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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6.29 도심과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국제적인 선찰로 명성이 높은 북한산 화계사 ~~~ (화계사의 석가탄신일 야경)
  2. 2018.06.12 단종애사의 슬픈 이야기가 깃든 도심 속의 고즈넉한 비구니 절집, 낙산 숭인동 청룡사 ~~~ (동망봉) 2

도심과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국제적인 선찰로 명성이 높은 북한산 화계사 ~~~ (화계사의 석가탄신일 야경)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북한산 화계사의 야경 '


▲  화계사 대웅전과 초파일 연등의 향연


 

올해도 변함없이 내가 좋아하는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이하 초파일)이 다가왔다. 초파
일만 되면 어김없이 내가 서식하는 서울 장안의 오래된 절이나 비록 역사는 짧지만 문화
유산을 간직한 현대 사찰을 중심으로 초파일 순례를 가장한 절 투어를 벌이고 있다. 허나
이번에는 전날 과음으로 인해 새벽 4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왔고 14시가 넘어서야 겨우
천근만근 같은 두 눈이 떠졌다. 그래서 15시가 넘어서 겨우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자꾸 기울어만 가는 햇님을 원망하며 열심히 걸음을 재촉해 숭인동에 있는 낙산 청룡사(
靑龍寺, ☞ 관련글 보러가기), 삼선동 정각사(正覺寺)를 둘러보고 삼선교(한성대입구역)
로 나오니 벌써 18시를 가르킨다.
3시간 가까이 바쁘게 움직였더만 몸도 좀 피곤하여 더 이상의 욕심을 버리고 철수하려고
했으나 화계사로 가는 151번 시내버스(우이동↔흑석동)를 보는 순간 마음이 변덕을 부려
계획에도 없던 화계사(華溪寺)로 길을 향했다.
아직 해가 조금은 남아있어 벌써 발길을 돌리기에는 다소 아쉬웠고, 연등의 향연이 펼쳐
지는 초파일 야경은 꼭 봐줘야 된다. 게다가 1년에 딱 하루 밖에 없는 날이니 제대로 즐
겨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화계사에 이르니 저녁 시간임에도 절을 찾는 수요가 엄청났다. 많은 사람들이 절에서 나
오고 또 그만큼 들어가기를 반복하여 화계사입구(한신대교차로)는 사람과 차량으로 북새
통을 이루었다. 하긴 서울 동북부 지역(도봉/강북/노원구)에서 도선사(道詵寺) 다음으로
크고 유명한 절집이니 사람들이 미어터지는 것은 당연하다. 썰물처럼 밀물처럼 들어가고
나오는 인파 속을 헤엄치며 간신히 일주문(一柱門)을 들어섰다.

경내를 코 앞에 둔 장소에서 신도 아줌마들이 백설기라 불리는 두툼한 떡을 나눠주고 있
었는데 그 떡을 1개 챙기며 초파일 야경에 잠긴 화계사 경내로 들어섰다. 햇님도 뉘엿뉘
엿 저물어 그만의 비밀 공간으로 숨어들고, 그 틈을 타 달님이 어둠을 내리니 조용히 웅
크리던 연등은 일제히 몸을 불살라 어둠을 몰아낸다. 바로 초파일 풍경의 백미(白眉)인
연등의 향연이 두근두근 시작된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화계사의 내력에 대해 간단
히 살펴보도록 하자.


▲  서서히 초파일 저녁 향연을 준비하는 화계사 연등
(대적광전에서 바라본 모습)


 

♠  화계사 입문 (범종각 주변)

▲  화계사 일주문 장엄등의 위엄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화계사는 1522년 신월선사(信月禪師)가 창건했
다고 전한다.
신월은 서평군 이공(西平君 李公)의 도움을 받았는데, 나무를 벌채를 하지 않고 인근 부허동(
浮虛洞)에 있었다고 전하는 보덕암(普德庵) 건물(법당과 요사 50칸)을 가져와 절을 세웠다. 아
마도 서평군이 그곳을 접수하여 절 건립에 제공했던 모양이다.
화계사 건립에 희생된 보덕암은 고려 광종(光宗) 때 법인대사(法印大師) 탄문(坦文)이 창건했
다고 전하나 확실한 것은 없다. 보덕암 건물을 단순히 옮겨왔다는 이유로 화계사의 창건시기를
고려 초로 우기기도 했으나 이는 단순히 건물만 가져왔을 뿐, 절의 이름과 성격은 다르므로 엄
연한 별개로 봐야 된다. 그래서 1522년을 창건 시기로 크게 삼고 있으며, 대적광전 앞에 450년
묵은 느티나무가 있어 절의 창건시기를 그런데로 받쳐준다.

1618년 9월 불의의 화재를 만나 절이 싹 잿더미가 되었다. 이때 도월(道月)이 덕흥대원군(德興
大院君) 집안의 지원을 받아 중창 불사를 벌여 1619년 3월 완성을 보았다.
이후 절이 크게 쇠퇴했으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 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민씨(府大
夫人閔氏)와의 인연 덕분에 다시금 흥한 기운을 얻게 된다. 당시 화계사는 민씨 외가의 원찰(
願刹)로 민씨는 자주 이곳을 찾아 불공을 올렸는데 그러다보니 대원군도 부인 손에 이끌려 이
곳을 찾았다.
당시 대원군과 화계사와의 끈끈한 인연, 그리고 대원군의 야망을 엿보게 하는 설화 한 토막이
세월의 바람을 타며 은은히 전해온다.


▲  반야용선(般若龍船) 장엄등
석가탄신일 1주 전 토요일에 열리는 서울 연등회(燃燈會) 제등행렬에
단골로 참여하는 장엄등이다.


때는 바야흐로 안동김씨 세력이 신나게 나라를 말아먹던 시절의 어느 여름날<헌종(憲宗) 때로
여겨짐>, 대원군은 남루한 옷차림으로 화계사를 찾았다. 무더운 여름이라 참을 수 없는 갈증으
로 꽤 지친 상태였는데 절 앞 느티나무에 이르니 왠 동자승(童子僧)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꿀
물이 든 사발을 내밀었다.
대원군은 지옥에서 부처를 만난 듯, 사발을 신나게 들이키고 물을 준 이유를 물었다. 동자승이
괜히 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자 동자 왈 '만인(萬印) 스님께서 이러이러한 손님이 오실
것이니 꿀물을 드리고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대원군은 자신이 올 것을 짐작했던 만인의 예지력에 크게 감탄하며 동자승의 안내로 만인의 방
으로 들어갔다.

대원군과 만인, 이들은 이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지 이번이 초면인지는 모르겠으나 금세 심금
을 터놓고 판이 큰 이야기꽃을 피웠는데 대원군은 안동김씨를 몰아내고 왕권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며 자신의 야망을 드러냈다. 허나 만인은 그의 야망은 물론이고 장차 나라를
좌지우지할 인물이 될 것을 예견하고 있던 터라 크게 놀라진 않았다.
그래도 시치미를 한번 뚝 떼며, '이것도 다 인연의 도리인데, 소승이 어찌하겠습니까? 흔쾌히
알려 드리지요'
그렇다면 그 방법은 무엇이냐? 충청도 덕산(德山,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가야사(伽倻寺) 금탑
자리가 제왕(帝王)이 태어날 명당(明堂)이니 연천(漣川)에 있는 남연군(南延君,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의 묘를 그곳으로 옮기라는 것이다. 그러면 장차 제왕이 될 왕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명당 자리를 알려주는 것은 좋으나 그 자리에 이미 절이 있다. 절에 몸 담은 승려로써 참으로
몹쓸 말을 한 꼴이 된다. 허나 그렇게 흥선대원군이란 든든한 후광(後光)을 얻게 됨으로써 가
야사에게는 미안하지만 화계사는 이전보다 더 흥하게 된다. 그게 바로 만인이 노린 것이다.

