로 아주 좋음;) 서울시는 무수골 입구에서
윗무수골을 거쳐 자현암까지의 길을 테마 산책길로 지정하여 '무수히 전하길(숲이 좋은 길)
'이란 간판을 달아주었다.
또한 무수골 하류(세일교 동쪽)에는 밭두렁이 넓게 펼쳐져 있는데, 시민들을 위한 주말농장도
여럿 있어 농촌 체험도 누릴 수 있다. 게다가 무수골 계곡은 물도 깨끗하고 암반도 즐비하며
상류로 갈수록 숲이 짙어져 피서의 성지로도 아주 좋다. 계곡 상류는 '원통사계곡(또는 보문
사계곡)'이라 불리는데, 문사동계곡, 원도봉계곡(망월사계곡)과 더불어 도봉산 3대 계곡의 하
나로 추앙을 받고 있다.


▲  무수골의 속살로 인도하는 무수골길 (세일교에서 윗무수골 방향)

▲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 (윗무수골, 원통사 방향)

무수골주말농장을 지나면 세일교가 나온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오른쪽(북쪽)으로
가면 무수골 북쪽 마을과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로 이어지고, 세일교를 건너면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북쪽 시작문과 무수골 안쪽, 원통사, 우이암 방면으로 이어진다.


▲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 (도봉역 방향)

방학동길 북쪽 시작점을 지나면 바로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길 왼쪽
에 돌담이 펼쳐졌다가 절반 정도 들어서면 자리를 바꾸어 오른쪽으로 돌담이 펼쳐지는데, 비
록 덕수궁(德壽宮, 경운궁) 돌담길만은 못해도 그런데로 운치를 자아내고 있으며, 나무도 무
성해 잠시나마 더위를 잊게 한다.
어디론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난향원 돌담길, 그 돌담길을 지나면 무엇이 나올까? 무수골
초행이라면 더욱 짙어진 숲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도봉산 산길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할 것이
다. 허나 그것은 착각이다. 무수골이 괜히 무수골이 아니거든..


▲  봄을 맞이하여 슬슬 기지개를 켜는 윗무수골 남쪽 논두렁

난향별원 돌담길을 지나면 흔히 생각하는 그늘진 숲 대신 햇살이 내리쬐는 뻥 뚫린 공간이 나
온다. 그 공간이란? 다름 아닌 논두렁이다. 짙은 숲속에 자리한 윗무수골 논두렁, 설마 이런
첩첩한 산골에 무려 논두렁이 있을 것이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논두렁의 크기는 바깥 세상과 비교하면 턱없는 수준이나 산골치고는 그런데로 큰 편이다. 마
치 강원도나 경북의 산골 논두렁으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인데, 길을 중심으로 남쪽에 조그
만 논이 펼쳐져 있고, 북쪽에 큰 논두렁이 여럿 있다. 그리고 영해군파묘역 밑에도 논두렁이
여럿 있다.
이들 논두렁은 무수골의 오랜 상징이자 꿀단지로 무수골 사람들은 조선시대부터 이 논을 통해
곡물을 생산했으며 그 생산량이 많아 배불리 먹고 살았다. 이렇게 산골에서 먹는 문제가 거뜬
히 해결되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식(食)은 걱정할 것이 없으니 근심이 없다는 무수골이란
이름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닐 것이다.


▲  호수처럼 보이는 윗무수골 북쪽 논두렁

윗무수골 논두렁은 여전히 논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우리가 갔을 때는 아직 모를 심지 않은
상태라 물만 가득해 마치 조그만 호수처럼 보였는데, 보통 5월에 모를 심어서 10월에 수확을
한다.
친환경 농법으로 벼농사를 짓고 있으며,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들이 황금색으로 숙성되
는 9월 이후 논두렁 풍경은 무수골 풍경의 가히 백미(白眉)로 꼽힌다
.


▲  느티나무 주변 윗무수골 (원통사 방면)

200년 이상 묵은 무수골 느티나무 앞에서 느티나무를 바라보는 기준으로 오른쪽(북쪽)에 느티
나무가든 문패를 내건 문을 들어서 직진하면 무수골에 가장 먼저 뼈를 묻은 개성이씨 집안의
호안공 이등 묘역이 있고, 오른쪽(북쪽)으로 식당을 가로질러 숲속으로 들어가면 영해군의 묘
역(영해군파묘역)이 있다.
그리고 느티나무에서 산꾼 왕래가 빈번한 왼쪽(서남쪽) 길로 가면 자현암과 원통사, 우이암으
로 이어지는데, 하늘을 가리며 쭉쭉 뻗은 나무들이 아름드리 숲길을 이루어 마치 강원도 원시
림을 방불케 한다. 아름다운 숲길 100선까지는 아니더라도 200선에 넣어도 손색이 없는 품질
로 성신여대 난향원 일부가 이곳에 자리해 있어 길 옆에 철조망이 둘러져 있다. 또한 숲의 옆
구리를 흐르는 무수골 계곡은 청정하기 이를 데 없어 피서의 성지로 아주 제격이다.


▲  수해(樹海)의 파도 속을 거닐다~~ 윗무수골 숲길

▲  윗무수골에 자리한 자현암(慈賢庵)

햇살도 슬금슬금 피해가는 윗무수골 숲길을 지나면 무수골공원지킴터가 마중을 한다. 여기서
오른쪽 길을 3분 정도 오르면(왼쪽으로 가면 함열남궁씨1묘역과 후손들의 거처) 윗무수골 가
장 윗쪽에 자리한 조그만 비구니 암자 자현암이 나타나며, 그곳부터는 완전한 자연의 공간으
로 바뀐다.


▲  자현암 이후 원통사계곡 산길


 

♠  도봉산의 으뜸 계곡, 원통사계곡(보문사계곡)

▲  숲속에 묻힌 원통사계곡

무수골의 최상류를 이루고 있는 원통사계곡은 보문사계곡이라 불리기도 한다. 원통사의 다른
이름이 '보문사'라 그런 이름도 지니게 되었는데 그냥 편하게 무수골계곡이라 불러도 상관은
없다.
이곳은 도봉산 3대 계곡의 하나로 원통사 부근에서 발원하여 무수골을 촉촉히 어루만지며 중
랑천으로 흘러간다. 골짜기는 조촐하지만 주름진 바위와 반석, 수심이 얕은 못이 가득해 아기
자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도봉산의 마음이 담긴 듯, 물이 맑고 허공을 덮을 정도로 숲
이 삼삼하다.
오랫동안 서울 근교 경승지로 계곡 밑에 왕족과 사대부의 묘역이 즐비하다보니 자연히 그들의
발길이 빈번해 오랫동안 그들의 입과 기록에 오르내리던 현장이며, 무수골공원지킴터에서 계
곡을 거쳐 원통사까지는 약 30분 거리로 처음에는 경사가 느긋하다가 막판에 잠깐 각박해진다.
허나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는 초급 코스이니 그리 걱정은 안해도 된다.


▲  바위와 암반을 가득 품은 원통사계곡

▲  힘차게 쏟아지는 원통사계곡의 위엄

전날까지 비가 적지 않게 내린 탓에 계곡 수량이 매우 풍부했다. 풍부하게 쏟아진 봄비로 간
만에 포식을 즐긴 계곡은 기분이 좋은지 패기가 돋는 물소리를 베풀며 속세를 향해 두둑하게
물을 흘려보낸다. 이게 얼마만에 들어보는 계곡의 당찬 물소리던가.? 산길은 계곡을 따라 이
어지기 때문에 물소리는 늘 우리를 따라다녔다.


▲  원통사계곡과 그를 쫓아가는 산길

▲  원통사계곡의 조촐한 여흥거리, 조그만 폭포와 주름진 벼랑들

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진리에 따라 우리는 잠시 길을 멈추고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아 김밥 등의 간식거리를 섭취했다. 하늘과 조금이나마 가까운 곳에서 낭랑한
물소리를 들으며 먹으니 꿀을 두르지 않았음에도 다들 꿀맛 같다.
그렇게 뱃속을 달래고 힘이 넘치는 계곡에 속세에서 딸려온 번뇌를 살짝 맡기니 시름이 잠시
나마 잊혀진 듯 하다. 하지만 그 번뇌는 우리가 내려올 장소에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해탈(解脫)은 정말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  원통사계곡 상류 부분

▲  경쾌하게 흘러가는 조그만 폭포

▲  원통사계곡에서 바라본 보문능선

▲  계곡 징검다리


▲  원통사로 이어지는 나무 계단길

계곡과 나란히 이어진 느긋한 산길은 계곡 최상류에 이르면 잠시 매정한 모습을 보인다. 여기
서 계곡과 완전히 떨어지게 되는데, 각박한 산자락에 닦여진 나무데크 계단길을 오르면 우이
동에서 올라온 산길과 만나면서 다시 진정을 되찾으며, 원통사와 우이암(관음봉)이 서서히 모
습을 드러내 보인다.


▲  하늘의 요새 같은 원통사 (밑에서 바라본 모습)
하늘과 한 발자국 가까워질 때마다 성큼성큼 커져 보이는 원통사, 그 뒤로
원통사의 든든한 후광, 우이암(관음봉)이 시야에 들어온다.

