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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2.29 호랑이를 닮은 잘생긴 바위산, 해돋이와 일몰 풍경이 일품인 호암산 (호압사, 한우물, 칼바위, 서울둘레길)
  2. 2019.12.19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달달한 숲길, 인왕산자락길 (청운문학도서관, 청운공원에서 수성동계곡까지)
  3. 2017.01.07 서울의 염통을 쫄깃하게 건드렸던 잘생긴 바위 명산, 호암산 (서울둘레길, 호압사)
  4. 2013.05.14 시간도 느릿느릿 걸음을 멈춘 서울 도심 속의 별천지 ~ 북촌한옥마을 산책 (재동, 가회동, 정독도서관..)

호랑이를 닮은 잘생긴 바위산, 해돋이와 일몰 풍경이 일품인 호암산 (호압사, 한우물, 칼바위, 서울둘레길)

 


~~~ 호암산 늦가을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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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서울 서남부)

▲  호압사 8각9층석탑

▲  호암산 남쪽 봉우리

 


서울 시흥동과 독산동, 신림동, 경기도 안양시(석수동)에 걸쳐있는 호암산(虎巖山, 393m)
은 삼성산(三聖山, 480m)의 일원으로 삼성산 서북쪽에 자리한다. 호암산이란 이름은 산세
가 호랑이를 닮았다고 하여 유래된 것으로 옛 금천(衿川) 고을(현재 서울 금천구)의 주산
(主山)이라 금지산(衿芝山), 금주산(衿州山)이라 불리기도 했다.

때는 바야흐로 1394년,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개경(開京, 개
성)에서 서울(한양)로 도읍을 옮겼다. 서울에 와서 주변 지형을 살펴보니 글쎄 한강 남쪽
에 호랑이를 닮은 호암산과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 모양의 관악산(冠岳山, 629m)이 나란히
서울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즉 풍수지리적으로 서울을 위협하는 존재로 봤던 것
이다.
하여 그들로부터 서울을 지키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에 따라 호암산 밑에 호압사를 세우
고, 관악산 정상 밑에 연주암(戀主庵)을 짓고 연못을 팠으며,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세우
고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의 현판을 세로로 세우는 등, 그야말로 난리법석을 떨었다.

이처럼 호암산에는 산의 기운을 누르고자 세운 호압사를 비롯하여 서울에서 가장 크고 오
래된 옛 우물인 한우물, 비보풍수로 세워진 석구상, 신라 때 축성된 호암산성, 흔적만 남
은 제2한우물터, 호암산의 기운을 누르고자 기도를 했던 자리에 세워진 불영암, 기해박해
(己亥迫害) 때 처단된 프랑스 신부 3명이 안장되었던 삼성산성지(三聖山聖地) 등, 신라부
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절의 흔적들이 존재하여 이곳의 중요성을 크게 일깨
워준다. 게다가 조망 또한 알품으로 서울의 절반 정도와 안양, 광명, 부천, 인천, 북한산
(삼각산)까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온다.
또한 호랑이를 닮은 뫼답게 멋드러진 바위가 아낌없이 포진해 있어 산행의 즐거움을 더해
주며, 호압사 남쪽에는 넓게 잣나무숲을 조성해 산림욕장으로 꾸몄고 벽산5단지 기점에는
2012년 8월에 닦여진 호암산폭포가 있으며, 호암산 서남쪽 끝자락에는 시흥계곡이 펼쳐져
있는 등, 볼거리도 풍년이다.

호암산은 호압사를 비롯하여 서울대와 신우초교, 삼성산성지, 벽산5단지, 시흥계곡, 석수
역 등에서 접근할 수 있으며, 깃대봉과 장군봉을 거쳐 삼성산까지 이어진다. 또한 사당역
에서 낙성대(落星垈), 서울대, 호압사, 시흥계곡을 거쳐 석수역까지 이어지는 서울둘레길
(13km)이 닦여져 있다.

호암산은 내 즐겨찾기의 하나로 1년에 여러 번씩 찾아 나의 마음을 비추고 있다. 이번 나
들이는 호압사입구에서 시작하여 호압사, 호암산 정상, 한우물(불영암)을 거쳐 벽산5단지
에서 마무리를 지었는데, 수십 번 인연을 지은 곳이라 호압사만 보고 빠지려고 했으나 고
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못지나친다고 여기까지 온 거 더블로 싹 둘러보았다.


▲  호압사 뒤쪽에서 바라본 호암산
늦가을이 지른 단풍불로 산이 매우 화사하다.


 

  호암산의 기운을 누르는 절, 호압사(虎壓寺)

▲  '호암산문(虎巖山門)'이라 쓰인 호압사 일주문(一柱門)

호압사입구 정류장에서 호압사로 인도하는 길로 들어서면 바로 일주문이 마중을 나온다. 팔작
지붕 머리를 한 그는 2000년에 금천구청에서 지어준 것으로 그 당시 금천구가 서울시 25개 자
치구 민원행정실적평가에서 우수구로 선정돼 시상금을 받자 그 돈으로 '활기찬 금천구 만들기
기념'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호압사에 만들어준 것이다.

문 현판에 쓰인 호암산문은 호암산 사찰, 즉 호압사를 뜻하며, 문이라고는 하지만 여닫는 문
짝이 없이 뻥 뚫려있어 누구든 가리지 않고 맞이한다. 문 앞에는 호암산 안내문과 조그만 공
원이 자리해 있다.


▲  호압사로 올라가는 산길

일주문을 지나면 속세살이처럼 각박한 오르막길이 중생의 마음을 잔뜩 주눅들게 만든다. 절까
지 걸어서 10분 거리로 차량들이 편하게 바퀴를 굴리게끔 콘크리트 길이 닦여져 있는데, 경사
의 패기가 짙어 아무리 차량이라 한들 조심스레 바퀴를 굴린다. 특히 눈이 쌓인 날은 울면서
길을 오르락 내리락 해야 된다.

처음에는 경사가 좀 완만하나 서서히 기울기가 커지면서 주차장을 지날 쯤에는 상당히 급해진
다. 주차장을 지나 하늘과 한 발자국 가까워질수록 호압사의 모습이 마치 솟아나듯 보이기 시
작한다. 그럼 여기서 잠시 호압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늦가을의 절정을 누리고 있는 단풍나무 (경내 바로 밑부분)

삼성산의 일원인 호암산 서쪽 자락 230m 고지에 자리한 호압사는 호랑이를 누르는 절이란 뜻
으로 자비를 강조하는 불교와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이곳이 호랑이와 무슨 원수를
졌길래 호랑이에게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을까.
지금이야 그리 신경은 쓰지 않겠지만 옛 사람들은 풍수지리(風水地理)를 매우 신봉했다. 고려
를 뒤엎고 조선이란 비리비리한 나라를 연 태조 이성계는 개경을 버리고 현재 서울을 도읍으
로 삼고자 땅을 살폈는데, 활활 타오르는 모습의 관악산과 호랑이를 닮은 호암산이 나란히 서
울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 잔뜩 기겁을 하게 된다. 이들 산이 서울에 무슨 감정이 있어서 그
런 것도 아니고 조물주 형님이 그렇게 빚어놓은 것 뿐인데, 생긴 모습이 그러하여 풍수지리적
으로 서울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버린 것이다.
그런 이유로 1394년에 태조가 무학대사에게 명해 호암산 밑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호압사
라 했다고 한다. 과연 태조와 무학대사가 지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약사전에 조선 초기
석불좌상이 깃들여져 있어 그런데로 시기는 맞아떨어지며, 조선 조정에서 호암산의 기운을 잡
고자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지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봉은사(奉恩寺)에서 작성한 '봉은사말사지(末寺誌)'에는 1407년에 창건했다고 나와있으며 태
종이 호압
(虎壓)이란 현액(現額)을 하사했다. 이후 400년 동안 적당한 사적(事績)을 남기지
못했다가 1841년에 승려 의민(義旻)이 상궁(尙宮) 남씨와 유씨의 시주로 법당을 중창했으며,
1935년에
만월(滿月)이 약사전 6칸을 중건하고 1995년에 삼성각을 지었고, 2008년에 9층석탑
을 세웠다.

서울 금천구의 유일한 전통사찰로 믿거나 말거나 창건설화가 한 토막 전해오고 있다. 이 설화는 이 절이 호암산의 기운을 때려잡고 서울을 수호하는 절임을 강조하고자 후대에 그럴싸하게
지어진 것이다.
때는 태조 이성계가 서울에 궁궐(경복궁)을 지을 때인 1394년, 전국에 잘나가는 장인을 싹 소
환해 궁궐을 짓고 있는데, 건물이 완성되면 이상하게도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계속 무너지는
것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현상이 계속 터지자 뚜껑이 폭발한 태조는 공사책임자를 불러 추궁
했다. 책임자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전하, 소인들이 일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면 호랑이를 닮은 커다란 괴물이 나타나 소인들을
위협하고 건물을 죄다 때려부시고 사라집니다. 소인들이 막으려고 해도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어 다들 궁궐 공사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통촉해 주시옵소서~~!!'
그 말을 듣던 태조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너희들이 지금 나를 우롱하냐~~?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냐??'
책임자는 더욱 오금을 저리며
'어찌 전하께 거짓을 아뢰나이까. 믿기 어려우시면 오늘 밤 몸소 확인하심이 좋을 듯 합니다'

그래서 태조는 직접 확인할 겸, 그날 밤 군사를 이끌고 공사현장에서 괴물을 기다렸다. 과연
어둠이 내려앉자 반은 호랑이고 반은 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눈에 불을 강하게 뿜으며 현
장에 나타났다. 괴물이 건물을 부시려고 폼을 잡자 태조는 군사들에게 화살을 쏘게 했다. 허
나 괴물은 화살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기껏 만든 건물을 보기 좋게 부시고는 유유히 사라졌
다.
괴물의 기세에 염통이 쫄깃해진 태조는 침소로 돌아와 한숨을 쉬며
'한양은 나와 인연이 아닌가 보구나. 개경으로 다시 돌아갈까?'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인의 우렁찬 목소리
'한양은 정말 도읍지로 제격이다!!'
태조는 깜짝 놀라 소리가 들리는 밖으로 나가보니 아름다운 수염의 노인이 서 있었다.
'공은 뉘시오?'
'허허~ 그런 것은 아실 필요는 없구요. 전하의 근심을 덜어드릴까 하여 왔습니다'
태조가 표정을 바로 하고 그 대책을 문의하자 노인은 저 멀리 보이는 한강 남쪽의 한 산봉우
리를 가리켰다. 태조는 달빛 속에서 노인이 가리킨 곳을 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오매~ 호랑이 머리를 한 봉우리가 한양을 바라보고 있구나!!'
태조는 노인에게 산의 기운을 누를 방도를 물었다.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호랑이는 꼬랑지를 밟히면 꼼짝 못하니 산 꼬리 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입니
다'
알려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태조는 바로 무학대사를 불러 호랑이의 꼬리 부분인 지금 자리에 절을 짓게 하고 호랑이를 누
른다는 뜻에서 호압사라 이름 지었다. 그 이후 궁궐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천 고을 동쪽에 있는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것과 같
고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 까닭에 범바위(虎巖)라 부른다. 술사(術士)가 이를 보고 바위
북쪽에다 절을 세워 호갑(虎岬)이라 했다'라고 나와있음. 여기서 호갑은 '호압사'로 호압사의
다른 이름으로 많이 등장한다>

서울 시내와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로 도심 속에서 아늑한 산사(山寺)의 내음과 분위기를 누리
는데 아주 좋은 곳이며 접근성도 괜찮아 언제든 안길 수 있다. 또한 절의 규모는 작지만 쓸데
없이 으리으리한 것보다는 정감이 가 두 눈에 넣어 살피기에도 그리 부담이 없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좌상과 500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절의 오
랜 내력을 살짝 속삭여주고 있으며, 2008년 이후 8각9층석탑을 만들고, 중생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원두막 쉼터와 풍경소리 도서관을 만드는 등, 경내를 조금씩 채워나가면서 올 때마다
늘 낯선 것들이 하나씩은 보인다. 또한 매주 일요일 점심시간에 국수 공양을 제공하며, 12월
31일 밤에는 제야의 종 타종식 행사를 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2동 234 (호암로 278 ☎ 02-803-4779)
* 호압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호압사에서 바라본 호암산 서남쪽 봉우리
바로 저곳에 호암산의 명물인 석구상과 한우물, 불영암, 호암산성터가
깃들여져 있다.

▲  호압사 서쪽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8-5호

주차장에서 계단을 올라 경내에 들어서면 계단 양쪽으로 500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마중한
다. 이들 느티나무 형제는 약사전에 있는 약사불과 더불어 호압사의 오랜 내력을 밝혀주는 산
증인들로 늦가을도 호압사가 좋은지 나무에 오래도록 머물며 알록달록 작품을 빚었다.
계단 서쪽에 있는 느티나무는 500년 정도 되었으며, 키가 7m, 허리둘레가 4.2m이다. 반면 계
단 동쪽 나무는 비슷한 나이에 키 11m, 허리둘레는 3.6m이다.


▲  호압사 동쪽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8-6호

▲  호압사 심검당(尋劍堂)
건물 앞에 서 있는 굵은 나무가 서울시 보호수 18-5호인 500년 묵은 느티나무이다.


오래된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호압사 경내로 들어서면 서쪽에 2층 규모의 심검당이 있
고, 북쪽에는 법당인 약사전, 그 옆구리 높은 곳에 삼성각, 그 아래쪽에 9층석탑이 조촐하게
경내를 이룬다. 심검당은 호압사의 요사(寮舍)이자 종무소(宗務所), 공양간으로 쓰이는 다용
도 건물로 건물 이름인 심검(尋劍)이란 지혜의 칼을 찾는다는 뜻이다.


▲  호압사 삼성각(三聖閣)과 9층석탑

삼성각 아랫쪽에 자리한 9층석탑은 2008년에 조성되었다.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8각9층석
탑을 유난히도 많이 닮았는데, 호압사의 유일한 탑으로 그가 있기 전에는 이곳에는 그 흔한
탑이 하나도 없었으며, 그 허전함이 달래고자 아주 통 크게 9층석탑을 심었다.
탑에는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는데, 1층 탑신(塔身)에 담긴 사리를 친견할 수 있도록
동그란 창을 냈다. 가람 배치의 정석대로라면 법당(약사전) 정면에 탑을 세워야 하나 특이하
게도 좌측 구석에 세운 것이 이상할 따름이다. 하얀 피부의 맨들맨들한 석탑, 늦가을 햇빛에
한층 빛나 보인다.

탑 뒤쪽이자 약사전 옆구리의 높은 곳에는 칠성(七星)과 산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 삼성각이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
붕 건물인데 1995년 완성을 보았으나 건물을 받치는 석축과 계단은 1999년에 완성되어 2000년
에 비로소 낙성식을 가졌다.
내부를 가득 메운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은 1978년에 제작된 것이며 우측 벽에는 호압사를
세웠다는 무학대사의 영정이 걸려있어 절의 창시자를 기린다.

▲  삼성각에 봉안된 무학대사의 진영(眞影)

▲  삼성각 칠성탱(七星幀)

▲  삼성각 산신탱(山神幀)

▲  삼성각 독성탱(獨聖幀)


▲  호압사의 법당인 약사전(藥師殿)

경내 중심에 자리하여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약사전은 호압사의 법당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창건 당시부터 있던 것으로 여겨지나 현재 건물은 1935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  호압사 석불좌상(약사불)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8호

호압사는 석가여래 대신 약사불을 중심으로 내세운 약사도량(藥師道場)이다. 그래서 법당 불
단에는 약사불을 봉안했으며, 법당 이름도 약사전을 칭했다. 바로 그 약사전에 이곳의 든든한
밥줄이자 상징인 석불좌상이 협시보살을 주렁주렁 대동하며 자리해 있다.

예전에는 약사불 홀로 불단을 지켰으나 2009년에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좌우에 붙여주어 약사3존불을 이루게 되었으며, 2011년에 그 양쪽에 천진불(天眞佛)이라 불리
는 귀여운 아기부처 2구를 갖다 붙였다.

인상이 온후해 보이는 약사불은 연꽃 대좌(蓮花臺座) 위에 사뿐히 앉아 조용히 명상에 임하고
있다. 아무리 서울에 위협을 주는 호암산 호랑이라 할지라도 그의 덕스러운 표정 앞에선 절로
꼬랑지를 내리며 온순한 호랑이가 될지도 모른다.
15세기에 조성된 그는
얼핏 보면 금동불(金銅佛)로 보이지만 실은 돌로 다져 도금을 입힌 것
이다.
불두(佛頭)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촘촘히 표현했으며 얼굴은 둥근 넓적한 모
습으로 약간의 양감이 표현되어 있다. 선정인(禪定印)을 취한 듯, 다리 위에 모은 그의 두 손
에는 고달픈 중생들을 치료하기 위한 약합(藥盒)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약사불 좌우의 일광/월광보살은 화려한 보관(寶冠)을 머리에 쓰고 각각 꽃을 1송이씩 들고 있
다. 중생을 지그시 바라보는 그들의 표정은 어린 동자승 마냥 포근하기만 하다. 그들 뒤에는
후불탱이 있으며, 불단 위쪽에 걸쳐진 닫집은 단청(丹靑)과 조각이 화려하여 중생의 눈을 매
료시킨다. 그리고 불단 좌우에는 헤아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조그만 금동 피부의 원
불(願佛)이 빼곡히 벽을 채워 약사전 내부를 화사하게 만든다.


▲  범종각과 쉼터

범종각에는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4가지의 물건, 범종(梵鍾)과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
판(雲版)이 담겨져 있다. 그 옆에는 원두막처럼 생긴 쉼터가 닦여져 있어 누구든 다리를 접고
쉬어갈 수 있다.


▲  원두막 쉼터와 풍경소리도서관 (왼쪽 하얀 책장이 도서관)

범종각 좌측에는 2칸짜리 쉼터와 풍경소리 도서관이라 불리는 하얀 피부의 책장이 있다. 이들
은 호압사에서 동네 사람들과 산꾼, 답사꾼을 위해 2012년에 만든 것으로 누구든 찾아와 독서
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개방형 책쉼터이다.

