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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4.26 서울 도심 속의 아늑한 전원마을을 거닐다 ~ 종로구 부암동 산책
  2. 2013.04.11 서울에서 가볼만한 명소 360곳 (2013년 4월 기준)
  3. 2012.12.18 우리나라 서원의 떠오르는 성지 ~ 달성 도동서원 (다람재, 이노정) 1

서울 도심 속의 아늑한 전원마을을 거닐다 ~ 종로구 부암동 산책

 


' 볼거리가 풍성한 서울 도심 속의 전원 마을 ~
종로구 부암동(付岩洞) '

▲  인왕산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북악산


하늘 높이 솟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北岳山), 그리고 인왕산(仁王山) 사이로 움푹 들
어간 분지(盆地)가 있다. 그곳에는 수려한 경치를 지닌 부암동이 포근히 감싸여 있는데 서
울 도심과 고작 고개(자하문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가까운 거리임에도 '이곳이 정녕 서울
이 맞더냐~?' 고개가 갸우뚱할 정도로 도심과는 생판 다른 전원(田園) 풍경을 간직하고 있
다.

부암동은 서울의 심장부인 종로구의 일부로 아늑한 전원 분위기와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경
승지가 즐비해 북촌(北村), 성북동(城北洞)과 더불어 두고두고 나의 마음을 앗아가는 곳이
다. 부암동의 주요 경승지로는 북악산 백사골(백사실, 백석동천)을 비롯해 세검정(洗劍亭),
홍지문(弘智門), 석파정, 무계정사터, 반계 윤웅렬별장, 능금마을, 북악산, 청계동천 바위

글씨 등이 있으며, 석파정을 옆구리에 낀 서울미술관을 위시하여 환기미술관, 자하미술관,
유금와당박물관 등 미술관과 박물관도 풍부해 문화의 향기도 진하기 그지 없다.

본글에서는 부암동 명소의 일부인 석파정 별당과 무계정사터(무계동 바위글씨), 청계동천,
반계윤웅렬 별장 등을 소개한다.
☞ 북악산 백사골(백사실) 보러가기
부암동 명소 (장의사지 당간지주/세검정/홍지문 등) 보러가기


♠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의 옛 사랑방 - 석파정 별당(石坡亭 別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3호

상명대입구 4거리에 이르면 4거리 서남쪽에 고풍스런 멋이 깃들여진 고래등 기와집 하나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 집은 석파랑(石坡廊)이란 고급 한정식당으로 서예가로 이름을 날린 소전 손
재형(素筌 孫在馨, 1903~1981) 선생이 살던 곳이다.

소전은 6.25 시절, 서울을 접수한 북한이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담긴 문화유산을 죄다 빼돌
리려고 하자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와 함께 뛰어난 재치로 그곳의 문화유산을 지켜냈으며,
<자세한 내용은 ☞ 간송미술관 답사기 참조> 왜열도로 넘어간 김정희(金正喜)의 완당세한도(阮
堂歲寒圖, 국보 180호)를 천신만고 끝에 품에 안고 온 인물로도 유명하다.

이 집은 원래 대한제국(大韓帝國)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의 집으로 인왕
산 동쪽인 옥인동(玉仁洞)에 있었다. 그러다가 소전이 1958년에 매입하여 이곳으로 옮겨 거처로
삼았으며, 그 기세를 몰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의 별당까지 떼어와
집 뒤쪽에 두었다. 이렇게 잘나가던 기와집을 하나도 아닌 2채나 누릴 정도면 소전도 꽤 부자였
음을 알 수 있다. (당시로는 흔치 않던 서양개 세퍼드를 여러 마리나 키우고 있었다고 함)
소전이 1981년 세상을 뜨자 이들 집은 모두 다른 이에게 넘어가 한정식당으로 변했으며, 석파정
의 이름을 따서 석파랑이란 간판을 달았다.

석파랑 뒤쪽 높은 곳에 자리한 석파정 별당은 맞배지붕의 'ㄱ'자 형태로 방이 모두 3개이다. 가
운데 큰 방은 흥선대원군의 방이고 건너 방은 손님을 접대하던 공간이다. 그리고 대청방은 그의
특기인 사군자(四君子)의 난초를 그릴 때만 특별히 사용했다고 전한다. 사랑채의 마루 안쪽에는
난간을 설치해 고급스러운 한옥 분위기를 진하게 자아내고 있으며, 외벽은 벽돌로 도배해 내부
를 가리고 가운데에 동그란 창을 냈다. 이는 청나라의 건축 양식을 부분 반영한 것이다.

소전에게 별당을 빼앗긴(?) 석파정은 오랫동안 비공개로 일관하다가 2012년 겨울에 비로소 공개
되었다. 문화유산은 제자리에 있어야 된다는 진리에 따라 별당을 원자리로 돌려놓는 것도 괜찮
을 듯 싶은데, 서로 소유자가 다르다보니 이 또한 쉽지가 않을 것이다.


▲  적막에 사로잠긴 석파정 별당
저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가면 열심히 난초를 그리고 있는
대원군 할배가 있는 것은 아닐까?

▲  석파랑 정원 (오른쪽 계단 너머에 석파정 별당이 있음)

석파정 별당은 현재 식당의 일부로 쓰이고 있다.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던 대원군의 별장
이 졸지에 식당 손님들의 밥먹는 장소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별탈이 없이 깨끗하게 보
존되고 있으니 이 정도는 뭐 봐줄 만은 하겠다.
별당으로 접근하는 방법은 석파랑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석파랑 주차장에서 들어가는 길이 있
는데, 주차장 쪽으로 가는 것이 더 접근이 쉽고 빠르다.


▲  150년 묵은 감나무가 무럭무럭 익어가는 석파랑

▲  경복궁에서 가져온 만세문(萬歲門)

석파랑 한옥은 순정효황후의 집을 옮겨온 것으로 청나라 천진(天津)에서 가져온 청나라식 호벽
이 그대로 남아있다. 뜰에 세워진 만세문은 고종(高宗)이 황제에 오른 것을 기념하고자 1898년
에 경복궁에 세운 것으로 궁궐 건축물의 품격이 고스란히 배여있는 문이다.
또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에는 곳곳에 박석(薄石)을 깔아 돌길을 냈으며, 조그만 절구를
비롯한 다양한 석물과 나무. 꽃 등을 심어놓아 눈을 심심치 않게 해준다.

석파랑은 고급 한정식당이라 가격이 매우 얄미운 수준이다. 점심 상차림은 55,000원에서 11만원
대, 저녁은 95,000원에서 15만 5천원이나 한다. 그것도 10% 부과되는 부가가치세(VAT)와 서비스
비(Service Charge)는 제외이다. 먹고 살기도 빠듯한 우리 같은 서민들에게는 정말 특별한 날이
아니면 가기 힘든 아득한 곳이지만 졸부들에게는 그저 가뿐한 장소다. 이 땅에서는 역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님이 많고 봐야 된다. 돈이 사람을 평가하는 더러운 세상이니 말이다. 아
직 이곳의 밥은 먹어보진 못했지만 돈을 몇 달치 모아서라도 한번은 먹어보고 싶다.


※ 석파정 별당(석파랑) 찾아가기 (2013년 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번, 1711번, 7016번, 7018번, 7022번, 7212번 시내
  버스를 타고 상명대입구 하차 (1,2호선 시청역 4/7번 출구에서 1711, 7016번 이용)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3번 출구)에서 110번, 153, 8153번 버스로 세검정(상명대) 하차, 도보
  2~3분
* 지하철 3호선 녹번역(4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로 세검정(상명대) 하차
* 석파랑 홈페이지는 위의 석파정 만세문 사진을 클릭한다.
* 석파랑 영업시간 : 12시~15시, 18시~22시 (설날, 추석연휴는 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125 (석파랑 ☎ 02-395-2500)


▲  하림각 건너편 길가에 자리한 부침바위터(付岩址)

부암동의 지명유래가 된 부침(붙임)바위는 바위 피부 곳곳에 난 구멍에 돌을 대고 비비면서 소
원을 빌면 아들을 얻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부터 뿌리 깊던 아들 선호 사상이 빚어낸
민간 신앙의 현장으로 아들을 원하는 서울 장안의 아낙네들로 늘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바위의 높이는 2m 정도 되었다고 하며, 자하문고개를 넘어온 개발의 칼질이 이곳의 명물인 부침
바위를 산산조각 내면서 이제는 그의 어떠한 흔적도 더듬을 수 없게 되었다. 다만 근래에 세운
바위터 표석이 이곳에 예전 그가 있었음을 아련하게 전할 따름이다.

서울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멋드러진 바위가 참 많았는데, 개발만 앞세운 급격한
도시화의 물결과 인간들의 속물 근성 앞에 많은 바위가 희생을 당했다. 그 바위 가운데 여기서
가까운 응암동(鷹岩洞) 백련산(白蓮山) 자락에는 매 모양의 잘생긴 매바위가 있었는데, 땅값을
노린 집주인이 무식하게 파괴해 버렸다.


