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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4.10.06 서울 도심의 좌청룡을 거닐다 ~ 낙산 가을산책 (이화마을, 낙산공원, 한양도성)

거닐기 좋은 강동구의 상큼한 북쪽 지붕, 고덕산~서울둘레길3코스 나들이 (양지마을, 광주이씨광릉부원군파묘역, 강동그린웨이, 양천허씨묘역)

 


' 강동구의 북쪽 지붕, 고덕산 나들이 '

▲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


 

봄이 아쉬움 속에 저물고 여름 제국이 서서히 이빨을 드러내던 5월의 끝 무렵, 강동구(江
東區) 암사동과 고덕동 지역을 찾았다.
선사시대 유적지의 성지(聖地)로 추앙을 받는 암사동(岩寺洞) 선사유적지(☞ 관련글 보러
가기)을 먼저 둘러보고 양지마을을 거쳐 고덕산으로 이동했다.

양지마을(양지말)은 암사3동에 자리한 시골 마을로 약 90호 정도가 살고 있다. 마을 북쪽
은 고덕산과 이어져 있고 남쪽과 동쪽, 서쪽은 밭과 주말농장 등의 경작지가 펼쳐져 있으
며 암사동 시내와도 거의 200~300m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마을 집들은 상당수 전원주택
스타일로 다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과 뜨락을 갖추고 있어 마을에 들어서면 마치 교
외로 나온 듯 즐거운 기분을 안겨준다. 


▲  아리수로에서 바라본 양지마을 주변 전원(田園) 풍경


 

♠  암사3동에서 고덕산까지

▲  도시인의 안구를 제대로 씻겨주는 암사3동 전원 풍경

▲  암사3동 밭두렁

양지마을을 벗어나 시내와 시골의 경계를 이루는 암사동 북쪽 도로(아리수로)를 따라 동쪽으
로 이동했다. 길 남쪽에는 밋밋하게 솟은 키다리 아파트들이 몰려있고, 북쪽은 녹색 물결이
파도를 치는 경작지와 농가들로 시골 풍경을 이루어 서로 180도의 대비를 보인다.


▲  암사정수센터교차로의 전설, 보리밭의 황금 물결 (2012년)

잘익은 보리가 여름 바람에 살랑살랑 몸을 움직인다. 보리밭 남쪽에는 원두막까지 두어 전원
풍경의 패기를 드높였는데, 유감스럽게도 구리암사대교 접속도로 공사로 한 토막의 전설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  고덕산 강동아름숲길에서 바라본 암사동 강동롯데캐슬퍼스트아파트

암사정수센터교차로 동북쪽에 고덕산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있다. 나를 이곳으로 부른 고덕산(
高德山)은 해발 90m의 작고 낮은 뫼로 강동구의 북쪽 지붕을 이루고 있다. 응봉이라 부르기도
하며, 암사동 선사유적지 동쪽에서 고덕천 서쪽에 이르는 동서로 길쭉한 산줄기로 북쪽은 한
강에 이르고, 남쪽은 암사동과 고덕동 주거지를 보듬고 있다.

아무리 작은 산이라고 해도 오래된 사연은 꼭 있는 법, 이곳은 고려 말 충신인 석탄 이양중(
石灘 李養中)이 숨어 살던 곳이라 전한다. 그는 고려수절신(高麗守節臣)의 하나로 형조참의(
刑曹參議)까지 지냈으나 태조 이성계가 1392년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우자 미련없이 벼슬을
내던지고 고덕동으로 내려와 은거했다.
태조는 그를 여러 번 불렀으나 모두 거절을 당했으며, 친분이 있던 태종 이방원(李芳遠)까지
이곳까지 찾아와 설득을 했으나, 석탄은 평복 차림으로 직접 빚은 술을 대접하며 벼슬을 거절
했다. 하여 태종은 고려에 대해 지조를 지킨 그를 찬양하며 그 높은 덕을 기리고자 그가 살던
동네를 고덕리, 그가 살던 산을 고지봉(高志峰)이라 했다. 그 고지봉이 이후 이름이 바뀌면서
지금의 고덕산이 된다. 이후 석탄은 죽어서 고덕동에 묻혔다고 하나 그의 무덤은 어느 귀신이
잡아갔는지 아직 발견되지 못했다.

조선 초기에 활동했던 이극배는 고덕산 자락에 묻혔는데, 그의 후손들이 주변에 덩달아 묻히
면서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을 이루었다. 그 묘역의 일원이던 이시무는 고덕산 정상에
흙으로 단을 쌓고 국난평정을 기원했다고 전한다.


▲  강동아름숲길

아리수로와 맞닿은 암사정수사업소 동남쪽 숲을 강동아름숲이라 부른다. 이곳은 주민들이 가
꾸고 복원한 유서 깊은 숲으로 2010년 9월 광화문과 강남 등 서울 곳곳을 물바다로 만든 태풍
곤파스의 공격으로 이곳에 살던 1,000여 그루의 나무가 절단이 나는 사건이 있었다.
하여 강동구는 2012년 4월부터 숲 복원에 들어갔는데, 지역 주민 1,000여 명이 나무 심기에
참여하여 산벗나무 등 1,500그루를 심어 곤파스의 상처를 대부분 지워버렸다.

나무에는 그를 심거나 기증한 시민의 이름과 사연이 깃든 목걸이가 걸려있으며, 조성된지 얼
마되지 않아서 나무들 대부분은 작고 어리다. 허나 100년의 시간이 지나면 삼삼한 숲으로 변
화하여 여름 제국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 것이다. 강동아름숲은 이곳 외에도 부근 샘터근린
공원에도 조성되어 있는데, 그곳 역시 곤파스로 피해를 본 것을 시민들 참여로 복원되었다.


▲  쉬지않고 이어지는 고덕산 서쪽 숲길

2000년 이후 도보길이 크게 유행을 타면서 천하 곳곳에 둘레길 같은 도보길이 닦여지고 있다.
강동구도 그 시류에 합류하여 2011년부터 도보길을 닦아 세상에 내놓았는데, 그 도보길의 이
름은 바로 강동그린웨이(Green Way), 즉 녹색 길이다.
그런데 순수한 우리 말도 많건만 왜 굳이 꼬부랑 영어로 기분 나쁘게 이름을 삼았는지 모르겠
다. 도보길을 만들어 지역 사람들의 마실을 크게 배려한 것은 좋으나 영어로 이름을 삼은 점
에서 적지 않은 옥의 티를 선사하니 역시 철밥통들의 한계는 어쩔 수 없나 보다.

강동그린웨이는 크게 2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1단계는 고덕산에서 시작해 샘터근린공원, 방
죽공원, 명일공원, 일자산, 둔굴을 거쳐 서하남나들목입구교차로까지 이어지며, 2단계는 서하
남나들목입구교차로에서 강동대로, 서울아산병원, 한강, 암사동유적을 거쳐 고덕산으로 이어
진다. 특히 고덕산에서 일자산을 거쳐 서하남나들목입구까지는 서울시의 야심작, 서울둘레길
3코스(고덕,일자산 코스)와도 겹친다.


▲  암사정수사업소 철조망과 나란히 이어진 고덕산 서쪽 숲길
철조망을 따라 걸으니 군작전지역이나 휴전선을 지키는 군인이 된 기분이다.


 

♠  조선 초기에 활동했던 이극배(李克培)와 그의 후손들이 묻힌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廣州李氏 廣陵府院君派 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0호

▲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극배 묘역

고덕산 서쪽 숲길을 거닐다보면 나무 사이로 무덤들이 복병처럼 모습을 비출 것이다. 암사정
수사업소가 보이는 서쪽에는 큰 비석을 머금은 비각도 있는데, 이들은 이극배를 중심으로 한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이다.
무덤은 죄다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묘역의 중심인 이극배 묘 앞에는 암사정수사업소가 철
조망을 치고 있어 마치 휴전선을 앞에 둔 무덤처럼 보인다. 그의 무덤 남쪽에는 고위 관료의
무덤만 지닐 수 있던 신도비와 비각이 있는데, 그 앞에 지나치게 짧은 간격으로 철조망이 쳐
져있어 앞 공간이 좁아 보인다.

※ 이극배(李克培, 1422~1495)는 누구인가?

묘역의 주인공, 이극배는 조선 초기 문신으로 광주이씨이다. 자는 겸보(謙甫), 호는 우봉(牛
峰)으로 이집(李集)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李仁孫), 어머니는 노신(盧
信)의 딸이다.

1447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해 진사(進士)가 되었고, 바로 그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응시
해 5등인 정과(正科)로 급제했다. 그렇게 관직에 진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
었고, 이어 감찰(監察)이 되었으며, 검찰관(檢察官)의 자격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왔는
데, 직무를 잘 수행한 공로로 병조(兵曹) 겸 좌랑(佐郞)이 되었다가 정랑(正郞)으로 승진되었
다.
1455년 세조(世祖)가 왕위에 오르는데 힘을 보탠 공로로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녹훈(錄勳
)되었으며, 1457년 예조참의(禮曹參議) 겸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가선대부(嘉善
大夫)에 직과 광릉군(廣陵君)에 작위까지 받았다.

병조참판(兵曹參判)과 예조참판(禮曹參判) 겸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을 지내다가 1460년 두
만강 북쪽에서 세력을 꾸리던 모련위(毛燐衛)의 우량하(兀良哈)를 정벌하고자 신숙주(申叔舟)
의 종사로 출전해 큰 공을 세웠다.
이 전쟁을 경진년에 벌인 북정(北征)이라 하여 경진북정(庚辰北征)이라 하는데, 우량하의 우
두머리인 아비차(阿比車)가 조선에게 처단된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며 두만강 유역을 공격했
다. 이에 뚜껑이 열린 세조는 신숙주를 함길도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로 임명해 8,000명의
군사를 주어 시비를 건 우량하 세력을 때려잡도록 했다.

조선군은 회령(會寧)과 두만강 북쪽 간도 지역으로 진출, 2차에 걸친 정벌 끝에 우량하 세력
의 고위급 인물 90여 명을 죽이고, 군인과 백성 430명을 포로로 잡거나 처단했다. 그리고 900
여 채의 집을 불태우며 정벌을 기분 좋게 마무리 지었다. 이때 간도(間島) 지역을 완전히 접
수하여 12세기 초반, 윤관(尹瓘)장군이 일구었던 동북9성의 옛 땅을 차지했으면 좋으련만 땅
에 대한 욕심도 별로 없고 그저 성리학 몰빵에 평화만 추구하던 조선에게 그런 기대는 무리였
다.
물론 조선이 상국(上國)으로 받들던 명나라의 눈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명나라의 영역은
동으로 요동(遼東)이 고작이었고, 압록강 중류 이북부터 두만강 이북까지는 여진족의 땅이었
으므로 여진족 소탕을 구실로 의지만 강했다면 충분히 간도 개척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조선에게 단단히 깨진 우랑하는 살려달라고 빌면서 조공을 바치며 조선의 그늘에 들어왔고 이
를 계기로 조선의 북쪽 변경은 약간이나마 확대되었다. 이때 두만강 안쪽에 있었으나 여진족
의 땅으로 남아있던 무산군(茂山郡) 지역을 점령해 조선의 땅으로 삼은 것이다. 또한 그곳을
개척하고자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 백성을 이주시켜 정착하게 했다.

북정을 마치고 돌아와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으며, 1462년 호조(戶曹)와 공조(工
曹)를 제외한 4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다. 또한 평안도절도사(平安道節度使)가 되어 평안도의
인심을 살폈으며,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등급이 올라가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그
리고 1471년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책훈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1479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가 되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승진했고, 1481년부터
2년 동안 큰 기근이 일어나자 진휼사(賑恤使)가 되어 백성을 살폈다. 1485년에는 우의정(右議
政)에 오르고 1493년 최고직인 영의정(領議政)을 제수받았으나 노병을 구실로 거절했다. 이후
광릉부원군에 봉해져 최고의 관작을 누리다가 1495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
자 연산군은 익평(翼平)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는 도량이 크고 뜻과 생각이 확고했다. 그리고 경학(經學)을 근본을 삼아 도덕 정치를 실천
했고, 관리로써 필요한 지식과 능력, 처신에 뛰어나 약 50년 간 벼슬을 지내면서 영의정을 제
외한 왠만한 고위직은 두루 거쳤다. 게다가 세종부터 연산군(燕山君)까지 7명의 제왕을 섬겼
으니 그 기록은 황희(黃喜)를 능가한다. 또한 사사로이 손님을 맞거나 선물을 받지 않는 공정
함을 지녔고, 가무(歌舞)는 좋지 않다고 하여 멀리 했으며, 나라의 일을 의논할 때는 대체적
인 것에 힘쓰고 세세한 것은 거론하지 않았다고 한다.


▲  이극배 신도비를 품고 있는 맞배지붕 비각(碑閣)


▲  이극배 신도비(神道碑)

이극배 묘역 서쪽에 자리한 신도비는 1496년에
세워진 것으로 명필로 명성이 자자했던 예조판
서 겸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신종호(申從濩,
1456~1497)가 글을 썼다.
장대한 세월이 무심하게 달아놓은 검은 주근깨
가 자욱한 비석 피부에는 그의 일대기가 깨알
같이 적혀있고, 이수(螭首)에 새겨진 구름무늬
와 그 속에서 놀고 있는 용이 매우 정교하게
새겨져 두 눈에 적지 않은 자극을 준다. 거기
에 비문(碑文)의 서체와 정교한 석공기술은 15
세기 후반 비석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여러
가지로 가치가 높다.

원래는 비석만 덩그러니 있었으나 2009년 이후
든든하게 비각을 씌워 그를 지키고 있다.


▲  뱀이 이리저리 또아리를 튼 듯, 섬세하고 복잡한 신도비 이수의 위엄

▲  신도비에서 이극배 묘역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  이극배 묘역

이극배 묘역은 1495년에 조성되었다. 부인인 경주 최씨와 쌍분(雙墳)을 이루고 있으며, 무덤
의 주인을 알리는 묘비를 비롯해 상석(上席),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 1쌍과 무인석
(武人石) 1쌍이 묘역을 지킨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체격이 우람하며, 묘비는 특이하게 이극배
의 봉분(封墳) 앞에만 세워져 있다.
그리고 묘역 뒷쪽에는 소나무들이 운치를 자아내고 있어 묘역의 분위기를 크게 북돋는다.


▲  묘역 좌측의 문인석과 무인석

▲  묘역 우측의 문인석과 무인석

묘역을 장엄하게 꾸미는 문인석과 무인석들은 다른 사대부의 석인보다 큰 편으로 이극배의 오
랜 명성을 가늠케 한다. 조선 초기 석인(石人)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이들은 문인석과 무
인석으로 구별은 되고 있지만 둘 다 복장이나 자세가 비슷하여 문인석 2쌍을 배열한 것 같다.
묘역과 가까운 석인은 500년의 장대한 세월에 지쳤는지 표정이 어둡고, 그 옆에 석인은 눈이
크게 충혈되어 재밌는 표정을 보인다. 세월의 검은 때가 점점이 입혀진 것을 빼면 대체로 피
부는 햐얗다.


▲  석인들의 뒷모습

▲  묘역 동쪽에 자리한 후손들의 묘역 (이수겸, 이세충, 이시무 등)

광릉부원군파 묘역 동쪽을 이루고 있는 이극배 후손들의 무덤은 9기 정도 된다. 가장 앞에 선
무덤은 이극배의 아들인 이수겸(李守謙)과 청주한씨 내외의 묘역으로 그는 공조좌랑(工曹佐郞
)을 지냈으나 공적이 즐비한 아비와 달리 딱히 두드러지는 인물은 아니다.

▲  이수겸 묘역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

▲  이세충 묘의 문인석

이수겸과 이세충 형제의 무덤 문인석은 이극배 묘역의 장대한 문인석과 달리 덩치가 매우 작
다. 문인석의 표정은 다소 우울해 보이는데 이수겸 묘 문인석은 관모(官帽)의 윗부분이 부러
졌다.


▲  이수겸 묘역 뒷쪽에 자리한 이세충(李世忠)의 묘
이세충은 이극배의 아들로 크게 벼슬은 못했으며, 나중에 도승지(都承旨)로
추증되었다.

▲  이시무(李時茂)와 이정립(李廷立) 묘역

이시무(?~1593)는 이극배의 현손으로 이건(李乾)의 아들이다. 자는 군우(君遇)로 1576년 별시
(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벼슬은 판결사(判決事)에 이르렀으며, 1593년에 병사했
다.

이정립(1556~1595)은 이시무의 아들이자 이수겸의 증손으로 어머니는 왕족인 의원정(義原正)
이억(李億)의 딸이다. 자는 자정(子政), 호는 계은(溪隱)으로 1576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80년 별시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갔다.

1582년 이이의 추천을 받아 이덕형(李德馨),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경연(經筵)에서 통감강목
(通鑑綱目)을 강의해 속칭 3학사의 하나로 칭송을 받았으며, 바로 그해 사관(史官)이 되고 예
조좌랑과 정언(正言)을 지냈다. 1583년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휴가를 받아 독서에 전념했
다.
이조좌랑 시절에는 호남어사(湖南御使)가 되어 백성을 구휼했고, 1589년에는 기축옥사(己丑獄
事)를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예조참의(禮曹參議)가
되어 선조(宣祖) 임금을 호종하다가 황해도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을 때 종묘사직(宗廟社稷
)의 위판(位版, 위패) 등이 개성(開城)에 남아있음을 알고 서둘러 선조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선조는 크게 발작하여 빨리 그것을 가져오라고 명을 내렸다.
이정립은 서둘러 개성으로 달려갔으나, 피난민들은 이미 왜군이 개성을 접수했으니 가봐야 소
용없다고 말렸다. 허나 이를 듣지 않고 개성으로 홀연단신으로 들어가 위판을 찾아 평양으로
가져오는 기염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1593년 부친 이시무가 죽자 부친상을 이유로 관직을 잠시 떠났고, 1594년 한성부좌윤(漢城府
佐尹)과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여 광림군(廣林君)에 봉해졌다. 1595년 세상을 뜨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 광주이씨광릉부원군파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 산12-4외


▲  광릉부원군파 묘역 사이를 지나는 고덕산 산길
이극배묘역 남쪽에 광릉약수터가 있어 지나는 길손의 목을 축여준다.


 

♠  고덕산 마무리

▲  고덕산 서쪽 봉우리 밑 (계단 너머가 봉우리)

광릉부원군파묘역에서 산길을 마저 오르면 'T'자형으로 갈리는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계단길을 오르면 고덕산 서쪽 봉우리(86.3m)인데, 운동시설이 여럿 있어 이곳까지 올라온 나
그네를 심심치 않게 해준다. 허나 더 이상 길이 없는 막다른 곳으로 북쪽은 한강과 강변도로
가 바로 밑에 보이는 천길낭떠러지이다.


▲  태극기가 펄럭이는 고덕산 서쪽 봉우리(86.3m)

▲  고덕산 서쪽 봉우리에서 바라본 천하 (명당의 욕심은 이곳까지..?)

고덕산에서 그나마 하늘과 가까운 곳이긴 하지만 나무의 방해로 겨우 북쪽만 속시원히 바라보
인다. 차량들의 질주 소리로 정신이 없는 올림픽대로가 바로 밑에 보이며, 한강과 암사대교,
강일동 지역. 구리시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고덕산 능선길

고덕산은 광주이씨와 양천허씨 등의 문중 묘역과 사유지가 많다. 게다가 군사구역도 섞여 있
다보니 본의 아니게 속인들의 발길을 주저하게 하는 철조망이 많다. 광릉부원군파 묘역에서
서쪽 봉우리로 오르는 길도 대부분 사유지라 길의 통행을 두고 한때 말썽이 있었으나 광주이
씨 문중은 이극배의 후손답게 광릉부원군파 묘역을 흔쾌히 개방하고 묘역 사이를 가로지르는
산길까지 열어두어 고덕산이 지역 사람들의 포근한 뒷동산이 되도록 배려했다.


▲  가재울에서 한강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만난 전원 풍경

고덕산 서쪽 봉우리에서 능선길을 따라 동쪽으로 15분 정도 가면 높이가 좀 낮아지면서 4거리
가 나온다. 여기서 직진하면 능선길을 따라 고덕산 동쪽과 고덕천으로 이어지며, 오른쪽(남쪽
)은 가재울마을과 고덕동 시내로 나가는 길이다.
그리고 왼쪽은 올림픽대로로 이어지는데, 그 길로 접어들어 1굽이를 넘으니 온갖 채소들이 무
럭무럭 자라고 있는 밭두렁이 진하게 전원풍경을 드러내어 안구를 놀라게 한다. 밭두렁 한쪽
에는 농가도 하나 있는데, 그 주변에 농민 2~3명이 한참 밭을 메고 있었다.

그 밭두렁을 지나 작은 1굽이를 추가로 넘으면 바로 올림픽대로이다. 도로 너머로 한강과 산
책로가 보이나 그곳으로 인도해주는 지하도나 구름다리는 없다. 그러니 뚜벅이로 왔다면 미련
없이 왔던 길로 다시 돌아나가야 되며, 한강이 보고 싶다고 1분에 수백 대씩 지나가는 올림픽
도로를 무단횡단하는 것은 완전 미친 짓이다.

발길을 돌려 나오다가 길 서쪽에 양천허씨묘역을 알리는 안내문이 나를 손짓한다. 안내문 옆
에 나있는 작은 산길로 들어가면 묘역이 있다고 하는데, 오래된 묘역이긴 하지만 비지정문화
재라 그냥 지나칠까 했으나 고덕산이 준 보너스라 여기고 그 산길을 잡았다. 산길을 50m 정도
들어서니 양천허씨묘역이 나타난다.


▲  양천허씨(陽川許氏)묘역

고덕산 북쪽 자락에 숨겨진 양천허씨 묘역은 상우당 허종(尙友堂 許琮, 1434~1494)의 손자인
허순(許淳) 3대의 묘역이다. 묘역이 제법 명당(明堂)자리인 듯 싶은데, 한강이 흐르는 북쪽을
애타게 향하고 있으나 나무들은 그들의 뜻도 모른 채, 앞은 물론이고 묘역 주변을 꽁꽁 둘러
싸 숲 너머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양천허씨는 후삼국시대에 서울 가양동(加陽洞) 지역에 터를 잡고 살던 허선문
(許宣文)을 시조
로 한 집안으로 고려 태조(太祖)를 적극 도운 공으로 고을 이름인 양천<그 당시는 공암(孔巖)
>을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이 집안에서는 허종을 비롯하여 허균(許筠), 허준(許浚) 등 삼척동
자도 알만한 유명 인물이 많이 나왔다.


▲  묘역 제일 밑에 자리한 허운(許雲)과 영천이씨 부인의 합장묘(合葬墓)

허순의 아들인 허운의 묘가 묘역 제일 말단에 자리해 있다. 허운은 결성현감(結城縣監, 충남
홍성군 결성면)을 지낸 평범한 인물로 부인 영천이씨와 같이 묻혀 있는데, 무덤 밑에는 근래
에 만든 호석(護石)이 둘러져 있고, 16세기에 조성된 고색의 기운이 넘치는 묘비와 문인석이
묘역을 지킨다.

▲  표정이 밝아보이는 좌측 문인석

▲  우측 문인석


▲  장대한 세월에 의해 검게 타버린 허운 묘비(묘표)

▲  허순의 정부인이자 전처인 한산이씨의 묘
허순 묘와 허운 묘 사이에 자리한 무덤으로 묘비는 봉분 정면이 아닌 정면에서
다소 우측에 치우쳐져 있다. 부인묘라 그런지 묘비와 상석 외에
다른 석물은 없다. (호석은 근래에 두룬 것임)

▲  허순의 무덤 (제일 앞쪽, 바로 뒤에 무덤이 청송심씨 묘)

허순(許淳, 1485~1546)은 허종의 손자이자 허광(許曠, 1468~1534)의 아들이다. 그의 무덤 뒷
쪽에는 후처인 청송심씨의 무덤을 두었고, 앞에는 전처인 한산이씨의 무덤을 만들어 독특한
양식을 보여준다.

양천허씨 제양군공파의 시조인 허순은 정주목사(定州牧使)를 비롯해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
事)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부총관(副摠管)을 지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와 제양군(
齊陽君)에 봉해졌다. 묘역의 주인답게 묘역 중앙에 자리해 있으며, 검은 피부의 묘비와 문인
석이 오랜 세월을 말해준다.

▲  약간 인상을 지은 듯한 우측 문인석

▲  우측 문인석과 많이 닮아 보이는
좌측 문인석


▲  묘역 윗쪽에 자리한 허흔(許昕)과 부인 영월엄씨의 묘

허흔(1543~1622)의 묘는 허순 묘역에서 제일 윗쪽에 자리해 있다. 그는 허순의 손자이자 허운
의 아들로 어머니는 이구정(李龜楨)의 딸이다.

1579년 생원(生員)이 되고 1583년 별시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감찰과 형조좌랑, 성균
관직강(成均館直講),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지냈다. 경상도도사(都使) 시절에는 의령
현감(宜寧縣監)인 정인홍(鄭仁弘)이 영송(迎送)에 무례하게 구므로 그 아전을 벌주니 백성들
의 칭송이 대단했다.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정여립(鄭汝立) 일당과 관련이 있다고 하여 감옥에 갇혔으나
혐의가 없어 풀려났으며, 임진왜란 때는 평안도도사로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절도사(節度使)
가 되어 왕실의 신주(神主)를 지켰다. 이후 정주목사가 되었고, 1615년 죽주부사(竹州府使,
안성 죽산)를 제수받았으나 나이가 칠순을 넘어 다른 사람에게 바로 넘어갔다.

광해군(光海君)의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이 조정의 여론을 휩쓸자 크게 상심하여 벼슬을
버렸으며, 1622년 79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는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공신에 녹훈되었다가
인조반정 때 공신 명단에서 떨려나기도 했다.

▲  허흔묘 상석 좌우에 자리한 조그만 동자석(童子石)
다른 무덤과 달리 문인석 대신 작은 동자석 1쌍을 두었다. 고된
세월에 많이도 지쳤는지 그들 표정에 주름이 묻어난다.

▲  허종과 허광 숭모비(崇慕碑)

묘역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는 허종과 허광(許曠)의 숭모비가 자손들의 무덤을 바라보
고 있다.
허종과 허광의 묘는 휴전선 북쪽인 경기도 장단군(長湍郡) 대강면 우근리에 있는데, 남한에
살고 있는 후손들이 성묘길이 막혀 가지를 못하자 상의 끝에 그들의 자손이 묻힌 이곳에 2005
년 숭모비를 세웠다. 남북분단의 비극이 빚어낸 안타까운 현실로 이곳은 양천허씨 제양군공파
를 비롯한 허종의 후손들이 애지중지하는 그들의 조촐한 성지가 되었다.

숭모비 정면 좌우에는 망주석(望柱石) 1쌍을 두었는데, 우측 것은 두툼하게 생긴 세호로 보이
는 동물이 새겨져 있고, 좌측 것은 기둥을 휘감은 용을 새겨 선조에 대한 자긍심과 정성을 보
였다. 허나 너무 이질적인 모습이라 쉽사리 적응이 가려 하질 않는다.

허순 3대의 묘역은 호석과 비석을 새로 한 것 외에는 16~17세기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
고 있어 광릉부원군 묘역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값어치가 있다. 마땅히 지방문화재로 삼아
보호하는 것이 마땅하다 여겨 지는데, 문제는 서울에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는 사대부(士
大夫)와 왕족의 묘역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경쟁이 생겨 어지간해서는 지정
문화재의 명함도 못내밀 정도이다. 게다가 문화재 지정을 환영하지 않는 후손들도 많다고 한
다. (묘역 소유자나 후손 문중, 지역에서 문화재 지정을 신청해야 됨)

* 양천허씨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동구 고덕동 산93-2


▲  가재울 마을

양천허씨묘역을 둘러보고 고덕산 등산로와 만나는 고개를 지나면 전원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가재울 마을이 나타난다.
가재울(가재골)은 가재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은 가재는 커녕 그들이 머물 시냇물도
찾기가 힘들 지경이다. 비록 푸른 숲과 밭두렁, 농장 등이 펼쳐져 있어도 시냇물은 고덕지구
개발로 말라버려 그것만은 제대로 재현을 못하고 있다.

