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먹거리'에 해당되는 글 14건

  1. 2019.02.23 천하에서 제일 큰 청동좌불로 유명한 고즈넉한 산사, 천안 태조산 각원사 ~~ (태조산 성불사)
  2. 2018.02.26 첩첩한 산골에 숨겨진 신비의 탄산약수를 찾아서, 춘천 사명산 추곡약수 (천전리 지석묘, 춘천의 먹거리들)
  3. 2017.05.08 푸른 동해바다를 거닐다. 부산 기장 봄나들이 ~~~ (죽성리왜성, 죽성항, 황학대, 죽성성당, 장어구이 1접시)
  4. 2017.04.21 서울의 아늑한 옆산, 아차산에 올라 장대했던 고구려를 추억하다~~~ (홍련봉보루, 아차산성, 서울둘레길, 아차산보루)
  5. 2016.06.14 현대 문학의 새로운 성지, 옥천 정지용시인 생가~정지용 문학관 (육영수생가, 옥천 구읍 명소들)
  6. 2015.12.12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강원도의 지붕, 정선 나들이 (아라리촌, 정선5일장, 아우라지)
  7. 2015.11.07 과거와 현재의 어울림, 우리나라 민속마을의 성지 ~ 아산 외암리민속마을 (돌담길)
  8. 2015.09.09 호남의 소금강, 순창 강천산 (강천사, 구름다리, 강천산계곡, 구장군폭포)
  9. 2015.06.02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 정릉 봉국사 (맛있는 점심공양)
  10. 2015.05.08 부산의 지붕을 거닐다 ~ 금정산, 원효암 봄나들이 (범어사, 고당봉, 금샘, 산성막걸리)

천하에서 제일 큰 청동좌불로 유명한 고즈넉한 산사, 천안 태조산 각원사 ~~ (태조산 성불사)

 


' 한겨울 산사 나들이,
천안 태조산 각원사~성불사 '

▲  각원사 청동좌불상


 

겨울이 무르익어가던 12월 중엽, 친한 후배들과 충남 제일의 도시인 천안(天安)을 찾았다.
천안에서 문을 두드린 곳은 청동대좌불로 유명한 각원사로 태조산(421m)에 포근히 자리해
있다. 태조산은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王建)이 이곳에서 군사를 양병했다고 하여 유래된
이름으로 태조봉이라 불리기도 한다.

오전 9시 반에 방학역(1호선)을 출발, 중간중간에 후배들이 합류하여 12시가 지나서 천안
역에 도착했다. 그 장대한 거리를 후배들과 수다를 떨며 가니 체감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
다.
천안역에 이르러 태조산의 품으로 들어가는 천안시내버스 24번(각원사↔동우아파트)을 타
고 20분 정도를 더 들어가 각원사 종점에서 두 발을 내렸다.


 

♠  각원사(覺願寺) 입문 (203계단, 청동좌불상)

▲  각원사 밑에 자리한 연화지(蓮花池)

시내버스가 바퀴를 돌리는 각원사 종점 주변은 각원사를 후광(後光)으로 삼은 식당과 찻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각원사는 법등(法燈)를 켠지 겨우 40여 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천하
제일의 청동불상으로 1980년대부터 유명세를 타면서 신도와 관광객, 답사객들이 구름처럼 몰
려들고 있다. 그러다보니 절 밑에 자연히 식당이 들어서고 조촐하게 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주말과 휴일이면 관광버스가 족히 100대나 줄을 이을 정도로 북새통을 이루지만 그날은 평일
이라 찾는 이도 별로 없어 식당들도 절간처럼 한산하다. 그런 식당촌을 지나면 절 밑에 형성
된 연화지란 호수가 나온다. 겨울 제국(帝國)이 씌워놓은 눈과 얼음으로 호수 또한 고요하기
그지 없는데, 그런 호수를 반바퀴 돌면 경내로 인도하는 203계단이 중생의 기를 죽인다.


▲  겨울이 씌워놓은 굴레를 뒤집어쓰며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기다리는 연화지

▲  시작부터 중생의 기를 단죄하는 203계단 <무량공덕(無量功德) 계단>

연화지에서 각원사로 가는 길은 2가지가 있는데, 203계단을 오르면 바로 청동대불(청동대좌불
)로 이어지며 잘 닦여진 2차선 길을 따라가면 각원사 경내로 통한다. 어느 길로 가든 청동대
불과 경내로 이어지니 취향대로 가면 되지만 기왕 왔다면 203계단으로 올라가 청동대불과 경
내를 둘러보고 2차선 길로 내려오는 것을 권한다. 마치 하늘에 닿은 듯, 장대하게 펼쳐진 203
계단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03계단은 '무량공덕 계단'이라 불리며, 1977년 11월에 조성되었다. 절에서 많이 애용하는 숫
자인 108보다 95가 더 많으니. 이는 108번뇌 소멸 기원 계단, 아미타불의 48가지 소망을 기원
하는 계단, 관세음보살의 32가지 화신(化身)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32응신(應身) 계단, 속세를
살아가는데 맺어지는 12인연 계단, 불(佛)/법(法)/승(僧) 3보(三寶)에 귀의하는 3도(三道) 계
단을 모두 합쳐 203이 된 것이다. 그러니 이 계단을 오름으로써 이들을 모두 누리는 셈이 된
다.


▲  203계단을 오르면 청동대불로 인도하는 돌길이 나온다.

'저걸 언제 다 오르나?' 계단의 미친 압박에 주눅부터 진하게 든다. 허나 계단은 누구나 오르
기 쉽게 규칙적으로 놓여져 있어 그리 힘든 건 없다. 속세살이처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오
르다보면 금세 계단 꼭대기에서 밑을 내려다보며 희열에 잠긴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
다.
계단 정상에 이르면 돌이 깔린 길이 나오고, 그 길을 지나면 광장처럼 넓은 길이 나오면서 청
동대불이 서서히 압도적인 위용을 드러낸다.


▲  남북통일기원 대불봉안공덕비(南北統一祈願 大佛奉安功德碑)
청동대불이 완성되자 그 기념으로 불상 서북쪽에 귀부와 이수(螭首)를
갖춘 공덕비를 세웠다.

▲  이보다 큰 좌불상은 없다 ~ 각원사 청동대불<靑銅大佛, 청동대좌불>

경내 북쪽에 위엄 돋게 자리한 청동대좌불(청동대불)은 각원사의 상징이자 든든한 밥줄로 천
안의 대표적인 명물이다. 각원사가 크게 유명세를 탄 것도 바로 이 청동대불 때문으로 1975년
4월 김영조(金永祚)를 비롯한 많은 중생들의 시주와 남북통일의 염원을 받아 조성하기 시작하
여 2년에 인고 끝에 1977년 5월 9일에 완성을 보았다.

불상 조각은 홍익대 교수 최기원(崔起源)씨가 담당했는데, 신라 불상의 정수로 추앙받는 석굴
암(石窟庵) 본존불(本尊佛)을 모델로 삼았으며, 높이 15m, 몸무게 60톤, 귀 길이 175cm, 손톱
길이 30cm, 그가 앉아있는 연화대좌(蓮花臺座)의 원 둘레만 30m에 이르러 천하 최대의 좌불상
으로 손꼽힌다. 불상 안에는 부처의 사리와 불교 서적, 불상 조성에 돈을 낸 100만 명의 이름
이 들어 있으며, 불상 재질이 매우 우수하여 수명이 족히 1만 년은 갈 것이라고 한다.
비록 40여 년 밖에 안된 어린 불상이지만 고색의 때가 조금은 피어나 겉 연령은 200년 이상은
들어보이며, 앞으로 70~80년 정도가 지나면 20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불상이라 하여 국가 중요
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100년 이상 묵은 오래된 절집을 좋아하는 편이
라 성북동 길상사(吉祥寺, ☞ 관련글 보러가기)를 제외하고는 현대 사찰에 대한 관심은 다소
야박한 편이다. 그럼에도 고색의 기운이 채 피지도 못한 각원사를 찾은 것은 바로 이 청동대
불 때문이다.


▲  옆에서 바라본 청동대불의 위엄

불상의 정체는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이다. 그래서 서방정토가 있
다는 서쪽을 바라보며 흐드러지게 미소를 머금고 있다. 불상이 얼마나 큰 지 불상 주변을 돌
아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점처럼 보인다.


▲  밑에서 바라본 청동대불의 아찔한 위엄
내 키가 크다 한들 그에게는 고작 귀 크기에 불과하고 내가 아무리 손톱을
게을리 관리한다 한들, 그의 손톱 길이의 1/60도 안된다. 내가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그의 손바닥 안에 불과하다.

◀  청동대불의 늠름한 뒷모습

    ◀  청동대불을 지키는 설법전(說法殿)
청동대좌불 북쪽에 자리한 설법전은 1978년에
지어진 것으로 청동대불을 관리하며 대법회
등의 행사를 준비하는 공간이다. 건물 내부에
는 공양 물품을 파는 가게와 의자를 갖춘 쉼
터가 있다.


 

♠  현대 불교의 성지이자 천안12경의 하나,
각원사(覺願寺) 둘러보기

▲  청동대불에서 바라본 각원사의 설경

천안의 진산인 태조산 북서쪽 자락에 둥지를 튼 각원사는 1975년 4월에 경해법인(鏡海法印)이
창건했다. 법인은 1931년 9월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으며, 1946년 10월 합천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6.25가 터지자 해인사에 머물며 절을 지켰고, 1950년 10월 경주로 탁
발을 나갔다가 석굴암에 잠시 들려 본존불에게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큰 도량을 짓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후 세상이 조금 진정되자 불교와 문학 공부에 박차를 가해 마산 해인대학 문학과와 종교학
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사학과와 성균관대 동양철학과를 거쳐 1967년 9월 동국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1969년에 왜열도로 넘어가 대동문화대학 대학원 종교학과에 들어갔으며, 1972년 11월 낡은 다다미방을 구해 '해동선원'을 개원했다.

그 이후 어느 날, 오사까에서 사업을 하는 재일교포 부부가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김영조<金
永祚, 법명은 각연(覺然)>와 정정자<鄭貞子, 법명 자연심(自然心)> 부부로 김영조씨가 당뇨병
으로 고생을 하자 법인을 찾아와 기도를 부탁한 것이다.
법인의 지도 아래 100일 관음기도를 올리니 2~3년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의사의 말과 달리 건
강을 거의 회복했다. 이에 김영조는 고마움의 뜻으로 동경(東京)에 절을 하나 마련하여 그에
게 주었고, 절 이름은 그의 어머니 이름을 따서 명월사(明月寺)라 하였다. 그런데 법인이 그
절을 대한불교 조계종(曹溪宗) 총무원에 재산 등록을 해버리자 김영조는 크게 아쉬워하며
'귀국할 때 명월사를 팔고 국내에 절을 지으십시요' 충고를 했다. 이에 법인은 '명월사가 개
인 재산이 아닌 재일동포의 안식처로 남았으면 합니다'
답을 하니 김영조는 크게 감동을 먹고
자기가 돈을 댈테니 고국에 큰 불상을 지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래서 바로 귀국하여 마땅
한 자리를 물색하다가 태조산 자락이 명당이라 그곳에 각원사를 세웠고, 곧바로 청동불상 조
성을 추진하여 1977년 5월 천하 최대의 좌불상인 청동대불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청동대불로 각원사의 존재가 급격히 뜨자 예전 석굴암 본존불에게 고백했던 남북통일을 기원
하는 큰 도량의 꿈을 이루고자 현 주지승인 서대원과 함께 꾸준히 불사(佛事)를 벌여 지금의
거대한 절을 이루게 되었다. 그래서 경주 불국사(佛國寺) 이래 최대 사찰이라 일컬어지기도
하며, 단양 구인사(救仁寺)와 더불어 20세기에 지어진 대표적인 큰 사찰이자 현대 불교의 성
지(聖地)로 격하게 명성을 누리고 있다.

법당(法堂)인 대웅보전은 건평 200평으로 이 땅에서 가장 큰 목조 건물로 꼽히며, 2002년에는
각원사 불교대학을 세워 운영하고 있다. 또한 절을 크게 일군 법인은 각원사에 만족하지 않고
해외에도 눈을 돌려 왜열도 야마구치현의 광명사(光明寺)와 미대륙 필라델피아에 관음사(觀音
寺)를 세웠으며, 각원사를 주지 서대원과 다른 승려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동경 명월사에 들어
가 해외 포교에 주력하기도 했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칠성전, 산신전, 천불전, 관음전, 경해원, 성종루, 개
산기념관, 영산전 등 10여 동의 굵직한 건물이 있으며, 절의 역사가 짧다보니 고색의 기운은
아직 피어나지 못했고 소장 문화유산도 없는 실정이다. 허나 산속에 제대로 묻혀 있어 산사(
山寺)의 고즈넉한 기운은 넉넉히 배여있으며,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천안12경의 제6경으로 손
꼽힌다. 또한 천안 시내와 가깝고 접근성도 양호하여 쉽게 안길 수 있는 점도 이곳의 큰 장점
이다.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도량이라 그럴까? 이곳에서 들리는 염불 소리가 통일을 애타게 부르짖은
이 땅의 소리 같다.

          ◀  각원사 칠성전(七星殿)
청동대불에서 경내로 내려가면 가장 먼저 칠성
전이 마중을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 건물로 1979년에 지어졌는데, 내부에는
칠성(七星)이 그려진 칠성탱(七星幀)과 나한상
(羅漢像)이 봉안되어 있으며, 그 흔한 칠성각(
七星閣) 대신 그보다 1단계 높은 칠성전을 칭
하고 있는 점이 꽤 이채롭다.


▲  색채가 고운 칠성탱과 그 앞에 줄지어 앉은 다양한 색채의 나한상들

▲  각원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칠성전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장대한 규모의 대웅보전이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든다. 각원사의
법당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 건평(建坪) 360평에 달하는 팔작지붕 집으로 이 땅의 목조 건
물 중 가장 큰 편에 속한다.
이 건물을 짓고자 10여 년 동안 목재 100여 만 재를 구입하여 1992년 9월에 공사에 들어갔고,
그해 11월, 34개의 주춧돌을 깐 다음 4년 동안 갈고 닦아 1996년 10월에 완성을 보았다. 내부
불단에는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들은 1983년에 미리 조성되어 대웅보전 완공을 기
다리고 있었다.
건물을 받치고 있는 네모난 기단(基壇)은 높이가 거의 3m이며, 기단부터 건물, 닫집, 불상까
지 모두 청동대불 만큼이나 몸집이 대단해 대불에서 놀란 마음을 다시금 놀래케 한다.


▲  대웅보전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이 고운 미소를 선보이며 중생의 하례를 받는다.
관세음보살을 하나도 아닌 둘씩이나 거느리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끄는데, 이들은
대자대비(大慈大悲) 관세음보살, 대성자모(大聖慈母) 관세음보살이라 불린다.

         ◀  각원사 천불전(千佛殿)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천불전은 원래 산신의
공간인 산신전으로 1979년 9월에 지어졌다.
2000년 10월 새로운 산신전이 옆에 완성되자
천불전으로 간판을 바꾸고 천불을 봉안했다.


▲  천불전 내부
커다란 석가불을 중심으로 조그만 석가불 1,000상이 그를 둘러싸며 건물
내부를 환하게 수놓는다.

▲  각원사 산신전(山神殿)
속세의 기운을 경계하고자 함일까? 지붕 밑에 날카롭게 고드름이 달려있다.


천불전 좌측에 자리한 산신전은 2000년 10월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는 현재 천불전이 산신전이
었다. 산신전은 우리의 토속신인 산신(山神)의 보금자리로 보통 각(閣)을 칭하기 마련이나 이
곳은 앞서 칠성전처럼 특별히 전(殿)으로 격을 높였다. 그만큼 산신과 칠성에게 바라는 것이
많다는 뜻일 거다.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붉은 옷을 입은 산신과 동자(童子),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등장한다.

▲  반야원(般若院) 서쪽에서 바라본
경내와 태조산


▲  한 지붕 두 가족, 영산전(靈山殿, 1층)과 개산기념관(開山記念館, 2층)

반야원 옆에는 영산전과 개산기념관이 한 지붕을 이루고 있다. 돌로 이루어진 1층은 영산전으
로 석가불과 그의 열성 제자인 나한이 봉안되어 있는데, 16나한도 아닌, 500나한도 아닌, 무
려 1,250나한이 내부를 장식하고 있으며, 기와집으로 이루어진 2층은 절을 개산(開山, 창건)
한 법인을 기리는 공간으로 그의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다. 각원사에서 나름 중요한 곳이지만
시간을 핑계로 그냥 통과하였다.


▲  이 땅에서 가장 큰 범종의 보금자리, 성종루(聖鐘樓)

2층 누각으로 장엄하게 이루어진 성종루는 범종(梵鍾)과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
등 사물(四物)이 담긴 공간으로 일종의 범종각이다. 그 흔한 범종각을 칭하지 않고 성종루란
간판을 달게 된 것은 이곳 범종의 이름이 성종(聖鐘)이기 때문으로 1984년 5월에 조성된 20톤
짜리 종이다.
성종루는 1990년 4월에 지어진 것으로 329평 규모이며 이 땅의 범종각 계열 중 제일 크다. 그
러니까 각원사는 노천 청동대불과 목조 1층 법당, 범종각 등 무려 3가지에서 규모 부분 1등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 소재지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안서동 171-3 (각원사길 245 ☎ 041-561-3545)
* 각원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연화지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2차선 길

각원사를 이리저리 둘러보니 그새 1시간이 뚝딱 흘렀다. 나름 열심히 살피긴 했지만 현대 사
찰이다보니 청동대불 외에는 그리 크게 관심이 가질 않았고 개산기념관 등은 그냥 빼먹고 말
았다.
그렇게 각원사와의 인연을 정리하고 태조산에 안긴 또다른 사찰, 성불사로 서둘러 길을 향했
다. 겨울 제국의 핍박으로 해가 많이 짧아졌기 때문이다. (그때 시간 16시)


 

♠  태조산에 안긴 오래된 절집, 성불사(成佛寺)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0호


▲  성불사 일주문(一柱門)

태조산에는 능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각원사와 성불사가 둥지를 틀고 있다. 그들은 비록 같은
태조산에 안겨있지만 서로가 너무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각원사는 역사는 매우 짧지
만 현대 불교의 성지이자 청동대좌불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고, 불국사 이래 최대 사찰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규모도 크다. 반면 성불사는 고려 초에 창건된 오래된 절로 문화유산도 여럿
지니고 있지만 규모도 작고 한참 후배인 각원사의 위엄에 눌려 거의 존재감이 없어 보일 정도
이다. 하여 속인(俗人)들은 각원사를 많이 찾아오지 성불사는 별로 모른다.

각원사와 성불사는 직선거리로 불과 600m에 불과해 금방이면 도달할 듯 싶지만 안서e편한세상
1차, 2차아파트로 크게 돌아가야 된다. (산길이 있긴 하지만 자세히는 모르겠음) 그 거리는 약
2.5km, 도보로 약 40분 정도 걸린다. 조금 편하게 가고 싶다면 24번 시내버스를 타고 두 정거
장 거리인 부경파크빌,안서e편한세상 정류장에서 내려서 800m 정도 올라가면 되지만 차 시간이
맞지 않으면 차라리 속 편하게 걸어가는 것이 좋다.
우리는 성불사까지 도보로 이동했는데, 30분 정도면 갈 줄 알았더만 거의 40분 이상이 걸린다.
뉘엿뉘엿 무심히 사라지는 햇님에 부랴부랴 서둘렀지만 일주문에 이르니 땅꺼미의 농도가 90%
이상으로 진해져 더욱 긴장감을 타게 만든다. 야경 사진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성불사는 경내와 멀리감치 떨어진 곳까지 일주문을 내려보내 중생을 맞이하고 있다. 겨울 제국
의 의해 지붕이 하얗게 변한 일주문 양쪽에는 코끼리상과 사자상이 자리하여 혹시 모를 속세의
불온한 기운을 경계한다.
일주문을 지나면 곧 경내가 나올 듯 싶었는데, 아직도 길이 한참이나 남았다. 거리는 얼마 안
되도 거의 느긋한 길로 이루어진 각원사(203계단 제외)와 달리 죄다 오르막길이고, 절이 가까
워질 수록 경사가 더욱 흥분을 한다. 게다가 눈까지 두툼히 깔려있으니 걸음도 은근히 더딜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오르막 한굽이를 오르니 야외 공연장의 돌로 다진 객석 같은 석축이 장대하
게 펼쳐지고 그 위로 성불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  야외 공연장 객석 같은 석축 위로 모습을 드러낸 성불사

▲  성불사 느티나무 (천안시 보호수)
경내를 코앞에 둔 경사지에 나이 800년을 헤아리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뿌리를
내렸다. 겨울 제국에게 모두 털려 앙상한 가지만 드러낸 그의 모습이 마치
두 팔을 벌려 봄의 해방군을 애타게 염원하는 것 같다.

▲  눈 지붕을 이룬 성불사 칠성각 (오른쪽)

▲  태조산의 옥계수를 하염없이 흘려보내는
성불사 샘터

느티나무에서 1굽이를 더 오르면 요사(寮舍)와 선방(禪房), 공양간 등을 모두 갖춘 4~5층 건물
앞에 이른다. 이제 비로소 경내에 이른 것이다. 각박한 경사를 이용하여 건물을 짓다보니 다층
건물을 이루게 되었는데, 그 옆을 오르면 법당인 대웅전으로 이어진다.


▲  성불사 요사/선방 옆에서 바라본 천하 (천안시내)

각원사와 더불어 태조산 북서쪽 자락에 안긴 성불사는 고려 태조 때 도선국사(道詵國師) 또는
목종(穆宗) 시절에 혜선국사(惠禪國師)나 혜조대사(惠照大師, 조선 태조 때라는 설도 있음)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중건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시절에 파괴되어 다시 중건했으며, 여러 차례의 중건을 거쳐 지금에 이른다.

절이 창건될 당시(또는 고려 후기) 하늘에서 백학(白鶴) 1쌍이 날아와 대웅전 뒷쪽 바위에 앉
아 부리로 열심히 불상을 새겼다. 그러기를 49일째, 불상이 완연하게 모습을 갖추며 완성을 눈
앞에 두고 있었는데, 나뭇꾼의 인기척에 놀라 불상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날아가 버렸다. 그래
서 이를 부처의 계시로 여기고 절을 세웠는데, 불상을 다 이루지 못했다고 하여 성불사(成不寺
)로 했다가 뒤에 부처를 이루었다는 뜻의 성불사로 이름을 갈았다고 한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산신각, 칠성각, 요사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마
애석가삼존16나한상 및 불입상과 석조보살입상을 지니고 있어 고색의 내음을 느끼게 한다. 또
한 성불사 자체는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0호로 지정되어 있다.
해발 230m 고지 가파른 곳에 자리해 있어 조망도 제법 좋으며, 여기서 남쪽 능선을 통해 태조
산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  성불사 산신각(왼쪽)과 대웅전(大雄殿, 오른쪽)

북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금동석가3존불
이 봉안되어 있다. 좌우 협시불인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은 어여쁜 여인과 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으나 정작 3존불의 주인인 석가불은 어디로 마실을 갔는지 자리에 없다.
하여 도난을 당했나 싶었으나 석가불의 빈 자리 뒷쪽에 창이 있는 것이다. 대웅전 뒷쪽에는 지
방문화재인 마애석가3존불이 있는데, 그 마애불이 바로 비어있는 자리의 주인, 즉 3존불의 중
심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별도의 불상을 두지 않고 불단을 두는 적멸보궁(寂滅寶宮)과 비슷한
모습을 취했다.


▲  가운데 자리가 빈 대웅전 석가3존불 (왼쪽 지장보살, 오른쪽 관음보살)
비어있는 본존불 자리는 창 너머로 보이는 마애3존불의 것이다.

▲  대웅전 우측 벽에 걸린 빛바랜 영산회상도와 현왕탱(現王幀)
석가3존불 뒷쪽에 창을 내는 바람에 후불탱인 영산회상도가 우측 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옆에는 붉은 색채가 중심을 이룬 현왕탱이 자리해 있는데, 이들
그림은 빛이 좀 바랜 것으로 보아 80년 이상 묵은 것으로 보인다.

▲  성불사 마애석가삼존16나한상 및 불입상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169호

대웅전 뒷쪽에는 고된 세월을 견딘 커다란 바위가 북쪽을 향하고 있다. 그의 꺼무잡잡한 피부
에는 마애석가3존불과 16나한 등이 빼곡히 담겨져 있는데 장대한 세월을 겪는 동안 무거운 상
처를 입으면서 간신히 형체만 확인할 수 있는 정도이다. 그런 상황에 어둠까지 깔리니 숨은 그
림을 찾듯 더욱 눈을 부릅뜨고 살펴봐야 된다. (겨우 몇몇 상만 시야에 들어왔음)

바위에 새겨진 불입상(佛立像)은 돋음새김으로 새겼으나 바위의 절리현상으로 인해 얼굴과 신
체의 전면이 크게 절단이 났으며, 머리 꼭대기인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과 손의 형태, 옷무
늬 등은 고려 때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다. 밑도리가 넓은 옷 밑으로 발가락이 선명한 오른쪽
발이 나와 있으나 왼발은 사라지고 없다.
바위 우측면 하단 중심에는 연화대좌가 있고, 좌우에 공양상(供養像) 또는 금강역사(金剛力士)
로 보이는 2구가 있다. 연화대좌 위에는 작은 연화대좌가 놓여져 있고, 거기에 석가불이 앉아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데,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을 취했으
며, 얼굴은 눈과 입이 크게 표현된 둥글넓적한 모습이다.

석가불 좌우의 협시보살과 16나한상은 손상은 심하나 서로 마주보는 모습과 수도하는 모습 등
각자 자유분방한 모습을 하고 있고, 나한상 주위 바위 면을 둥글게 파서 마치 감실(龕室)이나
동굴 속에 있는 것처럼 표현했다.
성불사 마애불은 바위 한 면에 석가3존불과 16나한을 덩어리로 새긴 것으로 이 땅에서 거의 유
일한 케이스이며, 도식화(圖式化)가 덜 된 것으로 보아 14~15세기 작품으로 여겨진다.


▲  성불사 석조보살좌상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386호

야외에 조성된 석조관음보살좌상 옆에 조그만 건물이 있는데, (건물 이름을 까먹음..) 그 안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조그만 석조보살좌상이 담겨져 있다.

이 불상은 원래 성불사의 것이 아니었다. 1990년에 지금은 세종시로 간판을 바꾼 연기군 조치
원(鳥致院) 부근 대성천에서 준설공사를 벌이다가 발견된 것으로 신도들의 노력으로 이곳에 안
착을 해 성불사의 보물을 하나 더 늘려주었다. 예전에는 종무소 안에 두었으나 근래에 그를 위
한 집을 지어 이렇게 집까지 가지게 되었다.

석불의 높이는 67cm, 어깨 넓이 34.5cm, 무릎 넓이 54.5cm로 등에 달린 광배(光背)의 윗부분이
깨져나가 붙여 놓았다. 오른쪽 무릎도 조금 깨진 상태이며, 무릎에서 오른쪽으로 가늘고 긴 균
열이 있어 조금씩 메워 놓은 상태로 거신광배(擧身光背)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다.
옷주름은 굵으면서 매우 도식적이며 오른손에는 연꽃 가지를 들고 왼손은 배 밑에 두었다. 두
팔은 몸에 비해 길지만 가늘고 두 손은 작으며, 연꽃을 들고 있는 점으로 보아 그가 관세음보
살로 여겨지지만 미륵불의 도상(圖像)으로 유행한 점도 있어 그의 정체는 아리송하다.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겉으로 보면 그저 그런 석불로 보이겠지만 보기 드문 형식의 석불로
인정받아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 성불사 소재지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안서동 178-8 (성불사길 144 ☎ 041-565-4567)


▲  강추위 앞에서도 향긋한 미소를 잃지 않은
풍만한 모습의 석조관세음보살좌상

▲  경내에서 바라본 천하와 일몰의 끝 모습
(성불사로 인도하는 고갯길과 천안시내)

햇님의 퇴근 본능에 쫓겨 서둘러 성불사에 들어와 잠깐을 방황하는 사이 시간은 18시가 되었다.
서서히 줄어드는 햇님의 흔적에 의지해 열심히 사진에 담았지만 역시나 신통치가 못했고, 머나
먼 수평선 너머로 햇님이 완전히 꽁무니를 감추면서 달님은 햇님의 나머지 흔적마저 지우며 천
하를 검게 태운다.
경내에 있는 문화유산은 모두 살펴보아서 다행이지만 눈이 적지 않게 깔린 상태라 칠성각 등은
접근도 하지 못했고 날이 어두워짐에 따라 더 머물기도 어렵게 되었다. 게다가 춥고 배도 고프
니 더욱 그렇다. 그래도 중요한 볼거리는 다 보았으나 이쯤에서 성불사에 대한 볼일을 마치고
절을 내려갔다.

시간도 어느덧 저녁 시간이라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밥이 그리워진다. 그래서 저녁을 어
디서 무엇을 먹을까를 두고 즐거운 고민을 벌이다가 각원사 밑에 줄지어 선 식당촌에서 해결하
고자 그곳으로 넘어갔다. 어느 집에서 먹을까 궁리하던 중, 그냥 장군도 아닌 무려 대장군(大
將軍)식당이란 위엄 돋는 이름의 식당이 있어 그곳에 들어가서 먹기로 했다. 태조산이란 이름
이 고려 태조가 군사를 양병했다고 해서 비롯된 것이다보니 그 밑에서 군권을 총괄하는 자리인
대장군을 식당 이름으로 삼은 모양이다.

평일이라 그런지 저녁 시간임에도 내부는 한산하다. 우리가 들어오자 주인 아줌마는 격하게 반
기며 방 안으로 자리를 안내했다. 처음에는 그냥 비빔밥 같은 것을 먹을까 했으나 날씨도 춥고
뜨끈한 국물 생각이 간절해 버섯전골과 막걸리를 주문했다.
잠시 뒤 밑반찬이 정갈하게 깔리고 버섯전골이 등장한다. 전골이 뽀글뽀글 익자 국자를 이용해
전골을 퍼서 먹는데, 버섯전골이란 이름이 무색치 않게 버섯이 매우 많다. 거기에 소고기와 당
면, 두부, 갖은 채소가 버무려져 하나의 버섯전골을 이루는데 국물도 제법 얼큰하고 맛이 좋다.
전골도 그렇고 반찬도 그렇고 죄다 밥도둑의 자격이 충분하며,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한 상태
라 시장기까지 강하게 돋아있어 전골이고 반찬이고, 밥까지 거의 비워버렸다. 거기에 답사 뒷
풀이용으로 막걸리까지 겯드리니 황제의 밥상이 부럽지 않다.

그렇게 저녁을 배불리 먹고 포만감의 행복을 누리며 소화도 시킬 겸 상명대 천안캠퍼스 남쪽까
지 걸어갔다가 천안시내버스 24번을 타고 아비규환의 속세로 나왔다.

이렇게 하여 한겨울 천안 태조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대장군식당에서 먹은 버섯전골의 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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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첩한 산골에 숨겨진 신비의 탄산약수를 찾아서, 춘천 사명산 추곡약수 (천전리 지석묘, 춘천의 먹거리들)



' 한겨울 춘천 나들이 '


▲  춘천 추곡약수


 

겨울 제국(帝國)의 혹독한 통치 속에서 묵은 해가 저물고 새해의 막이 올랐다. 강제로 나
이 1살이 누적되니 기분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한복판이다. 하여 꿀꿀한 기분도 좀 달래
고 조촐하게 몸보신도 누릴 겸, 요즘 한참 관심을 두고 있는 탄산 약수를 찾기로 했다.
탄산 약수는 태반이 강원도와 경북 산골에 묻혀 있어 서울에서 찾아가기가 그리 녹녹치가
못하다. 예전에는 서울에도 '천호약수'란 꽤 유명했던 탄산 약수가 있었지만 천박한 개발
의 칼질로 이제는 흔적도 없다. 그나마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탄산 약수는 춘천 추곡약수
, 비록 춘천(春川)이라고는 하지만 화천군과 양구군과 맞닿은 춘천의 북쪽 끝으머리에 자
리해 있다. 허나 교통편은 다른 탄산 약수와 달리 조금은 봐줄만한 편이라 흔쾌히 추곡약
수를 찾기로 하고 친한 후배와 길을 떠났다.

햇님이 하늘 중천에 걸려있던 오전 11시, 7호선과 경의중앙선, 경춘선이 만나는 상봉역에
서 그를 만나 경춘선 전철(청량리~상봉~춘천)을 타고 80여 분을 내달려 남춘천역에 두 발
을 내렸다.
남춘천역 서쪽인 온의4거리에서 추곡약수까지 들어가는 춘천시내버스 18번을 타면 되지만
시간이 전혀 맞지 않아 부득이 춘천시외터미널로 이동하여 양구(楊口)행 직행버스를 타기
로 했다. 허나 무려 50분 뒤에나 차가 있어 그 사이 점심이나 먹고자 바로 이웃에 자리한
이마트에서 늦은 점심을 때웠다.

점심을 먹고도 아직 20분이나 남아있어 터미널에서 억지로 시간을 죽이고 있으니 양구 경
유 속초행 직행버스가 슬그머니 타는 곳에 귀여운 얼굴을 들이민다. 그 버스를 타고 소양
강을 건너 신북읍과 천전리를 지나 우리나라 최장의 도로 터널로 등극한 배후령터널을 지
난다. 이 터널(5.1km)은 2012년 3월에 개통되었는데 터널 이전에는 뱀처럼 구불구불한 배
후령 고갯길을 힘들게 넘어야 했다.
배후령터널을 지나 화천군의 산하(간척리)를 잠시 거치다가 다시 춘천 땅으로 진입, 추곡
3거리(북산지서)에서 내렸다. 이곳은 인적도 거의 없는 첩첩한 산골로 4발 차량들의 굉음
외에는 소리라는 것이 거의 없다. 남쪽에는 소양호가 살짝 모습을 보이고 있고, 동쪽에는
양구로 인도하는 수인터널이 있으며, 동서남북 사방이 모두 산으로 막힌 그야말로 하늘의
감옥 같은 지형이다.


 

♠  추곡약수 둘러보기

▲  추곡약수 가는 길 (추곡약수3거리~약수터 입구)

우리가 찾는 추곡약수는 추곡3거리에서 2km 정도 들어가야 된다. 추곡3거리 바로 동쪽에 추곡
약수3거리가 있는데, 여기서 46번 국도 직선화로 무척이나 한가해진 왼쪽 길(소양호로)로 들
어선다. (직진하면 수인터널) 국도 직선화 이전에는 춘천과 양구를 오가던 차량들이 구불구불
소양호로를 이용했으나 직선 도로가 뚫리면서 차량들이 죄다 편한 새 길로 바퀴를 돌려 이제
는 추곡약수와 사명산, 소양호 상류 접근용으로 간신히 도로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주말이면 그래도 추곡약수와 사명산을 찾는 차량들이 좀 있을 터인데 평일이라 차량의 왕래가
없어 2차선 도로가 무척이나 넓고 외로워 보인다. 그 길을 거의 독점하며 북쪽으로 가다보면
약수터 입구가 나오는데, 여기서 소양호로를 버리고 북쪽 추곡약수길로 진입하면 된다.


▲  추곡약수 입구로 마중나온 익살스런 장승들

▲  추곡리 물푸레나무 - 춘천시 보호수 33호

그저 산바람 소리가 전부인 고적한 추곡약수길을 걷다보면 길 왼쪽에 커다란 나무 1그루가 잠
시 나좀 보고 가라며 발목을 붙잡는다. 나무 앞에는 그의 간략한 소개가 담긴 회색 피부의 안
내문이 있어 살펴보니 춘천시 보호수로 지정된 나이 지긋한 물푸레나무이다.
겨울 제국에게 영혼까지 털려 앙상한 뼈대만 남은 채, 봄의 해방군을 기다리는 이 나무는 나
이가 약 360여 년<2009년 보호수 지정 당시 추정 나이가 약 350년>으로 높이 10m, 둘레 360cm
이다. 추곡약수를 안내하던 오랜 길잡이로 나무에 돌이나 동전을 던져 가지 사이에 딱 들어앉
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있어 '아들나무'란 별명도 지니고 있다.


▲  추곡약수길 (남쪽 방향, 물푸레나무를 조금 지난 지점)

▲  추곡약수길 (북쪽 방향, 추곡약수 마을 직전)

▲  시내버스가 바퀴를 돌리는 추곡약수 정류장

물푸레나무를 지나 5분 정도 가면 추곡약수 마을이 나온다. 마을 앞에는 넓은 공터와 버스 정
류장이 있는데, 춘천시내버스 18번이 여기서 바퀴를 돌려 춘천시내와 오항리로 이동한다. 그
버스를 타면 시외직행버스의 1/3가격으로 약수터 밑까지 편하게 접근할 수 있지만 1일 5회 밖
에 안다닌다는 커다란 함정이 있어 시간표를 미리 확인해야 뒷탈이 없다.


▲  추곡약수 가는 길 (마을에서 약수 방면)

▲  아련한 전설이 되버린 천연기념물 장수하늘소 발생지 비석

마을 동쪽 옆구리를 지나면 추곡약수와 사명산을 안내하는 안내문이 마중을 한다. 그들을 지
나면 계곡을 옆구리에 낀 오르막길이 약수까지 이어지며 약수 밑까지 계곡과 길을 따라 집이
들어서 있다. 이들 집은 상당수 추곡약수로 끓인 닭백숙을 다루는 식당으로 평일이라 손님이
없어 거의 문이 닫혀 있다.

추곡사란 조그만 절이 길 남쪽 언덕에 자리해 있고, 한때 국가 지정 천연기념물 75호로 소양
호에 싹 털려 영원히 사라진 '춘천 장수하늘소 발생지'를 알리는 조그만 비석이 우두커니 자
리해 우수에 젖어있다.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그냥 지나가기 일쑤지만 이 비석은 한때 지정문화재 앞에 안내문과 함
께 세우던 것으로 소양댐이 앗아간 장수하늘소와 북산면의 산하를 잠시 생각하게 만든다. 속
세의 뇌리 속에 완전히 잊혀진 춘천의 장수하늘소 발생지는 여기서 가까운 북산면 추전리 지
역으로 비석이 이곳에 있는 것을 보면 여기도 발생지의 일원이었던 모양이다.

소양댐 건설로 추전리를 비롯한 북산면의 산하가 강제로 물에 잠기자 추전리 산중턱에 있었던
장수하늘소 발생지가 물에 묻혔고 장수하늘소는 지구의 암덩어리, 인간을 원망하며 그렇게 자
취를 감추고 말았다. (1973년 천연기념물에서 정리되었음)


▲  추곡약수 아랫약수

약수터 길 끝에는 나를 이곳으로 부른 추곡약수가 둥지를 틀고 있다. 사명산(四明山, 1198m)
서남쪽 자락에 자리한 이곳은 춘천에서도 가장 벽지이자 북쪽 끝으머리로 칼처럼 솟아 구름을
베게로 삼은 높은 뫼들과 소양호로 이루어진 북산면의 소중한 꿀단지이다.

추곡약수는 윗약수와 아랫약수로 이루어져 있는데 윗약수는 1812년에 김원보(金元甫, 또는 강
원보)가 사명산 산신(山神)의 계시를 받아 발견했다고 전하며, 아랫약수는 약 100년 이전에
맹인 김성련(金成練)이 이곳을 지나다가(아마도 윗약수를 마시러 온 듯) 돌부리에 채여 넘어
지니 바로 그 자리에서 샘이 솟았다고 전한다.


