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기와집'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20.06.05 보은 땅에서 만난 고래등 기와집 ~ 우당고택(선병국가옥), 선병우고가, 선병묵고가 한옥 나들이
  2. 2019.03.15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성북동에서 즐긴 고즈넉한 한옥 산책 ~~~ (최순우옛집, 수연산방, 한옥에서 즐기는 전통차 1잔)
  3. 2013.03.18 충청도의 내륙, 괴산 역사기행 ~~~
  4. 2013.01.21 볼거리가 풍성한 서울 도심 속의 꿀단지 ~ 북촌한옥마을 산책 (계동길, 원서동 일대)

보은 땅에서 만난 고래등 기와집 ~ 우당고택(선병국가옥), 선병우고가, 선병묵고가 한옥 나들이

 


' 새해맞이 충북 보은 나들이 '

▲  보은 우당고택(선병국가옥) 사랑채


 

온갖 아쉬움 속에 묵은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해가 밝았다. 올해는 제발 좋은 일이 많기를
애타게 소망하며 날씨가 최적화된 날을 택해 서울에서 고속/시외버스나 철도로 2시간 내
외 범위에서 새해 첫 답사지를 물색. 고르고 고른 끝에 보은(報恩)의 우당고택이 선정되
었다. 그곳이 그렇게 유명하고 대단한 명당(明堂)이라 하여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
문이다.

차디찬 기운이 가득한 이른 아침, 서울(남부터미널)을 출발하여 청주시내와 미원을 거쳐
보은읍에 이르렀다. 보은 읍내는 마침 5일장이라 장을 보러온 노인들로 활기를 띠었는데
읍내 한복판 중앙4거리에서 관기 방면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15분을 달려 장안3거리
에 두 발을 내린다.

장안3거리<개안리(開安里)>에서 북쪽으로 가면 장안면행정복지센터가 나오는데, 그 맞은
편에 우당고택으로 인도하는 하개교가 있다. 삼가천 위에 걸린 그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가면 선병우고가와 선병묵고가가 있는 개안리 마을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바로 우당고택
이다.


▲  겨울에 잠긴 삼가천 (하개교 주변)
누렇게 뜬 갈대가 겨울 바람에 힘없이 흩날리며 소쩍새가 울 그날을 기다린다.
(왼쪽이 우당고택이 있는 섬, 오른쪽이 장안로와 장안면행정복지센터)


 

♠  20세기 초에 지어진 고래등 기와집, 우당고택<愚堂古宅,
선병국가옥(宣炳國家屋)> - 국가민속문화재 134호

▲  우당고택 사주문(四柱門, 정문)과 돌담길

화개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가면 우당고택 주차장이다. 주차장 한쪽에는 문화유산해설사가 머
무는 조그만 집이 있는데, 거기서 안내 자료를 쥐어들고 바로 남쪽에 자리한 우당고택으로 이
동했다.

고택에 이르니 제일 먼저 북쪽 대문인 사주문이 마중을 한다. 이곳에는 대문이 남북으로 2개
가 있는데, 바깥에서 들어올 때는 무조건 사주문을 거쳐야 된다. 명문 부잣집의 대문답게 문
의 덩치도 크고 품격도 제법 깃들여져 있으며, 이미 세상에 공개된 집이라 낮에는 대문이 늘
열려있어 나들이객과 답사객, 사진꾼, 이곳에서 공부하는 고시생과 그들을 보러온 가족 등등
사람들이 마를 날이 거의 없다.

대문 옆에는 황토와 돌, 기와로 지어진 돌담이 고색의 내음을 물씬 풍기며, 조촐하게 돌담길
을 이룬다. 서쪽 돌담길로 가면 효열각과 고택의 남문인 솟을대문으로 이어지며, 대문을 들어
서면 고래등 기와집으로 유명한 우당고택 내부가 장대하게 펼쳐진다.
그럼 여기서 우당고택의 역사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우당고택 서쪽 돌담길

▲  정면에서 바라본 북쪽 대문(사주문)

속리산(俗離山)에서 발원한 삼가천(三街川)이 금강으로 흘러가면서 개안리에 조그만 삼각주(
三角洲) 섬을 빚어놓았는데, 바로 그 섬에 20세기 초기 대표적인 근대 한옥으로 손꼽히는 우
당고택(선병국가옥)이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이곳은 보은 땅의 거의 유일한 자연산 섬으로 이 부근은 조선 때 나라에서 운영하던 마장(馬
場)이 있었다. 그래서 마장 안쪽 동네라 하여 '장안','장내'라 불렸으며, 지금도 그 지명은
유효하다.

우당고택을 지은 이는 보성선씨 집안인 우당 선영홍(愚堂 宣永鴻, 1861~1924)과 그의 큰아들
인 남헌 선정훈(南軒 宣政薰)이다. 이들은 원래 전남 고흥(高興) 출신으로 고흥 지역의 제일
가는 부자였다. 풍요로운 재산만큼이나 인심도 후하여 소작농에게 토지를 골고루 나눠주고 적
은 소작료를 받았으며, 어려운 사람들의 세금을 대신 처리해주는 등 지역 사람들에게 많은 인
심을 베풀었다.

선영홍은 아들이 4명 있었는데, 모두 끝이 훈(薰)자 돌림이다. (정훈, 남훈, 준훈, 동훈) 그
는 아들과 손자, 자손의 번창을 위해 천하에 제일가는 명당으로 터전을 옮기고자 이름난 지관
을 섭외하여 명당 자리를 물색했다. 그는 섬에 집을 지어야만 집안이 흥한다는 꿈을 꾸었다고
하는데, 그에 걸맞는 자리를 찾은 끝에 서울 여의도와 충남 천안, 보은 개안리가 후보 장소로
꼽혔고, 지관인 심씨의 추천과 속리산과 가까운 개안리의 지형에 단단히 반해 1903년 이곳에
터를 닦았다.
이곳 지형은 삼가천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지는 육지 속의 섬으로 그 모습이 마치
연꽃이 물에 뜬 형상이라 하여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 불린다. 이런 자리는 꽤 좋은 명
당으로 꼽힌다.

1919년 아들 선정훈과 함께 그 섬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자신과 후손들이 길이길이 살 명당
자리라 천하에서 제일 이상적인 집을 짓기로 했는데, 선정훈이 공사를 주도했으며, 그 시절
잘나가던 목공과 기술자를 비롯해 일꾼들까지 후하게 대접했다. 공사 자재에도 돈을 아끼지
않아 질이 좋은 목재와 재료를 사용했으며, 이때 도편수로 참여한 사람이 궁궐 목수로 이름난
'방대문'이었다.
섬의 지형이 모래로 되어있어 따로 배수시설은 닦지 않았으며, 왜식과 서양식이 섞인 개량형
한옥이 한참 주류를 이루던 때라 너무 전통식에 얽매이지 않고 그 시류에 흔쾌히 동참했다.
이렇게 큰 정성을 들여 5년 만인 1924년 집이 완성되니 집의 전체 면적은 3,900평. 집 크기는
99칸을 자랑했으며, 사랑채와 안채, 사당 3구역으로 구성되어 각각 담장을 둘렀다. 특이한 것
은 사랑채와 안채가 '工'구조로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옛날 집에서는 극히 꺼리던 형태
였다. (부수는 것을 뜻한다고 함)
그럼에도 집의 중요한 공간을 '工' 구조로 한 것은 집터가 길하지 않아서 흉택의 평면인 '工'
구조를 택하면 70~80년 이후부터 길하게 된다는 지관의 해석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즉 후손
대에 반전을 노린 것이다.

선정훈은 아버지와 별도로 대동상사(大東商社)를 운영했는데, 고흥의 토산물인 우뭇가사리를
왜열도와 중원대륙에 수출해 큰 돈을 벌었다. 그의 곳간만해도 무려 33칸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 재산의 정도를 알만하다.
그들은 오늘날 이 땅에 썩어빠진 위정자와 상류층과 달리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
던 인물이다. 선영홍은 고흥에 대흥사(大興司)란 서숙(書塾)을 세워 인재를 양성했으며, 보은
에도 집 남쪽에 관선정이란 33칸짜리 서당을 세워 한학(漢學)을 교육시키고 우수한 학자를 초
빙해 수백 명의 후학을 길렀다. 또한 보은향교 명륜당(明倫堂)에 서숙을 지어주기도 했으며,
지역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덕행을 베풀었다.

6.25시절 폭격으로 대문 좌우 바깥행랑채와 주변 부속 건물이 파괴되어 사라졌다. 허나 그 외
에 건물은 별탈 없이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그 덕에 20세기 초에 지어진 전통 개량한옥
으로 학술 가치가 대단히 높다. 또한 6.25 때 군부대가 집 동쪽에 주둔을 했는데, 시간이 지
나면서 아예 그곳에 눌러앉았고, 동쪽 토지 2만 평은 그렇게 군부대 땅이 되었다.
19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집을 끼고 흐르는 하천 동쪽 물길을 막아 농토를 개간했으나 1980년
과 1998년 집중호우로 집이 물에 잠겨 돌각담들이 여럿 무너졌고, 집을 지키고자 안산(安山)
의 역할로 심은 소나무 숲까지 쑥대밭이 되는 피해를 입었다. 하여 현재 집 주인인 선민혁이
지역 사람들의 동의를 구해 하천을 현재 모습으로 복원했다. 그 이후로 더 이상 수해를 입지
않았으며, 소나무 숲도 다시 복원해 옛날의 운치를 되찾았다.

선정훈은 집만 물려주면 된다면서 많은 돈을 썼으나 워낙 돈이 많아 결국 아들에게 많이 상속
되었다. (아 부러워라ㅠㅠ) 현재는 선병국의 아들인 선민혁이 집을 지키고 있으며,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선병국가옥'이었으나 근래에 선정훈의 호를 따서 우당고택으로 이름을 갈았다. 

1990년대에 안채에 있는 곳간채를 손질하여 고시원을 열었는데, 최소의 비용만 받고 고시생들
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있다. 이는 교육에 아낌없이 돈을 던진 할아버지(선정훈)와 증조부(선
영홍)의 유지를 잇기 위함이다. 또한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가문의 별미인 씨간장이 있
는데, 무려 350년 이상 되었다고 전하며, 간장 보존을 위해 특별히 따로 보관하고 있다.
그 씨간장에 매년 새로 담구는 햇간장을 부어 보존하고 있는데, '대한민국 명품 로하스 식품
전'에 출품, 1리터가 500만 원에 팔리면서 유명세를 탔다. 그래서 우당고택(선병국가옥)이 천
하에 크게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현재 김정옥 종부(宗婦)가 '선씨 종가 아당골'이란 이름으
로 간장을 판매하고 있으며, 집 안팎에 700여 개의 장독을 두어 씨간장을 숙성/보관하고 있다.

이렇게 전통 한옥과 간장으로 이곳이 크게 떠오르자 보은군에게 2007년에 고택 북쪽에 주차장
을 닦고 대문 앞 소나무숲 주변에 잔디를 입히며 의자와 이정표를 지어주었다. 이곳이 보은의
새로운 꿀로 부상하자 그 꿀에 서둘러 그럴싸하게 단지를 입힌 것이다.

현재 고택 내부는 사랑채와 사주문에서 솟을대문으로 이어지는 통로만 개방되고 있으며, 안채
와 사당, 그밖에 건물은 개방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개방 공간은 변경될 수 있음~~) 고택
바깥에 있는 효열각과 비석, 복원된 관선정은 관람이 가능하며, 안채 곳간채에는 고시생들이
머물고 있는데, 이곳을 거쳐간 고시생이 1,000여명, 사법고시 합격자만 50명을 넘는다고 한다.
시내와 멀리 떨어진 외지이고 적막한 곳이라 고시생의 인기가 대단했으나 최근 관광객의 발길
이 증가하면서 고시생이 크게 줄었다고 한다.


▲  행랑채 북쪽에 자리한 장독대의 물결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앞에 사당을 품은 담장이 있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고택 내부로 인
도하는 너른 길이 나오는데, 그 왼쪽에 낮게 돌담을 두르고 키 작은 나무와 조촐한 텃밭, 씨
간장을 품은 장독대들의 공간이 있어 정겨운 분위기를 우려낸다. 그 장독대 너머로 행랑채와
안채가 있다.


▲  사주문에서 안채, 사랑채로 인도하는 너른 길
집 내부에 이렇게 넓은 길이 있다니? 집이 정말 넓기는 넓다. 조선과 왜정 때
지어진 어지간한 큰 기와집을 능가하는 규모로 완전 조그만 궁궐 같다.


▲  사당(祠堂)

양반가는 보통 집 내부에 가묘(家廟)라 불리는 사당을 갖추고 있는데, 이곳 역시 예외는 아니
다.
이곳 사당은 3칸 규모의 사당과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재실<齋室, 제수(祭需)채라고도 함>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당과 재실이 복도채로 연결되어 완전 한 몸처럼 되어 있어 자연히 'ㄱ'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제수채와 복도채를 둔 사당은 거의 흔치 않은 케이스로 복도 폭은 1.1m이며, 사당 각
칸 앞에는 시멘트몰탈로 이루어진 디딤돌이 있는데, 이는 건립 당시에 지어진 것으로 사당을
오래도록 보존하고자 그 시절 새로운 건축 재료가 시도되었다.
 
사당 주위는 돌담으로 꽁꽁 둘렀으며, 사당으로 인도하는 솟을삼문은 굳게 잠겨져 있는데, 선
씨 집안의 선조를 봉안한 공간이라 일반에는 공개하지 않는다.

▲  사당의 솟을삼문(三門)

▲  'ㄷ'자로 이루어진 행랑채


▲  안채 북쪽

사당 남쪽에는 안채와 행랑채가 있다. 돌담으로 주변을 빙 둘러 눈으로 하얗게 바래진 지붕과
집 윗도리만 보일 따름인데, 이곳은 선씨 일가의 생활 공간으로 내부 관람은 통제되어 있다.
그러니 그들의 사생활과 재산 보호를 위해서라도 억지로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안채는 사랑채 동쪽에 자리하여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사랑채와 모습과 구조, 규모가 똑같
다. 그러니 괜히 안채를 기웃거려 안좋은 소리 듣지 말고 그냥 사랑채를 보면 된다. 집 모습
은 '工' 구조로 이 땅의 한옥 안채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안채를 받치고 있는 기
단(基壇)은 사랑채보다 1단 낮은 2단짜리 석축으로 가운데 4칸짜리 대청을 끼고 왼쪽이 안방,
오른쪽이 건너방이다. 건물 중앙에 마루가 있고, 무려 9개의 온돌방을 갖추고 있으며, 부엌은
큰살림에 걸맞게 상당히 크고 위에 다락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앞뒤에 달린 툇마루가 복도
역할을 하여 모든 방과 부엌으로 이동할 수 있다.
안채 옆에는 'ㄷ'모양의 중행랑채를 두어 안채를 가리고 있는데, 그 사이로 조그만 안마당을
만들었고, 행랑채 남쪽 끝에 안대문을 두었다. 안대문 밖에는 담이 가로질러 있어서 바깥 대
문에서 안채로 가려면 'ㄹ'자로 꺾어 들어가야 했다.
행랑채 옆에는 쌀과 재물을 보관하던 곳간채가 있는데, 1칸 또는 1칸 반, 2칸 간격으로 있었
다. 허나 세월이 흐르면서 더 이상 쌀과 재물을 보관할 필요가 없게 되자 이들을 손질하여 고
시생들의 숙식 공간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곳이 세상에 널리 알려짐에 따라 관광/답사 수요가
늘면서 고시생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그만큼 이곳도 속세의 때를 크게 탄 모양이다.