대원군은 돈을 마련하여 가야사를 찾아가 그곳 주지승과 흥정했다. 돈에 함빡 넘어간 주지승은
자기 절에 불을 지르며 탑을 부셨고, 대원군은 남연군 묘를 그곳으로 이전했다. 이후 아들 이
재황(李載晃)이 태어났고, 1863년 조대비(趙大妃)의 지원을 받아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고종(高
宗)이다. 이렇게 대원군의 꿈은 그런데로 이루어진다. 동시에 만인의 꿈도 실현된다. 허나 그
러면 무엇하랴? 3대도 못가서 나라를 보기 좋게 말아먹었거늘...

▲  대적광전(大寂光殿)

▲  보화루<寶華樓, 화장루(華藏樓)>

고종 이후, 화계사는 날개를 겹겹히 달게 되는데, 1866년 대원군의 두둑한 지원으로 절을 중수
했으며 이때 지어진 것이 대웅전과 보화루(화장루)이다. 1870년에는 용선(龍船)과 초암(草庵)
이 대웅전을 중수했고, 1875년 화산재근(華山在根)이 대웅전의 아미타후불탱을, 성암승의(性庵
勝宜)가 신중탱과 현왕탱, 지장탱 등을 조성했다.

1876년에는 초암이 전년에 궁궐에서 받은 자수(刺繡)로 만든 관음상(觀音像)을 봉안하고자 관
음전을 고쳐지었다. 이 관음상은 1874년 2월 훗날 순종(純宗)이 되는 왕자가 태어나자 그의 수
명장수를 기원하고자 모후(母后)인 명성황후(明成皇后)와 조대비, 효정왕후(孝定王后) 홍씨(헌
종의 왕후로 홍대비)의 발원으로 궁녀들이 수를 놓아 만든 것이다. 기존 관음전이 1칸 밖에 안
되는 작은 건물이라 상궁들이 돈을 내었고, 넉넉한 재정 지원에 장인들도 앞을 다투어 건립에
참여해 건물을 짓고 단청하는데 불과 며칠 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1877년에는 왕명으로 황해도 배천군(白川郡)에 있던 강서사(江西寺)의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을
가져와 화계사에 주었고, 이들을 봉안하고자 1878년 시왕전을 고쳐지었다. 또한 1880년 조대비
가 명부전에 불량답(佛糧畓)을 내렸으며, 1883년 금산(錦山)이 조대비와 홍대비의 지원으로 관
음전의 불량계(佛粮契)를 세웠으며 1885년 산신각을 중수했다.
1897년에는 큰 종을 영주 희방사(喜方寺)에서 가져왔으며 중종(中鐘)은 경도에서 구입하고, 운
판은 멀리 해남 미황사(美黃寺)에서 가져왔다. 이렇게 고종과 순종 시절에는 왕비와 대비, 상
궁의 발길이 빈번해 속세에서는 이곳을 궁(宮)절이라 불렀다. 그만큼 왕실과의 끈이 두터웠던
것이다.

1910년 12월, 월명(越溟)이 임종할 때 강원도 양양에 있던 논 276두락(斗落)을 절에 헌납하면
서 만일염불회가 세워졌으며, 1911년 사찰령(寺刹令)으로 봉은사(奉恩寺)의 수반말사로 편입되
었다.
1921년 3월 현하(玄荷)와 동화(東化) 두 화주가 김창환, 민준기 등의 시주로 관음전과 시왕전
을 중수 단청했고, 이듬해에 대웅전 개금불사를 벌였다. 1925년에는 주지 한찬우(韓讚雨)가 김
종하, 오정근의 지원으로 법당 및 대방 앞뒤 축대를 쌓아 이듬해 7월 완성했으며, 1933년 7월
한글학회 주관으로 한글맞춤법 통일안 마련을 위한 모임이 이곳에서 열렸다. 그때 논의된 통일
안은 그해 10월 세상에 발표되었다.
1937년에는 종식(鍾植)이 낡은 건물을 정비했고, 북한산성(北漢山城)으로 올라가는 길목 바위
에 마애관음상을 조성했다. 그리고 1938년에는 승려 안진호가 '삼각산화계사약지(三角山華溪寺
略誌)'를 편찬했다.

6.25전쟁 때는 다행히 총탄이 비켜가 별 피해는 없었으며, 1964년 최기남 거사의 가족이 기증
한 최기남의 오백나한을 봉안하고자 천불오백성전을 세웠고, 1972년에 진암(眞菴)이 범종각을
지었다. 1973년에는 대웅전 삼존불을 조성했으나 이듬해 관음전이 불에 타면서 소실되었으며,
1975년 진암화상이 퇴락한 산신각을 증축해 삼성각으로 이름을 갈았다.
1991년 4층 규모의 대적광전을 세웠고, 1992년 국제선원을 개원해 외국인 승려의 필수 수행처
로 자리매김했다. 2001년에는 명부전을 보수하면서 지장보살상을 개금했고, 2005년에 대웅전을
보수해 지금에 이른다.

▲  대웅전을 바라보는 명부전(冥府殿)

▲  천불오백성전

화계사가 외국인 승려의 성지가 된 것은 숭산행원의 오랜 노력 덕분이다. 그는 1970년대에 미
국으로 건너가 서양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국 불교를 포교했다.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 많이 방
황하던 그들은 숭산의 포교와 설법에 적지 않게 감명을 받았고, 그가 해외에 머무는 동안 5만
명이 넘는 서양 사람들이 앞다투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숭산이 해외에 세운 선원은 30개 나라에 120곳이 넘으며, 미국에서 처음 세운 '프로비던스 선
원(禪院)'에서는 1982년 천하의 종교 지도자들이 모여 세계평화회의를 열기도 했다. 그의 열성
적인 해외 포교로 화계사를 찾는 외국인 승려와 승려 희망자가 늘자 계룡산(鷄龍山) 무상사에
제2의 국제선원을 닦아 이들을 수용해 가르치고 있다.

화계사 국제선원 출신 외국인 승려 중에 그 유명한 미국인 현각이 있다. 그는 카톨릭교 집안에
서 태어나 하버드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는데, 우연히 숭산의 설법을 듣고는 크게 감명을 받아
불교로 갈아탔고 화계사를 찾아 승려가 되었다. 꽤 열심히 활동하여 현정사(現靜寺, 경북 영주
부석면)의 주지를 지내기도 했으며, 화계사 국제선원의 선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렇듯 국제적인 수행처로 명성을 날리면서 경내에서 외국인 승려를 보는 것은 이제 일상 생활
이 되었다.

화계사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삼성각, 보화루, 대적광전, 조실당, 천불오
백성전, 교육관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을 지니고 있으며, 이중 대적광전이 단연 규모가
크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사인비구 제작 동종과 목조지장보살3존상 및 시왕상 일괄등 국가 보
물 2점과 대웅전, 목조관음보살좌상 및 복장유물, 아미타괘불도 및 오래여도, 탑다라니판, 천
수천안관음변상판 등 지방문화재 9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400년이 넘은 느티나무 3그루가 서울
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절의 오랜 내력을 대변해준다. (보호수 나무는 이번에 담지 않았음)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깝고 교통편 또한 착하여 접근성도 우수하며, 주택가가 바로 지척이지
만 삼삼한 숲에 포근히 감싸여 있어 고즈넉한 산사의 멋을 누리기에는 그리 부족함이 없다. 국
제적인 사찰이라 어색한 한국말을 구사하며 인사를 건네는 외국 승려와 수행자의 모습에서 우리
나라 불교의 높은 위상과 인기를 새삼 느끼게 한다.