▲  눈에 뒤덮힌 아랫약수 주변 (가운데 4각 지붕이 아랫약수,
오른쪽 주황색 지붕집은 식당)

이 약수는 보통 약수가 아닌 신비롭기 그지없는 탄산 약수로 철분과 나트륨, 탄산염, 황산염,
염소, 불소, 망간, 구리, 칼슘 등이 들어있어 물이 붉은 색을 띈다. 물은 톡 쏘는 쓴 맛으로
여기에 설탕을 타면 거의 천연사이다가 된다. 물맛은 일반 약수보다 다소 쓰지만 위장병과 빈
혈, 부인병, 신경통, 무좀 등에 효과가 있다고 전하며, 이 물로 밥을 지으면 밥이 파랗게 물
이 오르면서 일반 밥과 달리 꼬들꼬들하고 맛이 좋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이런 한약 같은 약수가 무척 싫었다. 하여 입에도 대지 않았었지. 그런
데 그 물로 지은 밥은 맛이 있어 몇 그릇을 뚝딱 비우곤 했다. 그러다가 어린 시절 그렇게나
동경했던 어른이 되면서 그렇게나 싫어했던 탄산 약수는 없어서 못마실 정도로 달콤한 약수로
바뀌었다. 나이가 들면 맛도 자연히 바뀌기 마련이지만 그만큼 건강을 챙겨야되는 우울한 나
이대에 이른 것이다.


▲  김원보가 약수를 발견한 것을 기리고자 그의 후손 자매가(손녀라고
되어있음) 1992년에 만든 추곡약수 발견내력 표석

▲  추곡약수 윗약수

추곡약수는 몸보신을 위해 왔으므로 마치 달콤한 음료수를 마시듯 몇 바가지를 마셔댔다. 몸
에 좋다고 하니 두둑히 마셔야 후회가 없지. 게다가 멀리서 왔으니 그 본전은 뽑아야 된다.
그렇게 심한 편은 아니지만 속이 좀 덥수룩했는데 정말 약수의 효과인지 꼬르륵 말썽을 부리
던 뱃속이 잠잠해진 것 같다. 마치 속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기분 같아서는 약수터 물이 마
르도록 더 퍼마시고 싶지만 위 용량의 한계가 있어서 더 마시진 못했다. 약수터 안내문을 보
니 1일 권장량이 1리터 이하라고 한다. (그날 아마 1.5리터는 마셨을 듯)


▲  추곡약수 윗약수 - 샘 주변이 시뻘겋다.

▲  겨울에 잠긴 추곡약수 윗계곡 (계곡은 출입 금지)
겨울 제국의 시련을 견디며 조용히 봄을 잉태한 계곡, 소쩍새가 우는 그날
거추장스런 눈과 얼음을 박차며 봄의 해방군을 맞이할 것이다.

▲  추곡사(楸谷寺) 가는 길

추곡약수 마을에서 약수로 가는 길목 남쪽 산중턱에 추곡사란 조그만 산사(山寺)가 자리해 있
다. 약수를 마시고 내려오면서 그냥 지나칠까 했지만 약수 하나만 보기에도 좀 허전하여 한번
살펴보기로 했다. 어차피 길목에 있으니 잠깐의 발품이면 충분하다.
추곡사는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현대 사찰로 정확한 창건 시기는 모르겠다. 원래 이름은
명도암(明道庵)이었으나 지역 이름을 따서 추곡사로 갈았다. 숲에 둘러싸인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산신각, 요사 등이 있으며, 대웅전은 법당임에도 규모가 꽤 단출하다. 산신각도 대
웅전과 닮은 꼴이며, 대웅전 내에는 문수/보현보살을 대동한 금동석가3존불과 여러 탱화가 봉
안되어 있어 있을 것은 거의 다 갖추고 있다.

▲  간단한 모습의 추곡사 대웅전(大雄殿)

▲  추곡사 요사(寮舍)

▲  산신이 봉안된 산신각(山神閣)

▲  금빛찬란한 대웅전 석가3존불과 후불탱


▲  밝은 색채의 산신탱 - 두광(頭光)을 갖춘 너그러운 표정의 산신과
밥을 며칠 못먹었는지 까칠한 표정을 지은 호랑이, 그리고
앳된 모습의 동자 등이 그려져 있다.

※ 춘천 추곡약수 찾아가기 (2018년 2월 기준)
① 춘천까지
* 청량리역, 상봉역, 망우역, 퇴계원역, 평내호평역에서 경춘선 전철을 타고 남춘천역이나 춘
  천역 하차
* 용산역, 청량리역, 상봉역, 평내호평역에서 경춘선 ITX-청춘 열차를 타고 남춘천역이나 춘
  천역 하차
* 동서울터미널, 강남 센트럴시티, 잠실역(5번 출구)에서 춘천행 직행/고속버스 이용
* 인천, 부천, 고양, 구리, 성남, 수원, 평택, 강릉, 원주, 청주, 천안, 대전(복합), 전주,
  대구(북부, 동대구), 울산, 부산에서 춘천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② 현지교통
* 경춘선 남춘천역 1번 출구를 나와서 도로(영서로)를 따라 서쪽으로 조금 가면 온의4거리이
  다. 여기서 서쪽으로 길을 건너면 강남동(시외버스터미널) 정류장인데, 여기서 춘천시내버
  스 18번을 타고 추곡약수에서 내린다. <춘천시외터미널을 나와서 왼쪽(북쪽)으로 가면 온의
  4거리, 여기서 북쪽으로 길을 건너면 강남동 정류장>
  버스는 1일 5회 운행하며, 후평동에서 7:30, 9:05, 11:35, 15:40(하절기 16:35), 19시에 출
  발한다. (강남동은 15분 정도 추가)   버스 시간이 맞지 않으면 춘천시외터미널에서 양구행
  직행버스를 타고 북산지서에서 내려 2km 걷는다. (직행버스는 40~60분 간격, 춘천역 경유)
③ 승용차
* 중앙고속도로 → 춘천나들목에서 양구 방면 5번 국도 → 배후령터널 → 간척3거리 → 추곡
  약수3거리에서 좌회전 → 추곡약수

* 소재지 -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추곡리 (추곡약수길 89-1)


 

♠  소양강 하류에 남아있는 청동기 유적 천전리지석묘(泉田里支石墓)
- 강원도 지방기념물 4호

추곡약수에서 조촐하게 약수 몸보신을 하며 사명산의 청정한 기운까지 누리다가 약수에 대한
미련을 애써 지운 채, 다시 추곡3거리(북산지서)로 나왔다. 그냥 춘천시내로 나갈까 하다가
추곡약수 하나로는 무척이나 허전하여 시내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천전리지석묘를 후식으로
살펴보기로 했다. 마침 춘천~양구 직행버스가 천전리지석묘 근처인 춘천국유림관리소에 정차
한다.

직행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중, 그렇게나 보기 힘든 18번 시내버스가 시내에서 나와 추곡
약수로 들어갔다. 이 차는 추곡약수에서 바퀴를 돌려 다시 추곡3거리로 나왔다가 북산면사무
소가 있는 오항리로 들어가는데 그를 타면 참 저렴하게 천전리로 넘어갈 수 있지만 시내 방면
은 무려 1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된다. 시간은 이미 16시가 넘은 상태, 그때까지 햇님이 우리
를 기다리지 않기에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비싼 직행버스를 타야 되는데 이 직행버스도 좀
처럼 나타나질 않는다. 게다가 일몰 직전의 산골이라 칼바람이 춤을 추며 우리의 폭력성을 적
지 않게 테스트한다.
그렇게 기다린지 40분 만에 춘천행 직행버스가 짜잔 모습을 비추었다. 그의 등장에 잔뜩 일그
러진 표정은 긍정적인 표정으로 씨익 바뀌었지. 거의 비행기 이륙 수준으로 질주하는 그를 잡
아타고 간척3거리와 배후령터널을 지나 거의 20분 만에 천전리 춘천국유림관리소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천전나들목 입구 3거리인데 여기서 길 오른쪽에 천전리
지석묘를 알리는 갈색 피부의 이정표가 나온다. 그의 안내로 겨울잠에 잠긴 농산물 비닐하우
스 단지를 지나면 그 길의 끝에 천전리지석묘가 웅크리고 있다.


▲  고된 세월에 새까맣게 탄 서쪽 지석묘(고인돌)

소양강 북쪽, 천전리 경작지에 자리한 천전리지석묘(고인돌)는 2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
에 시신과 유물을 담은 돌방을 낸 다음 커다란 뚜껑돌을 씌운 탁자식이다. 이들은 세력의 우
두머리나 부족장의 무덤으로 예전에는 10기가 있었으나 지금은 5기만 남은 상태이며, 다른 고
인돌에 비해 덩치가 작은 편이나 드물게 돌방이 잘 남아있다.

고인돌 뚜껑돌의 길이는 2.2~2.6m 정도이고, 기둥(받침돌)의 높이는 1~1.1m 정도이며, 돌방에
서 돌화살촉 3개와 대롱구슬, 민무늬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현재 돌방에는 잡석만 무성하며,
이들 고인돌을 통해 옛 조선(朝鮮)이 대륙을 호령했던 청동기시대에 춘천 지역에 조그만 세력
이 있었음을 귀뜀해준다. 이 세력은 점차 춘천 지역을 다스렸던 맥국(貊國)으로 발전하거나
혹은 그 세력에 강제통합된 것으로 여겨진다.


▲  장대한 세월의 무게를 극복하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은 가련한 고인돌
천전리고인돌 형제 중 가장 덩치가 작다.

▲  검은 피부가 되버린 동쪽 고인돌들

▲  돌방을 꽁꽁 가리고 있는 동쪽 고인돌 (왼쪽에 꼬꾸라진 커다란 돌은
예전에 사라진 고인돌의 뚜껑돌)

▲  가장 동쪽 고인돌

※ 춘천 천전리지석묘 찾아가기 (2018년 2월 기준)
① 대중교통 (현지교통, 춘천국유림관리소 하차)
* 경춘선 남춘천역(1번 출구)에서 11, 150번 시내버스 이용 (150번은 다소 돌아감)
* 남춘천역(1번 출구)을 나와서 서쪽으로 조금 가면 온의4거리이다. 여기서 서쪽으로 길을 건
  너서 강남동(시외버스터미널)에서 11, 18, 18-1번 시내버스 이용
* 춘천역(1번 출구)에서 11, 12, 150번 시내버스 이용
* 춘천국유림관리소에서 하차하여 동쪽(소양댐)으로 200m 가면 천전리지석묘를 알리는 이정표
  가 나온다.
② 승용차
* 중앙고속도로 → 춘천나들목에서 양구 방면 5번 국도 → 천전나들목을 나와서 소양댐 방면
  좌회전 → 천전리지석묘 입구 (차는 이곳에 주차)
* 소재지 - 강원도 춘천시 신북읍 천전리 685-7


천전리고인돌을 보고나니 땅꺼미는 완전 짙어져 세상은 검은색 도화지가 되었다. 소양호와 칼
처럼 솟은 산들로 둘러싸인 춘천분지 특유의 칼바람과 맞서며 종일 돌아다녔더니 저녁 시장기
가 강하게 피어오른다. 저녁은 이미 정처를 정해둔 상태라 춘천의 명물인 닭갈비와 막국수,
빙어회를 내놓는 식당으로 즐비한 윗샘밭(천전리)을 버리고 춘천시내버스 13번을 타고 춘천시
내로 들어갔다.

신북읍과 소양2교, 강원도청을 차례로 지나 동부시장에서 내려 남쪽 골목길을 비집고 들어가
니 효자동(孝子洞)에 자리한 별당막국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은 남부4거리 부근 약사동
으로 이전됨) 바로 이날 저녁을 처리할 집이다.
자리에 앉아 무엇을 먹을까 잠시 즐거운 고민을 벌이다가 춘천스타일에 맞게 막국수와 메밀전
병, 감자전을 주문했다. 잠시 뒤 따끈한 육수와 붉은 김치, 백김치 등 김치 2종류가 차려진다.
김치도 제법 숙성이 되서 맛이 좋았고, 백김치도 입에 잘 들어가 밥도둑이 따로 없었다. 그리
고 바로 감자전과 메밀전병이 수줍은 듯 앞에 차려졌는데 감자전은 강원도에서 먹을 수 있는
일반적인 감자전 맛이고, 메밀전병은 정선5일장과 동해(東海) 북평5일장에서 먹던 그 맛과 비
슷하다. 전병은 거의 20덩이로 이루어져 있으며, 간장 양념장에 찍어 먹으면 고소하다.
이윽고 춘천스타일 음식의 제왕인 막국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막국수는 춘천을 비롯한 강원도
의 토속음식으로 국수와 계란 반토막, 돼지고기, 당근, 오이 등이 버무러져 막국수를 이루고
있다. 식당 종업원의 안내로 지정된 육수를 조금 부어서 막 비벼 먹으니 제법 맛이 살아난다.
그렇게 주문한 음식을 모두 처리하니 포만감의 행복과 식곤증이 살짝 밀려와 나를 희롱한다.


▲  감자전과 메밀전병, 김치 2종류

▲  막국수의 위엄

식당을 나오니 날씨는 더욱 심술을 부려 바람이 더욱 까칠해졌다. 이제는 쿨하게 집으로 돌아
가야 될 시간, 남춘천역까지 걸어가 경춘선 전철을 타고 미련없이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한겨울 춘천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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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동해바다를 거닐다. 부산 기장 봄나들이 ~~~ (죽성리왜성, 죽성항, 황학대, 죽성성당, 장어구이 1접시)

 


' 부산 기장 동해바다 나들이 (기장 죽성리 일대) '

▲  죽성리왜성에서 바라본 죽성리와 동해바다
(정면에 큰 나무가 죽성리해송)

▲  죽성리왜성

▲  죽성리 월전포구


 

 

지루했던 겨울이 저물고 봄이 완전히 천하를 접수했던 4월의 한복판에 겨울로부터 해방된
기분도 만끽할 겸, 그리운 얼굴도 보고자 간만에 부산을 찾았다.
부산(釜山)은 이 땅의 2번째 대도시이자 천하 제일의 항구 도시로 북쪽은 울산 울주군(蔚
州郡), 서쪽은 경남 창원과 김해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동쪽은 너른 동해바다를 품고 있
으며, 남쪽은 바다 건너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는 큰 지역이다.

부산으로 내려가던 중, 잠시 대구에서 발길을 멈추고 팔공산(八公山)에 안긴 파계사(把溪
寺)와 성전암(聖殿庵)을 둘러보며 산사(山寺)의 봄 풍경을 즐겼다. (☞ 관련글 보러가기)
그런 다음 동대구 고속터미널에서 고속버스로 부산으로 내려가 광안동(廣安洞)에 있는 친
한 형님 집에 문을 두드렸다.

저녁을 먹고자 광안리 해변 인근을 거닐다가 소금구이 닭갈비집이 눈에 띄어 그곳에 자리
를 피고 닭갈비에 소주를 여러 잔 걸치며 간만에 회포를 풀었다. 물론 1차로 끝나면 섭하
지. 하여 집으로 돌아와 2차를 하며 다음날 나들이 장소를 모의하다가 새벽 1시에 꿈나라
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찬란한 여명의 재촉을 받으며 부시시 잠에서 깨니 벌써 9시였다. 그
날 일정은 다소 길기 때문에 잠에서 벗어나기 싫은 게으른 몸을 억지로 끌며 세수를 하고
10시에 광안동을 나섰다. 광안역 정류장에 이르니 그의 후배 하나가 합류하여 3명이서 기
장군(機張郡) 동해바다 나들이를 떠나게 되었다.

광안역에서 부산시내버스 39번(기장읍 교리↔용호동)을 타고 수영로터리, 해운대, 송정역
, 청강리를 지나 기장읍내 한복판에 자리한 기장지구대에서 내렸다. 그런 다음 건너편 정
류장에서 죽성리로 가는 기장군 마을버스 6번을 기다리니 5분도 안되어 버스가 나타나 활
짝 입을 벌린다.
주말 나들이 수요로 조그만 마을버스는 바퀴가 가라앉을 정도로 만석을 이루었다. 우리는
재빨리 탑승하여 앉아갈 수 있었지만 조금만 늦었어도 입석 신세를 면치 못할 뻔했다. 비
록 죽성리까지 10분 정도 거리에 불과하지만 서서 가는 것은 애나 어른이나 힘든 것은 마
찬가지이다.
버스는 시간이 되자 읍내에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몸을 움직였다. 죽성사거리와 기장
군청 남쪽 고개, 신천리를 지나 죽성초교에서 두 발을 내리니 바로 남쪽 언덕에 우리의 1
번째 목적지인 죽성리 해송이 기다리고 있었다.


 

  6그루가 합심하여 하나의 거대한 나무를 이룬 오래된 소나무
죽성리해송(竹城里海松) - 부산 지방기념물 50호

▲  죽성리해송의 위엄

죽성리 두호마을 서쪽에는 얕으막한 언덕이 푸른 초원처럼 누워있다. 대부분 경작지가 이루어
진 그 언덕 정상에는 유난히도 초록 빛을 발하는 장대한 소나무가 동대해(東大海)를 굽어보고
있으니 그 나무가 바로 이곳의 오랜 명물인 죽성리 해송이다.

죽성리 해송은 소나무의 일종인 곰솔로 줄기 껍질이 다른 소나무보다 검다고 해서 흑송(黑松)
이라 불리기도 하며, 바닷가 소나무란 뜻의 해송(海松)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곰솔은 남쪽
바닷가에서 많이 자라고 있는데 소금기가 서린 짠 바닷바람에도 잘 견딘다.
이 나무는 겉으로 보면 1그루로 보이지만 6그루의 나무가 한 지붕을 이룬 것으로 높이 약 10m,
나무 지름이 30~40m에 달한다. 나이는 250~300년 정도로 여겨지며 언덕에 있는 경작지를 바닷
바람의 핍박으로부터 보호하고자 심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 곰솔 가족은 강인한 협동심을 보이
며 서로를 보듬고 있으며, 거의 하나의 나무처럼 자라고 있어 안내문을 살피지 않으면 정말 1
그루의 나무로 오인하기 쉽다.
나무의 키가 훤칠하게 크고 덩치도 제법 있으며, 반경 0.5리 이내에는 키 큰 나무도 거의 없어
세상 중심에 서 있는 큰 나무처럼 웅장함을 진하게 풍긴다. 그리고 나무의 자태도 아름답고 바
다가 바라보이는 언덕 정상에 자리해 있어 사진쟁이와 그림쟁이들이 많이 찾는다.

해송의 그늘로 들어서면 나무들 사이로 조그만 당집인 국수당이 끼여있다. 나무가 제법 풍채를
드러내며 자라나자 마을 사람들이 나무 사이에 당집을 만들어 마을 성황신을 모시는 국수당으
로 삼았는데,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제물을 푸짐하게 차리고 풍어제(風魚祭)를 지낸다. 이 땅
의 어느 마을이든 마을의 안녕을 책임지는 당집이 있지만 나무 사이에 당집을 둔 경우는 별로
없다.

* 죽성리해송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249


▲  죽성리해송에서 바라본 죽성리 두호마을과 동대해

▲  해송 밑에 둥지를 틀어 마을을 지키는 국수당(성황당)
태극 문양이 그려진 국수당은 풍어제 등 당제(堂祭) 외에는 굳게 닫혀져 있다.
나무 밑도리 사이에 당집이 깃든 흔치 않은 곳으로 당집 좌우에는
돌로 벽을 만들어 내부를 보호한다.

▲  솔잎과 솔방울, 거기에 장대한 세월의 무게까지 듬뿍 더해져 가지가
거의 땅으로 내려 앉았다. <철기둥을 세워 가지가 땅에 완전히
주저앉지 않도록 막고 있음>

▲  죽성리해송 인근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기장 미역
기장은 미역이 유명하다. 이렇게 해송 인근에 널어두었으니 해송의 기운도
양념으로 듬뿍 더해져 더욱 최상품으로 끌어올려줄 것이다.


 

  죽성리에서 만난 임진왜란의 쓰라린 흔적
죽성리왜성(竹城里倭城) - 부산 지방기념물 48호

▲  죽성리해송에서 바라본 죽성리왜성 (산꼭대기에 보이는 성)

죽성리해송에서 서쪽(바다와 반대쪽)을 보면 높다란 언덕 위로 성곽 하나가 손에 잡힐 듯 가까
이에 보일 것이다. 그 성곽이 바로 임진왜란이 이곳에 남긴 쓰라린 흔적, 죽성리왜성이다.

해송에서 정겨운 시골길을 5분 정도 가면 왜성을 품은 언덕 밑에 이른다. 이곳에는 주차장, 해
우소가 있는데, 여기서 성으로 인도하는 나무 계단을 타고 2~3분 오르면 왜성의 아랫도리에 이
른다. 계단은 답사 편의를 위해 기장군에서 닦은 것으로 계단 옆에 흙길이 나란히 이어져 있으
니 개인 취향대로 움직이면 된다.
왜성 아랫도리에서 조금 더 오르면 왜성의 중심부이고, 중심부 서남쪽에 왜성 꼭대기가 있는데,
그곳에는 왜성의 본부라 할 수 있는 천수대(天守臺)터가 있다. 천수대의 모습은 왜열도 오사까
성(大阪城)에 있는 푸른 지붕을 지닌 큰 기와집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죽성리왜성은 1593년 봄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왜군과 지역 주민을 동원해 쌓은 순수
100%의 왜성(倭城)이다. 한참 북진을 하며 세를 과시하던 왜군은 1593년에 접어들어 조선의 대
대적인 토벌 작전과 왜열도에서는 맛보기 힘든 강추위로 고전하면서 순식간에 울산과 기장, 부
산, 창원 등 경상도 해안 지역으로 밀려났다.
더 이상 밀려나기 싫었던 왜군은 바다와 무척이나 가까운 산과 언덕에 성을 쌓고 자기 집 마냥
들어앉아 장기전을 준비했다. 그들이 해안가 언덕을 선호한 것은 수비력 강화와 서로 간의 긴
밀한 연락 및 병력/군수물자 수송 편의, 그리고 위급시 신속히 줄행랑을 치고자 함이다.

이 왜성은 죽성리 뒤쪽 언덕에 자리해 있는데, 서생포왜성(西生浦倭城)과 부산왜성 중간에 자
리해 서로를 연결하였다. 성 둘레는 약 960m, 성벽 높이 4m로 3단으로 축성되었으며, 성내(城
內) 면적은 11,776평 정도로 왜성 가운데 큰 편에 속한다. 장방형(長方形)의 크고 작은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성벽은 안쪽으로 조금씩 기울어진 이른바 들여쌓기 공법이다. 이 공법은 천하
제일의 축성술(築城術)을 자랑했던 고구려(高句麗)의 축성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부산왜성과 형태가 비슷하며, 왜열도에서는 기장성(機張城)이라 부른다. 지금도
왜열도에서 많이 답사를 온다고 하는데, 1598년 왜군이 도망친 이후 성이 버려지면서 천수대와
성문, 주요 시설이 사라졌고, 마을 사람들이 밭을 일구거나 집을 지으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
다. 허나 성곽은 쓸데없이 잘 남아있어 왜성 가운데 건강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한때 사적 52호의 외람되는 지위를 누리기도 했으나 1997년 사적에서 정리되어 버려졌다가 부
산시에서 지방기념물로 수습해 죽성리해송, 죽성성당, 죽성리 해변과 한 덩어리로 묶어 기장군
의 주요 명소로 키우고 있다.

왜성 주변은 상당수 경작지로 쓰이고 있으며, 왜성 북쪽과 계단이 있는 남쪽에는 소나무가 조
금 우거져 마치 양쪽에만 머리숱이 조금 있는 대머리를 보는 듯 하다.


▲  죽성리왜성으로 오르는 나무 계단
계단 주변은 유난히 소나무가 무성하여 이 땅을 요란하게 거치고 간 아픈 과거를
조금이나마 덮어주는 듯 하다. 그런다고 그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  풀이 잔잔히 돋아난 죽성리왜성의 아랫부분

▲  약간 비스듬히 누운 죽성리왜성의 본성(本城)

▲  왜성 외곽에서 본성으로 이어지던 성문터
왜성은 작은 산이나 언덕에 짧게 몇 겹으로 두룬 덩어리 같은 형태라 딱히
긴 성이 없다. 그나마 서생포왜성이 좀 긴 편에 속한다.

▲  죽성리왜성에서 바라본 죽성항과 두호마을
저 포구에 배를 정박해 주변 왜성과 수시로 연락을 취하며 병력과 물자를
수송했고 끝내는 저곳을 통해 줄행랑까지 쳤다.

▲  죽성리왜성에서 바라본 죽성리
평화로운 어촌 풍경에 속세에서 오염된 안구와 마음이 정화되는 듯 하다.
바닷가에 죽성리 두호마을과 월전마을(사진 오른쪽)이 형성되어 있고,
마을과 포구 주변에는 경작지가 많아 나무가 별로 없다.

▲  왜성 성곽에 뿌리를 내린 나무
하늘을 향해 무언가를 애타게 열망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  왜성의 중심인 본환(本丸, 본성)

▲  연병장처럼 넓은 본환 - 잡초가 잔잔히 녹색 물결을 이룬다.

▲  죽성리왜성 서쪽에 길게 누운 봉대산(烽臺山) 북쪽 자락

죽성리왜성은 계곡이 없는 낮은 언덕에 자리해 있어 물이 나오는 곳이 없다. 왜성 서쪽에 있는
봉대산에서 식수를 운반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군이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후방이라 물 수송에
는 그리 어려움은 없었다. <봉대산에는 봉수대(烽燧臺)가 있었음>

▲  본환의 서북쪽 성곽

▲  북쪽에서 바라본 본환 내부


▲  죽성리왜성의 꼭대기인 천수대(天守臺)터

왜성 정상부에 자리한 천수대는 왜장이 자고, 먹고, 부하들을 지휘하던 공간으로 사방이 확 트
여 조망(眺望)도 일품이다. 천수대의 모습은 왜열도 오사까성이나 구마모토성 천수각의 축소판
으로 보면 될 듯 싶다. 지금은 풀만 무성하나 바다를 바라보며 우뚝 자리했을 천수대의 모습이
자못 대단했을 것이며, 조선군의 공격 가능성이 적은 후방이라 왜장은 무척 편하게 지냈을 것
이다. (조선군이 서생포왜성을 점령해야 이곳을 마음 편히 공격할 수 있었음)

※ 죽성리해송, 죽성리왜성 찾아가기 (2017년 4월 기준)
① 부산시내에서 기장읍까지
* 지하철 2호선 해운대역(1/7번 출구)에서 39, 181번 시내버스를 타고 기장지구대 하차 (181번
  은 해동용궁사, 대변으로 다소 돌아감)
* 지하철 2호선 장산역(5/7번 출구 사이)에서 182번 시내버스를 타고 기장지구대 하차 (30~40
  분 간격)
* 지하철 4호선 안평역(4번 출구)에서 36, 183, 188번 시내버스를 타고 기장지구대 하차 (183,
  188번을 탔을 경우 기장중학교, 기장성당에서 내려도 됨)
* 부산대병원(1호선 토성역 9번 출구), 남포동, 부산역, 경성대 부경대역(1번 출구)에서 1003
  번 급행좌석버스를 타고 기장성당이나 기장지구대 하차
* 동해선 전철(부전↔일광)이나 동해남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기장역에서 하차, 1번 출구
  를 나와서 4분 정도 걸으면 기장중학교 정류장이다.
② 기장에서 죽성리까지
* 기장지구대, 기장중교(기장역 1번 출구), 기장성당에서 기장군 마을버스 6번(20~40분 간격)을
  타고 죽성초교 하차, 해송까지는 도보 5~6분, 왜성은 10분 정도 소요 / 황학대는 두호마을에
  서 내리면 되며, 월전마을은 월전 종점에서 내리면 된다.
③ 승용차
* 부산시내(반송/해운대) → 죽성4거리에서 죽성리 방면 죽성로로 진입 → 죽성초교 → 죽성리
  해송, 죽성리왜성, 죽성성당 (왜성 밑에 주차장 있음 / 해송은 인근 길가에 주차)

* 죽성리왜성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603일원


 

  죽성리 바닷가 둘러보기 (황학대, 죽성성당)

▲  죽성항 (오른쪽에 나무가 우거진 곳이 황학대)

▲  죽성리의 오랜 경승지, 황학대(黃鶴臺)

씁쓸한 화석으로 이 땅에 남아있는 죽성리왜성을 둘러보고 죽성항(죽성포구)으로 나왔다. 죽성
리는 동대해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어촌이지만 볼거리와 해산 먹거리가 풍성하
여 생각 외로 머무는 시간을 길게 만든다. 우선 앞에서 언급한 죽성리해송과 왜성이 있고, 바
닷가에는 황학대와 드라마 촬영지였던 죽성성당이 있으며 마을 남쪽에는 월전마을이 있다. 먹
거리는 죽성리 북부인 두호보다는 남부인 월전이 더 많은데, 이곳은 장어구이가 유명하다.

죽성항에는 소나무가 우거진 조촐한 바위 동산이 포구의 운치를 조금 돋구고 있다. 이 동산은
기장의 오랜 명승지인 황학대로 예전에는 거의 섬이었으나 방파제와 항만 시설이 닦이면서 육
지로 흡수되었다.


▲  황학대의 동남쪽 부분

황학대는 조선 중기에 활동했던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윤선도야 워
낙 유명한 인물이니 모르는 이는 거의 없겠지만 그가 여기서 오랫동안 유배살이를 했던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나도 여기서 처음 알았음~~

그는 1616년(광해군 8년) 광해군(光海君)을 지지하는 북인(北人) 일파의 죄상을 밝히는 병진소
(丙辰疏)를 올린 것이 원인이 되어 서울에서 2,000리 이상 떨어진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떨려
났다. 그러다가 1년 뒤, 거기서 3,000리 이상 떨어진 기장 죽성리로 이송되어 7년이나 유배생
활을 했다. 귀양살이 때문에 조선 땅을 남북으로 완전 종주를 했던 것이다. 토가 나올 정도로
그 먼거리를 강제로 이동하느라 고산도 무척 진을 뺐을 것이다.

윤선도는 백사장 건너에 있는 송도(松島)를 옛날 신선이 황학(黃鶴)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서린 양자강(揚子江) 하류의 황학루(黃鶴樓)와 견주어 황학대로 멋대로 이름을 갈고 매
일같이 찾아와 시를 짓고 책을 읽으며 시름을 달랬다.
그는 여기서 견회요(遣懷謠), 우후요(雨後謠) 등의 주옥 같은 시 6개를 남겼으며, 죽성리 뒷산
인 봉대산에 자주 올라가 약초를 캐어 병에 걸린 지역 사람들에게 약을 지어주거나 치료를 해
주니 죽성 사람들은 그를 서울에서 온 의원님이라 부르며 존경했다고 한다.

이곳에 오르던 윤선도도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20세기 후반에 방파제와 항만 공사로 백사장 또
한 이슬처럼 사라졌으며, 강제로 연륙되어 육지의 일부가 되버리면서 옛 운치도 다소 녹아내렸
다. 게다가 이곳을 덮고 있는 소나무도 1995년 수해로 뿌리가 뽑히는 피해를 입었는데, 이후로
도 계속 나무들이 말라가면서 황학대는 그야말로 세월의 무덤 같은 곳이 되버렸다.
다행히 기장군청에서 1,000만원의 돈을 들여 황학대를 살피면서 나무들이 다시 살아났고 웃음
을 잃었던 황학대의 표정도 밝아지면서 이곳의 풍경을 크게 수식해주는 꿀단지가 되었다.


▲  황학대의 정상 부분
윤선도 뿐 아니라 지역 선비들과 동네 사람들이 술 1잔의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  두호마을 당집
바다에 제를 지내는 당집으로 굳게 닫힌 문짝에 3색 태극마크가 그려져 있다.

▲  죽성항의 평화로운 풍경
바깥 세상은 아비규환처럼 숨가쁘게 흘러가건만 이곳은 모든 게 정지된 듯
그저 한가롭기만 하다. 죽성리왜성이 활용되던 임진~정유란 시절에는
왜군들의 배로 득실거렸던 현장이기도 하다.

▲  바닷가에 자리한 죽성성당

두호마을 남쪽 바닷가에는 서양 동화에나 나올법한 작은 성당(聖堂)이 있다. 이 성당은 2009년
에 방영된 드라마 '드림(Dream)'의 촬영장으로 콩 볶듯이 지어진 것으로 겉모습만 성당이다.
아담하게 생긴 성당과 주변의 해안 풍경이 아름다워 죽성리의 새로운 명소로 추앙받고 있으며,
처음에는 죽성성당이라 불리다가 드라마 이름을 따서 '드림성당'으로 바꾼 것을 다시 죽성성당
으로 갈았다. 지어진지 10년도 되지 않았건만 건물이 벌써부터 노화현상을 보여 2017년 2월 새
로 지었는데, 이때 지역 사람들이 종교적인 부분을 지워줄 것을 요청하여 마리아상과 십자가를
싹 치워버렸다. 그래서 정체가 더 아리송한 성당 아닌 성당이 되어버렸다.

▲  세월의 저편으로 사라진 하얀 피부의
성모마리아상 (지금은 없음)

▲  옆에서 바라본 죽성성당
성당 바로 옆에 등대가 붙어있다.


▲  죽성성당 주변 바닷가에 드러누운 울퉁불퉁 바위들

▲  죽성리의 어느 장어구이집에서 먹은 장어구이

죽성리 일대를 정신없이 누비니 어느덧 13시가 넘었다. 아침도 먹지 못한 터라 뱃속은 그야말
로 폭동 직전, 하여 불만에 잠긴 뱃속을 달래고자 점심 장소를 물색하다가 월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적당한 식당이 눈에 띄어 그곳으로 들어갔다.
두호마을은 회와 조개, 장어구이를 다루는 식당이 여럿 있지만 장어구이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월전마을에 밀려서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다. 그에 반해 우리가 들어간 식당과 월전마을의 많
은 식당들은 봐글봐글하다.

우리는 주차장이 바라보이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황제처럼 먹을 요량으로 남정네에게 무척
이나 좋다는 장어구이와 모듬조개구이를 주문했다. 이렇게 장어와 조개구이를 먹으니 곡차 1잔
을 겯드려야 되겠지. 그래서 동동주도 넉넉히 시켰다.


▲  모듬조개구이의 위엄

자신을 불태우는 숯불 위에 먼저 장어를 올려 모락모락 익혀 입에 넣는다. 장어는 맛이 좀 별
로였으나 장어 후속으로 구운 모듬조개구이는 맛깔스러웠다. 큰 조개 안에 조개살을 비롯해 파
와 마늘 등이 버무려져 하나의 작품처럼 나왔는데, 숯불 위에서 지글지글 구우니 거기서 나오
는 육수(조개의 눈물)가 제법 끝내줬다. 그래서 서로 조개를 더 챙기려고 아우성을 떨었다.

밑반찬은 김치와 도토리묵, 상추, 산채나물 등 대략 8가지 정도가 펼쳐졌다. 밑반찬도 그런데
로 맛이 괜찮아 밥도둑이 따로 없었으며, 금세 동이 나고 더 달라고 한 것이 가히 5번은 넘을
듯 싶다. 동동주도 금세 1동이를 비워 하나를 더 불렀는데 배가 불러 간신히 2번째 동이를 비
웠고, 메밀막국수로 식사를 기분 좋게 마무리하였다.
그렇게 점심을 먹어대니 폭동 직전이던 뱃속은 며칠을 굶어도 끄떡 없을 정도로 가득 찼고, 식
곤증의 일환으로 졸음이 슬쩍 마수를 부리자 후식 커피로 그들을 쫓아내며 다시 길을 재촉했다.
일행들은 송정(松亭)까지 걸어가자고 했으나 여기서 거기까지는 20리가 넘는 거리이다. 하지만
일단 갈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가보기로 했다.


▲  남쪽에서 본 월전마을 (월전포구, 월전방파제)

죽성리의 남부를 이루고 있는 월전마을에서 대변까지는 3km 정도 된다. 이 구간을 운행하는 시
내버스나 마을버스는 일체 없으며, 1.5~2차선 정도의 길이 바다와 적당히 거리를 두며 이어진
다. 월전 남쪽에는 식당을 비롯해 분위기를 내세운 카페들이 뿌리를 내렸고, 그 이후 대변(大
邊) 동쪽까지는 드문드문 민가(民家)가 보일 뿐이다.
휴일이라 그런지 월전, 죽성으로 외식을 가거나 나들이를 나온 차량들이 3분이 멀다하고 지나
갔고 대변에서 월전 구간을 걸어서 이동하는 도보꾼도 종종 눈에 띈다. 바닷가는 중간에 등대
가 있는 곳을 빼고는 어디든 자유롭게 바다 곁으로 내려갈 수 있다.


내용 분량상 본글은 여기서 끝 ~~ 이후 내용은 언젠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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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아늑한 옆산, 아차산에 올라 장대했던 고구려를 추억하다~~~ (홍련봉보루, 아차산성, 서울둘레길, 아차산보루)

 


' 수도권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나들이 (아차산성) '

▲  아차산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  아차산5보루

▲  아차산성

 


 

아차산은 해발 287m(또는 285m)로 용마산과 망우산을 거느린 큰 산줄기이다. 서울 강북의
동남쪽 벽으로<동북쪽 벽은 수락산과 불암산> 서울 광진구와 중랑구, 경기도 구리시의 경
계를 이루고 있으며, 예전에는 중랑구 봉화산(烽火山)까지 아차산의 영역이었다. <봉화산
에 있는 봉수대를 '아차산 봉수대'라 부름>

아차산은 음은 같지만 한자 표기만 해도 무려 4개(阿嵯, 峨嵯, 阿且. 峩嵯)씩이나 되는데,
삼국시대에는 아차(阿且), 아단(阿旦)이라 불렸으며, 고려 때 이르러 지금 널리 쓰이는 '
아차(峨嵯)'란 이름이 나타난다. ('峩嵯'도 이때 나타남)
아단(旦)이란 이름은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세우고 이름을 단(旦)으로 고치자 제
왕의 이름을 피하는 법칙에 따라 '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갈았다는 이야기가 있
으며 조선 때는 악계산(嶽溪山), 남쪽을 향해 솟은 산이라 하여 남행산(南行山)이란 별칭
까지 있었다.


겉으로 보면 수도권에 널린 흔하고 흔한 산이지만 천하가 서울의 북현무(北玄武) 북악산<
北岳山, 백악산 342m>보다 키가 더 작은 이 산을 주목하고 있다. 바로 고구려의 영광스러
운 역사가 진하게 배여있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과 만주, 요동, 요서(遼西) 등 차디찬 북
(北方)을 제외한 남한 영역에서 고구려 유적이 몰려있는 유일한 현장으로 그 값어치는 실
로 대단하다.
천박한 오랑캐 강대국들에게 둘러싸여 안그래도 좁아터진 땅, 남과 북으로 갈라진 채, 70
여 년 넘게 아옹다옹거리며 살아온 우리에게 너른 대륙과 바다를 다스렸던 고구려(高句麗
)와 발해(渤海), 백제(百濟), 옛 조선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이 너무 크기 때문일 것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아차산은 거의 동네 뒷산이었다. 그러다가 1989년 큰 산불이 터졌는
데, 이를 진화하는 과정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길게 이어진 이상한 돌무지와 산봉우리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파인 구덩이들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그들을 들춰보니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아차산 장성(長城)과 보루들이었다.
아차산장성은 아차산에서 용마산, 망우산까지 이어진 장대한 성으로 돌성과 토성(土城)으
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차산 주능선을 반달 모양으로 좌우 2겹으로 감싼 형태로 조성되었
는데, 중랑천을 건너 서울시립대 뒷산인 배봉산(拜峰山, 해발 110m)까지 이어졌다는 학설
도 있으며, 백제의 첫 도읍으로 한강 이북 어딘가에 있었던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의 흔
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들의 발견으로 아차산에 대한 호기심이 격하게 솟은 구리시(구리문화원)는 1994년 아차
산 일대를 조사하여 15개의 보루를 발견했고, 1997년 이후 아차산4보루를 비롯해 땅 속에
잠긴 보루와 유물을 끄집어냈는데, 이들이 거의 고구려 것으로 밝혀지면서 고구려 유적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남한에 한줄기 단비를 선사했다.

