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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3.28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강원도의 깊은 내륙, 양구 방산면 나들이 <수입천, 직연폭포, 양구백자박물관>
  2. 2021.10.31 강원도의 깊은 내륙이자 한반도의 배꼽, 양구 나들이 (양구근현대사박물관, 양구선사박물관, 파로호인공습지, 한반도섬)
  3. 2021.10.20 우리나라 수돗물의 탄생지, 성수동 수도박물관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
  4. 2020.03.20 삼일절과 6월이면 생각나는 그 사람, 예산 윤봉길의사 유적 나들이 (저한당, 도중도, 충의사, 보부상유품전시관)
  5. 2019.12.30 본인 제작 여행답사기 모음집 (2019년 12월 30일 기준)
  6. 2019.02.15 세계 구석기시대 유적의 대표 성지, 연천 전곡리선사유적지 ~~ (전곡선사박물관, 연천 구석기 겨울여행축제)
  7. 2018.01.30 경기도 안양의 상큼한 꿀단지를 거닐다 ~ 삼성산 안양예술공원, 김중업 건축박물관, 안양사지 겨울 나들이 (석수동 마애종, 안양사)
  8. 2017.09.27 목포의 오랜 상징을 거닐다. 유달산~갓바위 나들이 (노적봉, 목포시사, 달성사, 국립해양유물전시관)
  9. 2014.10.06 서울 도심의 좌청룡을 거닐다 ~ 낙산 가을산책 (이화마을, 낙산공원, 한양도성)
  10. 2014.02.12 눈꽃의 향연 속으로 ~ 태백산 눈꽃 나들이 (당골, 눈꽃축제장, 석탄박물관)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강원도의 깊은 내륙, 양구 방산면 나들이 <수입천, 직연폭포, 양구백자박물관>

양구 직연폭포, 백자박물관



' 강원도 양구 여름 나들이 '
(직연폭포, 양구 백자박물관)
양구 직연폭포
▲  양구 직연폭포
 



 

여름이 점점 깊어가던 6월의 끝 무렵, 한반도의 정중앙이자 배꼽을 자처하는 강원도 양구
(楊口) 땅을 찾았다.

양구는 거의 9년 만에 방문으로 이번이 4번째 인연인데, 양구읍내 북쪽에 있는 '양구근현
대사박물관'과 '양구 선사박물관', 선사박물관의 깜찍한 마스코트인 '가오작리 선돌', 파
로호 상류에 떠있는 '한반도섬' 등을 간만에 복습했다. 이들은 거의 한곳에 몰려 있어 한
덩어리로 같이 둘러보면 편하다. (☞ 관련글 보러가기)

그들을 모두 둘러보고 양구 읍내로 나오니 어느덧 15시, 점점 흥분이 더해가는 여름 제국
의 기운과 10km에 가까운 행군으로 몸은 다소 지쳐 있었다. 읍내 다음으로 방산면 지역의
직연폭포와 백자박물관을 정처(定處)로 두고 있었으나 날도 덥고 피곤도 하려니와 하루에
너무 많은 것을 봐버리면 내 침침한 두 망막이 과부하(?)가 걸릴 것 같아서 마음을 싹 비
우고 철수하려고 했다.
그래서 양구시외터미널로 들어가 양구를 뜰 궁리를 하던 찰라, 방산(오미리)으로 가는 군
내버스가 나타나 나의 그런 태만에 빵빵 제동을 건다.
'그래! 오늘 죽더라도 방산면과 인연을 짓자' 마음을 고쳐먹고 그 버스에 올라 미답(未踏
)의 공간인 방산면으로 이동했다.

방산면(方山面)은 양구 지역의 서북부를 이루고 있는 고장으로 읍내에서 방산면 중심지인
현리까지 30여 분 정도 걸린다. 서쪽은 남북분단이 빚은 어이없는 작품, 평화의댐에 이르
고 북쪽은 미움의 선, 휴전선으로 막힌 외로운 곳으로 두타연(頭陀淵)이 있는 고방산리까
지는 오로지 북만 보고 달리다가 거기서부터 급격히 서남쪽으로 길이 꺾인다.

방산면사무소(현리)에서 내려 남쪽으로 가면 방산면의 대지를 적시며 파로호로 흐르는 수
입천(水入川)이 마중을 한다. 수입천은 휴전선 이북에 강제로 잡힌 수입면 청송령(靑松嶺
)에서 발원한 34.8km의 하천으로 두타연과 직연폭포 등의 걸출한 명승지를 간직하고 있으
며, 수질 또한 전방 지역의 특수로 인해 청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  칠전1교에서 바라본 수입천 (서쪽 방향)
방산면의 중심지인 현리 마을 남쪽을 굽이쳐 북한강으로 흘러간다.

▲  칠전교에서 바라본 칠전1교와 수입천 (서쪽 방향)

▲  칠전교에서 바라본 직연폭포 방향
멀리 보이는 다리 밑에 나를 이곳으로 부른 직연폭포가 누워 있다. 물이 얼마나
맑은지 주변 나무는 물론이고 하늘과 구름, 달까지 그를 거울로 삼으며
매뭇새를 다듬는다.



 

♠  수입천이 빚은 대작품, 직연폭포(直淵瀑布)

▲  직연폭포로 인도하는 수입천 산책로

칠전교에서 수입천 산책로를 따라 동쪽으로 조금 가면 귀신이 놀라 도망칠 정도로 소리가 요
란한 직연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금강산(金剛山) 밑에서 발원한 수입천이 두타연을 거쳐 흐르다가 바위가 팽팽하게 들어선 이
곳에서 격한 흥분을 보이며 빚은 폭포로 동면 팔랑폭포(八郞瀑布, ☞ 관련글 보기)와 더불어
양구 지역을 대표하는 자연산 폭포이다.
팔랑폭포처럼 높이는 낮은 편이나 폭포 주위로 주름진 암벽들이 기묘하게 펼쳐져 있어 마치
조그만 대협곡을 보는 듯 하며, 폭포수가 고인 못은 깊이가 무려 20m가 넘어 많은 물고기가
살아가고 있다. 예전에는 물이 바로 떨어지는 못이란 뜻의' 직소(直沼)폭포'라 불렸으나 19세
기에 양구현감을 지냈던 '김구현'이 이곳을 다녀가면서 '직연(直淵)'으로 이름을 갈고 인근
바위 피부에 '직연' 바위글씨를 남겼다. (그 글씨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남아있지 않음)

암벽 한복판에서 요란하게 몸을 푸는 직연폭포에는 옛 사람들이 달아놓은 그럴싸한 전설이 있
을 법도 하지만 딱히 마땅한 전설은 없다. 다만 1922년 폭포 부근 칠전리에 살던 '김왈용'이
란 사람의 6개월 된 송아지가 직연에 빠져 죽은 일이 있었는데, 3자 이상이나 되는 메기들이
그 몸뚱이를 먹어치웠다는 소름 돋는 일화가 1토막 전해온다. 1자의 크기가 30cm 정도이니 대
략 90~100cm 정도 되는 메기들이 소고기 회식을 즐긴 것이다.

폭포 위에는 다리가 닦여져 있으며, 다리 너머에는 벼랑을 깎아 지은 방산백자폭포와 전통가
마 등이 있고, 다리 북쪽에는 양구 백자박물관과 백자공원이 닦여져 있다. 백자박물관 바로
남쪽에 폭포가 있으니 이들을 한 덩어리로 같이 둘러보면 된다.

* 직연폭포 소재지 :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칠전리


▲  층층이 주름진 암벽 사이를 패기 있게 흐르는 직연폭포

▲  대자연이 시퍼런 물감을 풀어놓은 직연폭포 못(직연)
물에 둥둥 떠있는 하얀 것은 비누 거품이 아니라 폭포에서 쏟아진 물의
자연산 거품이다. 수질이 청정하긴 하지만 워낙 깊이가 있고
시퍼런 기운이 가득해 밑바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  수풀 너머로 바라본 직연
산 속에 숨겨진 것이 아닌 주변에 훤히 드러난 곳이라 하늘나라 선녀 누님도
마음껏 놀러오지는 못할 것이다.

▲  직연폭포의 허공을 가르는 다리
폭포를 가까이서 보고 싶다면 이 다리를 이용하자. 다리 바로 밑에 폭포가
무섭게 입을 벌리며 하얀 실타래 같은 물을 풀어놓는다.

▲  다리 바로 위에서 바라본 직연폭포의 위엄

▲  다리 남쪽에서 바라본 직연폭포와 직연소

▲  직연폭포 동쪽 수입천

폭포 동쪽 보 너머에는 백사장이 닦여진 완만한 공간이 있다. 그곳은 수심도 얕은 편이라 어
린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피서객들에게 아주 그만인 곳이다. (내가 갔을 당시 한 가족이 텐트
를 치고 놀고 있었음) 다만 주변에 깊은 곳이 지뢰처럼 도사리고 있으니 조심은 필수이다.


▲  방산백자폭포에서 바라본 직연폭포 다리와 폭포 주변

▲  방산백자폭포 앞에 축소 재현된 황포 돛배

조선시대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황포돛배를 통해 양구 지역의 백토와 여러 물자를 서울과 경기
도로 수송했다. 하지만 화천댐과 춘천댐 등 여러 댐이 북한강에 걸쳐지면서 물길이 모두 막혔
고, 도로가 닦이면서 육상교통이 그 역할을 대신하니 이제는 세월의 저편으로 사라지기가 바
쁜 추억 속의 풍물시(風物詩)가 되어버렸다.


▲  말라버린 방산백자폭포

직연폭포 남쪽에는 또 다른 폭포인 방산백자폭포가 주름을 가득 보이며 자리해 있다. 직연폭
포가 대자연이 빚은 작품이라면 백자폭포는 인간이 지은 인공폭포로 높이만큼은 직연을 훨씬
능가하지만 나머지는 대자연 형님 작품에 모두 밀린다.
이 졸작스러운 폭포는 직연폭포 주변에 백자박물관과 백자공원, 전통가마를 닦으면서 그 수식
용으로 지은 것으로 내가 갔을 때는 물은커녕 물기조차 느낄 수 없는 우울한 상태였다. 물이
좀 흐르고 있거나 자연산 비슷하게 만들었다면 좀 봐줄 만하겠지만 꽤 어색해 보이는 주름선
만이 가득하니 주변 풍경과 너무 맞지 않는 것 같다. (서울의 홍제천인공폭포와 순창 강천산
의 여러 인공폭포를 보고 배워야 될 듯함)


▲  백자를 굽던 전통가마

백자폭포 서쪽에는 백자박물관에 딸린 전통가마가 길게 누워있다.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비바
람을 막고자 그 허공에 길쭉하게 지붕을 씌웠으며 지붕 용마루 2곳에 연기를 배출하는 장치를
달았다. (지금도 가마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

양구 지역, 특히 방산면은 고려시대부터 도자기 생산지로 명성이 높았다. 도자기 제조에 필요
한 백토(白土)와 도석(陶石)이 매우 풍부한데다 백토의 질도 매우 우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려 말부터 가마터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고,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이곳을 꽤 애지중지하
여 많은 관요(官窯)를 설치해 백자를 생산했다. 조선 초에는 분청사기(粉靑沙器), 조선 말에
는 청화백자(靑華白瓷)도 생산했으나 백자가 그 중심을 이루었으며, 양구에서 만든 백자를 '
양구백자'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 양구에서 40기의 가마터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상무룡리의 9기를 빼면 모두 방산면
(장평리, 칠전리, 현리, 송현리, 오미리, 금악리)에 분포하고 있어 방산면이 그 중심지였음을
알려준다. 이렇듯 풍부한 백토 덕에 반짝 흥한 것이 아닌 20세기 중반까지 600년 이상 두고두
고 도자기 산지로 위엄을 떨쳤으며 이렇게 오랫동안 도자기를 만든 현장은 천하에서 양구 방
산면이 거의 유일하다.

이곳에서 태어난 백자 등의 도자기는 한강을 통해 서울로 운송되어 상당수 왕실과 귀족들에게
납품되었는데, 서울에서 가까운 광주(廣州)에 백자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마('광주분원'이라
고 함)가 많이 설치되면서 양구와 방산 지역 가마터는 조금 한가해졌다. 그래서 지역 사람들
을 대상으로 여러 그릇과 도자기를 만들어 판매했다.
허나 나라에서는 여전히 양구 백토를 선호하여 중심 안료로 계속 인기를 누렸다. <광주 지역
수토도 적지 않게 사용했음>
양구 백토는 매년 500~550석(72~79.2톤) 정도 채굴했는데, 이를 채굴하고자 양구의 민호(民戶
) 500호가 동원되었다. 백성을 닥달하여 백토를 캐내고 거기서 괜찮은 것을 선별한 다음 한강
을 이용해 봄과 가을에 2번 운송을 했는데, 이때는 북한강 주변의 인제, 화천, 춘천, 홍천 지
역 백성들이 동원되었다. 양구 백성들도 운송에 동원되었으나 1709년 이후 빠지게 된다. 백토
채굴도 힘든데 수송까지 시켜먹으니 백성들의 고단함이 컸던 것이다.
그래서 다른 지역의 백토를 쓰려고 했으나 광주분원을 관리하던 사옹원(司饔院)에서 양구 백
토가 아니면 그릇이 거칠어지고 흠이 생긴다고 하자 계속 양구 것을 썼다. 이후 백성들의 고
통을 덜어주고자 상정미(詳定米)를 나누어 주고 백토 값을 올려주기도 했다.

백토를 수송할 때는 보통 배 10척에 25석씩 나눠 실었으며 화천이 110석, 춘천 220석, 인제
60석, 홍천이 12석을 나누어 운반했다. 또한 가뭄으로 물이 마르거나 제때 수송하지 못하는
경우는 말을 이용해 육로로 수송하기도 했고, 수송비를 주고 민간업자에게 맡기기도 했다.


▲  누런 황토로 닦여진 전통가마



 

♠  양구백자와 방산면 가마터를 집대성한 양구 백자박물관

▲  양구 백자박물관

직연폭포 북쪽에는 양구군에서 세운 백자박물관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양구는 기초자치
단체(군청, 시청, 구청)에서 세운 군립(시립) 박물관이 다른 군(郡)이나 인구가 적은 시(市)
에 비해 아주 많은 편으로 이번 나들이는 기이하게도 양구의 군립박물관 3곳(근현대사, 선사,
백자)과 한꺼번에 인연을 지었다.
 
방산면 중심지(현리) 동남쪽에 자리한 백자박물관은 2006년 6월 27일에 문을 열었다. 2003년
박기병(현재 명예관장)이 수집한 양구백자 50여 점을 양구군에 흔쾌히 기증을 했는데, 그것을
계기로 양구백자를 취급할 박물관의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어 양구백자의 대표 생산지인 방산
면 한복판에 그들을 전시하고 다룰 박물관을 세우게 되었다.
양구군은 박기병의 기증 이후 많은 이들의 문화유산과 자료 기증이 잇달아 그 방대한 자료로
근현대사박물관을 차리고, 선사박물관에 삼엽충(三葉蟲) 화석 전시실까지 닦았으며, 거기에
양구백자박물관까지 차렸으니 정말 기증 복은 많은 고장이다.

전시 유물은 50여 점 정도로 양구백자실과 도자역사문화실 등의 전시실 2개를 지니고 있으며,
전시실 외에 전기가마, 가스가마, 장작가마를 갖추어 도자기 체험을 선사하는 체험실, 양구
지역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를 판매하는 박물관(뮤지엄) 샵, 영상실, 전통가마, 칠전리 1호 가
마터, 백자공원을 갖추고 있다.
(예전에는 입장료가 없었으나 요즘에는 어린이(8세 이상)/청소년/군인/65세 미만 성인들에게
일률적으로 3,000원을 받고 있음)


▲  백자박물관에서 직연폭포로 이어지는 하얀 길
길바닥에는 백자박물관에 걸맞게 백자 등의 도자기 파편들이 박혀있다.

▲  박물관 잔디밭에 심어진 커다란 도자기 파편들 (오래된 것들은 아님)

▲  진지하게 도자기를 빚고 있는 도공의 모형

▲  '순(順)' 글씨가 쓰인 백자 접시 파편
작살난 파편에 깨알처럼 쓰인 '순'은 태종 말엽에 잠시 있었던
'순승부(順承府)'로 여겨진다. (자세한 것은 사진 참조)

▲  새가 나무가 그려진 백자청화수명호 (조선 중기)

▲  '구(龜)'가 쓰인 백자청화 대발 (조선 후기)
거북이처럼 장수하라는 의미에서 대발 피부에 '龜'를 넣은 것 같다.

▲  여러 자연물이 그려진 백자청화초화문호의 수수한 자태

▲  양구 백토를 먹고 자란 여러 백자들

▲  천하에서 가장 좋은 백토로 꼽히는 양구 백토의 위엄
저 하얀 가루가 바로 백자를 야무지게 해주었던 양구 백토이다. 지금도 많이 나오고
있으며, 저 백토로 양구와 방산 지역 가마는 600년이 넘는 역사를 유지했다.

▲  백자박물관 바깥에 마련된 전통가마
전통 방식으로 도자기를 불에 다지는 공간이다.


전시실에서 순백의 미와 몸매를 뽐내고 있는 백자들을 구경하며 일부를 사진에 살짝 담고 영
상실에서 지친 두 다리에게 잠시 자유를 주며 양구백자 관련 영상을 시청했다. 전시실 바깥에
있는 전통가마를 구경하고 백자박물관을 마무리 지었는데, 그만 칠전리 1호 가마터를 놓치고
말았다.
야무지게 본다고 했음에도 하나를 놓치고 말았으니 아직 내공이 멀었나 보다. 그 가마터는 언
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넘기고 장평리(방산면소방서) 정류장으로 나왔다. 시간은 벌써 18시
, 햇님은 여름 제국의 눈치를 격하게 보며 아직까지 퇴근을 못해 세상은 훤하다.

백자박물관을 끝으로 양구 땅에 목적한 곳을 모두 둘러보았다. 한동안은 양구에 오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이다. 버스를 기다린 지 10여 분 뒤, 양구 읍내로 가는 군내버스가 모습을 드러
내며 내 앞에서 입을 벌린다. 그것을 타고 다시 읍내로 나가 춘천(春川)으로 나가는 직행버스
에 고된 몸을 실으며 나의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렇게 하여 양구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양구백자박물관 소재지 :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장평리 344 (평화로 5182 ☎ 033-480-7238)
* 양구백자박물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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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의 깊은 내륙이자 한반도의 배꼽, 양구 나들이 (양구근현대사박물관, 양구선사박물관, 파로호인공습지, 한반도섬)

양구 근현대사박물관, 가오작리 선돌, 한반도섬(파로호인공습지)



' 강원도의 깊은 내륙, 양구 여름 나들이 '
(양구 근현대사박물관, 한반도섬)
양구 가오작리 선돌
▲  양구 가오작리 선돌
 



 

여름이 무심히 깊어가던 6월의 끝 무렵, 한반도의 배꼽을 자처하는 강원도 양구(楊口) 땅
을 찾았다.
아침 일찍 경춘선 전철을 타고 그림처럼 펼쳐진 북한강을 벗삼으며 강원도의 중심 도시인
춘천(春川)으로 이동했다. 오랜만에 발을 들인 춘천이지만 마음은 이미 양구에 넘어간 상
태라 남춘천역 인근에 있는 춘천시외터미널에서 양구로 가는 직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
렇게 춘천을 콩 볶듯이 떠나 첩첩한 산주름 속을 50분 정도 내달려 양구읍 한복판에 자리
한 양구시외터미널에 두 발을 내린다.

이 땅에 바람직하지 않은 나쁜 선, 휴전선을 강제로 짊어지고 있는 양구 땅은 거의 8~9년
만에 방문이다. 서울보다 높은 곳에 자리한 탓에 그리 덥지는 않았으며, 공기도 확연하게
틀려 청정함마저 진하게 느껴진다. 오죽하면 양구에 오면 10년은 젊어진다고 강조까지 하
겠는가. (양구군청에서 그렇게 강조하고 있음)

양구에서는 이미 정처(定處)를 정해둔 상태라 그곳만 얌전히 찾아가면 된다. 그래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양구 근현대사박물관(이하 근현대사박물관)'으로 예전 '양구향토사료관'
이다. 이곳은 양구터미널에서 북쪽으로 2km 거리로 '양구 선사박물관(이하 선사박물관)'
바로 남쪽에 자리해 있는데, 그들은 이미 2번이나 인연을 지었지만 정처의 하나인 한반도
섬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동선상 들리게 되었다.
게다가 '근현대사박물관'으로 거창하게 이름까지 바꾼 '양구향토사료관'이 어찌 변했을까
궁금도 했고, 눈과 코, 입을 지닌 깜찍한 돌덩어리, 가오작리 선돌의 안부도 궁금했다.


▲  여름 가뭄으로 그림이 완전히 바뀐 파로호 인공습지 남쪽 부분


양구 읍내를 벗어나면 근현대사박물관으로 인도하는 길(함춘로) 서쪽으로 수풀로 덥수룩
한 너른 공간이 나온다. 마치 물이 나간지 오래된 황량한 수몰지대처럼 덥수룩하기 그지
없는데, 이곳이 양구군의 야심작이었던 파로호(破虜湖) 인공습지이다.
이 습지는 이 땅 최초의 인공습지로 읍내 북쪽에서 양구서천(西川)을 따라 한반도섬까지
이어지며 그 거리는 2km가 넘는다. 허나 오랜 가뭄으로 물은 몽땅 말라버렸고 물이 가고
없는 자리에는 수풀이 무성하게 자라나 졸지에 밀림과 초원 같은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하늘의 야박함으로 여러 달째 습지의 정체성을 잃은 이곳은 원래 파로호 물을 먹고 살던
경작지였다. 허나 무단 경작과 농약과 비료의 과다 사용, 쓰레기 투기, 흙/돌의 무단 채
취 등으로 수질이 악화되었고, 경관 또한 나날이 훼손되자 뿔이 난 양구군청에서 2007년
에 이곳을 싹 갈아엎고 서천과 한전천이 만나는 하류부에 저류보를 다진 다음, 수면공간
을 확보하고 습지를 조성해 2008년 말 완성을 보았다.
그렇게 태어난 습지의 면적은 약 163만㎡로 천하 최대급을 자랑하며 저수량은 300만㎥에
이른다. 또한 양구가 한반도의 배꼽임을 강조하고자 한반도 모양의 섬을 닦아 양구의 새
로운 꿀단지로 격하게 키우고 있다.
하천변에는 자전거길을 겸한 산책로를 내었으며, 강원외고 서쪽과 선사박물관 서쪽에 습
지 탐방로를 내었다.


▲  물이 가득 올랐던 예전 어느 겨울의 파로호 인공습지 (2008년)

▲  거대한 초원이 되버린 파로호 인공습지
물은 저 멀리 밀려나 겨우 형태만 유지하고 있다.

▲  정체성을 잃은 파로호 인공습지
인공습지 너머로 하리, 동수리 지역과 양구의 서쪽 지붕 사명산(四明山, 1,198m)이
시야에 들어온다.

▲  파로호 인공습지 산책로 (자전거길)
양구읍내에서 인공습지 옆구리를 따라 한반도섬까지 이어지는 호젓한 길이다.

▲  인공습지 습지식생대를 가르는 습지 탐방로 (선사박물관 서쪽)
습지에 물이 없으니 나무로 만든 습지 탐방로도 딱히 의미가 없어졌다.
그냥 들판 위에 다진 다리에 불과해진 것이다.



 

♠  양구 지역 문명시대(文明時代)의 역사와 이 땅의 근현대사를 담은
양구 근현대사박물관

▲  근현대사박물관 정문 앞에 있는 쌍겨리 조형물
쌍겨리란 멍에에 소 2마리를 지어 논, 밭을 가는 것으로 1마리는 독겨리라고 한다.
쌍겨리 농법은 화전이나 단단한 땅을 갈 때 많이 이용되었다.


양구 선사박물관과 마주보고 있는 양구 근현대사박물관은 양구군에서 세운 군립(郡立) 박물관
으로 2002년 11월에 문을 열었다. 원래 이름은 '양구향토사료관'으로 건너편 선사박물관이 선
사시대의 양구를 다루었다면 이곳은 옛 조선(고조선)부터 20세기까지 문명시대의 양구를 다루
고 있었다.
그 시절 소장 유물은 600여 점으로 양구의 역사와 문화, 생활을 담은 작은 박물관이었으나 국
내 제1호 아리랑박사로 불리는 석우(石牛) 박민일<2011년에 10,700여 점을 기증>, 강원도민일
보 특파원을 지냈던 송광호<2012년과 2014년에 기증>, 연세대 명예교수이자 철학박사인 김형
석<2014년에 580여 점을 기증>, 독립운동가인 장준하(張俊河)의 장남이자 고려문화연구원 이
사장인 장호권 등 4명이 그들의 소장 자료와 문화유산 15,000여 점을 양구군에 흔쾌히 기증하
면서 번데기를 탈피한 나비처럼 크게 업그레이드를 하게 된다.
그 방대한 자료를 담고자 기존의 향토사료관을 2012년 7월부터 2년 동안 손질하여 2014년 9월
4일, 간판까지 바꾸어 '양구 근현대사박물관'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강원도 최초의 근현대사 전문 박물관으로 박물관의 중심이 양구에서 근현대사로 맞춰졌고, 근
현대사와 기증 받은 자료의 공간이 더해져 스케일이 엄청 커졌다. 기증 유물로 인해 소장 자
료만 무려 16,000점 가까이 머금게 되었고, 눈에 착착 달라붙는 다양한 주제의 볼거리와 사라
지기가 바뻤던 옛 존재들, 과거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20세기 중~후반 볼거리까지 흥미로운
것들이 많아 침침한 두 눈과 과거를 늘 그리는 마음을 제대로 어루만져준다.

박물관은 2층 규모로 '제1전시실'에는 이 땅의 근현대사를 집대성한 '역사의 휘모리', 오래된
우표와 엽서가 전시된 '엽서관','우표관','씰관'이 있고, '제2전시장'에는 우리나라 영화의
역사와 영화 관련 자료를 모든 '추억의 영화관', 아리랑 문화의 다양한 면을 다룬 '아리랑관'
, 근현대 출판의 역사를 다룬 '창간호관'이 있다.
'기획전시실'에는 박민일, 송광호, 김형석이 기증한 자료의 일부를 다루고 있으며, 근현대사
박물관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양구향토민속자료관에는 양구의 역사와 문화, 생활을 담고 있다.
그 외에 '추억의 교실','근현대사 체험의 공간','주막'이 있고, 양구 곳곳에서 수습한 비석과
연자방아, 맷돌 등의 문화유산이 뜨락을 채우고 있다.

그럼 지금부터 근현대사박물관을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전시 유물 일부를 전시관 순
서에 상관없이 다루도록 하겠음)

       ◀  초가 주막(酒幕)과 물레방아
주막에서는 국밥과 도토리묵, 메밀전병과 동동
주를 팔고 있다.
주막 앞에는 연못이 닦여져 있는데, 물레방아
가 쉬지 않고 돌아가며 연못에 물을 베푼다.

◀  양구에서 발견된 구석기/청동기시대 유물
왼쪽 돌덩어리들은 구석기 유물인 '찍개', 오
른쪽 것들은 청동기 유물인 '간돌도끼'와 '간
돌화살촉'이다.


▲  검은 피부의 신라 토기들

동아시아를 호령했던 옛 조선(고조선)이 사라진 후, 그 땅에는 고구려(高句麗)와 부여, 낙랑,
백제, 신라, 가야 등의 수많은 나라가 생겨났다. 요녕성(遼寧省) 지역인 요동(遼東)과 요서(
遼西)에서 시작된 고구려가 오랫동안 양구를 통치했고, 6세기 중반 이후에 신라가 접수 받아
양록군(楊麓郡)으로 지명을 변경하여 400년 가까이 통치했다.
이들 토기는 양구 지역에서 나온 것들로 신라 조정에서 파견된 양록군 태수(太守)나 양구 지
역 세력가들이 사용했을 것이다.


▲  고려시대 청동 수저와 청동 사발

9세기 말, 신라의 영역이 크게 3개로 쪼개지면서 양구는 후고구려(태봉, 마진)를 세운 궁예(
弓裔)의 지배를 받는다. 이후 918년 왕건(王建)의 고려가 그 자리를 대신하면서 춘주(春州,
춘천)의 속현(屬縣)이 된다.
이들 청동 수저와 그릇은 지역 세력가나 관리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숟가락이 지금보다 훨씬
커 그들의 왕성했던 식성을 보여준다.


▲  푸른 꽃이 그려진 백자 청화초화문 항아리 (조선 후기)
백자 피부에 깃들여진 꽃이 무척 곱다.

▲  왜정 때 만들어진 하얀 그릇과 '양구군 함춘리 이임명' 글씨가
새겨진 검은 피부의 놋그릇

▲  1950년대 이후 양구 군인들이 사용했던 수통과 수류탄 등잔,
군용 반합과 숟가락, 피복바구니

▲  이 땅의 경제를 이끌었던 20세기 지폐들

개인적으로 오른쪽 줄의 자주색 1,000원권과 점선이 있는 10,000원권, 그리고 1980년대에 사
라진 500원권에 크게 마음이 간다. 이들을 손에 쥐며 사용했던 것이 정말 엊그제 같은데 새
지폐에게 모두 밀려나면서 대부분 불살라지고 말았다.


▲  추억이 되버린 다양한 전화카드(위)와 서민들을 희망고문시켰던
여러 복권들(아래)

▲  옛 초등학교 교과서와 가방 (1970~80년대)
나도 어렸을 적에 저런 책으로 공부를 했었지. 근데 '보건'이란
교과서는 처음 본다.

▲  방산초교(방산국교)를 졸업한 어떤 이의 솔직한
생활통지표와 졸업 수료증(1978년)
내 초등학교 시절(그때는 국민학교)에도 저런 생활통지표가 쓰였다. 나의
교과학습 성적표에는 늘 '양'과 '가'만 가득했었지. '수'와 '우'는
가뭄에 콩나듯 나왔던 걸로 ㅠㅠ


▲  1960년대 강원도 미인들의 위엄 (미스 강원 선발대회)
빛바랜 흑백사진에 나온 미인들, 지금은 70~80대 할머니가 되어 세상 어딘가에서
살고들 있을 것이다. 파릇파릇한 저들이 설마 백발 할머니가 될 줄은
누가 알았으랴.

▲  고종(高宗)이 관리를 임명하면서 내린 칙명(勅命) <광무 7년, 1903년>

▲  네모난 구멍이 파인 옛 동전들
위에 조그만 동전은 송나라(1107~1110년) 동전인 대관통보 당십전(代官通寶 當十錢)이고
밑에 3개는 조선 후기에 널리 쓰인 상평통보(常平通寶)이다.

▲  왜정 시절 결전식기(決戰食器)와 궁성요배(宮城遙拜) 전단

돌다리와 붉은색 해가 담겨진 윗 사진은 왜열도 동경(토쿄)에 있는 황거(皇居, 코쿄)이다. 황
거란 왜열도 백성들의 영원한 등골브레이커 왜왕(倭王)과 그 떨거지들이 서식하는 곳으로 20
세기 전반기 왜국 군국주의의 상징과 같은 곳이다. 왜정은 저런 것들을 통해 이 땅의 사람들
에게 충성과 협조를 강요했다.


▲  의친왕 이강이 1914년 초가을에 쓴 글씨 (가운데 유물)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1955)은 고종의 5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귀인 장씨이다. 이곳
에 그의 글씨가 1점 전시되어 있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끝없이 펼쳐진 대륙은 그 드넒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산은 솟고 물은 흐르며 온갖 경계는 높
고 낮다. 이글거리는 태양은 그 밝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구름은 모이고 달은 숨으며 온갖 물
상은 같은 것이 없다. 이것이 하늘과 땅이 크다고 하지만 오히려 아쉬운 것이 있다.

아아! 인생만사 잠시라도 그 높고 낮은 산수와 변화무쌍한 구름과 달에서 그것을 즐기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명(命)을 아는 사람은 산에 가면 산과 함께 높아지고, 물을 만나면 반드
시 물과 함께 맑아지고, 구름과 마주치면 반드시 구름과 함께 치사(致辭)하고, 달을 만나면
달과 함께 숨어서 그 오는 것에 나를 맡길 뿐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그 안은 비워두고 그 바깥은 채우며, 그 날카로운 끝을 무디게 하고 그 등지
는 것을 벗어나야 한다. 쓰이게 되면 행하여 그 능력을 팔지 않으며 버려지면 숨어서 그 몸을
치욕스럽게 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세상에 처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  김형석 교수가 기증한 조선시대 백자들
김형석은 2012년 양구에 '시와 철학의 집'을 개관한 인연으로 자신이 수집했던
백자와 청자, 서화(書畵) 등 580여 점을 양구군에 기증했다.

▲  고고한 푸른 빛을 드러낸 고려 청자들
저 청자로 마시는 차와 곡차(穀茶)의 맛은 어떠할까? 아무리 맛없는 곡차나
쓴 차라고 해도 저들을 통하면 달달한 맛으로 바뀔 것 같다.

▲  고려 상감청자(象嵌靑瓷) 사발

▲  조선 분청사기(粉靑沙器) 사발

▲  조선 백자 사발

▲  조선 후기 청화백자

▲  북한에서 넘어온 상감청자(1990년 작)

▲  빛깔이 고운 청자상감과초화문 꽃병
(1990년 북한)

양구 지역이 북한과 살을 대고 있는 현장이다보니 북한에서 넘어온 존재들이 여럿 담겨져 있
다. 이들은 송광호 기자가 시베리아와 북미대륙 등에서 수집한 것을 양구군에 기증한 것으로
북한을 코 앞에 둔 곳이라 그런지 꽤 남달라보인다.


▲  북한의 소액 화폐들 (50전, 1원, 50원짜리)

▲  북한의 중/고액 화폐들 (1원, 10원, 100원, 200원, 500원)

▲  20세기 중/후반 영화 포스터들

▲  20세기 영화포스터와 여러 잡지들

▲  조촐하게 재현된 옛 극장 출입문


▲  옛 초등학교 교실을 재현한 추억의 교실 (박물관 세미나실)

나도 저런 교실에서 초등학교(국민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에는 저 의자와 책상이 딱 사
이즈에 맞았었는데 이제는 어떻게 저기에 앉아서 공부를 했는지 고개가 갸우뚱할 정도로 좁다.
그만큼 나의 면적이 넓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뚱뚱한 것은 아님)
이곳은 전시용 외에도 강연과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교육 공간으로도 쓰이고 있다.


▲  추억의 교실 한복판에 놓여진 난로

내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는 겨울마다 저 난로를 교실 한복판에 두어 난방을 했었다. 담당
주번은 학교 시설물을 수리하는 곳이나 창고에서 장작을 가져와 난로에게 먹였는데, 비록 오
늘날 난방기구만은 못해도 저 난로가 몸을 푸는 동안은 그런데로 따스했던 것 같다. 가끔 난
로에 도시락을 올려서 따끈하게 덥혀서 먹기도 했고 라면을 끓여먹기도 했었지.

허나 세월이 흐르면서 도시가스나 전기로 대체되었고 그로 인해 저런 난로와 장작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었다. 저 난로의 온기를 받으며 교실에서 겨울잠을 잤던 본인으로서는 조금 아
쉽기는 하지만 어찌하랴. 그것 또한 변화의 과정이거늘, 이제는 정겨운 풍물시(風物詩)가 되
어 이런 곳에서나 만날 수가 있다.



 

  양구 근현대사박물관 뜨락과 가오작리 선돌

▲  근현대사박물관 뜨락 (장독대, 연자방아)

햇살이 내리쬐는 근현대사박물관 뜨락에는 양구 곳곳에서 가져온 비석과 연자방아, 맷돌, 돌
절구, 항아리 등의 문화유산이 자리를 채우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양구향토사료관 시절부터
있던 것이라 꽤나 낯이 익은데, 문화유산을 기증하여 박물관을 크게 살찌운 이들을 위한 '근
현대사 자료기증 감사비'가 한쪽에 닦여져 있어 그들을 두고두고 기리고 있다.