▲  원통사 앞에서 바라본 천하 (서울 동북부 지역)

▲  우이암으로 이어지는 원통사 앞 길


 

♠  서울 지역 사찰 중 2번째로 조망이 우수한 높은 산중의 절집,
~ 도봉산 원통사(圓通寺)

도봉산의 제일 남쪽 봉우리인 우이암(관음봉, 542m) 동남쪽 자락 400m 고지에 원통사가 포근
히 둥지를 틀고 있다.
원통사는 서쪽과 북쪽이 산과 바위로 모두 막혀있지만 대신 동쪽과 남쪽은 조망이 훤히 트여
있으며, 흰구름이 손에 잡힐 정도로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조망의 품질만큼은 아주 우수하다.
여기서는 도봉동과 도봉구, 강북구를 비롯해 노원구, 성북구, 중랑구, 광진구, 동대문구, 수
락산과 불암산, 봉화산, 아차산 산줄기, 북한산(삼각산)이 아낌없이 바라보여 속세에서 오염
되고 상처받은 두 안구와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서울에는 많은 산사(山寺)가 전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북한산 보현봉 밑 560m 고지에 둥지를
닦은 일선사(一禪寺)가 서울에서 1등으로 조망이 좋은 절이다. 원통사가 도봉구와 동대문구,
중랑구 등 서울 동북부와 한강 이북의 동부 지역 중심으로 보인다면 일선사는 도봉구와 노원
구, 은평구, 강서구, 몇몇 구석진 지역을 제외한 서울의 상당수 지역을 커버하고 있다. 그러
니 조망(眺望) 부분에서는 이곳을 따라올 절집이 없다. 그 다음이 원통사이며, 3위는 호암산(
虎巖山) 남쪽 자락에 안긴 불영암(佛影庵)일 것이다. <불영암은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등
서울 서남부와 광명 지역이 바라보임>
조망은 일품이지만 그만큼 궁벽한 산중이라 가파른 곳에 간신히 자리를 닦고 석축을 쌓아 터
를 다졌으며, 뒷쪽 바위에도 약사전, 삼성각 등의 조그만 건물을 주렁주렁 올렸다. 거북바위
밑에는 샘터가 있는데, 물이 귀할 것 같은 바위 밑임에도 수량이 넉넉하다. 그렇다면 원통사
는 언제 창건되었을까?

원통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864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여 원통사라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관련 기록과 유물, 흔적이 전혀 없어 창건 시기에 대해 깊은 회의감을 가져다
준다. 또한 1053년 관월대사(觀月大師)가 중창을 했다고 하나 이 역시 신뢰도가 떨어진다. 다
만 1392년에 천은선사(天隱禪師)가 중창했다고 하니 아마도 이때쯤 창건된 것이 아닐까 싶으
며,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지만 현재 나한전으로 쓰이는 조그만 동굴에서 태조 이성계가 기도
를 올렸다고 전한다.
하지만 굳이 이성계가 아니더라도 이런 동굴은 승려나 도를 닦는 이의 수행처로 사용되기 마
련이다. 게다가 관세음보살 누님이 부처를 향해 기도를 올리는 형상이라는 우이암(관음봉)이
뒷쪽에 있어 지역 사람들은 그 봉우리를 관세음보살의 성지(聖地)로 여겼다. 바로 그들을 후
광(後光)으로 삼아 고려 말이나 조선 초에 조촐히 절을 짓고 관세음도량(관음도량)을 뜻하는
원통사를 칭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영조 때 유인(宥牣)이 중수를 했고, 1810년 청화(淸和)가 중수를 했는데, 중창 이후 나
라에 큰 경사가 있자 나라와 산천의 은혜를 갚았다는 뜻에서 보은사(報恩寺)로 이름을 갈았다.
1887년 응허 한규(應虛 漢奎)가 중창했으며, 1928년 자현(慈賢)이 주지로 들어와 퇴락한 절의
중건을 발원하고 설악산에 머물던 춘성(春城)을 청해 1,000일 관음기도를 올려 1929년에 절을
중건했다.
이후 보경 보현(寶鏡 普賢)을 데려와 아미타불과 지장보살상을 조성했으며, 1931년에 비로소
1,000일 기도가 끝나자 그해 겨울 보응과 함께 다시 만일 염불회를 시작하여 1933년 칠성각을
세우고 1936년 법당 일부와 큰방을 중수했으며, 이때 절 이름을 잠시 보문사(普門寺)로 갈았
다가 원래 이름인 원통사로 돌렸다. 그리고 1988년 약사탱과 칠성탱, 산신탱, 독성탱 등을 만
들어 봉안했다.

원통사는 양반사대부들이 즐겨 찾던 명소로 인근 방학동(放鶴洞)과 무수골에 별장과 집을 지
어 머물던 그들이 이곳까지 올라와 조망을 즐겼는데, 영조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조현명
(趙顯命)과 서명균(徐命均)이 나라 일을 논하며 마음을 가다듬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태조 이성계가 이곳 석굴에서 기도를 했다고 하는데, 기도 마지막 날에 꿈 속에서 하늘
나라의 상공(相公, 정승)이 되어 옥황상제를 만나는 꿈을 꾸었다고 하여 이를 기리고자 새겨
진 상공암 바위글씨가 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원통보전을 비롯하여 약사전과 삼성각, 정해료, 범종각, 자연산 석굴
을 활용한 나한전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이미 여러 개의 100년이 지났지만 그에 비
해 고색의 기운은 모두 말라버려 지정문화유산은 하나도 없는 실정이다. 다만 조선 말에 새겨
진 상공암 바위글씨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고, 왜정 때 지어진 원통보전과 탱화 여러
점이 전하고 있다. 또한 나한전 석굴은 태조가 기도를 했다는 전설이 깃들여져 있으며, 오랫
동안 승려들의 수행처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앞서 이른 데로 조망 하나는 아주 최상급이라 서울 동북부와 동부 지역이 훤히 시야에
바라보이며, 절 뒷쪽에 자리한 우이암(관음봉)을 들이밀며 관음도량을 내세우고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546 (도봉로169길 520 ☎ 02-954-9944)

◀  서울을 굽어보는 범종루(청화대)
매일 새벽 4시와 18시에 은은한 종소리를
서울로 흘려보낸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가히 일품급이다.

원통사는 산정(山頂)에 자리한 탓에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을 두지 못했다. 그래서 범종루를
대신 정문으로 내밀고 있는데, 절 남쪽 경계에는 돌담을 둘렀고, 동쪽 경계에는 석축을 2m 높
이로 다져 속세의 기운을 경계한다.
절로 들어서려면 범종루의 밑도리를 지나야 된다. 이 길이 속세와 원통사를 잇는 유일한 길로
범종루는 청화대(淸和臺)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  범종루(청화대) 앞에서 바라본 서울 동북부 지역

▲  오색 연등을 늘어뜨린 원통보전(圓通寶殿)

남쪽을 바라보고 선 원통보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
물이다. 1929년에 지어진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나 여러 번 손질을 더하면서 90
년 숙성된 기운은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내부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관세음보살, 지장보살로 이루어진 아미타3존불을 중심으로 호
법신들의 무리를 머금은 신중탱과 백의관세음보살을 담은 관음탱을 두었는데, 원통전은 관음
전(觀音殿)의 다른 말로 관세음보살 누님이 중심이 되야 맞지만 이곳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삼았다. 대신 관세음보살을 그림으로 1폭, 존상(尊像)으로 1기 등 총 2개를 두어 건물의 이름
값은 조금이나마 하고 있다.


▲  원통보전 내부 (왼쪽부터 백의관세음보살탱, 아미타3존불과
아미타후불탱, 신중탱)

▲  바위에서 샘솟는 원통사 샘터

▲  자연산 석굴에 자리한 나한전

원통보전에서 약사전을 향해 1단계 올라가면 거북바위 밑에 이곳의 소중한 젖줄인 샘터가 있
다. 산사에는 늘 샘터가 있기 마련이라 꼭 1모금 챙겨 마시는 편인데 바위 밑 산정에 있음에
도 물이 풍부한 편이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담아 목구멍에 들이키니 몸 속이 싹 시원해진다.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하늘이 내린 이슬 맛이 담긴 탓일까? 물맛도 그런대로 괜찮은 기분이다.


 ▲  나한전(羅漢殿) 내부

샘터에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약사전, 왼쪽은 바위 밑도리에 묻힌 나한전으로 이어진다. 나한
전 석굴은 태조 이성계가 기도를 했다는 현장이라 우기고는 있으나 신뢰성은 없으며, 오랫동
안 승려들의 기도처로 쓰였던 것을 근래 손질하여 돌로 만든 석가3존불과 보살입상, 나한상(
羅漢像)을 봉안해 나한전으로 삼았다.
석굴 내부는 더위 두 글자를 잠시 잊게 할 정도로 시원하며, 촛불이 어둠을 조금이나마 밀어
내고 있으나 다소 어두운 편이다.


▲  거북바위에 둥지를 튼 약사전(藥師殿)
샘터 뒷쪽에는 거북바위가 있다. 그의 등에는 약사여래의 거처인 1칸짜리 약사전이
둥지를 틀고 있는데, 바로 그 앞 바위 피부에 '상공암' 3자가 새겨져 있다.

▲  밑에서 바라본 약사전

▲  약사전 약사여래좌상과 약사후불탱


▲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상공암(相公岩) 바위글씨

약사전 바로 앞에 깃든 상공암 바위글씨는 직각으로 선 바위 피부에 새겨진 것이 아닌 누워있
는 바위에 진하게 깃들여져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여기서 상공이
란 정승(正承)을 뜻하는 것으로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엎어버리기 이전 원통사에 들어와 기도
를 하다가 그 마지막 날 꿈에 하늘나라 상공이 되어 옥황상제를 알현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기념으로 이곳에 상공암 바위글씨를 남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전설은 신뢰하기가 어려우며, 태조(太祖)가 과연 이곳까지 올라와 기도를 올렸는지
는 심히 회의적이다. 다만 도봉산 천축사(天竺寺)와 회룡사(回龍寺)는 이성계와 인연이 깊은
절로 그 절의 설화를 가져와 적당히 빚은 것으로 보이며, 조선 후기에 이곳을 찾았던 사대부
가 그 전설을 전해 듣고 꿈 속에서 하늘나라 상공이 된 태조를 찬양하고자 거북바위 위에 '상
공암' 바위글씨를 새겼다.

75x230cm 크기로 네모나게 외곽 선을 긋고 그 안에 3자를 새겼는데, 서체는 해서체(楷書體)이
며, 마치 꿈틀거리는 듯 필체가 우수하고 투박하다. 원통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절 경내
에 바위글씨가 있는 경우는 거의 흔치가 않은데, 그 글씨는 선비와 사대부, 왕족들이 즐겨하
던 낙서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원통사에 그들의 왕래가 잦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약사전 앞에서 꺼꾸로 지켜본 상공암 바위글씨
태조의 하늘나라 꿈 전설을 상징하고자 하늘이 잘 바라보이는 이곳에
글씨를 새겼다.

▲  삼성각(三聖閣) 앞에서 바라본 천하
도봉산 동남쪽 자락과 도봉구, 강북구, 노원구, 불암산, 아차산 산줄기,
성북구, 동대문구, 중랑구 등이 아낌없이 바라보인다.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칠성과 산신, 독성의 보금자리이다.