♠  야망의 사나이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부질없는 꿈이 깃든 현장
화려한 별장은 온데간데 없고 무계동 바위글씨만 아련히 남은
안평대군 이용 집터(무계정사터)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2호

▲  무계동(武溪洞) 바위글씨

석파랑에서 석파정을 품고 있는 서울미술관을 지나 부암동주민센터에서 창의로5가길을 들어서면
현진건 집터 표석이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 골목길을 들어서 왼쪽으로 20~30도 각도를 바라보면
커다란 나무를 간직한 기와집이 보이는데, 그 집 뜨락 동쪽에 '무계동' 바위글씨가 새겨진 검은
피부의 커다란 고개가 들고 있다. 거기가 바로 한 토막 전설이 되버린 안평대군의 별장, 무계정
사의 옛터이다.


※ 안평대군의 생애(1418~1453)
안평대군은 세종(世宗)의 3번째 아들로 세종이 왕위에 오르던 1418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이용
(李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 낭간거사(琅玕居士), 매죽헌(梅竹軒)으로 그의
호에서 보이듯 꽤나 낭만적인 인물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시문(詩文)과 그림에 능해 삼절(三絶)이라 칭송을 받았으며 거문고를 잘 타고
무예에도 꽤 일가견이 있었다. 이렇게 문무(文武)를 두루두루 겸비한 인재로 세종의 18명 아들
가운데서 가장 능력이 좋았다.

1428년에는 안평대군에 봉해졌으며, 1429년 좌부대언 정연(鄭淵)의 딸과 혼인했다. 그리고 1430
년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공부를 했으며, 1438년에는 두만강(豆滿江) 6진으로 파견되어 두만
강 이북의 여진족을 정벌했다.

세종이 붕어(崩御)한 이후, 맏형인 문종(文宗)의 신임으로 황표정사
(黃票政事 - 왕자들이 추천
한 인물 가운데 왕이 그 적임자를 골라 임명하던 인사제도)
를 장악, 자신의 측근을 요직에 앉혀
조정에서 꽤나 영향력을 행사했다. 1452년 문종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단종(端宗)이 즉위하
자,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과 손을 잡고 수양대군을 견제하며 세력을 꾸준히 키워
나갔다.

그는 창의문 북쪽에 별장을 지었는데, 이곳은 자신의 2째 큰아버지이자 세종의 2째 형인 효령대
군(孝寧大君)의 별장이 잠시 있던 곳이다. 안평대군은 이곳이 무릉도원(武陵桃源)의 계곡을 닮
았다고 하여 무계동(武溪洞)이라 이름 짓고, 별장 이름을 무계정사<武溪精舍, 또는 무이정사(武
夷精舍)>라 했다.
그리고 힘깨나 쓰는 장정을 모집해 숙식을 제공하며 자신의 사병을 꾸준히 키워나가는 한편 용
산에 담담정(淡淡亭)이란 정자를 지어 문인(文仁)들과 교류를 하며 자신의 야망을 키워갔다.

하지만 2째 형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온 이후, 크게 존재를 드러내면서
단종을 설득해 안평대군의 꿀단지던 황표정사를 폐지시켰다. 이는 안평대군에 대한 심각한 도전
이자 대권에 대한 야망을 드러낸 것이다. 이에 위기를 느낀 안평은 함경도에 있던 이징옥(李澄
玉)에게 무기를 지원받아 무력을 앞세워 잠시나마 황표정사를 회복시키는데 성공했으나 이는 그
의 명을 단축시킨 꼴 밖에는 되지 않았다.

동생의 무력도전에 발끈한 수양은 1453년 10월 그 유명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순식간
에 김종서, 황보인 등을 처단했다. 방심하고 있던 안평은 꼼짝없이 포박되어 반역의 죄를 뒤집
어 쓰고 강화도로 유배되었는데, 수양은 썩 안심이 되질 않았던지 곧 강화도 서쪽인 교동도(喬
桐島)로 추방했으며, 한명회(韓明澮)의 건의로 그 해를 넘기지 않고 사약 한사발을 보냈다.
안평은 형이 보낸 사약을 쭈욱 들이키며 권력에 눈이 어두웠던 그리고 형에게 방심했던 자신의
어리석움을 한탄하며 이내 피를 토하고 쓰러지니 그의 나이 불과 35살이었다.

역사에서 쓰라리게 퇴장을 당한 안평대군은 18세기 중반까지 복관(復官)되지 못했으며, 영조 23
년(1747년)에 이르러서야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건의로 복관되면서 죽은 지 300년 만에 편하
게 눈을 감게 되었다. 그의 시호는 장소(章昭)이며 무덤의 위치는 전해오지 않는다.

그가 이승을 뜬 이후, 그의 야망이 깃든 무계정사는 파괴되었으며, 권력을 향한 그의 강인한 정
열이 느껴지는 무계동 바위글씨만 쓸쓸히 바위에 남아 이곳이 무계정사였음을 속삭일 뿐이다.
무계정사는 안평대군의 호를 따서 비해당(匪懈堂)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여름철에는 많은 문인들
이 찾아와 경치를 즐겼다. 또한 정사 앞에는 기린교(麒麟橋)라는 다리가 있었다.

※ 문예가(文藝家)로써의 안평대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문, 서화, 거문고에 두루 능했던 안평대군, 그는 무이정사와 담
담정을 짓고 문인들을 초청해 연회를 베풀며, 궁중에 소장된 서화(書畵)와 자신이 수집한 중원
대륙의 서화들을 연구하거나 소개하는 등, 당시 문학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그는 고려 말부터 유행한 조맹부(趙孟頫)체를 사용했는데, 이를 나름대로 조선식의 필법으로 발
전시켰다. 또한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들은 그의 글씨를 보고 조맹부의 글씨보다 더 휼륭하다고
칭송하며 그의 글씨를 서로 받아가려고 굽신거렸다고 한다.

한편 무계정사에 머물던 어느 날, 꿈 속에서 아름다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냥 기억 속에 두
기가 너무 아까워 그와 친분이 있던 안견(安堅)에게 그 꿈의 내용을 설명하여 그리게 하니, 그
그림이 그 유명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이다. 지금은 유감스럽게도 왜국에 가 있으며, 2009
년 후반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때 잠시 귀국한 인연으로 몽유도원도가 그려진 현장인 무계정사
터를 찾는 답사객의 수가 잠시나마 늘기도 했다.
또한 여러 문인들의 글을 정리하여 시화첩(詩畵帖)을 만들기도 하였고, 1452년에는 경자자(庚子
字)를 개주(改鑄)해 만든 임신자(壬申字)의 자모(字母)를 쓰기도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글씨로는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에 있는 세종대왕 신도비(神道碑), 수원에 있는 청천부원군 심
온묘의 묘표(靑川府院君沈溫墓表), 자신의 아우인 임영대군묘표(臨瀛大君墓表, 의왕시 소재) 등
의 비문이 전한다.

'武溪洞' 바위글씨 곁에 자리한 낡은 기와집은 무계정사와 전혀 관련이 없는 집으로 구한말이나
왜정 때 지어진 것이다. 2005년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때는 쥐방울 만한 견공(犬
公) 2마리가 바위와 집을 철통같이 지켜 그들의 눈치를 살살 보며 바위글씨를 봐야 했다. 허나
이제는 그들도 안평대군의 부질없는 꿈을 따라 추억 속으로 사라졌고, 현재는 종로구청에서 관
리하고 있다.

2007년 이후 이곳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무계정사터'에서
'안평대군 이용 집터'로 변경되었
으며, 집으로 들어가는 철문이 굳게 잠겨있어 관람을 애타게 원할 경우 문에 달린 종로구청 문
화관광과로 연락을 하거나 철문의 헝클어진 틈을 요령껏 뚫고 들어가면 된다.


※ 무계정사터 찾아가기 (2013년 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22, 7212번 버스로 부암동주민센터 하차
  창의문로5가길을 따라 도보 5~6분, 현진건집터 표석만 찾으면 금방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319-4


▲  현진건집터에서 바라본 무계정사터
붉게 물든 아름드리 나무가 자리한 곳에 기와집과 무계동 바위글씨가 있다.
공터 남쪽 구석에는 은단천이라 불리는 샘터가 있으나 수질은 장담 못한다.

▲  이제는 표석으로만 남은 현진건 집터

빙허 현진건(憑虛 玄鎭健, 1900~1943)은 소설 '운수좋은 날'로 유명한 소설가이다. 예전에는 그
의 초라한 집이 좀 남아있었으나 개념도 밥말아먹은 개발의 칼질에 무침히 짓밟혀 지금은 표석
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래도 명세기 현대문학의 중추적인 인물의 집인데, 지방문화재나 등록
문화재로 삼아 보존하거나 평창(平昌) 봉평의 이효석(李孝石) 생가처럼 문학 테마 관광지로 특
성화시키면 정말 꿀단지가 되었을 것을 무작정 개발만 내세우는 작금의 현실이 그저 딱할 따름
이다.


▲  청계동천(靑溪洞天) 바위글씨

무계정사의 흔적을 둘러보고 현진건집터 표석으로 나와 인왕산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전원
분위기가 물씬 감도는 부암동, 그런 부암동에 핏줄처럼 얽힌 골목길은 마치 시골길을 거니는 즐
거운 기분이다. 동네가 산지에 있다보니 오르막길이 꽤 많지만 그렇게 죽을 정도는 아니다. 게
다가 인왕산과 북악산이 청정한 기운을 베푸니 도시의 탁한 기운도 거의 없어 머리도 맑아진다.