절에 딱 어울리는 이름을 지닌 풍경소리도서관 책장에는 절과 신도, 동네 사람들이 기증한 책
들이 담겨져 있는데, 소장 권수는 적으나 기증이 늘고 있다고 하니 책장도 조만간 늘어날 것
이다. 책장과 쉼터는 종일 개방하며, 누구든 책장에서 책을 꺼내 쉼터에 앉아 독서의 여유를
누리면 된다. 책을 며칠 빌리고자 하는 경우(대여비는 없음)에는 종무소에 문의하면 되며, 관
리가 느슨하다고 몰래 책을 가져가는 행위는 삼가하기 바란다.
또한 쉼터에서는 독서 외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쉬거나 속세에서 가져온 간식을 먹어도 된다.


 

  호암산 정상과 석구상 주변

▲  호압사에서 호암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각박한 산길

호압사 뒤쪽(동쪽)에는 호암산 등산로가 여럿 지나간다. 이곳을 편의상 '호압사분기점'이라고
하는데, 서울둘레길이 이곳을 거쳐 석수역과 서울대 방면으로 흘러간다.
여기서 남쪽 오르막 길을 오르면 호암산 정상과 삼성산으로 이어지며, 동쪽으로 내려가는 산
길(서울둘레길)은 삼성산성지로 이어진다. 북쪽 능선길은 난곡(蘭谷)과 목골산으로 연결되며,
서쪽은 호압사와 벽산아파트, 석수역(서울둘레길) 이어지니 취향대로 고르면 된다.
나는 호암산 정상으로 길을 잡았는데, 정상으로 가는 길은 시작부터 경사가 각박하여 만만히
보고 뛰어든 속인(俗人)들의 혼을 제대로 빼놓는다. 그런 길을 10~15분 정도 오르면 정상 입
구이며, 거기서 왼쪽(동쪽)으로 4~5분 가면 호암산 정상이다.


▲  돌로 이루어진 호암산 정상

호암산은 돌의 성분이 많은 산이라 정상도 단단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에는 2개의 커
다란 바위가 비스듬히 매달려 서울을 굽어보고 있는데 그중 오른쪽 바위가 정상으로 호암산의
머리에 해당된다.
서울의 이름난 조망지로 마치 서울을 향해 미사일이나 로켓포를 쏘는 듯한 무시무시한 모습이
다. 대자연은 이미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훨씬 이전부터 인간이 20세기에 발명한 미사일과
로켓포, 그것을 취급하는 기계의 모습을 예견했던 모양이다. 이러니 조선의 위정자들이 이 산
을 경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굳이 미사일이 아니더라도 무엇인가 날릴 것 같은
기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위 꼭대기나 그 부근까지 오르면 서울의 서남부를 중심으로 서북부와 도심부, 동북
부, 강남, 도심 주변의 여러 산들(북한산, 남산, 인왕산, 북악산 등), 그리고 광명과 안양,
멀리 인천과 부천 등 수도권의 주요 도시들이 두 발 밑에 펼쳐지니 굳이 풍수지리나 산의 생
김새가 아니더라도 전략적으로도 꽤 중요한 곳이다. 이곳이 만약 적에게 넘어가면 서울 도심
을 물론 서울의 왠만한 곳이 거의 다 노출되기 때문이다.

하늘나라 선녀 누님의 웃음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오가는 신선
이 바로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눈과 발 밑으로 점점히 펼쳐진 천하를 굽어보니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양, 천하를 다스리는 군주가 된 것 같은 즐거운 기분이 솟아 오른다.
(허나 현실은 시궁창 ㅠㅠ)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①
금천구와 관악구, 구로구, 영등포구를 비롯한 서울 서남부와 광명, 부천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바로 밑에 보이는 곳은 호암산을 감시하는 호압사이다.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②
관악구와 동작구, 여의도를 비롯하여 서울 도심과 강북 지역이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③
관악구와 동작구, 영등포구, 서울 도심과 서북부, 동북부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정면 중앙에 아득하게 보이는 산은 서울의 진산(鎭山)인
북한산(삼각산)이다.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④
관악구와 서울대, 서초구, 강남구, 성동구, 광진구를 비롯하여 서울 동부 지역이
바라보인다. 멀리 까마득하게 보이는 산줄기는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이다.

▲  호암산 남쪽 능선(호암산 정상~불영암)에서 바라본 천하 ①
푸른 하늘 밑으로 서울 서남부 지역과 부천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호암산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②
금천구와 시흥동 벽산아파트단지, 구로구, 광명, 부천 등

▲  호암산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③
 금천구와 시흥동 벽산아파트단지, 구로구 광명, 도덕산 등

▲  호암산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④
금천구와 구로구, 영등포구, 양천구, 부천 지역

▲  세상을 향해 머리를 내민 호암산 남쪽 봉우리

호암산 정상에서 한우물이 있는 남쪽 봉우리까지는 느긋한 능선길의 연속으로 능선을 따라 파
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조망을 즐기며 거닐면 된다. 이 구간이 호암산의 가장 큰 매력으로 산길
곳곳에 멋드러진 바위가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처럼 포진해 있고, 능선과 바위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맛은 정말 꿀맛이다.
내가 호암산에 퐁당퐁당 빠진 것은 잠깐의 고생 끝에 능선과 정상까지 오를 수 있고, 거기서
이렇게 명품급 조망을 누릴 수 있으며, 능선의 곡선이 매우 유연하고 느긋하기 때문이다. 게
다가 고색의 명소들도 호암산의 매력에 부채질을 하고 있으니 정말로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착한 산이다.


▲  호암산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수리산(修理山, 489m)과
그 사이에 포근히 들어앉은 안양(安養)시내

▲  청정한 솔내음이 나래를 펼치는 호암산 남쪽 능선길


 

♠  호암산 석구상과 호암산성터

▲  호암산 석구상(石狗像)

부드러운 곡선의 호암산 남쪽 능선을 더듬으며 남쪽 봉우리에 이르면 한우물을 200m 가량 앞
둔 지점에서 산길이 2개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동쪽)으로 가면 사방을 난간으로 두룬 돌로
쌓은 기단(基壇)이 나오고, 그 안에 호암산의 상징물인 조그만 석구상이 북쪽을 바라보며 귀
엽게도 앉아있다.

지금은 돌로 만든 개의 상, 석구상으로 통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정체에 대해 말들이 조금 있
는 모양이다. 예전에는 광화문 해태상과 마주 보게 하여 관악산의 화기(火氣)로부터 서울을
지키는 해태상으로 여기기도 했다. 허나 한우물을 발굴조사하면서 '석구지(石狗池)'라 새겨진
장대석(長臺石)이 출토되었고, 시흥읍지 형승조(始興邑誌 形勝條)에는
'호암산 남쪽에 석견(石犬) 4두(四頭)를 묻어 개와 가깝게 하고자 하였으며 지금 현남7리(縣
南七里)에 사견우(四犬偶, 개의 형상 4개)가 있다'
란 기록이 있어 해태상이 아닌 석구상으
로 크게 무게가 쏠리고 있다.

석구상의 크기는 길이 1.7m, 폭이 0.9m, 높이가 1m 정도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발과 꼬리 부
분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정면에서 바라본 석구상의 위엄

▲  석구상 뒷부분 (꼬랑지가 말려져 있다)

석구상의 모습을 가만히 보면 해태의 모습은 아닌 것 같다. 해태치고는 너무 작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완벽한 개의 모습이라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앞 모습을 보면 강아지의
모습 같기도 하지만 양과도 좀 비슷해 보인다. 어떤 이는 개구리를 닮았다고도 하는데, 보면
볼수록 참 답이 안나오는 기이한 석상이 아닐 수 없다. 아무래도 제 눈이 안경이라 사람마다
보이는 모습이 제각각 다를 것이다.
그의 뒷부분에는 길다란 꼬리가 말려져 있는데, 이는 개의 꼬리가 아니다. 긴 꼬랑지의 고양
이나 호랑이의 그것과 비슷해 손으로 잡아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석구상의 탄생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는 없으나 대략 조선 중기 이후로 여겨진다. 그는
정확히 북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는데, 정말로 광화문 해태상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를 만든 이유도 속시원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호암산의 기를 누르고 서울을 지키려는 비보
풍수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석구상은 그 모습이 참으로 아담하고 깜찍하여 등산객들의 눈길을 제대로 잡아맨다. 보는 이
들마다 귀엽다는 말이 연성 터져 나오고,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잔뜩 굳은 표정에서 웃음이
넘쳐나게 해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기도 하는 등 그의 식지않는 높은 인기를 보여준다.

▲  호암산성(虎巖山城)터 - 사적 343호

석구상에서 남쪽 능선길로 가면 산길의 일부가 된 채 현역에서 물러난 호암산성의 아련한 흔
적을 만날 수 있다. 석구상 북쪽에서 호암산성의 북문터로 여겨지는 성터 흔적이 있는데, 능
선길 산성터는 성돌과 흙이 섞인 1~3m 높이의 각도가 다소 진 성의 윤곽이 전부로 산길에 이
리저리 돌이 박혀있어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산길로 여기고 밟고 지나가기 일쑤다.

호암산성은 호암산 남쪽 봉우리에 다져진 퇴뫼식 산성으로 자연 지형을 이용했다. 산성의 길
이는 약 1,547m, 산성 면적은 약 133,790㎡에 이른다. 성곽은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이어지
는 길쭉한 마름모꼴로 1990년 봄, 한우물과 호암산성 일대를 발굴하면서 우물 2곳과 건물터 4
곳이 드러났고, 6,500여 점에 이르는 막대한 토기와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들 유물과 관
련 기록을 통해 대략 6세기 후반에서 7세기에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672년에 신라
가 당나라군을 막고자 세운 요새라는 설도 있음>

조선시대에도 한우물과 관련된 여러 기록과 제2한우물터, 건물터 등의 흔적을 통해 산성이 그
런데로 구실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딱 1번 크게 쓰인 적이 있는데 바로 임진왜란이 한
참이던 1593년 1월이다.
그 시절 수원 남쪽 독산성<禿山城, 오산 세마대(洗馬臺)>에서 왜군을 격파한 권율(權慄) 장군
은 서울을 수복하고자 행주산성(幸州山城)에 들어가 진을 쳤는데, 전라병사(全羅兵使) 선거이
(宣居怡)에게 군사 4,000명을 주어 이곳 호암산성으로 보내 자신의 후방을 지키게 하면서 서
울 수복 작전을 전개했다. 호암산은 서울을 위협하는 호랑이 모양의 뫼답게 서울로 공격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왜란 이후, 산성은 계속 유지되었으나 그 중요성이 나날이 떨어지면서 조선 후기에 그 이름이
지워지고 만다. 이후 산성의 운명은 지금의 상태가 여실히 말해준다. 버림을 받은 호암산성은
관리 소홀과 자연의 무정한 장난, 그리고 수백 년 세월의 덧없는 무게까지 더해져 뭉개져 갔
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속절없는 발길이 성곽을 짓누르면서 담장만도 못한 상태가 되어 버
린 것이다.
아무리 인간들이 멋드러지고 견고하게 성곽이나 건물을 지어도 대자연 형님 앞에서는 일개 장
난감에 불과하다.


▲  호암산성 건물터

석구상에서 남쪽으로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호암산 남쪽 봉우리의 정상부이다. 이곳에는 잡
초가 무성한 드넓은 공간이 있는데, 오른쪽(동쪽)에는 제2한우물터가, 왼쪽(서쪽)에는 호암산
성 건물터가누워있다.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지 수풀 속에 잠긴 건물터에는 건물을 받쳤을 주춧돌과 건물터의
윤곽이 떠받들 대상을 상실한 채 옛날을 그리워하고 있고, 나무에게 버림받은 낙엽들이 그 허
전한 빈터를 따스하게 덮어주어 서로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호암산
성을 관리하던 관청이나 장대(將臺) 등의 시설, 또는 군사들의 숙소나 창고로 여겨지며, 조선
후기에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  수풀 속에 묻힌 호암산 제2한우물터

건물터 맞은편에는 제2한우물터가 있다. 호암산성이 버려진 이후, 땅 속에 묻혀 강제로 기나
긴 잠을 자다가 1990년 발굴조사로 다시금 햇살을 보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우물의 길이는 남북 18.5m, 동서 10m, 깊이가 2m에 이르
며, 산꼭대기에 하나도 아닌 2개의 커다란 우물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지금
은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옛날부터 호암산의 중요성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물
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거나 기우제, 기타 여러 의식들이 거행된 곳 마냥 신비롭게 보여 우물
가까이 다가서기가 두려울 정도다. 괜히 저곳에 내려가다가 천벌을 받거나 다시는 나오지 못
할 것 같은 기분 말이다.

제2한우물터는 발굴 이후, 한우물처럼 온전히 재현되지 못하고 풀이 무성하도록 방치되고 있
으며, 우물터 곳곳에 석축과 우물을 구성하는데 쓰인 돌들이 무수히 널려있다. 복원할 계획이
있다고는 하는데 그게 언제가 될지는 호암산 귀신도 산신(山神)도 모른다. 어차피 복원된 한
우물이 있으니 그냥 저대로 두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  호암산 마무리 (한우물과 칼바위)

▲  한우물 - 사적 343호

호암산 남쪽 봉우리 서쪽에는 호암산의 또 다른 상징물인 한우물이 누워있다. 여기서 한우물
은 큰 우물이란 뜻으로 산 정상부에 이런 거대한 못이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인데 천
하가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해 있어 하늘의 우물인 천정(天井) 분위기도 물씬 풍긴다. 이곳은
물을 대줄 마땅한 수원(水源)도 없다고 하며, 어디서 그 많은 물이 나오는지 늘 물이 넉넉히
고여 있다. 특히 가뭄 때도 물이 가득하여 그 신비로움을 더욱 끌어올린다.

한우물은 다른 말로 천정, 용복, 용초 등으로 불리며, 신라 중기인 7~8세기 경에 축조되었다
고 한다. 현재 우물 자리 밑에서 신라 못의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그 시절에도 못의 규모는 상
당하여 동서 약 17.8m, 남북 약 13.6m, 깊이 약 2.5m에 달했다. 이후 조선 때 그 위에 새롭게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의 장방형 우물을 구축했다.

1990년 봄, 한우물을 발굴할 때 12개 기종의 1,313점의 유물이 햇빛을 보고자 앞을 다투어 쏟
아져 나왔는데 그중
'仍伐內力 只來..' 글씨가 새겨진 청동 숟가락이 나와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열쇠가 되었다. 또한 지표에서 30cm까지는 백자 파편을 비롯한 조선 때 유물이 많이 나왔다.

임진왜란이 한참이던 1593년 1월 전라병사 '선거이'가 권율 장군의 명으로 군사 4,000명을 이
끌고 호암산성에 머물 때, 이 우물을 군용으로 사용했으며, 세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
國輿地勝覽)에는
'虎岩山 有固城 城內有一池 天早祈雨 (호암산에 견고한 성이 있는데 성안에 연못이 하나 있어
일찍이 하늘에 기우제를 지냈다)'
란 기록이 있어 평시와 전쟁 때는 군사 식수로 쓰고, 가뭄이
극성일 때는 기우제도 지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비보풍수에 따라 서울의 화재를 막으
려는 방화용설(防火庸設)도 설득을 얻고 있다.
또한 석구지(石狗池)란 애칭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한우물에서 '석구지'라 쓰인 장대석이 나
왔기 때문이며, 여기서 동남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서 제2한우물터가 발견되었다.

한우물은 식수용으로 태어난 곳이지만 현재는 그의 보호를 위해 식수로는 쓰지 않는다. 우물
남쪽에는 갈대가 둥지를 트고 있어 운치를 드리우며, 북쪽에는 소나무 1그루가 우물을 거울삼
아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이제는 무늬만 우물로 그의 보존을 위해 그 주위
로 돌난간과 철제 난간을 2중으로 둘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

한우물이 있는 곳은 호암산 남쪽 봉우리로 천하를 조망하기 좋은 곳이다. 시내가 한눈에 바라
보이는 벼랑에 조망대가 터를 닦고 있어 이곳에 서면 금천구를 비롯한 서울의 서남부와 경기
도 광명시, 부천시 지역, 멀리 인천과 서해바다까지 거침없이 바라보여 두 눈이 너무 호강을
한다. 우물 주변에는 벤치가 여럿 설치되어있어 천하를 바라보며 잠시 쉬어 갈 수 있다.

한우물은 처음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0호였으나 1991년 호암산성과 제2우물터, 건물유적
을 한 덩어리로 묶어 사적 343호로 지정되었다. (지정명칭은 '서울 호암산성')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벽산5단지와 시흥동, 독산동, 광명시, 구로구 지역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시흥동 벽산아파트와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구, 광명시 지역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금천구와 구로구, 관악구, 영등포구, 양천구, 강서구 지역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④
호암산 북부와 관악구, 영등포구, 동작구, 용산구, 멀리 남산과
북한산(삼각산)까지

▲  불영암 대웅전(佛影庵 大雄殿)

한우물 옆에는 그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암자, 불영암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가파른 벼랑 위에 터를 다지며 속세를 향해 훤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호압사와 벽산
아파트단지, 호암로에서도 확 눈에 들어온다.

불영암의 내력에 대해서는 속시원한 정보가 없어 파악하긴 힘들지만 관악산과 호암산의 기운
으로부터 서울을 지키고자 기도를 올리니 서울에 큰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런
것을 보면 호랑이가 담배타령을 하던 조선 초기부터 조그만 기도터가 있었던 모양이다. 게다
가 호압사가 보일 정도로 가까우니 호압사 승려가 늘 머물며 기도를 올린 모양이다. 보통 100
여 년 이상 묵은 절들은 그 내력을 담은 안내문을 절 앞에 당당하게 내걸지만 그런 것이 없는
것으로 봐서 1950년대 이후 기도처 자리에 지금의 절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 무지 짧은 손바닥만한 암자로 대웅전과 산신각(山神閣), 요사(寮舍)로 쓰이는 작은 건
물이 전부이며, 그나마 대웅전만 불전(佛殿)의 분위기가 진할 뿐이다. 게다가 절이 들어앉은
위치도 건물을 크게 짓거나 사세를 늘리기도 여의치 않은 협소한 수준이다. 허나 한우물이 곁
에 있어 물 수급은 어렵지 않고, 벼랑에 자리한 탓에 조망 하나는 몸살이 날 정도로 좋다. 그
러니 한우물과 휼륭한 조망, 그리고 기존의 기도처를 바탕으로 삼아 절을 세웠을 것이다.
이곳 높이는 해발 310m 정도로 서울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하늘과 가까운 절인데, 아
무리 벽산아파트가 키다리라고 한들 불영암 앞에서는 어림도 없다.