▲  반쯤 열린 사랑채 중문

▲  우당고택의 백미, 사랑채

안채 서쪽에는 고택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사랑채가 있다. 안채와 같은 '工' 구조로 주위를
돌담으로 둘렀는데, 동쪽과 남쪽, 북쪽에 바깥과 사랑채를 이어주는 문을 냈으며, 남쪽에는
넓게 뜨락을 닦았다. 그리고 서쪽과 서남쪽, 동쪽, 북쪽 공터에는 소나무와 갖은 화초를 심어
사랑채 주변을 아름답게 꾸몄다.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2고주 5량가로 3단으로 싹둑 다듬
어진 석축 위에 큼직한 집을 세우고 8각으로 다듬은 화강암 주춧돌로 둥근 바깥 기둥을 받쳐
들고 있다. 집 구조는 안채와 같으며 가운데에 대청마루를 두고 그 좌우로 온돌방 8개, 창고,
부엌을 두었는데, 앞뒤로 툇마루(퇴칸마루)를 두어 일종의 통로를 두었다. 툇마루에는 난간을
둘렀는데, 난간의 모양이 섬세하며, 대청에는 사분합문(四分閤門)을 설치했다. 처마는 부연이
없는 홑처마로 서까래가 길다. 그리고 합작지붕의 박공면과 마루 밑은 붉은 벽돌로 쌓았는데,
이들은 나중에 손을 댄 것이다.

이곳은 일반에 공개된 공간으로 찻집과 전통체험공간으로 쓰이고 있는데, 평일이라 사람이 없
다보니 거의 닫혀있다. (주말에는 북적댄다고 함) 그래서 굳이 내부에는 들어가지 않고 소심
하게 바깥만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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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치 있게 자라난 사랑채 소나무

▲  이제 무늬만 남은 사랑채 서쪽 우물

▲  사랑채 동쪽 부분

▲  사랑채 뒷쪽(북쪽)


▲  사랑채 정면에 걸린 '위선최락(僞善最樂)' 현판의 위엄

사랑채 정면에는 파란 글씨로 쓰여진 '위선최락' 현판이 걸려있다. 글씨가 마치 살아서 율동
을 부리듯 필체의 힘이 대단한데 '위선최락'이란 '선을 베푸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란 뜻
으로 선영홍/선정훈 부자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그들은 그 좌우명을 말로만 끝내지 않고 평생 실천하고 살았다. 지역 사람들과 전통 유학을
배우고 지키려는 인재들을 위해 많은 재산을 내던진 것이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송덕비와 시
혜비(施惠碑)까지 세워 그들을 기리겠는가?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위인이자 성인군자라 할만
하다.
이런 상류층이 많아야 이 땅도 정말 희망이 있을 것인데 이 땅의 상류층과 권력층들은 어찌된
것이 하나같이 치졸하고 욕심들이 과한지 모르겠다. (특히 친일매국노의 후손들과 친일 패거
리들, 20세기 중/후반 독재정권 패거리들) 자신의 욕심을 위해 없는 사람들을 등쳐먹고, 백성
들 등골 빼먹고, 공기업과 도시, 나라까지 말아먹는 걸 예사로 여기니 말이다.
허나 그 치졸한 작자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선정훈 부자가 '위선최락'을 실천하고자 많
은 돈을 썼다. 그렇다면 그들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받기만 했을까? 전혀 그
렇지가 않다. 소작농은 소작농대로, 선정훈이 세운 대동상사 사람들은 역시 그들대로 열심히
살며 그를 도왔고, 지역 사람들도 그들 일가에게 호의적이었다. 또한 그들의 지원을 받아 공
부한 인재들은 사회 곳곳에 진출했으니 그들로 인해 선정훈 일가의 이름은 더욱 크게 빛을 발
하는 것이다. 그러니 크게 보면 서로 상부상조하며 살아간 것이다. 선정훈 부자도 그들의 도
움을 크게 받았던 것이다. 그러니 계속 집안이 번영을 하고 있고, 그들의 덕을 받은 사람들도
무탈하게 지내고 있다. 반면 이 땅 대부분의 상류/권력층들은 거의 일방적으로 뜯어먹기만 하
지 상부상조할 줄을 모른다. 그러니 대다수의 백성들은 빈곤해지고, 상류/권력층의 배때기는
더욱 짙어만 간다. 그들에게 있어 '위선최락'은 '그게 뭐임? 먹는 거임? 그런 건 빨갱이들이
나 하는 거야!!' 하며 현판을 깨부실 것이다.

사랑채에는 '위선최락' 현판 외에도 '무량수각(無量壽閣)' 현판도 있었다. 이것은 해남 대흥
사(大興寺)에 있던 추사 김정희의 무량수각 현판을 6.25 이후에 모각한 것으로 사랑채에 당당
히 걸려있었다. 허나 우당고택이 천하에 크게 존재감을 드러낸 이후, 찾는 이가 부쩍 늘었고
그 속에 불온한 무리까지 섞여서 들어오면서 2008년 2월 13일과 14일 사이 도난을 당하고 말
았다. 아직까지 현판의 행방은 오리무중이고, 그의 빈자리는 여전하다.


▲  솟을대문에서 바라본 사랑채 외곽 (담장과 중문, 사랑채)
사랑채 너머로 이곳의 든든한 후광이자 주산(主山)인 옥녀봉(玉女峯)이 바라보인다.

▲  가옥의 남쪽 대문인 솟을대문
사대부 기와집 대문의 품격이 느껴진다. 대문 바깥에는 너른 공터와 텃밭이
있으며, 서남쪽 소나무 숲에는 효열각과 3기의 비석이 서 있다. 대문
주변에는 바깥행랑채와 여러 부속 건물이 있었으나 6.25 전쟁 때
파괴되어 사라지고 지금은 대문과 돌담만 남아있다.


 

♠  우당고택 바깥쪽

▲  솟을대문 남쪽에 자리한 3기의 비석들

솟을대문 서남쪽에는 시대를 달리한 비석 3기가 나란히 자리해 있다. 가장 왼쪽에 있는 비석
은 '전승지성공 정훈공덕비(前承旨惺公 政薰功德碑)'로 20세기 중반에 선정훈을 기리고자 세
워진 것이며, 그 비석을 크게 업데이트한 것이 오른쪽 끝에 자리한 큰 비석 '남헌 선정훈 선
생 송덕비(頌德碑)'로 거북 머리인 귀부(龜趺)와 이수(螭首)까지 갖춘 당당한 모습이다.

선정훈은 매년 보릿고개가 되면 우리의 북방 영토인 만주에서 좁쌀을 수입해 보은 지역 빈민
들에게 나눠주었고, 지역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생활고로 고생하면 직접 해결해주곤
했다. 광복 이후, 공산당 세력인 남로당에 가입한 주민들이 많았는데, 국군이 그들을 잡아들
여 이유불문 모두 총살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선정훈이
'마을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고, 돈이 필요해 명의를 빌려주고 서명을 한 것 뿐이다!'
라며 주
민 구제에 나섰고 보은군수와 지역 유지, 국군을 설득하여 주민들을 모두 구제했다.
그렇게 지역 사람들에게 많은 공덕을 베푸니 그 은혜에 감동한 지역민들이 송덕비를 세운 것
이다. 처음에는 보은읍내에 있는 동헌(東軒)에 있었으나 근래 이곳으로 이전되었으며, 비문에
는 그의 덕행을 한자 16자로 표현했는데,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학군을 일으키고 가난을 구제하니, 대대로 내려온 덕행이다. 각박한 인심을 순화시키고 경각
심을 일으키니 길이길이 감명되어 마멸되지 않으리라'


▲  관선정 기적비(觀善亭 記蹟碑)

비석 3형제 가운데에 있는 지붕돌 비석은 '관선정 기적비'이다. 남헌 선정훈은 1926년 집 동
쪽에 '착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복을 받는다'는 뜻에 관선정을 지었다. 규모는 33칸으로 이곳
을 서당으로 삼아 왜정에 의해 시들해진 이 땅의 한문학과 유학을 배우고 닦는 공간으로 삼았
는데, 그는 보은향교 명륜당(明倫堂)에도 서숙을 설치해주어 당시 유명한 유학자인 홍치유(洪
致裕)를 초빙해 관선정과 보은향교에서 젊은 후학들을 양성했다.
가르치는 선생과 후학들의 숙식은 물론 생활비까지 두둑히 지원해주니 배우고는 싶으나 가난
앞에서 붓을 꺾어야 했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몰려와 시험으로 그들을 가려뽑았다. 무작정 다
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곳을 거쳐간 학생 수는 무려 수백 명이 넘었으며, 그 많은 이들
을 선정훈이 다 책임졌다.
이렇게 관선정은 왜정의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이 땅의 전통유학을 교육시켜 민족정신 함양
은 물론 한문학과 전통문화계승 발전에 크게 공헌했는데, 이에 속이 뒤틀린 왜정이 1944년 강
제로 폐쇄시키고 건물까지 부셔버렸다.

관선정에서 수학한 사람들은 1960~70년대 우리나라 한문학의 주류를 이루었는데, 청명 임창순
(靑溟 任昌淳, 1914~1999)이 그 대표적이다. 그는 14살에 이곳에 들어와 6년 동안 한문학을
배웠다.
이들 관선정 학생들은 1951년 '관선정학우회'를 세워 매년마다 선정훈을 기리는 행사를 가지
고 있으며, 1973년 뜻을 모아 관선정기적비를 세웠다. 비문(碑文)은 왕희지(王羲之)의 필체를
집자(集字)했다.

왜정에 의해 철거된 관선정은 1945년 경북 상주에 다시 지어졌으며, 상주 화북면으로 옮겨져
계속 후학을 기르다가 1951년에 철거되었다.


▲  옛 관선정의 모습과 평면도
관선정은 2개의 공부방, 선생방, 2개의 대청, 부엌, 고지기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  선공영홍시혜비(宣公永鴻施惠碑. 선영홍 시혜비)

비석 3형제 부근에는 철로 이루어진 철비(鐵碑)가 있다. 철비는 이 땅에서 그리 흔치 않은 비
석 스타일로 우당고택에서 전혀 생각치도 못한 그를 만나니 생소하면서도 무척 반가웠다.

이 철비는 선영홍을 기리는 시혜비로 시혜비란 은혜를 베푼 것에 대한 고마움의 뜻으로 세운
비석을 뜻한다. 선영홍이 전남 고흥에 살던 시절 자신의 토지를 소작농들에게 골고루 나눠주
고 소작료도 깎아주었다. 또한 지역의 어려운 사람들이 굶지 않도록 도왔고, 세금을 대신 내
주는 등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 하여 그의 덕을 입은 고흥 두원, 점암, 남양, 남면 지역 소작
농은 그의 은덕에 감사를 표하고자 십시일반 돈을 모아 1922년 시혜비를 세웠다. 그러니 거의
100년 정도 묵은 소중한 은혜의 증표인 것이다.
왜정 말기에 고약한 왜정이 전쟁 물자로 쓰고자 몰래 빼돌렸으나 다행히도 여수에서 선영홍의
종손인 선민혁이 주민들의 도움으로 발견해 원래 자리로 옮겼다. 허나 도로 확장 사업으로 제
자리를 떠나야될 상황에 이르자 철비를 만든 사람들의 후손들과 협의해 2004년 이곳으로 옮겼
다.

부자가 많은 선행을 베풀어 그 선행에 감동한 지역 사람들이 손수 지은 비석으로 의미가 정말
남다르다. 정말 인간적인 미와 정이 넘치는 비석인 것이다.


▲  비석의 모습을 취한 선공영홍시혜비

▲  돌담에 둘러싸인 선처흠 효열각(宣處欽 孝烈閣)

시혜비 옆에는 돌담을 두룬 공간이 있는데, 그 안에 선처흠 효열각이 담겨져 있다. 이 효열각
은 선영홍의 부모인 선처흠과 경주김씨의 열행을 기리고자 1892년에 명정(命旌)하여 지어진
것으로 편액 우측에는 '효자증조 산대부동몽교관 선처흠지문(孝子贈朝 散大夫童蒙敎官 宣處欽
之門)', 좌측에는 '열녀 선처흠 처금인 경주김씨지문(烈女 宣處欽悽今人 慶州金氏之門)'이라
쓰여 있다.

선처흠(?~1921)은 그의 아버지가 심한 안질로 고생하자 의원을 찾아가 침과 약으로 계속 안질
을 다스렸다. 허나 딱히 차도가 없자 의원이 매고기가 명약이라고 귀뜀을 해주었다. 하여 매
를 잡고자 영마산에 올라가 기도를 하니 마침 1쌍의 매가 날아와 알아서 잡혀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잡아 부친에게 먹이니 차도가 있었고, 추운 겨울 눈보라를 무릅쓰고 산에 올라
단을 쌓고 7일 동안 기도를 하니 또 다시 매가 알아서 잡혀주어 끝내 안질이 완쾌되었다고 한
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픽션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사건으로 선처흠의 효행은 서울까지 알려
졌다.
선처흠의 부인인 경주김씨도 효성이 지극하고 남편을 잘 따랐는데, 남편이 위독하자 넙적다리
를 베어 먹이고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였다고 한다. 이후 남편의 병이 낫자 열녀(烈女)로 명
성이 높아졌다.

그들 부부의 소식을 들은 조정은 이들을 효자와 열녀로 명정하여 효열각을 지어주었으며, 원
래 선처흠이 살던 전남 보성에 있었으나 자손들이 모두 보은으로 들어오면서 1928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효열각 역시 전혀 생각치도 못한 존재라 앞서 시혜비와 함께 우당고택이 나에게 덤
으로 얹혀준 선물이다.

▲  키가 작은 효열각 정문

▲  1칸 크기로 단촐한 효열각


▲  효열각 내부에 걸린 현판
오른쪽은 효자 선처흠, 왼쪽은 열녀 경주김씨의 정려문(旌閭文)이다.

▲  관선정과 간장의 숙성 공간, 장독대

효열각은 우당고택에서 가장 남쪽이다. 여기서 서쪽과 남쪽은 삼가천으로 막혀있으며, 동쪽은
고택의 텃밭이 있어 다시 고택으로 들어오던가 아니면 고택 서쪽 돌담길로 나와야 된다.
돌담길로 들어서면 근래 복원된 관선정과 기와 돌담에 둘러싸인 거대한 장독대의 보금자리를
만나게 된다. 관선정은 앞서 관선정기적비에서 소상히 다루었는데, 옛날과 달리 새로 지어진
지금은 강당의 역할은 하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복원된 의미 정도로 머물러 있다.

관선정 앞에는 장독대들이 넓게 포진해 있는데, 이들은 이곳의 오랜 자랑인 씨간장과 그 간장
을 혼합한 햇간장을 보관하고 있다. 즉 우당고택의 듬직한 꿀단지들인 것이다. 350년째 집안
대대로 전해오는 씨간장에 매년 새로 담근 햇간장을 부어 간장을 생산하고 있는데, 콩 80kg
가마로 만든 메주에 간장이 10L밖에 나오지 않는다. 2009년부터는 문화재청이 밀어주는 '전통
한옥 관광자원 활성화사업'에 일환으로 '전통 장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을 내놓아 호응을 얻
고 있는데, 바로 전통 간장 덕분에 이곳이 크게 뜬 것이다.

장독대는 각 지역 스타일로 조성하여 지역 별로 모아 두었는데, 평안도(平安道)와 황해도, 경
기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 장독대를 재현했으며, 그들은 모두 간장을 품
으며 숙성시키고 있다.

▲  황해도 장독대

▲  평안도 장독대

▲  제주도 장독대

▲  충청도 장독대

▲  관선정 옆 돌담길

▲  관선정 옆 송림에 묻힌 1칸짜리 정자


▲  우당고택 서쪽 돌담길과 돌담에 그려진 자연의 벽화
대자연이 그린 멋드러진 벽화가 황토 돌담의 품격을 드높인다. 그려진 폼을 보니
아마도 그만의 추상화 듯 싶은데, 아무리 천재화가가 모방해본들 자연이
그린 벽화만은 못하다.