가재울을 지나 고덕동 시내로 나와 이른 더위에 지친 몸을 달래고자 편의점에서 커피 음료를
사서 원샷으로 들이키니 그나마 좀 몸이 시원해진다. 마음 같아서는 고덕산에 둘러진 서울둘
레길을 따라 더 걷고 싶으나 이미 18시가 넘은 상태라 욕심을 곱게 버리고 나의 제자리로 돌
아갔다.

이렇게 하여 5월에 벌린 강동구 암사동/고덕동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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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에 이런 두멧골이?? 북악산 산주름 속에 깃든 백사실계곡, 부암동 능금마을, 평창동 소나무 (백사실약수터)

 


' 서울 도심 속의 두메산골을 거닐다 '
(부암동 능금마을, 백사실계곡, 북악산 북쪽 자락)


▲  부암동 능금마을(뒷골마을)

▲  은덕사에서 바라본 부암동

▲  평창동 소나무


 

여름 제국의 무더위 갑질이 극성이던 8월의 첫 무렵, 일행들과 북악산(백악산) 북쪽 자락
을 찾았다.
북악산 북쪽 자락(부암동, 평창동 지역)에는 나의 오랜 즐겨찾기 명소인 백석동천(白石洞
天, 백사실계곡)을 비롯해 능금마을(뒷골마을), 평창동(平倉洞) 소나무 등의 명소가 깃들
여져 있는데 여름 제국의 핍박도 피할 겸, 간만에 그들을 복습할 생각으로 북악산의 품을
찾은 것이다.

세검정초교 정류장에서 홍제천(弘濟川)을 건너 백석동천의 북쪽 관문인 현통사(玄通寺)와
백사폭포로 접근했다. 그곳을 지나면 백사골(백사실)의 속살로 들어서게 되는데 백사폭포
와 계곡 곳곳에 자리를 피고 피서 삼매에 빠진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띈다.
숲속에 진하게 묻힌 백석동천 중심부에 이르면 이곳의 상징인 별서(別墅)터가 있고, 그곳
을 지나 은행나무와 소나무숲을 지나면 백석동천 바위글씨가 모습을 비춘다. 그리고 여기
서 동쪽 산길로 들어서면 잘생긴 반석과 바위들이 늘어선 백사골 상류가 나타난다.

백석동천은 백사골, 백사실, 백사실계곡 등으로 널리 불리고 있는데, 정식 이름은 백사실
(백사실계곡)으로 백사골은 백사실계곡을 줄여 표현한 이름이다. 백석동천은 백사골의 엄
연한 일부로 백사폭포에서 백석동천 바위글씨와 백사골 상류 외나무다리 직전까지를 주로
일컫는다.


 

♠  백사골 상류 (능금마을로 가는 산길)

▲  백석동천의 남쪽 끝을 잡고 있는 외나무다리

백사골 상류의 너른 반석을 지나면 2012년에 지어진 외나무다리가 깊은 산골의 고적하고도 정
겨운 풍경을 자아낸다. 길쭉한 통나무 2개를 엮어서 놓은 것으로 겨우 1명이 지나다닐 정도로
좁은데 만약 이런 다리에서 원수를 만난다면 어찌해야 될까? 다리 길이도 짧고, 다리 밑 수심
도 매우 얕으며, 다리 곁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여울이 있어서 굳이 다리를 두고 싸울 필요
는 없을 것이다.


▲  가까이서 바라본 외나무다리

사람도 많고, 차량도 많고, 빌딩도 많고, 돌아다니는 돈도 많고, 그저 복잡하고 각박하게 보
이는 서울 도심 지척에 이런 다리가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신기할 따름이다. 백사골은 그 존
재 자체로도 예사롭지 않지만 캐면 캘수록 보물이 더 나올 것 같은 마르지 않는 샘이나 신세
계 같다.
백사폭포에서 시작된 백석동천은 이 외나무다리에서 사실상 끝이 나며 백사골은 능금마을 안
쪽까지 이어진다.


▲  백사골 상류의 평화로운 풍경
푸른 옷을 걸친 큰 나무가 하늘이 두려웠는지 아니면 겸손함 때문인지
곧게 자라나지 않고 허리를 푹 숙이고 있다.

▲  백사골 냇물이 잠시 쉬어가는 조그만 못

백사골에는 푸른 이끼 옷을 입은 바위들이 참 많다. 이끼가 마음 놓고 자라고 있다는 것은 여
기가 그만큼 깨끗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무성한 이끼를 만나는
것은 정말 힘들지, 백사골의 이런 청정함과 순수함이 앞으로도 영원했으면 좋겠다.


▲  온갖 채소와 과일이 숙성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백사골 밭두렁

▲  남쪽에서 본 백사골 밭두렁

백사골 밭두렁은 여러 채소와 과일이 자라나고 있다. 비닐하우스와 밭을 지키는 원두막 같은
것도 있어 마치 산간지방의 깊은 산골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라 백석동천에서 여러 번 놀
란 가슴을 또 놀라게 만든다.


▲  백사골 산길에서 만난 연분홍 코스모스의 위엄

수줍은 미소를 보이며 정처없는 나그네의 마음을 마구 들쑤시는 코스모스들~ 코스모스가 가을
꽃의 상징이다 보니 6~8월에 왠 코스모스가 피나 싶겠지만, 성질 급한 코스모스는 이미 6월부
터 꽃망울을 피운다. 그러니 전혀 이상할 것은 없다.


▲  완전 시골 둑방길을 거니는 기분 ~ 능금마을 백사골 둑방길

계곡 너머로 2012년에 지어진 커다란 농원용 비닐하우스가 있다. 도심에 있는 잇점을 살려서
요즘 잘나가는 허브 식물이나 과일 농장, 채소 농장, 농사 체험 현장 등으로 꾸리면 괜찮을
듯 싶다. 아무리 도심 속이라고 해도 이곳이 농촌인 것은 변함이 없다.


▲  능금마을에서 백석동천으로 내려가는 둑방길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두메산골마을
부암동 능금마을(뒷골마을)


▲  능금마을

부암동(付岩洞) 능금마을(뒷골마을)은 백사골 상류이자 북악산 북쪽 자락에 둥지를 튼 두멧골
이다. 행정구역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으로 주소는 분명 서울 종로구가 맞는데 분위기는
번잡한 도심을 제대로 비웃듯 첩첩한 산주름 속에 박힌 외딴 산골마을이라 그야말로 서울 도
심 속의 산골마을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능금나무가 많아 능금나무골, 능금마을이라 불렸는데, 뒷골마을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다. 이 이름은 북악산(백악산) 뒷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 북악산 앞쪽인 청
와대 일대를 앞골이라 불렀다. 예전에는 뒷골마을로 많이 불려 나도 입버릇처럼 그렇게 부르
고 있으나 요즘에는 능금마을로 크게 부르고 있으며, 마을에는 약 10여 가구에 50~60명 정도
의 주민이 살고 있다.

마을의 지형은 백사골이 흐르는 북쪽은 내리막이고, 서쪽과 남쪽, 동쪽은 모두 산으로 막혀있
다. 창의문(자하문)에서 넘어오는 유일한 포장길인 남쪽 골목길(백석동2길)은 속세살이처럼
각박한 고개를 넘어야 되는데, 지형이 이렇다보니 시내보다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며, 아랫
세상보다는 조금은 춥다.

마을 중앙부에는 창의문으로 나가는 골목길(백석동2길)의 종점이 있다. 그 종점이 마을 사람
들의 차량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으로 여기서 더 이상 차량은 들어갈 수 없다. 게다가
궁벽한 곳이다보니 쓰레기도 1주에 이틀 정도만 수거하러 온다.
주차장 북쪽에는 슬레이트 지붕 여러 채와 2층짜리 빌라 1동, 비닐하우스가 여럿 있으며, 동
쪽으로 백사골을 따라 여러 가옥과 밭, 과수원이 펼쳐져 있다. 북악산이 베푼 백사골은 마을
을 동쪽에서 북쪽으로 가로지르며 백석동천과 홍제천으로 흘러간다.

시내에서 마을로 들어가려면 백사골을 거치거나 창의문(자하문)에서 북악산 허리에 둘러진 부
암동 산복길(백석동길)을 이용해야 된다. 세검정초교에서 접근할 경우는 마을까지 30여 분 걸
리며, 창의문에서 갈 때는 산복길(백석동길)을 따라 20여 분 걸어야 되는데 중간에 고개를 하
나 넘어야 된다. 차량으로 갈 경우에는 창의문에서 부암동 산복길을 타거나 북악산길로 접근
하면 되며, 그 흔한 대중교통의 혜택도 미치지 않는 시내 속 벽지이다.

마을 사람들은 대체로 농사를 짓거나 시내로 출퇴근을 한다. 서울에서 공기가 1등급으로 맑고
청정한 계곡물이 흐르니 조촐하게 밭농사나 과수원을 하기에 적당하다. 백사골의 깨끗한 물을
먹고 자란 농작물(오이나 배추, 상추 등)은 밭과 비닐하우스에서 주민들의 갖은 정성을 거쳐
시내로 팔려 나간다.

이곳이 인구 1,000만을 지닌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 도심에 있음에도 개발의 칼질을 굴복시
키며 두메산골로 남을 수 있던 것은 푸른 기와집과 국무총리공관, 수방사 군부대를 비롯한 국
가의 예민한 장소를 품은 북악산 자락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북악산 주변은 개발제한구역
및 군사보호구역으로 상당수 묶여있다. 게다가 인왕산(仁王山)과 더불어 조선시대부터 서울을
지키는 전략적인 곳으로 군부대가 주변에 있으며, 북악산(백악산) 한양도성 능선을 따라 철책
과 초소가 줄지어 있다. 상황이 이러니 천박한 개발의 칼질도 무릎을 끓은 것이다.
북악산 북쪽 자락에 안긴 부암동과 성북동(城北洞)에 키다리 건물이 없는 것도, 녹지 비율이
두드러지게 높은 것도, 전원(田園) 분위기를 물씬 간직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북
악산과 인왕산의 성격이 180도 확 달라지거나 예민한 국가 시설들을 다른 데로 이전하지 않는
이상은 능금마을은 서울 도심 속의 두멧골로 영원히 남을 것이며, 쭉 그리 되기를 염원해 본
다.
물론 마을 사람들이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집 보수나 신축 등은 어느 정도 보장해줘야 될 것
이며, 북악산 나들이나 답사/출사를 이유로 그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동은 삼가해야 될 것이
다. 어차피 도심 속의 두멧골이란 상징성 외에는 명소라 할 만한 것은 없다. 그냥 지방 시골
에 널린 시골마을과 비슷하며 백석동천과 부암동 답사의 후식용으로 삼으면 적당하다.


▲  능금마을 북쪽 구역 (빌라 뒷쪽)

능금마을은 여러 번 와봤지만 딱히 명승지까지는 아니라서 제대로 둘러본 적은 없다. 하여 이
번에 제대로 마을의 속살을 살펴보기로 했다. 숨겨진 속살을 발견하고 보는 재미만큼 쏠쏠한
것은 없다.

주차장에서 빌라가 보이는 북쪽 골목길을 오르면 조금은 낡아보이는 산동네 기와집과 번듯하
게 지은 2층 빌라가 나란히 나타나 마을의 어제와 오늘을 대변하는 듯 하다. 작지만 빌라까지
들어섰고 근래에 새로 몸단장을 한 주택이 여럿 있을 정도면 개발 제한도 어느 정도 풀린 모
양이다.
빌라의 옆구리를 지나면 그나마 포장된 길은 끝나고 흙길로 변신하는데, 마치 백두대간 깊숙
한 곳에 숨겨진 화전민(火田民) 마을에 들어선 기분이며 밭두렁과 수풀이 우거진 그 길의 끝
에는 전원주택처럼 생긴 아담한 집이 있다.

다시 주차장으로 나와서 백사골을 따라 이어진 동쪽 골목길로 들어선다. 이 길도 좁다보니 자
전거나 오토바이 등만 겨우 바퀴를 굴릴 수 있는데, 동쪽 골목길은 세월을 먹은 집들이 여럿
있으며, 밭과 과수원이 제법 펼쳐져 목가적(牧歌的)인 풍경을 연출한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는 전원주택 스타일의 정원 넓은 집이 있다.

동쪽 골목길 중간에는 북악산길로 이어지는 샛길이 있다. 따로 이정표는 없지만 조금은 가파
르게 동쪽으로 이어진 길이 바로 그 길이다.

* 능금마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산50~69


▲  경작물이 무성하게 익어가는 동쪽 골목길

▲  백사골과 나란히 한 능금마을 동쪽 골목길
문명의 혜택이 전혀 들어오지 못할 것 같은 이 산골에도 전기와 전화는
모두 들어온다.

▲  능금마을 동쪽 골목길 밭두렁

▲  경작물이 익어가는 동쪽 골목길


▲  부암동에서 능금마을로 인도하는 각박한 고갯길
길의 경사가 각박해 내려가기는 쉬워도 오르는 건 조금 힘들다. (그래도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음)


 

♠  백사실약수터와 여러 돌탑들

▲  외나무다리 주변에 펼쳐진 하얀 피부의 반석
저 반석을 내려가면 계곡 오른쪽으로 백사실약수터로 인도하는 산길이 나온다.


능금마을을 둘러보고 다시 백석동천으로 내려가 외나무다리를 지나면 윗 사진의 넓은 반석이
나온다. 반석(磐石)을 지나면 바로 계곡 건너로 넘어가는 부분이 있는데 그곳을 건너면 백사
실약수터를 알리는 조그만 이정표가 조용히 손짓한다.
백석동천(백사실)을 15년 넘게 들락거렸지만 백사실약수터는 한참의 세월이 흐른 이후에야 인
연을 지은 곳이다. 별서터와 바위글씨들, 능금마을이 전부인줄 알고 등잔 밑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탓으로 무슨 일이든 방심은 정말 금물이다.


▲  백사골 돌탑

백사실약수터로 인도하는 산길을 30초 정도 가면 산등성이에 수북하게 쌓인 돌탑이 마중을 한
다. 이곳을 지나던 중생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은 돌탑으로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악신
앙(山岳信仰)의 현장이다.
백석동천 별서터가 지배층의 산물이라면 이 탑은 백성들의 한 줄기 희망과 애환이 만들어낸
산물로 별서터는 터만 남은 채, 성장이 멈추었지만 이 탑은 지금도 지나가는 이들에 의해 조
금씩 성장하고 있다.


▲  정면에서 바라본 돌탑 가족들 (얼핏 보면 3기처럼 보이나 4기임)

▲  옆에서 본 돌탑 가족

백석동천에서 백사실약수터로 오르는 산길에는 돌탑이 유난히도 많다. 앞 돌탑에서 3분 정도
가면 돌탑 4기를 만나게 되는데, (조금 후미진 곳에 있음) 이중 1기는 나머지 3기를 다 합쳐
도 한참이나 모자를 정도로 유별나게 크다. 그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으나 앞 돌탑과
달리 규칙적인 모습이고 그리 묵은 티가 보이지 않아 근래에 백사실 수식용으로 닦여진 것으
로 보인다.

돌탑을 만들려면 서로 비슷한 덩치로 만들 것이지 하나만 지나치게 크고 나머지는 완전 쥐꼬
리만한 크기라 마치 어미와 꼬마 3형제를 보는 듯 하다. 꼬마 탑도 어엿한 돌탑을 이루는 어
미탑처럼 장차 큰 탑으로 성장하길 기대해본다.


▲  백사실약수터로 오르는 적막한 산길

▲  소나무 산길 (백사실약수터 방향)
길을 가다가 뜬금없이 산신이나 신선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선녀 누님이
갑자기 나타나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첩첩한 산주름의 산길이다.

▲  백사실약수터와 북악산길로 인도하는 산길

백사실약수터는 백사골의 거의 유일한 약수터이자 백사골의 오랜 은자(隱者)로 능금마을 뒷쪽
(북쪽)에 숨겨져 있다. 북악산이 속세에 베푼 소중한 샘터로 백사골의 청정한 기운을 머금은
탓인지 수질도 청정하고 맛도 좀 달콤한 기분이다.
벽돌을 다진 약수터 주변은 산뜻하게 정비되어 두 다리를 쉴 수 있는 의자와 간단한 운동시설
이 닦여져 있다. 약수터 뒷쪽에는 나무 기둥 난간이 둘러진 공간이 있는데, 그 안에 여러 식
물이 담겨져 있어 마치 신선의 묘약(妙藥)이나 신선초(神仙草)가 자라는 듯한 기분이다. 그리
고 약수터 동남쪽으로 산길이 나 있는데, 그 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북악산길이 마중을 한다.


▲  백사실약수터 인근 바위에 심어진 조촐한 돌탑
이 돌탑도 앞에 돌탑 가족과 마찬가지로 근래에 조성된 것 같다. 그 모습이
산이나 계곡에 널린 일반적인 산악신앙의 돌탑이 아닌 조그만
봉수대(烽燧臺)처럼 보인다.


 

♠  북악산 백사실 동쪽 능선

▲  백사실 동쪽 능선길

백사실 동쪽 능선은 북악산길에서 시작되어 백사실약수터, 은덕사를 지나 북쪽으로 KT기지국,
평창동조망점까지 내려가듯 이어진다. 백사실의 동쪽 지붕으로 중간중간에 현통사와 백사골(
백석동천), 평창동으로 내려가는 산길을 늘어뜨렸으며, 소나무를 비롯한 갖은 나무들이 삼삼
하게 우거져 있다.
백사골에 왔다면 별서터와 계곡만 살피지 말고 백사실약수터와 1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진 백사
골 동쪽 능선도 한번 거닐기 바란다.


▲  소나무가 우거진 동쪽 능선에 걸터앉은 은덕사(恩德寺)

백사실 동쪽 능선을 걷다 보면 왼쪽에 건물 하나가 손짓한다. 소나무숲을 병풍으로 삼아 서쪽
을 바라보고 있는 그는 은덕사란 조그만 절로 건물 1동이 전부이다. 그러다보니 하나의 건물
에 법당(法堂)과 요사(寮舍), 종무소의 역할까지 싹 담겨져 있는데, 절집에 흔한 기와집이 아
닌 별장이나 전원주택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법당 앞에는 잔디가 입혀진 뜨락이 있으며, 이곳에서 가꾸는 여러 농작물이 한참 숙성의 과정
을 밟고 있다. 또한 절 앞에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는 꼭 가보도록 하자. 여기서 보는 조망
맛이 그런데로 일품이다.


▲  은덕사 앞 바위에서 굽어본 부암동

은덕사 앞 바위에 올라서면 산주름에 묻힌 부암동 북부와 홍지동이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다
만 자하문터널과 하림각이 있는 부암동 남부는 백사실 서쪽 능선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저 너머에 멋드러진 바위를 여럿 품고 있는 산은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이자 우리나라
호랑이의 성지(聖地)였던 인왕산으로 나와 비슷한 위치에서 바라보인다. 그리고 바로 밑에 보
이는 기와집들은 백사폭포 위에 자리한 현통사로 백사폭포의 우렁찬 폭포수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 두 귀를 멍하게 한다. 은덕사 바위에서 현통사로 바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는데, 경사가
다소 각박하므로 조심해야 된다.


▲  솔내음이 진동하는 백사실 동쪽 능선길

▲  평창동 조망점 바위

백사실 동쪽 능선의 북쪽 끝에는 KT기지국이 있다. 그곳에 이르기 전에 오른쪽으로 산길이 하
나 나있는데, 바위가 그 길의 끝을 장식하고 있다. (더 이상 내려가는 길도 없음)
이 바위는 딱히 이름은 없으나 백사골에 있는 안내도에는 단순히 조망점이라고 나온다. 북쪽
을 바라보고 선 이 바위에 올라서면 평창동과 북한산(삼각산) 남쪽 산줄기가 시야에 들어오는
데 본글에서는 평창동이 보이는 곳이란 뜻에서 평창동 조망점이라 칭하도록 하겠다.


▲  평창동 조망점에서 바라본 천하 - 왜 이리 옥의 때가 많은지..?

평창동 조망점에서 훤히 바라보이는 평창동은 성북동(城北洞)과 한남동(漢南洞), 장충동(奬忠
洞)과 더불어 서울의 대표적인 부자 동네이다. 강남이 부자라고는 하지만 이들 동네 앞에서는
감히 이름도 꺼내지 못하는 그들의 후배에 불과하다.
평창동은 북한산과 북악산 사이에 자리한 산악 지대로 나름 명당(明堂) 자리로 명성이 자자하
다. 게다가 경관도 수려하여 해방 이후 돈 꽤나 만지던 이들이 조금씩 들어와 살더니만 이제
는 완전 졸부들의 씁쓸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물론 서민들도 적지 않게 살고 있음)

성북동이 우리나라의 0.1% 부자들이 산다고 하지만 평창동도 그에 못지 않다. 완전 산동네로
차량이 없으면 왕래도 힘든 곳이지만 명당의 기운과 수려한 경승지의 덕을 보고자 졸부들이
가득 밀려와 북한산을 건방지게 압박했다. 그래서 산자락 곳곳에 무식하게 큰 저택과 빌라를
짓고 자연을 훼손하면서 북한산 남쪽 경관은 적지않게 손상되고 말았다. 다행히 평창동 윗쪽
이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으로 꽁꽁 묶여있어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북한산성 밑까지 졸부
들이 싹 밀어버릴 뻔했다.

조망점에서 보이는 천하는 정말 1폭의 그림이 분명한데, 옥의 티가 너무 많다. 내게 저 장면
을 손질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졸부들의 집을 지우개로 다 지우고 그들로 파괴된 숲과 계곡
을 그려 자연의 모습으로 채색하고 싶다.


 

♠  평창동에 숨겨진 오래된 소나무

▲  평창동 소나무 밑 오솔길 (평창동 방향)

평창동 조망점에서 다시 은덕사 쪽으로 나오면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이 있다. 여기서 직진(남
쪽)하면 백사실 동쪽 능선을 쭉 타게 되고, 오른쪽(서쪽)은 현통사, 왼쪽(동쪽)은 평창동으로
이어진다. 나는 평창동 소나무를 보고자 평창동 방향을 택했다.

갈림길에서 동쪽으로 2분 정도 내려가면 평탄한 곳이 나타나면서 1차선 크기의 비포장 오솔길
이 펼쳐진다. 이 길은 묘각사 입구까지 이어지는데, 햇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삼삼한 숲속
에 포장도 씌우지 않은 흙길이라 그냥 지나치기 아쉬울 정도로 매우 정겹기만 하다. 그 길 오
른쪽에는 3~4m 높이로 닦인 석축이 길게 이어져 있어 옛 산성(山城)이나 건물터 유적이 아닐
까 싶은 기대감을 안긴다. 허나 그 석축은 산성도 아니고 옛 건물터 등의 문화유적도 아니다.
자세한 사연까지는 모르겠지만 군부대나 체육 시설을 만들면서 넓게 땅을 다지고 석축을 쌓은
것으로 지금은 배드민턴장과 쉼터가 있어 동네 주민들의 조촐한 쉼터 역할을 한다. 바로 저곳
에 오래된 소나무가 깃들여져 있다.


▲  평창동 소나무 밑 오솔길 (백사실 능선, 은덕사 방향)

평창동 소나무를 보고자 석축 서쪽 끝에서 접근을 시도했으나 철책의 위엄 앞에 돌아서고 말
았다. 석축 밑 오솔길을 거닐면 중간에 그 소나무가 보이나 주변 나무들이 시선을 방해해 제
대로 사진에 담을 수가 없다.
석축 윗부분이 사유지라 출입이 통제된 것이라 여겨 살짝 들어갈 길을 찾던 중, 석축 동쪽 끝
에서 그곳으로 인도하는 길이 슬쩍 손을 내민다. 서쪽 끝과 달리 방해물도 없어 그 길을 오르
니 숲에 둘러싸인 제법 너른 터가 나온다. 


▲  석축 윗쪽에 넓게 닦여진 배드민턴장

▲  평창동 소나무 - 서울시 보호수 1-17호

북악산 북쪽 자락에 숨겨진 평창동 소나무는 280년 정도 묵은 늙은 나무이다. 그의 신상이 적
힌 안내문에는 보호수 지정일 기준으로 230년이라고 나와있는데, 그가 보호수로 지정된 것은
1968년 7월 3일이다. 그 이후 50여 년이 무심하게 흘렀으니 약 280~290년 정도로 보면 된다.
무한리필로 쏟아지는 세월을 든든한 양분으로 삼아 높이 13m, 둘레 2.24m의 어엿하고 기품 넘
치는 나무로 성장했는데, 그의 생김새가 속리산(俗離山)에 있는 정2품송(正二品松)과 좀 비슷
하여 그리 낯설지는 않은 모습이다.

서울에서 100년 이상 묵은 나무 중, 소나무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보호수나 문화재로 지정
된 것은 이곳과 여기서 가까운 석파정(石坡亭) 소나무 정도이다. 그중에서도 평창동 소나무가
나이가 제일 많아 서울에서 가장 늙은 소나무라 봐도 무리는 없다.
이 나무를 누가 심었고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전해오는 것은 없지만 백사실로 가는 길목에 자
리해 있어 그곳을 찾거나 백사실에 머물던 사람이 심은 것이 아닐까 싶다.


▲  서쪽에서 바라본 평창동 소나무의 위엄

하늘에 대한 경외심 때문일까?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40도 정도 고개를 숙였다. 벼도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고 이 나무 역시 나이를 먹으면서 그렇게 고개를 꺾은 모양이다. 그만큼 숙성될
수록 겸손을 차리라는 대자연 형님의 심오한 뜻이 담긴 것은 아닐까 싶다. 자연물은 그 뜻을
받들고 잘 지키는데, 동물과 신(神)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며 온갖 민폐를 아끼지
않는 인간들은 왜 단순한 그것을 지키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 인간은 신이 아닌 늘 애매한 존
재로 남아있는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고개를 수그린 소나무의 자태가 곧게 서있는 모습보다는 기품과 운치가 더 진해
보이는 것 같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일 줄 모르는 사람보다는 자신을 낮추며 겸손을
보이는 사람이 더 값어치가 있어 보인다.
평창동 소나무를 끝으로 한여름 북악산 북쪽 자락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평창동 소나무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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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20년 8월 1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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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듬직한 우백호를 거닐다. 인왕산 (개미마을, 북쪽 능선길, 환희사, 큰절골)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인왕산 환희사 (인왕산 북쪽 능선) '

▲  환희사 경내

* 스마트폰으로 보실 경우 꼭 PC버전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가급적 컴퓨터 모니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를 권함)


 

 

올해도 변함없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을 맞이하여 순례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세우며 서
울 시내 절 투어에 나섰다. 이번에는 절을 좋아하는 후배 2명이 동참을 하였는데, 오전 11
시에 길음역(4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제일 먼저 정릉동(貞陵洞)에 자리한 오래된 절, 봉국
사(奉國寺)의 문을 두드렸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상과 탱화를 중심으로 경내를 마음껏 누비며 온갖 나물이 버무려진
비빔밥과 떡, 전으로 이루어진 점심 공양으로 배를 두둑히 다듬었다. 그런 다음 인왕산 환
희사로 이동하고자 110번 시내버스에 몸을 싣고 홍제동(弘濟洞)으로 이동 중, 홍제천(弘濟
川) 변에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을 내민 옥천암(玉泉庵)이 진하게 손짓을 하자, 계획에
도 없던 그곳에 잠시 발을 들였다. 거기서 중생들의 하례를 받느라 분주한 고려시대 백불(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을 친견하고 두툼한 떡(백설기)을 하나씩 쥐어들며 잠시 잊었던 환희
사로 이동을 재촉했다.