현진건집터와 윤웅렬별장 사이에는 피부를 드러낸 바위들이 여럿 있는데, 청계동천이란 바위글
씨를 품은 바위가 있어 이곳도 동천(洞天)의 칭호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바위글씨는 작고 얇은 모습으로 옛 사람들이
이곳 절경에 반해 낙서를 남긴 것이다. 지금이
야 계곡 대부분이 주택 개발로 생매장을 당해
실감이 썩 나지 않겠지만 반계 윤웅렬 별장 뒤
쪽에 얇게 흐르는 계곡이 바로 청계동천의 상류
이다.

청계동천 바위 주변은 개인 땅이라 바위 주변을
철책으로 꽁꽁 둘렀다. 그래서 바위 앞까지는
접근이 어려우나 바로 길가에 있기 때문에 관람
과 촬영에는 그리 지장은 없다.

▲  확대해서 본 청계동천 바위글씨의 위엄


♠  서울 지역 근대 한옥의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는
반계 윤웅렬 별장(磻溪 尹雄烈 別莊)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12호

▲  윤웅렬별장 문간채 (안쪽 대문)

청계동천에서 1분 정도 오르면 반계 윤웅렬별장(이하 별장)이라 불리는 한옥이 나온다. 이곳은
인왕산의 품에 포근히 안긴 그림 같은 기와집으로 1906년에 윤웅렬(尹雄烈, 1840~1911)이 지은
별장이다.

윤웅렬은 해평(海平) 윤씨로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1856년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감영중군(忠
淸監營中軍)과 공주중군(公州中軍), 북청병마우후토포사(北靑兵馬虞侯討捕使)를 거쳐 1878년 통
리기무아문참사(統理機務衙門參事)와 남양부사를 지냈다.
1880년 수신사(修信使)의 일행으로 왜국(倭國)을 둘러보고 왔으며, 1882년 별기군(別技軍)이 창
설되자 훈련원 하도감(下都監)의 신병대장의 영관(令官)이 되었으나 곧바로 터진 임오군란(壬午
軍亂)으로 왜국으로 줄행랑을 쳤다가 곧 귀국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면서 김옥균(金玉均)에 의해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임명되
었으나, 3일 천하로 허무하게 막을 내리면서 화순 능주로 유배를 갔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
革) 때 군부대신(軍部大臣)으로 있으면서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여 청나
라 상해(上海)로 도망쳤으며, 몇 년 뒤 다시 컴백해 법무대신을 지냈다. 1910년 이후에는 왜정
의 남작(男爵) 작위를 받는 등 좋지 않은 뒷끝을 보이다가 1911년 인생을 마감했다.

참고로 윤웅렬의 아들 가운데 그 유명한 윤치호(尹致昊, 1865~1945)가 있다. 그는 개화파 지식
인의 하나로 여러 선각자들과 함께 독립협회와 신민회(新民會) 등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며 민
중 계몽에 앞장섰다. 1910년 이후 안창호(安昌浩)가 세운 대성학교(大成學校) 교장을 지내면서
민족 교육에 헌신했으며, 1911년 105인 사건으로 3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허나 이후 친일파로
갈아타면서 부친과 더불어 쌍으로 구린 뒷끝을 보였다.

윤웅렬의 별장은 처음에는 서양식 2층 벽돌 건물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윤웅렬이 골로 가면서 3
째 아들인 윤치창(尹致昌)이 상속을 받았는데, 1930년대에 한옥으로 안채와 사랑채, 광채, 문간
채를 추가로 지어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별장 안채는 대청을 사이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이 좌우에 있으며, 안방 앞에는 2칸 부엌이 있고
, 건넌방 앞에는 작은 누마루가 있다. 안채 왼쪽에 광채와 사랑채가 나란히 있는데, 'ㄱ'모양의
사랑채 한쪽 끝에 윤웅렬 시절부터 전해오던 서양식 2층 벽돌건물이 있다.
사랑채와 2층 건물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앞에 인왕산이 베푼 조그만 계곡이 흘러간다.
그 계곡이 바로 청계동천의 상류로 계곡에 돌로 2단의 석축을 쌓고 나무를 심어 경관을 아름답
게 꾸몄다. 사랑채 지붕에는 옥상 테라스를 돋보이게 만들어 경관을 감상하는 전망대로 삼았다.

사랑채와 광채는 변형이 심해 원래 모습을 짐작하기 어려우며, 한양도성(都城) 밖 부암동에 세
워진 별서(별장)의 하나로 외국 건축 양식이 상류층 주택에 적용된 사례로 주목된다. 또한 안채
는 서울 지역 근대 한옥의 변화가 잘 반영되어 있다.

윤치창 이후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봉산서원이라 불리는 미술공간으로 쓰였으며, 이때는 대문(
문간채) 앞 뜨락에 비너스상과 집채만한 큰 바위가 있어 특이한 모습을 보였는데, 2011년에 어
느 졸부가 이곳을 사들이면서 싹 정비해 그들을 내버렸다. 이때 대문을 새로 만들고 담장을 추
가했으며, 집도 새집처럼 산뜻하게 손질했는데, 보수공사 기간에 공사 관계자의 흔쾌한 허가로
2층 테라스를 비롯하여 별장 내부를 구석구석 관람하는 행운을 누렸다.
부암동이 요즘 인기를 누리면서 찾는 이가 쓸데없이 늘긴 했지만 여기까지는 거의 오지 않는다.
설령 용케 왔다고 해도 속사정을 알지 못하니 그저 담장만 찍고 돌아갈 뿐이다.

별장 보수공사는 2011년 12월에 끝났으며, 이후로는 소유자의 뜻에 따라 절대로 속살을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 그 이전에 본 것이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내 바램이긴 하지만 이 괜찮은 한
옥을 집주인 일가만 야속하게 누리지 말고 다수가 좀 누렸으면 좋겠다. 그냥 누리면 좀 미안하
니 요즘 인기를 더하고 있는 한옥체험장(한옥 민박, 게스트하우스)으로 개방하면 어떨까?
북촌과 전주한옥마을, 경주 양동민속마을, 안동의 몇몇 기와집들은 관광객을 상대로 한옥 체험/
숙박 장사를 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곳 집 크기는 북촌의 왠만한 한옥과 비슷하거나 조금
큰 편이며, 뜨락도 넓고, 바로 옆이 인왕산 숲이라 공기도 매우 상쾌하다. 도심이긴 하지만 깊
숙한 산골 마을에 들어온 듯, 전원 분위기가 그윽하며, 집에 딸린 방이 많고 한옥의 흔치 않은
2층 테라스까지 두고 있으니 소문만 잘나면 어지간한 한옥 숙박집 이상의 인기를 얻을 것이다.
게다가 도심과 가깝고 교통도 괜찮으며, 정류장에서 도보 10분이니 접근성도 그만하면 딱이다.


▲  서쪽 담장 너머로 바라본 윤웅렬별장의 뒷모습

▲  2011년 후반에 새로 지은 바깥 대문
예전에는 그냥 뻥 뚫린 공간이었다
.

▲  안채 옆에 있는 또 다른 문
원래 있는 문으로 늘 굳게 닫혀있다.

▲  윤웅렬별장 앞길 (대문과 담장은 2011년
보수 때 새로 했음)

▲  겨울잠에 잠긴 별장 연못
물과 연꽃, 물고기가 넘쳐날 그때를 꿈꾼다.


▲  윤웅렬 별장의 숨겨진 아름다움 (사랑채 뒤쪽 계곡) ▼

별장 뒤쪽에는 이곳만의 숨겨진 비경이 있다.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절경이 수줍은 듯 모습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는 조그만 계곡이 없는 듯 흘러가는데, 이 계곡이 바로 청계동천이다. 계곡 양쪽에는 돌
로 높게 석축을 쌓았으며, 위쪽에는 2단으로 석축(石築)을 둘렀다. 석축 위에는 단풍나무를 비
롯한 여러 나무들이 앞다투어 작품이 되면서 늦가을의 정취를 진하게 우려낸다. 지나가던 가을
도 이 별장에 단단히 눈독을 들였는지 뒤쪽으로 슬며시 들어와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을 빚은 것
이다.


▲  사랑채 뒤쪽 계곡의 막다른 곳 (바위와 폭포)

계곡의 막다른 곳에는 푸른 이끼를 뒤집어 쓴 바위가 있다. 이끼가 가득하다는 것은 이곳이 그
만큼 청정하다는 것을 강하게 의미한다. 인왕산에서 흘러온 계곡이 이 바위에서 아담하게 폭포
를 자아내며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폭포의 높이는 2m 정도로 물줄기가 바위 전체를 타고 흐르
는 것이 아닌 한쪽 구석에 답답한 줄기로 흘러간다. 바위 위쪽 주변에는 석축을 쌓고 계단을 만
들었는데, 붉게 타오른 낙엽이 수북히 쌓여 마치 산불이 일어난 듯 하다.


▲  푸른 이끼의 청정한 안식처인 바위와 폭포

▲  폭포 밑에 모인 인왕산 계곡물

티끌 없이 맑은 계곡물이 폭포 밑에 마련된 조그만 담(潭)에 옹기종기 모여 기나긴 여행을 준비
한다. 여기서 숨을 돌리고 길을 떠나면 다시 돌아오기 힘드니 그 아쉬움은 정말 대단하겠지. 그
런 못에 낙엽들도 몰려와 그들 생애의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고, 주변 나무들은 조그만 못에 비
친 자신을 바라보며 막바지 매무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  바위 위쪽 부분 (석축과 돌계단)
비록 짧지만 한세상 폼나게 살다 쓸쓸히 대지로 떨어진 이쁜 빛깔의 낙엽이
수북히 쌓여 아름다운 선경(仙境)의 불빛을 이룬다.