※ 화계사 찾아가기 (2018년 6월 기준)
* 지하철 우이신설선 화계역 2번 출구에서 도보 12분
* 지하철 4호선 미아삼거리역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151번, 1165번 시내버스를 타고 화계사입구
  , 한신대대학원 하차, 도보 10분
* 지하철 4호선 미아역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151번 시내버스 이용

* 화계사에서 템플스테이(Temple Stay)를 운영하고 있다. 체험형은 매주 토/일요일에 1박 2일
  일정으로 진행되며 참가비는 5만원이다. (1박 2일 기준) 자유롭게 머물다 가는 휴식형은 화~
  금요일에 운영하며 예불과 식사시간만 지키면 된다. (1박 2일에 5만원) 자세한 정보는 화계
  사 홈페이지 참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1동 487 (화계사길 117 ☎ 02-902-2663, 02-903-3361)
* 화계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천하를 향해 연등을 늘어뜨린 범종각(梵鍾閣)

대적광전 옆에 자리한 범종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4물(四物)이
라 불리는 범종과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의 보금자리이다.
범종각은 원래 대적광전 서남쪽에 있던 것으로 2층으로 이루어진 6각형 건물이었다. 1972년 진
암(眞菴)이 대방(보화루)에 얹혀살던 영주 희방사(喜方寺) 출신 동종과 대웅전 처마 밑에 매달
려 거의 썩기 직전이던 법고를 위해 지은 것으로 기존 건물을 부시고 지금 자리에 번듯하게 새
범종각을 지었다.

온갖 연등과 장엄등으로 몸을 치장한 범종각에
는 특이하게 종이 2개씩이나 달려있다. 큰 종은
1978년에 진암이 만든 것이며, 그 옆에 난쟁이
반바지 반 접은 정도의 작은 종은 1683년에 제
작된 것으로 1898년 희방사에서 올라왔다. 무게
는 300근 정도 된다.
이 동종은 17세기에 활약했던 사인(思印) 비구
가 만든 8개의 종 가운데 하나이다. 사인은 손
재주가 좋은 승려로 종을 매우 잘만들었는데,
그가 만든 종이 이곳과 강화도, 안성 청룡사(靑
龍寺), 의왕 청계사(淸溪寺), 홍천 수타사(壽陀
寺), 문경 김룡사(金龍寺), 포항 보경사(寶鏡寺
), 양산 통도사(通度寺)에 전하고 있다.

▲  화계사 동종 - 보물 11-5호

이들 종은 모두 보물 11호 계열의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으나 원래는 강화도 동종만 11호였다.
그러다가 2000년에 사인이 만든 종을 죄다 보물로 삼으면서 화계사 동종도 그 혜택을 받게 되
었다. (그 이전에는 비지정이었음) 그만큼 사인이 만든 종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우수 종으
로 전통적인 신라 범종 양식을 지키면서 거기의 자신만의 독창성을 집어넣었다.

경내에서 2번째로 오래된 보물로 종 윗부분 용뉴에 쌍용(雙龍)을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상대(
上帶)에는 범자(梵字)를 2줄로 배치했고, 그 밑에 조선 후기 양식을 지닌 유곽(遊廓) 4좌를 두
었다. 유곽대는 도식화된 식물무늬로 채우고, 유곽 안에 있는 9개의 유두는 여섯 잎으로 된 꽃
받침 위에 둥근 꽃잎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유곽 사이에는 '종면경석(宗面磬石)','혜일장명(
惠日長明)','법주사계(法周沙界)'란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안성 청룡사 동종에서 같은 내용이
있다. 종 밑도리에는 가는 두 줄의 띠를 둘렀고, 띠 안에 연꽃을 새겨놓았다.
사실성과 화사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며, 종 조성과 관련된 명문(銘文) 200자 정도가 새겨져 있
어 종의 탄생 정보를 알려준다.

이 종이 제자리(희방사)를 떠나 이곳으로 온 것은 왕실의 화계사 사랑이 뜨겁기 때문이다. 덕
분에 화계사의 보물은 그만큼 늘어났으며 이곳의 범종 역할을 하면서 하루에 2번 종소리를 날
렸다. 그러다가 1978년 그 곁에 새 범종을 매달면서 그 역할을 후배에게 물려줬고, 국가 지정
보물이란 큰 명예직을 얻게 되면서 더 이상 종소리를 울리지 않았다.
그의 나이는 이제 340년 남짓, 아직은 한참 몸을 풀 무탈할 나이이나 절에서 그의 몸을 무척
아끼면서 이제는 거의 무늬만 종이 되었다. 종은 종의 역할을 해야 종다운 것이지, 저렇게 그
림의 떡처럼 두는 것은 옳지 못하다. (다만 종의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경우는 예외)


▲  연등으로 활활 타오르는 범종각과 그 주변

▲  범종각에 걸린 붉은 연등과 네모 연등, 6각형 연등

시대가 바뀌면 연등과 장엄등에도 변화를 줘야 된다. 그래서 기존의 연등 모습을 탈피하여 네
모, 6각형, 8각형, 온갖 모습의 등까지 다양하게 등장했다. 그런 연등에 그려놓는 그림이나 등
의 형상도 불교 외에도 다채롭게 담고 있어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데 왼쪽 네모 등에는 코끼리
를 탄 두광(頭光)을 두룬 관음보살 누님이 귀엽게 깃들여져 있고, 오른쪽 6각형 연등에는 함박
웃음을 짓고 있는 토끼가 그려져 있어 웃음바이러스를 살짝 건네준다.


▲  기도하는 동자승을 담은 네모난 등(왼쪽)과 카톡 이모티콘
무지(muzi)를 담은 8각형 등

▲  8각형 등에 깃든 카톡 캐릭터 프로도의 위엄
연등에는 현재 유행하는 캐릭터나 온갖 군상(群像)의 존재를 담고 있어
21세기를 살아가는 변형 연등의 살아가는 정석을 보여준다.

▲  카톡 캐릭터 악동복숭아(어피치, apeach)를 담은 장엄등

▲  연꽃과 달이 그려진 연등

▲  카톡 이모티콘 네오를 담은 8각형 연등


▲  부엉이 부부와 흩날리는 봄꽃이 담긴 6각형 연등

▲  대적광전과 보화루 사이의 허공을 장악한 연등
하늘이 갑자기 건물 높이만큼 확 내려앉은 기분이다.

▲  보화루에 걸린 '삼각산 제일선원(第一禪院)' 현판

대웅전과 대적광전 사이에는 보화루가 자리해 있다. 화장루라 불리기도 하는데 1866년에 지어
진 건물로 대방(大房), 큰방이라 불리기도 한다.
대방은 조선 후기에 왕실의 지원을 두둑히 받던 서울 근교 절에서 많이 나타나는 건물로 이곳
을 비롯해 돈암동 흥천사(興天寺), 남양주 흥국사(興國寺), 고양 흥국사, 파주 보광사(普光寺)
등에 남아있다. 대방의 역할은 승려의 숙식 및 예불의 목적도 있지만 서울에서 온 왕족과 사대
부들의 숙식 편의를 제공하고 그들만의 별도 예불처를 두어 법당에서 백성들과 함께 예불을 보
는 번거로움을 덜어주려는 것이 주목적이다. 그러니까 왕족과 귀족을 위한 조금은 아니꼬운 특
별 서비스 공간인 셈이다. 그들이 주요 밥줄이나 다름이 없으니 절 입장에서는 그렇게라도 해
야 절도 꾸리고 속칭 소고기도 사묵을 수 있다.