▲  삼성각 칠성탱 (1988년 작)
치성광여래와 칠성(七星) 식구들이
빼곡히 담겨져 정신이 없다.

▲  삼성각 산신탱 (1988년 작)
흰 수염의 산신 할배와 호랑이, 동자 등
산신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  삼성각 독성탱 (1988년 작)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
존자)과 그의 식구들이 그려져 있다.


 

♠  도봉산의 남쪽 지붕이자 대자연의 걸출한 작품
우이암(관음봉)

▲  도봉산 우이암<牛耳岩, 관음봉(觀音峯)>

원통사가 우이암(관음봉) 바로 밑이긴 하나 이전보다 더 각박해진 산길을 10여 분을 올라가야
된다. 지도상의 거리는 200m 정도라 금방 이를 듯 싶었으나 체감거리는 거의 1km가 넘어 벌써
부터 땀 육수를 제대로 배출했다.
우이암 그늘이라 그런지 올라가는 길목에는 커다란 바위들이 유난히도 많았다. 하나같이 생겨
먹은 것들이 예사롭지가 않아 몇몇 바위는 세상이 달아준 이름도 있을 법도 한데 사람들의 귀
차니즘 때문인지 다들 이름표가 없다. 허나 그것이 무슨 대수랴?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일이지 바위들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칼처럼 솟은 우이암의 밑도리를 지나면 우이암을 바라보는 서쪽 봉우리에 이르게 된다. 드디
어 하늘 아래 우이암에 이른 것이다. 허나 우리가 발을 딛은 곳은 정상부가 바위로 이루어진
우이암 서쪽 바위 봉우리일 뿐, 여기서 동쪽으로 보이는 바위 산이 바로 우이암이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도봉산의 위엄
칼바위와 주봉 능선, 만장봉, 자운봉 등이 두 눈에 바라보인다.


도봉산 남쪽 끝 봉우리인 우이암(해발 542m)은 아주 잘생기고 위엄도 대단한 순 100% 바위 봉
우리이다. 대자연 형님이 억겁의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으로 약 2억 년 전인 중생대 쥐라기
중엽 시절에 일어났던 대보조산운동(大寶造山運動)으로 도봉산 산줄기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바람과 비 등이 계속 산을 깎고 다듬으면서 산 정상부는 화강암이 노출된 채 바위산이 되었고
, 그것이 지금의 도봉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여 도봉산은 자연히 서울 근교의 대표적인 화강암 바위 산으로 자운봉, 선인봉, 만장봉, 칼
바위 등 걸출한 바위와 암봉(岩峰)이 즐비하며, 우이암(관음봉)도 바로 그중의 하나로 대자연
이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의 손길을 꺼렸는지 완전히 난공
불락의 요새로 지어놓았다. 허나 그렇게 단단하게 만들었음에도 하늘과 가까워지고 싶은, 봉
우리를 정복하고 싶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 앞에 결국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①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지역


봉우리 자체가 거의 수직 절벽으로 아무나 범할 수 없는 천험의 요새이며, 내려가는 것 또한
까마득한 그야말로 하늘의 감옥이다. 그러다보니 아무나 올라갈 수는 없고 장비를 갖춘 암벽
꾼에게만 제한적으로 길을 내주고 있다. 특히 암벽 타기에 최적화된 곳이라 암벽꾼들로 늘 부
산하며, 전국 암벽 등반대회가 열렸던 암벽 등반의 성지이기도 하다. 대자연이 인간의 접근을
막고자 만든 바위 봉우리가 졸지에 암벽 등반을 위해 내려준 선물의 모양새가 되버린 것이다.

지금은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에서 아무렇지 않게 우이암이라 불리고 있지만 원래 이름은 관
음봉이다. 관세음보살이 부처를 향해 기도하는 모습과 비슷해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사모관대(紗帽冠帶)를 쓰고 있는 모습과도 비슷하여 '사모봉'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다.
도봉산에는 호랑이와 코끼리, 두꺼비, 코뿔소, 학 등 다양한 동물의 형상을 지닌 바위들이 많
은데 이들이 관음봉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
전부터 도봉산 제일의 관음성지(觀音聖地)로 조촐히 추앙을 받았다. 아마도 원통사에 있던 석
굴(현재 나한전)에서 수행하던 승려나 도봉산에 머물던 승려들이 발견하여 성지로 격하게 추
켜세웠을 것이다. 바위 자체가 아주 휼륭한 관음성지이니 그 후광(後光)을 놓치지 않고자 바
위 밑 적당한 곳에 원통사가 둥지를 틀고 관음도량을 칭하고 있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②
우이동을 중심으로 방학동, 강북구, 성북구,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이
바라보인다.


조금 밋밋해 보이면서도 순백의 아름다움이 묻어난 이 봉우리에도 왜정(倭政)의 추악한 잔재
가 서려있다. 왜정은 관음봉의 위엄을 욕보이고자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의 우이암으로 강제
로 이름을 갈아버린 것이다. (우이동, 우이시장에서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바꾸었다고도 함)
아무리 봐도 소의 귀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왜정은 왜 그리 눈이 삐딱한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 이름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사람의 망각 속에 완전히 굳어져 버렸고, 관음봉이란
이름은 흐릿한 기억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원통사와 불교 단체, 뜻있는 이들은 원래 이름으로
다시 갈아야 된다며 천하에 호소하고 있어 차차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 믿는다.

하긴 왜정에 의해 고의로 왜곡되고 격하된 지명이 어디 한둘이던가? 비록 관음봉이 불교식 이
름이긴 하나 왜정의 나쁜 의도로 이름이 바뀐 것이니 원래 이름을 찾아주는 것이 맞다. 그들
의 썩은 잔재가 이 봉우리 속에도 깃들여져 천하를 비웃고 있으니 기분이 다소 씁쓸하며, 이
렇게 잘생긴 바위가 소의 귀로 머물러 있는 것도 좀 위엄이 서질 않는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③ 북한산(삼각산) 백운대와 영봉

앞서 원통사가 아무리 조망이 좋다고 해도 우이암만은 못하다. 해발도 벌써 140m나 차이가 나
며 그만큼 하늘과 맞닿은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머리 위로 푸른 하늘과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과 별이 바라보이고, 저 밑으로는 서울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동대
문구, 수락산과 불암산, 아차산 산줄기가 시야에 잡혀 여기까지는 원통사 조망과 비슷하다.
허나 이곳에서는 의정부 일부(호원동, 장암동, 민락1,2지구 등)와 상계1동, 도봉동 북부가 추
가로 시야에 들어와 조망의 범위는 조금 넓어졌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④
도봉동과 상계1동, 수락산을 비롯해 의정부 호원동, 민락1,2지구(수락산 너머로
보이는 곳)까지 시야에 잡힌다.


하늘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보다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가는 신선이 바
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게다가 두 발 밑에 펼쳐진 천하를 바라보니 도봉산과 수락산부터 점
보다 작게 아른거리는 집들까지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듯 즐거운 생각이 솟아 오른다.
정말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현실은 편히 드러누울 땅도 시원치 않은 시궁창이라는 것..
저 천하에서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땅이 없다.


우이암에는 마침 한 무리의 암벽꾼들이 줄에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봉우리를 희롱하고 있었다.
하늘의 감옥 같은 봉우리 정상에 올라선 기분은 어떠할까? 하지만 정상부는 좁고, 그 주변은
죄다 수직 벼랑이니 자칫 실수라도 하는 순간에는 정말 답이 없을 것이다. 내가 저기로 순간
이동을 당한다면 아찔한 위치 때문에 염통이 쫄깃해져서 오래 있기도 어려울 것 같다. 그냥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⑤
무수골이 저 밑에 아득하게 바라보여 참 많이 올라왔음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우이암 서쪽 봉우리에서 두 다리를 푹 쉬었다.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이 솔솔 불어
주는 산바람이 땀과 이른 무더위를 싹 털어가고 대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일품 조망을 실컷 누
리니 두 안구와 마음이 싹 위로받은 것 같다. 하긴 이보다 좋은 정화감은 없지.

정상이란 자리는 오래 머물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이라 20분 정도 머물다가 우이암능선으로
길을 잡았다. 이후 내용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우이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우이암(관음봉)과 서울시내
약 50~60도 경사로 비스듬히 기대며 서울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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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4월 1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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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고구려 유적의 성지이자 서울의 부드러운 동쪽 지붕, 아차산~용마산~망우산 나들이

 


' 아차산, 용마산, 망우산 나들이 '

▲  망우산, 용마산 산줄기

▲  아차산4보루

▲  망우산1보루


 

여름 제국이 저물고 가을이 서서히 고개를 들던 9월의 한복판에 나의 즐겨찾기 산의 하나
인 아차산을 찾았다.
아차산은 고구려(高句麗) 유적의 성지이자 해돋이와 일몰 명소로 유명하여 오랫동안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야무진 산이다. (나들이와 산행, 답사, 야간 등산 팬들이 많음) 산세
가 완만하여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마음 편히 안길 수 있으며, 산 좌우가 죄다 평지
다보니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이 아주 일품이다.
게다가 고구려의 거룩한 넋이 깃든 보루가 20개 가까이 펼쳐져 있고, 아차산성과 아차산3
층석탑, 온달샘석탑, 석실고분 등의 문화유산과 영화사(永華寺)와 범굴사 등의 오래된 절,
긴고랑계곡, 관룡탑 등 다양한 볼거리가 존재해 눈이 마음이 심심치가 않다.
아차산 북쪽에는 용마산, 그 북쪽에는 망우산이 자리해 있는데, 이름만 다를 뿐, 모두 아
차산 식구들이며, 조선 때는 아차산의 영역이 중랑구 봉화산(烽火山)까지 이르렀다.
(본글은 편의상 아차산4보루부터 시작하겠음)


 

♠  고구려 보루의 정석, 아차산4보루(堡壘) - 사적 455호

▲  용마산에서 바라본 아차산4보루 (사진 가운데가 4보루)

아차산4보루는 아차산(용마산 ,망우산 제외) 보루 중 가장 북쪽에 자리해 있다. 남한에 있는
고구려 성터 중 건물터와 성벽의 구조가 제대로 밝혀진 최초의 현장으로 의미가 꽤 남다른데,
아차~용마~망우산 산줄기에서 발견된 보루 중 거의 유일하게 성벽의 흔적이 조금 남아있었다.
나머지 보루는 터만 간신히 남은 것에 비하면 상태가 다소 나았던 것이다.
복원 이전 성벽의 최대 잔존 높이는 1.8m로 남벽과 동벽은 잘 다듬은 성돌을 이용한 탓에 그
런데로 남아있었으나 북벽과 서벽은 훼손이 심해 남아있는 높이가 0.8m를 넘지 않았으며, 부
정형의 석재를 사용해 조잡하게 축조되었다.