▲  불의 화신일까..? 붉게 물이 오른 단풍잎

▲  2층 테라스를 갖춘 사랑채와 2층 벽돌집

비경의 정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사랑채는 별장 내부를 꽁꽁 가리고 있다. 사랑채 지붕
위에는 특이하게 옥상 테라스를 두어 작지만 천하를 굽어볼 수 있게 했으며, 사랑채 바로 옆에
는 붉은 피부의 서양식 2층 벽돌집을 두어 옥상으로 연결하는 계단을 두었다.
벽돌집에는 각 층마다 큼직한 방이 있어 사랑채의 보조 역할을 하고 있으며, 옥상 테라스와 벽
돌집은 이곳만의 진한 매력이자 서울에 있는 근/현대 한옥 중에서도 유일한 케이스이다.


▲  측면에서 바라본 2층 벽돌집과 사랑채
붉은 벽돌로 치장한 벽돌집에 중후한 멋이 엿보인다.

▲  별장 안쪽으로 들어가는 통로 - 왼쪽이 사랑채, 오른쪽이 문간채이다.

▲  2층 벽돌집과 안으로 들어가는 문

▲  사랑채 지붕 2층 테라스


▲  사랑채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본 별장 안채

▲  사랑채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본 남쪽 산자락
정말 시리도록 아름다운 늦가을 풍경이다.

▲  사랑채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본 별장 뒤쪽 (서쪽)

사랑채 지붕으로 올라가려면 2층 벽돌집을 거쳐야 된다. 실내화로 갈아신어 계단을 타고 2층으
로 올라가 문을 열면 나무로 지어진 2층 테라스로 전망용으로 지어지긴 했으나 시야에 들어오는
범위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매우 좁아 별장 일대와 남쪽 산자락이 고작이다. 하지만 산자락에
나무가 무성해 눈이 그리 심심치는 않으며, 이곳에 올라 인왕산에서 잔잔히 다가오는 선선한 바
람을 맞으면 속세에서 오염된 머리와 마음이 싹 가시는 듯 하다.

별장 서쪽 언덕에는 돌로 2단의 석축을 쌓고 구석에 소나무 등의 나무를 심었는데, 나무가 제법
다 자란 티를 내며 별장에 작게나마 그늘을 드리워준다. 게다가 커다란 바위도 한쪽에 자리잡고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숫키와가 얹혀진 담장이 집을 넓게 둘러싸며 속세와 경계를 이룬다.


▲  텅 비어있는 벽돌집 2층

※ 반계 윤웅렬 별장 찾아가기 (2013년 4월 기준)
* 교통편은 앞의 무계정사 참조, 무계정사 입구 현진건집터에서 큰 골목길로 직진하면 된다.
* 개인 소유라 내부 관람은 어렵다. 관계자의 허가를 받드시 받기 바란다.
* 여기서 인왕산의 품으로 6분 정도 들어가면 자하미술관(02-395-3222)이 있으며, 미술관 직전
  에서 부암약수터를 거쳐 인왕산으로 올라가도 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348


▲  부암동 나들이를 마치고 자하손만두에서 먹은 떡만두국
색이 입혀진 만두가 나그네의 입맛과 시각을 제대로 자극시킨다.

부암동을 둘러보니 슬슬 어둠이 내려오면서 시장기가 감돈다. 답사와 등산에서 먹는 재미만큼이
쏠쏠한 것은 없지. 마침 자하문고개까지 올라온 터라 자하문길과 북악산길이 만나는 고개 중턱
에 자리한 자하손만두를 찾았다.
이 만두집은 서울식 만두를 파는 곳으로 서울에서 만두로 꽤 유명한 집이다. 다양한 색과 모양
을 지닌 만두는 입안에서 살살 녹기가 바쁘며, 만두집이라 만두와 떡국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2층 양옥으로 이루어진 이 집은 뜨락에도 상을 놓고 손님을 맞는데, 휴일 저녁이라 자리가 거의
없다. 우리는 편수와 떡만두국을 먹었는데, 가격이 몹시나 얄미운 수준이다. 편수는 11,000원,
만두국은 무려 12,000원이나 한다. 내가 먹은 만두국 가운데 가장 허벌나게 비싸다. 그렇다고
나같은 장정이 먹기에도 썩 넉넉한 양도 아님. 만두를 겯드린 식사를 하려면 2인 기준으로 3~4
만원대는 잡아야 된다.

반찬은 김치와 송송(깍두기)이 전부이며, 식사를 마치면 후식으로 잘 익은 수정과를 준다. (지
금도 주는 지는 모르겠음) 고개 중턱에 자리한 탓에 자리만 잘 잡으면 인왕산과 부암동을 바라
보며 식사를 할 수 있으며, 산자락이라 밤공기가 좀 차다.


▲  편수의 위엄
편수는 소고기와 표고버섯, 오이 등이 들어간 만두로 그 모양이 참 이쁘다.
저들의 모습은 소중한 무엇인가를 꼭꼭 품고 있는 모습 같은데, 그 껍질을
벗기면 잘 버무려진 편수의 내용물이 수줍은 듯 속살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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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최근에 본인 다음 블로그에 올린 글과 사진입니다.
(글 제목을 클릭하시면 해당글로 바로 이어집니다)

 

 

서울에서 가볼만한 명소 360곳 (2013년 4월 기준)


★ 서울에서 가볼만한 명소 360곳 (2013년 4월 기준) ★
* 명소에 대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본글에 문의 댓글(명소에 대한 정보나 교통정보, 역사 등)을
  달아주시면 아는 한도에서 최대한 답변 드립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하셔도 됨)
* 불펌은 사절합니다. 무조건 출처와 원작자를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가급적 스크랩 기능을 사용하시기 바람)
* 본인 기준으로 작성된 만큼 쓸데없는 태클은 정중히 사절합니다.


1. 서울 종로구 내부 (북악산~인왕산 줄기 남쪽)
1. 경복궁
2. 국립고궁박물관 (경복궁 남쪽)
3. 국립민속박물관 (경복궁 동쪽)
4. 청와대 앞길
5. 청와대와 육상궁 (청와대 홈페이지에서 관람신청)
6. 윤동주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
7. 청운공원

8. 인왕산길

9. 사직단공원 (사직단)

10. 황학정

11. 수성동계곡

12. 선희궁터 사우

13. 통의동 백송터

14. 청와대사랑채

15. 서촌 일대

 

16. 해공 신익희가옥

17. 이상범 가옥(화실)

18. 필운대 (배화여고 안에 있음)

19. 삼청동길

20. 삼청공원

21. 북악산 정상 (촛대바위, 북악산 한양성곽길)

22, 북악산 말바위

23. 숙정문

24. 창덕궁 후원뒷길 (감사원에서 성대로 넘어가는 고개)

25. 와룡고개 (와룡공원)

26. 창덕궁과 후원

27. 창경궁

28. 종묘

29. 성균관 (문묘, 은행나무)

30. 송시열집터 (증주벽립 바위글씨) 

 

31. 대학로거리 (마로니에공원)

32. 이화장

33. 함춘원터 (서울대병원 북쪽)

34. 구 서울대본관

35. 구 대한의원본관 (서울대병원 남쪽)

36. 낙산공원 (낙산 일대)

37. 비우당과 자지동천(자주동천)바위글씨

38. 청룡사와 정업원구기

39. 낙산 이화마을 (이화벽화마을)

40. 서울국립과학관

 

41. 동대문(흥인지문)

42. 청계천 일대

43. 광장시장

44. 동묘

45. 인사동거리

46. 조계사와 불교중앙박물관

47. 우정총국 (우정박물관)

48, 세종문화회관

49. 경희궁

50. 서울역사박물관

 

51. 홍파동 홍난파가옥

52. 딜쿠샤와 행촌동은행나무

53. 보신각

54. 종로2,3가 거리

55. 경인미술관

56. 천도교 중앙대교당

57. 운현궁

58. 관상감 관천대

59. 인왕산

60. 대림미술관

 

61. 목인박물관

62. 광화문광장

63. 북촌한옥마을

64. 북촌문화센터

65. 한국불교미술박물관

66. 원서동 고희동가옥

67. 원서동 빨래터 (신선원전 외삼문)

68. 배렴가옥(북촌게스트하우스)

69. 중앙중고교

70. 인문학박물관

71. 가회민화박물관

72. 한상수자수박물관

73. 재동백송

74. 정독도서관

75. 서울교육박물관

 

76. 북촌생활사박물관

77. 북촌4,5,6,7경

78. 번사창

79. 부엉이공예박물관

80. 동아일보 일민미술관

81. 성곡미술관

82. 떡박물관

83. 혜화문(동소문)

 

 2. 서울 종로구 외곽 (북악산~인왕산 줄기 북쪽)
 1. 창의문(자하문)
 2. 부암동 (부암동 산복도로)
 3. 무계정사터 (안평대군집터)
 4. 반계 윤웅렬별서
 5. 능금마을 (뒷골마을)
 6. 북악산 백석동천
 7. 서울미술관과 석파정