보화루 현판은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제자인 위당 신관호(威堂 申觀浩)가 쓴 것이며, 화계사
현판은 1866년 대원군이 절 중수 자금과 함께 보내준 친필 현판이다. 이 현판에는 '대원군장(
大院君章)','석파(石坡)'가 쓰여 있는데, 예서체와 해서를 혼합해서 쓴 명필이다.
1933년에는 이희승(李熙昇), 최현배(崔鉉培) 등 한글학회 소속 국문학자 9명이 보화루에 머물
면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집필했던 유서 깊은 현장으로 그해 10월 그 통일안이 발표되었다.

현재 보화루는 큰방과 종무소로 쓰이고 있으며, 1974년 불에 탄 관음전에 있었던 관음보살상을
봉안해 관음전(觀音殿)의 역할도 겸한다. 그리고 건물을 받치는 석축 높이 때문에 누(樓) 비슷
한 성격을 지녔으나 대적광전을 지으면서 계단을 없애고 평평하게 다졌으며, 예전에는 보화루
가 외부에서 경내를 감싸서 가리는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대적광전이 그 역할을 몇배 이상으로
휼륭히 해내고 있다.


 

♠  화계사 대웅전 주변

▲  윤장대(輪藏臺) 장엄등

보화루 옆에는 윤장대를 흉내낸 장엄등이 중생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무로 만든 윤장
대는 여럿 봤지만 장엄등으로 된 그것은 처음인데 윤장대란 서적이나 장경판(藏經板)을 넣어
두던 일종의 장경각(藏經閣)이다.
법회 때 경전을 안에 넣고 손잡이를 잡아 돌리며 염불을 했는데 옛날에는 일반 백성들 상당수
가 까막눈이었고 설령 한자를 알아도 불교 경전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하여 '윤장대
를 1번 돌리면 경전을 1번 읽은 것과 같다 / 경전을 이해한 것과 같다 / 소망이 이루어진다 /
윤장대를 못보고 저승에 가면 혼난다'는 식으로 중생들에게 영업을 했다.
비록 장엄등이지만 그 성격에 맞추어 손잡이까지 두어 돌려보도록 했다.


▲  대웅전 옆구리를 가득 메운 연등

▲  화계사 대웅전(大雄殿)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5호

좌우로 명부전과 삼성각을 거느리며 동쪽을 굽어보고 있는 대웅전은 화계사의 법당(금당)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866년 대원군의 지원으로 지어졌으며, 1870년에 중건
했다. 당시 환공야조(幻空冶兆)가 쓴 '화계사 대웅보전 중건기문(華溪寺大雄寶殿重建記文)'에
따르면 석수(石手) 30명, 목공(木工) 100명이 불과 수개월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건물 정면에는 각 칸마다 사분합(四分閤)의 띠살문이 설치되어 있어 문짝을 위로 올릴 수 있
다. 그래서 초파일이나 한여름에 가면 보통 문이 위로 들려져 있다. 대웅전 현판은 조선 후기
명필인 몽인 정학교(夢人 丁學敎)의 것으로 여겨지며, 주련(柱聯)은 추사 김정희의 수제자인
신관호(申觀浩)가 쓴 것으로 내용은 이렇다.

비로해장전무적(毘盧海藏全無跡) - 비로자나의 법해에는 완전한 자취가 없고
적광묘사역무종(寂光妙士亦無蹤) - 적광묘사 또한 아무런 흔적이 없네.
겁화동연호말진(劫火洞然毫末盡) - 겁화가 훨훨 타서 털끝마저 다해도
청산의구백운중(靑山依舊白雲中) - 푸른 산은 옛과 같이 흰구름 속에 솟았네.


▲  대웅전 석가3존불과 아미타후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89호)

초파일 순례객들로 정신이 없는 대웅전 내부에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
大勢至菩薩)로 이루어진 금동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이들은 1873년에 조성된 것으로 포근하고 후덕한 표정으로 초파일 생일 인사를 받고들 있는데
그들 뒤로 1875년에 화산당 재근(華山堂 在根)이 그린 아미타후불도가 고색의 향기를 풍기며
든든히 자리해 있으며, 불단 우측에는 법당의 필수 그림으로 1969년에 제작된 신중탱(神衆幀)
이 자리를 지킨다.


▲  연등 위에 하늘이 있고, 그 밑에 인간과 세상이 있다.
연등 밑의 세상, 대웅전에서 바라본 모습

▲  영가(靈駕, 죽은 사람)를 위한 하얀 연등의 엄숙한 향연
대웅전 앞에는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오색 연등의 화려한 향연이 펼쳐지고 있고
뒷쪽에는 죽은 이들을 위한 하얀 연등의 엄숙하면서도 조금은 오싹한 향연이
펼쳐져 잠시 마음을 숙연케 한다.

▲  삼성각(三聖閣)에서 바라본 연등의 향연

▲  1975년에 조성된 삼성각 칠성탱(七星幀)

천불오백성전 뒤쪽이자 대웅전 우측 높은 곳에는 삼성각이 있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
리한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원래는 1885년에 중수된 산신각(山神閣
)이 있었다. 허나 나이를 먹을수록 퇴락하여 볼품이 없어지자 1975년 주지 진암이 기존의 산
신각을 부시고 새로 지으면서 삼성각으로 이름을 갈았다.
내부에는 산신과 독성, 칠성이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을 다시 지은 탓에 고색의 내음은 싹 말
라버렸다.


▲  명부전 목조지장보살3존상 및 시왕상 일괄 - 보물 1822호
그 뒷쪽에 자리한 지장시왕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90호)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878년 초암이 조대비
의 지원을 받아 지었다.
2001년에 건물을 중수하면서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을 개금하거나 개채(改彩)했으며, 명부전 현
판과 주련 글씨는 대원군의 친필로 전해진다.

불단에는 지장보살3존상과 시왕상(十王像)이 봉안되어 있는데, 예전에는 고려 말에 나옹화상(
奈翁和尙)이 만든 것으로 전해졌으나 불상 뱃속에서 나온 발원문(發願文)을 통해 1649년에 황
해도 배천군 강서사(江西寺)에서 승려 영철(靈哲), 인명(印明), 상원(尙元), 운혜(云惠) 등이
조성했음이 밝혀졌다.
대적광전 주변에 있는 보호수 느티나무를 제외하고 화계사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지만 이들
은 원래부터 화계사 것이 아니었다. 배천군 강서사에서 만들어 광조사(廣照寺)에 봉안했던 것
으로 이들이 이곳에 온 사연은 대략 이렇다.

부모를 따라서 화계사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 금수저 고종은 그곳에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이 없
음을 알았다. 그도 그것이 절의 필수 요소임을 알았던 모양이다. 하여 화계사에 가장 뛰어난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을 선사하고자 천하를 수소문하니 광조사의 것이 좋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래서 광조사에 의견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1877년 왕명으로 화계사로 가져왔는데 불상 운
송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설화가 아련히 전해온다.