보루의 무더기 출현에 힘입어 아차산 일대가 고구려 유적의 꿀단지로 격하게 떠오르자 서
울 광진구(廣津區)와 경기도 구리시가 이곳을 둘러싸고 서로 고구려의 도시임을 자처하며
오랫동안 쓸데없는 소모전을 벌이기도 했고, 아차산의 존재감이 나날이 커짐에 따라 등산
과 답사 수요까지 계속 상승 곡선을 달리게 되었다. 게다가 완만한 산세와 일품 조망으로
야간 등산(야등) 수요까지 늘어나 서울 야등의 성지(聖地)로 추앙받고 있으며, 천하 둘레
길의 성지인 서울둘레길 2코스(용마·아차산코스)도 이곳에 숟가락을 얹히며 남북으로 흘
러간다.

이처럼 든든한 후광인 고구려 유적과 완만하고 아름다운 산세 덕에 관악산(冠岳山), 수락
산(水落山) 등 쟁쟁한 뫼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 아차산, 하지만 만약 고구려 유적이 없
었다면 아차산은 그저 그런 평범한 산으로 조용히 누워있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사람도
그렇고 산도 그렇고 때와 장소를 정말 잘 만나야 된다.


 

♠  고구려를 품은 꿀단지, 아차산 입문

▲  친수계곡 입구에 자리한 아차산 표석과 사슴 모형등

계절의 여왕으로 추앙받는 5월의 평화로운 주말, 일행들과 아차산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가운
데에 걸려있던 14시, 아차산역(5호선)에서 길을 시작하여 음료수와 떡, 과자 등을 사들고 아차
산으로 인도하는 골목길을 쫓았다.

아차산은 1991년 중학교 시절에 처음 인연을 지었다. 이후 20년 동안 인연이 없다가 2011년 야
간 등산으로 여러 번 찾았고, 2014년 여름 이후 야간과 낮 산행으로 발길이 무척 잦아졌다. 내
가 좋아하는 뫼의 하나다보니 아무리 많이 가도 질리기는 커녕 집에 온 듯, 반갑기만 하다. 그
아차산에 퐁당퐁당 빠진 큰 이유는 그곳에 서린 고구려의 흔적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다음
은 빼어난 절경과 완만한 산세)

아차산 남쪽 밑에 자리한 아차산 생태공원에서 잠시 발을 멈추어 속세에서 사온 먹거리를 섭취
하고 잠시 아차산을 등지며 남쪽에 솟은 홍련봉을 오른다. 그 언덕은 구의2동 주택가와 아차산
공원 사이에 자리한 조그만 뫼로 아차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고 있는데, 그 정상에는 아차산 보
루의 최남단인 홍련봉 보루(堡壘) 유적이 깃들여져 있다.


▲  홍련봉 보루 입구 (아차산 만남의 광장 맞은편)
홍련봉 코스는 딱 1보루까지만 길이 이어져 있다. 그래서 다시 이곳으로
내려와야 된다. (1보루 이후는 길이 막힘)


▲  한참 조사를 받고 있는 홍련봉(紅蓮峰) 2보루 - 사적 455호

해발 60m 정도의 홍련봉 정상은 급한 경사와 달리 넓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은 장대한
기골을 지닌 아차산과 연결되어 있고, 동쪽과 서쪽, 남쪽은 평지라 조망도 나름 괜찮다. 또한
지척에 보이는 한강 너머로 강동, 송파 지역이 흔쾌히 두 눈에 들어오니 이런 곳에 산성이나
보루를 구축하면 제법 아름다운 요새가 된다.
하여 이곳에 일찌감치 매료된 옛 사람들은 보루를 3개씩이나 닦았는데 정상 북서쪽(북보루, 2
보루)과 남동쪽(남보루, 1보루)에 10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보루를 세웠으며, 홍련봉 남쪽 작
은 봉우리에도 보루 유적이 있다. 허나 그 유적은 정립회관 체육시설과 군사시설로 이미 아작
난 상태이다.

가는 날이 문닫는 날이라고 우리가 갔을 당시 2보루는 한참 발굴조사를 받느라 여념이 없었다.
2004년 이후 여러 차례 조사를 벌였지만 아직도 다 캐내지 못한 옛날 이야기 보따리를 끄집어
내려는 학자들의 불굴의 집념은 계속 되고 있었다. 그래서 보루 주변은 접근이 통제된 상태라
그 통제에 순응하며 금줄 너머로 그 뜨거운 현장을 지켜보았다.
발굴로 인해 강제로 흙색 속살을 드러내며 황량한 몰골이 되었지만 발굴이 끝나면 다시 자연의
옷과 돌을 입혀 보루를 산듯하게 복원할 계획이다.

2보루는 둘레 약 190m의 타원형 모양으로 남북 폭이 최대 85m, 동서 42m이다. 정상 일대를 평
탄하게 다듬고 조촐하게 보루를 쌓았는데 북서쪽에서 약 40m까지는 보루 주위의 토루(土壘)와
비슷한 높이로 흙이 깎여져있고 남동쪽 부분은 토루보다 2m가 낮다.


▲  홍련봉(紅蓮峰) 1보루 - 사적 455호

2보루에서 동쪽 숲길을 100m 가면 1보루가 나온다. 여긴 발굴조사가 끝났는지 2보루와 달리 인
적이 없어 한적했는데, 넓직한 푸른 덮개로 보루의 속살을 가리고 있었다.
이 보루는 서쪽 2보루와 비슷한 모습으로 둘레가 약 150m에 이르는 타원형이다. 폭은 최대 57m
, 최소 36m 정도이며, 남한 최초로 고구려 연꽃무늬 와당이 발견되어 아차산 보루의 중심 역할
을 했던 곳으로 여겨진다. 발굴 휴유증을 보듬고자 덮개를 뒤집어쓰며 곤히 잠든 보루를 건들
기가 그래서 굳이 그의 등에는 올라가지 않았다.

홍련봉 보루는 아차산보루와 달리 오래전에 확인이 된 유적으로 1942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성터로 나와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속세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버
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1994년 구리문화원이 아차산 일대를 뒤집으며 문화유적 정밀지표 조사
를 벌였고, 이곳이 고구려 보루로 크게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하여 2004년 고려대 매장문화재
연구소에서 홍련봉1보루의 속살을 털면서 고구려의 신성한 유적임이 밝혀진 것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홍련봉 보루의 신상을 털어보면 대략 이렇다. 아차산보루와 비슷한 5~6세기에
고구려가 쌓은 것으로 보루 안에 온돌을 갖춘 건물과 물을 보관하는 저수시설, 물을 밖으로 내
보내는 배수시설, 토기와 기와를 생산하던 조그만 가마터가 있었다. 북쪽 평탄지에는 저수시설
이 나왔는데, 바닥에 목재를 깔았던 흔적이 있으며, 흙을 파서 찰흙을 입힌 뒤 석축으로 벽면
을 쌓았다. 2005년에 확인된 가마터 흔적에서는 온돌 3기가 나왔고, 온돌을 폐기한 후 모래를
섞은 흙을 다져 가마터 시설을 조성한 흔적이 나왔다.
또한 보루 내부에서 외부로 이어지는 완벽한 배수시설 구조가 나왔으며, 보루 밖에는 'ㄴ'자로
판 후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도로 시설이 나왔고, 2013년 여름 이후에는 마른 해자의 흔적까지
쏟아져 나오면서 세상을 크게 놀라게 했다. 이는 남한에서 최초로 확인된 고구려 해자였던 것
이다. 해자란 방어력을 높이고자 성곽 주위에 두룬 물줄기로 북서쪽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에
서 드러났는데 규모는 길이 204m, 폭 1.5~2m, 깊이 0.6~2.5m, 단면 형태는 'U'자형과 'V'자형
이다.
이들은 흙을 파서 내,외벽을 이루고 있는데, 외벽 일부에는 배수로가 설치된 구간을 석축으로
쌓거나 따로 배수시설을 연결했으며 동/서쪽 내벽은 석축 성벽이다.

그리고 고구려 토기와 연꽃무늬 와당(기와), 철제 깃대, 철촉, 삽날 등 다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토기 중 '官瓮(관옹)'이 새겨진 붉은 토기와 '庚子(경자)'가 새겨진 토기가 있었다.
여기서 경자는 520년(또는 460년)을 뜻하며, 이를 통해 보루가 바쁘게 움직이던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여러 유물과 시설이 발견되면서 비슷한 시설 흔적이 나왔던 아차산3보루와 더불어 아차
산의 군수물자를 책임지던 병참기지(兵站基地)로 여겨지며, 연꽃무늬 와당을 통해 아차산 보루
의 중심지였음을 귀뜀해준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곳이 아차산의 중요한 목구멍이 되었을까? 아마도 한강이 가까운 탓이 아닐
까 싶다.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시절 고구려는 중원대륙 진출에 대한 몸풀기로 아리수(阿利
水, 한강) 이북을 점령했고, 장수태왕(長壽太王) 말엽인 475년에는 한강을 건너 경북 중부까지
장악했다.
한강은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요충지로 그 강을 통해 아차산을 비롯한 남쪽 후방으로 물자를 수
송했을 것은 뻔한 이치이니 강과 가깝고 아차산과 바로 이어지는 홍련봉과 인근 구의동(정립회
관), 자양동에 보루를 쌓아 아차산의 병참기지로 삼은 것이다.

허나 6세기 중반 신라가 백제의 뒷통수를 후려치며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그 기세로 아차산까
지 공격하자 고구려군은 강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털리고 말았다. 이는 온달(溫達)장군의 설화
를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신라는 이곳을 활용하여 한강과 서울 지역을 수비하고 고구려를 견
제했으나 8세기 이후 군사기지로서의 중요성이 떨어지면서 완전히 버려지게 된다.
그렇게 사람의 손길이 끊어진 보루는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완전히 헝클어졌고, 대자연의 힘
에 의해 아차산의 일부로 완전히 녹아버렸다. 그 억겁의 세월동안 자연에 강제로 묻히며 한이
단단히 쌓였을 홍련봉보루, 이제 그 한을 풀고 이곳에 묻힌 이야기 보따리(특히 고구려)를 모
두 풀어주기를 염원해본다.

홍련봉 보루는 '아차산 홍련봉 보루 유적'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기념물 21호의 지위를 누리
고 있었으나 사적 455호로 지정된 '아차산 일대 보루군'의 일원으로 흡수되었다.

* 홍련봉 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구의동 4-13


▲  홍련봉 1보루 밑에서 바라본 천하
숲 너머로 바로 보이는 아파트가 워커힐아파트이다.

▲  홍련봉 보루 조감도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

▲  아차산 소나무숲 입구

홍련봉 보루를 둘러보고 다시 내려와 아차산으로 인도하는 소나무숲으로 들어섰다. 아차산성으
로 가려면 이곳을 거쳐가는 것이 제일 빠르기 때문이다.

이 소나무숲은 아차산생태공원의 일원으로 소나무와 들꽃이 어우러진 상큼한 공간이다. 소나무
가 삼삼하여 따가운 햇살도 이곳만큼은 힘을 쓰지 못하며 달달한 솔내음을 머금은 솔바람이 살
포시 다가와 벌써부터 피어난 땀과 속세의 무성한 번뇌를 앗아간다. 소나무 그늘에는 들꽃이
가녀린 미소를 머금으며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에 무책임하게 돌을 던지고, 그런 꽃내음과
솔내음이 어우러져 조촐하게 극락을 연출한다.


▲  아차산 소나무숲의 한복판


 

♠  삼국시대 주요 격전지였던 아차산성(阿且山城) - 사적 234호

▲  아차산성 서벽 (1)

아차산 남쪽 자락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아차산성이 장대한 세월을 머금으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아차산생태공원에서 소나무숲을 지나 10분 정도 오르면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덥수룩하
게 자라난 나무와 수풀로 오랫동안 고통 받아오던 것을 2013년 이후 성곽 주변을 꾸준히 다듬
으면서 북쪽과 남쪽 성벽도 그런데로 확인이 가능하다.
허나 아무리 꾸준히 이발을 하고 숯을 쳐내도 대자연의 의해 금세 수풀이 자라 성곽을 가리려
드니 역시나 인간의 피조물은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돌이나 모래알에 불과하다.

아차산성은 언제 축성되었는지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나 백제 9대 제왕인 책계왕(責稽王)이 위
례성(慰禮城)과 함께 수축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백제 초기(1~2세기 경)에 국도(國都)
인 위례성 주변 수비와 고구려의 남진을 막고자 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귀신도 지릴
정도로 상당히 오래 묵은 성이다.
처음에는 아단성(阿旦城)이라 불렸는데, 5세기 이후부터 단(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변
해 아차산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 한문은 비슷한 모양으로 인해 금석문(金石文)과 판각인쇄
에서 같이 쓰이는 경우가 많았으며, 음은 같지만 한자만 달리 하여 '峨嵯山城'이라 쓰는 경우
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문화재청에서 삼국사기에 나온 한자(阿且山城)를 정식 명칭으로 삼으
면서 한자 논쟁은 그런데로 종결이 되었으나 아차산의 공식 한자 표기인 '峨嵯山'과 달리 그
산성은 예전 한자로 따로 노는 이상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아차'란 이름 외에도 장한성(長
漢城), 광장성(廣壯城)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으니 한자 이름도 그렇고 별칭까지 참 복잡하다.
그만큼 이곳은 역사적으로도 꽤 복잡했던 곳이다.

4세기 후반 고구려의 위대한 군주, 광개토대왕(재위 392~413)이 한강 이북을 말끔히 장악하면
서 이곳은 백제의 심장을 겨낭한 고구려의 화살이 되었다. 위례성으로 여겨지는 서울 강동/송
파 지역이 훤히 바라보이는 잇점을 지닌 아차산을 흔쾌히 활용한 것이다.
그렇게 위례성(한성)을 새가 땅을 바라보듯 감시하며 기회를 엿보던 중 개로왕(蓋鹵王)이 고구
려의 최대 라이벌이자 동시에 백제 자신의 라이벌<동성왕(東城王) 시절에 산동반도에서 북위의
대군을 크게 때려잡은 사건이 있었음>이기도 했던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같이 치
자고 들쑤시는 일이 발생했다. (북위는 백제의 요구를 거절함)
이에 뚜껑이 열린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은 3만의 군사를 휘몰아 한성<漢城, 위례
성과 하남위례성을 한성이라 부름>을 공격했다.

고구려군은 화공(火攻)으로 성문과 도성(都城)을 불태웠고, 개로왕은 급히 도성을 버리고 줄행
랑을 치던 중, 자신의 장수인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尒萬年)을 만났다. 허나 이들
은 개로왕의 미움을 받아 고구려에 투항한 상태로 그를 잡고자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런 사실을 알 턱이 없던 개로왕은 크게 안심을 했으나, 그들이 왕에게 절을 하면서 바로 그의
얼굴을 향해 침을 3번 뱉고 온갖 육두문자를 내뱉은 다음 포박하여 고구려에 바쳤다.

그렇게 포로가 된 개로왕은 아차산성으로 끌려와 비참하게 살해되었고, 바다 건너 왜열도와 중
원대륙의 무수한 해안 영토를 거느렸던 백제의 도읍 위례성(한성)은 철저히 파괴되어 이 땅에
서 영구히 지워지고 말았다. 바로 장수태왕의 그 만행 때문에 이 땅의 학자들이 위례성을 찾느
라 오랫동안 진땀을 뺐던 것이다. (장수태왕 큰형님 너무 나빠여~~!)


▲  아차산성 서벽 (2)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고구려는 아차산성을 보조하고 한강과 중랑천, 구리 지역을 효과적
으로 수비하고자 아차~용마~망우산 산줄기에 조그만 보루를 주렁주렁 달아놓았다.
이곳에 설치된 보루는 발견되지 않은 것까지 고려하여 최대 30개 정도로 여겨지며, (현재 17기
가 발견됨) 이들 보루는 북쪽으로 봉화산과 수락산, 사패산(賜牌山), 불곡산, 양주, 연천 지역
까지 이어지는데, 주목할 점은 오직 서울과 경기 북부에서만 발견되는 고구려의 독특한 요새라
는 점이다. 이는 오랜 라이벌인 백제를 크게 의식하고 경계하고 있었음을 뜻하며 그만큼 백제
는 고구려의 강력한 적이었다.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 시절 온달이 이곳에 쳐들어온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전
하며, 이후 신라가 접수해 고구려를 막는 요충지로 삼았다. 한때는 북한산성(北漢山城)이라 불
리기도 했고, 7세기 중반까지 고구려가 종종 건드렸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대륙을 다스렸던 고구려가 사라지고(668년) 신라가 황해도와 강원도 지역을 간신히 장악하면서
아차산은 전방 신세에서 벗어났다. 즉 좁아터진 신라 땅의 한복판이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아
차산은 할 일이 크게 줄어들어 한가한 신세가 되었고, 결국 산성과 보루는 완전히 버려지게 되
었다. (신라 말에 모두 버려진 것으로 여겨짐) 보루는 대자연과 세월의 의해 모두 아작이 났지
만 아차산성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며 그 자리를 지켜왔다.


▲  아차산성 구조와 관련 사진들

산성의 둘레는 약 1,038m(길게 잡으면 1,125m)로 산허리에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테뫼식성이다.
아차산 남쪽 자락에서 워커힐 뒤쪽까지 이어져 있으며, 동문터와 남문터, 서문터, 수구(水口)
터, 곡성(曲城)터, 장대(將臺)터, 건물터, 온달장군이 마셨다고 전하는 우물이 있다. 장대(장
대터)는 전쟁시에는 장수들 지휘소로, 평상시에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쓰였다고 하며, 커
다란 왕개벚꽃나무 1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덩치로 봐서 100~2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진다.
성벽 높이는 평균 10m, 성 내부 면적은 약 103,375㎡이며, 광나루까지 성을 쌓은 흔적이 발견
되었으나 워커힐이 들어서면서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1997년과 1999년 광진구에서 부분 발굴조사를 벌여 고구려와 백제, 신라 토기와 기와파편, 흙
으로 만든 인물상, 철로 만든 솥과 쟁기날 등을 건졌고, 신라의 북한산성이 대충 이곳임이 밝
혀졌다.
그리고 2015년 광진구가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한국고고환경연구소와 함께 아차산성 남벽과
배수구 일대 4,575
를 대상으로 조사를 벌였는데, 그 결과 여러 흥미로운 존재들이 햇살을 보
았다. 고구려의 연꽃무늬 기와인 '연화문와당'이 나왔고 (홍련봉 1보루에서 발견된 와당과 비
슷한 형태임) 남벽 90m 외벽에서는 신라 건축의 특징인 외벽 보축(補築) 시설과 물을 내보내는
출수구 3곳, 내벽에서는 입수구 2곳이 나왔다. 또한 망대(望臺)터에서는 내외성벽을 비롯한 치
성(雉城)과 방대형 시설이 나왔으며, 신라의 연화문와당 10여 점과 '북한산성'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신라의 북한산성이 이곳임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었다.

허나 아차산성의 적지 않은 부분이 워커힐 관련 사유지로 묶여 있어 아직까지도 건드리지 못한
부분이 많다. 산성은 물론 그 주변까지 모두 뒤집으면 보다 많은 유물과 숨겨진 이야기가 쏟아
져 나올 것인데 그 점이 몹시 아쉽다.

1999년 이후 헝클어진 산성을 복원 정비하였고, 그들의 건강과 사유지 보호를 위해 산성 주변
에 철책을 둘러놓아 출입을 막고 있다. 그래서 이 땅에 널린 산성(山城) 유적 중 유일하게 접
근이 통제된 까칠한 성곽이 되었는데<휴전선과 민통선 지역의 성곽 유적은 제외> 2014년 이후
부터 서울시와 워커힐이 협의하여 산성을 개방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감감
무 소식이다.
<2017년 광진구청장이 신년사에서 아차산성을 복원 정비하고 4계절 힐링공간을 위한 아차산 문
화벨트 조성사업을 마무리해 아차산둘레길과 연계한 문화탐방 명소로 만들겠다고 언급했음>

서벽과 북벽 일부, 남벽 일부는 산길에서 휴전선 너머를 바라보듯 만날 수 있으나 그 외는 어
림도 없다. 다만 1년에 딱 1번 아차산성의 속살이 강제로 해방되는<인터넷 용어로 민주화가 되
는> 날이 있는데, 바로 1월 1일 아침, 아차산 해맞이 행사 때이다. 그렇다고 정식 개방되는 것
은 아니다. 그때만 되면 산꾼들이 해돋이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산성으로 마구 넘어 들어가는데
그 행렬에 살짝 묻어 들어가면 된다. 물론 정당한 방법은 아니나 그때만큼은 아차산 일대가 수
만 명에 달하는 해돋이 인파로 북새통을 이루니 단속반도 거의 손을 못쓴다. 어차피 산성에 해
꼬지만 안하면 된다.

아차산성 내부를 정당하게 둘러보고 싶다면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아차산 생태공원에 있음)'
에 문의하거나 '한강문화재연구원'에 도움을 청해보자. 나도 아직 아차산성의 속살로 들어간
적이 없다. 그곳이 속칭 민주화되기를 몇 년째 기다리고는 있지만 그 민주화라는 것이 참으로
힘들다. 마치 이 땅의 민주화가 힘들게 자리를 잡은 것처럼 말이다.

※ 아차산성 찾아가기 (2017년 4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구의역(1번 출구)에서 광진구마을버스 03번을 타고 영화사입구 하차, 동쪽으로
  펼쳐진 '영화사로'를 따라 10분 정도 가면 아차산생태공원 만남의광장이며, 여기서 소나무숲
  산길로 들어서 10분 정도 오르면 된다.
* 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1번 출구)에서 아차산생태공원까지 도보 15분 (길이 좀 복잡함)
* 지하철 5호선 아차산역(2번 출구)에서 아차산생태공원까지 도보 17분
* 아차산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5-11 (워커힐로 177)


▲  아차산성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부분
저곳에서는 산성을 지휘하는 장대터가 발견되었다.


▲  아차산성 서벽 앞 산길 - 철책 너머가 금지된 성, 아차산성이다.

▲  낙타고개

아차산성 서쪽 옆구리를 지나면 낙타고개가 마중을 나온다. 이곳은 아차산성이 있는 남쪽 봉우
리와 1보루로 이어지는 능선 사이에 쑥 들어가 있는데, 그 모습이 낙타의 목이나 등 부분의 굽
은 모양처럼 생겼다 해서 낙타고개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그대로 직진하면 아차산 주능선이며, 서쪽은 친수계곡과 영화사, 동쪽은 온달
샘석탑과 대장간마을, 우미내계곡으로 이어진다.


▲  낙타고개에서 아차산 정상으로 달려가는 숲길

▲  무덤 갈림길

낙타고개에서 아차산 정상까지는 야간 등산에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산길이 잘 닦여져 있다.
그 길을 조금 가면 석축으로 자리를 다지고 들어앉은 조그만 무덤이 나오는데, 여기서 길은 두
갈래로 갈린다. (누구 무덤인지는 모르겠으나 위치 하나는 좋아 보임)
아차산 정상과 주능선, 보루가 목적이면 왼쪽 계단길을, 범굴사(대성암)와 아차산3층석탑을 원
한다면 오른쪽 길로 간다.


 

♠  아차산 주능선 더듬기 (아차산1보루, 5보루)

▲  해맞이광장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1)
광진구와 송파(잠실), 강남, 대모산, 관악산 지역


무덤 갈림길에서 주능선을 오르면서 뒤와 옆을 살짝 돌아보는 여유를 누려보자. 그러면 허벌나
게 기가 막힌 조망이 두 눈으로 바로 달려올 것이다. 아차산이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 주
변이 거의 평지라 하늘 밑에 펼쳐진 천하를 훤히 굽어볼 수 있다. 이런 장쾌한 조망은 아차산
정상을 지나 용마산까지 이어지는데, 이 일품 조망 때문에 고구려가 보루를 잔뜩 달아 군사기
지로 삼았고 신라 또한 이곳을 애지중지했던 것이다.


▲  해맞이광장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2)
광진구, 강동, 송파, 남한산성, 대모산 지역

▲  광진구 해맞이광장 비석

무덤갈림길과 1보루 사이에 해맞이광장이 조촐하게 터를 닦았다. 이곳은 묵은 1,000년이 지고
새로운 1,000년이 도래하던 2000년 1월 1일 아침 7시, 광진구청에서 하늘과 가까운 이곳에서
새천년 해맞이 행사를 치른 것을 기리고자 돌을 쌓아 비석을 세우고 해맞이 광장으로 삼은 것
이다. 여기서는 지는 해는 물론 뜨는 해도 맞이할 수 있으며, 광진구가 야심차게 닦은 서울의
주요 해돋이 성지로 매년 1월 1일 아침마다 '아차산 해맞이축제'가 절찬리에 열린다.


▲  해맞이광장에서 바라본 천하 (1)
광진, 성동, 송파, 강남, 대모산, 관악산 지역


▲  해맞이광장에서 바라본 천하 (2)
강동구와 하남시, 남한산성과 검단산(黔丹山)

▲  해맞이광장에서 바라본 천하 (3)
'S' 라인을 보여주고 있는 한강과 구리, 강동구, 하남시, 남양주시 와부읍 지역

▲  아차산1보루 - 사적 455호

해맞이광장을 지나면 두툼히 살이 오른 아차산1보루터가 나온다. 이곳이 넘버원 1보루가 된 것
은 별 이유 없다. 남쪽을 기준으로 발견된 순서대로 나열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해발 250m에 자리한 1보루는 봉우리를 활용해 닦은 것으로 1994년 발굴조사 때 고구려 토기가
여럿 나왔다. 동쪽과 남쪽에서 보루 성벽이 확인되었는데, 보루의 정체가 알려지기 훨씬 이전
부터 보루의 남쪽 성벽 흔적을 밀어버리고 산길을 냈으나, 정체가 밝혀진 이후에는 보루 주변
에 나무 난간을 둘러 접근을 통제하고 그 옆구리에 우회길을 내었다. 그러다가 2015년 이후로
다시 보루를 개방하면서 자유로운 공간이 되었다.

아차산 보루 중 가장 남쪽으로(홍련봉 보루 제외) 5보루와 함께 아차산성과 아차산 정상을 이
어주는 요새였으며, 동과 남, 서쪽이 확 트여있어 자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다. 특히 5보루
와 남쪽 해맞이광장과 더불어 서울의 이름난 해돋이 명소로 추앙을 받고 있어 1월 1일만 되면
사람들로 봉우리가 무너질 지경이다.

보루의 구체적인 생김새는 제대로 파악되지 못했으나 고구려의 축성 양식과 복원된 아차산4보
루를 흔쾌히 참고하여 보루의 모습과 거기서 머물던 고구려 군사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어차피 산의 일부로 흡수된 폐허의 현장이고 그들의 생전의 모
습을 담은 사진이나 기록도 없으니까 말이다.

고구려는 아차산을 비롯하여 홍련봉, 구의동, 자양동, 용마산, 망우산, 수락산, 봉화산, 사패
산, 천보산, 불곡산, 연천 지역까지 많은 보루를 설치하여 아차산성 등의 주요 성을 보조하며
주변 지역을 지켰는데, 이들 보루 중,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아차산 보루 6곳, 용마산 보루 7
곳, 망우산 3곳, 수락산 1곳, 홍련봉 2곳을 '아차산 일대 보루군'으로 묶어 사적 455호로 지정
했다.


▲  아차산1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광진, 성동구, 동대문구 지역)

▲  아차산5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5보루터는 해발 267m 봉우리에 둥지를 튼 보루로 둘레 158m, 내부 면적은 1,818㎡ 정도
이다. 봉우리를 활용하여 보루를 다졌는데 보루에 씌웠던 성벽은 거친 세월의 흐름 속에 죄다
휩쓸려 사라지고 겨우 흔적 일부만 있는 형편이다. 북쪽 비탈면에 석축 일부가 남아있으나 보
존을 위해 흙으로 덮었으며, 보루를 잡아먹은 봉우리는 예전보다 살이 두툼해진 상태이다.

그의 정체가 밝혀지기 이전에는 주능선 산길이 보루 복판을 가로질러 흘러갔으나 보루임이 밝
혀진 이후에는 그의 건강을 위해 서쪽에 우회길을 닦았다. 다른 보루와 달리 신라 후기 토기가
여럿 출토되었고, 봉우리 모습이 마치 신라 스타일의 고분과도 비슷해 이를 두고 신라가 고구
려 보루를 밀어버리고 무덤을 만든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고보니 정말 신라 고분처럼
생겼다. 허나 신라는 산능선에 무덤을 잘쓰지 않는 편이라 이 역시 설에 불과하다.

5보루터는 쿨하게 개방되어 있다. 길이 봉우리 남북으로 닦여져 있으며, 그 봉우리에 올라서면
1보루를 비롯해 아차산 능선과 한강, 서울 강동구와 송파구, 광진구, 강남구, 대모산, 구리시,
남양주시(도농, 덕소 지역), 하남시 지역이 훤히 시야에 잡혀 왜 이곳에 보루를 쌓았는지 십분
이해가 간다.


▲  아차산5보루 정상에 닦여진 돌탑

이곳을 스쳐간 산꾼들이 하나씩 얹힌 돌이 모여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돌탑을 이루고 있
는 돌 대부분은 헝클어진 5보루 성돌로 여겨지며, 그 성돌이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인 돌
탑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렇게 그들의 삶은 돌고 도는 모양이다.


▲  아차산5보루 남쪽 부분

▲  아차산5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1)
사진 중앙에 보이는 곳이 태왕사신기 촬영지로 조성된 고구려대장간 마을이다.

▲  아차산5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2)
푸른 한강을 사이에 두고 구리시와 남양주시(도농, 덕소), 서울 강동구,
하남시 지역이 바라보인다.

▲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

5보루를 지나 계속 주능선을 고집하면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로 지정된 키 작은 소나무를 만나
게 된다.
아차산이 광진구의 소중한 꿀단지라 광진구가 그에게 들이는 정성은 참 대단하다. 그만큼 기대
하는 것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 정성의 하나로 2009년 가을, 아차산에 있는 소나무 중
괜찮은 것을 골라 아차산의 새로운 명물로 키우려고 계획을 세웠는데, 바로 이 나무가 그 대상
이 되어 명품소나무 1호란 그럴싸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이 소나무는 바위 틈에 단단히 뿌리를 내려 천하를 굽어보고 있는데, 가지는 굴곡이 자연스러
우며, 피부가 붉고 아름다워 단아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그의 나이는 40~50년 남짓으로 여
겨지며 나무 곁에는 천하를 굽어보게끔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에서 바라본 광진, 성동, 동대문구 지역
오른쪽 구석에 남산서울타워도 보인다.

▲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에서 바라본 용마산, 아차산 산줄기

▲  아차산 명품소나무 2호

명품소나무 1호를 지나면 바로 명품소나무 2호가 나온다. 이 나무는 밑둥부터 여러 가지로 솟
아올라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모습이 마치 고구려의 기상을 닮았다하여 명품소나무 2호의 감
투를 받았다. 그 역시 1호 나무와 함께 광진구청의 보살핌을 받으며 아차산의 차세대 명물을
꿈꾼다. (명품소나무 3호는 아직 없음)


▲  명품소나무2호에서 아차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길


 

♠  아차산 마무리

▲  아차산6보루

명품소나무 2호와 아차산3보루 사이에 아차산보루의 막내라 할 수 있는 6보루가 언덕처럼 봉긋
이 자리해 있다.
언덕처럼 솟은 터가 바로 6보루터로 2005년 3보루 발굴조사에 참여했던 사람이 우연히 발견했
다. 허나 아직까지 발굴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 생김새가 보루터 비슷하게 생겨서 아
차산6보루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추정 둘레는 약 80m 정도로 이곳에서 나왔던 옛 불씨는 흙을
덮어 보존하고 있다. 아차산 주능선 바로 동쪽으로 적지 않은 아차산의 과거를 간직하고 있으
리라 여겨지며 속히 조사를 벌여 6보루의 정체성을 밝혀주었으면 좋겠다.


▲  아차산6보루 부근에서 바라본 5보루

▲  아차산6보루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1)
가운데 보이는 산자락에 아차산성이 누워있고, 그 너머로 한강과 강동,
송파 지역이 바라보인다.

▲  아차산6보루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2)
강동구와 하남시 지역

아차산의 품에 들어설 때 처음에는 아차산 정상까지 가려고 했다. 허나 그 힘찬 발걸음은 6보
루에서 뚝 멈추고 말았다. 일몰 시간도 지척인데다가 다들 힘들다고 하소연을 했기 때문이다.
하여 아쉽지만 주능선은 이쯤에서 놓아두고 동쪽으로 내려가 범굴사(대성암)을 경유하여 무덤
갈림길로 돌아왔다.


▲  범굴사 부근에서 바라본 한강과 강동, 구리, 하남 지역

▲  범굴사 부근에서 바라본 강동, 송파 지역

▲  크고 아름다운 이름을 지닌 고구려정(高句麗亭)

무덤 갈림길에서 낙타고개 방면으로 내려가면 서쪽에 붉은 기와를 지닌 2층 고구려정이 손짓을
한다.
아차산에 딱 어울리는 이름을 지닌 고구려정은 팔각정 모습으로 이곳에는 원래 1984년에 지어
진 콘크리트 팔각정이 있었다. 허나 노후로 정자 전체가 기울어지는 현상이 발생하자 2008년 1
월에 철거했으며, 고구려 유적의 성지에 걸맞게 고구려 스타일로 다시 짓기로 하고 2009년 2월
착공하여 그해 7월 완성을 보면서 정자 이름을 고구려정이라 하였다.
정자에 쓰인 목재는 300년 이상 묵은 금강송을 사용했는데, 기와는 고구려 왕궁인 평양 안학궁
(安鶴宮)과 홍련봉보루에서 출토된 기와의 붉은 색상과 문양을, 단청 문양과 현무, 주작 그림
은 쌍영총(雙楹塚)과 강서(江西)중묘 등 고구려 고분 벽화를 참고해 남한 최초로 고구려 건축
양식을 재현한 의미 깊은 현장이다.

고구려정은 바위 위에 곧게 자리해 고구려가 늘 응시하던 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정자 밑에
넓게 닦여진 넓적바위는 예로부터 기가 왕성한 장소로 알려져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한다.
정자 내부는 마루로 이루어져 1층에서 신발을 벗고 계단을 통해 올라가면 되는데 솔솔 불어오
는 산바람에 번뇌를 휘날리며 독서를 하게끔 도서함이 갖추어져 있다. (독서는 자유이나 책을
가져가는 것은 안됨)

▲  야외 도서관을 꿈꾸는 고구려정 도서함

▲  천정에 그려진 주작(朱雀)의 위엄


▲  천정에 장엄하게 그려진 현무(玄武)와 연꽃무늬의 위엄

▲  고구려정에서 바라본 천하 (광진구 구의/자양/성수동 지역과
송파, 강남 지역)

▲  주름진 하얀 피부를 지닌 거대한 넓적바위
아차산 동쪽 자락인 우미내계곡 북쪽에도 이런 비슷한 바위가 누워있다.

▲  밑에서 바라본 고구려정

고구려정에서 잠시 다리를 쉬었다가 정자 밑으로 펼쳐진 넓적바위를 타고 내려갔다. 바위 자체
가 산길로 쓰이고 있는데, 미끄러운 면이 별로 없어 산행에는 크게 불편은 없다. 다만 비/눈이
오거나 얼음이 언 경우에는 바위도 흥분기를 보이니 각별히 주의해야 된다.

아차산공원(동의초교 동쪽)으로 내려오니 어느덧 19시, 그렇게 높이 올라간 것은 아니지만 하
늘과 조금이나마 가까운 곳을 갔다왔더니 시장기도 강하게 요동을 친다. 그래서 어린이대공원
후문 부근에서 뜨끈한 갈비탕에 파전, 거기에 곡차(穀茶) 여러 잔을 겯드리며 황제처럼 저녁을
먹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아차산 나들이는 흐릿한 과거의 일부가 되어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어린이대공원 후문 부근 식당에서 먹은 갈비탕과 파전의 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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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4월 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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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문학의 새로운 성지, 옥천 정지용시인 생가~정지용 문학관 (육영수생가, 옥천 구읍 명소들)

 


' 옥천(沃川) 늦겨울 기행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 구읍 명소들) '

▲  정지용문학관 로비에 재현된 정지용의 모습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 정지용의 대표 작품인 '향수'

* 스마트폰으로 보실 경우 꼭 PC버전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가급적 컴퓨터 모니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를 권함)

 


 

겨울 제국(帝國)의 패기가 슬슬 수그러들던 2월 한복판에 대전 동쪽에 자리한 충북 옥천
을 찾았다.

옥천은 지금까지 여러 번 발을 들였지만, 거의 잠깐 스치는 정도에 불과했다. 옥천 땅에
도 굵직한 명소가 참 많건만 이웃 동네 떡에 눈이 어두워 그렇게 된 듯 싶다. 하여 이번
에는 옥천의 명소를 둘러보고자 적당한 곳을 물색하여 읍내에서 가깝고 볼거리도 풍부한
구읍 일대를 답사지로 정했다.

옥천 읍내는 지금의 읍내인 신읍(新邑)과 읍내 북쪽인 구읍(舊邑)으로 나눌 수 있다. 원
래는 구읍(교동리, 죽향리, 하계리, 문정리)이 옥천 고을의 중심지로 관아(官衙)를 비롯
해 향교(鄕校)와 객사(客舍) 등이 있었다. 게다가 양반이 많이 살던 고을이라 그들의 기
와집도 즐비했다. 반면 신읍은 거의 농경지에 백성들이 드문드문 사는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신읍과 구읍의 처지가 정반대가 되버렸으니 그 사연은 대략 이렇다.

때는 바야흐로 황성(皇城, 서울)에서 부산까지 경부선 철도를 한참 닦던 1901년. 경부선
의 원래 옥천 구간은 '마달령~증약~문정~동안~매화~구일~칠방'이었다. 옥천역은 구읍의
일원인 문정에 둘 계획이었으나 그 소식을 들은 읍내 양반들이 크게 발끈하였다. 괴상한
철마가 고을을 지나다니는 것도 못마땅하거니와 철도 건설로 인해 그들의 토지가 줄어들
고 소음과 위험 문제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옥천 양반들의 강렬한 반대에 꼬랑지
를 내린 철도 건설 사업자는 급히 옥천 구간을 수정했다.