 8. 석파랑 (석파정 별당)
 9. 환기미술관
 10. 홍지문

 11. 세검정
 12. 북악산 백사골 (백사실계곡)
 13. 평창동 소나무 (평창동 남쪽 북악산 자락)

 14. 보현산신각
 15. 북한산 금선사
 16. 동령폭포
 17. 북한산 승가사
 18. 북한산 문수사
 19. 북한산 비봉
 20. 화정박물관


 21. 평창동 박종화가옥

 22. 구기동계곡
 23. 북한산둘레길 옛성길 (탕춘대성 암문)
 24. 삼성출판박물관

 25. 북한산둘레길 평창마을길

 26. 북악산길

 27. 자하미술관

 

 

 3. 서울 중구
 1. 덕수궁(경운궁)
 2. 덕수궁돌담길
 3. 서울시립미술관
 4. 옛 러시아공사관터와 정동공원
 5. 중명전

 6. 배재학당역사박물관

 7. 이화여고박물관과 유관순우물

 8. 정동교회

 9. 서울광장

 10. 서울도서관 (옛 서울시청사)

 11. 서울시청 신청사

 12. 환구단 (황궁우)

 13. 명동거리

 14. 명동성당

 15. 남대문시장

 

 16. 남대문(숭례문)

 17. 서울역 (문화역 서울284)

 18. 약현성당

 19. 손기정공원 (손기정월계관수)

 20. 화폐금융박물관 (한국은행본관)
 21,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

 22. 남산 와룡묘

 23. 남산N서울타워

 24. 남산 정상 주변 (봉수대, 팔각정)

 25. 남산골한옥마을

 26. 동대문쇼핑타운

 27. 동대문역사문화공원
 28. 장충단공원

 29. 신당동 떡복기골목

 30. 신당동 중앙시장


 31. 금호산 (금호산 벚꽃축제)

 32. 광희문(수구문)

 33. 대한성공회성당 서울교구, 경운궁 양이재

 

 4. 서울 강북 서부 (은평, 서대문, 마포, 용산구)
 1. 북한산 삼천사 (삼천리골)
 2. 북한산 삼천사지 (삼천사에서 등산 2km)

 3. 북한산 진관사

 4. 진관사계곡

 5. 숙용심씨묘표

 6. 영산군묘역

 7.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내시묘역은 없음)

 8. 경천군송금물침비 (내시묘역길 중간에 있음)

 9. 북한산성 대서문

 10. 북한산둘레길 마실길 (은행나무숲길)

 11. 북한산둘레길 구름정원길

 12. 북한산 불광사계곡

 13. 금성당

 14. 금암문화공원 (금암기적비)

 15. 인조별서유기비

 

 16. 수국사

 17. 백련산 백련사

 18. 불광천 (불광천길)

 19. 옥천암 마애좌상 (보도각백불)

 20. 인왕산 환희사

 21. 홍제동 개미마을

 22. 안산(鞍山)

 23. 안산 무악봉 동봉수대터

 24. 봉원사 (연꽃축제)

 25. 서대문역사공원 (옛 서대문형무소)

 26. 독립문과 영은문주초

 27. 인왕산 선바위, 국사당

 28. 연세대 근대건축물 (언더우드관, 스팀슨관 등)

 29. 신촌거리

 30. 홍대거리


 31. 효창공원

 32. 용문동 남이장군 사당 (남이장군제)
 33. 원효로성당

 34. 전쟁기념관

 35. 이태원거리

 36. 남산야외식물원

 37. 용산가족공원

 38. 국립중앙박물관

 39. 공덕동, 마포 먹자골목

 40. 절두산성지와 잠두봉

 

 41. 양화진외국인묘역

 42. 망원정

 43. 평화의공원과 난지연못

 44. 월드컵경기장 주변

 45. 하늘공원과 월드컵공원

 46. 난지캠핑장

 47, 무악재 고갯길

 48. 삼성미술관리움

 49. 화의군묘역

 

 5. 서울 강북 동부 (동대문, 성북, 성동, 광진, 중랑구)
 1. 선농단 (선농대제)

 2. 세종대왕기념관
 3. 영휘원과 숭인원
 4. 홍릉수목원

 5. 고려대박물관

 6. 동망봉

 7. 보문사

 8. 개운사

 9. 보타사

 10. 개운산공원

 

 11. 삼군부총무당 (삼선어린이공원)

 12. 최순우옛집

 13. 돈암장

 14. 선잠단터

 15. 간송미술관

 16. 성북동 성락원

 17. 길상사

 18. 성북동 이종석별장

 19. 수연산방

 20. 성북구립미술관

 

 21. 심우장

 22. 삼청각

 23. 북악산 김신조루트(북악하늘길)

 24. 정릉

 25. 봉국사

 26. 경국사

 27. 정릉계곡

 28. 북한산둘레길 솔샘길

 29. 경동시장과 약령시장

 30. 서울풍물시장

 

 31. 서울숲

 32. 수도박물관

 33. 뚝섬

 34. 화양리느티나무

 35. 어린이대공원

 36. 아차산생태공원

 37. 아차산 홍련봉보루유적
 38. 아차산성과 아차산 보루유적

 39. 용마폭포공원

 40. 서울시립대, 배봉산공원

 

 41. 의릉

 42. 망우리공원 (망우리묘지)

 43. 중랑캠핑숲

 44. 봉화산 (봉화대)

 45. 살곶이다리

 

 6. 서울 강북 북부 (강북, 도봉, 노원구)
 1. 북한산 화계사
 2.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3. 조병옥박사묘

 4. 북한산 본원정사

 5. 북한산 구천폭포

 6. 4.19국립민주묘지

 7. 북한산둘레길 순례길

 8. 우이동 솔밭공원

 9. 북한산 소귀천계곡

 10. 북한산 도선사

 

 11. 봉황각

 12. 손병희선생묘

 13. 우이령길 (우이동~우이동유원지~우이령)

 14. 북서울꿈의숲

 15. 초안산공원 (초안산조선시대분묘군)

 16. 옹기민속박물관

 17. 연산군묘

 18. 방학동은행나무와 원당샘

 19. 양효공안맹담과 정의공주묘역

 20. 북한산둘레길 소나무숲길

 

 21. 도봉산둘레길 (우이동~무수골~도봉산입구)

 22. 중랑천 (중랑천둑방길)

 23. 도봉산 무수골

 24. 도봉산 도봉서원

 25. 도봉산 천축사

 26. 도봉산 만월암

 27. 도봉산 우이암 봉우리

 28. 도봉산 만장봉, 자운봉

 29. 창포원

 30. 수락산 벽운동계곡


 31. 수락산 정상

 32. 수락산 학림사

 33. 불암산 (불암산성, 불암산둘레길)

 34. 불암산 학도암

 35. 이윤탁한글영비 (한글고비)

 36. 태릉 (조선왕릉전시관)

 37. 강릉 (태릉 동쪽, 제한관람)

 38.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39. 화랑대역

 40. 태릉이스턴캐슬공원 (옛 태릉푸른동산)

 

 7. 서울 강서 (강서, 양천, 구로, 영등포, 금천구)
 1. 강서습지생태공원
 2. 개화산 약사사 (개화산)
 3. 개화산 미타사

 4. 서남물재생센터공원

 5. 겸재정선기념관

 6. 양천향교

 7. 궁산공원 (옛 양천고성터)

 8. 허준박물관

 9. 구암공원, 허가바위

 10. 안양천 (안양천 둑방길)


 11. 우장산공원

 12. 서서울호수공원

 13. 궁동 정선옹주묘역

 14. 궁동저수지생태공원

 15. 오류동 류순정, 류홍묘역

 16. 선유도공원

 17. 여의도 여의도둑방길 (여의도 벚꽃축제)

 18. 여의도공원
 19. 63빌딩

 20. 샛강생태공원

 

 21. 가산(가리봉)로데오거리

 22. 금천아트캠프, 금천구청역~독산역 벚꽃거리

 23. 시흥동 은행나무 (은행나무4거리)

 24. 호암산 호압사

 25. 관악산둘레길 호암산 구간

 26. 호암산성터와 한우물, 석구상 (불영암)

 27. 호암산 칼바위

 

 8. 서울 강남 (동작, 관악, 강남, 서초구)
 1. 사육신묘
 2. 흑석동 효사정
 3. 상도동 양녕대군묘역
 4. 국사봉 사자암 (국사봉)
 5. 보라매공원
 6. 신림동 굴참나무

 7. 난곡 강사상/강홍립(진주강씨)묘역, 신도비

 8. 삼성산성지
 9. 관악산 (관악산 철쭉제)

 10. 관악산 둘레길 (사당~낙성대~삼성산성지 구간)

 11. 낙성대
 12. 봉천동마애미륵불
 13. 사당동 임당 정공신도비 (동래정씨묘역)

 14. 효간공 이정영 묘역

 15. 관악산 관음사

 16. 구 벨기에공사관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

 17. 국립서울현충원

 18. 호국지장사
 19. 동작충효길 (동작구 둘레길)
 20. 잠실뽕나무 (잠원동)

 

 21. 강남역거리

 22. 도산공원

 23. 봉은사

 24. 삼성역 코엑스 (코엑스 아쿠아리움)

 25. 선정릉

 26. 효령대군묘역

 27. 우면산

 28.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29. 양재시민의숲

 30.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31. 양재천

 32. 구룡산

 33. 대모산

 34. 대모산 불국사

 35. 헌인릉

 36. 광평대군묘역

 37.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38. 한국자수박물관

 39. 호림박물관

 

 9. 서울 강동 (송파, 강동구)
 1. 잠실종합운동장

 2. 석촌호수

 3. 잠실롯데월드

 4. 삼전도비

 5. 석촌동고분군

 6. 방이동고분군

 7. 오금공원

 8. 올림픽공원, 몽촌토성

 9. 한성백제박물관

 10. 방이동 생태학습관

 

 11. 풍납토성

 12. 암사동 선사유적지

 13. 일자산 (일자산 해맞이공원, 둔굴)

 14. 일자산 허브천문공원, 강동그린웨이 가족캠핑장

 15. 길동자연생태공원
 
16. 고덕산 (고덕산림욕장, 강동그린웨이, 광주부원군묘역)

 17. 성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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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여행도서] 여행책의 백미, '남한 명승비경 79곳'

"예예원출판사(드라이브사)"에서 만든 "남한 명승비경 79곳" 책을 추천합니다.
이 책은 수도권부터 강원,충청,경상,전라도까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산,계곡, 폭포 등의

명소 79곳을 소개하는 책으로 자세한 설명과 함께 사진,지도가 잘 나와있습니다.