서쪽 돌담길을 타고 고택의 시작인 사주문으로 나왔다. 고래등 기와집을 그런데로 1바퀴 둘러
본 셈이다. (통제 구역은 제외)
주차장에 있는 문화유산해설사 사무실을 바라보니 그 안에서 쉬고 있던 해설사 아저씨가 구경
잘 했냐고 물어본다. 그렇다고 답을 하고 몇 가지를 물어보니 날도 추운데, 안으로 들어와 커
피 1잔 하라고 그런다. 내가 그런걸 마다할 이유가 없어 안으로 들어가니 따뜻한 커피 1잔을
제공해준다.
해설사 아저씨는 정년퇴직을 하고 해설사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데, 주말에는 관람객이 많
지만 평일은 썰렁하고 해설 요청 수요도 주말 평일 가리지 않고 거의 없다며 거의 대충 보고
간다고 그런다. 그렇게 그와 오랜 시간 세상 이야기를 주고 받으니 어느덧 햇님의 퇴근시간이
임박해 왔다.
날이 겨울인지라 햇님도 동절기 근무로 일찍 퇴근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갈 곳이 몇 곳 남았
는데, 더 이상 꾸물거려서는 안될 듯 싶어 그에게 선병우/선병묵고가, 상현서원에 대해 물어
보고 작별을 고했다.

* 우당고택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장안면 개안리 154 (개안길 10-2, ☎ 043-543-7177)


 

♠  개안리에 있는 선씨 일가의 다른 한옥 둘러보기

▲  보은 선병우 고가(宣炳禹 古家) - 충북 지방문화재자료 5호

개안리에는 우당고택(선병국가옥) 외에 선병우, 선병묵고가 등 3채의 오래된 한옥이 있다. 이
는 서울 북촌(北村), 전주한옥마을,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 등 한옥 밀집 지역과 오래
된 전통 마을을 제외하고는 거의 흔치 않은 케이스로 이들 모두 선정훈 형제가 세운 것이다.
가장 먼저 선영홍/선정훈이 이곳에 자리를 닦았고 1940년대에 선정훈의 형제들도 본거지인 고
흥을 버리고 이곳으로 올라와 선정훈집(우당고택) 북쪽 삼가천 너머에 집을 지은 것이다. 이
들은 20세기 중반 개량 한옥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선병우고가는 선정훈의 동생인 선준훈(宣俊薰)이 세운 것으로 안채, 사랑채, 행랑채, 중문 등
을 갖춘 당당한 한옥이다. (선병우는 선준훈의 아들) 집주인이 남쪽에서 올라온 탓인지 집의
구조는 남부 지방 가옥 배치와 유사하며, 간실을 넓게 잡은 것이 특징이다. 건축양식은 우당
고택과 너무 비슷한데, 이는 선정훈이 좋은 목수를 보내주어 도와준 탓이다.
비록 우당고택보다는 작아도 커다란 한옥은 분명한지라 집 상당수를 식당으로 쓰고 있다. 식
당 이름은 '복해가든'으로 닭백숙과 돼지고기, 버섯찌개 등을 내놓고 있는데, 집 관람은 딱히
제한은 없으나 개인 집이기 때문에 안에는 굳이 들어가지 않고 대문 밖에만 잠깐 기웃거리고
선병묵고가로 이동했다.

* 선병우고가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장안면 개안리142-1 (개안길 15-9, ☎ 043-543-0606)


▲  선병우고가 앞에 자리한 3기의 비석과 넓게 퍼진 큰 소나무

선병우고가 앞에는 청도 운문사(雲門寺)의 처
진소나무처럼 좌우로 넓게 퍼진 큰 소나무가
운치를 지어내고 있다. 그 앞에는 3기의 비석
이 나란히 자리해 있는데, 그들 중 가운데에
자리한 늙은 비석이 이 집을 세운 '국당(菊堂
) 선준훈 추모비'이다.
1940년대에 세워진 것으로 나이에 비해 비석
이 너무 낡자 근래에 기존 비석을 업그레이드
시킨 새로운 비석을 옆에 지어놓았다. 그래서
기존 비석에 비해 때깔이 무지 고우며, 비석
형태는 앞서 '남헌 선정훈 선생 송덕비'와 유
사하다.

▲  소나무 앞에 자리한 3기의 비석들


▲  보은 선병묵 고가(宣炳默 古家) - 충북 지방문화재자료 4호

선병우고가에서 동쪽으로 5분 정도 들어가면 뫼로 막힌 막다른 곳에 선병묵고가가 짧은 고색
의 기운을 드러내며 자리해 있다.

이 집은 선정훈의 동생인 선남훈(또는 선동훈)이 1940년대에 지은 것으로 그의 아들인 선병묵
이 소유하고 있다. 집 주위를 황토색 돌담으로 빙 두르고 그 안에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창
고로 쓰이는 초가 등을 두었는데, 남쪽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 한가운데에 사랑채가 있고, 중
문을 지나야 안채가 나오는 분산 배치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담장 서쪽 길에서 바로 사랑마
당과 안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는 서쪽 대문을 따로 내었는데, 이는 시대 변화에 따른 변형으
로 보면 된다.

현재는 우당고택(선병국가옥)처럼 집 일부를 고시원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속세에 너무 알려
진 우당고택보다 찾는 이도 훨씬 적고 다소 외진 곳이며, 바로 옆에 산이 있어 공부는 정말
잘 될 것 같다.
이곳도 내부는 그런데로 공개되어 있으나(상황에 따라 비공개할 수도 있음) 개인 집이라 깊숙
하게 들어가지는 않고 사랑채까지만 보고 살짝 나왔다.

* 선병묵고가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장내면 개안리 96 (개안길 60)

▲  선병묵 고가 남쪽 대문
대문은 맞배지붕을 취하고 있다.

▲  고가 내부 (남쪽 대문 안쪽)
집 내부에 조촐하게 텃밭을 두었다.

▲  담장 너머로 보이는 사랑채

▲  겨울 제국의 의해 꽁꽁 봉해진 연못


▲  삼가천 둑방길에서 바라본 선병묵고가
검은 피부의 기와집, 하얀 피부의 기와집, 그리고 누런 피부의 초가까지
다양한 집이 망라되어 있다.

▲  삼가천 둑방길에서 바라본 개안리와 옥녀봉

▲  눈에 젖은 삼가천 둑방길

선병묵고가를 둘러보고 아직 햇님 퇴근까지는 시간이 있어 북쪽 서원리에 있는 상현서원(象賢
書院)까지 욕심을 내보기로 했다.
선병국가옥 입구인 하개교에서 장안로를 따라 1.7km 정도 가면 상현서원인데, 차량의 눈치를
피하고자 장안로 동쪽 건너편, 그러니까 삼가천 둑방길로 걸어갔다. 서원에 다다르면 하천을
건너는 징검다리라도 있을 듯 싶어서였다. 둑방길은 거의 응달이라 눈이 좀 쌓여있었고, 주변
경작지와 삼가천 갈대는 죄다 누렇게 뜬 모습으로 겨울 제국이 속히 지나가기를 염원한다.

한참 둑방길이 잘 이어져 있다가 삼가천이 크게 구부러지는 곳에서 길이 끊기고 말았다. 하천
으로 내려가는 조그만 길은 있지만 눈과 얼음 투성이라 접근이 어려웠고, 괜히 내려가다가 큰
일 날듯 싶어서 자존심을 곱게 접고 되돌아나왔다. 괜히 차량의 눈치를 피한답시고 꾀를 부리
다가 오히려 그 꾀에 당한 셈이다. 그 사이 햇님은 더욱 기울어지고 첩첩한 산속이라 날씨까
지 다시 추워진다.

장안3거리로 다시 나와 군내버스를 타고 보은읍내로 들어서 후식거리로 보은동헌이라도 볼까
했으나 길을 헤매어 결국 우당고택 등 선씨 고택 3채를 보는 선에서 올해 첫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허나 날이 이날 뿐이랴..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숨쉬는 동안은 언제든 보은 땅에 찾아
올 수 있다. 그러니 그리 걱정은 하지 않는다.

이 땅에서 부디 선영홍/선정훈 부자 같은 대인배 부유/상류층이 많이 나오기를 염원하며 대단
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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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성북동에서 즐긴 고즈넉한 한옥 산책 ~~~ (최순우옛집, 수연산방, 한옥에서 즐기는 전통차 1잔)

 


' 서울 도심 속의 전원 마을 ~ 성북동 나들이 '
(최순우 옛집, 수연산방)

▲  수연산방 사철나무

▲  최순우 옛집 뒷뜰에 있는
둥그런 탁자와 의자

▲  최순우 옛집에서 만난 조그만
맷돌과 석구(石臼, 돌통)

 


 

♠  시민들이 지켜낸 시민문화유산 1호, 우리나라 고고미술에
평생을 바친 최순우(崔淳雨) 옛집 -
등록문화재 268호

가을이 한참 익어가던 10월의 끝 무렵, 후배 여인네와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성북동(城北洞
)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오후 2시, 한성대입구역(4호선)에서 그를 만나 5번 출구를 나와서
성북동 방면으로 뚜벅뚜벅 걸었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가니 왼쪽 골목에 키다리 빌라와 주택
사이로 별천지처럼 들어앉은 기와집이 손짓을 보낸다. 그 집이 이 땅의 고미술 연구에 평생을
바친 혜곡(兮谷) 최순우 선생(1916~1984)이 말년을 보냈던 집이다.

이 집에 살았던 최순우는 1916년 4월 27일 경기도 개성(開城)에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희
()으로 개성 송도()고보를 나와 1943년 개성박물관에 입사했다. 그는 당시 개성박
물관장인 고유섭()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면서 고미술에 뜻을 굳혔다고 한다.

1945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학예관과 미술과장, 학예연구실장을 지냈으며, 1950
년 6.25가 터지자 이승만 정권의 무책임한 한강인도교 폭파 만행으로 강을 건너지 못하고 북
한군에게 꼼짝없이 잡히고 만다.
서울을 접수한 북한은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당시는 북단장(北壇莊)과 보화각(葆華閣)이라
불림>에 있던 문화유산에 군침을 흘리고 박물관에서 일했던 최순우와 소전 손재형(孫在馨)을
소환해 그것을 모두 포장하여 지정된 곳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최순우와 손재형은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이 힘들여 수집한 문화유산의 북송만은 어떻게든
막아보고자 기가 막힌 눈속임작전을 감행했는데, 하늘이 도왔는지 감독관으로 온 공산당원 기
(奇)는 아주 어벙벙한 작자였다.

그들은 기씨에게 왜국(倭國) 판화로 된 춘화(春畵, 미성년자 관람불가급의 예민한 그림)를 보
여주고, 보화각 지하실에 있던 화이트호스 위스키를 권해 허구헌날 술에 쩔게 만들었다. 또한
문화유산 선별기준에서 좋은 것은 나쁘다. 나쁜 것은 좋다고 속이고, 물건을 하나 가져다가
풀면 이건 아니라고 다시 싸게 하고, 목록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다시 하게 했다.
포장이 진행되면 감독관에게 상자를 사와라, 목수가 없다 등으로 태클을 걸었고 손재형은 일
부러 생다리에 붕대를 매면서 다리가 아프다고 연극까지 벌여 9월 28일 서울수복까지 포장되
어 상자에 담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3달이 넘도록 아무런 진척이 없자 뚜껑이 뒤집힌 북한은 사람을 보내 그들을 추궁하려고 했다.
허나 그때 우리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하면서 추궁은 모면하게 되었고, 간송미술관의 유물
은 모두 북송을 면하게 되었다. 그 인연으로 간송 전형필과도 가까운 사이가 된다.

6.25 이후 서울대와 고려대, 홍익대에서 미술사 강의를 했으며, 1967년 이후 문화재위원회 위
원과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대표, 한국미술사학회 대표를 역임하고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되어 박물관을 크게 발전시켰다. 1981년에는 홍익대 대학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
며, 1984년 12월 16일 성북동 자택(지금의 최순우 옛집)에서 숙환으로 별세하니 그의 나이 68
세였다.

그는 고미술 외에 현대미술에도 조예가 깊었고, 우리나라 박물관사에 큰 업적을 끼쳤다. 주요
논문으로 '단원 김홍도 재세연대고()','겸재 정선론()', 한국
의 불화()','혜원 신윤복론(),'이조(李朝)의 화가들' 등이 있고 저서는 삼척
동자도 다 안다는 '무량수전(無量壽殿)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와 '한국미술사' 등이 있다.


▲  최순우 선생의 왕년의 모습

최순우 옛집은 1930년대에 지어진 한옥으로 경기도 지방 한옥 양식을 띄고 있다. 'ㄱ'자의 본
채와 'ㄴ'자의 사랑채, 행랑채가 있으며, 전체적으로 'ㅁ'자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본채 뜨
락에는 닫혀진 우물이 있고, 그 옆에는 작은 우물이 있다. 최순우는 1976년에 이 집을 구입해
1984년 생애 마지막 날까지 살았으며,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그가 사라진 이후, 이 땅의 천박한 개발의 칼질이 슬슬 압박을 가해오면서 그야말로 풍전등화
의 위태로운 신세가 되고 만다. 이 집을 밀어버리고 빌라를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청천
벽력과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뜻있는 사람들이 시민운동단체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를 창단해
개인마다 1평씩 구입하여 절대 사수에 나선 것이다. 그렇게 개발의 칼질은 그들의 의기(義氣)
에 보기 좋게 참교육을 당해 고개를 숙였고, 집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허나 주인이 사라진 옛집은 많이 초췌해져 있었다. 그래서 내셔널트러스트는 2003년부터 2004
년까지 돈을 모아 복원하고 뜨락을 꾸미면서 그 집에 '시민문화유산1호'란 별칭을 주었다. 우
리나라 최초로 민간에서 문화유산을 구입해 지킨 유서 깊은 곳이기 때문이다. (재단법인
내셔
널트러스트(National Trust)문화유산기금에서 관리하고 있음)

현재 안채는 전시 공간과 최순우기념관으로 쓰이고 있고, 동쪽 행랑채는 사무실, 서쪽 행랑채
는 회의실과 휴식공간으로 꾸몄다. 그리 넓지 않은 뜨락은 전통식으로 아기자기하게 손질하여
나무와 풀, 꽃이 뜰을 장식하고 있으며, 안채 앞뜰 중앙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
운다.
뒷뜨락과 모서리 공간에는 기증을 받거나 수습해온 동자상과 문인석, 맷돌, 석구(石臼) 등 다
양한 석물을 배치해 간송미술관의 뜨락을 꿈꾼다. 구석마다 그들이 자리를 채우니 넓고 알찬
느낌을 선사한다. 게다가 뒤뜰에 야외도서관을 두어 최순우가 쓴 글과 여러 서적, 그와 관련
된 서적들을 읽으며 독서의 여유도 누릴 수 있으며, 뒷뜰 뒤쪽에는 높은 담벼락으로 그늘이
가득하다.

안채 내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어 사무실에 허가를 구하면 들어가게 해주며, 쪽마루에 앉아
한옥의 미와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리며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도심 속의 새로운 오아시
스이다. 또한 주말과 휴일에는 다양한 공연과 전시회 등의 이벤트가 열려 성북동의 대중적인
명소이자 살아있는 한옥 공간으로 위엄을 날리고 있다.