▲  현역에서 물러나 한가로운 여생을
보내는 연자방아

▲  나무 그늘 밑에 모인 비석들


▲  서로를 보듬고 있는 조그만 비석과 석인(石人)
늦가을에 버려진 낙엽처럼 존재의 가치를 상실한 채, 뜨락의 일부가 되버린
그들의 초췌한 모습에 쓸쓸함만이 감돈다.

▲  초가3간 수복주택(收復住宅)

수복주택은 6.25전쟁 이후 미국군이 양구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지어준 초가이다. 나왕목으로
지었다는 특징 외에는 일반 초가와 크게 다를 것은 없으며, 수복(양구 지역은 1953년 이전까
지 북한 치하였음) 이후에 지었다고 해서 '수복주택'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허나 새마을운동 이후 대부분 사라지고 이곳으로 이전된 2채만 겨우 살아남아 수복주택의 존
재를 아련히 전해주고 있으며, 현재는 전통공예체험 장소로 쓰이고 있다.


▲  근현대사 자료기증 감사비 (김형석 교수)
그들의 크나큰 공로가 있기에 이 첩첩한 산골에 근현대사박물관이 단단히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  양구 선사박물관의 상징, 가오작리 선돌

선사박물관 앞에는 이곳의 상징으로 꼽히는 가오작리 선돌이 있다. 바닥에 평퍼짐한 돌을 깔
고 그 위에 세운 3m의 선돌로 아랫도리는 다소 볼록하여 풍만해 보인다. 중간에는 폭이 다소
넓어졌다가 위로 갈수록 일정하게 줄어들면서 세모로 머리 부분을 마무리 지었는데, 한반도의
배꼽을 칭하는 양구의 토박이 선돌이라 그럴까? 몸매가 한반도와 비슷하게 생겼다.
그의 얼굴에는 동그란 두 눈과 눈썹, 세모난 코, 살짝 구부러진 입 등이 앙증맞게 새겨져 있
어 정말 깜찍하기 그지 없다. 하여 나는 그를 '선사시대의 미소'라 칭하며 내 마음 바구니에
계속 넣어두고 있다.
하지만 그의 입과 눈은 원래부터 있던 것은 아니다. 가오작리에 있던 시절, 동네 사람이나 군
인이 심심풀이로 새긴 것으로 비록 수작(秀作)은 아니나 그렇다고 졸작도 아니어서 어색함이
없이 잘 새겨 놓았다. 예전(2008년)에 비해 눈썹과 코가 진하게 표현되어 그때와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다가와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그도 내가 올 것을 알았는지 미리 얼굴을 다듬은 모양
이다.
그래도 어여쁜 누님처럼 긍정이 느껴지는 눈과 미소가 드리워진 입술은 여전하여 이곳을 찾은
이들에게 웃음과 기쁨을 선사한다.

원래는 근현대사박물관과 가오작리 선돌만 보고 바로 빠지려고 하였으나 앞에서 선사박물관이
진하게 아른거리니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못지나친다고 애써 무시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입장료도 무료이고 시간도 아직 넉넉하니 잠깐 발을 들인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다.
간만에 발을 들인 선사박물관도 근현대사박물관만큼이나 많이 달라져 있었는데, 마음 같아서
는 그 박물관과 뒤쪽에 있는 고인돌공원도 싹 다루고 싶으나 내용이 너무 길어지므로 본글에
서는 쿨하게 생략한다. (예전에 갔던 ☞ 양구 선사박물관 글 보러가기)

* 양구 근현대사박물관 소재지 :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하리 510 (금강산로 439-51, 54 ☎
  033-480-2677)
* 양구 근현대사박물관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양구 선사박물관



 

♠  양구 속의 조그만 섬, 소한민국이라 불리는 한반도섬

▲  들판이 되버린 파로호 인공습지 (희망의 다리 부근)

양구 근현대사박물관과 선사박물관 세트를 둘러보고 잠시 잊었던 파로호 인공습지를 마저 거
닐었다. 습지라고는 하지만 오랜 가뭄에 지쳐 물은 사라지고 잡초만 무성한 황량한 들판이 되
버리면서 습지란 이름을 무색하게 만든다. 정말 때를 잘못 맞춰서 온 것이다.
그런 가련한 습지를 왼쪽에 끼고 북쪽으로 가면 한반도섬이 나온다. 양구가 한반도의 정중앙
임을 강조하고자 한반도를 축소 재현하여 띄워놓은 섬으로 소한민국을 칭하고 있다. 하지만
가뭄의 악영향으로 섬의 자격을 상실한 채, 그야말로 두툼히 솟은 언덕 신세가 되버렸다. 이
곳 매력은 물에 떠있는 한반도섬 자체의 모습인데 섬은 커녕 잡초 속에 두툼히 솟은 한반도
언덕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  가뭄에게 빼앗긴 습지에도 봄은 오는가? (한반도섬 남쪽)

▲  사막처럼 되버린 인공습지 (한반도섬 동남쪽)
이곳은 잡초도 포기했나보다. 거의 맨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  인공습지 강변(뱃길나루터)에
장식용으로 놓인 옛날 배

▲  알 모양으로 생긴 소한민국 조형물


한반도섬이나 지형이 갑자기 유명세를 탄 것은 2000년대 초반이다. 그때 영월(寧越)에서 3면
이 강으로 둘러싸인 한반도 모양의 지형이 발견되어 크게 주목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이후 옥
천(沃川) 등 여러 곳에서 대자연이 빚은 비슷한 지형이 발견되어 한반도지형이란 이름을 지니
게 되었다.
한반도와 비슷하게 생겨먹은 자연산 지형이 천하 곳곳에 숨겨져 있어 참 신비롭기 그지 없는
데, 그것으로도 모자라 양구는 아예 한반도섬을 만들어 띄워놓았다. 하지만 그런 것이 자칫
우리의 강역과 활동무대를 한반도로 국한시키는 모양새로 비춰지기도 한다. 우리는 원래 만주
와 동북3성, 연해주, 산동반도, 중원대륙 화북(華北)과 서해바다 지역, 왜열도, 유구(오키나
와) 지역까지 다스렸던 잘나갔던 민족이다.
허나 잘난 조상보다는 제삿밥도 아까운 못난 조상이 더 많아 그 넓은 땅이 모두 갈라지고 흩
어졌으며, 민족은 분열되어 겨우 좁은 한반도만 추스린 딱한 신세가 되었다. 그 한반도도 남
북으로 갈라져 남북분단의 비애를 겪고 있으며, 개양아치 같은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 고
통을 받고 있다.
다음에 한반도형 섬을 닦는다면 중원대륙과 일찍이 떨어져나간 왜열도는 빼더라도 대마도(對
馬島)와 동북3성, 만주를 포함하여 통 크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한반도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중심이자 일부이지 모두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  양구 속의 섬, 한반도섬을 이어주는 나무데크 다리
다리 높이는 4m 정도 된다. 원래대로라면 물이 2~3m 정도는 차있어야 되는데
50cm는 커녕 물기조차도 없다.

▲  억새가 춤을 추는 한반도섬 동쪽 (양구읍내 방향)
황량한 들판을 보니 마치 드넓은 대륙이나 초원을 거니는 기분이다. 한반도섬에서
옛 조선이나 고구려 같은 대륙의 기분을 느낄 줄이야. 역시 우리에게는
이런 좁은 땅보다는 넓은 대륙이 딱 어울린다.

▲  물이 없는 다리를 건너는 기분은 사람이 없는 도심 번화가를
걷는 기분일 것이다. (서쪽에서 바라본 나무데크 다리)

▲  한반도섬 동쪽에 닦여진 푸른 독도와 울릉도

▲  울릉도의 모습
한반도섬 주변에는 울릉도와 독도, 제주도가 두툼하게 닦여져 있다.
(울릉도와 독도는 접근 불가, 제주도는 접근 가능)

▲  그늘이 별로 없는 한반도섬 산책로

한반도섬은 나무와 수풀로 가득한 녹색의 섬이다. 산책로가 잘 닦여져 있고 다리를 쉬어갈 수
있는 쉼터도 갖추어져 있으며, 섬 복판에는 공군에서 지원받은 비행기 1대가 자리하여 조촐하
게 눈요깃감이 되어준다. 그리고 섬 서부에는 짚와이어(짚라인)가 있다. (짚라인은 서천 건너
편 산에서 타면 됨)

바깥에서 한반도섬으로 인도하는 길은 섬 북쪽과 동쪽, 남쪽에 있으며, 남쪽 다리는 제주도로
상징되는 섬을 경유한다. 그 외에 짚라인을 이용해 공중을 가르며 짜릿하게 들어서는 방법이
있다. (짚라인은 유료임)


▲  한반도섬 옆구리를 흐르는 양구서천
물은 섬 서쪽 서천에서만 겨우 흐르고 있었다. 물이 더 차야만 섬 주변과
인공습지를 촉촉이 어루만져줄 것인데 서천 하나로도 벅차다.

▲  양구서천과 그 너머로 보이는
공수리, 동수리 지역

▲  한반도섬의 하늘을 지키는
RF-4C 정찰기


한반도섬 한복판에는 현역에서 물러난 정찰기 1대가 매달려 있다. 미국 맥도널 더글라스사에
서 F-4C전투기를 기반으로 만든 비무장 항공정찰형 모델로 1962년 개발에 착수해 1963년 5월
에 최초로 비행을 했는데, 이 땅에는 1989년 12월 18일 3대가 수입되었고, 1990년까지 18대를
더 도입하여 항공정찰용의 역할을 수행했다.
허나 RF-16전력화에 따라 2014년 6월 30일 퇴역을 했고, 공군의 협조를 받아 이곳에 두어 한
반도섬의 조촐한 볼거리이자 휴전선을 머리에 인 양구의 현실을 일깨워주는 안보용 볼거리로
삼고 있다.


▲  한반도섬 짚라인(짚와이어)
서천 건너 산에서 짚라인을 타고 바로 이곳에 착륙을 한다.

▲  한반도섬 남쪽 끝에서 바라본 인공습지
다음에는 어설픈 섬이 아닌 완전한 한반도섬을 만나고 싶다.

▲  한반도섬에서 바라본 울릉도(오른쪽 섬)와 나무데크 다리

▲  파로호 인공습지와 한반도섬을 뒤로 하며

한반도섬을 1바퀴 둘러보고 남쪽 다리를 통해 동수리로 건너가려고 했으나 마침 다리 보수공
사로 통행이 금지되어 있었다. 하여 할 수 없이 건너왔던 동쪽 다리를 통해 육지로 넘어왔다.
한반도섬은 이렇게 볼일이 끝나 다시 읍내로 나가야되는데, 까마득하게 보이는 읍내를 보니
정말 멀리 오긴 했다. (양구터미널까지 약 3km) 도보 외에는 딱히 길이 없어 파워 도보로 양
구 읍내와의 간격을 좁혀나갔다.

방산면에 있는 다음 행선지로 가고자 읍내로 들어섰으나 오후 더위에 몸이 제대로 지쳐서 귀
차니즘이 파도처럼 몰려온다. 오늘 이 정도로 충분하다 여기고 마음을 곱게 접고 철수할까 했
으나 그때 방산면으로 가는 군내버스가 눈 앞에 나타난다. 하여 약해진 마음을 다 잡으며 그
차에 몸을 실었다.

본글은 분량상 여기서 막을 고하며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한반도섬 소재지 :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고대리 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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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수도박물관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



' 우리나라 수돗물의 고향, 수도박물관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 '

수도박물관 본관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 송수실)

▲  수도박물관 본관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 송수실)

성수동 느티나무 수도박물관 정수지와 정수지 환기장치

▲  성수동 느티나무

▲  정수지와 정수지 환기장치

 



 

♠  우리나라 수돗물의 탄생지, 수도박물관 입문

▲  수도박물관 입구 (저 고개를 넘으면 수도박물관임)

봄이 힘겹게 겨울 제국을 몰아내고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수놓던 4월의 한복판에 서울숲 옆
구리에 자리한 수도박물관을 찾았다.
서울숲역(수인분당선)에서 남쪽으로 5분 정도 가면 뚝도아리수정수센터 교차로로 여기서 한강
사업본부 쪽으로 가면 하늘색 피부의 수도꼭지 모형이 마중을 하는데 그를 지나 야트막한 고
개를 넘으면 바로 수도박물관이다. <고개에서 오른쪽(서쪽)으로 가면 서울시 한강사업본부와
한강 산책로로 이어짐>


▲  20세기 초, 뚝도수원지 상수도 보호구역을 표시하고자 세운 '경성
수도상수 보호구역표(京城水道上水 保護區域標)' 돌기둥과 독기(왼쪽)

▲  수도박물관 본관으로 인도하는 산책로
(왼쪽 건물이 '물과 환경전시관', 오른쪽은 '완속여과지')

▲  완속여과지(緩速濾過池)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2호

수도박물관 본관으로 이어지는 산책로의 오른쪽(서쪽) 너른 잔디밭에 하얀 피부의 네모난 것
들과 문짝이 달린 하얀 건물이 주렁주렁 보인다. 그들은 '완속여과지'로 잔디밭에 바짝 누운
하얀 것들은 환기구이고, 문이 있는 건물은 완속여과지 내부로 들어가는 출입구이다.

완속여과지는 고운 입자의 모래층에 물을 천천히 통과시켜 불순물을 잡아내는 정수 방식으로
여기서 '완속'은 느린 속도를 뜻한다.
1908년 5개의 여과지(濾過池)를 설치하여 작동에 들어갔고 1938년 1지를 더 증설했는데 면적
은 4,344㎡로 겉으로 보면 딱히 고색이 와닿지 않지만 송수실과 더불어 이 땅의 철근콘크리트
구조물 중 가장 늙은 것으로 꼽힌다.

여과지의 정화 순서는 대략 이렇다. 한강에서 물을 가져와 제일 먼저 침전지(沈澱池)에서 모
래 등의 무거운 물질을 걸러낸다. 그런 다음 모래와 자갈층으로 구성된 완속여과지로 보내는
데 여과지 모래층에서 증식하는 미생물을 이용해 물속 부유물질을 걸러내고 분해하는 방식으
로 정수가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물의 탁도(濁度)가 낮아지며, 세균을 비롯해 암모니아, 철,
망간 등도 거의 걸러진다.
모래층의 두께는 80cm를 기준으로 했으며 여과 속도는 하루에 4m로 매우 느리다. 겨울철 동파
방지를 위해 상부를 철근콘크리트로 다지고 천정 위를 60cm 두께로 흙을 덮었으나 안전 문제
로 인해 상부의 흙은 모두 걷어내었다.

완속여과 방식은 수질이 괜찮은 경우 정수약품을 쓰지 않고 수도물을 생산할 수 있다. 게다가
장치도 간단하고 운전과 유지 관리도 쉽다. 하지만 넓은 부지가 필요하고 생산 효율이 떨어져
요즘 시대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이곳 여과지도 80년 이상 바쁘게 살아오다가 1990년 현역
에서 물러나 송수실과 함께 서울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함부로 할 수 없는 귀한 몸이 되었다.
(이 땅의 수원지, 정수장 중 처음으로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얻은 존재임)


▲  5열로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완속여과지 환기구들
지금은 여과지를 굴리지 않기 때문에 환기구 뚜껑이 늘 닫혀있다.

▲  출입구 윗쪽, 환기구 줄

▲  굳게 닫힌 완속여과지 북쪽 출입구

▲  완속여과지의 중간 출입구들

▲  유일하게 입을 벌린 완속여과지 출입구

1990년 현역에서 물러난 이후, 여과지는 마음에도 없는 한가한 신세가 되었고 출입구와 환기
구 역시 굳게 닫히고 만다. 그러다가 2008년 수도박물관이 닦이면서 칠흑처럼 어두운 여과지
내부가 속세에 공개되었는데, 출입구는 본관과 가까운 문 1개만 열어두어 호기심 어린 관람객
들을 맞이하고 있다.
여과지 출입구들은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네모난 문을 지닌 하얀 건물과 윗부분이 살짝 구부
러진 문을 지닌 건물, 그리고 건물 없이 문만 있는 것 등 3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출
입구 앞 잔디밭에는 1908년부터 20세기 후반까지 정수장에 쓰였던 밸브와 관, 기계들이 놓여
져 조촐하게 야외전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  완속여과지 출입구 앞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20세기 초/중/후반
펌프와 수도밸브, 수도관, 온갖 기계들 (야외전시장)

▲  옛 밸브와 관들 (왜정~20세기 중반)

▲  완속여과지 내부 ①
조명시설을 설치하여 시야에 흐릿함을
다소 덜어준다.


▲  완속여과지 내부 ②
생김새가 마치 하천을 생매장하여 만든 복개도로의 밑도리 같다.


여과지가 한참 몸을 풀던 시절, 매주 1회 정도 모래 위의 부유물질을 치우는 작업을 했고, 매
년 1회 이상 모래를 보충하는 작업을 했다. 이들 작업은 모두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졌는데 새
로 투입된 모래는 밑바닥에 깔고 오래된 모래는 깨끗하게 씻긴 다음 맨 위에 수평으로 깔았다.
거둬낸 흙은 처음에는 한강에 그냥 내버렸으나 1970년대 중반부터는 도로 공사나 매립지에 투
입시켜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깔끔하게 활용되었다.


▲  완속여과지 내부 ③
물 대신 모래만 가득한 여과지의 속살, 얄미운 세월에 적응하며 비록
예전만은 못해도 전시용으로 새로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모래가 깔린 부분은 접근 금지)

▲  완속여과지 내부 ④

▲  완속여과지 왕년의 모습
여과지는 이렇게 외치고 있을 것이다. '나 옛날로 돌아갈래~~~!'
허나 현실은 '응 안돼~~!'

▲  완속여과지 운영 당시 물 높이는 약 1.3m였다.



 

♠  수도박물관 본관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 송수실)

▲  수도박물관 본관 (제1정수장 송수실,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2호)

수도박물관이 둥지를 튼 곳은 이 땅 최초의 정수장인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 자리이다. 즉 우
리나라 수도물의 탄생지이자 고향이 된다.

1903년 12월 9일, 미국 기업가인 콜브란(C.H.Collbran)과 보스트윅(H.R.Bostwick)은 고종(高
宗) 황제로부터 상수도 부설 경영에 대한 특허권을 하사받는다. 그들은 1899년에 조선황실과
합작하여 한성전기주식회사를 만들기도 했으며, 전차의 필요성을 황제에게 건의해 1899년 12
월 서대문~청량리 전차 노선까지 닦으며 돈을 긁어 모았다.
그들은 1905년 8월, 영국 사람이 설립한 대한수도회사(Korean Water Works Co.)에 특허권을
양도했으나 그들에게 공사 도급을 받으면서 1906년 8월 1일 공사를 시작하여 1908년 8월 제1
정수장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달인 9월 1일, 완속여과 방식으로 생산된 12,500㎥의
수돗물이 서울 4대문 안과 용산 일대 주민 125,000명에게 공급되면서 우리나라 근대 상수도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당시 서울에 닦여진 상수도 시설은 아시아권에서는 굉장히 빠른 것으로 수도물 보급으로 서울
시민들의 수인성(水因性) 질병 발생이 크게 떨어졌으며, 서울시내에 공용수도 220전(栓)이 설
치되어 물장수들의 연합체인 수상조합원들이 물을 각 집에 배달했다.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은 처음에 '경성수도양수공장'이라 불렸다. 이후 서울 확장에 따라 계속
몸집을 불려나갔으나 보다 월등한 정수 시설이 생겨나면서 완속여과지 방식으로는 도저히 타
산과 수요를 맞추기가 어렵게 되었다. 하여 1990년 바로 서쪽에 자리한 뚝도아리수정수센터에
정수장 기능을 모두 넘겨주고 은퇴하게 된다.
옛 뚝도수원지를 계승한 뚝도아리수정수센터는 35만㎥의 시설용량을 갖추고 있으며, 종로구와
중구, 용산구, 마포구, 성동구, 서대문구, 성북구 등 7개 구 102만 명에게 하루 평균 25만㎥
의 수도물을 공급하고 있다.

은퇴한 송수실은 계속 놀려두기가 아까워 내부를 손질하여 뚝도수원지의 역사와 옛 유물, 서
울 수도물의 역사와 문화, 수도물 생산과정 등을 머금은 수도박물관으로 2008년에 문을 열었
다. (완속여과지도 개방됨) 이 땅 최초의 정수장이 이 땅 최초의 수도물 전문 박물관으로 새
롭게 태어난 것이다. (천하에서 드물게 최초라는 타이틀을 2개나 가지고 있음)

수도박물관은 송수실을 다듬은 본관을 비롯해 별관, 물과환경전시관 등 3개의 전시실로 이루
어져 있으며, 본관은 '① 물장수를 만나다'→'② 뚝도에 세우다'→'③ 한강물이 들어오다'→
'④ 여과지를 지나다'→'⑤ 수돗물을 내보내다' 등 5개의 테마로 이루어져 뚝도수원지의 역사
와 서울 수도물의 역사를 흔쾌히 담고 있다.
그 외에 완속여과지와 정수지 등의 옛 정수장 시설과 야외전시장, 야외체험장, 생태연못, 이
곳의 오랜 터줏대감인 오래된 느티나무가 수도박물관 야외를 아낌없이 꾸며준다.
(송수실과 완속여과지는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문화재로 지정됨)

▲  동쪽에서 바라본 수도박물관 본관

▲  수도박물관 본관의 뒷모습

수도박물관 본관은 옛 제1정수장 송수실(送水室)로 1907년에 지어졌다. 사용된 기재와 시설은
모두 영국과 미국에서 가져왔으며, 붉은 벽돌조에 박공지붕을 씌운 공장형 건물로 화강석으로
된 아치형 포치를 정문에 설치하고 출입문과 좌우측 창틀도 아치로 둘렀다. 완속여과지와 더
불어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여과지보다 1년 먼저 지어졌으니 송수실이
그 1등이 된다.
건물 모습이 공장형이라고 하지만 십자가 같은 것이 없을 뿐이지 정말 오래된 성당과 교회로
봐도 어색하지가 않다. 정문 좌우에는 이곳 이름과 지어진 시기가 적힌 현판이 있고 그 위쪽
에는 꼬부랑 영어 현판까지 있다.

침전지와 여과지, 정수지를 거쳐 이루어진 수도물은 송수실의 모터펌프(영국 워싱턴사 제품)
를 통해 여기서 3.3km 떨어진 금호동 대현산배수지(해발 79m)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475mm와
500mm, 550mm 등 3종의 배수관을 통해 자연유하(流下) 방식으로 광희동(光熙洞)을 거쳐 을지
로5가 부근(옛 청녕교)까지 내려갔으며, 거기서 다시 4개 구간으로 분리되어 도심(4대문 안)
과 용산 지역으로 공급되었다.

1번 구간 : 을지로 보도 양쪽을 따라 동쪽으로 성벽(서울운동장 뒤쪽)까지 연결
2번 구간 : 퇴계로를 지나 한국은행 앞까지 연결
3번 구간 : 종로5가 부근에서 2개 방향으로 나눠짐, 동쪽 선은 동대문까지, 서쪽 선은 종로,
           광화문, 서대문을 거쳐 공덕동까지 연결
4번 구간 : 을지로, 남대문로, 서울역을 지나 용산까지 연결
<
뚝도에서 대현산을 거쳐 도심까지 이어지는 상수도 구간은 아래 지도를 참조>


▲  왜정 때 그려진 경성수도 일반평면도(京城水道 一般平面圖)
뚝도수원지에서 대현산배수지를 거쳐 도심으로 퍼져나가는 상수도 코스를
불빛으로 진하게 표현하고 있다. 녹색은 4번 구간으로 용산까지, 황색은
3번 구간으로 공덕동까지 이어진다. (축척 1/30,000)

▲  본관 정문 옆에 있는 '경성수도양수공장(京城水道揚水工場)' 현판

'경성수도양수공장'은 이곳의 첫 이름이다. 여기서 경성은 서울의 옛 이름 중 하나로 고종이
황제가 되면서 '황성(皇城)'이라 불리다가 왜정 때 경성으로 격하되어 불렸고 1945년 이후에
는 서울이 정식 이름으로 자리잡았다.


▲  송수실의 탄생시기를 귀띔해주는 '광무11년건축(光武十一年建築)' 현판
여기서 광무는 고종의 2번째 연호로 그 11년은 1907년이다.
(시작된 해를 1년으로 매겨서 계산함)

▲  아치형 포치 위쪽 'SEOUL WATERWORKS 1907' 현판
영국 양이가 세운 대한수도회사에서 지은 것이라 저렇게 멋대가리 없이
영문 현판까지 붙여놓았다.

▲  박물관 전시실로 거듭난 수도박물관 본관 내부 ①

▲  박물관 전시실로 거듭난 수도박물관 본관 내부 ②

▲  본관 시작부터 마중을 나오는 물장수 형상

▲  대리석으로 지어진 뚝도수원지 한글과 영문 현판 (1956년)

▲  준공도면 - 1932년 경성수도 확장공사 당시 준공도면

▲  대현산 제1배수지 준공 표지석 (1907년)

여기서 가까운 금호동(金湖洞)에 대현산(大峴山, 123m)이란 뫼가 있다. 신당동의 뒷산이기도
한 그곳에 1907년 대현산 제1배수지(配水池)가 조성되었는데 바로 그 배수지의 준공표지석으
로 지금은 퇴직하여 이곳에 편안히 누워있다.
대현산 배수지의 시설용량은 제1배수지 6,407톤, 제2배수지 2,795톤 등 총 9,202톤으로 뚝도
수원지 송수실에서 보낸 물을 받아 도심으로 보냈다. (현재 대현산배수지는 공원으로 개방됨)


▲  대현산 제2배수지 준공 표지석 (1910년대)

▲  삼상유도 전동기 (펌프)
1926년 6월에 제작된 것으로 한강물을 잡아오는 역할을 했다.
(뚝도수원지 제1취수장에서 활동했음)

▲  완속여과지(오른쪽) 내부 모형도

▲  여과수 집수블록 (자구식 휠러블럭)
1956년에 제작된 것으로 넓이 600mmX600mm, 높이 200mm이다. 여과된 물을 통과시키고자
여과지 바닥에 설치한 것으로 옛 제3공장 여과지에 있었다.

▲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의 과거 모습
현재는 송수실과 완속여과지(사진 가운데 부분), 정수지만 남아있다.
(송수실 옆 건물과 한옥은 진작에 사라지고 없음)

▲  1926년에 만들어진 제어기 (전압 220V, 마력 20HP)
저압전동기를 돌릴 때 전압을 서서히 상승시켜 회전력을 높이는 장치로
뚝도수원지 제1취수장에서 활동했다.

▲  검은 피부의 곡관(曲管)
1937년 3월에 제작된 것으로 곡선 구간에 투입된 수도관이다.

▲  경성수도 확장공사 뚝도수원지 평면도 (1928년)
(평면도의 축척은 약 1/600)

▲  수도박물관 별관

본관 옆구리에는 별관이 있다. '① 추억의 상수도 문화'→'② 상수도의 변화와 성장'→'③ 미
래의 수돗물' 등 3개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는데 기획전시도 가끔씩 열리며 그 뒤쪽에는 추억
의 상수도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야외체험장과 조그만 생태연못이 있다.


▲  별관에서 만난 추억의 수도계량기들
양수기, 수도미터라 불리기도 한다. 사용한 수도량을 체크하여 수도세를 징수하는
용도로 쓰인 것으로 계량기가 망가졌을 경우 교환을 요청하면 거의 무료로
해준다. (수도세를 징수하는 원천이기 때문에 그 정도는 서비스로 해줌)



 

♠  수도박물관 마무리 (정수지, 느티나무)

▲  정수지(淨水池)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내민 환기장치

본관 서쪽에는 푸른 잡초와 꽃으로 덥수룩한 공간이 있다. 이곳은 물을 잠시 머금어 깨끗하게
다듬던 정수지로 1908년에 지어졌는데, 면적 672㎡, 저수용량 920㎥로 처음에는 1지(池)만 있
었으나 1960년 1지를 추가로 지었으며 1990년에 송수실, 완속여과지와 나란히 은퇴했다.

수도물의 생산량과 공급량 간의 불균형을 조절하고, 여과 단계 이후 주입된 염소를 혼합시켜
물을 저장하는 정수 과정의 마지막 단계 시설로 완속여과지에서 검문을 거친 물은 여과지 각
면 출구에 설치된 양수기를 통해 400mm 관을 타고 정수지로 넘어왔다. 그리고 정수지를 나온
물은 350mm 관을 통해 바로 옆 송수펌프실(송수실)로 들어가 도심을 향한 대장정을 준비한다.

정수지의 속살은 지하에 묻혀 있으며 완속여과지와 달리 공개는 하지 않는다. 6개의 환기장치
(통풍구)가 땅 위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데 이들은 정수지 내부를 환기시키는 용도로 2012년 4
월 산화로 손상을 입어 수리를 하였다.


▲  가까이서 대한 정수지 환기장치들 (바로 옆에 완속여과지가 있음)
풀밭에 모여 앉아 봄의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는 모습들이 귀여워 보인다.

▲  수도박물관의 상큼한 자연물,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4-5호

별관 북쪽에는 야트막한 동산이 솟아있는데 그 동산에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이자 상큼한 존재
인 늙은 느티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340년 정도 묵은 것으로<보호수로 지정된 1982년 당시 추정 나이가 약 300년> 높이
20m, 나무둘레는 4.8m이다. 이곳 동쪽에 성덕정(聖德亭)이란 큰 정자가 있었는데 제왕이 군사
훈련을 사열하던 곳으로 양반과 선비들의 풍류 명소이기도 했다. 하여 그곳과 관련하여 심어
진 것이 아닐까 여겨지는데, 그들이 성덕정 주변에 흐르던 맑은 물을 마시니 그 물을 성스러
운 물로 높여 이곳 동네를 성수동(聖水洞)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이 한강물을 식수로 사용했는데 깨끗하고 고마운 물이란 뜻에서 성수동이라 했다
는 설, 성덕정에서 '성', 뚝도수원지에서 '수'를 따서 성수동이라 했다는 설이 덧붙여 전해옴
, 어쨌든 물과 관련되어 유래된 것은 확실함>

나무 앞에는 상석(床石)이 누워있는데, 옛날에 동네 사람들이 당제(堂祭)를 지낼 때, 제물을
올리던 상이다. 허나 그 당제는 흩어진 과거가 되었으며, 뚝도수원지가 그의 그늘에 안긴 이
후, 수도물을 빚느라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 지금은 이곳을 찾은 관람객을 위해 매일마다
품질이 좋은 그늘을 베푼다.

▲  느티나무의 옆 모습

▲  물과 환경전시관

수도박물관에서 마지막으로 살핀 존재는 '물과 환경전시관'이다. 정문 바로 앞에 자리한 공간
으로 '① 종이배를 띄우다'→'② 숲으로 간 물'→'③ 생활 속에 머물다','④ 물은 생명이다'
등 4개의 테마로 하여 물의 기능과 물과 환경, 물과 인체, 물과 생활 등 물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를 머금고 있다. 특히 '수분측정기'라는 흥미로운 것이 있어 몸 속의 수분 양을 직접 측
정할 수 있다.


▲  여기서 쿨하게 공개하는 내 몸의 수분량 (수분측정기)
적정 수분량보다 0.5% 정도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양호한 편이다.
(내가 좀 싱겁다보니 물을 좀 많이 마시는 편임)

▲  수도박물관을 뒤로 하며~~~ (정문 방향)
이렇게 하여 약 90분에 걸친 수도박물관 더듬기는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벌처럼
날라와서 벌처럼 보고 가려고 했지만 내 발길을 붙잡는 것이 하염없이 많아서
개미처럼 천천히 보고 나갔다. (천천히 둘러보는 것이 정석임)


* 수도박물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1가 642-1 (왕십리로27, ☎ 02-3146-5921)
* 수도박물관과 서울시상수도사업본부 홈페이지는 이곳을 ☞ 흔쾌히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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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9월 3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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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과 6월이면 생각나는 그 사람, 예산 윤봉길의사 유적 나들이 (저한당, 도중도, 충의사, 보부상유품전시관)

 


'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 나들이 '


▲  윤봉길이 태어난 광현당

▲  저한당

▲  윤봉길이 남긴 글씨들

 


 

차디찬 겨울 제국과 따스한 봄의 팽팽한 경계선인 3월 초의 어느 평화로운 날, 충남 홍성
과 예산(禮山)을 찾았다.
충남의 금강산으로 추앙받고 있는 용봉산(龍鳳山, 381m)을 둘러보고 덕산(德山)으로 나와
늦은 점심으로 얼큰하게 육개장을 섭취했다. 용봉산을 크게 1바퀴 돌아 몸이 좀 피곤했으
나 일몰까지는 시간이 넉넉하여 수덕사(修德寺)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윤봉길 의사 유적(
충의사)의 문을 두드렸다.

윤봉길(尹奉吉) 의사 유적은 그가 자란 저한당을 비롯해 도중도의 광현당과 부흥원, 윤봉
길 의사 기념관, 충의사, 그의 부인인 배용순 여사의 무덤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외에
윤봉길과는 관련은 없지만 보너스로 보부상유품전시관도 있다.

윤봉길 의사 유적은 통째로 사적 229호로 지정되었으며,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예산 윤봉
길 의사 유적이다. 이곳을 둘러보는 순서는 각자의 취향대로 하면 되나 나는 저한당을 시
작으로 도중도와 부흥원, 윤봉길의사 기념관, 보부상유품전시관, 충의사, 배용순 여사 묘
역 순으로 둘러봤다.


▲  옛 국도변에 자리한 저한당 서쪽 돌담길


 

♠  윤봉길 의사(義士)가 성장기를 보냈던 저한당(狙韓堂) 주변

▲  저한당

저한당은 윤봉길(1908~1932) 의사가 1911년부터 1930년 봄까지 살았던 집으로 1911년에 가족
을 따라 도중도에서 저한당으로 이사를 왔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들어갔으나 이듬해 3.1
운동이 터지면서 왜정(倭政)의 식민지교육을 거부하며 학교를 그만두었다. 하여 동생인 윤성
의(尹聖儀)와 함께 한학(漢學)을 공부했는데, 워낙 영특하여 15살 때 천재로 칭송을 받았다.
(나는 그 나이 때 뭐했나...?)
1921년부터 오치서숙(烏峙書塾)에 들어가 계속 한문학을 익혔으며, 1926년에 집에 서당을 차
리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새로운 문물을 틈틈이 익혔다. 그러다가 그 유명한 공동묘지 묘표(墓
標) 사건이 발생하니 사연은 다음과 같다.

서당에서 평화롭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던 어느 날, 글을 모르는 청년 하나가 마을 인근 덕
숭산(德崇山) 공동묘지에 있는 팻말을 모조리 뽑아들고 와서 자기 아비의 묘비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그 부탁에 묘비를 찾아주긴 했으나 문제는 그 청년이 아버지 묘비는 물론이고 다른
묘비까지 아무런 표시도 남기지 않은 채, 죄다 뽑아 온 것이다. 그러니 어찌 묘비의 위치를
알 수 있겠는가?
이에 큰 충격을 먹은 윤봉길은 아이들보다 청년들의 교육이 시급함을 깨닫고 야학회(夜學會)
를 창설해 지역 주민들의 문맹퇴치에 나섰다. 또한 민족의 경제자립이 자주독립의 지름길임을
인식하고 구매조합(購買組合) 조직과 양계(養鷄), 양돈(養豚) 등을 장려하여 농촌 경제자립운
동을 펼쳐나갔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18세에 불과했다. 나는 그 나이 때 학교에서 잠만
열라게 잤는데, 역시 위인은 떡잎부터가 다르긴 다른 모양이다.