예전에는 대웅전과 요사만 있던 볼품 없는 모습이었으나 2009년 이후 대웅전 뒤쪽 바위에 커
다란 불두(佛頭)를 얹히고, 절 앞에 돌탑을 심어 돌탑거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2011년에는 제
2한우물터 주변에서 발견된 절구통과 맷돌, 모서리돌 등을 잠시 돌탑 앞에 두기도 했다. 특히
고려불화의 유일한 전수자인 승려 여지(如智)가 2005년에 그린 '104위 신중탱화(神衆幀畵)'가
있어 눈길을 끈다. (대웅전 내에 있음)

불영암은 한우물의 이웃으로 그를 지켜주고 있으며, 조망이 일품이라 서울 시내를 넓은 뜨락
으로 삼아 절의 규모는 눈송이지만 뜨락 하나만큼은 천하 제일이다. 게다가 대웅전 옆에는 보
기만 해도 정겨운 부뚜막을 설치해 검은 가마솥으로 밥을 짓고 있는데, 인근에서 가져온 나무
장작으로 불을 땐다고 한다. 부뚜막 옆에는 장작이 담을 이루고 있어 심산유곡의 화전민(火田
民) 마을에 들어선 기분인데, 부뚜막이 장작을 먹어 모락모락 구름을 피어내면 나도 모르게
시장기가 돌면서 입 안에 침이 고인다. 또한 나그네를 대상으로 국수와 부침개, 식혜, 커피
등도 팔고 있다.


▲  돌탑거리를 이루고 있는 불영암 앞길

▲  제2한우물터 건물터에서 발견된 절구통(절구석)과 맷돌

돌탑 앞에 놓인 절구통과 맷돌은 호암산성 군사들이 쓰던 것들로 시흥동 주민이 발견하여 불
영암에 알렸다. 그래서 불영암에서 2010년 이곳으로 수습했는데, 신라 또는 조선시대 것으로
여겨지며 다른 절구통과 달리 금, 은, 동, 철의 성분이 많이 들어있어 상당히 무겁다고 한다.
옆에 맷돌은 어처구니를 상실한 채, 열심히 돌아가던 왕년을 그리워한다. (저들의 보관 위치
는 변경될 수 있음)


▲  제2한우물터 부근에서 수습된 절구통(절구석)의 일부와 모서리돌
불영암 주지승과 처사(處士)가 발견한 것들로 신라 후기 것으로 여겨진다.
(저들의 보관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바위에 머리만 꽂은 불영암 석불(石佛)

대웅전 우측 바위에 2009년에 만든 석불이 서쪽을 굽어본다. 석불이라고 하나 바위에 커다란
불두만 심은 형태로 바위는 그의 자연산 몸뚱이가 되었다. 바위에 접착된 불두 주변에 하얀
석고 등이 가득해 다소 이질감은 들지만 장대한 세월의 흐름은 저들을 완연한 하나의 존재로
만들 것이다.
석불 앞에는 키 작은 소나무가 하늘로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옆으로 늘어져 있는데, 그 모습
이 마치 석불에 머리를 숙여 예를 표하는 듯 하다.

* 호암산성터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2동 산 83-1외
* 한우물, 불영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2동 산93-2 (호암로 192, ☎ 02-809-3754)


▲  불영암 대웅전 내부
대웅전 내부는 조촐한 외부와 달리 장엄하다. 불단에는 석가여래가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을 대동하여 3존불을 이루고 있으며, 우측 벽에는 여지가 그린
104위 신중탱화가 빼곡히 자리를 채운다.

▲  예리한 칼날 같은 칼바위 (바로 밑이 벽산5단지)
서울을 위협하던 호암산의 날카로운 발톱은 아닐까?


한우물에서 불영암을 지나 5분 정도 내려가면 칼바위 조망대가 나온다. 바로 그 밑에 살짝 스
쳐도 피가 나올 것 같은 예리한 기세의 칼바위가 자리해 있는데, 가파른 산등성이에 아슬아슬
하게 자리해 있어 자칫 살짝만 건드려도 밑으로 쿨하게 굴러떨어질 것 같다. 이 바위는 위에
서 보는 것보다는 밑에서 봐야 그 위엄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데, 그 모습이 당장이라도 속세
를 향해 칼질을 벌일 것 같은 기세라 보기만 해도 조마조마하다.

이런 바위에는 옛 사람들이 붙인 그럴싸한 전설이 있기 마련이라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한토
막 전해온다.
때는 임진왜란 시절, 왜군이 시흥(始興) 고을까지 쳐들어오자 장사 1명이 혼자서 왜군을 때려
잡으며 분투를 벌였다. 이에 왜장이 시흥 장사와 턱걸이 내기를 해서 이기면 물러가겠다고 제
안을 했는데, 바로 이 칼바위에서 내기를 한 것이다.
왜군 장사는 99번을 하고 100번째 턱걸이를 하려는 순간 힘이 다해 바위 밑으로 떨어졌고, 그
때 바위의 끝이 쪼개져 나갔다고 전한다.
결국 시흥 장사가 이기자 왜군은 약속대로 후퇴를 하였고, 긴장이 풀린 장사는 소변을 보았는
데, 그 줄기가 얼마나 강한지 바위 한가운데가 움푹 패여 나갔다고 한다. 그 바위가 인근에
있는 팽이바위라고 한다.

칼바위가 세워진 틈새는 매우 좁아보이지만 속은 매우 넓어서 6.25시절에 이곳에 숨어 지낸
사람이 여럿 있었다. 허나 바위는 위치상 출입 통제구역이라 그것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  칼바위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벽산아파트와 시흥동,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구, 광명시
광명시 지역

▲  칼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②
(시흥동과 광명시 하안동, 소하동, 구름산과 가학산 산줄기)
이렇게 하여 늦가을 호암산 나들이는 다음의 인연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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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12월 1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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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달달한 숲길, 인왕산자락길 (청운문학도서관, 청운공원에서 수성동계곡까지)

 


' 서울 도심에 숨겨진 상큼한 숲길, 인왕산자락길 '

▲  인왕산자락길 (은행나무숲길)

▲  인왕산자락길 가온다리

▲  이빨바위

 


 

늦가을이 존재감을 진하게 드러내며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물들이던 11월의 어느 평화
로운 날, 인왕산 품에 숨겨진 인왕산자락길(숲길탐방로)을 찾았다.

인왕산자락길은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동쪽 자락에 닦인
둘레길로 2개의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제1코스(2.7km)는 인왕산길을 졸졸 따라가는 탐
방로로 윤동주문학관에서 인왕산길을 따라 사직단(사직공원)까지 이어진다.
경사가 거의 느긋하여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지 마음 편히 거닐 수 있으며, 시내와
도 무척이나 가까워 언제든 도시로의 탈출이 가능하다. 다만 인왕산길이 차량들 왕래가
빈번하다보니 비록 작은 소음이지만 종종 적막을 깨뜨린다.

본글의 주인공인 제2코스는 숲길탐방로(3.2km)로 윤동주문학관에서 산길을 따라 이빨바
위, 가온다리, 수성동계곡 윗쪽을 거쳐 택견수련터(황학정 북쪽)까지 이어진다. 인왕산
길과 서촌(西村, 웃대) 주택가 사이에 자리한 길로 제1코스와 달리 차량의 눈치와 소음
걱정에서 벗어나 아늑하고 달달한 산길의 멋을 느낄 수 있다. 다만 오르락 내리락 굴곡
이 다소 있어서 약간은 힘들 수 있다. 하지만 다리만 멀쩡하면 삼척동자도 능히 완주할
수 있으니 걱정 따위는 인왕산 산바람에 날려보내기 바란다.

제2코스는 인왕산길(제1코스)과 서로 만날 듯 가깝게 거리를 두고, 경쟁을 하듯 펼쳐져
있다. (현실은 청운공원과 택견수련터에서만 만남) 아주 편한 길을 원한다면 제1코스를
, 차량의 눈치 없이 아늑한 산길을 꿈꾼다면 제2코스(숲길탐방로)를 이용하자. 특히 제
2코스에는 숨겨진 명소와 계곡, 약수터가 많고 풍경도 고우며, 서울 도심이 늘 옆에 파
노라마처럼 따라다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번 나들이는 제2코스를 이용하여 윤동주문학관에서 사직단(社稷壇, 사직공원)까지 이
동했다. 늦가을이 겨울 제국의 압박으로 생각보다 명이 짧아서 그가 지기 전에 그의 가
랭이라도 붙잡을 겸 서둘러서 찾았는데, 아직은 늦가을 풍경이 여전해 내 정처 없는 마
음과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오감(五感)을 크게 정화시켜 주었다. 역시 사람은 대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이후 제2코스는 인왕산자락길이라 표시하며, 제1코스는 인왕산길로 표시함)


▲  윤동주문학관 앞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바로 앞에 붉은 뒷통수를 보인 주택들은 청운벽산빌리지이다.


 

♠  우리나라 최초의 한옥 공공도서관, 인왕산 동쪽 자락에 자리해
문학의 향기를 흩날리는 청운문학도서관 (청운공원)

▲  윗쪽에서 바라본 청운문학도서관

'한옥으로 지어진 도서관이 있다? 없다?'란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해야 될까? 2014년 11월 중순
까지는 '없다'로 해야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있다'로 바뀌었으니 그 정답을
바꾼 첫 현장이 바로 청운공원에 자리한 청운문학도서관이다.

윤동주문학관에서 청운공원, 인왕산자락길로 이어지는 2차선 길(자하문로35길)을 따라 3~4분
정도 가면 왼쪽(남쪽) 밑에 근래 지어진 산뜻한 한옥들이 모습을 비춘다. 처음에는 전통체험
공간으로 여겼으나 확인해보니 종로구에서 닦은 청운문학도서관이다. 콘크리트 건물이 진리를
이루고 있는 현실에서 한옥으로 도서관을 지을 생각을 하다니 그 생각이 참 기발하다. 그 발
상 덕분에 이 땅 최초의 한옥 공공도서관이란 근사하면서도 변치 않을 타이틀을 지니게 되었
다.

종로구가 '책읽는 종로만들기' 프로젝트를 야심차게 추진하면서 짜투리 공간을 활용하여 조그
만 공공도서관(일반 도서관 11곳, 문학 또는 예술로 특화된 도서관 7곳) 18곳을 지었는데 청
운문학도서관은 문학 특화 도서관으로 2014년 11월 19일에 문을 열었다.
종로구의 16번째 공공도서관으로 문학 특화 도서관이 된 것은 바로 옆에 윤동주문학관과 윤동
주시인의 언덕 등 현대 문학의 성지(聖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히 문학 특화의 목적
을 띄게 된 것이다. 그래서 종종 문학인과 명성이 있는 지식인을 초청해 문학 관련 프로그램
이나 강좌를 운영하고 있으며, 윤동주문학관과 한 덩어리를 이루며 도심 속 문향(文香)의 성
지로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이곳은 인왕산 동쪽 자락이자 청운공원 한복판으로 주변이 온통 싱그러운 자연에 감싸여 풍광
이 곱다. 그러다보니 정녕 이곳이 서울 도심 한복판이 맞는지 고개가 절로 갸우뚱거린다. 마
치 머나먼 산골로 순간이동을 당한 즐거운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변 자연과 흔쾌히 어우러진 모습과 한옥의 미를 잘 드러내고 있어 '서울의 아름다운
건물 찾기 공모전'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건물에 쓰인 기와는 돈의문(敦義門) 뉴타운 개발로
철거된 한옥 기와 중, 괜찮은 것 3,000여 장을 추려내 재활용했다.

도서관의 규모는 734.35㎡로 본관(지하 1층, 지상 1층)과 조그만 별당으로 이루어진 조촐한
모습이며, 열람석 수는 115석, 소장 서적은 21,985권(2018년 1월 1일 기준)이다. 도서관 이용
방법과 책 대출 방법 등은 다른 도서관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관련 홈페이지 참조), 10시부터
22시까지 운영을 한다. (일요일은 19시까지, 매주 월요일은 쉼)

굳이 책을 빌리거나 독서를 하지 않더라도 나들이로 잠시 들릴만하다. 주변에 청운공원과 윤
동주문학관, 윤동주시인의 언덕, 인왕산, 부암동, 창의문, 북악산, 서촌 등의 굵직한 명소가
많고 한옥으로 지어진 매력 때문에 북촌(北村)의 필수 관광지로 꼽히는 정독도서관처럼 자연
스럽게 명소처럼 되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4-20 (자하문로36길 40, ☎ 070-4680-4032~3)
* 청운문학도서관 홈페이지는 아래 '남쪽에서 도서관 본관' 사진을 클릭한다.

▲  남쪽에서 바라본 도서관 본관
본관 지하층 앞쪽에 주차장이 있다.

▲  운치를 더해주는 도서관 돌담


▲  청운문학도서관 본관

도서관 본관은 'ㄱ'자 모습의 팔작지붕 한옥이다. 겉으로 보면 1층 같지만 그 밑에 지하층을
품고 있어서 지상 1층, 지하 1층 규모를 이루고 있다. 지하는 서고(書庫), 지상은 열람실 및
교육 공간으로 쓰이며, 교육이나 강좌 프로그램이 없을 때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책을 읽으며
문향을 즐기면 된다.


▲  온갖 화초와 동물이 새겨진 도서관 담장의 위엄
이보다 우아한 도서관 담장이 또 있을까? 전통식 고급 담장에 충실하고자
다양한 화초와 동물 문양을 넉넉히 담아 넣었다.

▲  메마른 연못에 다리를 담군 1칸짜리 별당(別堂)

본관 서쪽에는 1칸짜리 별당이 자리해 있다. 별당 옆에는 연못이 있으나 내가 갔을 당시에는
물이 없는 휴업 상태였다. 만약 연못에 물이 차있고, 연꽃까지 두둥실 떠있었다면 그 운치가
몸살나게 죽여줬을 것이다.
별당은 늘 열린 공간으로 누구든 들어가서 책을 보면 된다. 가끔 명사들을 초청해 여기서 강
연이 열리기도 한다. 허나 이곳은 엄연한 도서관의 일원이기 때문에 대놓고 낮잠을 자거나 음
식을 섭취하는 행위 등은 하지 말자.


▲  탁자만 외로이 놓여진 별당 내부
여기서 책을 읽는다면 내용이 무엇이든 머릿속으로 술술 잘 들어올 것 같다.
그만큼 독서의 명당 자리이다.

▲  청운문학도서관 서쪽 출입구 (별당 옆에서 바라본 모습)

▲  붉게 타오른 단풍이 마중을 하는 청운문학도서관 서쪽 출입구
(바깥에서 바라본 모습)

▲  붉은 단풍이 진하게 아른거리는 청운공원 숲길 (인왕산자락길)
늦가을 단풍이 소리 없이 내려앉으면서 내 마음도 덩달아 알록달록 물들어간다.
(청운문학도서관 서남쪽, 인왕산자락길)

▲  늦가을의 붉은 수채화 속을 거닐다 (청운공원 인왕산자락길)

청운문학도서관 서쪽 출입구를 나오면 몸을 푸는 운동시설과 분수대가 있는 청운공원 서쪽 구
역이다. 여기서 오른쪽 산길을 오르면 인왕산자락길이 펼쳐진다. (인왕산길과도 연결됨)

청운공원은 종로구의 지붕인 인왕산 동쪽 자락에 자리를 닦은 공원으로 2007년에 인왕산 잡석
들을 모아서 만든 '인왕산에서 굴러온 바위(돌아파트)'와 2009년에 공원 동쪽을 떼서 만든 윤
동주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 등이 있다. 2014년에는 청운문학도서관까지 지어지면서 공원
을 더욱 알차게 수식해준다.
도심보다 한층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탓에 서울 도심과 남산, 부암동, 홍지동 일대가 훤
히 바라보여 조망도 일품이며,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 경계에 자리해 있어 바로 밑에 펼쳐
진 도심보다 청정한 공기를 자랑한다. 또한 서울 장안의 주요 해맞이 명소로 매년 1월 1일 아
침에 해맞이 축제가 열리며, 나무와 각종 꽃이 가득해 봄에는 벚꽃과 진달래, 개나리가 봄의
향연을 열고, 가을에는 오색영롱한 단풍잎이 가을의 향연을 베푼다.

청운공원 서쪽 구역에는 꿈의 분수라 불리는 바닥분수와 넓은 운동장이 있다. 꿈의 분수는 매
일 2회 조촐하게 분수쇼를 선보이는데, 그리 현란한 편은 아니며, 그냥 주변을 시원하게 해주
는 정도이다. 가동 기간은 4월부터 10월까지로 1차는 11시에서 13시까지, 2차는 15시부터 16
시까지이며, 겨울에는 무조건 쉰다. (가동 기간과 시간은 언제든 변경될 수 있음)
분수쇼는 전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분수와 어울려 물놀이를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러니
그냥 눈으로만 보기 바란다.

* 청운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7-4 일대


▲  꿈의 분수가 있는 청운공원 서쪽 구역, 그 너머로 서울 도심이
장대하게 펼쳐져 있다.

▲  청운공원 서쪽 구역에서 바라본 북악산(백악산)의 위엄


 

♠  인왕산자락길 이빨바위에서 해맞이동산까지

▲  인왕산 이빨바위
그저 단단해 보이는 뚜껑돌 위에도 자연은 피어나고 있었다.
 

청운공원에서 인왕산자락길로 들어서 1굽이 지나면 이빨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검은 이빨을 드
러내며 발길을 붙잡는다.
바닥에 누운 커다란 암석과 뚜껑돌처럼 놓인 암석 중간에 마치 동물의 이처럼 생긴 부분이 있
어 눈길을 끄는데 그로 인해 이빨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그는 자락길을 닦으면서 발굴
된 것으로 나도 그의 존재는 처음인데 사람의 틀니나 해골의 입처럼 보이기도 하며, 배가 고
파서인지 모르지만 햄버거처럼 보이기도 한다. 제 눈이 안경이라고 사람마다 눈에 비치는 모
습이 다 같을 수는 없다.