길상사의 창건주인 길상화(김영한)가 자신이 일군 고급 요정을 절로 바꾸어 속세에게 선물했
듯이 이 집 또한 최순우와 그의 집을 지킨 뜻 깊은 이들이 속세에 남긴 소중한 선물이다. 또
한 2006년에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성북동의 꿀
단지로 단단히 자리매김하여 대문 문턱이 무너질 정도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나
도 이곳을 2008년부터 거의 10회 이상 찾아 내부 구조를 거의 외울 정도이다.
성북동 초입에 자리해 있어 성북동 답사나 나들이를 계획한다면 한성대입구역을 기점으로 삼
아 이곳을 먼저 둘러보기 바란다. 단 겨울(12~3월)과 일요일에는 문을 열지 않으며 관람시간
은 10시부터 16시까지로 짧은 편이다. (15시 30분까지 입장 가능)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126-20 (☎ 02-3675-3401~2)

* 내셔널트러스트 최순우 옛집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빌라와 주택들 사이에 고풍스럽게 들어앉은 최순우 옛집의 위엄
개발의 칼질을 참교육시킨 유서 깊은 현장이다. 이곳은 그나마 운이 좋았지
속세의 관심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개발로 날라간 옛 집과
문화유산이 적지 않다.

▲  속세를 향해 가슴을 연
최순우 옛집 대문

▲  안채 앞뜰에 높이 솟아 옛집에
그늘을 드리우는 소나무


▲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나타나는 안채 앞뜨락

▲  최순우 옛집 관리사무실로 쓰이는 동쪽 행랑
최순우 관련 서적과 전통차를 판매하고 있다.

▲  소나무 옆에 뚜껑이 닫힌 죽은 우물
최순우와 이전 주인 일가의 식수를 제공했던 네모난 우물, 허나
지금은 뚜껑이 닫힌 채 겉모습만 남아있다.

▲  여러 석물과 서적들이 놓인 뒷뜨락 남쪽
돌의자에 놓인 책은 마음껏 볼 수 있으며 돌의자나 안채 뒷쪽 쪽마루에
걸터앉아 독서에 임하면 된다.

▲  동쪽 행랑에서 바라본 뒷뜨락

▲  수풀 밑에 누워있는 석구(石臼)

▲  표정이 앳된 조그만 동자상


▲  박석이 입혀진 뒷뜨락 돌길과 장승 2기 (오른쪽 장승은 수풀에 가려짐)

돌길이 우리네 인생처럼 너무나 짧다.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끝나기 때문이다. 그 앞에는 재
밌게 생긴 장승 2기가 돌길을 지키고 있는데 이곳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영 좋지않은 기운들
은 장승의 재미난 얼굴을 보고 자신의 본분도 잊은 채 발길을 돌릴 것이다.


▲  뒷뜨락에 닦여진 둥그런 탁자 (누구든지 앉아서 독서나 대화 가능)

▲  뒷뜨락 장독대
장독대에는 무언가가 숙성의 과정을 거치고 있으리라 생각하겠지만
저들은 속이 빈 장식용이다.

▲  옛집의 서쪽 모서리를 지키는 2기의 조그만 문인석(文人石)
저들의 표정에 부질없는 세월의 고된 모습이 묻어난 듯 하다.

▲  나그네들의 조촐한 휴식공간
안채 뒷쪽 쪽마루

▲  안채 내부 - 복원 과정에서 꾸며진
부분이 상당수 된다.


▲  최순우 옛집의 뒷통수 (안채 서쪽 담장길)

흙으로 만든 토담과 시냇물의 징검다리처럼 박석(薄石)이 입혀진 정겨운 담장길, 담장 너머가
자연의 공간이거나 한옥이었다면 그 운치는 곱배기가 되었을텐데, 빌라와 슬레이트 지붕이 그
자리를 대신하니 그나마 우러난 정겨움과 운치도 절반 이상으로 뚝 떨어진다. 내게 큰 지우개
가 있다면 담장 밖 풍경을 싹싹 지우고 싶을 뿐이다.


▲  서쪽 행랑채에 진열된 혜곡이 쓰던 도장과 조그만 자기들

▲  마루에 놓인 검은 피부의 커다란 함지박


 

♠  상허 이태준이 살던 기와집, 현재는 전통찻집으로 바쁘게 살고 있는
상허 이태준 가옥(尙虛 李泰俊 家屋)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11호

▲  상허 이태준 가옥<수연산방(壽硯山房)> 외경

성북동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지친 머리와 두 다리도 잠시 달랠 겸, 차 1잔의 여유를 즐기
기로 했다. 하여 찾아간 곳은 예전부터 꼭 차를 마시고 싶었던 수연산방이다.
수연산방은 성북구립미술관 서쪽에 자리해 있는데, 전통담장과 나무로 몸을 가린 기와집이다.
성북동의 어엿한 명소이자 굵직한 전통찻집으로 사람들로 늘 미어터져 주말에는 자리를 잡기
가 힘들다.

이곳은 월북작가로 이 땅에서 오랫동안 좋지 않은 대접을 받았던 상허 이태준의 집이다. 그는
성북동에 서린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 명당에 욕심이 났는지 29살이던 1933년에 성북동의 배
꼽 부분에 해당되는 바로 이 자리에 땅을 구입해 개량한옥을 지었다. 이런 한옥을 짓고 살 정
도면 어느 정도 재산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여기서 1946년까지 가족과 살았으며,
'달밤','돌다리','황진이' 등 그의 수많은 작품이
여기서 태어났다. 이른바 그의 문학의 산실(産室)인 셈이다.
(어떤 자료에는 1900년대에 지어
진 집으로 나옴)


집의 규모는 대지 약 120평, 건물 면적 23.2평으로 서남향(西南向)을 하고 있다. 건물은 사랑
채와 안채를 합친 본채 하나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조그만 대문을 들어서면 아기자기하게 펼
쳐진 뜨락이 눈길을 단단히 잡아매며, 하늘을 가리고 선 나무와 온갖 화초들로 가득해 산속의
외딴 별장에 들어선 기분이다. 산방 동쪽에는 찻집으로 쓰이는 본채가 있으며, 서쪽에도 기와
집이 있으나 이는 찻집을 확장하면서 새로 지은 것이다. 또한 예전에는 상심루란 건물이 본채
앞에 있었으나 6.25전쟁 때 파괴되었다.

죽간서옥(竹澗書屋)이라 불리는 본채는 앞부분은 팔작지붕이고, 뒷부분은 맞배지붕으로 'ㄱ'
자형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중앙 2칸을 대청으로 하고 대청 남쪽에는 1칸 크기의 안방을, 안
방 앞에는 작은 1칸 크기의 누마루가 있다. 그 뒤에 반칸 크기의 부엌을 두었으며, 대청 북쪽
에는 1칸의 건넌방이 있고, 대청과 건넌방 앞에 툇마루가 있으며, 건넌방 뒤에 1칸의 뒷방이
있다.

이태준이 월북하자 그의 남겨진 가족들은 나라의 눈치를 보며 힘들게 살았으며, 1977년에 개
량한옥의 모습을 잘보여주고 있는 점과 사랑채와 안채를 합친 특이한 구조로 인해 서울시 지
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99년에는 그의 외종손녀인 조상명이 이 집을 전통찻집으로 손질하
여 속세에 활짝 문을 열었다. 당시 성북동은 지금처럼 제대로 된 찻집이나 까페가 없던 시절
이니 거의 성북동의 전문 전통찻집 1호나 다름이 없다.
찻집의 이름은 이태준의 당호(堂號)인 수연산방으로 삼았는데, 수연산방이란 '오래된 벼루가
있는 산속의 작은 집'이란 뜻이다. 왜정(倭政)까지만 해도 이곳은 산속 같은 변두리라 그 이
름이 딱 어울렸으나 이제는 졸부들의 집이 주변에 널려 주택가 속의 외로운 기와집이 되었다.

수연산방은 고풍스런 분위기와 한옥에서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매력으로 속
인들의 입과 입을 통해 찾는 수요가 상당하며, 간송미술관과 길상사, 삼청각, 심우장 등 성북
동의 간판 명소들이 크게 인기를 누리면서 그 후광(後光)을 단단히 봤다. 성북동에서 꼭 가봐
야 직성이 풀리는 전통찻집 겸 한옥으로 명성이 높아졌고, 돈을 삽으로 쓸어담을 정도로 호황
을 누리고 있다.
특히 휴일에는 거의 자리를 잡기가 힘들 정도로 올 때마다 만원이라 여러 번 발길을 돌린 쓰
라린 기억이 있다. 허나 이번에는 운이 좋았는지 사랑채 쪽에 자리가 하나 있어서 거기서 차
를 1잔 마셨다.
이토록 늘어나는 손님을 해결하고자 서쪽에 새로 건물을 지었으나 역시나 역부족이다. 하지만
더 이상의 신축이나 증축도 어렵다. 주어진 공간을 다 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본채를 건드리는 것은 말도 안되며, 자칫 잘못 손댔다가는 고풍스런 분위기마저 해칠
수 있다. 괜한 욕심으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지 말고 지금 그대로 두는 것이 수연
산방 주인이나 손님 모두에게 좋다.

▲  뜨락에 세워진 이태준 문학의 산실 표석

▲  뜨락에 심어진 돌기둥과 석등


* 상허 이태준(1904 ~ ?)의 간략한 삶
이태준은 강원도 철원 출생으로 호는 상허(尙虛)이다. 그의 아버지는 개화파(開化派)의 지식
인으로 활약했던 이문교(李文敎)로 함경남도 덕원감리서(德源監理署)에서 관리로 있었는데,
수구파에 밀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여기저기를 전전하다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다보니 이태준의 가정형편은 그리 좋은 편이 되지 못했으며, 9살에 어머니까지 별세하면
서 친척집에 얹혀 살게 된다.

그는 책장사를 해가며 1920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당시 그 학교 교사였던 이병기(李秉
岐)의 영향을 받아 고전문학의 소양을 듬뿍 쌓았다. 그 소양은 나중에 소설가로 성장하는 밑
거름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허나 학교의 무슨 비리나 문제가 있었는지 불합
리한 운영에 불만을 품고 동맹휴학을 주도하다가 퇴학을 당했다.

1925년 '조선문단'에 단편소설 오몽녀(五夢女)가 입선되어 시대일보(時代日報)에 발표를 했고,
1926년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 조오치대학(上智大學) 문과에 진학해 신문과 우유 배달로 힘겹
게 돈을 충당하며 공부를 했으나 재정난을 이기지 못해 결국 중퇴하고 귀국했다.

1929년 개벽사(開闢社)에 들어가 기자로 일했고,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을 역임했으며, 1930
년에 이화여전 음악가 출신인 이순옥과 혼인하여 가정을 꾸린다. 1933년에는 그동안 모은 돈
으로 성북동에 땅을 구입해 꿈에 그리던 한옥을 지으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에 돌입한다. 그
리고 그해 이효석(李孝石)과 김기림(金起林), 정지용(鄭芝溶), 유치진(柳致眞) 등과 친목단체
인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했다.
그 시절 평론가이던 최재서(崔載瑞)는 시는 정지용(鄭芝溶), 산문은 이태준이라 할 정도로 문
장의 달인으로 평가를 받았으며, 순수 문학의 기수, 한국 단편의 완성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순수문예지 '문장(文章)'을 주재하여 수많은 문제작품(問題作品)을 발
표했고, 역량있는 신인들을 발굴해 문단에 크게 공헌했다. 그리고 1931년 '아무일도 없소(東
光, 1931.7.)'를 시작으로 '불우선생(不遇先生 / 三千里, 1932.4)'과 '꽃나무는 심어놓고(新
東亞, 1933,3)','달밤(中央, 1933.11)','손거부(孫巨富 / 新東亞, 1935.11)','가마귀(朝光,
1936 1936.1),'복덕방(朝光, 1937.3)' 패강냉(浿江冷 / 三千里文學, 1938.1)','농군(文章, 1939.7)', '밤길(文章, 1940·5·6·7합병호)','무연(無緣 / 春秋, 1942.6)','돌다리(國民文
學, 1943.1) 등을 냈다.
1945년 이후 민족의 과거와 현실적 고통을 비교하는 문제의식을 드러낸 '해방전후(解放前後/
文學, 1946.8)'는 그의 간결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묘사적 문장으로 속인들의 호응을 크게 받
았다.

1945년 문화건설중앙협의회 조직에 참여하였고,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하
면서 '해방전후'로 조선문학가동맹이 제정한 제1회 해방기념 조선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
다가 1946년 여름 홍명희와 함께 월북(越北)했다.
1946년 10월에는 북한의 조선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소련을 다녀왔고,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의 부위원장까지 지냈다. 그리고 6.25시절에는 종군작가로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허나 1952년부터 북한당국으로부터 사상검토를 당하고 과거를 추궁받았으며, 1956년 친일혐의
와 우경적인 작품을 썼다는 이유로 함흥(咸興)으로 추방당해 콘크리트 블럭 노동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 그의 행적은 전해지는 것이 없어 아마도 소리소문도 없이 처단된 듯 싶다.

그의 1945년 이전 작품은 대체로 시대적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경향을 띄기보다는 구인
회의 성격에 맞는 현실에 초연한 예술지상적 색채를 진하게 나타내고 있다. 인간 세정(世情)
의 섬세한 묘사나 동정적 시선으로 대상과 사건을 바라보는 자세 때문에 단편소설의 서정성(
抒情性)을 높여 예술적 완성도와 깊이를 세워 나갔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대표적 단편소설
작가로 평가받는다. 1945년 이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핵심으로 활동하면서 작품에도 사회주
의적 색채를 담으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북한 종군기자로 전선에 참여하면서 쓴 '고향길(1950)'이나 '첫전투(1949) 등은 생경한
이데올로기를 여과없이 드러냄으로써 왜정 때 쓴 작품에 비해 예술적 완성도가 훨씬 떨어진다.
그런데 그가 월북한 것도 자의적인 것이 아닌 강제로 갔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1956년 이후에
숙청으로 사라진 것은 그가 철저한 사회주의적 작가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어쨌든 엄연한 월북작가라서 우리나라 정부에서 그의 작품을 몽땅 통제하여 그의 이름과 작품
은 생매장을 당했다. 그렇게 어둠 속에 가려진 그의 존재는 1988년 통제에서 풀려나면서 정지
용과 더불어 다시 세상에 드러나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으며,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지겹도록 등장할 정도가 되었다.
또한 그의 외종손녀의 노력으로 그의 집은 수연산방이란 이름으로 속세에 널리 알려졌으며 자
연히 그의 이름 3자와 작품도 덩달아 알려지게 되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48 (성북로26길 8 ☎ 02-764-1736)


▲  문이 활짝 열린 수연산방 정문

▲  뚜껑이 닫힌 우물
본채 앞에 사람 키 정도로 땅을 파 석축을 입히고 그 복판에 우물을 팠다.
이태준 일가에게 시원한 물을 선사했던 우물은 오래전에 생명을 다해
지금은 겉모습만 남았다.

▲  문학의 향기와 차의 향기가 뒤섞인 수연산방 본채(죽간서옥)

죽간서옥이라 불리는 본채의 방과 툇마루에는 차 1잔의 여유를 누리는 사람들로 발을 디딜 공
간이 없다. 이곳은 이태준이 있던 시절, 구인회 회원들의 모임 장소로 우리들 귀에 매우 익숙
한 이효석, 정지용도 자주 찾았다. 그들은 여기서 다과나 곡차(穀茶)를 즐기며 서로의 작품을
이야기하고 토론을 했으며, 세상 걱정에 자주 밤을 샜다고 전한다.
죽간서옥은 대나무 숲 사이의 서옥(書屋)을 뜻하며, 건물 안에는 이태준의 손때가 묻은 유물
과 그가 직접 쓴 작품과 서적들이 있다.


▲  빛바랜 수연산방 현판의 위엄 - 이태준의 글씨로 전해진다.
빛바랜 부분이 많아서 수십 년이 아닌 300년은 거뜬히 묵은 현판 같다.