1927년에는 농민독본(農民讀本)을 짓고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하였으며, 1929년에는 도중도에
부흥원(復興院)을 만들고 매월 14일에 계몽강연회(啓蒙講演會)를 개최하여 농촌계몽에 발벗고
나섰다. 그리고 그해 2월 18일에는 부흥원 주관으로 학예회(學藝會)를 열고 촌극(寸劇)인 '토
끼와 여우'를 공연했는데, 동네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와 구경하면서 매우 성공리에 막을 내렸
다. 바로 이 연극 때문에 왜정은 그를 은밀히 감시하게 된다.
1929년에는 월진회(月進會)란 농민 단체를 만들어 회장이 되었고, 수암체육회(修岩體育會)를
조직해 농민의 단결과 애국사상 고취에 나섰다. 허나 왜정은 그런 행동이 독립운동이라며 쓸
데없이 꼬투리를 잡았다. 하여 왜경(倭警)에 여러 차례 불려가 조사를 받았는데, 윤봉길은 독
립운동이 아닌 단순한 교육이라고 했지만 왜정은 무조건 독립운동이라며, 더 이상 하지 말라
고 강요했다. 농민을 계몽하고 교육하는 것까지 왜정이 쓸데없이 태클을 거니 그는 이곳에서
의 활동도 한계에 이르렀음을 깨닫고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된다.
그래서 1930년 3월 6일, 그 유명한 7글자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는 집을 나
가서 그 뜻을 이룰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다)'이란 시를 남기고 만주로 망명을 떠났다.

윤봉길은 부인과 2남 1녀의 자녀가 있었는데, 1932년 상해 의거(義擧) 이후 왜정의 감시와 탄
압 속에 눈물과 독립에 대한 의지로 이 집을 지켰고, 해방 이후에도 계속 이곳에 살다가 1972
년 윤봉길 의사 유적을 몽땅 국가 사적으로 삼으면서 국가에서 집을 매입해 성역화 작업에 들
어갔다. 그래서 그해 8월 유족들은 정든 집을 떠나 인근으로 이사갔으며, 1974년 집을 중수했
다. 지금도 관리가 지극정성이라 마치 여인네들이 살고 있는 듯, 집이 매우 깨끗하다.

남쪽을 바라보며 선 저한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초가(草家)로 오래된 마을과 민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가이다. 1911년에 지어진 것으로 창고와 부엌으로 쓰이는 'ㄱ' 모양의 건
물과 방 2개가 딸린 건물 등 부속 건물 2채(담장 밖에 뒷간을 포함하면 3채)를 거느려 총 3채
가 한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제법 규모가 있는 집이다.
건물에 딱히 특별한 부분은 없으나 윤봉길의 오랜 손때가 묻어있고 그의 독립의식과 민족의식
이 담긴 터전으로 유서가 깊으며, 그의 유가족이 오랫동안 살았던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 집의 이름인 저한당(狙韓堂)은 한국을 건져낸다는 뜻이니, 즉 우리나라를 왜정에서 건져
내 독립을 이루고 말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담겨 있다.

* 저한당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35 (덕산온천로 182-10)


▲  돌담에 둘러싸인 저한당 외경

▲  저한당으로 인도하는 대문
두 부속건물 사이로 조촐하게 담을 만들고 문을 내어 정겨운 모습을 자아낸다.

▲  방 2개와 광으로 이루어진 부속건물

▲  창고와 부엌

▲  저한당 뒤쪽 장독대

▲  뒷간과 소나무

▲  글씨가 살아 꿈틀거리는 듯한
저한당 현판

▲  주인이 가고 없는 저한당 방


▲  저한당에 봉안된 잘생긴 윤봉길 의사의 영정

▲  윤봉길 의사 동상

▲  윤봉길 의사 의거 기념탑

저한당 주변에는 오른쪽 주먹을 쥐며 독립에 대한 각오를 다지는 윤봉길 의사의 동상과 1965
년에 세워진 의거 기념탑, 교육관 등이 있으며 나무가 많고 잔디가 곱게 깔려 정갈한 분위기
를 자아낸다. 그리고 그 주변을 기와 돌담으로 빙 둘러 속세와 성역의 경계를 그었다.


▲  저한당 주변
심술쟁이 겨울도 그를 흠모하는 것일까? 저한당에서 좀처럼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천하만물을 위해 빨리 떠나주면 좋으련만~~

▲  도중도로 이어지는 저한당 동쪽 돌담길
지긋한 전통마을의 돌담길처럼 정겹기 그지 없다.


 

♠  윤봉길 의사가 태어나고 농민계몽을 위해 힘쓰던 현장
도중도(島中島)

▲  도중도 광현당 정문

저한당을 둘러보고 남쪽으로 나오면 대치천이라 불리는 개천이 나온다. 그 개천에 걸린 '도중
도교'를 건너면 윤봉길이 태어나고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던 도중도 구역에 들어서게 된다.

도중도는 윤봉길의 증조부 때부터 정착해 살던 곳으로 1908년 6월 21일 광현당에서 윤황(尹璜
)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경주김씨인 김원상(金元祥)이며, 본관은 파평 윤씨, 본명은
우의(禹儀)이다. 봉길이란 이름은 별명이며, 호는 매헌(梅軒)이다.

그는 여기서 1911년까지 살다가 북쪽 저한당으로 이사를 갔으며, 1926년부터 1930년까지 야학
회를 비롯해 계몽강연회,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다. 도중도란 이름은 '조선반도 속의 섬, 조선
반도 가운데의 섬으로 왜인(倭人)이 절대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란 뜻에서 윤봉길이 지은 것
으로 예전에는 순 100% 섬이었지만 도중도교 서쪽 개천에 흙으로 둑을 닦아 그 밑으로 물을
흘려보내면서 99% 섬이 되버렸다. 큰 강도 아니고, 바다도 아니고 조촐한 개천 안에 이런 커
다란 섬이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할 뿐이다.

도중도에는 윤봉길의 체취가 서린 광현당과 부흥원이 있고, 무궁화(無窮花)를 비롯해 온갖 야
생화를 심은 무궁화학습원이 부흥원 동쪽에 있다. 하늘을 향해 곧게 솟아난 전나무길이 곳곳
에서 운치를 자아내며, 섬 동쪽에는 씨름장과 그네, 급수대, 쉼터를 갖춘 넓은 잔디밭이 있어
소풍이나 나들이로 잠시 쉬었다 가기에 좋다.
또한 섬 주변을 개천이 둘러싸고 있으며, 섬 남쪽에는 물을 모아 연못을 만들어 연꽃을 심었
다. 하여 여름에 오면 연꽃의 화려한 향연에 그야말로 두 눈이 환장할 지경이다.

* 도중도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80-1 (시량부흥길 21)


▲  넓은 공원 분위기의 도중도 내부

▲  광현당 서쪽에 자리한 매헌 윤봉길 유허비(遺墟碑)

▲  광현당(光顯堂)

도중도 가운데에 자리한 광현당은 윤봉길 의사가 태어난 곳으로 저한당과 마찬가지로 초가이
다. 이 집은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 정착한 증조부(曾祖父)인 윤자 때부터
살았다고 하며, 조선 후기 초가로 광현당이라 불리는 본당 외에 3채의 건물을 거느리고 있다.

윤봉길은 여기서 1911년까지 살다가 북쪽에 새롭게 장만한 저한당으로 이사를 갔고, 이후 그
의 친척이 잠시 살다가 버려진 이후 나라에서 매입하여 1974년에 복원해 지금에 이른다. 저한
당과 마찬가지로 관리가 잘되어 있어 마치 사람이 살고 있는 듯 깨끗하며, 광현당이란 이름은
윤봉길을 빛으로 비유해 그의 태어남을 높이는 뜻에서 지어진 것이다.

▲  광현당 대문과 펄럭이는 태극기

▲  적막이 감도는 광현당

▲  광현당 부엌
부엌이 양쪽으로 개방되어 있다.

▲  광현당 현판의 위엄
글씨가 마치 물이 흐르는 듯 생기가 넘쳐
보인다.

▲  담장을 두른 광현당 뒷모습

▲  우진회기공비(禹進會記功碑)

우진회는 1944년 2월 15일 윤봉길의 4촌과 6촌, 제자들이 만든 단체로 윤봉길이 만든 월진회
를 계승했다. 1946년 4월 29일 월진회로 이름을 갈았으며, 2011년 4월 29일 윤봉길 문화축제
때 우진회의 업적을 기리고자 광현당 앞에 기공비를 세웠다.


▲  부흥원 옆에 자리한 연자방아
윤봉길이 농촌계몽운동 때 사용했던 연자방아로 지금은 마음에도 없는
한가한 신세가 되었다.

▲  윤봉길이 농촌계몽운동 때 사용한 여러 농사 도구들

▲  부흥원 뒤쪽에 그림처럼 펼쳐진 전나무 숲길

▲  부흥원(復興院)

광현당 동쪽에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자리한 부흥원은 1928년에 윤봉길이 세웠다. 공동묘지 묘
표사건에 크게 충격을 먹은 윤봉길은 야학당을 만들어 저한당 사랑방에서 운영했는데, 참여
인원이 늘어남에 따라 도중도에 부흥원을 만들고 1928년 2월 25일에 자필로 대들보에 글씨를
새겨 상량식(上梁式)을 가졌다. (대들보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 있음)
그는 이곳을 3대 목표운동의 장으로 삼았는데, 그 3대란 무지 타파, 가난 타파, 단결이다. 무
지(無知) 타파를 위해 야학과 독서회, 학예회를 벌였고, 가난 타파를 위해 농촌 공동구매와
저축, 생활 개선을, 단결을 위해 월진회와 수암체육회, 공동작업과 공동식수 작업을 벌였다.
그의 개혁적인 활동에 왜정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태클을 걸자 바로 여기서 망명을 결심하게
되었으며, 상해 의거 이후 폐허가 되었다가 1974년 당시의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  부흥원 현판의 위엄
부(復)가 마치 도(渡)처럼 보인다.

▲  아직은 황량한 무궁화학습원

▲  겨울잠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그네

▲  도중도 남쪽에 조성된 연꽃 연못


 

♠  윤봉길 의사 기념관

▲  윤봉길 의사 기념관 앞 (왼쪽에 보이는 집은 보부상유품 전시관)

충의사 남쪽(저한당 북쪽 길 건너편)에 자리잡은 윤봉길 의사 기념관은 1973년부터 1977년까
지 진행된 윤봉길 유적 성역화 사업 때 관리사무소와 함께 세워졌다. 이후 2001년 기념관 옆
에 윤봉길의 어록(語錄)을 담은 윤봉길어록탑을 만들었으며, 2002년에 기념관을 새로 만들어
그해 12월에 속세에 문을 열었다.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는 윤봉길의 손때가 자욱한 유품 28종 56점이 전시되어 있는데, 윤봉길
일가에서 쓰던 그릇과 서적, 벼루를 비롯하여 그의 찰나(刹那)와 같은 인생을 다룬 영상관과
매직비전 11대, 다오라마 등이 그의 대한 이해를 도와주고 있다. 특히 그의 유품(遺品) 중에
회중시계와 지갑, 중국화폐, 도장, 손수건, 안경집, 일기, 월진회창립취지서, 농민독본, 형틀
대, 편지 등은 '윤봉길의사 유품'이란 이름으로 '보물 568-2호, 568-3호'로 지정되었다.

* 윤봉길의사 기념관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19-5 (덕산온천로 183-5, ☎
  041-339-8233)
* 윤봉길의사 기념관 홈페이지는 아래 그릇, 수저, 놋대야 사진을 클릭한다.

▲  윤봉길 일가가 사용했던 그릇과
수저, 놋대야 - 보물 568-3호

▲  윤봉길이 읽은 명심보감과 그가
사용한 벼루와 등잔대 - 보물 568-3호

▲  윤봉길의 글씨 (해석은 각자 알아서)
- 보물 568-3호

▲  윤봉길이 쓴 온갖 서적들
보물 568-3호


▲  윤봉길이 직접 그린 월진회 깃발 - 보물 568-3호
팔방미인이던 윤봉길은 지식 소양도 대단할 뿐 아니라 그림도 잘 그렸다고 한다.
깃발 가운데를 장식하고 있는 무궁화는 마치 뭉개구름 속에서 방긋
피어나는 태양처럼 찬란해 보인다.

▲  부흥원 대들보 - 보물 568-3호
옛 부흥원의 유물로 1928년 2월 25일 부흥원 상량식 때 윤봉길이
대들보에 기념 메세지를 남겼다.

◀  윤봉길이 1930년 만주로 망명할 때 가족들
에게 남겼다는 7글자의 시 - 보물 568-3호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는 집
을 나가서 그 뜻을 이룰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
다)' 물이 흐르듯 유연한 곡선의 서체에 그의
비장함이 엿보인다.


▲  월진회 창립취지서(보물 568-2호)와 통장(보물 568-3호)

1929년 농촌계몽운동을 위해 월진회를 만든 윤봉길은 창립 취지서(趣旨書)를 남겨 그 뜻을 천
하에 밝혔다. 월진회 통장은 저축운동을 위해 그가 회원들에게 나눠준 것으로 그가 직접 만들
었다고 하며, 그때 그의 나이는 고작 21살이었다. (지금 21살이면 완전 애기인데...)


▲  윤봉길이 1929년에 쓴 기사년일기(己巳年日記) - 보물 568-2호

▲  농민독본(農民讀本) - 보물 568-2호

1927년 농민들을 대상으로 야학당을 운영했을 때 그가 직접 편저한 책으로 모두 3권으로 이루
어져 있다. 지금은 2권과 3권 일부만 남아있으며, 왼쪽 책은 세월의 녹이 검게 그을려져 있다.
책에 수록된 우리나라 지도가 무척 인상적인데, 부산과 왜열도 사이를 조선해협이라 표시했다.


▲  위친계취지서(爲親契趣旨書) - 보물 568-3호
윤봉길이 부모의 상사(喪事) 등을 위해 친척을 중심으로 조직한 위친계의 취지서이다.
나라의 독립과 경제 부흥에 대한 생각이 잘 나타나 그의 높은 의식을 보여준다.

▲  우리의 옛 땅 동북아를 누빈 윤봉길의 위엄
지도에 나온 동북아 일대는 우리의 옛 땅으로 우리의 미래를 위해 필히
차지해야 될 땅이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  윤봉길이 중원대륙에 있을 때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복제품)

▲  윤봉길이 1932월 1월 30일 상해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복제품)
그해 1월에 벌어진 왜군의 상해 침략에 대한 내용이 소상히 나와있다. 왜군이
상해를 공격하자 장개석(蔣介石)의 중국군이 1달 동안 저항했으나
결국 상해를 빼앗기고 많은 중원 사람들이 도륙을 당했다.


1930년 3월 6일, 윤봉길은 가족에게 장엄한 각오가 서린 7자의 시를 남기고 만주로 홀로 길을
떠났다. 그가 떠났다는 소식에 간이 쫄깃해진 왜경은 몰래 미행을 붙이면서 평안북도 선천(宣
川)에서 붙잡고 만다. 하여 45일 동안 옥고(獄苦)를 치르고 바로 만주로 넘어가 그곳에서 그
와 뜻이 같은 김태식(金泰植), 한일진(韓一眞)을 만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허나 제대로 된 독립운동을 벌이기에는 역부족이라 1930년 12월 홀로 산동반도 청도(靑道, 칭
따오)로 넘어가 1931년 여름까지 세탁소에서 일을 하며 적당한 자리를 물색했으며, 여기서 번
돈 대부분을 고향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했다.

청도도 적당한 곳이 아님을 깨달은 그는 임시정부(臨時政府)가 있는 상해로 가야만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고 1931년 8월 상해로 갔다. 상해에 있는 프랑스 조계(租界)인
샤비루화합방(霞飛路和合坊) 동포석로(東蒲石路) 19호 안공근(安恭根)의 집 3층에 머물며 박
진(朴震)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일하면서 상해영어학교에서 영어를 익혔다. 그렇게 주경야독(
晝耕夜讀)을 하다가 공장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활동을 했고, 그해 겨울 드디어 백범 김구
(白凡 金九)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임을 호소해 그의 밑에 들어가게 되었다.


▲  윤봉길이 홍구공원 의거 2일 전에 김구에게 보낸 자신의 이력서들
이력서 옆에는 사진에는 빠져있지만 상해에서 사용한 중국제 수첩이 있다.

▲  윤봉길이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하면서 찍은 증명사진
(오른쪽은 자필로 쓴 한인애국단 가입 선서문)

▲  조금은 어설프게 재현된 홍구공원 의거 현장

1932년이 되자 왜국은 왜인 승려 처단 사건을 구실로 상해 사변을 일으켰다. 장개석이 1달 동
안 저항을 했으나 결국 상해를 내주고 말았으며, 상해를 점령한 왜군이 승리에 도취해 왜왕(
倭王) 생일인 4월 29일에 왜왕 생일 축하 및 전쟁 승리 축하 기념식을 상해 시내에 있는 홍구
공원(虹口公園)에서 갖기로 했다.

그 소식을 접한 윤봉길은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김구와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
始榮), 조소앙(趙素昻)에게 자신의 거사 계획을 밝히고 거사를 구상했다. 성공적인 거사를 위
해 채소장사로 가장해 기념식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신분을 세탁했으며, 김홍일(金弘一)이
만든 유명한 도시락 폭탄을 준비하고 폭탄 던지는 법을 배워 실수가 없게끔 자신을 채찍질했
다.
드디어 4월 29일 아침, 그는 물통 모양의 폭탄 1개와 자결용 도시락 폭탄 1개를 가지고 기념
식장으로 들어갔다. 공원을 지키던 왜군이 검문을 했으나 왜인이라고 속이니 그냥 들여보내주
었다.
왜인들만의 즐거운 잔치였던 그 행사가 거의 막을 내릴 무렵, 1만 명의 군중 사이에 묻혀있던
그는 기념식 단상 앞을 지키던 기마헌병 앞까지 들어와 물통폭탄을 단상을 향해 힘껏 던졌다.
그 물통이 단상에 떨어지는 순간 굉장한 폭음을 내면서 식장에서 오만을 띈 미소로 행사를 치
르던 왜인 고위층 7명이 모두 꼬꾸라졌다. 단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행사를 구경
하던 관중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목을 붙잡고 도망치느라 바뻤다. 왜군 또한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리니 충분히 빠져나와 다음 거사를 준비할 틈이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윤봉길은 피신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간신히 정신을 차린 왜군은 그를 체포했다.

윤봉길이 준 크나큰 선물에 감동하여 기절한 7명의 왜인 고위층 중에, 상해 왜인 거류민(居留
民) 두목인 가와바다 사다쯔구(河端貞次)는 사경을 헤매다가 다음날 바로 폐기되었다. 그리고
1932년 1월 상해 사변을 일으켜 전공(戰功)을 세운 왜장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는 5월
에 폐기되었다. 또한 제3함대 두목인 노무라 요시사부로(野村吉三郞)은 중상을 입고 눈병신이
되었으며, 주중일본공사 시케미쓰(重光癸)는 우측 다리가 절단되어 다리 병신이 되었다. 기타
2명도 막심한 중상을 입었다. 즉 2명이 폐기되고 5명이 병신이 된 것이다. 그 5명은 왜국 백
성들이 바친 세금이나 갉아먹으며 식충이처럼 살다가 골로 갔다.


▲  의거 이후 연행되는 윤봉길 사진
기념식장을 흔쾌히 아수라장으로 만든 물통 폭탄과 폭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업혀가는 왜군 장수 사진도 있다.

▲  상해 의거 관련 왜국 조일신문 보도
왜국은 상해 폭탄변사(爆彈變事)라고 표현했다. 하긴 그들 입장에서는 변사겠지~~
윗사진은 폭탄에 아작이 난 기념식장, 아랫 사진은 왜군에게 잡혀 호송되는
윤봉길 의사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은 왜국 군법회의로 넘겨져 이유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사형을 선고받
았다. 그를 심문하던 왜군은 그가 상해사변에 앙심을 품은 대륙 사람인줄 알았으나 조선 사람
이란 사실에 크게 놀랐다고 한다.
상해 왜군 헌병대에 갇혀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던 그는 그해 11월 18일 왜열도로 호송되었으
며, 20일 오사카(大阪) 위수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다시 가나자와(金澤)로 옮겨져 거기서 12
월 19일 총살형을 받으니 그의 나이 겨우 24세였다.

한편 상해 사변에서 개망신을 당해 절치부심에 빠진 중화민국(中華民國) 지도자 장개석(장제
스)은 그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특히 상해사변을 일으킨 원흉들이 대거 폐기되었다는
소식은 겁 많은 중원대륙 지도층을 비롯한 대륙 민중들까지 모두 환호하게 만들어 한국에 아
주 감사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장개석은 '쓸데없이 머릿수만 많은 4억 대륙인이 해내지 못한
위대한 일을 한국인 한 사람이 해냈다'
고 두고두고 격찬했으며, 1933년 5월 그의 제의로 남경
(南京)에서 김구와 회담을 했다.
여기서 장개석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터이니 서로 돕고 지내자며 손을 내밀었고, 임시정
부와 중원대륙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광복군은 장개석의 지원과 비호를 받으며 독립활동을 전
개했다. 그리고 왜국이 패망할 때까지 서로 상부상조했다. 윤봉길의 의거로 잠시 침체되었던
독립운동이 크게 고취되었고, 우리의 독립활동이 천하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  윤봉길의 최후 장면과 그가 갇혀있던 가나자와 형무소

▲  장개석이 윤봉길의 동생 윤남의에게 보낸 친필서한과 기념사진

▲  장개석이 윤봉길 의사 전기문을 낸 곽상훈에게 보낸 축하 친필 서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윤봉길의 시신은 가나자와 노다산(野田山) 공동묘지에 13년 동안 매장
되었다. 왜국이 패망하자 임시정부유해발굴단과 가나자와에 거주하던 박동조, 서성민으로 이
루어진 발굴단이 1946년 3월 4일 발굴을 시작해 6일에 시신을 발견했다.
그의 유해는 이봉창(李奉昌), 백정기(白貞基)의 유해와 함께 그해 5월 부산에 도착해 공설운
동장에서 추도식이 열렸으며, 7월 7일 서울운동장(지금은 없어진 동대문운동장)에서 최초로
국민장(國民葬)이 거행되어 효창공원(孝昌公園)에 안장되었다. 또한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
국장이 추서되어 그의 의거를 영원히 기리고 있다.


▲  윤봉길이 날린 그 유명한 도시락/물통 폭탄 (모형)
공원을 지키던 왜군을 감쪽같이 속이고 임무를 완수한 도시락/물통 폭탄의 위엄
겉은 그저 흔한 도시락과 물통이지만 그 속에는 무시무시한 폭탄이 들어있다.

▲  윤봉길 의사의 유품 (안경집부터 대륙 화폐까지) - 보물 568-2호
윤봉길을 사형시킨 왜국은 그의 몸에서 나온 유품을 덕산에 있는 유가족에게
보내주며 은근히 악어의 눈물을 보였다.

▲  윤봉길이 상해 의거 때 지녔던 지갑과 대륙 화폐 - 보물 568-2호

▲  윤봉길이 죽기 전까지 사용했던 손수건
손수건에 점처럼 찍힌 빨간 것은 그의 거룩한 피이다.

▲  회중시계(懷中時計)와 도장

윤봉길의 유품 중에 회중시계가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싶다. 이 시계는 원래 김구 주석이 쓰
던 것으로 상해 의거를 벌이던 4월 29일 아침, 김구와 마지막으로 만나면서
'선생님의 시계가 많이 녹슬었군요. 제 시계는 이제 쓸 일이 없으니 제 시계와 바꾸시지요'
제안을 하여 서로의 시계를 바꾼 것이다. 그의 시계를 받은 김구의 마음은 참 착잡했을 것이
다. 솟구쳐 나오려는 사나이의 눈물을 서로가 억지로 참아가며 시계를 서로의 정표로 바꿔야
했던 그 참담한 현실을..


▲  1962년 우리나라 정부가 윤봉길에게 바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윤봉길이 마지막으로 짊어진 형틀대
1932년 12월 19일 윤봉길의 몸을 묶었던 형틀
대이다.
가로목과 세로목이 있는데, 세로목은 두 팔을
묶었고, 가로목은 머리부터 허리까지 묶었다.
이 형틀대는 그가 묻힌 노다산 공동묘지에서
시신과 함께 발견된 것으로 세로목만 나왔으며
이후 이 땅에 들어와 윤봉길의사 기념관에 안
착하여 보물 568-2호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우리나라 보물급 문화재 가운데 가장 비
참하고 쓰라린 존재가 아닐까 싶다.


▲  윤봉길 의사의 흉상

▲  윤봉길 의사 기념관 옆에 자리한 윤봉길어록탑


 

♠  충의사(忠義祠)

▲  충의사로 인도하는 홍살문

윤봉길 의사 유적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한 충의사는 윤봉길의 충혼이 깃든 사당으로 1968년에
지어졌다. 1978년 4월에 사당과 삼문을 증축하고 주변을 정비했는데, 사당과 충의문의 색이
그 흔한 사당 건물의 색깔이 아닌 베이지색을 띄고 있다. 이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그리된 것으로 그 시절 성역화시킨 모든 사당은 모두 베이지색으로 떡칠을 했다. 이유는 그가
좋아하는 색이기 때문이라나..?
어쨌든 1979년 이후 많은 사당이 본연의 색깔을 되찾았으나 이곳은 아직 베이지색을 고수하고
있다.


▲  2마리의 사자가 문을 지키는 충의문(忠義門)의 위엄
가운데 문은 사당 주인이 이용하는 문이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굳게 닫아 둔다.

▲  충의사 본전(本殿)

▲  충의사에 봉안된 윤봉길의 영정 (정우성 화백의 그림)

그에게 있어 저렇게 편안히 앉아있던 시간은 과연 얼마나 될까?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시대에
저런 영웅이 여럿 나타나 세상을 바로 잡아 주어야 하건만 이젠 그런 것도 무뎌딘 것일까..?
윤봉길 같은 이가 나라의 주인이 된다면 나라와 백성이 많이 편안해질텐데 너무 젊은 나이에
숨진 것이 상당히 안타깝다.

그의 영정에 머리를 조아리며, 참배록에 '봉길이 형님 나 다녀갔소. 잘 봐주시오!'의 뜻으로
나의 보잘것 없는 이름을 살짝 남겨본다.


▲  늦은 오후의 무료함을 달래는 연못의 조촐한 분수대
충의사와 배용순 여사 묘소 중간에 연못을 두어 성역(聖域)의 딱딱한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덜어낸다.

▲  윤봉길의 부인인 배용순(裵用順) 여사의 묘역

충의사와 연못 서쪽에 소나무가 우거진 언덕이 있다. 바로 그곳에 윤봉길의 부인인 배용순 여
사의 묘역이 조용히 자리하여 남편의 사당을 바라본다.
배용순은 1922년 그와 혼인하여 2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상해 의거 이후 왜정의 감시로 적
지않은 마음 고생을 겪으며 저한당을 지켰고, 1974년 성역화 사업에 따라 나라에서 유적 일대
를 매입하면서 인근으로 이사가 여생을 보내다가 1988년에 적지 않은 나이로 별세했다. 그녀
와 유족의 마음 같아서는 남편(윤봉길)의 무덤 곁에 있고 싶겠지만 멀리 서울 효창공원에 가
있으니 그것도 쉽지가 않다. 그래서 사당이 바라보이는 서쪽 소나무 숲에 무덤을 쓴 것이다.


▲  보부상(褓負商) 유품 전시관

윤봉길 의사 기념관과 충의사 사이에 팔작지붕을 지닌 기와집이 하나 있다. 겉으로 보면 윤봉
길과 관련이 있는 집이겠지 생각을 하겠지만 현실은 그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보부상 유품 전
시관이다. 윤봉길 유적에 왠 뜬금 없이 보부상 유품 전시관이 있는 것일까? 신라시대 문화유
산으로 도배가 된 경주(慶州)에서 고구려 호우를 보는 것 마냥 꽤 이채롭다.

보부상 유품 전시관은 예산과 덕산 지역에서 활동했던 보부상의 조직적 단체인 예덕상무사(禮
德商務社)의 유품을 머금은 공간이다. 보부상은 일종의 행상(行商)으로 보상(褓商)과 부상(負
商)을 합친 말인데, 보상은 부피가 가볍고 돈이 나가는 물건을 짊어지며 팔았고, 부상은 부피
가 크고 값이 싼 생활용품과 먹거리를 지게에 이고 다녔다.

보부상은 고려 후기에 여진족과 싸우다가 화살을 맞아 부상을 당한 이성계(李成桂)를 부상 백
달원이 발견해 치료해 준 것이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
상업을 천시했던 조선 조정도 보부상에게는 조금 관대하여 여러 혜택을 주었고, 곳곳에서 보
부상이 조직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밥벌이를 하였다. 그들은 나라가 위급에 처했을 때는 쌀
이나 무기를 짊어지고 아군을 도왔는데,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幸州山城)을 지키던 권율에게
쌀을 날라주었고,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南漢山城)에 갇힌 인조와 군사들에게 쌀과 먹을 것
을 날라주었다. 대한제국 시절에는 보부상을 중심으로 황국협회(皇國協會)가 결성되어 어용단
체로 활동하기도 했다.

예산/덕산 지역에서 활동했던 예덕상무사는 조선 후기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서와 유
물을 남겼는데, 그 유물을 전시하고 보관하는 공간을 윤봉길 의사 유적에 세운 것이다.
아무래도 윤봉길과 관련이 없는 곳이다 보니 관람객들의 발길이 조금 적은 편인데, 우리나라
상업의 역사가 담긴 공간이니 잠시 둘러보는 것도 정신적으로도 지식적으로도 매우 유익할 것
이다. 결코 손해될 것은 없다.


▲  예덕상무사 시절의 문서와 도장들

▲  보부상들이 팔던 양반용 물건들 - 삿갓과 부채 등

보부상 유품 전시관에 전시된 예덕상무사 유물(인장 6개, 인궤 1개, 청사초롱 2개, 공문서 16
점)은 '보부상 유품'이란 이름으로 국가민속문화재 30-2호로 지정되었다. 스크롤의 압박이 상
당한 본글의 사정상 보부상 유품은 2장만 담았으며, 예덕상무사와 유품에 대한 내용은 생략한
다.

이리하여 윤봉길 의사 유적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끝으로 윤봉길을 폄하하고 테러
라고 치부하는 꼴통 매국노들과 뇌가 없는 머저리들이 여럿 있는데, 이런 것들은 정말 산소와
물이 아깝다. 테러와 의거의 차이부터 공부하길 권한다. 왜인이 저렇게 말하는 건 이해를 하
겠으나 그것도 우리나라 사람이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은 정말 이해 불가이다. 이는 이승만 시
절에 친일매국노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해 일어난 잔혹한 결과이다.
윤봉길이나 안중근(安重根),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같은 걸출한 인재나 영웅이 많이 나와서
이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매국노를 말끔히 청산하고 처단하여 역사를 바로 잡는 그날이
오길 간절히 고대한다. 역사 청산이 없는 이상 이 땅의 미래도 없다.