드디어 1905년 경부선(京釜線)이 개통되자, 역세권인 옥천역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리면
서 자연히 새로운 읍내, 즉 신읍을 이루게 되었고, 기존 읍내에 있던 관청, 시장, 민가
들도 역 주변으로 우루루 몰려가 신읍을 무럭무럭 살찌우니, 그것이 지금의 옥천읍이다.
반면 기존 읍내는 인구가 감소하여 나날이 쇠퇴를 거듭하니 결국 변두리로 전락되어 구
읍이란 우울한 이름의 시골마을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부자와 양반들은 많이 남았음)

그후로 오랫동안 뒷방 마님 신세가 되버린 채 잊혀진 구읍은 2000년대 이후 구읍 출신인
정지용에 힘입어 다시금 기지개를 켜며 옥천의 새로운 꿀단지로 서서히 도약하고 있다.
정지용 생가를 복원하고 문학관을 지어 현대 문학의 성지로 키우고 있으며, 육영수 여사
의 고래등 기와집을 복원하여 박정희 향수에 젖은 이들의 순례지로 만들었고, 이곳에 유
일하게 남은 조선 후기 기와집을 한정식 및 한옥 체험의 장인 춘추민속관으로 단장했다.

또한 구읍을 지나는 도로를 정지용의 시를 상징하는 '향수길'이라 이름 짓고 마을 식당
과 가게, 민가 외벽에 정지용의 시를 달게 했으며, 개발의 칼질을 제한하고 옛 읍내와
시골의 정취를 고스란히 유지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옛 시골에 대한 향수에 젖게 배려했
다. 그렇게 하여 옥천 관광의 새 중심지이자 문학, 전통의 중심지로 새롭게 거듭났다.
비록 신읍에 밀려 뒷전으로 물러났다고 하지만 오랜 세월 옥천의 행정, 경제, 교육의 중
심지였던 탓에 역사와 전통, 자부심이 짙게 배여있으며, 이를 입증하는 많은 문화유산이
깃들여져 있다.

이렇듯 옥천의 과거가 서린 구읍에는 정지용 생가와 그의 문학관을 중심으로 육영수생가,
옥주사마소, 옥천향교, 죽향리사지3층석탑, 죽향초교의 옛 교사(校舍)가 있으며, 한정식
및 한옥 민박을 할 수 있는 춘추민속관이 있다. 또한 한정식, 비빔밥, 짜장면, 묵밥, 올
갱이국으로 유명한 맛집이 다수 포진해 있어 눈과 코, 귀, 입 등 오각(五覺)과 마음, 정
신을 두루두루 즐겁게 해준다.


 

 

♠  현대문학의 새로운 성지이자 옥천의 굵직한 명소,
지용문학공원 <정지용 생가(鄭芝溶 生家), 정지용문학관>

▲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복원된 정지용 생가 (왼쪽에 누워있는 표석이
생가터 표석, 가운데는 시 향수를 머금은 비석)


구읍 한복판에 자리한 정지용 생가는 그의 동상과 시비를 포함하여 지용문학공원이라 불리기도
한다. 특정 인물과 관련된 공원이나 기념관, 장소는 인물의 호를 따거나 성씨를 포함한 이름을
붙이지만 이곳은 그냥 이름만 적용하여 친숙함을 배가시켰다.

정지용 생가는 그가 태어나 소년 시절을 지낸 곳으로 1918년까지 살았다. 그가 상경하여 서울
에 자리를 닦자 1929년 효자동(孝子洞)에 집을 마련하여 부인과 아들을 불러 같이 살았으며,
나중에는 부모도 올라와 3대가 같이 살게 되었다. 가족이 모두 서울로 가면서 집은 다른 사람
에게 넘겼고, 이리저리 주인이 바뀌는 동안 집의 모양도 가지각색으로 바뀌었다가 1974년 철거
되어 새 집이 들어섰다.
이후 정지용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풀리자 옥천군청에서 1996년 7월 원래 자리에서 약간 동쪽
인 지금 자리에 생가를 복원했는데, 원래 집은 초가 옆 우물 서쪽과 향수 표석 옆에 누운 생가
터 표석 일대로 지금보다 훨씬 작은 규모였다. 집안이 매우 가난했기 때문이다. 허나 문학계와
옥천군에서 격하게 띄워주는 인물인만큼 작은 모습으로 복원하기에는 체면이 서질 않아 제자리
보다 동쪽에 초가 1동과 헛간 1동을 크게 짓고, 보기만 해도 정겨운 토담을 둘러 관광객을 맞
게 되었다. 그러니까 생가를 있는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크게 부풀리고 가상까지 듬뿍 첨
가하여 완전히 민속촌 초가집이나 민속박물관이 되어 버렸다.


▲  활짝 열린 서쪽 사립문

초가에는 방 2개와 부엌이 있는데, 기존 초가의 방식을 그대로 본떠서 만들었다. 방과 부엌 안
에 담긴 물건들은 새로 만들거나 다른 마을에서 수습한 것으로 정지용 일가가 쓴 것은 단 하나
도 없다. 집은 재현했으나 정작 그들이 쓰던 유물은 남아있지 않으니 시골에서 쓰던 물건이나
오래된 생활도구를 사들여 궁색하게나마 집 안팎을 꾸민 것이다.
초가의 방문과 부엌문은 모두 열려있어 내부를 훤히 구경할 수 있으나 그저 눈으로만 구경하기
바란다. 비록 근래에 지어진 초가이나 엄연히 정지용의 생가를 칭하고 있으니 부엌이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은 통제되어 있다. 단 툇마루에 잠깐 앉는 것은 가능하다.

▲  뚜껑이 닫힌 우물과 장독대
정지용 생가를 복원하면서 갖다놓은
빈껍데기들이다.

▲  정지용 생가터
우물 서쪽 공터와 담장 너머 생가터 표석
일대에 조촐하게 생가가 있었다.


▲  정겨운 풍물시(風物詩) 초가 3간
부엌과 방 3개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초가이다. 정지용의 생가가 아닌
정지용이 살고 싶었던 큰 초가를 재현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  지용유적 1호 현판
정지용을 사모하는 단체인 '지용회'가 1988년에 달아놓은 것으로 그들은
복원된 생가를 지용유적 1호로 삼았다.

▲  정지용의 사진이 걸린 초가 우측 방
정지용이 살던 방을 재현한 모양이다.

▲  추억의 풍물시가 되버린 부뚜막을 갖춘 옛 부엌
옛날 단양(丹陽) 시골 외가집 부엌과 비슷하게 생겨 당시의 소중한 추억을
잠시나마 소환시켜 준다. 부뚜막에 장작을 떼서 지어먹은 밥과
누룽지의 맛은 참 예술이었지...

▲  부엌문 옆에 고된 몸을 기대어
선 돌절구

▲  초가 좌측 방 - 정지용 부모가
살던 방을 재현한 모양이다.


▲  초가 옆에 마련된 헛간 - 창고와 뒷간을 재현했다.
정지용 생가와는 애당초 관련이 없는 장식용임

▲  헛간 가운데 칸은 농기구 창고로 재현했다.

▲  정지용문학관으로 이어지는
남쪽 사립문과 생가


▲  남쪽 사립문 앞에 놓인 청석교(靑石橋)

남쪽 사립문을 나오면 조그만 개천과 물레방아가 있는데, 개천 위에는 넓직한 반석(盤石)이 벌
러덩 드러누워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돌다리는 '청석교'라 불리며 원래는 생가 앞에 흐르
는 개천에 걸쳐져 있었다. 지금이야 개천이 정비되어 폭이 좀 넓어지고 반듯해졌지만 예전에는
폭이 좁아 저 돌다리로 개천을 건넜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구읍을 가르는 개천 위에 걸쳐져 구읍의 동,서를 이어주는 역할을
했으며, 구읍 출신인 정지용과 육영수도 저 다리를 건너 학교를 가고 서울에 가고 했다. 어찌
보면 민속촌 초가처럼 재현된 정지용 생가보다 유서가 깊은 다리지만 마땅한 이정표가 없어 그
냥 지나치기가 쉽다. 허나 정지용문학관 해설사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저 돌다리에 대한 이야기
를 한 토막 들려주니 꼭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다리가 되어 드러누운 이 돌은 매우 단단하고 두꺼운데, 이런 넓은 돌은 옥천에
서만 나온다고 하며, 현재 옥천에서 보은으로 가는 길목인 금강(錦江) 상류 장계유원지에도 청
석교라는 오래된 다리가 말년을 보내고 있다. (삼국시대에 지어졌다고 함)


▲  정지용 생가 동쪽에 자리한 정지용문학관과 정지용 동상

정지용 생가 동쪽에 터를 닦은 정지용문학관은 2005년 5월에 문을 열었다. 정지용의 생애와 작
품, 문학 세계를 다룬 공간으로 2층 규모이며, 내부는 그리 넓지는 않다. 딱 하나 뿐인 전시실
인 문학전시실은 정지용의 인생과 그가 살았던 시대, 문학(향수, 바다와 거리, 나무와 산, 산
문...)을 설명하고 있으며, 20세기 초/중반 우리나라 현대 시의 흐름과 거기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을 소상히 다룬다. 또한 그의 시집과 산문집, 그의 손때가 담긴 육필 원고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의 유품은 그게 전부라 아직은 좀 빈약하다.

눈으로 보는 전시실 외에 문학체험의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자신의 손이 스크린이 되어 시를
직접 읽어 보는 '손으로 느끼는 시' 코너와, 음악과 영상을 배경으로 성우의 시낭송을 듣는 '
영상시화' 코너, 뮤직비디오로 제작된 가곡 '향수'를 감상하는 '향수영상', 컴퓨터로 직접 시
어(詩語)들을 검색하는 '시어검색', 노래방처럼 자막으로 흐르는 정지용의 시를 직접 부르는
'시낭송 체험실' 등이 있어 눈길을 끈다. 특히 시낭송체험실은 이곳의 백미(白眉)로 다른 문학
관이나 기념관에는 거의 없는 독특한 것이다. 그 외에 정지용의 삶과 문학 등을 다룬 다큐멘터
리를 상영하는 영상실과 시/문학 토론, 학습, 문학동아리 활동공간으로 쓰이는 문학교실이 마
련되어 있다. (문학교실은 사전 예약 요망)

관람료는 물론이고 시낭송실 사용까지 모두 공짜이며, 현관에서 실내화로 갈아신고 안으로 들
어서면 안내데스크 좌측에 옛날 복장을 갖춘 사람 하나가 실감나게 앉아 있어 깜짝 놀라게 만
든다. 그 사람은 실제 사람이 아닌 정지용을 재현한 인형으로 기념촬영용이다.


▲  문학전시실 내부 - 정지용의 생애와 시대상이 간략하게 기록된 공간

※ 정지용(鄭芝溶)의 생애 <1902 ~ 1950(?)>
정지용은 1902년 6월 20일(음 5월 15일) 한약상을 하던 정태국(鄭泰國)과 부인 정미하의 장남
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한자 이름은 지용(池龍)으로 이는 그의 생모가 연못에서 용이 하늘
로 승천하는 태몽을 꾸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지용(芝溶)으로 이름을 갈았다. (천
주교 세례명은 프란시스코)

그의 부친은 고향에서 한약상을 개업해 제법 여유롭게 살았다. 하지만 갑자기 밀어닥친 홍수로
가산을 죄다 말아먹고, 고향을 떠나 이곳 구읍으로 넘어와 새 보금자리를 꾸렸으며, 처가 친척
인 송지헌의 농장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목구멍에 간신히 풀칠을 했다. 정지용은 당시를 회상하
'나는 소년적 고독하고 슬프고 원통한 기억이 진저리가 나도록 싫어진다'고 말해 유년 시절
에 가난으로 인한 고초가 매우 심했음을 보여준다.

1910년 옥천공립보통학교(현재 죽향초교)에 입학했으며, 1913년 11살에 나이로 동갑인 송재숙
과 혼인을 했다. (헐~~ 부럽다) 1918년 휘문고보(서울 안국동)에 입학했으며, 성적이 우수하고
교우관계가 좋았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교비생(校費生)으로 학교를 다녔다. 또한 그 시절부
터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문학적 소질을 발견하고 박팔양 등 8명과 함께 요람동인을 만들어 동
인지 요람(搖籃)을 프린트판으로 10여 호를 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교내문제로 야기된 휘문사태의 주동이 되면서 이선근과 1년 무기정
학을 받았다. 그해 12월 서광(瑞光) 창간호에 소설 '3인'을 발표했는데, 이는 그의 유일한 소
설이자 첫 발표 작품이었다.
1922년 휘문고보를 졸업하여 아버지의 친구인 유복영의 집에서 생활을 했다. 또한 첫 시작품인
풍랑몽(風浪夢)을 썼다. 1923년에는 휘문고보 문우회에서 만든 '휘문' 창간호의 편집위원이 되
었으며, 휘문고보의 교비생으로 왜열도 교토(京都)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는 교토에서 시 '석류','민요풍 시편','새빨간 기관차','바다' 등을 썼으며, 학조 창간호에
'까페프란스' 등 9편의 시를, '신민', '문예시대'에 '홍춘' 등 3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활동
을 시작했다.
1927년에는 '갈매기','갑판우','향수'등 30여 편의 시를 냈으며, 1928년 2월(음력)에는 장남인
'정구관'이 태어났다. 이후 동지사문학 3호에 '마(馬)1,2'를 발표하고 1929년 대학을 졸업, 귀
국하여 휘문고보 영어 교사로 일했으며, 옥천에 있는 부인과 장남을 서울로 불러들여 효자동에
집을 마련했다. 12월에는 '유리창'이란 시를 썼다.

1930년 시문학동인으로 참가하여 '조선지광','시문학','대조','신생' 등에 '겨울','유리창' 등
의 시를 발표했으며, 1933년 3남 정구인이 출생했다. 또한 그해 6월에 창간된 '가톨릭 청년'지
의 편집고문을 지냈으며, 해협의 오후 2시, 소묘1,2,3을 발표했다.
1934년에는 종로구 재동(齋洞)으로 이사를 갔으며, 이때쯤 딸 정구원이 태어났다. 1935년에는
첫 시집 '정지용 시집'을 냈으며, 그동안 발표된 89편이 수록되었다.


▲  1935년에 발간된 정지용 시집

1936년에는 북아현동으로 이사를 갔으며, 그해 3월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조
광','소년' 잡지에 '옥류동','별똥이 떨어진 곳'을 발표하고, 동아일보와 삼천리문학, 여성,
청색지 등에 산문 '꾀꼬리와 국화', 산문시 '슬픈우상' 등 수필 30여 편을 발표하는 한편, 천
주교에서 주관하는 경향잡지를 돕기도 했으며, 1939년에는 문장지의 시부분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趙芝薰), 박두진, 박목월(朴木月) 등을 등단시켰다.

1940년에는 기행문 화문행각(畵文行脚)을 냈고, 문장 22호 특집으로 '진달래' 등 10여 편의 시
가 실리기도 했다. 1944년에는 서울 소개령으로 부천군 소사읍 소사리(현 부천시 소사동)으로
이사를 갔으며, 1945년 휘문고보 교사를 그만두고 이화여자전문학교(이대) 교수가 되어 한국어
와 라틴어를 강의했다.

1946년 서울 돈암동으로 이사를 했고, 6월에 '지용시선'이 을유문화사에서 나왔다. 이는 정지
용 시집과 백록담 등 기존의 낸 시집 가운데 25편을 가려 낸 것으로 조선문학가동맹의 아동분
과위원장에 위촉되었으나 활동을 하지 않았다.
1947년 경향신문사 주간직을 1년 만에 그만두고, 이대 교수로 복귀했으며, 서울대 문리과대학
강사로도 출강을 했다. 그리도 이듬해 이대 교수를 사임하고 녹번동(碌磻洞)에서 서예를 하며
지냈는데, 박문출판사에서 문학독본을 냈으며, 1949년 시문과 수필 55편이 수록된 산문을 출간
했다.

그리고 비운의 1950년이 밝아오자 그해 2월 '문예'에 '곡마단','사사조오수(四四調五首)'를 발
표했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문단 발표였다. 4달 뒤, 6.25가 터지자 미처 피신을 가지 못했
는데, 북한군에 잡혀 정치보위부로 끌려갔다고 하며,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가 평양감옥으
로 이감되었다. 이후 그의 행적은 지금까지도 오리무중(五里霧中)인데, 폭사 당한 것으로 여겨
지며, 월북을 했다는 설도 덧붙여 전해온다.

그가 사라지자 이승만 정권은 그가 월북한 것이라 단정짓고, 그의 작품을 통제했다. 그러다가
1982년 장남 정구관을 비롯하여 48명의 문학인과 각계 인사들이 정지용의 문학을 통제에서 풀
어줄 것을 요구하며 정지용 문학 회복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1988년 3월 31일 통제에서 해금
되었으며, 그해 5월 15일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 제1회 지용제를 지내게 되었다. 이에 탄력을
받아 지용시문학상이 제정되고, 그의 문학세계와 작품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옥천군
청에서도 그의 생가터를 매입하여 생가를 복원하고 문학관을 만들어 문학의 성지로 꾸몄다.


▲  문학관 로비에 마련된 정지용 인형

정지용의 작품은 중/고등학교 국어/문학 교과서에서도 징그럽게 많이 등장한다. 특히 '향수'가
약방의 감초 같이 자주 나오는데, 그 노래를 여러 번 들어 거의 외우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현실은 다 까먹음)
학창 시절에 그렇게나 나를 괴롭혔던 시와 시조, 시험을 보면 시 부분은 많이도 틀렸고 외우는
것도 무척 힘이 들었다. 그래서 시를 보기만 해도 진절머리가 났었고, 그런 시를 쓴 시인들을
무척 원망했었지~~ 허나 이제는 시 때문에 머리 아픈 시험을 봐야되는 굴레에서 벗어났고, 나
이를 먹어감에 따라 시의 내용을 저절로 음미하게 되었다. 정지용의 향수도, 윤동주(尹東柱)의
서시도 보면 볼 수록 빛나는 보석과 같은 시임이 틀림 없다.

정지용은 50평생 동안 140여 편의 시를 남겼으며, 바다와 산, 신앙(천주교), 고향이 중심 소재
였다. 향수 또한 고향을 표현한 시로 노래나 가곡으로도 나와있다. 1988년 통제에서 풀린 이후
왜정(倭政) 시절에 활약한 대표적인 시인이자 천재 시인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으며, 옥천을
빛낸 위인의 하나이자, 옥천의 든든한 후광(後光)이자 제일의 관광지로 또한 문학의 성지로 점
차 몸값을 높이고 있다.

문학전시관을 1바퀴 둘러보고 나오니 문학관 해설사가 구경 잘했냐고 묻는다. 그래서 그렇다고
답을 하면서 여러 질문을 넌지시 던졌는데, 거기서 생가 복원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과 사립문
앞에 누운 청석교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해설사와 작별을 고하고 점심을 먹고자 부근에 30여 년 묵었다는 짜장면집(문정식당)에서 간단
하게 간짜장을 먹었다. (자장면이 유명하다고 함) 별다른 맛은 없으나 밀가루 음식으로 덥수룩
하게 배를 채우고 구읍에 널린 명소들을 마저 둘러보았다.

※ 정지용 생가(정지용 문학관) 찾아가기 (2016년 6월 기준)
① 옥천까지
* 서울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조치원역, 김천역, 구미역, 동대구역, 밀양역, 부산역,
  마산역에서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옥천역 하차 (옥천역 정차 열차를 타야 됨)
* 동서울터미널에서 옥천, 영동행 직행버스가 1일 3회 떠난다.
* 대전복합터미널에서 옥천행 직행버스가 1일 20회, 청주시외터미널에서 1일 17회 떠난다.
* 대전복합터미널 앞, 대전역(중앙시장), 판암역(대전 1호선, 1번 출구)에서 607번 시내버스를
  타고 옥천종합상가 하차
② 현지교통
* 옥천역을 나와서 역전3거리에서 직진하면 우체국 너머로 4거리가 있다. 거기서 왼쪽으로 가
  면 옥천버스종점(군내버스터미널)이 있는데, 거기서 보은, 안남, 안내, 장계, 청산 방면 군
  내버스를 타고 구읍4거리에서 하차하여 도보 3~4분 (석탄리나 수북리 방면 군내버스를 탔을
  경우 구읍3거리에서 내려서 도보 5분)
* 옥천역을 나와서 역전3거리에서 계속 직진하면 구읍이다. 도보 35~40분 거리
* 옥천시외터미널에서 갈 경우에는 구읍까지 가는 버스가 없다. 택시를 이용하면 5~7분 정도면
  가며, 걸어갈 경우는 대전 방면으로 걸으면 삼양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접어
  들어 도보 30분
* 옥천종합상가(607번 정류장)에서 옥천군청 정문을 경유하여 도보 30분, 또는 택시 이용
③ 승용차로 가는 경우 (문학관 앞에 주차장 있음)
* 경부고속도로 → 옥천나들목을 나와서 향수공원4거리에서 좌회전 → 구읍3거리에서 좌회전
  → 구읍4거리에서 우회전 → 정지용 생가

★ 정지용 생가 관람정보 (2016년 6월 기준)
* 관람비와 주차비는 공짜
* 관람시간 : 9시~18시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과 추석 휴관)
* 매년 5월 중순에는 정지용생가와 상계체육공원에서 정지용을 추모하는 지용제가 열린다. 지
  용문학상을 비롯하여 다양한 문학행사와 공연, 공예품 전시, 음악회, 야시장 등이 열리며,
  행사기간은 보통 3일이다.
* 소재지 :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39 (향수길 56 ☎ 043-730-3408)
* 정지용문학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  옥천 제일의 명당이자 고래등 기와집, 박정희 전대통령의 처가집이자
현 정권의 임시 성지(聖地)로 거듭난 육영수(陸英修)생가 -
충북 지방기념물 123호

▲  솟을대문과 대문채

옥천 구읍 북쪽 끝에는 정지용생가(문학관)과 더불어 구읍의 대들보 명소인 육영수생가 기와집
이 있다. 교동리에 있다고 하여 '교동집'이라 불리기도 하고, 3정승이 살았다고 하여 '3정승집
'이란 체통 있는 이름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집이 고색의 때가 넘치는 묵은 기와집이었
다면 그 가치가 정말 남달랐을텐데, 아쉽게도 2011년 봄에 옛터에 복원된 새집이다.

교동집은 17세기에 정승을 지낸 김씨(이름은 모르겠음)가 지었다고 전한다. 이후 송씨에게 집
이 넘어갔는데, 그 집안에서 정승이 나왔으며, 다시 민씨에게 넘어가 거기서도 정승이 나왔다.
그런 연유로 3정승집이란 별명을 지니게 되었다.
옛 사람들이 신봉하던 풍수지리(風水地理)에 따르면 이 집터가 명당(明堂) 중의 상급이라고 하
니, 땅의 기운을 제대로 받은 모양이다. 3정승에 대통령 부인까지 이 자리에서 나왔으니 말이
다. 허나 이곳에 살던 집안들이 대대로 살지 못하고 다른 데로 가버리거나 끝이 좋지 못한 걸
보면 이 자리가 끝은 영 별로인 모양이다.

1918년 육종관(陸鍾寬, 1893~1965)이 민정승의 후손인 민영기에게서 구입하면서 육씨(陸氏) 일
가로 주인이 바뀐다.
육종관은 대지주(大地主) 육용필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금수저로 집안의 막대한 재산을 물
려받았다. 친일 대지주로 악명을 떨치면서 지역 소작농을 달달볶아 재산을 크게 불렸으며, 돈
이 너무 썩어나자 씀씀이도 엄청나 아내인 이경령(李慶齡) 외에 무려 18명의 첩을 두었다. (왜
인 첩도 있었고, 서울에도 첩을 두었음) 아내에게는 육영수를 비롯한 1남 3녀를 두었고, 나머
지 첩에게서 18명을 두어 총 12남 10녀, 무려 22명의 자식을 거느렸다.


▲  육영수 일가의 사진
사진 왼쪽 구석에 아들을 안은 이가 육종관이며, 가운데 자리한 할머니의
왼쪽(왼손 쪽)에 있는 꼬마가 육영수이다. (틀릴 수도 있음)


1925년 안채에서 육영수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살았으며, 1969년 생가를 전면 뜯어고치면서 조
선 후기 한옥 양식을 많이 상실하게 된다. 겉모습을 그냥 두고 내부만 손질했으면 좋으련만 그
것까지는 생각을 못한 것이다. 이후 가족들이 모두 외지로 나가면서 집은 무늬만 남게 되었고,
1979년 이후 상속 분쟁으로 인해 도깨비집 수준으로 망가진 것을 1999년에 다 밀어버리면서 그
장대했던 고래등 집은 주춧돌만 앙상하게 남게 되었다.

집터만 남았을 당시의 사진을 보니 터 주변이 나무와 수풀로 어지러웠다. 철거 이후에도 관리
는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2000년 9월, 옥천군청에서 구읍을 살려 관광지로 키우려는
목적으로 생가 복원계획을 세우고, 민간이 주체가 된 '육영수여사 생가복원추진위원회'를 결성
하여 2001년 3월부터 활동에 들어갔다. 생가 복원프로젝트에에는 육영수의 회고록이 크게 도움
이 되었으며, 2002년 생가터 지표조사를 마친 다음, 2003년부터 2010년까지 사업비 37.5억원을
쏟아부어 2011년 5월 11일 복원을 마쳤다.

복원된 생가는 99칸 기와집으로 13동의 건물을 갖춘 대저택이다. 후원과 과수원까지 합치면 무
려 26,400㎡의 면적으로 그중 집은 10,000㎡에 이른다. 내부에는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비롯하
여 안채와 사랑채, 위채, 아래채, 연당사랑, 정자 등 주인 일가의 생활공간과 아래대문채, 중
문채 등 하인들의 거주 공간. 그리고 연자방아, 뒤주, 곳간채, 아래채 창고, 대문 등의 부속
건물들이 가득 메우고 있다.

▲  솟을대문

▲  안채

육영수의 회고에 따르면 대문인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마방(馬房)이 있고, 대문과 마
주보는 곳이 사랑채였다. 사랑채 왼쪽에 건너채가 있고, 사랑채를 돌아 중문을 열고 들어서면
안채가 집터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 안채에서 왼쪽으로 행랑, 오른편으로 연당사랑, 뒤
로 돌면 별당, 후원에는 사당과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정자 오른쪽에는 뒤채가 있었으며, 바
깥겹집 사랑채만 하여도 누마루, 바깥 사랑방, 안 사랑방, 사랑채 안방, 대청, 광, 다락, 식객
들이 거처하는 방, 사랑채 전용부엌 등이 있었다.
안채의 안방은 웃방과 아랫방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위의 안방에는 어머니 이경영이 거처하였
고, 안방 아랫방에는 작은 아씨로 불리던 육영수 여사가 거처했다. 안방 뒤쪽으로 골방이 있고,
골방을 건너가면 침방이 웃방과 안방으로 나눠져 있는데, 육영수의 동생 육예수가 안채 중에서
도 가장 구석지고 조용한 침방 안방에 살았다고 한다.
사랑채는 마치 관아(官衙)의 동헌(東軒)처럼 꾸몄다고 하는데, 대청마루 옆에는 심부름꾼의 방
이 있었고, 전화기를 둔 전화방과 사진현상용 암실(暗室)도 있었다고 한다. 더불어 사랑과 안
채를 잇는 마루 복도는 단아한 지붕을 얹어 정취를 더했다고 한다. 연당(蓮塘)이란 연못은 여
름이 되면 연꽃으로 덮여 장관을 이루었고, 겨울에는 무려 스케이트를 탔다고 하니 정말로 없
는 것이 없는 조그만 궁궐이었다.

2011년 생가가 복원되면서 정지용 생가와 더불어 구읍의 주요 명소로 자리매김했는데, 특히 박
정희 내외에 대한 향수에 젖은 중장년층(특히 이웃 경상도)이 많이 온다.
육영수는 내가 태어나기 4년 전까지 살았고, 박정희는 내가 태어난 이듬해까지 살던 터라 나와
는 가까운 과거의 인물이다. 그들을 좋게 여기는 사람도 있고, 좋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많고,
이 2개의 상반된 여론이 지금도 티격태격하고 있다. 나는 현대사에 관심도 없고, 박정희 내외
도 관심 밖인지라 오로지 생가 한옥에만 열중했다. 그들에 대한 생각을 본글에 적는다면 자칫
이상한 댓글을 주렁주렁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연못을 바라보며 매뭇새를 다듬는
연당 사랑채

▲  사랑채 - 박정희가 방문했을 때는
임시 집무실로도 쓰였다.

그럼 육영수(1925~1974)는 누구일까?
육영수는 1925년 11월 29일 바로 이 고래등 기와집에서 육종관의 2녀로 태어났다. 죽향국민학
교(죽향초교)를 나와 서울로 상경하여 배화여고를 졸업했으며,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옥천여중
교사로 일하다가 6.25가 터지자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에 머물던 중, 당시 육군중령이던 박정희와 가까워져 1950년 12월 혼인을 했는데, 아버지
의 반대가 아주 극심했다. 하여 딸의 혼인식에도 참여하지 않았으며, 사위가 대통령이 된 이후
에도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65년 병석에 누워 골로 가기 직전. 병문안을 온 사
위에게 자신이 부덕해 큰 인물을 알아보지 못했다며 사과했다고 한다.

대구에서 3년 정도 머물다가 서울로 올라왔으며,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자 영부인(令夫
人)이 되었다. 남편을 열심히 내조하는 한편 양로원과 고아원을 비롯한 영세/취약계층에 대한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사회복지사업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또한 민생 현장과 재해/재
난 현장을 수시로 찾아가 살피면서 백성들의 인기가 대단했다. 그리고 야당/재야 인사들의 여
론에도 귀를 기울여 필요한 것은 남편에게 건의하는 등, 청와대 안의 야당이란 별명까지 갖게
되었다.


▲  박정희와 육영수의 혼인 사진 (1950년 12월)

드디어 그의 마지막 날인 1974년 광복절, 그날 광복절 행사는 서울국립극장(장충동)에서 열렸
다. 청와대를 나서기 전, 뭔가 불길한 징조를 느꼈는지 '오늘은 왠지 행사장에 가고 싶지 않네
요' 말했다고 한다. 이에 박정희는 무슨 소리냐며 등을 살짝 어루만지며 달랬다고 한다. 그 말
에 만약 부인을 데려가지 않았다면 아마도 박정희 자신이 피살을 당했을 지도 모른다. 결국 재
일교포 문세광(文世光)의 저격에 육영수는 힘없이 쓰러지고, 행사장은 난장판이 되었다.
육영수가 피살되자 전국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하며, 애도 물결이 청와대를 뒤덮었다. 국민장
영결식이 8월 19일 10시 중앙청(中央廳, 경복궁 남쪽) 광장에서 각국 조문사절과 내외인사 3천
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고 그날 오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육영수는 거론하기 조차 껄끄러운 1남 2녀를 두었으며, 당시 매우 미인이었다고 한다. 대통령
의 아내임에도 거만함이 별로 없었고, 부드럽게 남을 배려했으며 유머가 풍부해 주변을 늘 웃
음바다로 만들었다. 또한 국내외 안팎으로 동분서주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영부인이다.(이승만
의 아주 젊은 부인은 제외, 한 것이 없으니)

▲  땅에 누운 석빙고(石氷庫) <오른쪽은
위채로 넘어가는 문> 음식과 식재료,
술을 보관하던 공간이다.

▲  위채 - 연당 사랑채 뒤쪽에 독립적으로
자리한 공간으로 일반적인 사랑채나
안채와 비슷한 곳이다.


육영수와 관련된 일화는 참 많지만 그중에서 하나만 소개하고자 한다.
1966년 2월 박정희 내외는 동남아 태국을 방문했다. 당시 태국의 두목인 푸미폰 왕은 만찬회를
열었는데, 그때 푸미폰은 육영수와 자녀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푸 - 영부인께서는 평소 자녀에 대해 어떤 교육관을 갖고 계시나요?
- 쓸모있고 지혜로운 인간으로 키우려고 합니다. 대통령 가족이라고 해서 우월감이나 의타
심을 갖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정서적인 면과 도의적인 면을 강조하는 편입니다.(근데 그의 자
식들은 왜 한결같이 삐뚤게 놀까??)
- 대통령께서는 자녀 교육에 다른 의견을 안 가지셨나요?
- 저는 엄하게 가르치려 하는데 대통령은 아이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어 순하게 가르칩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대통령이 저보다 인기가 많아요. 근데 투표권도 없는 아이들에게 인기를
얻어봐야 뭐 하겠습니까'
 
그 말을 듣던 푸미폰은 근엄한 표정을 포기하고 자빠질 정도로 크게 웃었다고 한다. 평소 근엄
함이 쩔어 별로 웃지 않았는데, 그의 요란한 빵터짐에 주위 사람들이 어리둥절했다고 하며, 만
찬회장의 분위기는 한층 밝아졌다.


▲  연당(蓮塘)사랑채와 연못
연당은 연꽃이 있는 연못을 뜻한다. 여름에는 연꽃의 향연이 대단했다고 하며,
희귀한 나무와 꽃이 주변에 가득했다. 또한 겨울에는 얼어붙은 연못 위에서
육영수 가족이 스케이트를 탔다고 하는데, 그 당시에 벌써 스케이트라...?

▲  위채 뒤쪽에 펼쳐진 후원
후원은 지금은 볼품이 없지만 예전에는 나무와 꽃, 과수(果樹)들이 가득했다.


육영수 생가는 현재 집만 있을 뿐, 사람이 살지 않기 때문에 생활의 향기와 사람의 냄새가 나
질 않는다. 그냥 육영수의 생가라는 의미에서만 머물고 있으며, 이렇게 빈 집으로 놀려두는 것
보다는 전통문화 체험 및 한옥 민박이나 요즘 유행하는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는 것이 괜찮을
것 같다. 어차피 2011년에 복원된 것이니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오래된 건축물처럼 제약을 많이
둘 필요도 없고, 집과 방이 모두 새것이니 민박에 불편함이 없도록 편의시설만 갖추면 휼륭한
한옥 체험의 장의 될 싹수를 가지고 있다.

▲  대나무 소리가 귀를 들쑤시는 후원 산책로

▲  높이 들어앉은 사당(祠堂)

▲  쌀을 보관하던 2개의 뒤주

▲  육영수가 어린 시절을 보낸 안채 뒤쪽 방


▲  후원 높은 곳에 자리한 초가 정자
정자 주변은 사과, 밤, 배, 포도 등을 기르던 과수원이다. 육영수는 어린 시절 여기서
알밤을 주었다고 하며, 집에 과수원까지 있었다니, 그저 입이 벌어질 따름이다.

▲  현대식 차고(車庫)

육영수 생가의 아주 독특한 요소이자 그의 일가가 매우 부자였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존재
가 바로 차고이다. 차고는 차량을 주차하던 공간으로 육종관은 자동차에도 지나치게 관심이 많
아 왜정 시절부터 외국산 자동차를 소유했다. 이 차고는 4대까지 주차가 가능했으며 보통 2~3
대를 굴렸다. 게다가 그는 손기술도 뛰어나 차량도 직접 수리를 했으며, 라디오도 직접 수리하
고 주파수를 조정하여 다양한 라디오 방송도 들었다. 그 시절(20세기 초/중반) 일반 사람들은
어림도 없던 것을 넘치도록 소유하고 즐겼던 것이다.

★ 육영수 생가터 관람정보 (2016년 6월 기준)
* 정지용 생가에서 동쪽(향수길)으로 도보 9분
* 옥천버스 종점에서 금암리, 수북리, 석탄리 방면 군내버스를 타고 교동에서 하차, 도보 2분
* 관람비와 주차비는 공짜
* 관람시간 : 9시~18시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과 추석 휴관)
* 소재지 :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313 (향수길 119, ☎ 043-730-3417)


 

♠  구읍에서 만난 여러 명소들

▲  370여 년 묵은 느티나무 (정지용생가와 육영수 생가터 중간)

옛 옥천고을에 선선한 그늘을 드리웠던 정자나무로 나이가 무려 370여 년이라고 한다. 아무리
우걱우걱 먹어도 고갈되지 않는 장대한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어엿하게 자라난 그는 키가 16m
, 허리둘레 5.2m에 이르며, 그의 밑둥에는 마을의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금줄을 쳐놓아 부정한
기운을 막는다.


▲  2열로 배열된 옛 비석들
옛 옥천 고을 사또의 선정비(善政碑)와 불망비(不忘碑)이다. 허나 저들 중 진정으로
선정비를 받을 만한 사또는 과연 몇이나 될까?

▲  죽향초교 구교사(舊校舍) - 등록문화재 57호

옥천 구읍 남쪽에는 죽향초등학교가 자리해 있다. 이 학교는 1909년 10월 사립 창명학교(彰明
學校)로 문을 연 옥천 최초의 근대 초등교육기관으로 1910년 9월 공립으로 개편되어 옥천공립
보통학교로 이름을 갈았다. 이후 1938년 4월 옥천공립심상소학교로, 1941년 9월에는 옥천죽향
공립국민학교, 1945년 이후 죽향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1946년 7월 삼양국교(삼양초교)가 분리되었고, 1966년에는 군동국교(군동초교)가 분리되어 몸
집을 줄였으며, 1978년 12월 본관 교사를 신축하고 1981년 병설유치원을 두었다. 그리고 1996
년 죽향초교로 이름을 갈아 지금에 이른다. 정지용과 육영수도 이곳을 나왔으며, 50대 이상 옥
천읍내 사람들 상당수가 이 학교를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죽향초교 후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창고처럼 보이는 1층짜리 붉은색 목조 건물이 눈길을 부여잡
는데, 그 건물이 바로 죽향초교의 옛 교사로 1936년에 지어졌다. 교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3개의 교실을 지녔으며, 벽체를 가로로 댄 목재비늘판벽으로 마감한 편복도형 건물로 초기의
모습이 잘 남아있다.
본관 교사가 신축된 이후, 방과후 활동 공간으로 쓰이다가 문화재청에서 등록문화재로 삼으면
서 옥천 지역 교육사를 담은 옥천교육역사관으로 변신했다.

* 죽향초교 소재지 :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문정리 83 (향수1길 26, ☎ 043-732-0054)
* 옥천역을 나와서 정면으로 보이는 도로(중앙로)로 직진, 도보 30분
* 옥천버스종점에서 수북(석탄), 안남, 보은, 청산 방면 군내버스를 타고 죽향초교 하차
* 옥천교육역사관은 사전에 전화로 예약을 해야 된다. (관람 당일 이용허가 신청서 제출)


▲  죽향리사지 3층석탑 - 충북 지방문화재자료 51호

죽향초교 교정 내에 특이하게 생긴 3층석탑이 서 있다. 멋드러진 소나무를 우산으로 삼아 자리
한 이 탑은 죽향리148-1번지 탑선골에 깃든 이름 모를 절터에 있던 것으로 왜정 때 죽향초교로
가져왔다. 탑이 있던 탑선골에는 현재 태고종(太古宗) 사찰인 탑산사가 있는데, 절 주변에서는
고려시대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 발굴조사가 절실하다.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으로 마감한 형태로 3층에는 문비
로 보이는 네모난 창이 있다. 고된 세월의 때가 자욱한 옥개석(屋蓋石, 지붕돌)은 층마다 모습
을 조금씩 달리하고 있으나 뒤쪽이 좀 떨어진 상태이며, 탑신과 머리장식은 피부가 하얀 편으
로 근래에 때를 민 듯 보인다.
탑의 모습으로 보아 고려 후기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자세한 정보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지
금은 그저 교정의 장식물로 어린이들의 천진난만한 동심과 함께 하며 나이를 잊고 있을 뿐이다.