이처럼 잘생기거나 요상하게 생긴 바위에는 꼭 믿거나말거나 전설이 있기 마련이나 눈썰미가
좋은 옛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는지 그에게 깃든 전설은 딱히 없다. 다만 자락길을
닦으면서 초반에 종로구청에서 인왕산 치마바위와 인연이 깊은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와 중
종(中宗)의 이야기를 어거지로 지어서 당당하게 안내문까지 부착했는데, 그 내용이 실로 개판
에 똥판 수준이라 말들이 많자 그 안내문을 떼어버렸다. 대신 '건강한 치아는 오복 중의 하나
! 이빨바위를 보며 건강과 평안을 빌어보십시오'
란 조그만 돌 표석을 달았다. 차라리 엉터리
전설보다는 돌 표석 안내문이 훨씬 깊이가 있어 보인다.


▲  이빨바위 남쪽 쉼터 (운동시설이 여럿 있음)

▲  소나무 숲 사이로 바라보이는 서촌(웃대)과 서울 도심
자락길을 한 굽이 넘을 때마다 서울 도심은 조금씩 모습을 달리한다.

▲  조그만 계곡(청풍계로 여겨짐)을 건너는 나무데크 탐방로
(청운마루와 이빨바위 사이)

인왕산은 단단하게 생긴 바위 산이라 계곡과 샘터가 거의 없을 듯 싶지만 겉보기와 달리 많은
계곡과 샘터를 지닌 부드러운 산이다. 다만 서울 도심에 자리한 탓에 개발의 칼질이 계곡을
마구 끊어버리면서 눈에 보이는 것이 거의 없을 뿐이다.

인왕산 품에는 2012년에 복원된 수성동계곡을 비롯해 백운동(白雲洞), 청풍계(淸風溪), 청계
동천(淸溪洞天), 옥류동(玉流洞) 등 서울 장안의 경승지로 명성을 날렸던 계곡들이 많다. 허
나 수성동(水聲洞)을 제외하면 다들 조그만 편이며, 수성동 상류와 홍제동 환희사계곡이 그나
마 제대로 남아있다. 그 외 계곡들은 주택가 등 시가지 확장으로 모조리 강제 생매장을 당해
산 속 상류에만 여리게 물줄기가 남아있을 뿐이다. 인왕산자락길은 시내에서 모두 실종된 듯
보이는 인왕산 서촌(웃대) 방면 계곡들의 상류를 거의 만나볼 수 있는 소중한 현장으로 인왕
산을 달리 보는 계기를 선사해준다.

청운마루 직전에 이르면 넓게 닦인 나무데크 공간이 나온다. 그 밑에도 조그만 계곡이 가늘게
흐르고 있는데, 위치를 봐서는 청풍계(淸風溪) 상류로 짐작된다.
조선 중기 인물인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 청풍계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주변 풍경이 수
려해 청풍각(淸風閣)이란 별도의 건물을 지었다. 바로 그 건물로 인해 이곳 계곡이 청풍계란
간판을 달게 되었고, 청풍계와 인근 백운동의 이름을 따서 청운동이 되었다. <옛날에는 장동(
壯洞)이라 불림>

이곳 역시 주택가에 이르러서는 강제 생매장을 당해 청계천으로 흘러가며, 계곡 왕년의 모습
은 겸재 정선
(謙齋 鄭敾)이 그린 장동8경첩에 잘 남아있다.


▲  인왕산자락길의 구름다리인 가온다리

청풍계 추정 계곡을 건너 고개를 넘으면 '청운마루'라 불리는 나무로 다진 조망대가 있고, 바
로 조망대 정면(남쪽)에 인왕산자락길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가온다리가 펼쳐져 있다.
그는 일종의 흔들다리로 지방의 산이나 호수, 섬에서나 볼 수 있는 관광용 흔들다리가 이렇게
서울 도심에 버젓히 나타나 내 앞에 아른거리니 '서울에서 이제 흔들다리나 구름다리를 다 보
는구나~! 내가 너무 오래살았나?' 그저 충격과 놀라움 그 자체였다.
흔들다리의 성지인 파주 감악산(紺岳山), 원주 소금산, 청양 천장호 등 스케일이 큰 흔들다리
만은 못해도 서울에 거의 흔치 않은 흔들 구름다리로 흔들다리의 이름값은 하고 있으며, 이곳
이 깊은 협곡을 이루고 있어 눈요기도 시킬 겸, 이렇게 높이 구름다리를 닦은 것이다.

처음에는 다리 이름이 딱히 없었으나 언제부터인가 '가온다리'란 간판을 달게 되었는데, 사람
의 중량과 다리를 흥분시키는 정도에 따라 흔들리는 강도가 조금씩 다르다. 가벼운 사람이 건
너면 거의 미동 정도로 흔들리고, 무게가 좀 있거나 다리를 막 건드리면 조금은 출렁거려 사
람에 따라 염통이 쫄깃해지는 짜릿함도 느낄 수 있다.


▲  북쪽에서 바라본 가온다리

다리 저 밑에는 계곡이 흐르고 있는데, 위치를 봐서는 옥류동(玉流洞)계곡으로 여겨진다. 옥
류동에는 청휘각(晴暉閣)이란 유명한 정자가 있었는데, '청휘'란 이름은 '비가 개인 뒤에 맑
은 햇살이 비추는 누각'이란 상큼한 뜻으로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집 후원에 지었다.
이후 옥류동의 대표 명소로 이름을 날렸고, 겸재 정선이 그린 장동8경첩에 그 존재가 남겨져
있다.
그토록 아름답던 청휘각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흔적 조차 더듬기 어렵게 되었고, 옥류동
도 왕년의 위엄을 잃은 채, 인왕산 숲속에서나 겨우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
고보면 인왕산은 20세기를 거치면서 인간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상실 당했다. 게다가 서울 도
심에 자리해 있으니 그 희생의 정도는 매우 컸다.


▲  남쪽에서 바라본 가온다리

▲  가온다리 남쪽에서 바라본 청운동(淸雲洞) 지역과 북악산(백악산)
그들 너머로 북한산(삼각산) 남쪽 줄기가 살짝 모습을 비춘다.

▲  남쪽 밑 계단에서 바라본 가온다리

▲  청와대를 꿈꾸는 청와마루

가온다리를 건너 고개 1굽이를 넘으면 청와마루가 마중한다. 이곳은 청와대가 정면에 보이는
위치라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청와대와 함께 서촌(웃대)과 북악산(백악산), 서울 도
심부가 사이 좋게 시야에 들어온다.


▲  청와마루에서 바라본 서촌(웃대)과 북악산, 청와대

▲  숲 너머로 보이는 서울 도심 (청와마루 남쪽)

숲 사이로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도심이 모습을 비춘다. 인왕산자락길은 서
울을 잊게 할 정도로 싱그러운 산길이나, 번잡한 도심이 늘 옆에 머물며 감시의 눈길을 떼지
않는다. 마치 이곳이 시골이 아닌 서울 한복판임을 잊지 말라는 듯이...


▲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은행나무숲길

버드나무약수터와 청와마루 사이에는 은행나무가 조촐히 우거진 숲길이 있다. 비록 숲길의 거
리는 얼마 되지 않으나 은행잎이 황금 비단처럼 깔려 있으니 대자연 형님의 초청을 받아 잔칫
집이나 연회장에 들어서는 기분이다. 그만큼 감동의 너울은 컸다. 이곳의 아름다움은 두고두
고 망막과 가슴 속에 은은히 남아 아른거렸고 그들이 그리워 이후에도 여러 번 찾아왔다.


▲  은행잎이 깔린 은행나무숲길
땅바닥에 귀를 접고 누워있는 은행잎과 온갖 단풍잎들, 우리는 그들을
우울한 이름의 두 글자 '낙엽'이라고 부른다.

▲  은행나무숲길 (남쪽에서 바라본 모습)

▲  버드나무약수터 체육시설

은행나무 숲길에서 1굽이 지나면 버드나무약수터 체육시설이 마중을 한다. 옥인동(玉仁洞) 주
민들의 체력 단련을 위해 닦여진 것으로 늦가을 절정에 잠긴 나무들이 흩날린 누런 낙엽과 은
행잎이 바닥을 잔잔히 덮으며, 흙길의 촉감을 부드럽게 해준다.


▲  샘터의 기능을 잃은 옛 버드나무약수터

버드나무약수터는 인왕산의 유명 약수로 위엄을 떨쳤던 샘터이다. 허나 부적합 판정으로 샘터
의 기능은 끊겼고, 대신 남쪽에 새로 샘터를 파서 버드나무약수터란 간판을 달았으나 그 역시
약수의 기능을 상실해 생태연못으로 새롭게 살아가고 있다.


▲  좁은 샘터에서 유유자적 살고 있는 물고기들
저들은 무엇을 먹고 살아갈까? 좁은 샘터에 마땅한 수초도 없을텐데 말이다.

▲  늦가을도 몸을 푸는 버드나무약수터 체육시설 주변

▲  약수터의 추억을 지닌 옥인동(玉仁洞) 생물서식공간

이곳은 원래 버드나무약수터로 사진에 보이는 돌거북이 인왕산이 빚은 물을 열심히 베풀고 있
었다. 허나 세월을 너무 안좋게 타서 부적합 빨간 딱지를 받게 되었고, 끝내 딱지를 벗어나지
못하자 약수터 폐쇄 대신 여기서 나오는 물을 활용해 그 앞에 조그만 생태연못을 만들어 옥인
동 생물서식공간으로 삼았다. 그래서 조금은 어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약수터가 생태연못(생태공간)으로 거듭난 현장으로 이런 예는 천하에서 이곳이 거의 유일할
듯 싶다.


▲  버드나무약수터에서 수성동으로 이어지는 인왕산자락길

▲  해맞이동산 북쪽 인왕산자락길


 

♠  인왕산자락길 (산들수목원약수터에서 수성동까지)

▲  낙엽이 짙게 깔린 산들수목원약수터 해맞이동산

산들수목원약수터는 버드나무약수터와 수성동 사이에 자리해 있다. 약수터 이름치고는 좀 긴
편으로 단순히 이름만 봐서는 산들수목원에 깃든 약수터로 착각할 수 있으나 그런 이름의 수
목원은 여기에 없으며, 수목원 같은 시설도 전혀 없다. 어찌하여 속칭 낚시성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직까지는 수질이 양호하여 마셔도 무리는 없다.


▲  산들수목원약수터

마침 주변에 있던 아저씨들이 인왕산에서 제
일로 물맛이 좋다며 1모금 권하길래 졸고 있
는 바가지를 깨워 마셔보았다. 약수터는 수도
꼭지로 물을 통제하고 있어 물을 마시려면 꼭
지를 돌려야 된다. 그러면 물이 쏴~ 쏟아진다. 
물을 마셔보니 딱히 특별한 맛은 느껴지지 않
는 이 땅에 흔한 약수 맛이다.

약수터 주변에는 '해맞이동산' 표석이 있는데, 해맞이에 걸맞게 동쪽을 향하고 있다. 여기서
는 매년 1월 1일 해맞이행사가 열린다.


▲  산들수목원약수터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서촌, 남산,
그리고 푸른 하늘

▲  산들수목원약수터에서 수성동으로 넘어가는 인왕산자락길
늦가을 단풍이 곱게 자연산 터널을 이루며 산책의 흥을 돋군다.

▲  자연산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수성동계곡 상류

산들수목원약수터에서 자락길을 따라 고개를 넘으면 수성동계곡 상류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는 인왕산길에서 내려오는 산길과도 만나는데, 상류는 복원된 계곡 중심부와 달리 거의 자연
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자연산 바위와 온갖 잡석이 좁은 계곡을 가득 메우고 있고,
그 사이를 인왕산이 베푼 계곡물이 거의 소리도 없이 흘러간다.
이곳은 청계천의 주요 발원지이기도 하며 수질이 양호해 도룡뇽, 가재, 개구리, 버들치 등이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좁은 계곡이나 그들에게는 이만한 보금자리가 없을 것이다.

계곡 주변은 나무가 무성하여 한여름에도 더위를 잊게 하며, 산길을 따라 1분 올라가면 인왕
산길(석굴암입구)이 나오고, 반대로 2분 정도 내려가면 수성동계곡 중심부와 그를 내세운 공
원이 나온다.


▲  수성동계곡의 또다른 상류

수성동의 상류는 3개 정도 된다. 석굴암에서 오는 계곡과 그 남쪽에서 오는 계곡, 인왕천약수
터에서 오는 계곡이 서로 상류를 자처하며 수성동으로 내려온다. 수성동은 이들을 통해 인왕
산의 맑은 물을 접수받아 청계천으로 흘려보낸다.

상류 계곡들은 계곡 중심부와 달리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이 계곡 역시 바위
틈의 좁은 협곡을 타고 물이 내려온다. 수량이 많으면 폭포도 신이 나고 폭포 밑에도 많은 물
이 고여 조촐히 담(潭)을 이룰텐데, 가을 가뭄이 풍년 수준이라 간신히 물만 축이는 실정이다
. 물과 흙이 있어야 될 자리에는 잡초만 무성해 폭포의 위기감을 더해준다.


▲  협곡을 그리며 내려오는 수성동의 또 다른 상류
인왕천약수터에서 내려온 계곡


인왕산에서 제법 이름이 있는 인왕천약수터도 수성동에 물을 보태고 있었다. 이 물줄기는 거
의 90도 각도가 진 암벽 사이의 좁은 공간을 타고 내려오는데 그 풍경이 나름 절경을 이루며,
조그만 폭포 앞에는 얕은 못과 모래밭이 있어 어린이들이 흙장난을 하며 놀기에 아주 적당하
다.
모래 옆과 다리 주변에 돌로 쌓은 인공의 흔적이 조금 끼어있어 약간의 어색함을 주나 그 외
에는 예전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어 수성동 상류의 원초적 모습을 살피는데 도움을 준다.


▲  수성동 중심으로 내려가는 상류 (인왕천약수터에서 내려온 물줄기)

▲  수성동 풍경을 더욱 돋보이게 꾸며주는 사모정

수성동계곡 한복판에는 이곳의 구수한 양념인 사모정이란 네모난 정자가 자리해 있다. 사모정
이란 네모난 정자를 뜻하는 것으로 달랑 1칸 크기의 아주 조그만 팔작지붕 건물이다.
새색시처럼 단아한 모습으로 계곡을 굽어보고 있는 그는 옛날부터 이곳을 스쳐갔던 정자는 절
대 아니며 계곡을 복원하면서 장식용으로 달아놓은 것이다. 정선이 그린 수성동 그림에도 정
자는 나와있지 않고, 수성동 관련 기록에도 정자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기 때문이다. 허나 계
곡과 나무만 있는 계곡에 전통 양식의 정자(亭子)를 하나 두니 수성동의 풍경이 한층 더 살아
나는 것 같다. 그럼 여기서 수성동에 대해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  사모정 앞을 흐르는 수성동계곡 - 서울 지방기념물 31호

인왕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수성동계곡은 인왕산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서울의 주
요 경승지로 조선 후기에 편찬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와 한경지략(韓京識 略) 등에 서
울 명승지로 절찬리에 언급된 곳이다. 이 계곡을 예로부터 수성동(水聲洞)이라 불렀는데, 이
는 계곡에 있는 '기린교' 돌다리 밑에 물소리가 청아하고 좋기로 명성이 자자하여 유래된 이
름이다.

수성동계곡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유명한 겸재 정선(鄭敾)이 그린 장동팔경첩(壯洞八景
帖), 즉 장동(壯洞) 지역에 이름난 명소 8곳을 그린 그림의 '수성동'이란 제목으로 어깨를 피
고 등장한다. 여기서 장동은 효자동(孝子洞)과 청운동 일대로 북촌과 더불어 왕족과 사대부(
士大夫)들이 앞다투어 집과 별장을 지었던 금싸라기 땅이다. 특히 이 지역에는 인왕산과 북악
산이 빚은 절경이 많은데, 그중에 장동8경이 대표적이다. (지금은 수성동과 창의문, 대은암
바위글씨 정도만 남아있음)

수성동에 가장 먼저 집을 지은 귀족은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이다. 그는 계
곡 아랫쪽 기린교 부근에 비해당(匪懈堂)이란 집을 짓고 살았는데, 나중에 창의문 북쪽에 무
계정사(武溪精舍)란 별장까지 장만했다.
영조(英祖) 시절에는 겸재 정선이 인왕산을 모델로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란 그림
을 남기면서 수성동을 비롯한 장동8경을 화폭에 담았는데 수성동 그림은 계곡 복원에 아주 큰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그 그림에는 기린교를 건넌 선비 3명과 시중을 드는 동자(童子) 1명이
계곡 상류로 걸어가는 모습이 담겨져 있고, 가벼운 붓놀림으로 이끼가 끼어있는 바위와 질감
을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도 비오는 날에 이곳을 찾아 '수성동 빗
속에서 폭포를 구경하다(水聲洞 雨中觀瀑)'란 시를 지어 수성동을 격하게 찬양했다.

이 계곡은 첩첩한 산주름 속이 아닌 도성(都城) 안에 자리하여 접근성 또한 아주 착했다. 그
래서 사대부 외에도 중인과 평민들도 많이 발걸음을 했는데, 인근 송석정(宋石亭)과 더불어
조선 후기 중인층을 중심으로 한 위항문학(委巷文學, 중인/평민/서얼들이 주도하는 문학활동)
의 성지(聖地)로도 명성을 날렸다.


▲  겸재 정선이 그린 수성동 그림 (기린교 돌다리가 그려져 있음)

이렇게 인왕산을 든든한 후광으로 두르며 장안의 경승지로 인기를 누렸던 수성동은 1960년대
이후 개발의 칼질이 정신없이 그어지면서 아작나기 시작했다. 1971년 옥인시범아파트 9동이
건방지게 수성동계곡을 깔고 앉았던 것이다. 하여 참으로 아름답고 착했던 수성동의 경관은
99% 망가지고 말았다.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인근 청풍계나 옥류동처럼 계곡이 거의 증발하는 꼴은 면했지만 아파트
로 인해 계곡 폭도 줄어들고 아파트 사이를 마치 버려진 하천처럼 흘러가면서 완전 천덕꾸러
기 신세가 되어버렸다. 아파트 9동 앞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해 어두컴컴한 지하를 거쳐 역시
나 생매장된 청계천으로 서글프게 흘러가야 했으며, 수성동 뿐만 아니라 도심의 많은 경승지
들이 인간의 욕심 앞에 큰 고통을 받으며 꽃잎처럼 지고 말았다.