화계사 승려 봉흔(奉欣)과 위운(威雲), 봉림(奉林)은 광조사를 찾아가 왕명을 전달하고 그곳
의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일체를 접수했다. 허나 물가에 이르니 준비되어야 될 배가 없었다.
그들은 당황하여 어찌해야 되나 궁리를 하던 중, 마침 배 1척이 나타났다. 그들은 배를 세우
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뱃사공이 흔쾌히 승낙하며 '나도 당신들을 찾은 모양이오! 어젯밤 꿈
에 할아버님이 나타나 내일 날이 밝기 전에 배를 이끌고 강서사로 급히 가라고 하셨는데 아마
도 부처가 지휘했던 모양이오!'
말하면서 흔쾌히 불상을 싣고 서울로 향했다.
보통 배천군에서 서울까지는 뱃길이 2~3일 정도 걸리는데 그날은 유난히도 바람이 잘 맞아 불
과 반나절도 안되어 뚝섬에 도착했다. 불상을 화계사로 모두 옮기고 사공에게 배삯을 후하게
주었는데 사공은 쿨하게 돈을 거절하며 '할아버님의 현몽과 강바람의 순풍으로 보아 부처의
도움이 있었음이 분명한데 어찌 배삯을 받겠소? 그 돈으로 차라리 시왕전의 내 장등(張燈)이
나 하나 해주시오'
부탁을 했다. 그래서 수십 년 동안 시왕전에 그의 장등을 밝혔다고 전한다.

▲  우측 시왕상과 시왕탱

▲  좌측 시왕상과 시왕탱

푸른 승려 머리의 지장보살상은 후덕한 표정을 지으며 중생을 맞이한다. 몸의 신체 비례가 잘
맞아떨어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표현이 부드러워 귀족적인 기풍을 드러낸다. 몸에 걸친 법
의(法衣)는 두께가 상당한데 옷의 주름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그의 좌우에 서 있는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도 주인을 따라 황해도에서 이
곳으로 강제로 따라왔다. 주인과 마찬가지로 조각솜씨가 뛰어나며, 그들 좌우에 늘어선 저승
의 시왕상과 판관(判官), 동자, 사자, 장군상 역시 그곳 출신으로 꽤 준수한 모습이다. 조선
중기 불상과 시왕상을 대표할 만한 존재로 뱃속에서 복장 유물까지 나와 그들의 가치를 더욱
돋구어 주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2014년 3월 비지정문화재에서 국가 지정 보물로 특진되었
으니 불상을 만든 옛 사람들의 조그만 배려가 그들의 몸값을 비싸게 만들어준 것이다.

지장보살상 뒤에 걸린 지장시왕도와 시왕상 뒤쪽에 걸린 시왕도와 사자도는 1878년 화산재근(
華山在根)과 혜과봉간(慧果奉侃) 등이 상궁들의 시주를 받아 그린 것으로 이들은 순수 화계사
의 불화이다. <'화계사 명부전 시왕도 및 사자도(使者圖)'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92
로 지정됨>


▲  한참 물이 오른 보화루 뜨락 연등
아까보다 빛이 더욱 짙어져 아쉽게 저물어가는 초파일의 밤을 붙잡는다.

▲  마애3존불을 담은 장엄등

▲  계단에 두광(頭光)처럼 떠있는 연등

▲  화계사 초파일의 밤은 그렇게 깊어져만 간다.

화계사는 많이 발걸음을 했던 절이라 이번에는 연등과 장엄등이 중심이 된 초파일 야경을 구
경하는데 거의 집중했다. 그러다보니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들과 대적광전, 천불오백성전, 일
주문, 삼성각 내부(칠성탱 제외) 등은 아예 담지도 않았다. 오로지 연등이 주인공이 된 야경
을 주로 담았다. 왜냐 오늘은 초파일(석가탄신일)이니까..

연등의 향연에 취해 거의 2시간 가까이 경내에 머물렀다. 21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여전히 사
람들은 꾸역꾸역 들어오고 경내는 여전히 부산하다. 연등은 더욱 농도를 높이며 절에서 어둠
을 몰아낸다.
이렇게 하여 석가탄신일 나들이는 내년 초파일을 애타게 고대하며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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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애사의 슬픈 이야기가 깃든 도심 속의 고즈넉한 비구니 절집, 낙산 숭인동 청룡사 ~~~ (동망봉)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낙산 청룡사 '


▲  바깥에서 바라본 청룡사 우화루(雨花樓)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 이하 초파일)이 다가왔다. 초파일에는 꼭 '석가탄신일 사찰 순례!'라는 거창한 이름을 들먹이며 서울 장안의 오래된
절을 중심으로 절 나들이를 벌이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불교 신자냐? 그것도 아니다. 허
나 언제부터인가 설레는 날의 하나가 되었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이번에는 어
느 절을 접수할까? 열심히 연구에 몰두했다.
허나 서울에 있는 대부분의 오래된 절과 문화유산을 간직한 20세기 사찰 상당수는 인연을
지은 상태라 미답의 절은 거의 씨가 말랐다. 그래서 선택의 폭은 많이 좁아진 상태. 그렇
다고 서울 밖으로 나가기도 귀찮아서 옛날에 갔던 사찰 중, 볼거리가 많거나 급격히 소장
지정문화재가 늘어난 절을 선택하여 제일 먼저 낙산 청룡사를 찾았다


하지만 전날 지나친 과음과 새벽 귀가로 인해 15시에 비로소 두 눈이 떠졌다. 퇴근본능에
충실하며 자꾸 기울어만 가는 햇님을 원망하며 부랴부랴 길을 재촉하여 청룡사 밑에 자리
한 창신역에 이르니 시간은 벌써 16시가 넘어버렸다.


 

♠  낙산 청룡사 입문 (정업원터 비각)

▲  정업원(淨業院)터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호

창신역(6호선)에서 청룡사로 가다보면 경내 직전에 철책이 둘러진 비각(碑閣)이 마중을 한다.
청룡사의 일원인 그 비각은 한많은 인생을 살았던 조선 비운의 왕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
씨의 넋을 위로하고자 세운 정업원터 비각(정업원구기)이다. 그렇다면 정업원은 무엇을 하던
집이었을까?

정업원이란 제왕의 왕후나 후궁, 궁녀가 궁궐을 나와 살거나, 귀족 여인들이 비구니로 출가하
여 살던 곳이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의종(毅宗, 재위 1146~1170) 때
처음 등장한 것으로 봐서 고려 초나 중기부터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보통 제왕이 죽으면 그
의 후궁(後宮)과 궁녀는 출가하여 그곳에서 말년을 보냈고, 왕족과 귀족 같은 경우 남편이 죽
으면 아내가 출가하여 머물기도 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개경(開京)에 있던 정업원을 서울로 가져왔다. 정업원 위치에
대해서는 창경궁(昌慶宮) 서쪽 설과 동대문 밖 동망봉(東望峰) 설이 있어 정확한 자리는 아리
송한 실정인데 동망봉 설은 정순왕후 송씨 때문에 잘못 전해진 것으로 영조가 1771년에 세운
정업원 비석이 그 설을 크게 부추겼다. (그 비석은 정업원이 없어진 지 160여 년 후에 세워짐)

정업원에 살던 비구니는 대부분 높은 계급의 여인이었고 주지는 보통 후궁이나 공주(옹주) 등
의 왕족이 담당했다. 그러다보니 왕실에서도 각별히 신경을 써서 노비와 별사전(別賜田, 제왕
이 특별히 내린 전답), 분수료(焚修料, 향불을 피우고 도를 닦는데 드는 비용)를 두둑히 지원
했다. 허나 유생들의 정업원 폐지 건의가 끊이지 않아 1448년 일시 폐지되기도 했으나 1457년
다시 문을 열었으며, 연산군(燕山君) 시절 다시 폐지되어 그곳에 독서당(讀書堂)이 들어섰다.
하지만 독서당이 옥수동(玉水洞)으로 이전되면서 비어있는 공간이 되었고, 그 공간을 손질하
여 1550년 다시 정업원으로 문을 열었다.
그러자 유생들이 폐지하라며 아주 징하게도 징징거렸고 이에 왕실은 후궁들의 별처라 우기며
인수궁(仁壽宮)이란 간판까지 내걸었으나 유생들의 생떼 같은 반발을 감당하지 못하고 1612년
에 완전 폐지해버렸다. 그때 그곳에 살던 비구니는 모두 성밖 절로 쫓겨났다.