여기서 환희사까지는 참 애매한 거리이다. 버스를 타고 가기에도 참 어정쩡하여 때이른 무
더위를 무릅쓰고 인왕산을 더듬기로 했다. 옥천암 서남쪽 유원하나아파트에 인왕산으로 넘
어가는 산길이 있는데, 그 길을 타고 북쪽 능선(기차바위 북쪽)을 거쳐 서남쪽으로 내려가
면 1시간 이내에 환희사에 도착한다.
다만 그렇게 가려면 해발 280m까지 올라가야 된다. 절을 목적으로 왔는데, 뜻하지 않게 강
제 등산을 하게 되니 후배들은 버스를 타고 가자며 정색을 한다. 허나 내 마음은 석불처럼
굳어졌다. 산과 산사(山寺)는 물과 물고기와 같은 사이인데 산을 좀 타면 어떠하리~! 몸은
좀 힘들어도 보람은 그만큼 클 것이며 청정한 산내음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게다가 환희
사는 산속에 있기 때문에 버스를 타더라도 산을 좀 올라가야 된다.


 

♠  인왕산을 넘다 (개미마을, 홍심약수터, 옥동약수터)

▲  신록의 도화지를 이룬 인왕산 산길
(유원하나아파트에서 개미마을로 이어지는 산길)


옥천암과 가까운 유원하나아파트는 인왕산 북쪽 끝 세검정로 길가에 자리한 아파트이다. 천박
한 개발의 칼질이 인왕산 북쪽과 서쪽, 남쪽을 마구잡이로 난도질하면서 성냥갑 아파트를 잔뜩
지어올려 대자연의 걸출한 작품 인왕산의 시야를 가리며 농락한다. 특히 통일로로 이어지는 의
주로(義州路) 동쪽은 더욱 심각해 여유 공간도 없을 것 같은 가파른 산자락을 헤집고 온갖 아
파트를 지어놓아 미관을 찌푸리게 한다. 굳이 인왕산을 희롱하며 저렇게 잔뜩 아파트를 지어야
했는지 의문일 따름이다. 이 땅의 개발은 언제나 개념을 탑재하고 바른 길을 갈지 정말로 답이
없다.

유원하나아파트 남쪽에 인왕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계단이 있는데, 그 계단을 오르면 조촐한 운
동시설과 공원이 나온다. 여기서 용천약수터를 거쳐 기차바위 능선으로 가려고 했으니 길을 잘
못들어 개미마을로 이어지는 서남쪽 산길로 들어섰다. 그래서 뜻하지 않게 그곳을 강제로 거치
게 되었다.
개미마을로 가는 길은 둘레길마냥 느긋하다. 게다가 숲도 삼삼하여 시원한 산바람이 우리를 보
듬으며,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우리를 향해 미소를 짓는다. 아비규환 같은 속세에 우리를 보고
저리 웃어주는 존재는 거의 흔치 않은데 이렇게 대자연의 위로를 받으니 마음도 편해진다. 그
런 길을 10분 정도 가면 개미마을의 동쪽 부분에 이른다.


▲  벽화마을의 성지(聖地)로 거듭난 개미마을

부암동 뒷골마을(능금마을)과 더불어 서울 도심 속의 산골마을인 개미마을은 인왕산 북서쪽 자
락 100m 고지에 터를 닦은 산동네(달동네)이다. 허나 도시의 흔한 달동네와 달리 숲이 무성한
산자락에 감싸여 있어 완전 산골 벽지마을 같다. 거기에 뻐꾸기가 뻐꾹뻐꾹~♪ 노래하니 그런
기분은 더해져 이곳이 정녕 서울이 맞더냐? 내 자신도 햇갈려 순식간에 강원도 산골 마을로 순
간이동을 당한 줄 알았다.

이곳의 주소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3동 9번지, 지하철 3호선 홍제역과 가깝고, 서울 도심
이 바로 지척이다. 그런데도 이런 산골 마을이 도심 턱밑에 자리해 서울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
고 있으니 이런 것을 보면 서울도 참 넓긴 넓은 모양이다. 서울하면 대부분 키다리 빌딩과 사
람, 수레로 뒤엉킨 복잡한 시가지만 있는 것으로 알지 이런 시골 분위기는 생각을 못한다. 그
게 바로 서울에 대해 가지는 흔한 오류이다.

개미마을은 약 15,000평 규모로 200여 가구에 400여 명의 주민이 사는 마을이다. 오래된 마을
까지는 아니고 6.25 이후에 오갈 데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와 천막을 걸치고 살면서 자연
히 마을이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옹기종기 천막을 이룬 마을의 모습이 인디언마을과 비슷하다
고 하여 '인디언촌'이라 불렸는데, 인디언처럼 소리지르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서 그리 불렸다
는 설도 있어 바깥에서 이곳을 썩 좋은 시선으로 보고 있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마을 사람들도 그런 이름이 싫어서 적당한 이름을 물색하다가 1983년 개미마을을 이름으로 삼
았다. 이는 마을 사람들의 부지런함이 개미를 닮았다고 하여 스스로에게 붙인 이름이며, 애당
초 마을의 이름은 없었다.

이곳은 가난하고 고된 동네로 서민의 애환과 나날이 격해지는 빈부격차의 현실에 한숨을 쉬게
만드는 곳이다. 독거노인을 비롯해 일용노동자와 국민기초생활수급자가 주류를 이루며, 주황색
슬레이트 지붕을 얹힌 달동네 스타일의 집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마을 위쪽까지 길이 포장되어
있으나 여느 산동네와 마찬가지로 경사가 각박해 눈이 쌓이면 통행에 꽤 애를 먹는다. 그리고
연탄을 연료로 많이 사용하여 색깔이 벗겨진 살색 연탄을 쉽게 구경할 수 있다.
시내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오로지 문화촌에서 들어오는 북쪽 골목(세검정로4길)길이 전부
이다. 그 길로 마을버스와 차량들이 오간다. 마을버스는 산간 벽지처럼 서너 시간에 1대 정도
들어올 것 같지만 거의 10분 간격으로 들어와 접근성은 양호하며, 요즘은 좀 살만해졌는지 차
량을 가진 집도 좀 늘었다. 북쪽 외에는 3면이 죄다 산으로 막혀있으며, 인왕산 산길로는 인왕
산 정상이나 환희사, 홍은동 유원하나아파트로 넘어갈 수 있다.

이 마을의 이름 2자가 속세에 크게 주목을 받은 것은 요즘 지나치게 유행을 타고 있는 벽화마
을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2008년 이후 이곳 분위기를 화사하게 바꾸고자 서대문구청과 금호건
설이 '빛 그린 어울림 마을'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에 성균관대와 건국대, 추계예술대, 상명대, 한성대의 미술 전공 학생들이 몰려와 각기 다른
5개의 주제로 51가지의 그림을 그리면서 우울한 달동네가 화사한 그림 마을로 변신했다. 별로
기대를 하지 않던 마을 사람들도 그림판이 된 마을에 싱글벙글 웃었고, 벽화마을로 크게 언론
을 타자 마을 주민과 약간의 인왕산 등산꾼이 고작이던 이곳에 사진쟁이와 관광꾼들의 발길이
늘면서 도심의 새로운 명소로 성장했다. 또한 이곳과 동대문 이화(梨花)마을을 시작으로 많은
산동네와 시골 마을이 이를 따라하면서 전국적으로 너무 쓸데없이 벽화마을이 유행을 타게 된
것이다.
허나 사람들이 사는 마을임에도 사진 본능에 충실해 갖은 민폐를 부리는 사진쟁이가 적지가 않
고, 어렵게 사는 그들을 부정적인 눈으로 보며 무시하는 이들도 많아 마을 사람들과 적지 않은
충돌이 생긴다. 마을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시도한 벽화마을의 폐해인 셈으로 단순히 외지인들
이 들어와 그림만 그렸을 뿐,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냥 벽화만 두룬 산골 분위기 그
윽한 마을일 뿐이다. 하여 뭣도 모르는 이들은 잔뜩 기대를 하고 들어와 '이게 전부야?' 실망
을 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사진쟁이와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열게 할만한 꺼리가 없으니 단
지 사진만 찍고 가거나 인왕산을 오가는 경유지에 불과하여 마을 주민들에게도 그리 이익이 되
질 않는다.

이렇게 관광객과 마을 주민과의 조금은 불편한 동거를 줄이려면 마을을 개량하고 주민들도 이
득을 보도록 해줘야 된다. 예를 들면 도심과 가까운 잇점을 이용하여 1박 머물 수 있는 캠핑장
이나 산골, 농촌마을 체험 현장으로 활용하거나 부암동(付岩洞) 능금마을(뒷골마을)처럼 농작
물과 원예물을 재배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수 있으며, 예술인들을 초대하여 북촌(北村)처럼
갖은 예술을 체험할 수 있는 예술마을로 키우는 것도 좋을 것이다.

개미마을은 아직 개발 계획은 없다. 허나 벽화마을로 뜬 적이 있으니 졸부들의 마수를 경계해
야될 것이며, 마을을 둘러볼 때 사진을 찍는다며 허락도 없이 집에 침투하거나 사생활을 침해
하는 등 호들갑을 떠는 행위는 삼가해야 된다. 그리고 개미마을 하나만으로는 50% 부족하니 인
왕산 등산이나 인근 부암동 답사를 겯드리면 정말 알차고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 홍제동 개미마을 찾아가기 (2016년 5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홍제역(1,2번 출구 중간)에서 서대문구 마을버스 07번을 타면 개미마을까지 들
  어간다.
* 서울시내버스 110, 153, 7018, 7730번을 타고 문화촌현대아파트에서 서대문구 마을버스 07번
  으로 환승 또는 도보 15분 (평창동이나 부암동 방면에서 갈 경우에는 길 건너 정류장에서 서
  대문 07번으로 환승)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3동 9번지 일대


▲  개미마을 동쪽 부분

우리는 개미마을의 동쪽만 스치듯 지나갔다. 이런 인위적인 벽화마을에는 별로 관심이 없기 때
문이다. 강원도 산골 같은 한적하고 전원적인 분위기는 참 마음에 들었는데, 단순히 벽화를 보
자고 또 오는 것은 싫다.

개미마을 동쪽 끝에는 홍심약수터가 있다. 처음에는 홍삼약수터로 알고 '이름이 참 건강하네~~
물에 홍삼의 기운이 있나?' 싶었는데, 이름을 다시 보니 홍심이었다. 받침 하나에 약수터의 이
름과 이미지가 싹 바뀌는 순간이다.
이 샘터에는 인왕산이 베푼 약수가 쏟아지고 있는데, 가뭄이라 그 양이 시원치 못하다. 수질은
다행히 적합을 유지하고 있으며, 물이 나오는 구멍이 위에 2~3개가 더 있는데, 윗쪽이 아래 보
다 물이 더 잘나온다.

우리는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갈증을 해소하며 두 다리를 잠시 쉬었다. 오후 한참 시간이라
날은 덥고 땀은 약수터를 이룰 정도라 미동도 하기 귀찮았다. 허나 환희사를 목적으로 왔으니
목적은 달성해야 뒷탈이 없다. 그래서 나른한 몸을 억지로 움직이며 다시 길을 재촉했다.
홍심약수터에서 10분 정도 오르니 소나무가 우거진 북쪽 능선에 이른다. 이 능선은 장차 기차
바위 능선으로 변신을 하는데, 거기까지는 갈 필요가 없고, 그 직전 280m 고지에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된다. 사방이 뻥 뚫린 능선길로 서쪽으로 개미마을과 서대문구, 은평구가, 동쪽은 부
암동과 북악산(백악산), 자하문고개가 시야에 들어와 조망도 제법 일품이며, 소나무가 매우 삼
삼하여 솔내음이 진동을 한다.


▲  소나무로 그윽한 인왕산 북쪽 능선길 (1)

▲  소나무로 그윽한 인왕산 북쪽 능선길 (2)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1)
바로 밑에 산골마을인 개미마을이 보이고 그 너머로 홍제동과 홍은동을 비롯하여
백련산(白蓮山) 산줄기와 은평구 일부가 바라보인다.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2)
홍은동과 홍제동 일대를 비롯하여 산골고개 너머로 은평구와 서울~고양
경계 산줄기가 바라보인다.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3)
비슷한 높이로 북악산 정상이 시야에 들어오고, 그 밑에 북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산) 사이에 포근히 들어앉은 부암동이 보인다.

▲  환희사로 내려가는 산길

▲  옥동약수터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서쪽인 홍제동으로 좀 내려가다가 남쪽으로 가늘고 가파르게 이어진 산
길로 접어들면 바위로 이루어진 옥동약수터가 나온다.
이곳은 한때 인왕산 서쪽을 대표했던 약수터로 물 뜨는 동네 사람들이 꼬리를 물었으나 서대문
구청의 관리 소홀과 약수터를 지키는 노공(老公) 회원들의 감소, 수질의 부적합 판정으로 이제
는 초라한 행색이 되었다.

여기서 환희사까지는 작년 초여름에 발자국을 그은 경험이 있어 길은 훤하다. 이곳에서 계곡을
하나 건너면 조그만 약수터와 큰 바위가 나오며, 그들을 무시하고 서쪽으로 6~7분 정도 내려가
면 계곡 건너로 주차장과 연등을 두른 집이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환희사이다.


▲  전원주택 같은 환희사 외경


 

♠  인왕산 서쪽 자락에 소리없이 안긴 조촐한 산사(山寺),
오래된 지방문화재 2점을 간직한 인왕산 환희사(歡喜寺)

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338m)은 바위로 이루어진 각박한 경사의 암산(巖山)이
다. 시내에서 보면 산이 대개 협소해 보이지만 그의 품으로 들어가보면 생각 외로 넓어 놀라게
된다. 겉과 달리 속은 깊고 넓은 것이다.

인왕산에서 가장 경사가 각박하고 건물 지을 자리도 없을 것 같은 서쪽 자락에 조그만 비구니
절인 환희사가 조용히 안겨져 있다. 너무 없는 듯 자리해 있어 이곳의 존재를 안 것은 몇 년
되지 않았다. 나도 그만큼 등잔 밑이 어두웠다.

이 절은 20세기 중반에 지어진 현대 사찰로 정보의 바다로 자부심이 대단한 인터넷 세계에서도
그곳에 대한 정보는 좀처럼 걸려들지 않았다. 하여 누가 언제 창건하고 무슨 과정을 거쳤는지
는 절에 가서 묻지 않는 이상은 알 길이 없다. 그만큼 법등(法燈)의 역사와 인지도의 끈이 매
우 낮은 것이다.
절이 있기 전에는 부근에 무당이 굿을 하거나 사람들이 수행을 하는 석굴이 있었다고 하며 그
인근에 터를 닦고 환희사를 세워 지금은 인왕산의 주요 사찰로 성장했다.

나는 오래된 절을 무척 좋아하는지라 소장 문화유산이 있거나 성북동 길상사(吉祥寺) 같은 경
우를 제외한 80년도 안된 절에는 거의 관심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 환희사에 주목을 하고 초파
일에 이렇게 찾은 것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상이 무려 2점이나 있기 때문으로 그들의 존재
가 나를 이곳으로 소환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이곳이나 인왕산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
며, 20세기 중반 어느 때에 외지에서 모두 업어온 것이다. 역사가 짧고 딱히 내세울 것이 없는
환희사에서는 이들 불상을 후광(後光)으로 삼아야 장차 절을 꾸리기가 수월하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용화전, 요사로 쓰이는 건물 3동이 전부로 그 흔한 삼성각(三聖閣), 일주문
(一柱門)도 아직 갖추지 못했다. 경내는 작은 편으로 건물 3동에 딱 걸맞는 크기라 두 눈에 쏙
넣고 봐도 부담이 없다.
경내 북쪽과 동쪽, 남쪽은 경사가 급하며, 서쪽으로 속세로 내려가는
길이 닦여져 있다. 절 주변은 속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목이 울창해 산사의 기운을 더해주
며 남쪽에 조촐하게 계곡이 흘러간다.
이곳은 비구니 사찰이라 경내가 꽤 정갈하고 아기자기하다. 여인들의 공간이다보니 이쁘게 꾸
며진 것이다. 경내 곳곳에는 그들의 손맛이 담긴 온갖 귀여운 인형과 장식물이 놓여 있고, 뜨
락은 산뜻하여 먼지 하나 앉을 틈이 없다. 게다가 찬불가나 불교 관련 음악이 아닌 클래식 같
은 잔잔한 음악을 주로 틀어놓아 색다른 기분을 건넨다.
또한 다른 현대 사찰과 달리 외지인에 대한 경계심이 별로 없어 평일이나 주말 낮에 오면 종종
차 1잔 얻어마실 수 있으며, 편안한 기분으로 절을 둘러보거나, 쉼터에서 쉬거나, 예불을 보거
나 사진 출사를 하게끔 배려해 주는 착한 절이다. 지방문화재 불상 때문에 외지인에 대한 신경
이 다소 예민할텐데도 말이다. 허나 그렇게라도 해야 간접적으로나마 절의 존재를 조금씩 알릴
수 있다. 인지도가 누적이 되야 사람이 찾아오고 그에 따른 수입도 생기기 때문이다.
다만 18시 이후에는 초파일 등의 경우가 아니면 대문을 걸어잠구며, 18시까지는 밖으로 나가줘
야 된다. (비구니가 대문을 닫으니 나가라고 함) 연약한 비구니들의 공간이고 문화유산을 지키
그렇게 하는 모양이니 그거 외에는 딱히 문제될 것은 없다.

절 밑에는 주차장이 있는데, 주차장에서 대문을 지나 오르막을 오르면 요사(寮舍)이다. 이 건
물은 경내를 가리며 자리해 있는데, 그 흔한 기와집이 아닌 일반 주택으로 되어있어 겉으로 보
면 절집이 아닌 별장이나 전원주택 같은 분위기이다. 경내를 두른 연등이 아니었다면 누가 이
곳을 절로 생각이나 했을까? 그런 상식 밖에 요사를 지나면 뜨락이 나오면서 그보다 한층 높은
곳에 법당(法堂)인 대웅전이, 그보다 1단계 더 높은 곳에 용화전이 나오니 이들은 다행히 기와
집이라 나름 절집의 분위기를 풍긴다.

절이 작고 조촐하여 정말 5분이면 다 보고도 남음이 있으나 지방문화재 불상 때문에 머무는 시
간은 조금 길어진다. 작년에도 인왕산 정상을 찍고 홍제동으로 넘어오면서 이곳을 들린 적이
있는데, 그때는 용화전에 담긴 석불입상을 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갈 기회를 노리다가 이번 초파일에 인연을 지은 것이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인왕
산을 넘어서 왔다. 그들 불상이 아니었다면 굳이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이 절
의 존재를 길이길이 몰랐을 지도 모른다. 그들 덕분에 이렇게 정갈한 비구니 사찰을 알게 되니
나로써는 고마울 따름이다.

절에 들어서니 오후 행사가 막 끝난 터라 경내가 꽤 부산하다. 뜨락 서쪽과 정자에는 가족 단
위 신도와 산꾼, 노공들이 모여 앉아 있었고, 10~20대로 이루어진 행사 요원(학생 신도들)들은
행사 뒷처리와 먹거리를 파느라 바쁘다. 이곳 이전에 갔던 봉국사와 옥천암은 먹을거리를 무상
으로 제공했는데, 이곳은 그런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공양이나 떡은 꿈도 못꾼다. 게다
가 판매 가격도 속세만큼이나 야박하니 아무래도 초파일 특수를 노려 재정을 채우려는 모양이
다. 부처와 관음보살의 뜻에 따라 중생을 위해야 될 절이 지나치게 돈에 집착하는 것도 썩 좋
은 것은 아니다.


▲  대문 주변에 자리한 5층석탑
이 석탑은 왜정 때(또는 1950~60년대)에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며,
2층 지붕돌과 3,4,5층 몸돌에는 고색의 때가 약간 피어있다.

▲  연등이 춤을 추는 대웅전 뜨락

대웅전 뜨락에는 잔디가 곱게 입혀져 있다. 뜨락 북쪽에는 석불입상을 세우고 서쪽에는 7층석
탑을 세웠는데, 그 주위에 아기자기한 장식물이 널려 있어 사진기를 흥분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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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희사 요사 - 승려들의 생활공간으로 종무소(宗務所)도 겸하고 있다.

▲  인자한 표정으로 남쪽을 바라보는
석불입상과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  날씬한 몸매의 7층석탑
대문 앞 5층석탑과 조금 비슷한 모습이다.

▲  작고 귀여운 청개구리상

▲  돌 위에 얹혀진 인형들

▲  이쁘게 치장된 뜨락 화단

▲  오리 솟대(왼쪽)와 인형의 만남


▲  환희사 대웅전(大雄殿)

▲  환희사 목불좌상(아미타불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17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절 규모에 걸맞게 조촐한 모습이다. 불단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불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그 좌우에는 아주 작은 관음보살과 법륜(法輪
)이란 동그란 바퀴를 두광(頭光)으로 두른 지장보살이 자리해 소위 아미타3존불을 이룬다.
그들 뒤에는 색채가 고운 아미타후불탱이 든든하게 걸려있고, 좌우 벽에는 신중탱(神衆幀), 산
신탱(山神幀), 독성탱(獨聖幀), 칠성탱(七星幀) 등의 탱화가 빼곡히 자리하여 삼성각의 역할도
도맡고 있다.

불단에 앉아 넉넉하고 포근한 미소를 보이고 있는 목불좌상, 그는 원래 연천(漣川)에 있던 심
원사(心源寺)에서 넘어온 것이다. 심원사는 연천 지역에서 꽤 명성이 높았던 절로 6.25 때 파
괴되자 그곳에 있던 숱한 불상들이 고향을 잃고 외지로 흩어졌다. 이 목불좌상도 그중 하나로
환희사에서 어떻게 수습하여 이곳의 중심 불상으로 삼았다.
이 불상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로 17세기 중반 전후에 조성된 것
으로 여겨지며, 덩치는 작은 편이나 그를 협시(夾侍)하는 좌우 불상이 그보다 훨씬 작아 여기
서만큼은 제법 커보인다. 
그의 검은 머리칼은 꼽슬인 나발(螺髮)로 그 사이에 무견정상(無見頂相)이 솟아있으며, 두 눈
은 명상에 잠긴 듯 포근히 감겨 있다. 눈썹 사이에 푸른 백호가 찍혀있고. 작은 코는 오똑 솟
아있으며, 조그만 입술에는 미소가 넉넉히 드리워져 있다. 코와 입 사이에는 수염이 나있고,
볼살은 별로 없는 작고 갸름한 얼굴로 작은 얼굴을 선호하는 젊은 현대인들에게 부러움을 받는
다. 볼살이 절제되어 있으니 볼살이 많은 불상이나 포대화상(布袋和尙)보다는 더 미남으로 보
인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두 손은 복잡하다는 아미타9품인(阿彌陀九品印)의 하
나를 취해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다.

그는 중부지방 목불상(木佛像)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어 2006년 9월 서울 지방유형문화
재의 지위를 얻었다.

▲  대웅전 우측의 불화들
(영산회상도, 신중탱, 독성탱 등)

▲  대웅전 옆에 자리한 용화전


▲  환희사 석불입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18호

대웅전 좌측에는 용화전이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해 있는데 그 안에는 지
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입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의 예전 명칭은 판석부조불입상(板石浮彫佛立
像)으로 발음하기도 참 어렵다.

이 석불은 두꺼운 판석(板石)에 새긴 입상(立像)으로 마애불(磨崖佛)과도 다소 비슷하다. 고려
석불의 형식을 계승하고 있다고 하며, 조선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앞서 목
불좌상과는 달리 신체 비례와 조형감이 많이 떨어진다. 그 역시 다른 곳에서 가져왔으며, 고향
이 어디고 정체가 무엇인지는 자료가 없어서 모르겠다. 여기서는 막연히 미륵불(彌勒佛)로 심
심치 않은 대접을 받고 있다.

판석 위에 새겨진 석불은 보는 시각에 따라 고색의 기운도 별로 느껴지지 않아 근래 것으로 착
각하기도 쉽다. 얼굴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죄다 씻겨가거나 눈과 코, 입의 위치만 확
인할 수 있는 정도이며, 머리에는 무견정상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머리 뒤에는 꽃무늬가 새겨진 동그란 두광이 그를 밝혀주며, 몸에는 양 어깨를 가린 법의(法衣
)가 입혀져 있다. 가슴 밑은 얼굴처럼 닳은 부분이 많고, 몸 뒤에는 신광(身光)이 묘사되어 있
다. 석불입상 옆에는 조그만 귀여운 석상이 있는데, 서로 피부가 비슷해 같은 셋트임을 느끼게
한다. 정체는 알 수 없으나 부처의 열성제자인 나한(羅漢)이 아닐까 살짝 점쳐본다.


▲  대웅전과 관음전 사이에 자리한 관음보살상
지나치게 큰 정병(政柄)을 두 손에 쥐어들며 명상에 잠겨있다. 저 병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그를 졸라서 1잔 받아보고 싶다.

▲  환희사의 조그만 극락, 대웅전 우측 정자 쉼터
누구든 신발을 벗고 들어가 쉴 수 있는 쉼터로 간식도 먹을 수 있게끔
조그만 탁자도 닦여져 있다.

▲  정자에 걸린 현판과 음악을 흘려보내는 조그만 스피커의 위엄~~

▲  정자 뒷쪽 풍경
그림 같은 산책로가 수풀 사이로 나 있으나 그 길이는 인생처럼 짧다.

▲  정자에서 바라본 경내 뜨락

▲  환희사를 뒤로하고 다시 속세로 컴백하다

초파일 특수로 간만에 북새통을 이룬 환희사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빈 공간이 늘어간다. 음료
수도 거진 팔았는지 이내 장사도 접고 행사를 돕고 정리하던 앳된 여인네들도 일부만 남았다.
손바닥만한 이곳에서 목적한 2개의 불상을 질리도록 보고 정자 쉼터에서 지친 두 다리를 쉬고
16시에 그곳을 뒤로하며 속세로 길을 향했다.
시내로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다소 각박한데, 길 옆에는 인왕산에 몇 안되는 조그만 계곡이 온
전한 모습을 보이며 흘러간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물이 풍부해 밤이면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
빨래를 하며 수다를 떨던 곳으로 이 골짜기를 '큰절골', 남쪽 청련사 부근 계곡을 '작은절골'
이라 불렀다. 그러니 이 계곡은 큰절골이라 부르면 되나 요즘에는 '환희사계곡'으로도 불린다.
절까지 길을 닦느라 계곡 북쪽이 좀 깎이거나 콘크리트에 묻힌 옥의 티가 상당하지만 계곡이
맑은지 동네 아이들이 냇물을 뒤집으며 수중 동물을 탄압하는 모습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환희사에서 10분 정도 내려가면 인왕산을 건방지게 가리고 선 인왕산현대아파트와 홍제원현대
아파트가 나온다. 여기서부터 길은 진정을 되찾으며, 5분 정도 더 가면 마을버스 정류장이 나
온다. 여기서 마을버스를 타면 의주로와 홍제역으로 바로 이어지는데, 마을버스를 탈 것도 없
이 5분 더 발품을 팔면 서울의 주요 간선도로인 의주로가 알아서 모습을 비춘다.