그 이후 수성동의 이름 3자는 속인(俗人)들의 뇌리 속에서 점차 시들어가고 동네 사람들만 세
월의 저편으로 잊혀져 가던 계곡의 이름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서울 전문을 자처하는 본인
역시 수성동의 존재를 안 것은 2011년, 그 이전에는 인왕산에 이런 곳이 있는 것도 몰랐고 그
런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존재감이 밑바닥을 기었던 것이다.
 
옥인시범아파트에 깔린 채, 40년 가까이 고통스럽게 살았던 수성동계곡. 개발의 칼질에 빼앗
긴 계곡에도 과연 봄이 올 것인가? 이러다가 수성동 이름 3자가 영구히 지워지는 것은 아닐까
?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계곡을 해방시킬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수성동에게는
절망의 시절이었다.
허나 자연과 인간의 대결에서 거의 자연이 이기듯, 수성동에게도 좋은 소식이 날라왔다. 옥인
아파트가 2008년 재난안전위험시설 C급으로 지정되면서 철거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수성동
의 가치를 뒤늦게 깨달은 서울시는 아파트를 밀어버리고 계곡을 복원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우
선 2010년 10월 21일 기린교를 비롯한 수성동계곡 일대를 서울시 지방기념물로 삼아 늦게나마
문화유산으로 대우를 해주기 시작했다.
이후 인왕산을 가리며 계곡의 목을 조르던 옥인아파트는 입주민을 싹 내보내고 2011년까지 모
두 철거되었으며, 아파트 주변을 통제하고 1년의 복원공사를 벌여 2012년 7월 마무리되었다.

계곡 복원을 위해 전문가와 사회단체, 문화재청에 자문을 구했고 정선의 수성동 그림을 적극
참조했다. 또한 옛 경관을 어느 정도 재현하고자 소나무를 중심으로 상수리나무, 참나무, 산
철쭉 등 우리 고유의 나무 18,477그루를 심었으며, (그중에 구부러진 소나무가 제일 많음) 돌
단풍과 바위취 등 다양한 화초를 심어 주변과의 조화를 꾀했다.
그리고 좁아진 계곡을 크게 넓혀서 계곡 양쪽에 전통 방식으로 돌을 쌓아 암석 지형을 최대한
회복하고자 했으며, 계곡 중간에 전통식 정자를 세워 선비와 지배층의 풍류를 조금이나마 느
끼도록 했다. 그리고 정선이 수성동 그림을 그린 곳으로 추정되는 계곡 아랫쪽(기린교 동쪽)
에 관람공간을 조성해 정선의 눈으로 계곡을 바라볼 수 있게끔 했으며, 계곡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산책로를 닦아 인왕산과 어우러진 시민공원의 성격도 겸하게 했다.

수성동계곡 공원에는 복원된 계곡을 비롯하여 이곳의 터줏대감이자 유일한 오래된 존재인 기
린교가 있으며, 옥인아파트 주민들의 요청으로 공원 북쪽에 아파트의 잔재를 일부 남겨 수성
동을 거쳐간 개발 지상주의의 그릇됨을 일깨우게 했다.
상류 부분과 사모정 주변은 계곡 출입이 그런데로 가능하나 계곡 하류와 기린교 주변은 통제
하고 있다. 게다가 계곡을 복원했다고는 하지만 완전 옛날 모습은 아니며 여전히 비슷한 자리
(옛 옥인아파트 9동 자리로 지금은 계곡 관람공간으로 바뀜)에서 지하로 생매장을 당해 청계
천으로 흘러간다.
청계천까지 이어지는 전 구간을 모두 끄집어내어 복원하면 좋겠지만 이미 시가지가 꽉 들어차
거의 불가능하다. 계곡이 생매장되는 구역은 계곡이 상당히 밑으로 내려간 상태이고, 주변 바
위들도 날카로운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어 사고의 위험이 있다. 기린교 같은 경우는 계곡이 3m
밑에 흐르고 있으므로 조금 아찔하다.

도시 개발의 칼질에 희생된 수성동은 개발의 난도질이 무조건 능사가 아님을 보여준다. 안그
래도 사람도 허벌나게 많고, 빌딩도 많고, 공기도 탁한 서울 도심에 마음 편히 의지할 수 있
는 공간이 하나 더 생겼으니 그 가치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비슷하다 할 것이다.
비록 완전하게 복원된 것은 아니나 가급적 옛 모습을 되살리고자 했고, 복원공사를 벌이는 중
에도 여러 의견을 수렴해 어색함을 최대한 줄이고자 했다. 그래서 인왕산이 베푼 옥계수를 모
아 계곡을 재현했으니 어설프게 재현되어 전기와 세금만 축내는 청계천과 달리 살아있는 계곡
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79-1, 185-3외


▲  도심을 향해 흘러가는 수성동계곡 (사모정 주변)

인왕산자락길은 수성동계곡 상류를 지나간다. 이번은 어디까지나 자락길이 중심이라 그가 지
나는 부분만 살폈을 뿐, 기린교를 비롯한 나머지는 모두 통과했다. 수성동은 이미 20번을 넘
게 가본 곳이고 자락길 종점까지 아직 갈 길이 멀기 때문에 굳이 자세히 살펴볼 필요는 없었
다.


▲  수성동에서 남쪽으로 넘어가는 인왕산자락길
내용 분량 관계로 본글은 여기서 마무리를 짓는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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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염통을 쫄깃하게 건드렸던 잘생긴 바위 명산, 호암산 (서울둘레길, 호압사)

 

 

' 호암산 늦가을 나들이 '

▲  호암산 (사진 밑부분에 보이는 기와집이 호압사)


 

천하가 늦가을에서 겨울로 서서히 변해가던 11월 한복판에 일행들과 나의 즐겨찾기 명소
인 호암산을 찾았다. 호암산에 안길 때는 시흥2동 호압사입구에서 보통 출발을 하였지만
이번에는 약간의 변화를 주어 삼성산성지에서 첫발을 떼었다.

신림역(2호선)에서 서울시내버스 152번(화계사↔안양 경인교대)을 타고 관악구를 가로질
러 삼성산성지에서 발을 내린다. 여기서 호암산의 품으로 들어서면 삼성산성당과 삼성산
청소년수련관이 나오고, 그곳을 지나 5분 정도 더 가면 계곡 오른쪽 산중턱에 천주교 성
지인 삼성산성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  삼성산성지 동쪽 삼호약수터



  서울의 대표적인 천주교 성지의 하나, 기해박해 때 처형된
프랑스 신부 3명이 안장되었던 삼성산성지(三聖山聖地)

▲  기해박해 때 처형된 프랑스 신부 3명의 무덤 (유해 일부가 묻힘)

삼성산 북쪽이자 호암산 북쪽 자락 소나무 숲에 둥지를 튼 삼성산성지는 용산 새남터, 합정동
절두산성지(合井洞 切頭山聖地)와 더불어 서울의 대표적인 천주교 성지의 하나로 1839년 기해
박해(己亥迫害) 때 새남터에서 처단된 프랑스 천주교 신부 3명이 안장된 곳이다.

이곳에는 제2대 조선교구 주교인 라우젠시오 엥배르<1797~1839, 조선 이름은 범세형(范世亨)>
와 모방 신부로 잘 알려진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1803~1839, 조선 이름은 나백다록(羅伯多祿)>
, 그리고 자코브 오노레 샤스탕<1803~1839, 조선 이름은 정아각백(鄭牙各伯), 사사당(沙斯當)>
이 묻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프랑스 출신으로 청나라를 거쳐 조선에 들어왔다.

라우젠시오 엥배르(Laurent Joseph Marie Imbert)는 1797년 프랑스 뷰슈뒤론 데파르트망에서
태어나 1819년 천주교에 입문하여 신부가 되었다. 1820년 마카오로 건너가 활동했고, 1830년에
청나라 사천성(四川省) 부주교로 승진되었다가 1837년 제2대 조선교구 주교(主敎)로 임명돼 그
해 정하상(丁夏祥)과 함께 조선에 잠입했다.
1838년 서울로 들어와 천주교 영업과 교세 확장에 매진했으며, '범세형'이란 조선 이름까지 만
들었다. 허나 1839년 수원에서 체포되어 그해 9월 21일 이곳에 묻힌 2명과 나란히 망나니의 칼
을 받아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만다.
그는 조선 신도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한양교우회장인 현석문(玄錫文)에게 넘겼는데, 이것
이 1958년 프랑스 파리에서 간행된 기해일기(己亥日記)이다. 1925년 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시복<諡福, 천주교 신앙에 모범을 보이며 죽은 이를 복자(福者)의 반열로 추대하는 것, 복자는
교황청에서 추대함>되었고,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으로 우리나라를 찾은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에 의해 한국 103명 순교자의 하나로 추대를 받았다.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Pierre-Phillibert Maubant)은 1803년 프랑스 바시 출생으로 1831년 파
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신학교에 들어갔다.
1832년 청나라 사천성으로 가던 중, 조선교구 초대 주교인 브뤼기에르와 조선으로 가기로 하고
압록강까지 왔으나 국경 감시가 심하여 만주 마가자(馬架子)에 머물렀다. 이후 브뤼기에르가
병사하자 1835년 겨울, 삿갓에 상복 차림으로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잠입, 정하상의 안내로 서
울에 들어와 영업을 하면서 '나백다록'이란 조선 이름을 만들었다.
1837년 김대건(金大建)과 최양업(崔良業), 최방제(崔方濟)를 마카오 오문신학교(澳門神學校)로
유학을 보냈으며, 기해박해 때 충청도 홍성(洪城)에서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처단되었다. 1925
년 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한국 103명 순교자의 하나로 추대되었다.

자코스 오노레 샤스탕(Jacques Honor Chastan)은 1803년 프랑스 마르쿠에서 출생, 1826년 디뉴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신부가 되었다. 1837년 조선교구 주교의 서품을 받고 앵베르와 서울로 잠
입했으며, '정아각백', '사사당'이란 조선 이름을 만들었다.
그 역시 서슬 시퍼런 기해박해의 그물망에서 벗어나지 못해 충청도 홍성에서 체포되었으며, 새
남터에서 처단되었다. 1925년 로마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복자 반열에 올랐고, 1984년 한국
순교자 103인의 하나로 추대되었다.

그들이 처단되자, 목은 하늘 높이 효수되고 유해는 20여 일 동안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
었다. 이에 발끈한 박바오로 등 신자 여럿이 시신을 수습해 신촌 뒷산인 노고산(老姑山)에 안
장했으며, 1843년 박바오로가 삼성산에 있는 그의 선산(지금의 삼성산성지)으로 몰래 옮겼는데
아들인 박순집(朴順集, 1830~1911, 세례명 박베드로)에게만 무덤 자리를 알려주고 다른 사람에
게는 절대 비밀로 부쳤다.
이후 천주교가 공인되고 순교자에 대한 시복이 이루어지자 박순집이 교구에 이 사실을 알렸고
1901년 10월 21일 유해를 발굴하여 원효로(元曉路)에 있는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긴 다음, 11월
2일 명동성당(明洞聖堂) 지하묘지로 안장되었다.

1970년 대방동 본당 주임 오기선 신부는 최석우 신부의 자료 고증과 정원진 신부의 회고를 바
탕으로 프랑스 신부가 묻혔던 무덤 자리를 찾게 되었으며, 그해 5월 12일 김수환 추기경과 노
기남 대주교(大主敎), 박순집의 후손들이 참여한 가운데, 삼성산순교자성지(三聖山殉敎者聖地)
기념비 축성식을 가졌다. 그리고 1989년 서울대교구에서는 이곳 임야 16,000평을 사들여 명동
성당 지하에 안치된 3명의 유해 일부를 가져와 무덤을 만들고 축성식을 가졌으며, 1992년에는
무덤 북쪽에 삼성산성당을 세워 이곳을 천주교의 주요 성지로 애지중지 하고 있다.

삼성산(三聖山)이란 이름은 신라 중기에 원효대사(元曉大師)와 의상대사(義湘大師), 윤필대사
(尹弼大師)가 삼막사(三幕寺) 자리에서 불도를 닦았다고 하여 유래된 오래된 이름인데, (또는
고려 후기에 무학대사, 나옹선사, 지공대사가 수도했다고 함) 천주교에서는 프랑스 신부 3명이
묻힌 연유로 삼성산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우기고 있다. 허나 근거는 없으며 불교와 관련해서
유래된 이름이 맞다.


▲  1970년에 지어진 삼성산순교자성지 기념비와 십자가에 박힌 예수 형상

삼삼한 소나무 숲에 묻힌 삼성산성지는 순교자성지 기념비와 예수상, 프랑스 신부의 무덤, 성
모마리아상, 예수의 고난을 표현한 조그만 석물, 그리고 두 다리를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의자
여럿이 전부이다. 천주교 성지라기보다는 누구나 편히 안길 수 있는 자연공원 같은 아늑한 분
위기로 순교자성지 기념비와 무덤 주위를 돌며 기도를 하는 신도들이 여럿 눈에 띈다.

이곳은 인적도 그리 많지 않아 한적하기 그지 없으며 솔내음이 진하게 나래를 펼치고 있고, 도
심이 바로 지척임에도 공기가 청정하여 속세에서 오염된 머리와 마음을 정화하기에는 딱 좋다.
호암산(삼성산)에 널린 명소의 하나로 간단히 둘러볼 만하며, 2011년 11월에 전구간이 뚫린 관
악산 둘레길과 서울시의 야심작 서울둘레길이 이곳을 통과한다.

참고로 관악산둘레길은 사당역에서 출발하여 관음사, 낙성대(落星垈), 서울대, 약수암, 삼성산
성지, 호압사, 시흥계곡을 거쳐 석수역까지 연결되는 13km의 장대한 산길로 서울시의 야심작인
157km 서울둘레길도 이 구간의 신세를 징하게 진다. (사당역~석수역 같은 구간을 이용함)

※ 삼성산성지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림역(3번 출구)에서 152, 5522(A)번 버스를 타고 삼성산성지 하차.
*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3번 출구)에서 5517, 6515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1,9호선 노량진역(1,2,8번 출구를 나와서 한강대교 방면으로 가면 정류장 있음)에서
  152, 5517번 버스 이용
* 삼성산성지 정류장에서 도보 10분 거리로 관악산둘레길과 서울둘레길이 성지 옆을 지나간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산57-14


▲  겨울에 서서히 잠기고 있는 관악산둘레길 (삼성산성지 남쪽)

▲  삼성산성지에서 호압사로 이어지는 산길 (관악산둘레길)

삼성산성지를 간단히 둘러보고 호암산 서쪽에 자리한 호압사로 길을 옮긴다. 지도로 보면 조금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야트막한 산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바로 호압사의 뒷통수인 호압
사 분기점에 이른다.


▲  호압사 채소밭에서 바라본 호암산(虎巖山)의 위엄
알록달록 익어가는 늦가을 단풍이 산 전체를 활활 태우고 있다.


호압사 뒤쪽(동쪽)에는 호암산 등산로가 여럿 지나간다. 이곳을 편의상 '호압사분기점'이라고
하는데, 관악산둘레길이 이곳을 거쳐 호암산폭포, 석수역, 서울대 방면으로 이어지고, 서울둘
레길 또한 그 길에 숟가락을 얹히며 같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여기서 남쪽 오르막 길을 오르면 호암산 정상과 삼성산으로 이어지며 채소밭을 끼고 동쪽으로
이어진 산길(관악산둘레길)은 삼성산성지로 이어진다. 북쪽으로 난 평평한 길은 난곡(蘭谷)과
독산동으로 통하며, 서쪽은 호압사와 시흥2동 벽산아파트로 이어지니 취향대로 고르면 된다.


 

♠  서울을 위협하는 호암산의 기운을 누르고자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지어진 오래된 산사 - 호암산 호압사(虎壓寺)

▲  석축 위에 터를 다진 호압사 경내

삼성산의 일원인 호암산 서쪽 자락 230m 고지에 자리한 호압사는 호랑이를 누르는 절이란 뜻으
로 자비를 강조하는 불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이 절이 호랑이와 무슨 원수를 졌
길래 호랑이에게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을까?

지금이야 그리 신경은 쓰지 않겠지만 옛날 사람들은 풍수지리(風水地理)를 매우 신봉했다. 고려
를 뒤엎고 조선이란 비리비리한 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개경(開京)을 버리고 지금의
서울을 도읍으로 삼고자 땅을 살폈는데, 활활 타오르는 모습의 관악산(冠岳山)과 호랑이를 닮은
호암산이 나란히 서울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 잔뜩 기겁을 하게 된다. 이들 산이 서울에 무슨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조물주 형님이 그렇게 빚어놓은 것 뿐인데, 생긴 모습이 그러
하니 풍수지리적으로 서울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버린 것이다. 하여 두 산의 기운을 잡고자 숭례
문(崇禮門, 남대문)의 현판을 세로로 세우고, 관악산 정상 밑에 절을 세웠으며, 호암산에 호압
사를 세우는 등 난리법석을 떨었다.

호압사는 1394년 무학대사가 태조의 명으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과연 그가 지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약사전에 조선 초기 석불좌상이 깃들여져 있어 그런대로 시기는 맞아떨어지며, 조
선 조정에서 관악산과 호암산의 기운을 잡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지은 것은 분명
해 보인다.
봉은사(奉恩寺)에서 작성한 '봉은사말사지(末寺誌)'에는 1407년에 창건되었다고 나와있으며 태
종이 호압
(虎壓)이란 현액(現額)을 하사했다고 한다. 이후 400년 동안 적당한 사적(事績)을 남
기지 못했다가 1841년 승려 의민(義旻)이 상궁(尙宮) 남씨와 유씨의 시주로 법당을 중창했으며
1935년에
만월(滿月)이 약사전 6칸을 중건하고 1995년에 삼성각을 지었으며, 2008년에 9층석탑
을 세워 지금에 이른다.

서울 금천구의 유일한 전통사찰로 믿거나 말거나 창건설화가 한 토막 전해오고 있다. 이 설화는
이 절이 호암산의 기운을 때려잡고 서울을 수호하는 절임을 강조하고자 절에서 그럴싸하게 빚은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태조 이성계가 서울에 궁궐(경복궁)을 지을 때인 1394년, 전국에 잘나가는 장인
을 싹 소환해 궁궐을 짓고 있는데, 건물이 완성되면 이상하게도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계속 무
너지는 것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현상이 계속 터지자 뚜껑이 폭발한 태조는 공사책임자를 불러
추궁했다. 책임자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전하(殿下), 소인들이 일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면 호랑이를 닮은 커다란 괴물이 나타나 소인
들을 위협하고 건물을 죄다 때려부시고 사라집니다. 소인들이 막으려고 해도 도저히 당해낼 수
가 없어 다들 궁궐 공사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발 통촉해 주시옵소서~~!!'