특히 여름휴가철이나 계곡,폭포,명승비경 여행에는 아주 요긴한 책이지요.

책에 실려있는 사진들은 전문사진작가가 찍었다고 하며, 사진은 정말 괜찮습니다.
일부는 사진대회에도 출품하여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하며 여러 번 언론에 소개된
바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책의 단점이 딱 하나 있다면 숲,계곡,폭포 주변 음식점, 숙박업소에 대한 정보가

약간 미흡한 점인데, 그건 별로 신경쓸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만큼 명승지 관련 설명과

사진,정보가 풍부하니까 말이죠.


이 책은 현재 왠만한 유명서점,대형서점에서 판매되고 있구요.
저도 이책 1권을 가지고 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도 알려주고 계곡 등에 갈때 이 책을

아주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정확한 제목은 "남한 명승비경 79곳"입니다.
가격은 13000원..

한번 봐보세요.  저도 여기서 많은 정보를 얻었습니다. ^^*
후회하지는 않을 겁니다. 노련한 여행/사진 전문가가 만든 책이니까요.

 
 

 

 

우리나라 서원의 떠오르는 성지 ~ 달성 도동서원 (다람재, 이노정)

 


♠  대구 현풍(玄風) 나들이 ~ 도동서원, 이노정 ♠
도동서원 담장
▲  도동서원 담장
 


여름의 제국이 한참 무르익어가던 7월 중순, 경북의 중심지인 대구(大邱)를 찾았다. 대구에서
현풍(玄風) 지역 투어를 같이 할 여인네와는 북부정류장에서 만나기로 하여 동서울터미널에서
구미행 직행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서울에서 바로 대구 북부로 가는 차편이 없음)
피서객들로 미어터지는 동서울터미널에서 강원도와 충청도, 전라도, 경주 방면 버스는 대기시
간이 무지 긴데 반해 구미행 버스는 무척이나 한산하다.

피서차량으로 여름 몸살을 앓는 중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하여
구미까지는 무려 4시간이나 걸렸다. 구미에 발을 내리기가 무섭게 대구 북부행 직행버스를 잡
아타고 오후 2시에 북부정류장에 도착했다. 그곳에 이르니 만나기로 한 여인네는 그의 4발 수
레를 끌고 일찌감치 나와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의 차에 오르니 현풍에서 왔다는 그의 친구도
같이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셋이서 현풍 나들이를 떠나게 되었지~~

아직 다들 점심을 못먹은 터라 현풍 직전 달성1차공단에서 그들의 단골 식당에 들어가 간단하
게 뼈다귀해장국을 먹었다. 그렇게 점심을 채우고 그의 친구가 만든 과자를 후식으로 배의 나
머지 공간까지 꾸역꾸역 채우니 포만감의 행복에 쓰러질 지경이다.

잠시 현풍터미널에서 들려 부산으로 가는 직행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1번째 답사지인 도동서원
으로 길을 재촉했다. 그 여인네는 고향이 달성군 구지면이라 현풍과 구지 일대를 훤하게 꿰고
있어 나들이에 그리 불편은 없었다.

현풍에서 도동서원까지는 성하리와 자모리를 거쳐 낙동강변을 따라가다가 대니산(戴尼山, 408
m) 북쪽에 둘러진 험한 고갯길 다람재를 넘어야 된다. 다람쥐가 연상되는 다람재는 그 귀여운
이름과 걸맞지 않게 강원도의 고갯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험준하기 그지 없어 눈이 오
면 아예 통행이 불가능하다.
구불구불의 극치를 누리며 힘겹게 고개를 오르니 드디어 전망이 확트인 고개 마루에 이른다.
고개 정상에는 고개를 오르느라 지친 나그네와 수레가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도록 조촐하게 공
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에선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을 비롯하여 도동서원 주변과 강 건너로
고령군 개진면이 시원스레 두 눈에 다가와 조망도 괜찮다. 이런 평화로운 풍경에 마음까지 여
유로워지는 이런 곳에 서면 멋드러지게 시(詩) 한 수 읊어야 폼이 나겠지만 그럴 실력이 되지
못해 그냥 쉽게 감탄사만 연발했다.


▲  다람재 정상에 세워진 6각형 정자
정자에 오르면 낙동강을 비롯하여 도동리, 강 건너의 고령군 개진면 개포리,
오사리, 옥산리 지역이 시원스레 시야에 들어온다.

▲  다람재에서 굽어본 천하 (1)
강 왼쪽은 도동서원이 있는 도동리로 기와가 씌워진 도동서원이 희미하게 보인다.
강 오른쪽은 고령군 개진면이다.

▲  다람재에서 굽어본 천하 (2)
장마로 누런빛을 드러낸 낙동강 너머의 비옥한 평야는 고령군 개진면 옥산리

▲  뭉글뭉글한 다람재 표석
도동서원을 찾는 답사객이 늘자 대구시에서는 서원으로 가는 길목의 하나인 다람재를
정비하고 고갯 마루에 다람재 표석과 정자를 갖춘 아담한 쉼터를
만들어 그들의 발길을 배려했다.

▲  김굉필(金宏弼)의 시 한 수가 담긴 표석

 <
길가의 소나무(路傍松)>
  一老蒼髥任路塵  한 그루 늙은 소나무 길가에 서 있어
勞勞迎送往來賓  괴로이도 오가는 길손 맞고 보내네
    歲寒與汝同心事  찬 겨울에 너와 같이 변하지 않는 마음
  經過人中見幾人  지나가는 사람 중에 몇이나 보았는가


다람재에서 비록 보이는 범위는 좁지만 눈 아래로 펼쳐진 천하를 바라보며 대니산과 낙동강이
제공헌 선선한 기운을 즐기다가 구비구비 고갯길을 내려와 도동서원을 찾았다. 서원 주차장에
이르니 잔뜩 인상을 찌푸리던 먹구름이 조금씩 빗방울을 뿌려 천하를 적히기 시작한다.
서원을 둘러보기 전에 잠시 도동서원의 내력을 흔쾌히 짚어보도록 하자.


♠  우리나라 서원 건축의 백미(白眉)로 일컬어지는 서원
한훤당 김굉필을 배향한 도동서원(道東書院) - 사적 488호
(강당과 사당, 담장은 보물 350호)

▲  다람쥐와 서화 무늬
자모에서 도동으로 넘어오는 다람재란 고개 이름이 이 다람쥐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하늘을 향해 꼬랑지를 흔들며 열심히 올라가는
모습은 조정으로의 출세를 염원하는 유생들의 욕심이 담겨진 것이다.


대구의 대표적인 서원인 도동서원은 앞에는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뒤로는 나지막한 대니산을
배경으로 삼아 자리해 있다. 이 서원은 1568년 조선5현(朝鮮五賢)의 하나로 꼽히는 한훤당 김굉
필(寒暄堂 金宏弼, 1454~1504)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유림(儒林)에서 현풍 동쪽 비슬산(琵
瑟山) 자락에 세웠다. 여기서 조선5현이란 정여창(鄭汝昌), 이황(李滉), 조광조(趙光祖), 김굉
필, 이언적(李彦迪)을 일컫는다. 1573년 쌍계서원(雙溪書院)으로 정식으로 사액(賜額)되었으나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파괴되었다.

1605년 김굉필의 외증손인 한강 정구(寒岡 鄭逑)가 유생들의 후원을 받아 김굉필의 무덤 밑인
지금의 자리에 서원을 재건하고 보로동서원(甫老洞書院)이라 했다. 김굉필의 명성 탓인지 유생
들이 보낸 후원금이 상당하여 제법 많은 돈이 남았다고 하며, 정구는 그 돈을 다른데 쓰지 않고
죄다 서원을 꾸미는 데 쏟아부었다고 한다. (차라리 왜란 이후 어렵게 살던 백성들을 도왔으면
좋지 않았을까?)