청룡사와 정업원하면 떠오르는 여인은 앞서 언급한 단종의 왕후, 정순왕후 송씨(1440~1521)이
다. 단종(端宗, 1442~1457)이 숙부 수양대군(세조)에게 떨려나고 끝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
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강제 유배를 떠나자 왕후 역시 강제로 궁궐을 떠나야 했다. 그때 그들
의 나이는 불과 10대 중반, 송씨는 시녀 5명을 데리고 청룡사에 들어왔고, 단종 역시 같은 날
궁을 나와 여기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단종과 인근 영도교(永渡橋)에서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절로 돌아와 머리를 깎
고 비구니가 되니 이때 허경(虛鏡)이란 법명을 받았다.
이후 매일 동쪽(영월이 동쪽 방향임)에 자리한 동망봉에 올라 단종의 안녕을 기원했으며, 단
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동쪽을 향해 크게 통곡을 하니 그 소리가 아랫마을까지 들렸
다고 한다.

세조(世祖)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조카며느리인 그에게 영빈정동(英嬪貞洞, 영빈전)이란
집을 내리고 식량을 주었으나 송씨는 그 일체를 거절하고 청룡사, 또는 그 인근에 묻혀 살면
서 자체적으로 생계를 꾸렸다. 그는 자주동천(자지동천)에서 자줏물로 염색을 들여 그걸 팔았
는데, 염색을 할 때마다 빨간 물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자주동천(자지동천)이 되었음>
또한 그를 동정하던 백성들이 끼니 때마다 푸성귀 등의 먹거리를 갖다 주었는데 그 행렬이 매
우 길었다고 하며, 조정에서 이를 못하게 막자 여인들이 몰래 지금의 동묘(東廟) 인근에서 장
터를 열어 송씨를 도우니 세상에서는 그 장터를 '여인시장'이라 불렀다.

송씨는 16세에 강제 죽음을 당한 남편 단종과 달리 무려 81년이나 살았다. 그에게는 참 지옥
같은 삶이었으리라. 1521년에 기나긴 삶의 끈을 간신히 놓았으나 그의 집안 역시 역적으로 몰
려 풍비박산이 난 상태라 마땅히 묻힐 데가 없었다. 그래서 단종의 누님인 경혜공주(敬惠公主
)의 시댁 집안인 해주정씨 집안에 묻혔다. 그곳이 바로 사릉(思陵)이다.


▲  정업원터<정업원 구기(舊基)> 비석을 머금은 비각
너무 철통같이 머금고 있어 비석의 존재를 확인하기가 어렵다. 햇살조차도
감히 발을 들이지 못할 저 안에 들어있을 비석은 얼마나 답답할까?

▲  영조가 비석을 세우면서 친히 남긴 현판

1771년 영조(英祖) 임금은 창덕궁에 들렸다가 정순왕후의 슬픈 사연을 듣고 이곳을 찾아 비석
을 세웠다.
1칸짜리 비각이 비석을 꽉 조이듯 머금고 있어 그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정업원 옛터(구기)에
서 신묘년 9월 6일 눈물을 머금고 쓰다'란 내용이 쓰여 있으며, 비각 앞 현판에는 '前峯後巖
於千萬年(앞산 뒷바위 천만년을 가리라)' 쓰여 있으니 이는 영조의 친필이다. 그밖에 동망봉
(東望峰)이란 바위글씨도 남겼으나 왜정 때 채석장이 들어서면서 강제로 가루가 되었다.

이 비석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원래 '정업원구기'였으나 이름을 쉽게 한다며 단순하게 '정
업원터'로 갈았다. 허나 정업원은 이곳에 있지도 않았다. 송씨로 인해 엉뚱하게 이곳으로 엮
이게 된 것이다.


▲  담장 사이에 자리한 청룡사 일주문(一柱門)

청룡사는 낙산 동쪽 자락에 자리해 있다. 옛날이야 주변이 죄다 숲과 밭두렁이었지만 도심과
무척이나 가까운 위치로 20세기 이후 개발의 칼질이 요란하게 춤을 추면서 이제는 완전히 도
시 속에 외로운 공간이 되었다. 절 남쪽과 동쪽은 창신동(昌信洞)과 숭인동(崇仁洞), 보문동
(普門洞) 주택가가, 서쪽과 북쪽에는 아파트가 높이 들어서 절을 엿보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절 뒷쪽 언덕에 약간의 숲이 남아있긴 하나 산사(山寺)의 풍경은 와르르 녹아내려 근
처의 안양암(安養庵)처럼 속세에 완전 포위된 모습이다.

청룡사 일주문은 이곳의 정문으로 경내 바로 앞에 자리한다. 절 규모가 작고 주변이 싹 주거
지라 다른 산사와 달리 멀리 일주문을 내보내지 못했다. 문 좌우로 기와돌담을 둘러 절과 속
세의 경계를 가르고 있는데 '삼각산(三角山) 청룡사' 현판을 내걸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그런데 이곳은 엄연히 낙산 자락이고 북한산(삼각산)은 여기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니 '낙
산 청룡사'를 칭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낙산(낙타산)이 서울의 부실한 좌청룡(左靑龍
)이라 그리 칭하기가 썩 내키지 않은 모양이다. 게다가 북한산 남쪽 줄기가 여기까지 이르고
있으니 삼각산을 칭하는 것도 그리 잘못된 것은 아니다.


▲  약간 빛바랜 모습의 우화루 현판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경내 한복판이다. 정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이 있고, 오른쪽에는
선방(禪房)으로 쓰이는 심검당이, 왼쪽에는 요사(寮舍), 일주문 옆구리에는 법회와 강의 장소
로 쓰이는 2층 규모의 우화루가 경내를 가리며 앉아있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청룡사의 역사에 대해 잠시 풀어보도록 하자.

청룡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이다. 고려가 한참 후백제(後
百濟)와 다투던 922년 태조 왕건(王建)이 칙령(勅令)을 내려 창건했다고 전한다. 절이 들어선
위치가 한양(漢陽, 서울)의 외청룡(外靑龍)에 해당되는 산등성이라 청룡사라 했으며, 비구니
혜원(慧圓)을 초대 주지로 삼으면서 창건 초기부터 비구니 절로 시작되었다.
믿거나 말거나 창건 설화에 따르면 도선대사(道詵大師)가 태조의 아버지인 왕융(王隆)에게 고
려 건국을 예언하면서 동시에 이씨 왕조가 일어날 한양의 지기(地氣)를 억누를 필요가 있다며
개경 주변에 절 10개와 천하에 3,800개의 비보사찰을 세우도록 일렀다고 한다. 그래서 태조가
그 유언에 따라 절을 세우니 청룡사는 바로 그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허나 고려 초기 창건설을 입증할만한 유물과 기록이 없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하며, 그나
마 가장 오래된 존재가 17세기에 조성된 석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식구이다. 게다가 고려
말에 이르러서야 신뢰할만한 내력들이 쏙쏙 등장하고 있어 고려 중/후기에 창건되었을 가능성
이 크다.

어쨌든 문을 연 이후, 1036년 만선(萬善)이 1차 중창을 했으며, 1158년 회정(懷正)이 2차 중
창을 벌였는데 부근의 보문사(普門寺)가 문을 연 이후, 처음으로 세워진 절이라 하여 '새절
승방'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때 창건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13세기 중반, 무려 40년 가까이 이어진 몽골과의 전쟁으로 절이 제대로 황폐화되자 1299년 지
환(知幻)이 중창했다고 한다.