그 말을 듣던 태조는 어이가 없어서
'너희들이 지금 나를 우롱하냐~~?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냐??'
책임자는 더욱 오금을 저리며
'어찌 전하께 거짓을 아뢰나이까. 믿기 어려우시면 오늘 밤 몸소 확인하심이 좋을 듯 합니다'

그래서 태조는 직접 확인할 겸 그날 밤 군사를 이끌고 공사현장에서 괴물을 기다렸다. 과연 어
둠이 내려앉자 반은 호랑이고 반은 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눈에 불을 강하게 뿜으며 현장에
나타났다. 괴물이 건물을 부시려고 폼을 잡자 태조는 군사들에게 화살을 쏘게 했다. 허나 괴물
은 화살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기껏 만든 건물을 보기 좋게 부시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괴물의 기세에 염통이 쫄깃해진 태조는 침소로 돌아와 한숨을 쉬며
'한양은 나와 인연이 아닌가 보구나. 개경으로 다시 돌아갈까?'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인의 우렁찬 목소리
'한양은 정말 도읍지로 제격이다!!'
태조는 깜짝 놀라 소리가 들리는 밖으로 나가보니 아름다운 수염의 노인이 서 있었다.
'공은 뉘시오?'
'허허~ 그런 것은 아실 필요는 없구요. 전하의 근심을 덜어드릴까 하여 왔습니다'
태조가 표정을 바로 하고 그 대책을 문의하자 노인은 저 멀리 보이는 한강 남쪽의 한 산봉우리
를 가리켰다. 태조는 달빛 속에서 노인이 가리킨 곳을 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오매~ 호랑이 머리를 한 봉우리가 한양을 바라보고 있구나!!'
태조는 노인에게 산의 기운을 누를 방도를 물었다.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호랑이는 꼬랑지를 밟히면 꼼짝 못하니 산 꼬리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입니다'
알려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태조는 바로 무학대사를 불러 호랑이의 꼬리 부분인 지금 자리에 절을 짓게 하고 호랑이를 누른
다는 뜻에서 호압사라 이름 지었다. 그 이후 궁궐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천 고을 동쪽에 있는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것과 같고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 까닭에 범바위(虎巖)라 부른다. 술사(術士)가 이를 보고 바위 북쪽
에다 절을 세워 호갑(虎岬)이라 했다'라고 나와있음. 여기서 호갑은 '호압사'로 호압사의 다른
이름으로 많이 등장함>

▲  호암산문(虎巖山門)이라 쓰인 일주문

▲  호압사 범종각과 원두막 쉼터

서울 시내와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로 도심 속에서 아늑한 산사의 내음과 분위기를 누리는데 아
주 좋은 곳이며 접근성도 괜찮아 언제든 안길 수 있다. (호압사입구에서 도보 10분이면 끝) 절
의 규모는 작지만 쓸데없이 으리으리한 것보다는 정감이 가 두 눈에 넣어 살피기에도 그리 부담
이 없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좌상과 500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절의 오랜
내력을 살짝 속삭여주고 있으며, 2008년 이후 8각9층석탑을 만들고, 원두막 쉼터를 만드는 등, 경내를 조금씩 채워나가면서 올 때마다(1년에 2~3번 정도 방문함) 늘 낯선 것들이 하나씩은 보
인다. 특히 중생들이 편히 쉬어갈 수 있도록 원두막 쉼터와 풍경소리 도서관 등을 마련하는 등
호압사의 배려가 돋보인다. 범종각 우측 쉼터에는 커피 자판기가 있으며, 종무소에서 물과 음료
수, 염주 등의 불교용품을 판매한다.

호압사는 내가 서울 장안에서 1년에 여러 번 발걸음을 하는 절의 하나인데, 그 이유는 호압사를 안고 있는 호암산 때문이다.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도봉산(道峯山)과 더불
어 나의 마음을 앗아간 뫼이다보니 호압사도 자연스럽게 발길이 늘어난 것이다.

※ 호압사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림역(3번 출구)에서 서울시내버스 152번을 타고 호압사입구 하차 (삼성산성지
  에서 내려서 25분 정도 올라가도 됨)
*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3번 출구)에서 서울시내버스 5517번(서울대↔중앙대), 6515번(양
  천차고지↔안양 경인교대)을 타고 호압사입구 하차
* 지하철 1호선 금천구청역에서 금천구마을버스 01번을 타고 호압사입구 하차
* 호압사입구 정류장에서 도보 10분

* 매주 일요일 12~13시에 국수 공양을 제공한다. (상황에 따라 안주는 경우도 있음)
* 매년 12월 31일 밤 10시 이후 제야의 종 타종식 행사를 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2동 234 (호암로 278 ☎ 02-803-4779)
* 호압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호압사에서 바라본 호암산 서남쪽 봉우리
바로 저곳에 호암산의 명물인 석구상과 한우물, 불영암, 호암산성터가 있다.

▲  호압사 심검당(尋劍堂)
건물 앞에 서 있는 굵직한 나무가 서울시 보호수 18-5호로 지정된 느티나무이다.


오래된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호압사 경내로 들어서면 서쪽에 2층 규모의 심검당이 있고,
북쪽에는 법당인 약사전, 그 옆구리 높은 곳에 삼성각, 그 아래쪽에 근래에 심은 9층석탑이 조
촐히 경내를 이룬다. 심검당은 호압사의 요사(寮舍) 겸 종무소(宗務所), 공양간으로 쓰이는 다
용도 건물로 심검(尋劍)이란 지혜의 칼을 찾는다는 뜻으로 선원(禪院)에서 많이 쓰는 이름이다.


▲  심검당 옆에 솟아난 500년 묵은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8-5호

▲  쉼터 옆에 자리한 500년 묵은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8-6호

심검당과 범종각 옆에는 500년 숙성된 느티나무 2그루가 있다. 이들 느티나무 형제는 호압사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하는 산증인들로 오랫동안 뜨락에 아낌없이 그늘을 드리운 고마운 존재들이
다. 늦가을의 끝자락이라 그들은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떠나가려는 늦가을의 발목이라도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그게 쉽지가 않다.
늦가을의 약기운이 떨어질수록 겨울 제국의 이빨이 커지면서 뜨락에는 벌써부터 맥없이 떨어진
단풍잎으로 가득하다. 그들은 낙엽이란 꼬리표를 달며 산바람과 사람들의 빗자루질, 발질에 이
리저리 흩날려 속절없는 삶을 정리한다.

심검당 옆에 자리하며 천하를 굽어보는 느티나무는 키가 7m, 가슴둘레 4.2m이며, 범종각 옆에서
나란히 천하를 바라보는 느티나무는 키 11m, 가슴둘레 3.6m로 아무리 먹어도 끝이 없는 장대한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무럭무럭 성장했다.


▲  호압사 9층석탑
탑 너머로 절의 눈치를 살살 보고 있는 호암산 정상이 바라보인다.


삼성각 아랫쪽에 자리한 9층석탑은 2009년에 조성되었다.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8각9층석탑
을 유난히도 닮았는데, 호압사의 유일한 탑으로 그가 있기 전에는 이곳에는 그 흔한 탑이 하나
도 없었다. 그 허전함이 계속 마음에 걸렸는지 아주 통 크게 9층석탑을 심었다.
탑 안에는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으며, 1층 탑신(塔身)에 담긴 사리를 친견할 수 있도
록 동그란 창을 냈다. 가람 배치의 정석대로라면 법당 정면에 탑을 세워야 하나 특이하게도 좌
측 구석에 세운 것이 이상할 따름이다. 하얀 피부의 맨들맨들한 석탑, 늦가을 햇빛에 한층 빛나
보인다.


▲  삼성각(三聖閣)과 9층석탑

약사전보다 조금 높은 곳에는 칠성(七星)과 산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 삼성
각이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인데 1995
년 완성을 보았으나 건물을 받치는 석축과 계단은 1999년에 완성되어 2000년에 비로소 낙성식을
가졌다.
내부를 가득 메운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은 1978년에 제작된 것이며 우측 벽에는 호압사를 세
웠다는 무학대사의 영정이 걸려있어 절의 창시자를 기린다.

▲  삼성각 무학대사의 진영(眞影)

▲  치성광여래(칠성)가 그려진 칠성탱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山神幀)

▲  푸른 두광(頭光)을 갖춘 독성 할배가
그려진 독성탱(獨聖幀)


▲  호압사의 법당인 약사전(藥師殿)

경내 중심에 자리하여 남쪽을 바라보는 약사전은 호압사의 법당(法堂)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창건 당시부터 있던 것으로 여겨지나 현 건물은 1935년에 새로 지은 것
이다.


▲  호압사 석불좌상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8호

호압사는 석가불 대신 약사불을 중심으로 내세운 약사도량(藥師道場)이다. 그래서 법당 불단에
는 약사불을 봉안했으며, 법당 이름도 약사전을 칭했다. 바로 그 약사전에 이곳의 든든한 밥줄
이자 상징인 석조약사불좌상<예전 문화재청 지정명칭은 '석약사불좌상', 지금은 '석불좌상(약사
불)'>이 협시보살을 대동하며 자리해 있다.

예전에는 약사불 홀로 불단을 지켰으나 2009년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좌
우에 붙여 약사3존불을 이루게 되었으며, 2011년에 그 양쪽에 천진불(天眞佛)이라 불리는 귀여
운 아기부처 2구를 갖다 붙였다.
인상이 온후하기 그지없는 약사불은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사뿐히 앉아 조용히 명상에 임하
고 있다. 아무리 서울에 위협을 주는 호암산 호랑이라 할지라도 그의 덕스러운 표정 앞에선 절
로 꼬랑지를 내리며 온순한 호랑이가 될지도 모른다.


▲  호압사 석불좌상과 일광, 월광보살좌상

15~16세기 조성된 이 불상은 금동불(金銅佛)로 보이지만 실은 돌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것이다.
불두(佛頭)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촘촘히 표현했으며 얼굴은 둥근 넓적한 모습으로 약
간의 양감이 표현되어 있다. 선정인(禪定印)을 취한 듯, 다리 위에 모은 그의 두 손에는 고달픈
중생들을 치료하기 위한 약합(藥盒)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약사불 좌우에는 새로운 식구인 일광, 월광보살이 화려한 보관(寶冠)을 머리에 쓰고 각각 꽃을
1송이씩 들며 좌우를 지킨다. 중생을 지그시 바라보는 그들의 표정은 어린 동자승 마냥 포근하
기만 하다. 그들 뒤에는 후불탱화가 있으며, 불단 위쪽에 걸쳐진 닫집은 단청(丹靑)과 조각이
화려하여 중생의 눈을 매료시킨다. 불단 좌우에는 헤아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조그만 금동 원불(願佛)이 빼곡히 벽을 채워 약사전 내부를 훤하게 만든다.


▲  넓직한 원두막 쉼터와 풍경소리 도서관 (왼쪽 하얀 책장이 도서관)

범종각 좌측에는 2칸짜리 쉼터와 풍경소리 도서관이라 불리는 하얀 피부의 책장이 있다. 이들은
호압사에서 절과 호암산을 찾은 동네 사람들과 산꾼, 답사꾼을 위해 2012년에 만든 것으로 누구
든 찾아와 시간과 종교,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독서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개방형 책쉼터이다.

절에 아주 딱 어울리는 이름을 지닌 풍경소리 도서관 책장에는 절과 신도, 동네 사람들이 기증
한 책들이 담겨져 있는데, 소장 권수는 적으나 기증이 늘고 있다고 하니 책장도 조만간 늘어날
것이다. 책장과 쉼터는 종일 개방하며, 누구든 책장에서 책을 꺼내 쉼터에 앉아 독서의 여유를
누리면 된다. 책을 며칠 빌리고자 하는 경우(대여비는 없음)에는 종무소에 문의하면 되며, 관리
가 느슨하다고 몰래 책을 가져가는 행위는 삼가하기 바란다.
쉼터에서는 독서 외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쉬거나 속세에서 가져온 간식을 먹어도 된다. (음주나
벌러덩 누워서 자는 것은 안됨)

▲  풍경소리 도서관 책장

▲  새롭게 마련된 호압사 샘터

호압사는 산중 사찰이지만 제대로 된 샘터가 몇 년 동안 없었다. 물론 예전에 샘터가 있긴 했지
만 사라진 지 이미 오래,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종무소 옆에 큰 물통을 두어 물을 제공했다. 그
러다가 2011년 이후 풍경소리 도서관 주변에 자리를 마련해 새롭게 샘터를 갖추었다.
긴 파이프에서 쏟아져 나온 물은 호암산이 제공한 물로 동그란 조그만 석조로 떨어진다. 늦가을
오후 햇살에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서 갈증에 타들어가는 목구멍을 진화하니 몸 속의 때가 싹
가신 듯 시원하기 그지 없다.


 

  호암산 정상

▲  호압사에서 호암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각박한 산길

호압사에서 호암산 정상까지는 해발 160m 정도만 오르면 끝난다. (절 바로 윗봉우리가 정상임)
허나 그 길이 다소 각박하여 만만히 보고 덤벼든 속인(俗人)들의 혼을 제대로 빼놓는다. 다행
히 그 거리가 그리 길지 않아서 호압사분기점에서 10~15분 정도만 고생하면 정상 입구 갈림길
이며, 여기서 왼쪽(동쪽)으로 4~5분 가면 호암산 꼭대기(393m, 또는 385m)에 이른다.

호암산은 호압사입구에서 호압사까지, 호압사에서 정상 입구까지, 산림욕장에서 남쪽능선까지,
벽산5단지에서 불영암으로 오르는 산길이 좀 야박한 편이지, 그곳만 오른다면 구름 위를 거닐
듯 편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  돌로 이루어진 호암산 정상(393m)

호암산은 돌의 성분이 많은 산이라 정상도 단단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에는 2개의 커다
란 바위가 비스듬히 매달려 서울을 굽어보고 있는데 그중 오른쪽 바위가 정상으로 호암산의 머
리에 해당된다.
서울에 이름난 조망지로 마치 서울을 향해 미사일이나 로켓포를 쏘는 듯한 무시무시한 모습이
다. 대자연은 이미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훨씬 이전부터 인간이 20세기에 발명한 미사일과
로켓포, 그것을 취급하는 기계의 모습을 예견했던 것은 아닐까? 이러니 조선의 위정자들이 이
산을 경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굳이 미사일이 아니더라도 무엇인가 날릴 것 같
은 기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위 꼭대기나 그 부근까지 오르면 서울의 서남부를 중심으로 도심부와 서북부와 동북
부, 강남과 강동 일부, 도심 주변의 여러 산들(북한산, 남산, 인왕산, 북악산 등), 그리고 광
명(光明)과 안양(安養), 멀리 인천과 부천 등 수도권의 주요 도시들이 두 발 밑에 펼쳐지니 굳
이 풍수지리나 산의 생김새가 아니더라도 전략적으로도 꽤 중요한 곳이다. 이곳이 만약 적에게
넘어가면 서울 도심을 물론 서울의 왠만한 곳이 적지않게 노출되기 때문이다.

하늘나라 선녀 누님의 웃음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오가는 신선
이 바로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눈과 발 밑으로 점점히 펼쳐진 천하를 굽어보니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양, 천하를 다스리는 군주가 된 것 같은 즐거운 기분이 솟아 오른다.
(허나 현실은 시궁창 ㅠㅠ)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1)
금천구와 관악구, 구로구, 영등포구를 비롯한 서울 서남부와 광명, 부천이 바라보인다.
바로 밑에 보이는 곳은 호암산을 감시하는 호압사이다.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2)
관악구와 동작구, 영등포구, 서울 도심과 서북부, 동북부 지역이 바라보인다.
정면에 아득하게 보이는 산은 서울의 진산(鎭山)인 북한산(삼각산)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3)
관악구와 서울대, 서초구, 강남구, 성동구, 광진구를 비롯하여 서울 동부 지역이
바라보인다. 멀리 까마득하게 보이는 산줄기는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이다.

▲  호암산 남쪽 능선(호암산 정상~불영암)에서 바라본 천하 (1)
푸른 하늘 밑으로 서울 서남부 지역과 광명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호암산 남쪽 능선(호암산 정상~불영암)에서 바라본 천하 (2)
서울 금천구와 시흥2동 벽산아파트단지, 광명, 도덕산, 소래산 등이 보인다.

▲  세상을 향해 머리를 들이민 호암산 남쪽 봉우리

호암산 정상에서 한우물이 있는 남쪽 봉우리까지는 구름처럼 느긋한 능선길(남쪽 능선)의 연속
이다. 하여 능선을 따라 대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조망을 즐기며 거닐면 된다. 이 구간이 호암
산의 가장 큰 매력으로 산길 곳곳에 많은 바위들이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처럼 포진해 있고, 능
선과 바위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맛은 정말 꿀맛이다.
내가 호암산에 퐁당퐁당 빠진 것은 잠깐의 고생 끝에 능선부와 정상까지 오를 수 있고, 거기서
이렇게 명품급 조망을 누릴 수 있으며, 능선의 곡선이 매우 유연하고 느긋하기 때문이다. 게다
가 오래된 명소들도 풍부하니 정말로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착한 산이다.

우리는 호암산 남쪽 봉우리까지 가지 않고 호암산산림욕장을 거쳐 시흥동(始興洞) 시내로 내려
왔다. 넓게 퍼진 벽산아파트단지를 지나면 바로 시흥2,5동 시내인데,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까
궁리하며 걷던 중, 솔향기란 식당이 진하게 손짓을 한다. 날씨도 쌀쌀하여 다들 뜨끈한 해물칼
국수를 먹자고 하여 그 집에 들어갔다.


▲  시흥동 솔향기에서 먹은 돌솥비빔밥과 조개 국물의 위엄

솔향기는 해물칼국수와 돌솥비빔밥 등을 취급하는 식당이다. 다들 칼국수를 몇 그릇씩 먹을 기
세로 들어왔지만 정작 시킨 것은 돌솥비빔밥이었다. 갖은 나물과 고추장, 그리고 돌솥에 바짝
익혀진 밥이 잘 버무려져 그런대로 섭취할 만 했고, 밑반찬으로 깔린 김치도 잘익어 맛이 좋았
다. 특히 하얀 조개 국물이 일품이라 비록 비빔밥의 부속물로 나왔지만 오히려 주물로 봐도 손
색이 없을 정도였다.