▲  옥천성당(沃川聖堂) - 등록문화재 7호

구읍은 아니지만 신읍 북부인 옥천군청 남쪽 언덕에 푸른 피부를 지닌 성당 하나가 눈에 들어
올 것이다. 특이하게도 엷은 파랑색을 띄고 있어 조금은 고색의 냄새가 느껴지기도 한다.

이 성당은 1945년 무렵 메리놀외방선교회 소속의 페티프렌(R, Petipren) 신부가 세운 1층짜리
시멘트 벽돌 건물로 지붕은 왕대공형식이 변형된 목재 3각형 지붕틀을 하고 있다. 1966년 종탑
부(鐘塔部)의 부식된 함석마감을 기와로 대체하면서 환기창과 십자가형 첨탑(尖塔)이 철거되었
고, 1991년 10~11월에 증축공사를 벌여 성당 뒷쪽을 트랜셉트<transept, 익랑(翼)>와 제단앱
스<apse, 후진()>를 증축해 직사각형 형식에서 십자가형으로 평면이 바뀌었다. 이후 보수
공사를 벌여 기와지붕 마감재를 함석 마감재로 갈았다.
1940~50년대 현대식 성당 건축물로 이후 성당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전하며, 충북의
유일한 1940년대 성당 건물로 건축사적으로도 가치가 인정되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언덕을 올라서 가까이서 성당을 대하니 밑에서
본 것만큼이나 웅장해 보인다. 성당 내부는 예
배를 보는 너른 공간이 있는데 평상시에도 입
장이 가능하다. (정면 현관이 잠겨 있으면 성
당 옆구리 문을 이용하면 됨)

정지용생가에서 시작된 옥천 나들이는 옥천성
당에서 대단원의 마침표를 찍는다. 구읍에서
둘러본 명소가 더 있으나 내용 분량상 쿨하게
생략했다.

▲  성당 내부

* 옥천성당 소재지 :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삼양리 158-2 (중앙로 91 ☎ 043-731-9981)
* 옥천역을 나와서 정면으로 보이는 도로(중앙로)로 직진 도보 15분 거리
* 옥천시외버스터미널에서 도보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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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강원도의 지붕, 정선 나들이 (아라리촌, 정선5일장, 아우라지)

 


' 강원도 정선 나들이 (아라리촌, 아우라지) '
아라리촌 연자방아
▲  아리리촌에서 만난 정겨운 풍물시(風物詩) 연자방아


밤하늘을 환하게 비추는 보름달처럼 가을이 알차게 익어가던 추석 연휴, 강원도의 지붕인
정선(旌善)을 찾았다.
서울의 동쪽 철도 관문인 청량리역에서 선물보따리를 바리바리 짊어지며 고향으로 떠나는
귀성객에 섞여 강릉(정동진)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에 나를 싣는다. 다행히 좌석이 있어
서 입석으로 가는 것은 면했다.

거의 3시간을 달려 하늘과 지척인 정선 땅에 진입, 정선의 남쪽 관문이자 태백선(太白線)
과 정선선이 갈리는 민둥산역에 두 발을 내린다. 이곳은 예전 증산역(甑山驛)으로 2009년
9월 민둥산으로 이름을 갈았다. 그 이유는 증산마을 북쪽에 억새로 유명한 민둥산(1118m)
이 있어 관광객 유치 차원에서 그리 한 것이다. 허나 역 이름만 바뀌었지 마을 이름은 그
대로 증산이다.
태백선에서 사라진 새마을호 열차도 무조건 정차했던 정선 고을의 큰 마을이자 석탄 산지
였던 증산, 지금은 민둥산을 간판으로 내걸며 인근 태백(太白)과 영월처럼 관광지로 화려
한 도약을 꿈꾼다.

칼처럼 솟은 산 사이에 아늑하게 들어앉은 증산은 하늘과도 불과 3자의 거리 만큼이나 가
까워 아랫 세상과는 공기부터가 확연히 틀리다. 그날은 날씨가 조금 더웠는데 고원지대라
조금은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역전으로 나가니 마침 정선으로 가는 군내버스가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벌리며 대기
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꿩 대신 닭을 고를 권리가 없기에 무조건 그를 잡아탔다.

강원도의 지붕답게 높이 솟은 뫼 사이로 길은 구불구불 흘러간다. 근래에 도로가 많이 정
비되어 길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그 대가로 정선에 아름다운 산하(山河)는 적지않게 상
처를 입어야 했다. 역시 강원도의 길은 제대로 토할 정도로 구불구불한 길이 매력인데 말
이다.

증산을 출발하여 40분 만에 정선군의 서울인 정선읍내에 들어섰다. 읍내에 들어서면서 바
로 정선아라리촌이 길 옆으로 지나간다. 그곳의 존재는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원래는 계
획에 없던 곳이라 지나치려 했으나,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절대로 못지나친다고 결국 정선
역 입구에서 내려서 오던 방향을 거슬러 내려와 아리리촌의 문을 두드렸다.

 


♠  정선 지역의 전통 가옥과 풍습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강원도 스타일의
 민속촌 ~ 정선 아라리촌

▲  대문을 활짝 열어 나그네를 맞이하는 아라리촌 정문

정선읍내 동쪽 조양강(朝陽江) 강변에 터를 닦은 아라리촌은 세월의 저편으로 무심히 사라져가
는 정선의 옛 가옥을 붙잡아 재현한 민속촌이다.
정선군청에서 많은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 만든 아라리촌은 2004년 10월 7일 문을 열었으며, 면
적이 34,720㎡에 이른다. 전통기와집(1동)과 굴피집(3동). 초가(1동), 너와집(1동), 저릅집(1동
), 돌집(1동), 귀틀집(1동) 등 전통가옥 9동과 주막, 농기구 공방(工房) 1동, 육모정, 초정, 서
낭당 등의 건물이 있으며, 디딜방아와 연자방아, 통방아, 장승, 고인돌, 그네 등이 민속촌 곳곳
을 수식한다.
또한 연암 박지원(朴趾源)이 쓴 양반전(兩班傳)을 테마로 하여 양반전의 주요 장면을 재현한 조
형물 10여 개가 곳곳에 배치되 또 다른 볼거리를 선사한다. 양반전은 한문소설로 그 배경이 바
로 정선이다. 중/고등학교 국어/문학 시간에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이 소설은 조선 후기 몰
락하는 양반 계급의 위선과 무능력을 풍자한 것으로 쌀을 갚지 못한 가난한 양반과 양반을 꿈꾸
는 부자, 그리고 그들을 중재하는 정선현감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아라리촌은 이런 볼거리 외에도 민속촌 주막에서 토속 음식인 곤드레밥과 순두부, 메밀 관련 음
식을 사먹을 수 있으며, 가격은 다소 밉지만, 1일 숙박체험도 가능하다. 그리고 민속촌 서쪽으
로 정선의 대지를 촉촉히 어루만지는 조양강과 강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가 놓여 있으며, 강 너
머로 칼처럼 솟은 산 사이에 둥지를 튼 정선읍내가 바라보인다.

양반전 디오라마 등을 빼고는 여타 민속마을과 별 다를 것은 없으나, 강원도 고원지대에 가옥과
생활상을 두루 살필 수 있는 현장으로 정선에 왔다면 꼭 둘러볼만하며, 넉넉잡아 30분 정도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그럼 지금부터 정선의 과거가 담겨진 아라리촌을 둘러보도록 하자.

▲  청동기시대 지배자의 무덤인 고인돌
옛것이 아닌 모형이다.

▲  6각형 모양의 정자 육모정


※ 정선 아라리촌 찾아가기 (2015년 12월 기준)
① 대중교통
* 동서울터미널에서 정선행 직행버스가 1일 9회 떠난다.
* 청량리역에서 매일 8시 20분에 정선, 아우라지행 정선아리랑열차가 운행한다. 원주역과 제천
  역, 영월역, 민둥산역을 경유하며, 일반 여객열차가 아닌 관광열차기 때문에 운임이 좀 비싸
  다. (청량리역에서 정선역까지 어른 26,100원)
* 민둥산역에서 아우라지행 정선아리랑열차가 1일 2회 떠난다. <11:25(청량리발 열차), 15:15>
* 청량리역에서 강릉(정동진)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민둥산역에서 정선행 군내버스(1일 7회)를
  타고 아라리촌(여성회관) 하차
* 원주, 강릉, 제천에서 정선행 직행버스 이용
* 정선시외터미널에서 동면(화암), 증산 방면 군내버스를 타고 아라리촌(여성회관) 하차
* 정선역에서 도보 25분, 또는 택시 이용
② 승용차편 (주차장 있음)
* 영동고속도로 → 진부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정선방면 59번 국도 → 나전3거리에서 우회
  전 → 정선제2교 4거리에서 좌회전 → 봉양5리 교차로에서 증산 방면 우회전 → 아라리촌

★ 아라리촌 관람정보 (2015년 12월 기준)
* 입장료 : 3,000원(정선군 아리랑상품권을 지급함)
* 주차비 공짜
* 관람시간 : 9시 ~ 18시 (17시까지 입장)
* 공예 체험 : 정선 5일장(2,7,12,17,22,27일)과 주말에 도자기공예, 칠보공예, 컨츄리공예 체
  험 이벤트가 열린다. 체험비는 3,000~9,000원 정도 (겨울에는 안함)
* 아리랑학당에서 정선아리랑 소리체험을 받을 수 있다. 4~11월에 운영하며, 체험비는 무료
* 소재지 -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애산리 560 일대 (애산로 37, ☎ 033-560-2059)
* 아라리촌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  옛 정선을 거닐다 ~ 아라리촌 둘러보기

▲  아라리촌 정문을 들어서면 넓은 길이 나온다.
여기서 직진을 하던 오른쪽으로 가던 상관은 없으나 나는 오른쪽길로 들어서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았다.

▲  가장 먼저 만난 양반전 조형물 (양반전 조형물 1)

정선의 어느 가난한 양반이 살았다. 그는 독서를 좋아하고 정직한 성격으로 정선에 부임하는 군
수(郡守)들이 무조건 찾아가 인사를 할 정도로 유명했다. 허나 살림이 어려워 매년 관아의 쌀을
빌려 목구멍에 풀칠을 했는데, 계속 빌리기만 했지 갚지를 못해 그 양이 어느덧 1,000섬을 넘었
다.
그렇게 정선 사또와 관원들이 오랫동안 쉬쉬하고 넘어갔으나,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결국 강원
도 관찰사(觀察使, 도지사)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관찰사는 이에 노발대발하며 정선군수를 닥달
해 양반에게 빌려준 쌀을 받아낼 것을 명령했다.


▲  전통와가 ~ 양반 가옥으로 사랑채와 안채로 이루어져 있다.

▲  이름도 생소한 굴피집

굴피집은 강원도 정선, 양양, 평창에서 많이 나타나는 원시형 산간지방 가옥으로 참나무(상수리
나무) 껍질인 굴피를 지붕에 씌우면 집의 보온이 잘되고 습기를 제대로 차단해 준다. 그래서 겨
울에는 매우 춥고 여름에는 비가 많은 곳에 적당하다.


▲  굴피집에 있는 양반전 조형물 (양반전 조형물 2)

정선현감은 양반에게 당장 쌀을 갚지 않으면 감옥에 넣겠다며 최후 통첩을 하였다. 아무리 조선
의 중심 계층이고 지체높은 양반이라 할지라도 관청에서 빌린 쌀을 한 톨도 갚지 않고 무대책으
로 일관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될 수가 없었다.

통첩을 받은 양반은 땅에 힘없이 주저앉아 어찌할 바를 모른다. 축 쳐진 그를 바라보는 마누라
는 팔짱을 끼며 한심스러운 표정으로 징하게 바가지를 긁는다. '영감~ 이제 어찌하면 좋단 말이
요~!! 무슨 말 좀 해보시오!!'


▲  양반과 부자 상인의 거래 (양반전 조형물 3)

현감의 최후통첩에 제대로 울상이 된 양반에게 희소식이 하나 날라왔다. 바로 옆집에 사는 부자
가 그 환곡을 대신 갚아주겠다는 것이다. 그 부자는 평민으로 평소 양반을 꿈꾸며 살았다. 마침
옆집 양반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되면서 이때다 싶어 자신이 환곡을 처리해줄 터이니 대신 양반의
신분을 자신에게 넘길 것을 제안한 것이다.
그의 제안에 양반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감옥에 끌려가게 될 판에 그까짓 양반 자리가 무슨
소용이랴, 당장 발등에 붙은 불조차 끄기도 벅찬데 말이다. 그래서 부자의 거래를 흔쾌히 받아
들이고 양반의 신분을 그에게 넘겼다.


▲  현감에서 절을 하는 양반 (양반전 조형물 4)

부자와 거래를 성사시킨 후, 양반은 길을 가다가 현감을 만났다. 그런데 그에게 갑자기 넙죽 절
을 하는 것이었다. 양반이나 현감이나 거의 같은 양반계급이기 때문에 아무리 벼슬이 높다고 해
도 절은 하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면 된다.
현감은 화들짝 놀라며 '아니 왜 이러시오. 일어나시오' 그를 일으켜 세우며 절을 한 연유를 물
었다. 이에 양반은 옆집 부자에게 양반의 신분을 팔았다면서 그 사연을 털어놓았다.


▲  아라리촌 북쪽에 자리한 소박한 모습의 초정(草亭)과
읍내 곳곳에서 수습해온 오래되지 않은 비석들

▲  가까이서 바라본 8각형 모양의 초정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초가 정자, 소박하고 단촐한 멋이 돋보인다.
이곳은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 및 길손님의 휴식처 역할을 하였다.

▲  따사로운 가을 햇살을 받으며 단잠에 빠진 그네

▲  아라리촌 둑방길에서 바라본 정선읍내와 조양강
읍내 뒤로 보이는 높고 웅장한 산이 정선읍의 진산(鎭山)인 비봉산(飛鳳山)이다.

▲  강바람이 살랑살랑 귀를 간지럽히는 조양강 산책로

▲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언제나 싱글벙글인 장승 3형제

뻐드렁니와 풀어진 눈을 드러내 보이며 밝은 표정으로 나그네를 맞는 장승, 장승은 마을의 안녕
을 지키고, 이정표의 역할을 하는 존재로 보통 마을 입구에 세우며, 그들 몸통에는 그들의 정체
가 쓰여져 있다.


▲  아라리촌에 살포시 찾아온 가을

▲  주막 옆에 자리한 농기구 공방
▼  공방 내부 (왼쪽은 농기구를 불에 달구어 만들던 곳, 오른쪽은
농기구와 농사와 관련된 도구들이 진열된 공간)


▲  양반이란 실체에 대경실색하는 부자 (양반전 조형물 5)

양반의 신분을 산 부자는 현감에게 이를 인정하는 증인이 되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현감은
그 문서를 만들어 주면서 양반이 지켜야 될 행동과 권리를 설명했다. 행동은 그야말로 겉치례가
상당수였으며, 권리는 그야말로 백성들을 쥐어짜고 착취하는 도둑 수준이었다. 그것을 모두 들
은 부자는 기쁨의 표정은 싹 사라지고 표정이 하얗게 질리면서
'아이고~ 그런 것이 양반이라면 차라리 안하고 말겠소~~!!'
양반을 포기하고 줄행랑을 쳤다. 그
이후 다시는 양반 타령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고 한다.


▲  파전에 동동주 1잔 들이키고 싶은 아라리촌

아라리촌에는 주막이 장사를 하고 있다. (겨울에는 안함) 초가 주막에는 산채정식, 곤드레밥 등
을 팔며, 굴피집 주막에는 순두부와 메밀콩국수, 칼국수 등을 파는데, 가격은 조금은 미운 수준
이다. 이런 곳에 왔으면 바깥에 차려진 마루에 걸터앉아 동동주 1잔에 파전 하나 걸쳐야 기분이
나는데, 그러지를 못하니 아쉬울 따름이다.


▲  이제는 굳어버린 화석처럼 아련히 남은 외겨리
외겨리는 소 1마리로 전답에 쟁기질을 하는 것을 말한다. 반대로 2마리로
하는 것을 '쌍겨리'라고 하며 척박한 산간지대 전답에서 많이 쓰였다.


▲  양반의 특혜에는 상민을 괴롭히는 몹쓸 것도 있다. (양반전 조형물 6)

현감이 말한 양반의 특혜 중에 양반이 상민의 코에 잿물을 들이붓고 머리채를 잡아 댕기며 수염
을 희롱하더라도 상민은 감히 원망하지 못한다는 내용이 있다. 그야말로 비인간적인 행위이다.


▲  이름도 외우기 쉬운 돌집
돌집은 정선 지역에서 많이 지어진 가옥 형태로 안방과 윗방, 사랑방, 도장방 그리고
정지와 외양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돌집은 얇은 판석을 두께 2cm 정도의 돌기와로
지붕을 덮어 올린 집으로, 주로 정선 지역 산지에서 나오는
청석맥을 파내 사용했다.

▲  벌거숭이 모습이 부끄러웠던지 덩굴을 걸친 돌담장

▲  산간지역에서 많이 지어진 귀틀집

귀틀집은 껍질을 벗긴 통나무를 '井' 모양으로 쌓아 벽을 만들고, 나무 틈새는 진흙으로 채웠다.
눈이 많이 와도 견딜 수 있고, 온도 유지가 용이하며, 간편하게 지을 수 있어 나무가 풍부한 산
간지대에서 많이 선호된 가옥이다.


▲  밥 생각을 간절하게 하는 귀틀집 부엌

▲  투박한 모습의 너와집

너와집은 귀틀집과 더불어 산간지대를 주름잡았던 집이다. 200년 이상 된 소나무 토막을 쪼깬
널판으로 지붕을 이었으며, 안방과 건넌방, 사랑방과 대청, 부엌, 봉담, 외양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부는 정선 지역에서 많이 나타나는 '화티'가 있는데, 이는 부뚜막 귀퉁이에 진흙을 쌓아 2개
의 구멍 중 위쪽은 불을 피워 음식을 하거나 내부를 밝히고, 아래쪽은 불씨 보관용으로 쓰였다.


▲  일반 초가와 비슷한 저릅집

저릅집은 정선과 삼척 지역에서 많이 나타나는 초가로 대마의 껍질을 벗기고 줄기를 이엉으로
이은 집이다. 다른 말로 겨를집이라고도 한다.

       ◀  통방아가 담겨진 삼각형 건물
통방아는 '물방아','벼락방아'라고도 한다. 확(
곡식을 넣는 돌통), 공이(찧는 틀), 수대 등으
로 이루어져 있는데. 3~5㎝ 정도의 커다란 통나
무를 이용하여 앞쪽에는 공이를 박고, 뒤쪽에는
물이 담길 수 있도록 구이통을 팠다. 그리고 귀
대를 통해 구이통 속으로 흘러 들어온 물에 의
해 공이가 올라가고 내려가면서 확에 있는 곡식
을 찧게 된다.


▲  물레방아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물레방아는 흔히들 우리 고유의 것으로 알고 있다. 허나 그것은 조
선 후기에 청나라에서 가져온 것으로 앞서 양반전의 저자인 연암 박지원이 청에 사신으로 갔다
가 물레방아의 위력에 반해 그것을 연구하였다.
이후 안의(安義, 경남 함양)현감이 되자 안의 북쪽 용추계곡에서 물레방아를 시범 운영을 하였
으니 그것이 바로 이 땅 최초의 물레방아이며, 용추계곡은 우리나라 물레방아의 탄생지가 되었
다. 그 이후 전국으로 빠르게 보급되어 농업 생산력의 흔쾌한 증진을 가져왔다.


▲  돌탑과 장승
마을 입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승과 돌탑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의 기능과
마을을 알리는 이정표의 역할을 하였다.

▲  서낭당(성황당)

서낭당은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성황신(城隍神)의 보금자리로 시골 마을에는 꼭 1개씩은 있다.
보통은 마을 입구나 이웃 마을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세웠으며 지금도 성황제(城隍祭)를 지내
는 마을이 많다. 당 주위에는 금줄과 돌담을 둘러 잡인의 출입을 금하며, 장승이나 돌탑을 주변
에 세웠다. 마을에서 가장 신성하고 중요한 곳이다 보니 이곳에 대한 정성은 정말 대단했다.


▲  서낭당에 모셔진 성황신도(城隍神圖)

성황신도는 하나지만 각각 다른 모습의 성황신 2인이 담겨져 있다. 그들 머리 뒤로 공통적으로
금색의 동그란 것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광배(光背)의 일종인 두광(頭光)이다. 푸근한 인상이
매력적인 왼쪽 성황신은 하얀 옷을 걸치고 있는데, 오른손에 지팡이, 왼손에 산삼을 거머쥐며
서 있다. 빨간 옷은 입은 오른쪽 성황신도 왼쪽만큼이나 인자함이 깃든 표정으로 있는데, 오른
손에 지팡이를, 왼손으로 귀여움이 묻어난 호랑이를 살짝 어루만지고 있다.
산신과 호랑이 외에 동자와 나무, 산 등이 담겨져 있어 산신도(山神圖)와 비슷하다.

이렇게 하여 양반전과 정선의 옛 모습을 담은 아라리촌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  느긋하게 팔자걸음을 걷는 양반 (양반전 조형물 7)
현감이 부자에게 말한 양반의 겉치례 중에는 팔자걸음으로 느릿느릿 걸어야
되는 내용도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은 정선 5일장이었다. 그래서 읍내로 넘어가 장터의 중심지인 중앙시
장에서 간단하게 메밀전병과 메밀전을 사먹고 여량, 아우라지로 가고자 정선터미널로 이동했다.
정선 땅은 구절양장(九折羊腸)의 험준한 산악지대라 교통이 매우 좋지가 못하다. 강원도 안에서
도 매우 첩첩한 산골이라 평창, 영월과 더불어 산다삼읍(山多三邑)이라 일컬어진다.

정선터미널에서 그나마 많이 있는 강릉행 직행버스(1~2시간 간격)를 타고 정선의 험준한 산하를
넘어 25분 만에 여량면(餘糧面)의 중심지인 여량에 이르렀다. 여량은 말그대로 식량의 여분이
있다는 뜻으로 험한 산골임에도 너른 들과 논이 있어 논농사가 가능했다. 그래서 식량이 남을
정도로 풍족했다고 전한다.

여량정류장에서 북쪽으로 가면 정선선의 실질적인 종점인 아우라지역이 나온다. 정선선의 종점
은 여기서 7.2km를 더 들어가야 되는 구절리(九切里)역이지만, 관광열차는 아우라지에서 바퀴를
접고 더 이상 들어가지 않으며, (무궁화호 열차는 폐선되고 비싼 관광열차가 대신 들어옴) 대신
레일바이크(Railbike)가 그 구간을 쑤시고 다닌다.

아우라지역은 원래 여량역이었으나 2000년에 아우라지로 간판을 갈았다. 이 역은 현재 역무원이
없는 무배치 간이역으로 역건물과 플랫폼, 철로가 전부이다. 역과 철로시설을 보호하는 담장도
없이 사방이 개방된 형태로 자유롭게 역 내부를 거닐 수 있으며, 하루에 2번 외부세계를 이어주
는 정선아리랑열차가 운행된다.

아우라지역을 지나면 두 물줄기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곳, 아우라지가 바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  정선선 아우라지역 ~ 조촐한 간이역의 모습이 너무나 정겹다.


♠  정선아리랑의 발상지이자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정선의 제일가는 명승지, 아우라지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 장마가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몰려든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 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장철 임그리워서 나는 못살겠네
아리랑 아리랑 아리라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정선읍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여량에는 정선아리랑의 발상지로 알려진 아우라지가 있다. 이
곳은 평창군 도암면에서 발원한 송천(松川)과 삼척시 하장면에서 발원한 골지천(骨只川)이 만나
는 곳으로 두 물줄기가 하나로 어우러진다는 뜻에서 아우라지라 불린다. 여기서 하나가 된 물줄
기는 조양강으로 간판을 바꾸고 남한강으로 흘러간다.

구름을 허리에 두르며 칼처럼 솟아난 높은 산과 시리도록 맑은 두 물줄기가 합쳐진 곳이라 경관
이 한 폭의 수묵담채화처럼 아름답기 그지없다. 예전에는 여량에서 강을 건널 때는 나룻배를 타
야 했으며, 섶다리를 따로 만들어 통행하기도 했으나 장마철만 되면 떠내려가기가 바쁘니 자연
히 나룻배의 의존도는 컸다. 강의 수심은 그리 깊지는 않아 두 다리로 건너도 무관하지만 그렇
다고 1년 내내 그렇게 건널 수도 없는 노릇이다.
허나 아우라지가 정선5일장만큼이나 유명해지면서 정선군은 푸른 산과 맑은 강, 강변을 가득 메
운 자갈돌, 푸른 하늘과 구름 밖에 없던 이곳을 열심히 꾸미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요란하게 꾸
민 것은 아니다. 골지천에 여량교(餘糧橋)란 다리를 놓고, 그 너머에 여송정(餘松亭)이란 2층
정자를 지었으며, 거기서 송천 너머까지 소박하게 징검다리를 놓아 조금은 돌아가긴 하지만 이
제는 배에 의지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허나 나룻배는 이곳 아우라지의 상징, 그것을 없애는 것
은 갈비탕에서 갈비를 빼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관광용으로 남겨두어 호기심 가득한 관광
객을 실어나른다. 배삯은 편도 500~1,000원으로 저렴하다. (배삯은 변경될 수 있음)

이곳으로 흘러드는 송천을 양수(陽水), 골지천을 음수(陰水)라 하여 장마 때 양수가 많으면 대
홍수가 예상되고 음수가 많으면 장마가 끊긴다는 옛말이 전해오며, 남한강 1천리 길을 따라 목
재를 운반하던 뗏목 시발점으로 각지에서 모여둔 뗏꾼의 아라리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특히 정
선아리랑의 발상지로 유명한데, 그 애달픈 사연은 다음과 같다.

옛날 여량에 혼인을 약속한 남녀가 있었다. 총각은 뗏사공으로 나무를 팔아 돌아오면 처녀와 혼
인하기로 다짐을 하고 조양강에 배를 띄워 아우라지를 떠났다. 하지만 총각은 1년이 가도 2년이
가도 돌아오지 못했다. 아마도 가는 도중에 드센 여울에서 배가 뒤집혀 목숨을 잃은 듯 싶다.
기다림의 시간은 점점 절망적으로 변했다. 아우라지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처녀는 결국 아우라지
강에 몸을 던져 죽고 만다. 그녀가 그를 기다리며 애절한 마음을 적어 읆은 것이 바로 정선아리
랑의 시초라는 것이다. 이 전설 외에도 장마로 인해 강을 사이에 두고 만나지 못하는 남녀의 한
스러운 마음을 담은 것이 아리랑의 가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구전(口傳)으로 전해오던 아우라지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고자 여송정을 세우고, 그 옆에
처녀상을 1987년에 세웠는데, 지금의 것은 1999년에 새로 만든 것이다. 또한 아우라지비를 세워
이곳이 정선아리랑의 발상지임을 아련히 전한다.
그리고 속세에 거의 알려지진 않았지만 2개의 물줄기가 만나는 아우라지 자갈밭에서 신석기시대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유물은 어디 박물관이나 발굴을 주관한 대학교 수장고에서 잠
을 자고 있겠지만, 유적은 발굴 이후 사라져 지금은 흔적 조차 더듬을 수 없다. 이들 유적과 유
물을 통해 선사시대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살짝 알려준다.


▲  아우라지역에서 동쪽으로 바라보이는 왕재산(997m)

▲  단장의 사연을 담은 아우라지 노래비

▲  아우라지의 명물값을 톡톡히 하는 나룻배
예전에는 뱃사골이 직접 노를 저어서 배를 움직였으나, 지금은 강을 가로지른
굵은줄을 잡으며 배를 움직인다.


강 건너편까지 다리가 놓여져 굳이 돈 주고 느림보 나룻배를 이용할 필요는 없겠지만, 아우라지
의 상징이자 이 세상에서 자꾸만 사라지고 있는 우리의 정겨운 풍물의 하나이다. 시멘트 다리에
떠밀려 나룻배는 점점 그 설 자리를 잃어가고 이제는 손에 꼽을 정도만 간신히 명맥을 유지한다.


▲  평창에서 온 송천이 삼척에서 온 골지천과 하나가 되는 현장 ~ 아우라지

▲  조양강의 북쪽과 남쪽을 끈끈하게 붙들어 맨 여량교

초승달이 아우라지의 물을 뜨려는 달나라 토끼의 조정으로 인간 세상으로 깊히 내려오다가 그만
다리에 걸려 꼼짝달싹 못하는 것 같다.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한폭의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내는
아우라지의 풍경은 정말 집으로 살며시 훔쳐와 혼자서만 두고두고 보고 싶다. 이곳을 지나던 조
각구름도 아우라지의 풍경에 홀딱 반했는지 갈 길을 멈추고 한없이 머물고 있다.

▲  측면에서 본 초승달 모형
마치 날카로운 칼날을 보는 듯 하다.
저기에 손을 댔다가는 피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  아우라지의 명물, 아우라지 처녀상
오늘도 기약없는 님을 기다리는 것일까? 그녀의
모습에 처절함과 비장함이 엿보인다.


▲  아우라지를 굽어보는 여송정
1997년 주민들이 모든 1억원으로 지은 정자로 여량과 송천의 앞글자를 따서
여송정이라 하였다. 정선아리랑 설화에 나오는 총각은 여량에, 처녀는
송천 건너에 살았다고 전한다.

▲  송천을 따라 이어진 여송정 옛길
2010 정선비전 100대 시책사업의 하나로 조성된 길로 옛날부터 이곳
주민들이 이용하던 길이다.

▲  여송정에서 바라본 조양강, 그리고 정선의 산하
저 강물에 이 몸 하나 의지할 조그만 조각배를 띄우고
서울까지 흘러가 보고 싶다. 물론 위험한 짓이지만 ~~

▲  조양강 자갈밭에 조성된 돌탑들
이 주변에서 신석기시대 유적과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물론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아우라지를 정신없이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7시가 넘었다. 아쉽지만 내가 있어야 될 서울로
돌아가야 될 시간이다. 원래는 나전과 진부를 거쳐 서울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아우라지역에 청
량리로 가는 열차가 대기하고 있으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아우라지에서 잠시 머문 열차는 17시 10분 외마디 기적소리로 이곳의 정적을 살짝 깨뜨리며 첩
첩한 산주름에 묻힌 아우라지를 떠난다. 이리하여 강원도의 지붕 정선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
을 걷는다.

※ 정선 아우라지 찾아가기 (2015년 12월 기준)
* 청량리역에서 아우라지행 정선아리랑열차가 매일 8시 20분에 떠난다. (민둥산역 경유)
* 민둥산역에서 아우라지행 정선아리랑열차가 매일 2회 떠난다. (11:25, 15:15)
* 강릉에서 정선행 직행버스(1~2시간 간격)를 타고 여량 하차
* 정선터미널에서 강릉행 직행버스나 여량, 임계 방면 군내버스 이용
* 승용차로 갈 경우 (주차장 있음)
① 영동고속도로 → 진부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정선방면 59번 국도 → 나전3거리에서 임계
   방면으로 좌회전 → 나전 → 아우라지
* 구절리역에서 아우라지역까지 레일바이크를 이용할 수 있다. 거리는 7.2km로 동절기에는 1일
  4회(8:40, 10:30, 13:00, 14:50), 하절기에는 16:40분이 추가되어 1일 5회 다닌다. 이용요금
  은 2인승 25,000원, 4인승은 35,000원이며, 10대 이상 단체 예약시는 10% 할인된다. 레일바이
  크 예약 및 자세한 정보는 ☞ 여기를 클릭한다 (문의 ☎ 033-563-8787)
* 소재지 - 강원도 정선군 여량면 여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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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의 어울림, 우리나라 민속마을의 성지 ~ 아산 외암리민속마을 (돌담길)

 


' 과거와 현재의 어울림 ~ 아산 외암리(外巖里) 민속마을 '
외암리민속마을 돌담길
▲  외암리의 자랑, 돌담길

 


름 제국(帝國)을 몰아낸 가을이 한참 천하를 수놓던 10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아산(牙山)
외암리민속마을을 찾았다.
일행들은 전날 당진(唐津) 왜목마을로 여행을 갔는데, 그들은 왜목 남쪽인 장고항에서 1박을
머물렀다. 나는 일이 있어서 함께 가지 못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그곳으로 달려가 9시에 도
착했다.

그들이 머물던 펜션은 장고항 서쪽 언덕에 둥지를 틀고 있어 서해바다와 장고항이 훤히 바라
보인다. 일행들과 어울려 아침을 먹고 시간을 때우니 어느덧 방을 비워야 될 시간이 문을 두
드린다. 그래서 자리를 정리하고 일단 삽교호(揷橋湖)를 거쳐 상경하기로 했다.

삽교호방조제 서쪽에 터를 닦은 삽교호관광지는 가을 행락객과 수레들로 그야말로 만원을 이
룬다. 바닷가에 만든 삽교호함상공원에는 해군 함정을 개조한 함상까페가 있는데, 이곳은 미
운 수준의 입장료를 내야되서 굳이 들어가지 않았다. 함상공원 외에 북쪽 갯벌 위에 나무 다
리를 놓아 산책로를 내었는데, 여기서 서해대교가 가까이에 바라보인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딱히 볼거리는 없으며, 조개구이와 회 등 해산물을 다루는 식당과 가게들이 즐비하여 먹거리
와 수산물시장으로서의 비중이 더 크다.

이렇게 삽교호 관광지를 둘러보니 시간은 13시가 되었다. 일행 대부분은 피곤함으로 인해 일
찍 상경하고 나를 포함한 팔팔한 7명은 그냥 가기가 아쉬워 주변 명소를 더 둘러보기로 하였
다. 내가 여러 곳을 제시했는데, 처음에는 안성(安城)의 모처로 길을 잡았으나 삽교호방조제
를 건너자 바로 마음이 변해 외암리 민속마을로 방향을 틀었다. 삽교호방조제를 넘으면 아산
땅이고 서일농원은 거리도 제법 머니 아산 지역의 명소를 둘러보는 것이 편의상 좋을 것이다.

유난히 신호등이 안받쳐주는 아산시내를 간신히 지나 송악에서 동쪽으로 들어서면 바로 외암
리이다. 마을 주차장은 이미 수레들로 완전 초 만원, 마을은 그야말로 나들이 인파로 넝실넝
실 파도를 이룬다. 수레를 세울 데가 없어 주차장을 몇 바퀴를 돌아서야 간신히 공간이 나와
그곳에 수레를 쑤셔 넣었다.

주차장을 기준으로 동쪽 개울(외암천) 건너가 외암리민속마을이다. 그 마을로 들어서려면 돌
다리를 건너야 되는데, 그 다리를 건너기 전에 매표소가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
본다. 그래서 일단 입장권(2,000원)을 구입하고 늦은 점심을 먹고자 적당한 주막을 물색했다.
허나 주막마다 사람들로 미어터지고 여기저기 서성인 끝에 매표소에서 50m 떨어진 주막에 간
신히 자리를 잡았다.

외암리도 식후경이라고 허기진 배를 위로하고자 무엇을 먹을까 궁리하다가 간단히 묵밥과 잔
치국수를 먹기로 했다. 둘 다 가격은 7,000원 선으로 시중보다 조금은 비싼 수준이다. 허나
우리에게는 꿩 대신 닭을 고를 권리는 없었다. 여기서 먹지 않으면 언제 먹을지 기약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음식을 주문했으나 주문량이 가득 밀려 그들을 먹기까지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일찌감
치 나온 밑반찬 김치를 젓가락으로 축내며 애타게 기다리는데 정말 1분이 1시간 같았다.
한 20분 정도 기다리니 그렇게나 고대하던 밥과 국수가 우리 앞에 펼쳐졌다. 나는 묵밥을 먹
었는데, 외암리라고 해서 딱히 특별한 맛은 없었다. 그냥 이 땅의 평범한 묵밥 수준, 너무나
배가 고팠는지 순식간에 그릇을 비우고, 동동주 1잔씩을 겯드리며 늦은 점심을 마친다. 그럼
여기서 잠시 외암리민속마을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외암리마을 주막에서 먹은 묵밥의 위엄


♠  500년 묵은 살아있는 민속박물관 ~ 아산 외암리(外巖里) 민속마을
중요민속문화재 236호


▲  논밭이 어우러진 외암리마을

설화산(雪華山, 440m) 서남쪽에 포근히 둥지를 닦은 외암리는 이 땅에 몇 안되는 오래된 민속마
을로 무려 500여 년의 역사를 품고 있다. 자연 환경을 잘 살린 전형적인 시골 마을로 한결같이
옛 모습을 잃지 않아 마을로 발을 들인 순간 조선 후기로 강제 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수많은 건축가와 조경전문가들이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격찬했으며, TV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도 각광을 받아 '태극기 휘날리며'.'취화선','야인시대(SBS)','찬란한 여명(KBS)','임
꺽정(SBS)' 등이 앞다투어 이곳을 거쳤다.

예안이씨의 집성촌(集姓村)으로 현재 마을 주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9채의 오래된
기와집과 60여 채의 초가를 비롯해 70여 호의 집들이 옹기종기 마을을 이루고 있다. 근래에 물
레방아 북쪽에 조성된 외암민속관의 기와집과 초가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으
며,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농업과 음식점, 전통음식 제조/판매로 생계를 꾸린다.

이곳 외암리에 처음 터를 닦은 집안은 '평택진씨' 집안이라고 한다. 그들이 언제부터 이곳에 살
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16세기 초반 참봉 진한평(陳漢平)의 맏사위로 예안이씨 온양파의 시조
인 이사종(李嗣宗)이 들어오면서 마을의 역사가 싹 바뀐다.
이사종은 그 시절 관습에 따라 처가살이―이 풍속은 조선 중기까지 이어짐―를 했는데, 진한평
이 죽자 그 재산은 딸 3명(아들은 없음)에게 분배―조선 중기까지 부모의 재산은 아들, 딸 모두
에게 균등 분배되었다―
되었다.

이사종의 후손이 번창하면서 외암리는 예안이씨의 터전으로 거듭났으며, 많은 선비와 학자, 과
거 급제자를 배출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숙종 때 대학자인 외암 이간(巍巖 李柬, 1677∼1727)
이 있으며, 11명의 생원(生員), 진사(進士)를 배출했다. 과거 급제자로는 고종으로부터 퇴호거
사란 호를 받은 이정렬(李貞烈, 1868~1950) 등이 있다.

▲  마을 앞에 놓인 섶다리

▲  외암리의 주산(主山)인 설화산

마을의 이름인 '외암'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마을 서쪽에 '시흥역'이란 역
참(驛站)이 있었으며, 그곳의 말을 오양골(현재 외암리)에서 길렀다고 한다. 그 '오양'에서 '외
암'이란 이름이 나왔다는 설과 '외암(巍巖) 이간' 선생의 호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마을의 구조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동고서저(東高西低)로 집들 대부분이 지형의 영향으로
서남향을 취하고 있다. 마을 서쪽과 몇몇 초가 뜰에는 경작지가 펼쳐져 있으며, 북쪽과 동쪽으
로 설화산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어 평온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설화산에서 발원한 계곡은 마을 동쪽을 거쳐 돌다리 부근에서 광덕산 강당골에서 시작된 외암천
을 만나 마을 북쪽으로 흐른다. 그 냇물을 끌여들여 마을 안에 인위적으로 조그만 물길을 만들
었는데, 이 물줄기는 마을의 여러 집을 거치면서 물을 제공해주며 곳곳에 곡수(曲水)와 아름다
운 연못을 만들어 마을을 한층 아리땁게 수식한다.
또한 풍수지리적으로 설화산은 불을 상징한다고 하여 마을에 물길을 만들어 화기(火氣)를 막고
자 하는 이른바 방화수(防火水)의 역할도 하고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시멘트를 바르거나 현대식으로 개조된 집들이 많았다. 그러다가 전통민속
마을로 지정되면서 국가 지원으로 '옛 모습 되찾기 사업'을 벌였고, 마을 주민들의 흔쾌한 참여
와 협조로 옛 모습을 되찾았다.