▲  빛이 바랜 죽간서옥 현판 - 이태준 글씨
죽(竹) 글씨 위가 하얗게 바래지면서 마치 대나무에 쌓인 눈을 보는 듯 하다.

▲  본채(죽간서옥) 앞에 놓인 소나무 분재의 위엄

▲  뜨락 중앙에 자리한 사철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34호
수연산방에서 단연 돋보이는 자연물로 아담한 키로 뜨락을 햇볕으로부터 지킨다.
나이가 50년 정도 되었다고 하는데, 50년이면 이태준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그의 남은 가족이 망중한을 달래고자 심은 듯 싶다.

▲  뜨락을 수식하는데 조금이나마 일조하고 있는 벌개미취와 여러 꽃들

▲  본채 내부에 걸린 이태준 가족 사진
슬하의 자녀가 무려 5명이나 된다. (그 시절에는 5~6명은 기본이었으니)
본채에서 차를 마실 때, 방 곳곳에 걸린 사진과 현판, 그의 유품과
서적을 구경할 수 있다.

▲  본채 내부에 걸린 이태준의 친필 현판 (해석은 각자 알아서 ~~)

▲  액자에 소중히 담긴 이태준의 문서

▲  수연산방에서 누린 전통차 (차 이름은 잊어먹었음)

수연산방에서는 본채(사랑채, 안채) 내부나 새로 지은 서쪽 건물과 야외 자리, 그리고 사철나
무 밑에 자리를 잡고 차를 마실 수 있다. 그 자리들이 모두 찼을 때는 본채 툇마루에서 마셔
야 되는데 그 자리라도 앉으면 다행이다. (사랑채 안쪽 자리가 명당으로 미리 예약을 하는 것
이 좋음)
이곳 전통차 가격은 인사동과 비슷하거나 좀 야박한 수준으로 차를 주문하면 유과 등의 먹거
리와 따뜻한 물이 같이 덩달아서 나온다. 양반가의 방처럼 꾸며진 고풍스런 기와집에서 마시
는 전통차라 그런가 맛이 좀 남다른 것 같다. 특히 비오는 날 뚝뚝 대지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빗소리를 노래 삼아 누리는 차 1잔의 여유는 이곳의 백미(白眉)라 할만하다.

차의 향기도 좋고, 찻집 분위기도 아주 그윽하고 좋으니 서로의 긴장된 마음이 열리면서 이야
기꽃이 마구 쏟아진다. 그렇게 여기서 머문 시간은 무려 2시간, 전통찻집이나 까페는 자주 가
는 편이지만 길어봐야 2시간 이하로 머무는데, 여기서는 그 시간을 훨씬 넘긴 것이다. 정말 1
시간 정도 머문 것 같은데, 이곳이 시간 도둑인지 시간을 잡아먹는 블랙홀인지 하루에 1/12이
지나가버린 것이다. 게다가 방에 앉아서 마시는 거라 일어나기 귀찮음이 발생하면 머무는 시
간은 자연히 늘어날 수 있다.
이렇게 잠시나마 차담(茶啖)으로 각박한 속세를 잠시 잊는 것도 괜찮지. 식사를 하는 것이 아
닌 분위기에 취해, 차 향기에 취해, 이야기에 취하며 오래 머무는 공간이 바로 찻집(또는 까
페)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성북동 가을 나들이는 막을 내린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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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9년 2월 14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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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의 내륙, 괴산 역사기행 ~~~

 


' 겨울맞이 괴산(槐山) 나들이 '
괴산 원풍리 마애2불병좌상
▲  괴산 원풍리 마애2불병좌상

 


겨울의 제국(帝國)이 가을을 몰아내고 하늘 아래 세상을 접수한 11월 하순 주말에 충북 괴산
을 찾았다. 이번에는 멀리 남쪽(창원)에서 온 일행분들과 같이 갔는데, 그들이 괴산(槐山)으
로 답사를 온다고 하여 간만에 그들도 볼 겸, 미답지를 하나 지워볼 겸해서 답사에 동참했다.
사는 곳이 서로 반대라 괴산의 첫 답사지인 원풍리 마애불에서 그들과 합류하기로 했다.

괴산은 창원보다는 서울이 더 가깝다.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나 역시 아침 일찍 길을 떠나야
된다. 그래서 찬란한 여명(黎明)이 비추기 전인 5시에 대문을 나섰다. 원풍리는 교통편이 매
우 얄미운 수준이기 때문에 차 시간을 딱 맞춰야 된다. 다행히 동서울터미널에서 6시 20분에
충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면 별다른 일이 없는 이상은 충주터미널에서 원풍리까지 시내버스
로 딱딱 이어진다.

충주행 고속버스는 1시간 24분 만에 나를 충주(忠州)로 실어주었다. 충주터미널에서 8시 5분
에 수안보로 가는 충주시내버스 240번을 타고 아침의 청명한 기운이 깃들여진 충주의 산하를
달려 8시 50분에 온천으로 유명한 수안보(水安堡)에 도착했다.
수안보에서 연풍으로 넘어가는 군내버스가 9시 정도에 있는 것 같던데 시간표를 보니 9시 10
분에 차가 있다. 그 시간이 되자 버스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농촌의 인구 감소와 농어
촌버스의 어려운 현실을 보여주듯 승객은 달랑 나 혼자 뿐이다. 운전사에게 원풍리 마애불을
문의하니 마애불과 원풍리는 모른다고 그런다. 다만 신풍에서 내리면 될 것 같다고 그런다.

버스는 중부내륙고속도로와 우회도로로 많이 한가해진 옛 3번 국도를 경유한다. 라면보다 더
꼬불꼬불한 소조령(小鳥嶺, 작은새재) 고갯길을 굽이굽이 돌아 고개의 정상인 문경3관문입구
에 이르고, 고개를 넘자 얼마 뒤 원풍리마애불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나를 마중한다. 운전
사가 그곳을 그냥 지나치자 서둘러 일어나 내려달라고 했다.
그렇게 차에서 내려 이정표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서 마애불까지 얼마나 들어가야되나 왼쪽
을 살피니 들어가고 할 필요도 없다. 거대한 바위에 조그만 감실을 파고 들어앉은 그들이 바
로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곳에 이른 시간은 9시 20분, 그로부터 약 40분 뒤인 10시에 남쪽 사람들을 태운 관광
버스가 도착했다.

 


♠  우리나라에 거의 없는 이불좌상(二佛坐像), 거대한 바위 중앙에 둥지를 트고
다정히 들어앉은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院豊里 磨崖 二佛並坐像)
- 보물 97호

수안보에서 연풍(延豊)으로 넘어가는 소조령 고갯길 우측 큰 바위에 괴산의 명물이자 우리나라
에는 거의 없는 2불좌상, 원풍리 마애불이 자리해 있다. 문화재청의 지정 명칭은 원풍리 마애2
불병좌상인데, 예전에는 원풍리 마애불좌상이라 불렸다. 그러다가 근래에 그들 성격에 맞춘다고
이름을 고친건데, 그 명칭이 좀 어렵다. 그냥 속편하게 '원풍리 마애불'이라 불러도 무관하다.
그들은 속세에서 자신을 뭐라 부르든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데, 가만히 있는 자신들의 명칭을
두고 속세에서 계속 왈가왈가 하는 것이다.
지금이야 그를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있어 찾기는 쉽지만 도로보다 한층 높은 언덕에 있기 때문
에 이정표가 없던 시절에는 아무리 길가라고 해도 길 우측 위쪽 부분을 잘 살피지 않는 이상은
절대로 찾을 수가 없었다.


▲  도로에서 바라본 원풍리마애불

▲  수레의 왕래가 뜸해진 원풍리마애불 입구
우회도로와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2001년 이전)에는 자주 차가 막힐 정도로
수레의 왕래가 빈번했다.
 

마애불은 수레의 왕래가 많이 뜸해진 옛 3번 국도와 고속질주가 벌어지는 3번 우회국도가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높이 30m에 이르는 거대한 암벽에 조성되어 있는데, 특이한 것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못하는 6.5m 높이에 둥지를 트고 있다는 것이다. 보통 마애불은 아무리 커
도 발이나 다리까지는 사람의 손이 닿는다. 허나 이 불상은 허공에 떠있는 듯, 도저히 만질 수
없게 높은 곳에 만들었다. 아마도 속세(俗世)에 찌든 속인(俗人)의 오염된 손길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고자 그런 모양이다. 지금이야 기술이 좋아서 저런 불상은 뚝딱 만들지만 옛날에는 어떻
게 새겼을까? 나무로 불상 위치까지 대(臺)를 만들고 그곳에 올라 조각을 했을 것이다.

▲  남쪽 측면에서 바라본 마애불

▲  북쪽 측면에서 바라본 마애불

불상의 높이는 5m로 약 6x5.5m 크기의 네모난 감실(龕室)을 파고 그 안에 2구의 큰 불상을 돋음
새김으로 새긴 다음 별도로 2구의 보살상(菩薩像)을 형체만 알아볼 정도로 작게 만들었다. 이들
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없는 이불좌상이자 이 땅에서 유일한 이불마애불(二佛磨崖佛)로 그 가
치가 높다. 이불좌상은 병립불(竝立佛), 병좌상(竝坐像), 이불병좌상으로도 불리며, 중원대륙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크게 유행했던 불상 양식이다.

이렇게 2명의 불상을 나란히 새긴 것은 법화경(法華經)의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법화
경은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渤海)에서 크게 유행했던 법화신앙으로 그 주인공은 석가불(釋迦
佛)과 다보불(多寶佛)로 추정되지만 아직까지는 속시원한 정답은 없는 실정이다. 이들은 12세기
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전설에는 신라 후기에 여상조사(呂尙祖師)가 조성했다고 하고, 고려
후기 고승인 나옹대사(懶翁大師)가 인근에 상암사(上庵寺)를 세우고 몸소 새겼다고도 한다. 허
나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일 뿐이다.


▲  노부부처럼 다정하게 들어앉은 원풍리마애불

불상의 얼굴은 도드라지고 넓적하다. 머리는 민머리로 보이며, 눈은 좌우로 가늘고 길다. 코는
왼쪽 불상은 온전하나, 오른쪽은 파여서 흔적만 있다. 눈 위에는 부드러운 곡선의 눈썹이 드리
워져 있으며, 입가에는 은은하게 미소가 번져 자비로운 느낌을 선사한다.

통견의(通絹衣)를 걸친 불상의 몸은 반듯한 어깨와 평평한 가슴이 표현되었으며, 옷 주름이 선
명하다. 눈에 잘 들어오진 않지만 불상 뒤로는 광배(光背)가 있다. 광배에는 5구의 화불(化佛)
이 있는데, 채색과 장식을 했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이 불상에는 전쟁과 관련된 몇 가지 씁쓸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임진왜란 시절에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불상 앞을 지나다가 부처의 모양이 장사처럼 생긴 것을 보고
발끈했다. '근처에서 장사가 많이 나오겠구나. 혈을 끊어야겠다'
그래서 불상 뒤에 있던 혈(穴)을 칼로 찌르고 오른쪽 불상의 코를 베었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
도 명나라를 지극히 숭모하던 사대주의(事大主義)의 일환으로 나온 전설인 듯 싶다. 또한 불상
몸 곳곳에 나 있는 검은색은 총탄의 흔적으로 6.25시절에 근처에서 전쟁을 치르면서 생긴 것이
라고 하며, 혹은 양키 미군이 불상을 사격물로 삼고 표적사격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어 답사객의
마음을 착잡하게 만든다.


▲  기도처가 마련된 마애불의 아랫쪽

불상 앞에는 조촐한 기도처가 마련되어 있다. 기도처에는 마애불을 관리하는 인근 절에서 갖다
둔 복전함이 있는데, 함 옆에는 제발 돈을 빼가지 말라고 호소하는 내용이 걸려있다. 함(函)을
보니 자물쇠가 무려 3개나 달려있다. 오죽 도난이 잦았으면 그리했을까 싶지만 너무 돈에 집착
하는 것 같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마애불상은 돈과 관련없이 중생 걱정에 잠을 못이루
는데, 그런 불상을 관리하는 절은 그의 마음과 달리 복전함 걱정에 잠을 설치는 모양이다.

마애불이 깃들여진 암벽의 왼쪽에는 조그만 샘터가 있다. 수량이 적고 바가지가 없어서 마시진
않았지만 이 지역에서 이름난 샘터라고 한다. 소나무가 우거진 한쪽 구석에는 불공 때 쓰는 초
와 성냥, 청소도구 등이 담긴 함이 있는데, 돈은 복전함에 알아서 넣어달라고 쓰여 있다. 그 문
구를 보니 초를 쓰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나 버린다.

불상 주변으로 그를 관리하는 조그만 절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마땅한 흔적은 없다. 왜 이
곳에 불상을 새겼는지는 확실치는 않으나 연풍에서 충주로 넘어가는 주요 길목으로 하늘재보다
비중은 좀 떨어지지만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 그래서 인근 절이나 이 지역에 연고가 있는 승
려나 상인, 또는 충주 지역의 토착세력인 충주유씨 집안이나 연풍의 유력한 지방세력이 나그네
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명목으로 마애불을 만들었을 것이다. 나그네들은 불상 앞에 절을 올리
며 안녕과 소망을 빌었을 것이며, 그들이 시주한 돈으로 마애불을 관리하거나 자신들의 배를 채
웠을 것이다.

※ 원풍리 마애2불병좌상 찾아가기 (2013년 3월 기준)
① 수안보 경유
* 동서울터미널에서 수안보행 직행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부산, 울산, 구미, 상주에서 연풍, 수안보 경유 충주행 직행버스가 다닌다.
* 동서울터미널이나 서울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 인천, 수원, 성남, 대전, 원주에서 충주
  행 고속/직행버스를 타고 충주터미널에서 수안보행 직행버스로 갈아타거나 충주터미널 밖 시
  내버스 정류장에서 수안보행 시내버스로 갈아타도 된다. (15~30분 간격으로 운행)
* 수안보에서 괴산행 군내버스가 1일 8회 운행한다. 버스를 타고 원풍리마애불에서 세워줄 것을
  부탁하면 어지간해서는 앞에 세워준다. 원풍리마애불은 정식 정류장은 아니며, 마애불 이정표
  가 나올 때 세워달라고 하면 된다. 만약 정차를 거부하면 새터에서 내려가 버스가 가는 방향
  으로 도보 12분, 신풍에서 수안보 방향으로 도보 15분
② 괴산 경유
* 동서울터미널에서 괴산행 직행버스가 3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괴산터미널 부근 군내버스(아성관광) 종점에서 수안보(1일 8회), 수옥정행(1일 2회) 군내버스
  이용 (마애불 앞 또는 신풍에서 하차)
③ 승용차로 가는 경우 
* 중부내륙고속도로 → 연풍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연풍면사무소를 지나서 수안보 방면으로
  좌회전 → 원풍리마애불

* 소재지 -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산124-1

 


원풍리마애불을 친견하고 다음 답사지인 각연사(覺淵寺)로 이동했다. 각연사는 연풍에서 괴산가
는 길목인 태성리에 자리한 산중고찰로 속리산국립공원 북단에 고요히 묻혀있다. 이곳은 오른쪽
에 링크된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 괴산 각연사 보러가기)

약 2시간에 걸쳐 각연사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괴산읍으로 길을 잡는다. 각연사에서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다들 시장기가 강하게 맴돈다. 시간은 어느덧 2시를 훌쩍 넘긴 상태, 점심은 매운탕으
로 이름난 괴강매운탕에서 매운탕을 먹었다.
나는 매운탕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그리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생각 외로 꽤 입맛이
맞는다. 쏘가리와 피라미, 메기 등 3~4종류의 민물고기가 수제비와 갖은 진한 양념과 어우러져
매운탕이란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해 사람들 앞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다. 밑반찬도 그런데로
깔끔하고 정갈하며, 무척 시장해서인지 반찬도 금방 동이 나 여기저기서 더 갖다달라며 아우성
이다. 밥을 2그릇이나 먹은 사람도 나를 포함하여 상당하다. 이 집은 80대 할머니가 무려 60년
가까이 꾸린 집으로 지금은 그 아들이 운영하고 있다. 그날은 일요일이라 딸들도 와서 일을 거
들었다.