이렇게 하여 인왕산을 겯드린 환희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
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하얀 암반을 미끄럼타고 내려오는 환희사계곡(큰절골)

※ 인왕산 환희사 찾아가기 (2016년 5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홍제역 3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뒤로 돌아가면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다. 거기
  서 서대문구 마을버스 13번을 타고 인왕산현대아파트117동 종점에서 내려 도보 10분
* 지하철 3호선 무악재역(1번 출구)에서 도보 20분 (인왕아파트교차로에서 우회전)
* 환희사는 보통 18시까지 개방한다. 그 이후는 들어가지 못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2동 산1-1 (☎ 02-735-8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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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음 까페에 올린 글은 2015년 9월부터 문장 줄 간격이 좀 늘어져서 나옵니다. (다음에
   계속 시정을 요청했으나 소용이 없었음) 그러니 보기에 조금 불편하더라도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다만 다음과 네이버블로그에 올린 글은 간격 늘어짐이 없이 정상적으로 나오
   고 있으니 블로그글을 보셔도 됩니다.
 * 공개일 - 2016년 5월 20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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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새로운 꿀단지, 서촌 나들이 (한옥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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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화여고 생활관

▲ 이상범 가옥 담장
◀ 배화여고 생활관
▶ 백세청풍 바위글씨
▼ 박노수 가옥
(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

   

 

 



▲  옛 청휘각(晴暉閣)터 주변에서 바라본 서촌

서울 도심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서촌(웃대)은 경복궁(景福宮) 서쪽 동네를 일컫는다. <청계천
이북이자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는 북촌(北村), 청계천 이남은 남촌(南村), 창덕궁 동부는 동촌
(東村), 청계천 주변은 중촌(中村)이라 불림>
원래 서촌은 서대문 동쪽 동네를 일컬었고, 지금의 서촌은 '웃대'라 불렸다. 그러나 시간이 흐
르면서 서촌의 범위는 웃대를 넘어 자하문고개 밑까지 확장된 것이다. 그리고 세종(世宗)이 통
인동(通仁洞)에서 태어난 인연(1397년 출생)을 내세워 종로구청과 지역 주민 주도로 '세종마을
'이란 간판까지 달게 되었다.
서촌의 범위는 청운동(淸雲洞), 효자동(孝子洞), 옥인동(玉仁洞), 신교동(新橋洞), 누상동(樓上
洞), 누하동(樓下洞), 체부동(體府洞), 필운동(弼雲洞), 통의동(通義洞). 통인동, 창성동(昌成
洞), 사직동(社稷洞), 행촌동(杏村洞) 일대로 이들은 서울의 든든한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
仁王山)의 동쪽 자락이다.
1394년 서울이 조선의 도읍이 되면서 주거지가 조금씩 형성되었는데, 북촌이 양반사대부와 부유
층의 공간이었다면 서촌은 왕족과 양반사대부, 내시(內侍)와 상궁(尙宮), 의관(醫官), 역관(譯
官) 등 다양한 계층이 살았으며, 특히 중인 계급이 많이 살았다.

인왕산과 북악산(北岳山, 백악산)을 병풍으로 두룬 아름다운 절경으로 인해 조선 초부터 도성(
都城) 내 경승지로 아주 명성이 높았다. 이런 곳은 늘 귀족들이 군침을 흘리는 법이라 일찍이
안평대군(세종의 3번째 아들)부터 이항복(李恒福), 정철(鄭澈), 권율(權慄), 김상용(金尙容),
김수항(金壽恒), 추사 김정희(金正喜)에 이르기까지 많은 귀족들이 집과 별장을 지어 머물렀다.
특히 이곳은 도시와 자연이 경계를 맞닿은 도성의 변두리로 필운대로와 신교동교차로만 지나면
완전 자연에 감싸인 한적한 곳이었다. 게다가 궁궐과 육조(六曹) 등의 관청과는 엎어지면 코 닿
을 정도로 가까우니 귀족들의 별장 선호지로는 아주 그만이었다.

서촌의 이름난 명소는 겸재 정선(鄭敾)이 그의 노련한 손끝을 통해 그림으로 남겼는데, 그 화첩
이 장동(壯洞)8경첩으로 여기서 장동은 서촌의 일원인 청운동 지역의 옛 이름이다. 조선 후기에
는 중인이던 천수경(千壽慶)이 송석원(松石園)이란 시사(詩社)를 세워 중인들의 문학 공간이 되
었으며, 1910년 이후에는 윤동주(尹東柱)와 이상범, 박노수, 이상(李箱) 등 많은 시인과 화가들
이 자연과 가까운 서촌에 안기며 주옥 같은 작품을 그려냈다.

서촌은 북촌만큼은 아니지만 한옥들이 제법 많이 남아있다. 약 700여 채의 한옥이 옥인동과 누
하동, 사직동, 체부동, 창성동 일대에 흩어져 있는데, 정작 150년 이상 묵은 한옥은 하나도 없
고, 왜정 때 개량 한옥과 해방 이후 한옥이 전부이다. 그리고 왜식(倭式) 가옥과 박노수 가옥
등의 양옥도 섞여있어 20세기 초/중반 서울의 주거 양식을 잘 보여준다.
비록 한옥이 많긴 하지만 북촌처럼 정식적으로 한옥마을을 칭하고 있지는 않으며, 비공식적으로
서촌한옥마을이라 불리기도 한다, 또한 창성동 일대 한옥을 따로 '창성동한옥마을'이라 불리기
도 한다.

구한말까지 북촌과 더불어 장안에서 잘나가던 서촌이지만 옥인동 일대에 고래등 저택을 짓고 인
왕산의 맑은 공기나 축내던 악덕 친일파 윤덕영(尹德榮)과 이완용의 부정 때문인지 왜정 이후
적지 않게 기울었다. 게다가 해방 이후 개발제한구역에 꽁꽁 묶이면서 거의 시골 읍내처럼 오랫
동안 정체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루면 강산도 변한다는 서울 도심의 한복판임에도 북촌과 서촌만큼은 시간도 느릿느릿 양반걸
음을 하거나 뒷걸음을 친 것이다. 불과 조금만 나가면 21세기 한복판인데, 서촌은 아직 20세기
초/중반에 머물러 있어 서울의 옛 모습을 더듬기에 좋다.
허나 시간이 너무 정체되면 지역 주민들의 삶이 힘들어진다. 북촌도 도심 속의 꿀단지로 화려하
게 재기를 하고 있지만 서촌은 2011년까지 낙후된 과거 모습으로 남아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한옥 기피증이 생겨나 한옥이 적지 않게 사라졌고, 서촌의 숨겨진 명소들도 은근히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2010년 4월 서울시에서 '경복궁 서측 지구단위계획'을 발표하여 한옥 보존과
신축을 장려했고, 북촌으로 단단히 재미를 본 서울시와 종로구청이 서촌을 새로운 꿀단지로 손
을 대면서 서촌도 드디어 때를 만나게 되었다.
그 이후 새로 지어진 한옥이 나날이 늘고 있고, 종로구청에서 서촌 답사코스를 개발하고 홍보하
는 한편, 새로운 명소를 발굴하고, 기존의 명소를 손질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조금씩
북촌을 추격하고 있다. 특히 수성동계곡 복원(2012년 7월)과 박노수 가옥을 구립미술관으로 개
방한 일(2013년 9월)은 서촌에 큰 활력을 불어넣는데 충분했다. 게다가 소규모 갤러리와 공방(工
房),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조금씩 둥지를 틀면서 서촌의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한다.

서촌에는 수성동계곡과 박노수가옥(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 이상범 가옥, 사직공원, 황학정(
黃鶴亭), 선희궁(宣禧宮)터, 백호정 바위글씨, 백세청풍 바위글씨, 창성동 한옥단지, 통의동 백
송터, 신익희(申翼熙) 가옥, 송석원터, 청휘각터, 자수궁터, 이상 가옥, 필운대, 배화여고 생활
관, 체부동 홍종문가옥, 백운동천 바위글씨, 운강대 바위글씨, 보안여관, 행촌동 은행나무, 홍
건희 가옥 등 조선과 근/현대 문화유산이 풍부하게 깃들여져 있으며, 이상범 가옥과 박노수 가
옥, 신익희 가옥은 내부 관람이 가능하다.
그리고 대림미술관, 갤러리시몬 등의 온갖 갤러리와 문화공간, 금천교시장과 통인시장 등의 전
통재래시장이 있다. 특히 금천교시장(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은 제2의 피마골이라 불러도 손색
이 없을 정도로 먹자골목이 크게 형성되어 있는데, 온갖 고기와 해산물, 전, 한식, 분식 등을
내놓는 식당이 즐비해 학생과 직장인, 등산객, 답사객으로 1주 내내 활기가 넘친다.

성북동과 부암동(付岩洞), 북한산(삼각산), 북촌에 빼앗긴 나의 마음을 계속 훔쳐가고 있는 서
촌, 그들에 비해 늦게 인연을 맺었지만, 2011년부터 구석구석 발자국을 남기며 서촌의 숨겨진
속살을 계속 뒤집고 있다. 겉은 허름하고 그저 흔한 주거지로 보이겠지만 그 속은 신대륙 이상
으로 다양한 보물을 품은 곳이 바로 서촌이다.

서촌 나들이는 3호선 경복궁역(1,2,3번 출구)에서 시작하면 좋다. 여기서 자하문길이나 사직단
동쪽(경복궁역 1번 출구)의 필운대로를 중심으로 움직이면 되며, 창의문 옆에 자리한 윤동주시
인의 언덕(청운공원)에서 주요 명소를 거쳐 경복궁역으로 내려오는 것도 괜찮다. 또한 북촌처럼
조그만 골목길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고, 그 속에 여러 명소와 소소한 볼거리가 숨겨져 있으니
큰 길만 살피지 말고 서촌 사람들의 애환이 담긴 골목길도 꼭 거닐어보자. 그러면 정말 배부르
고 알찬 서촌 나들이가 될 것이다.

본글에서는 서촌의 명소 일부를 소개하도록 하겠다. 다 다루기에는 너무 많음..

 

 


 

♠  20세기 초반에 지어진 근대 건축물이자 배화학당(培花學堂)의 옛 흔적
배화여고 생활관(培花女高 生活館) - 등록문화재 93호

▲  배화여고 생활관

사직단을 품은 사직공원 북쪽에는 옛 배화학당의 역사를 이은 배화여자대학교와 배화여중/여고
가 한 덩어리로 몰려 있다. 대학과 여중, 여고, 유치원까지 한 울타리 안에 담긴 흔치 않은 현
장으로 교복을 입은 앳된 사춘기 여중~여고생부터 자유분방한 차림의 20대 여대생이 한데 공존
하는 여인들의 공간이다.
여중은 교내 북쪽, 여고는 교내 서쪽에 자리해 있고, 나머지는 대학이 채우고 있는데, 이화학당
(梨花學堂)과 더불어 이 땅에서 제법 오래된 신식학교이자 여학교로 의미가 깊다.

배화학당을 세운 사람은 미국 텍사스에서 건너온 남감리교 소속 여자 선교사 '조세핀 필 캠밸(
Josephine Eaton Peel Campbell, 1853~1920)'이다. 그는 이 땅을 찾은 최초의 여자 선교사로
1897년에 들어와 그들의 목적인 기독교 홍보를 위해 조선 여인들의 교육 계몽을 벌이기로 했다.
그래서 그가 몸담았던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학생들에게 선교 기금을 받아 경복궁 인근 내자동
(內資洞)에 땅을 구입해 캐롤라이나 학당을 세웠다.

학교를 열자 청나라 여선교사 도라유의 도움으로 2명의 여자 아이와 3명의 남자 아이를 간신히
모집해 초등교육을 실시했다. 당시 여자들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학교에 기숙사
를 두어 먹이고 재웠으며, 국어와 한문, 성경 등을 가르쳤다.
1902년 통학생의 입학을 허용하여 학생 수가 30명으로 늘어났다. 1903년 남감리교회 여선교부에
서 경비를 지원하여 학교 건물과 기숙사를 증축했고, 중학교 예비과를 설치했다. 1909년 고등과
를 설치했으며, 1910년 4월 배화학당으로 이름을 갈았다. 이때 초대 교장대리로 니콜스(Nicolls
)여사가 취임하면서 4년제 중학과와 4년제 소학과를 병설했다.
1910년 5월 16일 고등과 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했는데,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가 친히 축사를
보내 그들의 졸업을 치하했으며, 그때 축사를 윤치호(尹致昊)가 대독했다.

1910년 이 땅에 어둠이 내려온 이후, 1914년 왜인 교사의 왜어(倭語) 수업을 거부하기도 했으며,
1916년 1월 지금의 자리로 학교를 옮겨 1915년에 미리 지은 과학관 건물에 보통과/고등과/유치
원을 담았다. 이때 3년제 고등과를 4년제로 개편했으며, 홍천에서 '무궁화 보급 운동'을 펼쳤던
남궁억(南宮檍)이 잠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독립선언문'을 배포해 독립운동에 적극 동참했으며, 1920년 기숙생들
이 만세 사건을 벌이면서 많은 교사와 학생이 왜정에 잡혀갔다. 1922년 4년제 보통과를 6년제로
바꾸고 대학 예과를 설치했으나 이듬해 폐지했으며, 1924년에는 교가(校歌)가 지어졌는데,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가 노래 가사를 쓰고, 교사인 루비 리가 작곡을 했다.

1925년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로 이름을 갈았고, 1926년 캠벨기념관을 신축해 고등과가 이전했다.
1929년 11월 광주(光州) 학생운동이 터지자 격문(檄文)을 붙이는 등, 만세운동에 동참하여 왜정
의 염통을 잠시 쫄깃하게 만들었으며, 1938년 3월 배화여자고등학교, 배화여자소학교로 명칭을
갈았다.
1940년 왜정의 신사(神社) 참배 강요에 선교사들이 반발하면서 모두 그들 나라로 돌아가자 경영
난으로 일시 위기를 맞게 된다. 다행히 이민천(李閔天)의 재산 기부와 여러 교사들의 노력으로
문을 닫는 것은 면했다. 1943년 배화여자소학교를 경성여자배화학교로 변경했으며, 1944년 7월
왜군 통신부대가 캠벨기념관을 무단 점유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1945년 9월, 경성여자배화학교를 폐교하고 재학생을 종로국민학교로 보냈으며, 1946
년 4월, 6년제로 개편하고 배화여자중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허나 1950년 6.25가 터지면서 학
교는 부산(釜山) 초량동으로 내려가 임시 교사를 만들어 운영했으며, 서울의 학교는 폭격으로
상당수가 파괴되고 말았다.
1951년 5월, 교육법 개정으로 배화여중과 배화여고로 개편했으며, 1977년 배화여자대학을 설립
하여 지금에 이른다.

배화학당 초창기 시절, 이화학당도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조선이란 나라가 워낙 남녀유별이 심하
다보니 여학생 교육을 모두 여선교사들이 맡아서 했다. 단 한문(漢文)은 남자 선생이 맡는 경우
도 있었는데, 이때는 선생이 여학생을 마주 보며 가르치지 못하고 항상 뒤로 돌아앉아 여학생의
질문에만 대답을 하거나 선생과 학생 사이에 병풍을 치고 수업을 했었다. 지금으로써는 도저히
상상도 안되는 일이다.


▲  붉은 피부로 이루어진 배화여고 생활관

내가 배화여자대학을 찾은 것은 단순히 여자 구경을 하러 온 것이 아니다. (정말임ㅠ) 바로 옛
배화학당 건물을 보고자 함이다. 교내(校內)를 들어서면 황금빛으로 물든 은행나무 뒷쪽에 붉게
물든 중후한 모습의 근대 건축물이 있는데, 바로 학교에서 2번째로 오래된 건물인 배화여고 생
활관이다.

언덕에 터를 닦은 배화여고 생활관(이하 생활관)은 배화학당이 내자동에서 이곳으로 둥지를 옮
긴 1916년에 선교사 주택으로 지어졌다. 선교사들 대부분 미국에서 건너와서 그런지 건물도 그
들의 고향, 미국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해방 이후 윌슨 선교사의 집으로 사용되었다
가 1971년 배화여고에 기증하면서 배화여고 생활관 및 동창회관으로 쓰였다. 그러다가 1997년
이후에는 동창회관으로만 쓰이면서 많이 한가해졌다.

서양식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반지하와 2층으로 이루어졌는데, 반지하는 완전 밖으로 노출되어
있어 준3층이나 다름이 없다. 건물 현관은 1층에 있으며, 반지하는 현관을 거쳐 내려가야 된다.
현관 앞에는 돌출된 지붕을 만들고 그 위를 발코니로 사용했으며, 건물 내부에는 홀과 계단이
있고, 그 양쪽으로 방을 두었다. 건물의 겉모습은 서양식 근대 건축물로 붉은 피부의 벽돌을 사
용했는데, 지붕은 흥미롭게도 한옥의 기와지붕을 취했다. 그래서 서양식과 우리식이 조화를 이
룬 건물로 지붕에는 2개의 붉은 굴뚝을 세워 연기로 하늘을 찌른다. 허나 난방 방식도 많이 바
뀌었으니 이제는 무늬만 굴뚝이 되어 모락모락 연기를 불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  늦가을이 씌운 황금옷을 입고 아장아장 신이 난 은행나무
(나무 그늘에 캠벨 여사의 흉상이 있고, 그 뒷쪽에 생활관이 있음)

▲  은행나무 그늘에 세워진 배화학당의 창시자 '조세핀 필 캠벨'의 흉상과
리드(Dr. C.F. Reid)선교사 내한 100주년 기념비(왼쪽), 그리고 2007년에
세운 배화학당 창립 110주년 및 대학 개교 30주년 기념비(오른쪽)

▲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배화여고 과학관

생활관 앞에는 넓게 운동장이 닦여져 있다. 그 북쪽에는 교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과학관이
붉은 피부를 드러내며 자리해 있는데, 배화학당이 필운동으로 자리를 옮기던 1915년에 2층으로
지어진 것을 나중에 3층으로 올렸다. 바로 옆 생활관보다 무려 1년이나 선배이지만 아직까지 문
화유산의 지위를 얻지 못했다. 아마도 학교에서 문화재 지정에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그리고 사진에는 없지만 배화여고 본관(本館)도 생활관, 과학관과 마찬가지인 붉은 벽돌 건물로
1926년에 켐벨기념관으로 지어졌다. 1944년 왜군 통신부대가 무단으로 점유했으며, 6.25 시절에
반파된 것을 개축하여 현재는 도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유치원 놀이터 옆에는 수북하게 자라난 회화나무 1그루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나이는 대략
200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아직 오래된 나무로써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보호수 등급도 따지
못했지만 그에게는 인간이 달아주는 보호수란 훈장 따위는 관심이 없을 것이다.

끝으로 여기서는 빠졌지만 배화여고 필운관 뒷쪽에 필운대(弼雲臺)란 오래된 명소가 숨겨져 있
다. 이곳은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오성 이항복(李恒福)의 집터로 필운(弼雲)은 그의 또다른
호이다.
오성의 집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오래 전에 사라지고 고종 때 그의 후손인 이유원(李裕元)
이 '필운대' 3자와 이곳을 소개하는 바위글씨를 바위에 새겼다. 원래는 이들도 보려고 했는데
그만 깜박하고 말았다. 교문을 나오고 한참이 지나서야 앗차 생각이 나더군.. 아무래도 이번은
인연이 아닌듯 싶어서 쿨하게 다음으로 미루었다.

※ 배화여고 생활관, 필운대 찾아가기 (2015년 12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1번 출구에서 직진하면 사직동주민센터와 파출소가 나온다. 여기서 주
  민센터와 파출소를 왼쪽에 끼고 '사직로9길'로 들어서면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과 매동초교가
  나오며, 그들을 지나면 배화여자대학 정문이다. 정문을 들어서면 생활관의 옆구리가 정면에
  보이며, 필운대는 교내 서쪽 필운관(배화여고) 안쪽에 있다. (경복궁역에서 도보 10분)
* 경복궁역 2번 출구를 나와서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금천교시장)를 가로질러 직진하면(필운대
  로1길) 배화여자대학 정문이다.
* 사직단과 경복궁역(사직동주민센터) 정류장에서 도보 8분
  (이곳을 경유하는 시내버스 노선 - 171, 272, 601, 606, 700, 706, 707, 7025, 9703번)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산12 (배화여고 ☎ 02-724-0300)
* 배화여고 홈페이지는 아래 회화나무 사진을 클릭한다.


▲  유치원 운동장에 그늘을 드리우는 오래된 회화나무

 


 

♠  근/현대 동양화의 산실이자 왜정 때 개량한옥
이상범(李象範) 가옥 및 화실(畵室) - 등록문화재 171호

▲  이상범 가옥

배화여고 생활관을 둘러보고 서촌을 남북으로 가르는 필운대로를 따라 조금 올라가면 누하동(樓
下洞) 주택가이다. 여기서 왼쪽으로 펼쳐지는 갖은 골목길을 유심히 살펴보자. 앞서 배화여자대
학 유치원 회화나무가 가옥들 뒷쪽으로 짙게 보이는 골목길로 들어서면 그 막다른 곳에 서촌을
거쳐간 근/현대 동양화가 이상범의 가옥과 화실이 있다.
골목 입구에는 그를 알리는 이정표가 없기 때문에 동네 뒤로 보이는 배화유치원 회화나무를 단
서로 삼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찾아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눈뜨고도 놓칠 정도로 주택가
속에 파묻혀 있다.


▲  이상범 가옥과 화실이 있는 골목길
골목 끝에 자리한 집이 이상범 가옥이며, 그 뒤에 배화유치원 회화나무가 바라보인다.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푸른색 기와 대문 안쪽이 이상범의 화실과
그의 아들 내외가 거주하는 집이다.

▲  담장 너머로 바라본 이상범 화실 (청전화숙)

골목 끝 직전에는 이상범이 그림을 그리던 붉은 벽돌의 집이 있다. 그는 집 바로 동쪽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실을 두어 그림을 그리고, 많은 제자를 길러냈는데, 이 화실을 청전화옥(靑田畵屋)
또는 청전화숙(靑田畵宿)이라 불렀다. (여기서 '청전'은 이상범의 호)
겉을 보면 별로 오래되지 않은 주택처럼 보이지만 속은 1930년대에 지어진 왜식(倭式) 목조 건
물로 바깥에 빨간 벽돌과 기와를 씌웠다. 건물 남쪽에는 큰 창을 두어 실내를 밝게 하였고, 서
쪽에는 집과 이어지는 통로를 내었는데, 지금은 담장을 막아놓았다.
현재 화실은 그의 아들이 소유하고 있으며, 바로 동쪽에 그들이 사는 주택이 있다. 이상범 가옥
은 서울시에서 매입하여 관리하면서 관람시간 내에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지만 화실만큼은 아직
은 자유롭지 못해 관람을 원할 경우 초인종을 눌러 집주인에게 요청해야 된다. (나는 아직 화실
은 구경 못함)
화실에는 청전이 그림을 그리던 현장이 고스란히 남아있으며, 그의 손때가 탄 미술용품과 여러
유품, 서적이 전한다.

▲  화실 대문에 걸린 청전화옥 현판

▲  화실 담장에 걸린 표석


▲  함정이 깃든 이상범 가옥 바깥 대문

이상범 가옥의 철제 대문은 늘 굳게 닫혀져 있다. 그래서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비공개로 여
기고 발길을 돌리기 일쑤, 허나 그것이 대문의 함정이다. 화실은 몰라도 가옥은 2012년부터 속
세에 개방된 상태이므로 함정에 속지 말고 과감히 초인종을 눌러보자. 그러면 닫혔던 문이 확
열릴 것이다. 그렇게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안쪽 대문이 나타나는데, 이 대문이 원래 것이다.
바깥 대문은 가옥을 손질하면서 새로 단 것이다.


▲  이상범 가옥 안쪽 대문 (예전 대문)

안쪽 대문을 들어서면 뜨락과 대문 사이에 자리한 문간방이 나온다. 이 방은 현재 가옥 관리인
이 머무는 일종의 경비실로 예전에는 청전의 3째 아들 부부가 거처하기도 했고, 4째 아들 이건
걸(李建傑)이 작업실로 쓰기도 했다.

    ◀  행랑채 응접실 (안쪽은 청전의 방)
문간방 맞은편에는 행랑채 응접실이 있다. 이곳
은 청전이 남자 손님을 맞던 방으로 탁자와 의
자가 놓여져 있으며, 안쪽 방은 청전이 생활하
던 방이다.
손님이 많았던 청전은 대문과 이웃한 행랑채 끝
방을 자신의 방으로 삼고 그 양쪽 방을 손님 응
접실로 삼았으며, 방 동쪽에는 별도 건물로 화
실(청전화숙)을 두어 직접 드나들었다.


▲  주인이 가고 없는 청전의 빈 방
청전은 여기서 잠을 자고 책을 읽으며 작품을 구상했다.

▲  청전의 방에서 바라본 안채 응접실
안채와 연결된 안채 응접실은 여자 손님을
맞이하던 방이다.

▲  거실에서 바라본 안채 응접실과
청전의 방


▲  거실(마루)과 안채 응접실(오른쪽)

이상범 가옥은 1930년대에 지어진 서울에 흔한 개량한옥으로 1942년 청전이 매입하여 1972년 세
상을 뜰 때까지 30년을 살았다. 가옥의 구조는 'ㄱ'자 안채와 'ㅡ'자 행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도시 한옥에서는 드물게 부엌에 찬마루를 갖고 있는 것이 이 집의 강한 특징이다.
가옥 서부는 가족들의 생활공간으로, 동부는 자신의 사회적 활동공간으로 구분했으며, 화실에서
그의 많은 작품이 숱한 인고의 노력 끝에 태어났다. 그리고 배렴과 박노수를 비롯한 많은 열성
제자들이 이곳을 거쳐 현대 미술의 한 획을 그으면서 현대 미술의 살아있는 성지(聖地)로 크게
추앙을 받았다.

청전이 세상을 떠난 이후, 그의 자손들이 거주하다가 2006년 서울시에서 매입하면서 그들은 화
실 옆 주택으로 집을 옮겼다. 이후 2008년 복원 공사를 벌였으며 2012년 속세에 개방되어 자유
롭게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허나 집을 알리는 이정표도 아직 없고, 집의 인지도도 그의 높은
이름에 걸맞지 않게 너무 낮아 찾는 이는 별로 없는 실정이다.

가옥 내부에는 청전의 방과 안방 등 6개의 방과 마루(거실), 찬마루, 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청전 일가가 사용하던 TV수상기와 빨래 방망이, 돌판, 냉장고, 가구, 그릇과 밥상 등이 놓여져
청전의 숨결을 조금이나마 누리게 해준다.

▲  거실 한쪽에 자리한 냉장고
청전 식구들이 사용하던 냉장고라고 한다.

▲  막이 닫힌 오래된 TV수상기
그 밑에 빨래 방망이와 돌판이 있다.

▲  거실 서쪽에 자리한 안방
안방은 부인의 거처로 청전이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  찬마루에 걸린 누하동천(樓下洞天) 현판
이 글씨는 청전이 쓴 것으로 그는 자신의
집을 누하동천이라 칭하며 소중히 여겼다.


▲  아랫방(왼쪽)과 찬마루(가운데), 부엌
아랫방은 청전의 2째 아들(이건웅) 부부가 살던 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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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전 식구가 식사를 준비하거나 밥을 먹던 부엌 찬마루
그들이 사용하던 밥상과 놋쇠로 된 그릇이 고스란히 놓여져 갑자기
밥생각을 간절하게 만든다.

▲  껍데기만 남은 부엌 부뚜막과 검은 피부의 솥뚜껑
장작을 먹으며 모락모락 연기를 내뿜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청전의 작품도 저 솥에서 나온 밥과 음식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  마당과 장독대, 고품격 무늬가 새겨진 남쪽 담장
담장 벽면에는 궁궐 담장이나 벽에서나 볼 수 있는 화려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 무늬는 청전이 직접 제작한 것으로 벽면 절반이 뜯어져 나가
허전한 모습이다. 장대한 세월이 이곳을 방문한 기념으로
하나씩 뜯어간 모양이다.

※ 청전 이상범(1897~1972)의 생애
이상범은 1897년 몰락한 선비 집안인 이승원(李承遠)의 3째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어려
워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공짜로 교육을 시키던 서화미술원에 입학하면서 그의 숨겨진 미술적
재능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그 빛을 제대로 비추게 만든 이가 바로 그의 스승인 안중식(安中植
)으로 1917년 미술원을 수료하자 자신의 화실인 경묵당(耕墨堂)에 머물게 하며 미술을 가르쳤다.

1923년 이용우(李用雨), 노수현(盧壽鉉), 변관식(卞寬植)과 동연사(同硯社)를 조직하고 전통 회
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으나, 그해 11월 노수현과 2인전을 개최하는 선에서 중단되고 말았다.
1929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으며, 그 인연으로 추천 작가와 심
사 위원을 역임했다.

이후 동아일보사에서 근무하다가 1936년 손기정이 독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1등을 먹자,
그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운 사건으로 옥고를 치루었으며, 감옥을 나온 이후 집에 청전화
숙을 차리고, 오로지 그림과 제자 양성에 모든 것을 내던졌다. 그의 화숙을 거쳐간 이로는 배렴
과 박노수가 있으며, 청전의 그림 솜씨가 나날이 신을 닮아가면서 미술계의 춘원 이광수로 찬양
을 받기도 했다.