외암리에는 오래된 기와집이 9채 정도 있는데, 이들은 마을에서 꽤 권세있고 떵떵거리던 양반가
이다. 이들 모두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집을 세운 이의 관직명이나 연고 지명을 따라 참판댁,
감찰댁, 참봉댁, 송화댁, 영암댁(건재 고택), 신창댁 등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 모두 조선 말에
지어진 것으로 크기는 작지만 반가(班家)의 기품이 고스란히 깃들여져 있으며, 집주인의 공간인
사랑채와 아녀자의 공간인 안채, 그리고 제사공간인 가묘(家廟)를 갖추고 있고, 오래된 나무와
수석 등이 어우러진 전통정원을 지녔다.

이들 기와집 중에서 건재고택(영암군수댁)이 외암리 기와집의 대표격인데 사랑채 정원에는
소나
무와 은행나무 등을 마당 전체에 심고 왜국(倭國) 정원의 기법인 거북섬을 꾸며, 전통과 외래
조경이 섞인 조선 후기 절충형 정원을 이루고 있어 주목을 끈다. 또한 설화산에서 내려온 계곡
의 물줄기가 마당을 거쳐 연못으로 흐르게 하는 특이한 조경을 지녔는데, 특히 한국 음식 3대
명가(名家)의 하나로도 명성이 높다.
또한 퇴호거사 이정렬이 살던 참판댁은 툇마루 위에 영친왕(英親王)이 9살에 쓴 '퇴호거사(退湖
居士)란 현판이 자랑스럽게 걸려 있어 답사객의 눈길을 잡아 끈다. 이 집은 외암리의 명물이자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연엽주(蓮葉酒)로 유명하다. 이 술은 찹쌀로 빚은 누룩에 연근과 솔잎을
넣고 발효시켜 만든 술로 고종 황제에게 진상했다고 하며, 충남 지방무형문화재 11호이다.

▲  외암민속관 기와집과 장독대

▲  초가3간

마을을 이루고 있는 약 60여 채의 초가는 일반 백성들이 살던 집이다. 기와집과 달리 소박하고
단촐한 모습으로 초가삼간(草家三間) 그 자체이다.
현대화의 거친 물결에 그 개체수가 급속히 줄어들어 이제는 오래 숙성된 마을이 아니면 만나기
조차 힘든 초가, 하루 정도는 머물고 싶은 정겨운 우리의 옛 집이다. 하지만 그 집에 아예 눌러
살고 싶은 생각은 눈꺼풀만치도 없다. 왜냐? 나도 어쩔 수 없는 현대인이기 때문이다.

초가 대부분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집이란 아무리 오래되고 고귀한 집이라도 사람이 살고 있어
야 집으로써의 빛과 가치를 발한다. 사람의 때가 가득한 집은 건강 상태가 좋은 반면 텅 비어있
는 집은 아무리 건실하게 지어도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즉 사람의 손때가 집의 수명을 연장시
키는 비결이라 하겠다.

초가(집)의 형태는 'ㅡ', 'ㄱ'자형이 주류를 이루며, 집 내부를 옹성처럼 가린 'ㅁ'자형도 간혹
눈에 띈다. 뜰에는 감나무와 대추나무, 사과나무 등이 넓게 그늘을 드리워 주며, 몇몇 집은 작
은 텃밭을 갖추었다.

외암리의 자랑은 바로 돌담길이 아닐까 싶다. 마을을 찾은 나그네의 눈과 마음을 오래도록 붙잡
는 마을의 상징으로 그들로 하여금 외암리를 절대로 잊지 못하게 만든다.
마을 돌담의 길이는 무려 5.3km에 이른다고 하며, 높이는 거의 1.5m~2m 정도이다. 일종의 들여
쌓기 방식으로 지어졌는데, 초가와 기와집, 경작지의 담장 및 경계선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돌
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것이 마치 조그만 석성(石城)을 보는 듯 하다.

근래 시골마을의 돌담길이 계속 사라지자 문화재청에서 뒤늦게나마 몇몇 돌담길을 문화재로 지
정해 역사의 뒤안길로 가려고 하는 돌담길의 발목을 붙잡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  누렇게 익은 초가

▲  돌담길

담장 너머로 마구 가지를 늘어트린 정원수들은 단순하고 밋밋한 돌담을 더욱 멋드러지게 수식한
다. 가을에는 머리 위로 잘 익은 감이 뚝 떨어질 것 같은 돌담길, 그 길을 거닐면 누구나 사색
가가 되고 시인(詩人)이 되며, 조선시대 사람이 된다. 돌담길은 그야말로 과거로 통하는 타임머
신인 셈이다.
저 돌담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마치 어디엔가 빨려 들어가듯 그 끝을 향해 부지런히 발길
을 재촉한다. 정겹다 못해 집으로 살짝 가져가고 싶은 돌담길의 풍경~ 그 무거운 돌담을 가져갈
엄두가 나지 않아 사진으로 대리만족을 하련다.

마을에는 오래된 민속 유물이 즐비하다. 집집마다 디딜방아와 물레방아, 연자매, 상여, 장독대
등이 가득해 옛 생활상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  기와집 부엌

▲  그네 타기

※ 외암리 민속마을 찾아가기 (2015년 11월 기준)
① 아산까지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유구 방면 직행버스(1일 7회)를 타면 외암리 입구인 송악에서 내려준다.
  여기서 외암리마을까지 도보 10분
* 용산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대천역, 군산역, 익산역에서 장항선 열차를 타고 온양온천역에서
  하차
* 수도권 전철 1호선 신창행 열차를 타고 온양온천역 하차 (1시간에 1~2회꼴로 운행)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과 동서울터미널에서 아산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 인천과 수원, 청주, 대전(동부)에서 아산행 직행버스 이용
* 천안시외/고속터미널과 천안역(동부)에서 아산(온양온천역, 아산터미널)행 900번대 시내버스
  가 수시 운행
② 현지교통
* 온양온천역(1번 출구를 나와서 역전3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정류장 있음)과 아산터미널 건너
  편에서 아산시내버스 100, 101번을 타고 역촌1리에서 내리거나 송악면환승센터 종점에서 내린
  다. <역촌1리에서 도보 10분, 송악면환승센터(외암리마을 제2주차장)에서 도보 5분>
③ 승용차로 가는 경우 (주차장은 2곳이 있으며, 주차비는 공짜)
* 경부고속도로 → 천안나들목 → 아산 방면 21번 국도 → 장존교차로에서 송악 방면 → 외암3
  거리에서 좌회전 → 외암4거리에서 좌회전 → 외암리민속마을

※ 외암리 민속마을 관람정보 (2015년 11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2,000원 / 어린이,학생,군인 1,000원 (30인 이상 단체는 20% 할인, 민박 손님
  과 아산 시민은 공짜)
* 입장시간 : 9:00 ~ 17:30
* 먹거리는 매표소 부근에 잔치국수와 묵밥, 도토리묵, 두부김치, 파전, 동동주 등의 식사를 파
  는 식당이 여럿 있으며, 물레방아 서쪽 외암민속관에서 떡과 식혜를 저렴한 가격에 판다.
* 매년 10월에는 외암리의 대표 축제인 짚풀문화제가 열린다. 보통 3일 일정으로 열리며, 국악
  과 연극 공연을 비롯하여 관혼상제, 짚풀 만들기, 추수, 공장(工匠) 체험, 과거시험 등의 다
  양한 행사와 문화체험을 즐길 수 있다.
  (그 외에 음력 1월 14일에 장승제가 열리나 이건 마을 사람들의 전통의식 행사임)
* 오래된 초가와 기와집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별이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 외
  암리에는 20여 채의 가옥이 민박을 하고 있다. 수용인원은 4명에서 20명까지 다양하며, 취사
  도구와 현대식 화장실을 갖추고 있어 불편한 점은 별로 없다. 가격은 6만원에서 20만원선
  (입실은 14시, 퇴실은 11시까지이며, 바베큐도 가능함, 외암리마을 홈페이지에서 예약)
* 농촌체험(모내기 체험) 및 전통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공방체험과 다듬이체험 등은 주말
  에 상시적으로 체험이 가능하며, 떡메치기체험은 봄부터 가을까지 매주 주말에 운영한다.
* 외암민속관 주변에서 투호, 줄타기, 곤장치기, 짚풀 새끼꼬기, 다듬이, 떡매치기, 그네타기
  등을 무제한으로 체험할 수 있다.
* 외암리는 관광지이자 문화유산이기 이전에 주민들이 사는 생활공간이다. 허락 없이 들어가 집
  안을 기웃거리는 일이 없어야 되며, 그들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행동을 삼갈 것, 비공개 기와
  집과 초가는 그냥 담장 밖에서 바라보면 된다.
* 시간이 된다면 외암리 안쪽 강당골도 같이 둘러보길 권한다. 외암리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 소재지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84 (외암민속길 42-7 ☎ 041-540-2654, 541-0848)
* 외암리민속마을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민박, 축제, 전통/농촌체험 등)


▲  마을 동남쪽에 만든 코스모스 밭 너머로 바라본 외암리마을과 설화산


♠  돌다리, 물레방아 주변

▲  외암천에 발을 담군 돌다리를 건너면서 조선 후기로의 과거 여행이
시작된다. 돌다리는 마을로 들어서는 관문의 역할도 하지만
과거와 현재의 공간을 가르는 경계선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속세에서 외암리마을로 들어가려면 매표소 북쪽에 난 돌다리를 건너야 된다. 그 다리 외에는 딱
히 이어주는 공간이 없다. 입장료 아낀다고 괜히 대놓고 개울을 건너거나 개울을 거슬러 올라가
는 짓은 하지 않도록 한다.


▲  외암 이간 신도비(神道碑)

매표소 남쪽에는 훤칠한 키의 비석 하나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딱 봐도 예사롭지 않은
모습인데, 그에 대한 안내문이 없어 사연을 모르는 관광객 태반은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외암
리마을에 눈이 먼 나머지 눈길 조차 주지 않는 것이다. 나 역시 그 비석을 외암리마을의 내력(
來歷)을 담은 사적비(事蹟碑)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외암 이간의 신도비였다.

이간(李柬, 1677∼1727)은 외암리 출신으로 마을 이름을 그의 호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을 정도
로 이곳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러니 외암리에 왔다면 그의 신도비와 묘소를 둘러보는 것
이 외암리와 이간에 대한 당연한 예가 아닐까 싶다.

이 비석은 19세기 초반에 세워진 것으로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이 비문(碑文)을 썼다. 나중
에 윤용구(尹用求, 1853~1939)가 다시 쓰고, 이간의 6세손인 이정렬(李貞烈)이 고쳐 썼으며, 원
래는 이간 묘소 앞에 있던 것을 관리를 위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  물레방아를 품은 초가와 바위글씨가 새겨진 바위(초가 오른쪽)

▲  반석에 새겨진 바위글씨 동화수석(東華水石), 외암동천(巍岩洞天)

물레방아 동쪽 바위에는 2개의 바위글씨가 선명하게 박혀있다. 마을로 들어서는 다리 밑에 있음
에도 그들에게 눈길을 주는 이들은 별로 없는데, 내 일행들 역시 물레방아만 보였지 글씨까지는
몰랐다고 한다. 그야말로 등잔 밑이 어두운 셈이다.

이들 바위글씨는 서쪽에는 동화수석(東華水石), 동쪽에는 외암동천(巍岩洞天)이라 새겨져 있는
데, 동화수석 글씨는 높이 50cm, 너비 2m 크기이다. 그 우측에는 기미(己未)란 글씨가, 좌측에
는 이백선서(李伯善書)라고 쓰여 있어 이백선(1893~1969)이란 인물이 기미년에 새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여기서 기미년은 언제일까? 그 유명한 3.1운동이 일어난 해가 바로 기미년(1919년)
이다. 이백선의 생애에서 기미년은 1919년 딱 하나 뿐이므로 자연히 1919년이 된다. 그리고 동
화는 우리나라를 뜻한다.
외암동천 글씨는 높이 52cm, 너비 175cm로 끝에는 이용찬서(李用瓚書)라 쓰여 있어 이용찬이란
사람이 썼음을 알 수 있다. 이용찬은 이간의 후손으로 해방 이후 판사를 지냈다.

외암동천에서 외암은 당연히 마을의 이름이고, 동천(洞天)은 신선들이 기절할 정도로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곳에 부여되는 이름이다. 물레방아 주변 개울가에 넓은 반석이 깔려있고 나름
대로 괜찮은 풍경을 자아내니 이용찬이 그렇게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또한 이곳은 외암리 사람
들의 피서 장소이기도 하다.


▲  외암리와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외암천 (정면에 보이는 다리가 섶다리)

▲  원두막과 장승 (돌다리 북단)
돌다리를 건너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외암민속관,
전통민속체험장으로 이어지며, 오른쪽은 외암리마을이다.

▲  식혜와 떡을 파는 초가집 매점
여기서 떡메치기 체험을 할 수 있다. 식혜와 인절미는 2,000원 선으로
가격도 저렴하고 양도 제법 많다.


♠  외암민속관, 외암 이간묘 주변

▲  제각각의 표정과 개성을 지닌 장승들
그들의 익살스런 모습에 마을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火魔)는
자신의 본분조차 잊고 돌아설 것이다.

▲  외암민속관 기와집

▲  기와집 동쪽에 조성된 정자와 연못

물레방아 북쪽에는 외암민속관과 그곳에 딸린 초가와 기와집, 전통문화/민속놀이 체험현장이 있
다. 외암민속관 일대는 얼핏보면 외암리마을의 일부처럼 보이지만 엄연히 별도의 공간으로 전통
가옥과 다양한 전통문화 체험 및 외암리마을의 보조를 위해 근래에 터를 다졌다.

이곳에 있는 집들은 거주용이 아닌 전시용으로 한국민속촌의 가옥처럼 실제에 가깝게 재현되어
있으며, 민속관에는 이곳을 거쳐간 드라마, 영화와 관련된 상영물과 자료 등을 볼 수 있다. 또
한 전통혼례를 비롯하여 방망이 다듬이, 줄타기, 투호, 제기, 새끼꼬기, 곤장치기 등을 온몸으
로 즐길 수 있으며, 옛날 농사 기구와 생활유물을 기와와 초가, 그 주변에 골고루 배치하여 볼
거리를 가득 선사한다.


▲  장독대와 짚풀로 만든 김치의 보금자리 김치각
옛날 단양(丹陽) 시골집에 저런 김치각이 있었는데(1990년대 초반까지) 이제는
민속촌이나 고택(古宅)에서나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제아무리 김치냉장고가 설친다 한들 김치각의 김치만은 못할 것이다.

▲  서로 쌍둥이 같은 김치각
갑자기 김치각의 김치가 너무 먹고 싶다. 어디가야 흔쾌히 먹을 수 있을까..?

▲  기와집 서쪽에 초가 창고

▲  이제는 듣기조차 힘든 다듬이 체험 현장
겉으로는 엄청 쉬워 보이는데, 실제로 해보니 많은 요령이 필요하다.

▲  투호놀이 현장
저 동그란 통에 투호를 골인시키는 것이 은근히 어렵다.
10번 던져서 1~2번 가까스로 들어갈 정도니 말이다.

▲  줄타기 현장
줄의 거리는 짧아도 저기에 발을 올리면 엄청 길어 보일 것이다.
남의 도움 없이 줄을 완전히 통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는 거의 5m도 못가서 줄 밖으로 떨어졌음~~

▲  짚풀 새끼꼬기 현장
원두막에 앉아 한가롭게 새끼를 꼬는 것도 보기와 다르게 쉽지가 않다.

▲  곤장 체험 현장
저기에 십(十)자 모양으로 누워 무지막지하게 생긴 곤장을 맞는 현장.
겉으로 보면 별로 아프지 않을 것 같지만 제대로 맞으면 정말
일어나지도 못한다.
곤장 체벌에는 태형(笞刑)과 장형(杖刑)이 있는데,
태형은 곤장 50대, 장형은 100대이다.

▲  누런 초가집의 뒷모습

▲  전통민속체험장, 외암민속관 뒤쪽에 나란히 자리한 원두막 3형제

▲  비스듬히 누워있는 돌부처(마애불)

석축 밑에 고된 몸을 기대고 선 돌부처, 깨진 돌조각에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튼 마애불(磨崖佛
)로 연화대(蓮花臺)에 앉아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며, 살며시 미소를 선보인다. 불상 앞에
는 중생들이 소망을 들이밀며 얹혀놓은 돌들이 모이고 모여 조촐한 돌탑을 이루고 있다.
이 석불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으며, 마을 부근에서 수습해 온 것으로 보인다.


▲  외암리마을의 성지(聖地), 외암 이간 묘소

전통민속체험장 서북쪽으로 송림(松林)이 우거진 언덕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곳에 가려면 밭
을 거쳐야 되는데, 밭 입구에 설치된 조그만 문을 열고 그 언덕을 100m 가량 들어가면 외암리가
낳은 대학자이자 이곳의 성역인 외암 이간의 묘역이 모습을 비춘다.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 묘소는 이간과 그의 부인 파평윤씨의 합장묘(合葬墓)로 봉분의 크기는
일반 백성의 무덤처럼 조그만하다. 봉분(封墳) 앞에는 무덤의 주인이 적힌 비석과 상석(床石)
밖에 없어 정말 조촐한 모습이다. 대신 소나무가 울창하여 그 허전함을 달래주고 있으며, 남쪽
과 서쪽이 확 트여 경치는 좋다.

외암 이간은 1727년 3월 14일에 50세의 나이로 별세하여 그해 5월 온양군 유곡에 무덤을 썼는데,
1961년 3월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여 마을 곁에 있게 했다. 신도비 역시 마을로 옮겨와 매표소
부근에 두었다.

이곳은 보통 문(밭 입구에 있는 문)이 닫혀져 있고 적당한 안내문이 없어서 속사정을 모르는 대
부분의 속인들은 거의 찾지 않는 그야말로 아는 사람만 들어오는 소수의 공간이다.


▲  석축 위에 터를 다진 기와집과 누런 감이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


♠  과거와 현재의 어울림 ~ 외암리마을 둘러보기

▲  논과 어우러진 외암리마을 서부

500년의 장대한 역사를 간직한 외암리마을은 그 역사만큼이나 규모가 크다. 동서의 길이가 거의
500여m에 이르며, 외암민속관 주변을 포함하여 구석구석 살펴보려면 사진 찍는 시간과 이동시간
을 고려해도 적어도 5~6시간 이상은 걸린다.
허나 관광객 대부분은 마을의 절반도 살피지 않고 가버린다. 그래서 매표소와 거리가 멀수록 사
람의 수는 반비례하여 사람 보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마을 서쪽에는 논과 밭이 펼쳐져 있는데, 초가들이 그런 논과 어우러져 목가적(牧歌的)이고 편
안한 풍경을 연출한다. 속세에서 오염된 안구가 제대로 정화되어 눈이 번쩍 뜨며,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벼이삭은 고개를 숙이며, 가을 추수의 기쁨을 기다린다.


▲  풍년예감 ~ 외암리 평야

▲  교수댁 앞에 놓인 빛바랜 디딜방아
곡식을 찧는 본래의 목적은 상실되고 전통체험 및 호기심 충족을
위한 관광용으로 살아가고 있다.

▲  양반가의 품격이 드러난 교수(敎授)댁

교수댁은 외암리를 이루고 있는 9개의 오랜 기와집의 하나로 이사종의 13세손인 이용구(李容九,
1854~?)가 경학(經學)으로 성균관교수(成均館敎授)를 지냈다고 해서 속편하게 교수댁이라 불린
다.

원래는 사랑채와 안채, 행랑채, 별채를 지니고 있었으나, 지금은 안채와 행랑채, 사당만 남았다.
굳게 입을 봉한 대문 앞에 좌절하며 길을 돌아서기는 했지만 10월 중순 짚풀문화제 때는 쿨하게
대문을 연다고 하며, 그때는 전통성년의식과 야생화전시회 등이 열린다.


▲  굳게 닫힌 교수댁 대문 - 대문짝에는 위정자들이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국태(國泰), 민안(民安)이 쓰여있다.

▲  담장 너머로 본 교수댁
교수댁은 양반가이지만 기와를 얹힌 담장이 아닌 외암리에서 통용되는
수수한 돌담을 집 주변에 둘렀다.

▲  버드나무가 길게 생머리를 늘어뜨린 교수댁 앞길

▲  건재고택<(建齎古宅) 영암군수댁) - 중요민속문화재 233호

건재고택은 외암 이간의 5대손이자 전라도 영암군수(靈巖郡守)를 지냈던 이상익(李相翼, 1848~
1897)이 살던 집이다. 그가 영암군수를 지냈다고 하여 영암군수댁이라 불리기도 하며, 외암 이
간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간의 집과 현재의 집은 자리만 같은 뿐, 완전 틀림)

이상익이 기존의 집을 지금의 모습으로 새로 지었고, 그의 아들인 이욱렬(李郁烈) 때에 비로소
완성을 보았는데, 이욱렬의 호인 건재(建齋)를 따서 건재고택이라 불린다. 현재는 그게 정식 명
칭이다.

문간채와 사랑채, 안채를 중심으로 나무광과 곳간채, 가묘를 부속으로 두었으며, 사랑채 앞에는
자연경관을 위주로 정원을 만들어 연못과 정자를 만들었다. 소나무와 은행나무, 감나무 등의 나
무를 마당 전체에 심고, 왜열도 정원의 기법인 거북섬을 꾸며, 우리의 전통식과 왜열도 조경이
혼합된 조선 후기 절충형 정원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게다가 설화산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마당을 거쳐 연못으로 가게 했는데, 연못자리에는 원래 별당이 있었다고 한다.
담장에는 기와를 얹혀 다른 집과 차별을 두었고, 집안에는 300여 점의 오래된 유물이 보관되어
집의 가치를 더욱 돋군다. 특히 이간의 교지(敎旨)는 입향조(入鄕祖, 어떤 마을이나 장소에 제
일 먼저 정착한 사람)의 근거자료가 된다.

외암리마을의 대표적인 기와집으로 평상시에는 굳게 닫힌 대문 앞에 발길을 돌려야 된다. 다만
짚풀문화재 때는 관람이 가능하며, 전래동화극을 상영하기도 한다.


▲  건재고택의 사랑채 정원 (담장 너머에서 찍음)

▲  건재고택 앞에 푸르게 자라난 은행나무 (예전 봄에 찍은 사진)

▲  참판댁 사랑채 - 중요민속문화재 195호

외암리마을 안쪽 깊숙한 곳에는 참판댁이라 불리는 넓은 기와집이 있다. 이 집은 외암리가 낳은
위인의 1명, 퇴호 이정렬(退湖 李貞烈, 1868~1950)이 살던 곳으로 고종 때 이조참판(吏曹參判)
을 지냈다. 그래서 참판댁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정렬의 할머니는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의 이모로 그런 인연으로 황후와 친분
이 두터웠다고 한다. (이들은 촌수로 어떻게 되는지..?) 황후는 그에게 필묵과 첨지(籤紙)를 하
사했으며, 17세에 황후에게 왜국을 경계할 것을 진언했다고 한다.

2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이조참판까지 올랐으나, 1902년 왜국에 빌붙어 나라를 말아먹는 고위관
료들의 꼬락서리를 보다 못해 그들의 처벌을 고종에게 건의했다. 허나 그것이 통할 리는 없을
터, 그 뜻은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에 그는 나라를 팔아먹는 조정의 신하가 될 수 없다며,
관직을 버리고 외암리로 낙향, '칠은계'를 조직하여 충남지역 항일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  참판댁에 걸린 퇴호거사(退湖居士) 현판

참판댁에는 금색으로 '퇴호거사'라 쓰인 현판이 있는데, 이는 고종의 아들인 영왕(英王=영친왕)
이 9살에 친히 쓴 현판이다. 이 집안의 자랑이자 보물로 이정렬은 이 현판을 매우 애지중지했다
고 한다. 퇴호거사란 이름은 이정렬의 또 다른 호로 고종이 내린 이름이다.


♠  외암리마을 마무리

▲  마을의 오랜 내력이 차곡차곡 화석(化石)을 이룬 외암리 돌담길

▲  인적이 없는 어느 외암리 돌담길
맨몸이 허전했던 탓일까? 추위에 약한 탓일까? 아니면 치장하고자 함일까?
수풀과 꽃으로 몸을 덮은 돌담이 적지 않다.

▲  늦가을도 가는 길을 멈추고 쉬어가는 외암리 돌담길
돌담 위에 여장만 설치하면 영락없는 성곽(城郭)이나 보루(堡壘)가 된다.

▲  서로 대비되는 돌담길 (녹음이 우거진 건재고택 입구)
왼쪽 돌담은 기와가 입혀지고 뭔가 있어 보이는 양반가 담장,
오른쪽은 성처럼 쌓여진 수수한 모습의 서민가 담장

▲  600년 묵은 느티나무 - 아산시 보호수 8-89호

외암리마을을 남북으로 가르는 간선 골목길 중간, 건재고택 부근에 600년 묵은 느티나무가 넓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높이 21m, 둘레 5.5m에 이르는 외암리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
무로 장승제가 열리는 음력 1월 14일에 목신제(木神祭)를 지낸다.

나무의 나이가 600년을 넘었다고 하니 마을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있었을 것이며, 마을의 흥망성
쇠를 묵묵히 지켜보며 마을을 지키던 당산(堂山)나무이자 마을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쉼터와 그
늘을 제공하는 정자나무로써 이곳의 보석 같은 존재이다.


▲  논과 어우러진 마을의 동남부 ▼


▲  서서히 황금빛으로 도약하는 외암리 들녘

▲  사람과 가을꽃의 일그러진 만남 ~ 사람은 싱글벙글, 꽃은 시름시름.
인증샷을 찍는 것도 좋지만 너무 코스모스를 괴롭히지는 말자~~!

▲  가을의 아름다움이 모두 이곳에 깃들여진 듯 하다.

점심 먹는 시간을 포함하여 2시간 정도 마을을 둘러봤다. 욕심 같아서는 송화댁이 있는 안쪽까
지 들어가고 싶었으나 일행들의 요구로 절반만 둘러보고 길을 돌아섰다. 어차피 예전에 대부분
둘러본 적이 있고, 앞으로도 기회는 많으니 그리 아쉬울 것은 없다. 게다가 일행들은 나를 빼고
전날 밤새고 술마신 탓에 많이 지쳐
있었다.

이렇게 하여 외암리 가을 나들이는 다음의 인연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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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소금강, 순창 강천산 (강천사, 구름다리, 강천산계곡, 구장군폭포)

 


' 호남의 소금강, 순창 강천산(剛泉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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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다리 전망대에서 바라본 강천산

천우폭포 숲길 구장군폭포

▲  천우폭포 숲길

▲  구장군폭포

 


여름 제국(帝國)이 한참 절정을 누리던 8월 한복판에 호남의 소금강(小金剛)으로 격하게 찬양
받는 순창 강천산을 찾았다.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7시에 떠나는 전주(全州)행 직행버스를 타고 근 3시간을 달려 호남의 오
랜 중심지인 전주에 발을 내린다. 여기서 잠시 숨 좀 고르다가 순창(淳昌)으로 가는 직행버스
로 다시 1시간을 내달려 고추장의 고장인 순창에 이른다.

순창에서 11시 반에 강천산(강천사)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기다리니 시간이 다되도록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다. 이거 무단 결행이 아닌가 걱정이 들던 찰라, 버스는 딱 시간에 맞추어 슬그머
니 타는 곳으로 들어와 입을 벌린다. 그 버스를 타고 다시 10분을 11시 40분에 강천산 종점에
도착했다.


♠  강천산(剛泉山) 들어서기

▲  강천산 관광안내소 내부의 강천산 모형도

순창읍에서 강천산으로 가는 중에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비가 조금씩 창밖에 한줄기 낙서를 휘
갈기고 있었다. 그날 기상청 날씨예보에서는 비가 온다는 내용이 없었는데 하늘이 그걸 비웃듯
선전포고도 없이 대지를 적시고 있는 것이다. 비에 대항할 장비를 하나도 갖추지 못했는데, 이
거 어찌해야 되나 난감해 하던 중, 버스는 강천산 종점에 도착해 바퀴를 접었다.

비는 그렇게 많이 오는 건 아니었지만 우산이 필요할 정도로 꾸준히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우
선 제2주차장 부근에 있는 강천산 관광안내소로 피신해 비가 잠잠해지길 기다렸다.
관광안내소에는 강천산을 축소한 모형도를 비롯해 순창군 관광안내도와 관광정보, 고추장과 여
러 특산품 정보 등을 담고 있다.

순창의 제일 명소인 강천산(583,7m)은 순창 서쪽에 자리한 명산으로 산세가 수려하고 숲이 무성
하며, 폭포와 잘생긴 바위가 많아 호남의 소금강으로 일컬어진다. 1981년 1월 7일 이 땅에서 최
초로 군립공원(군청에서 지정한 공원)으로 지정된 현장이기도 하며, 강천산(왕자봉)을 비롯하여
광덕산(565m), 산성산(연대봉, 603m) 등의 봉우리를 지니고 있다. 또한 서쪽으로 담양 금성산성
과 이어져 있다.
강천산의 주요 명소로는 강천사와 삼인대, 병풍바위, 구장군폭포, 약수폭포, 천우폭포, 구름다
리, 용소 등이 있으며, 내장산, 백암산(白巖山)과 함께 가을 단풍명소로 이름 높다. 관광객 상
당수는 걷기에 별 부담이 없는 강천산계곡길을 이용해 구장군폭포나 구름다리까지 다녀오며, 넉
넉잡아 3시간 정도 걸린다.

관광안내소에서 20분 정도를 머물다가 약간의 기대를 품으며 바깥에 나가보았다. 허나 전혀 나
아진 것은 없었다. 마침 점심시간이고 하니 우선 점심밥을 먹으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관광안내소 서쪽에 펼쳐진 상가촌에는 여느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식당과 기념품점, 민박집이 즐
비하다. 어느 식당이 좋을까 재고 있는데, 평일이라 그런지 마땅한 호객행위는 없었고, 다만 완
도식당 1곳만 방황하는 나를 향해 적극적으로 호객을 한다. 그 식당 주인할매가 먹고 가라고 자
꾸 손짓을 하니 마지못해 그곳에 들어가 자리를 폈다.

평일 점심시간이라 손님은 하나도 없었고, 그건 다른 식당도 비슷했다. 내가 추천 메뉴를 물으
니 주인할매는 산채비빔밥을 권했다. 산에 왔으니 산채 나물이 들어간 비빔밥이 제일 무난하겠
지. 혼자 먹기에도 별 부담이 없고, 음식 메뉴 가운데 가격도 제일 낮으니 말이다. 허나 그 가
격은 무려 7,000원... 그래서 그걸 달라고 주문을 하니 10분 뒤에 잘 차려진 산채비빔밥과 갖은
반찬들이 내 앞에 펼쳐진다.


▲  완도식당에서 먹은 산채비빔밥의 위엄

여러 산채나물이 버무러진 산채비빔밥을 중심으로 6가지의 정갈한 반찬과 된장국이 나왔다. 반
찬도 죄다 풀이며, 된장국에는 감자와 두부, 파만 들어있다. 주인할머니는 더 먹으라며 공기밥
1그릇을 살짝 건넨다.
시장기가 폭발하여 비빔밥과 반찬, 된장국을 싹싹 긁어먹었다. 그렇게 기분좋게 점심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다행히 빗방울도 조금은 줄어들어 그대로 강천산으로 밀고 들어갔다.


▲  강천산계곡 (공원관리소 직전)

가촌과 제1주차장을 지나니 반갑지 않은 존재가 나그네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본다. 바
로 입장료를 징수하는 공원관리소 매표소이다. 처음에는 1,000원 내외로 생각했는데, 확인해 보
니 무려 3,000원.. 학생과 군인은 2,000원씩이나 한다. 강천산이 우리나라 최초의 군립공원(郡
立公園, 1981년에 지정됨)이긴 하나 군립공원의 입장료 치고는 너무 비싼 감이 든다. 허나 입장
료를 깎을만한 마땅한 명분이 없어 3,000원의 거금을 내고 매표소를 통과했다.
<참고로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은 지리산(智異山), 최초의 도립공원은 금오산(金烏山)임>


▲  병풍바위와 병풍폭포 (왼쪽이 중심 폭포임)
비록 두 폭포의 물줄기와 높이는 현저히 다르지만 나란히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똑같다.


공원관리소에서 씁쓸한 마음을 삼키며 안으로 들어서니 놀라운 풍경 하나가 나의 두 발을 묶는
다. 바로 병풍바위와 병풍폭포이다.
병풍바위는 그 바위 밑을 지나는 그 어떤 사람도 깨끗해진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데, 이는 강천
사에서 지어낸 말인 듯 싶다. 강천사를 목전에 둔 지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속세(俗世)의 번
뇌를 벗어던지고 들어와 해탈(解脫)을 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을 것이다.

그런 병풍바위에서 시원한 물줄기가 아래로 쏟아지고 있는데, 이를 병풍폭포라고 한다. 폭포는
2줄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쪽의 커다란 폭포가 중심폭포로 높이 40m, 물폭은 15m이다. 1분당
쏟아지는 낙수량은 5톤이라고 한다. 그 동쪽에는 가느다란 물줄기의 폭포가 있는데, 높이 30m,
물폭 5m이다. 이들은 겉으로 보면 자연산 같지만 아쉽게도 인공폭포로 2003년에 지어졌다, 그렇
다고 바위까지 인공은 아니며, 그냥 물줄기만 낸 것이다. 서쪽 폭포의 물줄기를 자세히 보면 자
연산 폭포가 아님을 눈치챌 수 있다.
한 덩어리로 어우러진 폭포와 바위의 위엄, 멋드러진 풍경 앞에 앞서의 아쉬운 마음은 싹 가시
고 말았다. 구장군폭포 만큼은 아니지만 장쾌하게 쏟아지는 물줄기에 약간의 더운 기운도 목을
붙잡고 줄행랑을 친다.

강천산은 폭포의 성지(聖地) 답게 폭포가 무지 많다. 병풍폭포를 시작으로 천우폭포, 약수폭포,
용머리폭포, 구장군폭포, 비룡폭포 등이 마치 꽃잎이 여기저기 날아가 앉은 듯 경승을 한층 돋
구고 있으며, 이중 구장군폭포가 단연 으뜸이다.

참고로 병풍폭포에서 산림욕장 데크산책로가 시작된다. 계곡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닌 산자락 숲
길로 계곡길과 적절히 거리를 두고 있으며, 전망대와 황우제골, 팔각정을 거쳐 구름다리 남쪽까
지 이어진다. 또한 강천산계곡길은 웰빙산책로로 삼아 공원관리소에서 구장군폭포까지 마음 편
히 맨발로 걸을 수 있게끔 흙길을 잘 다졌다.


▲  강천산계곡 (병풍바위와 용소 사이)
보기만 해도 마음이 정화되는 계곡물이 경쾌하게 졸졸졸~♪ 노래를 부르며
큰 세상으로 흘러간다.

▲  녹색의 진한 물결 강천산계곡 탐방로

▲  계곡에 뿌리를 내린 조그만 돌탑들
중생들의 조촐한 소망이 깃들여진 돌탑들이 계곡 물결 위에 뿌리를 내렸다.
겉으로 보면 물결에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지만 겉보기와 달리 견고하여
거의 바위처럼 굳어버렸다. 돌탑을 쌓은 이들의 소망이 굳게 이루어진 것일까?

▲  길가에서 만난 작은 폭포
가파른 바위에 한줄기 길을 내고 내려오는 조그만 폭포
속세에서 그에게 지어준 이름은 아직 없는 모양이다.

▲  무명의 폭포를 지나고 ~ 신록이 가득한 산길
저 풍경을 집으로 고이 훔쳐와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
현실은 그러지를 못한다. 그냥 여기서 실컷 누리고 가야 된다.

▲  현대사의 쓰라린 현장 회문산지구 전적비

원앙사육장 동쪽에는 회문산지구전적비가 초라하게 자리를 지킨다. 이 비석은 1954년 회문산에
머물던 북한군의 잔당, 빨치산을 토벌한 기념으로 세운 전적비로 현대사의 가슴 쓰린 현장이다.
1950년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으로 도망치지 못한 북한군 잔당 1만 명은 지리산을 비롯해 험준한
산에 들어가 항쟁을 벌였다. 특히 지리산 일대에 머물던 빨치산이 지독하여 1953년 7월 휴전 이
후에도 그들과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는 계속되었으며, 1956년 7월 비로소 토벌이 마무리 되었다.
그 기나긴 시간 지리산과 빨치산 은거지 주변에 살던 많은 양민들이 원통한 넋이 되었으며, 거
창 양민학살사건을 비롯한 여러 학살사건이 일어나 세상을 경악하게 했다. 그들 가운데 빨치산
에 적극 가담하고 도운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협박에 못이겨 국군과 빨치산 양쪽의 눈치를 보
던 순진한 백성들이었다.

전적비가 다소 외진 곳에 있어 지나치기가 쉽다. 상쾌하고 아름다운 곳에서 만나는 씁쓸한 현장
이긴 하지만 우리가 영원히 짊어지고 가야되는 그러나 다시는 재방송되서는 안되는 이 땅의 역
사이다.


♠  강천산 천우폭포(天雨瀑布)

병풍바위에서 15분 정도 올라가면 송음암이란 기암절벽이 나온다. 그 울퉁불퉁한 피부에 물줄기
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는데 이를 천우폭포라고 부른다. 겉으로 보면 자연산처럼 보이지만 병
풍폭포와 마찬가지로 바위에 물줄기를 낸 인공폭포로 하늘에서 비가 오면 자연히 폭포가 이루어
진다는 뜻에서 천우폭포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폭포 앞에는 하늘을 향해 늘씬하게 솟은 메타세콰어어 숲길이 짧게 숲길을 이루고 있으며, 폭포
와 계곡이 어우러져 선경(仙境)의 극치를 진하게 우려내니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을 제대로
앗아간다. 나 역시 이곳 풍경에 제대로 퐁당퐁당 빠져버렸다.
나무 그늘에는 폭포를 구경할 수 있도록 벤치가 여러 개 베풀어져 있으며, 강천산 명소 가운데
구장군폭포와 더불어 단연 으뜸으로 치고 싶은 곳이다.