공민왕(恭愍王)의 왕후인 혜비(惠妃) 이씨가 말년을 보냈고, 태조 이성계의 딸로 1398년 왕자
의 난으로 남편<흥안군 이제(興安君 李濟)>과 두 동생<세자 이방석(李芳碩), 무안대군 이방번
(撫安大君 李芳蕃)>을 몽땅 잃은 경순공주(慶順公主)가 출가해 머물렀으며, 단종의 왕후인 정
순왕후 송씨도 이곳에 의지하는 등, 뒷전으로 밀려난 왕실 여인의 안식처 역할을 했다.
또한 1405년 태종(太宗)이 무학대사에게 명해 절을 중창케 했고, 1771년 영조가 직접 비석을
내리고 절 이름을 잠시 정업원으로 바꾸는 등, 왕실의 지원과 관심도 넉넉했다.

1512년에 법공(法空)이 중창하고 1624년 예순(禮順)이 중창을 했으며, 1813년 화재로 소실되
었으나 이듬해 묘담(妙潭)과 수인(守仁)이 다시 일으켜 세웠다.
1823년 순조(純祖)의 왕후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깊은 병에 걸리자 그의 아비인 김조순(金
祖淳)이 청룡사를 찾아 기도를 올렸다. 기도의 효과인지 어의(御醫)의 노력인지는 몰라도 병
세가 호전되자 김조순은 너무 기뻐 절 이름을 다시 청룡사로 갈게 했다. 1853년에는 그의 아
들 김좌근(金左根)이 중창을 하는 등, 나라를 말아먹은 안동김씨 패거리의 원찰(願刹) 역할까
지 도맡으며 제대로 배를 불렸다.

1902년에 정기(正基)와 창수(昌洙)가 중창했고, 1918년과 1932년에는 상근(詳根)이 중창했으
며, 윤호(輪浩)가 1954년부터 1960년까지 대부분의 건물을 새로 손질하였다. 그리고 1973년
다시금 중창을 크게 벌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  명부전 석조지장보살3존상

▲  지장시왕도

인근 보문사와 함께 서울에 대표적인 비구니(여승) 도량으로 대웅전과 우화루, 명부전, 산령
각, 심검당 등 8~9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2014년에 국가 보물로 지
정된 석조지장보살3존상 및 시왕상 일괄을 비롯해 지방문화재인 지장시왕도, 칠성도, 현왕도,
감로도, 가사도, 신중도, 석 삼불상, 독성도, 산신도, 정업원터 등 지정문화재 11점을 간직하
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대웅전, 명부전, 산령각에 분포해 있으며, 구한말에 제작된 가사도(袈裟圖,
울 지방유형문화재 205호
)와 철원 심원사(深源寺)에서 넘어온 석 삼불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7호
)은 심검당에 들어있다. (이들의 위치는 바뀔 수 있으며, 나는 그들을 만나지 못했음)
도시 한복판에 자리해 있어 산사의 내음은 누리기 힘들지만 한편으로는 도시 속의 조그만 오
아시스 같은 존재로 비구니 고찰의 향기를 잔잔하게 불어주며, 비록 지금의 건물은 1950년대
이후 것들이라 겉으로 우러나오는 고색의 내음은 맡기 힘드나 건물 안에 오래된 불상과 불화
들이 앞다투어 고색의 향기를 불어주고 있다. 그러니 겉모습만 살피지 말고 반드시 대웅전과
명부전, 산령각, 심검당 안에도 들어가 그들을 살펴보기 바란다. 그래야 청룡사의 진정한 깊
이를 누릴 수 있다. 즉 꿀단지의 단지만 보려고 하지 말고 그 안에 담긴 꿀을 보란 이야기다.

흥겨운 초파일 분위기에 맛있는 절밥과 먹거리를 기대하고 왔건만 예상 밖으로 절은 무척 썰
렁했다. 오색 연등의 물결과 관불의식의 현장이 없었다면 오늘이 초파일인지 모를 정도로 말
이다.
아무리 시간이 16시가 넘었어도 아직은 사람이 넘칠 시간인데 생각 밖으로 사람도 너무 없고,
심검당 주변을 아무리 기웃거려도 절밥이나 먹거리를 주는 분위기도 없었다. 그래서 유일하게
먹거리를 챙기지 못한 초파일 절로 쓰라리게 기억에 남게 되었다. <이곳 이후에 간 절에서는
국수와 떡을 얻어먹었음>

※ 낙산 청룡사 찾아가기 (2018년 5월 기준)
* 지하철 6호선 창신역 3번 출구를 나와서 도로(동망봉길)를 따라 도보 3분
* 지하철 1/6호선 동묘앞역(10번 출구)이나 1/4호선 동대문역(4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청룡사(보문파크뷰자이아파트)에서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 17-1 (동망산길 65, ☎ 02-763-4031)


▲  청룡사 심검당(尋劍堂)
절 뜨락의 하늘을 차지해버린 초파일 오색 연등의 위엄 앞에 심검당은
지붕이 거의 지워지는 굴욕(?)을 당했다.


 

♠  청룡사 명부전, 산령각

▲  청룡사 제일의 보물을 품은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하며 남쪽을 바라보고 앉은 명부전은 20세기 후반에 지어졌다. 정면 3칸
,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지장보살과 시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 식구들이 봉안되
어 있는데, 지장보살3존상을 비롯해 시왕상과 귀왕(2점), 판관(2점), 사자(2점), 동자상(1점),
장군상(2점)은 국가 보물로 지정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들이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이들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청룡사 석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로 2014년 3월 지
방유형문화재에서 보물 1821호로 계급이 높아짐)


▲  명부전 석조지장보살3존상 - 보물 1821호

명부전에는 파란색 승려 머리를 한 지장보살이 조촐히 미소를 지으며 앉아있다. 돌을 빚어서
금색 옷을 입힌 것으로 그 좌우에는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합장인(合掌
印)을 선보이며 서 있다.

지장보살상의 높이는 92cm로 얼굴이 거의 네모난 편인데 이는 승일(勝一)이 만든 작품에서 많
이 나타난다. 머리가 좀 크다보니 신체비례가 그리 맞아보이지 않으며 몸에는 얇아보이는 법
의(法衣)를 걸쳤다. 달랑 2가지 색이 전부인 지장보살과 달리 밝은 색채의 옷을 입은 도명존
자와 무독귀왕은 조금 경직된 자세를 보이고 있다고 하며(문화재청 홈페이지에 그렇게 나옴),
시왕 같은 경우 각자의 스타일을 지니며 충실하게 표현되어 있다.
지장보살3존상과 주위에 배열된 시왕상과 그의 식구들(지장탱, 시왕탱 등의 그림은 제외)은
17세기에 승일이 중심이 되어 조성된 것으로 이들은 건강 상태도 좋고 처음 봉안된 절과 불상
을 만든 승려, 시주자 이름이 적힌 발원문(發願文)이 전하고 있어 17세기 불교 조각을 이해하
는데 중요한 기준이 되어준다. 즉 그 발원문 때문에 이들이 보물로 승진된 것이라 보면 된다.
조성 관련 절대 기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 기록 덕분에 국보나 보물로 오른
건물이나 불상, 탱화, 조각품이 적지 않다.

조성 관련 글자를 넣어둔 그 당시 절의 작은 배려가 그들을 무척 돋보이게 하였으며, 현재 우
리들에게 적지 않은 그 시절의 상황을 속삭여주는 시간적 유물이다.


▲  색채감이 돋보이는 좌측 시왕상 5점과 동자, 판관(判官), 시왕탱
이들은 17세기에 조성된 것으로(시왕탱과 일부 동자상 제외) 다들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며 명부전 내부를 화사하게 수식한다.