1947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가 창설되자 추천 작가, 심사 위원, 고문 등을 역임했고, 1950년부
터 홍익대 교수를 지내다가 1961년에 퇴직, 집에서 그림을 벗삼으며 말년을 보내다가 1972년 세
상을 떠났다.

청전의 작품은 그의 스승이던 안중식의 영향으로 남북종(南北宗) 절충 화풍을 추구하였다. 그러
다가 1923년부터는 논과 개울을 근경에 두고 나지막한 야산을 원경에 배치해 횡으로 전개되는
독창적인 구도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때 나온 작품으로 '산수도'(1919년), '모연도(暮煙圖)'
(1924년), '초동도(初冬圖)'(1926년) 등이 있다.
그만의 독자적인 양식이 형성된 것은 1945년 이후로 농촌의 전원 풍경을 2단의 간단한 구도 속
에 배치했으며, 엷은 먹에서 점차 진한 데로 변화하는 농담(濃淡)의 묘를 살려 향토색 짙은 세
계로 승화시켰다. 특히 시골 산야의 정취를 계절 변화에 따라 특유의 기법으로 처리하면서 한국
적 서정성을 추구했다.
이 당시 대표작으로 '설로도(雪路圖)'(1957년), '고원귀려도(高原歸旅圖)'(1959년) 등이 있으며,
전통적 수묵 기법의 새로운 창조적 추구와 한국 산야와 전원의 향토적 분위기를 독자적인 사상
풍의 화법으로 이루어낸 우리나라 현대 한국화의 대표적인 화가로 꼽힌다.

※ 누하동 이상범 가옥 찾아가기 (2015년 12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1번 출구)에서 직진하면 사직공원 바로 직전에 사직동주민센터가 나온
  다. 여기서 오른쪽 필운대로길로 들어서 조그만 언덕을 넘으면서 왼쪽 골목길을 잘 살펴보자.
  커다란 회화나무가 바로 뒤에 보이는 조그만 골목길을 들어서면 그 길의 끝에 이상범 가옥과
  화실이 있다.
* 가옥 관람시간 : 9시~18시 (겨울은 17시, 매주 월요일은 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하동 178, 181 (필운대로 31-7)

 

 


 

♠  서촌에 숨겨진 명소, 옛 백호정(白虎亭)의 아련한 흔적

▲  개발의 분별없는 칼질 앞에 외로운 신세가 된 옛 백호정터

주택들로 밀림을 이룬 누상동 서남쪽 구석에는 서울 장안의 활터로 유명했던 백호정터가 숨겨져
있다.
이곳에는 백호정 바위글씨와 글씨가 새겨진 바위, 죽은 샘터가 남아있는데, 바위 바로 윗쪽에는
배화여자대학이 콘크리트로 흉하게 터를 다지고 캠벨기념복지관을 세우면서 보기에도 참 가련한
신세가 되어버렸다. 아무리 바위 머리까지 학교 땅이라고 해도 바위를 저렇게 짓누르면서까지
콘크리트를 바르고 건물을 세워야 했는지 모르겠다.
여기서 가까운 청운동의 백세청풍(百世淸風) 바위글씨도 그 위에 졸부들의 빌라가 들어서 있고,
명륜동(明倫洞)에 있는 증주벽립(曾朱壁立) 바위글씨도 그 위에 집들이 들어앉아 그들을 깔아뭉
개니 그게 바로 개발이 철학도 없이 칼질을 자행한 결과이다. 인간이 저지른 개발의 칼질이 그
들에게 몹쓸 칼을 씌운 셈이다. 그래도 이곳은 바위가 그런데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고, 주변에
수목도 조촐하게 숲을 이루어 백호정터를 감싸니 그나마 백세청풍이나 증주벽립보다는 좀 나은
상황이다.

백호정은 서촌에 있던 5개의 활터인 오사정(五射亭)의 하나로 무인들이 궁술을 연마하던 곳이었
다. 허나 굳이 활쏘기가 아니더라도 이곳은 풍경이 빼어나 많은 문인들이 바위가 닳도록 찾아왔
던 장안의 경승지였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오사정이 폐쇄되면서 그때 문을 닫았는데, 6.25이후 무분별하게
집들이 들어서면서 아련하게 남은 활터의 흔적마저 완전 지워지고 말았다. 다행히 백호정이란
바위글씨가 백호정을 엄호했단 바위 피부에 화석처럼 새겨져 백호정의 옛 정취를 조금이나마 풍
겨주고 있는데, 이 글씨는 엄한명(嚴漢明, 1685~1759)이 새긴 것으로 여겨지며, 글씨가 제법 크
고 당찬 모습이다.

백호정이란 하얀 호랑이란 뜻으로 천하 호랑이의 성지로 추앙받던 인왕산 호랑이와 관련이 있다.
조선 초기에 인왕산에 살던 병든 호랑이가 풀속에서 솟는 물을 마신 이후 병이 나았는데, 물이
솟는 자리에 가보니 조그만 샘이 있었더랜다. 그래서 그 샘을 약수터로 삼으니 그것이 백호정
약수로 이 물을 마시면 모든 병이 낫는다는 이야기가 있어 왕년에는 많은 폐질환자들이 찾아와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렇게 장안에서 이름난 약수터였지만 개발의 칼질이 그 약수의 명
줄을 위협하면서 1980년대 이후 샘터는 끝내 숨이 끊겼고, 세상 뇌리 속에 완전 잊혀졌다.
다행히 1990년대 후반 이곳을 관리하는 효자동(孝子洞)에서 동네 명소로 지정하고 주변을 정비
하면서 그나마 바위글씨라도 유지하게 되었고, 2014년 6월,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어 개발의
칼질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문화재 지정 명칭은 '백호정') 하긴 서울에서 이렇게 처참한 모습
이 된 명소와 샘터가 어디 한둘이랴..?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상동 1-33


▲  한토막 전설이 되버린 백호정 약수터

약수의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라 샘터를 머금은 연두색 문은 거의 열릴 일이 없다. 방학동(放鶴
洞)의 원당(元堂)샘처럼 말끔히 복원을 하여 다시금 샘물이 콸콸 솟는 그날을 재현할 수는 없을
까? 허나 그전에 바위를 깔고 앉은 학교 건물과 인근 주택들 먼저 싹 지워야 될 것이다. 그래야
물도 마음 놓고 이곳까지 올 것이 아니던가?


▲  백호정 바위글씨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9호

▲  백호정 바위글씨가 새겨진 바위, 그리고 그 위에 굴레처럼 씌워진
흉물스러운 개발의 잔재물


▲  자수궁(慈壽宮)터 표석

필운대로는 사직공원에서 통인시장 서쪽, 맹학교와 농학교 앞을 거쳐 신교동로터리에서 끝을 맺
는 길이다. 서촌의 서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길로 길 주변에 사직공원, 배화여고 생활관, 이상
범가옥, 체부동 홍종문가옥(비공개), 홍건희가옥, 수성동계곡, 백호정 바위글씨, 박노수가옥,
송석원터, 자수궁터, 우당기념관, 선희궁터 등 명소가 풍부해 서촌의 꿀단지 같은 길이니 꼭 둘
러보기 바란다.

필운대로를 거닐다가 옥인아파트에 이르면 자수궁터 표석을 만날 수 있다. 자수궁은 광해군(光
海君)이 1616년에 지은 궁궐로 조선 초부터 이곳에는 북학(北學)이란 학당과 후사가 없는 후궁
들의 거처가 있었는데, 인왕산과 경희궁 자리에 왕기(王氣)가 서려있다는 풍수설(風水說)이 나
돌자 광해군은 그 기운을 막고 풍수설에 따른 백성들의 혼란을 잠재우고자 자수궁과 인경궁(仁
慶宮), 경덕궁(敬德宮, 경희궁)을 지었다.
궁이라고는 하지만 규모는 작았으며,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인경궁
은 철거되어 일부 건물과 목재가 창경궁으로 옮겨졌고, 자수궁은 후사가 없는 후궁들이 비구니
가 되어 말년을 보내는 일종의 이원()으로 형태를 전환하여 자수원()으로 이름을 갈
았다.

자수원은 한때 5,000명이 넘는 여승이 머물렀으나 경비가 많이 드는 등, 폐해가 심해 1661년 2
월 부제학(副提學) 유계() 등의 상소로 철거되었으며, 건물 목재는 성균관(成均館) 건물을
짓거나 보수하는데 동원되었다. 이후 자수궁 돌다리와 일부 건물이 왜정 때까지 남아있었으나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매국노의 대명사인 이완용(李完用)이 이곳을 매
입하여 잠시 살기도 했다. 이완용은 거의 공공의 적이 되어 목을 노리는 사람들이 나날이 많아
지자 그 더러운 목숨을 지키고자 여러 번 집을 옮겼다.


▲  송석원(松石園)터 표석

필운대로 통인시장 부근 길가에는 송석원터 표석이 있다. 송석원은 인왕산 계곡의 하나인 옥류
동(玉流洞)에 있던 천수경(千壽慶)의 집으로 그의 자는 군선(). 호는 송석원(), 송석
도인()이다.
천수경은 가난한 평민 출신으로 한시(漢詩)에 아주 능했으며, 1786년 옥류동에 집을 짓고 송석
도인을 칭하며 취미가 비슷한 중인 계급의 지식인 10여 명을 모아 일종의 동호회를 결성했다.
그 모임이 옥계시사(玉溪詩社), 또는 송석원시사()였다. <서사(西). 서원시사(西
)라고도 함>

그 모임은 그의 집인 송석원에서 열렸으며, 1817년 5월 천수경의 회갑을 기념하는 시사 모임에
추사 김정희(金正喜)도 찾아와 회갑 선물로 송석원 뒤에 있던 바위에 송석원 바위글씨를 남겼다.
당시 추사는 인근 통의동(通義洞) 백송터에 살고 있었다. (바위글씨는 1950년대 이후 동네 주민
들이 집을 지으면서 깨부심)

옥계시사는 천수경이 죽은 이후 점차 와해되었고, 송석원은 명성황후(明成皇后) 일가인 민규호(
閔奎鎬)와 민태호(閔台鎬)가 차례대로 접수했다가 친일매국노 윤덕영이 모두 매입했다.
그 작자는 1914년 독일인 감독을 시켜 222평의 양옥 건물인 벽수산장(碧樹山莊)을 지었는데, 무
려 10여 년이 걸렸으며, 산장 외에도 한옥 14동(그중의 박노수가옥도 있음)을 지어 그의 일가에
게 주었다.
당시 벽수산장은 서울 장안에서 제일 호화로운 주택으로 꼽혔는데, 사람들은 '돌문안 뾰족집'이
라 불렀다.

1940년 윤덕영이 지옥에 떨어지자, 그의 아들이 상속을 받았다. 허나 세상물정 모르던 금수저라
금세 재산을 말아먹었고, 집 유지비도 벅차서 1941년 왜열도 회사인 미쓰이(三井)에게 팔아넘겼
다. 미쓰이는 이때 부근 청풍계도 매입하여 그곳 절경을 싹 말아먹었다.

해방 이후 벽수산장에 덕수병원이 들어섰으며, 6.25시절에는 잠시 조선인민공화국 청사가 되기
도 했다. 청사로 쓰일 정도로 건물이 웅장하고 멋드러졌기 때문일 것이다. 1951년 이후에는 유
엔군장교 숙소로,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 건물로 쓰였으며, 1966년 수리를 하던 중 불이나 건
물은 전소되었다. 그래도 부시기 아까운 건물이라 중수를 하려고 했으나 도저히 가능성이 없어
1973년 말끔히 부셔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벽수산장 외곽에 세운 돌기둥 3개가 남아있고, 그가 지은 한옥 1동이 옥인동 구
석에 남아있으며, 딸에게 준 2층짜리 건물은 박노수가 매입하여 2011년까지 살다가 2013년 9월
에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본글은 여기서 끝.. 나머지 명소는 별도의 글에서 소개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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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강원도의 지붕, 정선 나들이 (아라리촌, 정선5일장, 아우라지)

 


' 강원도 정선 나들이 (아라리촌, 아우라지) '
아라리촌 연자방아
▲  아리리촌에서 만난 정겨운 풍물시(風物詩) 연자방아


밤하늘을 환하게 비추는 보름달처럼 가을이 알차게 익어가던 추석 연휴, 강원도의 지붕인
정선(旌善)을 찾았다.
서울의 동쪽 철도 관문인 청량리역에서 선물보따리를 바리바리 짊어지며 고향으로 떠나는
귀성객에 섞여 강릉(정동진)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에 나를 싣는다. 다행히 좌석이 있어
서 입석으로 가는 것은 면했다.

거의 3시간을 달려 하늘과 지척인 정선 땅에 진입, 정선의 남쪽 관문이자 태백선(太白線)
과 정선선이 갈리는 민둥산역에 두 발을 내린다. 이곳은 예전 증산역(甑山驛)으로 2009년
9월 민둥산으로 이름을 갈았다. 그 이유는 증산마을 북쪽에 억새로 유명한 민둥산(1118m)
이 있어 관광객 유치 차원에서 그리 한 것이다. 허나 역 이름만 바뀌었지 마을 이름은 그
대로 증산이다.
태백선에서 사라진 새마을호 열차도 무조건 정차했던 정선 고을의 큰 마을이자 석탄 산지
였던 증산, 지금은 민둥산을 간판으로 내걸며 인근 태백(太白)과 영월처럼 관광지로 화려
한 도약을 꿈꾼다.

칼처럼 솟은 산 사이에 아늑하게 들어앉은 증산은 하늘과도 불과 3자의 거리 만큼이나 가
까워 아랫 세상과는 공기부터가 확연히 틀리다. 그날은 날씨가 조금 더웠는데 고원지대라
조금은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역전으로 나가니 마침 정선으로 가는 군내버스가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벌리며 대기
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꿩 대신 닭을 고를 권리가 없기에 무조건 그를 잡아탔다.

강원도의 지붕답게 높이 솟은 뫼 사이로 길은 구불구불 흘러간다. 근래에 도로가 많이 정
비되어 길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그 대가로 정선에 아름다운 산하(山河)는 적지않게 상
처를 입어야 했다. 역시 강원도의 길은 제대로 토할 정도로 구불구불한 길이 매력인데 말
이다.

증산을 출발하여 40분 만에 정선군의 서울인 정선읍내에 들어섰다. 읍내에 들어서면서 바
로 정선아라리촌이 길 옆으로 지나간다. 그곳의 존재는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원래는 계
획에 없던 곳이라 지나치려 했으나,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절대로 못지나친다고 결국 정선
역 입구에서 내려서 오던 방향을 거슬러 내려와 아리리촌의 문을 두드렸다.

 


♠  정선 지역의 전통 가옥과 풍습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강원도 스타일의
 민속촌 ~ 정선 아라리촌

▲  대문을 활짝 열어 나그네를 맞이하는 아라리촌 정문

정선읍내 동쪽 조양강(朝陽江) 강변에 터를 닦은 아라리촌은 세월의 저편으로 무심히 사라져가
는 정선의 옛 가옥을 붙잡아 재현한 민속촌이다.
정선군청에서 많은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 만든 아라리촌은 2004년 10월 7일 문을 열었으며, 면
적이 34,720㎡에 이른다. 전통기와집(1동)과 굴피집(3동). 초가(1동), 너와집(1동), 저릅집(1동
), 돌집(1동), 귀틀집(1동) 등 전통가옥 9동과 주막, 농기구 공방(工房) 1동, 육모정, 초정, 서
낭당 등의 건물이 있으며, 디딜방아와 연자방아, 통방아, 장승, 고인돌, 그네 등이 민속촌 곳곳
을 수식한다.
또한 연암 박지원(朴趾源)이 쓴 양반전(兩班傳)을 테마로 하여 양반전의 주요 장면을 재현한 조
형물 10여 개가 곳곳에 배치되 또 다른 볼거리를 선사한다. 양반전은 한문소설로 그 배경이 바
로 정선이다. 중/고등학교 국어/문학 시간에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이 소설은 조선 후기 몰
락하는 양반 계급의 위선과 무능력을 풍자한 것으로 쌀을 갚지 못한 가난한 양반과 양반을 꿈꾸
는 부자, 그리고 그들을 중재하는 정선현감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아라리촌은 이런 볼거리 외에도 민속촌 주막에서 토속 음식인 곤드레밥과 순두부, 메밀 관련 음
식을 사먹을 수 있으며, 가격은 다소 밉지만, 1일 숙박체험도 가능하다. 그리고 민속촌 서쪽으
로 정선의 대지를 촉촉히 어루만지는 조양강과 강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가 놓여 있으며, 강 너
머로 칼처럼 솟은 산 사이에 둥지를 튼 정선읍내가 바라보인다.

양반전 디오라마 등을 빼고는 여타 민속마을과 별 다를 것은 없으나, 강원도 고원지대에 가옥과
생활상을 두루 살필 수 있는 현장으로 정선에 왔다면 꼭 둘러볼만하며, 넉넉잡아 30분 정도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그럼 지금부터 정선의 과거가 담겨진 아라리촌을 둘러보도록 하자.

▲  청동기시대 지배자의 무덤인 고인돌
옛것이 아닌 모형이다.

▲  6각형 모양의 정자 육모정


※ 정선 아라리촌 찾아가기 (2015년 12월 기준)
① 대중교통
* 동서울터미널에서 정선행 직행버스가 1일 9회 떠난다.
* 청량리역에서 매일 8시 20분에 정선, 아우라지행 정선아리랑열차가 운행한다. 원주역과 제천
  역, 영월역, 민둥산역을 경유하며, 일반 여객열차가 아닌 관광열차기 때문에 운임이 좀 비싸
  다. (청량리역에서 정선역까지 어른 26,100원)
* 민둥산역에서 아우라지행 정선아리랑열차가 1일 2회 떠난다. <11:25(청량리발 열차), 15:15>
* 청량리역에서 강릉(정동진)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민둥산역에서 정선행 군내버스(1일 7회)를
  타고 아라리촌(여성회관) 하차
* 원주, 강릉, 제천에서 정선행 직행버스 이용
* 정선시외터미널에서 동면(화암), 증산 방면 군내버스를 타고 아라리촌(여성회관) 하차
* 정선역에서 도보 25분, 또는 택시 이용
② 승용차편 (주차장 있음)
* 영동고속도로 → 진부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정선방면 59번 국도 → 나전3거리에서 우회
  전 → 정선제2교 4거리에서 좌회전 → 봉양5리 교차로에서 증산 방면 우회전 → 아라리촌

★ 아라리촌 관람정보 (2015년 12월 기준)
* 입장료 : 3,000원(정선군 아리랑상품권을 지급함)
* 주차비 공짜
* 관람시간 : 9시 ~ 18시 (17시까지 입장)
* 공예 체험 : 정선 5일장(2,7,12,17,22,27일)과 주말에 도자기공예, 칠보공예, 컨츄리공예 체
  험 이벤트가 열린다. 체험비는 3,000~9,000원 정도 (겨울에는 안함)
* 아리랑학당에서 정선아리랑 소리체험을 받을 수 있다. 4~11월에 운영하며, 체험비는 무료
* 소재지 -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애산리 560 일대 (애산로 37, ☎ 033-560-2059)
* 아라리촌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  옛 정선을 거닐다 ~ 아라리촌 둘러보기

▲  아라리촌 정문을 들어서면 넓은 길이 나온다.
여기서 직진을 하던 오른쪽으로 가던 상관은 없으나 나는 오른쪽길로 들어서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았다.

▲  가장 먼저 만난 양반전 조형물 (양반전 조형물 1)

정선의 어느 가난한 양반이 살았다. 그는 독서를 좋아하고 정직한 성격으로 정선에 부임하는 군
수(郡守)들이 무조건 찾아가 인사를 할 정도로 유명했다. 허나 살림이 어려워 매년 관아의 쌀을
빌려 목구멍에 풀칠을 했는데, 계속 빌리기만 했지 갚지를 못해 그 양이 어느덧 1,000섬을 넘었
다.
그렇게 정선 사또와 관원들이 오랫동안 쉬쉬하고 넘어갔으나,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결국 강원
도 관찰사(觀察使, 도지사)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관찰사는 이에 노발대발하며 정선군수를 닥달
해 양반에게 빌려준 쌀을 받아낼 것을 명령했다.


▲  전통와가 ~ 양반 가옥으로 사랑채와 안채로 이루어져 있다.

▲  이름도 생소한 굴피집

굴피집은 강원도 정선, 양양, 평창에서 많이 나타나는 원시형 산간지방 가옥으로 참나무(상수리
나무) 껍질인 굴피를 지붕에 씌우면 집의 보온이 잘되고 습기를 제대로 차단해 준다. 그래서 겨
울에는 매우 춥고 여름에는 비가 많은 곳에 적당하다.


▲  굴피집에 있는 양반전 조형물 (양반전 조형물 2)

정선현감은 양반에게 당장 쌀을 갚지 않으면 감옥에 넣겠다며 최후 통첩을 하였다. 아무리 조선
의 중심 계층이고 지체높은 양반이라 할지라도 관청에서 빌린 쌀을 한 톨도 갚지 않고 무대책으
로 일관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될 수가 없었다.

통첩을 받은 양반은 땅에 힘없이 주저앉아 어찌할 바를 모른다. 축 쳐진 그를 바라보는 마누라
는 팔짱을 끼며 한심스러운 표정으로 징하게 바가지를 긁는다. '영감~ 이제 어찌하면 좋단 말이
요~!! 무슨 말 좀 해보시오!!'


▲  양반과 부자 상인의 거래 (양반전 조형물 3)

현감의 최후통첩에 제대로 울상이 된 양반에게 희소식이 하나 날라왔다. 바로 옆집에 사는 부자
가 그 환곡을 대신 갚아주겠다는 것이다. 그 부자는 평민으로 평소 양반을 꿈꾸며 살았다. 마침
옆집 양반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되면서 이때다 싶어 자신이 환곡을 처리해줄 터이니 대신 양반의
신분을 자신에게 넘길 것을 제안한 것이다.
그의 제안에 양반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감옥에 끌려가게 될 판에 그까짓 양반 자리가 무슨
소용이랴, 당장 발등에 붙은 불조차 끄기도 벅찬데 말이다. 그래서 부자의 거래를 흔쾌히 받아
들이고 양반의 신분을 그에게 넘겼다.


▲  현감에서 절을 하는 양반 (양반전 조형물 4)

부자와 거래를 성사시킨 후, 양반은 길을 가다가 현감을 만났다. 그런데 그에게 갑자기 넙죽 절
을 하는 것이었다. 양반이나 현감이나 거의 같은 양반계급이기 때문에 아무리 벼슬이 높다고 해
도 절은 하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면 된다.
현감은 화들짝 놀라며 '아니 왜 이러시오. 일어나시오' 그를 일으켜 세우며 절을 한 연유를 물
었다. 이에 양반은 옆집 부자에게 양반의 신분을 팔았다면서 그 사연을 털어놓았다.


▲  아라리촌 북쪽에 자리한 소박한 모습의 초정(草亭)과
읍내 곳곳에서 수습해온 오래되지 않은 비석들

▲  가까이서 바라본 8각형 모양의 초정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초가 정자, 소박하고 단촐한 멋이 돋보인다.
이곳은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 및 길손님의 휴식처 역할을 하였다.

▲  따사로운 가을 햇살을 받으며 단잠에 빠진 그네

▲  아라리촌 둑방길에서 바라본 정선읍내와 조양강
읍내 뒤로 보이는 높고 웅장한 산이 정선읍의 진산(鎭山)인 비봉산(飛鳳山)이다.

▲  강바람이 살랑살랑 귀를 간지럽히는 조양강 산책로

▲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언제나 싱글벙글인 장승 3형제

뻐드렁니와 풀어진 눈을 드러내 보이며 밝은 표정으로 나그네를 맞는 장승, 장승은 마을의 안녕
을 지키고, 이정표의 역할을 하는 존재로 보통 마을 입구에 세우며, 그들 몸통에는 그들의 정체
가 쓰여져 있다.


▲  아라리촌에 살포시 찾아온 가을

▲  주막 옆에 자리한 농기구 공방
▼  공방 내부 (왼쪽은 농기구를 불에 달구어 만들던 곳, 오른쪽은
농기구와 농사와 관련된 도구들이 진열된 공간)


▲  양반이란 실체에 대경실색하는 부자 (양반전 조형물 5)

양반의 신분을 산 부자는 현감에게 이를 인정하는 증인이 되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현감은
그 문서를 만들어 주면서 양반이 지켜야 될 행동과 권리를 설명했다. 행동은 그야말로 겉치례가
상당수였으며, 권리는 그야말로 백성들을 쥐어짜고 착취하는 도둑 수준이었다. 그것을 모두 들
은 부자는 기쁨의 표정은 싹 사라지고 표정이 하얗게 질리면서
'아이고~ 그런 것이 양반이라면 차라리 안하고 말겠소~~!!'
양반을 포기하고 줄행랑을 쳤다. 그
이후 다시는 양반 타령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고 한다.


▲  파전에 동동주 1잔 들이키고 싶은 아라리촌

아라리촌에는 주막이 장사를 하고 있다. (겨울에는 안함) 초가 주막에는 산채정식, 곤드레밥 등
을 팔며, 굴피집 주막에는 순두부와 메밀콩국수, 칼국수 등을 파는데, 가격은 조금은 미운 수준
이다. 이런 곳에 왔으면 바깥에 차려진 마루에 걸터앉아 동동주 1잔에 파전 하나 걸쳐야 기분이
나는데, 그러지를 못하니 아쉬울 따름이다.


▲  이제는 굳어버린 화석처럼 아련히 남은 외겨리
외겨리는 소 1마리로 전답에 쟁기질을 하는 것을 말한다. 반대로 2마리로
하는 것을 '쌍겨리'라고 하며 척박한 산간지대 전답에서 많이 쓰였다.


▲  양반의 특혜에는 상민을 괴롭히는 몹쓸 것도 있다. (양반전 조형물 6)

현감이 말한 양반의 특혜 중에 양반이 상민의 코에 잿물을 들이붓고 머리채를 잡아 댕기며 수염
을 희롱하더라도 상민은 감히 원망하지 못한다는 내용이 있다. 그야말로 비인간적인 행위이다.


▲  이름도 외우기 쉬운 돌집
돌집은 정선 지역에서 많이 지어진 가옥 형태로 안방과 윗방, 사랑방, 도장방 그리고
정지와 외양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돌집은 얇은 판석을 두께 2cm 정도의 돌기와로
지붕을 덮어 올린 집으로, 주로 정선 지역 산지에서 나오는
청석맥을 파내 사용했다.

▲  벌거숭이 모습이 부끄러웠던지 덩굴을 걸친 돌담장

▲  산간지역에서 많이 지어진 귀틀집

귀틀집은 껍질을 벗긴 통나무를 '井' 모양으로 쌓아 벽을 만들고, 나무 틈새는 진흙으로 채웠다.
눈이 많이 와도 견딜 수 있고, 온도 유지가 용이하며, 간편하게 지을 수 있어 나무가 풍부한 산
간지대에서 많이 선호된 가옥이다.


▲  밥 생각을 간절하게 하는 귀틀집 부엌

▲  투박한 모습의 너와집

너와집은 귀틀집과 더불어 산간지대를 주름잡았던 집이다. 200년 이상 된 소나무 토막을 쪼깬
널판으로 지붕을 이었으며, 안방과 건넌방, 사랑방과 대청, 부엌, 봉담, 외양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부는 정선 지역에서 많이 나타나는 '화티'가 있는데, 이는 부뚜막 귀퉁이에 진흙을 쌓아 2개
의 구멍 중 위쪽은 불을 피워 음식을 하거나 내부를 밝히고, 아래쪽은 불씨 보관용으로 쓰였다.


▲  일반 초가와 비슷한 저릅집

저릅집은 정선과 삼척 지역에서 많이 나타나는 초가로 대마의 껍질을 벗기고 줄기를 이엉으로
이은 집이다. 다른 말로 겨를집이라고도 한다.