비빔밥으로는 성이 차지 않을 듯 싶어 손만두 2인분을 주문했다. 그러니 조그만 만두 10개(1인
분)가 각 테이블에 수줍은 듯 차려져 나온다. 만두를 집어먹으니 뱃속은 말끔히 채워졌고, 그
렇게 저녁은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근데 이 집은 특이하게도 소주나 맥주 등의 곡차(穀茶)
를 팔지 않는 이 땅에 흔치 않은 무알콜 식당이었다. 산행도 했으니 곡차 1잔 걸쳐야 마땅하지
만 술이 없으니 조금은 아쉬운 저녁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호암산 늦가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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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6년 12월 2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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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6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시간도 느릿느릿 걸음을 멈춘 서울 도심 속의 별천지 ~ 북촌한옥마을 산책 (재동, 가회동, 정독도서관..)

 


' 서울 도심 속의 꿀단지, 북촌(北村) 산책
(재동, 가회동, 정독도서관, 안국동 일대)'

▲  북촌문화센터


북촌(北村)은 서울 도성(都城)의 북쪽 지역으로 경복궁(景福宮)과 창덕궁(昌德宮) 사이를 일
컫는다. 이 지역은 가회동(嘉會洞)을 중심으로 삼청동(三淸洞). 계동(桂洞), 안국동(安國洞)
, 재동(齋洞), 소격동(昭格洞), 팔판동(八判洞), 원서동 등에 걸쳐있으며, 경복궁 서쪽은 따
로 서촌(西村)이라 불렀다. <청계천 남쪽은 남촌(南村)이라 불림>

북촌 지역은 조선시대 때 왕족과 사대부(士大夫)를 비롯하여 돈 꽤나 주무르던 부자들이 주류
를 이루며 살던 오늘날의 강남(江南) 같은 곳이다. 조선 초기부터 형성되었지만 조선 초/중기
시절에 한옥은 남아있는 것이 없고, 조선 후기(19세기~20세기 초반) 한옥을 시작으로 왜정(倭
政) 시절에 지어진 개량 한옥과 해방 이후의 한옥에 이르기까지 약 1,200여 채의 한옥이 진하
게 남아있어 그야말로 거대한 한옥박물관을 이룬다.

북촌 한옥은 민속촌과 달리 대부분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어 대부분 내부 관람이 어려운 함정
이 존재한다. 관람이 가능한 한옥은 북촌문화센터를 비롯해 공방(工房)과 박물관 등의 문화/
예술공간, 전통체험공간, 숙박업소로 쓰이는 한옥 정도이며, 북촌문화센터와 몇몇 공방과 문
화/예술공간을 제외하면 대부분 소정의 돈이나 연줄이 필요하다.

북촌은 높다란 빌딩과 콘크리트 일색의 밋밋한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하여 크게 돋보이며,
경복궁, 창덕궁 등의 궁궐(宮闕)과 함께 도심 속의 박힌 보석과 같은 소중한 곳이다. 한옥과
근대 건물, 현대식 건물이 서로 시간을 초월하여 얼굴을 맞대고 공존하고 있으며, 빛의 속도
로 빠르게만 변해가는 서울에서 시간이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발을 멈춘 듯, 옛 모습을 많
이 지키고 있는 도심 속의 이색 공간이다. 이 시대를 사는 어리석은 인간들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무작정 앞만 보고 뛰느라 뒤를 돌아보는 여유를 누리지 못하는데, 북촌은 바로 그런 여
유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북촌도 나날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북촌 답사의 기점은 3호선 안국역(2/3번 출구)로 잡는 것이 좋다. 북촌 초보라면 북촌문화센
터로 일단 달려가 북촌안내책자를 손에 쥐고 북촌에 대한 기초 지식을 읽은 다음에 나들이에
임하기 바란다. 그리고 정독도서관 입구와 재동초교에 북촌관광안내소가 있으니 거기서 지도
와 안내책자를 얻어도 된다.
북촌 골목길이 워낙 복잡해 길치들은 헤매기가 아주 좋으며 관광객 상당수는 북촌8경으로 꼽
히는 사진 찍기 좋은 곳과 정독도서관 주변, 북촌의 주요 도로인 가회로와 삼청동길, 계동길,
북촌길 등 널리 알려진 곳에만 잔뜩 몰려있을 뿐, 별로 알려지지 않은 많은 명소와 미로처럼
얽혀진 조그만 골목길은 사람이 별로 없다. 별처럼 무수히 흩어진 수많은 박물관과 문화유적
/전통체험공간 상당수는 골목 속에서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는데, 이를 놓치고 유명한 곳들만
둘러보는 것은 북촌의 겉만 도는 것과 같다. 본인이 강조하건데 북촌의 매력은 크고 작은 골
목길을 구석구석 돌면서 숨겨진 명소를 찾는 것이다. 그들을 찾으며 술래에서 벗어난 기분은
정말 형용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성북동(城北洞)과 부암동(付岩洞)만큼이나 나의 마음을 두고두고 앗아간 북촌을 지금까지 수
십 번이나 들락거렸지만 아직도 미답지가 여럿 있다. 북촌이 서울에서 가장 작은 지방자치구
역인 중구보다 훨씬 작은데도 말이다. 남들은 '그렇게 다녔으면 북촌을 다 둘러봤겠네요?'말
을 꺼내지만 여태까지도 개척하지 못한 골목길과 명소가 적지 않다.
지금도 계속 북촌의 숨겨진 속살을 찾고 있는데, 새로운 곳을 발견하면 '이런 곳이 있었구나.
왜 이제서야 알게 된 걸까?' 정말 내심 놀란다. 겉은 작지만 신대륙 이상으로 신세계와 보물
을 품은 꿀단지가 바로 북촌이다.

북촌에는 밤하늘을 장식하는 별처럼 한옥이 많지만 민속문화재나 사적으로 지정된 고택(古宅)
처럼 완전한 전통 한옥은 그리 많지 없다. 대부분은 왜정 이후에 지어졌고 시대와 편의에 맞
게 개량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두고 안좋게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시대가 지나면 한옥도 바뀌는 법이다. 특
히나 이곳 한옥은 민속촌에 있는 전시용 한옥과 달리 태반이 주거용이며 공방 등의 작업실과
숙박시설로 쓰이는 집도 적지 않다. 그러니 편의에 맞게 변화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직까
지 꺼림칙한 재래식 화장실을 쓰고, 부엌 부뚜막에서 밥을 지으며, 나무와 숯으로 불을 뗀다
면 불편해서 어떻게 살고 머물겠는가? 다 시대에 맞게 변하는 것이다. 그렇게 변화한 한옥은
후손들이 알아서 평가해 줄 것이다.

본글에서는 2013년 1월에 올렸던 북촌 글에 이어서 재동과 가회동, 정독도서관 주변 명소 일
부를 소개하도록 하겠다.
북촌 계동, 원서동, 창덕궁길 보러보기 (클릭)


♠  재동길 주변 (재동백송, 재동초교)

▲  재동 백송(白松) - 천연기념물 8호

헌법재판소 경내 북쪽에는 하얀 줄기의 큼직한 노송(老松)이 고고한 자태를 드러내며 자리해 있
다. 바로 소나무의 일종이자 천하에서 매우 희귀한 나무인 백송이다. 백송은 10년에 겨우 50cm
밖에 자라지 않는 느림보 나무로 하얀 피부의 줄기로 인해 백송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이 나무는 중원대륙이 고향이나 거기선 오래 전에 이미 씨가 말라버렸으며, 조선시대에 대륙에
서 넘어온 백송 일부가 살아남아 옛 기록이나 화석(化石)으로나 봐야되는 비운을 간신히 면하고
있다.
현재 목숨이 붙어있는 오래된 백송은 재동 백송을 비롯하여 조계사에 있는 '수송동(壽松洞) 백
송', 고양시에 '송포 백송', 이천에 있는 '신대리 백송', 예산 추사고택의 백송이 전부로 그만
큼 희소성이 매우 크다.

우리나라 백송의 으뜸은 경복궁 서쪽의 통의동(通義洞) 백송으로 천연기념물 4호의 지위를 가지
고 있었다. 허나 1990년 9월 가을 폭우의 괴롭힘에 결국 운명을 하고 말았다. 그가 비참하게 세
상을 뜨자(그의 죽은 몸뚱이는 남아있음) 그에게 주어진 천연기념물 지위는 소멸되었으며, 그의
후배인 재동 백송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백송의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다.

재동 백송은 600년 가량 묵은 오래된 나무로 15세기에 명나라를 다녀온 사신이 가져와 심은 것
이다. 높이는 15m, 면적은 230㎡로 줄기가 2갈래로 갈라져 'V'자 모양을 하고 있으며, 나무 껍
데기는 비늘처럼 벗겨져 얼룩무늬처럼 보인다. 특히 밑둥 빛깔이 하얗기로 유명하며, 우리나라
에서 제일 큰 백송이기도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백송으로도 꼽히기도 한다.

백송은 그것을 가꾼 사람의 영화(榮華)에 비례해 껍대기 피부가 하예졌다 덜해졌다 한다는 속설
을 가지고 있는데, 재동 백송은 얼마만한 영화를 보아왔길래 저렇게 새하얀 피부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백송이 있는 이곳은 조선 영조 때 풍양조씨의 우두머리인 조상경(趙尙絅)의 집이 있었다. 그는
영조 시절에 판서를 9번이나 했다고 하며, 그의 아들인 조돈(趙暾)은 이조판서(吏曹判書), 조카
는 조고집과 고구마로 유명한 조엄(趙嚴)이다. 그 이후 조대비(趙大妃)로 유명한 신정황후(神貞
皇后)까지 배출하면서 그야말로 안동김씨를 뛰어넘는 세도가가 되었다. 그러니 백송의 뽀얀 피
부는 더욱 더 빛을 발했을 것이다.


▲  약간 옆에서 본 재동 백송의 위엄

▲  박규수 선생 집터 표석

▲  제중원(광혜원)터 표석

풍양조씨의 공간이던 이곳이 언제부턴가 박규수(朴珪壽, 1807~1876)에게 넘어갔는데, 그 시기와
이유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조부(祖父)는 그 유명한 연암 박지원(朴趾源)으로 인근 계동 제
비바위 아래 외진 곳에서 검소하게 살았으며, 박규수는 그 집에서 태어났다.

박규수는 개화파의 선두적인 인물로 평양(平壤)에서 있던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년)을 계기로
서양 문물의 단물을 취하도록 설득하면서 개화와 부국강병을 주장했다. 허나 흥선대원군(興宣大
院君)이 쇄국정책만을 고집하면서 그의 주장은 허공의 메아리로 끝나고 만다. 우둔한 쇄국정책
의 결과 1876년 강화도(江華島)에서 왜국과 그것도 강제적인 불평등조약을 맺게 되는데, 바로
그해 박규수는 병으로 숨을 거두고 만다.
그의 집에는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개화파 인물을 비롯하여 개화사상에 관심이 많은 젋은 선비들
이 자주 찾아와 삼가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박규수가 세상을 뜨자 집은 친일파로 악명높은 이윤용(李允用, 1854~1939)에게 잠시 넘어갔다.
이윤용은 이완용(李完用)의 형인데, 형제가 쌍으로 비열한 매국노(賣國奴)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리고 그 옆집에는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의 주역인 홍영식(洪英植)이 살았는데,
갑신정변이 그 유명한 3일 천하로 싱겁게 끝을 맺자 김옥균과 박영효, 서재필은 패주하는 왜국
공사(公使)를 따라 왜국공사관을 거쳐 왜열도로 도망을 치고, 홍영식은 끝까지 남아 고종을 호
위하며 북묘(北廟)까지 따라갔으나 거기서 청나라군에게 살해되고 만다.

갑신정변으로 허벌나게 고생한 고종은 정변의 주역을 역적으로 간주하고 홍영식의 집을 몰수했
다. 그러다다 1885년 알렌에게 하사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원인 광혜원<廣惠院, 제중원(濟衆
院)>이 들어섰다. 알렌은 갑신정변이 일어날 때 개화당에게 제일 먼저 난도질을 당해 저승 코
앞까지 갔던 민영익(閔泳翊)을 살린 인물로 그 인연으로 광혜원 원장이 된 것이다.

광혜원(지금의 세브란스병원)은 1887년 을지로2가로 둥지를 옮겼고, 1910년 관립한성고등여학교
가 그 자리에 들어섰다. 그 학교는 1945년 10월 정동으로 이전되고, 1949년 창덕여중이 들어와
나중에 창덕여중/여고로 분리된다. 허나 그 학교는 강동 개발이 한참이던 1989년 땅값 차익을
두둑히 챙기며 둔촌동(遁村洞)으로 둥지를 옮겼고, 그 자리에는 1993년 경운궁(慶運宮, 덕수궁)
뒤쪽에 있던 헌법재판소가 들어서게 되었다.
참고로 현재 헌법재판소 자리에는 1882년 12월에 세워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
務衙門, 줄여서 외아문(外衙門)이라고 함>이란 긴 이름에 관청이 있었으며, 그 이전에는 명성황
후 집안인 민태호(閔台鎬)의 집이 있었다. 외아문은 1886년 광화문 육조거리로 이전되었다.

백송을 둘러싼 집과 토지의 주인을 계속 바뀌었지만 백송은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이곳을 지키
고 있다. 명나라에서 건너온 백송이지만 이곳 토양에 적응해가며 저렇게 커 간 것이다. 게다가
세도가의 집안을 비롯하여 지배층의 집안이 두루 거쳐갔고,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원인 광혜원,
그리고 사법의 중심지, 헌법재판소까지 앞다투어 그의 그늘을 받았으니 참 대단한 나무가 아닐
수 없다.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를 나오면 헌법재판소이다. 백송은 건물 북쪽에 있음 (정문 관
  리실에 허가를 받고 들어가면 된다. 낮에 가면 왠만하면 다 들여보내줌)
* 재동 백송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재동 35 (헌법재판소 내)


▲  재동 백송의 후예
재동 백송의 후예를 기르고자 1977년 그의 종자(種字)를 채집하여 문화재청 소속
사릉 전통수목 양묘장에서 발아시켜 30년 동안 관리하다가 2008년 3월 7일
이곳으로 옮겼다. 재동 백송의 유일한 혈손이자 희망과 같은 존재다.

▲  재동 백송 북쪽에 꾸며진 조그만 공원
헌법재판소의 딱딱하고 경직된 분위기를 조금은 풀어주는 공간이다.
공원 서쪽의 전통담장 너머로 기와집이 보이는데, 이들은 북촌 한옥의
제일이라 일컬어지는 윤보선가이다.

▲  11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재동초등학교

가회로와 북촌길이 만나는 곳에 재동초등학교가 자리해 있다. 북촌 사람들이 유년시절을 보내던
초등학교로 1895년 7월 고종이 발표한 칙령(勅令) 145호 29조 '소학교령(小學校令)'에 따라 문
을 열었다. 처음에는 인근 계동에 자리하여 계동소학교라 불렸으며, 그해 9월 지금의 자리로 옮
겨져 재동소학교로 이름을 갈았다. 

1906년 '보통학교령(普通學校令)'의 공포로 4년제 관립 재동보통학교로 개명되고 1910년에 재동
공립보통학교로 변경되었다. 이후 1938년 재동심상소학교, 1941년 재동공립국민학교로, 1946년
재동국민학교(현재는 재동초등학교)가 되었으며, 1969년 11월 인근에 있던 삼청초등학교가 폐교
되어 이곳에 통폐합되기도 했다. 초등학교가 사라지는 것은 그저 시골의 일로만 여겨졌는데, 서
울 도심 한복판에서 그런 현상이 생긴 것이다. 이는 도심공동화(都心空洞化) 현상과 북촌의 쇠
락이 큰 원인이다.
현재는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학교인 교동초교와 함께 신입생수가 나날이 줄어들어 간신히 2자리
를 채우고 있다. 북촌과 종로구 도심에서는 아무리 쥐어짜도 신입생 수요가 신통치가 않으니 별
수 없이 타 지역으로 눈을 돌려 다양한 특성화 교육을 내걸며 학생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다.
참고로 유진오(兪鎭午), 백두진(白頭眞), 김상만(金相万) 등이 이 학교를 나왔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210 (☎ 02-763-1812)

◀  재동초교 교문 앞에 심어진 진단학회
(震檀學會)터 표석
진단학회는 우리의 역사와 문학, 언어를 연구
하고자 1934년 5월에 설립된 학술단체이다.


▲  가회동 백인제(白麟濟) 가옥 바깥채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22호

▲  철문 너머로 백인제 가옥의 대문이 보인다.

정독도서관 동쪽에 자리한 백인제 가옥은 1874년 한상룡이 지은 집으로 압록강(鴨綠江) 흑송(黑
松)을 가져와 지은 상류 주택이다. 행랑채와 안채,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와 안채는
한 동으로 이어진 것이 특징이다.

이곳은 왜정 때 우리나라 외과 의술(醫術)의 1인자였던 백인제(白麟濟)가 1920년대부터 6.25전
쟁 시절 납북되기 이전까지 살던 집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립(民立) 공익법인 백
병원을 설립했으며, 백병원과 그 계열인 인제대학교(경남 김해)는 바로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
이다.

현재 백인제의 후손들이 집을 소유하고 있으며, 숨이 막힐 듯한 커다란 검은 철제대문을 설치하
여 내부를 꽁꽁 가리고 있다. 물론 내부 관람은 연줄이 없는 이상은 거의 불가능하다.

  ◀  이상재(李商在, 1850~1927) 집터 표석
조선 후기 정치가이자 왜정 때 독립운동가로 신
간회(新幹會) 초대회장을 지냈다. 그의 장례는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장(社會葬)으로 치뤄졌다.


♠  가회동 11번지(북촌3경) 주변
북촌3경 골목길
▲  복촌3경 골목길 (위에서 바라본 모습)

▲  복촌3경 골목길 (밑에서 바라본 모습)

▲  가회민화박물관(가회민화공방)

가회동 11번지에 자리한 북촌3경은 한옥이 밀집된 조그만 골목길이다. 이곳에는 여러 공방과 박
물관이 둥지를 틀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예전에 가봤던 가회민화박물관(가회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백성들의 삶과 소망이 담긴 민화(民畵)와 부적을 테마로 한 박물관이다. 북촌에 뿌
리를 내린 박물관답게 한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002년에 문을 열었다. 250점의 민화와 750점
의 부적, 150점의 서적, 기타 민속자료 250점 등 1,500여 점의 유물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중에
서 100점 정도만 속세에 공개하고 있다.