▲  아차산4보루 남쪽 2중치 (2개의 치로 이루어진 부분)

구리시(九里市)가 4보루에 숨겨진 옛날 이야기를 풀고자 1997년부터 문화재청과 경기도의 도
움을 받으며 1998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였다. 하여 온돌과 배수로, 저수조 등을 갖춘 건물터가
확인되었으며, '後部○兄'이라 쓰인 토기가 나와 고구려가 5~6세기에 쌓은 보루임이 명백해졌
다. 여기서 후부(後部)는 고구려 5부의 하나이며, '○兄'은 고구려 관등의 하나로 여겨진다.
고구려는 '형(兄)'자가 들어가는 관직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후 2007년에 다시 조사를 벌여 숨겨진 치성을 발견했고, 보루 형태와 성벽 축성 방식을 확
인하면서 복원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래서 구리시(4보루가 구리시 땅임)에서 2008년부터 복원
을 적극 추진하여 2년 동안 공을 들여 2010년 12월 24일 복원 준공식을 가졌다. 아차산 일대
보루 중 처음으로 복원된 행운의 보루인 것이다. (나중에 시루봉 보루도 복원되었음)

보루 복원을 위해 보루터에서 나온 오래된 성돌을 주로 사용했으나 수량이 달려 부득이 새 성
돌로 모자란 부분을 때웠다. 그러다보니 고색이 짙은 옛 돌과 하얀 피부의 새 돌이 어색하게
조화를 이룬다. 허나 이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발굴조사를 토대로 고구려 축성 양식에 맞춰
왕년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을 했고, 건물터와 온돌 유구 등은 보존을 위해 모두 땅으로 덮었
다. 그리고 보루 중앙 쪽에 탐방로를 내고, 건물터 쪽에는 금줄을 쳤으며, 보루 북쪽과 남쪽
에 보루로 오르는 계단을 냈다.

보루의 둘레는 약 249m, 성벽 높이는 최소 4m 이상이다. 허나 탐방객의 안전을 고려하여 2.5~
3.1m 높이로 축소 재현했다. 지형의 경사면을 이용해 바깥 쪽에 성벽을 쌓고, 안쪽 경사면에
는 뒷채움돌과 흙으로 다졌는데, 방어력을 높이고자 동,서,남,북에 5개의 치성(雉城, 치)을
두었다. 남쪽에는 이중치를 두었는데, 두 성벽 사이가 서로 떨어져 있어 보루 출입구로 여겨
지며, 고구려 축성 양식의 하나인 들여쌓기 형식이 잘 깃들여져 있다.


▲  아차산4보루의 독특한 구조물 남쪽 2중치

4보루 남쪽에는 2중 구조로 이루어진 독특한 치가 눈길을 끈다. 전체 길이 13.2m로 나무로 목
책(木柵)이 둘러진 중간에 2.5m의 뚫린 공간이 있어 이를 사이에 두고 남쪽과 북쪽 치로 구분
된다.
뚫린 공간에는 치의 성벽에 잇대어 4개의 후대 석축단이 축조되었고, 그 좌우로 목책을 세웠
는데, 아마도 보루의 출입구로 여겨진다. 이런 구조는 용마산2보루와 개발의 칼질에 이슬처럼
사라진 구의동(九宜洞)보루에서도 일부 확인되고 있어 고구려 보루의 독특한 구조를 보여주며
보루의 끝이 들여쌓기로 차곡차곡 쌓여져 있어 안정감을 준다.


▲  4보루로 올라가는 남쪽 계단

보루 내부에서는 건물터 7곳, 온돌 유구 2기, 배수로, 저수조 흔적, 치성 5곳이 발견되었다.
여기서는 항아리와 글씨가 새겨진 토기, 시루, 투구, 찰갑(가벼운 갑옷), 창, 도끼, 화살촉,
낫, 쇠스랑, 말에 물리는 재갈 등이 쏟아져 나와 인근 아차산3보루와 함께 아차산 일대 병참
기지로 추정된다.

▲  4보루 서남쪽 치

▲  4보루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

남쪽 계단을 통해 4보루로 올라서니 그런데로 너른 보루 내부가 펼쳐진다. 이곳에는 군사들이
머물던 숙소와 창고, 방어시설 등이 들어서 있었는데,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 형
님의 집요한 괴롭힘 앞에 모두 휩쓸려 사라지고 앙상하게 터만 남아 사람들의 상상력을 살찌
워준다.
이곳을 재현한 모형이 서울대박물관에 있으나 이 역시 100% 정답은 아니니 고구려 건축 양식
에 맞춰서 적당하게 4보루 내부가 어땠을지 상상해보기 바란다. 이것이 4보루가 우리에게 주
는 숙제이다.

건물터는 7개가 발견되었는데, 이중 1호 건물터가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해 있다. 여기서는 온
돌유구 2기와 주춧돌, 글씨가 새겨진 토기, 철제 투구 등이 나와 높은 사람이 머물던 곳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3호 건물터 밑에서는 'ㅡ'자형 온돌유구 2기가 나왔는데, 층위(層位)로 보
아 건물터보다 먼저 조성되었음이 밝혀졌으며, 이를 통해 4보루 내부 구조물이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보루를 먼저 쌓고 나중에 온돌과 내부 시설을 지었던 것이다.


▲  북쪽에서 바라본 4보루 1호 건물터

▲  한강을 향해 약간 튀어나온 4보루 동쪽 치

▲  4보루 내부 (북쪽 방향)

▲  4보루 내부 (남쪽 방향)

▲  4보루 저수시설
4보루에는 2개의 저수시설이 나왔다. 이들은 암반 흙을 파내고 바닥과 벽에
뻘을 발라 방수처리를 한 것으로 이들의 규모는 '430x300x깊이230cm',
'670x610x깊이 350cm'이다.

▲  4보루 1호 건물터 앞에서 바라본 한강과 강동구, 하남시 지역

4보루는 아차산 능선 높은 곳에 둥지를 틀고 있어 북쪽을 제외하고 조망이 제법 일품이다. 서
울 광진구와 성동구, 송파구, 강동구, 경기도 하남시, 구리시, 남양주시 지역이 속시원히 시
야에 들어오며 해돋이와 일몰을 모두 맞이할 수 있어 새해 해돋이 수요가 많다. 게다가 아차
산과 용마/망우산을 이어주는 매우 중요한 위치라 아차산 능선의 목구멍과 같은 곳이다.


▲  4보루 동북쪽 치
치 너머로 한강과 구리, 하남 지역이 바라보인다.

▲  4보루 동북쪽 치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①
한강과 구리암사대교, 강동구, 하남시 지역

▲  4보루 동북쪽 치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② 강동구, 송파구 지역

▲  4보루 동북쪽 치

▲  4보루 북쪽 치


▲  4보루 북쪽 치

* 아차산4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4동,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52-2


 

♠  아차산 산줄기 중간에 자리한 용마산(龍馬山)

▲  아차산에서 바라본 용마산

아차산4보루에서 북쪽 능선길을 10여 분 정도 가면 능선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서쪽은 용
마산, 북쪽은 망우산으로 이어지는데, 우리는 용마산 정상을 찍고 망우산으로 가기로 했다.

아차산과 망우산 사이에 자리한 용마산(348m)은 아차산의 일원으로 용마봉(龍馬峰), 장군봉(
將軍峯)이라 불리기도 한다. 봉우리가 커서 대봉(大峰)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으며, 아차산에
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봉우리로 아차산보다 50m 이상 키가 크다.
광진구와 중랑구(中浪區)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울 동부와 구리 지역을 훤히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일찌감치 고구려와 신라가 능선에 보루를 주렁주렁 달아놓았다. 지금까
지 발견된 보루는 7개로 1,2,4,5보루는 고구려, 3,6,7보루는 신라(新羅)가 세운 것으로 여겨
진다. 또한 아차산에서 시작된 아차산장성이 용마산을 거쳐 망우산까지 이어지는데, 군데군데
장성의 흔적이 아련히 남아있다.

용마산에는 아기와 용마의 짧막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데, 삼국시대에는 장사급 아이가 태어
나면 이유 불문하고 그 가족을 역적으로 죽이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그 시절
이곳에서 장사급 아기가 태어났는데, 집안 몰살을 두려워한 부모가 아기를 죽였다. 그러자 용
마봉에서 아기가 타고 다닐 용마(龍馬)가 나타나 다른 곳으로 갔다고 하며 (또는 죽었다고도
함) 그 연유로 용마산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
나 전설이며, 다른 곳에서도 이와 비슷한 전설이 여럿 전해오고 있어 아마도 무인(武人)을 차
별하던 고려 중기나 조선시대에 빚어진 전설이 아닐까 싶다.
또한 용마산과 아차산 서쪽 자락에는 왕실에서 운영하던 살곶이말목장이 있었는데, 용마급 말
이 많이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또는 용마가 나왔다고 해서) 용마산이라 했다는 이야기
도 덧붙여 전해온다. 그러니 후자가 맞을 듯 싶다.

* 용마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 중랑구 면목4동/면목7동


▲  헬기장이 되버린 용마산4보루 - 사적 455호

용마산 능선 갈림길에서 용마산 정상으로 가다보면 중간에 헬기장이 있다. 바로 이곳에 고구
려가 심어놓은 조그만 점, 4보루가 있었다.
용마산4보루는 성벽 둘레 약 228m로 동쪽 무덤 주변에서 회흑색(灰黑色) 연질토기와 대형 항
아리 조각, 대상파수편이, 북서쪽에서는 철제 화살촉 1개가 발견되었다. 동쪽 능선에 보루를
이루던 석축터가 일부 남아있고, 동쪽과 서쪽의 중간 지점인 저지대는 집수시설로 여겨진다.
1994년 구리문화원에서 조사했을 때는 동쪽과 서쪽을 별개 보루로 여겼으나, 2003년 서울시에
서 다시금 조사한 결과 하나의 보루로 확인되었다. 아직 전체적인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으
며, 하루 속히 주변을 싹 뒤집어 이곳에 숨겨진 구수한 옛날 이야기 보따리를 꺼냈으면 좋겠
다.