이렇게 점심을 배불리 마치고 괴산읍내로 들어갔다. 읍내에서 우리가 문을 두드린 곳은 홍범식
고가와 개심사란 조그만 절이다. 이들은 한곳에 뭉쳐 있어서 덩어리로 같이 둘러보면 된다.

 


♠  소설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洪命憙) 일가의 기와집
홍범식 고가(洪範植 古家) - 충북 지방민속문화재 14호

괴산읍내 북쪽 동부리에는 홍범식 고가가 있다. 정남향(正南向)을 하고 있는 이 집은 1730년경(
또는 1861년)에 지어진 풍산홍씨 일가의 집으로 면적은 1,200평, 왕년에는 50여명이 살았다. 좌
우대칭의 평면 구조를 지닌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양반가로 사랑채는 2고주 5량가의 납도리집이
며,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6칸의 'ㄷ' 모양으로 '一'자형 광채를 합쳐 'ㅁ'자형을 하고 있다.

속세에서 이 집을 주목하는 이유는 괴산이 낳은 위인, 홍범식과 홍명희 부자(父子)가 태어나고
자란 집이기 때문이다. 홍범식(洪範植, 1871~1910)은 자는 성방(聖訪). 호는 일완(一阮)으로 참
판(參判)을 지낸 홍승목(洪承穆)의 아들이다.
1888년(고종 25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1902년(광무 6년) 내부주사(內部主事), 혜민서참
서(惠民署參書)가 되었으며, 1907년 전북 태인(泰仁)군수로 부임하여 의병을 보호했다. 1909년
충남 금산(錦山)군수로 전임되어 백성들에게 아낌없는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나 1910년 8월 경
술국치(庚戌國恥)가 이루어지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을 택했다. 그는 아들에게 절대로 왜
(倭)에 협력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는데, 그것을 지킨 이가 바로 홍명희이다. 나머지는 아
비의 뜻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악덕 친일파가 되었다.

소설 임꺽정으로 유명한 홍명희(1888~1968)는 홍범식의 아들로 이곳에서 태어났다. 필명은 가인
(假人, 可人), 백옥석(白玉石), 벽초(碧初) 등으로 보통 벽초가 널리 알려졌다. 그는 왜국 다이
세이(大成)중학교에서 공부를 했으며, 귀국하여 집에 머물던 중, 3.1만세운동이 터지자 바로 이
집 사랑채에서 은밀히 만세운동을 준비해 1919년 3월 19일 괴산 지역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만세운동으로 왜정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었고, 그가 감방에 있는 동안 왜정의 탄압으로
가세가 기울어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팔고 인근 제월리로 이사갔다.

출옥 이후, 그는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으며, 휘문고보 교사와 오산고보 교장, 연희전문
(연세대) 교수를 지내고, 시대일보(時代日報) 사장이 되었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
면서 부회장으로 참여했으며, 1930년 신간회에서 주최한 제1차 민중대회사건으로 체포되기도 했다.

그는 민족운동의 지도자로 있으면서 그 유명한 소설 임꺽정(林巨正)을 집필했다. 임꺽정은 1928
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된 당대 최대의 장편 역사소설로 봉건 귀족을 우월성의 존재
로 파악하지 않고 천민계층을 이상화(理想化)함으로써 계급의식과 집단의식을 드러냈다. 그는
역사소설을 통해 계급의 관점에서 식민지적 모순보다는 자본주의적 모순을 겨냥하는 역사의식을
표출했다.

해방 이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냈으나 38선 이남이 점점 친일파의 소굴로 변질
되어가는 것에 회의를 느끼던 중, 백범 김구(白凡 金九) 선생이 남북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평양
(平壤)에 김일성을 만나러 가자 같이 따라 나섰다. 그러고는 다시는 내려오지 않았다. 완전히
월북(越北)을 한 것이다. 그는 북한에서 높은 관직을 지내며 문학활동을 하다가 1968년 8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  홍범식 고가의 솟을대문

▲  창고

홍씨 일가가 떠난 이 고가는 60여 년 동안 그런데로 모습을 유지하다가 1984년 국가지정 중요민
속자료 146호
<당시 지정명칭 '괴산 이복기 가옥(槐山 李馥基 家屋)>로 지정되었다. 허나 집주인
이 집을 변형시키면서 말썽이 생겼고, 결국 집주인의 요구로 1990년 9월 중요민속자료에서 정리
되고 만다. 그 이후 원형을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크게 망가져 끝내는 폐가 지경에 이르게 되었
고, 괴산군에서 홍범식,홍명희 부자를 기리고 관광지로 키울 생각에 이 집을 매입해 지금의 모
습으로 말끔히 손질하였다. 손질한 것은 좋지만 그 과정에서 기존에 없던 부분도 마구 덧붙이게
되었고, 그나마 남은 고색의 때도 거의 사라져 고가(古家)란 이름이 정말 무색하게 되었다.

또한 집을 복원할 때 괴산 지역 노인들이 쌍수를 들고 반대했다. 바로 월북한 홍명희의 집이란
이유 때문이다. 6.25를 뼈저리게 겪은 노인들에게 북한과 북한에 협조한 이들이 좋아 보일리는
없겠지. 그래서 괴산군청은 그들을 달래며 간신히 집을 복원했으며, 집의 명칭을 '홍명희 생가'
로 하려고 했으나 역시 그들의 눈치로 '홍범식 고가(한때는 동부리 고가)'로 이름을 변경했다.

비록 홍명희는 북한으로 넘어갔지만 고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고, 민족지도자이자 문학가
로 활동하며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6.25이후 60년이 넘는 세월이 속절없이 흘렀고 세상도
참 많이 변했다. 북한도 언젠가는 우리가 흡수하고 포용해야 될 존재인데, 그곳으로 넘어갔다고
무조건 부정적으로 몰아세워 복원사업을 방해하는 것은 시대적으로 뒤떨어지는 행위이다. 지금
은 반공(反共)을 내세우던 1950~80년대가 아니다. 만약 그가 월북을 하지 않았다면 이 집이 크
게 훼손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며, 지금과는 다른 높은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아마도 평창의 이
효석(李孝石) 생가처럼 우리나라 근/현대 문학의 성지(聖地)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  홍범식 고가의 사랑채
홍명희가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했던 역사의 현장으로 지금은 빈집이다.
신발을 벗어놓던 섬돌은 신발 대신 먼지만이 수북하여
신발로 가득했던 옛날을 그리워한다.

▲  홍범식 고가의 안채 외곽 -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게 안쪽을 가렸다.

▲  뜨락 한쪽에 옹기종기 모인 장독들
장독 안에는 무엇인가가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저들은 이곳을 복원할 때 갖다둔 빈 장독들이다.


※ 홍범식 고가 찾아가기 (2013년 3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괴산행 직행버스가 3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청주와 증평에서 괴산행 직행버스가 수시로 떠난다.
* 괴산터미널을 나와서 오른쪽으로 가면 시계탑4거리이다. 여기서 직진하여 7분 정도 걸으면 괴
  산대교가 나오며,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가면 길 오른쪽에 동부리고가가 있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중부내륙고속도로 → 괴산나들목을 나와서 괴산방면 19번 국도로 우회전 → 감물 → 괴강3거
   리에서 우회전 → 동진교를 건너 대덕4거리에서 직진 → 동부교차로에서 괴산읍으로 좌회전
   → 괴산대교북단3거리(역말3거리)에서 직진 → 동부리고가

* 고택 앞에 주차장이 있으며, 주차비와 관람비는 없음
* 관람시간 : 9시~18시
* 소재지 -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450-1

 


♠  법등의 역사는 짧지만 괴산읍내를 앞뜰로 삼은
작은 절집 ~ 개심사(開心寺)

▲  개심사 법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

홍범식고가에서 뒤쪽 언덕을 보면 절집 하나가 바로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곳이 바로 이번 답
사의 마지막 장소인 개심사이다. 

개심사는 역사가 매우 짧은 절로 1935년에 지어졌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1935년 괴산군 칠
성면 두천리에 있던 도덕암(道德庵)이 문을 닫자 괴산읍 서부리에 살던 김경림이란 여신도가 도
덕암에 있던 목조여래좌상과 목조관음보살좌상을 옮겨와 지은 절이라고 한다. 그 불상 2구는 조
선 후기 불상으로 1993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그들이 바로 우리를 이곳으로 오게 한 장
본인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이곳에 올 일은 정말 영원히 없었을 것이다.
1998년 대웅전에 있던 불상을 새로 만든 극락보전으로 옮겼으며, 요사채와 삼성각, 명부전을 지
어 절집다운 면모를 갖추었다.

절의 역사가 80년 남짓이고 지금 있는 건물은 모두 1998년 이후에 세운 때깔 고운 것들이라 고
색의 내음은 없다. 극락전 뜨락에는 자갈돌이 정갈하게 깔려져 있으며, 절이 바라보는 남쪽으로
괴산읍내가 두 눈에 바라보인다. 비록 절은 작지만 읍내를 앞뜰로 품으며 열심히 미래를 꾸려간
다.


▲  극락보전에 봉안된 개심사목조여래좌상과 목조관음보살좌상
(開心寺 木造如來坐像 / 木造觀音菩薩坐像) - 충북지방유형문화재 173호

려함이 배여난 극락보전 불단에는 도덕암에서 옮겨왔다는 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가운데에 앉
은 이는 3존불의 본존불(本尊佛)로 나무로 만든 목조여래좌상이다. 그리고 그 우측에 화려한 보
관(寶冠)을 쓴 보살상은 목조관음보살좌상이다. 좌측에 있는 것은 근래에 만든 것이다.

이들 목조여래좌상과 관음보살좌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다. 여래좌상은 머리에 작은 소라 모
양의 머리칼을 붙였으며, 얼굴에는 그만의 미소가 흐드러지게 피어 중생의 마음을 다독거린다.
목에는 3줄의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으며, 양 어깨를 가린 옷을 걸치고 있다. 양 손목과 무릎
에 걸쳐 두껍게 표현된 옷주름은 조선시대 불상 양식이며, 그의 수인(手印)은 설법인(說法印)을
취하고 있다.
관음보살좌상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으며, 여래좌상 못지않은 자비로운 인상이 풍긴다. 3존불
뒤로 붉은 색채의 후불탱화가 든든하게 자리해 있으며, 극락보전 좌우 벽에는 신중도(神衆圖)가
자리하여 법당을 지킨다.

절을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6시를 넘었다. 개심사를 끝으로 그날의 답사일정은 별무리 없이
마무리가 되었다. 아쉽지만 여기서 남쪽 일행들과 작별을 고하며 나의 제자리로 돌아오니 이렇
게 하여 겨울맞이 괴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개심사 소재지 -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428-1 (☎ 043-832-2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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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최근에 본인 다음 블로그에 올린 글과 사진입니다.
(글 제목을 클릭하시면 해당글로 바로 이어집니다)

볼거리가 풍성한 서울 도심 속의 꿀단지 ~ 북촌한옥마을 산책 (계동길, 원서동 일대)

 


' 현재와 과거가 나란히 공존하는 서울 도심 속의 꿀단지
~~ 북촌(北村) 산책 (계동길, 원서동 일대)'

▲  북촌6경 골목길


북촌(北村)은 서울 도성(都城)의 북쪽 지역으로 경복궁(景福宮)과 창덕궁(昌德宮) 사이를 일
컫는다. 이 지역은 가회동(嘉會洞)을 중심으로 삼청동(三淸洞). 계동(桂洞), 안국동(安國洞)
, 재동(齋洞), 소격동(昭格洞), 팔판동(八判洞), 원서동 등에 걸쳐있으며, 경복궁 서쪽은 따
로 서촌(西村)이라 불렀다. <청계천 남쪽을 남촌(南村)이라 불림>

북촌 지역은 조선시대 때 왕족과 사대부(士大夫)를 비롯하여 돈 꽤나 주무르던 부자들이 주류
를 이루며 살던 오늘날의 강남(江南) 같은 곳이다. 조선 초기부터 형성되었지만 조선 초/중기
시절에 한옥은 남아있는 것이 없고, 조선 후기(19세기~20세기 초반) 한옥을 시작으로 왜정(倭
政) 시절에 지어진 개량 한옥과 해방 이후의 한옥에 이르기까지 약 1,200여 채의 한옥이 진하
게 남아있는 그야말로 거대한 한옥박물관이다.
이곳에 서린 한옥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은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이 살던 안국동 윤
보선가이며, 그외에 한옥들은 대부분 일반 여염집 규모로 작다. 구조는 안채와 사랑채가 마당
을 둘러싼 'ㄷ','ㅁ' 구조이다.

북촌 한옥은 민속촌과 달리 사람들이 직접 거주하고 있어 대부분 내부 관람이 어려운 함정이
존재한다. 특히 지정문화재로 지정된 한옥은 북촌문화센터를 비롯하여 박물관과 공방(工房),
예술/문화공간, 찻집과 음식점, 숙박업소로 쓰이는 한옥만 흔쾌히 개방을 하고 있으며, 북촌
문화센터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부분 개방이나 조건개방(숙박업소나 입장료를 내고 들어
가는 전시공간)이 많고 그런 집들도 전체적으로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북촌은 높다란 빌딩과 콘크리트 일색의 밋밋한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하여 크게 돋보이며,
경복궁, 창덕궁 등의 궁궐(宮闕)과 함께 도심 속의 박힌 보석과 같은 소중한 곳이다. 한옥과
근대 건물, 현대식 건물이 서로 시간을 초월하며 얼굴을 맞대고 공존하고 있으며, 빛의 속도
로 빠르게만 변해가는 서울에서 시간이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발을 멈춘 듯, 옛 모습을 많
이 지키고 있는 도심 속의 이색 공간이다. 이 시대를 사는 어리석은 인간들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무작정 앞만 보고 뛰느라 뒤를 돌아보는 여유를 누리지 못하는데, 북촌은 바로 그런 여
유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북촌도 나날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조선이 망하고 왜인들이 남산 주변과 명동을 중심으로 한 청계천 남쪽에 대거 말뚝을 박으며
시내를 개발하면서 서울의 중심으로 번화했으나, 서울 토박이와 조선 백성들이 주로 살던 청
계천 이북은 근대 건축물(중앙중고 건물, 천도교중앙대교당, 화신백화점 등.)이 몇개 지어진
것 외에는 개발이 별로 없어 남촌에 비해 낙후되었다.
게다가 왜정 이후 서울의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북촌 구석구석에 조그만 한옥을 수없이 깔
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으며, 지배층과 부자들의 동네에서 점차 서민들의 동
네로 변화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한옥이 왜정과 해방 이후에 지어짐)
해방 이후 북촌은 도심 한복판에 있음에도 그 뒷전으로 밀려나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1990년
대까지 마땅한 개발도 이루어지지 못한 채, 나날이 쇠퇴해갔다.