박물관이 작고 그에 반해 입장료가 미운 수준이라 처음에는 실망할 수 있으나 그런데로 둘러볼
만하다. 게다가 전시실 서쪽 공간에는 차를 즐기며 쉬어가는 공간이 있으며, 시원한 녹차를 무
한으로 제공한다. 또한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방이라 아무데나 털썩 주저 앉아 안내문이나 책을
읽으며 이야기 꽃도 피울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11-103 (☎ 02-741-0466, Fax 02-741-4766)
* 관람료 : 일반 3,000원 (30인 이상 단체 2,000원) / 고등학생 이하 2,000원
* 관람시간 : 10시 ~ 18시 (매주 월요일 휴관)
* 3호선 안국역(2번 출구)에서 감사원 방면으로 500m 가면 전통병과교육원과 가회박물관을 알리
  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의 안내로 골목을 1분 정도 들어가면 길 왼쪽에 있다.

* 가회민화박물관 홈페이지는 이곳을 클릭 , 박물관 답사기는 ☞ 이곳을 클릭


▲  가회민화박물관 내부

▲  한상수 자수박물관(刺繡博物館)

북촌3경 북쪽에 자리한 한상수 자수박물관(한상수 자수공방)은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80호인 자
수장(刺繡匠) 기능보유자 한상수 선생이 운영하는 공방 겸 박물관이다. 한상수의 작품을 비롯하
여 조선 후기 자수품(刺繡品)과 복식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체험 학습도 가능하다. 박
물관의 구조는 앞에서 언급한 가회민화박물관과 비슷하며,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가 관람에 임
하면 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11-32 (☎ 02-744-1545)
* 관람료 : 일반 3,000원 / 고등학생 이하 2,000원 (20인 이상 단체는 20% 할인)
* 관람시간 : 10시 ~ 17시 (매주 월요일 휴관)
* 한상수 자수박물관 홈페이지는 위의 사진을 클릭한다.


♠  옛 경기고등학교에 둥지를 튼 시민과 학생의 지식 쉼터
정독도서관(正讀圖書館) 주변


▲  정독도서관으로 거듭난 화동 구 경기고교 - 등록문화재 2호

감고당길과 북촌길이 만나는 화동(花洞)에 지식의 마르지 않는 샘인 정독도서관이 자리해 있다.
화동은 화개동(花開洞)의 줄임말로 조선 때 과일과 화초(花草)를 관장하고 궁궐에 조달하던 장
원서(掌苑署)란 관청이 있었다.

정독도서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인 경기고등학교가 있던 곳으로 1900년 10월 고종의
칙령(勅令)으로 개교한 관립중학교(官立中學校)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 원래는 김옥균과 서재
필(徐載弼)의 집이 나란히 있었으나 갑신정변 이후, 나라에서 몰수했으며, 1900년 관립중학교
부지에 포함되면서 집은 사라졌다. 개교 당시에 건물 정면 삼각지붕 벽면에 태극기를 교차하여
그린 것으로 유명했으며,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가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06년 관립한성고등학교로 개편되고 왜정 때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로 바뀌었으며, 본관 뒤쪽
에 있던 을사5적의 하나인 박제순(朴齊純)의 집을 땅을 바꾸는 조건으로 매입해 평탄작업을 벌
여 기존 3,000평에서 11,000여 평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도서관 건물로 쓰이고 있는 옛 경기고 건물은 1938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강남 개발이 한참이던
1976년 청담동(淸潭洞)으로 둥지를 옮겼다. 서울시의 권고라고는 하지만 학교 입장에서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곳 땅값이 상당하며, 당시 청담동은 매우 저렴했다. 그
래서 쏠쏠하게 땅값 이득을 챙기고 쿨하게 강남으로 넘어간 것이다.
경기고가 떠나자 서울시에서는 그해 1월 옛 건물과 땅을 사들여 1년 간 손질을 거쳐 1977년 1월
4일 서울시립 정독도서관으로 세상에 내놓았으며, 현재 50여 만 권의 서적과 1만 7천여 점의 비
도서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또한 남쪽 건물을 손질하여 서울교육박물관으로 삼았다.

서울에서 어느 정도 공부 좀 했다는 사람은 꼭 거쳐갈 정도로 역사와 유서가 깊은 서울 제일의
도서관으로 단골이 꽤 많으며, 평일과 휴일 가리지 않고 자리 잡기가 힘들 정도다. 나 역시 여
러 번 이곳에 와 공부를 한답시고 책만 펴놓고 꿈나라를 허우적거린 얇은 추억이 있다.
다른 도서관과 달리 정원이 깔끔하고 아름다우며, 나무가 무성해 굳이 공부나 서적 대출이 아니
더라도 산책이나 나들이 장소로도 손색이 없다. 또한 도서관 동쪽에는 한때나마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종친부의 옛 건물이 있었고, 300년 정도 묵은 회화나무와 본관 뒤에 정체가 묘한 오래된
우물과 여러 석물이 있어 소소하게 고색의 볼거리를 선사한다.
북촌이 서울 관광의 성지의 부상하면서 그 한복판에 박힌 이곳 역시 그 후광을 입어 북촌 나들
이에서 필수로 가야되는 명소가 되었다. 그래서 공부나 책 때문에 오는 사람보다 나들이/출사로
온 사람이 더 많을 정도이며, 우리나라 도서관 가운데 유일하게 관광지화가 되었다. 
관광객들이 많아 공부가 되겠는가 싶겠지만 고즈넉하고 조용한 북촌의 일부라 도서관 분위기도
차분하여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도서관이니만큼 건물 내부와 열람실에서 고성방
가를 자행하거나 공부/독서를 방해하는 행위는 마땅히 삼가해야 될 것이다.

※ 정독도서관 관람정보 (2013년 5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를 나와서 안국동로터리에서 감고당길로 도보 10분
* 시내버스 이용시 안국역(종로경찰서)이나 안국동(조계사)에서 내려서 도보 10분
* 도서관 이용시간 : 평일 9시~22시 / 주말 9시~17시 (1,3주 수요일 휴관)
* 서적 대출은 정독도서관 홈페이지에 회원으로 가입하고, 자료실에 신분증을 들고 찾아가면 대
  출회원증을 발급해준다. 대출 기간은 2주이며, 1회에 한해 연장 가능하다.
* 서적 대출 및 도서관 이용비는 공짜 (서울시 교육청에서 운영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 2 (북촌로 5길 48, ☎ 02-2011-5799)
* 정독도서관 홈페이지는 아래나 위의 사진을 클릭한다.


▲  정독도서관 4거리 - 이곳에 북촌관광안내소가 있다.

▲  서울교육박물관

정독도서관 남쪽에 자리한 서울교육박물관(서울교육사료관)은 옛 경기고 건물을 활용한 붉은 벽
돌의 중후한 건물이다. 호랑이가 곶감의 눈치를 보던 옛날부터 가깝게는 내 학창시절의 이르기
까지(1980~90년대) 교육 관련 유물과 서적(내 학창시절 초등학교 교과서와 일기, 학용품, 장난
감, 중/고등학교 명찰, 소풍 관련 디오라마 등) 1만 2천여 점과 디오라마와 교육 현장 등이 재
현되어 있다.
특히 특별전시장에는 우리네 학창시절 학교 앞 구멍가게와 문방구, 1990년대 이전 초등학교 교
실 등이 재현되어 아련한 옛 추억으로 인도한다. 먼 시절도 아니고 바로 내 어린 시절이다. 이
렇게 쓰면 내가 나이가 꽤 많은 것처럼 오인하기 쉽지만 난 아직 30대의 한참을 달리고 있는 중
이다. 또한 교복과 모자, 교련복을 입고 기념 촬영을 하는 코너도 마련되어 있다.

북촌에 별처럼 널린 박물관 대부분은 야박한 가격의 입장료를 받아 손이 매우 후들거리는데 반
해 이곳은 시립이라 공짜다. 우리나라 교육 박물관의 성지로 이 땅의 30대 이상은 물론 아이를
둔 사람들도 꼭 들려볼만한 유익하고 영양가 높은 곳이다.

* 관람시간 : 9시~18시 (토요일과 일요일은 17시까지)
* 1,3째 주 수요일과 법정공휴일은 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2 (☎ 02-736-2859)
* 서울교육박물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  어린 시절에 절찬리에 쓰던 장난감들
요즘 애들도 저런거 가지고 노는지?

▲  초등학교 교과서
나도 저런 교과서로 공부했는데..

        ◀  김옥균(金玉均) 집터 표석
갑신정변으로 역적으로 몰렸던 김옥균과 홍영식,
어윤중(魚允中), 서광범(徐光範) 등은 1910년 7
월 시호가 내려지면서 역적의 굴레에서 벗어났
다. 이때 김옥균의 연시예식(延諡禮式)이 옛 집
터이던 한성고등학교에서 열렸는데, 김옥균의
부인인 유씨가 옛 집터를 돌려달라고 청원을 했
으나 거절당했다.


▲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宗親府 敬近堂/玉牒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호

정독도서관 동쪽 구역에 고색이 창연한 기와집 2채가 익랑(翼廊)으로 이어져 있는데, 이들은 종
친부 건물인 경근당과 옥첩당이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가 있음)

종친부(宗親府)는 경복궁 건춘문(建春門) 동쪽(옛 국군서울병원)에 있었는데, 조선 역대 제왕(
帝王)의 어보(御寶)와 영정을 보관하고, 제왕 내외의 의복을 관리하며, 왕족들의 관혼상제와 봉
작(封爵), 벼슬 등의 인사문제, 기타 그들과 관련된 업무를 보던 관청이다. 처음에는 제군부(
)였으나 1433년에 종친부로 이름을 갈았으며, 1864년(고종 1년)에는 종부시(簿)와 합쳐
지고 1894년 종정부()로 개편되었다.
1907년 순종(純宗)의 칙령(勅令)으로 황실과 국가의 주요 문서를 보관하던 규장각(奎章閣)으로
쓰였다가 1910년 이후 왜정은 이곳에 있던 서적들을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으로 옮기고 건물
도 상당수 부셔버리면서 달랑 경근당과 옥첩당만 살아남게 되었다.

이후 이곳에 국군서울병원(기무사)이 들어서면서 통제구역이 되었다가 1981년 경근당과 옥첩당
이 정독도서관으로 강제로 이전되었으며, 그들의 건강을 위해 주위로 얕은 철책을 둘러 속인들
의 출입을 막고 있다. 또한 우물(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3호)은 뚜껑이 닫힌 채 종친부터를 지키
고 있다.
2011년 이후 국군병원은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고, 그 자리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2013년 11
월 개관 예정)을 짓고 있다. 그래서 31년 동안 도서관에 얹혀살던 종친부 건물을 2012년 후반에
원자리로 옮겼으며, 도서관의 옛 종친부 자리는 현재 대머리처럼 텅 비어있다. 그래도 제자리로
돌아갔으니 참 다행이 아닐 수 없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개관되면 우물과 같이 있게 될
종친부 건물을 보게 될 것이다.


▲  경근당(敬近堂) -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규모가 크다.

▲  옥첩당(玉牒堂) -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  정독도서관 동쪽에 뿌리를 내린 회화나무
300년 정도 묵은 지긋한 나무로 높이 11m, 둘레
3.6m에 이른다. 이곳을 거처간 건물이나 인물이
한둘이 아니라 정신이 없지만 회화나무만은 그
대로 그 자리를 지키며 이곳에 깃든 이야기 보
따리를 마음껏 풀어준다. 또한 시원한 그늘까지
드리우며 속인들에게 독서를 장려하고자 애쓴다.

서울시 보호수 1-7호


▲  도서관 본관과 2관 사이에 있는 오래된 우물돌

정독도서관 본관(1관)과 2관 사이에는 조금은 생뚱 맞은 외의의 유물이 하나 있다. 도서관을 찾
은 사람들은 그를 죄다 지나치기 일쑤인데, 그는 정독도서관 내부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인 동그
란 우물돌이다.
우물이 있는 이 자리는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하나로 그 꼬질꼬질한 이름을 떨친 평제 박제순(
平齊 朴齊純, 1858~1916)의 저택이 있었다. 그는 1900년에 집 정원을 손질하다가 뜻밖에 이 우
물돌을 발견했는데, 의외의 유물이 나온 것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는지 시 1수를 짓고 돌 피부에
새겼다. 그때 새긴 24자가 진하게 남아있는데, 그 내용을 풀이하면
'둥근 우물돌이다. 아마도 전조(고려) 때 것 같은데, 샘은 메어져 흔적이 없고, 다만 돌만 우뚝
하구나. 광무(光武) 4년(1900년) 겨울, 평제(박제순)가 적다'
그때도 우물돌의 낀 고색의 때가 짙어보였는지 막연히 고려 때 우물 같다고 그랬는데, 고려까지
갈 것도 없이 조선 초나 중기에 쓰였던 것 같다. 허나 그에 대한 정보는 박제순의 시 외에는 아
무것도 없으니 그저 딱할 따름이다.


▲  우물 피부에 새겨진 24자의 박제순의 글씨

매국노의 글씨가 자신의 피부에 문신처럼 새겨진 것에 꽤 불쾌했던지 우물의 표정이 다소 일그
러져 보인다. 그렇다고 지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참고로 박제순의 손자인 박승유(朴勝裕, 1924~1990)는 친조부와 아버지의 매국노 행위를 수치스
럽게 여겨 20살에 몸담고 있던 왜군에서 탈영, 광복군(光復軍)에 들어가 많은 활약을 했다. 그
공로로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아 집안의 죄업을 조금이나마 씻었으며, 음악 교수 및 성
악가로도 유명했다.

▲  정체가 묘연한 네모난 돌덩이
어떤 구조물을 받치고 있던 좌대(座臺)로
여겨진다.

▲  디딜방아의 일부로 보이는 확돌
동그랗게 파인 부분에는 겨울의 제국이 내린
얼음이 진을 치고 있다.

우물돌에서 조금 옆으로 가면 2개의 아리송한 돌덩이가 나온다. 하나는 디딜방아의 일부로 여겨
지는 확돌이며, 다른 하나는 네모난 돌덩이이다. 이들 모두 도서관 일대에서 나온 유물로 앞의
우물돌처럼 정체가 묘연해 은근히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참고로 이곳은 조선 세종(世宗) 때 청
백리(淸白吏)로 명성을 날린 맹사성(孟思誠) 집안의 살던 곳으로 맹씨들이 사는 언덕이라 하여
맹동산이라 불리기도 했다.


♠  서울에서 제일 큰 기와집, 안국동 윤보선가(尹潽善家) - 사적 438호

▲  굳게 입을 봉한 윤보선가 솟을대문의 위엄

안국역 1번 출구를 나와서 바로 나오는 오른쪽 골목길로 쭉 들어가면 커다란 솟을대문과 길다란
담장을 두룬 기와집이 나온다. 이곳이 북촌에서 유일하게 사적으로 지정된 한옥이자 한때 99칸
을 자랑했던 안국동 윤보선가이다. 사적으로 지정되기 전에는 서울 지방민속자료 27호였다.

이 집은 1870년(고종 6년)에 민씨 일가에서 지은 조선 후기 한옥으로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친일
파로 더러운 이름을 날린 박영효(朴泳孝)가 왜정 때 귀국하여 잠시 머물기도 했다.
1910년경 윤보선의 아버지인 윤치소(尹致昭)가 매입했으며, 윤보선 전 대통령이 어린 시절부터
쭉 살았다. 그는 1960년 4.19혁명으로 대통령이 되면서 청와대가 아닌 이곳에서 국정(國政)을
살폈다.

서울 지역 상류층의 가옥으로 대지가 매우 넓으며, 양반가의 최대 칸수인 99칸을 자랑했으나 바
깥사랑채와 안사랑채, 안채, 대문, 행랑채, 창고만 남았다. 전통 한옥 양식에 청나라 건물 양식
을 더했으며, 서양식 가구를 갖추는 한편, 각 건물마다 현판이 걸려있는데, 진충보국(盡忠報國)
이란 현판은 김옥균이 썼다고 한다. 그리고 사랑채 뒤뜰에는 연못이 있고, 매화(梅花)와 향나무
를 비롯한 다양한 나무가 심어져 근대 조경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정원은 서양식으로 꾸며져
있으며, 실생활에 맞게 개조된 안채와 서양식 채양 등은 근대 한옥의 변화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정당인 한국민주당의 산실 역할을 하였고, 1950년대부터 1970
년대에 이르기까지 야당의 중심지였으며, 민주운동의 본부이자 피난처로 사용된 한국 정치사의
중요한 현장이다. 비록 개인 소유라고 해도 그런 뜻깊은 현장이 철저히 비공개로 일관하고 있어
그저 솟을대문과 담장을 넋빠지게 바라봐야 되니 한편으로는 아쉽기만 하다. 겉으로 보이는 모
습도 참 상당한데, 그 속살을 직접 본다면 정말 고래등 기와집이란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대단
할 것이다. 우리 같은 백성들은 언제 저런 집에 한번 살아보려나? 그곳에 대한 호기심과 빈부격
차의 서러움이 교차하는 현장이다.

참고로 윤보선가는 동쪽으로 재동백송이 있는 헌법재판소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재
동백송에서 담장 너머로나마 그곳에 들어있는 일부 기와집의 머리가 보이며, 서울시에서 이 집
을 매입하여 신익희(申翼熙) 가옥이나 고희동(高羲東) 가옥, 장면(張勉) 총리 가옥처럼 속세에
돌려줄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8-1


▲  윤보선가 (문화재청 사진)

▲  윤보선가 솟을대문 북쪽 담장길
담장 안쪽 나무들이 바깥에 조금씩 손을 내밀고 있다.

◀  윤보선가 솟을대문 남쪽의 옥의 티
대문 옆에 벽을 약간 허물고 수레의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  윤보선가 북쪽에 자리한 갤러리 담 (☎ 02-738-2745)
담쟁이덩굴로 외벽의 절반을 치장한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다.
갤러리 현관에는 문인석(文人石) 2기가 나란히 손님들을 맞이한다.

     ◀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터 표석
왜정 때 우리 말을 지키고 연구하고자 1921년에
설립된 조선어학회가 있던 곳이다. 1942년 조선
어학회 사건으로 문을 닫았다가 해방 이후 한글
학회로 다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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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5월 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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