▲  용마산4보루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아차산(왼쪽 산)과 용마산 사이 움푹 들어간 골짜기는 긴고랑이다.
그 너머로 광진, 성동, 송파, 강남 지역이 훤히 시야에 잡힌다.

▲  시내를 향하고 있는 용마산 조망대

용마산4보루를 지나 가파른 길을 오르면 용마산 정상이다. 정상에서 남서쪽 길로 내려가면 서
울을 향해 고개를 쳐든 조망대가 있으니 꼭 가보기 바란다. 그곳의 조망 맛이 아주 일품이기
때문이다.
그 조망대는 정면이 확 트인 곳에 자리해 있어 마치 하늘에서 천하를 굽어보는 기분인데, 산
으로 막힌 동쪽을 제외하고 북쪽, 서쪽, 남서쪽이 훤히 시야에 들어오며, 눈 밑으로 천하 최
대의 대도시로 콧대로 높은 서울 시내가 납작하게 바라보인다. 여기서는 광진구와 성동, 중랑
, 동대문, 성북, 도봉, 중구, 송파, 강남, 서초, 동작, 용산구 지역과 남산, 도봉산, 북한산(
삼각산), 북악산(백악산), 관악산, 대모산, 남한산, 한강 등이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오며, 특
히 야경(夜景) 맛이 좋다.


▲  용마산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용마산 서남쪽 산줄기와 긴고랑을 비롯해 광진구, 송파구, 강남구,
관악산 등이 바라보인다.

▲  용마산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광진구, 중랑구, 동대문구, 강남구, 한강, 중랑천 등이 바라보인다.

▲  용마산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중랑구, 동대문구, 성북구, 도봉구, 북한산, 도봉산 등이 바라보인다.

▲  밋밋하게 솟은 용마산 돌탑 (아차산~망우산 주능선)
아차/용마산을 꾸미면서 새로 심은 돌탑으로 딱히 의미는 없다.

▲  용마산 돌탑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아차산 동쪽 자락과 구리암사대교, 한강, 하남시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용마산 조망대에서 다시 아차산~망우산 능선길로 나와서 북쪽으로 향했다. 헬기장을 지나 부
드럽게 이어진 능선길을 고집하면 돌탑 하나가 넉넉한 모습으로 마중을 하고, 그를 지나치면
얼마 안가 헬기장이 나오는데, 그곳에도 고구려가 뿌린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용마산5보루
이다.


▲  남쪽에서 바라본 용마산5보루 - 사적 455호

용마산5보루는 아차~망우산 주능선 해발 316m 고지에 자리해 있다. 동,서가 뻥 뚫려있는 곳으
로 서쪽으로 중랑천과 서울 동부 지역이, 동쪽으로는 한강과 구리 지역이 훤히 바라보여 조망
하나는 끝내준다. 그러니 고구려가 이곳에 보루를 세워 아차~용마~망우산 주변을 지켰던 것이
다.
성벽 둘레는 약 132m. 내부 면적은 약 936㎡ 정도의 조그만 보루로 보루 북동쪽 비탈면에 성
벽으로 여겨지는 석축 일부가 약간 드러나 있을 뿐, 흔적은 희미하다. 보루 북쪽에서 고구려
토기인 몸통긴항아리(회흑색 연질토기)가 깨진 채로 출토되었고, 물미로 추정되는 철제품도
발견되어 고구려 보루임이 분명해졌다. 석축과 상층부에 보루 건물터가 있을 것으로 여겨지나
이미 헬기장이 들어앉으면서 상당수가 파괴되었다.
1994년 구리문화원에서 조사하여 고구려 보루임을 확인했고, 2000년 서울대박물관에서 조사했
으며, 2003년 서울시에서 측량 조사를 하였다. 허나 이곳 역시 완전한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
은 상태라 언젠가 이 일대를 싹 뒤집고 조사를 해야 될 것이다.


▲  헬기장에 짓눌린 보루의 현실 - 용마산5보루
산 밑을 바라보며 위엄을 부렸던 보루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H'마크가 새겨진
헬기장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정말 세월무상 그 자체로다.

▲  용마산5보루에서 바라본 서울 중랑구와 광진구, 동대문구 지역

▲  용마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동쪽 천하
구리시 아천동과 구리암사대교, 한강, 강동구, 하남시 지역


 

♠  아차산 산줄기 북쪽에 자리한 망우산(忘憂山)

▲  용마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망우산

용마산5보루를 지나면 내리막길이 하염없이 펼쳐진다. 나무로 다져진 나무데크길이 잘 닦여져
있어 통행은 그리 어렵지는 않으나 경사가 좀 각박하고 계단이 많아서 이곳으로 오를 경우 숨
이 제대로 찰 것이다.
그 산길을 쑥 내려가면 용마산 북쪽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면목동 사
가정공원, 동쪽으로 내려가면 구리시 아치울마을과 시루봉, 북쪽 산길을 오르면 망우산이다.
우리는 망우산을 조금 둘러보고 사가정공원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망우산은 해발 281m로 아차산 산줄기의 북쪽을 이루고 있다. 아차산의 엄연한 일원으로 위치
상 망우산으로 불리고 있으며, 북쪽은 망우리고개까지 이어진다. 서울 시민들의 사후 안식처
로 그 유명한 망우리시립묘지(망우리 공동묘지)를 품고 있는 산이기도 하다. 현재는 묘지란
이름 대신 망우리공원으로 세탁되었다.

망우산에는 고구려가 심어놓은 보루 유적이 3곳 발견되었다. 허나 1보루만 간신히 흔적만 남
아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중환자 상태이다. 하여 1보루만 아차산보루군의 일원으로 사적 455
호의 지위를 부여했다. 다행히 그곳은 용마산 북쪽 갈림길에서 10분 정도 가면 된다.


▲  망우산 산길 (1보루 방면)

망우산에는 망우리시립묘지가 넓게 누워있다. 이곳이 졸지에 서울 시민들의 사후(死後) 공간
이 된 것은 왜정(倭政) 시절로 이태원(梨泰院)에 있던 공동묘지를 서울 시가지 확장을 위해
1933년 이곳으로 모두 옮겼다.
공동묘지를 옮긴 것까지는 그러려니 하겠는데, 심술 고약한 왜정이 굳이 망우산을 고른 이유
가 있었다. 바로 인근에 자리한 조선 최대의 왕릉(王陵) 밀집 구역 동구릉(東九陵)을 엿먹이
기 위함이었다. 동9릉은 망우산 동북쪽에 자리해 있는데, 동9릉과 한줄기로 이어진 망우산에
공동묘지를 써서 동9릉의 기를 누르려고 했다. 이는 왜정이 산마다 천박하게 말뚝을 박으며,
이 땅을 모욕한 것과 같은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무덤이 많이 조성되어 최대 3만 기 넘게 들어찼으나 이후 이장을 장려하면서
지금은 절반 이하로 크게 줄었다. 특히 이곳에는 독립운동가와 문학가, 정치인들도 적지 않
게 신세를 지고 있는데, 만해 한용운(韓龍雲)과 오세창(吳世昌), 안창호(安昌浩), 종두법으
로 유명한 지석영(池錫永)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사람이 꽤 있다. 안창호 선생 등 일부는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아직도 많은 20세기 초~중반 역사 인물들이 묻혀 있어 그들 무
덤을 찾아다니며 숨바꼭질을 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립묘지를 1바퀴 돌던 5.2km의 순환도로는 손질하여 1998년 5월에 '사색의 길'이란 그럴싸한
간판을 달았는데, 숲이 짙고 기운이 맑아 산책 명소로도 아주 좋으며, 늦가을 풍경이 특히 아
름답다. 단풍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사색의 길은 완전 동화 속의 풍경, 선경(仙境) 그 자체이
다.


▲  망우산1보루 - 사적 455호

망우산1보루는 망우산 남쪽 끝 봉우리(해발 280.3m)에 자리해 있다. 1994년 지표 조사에서 고
구려 토기편이 여럿 나와 고구려 보루로 여겨지며, 보루로 밝혀지기 훨씬 이전부터 헬기장과
군부대 시설, 묘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철저히 고통을 받았다. 그러다가 근래에 헬기장과 참호
를 없애고 보루가 있던 자리를 싹 정리하여 보루터 티를 조금이나마 내게 했다.
안내문이 없다면 그냥 지나쳐도 용서가 될 정도로 보루터 흔적은 딱히 없으며, 여기서 더 북
쪽으로 향하면 2보루와 3보루가 나온다. 허나 이들은 매우 심각한 상태라 문화재청에서도 현
재 손을 놓은 상태이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발굴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모두 갈아 엎어야 된다. 그래야 망우산 보루에 대한 진실이 나오기 때문이다.

* 망우산1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3,8동


▲  망우산1보루 옆구리를 지나는 탐방로
보루 보존을 위해 보루 아랫쪽과 윗쪽 옆구리에 탐방로를 냈다.

▲  망우산1보루에 둥지를 튼 조그만 무덤
후손들의 손길이 그쳤는지 무덤이 잡초에 완전 뒤덮여 주변과 동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나마 묘비와 상석(床石)이 있으니 망정이지 그들도
없었다면 이 무덤은 자연 속에 완전히 잊혀졌을 지도 모른다.


망우산1보루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8시가 되었다. 저녁 시장기가 한참 피어오를 시간이
된 것이다. 아차산역에서 시작된 아차산 답사로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치고 배도 고프다. 게
다가 햇님의 퇴근 시간 임박으로 여기서 곱게 길을 접고 용마산 북쪽 갈림길로 돌아왔다.

속세로 내려갈 때는 사가정공원으로 길을 잡았다. 중간에 용마제일약수터가 있는데, 아직은
적합 수준이라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 모금 마시며 갈증을 털어낸다. 산에서 약수터나
샘터만큼 반가운 존재가 없다.