1607년 공자(孔子)의 도가 동쪽에 이르렀다는 뜻에서 도동서원으로 사액되면서 동네 이름도 도
동(道東)으로 강제로 변경되었다. 1871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도 운좋게 비켜
가면서 조선 중기 서원 양식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달성군이 경상북도 시절에는 도동서원이 경북 제일 남쪽 끝으머리에 자리한 탓에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았다. 서원을 이루는 건물도 거의 폐가처럼 변해갔고, 용머리와 여러가지 조각들이 도난
당하고 훼손되기가 바뻤던 것이다. 그러다가 1996년 대구에 강제로 편입된 이후, 비로소 제대로
관리가 이루어지면서 지금에 이른 것이다.

이곳은 산지형(山地形) 서원의 배치형태로 진입공간과 강학공간, 제향공간으로 나눠져 있다. 진
입공간에는 수월루와 외삼문이 있고, 공부를 하는 강학공간에는 강당과 동재, 서재, 장판각이
있으며, 서원에서 제일 뒤쪽이자 가장 높다란 곳에 제향공간인 사당이 자리한다.

도동서원은 달성군(達城郡)의 이름난 명소로 필수 답사지로 손꼽힌다. 비록 안동 도산서원(陶山
書院)이나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의 명성까지는 아니지만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고 시간이 흐
를수록 찾는 이도 정비례로 늘어나 우리나라 서원의 새로운 성지(聖地)로 부각되고 있다. 이곳
이 세상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다른 서원과 차별화된 매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우선 서원 주변을 두르는 흙담장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보물로 지정될 정도로 아름다운 담장으
로 유명하며, 강당은 기단이 높고, 용머리와 다람쥐 등의 동물상, 서화(瑞花) 등이 조각되어 건
물의 품격을 드높인다. 게다가 강당으로 들어서는 환주문(煥主門)은 특이한 구조로 눈길을 잡아
맨다. 이들 담장과 강당은 서원에서 따로 분리하여 보물 350호로 지정되었다.

서원 앞에는 김굉필나무라 불리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아름드리 그늘을 드리워주며, 신도비와 사
적비 등이 자리한다. 유물전시관에는 왕이 서원에 내린 서책과 제기(祭器), 경현록(景賢錄) 목
판 등이 전시되어 있으나 거의 문을 열지 않는다.

그윽하고 정겹기 그지없는 도동서원, 400년 묵은 오랜 은행나무가 선사한 그늘로 마음이 시원하
며, 선비의 낭낭한 글읽는 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서원 내부, 다른 서원과 차별을 둔 다양한 볼
거리로 눈과 마음이 즐거운 곳이다.

※ 도동서원 찾아가기 (2012년 12월 기준)
* 대구지하철 1호선 대곡역(1번 출구)에서 600, 655, 달성5번 시내버스를 타고 현풍터미널 하차
* 대구지하철 1호선 대곡역(1번 출구)에서 급행좌석 4번을 타고 유가치안센터 하차
* 대구서부정류장에서 현풍 경유 창녕, 의령 방면 직행버스 이용
* 현풍터미널과 유가치안센터, 구지에서 달성4번(1일 7회 운행)을 타고 도동 종점 하차, 버스에
  서 내리면 바로 도동서원이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이정표가 잘 갖추어져 있어 찾기는 쉬움)
① 구마고속도로 / 중부내륙고속도로 → 현풍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구지 → 수라리 → 도
   동서원
② 구마고속도로 → 달성나들목 → 논공카톨릭병원 → 현풍외곽도로 → 현풍3교 지나서 우회전
   → 자모 → 다람재 → 도동서원

★ 도동서원 관람정보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음
* 관람시간 : 9시 ~ 18시 (겨울은 17시)
* 사당은 향사(享祀)를 지내는 매년 음력 2월 중정일과 8월 중정일에만 공개된다.
* 유물전시관은 평소에는 문이 잠겨져 있다. 사전에 문의하기 바란다.
* 도동서원 뒷산에 김굉필의 묘소가 있다.
* 도동서원 문화관광해설사가 2월부터 11월까지 매일 근무하고 있다. 근무시간은 10시~18시까지
  이며 설과 추석연휴에는 근무하지 않는다. 해설을 원하면 도동서원 관광안내소를 찾는다.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 (구지서로 726) <☎ 053-617-7620>


▲  김굉필나무라 불리는 은행나무 - 대구 보호구 3-9호

도동서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존재가 바로 김굉필나무라 불리는 커다란 은행나무이
다. 나무의 덩치가 얼마나 거대한지 그의 앞에서는 그저 주눅이 들 수 밖에 없다. 위대한 자연
의 힘과 400년의 세월이 그를 산만한 덩치로 만든 것이다.
이 나무는 서원의 수문장 역할을 하는 존재로 1607년에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있던 한강 정구가
서원이 사액된 기념으로 손수 심은 것이라 전하나 확실하진 않으며, 서원에 배향된 김굉필을 기
리고자 조선 후기에 서원 관계자들이 김굉필나무라 이름을 붙인 것이지 절대 김굉필이 심은 나
무가 아니다.

400년의 지긋한 나이에도 변함없이 울창한 모습을 간직한 은행나무의 자태와 웅장함에 그저 감
탄사 밖에는 쏟아지지 않는다. 천연기념물이나 적어도 지방기념물로 삼아도 정말 손색이 없어
보이는데, 나무의 품격에 걸맞지 않게 아직까지 보호수(保護樹) 등급에 머물러 있다. 먹구름의
영향으로 나무 사진이 다소 흐리게 나왔지만 여름의 제국이 사라지고 가을이 오면 가을에 물든
아름다운 그를 보게 될 것이다.


▲  노쇠한 나무의 가지를 받치는 기둥들

아무리 울창하고 거대한 모습을 지녀도 400년의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이다. 400년의 노구를
지탱하기 힘들어 기둥을 여러 개 세워 지구의 중력에 힘겹게 저항하고 있다. 나무의 동쪽 줄기
는 이미 장대한 세월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역시나 세월보다 무거운
것은 천하에 아무것도 없다. 손으로 만질 수 없을 따름이지 세월의 무게는 무한대(∞)이기 때문
이다, 옛날에는 동네 애들이 땅에 내려앉은 가지를 타고 나무에 올라가 놀았다고 한다.


▲  서원의 정문인 수월루(水月樓)

수수한 모습을 지닌 수월루는 서원의 정문이자 외삼문(外三門)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 누각이다. 누각에 오르면 은행나무 너머로 낙동강의 풍광이 속시원하게 다가온다. 이곳은
유생들이 공부로 뜨거워진 머리를 식히며 바람을 쐬는 쉼터 및 교육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누
각으로 들어서는 계단이 2명 정도가 지나다닐 정도로 좁은데, 이는 세상의 번잡함을 멀리하고
서원에 지나치게 사람이 많은 것을 경계하며, 정말로 학문에 정진할 소수정예만을 받아들이겠다
는 서원의 의지로 보인다.

수월루란 이름은 누각에 오르면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과 밤하늘을 비추는 달이 바라보여 지어진
풍류적인 이름이다. 강과 달을 바라보며 시를 짓고 헛제사밥을 차려 음식과 곡차를 끼며 달놀이
를 즐기던 현장으로 선비들의 해학적이고 고풍스런 풍류가 와 닿는 공간이다. 지금은 노쇠한 수
월루의 보존을 위해 누각 출입이 통제되어 그들의 풍류를 따라하지 못함이 애석할 따름이다.

◀  수월루에서 강당으로 들어서는 환주문(煥主
門)
수월루를 지나면 강당으로 향하는 조그만 계단
과 함께 환주문이 나온다.
환주문은 주인을 부르는 문이란 뜻으로 주인의
식을 가지고 들어오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
다. 이곳의 계단도 수월루의 계단처럼 폭이 좁
고, 문의 높이도 낮아 부득이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가야 된다. 이는 옛 사람들의 키가 작아서
가 아니라 서원에 들어온 이들에게 자신을 낮추
고 서원에 배향된 김굉필과 서원에 있는 덕망있
는 이들에게 머리를 숙여 예의를 표하란 뜻에서
문의 높이를 일부로 낮게 만든 것이다.
머리가 부딪쳐 혹여나 문이 손상되지 않도록 머
리를 푹 숙여 문을 들어서니 마음가짐이 절로
숙연해진다.

여닫이 문을 고정시키는 정지석(현판이 걸린 평
방의 양쪽 모서리)에는 아름다운 꽃무늬가 새겨
져 있으니 살펴보기 바란다.

▲  도동서원 서재<西齋, 거의재(居義齋)>

▲  도동서원 동재<(東齋), 거인재(居仁齋)>

환주문을 들어서면 강학공간인 강당이 정면에 나타난다. 그 좌우로 서원 유생들의 숙소인 조그
만 서재와 동재가 서로 마주보며 자리해 있는데, 서재는 의로움이 산다는 뜻에서 거의재, 동재
는 인자함이 사는 뜻에서 거인재라 불린다. 서원의 명성을 듣고 가르침을 받고자 구름처럼 몰려
왔을 유생들의 고무신이 가득했을 섬돌에는 먼지만이 자욱하여 세월의 무상함을 드러낸다. 아무
도 없는 방문에 귀를 대면 학문의 어려움에 넋두리를 떨던 그들의 목소리가 아련히 들려올 것만
같다. 예나 지금이나 공부는 어려운 것이다.


▲  강당 앞뜨락에 머리를 내민 거북이
화마(火魔) 등의 나쁜 기운을 막고자 만든 것으로 보인다.