* 보부상유품 전시관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20-6 (덕산온천로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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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서대문구

박종화가옥, 보현산신각, 홍지문, 산모퉁이까페
옥천암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201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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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종로구

북한산 금선사 (목정굴)

201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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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중랑구

숙선옹주묘역, 봉화산(아차산봉수대터),
봉화산둘레길, 충익공 신경진 묘역

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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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노원구

불암산 학도암, 중계본동 느티나무

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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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강북구

수유동 분청사기가마터, 신익희묘, 김병로묘,
유림묘, 북한산둘레길 순례길

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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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도봉구

무수골, 무수골느티나무, 전주이씨영해군파묘역

201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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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서대문구

봉원사(서울연꽃문화축제)

201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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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노원구

수락산 노원골, 수락산보루, 동막골, 도선사

201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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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종로구

북촌문화센터, 김형태가옥, 이준구가옥,
북촌 가회동 일대

201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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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도봉구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능원사, 도봉사, 윗무수골

201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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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종로구

월암근린공원(한양도성), 홍난파가옥, 딜쿠샤,
행촌동 은행나무, 황학정

201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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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관악구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 관악산 사당능선,
선유천국기봉, 관음사국기봉, 관음사

201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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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종로구

청운문학도서관, 청운공원, 인왕산자락길
(이빨바위, 가온다리, 산들수목원약수터)
수성동계곡

201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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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금천구

호압사, 호암산, 석구상, 호암산성터,
한우물, 불영암, 칼바위

201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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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인천 - 43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글 링크

1

부천

야인시대촬영장, 루미나리에축제 20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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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양 북한산성(대서문, 중흥사터, 북한산행궁터) 200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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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양 북한산성(태고사, 산영루터, 북한산성계곡) 200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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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남 망경암, 봉국사 (사월초파일) 200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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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오산
수원

오산 물향기수목원 / 수원 팔달문

20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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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남양주

수락산 흥국사

2008, 3 ☞ 블로그글 보기
7 남양주

덕릉마을 산신각, 덕흥대원군 묘역

2008, 5 ☞ 블로그글 보기

8

파주 용미리 마애2불입상, 용암사 2008, 10 ☞ 블로그글 보기
9

안양

안양사, 석수동마애종, 석수동석실고분 2009, 3 ☞ 블로그글 보기
10

안성

서운산 석남사 (사월초파일)

2009, 5 ☞ 블로그글 보기
11

하남

춘궁동동사지(동사지3/5층석탑), 광주향교

2010, 2 ☞ 블로그글 보기
12

안양

삼성산 염불암, 중초사지당간지주, 안양예술공원

2010, 12 ☞ 블로그글 보기
13

양평

용문산 사나사, 사나사계곡

2011, 5 ☞ 블로그글 보기
14

강화

강화도 선원사 (연꽃축제)

2011, 8 ☞ 블로그글 보기
15

고양

북한산성 중성문, 노적사, 중흥사터, 봉성암,
산영루터

2011, 8 ☞ 블로그글 보기
16

포천

반월성, 청성공원, 포천향교

2011, 10 ☞ 블로그글 보기
17

하남

선법사(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

2011, 11 ☞ 블로그글 보기
18

고양

한미산(노고산) 흥국사

2011, 12 ☞ 블로그글 보기
19

고양

중남미문화원, 벽제관터

2012, 5 ☞ 블로그글 보기
20

강화

장정리 석조여래입상, 장정리5층석탑, 고려궁터,
김상용 순절비

2012, 8 ☞ 블로그글 보기
21

이천

관고리 석불입상, 설봉공원(설봉저수지),
설봉서원, 설봉산 영월암

2012, 10 ☞ 블로그글 보기
22

양평

용문산 용문사, 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

2012, 11 ☞ 블로그글 보기
23

파주

고령산 보광사

2013, 2 ☞ 블로그글 보기
24

화성

제암리 3.1운동순국유적 2014, 3 ☞ 블로그글 보기
25

파주

용미리 마애2불입상, 용암사 2014, 12 ☞ 블로그글 보기
26

의정부

도봉산 회룡사, 석굴암, 회룡골 2015, 7 ☞ 블로그글 보기
27

고양,
서울
종로구

북한산 북한산성계곡, 태고사, 행궁터,
금위영이건기비, 금위영유영지, 경리청상창터,
대남문, 문수사

2015, 12 ☞ 블로그글 보기
28

의왕

청계산 청계사

2016, 2 ☞ 블로그글 보기
29

강화

외포리, 석모도 보문사

2016, 7 ☞ 블로그글 보기
30

포천

백운산 백운계곡, 흥룡사

2016, 7 ☞ 블로그글 보기
31

양주
서울

우이령길(교현리~우이동), 우이동유원지

2016, 11 ☞ 블로그글 보기

32

인천

소래철교, 소래포구(소래어시장), 장도포대지
(댕구산), 논현포대

2017, 2 ☞ 블로그글 보기

33

수원

서호(서호공원), 항미정 2017, 6 ☞ 블로그글 보기

34

광명

광명동굴, 가학산 2017, 7 ☞ 블로그글 보기

35

양주

오봉산 석굴암, 우이령길 2017, 11 ☞ 블로그글 보기

36

안양

안양예술공원, 안양사지, 김중업건축박물관,
석수동 마애종, 안양사

2018, 1 ☞ 블로그글 보기

37

강화

월곶돈대, 연미정, 강화평화전망대

2018, 6 ☞ 블로그글 보기

38

과천

관악산 문원계곡, 문원폭포, 문원하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보광사

2018, 7 ☞ 블로그글 보기

39

군포

수리산(철쭉동산, 수리산 산림욕장, 수리산
둘레길), 수리사, 반월호수

2018, 9 ☞ 블로그글 보기

40

인천

양주성금속비, 용궁사, 영종도 백운산

2018, 12 ☞ 블로그글 보기

41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 (구석기 겨울여행축제)

2019, 1 ☞ 블로그글 보기

42

강화

교동도 (교동읍성, 교동향교, 화개사, 화개산)

2019, 6 ☞ 블로그글 보기

43

화성

봉림사, 구봉산 당성

2019, 10 ☞ 블로그글 보기

 

강원도 - 23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링크

1

양양

낙산사, 홍련암, 오색약수, 성국사, 설악산 주전골 200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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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릉 객사문, 오죽헌, 경포대, 굴산사터, 신복사터 200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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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창 대관령 양떼목장 200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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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강릉
동해

경포대해수욕장, 등명낙가사, 묵호항 200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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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동해 감추사, 감추해변 200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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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태백 구문소 200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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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양구

양구 선사박물관 20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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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화천

토고미마을(산천어축제), 딴산 2011, 1 ☞ 블로그글 보기
9

화천,양구
춘천

화천 평화의댐, 세계평화의종공원,
춘천 윗샘밭

2011, 2 ☞ 블로그글 보기
10

평창

남산공원, 송학루, 노산성

2011, 12 ☞ 블로그글 보기
11

삼척

미인폭포(통리협곡), 여래사

2012, 6 ☞ 블로그글 보기
12

정선

정선5일장, 봉양리뽕나무, 아우라지

2012, 7 ☞ 블로그글 보기
13

영월

보덕사, 금몽암, 낙화암, 금강정, 금강공원

2013, 11 ☞ 블로그글 보기
14

태백

태백산 (당골, 석탄박물관, 석장승, 눈꽃축제장,
단군성전)

2014, 2 ☞ 블로그글 보기
15

동해

추암(추암해수욕장, 촛대바위), 해암정,
추암조각공원, 북평5일장

2014, 7 ☞ 블로그글 보기
16

화천

화천 산천어축제(화천읍내, 북한강) 2015, 1 ☞ 블로그글 보기
17

정선,태백

함백산, 만항재 2015, 9 ☞ 블로그글 보기
18

정선

아라리촌, 아우라지 2015, 12 ☞ 블로그글 보기
19

양구

팔랑폭포, 팔랑계곡 2016, 6 ☞ 블로그글 보기
20

삼척

미인폭포(통리협곡), 여래사

2016, 7 ☞ 블로그글 보기
21

홍천

삼봉약수, 삼봉자연휴양림, 운두령

2017, 6 ☞ 블로그글 보기
22

춘천

사명산 추곡약수, 천전리 고인돌

2018, 2 ☞ 블로그글 보기
23

원주

치악산 구룡사, 구룡사계곡, 학곡리 황장금표

2019, 3 ☞ 블로그글 보기

 

충청북도 - 1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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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은
대전

보은 삼년산성
대전 동춘당 / 송애당 / 법동 석장승

20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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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동 영동향토민속자료전시관, 가학루, 황간향교 200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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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충주

단호사, 사문리당산나무숲, 미륵리사터,
하늘재, 충주호

200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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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단양

사인암, 청련암, 중선암, 북상리 시골

20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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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괴산

각연사 (각연사계곡)

20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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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괴산

원풍리 마애2불병좌상, 홍범식고가, 개심사

20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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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옥천

정지용 생가(정지용문학관), 육영수생가,
죽향리초교 구교사, 죽향리사지3층석탑, 옥천성당

201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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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청주

낙가산 보살사, 명암약수터, 명암저수지

201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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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단양

북상리 시골, 사인암, 청련암

201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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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단양

구인사 (구봉팔문)

201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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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괴산

산막이옛길 (괴산호, 등잔봉)

201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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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충청남도, 세종 - 16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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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안 태화산 광덕사 200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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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진
태안

행담도, 꽃지해수욕장, 방포항, 안면도자연휴양림,
안면암

200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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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전

식장산 고산사

2009. 11 ☞ 블로그글 보기
4 공주

계룡산 동학사

2012. 3 ☞ 블로그글 보기
5 공주

계룡산 남매탑, 삼불봉, 천진보탑, 용문폭포

2012. 3 ☞ 블로그글 보기
6 공주

계룡산 갑사

2013. 2 ☞ 블로그글 보기
7 태안

신진도(안흥외항), 마도, 안흥항, 안흥성(태국사)

2013, 8 ☞ 블로그글 보기
8 홍성

용봉산 (신경리 마애여래입상, 용봉산자연휴양림)

2014, 6 ☞ 블로그글 보기

9

당진
아산

장고항, 삽교호관광지, 외암리민속마을

2015, 11 ☞ 블로그글 보기

10

예산

금오산 향천사

2016, 1 ☞ 블로그글 보기

11

대전

계족산(계족산성, 계족산 황톳길), 장동산림욕장

2016, 10 ☞ 블로그글 보기

12

보령

성주사지, 성주천 가로수길

2017, 2 ☞ 블로그글 보기

13

서산

해미읍성, 해미순교성지

2017, 12 ☞ 블로그글 보기

14

대전

장태산자연휴양림, 형제산

2018, 7 ☞ 블로그글 보기

15

천안

태조산 각원사, 성불사 2019, 1 ☞ 블로그글 보기

16

세종

비암사, 도깨비도로 2019, 3 ☞ 블로그글 보기

 

전라북도 - 15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링크

1

부안 상록해수욕장, 내소사, 곰소항 200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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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수 의암사(논개사당) 200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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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주
장수

한풍루, 무주향교
의암송, 장수향교

200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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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주 전주한옥마을, 오목대(이목대), 한벽당 20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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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군산

동국사, 은적사, 발산초등학교

20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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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군산

응항, 선유도, 고군산군도 일주

201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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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순창

강천산(강천산계곡, 구장군폭포), 강천사, 삼인대

201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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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임실

오수 의견비, 오수망루, 오수리석불, 해월암

201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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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김제 망해사, 새만금바람길, 심포항 201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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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부안 변산 내소사 201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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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무주 적상산(적상호, 적상산성, 적상산사고), 안국사 201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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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무주

무주머루와인동굴, 덕유산무주리조트(곤도라),
덕유산 설천봉

201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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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김제 모악산 귀신사 201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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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완주 종남산 송광사 201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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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완주 모악산 대원사, 수왕사 201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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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전라남도 - 14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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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성
담양
나주

장성 방울샘,
담양 관방제림 / 담양읍 5층석탑 / 석당간
나주 남고문 / 정수루

200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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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광 내산서원 200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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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주
광주

정수루, 금성관
광주 풍영정

200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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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순천 금전산 금둔사 2009, 11 ☞ 블로그글 보기

5

순천 개운산 동화사 2010, 1 ☞ 블로그글 보기

6

순천 조계산 천자암 2010, 2 ☞ 블로그글 보기

7

장성 백암산 백양사 2011, 9 ☞ 블로그글 보기

8

광주 무등산 원효사 2011, 10 ☞ 블로그글 보기

9

구례 지리산 천은사(천은제) 2012, 4 ☞ 블로그글 보기

10

곡성 동리산 태안사(태안사계곡) 2013, 5 ☞ 블로그글 보기

11

광양 백계산 옥룡사터 (동백나무숲, 운암사) 2015, 4 ☞ 블로그글 보기

12

목포

노적봉, 유달산(목포시사), 달성사,
국립해양유물전시관, 갓바위

2017, 9 ☞ 블로그글 보기

13

나주

덕룡산 불회사, 불회사 석장승

2018, 12 ☞ 블로그글 보기

14

영광

불갑산 불갑사(꽃무릇군락지)

2019, 9 ☞ 블로그글 보기

 

대구, 경상북도 - 23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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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주

반월성, 석빙고, 남산 서쪽(용장사터, 천룡사터)

200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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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경 문경새재(여궁폭포, 혜국사, 주흘산, 주흘관) 200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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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달성 비슬산(유가사 / 암괴류), 현풍석빙고 200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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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구미 의구총, 낙산리고분군, 낙산리3층석탑 200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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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예천
상주

개심사지5층석탑
용화사(증촌리석불좌상/입상), 전고령가야왕릉

200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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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경주

남산 불곡 석불좌상, 신문왕릉 2009, 7 ☞ 블로그글 보기
7 경주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불무사)

2009, 9 ☞ 블로그글 보기
8

영덕
울진

고래불해수욕장, 후포항, 월송정, 월송해변 2011, 6 ☞ 블로그글 보기
9

달성

다람재, 도동서원, 이노정 2012, 12 ☞ 블로그글 보기
10

청도

남산 낙대폭포 2013, 7 ☞ 블로그글 보기
11

달성

비슬산 용연사 2014, 2 ☞ 블로그글 보기
12

예천

회룡포, 비룡산 2014, 7 ☞ 블로그글 보기
13

경산

팔공산 갓바위, 선본사 2014, 11 ☞ 블로그글 보기
14

경주

효소왕릉, 성덕왕릉, 성덕왕릉귀부 2014, 12 ☞ 블로그글 보기
15

경주

남산 보리사(미륵곡 석조여래좌상) 2015, 10 ☞ 블로그글 보기
16

안동

도산서원 2016, 1 ☞ 블로그글 보기
17

대구

팔공산 파계사, 대비암, 성전암 2016, 4 ☞ 블로그글 보기
18

경주

효현동3층석탑, 법흥왕릉, 율동 마애여래3존입상 2016, 11 ☞ 블로그글 보기
19

의성

문소루, 구봉산, 금성산고분군, 문익점면작기념비 2016, 12 ☞ 블로그글 보기
20

예천

개심사지5층석탑, 동본리석조여래입상과
3층석탑, 초간정(초간정 원림)

2018, 3 ☞ 블로그글 보기
21

상주

장각폭포, 오송폭포(성불사), 옥양폭포

2018, 6 ☞ 블로그글 보기
22

영주
봉화

휴천동 지석 및 입석
오전약수, 삼계서원, 석천계곡, 석천정사

2019, 6 ☞ 블로그글 보기
23

경주

감산사, 연지암, 숭복사(숭복사터)

2019, 8 ☞ 블로그글 보기

 

부산 - 17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링크
1

수영구
강서구

광안리해수욕장, 가덕도(외양포, 대항, 세바지)

200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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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서구
서구

망상도/유주암, 송도해변, 송도해수욕장

2008, 9 ☞ 블로그글 보기
3

기장군

불광산 (장안사. 장안사계곡) 2009, 1 ☞ 블로그글 보기
4

기장군

불광산 (척판암, 백련암) 2009, 1 ☞ 블로그글 보기

5

서구
북구

내원정사, 만덕사(만덕사 당간지주), 알터유적 2009, 9 ☞ 블로그글 보기

6

금정구

금정산(금정산성, 국청사) 2011, 1 ☞ 블로그글 보기

7

금정구

금정산 미륵사, 금성동 2011, 1 ☞ 블로그글 보기

8

강서구

가덕도(가덕도등대, 외양포, 대항, 새바지) 2012, 7 ☞ 블로그글 보기

9

사상구
강서구

백양산 운수사, 백양산 숲길,
범방동3층석탑, 부산경남경마공원

2012, 12 ☞ 블로그글 보기

10

사하구

몰운대, 다대포

2013, 7 ☞ 블로그글 보기

11

남구

백운포, 오륙도 (오륙도등대, 등대섬) 2014, 1 ☞ 블로그글 보기

12

사하구
서구

승학산, 구덕문화공원 2014, 11 ☞ 블로그글 보기

13

금정구

금정산(고당봉, 금샘), 원효암, 금정산성 2015, 4 ☞ 블로그글 보기

14

해운대구

해운대 동백섬, 해운대해수욕장, 미포,
달맞이길, 문텐로드, 청사포, 구덕포, 송정해수욕장

2015, 7 ☞ 블로그글 보기

15

연제구

배산, 배산성터

2016, 9 ☞ 블로그글 보기

16

기장군

죽성리해송, 죽성리왜성, 황학대, 두호포구,
기장성당, 월전포구

2017, 4 ☞ 블로그글 보기

17

기장군

월전~대변 해안가, 대변항, 죽도, 연하리 해변,
오랑대, 해동용궁사

2017, 7 ☞ 블로그글 보기

 

울산, 경상남도 - 2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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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울산
부산

처용암
옥련선원 / 정묘사(배롱나무)

200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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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창원 무학산(관해정), 가포해변 20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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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해

김해 수로왕릉

20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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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진주
사천

진주 금선암
사천읍성(산성공원), 대방진굴항

2008, 1 ☞ 블로그글 보기
5

함안
창원

함안박물관, 말산리/도항리고분군
진해 우체국

2008, 1 ☞ 블로그글 보기
6

창원

불모산 성흥사, 대장동계곡

2008, 9 ☞ 블로그글 보기
7

밀양

밀양 표충비, 무안리 향나무(홍제사) 2009, 1 ☞ 블로그글 보기
8

양산

천성산 홍룡사(홍룡폭포), 원효암 2009, 6 ☞ 블로그글 보기

9

울산 일산해수욕장, 대왕암공원 2009, 7 ☞ 블로그글 보기

10

창녕

창녕석빙고, 송현동석불좌상, 송현동고분군,
진흥왕척경비, 만옥정공원, 남지철교

2010, 5 ☞ 블로그글 보기

11

거창

수승대(귀연서원, 요수정)

2011, 7 ☞ 블로그글 보기

12

울주
밀양

서생 나사리해변,
밀양 얼음골(천황사)

2011, 7 ☞ 블로그글 보기

13

함양

상림공원, 한남군묘역

2012, 7 ☞ 블로그글 보기

14

산청

목면시배유지, 배산서원, 덕천서원, 남명조식유적

2012, 9 ☞ 블로그글 보기

15

남해

호구산 용문사, 남해자생식물단지, 미국마을,
용소리/금평해변

2012, 11 ☞ 블로그글 보기

16

통영

통영 달아공원

2013, 3 ☞ 블로그글 보기

17

울주

가지산 석남사 (석남사계곡)

2013, 9 ☞ 블로그글 보기

18

고성

연화산 옥천사, 공룡발자국화석

2013, 11 ☞ 블로그글 보기

19

창원

불모산 성주사 (성주사계곡)

2014, 10 ☞ 블로그글 보기

20

울주

서생포왜성

2016, 6 ☞ 블로그글 보기

21

산청

덕양전, 전 구형왕릉, 왕산(유의태약수터,
왕산사지)

2018, 10 ☞ 블로그글 보기

 

제주도 - 1개

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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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주

외도 월대, 수산봉, 수산리곰솔, 납읍리
납읍 금산공원(납읍리 난대림)

2019, 3 ☞ 블로그글 보기


 

기타 지역 - 1개

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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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열도

동경 지역(긴자, 록뽕키, 우에노, 도쿄도청타워,
아사쿠사<관음사>, 신주쿠, 코쿄, 디즈니랜드)

200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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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하에 공개된 글 중에서 하자가 없는 글만 선정해서 지역별로 모았습니다.
2. 2003년 4월 이전 글은 모두 제외했습니다.
3. 답사기 내용과 사진을 전체 혹은 일부라도 퍼갈 경우, 반드시 출처와 원작자(박융) 이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4. 사진이 일부 뜨지 않는 글들이 약간 있습니다. 이 점 널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5. 공개된 글 중, 추후 업데이트 판이 나올 경우, 이전 판은 모음집에서 삭제 될 수 있으며 2개 이상의 시리즈로
   작성된 글 중 추후 본인 필요에 따라 1개나 2개로 통폐합 정리될 수 있습니다.
6. 지역 별로 분류했으나 지역이 2개 이상 겹치는 글은 먼저 간 곳을 기준으로 했습니다.
7. 최종 업데이트 2019년 12월 30일

세계 구석기시대 유적의 대표 성지, 연천 전곡리선사유적지 ~~ (전곡선사박물관, 연천 구석기 겨울여행축제)

 


' 천하 구석기 유적의 성지,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 '

(연천 구석기 겨울여행 축제)

▲  구석기 스타일의 눈사람 (전곡리 선사유적지 구석기축제장)



선사시대(先史時代, Prehistory)란 문자가 없던 시대로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와 중석기
시대,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를 일컫는다. (청동기시대도 일부 포함됨)
선사시대는 그리 재미도 없고 관심도 별로 없는지라 이따금씩 관련 유적지나 박물관을 찾
는 것이 고작인데, 겨울의 한복판인 1월에 전곡리 선사유적지에서 '연천 구석기 겨울여행
축제'를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축제의 대한 호기심도 채우고 미답지(未踏地)도 하
나 줄일 겸 친한 후배와 겸사겸사 그곳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복판에 머물던 13시, 집 부근 방학역에서 그를 만나 1호선 전철을 타고 수도
권 전철의 북쪽 끝인 소요산(逍遙山)역으로 이동했다. (소요산행 열차는 거의 30~40분 간
격으로 운행)
소요산역에서 호떡으로 허기를 좀 달래고, 경기도 최북단 고을인 연천(漣川) 땅으로 넘어
가는 의정부시내버스 39번을 타고 차디찬 삭풍(朔風)을 가르며 북쪽으로 더 올라갔다. 수
도권 북방을 가르는 한탄강(漢灘江)을 건너니 전곡리 선사유적지가 누워있는 언덕이 보이
기 시작하고, 그 밑에 둥지를 튼 전곡선사박물관에서 두 발을 내린다. 전곡리 선사유적지
답사는 바로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


▲  밑에서 바라본 전곡선사박물관


 

♠  전곡리 선사유적지 입문

▲  은빛으로 이루어진 전곡선사박물관 지붕 (지붕에 산책로가 있음)

전곡리 선사유적지 남쪽에 자리한 전곡선사박물관은 구석기시대 유적의 영원한 성지(聖地)이
자 상징으로 전곡리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과 구석기시대,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옛 인류의 진
화 과정을 집대성한 선사시대 전문 박물관이다.
박물관을 이루고 있는 건물이 마치 상상 속의 우주 기지를 보는 듯, 심플하게 은색으로 이루
어져 있어 구석기시대를 취급하는 박물관에는 썩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2004년 전곡리 선사유적지 종합정비 기본계획이 문화재청의 승인을 받자 2005년 도립(道立)박
물관을 짓기로 결정했다. 하여 2006년 온 천하에 박물관 디자인 국제현상공모를 하였는데, 천
하 곳곳에서 앞다투어 응모해 아시아 131건, 아프리카 5건, 유럽 169건, 북미 17건, 남미 20
건, 오세아니아 4건 등 총 346건의 응모작이 접수되었다.
그래서 이들을 심사한 결과 1등은 프랑스 양이(洋夷)가 먹었으며, 2등은 미국 양이, 3등은 미
국 양이와 왜인(倭人)이 수상했다. 이들 수상작 40건을 서울 인사동 학고재에서 그해 4월 17
일부터 4월 23일까지 전시회를 열었고, 박물관 부지의 발굴조사가 끝나자 2009년 3월 23일에
삽을 뜨기 시작해 2011년 4월 25일에 완성을 보았다.

원시 생명체의 아름다운 곡선을 모티브로 했다는 박물관 내부에는 전곡에서 발견된 주먹도끼
를 주인공으로 하여 고고학체험실과 상설전시실, 체험 전시실 등을 두어 구석기시대와 무수한
세월을 겪으며 진화된 원시인의 변화 과정에 대해 소상히 다루고 있으며, 700만 년 전 투마이
부터 1만 년 전 만달인까지 14개체의 원시인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복원하여 전시했다. 그 외
에 도서실, 교육실, 야외체험장 등을 갖추고 있다.

박물관을 구경하고자 입장료를 살펴보니 성인은 무려 4,000원을 받는다. 1,000원 정도로 생각
을 했는데 생각보다 4배 이상이나 얹혀진 가격에 우리는 한없이 작아지고 말았다. 그 돈을 박
물관에 쥐어주면서까지 구경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리 땡기지도 않아 언제가 될지 모를 미래
로 쿨하게 넘겼다.
(박물관 입장료는 2017년 9월부터 무료로 바뀌었음, 이곳을 포함한 우리나라 박물관 대부분은
월요일과 1월1일, 설날, 추석 당일에 쉬므로 그날은 꼭 피해서 찾기 바람)

* 전곡선사박물관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 178-7 (평화로 443번길 2, ☎ 031-
830-5600)
* 전곡선사박물관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전곡 선사박물관 야외에 재현된 구석기 사람들의 매머드 사냥 현장
오른쪽은 지금은 먹을 수도 없는 매머드 고기 육포를 말리는 모습

▲  겨울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황야에 재현된 코뿔소로 보이는 동물상

▲  전곡 선사박물관에서 전곡리 선사유적지로 인도하는 계단
계단 앞에는 원숭이와 비슷하게 생긴 옛 인류의 모형이 멀뚱히 서 있다. 오늘날
인간의 과거형이 저런 모습이었다고?? 하지만 진화론도 흔쾌히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과연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그저
궁금~ 궁금할 따름이다.

▲  북쪽에서 바라본 전곡 선사박물관의 위엄

전곡선사박물관 지붕에는 서쪽 언덕과 동쪽 언덕을 잇는 지붕 산책로가 있다. 지붕에 오르면
한탄강 주변 남쪽 산하가 보이긴 하나 박물관 건물이 키가 좀 작기 때문에 보이는 범위는 그
뿐이다. 박물관 동쪽 언덕에는 산책로와 숲이 있고, 서쪽 언덕 너머에 전곡리 선사유적지가
있다.

선사박물관을 지나 야트막한 북쪽 언덕을 오르면 전곡리 선사유적지 후문이다. 선사유적지는
선사박물관과 별도로 소소하게 입장료를 받고 있는데, (어른 1,000원 / 학생과 어린이 500원)
구석기 축제 기간이라 잠시 무료의 공간으로 해방되어 아주 기분 좋게 선사유적지 내부로 들
어섰다.
(단 구석기축제 행사장은 유료의 공간이며,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은 문을 닫아걸고 쉼)


 

♠  천하 구석기 유적의 소중한 꿀단지, 아슐리안 주먹도끼의 등장으로
구석기 역사를 새로 쓰게 하였던 전곡리 선사유적지 - 사적 268호

▲  전곡리 선사유적지 내부

한탄강이 'U'자로 크게 굽이쳐 흐르는 전곡읍 서남쪽 강변 언덕에 구석기 유적지의 성지로 추
앙받고 있는 전곡리 선사유적지가 넓게 누워있다.

인류의 본격적인 첫 시대라 할 수 있는 구석기시대는 약 300만년 전부터 1만년 전까지를 일컫
는데 약간의 중석기시대를 거쳐 신석기시대로 발전하게 된다. 구석기 사람들은 강가나 동굴에
주로 살면서 과실을 따먹거나 동물을 사냥해 식량을 해결했으며, 여기까지는 다른 동물과 거
의 비슷해 보인다. 허나 그들은 일반 동물과 다르게 돌을 다듬어서 사냥 도구로 사용했다. 또
한 불을 지피는 방법을 터득하여 추위를 이겨내고 맹수들의 공격을 막았으며, 잡은 동물을 불
로 구워 먹었다. 이것이 동물과 사람의 큰 차이점이다. 

구석기 사람들은 자연석을 다듬거나 바위에서 돌을 떼어내 주먹도끼 등을 만들었는데, 주먹도
끼가 바로 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상징물로 역사/국사 교과서에 아주 지겹도록 등장한다. 이
도끼는 구석기 초기에 등장하며, 프랑스 생따슐(St. Acheul)에서 발견되어 지역 이름을 따서
아슐리안 주먹도끼라 불린다.
그 주먹도끼는 전곡리 유적이 발견되기 이전까지 주로 유럽과 아프리카, 서남아 지역에서 많
이들 나왔으며, 1940년대 초, 미국 하버드대학의 모비우스(H.L. Movius) 교수가 그동안의 고
고학 자료를 근거로 내세우며 이상한 학설을 내뱉었다. 인도를 중심으로 그 서쪽 유럽과 아프
리카, 서남아를 아슐리안 주먹도끼 문화권으로, 인도 동쪽 아시아를 찍개 문화권으로 나눈 것
이다. 찍개 역시 돌로 다듬은 도구이나 주먹도끼보다는 다소 떨어진다.
그래서 그걸 두고 구석기시대부터 이미 서양이 동양보다 우월했고 아시아는 주먹도끼가 없으
므로 그때부터 정체되었다고 주장했다. 털만 많은 양놈들의 그런 삐뚤어진 생각을 보기 좋게
참교육시킨 현장이 바로 이곳 전곡리이다.
전곡리의 등장으로 그동안 서양 오랑캐들의 의해 그릇되게 작성된 구석기 역사는 새로 쓰여지
게 되었으며, 천하 굴지의 구석기 유적으로 꽤 무거운 존재가 되었다. 이곳을 통해 동아시아
구석기 문화를 새롭게 조명하게 되었고, 전곡리를 시작으로 아시아 곳곳에서 주먹도끼가 쏟아
져 나왔다.


▲  전곡리 선사유적지 발견을 대서특필한 1978년 봄 신문기사들

한탄강변에 자리한 전곡리 선사유적 일대는 숲과 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속에는 억겁의
세월이 숙성된 보물이 잠들어 있었고, 이미 그 일대에 석기들이 적지 않게 노출되어 속세(俗
世)의 관심을 애타게 바랬건만 사람들은 단순 돌로만 생각했지 아무도 그들을 크게 여기지 않
았다. 허나 주머니 속의 송곳은 언젠가는 크게 드러난다는 말이 있듯이 결국 일이 터지고 말
았다.

때는 1978년 3월 '그렉 보왠(Mr. Gred Bowen)'이란 주한 미군이 한탄강에 놀러왔다. 그는 인
디애나대학교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자로 돈벌이를 위해 주한 미군에 들어왔다.
한탄강을 거닐던 그는 강 주변에 석기로 보이는 돌맹이가 많은 것에 크게 놀랬다. 자신의 짧
은 소견으로 볼 때 분명 선사시대 석기로 여겨져 석기 사진과 발견 경위를 작성하여 프랑스의
저명한 구석기 학자 보르드(Bordes) 교수에게 편지를 보냈다.
보르드는 그 사진을 보고 크게 놀랐다. 바로 아슐리안 주먹도끼였던 것이다. 허나 그 역시 전
형적인 양이라 그걸 쉽사리 믿지 않으며 '이 유물이 유럽이나 아프리카에서 발견되었다면 아
슐리안 문화의 석기가 맞다. 내가 직접 가보고 싶을 정도로 중요한 발견이지만 그럴 수가 없
으니 우선 서울대학교 김원용 교수를 찾아가 자문을 얻으라'
답을 하였다.
그러자 보웬은 그 석기를 들고 서울대를 찾아가 김원용 교수를 만났는데 그 석기를 살펴본 김
원용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여 발굴단을 꾸려 전곡으로 달려갔고, 그해 5월 14일 전곡리
일대를 지표 조사하였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김원용 교수와 영남대 정영화 교수가 진단학보
에 '전곡리 아슐리안 양면핵석기 문화예보'를 발표하여 전곡리 유적은 서양 고고학자들의 염
통을 쫄깃하게 만들 정도로 크게 이름을 드러낸다.


▲  오래 잠들어있던 전곡리 구석기 유적을 깨우다.
1978년 5월 전곡리 유적 지표 조사 장면


1979년 3월 26일, 김원용 교수가 이끄는 서울대 박물관 발굴단과 경희대와 영남대, 건국대가
연합해 본격적으로 발굴조사를 벌였다. 이후 전곡리 유적을 중심으로 전곡리 일대에서 30여
년 동안 17회의 발굴조사를 벌였으며, 약 8,500점의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들 유물은
인근 강에서 가져온 강자갈로 제작된 것으로 다소 거칠게 다듬은 아슐리안 주먹도끼와 잘 다
듬어진 찍개, 가로날도끼, 긁개, 소형 박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곡리의 명성을 듣고 다른 나라에서도 앞다투어 교수와 고고학자들이 찾아와 이곳을 조사했
으며,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약 30만 년 전으로 판단되고 있다. 참고로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적은 평양(平壤) 부근에 있는 상원 검은모루동굴 유적으로 약 100만년
을 헤아린다.

전곡리 선사유적은 크게 5지구로 이루어져 있는데, 1지구는 처음으로 석기가 발견된 곳이고,
2지구는 1지구 남쪽 건너편으로 주먹도끼가 많이 나왔으며, 3지구는 발굴유구와 습지가 있고,
4지구는 제1차 발굴(1979년) 때 발견된 강 건너 고능리 지역이고, 5지구는 유적지의 동편 언
덕 일대이다.


▲  전곡에서 발견된 아슐리안 주먹도끼의 위엄
그의 등장으로 한참이나 잘못된 구석기 역사는 새로 쓰여지게 되었고, 뼛속까지
서양 우월주의로 물들었던 양이 고고학자들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아시아에는 찍개만 있던 것이 아니라 이런 섬세한 주먹도끼도
일찌감치 있었던 것이다.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로 돌을 전체적으로 손질하여 끝부분이 뾰족
하고 몸체는 둥근 모습이며, 석기의 양측면에 날카로운 날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이용해 나
무를 벗기고나 동물 사냥, 가죽 벗기기 등에 사용했다. 그래서 만능석기라 불리기도 한다.

전곡리에서 나온 주먹도끼는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주먹도끼와 달리 몸체가 두텁고, 자
연면이 많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채석을 통해 규소 성분이 풍부한 양질의 석재를 이용
한 유럽, 아프리카와 달리 전곡리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석영이나 규암 등으로 된 강자갈을 주
로 사용하여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측면날보다는 뾰족한
끝부분의 손질에 더 집중한 경향이 있어 자르는 도구로 주로 사용된 서양과 달리 대상을 찍거
나 땅을 파는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  토층전시관에 전시된 전곡리 유적 발굴 이야기와 이곳을 발굴한
구석기시대 전문가 김원용의 빛바랜 수첩
김원용 교수는 1993년 세상을 뜨면서 전곡리 유적에 유해를 뿌려달라는 유언을 했다.
그만큼 이곳은 그에게 의미가 각별한 곳이자 그의 존재를 세상에 각인시켜준
소중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전곡리 유적의 지층 구조는 2001년에 조사된 E55S20 발굴피트를 통해 알 수 있다. 이곳은 현
무암을 기반암으로 하여 그 위에 사질층, 실트층, 점토층이 쌓여 있는데, 퇴적층의 최상부에
서부터 일정한 간격을 두고 토양쇄기가 4~5차례 반복되며, 1번 째 토양쇄기면과 2번 째 토양
쇄기면 상부에서 왜열도에서 날라온 2개의 화산재와 AT(약 25,000년 전), K-Tz(약 95,000년
전)가 발견되었다. 이들 화산재는 분출된 연대가 대략 밝혀졌기 때문에 전곡리 유적의 장대
한 나이를 추정할 수 있는 소중한 단서가 되었다.
퇴적층 하부의 사질층과 실트층은 하천 퇴적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상부의 붉은 색조의 점토
층에 대해서는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날라온 풍성퇴적물이라는 설과 강의 범람으로 쌓인 퇴적
물이라는 설이 서로 엇갈리고 있다. 구석기 유물 상당수는 붉은 색조의 점토층에서 많이 발견
된다.


▲  전곡리 선사유적 외곽 산책로

홍적세 중기 무렵, 강원도 평강 오리산에서 분출된 용암이 한탄강을 따라 흐르며 전곡을 비롯
한 강 주변을 용암대지(鎔巖臺地)로 칠해버렸다. 이후 수많은 물줄기가 용암대지를 적셔주었
고, 곳곳에 작은 습지와 호수가 만들어졌다. 또한 강에 떠내려온 퇴적물은 용암대지 위에 차
곡차곡 쌓이면서 숲이 우거지고 강에는 물고기들이 둥지를 틀었으며 온갖 동물들이 식량과 식
수 해결을 위해 모여들었다. 구석기 사람들 역시 이곳에 정착을 하였다. (전곡에 살았던 구석
기 사람들을 ''전곡리안'이라 부름) 그때가 약 30만 년 전으로 여겨진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언제까지 살다가 사라졌는지는 귀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그들이 떠난 이
후, 그들이 남긴 석기와 흔적은 자연의 거친 흐름 속에 죄다 묻히게 되었다. 그 흔적이 배인
퇴적층이 용암대지 위에 잘 보존되어 수천 년을 비밀리에 숨바꼭질을 하다가 1978년 이후 발
견된 것이다.

발굴조사가 마무리 되자 유물은 전곡선사박물관과 토층전시관, 여러 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
졌고, 유적은 영구 보존을 위해 흙으로 빼곡히 덮고 그 위에 숲과 잔디를 깔았다. 그래서 겉
으로 다가오는 전곡리 선사유적지의 모습은 유적지가 아닌 그냥 공원 같은 분위기이다.

전곡리 유적은 숲과 잔디로 뒤덮힌 지역과 토층전시관, 선사체험마을 등이 있으며,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또한 매년 1월과 5월에는 '전곡리안의 숨소리'라는 태마로 구석기 축제를
열어 크게 호응을 얻고 있다. 5월에는 그냥 '연천 구석기축제'란 이름으로 열고 있으나 겨울
축제는 '연천 구석기 겨울여행축제'란 이름으로 열리고 있는데, 선사시대 체험 프로그램, 원
시 퍼포먼스, 공연 행사, 전문가의 강연과 선사시대 전시 행사 등이 열린다.
구석기시대를 완전히 익히고 싶다면 전곡리 선사유적지를 꼭 찾기 바란다. 그러면 누구든 구
석기 전문가가 될 수 있다.

*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 515 (양연로 1510, ☎ 031-832-2570)
* 전곡리 선사유적지 홈페이지는 오른쪽 링크를 클릭하기 바라며 ☞ 전곡리 선사유적지
  겨울 축제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2019년 겨울여행축제는 1월 12일부터 2월 6일까지 열린다.


▲  인공눈이 깔린 전곡리 구석기축제장


 

♠   전곡리 선사유적지, 구석기 축제장 둘러보기

▲  전곡 구석기축제를 맞이하여 멀리 서유럽에서 온 신석기 사람의 미라

전곡리 선사유적지는 겨울 제국의 매서운 폭정에도 불구하고 구석기 축제로 뜨거웠다. 평일임
에도 어린이를 데리고 온 가족 나들이객들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이 축제
장 곳곳을 뛰어놀거나 썰매타기, 바베큐 체험 등. 온갖 체험에 도끼자루 썩는 줄도 모르고 있
어 겨울 제국을 무색하게 만든다.

축제장 일부에는 인공눈을 깔아 조촐하게 하얀 설원을 자아냈는데 그곳에 썰매장과 얼음 조각
등을 두었으며, 그 서쪽에 여러 부스와 천막을 설치하여 먹거리 장터와 구석기 체험 현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있듯이 점심도 제대로 못먹은 시장기를 달래고자 간단
하게 어묵으로 배를 때웠다. 가격은 시중보다 2배 정도 비쌌으나, 꿩 대신 닭을 고를 권한이
여기서는 없는지라 그냥 사먹었다.