       ◀  통방아가 담겨진 삼각형 건물
통방아는 '물방아','벼락방아'라고도 한다. 확(
곡식을 넣는 돌통), 공이(찧는 틀), 수대 등으
로 이루어져 있는데. 3~5㎝ 정도의 커다란 통나
무를 이용하여 앞쪽에는 공이를 박고, 뒤쪽에는
물이 담길 수 있도록 구이통을 팠다. 그리고 귀
대를 통해 구이통 속으로 흘러 들어온 물에 의
해 공이가 올라가고 내려가면서 확에 있는 곡식
을 찧게 된다.


▲  물레방아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물레방아는 흔히들 우리 고유의 것으로 알고 있다. 허나 그것은 조
선 후기에 청나라에서 가져온 것으로 앞서 양반전의 저자인 연암 박지원이 청에 사신으로 갔다
가 물레방아의 위력에 반해 그것을 연구하였다.
이후 안의(安義, 경남 함양)현감이 되자 안의 북쪽 용추계곡에서 물레방아를 시범 운영을 하였
으니 그것이 바로 이 땅 최초의 물레방아이며, 용추계곡은 우리나라 물레방아의 탄생지가 되었
다. 그 이후 전국으로 빠르게 보급되어 농업 생산력의 흔쾌한 증진을 가져왔다.


▲  돌탑과 장승
마을 입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승과 돌탑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의 기능과
마을을 알리는 이정표의 역할을 하였다.

▲  서낭당(성황당)

서낭당은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성황신(城隍神)의 보금자리로 시골 마을에는 꼭 1개씩은 있다.
보통은 마을 입구나 이웃 마을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세웠으며 지금도 성황제(城隍祭)를 지내
는 마을이 많다. 당 주위에는 금줄과 돌담을 둘러 잡인의 출입을 금하며, 장승이나 돌탑을 주변
에 세웠다. 마을에서 가장 신성하고 중요한 곳이다 보니 이곳에 대한 정성은 정말 대단했다.


▲  서낭당에 모셔진 성황신도(城隍神圖)

성황신도는 하나지만 각각 다른 모습의 성황신 2인이 담겨져 있다. 그들 머리 뒤로 공통적으로
금색의 동그란 것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광배(光背)의 일종인 두광(頭光)이다. 푸근한 인상이
매력적인 왼쪽 성황신은 하얀 옷을 걸치고 있는데, 오른손에 지팡이, 왼손에 산삼을 거머쥐며
서 있다. 빨간 옷은 입은 오른쪽 성황신도 왼쪽만큼이나 인자함이 깃든 표정으로 있는데, 오른
손에 지팡이를, 왼손으로 귀여움이 묻어난 호랑이를 살짝 어루만지고 있다.
산신과 호랑이 외에 동자와 나무, 산 등이 담겨져 있어 산신도(山神圖)와 비슷하다.

이렇게 하여 양반전과 정선의 옛 모습을 담은 아라리촌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  느긋하게 팔자걸음을 걷는 양반 (양반전 조형물 7)
현감이 부자에게 말한 양반의 겉치례 중에는 팔자걸음으로 느릿느릿 걸어야
되는 내용도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은 정선 5일장이었다. 그래서 읍내로 넘어가 장터의 중심지인 중앙시
장에서 간단하게 메밀전병과 메밀전을 사먹고 여량, 아우라지로 가고자 정선터미널로 이동했다.
정선 땅은 구절양장(九折羊腸)의 험준한 산악지대라 교통이 매우 좋지가 못하다. 강원도 안에서
도 매우 첩첩한 산골이라 평창, 영월과 더불어 산다삼읍(山多三邑)이라 일컬어진다.

정선터미널에서 그나마 많이 있는 강릉행 직행버스(1~2시간 간격)를 타고 정선의 험준한 산하를
넘어 25분 만에 여량면(餘糧面)의 중심지인 여량에 이르렀다. 여량은 말그대로 식량의 여분이
있다는 뜻으로 험한 산골임에도 너른 들과 논이 있어 논농사가 가능했다. 그래서 식량이 남을
정도로 풍족했다고 전한다.

여량정류장에서 북쪽으로 가면 정선선의 실질적인 종점인 아우라지역이 나온다. 정선선의 종점
은 여기서 7.2km를 더 들어가야 되는 구절리(九切里)역이지만, 관광열차는 아우라지에서 바퀴를
접고 더 이상 들어가지 않으며, (무궁화호 열차는 폐선되고 비싼 관광열차가 대신 들어옴) 대신
레일바이크(Railbike)가 그 구간을 쑤시고 다닌다.

아우라지역은 원래 여량역이었으나 2000년에 아우라지로 간판을 갈았다. 이 역은 현재 역무원이
없는 무배치 간이역으로 역건물과 플랫폼, 철로가 전부이다. 역과 철로시설을 보호하는 담장도
없이 사방이 개방된 형태로 자유롭게 역 내부를 거닐 수 있으며, 하루에 2번 외부세계를 이어주
는 정선아리랑열차가 운행된다.

아우라지역을 지나면 두 물줄기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곳, 아우라지가 바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  정선선 아우라지역 ~ 조촐한 간이역의 모습이 너무나 정겹다.


♠  정선아리랑의 발상지이자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정선의 제일가는 명승지, 아우라지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 장마가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몰려든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 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장철 임그리워서 나는 못살겠네
아리랑 아리랑 아리라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정선읍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여량에는 정선아리랑의 발상지로 알려진 아우라지가 있다. 이
곳은 평창군 도암면에서 발원한 송천(松川)과 삼척시 하장면에서 발원한 골지천(骨只川)이 만나
는 곳으로 두 물줄기가 하나로 어우러진다는 뜻에서 아우라지라 불린다. 여기서 하나가 된 물줄
기는 조양강으로 간판을 바꾸고 남한강으로 흘러간다.

구름을 허리에 두르며 칼처럼 솟아난 높은 산과 시리도록 맑은 두 물줄기가 합쳐진 곳이라 경관
이 한 폭의 수묵담채화처럼 아름답기 그지없다. 예전에는 여량에서 강을 건널 때는 나룻배를 타
야 했으며, 섶다리를 따로 만들어 통행하기도 했으나 장마철만 되면 떠내려가기가 바쁘니 자연
히 나룻배의 의존도는 컸다. 강의 수심은 그리 깊지는 않아 두 다리로 건너도 무관하지만 그렇
다고 1년 내내 그렇게 건널 수도 없는 노릇이다.
허나 아우라지가 정선5일장만큼이나 유명해지면서 정선군은 푸른 산과 맑은 강, 강변을 가득 메
운 자갈돌, 푸른 하늘과 구름 밖에 없던 이곳을 열심히 꾸미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요란하게 꾸
민 것은 아니다. 골지천에 여량교(餘糧橋)란 다리를 놓고, 그 너머에 여송정(餘松亭)이란 2층
정자를 지었으며, 거기서 송천 너머까지 소박하게 징검다리를 놓아 조금은 돌아가긴 하지만 이
제는 배에 의지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허나 나룻배는 이곳 아우라지의 상징, 그것을 없애는 것
은 갈비탕에서 갈비를 빼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관광용으로 남겨두어 호기심 가득한 관광
객을 실어나른다. 배삯은 편도 500~1,000원으로 저렴하다. (배삯은 변경될 수 있음)

이곳으로 흘러드는 송천을 양수(陽水), 골지천을 음수(陰水)라 하여 장마 때 양수가 많으면 대
홍수가 예상되고 음수가 많으면 장마가 끊긴다는 옛말이 전해오며, 남한강 1천리 길을 따라 목
재를 운반하던 뗏목 시발점으로 각지에서 모여둔 뗏꾼의 아라리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특히 정
선아리랑의 발상지로 유명한데, 그 애달픈 사연은 다음과 같다.

옛날 여량에 혼인을 약속한 남녀가 있었다. 총각은 뗏사공으로 나무를 팔아 돌아오면 처녀와 혼
인하기로 다짐을 하고 조양강에 배를 띄워 아우라지를 떠났다. 하지만 총각은 1년이 가도 2년이
가도 돌아오지 못했다. 아마도 가는 도중에 드센 여울에서 배가 뒤집혀 목숨을 잃은 듯 싶다.
기다림의 시간은 점점 절망적으로 변했다. 아우라지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처녀는 결국 아우라지
강에 몸을 던져 죽고 만다. 그녀가 그를 기다리며 애절한 마음을 적어 읆은 것이 바로 정선아리
랑의 시초라는 것이다. 이 전설 외에도 장마로 인해 강을 사이에 두고 만나지 못하는 남녀의 한
스러운 마음을 담은 것이 아리랑의 가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구전(口傳)으로 전해오던 아우라지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고자 여송정을 세우고, 그 옆에
처녀상을 1987년에 세웠는데, 지금의 것은 1999년에 새로 만든 것이다. 또한 아우라지비를 세워
이곳이 정선아리랑의 발상지임을 아련히 전한다.
그리고 속세에 거의 알려지진 않았지만 2개의 물줄기가 만나는 아우라지 자갈밭에서 신석기시대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유물은 어디 박물관이나 발굴을 주관한 대학교 수장고에서 잠
을 자고 있겠지만, 유적은 발굴 이후 사라져 지금은 흔적 조차 더듬을 수 없다. 이들 유적과 유
물을 통해 선사시대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살짝 알려준다.


▲  아우라지역에서 동쪽으로 바라보이는 왕재산(997m)

▲  단장의 사연을 담은 아우라지 노래비

▲  아우라지의 명물값을 톡톡히 하는 나룻배
예전에는 뱃사골이 직접 노를 저어서 배를 움직였으나, 지금은 강을 가로지른
굵은줄을 잡으며 배를 움직인다.


강 건너편까지 다리가 놓여져 굳이 돈 주고 느림보 나룻배를 이용할 필요는 없겠지만, 아우라지
의 상징이자 이 세상에서 자꾸만 사라지고 있는 우리의 정겨운 풍물의 하나이다. 시멘트 다리에
떠밀려 나룻배는 점점 그 설 자리를 잃어가고 이제는 손에 꼽을 정도만 간신히 명맥을 유지한다.


▲  평창에서 온 송천이 삼척에서 온 골지천과 하나가 되는 현장 ~ 아우라지

▲  조양강의 북쪽과 남쪽을 끈끈하게 붙들어 맨 여량교

초승달이 아우라지의 물을 뜨려는 달나라 토끼의 조정으로 인간 세상으로 깊히 내려오다가 그만
다리에 걸려 꼼짝달싹 못하는 것 같다.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한폭의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내는
아우라지의 풍경은 정말 집으로 살며시 훔쳐와 혼자서만 두고두고 보고 싶다. 이곳을 지나던 조
각구름도 아우라지의 풍경에 홀딱 반했는지 갈 길을 멈추고 한없이 머물고 있다.

▲  측면에서 본 초승달 모형
마치 날카로운 칼날을 보는 듯 하다.
저기에 손을 댔다가는 피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  아우라지의 명물, 아우라지 처녀상
오늘도 기약없는 님을 기다리는 것일까? 그녀의
모습에 처절함과 비장함이 엿보인다.


▲  아우라지를 굽어보는 여송정
1997년 주민들이 모든 1억원으로 지은 정자로 여량과 송천의 앞글자를 따서
여송정이라 하였다. 정선아리랑 설화에 나오는 총각은 여량에, 처녀는
송천 건너에 살았다고 전한다.

▲  송천을 따라 이어진 여송정 옛길
2010 정선비전 100대 시책사업의 하나로 조성된 길로 옛날부터 이곳
주민들이 이용하던 길이다.

▲  여송정에서 바라본 조양강, 그리고 정선의 산하
저 강물에 이 몸 하나 의지할 조그만 조각배를 띄우고
서울까지 흘러가 보고 싶다. 물론 위험한 짓이지만 ~~

▲  조양강 자갈밭에 조성된 돌탑들
이 주변에서 신석기시대 유적과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물론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아우라지를 정신없이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7시가 넘었다. 아쉽지만 내가 있어야 될 서울로
돌아가야 될 시간이다. 원래는 나전과 진부를 거쳐 서울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아우라지역에 청
량리로 가는 열차가 대기하고 있으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아우라지에서 잠시 머문 열차는 17시 10분 외마디 기적소리로 이곳의 정적을 살짝 깨뜨리며 첩
첩한 산주름에 묻힌 아우라지를 떠난다. 이리하여 강원도의 지붕 정선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
을 걷는다.

※ 정선 아우라지 찾아가기 (2015년 12월 기준)
* 청량리역에서 아우라지행 정선아리랑열차가 매일 8시 20분에 떠난다. (민둥산역 경유)
* 민둥산역에서 아우라지행 정선아리랑열차가 매일 2회 떠난다. (11:25, 15:15)
* 강릉에서 정선행 직행버스(1~2시간 간격)를 타고 여량 하차
* 정선터미널에서 강릉행 직행버스나 여량, 임계 방면 군내버스 이용
* 승용차로 갈 경우 (주차장 있음)
① 영동고속도로 → 진부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정선방면 59번 국도 → 나전3거리에서 임계
   방면으로 좌회전 → 나전 → 아우라지
* 구절리역에서 아우라지역까지 레일바이크를 이용할 수 있다. 거리는 7.2km로 동절기에는 1일
  4회(8:40, 10:30, 13:00, 14:50), 하절기에는 16:40분이 추가되어 1일 5회 다닌다. 이용요금
  은 2인승 25,000원, 4인승은 35,000원이며, 10대 이상 단체 예약시는 10% 할인된다. 레일바이
  크 예약 및 자세한 정보는 ☞ 여기를 클릭한다 (문의 ☎ 033-563-8787)
* 소재지 - 강원도 정선군 여량면 여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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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12월 4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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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의 어울림, 우리나라 민속마을의 성지 ~ 아산 외암리민속마을 (돌담길)

 


' 과거와 현재의 어울림 ~ 아산 외암리(外巖里) 민속마을 '
외암리민속마을 돌담길
▲  외암리의 자랑, 돌담길

 


름 제국(帝國)을 몰아낸 가을이 한참 천하를 수놓던 10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아산(牙山)
외암리민속마을을 찾았다.
일행들은 전날 당진(唐津) 왜목마을로 여행을 갔는데, 그들은 왜목 남쪽인 장고항에서 1박을
머물렀다. 나는 일이 있어서 함께 가지 못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그곳으로 달려가 9시에 도
착했다.

그들이 머물던 펜션은 장고항 서쪽 언덕에 둥지를 틀고 있어 서해바다와 장고항이 훤히 바라
보인다. 일행들과 어울려 아침을 먹고 시간을 때우니 어느덧 방을 비워야 될 시간이 문을 두
드린다. 그래서 자리를 정리하고 일단 삽교호(揷橋湖)를 거쳐 상경하기로 했다.

삽교호방조제 서쪽에 터를 닦은 삽교호관광지는 가을 행락객과 수레들로 그야말로 만원을 이
룬다. 바닷가에 만든 삽교호함상공원에는 해군 함정을 개조한 함상까페가 있는데, 이곳은 미
운 수준의 입장료를 내야되서 굳이 들어가지 않았다. 함상공원 외에 북쪽 갯벌 위에 나무 다
리를 놓아 산책로를 내었는데, 여기서 서해대교가 가까이에 바라보인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딱히 볼거리는 없으며, 조개구이와 회 등 해산물을 다루는 식당과 가게들이 즐비하여 먹거리
와 수산물시장으로서의 비중이 더 크다.

이렇게 삽교호 관광지를 둘러보니 시간은 13시가 되었다. 일행 대부분은 피곤함으로 인해 일
찍 상경하고 나를 포함한 팔팔한 7명은 그냥 가기가 아쉬워 주변 명소를 더 둘러보기로 하였
다. 내가 여러 곳을 제시했는데, 처음에는 안성(安城)의 모처로 길을 잡았으나 삽교호방조제
를 건너자 바로 마음이 변해 외암리 민속마을로 방향을 틀었다. 삽교호방조제를 넘으면 아산
땅이고 서일농원은 거리도 제법 머니 아산 지역의 명소를 둘러보는 것이 편의상 좋을 것이다.

유난히 신호등이 안받쳐주는 아산시내를 간신히 지나 송악에서 동쪽으로 들어서면 바로 외암
리이다. 마을 주차장은 이미 수레들로 완전 초 만원, 마을은 그야말로 나들이 인파로 넝실넝
실 파도를 이룬다. 수레를 세울 데가 없어 주차장을 몇 바퀴를 돌아서야 간신히 공간이 나와
그곳에 수레를 쑤셔 넣었다.

주차장을 기준으로 동쪽 개울(외암천) 건너가 외암리민속마을이다. 그 마을로 들어서려면 돌
다리를 건너야 되는데, 그 다리를 건너기 전에 매표소가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
본다. 그래서 일단 입장권(2,000원)을 구입하고 늦은 점심을 먹고자 적당한 주막을 물색했다.
허나 주막마다 사람들로 미어터지고 여기저기 서성인 끝에 매표소에서 50m 떨어진 주막에 간
신히 자리를 잡았다.

외암리도 식후경이라고 허기진 배를 위로하고자 무엇을 먹을까 궁리하다가 간단히 묵밥과 잔
치국수를 먹기로 했다. 둘 다 가격은 7,000원 선으로 시중보다 조금은 비싼 수준이다. 허나
우리에게는 꿩 대신 닭을 고를 권리는 없었다. 여기서 먹지 않으면 언제 먹을지 기약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음식을 주문했으나 주문량이 가득 밀려 그들을 먹기까지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일찌감
치 나온 밑반찬 김치를 젓가락으로 축내며 애타게 기다리는데 정말 1분이 1시간 같았다.
한 20분 정도 기다리니 그렇게나 고대하던 밥과 국수가 우리 앞에 펼쳐졌다. 나는 묵밥을 먹
었는데, 외암리라고 해서 딱히 특별한 맛은 없었다. 그냥 이 땅의 평범한 묵밥 수준, 너무나
배가 고팠는지 순식간에 그릇을 비우고, 동동주 1잔씩을 겯드리며 늦은 점심을 마친다. 그럼
여기서 잠시 외암리민속마을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외암리마을 주막에서 먹은 묵밥의 위엄


♠  500년 묵은 살아있는 민속박물관 ~ 아산 외암리(外巖里) 민속마을
중요민속문화재 236호


▲  논밭이 어우러진 외암리마을

설화산(雪華山, 440m) 서남쪽에 포근히 둥지를 닦은 외암리는 이 땅에 몇 안되는 오래된 민속마
을로 무려 500여 년의 역사를 품고 있다. 자연 환경을 잘 살린 전형적인 시골 마을로 한결같이
옛 모습을 잃지 않아 마을로 발을 들인 순간 조선 후기로 강제 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수많은 건축가와 조경전문가들이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격찬했으며, TV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도 각광을 받아 '태극기 휘날리며'.'취화선','야인시대(SBS)','찬란한 여명(KBS)','임
꺽정(SBS)' 등이 앞다투어 이곳을 거쳤다.

예안이씨의 집성촌(集姓村)으로 현재 마을 주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9채의 오래된
기와집과 60여 채의 초가를 비롯해 70여 호의 집들이 옹기종기 마을을 이루고 있다. 근래에 물
레방아 북쪽에 조성된 외암민속관의 기와집과 초가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으
며,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농업과 음식점, 전통음식 제조/판매로 생계를 꾸린다.

이곳 외암리에 처음 터를 닦은 집안은 '평택진씨' 집안이라고 한다. 그들이 언제부터 이곳에 살
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16세기 초반 참봉 진한평(陳漢平)의 맏사위로 예안이씨 온양파의 시조
인 이사종(李嗣宗)이 들어오면서 마을의 역사가 싹 바뀐다.
이사종은 그 시절 관습에 따라 처가살이―이 풍속은 조선 중기까지 이어짐―를 했는데, 진한평
이 죽자 그 재산은 딸 3명(아들은 없음)에게 분배―조선 중기까지 부모의 재산은 아들, 딸 모두
에게 균등 분배되었다―
되었다.

이사종의 후손이 번창하면서 외암리는 예안이씨의 터전으로 거듭났으며, 많은 선비와 학자, 과
거 급제자를 배출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숙종 때 대학자인 외암 이간(巍巖 李柬, 1677∼1727)
이 있으며, 11명의 생원(生員), 진사(進士)를 배출했다. 과거 급제자로는 고종으로부터 퇴호거
사란 호를 받은 이정렬(李貞烈, 1868~1950) 등이 있다.

▲  마을 앞에 놓인 섶다리

▲  외암리의 주산(主山)인 설화산

마을의 이름인 '외암'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마을 서쪽에 '시흥역'이란 역
참(驛站)이 있었으며, 그곳의 말을 오양골(현재 외암리)에서 길렀다고 한다. 그 '오양'에서 '외
암'이란 이름이 나왔다는 설과 '외암(巍巖) 이간' 선생의 호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마을의 구조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동고서저(東高西低)로 집들 대부분이 지형의 영향으로
서남향을 취하고 있다. 마을 서쪽과 몇몇 초가 뜰에는 경작지가 펼쳐져 있으며, 북쪽과 동쪽으
로 설화산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어 평온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설화산에서 발원한 계곡은 마을 동쪽을 거쳐 돌다리 부근에서 광덕산 강당골에서 시작된 외암천
을 만나 마을 북쪽으로 흐른다. 그 냇물을 끌여들여 마을 안에 인위적으로 조그만 물길을 만들
었는데, 이 물줄기는 마을의 여러 집을 거치면서 물을 제공해주며 곳곳에 곡수(曲水)와 아름다
운 연못을 만들어 마을을 한층 아리땁게 수식한다.
또한 풍수지리적으로 설화산은 불을 상징한다고 하여 마을에 물길을 만들어 화기(火氣)를 막고
자 하는 이른바 방화수(防火水)의 역할도 하고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시멘트를 바르거나 현대식으로 개조된 집들이 많았다. 그러다가 전통민속
마을로 지정되면서 국가 지원으로 '옛 모습 되찾기 사업'을 벌였고, 마을 주민들의 흔쾌한 참여
와 협조로 옛 모습을 되찾았다.

외암리에는 오래된 기와집이 9채 정도 있는데, 이들은 마을에서 꽤 권세있고 떵떵거리던 양반가
이다. 이들 모두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집을 세운 이의 관직명이나 연고 지명을 따라 참판댁,
감찰댁, 참봉댁, 송화댁, 영암댁(건재 고택), 신창댁 등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 모두 조선 말에
지어진 것으로 크기는 작지만 반가(班家)의 기품이 고스란히 깃들여져 있으며, 집주인의 공간인
사랑채와 아녀자의 공간인 안채, 그리고 제사공간인 가묘(家廟)를 갖추고 있고, 오래된 나무와
수석 등이 어우러진 전통정원을 지녔다.

이들 기와집 중에서 건재고택(영암군수댁)이 외암리 기와집의 대표격인데 사랑채 정원에는
소나
무와 은행나무 등을 마당 전체에 심고 왜국(倭國) 정원의 기법인 거북섬을 꾸며, 전통과 외래
조경이 섞인 조선 후기 절충형 정원을 이루고 있어 주목을 끈다. 또한 설화산에서 내려온 계곡
의 물줄기가 마당을 거쳐 연못으로 흐르게 하는 특이한 조경을 지녔는데, 특히 한국 음식 3대
명가(名家)의 하나로도 명성이 높다.
또한 퇴호거사 이정렬이 살던 참판댁은 툇마루 위에 영친왕(英親王)이 9살에 쓴 '퇴호거사(退湖
居士)란 현판이 자랑스럽게 걸려 있어 답사객의 눈길을 잡아 끈다. 이 집은 외암리의 명물이자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연엽주(蓮葉酒)로 유명하다. 이 술은 찹쌀로 빚은 누룩에 연근과 솔잎을
넣고 발효시켜 만든 술로 고종 황제에게 진상했다고 하며, 충남 지방무형문화재 11호이다.

▲  외암민속관 기와집과 장독대

▲  초가3간

마을을 이루고 있는 약 60여 채의 초가는 일반 백성들이 살던 집이다. 기와집과 달리 소박하고
단촐한 모습으로 초가삼간(草家三間) 그 자체이다.
현대화의 거친 물결에 그 개체수가 급속히 줄어들어 이제는 오래 숙성된 마을이 아니면 만나기
조차 힘든 초가, 하루 정도는 머물고 싶은 정겨운 우리의 옛 집이다. 하지만 그 집에 아예 눌러
살고 싶은 생각은 눈꺼풀만치도 없다. 왜냐? 나도 어쩔 수 없는 현대인이기 때문이다.

초가 대부분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집이란 아무리 오래되고 고귀한 집이라도 사람이 살고 있어
야 집으로써의 빛과 가치를 발한다. 사람의 때가 가득한 집은 건강 상태가 좋은 반면 텅 비어있
는 집은 아무리 건실하게 지어도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즉 사람의 손때가 집의 수명을 연장시
키는 비결이라 하겠다.

초가(집)의 형태는 'ㅡ', 'ㄱ'자형이 주류를 이루며, 집 내부를 옹성처럼 가린 'ㅁ'자형도 간혹
눈에 띈다. 뜰에는 감나무와 대추나무, 사과나무 등이 넓게 그늘을 드리워 주며, 몇몇 집은 작
은 텃밭을 갖추었다.

외암리의 자랑은 바로 돌담길이 아닐까 싶다. 마을을 찾은 나그네의 눈과 마음을 오래도록 붙잡
는 마을의 상징으로 그들로 하여금 외암리를 절대로 잊지 못하게 만든다.
마을 돌담의 길이는 무려 5.3km에 이른다고 하며, 높이는 거의 1.5m~2m 정도이다. 일종의 들여
쌓기 방식으로 지어졌는데, 초가와 기와집, 경작지의 담장 및 경계선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돌
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것이 마치 조그만 석성(石城)을 보는 듯 하다.

근래 시골마을의 돌담길이 계속 사라지자 문화재청에서 뒤늦게나마 몇몇 돌담길을 문화재로 지
정해 역사의 뒤안길로 가려고 하는 돌담길의 발목을 붙잡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  누렇게 익은 초가

▲  돌담길

담장 너머로 마구 가지를 늘어트린 정원수들은 단순하고 밋밋한 돌담을 더욱 멋드러지게 수식한
다. 가을에는 머리 위로 잘 익은 감이 뚝 떨어질 것 같은 돌담길, 그 길을 거닐면 누구나 사색
가가 되고 시인(詩人)이 되며, 조선시대 사람이 된다. 돌담길은 그야말로 과거로 통하는 타임머
신인 셈이다.
저 돌담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마치 어디엔가 빨려 들어가듯 그 끝을 향해 부지런히 발길
을 재촉한다. 정겹다 못해 집으로 살짝 가져가고 싶은 돌담길의 풍경~ 그 무거운 돌담을 가져갈
엄두가 나지 않아 사진으로 대리만족을 하련다.