그러던 북촌은 2000년 이후 서울시의 홍보와 뜻있는 이들의 노력, 여러 언론 매체를 통해 도
심 속의 관광지로 급부상하게 되면서 줄어만 가던 한옥의 개체수가 다시 늘어가기 시작했다.
북촌이 다시 서울의 꿀단지로 떠오르자 북촌 주민들도 자신의 한옥을 개량하거나 손질하였고
양옥으로 지어진 건물도 다시 한옥으로 고치는 등 북촌의 이미지를 바꾸는데 갖은 힘을 아끼
지 않았다. 거기에 종로구청과 서울시청도 북촌 가꾸기 사업을 벌여 흔쾌히 도와주고 있으니
나날이 관광객들이 폭주해 평일에도 국내/해외 관광객들로 북촌 골목길은 시장통을 이룬다.
특히나 북촌8경을 비롯한 북촌의 주요 명소들은 항시 사람들로 미어터진다. 게다가 북악산을
등지고 앞에 청계천이 있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세이고 도심의 한복판임에도 고즈넉하고
차분한 분위기 때문에 졸부들과 공장(工匠)과 예술가 등이 앞다투어 들어오면서 누워있던 북
촌 땅값이 끝없이 치솟고 있다.

한옥이 즐비하게 늘어선 골목길을 걸으며 사진을 찍는 것은 북촌의 제일 가는 운치로 꼽힌다.
허나 곳곳에 숨겨진 다양한 테마의 박물관과 문화/전시/체험공간, 문화유산들 거기에 맛집을
찾아다니는 재미는 북촌의 가장 큰 매력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북촌에 둥지를 튼 박물관은 약 10여 곳 정도로 대부분 규모가 작은 사립박물관이다. 그
러다보니 입장료는 시중보다 상당히 얄미운 수준이다.(성인 기준으로 2,000~6,000원선, 입장
료는 2~3년 간격으로 계속 오르고 있으니 해당 홈페이지나 전화로 문의 요망)

북촌 답사의 기점은 3호선 안국역(2/3번 출구)로 잡는 것이 좋다. 북촌 초보라면 북촌문화센
터로 일단 달려가 북촌안내책자를 손에 쥐고 북촌에 대한 기초 지식을 읽은 다음에 나들이에
임하기 바란다. 그리고 정독도서관 입구와 재동초교에 북촌관광안내소가 있으니 거기서 지도
와 안내책자를 얻어도 된다.
북촌 골목길이 워낙 미로처럼 얽히고 설켜있어 헤매기가 딱 좋으며, 박물관과 알려지지 않은
명소들이 대부분 골목 속에서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다. 관광객 대부분은 북촌8경이라 불리는
사진 찍기 좋은 곳과 정독도서관 주변, 북촌을 가르는 주요 도로인 가회로와 삼청동길, 계동
길, 북촌길 일대에만 새까맣게 몰려있는데 북촌의 매력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큰 골목길과
작은 골목길을 가리지 않고 구석구석 돌며 숨겨진 명소를 숨바꼭질하는 것이다. 그들을 찾으
며 술래에서 벗어난 그 기분은 정말 형용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성북동, 부암동(付岩洞)만큼이나 나의 마음을 앗아간 북촌을 지금까지 수십 번이나 들락거렸
지만 아직도 미답지가 여럿 있다. 북촌이 서울에서 가장 작은 지방자치구역인 중구보다 훨씬
작은데도 말이다. 남들은 '그렇게 다녔으면 북촌을 다 둘러봤겠구나~' 말을 꺼내지만 여태까
지도 개척하지 못한 골목길과 명소가 적지 않게 존재한다.
지금도 계속 북촌의 숨겨진 속살을 찾고 있는데, 새로운 곳을 발견하면 '이런 곳이 있었구나.
왜 이제서야 알게 된 걸까?' 정말 내심 놀란다. 겉은 작지만 신대륙 이상으로 신세계와 보물
을 품은 꿀단지가 바로 북촌이다.

북촌에는 밤하늘을 장식하는 별처럼 한옥이 많지만 민속문화재나 사적으로 지정된 고택(古宅)
처럼 완전한 전통 한옥은 그리 많지 없다. 거의 대부분 왜정 이후에 지어졌고 시대와 편의에
맞게 개량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두고 안좋게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시대가 지나면 한옥도 바뀌는 법이다. 특
히나 이곳 한옥은 민속촌에 있는 전시용 한옥과 달리 사람들이 살고 있고 숙박시설로도 쓰이
므로 편의에 맞게 변화할 필요가 있다, 아직까지 꺼림칙한 재래식 화장실을 쓰고, 부엌 부뚜
막에서 밥을 지으며, 나무와 숯으로 불을 뗀다면 불편해서 어떻게 살고 머물겠는가? 다 시대
에 맞게 변하는 것이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 20~21세기 한옥 양식이라 하여 건축사나 미술사
에서 한페이지를 장식할 것이다.


♠  조선 후기 한옥을 개량하여 북촌을 안내하는 공간으로
거듭난 북촌문화센터 - 등록문화재 229호

▲  북촌문화센터 대문과 바깥채

북촌문화센터로 쓰이는 기와집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양반가로 고종 때 민씨 세도가(勢道家)
의 하나이자 왜정 때 탁지부(度支部) 재무관(財務官)을 지낸 민형기의 집이다. 한때 '계동마님
댁'으로 장안에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집 구조는 안채와 바깥채, 앞행랑채, 뒷행랑채, 사당(祠堂)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계동마
님이 사라진 이후 크게 쇠락하고 만다. 그러다가 2002년에 서울시에서 북촌 가꾸기 사업의 일환
으로 매입하여 기존 한옥의 원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말끔히 몸단장을 시켜 그해 10월 북촌을 안
내하는 북촌문화센터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대문을 들어서면 'ㄷ'자형 안채와 'ㄱ'형 행랑채가 나오고, 중문을 지나면 'ㄱ'자형
안행랑채(별당)가 나온다. 안채는 안방과 부엌을 개조하여 서울시청 한옥문화과 사무실과 한옥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상담하는 수선 상담실을 두었으며, 회의실과 주민들의 사랑방(舍廊房)을
갖추고 있다.

뒷행랑채는 전부 터서 북촌홍보전시관으로 삼아 북촌의 역사와 현재의 모습을 여러가지 자료로
다루고 있는데, 영상물도 준비하여 북촌에 대한 이해를 돕게 하는 한편, 북촌안내책자와 지도도
여기서 얻을 수 있다. 이곳을 지나면 집의 뒷부분이 나오는데, 여기에 2칸 규모의 아담한 정자
가 있다. 원래 사당이었던 것을 정자로 개조하여 두 다리를 쉬어가는 쉼터로 삼았는데, 서울 도
심에서는 흔치 않은 이색 공간으로 다른 건물과 달리 기단(基壇)이 높아 예전에 사당이 있었음
을 짐작케 한다.
정자를 지나면 안행랑채라 불리는 별당(別堂)이 나오는데, 이곳은 온갖 공예와 예절과 다도(茶
道), 전통주 만들기, 민화 그리기 등 다양한 전통문화 강좌를 연다. (자세한 것은 북촌문화센터
홈페이지 참조)

※ 북촌한옥센터 찾아가기 (2013년 1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를 나와서 현대사옥 못미쳐 골목길로 좌회전하면 된다. 안국역
  에서 도보 3분 (입장료 없음)
* 관람시간은 9시 ~ 18시 (토,일은 17시까지)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105 (☎ 02-3707-8388, 8270)
* 북촌문화센터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대문을 들어서면 중문과 'ㄷ'자형 안채가 나온다.

▲  안채 서쪽 (한옥문화과 사무실)

▲  안채 동쪽 (안방과 사랑방)


▲  중문과 짧은 담장
중문 담장은 다른 담장과 이어지지 않고 안채 가운데 기둥에서 끝을 맺는다.

▲  북촌홍보전시관으로 탈바꿈한 뒷행랑채
북촌의 역사와 현재, 한옥의 구조에 대한 관련 자료들이 하얀 벽을 조촐하게 채운다.

▲  뒤쪽에 자리한 2칸 규모의 정자
원래 사당이었던 곳으로 지금은 누구나 발을 멈추고 쉴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정자 뒤쪽에는 외부로 나가는 문이 있는데 늘 닫혀있다.

▲  안행랑채(별당)와 뒷간(왼쪽)

정자 동쪽에 자리한 안행랑채는 툇마루를 갖추고 있는데, 여기서는 다양한 전통문화를 배울 수
있다. (강좌는 보통 3개월 과정으로 진행되며, 여기 외에도 안채와 사랑방에서도 강좌가 열림)
그 곁에는 뒷간이 있는데, 겉은 한옥이지만 속은 현대식 시설로 무장하고 있어 괜한 걱정은 안
해도 된다. 그들 뒤로 현대식 건물들이 이곳을 굽어보고 있으니 과거와 현재가 서로를 인정하며
공존하는 북촌의 현재를 잘 보여준다.


♠  관상감관천대, 계동길 주변

▲  현대사옥 그늘에 가려진 관상감 관천대(觀象監 觀天臺) - 사적 296호

안국역에서 창덕궁 쪽으로 가다보면 하늘 높이 솟은 육중한 건물, 현대사옥을 만나게 된다. 그
앞에는 현대사옥에 짓눌려 초췌해 보이는 고색의 때가 낀 석조 건축물이 자리해 있다. 바로 조
선시대에 천문(天門)과 기상을 관측하던 관천대(觀天臺)이다.

관천대란 돌로 만든 시설로 해와 달, 별의 움직임은 물론 일식과 월식, 비와 눈 등의 기상현상
을 눈으로 살피던 관상감의 관측시설이다. 관천대는 우리나라에 딱 2개가 남아있는데, 하나는
창경궁(昌慶宮)에 있는 관천대(보물 851호)로 조선 숙종(肅宗) 때 만들어졌고, 다른 하나는 바
로 이곳 관천대로 세종(世宗) 때 조성되었다. 문화재청에서는 이들을 구별하기 위해 관천대의
원로인 이곳을 관상감 관천대라 부른다.

이 관천대는 1434년(세종 16년) 경에 설치되었다고 하며, 현대사옥 동쪽 부분과 그 동쪽에 있는
언덕(원서공원)에 있었다. 높이가 4.2m, 가로 2.8m, 세로 2.5m 크기로 대(臺) 위에 돌난간이 둘
러져 있고 그 안에 화강석대()가 놓여 있으며, 여기에 소간의(小簡儀)와 해시계 등의
천문기기를 올려 하늘의 표정을 살폈다. 소간의를 올려 놓는 곳이라 하여 소간의대(小簡儀臺)라
불리기도 하며, 별을 관측하는 곳이라 하여 첨성대(瞻星臺)란 애칭도 가지고 있다. 가만 보면
우리나라 옛 천문시설의 성지(聖地)로 일컬어지는 첨성대와도 조금은 닮아 보이기도 한다.

원래는 대 위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었으나 오래 전에 사라졌으며, 현대사옥 자리에 휘문고보
(휘문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그 교정으로 옮겼다. 이후 1978년 학교가 강남으로 건너감에 따라
1983년 지금의 현대사옥이 들어서게 되었으며, 1984년 지금의 자리에 해체 복원되었다.

관천대를 복원할 당시, 원래 있던 자리와 땅의 높이를 맞추고자 평지에 2단의 석축을 쌓아 대를
만들고 그 위에 올렸으며, 석축 동쪽에는 관천대로 오르는 계단을 냈다. 허나 그래봐야 고작 3
층 높이 밖에는 되지 않으며, 바로 뒤에 현대사옥이 버티고 서 있으니 마치 해와 달의 격차를
보는 듯 하다. 원래 자리에 두기 힘들다면 차라리 원서공원이나 고층 빌딩의 눈치가 적은 곳으
로 옮기면 좋으련만..

이제는 현역에서 은퇴한 천문시설의 잊혀진 원로로 현대사옥의 그늘에 가려져 천문관들이 바쁘
게 왔다갔다하며 천문을 살피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물건이든 현역에
서 물러나 앉은 모습은 초라하고 쓸쓸하기 그지 없다.

참고로 현대사옥 자리에는 관상감과 휘문고등학교 외에 경우궁<景祐宮, 정조의 후궁인 수빈박씨
(綏嬪朴氏)의 사당>이 사옥 북쪽에, 남쪽에는 계동궁<桂洞宮, 흥선대원군의 장조카인 이재원(李
載元)의 집>이 있었으며, 경우궁과 계동궁은 갑신정변 때 개화당 패거리가 고종과 왕족을 호위
하며 잠시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206-2 (안국역 3번 출구에서 도보 1분)


▲  큼직한 돌들이 모여 이루어진 관천대, 돌에는 오랜 세월의 떼가
아낌없이 깃들여져 있어 중후한 멋을 선보인다.

▲  굳게 입을 봉한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고택

사업가이자 교육가, 언론인으로 우리나라 2대 부통령(副統領)을 지낸 인촌 김성수(1891~1955)가
살던 집으로 1919년 2.8독립선언을 위해 독립지사들이 왜정의 감시를 피해 모인 장소이자, 민주
화운동을 위해 지식인들이 모여 결의를 다진 현장이기도 하다. 현재는 인촌기념회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내부 관람은 거의 불가능하다.
고택 내부를 꼭 보고 싶다면 억지로 대문을 열거나 월담을 하지 말고 바로 동쪽 언덕에 자리한
대동세무고등학교로 달려가 서쪽 담장 너머로 내려다보기 바란다.

◀  공방 겸 찻집을 겸한 봉산재(奉山齋, 봉산아
트센터)
북촌문화센터에서 중앙고교로 이어진 계동길 중
간에 자리한 봉산재는 2007년 10월에 문을 열었
다. 나성숙 교수가 옻칠, 황칠을 하는 공방(工
房)으로 전시실과 찻집도 겸하고 있어 전통차 1
잔의 여유를 누 수 있다. 차의 가격은 5~6천원
선, 봉산재 홈페이지는 옆 사진을 클릭한다.
* 서울 종로구 계동 73-6 (개방시간 10시~18시
/ 매주 월요일, 명절 휴관 / ☎ 02-766-6649)


▲  북촌게스트하우스로 변신한 계동 배렴(裵濂) 가옥 - 등록문화재 85호

봉산재 뒤에는 북촌한옥체험관(북촌게스트하우스)이 있는데, 동양화의 거목으로 명성을 날린 배
렴(裵濂, 1911~1968)이 살던 기와집이다.
왜정 때 지어진 것으로 3동의 건물이 'ㅁ'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배렴이 사라진 이후 SH공사가
인수하여 외국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통체험을 겯드린 숙박업소로 변신했다. 북촌게스트
하우스 관련 정보는 윗 사진을 클릭한다.
* 서울 종로구 계동 72 (☎ 02-743-8531)


▲  이가(李家) 문화체험원
다도(茶道)와 예절을 비롯하여 전통 음식을 만드는 문화체험공간이다.
이곳은 왜인(倭人)들에게 인기가 높아서 그들의 한국문화체험과
학습을 위한 필수 코스로 자리매김하였다.

* 서울 종로구 계동 50-1 (☎ 02-762-4900)
* 개방시간 10시 30분 ~ 20시 (1,3째주 일요일은 쉼)

▲  지금은 죽어버린 석정보름우물터

이가문화체험관 부근에 '석정보름우물'이라 불리는 동그란 우물이 하나 있다. 겉으로 보면 근래
에 만든 것처럼 보이고 안내문도 하나 없어 사연을 모르는 속인들은 무심히 지나치기 일쑤지만
오래 전부터 계동 지역의 식수를 담당하던 동네 우물이자 서울 땅에 몇 남지 않은 우물로 가치
가 높다.

이 우물은 보름마다 물이 차올라 15일 동안을 맑고, 15일 동안은 흐려진다는 뜻에서 석정보름우
물이라 불리며, 예전에는 우물 위에 슬레이트로 만든 지붕을 만들어 그를 보호했으나 도심이라
물이 마르고 오염되어 결국 우물은 문을 닫고 말았다. 그 이후 1987년 돌과 시멘트로 우물을 복
원하면서 지금은 '석정보름우물터'라 불린다. 이제는 물도 나오지 않는 그저 형색만 갖춘 죽은
우물이지만 북촌의 소중한 옛 역사의 한쪽을 장식하는 소중한 존재이다.