▲  우측 시왕상 5점과 동자, 판관, 시왕탱

▲  우측과 좌측 가장자리에 자리한 판관과 사자, 금강역사상, 장군도


▲  산령각(山靈閣, 산신각)

대웅전 뒷쪽 높은 곳에는 산신을 봉안한 산령각이 조용히 자리해 있다. 달랑 1칸에 불과한 맞
배지붕 건물로 그 안에 100년 이상 묵은 산신도와 독성도가 깃들여져 있다.


▲  산령각 산신도(왼쪽)와 독성도(오른쪽)

▲  청룡사 산신도(山神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1호

산신도와 독성도는 유리 액자에 담겨져 있어 반사되는 빛으로 인해 온전히 사진에 담기는 것
을 허락치 않았다.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 내 모습도 조금 반사되어 나와 다소 쑥쓰럽다.

산신도는 1902년 4월에 조성되어 봉안된 것으로 금어 두흠(金魚 斗欽)이 그렸으며 비구니 충
근(忠根)이 시주를 했다. 그림 중앙에는 주인공인 산신 할배가 앉아있고, 그 옆에 동자와 긴
꼬랑지를 살랑거리는 호랑이가 배치되어 있다. 그외에 산신의 활동무대인 산과 소나무 등이
있어 산신도의 기본적인 모습은 갖추었으며, 그림 우측 밑에 조성 관련 내용이 적혀있다.


▲  청룡사 독성도(獨聖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0호

독성도는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 할배를 담은 것으로 산신도와 비슷
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독성을 비롯해 동자와 천태산 등이 그려져 있으며 그 앞에는 하얀 피부의 조그만 독성상이 유
리막 안에 담겨져 있다.


 

♠  청룡사의 보물 창고, 대웅전(大雄殿)

▲  연등을 뜨락에 늘어트린 대웅전

청룡사의 중심인 대웅전은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
이다. 안에는 석가3존불을 비롯해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지장시왕도와 칠성도, 현왕도, 감로도,
신중도 등이 담겨져 있다.


▲  초파일 행사의 백미,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간만의 외출에 신이 났을까? 그의 표정이 무척 해맑아보인다. 허나 손님도 없고
햇님도 무심하게 기울고 있으니 조금 있으면 다시 어두컴컴한 곳으로 들어가
1년을 기다려야 된다. 그에게 그 1년은 마치 1,000년과 같으리라...

▲  청룡사 칠성도(七星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2호

칠성도는 칠성 식구를 담은 그림이다. 1868년에 조성된 것으로 치성광여래(熾星光如來)를 중
심으로 칠성원군(七星元君) 등이 빼곡히 담겨져 있어 정신이 없다. 산신도와 독성도는 참 단
촐한데 반해 칠성도는 식구들이 너무 많다. 그만큼 칠성 식구들에게 바라는 것이 많다는 이야
기겠지..


▲  영가단(靈駕壇)에 가려진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4호

감로도는 1898년에 그려진 것으로 중생들에게 감로(甘露)와 같은 법문을 베풀어 해탈(解脫)시
킨다는 의도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보통 영가(靈駕, 죽은 사람)를 위한 그림으로 쓰이며 그림
을 보면 대도시마냥 참 복잡하기 그지 없는데, 전체적인 내용은 부처의 수제자인 목련존자(目
連尊者)가 아귀도(餓鬼道)에서 먹지 못하는 고통에 빠진 어머니를 구하고자 부처에게 그 방법
을 묻고 답을 듣는 것이다.
그림은 보통 3단으로 나눌 수 있는데, 상단에는 아미타3존블을 비롯한 7명의 여래(如來)와 지
옥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이 그려져 있고, 중간에는 지옥의 고통
에서 벗어나는 방법과 절차를 그린 반승(飯僧) 장면과 천도의 대상인 아귀(餓鬼)가 공양을 받
들어 먹는 장면을 그렸다. 그리고 하단에는 지옥과 현실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다양하게 묘
사되었다.


▲  청룡사 현왕도(現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3호

붉은 색채의 현왕도는 19세기 후반에 그려진 것으로 저승의 시왕(10왕) 가운데 가장 힘이 센
염라대왕(閻羅大王)을 다룬 그림이다. 그는 현왕(現王)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사람이 숨을 거
두고 3일 뒤에 영혼을 천도하는 의식을 할 때 사용된다. 그러니까 죽은 이의 내세와 극락왕생
을 위한 그림이다.

현왕탱은 현왕신앙이 유명하던 조선 후기에 많이 나타나며, 현왕을 비롯하여 판관과 사자 등
저승의 식구들과 그에게 심판을 받는 영가가 그려져 있다.
나도 언젠가 그의 면전에서 저럴 날이 있겠지. 나는 그에게 과연 어떤 말을 듣게 될까? 솔직
히 그리 착하게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 이득과 명예를 위해 뛸 뿐이다. 이 거지 같은 세
상에서 착하고 순하게 사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일이니까..


▲  청룡사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1호

지장시왕도는 원래 명부전에 있었으나 내가 갔을 때는 대웅전에 머물러 있었다. 1868년에 그
려진 것으로 푸른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지닌 지장보살과 무독귀왕, 도명존자를 비롯하
여 시왕 등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빈틈 없이 자리해 있다. 그러니까 앞서 명부전의 구성 요소
를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한 지장3존상은 노란 광배 안에 들어있어 저승의 특별한 존재임을 알려
준다.

이것으로 대웅전에 깃든 오래된 그림은 모두 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법당의 필수 그림인
신중도(神衆圖)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나를 피해 이웃 심검당으로 마실을 간 모양이다. 그
리하여 청룡사에 깃든 문화유산 3점(신중도, 가사도, 석 삼불상)과 인연을 짓지 못했다. 아무
래도 다시 또 오라는 청룡사의 뜻인 모양인데 다행히 괘불(掛佛)이나 복장유물처럼 그리 만나
기 어려운 존재들은 아니다.


▲ 대웅전 금동석가3존불과 석가후불탱
20세기 후반에 새로 만든 3존불로 가운데 석가불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고 있고
그 좌우로 수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자리해 석가3존불을 이루고 있다.

▲  경내 뒷쪽 언덕에 자리한 하얀 피부의 약사불(藥師佛)

대웅전 뜨락에서 요사 옆으로 난 길을 가면 정업원터 비각 윗쪽이다. 여기서 오른쪽 길을 오
르면 그 길의 끝에 근래 지어진 약사여래불이 환한 표정으로 맞이한다.
이곳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숲이 약간 우거져 있는데, 그 현장에 터를 닦고
중앙에 연꽃이 새겨진 대좌(臺座)을 만든 다음 약사여래불을 앉혔다. 주변에는 녹음(綠陰)이
잠긴 나무들이 있고, 북쪽과 동쪽 너머는 속인(俗人)들의 집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도시 속에
갇힌 청룡사의 현실을 말해준다.


▲  약사불에서 바라본 숭인동과 동망봉
바로 밑에 보이는 기와집은 산령각과 대웅전, 심검당이다.


약사불 주변에서는 아주 손바닥만한 천하가 조망되고 있는데 청룡사 경내와 숭인동, 숲이 우
거진 동망봉이 그 작은 천하를 이루고 있다.
동망봉은 정순왕후가 단종이 숨진 영월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짓고 남편의 극락왕생
을 빌던 곳으로 동쪽을 애타게 바라본 곳이라 하여 동망봉이라 불린다. 그곳에는 숭인근린공
원이 닦여져 있는데, 이렇듯 청룡사와 동망봉, 낙산 동쪽에는 정순왕후의 흔적과 애환이 진하
게 깃들여져 있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이렇게 하여 초파일 청룡사 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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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8년 5월 2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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