그렇게 요기를 마치고 옆 부스로 가니 멀리 서유럽에서 왔다는 뼈다귀 미라가 전시되어 있었
다. 이 미라는 1991년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경계선인 외츠탈 알프스에서 발견된 것으로
온몸이 얼음 속에 묻혀있어서 미라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발견된 곳의 이름을 따
서 이미 영혼이 빠져버린 그에게 '외찌'라는 이름을 붙여주면서 아이스맨이란 별명도 지어주
었다.
그는 약 5,300년 전 사람으로 그때면 신석기시대 한복판이다. 그가 어찌하여 알프스 산맥에서
그 지경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전곡리 구석기 축제를 맞이하여 수만 리나 떨어진 이곳까지
소환되어 휼륭한 눈요깃감이 되어준다. 설마 그가 나의 전생은 아니겠지?


▲  구석기 스타일로 지어진 눈사람
인공눈을 빚어서 두텁게 만든 눈사람으로 장소가 장소인 만큼 구석기 스타일로
만들었다. 귀여움이 묻어난 그는 눈, 코, 입, 머리까지 갖추고 있고
오른손에는 돌도끼까지 쥐어들고 있다.

▲  눈 속에 묻힌 돌 운반 체험장
무거운 돌을 끌어야 되는 일종의 3D 체험장이라 체험 수요가 없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어린이들의 인기를 먹고 자라는 눈썰매장 (유료임)
때가 겨울인지라 눈썰매장까지 갖추었다. 딱 30년만 어렸다면 한번 타보는 것인데
다 큰 장정이 눈썰매를 타는 것도 좀 그래서 그냥 구경만 했다.

▲  빙어잡이 삼매경에 빠진 어린이들 (빙어잡이 현장)
조그만 낚시 도구로 빙어를 탄압한다. 여기서 잡은 빙어는 비닐봉지에
담아서 가져가면 된다. 그 이후는 알아서...

▲  빙어잡이 현장 - 빙어의 마지막 몸부림 (죽어있는 빙어도 적지 않음)

▲  돼지고기 바비큐 체험 현장

제아무리 눈썰매와 빙어잡이가 인기가 대단하다 한들 돼지고기 바비큐 체험 앞에서는 어림도
없다. 먹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구석기 축제의 백미(白眉)나 다름없는 바비큐 체험은 길다란 나무 꼬챙이에 돼지고기를 직접
구워 먹는 것으로 흙으로 다진 네모난 화로에 숯을 넣어 고기를 구우면 된다.
편하게 고기를 굽게끔 나무 의자도 설치되어 있으나 고기가 익는데 시간이 다소 걸린다. 또한
나무 꼬챙이를 들고 있어야 되기 때문에 팔도 아프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적당하게 걸쳐놓고
딴짓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잘못하면 고기가 화로로 자빠지거나 검게 타버리는 경우도 발생
한다.
돼지고기 바비큐는 1꼬치에 3,000원(예전에는 2,000원)으로 잘만 구우면 유명 고깃집 못지 않
은 맛있는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으나 잘못하면 거의 타버리거나 흙, 숯에 묻혀 난감한 경우
도 생길 수 있다. 여기서는 그저 인내력과 근성, 요령이 있는 사람만이 맛있는 고기를 쟁취한
다. 나는 인내력을 발하며 고기 굽기에 매진한 결과 그런데로 잘 익어서 맛있게 고기 바비큐
를 섭취했다. 허나 후배는 잘못 구워서 반 정도를 버리고 말았지. 구석기 사람들은 이렇게 화
로 비슷한 것에 불을 지피고 사냥한 동물을 구워 먹었다고 한다. 바로 그 체험을 하는 것이다.
단 다른 것이 있다면 숯으로 불을 지핀다는 것과 고기를 돈주고 사먹는다는 것 정도. 구석기
축제에 왔다면 뱃속도 채울 겸 바비큐 체험을 꼭 해보기 바란다.


▲  노릇노릇 익어가는 돼지고기 바비큐

▲  구석기 생활상 복원존(Zone) ▼

축제장 동쪽에는 구석기 사람들의 생활상을 재현해 놓은 복원존이 있다. 사냥 모습을 위시하
여 잡은 동물을 손질하는 모습과 구석기 가족들의 단란한 모습, 석기 제작 모습 등이 있으며,
지금은 사라진 그 시절 동물의 모형 등도 담겨져 있다.

▲  말을 사냥하는 모습

▲  구석기 가족의 생활 모습


▲  지금은 사라진 넙적큰뿔사슴
지구 역사상 가장 큰 뿔을 가진 사슴과로 홍적세 중기~후기를 누볐던 동물이다.
구석기 사람들의 좋은 먹잇감으로 평양 상원 검은모루동굴에서 그의
뼈가 출토되기도 했다.

▲  역시나 화석만 남은 검치호랑이
오늘날 호랑이의 조상격으로 길이 18~20cm에 달하는 큰 송곳니를 가진 홍적세
시절 맹수이다. 아주 매섭게 재현되어 비록 모형이지만 오금을 지리게
하는데 동아시아에 살던 검치호랑이는 서양보다 검치의 크기가
작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구석기 사람과의 기념촬영 코너
의자는 구석기 스타일에 걸맞게 동물 뼈와 가죽으로 이루어져 있다.
(뼈와 가죽은 가짜임)

▲  매머드 뼈로 지어진 뼈다귀 집

구석기시대 후반(1~2만년 전)에 구석기 사람들이 메머드를 때려잡아 그 뼈로 만든 집으로 이
때부터 집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크라이나에서 발견된 매머드뼈 집터를 복원한 것으로 그
안에 불을 피운 흔적이 발견되었다.


▲  사냥감을 들고 귀가하는 구석기 사람들
사슴 같은 것을 잡은 모양이다. 저 사람들은 그날 고기 회식을 했겠지.

▲  겨울 제국에게 영혼까지 싹 털린 연천자생식물원 (야생화단지)
전곡리 선사유적 동편에 야생화 등을 심어놓은 자생식물원을 닦아놓았다. 허나
그러면 뭐하랴? 겨울 제국에게 몽땅 털려 황량한 벌판이 되버린 것을..
이곳의 진면목을 보려면 봄과 여름, 가을에 오기 바란다.

▲  축제장 북쪽에 자리를 닦은 얼음숲 연천 (얼음조각품)
한겨울에 걸맞게 축제장 한쪽에 얼음 조각품을 배치하여 겨울 축제의 분위기를
한껏 드높이고 있다. 이들을 한 덩어리로 '얼음숲 연천'이라 이름지었는데,
전곡리 선사유적지의 캐릭터인 고롱이와 미롱이, 매머드를 비롯하여
재인폭포, 움집, 연천의 특산물을 형상화 하였다.

▲  고롱이(왼쪽)와 다롱이(오른쪽) 얼음 조각품
이 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린이 모습에 구석기 스타일을 입혀 이곳의
귀여운 캐릭터로 삼았다.

▲  얼음으로 재현된 매머드

▲  연천의 명물, 재인폭포(才人瀑布)를 겨울 버전으로 형상화하였다.

▲  얼음 미끄럼
바닥이 차갑기 때문에 포대자루 같은 것을 깔고 타면 된다. 타고 싶은 마음 굴뚝
같지만 그놈의 나이 때문에 그냥 구경만 했다. 얼음 미끄럼을 신나게 타고
내려오는 어린이들의 표정에 화창함이 가득하다.

▲  알록달록 소원지를 달아놓은 현장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소망을 하나씩 머금은 소원지가 차디찬 삭풍에
몸을 떨고 있다. 적당하게 소원지가 들어차면 불에 태워버린다.


 

♠   전곡리 선사유적지 마무리

▲  아슐리안 주먹도끼를 정면에 내세운 토층전시관

토층전시관은 발굴조사를 벌였던 땅 속 지층(토층) 구조와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 그리고 다
른 나라에서 업어온 구석기 유물을 다루고 있다. 현관 윗쪽에는 전곡리 선사유적의 상징이자
인도 동쪽 아시아에서 최초로 발견된 아슐리안 주먹도끼 황금색 모형을 달아놓았다.


▲  토층전시관 내부에 있는 지층(토층) 구조
저 밑에서 장대한 세월의 의해 봉인되어 있던 구석기 유물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  전곡리 유적에서 나온 구석기 유물들
그 시대 원시인들의 유물은 거의 대부분 돌이다. (동물뼈 일부) 얼핏 보면
그냥 일반 돌맹이처럼 보여 보통 사람들은 구분하기가 어렵다.

◀  아프리카 케냐에서 가져온 구석기 유물


▲  토층전시관 옆에 자리를 닦은 선사체험마을 (연천마당)
이곳은 선사시대 및 전통 체험 공간으로 쓰인다. 마당 한쪽에 옹기종기 모인
초가집은 전통 체험 공간으로 그 남쪽에 선사 체험 공간이 있다. 이곳은
주로 어린이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선사시대 기술, 생활방식 등을 체험할 수 있다.

▲  겨울에 잠겨 한적한 연천마당 (선사체험마을 잔디밭)

▲  선사체험공간 한쪽에 자리한 귀여운 고롱이와 다롱이

▲  토층전시관 옆에 닦여진 움집과 원시인 모형 기념 촬영장
가운데 원시인 모형에 얼굴을 대고 기념촬영을 하면 된다. 그때만큼은
정말 구석기나 신석시기대로 순간 이동을 당한 기분일 것이다.

▲  전곡리 선사유적지 산책로 (정문으로 나가는 길)

▲  유럽 양이 스타일의 성(城) 눈조각품

전곡리 유적 정문 남쪽에는 인공눈을 빚어 만든 눈조각품이 막바지 눈 호강을 시켜준다. 옛날
유럽 성을 비롯하여 피라미드와 동굴 등이 재현되어 있는데 눈조각품 주변에는 인공눈이 짙게
깔려 있어 설원을 거니는 기분을 들게 한다.


▲  피라미드, 스핑크스 눈조각품(오른쪽)과
호주 오페라하우스 눈조각품 (그 뒷쪽)

▲  거대한 하얀 언덕 눈조각품 - 저 안에 얼음 동굴이 있다.

▲  하얀 언덕에 새겨진 재미난 형상들
창을 든 원시인과 매머드, 현대인으로 보이는 형상, 그 형상이
내뱉은 수상한 연기(?)가 새겨져 있다.

▲  하얀 언덕 - 왼쪽과 오른쪽에 언덕 동굴로 인도하는 문이 있다.
동굴 내부는 무척 시원하여 여름에 가면 아주 극락이 따로 없겠으나
여름에는 날씨 관계로 눈조각품을 운영하지 않는다.

▲  역 이름이 구석기역(?)
전곡리 선사유적지는 유적지 외곽을 도는 관광 레일카를 운행하고 있다.
그 레일카는 구석기역에서 타면 되며, 속도가 너무 굼뱅이라
1바퀴 도는데 20분 정도 걸린다.

▲  전곡리 선사유적지 정문 주변에서 다시 만나는 고롱이와 미롱이
칼라버전 모형들

▲  전곡리 선사유적지 정문
동굴처럼 생긴 정문 위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은 구석기 원시인의 얼굴상을
달아놓았다. 역시나 전곡리 스타일에 걸맞는 정문이다.


정문을 나섬으로써 2시간에 걸친 전곡리 선사유적지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시간도 벌써 16
시가 넘은 상태, 햇님도 고단한지 벌써부터 칼퇴근을 준비하면서 슬슬 땅꺼미가 어슬렁거리기
시작한다.
전곡리 선사유적지는 껍데기만 남은 딱딱한 선사유적지를 탈피하여 선사시대 관련 다양한 체
험을 누릴 수 있는 현장으로 특히 돼지고기 바비큐 체험이 인상적이었다. 집안에 아이나 조카
들이 있다면 구석기 축제 기간에 맞춰 가족 나들이로 한번 가보기를 바란다.
이렇게 하여 구석기시대로의 짧은 나들이, 전곡리 선사유적지 겨울 나들이는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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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양의 상큼한 꿀단지를 거닐다 ~ 삼성산 안양예술공원, 김중업 건축박물관, 안양사지 겨울 나들이 (석수동 마애종, 안양사)


 

' 묵은 해의 끝에 찾아간 안양예술공원, 안양사터 나들이 '
(김중업건축박물관, 석수동 마애종, 안양사)


▲  안양사지와 김중업박물관

▲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3층석탑

▲  석수동 마애종


 

새해가 시작된 지 정말 엊그제 같건만 벌써 연말의 끝에 이르렀다. 이제 며칠이 흐르면
올해는 완전히 끝나고 새해로 포장된 날이 밝아와 연말 우울감에 빠진 인간들에게 새해
의 부질 없는 희망을 안겨줄 것이다. 그렇게 우리네 인생은 챗바퀴처럼 비슷한 데를 돌
고 또 돈다. 하여 연말의 우울감도 잠시 잊을 겸, 올해의 마지막 나들이로 삼성산 남쪽
에 길게 누운 안양예술공원을 찾았다.

안양예술공원은 삼성산(三聖山)과 관악산(冠岳山)으로 오르는 주요 기점으로 경관이 아
름답고 볼거리가 풍부하여 소풍 및 등산/답사/출사/피서 수요가 대단하다. 게다가 접근
성도 매우 좋고 서울과도 지척이라 계절과 날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로 마를 날이 없다.
관악산과 삼성산이 사이좋게 빚어놓은 삼성천을 따라 서울대 관악수목원까지 길게 이어
져 있는데 비록 예술공원을 칭하고 있지만 원래는 안양유원지로 70여 년의 기나긴 역사
를 간직한 서울 근교에서 가장 오래된 유원지이다.
1950년대에 벌써부터 수영장이 생겼을 정도로 서울 근교의 제일 가는 유원지로 미친 존
재감을 드날렸으나 1990년대 이후 서서히 망해가던 것을 2005년에 안양시에서 유원지의
명성을 되찾고자 안양예술공원으로 새롭게 간판을 갈아치우고 제1회 '안양공공예술프로
젝트'를 도입했다.
그 프로젝트에 따라 국내외 예술 작가의 예술 작품 50여 점을 공원에 설치하여 '지붕이
없는 미술관'으로 시민들에게 좋은 호응을 얻었고, 삼성천과 산책로, 편의시설 등을 정
비하고 조명시설까지 갖추어 야경(夜景)까지 배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존의 유원지
기능을 완전히 내버린 것은 절대 아니다. 원래부터 삼성산과 관악산을 배경으로 형성된
유원지라 그 성격을 완전히 갈아엎는 것은 어렵다. 휴양과 나들이, 유원지의 기능을 바
탕으로 문화와 예술을 얹힌 것이 지금의 안양예술공원이 되겠다.


▲  안양예술공원을 촉촉히 어루만지는 삼성천 (안양워터랜드 주변)


 

♠  칙칙한 공장을 걷어내니 숨겨진 절터가 기지개를 켜는구나~~!
제약공장에서 역사와 문화의 공간으로 거듭난 상큼한 현장
~ 안양사터(安養寺)터와 김중업건축박물관(안양박물관)

안양예술공원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옛 유유산업과 안양사터를 만나게 된다. 예술공원의 젖줄
인 삼성천 북쪽에 자리한 이들은 예술공원의 어귀로 예술공원로(공원 산책로)에서도 훤히 바
라보이는데 예전에는 유유산업이란 제약 공장이 들어앉아 고얀 연기로 하늘과 삼성산을 찌르
던 현장이었다.
삼성산과 안양유원지의 아름다운 경관을 적지 않게 들쑤시던 유유산업은 1959년에 유특한 회
장이 세웠다. 비나폴로 등의 비타민을 생산하던 제약 공장으로 공장 건물은 당시 건축의 1인
자로 삼일빌딩과 평화의문, 프랑스대사관 등을 설계했던 김중업(金重業, 1922~1988)이 설계했
으며, 굴뚝과 경비실까지 모두 그의 손에서 디자인되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공장이 들어앉은 터는 안양의 지명 유래가 되었던 안양사터였다. 허나 그
때까지만 해도 바깥으로 드러난 절터의 흔적은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3층석탑, 약간의 주춧돌
뿐이었고 오로지 경제 개발이 우선이었던 시대라 절터를 싹 밀고 공장을 닦았다.

이후 안양유원지 초입에서 의약 발달을 향한 집념의 연기를 내뿜던 유유산업은 2007년, 공장
증축을 꾀했으나 인허가 제한으로 어렵게 되면서 48년 동안 기대던 안양 공장을 버리고 충북
제천(堤川)으로 둥지를 옮겼다.
유유산업이 그렇게 자리를 뜨자 안양시는 공장과 부지를 240억에 매입했으며, 문화재청의 권
고에 따라 김중업이 설계한 건물 5동을 제외하고 모두 부셨는데, 그 과정에서 공장에 가려져
고통받던 절터가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하여 2008년부터 2011년까지 4차에 걸쳐 발굴조
사를 벌인 결과 '안양사(安養寺)'라 쓰인 기와가 출토되어 이곳이 안양사터임이 밝혀졌으며,
중초사와 안양사가 별개의 존재가 아닌 같은 존재임이 드러났다.

안양사터의 등장으로 잔뜩 흥이 오른 안양시는 이곳을 김중업박물관과 안양사지 전시관을 갖
춘 복합문화공간이자 안양예술공원을 수식하는 상큼한 꿀단지로 꾸미기로 마음 먹고 2013년에
발굴로 어수선했던 안양사지를  복원했다. 그리고 김중업이 설계한 건물 5동을 손질하여 드디
어 2014년 3월 28일, 안양 최초의 박물관이자 안양사터까지 아우른 김중업건축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이때 제4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가 2달 동안 열렸으며 2017년 9월에는 평촌에 있
던 안양박물관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2개의 박물관이 공존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김중업의 일생과 작품을 다룬 김중업건축박물관, 안양사지에서 출토된 유물과 관련
문헌 자료, 안양시의 역사와 문화를 머금은 안양박물관, 그리고 특별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
으며 이들 전시관은 모두 김중업이 설계했던 옛 유유산업 건물을 다듬은 것으로 뜨락에는 옛
안양사터가 펼쳐져 있어 신라 후기와 고려, 조선, 현대까지 모두 아우른 문화/역사의 공간이
다.


▲  중초사지(中初寺址) 3층석탑과 당간지주

유유산업이 멋모르고 깔고 앉았던 안양사터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 시절인 826
년에 창건된 중초사(中初寺)에서 비롯되었다.
중초사는 당간지주(幢竿支柱)와 약간의 건물터를 남겼는데 당간지주의 겉모습은 그저 흔한 모
습이지만 이 땅에서 유일하게 조성 시기와 공사 참여자 이름, 절 이름이 담긴 명문이 새겨져
있어 그것만으로 이미 다른 당간지주와 크게 차별화된 가치가 높은 보물이다. 특히 안양사에
묻혀 잊혀질뻔한 중초사의 이름 3자를 고맙게도 밝혀주고 있으며, 바로 그 명문 덕에 일찌감
치 보물 4호라는 큼지막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조성 명문은 서쪽 돌기둥 바깥쪽에 문신처럼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826년 8월 6일, 절 동쪽 승악(僧岳, 관악산으로 여겨짐)의 돌 하나가 둘로 갈라져 이를 얻었
다. 같은 달 28일, 두 무리가 돌을 가져와 9월 1일 이곳에 이르렀으며, 827년 2월 30일에 완
성되었다.
이때 황룡사(皇龍寺) 주통<州統, 승려의 직책으로 국통(國統) 밑임>인 항창화상(恒昌和尙)이
공사를 지휘했으며, 상화상(上和上)은 진행법사, 정좌<貞坐, 승직(僧職)의 하나>는 연숭법사,
사사<史師, 승려를 통솔하고 사무를 돌보는 자리>는 2명으로 묘범법사와 칙영법사. 전도유내
<典都唯乃, 승직의 하나>는 2명으로 창악법사와 법지법사, 도상(徒上)은 2명으로 지생법사와
진방법사, 작상<作上, 승직의 하나이나 역할은 확실치 않음>은 수남법사이다'


당간지주 동쪽 돌기둥의 윗쪽은 살이 좀 뜯겨져 있는데, 이는 해방 이후 석수장이들이 석재로
쓰고자 뜯어간 것이라고 한다.


▲  중초사지 당간지주 - 보물 4호

중초사는 후삼국시대에 고려 태조(太祖)의 지원으로 크게 몸집을 불리게 된다. 안양사 창건설
화에 따르면 900년에 태조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남쪽(후백제)으로 출정하면서 안양을 지나던
중, 삼성산 꼭대기에 오색구름이 채색을 이루며 떠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를 이상히 여겨 산
을 살펴보다가 구름 밑에서 능정(能淨)이란 나이 지긋한 승려를 만났다.

능정과 이야기를 나눈 왕건(王建)은 서로 뜻이 잘 통하자 너무 기분이 좋았던지 그를 만난 자
리에 절을 세웠다. 그것이 안양사의 시초라는 것이다. 허나 900년이면 왕건의 왕씨 세력은 고
작 송악(松嶽, 개성) 일대가 전부였고, 황해도(黃海道)의 여러 지방 세력과 더불어 당시 한참
신라 북부를 평정하고 있던 궁예(弓裔)와 싸울 것인가? 항복할 것인가를 두고 고심하던 시기
였다. 그러니 900년은 전혀 맞지가 않다.
하지만 왕건의 지원을 받은 것은 확실해보이며 연도(年度)의 오류는 흔한 일이므로 고려를 세
운 918년 이후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또한 설화에는 복종하지 않는 자를 정벌하러 가던
중이라고 했으니 후백제를 치러 가던 중에 잠시 들렸음을 알 수 있다.

그때 중초사 주지로 여겨지는 능정과 마음이 잘맞자 두둑히 지원을 내려 절을 중창케 했고 경
내 남쪽에 벽돌로 7층전탑을 세웠다. 그리고 천하를 통일하여 좋은 세상을 이루고 싶은 심정
을 담아 극락정토(極樂淨土)를 뜻하는 안양(安養)으로 절 이름을 바꾸게 했다. 제왕(帝王)이
발걸음을 하고 지원을 내렸을 정도면 절도 어느 정도 명성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며, 능정 또
한 도선국사(道詵國師)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명망을 갖춘 승려였을 것이다.
참고로 극락정토는 이 세상에서 서쪽으로 10만억 불토(佛土)를 지나야 나온다는 이상의 세계
로 안양세계(安養世界), 안양정토(安養淨土)라고도 한다. 수도권 굴지의 도시로 인구 70만을
지닌 안양시의 이름도 바로 이 안양사에서 유래되었다. 불교색이 진한 이름이긴 하지만 의미
만큼은 정말 일품이다.

고려 중기에는 천태종(天台宗)을 일으킨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잠시 들려서 능정의
영정에 참배한 적이 있으며, 특히 고려의 마지막 보루인 최영(崔瑩, 1314~1388)장군과도 인연
이 꽤 깊었다.
그는 젊었을 때 안양사에서 하룻밤 머문 적이 있었는데, 전탑을 바라보며 태조가 안양사를 경
영했던 의미를 되새기고 스스로에게 '제가 나중에 잘되고도 이 탑을 새로 세우지 않는다면 하
늘에 계신 신령이 내려다 보실 것입니다'
다짐을 했다.

이후 우왕(禑王, 재위 1374~1388) 시절, 제일 높은 관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자 안양
사 주지인 혜겸(惠謙)과 함께 옛 시절의 다짐을 실행코자 전탑을 새롭게 중수했다. 그는 자신
의 재물과 신도들의 지원을 모아 쌀과 콩, 베 등을 마련했고 양광도(楊廣道, 경기도와 충청도
) 안렴사(按廉使)에게 명을 내려 군납미(軍納米)를 감액하여 경비를 마련하고 장정을 모았다.
그래서 1381년 8월 공사를 시작해 그해 10월 완성을 보았는데, 완성이 되자 우왕이 내시 박원
계(朴元桂)를 보내 향을 하사하고, 승려 1천여 명으로 성대하게 불사(佛事)를 치르면서 사리
12개와 불아(佛牙) 1개를 탑에 봉안하는 의식을 가졌다.
이때 탑 중수에 시주를 한 관리와 귀족, 부자가 3천 명에 이르렀으며, 1382년 탑에 단청을 장
식하고 1383년에는 탑 안에 그림을 그렸는데, 동쪽 벽에는 약사회(藥師會), 남쪽 벽에는 석가
열반회(釋迦涅槃會), 서쪽에는 미타극락회(彌陁極樂會), 북쪽에는 금경신중회(金經神衆會)를
그리고 탑을 둘러싼 회랑(廻廊) 12칸에는 벽마다 부처와 보살, 인천(人天)을 그려놓았다. 이
들 단청과 그림을 그리는데 동원된 인원은 400여 명, 소요된 쌀은 595석, 콩 200석, 베 1,155
필에 이르렀고, 전탑 중수가 완료되자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은 자신의 도은집(陶隱集)에
'금주 안양사탑 중신기(衿州安養寺塔重新記)'를 남기며 최영을 찬양했다.

조선으로 들어와서도 왕실과 사대부와의 교류는 빈번하여 1411년 태종(太宗)이 충청도 온양(
溫陽)으로 온천욕을 가다가 잠시 들렸으며, 안양사와 관련된 여러 수의 시가 전해오고 있다.
이렇게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찬란하게 광을 냈던 안양사는 16세기
중반 이후 갑자기 사라지고 마는데, 아마도 임진왜란 때 파괴되거나, 억불숭유(抑佛崇儒)의
거친 파도를 극복하지 못하고 쫄딱 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후 안양사터는 당간지주와 3층석탑 등을 속세에 드러낸 채, 땅 속에 묻혀있다가 1959년
엉뚱하게 유유산업이 절터를 깔고 앉았고 공장 주변에는 집들이 들어찼다. 하여 제자리에 안
양사 재건이 어렵게 되자 1960년대에 동북쪽 산자락에 새 안양사를 짓고 안양사의 유물로 여
겨지는 승탑과 귀부를 업어와 옛 안양사의 뒤를 자처하고 있다.


▲  중초사지 3층석탑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64호

당간지주 옆에는 조금 부실하게 생긴 3층석탑이 멀뚱히 서 있다. 높이 약 3.6m의 석탑으로 당
간지주보다 다소 늦은 고려 중/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때는 중초사가 아닌 안양
사 시절이니 '안양사지 3층석탑'이 적당한 명칭이겠으나 아직 바로 잡히지는 않았다.

이 탑은 원래 지금보다 동쪽에 있었으나 공장이 들어서면서 지금의 자리로 강제로 옮겨졌으며
탑의 기단(基壇)은 단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탑신부(塔身部)에 비해 기단부가 훨씬 커서 전체
적으로 균형이 떨어지고 볼품이 좀 떨어진다. 하지만 당간지주의 후광(後光) 덕인지 보물 5호
라는 큼직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으나 1997년 1월 문화재지정등급 재조정으로 결국 지방문화재
로 등급이 떨어지고 말았다. (현재 보물 5호의 자리는 비어있음)


▲  삼성천을 향해 누워있는 중문(中門)터

안양사터의 구조는 남쪽에 중문터와 남회랑터를 두어 경내를 감싸고, 중문을 들어서면 전탑터
와 금당이 나온다. 금당 북쪽에는 설법단터와 승방터가 있고, 동쪽에는 동회랑터, 서쪽에 서
회랑터를 두었다.
하지만 공장 건물을 모두 철거하지 못했고 공장 주변에 집과 건물이 가득하여 아쉽게도 절터
를 모두 파내진 못했다. 겨우 금당(법당)과 전탑, 그 주변만 속살을 캤을 뿐이다. 허나 지금
까지 드러난 모습도 충분히 입을 벌어지게 만드니 나중에 나머지를 싹 뒤집으면 지금보다 훨
씬 장대한 안양사터의 진면목을 만나게 될 것이다.


▲  북쪽에서 바라본 중문터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안양박물관 사이에는 중문터가 누워있다. 옛 유유산업 건물을 밀어버린
이후에 모습을 드러낸 건물터의 하나로 지금까지 확인된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 정도인데
절 바깥에서 법당(法堂)으로 가려면 거의 반드시 중문을 거쳐야 된다.
중문 앞에는 삼성천이 흐르고 있는데 절로 인도하는 돌다리가 있던 것으로 여겨지며, 중문 옆
건물(안양박물관)을 밀어버리지 않고 박물관으로 활용하면서 중문터 일대를 완전히 캐내진 못
했다. 대략 중문의 전체적인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여겨지며, 중문지 북쪽 13m 거리
에 안양사의 명물인 전탑터가 있다.


▲  중문터 남쪽에 널려있는 석물들
안양사터 발굴로 다시 햇살을 본 주춧돌과 계단, 석탑, 석등의 석재 등
여러 석물이 놓여져 있다.


▲  남회랑(南回廊)터

중문터를 들어서면 바로 북쪽에 전탑터가 있고 그 서쪽에 남쪽 회랑터가 있다. 김중업박물관
남쪽에 자리한 남회랑은 북쪽으로 강당터와 이어지는데, 회랑 동서방향으로 2차에 걸쳐 중복
된 건물터 형태를 보여준다. 회랑 남측 건물터에 추가적으로 흙을 얹힌 사실이 확인되어 북측
건물터가 먼저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며, 북측 건물터는 남북 3.21m, 동서 26.6m에 달한다.
동회랑터는 안양박물관과 담장으로 인해 완전하게 조사를 벌이지 못했으며, 서회랑터는 남북
약 70m, 동서 6m로 추정된다. 또한 남회랑터 일대에서 신라 후기 기와조각과 막새, 토기파편
등이 출토되어 중초사 시절부터 절찬리에 쓰였던 현장임을 귀뜀해준다.


▲  안양사의 명물, 전탑터

금당터와 중문터 사이에는 네모난 터가 바짝 누워 있다. 이 자리가 바로 고려 태조가 세우고
최영장군이 중수했다는 7층전탑이 어깨를 활짝 피며 푸른 하늘을 받쳐든 현장이다.
금당터 정면 6m 앞에 자리한 이 탑은 그 동안 기록에만 있었으나 안양사터 발굴로 인해 전탑
터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 전탑은 전설이 아닌 사실이 되었다. 비록 그 장대했던 전탑의 모
습은 녹아없어지고 그 터만 메마르게 남았지만 발굴 결과 남북 9.62m, 동서 5.29m에 이르러
백제의 미륵사지5층석탑 이상만큼이나 웅장한 탑이었음이 밝혀졌다.

전탑터 기단부는 암갈색 사질점토층에 삼성천 냇돌을 섞어서 다졌고, 그 위에 냇돌과 사질점
토층을 채워서 다졌다. 전탑터 남쪽 답도시설 일부에 벽돌과 기와편들이 확인되었는데, 전탑
옥개석(屋蓋石) 위에는 기와가 덮혀있었음이 밝혀졌으며, 고려시대 백자와 분청자 연봉 등이
기와와 함께 출토되어 최영장군 중수설을 진하게 뒷받침해준다. 안양사의 상큼한 상징이었던
이 탑은 조선 초/중기 때 무너져 끝내 일어서지 못했다.


▲  남쪽에서 바라본 전탑터와 금당터

▲  두 터의 공존 ~ 금당(金堂)터와 옛 유유산업 공장터의 기둥

전탑터 북쪽에 자리한 금당(법당)은 안양사의 중심 건물로 건물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안
양사의 위엄에 걸맞게 금당도 제법 컸을 것으로 여겨지나 동쪽에 자리한 옛 공장 건물을 모두
부시지 않고 기둥과 지하 구조물을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남겨두어 겨우 반쪽만
조사를 벌인 탓에 정확한 규모는 아직 모른다.
금당터에서는 9개의 적심이 확인되었으며, 적심은 정면 1칸, 측면 4칸 규모로 기둥간의 거리
는 정면 360~370cm, 측면은 270~280cm 정도이다. 공공예술도 좋지만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기
둥의 모습도 썩 좋아보이진 않는다. 어차피 이 땅에 흔한 콘크리트 건물 기둥이니 그들을 싹
뽑아 주변으로 옮기고 금당터의 나머지 부분을 모두 들추었으면 좋겠다.


▲  강당터와 동회랑터, 특별전시관

▲  강당터

금당터 북쪽에 자리한 강당터는 교육 공간으로 정면 9칸(동서 39.5m), 측면 4칸(남북 14.4m)
에 이르는 거대한 터이다. 건물 어칸(가운데 칸)에서는 대좌(臺座) 시설이 양쪽으로 마련된
형태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경주 황룡사터 강당터의 내부와 비슷하여 안양사의 높은 품격을
보여준다.
건물을 받치던 초석은 자연석을 일부 손질했으며, 기둥 자리에는 40~50cm의 원주가 사용되었
다. 그리고 초석 밑에 예전 건물터(중초사 시절 건물)의 원형 초석이 발견되어 이전보다 50~
60cm 정도 높아졌음이 드러났으며, 강당 좌우로는 동회랑과 서회랑을 이어주는 조그만 건물터
가 배치된 것으로 여겨진다.


▲  강당터 북쪽에 수북히 쌓인 기와편들
절터에서 발견된 기와편을 한데 수습하여 그들만의 조촐한 세상을 일구었다.
이리 깨지고 저리 깨지고, 보잘 것 없는 기와 파편을 저렇게 쌓아두니
왠만한 대(臺)와 단(壇)이 부럽지가 않다.

▲  승방(僧房)터

강당터 북쪽에 자리한 승방은 승려들의 생활공간이다. 정면 9칸, 측면 1칸의 동/서향 장방형(
長方形) 건물로 터 전체를 모두 들추지 못해 완전한 규모는 파악하지 못했다. 건물터 남쪽과
북쪽 기단부에선 기와편들이 많이 나왔는데 조선 중기에 어떤 연유로 절이 파괴되어 건물이
내려앉으면서 지붕의 기와들이 그대로 떨어져 쌓인 것으로 보인다.
기둥 간의 거리는 4.05~4.25m, 측면은 5.1m로 기와편 가운데 '안양사'라 쓰인 기와가 발견되
어 이곳의 정체를 살짝 알려주었다.

안양사터는 양주 회암사(檜巖寺)터, 북한산 삼천사(三千寺)터와 더불어 서울 인근에 몇 남지
않은 커다란 절터 유적(조그만 절터는 제외)으로 그 가치는 중초사지 당간지주 못지 않다. 사
적(史蹟)이나 지방기념물로 삼아도 전혀 손색이 없으며, 나중에 여건이 된다면 주변을 싹 밀
고 안양사터의 숨겨진 속살까지 모두 들추었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들춰낸 것은 기껏해야 절
반 정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갔을 당시는 박물관의 공통 휴일인 월요일이라 박물관은 언제가 될 지 모를 다음으로
미루고 안양사터만 둘러보고 나왔다.

※ 안양사터, 김중업건축박물관(안양박물관) 찾아가기 (2018년 1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석수역(1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관악역(2번 출구)에서 5530, 5624, 5625,
  5626, 5713, 1, 51, 900번 시내버스를 타고 안양예술공원에서 하차, 도보 10분 (관악역 2번
  출구에서 도보 20분)
* 지하철 1호선 안양역(1번 출구)에서 안양마을버스 2번 안양예술공원행 차량을 타고 안양박
  물관(김중업건축박물관) 하차 (반드시 예술공원행을 타야됨)

★ 안양사터, 김중업건축박물관, 안양박물관 관람정보 (2018년 1월 기준)
* 박물관 관람시간 : 9시 ~ 18시 (17시까지 입장 / 매주 월요일, 설날, 한가위 당일 휴관)
* 박물관 입장료는 없음 (특별 전시 때는 상황에 따라 유료 입장)
* 안양사지는 언제든 관람 가능
*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12-1 (안양예술공원로 103번길4 ☎ 031-687-0909)
* 김중업건축박물관과 안양박물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  옛 안양사의 유물로 천하에서 단 하나뿐인 바위 종
석수동 마애종(石水洞 磨崖鐘)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92호

▲  석수동 마애종을 품은 보호각

안양사터 동쪽이자 안양예술공원 주차장 북쪽에는 기와 보호각에 감싸인 석수동 마애종이 조
용히 웅크리고 있다. 마애종을 품은 바위에는 사람들이 치성을 올린 흔적(촛불이나 불에 그을
린 흔적)이 많은데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여겨질 만큼 범상치 않은 자태를 지녔다. 그런 탓일
까? 그의 남쪽 피부에는 승려와 종을 묘사한 마애종이 새겨져 있는데, 바위에 새긴 마애불(磨
崖佛)은 기러기의 털처럼 많이 널려있지만 바위 종은 천하에서 오직 이것 뿐이다.