▲  용마제일약수터

▲  사가정공원으로 내려가는 계곡길

용마제일약수터에서 계곡길을 따라 10분 정도 내려가면 망우산 서남쪽에 자리를 닦은 사가정
공원에 이른다. 공원을 지나면 시내의 모습이 더욱 짙게 다가오고 공원 입구인 용마한신아파
트 교차로에서 아차~용마~망우산 나들이의 끝을 맺었다.
이렇게 하여 고구려의 역사가 배인 현장, 아차~용마~망우산 가을 나들이는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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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12월 2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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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남쪽 지붕, 관악산 늦가을 나들이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 사당능선, 거북바위, 관음사]

 


' 늦가을 관악산 나들이 (낙성대역에서 관음사까지) '

관악산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  관악산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 관음사국기봉

▲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

▲  관음사국기봉

 


 

늦가을이 절정의 끝을 보이던 11월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와 관악산(冠岳山)을 찾았다. 관
악산이라고 해서 관악산 정상인 연주대(戀主臺)까지 올라간 것은 아니고 사당능선의 관음
사국기봉까지만 짧게 탔는데, 사당능선 북쪽에 숨겨진 봉천동 마애불 생각이 모락모락 피
어올라 오랜만의 그의 얼굴도 볼 겸, 간만에 관악산의 품을 찾았다. 봉천동마애불은 대학
교 재학 시절인 2004년에 2번 찾은 것이 끝이다.

오후 2시에 낙성대역(2호선)에서 후배를 만나 분식집에서 김밥과 만두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길을 재촉했다. 서울대로 들어가는 관악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인헌아파트까지 좀
편하게 가려고 했으나 밥을 먹는 사이에 그만 그 중요한 대중교통 환승할인시간이 초과되
고 말았다. 하여 편하게 갈 생각을 쿨하게 버리고 뚜벅뚜벅 걸었다. 어차피 걸으러 온 것
이니 1.6km를 더 걷는다고 해서 손해 볼 것은 없다.


 

 

♠  관악산 입문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

▲  수목이 빽빽하게 우거진 관악산 산길

인헌아파트는 낙성대와 서울대 호암교수회관 중간 산자락에 자리한 3동 규모의 조촐한 아파트
이다. 아파트의 이름인 인헌(仁憲)은 관악구 출신으로 귀주대첩의 영웅인 강감찬(姜邯贊)장군
의 시호로 이곳이 정녕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이 맞는지 고개가 절로 갸우뚱거릴 정도로 산
속에 묻혀있어 마치 외딴 산골 아파트 같은 분위기이다.

아파트 가게에서 음료수로 목을 축이고, 봉천동 마애불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를 따라 관악산
의 품으로 들어선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산길도 예전과 달리 조금 정비가 되었고, 마
애불을 알리는 이정표도 산길 입구에 세워져 있어 산꾼과 답사꾼의 길눈이 되어준다. 여기서
관악산 연주대까지는 대체로 1시간 40~50분 정도 걸리며, 마애불까지는 25~30분 정도이다.


▲  100m 고지에서 바라본 천하 (서울대 호암교수회관 주변과 관악구 지역)
이제 몇 걸음 시작한 상태라 보이는 범위는 매우 좁다. 첫술에 벌써부터
배가 부를 수는 없겠지.

▲  100m 고지에서 바라본 천하 (인헌동과 사당동, 강남 지역)

▲  울퉁불퉁 산길
마애불로 인도하는 산길은 상당수 느긋한 수준이다. 가끔 흥분한 산길도 튀어나와
숨을 헐떡이게 하지만 그렇게 염려할 정도까지는 되지 않는다.

▲  솔내음이 나래를 펼치는 관악산의 푹신한 산줄기

▲  200m 고지에서 바라본 천하 (서울대와 삼성산, 호암산 줄기)
하늘과 불과 100m 가까워졌을 뿐인데, 조망의 품질은 그만큼 높아졌다.

▲  봉천동 마애불 남쪽에 자리한 상봉약수터 쉼터

인헌아파트에서 25~30분 정도 오르면 250m 고지에 자리한 상봉약수터가 모습을 드러낸다. 약
수터 주변에는 온갖 운동 시설과 의자가 놓여져 있어 잠시 몸을 풀며 쉬어가기에 좋다 산속의
아늑한 쉼터로 인근 낙성대동과 인헌동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속세에 지친 심신을 달랜다.
약수터는 원래 봉천동 마애불을 품은 바위 남쪽에 있었으나 이번에 와보니 샘터가 서남쪽으로
옮겨졌다. 아마도 수맥의 문제가 있어서 그런 듯 싶으며, 샘터 주변에 천막을 설치했다. 허나
가는 날이 문닫는 날이라고 약수는 붉은 색의 부적합 판정 도장을 받은 상태.. 거기다가 늦가
을 가뭄으로 물도 말라버려 도저히 물을 마실 수가 없었다. 물이 풍부하게 나오고 수질만 보
장이 되었다면 전혀 나무랄 데가 없는 100점짜리 안식처가 되었을텐데 그 점이 참 아쉽다. 이
러다가 이 약수터도 영영 목숨이 끊기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  물이 말라버린 상봉약수터

▲  상봉약수터에서 마애불로 가는 산길

상봉약수터까지 왔다면 봉천동 마애불은 다 온 것이다. 약수터 북쪽에는 큰 바위가 누워있는
데 그 서쪽 옆구리로 가늘게 이어진 산길이 있다. (찾기는 쉬움) 바위를 오른쪽에 바짝 두고
산길을 조금 더듬으면 검은 피부의 문화유산 안내문과 봉천동 마애불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  봉천동 마애불의 거처

▲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磨崖彌勒佛坐像)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9호

활활 타오르는 불 모양으로 서울을 굽어보는 관악산, 그 북쪽 산자락에 관악산의 은자(隱者)
인 봉천동 마애미륵불이 살짝 깃들여져 있다. 상봉약수터 북쪽에 있는 아주 큰 바위 서쪽 면
에 조용히 자리한 그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서울의 100년 이상 묵은 8개의 마애불(磨崖
佛) 가운데 유일하게 한강 이남에 있다.
이곳은 첩첩한 산주름 속으로 접근성이 영 좋지가 않고, 산길을 기본으로 30분 정도 타야 된
다. 다행히 산길은 느긋한 수준이라 그나마 다행인데 외딴 곳에 있다보니 인지도도 밑바닥이
라 그야말로 아는 사람만 살짝 찾아오는 숨겨진 명소이다.

2004년에 2번 인연을 지은 이후 10여 년 만에 방문으로 그새 나는 그만큼 나이가 누적되었으
나 마애불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니 그의 정정함이 부러울 따름이
다. 그가 이토록 정정한 것은 자리가 좋기 때문일 것이다. 겨울에는 추운 바람과 눈을, 여름
에는 비를 피하기가 좋으며, 서쪽에서 뜨는 햇님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기에 좋다.

이 마애불은 1630년에 박산회(朴山會)란 사람의 시주(施主)로 조성되었다. 아주 고맙게도 마
애불 옆구리에 조성 관련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그의 정보를 소상히 알 수가 있는데, 명
문에는 '彌勒尊佛 崇禎三年 庚午四月日 大施主 朴山會'라 쓰여 있다. 이를 통해 마애불의 정
체가 미륵불이며, 1630년(숭정 3년) 경오년 4월 박산회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렇게 1630년이라는 절대 연대(年代)를 가지고 있어 조선 중기 불상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어
주며, 17세기 마애불을 대표하는 존재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만약 명문이 없었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지금보다 한참이나 깎였을 것이다. 

대시주 박산회가 어떤 인물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름 앞에 관직이나 작위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평민이나 양반으로 여겨지며, 멀리갈 것도 없이 관악산 밑 금천(衿川) 고을에 살던 사람
으로 파악된다. 그러니까 관악산 외딴 산골에 마애불을 지었을 것이다.

마애불이 의지하고 있는 바위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백성들의 산악신앙(山岳信
仰)의 현장으로 쓰였던 듯 싶다. 마애불은 아
무 바위에나 만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마애불의 정체가 미륵불이라 미륵신앙(彌
勒信仰)이 그 시절 백성들 사이에서 적지 않게
유행하고 있었음을 살짝 귀뜀해준다.
당시 무능했던 인조(仁祖)와 서인(西人)패거리
의 잘못된 국정(國政)과 대외정책으로 나라가
아주 어지럽던 시절이라 이렇게 미륵불을 짓고
자신과 집안의 안녕을 빌며 의지했던 것이다.



   ◀
  미륵불 옆에 선명하게 새겨진 명문


▲  고독을 즐기는 봉천동 마애불

마애불은 바위에 선각(線刻)으로 새겨져 있는데, 머리 스타일은 민머리로 상투 모양의 무견정
상(無見頂相)이 아주 낮게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길고 갸름한 편으로 표정이 썩 밝아보이지
는 않는다. 당시 백성들의 원망이 담겨진 탓일까? 아니면 고독하고 적적한 삶에 지쳐서일까? 그런 얼굴에는 눈썹과 눈, 코, 입이 새겨져 있으며, 입술이 좀 두껍다. 그리고 두 귀는 어깨
까지 축 늘어져 중생들의 소리를 듣는다.
둥글게 깎인 어깨는 작은 편으로 가슴 위를 훤히 드러내고 있는데, 두 가슴이 크게 쳐진 모습
이다. 미륵불은 분명 남자로 알고 있는데, 여기서는 여자인 것일까? 표정도 가만 보면 나이도
제법 깃든 비구니처럼 보이기도 한다. 몸을 감싸고 있는 옷은 어깨와 가슴 아래, 다리를 덮고
있으며, 얼굴 뒤에는 2겹으로 된 두광(頭光)이, 몸통 뒤에는 신광(身光)이 동그란 선을 보이
며 그를 비춘다. 불상 밑에는 연꽃이 새겨진 대좌(臺座)가 묘사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신체 비율도 거의 맞아 떨어지고, 조각 수법도 제법 뛰어나 적지 않은 감동
을 선사한다. 국가 보물로 삼아도 손색이 전혀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허나 미륵불은 그런 시
시콜콜한 속세의 일에는 관심이 전혀 없을 것이다. 56.7억년 이후에 온다는 자신이 중심이 되
는 미륵세계를 어떻게 구상할까 머리와 마음 속에는 온통 그 생각 뿐이니 말이다.