18세기 후반, 청나라에서 온 천주교(天主敎) 신부 주문모(周文謨, 1752~1801)가 계동에 숨어살
면서 영업(?)을 했을 때, 이 우물에서 퍼온 물로 영세를 주었다고 전
한다.

◀  석정보름우물터와 나란히 있는 유심사
(惟心社)터 표석
유심사는 만해 한용운(韓龍雲) 선생이 중앙학교
(중앙중고교) 학생들에게 3.1독립정신을
심어주고 일깨워주던 곳이다.


▲  고풍스런 분위기의 락고재(樂古齋) 한옥체험관 정문

재동초등학교 뒤쪽에 락고재라 불리는 제법 규모가 있는 한옥이 있다. 이곳의 이름인 '락고(樂
古)'는 '옛것을 누리는 맑고 편안한 마음이 절로 드는 곳','옛 선비의 풍류를 즐긴다'는 풍류적
인 뜻이 담겨져 있으며,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130년 묵은 오래된 집으로 진단학회(震檀學會)가
잠시 사용한 적이 있었다.

근래에 이르러 인간문화재 정영진 옹(翁)이 개조하여 전통체험 및 숙박을 할 수 있는 한옥체험
관으로 거듭났으며, 외국인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곳은 방마다 화장실
이 따로 설치되어 편의를 도모했고, 전통 음식과 국악 등의 다양한 문화체험은 물론 천기토로
만든 장작 찜질방까지 갖추고 있다. (단 숙박비가 비쌈 20~25만원선) 특히 집을 에워싼 담장은
전통 토담으로 정겹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진하게 우려내 문을 열고 들어가 머물고 싶은 충동
을 절로 일으킨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218 (☎ 02-742-3410)
* 락고재 홈페이지는 위와 밑에 있는 락고재 사진을 클릭한다.

▲  락고재 뒤쪽

▲  옻칠공방 칠원(漆院, 한국옻칠연구소)

칠원은 서울 지방무형문화재 1호 칠장(漆匠)의 기능보유자인 신중현씨가 운영하고 있다. 옻칠이
란 목기(木器)의 수명을 늘리고 아름다움을 더하고자 옻나무에서 채취한 나무액을 목기(木器)에
칠하는 것으로 이런 목기를 칠기(漆器)라고 한다. 옻칠에는 고무질이 있어 방수에 효과가 있으
며, 잘 썩지 않는다. 또한 옻칠은 오래될 수록 단단해지고 습기와 벌레를 방지하는 효과도 있다.

칠원은 오래된 한옥을 매입하여 목조를 개보수했으며, 옻칠 작품이 앞뜨락과 툇마루, 공방 곳곳
에 전시되어 있다. 옻칠과 관련된 유물 300여 점과, 국내 작가들의 옻칠 공예품 200여 점, 옻칠
화 30여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옻칠 체험프로그램도 운영한다.

* 소재지 : 서울 종로구 계동 25 (☎ 02-764-5775)
* 개방시간 : 10시 ~ 18시 (월요일 휴관) / 칠원 홈페이지는 아래 칠원 내부 사진을 클릭한다.

▲  옻칠공방 칠원 내부

▲  옻칠공방에서 만난 고양이 조각품
묘공(猫公)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귀여운 모습으로 꼬랑지가 방망이처럼
유난히 길고 굵직하다.

▲  골목 구석에 자리한 심화숙 한지공방

▲  심화숙 한지공방 내부

심화숙 한지공방은 우리의 전통 종이인 한지(韓紙)로 다양한 공예품을 만드는 공방이다. 한지에
그림을 그리는 지화 공예와 색색의 종이를 붙여 그림을 만드는 한지 회화, 종이실로 직물을 짜
는 한지 섬유 공예, 종이를 여러 가지 문양으로 잘라 기물에 붙이는 전지 공예 등 다양한 공예
가 적용된 가구와 옷, 모자, 항아리, 생활용품을 전시/판매하며, 공방 체험도 가능하다.

* 소재지 : 서울 종로구 계동 32-10 (☎ 02-394-6534)
* 개방시간 : 10시 ~ 17시 (월요일 휴관)


▲  중앙중고 동남쪽의 작은 골목길 ▼
북촌의 조그만 골목길을 거니는 것은 북촌의 백미와 보석을 캐는 것과 같다.
큰길이나 사람들이 많은 길만 다니지 말고 반드시 작은 골목길도
둘러보기 바란다.


♠  창덕궁과 맞닿은 북촌의 동쪽 끝, 원서동과 창덕궁길 주변

▲  북촌 주택가와 창덕궁의 경계선인 창덕궁 돌담길 (창덕궁길)

▲  시골 읍내 같은 원서동과 창덕궁길

창덕궁길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에서 창덕궁 돌담길을 따라 원서동으로 이어지는 북
촌의 주요 간선로이자 북촌의 동쪽 경계선이기도 하다. 창덕궁과 속세를 구분짓는 높다란 돌담
과 나란히 이어진 길로 동쪽은 궁궐 돌담, 서쪽은 백성들의 주거지로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인
다. 그래서 덕수궁(德壽宮)이나 경복궁, 창경궁 돌담길보다는 다소 운치가 떨어진다. 돌담길은
요금문을 지나서부터 집들로 인해 돌담과 조금 멀어지게 되며 빨래터에서 다시 만나게 되나 거
기서 길은 끝나버린다.

북촌의 동쪽 변두리이자 창덕궁길이 지나는 원서동(苑西洞)은 창덕궁 후원(後苑) 서쪽에 있다고
하여 유래된 이름으로 조선 때는 원동<苑洞, 원동(園洞)>이라 불렸다고 한다. 또한 왜정 때 창
경궁을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시키고 그 서쪽에 있다는 뜻으로 붙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  창덕궁 요금문(曜金門)

돈화문에서 창덕궁돌담길을 따라 원서동 쪽으로 들어가면 창덕궁과 바깥을 이어주는 조그만 궁
문(宮門), 요금문이 모습을 비춘다. 문 앞에는 어린이 놀이터와 속인들의 집이 있고 쓰레기봉지
도 가까이에 널려있어 다소 어수선해 보인다. 돌담길 일부 구간은 이렇게 민가들이 돌담과 무책
임하게 붙어 있는데, 돌담길 주변 정화가 무척 절실해 보인다.

요금문은 창덕궁 서쪽에 뚫린 3개의 문의 하나로 후원과 매우 가깝다. 이 문은 궁녀와 내관, 상
궁(尙宮) 등이 드나들던 통로로 상궁과 내관이 죽으면 그들의 시신을 이 문을 통해 내보냈다.
창덕궁이 지어진 태종(太宗) 때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처음에는 문의 이름이 없었다. 그러
다가 성종(成宗)이 서거정(徐居正)에게 문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했는데, 서거정이 '요금문'
이란 이름을 올리면서 그것이 문의 이름이 되었다.

그저 평범해 보여 지나치기 쉬운 이 문에는 2개의 옛 이야기가 서려 있다.
1623년 세검정(洗劍亭)에서 칼을 갈고 반란을 일으킨 서인(西人) 패거리에 의해 왕이 된 얼떨떨
하고 통이 작은 인조(仁祖), 그는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을 보기 좋게 당
한 이후, 그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리고 살았는데, 그 후유증을 달래고자 창덕궁 후원에 경치 좋
은 곳을 골라 정자를 지으려고 했다.
허나 신하들이 쌍수를 들고 반대하자 몰래 공사를 진행시켰다. 매년 12월에는 요금문을 통해 얼
음을 궁내(宮內)로 운반했는데, 그 문이 마침 후원과 가깝고 숲이 무성해 인적이 드물었다. 그
래서 내관에게 몰래 일러 문을 닫는 시기를 늦추게 하면서 공사에 쓰일 나무와 돌을 몰래 궁으
로 들여와 정자를 지었다. 이를 발견한 신하들은 상소문(上疏文)을 올려 중단할 것을 청했으나
인조는 '유념하여 채택해 사용하겠다'고만 할 뿐, 끝내는 정자를 완성시켰으니, 과연 부국강병(
富國强兵)에는 관심은 없고 허울뿐인 대의명분에 휩싸여 나라를 망친 임금다웠다.

또 하나는 숙종 때에 일이다. 조선을 통틀어 민중부터 관료들에 이르기까지 전폭적인 사랑을 받
았던 인현왕후(仁顯王后), 그녀가 숙종(肅宗)에게 폐위되었을 때, 흰 옥교(玉轎)에 실려 이 문
을 통해 추방되었다. 이때 많은 관료들과 선비, 백성들이 옥교를 따라오며 통곡을 했다고 한다.
이후 인현왕후를 다시 복위시킬 때 이 문을 통해 창덕궁으로 들어왔다.

현재 요금문은 굳게 닫혀져 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열릴 일은 없을 것이다. 창덕궁으로
들어가려면 입장료를 내고 무조건 돈화문으로 들어가야 되기 때문이다.

◀  요금문 현판의 위엄
요금문은 입장료, 요금을 뜻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빛나다와 일월(日月), 오성(五星)을
뜻한다고 한다.


▲  수레 1대 다닐 정도로 좁은 원서동 골목길

▲  궁중음식연구원
조선왕조 궁중음식(중요무형문화재 38호)을 연구하고 전수하는 곳으로 1971년에
설립되었다. 이곳은 궁중음식으로 유명한 황혜성, 한복려 선생 모녀가 운영하고 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34 (☎ 02-3673-1122~3)
* 궁중음식연구원 홈페이지는 위의 사진을 클릭한다.

▲  창덕궁 후원 물이 졸졸 흐르는 빨래터

창덕궁돌담과 이어진 원서동 북쪽 끝에 창덕궁 후원 물이 속세로 나오는 공간이 있다. 담장 밑
에 수구(水口)를 뚫어 후원(後苑)의 물을 쏟아내고 있는데, 도심 속 청정지대인 후원에서 나온
물이라 제법 차고 깨끗하다. 수구 앞에는 발을 들일 수 있는 약간의 공간이 있는데, 이곳을 빨
래터라고 부른다. 말그대로 동네 아낙들이 빨래를 하던 공간이다.

담장 안쪽은 태조(太祖)와 제왕들의 어진(御眞)을 봉안하던 신선원전(新璿源殿)이 있다. 창덕궁
가장 서쪽 구석에 자리한 신선원전은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비공개구역으로 남아있는데, 중앙
중고교 운동장에서 철조망 너머로 그곳을 굽어볼 수 있다. 운동장 축대 바로 밑이 바로 신선원
전이기 때문이다. 그곳 주변을 흐르는 계곡이 바로 빨래터로 흐르는 것이다.

이곳이 빨래터가 된 것은 옛날 궁녀들이 이 물에 세수나 빨래를 할 때, 쌀겨나 조두를 많이 사
용했는데, 그것을 쓰면 물이 뿌연 색을 띄었다. 이런 물에서 빨래를 하면 때가 잘 진다고 하여
장안 아낙들이 몰려와 빨래를 하면서 빨래터가 된 것이다. 궁궐 내를 흐르는 계곡이나 금천(禁
川)이 바깥으로 흘러가는 통로는 여럿 있지만 이곳은 숲이 우거진 후미진 곳이고, 담장 너머로
바로 민가들이 있기 때문에 여염집 처자들이 빨래를 하기에는 제격이다. 게다가 궁궐에서 나온
물이니 그 물로 가족들의 옷을 빨았다는 긍지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을 통해 세상 구경을 나온 계곡은 창덕궁길을 따라 청계천으로 흐르는데, 도시화란 이유로
죄다 콘크리트로 생매장을 당했다. 그들의 속살을 속시원히 드러내면 좋으련만 정녕 어둠의 경
로로 흐르게 하는 것이 최선인 것일까?


▲  강제로 어둠의 경로로 흘러야 되는 빨래터 물의 비애

▲  굳게 닫힌 창덕궁 신선원전 외삼문(外三門)

▲  원서동 백홍범(白鴻範) 가옥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13호

빨래터를 지나 돌담길의 막다른 곳에 이르면 높다란 담장과 굳게 닫힌 문으로 일관하는 한옥이
있다. 그 집이 바로 지방민속문화재로 지정된 백홍범 가옥이다. 이 집은 원래 안채의 별채로 '
ㄱ'자 모양을 띄고 있는데, 안채 자리에는 근래에 지은 양옥이 있으며, 동남쪽에 작은 방 1채가
있다.
1910년 전후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조선 황실(皇室)에서 은퇴한 상궁들이 주로 기거했으
며, 그 유명한 장희빈(張禧嬪)의 집도 이곳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창덕궁 돌담을 따라 이곳까지 들어왔지만 여기서 더 이상 길은 열리지 않아 왔던 길로 다시 되
돌아나가야 된다. 창덕궁에 단단히 막히고 길도 좁은 빨래터 일대는 도심 속의 외로운 벽지 같
은 곳이다.

* 백홍범 가옥, 빨래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9-5

* 창덕궁 돈화문에서 돌담길을 따라 도보 12분 거리
* 안국역 2번 출구에서 종로구마을버스 01번을 타고 빨래터(고희동 가옥)에서 내리면 된다. 허
  나 거리가 멀지 않으므로 걸어가기를 권한다. 안국역 3번 출구에서 도보 17분 거리이다.


▲  고희동(高羲東) 가옥 - 등록문화재 84호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1886~1965)이 왜국 유학을 마치고 1918년에 돌아와 직접 설
계하여 만든 한옥이다. 대지 540㎡, 연면적 250㎡ 규모의 ㄱ자형 구조를 이룬 4동의 단층집으로
서양 주거문화와 왜열도 주거 문화의 장점을 취해 한옥에 적용했는데, 그는 이곳에 41년을 살면
서 많은 제자를 길러내고 그림을 그렸다. 또한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의 휘문고보 미술 스승
으로 그에게 문화유산 수호를 권하며 그의 길을 인도한 등불 같은 인물이기도 하다.

고희동이 세상을 뜬 이후, 2002년 절대절명의 위기가 다가왔다. '한샘'이란 회사가 원서동에 사
무실과 연구소를 만들면서 주차장을 만들고자 이 집을 매입하여 싹 밀어버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에 내셔널트러스트 등 시민단체가 강하게 발벗고 나서자 한샘의 야욕은 보기 좋게 좌절되었다.
이후 서울시가 인수하여 낡은 집을 보수했으며, 2012년 11월부터 속세에 개방되어 2013년 1월
15일까지 오픈 기념 특별전(춘곡 고희동의 집을 열다)을 조촐하게 열었다.


* 관람시간 : 10시 ~ 16시까지 (매주 수~일요일에 개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16 (☎ 02-2148-4165)


▲  비원손칼국수에서 먹은 칼국수와 만두

북촌에는 그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먹을거리와 맛집도 풍부하다. 특히 삼청동에는 청와대나 국무
총리공관 등의 고위 관료들이 단골로 찾는 식당들이 많다보니 다른 곳보다 맛의 질과 가격이 높
은 편이다. 거기에 찻집과 까페도 즐비하니, 구경 잘하고, 거기에 1끼 잘 먹고, 차 1잔의 여유
까지 누릴 수 있다.

현대사옥 뒤쪽 북촌1경 부근에 자리한 비원손칼국수는 칼국수 전문 식당이다. 잘 우려낸 국물에
국수사리와 파 등을 넣은 것으로 국수도 괜찮지만 국물 맛이 단연 일품이다. 반찬은 부추와 김
치 2종류로 칼국수의 찬으로는 적당하나 별도 메뉴인 만두는 높은 가격에 비해 양도 적고 맛도
시중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평범한 맛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원(秘苑)이란 말도 왜정이 창덕
궁 후원을 깎아내리고자 쓴 말인데 그걸 식당 이름으로 쓰고 있으니 이 또한 함정이면 함정이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이름을 바꾸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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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1월 1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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