마을에는 오래된 민속 유물이 즐비하다. 집집마다 디딜방아와 물레방아, 연자매, 상여, 장독대
등이 가득해 옛 생활상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  기와집 부엌

▲  그네 타기

※ 외암리 민속마을 찾아가기 (2015년 11월 기준)
① 아산까지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유구 방면 직행버스(1일 7회)를 타면 외암리 입구인 송악에서 내려준다.
  여기서 외암리마을까지 도보 10분
* 용산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대천역, 군산역, 익산역에서 장항선 열차를 타고 온양온천역에서
  하차
* 수도권 전철 1호선 신창행 열차를 타고 온양온천역 하차 (1시간에 1~2회꼴로 운행)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과 동서울터미널에서 아산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 인천과 수원, 청주, 대전(동부)에서 아산행 직행버스 이용
* 천안시외/고속터미널과 천안역(동부)에서 아산(온양온천역, 아산터미널)행 900번대 시내버스
  가 수시 운행
② 현지교통
* 온양온천역(1번 출구를 나와서 역전3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정류장 있음)과 아산터미널 건너
  편에서 아산시내버스 100, 101번을 타고 역촌1리에서 내리거나 송악면환승센터 종점에서 내린
  다. <역촌1리에서 도보 10분, 송악면환승센터(외암리마을 제2주차장)에서 도보 5분>
③ 승용차로 가는 경우 (주차장은 2곳이 있으며, 주차비는 공짜)
* 경부고속도로 → 천안나들목 → 아산 방면 21번 국도 → 장존교차로에서 송악 방면 → 외암3
  거리에서 좌회전 → 외암4거리에서 좌회전 → 외암리민속마을

※ 외암리 민속마을 관람정보 (2015년 11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2,000원 / 어린이,학생,군인 1,000원 (30인 이상 단체는 20% 할인, 민박 손님
  과 아산 시민은 공짜)
* 입장시간 : 9:00 ~ 17:30
* 먹거리는 매표소 부근에 잔치국수와 묵밥, 도토리묵, 두부김치, 파전, 동동주 등의 식사를 파
  는 식당이 여럿 있으며, 물레방아 서쪽 외암민속관에서 떡과 식혜를 저렴한 가격에 판다.
* 매년 10월에는 외암리의 대표 축제인 짚풀문화제가 열린다. 보통 3일 일정으로 열리며, 국악
  과 연극 공연을 비롯하여 관혼상제, 짚풀 만들기, 추수, 공장(工匠) 체험, 과거시험 등의 다
  양한 행사와 문화체험을 즐길 수 있다.
  (그 외에 음력 1월 14일에 장승제가 열리나 이건 마을 사람들의 전통의식 행사임)
* 오래된 초가와 기와집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별이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 외
  암리에는 20여 채의 가옥이 민박을 하고 있다. 수용인원은 4명에서 20명까지 다양하며, 취사
  도구와 현대식 화장실을 갖추고 있어 불편한 점은 별로 없다. 가격은 6만원에서 20만원선
  (입실은 14시, 퇴실은 11시까지이며, 바베큐도 가능함, 외암리마을 홈페이지에서 예약)
* 농촌체험(모내기 체험) 및 전통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공방체험과 다듬이체험 등은 주말
  에 상시적으로 체험이 가능하며, 떡메치기체험은 봄부터 가을까지 매주 주말에 운영한다.
* 외암민속관 주변에서 투호, 줄타기, 곤장치기, 짚풀 새끼꼬기, 다듬이, 떡매치기, 그네타기
  등을 무제한으로 체험할 수 있다.
* 외암리는 관광지이자 문화유산이기 이전에 주민들이 사는 생활공간이다. 허락 없이 들어가 집
  안을 기웃거리는 일이 없어야 되며, 그들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행동을 삼갈 것, 비공개 기와
  집과 초가는 그냥 담장 밖에서 바라보면 된다.
* 시간이 된다면 외암리 안쪽 강당골도 같이 둘러보길 권한다. 외암리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 소재지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84 (외암민속길 42-7 ☎ 041-540-2654, 541-0848)
* 외암리민속마을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민박, 축제, 전통/농촌체험 등)


▲  마을 동남쪽에 만든 코스모스 밭 너머로 바라본 외암리마을과 설화산


♠  돌다리, 물레방아 주변

▲  외암천에 발을 담군 돌다리를 건너면서 조선 후기로의 과거 여행이
시작된다. 돌다리는 마을로 들어서는 관문의 역할도 하지만
과거와 현재의 공간을 가르는 경계선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속세에서 외암리마을로 들어가려면 매표소 북쪽에 난 돌다리를 건너야 된다. 그 다리 외에는 딱
히 이어주는 공간이 없다. 입장료 아낀다고 괜히 대놓고 개울을 건너거나 개울을 거슬러 올라가
는 짓은 하지 않도록 한다.


▲  외암 이간 신도비(神道碑)

매표소 남쪽에는 훤칠한 키의 비석 하나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딱 봐도 예사롭지 않은
모습인데, 그에 대한 안내문이 없어 사연을 모르는 관광객 태반은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외암
리마을에 눈이 먼 나머지 눈길 조차 주지 않는 것이다. 나 역시 그 비석을 외암리마을의 내력(
來歷)을 담은 사적비(事蹟碑)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외암 이간의 신도비였다.

이간(李柬, 1677∼1727)은 외암리 출신으로 마을 이름을 그의 호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을 정도
로 이곳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러니 외암리에 왔다면 그의 신도비와 묘소를 둘러보는 것
이 외암리와 이간에 대한 당연한 예가 아닐까 싶다.

이 비석은 19세기 초반에 세워진 것으로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이 비문(碑文)을 썼다. 나중
에 윤용구(尹用求, 1853~1939)가 다시 쓰고, 이간의 6세손인 이정렬(李貞烈)이 고쳐 썼으며, 원
래는 이간 묘소 앞에 있던 것을 관리를 위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  물레방아를 품은 초가와 바위글씨가 새겨진 바위(초가 오른쪽)

▲  반석에 새겨진 바위글씨 동화수석(東華水石), 외암동천(巍岩洞天)

물레방아 동쪽 바위에는 2개의 바위글씨가 선명하게 박혀있다. 마을로 들어서는 다리 밑에 있음
에도 그들에게 눈길을 주는 이들은 별로 없는데, 내 일행들 역시 물레방아만 보였지 글씨까지는
몰랐다고 한다. 그야말로 등잔 밑이 어두운 셈이다.

이들 바위글씨는 서쪽에는 동화수석(東華水石), 동쪽에는 외암동천(巍岩洞天)이라 새겨져 있는
데, 동화수석 글씨는 높이 50cm, 너비 2m 크기이다. 그 우측에는 기미(己未)란 글씨가, 좌측에
는 이백선서(李伯善書)라고 쓰여 있어 이백선(1893~1969)이란 인물이 기미년에 새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여기서 기미년은 언제일까? 그 유명한 3.1운동이 일어난 해가 바로 기미년(1919년)
이다. 이백선의 생애에서 기미년은 1919년 딱 하나 뿐이므로 자연히 1919년이 된다. 그리고 동
화는 우리나라를 뜻한다.
외암동천 글씨는 높이 52cm, 너비 175cm로 끝에는 이용찬서(李用瓚書)라 쓰여 있어 이용찬이란
사람이 썼음을 알 수 있다. 이용찬은 이간의 후손으로 해방 이후 판사를 지냈다.

외암동천에서 외암은 당연히 마을의 이름이고, 동천(洞天)은 신선들이 기절할 정도로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곳에 부여되는 이름이다. 물레방아 주변 개울가에 넓은 반석이 깔려있고 나름
대로 괜찮은 풍경을 자아내니 이용찬이 그렇게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또한 이곳은 외암리 사람
들의 피서 장소이기도 하다.


▲  외암리와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외암천 (정면에 보이는 다리가 섶다리)

▲  원두막과 장승 (돌다리 북단)
돌다리를 건너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외암민속관,
전통민속체험장으로 이어지며, 오른쪽은 외암리마을이다.

▲  식혜와 떡을 파는 초가집 매점
여기서 떡메치기 체험을 할 수 있다. 식혜와 인절미는 2,000원 선으로
가격도 저렴하고 양도 제법 많다.


♠  외암민속관, 외암 이간묘 주변

▲  제각각의 표정과 개성을 지닌 장승들
그들의 익살스런 모습에 마을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火魔)는
자신의 본분조차 잊고 돌아설 것이다.

▲  외암민속관 기와집

▲  기와집 동쪽에 조성된 정자와 연못

물레방아 북쪽에는 외암민속관과 그곳에 딸린 초가와 기와집, 전통문화/민속놀이 체험현장이 있
다. 외암민속관 일대는 얼핏보면 외암리마을의 일부처럼 보이지만 엄연히 별도의 공간으로 전통
가옥과 다양한 전통문화 체험 및 외암리마을의 보조를 위해 근래에 터를 다졌다.

이곳에 있는 집들은 거주용이 아닌 전시용으로 한국민속촌의 가옥처럼 실제에 가깝게 재현되어
있으며, 민속관에는 이곳을 거쳐간 드라마, 영화와 관련된 상영물과 자료 등을 볼 수 있다. 또
한 전통혼례를 비롯하여 방망이 다듬이, 줄타기, 투호, 제기, 새끼꼬기, 곤장치기 등을 온몸으
로 즐길 수 있으며, 옛날 농사 기구와 생활유물을 기와와 초가, 그 주변에 골고루 배치하여 볼
거리를 가득 선사한다.


▲  장독대와 짚풀로 만든 김치의 보금자리 김치각
옛날 단양(丹陽) 시골집에 저런 김치각이 있었는데(1990년대 초반까지) 이제는
민속촌이나 고택(古宅)에서나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제아무리 김치냉장고가 설친다 한들 김치각의 김치만은 못할 것이다.

▲  서로 쌍둥이 같은 김치각
갑자기 김치각의 김치가 너무 먹고 싶다. 어디가야 흔쾌히 먹을 수 있을까..?

▲  기와집 서쪽에 초가 창고

▲  이제는 듣기조차 힘든 다듬이 체험 현장
겉으로는 엄청 쉬워 보이는데, 실제로 해보니 많은 요령이 필요하다.

▲  투호놀이 현장
저 동그란 통에 투호를 골인시키는 것이 은근히 어렵다.
10번 던져서 1~2번 가까스로 들어갈 정도니 말이다.

▲  줄타기 현장
줄의 거리는 짧아도 저기에 발을 올리면 엄청 길어 보일 것이다.
남의 도움 없이 줄을 완전히 통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는 거의 5m도 못가서 줄 밖으로 떨어졌음~~

▲  짚풀 새끼꼬기 현장
원두막에 앉아 한가롭게 새끼를 꼬는 것도 보기와 다르게 쉽지가 않다.

▲  곤장 체험 현장
저기에 십(十)자 모양으로 누워 무지막지하게 생긴 곤장을 맞는 현장.
겉으로 보면 별로 아프지 않을 것 같지만 제대로 맞으면 정말
일어나지도 못한다.
곤장 체벌에는 태형(笞刑)과 장형(杖刑)이 있는데,
태형은 곤장 50대, 장형은 100대이다.

▲  누런 초가집의 뒷모습

▲  전통민속체험장, 외암민속관 뒤쪽에 나란히 자리한 원두막 3형제

▲  비스듬히 누워있는 돌부처(마애불)

석축 밑에 고된 몸을 기대고 선 돌부처, 깨진 돌조각에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튼 마애불(磨崖佛
)로 연화대(蓮花臺)에 앉아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며, 살며시 미소를 선보인다. 불상 앞에
는 중생들이 소망을 들이밀며 얹혀놓은 돌들이 모이고 모여 조촐한 돌탑을 이루고 있다.
이 석불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으며, 마을 부근에서 수습해 온 것으로 보인다.


▲  외암리마을의 성지(聖地), 외암 이간 묘소

전통민속체험장 서북쪽으로 송림(松林)이 우거진 언덕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곳에 가려면 밭
을 거쳐야 되는데, 밭 입구에 설치된 조그만 문을 열고 그 언덕을 100m 가량 들어가면 외암리가
낳은 대학자이자 이곳의 성역인 외암 이간의 묘역이 모습을 비춘다.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 묘소는 이간과 그의 부인 파평윤씨의 합장묘(合葬墓)로 봉분의 크기는
일반 백성의 무덤처럼 조그만하다. 봉분(封墳) 앞에는 무덤의 주인이 적힌 비석과 상석(床石)
밖에 없어 정말 조촐한 모습이다. 대신 소나무가 울창하여 그 허전함을 달래주고 있으며, 남쪽
과 서쪽이 확 트여 경치는 좋다.

외암 이간은 1727년 3월 14일에 50세의 나이로 별세하여 그해 5월 온양군 유곡에 무덤을 썼는데,
1961년 3월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여 마을 곁에 있게 했다. 신도비 역시 마을로 옮겨와 매표소
부근에 두었다.

이곳은 보통 문(밭 입구에 있는 문)이 닫혀져 있고 적당한 안내문이 없어서 속사정을 모르는 대
부분의 속인들은 거의 찾지 않는 그야말로 아는 사람만 들어오는 소수의 공간이다.


▲  석축 위에 터를 다진 기와집과 누런 감이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


♠  과거와 현재의 어울림 ~ 외암리마을 둘러보기

▲  논과 어우러진 외암리마을 서부

500년의 장대한 역사를 간직한 외암리마을은 그 역사만큼이나 규모가 크다. 동서의 길이가 거의
500여m에 이르며, 외암민속관 주변을 포함하여 구석구석 살펴보려면 사진 찍는 시간과 이동시간
을 고려해도 적어도 5~6시간 이상은 걸린다.
허나 관광객 대부분은 마을의 절반도 살피지 않고 가버린다. 그래서 매표소와 거리가 멀수록 사
람의 수는 반비례하여 사람 보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마을 서쪽에는 논과 밭이 펼쳐져 있는데, 초가들이 그런 논과 어우러져 목가적(牧歌的)이고 편
안한 풍경을 연출한다. 속세에서 오염된 안구가 제대로 정화되어 눈이 번쩍 뜨며,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벼이삭은 고개를 숙이며, 가을 추수의 기쁨을 기다린다.


▲  풍년예감 ~ 외암리 평야

▲  교수댁 앞에 놓인 빛바랜 디딜방아
곡식을 찧는 본래의 목적은 상실되고 전통체험 및 호기심 충족을
위한 관광용으로 살아가고 있다.

▲  양반가의 품격이 드러난 교수(敎授)댁

교수댁은 외암리를 이루고 있는 9개의 오랜 기와집의 하나로 이사종의 13세손인 이용구(李容九,
1854~?)가 경학(經學)으로 성균관교수(成均館敎授)를 지냈다고 해서 속편하게 교수댁이라 불린
다.

원래는 사랑채와 안채, 행랑채, 별채를 지니고 있었으나, 지금은 안채와 행랑채, 사당만 남았다.
굳게 입을 봉한 대문 앞에 좌절하며 길을 돌아서기는 했지만 10월 중순 짚풀문화제 때는 쿨하게
대문을 연다고 하며, 그때는 전통성년의식과 야생화전시회 등이 열린다.


▲  굳게 닫힌 교수댁 대문 - 대문짝에는 위정자들이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국태(國泰), 민안(民安)이 쓰여있다.

▲  담장 너머로 본 교수댁
교수댁은 양반가이지만 기와를 얹힌 담장이 아닌 외암리에서 통용되는
수수한 돌담을 집 주변에 둘렀다.

▲  버드나무가 길게 생머리를 늘어뜨린 교수댁 앞길

▲  건재고택<(建齎古宅) 영암군수댁) - 중요민속문화재 233호

건재고택은 외암 이간의 5대손이자 전라도 영암군수(靈巖郡守)를 지냈던 이상익(李相翼, 1848~
1897)이 살던 집이다. 그가 영암군수를 지냈다고 하여 영암군수댁이라 불리기도 하며, 외암 이
간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간의 집과 현재의 집은 자리만 같은 뿐, 완전 틀림)

이상익이 기존의 집을 지금의 모습으로 새로 지었고, 그의 아들인 이욱렬(李郁烈) 때에 비로소
완성을 보았는데, 이욱렬의 호인 건재(建齋)를 따서 건재고택이라 불린다. 현재는 그게 정식 명
칭이다.

문간채와 사랑채, 안채를 중심으로 나무광과 곳간채, 가묘를 부속으로 두었으며, 사랑채 앞에는
자연경관을 위주로 정원을 만들어 연못과 정자를 만들었다. 소나무와 은행나무, 감나무 등의 나
무를 마당 전체에 심고, 왜열도 정원의 기법인 거북섬을 꾸며, 우리의 전통식과 왜열도 조경이
혼합된 조선 후기 절충형 정원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게다가 설화산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마당을 거쳐 연못으로 가게 했는데, 연못자리에는 원래 별당이 있었다고 한다.
담장에는 기와를 얹혀 다른 집과 차별을 두었고, 집안에는 300여 점의 오래된 유물이 보관되어
집의 가치를 더욱 돋군다. 특히 이간의 교지(敎旨)는 입향조(入鄕祖, 어떤 마을이나 장소에 제
일 먼저 정착한 사람)의 근거자료가 된다.

외암리마을의 대표적인 기와집으로 평상시에는 굳게 닫힌 대문 앞에 발길을 돌려야 된다. 다만
짚풀문화재 때는 관람이 가능하며, 전래동화극을 상영하기도 한다.


▲  건재고택의 사랑채 정원 (담장 너머에서 찍음)

▲  건재고택 앞에 푸르게 자라난 은행나무 (예전 봄에 찍은 사진)

▲  참판댁 사랑채 - 중요민속문화재 195호

외암리마을 안쪽 깊숙한 곳에는 참판댁이라 불리는 넓은 기와집이 있다. 이 집은 외암리가 낳은
위인의 1명, 퇴호 이정렬(退湖 李貞烈, 1868~1950)이 살던 곳으로 고종 때 이조참판(吏曹參判)
을 지냈다. 그래서 참판댁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정렬의 할머니는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의 이모로 그런 인연으로 황후와 친분
이 두터웠다고 한다. (이들은 촌수로 어떻게 되는지..?) 황후는 그에게 필묵과 첨지(籤紙)를 하
사했으며, 17세에 황후에게 왜국을 경계할 것을 진언했다고 한다.

2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이조참판까지 올랐으나, 1902년 왜국에 빌붙어 나라를 말아먹는 고위관
료들의 꼬락서리를 보다 못해 그들의 처벌을 고종에게 건의했다. 허나 그것이 통할 리는 없을
터, 그 뜻은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에 그는 나라를 팔아먹는 조정의 신하가 될 수 없다며,
관직을 버리고 외암리로 낙향, '칠은계'를 조직하여 충남지역 항일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  참판댁에 걸린 퇴호거사(退湖居士) 현판

참판댁에는 금색으로 '퇴호거사'라 쓰인 현판이 있는데, 이는 고종의 아들인 영왕(英王=영친왕)
이 9살에 친히 쓴 현판이다. 이 집안의 자랑이자 보물로 이정렬은 이 현판을 매우 애지중지했다
고 한다. 퇴호거사란 이름은 이정렬의 또 다른 호로 고종이 내린 이름이다.


♠  외암리마을 마무리

▲  마을의 오랜 내력이 차곡차곡 화석(化石)을 이룬 외암리 돌담길

▲  인적이 없는 어느 외암리 돌담길
맨몸이 허전했던 탓일까? 추위에 약한 탓일까? 아니면 치장하고자 함일까?
수풀과 꽃으로 몸을 덮은 돌담이 적지 않다.

▲  늦가을도 가는 길을 멈추고 쉬어가는 외암리 돌담길
돌담 위에 여장만 설치하면 영락없는 성곽(城郭)이나 보루(堡壘)가 된다.

▲  서로 대비되는 돌담길 (녹음이 우거진 건재고택 입구)
왼쪽 돌담은 기와가 입혀지고 뭔가 있어 보이는 양반가 담장,
오른쪽은 성처럼 쌓여진 수수한 모습의 서민가 담장

▲  600년 묵은 느티나무 - 아산시 보호수 8-89호

외암리마을을 남북으로 가르는 간선 골목길 중간, 건재고택 부근에 600년 묵은 느티나무가 넓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높이 21m, 둘레 5.5m에 이르는 외암리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
무로 장승제가 열리는 음력 1월 14일에 목신제(木神祭)를 지낸다.

나무의 나이가 600년을 넘었다고 하니 마을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있었을 것이며, 마을의 흥망성
쇠를 묵묵히 지켜보며 마을을 지키던 당산(堂山)나무이자 마을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쉼터와 그
늘을 제공하는 정자나무로써 이곳의 보석 같은 존재이다.


▲  논과 어우러진 마을의 동남부 ▼


▲  서서히 황금빛으로 도약하는 외암리 들녘

▲  사람과 가을꽃의 일그러진 만남 ~ 사람은 싱글벙글, 꽃은 시름시름.
인증샷을 찍는 것도 좋지만 너무 코스모스를 괴롭히지는 말자~~!

▲  가을의 아름다움이 모두 이곳에 깃들여진 듯 하다.

점심 먹는 시간을 포함하여 2시간 정도 마을을 둘러봤다. 욕심 같아서는 송화댁이 있는 안쪽까
지 들어가고 싶었으나 일행들의 요구로 절반만 둘러보고 길을 돌아섰다. 어차피 예전에 대부분
둘러본 적이 있고, 앞으로도 기회는 많으니 그리 아쉬울 것은 없다. 게다가 일행들은 나를 빼고
전날 밤새고 술마신 탓에 많이 지쳐
있었다.

이렇게 하여 외암리 가을 나들이는 다음의 인연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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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11월 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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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좌청룡을 거닐다 ~ 낙산 가을산책 (이화마을, 낙산공원, 한양도성)

 

' 서울 도심의 영원한 좌청룡, 낙산(駱山) '
(한양도성, 이화마을, 낙산공원)

▲  낙산공원 한양도성 바깥길 (낙산에서 동소문 방향)


가을이 여름 제국(帝國)의 잔여 세력을 힘겹게 몰아내며 천하를 진정시키던 9월 끝무렵에
서울의 좌청룡인 낙산을 찾았다. 서울 땅을 거진 꿰고 사는 본인이지만 정작 낙산은 아직
까지 발자국도 남기지 못한 채, 미답처로 쭉 남아있었다.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건만 인
연은 정말 지지리도 없던 곳이었지. 그러다가 이번에 억지로 인연을 갖다 붙여 낙산의 품
을 찾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영원한 보물 1호, 동대문<東大門, 흥인지문(興仁之門)>에서 일행을 만나 낙산
의 남쪽 관문이나 다름없는 동대문성곽공원을 찾았다. 이번 낙산 투어는 이곳에서 시작된
다. (본글에서 한양도성과 한양성곽은 같은 곳임)

 


♠  동대문성곽공원 (한양도성)

▲  동대문 쇼핑타운을 굽어보는 동대문성곽공원

동대문성곽공원은 이대병원을 밀어내고 동대문 북쪽에서 잠시 끊긴 한양성곽(漢陽城郭)을 복원
하면서 만든 공원이다. (이대병원은 양천구 목동으로 이사감) 성 안쪽이자 하얀색의 병원 건물
이 있던 그 자리에는 푸른 잔디를 곱게 입혔고, 갖은 들꽃들이 미소를 지으며 나그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그리고 공원 중앙에는 네모난 정자를 지어 나그네의 조촐한 쉼터가 되어준다.

공원 북쪽에는 성곽을 따라 낙산으로 올라가는 한양성곽길이 여장과 함께 펼쳐져 있으며, 흥인
지문4거리(로터리)와 맞닿은 성곽 남쪽에는 동대문교회가 있었으나 공원 확장을 위해 2014년에
철거되었다. (지금은 교회 부속 건물만 일부 남아 있음)

근래에 조성된 공원이라 성곽 외에는 딱히 볼거리는 없지만 도심 속의 소중한 쉼터로 사막 속의
오아시스처럼 그 가치는 돋보이며, 낙산의 남쪽 관문으로 이곳을 기점으로 낙산 나들이를 벌이
는 것도 괜찮다. 또한 공원 북쪽에는 서울디자인지원센터가 있는데, 그 안(1~3층)에 2014년 7월
31일에 개관된 한양도성박물관이 담겨져 있어 볼거리를 더해준다.
이곳은 문을 연지 얼마 안된 아주 따끈따끈한 박물관으로 서울 도심의 갑옷이던 한양도성의 모
든 것을 담고 있는데, 1915년 왜정에 의해 가루가 되버린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의 유일한 흔
적인 돈의문 현판(1749년에 제작됨)이 100년 만에 처음 외출을 했다. 그밖에 동대문 추녀와 지
붕에 달던 용머리와 잡상(雜像) 8점, 한양도성을 돌며 촬영한 순성(巡城) 체험 3면 영상 등이
있으며, 박물관 개관 기념으로 9월 14일까지 남산 회현동(會峴洞)과 남산도서관 주변에서 발굴
된 유물과 성돌, 발굴 성과를 다룬 '남산에서 찾은 한양도성' 특별전을 열었다.

★ 한양도성박물관 관람정보 (2014년 10월 기준)
* 관람요금 없음
* 관람시간 : 평일 9시~21시 / 토요일과 일요일, 휴일 9시~19시 (겨울은 18시까지)
*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 9,10번 출구를 나오면 흥인지문4거리이다. 여기서 성곽이 보이는 동
  북쪽(10번 출구는 동쪽)으로 건너가면 동대문성곽공원으로 공원 북쪽에 박물관을 머금은 서울
  디자인지원센터가 있다. (박물관은 내부 1~3층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 70-6 (율곡로 208, ☎ 02-2152-5800)


▲  동대문성곽공원 정자(亭子)
공원을 조성하면서 지은 1칸짜리 조촐한 정자로 이름은 아직 없다.
그 흔한 이름 현판도 없음..

▲  낙산으로 인도하는 한양도성길 (동대문성곽공원 북쪽) ▼

※ 조선의 수도를 지키던 한양(漢陽)의 듬직한 갑옷, 한양도성(漢陽都城) - 사적 10호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국도(國都)를 개경(開京)에서 남경(南京)이던 한양으
로 천도했다. 그의 최측근인 정도전(鄭道傳)은 도성축조계획을 세우고 우선 경복궁과 종묘(宗廟
), 사직단(社稷壇)을 1395년까지 완성한 다음, 1396년 1월 도성 축성에 들어갔다.

한양성곽 코스는 정도전이 모두 짰으며, 수도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내사산(內四山)이라 불
리는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을 모두 끼고 돌게 했다. 성곽의 길이는 총 59,500자
(18.2km)로 고려의 국도인 개경보다는 형편없이 작은 수준이며, 평지에는 토성(土城), 산지에는
석성(石城)을 세웠다.
도성 축성을 위해 전국에 징발령(徵發令)을 내려 11만 8천명을 동원, 49일 동안 성곽의 대부분
을 완공했고, 농사철에는 축성을 잠시 접고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도록 했다. 농사를 지
어야 뜯을 세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농사철이 끝나기가 무섭게 8월에 79,400명을 징발
하여 다시 49일 동안 빡세게 굴려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고 4대문과 4소문까지 만들어 도성 축조
는 일단 마무리가 되었다.

이후 토성으로 지은 부분이 마음에 걸린 세종은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업그레이드 하기로 결정
했다. 그래서 1422년 1월 전국에 약 32만 2천명을 동원하고 기술자 2,200명을 소환해 보수 공사
를 벌였다. 그 당시 한양 인구가 10만 명이었다고 하니 성곽 보수 공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가늠케 해주며, 이때 동원 규모는 조선 최대였다.
허나 아무리 현군(賢君)이라 추앙을 받는 세종이지만 꽤나 공사를 닥달했던 모양이다. 공사 중
에 사망한 인부가 872명에 달했으며, 그렇게 피와 땀을 바쳐 완성시킨 성곽이 지금의 한양도성
이다.

세종 때 피나는 업그레이드 작업으로 도성은 성곽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城
) 6곳, 곡성(曲城) 1곳, 성랑(城廊) 15곳을 갖추게 되었으며,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
監)을 두어 도성을 관리하게 했다. 이때 워낙 성곽을 단단하게 다져나서 20세기까지 붕괴된 적
도 없고, 보수도 겨우 1차례만 벌였다. (인위적으로 철거된 것은 제외)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쪼잔한 선조(宣祖)는 신하들을 데리고 평양(平壤)으로 서둘러 줄행랑
을 쳤다. 왕을 비롯한 위정자들이 앞장서서 도망치니 누가 도성을 방어하겠는가? 그래서 왜군은
손바닥에 침 한번 뱉는 정도로 손쉽게 도성을 점령했다. 아무리 도성을 단단하게 만든 들 무능
한 집권층 앞에서는 그 성곽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허나 수성전(守城戰)이 없던 탓에 성곽과
성문은 피해가 없었다.

1704년(숙종 30년) 숙종(肅宗)은 혹시나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을 대비해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
치고 성곽을 보수했다. 이때 버려져 있던 북한산성(北漢山城)도 크게 손질 했는데, 그 안에 행
궁(行宮)과 여러 관청, 창고를 만들고 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쌓아 도성의 수비력
을 한층 드높였다.
이렇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한양을 에워싸며 위엄을 드러낸 한양성곽은 근대화의 물결이 요동치
던 1899년 이후 적지 않은 수난을 당하게 된다.