종각(鐘閣)을 묘사한 듯 'ㅍ'자 공간 안에 두툼히 새겨진 마애종은 9개의 유두가 달린 2개의
유곽을 지닌 범종으로 종 위에 쇠사슬이 단단히 묘사되어 있으며, 범종의 기본 메뉴인 음통, 상대, 유곽, 당좌, 하대 등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종 우측에는 종을 치는 승려가 새겨져 있
다.
공중에 높이 떠있는 듯한 마애종은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느껴지며, 조각 수법과 종류, 종신(
鐘身)의 표현으로 보아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곳은 안양사터 바로 옆에 자리해 있어
안양사의 유물임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예전
에는 중초사의 유물로 여겨졌는데, 조선총독부
에서 1924년에 만든 '고적급유물등록대장'에도
'중초사지 마애종'으로 표시했다.
중초사나 안양사나 같은 곳이니 어느 이름이든
크게 상관은 없겠지만 이제 안양사의 정체가
훤히 드러난 만큼 '안양사지 마애종'으로 이름
을 바꾸는 것이 어떨까 싶다.

▲  서쪽에서 바라본 마애종 보호각


▲  바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석수동 마애종

무려 1,000년 가까운 지긋한 나이에도 마애종의 건강 상태는 썩 양호하며, 승려와 종의 모습
을 무난히 살펴볼 수 있다. 무슨 이유로 바위에 이런 독특한 것을 새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땅의 유일한 존재로 서울 가까이서 이렇게 쉽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참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토록 희소성이 큰 보물이건만 아직도 국가지정 보물이 아닌 지방문화재 등급에 머물러 있다
는 현실에 고개가 좀 갸우뚱하지만 그까짓 인위적인 등급이 무슨 대수겠는가. 비록 보호각 때
문에 마애종 앞까지는 다가갈 순 없지만. 종을 향해 귀를 쫑긋 기울이면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올 것만 같다.

참고로 관악산 동쪽 문원계곡 입구에는 이 땅의 유일한 마애 승려 얼굴상이 있다. <마애승용
군(磨崖僧容群)이라고 함> 이렇게 관악산 자락에는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존재가 1종류도
아닌 무려 3종류(중초사지 당간지주, 마애종, 마애승용군)씩이나 있다는 것이 참 흥미로운데
예로부터 잘생기고 험준한 산은 산악신앙(山岳信仰)과 불교의 성지(聖地)로 널리 추앙을 받았
으니 관악산 또한 그중의 하나로 그 덕을 제대로 본 것 같다.

* 석수동 마애종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산32


▲  안양사 입구 삼성천 바위에 닦여진 어느 예술작품 (무슨 작품일까?)


 

♠  옛 안양사의 뒤를 이은 조촐한 절집,
삼성산 안양사(安養寺)

▲  경내 입구에 자리한 안양사 표석

석수동 마애종에서 동쪽으로 3~4분 정도 가면 안양사입구이다. (안양예술공원입구에서 예술공
원로를 따라 10분 정도 들어가면 안양사 이정표가 나옴) 사람들로 늘 붐비는 예술공원길과 달
리 안양사 길은 종종 스치는 산바람 소리와 새들의 지저귐 소리가 나그네의 두 귀를 간지럽힐
뿐, 거의 고적한 편으로 그 길의 끝에 안양사가 왕년의 영광을 꿈꾸며 조용히 둥지를 틀었다.

경내 입구에는 마치 서예 작품을 보듯 기품이 넘치는 안양사 표석이 서 있는데, 그 표석을 지
나면 버려진 집 1채와 다소 볼품이 떨어지는 연못이 나오고, 이어서 계단을 오르면 주차장과
안양사 경내에 이른다.
이곳 안양사는 앞서 언급한 안양사(안양사터)의 뒤를 이은 사찰로 원 자리를 잃음에 따라 지
금의 자리에 새롭게 자리를 닦았다.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비구니 사찰로 고색의 내음은
아직 여물지 않았으나 옛 안양사의 유물로 여겨지는 승탑과 귀부를 업어와 고색의 향기를 조
금이나마 보태고 있다.
경내는 크게 명부전이 있는 남쪽과 대웅전이 있는 북쪽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가람
이 허벌나게 큰 것도 아니며, 단지 둘 사이에 소나무 숲이 자리해 있어 자연히 구분이 된 것
뿐이다.

▲  푸른 지붕을 지닌 요사(종무소)

▲  소나무 밑에 자리한 샘터

명부전(冥府殿)을 중심으로 한 남쪽 구역에는 종무소와 명부전, 기묘한 자세로 솟아나 명부전
을 지키는 소나무가 있다. 소나무 밑에는 산사(山寺)의 필수품인 약수터가 있는데, 삼성산이
베푼 청정한 샘물이 쉬지 않고 뿜어져 나와 조그만 석조(石槽)를 가득 채운다. 마침 목도 마
르고 해서 바가지에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몸 속의 체증이 싹 가신 듯 개운하다.
 
남쪽 구역의 유일한 불전(佛殿)인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지장보살
(地 藏菩薩)과 저승<명부(冥府)>의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으며, 명부전을 지나 솔내음이 진동하
는 오솔길을 오르면 미륵불과 대웅전이 있는 북쪽 구역이 모습을 드러낸다. 경내가 숲을 경계
로 둘로 나눠진 점이 이곳의 큰 특징이다.


▲  안양사 명부전과 소나무

▲  홀쭉하고 넉넉한 표정의 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명부전 내부를 가득 채운다.

▲  경내 북쪽 구역으로 인도하는 짧은
소나무 숲길

▲  심검당과 경내를 지키는 호랑이상

안양사의 알맹이라 할 수 있는 북쪽 구역에는 심검당과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을 비롯해 이
곳의 오랜 보물인 승탑과 귀부가 있다. 심검당 주변에 자리한 호랑이상과 두꺼비상은 이곳을
지키는 용도로 배치해 놓은 것으로 무섭다기보다는 귀여운 인상이 강하다. 절에 볼일이 있어
서 찾아온 나쁜 기운도 그들의 귀여운 표정 앞에 자신의 소임도 깜빡 잊고 길을 돌아설 것이
다.


▲  안양사 대웅전(大雄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금동을 입힌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  잘 다듬어진 수작(秀作), 하지만 중요한 탑신 부분을 잃어버린
안양사 승탑<僧塔, 부도(浮屠)>

대웅전 앞에는 장대한 세월의 때로 자욱한 승탑과 귀부가 단짝처럼 자리해 있다. 승탑(부도)
은 머릿 부분이 8각으로 이루어진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으로 고려 때 조성되었다. 그의 인
생이 그리 순탄치 않았음을 보여주듯, 승탑의 알맹이인 탑신(塔身)은 오래 전에 상실되어 머
리 부분과 아랫도리만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다.
탑의 높이는 1.4m로 누구의 승탑인지는 귀신도 모르는 실정이며, 원래 인근 숲에 있던 것을
업어왔다. 옛 안양사의 유물로 여겨진다.


▲  안양사 귀부(龜趺)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93호

승탑을 바라보며 넓직하게 앉아있는 귀부는 안양사의 제일 가는 보물이자 유일한 지정문화재
로 비석의 일부이다. 용머리가 받쳐들던 비신(碑身)과 2마리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두고 다투
는 모습이 묘사된 비석의 머리 부분은 거친 세월의 흐름 속에 이미 사라진 상태이다.
이 귀부는 고려 중기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원래 위치는 확실하지 않으나 안양사와 관련
된 유물로 여겨진다. 비석의 성격은 그 중요한 비신이 없어 헤아리기는 힘들지만 대략 승려의
탑비(塔碑)나 안양사의 사적비(事蹟碑)로 여겨지며,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저술한 김부식(金
富軾)이 비문을 썼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인할 길은 없다.

귀부의 등에는 등껍데기가 세세히 묘사되어 있고 비신이 심어져 있던 비좌(碑座)는 치아가 빠
진 모양처럼 무척 허전해 보인다. 엄금엄금 기어갈 것 같은 용머리(귀부)의 높이는 1m, 길이
3m, 너비 2.18m로 머리와 수염, 4개의 발, 등껍데기, 살랑살랑 흔드는 꼬랑지 등이 섬세히 표
현되어 조각 솜씨가 예사롭지가 않다. 그리고 귀부 주위로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 석주(石柱)
18개를 심었다.

귀부의 원래 위치는 확실치 않으나 1942년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수
록된 경기도 시흥군(始興郡) 고적유물에 석비귀부(현 안양사 귀부)와 고분(현 석수동 석실고
분)의 관한 기록이 있다.

24. <석비귀부(石碑龜趺), 석등(石燈)> 동면 안양리(東面 安養里, 현 안양시) 불곡(佛谷, 국
유림) - 석비귀부는 길이 10척, 폭 7척, 높이 3척5촌으로 석비는 분쇄되어 파편의 일부만 남
아 곁에 넘어져 있으며, 석등 하나와 폐정(廢井) 하나가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불곡이라는 사
찰이 있었다고 하지만 절의 이름 등은 알지 못한다.

35. <고분(古墳)>, 동면 안양리 국유림(國有林) - 석수동 동방의 산록 제24호 귀부(龜趺) 후
방에 석곽(石槨)이 노출된 것 2, 3개가 있다.

▲  꼬랑지가 옆으로 늘어진 귀부의 뒷모습

▲  당당한 자태의 귀부 앞모습

▲  귀부의 옆 모습

▲  미륵불 곁에 새로 지은 나한전(羅漢殿)


▲  속세를 굽어보는 안양사 미륵불(彌勒佛)

대웅전 뒷쪽이자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는 안양사의 든든한 후광인 미륵불이 있다.
1976년에 조성된 안양에서 가장 큰 불상으로 높이는 거의 20m에 이르며 얼마나 키다리던지 바
로 밑에서 바라보니 고개가 아파서 뚝 떨어질 것 같다.
온몸이 온통 하얀 피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머리에는 면류관(冕旒冠)과 비슷한 보관(寶冠)을
쓰고 오른손에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제스처를 취했으며,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높다랗
게 서서 남쪽을 굽어 본다. 석불 양쪽으로 계단을 만들었고, 그 앞에 넓게 기도처를 닦았다.

▲  미륵불 옆에 자리한 1칸짜리
산신각(山神閣)

▲  대웅전에 봉안된 금동석가3존불

경내를 이렇게 둘러보고 미륵불에게 3배를 올리며 소망을 슬쩍 들이밀어본다. 기도를 올리니
소망이 들어진 듯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진다. 나는 저 미륵불에게 해준 것이 전혀 없는데 염
치없이 나의 소망만을 요구하니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긴 하지만 정작 그 소망도 이루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 (미륵불도 공무원들처럼 민원만 받고는 모르쇠로 일관~~)
안양사를 끝으로 연말에 벌인 안양예술공원 주변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안양사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산28 (안양예술공원로 131번길 ☎ 031-471-
  4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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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 오랜 상징을 거닐다. 유달산~갓바위 나들이 (노적봉, 목포시사, 달성사, 국립해양유물전시관)



' 호남선의 종점, 목포 늦여름 나들이 '

   

▲ 유달산 노적봉
◀ 달성사에서 바라본 목포시내

▶ 갓바위입구 포구
▼ 갓바위

   



늦여름과 초가을의 팽팽한 경계선인 9월 첫 무렵에 예향(藝鄕)의 고을이자 전남 제일의 항구도
시인 목포(木浦)를 찾았다.
목포는 무려 10여 년 만에 방문으로 그곳과는 이상하게도 인연이 잘 닿지가 않았다. 하여 이번
에 억지로 인연을 갖다붙여 목포행 무궁화호 첫 열차에 속세에 찌든 몸을 담고 느림의 미학(美
學)을 음미하며 거의 5시간을 달려 호남선(湖南線)의 오랜 종점, 목포역에 이르렀다.
목포에서의 정처는 이미 정해둔 상태라 그곳만 얌전히 찾아가면 되는데 이번에 문을 두드린 곳
은 유달산 동부와 달성사, 그리고 갓바위이다.


 

♠  유달산(儒達山) 겉돌기

▲  노적봉(유달산입구)에서 유달산으로 인도하는 계단

목포역에서 시내를 가로질러 노적봉길을 따라 10여 분 걸으면 유달산의 관문인 노적봉 주차장(
유달산입구)이다. 속세에서 유달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중심 관문으로 이곳 외에도 어민동산과
조각공원, 목포시사 등에도 산길이 있으나 관광객들은 보통 노적봉에서 오른다. 이곳에 너른
주차장이 있고 접근성도 괜찮기 때문이다.

유달산(228.3m)은 목포의 상징이자 꿀단지로 시내 서쪽에 들어앉아 서해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노령산맥(蘆嶺山脈)의 실질적인 종점으로 호남의 개골(皆骨)로 일컬어졌으며 영혼이 거쳐가는
산이라 하여 영달산(靈達山)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 영혼이 나중에 선비를 뜻하는 한자로 바뀌
어 유달산으로 간판을 바꾼 것이다.
산세는 그리 크지 않아 노적봉에서 정상까지 넉넉잡아 30~40분 정도면 충분하며 유달산의 정상
인 일등바위와 이등바위, 삼등바위, 고래바위, 투구바위, 노적봉 등 20개가 넘는 개성파 바위
들이 앞다투어 산을 멋지게 수식하고 있다. 이들은 목포8경의 으뜸인 유산기암(儒山奇巖)의 현
장으로 지금은 목포9경으로 재편되어 '유달산풍경'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유달산의 품에는 대학루와 달선각, 소요정, 낙조대 등의 정자가 있고, 조각공원과 특정자생식
물원, 노적봉예술공원, 목포시사, 달성사, 오포대(午砲臺) 등의 명소가 있으며, 2.7km의 유달
산 일주도로(유달로)와 뚜벅이를 위한 유달산 둘레길이 둘러져 있다. 또한 산자락에는 왕자귀
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 천하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서식하고 있다.

산에 왔다면 정상은 한번 가주는 것이 산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정상에 오르면 목포시내를 비
롯하여 서해바다와 점점이 찍힌 크고 작은 섬들이 앞다투어 두 눈에 들어와 조망(眺望)이 천하
일품이다. 게다가 사방(四方)이 확 트여있어 일출과 일몰을 모두 구경할 수 있다.
이곳 정상은 한참 20대의 중반을 달리고 있던 2002년 초, 심야열차로 목포에 내려와 새벽에 검
은 도화지 속을 가르며 올라간 추억이 있다. 그때 일등바위에 걸터앉아 불끈 솟아오르는 해돋
이를 보며 목이 터져라 환호를 질렀었지~! (허나 지금은 우울이 파도를 치는 30대 후반 ㅠㅠ)
노적봉에서 정상까지 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 밤에도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이렇게 오랜만에 찾은 유달산이지만 이번에는 뫼 깊숙히 안기지 않고 노적봉과 목포시사, 달성
사 등 유달산의 겉만 돌고 철수했다.


▲  노적봉예술공원 미술관 야외공연장

노적봉 주차장 서쪽에는 노적봉예술공원이 자리해 있다. 주차장에서 보이는 공원은 3층 꼭대기
로 야외공연장으로 쓰이며 공연장 옆에 '노적봉예술공원'이라 쓰인 건물로 들어가 내려가면 미
술관과 홍보관이 나온다.
이곳은 2009년 7월에 문을 연 목포 종합 홍보관 겸 미술관으로 지상 2층과 옥상(3층)으로 이루
어져 있다. 1층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작품과 목포 지역 서화가의 작품을 다루는 미술관으로
, 2층은 목포의 역사와 지리, 문화, 예술 등을 다루고 있으며, 3층 옥상은 야외공연장으로 쓰
이고 있다. 허나 이곳은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곳이라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넘기고 유달
산으로 등을 돌렸다.

★ 노적봉 예술공원 미술관 관람정보 (2017년 9월 기준)
* 관람시간 : 9시~18시 (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 없음)
* 소재지 : 전라남도 목포시 대의동2가 1-4 (유달로 116, ☎ 061-270-8300)


▲  노적봉(露積峯)

노적봉 주차장(유달산입구) 뒤쪽에 노적봉이라 불리는 울퉁불퉁한 큰 바위가 있다. 속세(俗世)
에서 유달산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그는 대자연이 빚은 해발 60m의 바위로 남해바다의 영
원한 해신(海神),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뛰어난 전략과 숨결이 서린 현장이다.

때는 1597년 겨울, 그 유명한 명량대첩(鳴梁大捷)으로 적선 133척을 격파하고 왜군 1만여 명을
물고기 간식으로 만든 이순신은 목포 앞바다에 뜬 고하도(高下島)에 주둔하며 남해로 진출할
준비를 했다.
왜군들은 언제 이순신이 나타나 자신들의 목을 칠지 전전긍긍하며 수시로 조선 수군의 동태를
살폈는데, 이순신은 바다가 잘 보이는 노적봉에 이엉(볏짚)을 덮어 마치 군량미가 산처럼 쌓여
있는 것처럼 위장을 하고, 새벽에는 바닷물에 백토를 풀어 쌀뜨물처럼 보이게 하여 왜군을 눈
뜬 장님으로 만들었다. 단순한 왜군은 그의 계략에 제대로 속아 쫄깃해진 염통을 부여잡고 도
망을 쳤으니 그 연유로 세상에서는 이 바위를 노적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유달산의 상징이자 이순신의 손길이 담긴 노적봉은 매우 거친 바위라 오르는 것이 통제되어 있
다. 바위 주변에는 산책로가 둘러져 있어 방향마다 달리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맨
살을 완전히 드러내기가 부끄러웠는지 얇게나마 푸른 덩굴 옷을 걸치고 있다. 근래에는 노적봉
큰바위 얼굴이라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바위 꼭대기를 가만히 살펴보면 사람 얼굴과도
 비슷해 보인다. 그래서 이를 두고 이순신 장군이 호령하고 있는 모습이라 말하기도 한다.
또한 노적봉의 기운을 받으면 건강에도 좋다고 하여 인근 다산목과 함께 소원을 비는 현장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  가까이서 바라본 노적봉 (바위 정상이 사람 얼굴과
좀 비슷하게 생겼음)

▲  동쪽에서 바라본 노적봉

▲  북쪽에서 바라본 노적봉


▲  노적봉 동쪽에 심어진 옛 목포MBC 표석
1980년 5.18 시절 방송매체들이 정권의 나팔수를 자처하며 5.18을 폭동으로,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하는 보도를 내보내자 분노한 목포 시민들이 방송국에 불을 지르고 5.18
탄압을 규탄했던 현대사의 쓰라린 현장이다. 그 현장이던 목포MBC는 다른 곳으로
둥지를 옮겼고 저렇게 표석 하나를 남겨 놓아 당시의 상황을 아련히 전한다.


▲  새천년 시민의 종

노적봉 뒤쪽으로 가면 커다란 종각(鐘閣)이 있다. 그 안에는 2000년 10월에 조성된 커다란 종,
새천년 시민의 종이 담겨져 있다.
2000년에 새로운 천 년을 맞이하여 목포시에서 6억 원을 들여 만든 종으로 옛날에 정오 12시를
알렸던 오포대(午砲臺) 자리에 세웠다. 종은 1998년에 만들기 시작하여 2000년 10월에 완성을
보았는데 서울대 정밀기계설계 공동연구소에서 제작 설계를 하고, 김응현 선생이 종에 글씨를
새겼으며 종각의 현판인 '시민종각(市民鐘閣)'은 전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남겼다.
보통 종은 33번을 치기 마련이나 이 종은 희망찬 21세기의 염원을 담아 만든 것이라 하여 특별
하게 21번을 친다.


▲  노적봉에서 시내로 내려가는 계단길
이 계단을 내려가면 옛 목포 일본영사관(사적 289호)이 나온다.

▲  온갖 거시기한 상상을 유발시키는 노적봉 다산목(多産木) 아랫도리


▲  노적봉 다산목

노적봉 남쪽에는 유달산의 새로운 명물로 등극
한 다산목이란 나무가 있다. 이들 나무는 팽나
무로 나무 줄기는 뼈만 앙상한 다리 같은 모습
인데 그들이 갈라져 가랭이를 벌리고 있는 듯
한 부분은 여인의 은밀한 부분과 비슷하게 생
겨 먹어 온갖 예민한(?) 생각들을 불러일으킨
다.

이 나무는 1900년대 초반에 발견된 것으로 여
한목(한스러운 여인나무)이라 불렸다고 한다.
나이는 150년 정도로 1910년경에 어미나무(여
한목)의 뿌리에서 새끼나무가 자라나자 그를
다산목이라 했다.
인근 주민들만 알고 지내던 숨겨진 존재로 이
들 나무를 보면 아이를 많이 낳는다고 하여 노
적봉 주변 동네의 출산율이 목포의 다른 동네
보다 높았다고 전한다. 아무래도 자연의 경이
로움이 느껴질 정도로 걸작이다보니 보기만해
도 밤일(?) 생각이 간절하고 힘 또한 불끈 솟
는 모양이다.

동네 사람들의 아주 비밀스러운 성기/기자신앙(性器/箕子信仰)의 대상물로 오랫동안 숨바꼭질
을 해왔지만 2000년 10월 새천년 시민의 종을 만들고자 노적봉 주변의 수풀을 손질하는 과정에
서 발견되어 속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목포시청에서 그 나무를 여자나무(여인나무)
라고 부르다가 동네 설화에 따라 다산목으로 이름을 바꾸고 유달산의 명물로 키우고 있다.


▲  노적봉에서 바라본 목포시내

▲  유달산 주위를 도는 드라이브 둘레길, 유달로

▲  점점 멀어져가는 노적봉 (유달로에서 바라본 노적봉)

▲  목포시사로 인도하는 계단길
나무가 적절하게 고개를 숙이며 조촐하게 숲길을 이룬다.

▲  돌담에 둘러싸인 목포시사(木浦詩社) - 전남 지방기념물 21호

노적봉에서 유달산 밑도리를 따라 흘러가는 둘레길을 쫓아 조각공원 방면으로 가다보면 숲속에
고즈넉하게 들어앉은 목포시사가 마중을 나온다.

유달산 동쪽 자락에 안긴 목포시사는 1907년 대학자로 칭송받는 정만조(鄭萬朝)가 세웠다. 시
사(詩社)란 선비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던 곳으로 지금으로 따지면 문학 동호회 모임터이
다. 1890년 허석제, 여규향 등 지역 문인들이 세운 유산정에서 비롯된 목포시사는 망국의 한
과 우국충정을 토로하던 문학결사 단체로 명성이 자자했는데 시에 뜻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받아들였으나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사람은 절대로 받지 않았다.
지금도 시사의 성격은 전혀 녹슬지 않았으며, 매년 봄과 가을에 한시(漢詩) 백일장을 열고 있
다. 그때가 되면 전국에서 100~200명 이상의 문인들이 찾아와 서로의 필력을 겨루며 한시의 명
맥을 이어가고 있다.


시사를 이루고 있는 건물은 2동으로 앞에 있는
건물이 시사 본당(本堂)이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진
본당에는 정만조의 문집과 구한말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온갖 서적과 한시 현판, 백일장 입
선작, 문인들의 원고가 소장되어 있으며 뒷쪽
건물은 시사 관리인의 거처이다.


  목포시사 본당



 

♠  유달산 자락에 안긴 100년 묵은 산사(山寺)
목포 달성사(達聖寺)

▲  달성사 (왼쪽부터 범종각, 명부전, 극락보전, 관음전)

목포시사에서 다시 둘레길을 따라 북쪽으로 2~3분 가면 달성사 이정표가 마중을 나온다. 그의
안내에 따라 산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면 그 계단의 끝에 유달산 동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다진 달성사가 모습을 비춘다.

달성사는 목포 지역 유일의 오래된 사찰로 1913년 4월 석가탄신일에 노대련 선사(盧大蓮 禪師)
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조선 후기에 창건되어 대원사(大願寺)라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근
거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1913년 창건 이후 법등(法燈)을 켠지 이제 100여 년이 되었지만 그 짧은 역사도 제대로 정리하
지 못해 많은 내력이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의 절은 2000년대 초반에 손질된 것으로 고색의 내
음은 싹도 틔우지 못했지만 다행히 다른 곳에서 오래된 불상 2개를 업어와 든든한 밥줄로 삼고
있다. 내가 여기에 온 것도 바로 그 불상을 보기 위함으로 그들이 만약에 없었다면 이곳에 영
원히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보전을 위시하여 명부전과 삼성각, 요사 등 7~8동의 건물이 있으며, 산자
락에 크게 2단으로 석축을 다져 1단에는 3층석탑과 요사, 범종각을 두고, 2단에는 극락보전과
명부전, 관음전을 두었다. 그리고 극락보전 뒤쪽에 높이 터를 구축해 삼성각을 세웠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아미타3존불좌상과 목조지장보살반가상 등이 있
으며, 이곳에 있는 우물은 유달산 뿐 아니라 목포에서도 흔치 않은 샘터로 유명하다. 또한 목
포8경의 하나인 달사모종(達寺暮鐘)의 현장으로 이곳에서 울려퍼지는 종소리는 목포 시내의 번
뇌를 잠재운다.


▲  달성사로 올라가는 계단길

▲  경내 밑에 자리한 이형(二形) 석탑
정확한 조성시기는 모르겠으나 때깔이 좀 낀 것으로 봐서는 20세기 초나 중반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3층탑 같기도 하고 2층탑 같기도 하고, 보면 볼수록
참 답이 없는 탑인데 아랫층을 기단으로 본다면 2층이 되겠고, 탑신으로
본다면 3층이 되기 때문이다. 지붕돌의 처마는 경쾌하게 들려져
살짝 날개짓을 벌이는 것 같다.

▲  경내로 오르는 계단

▲  앞서 이형 석탑 윗도리와 똑같이 생긴
2층 탑신이 계단 옆에 놓여져 있다.

▲  관음전(觀音殿, 2층)과 요사, 공양간(1층)
관음전 밑도리를 활용하여 요사와
공양간을 두었다.

▲  극락보전(極樂寶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처음에는 대웅전을 칭했으나 본존불과의
형편성을 고려해 극락보전으로 바뀌었다.


▲  달성사 목조아미타3존불좌상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228호

극락보전에는 눈을 가늘게 뜨며 포근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건물
의 이름을 대웅전(大雄殿)에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인 극락보전으로 바꾼 것도 바로 이
들 때문이다.

그들은 1678년 강진 만덕산 백련사(白蓮寺)에서 조성된 목불(木佛)로 이들을 조성하면서 남긴
조성발원문(14cmX25cm)에 자세한 내용이 적혀있다. 아미타9품인(阿彌陀九品印)의 하나를 취하
며 앉아있는 아미타불의 옷은 통견의로 U자형의 옷주름이 물결을 이루고 있으며 1자형의 띠줄
과 연화형 승각기, 우측 어깨의 반단, U자형 군의자락 등이 특징이다. 그의 좌우에는 현란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협시로 앉아있는데 표정이 좀 무거
워 보이며 17세기 전남 지역의 몇 안되는 목불의 하나로 손꼽힌다.

◀ 극락보전 뒷쪽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과
그 앞에 솟은 대련선사창공비(大連禪師彰功碑)

삼성각은 산신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
금자리로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해 있다.
그 밑에 밋밋하게 솟은 비석은 절을 세운 노대
련 선사를 기리고자 세운 창공비(彰功碑)이다.

         ◀ 달성사 우물 <옥정(玉井)>
극락보전 뒷쪽에는 정(井)과 샵(#) 모양의 진
수를 보여주는 우물이 누워있다. 여기선 그를
옥정이라 하여 애지중지하고 있는데 노대련이
100일 기도 중에 굴착을 하니 기도의 영험인지
30척 바위 속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유달산의 흔치 않은 우물로 물맛이 좋기로 소
문이 자자하며, 여름에는 물이 차고 부정한 사
람이 물을 길으면 일시에 마른다고 한다. (내
가 갔을 때는 물 구경도 못했음)

  종무소(宗務所) 겸 요사(寮舍)

  명부전(冥府殿)

  명부전 10왕상 (우측)

  명부전 10왕상 (좌측)


  달성사 목조지장보살반가상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229호

극락보전 옆에는 지장보살과 10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된 명부전이 있다. 다
른 건물은 다 지나치더라도 극락보전과 명부전 내부는 꼭 살펴보도록 하자. 바로 달성사의 보
물이 담겨져 있기 때문으로 특히 명부전의 목조지장보살반가상은 이 땅에 흔치 않은 반가상(半
跏像)으로 매우 희소성이 높다.

푸른색의 승려 머리를 선보이며 동자처럼 해맑
은 표정을 지은 지장보살상은 1565년 나주 웅
점사<熊岾寺, 현재 운흥사(雲興寺)>에서 조성
된 것으로 조성 관련 내용이 조성발원문(13cmX
143cm)에 소상히 나와있다.
극락보전의 목조아미타3존불처럼 낯선 이곳으
로 흘러들어왔는데, 언제 무슨 경로로 왔는지
는 전하는 것이 없다.

이 불상은 나무로 만든 것으로 밝은 표정 속에
는 눈썹과 가늘게 뜬 눈, 오똑한 코, 붉은 입
술이 담겨져 있으며,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島
)가 획 그어져 있다.
왼쪽 다리는 가부좌(跏趺坐)를 취하고 있고 오
른쪽 다리는 밑으로 내리고 있는데, 이런 형태
의 불상은 17세기 이전에는 오로지 이것 밖에
없다고 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매우 사실적
으로 묘사되었으며 지방문화재가 아닌 국가 보
물로 삼아도 전혀 손색은 없어 보인다.

그가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그를 위해 근래에 특별한 제작된 것으로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살짝 앉아보고 싶을 정도 탐이 난다. 그의 좌우에는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
明尊者)가 밝은 색채를 띄며 서 있다.


▲  달성사에서 바라본 목포시내

경내를 둘러보고 종무소 툇마루에 앉아 불만에 잠긴 두 다리를 쉬었다. 툇마루에 식당에서 많
이 볼 수 있는 커피 자판기가 있는데 무려 공짜이다. (지금은 없으며 종무소에서 승려가 전통
차를 달여서 제공해줌, 단 그가 종무소 방에 머물고 있을 때에 한함) 그래서 2잔이나 뽑아 마
셨지.
속세에 대한 근심을 잠시 바람에 날리며 툇마루에 앉아있으니 종무소에서 일하던 여인네가 다
가와 말을 건넨다. 그는 나와 비슷한 연령대로 보였는데 어디서 오셨나면서 과자와 녹차를 권
한다. 뜻밖에 호의에 고마움을 표하며 과자와 녹차를 마셨고 배고픈 마음에 과자를 더 청하니
초코과자를 더 건네준다. 그렇게 간식을 섭취하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아쉽지만 작별을
고하고 절을 떠났다.

달성사에 대해서는 운좋게 오래된 불상을 업어온 20세기 초반 사찰, 1번 오면 그만인 그런 정
도로 인식하고 있었으나 절의 호의에 또 오고 싶은 긍정적인 사찰로 인식이 돌변했다. 그래서
얼마 전 봄에도 지나는 길에 잠시 들려 승려에게 차를 여러 잔 대접 받으며 차담(茶啖)을 주고
받았다.

※ 유달산 찾아가기 (2017년 9월 기준)
① 목포까지
* 용산역, 영등포역, 수서역, 광명역, 수원역, 천안역, 오송역, 서대전역, 익산역, 광주송정역
  에서 목포행 각종 열차 이용
* 서울 강남센트럴시티에서 목포행 고속버스가 40~60분 간격, 동서울터미널에서 목포행 직행버
  스가 1일 5회 떠난다.
* 고양(백석), 성남, 수원, 안산, 인천, 천안, 세종, 전주, 광주, 여수, 부산(사상), 창원(마
  산)에서 목포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② 현지교통
* 목포역에서 유달산입구(노적봉)까지 도보 12분, 달성사는 약 25분
* 목포종합터미널에서 물 흐르듯 자주 다니는 목포역, 삼학도, 해양대 방면 시내/좌석버스를
  타고 목포역 정류장에서 도보 이동, 또는 노선 굴곡이 심한 2, 60번 시내버스를 타고 목포
  YMCA나 유달산우체국에서 하차하여 도보 이동 (60번은 연산동으로 크게 돌아감)

③ 승용차
* 서해안고속도로 → 죽림나들목에서 고하대로 직진 → 삽진고가교 → 북항교차로에서 좌회전
  → 해양대학로 → 유달로 → 달성사입구 → 유달산주차장, 노적봉

★ 유달산 관람정보 (2017년 9월 기준)
* 입장료는 공짜, 주차비는 경차 30분에 500원, 중형은 500원, 대형은 1,000원
* 유달산 소재지 : 전라남도 목포시 죽교동 (☎ 노적봉 관광안내소 061-270-8411)
* 달성사 소재지 : 전라남도 목포시 죽교동 317-1 (유달로 173 ☎ 061-244-1489)


 

♠  대자연이 빚은 기묘한 작품, 갓바위 - 천연기념물 500호

  갓바위 입구 포구

유달산과의 짧은 인연을 쿨하게 마무리짓고 갓바위로 가고자 시내로 나왔다. 뱃속을 달래고자
목포역 부근으로 내려와 마땅한 식당을 물색하다가 다양한 종류의 순두부찌개를 내놓는 '수가
정'이란 식당에 눈에 들어와 소고기 순두부찌개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이곳은 10여 가지의 순
두부찌개를 취급하는데 찌개와 돌솥밥이 같이 나온다. 돌솥에 담긴 밥에 뜨거운 물을 넣어 푹
우린 다음 순두부와 같이 냠냠하는 것으로 그런데로 숟가락을 들만하다.

그렇게 시장한 배를 배불리 달래고 목포역에서 목포시내버스 15번을 타고 남항과 하당 사이에
자리한 갓바위로 이동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바로 앞에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지는데 이곳도 엄연한 목포 도심이건만 시골
어촌 풍경이 여전히 진하다. 목포만(木浦灣) 너머로 영산강하구둑을 비롯하여 지역 발전과 돈
을 향한 집념의 연기를 내뿜는 대불공단 공장들이 바다 건너로 보이고 바다와 포구에는 갖은
어선들이 조각배처럼 수면 위를 장식하고 있어 평화로운 어촌 풍경을 자아낸다.

버스정류장에서 갓바위로 인도하는 산책로를 들어서면 중간에 갓바위 뒷통수로 오르는 입암산(
立巖山) 산길이 있으며, 직진을 고수하면 나무로 다진 해안산책로(보행교)가 나온다. 이 산책
로는 갓바위를 두 다리로 편하게 구경할 수 있게끔 2008년 4월 10일에 설치된 298m의 길로 동
쪽은 하당신도시 달맞이공원과 이어진다.
밀물 때는 바닷물을 따라 1m 정도 육지쪽으로 올라왔다가 썰물이 지면 바닷물을 따라 내려가는
산책로로 바다를 따라 조금씩 모습을 달리 한다. 보행교에는 야간 조명을 설치하여 통행 편의
는 물론 갓바위의 환상적인 야경까지 선사하고 있다.


  갓바위 입구 앞바다(목포만) - 바다 건너는 대불공단

▲  갓바위와 이웃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와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신안(新安) 해저 유물을 비롯하여 바다에서 발견된 온갖 묵은 보물들이
담긴 이 땅 최초의 해양박물관이다.