  천우폭포 앞 메타세콰이어 숲길

여름이 이쁘게 채색을 들인 아름다운 메타세콰
이어 숲길, 늘씬한 자태로 쭉쭉 솟아나 하늘을
가린 숲길은 나그네의 마음을 다시금 들었다가
놓는다.
나무가 불어준 산내음에 속세의 번뇌를 저만치
날려 보내며 계속 길을 재촉한다. 허나 번뇌가
너무 무거워 인근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해탈은 정말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  천우폭포 앞 녹음이 깃든 숲길
자연과 여름이 앞다투어 깃들여진 탓인지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  푸른 물감이 첨가된 듯한 용소(龍沼, 아랫용소)

강천산에는 용소라 불리는 담(潭)이 2개가 있는데, 여기는 아랫용소이다. 구름다리 부근에 있는
윗용소에는 숫용이, 이 용소에는 암용이 살았는데 세상이 혼란해지면 서로 소리를 내어 울었다
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서려 있다.
물이 워낙 청정하여 밑바닥이 거의 다 보이지만 겉보기와 달리 수심이 깊어 옛날 사람들이 수심
을 재고자 명주실을 내리니 딱 한 타래가 들어갔다고 한다. 그만큼 깊다. 괜히 안전 장비 없이
푸른 색의 유혹되어 무책임하게 풍덩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  강천사의 일주문(一柱門)인 강천문(剛泉門)

용소를 조금 지나면 강천문이라 불리는 맞배지붕 문이 중생을 맞는다. 이 문은 강천사의 일주문
으로 다른 절의 일주문보다 규모가 좀 있으며, 절의 이름 대신 강천문이라 쓰인 현판을 내걸었
다. 즉 강천사의 일주문이란 뜻이다.


♠  강천산 품에 포근히 안긴 작은 고찰 ~ 강천사(剛泉寺)

일주문을 들어서면 수해(樹海)에 가려 보이지 않던 강천사의 조촐한 산문이 조금씩 모습을 비추
기 시작한다. 2층짜리 누각을 비롯하여 현대식으로 지어진 해우소(解憂所)와 세심당, 염화실 등
이 차례대로 나타나며, 그 다음에 경내의 중심인 대웅전이 이곳의 오랜 보물인 5층석탑과 나란
히 나타난다.

강천산 동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닦은 강천사는 강천산 유일의 절집으로 887년 도선국사(道詵
國師)가 창건했다고 하나 근거는 없다. 1316년 덕현(德賢)이 중창하면서 5층석탑을 세웠다고 하
며, 강천산이란 이름은 이 절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1482년 신말주(申末舟, 1439~?)의 부인 설씨가 '강천사모연문(募緣文)'을 작성했는데, 바로 그
해 설씨 부인의 지원으로 중창되었다고 한다. 신말주는 세조 때 공신(功臣)인 신숙주(申叔舟)의
동생으로 1470년 순창으로 내려와 살았다고 하며, 모연문에 따르면 옛날에 신령(信靈)이 광덕산
가운데서 명승지를 골라 그곳에 초암(草庵)을 짓고 지낸 것에서 강천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세월이 계곡처럼 흘러 절이 폐허의 지경에 이르자 중조(中照)가 서원을 내어 시주를 모아
중창했는데, 부근에 부도(浮屠)가 있으므로 절 이름을 임시로 부도암(浮屠庵)으로 갈았으며, 이
때 절은 비록 소소한 규모지만 청정한 수도처로서 유명했다고 한다. 허나 절이 다시 쇠락에 빠
지자, 증조가 신말주의 부인인 설씨의 지원을 받아 중창을 했다.

임진왜란 시절에 파괴되어 1604년 소요(逍遙)대사가 중창했으며, 1760년(영조 36년)에 출판된 '
옥천군지'에는 당시 절의 부속암자로 명적암, 용대암, 연대암, 왕주암, 적지암 등 5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나와있어 지금과 달리 왕년에 꽤나 잘나갔음을 보여준다.
1855년 금용(金容)이 중창했으며, 6.25전쟁으로 완전히 쑥대밭이 된 것을 김장엽 주지가 1959년
첨성각을 짓고, 1977년 관음전, 1978년 보광전을 새로 지었다. 1992년 보광전을 대웅전으로 이
름을 갈았고, 이후 계속 불사를 벌여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런데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심우당과 염화실, 세심당 등 6~8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
으로는 5층석탑과 모과나무가 있다. 그외에 파괴된 석등과 석주의 일부가 대웅전 뜨락에 있으며,
용소 근처에 조선시대 부도 4기가 있다.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혀 산골이 깊고 물이 맑으며, 병풍처럼 들어선 숲이 고요한 바다를 이루
고 있어 그야말로 금강산이 부럽지 않은 곳이다. 비록 옛날의 영화는 거진 다 사라지고 말았지
만 새소리와 솔바람, 산바람 소리가 전부인 그야말로 고적하고 호젓한 산사로 심술쟁이 번뇌가
따라오다가 졸도를 할 정도로, 산새도 넘어오다 날개가 마비될 정도로 깊은 산골에 묻혀 있다.

강천사는 대웅전과 그 뜨락만 둘러보면 충분하다. 나머지는 승려들의 생활공간이고, 절이 조그
만하기 때문에 대웅전 뜨락에서도 계곡길과 나란히 한 담장 너머에서도 훤히 바라보인다.

▲  경내 동쪽에 새로 지은 2층 문루

▲  염화실과 세심당


▲  강천사 약수터

산사에 꼭 하나씩은 있는 약수터, 강천사도 예외는 아니다. 강천산이 베푼 청정한 옥계수가 쉼
없이 쏟아져 나와 나그네의 목마름을 해소해준다. 빨간 바가지에 가득 담아 한 모금의 신세를
지니 몸 속에 낀 속세의 때가 싹 가신 듯 목구멍이 즐겁다며 쾌재를 부른다.


▲  대웅전 뜨락에 놓인 아픈 상처들 (부도탑)

풀이 곱게 입혀지고 아름드리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대웅전 뜨락에는 5층석탑과 근래에 심은
석등(石燈) 외에 석주와 6.25때 파괴되어 일부만 남은 부도와 석등 등이 초췌하게 자리를 지킨
다. 왼쪽은 조그만 부도탑으로 여겨지는데, 지붕돌과 상륜부(相輪部), 바닥돌과 탑신(塔身)의
일부만 간신히 남아있으며, 바닥돌 위에 잎이 아래로 향한 연꽃무늬가 섬세하게 남아 초라해진
자신을 위로한다.
그 동쪽에는 석주(石柱)로 보이는 기둥이 서로의 고된 몸을 기대고 있고, 그 곁에 맷돌처럼 보
이는 동그란 돌이 놓여져 있는데 그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  대웅전과 대웅전 뜨락 (5층석탑)

강천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61년에 지어졌다. 불
단에는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후불탱화와 지장시왕탱, 산신탱, 칠성탱, 신중탱 등의 탱
화가 걸려있어 칠성각과 산신각 등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  강천사5층석탑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92호

대웅전 뜨락에는 보기에도 정말 안쓰러운 5층석탑이 보호철책에 둘러싸여 상처투성이의 고단한
몸을 지탱하고 있다.
이 탑은 강천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1316년에 덕현
이 세웠다고 한다. 1중의 기단 위에 5층
의 탑신을 세웠는데, 1층과 2층, 3층 옥개석(屋蓋石)이 크게 깨져나갔고, 4층과 5층 탑신도 그
리 성하지가 못하다. 그가 이렇게 된 것은 세월의 장대한 흐름과 자연의 괴롭힘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6.25 때문이다. 그 전쟁은 이 땅의 민중 뿐만 아니라 문화유산까지도 불구를 만든 것
이다.

탑신에는 양 우주가 새겨져 있으며, 옥개석에 높은 3단의 층급받침이 있고 1층에 비해 2층 이상
이 급격히 줄어드는 점에서 신라 석탑 양식을 기본으로 부분적으로 백제 석탑 양식이 반영된 고
려 석탑으로 추정된다. 상륜부는 노반(露盤)이 사라진 채, 복발과 보륜(寶輪)이 남아있다.

대웅전 바로 앞에는 명문이 새겨진 괘불대가 3개 있는데, 그중 하나에 '乾隆八歲十五(건륭8세15
)'라고 되어 있어 1700년대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선방(禪房)으로 쓰이는 심우당(尋牛堂)
대웅전 서쪽 높다란 곳에 터를 닦고 자리한 심
우당은 선방이다. 심우당이란 이름은 선종(禪宗)
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이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10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되었다.


▲  삼인대(三印臺)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27호

강천사 남쪽 계곡 너머에 삼인대 비석을 품은 1칸짜리 기와집이 있다. 계곡 건너에 자리한 탓에
그의 존재와 사연을 모르는 무심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고 무심히 지나
가기 일쑤인데, 삼인대에 얽힌 사연은 다음과 같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燕山君)이 폐위되고 그의 아우인 중종이 익선관(翼善冠)
을 쓴 채 왕위에 올랐다. 박원종(朴元宗)을 비롯한 반정파(反正派)들은 반정에 반대한 신수근(
愼守勤)을 죽이고, 왕을 협박하여 그의 딸이자 중종의 왕비인 신씨<단경왕후(端敬王后)>를 폐위
시켰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하여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를 왕비로 맞이하게 했다.

1515년 장경왕후가 후사도 없이 세상을 뜨자 순창군수 김정(金淨), 담양부사 박상(朴祥), 무안
현감 유옥(柳沃) 등 3명이 비밀리에 강천산에 모여 당시로써는 큰일 날 소리인 신씨의 복위(復
位)를 주장하며, 각자의 관인(官印)을 소나무 가지에 걸어 맹세하고 상소(上疏)를 올리기로 결
의를 했다. 그때 그들이 관인을 걸고 맹세한 곳을 3개의 관인을 걸던 곳이라 하여 삼인대라 부
르게 되었다. 허나 그들의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조선의 여제(女帝)로 악명을 떨친 문
정왕후(文定王后) 윤씨가 비어있는 국모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1744년 홍여통(洪汝通), 윤행겸(尹行謙), 유춘항(遊春恒) 등 순창 선비들이 삼인대의 사연
을 기리고자 비석을 세웠고, 대학자 이재(李縡, 1680∼1746)가 비문(碑文)을, 민우수(閔遇洙,
1694∼1756)가 비문의 글씨를 썼으며 유척기(兪拓基, 1691∼1767)가 전서(篆書)를 썼다. 비각은
정면과 측면이 모두 1칸으로 비석의 높이는 157cm, 너비 80cm, 두께 23cm이다.

삼인대는 1963년부터 여러 차례 보수를 했으며, 1978년 삼인대 비석의 내용을 한글로 해석하여
옆에 검은 피부의 비석을 만들었다. 또한 1994년 지역 사람들에 의해 '삼인문화선양회'가 결성
되어 1995년부터 매년 8월 삼인문화축제를 열고 있다.


▲  삼인대 절의탑(節義塔)
삼인대 3인방의 절의를 기리고자 근래에 쌓은 탑으로 탑 꼭대기에 하얀 돌을 심어
그 피부에 절의탑이라 새겼다.

▲  비각 안에 소중히 담긴 삼인대 비석

▲  '삼인대비'로 시작되는 비석의 좌측
글씨가 근래 새겨진 듯 매우 또렷하고 정정한 모습이다.

▲  강천사 모과나무 - 전북 지방기념물 97호

삼인대입구에는 강천사의 또 다른 오랜 보물인 모과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300년 정도 묵은 것
으로 높이 20m, 둘레 3.1m의 노거수(老巨樹)이다. 강천사 승려가 심은 것으로 여겨지며, 관상용
으로 인기가 좋아 5월에 홍색 꽃을 피운다. 또한 9월에는 황색의 열매가 피어 속세에 모과를 제
공한다.

나무를 살피니 녹음(綠陰)에 젖은 잎파리만 보일 뿐, 열매는 어디 숨었는지 눈에 들어오질 않는
다. 나무 주변으로 붉은 백일홍이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그의 주변을 화사하게 맴돈다.


♠  강천산 구름다리와 구장군폭포

▲  윗용소
이곳에는 숫용이 살았는데, 세상이 혼란해지면 아랫용소에 암용과 함께
서로 소리를 내며 울었다고 전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전설)


강천산의 중심 길이자 공원관리소부터 줄곧 하나의 길로 이어진 강천산계곡길이 윗용소에 이르
면 2갈래로 갈린다. 물론 그 이전에도 숲속데크산책로다 대나무숲길이다 해서 갈림길이 여럿 있
었지만 방향을 두고 그리 갈등은 없었는데, 여기서는 갈등이 생긴다. 이유는 여기서 용소를 건
너 직진하면 구장군폭포이고, 오른쪽 까마득한 계단길을 오르면 전망대와 구름다리로 이어지는
데, 구장군폭포와 구름다리를 모두 보고 싶기 때문이다.

푸른 물감이 흐드러진 듯, 순수함을 자랑하는 윗용소는 강천사 밑의 용소와 구별하기 위해 그렇
게 부른다. 상류에서 내려온 물이 암반을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와 용소를 이루며, 여기서 잠시
비를 피하고자 20분 정도 머물렀다.

비가 어느 정도 가늘어지자 먼저 구름다리로 가기로 했다. 구름다리와 전망대까지는 0.2km라고
하지만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경사가 급해 체감거리는 0.5km 정도 되는 듯 싶다. 계단을 힘겹게
오르니 그 언덕 정상부에 마치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누각처럼 전망대가 보이고, 그 전망대로
오르니 천하일품의 조망(眺望)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그 조망 앞에 조금 전의 고단함과 날씨에
대한 서운함이 싹 가셔버린다.


▲  구름다리 동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 구름다리와 강천산계곡

구름다리 동쪽 전망대에 발을 딛으면 주황색이 칠해진 강천산의 명물 구름다리와 장군봉, 강천
산계곡 상류가 두 눈에 바라보인다. 비록 첩첩산중이라 보이는 범위는 좁지만 강천산계곡을 둘
러싼 여러 봉우리가 비슷한 높이에서 바라보이고, 녹음에 젖은 강천산의 모습을 파노라마처럼
실감나게 둘러볼 수 있다.

여기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바로 구름다리와 이어지고, 동쪽으로 가면 강천산계곡으로 이어진다.
허나 여기까지 왔으니 구름다리의 아찔함과 그 위엄을 체험해봐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  강천산 구름다리

▲  구름다리를 건너다 - 남해대교의 축소판을 보는 듯 하다.

▲  밑에서 올려다본 구름다리의 아찔함

강천산의 인공적 명물인 구름다리는 강천산계곡 상류 협곡에 설치되어 있다. 길이 75m, 높이 50
m로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다리가 조금씩 꿈틀거려 나그네의 염통을 제대로 오므라들게 만든다.
게다가 아래를 바라보면 아찔한 현기증에 눈을 감게 만들어 다리를 건너지 않고 꼬랑지를 내리
는 사람도 적지 않다.

다리의 길이가 75m라고 하나 실제 체감거리는 능히 100m를 넘는다. 짧은 거리를 믿고 다리를 건
너니 정말 그 아찔함에 나도 모르게 두려운 마음이 생겨난다. 다리 바닥에는 4개의 작은 구멍이
일정한 간격으로 나 있는데, 그 구멍을 통해 아래가 훤히 보인다. 밑을 보면 현기증이 날 것 같
으니 천상 눈은 다리 건너편을 뚫어지라 응시하며, 쫄깃해진 염통을 부여잡고 양쪽 난간을 잡아
걸음을 빨리 했다.
분명 건너편이 가까이에 보이는데도 쉽사리 와 닿지가 않는다. 75m가 이렇게 길었단 말인가..?
두려운 마음이 그 거리마저 혼란스럽게 만든다. 다리 위에서 사진이라도 담았어야 했는데, 다리
의 아찔함에 그럴 여유를 부리지 못하고 건너 버렸다.

건너편으로 넘어가 내려가는 길을 찾았으나 지도를 잘못 봐서 올라가는 길만 있는 것으로 착각
했다. 여기서 700m 정도 오르면 신선봉(425m)이 나오는데, 나의 목적지는 그곳이 아니다. 게다
가 비까지 조금씩 내리고 있어 산을 오를 상황이 아니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다 잡고 다리를
다시 건너 동쪽으로 돌아왔다. 본의 아니게 다리를 왕복한 셈이다.

동쪽 전망대로 돌아와 동쪽으로 나 있는 내리막길을 거쳐 계곡으로 내려왔다. 계곡에는 비를 피
할 수 있는 조그만 쉼터가 있는데, 여기서 구름다리의 위엄을 제대로 볼 수 있다. 마치 구름 위
에 떠 있는 듯한 다리, 마침 용감한 나그네 1명이 다리에서 계곡 상류를 향해 사진을 찍고 있었
다. 그 광경을 보며 그저 다리를 건너는데 급급했던 내 자신이 조금은 씁쓸해진다.


▲  구장군폭포로 인도하는 오솔길

구름다리 밑에서 계곡 오솔길을 따라 10분 정도 가면 산수정이란 정자와 구장군폭포가 나온다.
이 구간은 앞서의 길과는 약간은 틀리다. 계곡을 3번 정도 건너야 되는데, 지금까지는 모두 다
리가 있었지만 이 구간은 다리와 함께 두 다리에 물을 묻히며 직접 계곡을 건너는 구간도 마련
되어 있다. 다리에 물을 묻히지 않고 편하게 가고 싶다면 다리를 건너면 되고, 강천산계곡길의
특징인 맨발 산책이나 계곡물을 원하면 다리 옆에 마련된 길로 물살을 헤치며 건너면 된다. 직
접 건너는 구간은 통행에 별무리가 없도록 바닥을 잘 다졌기 때문에 안심해도 된다.


▲  구장군폭포 곁에 세워진 산수정(山水亭)
구장군폭포의 명쾌한 물줄기를 보며 쉴 수 있는 정자로 근래에 지어졌다.

▲  수직으로 가파른 벼랑에 물길을 낸 구장군폭포(九將軍瀑布)

강천산계곡 산책로의 종점이라 할 수 있는 구장군폭포는 강천산의 얼굴이자 백미(白眉)이다. 강
천산에 왔다면 꼭 봐야 되는 경승지로 이곳을 눈에 넣지 않고는 강천산에 갔다고 우길 수 없다.
폭포 물줄기가 2개로 이루어져 있어(서쪽에 깎아지른 벼랑인 거북바위에도 여러 물줄기가 있음)
둘 다 구장군폭포로 생각하기 쉽지만 진품은 오른쪽 폭포이다. 왼쪽 폭포는 근래에 물줄기를 낸
인공폭포로 겉으로 보면 거의 자연산처럼 보인다.

구장군폭포는 높이가 무려 120m에 이르는 3단 폭포로 제일 윗부분은 수직으로 거의 70m 가까이
떨어져 장관을 이룬다. 그렇게 급하게 낙수(落水)한 물은 조금은 완만한 2단과 3단 부분을 거쳐
아래로 떨어지는데, 이들 물이 옹기종기 모인 담을 용소라고 하며, 이곳에 모인 물은 청랭한 산
공기를 싣고 속세로 흘러간다.

폭포 맞은편에는 산수정과 여러 벤치를 두어 폭포를 구경하며 두 다리를 쉬도록 배려했고, 용소
앞에는 보다 가까이에서 폭포를 구경하도록 나무도 조망대를 만들었다. 폭포 부근에는 남근석과
사랑 관련 조각품들이 있는 공원, 강천제2호수, 수좌굴이란 자연굴이 있다. 강천제2호수는 강천
산계곡 상류에 만든 산중호수로 호수 주변은 출입이 통제되어 있으며, 강천제1호수는 강천산 입
구에 있는 강천호를 일컫는다.

구장군폭포에서 느긋한 산책로는 끝을 맺으나 그 길이 산길로 바뀌는 것일 뿐, 완전히 끝난 것
은 아니다. 여기서 계곡을 따라 15분 정도 가면 비룡폭포가 나오며, 연대암터를 지나면 금성산
성(金城山城, 사적 353호) 동문(東門)에 이른다.


▲  구장군폭포 용소

▲  구장군폭포 (오른쪽이 진품)

▲  구장군폭포 서쪽 벼랑 (거북바위)

구장군폭포는 말그대로 9명 장군의 폭포로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해온다.
때는 삼한(三韓)시대, 마한(馬韓) 장수 9명이 전쟁에서 패해 이곳으로 쫓겨왔다. 그들은 여기서
자결을 하여 치욕을 씻고자 했으나, 그중 1명이 '자살을 할 바에는 차라리 1명의 적이라도 더
죽이는 것이 좋지 않겠소?'
제안을 했다.
그 말을 들은 장수들은 다들 힘을 얻어 다시 전장으로 나가 승리를 거뒀다고 하며, 그래서 구장
군폭포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전설이야 뭐 어쨌든 이 폭포는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고
돌아온 장수마냥 위엄이 상당하며, 폭포와 그를 껴안은 거북바위의 위용 또한 대단하여, 아무리
만물의 영장을 칭하며 설치는 인간을 보기 좋게 주눅들게 만든다. 인간이 아무리 대단하다 설친
들, 대자연의 작품 앞에는 그저 조그만 개미에 불과하다.


▲  구장군폭포 부근에 마련된 공원과 돌탑

▲  실로 거대한 거북바위의 위엄

구장군폭포를 둘러보고 잠깐 쉬려고 자리를 물색했는데, 산수정과 공원 벤치들은 죄다 관광객들
이 점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인적이 드문 강천제2호수 밑으로 가서 의자에 벌러덩 누우며, 잠시
휴식 시간을 갖는다. 다리도 지치고 했으니
말이다. 잠까진 들지 않아 꿈나라까진 가지 않았지
만 강천산 자체가 꿈속에서나 나올 법한 세계이니 굳이 따로 꿈나라를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1시간 정도 휴식을 취하다가 강천산과의 짧은 인연을 정리하고 가기 싫은 속세로 힘 없는 발걸
음을 옮긴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비룡폭포나 금성산성, 강천산 정상까지 흔쾌히 가고 싶었지만
그날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구장군폭포까지였다. 강천산을 찾는 사람들 상당수는 강천산에
중심 산길인 강천산계곡길을 따라 구장군폭포까지만 보고 다시 내려간다. 구름다리를 빼고는 경
사가 급하거나 힘든 구간이 없어 그냥 계곡만 졸졸 따라가면 되며,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어도
충분하다. 그래서 강천산계곡길을 맨발산책로라 부르기도 한다.
내려갈 때는 신발을 벗고 강천사까지 맨발로 걸었는데, 발에 크게 위해가 되는 곳은 없다. 계곡
에 여러 차례 발을 담구며, 흙과 부드러운 스킨쉽을 즐기니 내려가는 길은 그저 즐겁기만 하다.

강천산 상가촌으로 내려가니 마침 속세로 나가는 직행버스가 요란하게 심장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걸 놓치면 꼼짝없이 40분 이상을 기다려야 되기 때문에 서둘러 뛰어가 그 버스를 타고 순창읍
으로 나갔다.
이렇게 하여 호남의 호금강, 강천산 나들이는 다음의 인연을 애타게 고대하며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강천산 찾아가기 (2015년 8월 기준)
* 서울 강남센트럴시티에서 순창행 고속버스가 1일 5회 떠난다. (9:30~16:10)
* 광주에서 순창행 직행버스가 20~40분 간격으로 다니며, 이중 10회가 강천사까지 들어간다.
* 전주에서 순창행 직행버스가 20~40분 간격으로 다니며, 이중 2회가 강천사까지 들어간다.
* 순창터미널에서 강천사(강천산)행 직행버스가 1일 10회, 군내버스는 10여 회 다닌다. 직행버
  스는 강천산 상가촌(관광버스주차장)까지 들어가나 군내버스는 강천산입구만 스쳐 지나가며,
  강천산입구에서 강천산 상가촌까지 도보 10분 거리이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호남고속도로 → 전주나들목 → 전주시내 우회도로와 27번 국도 경유 → 순창고교 교차로에
   서 우회전 → 팔덕 → 강천산입구 → 강천산
② 88올림픽고속도로 → 순창나들목 → 순창읍 → 팔덕 → 강천산입구 → 강천산

★ 강천산 관람정보 (2015년 8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3,000원 / 초,중,고생 2,000원 / 군인,전의경 1,500원 (30명 이상 단체는 500
  원 할인)
* 강천산 주요 등산코스 (여기서 매표소는 강천산 관리사무소 매표소)
① 신선봉 코스(5km, 3시간) : 매표소 → 강천사 → 구름다리 → 신선봉 → 강천사 → 매표소
② 산성산 코스(9.2km, 4시간) : 매표소 → 강천사 → 구장군폭포 → 운대봉 → 산성산 → 송낙
바위 → 강천사 → 매표소
③ 광덕산 코스(11.2km, 5시간) : 매표소 → 금강계곡 → 황우제골 → 광덕산 → 시루봉 → 금
성산성 동문 → 강천사 → 매표소
④ 강천산 코스(5.2km, 3시간) : 매표소 → 깃대봉 → 갈우봉 → 강천산(왕자봉) → 강천사 →
매표소
⑤ 옥호봉 코스(8.7km, 4시간) : 매표소 → 강천사 → 구장군폭포 → 장군봉 → 광덕산 → 금강
계곡 → 옥호봉 → 매표소
⑥ 종주 코스(12km, 7시간) : 매표소 → 깃대봉 → 강천산(왕자봉) → 형제봉 → 송낙바위 →
금성산성 동문 → 광덕산 → 옥호봉 → 매표소
⑦ 강천산계곡(맨발산책로, 5km, 2시간) : 매표소 → 강천사 → 구름다리 → 구장군폭포 → 강
천사 → 강천산매표소
* 강천산 소재지 :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강천산 관리사무소 ☎ 063-650-1672)
* 강천사 소재지 :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996 (☎ 063-652-5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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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8월 2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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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 정릉 봉국사 (맛있는 점심공양)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정릉 북한산 봉국사(奉國寺) '

▲  조선 후기에 조성된 봉국사 석조여래좌상


봄과 여름의 팽팽한 경계선인 5월이 되면 3가지의 볼거리가 나를 바쁘게 만든다, 서울연등축
제(연등회)와 석가탄신일, 그리고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특별전이 그것인데, 이중 가장 흥
겨운 것이 석가탄신일(이하 초파일)과 그 1주 전에 열리는 서울연등회이다.  (간송미술관 특
별전 2014년부터 미술관 대신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리고 있음, 특별전 기간도 연장됨)

간송미술관 특별전은 별 인연이 없으면 거르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초파일은 비가 와도 절대
거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불교 신도도 아니고 평소에도 많은 절을 다녀 지금까지 300곳
에 이르는 사찰을 들락거렸지만 초파일에 굳이 순례를 가장한 절 투어를 벌이는 이유는 초파
일의 흥겨운 분위기가 너무 좋기 때문이다. 거기에 공양밥과 떡 등 온갖 먹거리까지 그 흥겨
움을 보탠다. (공양밥 때문에 그럴지도??)

초파일이 다가오자 설레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내가 살고 있는 서울 장안을 대상으로 미답(未
踏)으로 남은 고찰(古刹)을 물색해본다. 초파일 만큼은 멀리 갈 것도 없이 마음 편하게 가까
운 시내 고찰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의 왠만한 고찰과 문화유산을 간직한 근현대
사찰은 거의 가본 터라 아무리 쥐어짜도 적당한 곳이 나오질 않는다.  <문화유산을 소장하고
있지만 개방을 꺼리거나 외지인에게 꽤나 인색하게 구는 곳은 뺐음>
그래서 아주 옛날에 가보거나 1~2번 정도 간 곳을 포함하여 서울 강북 일대를 대상으로 코스
를 짰는데, 이번에는 후배 2명도 같이 가기로 하여 이동이 편하게끔 동선을 고려했고, 그 첫
답사지로 20년 전에 딱 1번 가봤던 정릉 봉국사를 선정했다.

드디어 고대하던 초파일의 서광이 밝았다. 그 서광을 받으며 오전 11시에 길음역(4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국민대로 가는 1213번 시내버스를 타고 봉국사에서 발을 내린다. 봉국사가 비록
도선사(道詵寺), 길상사(吉祥寺) 만큼이나 유명한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중생의 발길이 적지
않은 절이라 일주문부터 사람과 수레가 꼬리를 꼬리를 문다.


♠  봉국사 입문

▲  봉국사 일주문(一柱門)의 뒷모습 - 지붕에 세월이 달아준
푸른 머리칼이 자라고 있다.

서울의 북서쪽과 동쪽을 이어주는 정릉로는 시
내의 주요 간선도로로 수레의 왕래가 빈번하다.
거기에 고가도로로 된 내부순환도로까지 있어
수레의 굉음이 멈추질 않는다. 그런 정신없는
현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선 일주문은 봉국사
의 정문이다.
북한산(삼각산)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지만
내부순환로가 떡하니 앞을 가로막고 있어 그 시
야도 시원치 못하며, 문의 크기가 상당하여 시
작부터 중생의 기를 죽인다. 여기는 그런식으로
속세의 기운을 다스리는 모양이다.
문 앞쪽과 뒷쪽에는 절의 이름(삼각산 봉국사)
이 쓰인 현판이 있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경내까지 200m 정도의 가파
른 오르막이 펼쳐져 다시 한번 중생의 기를 죽
인다. 절이 산중턱에 있고 경내로 인도하는 길
이 일주문을 경유하는 북쪽 언덕길 뿐이라 꿩
대신 닭을 택할 권리는 없다. 그저 자존심을 곱
게 접고 길을 임하는 수 밖에..


▲  천왕문(天王門)과 범종루(梵鍾樓)를 품고 있는 일음루(一音樓)

일주문을 들어서면 2층 규모의 건물이 중생을 맞는다. 1층에는 천왕문 현판이, 2층에는 범종루
현판이 있어, 한지붕 밑에 2개의 서로 다른 공간이 담겨져 있는데, 이 건물을 통틀어 일음루라
부른다. 일음루는 범종루의 다른 이름으로 그 일음(하나의 소리)이란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메세지이다.
이 건물은 1979년 10월에 주지 현근(玄根)이 세웠는데, 일음루 편액과 주련은 청사 안광석(晴斯
安光碩)이 썼고, 천왕문 현판은 여초 김응현(如初 金膺顯)의 글씨이다.


▲  일음루의 뒷모습 - 일음루 현판이 뒷쪽에 달려 있다.

▲  천왕문 사천왕상(四天王像)
천왕문 양쪽에 늘어서 중생을 검문하는 사천왕, 허나 일음루 옆에 수레를
위한 길이 따로 닦여 있어 사천왕의 눈치를 굳이 볼 필요는 없다.

▲  여염집 같은 종무소(宗務所)

일음루를 지나면 주차장이 나온다. 수레를 끌고 온 이들은 여기서 수레를 접어야 되는데, 주차
공간이 넉넉치 못해 바퀴를 동동 굴리는 수레들도 적지 않았다. 어떤 수레 주인은 주차장 관리
요원과 자리를 두고 말싸움을 벌여 석가탄신일의 경건한 분위기를 해치기도 한다. 봉국사가 교
통이 불편한 시골에 있다면 이해라도 하지만 교통편도 괜찮은 서울 한복판에 자리해 있는데, 잠
깐 편하자고 굳이 수레를 끌고와 불편과 혼잡에 기름을 껴얹어야 되는지 모르겠다. 이런 날은
그저 대중교통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주차장을 지나면 길은 180도로 크게 구부러지며, 그 길의 끝에 산중턱에 둥지를 튼 봉국사가 자
리해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봉국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정릉의 원찰(願刹)이자 약사도량(藥師道場), 봉국사(奉國寺)
북한산(삼각산)의 가장 남쪽 산줄기에 자리한 봉국사는 1395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창건했
다고 전한다. 예전에는 1354년(고려 공민왕 3년)에 나옹선사(奈翁禪師)가 창건했다고 우겼으나
근래에는 무학대사 창건설로 완전 굳어진 모양이다.
무학은 이곳에 절을 짓고 약사여래불을 봉안해 약사사(藥師寺)라 했다고 전하며, 1468년에는 세
조(世祖)의 지원으로 절을 중창했다고 전한다.
허나 그 이후 정릉(貞陵)이 복원된 17세기 중반까지 200년 동안 적당한 내력이 없어 창건 시기
에 대한 의구심을 던지게 한다. 게다가 조선 초기 유물은 하나도 없으니 무학이 정녕 창건한 것
인지 아니면 15세기의 세조의 지원으로 지어진 것인지, 정릉이 복원된 이후에 지어진 것인지는
좀더 조사가 필요하다.

봉국사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1669년 이후이다. 태종(太宗)에 의해 260년 가까이 속세
의 뇌리 속에 잊혀져 쑥대밭이 된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정릉을 현종(
顯宗)의 명에 따라 1669년에 복원되었다. 이때 정자각(丁字閣)과 전례청(典禮廳) 등 정릉의 부
속 건물이 새로 지어지고, 인근 경국사(慶國寺, ☞ 관련글 보러가기)와 이곳을 정릉의 원찰로
삼았는데, 이때 나라를 받든다는 착한 뜻에서 봉국사로 이름을 갈았다. 왕실에 더욱 잘보여 절
을 크게 꾸려보겠다는 야심에서 비롯된 소산일 것이다. 참고로 봉국사는 정릉과 같은 산자락에
안겨져 있으며, 정릉에서 바로 북쪽 300m 거리에 자리해 있어 원찰의 자격으로는 충분하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터지자 성질이 난 군인들에 의해 절이 피해를 입었고, 1883년 한
계(漢溪), 덕운(德雲)이 중건했다. 1885년 3월에는 명부전에 지장탱을 조성했으며, 1898년에 운
담(雲潭), 영암(永庵), 취봉(翠峰) 등이 명부전을 중건하고 시왕도를 봉안했다.
1913년에 주지 종능(宗能)과 화주 월하봉연(月荷奉蓮)이 칠성각을 중건했고, 1938년 화주 금파(
錦坡)가 조인섭(趙寅燮)의 시주로 염불당을 새로 지었다. 1979년에는 주지 현근이 2층 크기의
일음루를 세워 범종루와 천왕문으로 삼았고, 1986년에 산신각을 중수하고 만월보전에 신중탱을
봉안했으며, 1991년에 천불전에 신중탱을 봉안했다.
1994년 3월에는 안심당을 새로 마련해 승려와 신도의 수행처로 활용하고 있고, 주지 선관과 신
도들이 합심해 경내에 나무 1,000여 그루와 온갖 꽃을 심어 도량의 분위기를 화사하게 살렸다.
그래서 경내에 제법 나무가 무성하여 산사의 티가 진하게 된 것이다.

일주문이 정릉로 도로변에 있어서 그렇지 일주문과 일음루를 지나면 산사의 내음이 오각을 간지
럽힌다. 정릉로와 내부순환도로가 절 앞에 있고 주택가와 가깝지만 숲에 짙게 둘러싸인 경내는
아늑하고 적막해 깊은 산골에 들어선 기분이다. 지금이야 속세의 기운이 절 밑까지 올라와 실감
이 덜하겠지만 옛날에는 완전 첩첩한 산주름 속이었다. 한양(서울) 도성에서 오려면 동소문<(東
小門), 혜화문(惠化門)>을 나와 아리랑고개를 넘어가야 했는데 워낙 외진 곳이라 호랑이의 등장
이 잦았다.

일주문은 북한산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경내 서쪽과 남쪽, 동쪽은 야산이라 정릉천이
있는 북쪽이 그나마 진입이 쉬웠다. 그래서 그곳에 문을 내고 속세와 왕래했으며, 그 길이 절과
속세를 잇는 유일한 통로이다. 경내는 일주문에서 각박한 오르막길을 200m 올라야 나오는데, 법
당(만월보전)은 지형상의 이유로 동쪽을 향하고 있고, 명부전은 남쪽을 향하고 있다. 법당 뒤쪽
에는 높은 벼랑이 병풍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 벼랑에 독성각과 산신각을 아슬아슬하게 걸쳐놓
았다. 이는 경내 확장이 용이하지 못해 그리 한 것이다.
이렇게 조촐한 경내에는 만월보전을 위시하여 명부전, 천불전, 산신각, 독성각, 납골당인 연화
원 등 약 10동의 건물이 터를 메우고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목조석가여래좌상, 석조여래
좌상, 석조지장3존상과 시왕상 및 권속일괄,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아미타괘불도(서울 지방유형
문화재 351호
), 지장시왕도, 시왕도와 사자상 등 지방문화재 6점을 간직하고 있다. 이들은 2014
년 1월에 한꺼번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받았다.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깝고, 교통편도 양호해 접근성은 진짜 좋다. 몇 시간이나 발품을 팔아
야 되거나 수레도 겁을 집어먹는 깊은 산중의 산사에 가기가 여의치 않을 때 아주 잠깐의 발품
으로 언제든 안길 수 있는 산사(山寺)로 산사의 기운을 나름 진하게 간직하고 있어 속세의 기운
을 잠시 털어버리기에 좋다.

※ 정릉 봉국사 찾아가기 (2015년 5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길음역(3번 출구)에서 171, 1213, 7211번 시내버스를 타고 봉국사 하차
* 지하철 4호선 미아3거리역(1,6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길음역(7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에서 153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6호선 고려대역 4번 출구에서 1213번, 6번 출구에서 7211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4번 출구)에서 7211번 시내버스 이용
* 경내에 주차장 있음 (주차장까지 진입 가능)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2동 637 (정릉로 202 ☎ 02-919-0211~2)
* 봉국사 홈페이지(연화원 포함)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초파일 분위기에 잠긴 봉국사 경내


♠  봉국사 만월보전, 명부전 주변

▲  봉국사의 법당인 만월보전(滿月寶殿)

경내로 들어서니 사람들로 진짜 봐글봐글하다. 때가 점심시간이라 공양밥을 먹고자 사람들이 만
월보전 뜨락에 길게 꼬리를 물고 있는데, 지금 그 꼬리에 동참을 하더라도 공양밥이 내 손에 오
기까지는 30분 이상은 걸릴 것 같았다. 그래서 밥은 나중에 먹고 일단 경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사람들로 가득한 뜨락을 말없이 굽어보고 있는 만월보전은 이곳의 법당이다. 정면 5칸, 측면 3
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큰 불전(佛殿)인데, 만월보전이란 약사전(藥師殿)의 다른
이름으로 약사여래(藥師如來)의 거처이다. 봉국사가 약사도량을 칭하다보니 자연히 약사여래와
그의 거처가 절의 중심이 되었다.

만월보전은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건물은 근래에 새롭게 손질한 것이다. 만월
보전 현판은 조선 후기 것으로 지금은 종무소에 있으며, 그 글씨를 확대한 새 현판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  만월보전 불단에 봉안된 불상과 용이 그려진 기둥
불단 가운데가 석조여래좌상, 왼쪽에 보관을 쓴 이가 관음보살,
오른쪽은 목조석가여래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4호)


만월보전 불단에는 이곳에 주인으로 약사불로 통하는 석조여래좌상을 가운데에 두고 그 좌우에
관음보살과 목조석가여래좌상을 배치했다.
이중 목조석가여래좌상은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어깨가 넓고 둥글며, 머리를 앞으로
살짝 수그려 굽어보는 듯한 자세를 하고 있고, 간략해진 옷 주름으로 신체 윤곽이 뚜렷하고 부
피감이 있어 보이는 점으로 보아 18세기 중/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해맑은 표정의 만월보전 석조여래좌상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7호

봉국사의 든든한 밥줄인 석조여래좌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석불로 정확한 시기는 전해오지 않
는다. 불상의 얼굴은 거의 동그랗고 볼에는 살이 좀 있어 보이며,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
러져 선의 미학을 선사한다. 눈썹 사이에는 백호가 살짝 찍혀 있고, 두 눈은 가늘고 살며시 뜨
며 중생과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진 제물을 바라본다. 코는 끝이 두툼하고 붉은 입술은 얼굴 크
기에 비해 지나치게 작은 감이 있으나 입술에 드리워진 미소는 얼굴 전체를 환하게 만든다.
두 귀는 중생들의 소망을 모두 경청하려는 듯, 어깨까지 늘어졌으며, 머리칼은 꼽슬인 나발이고,
그 가운데에 하얀 무견정상(無見頂相)이 솟아 있다.
목에는 불상에 흔한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지 않고, 몸에 걸친 옷은 어깨를 감싼 통견
(通肩)이
다. 가슴 밑에는 군의(裙衣)가 보이는데, 그 옷깃과 띠가 직사각형으로 정형화되어 표현된 것은
조선 후기 불상에서 많이 나타나는 양식이다.
두 손은 다리 위에 모아 금색이 칠해진 무엇인가를 소중히 들고 있는데, 이는 약사여래의 필수
품인
약합(藥盒)로 근래에 금색을 입혔다.