미륵불이 너무 외진 곳에 있어 그의 신상이 적지 않게 염려가 된다. 불온한 자들이 마음만 먹
으면 무슨 짓을 벌이기에 좋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처럼 흉흉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이곳까지 전기를 가져와 CCTV를 달기도 어려울 것이고 참 난감하다. 그저 상봉약수터를 자주
찾는 사람과 마애불 단골 고객들, 그리고 달과 별이 지킴이가 되어 잘 지켜주기를 바랄 수 밖
에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산4-9


▲  봉천동 마애불에서 바라본 천하 (서울대와 관악구 지역)
속세의 소리가 소슬바람을 타고 이곳까지 살며시 날라온다.


마애불 앞에는 절을 할 수 있는 조촐한 공간이 있다. 돌바닥이 약간 경사가 있을 뿐, 절을 하
는 데는 그리 무리는 없으며, 성인 3명 정도 앉으면 자리가 거의 꽉 찬다. 그 앞에는 낮은 벼
랑과 바위가 있으며, 그 바위에 발을 딛으면 서울대와 낙성대 등 관악구 지역이 훤히 바라보
여 조망도 제법 괜찮다.
봉천동 마애불과 오랜만에 상봉의 인사를 나누며 10분 정도 머물다가 언제가 될 지 모를 다음
인연을 기약하며 그를 떠났다. 내가 있어야 될 곳은 이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스쳐
가는 수많은 존재의 하나일 뿐이며, 그도 나에게는 이번 나들이의 엄연한 중간 경유지일 뿐이
다.

상봉약수터에서 7~8분 정도 오르면 사당능선 능선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능선을 타고 남쪽으
로 1시간 정도 오르면 관악산 연주대, 북쪽 능선으로 가면 사당역으로 이어진다. 저만치 아른
거리는 연주대의 뒷통수를 보니 순간 '연주대까지 확 질러버릴까' 싶은 마음이 불끈 솟아올랐
지만, 시간도 어느덧 16시가 넘어 괜히 무리해서 좋을 것도 없다.


▲  능선3거리에서 바라본 천하 (관악구와 영등포구 지역)
능선3거리 북쪽에는 목재로 지어진 전망대가 있다. 이곳은 360m 고지라 앞서 봉천동
마애불보다 조망의 질감이 높다. 하늘과 100m나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  가까이에 보이는 선유천국기봉


 

 

♠  관악산 선유천국기봉, 관음사국기봉

▲  선유천국기봉 헬리포트 (헬기 착륙장)

능선3거리에서 2분 정도 가면 'H'마크가 새겨진 헬기장이 나온다. 여기서 잠시 능선길을 버리
고 북쪽 숲길로 가면 우리의 국기, 태극기가 펄럭이는 선유천국기봉이 모습을 비춘다.
이 봉우리는 해발 약 330m로 육중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관악산과 삼성산(三聖山), 호암
산(虎巖山) 일대에 태극기가 심어진 13개의 국기봉이 있다. 국기봉이란 이름은 태극기가 있어
서 비롯된 것이다.
왜 관악산과 삼성산에 태극기를 지닌 국기봉이 이렇게 많은지 궁금할 따름인데, 이유가 어찌
됐든 평소 잊고 살던 태극기를 산에서 보니 하늘님이 내린 신성한 깃발 마냥 엄숙하게 다가와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  태극기를 휘날리는 선유천국기봉

태극기는 이 좁은 땅에서만 휘날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국기가 분명하다. 이 땅을 넘어서 모
든 천하에 꽂힐 그날을 막연히 염원해본다. 미국 화이트하우스, 영국 버킹엄 궁전, 중원대륙
북경 자금성(紫禁城), 러시아 붉은광장에 그들의 꼬질꼬질한 토종 국기 대신 태극기가 휘날리
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참 마음이 흐뭇해진다. 허나 현실은 시궁창...


▲  바람 잘 날 없이 늘 분주하게 펄럭이는 선유천국기봉 태극기의 위엄

▲  선유천국기봉에서 바라본 관악산
사진 중앙에 관악산 정상인 연주대의 뒷통수가 바라보인다.

▲  관악산 사당능선 (관음사국기봉)

▲  선유천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① (서울대와 관악구 지역)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드센 서울이 눈 밑에 내려앉았네~~~
학의 등에 올라탄 듯, 조망이 제법 명품이다.

▲  선유천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②
관악구(봉천동, 신림동)와 동작구, 영등포구 지역

▲  선유천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③
봉천동과 사당동, 관악구, 동작구, 서초구, 강남구와 한강 너머로 남산,
마포구, 성동구, 북한산(삼각산), 아차산 줄기까지 시야에 잡힌다.

▲  선유천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④
사당능선과 사당동과 남현동, 서초구, 강남구, 송파구, 성동구, 광진구,
아차산~용마산 줄기가 흔쾌히 바라보인다.

▲  선유천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⑤
관악산 동부와 서울경마공원 주변, 청계산(淸溪山, 618m) 산줄기

▲  선유천국기봉 동쪽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관악구와 동작구는 물론 한강 너머로 남산과 서울도심, 북한산이 바라보인다.

▲  바위로 아기자기하게 이루어진 사당능선
경사가 좀 있어서 그렇지 산길은 잘 정비되어 있어 오가기는 편하다.

▲  거북바위
사당능선에 걸터앉아 서울을 바라보며 자리한 탓에 선유천국기봉 못지 않게
조망이 매우 뛰어나다.

▲  거북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1)
봉천동과 사당동, 동작구, 용산구, 남산과 도심 지역

▲  거북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2)
방배동 전원마을과 우면산(牛眠山, 293m)을 중심으로 서초구와 강남구,
우면지구(오른쪽), 대모산 산줄기 등이 시야에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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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북바위 옆에서 바라본 천하 (3)
관악산 동부와 남태령, 서울경마공원 주변, 청계산(淸溪山, 618m)

▲  속세와 하늘을 이어주는 계단일까? 사당능선 철계단

유천과 관음사국기봉 구간은 바위와 벼랑이 즐비한 까칠한 구간이다. 하여 산꾼의 편의를
위한답시고 철계단을 많이 깔았는데, 위에서 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까마득하게 보이고 밑
에서 보면 마치 하늘과 이어진 계단처럼 장대하게 보인다. 계단은 2명이 지날 정도의 폭으로
계단 밑은 구멍이 쏭쏭 뚫린 철판이라 계단 밑 땅바닥이 정말 아찔하게 보인다. 계단과 땅바
닥이 그리 가까운 편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강심장이라고 해도 염통이 은근히 쫄깃해질 것
이다.


▲  서울을 향해 고개를 내민 관음사국기봉

▲  서울을 향해 고개를 내민 관음사국기봉 전망대

철계단을 내려가면 바로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가 나타나면서 잠시나마 오르막길이 꿈틀거린
다. 그 바위를 오르면 나무로 지어진 관음사국기봉 전망대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관악산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한 최전방 봉우리로 서울시내에 아주 가깝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하여 바로
밑으로 서울시내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조망이 제법 휼륭하다.


▲  관음사국기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1)
관악산 북쪽 자락과 서울대, 낙성대, 관악구 지역

▲  관음사국기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2)
봉천동과 사당동, 관악구, 동작구 지역

▲  관음사국기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3)
관악산의 힘찬 기운은 시내까지 파고들어가 관악구와 동작구의 경계를 그으며
까치산근린공원, 상도동 살피재를 지나 국립현충원과 노량진까지 이어진다.

▲  관음사국기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4)
봉천동과 사당동, 동작구, 서초구, 한강, 남산, 북악산과 북한산(삼각산) 산줄기

▲  관음사국기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5)
사당동과 방배동, 서초구, 강남구, 송파구와 광진구, 아차산 산줄기

▲  오늘도 바쁘게 펄럭이는 관음사국기봉 태극기

관음사국기봉 전망대에서 속세로 내려가는 길은 거의 벼랑에 가까운 수준이다. 그래서 철계단
을 밑으로 늘어뜨렸는데, 그 중간에 바위에 뿌리를 내린 태극기가 서울을 향해 부지런히 휘날
리고 있어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게 한다. 태극기 밑으로 바위를 타고 오가는 지름길이 있으
나 다소 위험하므로 우회길을 이용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  관음사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1)
(관악구, 동작구, 영등포구 지역)

▲  관음사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2)
(사당동과 동작구, 강남구, 서초구, 용산구, 남산, 북한산 산줄기)

▲  관음사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3)
(서초구와 강남구, 송파구, 강동구, 광진구, 아차산 산줄기)


시나마 가까워졌던 하늘을 등지며 관음사국기봉을 내려가면 흥분했던 산길은 진정을 되찾는
다. 단단하고 자잘한 돌이 많던 산길의 시대는 가고 조금은 촉감이 부드러운 흙길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래도 흥분한 구간이 여럿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관음사까지 방심은 금물이다. 산이
란 자신을 만만하게 대하는 사람에게는 무척 까칠하게 굴기 때문이다.

산길을 직진하면 남현동(南峴洞) 흥화브라운빌아파트로 이어지는데, 관음사로 가려면 동쪽 산
길로 꺾어야 된다. 중간에 체육시설이 여럿 설치된 쉼터가 나오고, 여기서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관음사가 조그만 점처럼 모습을 비춘다. 그렇게 그를 향해 내려가면 절은 그만큼 정비
례로 커져 보이며, 절의 옆구리로 우리를 인도한다.


▲  관음사로 인도하는 산길
속세는 아직도 늦가을의 기운이 완연한데, 산속은 벌써부터 겨울 제국(帝國)의
마수가 심술을 부린다. 벌거숭이가 된 나무가 도처에 보이고, 귀를 접고
누운 낙엽은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하며, 화려한 윤회를 꿈꾼다.


 

 

♠  관악산 동북쪽 자락에 안긴 오래된 관음도량
관악산 관음사(觀音寺)

관악산 남쪽 청계산 북쪽에 절집이 우뚝하여 긴 숲을 눌렀다.
밤비에 고함을 지르니 주린 호랑이가 부르짖는 듯하고
해돋이에 조잘거리니 그윽한 새가 우는 듯하다.
구름이 창밑에서 나니 담장이 덩굴이 얽히고
길이 돌 모퉁이로 소나무, 회나무 우거졌도다.
멀리 생각하건대 혜사(惠師)는 응당 잘 있을 것이고
산 가운데서 밤마다 꿈에 서로 찾는다.