  갓바위 해안산책로(보행교) - 갓바위 서쪽 보행교


  서쪽에서 바라본 갓바위

  서남쪽에서 바라본 갓바위

입암산 남쪽 바닷가 벼랑에 자리한 갓바위는 대자연이 긴 세월을 두고 빚은 심오한 작품이다. 아직 작품은 완성되지 않았고 지금도 계속 자연의 보이지 않은 손에 의해 굼벵이 속도로 손질
되고 있어 몇백 년 이후에는 지금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자아낼 것이다.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갓바위는 갓을 쓰고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갓바위란 단순한 이름
을 지니게 되었다. 보면 볼수록 놀라움만 더하게 하는 그는 2개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왼
쪽(서쪽) 바위는 모자가 달린 외투나 옷을 껴입은 모습처럼 보여 사오정 시리즈로 유명한 귀머
거리 사오정과 비슷해 보이며 오른쪽(동쪽) 바위는 갓보다는 철모를 쓰고 있는 군인 같다.
예전에는 갓처럼 보였겠지만 그만큼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 모자 달린 옷이나 철모처럼 서서히
변했을 것이다. 겉으로 보면 시멘트가 떨어져 나간 듯한 모습이라 사람들이 건드린 것은 아닐
까 싶지만 저게 모두 순수 자연 현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
겠는가.

갓바위가 이런 요상한 형태가 된 것은 이곳이 바닷물과 담수가 만나는 곳으로 암석 표면에 파
도가 치거나 안개가 끼면 소금기를 머금은 물에 젖었다가 마르기를 되풀이한다. 그 와중에 수
분에 들어있던 실리카 성분이 침전되면서 용해된 부분은 조직이 이완되고 강도가 낮아져 모자
모양의 경질부와 아랫쪽이 움푹 패인 벌집 모양의 풍화혈(風化穴)이 형성된 것이다. 파도와 해
류, 바다 바람에 의해 바위가 변해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는 현장으로 다른 풍화혈에서는
찾기 힘든 희귀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삿갓이 동남쪽을 향한 것은 햇볕의 영향 때문이라는 설
도 있다.

이곳을 물든 저녁 노을과 갓바위와 해안 벼랑에서 반사되는 노을빛이 무척 아름다워 예로부터
목포8경의 하나인 입암반조(笠岩返照)로 꼽혔으며 파도와 바닷바람에 의해 바위가 이렇게도 성
형이 될 수 있음을 실감나게 하는 현장으로 2009년 천연기념물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지금은
목포9경의 일원임)


  정면에서 바라본 갓바위의 위엄

이렇게 개성이 넘치는 바위에는 옛 사람들이 그럴싸하게 붙여놓은 전설 보따리가 꼭 담겨져 있
기 마련이다. 목포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갓바위 역시 그 예외는 아닌데 그들이 붙여놓은 전설
은 대략 이렇다.

호랑이가 담배를 피다가 수염을 태워먹던 어느 옛날,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청년이 있었
다. 그는 소금을 팔아서 생계를 꾸렸는데 살림살이는 늘 궁핍했으나 아버지에 대한 효성이 매
우 지극하여 동네 사람들의 칭찬이 마를 날이 없었다.
소금 장사로는 생계가 어려워 부잣집에 머슴으로 들어갔으나 주인이 돈은 주지도 않고 부려먹
기만 하는지라 1달 만에 그만두고 말았다. 집에 와보니 심상치 않은 기운이 있어 방문을 열어
보니 글쎄 아버지의 손과 발이 이미 식어있는 것이 아닌가. 청년이 집을 비운 사이 그는 숨줄
을 놓은 것이었다.
청년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양지바른 곳에 묘자리를 잡고 관을 모시고 가던 중, 그만
실수로 관을 바다 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어떻게 빠뜨렸는지는 모르겠으나 전설은 그냥 그렇
게만 나와있음) 청년은 다시 한번 불효를 통회(痛悔)하며 울부짖다가 하늘을 바라보고 살 수
없다고 자책하며 평생 갓을 쓰고 관이 빠진 자리를 지키다가 죽었다. 이후 그곳에 2개의 바위
가 불쑥 올라왔는데 사람들은 큰 바위를 아버지 바위, 작은 바위를 아들바위라 불렀다.

다른 전설로는 부처가 나한(羅漢)을 이끌고 영산강을 건너 이곳에서 잠시 쉬었는데, 그때 모르
고 놓고 간 삿갓이 바위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갓바위 대신 중바위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앞 전설이 효도를 소재로 한 것이라면 뒷 전설은 불교를 소재로 한 것으로 효행사상을 장려하
고자 갓바위를 이용한 선비들과 이곳에 오지도 않은 부처와 나한을 내세워 바위를 포교의 소재
물로 삼은 승려들의 투철한 영업 정신이 교차된 현장이다.

바위가 해변 벼랑에 있다보니 육지에서는 그의 뒷통수 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천상 배를
타고 봐야 했었지. 바로 그런 고충을 해결하고자 2008년 4월 갓바위 주위에 해안보행교를 만들
어 두 다리로 언제든 갓바위를 만날 수 있게 배려했으며 조명시설까지 설치해 야경까지 덤으로
제공한다.


  갓바위에서 바라본 목포만과 영산강하구둑

▲  동쪽에서 바라본 갓바위 - 바다에 돌출된 모자 끝부분을 손으로 만지면
가루처럼 뚝 부러질 것만 같다. 정말 만져보고 싶은데 위치가 저러니
이렇게 바라보는 선에서 그 미련을 접어야 된다.

▲  아랫도리가 긁힌 갓바위 동쪽 벼랑 (윗쪽은 입암산 전망대)
이들도 갓바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저 모양이 되었다. 마치 사람들이
도구를 이용해 긁은 모습처럼 말이다.


  갓바위 바로 앞 보행교

  갓바위 동쪽에 둥지를 튼 하당신도시

  동쪽에서 바라본 갓바위 주변

  갓바위 뒷통수에 펼쳐진 입암산 산길

  입암산에서 바라본 목포만과 영산강하구둑

갓바위 뒤쪽은 해안 언덕으로 목포자연사박물관 뒷쪽에 누운 입암산의 일부이다. 그 언덕에는
산책로가 닦여져 있는데 갓바위 뒷통수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해조음을 듣고 자라난 나무들이
숲을 이루며 우거져 있고 그 산을 넘으면 하당 달맞이공원으로 이어진다. 갓바위에 왔다면 바
다와 바위만 볼 것이 아니라 입암산 산길도 한번 거닐기 바란다.
이처럼 갓바위는 산과 바위, 바다, 3박자가 깔끔하게 어우러진 경승지이자 유달산과 자웅을 겨
루는 목포 제일의 명소이다.

갓바위를 둘러보니 어느덧 18시, 찬란했던 햇님의 기운도 슬슬 망조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땅꺼
미가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목포에서의 볼일도 그런데로 다 마쳤으니 이제 제자리로 돌아와
야 되겠지. 마음 같아서는 하루를 더 머물며 인근 지역까지 살펴보고 싶지만 그럴 준비까지는
갖추지 못했다. 하여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여기서 가까운 목포종합버스터미널로 이동하여 수
원행 마지막 고속버스에 몸을 실으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9월 초 목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목포 갓바위 찾아가기 (2017년 9월 기준)
* 목포역 건너편에서 목포시내버스 15번을 타고 중바위(갓바위) 하차
* 목포종합버스터미널 남쪽 상동입구 정류장에서 목포시내버스 112번을 타고 우미파크빌5차에
  서 하차, 여기서 해안산책로나 달맞이공원을 거쳐 갓바위까지 도보 10분
* 목포종합버스터미널 남쪽 상동입구나 서쪽 버스터미널 후문 정류장에서 900번(900번A) 좌석
  버스를 타고 갓바위터널 하차, 갓바위터널을 거쳐 갓바위까지 도보 15분

* 갓바위 해안산책로(보행교) 통행가능시간
- 하절기 5시~24시 (동절기는 23시까지)
- 태풍과 호우, 폭설, 안개 등의 기상악화 시에는 접근 통제

* 갓바위 서쪽에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061-270-2000, ☞ 홈페이지 보기), 목포자연사박
  물관(☎ 061-270-8367, ☞ 홈페이지), 목포생활도자박물관(☎ 061-270-8480, ☞ 홈페이지),
  남농기념관(☎ 061-276-0313), 목포문학관(☎ 061-270-8400, ☞ 홈페이지 보기), 목포문화예
  술회관(☎ 061-270-8484, 홈페이지 보기) 등의 박물관과 전시/예술공간이 몰려있다. 이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서 ‘갓바위문화타운’이라 부르는데, 갓바위와 이들 몇 개를 같이 묶어서
  본다면 정말 배터지는 나들이가 될 것이다. 특히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이 땅 최초의 해양
  문화재 박물관으로 신안 서해바다에서 발견된 보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 갓바위 소재지 : 전라남도 목포시 용해동 8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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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9월 8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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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좌청룡을 거닐다 ~ 낙산 가을산책 (이화마을, 낙산공원, 한양도성)

 

' 서울 도심의 영원한 좌청룡, 낙산(駱山) '
(한양도성, 이화마을, 낙산공원)

▲  낙산공원 한양도성 바깥길 (낙산에서 동소문 방향)


가을이 여름 제국(帝國)의 잔여 세력을 힘겹게 몰아내며 천하를 진정시키던 9월 끝무렵에
서울의 좌청룡인 낙산을 찾았다. 서울 땅을 거진 꿰고 사는 본인이지만 정작 낙산은 아직
까지 발자국도 남기지 못한 채, 미답처로 쭉 남아있었다.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건만 인
연은 정말 지지리도 없던 곳이었지. 그러다가 이번에 억지로 인연을 갖다 붙여 낙산의 품
을 찾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영원한 보물 1호, 동대문<東大門, 흥인지문(興仁之門)>에서 일행을 만나 낙산
의 남쪽 관문이나 다름없는 동대문성곽공원을 찾았다. 이번 낙산 투어는 이곳에서 시작된
다. (본글에서 한양도성과 한양성곽은 같은 곳임)

 


♠  동대문성곽공원 (한양도성)

▲  동대문 쇼핑타운을 굽어보는 동대문성곽공원

동대문성곽공원은 이대병원을 밀어내고 동대문 북쪽에서 잠시 끊긴 한양성곽(漢陽城郭)을 복원
하면서 만든 공원이다. (이대병원은 양천구 목동으로 이사감) 성 안쪽이자 하얀색의 병원 건물
이 있던 그 자리에는 푸른 잔디를 곱게 입혔고, 갖은 들꽃들이 미소를 지으며 나그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그리고 공원 중앙에는 네모난 정자를 지어 나그네의 조촐한 쉼터가 되어준다.

공원 북쪽에는 성곽을 따라 낙산으로 올라가는 한양성곽길이 여장과 함께 펼쳐져 있으며, 흥인
지문4거리(로터리)와 맞닿은 성곽 남쪽에는 동대문교회가 있었으나 공원 확장을 위해 2014년에
철거되었다. (지금은 교회 부속 건물만 일부 남아 있음)

근래에 조성된 공원이라 성곽 외에는 딱히 볼거리는 없지만 도심 속의 소중한 쉼터로 사막 속의
오아시스처럼 그 가치는 돋보이며, 낙산의 남쪽 관문으로 이곳을 기점으로 낙산 나들이를 벌이
는 것도 괜찮다. 또한 공원 북쪽에는 서울디자인지원센터가 있는데, 그 안(1~3층)에 2014년 7월
31일에 개관된 한양도성박물관이 담겨져 있어 볼거리를 더해준다.
이곳은 문을 연지 얼마 안된 아주 따끈따끈한 박물관으로 서울 도심의 갑옷이던 한양도성의 모
든 것을 담고 있는데, 1915년 왜정에 의해 가루가 되버린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의 유일한 흔
적인 돈의문 현판(1749년에 제작됨)이 100년 만에 처음 외출을 했다. 그밖에 동대문 추녀와 지
붕에 달던 용머리와 잡상(雜像) 8점, 한양도성을 돌며 촬영한 순성(巡城) 체험 3면 영상 등이
있으며, 박물관 개관 기념으로 9월 14일까지 남산 회현동(會峴洞)과 남산도서관 주변에서 발굴
된 유물과 성돌, 발굴 성과를 다룬 '남산에서 찾은 한양도성' 특별전을 열었다.

★ 한양도성박물관 관람정보 (2014년 10월 기준)
* 관람요금 없음
* 관람시간 : 평일 9시~21시 / 토요일과 일요일, 휴일 9시~19시 (겨울은 18시까지)
*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 9,10번 출구를 나오면 흥인지문4거리이다. 여기서 성곽이 보이는 동
  북쪽(10번 출구는 동쪽)으로 건너가면 동대문성곽공원으로 공원 북쪽에 박물관을 머금은 서울
  디자인지원센터가 있다. (박물관은 내부 1~3층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 70-6 (율곡로 208, ☎ 02-2152-5800)


▲  동대문성곽공원 정자(亭子)
공원을 조성하면서 지은 1칸짜리 조촐한 정자로 이름은 아직 없다.
그 흔한 이름 현판도 없음..

▲  낙산으로 인도하는 한양도성길 (동대문성곽공원 북쪽) ▼

※ 조선의 수도를 지키던 한양(漢陽)의 듬직한 갑옷, 한양도성(漢陽都城) - 사적 10호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국도(國都)를 개경(開京)에서 남경(南京)이던 한양으
로 천도했다. 그의 최측근인 정도전(鄭道傳)은 도성축조계획을 세우고 우선 경복궁과 종묘(宗廟
), 사직단(社稷壇)을 1395년까지 완성한 다음, 1396년 1월 도성 축성에 들어갔다.

한양성곽 코스는 정도전이 모두 짰으며, 수도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내사산(內四山)이라 불
리는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을 모두 끼고 돌게 했다. 성곽의 길이는 총 59,500자
(18.2km)로 고려의 국도인 개경보다는 형편없이 작은 수준이며, 평지에는 토성(土城), 산지에는
석성(石城)을 세웠다.
도성 축성을 위해 전국에 징발령(徵發令)을 내려 11만 8천명을 동원, 49일 동안 성곽의 대부분
을 완공했고, 농사철에는 축성을 잠시 접고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도록 했다. 농사를 지
어야 뜯을 세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농사철이 끝나기가 무섭게 8월에 79,400명을 징발
하여 다시 49일 동안 빡세게 굴려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고 4대문과 4소문까지 만들어 도성 축조
는 일단 마무리가 되었다.

이후 토성으로 지은 부분이 마음에 걸린 세종은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업그레이드 하기로 결정
했다. 그래서 1422년 1월 전국에 약 32만 2천명을 동원하고 기술자 2,200명을 소환해 보수 공사
를 벌였다. 그 당시 한양 인구가 10만 명이었다고 하니 성곽 보수 공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가늠케 해주며, 이때 동원 규모는 조선 최대였다.
허나 아무리 현군(賢君)이라 추앙을 받는 세종이지만 꽤나 공사를 닥달했던 모양이다. 공사 중
에 사망한 인부가 872명에 달했으며, 그렇게 피와 땀을 바쳐 완성시킨 성곽이 지금의 한양도성
이다.

세종 때 피나는 업그레이드 작업으로 도성은 성곽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城
) 6곳, 곡성(曲城) 1곳, 성랑(城廊) 15곳을 갖추게 되었으며,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
監)을 두어 도성을 관리하게 했다. 이때 워낙 성곽을 단단하게 다져나서 20세기까지 붕괴된 적
도 없고, 보수도 겨우 1차례만 벌였다. (인위적으로 철거된 것은 제외)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쪼잔한 선조(宣祖)는 신하들을 데리고 평양(平壤)으로 서둘러 줄행랑
을 쳤다. 왕을 비롯한 위정자들이 앞장서서 도망치니 누가 도성을 방어하겠는가? 그래서 왜군은
손바닥에 침 한번 뱉는 정도로 손쉽게 도성을 점령했다. 아무리 도성을 단단하게 만든 들 무능
한 집권층 앞에서는 그 성곽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허나 수성전(守城戰)이 없던 탓에 성곽과
성문은 피해가 없었다.

1704년(숙종 30년) 숙종(肅宗)은 혹시나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을 대비해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
치고 성곽을 보수했다. 이때 버려져 있던 북한산성(北漢山城)도 크게 손질 했는데, 그 안에 행
궁(行宮)과 여러 관청, 창고를 만들고 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쌓아 도성의 수비력
을 한층 드높였다.
이렇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한양을 에워싸며 위엄을 드러낸 한양성곽은 근대화의 물결이 요동치
던 1899년 이후 적지 않은 수난을 당하게 된다.

1899년 조선황실은 미국(米國) 사람인 콜브란(Corlbran)과 합작을 하여 한성전기주식회사를 만
들었다. 콜브란은 고종 황제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잠든 홍릉(洪陵)까지 편하게 가시라며
전차(電車)의 필요성을 주청했다. 그래서 그해 12월 서대문에서 종로를 경유하여 홍릉 남쪽인
청량리(淸凉里)까지 이어지는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이때 전차의 통행을 위해 동대문과 서대
문 양쪽 성벽을 싹둑 자르면서 성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도성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0년에는 종로와 용산(龍山)을 잇는 전차를 만들면서 남대문 양쪽 성벽도 잘랐다. 그
래도 여기까지는 황제의 명으로 백성들의 교통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니 이해는 된다. 허나 문
제는 1905년 이후이다.

을사조약(乙巳條約) 이후 왜국(倭國)이 서울에 설치한 통감부(統監府)는 1908년 성벽처리위원회
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한양성곽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이때 서소문<소의문(昭義門)>이 사라졌으
며, 1910년 이후 서울 시가지 개발과 도로 확충을 이유로 성벽 곳곳을 잘랐다. 그래서 서대문<
돈의문(敦義門)>과 동소문<혜화문(惠化門)>이 사라지고, 동소문이 있던 고개는 그 고개마저 깎
여 도로가 생겼다. (현재 혜화동로터리에서 돈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또한 어둠의 시절이 끝나기가 무섭게 6.25가 터지면서 왜정(倭政) 때 이상만큼이나 무거운 상처
를 입었으니, 이때까지 제대로 살아남은 성문은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 창의문(자
하문) 등이며, 남소문<(南小門, 광희문(光熙門)>과 숙정문은 홍예문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성
벽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남산, 낙산, 장충동, 성북동 등 산 중턱만 남았고, 시가지 쪽은
대부분 녹아버렸다.

이렇게 영욕의 상처를 안고 쓰러진 성곽을 뒤늦게나마 1975년 복원사업을 벌여 광희문과 숙정문
을 복원하고, 남아있던 성곽 10.5km를 수리했다. 이후 형체도 없이 사라진 동소문을 다시 일으
켜 세우고, 사라진 부분의 성곽을 조금씩 복원하여 옛날의 면모를 서서히 회복하고 있다. 또한
근래에는 시민과 답사객을 위해 성곽을 따라 긴 탐방로를 만들어 인기가 대단한데, 북악산 주변
과 인왕산 정상 주변을 제외하고는 언제든지 출입이 가능하다. 다만 성곽이 사라진 부분은 인근
골목길을 이용해야 된다. (사직터널 윗쪽~월암근린공원, 서울시 교육청~남대문, 남대문~남산육
교, 장충체육관~광희문, 광희문~동대문, 동소문~성북동 서울과학고 북쪽)

예전에는 한양도성을 서울성곽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한양도성, 한양성곽이라 부른다. 허나 서울
성곽이라 불러도 별 무리는 없다. 어차피 서울에 있는 성곽이고 서울이란 이름은 조선 초기부터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서울이란 이름도 이 성곽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설화
한토막이 전해온다. (선바위 전설과 조금 비슷함)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국도로 삼고 어떤 코스로 성을 쌓을지 고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난
데 없이 큰 눈이 내렸는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한양 주위로 마치 성곽 모양으로 눈이 쌓여져
있던 것이다. 그래서 태조는 하늘이 친히 성곽 자리를 정해준 것이라 여겨 눈이 쌓인 자리에 성
을 쌓게 했다. 눈이 쌓인 자리, 즉 눈울타리<그것을 한자로 하면 설울(雪圍)>에 따라 성곽을 쌓
았다고 하여 설울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나중에 서울로 변했다고 한다.
서울은 이 땅의 수도 이름이기도 하지만 나라의 수도를 뜻하는 명사이기도 하여 수도(首都) 대
신 많이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몽골의 서울은 울란바토르' 이런 식으로 말이다.


▲  낙산에서 동대문으로 내려가는 한양도성 (이화마을 남쪽)

▲  이화마을 남쪽을 지나는 한양도성

▲  이화마을 남쪽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창신동(昌信洞)과 숭인동(崇仁洞), 신설동을 비롯하여
멀리 아차산(阿且山) 능선과 남한산성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낙산에 둥지를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 벽화 및 달동네의
성지(聖地)로 크게 유명세를 타고 있는 ~ 이화(梨花)마을

▲  이화마을 옆구리로 흘러가는 한양도성

서울에 있는 마을 가운데 가장 세상에 많이 알려진 마을은 어딜까?? 아마도 북촌한옥마을(북촌)
과 이곳 이화마을이 아닐까 싶다.
이화마을은 낙산 남쪽에 둥지를 튼 도심 속의 달동네로 행정 구역은 서울 종로구 이화동(梨花洞
)이다. 조선시대에는 살구나무가 많이 자라던 한양도성의 외곽으로 마을이라고 해서 시골마을이
나 산골 마을은 아니다. 그냥 낙산 남쪽 자락의 이화동 달동네를 이화마을('이화동 벽화마을'이
라 불리기도 함)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 마을은 서민들의 애환과 삶의 향기가 깊게 서린 산동네(달동네)로 근대화의 바람을 타고 서
울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1960~70년대에 조성된 달동네의 하나이다. 주황색 기와의 조
그만 집과 판자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거대한 산동네를 이루었는데, 그곳에서 서민들은 미래에
대한 꿈을 조금씩 싹틔우며 힘겹게 서울살이를 했다.
그렇게 서울에서 제법 비중을 이루며 형성되던 달동네는 1990년대 이후 개발의 칼질로 강제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동네 구조가 바뀌고 달동네의 초췌한 집 대신 아파트와 빌라, 단독주택 등
이 그 자리를 채워나간 것이다. 이화마을 역시 이런 세월의 변화는 감히 거스를 수가 없어 주황
색 기와집은 많이 사라진 상태이나 지붕 색깔과 집 외형만 조금 바뀌었을 뿐, 동네 구조와 가옥
구조, 주민들의 삶은 거의 그대로라 달동네의 모습은 아직 여전하다.

어린 시절을 달동네(금호동, 약수동)에서 어렵게 살았던 본인인지라 이곳에 들어서니 정감이 참
많이 간다. 그 시절 온갖 추억을 소환하는 빛바랜 일기장 같은 곳, 이곳을 거닐면 나의 어린 시
절의 모습, 또는 옛 친구를 만나는 것은 아닐까? 마음까지 두근거린다. 달동네를 누비며 위엄을
날리던 어린 시절, 그때 나의 꿈은 얼마나 실현이 되었을까? 당시의 순수함은 얼마나 남아있을
까? 지금 나는 어떠한가? 등등 어렸을 때를 바탕 삼아 잠시 나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게 만드는
거울 같은 곳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급하게만 변해가는 세상도, 빛의 속도로 흘러가는 세월의 거친 흐름도 이곳만
큼은 고삐를 늦추며 천천히 흘러간다. 1960~80년대 고향을 떠나 서울에 힘겹게 둥지를 튼 이들
의 초심이 서린 곳이라 세월도 이곳에선 자신의 초심을 되새기는 모양이다. 숨이 막힐 정도로
번잡한 도심이 바로 밑이지만 이곳만큼은 그런 도심을 비웃듯 조용하고 아늑하다.


▲  이화마을에서 바라본 남산과 서울타워

이화마을이 속세에 이름 4자를 드러낸 것은 바로 마을을 수놓고 있는 그림 때문이다. 2006년 서
울시에서 'Art in City 2006'이란 프로젝트를 위해 구성된 '공공미술추진위원회'에서 소외된 지
역의 시각적인 환경을 개선하고자 적당한 곳을 물색하다가 이화마을을 점찍고 '낙산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래서 70여명의 작가들이 찾아와 집과 담장, 계단에 그림을 그리고 조형물을 설치했
는데, '남의 집 벽에 뭐하는 것이야?' 반감을 가지던 동네 주민들과 호흡을 같이하고자 동네의
역사와 동네 주민들의 옛 기억, 풍물, 희망을 수집하고 정리해 그림에 반영했다. 그렇게 하여
우울한 흑백 분위기에 이화마을은 그림을 품은 색채감 돋는 벽화마을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그저 하얀색과 회색, 주황색 기와가 전부이던 우중층한 동네에 알록달록 색깔을 머금은 그림을
입혀놓으니 동네가 확 달라보이고 동네 사람들의 표정도 희망 어린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림이 그려진 마을로 사람들의 입과 인터넷, 언론을 통해 속세에 널리 알려지면서 이곳을 찾는
외지인의 발길도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늘어났고, 외국인 관광객까지 불이 나게 찾아오면서 이제
는 서울의 이름난 명소로 크게 자리를 잡았다.
또한 이곳을 시작으로 벽화마을이 크게 유행을 타면서 달동네나 시골마을을 대상으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벽화를 머금은 마을이 늘어나고 있다. 서울에는 이곳 외에도 인왕산(仁王山) 북쪽
에 누운 개미마을이란 달동네가 있는데, 그곳도 벽화마을로 한참 유명세를 타고 있고, 근래에
는 성내동(城內洞) 주택가에 강풀만화거리가 조성되어 벽화마을의 유행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러니 이화마을은 전국에 벽화란 불을 지핀 벽화마을의 성지인 셈이다.

마을은 그리 넓지는 않으나 가파른 산자락에 둥지를 틀고 있어 오르락내리락이 여간 힘들지 않
다. 게다가 벽화도 마을 곳곳에 흩어져 있어 대포처럼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숨을 헐떡이며 그
림과 숨바꼭질을 벌이는 사진쟁이들이 쉽게 눈에 띈다.
이렇게 관광객과 사진쟁이의 방문이 늘다보니 자연히 동네 사람들과도 조금씩 마찰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실제 예로 2012년에 어느 유명 가수가 마을에 그림을 그렸는데 그것을 보겠다며 사람
들이 몰려와 소란을 피우자 동네 사람들이 그 그림을 지운 일이 있었고, 마을 분위기를 사진에
담는다면서 남의 집을 침범하거나 골목길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등의 민폐가 종종 발생한다. 사
람들은 오로지 벽화와 마을 풍경을 사진에 담는 것에만 혈안이 되있을 뿐, 이화마을이란 동네와
그곳에서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동네 사람들의 애환과 삶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것이다. 어
찌보면 현대판 민속마을인 셈이다. 게다가 관광객이 늘어나도 동네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수익은
거의 없다. 관광객을 수입으로 제대로 연결시키지 못한 탓이다. (겨우 동네 구멍가게와 찻집/까
페, 장식품을 파는 가게가 몇 있을 뿐임)

단순히 이화마을을 목적으로 오는 것보다는 낙산(낙산공원) 나들이의 일부로 살펴보는 것을 권
하는 바이다. 벽화와 달동네 풍경 외에는 딱히 볼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벽화와 마을을
목적으로 왔다면 은근히 허기질 수 있으니, 이화마을을 품은 낙산 일대를 더 둘러보는 것이 좋
을 것이다. 낙산 자체도 그리 넓은 편은 아니니 낙산공원과 한양도성, 이화장을 비롯해 낙산에
안긴 여러 명소와 한 덩어리로 둘러보길 바라며, 이화마을 자체가 달동네 분위기를 잘 간직하고
있으므로 달동네를 겪었던 사람들에게는 당시의 추억을 소환할 수 있는 좋은 타임머신이 될 것
이다.

이화마을은 현재 재개발지역에 들어있다. 다행히 마을을 뒤덮은 벽화가 유명세를 타면서 개발의
칼질도 고개를 숙였지만 벽화가 언제까지 방패가 되어줄 수는 없다. 개발을 하더라도 마을 사람
들과 벽화의 피해가 최소화되도록 최적의 답안을 찾아 서로가 좋은 방향으로 개발을 했으면 좋
겠는데, 많은 것들이 잘못된 이 나라에서 그런 것이 과연 통할지는 모르겠다.


▲  이화마을의 새로운 명물, 이화마루 텃밭

동대문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낙산으로 가다보면 성곽 쪽에 이화마루 텃밭이란 작은 공원이 나타
난다. 도심 속에 왠 텃밭?? 집이 다닥다닥 여유도 없이 들어찬 이런 곳에 조촐하게나마 밭이 있
다니 참으로 신선하다.

이화마루 텃밭은 이화마을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지대에 자리한 공간으로 작은 밭과 평상, 의
자, 정자나무 4그루, 상자텃밭이 전부인  조그만 공원이다. 이곳은 원래 집 2채가 있었는데, 철
거되어 짜투리 땅으로 버려져 있었다. 그런 잉여 공간이 이렇게 참신한 공간으로 거듭났으니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2012년 6월 건국대 건축학부 동아리인 'FAS(외부공간) 프로젝트 그룹'에서 건축계의 최대 관심
사인 '녹색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텃밭'과 '주민의 커뮤니티 공간'을 주제로 선정했다. 그들
은 서울의 달동네나 낙후 지역에 텃밭과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기로 하고 장소를 물색했는데, 그
결과 주민들의 반응이 제일 좋았던 이화마을을 선정했다.
마침 동네 정상부에 짜투리 공간이 있었는데, 그 공간이 바로 이곳으로 집 2채가 철거되어 버려
져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 텃밭을 닦기로 했으나 문제는 집의 잔재를 비롯한 쓰레기가 무려 35
톤에 이른다는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팀원들은 스스로 돈을 모아 150만원의 처리 비용
을 마련했지만 그들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팀장은 방법을 찾다가 작년 폭설로 동주민
센터에 3,000여 개의 삽이 지원되었다는 것을 듣고 제안서를 작성해 이화동주민센터를 찾았다.

허나 주민센터 공무원들은 그들의 제안서에 '대학생들이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있어요?' 부정적
인 반응을 보였다. 허나 다행히 설득이 되어 같이 해보자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바로
다음 날 작업에 들어갔고, 종로구청에서도 흔쾌히 도와주었다. 또한 환경미화원과 동네 주민들
도 나와 그들의 프로젝트를 거들었다. 팀원들은 아침 8시부터 모두 나와 12시간 넘게 쓰레기를
치웠고, 그로 인해 처음 2주를 예상했던 작업 기간은 3달로 크게 늘어났다.

쓰레기를 치운 이후 팀원들은 본격적으로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허나 그 프로젝트가 팀원과 종
로구청, 마을 주민과 함께 하는 것이다보니 의견 조율이 쉽지 않았다. 팀원들은 전체적인 공간
구성과 조화를 더 우선시했지만 구청은 텃밭을 우선시 했다. 또한 마을 주민들의 의견도 엇갈려
어려움이 있었으나 점차 주민들의 지지와 협조를 얻어내 주민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작업을 진행
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그해 9월, 텃밭과 주민들의 소중한 공원으로 완전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팀원들은 이곳이 이화마을의 꼭대기라하여 '이화마루'란 이름을 붙였고, 마땅한 쉼터와 나무가
없던 마을에 소중한 오아시스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촐한 갤러리도 조
성되어 문화공간의 역할도 종종 겸하고 있다.


▲  이화마루 부근에 있는 흑백 벽화
벽화 속에 또다른 달동네가 담겨져 있다.

▲  이화마루 동쪽에 있는 성곽 암문(暗門)
성 내외를 이어주는 문으로 동대문과 낙산공원 사이에 2곳이 있다.

▲  이화마을 언덕 골목길 - 어린 시절 저런 골목길을 많이도 뛰어다녔는데
이제는 나이가 적지 않게 누적되다보니 저런 길을 오르는 것도 힘들다.

▲  어린 시절 소꿉친구가 뛰어나올 것 같은 이화마을의 막다른 골목길

▲  하트 풍선을 든 토끼와 곰탱이의 표정이 썩 밝아보이진 않는다.
온갖 경쟁과 세상살이에서 어쩔 수 없이 적(경쟁자)과 공존해야 되는
우리의 불편한 자화상은 아닐까...?

▲  이화마을의 백미(白眉), 꽃계단

이화마을 중간 부분에 있는 꽃계단은 흔히 볼 수 있는 달동네 계단이다. 숨을 헐떡이게 만드는
그 밋밋한 계단에 어여쁜 꽃잎을 그려놓으면서 이제는 이화마을의 상징과 같은 귀한 존재가 되
었다. 마을에 널린 다른 벽화는 크게 눈에 들어오진 않지만 이 꽃계단만큼은 정말 인상이 깊다.
마을을 찾은 사람들은 이곳에서 대부분 기념 촬영에 임하느라 부산한데 비록 사람들이 유화로
그린 그림이지만 자연산 꽃잎에 못지 않게 화사하다. 그들의 방긋~♪ 웃는 모습에 속세에서 오
염되고 상처받은 마음마저 싹 정화되는 듯 하다.
지금 이곳에 사는 사람들 상당수 우울한 환경이지만 꽃계단 꽃잎의 응원에 힘입어 다들 귀하게
되기를 기원하며 모두가 잘사는 복지국가가 되기를 염원해본다.

※ 이화마을 찾아가기 (2014년 10월 기준)
* 흥인지문4거리(1,4호선 동대문역 9,10번 출구)에 있는 동대문성곽공원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12분 정도 오르면 이화마루 텃밭이 나온다. 이곳을 중심으로 성곽 안쪽 동네가 이화마을이며,
  여기서 서쪽(대학로 방향) 골목길로 내려가면 다양한 벽화들이 고개를 내민다.
* 서울시내버스 102, 107, 108, 301, 7025번 시내버스를 타고 이화동(이화장) 하차, 동대문 방
  면(동쪽)으로 조금 가면 산쪽으로 난 율곡로19길이 나온다. 그 길을 올라가면 이화마을이다.
* 이화마을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남의 집에 불쑥 들어가 사진을 찍거나 크게 떠드는 등의
  민폐는 삼가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동 9,10번지 (율곡로19길, 낙산성곽서길)


♠  좌청룡(左靑龍)을 타고 서울 도심을 굽어보다 ~ 낙산(駱山)
(낙산공원, 한양도성 산책로)

▲  낙산공원 남쪽에 자리한 낙산정(駱山亭)

서울 도심 동쪽에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는 낙산은 해발 125m의 나지막한 산이다. 낙산이란 이름
은 산의 모양이 낙타의 등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 산 이름인 낙(駱)은 낙타를 뜻한다.
또한 3글자로 낙타산(駱駝山), 타락산(駝駱山)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들 모두 낙타를 상징하며,
그 이름을 간편하게 줄인 것이 낙산이다. 또한 조선시대에 궁궐에 우유를 조달하던 관청인 유우
소(乳牛所)가 낙산 기슭에 있어 타락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낙산은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內四山)의 하나로 도성(都城)의 동쪽을 맡고 있다. 여
기서 내4산이란 한양의 주산(主山)이자 북쪽에 자리한 북악산<北岳山, 백악산(342m)>과 서쪽에
인왕산(仁王山, 338m), 남쪽에 남산(南山, 262m), 그리고 동쪽에 낙산을 이르는데, 문제는 그들
중에 낙산이 가장 부실하게 생겼다는 것이다. 낙산과 멀리감치 마주보고 있는 인왕산은 산세는
좀 작아보이지만 꽤나 알차고 험준하여 예로부터 호랑이의 소굴로 유명했다. 북악산 역시 인왕
산 못지 않은 위엄을 가지고 있으며, 남산은 그들보다는 세는 약해도 덩치는 좀 있다. 허나 낙
산은 그들보다 높이나 덩치 모든 면에서 형편없이 떨어져 그냥 뒷동산 같은 언덕이다. 옛 사람
들이 신봉했던 풍수지리 입장에서 본다면 그리 착한 산은 아니다.
그래서 한양을 서울로 삼은 조선은 낙산의 그런 부실한 기운을 북돋아주고자 낙산 남쪽에 있는
동대문의 이름인 흥인문(興仁門)에 지(之) 1글자를 추가해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한 것이다.