▲  강당 우측에 자리한 장판각(藏板閣)
서원의 소중한 보물인 경현록(景賢錄)이 있었으나 지금은 유물전시관에 가 있다.

▲  도동서원의 강당인 중정당(中正堂) - 보물 350호

고색의 때가 만연한 서원의 강당(중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반의 맞배지붕 건물로 1.5m의
높은 기단 위에 자리하여 웅장함과 품격이 더욱 돋보인다. 건물 좌측과 우측 방은 온돌방이고
가운데 3칸은 개방된 대청마루로 유생들이 유학의 도를 배우며 토론하던 장이다.
건물의 모습은 여느 한옥과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이 건물의 매력은 바로 기단부에 있다. 기
단을 이루는 돌은 일정한 법칙이 없이 제멋대로의 모습으로 자유분방하게 늘어서 눈길을 끈다.
그런 기단에는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용머리 4개가 삐죽 나와 있으며, 다람쥐 모양의 동
물상과 서화(瑞花)무늬 2쌍이 조각되어 다양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이들 무늬는 모두 나름대로
의 뜻을 담고 있으니, 기단을 유심히 살펴 괜한 보물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기 바란다.


▲  삐죽 고개를 내민 용머리

멀뚱한 표정으로 기단 밖으로 고개를 내민 4마리의 용은 예(禮)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움직이지도 말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의미한다고 한다. 처음에는 화마(火
魔)의 피해를 막고자 만든 것으로 여겼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이들 용머리는 겉으로 보기에
는 아무렇지 않게 보이지만 여러 차례 도난을 당했던 아픔의 과거를 간직하여 듣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문화유산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저 중에서 1~2개만 진품이고 나머지는 모조품이
라고 한다. 모조품의 진품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유물전시관이나 대구에 있는 모박물관
에 보관 중이라고 한다.


▲  해학적인 표정의 용머리 ~ 용머리의 눈이 마치 누군가에게 단단히
얻어터진 듯, 밤탱이가 된 것처럼 보여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  강당 내부에 걸린 2개의 현판

▲  강당 좌측에 있는 굴뚝
연기를 모락모락 뿜어내던 왕년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그의 모습에 쓸쓸함이 비쳐진다.

▲  사당으로 들어서는 내삼문(內三門)

강당 뒤에는 서원의 중심인 사당이 있다. 김굉필이 배향된 사당으로 들어서려면 내삼문을 지나
야 되는데 제향일을 제외하고는 입을 굳게 봉한 채, 좀처럼 열릴 줄을 모른다.



▲  도동서원의 백미, 담장 - 보물 350호

고색이 가득 깃들여진 담장은 자연석을 정렬시킨 바닥돌 위에 자연막돌을 쌓고 그 위에 암키와
를 5단으로 놓아 그 사이에 진흙층을 쌓아 거의 1m 간격으로 수막새를 엇갈리게 끼웠다. 담장에
암키와와 수막새를 사용한 것은 음양(陰陽)의 조화를 통해 담장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장식효과
를 살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밋밋한 모습의 다른 서원의 담장과 달리 정겹고 아름다운 모습
으로 우리나라의 오래된 담장 중에서 최초로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흙과 돌, 기와를 적절히 이용했으며 수막새를 달아놓은 매력적인 담장으로 나중에 한옥을 짓고
산다면 저런 담장을 만들어 집을 두르고 싶다. 서원과 외부의 경계선 역할을 하는 담장에 미적
(美的)인 부분이 크게 배려되어 밤손님조차도 담을 아껴줄 것 같다. 담에 쓰인 흙에는 오랜 세
월의 누런 때가 가득 끼여 담장에 대한 눈길을 단단히 붙들어 맨다.


♠  김굉필과 정여창 두 노인이 말년을 보내며, 석별의 정을 나누던 곳
이노정(二老亭)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30호

▲  이노정 전경 (정자를 가린 건물은 정자를 관리하는 노부부의 집)

▲  담장 너머로 바라본 이노정

▲  곁에서 바라본 이노정

도동서원을 둘러보고 구지(창리)를 거쳐 내리에 있는 이노정을 찾았다. 모정에서 이노정을 알리
는 갈색 이정표를 따라 조그만 농로로 들어서면 막다른 곳에 녹음이 짙은 숲을 병풍으로 두르며
부뚜막 연기가 뿜어 나올 것 같은 정겨운 풍경의 기와집, 이노정이 나온다.
세상과 거리를 두며 강가에 홀로 자리한 외로운 기와집인 이곳까지는 현대의 이기(利器)는 전혀
들어오지 못하고 전통 방식으로 초롱불로 어두운 밤을 밝히며 장작을 뗄 것 같은 분위기가 엄습
한다. 허나 안으로 들어가보면 티비에 냉장고까지 현대의 이기는 이미 여기까지 손을 썼다. 이
곳은 도동서원처럼 낙동강변에 자리해 있는데 그곳과는 달리 강이 바라보이는 높다란 곳에 터를
잡았다.
 
고색창연해 보이는 이노정은 다른 말로 제일강정(第一江亭)이라고도 하며, 김굉필과 정여창(鄭
汝昌)이 말년을 보낸 곳이라 전한다.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화를 당한 그들이 시골(김굉필은 도
동서원이 있는 도동리, 정여창은 함양)로 내려와 살다가 1504년 이곳에서 만났다고 한다.
그들은 정자를 짓고 학문을 논하며 팔자 좋게 지내다가 연산군(燕山君)이 훈구파(勳舊派)와 건
방진 사림계열 유생들을 때려잡고자 일을 벌린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년)로 석별의 정을 나누
었고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처단되었다. 정자의 이름인 이노(二老)는 김굉필과 정여창 두 노인
네를 지칭한 것으로 그 당시 그들의 나이는 50대 중반이었다.

도동에 머물던 김굉필은 배를 타고 10km 떨어진 이곳을 자주 왕래했다고 하며 그들이 사라진 이
후 정자는 그들을 추모하는 이들이 관리하였다. 1885년 영남 유림에서 중수를 했고, 1904년에도
수리를 하였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정자의 두 이름(이노정, 제일강정)이 새
겨진 현판과 그들이 지은 유악양(遊岳陽, 악양을 거닐다)이란 시가 걸려있다.

이곳은 우물마루를 둔 정자 건축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평면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천정에는
우물정(井) 모양의 통풍구를 두어 산바람과 강바람이 서로 어우러지게 하여 한여름에도 더위를
잊을 정도로 시원하다. 정자 주변으로는 얕은 담장을 둘렀으며 정자 밖에 뒷간을 두었다.

현재 이노정은 어느 노부부가 관리하고 있다. 그들은 정자 앞에 딸린 조그만 기와집에 살고 있
는데, 드문드문 오긴 하지만 정자를 찾은 답사객에게 정자 내부를 둘러볼 수 있도록 배려해 준
다. 우리가 갔을 때는 처음에는 조금 경계의 눈빛을 보냈는데,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자 표정을
바로 하고는 구경하고 가라며 내부로 안내해 주었다.

그들은 이노정에서도 가끔 잠을 자고 생활을 하는지, 정자 내부는 모기장이 쳐져있고, 여러 생
활용품이 널려 있는 등 다소 어수선해 보인다. 비록 세상물정 모르고 공자와 성리학 사상만 들
쑤시던 지배층의 전유물이긴 하지만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 살고자 했던 그들의 마음가짐이 보
이는 정자로 두 노인네가 술 한잔 걸치며 시를 짓고 달놀이를 즐길 때 그들의 노비는 강에 돌을
던지며 신세 한탄을 했을 것이다. 그들이 비록 벼슬을 박탈당하고 시골에 숨어 사는 처지긴 하
나 잘나가는 집안의 양반이자 조선의 중심계층인 선비이며, 그들을 추종하는 제자들이 많기 때
문에 먹고 사는 문제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  중후한 멋이 엿보이는 이노정 현판

▲  제일강산(第一江山) 현판


▲  정자 밖에 자리한 뒷간 - 하얀 털의 견공(犬公)이 처음 본 우리에게
경계의 메세지를 보낸다.

▲  정자 담장 밖으로 장맛비로 불어난 낙동강이 보인다.
강 건너로 보이는 곳은 고령군 우곡면이다.

▲  온돌방을 지피던 아궁이의 흔적

▲  아마존의 깊은 늪지대처럼 다가서기가 두려운 이노정 앞 낙동강 늪지대
홍수가 심할 때는 저 늪지대는 물론이고 정자 앞까지 강물이 넝실거린다.


※ 이노정 찾아가기 (2012년 12월 기준)

* 대구서부정류장에서 현풍 경유 이방, 의령 방면 직행버스를 타고 모정(내리) 하차 (1일 20회
  남짓 운행)
* 현풍터미널에서 이방, 신반, 의령 방면 직행버스 또는 달성7번 시내버스(1일 6회)를 타고 모
  정(내리) 하차
* 모정에서 대암리, 의령 방면으로 2분 정도 걸으면 이노정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거기서
  5분 정도 들어가면 이노정이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이노정까지 차량 접근 가능, 단 길이 좁으므로 정자를 둘러보고 차를 돌
  려 나갈 때 주의 요망)
① 구마/중부내륙고속도로 → 현풍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구지 → 모정 → 이노정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내리 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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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2년 12월 1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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