1899년 조선황실은 미국(米國) 사람인 콜브란(Corlbran)과 합작을 하여 한성전기주식회사를 만
들었다. 콜브란은 고종 황제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잠든 홍릉(洪陵)까지 편하게 가시라며
전차(電車)의 필요성을 주청했다. 그래서 그해 12월 서대문에서 종로를 경유하여 홍릉 남쪽인
청량리(淸凉里)까지 이어지는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이때 전차의 통행을 위해 동대문과 서대
문 양쪽 성벽을 싹둑 자르면서 성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도성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0년에는 종로와 용산(龍山)을 잇는 전차를 만들면서 남대문 양쪽 성벽도 잘랐다. 그
래도 여기까지는 황제의 명으로 백성들의 교통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니 이해는 된다. 허나 문
제는 1905년 이후이다.

을사조약(乙巳條約) 이후 왜국(倭國)이 서울에 설치한 통감부(統監府)는 1908년 성벽처리위원회
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한양성곽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이때 서소문<소의문(昭義門)>이 사라졌으
며, 1910년 이후 서울 시가지 개발과 도로 확충을 이유로 성벽 곳곳을 잘랐다. 그래서 서대문<
돈의문(敦義門)>과 동소문<혜화문(惠化門)>이 사라지고, 동소문이 있던 고개는 그 고개마저 깎
여 도로가 생겼다. (현재 혜화동로터리에서 돈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또한 어둠의 시절이 끝나기가 무섭게 6.25가 터지면서 왜정(倭政) 때 이상만큼이나 무거운 상처
를 입었으니, 이때까지 제대로 살아남은 성문은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 창의문(자
하문) 등이며, 남소문<(南小門, 광희문(光熙門)>과 숙정문은 홍예문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성
벽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남산, 낙산, 장충동, 성북동 등 산 중턱만 남았고, 시가지 쪽은
대부분 녹아버렸다.

이렇게 영욕의 상처를 안고 쓰러진 성곽을 뒤늦게나마 1975년 복원사업을 벌여 광희문과 숙정문
을 복원하고, 남아있던 성곽 10.5km를 수리했다. 이후 형체도 없이 사라진 동소문을 다시 일으
켜 세우고, 사라진 부분의 성곽을 조금씩 복원하여 옛날의 면모를 서서히 회복하고 있다. 또한
근래에는 시민과 답사객을 위해 성곽을 따라 긴 탐방로를 만들어 인기가 대단한데, 북악산 주변
과 인왕산 정상 주변을 제외하고는 언제든지 출입이 가능하다. 다만 성곽이 사라진 부분은 인근
골목길을 이용해야 된다. (사직터널 윗쪽~월암근린공원, 서울시 교육청~남대문, 남대문~남산육
교, 장충체육관~광희문, 광희문~동대문, 동소문~성북동 서울과학고 북쪽)

예전에는 한양도성을 서울성곽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한양도성, 한양성곽이라 부른다. 허나 서울
성곽이라 불러도 별 무리는 없다. 어차피 서울에 있는 성곽이고 서울이란 이름은 조선 초기부터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서울이란 이름도 이 성곽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설화
한토막이 전해온다. (선바위 전설과 조금 비슷함)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국도로 삼고 어떤 코스로 성을 쌓을지 고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난
데 없이 큰 눈이 내렸는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한양 주위로 마치 성곽 모양으로 눈이 쌓여져
있던 것이다. 그래서 태조는 하늘이 친히 성곽 자리를 정해준 것이라 여겨 눈이 쌓인 자리에 성
을 쌓게 했다. 눈이 쌓인 자리, 즉 눈울타리<그것을 한자로 하면 설울(雪圍)>에 따라 성곽을 쌓
았다고 하여 설울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나중에 서울로 변했다고 한다.
서울은 이 땅의 수도 이름이기도 하지만 나라의 수도를 뜻하는 명사이기도 하여 수도(首都) 대
신 많이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몽골의 서울은 울란바토르' 이런 식으로 말이다.


▲  낙산에서 동대문으로 내려가는 한양도성 (이화마을 남쪽)

▲  이화마을 남쪽을 지나는 한양도성

▲  이화마을 남쪽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창신동(昌信洞)과 숭인동(崇仁洞), 신설동을 비롯하여
멀리 아차산(阿且山) 능선과 남한산성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낙산에 둥지를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 벽화 및 달동네의
성지(聖地)로 크게 유명세를 타고 있는 ~ 이화(梨花)마을

▲  이화마을 옆구리로 흘러가는 한양도성

서울에 있는 마을 가운데 가장 세상에 많이 알려진 마을은 어딜까?? 아마도 북촌한옥마을(북촌)
과 이곳 이화마을이 아닐까 싶다.
이화마을은 낙산 남쪽에 둥지를 튼 도심 속의 달동네로 행정 구역은 서울 종로구 이화동(梨花洞
)이다. 조선시대에는 살구나무가 많이 자라던 한양도성의 외곽으로 마을이라고 해서 시골마을이
나 산골 마을은 아니다. 그냥 낙산 남쪽 자락의 이화동 달동네를 이화마을('이화동 벽화마을'이
라 불리기도 함)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 마을은 서민들의 애환과 삶의 향기가 깊게 서린 산동네(달동네)로 근대화의 바람을 타고 서
울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1960~70년대에 조성된 달동네의 하나이다. 주황색 기와의 조
그만 집과 판자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거대한 산동네를 이루었는데, 그곳에서 서민들은 미래에
대한 꿈을 조금씩 싹틔우며 힘겹게 서울살이를 했다.
그렇게 서울에서 제법 비중을 이루며 형성되던 달동네는 1990년대 이후 개발의 칼질로 강제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동네 구조가 바뀌고 달동네의 초췌한 집 대신 아파트와 빌라, 단독주택 등
이 그 자리를 채워나간 것이다. 이화마을 역시 이런 세월의 변화는 감히 거스를 수가 없어 주황
색 기와집은 많이 사라진 상태이나 지붕 색깔과 집 외형만 조금 바뀌었을 뿐, 동네 구조와 가옥
구조, 주민들의 삶은 거의 그대로라 달동네의 모습은 아직 여전하다.

어린 시절을 달동네(금호동, 약수동)에서 어렵게 살았던 본인인지라 이곳에 들어서니 정감이 참
많이 간다. 그 시절 온갖 추억을 소환하는 빛바랜 일기장 같은 곳, 이곳을 거닐면 나의 어린 시
절의 모습, 또는 옛 친구를 만나는 것은 아닐까? 마음까지 두근거린다. 달동네를 누비며 위엄을
날리던 어린 시절, 그때 나의 꿈은 얼마나 실현이 되었을까? 당시의 순수함은 얼마나 남아있을
까? 지금 나는 어떠한가? 등등 어렸을 때를 바탕 삼아 잠시 나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게 만드는
거울 같은 곳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급하게만 변해가는 세상도, 빛의 속도로 흘러가는 세월의 거친 흐름도 이곳만
큼은 고삐를 늦추며 천천히 흘러간다. 1960~80년대 고향을 떠나 서울에 힘겹게 둥지를 튼 이들
의 초심이 서린 곳이라 세월도 이곳에선 자신의 초심을 되새기는 모양이다. 숨이 막힐 정도로
번잡한 도심이 바로 밑이지만 이곳만큼은 그런 도심을 비웃듯 조용하고 아늑하다.


▲  이화마을에서 바라본 남산과 서울타워

이화마을이 속세에 이름 4자를 드러낸 것은 바로 마을을 수놓고 있는 그림 때문이다. 2006년 서
울시에서 'Art in City 2006'이란 프로젝트를 위해 구성된 '공공미술추진위원회'에서 소외된 지
역의 시각적인 환경을 개선하고자 적당한 곳을 물색하다가 이화마을을 점찍고 '낙산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래서 70여명의 작가들이 찾아와 집과 담장, 계단에 그림을 그리고 조형물을 설치했
는데, '남의 집 벽에 뭐하는 것이야?' 반감을 가지던 동네 주민들과 호흡을 같이하고자 동네의
역사와 동네 주민들의 옛 기억, 풍물, 희망을 수집하고 정리해 그림에 반영했다. 그렇게 하여
우울한 흑백 분위기에 이화마을은 그림을 품은 색채감 돋는 벽화마을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그저 하얀색과 회색, 주황색 기와가 전부이던 우중층한 동네에 알록달록 색깔을 머금은 그림을
입혀놓으니 동네가 확 달라보이고 동네 사람들의 표정도 희망 어린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림이 그려진 마을로 사람들의 입과 인터넷, 언론을 통해 속세에 널리 알려지면서 이곳을 찾는
외지인의 발길도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늘어났고, 외국인 관광객까지 불이 나게 찾아오면서 이제
는 서울의 이름난 명소로 크게 자리를 잡았다.
또한 이곳을 시작으로 벽화마을이 크게 유행을 타면서 달동네나 시골마을을 대상으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벽화를 머금은 마을이 늘어나고 있다. 서울에는 이곳 외에도 인왕산(仁王山) 북쪽
에 누운 개미마을이란 달동네가 있는데, 그곳도 벽화마을로 한참 유명세를 타고 있고, 근래에
는 성내동(城內洞) 주택가에 강풀만화거리가 조성되어 벽화마을의 유행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러니 이화마을은 전국에 벽화란 불을 지핀 벽화마을의 성지인 셈이다.

마을은 그리 넓지는 않으나 가파른 산자락에 둥지를 틀고 있어 오르락내리락이 여간 힘들지 않
다. 게다가 벽화도 마을 곳곳에 흩어져 있어 대포처럼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숨을 헐떡이며 그
림과 숨바꼭질을 벌이는 사진쟁이들이 쉽게 눈에 띈다.
이렇게 관광객과 사진쟁이의 방문이 늘다보니 자연히 동네 사람들과도 조금씩 마찰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실제 예로 2012년에 어느 유명 가수가 마을에 그림을 그렸는데 그것을 보겠다며 사람
들이 몰려와 소란을 피우자 동네 사람들이 그 그림을 지운 일이 있었고, 마을 분위기를 사진에
담는다면서 남의 집을 침범하거나 골목길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등의 민폐가 종종 발생한다. 사
람들은 오로지 벽화와 마을 풍경을 사진에 담는 것에만 혈안이 되있을 뿐, 이화마을이란 동네와
그곳에서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동네 사람들의 애환과 삶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것이다. 어
찌보면 현대판 민속마을인 셈이다. 게다가 관광객이 늘어나도 동네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수익은
거의 없다. 관광객을 수입으로 제대로 연결시키지 못한 탓이다. (겨우 동네 구멍가게와 찻집/까
페, 장식품을 파는 가게가 몇 있을 뿐임)

단순히 이화마을을 목적으로 오는 것보다는 낙산(낙산공원) 나들이의 일부로 살펴보는 것을 권
하는 바이다. 벽화와 달동네 풍경 외에는 딱히 볼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벽화와 마을을
목적으로 왔다면 은근히 허기질 수 있으니, 이화마을을 품은 낙산 일대를 더 둘러보는 것이 좋
을 것이다. 낙산 자체도 그리 넓은 편은 아니니 낙산공원과 한양도성, 이화장을 비롯해 낙산에
안긴 여러 명소와 한 덩어리로 둘러보길 바라며, 이화마을 자체가 달동네 분위기를 잘 간직하고
있으므로 달동네를 겪었던 사람들에게는 당시의 추억을 소환할 수 있는 좋은 타임머신이 될 것
이다.

이화마을은 현재 재개발지역에 들어있다. 다행히 마을을 뒤덮은 벽화가 유명세를 타면서 개발의
칼질도 고개를 숙였지만 벽화가 언제까지 방패가 되어줄 수는 없다. 개발을 하더라도 마을 사람
들과 벽화의 피해가 최소화되도록 최적의 답안을 찾아 서로가 좋은 방향으로 개발을 했으면 좋
겠는데, 많은 것들이 잘못된 이 나라에서 그런 것이 과연 통할지는 모르겠다.


▲  이화마을의 새로운 명물, 이화마루 텃밭

동대문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낙산으로 가다보면 성곽 쪽에 이화마루 텃밭이란 작은 공원이 나타
난다. 도심 속에 왠 텃밭?? 집이 다닥다닥 여유도 없이 들어찬 이런 곳에 조촐하게나마 밭이 있
다니 참으로 신선하다.

이화마루 텃밭은 이화마을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지대에 자리한 공간으로 작은 밭과 평상, 의
자, 정자나무 4그루, 상자텃밭이 전부인  조그만 공원이다. 이곳은 원래 집 2채가 있었는데, 철
거되어 짜투리 땅으로 버려져 있었다. 그런 잉여 공간이 이렇게 참신한 공간으로 거듭났으니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2012년 6월 건국대 건축학부 동아리인 'FAS(외부공간) 프로젝트 그룹'에서 건축계의 최대 관심
사인 '녹색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텃밭'과 '주민의 커뮤니티 공간'을 주제로 선정했다. 그들
은 서울의 달동네나 낙후 지역에 텃밭과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기로 하고 장소를 물색했는데, 그
결과 주민들의 반응이 제일 좋았던 이화마을을 선정했다.
마침 동네 정상부에 짜투리 공간이 있었는데, 그 공간이 바로 이곳으로 집 2채가 철거되어 버려
져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 텃밭을 닦기로 했으나 문제는 집의 잔재를 비롯한 쓰레기가 무려 35
톤에 이른다는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팀원들은 스스로 돈을 모아 150만원의 처리 비용
을 마련했지만 그들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팀장은 방법을 찾다가 작년 폭설로 동주민
센터에 3,000여 개의 삽이 지원되었다는 것을 듣고 제안서를 작성해 이화동주민센터를 찾았다.

허나 주민센터 공무원들은 그들의 제안서에 '대학생들이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있어요?' 부정적
인 반응을 보였다. 허나 다행히 설득이 되어 같이 해보자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바로
다음 날 작업에 들어갔고, 종로구청에서도 흔쾌히 도와주었다. 또한 환경미화원과 동네 주민들
도 나와 그들의 프로젝트를 거들었다. 팀원들은 아침 8시부터 모두 나와 12시간 넘게 쓰레기를
치웠고, 그로 인해 처음 2주를 예상했던 작업 기간은 3달로 크게 늘어났다.

쓰레기를 치운 이후 팀원들은 본격적으로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허나 그 프로젝트가 팀원과 종
로구청, 마을 주민과 함께 하는 것이다보니 의견 조율이 쉽지 않았다. 팀원들은 전체적인 공간
구성과 조화를 더 우선시했지만 구청은 텃밭을 우선시 했다. 또한 마을 주민들의 의견도 엇갈려
어려움이 있었으나 점차 주민들의 지지와 협조를 얻어내 주민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작업을 진행
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그해 9월, 텃밭과 주민들의 소중한 공원으로 완전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팀원들은 이곳이 이화마을의 꼭대기라하여 '이화마루'란 이름을 붙였고, 마땅한 쉼터와 나무가
없던 마을에 소중한 오아시스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촐한 갤러리도 조
성되어 문화공간의 역할도 종종 겸하고 있다.


▲  이화마루 부근에 있는 흑백 벽화
벽화 속에 또다른 달동네가 담겨져 있다.

▲  이화마루 동쪽에 있는 성곽 암문(暗門)
성 내외를 이어주는 문으로 동대문과 낙산공원 사이에 2곳이 있다.

▲  이화마을 언덕 골목길 - 어린 시절 저런 골목길을 많이도 뛰어다녔는데
이제는 나이가 적지 않게 누적되다보니 저런 길을 오르는 것도 힘들다.

▲  어린 시절 소꿉친구가 뛰어나올 것 같은 이화마을의 막다른 골목길

▲  하트 풍선을 든 토끼와 곰탱이의 표정이 썩 밝아보이진 않는다.
온갖 경쟁과 세상살이에서 어쩔 수 없이 적(경쟁자)과 공존해야 되는
우리의 불편한 자화상은 아닐까...?

▲  이화마을의 백미(白眉), 꽃계단

이화마을 중간 부분에 있는 꽃계단은 흔히 볼 수 있는 달동네 계단이다. 숨을 헐떡이게 만드는
그 밋밋한 계단에 어여쁜 꽃잎을 그려놓으면서 이제는 이화마을의 상징과 같은 귀한 존재가 되
었다. 마을에 널린 다른 벽화는 크게 눈에 들어오진 않지만 이 꽃계단만큼은 정말 인상이 깊다.
마을을 찾은 사람들은 이곳에서 대부분 기념 촬영에 임하느라 부산한데 비록 사람들이 유화로
그린 그림이지만 자연산 꽃잎에 못지 않게 화사하다. 그들의 방긋~♪ 웃는 모습에 속세에서 오
염되고 상처받은 마음마저 싹 정화되는 듯 하다.
지금 이곳에 사는 사람들 상당수 우울한 환경이지만 꽃계단 꽃잎의 응원에 힘입어 다들 귀하게
되기를 기원하며 모두가 잘사는 복지국가가 되기를 염원해본다.

※ 이화마을 찾아가기 (2014년 10월 기준)
* 흥인지문4거리(1,4호선 동대문역 9,10번 출구)에 있는 동대문성곽공원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12분 정도 오르면 이화마루 텃밭이 나온다. 이곳을 중심으로 성곽 안쪽 동네가 이화마을이며,
  여기서 서쪽(대학로 방향) 골목길로 내려가면 다양한 벽화들이 고개를 내민다.
* 서울시내버스 102, 107, 108, 301, 7025번 시내버스를 타고 이화동(이화장) 하차, 동대문 방
  면(동쪽)으로 조금 가면 산쪽으로 난 율곡로19길이 나온다. 그 길을 올라가면 이화마을이다.
* 이화마을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남의 집에 불쑥 들어가 사진을 찍거나 크게 떠드는 등의
  민폐는 삼가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동 9,10번지 (율곡로19길, 낙산성곽서길)


♠  좌청룡(左靑龍)을 타고 서울 도심을 굽어보다 ~ 낙산(駱山)
(낙산공원, 한양도성 산책로)

▲  낙산공원 남쪽에 자리한 낙산정(駱山亭)

서울 도심 동쪽에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는 낙산은 해발 125m의 나지막한 산이다. 낙산이란 이름
은 산의 모양이 낙타의 등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 산 이름인 낙(駱)은 낙타를 뜻한다.
또한 3글자로 낙타산(駱駝山), 타락산(駝駱山)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들 모두 낙타를 상징하며,
그 이름을 간편하게 줄인 것이 낙산이다. 또한 조선시대에 궁궐에 우유를 조달하던 관청인 유우
소(乳牛所)가 낙산 기슭에 있어 타락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낙산은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內四山)의 하나로 도성(都城)의 동쪽을 맡고 있다. 여
기서 내4산이란 한양의 주산(主山)이자 북쪽에 자리한 북악산<北岳山, 백악산(342m)>과 서쪽에
인왕산(仁王山, 338m), 남쪽에 남산(南山, 262m), 그리고 동쪽에 낙산을 이르는데, 문제는 그들
중에 낙산이 가장 부실하게 생겼다는 것이다. 낙산과 멀리감치 마주보고 있는 인왕산은 산세는
좀 작아보이지만 꽤나 알차고 험준하여 예로부터 호랑이의 소굴로 유명했다. 북악산 역시 인왕
산 못지 않은 위엄을 가지고 있으며, 남산은 그들보다는 세는 약해도 덩치는 좀 있다. 허나 낙
산은 그들보다 높이나 덩치 모든 면에서 형편없이 떨어져 그냥 뒷동산 같은 언덕이다. 옛 사람
들이 신봉했던 풍수지리 입장에서 본다면 그리 착한 산은 아니다.
그래서 한양을 서울로 삼은 조선은 낙산의 그런 부실한 기운을 북돋아주고자 낙산 남쪽에 있는
동대문의 이름인 흥인문(興仁門)에 지(之) 1글자를 추가해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한 것이다.

낙산이 그렇게 염려되면 도성을 동쪽으로 좀 확장하면 어떨까 싶지만 낙산 동쪽은 보문동 방향
으로 조금 뻗은 동망봉(東望峰)을 빼고는 거의 평지이다. 그래서 별 수 없이 낙산에 성곽을 얹
힌 것이다. 게다가 조선은 고려보다 스케일이 비교도 안될 정도로 작기 때문에 도성을 크게 구
축하진 못했다. <고려의 황도(皇都)인 개경(開京)의 절반도 안되는 크기임>

낙산은 야트막한 산으로 숲이 무성하고 잘생긴 바위와 약수터가 많았다. 게다가 도성 내부가 훤
히 다 보일 정도로 조망도 일품이라 도성 주변 경승지로 꼽혀 왕족과 양반들이 앞다투어 낙산에
정자와 별장, 거처를 짓고 살았다. 효종(孝宗)의 아우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은 석양루(夕陽樓,
지금의 이화장 정문 앞에 있었음)를 지었고, 조선 후기 문인 이심원(李心源, 1722~1770)이 지은
일옹정(一翁亭)을 비롯하여 이화정(梨花亭)과 백림정(柏林亭) 등이 있었다. 이들은 양반과 시인
묵객들이 자주 발걸음을 하던 낙산의 이름난 명소였다.
또한 조선 후기 한옥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잠시 머물던 이화장(梨花莊)과 지봉유설(芝峯類說)로
유명한 이수광(李睟光)이 살았던 비우당(庇雨堂), 낙산의 유방이라 불리던 이화동약수와 신대약
수 등의 약수터, 우물이 나란히 5개가 있었다는 5형제우물터,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의 애환이 서린 자지동천(紫芝洞天, 자주동천)과 동망봉, 도성 5대 명승지의 하나로 기이한 바
위가 많았던 쌍계동(雙溪洞, 이화장 주변) 계곡이 있었으며, 마을 전체가 온통 붉은 열매를 맺
는 나무만 있다고 하는 홍수동(紅樹洞, 홍숫골), 동촌이씨(東村李氏)의 세거지 등이 낙산에 앞
다투어 안겨져 있었다.

이렇듯 낙산에 안겨있던 명소들은 20세기 이후 어둠의 시절과 산업화시대를 거치면서 대부분 녹
아 없어졌고, 서울의 인구가 폭증함에 따라 낙산과 동망봉 일대에 빼곡히 주거지가 들어서면서
옛날의 운치와 정취는 다 말라버렸다. 이화마을도 바로 그런 시류를 타고 낙산 남쪽에 둥지를
튼 것이다. 그나마 살아남은 것은 낙산의 허리를 가르는 한양도성과 이화장, 자지동천 바위글씨,
그리고 근래 복원된 비우당이 고작이다. 그외에 조선 왕실의 원찰(願刹)이던 청룡사(靑龍寺),
고려 때 지어진 비구니절 보문사(普門寺), 구한말에 세워진 안양암(安養庵)과 지장암(地藏庵)
등의 절이 있다.

낙산 정상에 깔고 앉아 산의 미관을 크게 망치던 낙산시민아파트가 노후화되면서 1990년대 이후
서울시의 공원녹지확충 5개년 계획에 따라 이들 아파트와 주변 주거지를 밀어버리고 정상 주변
과 서쪽 일대 61,000여 평을 다져 낙산공원을 닦았다. 공원은 1999년 12월 30일 삽을 뜨기 시작
해 2002년 6월 완공되었는데, 다양한 운동시설과 쉼터 등의 편익시설, 낙산전시관, 중앙광장과
놀이마당, 3개의 전망광장, 산책로와 역사탐방로를 갖추고, 소나무를 비롯한 15만 그루의 식물
을 심어 비록 왕년의 손톱때만큼은 못되어도 도심 속의 포근한 휴식처이자 답사/나들이/데이트
장소의 성지로 크게 명성을 누리고 있다. (공원 면적 201,779㎥)

한양도성의 낙산 구간은 동대문에서 동소문<東小門, 혜화문(惠化門)>까지의 2.3km 구간으로 성
곽이 잘 남아있다. 1999년 이후 산업화의 칼질에 무책임하게 희생된 낙산을 조금씩 되살리면서
성곽도 보수를 벌여 동대문 북쪽 구간을 복원하고, 성곽과 성밖에 탐방로를 만들었다. 성곽 내
부 탐방로는 동소문에서 카톨릭대 성심교정 사이 약 1리 구간을 제외하고 모두 길이 나있고, 성
밖은 동소문에서 동대문까지 전구간 이어져있다.

낙산은 대학로와 무척 가깝고, 혜화역(4호선)과 한성대입구역(4호선), 동대문역(1,4호선), 창신
역(6호선)과도 가깝다. 심지어 낙산공원 정상까지 마을버스가 올라가는 등 교통과 접근성은 매
우 착하다. 산이라고는 하지만 뒷동산처럼 야트막하여 누구나 쉽게 안길 수 있고, 동쪽을 제외
하고는 주변이 거의 평지라 조망도 그런데로 일품이다. (도심과 북쪽 방향의 조망이 좋음) 특히
서울 도심의 야경(夜景)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포인트라 인기가 대단하다.

낙산에 간다면 동소문이나 동대문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오르는 것을 추천한다. 낙산공원에 이르
러 성곽길이 지루하다면 서쪽으로 대학로(마로니에공원) 방면으로 내려가도 되고, 동쪽으로 창
신동 방면으로 내려가도 된다. 낙산공원에서 가까운 명소로 이화장과 이화마을, 자지동천(자주
동천), 비우당, 삼군부총무당 등의 명소가 있으며, 여기서 욕심을 더 부린다면 거리가 조금 있
지만 동망봉, 청룡사, 보문사, 안양암, 대학로 주변 명소까지 겯드린다면 정말 배터지는 나들이
가 될 것이다.

※ 낙산공원 찾아가기 (2014년 10월 기준)
* 흥인지문4거리(1,4호선 동대문역 9,10번 출구)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도보 20분
* 한성대입구역(4호선) 4번 출구에서 성곽 탐방로를 따라 도보 20분 (4번 출구를 나와서 2~3분
  정도 가면 한양성곽과 탐방로가 나옴)
* 혜화역(4호선) 2번 출구에서 마로니에공원 북쪽 골목길로 들어서면 낙산공원을 알리는 이정표
  가 나온다. 도보 10분
* 동대문역(5번 출구), 1/6호선 동묘역(10번 출구), 6호선 창신역(4번 출구)에서 종로03번 마을
  버스를 타고 낙산공원 종점 하차 (창신역 2번 출구에서 낙산공원까지 도보 16분)
* 낙산공원과 한양도성 탐방로는 24시간 개방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산2-10 일대 (중부공원녹지사업소 ☎ 02-743-7985~6)


▲  낙산정에서 바라본 천하 (1)
바로 앞에 혜화동(惠化洞)을 비롯해 명륜동과 성북동(城北洞), 북악산과 북한산 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낙산정에서 바라본 천하 (2)
혜화동과 서울대병원, 창경궁, 창덕궁,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안산(鞍山) 등이 바라보인다.

▲  낙산정에서 바라본 천하 (3) - 혜화동과 원남동, 종로 지역

▲  낙산정에서 바라본 천하 (4) - 종로와 중구, 남산

대학로가 있는 서쪽을 바라보고 선 낙산정은 2002년에 지어진 조촐한 정자이다. 비록 고색의 내
음은 익지도 않았지만 4대문 안 서울 도심은 물론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남산 등 서울의 내
4산이 모두 바라보여 조망도 제법 일품이다.


▲  낙산공원 종로03번 마을버스 종점

빈틈없이 이어진 한양도성의 낙산 구간이 여기서 잠시나마 끊긴다. 그 사이로 마을버스가 귀여
운 뒷태를 선보이며 바퀴를 멈추고 쉬고 있다. 이곳은 예전 낙산아파트가 있던 곳으로 저 길로
나가면 창신동과 비우당, 숭인동 방면으로 이어진다.


▲  낙산공원 정상부 (놀이마당 주변)

▲  낙산공원 놀이마당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혜화동과 종로구 일대)

▲  낙산공원 마크와 동소문 방면 성곽 바깥 탐방로

▲  낙산에서 동소문 방면 한양도성과 성곽 바깥 탐방로

▲  동소문을 향해 힘차게 흘러가는 한양도성 (1)
혜화동과 명륜동, 성북동, 북악산 줄기와 북한산이 바라보인다.

▲  동소문을 향해 힘차게 흘러가는 한양도성 (2)
삼선동과 돈암동, 성북동이 바라보인다. (덤으로 북한산까지)


▲  성바깥 탐방로에서 바라본 삼선동과 돈암동, 한성대(오른쪽 건물들)
낙산공원에서 동소문 구간은 별도의 글에서 소개하도록 하겠다.
본글은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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