낙산이 그렇게 염려되면 도성을 동쪽으로 좀 확장하면 어떨까 싶지만 낙산 동쪽은 보문동 방향
으로 조금 뻗은 동망봉(東望峰)을 빼고는 거의 평지이다. 그래서 별 수 없이 낙산에 성곽을 얹
힌 것이다. 게다가 조선은 고려보다 스케일이 비교도 안될 정도로 작기 때문에 도성을 크게 구
축하진 못했다. <고려의 황도(皇都)인 개경(開京)의 절반도 안되는 크기임>

낙산은 야트막한 산으로 숲이 무성하고 잘생긴 바위와 약수터가 많았다. 게다가 도성 내부가 훤
히 다 보일 정도로 조망도 일품이라 도성 주변 경승지로 꼽혀 왕족과 양반들이 앞다투어 낙산에
정자와 별장, 거처를 짓고 살았다. 효종(孝宗)의 아우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은 석양루(夕陽樓,
지금의 이화장 정문 앞에 있었음)를 지었고, 조선 후기 문인 이심원(李心源, 1722~1770)이 지은
일옹정(一翁亭)을 비롯하여 이화정(梨花亭)과 백림정(柏林亭) 등이 있었다. 이들은 양반과 시인
묵객들이 자주 발걸음을 하던 낙산의 이름난 명소였다.
또한 조선 후기 한옥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잠시 머물던 이화장(梨花莊)과 지봉유설(芝峯類說)로
유명한 이수광(李睟光)이 살았던 비우당(庇雨堂), 낙산의 유방이라 불리던 이화동약수와 신대약
수 등의 약수터, 우물이 나란히 5개가 있었다는 5형제우물터,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의 애환이 서린 자지동천(紫芝洞天, 자주동천)과 동망봉, 도성 5대 명승지의 하나로 기이한 바
위가 많았던 쌍계동(雙溪洞, 이화장 주변) 계곡이 있었으며, 마을 전체가 온통 붉은 열매를 맺
는 나무만 있다고 하는 홍수동(紅樹洞, 홍숫골), 동촌이씨(東村李氏)의 세거지 등이 낙산에 앞
다투어 안겨져 있었다.

이렇듯 낙산에 안겨있던 명소들은 20세기 이후 어둠의 시절과 산업화시대를 거치면서 대부분 녹
아 없어졌고, 서울의 인구가 폭증함에 따라 낙산과 동망봉 일대에 빼곡히 주거지가 들어서면서
옛날의 운치와 정취는 다 말라버렸다. 이화마을도 바로 그런 시류를 타고 낙산 남쪽에 둥지를
튼 것이다. 그나마 살아남은 것은 낙산의 허리를 가르는 한양도성과 이화장, 자지동천 바위글씨,
그리고 근래 복원된 비우당이 고작이다. 그외에 조선 왕실의 원찰(願刹)이던 청룡사(靑龍寺),
고려 때 지어진 비구니절 보문사(普門寺), 구한말에 세워진 안양암(安養庵)과 지장암(地藏庵)
등의 절이 있다.

낙산 정상에 깔고 앉아 산의 미관을 크게 망치던 낙산시민아파트가 노후화되면서 1990년대 이후
서울시의 공원녹지확충 5개년 계획에 따라 이들 아파트와 주변 주거지를 밀어버리고 정상 주변
과 서쪽 일대 61,000여 평을 다져 낙산공원을 닦았다. 공원은 1999년 12월 30일 삽을 뜨기 시작
해 2002년 6월 완공되었는데, 다양한 운동시설과 쉼터 등의 편익시설, 낙산전시관, 중앙광장과
놀이마당, 3개의 전망광장, 산책로와 역사탐방로를 갖추고, 소나무를 비롯한 15만 그루의 식물
을 심어 비록 왕년의 손톱때만큼은 못되어도 도심 속의 포근한 휴식처이자 답사/나들이/데이트
장소의 성지로 크게 명성을 누리고 있다. (공원 면적 201,779㎥)

한양도성의 낙산 구간은 동대문에서 동소문<東小門, 혜화문(惠化門)>까지의 2.3km 구간으로 성
곽이 잘 남아있다. 1999년 이후 산업화의 칼질에 무책임하게 희생된 낙산을 조금씩 되살리면서
성곽도 보수를 벌여 동대문 북쪽 구간을 복원하고, 성곽과 성밖에 탐방로를 만들었다. 성곽 내
부 탐방로는 동소문에서 카톨릭대 성심교정 사이 약 1리 구간을 제외하고 모두 길이 나있고, 성
밖은 동소문에서 동대문까지 전구간 이어져있다.

낙산은 대학로와 무척 가깝고, 혜화역(4호선)과 한성대입구역(4호선), 동대문역(1,4호선), 창신
역(6호선)과도 가깝다. 심지어 낙산공원 정상까지 마을버스가 올라가는 등 교통과 접근성은 매
우 착하다. 산이라고는 하지만 뒷동산처럼 야트막하여 누구나 쉽게 안길 수 있고, 동쪽을 제외
하고는 주변이 거의 평지라 조망도 그런데로 일품이다. (도심과 북쪽 방향의 조망이 좋음) 특히
서울 도심의 야경(夜景)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포인트라 인기가 대단하다.

낙산에 간다면 동소문이나 동대문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오르는 것을 추천한다. 낙산공원에 이르
러 성곽길이 지루하다면 서쪽으로 대학로(마로니에공원) 방면으로 내려가도 되고, 동쪽으로 창
신동 방면으로 내려가도 된다. 낙산공원에서 가까운 명소로 이화장과 이화마을, 자지동천(자주
동천), 비우당, 삼군부총무당 등의 명소가 있으며, 여기서 욕심을 더 부린다면 거리가 조금 있
지만 동망봉, 청룡사, 보문사, 안양암, 대학로 주변 명소까지 겯드린다면 정말 배터지는 나들이
가 될 것이다.

※ 낙산공원 찾아가기 (2014년 10월 기준)
* 흥인지문4거리(1,4호선 동대문역 9,10번 출구)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도보 20분
* 한성대입구역(4호선) 4번 출구에서 성곽 탐방로를 따라 도보 20분 (4번 출구를 나와서 2~3분
  정도 가면 한양성곽과 탐방로가 나옴)
* 혜화역(4호선) 2번 출구에서 마로니에공원 북쪽 골목길로 들어서면 낙산공원을 알리는 이정표
  가 나온다. 도보 10분
* 동대문역(5번 출구), 1/6호선 동묘역(10번 출구), 6호선 창신역(4번 출구)에서 종로03번 마을
  버스를 타고 낙산공원 종점 하차 (창신역 2번 출구에서 낙산공원까지 도보 16분)
* 낙산공원과 한양도성 탐방로는 24시간 개방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산2-10 일대 (중부공원녹지사업소 ☎ 02-743-7985~6)


▲  낙산정에서 바라본 천하 (1)
바로 앞에 혜화동(惠化洞)을 비롯해 명륜동과 성북동(城北洞), 북악산과 북한산 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낙산정에서 바라본 천하 (2)
혜화동과 서울대병원, 창경궁, 창덕궁,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안산(鞍山) 등이 바라보인다.

▲  낙산정에서 바라본 천하 (3) - 혜화동과 원남동, 종로 지역

▲  낙산정에서 바라본 천하 (4) - 종로와 중구, 남산

대학로가 있는 서쪽을 바라보고 선 낙산정은 2002년에 지어진 조촐한 정자이다. 비록 고색의 내
음은 익지도 않았지만 4대문 안 서울 도심은 물론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남산 등 서울의 내
4산이 모두 바라보여 조망도 제법 일품이다.


▲  낙산공원 종로03번 마을버스 종점

빈틈없이 이어진 한양도성의 낙산 구간이 여기서 잠시나마 끊긴다. 그 사이로 마을버스가 귀여
운 뒷태를 선보이며 바퀴를 멈추고 쉬고 있다. 이곳은 예전 낙산아파트가 있던 곳으로 저 길로
나가면 창신동과 비우당, 숭인동 방면으로 이어진다.


▲  낙산공원 정상부 (놀이마당 주변)

▲  낙산공원 놀이마당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혜화동과 종로구 일대)

▲  낙산공원 마크와 동소문 방면 성곽 바깥 탐방로

▲  낙산에서 동소문 방면 한양도성과 성곽 바깥 탐방로

▲  동소문을 향해 힘차게 흘러가는 한양도성 (1)
혜화동과 명륜동, 성북동, 북악산 줄기와 북한산이 바라보인다.

▲  동소문을 향해 힘차게 흘러가는 한양도성 (2)
삼선동과 돈암동, 성북동이 바라보인다. (덤으로 북한산까지)


▲  성바깥 탐방로에서 바라본 삼선동과 돈암동, 한성대(오른쪽 건물들)
낙산공원에서 동소문 구간은 별도의 글에서 소개하도록 하겠다.
본글은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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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의 향연 속으로 ~ 태백산 눈꽃 나들이 (당골, 눈꽃축제장, 석탄박물관)

 

' 태백산(太白山) 눈꽃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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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산 설경

장공(長空)에 뛰어들어 안개 속에 파묻히니
 비로소 정상에 오른 줄 알았네
 둥근 해는 머리 위에 나직하고
 주위의 뭇 산봉우리들이 눈 아래에 내려앉네
 구름 따라 몸이 날으니 학(鶴)의 등에 올라탄 듯
 돌을 밟고 허공에 길이 걸렸으니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인가
 비 그치자 골짜기마다 시냇물이 흘러넘치니
 굽이굽이 오십천(五十川) 건널 일이 걱정스럽네


*
고려 후기 문신인 근재 안축(謹齋 安軸, 1282~1348)이 태백산에 올라 지은 시

 


겨울의 한복판이자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인 설날 연휴를 맞이하여 진한 설경을 맛보고자 강원
도 태백(太白)을 찾았다. 마침 후배 하나가 태백 서쪽 동네인 고한(古汗)에 잠시 머물고 있어
서 그와 함께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인 태백산을 찾기로 했다.

원래는 설 연휴 전날 아침에 일찌감치 열차를 타고 가려고 했으나 급히 일이 생겨서 내려가는
것을 취소했다. 그러다가 그날 오후에 급히 연락을 넣어 심야 열차로 가겠다고 하니 사북역에
서 대기하여 합류하겠다고 그런다.

설날 연휴인지라 태백까지 열차표를 힘들게 예약히고 21시 반에 대문을 나섰다. 방학역에서 1
호선 전철을 타고 회기역에서 신통치 못한 배차를 자랑하는 중앙선 용문(龍門)행 전철로 갈아
타서 근 1시간을 달려 용문역에 두 발을 내린다. 여기서 잠시 대기를 타다가 강릉(江陵)행 심
야 무궁화호 막차에 몸을 싣는다.
거의 2년 만에 타보는 추억의 심야열차, 옛날에는 서울에서 당일로 오가기 버겨웠던 광주, 목
포, 여수, 경주, 부산, 동해 등 장거리를 갈 때 많이 타고 다녔는데, 도로망이 나날이 좋아지
면서 안그래도 비좁은 국토가 더 좁아져 2006년부터 탈 일이 크게 줄었다. 그러다가 이제는 1
년에 1회도 타질 않는다.

용문에서 태백까지는 3시간 반 정도 걸린다. 자리에 앉아 잠을 간곡히 소환해 봤지만 잠이 좀
처럼 강림하질 않으니 아무래도 잠님이 나를 원치 않은 듯 싶다. 한밤중이라 차창 밖 풍경은
온통 검은 도화지라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고 심심치 않게 보이는 불빛이 그런 도화지에
살짝 작은 점을 찍는다. 그렇게 뜬 눈으로 원주와 제천, 영월, 예미를 지나 사북역에 이르니
대기하던 후배가 열차에 올라타 옆 자리에 앉는다.

정선과 태백의 경계를 가르는 두문동재터널을 지나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태백 관내로 들어서
니 창 밖 풍경이 다소 달라지기 시작한다. 정선 땅까지 별로 보이지도 않던 눈이 터널을 지나
서부터는 완전 눈천지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차창 밖 검은 도화지는 하얀 색이 추가되어 2색
의 흑백 도화지가 되었다. 단지 터널 하나에 천지가 뒤바뀐 것이다.

열차는 강원도의 산주름을 열심히 지나 드디어 태백역에 도착했다. 열차가 멈추자 등산복으로
중무장한 사람들이 우루루 나와 적막이 감돌던 태백역에 잠시나마 활력을 불어 넣는다.
밥이나 먹을 겸 식당을 찾아보니 역전 주변 식당은 죄다 자고 있었고, 실비집 한 곳만 환하게
불을 밝히며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집에 들어가니 열차에서 내린 등산객 10여 명 정
도가 밥을 먹으며, 몸을 녹이고 있었다.
우리는 김치찌개를 먹었는데, 생각한 것과 달리 맛이 괜찮았다. 고기도 풍부하게 들어가 있고
밑반찬도 가짓수가 많아서 찬이 제법 풍성했다. 저녁을 먹고 왔지만 다시 시장기가 강하게 돋
으면서 밥을 2그릇이나 먹고 찌개와 반찬을 죄다 비우고서야 식당을 나섰다.

아침이 멀지 않았으니 찜질방에서 잠시 눈이나 붙이자고 했으나 후배는 여관에서 편하게 자자
면서 자기가 방값 내겠다고 그런다. 그래서 터미널(역 앞에 터미널 있음) 인근 여관에 들어가
눈을 붙였다.
아침 8시 반이 되자 찬란한 여명의 재촉에 스르륵 잠에서 깨었다. 4시간 밖에는 못잤지만, 더
이상 잠도 오질 않는다. 나는 태백산을 보러 여까지 온 것이지 잠이나 퍼자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도 꿈나라에서 허우적거리는 후배를 강제로 깨워 9시 반에 여관을 나섰다.

고원(高原)의 도시, 태백이라 제법 추울 줄 알았더만 아침임에도 그다지 춥지는 않다. 터미널
로 들어서니 마침 당골로 가는 태백시내버스 7번이 기지개를 켜고 있어 그것을 잡아타고 태백
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터미널에서 당골 종점(태백산관리사무소)까지는 20~25분 정도 걸린다.


▲  당골 종점(태백산관리사무소 앞)


♠  하얗게 분을 칠한 태백산(太白山, 1567m) 간보기

▲  태백산관리사무소에서 당골광장으로 오르는 길

버스에서 내리니 바로 매표소를 겸하고 있는 태백산관리사무소 앞이다. 우리나라의 신령스러운
산인 태백산의 안기려면 반드시 매표소를 거쳐야 되는데, 등산객들의 호주머니를 뚫어지라 쳐다
보는 그곳에서 입장권을 구입하고 안으로 들어서니 하얗게 분을 바른 태백산의 모습이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와 마음을 말끔히 정화시켜준다.

이곳에 온 목적은 오랜만(거의 7년 만)에 태백산 정상(1567m)과 천제단(天祭壇, 1561m)을 보고
자 함인데, 후배가 겨울 산행에 아주 바람직하지 못한 신발을 신고 있어서 정상까지 가는 것은
어려웠다. 괜히 그랬다가 119헬기를 불러야 될 상황까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식
총(虎食塚)까지만 갈까 하다가 눈이 제법 많고 미끄러워 후배가 오르기 힘들다고 투정하여 당골
광장에서 1km 정도만 오르고 철수하고 말았다.

태백산은 우리나라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남쪽 척추인 태백산맥(太白山脈)의 중심 산으로 위엄
돋는 산의 이름만큼이나 험준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허나 정작 올라보면 별로 힘들지 않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금강산(金剛山)이나 설악산과 달리 순수 흙으로 이루어진 육산(肉山)이
라 능선의 곡선이 완만하고 산세가 부드럽기 때문이다. 게다가 버스와 수레로 800~900m 고지(당
골, 백단사, 유일사, 금천동)까지 올라갈 수 있어 거기서부터 등산에 임하면 되며, 제일 단거리
인 유일사와 백단사에서 정상까지 2시간, 당골에서는 2시간 30분(문수봉 경유는 3시간 30분) 정
도면 충분히 닿는다. (금천에서는 4시간 소요)

매표소에서 당골광장까지는 야트막한 오르막 길의 연속이다. 4발 수레들도 마음껏 바퀴를 굴리
게끔 2차선 도로가 놓여져 있는데, 길이 온통 눈투성이라 수레들도 겁을 먹고 가기를 꺼려한다.


▲  태백산 눈썰매장 입구

▲  한참 몸단장중인 눈조각품

태백산은 사계절이 모두 아름다운 곳이지만 눈으로 뒤덮힌 겨울이 단연 갑(甲)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겨울 산행의 성지(聖地)로 백설(白雪)이 두텁게 쌓인 겨울 산행의 장쾌함을 누리고자
많은 산꾼들이 몰려온다. 봄과 여름, 가을보다는 겨울 산꾼이 훨씬 많다고 하니 기온이 낮을 수
록 찾는 이가 반비례로 늘어난다. 그리고 겨울의 한복판인 1월에는 눈꽃축제(눈축제)를 벌이는
데, 이 축제는 겨울 축제의 성지이자 대명사로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미국(米國)을 비롯한 여
러 나라에서 이 축제를 찬양했고, 미국의 CNN방송은 한국에서 가봐야 될 50곳의 하나로 선정하
며 찬양의 수준을 높였다. 솔직히 태백산은 국내에서만 머물기는 진짜 아까운 산이다. 국내 명
소/축제를 넘어 세계적인 겨울 축제와 명소의 성지로 우뚝 서기를 고대해 본다.

태백산은 겨울 산행의 성지, 겨울 축제의 성지이지만, 호랑이가 담배맛을 알던 옛날부터 제천의
식(祭天儀式)을 거행하던 성지였다. 산 정상에는 천제단(天祭壇, 중요민속문화재 228호)과 장군
단(將軍壇)이 있는데, 이들은 천하의 국조(國祖)인 단군(檀君)을 비롯하여 어린 나이에 숨져 태
백산신으로 추앙 받은 단종(端宗)에게 제를 올리던 곳으로 돌로 쌓은 조촐한 제단이지만 강화도
참성단(塹星壇)만큼이나 신령스러운 기운이 가득하다. 이렇게 하나도 아니고 3가지의 성지로 일
컬어지니 태백산의 명성은 나날이 하늘을 찌른다.


▲  설송(雪松) 밑에 자리한 석탄박물관 표석

▲  태백석탄박물관(太白石炭博物館)

당골광장 동북쪽에 자리한 태백석탄박물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석탄 전문 박물관으로 1997년 5월
에 문을 열었다. 초창기에는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으나 꾸준히 업그레이드를 벌여 이제는 태백
에서 꼭 가봐야되는 명소로 단단히 부각되었다.

박물관 규모는 지상 3층, 지하 1층으로 8개의 전시실과 야외전시장을 갖추고 있으며, 단순히 석
탄 관련 내용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역사와 지질(地質)을 시작으로 광물(鑛物)의 탄생
과 종류, 화석(化石), 석탄과 탄광 관련 문서와 기계/장비, 탄광 정책 관련 자료, 태백 관련 향
토자료, 탄광 광부들의 생활상, 탄광갱도 체험 등을 다루고 있다. 특히 3층에서 지하로 내려갈
때 엘리베이터는 층수가 아닌 -100m 단위로 거의 -900m까지 수치가 내려가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 마치 탄광 엘리베이터를 탄 듯한 오싹함을 선사한다. 지하층으로 내려오면 탄광 체험 갱도관
이 있으며, 그곳을 나오면 기념품과 특산품을 파는 기념품점이 나온다.

태백석탄박물관은 지금까지 2번 구경을 했는데, 이번에는 내려올 때 관람을 했다. 박물관과 관
련된 내용은 이쯤에서 정리를 하겠으며, 전시실을 모두 둘러보는데, 보통 1시간 반 정도, 길게
는 2시간 정도 잡으면 된다.


▲  제1전시실 지질관에서 만난 자수정(紫水晶)의 위엄
지질관에서는 자수정 같은 귀에 익은 광물부터 낯설은 광물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와 지구 곳곳에서 수집한 광물 진품이 진열되어 있다.


※ 태백석탄박물관 관람정보 (2014년 2월 기준)
* 관람시간 : 9시 ~ 18시 (17시까지 입장해야 됨, 쉬는 날 없음)
* 입장료는 공짜인 듯 싶지만 엄연히 태백산도립공원 입장료에 포함되어 있음
* 소재지 - 강원도 태백시 소도동 166 (천제단길 195 ☎ 033-552-7730 / 033-550-2743)
* 석탄박물관 홈페이지는 위의 자수정 사진을 클릭한다.


▲  당골광장 부근에 조성된 공원과 연못
소쩍새가 우는 그날이면 연못도 거추장스러운 얼음을 박차고 기지개를 켤 것이다.

▲  당골광장에서 문수봉으로 올라가는 길
당골광장에서 산길은 2개로 갈리는데, 왼쪽은 제당골과 문수봉으로, 오른쪽은
호식총과 망경사, 천제단으로 이어진다. 문수봉으로 가도 천제단까지
갈 수 있으나 3시간 30분 정도 잡아야 된다.

▲  막바지 매뭇새를 다듬고 있는 눈축제장

태백산의 백미(白眉) 중 하나인 눈축제는 보통 1월 중순에 열린다. 허나 우리가 갔을 때는 열리
기 직전이라 축제 분위기도 누리지 못하고 축제를 위해 조성된 눈조각품만 바깥에서 보는 것으
로 만족해야 했다.


▲  설림(雪林)으로 들어서다 (문수봉 방면)

▲  설림에 한가운데에 서다.
키가 큰 늘씬한 수목들이 앞다투어 하늘을 가리면서 산길이 좀 어둡다.
나무들은 겨울 제국이 내린 눈을 소복으로 삼으며 묵묵히 봄을 기다린다.

▲  고려 후기 문인인 안축(安軸)이 태백산에 올라 지은 시가 담긴 표석
시의 내용은 앞부분에 있음 (당골광장에서 망경사 방면)


♠  태백산 마무리

▲  태백산의 또 다른 수호신 석장승 - 강원도 지방민속문화재 4호

당골광장에서 단군성전 입구를 지나면 길 오른쪽에 별다른 모양이 없는 석상이 마중한다. 이 석
상은 바로 석장승으로 원래는 북쪽으로 1.2km 떨어진 미루둔지(장승둔지)에 있었는데, 1960년대
에 망경사로 옮겼다가 1987년 태백문화원이 지금의 자리에 안착시킨 것이다. 

장승의 모습을 보면 얼굴 부분이 손상된 문인석(文人石)처럼 보이기도 하며, 미륵상으로 보이기
도 한다. 얼굴이 워낙 심하게 손상되어 원래 모습을 알기 힘들며, 머리에는 관(冠)처럼 생긴 것
을 쓴 것으로 보인다. 얼굴 양쪽에는 귀로 보이는 길쭉한 부분이 있다.
그의 탄생시기는 딱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천제단 가는 길목인 태백산 북쪽에 자리해 있어 성
역(聖域) 임을 알리는 역할과 이정표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덩달아 산신의 수호신상의 역
할까지 겸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코 부분이 많이 닳아있어 마을의 수호신까지 겸한 것으로 여
겨진다. 예전에는 장승 옆에 3마리의 오리가 새겨진 솟대가 있었으나 지금은 어디로 마실을 갔
는지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에는 석장승이 많이 전해오고 있지만
정작 강원도에는 이 장승이 유일하다. 옛날에는
태백산 정상 천제단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장승
<장생(長生)>을 많이 세워 성역(聖域) 및 이정
표의 역할을 했으며, 장승모랭, 장승백이, 장승
둔지, 장승거리 등의 지명이 남아있어 태백 땅
에 장승이 제법 많았음을 보여준다.
허나 무심한 세월과 몰지각한 사람들의 만행으
로 장승은 죄다 자취를 감추어 이제는 전설 속
의 이야기가 되었으며, 오로지 당골의 석장승만
살아 남아 태백이 왕년에는 장승의 낙원이었음
을 아련하게 귀뜀해줄 따름이다. 참고로 태백의
조선시대 지명인 장생은 바로 장승에서 유래된
것이다.
<태백을 이루는 동네의 하나인 장성(長省)이 장
생에서 변경된 이름임>


▲  태백산으로 올라가는 하얀 숲터널 (석장승에서 망경사 방면)

▲  당골계곡과 함께 이어진 산길
이 세상에 색깔은 하얀색과 하늘색, 갈색(나무 줄기) 밖에 없는 것 같다.

▲  설림 속을 거닐다
집으로 고이 훔쳐와 혼자서만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절경이다. 허나 나는 조물주가
아닌지가 저 풍경을 가져오지는 못하고 대신 사진이란 것으로
그 장면을 복사해 담아가지고 왔다.

▲  단군성전 앞에 마련된 단군상
명세기 우리의 국조(國祖)인데, 보호각 하나 놓아드려야 되는거 아닐까?
저렇게 눈과 바람을 맞게 놔두는 것은 그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  단군성전(檀君聖殿)

석장승을 지나 대략 1km 정도만 전진하고 발걸음을 접고 말았다. 후배가 힘들다고 그러니 더 이
상 끌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 수 없이 다음 인연을 고대하며 발길을 접
었다. 발을 돌린 지점은 아마도 해발 1,000m 정도 될 것이다. (당골광장이 거의 850m임)

내려가는 길에 당골광장 남쪽에 자리한 단군성전에 들렸다. 이 성전은 옛 조선(朝鮮)의 시조이
자 우리의 국조인 단군의 사당으로 1975년에 구성된 '국조단군봉사회'가 1982년에 성금을 모아
창건하고 단군성전이라 하였다. 그의 사당을 이곳에 지은 것은 그에게 제를 지내는 천제단으로
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1993년에 태백산도립공원 개발계획에 따라 성전을 수리했으며, 매년
10월 3일 개천절(開天節)에 제례를 올리고 있다. 성전 현판의 글씨는 신덕선이 썼다.

비록 오래된 문화유산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뿌리를 생각하게 하는 의미심장한 현장이다. 하지
만 등산객과 탐방객들 대부분은 그냥 지나치고 만다. 등산로에서 계단을 타고 조금 올라가야 되
는 곳에 있기도 하지만 썩어빠진 이 땅의 권력층에 의해 점차 오염되가는 역사교육의 부실과 무
관심 조장도 한몫한다.


▲  단군성전에 봉안된 단군 영정

오로지 상상으로 그려진 단군의 영정(影幀), 후덕한 인상과 긴 수염, 황색 옷이 인상적이다. 단
군은 옛 조선 군주의 명칭으로 여겨지며, 조선의 군주가 정치와 제사를 모두 관장한 제정일치(
祭政一致) 사회였다.

옛 조선은 기원전 2333년 경에 건국되어 기원전 108년에 문을 닫은 장수국가로 한반도를 비롯하
여<남한 지역에 있던 삼한(三韓)>도 조선의 간접 영역으로 보기도 함> 요동(遼東)과 만주, 요서,
화북(華北) 일부를 다스린 동아시아 강대국이다. 조선의 건국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여전하나
산소도 아까운 식민사관(植民史觀) 패거리들은 기원전 10세기 이내로 창건 연대를 잡고 있으며,
영역도 한반도 북부와 요동으로 크게 축소시켰다.

조선의 중심지는 요동으로 보이며, 춘추전국시대에 연나라를 공격하여 대륙의 지배권을 차지하
려했으나 철기(鐵器)로 중무장한 연나라의 반격에 오히려 크게 밀려 요하(遼河)를 비롯한 서쪽
2,000리의 땅을 잃고 만다. 당시 조선은 청동기 무기였다. 그러니 어찌 게임이 되겠는가?
이후 대륙에서 넘어와 준왕(準王)의 신임을 받은 위만(衛滿)이 반란을 일으켜 준왕을 남쪽으로
쫓아내고 왕이 되었다. 준왕은 그를 따르는 신하와 배를 타고 남쪽으로 건너가 한왕(韓王)을 칭
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마한(馬韓) 영역인 전라도나 충청도로 내려간 것이 아닌가 싶다.

위만이 조선을 장악하자 철기무기를 개발하고 국력을 길러 한나라를 비롯한 주변 나라를 공격해
영토를 확장하고 동아시아 무역을 독점해 막대한 부를 누렸다. 이에 한나라 무제(武帝)는 조선
이 동방(東方) 무역 독점으로 배를 불리며 나날이 국방력을 다지는 것에 크게 위협을 느끼며 우
선 주변 나라를 말끔히 정복하고 그 자신감으로 조선을 협박했다.
조선이 반발하며 먼저 대륙을 공격하자 한무제는 이때다 싶어 군사를 보내 반격을 가했는데, 한
나라군 내부 분열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패했다. 그러자 뚜껑이 단단히 열린 한무제가 다시
군사들을 다그치자 정신을 차린 한군(漢軍)은 정비를 가다듬고 반격을 가해 끝내 왕검성까지 포
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하며 끙끙 앓던 차에 조선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조선의 마지막
군주인 우거왕(右渠王)이 반대파에게 피살되고, 왕을 잃은 조선 조정은 그 혼란을 잠재우지 못
해 결국 성은 함락되고 만다.

이렇게 옛 조선은 망하고, 그 땅 일부에 그 유명한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는데, 그것도 조선
유민들의 끊임없는 비협조와 반발, 그리고 고구려(高句麗)와 부여(夫餘)의 등장으로 그 땅에 제
대로 침도 바르지 못하고 쫓겨나고 만다.
한사군의 존재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은데, 식민계열 쓰레기들은 평안도와 황해도, 요동 일부로
보고 있으며, 강단사학자와 많은 사학자들은 요동과 요서 쪽으로 보고 있다. 한4군의 하나로 유
명한 낙랑(樂浪)이란 존재도 낙랑국과 낙랑군(樂浪郡) 2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아직 의견이 분
분하나 대체로 낙랑국은 평양 지역, 낙랑군은 요서로 보고 있다. 그러니 호동왕자(好童王子)와
낙랑공주(樂浪公主) 설화로 유명한 낙랑은 낙랑군이 아닌 낙랑국으로 보는 것이 맞다. 만약 낙
랑군이라면 낙랑공주는 공주를 칭할 수가 없다. 그냥 군을 다스리는 태수(太守)의 딸일 뿐이다.

옛 조선은 전성기였을 때 인구가 무려 1억 8천만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조선의 문화와 문명
은 중원대륙과 주변의 많은 나라와 민족에 영향을 주었다. 한자(漢字) 같은 경우도 동이족(東夷
族)으로 대표되는 조선에서 만들어 대륙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으며, 그 문자가 대
륙으로 넘어가 크게 발전하면서 동아시아 통용 글자가 되었다. 또한 대흥안령산맥 쪽에서 발생
한 홍산문명(紅山文明)도 조선의 찬란했던 흔적이며, 한반도와 만주에서 많이 발견되는 엄청난
양의 고인돌(지석묘) 또한 조선의 청동기시절 흔적이다.


▲  하얀 기와집이 된 단군성전 삼문(三門) - 단군성전에서 바라본 모습
성전 뜨락에는 눈이 수북하게 덮여 설경의 극치를 이룬다.

▲  단군성전 삼문 - 바깥에서 본 모습
눈이 지붕에 가득하니 혹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눈 자체는 거의 무게가 없지만 저리 두툼하게 쌓이면 정말 몇톤이 되버린다.

▲  석장승에서 당골광장으로 내려가는 길

▲  눈축제를 위해 조성된 커다란 눈 이글루
마치 눈을 뒤집어 쓴 거대한 석실고분(石室古墳) 같다.

▲  당골광장에서 당골 종점으로 내려가는 길

▲  당골 통나무집에서 먹은 곤드레밥과 반찬들

정상까지 오르지 못한 아쉬운 마음을 눈 속에 애써 묻으며 당골 종점으로 나왔다. 그때 시간은
12시, 뱃속에서 배고프다고 난리를 친다. 하여 허기진 배를 달래고자 적당한 곳을 찾다가 통나
무집이란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폈다.

이곳은 여행사 단체 손님들로 북적거렸는데, 신발을 벗어야 되는 뜨끈한 방에 들어가 곤드레밥
과 해물파전, 동동주, 소고기국밥을 시켰다. 잠시 뒤 콩나물과 더덕, 김치, 두부 등 8가지의 정
갈한 밑반찬이 앞에 펼쳐진다. 이들 가운데 양념장이 버무러진 커다란 두부는 반찬의 갑(甲)으
로 두부 맛이 좋아 2번 정도 더 시킨 것으로 기억이 난다.

반찬을 먹고 있으니 곤드레밥과 소고기국밥 등의 식사가 나타난다. 곤드레밥은 정선과 평창, 영
월, 태백 지역의 토속음식으로 곤드레나물을 비롯한 산채 나물과 김가루가 버무려진 일종의 비
빔밥이다. 곤드레밥에는 늘 구수한 된장찌개가 짝궁처럼 나타나는데, 이곳의 찌개는 두부가 풍
부하다. 그렇게 먹고 있으려니 동그란 해물파전과 동동주가 3차로 나타난다.
파전은 가격에 비해 좀 커보인다. 허나 반찬과 곤드레밥으로 어느 정도 배가 들어찬 상태기 때
문에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파전은 일부를 남기고 거진 다 먹었는데, 뱃속에서 그만
보내라고 북소리가 울린다. 그러다보니 동동주는 둘이서 절반 밖에 마시질 못했다.


▲  해물파전의 위엄

이렇게 풍성하게 점심을 먹으니 졸음이 슬쩍 나를 희롱하며 배 깔고 한숨 자라고 보챈다. 졸음
의 희롱을 과감히 내던지고, 커피와 식당 내부 연탄 난로에서 대핀 보리차를 여러 잔 마시며 식
곤증과 추위를 몰아내고 밖으로 나선다.

이렇게 태백산과의 짧은 인연을 마치고, 어디로 갈까 머리를 굴리다가 미인폭포로 가기로 하고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그곳으로 향했다. 이후 내용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기 바란다.
(☞ 미인폭포 보러가기)

★ 태백산 당골 찾아가기 (2014년 2월 기준)
① 철도 이용
* 청량리역과 양평역, 원주역, 제천역에서 태백역으로 가는 강릉행 무궁화호 열차가 1일 6회(휴
  일에는 7회) 운행한다.
* 강릉역과 동해역에서 청량리행 열차(1일 6회, 휴일 7회)를 타고 태백역 하차
② 시외버스 이용
* 동서울터미널에서 태백행 직행버스가 20~4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부산에서 태백행 직행버스가 1일 6회, 대구(북부)에서 태백행 직행버스가 1일 10여 회(직통은
  1일 9회 운행) 떠난다.
* 인천, 고양, 의정부, 부천, 성남, 안산, 수원에서 태백행 직행버스 이용
* 원주, 제천, 삼척, 강릉, 영주에서 태백행 직행버스 이용
③ 현지교통
* 태백역전에 있는 태백터미널에서 당골행 7번 시내/좌석버스가 1일 20여 회 운행
④ 승용차
* 중앙고속도로 → 제천나들목을 나와서 영월 방면 38번 국도 → 영월 → 고한 → 태백시내 →
  당골주차장
* 중앙고속도로 → 제천나들목을 나와서 영월 방면 38번 국도 → 영월 → 상동 → 유일사/백단
  사 → 당골주차장

※ 태백산 관람 정보 (2014년 2월 기준)
* 입장료(단체는 30인 이상) : 어른 2,000원 (단체 1,500원) / 학생,군인 1,500원 (단체 1,000
  원) / 어린이 700원 (단체 500원)
* 주차비 : 대형 4,000원 / 소형 2,000원
* 태백산 눈축제는 1월 중/하순에 2주 정도 열린다. (열리는 시기는 매해마다 다름)
* 당골에는 콘도형 태백산민박촌이 있다. 현재 15동 73실이 있으며, 인터넷에서 예약하면 된다.
  ☞ 태백산 민박촌 홈페이지 가기 (문의 ☎ 033-553-7440~41)
* 태백산 눈썰매장 이용료 : 어른 5,000원 / 어린이 4,000원
* 태백산 당골 소재지 - 강원도 태백시 소도동 (태백산도립공원 사업소 ☎ 033-550-2741~42)
* 태백산도립공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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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2월 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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