변계량(卞季良)의 '관음사 절경'


관악산 동북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닦은 관음사는 절 이름 그대로 관세음보살을 내세운 관
음도량(觀音道場)이다. '남태령 관음사','승방골 관음사'라 불리기도 하며, 절을 끼고 흐르는
계곡을 절골이라 부른다.

관음사는 895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고자 비보사찰(裨補寺刹)로
세웠다고 전한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이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이 전혀 없으며, 조선 초에 활
약햤던 변계량(1369~1430)이 지은 '관음사 절경'이란 시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
覽)에 전해오고 있어 절이 우후죽순 생겨나던 고려 때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18세기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와 '가람고(伽藍考)','여지도서(與地圖書)' 등에 관음사가
잠깐 소개되어 있고 1977년 극락전(極樂殿)을 해체하면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는 1716년
4월 21일 극락전을 개축했음을 밝혀주고 있다. 그리고 절 밑에 승방벌(승방뜰)이란 일종의 사
하촌(寺下村)이 있어 절의 규모가 제법 컸음을 가늠케 한다.

1863년 8월 철종(哲宗)의 장인인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 김문근(金汶根)의 시주로 절을 정비
했으며, 1883년 봉은사 승려들이 절을 중수했다고 전하나 확실치는 않다. 1924년 승려 석주(
石洲)가 주지로 부임하여 신도들의 시주로 큰방 10칸을 지었고, 1925년 요사를 지었다. 뒤를
이은 주지 태선(泰善)은 1929년에 칠성각, 1930년에 산신각을 짓고, 1932년에 용화전을 세웠
으며, 1942년 극락전을 보수했다.
허나 1950년 이후, 조계종과 태고종(太古宗)간의 재산소유권 분쟁으로 10여 년 간 지루한 송
사에 휘말리게 된다. 승려들이 속세(俗世) 정화와 중생 구제 등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지 않고
종교의 탈을 쓰며 보기 흉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동안 건물은 황폐화되고, 절은 거의 문 닫
기 직전까지 이른 것이다.

대법원이 조계종의 손을 들어주면서 간신히 절의 목을 조르던 재산 다툼이 끝나자 1973년 진
산당 박종하(晉山堂 朴宗夏)가 주지로 부임해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벌였다. 허나 절의 부지가
국유지와 시유지(市有地), 사유지가 뒤섞이면서 소유권 분쟁이 발생했고, 거기다 개발제한구
역과 여러 가지 규제까지 발목을 잡으면서 중창의 길은 거의 쉽지가 않았다.
그런 시련을 간신히 극복하며 1977년 대웅전을 새로 지었고, 1980년대에 범종각을 지었으며, 삼성각과 용왕각을 크게 보수했다. 그리고 1992년 대웅전 밑에 지하 강당과 법당을 만들어 1
천불을 봉안하고, 1997년에는 명부전과 요사, 9층석탑을 지었다. 2001년에는 요사채를 신축하
고 용왕각 부근 지하 150m에서 수맥(水脈)을 찾으면서 그들을 끌여와 석조를 마련했다.
2002년에는 미타전과 관세음보살입상을 만들어 관음도량의 면모를 갖추었고, 2007년 4월 일주
문을 세움으로써 34년에 걸친 중창불사는 그런데로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재단법인 불교방
송이 경내에 '불교방송개국기념대탑(불교방송대탑)'을 조성하면서 절의 명성을 드높였다.

절의 규모는 거의 조촐한 수준으로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위시하여 명부전과 용왕각, 삼성각
, 요사 등 약 9~10동의 건물이 경내를 메우고 있으며, 오랜 내력에 비해 고색의 내음은 맡기
가 힘들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파도가 관음사의 고색을 죄다 앗아갔기 때문이다. 소장문화유
산으로는 지방문화재인 석조보살좌상이 있으며, 그것이 경내에서 가장 늙은 보물이다.

시내와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로 사당역에서 걸어서 20분 정도면 충분히 닿는다. 사당역을 기
점으로 관악산을 오를 경우 반드시 지나쳐야 되는 곳이며, 시내와 지척이지만 숲속에 단단히
묻혀있어 산사의 분위기도 그윽하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 519-3 (승방1길 109-80 ☎ 02-582-8609)


▲  관음사 경내 (왼쪽이 불교방송대탑)
불교방송대탑은 1997년 불교방송국 기념대탑으로 세운 것으로
높이는 거의 15m에 달한다.

▲  명부전(冥府殿)과 요사

경내 동쪽에 자리한 명부전은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
을 비롯한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를 머금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
작지붕 건물로 1997년에 지어졌으며, 우측 옆구리에는 요사 1채를 익랑(翼廊)처럼 거느리고
있다. 그리고 건물 뒷쪽에는 대나무밭이 우거져 있는데, 중간중간에 조그만 석불이 자리를 폈
다.


▲  명부전 불단 - 온후한 표정을 지은 지장보살좌상과 저승의 식구들

▲  삼성각(三聖閣)

명부전과 대웅전 사이에 자리한 삼성각은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이다.
이 건물은 1929년에 태선이 칠성각으로 지은 것으로 1989년 삼성각으로 개축하여 관음사에서
그나마 가장 오래된 건물로 꼽힌다. 1988년에 조성된 칠성탱 앞에 16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관음사의 유일한 문화유산인 석조보살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21호)이 있으나 그
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해 지나치고 말았다.


▲  용왕각(龍王閣)과 둥그런 석조(石槽)

성각 뒤쪽에 자리한 용왕각은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아주 단출한 맞배지붕 건물이
다. 이 집은 용왕(龍王)을 봉안하고 있는데, 바다와 강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전혀 연관
성이 없어 보이는 용왕의 거처를 둔 점이 매우 특이하다. 바로 옆에 조그만 계곡이 흐르고 있
고, 앞에는 관음사의 목을 축여주는 석조가 있으니 용왕을 배려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물은 모두 용왕의 관리 대상이기 때문이다.
용왕각은 1930년에 태선이 슬레이트로 지은 것으로 1989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개조했으며, 내
부에는 1989년애 조성된 용왕탱과 비천상 1쌍이 자리를 메운다.

용왕각 앞에 자리한 석조는 관악산이 중생들에게 베푼 조촐한 선물이다. 이곳에서는 그를 수
각(水閣)이라 부르며 대우를 하고 있는데, 하늘을 향해 어여쁜 잎을 펼쳐 보인 연꽃이 새겨진
연화석조로 진짜 꽃을 보듯 아름답다. 석조 위에는 귀여움이 묻어난 동자승이 두 손으로 거북
이를 들고 있는데, 거북이는 관악산의 옥계수를 졸졸졸 뿜어낸다. 이들 석조는 2001년에 지하
150m 지점에서 수맥을 발견하면서 닦은 것이다.


▲  관음사의 이름값을 하는 아름다운 관세음보살입상

삼성각과 대웅전 사이에는 하얀 피부의 관세음보살입상이 자리해 있다. 연화대좌 위에 부드럽
게 서 있는 그는 2002년에 관음도량의 품격을 갖추고자 장만한 것으로 자태도 곱고, 조각 솜
씨도 걸작이라 1번 보고, 2번 보고, 자꾸만 보게 된다. 왼손에는 감로수(甘露水)가 든 정병(
政柄)을 들고 시무외인의 제스쳐를 취했다.


▲  관음사 대웅전(大雄殿)

관세음보살입상 좌측에는 이곳의 법당인 대웅전이 앉아있다. 이곳에는 원래 1942년에 지어진
극락전이 있었으나1977년에 밀어버리고 지금의 대웅전을 앉혔다. 그때 1716년에 극락전을 개
축했다는 상량문이 튀어나와 조선 후기에도 그런데로 법등(法燈)을 꾸렸음을 밝혀주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관음사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불단에는 금
동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3존불 뒤에 1990년에 조성된 석가모니후불탱이 걸려 있는데,
붉은 면바탕에 금니로 초를 내고 부분 채색한 그림으로 매우 생소한 형태이다. 건물 좌측 영
단(靈壇)에는 1974년에 만들어진 조그만 범종이 자리해 있다.


▲  추억의 덤블링
관음사는 지하 강당에 어린이유치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그 뜨락에 어린 시절 많이
봐왔던 정겨운 덤블링을 두어 잠시나마 어린 시절의 향수로 인도한다.

▲  웃음삼매에 빠진 관음대장군/여장군 장승
지하대장군/여장군을 칭한 장승은 많이 보았지만 관음을 칭한 장승은 처음이다.
관음사가 관음도량을 칭하다보니 장승까지도 관음이란 이름을 단 모양이다.


늦가을이 깃든 관음사에서는 약 20분 정도 머물렀다. 이곳은 예전에 여러 번 인연이 있고 구
미가 확 당길만한 유혹거리가 딱히 없다. 게다가 햇님도 퇴근 직전이라 서둘러 속세 귀환을
종용한다.

절을 뒤로하고 속세로 향하면 각박한 경사의 내리막길이 펼쳐진다. 허나 내려가는 것이기 때
문에 눈과 얼음이 없는 이상은 별 무리는 없다. 길 옆에는 새하얀 석등이 주차장까지 이어지
는데, 석등의 모습이 왜열도 양식과 좀 비슷하여 모습 전환이 필요해 보인다. 석등 중간에는
관음대장군과 여장군을 칭한 장승 1쌍이 뻐드렁니를 시원스레 드러내며 해맑은 표정으로 중생
을 환송한다.


▲  관음사 일주문(一柱門)

주차장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관음사의 정문인 일주문이 나온다. 이 문은 2007년에 새로 지어
진 것으로 높이가 상당하여 매우 장엄하게 다가온다. 허나 그 중요한 고색의 향기가 우러나오
질 않으니 나에게는 별로 감흥이 없다.

일주문을 지나면 절골이라 불리는 관음사계곡이 오른쪽에 모습을 드러낸다. 늦가을 가뭄 탓에
물이 넝실거리던 관음사 석조와 달리 계곡은 거의 타들어간 상태이다. 그런 계곡을 따라 5분
정도 내려가면 남현동 주택가이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관악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
다.


▲  관악산을 뒤로하며 다시 속세로 나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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