불상을 만들 때 해맑은 동자승을 모델로 하지 않았을까? 그의 동그란 얼굴은
해맑고 귀여워 보
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웃음의 꽃을 머금게 한다. 아무리 세상이 즐거움과 웃음을 앗아가도 그
는 그 웃음을 되찾아주고 치료해주는 의원인 셈이다. 약합보다는 그의 얼굴이 그야말로 약이다.
자신을 보며 늘 웃어주고 밝은 표정을 지어주는 불상 앞에 어느 누가 즐겁지 않으리..? 찰거머
리같은 번뇌도 속세의 부정한 기운도 그 앞에서는 모두 털리게 되어있다.

이 약사불은 도금을 입히지 않고 원초적인 돌의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신체 비례도 거
의 맞고 세부 묘사도 충실해 조선 후기 불상 가운데 괜찮은 작품으로 점수를 받고 있다. 특히나
해맑은 얼굴과 미소는 보물급으로도 손색이 없다. 다행히 조선 후기 서울/경기 지역에서 유행했
던 도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뒤늦게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  석조여래좌상과 석가후불탱화

▲  호법신(護法神)을 있는데로 끌어 담은 신중탱
법당에 필수적으로 걸어놓는 신중탱은 법당 수호를 목적으로 한다.
허나 그림에 그려진 이들이 너무 많아 누가 누군지 정신이 없다.

▲  봉국사 5층석탑
만월보전 뜨락에 날씬한 몸매의 5층석탑 2기가 서있다. 이들은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저들 이전에는 경내에 그 흔한 탑도 없었다.

       ◀  천불전(千佛殿)과 느티나무
남쪽을 바라보고 선 천불전은 석가3존불과 조그
만 금동불 1,000상을 봉안하고 있다. 이들이 합
심하여 금빛을 발산하니 그 찬란함에 눈이 마비
될 지경이다.
천불전 앞에는 60여 년 묵은 느티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
무 9호
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높이는 약 16m
정도로 경내에 있는 나무 가운데 가장 으뜸이다.


▲  천불전을 장식하고 있는 석가3존불과 조그만 금동불 1,000상의 위엄
조그만 불상은 중생들의 돈으로 조성된 원불(願佛)이다. 즐거운 초파일을 맞이하여
후하게 차려진 제물을 바라보며 봉국사 승려를 대신하여 흐뭇한 미소로 답을 한다.

▲  천불전 옆에 자리한 안심당(安心堂)
승려와 신도들의 수행을 위해 1994년 3월에 지어졌다.

▲  봉국사의 보물 창고, 명부전(冥府殿)

만월보전의 옆구리를 뚫어지라 바라보는 명부전은 조선 후기에 지어졌다. 지금의 건물은 1989년
에 중건된 것인데, 내부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조지장3존상과 시왕상, 지장시왕도, 시왕도,
사자도 등이 푸짐하게 봉안되어 있어 경내의 보물 창고나 다름이 없다.
특히 건물 현판은 가로가 아닌 세로로 걸린 것이 이채로우며, 현판의 색깔도 검은색이 아닌 붉
은색 바탕에 금색으로 된 것이 꽤 돋보인다. 이런 현판은 여기서도 가까운
흥천사(興天寺) 명부
전(☞ 흥천사글 보러가기)에도 있어 무슨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보니 거기 명부전과
여기 명부전이 너무나 닮았다.


▲  명부전 석조지장3존상과 시왕상, 권속일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5호
그 뒤에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2호

명부전 불단에 봉안된 조그만 지장3존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다. 금동 옷을 입은 지장보살상
은 녹색 승려머리로 조금 매서운 맵시로 앉아있는데, 북한산(삼각산) 동쪽에 있는
본원정사(本
精舍) 지장보살상과 비슷한 모습이다. (☞ 본원정사글 보러가기)
지장보살 옆에는
도명존자(道明尊者)무독귀왕(無毒鬼王)협시(夾侍)해 있는데, 얼굴이 좀
순하고 단정해 보인다. 그들 뒤에는 1885년에 제작된 지장시왕도가 든든하게 걸려있고, 그 좌우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인 시왕상을 비롯하여 판관(判官), 녹사, 시자상, 동자상, 인
왕상 등이 거의 빠짐없이 자리를 메운다. 시왕도와 사자도는 1898년에 그려진 것으로 19세기 후
반 불화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명부전 시왕상과 시왕도
밑줄에 자리한 상은 판관, 녹사, 시자상

◀  호랑이탈을 쓴 고양이처럼 귀여운
인왕상(仁王像)과 사자도
(시왕도와 사자도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3호)


♠  봉국사 마무리

▲  산신각이 달려있는 경내 뒤쪽 벼랑

만월보전 뒤쪽(서쪽)에는 거의 80도 가까이 솟은 벼랑이 병풍처럼 자리해 있다. 그 옹색한 곳에
계단을 내고 좁은 자리를 간신히 닦아서 독성각과 산신각을 내는 기적을 내었는데, 산신각은 각
한 계단을 1분 정도 올라야 된다.
봉국사가 이런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산신각을 걸친 것은 경내가 썩 넓지가 않고,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에 산신각이나 삼성각을 두는 원칙 때문이다. 그래서 욕심을 내어 벼랑 윗부분
에 자리를 닦은 것이다.

산신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예전에는 광응전(光膺殿)이란 생소한 이름으로
불렸다. 산신각이니 당연히 산신(山神) 할배가 중심이 되야겠지만 중심은 엉뚱하게도 약사여래
상이 차지하고 있으며, 산신과 관음보살상이 그 좌우에 자리해 있다. 아무래도 이곳이 약사도량
을 내세우다보니 경내에서 가장 높고 험준한 이곳까지 약사여래를 둔 모양이다.

이곳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각박하지만 다행히 거리는 짧아서 그런데로 올라갈 만하다. 경내에
서 가장 하늘과 가까워 조망은 좋을 것 같지만 숲의 패기가 드높아 조망은 썩 좋지 못하다. 숲
에 가려 경내와 정릉동 일부가 보이는 것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건물 주변이 낭떠러지라
추락사고의 위험도 늘 도사리고 있으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뒷탈이 없다. 사고가 나면 제아무리
영험하다는 산신, 약사여래라도 구제해주지 못한다.

▲  계단 끝에 자리한 산신각

▲  산신각 중수 공덕비(功德碑)


▲  산신각 식구들 (왼쪽부터 산신, 약사여래상, 관음보살)
이들과 후불탱화는 모두 근래에 조성되었다. (산신각도 마찬가지)

▲  산신각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울창한 숲에 가려 보이는 것은 별로 없다.

▲  독성각(獨聖閣, 위쪽)과 용왕단(龍王壇, 아랫쪽)

▲  용왕단 (독성각 바로 밑에 있음)

월보전과 산신각으로 인도하는 계단 입구 사이에 용왕단이 자리해 있다. 말그대로 용왕(龍王)
의 거처로 용왕과는 전혀 관련도 없어보이는 이런 산속에 그의 공간이 있다는 것이 참 이채롭다.
바다 용왕이 바다에서 먼 이런 산골까지 무슨 볼일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
이곳에 용왕단을 세운 것은 지금은 제대로 안나오지만 약수터를 지키고자 세운 것이다. 용왕이
라고 해서 꼭 바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물이 미치는 모든 곳이 그의 관리 영역이다. 허나 독
성, 산신과 달리 번듯한 건물이 아닌 노천에 있어 절에 봉안된 다른 존재와 크게 차별을 두었다.
용왕의 거처는 둥근 초석을 깔고 그 위에 나무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에 용이 새겨져 있으나 색
이 퇴색해서 제대로 안보면 지나치기 쉽다. 마주보는 용머리 위에 기둥을 세우고 기와를 올렸는
데, 이는 최근에 세운 것이며, 그 안쪽을 파서 얕은 감실(龕室)을 두고 거기에 용을 탄 용왕을
봉안했다.


▲  벼랑 위에 둥지를 튼 독성각

용왕단 위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독성각이 벼랑 바위에 아찔하게 걸터 앉아있다. 이곳은 독성(獨
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근래에 조성된 독성상과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독성각을 가려면 만월보전 좌측에서 올라가야 되는데, 산신각보다는 접근이 쉽다. 다만 건물 정
면 바깥은 벼랑이기 때문에 내부에서 괜히 뒷걸음질하다가 자칫 골로 가는 수가 있다. 건물 크
기도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손바닥만한 규모라 3명만 들어가도 숨쉬기 힘들다. 추락을
염려하여 2줄로 안전 난간을 둘렀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해 보인다.


▲  독성상과 독성탱 - 초파일 특수로 그에게 올려진 제물이 꽤 풍족하다.
며칠 동안 독성 식구들 제대로 회식했을 듯~~

▲  독성각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 오른쪽 녹색 천막에서는 전을 팔고 있었다.

▲  봉국사에서 먹은 점심 공양의 위엄

국사를 정신없이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3시가 되었다. 경내도 다 구경했으니 이제 점심을
먹으며 지친 몸을 달래줘야 되겠지. 공양줄도 제법 줄어든 상태라 줄에 동참하여 공양을 받았다.
이곳 공양은 다른 절집과 비슷한 비빔밥이다. 밥과 갖은 나물, 고추장이 그릇에 담겨
이들을
비벼먹으면 되며, 작은 그릇에는 물김치가 담겨져 있다. 그리고 떡도 1봉지씩 나눠주면서 후식
도 배려했다.

공양을 받는 건 좋으나 경내가 사람들로 가득하다보니 밥먹을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산
신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간신히 자리를 잡고 즐거운 공양시간을 갖는다. 이들 공양밥 외에도
전과 간식도 있는데, 이들은 돈 주고 사먹어야 된다. 전 1장은 1~2천원선, 후배 1명이 전을 2장
사와서 같이 먹었다. 한참 배가 고플 시간이고 바깥에서 소풍 나온 듯 밥을 먹으니 밥과 물김치,
전이 모두 꿀맛 같다. 밥에 담긴 고추장은 양이 적당하여 모두를 붉게 물들이는데 충분했고, 물
김치는 맛이 시원하여 이내 바닥을 드러냈다.

그렇게 즐겁게 점심 공양을 마치고 봉국사를 뒤로하며 다음 절로 이동했다. 이날 우리의 갈 길
은 아직 멀었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만 둘러보고 끝낼 수도 있지만 달랑 1곳으로 초파일 절투어
를 땡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1년에 딱 하루 있는 날이니 이날만큼은 좀 무리하여 초파일 분위
기를 내내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봉국사 글은 여기서 끝 ~~~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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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지붕을 거닐다 ~ 금정산, 원효암 봄나들이 (범어사, 고당봉, 금샘, 산성막걸리)

 


' 부산 금정산(金井山)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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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정산의 상징, 금샘


 

차디찬 겨울 제국의 기운이 슬슬 꺾이던 3월 첫 무렵에 부산(釜山)의 듬직한 진산(鎭山)인
금정산을 찾았다.
바로 전날 부산 광안동 선배 집에 여장을 풀고 코가 비뚤어지도록 곡차(穀茶)를 마시며 간
만에 회포를 풀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찬란한 여명의 재촉에 졸린 눈을 비비며 그날의
목적지인 금정산 산행을 떠났다.

광안역에서 부산시내버스 49번(노포역↔광안동)을 타고 금정산 기점의 하나인 범어사 입구
에서 내리니 시간은 벌써 정오를 가리킨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우선 점심을 먹기로 하
고 부근 식당에서 콩나물해장국과 뼈다귀해장국으로 뱃속을 위로하고 범어사입구 종점에서
등산객들로 미어터지는 부산시내버스 90번에 간신히 매달려 범어사 턱밑에 발을 내린다.

범어사(梵魚寺)는 부산을 대표하는 고찰(古刹)이자 경남권 3대 사찰의 하나로 지금까지 세
번 발걸음을 했다. 2002년 이후 정말 오랜만에 찾았지만 별로 땡기지 않아 그냥 항아리 겉
돌 듯 바로 통과해 버렸다. 우리의 목적지는 원효암과 금정산 정상이기 때문이다.

범어사의 상징이자 천하에 널린 일주문(一柱門) 가운데 유일하게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조계문(曹溪門, 보물 1461호)을 지나 왼쪽 산길로 진입, 북문 쪽으로 조금 가
다가 원효암으로 가는 산길로 진입했다. 여기서 원효암까지는 대략 1km이다.


▲  원효암으로 가는 산길


♠  금정산에 묻힌 도심 속의 산중암자 원효암(元曉庵)

▲  꾸밈 없는 소박함, 원효암 정문

해발 500m 고지에 자리한 원효암은 범어사의 부속암자로 금정산 동쪽 자락에 안긴 아담한 산중
암자이다. 삼삼하게 우거진 숲속에 숨은 듯 자리해 있어 바깥에서는 어지간해서는 보이지를 않
는다. 절을 알리는 이정표가 없었다면 지나가는 새 조차도 이곳에 절이 있는지 모를 정도로 말
이다.

원효암은 절 이름 그대로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그는 금정산에서 미륵사(彌勒
寺, ☞ 관련글 보러가기)와 원효암을 지었다고 하는데, 부산 앞바다에 무려 5만 척의 왜군이 밀
려오자 도술을 부려 물리친 곳이라 한다. 허나 신라 왕실의 측근으로 의상(義湘)과 더불어 신라
불교를 이끌었고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바쁘게 살던 그가 과연 이곳까지 내려와 절을 지을 여유
가 있었는지 과연 궁금할 따름이다. 그가 세웠다는 일말의 증거와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신라 중기에 활약했던 원효와 의상은 3살짜리 아이도 줄줄 욀 정도로 유명하여 신라 후기 이후
창건된 많은 절들이 앞다투어 그들을 이용했다. 그들이 창건했다는 식으로 그럴싸하게 창건 설
화를 꾸민 것이다. 어떤 절은 아예 그들의 이름을 따서 원효암, 원효사, 의상암(義湘庵)을 칭하
고 있으니 극락에 가있을 원효와 의상이 '엥 내가 언제 이렇게 많을 절을 지었나?' 놀랄지도 모
른다.

그러면 원효암은 언제 지어졌을까? 유감스럽게도 절과 관련된 역사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다만
경내 동쪽에 신라 후기에서 고려 초기에 지어진 3층석탑이 있어 적어도 신라 후기에 문을 연 것
으로 여겨진다. 즉 탑이 있으니 절이 있는 것이다. 원래 위치는 동편3층석탑 일대로 언제부터인
가 터만 남아오던 것을 조선 중/후기에 지금에 자리에 다시 지었으며, 1906년에 성월선사(聖月
禪師)가 1906년 중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무량수각을 비롯하여 요사와 심검당 등 5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문화유산으
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3층석탑 2기와 목조관음보살, 아미타3존도(부산 지방유형문화재 141호)
를 비롯해 오래된 부도, 방광탑(放光塔) 등이 있다. 또한 1950년대에 우물에서 원효대사가 쓰던
것이라 전하는 옥돌의 도장이 발견되어 현재 범어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절의 땅을 구분짓고자 경내을 둘러싼 숲 주위로 촘촘히 철조망을 둘러 휴전선 철책 마냥 은근히
옥의 티를 선사하고 있는데, 철조망 사이로 2~3개의 문을 내어 조촐하게 일주문으로 삼았으며,
이들 문은 범어사와 금정산성 북문으로 이어진다.


▲  원효암동편3층석탑 - 부산 지방유형문화재 11호

하늘과 나무만 보이는 첩첩한 산주름 속의 암자로, 원효암을 가려면 철조망 정문을 거쳐야 된다.
문을 들어서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오른쪽 내리막 길로 가면 운치가 깃들여진 전나무
숲길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데, 그 전나무 그늘에 오래된 3층석탑과 부도(浮屠) 3기가 뿌리를
내렸다.

3층석탑은 원효암 동쪽에 있어서 원효암동편3층석탑이라 불린다. 예전에는 원효암동3층석탑이라
불렸으며, 이는 문화재청의 지정 명칭이다.


동편3층석탑은 높이 약 1.9m로 신라 후기(또는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원효암
은 원래 이곳에 있었는데, 이 탑을 통해 절이
적어도 신라 후기에 창건되었음을 귀뜀해주며,
원효암의 옛 금당(金堂)터를 알려주는 소중한
보물이다.

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
을 세운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기단은 없고 바
닥돌 바로 위에 탑신이 있다.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조각했는데, 2층과 3층은 돌의 재
질이나 비례로 보아 나중에 손질된 것으로 보인
다. 제법 두터워 보이는 옥개석(屋蓋石)은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져 있어 곡선의 미를 선사하
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신은 세
월의 검은 때가 낀 것을 빼면 대체로 상태는 양
호하나 탑의 기본 요소인 기단이 없어 다소 어
색해 보인다. 기단이 있었다면 제법 볼만했을텐
데 말이다.


▲  석종형(石鐘形) 부도 3형제

3층석탑과 마주한 부도 3형제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모두 석종형 스타일이다. 위의 사진
을 기준으로 왼쪽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기단 받침 위에 방금 피어오른 연꽃 봉오리처럼 탑신이
얹혀져 있고, 오른쪽 부도는 지붕돌을 갖추고 있다.


▲  원효암의 백미, 전나무 숲길

원효암의 백미는 경내로 인도하는 전나무 숲길이 아닐까 싶다. 비록 잠깐의 짧은 거리이지만 전
나무가 늘씬한 몸매로 하늘을 가리며 늘어서 있어 동화 속의 풍경처럼 정겹기 그지없어 마치 순
천 금둔사(金屯寺, ☞ 관련글 보러가기)만큼이나 아름다운 절이 아닐까 싶은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  옛 사람들이 바위에 남겨놓은 바위글씨

▲  경내 직전에 펼쳐진 대나무 숲길

전나무 숲길은 절과 가까워지면서 녹음(綠陰)이 서린 대나무 숲길로 변화한다. 푸르름의 한복판
에 서 있으니 늦겨울은 정말 다른 세상 이야기 같다. 대나무들이 앞다투어 잎을 피우며 경내 앞
쪽을 가득 메우니 말이다. 바람이 스치는 대나무 소리에 속세에서 오염된 귀가 정화되며 마음
속에 가득한 번뇌도 잠시나마 와해되는 듯 하다.

     ◀  원효암 경내로 오르는 계단과 문
대나무 숲길을 지나면 경내로 오르는 계단이 나
온다. 계단 끝에는 허름하게 생긴 기와문이 있
는데, 문 좌우에는 담장을 둘렀으며, 돌로 축대
를 쌓아 터를 다졌다. 바로 저 문을 들어서면
절간 같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숲속에 없는
듯 자리한 원효암 경내가 펼쳐진다.


▲  아늑하고 조용한 원효암 경내 (정면에 기와집이 법당인 무량수각)


▲  무량수각 툇마루와 단청이 곱게 입혀진
기둥과 천정

경내로 들어서면 흙이 입혀진 넓고 잔잔한 뜨락
이 펼쳐진다. 뜨락 너머에는 이곳의 법당(法堂)
인 무량수각(無量壽閣)이 뜨락을 굽어본다.
무량수각은 조선 중기 이후 원효암이 이곳으로
터를 옮기면서 지은 건물로 여겨지며, 적어도
200년 이상 묵은 듯 고색의 때가 넘친다. 현판
에는 '無'가 '天' 비슷하게 쓰여있어 천량수각
으로 오인하기 쉬우나 그는 엄연히 '無'이다.
'無'의 다른 모습이라고 보면 된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나중에
법당 우측에 'ㄱ'자 모습의 건물을 붙이면서 지
금과 같은 독특한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비록
속은 하나로 이어져 있지만 우측과 좌측은 엄밀
히 다른 성격과 이름을 가지고 있다. 좌측은 법
당이고 우측은 공양간 및 종무소로 쓰인다. 법
당에는 원효암 현판과 무량수각 현판이 걸려 있
으며, 특이하게도 툇마루를 가지고 있어 잠시
두다리를 쉬어가기에 적당하다. 퇴색한 마루에
는 세월의 때가 가득하여 움푹 들어간 부분도
있으나 아직은 튼튼하다. 기둥 윗부분과 천정에
는 환하게 단청이 칠해져 건물을 수식한다.

▲  다소 빛이 바랜 원효암 현판의 위엄

▲  글씨가 꿈틀거리는 듯한 무량수각 현판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친필이라고 전한다.


무량수각은 허름해 보이는 외부와 달리 내부는 깔끔하여 오래된 티가 별로 풍기질 않는다. 불단
은 2개가 마련되어 있는데, 우측에는 목조관음보살이, 좌측에는 지장보살이 한 자리씩 차지해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건물 이름은 분명 아미타불의 거처인 무량수각인데 아미타불은 온데간
데 없고, 전혀 관련도 없는 이들이 대신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  무량수각 좌측 불단에 자리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지장탱화
지장보살상은 근래에 만든 것으로 그 크기가 작아 유리막 안에 특별히 봉안했다.
지장보살의 뒤를 받쳐주는 지장탱화는 색채가 다소 바래 보여 적어도
100년 정도는 묵은 듯 싶다.

▲  원효암 목조관음보살좌상 - 부산 지방유형문화재 96호

무량수각 우측 불단에 봉안된 목조관음보살좌상은 17~18세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범어사에 있는
여러 불상과 비슷하게 생겨 범어사에서 넘어온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있고, 입술에는 엷은 미소를 띄우며 중생을
맞는다. 볼살은 두텁고 귀는 중생의 소리를 모두 듣고자 어깨까지 축 내려왔으며, 몸에는 두꺼
운 법의(法衣)를 걸치고 있고, 왼손은 다리 위에 대고 오른손은 아미타9품인과 비슷한 수인(手
印)을 취하고 있다.
부산 지역에 몇 안남은 17~18세기 보살상으로 한때 도난을 당하여 왜열도로 넘어갔다가 현몽에
의해 다시 돌아왔다고 전한다. 그래서 영험이 뛰어나다고 명성이 자자하며, 그의 신변보호를 위
해 짙게 유리막을 봉했다. 문화유산 도난이 다반사처럼 일어나는 이 땅의 현실에서 이해는 되지
만 폐쇄된 공간에 갇힌 듯 그도 꽤 답답할 것이다.


▲  무량수각 우측 샘터
금정산이 중생에게 베푼 소중한 선물로 그 뒤로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무언가를 담은 장독대들이 늘어서 있다.

▲  원효암서편3층석탑 - 부산 지방유형문화재 12호

원효암에는 2기의 오래된 석탑이 있는데, 하나는 앞서 언급한 동편3층석탑이고, 다른 하나는 경
내 서쪽에 자리한 서편3층석탑이다.

서편3층석탑은 높이 2.33m로 경내에서 서북쪽으
로 30m 떨어진 공터에서 수습해 온 것이다. 2중
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얹힌 것으로 대자연
과 세월의 괴롭힘이 상당했는지 성치 않은 부분
이 별로 없을 정도인데, 바닥돌은 거의 파괴되
었고 아래층 기단은 옆이 뭉개졌으며, 탑의 머
리장식 일부도 날라간 상태이다.
위층 기단은 탱주가 사라졌고, 탑신 역시 1층만
남아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2층과 3층 탑
신을 새로 만들어 붙였다. 각층 옥개석에는 밑
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네 모서리는 세월
의 거친 흐름에 죄다 휩쓸려나갔다.
탑의 양식으로 미루어 보아 동편3층석탑과 더불
어 신라 후기 또는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서편3층석탑 부근에 자리한 부도

서편3층석탑 부근에는 네모난 기단 위에 심어진 맵시가 고운 석종형부도가 서 있다. 기단에 검
은 이끼가 끼어 있고, 돌의 피부가 제대로 바래 있어 제법 묵은 부도임을 알 수 있는데, 부도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목조관음보살상과 더불어 원효암의 조선 후기 유물이다.

이렇게 원효암를 말끔히 둘러보고 경내 서쪽에 가늘게 난 산길을 타고 금정산으로 향했다. 산성
북문까지는 25분 정도 걸렸는데, 처음에는 원효암 뒷쪽에 자리한 의상대(義湘臺)와 원효봉에 가
려고 했으나, 사람의 마음은 갈대라고 고당봉과 금샘으로 행선지를 바꿨다.

※ 금정산 원효암 찾아가기 (2015년 4월 기준)
* 부산지하철 1호선 범어사역 5,7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뒤로 돌아서 가면 범어사로 올라가는
  길(청룡예전로)이 나온다. 그 길을 오르면 삼신교통 종점이 있는데 거기서 범어사행 90번 시
  내버스를 타고 범어사 하차, 범어사를 거쳐 40분 정도 오르면 된다. 90번 버스는 평일에는 15
  ~20분 간격, 휴일에는 10분 내외 간격으로 운행된다.
* 승용차로 갈 경우 원효암까지 찻길이 없어 접근이 불가능하다. 범어사 인근 주차장에 차를 세
  우고 올라가야 된다.
* 원효암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25 (☎ 051-508-4008)


♠  부산의 지붕 거닐기 ~ 금정산성(金井山城) 북문에서 고당봉까지

▲  금정산성 북문(北門) - 사적 215호

금정산 지붕에 길게 둘러진 금정산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산성(山城)으로 왕년에는 길이가
18km에 달했다고 한다. (북한산성은 약 9.5km) 허나 지금은 ¼도 안되는 4km 정도의 성벽만 간
신히 남아 있다.
지금의 성은 1703년에 지어진 것으로 정확한 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667년 경상좌수영 통제
사 이지형(李枝馨)이 금정산성 보수를 조정에 건의한 적이 있으며, 아마도 신라나 고려 때 왜구
(倭寇)의 공격에 대비하여 쌓은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1707년 성이 너무 넓어서 성의 중간 부분에 남북을 가르는 중성을 쌓았으나, 1774년에 성이 너
무 커서 수비가 어렵다며 폐지했다. 1806년에 성을 다시 손질했으나 왜정 때 철저히 파괴된 것
을 1972년부터 1974년까지 복원공사를 벌여 동문(東門)과 서문, 남문, 수구문(水口門)을 복원하
고, 1989년에 북문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마치 사극 세트장의 성문처럼 간결하게 생긴 북문은 해발 590m에 자리해 있는데, 문의 높이가 3
m 정도이다. 문은 동그랗게 구부러진 모습이 아닌 네모난 형태로 문 위쪽에는 여장을 쌓고 조그
만 팔작지붕 문루(門樓)를 세웠으며, 문의 규모는 서문(西門)에 비해 상당히 왜소하다.

문을 들어서면 길은 3갈래로 갈리는데, 여기서 오른쪽(북쪽)으로 가야 고당봉이다. 직진하면 미
륵사와 금성동, 왼쪽은 성곽길을 따라 원효봉과 의상봉, 동문으로 이어진다. 북문에서 고당봉까
지는 넉넉잡아 25분 정도 걸리며, 정상과 가까워질수록 속세살이처럼 경사가 좀 급해진다.


▲  북문에서 정상 방면으로 이어지는 금정산성 성곽 (북문 북쪽)
저 멀리 우뚝 솟은 봉우리가 고당봉이다.

▲  북문에서 동문 방면 금정산성 성곽 (북문 남쪽)

▲  부드러운 곡선의 원효봉~의상봉 능선

▲  고당봉 밑에 자리한 고모영신당(姑母靈神堂)

고당봉을 2분 정도 앞둔 지점에 이르면 돌담을 두른 붉은 벽으로 된 고모영신당이란 사당을 만
나게 된다. 이 사당은 고당봉에 깃들여진 고모영신(姑母靈神)을 모신 일종의 산신당(山神堂)과
같은 곳으로 1920년대에 범어사 신도인 밀양박씨 할머니의 유언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임종에 임하면서 '내가 죽거든 화장을 하고 고당봉에 고모영신을 모시는 사당을 지어 고모
제(姑母祭)를 지내달라. 그러면 고당봉의 수호신이 되어 범어사를 지켜주겠다'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범어사 승려들은 그 유언을 받들어 고당봉 밑에 사당을 지어 1년에 2번(음력 1월 15일,
5월 5일) 제를 지내니 범어사가 나날이 흥해졌다고 한다. (지금도 제사를 지냄)

우리의 토속 사당인 산신당이나 성황당은 기와나 나무로 만든 집이 딱 어울리는데 이곳은 근래
에 새로 지은 붉은 시멘트 집이 신당(神堂)의 역할을 하여 다소 어색할 따름이다. 허나 이곳은
고지대라 거센 바람과 눈,비에 자주 시달려 안전과 관리를 위해 시멘트 집을 지어 고모영신을
봉안한 것이다. 신당 옆에는 어린이 키높이 정도의 관리실이 있으며, 신당에는 누구나 절을 올
릴 수 있다.


▲  고모영신당에 봉안된 산왕대신(山王大神, 산신)과 고모영신 위패
활짝 웃는 두 송이의 꽃을 비롯하여 여러 문양이 그려진 단청이
 식상한 신당 내부를 아름답게 꾸며준다.


고당봉(801.5m)은 금정산의 정상으로 부산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이다. 바위 봉우리로 이
곳에 올라서면 금정산의 주요 봉우리들이 두 눈
아래 들어오고, 금정산 분지에 둥지를 튼 금성
동을 비롯하여 부산 북부 지역과 양산(梁山),
김해 대동면, 기장군(機張郡) 서부 일대가 훤히
시야에 들어와 조망 또한 천하일품이다.

이 봉우리는 범어사 창건 설화에도 등장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 문무왕(文武王)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
나 왈
'폐하, 태백산에 의상(義湘)이란 승려가 있습니
다. 그는 항상 3,000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화엄
법문을 연설하며, 화엄신중(華嚴神衆)과 제신(
諸神), 천왕(天王)이 그를 따라다니며 수행을
합니다. 동쪽 해변에 금정산이 있고, 그 산정에
높이 50여 척에 이르는 바위가 솟아 있는데, 그
바위 위에 우물이 있고, 그 우물은 항시 금색이
며, 사시사철 마르지를 않습니다.

▲  고당봉(故堂峰) 표석의 위엄

 

그 우물에는 범천(梵天)에서 오색(五色) 구름을 타고 온 금어(金魚)가 헤엄치고 놀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의상과 함께 금정산에 가시어 7일 밤낮 화엄신중을 독성하면, 그 정성에 따라 미륵불
이 금색신으로 화현하시고 동해에 임하되 왜구가 자연히 물러날 것입니다'

꿈에서 깨어난 문무왕은 아침에 바로 의상대사를 소환하여 그와 금정산에 들어가 7일 밤낮을 일
심으로 독경하니 그 장소가 바로 고당봉이란 것이다. 고당(姑堂)이란 '원래 불가에서 부처의 화
엄일승(華嚴一乘)인 최고의 법문을 높은 깃대에 세웠다'는 뜻으로 금정산 꼭대기에 기치를 꽂아
세웠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법의 당을 높이 세워 운집한 중생을 위해 법문을 강설했다는 의상대
사의 뜻에 따라 고당봉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범어사에서 그럴싸하게 다듬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다.


▲  등산객들로 가득한 고당봉

고당봉에는 많은 산꾼들이 진을 치며 정상에 올랐다는 쾌감에 젖어있다. 고당봉 표석은 그들의
인기 사진모델로 정상에 올랐다는 인증 사진을 찍느라 표석 주변은 늘 부산하다. 한두 사람이나
한 단체가 찍기가 무섭게 바로 다른 이들이 다가와 사진을 찍으니 말이다.
이곳에서 천하를 굽어보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여 부산 북부 지역과 양산, 낙동강(落東江), 김해
대동면, 기장군 서부 일대가 두 눈에 박혀 눈이 그야말로 호사를 누린다. 간만에 하늘과 맞닿은
높은 산꼭대기에 오르니 속세살이에 상처 받은 마음이 쾌유가 된 듯, 속이 시원하다.


▲  고당봉에서 바라본 천하 (1)
김해 대동면과 낙동강, 양산 남부(물금, 범어, 양산신도시) 일대

▲  고당봉에서 바라본 천하 (2)
금정산 남쪽 줄기(원효봉, 의상대)와 그 너머로 희미하게 다가오는
부산 동래(東萊) 지역

▲  고당봉에서 바라본 천하 (3)
금정산 동쪽 줄기와 금정구, 기장군 서부 지역

▲  고당봉에서 바라본 천하 (4)
금정산 북쪽 줄기(장군봉)와 양산시 동면, 덕계 지역


♠  금정산의 유래가 된 금정산의 성지(聖地)
금샘<금정(金井)> - 부산 지방기념물 62호

▲  금샘을 품은 바위
여러 바위를 디딤돌로 삼은 커다란 바위 꼭대기에 금샘이 있다.


정상에 올랐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내려가야 되는 법, 10분 정도 머물며 천하를 바라보다가 금샘
으로 넘어갔다.
금샘은 고당봉에서 동쪽으로 약 10분 거리에 있는데, 고당봉 동쪽으로 내려가야 된다. 빙글빙글
머리를 환장하게 만드는 빙글계단을 내려가 바위를 몇 개 넘으면 금정산과 부산의 성지인 금샘
이 그 영롱한 모습을 비춘다.

금샘은 고당봉 동쪽에 솟아난 커다란 바위 위에 있는 패인 웅덩이로 범어사 창건설화의 현장이
다. 바로 금빛이 나는 물고기(金魚)가 오색 구름을 타고 내려와 놀았다는 그곳이다. 그래서 금
빛 물고기가 놀았다는 뜻에서 금샘(金井)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산 이름도 자연히 금정
산이 되었다. 물론 그런 물고기는 없을 것이다. 다만 바위 꼭대기에 저렇게 묘하게 물이 안착
할 공간이 있다는 것이 신비로울 따름이다.
백악기 말인 8,000만 전부터 형성된 화강암체가 오랜 세월 풍화과정과 기후변화를 거치면서 만
들어진 대자연의 기가 막힌 작품으로 낙동강에서 올라온 안개가 낮에 햇빛으로 데워지고, 데워
진 바위가 밤이 되면 주변 수분을 흡수하는 작용으로 금샘 물이 차가워진다고 한다. 지금도 10
월 해질 무렵에 금샘을 보면 물 안에 물고기 형상의 홈이 파여있는데, 저녁노을과 단풍빛이 반
사되어 금빛 물로 변하고, 바람이 불면 마치 마치 금빛물고기가 거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금샘에 모인 물은 바깥으로 나갈 공간이 없기 때문에 늘 일정한 수량을 유지한다. 그렇다면 물
맛은 어떨까? 금샘이란 말 그대로 수질도 그에 버금가야 적당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무늬만 샘
이다. 물이 고인 웅덩이기 때문이다.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비와 눈이 내리지 않는 이상은 물이
들어올 때가 없고, 그곳에서 마를 때까지 고여있기 때문에 물은 속세처럼 썩는다. 가까이 다가
가서 보면 물 속에 여러 부양물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수질이 좋지 않으니 금샘이라 하여
괜히 물을 섭취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 화려한 이름과 달리 수질만큼은 독샘인 것이다.
금샘의 물이 마르면 큰 재앙이 온다고 범어사에서 믿고 있으나, 물이 마르기가 무섭게 또 비가
내리니 물은 늘 마를 날이 없다. 금샘까지는 접근이 가능하나 주변이 험해 사고 위험이 도사리
므로 괜한 오만을 부리지 않도록 한다.

※ 금정산 고당봉, 금샘 찾아가기 (2015년 4월 기준)
* 범어사에서 북문을 거쳐 고당봉까지 약 60분, 금샘은 70분 소요
* 금성동주민센터<① 1호선 온천장역 3번 출구, 길 건너편에서 203번 좌석버스 이용 / ② 2,3호
  선 덕천역 10번 출구와 2호선 화명역 6번 출구에서 금정구 마을버스 1번 이용>에서 북문까지
  70~75분, 고당봉까지 90~95분, 금샘은 100~105분 소요

* 금샘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산2-1


▲  가까이서 본 금샘의 위엄
백두산(白頭山)에 천지(天池)가 있고 한라산(漢拏山)에 백록담(白鹿潭)이 있다면
금정산에는 그들의 축소판인 금샘이 있다.

▲  금샘에서 바라본 금정구, 기장군 철마면 지역

▲  금샘에서 바라본 금정산 동/남쪽 줄기와 북문(움푹 들어간 부분)

▲  북문에서 금성동으로 내려가는 길

금샘을 둘러보고 남쪽 샛길을 거쳐 북문으로 내려왔다. 북문에서 금성동으로 통하는 넓은 길로
내려가면서 오랜만에 미륵사를 찾아 그곳의 청정한 약수를 먹고 싶었으나 몸이 지친 상태로 그
냥 통과했다. 거기까지는 20분 정도 올라가야 된다.

미륵사입구를 지나 10분 정도 가면 산길을 둘러싼 숲의 삼삼한 물결은 잠시 멈추고 잡초와 조그
만 나무가 무성한 벌판이 잠시 펼쳐진다. 이곳은 예전 농장과 마을이 있던 곳으로 금정산 정화
사업으로 모두 철거되었다. 예전에는 껍데기만 남은 교회가 수풀에 묻혀 버려져 있더만 그 역시
말끔히 철거되어 흔적조차 없다.


▲  옛 마을과 농장이 있던 곳(왼쪽 바위 봉우리 밑에 미륵사가 있음)

▲  산내음이 가득 깃든 금성동 가는 숲길
숲길은 대체로 평탄하여 산책 삼아 걷기에 좋으며 거의 숲터널을
이루고 있어 솔솔나부끼는 바람에 마음이 즐거워진다.

▲  금정산성 중성 - 사적 215호

금정산의 허리를 가르는 중성은 의상봉 남쪽 제4망루에서 국청사 북쪽을 거쳐 서문으로 이어지
는 약 2km의 성곽으로 여장과 성문은 사라지고 성벽만 일부 남았다. 성벽 위로 수풀이 무성하여
인간의 건축물은 자연 앞에선 한낱 장난감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  도토리묵과 산성막걸리

등산을 하면 도토리묵, 파전을 겯드린 동동주나 막걸리 1잔이 간절해진다. 금성동에는 등산객과
도시인을 상대로 한 주막들이 즐비한데 이곳의 명물인 산성막걸리와 염소고기를 비롯하여 도토
리묵과 파전, 백숙 등을 취급한다.
간만에 등산으로 몸이 무거워진 우리는 어느 주막에 들어가 도토리묵을 주문했다. 물론 산성막
걸리도 마셨지, 얼마나 콸콸 잘 흡입이 되던지 우리는 순식간에 막걸리 3명을 마셨다. 배추김치
와 당근 등이 잘 어우러진 도토리묵도 맛이 괜찮아 목구멍이 신난다고 쾌재를 부른다. 도토리묵
말고도 다른 것도 먹을까 했으나 시내로 나가 먹기로 하고 자리를 훌훌 털고 나왔다.
이렇게 소소하게 등산 뒷풀이를 마치고 금성동의 중심인 금성동주민센터에서 시내로 나가는 부
산좌석버스 203번을 타고 한계령(寒溪嶺)만큼이나 험준한 산성고개를 넘어 온천장역(1호선)으로
나왔다.

이리 하여 부산의 지붕 금정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다음에 다시 인연이 닿으면 제
대로 된 금정산 본전 종주를 하고 싶다.


▲  국청사 입구에서 바라본 파리봉과 상학산
그 아래로 금성동 마을이 포근하게 터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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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4월 2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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